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33)
  • 이마에 시원한 기운을 느껴 눈을 뜨니, 엄마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를 내려보고 있다. 

    몸을 일으키려하니 방이 핑그르르 돌며 어지러움에 정신을 차릴 수 없다. 

    내 몸인데도 내 몸 같지 않게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다. 

    엄마가 떠 먹여 주시는 흰죽을 조금 받아먹고, 약을 먹은 후 또다시 누워 잠을 잤다. 

    깨어보니 8시다. 아침 8시인지, 저녁 8시인지 가늠하기가 힘들다. 

    온 몸이 땀에 절어 축축한데다 끈적거려 불쾌하다. 

    "아이고 이제 일어났니? 민하야." 

    엄마가 계신 것을 보니 아직 저녁이구나 싶었다. 

    나는 일어날 힘이 없어 겨우 고개만 끄덕이고는 엄마를 보았다. 

    "학교에는 못간다고 선생님께 전화 드렸어. 조금 있다가 엄마랑 병원에 가자." 

    ".....그럼 지금 월요일이야?" 

    "그래. 밤새 끙끙 앓아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일어날 수 있겠어?" 

    ".......가게는?" 

    "걱정하지마. 누나 먼저 나가서 준비하라고 했어. 너랑 병원에 들렸다가 가면 돼." 

    조금 있다 엄마의 부축을 받으며, 병원 문 열 시간에 맞춰 내과에 가서 진료를 받았다. 

    의사가 감기몸살이니 걱정할 것 없다며, 하루이틀 집에서 푹 쉬란다. 

    엄마는 다 큰 자식인데도 아픈 날 두고 나가는 것이 무척 마음에 쓰이시는지, 

    죽 챙겨먹을 것과 제 시간에 약 챙겨 먹을 것을 신신당부하신다. 

    또다시 혼자가 되어 멍한 머리로 어제 일을 되씹어 본다. 

    승주와 내가 한 대화가 서로 핀트가 맞지 않고 어긋난 느낌이 계속 드는 것은 왜일까. 

    나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 저었다. 

    기대를 못버리는 내 감정탓으로 돌리며 빨리 잊어야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오피스텔을 나오기 전 말하던 승주의 슬픈 음성이...... 

    체념한 슬픈 얼굴이 떠올라 견디기가 힘들다. 

    나 이대로 쉽게 녀석을 잊을 수가 있을까? 

    아픈 자식이 마음에 걸려 일찍 가게를 정리하고 들어온 엄마가 

    공부하느라 몸이 많이 허약해진 것 같다며, 

    과부 변돈을 내서라도 보약 한 재 지어주시겠다고 하신다. 

    나는 그냥 어쩌다 감기몸살에 걸려 그런 것뿐이라며, 속이 미슥거리는 탓에 

    엄마가 깎아준 과일을 겨우 한 입 베어 물곤 포크를 놓았다. 

    엄마는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한 숨을 쉬시며 내일도 집에서 하루 더 푹 쉬라고 하신다. 

    아직 승주를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과 못견디게 보고 싶다는 마음이 교차한다. 

    내일 일어나서 몸 상태보고 결정하겠다고 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열은 내렸지만, 여전히 속이 미슥거리고 머리가 띵하니 

    몸을 움직이기가 버겁다. 엄마가 오늘 하루 더 푹 쉬자며 학교에 전화하는 소리가 들린다. 

    "TRRRRRR------TRRRRR------TRRRRR-----" 

    시간을 보니 오후 1시다. 바쁜 시간일 텐데도 약 챙겨먹으라고 엄마가 전화하셨나 싶다. 

    "여보세요." 

    [야. 너 많이 아프다며?] 

    활달한 성재의 음성이 전화선을 타고 귀를 울린다. 주위가 소란한 것을 보니 매점인가보다. 

    "어...아니 많이 나았어." 

    [짜식. 생긴 것처럼 비리비리하니, 비 좀 맞았다고 사내자식이 감기몸살에 걸리냐?] 

    "그러게 말이야.....그 날........ 잘 놀다 들어갔어?" 

    [야, 글쎄~ 나 그 날 심장마비 걸려 죽는 줄 알았다.] 

    가슴이 철렁한다. 내가 승주에게 끌려간 것을 들은 것일까? 

