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0)

6.

어쩌면 이것은 그가 상상하지 못하였던 가장 최악의 악몽이 구현된 것일지도 몰랐다. 눈을 뜨면 아직 해는 완전히 넘어가지 않았고, 그는 홀로 방에 앉아서, 지크하르트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크하르트가 돌아오면 먼저 그를 불러 말을 껴내어 내가 네 가족들을 죽였어, 하고 사죄하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

“하아.”

지크하르트가 한숨을 쉬며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나직이 바닥을 내려치는 부스러진 내음에 오르피어스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이것은 여전히 현실이었고 쥐어뜯긴 심장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이마와 얼굴을 쓸며 한동안 천장을 올려다보기만 하던 지크하트가 사진을 갈무리하고 또 한 번의 한숨을 쉬는 모습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 건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고, 그 알 수가 없다는 감정과 의문 또한 온전한 형상을 이루지 못하고 미약하게 흐무러진 채 그의 안에서 사라졌다가, 또 한 번 자신이 취해야하는 행동에 의문을 갖기를 반복하였다.

“어떻…….”

하얗게 표백된 머리의 구석에서 간신히 내비치는 이성적인 행동의 꼬리를 부여잡은 오르피어스는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한심한 ‘어떻게 알았느냐.’라는 요지의 질문을 하려다 자신의 호흡이 지나치게 크게 쌕쌕 울리고 있다는 걸 깨닫고 입술을 감쳐 물었다. 꼭 쥔 주먹으로 심장 언저리를 문지르면서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애쓴 그는 겨우 한 마디의 말을 토해 내었다.

"어떻게……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그러고도 나온 목소리는 형편없이 가늘었다. 지크하르트의 귀에도 닿지 못할 희미한 꺼짐이었으나 또 한 번 반복할 용기도 내지 못해 떨리는 주먹만 움켜쥐었다. 다행한 흐름으로, 또는 불행한 운명으로 지크하르트는 한숨만 머금고 있던 입술을 뗐다.

"너라면 부모님이 살해당하셨던 날 마주친 범인의 얼굴을 잊겠냐?”

짤막한 대답은 지나치게 객관적이고 감정이 배제되어 있었기에 오르피어스는 더욱 숨이 막혔다. 어째서 화를 내지 않지. 어째서 나를 비난하지 않지. 어째서, 나를.

“학교에서 널 만났을 때는 너도 나를 못 알아보는 눈치라 긴가민가했는데 힐라리아의 얘기를 몇 가지 듣고 나니까 네가 그때의 범인이라고 확신이 섰었다. 요 며칠 네 낌새가 이상해서 혹시 너도 나를 예전부터 눈치 했던 게 아닌가 의심했는데…….”

지크하르트가 그를 바라보더니, 사진을 품에 갈무리하였다.

“혹시나 했던 게 맞군.”

지크하르트도,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모든 걸.

아연히 되뇐 한마디의 문장이 가슴을 내려치고 상처를 찢어 벌리며 그를 침몰시켰다.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외면하며 기만하였던 진실은 처음부터 모두 밝혀져 있었다. 이 이상 짙어질 것 같지 않았던 죄악감에 수치가 깃들어 한층 더 어둡고 질척하게 무거워졌다.

사죄를 하지도 못하였다. 진실을 밝히지도 못하였다. 모든 걸 지크하르트에게 돌린 그가 처분마저 그에게 넘긴 채 방기해서는 안 되었다. 오르피어스는 ‘네 원망이 내 목숨 하나로 풀릴지는 모르겠지만, 마음대로 해.’하고 죽음을 결심하였지만 지크하르트의 목소리가 그의 생각을 앞서 가로질렀다.

"이 얘기는 길게 하고 싶지 않아. 네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나니까.”

‘네 아버지를 내가 죽였다.’는 한마디의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 오르피어스는 다대한 심력을 소모해야했다. 영문도 맥락도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내가 죽인 게 아니었어? 아니야, 살해자는 불분명하다고 들었어. 지크하르트가? 왜 지크하르트가 아버지를 죽일 수 있었지? 왜 아버지를 죽였지?

흐릿하게 뭉개지기도 하고 정신없이 휘몰아치기도 하는 산란한 의식에서 오르피어스는 가까스로 지크하르트의 가족을 살해를 명령한 사람이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힐라리아의 가이드가 된 것 자체가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고, 그 정보로 요새에 잠입해서 네 아버지를 죽일 수 있었다. 그때……. 너도 봤고.”

아버지가 죽을 때의 자신. 머리가 욱신거렸다. 오르피어스는 떨리는 어깨를 꾹 감싸 안아 누르며 지크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절망했다. 지크하르트의 시선은 격정 없이 고요하게 침잠해있었다. 오르피어스가 무지하여 무작정 피하기만 하였던 지난 시간 동안 지크하르트는 혼자 납득하고 곱씹어서 더는 오르피어스가 범한 죄가 그의 안에서 파문을 일으키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널 죽일 기회였고, 실제로도 너는 내가 코앞까지 다가가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무방비하게 있었으니까 칼만 내려 그으면 다 끝나는 일이었지. 헌데 널 죽이지 못했어. 호기라 판단하여 너까지 거침없이 죽여 복수하기엔, 너에 대해서 너무 많이 알아버렸거든.

아이러니하기도 하더군. 너와 네 가문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백지 상태였으면 아주 힘들게 너와 네 아버지를 죽여서 복수를 하였을 거다. 그렇지만 나는 '오르피어스 벨포드'를 알게 되었고, 손쉽게 네 아버지를 죽인 대신 넌 죽이지 못한 거지. 널 못 죽이고 혼자 요새에서 나왔을 때 모든 건 끝난 거다. 그래, 내 복수는 끝났어. “

끝났다고 되풀이하여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오르피어스는 모든 종결을 깨달았다. 그가 시작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끝을 내었다. 동시에 이 같은 상황에서도 그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던 자신의 은밀한 내면에 진저리를 쳤다.

“나에게나 너에게나, 오래도록 반복할 이야기는 아니야. 여기서 끝내자. 미안하지만 네 마음은 못 받아들이겠다. 다 알고서 네 가이드가 되기로 하였고 그 의무는 앞으로도 신실하게 이행할 테지만 의무와 감정은 별개야. 난 네 마음을 받아들일 수도 보답할 수도 없어. 이유는 너도 알겠지?”

지크하르트가 거듭 흘리는 한숨을 또 한 번 길게 내깔았다. "너도 모든 걸 기억하고 있었다는 걸 진즉 알았다면 절대 가이드가 되지 않았을 텐데.” 한숨에 섞인 혼잣말은 종결을 재차 각인시켰다. 자신이 시작하지도 못하고 두려움에 떨며 그저 피하기만 하고 있을 때, 그는 끝을 내었다는 것을. 이제야 시작해야 한다는 걸 깨닫고 사죄하려 하여도 그는 끝을 반복할 뿐이라는 것을.

"……네가 왜 우냐."

"어?”

난처함이 섞인 목소리에 오르피어스는 고개를 올렸다. 물안개가 낀 것처럼 지크하르트가 희미하게 흐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무턱대고 눈가를 문지른 오르피어스는 손등에 축축하게 묻어나는 것이 자신의 눈물이라는 것을 인식했다.

눈물을 인식하자, 걷잡을 수 없어졌다. 지크하르트의 앞에서, 지크하르트에게 단죄 받기 위하여 억눌렀던 감정이 봇물이 터지는 것처럼 그의 밖으로 흘러넘쳤다.

"난, 나는……. 너에게 사죄해야 했어. 그리고 네게 지탄받고 원망 받고 증오 받아야 마땅해. 감히 용서를 바랄 수도 없을 만큼 큰 죄를 지었는데 사죄조차 하지 못하고 모든 게 끝나 버리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돼? 응? 네 말처럼 모든 걸 다 끝내고 태연히 예전처럼 네 곁에 있을 수 없어, 난. 네 부모님과 동생을 죽인 손으로 널 만지고 안고 할 수는 없단 말이야. 다 나 때문인데. 전부 내가 저지른 죄인데. 내가 죽인 건데. “

지크하르트가 부쩍 피곤한 낯으로 "오르피어스. 일단 진정해."라며 다독거렸지만 턱 아래로 하염없이 떨어지는 눈물만큼이나 그의 목소리도 뚝뚝 흐느끼며 흘러내렸다.

“그래. 모두 내가 죽였어. 조제도 자네트도 나 때문에, 내가 죽인 거야. 다른 사람들도 내 가이드가 되지 않았으면 안 죽었을 거라구. 큰형과 내가 무슨 관계인지 알게 된 누나가 하나씩 죽였어. 날 죽이는 건 불가능하니까 나대신 그 애들을 죽였다구. 내 탓인데도 이미 죽은 그 애들에게 사죄할 수가 없어. 그런데 너마저도.”

“잠깐만.”

묵묵히 마른세수만 하던 지크하르트의 서늘한 목소리가 쏟아지는 그의 말을 갑작스레 끊었다.

"힐라리아가 네 가이드를 죽였다니 무슨 뜻이냐. 각하와 넌 또 어떤 관계였다는 거고. “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정신없이 중얼거리던 오르피어스가 거짓말처럼 말문을 닫았다. 격앙으로 벌겋게 되었던 뺨에서 창백하게 핏기가 빠지고, 그는 얼굴을 감싼 채 목 맨 흐느낌을 토했다.

추궁할 정황이 아니라 다시 침묵한 지크하르트의 한숨과 입을 막아도 채 숨겨지지 못하는 오르피어스의 흐느낌만이 출렁이는 실내에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 벨 소리가 혼탁하게 섞이었다. 전화를 받을 여력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끊어진 전화는 또 한 번 울리고, 또 한 번 울리며 계속하여 실내를 뒤흔들었다. 지크하르트는 흐느낌을 멈추지 못하는 오르피어스를 곁눈으로 보고는 일어나서 송수화기를 들었다.

