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0)

4.

수틀리면 당장에라도 짐을 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동거는 순탄했다. 무엇보다, 오르피어스와 집에서 장시간 마주한 적이 없었다. 하루를 멀다 하고 그는 유안에게 붙들려 반강제로 밤마실을 나다니고 있었다. 처음처럼 거나하게 취하여 인사불성이 되지는 않았지만 하루라도 술 냄새를 풍기지 않는 날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밖에 나가면 겉옷도 벗지 않고 소파에 뻗어 있는 오르피어스를 볼 수 있었다. 유안과 함께 뻗어 있는 날도 있었다. 성의 없이 한 번 흔들어 깨우면 비척비척 일어나서 다크 서클이 무릎까지 내려 온 퀭한 몰골로 그와 함께 등청하거나, 일어나지도 못하여 그대로 뻗어서 자고 있는 녀석을 방치하고 온자 아파트를 나섰다.

오르피어스가 전혀 집안 살림에 손을 댄 경험이 없어 보였기에 이 자식을 데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고민도 있었지만 이 또한 손쉽게 해결되었다. 유안이 보나마나 도련님은 혼자 있으면 이불도 정리하지 못할 게 뻔하다면서 벨포드 본가에 따로 말하여 낮 시간에 사용인 두 명을 보내주었다. 사용인들은 집이 비어 있는 시간에 집안 청소와 정리 및 다음날 아침까지 먹을 식사 준비를 갖춰두었기에 지크하르트가 신경 써야 할 일은 없었다. 오히려 관사에서 지낼 때보다 여유 시간이 많이 생겼다. 이래서 사람들이 가정부를 고용하는 것이라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얻었다.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삶이 윤택해진다.

그의 돈줄과 동거를 시작하였다는 소식을 일부러 입 밖에 꺼낸 적은 없지만 같은 차를 타고 등청하는 모습을 一 물론 운전은 오르피어스가 했다 一 목격한 사람이 더러 있어 소문은 알음알음 퍼졌다. 엊그제는 워낙에 오르피어스가 일을 하지 않아 유명무실한 오르피어스의 부관이 소령님 어디 계시는지 알고 있느냐며 울 것 같은 얼굴로 찾아오기도 했다. 아침에 아파트에서 같이 나오기는 하였기에 숨어서 잘 수 있을 만한 곳을 찾아보라고 일렀더니 의무실에서 찾아냈다는 연락이 왔다.

유명한 주당이라 부인의 감시가 없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날이면 날마다 술독에 빠져 사는 유안과 평소에도 불성실한 오르피어스미기에 두 사람이 매일 밤을 같이 보내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크하르트도 오르피어스와 동거하는 게 아니었으면 유다르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거실에서 운동 중이던 지크하르트는 현관 앞에서 열쇠가 열쇠 구멍에 자꾸 헛도는 소리에 아령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안쪽에서 문을 열어주니 술 냄새가 먼저 그를 맞았다.

“오늘은 웬일로 일찍 왔냐.”

“응…….”

코를 삐뚤어지게 하는 지독한 술 냄새만큼 만취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멀쩡한 정신도 아닌 오르피어스가 휘청거리며 들어왔다.

“관사까지 유안 데려다 주고 왔어.”

“술 마시고? 용케도 사고가 안 났구만.”

“갈 때 운전은 유안이 했지 …….”

술을 마시지 않는 녀석이 거의 매일 취하고 있다거나, 이처럼 간간이 흘리는 말에서 기이한 위화감을 감지하지 않았다면 예사하게 넘기고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 요 근래의 오르피어스는 어딘가 낯설었다.

유안이 사람을 자기 페이스에 잘 끌어들이고 어렸을 때부터 친근하게 지냈던 어른이라고 하여도 어디까지나 벨포드가 주(主)이고, 페인d,s 종(從)dl다. 오르피어스가 진심으로 내켜하지 않는데 유안이 억지로 동행을 강요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은 서지 않았다.

“죽겠다……. 나 화장실.”

새하얀 낯을 숙이고 화장실로 급히 종종걸음을 옮긴 오르피어스가 변기 앞에 주저앉아 웩웩거리고 속을 게워냈다.

“얼씨구.”

지크하르트는 혀를 차며 화장실 밖에 섰다.

“대체 얼마나 마섰냐?”

“많이 안 마셨는데……. 요 며칠 너무 속을 버려서…….”

한참을 토한 오르피어스가 물을 내린 후에도 일어날 생각을 못 하고 축 늘어졌다.

“유안 따라다니다가 죽을 거 같아……. 밑 빠진 술독이 따로 없어.”

“그러게 왜 따라다녀? 네 성질 머리에 용케도 잘 다니네.”

“뭐어…….”

오르피어스가 입속에서 우물우물 말을 씹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설명을 하기 싫은 것이든 다른 사정이 있는 것이든 본인이 내켜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캐물을 생각은 없어 지크하르트도 더는 화제로 올리지 않았다.

“양치나 하고 자라.”

변기를 붙잡고 꾸벅꾸벅 졸 기세를 보이는 오르피어스를 억지로 일으켜 치약을 짠 칫솔을 입에 넣어 주었다. 그제야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그는 휘젓는 것에 더 가까운 힘없는 손짓으로 양치를 끝내더니, 불현듯 세면대의 물을 틀고 머리를 가져다 댔다. 차가운 물이 세차게 쏟아지며 머리칼과 목깃까지 흥건히 적셨다.

“이제 좀 정신이 드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올린 오르피어스가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슬슬, 필요할 거 같은데. 네가.”

영 내키지 않는다는 것을 강변하듯 맥없이 내뱉은 음성이었기에 단번에 알아듣지 못하고 반문하였다가, 뒤늦게야 “아, 아아.”하고 턱을 주억거렸다.

“그러든가. 지금 씻을 거냐?”

“아니. 먼저 가 있을 데니까 넌 마음대로 해.”

오르피어스가 머리를 휘저으며 흐느적흐느적 화장실을 나갔다. 가볍게나마 운동도 하였으니 샤워하는 게 낫겠다 싶어 준비를 갖추고 욕실로 간 지크하르트는 샤워기를 틀어 놓고 잠시 아래에 서 있었다. 관사를 태웠던 전날 밤의 기억은 오르피어스에게 없다. 그는 자신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내지르던 때와 같은 어조로 관계를 요구했다. 어느 쪽이 진심일까. 어깨와 머리를 두드리며 자극하는 물줄기 아래에서 두 개의 얼굴을 떠올렸다.

불분명한 이유의 거부와 불분명한 이유의 애원.

진심의 향방을 추측하여 가릴 수 있을 만큼 그는 오르피어스를 알지 못했다.

‘저 녀석은 숨기는 게 너무 많아.’

샤워기의 밸브를 잠그고 머리의 물기를 훑었다. 어머니처럼 살짝 웨이브가 있는 흑발은 물에 젖자 선명한 굴곡으로 늘어졌다. 거울에 비치는 남자는 무심한 자색 시선을 흘리고 있었다.

오르피어스가 숨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본정이 무엇인지, 관련되지 않았다면 모를까 자신이 엮인 이상 궁금한 건 당연했다. 좋으나 싫으나 죽지 않는 이상 평생을 이고 가야 할 관계다.

하지만 그가 먼저 진솔히 내면을 밝히지 않는 한 구태여 추궁할 작정은 없었다. 그를 배려하는 것도 의문이 작은 이유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상관은 없으니까. 그래. 상관없었다. 자신은 센티넬에게 육체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위해 없이 무탈히 군에서 근무하며 생활의 안정을 얻을 수 있다. 지내다 보면 가이드와 관계를 지속하여도 무관하다는 여자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고, 혹 힐라리아처럼 상호 애정은 없어도 상호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여자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난다면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게 될 것이고, 만나지 못하면 못하는 대로 혼자 살게 될 것이다.

지크하르트는 정말, 조용히 살고 싶었다. 모진 풍상을 겪지 않고 급류에 휩쓸리는 일 없이, 타인에게는 시시하고 지루한 삶이라 치부할 만큼 안온한 평화. 그가 바라는 건 정말 그뿐이었다.

‘그리고…….’

수건으로 몸을 닦고 베스 가운을 걸쳤다. 낮은 쓴웃음이 털어낸 물방울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도 추궁할 자격은 없지.’

자신이라고 오르피어스에게 모든 걸 다 털어놓지는 않는다. 오르피어스가 그에게 숨기는 것처럼, 그도 오르피어스에게 숨기고 있는 것 정도는 있었다.

오르피어스와의 관계는 이 정도 적정선이 좋았다. 결혼이라는 인척 관계로 엮이어도 당사자들은 무관계한 타인의 거리감을 고수하던 선이 깨졌으니, 육체적 관계는 있어도 마음의 교분은 깊이 트지 않는 관계. 함께 술을 마시고 식사하고 실없는 우스갯소리를 나누고 언성을 높여 다투기도 하지만 서로를 신뢰하여 의지하거나 믿음이 깨져 배신감을 느끼지도 않는 외피만의 관계. 지크하르트가 원하는 건 그것이었다.

‘마음처럼 쉽게 되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거울에 비치는 상체의 하안 흉터가 씁쓸했다. 이따금 가려운 화상의 흔적은 오르피어스를 구해 주었던 당시의 기억을 되새기게 하려는 것 같아 입맛이 썼다. 육체뿐인 관계라도 부대끼는 시간이 많아지면 마음의 거리도 가까워지게 되는 걸까. 아, 그건 싫은데.

그래도 지금은 오르피어스와 동침할 때였다. 분답한 생각을 머리 한구석으로 밀어두고 욕실을 나왔다.

“오르피어스? 야, 인마. 벌써 자냐?”

씻는 시간이 지체되었기 때문인지,술에 많이 취하였기 때문인지 오르피어스는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은 채 졸고 있었다. 본인이 관계가 필요할 정도라고 하였으니 현재 상태가 썩 좋지는 않다는 뜻인지라 버려두고 모르는 척 잠을 잘 수는 없었다.

다행히 몇 번 더 흔드니 바닥으로 추락하는 꿈이라도 꾼 양 몸을 움찔 떨며 화닥닥 눈을 떴다.

“깼냐? 잘 땐 자더라도 한 번은 하고 자라.”

“아……. 맞아, 너랑 자야지.”

간간이 하품하며 주섬주섬 재킷과 셔츠를 벗어 바닥에 던진 오르피어스가 베스 가운을 젖히고 대뜸 얼굴을 숙이려 했다. 깜짝 놀라 이마를 턱 짚어 막았다.

“뭐가 이렇게 급해?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거기만 벌떡 세우는 것도 웃기잖냐.”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오르피어스가 갸웃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넌 안 서잖아?”

“그거야…….”

술 취해서 엉겨 붙은 기억도 없는 녀석에게 네가 내 몸 위에서 헐떡거리며 키스하니까 나도 섰다, 라는 구체적인 상황을 알려주기에도 뭣하여 입속에서 단어를 고르던 지크하르트는 그냥 설명을 포기하고 키스했다. 양 뺨을 올려 안고 고개를 숙이자 그러잖아도 커다란 오르피어스의 눈동자가 더욱 선명해졌다. 채 다물지도 못하고 가늘게 벌린 아랫입술을 핥으며 혀를 넣었다. 저항 없이 느슨히 들어간 혀가 무방비한 혓바닥을 간질이자 화들짝 어깨를 굳혔다.

“뭐, 뭐야?”

“뭐긴 뭐야. 키스지.”

“누가 몰라서 물어? 왜 키스하냐고.”

가늘게 모은 미간이 당혹감인지 노여움인지 애매하였으나 언짢아하는 건 알 수 있었다. 지크하르트도 “으음.” 낮게 침음하며 미간을 모았다.

“섹스하다가 키스하는 데 이유가 필요하냐? 꼴리니까 하는 거지. 싫으면 억지로 할 생각은 없다마는…….”

얼굴을 뗐다.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맹렬하게 고민하던 오르피어스가 힐끔 눈을 올렸다. 키스가 성감을 돋운다는 당연한 사실은 오르피어스도 지크하르트도 잘 알고 있다.

“……나랑 키스하면 설 거 같아?”

“설 수도 있겠지.”

섰다, 라는 대답은 속으로만 했다.

오르피어스가 아랫입술을 결연히 깨물었다.

“조, 좋아. 키스해.”

구음보다 키스하는 데 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희한한 놈이라는 생각을 하며 다시 입술을 겹쳤다. 첫키스를 하는 소녀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던 오르피어스는 무반응인 입술을 빨고 핥는 것에 그가 지겨움을 느낄 무렵에야 느닷없이 어깨를 부둥켜안으며 혀를 마주 얽었다.

느릿느릿 교차하던 호흡이 가파르게 튀어 올라갔다. 습관인지, 취향인지, 성벽인지, 이번에도 먼저 체중을 걸어 그를 침대로 넘어뜨린 건 오르피어스였다.

“지…….”

……크하르트, 라고 달싹이려는 듯하던 입술은 그의 이름을 떨구는 대신 키스로 돌아왔다. 창백한 안색이기에 더욱 도드라지는 선홍색 입술이 그를 먹어 삼킬 듯이 거칠게 파고들었다. 얇은 입술의 틈을 열어 구강을 애무하고 가쁜 호흡마저 달콤하게 핥는다. 아, 빌어먹을. 지크하르트는 잘게 헐떡였다. 이 자식은 구음만 잘하는 게 아니라 키스도 잘했다. 인사불성이었을 때는 기교 없이 물고 빨기만 하더니.

오르피어스의 무릎에 걸린 사타구니의 변화를 그도 분명히 알아차렸을 것이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턱과 목에 점점이 키스를 떨어트리던 입술이 입맞춤이 되어 섞이고, 어깨를 어루만지던 손이 베스 가운 안쪽으로 스르륵 미끄러지며 성기를 매만졌다.

“하아…….”

가쁜 열기가 오르는 성기가 감싸이자 반사적으로 낮은 신음이 나왔다. “진짜 섰어…….” 오르피어스가 입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고자가 아닌 이상 키스하고 애무하면 서는 게 당연한데 뭐 그리 놀라울 일이란 말인가.

“너도 섰잖아.”

바지 위로 사타구니를 꾹 쥐었다. 오르피어스가 짧게 비명을 질렀다.

“아파!”

“참 나.”

투덜거리며 그의 바지와 속옷을 벗겼다. 무릎 어림에 걸린 옷을 비비적거리며 밀어낸 오르피어스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흥분의 증거들이 서로의 몸 사이에서 짓눌렸다. 잠깐 숨을 멈춘 입술에 키스하며 엉덩이를 더듬었다. 입속으로 신음하며 그의 성기를 부비던 오르피어스는 엉덩이 골 안쪽으로 파고든 손가락이 구멍을 건드리자 멈칫 경직했다. 지크하르트는 귓불을 깨물었다.

“계속 만져.”

고개를 끄덕거렸는지 신음에 웅얼거리며 대답을 했는지는 불확실했지만 오르피어스는 손을 움직여 애무를 계속 했다. 손톱을 안 깎아서 안쪽에 상처가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오른 건 자글자글한 주름을 해치고 손가락을 비부 깊숙이 넣은 후였다.

오르피어스가 목 안으로 가느다란 신음을 내며 허리를 바싹 붙였다. 한껏 흥분한 남성이 지크하르트의 복부와 그 의 성기를 감싼 오르피어스의 손에 문질러졌다.

“흐으, 응……. 나, 만져도 돼? 응?”

“뭘 일일이 허락을 받냐. 마음대로 해.”

오르피어스의 눈동자가 조금 커지는가 싶었다. 이윽고 기다란 손가락이 두 성기를 한 번에 감싸 쥐며 아래위로 문질렀다. 크, 맙소사. 지크하르트는 무심코 입술을 깨물었다. 깨문 입술마저 오르피어스가 삼키며 머금었다. 뜨거운 열기가 한껏 오른 민감한 성감이 서로 맞물리고 압박받으며 비벼지는 감각은 상상 이상이었다. 직접적인 열기가 가장 예민한 부분에서 얽혀 고양했다. 낯설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했다. 확실한 건, 쾌감이었다.

