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공적인 자리에서 총독을 독대할 만한 위치가 되지 못하는 그가 이 문 앞에 서는 것이 요 근래 벌써 3번째다. 처음과 두 번째는 오르피어스와 관련한 일이었으니 이번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으리라 짐작했지만 마땅한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오르피어스와의 관계도 원만해졌고, 합동훈련도 어제 잘 끝났다고 들었다.
추측이 길을 찾기 전에 비서가 문을 노크하며 지크하르트의 방문을 알렸고,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문을 넘어 왔다. 아이릭은 언제나처럼 집무실 안쪽의 책상에 앉은 모습으로 그의 경례를 받았다.
“자네를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느릿하게 말하며 지크하르트를 가까이 불렀다.
"유안을 구출하였을 때도 그렇고, 이번 일도 자네가 있어서 큰 잡음 없이 끝날 수 있었지. 공식적으로 서훈할 수는 없지만 바라는 게 있나? 내 권한 안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마.”
지크하르트는 눈을 반짝 빛냈다. 오히려 희소식이 아닌가. 자신의 권한이라고 심상하게 표현하였지만 남부 글래스팅 성에서 총독에게 불가한 일이 어디 있던가. 그가 절실히 바라는 건 있었다. 3계급 강등. 책임도 의무도 일도 함께 줄어드는 최상의 선택. 그리고??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입술을 움직였다.
"실례되는 질문이라면 죄송합니다만, 오르피어스와 관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입니까?”
맥락 없는 질문에 아이릭이 눈을 치떴지만 언짢은 기색 없이 순순히 긍정했다.
"누구에게 들었나? 오르피어스에게?”
“제가 개인적으로 얻은 정보입니다.”
"아, 자네가 만난다는 어퍼 돌덤 가의 그 여자로군.”
다소 놀랐지만 오르피어스도 엠마에 대하여 얼추 알고 있을 정도이니 아이릭에게 자신의 주변에 관한 상세한 보고는 올라갔을 것이다.
"바란다는 게 질문에 대한 사실 확인이었나?"
“아닙니다. 제가 각하께 청원드리고 싶은 건…….”
아이릭의 제안은 갑작스러웠지만 언젠가 때가 된다면 한 번쯤 이야기해 보려 머릿속으로 상정해 보았던 상황이기도 하였다. 지크하르트는 섣부르게 말하다 실수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각하와의 관계가 오르피어스의 자의가 아니라면, 부디 거두어 주셨으면 합니다.”
자칫하면 아이릭이 겁간하고 있으니 중단하라는 뉘앙스로도 해석될 수 있는 이야기다. 가급적 감정을 실지 않게끔 딱딱한 어조로 말하며 아이릭의 안색을 살폈다. 아이릭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으나 그의 긴장감과는 별개로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턱을 쓰다듬던 손이 책상을 탁탁 두드렸다.
“내가 오르피어스를 안는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 번째는 사정이 길고, 두 번째는 유안과의 관계를 덮기 위한 연막이었다. 뒤처리는 하지만 혹여 의혹이 샐 가능성도 있으니까. 뭐, 이 건은 내가 주의하면 된다고 해도 문제는 첫 번째 이유인데…….”
아이릭이 드물게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고지식한 성품만큼 자신의 입으로 내뱉은 말이나 약속은 철저히 이행하는 그로서는 꽤나 난관에 봉착했다.
“곤란하군.”
"……제가 이유를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지크하르트는 오르피어스가 밝히고 싶지 않아하는 이 일을 자신이 아이릭에게 물어도 될지 계속 고민하였으나 그가 나서지 않는다면 오르피어스는 입을 꾹 다물고는 앞으로도 내키지 않아하는 관계를 지속해야 할 것이다. 사정을 알아야 방법을 찾을 수 있다. 타인에게 관여하지 않는 지크하르트로서도 퍽 드문 결심이기도 하였다.
“우리 가문의 치부이다마는, 힐라리아가 자네에게 많은 이야기를 한 듯하니 알려주마. 10년 전에 프렌슈발트 요새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일이다만…….”
덤덤히 설명하는 과거의 전말을 접한 지크하르트의 안색은 시시각각 붉어지기도 하였고, 파랗게 되기도 하였다가, 종내에는 창백해졌다. 허벅지에 늘어트려 움켜쥔 주먹이 사납게 경련하고 앙다문 턱에 힘줄이 곤두섰다.
지크하르트가 억눌린 목소리를 긁어내어 노성이 아닌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다대한 심력이 필요했다.
"……당신은 정말 최저의 쓰레기야."
"신선한 반응이로군."
타인의 감정에 그리 영향을 받지 못하는 아이릭은 언짢은 기색도 표하지 않았다.
"녀석을 내 밑에 계속 두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판단이었지만 옳은 것이었다는 변명은 하지 않으마. 이만 물러가도 좋다. 자네의 청에 대한 답은 며칠 안으로 알려 주지.”
아이릭은 물러가라는 말을 하며 서류를 펴들었고, 그의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니라 계속 있다가는 아이릭을 두들겨 패기라도 할 것 같았기에 그대로 등을 돌려 집무실을 나왔다. 문이 탕 닫히는 소리에 놀란 비서가 문 앞에 주저앉는 지크하르트를 보며 당황하였지만 그는 머리를 싸매어 안은 채 이를 악물었다.
본의가 아니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진실은 그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욕망만으로 범하였다면 차라리 인간적이라고 하였을 법한 상황이다. 허나, 그것도 아니었다. 인성마저 거세된 철저한 필요성에 의한 도구. 아이릭의 개라든가, 아이릭의 도구라든가, 하는 표현이 그의 명령에 복종하는 심복이라는 의미가 아니었음을 지크하르트는 이제야 깨달았다.
오르피어스는 문자 그대로 아이릭의 개였고, 도구였다.
‘……넌 이렇게 20년을 살았나?’
그리고, 체스터의 주박이 풀어지지 않는 한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할 것이다. 지크하르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현실 앞에 비참함을 곱씹었다.
***
어떤 정신으로 걷고, 차를 탈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크하르트는 자신의 사무실 앞에 섰다. 사무실에는 그를 기다리던 손님이 있었다. 이 같은 상황이 아니었다면 무척이나 기뻐하고 반가워하며 맞았을 사람이다. 지크하르트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억누르며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아저씨! 오랜만에 뵙네요. 건강하셨어요?”
바깥쪽의 테이블에 앉아 있던 장년의 남자가 웃으며 일어났다. 엠마의 양아버지이자 소년기의 그를 교육하였던 용병, 굴라트 윔므였다.
"이게 얼마만이냐. 네 얼굴은 여전하구나.“
지크하르트는 굳은 얼굴에 애써 미소를 올리며 굴라트의 어깨를 안았다. 커다란 손이 등을 탕탕 두드렸다.
"그 사이에 대령님이 되셨다지?"
"약혼녀 덕분에 얼결에 승진한 거예요. 그보다 내려가서 이야기해요, 아저씨."
부하들에게 아래층에 내려가 있겠다고 언질한 지크하르트는 굴라트와 나란히 걸어갔다.
"아저씨네 용병 부대가 2년 전에 델마이란으로 갔다는 소식 이후로는 처음이네요. 거기 상황은 좀 어때요?”
“새파랗게 어린 11살짜리 왕이 등극한 이후로 더 엉망이다. 수도는 그나마 치안이 유지되고 있지만 조금만 외곽 지역으로 나가도 해가 지면 무기 없이는 밖을 나다니지 못할 정도야.”
"덕택에 돈은 많이 버셨겠네요."
"네가 왜 그런 말을 안 하나 했다.”
굴라트가 어쩌면 이렇게 어릴 때와 변한 게 하나도 없느냐는 얼굴로 쓴웃음을 지었기에 그는 머쓱하게 뒷목을 긁었다. 군무청에 근무하는 군인들이 휴식처로 이용하는 아래층 카페로 내려와 굴라트와 그를 위한 커피를 두 잔 샀다.
그가 커피를 사오는 동안 테이블에 않아 신문을 뒤적거리던 굴라트가 피식 웃었다.
“내 팔자도 많이 좋아졌구나. 대령님을 커피 심부름으로 부려 먹고."
“더한 심부름도 해 드릴게요. 아저씨가 어디 가서 이런 호사를 누려 보시겠어요.”
오랜 지인과 이야기하는 동안 금세라도 폭발할 것처럼 끓던 가슴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지크하르트는 적절한 시기에 나타나준 굴라트에게 몰래 고마워하며 말을 이었다. 굴라트를 만나면 그동안의 근황이라든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라든가, 화제는 끊이지 않고 풍부하게 솟아날 터이나 두 사람에게는 무엇보다 가장 큰 교집합이 있었다.
“엠마는 만나고 오셨어요?"
예사하게 건넨 안부였는데, 굴라트의 안색이 조금 안 좋아졌다.
"그러잖아도 네게 엠마 관련으로 상담할 게 있었다.”
그가 바닥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뒤적거려서 편지를 한 통 꺼냈다. 엠마의 필적이었다. 자주 만나지 못하는 부녀이니만큼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안부 인사와 그녀 자신의 이야기가 수다스러울 만큼 길게 쓰여 있었다. 거기에는 지크하르트의 이야기도 있었고, 오늘의 날씨가 좋으니 나쁘니 하는 소소한 하루의 풍경도 있었다. 지크하르트는 미심쩍음에 눈썹을 찌푸렸다.
"뭐가 문젠데요?"
“마지막을 봐라.”
열 몇 장이나 되는 편지를 넘겨 제일 끝 장을 찾았다. 그녀의 서명과 함께, 추신이 곁들여져 있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계집애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사랑하는 아버지.
그동안 고마웠어요. 지크하르트는 마지막 문장을 입 속에서 더듬었다. 대수롭지 않게 흘려 넘길 수 있는 인사지만, 어딘가 깔끄럽다. 고마웠다니 이것은 마치 작별을 준비하는 인사 같지 않은가.
"……엠마는 못 만나신 거예요?"
"그래. 그 애가 있는 가게로 가니 오늘 아침부터 출장을 갔다고 자리를 비웠다는구나. 내가 오늘 즈음에 헤임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보낸 편지는 도중에 우편 사고가 있었는지 아직 배송되지 않은 모양이야. 혹시 엠마에게 이야기를 들은 건 없나?”
“글쎄요, 저도 딱히…….”
자신이 진짜 창녀가 아니고 조직에 속하였다는 것까지 끝내 그에게 숨겼던 엠마다. 며칠 전, 의뢰할 당시에 술을 마시며 밤늦게까지 대화하긴 하였지만 심상치 않은 기색은 감지하지 못했다.
혹여 자신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 놓친 부분이 있던가 싶어 기억의 저편으로 보내두었던 대화를 건져올리던 차에 자그마한 방해가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대령님. 말씀을 나누시는 중에 정말 죄송합니다."
지크하르트는 편지에 고정하였던 시선을 올렸다. 오르피어스의 부관인 모니카 대럿 소위였다.
"귀관이 나에게 용무가 있나?"
"벨포드 소령님의 행방을 알고 있으십니까?”
오르피어스의 이름을 듣자 겨우 진정하였다고 여겼던 속이 다시금 꿈틀거렸다. 지크하르트는 동요를 감추기 위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아침에 같이 나오기는 했는데 그 뒤는 본 적이 없어. 의무실에서도 안 보이나?”
