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33)
  • 다음날 아침 나는 서둘러 학교에 가서 원희형이 오기만을 눈빠지게 기다렸다. 

    몇 몇 아이들이 몸상태를 물어오지만, 건성으로 대답하며 형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뒷자리에 앉은 성재가 뒷통수를 때리며, 반갑게 인사한다. 

    "야, 민하. 몸은 괜찮냐?" 

    "그래. 덕분에." 

    "짜식, 아프더니만 사람됐네, 인사도 할 줄 알고. 못 본 사이에 더 예뻐졌다." 

    "영양가 없는 소리 그만 해." 

    "야. 다음 주에 우리 교회 고등부 하기수련회 열리는데, 너 올 수 있냐?" 

    "내가 왜, 하기수련회를?" 

    "짜식. 이래서 너는 안돼요~ 그 날 미팅한 여학생들이 같은 교회다니지 않냐~ 

    태호랑 창현이는 연락 주고받는 눈치던데, 너 파트너도 내 여친에게 계속 

    너 안부 물어보며 전화번호 알려달라고 하던데, 어때?" 

    "뭘?" 

    내가 퉁명스럽게 답하자, 김 빠졌다는 식으로 성재가 말을 잇는다. 

    "뭐라니? 너 그 여학생 맘에 없는거야? 그 여학생은 너 만나고 싶어서 

    열병을 앓나보던데. 짜식, 튕기긴!! 그 날 와서 얼굴 한 번 보여줘. 

    혹시 아냐? 팍 필이 꽂혀 여름날의 추억을 만들지~ 같이 가자~" 

    "난 됐어.........그나저나 다른 일 뭐 없지?" 

    "다른 일이라니?" 

    "아,아니야. 됐어. 선생님 오신다." 

    아직 오지 않는 승주, 아니 원희형의 이야기를 묻고 싶었으나, 새삼 대놓고 물어보기가 

    그러해서 얼버무리며, 앞으로 돌아앉아 자세를 바로 했다. 

    계속 자리가 비워있다. 설마 군대에 간다고 하더라도, 오늘까지는 학교에 나올텐데라고 

    생각한 내 예상을 뒤엎듯, 쉬는 시간에 성재 자리로 놀러온 창현이가 말을 한다. 

    "승주놈 없으니까, 교실 분위기가 화기애애하니 가족적이지 않냐?" 

    "글세 말이다. 진작에 이래야 정상이지. 그 동안 숨죽인 거 생각하니, 속이 다 후련하다." 

    나는 뺨을 한 대 맞은 것처럼 얼떨떨해져, 성재에게 물어본다. 

    "무슨 소리야?" 

    "어? 참 너는 결석해서 모르지. 월요일날, 담임이 승주놈 서울로 다시 

    전학가게 됐다면서 종례시간에 인사 시켰잖아~ 야, 창현아 그때 담임얼굴 봤냐? 

    노친네, 꼭 앓던 이가 빠져서 시원하다는 표정이었잖아." 

    그 뒤로 무슨 소리를 하는지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벌써 가버리다니........ 

    이건 반칙이야. 겨우 승주가 원희형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는데......나는 허탈해졌다. 

    학교를 마치고 정신없이 오피스텔로 달려왔다. 누가 이사를 오는 것인지 이삿짐으로 

    주위가 산만해 보인다. 나는 분주히 서두는 인부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뭐야? 이삿짐과 함께 탄 인부가 7층 버튼을 누른다. 

    아아........제발........나는 7층까지 올라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간절히 빌었다. 

    맙소사!!! 형의 오피스텔 현관문이 열려져 있고, 인부들이 짐을 넣는 것이 보인다. 

    한 발 늦었구나. 

    '너가 나를 얼마나 미워하는 줄 알았어. 그리고 쉽게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이젠 너 앞에 다시 나타나는 일 따위 없을 거야.' 

    형의 마지막 말이 귓가를 맴돈다. 나는 짐을 옮기던 인부와 부딪혀 벽에 어깨를 찧고, 

    힘이 빠져 황망히 벽에 기대선 채 있었다. 

    겨우 형이란 사실을 알게 됐는데, 또 내게 말도 없이 떠난 형이 정말 야속하다. 