“……네, 벨포드입니다.”

「카시야스 대령님? 유안 페인입니다. 곁에 막내 도련님 계시나요?」

“있기는 합니다마는…….”

「대령님과 함께 있으셔서 다행이군요. 도련님을 바꿔주십시오」

송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유안의 음성은 항상 넉살이 좋던 이전까지와는 다른 다급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후방에서도 웅성웅성 시끄러운 소리가 배경으로 깔리고 있었다.

“잠시만요. ……오르피어스, 전화 받을 수 있겠냐? 페인 중령이야.”

유안의 전화라는 말에 오르피어스가 눈물을 닦고 비척비척 다리를 움직이며 지크하르트의 곁에 섰다. 송수화기를 건네줄 때 손끝이 스치자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떨어트렸다. 지크하르트는 허리를 굽혀 송수화기를 들고는 손이 스치지 않게 끝부분을 살짝 잡아 재차 건넸다.

"응……. 왜.”

낮게 가라앉아 쉰 목소리에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냐며 안부를 건넬 만도 한데 유안은 거두절미하고 서둘러 용건을 꺼냈다.

「도련님. 곁에 카시야스 대령님 있으시죠? 놀라지 마시고 잘 들어주세요. 레베카 소장님이 피격 당하셨습니다. 매우 위독해요」

현재 수술 중이라는 것과 어느 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것과 와 보시겠느냐는 말이 빠르게 뒤를 이었지만 오르피어스는 하나도 듣지 못했다. 바닥에 떨어진 송수화기 건너편에서 급박한 유안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좋지 못한 낌새를 감지한 지크하르트가 다급히 그를 끌어안았지만 오르피어스는 느끼지 못했다. 세상이 빙글빙글 거꾸로 돌다가 추락하는 것 같았다.

병원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시내 곳곳에서 발생한 테러로 인한 부상자가 쉴 새 없이 앰뷸런스에 실려 오고 환자를 찾는 가족들과 생사를 확인하려는 사람들로 아우성이었다. 병원의 직원들이 목청껏 상황을 정리하려 애썼지만 소요는 좀체 진정되지 않았다. 지크하르트는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리기만 하는 오르피어스의 손을 꽉 쥐고 바쁘게 지나치는 간호사를 붙잡아 신분증을 보여주고 난 뒤에야 레베카가 수술 중인 수술실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수술실은 만원이었고 갑작스럽게 밀어닥친 사상자들로 인하여 인력이 부족하였다. 비번 중인 의사와 간호사까지 호출되어 총력으로 가동되고 있는 가운데 병실이 없어 다른 병원으로 재이송되는 환자들도 있었다. 시내라고 상황이 다르지는 않았다. 혼란이라는 단어 하나로밖에 설명하지 못할 도로는 경찰과 군대가 동원되어 강압적으로 통제 중이었고, 그가 대령이라는 신분이 아니었으면 병원까지 차를 몰고 제 시간에 당도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오르피어스는 멍하니 지크하르트가 이끄는 대로 따라 와서 수술실 앞 복도의 대기 의자에 앉아 있었다.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 눈동자가 연신 불안정하게 사방을 헤맸고, 깍지 끼어 얼굴을 괸 손은 육안으로도 확인될 만큼 후들거리고 있었다. 아주 약간의 충격만으로도 무너질 상태임은 굳이 그가 페어 가이드가 아니라도 알 수 있었다. 그의 어깨를 어루만지려 손을 약간 들어 올렸던 지크하르트는 한숨과 함께 도로 떨어트렸다. 적어도 수술이 지속되는 한 폭주하지는 않으리라.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 복도를 돌아 나갔다. 수술등은 복도마다 가득 켜져 있었다. 지크하르트는 수술을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 중 비교적 침착해 보이는 사람에게 정중히 부탁했다.

“심려가 많으실 텐데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저와 페어인 센티넬이 수술실 앞에 있는데 잠깐만 살펴봐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1층에서 전화하고 있을 테니 낌새가 안 좋으면 내려와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자신이 군무청의 대령이라는 점까지 넌지시 밝히자 남자는 망설이다가 알겠노라고 대답했다. 한 번 더 감사하고 서둘러 1층으로 내려온 지크하르트는 신분증을 들고 혼잡에 빠진 사람을 틈을 먼저 헤쳐 안내 데스크에서 전화를 사용하는데 성공했다. 전화교환국에도 전화가 빗발치고 있는지 전파가 연결되고도 꽤 시간이 홀렸는데도 교환원이 받지 않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서야 들려온 교환원의 목소리는 탁하게 쉬어 있었다.

「어디로 연결해 드릴까요?」

“군무청, 회선 번호는 I-E-23-CO입니다.”

자신의 사무실 번호를 불러준 지크하르트는 또 기다렸고 이번에는 아까보다 빨리 전화가 연결되었다. 닉 마텐 중위의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들도 산만하기 짝이 없었다.

“중위인가?"

「아! 대령님!! 어디에 계십니까? 벨포드 소령님의 자택에도 통화가 되질 않아서 걱정했습니다」

“지금 오르피어스의 지인이 부상 중이라 함께 병원에 와 있어서 사무실에는 가지 못한다. 헬시터 소령에게 내 권한을 일임할 테니까 그녀에게도 전언하고 필요하면 그녀의 지휘에 따르도록. 그리고 이게 대관절 무슨 사태인가?"

「테러입니다. 시내 총 5곳에서 동시다발적인 폭탄 테러가 발생하여 사망자가 현재 집계된 숫자만 하여도 30명이 넘습니다」

"어디의? “

그가 군인이라는 걸 알자 근처에서 숨죽이고 흘끔거리며 엿듣는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지크하르트는 가급적 말을 짧게 줄였다.

「불명입니다. 성명 발표도 없었으며, 목적도 단순 교란인지 특정 타깃이 있는지 아직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급 장교의 선에서 파악할 수 있는 정보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하여 당장 정보를 수집할 시간과 여력은 없었기에 지크하르트는 알겠노라고 우선 응답하고는 시급한 연락이 필요하면 전화하라고 병원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수술실 앞으로 올라오자 오르피어스로부터 멀찍이 떨어져서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던 남자가 눈에 띄게 안도하였다. 통화는 다 끝냈냐고 묻는 말이 이 테러의 정황이 궁금한 눈치였으므로 지크하르트는 군과 정부가 사태의 수습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정석적인 대답을 해 주었다. 썩 의문이 해결되는 대답은 아니었으나 남자는 그래도 명색이 고위 장교의 장담이니 어느 정도는 안심한 얼굴로 돌아갔다.

오르피어스는 그가 자리를 뜨기 전과 똑같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오르피어스.”

불러 보았지만 그의 목소리를 듣는 기척도 아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괜찮으냐 염려해도 헛돌다 떨어질 물음일 것을 알기에 지크하르트는 잠자코 오르피어스의 옆자리에 않았다. 수술등이 좀체 꺼지지 않았다.

도중에 두어 번 문이 여닫히며 의사와 간호사가 들락거렸지만 심상치 않은 표정이 굳어 있어 섣불리 방해하지 못했다. 수술등이 껴진 건 그들이 병원에 도착하고도 세 시간이 지난 후였다. 내도록 석상이라도 된 양 꿈적하지 않고 있던 오르피어스가 비명처럼 외쳤다. "레베카아!!" 무작정 달려드려는 그를 등 뒤에서 붙잡아 달래었다. 팔 안에 갇힌 오르피어스의 육체가 가파르게 헐떡거렸다.

레베카는 집중치료실로 옮겨졌다. 미동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운 그녀의 오른쪽 어깨 아래의 팔이 헐렁했다. 남편을 오래 전에 보내고 일가친척이 헤임에 거주하지 않는 레베카의 병실을 지키는 사람은 오르피어스와 지크하르트뿐이었다. 의사가 나직이 헛기침하며 눈짓했다. 지크하르트는 넋이 나간 얼굴로 침대 곁에 않은 오르피어스를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 함께 병실을 나왔다.

"소장님의 상세는 어떠하십니까?"

“안 좋으십니다.”

의사가 침중한 얼굴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설명했다. 그녀의 차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어 일차적으로 폭발에 휩쓸려 중상을 입은 데다 재차 확인사살을 위한 총격까지 있었다. 동시다발적인 테러로 인하여 시내의 도로 상황이 좋지 않아 병원으로의 이송도 늦었다. 총탄은 제거하였으나 폭발에 직격당한 오른팔은 절단할 수밖에 없었다. 하반신도 마비되어 회복하기 힘들 가능성이 컸다.

"수술이 끝나자마자 센티넬이 치료는 하였으나……, 본디 센티넬의 치료는 근본적으로 인체의 자연적인 신진대사를 촉구하는 것이지 만능의 치료법은 아닙니다. 할 수 있는 치료와 조치는 다 하였습니다. “

간혹 기적적인 치유 능력을 지닌 센티넬이 태어나기도 하지만 지금, 헤임에는 없었다. 남은 건 레베카의 생명력에 달렸다는 막연하지만 유일한 대답에 지크하르트도 고개를 끄덕일 도리밖에 없었다.

장시간의 수술이 끝난 의사가 피곤한 낯빛으로 미간을 주무르며 병실 앞을 떠난 뒤에도 지크하르트는 병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복도에 섰다.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며 문고리에 얹었던 손은 결국 돌리지 못한 채 멀어졌다. 완전히 곁을 떠나지도, 돌아가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위치에서 지크하르트는 오랫동안 서 있었다.

밤이 깊었다. 병원 안의 어수선함은 변함없었으나 새로이 수술실로 들어가는 급박한 환자는 없었다. 도로의 통제에 휘말려 크지 않은 부상을 입은 사람들만이 간혹 찾았다. 어느 병원이든 상황은 비슷하리라. 레베카의 병실에도 간호사가 들러 링거를 갈고 상세의 변화를 기록하였으나 썩 낙관적인 기색은 아니었다. 유안이 모습을 드러낸 건 그 무렵이었다. 수술의 경과는 들었는지 그는 지친 얼굴로 병실을 가리켰다.

