VVIP 영주님의 품격 18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8화
18화
【 첫 내전 】
“다들 표정이 안 좋은데?”
출정을 하고 얼마나 되었다고 병사들이고 용병들이고 표정이 하나같이 어두웠다.
특히 용병들은 나름 사기를 높였다고 생각했는데도 그렇다.
“그야 전쟁 아닙니까?”
“응? 아, 그것 때문이군.”
난 일부러 몰랐던 척하면서 태연하게 말을 꺼냈다.
“안심해. 우리는 싸우러 가는 게 아니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라이언을 비롯해서 용병들의 표정이 삽시간에 바뀌었다.
죽으러 가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하다가 갑자기 싸우지 않는다고 하니 이런 반응을 보일 만도 했다.
“쯧쯧. 싸울 생각이었으면 징집을 했겠지. 우리끼리만 가겠느냐?”
터너가 라이언에게 핀잔을 주었다.
나에 이어 기사단장까지 싸울 생각이 없다고 말하자 병사들의 눈빛도 살아났다.
“그럼 어디로 가는 겁니까? 혹시 동맹이라도 맺으러 가는 겁니까?”
“그냥 지켜보면 안다.”
“아, 진짜 놀라지 않았습니까. 갑자기 장비 다 챙겨서 떠난다는데.”
싸우지 않는단 소식에 라이언은 아주 기분이 좋아 보였다.
“싸우는 걸 반길 줄 알았는데 의외군.”
“물론 제가 싸움은 좋아합니다만…….”
라이언은 뒷말을 흐렸다.
어떤 말을 하려던 것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승산이 없는 싸움까지 즐겁지는 않다는 거겠지.
‘다른 영주들이라면 징집 없이도 400 정도, 징집까지 하면 700에서 800까지 숫자를 불릴 수 있겠지.’
거기에 비해 나는 징집도 안 해서 고작 150명이 좀 넘는 군대다.
숫자 차이가 이렇게 많이 나면 전투도 일방적인 학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속도를 좀 높이지.”
난 대화를 멈추고 이동을 재촉했다.
징집이 없었던 덕분에 행군 속도는 나쁘지 않게 나왔다.
말 타는 기사들이야 원래 그렇고 병사들과 용병들도 지난 훈련으로 체력이 어느 정도 붙은 듯했다.
현대처럼 이동 수단이 잘 발달하지 않아서 기본적인 체력이 좋기도 하고.
“헉헉!”
그러나 역시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보다는 체력이 떨어지는 쪽이 빨랐다.
슬슬 속도가 느려지는 게 보이자 난 휴식을 취할 것을 명령하고 주변을 살폈다.
우리의 출정 소식은 지금쯤이면 이웃 영주들에게 모두 알려졌을 것이다.
최약의 세력인 네패스 남작가인 만큼 내 존재를 의식하지 않던 이들은 당연히 당황할 것이다.
특히 내 군대가 향하는 방향에 있는 도미닉 남작은 더욱.
‘지금쯤 생각이 많겠지.’
* * *
“네패스 남작이 왜 이쪽으로 오는 거지?”
도미닉 남작은 네패스 남작가의 군대가 이동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고민에 빠졌다.
4개의 세력 중에서도 가장 약한 곳이 설마 먼저 움직이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상태였다.
“그것도 고작 150명으로?”
병력이라도 잔뜩 끌어왔다면 이해라도 하련만 겨우 150명이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기기 위해서 오는 군대가 아니었다.
“제 생각에는 인근 마을을 돌며 약탈할 계획 같습니다.”
도미닉 남작의 장남이 의견을 꺼냈다.
“농노들을 징집하지 않았으니 기동성이 좋을 겁니다. 이를 통해서 약탈로 이익을 보려는 게 아니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의견입니다.”
그런데 장남의 의견은 뒤이은 차남에게 바로 비판받았다.
“형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약탈을 통해 뭘 얻을 수 있습니까? 오히려 방금 형님이 말한 기동성만 잃을 뿐입니다. 우리 가문을 적으로 돌리는 건 물론이고.”
차남의 주장이 그럴듯했기에 장남은 반박할 수 없었다.
그에 차남은 조소를 흘렸다.
“그럼 너는 저들이 왜 온다고 생각하는 거냐?”
“보통 여러 세력이 대치 중일 때 한 세력이 먼저 움직이는 경우는 둘 중 하나입니다. 가장 강한 세력이거나, 가장 약해서 뭐라도 해야 하거나. 네패스 남작가는 당연히 두 번째 경우이지요.”
“그래서?”
“동맹을 요청하러 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언제 공격받을지 모르니 병력을 이끌고 오는 것이고.”
“동맹 요청이라고?”
도미닉 남작은 인상을 찡그렸다.
네패스 남작은 가장 세력이 약한 곳이었다.
그렇기에 다른 곳과 손을 잡고자 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도미닉 남작가의 입장에서는 그 손을 잡아서 얻을 이익이 크지 않았다.
‘최약이 그들이라면 그다음은 우리다.’
마이어드 후작가와 연결 고리가 있는 바이든 남작가나 다른 이웃 영지들보다 체급이 큰 왈트 자작가였다.
