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5 4권 =========================
카페를 찾은 두 사람은 조용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서 뭘 어떻게 도와야 할지 저도 잘 모릅니다. 그냥 돕고 싶은 마음이 강해 알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과연 도움이 될지 모르겠군요.”
“아닙니다. 도와주겠다는 말만으로도 충분히 힘이 됩니다.”
김민수의 말에 최강현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일단 최선을 다해 돕도록 노력하죠.”
“고맙습니다.”
“한데 어느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야 합니까?”
“예. 제가 원하는 분야의 최고가 되면 수술을 한다더군요. 몇 년이라는 시간을 권투에 보냈지만 정말 원하는 것은 링 위에서의 고독한 싸움, 그 시간을 위한 훈련일 뿐입니다.”
김민수의 말을 듣던 최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링만 있다면 뭐가 되었건 상관이 없다는 겁니까?”
최강현의 말에 김민수가 눈을 빛냈다.
“예.”
“알겠습니다.”
이후로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눴다. 그 속에서 최강현은 김아영의 마음을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외롭고 쓸쓸함.’
또한 김민수가 진정 원하는 것이 어떤 건지도 말이다.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난 최강현은 김민수와 인사를 나누고 OX기업으로 돌아갔다. 홀로 차를 운전하니 생각들이 머리로 파고들었다.
‘으음...!’
걱정도 된다.
‘내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신경을 쓰기도 벅찬데 괜히 도와준다고 했던 걸까?’
상념들이 무질서하게 엄습한다.
‘하지만 도와주고 싶다.’
작고 여린 소녀를 생각할수록 그 마음은 더욱 강했다.
‘지금 나의 행동으로 그 아이를 살릴 수 있다면... 또한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자동차들이 도로를 달린다. 최강현은 그 속에서 흔들리던 눈동자가 멎어 감을 느꼈다.
강동운은 자신이 앞으로 지내게 될 연구실을 살폈다.
“여기구나.”
그리고 기계들을 살펴보며 만지기 시작했다. 최첨단 연구 기계들을 조작하던 강동운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좋아. 할 수 있어.”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누구인지 확인한 강동운이 고개를 숙였다.
“회, 회장님.”
“한 번 들러봤습니다.”
“아, 예.”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의 현재 상황을 살피기 위해 직접 찾아온 것이다.
‘흐음.’
이제 시작한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아직 많은 것들이 부족했다. 최강현은 고개를 돌려 강동운을 바라봤다.
“강동운씨.”
“예.”
“필요한 게 있으면 바로 바로 말하시면 됩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부터 최선을 다해 연구해 주세요.”
“예. 회장님.”
“그리고 폴드잇을 이용하기 위해선 확실하게 정하고 가야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강동운의 자신감 있는 목소리에 최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입니까?”
“크론병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당사자에게 직접 들으니 느낌이 조금 달랐다.
“그렇군요.”
최강현의 반응에 강동운이 의아함을 나타냈다.
“놀라시지... 않으십니까?”
그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만약 최강현이 놀랐다면 그것은 순수한 감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말도 안 된다는 표정, 그리고 의아함과 불신을 섞으며 놀란 척 할뿐이다.
“놀라야 합니까?”
“아니, 그것은 아니지만...”
하지만 최강현은 아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고 눈앞의 사내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한 마디로 말해 최강현은 강동운을 인정한 것이다. 아니, 믿고 있었다. 무언가를 갈망하는 자에게 그 정도의 믿음은 사치가 아니라 여겼다.
“강동운씨라면 충분히 해낼 거라 여깁니다.”
“아...!”
처음이다. 누군가의 인정을 받는 것은. 강동운의 눈동자가 떨렸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자세한 내용들은 비서실장에게 말하시면 됩니다.”
최강현이 그렇게 말하며 등을 돌렸다. 강동운의 시선이 최강현을 따라갔다.
“가, 감사합니다.”
그 말에 최강현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걸음에 힘을 가했다.
연구실에서 나와 회장실로 이동한 최강현은 곧바로 비서실장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예. 앞으로 강동운씨가 많은 걸 부탁할 겁니다.”
“예.”
“무엇이 되었건 지체 없이 지원해 주세요.”
“무엇이 되었건... 말입니까?”
“예.”
“알겠습니다, 회장님.”
비서실장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더 하실 말씀이 없다면 나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비서실장이 나가려는 자세를 취했다. 그때 최강현이 무언가 떠올랐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예, 회장님.”
“K-1이 입식 격투기였죠?”
“예. 그렇습니다만...”
“그럼 K-1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아봐 주세요.”
최강현의 말에 비서실장이 고개를 갸웃 거렸다.
