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33)

그렇게 한참을 거슬러서 걸어왔다. 보통 버스 타고 20분 남짓 걸릴 거리를 

우리는 1시간을 훨씬 넘게 말없이 바람을 맞고 걸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시계를 보니 벌써 11시가 넘어가고 있다. 이 시간이면 집에 엄마와 누나와 

돌아와 있을 시간인데 걱정하시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간다. 

집 근처의 큰 사거리 쪽에 다 왔을 무렵, 입을 굳게 다물고 침묵을 지키고 있던 

승주가 드디어 입을 떼고 말을 시작한다. 

"김.민.하" 

"응" 

"민하야." 

"그래. 할 말 있다면서........기다리고 있었어." 

"아주 오래된 얘기야." 

"........" 

"...........내가 오래 전부터 마음 속에 품" 

그 때, 귀에 익은 누나의 하이톤 목소리가 들렸다. 

"민하야!!!!!" 

"어! 누나잖아!!" 

승주가 깍지끼고 있던 손을 살며시 놓는다. 

의식하지도 못한 채 한참을 잡고 있었던 녀석의 체온이 없어지니, 

연결고리가 떨어진 것 같아 못내 아쉽다. 

누나가 편의점 쪽에서 이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인다. 

누나가 왜 이 시간에 편의점엔? 가만 있어봐 오늘이 16일이까....... 

아! 맞다. '마술'의 시간이 시작됐구나. 남자인 나는 세월 가는 것을 누나의 생리주기로 

확인하는 꼴이다. 누나가 종종걸음으로 내 앞으로 걸어오며 말을 건넨다. 

"너. 왜 연락도 없이 지금 와? 엄마가 무슨 일 있는 줄 알고 걱정 하셨잖........." 

누나가 말을 끊고 옆에 있는 승주를 놀랜 얼굴로 물끄러미 올려 보고 서 있다. 

이 아줌마 얼굴 밝히긴!!!! 

"누나 내 친구 권승주야. 인사해. 이쪽은 우리누나." 

내 말에 승주가 허리를 천천히 굽혀 깍듯하게 인사한다. 

"어.......어........." 

"왜 그래? 누나." 

"어? 어!어! 그냥 좀...... 집에 들어가는 길이지?" 

"아니. 나" 

친구랑 남은 얘기가 있다고 말을 하려던 내 어깨를 잡아 제지하듯이 녀석이 말을 한다. 

"민하야. 다음에 얘기하자." 

그 말을 하고 우리는 헤어졌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누나는 뭐가 이상한지 계속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열심히 생각하는 눈치다. 

"왜 그래? 뭐가 이상해서 그렇게 고개를 갸웃거려?" 

"조금 전에 걔.........너 친구 맞어?" 

녀석이 우리 또래랑 다르게 키가 크고 어른스럽게 보이는 것은 알지만 이건 너무하다. 

"나랑 같은 교복 입은 거 못 봤어. 같은 반 친구야." 

"......그래.......하기사 닮은 사람도 많으니까." 

"뭐? 닮다니...누구랑?" 

"아!.........아니야. 엄마가 눈 빠지게 기다리시겠다. 빨리 가자." 

녀석이 한참을 뜸들인 끝에 겨우 말하려는 것을 누나 때문에 듣지 못했다. 

하필 그 때, 그 시간에 누나가 왜 거기에서 튀어나와 부르는 것인지...... 

나는 승주의 핸드폰 번호가 적힌 냅킨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수화기를 몇 번이나 

들어 전화를 걸어볼까 망설이다가 그냥 냅킨을 조심스럽게 책 사이에 끼워놨다. 

토요일 약속한 미팅장소에 6시 조금 넘어 도착했다. 

다른 녀석들은 평소와는 다르게 점잔빼며, 때 빼고 광 낸 모습으로 의젓하게 앉아 있다. 

성재가 들어서는 나를 금방 알아보곤 반갑게 손짓한다. 

"야! 임마. 그렇지 않아도 씹고 있었는데.... 양반 되긴 글렀네. 왜 이렇게 늦었어?" 

"응. 비가 심하게 오는데 다, 차까지 막혀서....." 

성재가 권해주는 자리에 앉으며 대강 둘러댔다. 사실은 나오기를 한참을 망설였었다. 

승주의 마음은 알 수 없지만, 그 동안 녀석과 가진 비밀스런 관계와 어제 함께 보낸 시간이 

꼭 데이트하는 연인 같았기에, 이 자리에 나오는 것이 녀석에 대한 배신행위 같았다. 

하지만, 한편으론 내가 그 동안 녀석이 보여준 행동을 착각하고 오해해서 

상처받는 것이 아닐까 하는 비겁한 자기방어에서 오는 염려에, 

'바람맞히면 나 안 보는 걸로 알거야.' 

라며 밀어 부쳤던 성재 핑계를 계속 내 자신에게 대며 오늘 이 자리에 나왔다. 

