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33)
  • 아빠 제사인 줄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 너무 죄스러워 끝나자마자 엄마 가게로 달려왔다. 

    "헉! 헉!........ 엄마 나 왔어요." 

    ".....네.....여러모로 알게 모르게 보살펴 주신 것 잘 알고 있습니다. .......네...." 

    엄마는 내 쪽으로 손을 저으시며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하신 뒤 계속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고 있다. 나는 손부채질을 하며 카운터 앞에 앉았다. 

    "......다 지난 일인걸요.......무슨......아닙니다. 이 가게 낼 수 있었던 것도 다...... 

    .......아니에요......잊지 않고 이렇게 기일마다 연락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됐습니다." 

    통화가 길어질 모양이다. 나는 탁자에 있는 따 놓은 캔음료에 손을 댔다. 

    아마 누나나 엄마가 마시다가 그냥 놔두었나 보다. 만져보니 시원한 기는 하나도 없다. 

    조금 망설이다가 한 모금 마셨다. 

    ........!!!!!......... 캔에 익숙한 녀석의 향이 희미하게 묻어 난다. 

    나는 잘못 맡았나 싶어 다시 코를 대고 맡아보았다. 조금 전 그 향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혹시 음악실에서 키스 끝에 녀석의 향이 나에게 남았나 싶어, 교복 깃과 손목을 들어 

    냄새를 맡아보니 희미하게 향이 남아있는 것 같다.........//////............ 

    예민하지도 못한 게 괜히 예민한 척 유난떨긴......... 

    나는 계속 남은 음료수를 홀짝이며 엄마의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린다. 

    엄마의 깍듯한 예대와 기일을 얘기하는 것을 보니 아빠와 아시는 분과 통화하나 보다. 

    조금 지루해져 있는데 귀에 익은 이름이 들린다. 

    "........뭘요. 그렇지 않아도 조금 아까 원이가 다녀갔습니다............... 

    예. 잘 받았습니다. 그런 것이 남아있었다니...........예..........예......." 

    원희 형이라면 나랑 1년 동안 함께 지냈던 그 형의 이름이다. 누나가 엄마대신 

    음식재료를 사 온 모양인지 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들어온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나는 엄마가 수화기 놓기가 무섭게 말을 걸었다. 

    "엄마! 정말 원희 형이 여기 왔다 갔어?" 

    ".......그래......." 

    "언제? 언제 왔었는데?" 

    "조금 아까 잠시 들렸어." 

    "그럼. 나 오늘 학교 마치고 바로 오기로 했으니까 잠깐 기다리라고 좀 하지 그랬어." 

    누나가 봉지를 주방에 대강 놓고 나오며 엄마 대신 내 말에 대꾸한다. 

    "어머. 원희 조금 앉아 있다가 금방 인사만 하고 갔어." 

    "누나도 형 봤어?" 

    "응. 어머 얘. 길에서 만나면 몰라보겠더라. 키가 훨친한 게 꽤 멋지게 컷더라." 

    "정말? 와서 무슨 얘기했는데? 형이 내 얘기는 안 물어봤어?" 

    "응. 군대간다고 겸사겸사 인사하느라고 들렸다던 걸." 

    "엥. 군대? 그 동안 어떻게 지냈기에 얼굴도 한 번 안 보여주고....." 

    "어머 무슨.... 걔 꼭꼭 아빠 기일쯤에 와서 엄마한테 인사하고 갔다고 하던 걸....." 

    우리 얘기 중간에 엄마가 누나를 부르며 일하기를 채근한다. 

    "민정아. 그만 수다떨고 와서 빨리 일하자. 하던 음식 마저 끝내야지." 

    "아이. 엄마도 이름 좀 하나만 불러. 민정아, 정이, 정아야 손님들이 헷갈려 하잖아." 

    "쓸데없는 소리. 개떡같이 불러도 찰떡처럼 알아들으면 됐지 무슨. 빨리 서둘러." 

    엄마는 누나 이름이 김민정인데 꼭 끝에 외자만을 부른다. 

    어릴 때 우리 집에 놀러 온 내 친구들과 누나 친구들이 그런 누나이름을 헷갈려하며 

    누나 이름이 도대체 몇 개인지 물어본 적이 있을 정도다. 