“무슨 일 때문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예. 제가 아는 사람이 권투를 하다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만둬야 했습니다. 한데 지금 꼭 시작해야 할 이유가 생겨서 말입니다. 도와주고 싶군요.”
“아,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비서실장은 회장실에서 벗어났고 최강현은 홀로 남아 생각에 잠겼다.
며칠 후.
비서실장에게서 정보를 얻은 최강현은 김민수를 만나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 김아영이 입원한 병실로 들어선 최강현은 의자에 앉아 있는 김민수를 발견했다.
"반갑습니다."
인사를 건네자 김민수가 뒤돌아 봤다.
"아, 어서 오십시오."
"상태는 어떻습니까?"
"보시는 대로입니다."
김민수의 눈동자에 안타까움이 어렸다.
"그렇군요."
최강현 역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한데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예. 저랑 같이 갈 곳이 있습니다."
"어디를...?"
"일단 가시죠."
최강현의 권유에 김민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면서 김아영에게 속삭였다.
"오빠 잠깐 갔다 올게."
그 소리에 김아영이 눈을 살짝 뜨며 고개를 돌렸다.
"갔다 와..."
힘없는 목소리, 쥐어짜내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래, 쉬고 있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며 김민수는 최강현의 뒤를 따랐다. 병실에서 벗어난 두 사람은 어딘가로 향했다.
"차에 타시죠."
"예."
운전석에 탑승한 최강현은 시동을 걸고 도로를 주행했다. 약 30분을 이동해 도착한 곳은 서울이라곤 믿기 힘들 만큼 소박한 장소였다.
"여기가 어딥니까?"
"일단 내리시죠."
최강현은 대답을 피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여깁니다."
최강현이 가리킨 곳에는 낡은 건물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그곳에 걸린 간판에 적힌 몇 개의 단어가 보인다.
"전진체육관?"
"예. 들어가시죠."
김민수의 눈에 의아함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거절하기도 어려웠기에 최강현을 따라서 건물로 들어갔다.
"으음."
김민수가 낮은 탄성을 뱉었다. 겉에서 보기와는 상당히 달랐다. 사람의 수야 적었지만 시설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거기에 소수의 인원임에도 열정이 느껴졌다. 특히 관장으로 보이는 노인은 풍겨오는 기세가 남달랐다. 노인이 최강현과 김민수에게 다가왔다.
"누구신가?"
"예. 체육관에 다니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 데리고 왔습니다."
노인이 최강현의 말에 두 사람을 훑어봤다.
"뭐, 나쁘지 않군."
뭘 보고 판단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노인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는 몸을 돌렸다.
"따라오게."
"아, 예."
김민수와 최강현이 노인을 따라 관장실로 들어섰다. 노인은 두 사람을 보며 물었다.
"누가 배우고 싶어 하는 건가?"
"접니다."
노인의 말에 김민수가 대답했다.
"흐음. 난 아무나 가르치지 않는다네."
"예? 방금 전에는 나쁘지 않다고..."
"그거야 눈으로 봤을 때의 의견이고."
노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김민수가 입을 다물었다.
"하니 내 한 번 자세히 살펴보겠네."
노인은 그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김민수의 곁에 다가갔다. 그리고 어깨와 등, 허리를 손끝으로 누르며 무언가를 살피기 시작했다.
"흐음."
팔의 하박과 허벅지 그리고 종아리까지 만져보며 고민하더니 김민수의 눈빛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마음에 들지는 않는데 말이야. 눈빛은 괜찮군."
상황을 살피던 최강현이 끼어들었다.
"그럼 배울 수 있습니까?"
"일단 나와 봐."
"감사합니다."
"그래, 내일 하는 거부터 보자고."
"예."
그 말을 끝으로 노인은 다시 관장실에서 나가 소수의 인원들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김민수가 최강현을 쳐다봤다.
"도대체 여긴 뭡니까?"
"링이면 된다고 하셨죠?"
"예."
"여깁니다. 여기서 시작하죠. 권투를 했으니 K-1에서도 어렵지 않게 적응할 겁니다."
"k-1... 말입니까?"
"예."
김민수는 생각하더니 다시 물었다.
"한데 왜 여깁니까?"
"여기가 좋다고 하더군요."
"예?"
"인재를 알아보는 눈, 거기에 맞춘 최적의 트레이닝."
최강현이 김민수의 눈을 봤다.
"여길 거친 많은 이들이 이렇게 말했다더군요."
“어떻게 말입니까?”
김민수의 물음에 최강현이 희미하게 웃었다.
"최고가 되기 위해선 고압천 관장을 거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