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대개의 사건이 그러하듯, 균열의 시초는 아주 사소한 틈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힐라리아는 눈이 보이지 않는 대신 다른 감각이, 특히 청각이 아주 예민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사람의 내밀한 감정을 파악하는데 능한 센티넬이었다. 이 조건에 어렸을 때부터 한결같이 믿고 의지하였던 아이릭이 겹치면 그녀는 감정의 고저가 격하지 않은 아이릭의 짤막한 몇 마디 음성만으로도 그의 기분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무사히 첫 아이를 순산한 국왕 베아트리체 2세가 전 장병을 독려차 전장을 시찰한 건 억지스럽지도,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전쟁의 승패가 오시안의 승리로 거의 확실시되고 있을 무렵이라는 때늦은 방문이기는 하였으나 국왕이 임신 중이었음을 고려하면 시기도 적절하였다.
국왕을 영접하기 위하여 총독을 비롯한 몇몇 장성과 자리할 때만 하여도 힐라리아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궁중 귀족이나 중앙의 사교계에는 전혀 흥미가 없어 리벡에 한 번도 걸음하지 않은 그녀는 국왕을 알현하는 것도 금번이 처음이었으나 이 역시 특별한 의의가 있지는 않았다. 힐라리아에게 있어서 니베이아 베아트리체 키르허라는 여자는 아이릭과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그녀를 옹립하기 위한 내전에서 아이릭이 그녀의 편에 섰다라는 사실뿐이었다.
전날 포로들을 심문하느라 철야하였던 그녀는 이 따분한 행사가 끝나면 책을 읽어주는 지크하르트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을 자야겠다는 생각만으로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아이릭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 국왕의 손등에 키스하며 인사하기 직전까지는.
국왕은 노고를 치하하고 아이릭은 왕의 성은이라 겸허히 응대했다. 하품이 나올 정도로 정석적이고 지루한 절차가 힐라리아의 귀에 들어오자 표변하였다.
「……」
아이릭의 음성에, 희미하지만 선연한 열기가 있었다.
쿠데타를 성공하고 체스터를 제거하여도, 총독으로 임명 받아도, 록사나가 태어나도, 그 어떠한 상황에 맞닥뜨려도 흉부 안쪽에서 올라오는 격한 흥분이나 격정을 드러낸 적 없던 아이릭의 음성에 발긋한 색채가 덧씌워졌다.
「어머나, 벨포드 공의 아우들이 모두 전장에 출진하였다니. 벨포드의 충정이 참으로 기뻐. 이 기회에 공의 누이를 소개해 주지 않겠어? 공의 다른 아우들은 모두 면식이 있는데 누이는 처음인걸」
한가한 사적인 담화로 넘어가 몇 마디 나누던 국왕이 불현듯 힐라리아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음성 또한 아이릭과 비슷한 색채의 열기를 띄고 있었다.
힐라리아는 경련이 일어나려는 양손을 꾹 쥐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힐라리아 벨포드입니다. 소녀의 일신이 자유롭지 못하여 무례함을 해량하여주십시오」
「무례라니, 천만에. 그대의 이야기는 벨포드 공으로부터 많이 들었단다. 그 상흔은 충분히 자랑스러워해도 돼」
눈을 자해하였다는 사실도 미리 들어 알고 있는 듯한 어조였다. 흔들리는 마음을 억지로 다잡으며 그녀와 몇 마디 대화한 힐라리아는 기이한 이질감을 느꼈다. 그것의 정체가 그녀에게 표출하는 우월감과 여유임을 깨달은 것은, 센티넬이 아닌 여자로서의 직감이었다.
그녀는 아이릭의 앞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정말 필사적으로 그 자리를 버텼다. 오직 자존심과 오기 하나만으로 모든 행사를 끝낸 힐라리아는 처소에 돌아오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5분 정도 늦게 돌아온 지크하르트가 문가에 망연자실하게 주저앉아 있는 그녀를 보고는 크게 놀라 부축하였다.
사열식을 위해 오랜만에 입은 정복을 갈아입지도 못한 지크하르트에게 안긴 채 그녀는 자신의 안에서 시커먼 입을 벌리기 시작한 의심에 와들와들 떨었다. 지크하르트는 언제나 그러하듯이 이유를 캐묻지 않고 잠자코 그녀를 내도록 안으며 달래주었다. 그가 그녀의 가이드인지라 정서적인 안정을 찾을 수 있다는 현상보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그의 태도가 더욱 그녀를 안정하게 해 주었다. 그의 위로를 받으며 그녀의 안에 똬리를 틀기 시작한 의심의 한 조각이라도 내비치기 시작하였다면 걷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크하르트는 어설픈 위로를 하지 않았으며, 힐라리아는 간신히 모든 의혹과 직감을 억누르고 단단히 매조지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감춰둘 수 있게 되었다.
일제키아 공화국과의 전쟁은 오시안 왕국의 승리로 종전되었다.
헤임으로 돌아와 벨포드 저와 총독부도 평상시의 위치와 모습을 되찾고, 전쟁이 남긴 상흔이 어느 정도 가시고 난 후에야 힐라리아는 유안을 호출했다.
「말해. 오빠와 국왕이 무슨 관계지?」
그녀의 다그침에 유안은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웃으면서 ‘보시는 바와 같이 모범적인 군신 관계이시죠.’라는 대답을 하였으나 힐라리아는 그녀의 물음과 유안의 대답 사이를 일순간 가른 싸늘한 경직을 놓치지 않았다. 힐라리아는 유안의 어깨를 잡아 자신에게 바짝 당겼다.
「허튼 수작하지 말고 이실직고해. 나는 너를 죽일 작정으로 온 거니까」
아이릭에게 서슴없이 목숨을 바치는 나오미에게 협박은 통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아이릭의 가이드로서 반드시 생존해야 하는 유안에게는 협박이 통한다. 그렇기에 그를 호출했다. 그녀가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은 유안은 한참을 침묵했다.
「……지금은 관계가 정리되신 것으로 알지만 즉위하시기 전까지는……」
「전까지는?」
「정부, 이셨습니다」
직감으로 막연히 추측하던 것과 명확한 사실로서 듣게 된 진실의 충격은 감도가 달랐다. 힐라리아는 흉부에 묵직한 돌덩이가 얹히는 것 같은 감각 속에 가슴을 쥐어뜯었다. 아이릭에게 여자가 있었느냐 없었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아이릭이 그녀에게 비밀을 갖고 있었다. 그녀를 경악에 빠트린 건 그것이었다.
「언제부터?」
「……」
「오빠와 국왕의 관계가 언제부터였냐고!!」
아이릭이 공공연히 국왕과의 관계를 알린 적은 없었지만 리벡에 그를 배행하였던 그의 아우들이나 페인 남매는 은연중에 눈치를 챘고, 곧잘 아이릭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오르피어스가 총대를 메고 질문하여 시원한 수긍을 얻었다. 아이릭은 힐라리아에게 함구하라는 명령은 하지 않았지만, 그가 먼저 그녀에게 알리지도 않았기에 네 사람은 암묵적으로 침묵에 동의했다. 동시에 사실을 알게 될 힐라리아의 이 같은 반응을 염려하였으나 국왕과 관계가 끝난 지금에 와서 불거질 줄은 예상하지 못하였다. 유안은 그녀 자신이 어떠한 표정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를 힐라리아를 안타깝게 내려다보았다.
「체스터 님이 돌아가시기 전부터였습니다」
「……」
적어도 10년 전에 형성된 관계였다. 혼자 있었다면 그녀는 힘없이 주저앉았을 것이다.
힐라리아는 거칠게 치미는 격앙을 턱이 바르르 떨릴 만큼 아득 깨물어 억누르며 유안을 강제로 내보냈다. 유안이 내쫓기듯 나가고도 오랫동안 감정을 삭이지 못하던 그녀는 결국 머리로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비틀비틀 아이릭을 찾아갔다.
서재에 않아서 두 시간쯤 기다렸을 때 아이릭이 돌아왔다. 그녀가 좋아하는 다과를 손수 가지고 온 아이릭이 테이블에 늘어놓으며 말했다.
「유안에게 이야기는 들었다만 일부러 너에게 비밀을 만든 건 아니다. 나뿐만이 아니라 니베이아 님께도 누가 될 수 있는 일이기에 구태여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던 거야. 유안에게도 내가 말한 게 아니라 녀석이 날 따라다니다 보니 알아챘던 거고」
아이릭이 그답지 않게 긴 말로 그녀를 달랬다.
여기까지라면 해프닝으로 종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 힐라리아는 어렸을 때부터 모든 것을 공유하였던 오빠가 자신에게 비밀을 하나 만들었음에 충격 받았을지언정 이가 그녀를 따돌리려는 고의가 아니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아이릭은 그녀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리벡에서 니베이아 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렇게 네 앞에 있지도 않았겠군」
「……무슨 말이야, 오빠?」
아이릭은 그녀와 자신의 찻잔에 나란히 차를 따르며 여상히 응대했다.
「니베이아 님이 아니었다면 내가 구태여 아버지를 축출하지 않았을 거란 뜻이다. 아버지는 1왕녀를 지지하셨고, 나에게는 힘이 필요했으니까」
힐라리아는 그녀가 앉은 자리에서 아득히 추락하는 감각을 느꼈다.
「설마, 처음부터 국왕을 옹립하기 위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거야……?」
「음. 아버지가 신뢰하는 자식은 나 하나뿐이었으니 가만히 있어도 언젠가는 내가 종주가 되었을 테지만, 아버지는 정정하셨고 순리를 따르기에는 시간이 없었지」
「……정말, 그뿐이야? 그것 하나 때문에 아버지를 죽인 거야?」
「이 외의 이유가 필요한가?」
떨리는 목소리로 재차 묻는 그녀에게 아이릭이 오히려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갸웃했다.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은 그녀의 찻잔 앞에 아이릭이 반 정도 마신 자신의 찻잔을 놓으며 나른하게 소파에 등을 기대어 앉는 기척이 났다.