"도련님은 안에 계시나요? “

수긍하자 그것으로 되었다는 듯 고개만 한 차례 끄덕거리고는 무너질 것처럼 벽에 등을 기댔다. 현재 가장 바쁘고 정신없을 위치에 있을 사람인데도 짬을 내어 오르피어스에게 연락하고 병원까지 직접 찾아왔다는 점이 다소 의외였다.

유안이 얼굴을 문질렀다. 평생을 이고 가야 할 화상의 흔적이 그의 손짓에 따라 주름이 겹쳤다.

"아무 것도 안 물으세요?”

"제가 알아도 되는 내용입니까?"

"……대령님도 참, 변함이 없으시군요. “

유안은 미소 비슷한 것을 입가에 올렸으나 희미한 미소는 제대로 맺히지도 못하고 흐물흐물 추락했다. 한 차례 회진이 끝난 병실 앞은 멀리에서 두런두런 들려오는 소리만을 제외하고는 죽음과도 같은 정적에 점령되어 있었다.

"자의로 판단하여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제 누님을 구해 주셨던 일을 기억하시죠?”

오늘 하루 예상하지도 못한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여 시간적인 감각은 멀었지만 고작해야 어제의 일이다. 유안이 중얼거림에 가까운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대령님께도 암살 기도가 있었던 건 짐작하고 있으실 테고요. 암살 기도가 있었던 가이드는 누님과 대령님만이 아니었던지라 만일을 대비하여 임시 가이드들은 안가에 대피시켰습니다. 센터에 등청하셔야하는 소장님을 제외한 4명이 안가에 대피되었고, 오늘 폭탄 테러는 총 5군데에서 있었습니다.”

지크하르트는 바보가 아니었고 어렵잖게 행간을 읽어냈다.

"……가이드를 노린 테러였습니까.”

“네. 암살을 대비하여 시내의 안가에 대피하도록 하였는데 그 일대를 통째로 날릴 줄은 짐작 못했습니다.”

집요하고 잔인한, 허나 꽁꽁 숨은 표적을 일거에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상대의 질척한 악의에 지크하르트는 속이 매슥거리는 걸 느꼈다. 유안이 허탈한 웃음을 홀렸다.

“하하. 체스터 님 외에도 이런 방법을 택하는 사람이 있었군요. 정보가 누출되었다는 것보다 이 사태를 지휘하고 있을 놈을 상대해야 된다는 게 더욱 끔찍합니다.”

낮은 침음이 무심코 새었다. 그래, 자신의 가족 하나를 멸하기 위해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었던 체스터 벨포드라면 가이드 한 명을 제거하기 위하여 무고한 수십 명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을 게 확실했다. 문제는, 그가 죽은 지 10년이 지났다는 사실이었고, 그와 흡사한 사고를 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진짜 목표는 센티넬이겠지요. 모쪼록 카시야스 대령님도 보중해 주십시오.”

"오르피어스보다 먼저 죽지는 않을 겁니다.”

안심하고 돌아가라는 의미에서 대답해 주었지만 유안은 잠깐 머뭇거렸다. 더 전해야 하는 말이 있는지 의아함을 담고 바라보자, 미구에 그의 무릎이 풀썩 꺾였다. 당황하여 일으키려는 지크하르트에게 유안이 필사적으로 부탁했다.

“카시야스 대령님. 다른 분도 아닌 대령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참으로 면목 없고 부당한 요구라는 건 알지만, 대령님이 아니시면 누구도 이루어줄 수 없습니다. 레베카 소장님은 록사나 아가씨와 함께 도련님의 정신을 버티게 하는 유일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분이세요. 혹여 저분을 잃게 되면 도련님은, 도련님은…….”

유안이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입술을 사리물다,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도련님을 지켜주십시오. 제발.”

지크하르트는 긍정의 대답도 부정의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개 최초로 발현한 센티넬을 진정시키고 페어가 될 가이드가 배정될 때까지 케어해 주는 임시 가이드는 보편적인 가이드보다 훨씬 심력이 많이 소모되고 지난한 과업이었다. 센티넬이 최초로 발현할 당시에는 정신이 산란한 경우가 많아 심리학과 정신의학 공부도 하여야했고, 정신적인 균형을 조율하지 못하면 각인이 되어 본인의 의향과는 무관히 페어가 될 우려도 있었기에 가이드로 발현하여도 임시 가이드로서의 길을 찾는 사람은 드물었다.

레베카 크롤은 센티넬이었던 남편이 결혼 5년 만에 사고로 죽고 뱃속의 아이가 유산되자, 새 센티넬을 찾지 않고 임시 가이드로 재등록하였다. 정신적인 면을 보듬는 봉사와 상담을 주로 행하는 임시 가이드로서 활동하며 레베카는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은 자신의 상처도 조금의 아물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벨포드 가의 긴한 청을 받고 오르피어스를 만난 때는 남편과 자식의 기일을 한 달 앞둔 날이었다.

「벨포드 공의 막내 아드님이신 오르피어스님이십니다. 혼외 관계에서 보신 아드님이셨으나 작년에 발현하시어 가문으로 정식 입적하셨습니다」

글래스팅의 벨포드뿐만이 아니라 입시니아의 이노르칸다르와 뮈르달의 센시어웰에서도 센티넬로 발현한 아이를 선별하여 가문으로 입양하거나 들이는 건 이제껏 흔히 있었던 일이기에 레베카는 소년이 센티넬로 발현하고 나서야 인지되었다는 점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센터의 일로 번다하실 대령님께 임시 가이드가 되어 주십사 청하여 송구합니다만, 오르피어스 님은 발현하시고 가혹한 상황을 겪으신지라 특별히 대령님께 부탁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이상한 점은, 소개를 받는 와중에도 나오미의 뒤에 숨어 앙증맞은 손으로 그녀의 옷자락을 꼭 쥐고 놓지 않는 오르피어스의 낌새였다. 임시 가이드로서, 또한 센티넬 센터의 관리로서 많은 센티넬들을 만난 레베카는 소년에게 어린 배타성을 감지하였다. 나오미가 안심하라는 듯한 태도로 소년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발현하시면서 오르피어스 님의 어머님과 당시의 가족이 불운한 변을 당했습니다」

그제야 납득이 갔다. 자신의 힘으로 인해 가족들이 참변을 당했는데 열 살 남짓한 소년이 이겨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레베카는 한쪽 무릎을 꿇어 소년과 비슷하게 눈높이를 맞추고는 다정하게 웃었다.

「나는 레베카라고 한단다. 네 이름을 한 번 더 말해 주겠니?」

어루만지고 있는 오르피어스의 손등이 가늘게 떨리고 있어 나오미는 긴장했다. 체스터로부터 가혹한 학대를 받았던 오르피어스는 부친을 연상하게 하는 성인 남자를 극도로 무서워하였다. 또래의 아이처럼 도망치거나 울지는 않았지만 유안이나 엘빈의 그림자만 보아도 벌벌 떨면서 끅끅 숨도 쉬지 못하다가 기절하기 일쑤였다. 언젠가는 도젠이 피하기만 해서 해결되는 게 있겠느냐며 아이의 어깨를 움켜잡으니 발작처럼 잘못했다고 끊임없이 울며 용서를 구하기만 한 적도 있었다. 동요하지 않는 사람은 그를 체스터로부터 빼내 온 아이릭의 곁이었으나 아이릭은 본디 어린아이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나마 여자인 나오미의 곁에서만 안심이 되는지 그녀가 보이기만 하면 졸졸 따라다니며 양순하게 말을 들었지만, 도젠의 말처럼 상황의 고착이 해결 방안이 아님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레베카는 남자가 아니며 임시 가이드로서도 평판이 좋았다. 됨됨이가 진중하고 신중하여 혹여 오르피어스의 비밀을 알아도 태도가 바뀌거나 이 비밀을 이용할 이도 절대 아니었다. 레베카는 나오미와 유안, 엘빈이 머리를 맞대어 몇 번이나 신중하게 검토하고 선택한 사람이었다.

부드럽게 미소하며 조곤조곤 속삭이는 레베카를 힐끔힐끔 관찰하던 오르피어스가 나오미의 손을 꾹꾹 잡아당겼다.

「가도 돼요?」

오르피어스는 항상 자신이 행동을 취하기 전에 누군가에게 허락을 받고, 그 이후에야 움직였다. 체스터의 명령에 길들여진 탓이다. 이 부분도 차차 감싸 안아 쥐야 할 상처 중의 하나였다. 나오미는 허리를 숙여 소년의 정수리에 키스하고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물론입니다, 오르피어스 님」

오르피어스가 주춤주춤 걸음을 뗐다. 언제라도 도망쳐서 나오미의 뒤에 숨을 요량을 숨기지 않는 소년의 뻣뻣하게 긴장한 손을 레베카는 조심스럽게 잡았다. 진땀이 흠뻑 찬 손가락이 손 안에서 불안하게 꼼지락거리다가 살짝 굳었다. 소년에게 내재한 센티넬의 힘이 가이드를 본능적으로 인지한 것이다. 레베카가 익히 예상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알지 못하였던 건, 오르피어스가 최초로 인지한 가이드는 어머니였다는 점이었다. 힐끔거리며 눈치만 살피던 눈동자에 뿌연 습기가 차고 소년이 달려들어 안긴 건 순식간이었다.

「엄마……!! 엄마!」

앙앙 울면서 매달리는 오르피어스의 무게에 레베카는 당혹하였으나 이내 침착함을 되찾고 소년을 끌어안으며 곰살궂게 등을 도닥거려주었다. 나오미가 안도하며 가슴을 쓸었다. 아이를 무사히 낳았으면 딱 이 또래가 되었으리란 생각이 든 건 정갈하게 입은 군복이 눈물 콧물에 젖어 잔뜩 더럽혀진 후였다.

