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15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5화
15화
* * *
“이거 우리가 영주의 사냥터에 들어오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네패스 남작가의 사냥터에 들어서자 라이언이 들뜬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사실 영주 가문의 사냥터라고 뭐 특별한 건 아니었다.
그냥 적당히 짐승 많은 곳을 다른 사냥꾼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통제했을 뿐이니까.
“바라는 놈 있으십니까? 곰이나 멧돼지?”
“뭐든 큰 놈이면 좋지.”
“크흐! 알겠습니다. 자, 큰 놈은 바치고 나머지는 우리가 다 가지는 거다!”
내가 사냥에 나서지 않기에 몰이꾼은 없었지만 용병들은 신이 나서 사냥터를 휘저었다.
나는 그런 용병들의 뒤를 따라서 최대한 깊은 곳으로 향했다.
‘원래는 세력이 좀 큰 뒤에야 시도해 볼 생각이었는데.’
레이드 기능을 지금껏 미뤄뒀던 건 위험성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절대군주는 친절하게 적당한 수준의 난이도를 골라주는 게임이 아니니까.
그러나 요 며칠 생각이 달라졌다.
내전이 임박해서 서두르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내 실력에 확신이 생겼다.
특전으로 얻은 5티어 실력에 네패스 남작가의 비전 마법.
거기에 라이언을 대상으로 한 경험까지.
지금이라면 충분히 할 만했다.
‘스승님께 받은 마법도 있고.’
플레턴이 내준 생명의 서에 적힌 치유 마법.
간단한 외상부터 중독 증상까지 다방면으로 유용한 마법이었다.
보통이라면 익히는 데 한 세월이 걸리겠지만 5티어의 수식언이 괜히 불세출이 아니었다.
네패스 남작가의 마법서를 익힐 때처럼 배우는 건 순식간이었다.
[영웅 정보]
이름 : 아인 네패스
국적 : 크레시안 왕국
소속 : 네패스 남작가
유형 : 마법형
등급 : 5티어
칭호 : 불세출의 대마도사
스킬 : 마나 블래스트(5), 마나 파장(1), 마나 가속(2), 치유(1)
아직 절대군주에서 쓰던 계정보다는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여러 스킬이 채워져 있으니 흡족한 기분이었다.
‘이름은 좀 별로 같지만.’
네패스 마법 이론은 마나 가속으로, 생명의 서는 치유로 바뀌어 있었다.
‘하긴, 다른 스킬들도 검술이나 단검술이라고 나오지 어느 나라, 어느 가문의 검술이라고는 안 나오니까.’
유파가 달라도 검술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되는 게 영웅 정보에 나오는 스킬이었다.
그 영향은 마법에도 고스란히 적용되고 만 것이다.
‘마나 가속이라.’
초대 네패스 남작이 남겼다는 네패스 마법 이론은 특이한 마법서였다.
마법에서 마나는 마법사가 몸에 담고 있는 에너지를, 마력은 외부로 방출하는 힘을 말한다.
달리 말해서 마력은 출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초대 네패스 남작은 마나의 증가가 마력의 증가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그러나 내려진 결론은 별 상관없다는 것이었다.
다른 마법사들도 같은 결론을 내렸는지 마법사들은 마나보단 마력을 늘리기 위한 연구에만 몰두하고는 했다.
그러나 초대 네패스 남작은 이 결과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마나의 증가가 마력의 증가로 이어지게 하는 방법을 찾았다.
그게 네패스 마법 이론의 핵심인 마나 가속이다.
체내 마나의 흐름을 특정한 흐름으로 가속시키면 마력이 늘어나게 된다는 게 주요 골자인데 문제는 이 과정을 마법사들이 뒷목 잡게 만들었다.
필요한 흐름이 사람마다 다르기에 전적으로 타고난 감각에 의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마나 가속을 위해서는 이론에 대한 이해나 부단한 노력이 아니라 천재적인 재능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러니까 후손 중에 제대로 된 마법사가 없지.’