「오빠……」
숨 막히는 소리로 힐라리아가 그를 불렀다. 그녀의 음성은, 언어라기보다는 오히려 가느다란 헐떡임에 가까웠다.
「오빠. 복수가, 아니야? 어머니가 아버지의 손에 죽어서, 내 눈이 이렇게 되어서, 우리 집안이 엉망이 되어서, 오빠와 내 인생을 망쳐서, 아버지 때문에 모든 게 망가져서, 복수하려고 아버지를 배신한 게 아니었어? 어머니와 날 위해, 아버지를 죽인 게 아니었어……? 응?」
「복수? 내가? 아버지에게?」
아이릭이 굉장히 생경한 것을 접하는 것처럼 서툴게 입 안에서 단어를 되풀이하였다.
「전혀. 의외의 소리를 하는군. 난 아버지에게 유감도 원망도 없다만」
그는 그러며, 마지막 쇄기를 무심히 박았다.
「네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구나, 힐라리아」
경련하는 손을 더듬거려 느슨히 긴장을 풀고 있는 아이릭의 손을 맞잡았다. 능력을 발현하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의 정신을 넘나들어도 오롯한 신뢰와 애정을 다한 아이릭의 정신에만은 난입하지 않았던 그녀가 그의 머리에서 최초로 읽어낸 것은, 아이릭의 말이 진심이라는 사실과 그녀를 보는 그의 눈이었다.
힐라리아 벨포드.
하나. 나의 누이.
하나. ‘넌 오빠니까 힐라리아를 지켜야 한단다.’ 어머니가 부여한 의무.
하나. 센티넬로서의 유용성.
??그것이 전부였다.
힐라리아는 자신의 세계가 그녀와 함께 붕괴되는 것을 느꼈다.
국왕은 오르피어스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글래스팅의 입장에서는 본의든 타의든 공공연히 국왕을 시해하려한 현행범을 바로 자유의 몸이 되게 할 수는 없었다. 아이릭은 우선 오르피어스를 구금하라 명령하였고 센티넬의 치료가 끝나자마자 오르피어스는 체포되었다. 아이릭이 오르피어스를 이대로 버릴 리는 없으니 국왕과 자세한 이야기가 끝나면 적당한 시기에 석방하리라 판단하였으므로 체포 자체는 큰 걱정을 하지 않았지만, 문제는 오르피어스였다. 두통을 호소하며 고통스럽게 몸을 뒤트는 그의 모습은 결코 연기나 과장이 아니었다. 센티넬의 치료로 상처가 아닌 병증을 완화하는 건 불가하기에 더 이상 손을 쓸 도리 없이 오르피어스는 구금되었다. 그의 상세가 심상치 않아 지크하르트도 같은 수감실에 들어갔다.
“대령님. 일이 있으시면 편하게 불러주십시오.”
오르피어스가 갇힌 흉내만 내다가 석방될 정황이기도 하였거니와 군사들에게는 두루 명망이 있는 지크하르트이기에 헌병은 허리를 굽혀 인사한 후 정중히 문을 닫아 잠갔다. 지크하르트는 몇 년 전 이맘때에 소위의 신분으로 잠깐 갇혔던 수감실 ― 그때와 동일한 수감실은 아닐 테지만 ― 을 휘둘러보고는 벽에 붙은 철제 침대에 웅크린 오르피어스의 옆에 앉았다.
차라리 아이릭의 힘에 의해 늑골이 부서지고 폐를 찢었을 때에는 그럭저럭 이지가 남아 있었는데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의 의식은 두통에 점령되어 점차 혼몽해졌다. 머리를 감싸 안은 채 힘겨운 숨을 몰아쉬는 그는 이곳이 어디인지도 뚜렷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병원에 입원하거나 제대로 진찰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닐까. 지크하르트는 신열로 뜨거운 그의 이마를 물에 적신 수건으로 닦으며 걱정스레 내려다보았다.
타의에 의하여 반년 동안 어둠에 갇혔던 기억이 힐라리아의 '명령'과 함께 서서히 부상하였다.
죽여. 죽여. 죽이려무나. 니베이아 베아트리체 키르허를 죽여. 며칠 전부터 그의 머리를 내려치며 두통을 유발하였던 흉기가 비로소 명확한 언어로 형성되어 그를 지배하였다. 니베이아 베아트리체 키르허를 죽여. 잊지 마, 오르피어스. 네가 해야 할 일을.
힐라리아의 호출이 있어 구관에 발을 들이긴 하였으나 문턱을 넘기 전부터 오르피어스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사용인들이 청소와 단장을 거르지 않는다고 하여도 거의 십년 간 거주한 적이 없는 구관은 깔끔하게 정리된 폐허나 다름없었다.
그를 더욱 언짢게 하였던 건 힐라리아가 호출한 곳이 구관의 다른 방도 아닌 체스터의 서재라는 점이었다. 서재 앞에서 서성이던 오르피어스는 힐라리아의 용건이 무엇이든 10분 안에 끝내고 나갈 것이라는 다짐을 굳히며 문을 열었다.
체스터 사후, 시간 속에 고립된 양 서재는 변한 흔적이 없었다. 서가의 책들과 서류들만이 아이릭의 서재로 옮겨지고 가구도 기물도 장식도 벽지도 바닥재도 세월의 흐름이 약간 스미었을 뿐 모두 10년 전과 매한가지였다. 체스터는 책상 앞에 오연히 앉아, 어린 그를 눈짓만으로 가까이 부르곤 하였다.
진땀이 등줄기를 또륵또륵 굴렀다. 커다란 손이 심장을 움켜쥐고 호흡기를 틀어막은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오르피어스는 문간을 넘기가 무섭게 주춤거리는 발을 물려 돌아나가고자 하였지만 힐라리아가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후였다.
「들어와」
냉랭한 명령은 체스터의 것과도 아이릭의 것과도 닮아 있었다. 오르피어스는 떨리는 뒷손으로 서재의 문을 닫았다. 창틀에 비스듬히 앉은 힐라리아가 손짓했다.
「가까이 와. 도망치려 하지 말고」
그녀의 앞으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세상이 휘청거리며 흔들렸다. 힐라리아가 두 명으로도 보였고, 세 명으로도 보였다.
「……용건은 빨리 끝내줘」
「넌 기억도 하지 못할 테니 걱정하지 마」
옅은 비웃음이 힐라리아의 코끝에 남았다. 평시에 그녀가 피부를 접촉하였으면 오르피어스는 의도를 깨닫고 정신을 흐트러트리지 않으려 노력했을 테지만 과거의 기억으로 현재의 감각이 뒤집힌 그에게 평정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했다. 힐라리아가 손을 맞잡았을 때도 그는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언제나 네가 부러웠어. 질투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고」
붉은 손자국이 남을 만큼 그의 손을 움켜쥔 힐라리아가 낮게 말했다.
「아버지의 아래에 얌전히 있었으면 내 안에 이런 추한 감정이 있었다는 걸 자각하지 않았을 텐데 넌 왜 오빠의 눈에 들었니? 왜 오빠의 개가 된 거니? 왜 오빠가 가장 쓸모 있어 하는 개가 되었어? 나는, 누구라도 오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가까이에 있는 누이라는 이유만으로 먼저 맡은 것일 뿐인데 넌 아니잖아. 오빠가 정말로 '널' 필요로 하잖아. 기어이 잠자리에서까지……. 사생아 주제에. 그대로 두었으면 아버지에게 비참하게 죽었을 사생아 따위가……!」
손톱이 까득까득 살갗을 파고들었다. 오르피어스는 무어라 말을 하려 입술을 열었지만 가늘게 열린 입술에서는 헐떡거림만이 튀어나왔을 뿐이었다. 가쁜 호흡은 힐라리아의 입술에서도 흘렀다. 잠시 가슴 위를 주먹으로 문대며 호흡을 다스리던 힐라리아가 재차 입술을 열었을 때 날카롭게 치솟았던 노성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꺼지고, 그녀는 잿빛으로 젖은 음성을 무기력하게 중얼거렸다.
「……됐어. 이젠 모든 게 다 의미가 없으니까. 처음부터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어, 어리석은 계집 같으니……. 오빠는 내 모든 것이었는데 오빠에게 난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어. 그럼 오빠에게 헌신하였던 내 마음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내 평생의 시간은 모두 어디에 있는 거야?」
힐라리아는 중얼거림의 끝에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트렸는데, 그 웃음은 바람이 빠지는 풍선보다 더 빠르고 맥없이 꺾였다.
「오빠를 무너트리려고, 아버지에게 그러하였던 것처럼 오빠를 무너트리려고 손을 썼지만, 모르겠네. 그 멍청한 왕후가 제대로 일을 처리할 것 같지는 않아. 하지만 그 여자만은 죽여야겠어. 오빠의 안에 있는 유일한 것을 멸살할거야. 아하, 그래. 이게 바로 복수로구나. 잘 봐. 오빠가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복수야, 오빠」
힐라리아의 의자가 그의 뇌리에 파고들었다. 오랜 옛날, 그의 아버지가 가장 깊숙한 곳에 그의 정신을 주무르고 녹이고 조각하여 만든 지배라는 이름의 영역에 그녀는 훔친 열쇠로 활짝 열어젖혔다. 죽여. 명령이 떨어졌다. 죽여. 죽이려무나. 니베이아 베아트리체 키르허를 죽여. 오빠가 살아 있으면 합동훈련을 친감할 테고, 오빠가 죽으면 장례에 위문을 올 테니, 죽여. 니베이아 베아트리체 키르허를 본 순간 죽여. 오빠의 눈앞에서, 오빠의 관 앞에서 니베이아 베아트리체 키르허를 죽여.
