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6 5권 =========================
두 사람의 모습을 주시하며 해설을 하던 캐스터와 해설자가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묘한 상황인데요?”
“그렇군요. 아무래도 윤민수 선수가 정의직 선수를 도발한 모양입니다.”
“하하, 정의직 선수가 그런 도발에 넘어갈리 없지 않나요?”
“물론이죠. 아, 심판이 주의를 주고 다시 경기가 진행되는군요.”
“네, 이번엔 윤민수 선수 가드를 올렸습니다. 방금 전에는 왜 가드를 내리고 멍하니 있었던 걸까요?”
“글쎄요. 정의직 선수를 도발하기 위함이 아닐까요?”
“하하, 재밌는 경기가 될 것 같습니다. 자, 다시 경기를 살펴보도록 하죠.”
“네, 자세를 잡은 윤민수 선수가 정의직 선수에게 다가가고 있습니다. 잽을 날리거나 하는 견제는 없군요.”
그때 해설자의 말을 캐스터가 가로챘다.
“조금... 이상한데요?”
“뭐가 말입니까?”
“왜 정의직 선수가 뒷걸음질치고 있는 거죠?”
캐스터의 물음에 해설자는 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뒤이어 벌어진 상황을 보며 입을 떡하니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 이, 이럴 수가...!”
“어떻게 된 거죠?”
“한 방, 단 한 방에 정의직 선수가... 쓰러졌습니다.”
심판의 카운터 소리가 들렸다.
“아, 이렇게 끝나는 건가요?”
“믿을 수가 없군요. 어떻게 정의직 선수를 주먹 한 방에 눕힐 수 있는 거죠?”
캐스터와 해설자들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심판의 카운터는 계속 되었고 결국 경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처음 출전하는 신인, 윤민수가 혜성처럼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최후의 8인이 정해졌다. 월드 그랑프리의 규칙을 따라 원 나이트 토너먼트로 치러질 다음 경기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때 보러 오면 됩니다.)
“그러죠.”
(예. 그럼.)
최강현은 김민수와 짧은 통화를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후우, 이 녀석은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는 건지...’
그 휴식 시간을 이용해 오랜만에 정시혁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누구도 받지 않았다.
‘바쁜가 보네.’
정시혁의 죽음을 모르는 최강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전화를 내려놓았다.
“뭐, 나중에 통화하면 되겠지. 그건 그렇고 슬슬 움직여 볼까?”
최강현은 서랍에 넣어 두었던 몇 가지 서류를 꺼내었다. 그리고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서류를 다 읽고서 조한무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형님.)
“그래, 슬슬 준비해라.”
(고아원부터입니까, 아니면 복지재단입니까?)
“고아원부터 간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최강현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서 회장실을 나섰다.
차를 타고 운전을 시작한 최강현은 내비게이션에서 목적지를 찾았다.
‘동산 고아원.’
멀지 않은 곳이었다.
‘30분 거리.’
최강현은 내비게이션에 찍힌 최단거리로 이동하면서 그들의 얼굴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후우.”
상상만으로도 역겨웠다.
‘어린 아이들을 상대로 어떻게 그런...!’
너무 오래 기다렸다. 하지만 그만큼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다. 지금도 고통 받고 있을 아이들이 안쓰럽지만 이제는 끝이다. 최강현은 속도를 조금 더 올렸다.
잠시 후, 최강현은 동산 고아원에 도착했다. 차를 주차시키고 곧바로 고아원의 입구로 향했다.
딩동.
(누구세요?)
“예. 기금을 전달하려고 왔습니다.”
(기금이요?)
“예.”
(잠시만요.)
돈을 준다는 말에 말투가 달라졌다. 그리고 나온 사람은 머리가 까진 중년 사내였다. 탐욕스런 눈동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단 들어가시죠.”
“예.”
최강현은 중년 사내를 따라 고아원으로 들어갔다. 곳곳에서 아이들이 보였다.
‘흐음.’
아이들의 모습은 평범했다. 그냥 다른 고아원처럼 흙을 만지고 장난을 치는 듯 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무언가 묘한 거리낌이 생긴다.
‘너무... 말랐다.’
그랬다. 아이들은 심하게 말라 있었다. 그 모습을 두 눈에 담은 최강현은 중년 사내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걸음에 힘을 가했다.
“자, 안으로 드시죠.”
“예.”
최강현은 건물 내부로 들어섰다. 그리고 중년 사내가 안내하는 방에 도착했다.
똑. 똑.
“원장님.”
“예.”
“손님입니다.”
“들여 보내세요.”
중년 사내는 최강현을 보며 손짓했다.
“들어 가시죠.”
최강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벽에 걸린 비싸 보이는 그림들과 금으로 치장된 사치품들이 곳곳에서 보였다.
“좋군요.”
“하하, 안목이 있으시군요.”
