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0)

5.

「지크하르트 카시야스」

아이릭은 유안이 가지고 온 보고서에 적힌 이름자를 천천히 되뇌었다. 보고서를 읽은 후에도 소년의 이름자는 여전히 낯설게 씹혔다. 

오르피어스의 폭주를 진정시켜주었다는 미등재 가이드의 신상을 큰 뜻 없이 간략히 보고하려던 유안은 '카시야스모'라는 성씨에서 익숙함을 감지하고 아서와 의논하였다. 하여 새롭게 조사된 소년의 신상보고서였다.

「난 전혀 기억이 안나는군」

「그래서 지크하르트도 이름을 숨기거나 바꾸지 않고 사용한 것 같네요. 대범하다고 해야 할지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꼬마가 마르크 슐츠의 아들이라는 건가?」

「네. 막내 도련님이 최초로 살해하신 슐츠 일가의 유일한 생존자가 맞습니다」

5년이나 된 일이다. 오르피어스를 알게 모르게 살들히 보살펴 주고 있는 유안이 아니라면 구태여 기억의 구석을 할애하지 않을 만큼 작은 일이기도 하였다. 

당연히 아이릭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가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사안이라면 체스터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마르크 슐츠는 1왕자를 지원하는 로비커스 콘체른 사장의 심복의 조카였다. 즉, 1왕녀를 지지하는 체스터에게 있어서는 굳이 제거할 필요가 없으나 강박적인 그의 성정으로 인해 처리를 해야만 제거해야 성이 풀리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실패해도 큰 지장이 없을 암살에 오르피어스를 실험대로 올렸다. 결과는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였다. 아버지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소년이 가옥을 방화하고 마르크의 일가를 소사시키는데 성공하였으나 발견된 시체는 3구였다. 

마르크의 장남은 화염 속을 탈출하였다.

「카시야스는 모계의 성인가」

「마르크 슐츠 본인이 위르달 출신이기도 해서 원래 자식들에게는 모계의 성을 쓰도록 한 모양입니다. 지크하르트 카시야스는 이름을 전혀 바꾸지 않고 사관학교에 입학한 거죠. 지난 5년간의 행적은 깨끗이 지워져 있어 자세히 파악하려면 시일이 필요합니다」

아이릭은 주억거리며 보고서를 뒤적였다.

「입학 성적은 평균치로군」

「필기시험의 반영 비율이 높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입학한 후에는 발군의 실력이 부각되어 교사들도 칭찬이 자자하더군요. 여전히 필기는 약합니다만」

「가이드로서의 재능도 뛰어나고, 잘 키우면 쓸모는 있겠는데」

「위험해요」

유안으로서는 드물게 날을 굳히며 정색하는 모습을 아이릭은 흥미롭게 관찰하였다.

「카시야스가 가족이 몰살당한 내막을 알고 있으리라 보나?」

「당시의 볼이 꽤 크게 번져 피해가 커진 탓에 시경은 슐츠 일가를 목표로 둔 게 아닌 방화범의 무작위한 소행이 라고 발표하긴 했습니다만, 카시야스 하나에만 중점을 두고 정황을 되집어 보면 체스터 님께 도달하지 못할 건 없습니다.5년 동안의 행적을 백지로 만들어준 보호자가 있었으니 가능성은 더 높아지지 않을까요」

체중이 쏠린 의자가 삐걱거렸다. 등받이에 몸을 깊게 파묻은 아이릭이 책상을 몇 차례 두드리다 유안을 응시했다. 

「해서,넌 어떻게 하길 바란다는 건가?」

「체스터님이시라면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리시겠지만……」

유안은 씁쓸하게 웃었다.

「제 소견으로는 이 이상 크지 않도록 적당히 손 안에서 지켜보다가 위험해 지면 그때 처분을,」

「시시하군」

정론을 묻고자 하는 게 아니야, 라고 따분함이 스민 어조로 아이릭이 말을 잘랐다. 그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머릿속으로 생각을 가다듬다가 재차 말을이었다.

「유안, 질문을 한 가지 하마. 부모와 동생이 살해당한 사람은 보편적으로 어떠한 감정을 갖지? 분노라든가 슬픔 이라든가 하는 언어적인 의미는 알고 있어」

「……3왕녀 니베이아 베아트리체 전하께서 부당한 죽음을 당하신다면 아이릭 님은 어떻게 느끼실 것 같으신가요?」

대꾸는 바로 없었다. 천장을 몰려다보던 자세 그대로 유안의 말을 곱씹으며 상황을 가정하는 시간이 얼마간 흘러가서야 아이릭은 명쾌한 웃음을 머금었다.

「아, 좋아. 이해했다」

그는 책상을 가법게 탁 쳤다.

「힐라리아를 불러와라」

「아가씨를요? 왜요?」

「카시야스가 운 좋게 가이드라고 하니 페어가 되어야지. 그 녀석의 까다로운 성미를 카시야스가 만족시켜 줄지는 모르겠다만」

아이릭을 그의 부모보다 더 잘 파악하고 있는 유안으로서도 말문이 막혔다. 혼자만 납득하고 사고의 전개를 한참 뛰어 넘어 결론만을 가져다가 시행하라고 명령하니 도무지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만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설마 차도살인으로 아가씨를 제거하시려고요?」

'제거' 따위의 단어는 힐라리아에게 사용하기멘 부당한 단어였으나 아이릭과 대화하려면 에두른 표현으로는 어렵다. 아이릭은 모든 것을 직설적으로, 접하는 그대로 이해한다. 유안은 속으로 힐라리아에게 빠르게 사과했다.

「힐라리아는 사용 가치가 높아. 아버지가 자해하여 눈까지 훼손한 그 애의 저향을 묵인한 것처럼 나도 특별히 제거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만?」

「그럼 왜 지크하르트를 아가씨의 가이드로 삼으시는 건가요? 지크하르트가 내막을 알게 되면 아가씨가 제일 위험하십니다」

「죽인 건 벨포드지, 힐라리아는 아니지 않나?」

유안은 '벨포드라는 거대한 틀 안에 힐라리아가 포함되고 보통 사람은 증오의 표적을 이성적으로 명확히 나누지 못한다'라는 요지의 응대를 꺼내려 하였으나 아이릭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게다가 나라면 힐라리아를 죽이는 대신 힐라리마로부터 정보를 얻어내고 이용할 거다. 바로 죽이는 것보다는 그쪽이 훨씬 유용하지」

「논리적으로는 맞긴 한데요……」

「힐라리아라면 자신에게 화살을 돌린 살의 정도는 감지할 수 있다」

이어지는 첨언이 유안의 입을 다물게 했다. 아이릭의 말도 정확했다. 지크하르트가 그녀에게 뚜렷한 적의를 드러 낸다면 정신을 훔치는 그녀가 알아차리지 못할 리는 없다. 페어로서 각인되면 지크하르트의 내심을 온전히 엿보는 것이 불가능할 터이나 각인 전까지 지크하르트가 힐라리아 벨포드라는 사람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는 없으리라고, 유안은 불안한 마음을 정리했다.

「난 아버지에게 전혀 유감이 없지만 우리 형제 중에서 아버지를 제일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은 오르피어스일 거다. 그래서 난 오르피어스에게 아버지를 상으로 주려고 했지. 허나 녀석에게는 볼안 요소가 많아서 고민하던 차에 새로이 끼워넣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수단이 지크하르트라는 거다」

아이릭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협력하든지 경합을 벌이든지 아에 서로의 존재를 모르든지, 수단은 두 녀석들미 정할 일이지. 잘 풀리기만 하면 오르피어스뿐만이 아니라 카시야스에게도 좋은 상이 되질 않겠나?」

「.....」

다른 사람에게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면 사람의 목숨이 장난감이냐며 사람의 존재가 유흥거리미냐며 분개하였을 터다. 그렇지만 아이릭은 처음부터 이렇게 태어난 남자였고, 일평생을 바치기로 한 주인이었다. 체스터의 광기가 가장최악으로 치달아 응집된 된 괴물은 다름 아닌 아이릭이리라 생각하며 유안은 무겁게 수긍했다.

「만에 하나 지크하르트가 진상을 모른다면요?」

아미릭의 대답은 시원했다.

「모른다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하지」

「……알겠습니다. 힐라리아 아가씨를 모셔오겠습니다」

「아버지에게는 내가 말씀드리마」

맏아들을 유일하게 신임하는 체스터는 아이릭의 이 제안도 거절하기는커녕 흔감하게 허가할 것이다. 유안은 살짝 목례하고 아이릭의 방을 빠져 나왔다. 

사욕이 없어 바람 또한 없었기에 아버지에게 무념히 순응하였던 아미릭의 안에 최초로 욕망이 싹을 틔웠을 때부터 체스터 벨포드의 종언은 예고되어 있었다.

첫 인상은 최악이었다. 적어도 오르피어스에게는 그러하였다.

아버지의 아래에 있을 때의 기억은 열을 않고 있는 것처럼 불분명하게 흐렸다. 무의식중에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최후의 껍질을 정신에 둘러 생생한 기억을 흐리게 문지른 것인지, 끊임없이 조각되고 부서지던 후유증의 여파인지 그로서는 알지 못하였으나 기억이 떠올려지지 않는다면 어쨌든 그것으로 좋았다. 볼필요한 기억이었다.

가끔씩 잠을 자지 못하기는 하였으나 오르피어스는 잊힌 과거의 기억으로 악몽을 꾸거나 특별히 괴로워한 적은 없었다. 그의 의식 저편에서 죄의식은 두껍게 봉인된 채 침전하여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오직 유일하게 단 한 가지, 색채를 지닌 장면이 있었다.

사납게 일렁이는 화염 사이로 격정을 담아 빛나던 뜨거운 보라색 눈동자는 때때로 그의 머릿속을 감돌았다. 꿈으로 꾸고 나면 등이 흥건하게 젖었고 머릿속으로 상기되면 오한이 일었다. 

원인이 무엇일지 아이릭이나 유안에게 상담해 볼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왠지 망설여였고, 그 망설임의 이유도 알 수가 없어 불쾌하였다.

하여, 이따금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던 환상을 현실로 맞닥뜨린 그의 기분은 최악이었다.

불참하였던 입학식으로부터 일주일 후 최초로 출석한 수업에서 기억 속의 보라색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사나운 전율이 그를 짓쳤고, 오르피어스는 자리를 박차 교실을 뛰쳐나왔다.

한참을 홀로 주저앉아 동요를 삭힌 후에 교실로 돌아왔다. 수업은 이미 끝나 있었고 지크하르트는 일주일 사이에 제법 친구를 사권 듯 몇 명의 무리에 섞여 즐겁게 이야기 중이었다. 

곁눈으로 그를 훔쳐보며 기억 속 소년의 얼굴에 시간을 더해 보았다. 앳되기만 하였던 어린 날에 세월이 깃들고, 소년이 표출하였던 분노와 증오와 비통을 덜어내면 지금의 지크하르트와 같은 얼굴이 될 것 같기도 하였다. 

부드러운 얇은 웨미브가 있는 흑발과 영민한 빛을 머금은 보라색 눈동자를 기억의 소년에게 그대로 옮겨 보기도 하던 그는 시선을 느낀 듯 지크하르트가 돌아보자 제풀에 흠칫하여 눈을 내깔았다.

기숙사로 돌아온 후에도 오랫동안 고민하다 막 대면하고 어색하게 기색을 살피는 룸메이트에게 지크하르트에 대하여 물었다. 사교성이 좋다, 인기가 많아서 두루두루 친하게 지낸다, 보기보다 훨씬 재능이 있는 것 같다, 정신계 센티넬인 클라우드와 룸메이트다, 라는 둥 하등 무의미한 단편적인 정보의 나열에 질린 그는 지폐를 몇 장 주었다. 

룸메이트는 며칠 후에 진짜 정보를 갖고 왔다.

방화 사건으로 조실부모하였고, 형제는 여동이 한 명 있었으며, 출신지는 글래스팅 북쪽의 하밀 시. 오르피어스는 애매한 기억의 가닥을 더듬으려 애썼고, 간신히 슐츠에 도달하였다. 기억의 소년은 지크하르트가 맞았다. 

자신 보다 한 살 연상이니 당시에는 11살이었을 터다.

그럼에도 체스터가 왜 슐츠 일가를 몰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는지, 일가의 죽음이 그 이후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결과적으로 유리한 국면을 연출하게 되었는지, 무엇도 알지 못했다. 

체스터는 명령하였고 오르피어스가 이에 의문을 갖거나 거부하는 건 불가능했다.

확실한 건, 자신이 지크하르트의 가족을 죽였다는 것.

실패한 표적이다. 오르피어스는 고심하였다. 체스터에게 이 사실을 밝히면 분명히 죽여서 처리하라고 명령할 것 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오랫동안 고민하던 오르피어스는 그의 고민 여부와는 상관없이 처음부터 그의 마음이 정하였던 대답을 반복하였다. 그때 실패한 표적을 찾아내라는 명령은 받지 않았으니까 말하지 않아도 돼. 

지크하르트의 생존은 아버지가 몰라도 상관없어. 이성도 납득시킬 수 있는 좋은 결론이었다.

명료한 사실 하나를 인식한 오르피어스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지크하르트를 의식의 저편으로 밀어냈다. 의혹을 해결하였으니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지크하르트와 조우하고 처음으로 편안하게 잠을 잤다.

이가 오산이었음은 고작해야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러 내려간 기숙사 식당에서 깨달았다. 클라우드의 어깨에 팔을 건 채 하품하며 터벅터벅 나란히 계단을 내려오는 지크하르트와 마주하자 심장은 또다시 불쾌한 울림으로 맥동하기 시작하였다. 

반사적으로 걸음을 돌려 식당을 나가 만남은 면하였으나 학내에서 동기인 지크하르트를 완전히 피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였다.

수업 중에 열심히 필기하다가 턱을 괴고 졸아 교사에게 꾸중을 듣는 지크하르트도 보았고, 훈련 시간이 되면 생생 하게 기력을 회복하여 수석을 놓치지 않는 지크하르트도 보았다. 

쾌활하게 높아지는 시원한 웃음소리도 들었고, 네 가족이 워낙에 유명하니까 벨포드보다는 오르피어스라고 부르는 게 낫지 않겠냐며 '오르피어스라고 학교에서 그의 이름을 제일 처음으로 불러주는 목소리도 들었다.

그는 향상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활달하게 좌중을 이끄는 리더는 아니었으나 외모도 번듯한데다 서글서글 붙임성도 있는 지크하르트를 중심으로 무리가 형성될 때가 잦았고, 그럴 때면 오르피어스는 멀리 떨어진 뒤편에서 지크하르트의 목소리와 웃음소리를 들으며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친구를 사귀는 게 그렇게 좋은 걸까. 친구란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거지.

친구들 틈에 있는 지크하르트는 밝은 표정을 무너트리지 않았기에 오르피어스도 궁금해졌고, 직접 체험해 보고 싶었지만 평범하게 친구를 사귀고 평범한 대화를 나누는 방법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아주 어렸을 때의 그는 분명히 동네의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며 신나게 놀았던 것 같은 퇴락한 기억의 파편이 남아 있지만 아버지를 거치며 그의 일상과 평범함은 흔적도 남지 않았다. 