니베이아 베아트리체 키르허를 죽여.
니베이아 베아트리체 키르허를 죽여.
니베이아 베아트리체 키르허를 죽여.
명령이, 그를 지배했다. 힐라리아가 만들어진 조상처럼 건조한 웃음을 터트렸다.
「넌 참으로 딱하구나? 열 살짜리 꼬마를 어떻게 살인으로 내돌렸나 싶었더니 죄책감을 거세한 거였어? 아하하. 좋아, 오르피어스. 누나가 동생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을 줄게. 내 명령이 최후의 문이란다. 넌 니베이아 베아트리체 키르허를 죽이고자 하면 아버지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될 거야. 그러니 마음껏 괴로워하렴. 네가 오빠와 아버지의 밑에서 무엇을 했는지, 네가 그토록 사랑하는 지크하르트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국왕시해범으로 처형당하기 직전까지의 그 짧은 시간을, 고통에 몸부림치고 마음껏 절망하도록 하려무나」
힐라리아의 창백한 손이 그를 밀쳤다. 휘청거리며 몇 걸음 물러난 오르피어스의 희미하게 감기는 눈동자에 창틀에 앉은 그대로 몸을 뒤로 젖히는 누이의 얼굴이 보였다.
「오르피어스. 난 네가 정말 싫어」
누이의 백색 드레스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나풀거리는 광경이 그의 의식이 암흑으로 꺼지기 전 최후로 담은 영상이었다.
두 시간 후, 구관을 청소하기 위하여 왔던 시녀의 비명을 시발로 벨포드 저택은 경악에 물들었다. 체스터의 서재로 쓰던 방의 창문이 열려 있음을 제일 먼저 확인한 엘빈이 달려와 바닥에 쓰러진 채 기절한 그를 발견하고 몰래 신관으로 데려올 때까지 오르피어스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해가 지고 난 후에야 깨어날 수 있었던 오르피어스가 최후로 기억하는 장면은 힐라리아의 호출을 받고 서재의 문을 여는 순간까지였다. 아이릭은 오르피어스가 정황상 힐라리아와 같은 방에 있었다고 신중하게 고하는 엘빈의 말을 듣고, 의혹이 번지기 전에 힐라리아를 빠르게 자살로 처리하여 장례식을 올렸다.
그리고 오르피어스는, 힐라리아의 명령을 이행하였다.
***
"……누나?“
거의 의식도 없이 내도록 앓기만 하던 오르피어스가 불현듯 새된 신음을 흘렸다. 병열로 뜨거운 손이 더듬거리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지크하르트의 팔을 붙잡았다.
“누나……. 누나였어. 누나가, 나를…….”
“음? 그래, 알았으니까 좀 쉬어.”
열에 들떠 헛소리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지크하르트는 대수롭지 않게 다독거렸으나 오르피어스는 붙잡은 손을 완강하게 놓지 않았다.
“누나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아. 죽이라고……. 죽였는데, 아니, 진짜 죽었나? 죽은 걸까? 모르겠어, 지크하르트. 나는, 나는…….”
진땀에 젖은 손이 그의 어깨를 안으며 바싹 당겼다. 가까워진 오르피어스의 호흡만큼이나 그의 손바닥이 뜨거운 것에 지크하르트는 놀랐다. 열이 많이 심한데 해열주사를 맞지 않아도 괜찮은 건가. 고통스럽게 찡그린 오르피어스의 숨결이 그의 입술 언저리를 헤맸다.
"지크하르트……. 누나 목소리 좀 지워줘. 누나가 날 정말 싫어한대. 너도 날 싫어하니? 나도 누나를 싫어했어. 누나는 언제나 당당하고 거리낄 것도 없고 널 가졌고. 왜 죽이라고 한 걸까. 복수? 형 애인이라서? 그치만 몇 년 전에 이미 헤어졌는걸. 누나가 난 괴로워하래. 목소리가 아파. 너무 아파.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조리 없는 단어의 토막들을 늘어놓는 오르피어스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이며 갑자기 힐라리아가 왜 언급되고 있는 건지 지크하르트는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오르피어스에게 괴로워하라고 하였다던 힐라리아의 바람 하나는 이루어진 것 같았다.
전 약혼녀이자 센티넬이기도 하였던 그녀가 동생을 이토록 저주한 발언이 아직까지도 그에게 깊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음이 착잡했다. 급한 대로 약이라도 먹이고 재워야 할 것 같아 헌병을 부르려 했는데, 오르피어스가 그의 목을 안으며 입을 맞췄다. 힘겹게 파고드는 혀와 숨결마저도 뜨거운 병열이 휘몰았다.
"지크하르트, 아파……. 목소리를 지워줘. 누나를 지워줘I. 안아줘……. 응?”
“그, 저기…….”
지크하르트는 당혹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를 괴롭히고 있는 듯한 힐라리아의 목소리를 지워달라는 요청의 씁쓸함과 헛소리를 할 만큼 열이 오른 두통을 호소하는 그에 대한 걱정과, 철문으로 가로막혀 있다지만 다른 곳도 아닌 수감실에서 안아달라고 청하는 현실적인 당황함이었다.
"약 달라고 할 테니까, 약부터 먹자.”
일단 진정시키는 게 우선일 것 같아 달랬지만 오르피어스는 더욱 그를 붙들었다. 등허리에 팔을 두르고 당기는 통에 완고하게 뿌리치지 못하고 침대 위에 엎어진 지크하르트에게 오르피어스가 애원했다.
“네가 안아주면 목소리가 지워질 것 같아. 제발, 부탁이야. 미안해. 미안해…….”
“…….”
매달리기만 했다면 모를까 사과까지 하면서 부탁하니 지크하르트도 도리가 없었다. 가이드를 같은 방에 들여보냈다는 건 어느 정도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기는 하였을 테지만……. 굳게 닫힌 철문을 흘금 보고는 되도록 소리라도 적게 새어나길 빌며 오르피어스에게 입을 맞췄다.
“……으읏, 여름눈.”
평소와 같은 정사라면 마주 호응하며 애무하였을 오르피어스는 한껏 인상을 찌푸리며 이마를 누르고만 있었다. 발긋한 열꽃이 핀 피부가 뜨거웠다. 센티넬이 급한 치료는 하였으나 늑골이 부러지며 생긴 시커먼 멍이 가시지 않은 가슴팍을 더듬고, 드러난 맨 어깨에 입술을 눌렀다. 오히려 그의 체온이 시원하게 느껴지는지 오르피어스가 탈력한 숨을 흘렸다.
허벅지에 눌린 성기는 벌써 반쯤 발기해 있었다. 오르피어스의 상세도 종지 않았거니와 수감실 안에서 느긋하게 몸을 겹치는 건 여러 문제가 있었기에 지크하르트는 그의 하의를 바로 벗겼다. 차가운 공기에 맨몸이 노출되자 오르피어스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아, 참."
지크하르트는 중요하다면 중요한 문제를 발견했다.
"밑에 바를 거 있냐?"
“……으응?”
물에 적신 솜처럼 전신을 누르는 열과 두통에 더하여 나른하게 번지는 쾌감으로 반쯤 의식을 이성의 건너편에 두고 있던 오르피어스가 한 호흡 늦게 반문했다.
"기름, 같은 거.”
말로 하자니 머쓱하여 짧게 끊었다. 오르피어스는 별거 아니라는 투로 느릿하게 말했다.
“찢어져도 괜찮아. 그냥 해 줘.”
"……머리 아프다고 끙끙거리는 놈이 무서운 소리를 태평하게 하시는구만.“
일일이 밖을 통하지 않으면 치료할 수단도 마땅치 않은 곳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지크하르트는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그는 정말, 자신의 몸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구석이 있었다. 스스로가 일회용으로 사용하고 버리는 휴지나 기물이라도 된 양 상처나 부상을 하찮게 취급했다.
“음…….”
오르피어스의 다리 사이를 내려다보며 지크하르트는 중대한 결심을 하였다.
감각이 무너져 가는 와중이라 필연적으로 섹스가 필요한 상황이 아닌데 그에게 요구하였던 것이기에 재촉하지도 못하고 두통을 억누르고만 있던 오르피어스는 허리가 둥글게 굽혀지자 삽입의 층격을 대비하였지만 그의 등허리를 후려갈긴 건 묵직하게 진입하는 성기가 아니라 축축하고 말캉한 살덩이였다. 자신이 느낀 감각을 불신하며 감고 있던 눈을 뜬 오르피어스는 순간 아픔마저 잊을 정도로 놀랐다.
“하, 하지 마! 그런 거……!”
“가만히 좀 있어 봐.”
지크하르트가 잠깐 입술을 때며 중얼거렸다. 예민한 회음부에 호흡과 숨결이 함께 달아 오르피어스는 자지러졌다. "잠깐만! 잠깐만!" 난생처음 겪는 직접적인 애무에 당황한 오르피어스의 바르작거림을 무시하며 지크하르트는 혀를 다시 움직였다. 혀를 뾰족하게 세워 촘촘한 주름의 결을 하나하나 더듬듯이 핥다, 꽉 맞물린 구멍으로 깊이 찔러 넣었다.
“흐아, 앗!”
지나치게 놀란 나머지 지크하르트의 머리를 잡고 밀어내리기라도 할 기세였던 오르피어스의 양손은 바르르 경련 하더니 아래로 떨어졌다. 그의 모습을 보니 뒤늦은 깨달음이 있어 일단 고개를 들었다.