최강현은 일어서며 반겨주는 음흉한 눈빛의 노인을 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뭐, 안목은 있는 편이죠.”
“하하, 이 물건들을 알아보니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한데 여긴 무슨 일로 오셨지요?”
“제가 고아원에 다니는 아이들을 측은하게 여겨서 돈을 기부할까 합니다.”
기부라는 소리에 노인의 눈빛이 반짝였다.
“기부라, 저희는 너무 큰 돈은 받지 않습니다.”
“하하, 좋은 곳이군요.”
“저희야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고아원을 운영하니 다른 것이 필요할 이유가 없지요.”
“그런가요?”
“그럼요.”
최강현은 그들의 세치 혀를 잘라 버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렇게 말씀 하시니 더 기부를 하고 싶군요. 제가 물려받은 재산의 일부인데 얼마 되지 않습니다. 한 10억 정도.”
“예?”
“10억 정도 기부할까 합니다.”
“저, 정말이십니까?”
“물론이죠. 그 전에 아이들을 한 번 살펴보고 싶은데요.”
“다, 당연히 그러셔야죠. 이쪽으로 오시죠.”
노인의 눈은 이미 10억이라는 돈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
‘10억, 큰돈이지. 네 녀석들이 죽고 못 살 정도로.’
최강현은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말했다.
“일단 아이들이 가장 많은 곳이 어디죠?”
“가장... 많은 곳이요?”
“예.”
“하하, 지금 아이들이 어디를 나가 있습니다.”
“예? 고아원의 아이들이 지금 이 시간에 어디에 나가있다는 겁니까?”
최강현의 물음에 노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희 고아원은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많은 곳을 구경시키고 있습니다. 안목도 넓히고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려줄 수 있어서 좋지요.”
“흐음, 그럼 저도 그곳에 한 번 가보죠.”
“그곳에 말인가요?”
“예. 안 되나요?”
“아니, 안 되는 건 아닙니다. 그럼, 준비를 할 테니 잠시만 기다리시죠.”
“예.”
최강현은 다급히 어딘가로 가는 노인의 뒷모습을 봤다. 틈틈이 뒤를 돌아보며 최강현이 그 자리에 있는지를 확인하는 모습이 여간 의심스러워보이지 않았다.
‘가볼까?’
노인이 코너를 돌아 보이지 않을 때 최강현은 빠르게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조금씩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 지금 아이들 모두 단장시켜.”
최강현이 노인의 말에 눈동자를 빛냈다.
‘역시...!’
“말이 많아! 최대한 깨끗하게 해서 대기하란 말이다!”
최강현은 대화를 엿듣다가 다급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노인과 거리를 벌렸다. 그때, 노인이 나오며 목소리를 크게 냈다.
“아이고, 오래 기다렸습니다. 어서 가시죠.”
“예.”
최강현은 무심한 표정으로 노인의 뒤를 따랐다.
차에 탑승한 채 도착한 곳은 꽤나 사람의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여긴 왜...?”
“하하, 아이들이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놀고 싶다고 보채는 바람에 이곳에 왔다고 하는군요.”
“그래요?”
“예. 저희 아이들이 사람 만나기를 영 꺼려해서 말이죠.”
최강현의 노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보죠.”
“하하, 예.”
길이 아주 복잡했다. 폐차 직전의 차들이 주위 곳곳에 쌓여 있었고 그 주위로 많은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운영되고 있진 않았다.
“여긴 조용하군요.”
“예.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곳이죠.”
“흐음. 이런 곳도 알고 계시는군요.”
“하하, 아이들에게 많은 곳을 보여주려다 보니 별 곳을 다 돌아다녔죠.”
곤란스러운 질문에도 잘 빠져나가는 노인이 못마땅했다. 최강현은 이마를 찌푸렸지만 이내 원래대로 돌렸다.
“거의 다 왔나요?”
“예. 저깁니다.”
문이 잠겨 있는 건물 앞, 아이들이 어색한 몸짓으로 여기저기에 앉아 있었다. 한 눈에 봐도 불안해 보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기 있군요.”
“예. 아이들과 조금 대화를 나눠도 되겠죠?”
“예?”
최강현의 말에 노인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안 되나요?”
“아이고, 아닙니다. 나누시죠.”
하지만 다시 묻는 최강현을 보며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잠시만...”
그리고는 최강현보다 먼저 아이들에게 다가가 그들에게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러자 아이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최강현은 이마를 찌푸리며 걸음을 빨리 옮겼다.
“알겠지?”
마지막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들도 보였다. 하지만 전의 내용은 듣지 못했다.
‘뭐, 대충 예상은 되지만.’
최강현은 아이들에게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그럼 아이들과 있을 테니 자리 좀 비켜 주시죠.”
“아아, 예. 그러죠.”
노인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등을 돌렸다. 그리고 최강현은 불안한 시선을 감추지 못하는 십여 명의 아이들을 살폈다.
“안녕?”
