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33)
  • 방학을 얼마 남겨두지 않아서인지 정규수업이 끝나고 종례를 마치니 4시가 조금 넘었다. 

    나는 재빨리 가방을 챙기고, 눈짓하는 녀석의 뒤를 따라 조용히 거리를 두고 따라간다. 

    태풍이 온다고 했던가. 습기를 품은 축축한 바람이 꽤 강하게 불고, 

    강한 바람에 못이겨 길가의 나무들이 가지를 흔들며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나무 아래로 바람을 안고 가는 키가 큰 녀석의 뒷모습이 굉장히 멋져 보인다. 

    녀석은 학교 안에서 단둘이 있을 때와는 분위기가 틀려 말을 걸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얼마 전부터 생긴 둘 사이의 비밀스런 관계가 의식되어 더더욱 말을 걸기가 힘들다. 

    오토바이를 가져오지 않았는지 녀석이 버스정류장 쪽으로 걸어간다. 나도 조용히 뒤따른다. 

    다행이다. 녀석과 오토바이 탄 것을 보고 성재가 오해했는데....... 

    버스정류장에 있던 아이들이 녀석을 보자 경계하는 듯 조금 멀리 떨어지는 것이 보인다. 

    우리는 그 곳에서 모르는 사이처럼 거리를 두고 서 있다가, 우리가 탈 버스가 오자 

    녀석은 나에게 눈짓하며 올라탔고 나도 말없이 올라탄다. 

    붐비는 버스 안에서 밀리듯 겨우 녀석 쪽으로 다가가 옆에 나란히 서본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누군가 내 손을 잡는 것이 느껴져 시선을 내려보니, 

    녀석이 살짝 내 손을 잡은 것이 보인다. 

    나는 시선을 올려 녀석과 눈을 맞추기 위해 보지만, 녀석은 모르는 척 창 밖만 보고 있다. 

    마주 잡은 손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얼마쯤 그렇게 있었을까. 시내가 보이자 녀석이 벨을 누르고, 

    그 때서야 나를 쳐다보며 눈이 조금 웃는다. 

    우리는 버스에 내려 골목길을 들어가면서 일행답게 나란히 걷는다. 

    "시험은 잘 봤어?" 

    "예상외로 잘 봤어. 너가 찍어 준 문제가 많이 출제되서 놀랬어. 너는?" 

    "대강" 

    "할.......말.......이라는 것이 뭐야?" 

    "있다가......시내까지 나왔는데 우리 영화 볼까?" 

    "영화?" 

    생각해보니 나는 단체관람 외에 일부러 극장을 찾아 영화를 본 일은 별로 없었다. 

    "어떤 류 좋아해?" 

    "음......특별히 좋아하는 건 없어. 그렇다고 싫어하는 것도 없지만.......너가 골라." 

    우리는 가까운 극장을 찾았다. 어떤 영화를 볼까 의논하다 그냥 흥미위주의 액션영화를 

    보기로 하고 녀석이 표 2장을 끊었다. 

    극장 안은 습기를 품은 밖과는 대조적으로 냉방중이라 쾌적했고, 평일이라 그런지 

    비교적 한가했다. 우리는 표에 적힌 좌석으로 가서 나란히 앉았다. 

    아직 시작하려면 시간이 좀 남았다. 

    옆에 앉아있던 녀석이 진동으로 해놓았는지 휴대폰 꺼내 전화를 받는다. 

    "예.........잠깐 금방 다시 걸게." 

    녀석은 가방을 의자 위에 올려놓고 일어선다. 

    "잠깐 밖에 나가 전화 좀 걸고 올게. 마실 것 좀 사다줄까?" 

    "같이 나가자. 내가 사올게." 

    "아니, 나간 길에 사올게. 콜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녀석은 밖으로 나간다. 나는 그냥 멀뚱히 극장 안을 둘러본다. 

    내 앞쪽에 연인으로 보이는 한쌍이 서로의 허리에 팔을 감은 채 좌석에 앉는 것이 보인다. 

    그 전에는 저런 모습이 보기 흉하게 느껴졌었다. 좋아하면 그냥 손만 잡을 것이지 

    남들 보기 민망하게 꼭 붙어서 뭐하자는 것인지 싶어 눈살을 찌푸렸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녀석에게 느끼는 내 감정을 깨닫고 난 후, 

    좋아하는 상대를 보면 눈을 뗄 수 없고, 그만 생각하게 되고, 옆에 있으면 

    그 체온을 조금이라도 느끼고 싶고, 만져보고 싶고, 안고 싶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마음이 무거워진다. 

    이런 감정은 녀석과 상관없이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에..... 

    녀석은 흔히 우리또래 아이들이 느끼는 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시작해, 

    제어가 안되는 욕구를 푸는 단순한 대상으로 밖에 나를 보는 것은 아닐까. 

    나간 녀석은 통화가 길어지는지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곧 있으면 영화가 시작하는데.......나는 녀석을 찾아보기 위해 의자에 가방을 두고 

    밖으로 나와 음료 파는 곳을 찾았다. 그 곳에 녀석이 보인다. 

    유니폼을 입고 짙은 화장을 한 아가씨가 무슨 말을 하며 웃으면서 컵을 건네주고, 

    평소에 잘 웃지 않는 녀석이 아가씨의 말에 따라 웃으며 그것을 받는다. 

