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이후로 서로 말을 건네거나 하지는 않지만 나는 조심스레 그 놈을 살펴본다.
놈은 다른 주먹패(?)와는 다르게 성실하게 학교생활을 하는 것 같다.
일부러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는 것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지낸다.
점심시간에는 일부러 교실에 없는 것 같다. 그편이 교실안 공기가 편하기 때문인 것 같다.
수업이 마치면 놈은 내가 나갈 때에 엇비슷하게 나간다. 꼼지락거리며 챙기는 편인
나보다 빨리 나간 적은 별로 본 적이 없다. 나는 그런 놈에게 가볍게 말을 걸어보고 싶지만
괜히 망설이다 잔뜩 신경만 쓰곤 하루해를 넘긴다. 오늘 역시 그런 하루이다.
마을버스에서 내려 터벅터벅 걷는다. 삼삼오오 짝지어 하교하는 아이들이 부럽다.
우리 동네에서 '서일고'를 다니는 놈은 별로 없다. 고등학교 들어갈 무렵 두 정거장 위에
남녀공학고등학교가 신설되었는데 우리 집이 어중간한 구역에 있어 나만 '서일'로 떨어졌다.
같이 다닐 친구가 있으면 심심치 않을텐데......
어라. 그러고보니 그 놈도 이 동네인데 어떻게 우리 학교로 온 걸까?
새로 생긴 학교와 더 가까운데........
집에 와서 대강 씻고 혼자 저녁을 챙겨먹는다. 엄마와 누나는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
시내에서 도시락전문점을 하고 있다. 다행히 목이 좋아 단골이 제법 많지만 귀가가 늦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누나가 혼자 왔다. 엉거주춤 잔뜩 인상을 찡그리며 걷는다.
또 그 날이군!!!
잠시 후 누나가 소리친다.
"야! 너 내 방에 있던 게보린 못 봤어?"
"어. 그거 2알 정도 남아서 내가 썼는데........"
"이런........아이구 배야. 남은 줄 알고 그냥 바로 왔는데.........너 가서 좀 사와."
시간을 보니 10시이다. 요 앞에 약국은 닫았을텐데.........
"귀찮아. 그냥 견뎌 봐."
내가 텔레비전을 보며 건성으로 말하자 누나는 히스테릭하게 소리친다.
"야. 너 정말 이럴래......아이고 배야......너 엄마 몰래...."
"알았어. 갔다올게. 돈이나 줘."
누나는 10,000원을 주며 말한다.
"올 때 내가 쓰는 생리대도 부탁해~~"
이--씨. 나도 남잔데 꼭 심부름을 시켜도......
"거스름 돈은 나 갖는다."
나는 슬리퍼를 꿰차고 나왔다.
생각대로 근처 약국은 문을 닫았다. 큰 길 쪽에는 아직 약국이 문을 열었겠지 싶어
큰 길쪽으로 향했다. 그 놈이 사는 오피스텔이 보인다.
흘깃 주차장을 보니 놈의 잘난 은색 오토바이가 있다.
7층을 가늠하며 올려다 보았다. 불이 켜져 있다.
친한 놈이라면 혼자 사니까 이 시간에도 들릴 수 있을텐데...........
나는 모퉁이를 돌아 조금 내려가 약국에서 약을 한 통 구입해서 손에 들고 옆에 있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괜히 민망해서 고개를 숙이고 생리대 있는 곳으로 갔다.
누나가 애용하는 생리대를 집어, 카운터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얼른 다가서다
"........쿵!!!!!!"
옆 통로에서 나오는 사람과 부딪혀서 손에 들고 있던 약과 생리대를 떨어뜨렸다.
아이 씨..../////......쪽 팔려.
너무 창피해 몸을 굽혀 생리대를 잡는데 나와 부딪힌 사람이 약을 집어 든다.
고맙다고 인사하려 고개를 드니.........그 놈이다!!!!
"어!!어......."
나는 이 놈만 보면 바보처럼 그 저 '어' 소리밖에 못한다. 놈은 손에 든 약을 잠시 보곤
건네주며 한 마디 한다.
"여전하구나."
뭐가 여전한데??!!!!!
나는 물건 한가지라 먼저 계산하고 뻘쭘히 서서 계산하는 놈 옆에서 기다렸다 함께 나왔다.
계산할 때 보니 주먹밥과 컵라면, 맥주, 담배 등을 샀다.
나는 어색해서 무엇인가 말을 붙여보기 위해 한 마디 꺼냈다.
"간식 사러 나온거야?"
놈은 봉투를 잠깐 들어 보이며 대꾸한다.
"아아. 저녁이야"
꽤 늦은 시간인데....... 혼자 살기에 밥을 안해먹나? 금방 오피스텔 앞이다. 인사는 해야겠지?
"내일 보자."
내가 인사하자 놈은 가만히 내 머리를 헝클리 듯 쓰다듬곤 건물로 들어간다.
잠시 서서 놈이 만졌던 내 머리를 만져보았다. 그 큰손으로 머리를 만지면 왠지 마음이
편안히 놓인다. 조금 가까워진 기분도 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