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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대한민국과 파라과이의 경기가 시작되기 세 시간 전이었다. 비록 월드컵이 대한민국에서 개최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TV를 통해 보면서 마음을 달래기로 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따르릉-
“여보세요?”
“어, 강현아. 뭐하냐?”
“오랜만이네.”
지금 연락이 온 사람은 최강현의 오랜 친구 박현이었다. 박현은 역시나 상류층의 자제다. 하지만 마음 씀씀이가 크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알았다. 최근에야 사회생활을 한다고 자주 보지 못했지만 가끔씩 연락하며 지내는 몇 안 되는 절친한 사이다.
“오늘 축구 시합 있잖아. 대구냐?”
“아니, 잠시 서울에 올라 왔다.”
“그래? 그럼 만날까?”
“좋지.”
수련도 해야겠지만 월드컵 시합은 보고 싶었다. 박현과 대화를 나누면서 만날 곳을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
‘혼자 있기 뭐했는데 잘됐네.’
그러고 보니 입을 만한 옷도 없었다. 아직 약속 시간이 멀었기에 가까운 곳에서 입을 만한 옷을 샀다.
“가볼까?”
알고 지내던 다른 친구들도 온다고는 했지만 크게 상관없다고 여겼다. 그중에 친한 녀석도 몇 명 있었고 그다지 알지 못하는 녀석도 있었지만 말이다.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이미 박현과 몇 명의 친구들이 도착해 있었다.
“왔냐? 오랜만이다. 정말!”
박현과 최강현은 서로 껴안으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그러게 말이다. 정말 오랜만이네.”
주위에 있던 사람들 중에 꽤나 친하게 지내던 김인수와 김동욱과도 인사를 했다.
“너희들도 오랜만이네.”
“그래. 반갑다.”
“이야, 이게 얼마만이야?”
그리고 옆에 있던 두 사람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예전부터 가진 돈이 있다고 거들먹거리는 녀석들이다. 꽤나 힘이 좋아 폭력도 서슴지 않던 놈들이라 반가운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자, 다 왔으니까 가자.”
박현이 친구들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분위기를 띠웠다. 역시나 남자들끼리 가는 곳은 술집이 최고였다. 하지만 노는 것도 배를 든든하게 채운 후에 할 일이다. 그리고 오늘은 축구 경기에 집중을 해야 하기 때문에 술집보다는 음식점이 더 나을 거라 여겼다.
“일단 1차는 내가 쏘마!”
“콜!”
“역시 너밖에 없다니까. 크하하.”
김인수와 김동욱이 박현의 말에 동조하며 기분 좋게 웃었다. 최강현도 좋았지만 역시나 옆에서 거만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두 녀석을 보면 다시금 불편해졌다.
‘저 녀석들은 왜 부른 거야.’
최강현은 그들이 불편했지만 그래도 겉으로 표현하지 않은 채 고기 집으로 향했다. 각자 끌고 온 차를 타고, 최강현은 박현의 차에 탄 후 이동했다.
“근데 저 녀석들은 왜 부른 거야?”
최강현의 말에 박현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 미안하다. 어쩔 수가 없어. 저 녀석들 아버지 회사하고 우리 아버지 회사가 서로 돕고 사는 사이라서 말이야.”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최강현은 우울한 이야기를 접고 오랜만에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나누어서인지 꽤나 빨리 도착했다.
“벌써 다 왔네.”
둘은 차에서 내려 친구들과 함께 식당으로 들어갔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경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야. 역시 사람이 많구나.”
최강현과 박현도 자리를 잡고 음식을 주문했다. 그리고 자리에 앉은 박현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친구들 불러도 되지?”
그 말에 김인수와 김동욱이 반응했다.
“누군데?”
“여자야.”
“콜!”
김인수가 손을 올리며 크게 외쳤다. 그 모습에 최강현이 웃음을 지었다.
