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17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7화
17화
* * *
루안의 행방을 묻는 질문에 마법사 협회로부터 답이 돌아온 건 하루가 지난 후였다.
플레턴의 입김이 들어갔는지 마법사 협회에서 생각보다 일찍 루안의 위치를 확인해 주었다.
그런데 답의 내용은 내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왈트 자작가, 억류, 회유 중.]
찾아보겠다는 답만 돌아와도 긍정적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쉽게 알게 되니 놀랐다.
그런데 그 위치가 이상했다.
왈트 자작령에 속한 마을 같은 곳도 아니고 자작가라고 정확한 답변이 들어왔다.
거기에 억류된 상황이라니?
뒤에 회유라는 단어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왈트 자작가에서 루안을 회유하기 위해 붙잡아 둔 모양이었다.
‘흠.’
그럼 이 붙잡힌 루안이 어떻게 절대군주의 메인 스토리에 나올 수 있었을까?
왈트 자작가가 순순히 풀어줬을 리는 없으니 혼자서 탈출했거나 왈트 자작가가 망해서 풀려났을 가능성이 컸다.
‘아마 후자겠지.’
루안이 싸움을 잘한다는 이야기는 메인 스토리에서 나온 적이 없다.
대장장이로서의 실력은 뛰어나겠지만 억류된 것만 봐도 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한테는 기회다.’
왈트 자작가에서 루안을 구한다면 어쩌면 루안을 회유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구해준 은혜를 대가로 장비 몇 개 정도는 요구해 볼 법했고.
“벌써 찾은 겁니까? 역시 마법사 협회는 다르군요.”
베르타에게 이 사실을 전달하자 베르타는 마법사 협회의 정보력에 감탄했다.
“그런데 다른 소식은 없었습니까?”
“어떤?”
“동부 내전에 대한 소식이나 다른 지역에 대한 소식도 혹시 얻을 수 있을까 해서…….”
확실히 지금 이 왕국에서 마법사 협회보다 신속하게 정보를 모을 수 있는 세력은 없었다.
그러나 플레턴은 이 이상의 정보는 나에게 보내주지 않았다.
불필요하다고 생각했거나 내가 마법사 협회의 정보를 어디에 써먹을지 염려한 듯했다.
“그 부분은 베르타 경이 수고해 주게.”
“하아. 알겠습니다.”
베르타는 크게 아쉬운 기색이었다.
마법사 협회에서 생각보다 큰 소득을 얻은 탓에 좀 더 얻어낼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모양이다.
사실 나도 그렇기는 했지만.
‘덥석 제자로 받아준 것도 그렇고. 마법서도 하나 내주길래 막 도와줄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군.’
씀씀이는 큰 편이지만 자신이 속한 마법사 협회에 대한 애착 역시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그렇기에 협회에 역풍이 될지 모르는 행동은 피하는 것이겠지.
“그런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왈트 자작가에 억류 중이라면…….”
“몰래 빼내거나 왈트 자작가를 무너트리고 구해야겠지.”
“어느 쪽도 힘든 방법입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왈트 자작가의 분노를 사게 될 테고, 후자는 그냥 전쟁 아닙니까?”
“그렇기야 하지만.”
딱히 문제 될 거 같지는 않았다.
그 수를 찾아내면 그만이니까.
지금으로선 주변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 * *
일주일 정도가 더 흘렀을 때 베르타는 내전에 관한 새로운 소식을 들고 왔다.
북부의 대영주들이 병력을 일으켰다는 내용이었다.
동부에서 시작된 내전의 불길이 기어이 다른 지역인 북부까지 번진 것이다.
그리고 이곳 남부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카이로스 백작이 이웃 영주들을 호출했다고 합니다.”
“호출?”
카이로스 백작은 마이어드 후작과 같은 남부의 대영주였다.
마이어드 후작과 비교될 수 있는 세력은 아니었지만, 명색이 대영주인 만큼 나 같은 남작과는 수준이 달랐다.
“자신에게 복종할 것인지 대항할 것인지 선택하라는 압박이겠지요. 복종이라면 받아들이겠지만 거부한다면 정복을 할 겁니다.”
“마이어드 후작은?”
“아직 움직임은 없지만, 곧 행동을 취할 것 같습니다.”
내전의 불길이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는 건 한쪽이 움직이면 다른 쪽도 움직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대영주들의 힘은 다른 영주들과는 아예 급이 달랐기에 이웃 영주들로서는 설령 연합하더라도 대영주에게 대항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한쪽이 힘을 키우면 대영주들 사이의 균형도 무너지기 마련.
그걸 막으려면 대영주들끼리 직접 충돌하거나 마찬가지로 힘을 키워야 했다.
“그렇겠지.”
대영주들의 이해관계는 모르겠지만 설령 어느 정도의 밀약이 있더라도 서로를 완전히 믿지는 않을 것이다.
힘을 가진 이의 앞에서 당당하기 위해선 자신 역시 거기에 맞설 힘이 있어야 하니까.