"오르피어스."
"으, 어?"
“괜찮으니까 싫다면 싫다고 말해. 네가 싫어하는 건 억지로 안 한다.”
짓궂게 놀리는 물음이 아니었다. 엠마의 정보가 맞다면 그는 아이릭과 수년간 동침 중이었고, 아이릭의 명령에는 절대복종하는 그가 거부를 표출할 수 있었을 리가 만무했다. 때문에 무엇이든 참고 견디는 것에 익숙해진 것이리라.
오르피어스의 눈동자가 커지는가 싶더니 양손으로 가려졌다. 가뜩이나 열이 올라 발긋하던 얼굴이 붉은색 물감을 끼얹은 양 시뻘겠다.
"너무 차, 창피해."
“알았어. 천천히 하지, 뭐.”
지크하르트는 끄덕끄덕하고는 자신의 손가락에 침을 묻혀 구멍 안으로 천천히 밀어 넣었다. 대경실색하여 가빠졌던 오르피어스의 숨소리가 이젠 다른 의미로 가빠지기 시작했다. 충분히 공을 들여 안쪽을 넓힌 지크하르트가 마른 입술을 핥으며 자신의 성기로 입구를 문질렀다. 들썩거리는 오르피어스의 가슴팍만큼이나 가쁘게 개폐하던 항문이 크게 열리며 지크하르트의 것을 삼켜 갔다.
“하아…….”
뿌리 끝까지 삽입하고 오르피어스를 내려다보았다. 양 팔 안에 갇힌 오르피어스가 화끈거리는 얼굴을 어떻게 해야 할지 주체를 못하다 무작정 그의 팔뚝을 붙잡았다. 시간적으로 긴 공백이 있었던 게 아닌데 지난번의 정사는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던 오르피어스와 하였던지라 솔직하게 쾌감을 표시하는 오르피어스의 얼굴을 보는 건 퍽 오랜만인 기분이 들었다.
"힘들면 말해라."
입술을 꼭 감쳐문 턱이 아래위로 끄덕였다. 귀두부터 뿌리 끝까지 촘촘히 조이며 당기는 내벽의 감촉을 잠시 누리던 지크하르트는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몸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신중히 움직였음에도 오르피어스는 힘겹게 신음하다 기침을 쿨럭였다. 늑골이 부러지면서 폐를 찢었던 중상에서 회복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역시, 정사는 무리였나.
고민하다가 오르피어스의 허리를 가까이 당겨 안은 채 그도 앉아 벽에 등을 기대였다. 허리 위에 걸터앉는 체위가 된 탓에 삽입이 깊어지자 오르피어스가 신음을 높이며 그의 어깨에 손톱을 세웠다.
상체에 무게가 실리지 않아 부담은 덜한 것 같았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아흣, 아!! 지크하르, 트……! 아, 하악!!”
좁은 수감실 안에 오르피어스의 교성이 메아리쳤다. 지크하르트는 상체에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감은 오르피어스를 안은 채 허리짓하는 와중에도 얼굴을 붉혔다. 수감실 밖으로도 분명히 새어나갔을 것이다. 밖에는, 헌병들이 있고. 조용히 해달라는 말 대신 키스로 입을 막았지만 호흡이 불안정해지자 오르피어스는 또 기침을 했다.
도리 없이 지크하르트는 자신만이라도 이를 악물거나 오르피어스의 어깨며 목덜미에 입술을 누르며 신음을 참았다. 그래도, 오르피어스와의 정사는 기분이 좋다. 지크하르트는 눈앞에 보이는 자신의 이름에 이를 박으며 유두까지 깨물었다. 쾌감에 녹아내린 오르피어스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울먹였다.
내빈관에서 국왕 부처를 연기하던 시종들의 역할은 끝났다. 그곳부터는 이제 진짜 국왕 부처의 역할이었다. 시기가 좋지 않기에 첫날의 일정은 개막식을 제외하면 조촐하고 빠르게 치러졌다. 모든 일정을 소화하고 내빈관으로 다시 돌아온 니베이아는 꽃잎을 띄운 따스한 물로 씻으며 바쁘게 오가느라 혹사당한 발을 부드럽게 지압하는 족욕까지 끝낸 후에야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내실로 나왔다. 긴장한 신경을 이완하게 한다는 향초가 은은한 향기를 사방에 엷게 번지게 했다. 엔조는 내빈관으로 돌아왔을 때의 모습 그대로 앉아 있었다. 오늘 내도록 니베이아에게 끌려 다니면서 탈혼이라도 한 것처럼 무기력하게 휘청거리던 그의 얼굴에는 이제 절망이 자리했다. 저런, 니베이아는 부러 혀를 찼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담량 없는 사내 같으니.
"이제 말해 봐요."
니베이아는 모든 시종을 물리며 남편의 앞에 앉았다. 시종이 마지막으로 준비해 두고 간 로열 밀크티를 마시며 대답 없는 엔조에게 다시 한 번 말했다.
"당신을 배려하여 벨포드 공도 청하지 않았어요. 물론 정 내키지 않으면 침묵해도 좋아요. 대신 내가 직접 사람을 지휘하여 진실을 밝혔을 때의 결과도 알고 있겠죠?"
부드러우나 매서운 강압에 엔조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빠르든 늦든 그가 거쳐야 할 일이었다.
“니베이아 님. 믿어 주십시오……. 정말 당신을 해하려 한 건 아니었습니다. 전, 저는…… 어디까지나 벨포드 공을…….”
"내부 협력자는 누구죠?“
후들거리는 목소리가 애걸하듯 그녀의 발밑에 굴종하였으나 니베이아는 어디까지나 사무적으로만 재차 질문했다. 그녀는 남편을 잘 알았다. 내부에 확실히 조력을 약속한 협력자 없이 이 남자가 이렇게 큰일을 벌였을 리는 없었기에 넘겨짚은 추측이었다. 엔조는 저항하지 못하고 자백했다.
“힐라리아…… 힐라리아 벨포드였습니다.”
"벨포드 공의 죽은 누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의 이름에 니베이아는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녀가 듣기로 힐라리아가 죽은 건 반년 전이다. 허면 반년 전에 얻은 정보를 왜 이제 와서 행하였단 말인가. 엔조는 사시나무 떨듯이 부들거리면서도 토설했다.
모든 계획안은 힐라리아가 수립하였다. 무고한 사람을 수십 명씩 희생하는 계획을 엔조는 반대하였지만 힐라리아는 이가 잔인한 만큼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며 선대 벨포드 공의 선례를 들었다. 합동군사훈련이 있을 시기로 날짜를 정한 것도 그녀였다. 엔조는 반쯤은 비현실적인 감각 속에서 그녀의 인도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밀크티를 홀짝이며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니베이아가 느닷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됐어요, 됐어. 이유는 내가 알 것 같네요. 힐라리아의 목표는 처음부터 벨포드 공이 아닌 나였고, 당신은 철저히 이용당한 거예요. 벨포드 공이 생존하면 생존한 대로 합동훈련 친견을 위해 헤임을 방문했을 테고, 암살당하면 암살당한 대로 위문하기 위하여 방문했을 테니.”
국왕을 시해하기 위하여 처음부터 이용당하였다는 말에 더 이상 몰릴 곳이 없으리라 여겼던 엔조의 머리 위로 더 커다란 충격이 떨어졌다.
"당신, 음모를 꾸미는 건 좋은데 누군가와 손을 잡으려면 그 사람에 대하여 확실히 조사를 했었어야죠. 힐라리아 벨포드는 아버지를 극히 증오하던 사람인데 그녀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오빠를 죽인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녀가 왜 눈이 멀게 되었는지는 딱히 비밀도 아니니 조금만 더 신중하게 조사하였으면 알게 되었을 것을……. 후후. 하지만 제 오라비의 죽음마저 날 죽이기 위해 이용하다니 정말 체스터 벨포드의 딸이자 아이릭 벨포드의 누이답군요. 맹랑한 계집 같으니. 그게 그렇게 원망스러웠니? 감히 날 죽이려 들 만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낮게 웃던 그녀는 이윽고 엔조에게 화살을 돌렸다.
"그럼 이제 당신 차례네요. 당신은 벨포드 공을 왜 죽이려 한 거죠?"
준엄한 힐책이 궁지에 몰릴 대로 몰린 엔조를 쪼았다. 아연하게 더듬거리기만 하던 엔조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어차피 모든 게 끝났다. 이용당하였든 능동적으로 행하였든 그는 국왕 시해미수범이었고, 니베이아는 자신에게 거역한 사람을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그리고 엔조 자신에게도, 이유는 있었다.
“저도…… 저도 모르는 척 인내하며 참고 견디려 했었습니다! 하지만 친자식도 아닌 간부의 자식을 내 자식인 양 사랑하며 키운다는 건 아버지로서도 남자로서도 무리였어요. 더 이상은 저도 힘들어서 견딜 수가 없었단 말입니다!”
“간부의 자식?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당신?”
"십수 년 전부터 아이릭 벨포드를 정부로 두지 않으셨습니까?! 당신이 낳은 두 아이도, 모두 벨포드 공의 자식이잖습니까!!"
결혼한 후 수년 동안 가슴 안에 감추어 홀로 키워왔던 의심을 가장 최악의 국면에서 가장 최악의 형태로 폭로한 엔조는 숨까지 거칠게 헐떡거렸다. 방심하고 있던 정곡을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한참을 굳어 있던 니베이아의 입가에 희미한 경련이 일더니, 이내 요란한 폭소가 되었다. 의자째 뒤로 넘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신명나게 박장대소하는 그녀의 앞에서 이를 조롱이라고 여긴 엔조의 낯은 치욕으로 부들거렸다.