“하하, 인수 너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크큭, 사람이 변하면 안 되는 거지.”
인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박현이 슬쩍 최강현의 옆구리를 찔렀다.
“음?”
“민경이도 온다.”
그 말에 최강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래?”
하지만 그것은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박현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박현이 묘하게 웃으며 나온 고기를 불판에 올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네 명의 여자들이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모두들 상당한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띠는 여인이 있었다.
‘이민경...’
최강현은 그녀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와 헤어진 지 어느새 2년이다. 이젠 남이 되어 버렸기에 그저 희미하게 웃을 뿐이었다.
“오랜만이다.”
최강현의 인사에 이민경이 움찔거렸다.
“으, 응. 오랜만이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모두들 자리에 앉아 고기를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다만, 최강현도 이민경은 처음처럼 말이 없었다.
“너희들도 말 좀 해라.”
“으, 응?”
박현이 둘 사이에 끼어들어 분위기를 유도하면서 조금씩 어색함이 사라졌다.
“잘 지냈어?”
“응, 너도 잘 지냈어?”
최강현과 이민경이 처음으로 안부를 물으면서 대화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박현의 입가로 미소가 그려졌다. 음식들을 먹으면서 술도 한 잔 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분위기는 달아올랐다.
“조금 있으면 경기 시작이네.”
달아오른 분위기를 띄워줄 대한민국의 축구 경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미 스포츠 캐스터들이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게 좋은 분위기에서 최강현은 이민경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했다. 그때,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거만한 자세를 유지하던 두 사람이 이민경의 옆자리에 앉았다.
“여, 오랜만이다.”
“아, 응.”
이민경은 불편해 보이는 기색을 풍겼지만 두 사람은 신경 쓰지 않는 표정으로 계속해서 집적거렸다. 지켜보던 최강현의 눈빛이 빠르게 식어갔다. 그리고 그 기운을 감지했는지 박현이 미리 나섰다.
“우일아, 재형아. 그만 하고 술이나 마시자.”
지금 이민경의 옆 자리에 앉아 관심을 나타내는 두 사람은 김일우와 박재형이다. 박현은 그들의 아버지와 자신의 아버지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에 서로 친하게 지내려 노력하는 중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지금까지 박현은 저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티를 낼 수도 없는 일이다.
“하하, 됐어. 민경이가 우리랑 놀고 싶어 하잖아.”
그러더니 눈이 찢어진 김일우가 이민경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이민경이 움찔거리며 몸을 뺐지만 김일우는 손에 힘을 주어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오랜만에 보는데 왜이래. 친구끼리 좀 놀자고. 응?”
박현이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지켜보던 최강현은 이미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는 중이었다.
“그만 해라.”
결국 참지 못한 최강현이 한 마디 내뱉었다. 하지만 김일우와 박재형은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며 이민경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리고 최강현의 동공으로 더 이상은 참지 못할 광경이 포착 되었다.
“왜, 왜 이래?”
김일우의 손끝이 이민경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었다. 지켜보던 최강현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서 김일우에게 다가갔다.
“그만 해라.”
“이 자식이 미쳤나? 한 번은 넘어가지만 두 번은 아니야.”
김일우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최강현을 바라봤다. 그 모습을 보던 박재형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이 먹었다고 뭔가 달라졌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오랜만에 이 형들이 조금 주물러 줄까? 응?”
“큭, 박현 때문에 참고 있었더니 눈에 뵈는 게 없나 본데. 좋게 말할 때 그만하자.”
그들의 태도를 보던 최강현이 피식 웃었다. 그것은 비웃는 느낌이었다.
“이 새끼가!”
참지 못한 박재형이 주먹을 뻗었다. 파워도 없고 스피드도 없다.
‘느리다 못해 지겨울 정도네.’
지금의 최강현에게 그 주먹은 우습지도 못했다. 궤도를 틀어버리기 위해 손날로 박재형의 손목을 강타했다.