    나는 오피스텔 1층으로 내려와, 구석에 놓인 공중전화기에 카드를 넣고 버튼을 눌렀다. 

    형의 휴대폰은 여전히 전원이 꺼져 있다는 음성만 흘러나온다. 

    .........이렇게 숨어버리다니........ 비겁해!! 

    뒤에서 이삿짐을 옮기는 소리가 요란하다. 엘리베이터에 물건을 싣기 위해 

    계속 짐을 실어 나르며, 큰소리로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휴-우, 보기보다 꽤 무겁네. 도대체 점심때가 다 됐는데, 여기 주인은 어디 갔어?" 

    "좀 기다려 봐라. 잔금 치른다고 부동산에 갔으니, 곧 오겠지."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혹시 부동산에 가면 전 주인인 형을 볼 수 있을지도........ 

    아니다......잠깐 내려와 있던 것인데, 아마도 임대를 했던 것이겠지...... 

    아니!.....아저씨가 부자라고 했으니까, 어쩌면 형이 샀을 수도 있을 거야. 

    밑져야 본전이다!! 

    나는 밖으로 나가 무작정 근처에 있는 부동산을 찾아다녔다. 

    ......제발.........이대로 그냥 보낼 수는 없어.........제발.........한번만................... 

    3곳을 둘러봤지만 형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다. 

    찻길 건너편에 2곳의 부동산이 보인다. 저기에도 없다면........... 

    힘이 빠진다. 혹시나 기대를 걸며, 다녀 본 부동산에서 형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못보는 것일까? 겨우 형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가까운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걸어보지만, 휴대폰은 계속 전원이 꺼져있고, 

    형과 연락할 길이 없다. 주소라도 알면 편지라도 써 볼텐데........ 

    ........!!!!..........그래 맞다!!!! 

    만약 형이 이 오피스텔을 산 것이라면, 계약서에 주소와 전화번호가 있을 것이다. 

    매년 엄마가 가게 주인과 재계약할 때 쓰는 계약서에 분명 집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었다. 

    그런데, 그냥 임대만 한 것이었다면, 오피스텔 원주인에게 주소가 있을텐데......... 

    아니. 만약 형 것이었다면 이제 필요가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팔고, 그 사람이 다시 임대를 

    놓은 것이라면.........좀 복잡해진다. 단순한 내 머리로 여기까지 생각해 낸 것도 기적인데, 

    그 뒷일까지 머리를 썼더니 용량부족인지 머리가 아프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다. 새로 이사온 사람에게 물어서 확인해 보는 수밖에는..... 

    나는 다시 예의 그 오피스텔 7층으로 올라왔다. 

    여기 저기에 물건 놔 둘 장소를 일러주는 젊은 남자가 보인다. 

    아마 저 사람인 듯 싶어, 옆에 조용히 다가가 말 끝나기를 기다려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저......저기요-" 

    "어, 무슨 일이십니까?" 

    "안녕하세요? 저 여기 먼저 살던 사람의 친, 아니 알고 지내던 동생인데요." 

    "아, 그런데요? 그건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놔주세요." 

    "형한테 전에 빌렸다가 돌려주지 못한 물건이 있는데, 이사를 가버려 주소를 몰라서...." 

    "그럼, 전화를 해서 주소를 물어보면 되겠네요." 

    "아,아니요. 휴대폰으로 연락을 해봤지만 전원이 꺼져 있다고 해서요. 

    저는 잘 모르지만, 보통 계약할 때 계약서에 주소 같은 거 쓰는 것 같기에, 

    주소라도 알면 우편으로 물건을 보낼까 해서......" 

    "글세? 나는 2년 계약으로 임대한 것인데, 조금 전 계약할 때 서류 보니 

    여기 주인이 학생이 말한 형처럼 젊은 분 같긴 하던데..... 

    학생이 찾는 형 이름이 어떻게 돼지?" 

    젊은 남자가 옆에 놓아 둔 서류가방 안에서 계약서를 찾는 것이 보인다. 

    "원희 형인데요." 

    "응? 성은 몰라요?" 

    "아, 예. 그냥 원희형이라고 불렀는데......" 