허리가 들썩였다. 엉덩이를 꾹 당겨 안으며 손짓을 재촉했다. 비부를 파고든 손가락이 개수를 늘리며 내벽을 문질렸다. 오르피어스가 정신없이 키스하고 혀를 빨았다. 살과 살이 스치며 부딪치는 소리와 질척하게 엉기는 물소리가 흐린 신음에 섞여 조용해진 침실 안을 채웠다. 파정은 빨랐다.

오르피어스의 양손바닥에 고인 정액이 손목을 타고 느슨히 흘렀다. 어깨로 숨을 몰아쉬던 그가 천천히 입술을 손목에 댔다. 거친 호흡이 다듬어지지 않은 입술이 손목을 거꾸로 더듬어 손바닥까지 느른히 올라가며 눈앞에서 정액을 핥고, 먹었다. 젠장. 지크하르트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하안 피부를 더럽힌 자신의 것이 키스로 붓고 붉어진 입술과 혀 사이로 할짝거리며 사라지는 모습이 지나치게 선연했다. 이 자식은 남자를 흥분하게 하는 방법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안고 있던 팔을 돌려 그대로 침대 바닥에 눕혀 깔아뭉갰다. 또 한 번의 키스는 비릿하고 씁쓸한 정액의 맛이 났다. 잇새에서 가슴에 새겨진 그의 이름이 씹혔다. 오르피어스가 않는 소리를 내며 목을 젖혔다.

“뒤로…… 뒤로 하고 싶어.”

다리를 벌려 허벅지를 가슴에까지 밀어 올리자 그가 양손바닥으로 눈을 덮으며 흐리게 요구했다. 무턱대고 삽입하려던 흥분이 잠깐 꺾이며 머리가 식었다. 숨을 크게 한 번 들이키고는 주섬주섬 돌아 엎드린 오르피어스의 등을 쓸었다. 척추의 골을 따라 더듬어 주니 웅크린 등이 파르르 떨렸다.

“야. 콘돔 있냐?”

베개에 누르고 있던 오르피어스의 옆얼굴이 슬며시 돌아왔다.

“갑자기 콘돔은 왜? 나 임신 같은 거 안 해.”“누가 그걸 모르냐. 남자끼리 할 때는 콘돔을 써야 나중에, 뭐랄까, 배도 안 아프고……. 아무튼 그렇다던데?”

처음 오르피어스와 관계하였을 때는 정신이 없어서 깜빡했지만 그가 탐독하였던 동성애 잡지에서는 파트너를 배려하려면 꼭 콘돔을 착용하라는 권장 문구가 있었다. 오르피어스가 곁눈으로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는가 싶더니 도로 베개에 푹 파묻었다. 베개에 묻힌 목소리는 웅얼웅얼 낮게 뭉개졌다.

“콘돔 안 써도 돼.”

“배 안 아프냐?”

“음, 그러니까, 나는, 그……. 아, 그래. 난 내 안에서 사정하는 거 조, 좋아해.”

“그래?”

사람이 열 명이 있으면 열 종류의 성벽이 있을 테니 지크하르트는 이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오르피어스의 엉덩이를 문질렀다. 촘촘히 맺힌 주름이 천천히 삽입하는 살덩이의 부피에 맞추어 빠듯하게 벌어지며 그를 온전히 삼키었다. 베개를 움켜쥔 오르피어스의 손등이 하얗게 되었다. 뿌리 끝까지 삽입한 지크하르트는 숨을 골랐다. 성기를 아프리만큼 꾹꾹 조미는 이 압박감만큼은 쉽게 익숙해 질 것 같지 않았다.

“후……. 움직인다.”

보슬보슬 솜털이 어린 흰 목덜미가 아래위로 끄덕였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지크하르트는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왜 이 자식이랑 하면 한 번에 끝나지 않는 걸까.

등을 돌리고 누운 오르피어스의 어깨는 아직도 연신 들썩거리고 있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신음소리며 허리와 엉덩이에 선명하게 남은 손자국 따위가 괜스레 켕겼다. 그만두라는 말도 싫다는 말도 하지 않고 요구하면 요구하는 대로 받아들였으니 마냥 자신에게만 책임이 있는 건 아니지만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하고 뻗어 있는 모습을 보니 혹사시킨 게 아닌가 하는 미안함이 생기기도 하였다.

“……괜찮냐?”

달리 꺼낼 수 있는 말도 없어 괜찮으냐 물으며 그의 어깨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끌어당기는 대로 힘없이 이끌려 가슴팍에 얼굴을 기댄 오르피어스의 눈자위와 뺨이 아주 빨갛게 부어 있었다.

“너, 이……. 망할, 짐승이…….”

칼칼하게 목이 쉰 와중에도 그가 원망스레 눈을 치떴다. 지크하르트는 조금 시선을 피하다가 내가 무어 잘못한 게 있냐는 생각이 들어 정색했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싫으면 싫다고 말하라니까. 강제로 안 한다고.”

변명도 있고, 꿀릴 것도 없다. 오르피어스가 사납게 노려보고는 눈을 감았다. 지크하르트도 굳이 추궁하지 않고 그를 기대게 한 채 정사 후의 나른함에 몸을 맡겼다.

불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던 호흡도 차츰 가라앉고 땀이 식은 몸에 서늘한 한기가 으슬으슬 올라왔다. 늦기 전에 씻든지 옷을 입든지 해야 할 것 같았다. 얕게 선잠이 든 오르피어스를 조심스럽게 베개에 눕혔는데 그 서슬에 깼는지 어깨를 흠칫하며 눈을 떴다.

“아, 깼냐? 미안.”

비몽사몽 중에 느슨히 깜빡이던 오르피어스의 눈이 파랗게 경직되었다. 무심히 몸을 돌려 나가려던 지크하르트도 이상한 느낌에 그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지크하르트는, 자신의 가슴에 남아 사라지지 않는 화상흔을 크게 괘념한 적은 없었다. 때때로 환각통처럼 환부가 뜨거워지거나 살갗이 가려워 당시의 기억을 되새기게 하였지만 상처 자체에 대해서는 주의하지 않았다. 가끔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어쩌다 그렇게 큰 화상을 입었느냐는 동정 반 호기심 반의 질문을 하면, ‘폭주한 센티넬을 구해 주었다가 멍청한 놈이라고 욕먹었다.’라는 설명 대신 적당히 핑계를 둘러댈 때 정도나 자신의 상처를 내려다보고는 하였다.

“야, 오르피어스.”

서늘한 목소리가 쫓자 오르피어스가 흠칫 몸을 굳히더니 눈길을 피하며 일어섰다. “씻고 잘래.”라고 중얼거리며 침대 반대편으로 내리려는 팔목을 쥐었다.

생각해 보면 오르피어스는 늘 그의 흉터를 외면하였다. 눈을 감거나, 눈을 가리거나, 눈을 피하거나, 혹은 등을 돌리거나 하여. 지크하르트는 실소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죄책감이냐? 눈에 띄게 피하지 마라. 그게 더 화나니까.”

“……누가 죄책감이냐는 건데.”

오르피어스가 팔을 세게 쳐냈다.

“흉터를 볼 때마다 네 멍청함이 다시 떠올라서 짜증이 난다구.”

그는 침대를 벗어나 문가로 걸어갔다. 그리고 침실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뒤를 돌아보지 않고 의문만을 날카롭게 던졌다.

"그때 나를왜 구했어?”

날을 뾰쪽하게 세운 물음은 그가 사라진 후에도 사방을 텅텅 튀며 돌아다녔다. 욕실에서 몸을 씻는 소리가 반쯤 열린 문틈으로 기어들었다. 짜증이 났다. 

목숨을 걸고 구명하였다는 점을 강요하여 유세하거나 배상을 바라는 건 아니었지만, 적반하장으로 콧대를 세우는 것도 정도가 있지 왜 자신이 지금까지 그 일로 막말을 들어야 하는 건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와 오르피어스가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찰 것들은 몇 가지 있었고, 그는 대부분의 것들을 묻어 두었지만 이것 만큼은 지금 해결을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도 인식하고 오르피어스도 인식하고 있는 사안이다. 

이대로 오르피어스의 페이스에 계속 휘말리다가는 10년 전 병원에서 애써 삭혔던 울화까지 도로 치밀어 오를 것이다.

지크하르트는 가운을 대충 걸쳐 입고는 욕실 문을 열어젖혔다.

"너,나랑 얘기 좀 하자"

타이밍이 안 좋았다고 자각한 건 몸을 씻고 있는 오르피어스를 보고 난 직후였다. 구체적으로 묘사하자면, 허리를 숙미고 엉덩이 안쪽에 손가락을 넣어 정액을 긁어내고 있는 오르피어스를 보고 난 직후였다. 

자신의 것임이 분명한, 그의 것이 아닐 수가 없는 정액이 얼룩덜룩한 손자국이 남은 허벅지에 끈적거리며 흘렀다.

"........."

그 광경에 말문이 막혀 어정쩡하게 서 있자니 오르피어스가 뺨을 확 붉혔다. 

"무, 문 닫아. 넌 이런 거 구경하는 게 취미야?”

"........"

오해라고 말하기에도 다른 용건이 있다고 말하기에도 난감한 상황이라 고개를 돌리며 문을 닫아주는 수밖에 없었다.

"제엔장"

지크하르트는 닫힌 문 밖에서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다가 담배를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그날 밥도 그는 침실에서, 오르피어스는 소파에서 따로 잠이 들었다.

***

이른 아침부터 비가 내릴 것처럼 두꺼운 구름이 하늘을 잿빛으로 가린 하루였다. 점심 무렵에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은 소낙비가 되어 한 차례 도시를 쓸고 간 후에 멎었으나 하늘은 맑게 개이지 않았다. 언제 빗방울이 쏟아질지 모르는 쌀쌀하고 흐린 거리의 밀도는 어제보다 약간 낮았다. 허나 날씨의 맑고 흐린 여부가 장사에 지장 을 주지 않는 어퍼 돌덤 거리는 오늘도 들썩였다. 하나둘씩 켜지는 붉은 등이 거리를 색정적으로 물들이고 창부들 의 교소가 짤랑거리는 돈다발 소리에 섞여 농후한 술 냄새를 안고 번졌다.

엠마는 어퍼 돌덤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창녀였다. 치렁치렁 늘어뜨린 머리칼과 절묘한 화장으로 이마부터 뺨까지 일그러진 화상흔을 감춘 그녀는 어린 시절 화재로 부모를 잃고 친척집을 전전하다가 뒷거리로 흘러들었다는 흔한 배경도 갖고 있었다. 몇 년 전에 사업가 한 명을 꿰차 거리를 떠났다는 소문미 자자하였던 그녀가 반년 전 거리에 복귀하자 그녀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더러는 안쓰럽게 여겼고 더러는 조소하였다.그리고 더 많은 이들이 신경도 쓰지 않았다. 타인의 인생 굴곡에 깊이 관여하여 마음을 쓸 여유가 있는 사람은 이 거리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적당한 미인미고 적당한 인기가 있는 엠마는 역시 동료들의 적당한 질시와 적당한 부러움을 샀다. 그녀가 복귀한 걸 어떻게 알았는지 몇 년 전 그녀의 단골손님이 재차 발걸음을 하고 있는 탓이다. 풋내기 사관 생도였던 소년은 이제 장래 유망한 청년 장교가 되어 있었다.

"대령님. 근육이 왜 이렇게 뭉쳤어요? 아주 돌덩이가 따로 없는데요?"

"아야, 아야야. 살살해"

"살살하면 안마가 안 되죠"

침대에 업드린 지크하르트의 허리에 걸터앉은 엠마가 짐짓 어깨를 더 세게 눌렸다. 지크하르트가 아악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베개에 처박았다. 엠마가 등을 찰싹 쳤다.

"체면이라도 좀 지키세요"

"네 앞에서 지킬 체면이 워가 있냐? 아오, 이게 다 그 자식 때문에 생긴 스트레스라고."

"누구요? 같이 살림 차렸다는 벨포드 소령님이요?"

여상하게 이어진 대화였으나 지크하르트에게는 아니였다. 그는 멈칫하여 어깨를 안마하는 엠마의 손을 잡았다. 

"내가 그 자식이랑 살고 있다는 거 누구한데 들었나?”

"흐응."

엠마가 피식거리며 지크하르트의 허리에서 내려와 옆에 비스등히 업드렸다. 깊이 숙인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대령님 한 명을 마크하는 스파이가 몇 명이나 되는지 말해 줘요?”

"……나한테? 진짜?"

"뻥이죠"

까르륵 웃음이 터졌다.

"대령님이 뭐라고 스파이가 따로 붙겠어요. 그냥 간단한 추론이라고요. 경호원들은 아무리 민간인인양 행세해도 어깨에 힘이 빡 들어가 있으니까 바로 티가 나잖아요. 대령님의 경호원들 행적이 관사가 아니라 벨포드 소령님이 거주하시는 아파트로 이어져 있고, 알아보니 관사에서는 센티넬미 잠시간 폭주했었다는 소문이 자자하고, 결정적

으로……"

"결정적으로?"

"오붓하게 두 분이 같이 등청하시는 모습을 봤죠."

"추론이고 뭐고 그냥 목격했다는 거잖아."

"사실 그래요. 마침에 근처 지나다가 우연히 본거에요."

우연히 목격하였다는 발언이 진실이라고는 믿지 않았지만 그녀가 말하니 모르는 척 눈감았다. 그와 오르피어스가 동거 중인 게 비밀도 아니었다. 그녀가 키득거리며 흐트러진 그의 머리칼을 장난스럽게 귀 뒤로 넘겼다.

"벨포드 소령님이 얼마나 속을 썩이시길래요? 살던 방을 다 태워서요?”

"그것도 있지만, 그 일은 내 정신적 피해 보상까지 합산하여 뜯어냈다."

"와우. 재능이 있으신데요. 저랑 동업해서 사채업으로 전향해 보실래요?”

"너랑 사업하면 뼛골까지 탈탈 털어 먹히고 송장이 되어서 버려질 거 같은데."

지크하르트가 몸을 반바퀴 돌려 편하게 드러누웠다.

"상식적으로 말이야, 아니 굳이 상식적이니 뭐이니 하는 말을 꺼낼 것도 없이 사람이 사람을 살려 줬으면 고마워 해야 하는 게 아니냐?내가 무릎 꿇고 머리라도 박으라고 했거나 은혜 갚으라고 요구라도 했으면 이런 말 안 한다. 근데 뭐? 기껏 살려줬더니 흉터 볼 때마다 내 멍청함에 짜증이 난다고? 내가 어째서 면전에서 욕을 처먹어야 하는 건지 이해가안돼."

말을 잇다 보니 화가 북받쳐서 두서없이 튀어나갔으나 엠마는 어렵잖게 알아들었다. 자그마한 입술이 경악으로 동그랗게 벌어졌다.

"설마하니 옛날의 그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거에요? 11년 전의 일로요?"

"제기랄. 나도 케케묵은 옛날 일 따위는 꺼내기 싫다고."

"어쩌다가 이제 와서 언급이 되는 거에요?”

들어주는 사람도 있겠다, 울분이 치밀어 나오는 대로 지껄이던 지크하르트가 우물우물 말꼬리를 흐렸다.

"그거야, 뭐……. 그렇 만한 상황이잖냐."

"아하앙."

엠마의 눈매가 음흉하게 가늘어졌다.

"두 분, 그런 사이가 되셨죠."

"……그런 사이가 뭔데."

"알몸 보는 사이요. 어때요, 속공합은 좋아요?" 

"……묻지 마라."

"어머, 좋은 가봐."

시선을 회피하는 지크하르트의 뺨을 잡고 진한 키스를 퍼부은 엠마가 그의 몸 위로 을라갔다. 검은색 매니큐어의 손끝이 목깃의 단추를 풀며 맨살을 더듬었다.

"질투 나는데. 저보다 더 잘 맞아요? 벨포드 소령님은 남자랑 경험도 없으실 거 같은데 테크닉도 별로 아니에요?” 

지크하르트는 한숨을 쉬며 엠마의 손을 정중히, 그러나 단호하게 떨어트렸다.