시험 삼아 룸메이트에게 친구 비슷한 것을 흉내 내며 시도하였으나, 그 보다 생일이 석 달 빠르고 주근깨가 선명하게 콧잔등에 남아 있고 두 살 많은 형이 있다는 그의 룸메이트는 아첨하듯이 웃거나 비굴하게 눈치를 살폈다. 

지크하르트의 친구들처럼 구김 없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돈이 얽힌 거래로 교분을 튼 관계는 친구가 되지 않는다는 걸 인식하지 못한 오르피어스는 곧 지루해졌다.

「친구가 있으면 좋아요?」

레에카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지다 이내 웃음을 터트리며 가늘게 휘었다.

「학교가 좋긴 좋구나. 네 입에서 친구 사귀고 싶다는 말도 나오고」

「사귀고 싶다는 말은 아닌데요」

새침하게 입술을 삐죽이는 그의 머리칼을 레베카가 웃으며 헤집었다.

「나는 물론이거니와 네 형들과 누나를 비롯하여 나이가 많은 사람은 네 옆에 많지? 너보다 인생을 오래 산 사람에게는 아주 사소한 한 가지라도 배울 점이 있고 무엇이든 네 자양분이 되어줄 거다. 하지만 친구 사이에서만 배울 수 있고, 또 나눌 수 있는 마음도 있지」

「어떻게 사귈 수 있는 건데요?」

「동등해야지. 그리고 너 자신부터 솔직해져야 하고. 내 말이 정론은 아니고 교분을 나누게 되는 과정은 각양각색 이다만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렇더구나. 너는 어떨 것 같으냐, 오르피어스?」

「동등하고 솔직해야 하다니 조건이 까다롭잖아요. 전 평생 친구를 못 만날 거 같아요」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친구는 평생을 함께 하는 배우자를 만나는 것보다 어렵기도 하지」

「결혼도 솔직해져야 해요?」

「그럼. 비밀을 기반으로 쌓은 관계는 결국 허물어지게 되어 있단다」

「결혼도 평생 못하겠네요」

레베카에게도 난 솔직해지지 못하니까. 뒷말은 속으로 되삼켰기에 레베카는 의심 없이 웃으며 화제를 전환하였다.

「친구를 사귀는 것도 좋지만 슬슬 페어 가이드를 고려해야지. 사춘기 때는 그러잖아도 폭주하기 쉬운데 내가 늘 향상 네 옆에 있어줄 수 있는 건 아니니 너도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임시 가이드가 아니라 정식으로 각인한 가이드가 필요할 때가 되었다. 내가 너와 잘 맞을 듯한 또래의 소녀를 생각해 두었는데 관심은 있나? 고아 출신이지만 아주 착하고 다정한 아이란다. 나이는 너보다 한 살 어리지」

정식 가이드가 필요하다는 말에 멍하니 지크하르트가 내 가이드가 되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 버린 오르피어스는 화들짝하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나중에 생각해 볼게요」

우물우물 당혹감을 얼버무리며 빨대를 꽃고 있던 오렌지 주스에 고개를 처박았다. 레베카와 헤어져서 기숙사로 돌아온 오르피어스는 친구는 동등하고 솔직해져야 한다는 말을 떠올리며 어렴풋이 시도하였던 친구 놀이를 포기했다.

지크하르트를 눈에 담게 되자 긍금한 건 이외에도 하나씩 늘어갔다. 사관학교는 무엇 때문에 입학하였을까. 친구들과 어울리면 즐거울까. 아버지가 가족을 죽이게 했다는 걸 알고 있을까.

그리고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최후의 궁금증은 그를 가장 장시간 고심하게 하였다. 결론은 '기억하지 못한다'로 판단하였다. 자신의 원수를 알고, 그 원수의 아들이자 실행범과 하루에도 수 번씩 마주치는데도 평연하게 인사하고 친구들과 웃고 떠들지는 못할 것이다. 

동요하는 건 오히려 오르피어스였다. 지크하르트가 인사할 때마다 괜스레 움찔 놀라 무시하고 그와 부딪히는 걸 최대한 피하려 수업에 더 많이 결석하고 기숙사 방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았다. 기억하지 못하리라 판단하였으나 이가 확신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지크하르트에게 직접 물어 의문을 해소할 수도 없었다. 내가 네 부모를 죽였는데, 날 기억하해? ……세상에 둘도 없는 멍청한 질문이었다.

「야. 넌 다 알고 있지 않냐?」

느닷없이 툭 내던져진 질문에 너무 놀라 하마터면 외마디 비명을 지를 뻔하였다.

「뭐,뭘?"」

「우리가 듣는 수업 말이야」

지크하르트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하며 소총을 가리켰다. 더 이상은 불참하는 것도 한계라 억지로 출석한 수업은 때마침 사격 훈련이었고, 훈련 조교는 특별히 신경을 써서 제일 성적이 우수한 지크하르트와 매번 결석하여 혼자 뒤처진 오르피어스를 짝지어 주었다.

「일반 수업은 나도 헷갈려서 네가 일부러 답을 피해서 적는지는 모르겠는데, 이렇게 몸으로 때우는 교과는 굉장히 능숙한데도 일부러 성의 없이 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총을 쏘는 족족 표적판에서 어긋나 훈련 조교의 입에서 기어이 한숨을 쉬게 만들었던 오르피어스였다. 체력 단련 수업에서도 달리기는 꼴찌에 모든 종목에서 평균 미달의 하위권을 맴돌아 교사들이 성적을 조작하래야 할 수도 없는 처참한 결과는 벨포드만 아니었으면 입학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비웃음을 샀다.

「……왜 그렇게생각해?」

「그냥, 느낌이지. 네 평상시 몸놀림이나 걸음에서는 훈련 받은 사람들만이 갖는 특유의 버릇이나 고정된 행동이 있어. 걸음새도 시적거리는 것 같지만 무게 중심은 정확하게 잡혀 있고. 그런데 교과는 향상 끝에서 맴돌면서도 정작 지친 기색은 전혀 없는데다가, 살인 병기인 총을 들든 칼을 들든 너무 태연하니까. 보통은 그 무게감이 섬득하거든」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린 아이의 장난처럼 따분한 훈련을 성실하게 임하는 게 무리였다. 게다가 훈련 조교들은 실수하여도 도젠처럼 팔다리가 부러질 때까지 구타하거나 울면서 토할 때까지 혹독하게 몰아세우지는 않는다. 

오르피어스는 한때 피멍이 사라지지 않은 적이 없었던 몸을 무심결에 감싸 안았다.

그가 지크하르트를 보았던 것처럼, 지크하르트도 그를 보고 있었다.

「아니면 말고」

무심한 응대를 돌리며 지크하르트는 짧은 휴식 시간을 왁자하게 떠들며 보내는 급우들의 틈으로 섞여 들었다.

'지크하르트가나를 보고 있었어'

그 자각은 야릇한 열병처럼 그의 체내를 휘돌았다. 오르피어스는 이틀을 앓ㅎ았다.

혼곤하게 전신을 누르는 열기에 깔려 허우적거리면서도 머릿속은 끙임없미 한 가지의 의문을 곱씹었다. 왜 날 보았을까. 날 기억하고 있는 걸까. 기억하고 있다면 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을까.

죽이고 싶다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오르피어스는 그처럼 급우들과 행동하지 않았고 늘 혼자 사람들로부터 떨어진 인적 없는 곳에 머물렀다. 자신이 죽였다는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고 하는 걸까 싶기도 하여 지크하르트의 귀에도 들어가게끔 외출 허가증을 끊어 의미도 없이 혼자 으슥한 뒷골목을 하루 종일 거닐기도 하였지만 지크하르트가 그를 죽이려는 조짐은 없었다. 

왠지 한심해져서 이상한 시도는 그만두었지만 머릿속마저 깨끗이 비워낼 수 있던 건 아니었다.

폭주한 건 외출에서 돌아온 사흘 후의 휴일이었다.

역사학을 강의하는 교사의 아내와 어린 두 딸이 학교를 방문하였고, 오르피어스는 젊은 부부와 두 명의 딸에게서 그가 죽인 그의 가족을 착종하였다. 계기는 과거의 잔재였으나 원인 중에는 지크하르트로 인하여 산란하였던 마음의 동요도 있었다. 

이처럼 복잡다단하게 얽혀 흉부 안쪽을 답답하게 두드리지 않았다면 오르피어스도 혼란을 어렵게나마 가라앉혔겠으나, 평상심을 유지하기 위하여 쏟을 정신의 여력이 부족했다.

화목한 일가의 환영이 화염에 삼켜지고 사람들의 다급한 외침과 비명이 그의 의식이 닿는 모든 곳을 점령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신을 뒤집었던 체스터의 학대에 익숙한 오르피어스는 여타의 센티넬보다 붕괴되기 시작하는 감각을 유지할 수 있는 인고가 길었다. 

출장으로 헤임을 벗어난 레베카가 당도할 때까지의 시간은 2시간 이상, 그때까지는 미치지 않고 버틸수 있었다. 효예한 감각을 가다듬고자 애쓰며 비명을 짓씹었다.

그리고, 눈물에 흠뻑 젖은 시야로 오르피어스는 지크하르트를 보았다.

그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시선으로 화염 너머의 그를 직시했다. 또 한 번, 확신했다. 이성으로 추론한 대답이 아닌 본능의 인지였다. 

지크하르트는 기억에 각인된 그 소년이었다. 너울너울 난폭한 춤을 추며 사방을 휘도는 백염의 선연한 빛을 머금은 격정적인 자색 눈동자는, 그 소년의 것이었다. 

그래, 지크하르트는 5년 전의 그날에도 자신에게 공포는 갖지 않았다.

'내가 네 부모와 동생을 죽였어'

둔하게 잘 움직여지지 않는 혀로 중얼중얼 입속으로 말을 건네다, 발작적인 비명을 질렀다. 기억하고 있으면 잘 됐네. 네 눈앞에서 원수가 고통스러워하며 한 명 죽는 거잖아. 그런 건 역시, 기쁠까? 나는 잘 모르겠어. 너도, 모르겠고.

화염의 건너편에서 지크하르트는 주변의 소요로부터 격리된 것처럼 고요히 그를 응시했다. 오르피어스는 눈물을 닦으며 지크하르트의 낯에서 희열과 기쁨 같은 감정의 조각을 찾아보려 하였지만 제멋대로 확장된 시야로는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때에 지크하르트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게 조금 아쉬워졌고, 그 아쉬움은 찰나 머릿속을 스친 것처럼 빠르게 고통으로 난도질되어 사라졌다. 레베카가 올 때까지 얼마나 남았을까. 너무 아팠다.

웅성임이 갑자기 치솟았다. 무어라 커다랗게 만류하는 외침이 고막을 찢어 귀를 틀어막았다. 검압에 화염이 갈라 지며 좁은 틈을 냈다. 

한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법한 틈으로 화염은 사납게 날름거렸고, 틈이 에워지기까지의 아슬아슬한 순간을 재빠르게 내달리는 걸음이 있었다. 비명이 하늘을 찢었다. 치료계 센티넬을 불러오라는 다급 한고함이 번졌다.

뚜벅뚜벅 다가오는 걸음이 천둥처럼 그의 앞에 당도하였다.

「오르피어스」

오르피어스.

연젠가, 똑같이 화염 속에서 괴로워하며 울부짖던 어린 자신을 온화하게 부르며 포옹하였던 목소리가 있었다. 그의 불길에 육체가 타들어가면서도 끝까지 그를 놓지 않고 목숨을 걸고 그를 구하였던 존재가 있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지 마」

지크하르트가 그를 끌어안았다.

안온하게 보듬어주는 가이드의 감정적인 파장에 나른하게 젖어들며 암전하였던 의식이 깨어났을 때는 모든 상황이 정리된 후였다. 오르피어스는 자신이 비교적 멀쩡하게 침대에 누워있고 정신도 명료하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염려하며 내려다보는 레베카에게 물었다.

「저기, 레베카. 보통 자기의 원수를 죽을 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구하지는 않죠?」

깨어나자마자 느닷없는 소리에 레베카는 황당해하였지만 그 모습마저 평소의 오르피어스라고 느꼈는지 이내 웃으며 끄덕였다.

「탈 없는 것 같아서 다행이구나」

'날 기억하지 못해'

그의 기억을 확신하자 어쩐지 우스워였다. 어이가 없었다. 나는 네 가족을 죽였는데 너는 날 구해줘? 그것도 네가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 속에? 너는 원수를 살리려다 죽을 뻔했다고. 바보 같은 놈. 멍청한 자식. 오르피어스는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트리며 이를 악물었다.

지크하르트는 오르피어스가 퇴원한 다음날 오전에야 눈을 떴다.

센티넬의 치료는 받았지만 흉터까지 온전히 치유되지 않았다는 걸 엿들었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부상이 컸다.

지크하르트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평생을 가야 하는 흉터잖아. 날 그대로 두었으면 넌 다치지 않았어도 됐어. 나는 네 원수야. 죽도록 방치해두었어야지. 반편이나마 원수를 갚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겉으로 토해내지 못하는 진정은 흉부에서 엉망으로 일그러진 채 난폭한 비아냥거림이 되어 분출되었다.

병실 문을 닫고 나오자마자 후회했다.

'이런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어. 괜찮으냐고, 먼저 묻고 싶었는데'

병실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지만 지크하르트의 곁에는 클라우드가 있었다. 그의 능력은 정확히 모르지만 체스터와 힐라리아의 경험으로 정신계 센티넬을 극도로 꺼리는 오르피어스는 쉬이 문을 노크하지 못했다. 

행여나 클라우드가 자신의 정신을 가늠하여 지크하르트에게 알릴 가능성이 있다는 게 두려웠다. 두려움의 이유도 명백히 알지 못하였지만 두려움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병실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자니 문이 열리며 클라우드가 나왔다. 그의 눈에 띄지 않도록 급히 복도를 돌아 몸을 숨겼다. 다행히 클라우드는 오르피어스가 숨어 있는 방향이 아닌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잠깐 자리를 비운 걸까, 아니면 아예 귀교하는 걸까. 몇 분간 주저하던 오르피어스는 클라우드가 돌아오는 기척이 없자 지크하르트의 병실로 다가갔다.

그때, 익숙한 걸음걸이가 복도를 조용히 울렸다. 탁, 타닥 내딛으며 전방을 휘저어 더듬는 지팡이 소리와 두 쌍의 구두급 소리. 힐라리아였다.

오르피어스는 반사적으로 도망쳤다. 지크하르트의 병실로 들어간 힐라리아는 한참을 나오지 않았고, 오르피어스는 의혹과 당혹감 속에 방황하다 병원을 나왔다.

며칠 후, 지크하르트가 퇴원하고 힐라리아의 가이드가 되기로 하였다는 소식을 유안에게 들은 오르피어스는 레베카에게 전화하였고, 첫가이드를 만났다.

***

힐라리아의 가이드로서 지낸 1여 년의 기간 동안 지크하르트는 끊임없이 고민하였다. 그녀는 사건과 무관하지만 원수의 딸임에 분명한 힐라리아와 깊은 연을 맺어도 되는 것일까.