“의무실에도 먼저 들렀는데 오전 중에 잠시 누워 있으시다가 찾아온 손님이 있어서 나가셨다고 합니다. 스물 중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라고 의무실의 애듀란 대위님께 들었는데 그 뒤로는 아무도 소령님을 봤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여느 때처럼 오르피어스가 혼자 인적 없는 곳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겠거니, 라고 생각하였던 지크하르트는 불현 듯 머릿속을 스친 직감에 빠르게 내처 물었다.
"그 여성의 인상착의는 들었나?"
"네. 소령님과 함께 계신 건지 찾아보려고 애듀란 대위님께 다시 여쭤보니, 화장이 야할 정도로 굉장히 전하고, 진갈색 머리칼에 신장은 저보다 약간 작은 정도라고 하셨습니다. 아, 옷차림은 평범한 테일러드 슈트였고요."
엠마는 화상 흔적을 가리기 위하여 화장을 짙게 한다.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통화에서 그녀가 오르피어스를 언급 할 때, 아주 짧기는 하였으나 생각해 보면 석연찮은 구석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억측일지도 모르지만 찾아볼 이유는 있었다.
"귀관은 군무청 내부를 찾아봐. 밖은 내가 찾지.”
모니카를 보낸 지크하르트는 심상치 않은 대화에 낯빛이 안 좋아진 굴라트에게 낮게 속삭였다.
“아저씨. 추측이지만, 엠마가 제 센티넬과 행적을 감춘 것 같습니다.”
"엠마가 네 센티넬을 왜?”
굴라트의 의문이 깊어지는 건 당연했다. 지크하르트는 얼굴을 문지르며 무겁게 대답했다.
“제 센티넬이…… 엠마의 부모님이 사망한 그 화재의 범인입니다. 총독의 막냇동생이죠.”
한낮의 어퍼 돌덤 거리는 대낮부터 술을 들이마시거나 전날 밤을 새고 느지막이 귀가하는 주정뱅이들을 제외하면 당일의 영업 준비를 슬슬 시작하는 종업원들만 드문드문 눈에 띈다. 평소에는 멀찍이 주차하던 차를 가게 앞까지 몰고 온 지크하르트는 닫힌 문을 쾅쾅 두드렸다.
"아직 영업 안 하니까 3시간 후에 오쇼."
요란한 소리에 결국 문을 열고 손을 휘휘 젓는 남자를 밀어 헤치며 안으로 급한 걸음을 옮겼다. "이봐요, 손님. 지금은 아가씨들도 자고 있을 시간이라니까." 기도로 보이는 남자가 그를 붙잡았지만 무시하고 외쳤다. "엠마는 안에 있나?!"
창을 활짝 열고 가게 내부를 청소 중인 듯 하였으나, 단순히 청소를 한다고 여기기엔 어수선하게 들썩거리던 분위기가 싹 가라앉았다. 그때서야 안쪽에서 대외적으로 이 가게의 마담이라고 알려진 여성이 나왔다.
“어머나, 카시야스 대령님 아니신가요. 일찍부터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엠마는 오늘 하루 종일 다른 손님과 약속이…….”까지 말하던 그녀는 지크하르트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굴라트를 보고 어물어물 말을 삼켰다. 굴라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날 기억하겠지?"
"네에, 엠마의 아버님이라고 하셨죠. 하지만 정말 엠마는 가게 없어요."
"자리에 없으면 어딜 갔는지 말해. 지금 일이 급하다고!"
난처한 듯 고개를 외로 꼬는 그녀에게 지크하르트가 답답하게 외쳤다. 굴라트의 안색도 흐려졌다.
"엠마 개인의 일이 아닐세. 자네들의 그 조직과도 연관한 문제야."
굴라트는 옛 인연으로 엠마에게 조직의 보스를 소개해 주었던 사람이다. 조직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자 여자의 낯이 살짝 굳더니 그들을 위층으로 안내했다. 방음이 제일 완벽한 엠마의 방이었다. 방금까지 자다다 막 일어난 것처럼 흐트러진 침대와 반도 비우지 않고 식은 커피잔 등이 방 안에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어디에도 그녀가 갑자기 종적을 감춘다는 선택지는 없어 보였다. 지크하르트는 자신의 걱정이 기우이길 바라며 초조하게 방 안을 서성거렸다. 이윽고 낯선 남자가 들어왔다.
"누님을 찾으러 오셨다고요."
남자가 굴라트에게 먼저 인사했다.
“아버님의 소개로 조직에 올 수 있게 되었다고 누님께 한 번 얘기 들은 적이 있습니다. 혹 누님의 행방에 대해서 알고 있으십니까?”
오히려 남자가 역으로 질문했다.
“새벽녘에 누님이 가게를 나가시는 건 본 녀석이 있는데 그 이후로는 감감무소식입니다. 평소에도 종종 혼자 가게를 나가곤 하셔서 그리 큰 걱정은 안 했는데 다른 일이 하나 발생하여 저회도 누님을 찾고 있던 중이라…….”
말끝을 흐리는 그에게 굴라트가 내처 재촉하였으나 그는 애매한 어투로 지크하르트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이런 방향으로는 둔한 지크하르트였지만 대강 짐작은 갔다. 무언가 불법적인 일이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당신네들이 무슨 짓을 하든지 상관없는 일이고 저는 엠마의 종적만 알면 됩니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화약이 없어졌습니다. 얼추 계산하여도 5층 건물 하나는 너끈히 날릴 수 있을 무게의 화약이요."
맙소사. 지크하르트는 이마를 꾹 눌렀다. 불길한 상상을 하지 않으려 하여도 오르피어스의 발화 능력과 자꾸만 연관이 되었다. 굴라트가 자세한 내용을 질문하려던 때, 전화벨이 울렸다. 남자가 전화를 받기도 전에 지크하르트는 뺏어가듯 송수화기를 들었다.
"카시야스입니다. 페인 중령이십니까?”
가게로 오기 전에 유안에게 연락하여 오르피어스의 수소문을 부탁하며 가게의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멋대로 가게, 그것도 엠마의 방의 회선 번호를 알려주었다는 사실에 남자는 언짢은 기색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잠자코 있었다.
「아, 네. 대령님. 말씀하신대로 청사 근처를 찾아봤는데 청사 건물 옆의 레 누아르라는 카페에서 도련님이 말씀 하신 인상착의와 같은 여자와 동석하셨던 게 밝혀졌습니다. 함께 차를 타고 갔다던데 그 여자의 차가 갈색 머스텐이 맞습니까?」
지크하르트는 송수화기에서 얼굴을 떼고 남자에게 물었다.
"엠마의 차가 머스텐입니까?"
“……뭐, 맞긴 합나다만.”
"맞다고 합니다. 어느 방향인지, 그 뒤는 종적이 없습니까?”
「그레이트 홀 주변이 워낙에 차들이 많이 오가는 곳이라 자세한 부분까지 기억하는 목격자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유안이 전파 건너편에서 목을 가다듬었다.
「웨이터 한 명의 기색이 심상치 않아 캐보니 동석하였던 여자가 도련님과 들어오기 삼십분 쯤 전에 웨이터에게 돈을 주어 음료에 약을 타게 했다고 하더군요. 도련님이 카페 밖으로 나갈 때도 여자의 부축을 받아서 나갔다고 하고요. ……대령님. 그 여자가 누굽니까?」
이로써 확실해졌다. 엠마가, 단순히 이야기를 나누겠다고 오르피어스를 약까지 먹여 몰래 데리고 나간 건 아닐 터였다. 엠마가 오르피어스를 해하려 한다. 마음 한구석으로 부정하고 있던 문장이 명확한 형체를 이루자 앞이 깜깜했다.
지크하르트는 마른침을 삼켰다. 목 안쪽이 오돌토돌한 가시가 돈은 것처럼 쓰라렸다.
"나중에……. 나중에 설명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송수화기 건너편이 잠시간 침묵하였다.
「……알겠습니다. 일단 이름이라도 말씀해 주세요. 행적을 찾으려면 행정적인 서류도 열람해 봐야 합니다」
엠마가 그녀 자신의 이름을 썼을 것 같지 않았다. 남자에게 엠마가 관청에 등록할 때 쓰는 이름이 무어냐 묻자, 그는 난색을 표하였다.
“실례지만 대령님. 저희도 누님의 행방을 찾아야 하는 건 맞지만 굳이 기관의 도움까지 빌려야할 상황은 아닙니다. 저희 쪽은 저희가 알아서 찾을 테니 이 이상 내부의 정보는.”
"엠마가 납치한 건 벨포드 가의 사람이야!!”
말허리를 끊으며 튀어나간 그답지 않은 울화보다, 엠마가 벨포드 가의 사람과 종적을 감추었다는 사실이 남자의 안색을 해쓱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조직이 헤임 내까지 쑤시고 들어와 영역을 넓히려 한다는 사실은 차치하고도, 그녀가 건드린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벨포드다. 총독의 딸을 유괴하였던 마피아가 어떤 종말을 맞이하였는지는 그들에게도 눈과 귀가 있었다. 조직의 존망이 걸린 문제였다. 남자는 더듬거리며 엠마가 쓰는 위조 신분을 불러주었고, 지크하르트는 유안에게 전달했다.
알아내는 대로 전화해 주겠다는 대답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남자는 전화가 끝나자마자 다급히 방을 나갔다. 그들 나름대로 회의를 하든, 본 조직에 보고를 하든 거기까지는 지크하르트가 알 바가 아니었고 생각이 미치지도 않았다. 갑작스럽게 탈력하는 기분이라 겨우 의자에 주저앉은 그의 옆에서 굴라트가 무거운 입술을 뗏다.
"아까는 네 경황이 없어 보여서 묻지를 못했다만, 그 화재의 범인은 네 원수도 아닌가? 네가 벨포드 가 여자의 가이드가 되고 약혼까지 했다고 들었을 때는 그 여자가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면 충분히 네 성격으로 있을 법하다 여겼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다르지 않나.”
굴라트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지크하르트에게 그의 말은 책망처럼 들렸다. 원수를 갚겠다고 부득불 우겨서 종조부의 보호에서마저 나간 녀석이 정작 그 원수를 갚지도 못하고 미적미적 10년이나 허송세월을 보내다 기어이 엠마까지 나서게 하지 않았나. 지크하르트는 굴라트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아니, 그 자신의 마음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엠마도 충분히 원한이 있을 진데도 이에 대처하지도, 대비하지도 못한 채 오르피어스와 엠마 둘 모두를 위험에 빠트렸다.
“……맞아요, 아저씨 말이 다 맞아요. 복수를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어요. 죽일 수 있었는데 못 죽였어요.”
"용서한 거냐?”
"용서도 아니에요. 저는 그냥, 그 녀석을 못 죽였어요. 죽이지 못한 겁니다. 앞으로도 죽이지 못할 거고요."
천천히 말을 되뇌며 반복할수록 마음 안의 외침이 하나로 정돈되어 갔다. 그는 오르피어스를 죽이지 못한다. 죽이 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를 살렸다. 이 결심은 엠마가 아니라 죽은 부모님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말할 수 있었다.
이제 이것은 센티넬과 가이드로 역인 피상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지크하르트'는 '오르피어스'를 죽이지 않고, 살리고, 또한 구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엠마가 죽도록 방치하지도 못한다. 엠마의 가족은 단지 그의 옆집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무고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단순히 누이의 어린 시절 동무였다는 점을 떠나도 그녀는 그의 과거와 고통을 공유하는 유일한 존재였다.
오르피어스와 엠마 모두를 구할 수 있을까.
“…….”
긍정의 답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나오지 않았다. 무언가를 물으려하던 굴라트는 그의 표정을 보고는 화제를 돌렸다.