그때로부터 십 수 년이 지났는데 우는 얼굴은 변하지 않았구나, 하고 레베카는 말해 주고 싶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레베카! 정신 들어요?! 레베카!!”

눈물로 얼굴을 흠뻑 적신 아이의 뺨이라도 쓰다듬으며 걱정하지 말라고 도닥거려 주고 싶은데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감각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무엇 하나도 해 줄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그녀의 흐린 시야에 오르피어스의 얼굴이 가득 찼다.

범상하지 않았던 첫 대면으로부터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면에 깃는 어두운 그림자를 감지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섣부르게 건드리어 자극된 그림자가 창날이 되어 아이의 여린 마음을 산산이 부서트릴까, 그것이 염려되어 그림자를 백일하에 끌어내는 대신 애정으로 푸근하게 덮어주고자 하였다. 그때는 이것이 최선이라 여겼지만 애정만이 아니라 그의 그림자를 직시하는 이해가 필요하였던 게 아닐까. 잘못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는 과거가 아쉽고 미안했다.

행복해야 할 텐데.

끝내 확신할 수 없는 그 점이 못내 심려되어 레베카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와 움직이지 않는 팔 대신 미소만이라도 지어주고자 노력하였고, 울부짖는 오르피어스의 얼굴을 최후로 서서히 침몰하였다.

의사가 그녀의 사망을 최종적으로 확인한 건 그로부터 3시간 후였다.

닷새 후 레베카 크롤의 장례식은 여타의 희생자들과 함께 엄숙히 거행되었다. 새벽기차를 타고 서둘러 올라와 임종을 지킬 수 있었던 두 동생은 테러에 휩쓸려 마지막까지 죽음 앞에서 저항하다 숨을 거둔 누이의 관이 공립묘지에 안장되고 총독 이하 장성과 고관이 참석한 영현식의 마지막 절차까지 조용히 눈물을 닦았다.

장례가 끝나고 술 한잔하자는 클라우드의 제의를 고사하고 아파트로 귀가한 지크하르트는 멍한 얼굴로 소파 구석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인 오르피어스를 보며 옅은 한숨을 쉬었다. 오르피어스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참석하지 ‘못했다’라는 표현이 보다 정확하리라. 레베카의 사후 그는 거의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내도록 이 상태였다. 오르피어스에게 진실을 인정받기 위해 돌아왔을 때만 해도 그의 아파트를 나갈 작정이었으나 레베카의 사망으로 인한 충격으로 무기력해진 그를 두고 매정하게 나가는 건 저어되었다. 식사라도 하라고 식탁에 차려두었던 음식들은 싸늘하게 식은 지 오래였다.

“…….”

아파트에는 싸늘한 침묵만이 존재했다. 서로의 진실을 확인한 때로부터 무엇 하나 마무리가 된 게 없었다.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도 불명확하였다. 불연소된 감정의 잔해들이 흉부 안쪽에 그득 쌓여 답답하게 옥죄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혼이 빠져 나간 얼굴로 망연자실히 않아 있기만 하는 오르피어스를 다그칠 상황도 아닌지라 지크하르트는 묵묵히 코트와 재킷을 벗었다. 제 날짜에 완성되지 않아 신장과 체격이 비슷한 더글라스에게 빌린 예복이었다. 재킷과 코트를 팔에 걸치고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려던 지크하르트는 실수로 군모를 놓쳤다. 모자가 바닥에 탁 떨어지는 소리가 일순간 침묵을 깨트렸다.

“……아!”

오르피어스가 불현듯 등을 굳히며 얕은 신음을 냈다. 예사하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크하르트는 10년이라는 가이드로서의 경험이 있었다. 안색이 살짝 굳은 그는 서둘러 재킷과 코트를 옷걸이에 일단 걸어두고 거실로 돌아왔다. 창을 반 정도 가린 커튼을 휙 젖혔다. 완전히 저물지 않은 오후의 햇살이 소파 구석의 그늘에 웅크린 오르피어스에게까지 쏟아졌다. 무릎에 늘어뜨린 주먹이 꽈악 쥐이며 파르르 경련했다.

“멍청아!”

지크하르트는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가 얼굴을 양손으로 잡았다. 억지로 반개한 눈가에 빛살을 감당하지 못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상태가 악화될 때까지 왜 말을 안 하냐. “

센티넬의 평정은 심리 상태가 큰 영향을 끼친다. 요 며칠 사이에 오르피어스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고려하면 그의 내면이 단기간에 허물어지고 있음은 명백하였다. 지크하르트는 우선 오르피어스를 침실로 데려가려고 그를 일으켰다.

“하지 마……!”

칼칼한 비명 소리와 함께 오르피어스가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날 만지지 마. 가만히 두라구.”

“뭐야?”

“너에게 날 살려달라고, 못해…….”

사지에 기력이 들어가지 않아 밀치는 힘은 약했지만 단순한 완력 이상의 완강한 거부가 그에게 있었다. 지크하르트는 다시금 피곤이 부쩍 밀려왔다.

“끝난 일이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하냐. 네 아버지의 일과 벨포드 일가는 별개다. 동일하게 판단하였으면 아무리 정보 수집을 위해서였다고는 해도 힐라리아의 가이드가 되거나 약혼까지 하지는 못해. 너도 마찬가지고.”

“누나와는 달라. 난 직접 이 손으로 네 가족을 죽였어……!”

"이제 와서 거부하고 도망칠 거면 처음부터 날 가이드로 삼지 말았어야지!”

결국 지크하르트의 언성도 높아졌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면 네 형을 설득하든 협박하든 뭘 하든 나와 각인하는 걸 확실히 거절했어야 했어!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면 끝까지 날 기만하여 모르는 척 하든가! 그런데 이제 와서 뭐냐고. 혼자서 자살이라도 할 참이냐?! 날 두 번이나 센티넬을 자살하도록 방치한 가이드가 되라고?!!“

거칠게 튀어나간 말들이 입 밖에서 형상화가 되어서야 지크하르트는 자신마저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였던, 오르피어스의 가이드로서 책무를 저버리지 않는 하나의 이유를 더 깨달았다. 힐라리아는 자살까지 결심하며 시커멓게 썩고 곪아 문드러졌을 그녀의 고통을 터럭만큼도 그에게 내비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애틋하고 절절한 사랑은 없었지만 그는 그녀와 평생을 서약한 가이드였고, 또한 약혼자였다. 그리고 이젠 오르피어스도 자살이나 다름없는 방식으로 그에게서 도피하려 한다. 지크하르트는 그것을 견딜 수 없었다.

"전쟁터에서 죽든 사고로 죽든 상관하지 않겠다. 그렇지만 자살만은 하지 마!”

그를 용서한 건 아니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정리하고 지워, 복수의 선상 배재하였을 따름이다. 10년 전 오르피어스를 죽이지 못하고 돌아오며 스스로 내린 마음의 결정이었고, 종결이었다. 자신의 안에서 이미 끝난 일이 이제 와서 심산하게 만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도 못했다. 오르피어스가 일전에 한 말이 맞았다. 자신들은 한데 부대끼면서 잦은 만남을 가져야 하는 게 아니라 필요할 때만 만나 필요한 수순만 치렀어야 했다.

오르피어스가 고개를 떨구었다. 지크하르트는 치솟은 격양을 꾹 누르곤 그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여태 아무렇지 않은 척 지내다가 갑자기 왜 나에게 요구하지 못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필요하면 날 이용하고 써먹어. 특별히 부담 같은 건 느낄 필요 없다고. 어디까지나 센티넬과 가이드로서의 계약이고, 너에게 정서적인 안정을 제공하는 대신에 나는 안락한 생활을 보장받는 거니까."

"나도 모르겠어. 그동안 내가 힘들어서 널 피했던 건데 어째서 네 입장에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건지, 생각하고 나니까 걷잡을 수 없이 무서워져서, 너에게 너무 죄스러워서……. 조제랑 자네트도, 다른 가이드들도 나, 나 때문에 죽었다고 여겼던 적은 없었는데……. 머리가 이상해. 아파. 너무 아파. 나, 지금 잘못된 거 아니지? 이상한 거 아니지?”

숙인 고개 아래에서 웅얼웅얼 올라오는 목소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부들거리는 손이 얼굴을 감싸 안았다.

"……보통은 죄책감을 느끼는 게 정상이지.”

지크하르트는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상체가 크게 경직되었으나 아까처럼 극도로 거부하며 피하지는 않았다.

“해서, 견디기 힘들다고 죽을 거냐? 죽고 싶어?”

머리가 아래위로 끄덕거렸다. 지크하르트는 소리 없이 툭툭 떨어지는 눈물로 그의 무릎이 짙게 젖어가는 걸 보다 유안의 말을 상기했다. 레베카 소장님은 록사나 아가씨와 함께 도련님의 정신을 버티게 하는 유일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분이세요.

‘지켜주는 게 아니야. 죽고 싶어 하는 녀석을 자살하게 할 수는 없다는 내 이기심으로 붙잡는 거지.’

지크하르트는 중얼거렸다.

“록사나.”

오르피어스가 급격히 숨을 들이켰다. 마른 입술을 축이고 재차 입술을 뗐다.

"록사나는 이제 네게 남은 단 하나의 가족이라고 들었다. 넌 너 하나 편하겠다고 죽어서 그 애를 슬프게 할 참이냐?"

“하지만…… 하지만…….”

"좋아. 이건 복수다. 죽겠다는 널 억지로 살라고 몰아세워서 내 복수를 하는 거야. 오르피어스. “

죽고 싶다는 건 오르피어스의 이기심이었고 살리겠다는 건 지크르트의 이기심이었다. 승자는 지크하르트였다. 지크하르트는 끝내 허물어진 오르피어스에게 입 맞추며 소파에 쓰러트렸다. 옷을 벗기고 부드럽게 애무하며 마침내 깊이 삽입할 때까지 그는 흐느낌을 멎지 못했다.