그가 혼자 복수하기에 벨포드라는 이름은 너무나 거대하였다. 복수의 여정에 그마저 사망하거나, 천행으로 복수를 이루어도 평생 도망자의 신세가 되거나 처형당하는 건 죽은 가족들이 바라는 바가 아닐 터였다. 

복수의 대상을 모든 일을 획책하였을 체스터 벨포드와 실행자인 오르피어스 벨포드로 국한해 두었으나 힐라리아가 거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오르피어스가 화염의 한 가운데에서 망연자실하게 떨며 자신을 올려다보던 하얀 악마와 동일인임은 그도 사관학교에 입학한 후에야 알았다. 지난 수년 동안 지크하르트는 가족을 살해한 소년의 얼굴을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거듭 상기하며 나이를 먹은 모습을 가정하였기에 첫눈에 그가 오르티어스임을 직감하였다.

하지만 지크하르트의 사고에서 아버지가 열 살 남짓한 어린 아들, 그것도 형제들과 연차가 많이 지는 막둥이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귀애할 막내아들을 살육의 터로 내몰았음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는 신중하였다.

오르피어스가 자신을 알아보는 눈치는 아니었다. 알아보기는커녕 자신의 어디가 그렇게 못마땅한지 어찌다 시선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인상을 탁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곤 하였다. 

대부분의 급우와도 교류하지 않았으니 딱히 자신 하나만 꺼리기보다는 본래 성격일 가능성도 있었다. 긴 시간의 신중한 관찰로 적어도 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훈련을 받았음은 확실해졌지만 근본적인 의문은 해소되지 않은 채였다.

때문에 지크하르트는 명료한 결론을 얻고 자신의 손으로 직접 복수하기 위하여 오르피어스를 살렸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벨포드와의 만남을 갖게 하였다.

힐라리아의 제의를 받고 깊이 고심하였다. 표면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는 제의였다. 문제는, 벨포드가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는 점이다. 자신의 몸 하나 정도는 얼마든지 빼낼 자신이 있는 지크하르트였기에 개명하고 어둠에 숨은 로즈마리와는 다르게, 가이드로서의 인식을 숨긴 채 이름과 출신지를 무엇 하나 엄폐하지 않고 정면으로 나갔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매 짓뭉갠 벨포드에 대한 작은 도전이자 도발이었다. 로즈마리는 위험하다고 충고하였으나 벨포드가 보잘 것 없는 사관생도에 불과한 자신을 낚기 위해 던진 미끼라기에 힐라리아는 너무나 큰 위험 부담이였다. 

그녀는 종주의 유일한 여식임과 동시에 상위 센티넬이다. 그녀의 가까이에 있으면 벨포드의 중추에 직접 닿을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며칠의 고심 끝에 제안을 승낙하였고 힐라리이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미소하였다. 지크하르트는 그렇게 힐라리아의 페어 가이드가 되었다.

「두 시간 이내로 와」

힐라리아는 아름다운 거만함으로 그에게 요구하였다. 태어남과 동시에 명령하는 위치에 있었던 그녀에게 불복과 거절은 존재하지 않는 단어였다. 

지크하르트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정보였으며, 그 정보를 얻기 위해서 그녀는 필수불가결한 존재다. 언짢게 해서는 안 되었기에 지크하르트는 그녀에게 따라주었고, 시일이 지나자 자신이 자의로 숙인 것인지 그녀의 강한 성역에 휘둘리고 있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덕분에 힐라리아는 아주 흡족하였다.

앞이 보이지 않는 힐라리아의 취미와 활동 영역은 제한되어 있었고,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벨포드 저택 내에서 보내었다. 전언에 특별한 위치가 지정되어 있지 않을시 그가 찾아가야 할 곳은 벨포드 저택이었다. 

사관학교의 엄정한 규율도 센티넬과 가이드의 요구는 이미 허가되었으므로 외출 허가를 받는 건 어렵지 않았다.

「몸이 안 좋으시다면서요?」

「그러엄. 기분이 아주 불쾌해. 센티넬에게 이보다 더 심각한 일이 있니?」

전혀 나빠 보이지 않는 얼굴로 그녀는 지크하르트의 무릎에 드러누운 채 후후 웃었다. 오늘 그의 존재 의의는 가지고 놀기 좋은 인형인 듯하였기에 지크하르트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무엇보다 육체적 접촉이 센티넬의 정신을 안정시키는 방법이기도 하였으니 구태여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요즘 안 좋은 일이라도 있니?」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목소리가 안 좋거든」

앞을 보지 못하는 힐라리아는 사람의 음성과 기척에 민감했다. 특정 상대의 정신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그녀는 一 일라리마는 이를 훔친다요고 표현했다一 감정이 짙게 깃든 음성일수록 육안으로 직접 보는 것처럼 선연하게 느껴진다고 하였다. 그녀와 각인하여 힘이 닿지 못하는 지크하르트의 음성만이 무색하고 투명했다. 때문에 그녀는 각인하기 전부터 요구하였다.

'나에게 거짓말은 하지 마. 각인하면 난 네가 겉과 속이 다른 거짓말을 하여도 확인할 수가 없어. 하기 싫은 말은 감추어도 추궁하지 않을 테니 거짓말만은 하지 마렴. 나도 너에게 이것 하나만은 지킬 테니까'

지크하르트는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였다.

「머릿속이 복잡하긴 합니다. 옛날부터 끝어오던 일들이 명쾌하게 풀리지 않네요」

적당히 감춘 사실을 말하자 그녀는 '흐응'하고 짧게 웃더니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힐라리아가 벨포드의 사람인지라 꺼림하다는 점만 제한다면 좋은 정보원인 건 사실이었다. 그녀의 가이드가 되지 않았다면 벨포드 가의 내밀한 사정은 알지 못하였으리라. 이를테면, 그녀가 눈이 멀게 된 이유 같은 것.

벨포드는 그가 예상하지도 못한 시커멓게 썩은 광기에 젖어 있었다.

'오르피어스는 아주 어리석어. 나처럼 눈을 훼손하였다면 적어도 아버지에게 정신이 주물러지지는 않았을 텐데. 이도 못하겠으면 죽든가. ……하긴, 너무 어린애였나'

자신을 보호할 방법도, 보호해 줄 사람을 찾을 방법도 알지 못하는 어린 아이가 어떻게 체스터 벨포드의 손아귀에 얼어졌는지, 어떻게 취급받았는지, 힐라리아가 아니었으면 절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무에 달린 사과가 갖고 싶으면 사과를 따는 게 아니라 사과나무를 잘라서 가져오는 사람이야. 거기다가 감히 당신을 배신하고 도망 친 여자를 용서하겠니? 당시 오르피어스가 제정신이 아니라 듣지는 못겠지만一 물론 들을 생각도 없어 一 끔찍하게 죽었을걸, 그 여자. 그것 하나만은 그 애를 동정해. 나와 아이릭 오빠를 지키려던 어머니도 그렇게 돌아가셨으니까'

이야기를 할 당시에 그녀의 요구에 맞춰 패티큐어를 발라주고 있던 지크하르트는 하마터면 병을 떨어트려 깨트릴 뻔 하였다.

'지금도 제정신이긴 할까. 영 자신이 없네. 그 애 머릿속은 뒤져볼 엄두도 안 나서 이제까지 한 번도 훔친적이 없어. 앞으로도 특별한 흥미가 일지 않는 이상은 건드리지 않을 것 같아.

어쪄면, 의외로 생각미라는 걸 전혀 하지 않고 있을 지도 모르지. 오르피어스는 과거엔 아버지의 개였고, 지금은 오빠의 개야. 무슨 짓이든 해. 오빠가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이 아니라 진짜 죽어. 키우는데 공도 많이 들었고 워낙에 쓸모 있으신 변견이시라 오빠가 버리는 일은 없을 테지만'

말을 맺는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욱 비아냥거림이 짙었지만 지크하르트는 거기까지 헤아려 짚지 못하였다. 오르피어스가 체스터의 친아들이면서도 어렸을 때부터 암살과 살육에 내몰린 이유는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면, 오르피어스는.

「지겨워」

그의 무릎에서 햇별을 쬐고 있던 그녀가 갑자기 짜증을 내며 몸을 일으켰다. 무심결에 그녀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고 쓰다듬으면서 다사하게 이어지는 사고의 꼬리를 쫓고 있던 지크하르트는 흠칫 얼굴을 들었다.

「기분 전환이라도 하시게 밖을 나갈 까요?」

「그래. 그게 낫겠어. 요즘 집에 있으면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야」

힐라리아가 내민 팔로 어깨와 목을 짚게 하며 지크하르트는 그녀의 등허리와 무릎 아래에 손을 받쳐 안고 일어났다. 숨 쉬는 소리조차 없이 배석 중이던 하녀가 조용히 문을 열었다. 정원으로 걸어가는 지크하르트에게 안긴 채 그녀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기댔다.

「아이릭 오빠가 너무 바빠서 만나기도 힘들어. 즐거운 일이 있을 테니 기다려 달라던데, 뭘까?」

그녀를 심란하게 하는 진짜 이유였다. 지크하르트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신실하게 대화를 섞었다.

「생일은 이미 지났으니 선물은 아닐 데고, 당신만 즐거운 일일까요. 아니면 함께 즐길 수 있는 일일까요?」

「으음, 거기까지도 말해 주지 않았어. 나오미나 유안에게 물어볼까」

상대가 자신은 아니었으나, 그녀답지 않은 응석에 가까운 투정에 지크하르트는 무심코 짧게 웃었고 그 대가로 어깨를 한 대 맞았다.

아이릭이 말한 '즐거운 일의 정체' 알게 된 건 며칠 후였다.

체스터 벨포드를 축출하기 위한 아이릭 벨포드의 쿠데타였다.

예고 없이 헤임의 하늘에 울려 퍼지며 사방을 가득 메운 총성은 반나절만에 멎었지만 시가지의 분위기를 냉각시키는 군홧발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흉ㅇ흉한 공기를 타고 넘실거리는 불안한 소문은 헤임의 교외에 있는 사관학교까지 장식하였다. 아이릭 벨포드의 쿠데타 성명 발표와 함에 계엄령이 선포된 건 그날 저녁 무렵이었고, 지크하르트는 힐라리아의 연락을 받았다.

삼엄한 계엄령이 내려진 와중에도 그녀의 명령을 받은 군용차가 사관학교까지 마중 나왔다. 그보다 겨우 몇 살 더 많음직한 앳된 병사들은 긴장과 살기로 한껏 경직되어 있었기에 지크하르트는 사태에 대한 궁금증을 꼴깍 삼켰다. 

아이릭의 쿠데타가 성공하든 말든 그로서는 관심 밖이였다. 오직, 체스터의 생사만이 중요했다. 

일반 병사에게 체스터의 생존여부나 행적이 정확하게 전달되지도 않을 터이기에 그는 초조하게 힐라리아와의 만남을 기다렸다.

도로가 훤히 열려 있는데다 벨포드의 명령서는 허가증이나 다름없는지라 군용차는 다른 때보다 빠르게 저택에 도착하였다. 

무장 태세의 군인들이 너른 저택을 엄중히 경호하고 있어 헤임 시내에 가득하였던 군인들의 존재만큼이나 비일상을 각인시켰다. 바닥에 내려서는 그의 앞으로 차가 빠르게 지나갔다. 

앞을 지나치는 짧은 순간에만 목격하여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어딘가 낯익은 여자의 옆모습이었다. 잠깐 고민한 지크하르트는 곧 신문상으로 간혹 보 았던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는 데 성공했다. 

군무청장인 안네미커 자이넷 대장이었다. 니것 하나만은 확실해졌다.

이 시국에 군무청장이 쿠데타에 반하는 뜻을 갖고 벨포드 저택을 방문하였을리는 없다. 아이릭 벨포드가 군부와 손을 잡고 있으니 체스터 벨포드의 몰락은 시간문제였다. 초조함이 조금 더 커졌다.

헤임을 휩쓸고 있는 불온하고 혼잡한 공기가 벨포드 저택만은 침범하지 않았다. 사용인들은 평소에 얼굴을 마주 할 때보다 한결 굳은 기색이기는 하였으나 비교적 평연히 지크하르트를 맞이하며 힐라리아에게 안내하였다. 힐라리아는 그가 보았던 그 여느 때보다 희열로 충만하였다.

「오빠가 드디어 아버지의 발밑을 허물어트렸어! 이제 아버지는 파멸할 거라고! 아버지가 지방 순시로 헤임을 비우기만을 기다렸대」

친오빠와 친아버지의 대립에도 힐라리아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친아들이 친아버지의 등에 칼을 꽃고 친딸이 진심으로 기삐하며 오빠를 고취한다는 이 가족의 뒤틀린 상황이 그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그에게 중요한 건 상황의 납득이 아니었다.

「아버님은 어떻게 되셨고요」

부자연스럽게 여겨지지 않으려 지크하르트는 최대한 신중이 질문하였고, 한껏 기쁨에 들뜬 힐라리아는 이상한 기척을 느끼지 못하였다.

「추격 중이라고 들었어. 아버지도 그간 공으로 글래스팅을 지배하신 건 아니니까 하루이틀만에 제압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시간문제지. 오빠는 내 소원을 이루어 준 거야」

시간문제. 그가 생각하였던 것과 같은 단어를 입에 올리며 힐라리아는 빙글빙글 웃었다.

마약이라도 주사한 양 잔뜩 흥분하여 조잘거리는 그녀를 밤새도록 상대하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해방되었다. 계엄령으로 인해 어차피 학교도 휴교할 테니 저택에 머물라는 그녀의 말을 따라 손님방을 배정받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체스터 벨포드는 전사하던 처형당하든, 아니면 혈육이라는 미명으로 유폐되든 곧 종국을 맞을 것이다. 자신이 손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 전이었다. 힐라리아가 저택에서 머물라는 제안을 한 건 행운이었다. 

사방이 통제되고 눈과 귀가 가려진 사관학교 내에서는 소문이나 아이릭 측에서 발표할 여과된 정보만이 입수 가능하였을 것이다. 답답하지만 지금은 기다려야 했다.

'……오르피어스는 어디 있지'

하릴 없이 침대 천개의 구불구불한 문양을 눈으로 쫓던 지크하르트는 문득 떠올렸다. 체스터와 함께 그가 처단해야 하는, 사람이다.

학교에는 며칠 전부터 보이지 않았지만 규율도 밥 먹듯이 어기고 워낙에 결석이 잦은 녀석이라 큰 의심은 하지 않았다. 정황을 파악하게 된 지금은 얼추 이해가갔다. 

아마도 아이릭의 군문에서 무언가의 임무를 맡고 있을 터다. 하지만 그 녀석은 아버지로부터 세뇌 당했다고 들었는데 아버지를 치라는 명령에…….

「젠장」

지크하르트는 짧게 욕설하며 눈을 감았다. 오르피어스를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다. 잠은 오지 않았지만 해가 거의 중천에 오를 때까지 지크하르트는 침대에서 나오지 않았다.