"……엠마가, 그 애가 예전에 언뜻 지나가다 흘린 친구의 이야기를 기억하고는 조직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졸랐지. 세상에 하나뿐인 딸이 범죄자가 되겠다는 걸 응원해 줄 아비가 어디 있겠나? 단단히 꾸중하며 돌려보냈지만 그 애도 끝끝내 고집을 세우는 통에 소개해 주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애초부터 이걸 노리고 있었구나 싶다."
"제가 멍청했어요."
자책감이 흉부에 쓰라린 멍울을 새겼다. 뮈르달에서 평범하게 지내던 소녀가 느닷없이 먼 곳까지 찾아와 창녀이니, 조직이니 하는 말을 하였을 때부터 그녀를 세심히 살폈어야 했다. '평범'만으로는 부모를 하루아침에 화마에 여읜 소녀가 복수할 길을 찾을 수 없음을 깨달아야 했다.
뮈르달에서 함께 지낼 때에는 그 자신의 복수만 가슴에 꽉 차 엠마를 보지 못하였고, 헤임에서 재회하였을 때에는 자신만으로 복수가 종결되었다 여기고 엠마까지 헤아려 짚지를 못하였다. 오르피어스에게 복수하고 싶은 념은 그녀 또한 마찬가지일 텐데.
시간이 지독하리만큼 느린 속도로 움직였다.
탁상시계가 째각거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진행되는 게 아니라 한 템포씩 늦춰지며 속도를 떨어트리는 것만 같았다. 창에서 비치는 햇살이 서서히 길어지고 거리에 행인이 하나둘 씩 늘어 조금씩 소란이 차올랐지만 유안으로부터도, 가게의 남은 조직원들에게서도 소식이 없었다.
지크하르트는 그 자신도 엠마가 몸을 숨길만 한 곳을 생각해 보았지만 그 어디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엠마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실감하였다. 그녀는 모든 걸 그에게 철저히 숨겼다. 오직 그 자신 혼자만으로 복수를 다져오고 있었다. 지크하르트가 그렇게 하였듯이.
따르릉.
벨소리는 침묵을 뒤흔들며 요란하게 강림했다. 두 번째의 벨소리가 들리기가 무섭게 지크하르트는 튀어나가 전화를 받았다. 유안이었다.
「북쪽 교외에 그녀 명의로 된 집이 한 채 있는데 혹시 이 집의 존재를 다른 사람도 알고 있는지 여쭤 주시겠어요?」
"아저씨! 아까 그 남자를,"
굴라트는 그가 부탁하기 전에 이미 방밖을 나서고 있었다. 잠시 후 같이 들어온 남자는 지크하르트가 전한 집의 주소를 알지 못하며 조직과는 무관한 그녀 개인의 일일 것이라 대답했다.
「계좌에서 돈이 빠져 나간 경로를 추적해 보니 이 집의 리모델링과 수리로 지출이 많았습니다. 담당한 회사의 말에 따르면 집 내부는 전혀 안 건드리고 지하를 개조했다고 하더군요. 시경에도 연락할 테니 일단 이곳을 찾아보지요. 주소는……」
유안에게서 주소를 들은 지크하르트는 그대로 방을 뛰쳐나갔다. 말도 없이 뛰쳐나가는 모습에 당황한 굴라트가 전화기 옆에 내동댕이쳐진 송수화기를 들어 유안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재차 주소를 받았을 때에는 이미 지크하르트의 차가 출발한 후였다.
‘머리가 아파…….’
오르피어스는 답답한 숨을 토했다. 두통이야 체스터의 명령 이후로 으레 그를 덮치곤 하던 만성적인 병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이번의 두통은 달랐다. 그의 정신을 주무르고 빠개어 엄습하는 언제나의 통증이 아니라, 보다 생생하리만큼 노골적이고, 속까지 역겹게 뒤집히는, 그런 아픔이었다.
헛구역질을 억지로 삼키며 눈을 뜨고 일어나려던 그는 멈칫했다. 팔이 등 뒤에서 결박되어 있었다. 오르피어스는 그제야 의식을 잃기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그녀를 보았을 때 제일 먼저 그에게 닿은 건, 향수 냄새였다.
맡은 적이 있는 향수였다. 그를 안고 난 다음에 여자를 만나고 왔던 지크하르트의 몸에 어렴풋하게 남아 있던, 그 향수였다. 덕택에 여자와의 첫 대화부터 오르피어스로서는 상당히 주눅이 들어 무의식중으로 굽히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같은 속내까지 그녀가 알고 있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지만, 엠마라고 이름을 밝힌 여자는 당당하게 그의 시간을 요구하였다.
「카시야스 대령님의 일로 말씀드릴 게 있어요」
단순히 창녀와 손님의 관계라면 몇 년 동안 관계를 유지하지는 않을 텐데. 지크하르트의 애인인걸까. 따위의 심란함에 젖어 있던 오르피어스는 그녀가 지크하르트까지 직접 화제에 올리자 거절할 핑계를 도저히 찾지 못했다. 어영부영 의무실을 나와 청사 밖의 외부 카페에 올 때까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챌 여유도 갖지 못했다.
무슨 정신으로 주문했는지 모를 음료가 웨이터를 통하여 나오고, 가슴이 조마조마하게 졸여 바짝 긴장된 탓에 목이 타 몇 모금 마신 음료가 반이나 줄 때까지 엠마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며 맞은편에 않아있기만 하였다.
「……들어가 봐야 해. 용건이 있으면 빨리 끝내줘」
「저는 당신에 대하여 알고 있어요, 벨포드 소령님」
「뭘?」
「당신과 벨포드 총독의 관계요」
양 손으로 잡고 있던 주스잔에 손톱이 까득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오르피어스는 타인과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였고, 그와 깊이 대화하는 사람은 항상 그를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아이릭의 심복이 대부분이었기에 감정적인 허를 직격하며 치고 들어오는 상황의 대처에 능숙하지 못했다. 때문에 그는 변명도 부정도 못한 채 안색만 창백하게 굳혔다. 그녀가 단순히 의심을 떠보는 것에 불과하였다 할지라도 자신의 반응이 명확한 증거가 될 것임을 겨우 떠올리고 어설프게나마 부정하려 하였지만 엠마가 더 빨랐다.
「어떻게 피가 섞인 형과 같은 침대에서 뒹굴면서 대령님의 곁에 있을 수 있어요? 짐승도 그렇지는 않아요」
예의 테러 사건의 여파는 여전히 깊은 상흔을 남겨두고 있었지만 범인이 밝혀지고 합동훈련도 무사히 끝나게 됨으로써 어느 정도 활기를 찾은 헤임 시내는 일전의 광경으로 조금씩 복귀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을 맞아 사람들로 북적이는 카페 내의 일상적인 소란이 그녀의 목소리와 유리되어 붕 떴다. 그녀의 목소리는 단어 하나와 음절 하나가 모두 오르피어스의 살점을 저미고 가격하는 흉기였다.
그의 가장 치명적인 내면을 낱낱이 까발리는 예리한 공격에 오르피어스는 비난하는 어조와는 다르게 그녀의 목소리가 열기 없이 건성으로 단어의 나열을 하고 있다는 것까지는 눈치 챌 수 없었다.
「대령님도 이미 알고 있으신 사실이에요. 언제까지 숨길 수만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죠?」
일면식 없는 사람에게 제일 감추고 싶었던 비밀이 밝혀졌다는 것보다, 그녀로 인하여 지크하르트의 귀에 들어가게 될 수도 있다는 우려는 그가 상상하였던 가장 최악의 형태로 나타났다.
「……지크하르트도, 알고 있어?」
입술 사이로 느적느적 기어 나오다가 굴러 떨어진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가냘팠다. 시야가 흐리게 출렁이며 엠마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맞아요. 알게 되신 지 꽤 시간이 지났을걸요」
오르피어스는 자꾸만 혼몽하게 멀어지려는 의식을 다잡으려 애썼다. 여기에서 무너질 수는 없어. 지크하르트는 어떻게, 아니, 알게 된 과정이 중요한 게 아니야. 지크하르트가 그녀에게 말하였을까.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나는, 난…….
「어머나, 소령님. 괜찮으신가요?」
엠마가 불현듯 목소리의 음색을 바꾸며 짐짓 걱정스러워하였다. 그 목소리마저도, 동굴에서 웅얼웅얼 울리는 것처럼 불분명한 윤곽으로 뭉개졌다. 테이블에 얼마간의 지폐를 꺼내놓은 그녀는 휘청거리는 오르피어스를 부축하여 일어났다.
「제가 모실게요」
늘어지는 팔을 올려 어깨에 걸 때 그녀는 흉측한 것이라도 몸에 닿은 양 진저리를 쳤으나, 곧 익숙하게 평상심을 회복하고는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른 채 제법 정겹게 부축하여 카페를 나왔다. 그녀에게 이끌려 차에 타게 될 때까지도 오르피어스는 상황을 잘 파악할 수 없었다. 혼자 깊은 물속을 부유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너무나 멀게만 느껴졌다.
「약효가 너무 늦게 돌아서 쓸데없는 얘기까지 했잖아」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차를 출발하는 엠마의 옆모습이 그가 기억하는 최후의 광경이었다.
‘주스에 약이 있었나.’
머리가 지끈거리며 속이 뒤집히는 걸 보니 양질의 약은 절대 아니었다. 목적이 무엇이든 그를 해하려 하였던 사람이 그의 건강을 고려하며 약을 쓸 리는 없지만. 얼마나 오랫동안 의식불명으로 실신해 있었는지 습하고 딱딱한 바닥에 닿아 체중이 눌린 어깨가 아팠다. 당연한 얘기지만, 손목뿐만이 아니라 다리도 결박되어 있었다. 밧줄이라면 태워서 끊을 수 있었을 텐데 수갑이었다.
광원이 없어 센티넬인 그의 시력으로도 사방을 분별하는 건 어려웠으나 인기척이 하나 더 있음은 감지하였다. 얕고 작은 숨소리. 아마도 엠마라는 그 여자일 것이다. 그녀를 인식하자 반사적으로 지크하르트가 떠올라 숨이 막혔다.
‘지크하르트가 다 알고 있었어.’
그 사실 하나를 머릿속으로 되뇌는 것만으로도 아뜩해졌다. 지크하르트의 경멸 어린 눈동자가 그를 비난하는 것만 같았다.
“아, 깼군요.”
기절해 있는 척 주변 정황을 살필 요량이었지만 동요로 평정이 깨졌다. 구두까지 길게 늘어뜨린 드레스 자락이 바스락거리면서 스치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랜턴이 달깍거리고, 자그마한 광원이 그녀를 중심으로 둥글게 번졌다.
노란 랜턴에 비친 그녀의 낯은 불빛의 일렁임에 따라 일그러진 것 같아 보이기도 하였고, 희열이 깃든 것 같기도 하였다.
심산한 심정과는 별개로 자신의 능력이라면 돌파구를 찾는 건 어렵지 않기에 오르피어스는 당황하기에 앞서 이유를 찾았다. 지크하르트와의 일로 그녀가 자신을 납치까지 하였다고는 여기지 않았다. 그녀가 정말 그의 애인이라 지크하르트와의 관계를 끝내라고 종용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하여도 형과의 관계라는 카드까지 꺼낸 이상 자신은 한없이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고, 감금의 이유로도 미흡하였다. 허면, 어찌해서.
"사실은 저희 구면이라는 거 알고 있으세요?"
“전혀 기억이 안 나.”
"저도 그렇긴 해요. 불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거든요. 16년쯤 되었던가."
