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그래서 그랬어!!"
"민하야. 내가 직접 말하고 네게 용서를 구하고 싶었어."
녀석은 착잡한 얼굴로 조용히 말을 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용서를 구하고 받을 것도 없어!!"
"민하야..... 그 동안 너를 속여온 것은 미안하지만. 난"
녀석의 변명은 듣기 싫다. 듣고 있다가 또 다시 기대하고 바랄 것이다.
나만 또 상처입게 될 것이다는 생각에 나는 급하게 말을 막았다.
"아니 됐어!!!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들을 필요도 없어!!!"
"민하야"
"그 동안 내 옆에서 나를 속여가며 가지고 논 것이 재미있었겠지!!"
"민하야!!!! 무슨!!"
이상하게 녀석앞에선 감정이 조절이 안된다. 흥분한 나를 잡으려고 손을 뻗치는
녀석의 손을 뿌리치면서, 나는 내 못난 감정에 빠져 덮어두려고 했었던 얘기를 해버렸다.
"건드리지마!!!! 부정하고 싶은 거야?
너는 내게 약을 먹이고 호기심에 나를 안은 것뿐이잖아!!!!"
"약.......이라니?"
"모르는 척 하려고 했어. 그 날 내게 먹인 약!!!"
"뭐?"
녀석은 그 약까지 내가 모르는 줄 알고 있었는데, 내가 안다는 사실에 놀랜 모양이다.
그래, 모르는 척 넘어가려 했지만 이왕 말 꺼낸 김에 다 해버렸다.
"꼭 내 입으로 얘기해야겠어? 최.음.제.말이야. 그것을 내게 먹이고 나를 안은 거잖아!!!"
"뭐? 그럼.....너는.....그렇게 생각해서 단지 그것 때문에 내게 안긴 거였어?
단지......... 그것 때문에?"
이상하다. 어째 서로 어긋난 대화를 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뱉어놓은 이상
다시 주워담기는 힘들다. 녀석은 내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분명히 알텐데도
내게 확인하듯이 물어오는 것이 자존심이 상한다. 내일부터 녀석을 못 보더라도......
"그래!!그래. 맞어!!!! 단지 그것 때문이었어!!!! 이제 됐지!!!!"
"...........겨우.....그냥 그런 생각 때문이었다고?"
"그래!!"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그런거야?"
녀석이 왠지 슬픈 표정으로 힘없이 되물어 온다. 다시 기대감을 걸기에는 너무
멀리와 버린 것 같다. 이젠 정말 끝내야 된다.
"나도 착각했어!!! 그런 너를 오해해서.......바보처럼......나도 지금 무척 혼란스러워.
다시 네 얼굴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거라면 걱정하지마."
녀석이 아주 담담하게 말을 한다.
"뭐?"
"다 알아들었어.......됐어.......시간이 많이 늦었다."
"무,무슨?"
"너가 나를 얼마나 미워하는 줄 알았어. 그리고 쉽게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이젠 너 앞에 다시 나타나는 일 따위 없을 거야."
"너!"
"다 알았는데도 그렇게 부르는 것을 보면 역시 내가 용서가 안되는 모양이구나.
미안하다. 깊은 상처를 줘서.......... 이런 식으로 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녀석은 멍하니 있는 나를 지나쳐, 신발장에서 우산을 꺼내 현관문을 열어준다.
나도 더 이상 아무 말 못하고, 녀석이 주는 우산을 못 본 체하고 그냥 나와버렸다.
밖은 여전히 모든 것을 부숴 버릴 듯 거센 비바람이 친다.
[다다] 한.국.인.의 두.통.약. <下>
"..하야............민하야..............민하야"
누군가가 흔들며 나를 깨운다. 눈이 떠지지가 않는다.
.......그냥 좀.....날........냅 둬.................
"어머! 얘 머리 뜨거운 것 좀 봐. 엄마--엄마---"
소란스러운 소리에 겨우 눈을 떴다. 누나가 급히 내 방을 나가는 것이 보인다.
........그래...........어제....오피스텔에서.... 승주와 한바탕하고.......
비를 흠뻑 맞으며 거리를 헤매다가 집으로 돌아 온 것이 생각났다.
몸을 일으키려고 하니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온 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프다.
지금 몇 시정도 되었지? 머리가 핑그르르 도는 게 힘이 들어 가지지가 않는다.
겨우 일어나 벽에 기대어 않으니 누나가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벌써 가신 모양이네. 어쩌지? 민하야. 많이 아파?"