***

안기면서 계속 눈물로 토해냈기 때문일까. 두통은 여전히 남아 간헐적으로 그의 머리를 두드렸지만 오감이 안정되었다는 것만으로도 한결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머리가 맑아지자 레베카의 마지막이 또 떠올랐다.

‘레베카…….’

오르피어스는 눈두덩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오래도록 울어 빨갛게 쓰린 눈가에 다시 축축한 눈물이 배어났다. 범인은 형이 찾아줄 것이다. 꼭 찾아줄 것이다. 비록 그의 바람은 아니었다 할 지어도 아버지에게 복수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형이니 레베카의 복수도 해 줄 것이다.

심장이 가파르게 헐떡이며 폭랑이 휩쓰는 것처럼 요동치고 있었기에 오르피어스는 아이릭을 향한 절대적인 신의를 거듭 되뇌며 진정하려 애썼다.

눈물을 닦으며 주변으로 눈을 돌린 오르피어스는 정사 직후 의식을 잃은 사이에 침실로 옮겨져 있다는 걸 알았다. 저녁놀이 창밖에 남아 있으니 그리 긴 시간 잠든 건 아니었다. 실내복도 제대로 입혀져 있고 아랫도리에 불쾌한 감각도 없으니 몸도 닦여 있는 듯했다. 낯선 경험에 오르피어스는 당혹하여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났다. 허리가 아프고 엉덩이 사이가 욱신거렸지만 견딜 만했다.

처음이었다. 이런 배려를 받은 건.

“…….”

그에게 짙은 죄책감을 이고 있음에도 사소한 배려 하나에 심장이 두근거리며 뺨이 붉어지는 자신이 어이없었고 화가 났다. 오르피어스는 얼굴을 세게 흔들고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요리가 보글보글 끓고 식욕을 돋우는 냄새가 주방으로부터 흘러넘쳤다. 스푼으로 간을 보던 지크하르트가 고개를 돌렸다.

"안 그래도 깨우려던 참이었는데 딱 맞게 일어났네. 않아."

“……으응…….”

힐끔힐끔 곁눈으로 그를 훔쳐보며 얼추 식사가 차려진 식탁에 슬그머니 착석했다. 앞치마를 맨 그의 모습은 무척 낯설었다. 힐라리아에게도 딱히 그가 요리를 할 줄 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었는데.

스튜가 다 끓자 지크하르트가 냄비 째로 식탁에 가져와서는 오르피어스의 그릇에 듬뿍 펐다. 왜인지 신기하여 오르피어스는 머뭇거리다 질문했다.

"……네가 저녁식사 만들었어?"

"그럼 누가 만들었겠냐.”

지크하르트는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자신의 그릇에도 펐다.

"요리는 딱히 자신도 없고 취미도 아닌데 요새 벨포드 저택도 정신이 없는지 사람이 안 오더라고. 나 혼자라면 모를까 며칠 굶은 놈 끌고 식당 찾아가기도 좀 그렇고 별수 있냐. 네 고급스러운 입맛에 맞지는 않겠지만 먹다가 토할 맛은 아닐 거다."

“잘 먹을게.”

오르피어스가 살짝 스푼을 떴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가, 종조부 밑에서는 사용인이, 그리고 사관학교 기숙사와 관사를 거치며 대부분의 끼니를 식당에서 해결했던 지크하르트는 정말 요리에 자신이 없었다. 술안주 삼아 간단한 요리를 만들거나 할 일 없고 심심할 때나 레시피를 찾아 적당히 썰고 다듬고 굽는 게 전부였던지라 오늘의 스튜도 썩 성공작은 아니었다. 한 입 먹은 그는 오르피어스가 먹다가 남겨도 할 말이 없는 맛이라고 객관적인 평가를 내렸지만 오르피어스는 맛이 없다는 불평 따위는 하지 않고 꾸역꾸역 입으로 요리들을 옮기고, 씹고, 삼켰다. 시장이 최고의 요리란 걸까, 또 멍청하게 눈치를 본다고 억지로 먹는 걸까.

"뭐라고 안 할 테니까 남겨도 돼.”

오르피어스의 고개가 도리도리 흔들렸다.

"맛있냐?"

“……아니.”

“망할 놈.”

피식 웃은 지크하르트는 자신도 식사를 계속했다.

길지 않은 식사를 끝낸 후 빈접시들을 개수대에 쌓아 놓고 자리로 돌아왔다. 손가락을 불안하게 마주치면서 말없이 앉아있던 오르피어스가 흘끔 곁눈질했다. 의자를 빼고 맞은편에 털썩 앉은 지크하르트는 머릿속으로 적당한 단어와 문장을 고르다 천천히 시작했다.

"우리 아버지는 로비커스 콘체른 상임이사인 한스 슐츠의 조카야. 원래 뮈르달 출신으로 종조부님 밑에서 교육을 받고 있었는데 글래스팅까지 여행을 왔다가 어머니와 만나서 사랑에 빠졌다. 일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탓에 뮈르달로는 돌아가지 못하고 어머니의 고향인 글래스팅에 정착하셨고.”

“갑자기 웬……?”

오르피어스가 되물었으나 "일단 들어."라고 짧게 내질렀다.

“두 살 밑의 여동생도 있었는데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같이 죽었지. 소식을 들은 종조부님이 뮈르달로 데려오셨는데, 내가 네 아버지에게 복수하려고 억지로 우겨서 글래스팅의 사관학교에 입학한 거야. 그리고 힐라리아를 통해 정보를 얻어 선대 벨포드 공을 죽였다. 힐라리아는 내 복수에 무관해. 당시 내 목적과 과거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니까. 어떻게 정보를 수집하고 어떻게 죽였는지 구체적인 건 네가 들어서 즐거운 이야기가 아닐 테니 생략한다. 궁금하면 말해.

여기까지는 괜찮았는데 글래스팅 군에 정식으로 임관하고 뮈르달과의 내전에서 전공까지 세우는 바람에 종조부님이 노발대발하시며 절연장을 보내셨다. 두 번 다시 뮈르달로는 못 돌아가. 종조부님이 용서해 주신다고 해도 뮈르달 군적에서 글래스팅과 대적하는 건 내가 싫어. 입시니아는 더더욱 안 되지. 먹고 살만한 재주가 사람 죽이는 것뿐인데 해군 훈련은 하나도 못 받았고, 그렇다고 중앙이 글래스팅에서 도망친 장교를 받아주겠냐. 아예 말도 안 통하는 국외로 도피하지 않는 이상 좋든 싫든 여기 글래스팅에 뼈를 묻어야 한다고. 무슨 말이지 알겠냐? 난 정말 나 하나의 편의를 위해서 네 가이드로서의 제의를 받아들인 거야. 네 가이드를 거절하면 나도 군에 있기 힘드니까. 당장 잘리지야 않겠지만 안 그래도 견제가 심한데 총독 각하에게 밉보인 상태에서 근무 계속하다가는 스트레스로 위장에 구멍이 뚫릴 거라고.“

단숨에 이야기를 끝낸 지크하르트는 물을 따라 마셨다.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우리는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지만 제일 큰 문제는 서로 속이고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고 생각해. 어쨌거나 평생을 같이 부대껴야 하는데 끝까지 숨기고 있었다면 모를까, 다 까발려진 상태에서 지금 분위기가 고착되면 나도 불편하고 너도 부담스러울 거 아냐. 난 더 이상 네게 숨기는 것 없는데 달리 궁금한 점이라도?“

시선을 내깔고 침묵한 그대로 오르피어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지크하르트는 담배를 한 대 물고 싶었지만 참고 물을 한 잔 더 마셨다.

"그럼 이제 네 이야기를 해 줘.“

오르피어스는 쉬이 말문을 열지 못했다. 한참이나 거스러미가 인 입술을 축이고 마른침을 삼키던 그가 간신히 목 안으로부터 밀어 올려 토해낸 말은 짤막한 물음이었다.

"……나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어?“

“네가 어떻게 벨포드 가에 인지되었는지, 그리고 선대 공의, 아니 선대 공과 총독 각하에게 훈련 ― 지크하르트는 하마터면 선대 공의 ‘학대’라는 말을 입에 올릴 뻔 하였다가 다급히 되삼켰다 ― 받았다는 것 정도? 그 후는 몰라. 힐라리아는 총독 각하의 쿠데타 성공 후 아버지를 떠올리는 것도 소름 끼친다며 관련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똑같아……. 형이 명령하면, 내가 수행해. 지금까지 변한 건 없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아.”

"너와 총독 각하의 관계라는 건? 네 가이드들과 힐라리아가 어떻게 연관된 거냐? 단순히 호기심의 충족이 아냐. 네 이전까지의 가이드들이 관련되어 있었다고 하니 지금의 나도 알 권리는 있다고 본다만. 두 손 놓고 있다가 죽고 싶지는 않다고.“

여태 식탁 구석으로 고정되어 있던 오르피어스의 시선이 퍼뜩 올라왔다.

"아, 아냐. 넌 괜찮아. 누나도 없으니까 네가 해를 입지는 않아."

“하지만 힐라리아 사후에 죽은 자네트는? 네가 죽였다고 하였으니 아예 상관이 없는 건가?”

“상관이 없는 건…… 아니지만…….”

오르피어스의 고개가 다시 꺾였다. 그가 다시 말문을 열기까지는 처음보다 더 오랜 시간이 소모되었다. 재차 질문 하려던 지크하르트는 그의 관자놀이에 또륵 진땀이 고이고 손이 몇 번이고 쥐었다 폈다 하는 걸 보고는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나는, 난…… 너에게 어떤 증오나 노염을 받아도 마땅해. 하지만 너에게 경멸은 받기 싫어……. 말할 수 없어…….”

“……그래?”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남은 물을 마저 마시고는 일어났다. 거실에서 차 열쇠를 찾아들고 바로 현관으로 나가려는 등을 오르피어스는 주춤거리며 따랐다.

