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9화
VVIP 영주님의 품격 9화
9화
* * *
‘용병과 기사 쪽은 대충 정리된 거 같고.’
터너의 압승으로 기사들의 사기는 충분히 올라 있었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좋아졌다.
그렇지만 내전에 대한 대비로는 여전히 한참 모자랐다.
용병을 몇이나 더 고용하든, 기사들을 시켜 병사들을 혹독하게 훈련시키든.
아직도 영지에는 부족한 게 너무 많았다.
문제는 그 부족한 부분들을 단시일에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부에서 할 만한 건 거의 다 했어. 이제는 외부로도 눈을 돌릴 때야.’
그래서 나는 행정관 베르타를 찾았다.
베르타는 2티어의 외교형 영웅으로 지금 내가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상대였다.
“베르타 경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솔직히 웬만큼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셨습니다.”
베르타는 내가 했던 생각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기사 같은 고급 병종은 늘리고 싶다고 늘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병사들을 더 뽑거나 하기에도 영지의 인구가 많은 것도 아니니 무리다.
또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에게 하나씩 가르칠 바에야 차라리 돈 좀 쓰더라도 용병들을 모으는 게 나았고.
그러나 그 용병을 모으는 것도 이제는 한계였다.
‘70명이면 최대한 모은 셈이지.’
그 외에는 지원하겠다는 용병도 드물고 아무리 급해도 무기 잡는 법도 모르는 머저리를 뽑을 생각은 없다.
“이제는 외부를 둘러볼 때지요. 제 생각에는 동맹을 찾는 게 급선무라고 봅니다.”
“동맹?”
베르타도 역시 외부로 눈을 돌리자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내 생각과 달랐다.
난 이웃 영지들을 최대한 염탐하고 그들 중 당장 네패스 남작가를 노릴 적이 누군지를 파악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먼저 선수를 쳐서 상대에게 피해를 입혀 유리한 고지를 잡는 게 좋다고 봤다.
아무래도 선공을 잡지 않고서는 절대적으로 불리해 보였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가 손을 잡을 수 있는 상대가 있을까?”
네패스 남작가와 비슷한 처지의 영주 가문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들은 수가 적고 세력도 약하며 무엇보다 너무 멀리 있었다.
내전이 일어나면 자신의 영지를 지키기에도 급급할 이들과 동맹을 맺는 건 무의미했다.
정 동맹을 원하면 이웃 영지에서 찾아야 했다.
“귀족으로 보자면 그렇지요.”
“흠?”
그런데 베르타는 내 예상을 벗어난 답을 꺼냈다.
베르타가 말한 외부의 동맹 상대는 귀족이 아니었다.
“귀족이 아니라 마법사 협회와 손을 잡으십시오.”
“허?”
이어지는 베르타의 말은 날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절대군주에서 세력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영주들을 말하는 단어였으니까.
설정상 마법사 협회 같은 다른 단체가 있기는 했지만, 그들과 협력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럴듯하군.’
이 세계는 절대군주를 기반으로 두고 있되 결국 현실이었다.
게임상에서의 제한이 그대로 통용될 리 없는 것이다.
실제로 베르타는 이미 마법사 협회를 이용해서 용병들을 불러들이기도 했고.
“그렇지만 무슨 수로?”
조직은 이익을 위해서 움직인다.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을 일에 나서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쪽에서 크게 뭔가를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고작 시골 변두리에 있는 영주 가문을 위해 그들이 조력해 줄까?
“되든 안 되든 시도는 해봐야 하는 법이지요. 다행히 네패스 가문에는 그게 있지 않습니까?”
“그거?”
전혀 짚이는 게 없는 말이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멀뚱히 바라보고 있자 베르타가 부연 설명을 더했다.
“초대 영주님께서 남기신 마법서 말입니다.”
“어?”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 * *
모든 귀족 가문에는 그 역사가 있다.
장황한 표현과 함께 시작한 빅터의 설명에 의하면 네패스 남작가를 세운 초대 네패스 남작은 대단한 마법사였다고 한다.
왕국 역사에 크게 이름을 떨쳤을 정도로.
그러나 정작 후손들은 그에 비견되기는커녕 평범한 수준의 마법사도 나오지 않아 가문은 그대로 쇠퇴하고 말았다.
“초대 영주님께서 남기신 마법서는 네패스 남작가 최고의 보물입니다.”
하지만 초대가 남긴 마법서는 여전히 남아 있으니 그게 지금 바로 내 손에 들린 마법서였다.
‘이런 게 있는 줄 알았으면 진작 썼을 텐데.’
5티어 마법형을 골라놓고서도 스킬을 배우지 못해 쩔쩔매고 있던 입장에서 기가 막힐 수밖에 없는 일이다.
현재 내가 익히고 있는 마법은 딱 두 개였다.
마나를 조종해 다양한 형태로 응용이 되는 기초 마법 마나 블래스트.
그리고 베르타가 마법사 협회에 요청해 알아낸 협회에 연락할 수 있는 마나 파장.
이렇게 공격 마법 하나와 연락 마법 하나가 내가 가진 전부였다.