간신히 웃음을 가라앉힌 니베이아는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훔쳤다.
"아하하하하!! 이제야 알겠네. 내도록 궁금했거든요. 당신이 왜 얼굴만 반반할 뿐이지 아무것도 갖지 못한 내 막냇동생과 통정하여 자식까지 몰래 낳았는지 영문을 알지 못했지 뭐예요. 아하, 당신 얼굴 또 창백해졌네. 생각하는 그대로 겉으로 훤히 드러나는 얼굴이라 재미있어. 애써 변명은 하지 말아요. 이유가 궁금해서 어디까지 추락하나 지켜보려 말을 안 했을 뿐이지 증거는 다 내 손에 있으니까.
당신 말이 맞아요. 내가 하잘것없는 일개 왕녀에 불과하였을 때부터 나와 벨포드 공은 관계가 있었죠. 우리는 정치적인 이해타산도 일치했지만, 흐응, 당신이 먼저 화제를 꺼냈으니 이 정도 얘기는 괜찮겠죠?"
니베이아가 문득 야릇하게 눈웃음을 쳤다. 그녀가 머리칼을 쓸어넘기려 손을 움직이자 평소에는 장갑에 덮여 잘 보이지 않는 손목에 오래된 자해 흉터가 드러났다. 생명에 지장은 가지 않을 정도로 그은, 엷은 상처였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침대에서 난폭하게 다뤄지는 걸 좋아해요. 그리고 벨포드 공은 상당히 난폭한 남자죠. 뭐, 보다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속궁합이 기가 막히게 잘 맞았다는 거예요. 당신과 결혼한 후에도 그와 관계를 지속하였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어요. 리벡까지 오는 경우가 드물었으니 자주 만난 건 아니지만. 그런데 말이에요…….”
엔조를 더 할 나위 없이 비참하게 만든 니베이아의 말은 아직도 끝난 게 아니었다.
"벨포드 공을 유혹하여 손잡을 때 이런 말을 했어요. 내가 왕이 되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창녀를 안게 해 주겠노라고. 당연히 그 약속을 지킬 셈이었지만, 즉위식 전날 밤에 그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
"자신이 왕으로 만든 나를 안아서 왕이 아닌 한낱 여자로 떨어트리기 싫대요. 애초에 우리가 손잡았던 계약이 나를 왕위에 올리는 것이었으니 여기까지면 되었다고. 그 정도로 고지식한 남자에게 뭘 어쩌겠어요. 관계는 그날 끝났죠.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
“내 두 아이는, 왕세녀와 왕자는 둘 다 당신의 자식이에요.”
“…….”
새하얗게 핏기를 잃은 낯을 굳힌 엔조에게 니베이아는 그의 찻잔을 밀어 주었다.
"가여운 남자. 당신에게 책임을 묻지도, 이혼하지도 않겠어요. 아이들에게는 아빠가 필요하고, 무엇보다 당신과 이혼하면 종실들이 결혼하라고 아우성인 언니의 외가쪽 조카와 재혼해야 하거든요. 그 남자와 결혼하면 죽은 언니에게 집어삼켜지는 격이 되니 끔찍하죠. 차는 식기 전에 들어요."
조용한 명령에 엔조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올려 찻잔의 손잡이를 잡았지만 잡기가 무섭게 찻잔은 쉴 새 없이 달그락거리며 찻잔받침에 부딪혔다. 그것을 지켜보다, 니베이아는 일어났다.
"당신의 오해도 불식했으니 돌아가면 화해도 할 겸 우리 셋째나 만들어요. 당신의 '지금' 셋째 아이는 앞으로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테니."
엔조가 말뜻을 뒤늦게 이해하고 허겁지겁 그녀를 찾았을 무렵에는 이미 그녀의 뒷모습까지 사라진 후였다.
옆방으로 들어간 니베이아는 짓궂게 미소했다.
"다 들었을 테니 설명은 필요 없겠지?"
양 손을 깍지 낀 채로 무념히 앉아 있던 아이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힐라리아가 왜 니베이아 님을 죽이려고 했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당신은 설명해 줘도 모를 거야. 사람의 마음은, 특히나 여자의 마음은 아주 복잡하고 섬세하거든. 정 궁금하면 유안 페인에게 저간의 사정을 설명해 봐. 당신이 이해하기 쉽게 해석해 줄 거니까."
“그렇습니까.”
그녀의 설명 아닌 설명에 아이릭은 더 묻지 않았다.
"참 나. 어이가 없어서, 원!"
니베이아는 남편의 앞에서는 굳이 드러내지 않았던 짜증과 빈정거림을 표출하며 신경질적으로 방 안을 서성거렸다.
"시부도, 시형도, 시누도, 저이의 가족은 어디 한 군데 뒤처지는 면이 없는데 어째서 저이만 저렇게 아둔하고 생각이 짧지? 내 막냇동생이, 그 요악한 것이 어째서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를 유혹하여 아이까지 몰래 낳았는지 머리로 추론이라는 것을 못하는 걸까? 당신이 내 정부였다는 걸 누가 알려주었을까? 당연히 내 동생이겠지! 보나마나 뻔해. 정부가 있는데 자식이 친자식일 것 같으냐고 그 요설로 살살 부추겨서 의심을 키운 거지. 내 최대 지지자인 당신이 죽고 나면 그 다음에는 내 차례야. 그럼 그때에는 '친자식'을 위해 자기를 도우라며 내 등에 직접 칼을 꽂게 했을 걸. 멍청하긴!!”
"그래서 엔조 뒤아르와 결혼하신 게 아니었습니까?”
묵묵히 침묵하며 듣기만 하던 아이릭의 한마디에 니베이아는 서성이던 걸음을 멈추더니 실소했다.
"맞아. 그만한 재력을 지닌 집안에서도 의외이리만큼 소박하고 순진해서 결혼한 남자였지. 뇌까지 순진할 줄은 예상 밖이었지만."
허탈한 웃음을 흘린 니베이아는 디방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왕세녀가 저 사람 머리를 닮으면 어떻게 하지? 역시 당신 아이를 낳을 걸 그랬나봐."
아이릭이 의아해하였다.
"저에게 아이를 낳아주실 수는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응, 그랬어. 나는 왕이 될 몸이고 내가 낳는 아이는 곧 왕의 아이니, 당신에게 모든 건 줄 수 있지만 아이만은 줄 수 없다고, 그러니 내가 주지 못하는 아이를 다른 여자에게 받는 건 용납하지 않겠노라고 했었어."
"정확히 말하자면 이번에는 자해가 아니라 진짜 자살을 할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땐 나도 어렸지……. 그 말을 들은 당신이 정말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 가문을 이을 후계자를 동생에게서 받아 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니까?"
“네?”
의문을 감추지 못하는 그에게 니베이아가 웃음인지 한탄인지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말했잖아. 여심은 복잡하고 섬세하다고. 당신이 나와의 아이를 갖고 싶다고 간곡히 부탁하기를 기다리고 있었거든. 위험하지만 당신에게 몰래 자식 하나는 낳아줄 수 있다고, 당신에게 그만한 가치는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때는 이 정도로까지 고지식한 남자일 줄은 상상도 못했어. ……뭐, 이제는 다 지난 일이지만."
니베이아는 표정을 풀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목소리를 고치며 정중히 그를 보았다.
"아무튼 이번 일은 정말 미안해. 주모자라고 해야 할지, 이용당했다고 해야 할지, 배후자는 내 남편이지만 그와 헤어질 수는 없어. 대신에 크리스티나를 넘길 테니 당신의 동생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것과 갈음할 수 있을까?”
수년 만에 밝혀진 그녀의 진심이 다소 놀라웠으나, 말처럼 과거의 일이다. 잠깐 니베이아와 자신의 자식을 상상해 보았던 아이릭은 곧 상념을 접으며 그녀의 제안에 응하였다.
중앙과 남부 글래스팅 성의 합동군사훈련이 무사히 끝났을 무렵, 글래스팅에서 발생하였던 일련의 사건의 배후가 왕매 크리스티나 로미아 임이 밝혀져 세상은 또 한 번 뒤집혔다. 본래 글래스팅에서 신변을 이수하여야했으나 그녀의 신분을 고려하여 중앙에서 시행된 판결로 크리스티나는 서작(敍爵)당하고 일평생 유폐되었다. 수년 후, 글래스팅의 사건이 대중의 인식에서 잊힐 즈음 그녀의 사생아로 알려진 소년이 어린 나이에 병사하였고, 크리스티나가 아들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다음날 밤 숨겨두었던 독으로 음독자살함으로써 사건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넌 항상 신중해야 한단다. 공연히 아버지의 눈에 들지 않도록 늘 한 번 생각한 후 주의 깊게 행동하도록 해. 평범한 사람들의 언행을 흉내 내고 너 자신을 감추도록 해야 해. 네가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니지만, 네가 저 자신을 드러내도 해를 입지 않을 때까지 조용히 숨죽이고 힘을 기르렴」
어머니는 그를 꾸중하거나 탓하는 대신 살아남을 방법을 나직이 타일렀다. 그가 일평생 나아가는 길의 지침이 된 건 어머니의 충고였다.