16년 전의 불. 지나치게 감정을 절제하여 무감하게까지 들리는 그녀의 말에서 오르피어스는 불길한 직감에 등골을 주뼜 경직하였다. 그리고, 그의 직감은 정확했다.
"방화범의 소행이라고 알려졌지만요, 제 집은 카시야스 대령님의 바로 옆집이었거든요? 그래서 똑똑히 볼 수 있었어요. 시초가 되었던 하얀 불을."
"……그때의 생존자야?"
“네에, 당신의 손에 가족이 몰살당하고 저 혼자만 유일하게 살아남았어요. 그럼 제가 이제 뭘 할지도 알고 있겠죠?”
엠마가 랜턴을 비스듬히 옆으로 옮겼다. 나무로 만든 투박한 탁자에는 줄을 꼬아 만든 듯한 가느다란 밧줄이 있었다. 오르피어스는 전쟁을 거친 군인이었고, 밧줄의 정체도 바로 눈치 챘다. 안색이 표변하여 주변을 돌아보는 그에게 엠마는 재차 확인해 주었다.
"화약이에요. 소령님의 능력이라면 화약이 영향을 끼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지하실을 아주 꽉 메웠어요. 화약이 폭발하면 연쇄적으로 무너지게끔 장치했죠.”
오르피어스는 무심코 마른 입술을 축였다.
"……여기에서 화약을 폭발시키면 너도 죽을 텐데?”
“아무린 능력도 힘도 없는 제가 사지 멀쩡히 소령님을 살해할 각오를 했겠어요? 아, 물론 소령님의 능력으로 저 한 명 정도는 겨냥하여 불태워 죽일 수 있을 거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제가 불덩이가 되어 죽는 것보다 도화선에 불을 불이는 게 더 빠를 거예요. 어느 쪽이든 마음대로 해요.”
가족의 원수를 목전에 두고 감정을 자제하려 애쓰는 기색이었지만, 말이 이어질수록 엠마의 어조는 높아지고 긴장된 흥분이 어렸다. 오르피어스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몸을 힘들게 움직여 엉덩이를 불이고 앉았다. 지하 특유의 습한 공기마저 바짝 긴장하여 피부를 할퀴는 것 같았다.
"변명할 생각은 없어. 네 가족을 죽인 건 분명히 내 죄가 맞으니까 내가 대가를 치르길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게. 하지만 절대로 죽을 수는 없어.”
"왜죠? 다른 사람은 벌레처럼 불에 태워 죽인 당신이 자신의 목숨은 아까워요?"
“아니……. 지크하르트가, 죽지 말라고 했어.”
짧은 침묵이 떨어졌다.
이어 날카롭게 터진 웃음은 그녀의 억눌렀던 감정만큼이나 새빨간 색채를 띠고 어둠을 울렸다.
“대령님이 그런 말을 했어요? 어쩐지 그렇게 복수를 하겠다고 이를 갈던 남자가 당신을 곁에 두면서 과거를 잊은 것처럼 행세하더라니! 무슨 짓을 해서 대령님의 마음을 돌려 세운 거예요? 같잖은 동정심이라도 유발하여서? 가증스럽긴!!”
가득 쌓였던 감정을 토해낸 엠마는 발작적인 잔웃음으로 어깨를 떨며 도화선을 손으로 집었다.
"하하하. 하긴, 나야 상관이 없지. 대령님이 당신에게 무슨 감정을 가졌든 아무래도 좋아요. 이건, 내 복수니까. 그럼 얌전히 뒈져버려요. 제 부모님처럼 당신도 화염 속에서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다 죽으라고요."
지하실이 무너지기 전까지 오르피어스는 빠져갈 방도를 찾기 위해 다급히 주변을 살폈다. 화약의 폭발이 어느 정도 클지는 모르지만 그의 능력으로 약간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수갑을 끊기만 하면??
계단 위쪽의 문짝이 굉음을 내며 부서진 건 그때였다. 엠마는 크게 놀라 막 불을 불이기 직전이었던 도화선을 놓으며 대신 총을 들었다. 랜턴의 불빛이 일렁이는 동공이 불신으로 크게 열렸다.
“……오빠?”
"로즈마리. 멈춰.”
지크하르트의 총구가 그녀를 겨냥하고 있었다.
엠마가 절규했다.
"오빠가…… 오빠가 어떻게 나에게 총을 겨눌 수가 있어? 오빠는 잘 알잖아. 누구보다 내 증오를 알잖아!!"
오르피어스의 무사를 확인한 지크하르트는 분노와 배신감으로 잘게 떨리는 그녀의 시선에 고통을 느꼈지만 총을 거두지는 않았다. 그는 느리게 발을 옮기며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우리 이러지 말자, 응?”
"오빠는 체스터 벨포드를 죽여서 복수를 끝냈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난 아니야! 내 복수는 끝나지 않았어! 처음부터 오르피어스를 죽이려고 헤임까지 온 거야. 오빠가 복수를 중단한 저 악마를 죽이기 위해!! 오빠는 지금 저자를 위해서 날 막으려는 거야? 그 총으로 날 쏘려고?!”
"네 복수를 막으려는 게 아니야.“
한껏 격앙한 그녀를 주의에서 놓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지크하르트는 부지불식간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내가 체스터 벨포드를 살해한 것만큼이나 오르피어스를 죽이겠다는 네 복수도 정당한 권리야.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째서!!”
"난 오르피어스를 구하기 위해 온 거야."
거짓말처럼 눈앞에 나타난 지크하르트를 아연히 올려다보던 오르피어스가 고개를 푹 떨구었다. 제정신이 아니다. 미친 게 분명했다. 지금 자신뿐만이 아니라 지크하르트까지 자칫 폭발에 휩쓸릴 위험에 처해있고, 현재까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듯한 오랜 지인과 서로 총을 겨누고 있는 참담한 상황임에도, 자신을 구하기 위하여 왔다는 지크하르트의 그 한마디가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다.
"로즈마리, 제발 부탁이다. 난 저 녀석만큼 너도 소중해. 잃고 싶지 않아. 지금이라면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풀어줘. 너도 이런 곳에서 죽어서는 안 돼. 네가 죽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라.“
엠마가 흐느낌인지 웃음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새된 소리를 높였다.
"오빠는 행복했어? 체스터 벨포드를 죽이기 전까지,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행복했어? 가족을 살해한 원수가 버젓이 대낮을 활보하고 등 따뜻하게 침대에 눕고 맛있는 식사를 하며 유유히 자신의 삶을 누리는 모습을 보고도, 행복했어?"
뺨을 타고 떨어지는 눈물과 함께 그녀는 총을 아래로 놓았다.
"난 아냐. 내 행복 같은 건, 16년 전에 다 끝났어."
“로즈마리!!”
지크하르트의 외침과 그녀가 도화선을 붙잡은 것과, 좁은 지하실을 울리는 총성은 동시에 한데 섞이어 어우러졌다. 엠마는 배에 총상을 입었음에도 끝끝내 손을 움직여 불을 붙였다. 도화선이 빠르게 타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배를 움켜 안은 채 쓰러졌다. 슈트 드레스에 금세 핏물이 번졌다.
“제기랄!!”
계단을 달려 내려가는 시간도 아까워 지크하르트는 위에서 뛰었다. 엠마를 내려다보며 잠깐 흔들리는 듯하였던 시선은 사납게 날을 곤두세우며 곧장 오르피어스에게 달렸다. 자력으로 탈출할 상황이 안 되고 수갑의 열쇠를 찾을 시간도 없어 대뜸 그를 어깨에 둘러매는 지크하르트에게 오르피어스는 당황하여 외쳤다.
“지크하르트! 저 여자는! 구해야 하잖아!”
"둘 다 못 구해! 시간이 없어!"
“나는, 난 됐어. 네가 구해 주러 온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러니까.”
"입 다물어!!”
두 번째 외침은 쌓아 둔 화약이 폭발하는 소리에 묻혔다. 콰앙, 쾅! 넓지 않은 지하실이 폭음으로 뒤흔들리며 연이어 터지는 폭발음이 사방을 웅웅 때렸다. 그리고 오르피어스가 결박되어 있던 가장자리로부터 서서히 붕괴를 일으켰다. 지크하르트는 애써 엠마가 쓰러진 방향으로는 눈을 돌리지 않으며 계단을 달음박질 쳤다. 시시각각 바닥이 꺼지고 천장이 내려앉았다.
지하의 붕락은 지상의 건물에도 영향을 끼쳤다. 무너지는 골조를 피해 세간이라고는 일절 없는 삭막한 내실을 가로질러 집 밖으로 뛰쳐나온 지크하르트의 등 뒤로 건물은 완전히 붕괴하며 불길에 휩싸였다.
이웃의 사람들이 놀라 뛰쳐나오고, 분분히 당황하여 허둥지둥 신고하며 대피하는 와중에 지크하르트는 망연자실 하게 주저앉았다.
"……로즈마리.”
붉고 노란 화염에 비치는 그의 옆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기에 오르피어스는 그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였다. 운신이 자유로우면 멀리 도망쳐 그의 앞에서 꺼지고 싶다는 생각마저 하며, 맥없이 사과를 떨어트렸다.
“미안……. 미안해. 나 때문에 네 소중한 사람이 또…….”
'사과하지 마."
말허리를 끊는 목소리는 낮게 쉰만큼 탁하고 무거웠기에 오르피어스는 흠칫 말문을 닫았다. 그러나 지크하르트는 노여움을 표하지 않고, 어두운 그늘이 드리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네 잘못이 아니니까 사과하지 마.”
“하지만…….”
“잘못이 있다면 나야. 그 애의 행동을 예상하지도 못했고, 널 위험하게 하였고, 그리고 그 애를…….”
몇 마디 주섬주섬 말을 잇던 그는 이내 고개를 떨구며 오르피어스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미안. 잠깐만 이대로 있어줘.”
어깨가 습하게 젖어갔다. 오르피어스는 피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이 눈물을 쏟을 것만 같았다. 거리 저편에서 사이렌이 울리고 잇따라 차들이 도착하는 소리가 났다.
***
정황은 확실하였으나 절차상의 처리를 위하여 형사와 조서를 작성하고 나왔을 무렵에는 어둑한 땅거미가 하루의 종말을 고하듯이 내깔리는 시간이었다.
「범인은 아마 살아 있을 겁니다. 시체도 발견되지 않았을 뿐더러 지하실 아래에 외부로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두었더군요. 출구 쪽에서 혈흔도 찾았습니다」
통로는 엠마가 지하실을 수리할 때부터 개조한 것이라 하였다. 더 이상 추적하지 말라는 오르피어스의 완강한 태도에 유안도 은연중에 힘을 써서 수사는 적절한 선에서 종결될 예정이었다. 그녀가 생존하였음이 유력시됨에도 마음에 가해진 무거운 짐은 조금도 덜어지지 않았다. 엠마가 살아있어도, 그가 그녀를 저버렸음은 변하지 않는다.
지크하르트는 한없이 바닥으로 껴져 추락하는 듯한 걸뜸을 힘겹게 내딛으며 경찰서 밖으로 나왔다. 그보다 먼저 조서를 끝냈는지 굴라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 끝났냐?”
“네…….”
그를 어떻게 봐야 할지 알 수가 없어 지크하르트는 묵묵히 시선만 내깔다, 간신히 입술을 움직였다.
“죄송해요, 아저씨…….”
구차한 변명도 실을 수 없는 여실한 그의 대가라, 죄를 구하는 말 이외의 다른 말은 할 수조차 없었다. 굴라트는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외면하며 탄식했다.
"네 잘못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는데, 아비로서 그 말 한마디를 하기가 힘들다.”