    "흠.......제대로 이름도 모르다니........" 

    미심쩍은 표정이다. 어렸을 때 그냥 형이라고 부르고, 집 식구들이 원희라고 불렀기에 

    나중에 그냥 원희형으로 알고 있었을 뿐, 그러고 보니 형의 온전한 이름도 모르고 찾는 

    나의 어리석음에 혀가 차진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급하게 말을 잇는다. 

    "원희형은 21살이고, 핸드폰 번호가 011-****-7513이에요." 

    "기재된 주민등록번호와 핸드폰 번호 보니 맞긴 하네요. 

    찾는 분 성함이 한재원이네요. 다음부터는 찾는 사람 이름정도는 정확히 알아두세요." 

    ......한. 재. 원..........재.원.......원.이.......원.희......지금까지 불러온 원희라는 이름이, 

    경상도 출신이신 우리 엄마 덕분이었단(?) 사실에 나는 헛웃음이 나온다. 

    "아, 예.....고맙습니다." 

    나는 노트를 꺼내 계약서에 적힌 서울 주소를 옮겨 적었다. 

    계약서에 씌여진 글씨가 그간 보아온 깔끔한 글씨체가 아닌 날리는 글씨체다. 

    나는 다 적고 노트를 덮으면서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저..... 이거 형 글씨체가 아닌 것 같은데, 형이랑 직접 계약하셨어요?" 

    "아니, 그 분은 서울에 있어서 내려오기 힘들다며, 친구분이 대신 오셨던데." 

    "친구라면 혹시 머리 노랗게 염색한 분?" 

    "어, 학생도 아는 사람인가 보네." 

    "예. 주소 정말 고맙습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또 휴대폰으로 전화를 해보지만, 

    이제 많이 들어 외울 정도가 되어버린 여자음성에 질려 수화기를 놓았다. 

    그러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다. 우선 성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성재 어머니가 잔뜩 화난 음성으로 전화를 받으시며 성재를 날카롭게 부르신다. 

    아마 성적표 때문에 많이 혼나지 않았나 싶다. 

    역시나 평상시의 성재답지 않게 잔뜩 볼 부은 소리가 들린다. 

    [여보세요?] 

    "나. 민하야. 미안하지만 부탁 하나만 할게." 

    나는 성재에게 사촌형 일로 급히 알아볼 게 있는데 연락이 되지 않는다며, 

    성재가 여친에게 연락을 취해, 여친오빠의 전화번호를 물어봐 

    내게 알려줬으면 한다고 아쉬운 부탁을 했다. 

    다행히 성재는 아무 의심없이 여친과 내 핑계를 대고 통화할 수 있다는 

    기쁨 때문인지, 있다가 여친 집에 올 시간에 맞춰 알아봐 주겠다고 했다. 

    4시가 조금 지나자 성재에게서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 

    나는 성재가 불러주는 전화번호를 힘있게 메모지에 적고 고맙다고 인사하자, 

    성재가 미팅 때 내 파트너였던 여학생이 계속 내 연락처를 물어온다며, 

    웬만하면 자기 여친 얼굴 봐서 에프터 신청 받으라고 말한다. 

    나는 웃음으로 떼우며 전화를 끊었다. 

    형과 오해를 안은 채 헤어진 그 날, 나만 상처받았다 생각했는데,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용서를 구하고 받을 것도 없어!!' 

    '그런 너를 오해해서.......바보처럼......나도 지금 무척 혼란스러워. 

    다시 네 얼굴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형 역시 내 앙칼진 말에 상처를 받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아빠의 죽음이 형과 연관되었다고 하지만, 형의 잘못은 아닌데......... 

    형도 그 동안 우리 가족 못지않게 괴롭고 힘들었을 텐데, 내가 그런 말을 하다니..... 

    형이 입대하기 전, 내가 했던 말의 오해는 풀어야겠다. 

    나는 성재가 알려 준 노란머리 형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재원형의 입대날짜와 형의 상태가 궁금하고 걱정되었다. 

    사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기에 도움을 구하고 싶었었는지도 모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저 민하라고........" 

    이동 중인지 잡음이 간간히 들린다. 