    아니면 혹시......... 여학생 말을 듣고 따라나왔다가 차안에서 키스하는 것을 본 것일까? 

    조금 음성이 떨리며 물어본다. 

    "......왜?" 

    [야. 우리가 그 때 단체 영화관람하던 날 전갈보고 놀래서 얘기하다 

    서일중학교 삼총사 말한 거 기억나냐?] 

    "응. 그게 왜?" 

    [아. 글쎄~ 그 중 공고 갔다는 형이 알고보니 내 여친 오빠쟎아!!] 

    "뭐, 뭐라고? 설마 키 크고, 머리 노랗게 염색한" 

    [그래. 니 사촌형 친구라며~ 너도 전혀 몰랐어?] 

    "사촌형이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짜식. 쪽 팔려서 숨기긴!!! 다 들었는데......니 사촌형이 한 눈 팔지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서 

    대학가라고 했는데, 너 그 날 정통으로 걸려서 끌려갔다며!! 

    내 여친 오빠는 이성교제는 말리지는 않지만, 사귀는 동안 건전해야 된다며 

    은근히 날 눈에 힘을 주고 보는데, 나 쫄아서 죽는 줄 알았다.] 

    도통 무슨 소린지 감이 잡히지 않는데다, 멍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그 날 화장실에서 엿들은 두 사람의 대화는 분명히 친구사이던데...... 

    전갈이 작년에 졸업했으니까........우리와 3살 터울인데, 그 전갈의 친구인 노란머리가 

    어떻게 승주와 친구가 될 수 있는지.......뭔가 크게 잘못됐다. 

    "그, 그래서?" 

    [그래서라니!!! 그래도 그 형 말은 그렇게 해도 노는 거 하나는 짱이더라. 

    노래방 사장과 어떻게 아는지 서비스곡 곱빼기로 받아 함께 어울려 3시간 가까이 

    노래방에서 실컷 놀다가 헤어졌지~ 얼마나 소리지르며 놀았던지 아직도 목이 다 아프다. 

    너 그나저나 이제 몸은 괜찮아? 혹시 사촌형에게 두들겨 맞고 못 나오는 거 아니야?] 

    "뭐?" 

    도대체 성재는 어떻게 자랐기에 모든 걸 맞는 쪽으로 결부시킬까? 

    기가 막히다. 승주가 사촌형으로 둔갑 한데다가......노란 머리가 승주 친구라니..... 

    그러고보니....... 그 날 처음 본 날 보고 놀랜 표정을 지었었다. 

    [야. 그건 그렇고, 내일 방학식인데 내일은 학교 올 수 있지?] 

    ".....그래......가야지." 

    [그럼 몸조리 잘하고 내일 보자.] 

    통화가 끊어진 수화기를 들고 한참을 서 있었다. 

    .............뭐, 뭐야?..............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가뜩이나 띵한 머리가 복잡한 생각 탓에 지끈 쑤셔온다. 

    나는 승주와 보냈던 때와 그 날 일을 심각하게 하나하나 되짚어 본다. 

    승주가 나를 보던 눈과.....이상하리만큼 나에게 자상하게 굴었던 일........... 

    .........약을 먹고 안긴 날.......끊임없이 내 귓가에 미안하다고 말했던 승주의 낮은 음성....... 

    사라졌다가 예고없이 나타나 음악실에서 정열적으로 키스했던 때...... 

    ............할 얘기가 있다며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을 겨우 꺼낼뻔 한........ 

    '아주 오래된 얘기야.' 

    화장실에서 엿듣고 배신감에 승주에게 반항하고...........내 꺼라는 표시로 귀를 뚫었을 때...... 

    ........그리고.........마지막 오피스텔에서........내 못난 감정을 숨기려고 흥분해서 했던 대화..... 

    '다 알았는데도 그렇게 부르는 것을 보면 역시 내가 용서가 안되는 모양이구나.' 

    '다 알았는데도 그렇게 부르는 것을 보면 역시 내가 용서가 안되는.' 

    '다 알았는데도 그렇게 부르는 것을 보면' 

    이라니........그 때는 이상했지만 너무 흥분한 탓에........아!!! 뭐가 뭔지.............. 

    ...................서, 설마!!!!..................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아파온다. 

    나는 벌떡 일어나 승주의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찾았다. 

    빨리 확인하고 싶다. 떨리는 손으로 버튼을 눌렀다. 