“…….”
"엠마는 벨포드 가와 척을 진 것뿐만이 아니라 헤임에 진출을 준비하던 조직까지 위험으로 몰아넣었으니 그쪽에서도 결코 그 애를 용서하지 않을 거다. 살아있어도, 앞으로가 걱정이야."
굴비 엮듯이 줄줄이 연좌되어 당국의 포탄을 맞을 수도 있었던 사안이었다. 지크하르트는 더 말을 할 수가 없어 주먹만 쥐었다. 경찰서 정문 근처에 나란히 서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두 사람을 경찰이 곁눈질하였다. 지크하르트는 먼저 걸음을 떼기 시작한 굴라트의 뒤를 멈칫거리며 따랐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엠마를 찾아야지.”
짤막한 한마디의 대답만을 던진 굴라트는 침묵했다. 이 이상의 대화를 허용하지 않으려는 것 같아 그도 다시 입을 다물었다. 굴라트의 뚜렷한 목적지도 알지 못하면서 말없이 뒤를 따르기만 하였다. 침묵 속에 뚜벅뚜벅 엇갈린 걸음만 내딛으며 대로변까지 나온 굴라트가 지크하르트를 불렀다.
“나도 나이도 있고, 내 가이드도 슬슬 용병 부대를 따라다는 걸 힘에 부쳐하는 눈치라 엠마를 찾으면 은퇴하고 어디 조용한 곳에 정착할 예정이다. 당분간은 만나기 힘들겠구나.”
어디에 정착할 것인지 물어보려 하였지만 입술을 벙싯거리기만 할 뿐 쉽사리 단어를 조합하지 못했다. 지크하르트는 결국 온전히 만들지도 못한 말을 되삼키며 굴라트에게 건강하시라는 힘없는 인사만을 전하였다. 엠마를 찾으면 연락하겠다든가, 하는 말은 일절 되돌리지 않은 굴라트는 지크하르트의 인사를 받고는 노면전차 승강장 방향으로 걸어갔다. 지크하르트는 거리에 길게 늘어진 굴라트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가슴에 얹힌 무게감을 되새기며 서 있었다.
해가 완전히 서쪽으로 떨어지고 아파트 창문마다 전등으로 밝아져도, 지크하르트는 귀가하지 않았다. 경찰서에 전화하여 지크하르트가 이미 경찰서를 나갔다는 확언까지 듣자 더 초조해져 아파트 밖으로 나갔다. 길이 도중에 엇갈리기라도 할까봐 멀리 나서지도 못하고 아파트 입구 근처에서 발을 굴리고 있기를 몇 십 분이나 지났을까, 가로등 아래를 터벅터벅 걸어오는 익숙한 인영이 있었다.
“지크하…….”
반색하여 외쳐 부르려다 꿀꺽 삼키고 몇 걸음 달려갔다. 항상 등을 곧게 세우고 앞을 보며 걷던 그의 고개가 아래로 푹 꺾여 있었다. 타닥거리는 걸음이 코앞까지 닥친 후에야 지크하르트의 얼굴이 올라왔다. 오르피어스는 무표정하게 굳은 그를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았다.
"그, 저기…….식사는 했어?"
괜찮으냐는 물음도 왜 이렇게 늦었느냐는 물음도 자신에게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 간신히 꺼낸 말이 하잘것없는 안부였다. 오르피어스는 자신이 말하고도 무색하여 뺨을 조금 붉혔지만 지크하르트는 말없는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기만 하다, 재차 걸음을 옮겼다.
오르피어스를 한 걸음 뒤에 매달고 계단을 올라 집으로 들어가기까지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무표정한 침묵이 도무지 사라지지 않는 자책감에 무거운 돌을 매다는 느낌이라 오르피어스는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현관문을 닫고 들어서며, 날 보는 것도 내키지 않을 텐데 며칠 집을 떠나 있겠다는 말을 하려던 오르피어스는 눈을 흡떴다. 문이 닫히자마자 지크하르트가 그를 벽으로 밀치며 키스했다.
“으…….”
전에 없던 난폭한 입맞춤이었다. 막무가내로 그의 입술을 비집어 열며 들어온 혀가 구강을 휘저었다. 갓 키스를 배운 성급한 소년처럼 배려 없이 물어뜯는 거친 키스에 허덕이며 호응하기도 전에 아랫도리에 서늘함을 느꼈다.
"아! 잠, 잠깐……!"
벨트를 풀어 바지와 속옷만 아래로 벗긴 지크하르트가 그의 왼쪽 무릎에 팔을 걸어 위로 올리며 하체를 밀어붙였다. 겨우 지퍼만 내렸을 뿐인지라 허벅지의 여린 맨살에 딱딱한 요철이 눌려 쓰라렸지만, 희미한 아픔은 꽉 닫힌 몸을 무턱대고 파고드는 육중한 성기에 짓눌려 사라졌다. 반사적으로 지크하르트의 어깨에 양팔을 둘러 붙잡으며 긴장을 풀려 애썼지만 이완되지도 않은 마른 구멍은 버거운 아픔만을 호소했다.
지크하르트가 손톱이 살에 박힐 만큼 오르피어스의 양쪽 둔부를 꽉 부여잡으며 옆으로 바짝 벌렸다. 귀두만 간신히 걸쳐졌던 성기가 뻑뻑한 내벽을 헤집으며 파고들었다.
“흐아…….”
오르피어스는 혀끝에 걸린 비명을 억지로 짓씹으며 지크하르트에게 매달렸다. 자신의 체내로 깊숙히 박히며 점령하는 성기가 그 여느 때보다 뜨겁고, 강렬했다. 그를 온전히 삼키고 나서야 간신히 비명 비슷한 신음을 잇새로 흘리며 벽에 뒷머리를 문댔지만 이질감에 익숙해질 겨를도 없이 퍽퍽 부딪혔다. 한쪽 발이 허공에 들려 있어 균형을 잡기도 힘들었다. 허덕이며 지크하르트를 부둥켰지만 그는 묵묵히 거친 숨만 몰아쉬며 난폭하게 다루었다.
억지로 비집어 열린 직장이 찢어질 듯 가득 지크하르트를 품으며 비명을 질러댔다. 무턱대고 쑤시는 단단한 성기가 내벽을 마구잡이로 긁고 거듭하여 덧썼다. 홧홧하게 쓰라린 내벽에 상처가 생긴 것 같았지만 오르피어스는 정신없이 휘몰아치며 그를 벽에 쾅쾅 치대는 지크하르트를 끌어안았다. 아픔이 아니었다. 끔찍한 쾌감이었다. 상대를 존중하며 함께 쾌락을 탐닉하는 섹스가 아닌, 가슴께에 꽉 치받은 울화를 토해내기 위한 배출에 불과한 섹스였지만 오르피어스는 그 여느 때보다 쾌감에 젖었다. 강간에 가까우리만큼 폭력적으로 열린 육체는 쾌락점을 전혀 자극받지 못하고 무자비한 강압에 노출되어 있었지만 한 번도 만지지 않은 성기는 어느새 곧추서서 선액으로 젖었다.
지크하르트가 그를 원하고, 탐하고 있었다.
가이드로서의 의무적인 섹스도 아니고, 그가 원하여 달래주기 위한 섹스도 아니었다. 순수한 욕망만으로 그를 탐하고, 육체를 원하는 지크하르트가 여기에 있었다. 그것이 끔찍하리만큼 황홀하였다.
"아아, 앗??!!"
기어이 지크하르트와 자신의 옷자락에 허연 정액을 사출하고야만 오르피어스는 반사적으로 힘이 풀려 휘청 허리를 굽혔다. 고꾸라지려는 그를 붙잡은 지크하르트가 바닥에 엎드리게 했다. 굵은 핏줄이 불거진 검붉은 성기가 뻐끔거리며 열린 항문에 다시금 쑤셔 박혔다.
"윽! 읏, 아윽!!”
사정의 여문에 휩싸일 틈도 없었다. 오르피어스는 내장째로 치받히는 감각에 꺽꺽거리며 바닥을 기었다. 팔을 받쳐 몸을 지탱하려 애썼지만 거칠게 앞뒤로 흔들리는 움직임을 따라 가지 못하고 자꾸만 꺾였다. 눈물과 타액이 바닥을 더럽히고, 그 위를 또 처박힌 얼굴이 문질렀으나 불쾌감은 느끼지도 못했다. 뻐근한 아픔과 쾌감으로 하얗게 튀는 머릿속에 지크하르트만이 가득했다. 오르피어스는 떨리는 손을 사타구니로 옮겨 꼿꼿하게 힘이 들어가는 자신의 성기를 붙잡았지만 허리 아래에서 치받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교미하는 짐승처럼 허리와 엉덩이만 올려 잡힌 채 울며 신음하는 그의 체내를 뜨겁게 사출된 정액이 두드렸다. 안쪽이 적셔지는 감각에 오르피어스는 두 번째로 사정하며 아래로 허물어졌다. 깊이 몸을 연결한 그대로 지크하르트가 그의 등을 쓰러지듯 안았다. 땀이 섞인 거친 호흡이 오르피어스의 귓가를 간질였다.
한참을 그대로 있던 지크하르트가 울음의 여운이 남아 훌쩍거리는 그의 눈가와 뺨을 입술로 문질렀다.
"……미안하다. 많이 아팠지?“
“으으응.”
도리도리 내젓는 귓가에 다시 한 번 키스를 떨어트리고 몸을 뗏다. 풀이 죽은 성기가 부드럽게 빠져 나가는 감각에 오르피어스는 무심코 엉덩이를 조였다가 얼굴을 붉혔다. 일어날 기력이 없어 엎드린 채 숨만 고르고 있는 그의 등 뒤에서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옷을 추슬러 입은 지크하르트가 물에 적신 수건을 가지고 와 그의 다리 사이를 닦았다.
“내가 닦을게.”
당황하여 내저은 손은 지크하르트에게 붙잡혔다.
"그냥 있어."
지크하르트는 벌건 손자국이 남은 엉덩이를 조금 착잡하게 내려다보고는 엉덩이 안쪽의 정액까지 제대로 긁어내 주며 몸을 훔쳤다. 자신이 실신했을 때도 이렇게 뒤처리를 해 주었을 거라는 건 알았지만 의식이 있을 때 겪는 건 또 달랐다. 벌게진 얼굴로 어쩔 줄 모르며 당황한 오르피어스의 속옷과 바지까지 끌어올려 입혀준 다음에야 지크하르트는 수건을 대야에 아무렇게나 내던지며 주저앉았다.
쾌감이 몸 안으로 번지고 나니 이제 현실적인 아픔이 닥쳐 억지로 열린 몸이 뻐근하게 호소하는 통증을 무시하며 일어나 앉은 오르피어스는 그와 거리를 두고 외면한 채 어딘가의 허공을 멍하니 시선을 둔 지크하르트를 바라보다, 살그머니 가까이 갔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안고는, 이마에 입술을 살짝 누르며 키스를 떨어트렸다. 자신이 안아도 다른 곳을 헤매는 듯한 눈길을 던지고 있던 지크하르트가 돌아보며 깊은 숨을 내쉬더니 입을 맞췄다. 보드라운 키스가 혀끝을 간질였다. 지크하르트가 빨갛게 붓고 찢어진 오르피어스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빨았다.
오르피어스는 그의 가슴에 깊이 안기어 지크하르트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언제나 자신을 안정하게 해 주던 심장 소리가 불규칙적으로 날뛰며 쿵쿵쿵 울려댔다. 오르피어스는 그를 더 힘주어 끌어안았다.