유료 상점에도 마법서가 있긴 했지만, 보주가 부족한 지금으로선 그림의 떡이었다.
“무슨 마법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배울 수만 있다면 쓸모 있겠지.”
베르타는 이걸로 마법사 협회와 거래를 하라고 했지만 내가 봤을 때 그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일단 이쪽에서 준다고 저쪽에서 받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받고 나서 입을 닦아버리는 것도 걱정이고.
그 대신 빅터에게 들은 네패스 남작가의 역사를 보면 이름값이 상당해 보이니 차라리 그걸 이용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문의 마법을 익힌 다음에 마법사 협회에 직접 들어가는 것.
거래로 이루어지는 관계보다 더 돈독해질 수 있는 해법이었다.
[네패스 마법 이론 – 마나 가속에 관하여]
“워, 보물이네.”
시스템을 통해 확인해 본 결과 마법서의 정보가 떠올랐다.
사람도 그렇고 장비도 그렇고 이렇게 시스템이 인정해 주는 일은 잘 없었다.
그런 점을 미루어 볼 때 초대 네패스 남작의 업적이 결코 허황된 건 아닌 모양이다.
‘시간은 얼마나 걸리려나?’
마나 파장을 이용하는 방법은 보자마자 요령을 알 수 있었지만 이건 한 마법사의 정수가 담긴 책이었다.
절대군주에서도 스킬이 바로 습득되는 게 아니라 경험이 필요했던 만큼 이 마법을 배우는 데에도 어느 정도 시간을 투자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
마법형 영웅의 가치는 보유하고 있는 마법의 숫자와 활용성에 따라서 결정된다.
내가 게임에서도 마법형 영웅을 골랐던 이유가 바로 그 다양한 활용성 때문이었다.
당장 수준이 낮은 1티어, 2티어에서는 다른 유형보다 성장도, 활약도 미미하지만, 잠재력은 영웅 유형 중에서도 독보적이니까.
너무 느린 성장의 문제가 발목을 잡지만 이는 VVIP 특전으로 건너뛰었으니까 신경 쓸 필요 없었다.
‘마법사 협회를 이용하기 위해서.’
마법사 협회는 이름 그대로 마법사들이 소속된 집단이었다.
그들이 생겨난 계기는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마법사들을 모아 지혜를 연구한다는 듣기 좋은 이유였지만 결국은 이익 집단이었다.
마법사들의 최대 문제는 머릿수가 적다는 것이니까.
그래서 그들은 기득권층에 편입되기 위하여 단체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지식을 자신들끼리 독점하고 연구해서 체제를 공고하게 했다.
마법사란 부류의 숫자가 워낙 적기에 그들의 결속은 상당히 단단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내가 끼어들 수만 있다면.’
아무리 영주들이라고 해도 마법사 협회와 척을 지는 건 내키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그들에게 편입될 수 있다면 내전에서 영주들의 위협을 빗겨 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특히 대영주들은 지금으로선 무슨 수를 써도 상대하는 게 불가능하니까.’
전략이 통용되는 것도 어느 정도 비슷한 수준의 상대와의 이야기다.
고작 200도 안 되는 병력으로 수천 대군을 맞상대하는 건 자살행위였다.
힘을 키울 때까지는 다른 세력의 그림자에 숨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하지만 임시방편일 뿐이다.’
마법사 협회의 그림자에 숨어 잠깐 위기를 벗어나더라도 상황이 나아지는 건 아니었다.
결국 크레시안 왕국은 대영주들의 손아귀에 떨어지게 될 테니까.
내전을 평정하여 왕국을 손아귀에 넣어야 할 입장에서 이는 긍정적인 경우가 아니었다.
‘차라리 내가 대영주 세력이라면 좋았을 텐데.’
네패스 남작가가 대영주 세력에 편입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는 빅터가 이전에 지적한 내전이 일어날 수 없는 이유와 같았다.
마족과의 전쟁으로 가뜩이나 가난해진 왕국인데 그마저 내전으로 한 번 뒤엎으면 뭐가 남겠는가?
다른 영주가 가진 것들을 모두 강탈하지 않는 이상 심각한 적자였다.
그런데 대영주들이 굳이 제 몫을 나눠줄 아군을 원할 리 없었다.
“아니, 아니지.”
잘 생각해 보면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대영주들이라고 해서 그들이 완전히 단일화된 세력은 아니니까.
결국, 그들도 자신들이 얻어낼 몫에 대해서는 서로 경쟁을 해야 하는 처지였다.
영지에 충분한 가치가 생긴다면 아예 그들과 연합하는 쪽도 생각할 수 있었다.
절대군주라는 게 마지막에 승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까.
* * *
“직접 협회로 가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뭐, 우리가 아쉬운 처지니까.”
“거래는 해본 적 있으십니까?”
“어차피 얻어야 할 건 정해져 있잖아?”
내 이야기에 베르타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확실히 말이야 그렇지만 네패스 남작가에서 마법사 협회에 제시할 수 있는 건 초대의 마법서가 유일했으니까.
그것이 상당히 가치 있는 것이기는 해도 확신하기에는 부족했다.
제일 큰 문제는 네패스 남작가 스스로가 그 마법서의 가치를 정확하게 모른다는 것.