“크윽.”
최강현의 얼굴로 날아가던 주먹이 한 순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최강현은 그 모습을 보며 발끝으로 박재형의 정강이뼈를 강하게 찼다.
빡!
“크아악!”
정강이뼈는 조금만 충격을 받아도 심한 통증을 유발하는 곳 중에 하나였다. 다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아 버린 박재형을 두고 이제는 김일우를 쳐다봤다.
“어, 뭐, 뭐야?”
최강현은 김일우에게도 똑같은 방법으로 고통을 줬다. 둘은 한 순간에 주저앉아 갖은 인상을 다 쓰고 있었다.
“작작하자. 쪽팔린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타일렀다. 마치 어리광부리며 떼쓰는 아이를 달래듯이 대했다. 주위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키득거리며 웃었고 박재형과 김일우는 제대로 반항도 하지 못한 채 신음만 흘렸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과 친구들이 모두 놀란 표정으로 최강현을 봤다. 하지만 최강현은 그런 시선에 신경 쓰지 않았다.
“경기 시작한다. 조용히 보자. 알았지?”
“그, 그래.”
최강현이 그들의 태도에 다시 피식 거리며 웃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모습을 보고서도 둘은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최강현은 마지막으로 그들의 머리를 한 번씩 더 후려친 후에 자리에 앉았다.
“고마워.”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이민경이 최강현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괜찮아?”
“응. 많이 변했네.”
“뭐, 그렇지.”
오랜만에 환하게 웃는 이민경을 보며 최강현도 기분이 좋아졌다. 시간은 많이 흘렀지만 아직도 좋아하는 감정이 남았기 때문이다. 어리석게도 자신이 헤어지자고 했으면서도 여전히 이민경을 잊지 못했다.
“아, 시작한다.”
“그래.”
어느새 시작하는 대한민국과 파라과이의 경기. 모두들 숨죽이며 경기에 집중했다.
“와아!”
대한민국의 첫 득점이었다. 전반전 39분에 이창수 선수가 현란한 드리블로 파라과이의 수비수를 제치며 골을 넣었다. 순식간에 식당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그것은 최강현과 이민경도 마찬가지였다.
“꺄아악! 골 넣었어!”
이민경이 최강현의 손을 맞잡고 팔짝 거리며 뛰었다.
“어, 어...”
부드러운 감촉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 모습에 이민경도 맞잡고 있는 서로의 손을 보더니 흠칫 거리며 조금 거리를 벌렸다.
“아, 미안.”
“아니, 뭘.”
열기가 조금 가라앉고 모두들 자리에 앉았다. 술 한 잔을 마시며 분위기도 띄우며 다시 경기에 집중했다.
최강현은 그 와중에 자신의 손을 살며시 내려다봤다. 자신도 모르게 입가로 미소가 그려졌다.
전반전은 그것으로 막을 내렸다. 조금의 시간을 가지고 후반전이 바로 시작 되었다. 처음부터 파라과이의 선수들이 대한민국의 골문을 흔들기 위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
여기저기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후반 9분만에 득점을 빼앗기고 만 것이다. 하지만 안타까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약 10분이 지난 후반 19분에 다시 골을 빼앗겨 1:2가 되었다.
“으음.”
모두들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는 것도 중단한 채 화면에 집중했다. 하지만 후반40분까지 점수가 나지 않았다. 지켜보던 최강현은 불안했다.
‘이런. 어떻게 된 거지?’
혹시나 알려준 것과 다르게 흘러간다면 자신이 계획했던 미래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그때였다.
“와아아아!”
후반41분에 드디어 대한민국이 동점골을 넣었고 약3분이 지난 후반44분, 결국 역전골을 넣고야 말았다. 그렇게 경기가 끝이 났다.
‘3:2다! 좋아.’
최강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고 동시에 점수를 맞춘 것에 대한 환호를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