녀석에게 아무 말 듣지 못하고 미팅에 나온 것이 못내 찜찜하고 가시방석 같다. 

"민하야. 내가 얘기 많이 했지? 내 여자친구 정소연이야." 

성재가 말하는 소연이라는 여학생을 보니 귀엽고 깜찍하다. 나 같아도 자랑하고 싶겠다. 

성재 녀석 다니지 않던 교회를 여친 볼 마음에 열심히 가는 이유를 십분 이해하겠다. 

"안녕하세요? 얘기 많이 들었어요. 김민하에요." 

"안녕하세요? 성재가 미소년에 꽃미남이라고 자랑하더니 정말이네요." 

미소년에 그것도 웬 꽃미남? 나는 머쓱해져 대강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곧이어 성재가 주선자답게 자기소개로 이끈다. 

성재를 뺀 남자측 4명과 여자측 4명이 자기소개를 간단하게 했다. 

여자측도 성재 여친과 거의 비슷한 분위기에 키도 고만고만 아담하고 귀엽다. 

우리는 탐색전 끝에 고전적인 방법으로 소지품을 하나씩 꺼내놓고 파트너를 정했다. 

내 파트너는 아까부터 나에게 계속 눈길을 주던 세림이라는 여학생이 되었다. 

우리는 파트너랑 다른 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그곳에서 저녁을 먹었다. 

이제 얼굴도장 찍었으니 돌아가 볼까 싶지만, 내일이 일요일인 탓에 조금 더 놀고 

들어가자며 비가 오니 어디 가기는 그렇고, 노래방에 가서 서먹한 분위기도 없앨 겸 

친목을 다지는 쪽으로 말들이 맞춰졌다. 아주 날을 잡은 것 같은 분위기다. 

발 넓은 성재가 서비스곡 많이 주는 곳을 알고 있다며 자기 여자친구와 앞장선다. 

아까보다 비가 꽤 많이 쏟아진다. 조금 주춤하며 건물입구에 서 있는데, 

성재가 남학생들의 우산을 뺏어 들고 짓궂게 웃으며 첫미팅의 추억을 만들어 주겠단다. 

모두 무슨 소리인가 싶어 성재를 주목하니, 각기 정한 여학생 파트너와 우산을 쓰고 

자기 뒤를 따르라고 소리치고 여친의 팔짱을 끼고 빗속으로 나간다. 

태호와 창현이는 좋아서 입이 벌어진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기 파트너를 매너있게 호위하며 빗속으로 걸어간다. 

나중에 남은 나와 내 파트너 역시 아이들을 따라 그렇게 한 우산을 쓰고 걷는다. 

긴 머리가 흔들려 상큼한 샴푸향이 우산 속에 번진다. 

하지만 그 뿐일 뿐, 승주와 함께 우산 속에 있을 때처럼 두근거림은 없고 오히려 담담하다. 

성재가 말한 노래방은 술집과 까페가 많은 뒷골목 2층에 있었다. 뒷골목에 있지만 

꽤 큰 건물로 2층에 노래방과 호프집 간판이 보인다. 건물 옆에 여기저기 빼곡하게 

승용차들이 주차되어 있어, 우리는 그 사이를 조심스럽게 빠져나가야 했다. 

우리는 넓은 방으로 들어가 서로 눈치를 보며 어색해서 여자와 남자가 갈라 앉았다. 

눈치 빠른 태호가 여자들에게 점수를 얻을 양인지 음료수를 빼 오겠다며 

주문을 받기 시작한다. 이런 자리가 못내 어색했던 참에 태호를 따라나와 나는 

주문 받은 온커피를 3잔을 뽑아서 쟁반에 들고 다시 그 방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잠깐 나갔다 온 사이에 남녀가 섞여 파트너끼리 앉아있고 

성재가 몸을 흔들며 노래를 한 곡을 근사한 척 뽑고 있다. 

태호는 여자들에게 웃으면서 건네 주면서, 우리에게 줄 땐 못내 아까운 눈치가 역력하다. 

나는 커피를 주문한 사람에게 종이컵을 조심스럽게 건네고, 

나머지 한 잔 역시 주문했던 내 파트너에게 건네주고 손을 놓는데...... 

내 손끝이 닿자 움찔하면서 여학생이 컵을 놓치는 바람에 뜨거운 커피가 

내 허벅지에 조금 쏟아지고 바닥에 떨어졌다. 

"핫! 뜨거......." 

"어머!! 어떡해. 미안해요....어떻하면 좋아.....괜찮아요? 아! 참 여기, 여기 손수건으로..." 

세림이라는 아이는 자기 때문에 미안하다며 호들갑스럽게 손수건을 꺼내며 닦아주려 한다. 

나는 화장실에 가서 물로 씻으면 된다고 하고 급히 밖으로 나오는데 허벅지가 화끈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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