다음날 꼬리에 꼬리를 물고 헤임을 휘휘 도는 소문에는 전장에서 백염이 목격되었다는 사실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체스터 벨포드의 세 아들이 모두 그에게 등을 돌렸음이 공표된 바나 다름없었다.

체스터 벨포드에 의하여 그의 형제자매와 조카들은 몰살당하였지만 그 이상의 촌수를 가진 친척과 가문의 원로는 건재하였다. 체스터는 나약하고 잔인하였으나 아둔한 자는 아니었다. 

한때의 광기로 일가를 전부 살해하였다면 벨포드라는 철옹성도 내부로부터 무너졌으리라. 그리고 그들은 아이릭에게 포섭되어 지지를 표명하거나 침묵으로 동조하였다.

형제자매를 참살하며 수십 년을 군림하였던 체스터 벨포드가 몰락하기까지는 한 달도 소모되지 않았다. 군부의 통제에 놓인 신문은 연일 아이릭 군의 쾌속 진격을 보도하며 체스터의 통치를 비판하는 논조의 기사를 싣기에 바빴다. 

마침내 체스터가 최후로 도피한 요새를 포위하였다는 길보가 저택으로 전해지자 힐라리아는 어쩔 줄 모르며 홍소하였다. 그녀가 너무 기쁜 나머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여 폭주하는 건 아닌지 지크하르트가 진지하게 염려할 정도였다.

21

「후후, 하하하하! 태어나서 이렇게 기쁜 건 처음이야!」

「……그렇게 보이긴 하네요 」

웃음의 여운이 함빡 담긴 목소리가 다소 쓴맛을 삼킨 그에게 돌아왔다.

「넌 기쁘지 않은 모양이구나?」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윗분들의 사정 같은 건 별로 상관이 없거든요. 저 혼자만 탈 없이 살 수 있으면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넌 참 신기해. 그만한 재능을 타고 났으면서도 이렇게까지 야망이 없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

지크하르트는 자신의 표정이 그녀에게 읽히지 않음에 안도하며 목소를 태연하게 꾸미려 애썼다.

「제 가족들이 사건으로 죽은 건 알고 있으시죠?」

「음」

「그때부터 계속 생각했어요. 다치지 않고, 잃지 않고, 죽지 않고 평화롭고 조용히 살 수 있는 게 저에겐 가장 중요한 일이 될 것 같다고」

힐라리아가 알 것 같다는 얼굴로 주억거렸다.

「가족들을 많이 사랑했구나?」

「그냥, 평범한 가족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는 곧잘 꾸중을 듣기도 했고, 칭찬을 받으면 어깨가 절로 으쓱거리고, 동생과는 다투다가 울리기도 했고, 동생을 못살게 구는 녀석을 때려눕히기도 했고……. 발에 채일만한 흔한 가족이었어요. 함께 살고 있을 때는 사랑한다는 느낌도 없었고요. 지금도 딱히 극적으로 부모님과 동생을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지만 가족을 떠올리면 슬픕니다. 아주 굉장히」

「충분히 좋은 가족인걸?」

그가 여태 단 한 번도 입에 담지 않던 과거의 감정을 읊었기 때문일지, 흥분으로 숨이 넘어갈 만큼 환희를 느끼고 있기 때문일지 알 수 없으나 힐라리아는 그녀답지 않게 상냥한 대꾸를 했다.

「낳아주고 길러준다고 다 부모가 아니란 걸 내 가족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니? 폭군처럼 예속하는 아버지가 수중에서 쥐락펴락하는 이 집에서 우리를 결사적으로 지켜준 사람은 어머니뿐이었어. 

결국 어머니는 나와 큰오빠가 보는 앞에서 아버지의 손에 살해당하셨지. 이 세상에 나와 오빠만이 남게 된 거야. 내가 센티넬로 발현하자 내 힘을 마음대로 쓰기 위해 나를 세뇌하고 지배하려고 했을 때, 이미 아버지는 날 자식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해. 

자식이 아닌 도구로 취급한 거야. 하긴, 아버지는 사람들을 도구로 유용한 것과 유용하지 않은 것 두 가지만으로 분류 하고 있겠지만.

세간에서는 친아들이 친아버지를 배신하고 죽이려는 패륜이라고 많이들 욕하고 있지? 어리석은 소리야. 적어도 오빠와 나는 아버지를 죽일 권리를 갖고 있어. 가족이라는 연과 혈육이라는 존재를 흙발로 더럽혀 짓뭉갠 건 나와 오빠가 아니라 아버지야」

그녀는 잔웃음을 떨어트리며 느슨히 지크하르트에게 기대었다.

「자해한 걸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지만 지금은 아쉬워. 아버지의 시체를 이 눈으로 똑똑히 봐야 하는데. 그러면 어머니가 살해당하던 모습이 조금은 흐려질까. 내 눈이 세상을 볼 수 없게 된 건 벌써 몇 년이나 지났는데 어머니의 핏자국만이 지나치게 생생해」

지크하르트는 저도 모르게 묵직한 숨을 토하고는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체스터 벨포드와 힐라리아 벨포드가 분리되어 비로소 그녀의 가이드로서 일생을 같이 걸을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덮개를 내려 빛을 최대한 차단한 랜턴의 빛은 지근거리만 간신히 비치는 광원으로 어둠을 흐리게 밝혔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양말만 신은 맨발로 바닥을 내딛은 지크하르트는 밖의 기척에 주의하며 아이릭의 서재를 뒤졌다. 

서재의 주인은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친히 전선으로 떠나 며칠째 비어 있다. 힐라리아에게서 들은 전황은 촉박하였다. 군의 승패여부가 아닌 체스터 벨포드 개인과 연관된 문제였다. 체스터에게 끝려가 요새까지 동행하였던 그의 가이드는 요새가 포위된 당일 방에 자살하였다는 첩보였다. 

진위가 밝혀지자 아이릭 벨포드는 항복하면 새 가이드를 배정해 주겠노라는 요지의 정중한 권고를 하였고, 그 답을 기다리며 공격을 멈추었다. 힐라리아는 비웃었다.

'오빠도 나도 아버지 성격을 잘 알아. 쳐죽여도 부족할 아들에게 절대 항복할 리가 없지. 스스로 폭주하여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해'

아이릭의 본심이 무엇이든 전투의 끝이 머지않았다는 건 확실하였다. 힐라리아가 대수롭지 않게 화제에 몰린 요새의 이름과 위치까지 파악한 지크하르트는 틈을 봐서 아이릭의 서재에 잠입하였다. 

힐라리마아의 말에 따르면 장기 간 준비한 쿠데타였다. 아이릭 군의 진군 및 체스터 군의 도주 경로 등지를 사전에 조사해 두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밑져야 본전이다.

지문이 남지 않도록 가죽 장갑을 끼고는 즐비하게 방이고 책장에 꽃힌 서류들을 신중하게 뒤졌다. 사용인들이 청소할 시간은 지났지만 돌발 상황이 어떻게 발생할지 장담할 수 없기에 외부의 기척에도 신경의 한 축을 할애하며 서류를 찾는 건 에상보다 고되었다. 힐라리아도 언제 자신을 호출할지 모른다.

탁상시계를 확인 후 30분만 더 찾아보고 없으면 포기하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한 지크하르트는 서가의 아랫단부터 하나씩 훑기 시작하였다. 째깍째깍. 초침이 딸깍거리는 소리가 그의 심정을 대변하듯 촉박하게 시간을 쪼았다.

아!!!!

짧게 탄성을 지를 뻔한 혀를 깨물며 안도의 숨을 크게 토했다. 벼랑 끝에 몰린 체스터 군이 최후로 진군을 빙자한 후퇴를 하였다고 하는 부탄베르트 요새의 전면도와 군 배치도였다. 

배치도는 이 서류가 아이릭의 서재로 보고가 될 무렵의 시점이었을 터이나 체스터 군도 크게 차이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군사 지도를 읽는 법은 사관학교가 아니라 입학 전에 그를 교육하였던 용병에게 배웠다. 

사령부의 위치와 주요 배치를 거듭 되풀이 읽어 머릿속에 확실하게 새긴 지크하르트는 지도가 철되어 있던 서류함을 최초의 위치에 신중하게 되돌렸다.

이제 남은 건 무사히 손님방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문을 열기 전에 밖의 기척을 살폈다. 복도 저편에서 탁탁 울리는 발걸음소리를 감지하고는 재빠르게 불을 끄고 벽에 기대었다. 서재 쪽으로 다가오는 듯하던 걸음은 복도를 가로 질러 반대편으로 향했다. 5분 쯤 기다려 보았지만 더 이상의 기척은 없었다.

지크하르트는 신발을 신고 서재를 나와 태연하게 방으로 돌아갔다. 사람과 마주칠 때를 대비하여 손에 든 랜턴은 정원에 달구경을 나갈 때 쓰려고 가져왔다는 핑계를 준비해 두었지만 요행히 그는 누구와도 마주하지 않고 자신의 방 문을 여는데 성공하였다.

아이릭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 계엄령은 곧 거두어질 테고 사관학교도 정상 수업에 들어갈 텐데 그간 시험공부를 하나도 안 했다는, 학생에게 매우 중차대한 변명을 마련하자 힐라리아는 이 시국에 시험이 중요하냐며 깔깔 웃음보를 터트리더니 공부 열심히 하라며 기숙사로 돌아가는 걸 허락해 주었다.

다음날 아침, 벨포드의 명령서를 받은 군용차가 학교까지 데려다주었으나 도중에 산책도 할 겸 걸어가고 싶다는 뜻을 전하자 병사는 의심 없이 차를 세웠다. 도심에서 무장한 병력이 눈에 띄는 것만 제외하면 헤임은 비교적 평시의 상황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지크하르트는 차를 렌트해주는 가게가 영업을 개시하기를 기다렸다가 문을 열자마자 차를 한 대 빌려 도로를 탔다. 성도 헤임 일대는 계엄령이 완화되었지만 지방으로 통하는 도로로 들어서자 곳곳에서는 검문이 끊이지 않았다. 

검문에 걸릴 때마다 지크하르트는 위조해 두었던 명령서를 보여주었고 차는 무사통과하였다. 순조롭게 일이 진행되머 스스로도 놀라기는 하였지만 아미릭이 암중에서 그가 요새까지 당도하기를 이끝고 있으리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여느 때였다면 과속 운전으로 다른 차량과 사고가 발생하였을 속도로 질주하기를 이틀 밤낮 꼬박 한 끝에 지크하르트는 부탄베르트 요새의 인근 도시에 도착하였다. 

육안으로 요새를 확인할 수 있는 지점에 아이릭 군이 진지를 건설하고 포위 중이었으나 공기는 예상만큼 긴장되어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총기를 제외한 식량 등 생필품의 통행이 자유로웠다. 요새로부터의 반출은 엄격히 제재하였으나 식량과 의복은 요새로 공급되고 있었다.

「제아무리 애비헌티 칼을 빼들었기로서니 천륜을 저버릴 수 있겠누? 여그 전세는 확실허니 시방 배려하믄서 아양을 베푸는 거 아니것냐. 궁지에 몰린 쥐도 무시무시하니께」

얼마간의 금전을 대가로 요새로 반입하는 생필품의 잡역부에 그를 포함시켜준 상인은 그렇게 말했지만 힐라리아로부터 내밀한 사정을 들은 지크하르트로서는 회의적이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그가 요새 안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문제될 게 없었지만.

요새의 입구에서 신원을 확인하는 체스터 군은 혹여 센티넬이 섞여 있지 않은지 글래스팅 군에 등록된 센티넬 명부의 사진으로 한 명씩 확인한 후 통과를 허락했지만, 건실하게 명단을 대조하는 건 아니었다. 

그들의 낯에는 이미 패배의 기운이 깊숙이 깔려 있었다. 상인들의 감시도 소홀하여 짐을 운반하는 척하며 어렵잖게 꼬리를 감추고 요새 안으로 숨어들 수 있었다.

교대 시간까지 기다려 암호를 엿들은 후 경계를 서는 일반명 한 명을 은밀히 습격하여 기절시키곤 군복과 무장을 벗겨 자신의 옷 위에 겹쳐 입었다. 또래보다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지크하르트이기에 군복을 갖추어도 소년병이 아닌 정식 징집된 군인처럼 어색하지 않았다. 

인적이 없는 곳에 숨겨두기는 하였으나 교대 시간이 되면 바로 발각 될 것이다. 탈영병으로 간주되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거기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다.

지크하르트는 숙지해 두었던 사명부의 위치와 배치도를 하나씩 떠을리며 차츰 거리를 좁혔다. 조급하여 어색하게 행동하면 안된다. 사관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용병에게 생생하게 전해 들었던 군대의 사정이며 경험이 그의 행동에서 낯설음을 덜어냈다.

멀리 보이는 사령부는 3층 건물이었다. 체스터가 머물 사령실은 3층 중앙이다. 최단 거리로 돌파 가능한 루트는 요새까지 오는 동안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가정하였다. 사령부의 구조 자체가 바뀌지 않은 한 어렵지 않을 것이다.

지크하르트는 사령부 인근에서 병사들 틈에 적당히 섞이어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렸다. 몰래 가지고 온 술 한 병으로 그는 어렵지 않게 녹아들었다.

요새에 진입할 때에 실감하였지만 사기는 바닥에 떨어질 만큼 떨어져 있었다. 기적적인 승리1를 낙관하는 병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애초에 애국심이나 애향심이 고취되어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전쟁도 아닌 탓이다. 상층부에서는 탈영하다 발각되는 병사들을 예외 없이 처형하여 군율을 엄정히 세우려 하고 있었지만 총을 거꾸로 들고 투항하는 병사들은 날마다 증가하였고 낯선 얼굴의 지크하르트를 보고도 소속 부대를 재차 확인받으려는 병사도 없었다. 

농담 삼아 네가 스파이라서 벨포드 공을 암살했으면 좋겠다는 진담 반의 우스갯소리를 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였다.

해가 저물고 어둠이 사위를 덮자 지크하르트는 경계병의 사각 지대에서 사령부를 관찰했다. 침입자가 한 명 있다는 사실이 보고되었는지 사령부의 경계는 낮에 보았을 때보다 삼엄하였지만 상정 범위 내였다. 

그는 심호흡을 하거나 마음을 다잡는 둥의 심리적인 안정도 없이 볼일이 있어 지나가는 양 여상하게 접근하여 으슥한 담 아래의 병사 두 명의 목을 긋고 털썩 털썩 쓰러지는 소리를 배경으로 담을 뛰어 넘었다. 

사령부 본관까지의 길은 멀지만 지크하르트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순시병의 경로를 따라 마주치는 병사들을 한 명씩 죽여가며 본관 건물 뒤쪽에 접근하였다.

불이 꺼진 창을 넘어 건물 안으로 참입하는데 성공하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동시에 이것미 자신이 범한 최초의 살인이었음을 인식했다. 또한 첫 실전이기도 하다. 

심장은 평소처럼 일정한 속도로 박동하고 있었으며 호흡이 거칠거나 살인에 대한 충격도 없었다. 그의 내면은 어떠한 동요 없이 고요하였다.

