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라서 그런지 계속 비가 오락가락이다. 다시 비가 올 모양인지 조금씩 흩뿌린다.
시험만 아니라면 집에서 뒹굴 거리며 텔레비전 보기 좋은 일요일이다.
나는 데이트하는 사람처럼 아침에 이 옷 저 옷 걸쳐보다가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다.
약속한 서점은 큰길에서 두 정류장 정도 걸어가면 있다.
생긴지 얼마 안되었지만 매장도 꽤 넓고 다양한 참고서와 문제집을 갖추고 있는데다,
큰 사거리에 위치해서 찾기가 싶다. 나는 우산을 털어 우산함에 넣고 들어갔다.
위치가 좋아 약속장소로도 이용되는지 여기저기 서성이는 학생들이 꽤 많이 보인다.
이상하게 이 넓은 공간에서 녀석의 모습이 한 눈에 박힌 듯 들어온다.
조금 몸에 붙는 고급스러운 검은 반팔에 검은 바지차림으로 굉장히 어른스럽게 보였다.
주변의 여학생들은 무슨 책인가를 열심히 보고 있는 녀석을 흘끔거리며 훔쳐보기에 바쁘다.
내가 아는 놈이라는 게 뿌듯했다.
조용히 녀석에게 다가서는데, 좀 놀게 생긴 여학생이 생글거리며 녀석에게
시간 있냐며 제 딴에는 귀여운 얼굴을 하며 묻는다.
녀석은 책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 표정없는 얼굴로 싸늘히 내뱉는다.
"풋내나 가시고 오던지. 꺼져!!"
그 여학생은 녀석의 싸늘한 태도에 질려 쥐구멍을 찾듯이 급히 자리를 옮기고,
주변 여학생들은 자기가 당한 일인 것처럼 슬금슬금 자리를 피한다.
녀석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들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옮기다 나를 발견했다.
무표정했던 녀석의 얼굴이 거짓처럼 웃음기가 돌며 풀어진다.
"미안, 조금 늦었지? 책은 골랐어?"
"아니. 나도 조금 전에 왔어. 이 문제집 잘 정리되어 있네."
"그래? 그럼 수학은 그것으로 하고........"
녀석이 건네준 수학문제집과 우리 학교 성향과 맞는 다른 과목 문제집도 골랐다.
시험 보는 기간에 함께 돌려보면 되기에 추려서 4권만 샀다.
카운터에 가서 반을 부담하려고 하는데 거절하며 녀석이 다 냈다.
나는 돈을 주려고 했지만 한사코 받질 않는다. 대신 내가 점심을 쏘기로 하고 매듭지었다.
입구로 나와 우산을 폈다. 밖으로 나오니, 올 때 보다 빗줄기가 더 굵다.
"이런, 우산이 없네. 같이 쓰자."
작은 내 우산 속으로 큰 덩치가 들어온다.
"우산 안가져 왔어?"
"아니, 꽂아뒀는데 없어졌네."
"그럼, 어떡해. 가서 다시 잘 찾아보자."
"아니, 됐어. 우산 내가 들께."
과자 하나 사도 알뜰하게 마트 이용하는 놈이 우산은 왜 찾을 생각을 안 하는지.....
할 수 없이 녀석과 함께 우산을 쓰고 가는데
좁기도 하고 어색해서 우산 밖 쪽으로 몸을 내밀었나 보다.
갑자기 몸이 안쪽으로 끌어당겨진다.
"어깨가 다 젖었잖아."
녀석이 어깨를 안 듯이 감싸안아 몸이 밀착되었다. 우산 속에 있으니 녀석의 향이 자극된다.
몸보다 마음이 불편하다. 나는 어색해져서 말을 걸었다.
"저......뭐 먹고 싶어? 비 그칠 때까지 어디 좀 들어가 있을까?"
"아니, 점심 먹기에는 좀 시간이 이르지 않나? 불편해?"
"아, 아니. 너가 불편할까봐서......."
"아니, 나는 괜찮아. 어서 가자."
어휴- 나는 왜 이렇게 소극적일까. 그냥 안기듯이 걷는다.
꼭 연...인......같.........다???!!!!
몇 일전 창현이네서 본 충격적인 영상들이 갑자기 떠오른다.
전혀 연관 없는 이 상황에 왜 그 영상들이 떠올려지는지?
더더욱 긴장되는 바람에 숨이 가빠진다. 나는 이상히 여길까 싶어 눈치를 보며
숨을 얕게 내쉬기를 반복한다. 이 노릇도 못 해먹겠다.
빗발은 점점 거세지면서 바람까지 동반한다. 녀석은 빗줄기를 피하려는 듯
더더욱 나를 꼭 감싸안으며 조금 숙인 채 걸을 뿐이다.
다리도 긴 녀석이 왜 이리 천천히 걷는 것인지.......
그래. 너 핏줄 좋은 양반이다!!!!!
차라리 버스 타고 가자고 할 걸. 두 정류장 밖에 안되는 길이 왜이리 멀게 느껴지는지.....