또한 어머니는 오빠인 네가 동생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고, 실지 그녀도 남편의 광기로부터 자식을을 지키고자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아이릭에게는 노상 숨죽이라고 충고하였지만 정작 그녀는, 그녀의 딸에게도 이어진 불같이 격렬한 성정을 고스란히 내비쳤다. 하지만 그녀는 결과적으로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남편의 손에 죽음으로써, 단단히 진저리가 난 남편이 한동안 자식들에게 눈도 두지 않게끔 하였다. 하여 그는 어머니의 보호에서 갑자기 벗어나게 되어도 보편적인 생활양식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할 수 있는 기간을 갖게 되었고, 누이도 아버지만 보면 발악하듯 원망을 쏟아 부었지만 센티넬로 발현하기 전까지는 무시당했다. 어머니는 최후까지 그와 누이를 보호한 것이다.
떼문에 아이릭은 어머니의 죽음에 큰 유감이 없었다. 그는 어머니를 보편적인 의미에서 존경하고 사랑했다. 자식을 지키겠다는 목적을 달성한 죽음이었으니 자신이 노여워하거나 애통해 할 여지는 없다고 여겼다. 그렇기에 어머니의 죽음과 복수를 들먹이는 힐라리아가 이해되지 않았다.
“……힐라리아 아가씨였어요?"
유안이 아연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하긴, 아가씨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낌새가 이상하긴 했습니다. 만약 아가씨가 살아계셨더라면 의심하였을 텐데 돌아가신 지 반년이나 되어서 염두에 두시 않았던 것을…….”
그와는 다르게 유안은 힐라리아의 행동을 이해하는 듯하였기에 아이릭은 물었다.
"힐라리아는 왜 나도 아닌 니베이아 님을 죽이려 하였을까? 짚이는 건 그때 했덧 이야기뿐인데 이유는 여전히 모르겠다. 별다른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만."
그는 힐라리아가 니베이아를 사이에 두고 자신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생각나는 대로 차분히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유안의 입술이 가늘게 벌려졌다.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다 끝내 장탄식하는 기색이 심상치 않아, 아이릭의 미간은 마뜩찮게 찌푸려졌다.
"니베이아 님이 네게 물으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줄 거라고 하셨는데, 너도 어려우냐? 그 아이가 어머니의 복수를 원했다면 직접 행동에 옮기면 되었을 것을."
유안은 말없이 아이릭을 바라보았다.
「이 아이게게 보편적인 행동 양식을 알려주렴. 너희가 일평생 이 아이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단다」
선대 공의 부인은 타계하기 전 나오미, 유안과 엘빈에게 부탁하였다. 벨포드가에 종속된 페인 가와 레드필드 가의 후계자인 세 사람은 아이릭과 나이가 비슷한 또래이자, 큰 이변이 없는 한 차대 벨포드 종주가 될 그를 섬길 종이었다.
당시에는 유안도 어렸기 때문에 그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그보다 머리가 굵은 나오미와 엘빈은 얼추 상황을 파악했다. 아이들의 눈으로 보기에도, 아이릭에게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협화음이 느껴졌었다.
아이릭은 누구나 당연히 여기어 의심하지 않는 질문을 아이들에게 하였다. 세 아이는 머리를 맞대어 자신들이 가진 도덕적인 잣대와 사회적인 통념에 기반을 둔 설명을 해 주었고, 그래도 아이릭이 받아들이지 못하면 나오미의 언니나 아버지, 또는 엘빈의 어머니에게 물어 상세한 답변을 전해 주었다.
아이릭이 아이들의 조악한 설명을 모두 이해하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애완견과 놀다가 짖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목뼈를 부러트려 죽이는 대신에, 자신이 자리를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본보기가 되어달라고 당부하였던 부인의 말뜻은 몇 년이 지나 좀 더 자란 후에야 알게 되었다. 이이릭은 그의 지식으로 대처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면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는 세 사람의 행적을 되짚어 비슷한 상황을 상기한 후 지신도 이를 흉내 내었다.
천성적으로 감정이 크게 격하지 않고 욕망도 미미한 그엿기에 타인의 흉내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자신이 아닌 타인을 투영하여 행동을 결정짓는 건 이미 그 때에 아이릭의 근간을 형성하였다.
아이릭은 아버지에게는 신뢰할 수 있는 순종적인 아들이, 어머니에게는 누이를 지켜주는 듬직한 아들이, 힐라리아에게는 그녀를 아끼며 사랑하는 오바가, 나오미와 엘빈에게는 목숨을 바칠 가치가 있는 주인이 되었다. 그의 근간을 눈치챈 건 세 사람 중에서도 유안뿐이었다. 하여 유안을 아이릭에게 바람을 갖지 않았고, 아이릭은 오직 유안의 앞에서만 벨포드의 종주도, 글래스팅의 총독도, 자식도, 오빠도, 주인도 아닌 오롯한 아이릭 자신으로만 있게 되었다.
니베이아가 아이릭의 이 같은 본정을 파악하고 있는지는, 국왕을 사사로이 배알할 위치가 아닌 유안으로서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대문에 그는 힐라리아는 아이릭의 쿠데타에 도우며 그의 복수에 조력하였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라든가, 어머니가 눈앞에서 살해되는 건 평생 지울 수 없을 고통이라든가, 아이릭 본인이 아닌 정부였던 니베이아를 죽여 더욱 처절한 복수를 하려 하였다든가 같은 세세한 설명 대신, 그저 한마디만을 하였다.
"힐라리아 아가씨가 아이릭 님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스스로를 버릴 만큼 아주 많이요."
아이릭이 침음했다.
“……어렵군."
"사람의 마음이 다 그래요. 뒤집으면 아주 간단하기도 하지만요."
유안은 집짓 표정을 풀며 빙그레 미소하였다. 아이릭은 여전히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내년, 그 아이의 기일에 무덤에 찾아가면 싫어할까?"
"아이릭 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싫어할 것 같아."
"그럼 그렇게 받아들이셔도 됩니다. 사람의 마음에 정답을 없어요."
"그런가…….”
사회와 사람의 양식과 감정에서 비롯된 교감과 공감을 거론할 때의 그는 어린 아이보다 서툴다. 그가 홀고 생각할 수 있도록 유안은 조용히 문을 답으며 서재를 물러났다. 서재의 문이 살그머니 닫히는 소리가 나자 비로소, 길지 않은 시간 격하게 치달았던 사건이 마무리되었음을 실감하였다.
아니, 아주 긴 시간이었다. 체스터로부터 시작된 커다란 비극이 이제야 막을 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완전한 종막이 아닌 건 오르피어스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유안은 그 방법을 강구하며 걸음을 뗐다.
정사가 끝나자마자 기진맥진 잠이 들어 죽은 것처럼 늘어져 있던 오르피어스가 깨어나는지 부스럭거리는 기척이 들렸다. 지크하르트는 맥주병을 입에 물고 잡지를 슬렁슬렁 넘기다 뒤를 돌아보았다.
"깼냐?"
눈썹을 깜빡이며 지크하르트를 보기도 하고, 이마를 매만지기도 하고, 깨끗이 닦여 옷이 입혀진 자신의 몸을 만져 보기도 하던 오르피어스가 낮게 침음하며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네 앞에서 절대 정신 해이해지면 안 될 것 같아. 지난번에도 그렇고 이게 무슨…….”
"뭘. 너 술 마셨을 때는 오늘보다 더했어."
"토한 것 때문에?”
"그전에. 울었던 기억은 전혀 안 나냐?”
오르피어스의 울 것 같은 목소리가 이불 안에서 웅얼웅얼 들렸다.
"……그거 꿈 아냐?”
"나도 꿈이었으면 좋겠다, 인마."
“……미치겠네…….”
일반 사병들이 수감되는 영창이 아닌 장교 이상이 수감되는 장소였지만 본래 일인용의 수감실이다. 좁은 침대인지라 어디로 피해도 매한가지지만 오르피어스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꿈질꿈질 움직여서 벽에 최대한 바싹 붙었다.
"절대 술 안 마실 거야.”
“마셔도 돼. 무슨 꼴을 봐도 내 몸에 오바이트한 것보다 더한 꼴은 없을 테니까. 그건 그렇고…….”
지크하르트는 두어 모금 남은 맥주병을 기울여 단번에 마시고는 빈병을 안주 겸 저녁으로 먹던 빵 바구니 옆에 내려놓았다.
"머리는 이제 괜찮냐?”
이불로 푹 쌓인 고개로 추정되는 부위가 아래위로 흔들렸다.
“응. 누나 목소리도 안 들리고 이제 안 아파. 고마워."
"배고플 텐데 내려와서 뭐라도 들어."
오르피어스의 몫으로 남겨 두었던 과일 주스를 컵에 쪼르륵 따랐다. 오르피어스는 크게 생각이 있지는 않았지만 지크하르트가 권하니 일단은 슬금슬금 이불에서 빠져 나왔다. 빵과 파이 등이 담긴 소박한 바구니를 사이에 두고 지크하르트와 나란히 바닥에 앉아 침대에 등을 붙였다.
"여기는 배식이 이렇게 나와?"
"아니. 너 자고 있을 때 페인 중령이 들렀다가 사식이랑 잡지 같은 거 넣어주고 갔다. 심심할 테니까 이거라도 보라면서."
외부 유입물이 엄격히 통제되는 헌병대 구치소였기에 아이릭이 이런 사소한 일에 권력을 쓸 사람은 아닌지라 의아해하였던 오르피어스의 의문은 곧 해결되었다.
“범인은 밝혀졌지만 바깥 쪽 눈치도 있고 내부 사정도 있으니까 합동훈련 끝날 때까지만 여기에 있으면 된다고 하더군. 대신에 필요한 건 최대한 차입해 줄 테니 불편한 건 말하라고 했고.”
"범인이 누구래?"
지크하르트가 조금 목소리를 낮췄다.
"왕매라던데."
선왕은 3명의 딸과 2명의 아들을 보았고, 개중에서 현왕의 여동생은 한 명 뿐이다. 오르피어스로서는 전혀 예상 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크리스티나 로미아 전하? 그 사람이 도대체 왜 형을 죽이려고 한 거래?"