“나는 로즈마리를……,엠마를 두 번 버린 거나 다름없어. 처음은 복수하겠답시고 종조부님 댁을 뛰쳐나왔을 때, 그 다음은 바로 오늘. 그 애는 내 동생의 동무였고 이제는 유일하게 아픔을 공유하는 사이였는데 나는 나만 보느라 그 애까지 헤아리지 못했어.”
“미안…….”
"사과하지 말라니까.”
지크하르트가 품에 안긴 오르피어스의 정수리에 볼을 부볐다. 그는 엠마와의 시간을 되새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오랫동안 말없이 오르피어스를 끌어안고 있다가, 수갑에 눌린 손목의 상처에 입술을 눌렀다.
"몇 시간이나 감금되어 있었던 것 같은데 다친 데는 없고?"
그때야 오르피어스는 번연히 자각했다. 자신과 아이릭의 관계를 이미 알고 있다는 엠마의 비난을. 나른하게 남아 몸 안을 부드럽게 감돌던 열기가 급속도로 사라지고 등줄기가 뻣뻣하게 곤두섰다. 지크하르트가 예민하게 그의 반응을 눈치 챘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나?"
오르피어스는 눈을 꼭 감았다. 지크하르트에게 안겨 있는데도 오한이 일었다. 그는 지크하르트로부터 떨어져야 할지, 더 굳게 붙잡으며 안겨야 할지 가늠하지 못하며 떨리는 입술을 움직였다.
“엠마에게 들었는데……. 지크하르트. 형이랑 나, 알고 있어……?”
“…….”
대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숨 멎은 침묵이 두 사람을 점령했다. “아, 아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서야 지크하르트는 낮은 침음성을 흘리며 앞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아, 그래. 알고 있어. 엠마에게 부탁해서 네 뒤를 캐냈었어. 내 멋대로 널 조사해서 면목이 없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확답을 듣자 눈앞에 시꺼먼 암흑이 내리는 것 같았다. 오르피어스는 생각이 미치기도 전에 그를 뿌리치며 거리를 두었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안정을 찾지 못하고 연신 사방을 헤맸다.
"그러니까, 그게, 미안해, 미안. 형이랑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 아, 알아. 나도. 그렇지만……. 나는, 난."
“……오르피어스.”
"싫어. 정말 싫어. 이, 익숙해지기는 했는데, 그래도…… 싫어서.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 미, 미안해. 지크하르트. 숨겨서 미안해. 미안해. 미안. 다 내 탓이야. 내가, 내가 널 너무 좋아해서. 그래서 너에게만은."
“오르피어스!”
어순도 맞지 않는 말을 횡설수설 늘어놓기만 하던 오르피어스의 어깨가 멈칫 굳었다. 지크하르트의 양손이 그의 뺨을 안았다. 부들거리는 눈동자를 내리깔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지 못해 벌벌 떨기만 하는 그를 보듬으며 찬찬히 시선을 숙였다.
"널 경멸하지 않아.”
잔잔한, 그러나 힘 있는 목소리가 오르피어스를 다잡았다. 후들거리기만 하던 얼굴이 망설이며 위로 올라왔다. 불신을 머금은 시선이 탐색하듯이 지크하르트를 올려다보다, 경멸도 노염도 멸시도 깃들지 않은 고요함을 마주하고는 한껏 일그러지며 아래로 떨구어졌다.
양 뺨을 안은 자신의 손을 뜨겁게 적시며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시야의 한 곳에 담은 지크하르트가 다시금 속삭였다.
“오르피어스. 난 널 경멸하지도 않을 거고, 버리지도 않는다. 이게 네가 나에게 보내는 것과 같은 애정인지 나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잠시 말을 끊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마치 선고를 기다리는 것처럼 오르피어스는 흐느낌을 억누르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바짝 곤두세운 그의 긴장이 지크하르트에게도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그때에 엠마를 버리고 널 택한 거야. 또 한 번 그때로 돌아가도, 지금처럼 후회하면서도 널 택할 거고. 앞으로 어떤 선택지가 나에게 주어져도 널 선택하게 되겠지. 이것 하나만은 절대 변하지 않을 거다.“
오르피어스는 평생을 박탈당하였다.
센티넬로서 발현한 능력도, 진짜 가족도, 인생도, 자식도, 일체의 것을 빼앗기고 부정당하며 그의 앞에 강제로 열린 길을 그저 따라 걸으며 명령에 순응할 따름인 강제된 삶이었다.
지크하르트를 향하는 애정은 오르피어스가 최초로 품었으며 또한 유일하게 가진 자신만의 것이었다. 그가 자의로 택한 것은 오직 이 감정 하나뿐이었다. 동시에 그가 갈구하고 보답받길 원해서는 안 되는 애정이었다.
박탈당하는 것에 무뎌진 그는 욕심조차 내지 못하고 자신의 유일한 것을 유일하다는 인식도 못한 채 그저 가슴 깊숙이 품어 숨기어, 그렇게, 조용히, 스러져갈 터였다. 어쩌면 힐라리아와 결혼한 지크하르트를 보고, 힐라리아가 낳을 지크하르트의 자식들과, 먹먹하게 압박하는 가슴을 억누르며,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그의 뒤에 멀찍이 물러선 채. 그런 미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오르피어스에게는 지금이 현실이었다. 지크하르트가 그의 현실이고 미래였다.
"너에게 날 주겠어."
지크하르트가, 그의 유일을 주었다.
"나는 언제냐 네 것이다. 오르피어스.”
오르피어스는 유일이며 전부인 단 하나의 감정이 온전히 자신을 증명하는 것을 감각하였다. 지크하르트였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닌, 그의 지크하르트였다.
그것 하나만을 품은 채 오열하며 무너지는 오르피어스를 지크하르트가 힘 있게 안았다. 항상 그러하였고, 앞으로도 그리하게 되었듯이.
***
"벌써 빚진 게 세 개나 된다."
"예?”
욕실에서 씻고 나와 옷을 갈아입던 유안은 앞뒤 없는 아이릭의 말에 눈만 크게 떴다. 아이릭은 침대에 느슨하게 기대어 담배를 피웠다.
"오늘 오르피어스까지 구출했으니 지크하르트의 공적이 세 개나 되었어.”
"뭐, 유능한 사람이긴 하죠."
별다른 일은 아닐 것 같아 드레스셔츠의 단추를 다 잠근 뒤 침대에 걸터앉아 양말까지 신었다. 아이릭과 동침 후 샤워하게 되더라도 마르는데 시간이 걸리는 머리칼은 씻지 않는다. 아주 사소한 것이더라도 혹여 그와의 관계가 발각될 여지가 있다면 의심을 사지 않게끔 철저히 단속하는 습관은 이십 년 이상 지속되어 이제는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러웠다.
씻지 않으시냐고 그를 돌아보았던 유안은 훤히 드러난 맨가슴과 어깨에 남은 자신의 손톱자국이 괜스레 머쓱하여 이거라도 걸치시라고 가운을 주었다. 유안처럼 가슴의 각인을 불로 지져 지우는 조치까지는 취하지 않았지만 아이릭도 타인의 앞에서는 절대 옷을 벗지 않음으로써 유안의 이름이 새겨진 각인을 숨겼다. 니베이아와 관계를 가질 때도 절대 맨몸은 노출하지 않았을 정도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유안이 입으라고 하였으니 일단 담배를 재떨이에 내려놓고 가운을 걸쳤다.
"지크하르트의 공훈을 공개적으로 치하할 수는 없으니 내가 사적으로 들어 줄 수 있을 청원을 말하라고 하였더니 오르피어스와의 관계를 중지해 달라는 청을 해서 아주 곤란해."
대수롭지 않게 듣던 유안은 뜨악한 표정이 되었다.
"……카시야스 대령님이 두 분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고요?"
“음.”
"전부 다요?”
"이유를 묻길래 설명해 주었다만?"
유안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아니, 그건 아셔야 한다면 막내 도련님께 들으셨어야 하는 내용일 텐데. 어쩌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이릭 님의 입으로. 맙소사.”
그리고는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표정으로 마주 응시하는 아이릭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뭔가?"
"혹시 대령님에게 맞지 않으셨어요? 제가 같은 입장이었다면 아이릭 님을 아주 요절을 냈을 텐데요.”
"불가피한 상황이었지 않나."
"글쎄요, 아주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보통 사람의 마음은 아이릭 님처럼 냉정한 이성의 판단만으로 결론짓지 못하거든요.”
“흐음. 그렇기는 하겠군.”
턱을 주억거리는 아이릭의 근처로 유안은 자리를 옮겨 앉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고민 중이다. 공이 하나라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는데 세 개나 되니까 반드시 수락하기는 해야 할 테고."
“으음……. 저, 아이릭 님. 예전부터 말씀 드리고 싶었는데요…….”
유안은 자신의 손을 깍지 끼며 진지하게 입술을 뗐다.
"막내 도련님을 놓아 드려도 되지 않을까요? 아이릭 님의 목적은 국왕 폐하와 그분의 기반을 공고히 다지는 것이었으니 이제 이루어진 것 같아요. 국왕 폐하시라면 이번 사건을 빌미로 당신께 적대적인 세력을 왕매 전하와 엮어 솎아내실 거고요.”
아이릭은 가부를 즉답하지 않았다. 턱을 쓸며 오랫동안 고심하던 그는 초조함에 유안의 목 안이 바짝 타 들어가고 난 후에야 느리게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니베이아 님의 권력은 이제 쉬이 흔들리지 않을 테지. 하지만 힐라리아도 죽은 마당에 아버지의 명령을 주해할 수 있는 센티넬을 찾을 수 있을까? 적어도 글래스팅 내에는 없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유안은 가까스로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것으로도 오르피어스에게 절대 보상은 되지 않겠지만 적어도 그에게 그의 인생을 돌려줄 수는 있게 되었다.
“몇 년이 걸리더라도 찾아봐야지요.”
정신계 센티넬은 구체적인 능력이 밝혀지고 공개될수록 활용폭이 좁혀지기에 특히 엄중한 기밀로 관리되는 자들이다. 몇 년이 소모될지 모른다는 유안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일말 믿는 구석은 있었다.
"때마침 당장 확인해 볼 수 있는 사람도 있고요."
"누구? 내가 모르는 센티넬이 있었나?”
"왕후 폐하께 협력하였던 정신계 센티넬이요. 소대 전체에 정신적 금제를 걸어두었을 만큼 강력한 센티넬이니 시도해 볼 가치는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잖아도 이 사람만은 국왕 폐하께서도 중앙에서 처분하기 곤란하다고 신병을 저회에게 넘겨주셨으니 좋은 기회 아닐까요?”
"아……. 그래, 그 사람이 있었지. 헤임에는 언제 이송된다고 하였나?"
"내일입니다."
국왕이 말하였던 '처분하기 곤란한 이유'는 금세 밝혀졌다. 삼엄한 감시 속에 헤임 역에서 하차한 센티넬은 겨우 11살의 소녀였다.
센티넬의 도착을 기다리며 아이릭의 집무실에 모인 네 사람은 센티넬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할 말을 잃었다. 옳고 그름의 가치가 명확히 세워지기도 전에 강대한 능력을 발현하여 어른들에게 이용당하였을 소녀는 그녀의 임시 가이드의 손을 생명줄이라도 된 양 꼭 끌어안은 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주위 어른들의 눈치를 보는 것에 지나치리만큼 익숙해 보이는 소녀의 모습 위에 과거 오르피어스의 모습이 겹쳐져 유안은 몰래 한숨을 쉬었다. 오르피어스의 안색도 좋지 않았다. 해쓱하게 창백한 낯으로 구역질이라도 할 것 같은 그의 옆에서 지크하르트가 어깨를 가볍게 치며 무어라 속삭였다. 가볍게 끄덕인 오i피어스의 안색이 그제야 편해졌다.