게다가 설명도 아주 복잡하게 적어놔서 알아먹기도 어려웠다.
초대라고 해서 많이 미화되지만 결국 평민에서 귀족으로 올라온 이였기에 문장력이나 학식이 나빴던 게 원인인 듯했다.
더구나 그때는 마법사 협회도 없었고.
‘대충 이쯤 오면 충분한가?’
적당히 깊다고 판단이 들자 난 VVIP 시스템을 열고 일일 레이드 항목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척 보아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외형과 이름을 가진 몬스터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일단 한 마리.’
레이드 개시를 누르고 잠깐 기다렸다.
용병들은 여전히 신나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퓻!
근처에 있던 한 용병이 쏜 화살이 나무 위에 있던 새를 맞췄다.
새가 떨어지자 용병은 기뻐했지만, 그 기쁨은 이내 사라졌다.
텁!
추락하던 새가 화살이 꽂힌 통째로 웬 괴수의 입에 삼켜졌기 때문이다.
복슬복슬한 털에 거대한 뿔을 달고 두 발로 선 사슴의 얼굴을 한 괴물.
녀석은 새 한 마리로는 부족했는지 이쪽을 향해 탐욕스러운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으아악!”
“무슨 일이야?”
괴수를 발견한 용병이 비명을 내지르자 흩어졌던 용병들이 다시 모였다.
“저게 대체 뭐야?”
곧 라이언도 내 곁에 합류했다.
그는 괴수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거 북부에서 서식하는 웬디고 아닌가?”
“북부 몬스터라고?”
“그런데 왜 여깄어?”
용병들은 멍한 눈으로 웬디고를 보았다.
라이언을 빼고는 다들 웬디고를 처음으로 보는 거 같았다.
“저게 뭐든 도망쳐야 하지 않을까? 위험해 보이는데.”
“위험하기는!”
라이언은 도망치자는 말에 피식 웃더니 호기롭게 웬디고의 앞으로 나섰다.
“까짓, 저놈도 사냥하면 그만이지!”
호기로운 말과 함께 라이언은 번개 같은 찌르기로 단숨에 웬디고의 목덜미에 단검을 들이밀었다.
그러나 두꺼운 웬디고의 가죽은 라이언의 단검 정도에는 뚫리지 않았다.
북!
아주 얕게 베이며 칼날이 미끄러지자 라이언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크오오!”
당연히 웬디고는 라이언을 가만두지 않았다.
팔인지 앞발인지 애매한 것을 휘두르고 뿔 달린 머리를 흔들며 라이언을 매섭게 몰아쳤다.
“이거 왜 이렇게 질겨?”
라이언은 빠른 몸놀림으로 몇 번 더 웬디고를 공격해 봤지만 웬디고의 질긴 가죽에 막혀 제대로 된 피해를 주지 못했다.
“혼자서는 위험해 보이는데 도와줘야겠군.”
“하지만 라이언 형님도 고전하시는데요?”
상황이 그러하니 용병들은 섣불리 덤비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험상궂고 덩치가 큰 웬디고는 일격에 사람을 즉사시키고도 남을 만큼 위험했으니까.
게다가 최고 실력자인 라이언의 공격이 통하지 않아 용병들은 자신감을 잃었다.
“걱정하지 말게. 내가 마법으로 지원할 테니까.”
하지만 난 자신 있게 웬디고를 노렸다.
콰콰콰콰!
“일단 크게 한 방!”
작렬하는 마나 블래스트.
사람이 맞는다면 그대로 뼈가 으스러지며 즉사할 위력의 일격이었다.
제아무리 웬디고라도 이 공격에는 충격이 컸는지 휘청이는 모습이 보였다.
“크르르!”
그러나 그뿐이었다.
원체 질긴 녀석이라 그런지 사람이 죽는 정도의 위력에는 큰 피해가 없었다.
덕분에 용병들의 사기만 더 떨어졌다.