'네 엄마가 절대 군인은 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고? 보는 눈은 있으셨구만'

어렸을 때 한두 번 보았던 종조부는 조카 일가가 방화 살인으로 해를 입었다는 비극의 배후에 숨은 체스터의 존재를 직감하고는 재빠르게 사람을 하밀로 보냈다. 종조부가 보낸 남자는 그와 같은 S실에 있던 로즈마리의 입원 기록까지 말소하고 위르달로 두 사람을 데려갔다. 

종조부는 네 아비가 글래스팅 여자와 결혼하는 걸 왜 반대하였겠느냐며 크게 탄식하고는 지크하르트의 신변을 위조했다. 지크하르트와 로즈마리는 새롭게 얻은 위르달 속령민의 신분으로 학교에 편입하고 평범한 삶을 얻었지만 무언가 미흡하였다.

그것의 정체가 복수임을 지크하르트는 알고 있었다.

종조부는 체스터 벨포드에게 복수하겠다는 어린 종손의 만용에 헛웃음을 지었지만 부탁은 무시하지 않았다. 이루지 못할 헛된 꿈일지언정 꿈은 꾸게 해주겠다는 동정일지라도 종조부가 고용한 용병에게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굴라트 윔므라는 이름의 용병은 그에게 단순한 육체의 단련보다 중요한 지혜와 경험을 전수하였고, 엠마로 개명한 로즈마리를 양녀로 입양하여 지금까지도 그와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센티넬로 발현하자 곧장 용병에 적을 몰린 그는 그 자신의 나이에 버금가는 전장의 노련함이 있었다. 진한 피비린 내를 알코을 냄새로 덮어 가린 그는 지크하르트의 천부적인 재능을 깨닫고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군인이 되면 넌 끔찍한 살인귀, 혹은 영웅이 될 거다. 어느 쪽이든 사람을 많이 죽인다는 건 똑같지. 너는 무기를 너무 쉽게 다퉈. 총이며 칼을 들어도 아무 느낌이 없지?'

'막대기랑 똑같지 않아요? 아, 좀 무겁긴 한가. 무게감만 빼고는 그냥 팔다리를 움직미는 거랑 차이를 못 느끼겠는데요.'

'그게 문제라는 거다. 인석아.'

굴라트가 이마에 날린 알밤은 눈물이 날 정도로 아팠다. 이마를 붙잡고 끙끙거리는 그에게 굴라트는 나직이 말을 이었다.

'난 말주변이 없지만 곡해하지 말고 잘 들어라. 네 과거가 다행이라는 표현은 걸맞지 않다만 너는 소중한 가족의 죽음으로 인해 생명의 무게를 뼈저리게 알고 있어. 그 무게를 절대 잊지 말아라. 살인귀냐 영웅이냐의 무게는 백짓장보다도 얇다. 뒤집히는 건 한순간이야.'

'영웅이 되고 싶은 바람은 없는데요.'

'주변에서 널 내버려 두겠냐? 나라도 반드시 목줄을 매서 내 밑으로 붙들어 앉힐 거다.'

'어쨌든 할아버님께 말씀만은 하지 말아주세요. 제게 큰 관심은 없으시긴 하지만 혹시나 위르달에서 군인이 되라고 붙잡으시면 제 복수는 요원해요.'

'오냐. 체력 단련이나 하는 수준이라고 보고하마. 대신에 전장에서 적으로 마주쳐도 우리 부대만은 피해 가라. 내가 감당도 못할 괴물을 키우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우스갯소리를 하며 굴라트는 거칠지만 다정한 큰 손으로 그의 머리를 쑤석거렸다. 그가 복수에 눈이 멀어 무작정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몰아세우다 자멸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굴라트가 적정선에서 그를 붙잡아 주었기에 가능했다. 지크하르트는 굴라트의 밑에서 때가 당도하기를 묵묵히 기다리는 인내도 배웠다. 지금이 그 때였다.

살인귀냐, 영웅이냐. 속으로 중얼거리며 양 손을 주먹 쥐었다가 펴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그리고 손에 흠뻑 묻은 피를 바짓자락에 문질러 닦고 나이프를 고쳐 쥐었다. 침입이 발각되기 전에 불가피한 최소한의 사람만 죽이는 최단 루트로 가야 했다. 여유 시간은 고작 몇 분이었다.

벽의 그늘과 귀퉁이에 병사들의 시신을 감추며 3층에 당도하였다. 바로, 이 문 너머에 체스터 벨포드가 있다.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 지크하르트는 문을 노크했다.

「벨포드 공. 야심한 시각에 죄송합니다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신경질적인 예민한 목소리가 응대하였다.

「들어와」

지크하르트는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조종처럼 그의 마음에 울렸다.

옷을 갈아입을 심적인 여유도 없었는지 군복을 입은 채 피로한 얼굴로 책상에 앉아 있던 체스터는 지크하르트가 뒷손으로 문을 잠그는 소리가 난 후에야 고개를 올렸다.

「자네는……. 설마 힐라리아의, 카시야스 군인가? 어떻게 여기?」

장교도 아닌 낯선 일반 병사의 모습을 탐색하던 체스터가 의혹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하지 않기 위하여 공손한 척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그는 힐라리아의 가이드로서 소개되었을 때 하고 싶었지만 묵혀 두어야만 했던 인사를 일 년이 지난 후에 되풀이하였다.

「저는 마르크 슐츠와 이사벨 카시야스의 아들, 지크하르트 카시야스입니다」

「음? 누구의 아들이라고?」

체스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오히려 반문하였다. 알지 못한다. 그의 유년기를 짓밟고 가족을 화마에 집어 삼켜지게 한 사람은 그 존재를 망각하고 있었다. 

차분히 진정하고 있던 심장이 격하게 뛰고 있음이 느껴졌다. 지크하르트는 요새에 잠입한 후 처음으로 거칠게 심호흡하였다.

「당신이 6년 전에 죽인 일가의 유일한 생존자입니다, 공」

체스터가 앉아 있던 의자가 뒤로 밀려나 넘어지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체스터는 그가 누구인지 여전히 알지 못했 지만 적의와 살의는 명백하다.

침입자가 있다는 체스터의 외침은 방 안의 전등이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사방을 장악한 어둠을 흔들었다. 때마침 시체가 발견된 듯 아래층으로부터 소란도 역랑처럼 올라왔지만 지크하르트는 평정을 잃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는 당신의 힘을 쓸 수 없겠죠? 당장 죽이지는 않을 테니 마음껏 몸부림 쳐 보십시오」

어떤 고통과 절망 속을 뒹굴지라도 그의 가족이 겪은 죽음에 비하지는 못한다.

암흑이 시야를 가려도 지크하르트는 육안으로 보는 것처럼 능숙하게 움직이며 어둠에 갇힌 체스터의 노호성과 닫힌 문을 부수고 여는 시도를 하는 병사들의 소란을 태연히 받아들였다. 

칼날이 살과 근육을 찢으며 뼈를 가르는 묵직한 감촉이 손을 울릴 때마다 체스터의 비명이 높아졌다. 

힘을 쓸 수 없게 눈을 먼저 멀게 할까, 찰나 충동이 들었지만 포기했다. 그의 힘이 봉쇄되면 쉽게 포기할지도 모른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부모님과 동생의 아픔 속을 허우적거리며 발버둥 쳐야 했다.

치명상은 입히지 않았다. 최후까지 도주해야 할 다리에 치명타를 가하지도 않았다. 병사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오기까지 이 분도 채 걸리지 않았으나 그때에 이미 체스터는 피투성이로 나팅굴고 있었다.

「벨포드 공!!」

장교의 외마디 외침에 꼬리를 무는 것처럼 퍼부어지는 총탄을 책상 뒤로 들어가 방어했다. 그가 엄폐물에 숨은 사이 병사들이 체스터를 끝고 가다시피 다급히 부축하여 나갔다. 일부러 완전히 절단하지 않은 왼팔이 어깨에서 덜렁거리며 사방에 피를 흩뿌렸다.

체스터가 무사히 구출된 것을 확인하고 난 후에야 지크하르트는 홀스터 벨트의 총을 꺼내 응사했다. 책상 너머로 손만 내민 채 탄창의 절반가량을 비우자 사위는 순간의 침묵이 하강했다. 총탄이 격발된 소리와 정확히 일치하는 시체를 넘어 핏자국을 쫓았다.

생명에 직결하는 치명적인 부상은 없으나 출혈이 심한 체스터는 그리 먼 거리를 이동하지 못했다. 이어 올라오는 부대를 상대하며 느리지만 확실히 체스터의 뒤를 쫓던 지크하르트는 멈칫했다. 

체스터 군의 안색이 창백하게 굳었다. 포탄이 터지는 굉음과 맞추어 해가 뜨는 양 하늘이 환하게 밝아졌다. 전장에서 직접 본 건 처음이지만 지크하르트는 하늘을 밝힌 하얀 빛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함성이 어우러진 전쟁터의 소리가 커졌다. 오르피어스다. 아이릭 군의 진군이었다.

거리가 가까웠다. 오르피어스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지휘체계가 무너져 있던 본관의 체스터 군은 우왕좌왕하더니 등을 돌려 도망쳤다. 지크하르트는 구태여 그들을 쫓지 않고 멈추었던 추적을 계속했다. 본관이 점령당하기 전에 자신의 손으로 해치워야한다.

적군이 침공하는 와중의 도주 경로는 뼌하다. 지도를 머릿속으로 떠을리며 달려가던 지크하르트는 공기가 응축되며 특정 지점으로 매섭게 빨려 들어가는 걸 감지했다. 그는 이 느낌을 알고 있었다. 놈이 힘을 쓰면 먼저 공기가 비명을 지르고 허공에서 내려 찍히듯 하얀 악마가 강림한다. 전장은 놈의 손아귀에 있었다.

보편적인 인식을 넘고 있기에 공포감을 부채질하는 새하얀 화염이 사방을 터트리며 매섭게 영역을 확장겠다. 지크하르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불이 나면 도주 경로는 봉쇄되고 그도 추적하기 어려워진다. 체스터는 구태여 문으로 빠져 나가느니 창문을 깨고 밖으로 도피하는 길을 택할 것이다. 머릿속에 가정하여 넣어야 하는 상황이 증가하였다. 

이쯤해서 자신도 밖에서 나가 체스테 기다리거나 찾는 게 낫지 않을까 경로를 고심하던 그의 귀에 두 줄기의 비명이 포착되었다. 그는 저 비명의 정체도 알고 있었다. 단번에 격중당하는 고통의 비명이 아니다. 산 채로 자신의 몸이 타들어가는 단발마의 참혹한 비명이었다.

생각하며 지체할 시간마저 아까웠다.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화염 사이에 위태로이 난 길로 뛰어들었다. 후끈거리는 열기가 폐를 날카롭게 들쑤셨다. 비명 소리는 분명히 같은 층에서 들렸다. 

끔찍한 울림을 안으며 길게 이어진 꼬리를 쫓은 지크하르트는 이내 시커멓게 소사한 한 쌍의 시체 사이에 선 체스터와 맞은편의 오르피어스를 볼 수 있었다.

복도 귀퉁이에 은신하여 일단 상황을 살폈다.

「체스터 님! 피하십시오!」

체스터에게도 충성하는 부하는 있는지 장교 한 명이 죽음을 무릅쓰고 볼길에 뛰어들어 구출을 시도했지만 석상처럼 체스터의 앞에 있던 오르피어스가 힐끔 눈을 돌리자 넘실대던 불길이 단번에 그를 삼키며 타올랐다. 또 한 번의 참혹한 단발마의 비명이 화염에 섞였다.

내도록 쫓기던 체스터는, 기이하게도 평정을 찾은 것처럼 흔들림없이 오르피어스의 앞에 서 있었다. 대치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사람을 태워 죽인 오르피어스의 낯에서 차츰 핏기가 빠졌다. 

그의 입술이 무언가를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거리가 있는 지크하르트의 육안으로도 분별될 만큼 총을 쥔 손이 경련하기 시작했다. I,

힘없이 늘어뜨리고 있던 손이 부들거리며 천천히 을라왔다. 어깨가 거칠게 오르락내리락했다.

「허억, 헉……」

체스터를 겨냥한 오르피어스의 총구가 하염없이 떨렸다.

「오르피어스! 감히 네가!!」

한 쪽 귀가 잘리고 뺨을 칼등으로 맞아 일그러진 피투성이 얼굴로도 체스터의 호령은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 상황에 마주친 사람이 오르피어스라는 점을 기꺼워하는 둣도 보였다. 

매서운 호령에 오르피어스가 상체를 크게 흠칫하며 총을 떨어트렸다. 허리를 굽혀 바닥에서 총을 다시 쥔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지 그는 벌벌 경련하는 손으로 군도를 빼들었다. 

습관적으로 칼날을 훑은 손끝에서 불길이 일어나 용맹함을 더하였지만 그의 떨림은 멎지 않았다. 무기를 겨누고 있는 사람은 오르피어스인데 우위는 체스터에게 있었다.

지크하르트에게도 좋은 기회였다. 방해하는 사람도 없다. 무방비하게 등을 내비치고 있는 체스터를 죽이고 오르피어스에게 칼날을 향하면 끝이었다. 그가 발화하는 것보다 빠르게 죽일 자신이 있었다. 6년을 벼렸던 복수는 완료 된다.

하지만.

하지만....

'빌어먹을!'

오르피어스의 눈미 6년 전과 똑같았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하는 초점 없는 눈동자.

6년 전의 그날, 발화는 갑작스러웠다. 저녁 식사 후 거실에서 아버지는 동생을 무릎 위에 앉힌 채 이야기 중이었고, 어머니는 밖에 나가서 놀려는 그를 자리에 붙잡아 앉혀 책을 읽도록 강요하여 불만을 구시렁거리고 있을 때였다. 

화염은 어떠한 전조도 없이 사방에서 그의 집으로 침투하였다. 피부가 따끔거릴만큼 사나운 열기가 아니었다면 환영이라고 치부하였을 만큼 갑작스러운 불길은 제일 먼저 아버지와 동생을 집어삼켰다.

'마르크! 레나!'

지크하르트를 출산하며 건강을 너무 많이 해쳐 퇴역하기는 하였으나 어머니는 수라장을 해쳐 온 군인이었다. 자연적인 발화가 아님을 깨달은 그녀는 피눈물을 삼키며 아버지와 동생의 비명에도 현실에 서지 못하고 멍하니 우뚝 굳은 지크하르트의 팔을 잡고 뛰었다. 서둘러 달려간 서재의 책상 세랍에서 권총을 꺼내고 지크하르트를 등 뒤에 서게 했다.

'괜찮아, 괜찮아. 엄마가 너만은 꼭꼭 지켜 줄 테니까.'

현관으로 나가는 건 무리였다. 어머니는 지크하르트를 데리고 비교적 불길이 덜한 방향으로 달렸다. 창이 있었다. 반 정도 열려 있기는 했지만 통과하기에는 좋았다. 

화상은 입겠지만 창을 깨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듯하였다. 의자로 창문을 후려치려던 어머니가 불현듯 깜짝 놀라며 등을 돌렸다. 거기엔 지크하르트의 또래로 보이는 은발의 소년이 있었다.

'....너, 너 어떻게 들어온 거니?'