"나도 모르지.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 다 밝혀지고 해결됐으니 잘 끝난 거지, 뭐."
여전히 자신 이외의 상황에 별 흥미가 없는 투로 지크하르트가 으쓱했다. 오르피어스도 동조하며 주억거렸다. 야심만만한 언니들과 오빠를 보며 자란 막내 왕녀가 국가 전복을 꾀한 건지, 아이릭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세부적인 사항은 윗선이 밝혀줄 것이다. 그래, 잘 해결되었다. 레베카의 원수도 찾았으니 정당한 심판을 받으리라.
레베카를 떠올리자 기분이 저조해진 오르피어스는 말없이 입을 다물고 깨작깨작 빵을 찢어 먹었다. 지크하르트도 억지로 말을 붙이지 않고 새 맥주병을 들고 홀짝이며 잡지를 넘겼다.
"……지크하르트. 너도 합동훈련 끝날 때까지 여기 갇혀 있어야 해?”
"음. 잘됐지. 안 그래도 일에 파묻혀 죽을 지경이었는데 강제 휴가 받은 셈 치면 돼,
"갇혀 있는 동안 월급에서도 까이잖아.”
"난 돈 적게 받고 일 적게 하는 게 좋아."
“그렇지만 답답하기도 할 거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기에 마찬가지로 성의 없이 대꾸하던 지크하르트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호밀빵 하나를 겨우 먹을까 말까 한 오르피어스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음, 그게, 그러니까…….”
오르피어스가 연방 헛기침하면서 말을 골랐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얼추 짐작은 갔다. 정신 나갔을 때는 잘만 얘기하더니 맨정신으로는 왜 못하는 걸까.
그의 입에서 ‘미안해.’라는 말이 겨우겨우 나오기 직전에 지크하르트는 짐짓 하품하며 팔을 머리 위로 쭉 켰다.
"피곤하기도 하고 할 일도 없으니 잠이나 잘 건데, 넌?"
"어, 어? 으응……. 나도 잘래."
"방금까지 자다가 일어난 녀석이 또 자? 배는 안 고프냐?"
"눈 감으면 잠 올 거야.”
지크하르트는 그러라며 끄덕이고는 남은 바구니와 맥주를 구석으로 정리해서 밀어 놓고 불을 껐다. 유안에게 같이 받았던 침낭을 주섬주섬 피자 오르피어스가 정색했다.
"내가 밑에서 잘게. 침대는 네가 올라가."
“아픈 놈을 맨바닥에 어떻게 재우냐.”
"나 이제 안 아파.”
끝까지 우기는 그를 무시하고 침낭에 누우려니 숫제 마구 흔들어댔다.
"침대에서 자라니까."
"아 좀! 아파 죽겠다고 엉엉 울던 놈이 갑자기 왜 이래?"
적나라한 발언에 뺨을 붉혔지만 오르피어스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티격태격 의미 없는 말싸움이 이어지고 지크하르트는 두 손을 올렸다.
"그럼 침대에서 같이 자자. 됐냐?”
“아, 안 돼! 저번에 말했잖아. 내가 널 덮칠 거 같다구!”
"아니, 그건 제발 참아다오.”
오르피어스를 닦지도 못한 채 방치할 수가 없어 쪽팔림을 무릅쓰고 헌병에게 몸을 닦을 새 물과 새 수건을 청하였던 지크하르트는 분명히 밖으로 새어나갔을 소리라든가, 환기가 되지 않아 퀴퀴하게 젖은 냄새와 열기라든가, 급한 대로 알몸에 이불만 덮어 놓은 오르피어스 모습 등등에서 훤히 눈치를 챘을 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을 떠다 준 헌병의 태도가 더 민망했다. 이 쪽팔림을 또 겪는 건 절대 사양이었다. 하지만 지크하르트를 침대에서 편하게 재우겠다는 오르피어스의 고집은 더 셌다. 설마 방금 전에 해 놓고 또 흥분하지는 않을 것이란 긍정적인 사고를 하며 완력에서 밀리는 오르피어스를 막무가내로 침대에 쑤셔 넣고 자신도 올라갔다.
장정 두 명의 무게가 실린 좁은 침대가 삐걱거렸다. 자신이 발버둥을 치면 지크하르트가 짤없이 침대 밖으로 굴러 떨어진다는 걸 깨달은 오르피어스는 겨우 몸부림을 멈췄다. 등을 돌려 눕기도, 바로 눕기도, 상당히 어정정한 넓이여서 이리저리 뒤척이던 지크하르트는 편한 자세를 찾아 오르피어스의 뒷목에 팔을 밀어 넣어 팔베개를 하게 해 주고는 뻣뻣한 냉동 참치 같은 그를 당겨 안았다. 겨우 침대에 공간이 생겼다.
"이렇게 자도 괜찮겠지?"
“아, 아, 아, 안 괜찮거든?!”
"괜찮다는 뜻이군."
태평하게 중얼거리고는 눈을 감았다. 자신을 안은 지크하르트의 존재감만으로도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은 그와는 달리 지크하르트는 이내 곤한 수마에 젖었다. 오르피어스는 숨을 꽉 눌러 죽인 채 꼼짝도 못하다가 새벽녘에야 간신히 잠이 들었다.
***
“가슴이라니까.”
“다리야.”
“가슴이라고.”
"다리."
가슴과 다리만을 말하는 유치한 공박이 오갔다. 지크하르트는 손에 들고 있던 잡지의 한 페이지를 탁탁 두드렸다. 남성의 은밀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목적의 잡지에는 헐벗은 여성들이 뇌쇄적이고도 고혹적인 포즈로 종이 건너편의 독자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여기도 가슴을 도드라지게 하는 포즈가 많잖아. 여자 몸매를 볼 때는 가슴이 최고라니까."
“아니야. 다리래두.”
바닥에 앉은 채 침대에 등을 기댄 지크하르트의 어깨에 턱을 괸 오르피어스가 종알거렸다.
"같이 자고난 다음날 아침에 막 일어났을 때, 어슴푸레하게 비치는 아침 햇살 받으면서 여자가 허리를 굽히고 발 받침대에 발을 올려놓은 채 스타킹을 신을 때 드러나는 다리의 곡선이 얼마나 육감적이고 섹시한데. 가슴 아래로 살짝 접힌 뱃살로부터 허벅지와 종아리로 떨어지는 곡선의 윤곽이 끝내줘."
"……그, 그래?"
여자에게 큰 관심이 없어서 엠마와 힐라리아를 제외하고는 경험이 적은 지크하르트는 묘하게 납득되었다. 그런 가, 그래. 그렇군. 머릿속으로 불특정한 얼굴을 가진 여자의 육감적인 몸매를 그리며 오르피어스가 실감 나게 말한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듣다 보니 좋은 것 같기도 한데.
"있지, 지크하르트."
턱을 괸 채 엎드리고 있던 오르피어스가 늘어트린 팔로 잡지를 가리켰다.
"저 여자 가터벨트랑 스타킹 예쁘지 않아?"
"뭐, 섹시하네. 이 여자들이야 이게 직업이니까.”
"네가 입으면 더 섹시할 거 같아.”
지크하르트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여겼기에 여상하게 되물었다.
"뭐라고 했냐?”
"넌 키도 크고 다리도 길고 늘씬하잖아. 스타킹 한 번만 신어 보면 안 될까?"
“미쳤냐!!"
자신의 청각이 정상적임을 확인하자마자 잡지를 둘둘 말아 헛소리를 시부렁거리는 놈의 머리통을 냅다 후려 갈겼다. 오르피어스가 머리를 감쌌다.
"아파아!"
"인마! 아프라고 때렸지 간지러우라고 때렸겠냐! 넌 대체 뭘 생각하고 있길래 나한테 스타킹을 신기겠다는 망언을 하는 거야?!”
"가터벨트랑 스타킹 한 번 신어 보는 게 뭐 어때서!”
"그렇게 신고 싶으면 너나 신어!"
"난 네 다리를 보고 싶은 거지 내 다리를 보고 싶은 게 아니란 말이야. 다리털은 내가 밀어줄 테니까. 응?”
"안 해!!"
"지크하르트으~~"
“안 한다고!!”
수감실 안을 짜랑짜랑하게 울린 지크하르트의 기가 막힌 외침을 꺾은 건 배식시간이 아님에도 묵직하게 열리는 문이었다.
"두 분 싸우고 계셨어요?"
이틀만에 만나는 유안이 문가에서 인사했다. 오르피어스가 입술을 뾰족하게 모았다.
“지크하르트가 스타킹 신기 싫대.”
“야!!!”
“저런, 딱하게도……. 저라도 대신 신어드려요?”
"싫어."
대번에 방금까지의 지크하르트와 같은 얼굴이 된 오르피어스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유안은 실소하고는 손짓했다.
"아무튼 나오세요. 오늘로 합동훈련도 끝났고 두 분도 석방하시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요 며칠 제일 기다렸던 소식에 지크하르트는 반색하며 일어났다. 훈련이야 크루엘라가 연대장 대리로써 수행하였지만 급한 일은 닉이 구치소까지 가지고 오느라 마냥 일을 안 하고 쉰다는 느낌도 안 들었거니와, 며칠 내내 좁은 방에 갇혀 있자니 좀이 쑤셨다. 유일한 말상대인 오르피어스는 원기 회복을 하자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었다.
"이 자식한테서 드디어 해방이야!"
"집에 가면 또 만나시잖아요."