아이릭이 침묵을 깼다.
"자네에 대한 처우는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하지. 앞서 말하였던 것처럼 내 아우에겐 정신적인 주박이 있으니 그 점을 먼저 확인해라."
힐끔힐끔 주변을 둘러보던 소녀는 그녀의 가이드가 손을 꼭 쥐어주자 간신히 주뼛주뼛 오르피어스에게 다가가 금세라도 꺼질 것 같은 연약한 소리로 속닥였다.
"……앉아주세요.”
소녀는 소파에 앉은 오르피어스의 허벅지 위로 올라가 걸터앉고는 그의 가슴께에 뺨을 바싹 붙이며 끌어안았다. 오들오들 떨던 소녀의 어깨는 능력을 행사하자 오히려 차분해졌다. 지크하르트는 소파 뒤에 서서 불안한 심경을 다스리며 소녀의 말을 기다렸다.
5분가량 눈을 감고 있던 소녀는 불현듯 오르피어스의 몸에서 탁 떨어져 나오더니 도도독 달려가 다시 가이드의 손을 붙잡았다.
"……없어요."
"정확히 말해."
"저 아저씨 머릿속에, 강제하고 있는 건 없어요.”
소녀는 그 말 한마디만 겨우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아이에게 그다지 조리 있는 설명을 기대하지 않은 아이릭은 미심쩍은 기색으로 오르피어스를 살폈다. 오르피어스가 당황했다.
“실은 구치소에 갇혔을 때 누나가 했던 말이 기억났었어. 애매하게 흐려서 확실한 기억은 아닌데 누나가 자살하기 전에 날 불렀었나봐…….”
당시 힐라리아가 하였던 말을 더듬거리며 구술한 그는 스스로의 기억을 불신하며 아이릭을 보았다. 그가 전한 힐라리아의 말을 잠시 곱씹은 아이릭이 손짓했다. 그리고 책상 서랍에서 총을 한 정 꺼내어 흘끔거리며 다가온 오르피어스의 손에 쥐어 주었다.
"명령이다. 날 쏴라.”
긴 세월 길들여졌던 육체가 명령에 즉시 반응하였다. 기겁한 유안의 외마디 비명보다 오르피어스의 손이 트리거를 당기는 게 더 빨랐다. 타앙??! 격발한 총알은 아이릭의 가슴이 아닌 그의 머리 한참 위의 창문에 격중했다. 총 소리에 달려온 경호원들은 방탄유리에 금이 간 것을 목도하고는 당혹하였으나 아이릭은 오발이라는 이유를 대고 그들을 모두 물렸다.
오르피어스는 망연자실하기까지 한 얼굴로 총을 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형, 안 쐈어…….”
"그렇군."
“그럼 난…….”
“넌 이제 자유다.”
아이릭이 그 총은 기념으로 네게 주겠다면서 손을 내저었다. 오르피어스의 얼굴이 그저 그의 목소리에 반응하여 올라왔다. 핏기가 빠진 하얀 얼굴은 경악과 당혹함과 아연함과 불신이 마구잡이로 뒤엉켜 오히려 아무 것도 담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내 밑에 있든 독립하여 나가든, 반기를 들든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어?”
"자유라고."
차분하게 반복해 주었지만 오르피어스는 그 말조차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눈썹만 깜빡였다. 언제 다가왔는지 지크하르트가 오르피어스의 등 뒤에서 슥 손을 내밀었다.
"각하. 실례지만 부탁 하나만 더 드려도 되겠습니까?”
"음? 뭐지?"
"이 꽉 깨무십시오."
지크하르트는 그대로 아이릭의 얼굴을 후려갈기고는 오르피어스의 손목을 낚아채듯이 잰 걸음으로 집무실 밖으로 사라졌다. 유안이 아이고 하는 비명을 지르면서 의자에서 나동그라진 아이릭을 허겁지겁 부축했다.
"이를 어째. 아이릭 님의 제일 큰 재산이 바로 얼굴인데!”
상황에 걸맞지 않은 호들갑에 소녀가 무심코 풋 웃고는 그만 제 풀에 새빨개져서 가이드의 등 뒤로 숨었다. 유안은 두 사람을 돌아보며 미소했다.
“이제 나가보셔도 됩니다. 비서가 안내할 테니 대기하고 있으세요. 두 분의 처우를 어떻게 할 것인지 자세한 건 나중에 연락하겠습니다.”
“……부디 선처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소녀의 임시 가이드는 정중하지만 비굴하지 않은 어조로 목례하고는 조용히 소녀를 도닥였다. 두 사람이 나가고 난 후에야 유안은 아이릭을 의자에 앉히며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입술 다 터졌는데요. 의무실에 전화할까요?"
대답하려던 그는 잠깐 우물거리며 혀를 굴리더니 피가 섞인 침을 재떨이에 뱉었다.
“당분간 열굴 비칠 행사도 예정에 없고 이도 안 빠졌으니 됐다.”
"안 아프세요?"
"아파."
“그래도 주먹 한 대라니 엄청 싸게 먹혔네요.”
아이릭은 통증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유안에게서 받은 손수건으로 피를 닦았다. 유안이 말끄러미 응시했다.
"실은요, 아이릭 님이 막내 도련님의 가이드로 카시야스 대령님을 지목하였을 때 굉장히 걱정했어요. 힐라리아 아가씨와는 다르게 막내 도련님은 직접적인 원수로 볼 수 있으니까요. 대령님이 막내 도련님을 방기하지 않고 가이드로서의 의무를 신실하게 이행할지 의심스럽기도 했고, 아이릭 님의 저의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두 분이 좋은 방향으로 잘 해결되신 것 같아서 다행이지만 도대체 어떤 생각이셨던 거예요? 단순히 카시야스 대령님을 벨포드의 센티넬로 엮어서 글래스팅에 붙잡을 요량이셨다면 8촌 조카 되는 알리시아 님이 그 무렵에 발현하셨잖아요."
"저의랄 게 뭐가 있나?”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이 그가 책상 옆에 선 유안을 올려다보았다.
"심증만 있을 뿐 증거는 없었지만 오르피어스의 가이드들에게 차례대로 스파이라는 누명을 씌운 건 십중팔구 힐라리아겠지. 그 애가 죽어서 오르피어스의 가이드도 죽지 않으리라 여겼는데 이번에는 자네트가 사고로 죽었고. 그래서 지크하르트를 붙여준 거다. 지크하르트라면 사고에도 죽지 않을 테고, 혹 자네트의 사고를 조작한 게 오르피어스였다 할지라도 지크하르트마저 죽이지는 않겠지. 그 녀석은 지크하르트를 아주 예전부터 좋아했으니까."
“……그 뿐이셨어요?"
“그 뿐이다만?”
명쾌하다고 해야 할지 단순하다고 해야 할지, 일 더하기 일은 이라는 수식만큼이나 깔끔하게 사람의 감정을 계산하여 배치한 아이릭의 수완에 새삼스럽게 더 놀랄 일이 있었던가 싶을 만큼 유안은 입을 벌렸다. 아이릭이 피가 묻은 손수건을 접어서 돌려주었다.
"녀석을 지켜준다고 약속했으니, 이행할 뿐이야.”
그래, 이 사람은 예전부터 약속 하나만큼은 우직하리만큼 칼 같이 지키는 사람이었다. 유안은 놀란 얼굴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저랑도 약속 하나만 해 주실래요?”
“말해 봐라.”
"카시야스 대령님에게 맞을 짓은 앞으로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여러 가지 의미로요.”
여러 가지 의미라는 말의 뜻이 심히 궁금하였으나 모처럼의 부탁이니 아이릭은 자신의 가이드에게 선선히 응했다.
잰 걸음은 복도로 나오자 달음박질이 되었다. 의아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틈을 지나 인적이 닿지 않는 비상계단까지 와서야 지크하르트는 발을 멈췄다. 붙잡힌 채 뛰어오느라 호흡이 가빠진 오르피어스의 볼이 발긋하게 붉었다.
그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지크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자유'라는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는 알고 있지만 그것이 자신의 것으로 명료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지크하르트. 내가 자유래."
“그래, 들었다.”
"자유라면 뭘 하면 되는 거야? 응?”
"뭐든지.”
"뭐든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그렇구나…….”
갑자기 힘이 풀렸는지 오르피어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지크하르트는 그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우려다, 자신도 그냥 옆에 앉아 버렸다. 오르피어스가 멍하니 혼잣말했다.
"자유라니, 모르겠어. 뭘 해야 되는지 뭘 하면 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지크하르트는 피식 웃으며 오르피어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린애처럼 머리를 만지는 게 습관이 되면 안 되는데 이렇게 쓰다듬어 줄 때의 그는 시선을 내리깔며 뺨을 물들이곤 하였기에 묘하게 손이 올라갔다.
"그렇게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부터가 넌 자유롭다는 거야.”
"……그런 거야?"
"당연하지. 급할 건 없으니 천천히 조금씩 생각해 보자.”
'생각해라'라 아닌 ‘생각해 보자’라는 말이 오르피어스를 조금 기쁘게 했다.
"이를 테면, 가장 큰 맥락 중의 하나로 네 거취 문제가 있겠지. 어떻게 하고 싶냐? 남고 싶겠다면 나도 이대로 있고, 떠나고 싶겠다면 나도 따라주마."
"그치만 넌 글래스팅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다며."
"어딜 가도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지 않겠냐. 정 뭣 하면 용병이 되는 선택지도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센티넬과 가이드 페어가 나란히 용병이 되고 싶다는데 거절할 부대는 없어."
오르피어스는 작게 감탄했다. 그렇구나. 자신은 이곳에서 군인의 신분을 유지할 수도 있고, 용병이라는 새 신분을 얻을 수도 있었다. 회사원으로서 일자리를 찾아볼 수도 있었고, 공부를 계속하겠다면 대학에도 갈 수 있었다. 그는 원하기만 한다면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었으며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었다. 그것이 자유였다.
"아까우니까 조금 더 생각해 볼래."
“시간이야 많으니까 생각은 느긋하게 해도 되지만 아깝다는 건 또 뭐야.”
“모르겠어. 그냥 굉장히 아까워. 지금 이 기분이."
지크하르트는 가볍게 웃고는, 그렇게 하라며 머리를 슥슥 헤집었다.
"그럼 보다 간단한 고민으로 가 볼까? 하고 싶었던 건 없냐?”
"하고 싶었던 거?”
그의 말을 받아 뇌며 오르피어스는 갸웃했다. 명령만을 따라 자신 앞에 강제로 놓인 길을 걸어갈 뿐 바람이라든가 염원 같은 희망을 꾼 적이 없는 그로서는 생소한 내용이었다. 지크하르트의 손이 자신의 정수리에 얹어져 있다는 것마저 잊을 만큼 깊이 생각하다, 슬쩍 눈을 올렸다.
"……난 이런 게 되게 부러웠어. 가족이나 연인들이 함께 식사하고 별 것 아닌 사소한 대화로 하루의 시간을 채우기도 하고, 투덕거리다가 화해하고, 하루의 긴 시간을 서로와 나누고……. 그런 평범한 게 좋았어."
"내가 좋아하는 게 바로 그거야."
지크하르트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너랑 처음으로 마음이 일치한 거 같다. 지루하고 평범한 게 최고지.”
“정말?”