“어, 어디 가?”

“산책. 늦으면 먼저 자라.”

지크하르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쾅 닫히고 자물쇠가 덜그럭거리며 잠기는 소리가 천둥처럼 오르피어스의 가슴에 울렸다. 자신이 옷을 잡아 뜯고 있음을 인식도 못하며 식은땀이 흠뻑 고인 손으로 옷자락을 쥐었다. 끝까지 숨기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고 해도 도리 없다.

「……오르피어스. 당신……. 형과, 무슨……」

하지만 제아무리 이기적인 내심이라 하여도 경멸만은 싫었다. 그를 향한 순수한 애정이 가득하였던 자네트의 눈가가 참혹한 모멸로 산산이 깨져 무서우리만큼 격한 거부감을 드러내었던 그 광경을, 지크하르트에게만은 보고 싶지 않았다.

리벡에 여행을 다녀올 예정이라는 힐라리아의 말에 당연히 자신의 동행을 생각하고 휴가 일정을 조정하던 그에게 그녀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일주일 정도 느긋하게 구경할 예정이니까 넌 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여 못내 걱정되기는 했으나 힐라리아는 자신의 발언을 철회한 적이 없었고, 그는 초조한 기분을 하루하루 곱씹으며 보냈다. 그녀가 헤임에 도착하기로 한 시각에 역까지 마중을 나가 무탈한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 난 뒤에야 안도했다. 그리고 바로 저택으로 돌아가기 싫다는 그녀의 말에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이틀을 묶었다.

「넌, 날 좋아하니?」

일주일여의 여행을 다녀온 힐라리아에게서는 기이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정확히 단어로 표현하라고 하면 어려운 일이나 근 10년을 누구보다 친밀히 교류하였던 사람의 직감이었다. 리벡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을까 말까 망설이던 그에게 그녀는 먼저 선수를 쳤고 지크하르트는 자신의 가슴에 엎드린 힐라리아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대꾸했다.

「아니요」

「대답이 빠르잖니 . 너무 솔직하잖아」

힐라이아가 옆구리 ― 어쩌면 배나 허벅지를 꼬집으려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 를 세게 꼬집었고 지크하르트는 비명을 삼키려다 혀를 깨물 뻔했다.

「거짓말은 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흥, 맞아. 나도 널 안 좋아해」

「하지만 앞으로는 당신과 결혼도 할 테니 좋아하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전쟁에 동원되어 결혼적령기를 놓친 힐라리아는 서른이 목전이었다. 더 늦어서는 안 되겠다는 종주 아이릭의 말에 따라 두 사람의 결혼은 넉 달 후로 예정되었다. 결혼 날짜가 잡혀도 뚜렷한 실감은 나지 않았다. 본가도 없으니 일체의 준비는 벨포드 가에서 맡았고 그가 할 일이라고는 나중에 웨딩드레스를 고르고 신혼여행을 갔다 와서 벨포드 저택에서 신접만 하면 되었다. 결혼식에 초청할 명단을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군무청의 장성과 장교는 지크하르트가 아니라 벨포드의 이름 때문에 참석할 테고 그는 사관학교 동기와 부하들, 헤임에서는 종적을 감췄어도 간간이 소식을 주고받는 엠마와 그녀의 양아버지에게만 연락하면 되었다. 외가와는 어머니 사후 연락이 끊기었고, 종조부에게 벨포드의 여식과 결혼한다는 청첩장을 보냈다가는 결혼 축하 선물로 폭탄이나 암살자의 방문을 받을 지도 모른다.

「결혼이라……」

그와 마찬가지로 곧 새신부가 될 예정이면서도 힐라리아는 유다른 감흥 없이 중얼거렸다.

「서른 전에 아기 낳으려면 빨리 하긴 해야지」

「서른 지나고 낳으면 안 되나요?」

뜻 없는 물음에 그는 한 번 더 꼬집힘을 당했다.

「바보야. 여자는 서른 넘어서 초산이면 더 많이 힘들다고. 네가 아기 대신 낳아 줄 거니?」

지크하르트는 조금 붉어진 목덜미를 긁적였다. 결혼도 실감이 안 나는데 아기라니, 차라리 오늘 새벽에 꾼 개꿈이 더 현실성 있게 느껴졌다.

「아니면 꼭 결혼 후에 아기를 가져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 지금부터 미리 아기를 갖기 위한 예행연습이라도 할까?」

힐라리아가 장난스럽게 키득거렸지만 지크하르트는 주춤주춤 물러났다.

「당신이 배불러서 예식장 들어가면 조리돌림 당하는 건 저인데요……」 

「나만한 사람을 데려가려면 그 정도 각오는 해야 하는 거 아니니?」

「……살려 주세요」

벨포드의 원로들로부터 호되게 꾸중당하는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쳤기에 그는 진심으로 빌었고 힐라리아는 깔깔깔 유쾌하게 홍소했다.

「아하하! 역시 넌 마음에 든다니까」

가슴에 뺨을 기댄 힐라리아가 그의 어깨를 탕탕 두드려가며 웃었다. 기대든지 때리든지 하나만 해 주면 좋겠다는 불평을 내심 흘리며 지크하르트는 무겁다는 말을 하면 몇 시간짜리 잔소리를 듣게 될지 고민했다.

「나는 널 안 좋아하지만 널 그 사람보다 먼저 만났으면 아마 널 좋아하게 되었을 거야. 첫 만남 때부터 마음에 들었거든. 있지, 날 처음 봤을 때 넌 어떤 생각을 했어?」

「음…… . 상처에 놀라긴 했는데 무척 예쁘다고 생각했죠」

「맞아. 그 점이 마음에 든다니까. 사람들을 보통 날 보면 동정하거나, 상처를 징그럽게 보거나, 실명한 진상을 알게 되면 미쳤다고 하거나, 등등……. 비슷비슷한 반응이고 난 그런 반응들 다 알 수 있으니까. 그런데 상처에 놀라긴 하였어도 대수롭지 않게 넘긴 건 네가 처음이었어. 넌 어설픈 동정도 말뿐인 위로도 하지 않아. 나에게 필요한 건 그것이란다」

「……그건 단순히 제가 이기적이고 남들에게 관심이 없어서 그래요」

「아주 관심이 없지. 보통은 내가 아까 말을 했을 때 '그렇다면 당신이 말한 그 사림이 누구냐'고 질투해 줘야 하는 시점이라고. 명색이 내 약혼자잖니?j

「그렇다면 당신이 말한 그 사람이 누구에요?」

책 읽는 어투로 또박또박 묻자 힐라리아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세게 꼬집어 기어이 비명을 나오게 한 뒤 넓은 침대에 도르륵 굴렀다.

「정말 궁금하니?」

「으윽, 네 . 아주 많이 정말 굉장히 미치도록 궁금합니다. 질투가 나서 죽을 것 같네요」

「좋아. 너에게만 특별히 말해 줄게. 바로 오빠야. 도젠 오빠라는 바보 같은 착각은 하지 말아 주길 바라」

'바로 오빠야'라고 말하는 그녀의 고백은 오늘 점심 메뉴를 말하는 것만큼이나 고저 없고 일상적이었기에 지크하르트는 순간적으로 오빠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아닌가하고, 그녀가 말한 것보다 더 바보 같은 착각을 했다. 그녀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고 나서야 그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어, 음. 그런가요」

「감상은?」

「총독 각하보다 당신을 먼저 만나는 건 불가능한데요」

썩 우스운 답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배를 부여잡고 폭소했다.

「넌 즐거워, 정말! 아하하하하! 여기에다가 내가 친오빠와의 이루지 못할 금단의 사랑에 괴로워하는 비련의 여주인공이었다면 더 재미났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범속한 사랑은 아니야. 단지, 내가 일생 동안 타인에게 가지며 소유할 수 있는 애정의 한계치까지 모두 오빠로 가득할 뿐이란 거지」

힐라리아가 꿈을 꾸는 것 같은 몽롱한 표정으로 허공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라는 이름의 폭군에게 지배당하여 있던 그녀의 세계에 있는 사람은 어머니와 오빠, 단 둘뿐이었다. 어머니가 필사적으로 펼친 연약한 울타리 안에서 그녀와 오빠만이 고립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우리를 지키려다 살해당하셨지. 나와 오빠의 앞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확실히 깨달았어. 아, 이제 나에겐 오빠밖에 남지 않았구나――― 하고」

비정상적으로 뒤틀린 벨포드라는 감옥과 어둠에서 그녀가 안심하고 온기를 느낄 수 있었던 건 오직 아이릭의 곁이었다. 아이릭만이 그녀를 보호해 주었고 아이릭만이 그녀를 안아주었고 아이릭만이 그녀를 지켜주었다. 그녀의 세계에는 이제 그녀와 아이릭이 아닌, 아이릭만이 남았다.

아이릭이 그녀의 유일한 세계였다.

「난 오빠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아서 슬펐어. 오빠를 위해 타인의 머릿속을 읽기도 하고, 스파이에게 역 정보를 흘리기도 하고, 아버지의 명령을 듣는 척하면서 오빠에게 유리한 쪽으로 조작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일을 했었지. 하지만 이건 내가 아니어도 다른 정신계 센티넬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잖아?」

지크하르트는 말없이 긍정했다.

힐라리아의 센티넬로서의 능력은 기본적으로 훔치는 것이다. 정신을 방과 그 안의 물건으로 비유하자면, 그녀는 방 안의 물건을 훔칠 수도 있으며, 물건을 훔치러 들어가 다른 물건을 몰래 놔둘 수도 있고 아예 방 안을 난장판으로 휘저어 놓을 수도 있다. 사용에 따라 광범위하지만, 한편으로는 얕았다. 일례로 타인의 내면세계를 읽는 점만 하여도 그의 친구인 클라우드가 훨씬 능했다.