참 이상하다. 뭐가 서러운지 나도 모르게 가슴이 찡해지며 눈물이 난다.
"어머! 민하야 왜 그래? 못 견딜 정도로 많이 아파서 그래?"
나는 말을 못하고 힘없이 고개를 젓지만, 뭔지 모르게 마음이 아파 오면서
눈물이 계속 뺨을 타고 흐른다. 누나는 당황스러워하며 티슈를 뽑아와
내 눈가의 눈물을 닦아주며, 걱정하는 부드러운 소리로 물어본다.
"민하야..........무슨 일 있었니?"
어릴 때 나는 울보였다. 울지 않아도 될 일이었는데, 누군가가 옆에서 상냥하게
물어오면 그 소리에 기대어 울음을 터트렸다. 지금도 그렇다.
누나의 부드러운 음성이 내 눈물보를 건드려 그만 울음이 터져 나온다.
"......흑......흐흐흑.......흐윽......"
왜 내가 지금 울고 있는지도 모르는 체 감정에 복받쳐 소리내어 울었다.
옆에서 달래주면 달래줄수록 더 운다는 것을 아는 누나는 그냥 내 옆에 앉아
한숨을 쉬며,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내 등을 토닥거려주며 울음이 멈추길 기다려준다.
한참을 그렇게 아이처럼 울었다. 울고 나면 속이 후련해질 것 같았는데
반대로 가슴이 더 답답해지고 무거워진다.
"다 울었어? 덩치는 커다란게 아이처럼....."
".....으응........훌쩍........"
"어제 친구랑 놀고 온다더니 뭐 안좋은 일 있었어?"
".....으응.......그냥 좀........"
"귀는 또 어떻게 된 거야?"
"아!!"
나는 그 말에 놀라 손을 들어 왼쪽 귀를 가렸다. 손끝에 차가운 금속이 닿는다.
"요즘 남학생도 귀뚫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너까지 귀를 뚫고 들어올 줄이야......."
"....어......친구들 하는 거 구경하다가 얼떨결에......."
"엄마 앞에서는 귀걸이 빼고 절대 보이지마. 엄마 놀래서 기절하시겠다."
"으응"
"쯪쯪.......그리고 목에 시퍼런 멍은 어디서 들었어? 친구랑 싸운거야?"
????........!!!!!......////////.........
아뿔사! 나는 손을 들어 목에 대보았다. 아얏!! 어제 승주가 차안에서 반항하는
내 목덜미를 물고 힘껏 빨아 당긴게 생각나버렸다. 설마 멍까지 들 줄이야.
"그냥 좀.../////...한 눈 팔다 부딪쳐서......."
"아휴......참! 골고루 한다. 아이처럼 울지 않나~ 귀 뚫은 거에~ 멍까지~"
"엄마는?"
"오랜만에 쉬는 휴일이라 아줌마들이랑 새로 생긴 맥반석사우나에 몸 풀러 가셨어."
"으응.....누나는 어디 안나가?"
"나도 좀 있다 약속 있어서 나가봐야 되는데......너 많이 아픈 것 같은데, 혼자 괜찮겠어?"
다행이다. 그냥 혼자 조용히 쉬고 싶었는데.....
"뭐. 새삼.......내 걱정말고 모처럼 쉬는데, 나갔다 와."
누나는 약속시간이 빠듯한지 늦은 아침과 약을 챙겨주고는 예쁘게 차려입고 나갔다.
입이 쓴 탓인지 밥맛이 없어, 겨우 한 숟갈 먹고는 해열제와 약을 먹고 침대에 누웠다.
텅 빈집에 아파서 혼자 누워있는 내 자신이 너무 처량하다.
창을 때리는 빗소리만 들릴 뿐 너무 고요해, 몸을 일으켜 라디오를 켜놓고 다시 누웠다.
날씨 탓인지 나오는 음악마다 이별에 대한 슬픈 노래만 흘러나온다.
참 이상하지. 가수가 부르는 슬픈 음색이 내 감정에 전이되어 마치 모두 내 얘기인 양
아릿하게 가슴을 적신다. 나는 귀에 있는 귀걸이를 떼어 베개 밑에다 감추었다.
어제의 일이 생생하게 기억나지만 마치 오래 전 일 같이 멀게만 느껴진다.
아까 운 탓인지 아니면 열 때문인지 노래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엄마가 내 이마를 짚으며 웅얼웅얼 걱정하시는 소리를 들은 것 같지만,
눈이 떠지지가 않아 그냥 그렇게 죽은 듯이 잠을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