왜냐하면 제대로 익혀낸 후손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제가 꺼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방법이 있겠습니까? 보주로 구슬리는 것과는 다릅니다.”
“방법은 생각해 뒀어. 저번에 마법사 협회와 만들어둔 선만 연결해 줘.”
내 요청에 잠시 셈을 해보던 베르타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판단이 섰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령을 보내서…….”
“뭐 하러? 마나 파장을 알았으니까 이쪽에서 연락하면 그만이지.”
“하지만 영지에는 마법사가 없지 않습니까?”
“없긴 왜 없어.”
난 잠깐 주변을 살피다 책상 모퉁이에 걸쳐져 있는 서책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여기 한 명 있는걸.”
내 손짓에 따라 모퉁이에 있던 서책이 안쪽으로 밀려났다.
언뜻 마법보다는 마술 같은 속임수처럼 보이는 움직임.
그렇지만 엄연히 마법이었다.
마나 블래스트를 극단적으로 약하게 조절해서 쓴 것이니까.
‘괜히 마법형의 기본 스킬이 아니지.’
아무것도 없이 단숨에 나를 5티어로 높여줬던 특전도 빼먹지 않고 챙겨준 스킬.
마법사는 결국 마나를 사역하는 이였다.
마나를 다루는 것으로 물리력을 행사하는 모든 스킬들은 이 마나 블래스트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공자님, 대체 언제부터 마법을?”
“마법사 가문의 가주가 마법을 쓰는 게 이상한가?”
“아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베르타는 명맥이 끊어진 지가 언제인데 어떻게 마법을 익혔냐며 물어왔다.
물론 난 평소에 열심히 마법서를 공부했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VVIP 특전으로 5티어 먹고 배웠다고는 말하지 못하니까.
‘그나저나 진짜 더럽게 어려운 마법서였네.’
네패스 남작가의 후손들이 왜 그동안 변변한 마법을 못 쓴 건지 마법서를 보면서 느낄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마법사는 학자의 이미지로 대표되며 이는 마법이 학문의 한 종류이기 때문이다.
마법을 익히고 배우는 것에는 이론적인 부분이 빠질 수 없었다.
그런데 초대 네패스 남작은 그 이론을 제대로 몰랐다.
그는 그저 마나에 대한 감각을 타고난 천재의 부류였고 자신의 마법을 이론으로 제대로 정립하지 못했다.
천재의 가르침을 범재가 따라갈 수 있을 리 없으니 이후 후손들의 성과가 시원찮을 수밖에.
차라리 가문의 것이 아닌 다른 마법서를 배워서 어느 정도 경지를 이룬 뒤에 가문의 마법서를 배웠다면 모를까.
가문의 마법서를 먼저 익힌 네패스 남작가의 선조들은 죄다 쓴맛을 볼 수밖에 없었다.
‘뭔 대단한 영웅처럼 말하더니.’
다른 이도 아니고 자신이 다루는 마법의 이론조차 제대로 정립하지 못한 걸로 봐서 초대 네패스 남작은 그리 똑똑한 인물은 아니었다.
‘뭐, 어떤 면에서는 대단하긴 한가?’
직접 익힌 결과 2티어 이하에서는 엄두도 못 낼 수준의 난이도였다.
그런 걸 순전히 감각만으로 써먹었으니 초대 네패스 남작이란 인간이 어지간히 재능을 타고난 건 맞을 것이다.
본인만 돌연변이라서 문제지.
“보다시피 대단한 수준은 아니야. 가볍게 마나를 움직일 수 있는 정도지.”
겉으로 보인 게 책을 옮기는 것이었기에 베르타는 내 말에 수긍했다.
갑자기 5티어에 걸맞은 위력을 보이면 기겁할 게 당연했기에 일부러 조절한 거였다.
“그렇다 해도 대단한 일입니다. 이 가문에 다시 마법사가 나오게 된 것이군요.”
베르타는 이거라면 마법사 협회에서도 관심을 보일 거라고 이야기했다.
어쨌든 마법사는 극히 희귀한 존재였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그들의 결속은 상당히 단단한 편이었다.
“뭐, 그리 쉽게 되지는 않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걸로는 부족하다.
마법사 협회에서는 이보다 좀 더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일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내가 아직 마법사다운 경험이 전무하다는 것.
‘가는 길에 경험을 좀 쌓아야겠지.’
라이언에게 사전에 약속한 것도 있으니 딱일 듯했다.
“내가 없는 동안 영지를 부탁하지. 특히 기사들이랑 용병들 사이를 잘 중재해 주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만약 터너나 빅터에게 뒤를 맡기는 것이었다면 많이 불안했을 것이다.
그러나 베르타의 대답이기에 상당히 안심되었다.
‘아무렴. 베르타라면 가장 믿을 수 있는 인선이지.’
행정관의 권위가 기사보다 낮은 것도 아니고 최근 기사들의 충성심도 좋으니 어지간하면 큰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 이번이 첫 외출인가?’
영지를 둘러보는 게 아니라 외부로 나간다는 점에서 나는 이 세계에 와서 첫 외출을 앞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