“여, 역시 안 되는 거 같은데?”
“그럼 더 세게 한 방.”
하지만 아직이다.
난 방출하는 마력을 늘리고 체내 마나의 흐름을 가속시켰다.
한순간 몸을 타고 흐르는 성난 흐름에 통증이 찾아왔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마나 블래스트!”
처음으로 힘 조절을 생각하지 않고 전력으로 날린 공격.
콰르릉!
무지막지한 충격파는 마치 천둥 같은 굉음을 일으키며 웬디고를 휩쓸었다.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주변에 있던 용병들도 몸을 가누지 못하고 나뒹굴었다.
물론 최대 피해자는 근접해서 웬디고와 겨루고 있던 라이언이었지만.
“으아악!”
라이언은 그대로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더니 내 발 앞까지 밀려났다.
그리고 퀭한 시선을 보내왔다.
“귀족 나리, 사실 제가 처음에 저지른 무례 때문에 이러시는 거죠? 뒤끝이 장난 아니십니다.”
“그럴 리가.”
진심을 담아서 말하는데 결코 감정적으로 대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라이언이라는 인간 자체가 워낙 방자하고 남 눈치 안 보니까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내 실력을 어필해 줘야 할 거 같아서 그랬을 뿐이다.
고삐 풀려서 날뛰는 걸 막으려면 고삐를 채워야 되니까.
용병들의 세계에서는 무조건 강한 놈이 인정받으니 용병들 방식에 어울려준 것뿐이다.
라이언에게도 그게 잘 먹히는 거 같았고.
쿵!
마나 블래스트의 충격이 가시자 중심에 있던 웬디고가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녀석은 그 질기던 가죽들이 거적처럼 너덜너덜해진 채 숨만 고르고 있었다.
“저걸 맞고도 즉사를 안 하다니.”
라이언이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추가타를 날려서 웬디고의 숨통을 확실하게 끊어냈다.
“그럼 한번 성과를 볼까?”
쓰러진 웬디고에게 다가가서 혹시 아이템이 나온 건 없는지 확인했다.
그러나 딱히 보이는 건 없었다.
그냥 몬스터도 아니고 레이드인데 아무것도 없다?
시스템을 확인해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게임이 아닌 만큼 직접 도축하거나 채집해야 할 필요가 있는 모양이었다.
“이거 손질할 수 있나?”
“웬디고를 손질해 본 적은 없지만 생긴 게 사슴 같으니 대충 비슷하게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특히 이거…….”
라이언은 웬디고의 커다란 뿔을 툭툭 건드렸다.
그 질긴 가죽조차 엉망이 되었음에도 뿔은 온전하기만 했다.
“보통 뿔은 아니군요. 사실 가죽도 굉장히 질겨서 좋아 보였는데…….”
라이언이 아쉽다는 듯 엉망이 된 가죽을 건드렸다.
“그럼 빨리 손질해 주게.”
“예.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다음 사냥감이 도착한 거 같으니까.”
웬디고에게 단검을 들이대던 라이언은 이어지는 내 말에 돌처럼 굳어버렸다.
용병들은 이미 겁먹은 얼굴로 어느 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웬디고보다 거대한 괴수 하나가 씩씩거리며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거 혹시 트롤?”
“그 악명 높은 몬스터 말이야? 그게 왜 여기 있어?”
“뭐, 인적 드문 사냥터에 웬디고나 트롤쯤 나올 수도 있지 않나?”
난 연달아 괴수가 튀어나온 것에 어안이 벙벙해진 용병들에게 대충 말을 꺼냈다.
그에 용병들은 발작하듯 소리쳤다.
“세상에 어느 사냥터에 몬스터가 나옵니까!”
“미안하군. 우리 남작가가 워낙 오지에 있다 보니 가끔 그래.”
“말도 안 돼!”
절규하는 용병들을 뒤로하고 마나 블래스트가 다시 한 번 쏘아졌다.