호흡을 뜨겁게 턱턱 찢고 모든 것을 집어삼킬 용맹한 기세로 불타오르는 불길이 소년에게만은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이 불과 소년이 연관이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럼에도 어머니가 바로 총을 쏘지 못하였던 건 아들과 비슷한 연배의 어린 소년이라는 점과 더불어 소년의 눈동자가 두려움과 공포에 쫓기는 것처럼 하얗게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훗날 지크하르트는 곱씹으며 추측했다.

'흐윽…… 하아, 죽이라고 했어. 죽이라고 했어. 죽이라고 했어.'

소년이 불분명한 소리를 웅얼거리며 얼굴을 감쌌다. 소년의 발끝으로부터 길게 뼏어나간 화염의 가닥이 일순간에 어머니에게 닿아 가느다란 줄처럼 육신을 거슬러 오르며 총을 폭파시켰다.

'아아악!!'

어머니와 비명과 살점은 지크하르트의 얼굴까지 튀었다. 다음 순간, 몸이 붕 떴다. 어머니는 최후의 힘을 쥐어짜 거의 제 구실을 할 수 없게 된 손으로 지크하르트를 움켜쥐고는 힘껏 내던졌다. 등으로 창문을 와장창 깨며 날아간 지크하르트는 바닥에 나뒹굴며 직접적인 아픔이 육신을 강타하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엄마! 엄마!! 아빠!!'

화염이 거세게 오르는 집으로 무작정 뛰어들려는 지크하르트를 사람들이 붙잡았다. 네댓 블록에 번진 큰 화재로 인해 동네는 발칵 뒤집혔다. 들어가면 안 된다고 위험하다고 부둥키는 이웃의 팔을 깨물어 벗어난 지크하르트는 사람들의 비명을 등 뒤로 보내며 달려갔다. 

그때 열려 있던 옆의 문으로 거의 숯덩이가 된 사람이 비틀거리며 걸어 나오다 쓰러졌고 필사적으로 감싸 안은 그의 품에서 로즈마리가 울며 몸부림쳤다. 로즈마리의 얼굴과 머리칼에도 불이 옮겨 붙어 있었다.

'지크하르트! 오지 마!'

잠만 멈칫하였으나 방금 자신이 던져진 창문 안으로 들어가려는 지크하르트의 귀에 어머니의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그것이 환청이었는지, 진짜 어머니가 죽기 직전에 외친 비명이였는지 지크하르트는 지금도 알지 못했다. 

허나 그 비명은 그의 걸음을 멎게 하였다. 발치에서 로즈마리가 울면서 엄마를 찾았다. 로즈마리는 본능적으로 머리칼을 뜯어내며 바닥에 나뒹굴었지만 불꽃은 약해지지도 거세지지도 않은 채 그녀의 피부에 얹혀 있었다. 어른들이 위험 하다고 얼른 이쪽으로 오라고 외치는 소리가 아득히 멀었다.

‘……으, 하아, 하아…….'

그, 숨소리였다. 지크하르트는 퍼득 고개를 올렸다. 화염 건너편의 지근거리에서 은발의 소년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흐느끼고 있었다. 눈물로 흠뻑 젖은 눈동자가 초점을 고정하지 못하고 어지러이 흔들렸다.

'나는, 난……. 아버지가,죽이라고, 아니야, 싫어, 싫어……'

소년이 조각조각 단락적으로 끊어지는 단어를 떨어트리며 주저앉았다. 로즈마리의 불이 거짓말처럼 꺼졌다. 하지만 작용하던 힘이 거두어졌음에도 통제를 벗어나 '진짜' 화재가 된 붉은 불길은 진화되지 않고 흉흉하게 이를 곤두 세웠다. 

발만 동동 구르던 어른들 중의 누군가가 용기를 내어 두 아이를 구출하러 달려왔다. 지크하르트가 다시 고개를 올렸을 때 소년은 사라지고 없었다.

비아냥거림을 한껏 담고 이죽거리며 사람을 비웃게 된 주제에, 그는 지금도 그때의 그 깨진 눈동자를, 여전히 갖고 있었다.

「오르피어스!」

체스터가 언성을 높였다. 오르피어스가 주춤거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넌 왜 여기에 있느냐?」

「혀, 형이……. 형이, 아버지를 주, 죽이라고……」

「네가? 감히 나를?」

체스터가 한 걸음을 내딛자 오르피어스는 두 걸음을 물러섰다. 바로 등 뒤까지 닿았던 화염이 그의 뒷걸음질에 따라 길을 텄다. 칼자루를 쥔 오르피어스의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 칼은 체스터를 공격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는 듯 보였다.

「네 주인이 누구냐」

「혀, 혀, 아이, 릭 형」

「오르피어스!」

거친 손이 오르피어스의 앞머리칼을 움켜쥐며 얼굴을 당겼다. 칼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체스터의 등에 가리어 세세한 정황까지 읽는 건 어려웠으나 지크하르트는 직감하였다. 체스터와 시선이 마주한 것이다. 정적은 짧았다. 오르피어스가 비명을 지르면서 주저앉았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쓸모없는 것」

「버, 버리지 마세요! 잘못했어요……!」

흐느끼면서 연방 사죄를 중얼거리는 오르피어스에게 체스터가 명령했다.

「돌아가서, 네 형들을 죽여라. 그리고 너도 죽어라 」

「네, 네……!」

「말해라. 내가 뭐라고 했느냐?」

「형들을 주, 죽이고…… 저도 죽……」

「좋아. 그럼 우선 불을 진화, 아니 내가 나갈 수 있는 길만,」

체스터는 명령을 계속하지 못했다. 타앙, 하는 총성과 그의 입에서 터진 비명이 명령을 덮었다. 지크하르트는 탄창이 비워질 때까지 총을 쏘며 걸어갔다. 총알이 격중된 양 다리가 피투성이가 되어 처참히 나뒹굴었다. 탄창이 다 비워지고 공이치기가 헛돌았다. 

총을 내던지고 바닥에 떨어진 오르피어스의 칼을 쥐었다. 불길이 용맹하게 칼날에 머물러 있었다. 체스터가 발작 같은 고성을 토하며 오르피어스에게 죽이라는 명령을 하기 직전 불길을 머금은 칼날이 허공을 찢었다. 

체스터의 수급은 일그러진 얼굴 그대로 오르피어스의 발 언저리까지 굴러갔다. 목을 잃은 주검이 털썩 쓰러지며 무릎을 건드려도, 상처가 컸던 체스터의 얼굴에서 흩뿌려진 피가 눈가까지 음씬 튀어도 오르피어스는 미동도 없이 주저앉은 채 중얼거렸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아버지의 시체도, 목젖까지 들이댄 칼날도, 그 앞에 선 지크하르트도, 오르피어스는 보지 못했다.

쉽다. 아주 쉽다. 무저항인 상대의 목을 칼로 긋고 치면 끝이다. 지크하르트는 칼을 올렸다. 그의 복수는 이것으로 결착된다. 오르피어스가 울며 중얼거렸다. 잘못했어요…….

허공에서 떨어지던 칼이 빙글 반전하며 폼멜이 오르피어스의 뒷목을 후려갈겼다. 오르피어스는 흐느끼던 얼굴 그대로 실신하여 체스터의 주검 위에 쓰러졌다.

「나더러 어찌라는 거야, 젠장……」

지크하르트는 이마를 짚었다.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다. 이마를 누르며 한참을 서 있던 그는 전쟁터의 소리가 차츰 커지자 걸음을 뗐다. 불길은 오르피어스가 의식을 잃어 연이어 번지지도 않고 꺼지지도 않았지만 아이릭 군이 사령부까지 정령하기 직전이었다. 그전에 벗어나야 했다.

오르피어스를 일별하고 화염 속으로 사라잤다. 혼잡을 틈타 미리 봐두었던 도주 경로로 빠져 나와 피와 검댕이 묻어 더러워진 군복을 벗었다. 요새의 정중앙에 피어난 불길은 그가 떠난 뒤에도 밤새도록 새하얗게 타오르며 아이릭 벨포드의 완벽한 승리를 선포하였다.

***

「것 참. 야무지게도 태워 놓으셨더구만」

도젠은 군홧발로 계단을 툭툭 건드리며 검은 재를 털어냈다. 동생이 잿더미로 만들어 놓은 요새를 떠나며 검댕을 한 번 털어냈음에도 재로 만들어진 짙은 발자국이 그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부관이 고소했다.

「그분의 능력 탓이니 도리가 없질 않습니까」

「덕분에 요새에서 머물지도 못하는 꼴이 되었지만 말이다. 뭐, 쉬기에는 편해졌나」

병사들은 얼추 진영을 설치할 수 있었으나 사령부는 골조만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상태라 장교들의 숙식은 불가능했다. 일부 군사와 장교는 전투의 수습이 종료될 때까지 인근 도시의 병영과 시내의 호텔을 대여하게 되었다. 최후까지 체스터를 지지하던 세력은 전멸되었고 더 이상의 위험은 없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헤임으로 귀성하면 계엄령도 거두어질 것이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부관을 돌려보낸 도젠은 그를 비롯한 수뇌부가 숙식 중인 6층 복도에서 유안과 마주쳤다. 쿠데타 직전과 쿠데타 이후 아이릭의 부관으로써 제일 바쁘게 뛰어다녔을 유안은 여전히 쉬지 못하고 잰 걸음으로 복도를 걷는 중이었다. 손에 있는 것이 서류가 아닌 식사가 담긴 트레이라는 점만 달랐다.

「이봐, 유안」

유안이 걸음을 멈추고 인사겠다.

「안녕하세요. 언제 돌아오셨어요?」

「방금. 넌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나? 설마 형님 식사까지 챙겨주고 있는 건 아니겠지?」

체면도 있으니 사소한 신변잡기는 당번병이나 호텔의 직원들에게 일임하라는 충고를 할 요량이었던 도젠의 표정은 머뭇거리는 유안의 응수에 어이없음으로 변질되었다.

「아이릭 님이 아니고……. 음, 그게, 막내 도련님이 통 나오시질 않아서요」

「웃기는 꼬락서니구만. 여기가 본가 저택도 아니고 종전되었다고는 하여도 엄연히 전쟁터인데 널 급사처럼 부려 먹는다고?」

유안이 당혹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요. 막내 도련님이 단순히 식당까지 내려가기 싫다는 투정을 부리시는 거라면 제가 친히 식사를 가져다 바치겠어요? 알아서 밥 먹을 때까지 굶기죠」

맞는 말이었다. 아이릭의 일을 하는 틈틈히 오르피어스를 훈육하였던 유안의 모습을 돌이키며 도젠은 묘하게 납득했다. 

체스터의 아래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모조리 파탄된 오르피어스가 그럭저럭 인간 비슷한 흉내를 갖추게 된 것도 유안을 비롯한 페인 남매와 집사 엘빈의 보살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잖아도 도련님들께 말씀을 드리려고 했는데 ……」

주위를 둘러보아 인기척이 없음을 재차 확인한 유안이 낮게 속닥였다.

「막내 도련님의 상태가 정말 심상치 않아요. 미건 제 추측이지만, 아무래도 체스터 님과 대면하셨을 때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알았다. 일단 내가면저 가보지 」

오르피어스의 방은 가까웠다. 유안이 잠깐 기다리라는 제스쳐를 하며 문을 두드렸다.

「도련님. 유안입니다.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

「작은 도련님도 함께 오셨습니다.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시는데요」

사람이 없는 것처럼 한참이나 대답이 없던 문 너머에서 맥없이 꺼지는 듯한 아주 얇은 허락의 소리가 문틈으로 흘러 나왔다.

「그동안 저는 암만 두드려도 들어오란 말 한마디를 안 하시더니 작은 도련님은 직방인데요」

유안이 트레이 위에 올려놓았던 마스터키를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문을 열었다. 문 안에 들어서자마자 도젠은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오르피어스는 소파 아래의 바닥에 한껏 웅크리어 쪼그려 앉은 채 사방과의 가림막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도젠의 미간에 골이 패였다. 동생이 저토록 폐쇄적인 성향을 내보이는 건 오랜만이다. 체스터에게서 아이릭의 아래로 들어오게 된 직후의 오르피어스가 딱 저런 모습이었다.

오르피어스로 하여금 체스터를 죽이게 한다는 아이릭의 계획에 반대하였던 도젠은 아이릭이 한동안 군을 물린 채 시일을 보내기만 하였기에 자신의 반의를 받아들인 것이리라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아이릭은 급작스러운 공격을 지시하며 오르피어스를 별동대로 깊숙이 전진시켰고,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헤임에서 지크하르트가 벨포드 저택을 벗어났다는 소식과 요새 내에 생필품을 매출하던 상인 일행 중 요새로 진입 후 사라잤다는 잡역부 한 명의 인상 착의를 보고 받은 아이릭이 진군을 결정하였다는 건 도젠도 알지 못겠다. 

허나 그는 아이릭의 계획을 들었을 때부터 이것을 염려했다. 센티넬이 아니라고 알고 있었기에 굳이 세뇌하지 않았던 아이릭과, 입양되기 전의 진짜 가족이 인질이나 다름없었기에 세뇌가 없어도 복종할수밖에 없었던 그와, 모든 걸 거부하고 자해한 힐라리아와는 다르게 오르피어스는 정신의 가장 깊은 곳까지 체스터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아이릭의 부하로 오게 된 후 오르피어스에게 별다른 정신적인 이상은 없었지만 오랜 시간 체스터를 아버지로써 주인으로써 섬겼던 도젠은 체스터가 지배하는 무서움을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시선을 마주하는 찰나의 순간이면 오르피어스가 7년 전으로 돌아가기엔 아주 충분한 시간이였다.

도젠은 오르피어스의 기색을 아주 차분히 살피며 걸음을 내디뎠다.

「오르피어스. 아버님을 만났을,」

「맙소사! 도련님!!」

도젠의 온몸이 불길에 됩싸인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리고 유안이 비명이 높이 올라갔을 때 도젠은 이미 오르피어스의 코앞에서 꽁꽁 감싼 이불을 걷어내고 있었다. 그를 목표로 하였던 불길은 닿지 못하자 흔적도 없이 사그라졌다.

「형을 맞는 인사가 아주 거창하구나. 면상이나 보자, 새끼야」

억지로 턱을 올리게 한 도젠이 침음했다. 생기 없는 눈동자는 초점이 맺혀 있지 않았다. 또 능력을 쓰기 전에 주먹으로 배를 후려쳐 기절 시킨 도젠은 쓰러지는 동생을 팔 안에 받아 안았다.

「형님 모셔와. 이자식 완전히 맛이 갔어」

유안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달려 나갔다.

오르피어스가 의식을 회복한 건 아이릭이 그가 누운 침대 곁 의자에서 두 권째의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옅은 신음을 흘리며 깨어난 그는 지근거리에서 아이릭의 존재를 인식하자 본능적으로 불길을 일으켰다. 

그러나 산소가 차단된 불길은 가느다란 불똥도 튀지 못하고 꺼졌다. 거듭 불길을 일으키려던 오르피어스의 몸이 침대에 꽉 눌렸다. 

