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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의 태블릿-67화 (67/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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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환 대장보다 느리긴 했지만 최강현 역시 190미터 지점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챙겨 왔던 피켈을 양손에 쥐었다.

피켈은 눈과 얼음이 깔린 비탈에서 발판 등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 또한 미끄러질 경우 자기 제동용으로도 쓰인다. 낫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최강현을 이것을 이용해 내려갈 생각이었다.

최강현은 결심을 했는지 오른 손에 들린 피켈을 벽에 찍었다. 피켈의 날이 깊숙하게 박혔다. 최강현은 곧바로 왼 손으로 하네스와 카라비나에 묶여 있는 로프를 풀기 시작했다.

“크윽.”

로프가 풀리는 순간 벽면에 박혀 있던 피켈이 버티지 못하고 아래로 쓸리기 시작했다. 최강현은 빠르게 왼 손에 들려 있는 피켈로 벽면을 찍었다.

모래와 먼지가 자욱이 퍼지며 입과 코를 막았다.

“쿨럭.”

최강현은 그렇게 잠시 동안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서서히 안정이 되기 시작하자 최강현은 오른 손에 들린 피켈을 벽면에서 빼어냈다.

후두득.

또 다시 모래와 먼지가 떨어진다. 최강현은 오른 손의 팔꿈치를 굽혔다. 정수리의 위치에서 다시 힘을 가해 피켈을 벽면에 꽂았다.

신발 바닥에 날카로운 송곳 같은 것이 튀어 나와 미끄러움을 방지하는 암벽화를 신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몸무게를 지탱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최강현은 지쳐갔고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헉, 헉.”

숨이 가빠진다. 조금씩 피켈을 벽에서 빼내는 것도 그리고 다시 찍는 것에도 많은 기운이 소모되었다. 그때였다.

후드드득.

피켈이 박힌 부위가 상당히 약한 곳이었는지 벽면이 버티질 못하고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크윽.”

온 몸이 벽면에 긁히기 시작했다. 아래로 떨어지는 속도도 상당했다. 이대로라면 위험하다. 최강현은 눈을 감고 호흡을 참더니 힘을 가해 암벽화를 벽에 박았다.

큰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속도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잠시후에 최강현의 몸이 멈췄다.

“하아. 하아...”

잠시 벽면에 몸을 붙이고 휴식을 취했다. 그나마 기를 사용했기에 이정도이지 아니라면 벌써 떨어져 죽었을 것이다.

“후우.”

최강현이 호흡을 안정시키고 잠시 고개를 꺾어 아래를 내려다 봤다. 그곳에서 무언가 희미한 빛이 보였다. 기운이 없던 최강현의 눈가에서 힘이 솟기 시작한다. 비장한 표정을 하며 다시 피켈을 벽에서 빼내었다. 그리고 꽂혀 있던 곳보다 약간 아래에 박았다.

한 번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짧았기에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드디어 어둠 속에서도 희미한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무너져 내린 건물이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형체는 갖추고 있는 상태였다. 지면과 함께 건물이 아래로 떨어진 상태였기에 충격이 흡수가 되어 붕괴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조금 더 살펴보니 옥상으로 추정되는 곳이 보인다. 최강현은 거리를 보더니 벽면에 꽂은 두 개의 피켈을 동시에 빼내었다. 그리고 발로 지면을 박차 아래로 내려갔다.

“크윽.”

생각보다 높았던지라 최강현은 몇 바퀴를 구르고서야 멈출 수 있었다.

“후우...”

주변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최강현은 형체를 갖추고 있는 건물의 계단을 이용해 아래로 내려갔다.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최강현은 뒷주머니에서 작은 손전등을 꺼내어 앞을 비췄다.

최강현의 입술이 꿈틀 거렸다. 구역질이 나는 것을 억지로 참은 것이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최강현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시체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최강현의 검은 동공이 크게 떨려왔다. 견디기 힘든 지옥 같은 공간이다.

한 걸음을 떼기가 무섭게 또 다시 구역질이 올라왔다. 최강현은 한참이나 제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이민경...!’