아이들은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으나 대답은 하지 않았다. 최강현은 그에 한 번 더 인사를 했다.
“안녕?”
그러자 아이들 중 한 명이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에...”
대답인지 아닌지 애매했지만 최강현은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걱정 안 해도 돼.”
갑작스런 말에 아이들이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내가 너희들 괴롭히는 아저씨들 다 잡아갈 거야. 괜찮지?”
아이들은 불안한 눈동자로 서로를 바라봤다.
“흠. 대답이 없네. 그러면 그냥 간다?”
최강현이 말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소년이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는 낮았지만 아주 자세하게 들렸다.
“거짓말.”
최강현은 소년의 말에서 깊은 불신을 느꼈다.
“거짓말 아닌데?”
최강현은 입을 연 소년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에 담겨 있는 분노, 그리고 좌절. 그 둘이 묘하게 섞여 있었다.
“너희들이 허락만 하면 너희들 괴롭히던 사람들 다 잡아갈 거야. 정말이야.”
최강현의 진실한 마음을 읽은 것일까, 아니면 지금의 상황을 빠져나갈 희망을 발견한 탓일까. 지켜보던 예쁜 소녀가 최강현과 소녀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저, 정말인가요?”
그 소녀의 질문과 함께 최강현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이 바뀌었다.
“그럼.”
“하, 하지만...”
“괜찮아. 지금까지 있었던 일 말해줄래?”
“하지만...”
소녀는 무엇이 두려운지 한참을 망설였다.
“이야기를 하면... 항상 절 때렸어요.”
그 말에 최강현의 눈빛이 변했다. 그것을 어린 아이들도 알아차렸는지 움찔거렸다.
“아, 미안. 더 자세하게 말해줄래? 그래야 너희들을 도와줄 수 있어.”
고민하던 소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매일... 일을 해요.”
“그리고 밥도 안 줘요.”
“잠도 못 자고...”
“맨날 때리기만 해요.”
한 아이의 이야기가 끝이 나면 다른 아이가 이야기를 받았다.
‘으음. 조한무 이 녀석, 진작 여길 찾았어야지.’
조한무는 아직 이곳을 발견하지 못했다. 최강현도 이곳이 있음을 오늘에서야 처음 알았다.
‘어떻게 한다?’
이곳에서 아이들을 괴롭히는 증거 자료만 확보할 수 있다면 단숨에 처리할 수 있지만 그때가지는 또 다시 시간이 걸린다.
‘현재 조한무가 입수한 증거 자료는 고아원에서 가끔씩 확보한 폭력 사진이나 영상뿐이다.’
최강현은 아이들을 바라봤다.
‘아이들의 증언만으로는 불가능할텐데...’
최강현은 결정을 내렸다.
“얘들아.”
“네?”
“내가 부탁하나 해도 될까?”
“뭐, 뭔데요...?”
“너희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이 조금 걸릴 거야.”
최강현의 말에 역시나라는 표정을 짓는 아이들이 보인다. 하지만 최강현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곳에서 너희들을 때리고 괴롭히는 모습을 확보해야 저 나쁜 아저씨들을 혼내줄 수 있단다. 그러니까 며칠만 기다려 줄래?”
“정말, 정말로... 며칠이면... 되는 거에요?”
소년의 말에 최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대신...”
“대신...?”
최강현은 아이들에게 몇 가지를 부탁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았지?”
마지막으로 되묻자 아이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강현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빌어먹을.’
지금 당장이라도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중년인들을 처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조금만, 조금만 기다리자.’
그때 다가온 노인이 웃으며 최강현을 반겼다.
“아이들은 어떤가요?”
“예. 착하네요.”
“그렇죠? 저희 아이들이 말을 참 잘 듣는 편이죠.”
“예. 여기 10억입니다.”
“아, 아이구. 감사합니다. 아이들을 위해 좋은 곳에 쓰겠습니다.”
“예. 그러셔야죠.”
최강현은 손에 들고 있는 10억짜리 수표를 건네며 살짝 고개를 틀었다. 그리고 태양빛에 반사되는 무언가를 발견하고서야 봉투를 넘겼다.
“자, 그럼. 전 여기서 바로 가보겠습니다.”
“아이고, 식사라도 하고 가시죠.”
“아닙니다. 바빠서요.”
“예. 감사합니다.”
“예, 그럼.”
최강현은 미로같은 길을 빠져 나와 대로변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누군가를 기다렸다.
잠시 후.
“형님.”
“그래, 찍었지?”
“예.”
“그리고 진작 저런 곳을 찾았어야 되지 않냐?”
“죄송합니다.”
최강현은 한숨을 내쉬며 명령했다.
“시간이 없으니까, 최대한 빨리.”
“알겠습니다, 형님.”
“그래, 수고해라.”
“예.”
최강현은 아직은 시간이 필요한 안타까운 일을 뒤로하고 OX기업으로 발걸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