발버둥질했지만 그의 사방에 있는 공기가 그를 거절하여 손 끝 하나 움찔할 수 없었다. 압박당한 폐로 호흡이 어려워 숨이 꺽꺽 막혔다. 무거운 무게추라도 얹은 양 짓눌리고 있는 전신에서 뼈마디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혀, 혀.」

목 안에서 한껏 짓눌린 신음에 가까운 부름이 간신히 올라왔다. 아이릭이 보던 책의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이제 정신이 드나?」

「으..」

「알아들었으면 눈썹을 깜빡여라」

아이릭은 아주 약간의 압력을 덜어주었다. 고통으로 인한 생리적인 눈물이 흘러 넘쳐 흠뻑 젖은 눈썹이 빠르게 깜빡였다.

「좋아. 능력을 쓰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

눈썹이 한 차례 더 깜빡였다. 아이릭은 힘을 거두었다. 오르피어스가 급격하게 숨을 몰아쉬며 기침을 콜록였다. 그가 평정을 되찾는 동안 아이릭은 담배를 피우며 무료함을 달래었다.

간신히 호흡을 진정시킨 오르피어스가 엎드린 그대로 아이릭을 올려다보았다.

「요새에서 아버지에게 명령 받은 게 있나?」

「……융」

「워지?」

「형들을 죽이고, 나도 자살하라고 하셨어」

이성은 일 푼이나마 회복하였지만 오르피어스의 눈동자는 불안정하게 흔들렸고 그 짧은 대화 한마디를 하는 와중에도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이를 딱딱 맞부딪혔다. 

아미릭은 담배를 입술로 되돌리는 것도 잊고 한숨을 쉬었다. 도젠을 살해하려 하였다는 소식에 일말 예상은 하였지만 최악의 상황이었다.

「네 주인이 누구지?」

「아이릭 형이야」

「그런데도 날 죽이려느냐?」

「하지만, 하지만……. 아, 아버지가 명령을……. 아버지가……, 형을, 형을……」

오르피어스의 호흡이 거칠게 올라가고 침대에 늘어뜨린 손등이 전류라도 흐르는 것처럼 세차게 경련했다. 최초의 명령권자이자 주인이었던 체스터와 그에게서 소유권을 이양받은 현재의 명령권자이자 주인의 상충되는 명령 사이에서 그의 정신은 극도로 흔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이릭은 빠르게 응수했다.

「날 죽이지 말라는 명령은 아니다. 지금은, 생각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임시방편이나마 효과는 있었다. 오르피어스의 떨림이 약간 멎었다.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초지종을 캐물은 아이릭은 오르피어스로부터 아버지와 맞닥뜨린 전후의 상황이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명령만이 뇌리에 남아 있다는 대답을 얻었다. 아버지의 힘이 작용한 게 틀림 없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두 눈알을 태우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한다……'

아이릭은 오르피어스를 넘겨받을 때 체스터의 명령권을 말소시켰어야 했다고 뒤늦은 후회를 하였다. 당시에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괜한 의심을 살까 저어되어 제안하지 못했었다.

언제 주인에게 엄니를 세울지 알 수 없는 개라면 파기하는 게 나을까. 진땀에 흠뻑 젖어 간헐적인 떨림을 일으키는 동생의 가느다란 목덜미를 내려다보며 심각하게 숙고하였다. 죽이는 건 쉽다. 체스터처럼 자해하라는 명령을 할 필요도 없이 그의 힘만 쓴다면 심장을 압박하거나 목을 부러트리거나 머리를 터트려 죽일 수 있다. 1초도 걸리지 않는다.

진심으로 오르피어스의 제거를 고심하였던 아이릭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오르피어스는 이제야 그 용도를 시작한 참이고 그에게는 하루 이틀만에 이루어지지 않을 목적지점으로 달하는 험로가 여전하다. 몸도 자라지 않은 어린 아이를 무턱대고 살육으로 내몰려 하였던 아버지와는 다르게 그는 차근차근 오르피어스를 훈련시켜 다방면으로 유용하게 이용하고자 하였다. 금번 쿠데타가 자아낸 최초의 전장에서 오르피어스는 예상 이상의 전과를 거두었고 흡족해한 참이었다. 지금 제거하기에는 아깝다.

숙고하던 아이릭은 거의 존재를 잊고 있던 담배를 무심코 입에 가져오려다 멈칫했다. 재가 짧아져 있었다.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하강겠다. 새하얗게 질릴 만큼 침대 시트를 움켜쥔 오르피어스의 손등에 재가 소복이 떨어져 있었다. 피하거나 뜨겁다는 비명이 나을 법도 한데 미동도 하지 않는 동생을 의아하게 내려다보던 아이릭은 곧 깨달았다.

그는 방금 전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을 하였다.

시험 삼아 거의 필터에 다다른 담배를 손등에 비벼 었다. 어깨가 크게 경직하며 희미한 비명을 잇새로 씹었지만 오르피어스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주인이 누구냐 물었을 때 오르피어스는 아이릭이라고 즉답하였다. 명령의 우선권은 아직 그에게 있다. 해결 방법을 찾았다. 우선권이 있는 자신의 명령을 계속하여 주기적으로 그에게 인식시키면 된다.

'하지만, 어떻게'

지금처럼 가만히 있으라는, 일상을 침범하는 명령은 안 되었다. 그렇다면 일어나서 세수하고 식사하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하나씩 명령해야 한다. 능력을 쓰거나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도 안 되었다. 하나의 명령이 종료되면 오르피어스가 체스터의 명령을 떠올릴 가능성이 있을 뿐만이 아니라, 아이릭 자신이 불필요하고 불합리한 살해 자체를 원하지 않았다. 오르피어스가 항상 명령을 인식하며 대기하고 있을, 그러한 조건이 필요하였다.

두 번째의 해답은 쉬이 나오지 않았다.

세부적인 계열은 차이가 있지만 월등한 상위의 힘을 지닌 힐라리아라면 정신 지배를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완전히 푸는 것 또한 아이릭은 원하지 않았다. 오르피어스는 적어도 그의 일차적인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만이라도 복종해야 했다.

고민을 거듭하고 거듭하였지만 상상력이 썩 풍부하지 않은 그는 마땅한 방법을 도출할 수 없었다. 시체처럼 가만히 있는 오르피어스의 곁에서 무의미한 시간을 한참 보내었을 때 조심스럽게 문을 노크하며 유안이 들어왔다.

「아이릭 님. 실례합니다만 리백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통화를 요청한 장본인을 밝히지 않았기에 아이릭은 상대를 짐작했다. 복잡한 머리도 식릴 겸, 오르피어스의 손을 치료해 주라고 유안에게 이르고는 기겁한 그를 남겨두고 방을 나왔다.

비어 있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아이릭은 전화기 옆에 놓인 송수화기를 들며 의자에 앉았다. 예상하였던 달콤한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고막까지 흘러들었다.

「축하해. 승리하였다면서? 이제 글래스팅의 새로운 총독 각하가 되시는 걸까?」

「시기상조입니다, 니베이아 님. 저는 젊은데다 바로 총독 임명을 받기에는 시기가 좋지 않아 당분간은 이대로 있을 예정입니다」

국왕의 차녀이자 통화의 상대인 니베이아 베아트리체 키르허는 전파 너머로도 생생하게 닿는다는 착각이 들 만큼 선명하게 희소하였다.

「그래? 하긴 내가 참섭할 건 아니긴 해. 입시니아의 일은 입시니아가, 글래스팅의 일은 글래스팅이, 뮈르달의 일은 뮈르달이지. 그보다 나도 축하 받을 일이 생겼어. 궁금하지 않니?」

그녀는 아이릭이 필요성을 전제하지 않은 순수한 궁금증이나 호기심을 유발하게 하는 유일한 사람이었기에 무심코 고개까지 끄덕였다.

「알려주십시오」

니베이아가 즐겁게 웃었다.

「결혼 상대를 찾았어. 작위도 없고 명문가도 아닌 평범한 남자야. 집안에 아주아주마~~주 돈이 많다는 점만 제외하면. 후후후! 언니와 오빠도 흡족하더라. 궁중에서 잊힌 초라한 왕녀와 그 왕녀를 돈으로 사들여 비천한 가문의 품격을 상승하려하는 평민 출신의 부호라니 그야말로 천생연분이지」

자조적인 어투와는 다르게 니베이아는 진심으로 즐거워하였기에, 아이릭은 그녀가 이 결혼 상대를 모든 요소를 치밀히 고려하고 선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위세 등등한 손위형제들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않으면서 자신의 기반이자 조력이 될 수 있으며 그녀가 수족처럼 움직일 수 있는 존재. 이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시킨 남자의 등장이기에 아이릭도 진심으로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그가 그녀를 옹립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기 위하여 아버지의 숙청에 성공하였던 것처럼, 그녀 역시 착실히 초석을 쌓고 있었다.

「당신에게 인사 들으니 약혼하였다는 실감이 나네. 돈에 눈이 멀어서 하가하는 왕녀답게 결혼식은 눈이 돌아갈 만큼 호사스럽게 할 거야. 굉장히 많은 사람도 초청하고」

1왕녀와 1왕자,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적인 一 보다 노골적인 표현으로는 무시된 一 그녀의 결혼식이니 만큼 왕녀를 지지하거나 왕자를 지지하거나, 둘 모두를 지지하지 않는 다양한 층의 사람들이 초청되고,명색이 왕녀의 초청장을 거절할 수는 없으니 그녀는 아주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행간에 숨은 의미 정도는 쉽게 파악하는 아이릭은 그녀의 상황을 염려했다.

「약혼까지 하셨다면 어느 정도 주목 받고 있으실 텐데 저와 통화해도 괜찮으십니까? 도청의 위험은 없으시고요?」

「괜찮아, 괜찮아. 약혼식으로 마음이 들떠 내가 정부에게 전화하는 것을 신경 쓸 만큼 언니와 오빠는 한가하지도 않고 여력도 없어. 날 도청할 인력으로 서로를 도청하려 할 걸? 당신의 승리를 축하한다는 좋은 핑계도 있고. 아, 혹시 정말 도청할 지도 모르니 재미있는 걸 해 볼까? 얼마 전에 시녀에게 들은 얘기인데 민간에는 전화 통화를 하면서 목소리로 하는 유사 섹스가 유행 중이라던 걸」

「제가 흥분하는 건 당신의 목소리가 아니니 사양합니다」

「아쉬워라. 한 번은 해 보고 싶었는데」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사소한 신변 얘기를 나누는 중에도 아이릭의 머리 한 구석은 오르피어스로 꾹 눌려 있었다. 니베이아가 예민하게 눈치 했다.

「아이릭. 당신 고민 있지? 말하는 투가 영 건성이야」

「……동생 문제가 조금, 걸려있습니다 」

「어느 동생일까? 의붓 동생? 막내동생? 아니면 당신을 아주 많이많이 좋아하는 여동생?」

「막냅니다」

그녀가 돌파구를 열어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을 부정하지 않으며 아이릭은 차근차근 정황을 설명했다.

응, 응 호응하며 듣던 그녀는 짧게 탄성했다.

「벨포드 공, 아 이젠 선대 벨포드 공이 되었구나. 그 사람이 능력을 운용하여 정신을 지배할 수 있다는 건 들었지만 이 정도로 강력할 줄은 몰랐어. 선대 공도 참 저열하게 일을 처리했네. 내가 그런 능력을 갖고 있었으면 언니와 오빠는 깔끔하게 자살한 시체로 발견될 수 있었을 텐데. 해서 요점은 동생에게 반쯤 영구히 지속할 수 있는 명령이 필요하다는 거지?」

「네. 언젠가 때가 되면 힐라리아에게 정신 지배를 주해하라는 시도를 해 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머릿속을 정리하는 듯 수화기 너머에서는 호흐 소리만이 들려왔다. 아이릭은 자신이 무심코 테미블을 두드리고 있었다는 걸 자각하고는 주먹을 쥐었다.

「선대 공이 한 것처럼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은 안 되지?」

「특정인을 지칭하는 명령이라면 수행하는 즉시 종결되었다고 여길 가능성이 큽니다. 헤임의 모든 시민을 죽여라, 따위의 포괄적인 명령은 제가 원하는 바가 아니고요」

「그럼 이런 건 어때? 자해를 하라고 명령하되 상처가 나으면 또 자해 하라고. 단순히 예로 든 것이긴 하지만 이렇게 지속되는 건 효과가 있을까?」

이번에는 아이릭이 침묵으로 생각을 가다듬었다.

「……시도해 봐야겠지만 효과는 기대할 만 합니다. 단, 자해는 제가 안 됩니다. 불필요한 부상으로 필요할 때 최상의 컨디션으로 능력을 쓰지 못하면 안 되니까요」

「후후. 정말 당신다운 대답이야. 흐음, 그렇다면……. 떠오를 듯 말듯하기도 한데……」

 머릿속을 아른아른하게 감도는 생각의 꼬리를 잡으려는 것 같던 니베이아가 문득 목소리를 낮혔다. 

「안아 봐」

「말씀의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데리고 자라는 의미야. 직접적으로 얘기해 줘야 해?」

 앞뒤 자른 그 소리에는 아이릭마저 대답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당신은 왜 싫은 건데」

「피를 나눈 동생과 몸을 섞는 게 윤리에 어긋나는 배덕이라는 것 정도는 압니다」

갑자기 니베이아의 폭소가 쏟아지듯 터졌다. 아이릭이 방금 전 자신의 대답의 어디가 그렇게 우스운 건지 진지하게 되짚는 동안 그녀는 숨마저 가쁘게 하닥거리며 웃음의 여운을 퍼트렸다.

「요 근래 들은 이야기 중 최고로 재미있는데? 당신 입에서 윤리이니 배덕이니 운운하는 말이 언급될 줄은 짐작도 못했어. 전혀 그런 거 공감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짆아?」

「위에서 통치하는 입장이 되었으니 가급적 사회 통념에 따르려는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

「뭐, 좋아. 내가 생각하는 명령의 방식은 이거야. 내가 원할 때, 혹은 특정 기간에 널 안을 테니 그 사이에는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어라. 이러면 지속적인 명령권이 충족되지 않아?」

의도는 이해했지만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아이릭은 '그렇다면 지정하는 명령이 굳미 동침이 아니어도 되질 않습니까'라는 요지의 질문을 하려 했지만 그녀가 재차 뒷말을 잇는 게 더 빨랐다.