"너랑 하려고 온 거 아니다. 오랜만에 얘기나 하려고."

"아이, 시시해. 창녀 몸 풀려고 찾아오는 게 아닌 손님은 필요 없다고요. 장사 분위기 망쳐요. 아님 저랑 결혼이라도 하실 건가요? 요새 이 거리에서 꽃다발 결혼해달라고 무릎 꿇는 풋내기들이 유행인 거 같던데 대령님도 혹시 그런 부류?"

"음? 너랑? 결혼? 좋아. 그러지, 뭐."

"즉답하는 남자도 결혼 사기꾼이니 필요 없습니다아."

샐쭉하니 토라진 어조였지만 그녀는 더 추근거리지 않고 물러났다.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만큼이나 흔한 창녀의 방에 걸맞은 저가의 물품들로 얼기설기 성의 없이 꾸며진 방이 탁한 전등 빛을 받아 더욱 칙칙한 색을 머금었다.

"별고는 없으셨어요? 저 말고도 대령님 노리는 업자가 있었을 텐데요."

구석에서 곰팡이가 슬고 있는 천장을 의미 없미 올려다보며 여념에 빠진 지크하르트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두 번인가 세 번인가 암살 기도가 있었던 거 같기는 한데 경호팀이 처리해서 신경은 안 썼다."

"액세서리쯤으로 달고 있으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일은 하네요, 그 사람들?"

"나도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라고 말을 받았던 지크하르트는 곧 정정했다. 엠마의 말처럼 얼굴을 보지 않았을 뿐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경호원들이 누구인지는 짐작이 간다. 

"여튼 그 사람들도 전쟁을 거친 베테랑일테니 실력은 꽤 좋을걸. 그보다 엠마, 아니 로즈마리. 말 나온 김에 결혼할 생각은 진짜 없냐? 너도 슬슬 안정을 찾을 때라고 봐."

휘둥그렇게 커졌던 엠마의 눈동자가 이내 새침하게 가늘어졌다.

"먼저 옛날 이름으로는 부르지 말아주시고요, 대령님과 진심으로 결혼할 마음은 없어요. 전 저를 사랑해 주거나 아니면 조건이라도 빵빵한 남자와 결혼할 예정인데 대령님은 둘 다 아니시잖요?”

"내 조건이 뭐가 문젠데?”

진심으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반문에 그녀가 한심하다는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어 지크하르트는 머쓱해졌다.

"가이드잖아요. 대령님처럼 무신경하고 무딘 사람이 아닌 이상 자기 배우자를 다른 센티넬 一 마니면 가미드라거 나요 - 과 공유하고도 잘 참고 건디는 사람은 극히 드물거든요? 괜히 센티넬미나 가이드가 페어끼리 결혼하거나, 다른 사람과 결혼해도 파국을 맞는 경우가 왕왕 있겠냐고요."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생존에 직결한 문제라 하여도 배우자나 연인이 타인과 접촉하거나 성관계까지 수시로 맺어야 한다는 걸 쉬이 이해할 사람은 찾기 힘들 것이다.

"그럼 난 평생 결혼 못하겠는데."

"벨포드 소령님이랑 하시면 되겠네요."

지크하르트의 얼굴미 필설로 형용할 수 없으리만큼 끔찍하게 되었기에 엠마는 과거에 버린 이름을 부른 복수의 대가를 톡톡히 받아냈다.

그녀는 깔깔깔 시원하게 웃으며 그를 밀어냈다.

"할 얘기는 다 끝내셨죠? 결호날 것도 아니고 일할 것도 아닌 손님은 필요 없으니까 빨리 나가 주세요."

"돈 낸 시간 한참 남았는데 매정하시군."

이야기는 더 하고 싶었지만 그녀가 굳이 밖으로 내보내려 하니 지크하르트도 뒹굴거리던 침대에서 일어났다. 

엠마가 옷걸이에 걸어 두었던 재킷을 가져왔다. 퇴청하고 아파트에 들러서 옷을 갈아입고 온 지라 따로 소지한 무기는 없었다. 

옷 입는 걸 도와주며 못매무시를 가다듬어 주던 그녀가 지나가는 어조로 힐긋 화제를 던졌다.

"11 년 전에 어째서 벨포드 소령님을 살려주신 거에요?" 

"그때 너한데 말안 했던가?”

"몰라요. 까먹었나봐요. 짐작가는 건 있긴 한데."

"뻔한 이유지. 네가 짐작하는 게 맞을 걸."

대수롭지 않게 응대하며 지크하르트가 거울 앞에서 베개에 눌린 머리칼을 대강 손으로 쓸어넘겨 정리했다.

"당연히 내 손으로 직접 죽이려고 했었던 거라고. 우습겠지만 이해해 줘.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열여섯 살 때잖아?"

매무시를 끝내고 인사하려는 그에게 엠마가 마지막으로 일렀다.

"참. 전공 하나 쌓게 해 드릴 테니까 관심 있으시면 젠츠바이 거리 쪽 한번 둘러보세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알았다."

지크하르트는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술을 눌러 키스하며 작별 인사를 하였다.

"로즈마리. 넌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야. 결혼이든 무엇이든 나는 네가 행복해지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어."

홀로 남은 인사의 여운이 사라질 무렵이 되어서야 엠마는 창가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골목길 저편으로 멀어지는 지크하르트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디에 존재하여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방종과 타락만이 혼탁하게 엉긴 지저분 한 거리에서도 그는 자신을 잃지 않고 의연했다.

그는 강한 남자였다. 육체가 완전한 재능을 타고 난 지크하르트의 정신은 틈 없이 강인하다. 그라면 어떠한 시궁창에 굴러떨어져도 곧게 일어나 자신의 의지를 다지겠지. 

그것이 등대처럼 그녀를 비추어준 적도 있었고 때로는 듬직한 거목처럼 기대기도 하였지만, 지금은 야속하고 씁쓸했다.

"……죽이려고 했었다니 과거형이잖아. 나는 아직도 과거에 살고 있는데. 무신경하고 무딘, 바보 같은 남자."

엠마는 점차 작은 점이 되어 흐릿하게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지크하르트의 뒷모습을 언제까지고 바라보았다.

키스를 했다. 

키스를. 

키스했다.

입술에 달게 남은 감촉이 되새겨질 때마다 볼이 홧홧 물들었다. 가끔 상상 속에서만 탐하였던 입술은 꿈꾸던 것보다 훨씬 더 황홀하고, 고통스러웠다.

'미래서 싫었던 거야'

그에게 기대어 연명해야한다는 것도 싫었고, 이따금 신체가 접촉될 때마다 그를 가까미에서 느끼게 되는 것도 싫었고, 그의 존재를 인식하며 뜨겁게 꿈틀거리는 심장의 고동도 싫었다.오르피어스는 멍하니 아랫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숨결이 자신의 입술에 머물렀음이 거짓처럼 아득했다. 사실 자신은 평범하게 섹스만을 하였고, 키스는 술에 취하여 꾼 미몽이 마닐까.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현실 도피에 가까운 망상 속에 고개를 숙였다.

아파트를 팔려고 내놓은 것도 그 탓이었다. 나만의 공간이라는 것이 있게 되면 가이드인 지크하르트를 필요에 의하여 부를 일미 있을 테고, 지크하르트도 필요에 의하여 방문할 경우가 생긴다. 외부에서 만나게 되는 것보다 부대끼는 시간이 길어진다. 그것이 싫었다. 지레 겁먹어서 피하는 과장된 이유이나 그만큼 절박했다.

'알몸을 보는 것도 싫어'

온통 싫은 것 투성이다. 세워서 가슴팍으로 끌어안은 무릎에 이마를 꾹꾹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목 아래부터 쇄골과 가슴을 지나 복부까지 넓게 이글거리며 좀 먹은 하얀 흉터는 보지 않으려 애써도 이미 망막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때 죽든지 말든지 놔뒀으면 됐잖아. 멍청이'

그랬으면 가이드인 걸 숨기고 있던 지크하르트도 아버지와 큰형의 눈에 뜨이지 않았을 테고, 힐라리아와 약혼하지도 않았을테고, 자신도 지금쯤 다른 가이드를 배정받마 이따금 사령부에서 스치는 지크하르트의 변함없는 모습에 만족하며 지냈을 것이다.과거를 되짚기 시작한 기억은 끊임없이 거슬러 올라갔다.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짐작되지 않았다. 이러한 때에 흔히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라고 사용하는 관용어구가 떠올랐지만 자신의 경우에는 그 단추 자체가 잘못된 것 같다.

센티넬로 발현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방황하는 사춘기 무렵에 마무리 외탁하였어도 아버지와 동생들을 전혀 닮지 않았다는 사실에 고민하면서도 평범하고 소박하게 살았을 것이다. 머리가 나쁜 건 아니니 적당한 직업 학교에 입학 하여 일을 배우고 졸업하면 아버지를 돕거나 어딘가의 도제로 들어갔을 터다. 지금쯤이면 작은 가게 하나를 맡아서 사람들과 부닥치며 바쁘게 일하다 좋은 아가씨와 만나 결혼하고 아이의 재롱을 보고 있을 지도 모른다. 전쟁통으로 장사가 잘 되지 않는다며 걱정도 하고 있을 것이다. 두 동생들도 슬슬 좋은 남자를 데리고 을 나이였으니 지참금과 결혼식을 부모님과 밤새 의논하기도 할 것 같았다. 다정한 어머니는 자신의 고민을 듣고 강간당하여 임신하였다는 잔인한 진실 대신 친아버지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는 그럴듯한 이유와 로맨스를 꾸며 위로해 주었을 것이고, 그는 친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임신한 몸으로 홀로 된 어머니를 기꺼이 사랑하고 결혼한 아버지를 여전히 존경하고 사랑하였을 것이 분명했다.

그가 센티넬로 발현하지만 않았다면 모두가 행복했다.

그가 죽여야만 했던, 모두가.

"삼촌!”

동글동글 굴러가는 활기 찬 목소리가 그를 과거의 늪에서 이끌었다. 오르피어스는 퍼득 고개를 들었다. 늠실늠실 집어삼키는 끈적한 과거에서 그는 밝은 색조로 온화하게 가꾸어진 아이의 방으로 귀환하였다. 

맞은편 테미블에 앉은 록사나가 커다란 눈동자로 빤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또 어디 아파?"

오르피어스는 부드럽게 미소하며 아프지 않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가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끝어안고 침몰하여도 기껍게 운명에 순응할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있지, 록사나. 삼촌은 우리 록사나를 보면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이유가 생겨. 아무리 힘들고 아파도 록사나가 원한다면 삼촌은 괜찮아. 견딜 수 있어. 아무렇지도 않아.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아이에게는 어려운 말이었다. 헤에, 하는 얼굴로 입을 작게 벌리고 갸우뚱하던 록사나는 이내 그녀만의 결론을 내리고 활짝 웃었다.

"록사나도 삼촌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

"세상에서 제일 좋으면 안돼. 아빠를 제일 좋아해야지."

"으응. 아빠 다음으로 제일 좋아!"

무어가 그리 재미난지 까르륵 소리 높여 웃은 소녀는 가정교사가 내 준 숙제에 골몰했다. 

연필을 주먹으로 움켜쥐다 시피하며 비둘삐뚤 노트 위에 지렁이를 기어가게 하였다. 오르피어스는 허리를 숙여 테미블에 바짝 얼굴을 댔다. 록사나가 히잉 투정하며 노트를 감췄다.

"받아쓰기는 언제 할 거니?"

"잠깐만. 아직 덜 외웠어."

“틀려도 괜찮아. 선생님도 혼내지 않을 거라구."

"싫어. 백 점 맞을 거란 말이야."

"하하하. 어려울걸."

놀림이 가득한 목소리에 록사나의 입술미 삐죽거렸다.

"아까 선생님이랑 공부하면서 아빠랑 삼촌이랑 우리 집 그렸는데 삼촌한테 안 보여줄 거야."

입장은 역전되었다. 삼촌이 잘못했으니까 제발 보여 달라고 애걸하는 오르피어스와 싫다고 삐쳤다는 록사나 사이에서 실랑이가 계속 이어졌다. 테미블을 빙글빙글 돌고 방을 한 바퀴 헤집은 실랑이의 마지막은 오르피어스의 간지럼 공격에 록사나가 까르륵 숨이 넘어가며 침대를 굴러다니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줄게 ! 줄게 !"

간지럼에 약한 록사나가 깔깔거리며 파닥파닥 바동거렸다. 침대 밑에서 주섬주섬 꺼낸 스케치북에 빼뚤빼뚤 그려진 '아빠와 삼촌과 나'에 감격한 오르피어스가 이건 꼭 아빠 서재에 액자로 걸어놓자고 록사나를 꼬드기고 있을 때 문을 똑똑 노크하는 소리가 있었다. 유안이었다.

"오, 이건 아가씨가 그리신 아이릭 님과 도련님이십니까?"

"응응! 나 잘 그렸지?"

"멋지네요. 나중에 저도 좀 그려주세요. 아, 그리고 도련님은 조금 더 못생기게 그리셔도 됩니다." 

"알았어."

"애한테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록사나, 유안이 하는 말은 지지니까 들으면 안 돼. 지지야. 지지."

짐짓 록사나의 귀를 막으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니 뭐가 웃긴지 깔깔 웃음보를 터트렸다. 유안과 동행한 유모에게 록사나를 부탁하고 두 사람은 록사나의 방을 나왔다.

"형이랑 할 얘기는 다 끝난 거야? 밤도 깊었으니 오늘은 본가에서 자고 가지 그래?"

"도련님미 록사나 아가씨와 놀고 싶다고 절 핑계로 대지는 말아주십쇼."

"흥, 그게 워가나빠."

툴툴거리는 그에게 유안이 피식 실소했다.

"헌데 도련님. 혹시 어제 카시야스 대령님과 주무셨습니까?"

"남의 잠자리 사정을 왜 물어?"

"대령님이 오늘도 예의 그 창부를 만나러 가셨길래요.”

"……남자량 자서 기분 나빴나 보지, 뭐."

갑자기 쓴맛이 감돌았다. 오르피어스는 무심코 아랫입술을 만지며 시선을 떨구었다. 지크하르트의 거부는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오히려 그가 선을 긋는 것이 편하다고 이성으로는 알고 있지만 심부 안쪽이 까끌까끌 쓰라린 건 그로서도 도리가 없었다.

유안의 표정은 심상했다.

"대령님이 그쪽으로 가신 게 다행이었습니다. 덕분에 누님을 구할 수 있었거든요."

“무슨 소리야?”

"드디어 누님에게도 닥쳤다 이겁니다. 가이드 암살 기도가."

"형 ! 나오미는 괜찮아?"

다급히 달음박질하여 달려간 서재의 문을 열자마자 감지한 건 옅은 피비린내였다. 일순 우뚝 굳었던 시선이 찬찬히 서재 안을 더듬었다. 고택이 갖는 특유의 예스러운 분위기 대신 약간의 책 냄새가 스미었을 뿐인 현대적인 인테리어의 서재에 자리하고 있는 사람은 단 두 명이었다. 

안쪽의 책상에 굳은 표정으로 앉은 아이릭은 무사하다. 내도록 저택의 안에 머물렀던 그가 부상을 입었을 리는 만무하다. 

오르피어스는 숨을 한 번 들이켜고 시선을 옮겼다. 책상 앞에 비스듬히 서 있는 지크하르트와 눈미 마주쳤다. 피. 피 냄새. 가이드의 부상.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지크하르트가 고개를 한 번 내젓고는 가까이 다가왔다. 커다란 손이 그의 머리를 턱 짚었다. 팔뚝에 하얀 붕대를 감은 팔이다. 피 냄새와 엉긴 소독약 냄새가 독하게 비강을 찔렀다.

"많이 안 다쳤어. 총탄에 살짝 긁힌 정도라고. 네가 놀랄까봐 일부러 붕대를 공공 싸맨 거다."