    어떻게 나를 설명해야 되나......설명하기가 참 애매하고 복잡해서, 

    민하라고만 하고 잠시 말을 끊었다. 

    [......김.민.하?] 

    놀란 듯 내 이름을 크고 정확히 부르는 소리에, 나 역시 놀라며 냉큼 대답했다. 

    "네!! 안녕하세요?" 

    [하! 제수씨가 나에게 직접 전화를 다 걸고~ 그 때 잠깐 노래방에서 봤지? 

    나 정동연이다. 반갑다!! 그런데 내 전화번호 용케 알았네.] 

    .........이게 무슨 소리야? 지나가는 소리지만 분명히 나에게..........제.수.씨......라고...... 

    '야! 씹새끼야. 제수씨 언제 인사 시킬거야?' 

    '제수씨는......형수다. 임마. 쿡쿡.' 

    나는 얼떨떨한 채로 전화 건 용건을 얘기했다. 

    "네. 여쭤보고 싶은게 있어서 실례인 줄은 알지만, 성재 통해서 전화번호 알았어요. 

    실은 원희형한테 계속 전화를 걸었는데, 휴대폰이 꺼져 있어서 걱정도 되고, 

    형 입대날짜를 몰라 여쭤보려고 전화 드렸어요." 

    [입대날짜 물어보는 걸 보니, 재원이놈에게 다 들은 모양이네. 

    나도 일요일 밤 이후로 그 녀석과 통화가 안되서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그럼, 오늘 오피스텔 계약은 어떻게........" 

    [나도 부동산에서 어젯밤 연락 받고, 좇 빠지게 내려가 대신 일 봐준거야. 

    씨발! 이 새끼 어떻게 된거야? 입대 얼마 남지 않은 놈!!] 

    "저...형 입대 날이 정확히 언제에요?" 

    [다음 주 월요일인데, 씨발! 생각하니 열 받네. 이 새끼, 어디로 증발한 거야? 

    참!! 너희 방학했냐?] 

    "네. 오늘 했어요." 

    [그래, 그럼 잘 됐네~ 토요일 서울에서 재원이놈 입대 환송회 할건데, 

    연락 줄테니, 그 날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참석해라.] 

    "..........." 

    [씨발! 왜 대답이 없어!! 너 먼 길 떠나는 서방님 그냥 보낼 셈이야!!! 

    아니면 벌써부터 고무신 거꾸로 신은거야 뭐야!!] 

    "아,아니요.....그럼, 연락주세요." 

    [그래. 그럼 그 날 보자. 내가 소연이 통해서 연락줄게. 들어가라~] 

    "안녕히 계세요." 

    어리벙벙한 상태로 전화를 끊고 달력을 보았다. 

    다음 주 월요일이면.......오늘이 수요일인데, 시간이 너무 없다. 

    그리고 지나가는 소리였지만 분명히 나에게......제.수.씨.....라고 했다. 

    황당하다. 그 동안 그럼, 나 혼자 오해해서 찧고, 까불고, 열심히 삽질했단 말인가!!! 

    화장실에서 엿들었던 제수씨가.......설마........ 나였을 줄이야!!!! 

    '씨발......천하의 바람둥이가 짝사랑에 목 맨 순정파였다니......이루니 좋냐?' 

    '아주 얼굴에 꽃을 달았구만!!!! 좋기도 하겠지~~ 풋.풋.한 영.계.라니~~' 

    내 얘기일 줄은 까맣게 모르고, 나는 질투를 하고 내 못난 감정을 숨기기 위해 

    해서는 안 될 말까지 하며, 형을 몰아 부쳤다. 

    형은 언제부터 나를 마음에 담고 있었던 것일까? 그런 줄도 모르고........ 

    '하......아........상상만......했었어............' 

    '널 안고 싶어.' 

    '쉿. 조금만......너와 하나가 되고 싶어.....' 

    나를 안은 후 계속 읖조렸던 '미안해'의 의미를 이제는 알겠다. 

    가슴이 벅차 오른다. 나하고 줄곧 같은 마음이었는데, 바보처럼 그런 것도 못보고....... 

    이렇게 다 알아버린 이상, 이제는 정말 형을 그냥 보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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