“우리 이웃들은?”
“분위기가 살벌해졌지만 아직 선공을 취할 영주는 없어 보입니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포식자가 없으니 눈치를 보게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마 이 상황이 그리 오래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마이어드 후작의 행보가 결정되면 다른 영주들도 각자 선택을 하게 될 테니까.
복종하거나 대항하거나.
복종을 바란다면 백기를 올릴 테고, 대항할 거라면 힘을 키우기 위해 다른 영지를 노릴 것이다.
물론 그 상대는 피의 연회로 큰 피해를 본 우리 네패스 남작가가 유력했고.
“병력을 모두 모아야겠군.”
“정말 먼저 움직일 생각이십니까?”
“그게 유리하니까.”
아마 지금쯤이면 우리 영지 주변에도 이웃 영지에서 보낸 첩자들이 쫙 깔렸을 것이다.
내전 이후로 검문을 강화했지만, 그 이전에 들어왔거나 외부에서 동태를 살피는 이들은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베르타도 그런 이들을 통해 정보를 얻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다른 영주들의 반응이 기대되는군.”
* * *
“역시 카이로스 백작이 먼저 움직임을 보였군요.”
바이든 남작은 마이어드 후작가로부터 온 서신을 읽고 있었다.
카이로스 백작이 행동을 취했기에 마이어드 후작도 이제 가만히 있을 순 없게 되었다.
그에 따라 마이어드 후작은 자신을 따르는 영주들에게 자신의 뜻을 드러냈다.
“그럼 이제 시작인가요?”
바이든 남작의 맞은편에 앉은 레일리 왕녀는 긴장을 품고 물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고 준비도 했지만 그래도 내전이 시작되었다는 건 태연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족과의 전쟁이 끝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크레시안 왕국은 원래 강대국도 아니었고 전쟁으로 입은 피해는 복구 시도조차 못 한 상황이었다.
내전까지 치르고 나면 전쟁이 끝나도 왕국이 제 모습을 찾기 어려울지도 몰랐다.
“그렇습니다. 왕녀 저하.”
바이든 남작은 서신을 보여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마이어드 후작이 행보를 결정했으니 그 아래의 영주인 자신도 움직여야 할 때였다.
“우리는 계획대로 왈트 자작가와 함께 움직일 것입니다.”
세간에 알려진 사실은 아니나 바이든 남작가는 왈트 자작가와 동맹을 맺은 상태였다.
그러나 진실한 동맹은 아니었다.
왈트 자작가와 도미닉 남작가의 충돌을 유도한 뒤 두 가문을 한 번에 집어삼킬 계획이었다.
바이든 남작가만의 힘으로는 버겁지만, 눈앞에 있는 레일리 왕녀의 협조가 있다면 힘이 빠진 두 가문을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네패스 남작가의 움직임이 어떨지 모르는 게 걸리네요.”
“네패스 남작가야 얌전히 눈치나 보고 있지 않겠습니까?”
이웃 영지인 만큼 바이든 남작은 네패스 남작가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네패스 남작으로 있는 인물은 나이도 어린 막내 공자였다.
피폐해진 영지를 돌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을 텐데 내전에 감히 끼어들 거 같지는 않았다.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그렇지도 않던데요?”
그러나 레일리 왕녀는 생각이 달랐다.
잠깐이지만 직접 본 네패스 남작의 모습은 바이든 남작이 말하던 것과 꽤 차이가 있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후후. 사실 일부러 말 안 한 일이 좀 있었거든요.”
레일리 왕녀는 짧은 만남을 떠올렸다.
어째서 네패스 남작은 행렬의 뒤에서 나타났는가?
정황상 하보크를 다녀온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왜 하보크에 갔는가?
만나서 딱히 득 될 거 없을 자신들을 굳이 피하지 않고 마주한 이유는?
여러 미심쩍은 정황들이 있었다.
“적어도 가만히 눈치만 볼 거 같지는 않아요.”
“아니, 그런 걸 왜 미리 말씀해 주지 않으신 겁니까?”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바이든 남작은 식은땀을 흘렸다.
처음부터 네패스 남작가의 움직임을 배제하고 짠 계획인데 이렇게 변수가 생기다니?
물론 네패스 남작가가 긴장할 만큼 힘 있는 세력은 아니지만 아무리 망해도 영주 가문은 영주 가문이었다.
‘만약 세 가문들이 다 동맹을 맺으면 이쪽도 위험한데.’
왈트 자작가, 도미닉 남작가, 네패스 남작가.
그 셋이 혹시 이쪽의 계획을 알아차리거나 나중에라도 연합한다면 바이든 남작가도 잃을 게 너무 많았다.
“네패스 남작가는 왕실에 충성하던 이들이니까요. 그래서 한번 지켜보고 싶었어요. 아직 그 충성심이 남아 있는지 어떤지.”