말이라도 좀 하지. 어색한 내 호흡을 감출 겸 아무 말이라도 꺼내본다.
"아! 어제 공부는 많이 했어?"
"조금"
"아침은 먹었어?"
"대강"
어-휴, 무슨 말을 걸기가 무섭게 짧은 대답으로 돌아와 대화가 진행이 안된다.
나는 포기하는 심정으로 폭 안기듯이 걷는다.
오피스텔 근처에 거의 다 왔을 무렵, 음악소리가 요란하다.
"우리 몸 좀 풀까?"
녀석의 말에 의아해서 보니 오락실의 DDR을 턱짓으로 가리킨다.
나는 끄덕인다.
잘 하지는 못하지만 지금 이 난처한 상황보다는 낫겠지 싶었다.
녀석이 앞서서 들어가 동전을 넣는다. 나는 구경할 요랑으로 보고 있자,
2인용으로 선택했는지 내 팔을 잡아끈다. 나는 얼떨결에 가방을 내려놓고 올라섰다.
음악소리에 맞춰 녀석이 난다. 많이 놀아본 솜씨다.
도대체 이 놈 못 하는 게 무엇일까?
나는 그런 녀석에게 끌려 헥헥대며 밟았다. 몇 판을 연속으로 해서 땀이 시원하게 흐른다.
기분이 상쾌하다.
오락실을 나서니 비가 잠깐 멎어 있다. 녀석도 기분좋은 얼굴로 말한다.
"뛰었더니 배 고프네."
"나도..... 점심 먹고 가자."
"해장국 좋아해?"
"해장국?"
"잘하는데 알어. 가자."
어떻게 이 길을 아는지 미로같은 뒷골목을 잘도 찾아 들어간다.
나는 놓칠세라 따라 걸었다.
겉보기에 허름하고 낡은 국밥집이다. 꽤 오래 전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터주대감 같다.
녀석은 곧장 좁은 가게로 들어가 제 집 마냥 자리를 잡고 앉아 아줌마에게 말한다.
"해장국 2그릇이요."
"여기 자주 와?"
"가끔..... 보기에는 이래도 아주 맛있어."
일하는 사람은 주인아줌마 한 분뿐인지 물도 주지 않고
바쁘게 주방에서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동그란 양은 쟁반 위에 뚝배기에 담긴 해장국과 깍두기가 나왔다.
아줌마는 녀석과 안면이 있는지 웃으면서 말을 한다.
"어이구. 잘 생긴 총각 왔네. 여기는 동생이유?"
"네"
"동생도 잘 생겼네. 많이 먹고 적으면 말해요."
"오늘은 이른지 손님이 없네요?"
"어디? 벌써 한 차례 다녀갔지-. 참! 손님이 남긴 소주 반 병 있는데, 함께 줄까?"
"좋죠. 잔은 하나만 주세요."
마음 좋은 청년처럼 아줌마와 대화하는 것을 보니 학교와는 전혀 다르다.
어른스러운 모습에 저 아줌마도 속았나보다. 겨우 고등학생인데 술까지 서비스다.
나보고 동생이라니? 이 녀석이 겉늙어 보이는 건데..........씨.
녀석은 국물을 떠서 맛을 보곤 밥을 말아 소담스럽게 먹는다.
아줌마가 소주병에 잔을 엎어서 주고, 많이 들라며 밖으로 나간다.
"먹어 봐. 국물이 구수해."
"으응"
그제서야 해장국을 보니 큼직하게 들어있는 선지와 콩나물이 가득하다.
맛을 보니 정말 구수하다.
예전에 아빠가 살아 계실 때 엄마도 종종 끓였던 것이다.
나는 선지가 징그러워 못 먹었지만 형이 잘 먹는 모습을 보고는 선지를 곧잘 먹었다.
형은 잘 살고 있겠지?
가끔 형의 모습을 떠올려 보지만 마른 체형에 안경 낀 모습만 생각 날 뿐이다.
함께 찍은 사진이 한 장 있었는데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고, 왠지 아빠 돌아가신 후
엄마와 누나가 형의 이야기를 피하는 것 같기에 묻어 두었다.
녀석은 소주까지 곁들이며 깔끔하게 그릇을 비우곤 담배를 자연스럽게 꺼내 문다.
저 모습을 보면 정말 고등학생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아줌마가 파를 몇 단 들고 들어오시는 것을 보고 내가 계산을 하고 나왔다.
골목을 빠져나가다, 녀석이 손을 잡아끌고 흔히 보이는 동네 목욕탕으로 간다.
"땀 흘렸는데 목욕하고 들어가자."
"아, 아니. 싫어. 집에 가서 샤워하면 돼."
"괜찮아. 등 밀어줄게. 가자."
녀석이 말릴 틈도 없이 돈을 내고 녹색 이태리 타월과 칫솔2개를 받아든다.
맙소사. 나는 초등학교 이후 공중목욕탕에 가 본 적이 없다.
음모가 듬성듬성 나기 시작하면서 부끄러워 집에서만 목욕을 했고
그 이후 친구와도 와 본적이 없었다.
목욕탕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찌른다. 동네 작은 목욕탕인데도 사람이 별 없다.