익숙하게 자신의 상태를 설명하는 그의 언행에 오르피어스는 어물쩍 고개를 끄덕이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소파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한발 늦게 유안이 들어오고 지크하르트도 벗어서 손에 들고 있던 재킷을 다시 입었다. 아이릭이 책상에 몰려두고 있던 손가략을 토옥 톡 두드렸다. 무심코 나온 그의 습관에 상황이 생각만큼 중대한 건 마닌 것 같아 오르피어스는 뒤늦게 숨을 몰아쉬었다. 

지크하르트의 부상이 심하지 않아 일말 안도하긴 하였으나 심장은 여전히 빠른 속도로 두근거리고 있었다.

"나오미는 응급 처치를 받으러 갔다만 큰 부상은 아니다."

"……배후가 누군지는 알아냈어?”

"유감스럽게도 전멸이야. 시신을 조사해 봐야겠지만 썩 낙관적인 기대는 안 드는군. 나도 나오미에게 정황은 보고 받지 못겠다. 자세한 건 내일 얘기하자."

그러며 그는 지크하르트에게 시선을 돌렸다. 부외자처럼 서 있던 지크하르트가 가법게 시선을 숙였다.

"자네 덕분에 나오미가 무사히 귀환했네. 고맙다."

"아닙니다. 드라이브하느라 근방을 지나가다 우연히 목격했을 뿐입니다."

"꼭 치하하지. 그보다 오늘 밤은 본가에서 묵고 가질 않겠나? 엘빈이 손님방으로 안내해 줄 걸세.”

"네? 괜찮습니다. 늦은 시간도 아니고 저야 치료할 부상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귀가해도 별 문제는 없습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야."

아이릭이 조금 난감한 빛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입속으로 말을 고르는 듯하던 그는 결국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저 녀석이 많이 놀랐으니까 달래주었으면 한다는 뜻이다. 나중에 듣느니 직접 눈으로 확인하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데려오게 했는데 그래도 어지간히 놀란 게 아닌 모양이군."

오르피어스가 화들짝하며 고개를 올렸다.

"안 놀랐어……!"

하지만 반문하는 음성은 그 자신이 듣기에도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기에 곧 입술을 감쳐물었다. 지크하르트는 헛 기침을 큼큼했다. 전날 방에 언성을 높인 채로 헤어져 서먹하고 껄끄러운 감정은 남아 있으나 자신의 의무를 방기할 만큼 책임감이 없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다른 말씀이 없으시다면 오르피어스와 이만 물러나가겠습니다."

"가도 좋아."

지크하르트는 내선 전화로 집사를 호출하는 아이릭에게 경례하고 오르피어스의 어깨를 짚었다. 

오르피어스는 주 먹을 한 번 꾹 쥐고는 소파에서 엉덩이를 뗐다. 내도록 잠자코 있던 유안이 싱긋 웃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좋은 밤 되십쇼" 그를 한 번 흘겨보고는 서재를 나왔다. 문은 둔중한 소리를 내며 등 뒤에서 닫혔다.

잠시 말없이 기다리고 있자니 집사 엘빈이 이내 서재 앞까지 왔지만 지크하르트는 정중히 고사하고 방만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다. 

벨포드 본가에 처음 방문하는 것도 아니고 손님방이 있는 위치 정도는 알고 있었다. 집사는 곤란해하는 눈치였으나 오르피어스와 단 둘이 할 이야기가 있다는 말에 깊히 간섭 하지 않고 물러 났다.

아이릭이 종주가 되며 증축한 신관은 그의 서재만큼미나 실용적이고 단정했다. 저택의 품위를 깊이 하는 내부 구조와 사소한 장식에서도 고아한 풍치는 엿볼 수 없었다. 

으레 명가의 대저택이 지니는, 가문과 함께 나미를 먹어 가는 옛 시간이 깃들지 않은 신관은 고풍스럽다는 단어를 수식어로 갖고 박제된 채 분리 보전된 구관과 결별한 것처럼 낯설었다. 

이따금 힐라리아를 맞으러 갈 때 머물렀던 구관은 현재 사람이 거하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잠깐만."

두 방의 발걸음 소리만 뚜벅뚜벅 높은 천장을 울리는 복도를 말없이 걷다, 갑자기 오르피어스가 벽에 등을 기대며 스르륵 앉았다. 식은땀이 아래로 숙인 목덜미에 또록또륵 맺혀 있었다. 지크하르트는 애매하게 시선을 굽혔다.

"뭘 그렇게 놀라냐. 이 정도는 다친 축에 속하지도 않는다고."

"알아, 아는데. 여긴 전쟁터도 아니고 방심하고 있다가 피 냄새 때문에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단 말이야. 넌 폭탄을 맞아도 멀쩡하게 두 발로 걸어 나을 것 같은 놈이 왜 다치고 그래?”

"아무리 나라도 폭탄 맞으면 죽거든?” 

"거짓말하지 마.”

"......."

이상한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그래도 얘기하는 걸 보면 평상시에 가깝게 회복된 것 같기도 하여 지크하르트도 별 다른 걱정 없이 오르피어스의 앞에 섰다. 그와 자신의 사이에 정리해야 할 문제가 있는데 한 번 놓친 타이밍은 좀체 돌아오지 않았다. 지금 꺼내기에는 그러잖아도 자신의 부상으로 감정이 많이 고양되어 있는 그에게나 자신에게나 좋지 않다.

바닥에 다리를 늘어뜨리고 마무렇게나 앉은 오르피어스가 한숨을 푹푹 쉬었다.

"다른 가이드들처럼 내가 끝어안고 보호해 줄 수도 없는데 또 전쟁이라도 나면 걱정돼서 어떡해. 너도 전선으로 배치될 게 뻔하잖아."

가이드의 방호는 센티넬이 최우선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의무미자 불가결한 수행이다. 유일무이한 존재인 가이드의 생사가 센티넬에게 끼치는 영향은 극대하다. 꽤나 현실성 있는 한탄을 하며 울적해하고 있는데 가만히 듣기만 하던 지크하르트가 느닷없이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남은 심각한데 웃음이 나와?!”

"미안, 미안."

그가 여전히 웃음을 쪼개며 손사래를 쳤다.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일전에 나 때문에 힐라리아까지 전선으로 가게 되었던 적이 있잖냐. 귀하게 자란 아가씨가 가이드 잘못 만나서 팔자에도 없는 전쟁터로 끝려가게 되는 게 걱정이 돼서 내가 말했지."

「당신은 꼭 제가 지켜줄 테니까 두려워하지 마세요」

힐라리아는 설레어하지도 안도하지도 않고, 대신 눈을 치떴다.

「너 어디 있니? 이쪽으로 와 봐 그래, 바로 거기에」

영문을 모르고 힐라리마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까지 허리를 숙여 얼굴을 댔다. 이어 날아온 건 매서운 따귀였다.얼결에 뺨을 맞고 어안이 막힌 그에게 그녀는 거만한 목소리를 올렸다.

「건방지게. 감히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니? 우습지도 않는 소리 하지 마. 넌 내 가이드니까 내가 지켜」

"손 정말 맵더라. 손톱에 긁혀서 뺨에 상처까지 길게 생겼는데 흉터가 사라지기 전에는 세수할 때마다 뺨 맞은 게 생각나서 오금이 저리더라니까.”

과거를 회상하는 목소리는 구김 없이 온화했다.

오르피어스는 고개를 숙미고 있어서 자신의 표정이 지크하르트에게 전혀 보이지 않으리라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 했다. 침을 삼켜 메마른 목을 축이고 호흐을 가다듬었다. 목소리는 다행히 평범한 음색을 띤 채 입술 사이로 흘러 나갔다.

"넌 누나 좋아했어?"

지크하르트는 예사하게 반문했다. 

"네 누나는 날 좋아했을 거 같냐?”

"....아니...."

"다 그런 거지."

낮아진 시야로는 지크하르트의 종이리 어림까지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르피어스는 그의 구두에 튄 진흙이며 핏자국을 하나씩 더듬었다. 구두가 바닥을 한 번 차는가 싶더니 볼안정하게 멈혔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목소리는 담담 했다.

"그래도 힐라리아는 날 닮은 아이를 낳고 싶어 했어. 날 닮으면 볼행해질 테니 그만두라고 했는데도, 딸미든 아들이든 좋으니까 딱 한 명만 낳아서 마음껏 사량해 줄 거라고……. 그때까지만 해도 힐라리아는 미래를 보고 있었는데 어째서 자살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

오르피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크하르트도 대답을 기다린 게 아닌 듯 혼잣말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넌 이제 탈 없지? 미안한데 안 되겠다. 먼저 아파트로 갈게. 여기 있으니까 힐라리아가 자꾸 생각이나"

짐짓 높아진 듯한 음성은 반항하지 못하고 사그라졌다. 묵묵히 숙인 고개만 아래위로 흔든 오르피어스의 어깨를 한 번 더 도닥여주고 지크하르트는 등을 돌렸다.

"혹시 힐라리아가 죽기 전에 널 찾아간 적이 있었나?”

완전히 시야를 떠나기 전 낮은 물음이 벽면을 타고 돌아왔지만 오르피어스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말 없는 부정뿐이었다.

오르피어스와 지크하르트가 나가자 서재는 짧은 침묵이 내렸다. 유안이 문을 닫고 돌아와 책상 앞에 섰다.

"커피라도 한잔 타 드릴까요?”

"안 그래도 지나치게 놀라 머리가 각성한 참미니 커피는 필요 없다." 

"하하. 전혀 안 놀라 보이시는데요."

아이릭은 대꾸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님께 바로 가시려고요?”

"아까 멜빈을 불렸을 때 치료가 끝났다는 소식도 들었다."

집사에게 따로 전갈을 받았다고 하니 유안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다시 문을 열었다. 성큼성큼 서재 밖으로 걸어 나가던 아이이미 문가에서 갑자기 발을 멈혔다.

"왜 그러십니까?"

아이릭은 말없이 유안을 잠시 내려다보다 그의 머리를 슥슥 헤집어 만지고는 복도로 발을 내디뎠다. 유안도 어깨를 움츠리며 형클어진 머리칼을 가다듬고 뒤를 따랐다.

"오르피어스와는 지낼 만한가?”

"저는 괜찮습니다만 도련님은 조만간에 스트레스든 술병이든 위장에 구멍이 생길 거 같네요."

"그 녀석 너무 괴롭히지 마라."

복도의 벽이 재게 뒤로 흘러갔다. 종종걸음으로 바삐 걸어가는 아이릭의 등으로 유안이 실소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막내 도련님께 제일 마음 써주는 분이 아이릭 님이라는 사실이 재밌다니까요."

"무슨 뜻이냐. 난 그 녀석과의 거래를 수행하고 있을 뿐미다. 나는 지켜주겠다고 했고, 오르피어스는 내게 복종한 다고 했지."

"도련님이 그 거래를 정확히 이해했다고 보십니까? 열 살짜리 꼬맹이 눈에는 자기 학대하는 끔찍한 아버지와 방치하는 무시무시한 큰형은 별 차이가 없다고요."

"음?”

아이릭의 걸음이 잠깐 멎었다. 돌아보는 시선에는 반문의 어의를 해석할 수 없다는 뜻이 명백히 드러나 있어 유안은 억지로 납득시키는 대신 그냥 한 번 웃고는 얼른 가자고 손짓했다. 

감정을 철저히 배제하여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명령을 내리는 아이릭과 무조건적으로 순종하여 미행하는 오르피어스라는 조합이 결과적으로 오르피어스에게 그릇된 방향으로 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가까게는 지크하르트, 멀게는 록사나에 이르기까지.

'카시야스 대령의 경우는 섣부른 판단인가'

지크하르트 카시야스. 그 이름자가 가지는 의미를 알면서도 오르피어스, 그리고 앞서는 힐라리아의 가이드로 붙여준 그의 결단이 무섭다고 해야 할지 경솔하다고 해야 할지 유안은 지금까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주치의가 치료를 끝나고 나갈 때 문이 덜 닫혔는지 나오미가 임시로 머물고 있는 손님방 안쪽에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안은 그 목소리를 무시하고 노크하려는 아이릭을 가로막으며 입술 앞에 검지를 세웠다. 의아하다는 눈길이었으나 아이릭은 그에게 따라 주었다.

"걱정하지 말래두. 총알은 빼냈고 내일 병원 가서 센티넬에게 마지막 치료를 받으면 흉터도 안 남아."

"다른 곳은 정말, 괜찮아? 아픈 곳은 없고?”

"응. 진통제 때문에 정신이 몽롱하긴 하지만. 얼굴만 보면 당신이 더 환자 같아. 내 몸에서 나온 총알을 기념으로 받았는데 당신 줄까? 부적으로 쓰기도 한대."

"별 희한한 부적이 다 있네. 부적이 아니라 다른 총알을 불러들이는 저주가 될 것 같구만."

"후후."

말소리가 도란도란 이어지다 웃음에서 끊어졌다. 유안이 그제야 문을 똑똑 노크했다.

"누님, 자형. 접니다. 각하를 모시고 왔습니다."

문을 연 유안은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했다. 부부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고 테미블 앞에 앉아 있던 남자가 아이릭 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보부 제1과장 아서 탠서워즈 대위이었다.

"아이쿠, 과장님. 있으면 있다는 기척이라도 해 주시죠."

"못 알아차린 자네가 문제지. 안녕하십니까, 각하."

목례한 아이릭은 남편의 부축을 받아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나오미를 그대로 앉아 있도록 했다. 나오미가 눈짓으로 감사 인사를 하고는 남편의 손등을 토닥였다. 그는 못내 걱정되는 눈치였으나 총독의 공무를 방해할 자격도 위치도 되지 않는 평범한 은행원이었다. 괜찮다고 거듭 속삭미는 아내의 목소리를 위안 삼고 옆방으로 물러났다.

유안은 축음기에 음반을 마무거나 골라 걸고 네 사람의 차를 탈 준비를 했다. 신관은 설계할 때부터 방음을 염두에 두었으나 혹여 모를 밀청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부드러운 피아노 조곡의 선율이 방 안을 휘돌았다.

아이릭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나오미를 보았다.

"상태는?”

"실혈로 인해 약간 현기증이 있을 뿐 염려하실 바는 안 됩니다."

"미야기는 가능하겠나?”

"물론입니다."

커다란 쿠션을 침대 헤드에 받쳐 등을 기대어 앉은 나오미가 마른 입술을 축였다. 건넛방에서 유안미 찻물을 끓이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습격 당시를 회술했다.

상대는 능숙한 사냥개였다. 그리고 이쪽은 미숙한 사냥감이었다. 나오미는 총을 고쳐 쥐며 이를 악물었다. 자꾸만 손바닥에서 땀이 배어 나와 그립미 미끄러진다. 셔츠를 묶어 어설프게 동여맨 허벅지의 총상도 식은땀에 일조하였다. 낮부터 어둑하게 끼어 있던 구름은 어제보다 일찍 햇살을 거두어갔다. 어둑어둑한 땅거미가 내린 저편에서 총탄이 간헐적으로 빗발쳤다. 커다랗게 뜷린 문을 사이에 두고 그녀의 반대편에 몸을 숨긴 잭이 응시했다. 유일하게 생존한 그녀의 경호원이었다.

'방심했어."

총을 쥔 손을 이마에 대며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은 어깨는 좀체 풀리지 않았다. 운전기사가 매수되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못하고 운전 중에 눈을 붙인 게 실수였다. 

그녀의 차가 이상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걸 눈치 챈 경호 차량이 속도를 높였지만 흐름을 꺾지는 못하였다. 경호 차량이 위험을 무릅쓰고 범퍼를 박아 차를 세워 겨우 탈출은 하였으나 상대는 이를 예견한 것처럼 착실히 그녀를 몰아넣었다. 

음습한 뒷골목의 폐창고라니 마치 영화나 소설처럼 짜맞춘 상황에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잭이 탄창에 총을 장전하는 사이에 나오미가 상대를 겨냥했다. 비웃기라도 하는 양 몇 배나 되는 총탄이 날아든다. 나오미와 잭 사이에 나팅굴고 있는 돌맹이에 찰나 불꽃이 탁 튀었다. 

소음기를 부착하여 정확하지는 않지만 전방에 최소 다섯 명 이상 있다. 거기에 저격수 2명. 사냥감을 잡을 덫까지 충실하게 마련해 놓은 자들이니 후방에서 포위하는 인원이 없으리라는 보장은 할 수 없었다. 