하지만 이민경을 생각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조금은 역겨운 냄새에 익숙해진 최강현이 드디어 걸음을 옮겼다.

“후우.”

최강현이 손전등을 비추며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어린아이, 노인,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모두 참혹한 상태였다.

팔이 비틀리고 다리가 반대로 꺾이는가 하면 날카로운 무언가에 찍혔는지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어 있는 시체도 있었다. 거기다가 아예 형체까지 알아보기 힘들었으니 이민경을 찾는 일이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꼼꼼하게 살피며 주위를 둘러보던 최강현은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 있을 만한 곳을 발견했다. 계단으로 추정되는 곳이긴 했지만 확신할 순 없었다.

돌무더기를 밟고 아래로 향했다. 그곳 역시 사람들의 시체로 가득했다. 최강현은 이민경이 살아있기를 바라며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그때였다.

“으, 음...”

낯선 사람의 목소리였다. 분명 살아있는 자의 신음이었다. 최강현이 다급히 그곳으로 이동했다.

“사, 살려...”

목소리가 난 곳으로 손전등을 비추자 빛을 발견한 그가 눈을 깜박였다. 최강현은 그제야 목소리의 주인이 여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까이에 다가가자 허물어진 벽에 하체가 깔려 있었다.

“사, 살려 주세요.”

그녀는 이미 몽롱한 정신으로 살려달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최강현은 허물어진 벽을 보다가 근처에 있던 옷을 걸어 놓는 철봉을 발견했다. 철봉을 들고 다가간 최강현은 그녀의 하체를 누르고 있는 허물어진 벽을 들었다.

“크아악!”

기를 운용하자 아주 약간 들려진 틈 사이로 최강현이 철봉을 발로 차서 집어넣었다. 그리고 손에서 힘을 뺐다.

“후우.”

최강현은 옆에 있던 꽤나 큰 돌을 철봉의 가운데에 놓았다. 그리고 철봉의 끝으로 이동해 아래로 힘을 가하기 시작했다.

“크으윽!”

이를 꽉 깨물며 내리누르자 여인의 하체를 짓누르고 있던 허물어진 벽이 들리기 시작한다.

“나, 나오세요.”

그녀는 희미한 정신 속에서도 최강현의 말은 들었는지 상체를 움직이며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빠, 빨리...!”

짧은 시간이었지만 상당히 길게 느껴지는 순간이 지났다. 그녀가 나오는 순간 최강현은 철봉을 손에서 놓았다.

쾅.

“후우.”

최강현이 상체를 숙이고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옷을 몇 개 들고 와 그녀의 몸을 덮어줬다.

“미안하지만 이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전부입니다.”

그녀의 눈동자가 붉어진다. 최강현은 애써 외면하며 등을 돌렸다.

“곧 구조대가 올 겁니다.”

아니, 언제 올지 모른다. 지금 같이 거대한 싱크홀은 대한민국에서 처음 발생했다. 과연 목숨을 담보로 하여 이곳에 내려올 구조대원이 몇 명이나 될까.

충분히 안전성을 검토한 후에야 대대적인 작업이 이뤄질 것이다. 그 전까지는 소수의 인원만으로 움직여야 한다. 시간은 오래 걸릴 수밖에 없고 그럴수록 생존자는 줄어들 것이다.

최강현이 잠시 고개를 돌렸다.

‘살아남긴 힘든 상태다.’

지금 그녀를 업고 위로 올라간다면 어쩌면 살아날 수도 있다. 찰나의 순간동안 수많은 생각들이 눈앞을 스치고 갔다. 하지만 끝내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지금의 최강현에겐 낯선 사람보단 이민경이 더욱 소중했다.

한 편.

최강현의 행동을 지켜보던 이경환 산악구조대장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으, 음...!”

그의 곁으로 당황한 표정의 구조대원들이 다가왔다.

“대, 대장님.”

어떻게 할 건지를 묻는 말투였다. 이경환 대장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가망이 없다. 그렇게 말렸건만...”

이경환 대장은 최강현이 죽었을 거라 생각했다. 물론 그 생각의 작은 틈에는 어쩌면 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 부분은 극히 적었다.

“모두 본부에서 지원이 올 때까지 기다려라.”