나는 놈의 손에 이끌려 들어가 옷을 벗고 있다. 같은 남자인데도 어색해서 미치겠다.
녀석을 아무렇지 않게 옷을 훌렁훌렁 벗고는 나를 재촉한다.
나는 열쇠를 발목에 걸고 놈을 따라 탕으로 들어갔다.
놈의 잘 짜여진 뒷모습에 괜시리 눈을 어디 둬야 할지 몰라 바닥만 보고 걸었다.
샤워기 앞에 서서 칫솔에 치약을 짜서 내민다.
나는 나란히 서서 이를 닦고 샤워를 마친 후 함께 동그란 열탕 속에 들어갔다.
으윽! 뜨거워. 살이 발갛게 익는 것 같아. 녀석은 편하지 팔을 걸치고 눈을 감고 있다.
꼭 아저씨 같다.
그런 녀석이 갑자기 눈을 뜨고 내게 눈짓하며 냉탕으로 들어간다.
나도 따라 냉탕에 몸을 담그는데 장난 아니게 차다.
몸이 얼어붙는 것 같고 소름마저 끼친다. 조금 있으니 녀석이 일어난다.
나도 녀석을 따라 일어서며 계단을 내딛다가 타일이 미끄러워 중심을 못잡고
내려 선 녀석쪽으로 몸이 기울었다.
"어....엇-------------"
녀석이 급하게 잡아줘서 넘어지는 것은 피했지만 녀석의 손에 허리를 잡히니
나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냉탕에 있었는데도 몸에 확확 불이 나는 것처럼 뜨거워지고 두근거린다.
내가 고개도 못 들고 놈의 손을 밀자 녀석이 몸을 뗀다. 녀석의 중심이 눈에 들어온다.
내 것과는 다르게 크고 털도 많이 나있다.
어.....오른쪽 아랫배 쪽에 5센티 가량의 가늘한 흉터가 보인다.
녀석이 내 어깨를 친다.
"저 쪽으로 가자. 등 밀어줄게."
빨리 나가고 싶다. 욕탕의 후덥지근한 공기도 신경에 거슬리고 무엇보다 녀석이 의식된다.
마음과는 반대로 나는 녀석에게 등을 돌리고 의자에 쪼그린 채 앉아있다.
녀석이 내 등뒤에 앉아 따뜻한 물을 끼얹은 후 등을 시원스럽게 밀고 있다..
얼마만에 등을 밀어보는가? 때가 많이 밀린텐데....... 창피하다.
깔끔한 것은 익히 알고 있지만 녀석은 꼼꼼하기까지 하다.
내 뒷목과 어깨, 등........거기다 허리, 엉덩이까지 시원하고 세심하게 밀어준다.
아빠가 바빠서 어쩌다 한 번 갈 수 있었던 목욕탕을 형이 오면서 매 주 일요일마다
함께 다녔다. 형은 엄마처럼 내 몸 구석구석을 깨끗하게 닦아준 후 자기 몸을 닦았다.
뒤에서 따뜻한 물을 끼얹고 이번엔 비누칠을 한다.
"팔 들어."
엉? 내가 아무생각 없이 한 팔을 들자 겨드랑이에도 비누칠을 해준다.
"하하.........간지러워.....////////......"
"다른 팔."
마치 어린애를 닦이듯 비누칠을 여기저기 해준다. 어어....//////....미끄러운 비누칠 감촉에......
어쩌지......이상한 생각이 나 버렸다.
고개를 못들겠다. 녀석이 등뒤에서 물을 뿌려준다.
"나도 부탁해."
다행이다. 얼굴을 마주 안 봐서....... 녀석이 건네준 때 타월로 등을 밀었다.
군살 없이 단단한 등에 잔상처가 보인다. 넓은 등을 밀고있으려니 조금 손해보는 기분이다.
비누칠까지 마치고 우리는 마저 머리를 감고 옷을 갈아입으러 나왔다.
옷을 다 입고 나가려다 구석에 놓인 갈색 껍질의 삶은 계란이 보여, 녀석에게 물었다.
"저......삶은 계란 먹을래?"
"여기 삶은 계란 2개와 사이다 2개 주세요."
"어어, 돈은 내가 낼게."
"너가 점심 샀잖아."
녀석이 사 준 계란을 먹으며 시원한 사이다를 마셨다.
형과 목욕 후에 언제나 삶은 계란과 사이다 하나를 사서 나눠 마셨는데........
이상하게 녀석과 있으면 형이 생각난다.
오피스텔로 들어오니 오후 2시 정도다. 우리는 서둘러 앉아 공부를 시작했다.
녀석의 수학실력을 알기에 간간히 녀석에게 이해 못했던 곳을 배우며 수학을 정리했다.
녀석과 저녁에 피자를 불러 먹고는 잡담없이 열심히 공부만 했다.
내일 방과후 역시 오피스텔에서 함께 공부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11시다.
이틀동안 함께 했지만 이대로 계속한다면 좋은 성적이 나올 것 같아 흐뭇했다.
녀석!!!!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