가급적 시간을 벌고는 있지만 구조 인력이 언제 도착할지도 미지수다.

철벅거리는 피가 발치까지 흘러들었다. 저격수는 무전기로 교신하려던 경호원과 무전기기를 제일 먼저 박살 냈다. 총소리를 듣고 누군가가 신고해 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젠츠바이 거리는 마피아들의 싸움이 종종 발생하는 곳이라 시민도 경찰도 총소리에 둔감하다는 것이다. 두 차례의 전란을 거친 헤임의 치안은 예전만큼 좋지 않았고 전임 총독과는 다르게 아이릭의 주의 또한 내부가 아닌 외부로 돌려져 있어 마피아들미 세력권을 넓히기에 적절한 시기였다. 

희망이 그뿐이기에 가급적 시간은 끌고 있지만 자꾸만 회의적인 절망이 그녀를 엄습했다. 

「총알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어디 보자. 나는 하나, 둘…… 다섯, 아니 네 개가 남았군. 하나는 자살용으로 남겨둬야지」

마음을 굳힌 나오미는 애써 미소했다. 센티넬에게 있어 최악의 상황은 가이드의 사망이 아닌 실종이다. 가이드가 생존한 채 행방불명되면 센티넬은 새 가이드와 각인하지도 못한 채 폭주와 죽음만을 기다리게 된다. 그렇기에 상대들도 몰미꾼처럼 덫으로 몰아넣고 있었으며, 그녀가 아직까지 목숨을 붙일 수 있는 이유미기도 했다.

「……제가 꼭 비서관님만은 무사히 나가시도록 하겠습니다」

잭이 나오미를 바라보지도 않으며 낮게 말했다. 그녀보다 열 몇 살은 어린 앳된 청년이다. 나오미는 마른 침을 삼키며 차가운 돌 벽에 등을 기댔다. 위협하듯 총탄이 날아온다. 거리는 최초보다 가까웠다.

「자네 딸이 백 일 전이던가?」

「다음 주에 백 일입니다」

「한창 귀여울 때군. 우리 딸내미는 워낙 낯가림이 심해서 낯선 사람만 보면 우는 통에 백일은커녕 첫돌 사진도 제대로 찍지를 못했지」

억지로 꺼낸 우스갯소리에 잭의 굳은 얼굴에 살짝 웃음이 어리는 듯 하였으나 입가까지 가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살아나가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자네일 텐데, 마지막을 함께 하는 사람이 이런 아줌마라서 미안하네」

「비서관님을 모시게 되어서 영광이였습니다」

그녀처럼 이미 죽음을 맞을 준비를 갖춘 잭의 딱딱한 말투에 나오미는 '소설에서 많이 읽은 대사일세'라는 실없는 미야기를 꺼내려다 도로 삼켰다. 

죽음이 가까워져서 그런지 자꾸만 입이 쓸데없이 가벼워였다. 그녀는 마지막에 떠 오르는 사람이 가족이 아니라 그녀가 일생을 바친 아이릭이라는 점이 못내 남편에게 미안했다. 

남편을 사량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페인이기에 최후의 최후까지 남편에게도 밝히지 못한 비밀만을 안고 갔다.

총알이 세 개 남았다. 잭의 입술은 무겁게 다물린 지 한참이였다. 여기까지인가. 그녀가 각오를 다졌을 무렵이었다.

「끅……!」

건축 자재가 어지러이 방여 시야를 가린 창고 건너편의 어둠 속에서 탁 막힌 신음이울렸다. 잭이 반사적으로 총구를 뒤로 획 돌렸다. 어둠 너머에서 인영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아니, 목에 등 뒤로부터 팔꿈치가 걸려 포박당한 인영이 반쯤 끝려나왔다.

「카시야스 대령님?!」

나오미의 입에서 나직한 경악성미 터였다. 얼굴을 확인할 수 있게 한 지크하르트가 남자의 목에 십자 형태로 교차 한 양팔을 비들었다. 소름 끼치는 기괴한 마찰음을 내며 목뼈가 부러졌다. 결박을 풀자 방금 전까지 사냥개였던 남자는 물려 죽은 사냥감이 되어 바닥에 나뒹굴었다.

「늦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오르피어스가 폭주하면 각하라도 막으실 수 있지 각하가 폭주하시면 저도 못 막습니다.」

「어, 어, 어떻게 여기……! 설마 신고를 받고 출동하신 겁니까?"」

경악한 나머지 나오미는 평소라면 하지 않을 멍청한 질문을 하고 말았다. 신고가 접수되었으면 군무부가 아니라 관찰 경찰서에서 출동하였을 것이다. 지크하르트는 구태여 그 점을 지적하지 않고 시체의 품을 뒤지며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아니요. 드라이브하다가 저격총 소리가 나길래 들러봤는데 마피아가 아니라 비서관님이 있으시더군요. 아, 뒤 쪽에서 접근하던 놈들과 저격수들은 다 처리했으니까 염려 놓으셔도 됩니다」

그리고는 시체가 갖고 있던 총과 군용 나미를프를 챙겨 들며 멋쩍게 웃었다.

「사복으로 나왔던 지라 무기를 하나도 안 갖고 왔거든요. 저는 칼이 손에 잘 맞는데 이놈이 갖고 있어서 잘됐군요」

생사관두에 처한 상황과는 터무니없이 부조화한 일상적인 어조라 오히려 감이미 나지 않았다. 잭도 매한가지인 듯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쳐다보기만 했다.

「총은 쏘지 말아주십시오」

지크하르트는 잭의 위치에 많아서 팔을 뼏어 총을 탕, 탕 두 번 쐈다. 두 가닥의 비명이 짧게 터지고 잠시 후 그에 보복하기라도 하듯 콩알 볶는 소리가 드드륵 울리며 총탄이 쏟아졌다.

「이야, 끝내주는데요? 그 무거운 자동소총까지 들고 온 걸 보니 단단히 작정하고 덮친 모양입니다. 이제 신고를 하든 말든 막 나가네요. 저놈들도 어지간히 촉급한가 봅니다. 뒤에서 덮치기로 한 놈들도 조용하잖습니까」

긴장을 풀어주려 부러 가벼이 던진 말이었다고 이해한 건 나오미가 무사히 귀환하고 치료를 받은 후였다. 지금의 그녀는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하여 아연하게 지크하르트를 보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녀는 총독의 가이드로써 유사시에 자기 한 몸은 지킬 수 있을 훈련은 하였으나 전선의 참전 경험은 없었다. 

지크하르트의 전공을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전쟁 영웅이기에 그의 실력에 과장된 면이 있다고 여겨왔다.

'사격대회만 열리면 100접 만점에 100점으로 일등상 됩쓸어오는 바람에 아에 출전 금지까지 된 건 물론이거니와 전쟁터에서도 원샷 원킬이에요. 총탄이 날아온 각도나 숨소리 따위로 위치를 일순간에 정확히 파악하는 걸 보면 놀라움을 넘어 황당할 정도라니까요. 머릿속으로 계산해서 도출하는 수식이 아니라 그 양반은 본능으로 알아채는 겁니다'

그녀는 지크하르트와 같은 부대 소속이었던 장교가 하는 말을 웃음으로만 넘겼지만,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 지금은 전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한참을 울리던 총성이 멎었다. 응사가 없자 총알이 다 떨어졌다고 판단한 듯 신중한 걸음들이 접근했다. 목 안쪽이 바싹 타들어갔다. 나이프의 폼멜에 뚫린 고리에 손가략을 걸고 빙글빙글 돌리던 지크하르트가 한 바퀴 휘릭 돌아간 나이프를 고쳐 쥐며 튀어 나갔다. 총알이 튀는 소리와 단말마의 비명 소리가 엇갈렸다.

나오미는 현장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지만 나중에 잭이 설명해 주었다. 반사적으로 쏴대는 총알을 피해 달려 나가 제일 앞에 있던 자의 총을 쳐 궤도를 바닥으로 꺾으며 그 옆에 있던 사람의 목을 나이프로 긋는 것까지만 보고 그 뒤 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눈 몇 번 깜빡이니 순식간에 제압이 되어 있었더라는 설명이라 썩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두 놈은 팔다리만 부러트렸……」

바닥에 고꾸라트려 등을 발로 짓누르고 올려 잡은 남자 하나의 팔을 으직 부러트리던 지크하르트가 혀를 찼다. 그가 살려 놓은 두 사람의 입술 사이에서 검붉은 핏줄기가 흘렸다.

「입 안에 독을 숨겨 놨군요. 지독한 놈들인데요」

숨 몇 번 쉬기도 전에 습격자들은 다 처리되었고 잭은 딸의 백 일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었으며 나오미도 남편에게 비밀을 안고 돌아갈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현실감이 전혀 없었다. 나오미는 생존의 기쁨과 환희를 내밸는 대신 비현실적인 기이한 감각 속에 입술을 달싹였다.

「대령님. 팔에 피가……」

가리킨 손가락을 따라 팔뚝을 내려 다본 지크하르트가 쑥스러워 했다.

「총알에 좀 긁혔네요. 오랜만이라 몸이 좀 안 풀려서 그만」

「아, 그렇군요」

역시 오랜만의 실전이라 몸이 굳어 있구나. 나오미는 멍하니 끄덕끄덕했다. 멀리에서 경찰차들이 도착하는 소리가 났다. 그제야 살아남았다는 현실감이 밀려와 그녀는 총을 떨어트렸다. 다리의 통증이 급작스럽게 전신을 엄습했다. 등이 온통 비지땀으로 흥건했다.

"....경위는 이렇습니다."

썩 긴 이야기는 아님에도 목이 탔기에 나오미는 식지 않은 찻물을 입 안에 머금었다. 나오미를 제외한 세 남자는 테이블에 앉아 드문드문 찻잔을 올리며 경청하였다. 

피아노 연주는 연탄으로 넘어가 그녀의 목소리를 묻었다. 아서가 비뚜름히 턱을 괬다.

"이상하군요. 젠츠바이가 절대 드라이브하기 좋은 장소는 아니질 않습니까"

풍광이 좋은 것도 아니고, 도로가 시원하게 잘 뚫린 것도 아니고, 되레 마피아들의 투쟁이 빈번하여 치안도 나쁜 곳이다. 한 호흡 뒤에 그는 첨언했다.

"카시야스 대령이라면 새삼스럽게 치안 나쁜 걸 신경 쓰지는 않을 테지만 말입니다. 유안, 대령이 어퍼돌덤 거리에서 엠마와 만난 후 젠츠바미 거리로 직행했나?”

"직행하였는지의 여부는 모릅니다. 도로에서 경호팀이 놓쳤거든요."

"쯧, 그거 하나 추적 못하고."

"우리 애들 목적은 미행이 아니라 호위인데요. 대령님이 작정하고 따돌리면 못 쫓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카시야스 대령님을 경호하는 팀이라 군기가 빠져 있다는 점은 부정하질 않겠습니다만."

"대령이 아니라 대령 할아버지가 와도 정신 차려야지."

쌀쌀맞게 유안을 타박한 아서가 내도록 침묵 중인 아이릭을 돌아보았다.

"각하. 엠마의 뒤를 캐보겠습니다. 과거 행적도 마음에 걸리는군요."

찻잔을 거의 입술에 대지도 않고 팔짱만 끼고 있던 아이릭이 그제야 팔을 풀며 고개를 올렸다.

"지크하르트는 됐다. 헛되이 인력을 소모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카시야스는,"

"이제 와서 배신할 자가 아니다. 수십 번은 있었던 기회를 다 흘려 넘겼는데 이런 미적지근한 방법으로 배신하겠나?"

반박하려던 아서는 아이릭의 부연에 화제를 접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자세한 경위도 파악했으니 저는 돌아가서 놈들을 조사하겠습니다."

"장담하는데 무기는 흔한 공산품 아니면 공화국 제식 총일걸요? 어느 쪽에 내기하실래요?”

"어느 쪽이든 자네 뒤통수를 후려칠 수 있는 쪽에 걸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아서와 유안의 느긋한 공방에 나오미가 풉 웃음을 터트렸다. 유안이 얼씨구나 좋아하며 웃음을 주워왔다.

"봐요, 누님도 한심하다고 하시질 않습니까."

"자네는 대체 언제 철이 들건가?”

아이릭은 익숙한 두 사람의 대화를 한 귀로 흘러 넘기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꺼림칙한 불길한 감각이 목 안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불쾌하게 자극하고 있음에도 그 이유가 파악되지 않아 답답했다. 

좋지 못한 예감이 든다. 예비 가이드들이 암살당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무언가가 묘하게, 끈적거렸다.

언젠가 겪었던 감각이었다.

***

일라리아는 드물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빠, 나 왔어!」

신체가 부자유하지 않았으면 빙그르르 드레스 자락을 팔락이며 한바탕 춤이라도 추었을 것 같은 기세로 까르륵 소리 높여 웃으며 문을 활짝 열었다. 아이릭은 그녀가 발을 헛디뎌 넘어지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허리를 붙잡아 안았다.

「조심해야지」

「오빠가 잡아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는걸?」

힐라리아가 보이지 않는 눈으로 빙그레 희소하였다. 아이릭은 쓴웃음을 삼키며 누이의 텅 빈 눈동자에 살짝 입을 맞혔다. 남매의 부친 체스터의 능력은 피시전자와 시선을 맞추어야 구현 가능하였고, 그는 환상을 투영하는 자신의 능력으로 사람의 정신을 지배하는 게 특기였다. 특히, 유용한 센티넬을.

감정의 고저가 격하지 않은 아이릭은 센티넬로 발현하였음을 숨기고 순종적인 아들로서 행세하였으나, 격정적이고 오만한 품성의 힐라리마는 아버지의 폭압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스스로 자신의 눈을 칼로 망가트렸다. 

큰 관심 없이 의무만이 있던 누이에게 주의를 돌리게 된 건 피투성이가 되어 비명을 지르면서도 센티넬의 치료를 완강히 거부하며 홍소하던 광기 어린 모습을 본 후였다.

「카시야스와는 잘 만나고 왔나?」

힐라리아를 부축하여 디방에 앉혔다.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인 손에 그녀가 즐겨 먹는 다쿠아즈 접시를 트레이에서 꺼내 밀어주고 홍차를 우렸다. 지금이면 그녀가 병원에서 도착할 시간이라 미리 하녀에게 가져오게 한 다과였다.

힐라리마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그러엄! 정말 마음에 들어. 나 주는 거 맞지? 가져도 돼?」

「네가 원한다면. 카시야스는 네 가이드가 되겠다던가?」

「아하하하. 즉답하지 않았지만 감히 거역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장래 유망하다고 교사들 사이에서도 칭찬이 자자하니까 아버지는 결혼까지 염두에 두고 있으신 것 같지만, 흐응. 어떻게 클지는 모르지. 내 남자가 되려면 아직은 한참 격이 부쪽해」

눈이 보이는 것처럼 능숙하게 다쿠마즈를 베어 먹으나 그녀의 시선은 어떠한 빛도 남지 않기에 아이릭은 거리낄 것 없이 고소하였다. 

힐라리아의 까다로운 성미를 충족시킬 만한 남자라는 판단은 서지 않았는데 부합할 수 있어서 안심했다. 물론 힐라리아가 마뜩잖았을지언정 아이릭의 말을 거역할 리는 없었지만 처음부터 기꺼운 마음으로 행사하는 것이 훨씬 능률적이리란 건 굳이 유안의 조언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오빠 지크하르트를 어디에 쓰려고 내게 붙였어?」

남매에게는 특별할 것 없는 하루였다. 체스터는 허수아비로 내세운 총독과 면담하기 위하여 저택을 나섰고, 둘째 도젠은 사령부에 등청하였고, 막내 오르피어스는 레베카를 만나고 있을 무렵이었다. 

오르피어스가 폭주하여 문제가 생겼지만 곧 해결되었고 일상처럼 느른히 흘러가는 하루의 가운데에서 힐라리아 또한 여상하게 물었다. 

