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12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2화
12화
“전 딱히 드릴 게 없습니다. 영지 사정이 좋지 않거든요. 그나마 내세울 게 있다면 선조께서 물려주신 비전 마법서뿐인데.”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 가져온 마법서를 내밀었지만 플레턴은 콧방귀를 뀌었다.
“너희 가문 비전을 빼먹을 생각은 없다. 애초에 내 나이에 새로 배운다는 것도 우스운 노릇이고.”
플레턴은 품속 어딘가에서 서책 하나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여서 표지에 적힌 제목을 읽었다.
‘생명의 서?’
특이한 제목의 마법서였다.
“이게 뭡니까?”
“내 마법서다. 네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지만 제자라면 스승의 마법 정도는 배워야지.”
“이렇게 쉽게 주셔도 됩니까?”
“내 평생 이룩한 여러 마법 중 하나일 뿐이다. 적어도 어디에서 요절하지는 말아야지.”
통 크게 마법서 하나를 내주는 플레턴의 행동에 나는 꽤 충격을 받았다.
아직 내 쪽에서는 마땅히 줄 수 있는 게 없었는데 마법서를 그냥 주다니.
“싸우라고 있는 마법은 아니고 다친 몸을 낫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괜히 위험한 짓 할 생각은 말아라.”
“그렇군요.”
플레턴의 뜻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일단 제자로 삼았으니까 마법은 알려줄 테지만 그렇다고 내가 마구 날뛰기는 바라지 않는 거 같았다.
공격이나 다른 방향으로 활용할 마법이라면 내전에서 적극적으로 사용할지도 모르지만, 치유 마법은 그럴 수 없으니까.
“그런데 눈빛을 보니까 말 들어 먹을 놈은 아닌 것 같구나.”
그러나 이어지는 플레턴의 말에 내 표정은 굳어지고 말았다.
플레턴은 내가 적당히 마법사 협회의 비호를 받고 영지를 지키는 선에서 멈추기를 바라는 것 같지만 확실히 그건 내 목표가 아니었다.
영지를 지키는 건 물론이고 내전을 평정해야 지구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하여튼 세상은 요지경이야. 착한 것들은 멍청하고 나쁜 것들은 똑똑하지.”
“저라고 싸우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 상황이 그렇지 않습니까? 힘이 없으면 잡아먹히는 세상입니다.”
플레턴의 투덜거림에 난 괜히 반발심이 생겨서 말했다.
“거짓말 말아라, 이놈아.”
그러나 플레턴은 내 말을 전혀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제 목숨만 챙길 거였으면 그 입으로 더 도와달라고 말했겠지. 치료 마법 따위에 만족할 게 아니라.”
정곡이었다.
내가 정말 걱정하는 게 내전으로 인해 영지가 망하는 거였다면 좀 더 적극적인 도움을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내가 원하는 건 방어가 아니라 공격이었으니까.
단지 힘이 갖춰질 시간만 벌면 되는 거였다.
“어디까지 보고 있는 거냐? 이번 기회에 가문을 키워서 대영주라도 되어볼 셈이냐? 아니면 아예 거창하게 왕국을 정복하고 싶은 거냐?”
플레턴의 물음에 나는 잠깐 고민했다.
과연 어디까지 말해도 될까?
오늘 처음 본 스승을 신뢰할 수 있을까?
그냥 얼버무리고 벗어나는 게 맞을까?
곧 내 입이 열렸고 플레턴은 인상을 와락 찡그렸다.
“똥을 주웠군!”
* * *
“아, 족보 꼬였네!”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온 가이트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플레턴은 원로 중에서도 가장 높은 기수에 해당하는 이로 마법사 협회의 최연장자였다.
당연히 그 제자들 역시 마법사 협회에서는 상당한 위치에 앉은 상태였다.
“이거 대체 어떻게 대우해 줘야 하는 거야?”
가이트가 괜히 아인을 제자 삼겠다고 나선 게 아니었다.
아인이 플레턴의 제자로 들어가게 되면서 기수가 꼬이게 생겼다.
더구나 아인은 귀족이었다.
그것도 한 지역을 다스리고 있는 영주.
영주 중에선 변방의 한미한 가문이라지만 상급 귀족인 영주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협회에 들어오는 귀족이라고 해봐야 대부분 가문에서 기도 못 펴던 놈들이었는데.”
평민과 농노 출신을 주축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마법사 협회에 들어온 귀족들은 대부분 그 수준이 낮았다.
영주급은 당연히 없었고 직계쯤만 되어도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는 터라 마법사 협회에는 발도 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협회 소속 귀족은 대부분 허울뿐인 귀족이었다.
성은 있으나 다스리는 영토가 없거나, 가문에서 천덕꾸러기 취급받던 이들이나 협회에 오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이들도 어쨌든 귀족이라고 나름 대우를 해주는 편이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마법사라고 해도 평민들 틈바구니에서 귀족들이 잘 적응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렇지만 이번 상대는 달랐다.