반색하는 오르피어스에게 바짝 다가앉아 밀담이라도 전하듯 은밀히 속닥거렸다.
"야. 그럼 오늘 저녁에 장 보러 같이 갈래? 네가 먹고 싶어하는 거 다 만들어 주마."
"으응, 그건 좋은데……. 넌 솔직히 요리 못하는 것 같아. 맛없어."
"그럼 네가 만들어 보든가!”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주먹이 되어 오르피어스의 양쪽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오르피어스가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다.
"아파아! 넌 힘이 너무 세단 말이야!!"
"얄미운 주둥아리를 후려치지 않은 걸 감사히 여기라고!!"
티격태격하던 말싸움의 끝은 엉뚱하게 요리 대결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자기 손으로 물 한 번 끓여 본 적 없는 오르피어스였지만 지크하르트의 요리를 생각하니 근거 없는 자신감이 무럭무럭 피어올랐기에 흔쾌히 도전했다. 정 안 되면 나오미나 엘빈에게 요리 강습을 해 달라고 요청해도 될 것이다. 요리를 자주하는 건 아니나 아이릭도 먹을 만한 음식은 만드는 편이었지만 그가 좋은 선생이 될 것 같지는 않았기에 선택지에서 제외하였다.
"지는 사람은 무조건 소원 하나씩 들어주기로 한 거야. 나중에 발뺌하면 안 돼."
"넌 무슨 소원 말할 건데?”
“스타킹.”
“그건 좀 잊어!!”
이번에는 미리 대비하고 있었기에 오르피어스는 등짝을 후려 맞지 않고 재빠르게 몸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럼 네 소원은 뭐야?"
"네놈이 스타킹을 다 찢어버리는 거!”
지크하르트의 요리라면 맛이 있든 없든 잘 먹지만 이와는 별개로 이 승부에서는 반드시 이겨야겠다고 오르피어스는 새삼 결심을 굳혔다.
epilogue
「네. 퍼블입니다」
두어 번 만난 적 있던 하숙집 주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크루엘라의 하숙집과 통화가 연결되자 조제는 반사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오르피어스의 아파트 앞까지 데려다 준 크루엘라와 헤어지고 시간이 꽤 지났으니 귀가하고도 남았을 무렵이었고, 그녀가 절실히 필요하여 전화한 것이지만 막상 통화를 시도하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좋지…….’
조제는 얼굴을 감싸며 흐느꼈다. 불과 두 시간 전만 하여도 꿈만 같았던 달콤한 환상이 조각조각 부서지어 그녀의 발밑에 쏟아졌다. 깨진 조각의 파편들마다 오르피어스가 있었다. 난 왜 하필이면 그 시간에 네 아파트를 갔어야 했던 걸까. 전화로 만나자는 약속도 없이 불시에 찾아갔던 걸까. 청혼에 대한 대답 같은 건 늦어도 되었는데. 네가 좋아하는 요리 같은 건 꼭 지금 해 주지 않아도 되었는데.
처절한 배신이었다. 그럼에도 기만당하였다는 분노가 일지 않는 자신의 마음에 조제는 제일 절망하였다. 차라리 마음껏 미워하고 화를 낼 수 있다면 편할 텐데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단순히 그녀가 목도한 사실만으로 그에게 노여워하고 경멸하기엔 그를 잘 알았다. 오르피어스는 자신의 속내나 과거를 진솔하게 설명해 주는 이는 아니었지만 그녀에게는 5년이라는 시간이 있었다. 벨포드 가라는 이름자에 걸맞지 않게 그의 과거가 기이하게 뒤틀려 있다는 것도 어렴풋이 눈치를 챘다.
‘조제. 널 사랑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너라면 지금처럼 평생을 같이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엉망진창의 청혼이었다. 동시에 그녀는 그의 청혼에서 그의 안에 있는 그늘을 엿볼 수 있었다. ……그것이 이 같은 최악의 형태로 닥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였지만.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한참을 울던 조제는 마음을 굳혔다. 오르피어스와 결별하는 건 불가능 하였다. 그녀가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도망친다는 건 곧, 오르피어스의 죽음이었다. 천성이 선량한 조제는 이 배신의 대가로 그의 죽음을 바라는 독심을 품지도 못했다. 알지 못하였다면 모를까, 이제 와서 그를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증오하거나 용서할 만큼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방기하거나 외면할 만큼 마음이 가벼운 것도 아니었다.
‘미안해, 크루엘라. 난 이런 방법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어.’
손이 후들거려 제대로 편지를 쓸 수가 없었다. 조제는 타이프라이터를 두드려 친구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작성하고는 가까스로 자신의 서명을 하여 골목 어귀의 우체통에 편지를 부치고 돌아왔다. 그러고도 오랫동안 오르피어스에게 받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앉아 있었다.
***
“너와 길게 말 섞고 싶지 않으니까 용건이 있으면 빨리 끝내.”
크루엘라는 오르피어스를 노골적으로 외면하며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점심시간이지만 청사 건물 뒤편으로는 사람들이 잘 오가지 않아 바쁜 소요가 거짓말처럼 한적했다. 오르피어스는 자신과 엇비슷할 만큼 장신인 크루엘라와 키가 작아 크루엘라의 턱 밑이나 겨우 왔던 조제의 얼굴을 가만히 떠올렸다.
“조제는…… 그날 나를 찾아왔다면 봤을 거야. 그걸 보고 자살했다고 생각해……. 나 때문에 죽은 게 맞아. 모든 게 내 잘못이야.”
제일 듣고 싶지 않지만 죽음의 이유를 알고자 한다면 들을 수밖에 없는 사람의 입에서 친구의 이름이 언급되자 크루엘라는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크게 동요하였다. 세게 경직된 턱이 파르르 경련했다.
"조제가 봤다는 게 뭐지?"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서 그건 말할 수 없어."
“장난해?!"
참지 못한 크루엘라가 난폭하게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가 처분을 기다리는 것처럼 저항 없이 눈만 감은 오르피어스를 보고는 신경질적으로 내팽개쳤다. 오르피어스는 꽉 조였던 목을 어루만지며 눈을 내리깔았다.
“왜 자살하였는지는 모르겠어. 무척이나 나를 경멸하게 되었을 텐데, 그럴 바에는 죽지 말고 날 죽이러 왔으면 좋았을걸. 조제는 세상에서 제일 손쉽게 나를 죽일 수 있었잖아…….”
“사람을 죽이는 감각이 마비된 우리와는 달라! 조제를 살인자로 만들지 마.”
"……하지만 조제가 죽는 건 바라지 않았어. 그때도 지금도."
울분을 삭이려는 듯 씨근덕거리던 크루엘라가 탈력한 숨을 길게 토했다.
"조제가 목격한 게 널 경멸하고 혐오할 만한 일이었나?”
“응…….”
"네 청혼을 받아들이지도 못할 만큼?”
아래로 푹 꺼진 오르피어스의 고개 위로 크루엘라의 침중한 음성이 떨어졌다.
“자살하고 이틀인가 지났을 때에 그 애가 보낸 편지를 받은 게 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오르피어스는 멈칫하여 크루엘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를 외면하고 있었다.
“널 사랑하긴 하지만 모든 걸 포용할 만큼 사랑한 건 아니라고 하더군. 하지만 그렇다고 널 증오하거나 죽길 바라지는 않는다고 쓰여 있었다. 네가 죽는 건 원하지 않고 널 사랑하는 것도 사실이니까 내가 선택할 게 이것뿐이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 널 사랑하는데 죽다니! 난 이 편지를 너나 다른 사람이 악질적으로 위조했다고까지 생각했어. 그런데…….”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탄식한 크루엘라는 가늘게 떨리는 오르피어스의 시선과 마주 하고는 욕설을 씹으며 고개를 돌렸다.
오르피어스는 자신이 그녀에게 할 수 있는 말을 찾지 못했다. 자신에게 조제의 자살이 무거웠듯, 그녀가 보낸 지난 세월도 매한가지였다.
“……미안해.”
"나한테 미안해하지 마. 조제에게 사과해, 개자식아.“
그녀는 그대로 등을 돌려 오르피어스를 남겨 두고 사라졌다.
오르피어스는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벽에 등을 기댔다. 지지대가 닿자마자 등은 그대로 스르륵 아래로 미끄러졌다. 세운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묻은 채 웅크렸다.
먼발치에서 흐리게 건너오던 점심시간의 활기가 점차 사라지고 사방은 조용해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웅크리기만 한 그의 옆에 누군가가 털썩 엉덩이를 붙였다. 탁, 탁 성냥에 불을 붙이는 소리가 났다. 침묵이 느리게 물결쳤다.
“……조제가 날 싫어해서 죽은 게 아니래. 바보 같이……. 그때 난, 죽어도 상관없었는데. 나 같은 것 보다는 조제가 살아있는 게 훨씬 가치가 있었을 거야.”
“조제 씨는 너에게 이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았을 거다.”
“그치만…….”
지크하르트가 그의 어깨에 팔을 둘러 가까이 당겼다. 그대로 이끌려온 오르피어스는 풀썩 쓰러지듯이 기댔다.
"넌 누나가 왜 자살했는지 안 궁금해?"
"글쎄다. 안 궁금하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렇지만 힐라리아가 나에게 숨기고 싶어했으니 그녀의 비밀을 억지로 들춰내서 까발리고 싶지는 않아. 생전에 나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건 날 신뢰하지 못했다는 거잖아."
오르피어스의 어깨를 안은 손으로 토닥토닥 어루만지며 지크하르트는 담배 연기를 길게 뿜었다.
"하지만 넌 나에게 이야기해 줬으면 좋겠어.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모든 걸."
말없이 지크하르트의 허리를 안고는 목덜미에 이마를 부볐다. 지크하르트의 심장 소리가 닿을 듯이 가까이에 울렸다. 자신의 심장 소리와 섞이어 엇박자로 나아가다 이윽고 완전히 하나로 겹치는 순간이 좋았다. 그가 준, 자신의 것이었다.
“근데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안 그래도 이따 찾아가려고 했었는데.”
"소령에게 들었다."
“그렇구나…….”
그의 말을 곱씹는 것처럼 가만히 침묵하다, 몸을 떼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오르피어스가 무척 좋아하는 자색의 눈동자가 마주보며 부드럽게 휘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정했어. 그냥, 이대로 남아 있을래. 지금 하고 있는 일 자체를 치 떨리도록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도 나쁘지 않고 한가한 여가 시간도 많아서 나쁘지 않아."
“네가 한가한 건 일을 안 하기 때문이야.”
단호한 지크하르트의 부정을 못 들은 척하며 오르피어스는 내처 말을 이었다.
"제일 중요한 이유는 뭔지 알아? 네가 제복 입고 있는 모습이 제일 섹시해."
"……중요한 문제를 그렇게 얼렁뚱땅 결정해도 되는 거냐?”
"나에겐 엄청나게 중요한 이유라구.”
꽤 진심이 섞인 어조로 심각하게 지크하르트를 보고는, 속에 품은 말을 하자니 시선을 마주하는 게 괜스레 무색하여 그를 끌어안아 얼굴을 파묻었다.
"있지, 지크하르트."
“음?”
"널 좋아해서 정말 다행이야. 난 이제까지 나 자신을 좋아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널 좋아하는 나라면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아."
지크하르트는 품에 안긴 오르피어스를 내려다보고는 실소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어렵게 하냐."
그리고 담뱃불을 바닥에 비벼 끄고, 오르피어스의 정수리에 키스를 떨어트렸다. 머리칼에 머무는 촉감이 간지러워 오르피어스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