거기에 비하면 도미닉 남작가는 내세울 게 딱히 없었다.
그나마 네패스 남작가보다는 사정이 훨씬 나았지만.
‘설령 네패스 남작가와 동맹을 맺어도 다른 두 가문이 동맹을 맺으면 망할 수밖에 없지.’
도미닉 남작가는 왈트 자작가와의 동맹에 공을 들였다.
그들과 힘을 합쳐서 네패스 남작가를 없애고 영토를 집어삼킨 뒤 그 힘으로 바이든 남작가에 대항할 속셈이었다.
왈트 자작도 이 제안을 받아들여 이미 밀약이 맺어진 상태였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거 같으냐?”
“동맹을 받아주는 척하면서 유인해 네패스 남작을 잡으면 그만입니다.”
“그건 너무 비겁한 방법 아니냐?”
“네패스 남작의 군대가 먼저 우리 영지에 발을 들이민 이상 명분은 저희에게 있습니다.”
차남은 자신감을 갖고 의견을 개진했다.
어차피 네패스 남작도 처리해야 하는데 이렇듯 제 발로 와준다면 좋은 일이었다.
네패스 남작을 성공적으로 사로잡으면 휘하 병력까지 통째로 흡수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괜한 피해를 보는 것보다 훨씬 낫지.’
도미닉 남작은 결국 차남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당연히 자신의 의견을 무시당한 장남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저놈이 후계자는 나인데 감히.’
그때 네패스 남작의 움직임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다.
“주군, 네패스 남작의 군대가 방향을 틀었다고 합니다.”
“뭐라고?”
* * *
도미닉 남작가로 향하던 것처럼 보였겠지만 우리는 곧 방향을 바꿨다.
사전에 작전을 설명받은 기사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용병들과 병사들은 당혹스러운 모습이었다.
“도미닉 남작가로 가는 게 아니었습니까?”
“내가 그곳으로 간다고 한 적 있었나?”
“그건 아닙니다만…….”
라이언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다면 왜 똑바로 이리로 왔느냐는 의문이 엿보였다.
“도미닉 남작가와 동맹을 맺는 건 상황에 따라서 최악일 수도 있다.”
만일 도미닉 남작가와 동맹을 맺는다면 이는 바이든 남작가와 왈트 자작가가 연합할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런 만큼 네 세력 중 가장 약한 두 세력이 동맹을 맺어봐야 아무 이득도 없다.
“그럼 어디로 가는 겁니까? 저번에 본 바이든 남작가? 아니면 왈트 자작가?”
난 금세 밝아져서 좋아하는 라이언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어느 쪽이든 라이언의 기대는 보답받지 못할 것이다.
나는 적어도 이 싸움이 끝나기 전까지는 동맹을 맺을 생각이 없었으니까.
‘내 목적은 적어도 한 곳 이상의 영지를 먹어치우는 거니까.’
특히 도미닉 남작령은 그 유력한 대상이었다.
일이 잘 풀려서 그 이상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나도 소화할 역량이 없었다.
그렇기에 도미닉 남작령을 손에 넣는 게 최선이었다.
“빨리 입질을 물면 좋겠는데.”
* * *
“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
각 영주들은 모두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네패스 남작의 움직임을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고.
네패스 남작가의 군대는 영토를 넘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저 아슬아슬하게 경계 지점을 훑고 있을 뿐.
‘무력시위 같은 건가? 고작 150명으로?’
무력시위라면 병력을 더 데려와야 했다.
오히려 지금 모습은 네패스 남작가가 얼마나 약한 상태인지를 드러내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게다가 이웃 영지들을 다 거치고 있군.’
주변의 신경이란 신경은 다 거슬리고 있다.
죽고 싶지 않은 이상에야 제정신 박히고 할 짓은 아니었다.
‘게다가 하루가 다 되어가도록 철수도 하지 않고.’
이런 네패스 남작가의 행동에 영주들의 눈치 싸움이 극심해졌다.
네패스 남작가의 군대를 경계하고 싶은데 아직 넘어온 것은 아니고.
먼저 나가서 막자니 후방이 불안했다.
괜히 병력을 분리했다가 각개격파 당해도 문제였고.
‘가능성은 낮지만 함정의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하지.’
염탐 결과에 의하면 다른 위험 요소는 파악되지 않았지만, 혹시 모르는 노릇이었다.
애초에 믿는 게 없다면 저렇게 나대는 것도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대체 이놈이 뭐가 하고 싶은 걸까?”
도미닉 남작은 경계에서 서성거리는 네패스 남작가의 군대에 이를 갈았다.
정찰을 나왔다고 보기에도 이상하고, 무력시위로 봐도 이상하고, 유인이라고 봐도 이상했다.
뭔가 한 군데씩 다 미흡한 점이 있었다.
“그냥 무시해 버리면 어떻습니까?”
장남은 그냥 자신들의 시선을 잡아끌 뿐, 별다른 목적이 없는 군대라고 주장했다.
다른 세력과 동맹을 맺어서 자신들의 힘을 나누게 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차남도 이번에는 그것을 부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대신 다른 아이디어를 꺼냈다.