‘대단히 젊지만, 영주 귀족이다. 남작 작위를 가진 본인이야. 게다가 놀라운 재능에 철저하게 협회를 이용할 생각까지 하고 있다. 알아서 떨어져 나갈 일은 없어.’
아무리 견적을 봐도 골치 아픈 상대였다.
그렇기에 애초에 받아들이지를 말거나 받더라도 협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힘든 위치로 들여와야 했다.
그런데 플레턴이 그 재능에 눈이 멀어서 자신의 밑으로 들였다.
‘뭐, 대단하기는 했지만.’
가이트는 설비에 측정된 기록들을 떠올리고는 혀를 내둘렀다.
정말 대단한 기록이었다.
이 남부 지부의 모든 신기록을 갱신해 버렸으니까.
솔직히 욕심날 만했다.
게다가 플레턴은 살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 피해가 돌아올 것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고.
“젠장! 우리 지부만 덮어쓰겠군.”
결국 그 불똥이 튈 곳은 남부 협회 그리고 그 지부장인 자신이었다.
가이트는 마법사 협회 본부에 보낼 보고를 생각하며 이마를 짚었다.
* * *
마법사 협회에서 낸 성과를 평가하자면 그야말로 기대 이상이었다.
지부의 간부나 잘해야 지부장 선으로 예상했는데 그보다 윗줄인 원로의 제자로 들어갔다.
나와 같은 영주들도 쉬이 어쩌지 못하는 자이니 영지가 내전 초기에 멸망하는 일은 피한 셈이었다.
“일이 잘 풀린 거 같아 다행입니다.”
“그 정도가 아니지. 아주 대박이었어.”
플레턴은 나에게 상당히 많이 양보해 주었다.
그가 양보한 피해가 남부 지부에 덮어씌워질 거 같기는 한데 가이트라는 지부장이 꼼짝도 못 하니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런데 공자님. 그럼 이제 내전은 걱정할 필요 없지 않습니까? 굳이 용병들의 고용을 유지할 필요는…….”
“빅터 경.”
난 빅터의 말을 끊었다.
그저 바라는 게 평화라면 분명 빅터의 말은 맞다.
하지만 나는 당장 목숨을 구하는 것에 만족할 수 없었다.
지구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결국 위니스가 바라는 절대군주가 되어야 했으니까.
“내가 말했지. 피의 연회에 대영주들이 관여했을 거라고.”
“그건…….”
“가족들의 죽음을 외면하란 소리인가?”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아인의 가족들은 당연히 내 알 바가 아니었다.
이건 그냥 명분이었다.
빅터처럼 순진한 사람들은 더 이상을 원하지 않을 테니까 그들을 끌고 갈 명분이 있어야 했다.
다행히 가족의 복수는 최고의 명분이 되어줄 수 있었다.
“그리고 내전으로 피해를 보게 되는 건 우리 영지만이 아니야. 크레시안 왕국의 많은 백성들이 피눈물을 흘릴 텐데 외면하는 게 옳은 일일까?”
명분이라는 건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였다.
얼마든지 만들어서 쓸 수 있는 것.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빅터와 함께 마법사 협회를 나서니 입구 근처에 대기하고 있는 기사들이 보였다.
그들과 합류하여 병사들과 용병들이 있는 곳까지 갔는데 모두 한데 모여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조심스레 다가가니 라이언이 가운데에서 구슬 하나를 굴리는 게 보였다.
“자, 돈 넣고 돈 먹기. 어느 상자에 숨기는지 맞추면 10라페라고?”
아무리 봐도 야바위였다.
그것을 발견한 기사들의 반응은 안 봐도 뻔했다.
더구나 용병들만도 아니고 병사들까지 끼어 있었으니.
“남작님을 모시는 것들이 이게 무슨 추태야!”
“이 자식이 진짜!”
영지 내부도 아니고 외부에 나온 이상 엄정한 군기를 보여도 모자랄 판에 야바위를 하고 있으니 기사들의 분노는 지당했다.
“그냥 기다리기 심심해서 그런 건데 좀 봐주십시오!”
라이언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 다녔다.
그러나 사방에서 추격해 오는 기사들에게 금방 사로잡혔다.
본인이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이놈을 어떻게 할까요?”
“보통 이런 경우에 어떻게 처벌하지?”
“딱히 규정은 없습니다. 하지만 적당히 손을 봐주는 게 맞습니다.”
“더구나 병사들에게도 악영향을 줬습니다.”
벼르고 있던 기사들은 건수를 잡은 것에 기뻐 보였다.
그에 알아서 처리하라고 입을 떼는데 주변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기이한 소음이 있었다.
우웅! 웅!
다른 이들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눈치였으나 난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얼마 전에 배운 것이기 때문이다.