“예. 알겠습니다.”

구조대원들이 다시 넓게 퍼지며 사람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제지했다. 이경환 대장은 싱크홀 바로 앞에서 끝없이 움직이는 로프를 지켜봤다.

한참이 흘렀다. 어느 순간부터 로프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경환 대장의 이마가 꿈틀거렸다.

잠시 고민하던 이경환 대장은 로프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무게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표정으로 의문이 흘러갔다. 그때 근처에 있던 구조대원이 다가왔다.

“왜 그러십니까, 대장님?”

“로프에서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경환 대장의 말에 구조대원이 잠시 고민하더니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혹시...”

부정적인 결말이 떠오른다. 하나 이경환 대장은 고개를 저었다.

“로프를 모두 사용해도 내려가지 못하자 아무래도 줄을 푼 모양이다.”

이경환 대장의 말에 구조대원이 잠시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이경환 대장의 말은 결국 그 청년이 죽었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가능성은 반반. 자신이 있어서이거나, 혹은 포기했거나.”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던 이경환 대장이 최강현에게 잡혔던 손목을 바라봤다. 손자국이 붉게 남아 있었다.

“엄청난 악력이었다.”

“예?”

“아니, 아니다.”

왠지 모를 기대감이 드는 것은 그만의 착각이었을까.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한탄이 뿜어진다.

“한심하군.”

이경환 대장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지켜만 보는 자신의 모습에서 일말의 회의감을 느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밤인지 낮인지도 분간이 가지 않는 어둠속에서 최강현은 이민경을 찾기 위해 쉼 없이 움직였다. 한 층, 한 층 내려설 때마다 그녀가 있기를 희망했지만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상황과 장소, 그리고 죽어 있는 사람들로 인해 식욕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갈증은 느껴졌다.

주변을 둘러보며 발견한 편의점에서 바닥에 나뒹구는 생수통 하나를 들고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목구멍으로 넘긴다.

최강현의 목젖이 위, 아래로 움직여갔다.

“하아, 하아.”

지쳐버린 최강현의 눈동자에는 힘이 없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가자...’

이미 여기까지 오면서 한 사람의 생존자를 더 발견했다. 그는 충격으로 척추에 이상이 왔는지 움직이지 못했다. 그에게는 생수 한 통을 건네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이제는 이곳이 몇 층 정도인지는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저 갈 수 있는 곳은 모두 돌아다닐 뿐이었다. 그리고 또 다시 소리가 들린다.

최강현은 잠시 머뭇거렸다. 들려오는 소리에서 그 대상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고민이 되었다. 지금 도와준다면 끝까지 도와줘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쓸데없는 짓이기 때문이다.

결정을 내린 최강현이 그 소리를 무시하고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아, 아무도 없...”

최강현의 몸이 굳었다.

“제, 제발... 우리 아기만이라도...”

그랬다. 처음 들려왔던 소리의 정체는 울음소리였다. 그것도 아주 건강한 아기의 울음소리. 한데 그 아기의 엄마로 생각되는 여인의 목소리가 최강현의 발길을 잡았다.

“젠장!”

최강현이 소리가 난 쪽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중년 부인과 품에 꼭 안겨 울고 있는 갓난아기가 보인다. 떨어지면서 본능적으로 아기를 품에 안은 채 모든 충격을 중년 부인이 감당한 것이다. 갓난아기는 생치기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이었다. 기적적으로 아직은 둘 다 살아 있었지만 흘린 피로 보아 중년 부인은 가망성은 없어 보였다.

다가오는 빛을 확인하던 중년 부인이 물었다.

“구, 구조대원 인가요...?”

최강현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예.”

그 대답에 중년 부인의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흐른다.

“다, 다행이다, 아가. 너는 꼭...”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기를 바라보던 중년 부인이 끝내 숨을 거뒀다. 축 늘어진 팔, 하지만 안도감이 흐르는 표정이 최강현의 시야에 포착되었다.

최강현은 한참이나 그곳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중년 부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최강현이 시선을 옮겼다. 갓난아기가 힘차게 울고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죽은지도 모른 채, 그렇게 오랫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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