그의 뒤 쪽에서 비치는 햇살이 책상 위에 던져 놓은 지크하르트 카시야스의 자료를 백일하에 훤히 드러내고 있는 것만큼이나 평범한 조각이였다. 아이릭도 여상히 대답했다.

「네게 말해 줄 수는 없다. 넌 거짓말을 너무 못하거든」

「아하하! 몰라도 상관없어. 오빠에게 도움이 된다면 난 얼마든지 이용해도 돼」

오빠에게 이용 가치가 있다면, 기뻐. 힐라리마의 낯에 어린, 도취에 가까운 흥분을 아미릭은 응시했다. 사람을 도구처럼 태연히 이용하고 다룬다는 점이야말로 아버지의 핏줄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아닌가, 하고 그는 때때로 생각하곤 하였다.

'체스터 님보다는 아이릭 님이 낫습니다. 그분은 도구의 가치를 모르시거든요. 가치를 알지 못하니 부적합한 곳에 일회용으로 쓰고, 버리시죠. 적어도 아이릭 님은 적절한 곳에 사용한 도구를 최적의 상태로 손질할 줄 아시니까요.'

체스터를 배행하였다가 시체로 귀가한 누이를 앞에 둔 유안이 그답지 않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어떠한 차이인지 아이릭으로서는 명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해한들 달라지는 건 없으리라.

「리벡에 가는 날이 내일이라고 했어?」

「그래. 갖고 싶은 건 있나? 」

「지크하르트를 줬으니 당분간은 됐어」

힐라리아는 상관없다는 투로 말하며 디방에 비스듬히 옆으로 누워 따스한 햇살을 담뿍 온몸에 받았다. 기분이 좋은 그녀는 봄날의 고양이처럼 나른하게 심신을 이완하여 보이지 않는 세계를 느끼곤 하였다.

'여동생이 눈이 보이질 않는다며? 음반은 흥취가 없고, 악사와 악기를 세트로 선물하는 건 어때'

수도 리백에서 이번에도 만나게 될 젊은 왕녀는 누이의 선물로 고심하는 그에게 조언 같지도 않은 조언을 해 준 적이 있었다. 사람을 선물하는 대신 뮤직홀을 대여하여 힐라리아를 위한 왕립 악단의 공연을 감상할 수 있게 해 주었고, 힐라리마는 만족했다. 

이번에는 필요 없다고 하였으니 나오미의 안목에 기대어 오르골 정도를 골라볼 요량이었다. 나오미만큼 힐라리아의 취향을 잘 파악하는 사람은 없었다.

고민을 한 가지 해결한 아미릭은 찻잔을 들고 책상으로 돌아가 서류를 뒤적였다. 지크하르트가 그의 계획만큼 잘 움직일지는 미지수였으나 힐라리아가 있으니 적어도 시야 안에는 넣을 수 있을 것이다.

햇빛과 잠에 취한 나른한 목소리가 팔랑팔랑 종이를 넘기는 소리 사이로 섞여 왔다.

「오빠」

「음」

「아버지는 언제 죽일 건데?」

「곧」

아이릭은 무심히 응대하였고, 힐라리마는 만족한 웃음을 머금으며 잠이 들었다.

방문을 알리는 유안의 노크 소리에 아미릭은 서류에서 고개를 올렸다. 어느새 동녘 하늘이 희끄무레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밤새 잠을 거의 미루지 못한 양 퍼석퍼석한 얼굴로 들어온 그가 하품하며 인사했다.

"눈이라도 좀 붙이셨어요?"

"얼추 한 시간은 잤다."

"보고 올라오기 전에는 긴히 처리하실 수 있는 일도 없는데 주무시질 않고요."

"잠이 안 와."

명료한 대답에 유안이 짧게 웃고는 보고서를 내밀었다.

"그놈들 시체를 탈탈 털었습니다. 과장님이 밤새도록 고생 많으셨죠. 근데 지금 읽고 계시는 거 카시야스 대령님 자료 아닙니까? 엄청 옛날 것 아니에요?”

열여섯 앳된 소년의 사진이 첨부된 서류를 아이릭은 탁 덮었다.

남부 글래스팅 성에서 벨포드는 작은 왕처럼 군림한다. 체스터 벨포드는 야욕은 높았으나 지극히 나약하고 소심 한 사내였다. 

센티넬로 발현하자 형제자매를 참살하고 권력을 장악하였으나 그는 평생을 두려움에 떨었다. 짓밟고 짓뭉개고 뿌리 뽑지 않으면 안심할 수 없는 자였다. 

핏줄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가이드도 신뢰하지 못하여 감금 한 채 지배하였고, 몇 년에 한 번씩 갈아치웠다.

체스터가 유일하게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장남 아이릭이었다. 친자라는 세속적미고 시시한 이유가 아니었다. 위협적인 센티넬의 힘을 지니지 않고 평범하게 태어난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그가 자아내는 공포에 굴복하였다. 

눈앞에서 친모가 아버지에게 살해당하여도 분개하지 않고 굴종한 아들을 체스터는 신임하였다. 때문에 그는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양자로 입적한 도젠이나 스스로 눈을 훼손할 만큼 반감을 가졌던 힐라리마가 반기를 들었다면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은밀히 군부를 장악하고 등 뒤에 칼을 꽃은 아들이 다른 누구도 아닌 아이릭미라는 현실을 끝내 이해하지 못하며 죽었다.

지크하르트는 그 사이에서 아미릭의 계산대로 움직여 주었고, 에상 이상으로 성장하였다.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아이릭은 판단했다. 이제 와서 그의 지휘에서 벗어나 깔끄러운 불협화음을 일으킬 남자는 아니었다.

"옛날 생각을 했다. 조사 결과는?"

"구두로 말씀드리기 전에 보고서를 한 번 읽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피곤해서 글자가 눈에 안 들어온다."

말을 하며 아이릭은 정말로 의자에 머리를 깊이 기댄 채 눈을 감았으므로 유안은 실소하곤 간단하게 설명했다.

"헤임에 언제 어떤 경로로 들어와서 어디에서 묵었는지 따위는 며칠 더 행적을 찾아봐야 할 거 같고요, 소지품에서 특이접은 없습니다. 

공화국을 비롯한 특정 나라의 제식 화기는 아니었고 자동 소총 하나만 델마이란 왕국 육군 에서 개발된 것미이었지만, 그 동네야 워낙에 무기 밀반출이 많이 일어나는 곳이라 딱히 도움은 안 되네요. 

포로로 잡히자 자살한 점미나 전문 훈련을 받은 점으로 미루어 용병이나 업자보다는 군인으로 추정 중입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개인 신상을 밝칠 소지품은 일절 없습니다. 참, 그리고 그놈들에게 매수당했던 운전기사도 수술이 끝나고 취조 중이긴 한데 이 상황으로 봐서는 돈만 냉큼 받아먹고 자세한 계획은 일절 접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네요."

"알아낸 게 없군."

"알아낸 게 없다는 걸 알아낸 게 어딥니까.”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아이릭은 싱겁게 웃었다.

"이상한데."

"이상하죠."

거의 동시에 말한 두 사람은 잠깐 말을 멈추었고 아이릭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먼저 얘기하라는 뜻으로 턱짓했다.

"진짜 목적이 누구든 간에 처음부터 집요하게 가이드만 노리는 게 영 마음에 걸리네요."

센티넬만이 정부의 중핵에서 글래스팅을 좌우하는 실권을 지니는 게 아니다. 가이드 암살 시도 후 요직 요인의 경호를 강화하였으나 놈들의 타깃팅은 처음부터 일관되게 가이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연막작전일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부에서 무너트릴 계획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라면 중화기까지 매입할 자금력을 갖고 쪼잔하게 가이드를 암살하느니 한방 큰 거 터트릴 텐데요."

아이릭도 동감이었다. 놈들의 목적을 정확히 판별할 수 없으나 지극히 국소적으로 한정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속단은 이르다. 정보가 너무 적었다.

"무엇이든 전쟁이 발발하지 않는다면 다행이지. 승전과는 둘째 문제로 지난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려면 한참이야."

유안이 휘파람을 불었다.

"웬일로 위정자 같은 말씀을 다 하시네요."

"멸망시킬 작정으로 통치하지는 않아."

"하하. 그야 글래스팅이 무너지면 국왕 폐하의 다리 하나가 부러지는 거니까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는 얼굴로 아이릭미 눈을 뜨고 빤히 쳐다보자 유안은 시치미를 뚝 떼고는 화제를 바꿨다.

"달리 하명하실 게 없으시면 저는 물러나서 쉬겠습니다."

"오르피어스도 록사나 방에 있으니 서재에서 자고 가라."

그럼 사양하지 않겠노라고 대답한 유안은 소파에 편히 드러누웠다. 많이 피곤하였는지 머리를 대자마자 숨소리가 낮아졌다. 아이릭은 밤새 사용하였던 무릎 담요를 유안의 몸에 덮어주고 벽난로에 해탄을 충분히 넣었다. 그리고 조용히 책상으로 돌아가 보고서를 펼쳤다.

***

지난밤의 사건으로 인해 유안이 밤새도록 분주하게 뛰어다니느라 겨우 해방되어 술도 마시지 않는 달콤한 하룻밤을 보내 컨디션이 그럭저럭 회복된 오르피어스는 등청하자마자 도로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걸 느꼈다.

"소령니이임. 제발요오오.”

"결재할 서류 생기면 내 사인 위조해서 네가 올리라니까? 내 사인보다 네가 하는 사인이 더 진짜 같아. 그럼 난 이만."

팔랑팔랑 손을 든들며 숫제 여관 침대처럼 쓰고 있는 의무실로 가려는 오르피어스의 앞을 모니카 대럿 소위가 용감하게 턱 가로막았다.

"제가 소령님 사인 대신하는 거 행정과에서 이미 옛날에 다 알고 있다니까요? 은근히 눈치를 팍팍 주는데 부담스러워서 위가 꼬일 거 같습니다.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직접 확인해주시면 안 될까요? 살려주세요, 소령님."

"귀찮아 죽겠네."

오르피어스는 한것 인상을 구겼다. 이럴 줄 알고 등청 확인서에 서명만 하고 모니카가 나타나기 전에 도망치려고 했던 건데 그녀는 작정하고 새벽부터 그의 사무실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모두가 기피하는 오르피어스의 부관을 아무나 하는 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이 그녀는 그에게 단단히 이골이 나 있었다.

모니카가 징징거리는 소리를 뒤꽁무니에 달고 가느니 후다닥 해치우고 심신 편하게 쉬자는 쪽으로 마음을 고쳐먹고 구겨진 인상 그대로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안색이 화사하게 밝아진 모니카가 종종걸음으로 책상에 너저분하게 쌓인 서류들을 정리하고는 여기부터 확인하시라며 만년필까지 대령했다.

오르피어스는 하품하며 서류들을 읽어보지도 않고 모니카가 연필로 표시해 놓은 부분에만 사인을 휘날렸다. 워낙 오랜만에 펜을 쥐어 글자들은 흐물흐물 제멋대로 춤을 췄지만 모니카는 감격한 표정이었다.

"애초에 나는 야전이 적성에도 맞고 체질이라구. 연병장에서 구르면 굴렀지 책상머리에 붙어 앉아서 팬대 놀리는 건 흥미 없어."

"저도 그렇습니다"

"너랑 마음이 일치하다니 싫네.”

“....."

힐긋 쳐다보자 괜스레 부산하게 사무실 안을 정리하는 척하다가 차를 타 왔다. 커피를 잘 마시지 않는 오르피어스 에게는 허브 차였다. 획획 사인을 날려서 서류를 순식간에 해치우고 일어나려는 그의 앞에 타미밍 좋게 찻잔이 놓였다. 한 잔만 마시고 가자는 생각에 엉거주춤하게 일어났던 엉덩이를 다시 붙이자 모니카가 눈치를 살피며 해헤 웃었다.

"저,그런데 소령님."

"안돼. 안가. 안해."

"제가 무슨 말씀 드릴 줄 아시고요?"

"뭐든, 안 해"

"하지만 소령님! 이번에는 정히 안 내키시더라도 얼굴 도장만이라도 찍어주세요!"

"얼굴만 필요한 거라면 사진 줄 테니까 마네킹이라도 가지고 가서 붙여 놔."

"흑백이잖아요! 못 씁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연대장님들도 직접 참관하시는 자리라고요!”

"무슨 자리길래 유난이야?”

모니카가 일하기 싫어하는 오르피어스의 다리를 붙잡는 것에 진력이 난 것만큼이나, 한껏 과장해서 오르피어스의 주의부터 붙들어 놓고 보는 모니카의 화법에도 진력이 나 있는 오르피어스이기에 시큰둥하게 물었다. 역시나 대단한 용건은 아니었다.

"합동군사훈련을 대비한 사열식 준비와 예비 훈련이요. 정식 예행은 아니니까 우리 부대 군기 바짝 들도록 잠깐 타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모니카는 '내가 가면 군기가 오히려 빠지지 않을까?요라든가 '군기 바짝 들도록 애들 내 맘대로 굴려도 돼?' 등의 반문에 대한 대답을 준비해 두고 심장이 공공 뛰는 소리를 들으며 기다렸으나 오르피어스는 별다른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기만했다.

'설마 말도 없이 도망치시려구?'

이번마저 빠지면 예행 때도 얼굴이나 비칠까 의문이다. 바직가랑이를 붙잡아서라도 매달리겠다고 굳은 다짐을 하는 모니카의 눈앞에서 오르피어스는 군복 재킷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그리고 책상을 빙 돌아서 나가 의아하게 눈을 크게 뜬 모니카의 어깨에 자신의 재킷을 다정히 걸쳐 주었다.

"네가 오늘부터 소령이야. 그럼 안녕, 소령님."

"안됩니다아아아!!”

모니카가 맹렬히 외치며 오르피어스보다 빠르게 달려 나가 문을 온몸으로 가로막았다.

"네가 소령이라니까? 진급 축하해. 짝짝짝."

"연봉도 안 오르는데 일거리만 늘어난 진급은 싫어요!”

"볼 지른다?”

"차라리 제 시체를 밟고 가십시오!”

살벌한 평판과는 다르게 오르피어스가 전장이나 훈련이 아닌 이상 사사로이 능력을 써서 방분하게 발화할 만큼 막돼먹은, 아니 막돼먹은 건 맞지만 그 정도로 최악의 인간쓰레기는 아님을 아는 모니카는 협박에도 꿋꿋하게 버티고 섰다.

비켜라, 못 비킨다 실랑이를 하던 끝에 먼저 포기한 건 오르피어스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러한 공방이 유치 하고 같잖았다.

"차암, 애들도 아니고 한심하네."

그는 투덜거리며 한 발 물러섰다.

"갈 테니까 차준비해."

"알겠습니다! 서류만 올리고 바로 오겠습니다!"

오르피어스가 속 보이는 뻔한 거짓말을 하고 상황을 모면하지는 않기에 모니카는 대번에 얼굴이 화악 펴져 희희 낙락 서류들을 챙겼다. 종종종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을 나가는 그녀의 발목을 낮은 한탄이 붙잡았다.

"우리 슬슬 헤어질 때 되지 않았어? 나 안 싫니?”

"네? 전 벨포드 소령님이라는 줄을 단단히 붙잡고 있을 건데요?"

"내가 무슨 힘이 있다구?”

"총독 각하께 직통으로 연결된 줄이잖아요! 제가 잡을 수 있는 줄 중에 헤임에서 이만큼 단단한 동아줄도 없습니다!”

당신 밑에서 어떤 더러운 꼴을 당하더라도 꼭 출세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가 이글거리는 눈동자 앞에 할 말이 없어져 얼른 갖다 오라고 쫓아 보냈다.

'일 잘하고 빠릿빠릿해서 편하긴 한데 ……'

속으로 본심을 꿍꿍 둘러 감추고 있는 사람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고스란히 내비치면서 직격하는 사람이 대하기에 수월한 것도 사실이다. 아까 모니카와 이야기하던 중간부터 머리가 조금 지끈거렸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거의 마시지도 않은 찻잔을 손에 들고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자신의 재킷을 입고 있는 걸 목격한 사람들 사이에서 안 좋은 소문이 돌지도 모른다는 걸 짐작하면서도 모른 척한 건 약간의 심술이었다.