‘마나 파장.’
마나 파장이라는 건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마나를 자극하는 기술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도 먼 거리에서 끼칠 수 있는 영향은 한계가 있었기에 직접 대화는 불가능했고 사전에 약속해 둔 패턴을 전달하고는 했다.
‘마법사 협회에 전달하는 거 같은데 이게 무슨 내용이지?’
난 내가 배운 신호들과 이 신호를 비교해서 뜻을 해석했다.
‘긴급 신호군. 위험도 4단계.’
집중해서 마나 파장을 읽다가 올 것이 왔다는 걸 깨달았다.
총 다섯 단계까지 있는 위험도에서 4단계라면 매우 높은 수준이니.
그 이상의 위험도는 인류 역사상 딱 한 번, 마족과의 전쟁에서만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는 곧 한 가지를 의미했다.
‘시작했다.’
이 왕국 어디선가 내전이 시작되었다.
* * *
지구에서의 전쟁은 총력전이다.
미사일의 사거리는 국경을 넘어 민간 지대를 타격할 수 있기에 이웃한 국가들의 경우에는 전국 어디도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절대군주의 배경이 되는 아르카디아는 그런 총력전의 개념이 낯설었다.
기본적으로 전쟁이라는 건 지역 단위로 이루어지는 국지전의 개념이었으니까.
한 곳에서는 전쟁으로 힘들어도 다른 곳은 무슨 일 있냐는 듯 평화로운 모습이 결코 드물지 않았다.
마족과의 전쟁도 그랬다.
전선에 해당하는 지역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네패스 남작가는 사람과 재물만 엄청 빠져나갔을 뿐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적잖은 타격이 되었겠지만 적어도 눈앞에서 참상을 본 것은 아니었다.
내전 역시 당장은 그랬다.
첫 불씨가 당겨진 것은 동부.
동부에 있는 대영주 가문들이 사병들을 동원해서 이웃 영지들을 침략했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시작은 동부일지언정 그 불길은 동부를 벗어날 거라는 사실을.
“서둘러라!”
지금 우리에게 급한 건 시간이었다.
“짐도 쓸모없는 건 버려!”
영지를 나선 상황에서 시작된 내전.
최대한 빠르게 영지로 돌아가야만 했다.
“차라리 공자님을 모시고 저희끼리 먼저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기사 한 명이 의견을 냈다.
말을 갖고 있는 기사 네 명과 영주인 나까지 다섯 명이 먼저 돌아가자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안 될 말이었다.
“그러다가 습격이라도 받으면?”
내전의 조짐이야 누구나 느꼈겠지만, 지금까지는 눈치 싸움이었다.
그래서 나는 외부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내전이 시작한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이웃 영주들이 작정하고 나를 노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을 염려해서 가급적 은밀하게 이동하여 마법사 협회를 찾았지만 발견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병사들끼리 잘 합류할지도 의문이지.’
대부분의 병사들은 길눈이 좋지 못했다.
웬만해서는 영지를 벗어나는 경험이 잘 없으니까.
물론 지금은 길눈이 밝은 용병들이 있었지만, 기사들이 모두 빠지고 나면 과연 용병들이 제대로 복귀할지 의문이었다.
내전이 터지기 전이라면 모를까 전쟁이 시작된 이상 지금껏 받은 돈만 갖고 날라버려도 이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반드시 용병들과 같이 복귀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을 강제할 수 있는 건 용병들을 제압할 무력을 가진 나나 기사들뿐이었고.
‘기사들이 많이 빠지는 게 걱정이라서 실력 있는 용병들도 동행시킨 것이었는데 이 상황에서는 악수가 되었군.’
“모두 정지!”
그때 선두에서 위험이 없는지 살피던 기사가 갑자기 정지 신호를 보냈다.
뒤따라서 쫓아오던 이들이 다급하게 멈춰 섰다.
“무슨 일이지?”
“앞에 행렬이 하나 있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귀족 가문 같습니다.”
정면을 살펴보니 우리보다 족히 두 배는 큰 규모의 병력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적어도 50명은 넘겠는데.’
귀족이라도 저만한 병력을 호위에 동원할 수 있는 건 영주 가문뿐이었다.
“바이든 남작가로군요.”
“바이든 남작가?”
옆에 선 빅터가 깃발을 통해 상대의 정체를 파악했다.
나도 들은 기억이 있었다.
‘네패스 남작가 옆에 자리한 이웃 영지이고, 남부의 대영주인 마이어드 후작가와 연관이 있지.’
바이든 남작이 자신의 딸을 마이어드 후작에게 첩으로 보냈다고 했던 거 같다.
“우리를 알아챈 기색은 아닙니다. 우회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빅터는 곧장 우회하자는 의견을 냈다.
내전이 시작된 이상 괜히 접촉했다가 문제가 생기는 걸 피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 빅터다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결정이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아니, 우리는 정면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