    괜히 기분이 나빠지고 불쾌하다. 

    .........그래, 너도 남자니까........ 

    나는 못 볼 것을 본 거 마냥 몸을 되돌려 자리에 와서 앉았다. 

    앉고 나서 조금 있다 녀석이 조심스럽게 두 손에 들고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나는 재빨리 옆 좌석의 가방을 내 무릎에 얹고, 녀석이 앉을 수 있게 의자를 바로 잡았다. 

    빨대가 2개 꽂혀 있는 빅사이즈의 음료컵과 고소한 팝콘이다.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영화를 보다 목이 말라 빨대를 물었다. 녀석도 함께 빨대를 물며 내 눈을 깊게 응시한다. 

    나도 녀석에게 눈을 맞춘 채 빨대를 빨았다. 얼굴이 너무 가깝다. 

    웅웅거리던 스피커 소리가 하나도 안들린다. 

    ............이대로 그냥 키스하고 싶다. 

    내가 녀석에게 눈을 못떼고 키스를 생각하듯 녀석 역시 그런 눈빛이다. 

    우리는 눈빛만으로 서로의 같은 마음을 읽은 것 같다. 

    내가 만족한 듯 눈웃음을 지었고 녀석도 함께 웃어준다. 

    내가 팝콘을 하나 녀석에게 튕기자, 녀석도 팝콘을 나에게 튕긴다. 

    우리는 남은 시간 내내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아쉬운 마음을 담아 

    장난으로 서로의 주의를 끌며 대강대강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본 후 밖으로 나오니 해가 긴데도 날씨가 흐려서 인지 거리가 어둡고 

    바람이 더 강해졌다. 

    "배고프지? 우리 저녁 뭐 먹을까?" 

    "음......돈까스." 

    "뭐? 그건 항상 먹는 거잖아?" 

    맞다. 엄마 가게의 도시락 메뉴에 돈까스라던가 다진 햄버거고기가 인기있는 단골 메뉴다. 

    "하지만, 레스토랑에서 제대로 먹은 적이 없어서......" 

    바쁜 엄마와 누나 덕에 흔히 남들이 가는 식당에 가서 외식을 즐겨본 적이 별로 없다. 

    기껏 해봤자 친구들과 가는 분식점과 햄버거 집, 그리고 승주와 같던 해장국집 정도랄까. 

    "그럼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가자." 

    우리는 조금 떨어진 스카이 락으로 들어갔다. 유니폼을 입은 누나가 메뉴판을 내민다. 

    내가 흔히 아는 돈까스, 생선까스, 정식, 스테이크라는 이름 앞에 길게 알 수 없는 

    생소한 명칭이 붙어있고 소스도 몇 가지나 된다. 겨우 사진을 보고 손가락으로 짚었다. 

    녀석은 서로 다른 것을 시켜서 맛보자며 골고루 이것저것 시킨다. 

    영화를 보고 레스토랑에 들어온 것이 꼭 데이트하는 연인 같은 코스다. 

    음식을 기다리며 녀석은 탁자에 피아노를 치듯 긴 손가락을 튕기며 생각에 잠겨있다. 

    할 얘기가 있다고 해놓고 말을 쉽게 꺼내지 않아 조금 답답하다. 

    ".....저....." 

    "응?" 

    "전화번호가 어떻게 돼? 결석했을 때 연락 할 방법이 없어서 걱정했어." 

    "......아!....." 

    "휴대폰 번호 좀 알려 줘." 

    "곧 필요 없게 될텐데......" 

    "뭐?" 

    "아니. 적어줄게." 

    녀석을 펜을 꺼내 탁자에 꽂혀 있는 네모 모양의 냅킨 위에 011로 시작되는 

    휴대폰 숫자를 적어 나에게 건네준다. 나는 그것을 받아 조심스럽게 책 사이에 끼웠다. 

    조금 전 주문을 받은 누나가 음식을 가져와 탁자 위에 놓는다. 

    음식이 나오자 서로의 것을 맛본다며 뺏어먹고 또 나눠주기도 하면서 먹었다. 

    밥을 먹다 서로 눈만 마주쳐도 웃음이 나온다. 지금까지 이 녀석과 지내면서 

    오늘처럼 부담없이 지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시계를 보니 9시가 조금 넘었다. 아까 할 얘기가 있었다고 했는데..........아직 못들었다. 

    녀석은 잊었는지 할 말을 꺼내지 않는다. 먼저 물어볼까? 조금 더 기다리자. 

    우리는 그냥 바람을 맞으며 밤거리를 걷고 있을 뿐이다.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는 것인지 승주는 아무 말 없이 차도를 따라 

    우리 동네 방향으로 걷고 있다. 나는 조금 뒤쳐져 그런 녀석의 보조에 맞춰 걸으며, 

    말을 꺼내길 초조히 기다리면서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앞서서 걷던 승주가 우뚝 멈춰서며 뒤를 돌아 나를 본다. 

    왠지 나를 보는 그 눈이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착잡하게 가라앉아 있다. 

    녀석이 한 손을 내게 내밀어 나는 그 손을 살며시 마주 잡았다. 

    깍지를 끼며 굳게 잡고 다시 집 방향으로 발길을 옮길 뿐 아무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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