    우리 집 식구들이야 그러려니 습관이 되어버렸지만, 

    가끔 동네에서 아는 분을 만나면 우리 엄마를 정이엄마, 정아엄마라고 부른다. 

    나는 다행히 이름 끝자에 받침이 없어 하야라고 부르는 어감이 이상해서 

    그냥 민하라고 부르시지만 그래도 우리엄마는 가끔 꿋꿋하게 '하야'라고 부르신다. 

    엄마와 누나는 주방에서 분주하게 제사음식을 만들고 계신다. 나는 카운터에 서서 

    오시는 손님을 응대하며 주문을 받아 포장하는 일을 도와주고 있다. 

    벌써 아빠가 돌아 가신지 만 5년이 되었다. 참 빠르다. 어제일 같은데....... 

    청천벽력 같던 소식을 접하고 혼비백산 엄마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통곡하시고 

    혼절하기를 몇 번.....어른들은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고 엄마도 곧 아빠를 따라 

    가시는 것 아닌가 걱정했을 정도였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아빠의 장례식은 주위 어른들의 도움으로 그런대로 

    이루어졌고, 낯익은 친지와 아빠 동료 분들은 침울한 표정으로 우리를 연신 위로하셨다. 

    모두 어른들이라 불편했던 나는 형을 찾아보았지만, 이상하게 장례식 전후로 

    형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고, 금기처럼 누구도 형에 대해서 묻거나 말하지 않았다. 

    나도 굳이 엄마나 누나에게 물을 수가 없었다. 

    아빠 돌아가시고 한 동안 정신을 놓으셨던 엄마가 어느 날부턴가 털고 일어나셔서 

    생활전선으로 뛰어드셨다. 지금의 이 도시락전문점이다. 다행히 주위의 도움으로 

    길목 좋은 곳에 위치한 이 가게를 얻어서 지금까지 누나와 함께 꾸려 오셨다. 

    누나는 그 때 대학에 낙방하고 미련없이 엄마와 함께 이 가게를 시작했다. 

    그 뒤로 가끔 엄마가 전문대라도 갈 것을 권했지만 누나는 별 생각이 없다고 한다. 

    그렇게 우리는 나름대로 안정을 찾아가며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아빠 기일이 돌아오면 다들 내색은 하지 않지만 힘들게 보여지는 것이 사실이다. 

    겨우 힘들게 애써서 묻어 놓은 것들을 하나씩 조심스럽게 꺼내보며 마음 아파한다. 

    나도 역시 그렇다. 어렸다고 하지만 아빠의 죽음은 나에게도 큰 상처였다.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아빠였지만 형사라는 직업을 가진 아빠는 나의 자랑이었고, 

    남자로서 꿈꾸었던 우상이기도 했었다. 

    가끔 형과 함께 텔레비전에서 본 형사의 모습을 흉내내며 형사놀이를 하기도 했다. 

    형이 내가 쏜 총에 맞아 리얼하게 죽는 시늉을 하면 어느새 나도 연기에 몰입해 

    누워있는 형을 부둥켜안고 울기까지 했었다. 형은 그런 나를 항상 다정하게 안아주었다. 

    그랬던 원희 형이 아빠 기일에 맞춰 인사 오는 것을 나만 전혀 모르고 있었다. 

    두 모녀는 언제나 맨날 나만 빼놓고.......나도 형이 보고 싶었는데..... 

    나 없을 때 왔다 간 형이 너무 야속하다. 형은 내가 보고 싶지도 않은지...... 

    그렇게 형이 말없이 사라지고 나서 집안의 무거운 분위기 때문에 물어보지도 못하고 

    그냥 형을 기억 속에 묻어두었었는데.........어떻게 변했을까? 꽤 멋지게 컷다고 했지. 

    나도 꼭 보고 싶었는데.......아쉽다. 군대간다니까 보고싶어도 한동안 못보겠네. 

    엄마가 정리를 대강 끝내고 누나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하신다. 나는 엄마가 들려준 

    짐을 양손에 들고 엄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 내내 엄마는 

    아빠를 생각하시는지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서둘러 이것저것 제사 준비를 하신다. 

    엄마의 뒷모습에 큰 슬픔이 묻어있는 것 같아 마음이 너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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