유안이 정확한 사실을 지적해 주었지만 지크하르트는 듣지 못한 척했다. 오르피어스는 못내 미련이 남은 얼굴로 잡지를 뒤적거리며 그의 뒤를 따라 나왔지만 이 또한 보지 못한 척했다. 저놈이 포기를 못하고 스타킹을 사오기라도 하면 불태울 결심만 굳혔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으며 유안이 설명을 부연했다.
"국왕 폐하의 언질도 있으셔서 구금되었던 기간 동안 도련님은 정직으로, 카시야스 대령님은 가이드 특무로 처리되었으니 대령님의 경력에 흠이 되지는 않을 거예요."
"특무로 처리되었다면, 월급은 안 깎인 겁니까?”
“물론이죠.”
지크하르트는 무심코 짧은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돈 욕심은 크게 없지만 깎이리라 예상하였던 월급이 그대로 들어오는 걸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더군다나 엠마에게 탈탈탈 털릴 예정이라 당분간 긴축 재정이었다.
“내 월급은?”
“무급 정직입니다.”
단호한 부정에도 오르피어스는 크게 괘념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어차피 그의 소령 연봉보다 벨포드 가에서 일임한 신탁재산으로 인한 수익이 더 많다. 지크하르트와 함께 살고 있는데 여자를 끌어들이거나 만날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여자들에게 지갑을 빼앗길 일도 없으니 앞으로도 주욱 통장에 돈은 쌓여만 갈 것이다. 취미가 없는 오르피어스는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몰랐다.
“오늘은 군무청에 가실 필요 없이, 근무는 내일부터 하시면 됩니다.”
유안의 말이 없어도 당장 오늘부터 등청할 작정은 절대 아니었다. 넓지 않은 복도를 걸으며 헌병의 인사를 받고, 구치소 밖으로 나오자 밀폐된 공간의 꿉꿉한 공기만 감돌았던 폐에 비로소 맑은 공기가 순환했다. 안에 있을 때도 딱히 수감되었다는 느낌은 없었지만 그래도 묘한 해방감이 짜릿했다.
“참, 별건 아니지만…….”
유안이 품에서 티켓 두 장을 내밀었다.
"고생하셨으니 머리도 식히실 겸 공연이라도 보실래요? 내키지 않으시면 다른 사람 주셔도 되고요.”
발레 공연 티켓이었다. 발레 감상 같은 고상한 취미를 가진 적은 없었지만 공짜로 주는 거니 일단은 고맙게 받았다.
“그런데 웬 발렙니까?”
“도련님이 다리 취향이셔서요.”
“…….”
이런 불순한 의도로 문화 공연을 관람하여도 되는 걸까. "나는 스타킹이든 치마든 신는 과정이 좋지 신고 난 다음은 별 흥미 없어.”라는 오르피어스의 정정은 무시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안사람이 오늘 돌아오는 날이라 역에 마중 갔다가 총독부로 돌아가야 돼서 바쁘거든요. ……이번 사건에 대해서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연락 주시고요. 두 분은 들을 자격 있으십니다.”
왕매가 리벡에서 긴급 체포된 소식은 차입된 신문에서 읽었다. 유안이 말하는 뉘앙스에서 공표되지 않은 진실이 있는 기색이 있었지만 지크하르트는 큰 관심 없이 알았다는 인사만 했다. 진실이 무엇이든 사건은 해결되었고 오르피어스도 무사하다. 그것이면 족했다.
"말로는 저렇게 해도 진짜 비밀은 얘기 안 해 줄 거야."
유안과 헤어지고 전차 승강장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와중에 오르피어스가 중얼거렸다. 지크하르트는 그와 걸음을 나란히 하여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한 달 전에는 생각하지도 않았던 모습이다.
“…….”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몹시 생경하여 걸음을 멈추자 오르피어스도 걸음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혹 자신의 말에 기분이 언짢아지기라도 하였는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 조마조마하게 탐색하며 눈치를 살피는 시선이 말끄러미 쫓아왔다.
“음, 오르피어스.”
“으응?”
가만히 불러보았다. 불안해하면서도 빠른 대답이 쫓아왔다. 지크하르트는 무심코 손을 뻗어 머뭇거리는 시선을 달래듯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오르피어스의 뺨이 엷은 홍기에 물들며 시선이 아래로 내깔렸다. 사관학교 다닐 때부터라면, 몇 년이나 되었다는 건지.
지크하르트는 자신이 객관적으로 보아 썩 매력 있는 남자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복수라는 극히 이기성에 기반한 단어 하나로만 꽉 찬 유년기를 보냈던 그는 근본적으로 타인에게 무심한 성정으로 자라났다. 번듯한 외양과 조건만으로 교제를 시작한들 자신에게 무관심한 남자와 긴 시간 마음을 나눌 여자는 없을 것이다.
엠마나 힐라리아와의 관계도 비슷한 선상이었다. 난 과거와 결별하고 새로운 이름으로 이곳에 섰으니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람이어야 한다며 깍듯하게 '대령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엠마와는 각자의 영역을 터치하지 않는 선에서 이따금 몸을 겹치는 게 전부였으며, 이미 모든 애정이 단 한 명의 사람에게 귀결되어 있었던 힐라리아는 타인이 멋대로 자신의 영역으로 난입하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타인에게 벡터가 향하지 않는 자신의 무심함을 긍정할 여자가 거의 없으리란 건 알고 있었기에 애초에 큰 흥미도 없던 연애니 결혼이니 하는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그가 알지 못하였던 곳에서 그를 보았던 사람이 있었다.
솔직히 그는 지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자의든 타의든 자신의 손으로 가족을 해한 사람을 품게 되는 마음을.
‘영문을 모르겠다니까.’
오르피어스의 뺨에 점점 더 핏기가 오르고 있었기에 손을 뗐다. 아래로 내깔렸던 시선이 힐끔 위로 올라 왔다가 도로 내려왔다. 뺨을 손등으로 문지르는 움직임이 다소 조급했다. 지크하르트는 타인에게 무심한 것만큼이나 타인의 감정에도 둔하지만 오르피어스의 심리는 알 것 같았다.
"아쉽냐?”
“누, 누가……!”
당혹하여 반박하려던 오르피어스는 ‘지크하르트에게 거짓말하지 않겠다.’라는 자신의 말을 떠올리고는 우물우물 대답을 씹었다.
“……응.”
"더 쓰다듬어 줘?”
“……으, 으응.”
"애도 아니고."
살짝 핀잔을 주자 뺨은 조금 다른 의미로 물들었다. 저도 쪽팔린가. 지크하르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오르피어스의 머리칼을 한 번 쓸어넘겨주다, 뒤통수를 당겨 안았다. 오르피어스의 이마가 어깨에 쭉 파묻혔다. 뒷머리를 슬슬 쓰다듬으며 혼잣말을 흘렸다.
"나 같은 게 왜 좋냐, 넌."
대답을 기대한 물음이 아니었기에 지크하르트는 느릿하게 이어 갔다.
“널 훨씬 더 아껴주고 네 마음에 보답해주고 사랑해 줄 사람이 있을 텐데.”
"없어."
오르피어스가 고개를 올렸다. 뺨은 여전히 붉었지만 음성은 떨림 없이 단호했다.
"열정적으로 사랑하지는 않아도 평생을 같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여자들은 있었지만, 아무도 안 됐어. 나라는 인간을 알게 되면 경멸하거나…… 차라리 자살할 만큼 싫어하게 되나봐. 레베카가, 부부는 비밀을 가져서는 안 되는 거랬는데 비밀을 알게 되면 나를 거부해."
그의 목소리는 격분도 절망도 슬픔도 없이 담담했다. 지크하르트는 그 담담함에서 새카맣게 연소하여 버석거리는 잿가루밖에 남지 않은 잔해를 엿보았다.
"날 사랑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아, 지크하르트. 바라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도 알구. 넌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아도 돼. 그냥, 지금까지처럼 조용히 몰래 좋아할 수 있게만 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워.”
상실과 체념과 고통에 익숙하여 이제 그것을 감각하지도 못하는 아홉 살의 어린아이가 그의 안에 있었다. 물색 시선이 고요히 그를 올려다보다, 한 걸음 물러났다. 그의 가슴을 가볍게 밀어 내며 오르피어스는 한 걸음 더, 뒤로 옮기고는 등을 돌렸다.
몹시도 낯선 광경이었다. 그러나 지크하르트는 한편으로는 이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었다. 거리감이다. 상대와의 간격을 정확히 나누어 좁히지 않는 거리감. 오르피어스의 안에, 또한 자신의 안에도 존재하는 것.
그리고 존재하였던 것.
뒤에서 당기는 힘에 휘청 끌려간 오르피어스는 등에 맞닿는 단단한 가슴과, 바짝 붙은 숨결과, 허리를 안은 오른쪽 팔에 숨을 멈췄다.
지크하르트는 자신의 오른팔 안에서 한껏 긴장한 등을 움츠린 오르피어스의 심장이 박동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번 사건이 아니었다면, 그는 서로가 숨기었던 본심과 과거를 확인한 후 아파트를 나와 따로 방을 구하였을 테고, 오르피어스는 필시 자신의 감각이 무너지고 있음을 그에게 알리지 않고 자멸하여 죽었을 것이다. 그 한 통의 전화가 길을 뒤틀었다.
뒤틀린 이 길이 옳은지, 본래 그가 생각하였던 원래의 길이 옳은지, 지크하르트는 확신할 수 없었다. 허나, 그르지 않았음을 확신할 수 있는 단 한 가지가 있었다.
"오르피어스.”
"으응……."
붉게 물들어 가냘프게 올라오는 목소리를 담으며, 그는 자신이 확인한 옳음을 전했다.
“죽지 마.”
가느다란 은발이 아래위로 살랑,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