오늘 훈련 기지의 연병장에는 5개 여단이 훈련 중이였다. 사기를 진작하는 의미에서 가법게 얼굴을 비추는 자리였기에 연대장들은 훈련 소리를 배경으로 사소한 잡담을 나누거나 정보를 교환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젯밤에 있었던 나오미 페인의 사건을 입에 을리는 사람은 없는 걸 보니 총독부에서는 공표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총독 부에서 언급하지 않은 일을 구태여 자신이 언급할 필요는 없었기에 지크하르트도 침묵했다.매해 치러지는 합동군사훈련은 군사훈련 본연의 목적 외에도 국왕 직할령인 중앙을 포함, 사분된 오시안 각 지구의 교류와 상호 연합을 돈독히 하기 위함이라는 그럴 듯한 명분을 지니었으나 이를 빙자한 상호 견제와 과시의 장으로 변질된 지 오래였다. 

지크하르트도 사관학교를 갓 졸업하여 소위로 임관하였을 당시에는 합동군사훈련을 경험하였으나 이후 전쟁이 계속되어 글래스팅 군의 합동군사훈련이 중지된 탓에 지휘자로써 임하는 훈련은 올해가 처음이었다. 

감회가 있을 법한데도 그는 유다른 감개 없이 훈련이라는 목적 하나만을 보고 있었다.

"저도 잘 기억이 나는 건 아니지만 올해는 예년보다 규모가 큰 것 같기도 합니다."

지크하르트와 단상에 나란히 앉아 있던 제 37연대의 더글라스 싱 대령이 턱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자네는 마직 소식을 못 들었나보군. 올해는 왕후, 혹은 국왕 폐하께서 친감하실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있네."

"아 그렇군요."

지크하르트는 별 생각 없미 주억거렸다. 그는 젊은 군인의 우상이었다. 허나 글래스팅 군의 장성을 비롯하여 연대장 이상의 직급을 가진 고급장교들은 대부분이 조카뻘, 또는 아들뻘의 새파랗게 젊은 지크하르트가 자신들과 대등한 위치에 이르렀음을 크게 마뜩잖아하였다. 

장래의 처가인 벨포드 가의 후광에 힘입은 애송미라는 비난은 그의 그람자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기에 지크하르트도 굳이 반박하거나 노여워하지 않았다. 

그가 하나의 집단인 군 상층부를 가름하는 미묘한 힘의 역학에서 겉돈다고 하여 월급이 안 나오는 건 아니니 말이다. 

덕분에 이렇게 정보가 늦을 때가 왕왕 있지만 더글라스처럼 순수한 무투파라 그에게 호의를 가진 고급 장교가 없는 건 아니었다.

'겉돌다가 잘리거나 연봉 삭감되면 화가 날지도 모르겠지만, 설마. 이번 훈련에서도 큰 과오만 안 저지르면 되겠지. 국왕 부처까지 침감할 수도 있다니 성대하긴 하군."

먼발치에서 목격한 적 있던 국왕 베아트리체 2세를 떠올렸다. 전선시찰을 위하여 부대를 방문하였던 국왕은 작달막한 신장에 평범한 인상이었다는 점만 어렴풋하게 기억날 뿐 자세한 상이 맺히질 않는다. 

왕세녀를 출산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통통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까지 생각을 되짚었던 그는 곧 이유를 깨달았다. 

그날은 하루 종일 힐라리아의 상태가 좋지 않아 끝어안고 달래주느라 국왕에게 기억을 할애할 여유가 없었다.

"입시니아나 뮈르달이 아닌 중앙과의 합동훈련미라 큰 문제는 없을 걸세. 지난번처럼 입시니아 군과 패싸움이 벌어지지는 않……. 아, 그러고 보니 자네가 소위였을 때의 일이던가?”

"하하하. 예, 좀. 객기를 부렸습니다."

지구민들의 감정도 서로 좋지 않은지라 합동훈련 때는 사소한 다툼의 볼씨가 크게 번져 간혹 큰 싸움이 붙는 때가 있었다. 합동훈련 중 패싸움의 산증인이었던 지크하르트는 객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밥 먹다가 시비가 붙었던가, 그랬을 겁니다. 사실 싸우는데 이유는 딱히 중요하지 않잖습니까? 식판으로 먼저 머리를 후려친 게 무리였는지 그 물개, ……가 아니라 입시니아 군이었는지도 기역이 안 납니다."

"으하하! 다른 사람도 아닌 자네가 직접 싸움판에 끼어들었다면 입시니아 놈들이 단단히 온쭐이 났겠구만."

I,

"센티넬의 치료가 아니면 평생 죽 이상의 것을 먹지 못하고 살았을 놈들이 몇 놈 생기긴 했죠. 덕분에 며칠 구금되기는 했습니다만 익숙해지니까 지낼 만하더라고요."

"아이고. 입시니마 놈들미 자네한테 쥐어터져 설설 기는 꼴을 봤어야 하는 건데.”

이럴 때 술이 없어서 아쉽다며 입맛을 다시던 더글라스가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요즘 벨포드 소령과는 어떻게 지내나? 동거한다며?”

지크하르트는 무심코 침음하였다. 오늘 그가 제일 많이 들은 물음이었다. 사무실에 박혀 있을 때는 부하들이 차마 대놓고 물어보지를 못겠으나 군사기지까지 나오니 그와 맞먹는 장교들이 우글거린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애매하게 얼버무렸지만 더글라스는 그에게 호의적인 소수 중 하나였거니와 무엇보다 오르피어스의 직속상관이라 성의 없이 뭉갤 수가 없었다.

"얼굴 안 붉히고 잘 지내보려고 노력은…… 하고 있는데 힘듭니다. 며칠에 한 번씩은 언성 높일 일이 생기는 것 같기도 하고요."

"오랫동안 사귄 부부도 같이 살게 되면 삐걱거리는 일이 다반사인데 자네들은 오죽하겠나."

"……빨리 관사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지크하르트는 반쯤 진심이었는데 더글라스는 껄껄 웃음소리를 높였다.

"자네에게는 미안한 말이네만, 이 상황이 즐겁기도 하네. 만약 전쟁이 발발한다면 자네 부대와 내 부대는, 적어도 벨포드 소령의 대대는 연합해서 작전을 짜지 않겠나? 그 모습이 기대되는군."

아이처럼 어매를 들썩이는 더글라스의 옆에서 지크하르트는 쓴웃음을 설핏 머금었다. 사람 좋은 호인처럼 허허 웃고 있지만 그는 글래스팅에서 으뜸으로 손꼽히는 무투파이며 그의 부대는 과격하고 저돌적인 작전으로 유명했다. 

10년 전의 쿠데타에 동참한 골수 아이릭 벨포드 파이면서도 총독의 동생인 오르피어스를 가차 없이 사지로 내 던지는 작전을 감행하는 순수한 군인이기도 하다. 

전공에 크게 연연하지 않고 안전한 보신이 최우선인 지크하르트로서는 개인에 대한 호감은 별개로 가장 함께 작전을 수행하고 싶지 않은 장군이었다.

"아...."

뒷자리에 배석하여 있던 크루엘라가 이를 아득 악무는 기척이 났다. 침착한 그녀가 느닷없이 흥분할 만한 일은 한정되어 있다. 시선은 반사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원인은 이내 발견했다. 오르피어스가 주차장 쪽에서 단상으로 슬렁슬렁 걸어오고 있었다. 한 발자국 뒤에서 울상을 낏고 있는 장교는 오르피어스의 밑에서 최장 시간을 기록 중인 부관이었기에 그의 눈에도 익은 모니카 대럿 소위였다. 

더글라스도 한 발 늦게야 오르피어스를 발견하였다.

"양반은 안 되겠구먼.”

이젠 군복도 제대로 안 행겨 입고 다니는지 훤히 열린 재킷 사이로 안에 받쳐 입은 흰 드레스셔츠가 고스란히 보였다.

"크읍. 소, 소령님. 제가 소령님 재킷 걸친 지도 모르고 나갔다가 어떤 소리를 들었는지 아십니…… 저 시집은 다 갔어요! 으흐윽."

"으응? 우리 아~~주 뜨거운 시간을 보낸 거 맞잖아? 난 아직까지도 손목이 짜릿짜릿한걸?”

"오해할 발언은 삼가시고 단추라도 제대로 잠가주세요! 다른 장교들도 계시는데 단정히 입으셔야죠!”

"내가 요새 술을 너무 많이 마시다 보니 기억이 오락가락해서 묻는 건데 너랑 나, 혹시 결혼이라도 했니?”

"아, 아까부터 자꾸 서, 서서서서성희롱 발연을 하시는데! 자꾸 이러시면 저도 시, 신, 신고할 겁니다."

"웬 헛소리야. 난 잔소리는 마누라에게만 들을 예정이니까 넌 조용히 하라는…… 아참, 맞아. 아까 그거 성희롱이었어. 대럿 소위는 오늘도 몸매가 끝내주는데? 다리 한 번 쓰다듬어 주고 싶어. 자, 빨리 신고해. 신고하고 더 좋은 상관 밑으로 가버려."

부관과 투덕거리는 소리가 을라오는 걸음에 섞여 드문드문 들려왔다. 더글라스가 흐뭇하게 미소했다.

"사이가 좋군."

사이가 좋다고 할 수 있는 모습인가, 저게. 지크하르트가 흰 눈으로 보는 사이 계단을 다 올라온 오르피어스는 주위를 슥 훑더니 지크하르트와 더글라스를 포착하고는 바지 주머니에 양 손을 찔러 넣은 자세 그대로 다가왔다.

"대령님,안녕하세요."

경례는 하는 둥 마는 둥 관자놀이 언저리까지 올라오기만 했다가 떨어졌다. 상관에게 올리는 군례라고는 절대 볼 수 없는 방만한 언행이었으나 더글라스는 고까워하는 기색 없이 경례를 받았다. 

평시의 태도는 방약무인하여도 전장에서의 오르피어스는 상관에게 절대 볼복하지 않는 군인이자 유능한 센티넬이었고, 더글라스에게는 그것이면 족했다.

"제가 꼭, 간곡히, 정말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뭔가?"

"얘랑 헤어지게 해 주세요."

영관급 장교들이 띄엄띄엄 앉아 있어 바짝 얼어 있는 모니카를 엄지로 가리키자 그녀는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이 되었다.

"적어도 소령 달기 전까지 자네 밑에서 굴릴 예정인데?"

"얘 인생이 불쌍하지도 않으세요?”

"대럿 소위까지 못 견디고 떨어져 나간 뒤에 새로 부임할 자네의 새 부관 인생이 더 불쌍하네만.”

"에이, 참."

어투는 가벼웠지만 절대 허략해 주지 않을 것 같은 더글라스의 어조에 오르피어스는 툴툴거리며 까닥 목례하고는 자신의 자리로 가려다, 문득 지크하르트의 앞에서 발을 멈췄다.

"……뭘 그렇게 보냐?"

"어젯밤에 물어보려다가 상황이 안 좋아서 깜빡했는데, 음. 저기, 지크하르트."

"왜."

"넌 나랑 자는 거 싫어?"

모니카가 딸꾹질을 시작했고 더글라스마저도 어색하게 헛기침했고, 지크하르트는 의자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뭐, 뭐?! 야! 갑자기 뭐야!"

"왜 화를 내고 그래. 아니, 좀 그렇잖아. 넌 처음에 나랑 잤을 때도 그렇고, 그제 잤을 때도"

“야!!!!"

느닷없이 커진 외침에 단상의 주의가 탁 몰렸다. 더 있다가는 좌중 주시하에 어떤 소리를 지껄일지 심히 두려워진 지크하르트는 무작정 오르피어스의 귀를 잡아당기며 자리를 빠져나갔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대령님. 넌 닥치고 따라와!"

"아야야, 아파! 왜 그러는데 ! 말로 해 ! 말로! 놔! 진짜 아파!”

"닥치라고! 네가 말로 하면 들을 놈이냐!" 

"아프단 말이야!"

오르피어스의 비명 소리를 배경음으로 깐채 두 사람은 단상에서 멀어졌다. 더글라스가 두 사람을 일별하며 중얼 거렸다.

"사이가 좋군."

하마터면 상대가 누구라는 것도 잊고 '네에?!!!'하며 반문할 뻔하였던 모니카는 멈추지 않은 딸꾹질 덕분에 위기를 넘겼다.

오르피어스의 비명 소리는 인적 없는 건물 뒤에 가서야 멎었다. 소수의 사무원을 제외하고 비어 있어 훈련 소리도 아득하게 먼 본관 건물에 앙칼진 목소리가 높아졌다.

"귀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잖아! 안 그래도 무식하게 힘만 센 놈이 !”

"다른 사람들 다 듣는 데서 이상한 소리를 먼저 한 게 누군데! 이걸 확 두들겨 팰 수도 없고!”

새빨갛게 된 귓볼을 문지르면서도 제 잘못은 없다는 듯 외려 큰소리를 뻥뻥 치는 오르피어스를 보니 더 울화통이 터져 주먹을 치켜들었다. 

오르피어스가 움찔 눈을 감았다. 물론 진짜 팰 생각은 없었고 홧김에 올리기만 한 손이었지만 그의 반응에 조금 머리가 식었다. 

도망치지도, 피하지도, 막지도 않으며 눈만 감음으로써 대처하는 그 모습은 어딘가 비틀린 것처럼 낯설고 이상했다. 마치, 이런 식으로 쏟아지는 폭력에 익숙한 듯한.

"……제기랄."

괜스레 기분이 찝찝해져 손을 내렸다. 짜증이 나서 담배를 입에 물고 성냥을 찾고 있는데 오르피어스가 힐끔 눈을 떴다.

"안 때려?"

"팬다고 뭘 잘못했는지 알아 듣냐, 네가?" 

"내가 뭘 어쨌다구."

끝까지 사과의 ㅅ는 꺼내지도 않는다. 허기사 고분고분히 사과할 놈이었다면 처음부터 미상한 소리를 지껄이지도 않았을 테지. 그 와중에 성냥이 발견되지 않아 짜증은 신경질로 확장되었다.

"이놈의 성냥은 꼭 필요할 때 안 보인다니까! 라이터를 사든가 해야지!"

짜증을 씹다 오르피어스를 돌아보았다. 여기에 움직이는 인간 라미터가 있지 않은가.

"담배 끊은 사람 앞에서 꼭 담배 피워야겠어?"

그는 새침하게 불평하는 오르피어스의 앞에 담배를 쥔 손을 내밀었다. 동그래진 오르피어스의 눈동자가 내려왔다.

"야. 라이터. 딴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불이나 붙여."

"라이, 잠만. 사람을 뭐라고 부르는 거야?”

"라이터가 싫냐? 알았다. 성냥. 불 붙이라고."

"내 성격도 나쁘지만 너도 만만치 않은 거 같아."

오르피어스가 깨죽거리며 검지를 담배 끝에 문지르듯이 스쳤다. 선명한 주홈색의 볼꽃이 튀며 하얀 연기가 흐늘 흐늘 허공으로 을라갔다. 

지크하르트는 깊게 들미켠 연기를 밸었다. 담배 연기를 피해서 멀찍히 도망치는 놈 앞에서 피우니 더 꿀맛이었다.

"여기는 사람도 없으니 들어줄 데니까 말해봐 라이터. 너랑 자는 게 싫으니 좋으니 하는 얘기는 어째서 갑자기 꺼내는 건데?”

"나랑 자고 난 다음날에는 꼭 어퍼 돌덤 거리에 여자 사러 갔잖아. 싫어서 그런 게 아니면 뭐냐구."

"뭐? 그걸네가 어떻게 알……"

어떻게 알았느냐고 내 뒷조사라도 하는 거냐고 언성을 높일 뻔하였던 지크하르트는 자답을 찾아냈다.

"마, 맞다. 경호하는 사람들 있지."

엠마를 만나러 간 날에도 경호원들은 멀찍히 따라붙었었다. 경호라는 본연의 목적을 잘 수행하고 있는지는 신경 쓰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오르피어스의 귀에 자신의 행적이 흘러들어가긴 한 것 같다. 