    전원이 꺼져있다는 여자의 멘트가 들린다. 시계를 보니 수업시간이다. 

    이럴 수가....... 

    다시 한번 퍼즐 맞추듯 차근차근 그 동안의 일을 맞춰본다. 

    한 조각 한 조각 조심스럽게 기억을 더듬어 꺼내본다. 

    학기 초, 서울에서 온 전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거기다 눈에 띄는 외모와 분위기에 눌려, 우리는 낯선 이방인인 승주를 관찰했다. 

    호기심과 부러움 섞인 우리의 시선을 묵묵히 외면한 채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 승주를 

    어떻게 알았는지, 몇 일 뒤 이름을 대면 알만한 우리학교 일진들이 

    몇 번 승주를 찾아와 폭력 써클에 가입할 것을 권유하고 갔다. 

    우리는 촉각을 세운 채 재미있는 구경을 놓치지 않으려고, 

    승주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나름대로 승패를 추측해 연신 화제로 삼았다. 

    나도 역시 호기심을 갖고 승주를 훔쳐보기 바빴지만, 의미가 조금 다르다. 

    흔히 볼 수 없는 수려한 외모도 한 몫 했지만 뭔가 꼬집어서 말하기 힘든 

    승주의 독특한 매력에 끌려, 눈으로 녀석을 쫓기에 바빴고 이상하게 눈이 자주 마주쳤다. 

    .............지금 생각해보니 우연이기보단 승주의 눈길은 나를 향해 있었던 것 같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보았는지 승주와 일진이 크게 붙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학교안테나인 성재가 빠르게 그런 정보들을 입수해, 우리에게 실어 나르는 과정에서 

    과장되게 살이 붙어 무서운 녀석으로 둔갑했고, 우리는 그런 승주를 견제하며 경외시 했다. 

    한 술 더 떠, 아직도 그 화려한 무용담이 우리 입에 심심치 않게 오르내리는 

    선배 전갈이 녀석을 보호하는 뉘앙스를 풍기며 녀석의 무서운 소문을 부채질했다. 

    그러나 빗속에서 승주와 부딪쳐 녀석 옆에 섰을 때, 소문과는 다르게 배려심 깊고 

    자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녀석이 내 머리를 헝클리듯 쓰다듬었을 때 

    나는 안정감을 느꼈고, 예전에 알던 형을 떠올렸었다. 내 입맛에 맞게 탄 코코아도 그랬고, 

    목욕탕에서 승주가 형처럼 꼼꼼하게 닦아 준 일 

    ...........그러고 보니 나와 씻는 순서가 똑같다. 

    벗은 승주 몸에 있었던 오른쪽 배 아래의 수술흉터.....보통 맹장수술 후 남는 위치다. 

    목욕 후 먹은 삶은 계란과 사이다 

    .........왜 형처럼 사이다였을까? 다른 음료도 많은데...... 

    승주와 시험공부 할 때 마음을 잡기위해 과외를 했었다곤 하지만 실력이 월등했다. 

    시험공부를 같이하며 은근히 내 입맛에 마음 써준 커피와 쵸코과자 

    .......지금은 입맛이 변해 진한 코코아로 만족하지만, 어렸을 땐 달콤한 쵸코과자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 날 승주가 사온 쵸코과자를 나만 먹었지, 승주는 입에 대지도 않았다. 

    시험공부를 하기위해 밤샘하던 날, 승주는 평소와 다르게 창현이네 있었던 얘기를 

    꼬치꼬치 캐물었고, 나와 첫 키스를 나눈 후 이런 일이 자주 있냐는 내 물음에 

    '다른 의미지만 분명히 나도 첫 키스야.' 

    라고 했다. 

    나는 그 때 다른 의미를 남자와의 키스를 칭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말 그대로의 뜻이 담긴 것 같다. 

    학교에서 창현이가 내게 엉겨붙어 내 귓가에 숨을 불며 짓궂게 장난했을 때, 처음으로 

    험한 승주를 보았고 창현이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칼날같이 이글거리던 눈이 생각났다. 

    ...........설마 그 때 질투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것은 질투 어린 시선이 분명하다. 

    노래방 복도에서 내가 그 여학생과 눈을 마주쳤을 때 그 때와 똑같은 눈빛이었다. 