「그런데 네 센티넬이 되는 건 오직 나 혼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거든. 오빠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무척 기뻤어. 오빠에게는 네가 어떤 남자인지 파악하고 결정하겠다고 하였지만 병살의 문을 노크할 때 네가 아무리 천하에 둘도 없는 최악의 인간쓰레기라도 가이드로 삼을 결심을 굳히고 있었지. 다행히 넌, 아주 흡족했고.

……뭐, 그럴 때도 있었다는 얘기야. 지금은 의미 없지만」

꿈결처럼 중얼거리던 힐라리아가 슬쩍 표정을 굳히더니, 이내 미소했다.

「이런 얘기는 지루하고 재미없네. 우리 다른 얘기할까? 난 이 다음에 널 닮은 아이를 낳고 싶어. 생각해 둔 이름이라도 있니?」

이상했다. 어렴풋이 그녀의 주변을 감돌던 위화감이 이제 공기까지 잠식하였다. 지크하르트는 오늘따라 왜 그러냐면서 혀끝까지 올라온 말을 간신히 막았다. 힐라리아가 화제를 돌리고 있는데 응해 주지 않으면 노여워할 것이다. 지크하르트는 저도 모르게 긴장한 어깨를 풀며 스스로를 달래듯 되뇌었다. 시간은, 많으니까.

「걸 닮으면 불행해질 테니 관두세요」

「날 닮은 것보다는 나을 텐데?J

「그럼 두 명 낳을까요? 당신을 닮은 딸이랑 저를 닮은 아들이랑」

힐라리아가 픽 웃었다.

「안 돼. 딸이든 아들이든 좋으니 딱 한 명만 낳아서 후회 없도록 마음껏 사랑해 줄 거야. 세상의 그 누구보다 가장 많이. 오빠를 좋아했던 것보다 훨씬 더 사랑해 줄 거라고. 아이를 낳으면 넌 안중에도 없어질걸」

「집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미리미리 당신에게 환심을 사 두어야 하겠는데요」

다분히 장난기 섞인 응대에 지크하르트도 농으로 대꾸해 주었다. 힐라리아가 즐거운 웃음을 터트렸다.

지크하르트는 반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했다. 그날 저녁 늦게, 바래다주었던 벨포드 저택 앞의 가로등에 비친 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낮은 목소리와 흐린 미소를.

「내가 죽으면 넌 슬플까?」

안까지는 데려다주지 않아도 된다고 정문 앞에서 헤어지려다, 사용인까지 멀리 물리더니 느닷없이 던진 물음이었다. 지크하르트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입 안이 바짝 타고 느슨하게 이완되어 있던 신경이 바짝 조였다. 위화감이 절정으로 올랐다. 그녀를 강하게 붙잡고 밤새도록 같이 있어주고 싶었지만, 자신의 예감이 좋지 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례를 범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저 단순히 가이드가 없는 여정이 긴장되어 피로하였을 따름일 수도 있지 않은가.

「죽는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당신이 죽으면 아주 많이 슬플 겁니다. 관을 붙잡고 엉엉 울 거라고요」

「……응, 역시 널 먼저 만날걸 그랬어」

희미한 미소가 노란 가로등 불빛 아래 이지러졌다. 그녀는 드레스를 살짝 올려 쥐고 인사했다.

「잘 자렴. 좋은 꿈꾸고」

지팡이로 바닥을 가늠하는 소리와 구두 소리가 또각또각 정문 안으로 사라지고 완전히 어둠에 묻히고 난 후에도 지크하르트는 이유 모를 불길함에 오래도록 저택 앞을 떠나지 못했다.

힐라리아가 자살한 시체로 발견된 건 다음날이었다.

끼이이익??! 타이어가 급히 감속하는 마찰음이 허공을 날카롭게 뒤흔들었다. 갓길에 아슬아슬하게 차를 멈춘 지크하르트는 핸들에 머리를 눌렀다. 그날 수없이 많았던 기회 중 단 한 번이라도 그녀를 붙잡았다면 자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번에는 강제로라도 그를 붙잡을 것이다. 심호흡을 찬찬히 하여 격동하는 가슴을 가라앉히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가게로 들어가 데스크의 관리인에게 엠마를 찾자 그녀는 그가 걸음할 때마다 늘 그러하였듯이 지체 없이 위층에서 내려왔다.

"어머나, 어쩐 일이세요. 대령님? 제가 얼마나 기다렸다고요.”

살갑게 다가온 엠마는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댔다. 비음이 가득한 애교를 흘리는 엠마와 그녀의 방까지 올라온 지크하르트는 문이 닫히자마자 그녀의 팔을 꽉 붙잡았다.

"엠마. 네게 독자적인 정보 조직이 있지?”

‘아이, 벌써 몸이 달아오르셨어요? 급하게 보채지 마세요.’라는 둥의 보편적인 반응을 보이려던 엠마의 낯이 언뜻 굳었지만 지크하르트의 시야에 머물렀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졌다.

“대령님. 물론 제가 이 일만으로는 먹고 살기 힘들고 아버지에게 배운 재주도 있으니 의뢰를 받긴 하지만요, 저 혼자 짬을 내서 발로 뛰는 거지 손가락 하나로 이리저리 부리는 사람은 없어요. 가끔씩 업자들끼리 도는 소문 정도는 있지만요.”

"농담하자는 게 아니야. 네가 평범한 창부일 리가 없잖아.”

"아이 차암. 오늘 따라 아이처럼 왜 이러세요. 이 거리에서 제가 그럼 뭔데요?”

“내가 네 가족을 모르냐? 아저씨가 널 헤임까지 고작해야 창녀로 만들어서 보낼 리가 없다고. 다리몽둥이를 부러트려서라도 막지. 거기다가 여기 가게의 주인이 너잖아.”

엠마의 낯빛이 그제야 눈에 띄게 일변했지만 여전히 시치미를 뗐다.

"마담이 들으면 노발대발하시겠네요. 앞으로 출입 금지 당하실지도 몰라요."

"내가 올 때마다 넌 다른 손님도 없이 항상 부르면 바로 내려오고, 가게의 다른 창부는 물론이고 기도나 관리인까지 널 대하는 언행에 조금 차이가 나고, 이 방은 확실하게 방음까지 되어 있다는 것도 눈치 못 채는 장님인 줄 알았냐?“

물끄러미 굳은 낯으로 그를 올려다보던 엠마가 붙잡은 그의 팔을 밀어내며 실소했다.

"항복, 항복.”

항복하는 제스처처럼 양 손을 머리까지 올려 짓궂게 흔든 그녀는 담배를 꺼내어 물었다.

"오래 못 속일 거라는 건 알았지만, 어쩐지 알면서 속아주는 낌새가 있었다니까요. 담배 피우실래요?“

지크하르트는 엠마에게 담배와 성냥을 받아 불을 붙였다. 엠마가 재떨이를 가지고 가 테이블에 앉고는 손짓했다. 맞은편에 착석하자 그녀는 담배 연기를 훅 뿜었다.

"제가 여기 주인이라는 건 둘째치고 정보 조직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어, 그냥 찍었는데? 없다고 하면 다른 정보원 소개 시켜달라고 부탁하려 했지."

“네에?”

엠마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곧 반달처럼 가늘어지며 큭큭 웃었다.

"못 살겠다, 정말. 오빠가 예전부터 뻥 하나는 잘 쳤다니까."

"기왕이면 번듯한 말로 허세라고 해 줘.“

그녀의 말투가 편해지자 지크하르트도 어릴 때처럼 가벼이 웃었다.

“창녀 행세를 한 건 이 거리에서 굴러다니는 돌멩이처럼 묻히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오빠한테 안 들키려고 한 건데 다 끝났네. 보스가 알게 되시면 난 실격이야, 실격."

"보스도 있냐?”

“그러엄. 천둥벌거숭이 같은 계집애가 이런 뒷거리에서 혼자 조직을 이끌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거야? 아버지 옛 친구분이셔.”

"혹시 마피아? 헤임에 있는 조직인가?"

“헤임은 아니고.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거짓으로 창녀인 양 꾸미고 있다는 건 눈치 챘지만, 자신이 추궁할 권리는 없으리라 여겨 모른 척하고 있는 사이에 그녀에게도 많은 일이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그녀에게 모든 일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처럼, 그녀가 그에게 모든 일을 이야기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게 뮈르달에 있지 왜 헤임까지 내려와서 고생이냐.”

"원인이 오빠에게도 절반은 있어. 오빠가 어르신이랑 대판 싸우고 가출하다시피 뛰쳐나갔는데 피붙이도 아닌 내가 오래 버틸 수 있었을 것 같아?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계약 끝나자 전쟁터로 가셨구. 중등교과 과정만 마치고 바로 나온 거야. 뭐, 나 하나 먹여 살리는 거야 어르신께는 부담스러운 일도 아니니 눈치껏 불어 있었다면 지금쯤 조건 괜찮은 혼처를 알아봐 주셨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러잖아도 예민한 사춘기 소녀의 감성으로는 있기 힘들었다구."

"그, 그랬냐? 헤임에서 네가 가끔 연락할 때도 전혀 그런 기색은 없었던 것 같은데."

"당연하지. 오빠는 복수하겠다고 타지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내가 눈칫밥 때문에 힘들다고 속 편한 소리를 할 수 있었을 것 같아?”

허기서 그때는 복수를 하겠다는 생각만 머리에 가득 차서 만류하는 종조부를 뿌리치고 얼마간의 돈만 챙겨 무작정 헤임까지 왔었다. 뒤에 의지가지없이 혼자 남을 그녀의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슐츠 가에서 그녀는 그와 동일한 병실에 입원하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여기까지 온 덤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한참 늦었지만 미안하게 됐다. 내가 그땐 너무 어려서 네 생각을 못했어.“

엠마의 미소가 잿빛 담배 연기 너머로 어룽어룽 흐무러졌다.

"괜찮아. 덕분에 오빠는 체스터 벨포드를 죽여서 내 복수도 해 주었고, 무엇보다 여기 와서 오빠 동정을 받아갔잖아. 그걸로 퉁쳐.”