* * *
“대체 사냥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처음 용병들이 사냥에 나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 기사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아무리 아인이 원한 것이라지만 동부가 내전으로 소란스러운 때에 느닷없이 사냥이라니?
자신들은 경계 태세를 갖추고 전쟁에 대비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그러나 그런 불만은 사냥터에서 돌아온 용병들의 몰골을 보는 순간 바로 사라졌다.
“사, 살았다.”
용병들은 영지에 발을 들이기 무섭게 우르르 쓰러졌다.
그들의 모습은 전쟁터에서 도망쳐 온 패잔병과 다를 바 없었다.
반면 용병들을 이끌고 나갔던 아인은 약간 먼지가 묻었을 뿐 멀쩡한 모습이었다.
“기사님들.”
그때 라이언이 기사들의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대체 네패스 남작가의 사냥터는 왜 이럽니까?”
“뭐가 말이냐? 우리 사냥터에 문제라도 있었던 거냐?”
“아니, 기사님들은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뭔 괴수들이 바글거리는데?”
라이언은 경악한 눈으로 기사들을 보았으나 기사들은 라이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네패스 남작가의 사냥터는 평범했다.
나타나는 맹수라고 해봐야 멧돼지 정도였고 그 이상 위협적인 동물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 사냥터도 관리를 하지 않았으니 개체 수에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겠습니다. 멧돼지가 크게 늘었다거나.”
“그래 봐야 멧돼지잖아?”
혼자라면 모를까 사냥에 나선 용병들의 숫자만 수십이었다.
더구나 기사도 이기는 실력자인 라이언이 쩔쩔매기에는 멧돼지가 그리 힘든 사냥감으로 생각되지는 않았다.
결국, 기사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앓는 소리를 내뱉는 라이언과 용병들을 보았다.
당연하지만 그 뒤로 용병들은 사냥을 나가자는 아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안타까운 건 그들에겐 고용주의 명령을 거부할 권리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 * *
‘웬디고의 뿔’, ‘트롤의 심장’, ‘하피의 발톱’.
난 주간 퀘스트에서 새로 얻은 도안과 함께 재료들을 가지고 대장간을 찾았다.
그러나 대장장이들은 상세한 도안에도 불구하고 낯선 재료들에 난색을 표했다.
“이건 좀 어렵습니다. 저희가 다뤄본 적 없는 재료들이라서.”
“정말 안 되나?”
기껏 용병들을 통해 레이드 뺑뺑이를 돌아 얻은 재료들이었다.
이것으로 장비들을 만들면 머릿수는 다소 부족하더라도 실력은 어디에 꿇리지 않는 군대를 만들 수 있을 거 같아 나름 기대를 갖고 있었다.
“이런 재료들을 다룰 수 있는 장인이라면 왕국 내에서도 몇 없을 겁니다.”
“흠. 그럼 혹시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나?”
“보통은 왕실 직속 공방이나 대영주들의 아래에 있지요.”
당연한 이야기였다.
얼마 전까지 마족과의 전쟁이 있었고 내전까지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 실력 있는 장인의 가치 역시 엄청날 테니.
물론 크레시안 왕국에는 이제 왕실이라고 할 곳이 사라지기는 했지만.
‘혹시…….’
난 얼마 전에 본 레일리 왕녀를 떠올렸다.
왕가에 속한 병력이 있던 것과 그녀가 가지고 가던 수준 높은 장비들.
어쩌면 솜씨 좋은 장인도 남아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무리겠지.’
마이어드 후작의 의향을 모르는 상황에서 왕녀는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폭탄이었다.
“다른 실력 좋은 장인은 없나?”
“아, 루안이라고 하는 젊은 장인이 꽤 실력이 좋다는 걸 행상들에게 들어본 거 같습니다.”
“응? 누구?”
“루안입니다. 루안. 어디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들을 줄 몰랐던 뜻밖의 이름에 난 당황하고 말았다.
대장장이 루안.
녀석은 절대군주의 메인 스토리에 등장하던 영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