“하지만 계획에 지장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마이어드 후작께서 나서주면 될 일이에요.”
“끄응.”
바이든 남작은 차마 화를 내지 못하고 앓는 소리만 흘렸다.
자신의 신분으로 감히 왕녀에게 목소리를 높일 수는 없었으니까.
“급보입니다!”
그때 밖에서 무장한 기사가 뛰쳐 들어왔다.
그는 레일리 왕녀의 기사였다.
잘 훈련된 정예기사의 당혹스러운 표정에서 바이든 남작은 뭔가 큰일이 터졌음을 짐작했다.
‘뭐지? 왈트 자작가가 우리 계획을 알아차리고 도미닉 남작가와 연합했나?’
바이든 남작은 불안한 눈빛으로 기사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네패스 남작이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뭐?”
정말 레일리 왕녀의 말대로 일이 터졌다는 것에 바이든 남작은 기겁했다.
도대체 무슨 병력이 있다고 네패스 남작가에서 먼저 움직인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만히 제 땅만 지켜도 벅찰 거면서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규모는 얼마나 되나요?”
“약 150명입니다.”
“하, 그럼 그렇지.”
150명이라는 말에 바이든 남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정도라면 딱히 균형에 영향을 주지도 못할 미미한 숫자였다.
“아니, 잠깐만.”
그러나 곧 바이든 남작은 잘못된 부분을 깨달았다.
“150명이라고?”
이 150명은 네패스 남작가의 전력을 추정했을 때 한 번 예측된 숫자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정규군과 용병만 계산한 기준이었다.
전쟁에서는 농노들을 모아 징집하는 게 당연함을 고려하면 당연히 이보다 훨씬 많이 나오는 게 맞았다.
이건 적어도 너무 적었다.
“병력 구성이 어떻게 되지?”
“정규군과 용병으로만 편성된 병력입니다. 농노들의 징집은 없었다고 합니다.”
“하?”
그 당연한 징집을 하지 않았다는 것에 바이든 남작과 레일리 왕녀 모두 당황했다.
“아니, 징집도 안 하고 고작 150명으로 뭘 하겠다고?”
농노들에게 창 한 자루 쥐여준다고 병사가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숫자는 그 자체로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이 싸움이 귀족들끼리의 분쟁으로 일어난 영지전도 아니고 내전에서 굳이 농노를 동원하지 않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패배한다면 뒤가 없으니까.
“경로는? 어디로 향하고 있나?”
“도미닉 남작가 쪽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소식이었다.
하지만 돌발적인 상황인 건 마찬가지였기에 바이든 남작은 미간을 좁혔다.
“흠. 네패스 남작이 무슨 생각일까요?”
레일리 왕녀는 인근 지형이 그려진 지도를 앞에 두었다.
고작 150명의 군대.
마을을 습격하는 정도라면 모를까 다른 가문의 군대를 상대할 규모는 아니었다.
“도미닉 남작을 밖으로 끌어낼 계획 아니겠습니까?”
바이든 남작은 정면충돌을 피하며 상대를 끌어낼 계획이라는 의견을 내었다.
“글쎄요. 밖으로 끌어낸다고 이길 수 있나요?”
그러나 이어지는 레일리 왕녀의 물음에는 마땅한 답이 없었다.
고작 150명이라는 인원으로는 함정을 파고 준비하거나 유리한 지형을 잡더라도 패배할 확률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혹시 왈트 자작과 연합했을 가능성은 없나요?”
왈트 자작가는 이미 자신들과 밀약을 나눠 도미닉 남작가를 없앨 계획을 짜고 있었다.
여기에 네패스 남작가를 끌어들인 것이라면?
도미닉 남작의 시선을 돌리고 그 뒤를 칠 계획이라면 꽤 괜찮은 상황이었다.
“그러면 왈트 자작이 저희에게 언질을 줬을 겁니다. 저희가 네패스 남작가를 노리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바이든 남작이 왈트 자작과 맺은 동맹에는 왈트 자작이 도미닉 남작을, 바이든 남작 본인이 네패스 남작을 상대하기로 결의되어 있었다.
물론 이는 말로만 그럴 뿐 실제로 바이든 남작가는 네패스 남작가를 공격할 계획이 없었지만.
그냥 시늉만 하다가 왈트 자작가의 뒤를 치면 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해졌네요.”
“어떤 것이 말입니까?”
“네패스 남작이 움직이면서 우리들의 계획이 다 어그러졌다는 거요.”
레일리 왕녀의 신랄한 말에 바이든 남작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 말대로 네패스 남작의 움직임은 큰 변수였다.
가장 약한 세력이 가장 먼저 움직이리라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끙. 그 어린놈이 공들인 계획을.”
“네패스 남작을 너무 무시한 게 문제예요.”
“면목 없습니다.”
바이든 남작은 할 말이 없었다.
아예 계획에서 일찌감치 배제해 버린 상대였기에 네패스 남작은 도리어 이 전장의 핵심이 되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