    내가 승주를 떠올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녀석에게 다가가고 싶어할 때, 

    녀석은 티 나지 않게 기뻐하며, 내가 다가올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놓은 것 같다. 

    편의점에서 산 녀석의 저녁식사를 보고 도시락을 가져가던 날 녀석은 

    '너도 집에 가면 혼자잖아? 먹고 가.' 

    라며 젓가락을 쥐어줬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무심한 녀석치곤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전날 편의점에서 부딪혔을 때, 손에 든 게보린을 유심히 보고는 

    '여전하구나.' 

    라고 했을 때, 덜렁대서 부딪친 내 실수를 말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약 얘기를 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녀석에게 안긴 날, 머리가 아파서 고생하던 내게 약을 먹였을 때 

    녀석의 표정이 짓궂으면서 아이처럼 칭찬을 바라는 묘한 표정을 지었기에 사악하다고 

    생각했었는데.......승주에게 흥분해서 퍼붓던 날 최음제를 먹이고 안았다는 내 말에 

    승주는 황당하고 놀랜 표정과 무너질 듯 아슬한 표정을 담고 내게 말했었다. 

    '뭐? 그럼.....너는.....그렇게 생각해서 단지 그것 때문에 내게 안긴 거였어? 

    단지......... 그것 때문에?' 

    '..........겨우.....그냥 그런 생각 때문이었다고?'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그런거야?' 

    그 때의 일을 떠올리니 상처를 쥐 뜯은 것처럼 마음이 쓰리게 아파온다. 

    그리고 내가 귓등으로 흘려듣던 마지막 녀석의 말....... 

    '다 알았는데도 그렇게 부르는 것을 보면 역시 내가 용서가 안되는 모양이구나. 

    미안하다. 깊은 상처를 줘서.......... 이런 식으로 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그 말이 마음에 걸린다. 내가 '너!'라고 했을 때. 녀석이 말하던 

    '다 알았는데도 그렇게 부르는 것을 보면' 

    이라니.....그건 녀석이 설마 원희형이라서????..........!!...... 

    아빠의 제삿날 학교에서 녀석 품에 안겼을 때, 녀석의 익숙한 향과 함께 

    희미한 향불 냄새가 맡아졌었다. 역시 가게로 바로 달려가서 탁자에 놓인 

    음료캔을 마실 때 순간 코끝을 스친 익숙한 녀석의 체향 

    ......내가 오기전 형이 왔었다 했는데 그 음료는 형이 한 모금 마셨던??!! 

    아!! 몇 일전 길에서 누나가 승주와 마주쳤을 때 놀란표정을 지었고, 계속 갸우뚱거리며 

    '조금 전에 걔.........너 친구 맞어?' 

    '......그래.......하기사 닮은 사람도 많으니까.' 

    라고 말했지. 뭐야? 정말 승주가 예전의 그 원희형인 것일까?? 

    왜 그 때 아무 말 없이 가버리고, 엄마와 누나는 내게 형에 대해 한마디도 안 해줄까? 

    승주가 원희형이 맞다면 당당하게 내 앞에서 원희형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고, 

    그런 방법으로 내 주위를 맴돌았을까??? 이건 답이 나오지 않는다. 

    "TRRRR---TRRRR-----" 

    전화벨소리에 놀라 고개를 드니 저녁시간이 다되었다. ......엄마다. 

    [정아 왔지?] 

    "아니! 누나가 이 시간에 왜?" 

    [뭐야? 여기서 나간 지가 언젠데, 엄마가 아는 한의원에 얘기해 몸에 좋다는 보약 지어서 

    저녁에 챙겨 먹이라고 일찍 보냈는데......아직도 안왔단 얘기야? 얘가~] 

    나는 엄마가 보내 준 약 쓰더라도 꾹 참고 마시라는 당부를 듣고 옷을 갈아입었다. 

    이대로는 참을 수가 없다. 녀석을 만나서 물어보고 확인해야 이 답답한 속이 풀릴 것 같다. 

    혹시라도........ 녀석이 내게 했던 

    '이젠 너 앞에 다시 나타나는 일 따위 없을 거야.' 

    란 말처럼 원희형처럼 아무 말 없이 사라져 버린다면, 나는 이 거미줄처럼 엉킨 

    혼돈된 생각 속에서 헤어날 길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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