“왈트 자작에게 병력을 움직여달라고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무슨 뜻이냐? 소상히 말해라.”
“지금 네패스 남작의 목적이 뭔지는 모르겠으나 치명적인 실수를 하나 하고 있습니다. 바로 자신들의 영지를 비워두고 있다는 것이죠.”
물론 아직 영지를 넘어온 것은 아니니 얼마든지 다시 돌아갈 수는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낮부터 저렇게 계속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체력을 빼두었다면.
“산을 돌아서 후방으로 침투해 영지를 습격하면 분명 큰 성과를 볼 겁니다.”
“확실히 그렇구나. 문제는 다른 두 가문인데 서로 대치하게 만들자는 거지?”
“네. 왈트 자작의 입장에서도 나쁜 제안은 아닐 겁니다. 어쨌든 확정적으로 네패스 남작가를 배제시킬 수 있고 자신들의 병력도 온존할 수 있을 테니.”
물론 도미닉 남작가만 이득을 보는 것이기에 어느 정도 대가를 요구해 올 것이다.
그러나 충분히 들어줄 가치가 있었다.
일단 네패스 남작가를 밟아버리면 바이든 남작가는 동맹을 맺을 상대가 없어지는 셈이니까.
“어차피 네패스 남작가는 저희 쪽에 있어도 그리 득 될 것도 없습니다.”
셋이서 연합해 바이든 남작가와 배후에 있는 마이어드 후작가를 상대하는 전략도 생각해 봤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바이든 남작가가 공세를 포기하고 시간만 끌면 나중에 마이어드 후작의 군대가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는 것.
시간은 결코 자신들의 편이 아니었다.
“괜찮은 생각 같구나. 역시 내 아들이다.”
도미닉 남작이 이번에도 차남을 인정하자 장남의 표정은 다시 일그러졌다.
“아버님, 그 일에 제가 자원하겠습니다.”
장남은 어쩔 수 없이 칼을 뽑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자신의 후계자 자리를 위협받을지도 모르기에 위험을 감수하기로 한 것이다.
“음? 네가 직접?”
“동생보다야 제가 칼 쓰는 쪽에 더 재능 있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직접 병력을 이끌고 네패스 남작령을 치겠습니다.”
도미닉 남작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장남이고 자기 말대로 칼 쓰는 재능은 차남보다 나았다.
공을 세울 기회를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제 계획을 멋대로 차지하겠다는 장남의 행동에 차남은 표정이 구겨졌지만, 뭐라 하지는 못했다.
자신이 짠 계획이기는 하지만 직접 전장에 설 용기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꾸나.”
이렇게 해서 도미닉 남작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계획대로 왈트 자작가와 연락이 오고 갔고 왈트 자작가는 대가를 약속받고 군대를 움직여 바이든 남작가를 견제했다.
바이든 남작은 그제야 왈트 자작가와 맺은 동맹이 무의미해졌음을 알게 됐다.
네패스 남작가의 돌발적인 행동으로 인해 생겨난 변수였다.
* * *
“후욱! 후욱!”
길이 아닌 산을 넘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도 완전 무장을 한 상태에서는.
그러나 도미닉 남작가 역시 가능한 정예들을 추린 상황.
거기에 후계자인 장남까지 나섰기에 정예들은 힘을 내서 산을 넘고 있었다.
“네패스 남작의 영지에 가까워지면 한 번 휴식을 취해야겠군.”
그들은 정예답게 신속했지만, 뒤를 생각하는 치밀함도 보였다.
체력이 빠진 상태로 바로 전투에 들어섰다가 낭패를 당할 수도 있기에 거의 도착할 때쯤에 휴식을 취하려는 것이다.
“네패스 남작가의 군대는 아직 그 자리에 있겠지?”
장남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따라온 마법사에게 물었다.
도미닉 남작은 산을 넘는 부대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 정면에서 200여 명의 병력을 보낸 상태였다.
별일이 없다면 네패스 남작가의 시선은 그쪽을 향했을 것이다.
마법사는 마나 파장을 몇 번 보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병력을 너무 많이 보낸 모양입니다. 겁을 먹었는지 흩어져서 도망가고 있다는군요.”
“하?”
장남은 어이가 없었다.
대치하거나 물러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아예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다니?
하지만 나쁜 소식은 아니었다.
“그럼 본대도 와해되었다는 거군.”
유일한 위험은 본대가 빠르게 돌아와서 자신들이 고립되는 거였는데 그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 같았다.
“조금만 더 힘을 내라, 이 언덕만 넘으면 쉴 곳이 나올 거다.”
장남은 좀 더 서두르기로 하고 병력을 이끌었다.
그는 자신이 이끌고 있는 이 특공대가 승리를 거둘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윽고 언덕을 넘은 그들은 쉴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참, 피곤해 보이는군.”
그러나 그곳에서도 휴식을 취하는 건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네패스 남작가의 군대가 그들의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기에.
“어떻게 여기에?”
“모두 손님분들을 편히 쉬게 해드리도록.”
선두에 서 있던 아인의 신호와 함께 남부의 첫 전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