"……아오, 그때 술을 마시는 게 아니었는데.“

지크하르트는 침음하며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았다. 엠마의 웃음소리가 뒤통수로 떨어졌다.

"사관생도라면 인기도 많을 텐데 설마 동정일 줄은 몰랐지 뭐야. 첫사랑은 있었던 게 맞지?“

싱글거리며 실컷 지크하르트를 놀려 먹은 엠마는 거의 필터까지 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사담은 여기까지만 하고 사업 얘기로 돌아가 볼까요, 대령님. 누구의 정보를 원하시는 건데요?”

"오르피어스 벨포드. 10년 전, 정확히는 현 벨포드 총독의 쿠데타 이후의 행적에 관한 정보이면 돼. 사소한 것이라도 상관없으니 뭐라도.”

일부러 가족과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 범위를 포괄적으로 넓게 잡아 조건을 내걸었다. 엠마의 표정에 동요가 일었으나 테이블에 엎드린 지크하르트는 보지 못했다. 그녀는 능숙하게 감정을 다잡았다.

"너무 에매한걸요. 일단은 해 보겠지만 큰 기대는 마세요. 설마 지난번에 전화로 물었던 일과 관련이 있는 거예요?"

“관련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고맙다,”

"고맙긴요, 엄연히 정보를 사고파는 거래인데.”

지크하르트는 어깨를 크게 흠칫하며 슬그머니 고개를 올렸다. 대어를 낚은 엠마의 미소가 햇살처럼 아름다웠다. 

"……얼만데?"

손가락 다섯 개가 쫙 펴졌다.

"오십 만 덴트?“

손가락이 고개를 흔드는 것처럼 옆으로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크하르트는 기겁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라 엠마에게 의뢰하는 만큼 지갑이 탈탈 털릴 것이라는 각오는 했지만 그 각오를 월등히 뛰어넘는 금액이었다.

"오백?! 내 석 달 치 월급이잖아!”

"대령님이니까 엄청 싸게 해 준 거예요. 벨포드 가를 뭐라고 여기시는 거예요? 중앙으로 따지자면 왕궁에 잠입하여 왕제의 스캔들을 알아오라는 요구랑 같다고요."

"아무리 그래도 왕궁과 비교하다니 과장이 심한 거 아니냐.”

“더군다나 벨포드의 사용인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교육 받는지 아세요? 그 저택에서 나오는 쓰레기들은 종잇조각 하나에 이르기까지 사전에 철저히 검열한다는 소문까지 있다고요. 십중십 정신계 센티넬까지 필요할 텐데 정신계가 얼마나 귀한지는 알고 있으시죠? 타계열 센티넬은 적당히 몸을 뺄 방도나 있지 정신계열은 예외 없이 어떠한 형태로든 정부에 속하여서,”

"아, 알았어! 알았다고! 돈 다 지불하마!“

이 금액이 절대 부당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이유가 줄줄줄 끊임없이 이어지자 그는 혀를 내두르며 백기를 들었다. 이 같은 거래에 통달한 자는 엠마였고 무지한 자는 지크하르트였다.

“……혹시 할부 같은 건 안 되고? 최소 육 개월 정도…….”

"후후후! 일단 계약서부터 작성하시죠. 기다리고 있으시면 벨포드 소령님이 오늘 입은 속옷 색깔 정도는 알아다 줄게요. 아, 이건 대령님이 더 잘 아시려나?“

실로 공포스럽게까지 보이는 웃음을 꺄르륵 터트린 그녀는 들통도 났으니 거리낄 게 없다는 듯 내선 전화로 종업원에게 계약서와 술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돈도 없으실 테니 이 술은 계약 완료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제가 사죠.”

“……눈물 나도록 고맙구만.”

저금해 둔 게 있으니 월급에 갑자기 구멍이 뻥 뚫려도 굶어죽지는 않으리라 애써 위안하며 술로 암담함을 삼켰다.

엠마와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며 한담하다 아파트로 귀가하였을 때는 새벽 2시를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마음 같아서야 부스러기 하나까지 탈탈 털린 김에 그녀가 사겠다고 한 술이었으니 가게의 술 저장고가 바닥을 드러낼 정도로 마시고 싶었으나, 그는 다음날에도 등청해야 하는 가련한 장교의 신세였다. 취기는 있었지만 몸을 가누지 못 할 만큼 대취한 건 아니라 지크하르트는 오르피어스가 깨지 않도록 가급적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달칵, 하고 현관의 불을 켠 순간 그는 기겁하여 비명을 꽥 질렀다.

"헉!! 야, 야!! 너 여기서 뭐하냐!!!”

"……왔어?“

아무도 없으리라 여겼던 어둠 속에서 불쑥 존재를 드러내어 지크하르트의 심장을 벌렁거리게 만든 장본인이 손등으로 눈을 부비며 고개를 들었다. 간 떨어지게 왜 이 자식은 현관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자고 있었던 걸까.

"먼저 자라고 했잖냐."

“그치만……. 화가 나서 안 돌아올까봐…….” 

“내가? 화를 낸다고?"

“……아까 내가 말을 안 한 것 때문에.”

이 자식 이런 놈이었던가. 지크하르트는 우물쭈물 시선을 피하며 말꼬리를 흐리는 오르피어스를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내려다보다가 머리를 긁적이고는 그를 부축했다.

"됐으니까 들어가서 자자."

"응. 잘 자.“

하품하며 일어난 오르피어스는 곧장 걸음을 옮겼다. 지크하르트가 그의 팔을 턱 붙잡았다.

"야. 어디가? 침실은 저쪽인데 거실로 가고 있냐."

“이제까지 맨날 난 거실에서 잤잖아.”

오히려 이상하다는 기색으로 그가 갸웃했다. ……맞는 말이었다. 맞는 말이긴 한데 이 아파트의 주인이 오르피어스라는 사실은 차치하고도 몸도 마음도 편치 않아서 골골거리는 놈을 불편하게 소파에서 자게 하는 건 영 꺼림칙했다. 그도 꽤 졸렸던 데다가 길게 실랑이할 의욕도 나지 않아서 지크하르트는 그냥 오르피어스의 허리를 붙잡아 올려 어깨에 둘러맸다.

“어, 어?! 지크하르트! 놔!!”

“발버둥 치지 마. 걷어차면 세간 다 깨진다.”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 침실 문을 열고 침대로 그를 안착시켰다.

"손가락 하나 안 건드릴 테니까 여기에서 자라. 너 이러다가 진짜 병난다."

"거, 거실에서는 네가 자려구?”

“너보다 길어서 소파에서 못 자.”

건성으로 대꾸하며 길게 하품했다. 옷을 훌훌 벗어던지는 그를 아연히 보던 오르피어스는 맨몸이 전등빛에 드러나자 불현듯 얼굴을 붉히며 침대에 등을 돌려 누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크하르트는 무심히 아침에 벗어놓은 그대로 침대 귀퉁이에 널브러져 있는 파자마를 입고는 양치를 하려는 듯 침실 밖을 나갔다.

잠시 후 그가 돌아왔을 때 오르피어스는 숨을 죽이고 자는 척했다. 꼭 내리감은 망막으로 스며들던 전등빛이 꺼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슬리퍼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나고, 침대 앞에서 멈추었다가, 삐걱거리며 체중이 실렸다. 등 뒤로 남자의 존재감이 묵직하게 닿았다. 숨도 제대로 못 쉬던 오르피어스는 지크하르트의 숨소리가 고요히 가라앉고 난 뒤에야 잘게 헐떡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로 희끄무레한 암상이 그려졌다. 웨이브진 머리칼과, 날렵한 목덜미와, 넓은 어깨의 선. 그의 등.

술 냄새와, 그리고 낯선 향수 냄새.

지크하르트는 향수를 쓰지 않는다. 여자를 만나고 온 걸까. 어퍼 돌덤 가의 엠마라는 여자일까. 지크하르트는 항상 그를 안고 나면 여자를 찾아간다.

“…….”

도로 등을 돌려 눕고 꼼지락꼼지락 최대한 침대 끝까지 자리를 피한 오르피어스는 애써 잠을 청하려 눈을 감았다.

지크하르트가 돌아가자 좁고 허름한 방에는 순식간에 정적이 하강했다. 방을 치우겠다는 직원을 거절하여 물리고 홀로 남은 엠마는 남은 술을 홀짝홀짝 독작하며 마셨다. 여태 십 년을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지내오다가 이제 와서 갑자기 오르피어스에 관한 정보라니. 웃음이 나올 것 같기도 하고 울음이 나올 것 같기도 하여 엠마는 울컥거리는 감정을 술로 삼켰다.

“체스터 벨포드가 죽은 후에 10년이나 지났다구, 오빠…….”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목구멍 안으로 넘긴 엠마는 의자에 깊이 기대었다. 아무렇게나 테이블에 놓은 술병이 데구르르 굴러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소리에도 미동하지 않았다. 그대로 잠에 빠진 듯이 고요히 앉아 있던 그녀는 시계의 시침이 숫자 3을 지날 무렵에야 옷자락을 부스럭거리며 허리를 굽혔다. 성냥을 켜고 테이블 구석에 놓인 채 방치되었던 지크하르트가 작성한 계약서 모서리에 불을 붙였다. 종이는 금세 붉은 불길에 먹혀 검은 재로 화해 재떨이로 떨어졌다.

오르피어스에 관한 정보가 필요하다면 그는 대단히 탁월한 선택을 한 것이다. 엠마는 벨포드 일가와 그 측근을 제외하고 오르피어스의 동향을 제일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리라 자부했다. 지크하르트가 원하는 정보가 무엇이었든 대개 즉시 대답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오빠. 난 오르피어스 벨포드에 관한 정보를 넘기기 전에 오빠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할 것 같아.”

엠마는 잿더미를 향해 낮게 속닥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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