「거기에다가 당신이 좋아하는 합리성을 붙여 봤지. 아무래도 저택 내에는 보는 눈이 많으니까 가이드와 동침한 후에 뒤처리가 곤란하다며? 그걸 당신 막내동생으로 덮어. 스캔들이 나더라도 근친상간 쪽이 낫지 않겠어? 근친상간이야, 뭐, 후후. 궁중이나 문벌가에는 드레싱처럼 곁들인 스캔들이기도 하고. 전혀 새삼스럽지는 않아」

니베이아는 반년 전 궁중 사교계에 떠돌았던 모 귀족 남매의 근친상간 의혹을 수다스럽게 늘어놓았다. 성실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한편 그녀의 말을 곰곰히 되짚었다. 여러 가지 조건들을 늘어놓아 보았지만 니베이아의 조언 이상의 방법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행여 임신 가능성이 있는 여동생이었다면 절대 이 방법을 권하지 않았을 데지만, 남동생이 난 괜찮아」

「……일단은 고려해 보겠습니다」

「어느 쪽이든 최선의 결과가 되길 바랄게. 글래스팅이 안정되면 틈을 봐서 리벡도 방문해 줘. 당신에게 물어뜯기고, 집어 삼켜지고 싶어. 아이릭」

농염한 키스 소리를 남기고 전화는 끊어졌다. 수화기를 전화에 되돌려 놓고 머리를 싸매던 아이릭은 끝내 유안을 호출하였다. 그러잖아도 오르피어스를 염려하고 있던 차에 자세한 상황까지 알게 된 유안은 대경하였고, 니베이이아의 방법까지 듣자 아이릭을 후려치기라도 할것 같은 눈빛이 되었다.

아이릭은 탈력하는 기분을 느끼며 양팔을 팔걸이 아래로 늘어뜨렸다.

「외의 적합한 수단이 있나? 있다면 말해 다오. 무엇이든 따르마」

「.....」

유안은 대답하지 못겠다. 긴 시간이 지나서야 그는 창백한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씁쓰레하게 중얼거렸다. 

「저도 체스터 님과 똑같은 인종이군요. 그 어린 도련님을 이용하려는 목적으로만 머리가 가득 차 있어요」

「아버지라면 다른 수단을 강구한다는 노력도 하지 않았어」

나름대로 유안을 위로해 주려는 목적으로 꺼낸 말이었지만 전혀 위안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유안은 깊은 한숨을 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를 잠자코 응시하다 의자에서 일어났다. 유안이 말없이 앞을 비켰다.

오르피어스는 손에 붕대가 감겨 치료되어 있다는 점만 제외하고는 그가 방을 나올 때와 똑같이 엎드리어,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일어나라」

아이릭은 중얼거리듯 명령했다. 오르피어스가 비척비척 일어나 앉았다. 순종적인 충견처럼 얌전히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 속삭이며 침대로 넘어트렸다. 오르피어스의 눈동자가 새하얗게 커지다가, 이내 감겼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유안이 엘빈 대신 집사로 취직한 게 아닐까.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유안의 등에 오르피어스는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빤히 바라보았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화초에 물을 주던 유안이 시선을 느꼈는지 흠칫 돌아보고는 질겁 했다.

「도련님! 깨어나셨으면 깨어나셨다고 말을 해야지 왜 빤히 쳐다보고만 계세요. 사람 무섭게」 

「배고파서 말할기운이 없어」

배 안에서 울리는 꾸르륵거리는 소리에 더 기력이 빠졌다.

「요새에서 며칠이나 지난 거야?」

「나흘 쯤 됐습니다. 영영 안 일어나시는 줄 알았어요」

기절한 건 호텔이었는데 눈을 떠 보니 익숙한 자신의 방이라 장시간이 지났으리란 건 짐작했지만 나흘이나 껑충 뛰어넘었다고는 예상 못했다. 등과 달라붙은 뱃속이 따가우리만큼 아픈 게 이해되었다. 심정을 이해하고 있는 듯 유안이 먼저 제의했다.

「식사 먼저 하실래요?」

오르피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뿌리개를 화분옆의 창틀에 내려놓은 그는 호출벨을 눌러 시녀에게 간단히 소세할 차비와 식사를 내오라고 일렸다.

「안 그래도 바쁜데 혼자 얄밉게 나흘이나 쿨쿨 자고 계시니까 기분 좋아요?」 

「안 그래도 바쁜데 넌 한가하게 여기서 워해? 엘빈 쫓아내고 우리 집에 취직했어?」

「엘빈 형이 알면 뒷목 잡고 넘어갈 소리는 그만하십쇼. 바쁜 와중에도 도련님이 걱정되어서 억지로 휴가 쓰고 나온 제 정성에 빨리 감동하세요」

대답으로 오르피어스는 질색하는 표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어 응수해 주었다. 유안이 살갑게 웃었다. 언뜻 안도의 기색이 엿보이는 그 웃음을 보니 가슴 한쪽이 간질간질하여 오르피어스는 짐짓 시선을 내깔았다. 기절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머리가 굉장히 아팠는데 지금은 두통이 말끔히 사라져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머릿속을 쟁쟁 울리며 뇌를 압박하던 아버지의 명령도 사라졌다. 지금 이 자리에서 두 형과 만나도 살해 시도를 할 것 같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아버지의 명령이 떨어지면 머릿속이 몽롱하고 사방이 부옇게 흐려졌다.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한 발자국 멀어져 마치 부외자처럼 명령을 본능대로 좇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는 하였다. 후에는 향상 두통이 몰아닥쳐 심할 때는 밤새도록 아파서 운 적도 있었다. 오르피어스는 적어도 그 두통에서 해방시켜주었다는 점만이라도 아이릭에게 감사하였다.

「깨어났으니까 얼른 일이나 하러 가」

「안 돼요. 도련님 공부 가르쳐 드려야 하는데요? 적어도 교양 과목은 가르쳐드릴 수 있어요」

「뭔 공부야 」

「다음 주부터 시험이라는 거 당연히 까먹고 있으실 줄 알았어요. 그래야지 저희 도련님이시죠」

전쟁터에 동원되어 한참 포연이며 피비린내를 맡다가 기절하여 눈을 뜨자마자 들이닥친 일상적인 감각에 오르피어스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순위권 내에 들라는 가당치도 않은 부탁은 드리지도 않으니까 제발 전교 최하위에서는 벗어나주십쇼. 듣는 제가 쪽팔려요」

「전혀 의미도 없는 학교 공부 따위를 잘하면 뭐해. 나는 생각할 필요 없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거잖아. 학교도 가기 싫다구」

「하지만요」

유안이 침대 근처로 의자를 바짝 당겨 앉으며 은밀한 밀담이라도 하는 양 속닥였다.

「도련님을 사관학교에 입학하도록 하자고 제일 먼저 말씀을 꺼내신 분이 작은 도련님이세요」

처음 듣는 소리였다. 오르피어스는 순간 굶주림도 잊을 만큼 놀랐다.

「작은 형이? 대체 왜?」

「작은 도련님도 사관학교를 다니시면서 얻은 게 많으셨으니까 도련님께도 기회를 드리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수학이 필요 없다고 여기고 계시는 의미를 저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비단 공부 외에도, 딱 지금 한 순간만을 겪을 수 있는 열여섯 살이라는 시간에 학교라는 울타리와 또래 친구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값지고 소중한 반짝게림이 있어요. 작은 도련님도 겪으셨고, 저도 겪었기에 드리는 말입니다.

정히 다니기 힘들면 제가 아이릭 님께 말씀 드려볼 테니까 억지로 참지는 마시고요. 뭐, 작은 도련님이 도련님을 안 좋아하시는 건 맞지만 동생이라는 점까지 잊을 만큼 싫어하시는 건 아니에요」

도젠에게 훈련 중 두들겨 맞은 기억밖에 없는 오르피어스는 넉살 좋은 유안의 말에 회의가 들었지만 반박하기도 전에 시녀가 식사와 세숫물을 가져왔다. 그가 의식을 되찾는 걸 대비하고 있었는지 빠르게 갖춰진 준비였다. 물에 적신 수건으로 대강 얼굴을 훔치고 스푼을 들었다. 한동안 주린 배에 스프와 설러드는 허기만 간신히 달래었을 뿐 허한 뱃속이 채워지지 않았지만 유안이 더 이상은 안 된다며 딱 잘랐다.

「그러게 누가 기절하고 있으했어요」

참으로 알미운 소리였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정말 공부를 가르칠 작정인지 시녀가 트레이를 끌고 물러나자 어디에서 났는지 모를 새 교과서까지 가져왔다. 당연히 필기는 하지도 않았을 테니 도련님의 교과서 따위는 필요 없지 않겠느냐는 말에 오르피어스는 할 말이 없어졌다.

책을 펼쳐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글을 억지로 읽으며 기력 없이 필기를 끼적이던 오르피어스는 눈을 뜨고 유안을 보았을 때부터 내도록 마음 안을 잔유물처럼 부유하던 껄끄러움을 반쯤은 충동적으로, 반쯤은 용기를 내어 토설하였다.

「나 형이랑 잤어」

똑똑히 새겨들으라며 잔소리하던 유안의 목소리가 뚝 멎었다.

「혼 안 내?」

잘못을 꾸짖어주고 잘한 일을 칭찬해 주는 몇 안 되는 사람에게서 응답이 돌아오지 않자 그는 조금 더 초조해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유안은 누가 보아도 억지로 머금은 게 분명한 힘든 미소를 돌리면서 낮게 말했다.

「도련님이 원하셨던 상황이 아니잖아요. 꾸중 듣지 않으셔도 돼요. 해서는 안 되는 잘못된 일이라는 건 알고 있으시죠?」

「응……」

「그러면 됐어요. 단지 ……,도련님은 괜찮으세요?」

「……형이랑 자는 거 되게 싫었어. 앞으로도 아마 계속 싫을 게 뻔해서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괜찮을 것 같아. 난 처음에 사람 죽이는 것도 정말 싫어했는데 결국은 이렇게 견딜 수 있게 되었잖아. 형이랑 자는 것도 아마 그렇게 될 거야」

자조도 빈정게도 아닌, 지나치게 담백하여 무감하게까지 들리는 담담한 대꾸에 유안은 가까스로 머금은 미소를 결국 일그러트렸다.

「도련님. 앞으로 고통스럽고 힘겨워서 노여움을 돌릴 대상이 필요하다면 아이릭 님이 아니라 제 원망하세요. 알면서도 말리지 못한 방관의 죄도 큽니다. 원망하여도 해소되지 않는다면, 복수가 필요하다면 저를 죽이세요. 제가 아이릭 님을 대신하여 모든 죄와 분노를 다 받겠습니다」

아이릭에게 있어서 유안이 갖는 의미를 아는 오르피어스는 그의 말이 지니는 진실성과 무게에 흠칫 어깨를 굳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태연한 척 미소를 가장하며 여상히 대꾸했다.

「널 죽이면 내가 형한테 죽어」

그리고 서둘러 화제를 전환하였다. 의미 없미 끄적이기만 하던 노트는 연필의 육연으로 새까맣게 덧칠되어 있었다.

「근데 아버지 시체는 확인했어? 난 전혀 기억이 안 나」

유안은 마른세수를 하며 목울대를 몇 번 크게 움직였지만 '보통의 때'로 돌아가려는 오르피어스의 의도에 따라 주었다.

「도련님의 근처였기에 시체가 신원을 확인하지 못할 만큼 손상되지는 않았습니다. 체스터 님은 돌아가신 게 확실해요 」

「그런가……」

오르피어스가 의자에 한쪽 무릎을 올려 가슴에 끌어안은 채 이마를 파묻었다.

「형은 나더러 아버지를 죽이라고, 이건 명령 이전에 내게 내리는 상이라고 했지만 죽이고 싶지 않았어. 아버지가 죽을 정도로 원망스럽기는 했지만 내 손으로 직접 죽이는 건 한 번도 상상한 적 없었거든……. 너도 내가 아버지를 죽였어야 마땅하다고 판단해? 내가 정말 아버지를 죽인 건지도 모르겠어」

손가락을 맞부딪히면서 생각을 가다듬는 듯하던 유안이 삼가는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실은 극비에 붙여진 사항입니다만, 검시 결과 체스터 님은 생전에 난자한 부상을 당하섰고, 후방으로부터의 총격도 있었다는 게 밝혀졌습니다. 저희의 공격 직전에 습격자가 침입하였다는 투항병의 증언도 있고요」

「……그럼 내가 안 죽인 거야?」

「하지만 체스터 님의 목을 벤 결정적인 무기는 도련님의 칼이 맞습니다. 절단면도 절단되는 동시에 불길에 타 출혈이 없는 상태라 적어도 도련님의 칼이 사용된 건 확실합니다」

「모른다는 거네 ……」

볼안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무는 그에게 유안은 '어쩌면 카시야스가 죽였을지도 모른다'라는 말을 하지 않기 위해 인내심을 퍽 소모해야 했다.

「체스터 님이 도련님께 범한 일은 부도하지만 도련님도 똑같이 되갚음으로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인륜이니 도의니 하는 문제를 떠나 그러잖아도 많이 힘든 도련님을 위해서요. 저는 도련님이 체스터 님을 살해 하셨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그렇게 믿어요」

그의 등에 부친을 살해하였다는 죄업 하나를 더 얹고 싶지 않은 유안은 차분히 설명했다.

「아이릭 님께는 비밀입니다」

마지막 말을 덧붙이며 장난스럽게 입가에 검지를 세우자 오르피어스는 비로소 돌아온 일상에 확연히 안도하는 빛을 비치며 교과서에 얼굴을 박았다.

다음날 오후에 오르피어스는 귀교하였다. 계엄령이 철회되고 정상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 학교는 그가 비우기 전 이나 똑같은 시간이 지루하게 흘러가고 있었지만 변화는 확실히 있었다. 오르피어스는 뒤통수가 괜스레 따끔거리는 걸 느끼며 문질렸다. 대략적인 전장의 상황은 날마다 신문 1면에 특필되었고 외부의 정보를 접할 곳이 신문뿐이었던 헤임의 사람들은 작은 기사 한 토막까지 놓치지 않았다. 사관학교의 교사와 학생도 매한가지였다.

낙제생이라고 은연중에 경시하였던 오르피어스의 전공에 그를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의심했다. 불신과 의혹의 시선이 그가 어딜 가든 뒤꽁무니를 따라다녔다. 폭주하였을 때를 제외하고 이렇게 뭇사람들의 관심을 받은 적이 없는 오르피어스는 부담스럽기도 하고 껄끄럽기도 했다. 역시, 학교를 다녀야 하는 이유 같은 건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인적이 없는 장소를 찾아 시선의 바다를 헤쳤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값지고 소중한 반짝거림을 얻을 수 있다는??

「여, 안녕.오랜만이다」

지크하르트가 어깨를 툭 치고는 여상한 인사를 하며 지나졌다. 오르피어스는 반사적으로 그의 소매를 쥐었다가 쥐자 마자 후회하며 손을 떨어트렸으나 이미 지크하르트의 주의는 돌아와 있었다.

「어? 왜?」

돌아보는 자색의 시선에 혀끝에 매달린 말이 간지럽게 대롱대롱 입속을 맴돌았다. 아버지가 죽었어. 네 가족을 죽이라고 명령했던 아버지가 죽었어. 넌 모르겠지만 네 복수가 하나 이루어진 거야. 기쁘지? 기뻐해야 해. 기뻐해 줘. 아버지가 죽었으니까. 어쩌면 내가 죽였을지도 모르는, 아버지가. 아버지가. 나는, 내가. 너는.

불러 세운 오르피어스가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자 지크하르트는 가우뚱 머리를 긁적이더니 용건 없으면 가겠다는 짤막한 말을 남기고는 저만치 계단 밑에서 소리 높여 부르는 클라우드에게 달려갔다.

오르피어스는 찰나나마 그에게 닿았던 손을 탁 움켜쥐었다.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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