납득이 가지 않는 건 아니였다. 경호팀의 명령 체계가 어떠한지 명확히 아는 건 아니지만 직속보좌관인 유안은 파악하고 있을 테고, 대화하던 중에 흘릴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자신의 사사로운 이야기가 오간다는 건 언짢지 않았다. 미혼인 그가 여자를 산다는 건 비밀로 숨길만 한 내용도 아니었던 데다, 애초에 행적을 감추려면 경호팀을 따돌렸을 것이다.

"어퍼 돌덤 거리에서 만나는 여자는 엠마라고 하는데, 엠마는 단순한 창부가 마니라 옛날부터 나와…… 에잇, 너랑 왜 이런 얘기까지 해야 하냐."

어쩐지 변명 비슷한 모양새가 되었기에 지크하르트는 말을 되삼켰다.

"아무튼지간에 내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네가 무슨 상관이 있어서 궁금한 건데?" 

오르피어스가 슬며시 시선을 내깔았다.

“……만져도 된다구."

"엉?"

"나랑 자는 게 그 정도로 싫으면, 평소에 스킨십해. 어느 정도 접촉이 있으면 섹스까지 해야 하는 텀은 길어지잖아."

"어깨 한 번 만진 걸로도 지랄하던 놈이 뭔 소리야? 네가 언제부터 남 기분을 신경 썼다고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러냐. 죽을 땐가?"

쓸데없는 생각으로 기력 쓰지 말라고 충고까지 해 주었으나 오르피어스는 되레 얼굴을 붉혔다.

"싫은 걸 억지로 하고 있을 까봐 걱정돼서 하는 말인데 무슨 대답이 그래?”

"부상을 당하는 것도 아닌데 네가 왜 날 걱정해? 섹스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한다고 사람 안 죽으니까 신경 꺼.”

지크하르트로서는 당연한 의문이었다. 저놈과 내가 언제부터 서로 걱정씩이나 하는 살갑고 다정한 관계였단 말인가.

"어,그, 그건..."

오르피어스가 우물거리던 입술을 닫으며 뺨을 더 붉혔다. 몇 호흐 뒤에 이어진 설명은 매우 가관이었다.

"음, 어……. 그게, 그러니까, 그렇잖아. 억지로 자꾸 하다 보면 꼭 필요할 때에 네가 안 설 수도 있, 는 거고……"

"……참으로 허리하학적인 이유라서 명쾌하긴 한데."

우물쭈물 엉성하게 이어진 말들이 진짜 이유인지 급조한 핑계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딱히 궁금하지도, 캐물을 필요성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싫으냐 좋으냐에 대한 대답은 해야 할 것 같았다. 놔두었다가는 쓸데없는데 소모하고 있는 의식이 어디까지 발을 뻗쳐 나갈지 모르고, 제멋대로 튕겨 나간 오르피어스를 상대하는 건 퍽 피곤한 일임은 겪지 않아도 뻔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담배를 구두굽에 비벼 끄고는 오르피어스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복잡하게 설명하는 것보다는 직접 보여주는 명확한 대답이 그도 이해하기 쉽고 뒤끝이 없을 것이다.

지크하르트는 영문을 알 수 없어 흔들리는 물색 눈동자를 보며 키스했다. 담배 냄새 싫어하는 놈이니 일말의 복수도 겸한 키스였다. 

혀를 깊이 섞어 밑바닥에 감긴 혓바닥을 희롱하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입술을 뗐다. 은색의 타액이 가늘게 늘어지다 끊어졌다.

싫으면 이러겠느냐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려던 입술이 멈칫 다물렸다. 오르피어스를 보는 지크하르트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졌다.

"……야, 저기. 오르피어스?"

목덜미를 안은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맥박이 지나치게 빠르다. 망연하리만큼 굳은 채 귓불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라 미동도 하지 않고 있던 오르피어스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지크하르트를 세게 밀어냈다.

얼결에 밀려 휘청휘청 뒷걸음질 친 등이 벽에 닿았다. 오르피어스가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며 주저앉았다. 드러난 목덜미가 아주 붉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것 같기도 했다.

'담배 피우다가 갑자기 키스했다고 화, 화났나?'

떨떠름한 심경이 된 지크하르트는 변명을 시도했다.

"담배 냄새는 고의가 아니 ……, 맞긴 한데, 미안하게 됐다."

대답이 없었다. 슬슬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화나는 걸 계속 참고 있을 놈은 절대 아닌데. 지크하르트는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쿵쿵쿵 빠르게 뛰던 맥동이 피부에 흠뻑 스며든 것 같았다.

설마.

손바닥을 꾹 쥐었다. 술에 취하였던 밤의 키스와 지금의 키스. 제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눈치 채지 못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과거에 험한 말을 들었던 경험 때문에 아닌 것이라 치부하고 확신하여 굳힌 심부에 설마 하는 의문이 물방울처럼 똑똑 떨어졌다.

부러 목소리를 굳히고 사무적으로 첨언했다.

'여튼 네가 걱정해야 할 건 없어. 이건 내 의무고, 관계하지 않으면 네가 죽는데도 방기할 만큼 무책임하지는 않으니까. 일부러 널 죽게 하지는 않을 거야."

마지막 음절까지 완전히 흩어지고 사라질 무렵에야 오르피어스가 일어났다. 볼은 상기되어 있었으나 아까보다는 한결 침착한 모습이었다.

"……먼저 갈게."

흔잣말에 가까운 인사는 그의 그림자에 닿지도 못하고 흐무러졌다. 잰걸음으로 멀어지는 뒷모습을 담는 지크하르 트의 눈매가 가늘어였다.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붉은 볼과 잘게 떨리는 눈가에 어린 동요는 실망이나 낙담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편의 당혹, 그리고 공포에 가까운 감정의 틈새.

확인을 해야 한다.

그의 기억으로는 근방에 전화박스가 있었다. 근처의 뒷문으로 들어가 사무원 한 명을 붙잡고 전화박스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녀에게는 이른 시간이라 미안했지만 물어봐야 할 게 있었다. 전화음이 한참을 울리고 졸린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종업원에게 통화를 부탁했다.

"엠마? 나야. 오전부터 미안한데 전화는 팬찮나?”

「자기야, 오늘 에약 손님 있으니까 연락하지 말했잖아. 그치만 자기니까 10분 정도라면 괜찮아」

같은 방에 손님이 있어 제대로 대화할 수 없는 모양이였다. 지크하르트는 삐르게 말을 이었다.

"궁금한 게 한 가지 있……, 아 그전에 내 경호팀이 널 만나러 가고 있는 것 알고 있던데 별 문제는 없고?"

「물론. 자기가 약혼할 때부터 처가에서 날 알고 있던걸? 자기 옆에서 당장 떨어지라고 무서운 사람이 찾아와서 협박이라도 찰까봐 얼마나 겁났는데」

"……아, 그래서 사라진 거였나. 저번에는 일 때문이라며?”

「겸사겸사. 할 말은 다 했어?」

"하나만 더 물으마.”

지크하르트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켰다. 모래를 씹어 삼키는 것처럼 목 안쪽이 버석거리며 메말랐다. 

"16년 전에, 기억나지?" 

「당연하지. 자기랑 데이트한 건 안 잊는다니까」

"……그때, 그놈에 대한 것도? 예를 들어 표정이라든가 우리한데 한 말이라든가"

「글쎄, 사소한 일이니까 신경 안썼는걸?」 

"알았다. 방해해서 미안.끊는다"

「응. 나도 사랑해. 다음에 올 때 반지 사 준다는 약속 잊으면 안 돼」

엠마의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수화기를 탕 내려놓았다. 그는 전화박스를 떠나지도, 다른 행동을 취할 생각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끈질긴 손님인가 보지?”

전화를 끊고 등을 돌렸을 때 그녀는 서늘하게 굳었던 표정을 풀고 평소처럼 생글거리는 엠마로 돌아와 있었다.

“우리 자기가 다 그렇죠."

"몇 번째 자기인 게야?”

"한 다스의 마지막 번째 쯤?"

장난스럽게 웃으며 자리로 돌아온 엠마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도중에 끊어서 미안해요, 영감님. 어디까지 이야기하던 중이었죠?” 

"금액이었네. 열 장까지 가능하고 선수금으로 다섯 장 먼저 줌세." 

"작은 거요? 큰 건 아니겠죠?"

"제일 큰 거. 결과에 따라서 몇 장 더 얹을 수도 있네.”

"헤에. 어떤 의뢰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세게 나오는데요."

짙게 퍼지는 담배 연기 안쪽으로 엠마는 싱글싱글 웃었다. 중개자인 노인이 말한 조건이 꽤 드물게 날아오는 큰 건수였기에 그녀는 흔들림이 온전히 잡히지 않은 동요를 의뢰로 인한 놀라움이라고 가장할 수 있었다.

"대체 타깃이 어느 가문이길래 그래요? 자미넷? 보바라? 텐서워즈? 과트로우? 메넬시? 싱? 쉬미르놉? 이바? 펠부와? 칸?”

헤임의 문벌가와 무가를 줄줄이 읊는 그녀에게 노인은 번번히 고개를 내저었다.

"좀 더 배포 크게 놀아보게."

"……설마 벨포드에요?"

노인이 그제야 품에서 사진을 한 장 꺼내어 디밀었다. 엠마는 입술을 동글게 모으며 노인이 가지고 온 대박 건수에 대한 감상과 타깃에 대한 감상을 한마디로 표현 했다.

"와우."

오르피어스가 돌아오지 않았다. 지크하르트도 보이지 않았다.

연병장의 부대 근처로 내려간 후에도 모니카는 연신 단상을 힐끔거렸지만 두 사람의 모습은 없었다.

글래스팅 제 5보병 여단 37보병 연대에서 오르피어스가 이끄는 대대는, 다름 아닌 대대장이 오르피어스라는 점에서 다른 부대와 다르다. 

오르피어스가 가진 힘의 특성상 단독 임무를 수행하는 경우가 잦은 대대는 대대장의 돌출 행동에도 이골이 나있었다.

마지막 날까지 대대장이 없어도 훈련에는 전혀 지장이 없을 테고, 다른 장교들도 익숙하게 훈련을 이끌고 있지만 모니카는 괜스레 걱정되었다.

오르피어스는 부하들에게 평판이 나쁜 대장은 아니었다. 그는 사사로이 전공을 노리어 부대를 무리하게 진군하지 않으며, 정확히 자신이 부여 받은 임무만 수행하였다. 

항상 최전선에 섰기에 전투에서 실질적으로 부대를 지휘하는 사람은 안네 후야르민 대위였다.

평시에도 오르피어스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부대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았으므로 전투 이외의 모든 일은 위관들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일체 손을 대지 않았다. 

좋게 표현하면 자율적이고,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방기다. 하지만 이로 인해 빚어지는 책임까지 전가하지는 않았다. 

총독의 형제라는 배경을 등에 이고 있는 대대장의 뒤로 숨어 버린다는 비아냥거림도 있으나, 어차피 대대의 선에서 결정 할 수 있는 권한은 크게 없으니 큰 문제로 확대된 적은 없었다.

때때로는 자신에게 부하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인지라 살뜰하게 부하들을 배려하지는 않았지만 대신에 힐책도 없었다. 게다가 씀씀이가 후했다. 

회식이나 모임을 가질 때 넌지시 얘기하면 선선히 지갑을 통째로 넘겨주었고 모임에 동행도 하지 않았다. 

대대의 연병장에도 코끝 하나 보이지 않으니 아래에서 눈치 보지 않고 일하기에는 편했다. 

중간에 끼인 모니카는 죽어났지만 그녀의 희생으로 부대는 안식을 얻었다.

"소령님이 오늘 오시기는 했나?”

"아, 네. 대위님! 아까 카시야스 대령님과 말씀을 나누시러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하마터면 지크하르트에게 붙잡혀서 끝려갔다는 말을 할 뻔했던 모니카는 혀를 깨물었다. 안네 후야르민 대위는 크게 심려하지 않는 표정으로 끄덕였다. 

이 정도는 오르피어스의 아래에서 유다른 일도 아니었다.

"말씀 끝내시면 돌아오시겠지."

그녀는 훈련 사이에 휴식 중인 부하들 틈으로 걸어갔다. 안네의 말처럼 헤임으로 귀환할 차의 열쇠가 자신에게 있으니 도중에 사라지지는 않고 돌아오긴 할 테지만 못내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다. 

오르피어스는 일하기는 싫어하지만 한 번 맡은 일을 도중에 내팽개치지는 않았다. 오늘 일만 해도 슬렁슬렁 돌아와 부대가 보이는 연병장 구석의 그늘에서 늘어지게 누워있을 사람이었지 안 보이는 곳으로 도망칠 사람은 아니었다. 

타인에게는 우스운 사고의 흐름이지만 적어도 모니카에게는 이상한 불안의 근원이었다.

결국 모니카는 안네에게 오르피어스를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연병장을 벗어났다.

연대급이 훈련 중인 넓은 연병장을 지나 오르피어스가 지크하르트와 사라졌던 방향의 건물을 둘레둘레 둘러보았지만 좀체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묻고 물어 지크하르트가 전화박스의 위치를 물었다는 정보를 겨우 접하여 찾아가봤지만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의 대화가 길어진 것이라면 괜한 염려를 하였다고 사소한 해프닝으로 넘길 테지만, 이미 헤어진 지 한참 시간이 지났는데도 두 사람 다 보이지 않으니 걱정은 더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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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정 방황하는 사이에도 시간은 꽤 지났다. 길이 엇갈려 지나쳤거나 어쩌면 이미 부대로 돌아가 '바보 같이 어디를 헤집고 다니고 있는 거야'라며 태평하게 웃고 있을 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한 곳만 찾아봐야겠다고 운동실이 있는 별관으로 향하던 모니카의 뒷목에 불현듯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젊지만 충분히 전쟁을 경험한 참전 군인이었다. 모니카는 서늘하게 식은 것 같기도 하고 날카로운 바늘로 찌르는 것 같기도 한 이 불온한 공기의 흐름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살기다. 소리 나지 않게끔 신중하게 총을 빼내어 양손으로 쥐고 걸음을 옮겼다.

별관의 정문을 지나 벽에 등을 대고 서서히 거리를 좁혔다. 사람들이 잘 사용하지 않아 잡초가 듬성듬성 자라난 소로에 어긋난 두 쌍의 발자국이 있었다. 군화의 흔적이었다.

"크....!"

억눌린 신음이 희미하게 공기를 떨리게 했다. 상황을 파악할 단서는 적었지만 적어도 한 명 미상의 사람이 위급한 건 확실했다. 신음을 쫓아 단번에 거리를 좁혀 모퉁이를 돌아간 모니카의 입에서 날카로운 경악성이 터졌다.

크루엘라가 오르피어스의 목을 들어 올린 채 조르고 있었다.

「이건 내 의무고, 관계하지 않으면 네가 죽는데도 방기할 만큼 무책임하지는 않으니까」

대비하지 못한 키스로 콩닥거리며 뛰던 심장이 멈추고, 머리까지 오른 핏기가 일거에 싸악 가시는 감각이었다. 그래, 맞았다. 

자신에게 있어 지크하르트와의 관계는 고통이었지만 지크하르트에게는 의무였다. 자신은 그저 참기만 하면 되었다. 과거의 죄악으로부터 모르는 척 눈을 돌리고, 상처를 헤집어 덧내는 것과도 같은 그와의 접촉을 견디며, 그렇게 혼자만 인내하면 되었다. 

딱지가 앉은 상처를 튿고 피고름이 흐」 때까지 들쑤셔도 참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학대와 형의 가옥한 훈련에 길들여진 오르피어스에게 고통을 인내하는 건 아주 익숙했다.

하지만 지크하르트는.

오르피어스는 여태 단 한 번도  지크하르트의 처지에서 자신과의 관계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그의 무지를 방패 삼아 진실을 덮고 우롱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그에게 태연히 자신의 생명줄을 맡겼다. 자신으로 인하여 모든 걸 잃은 그에게 자신의 생명까지 짊어지게 했다.

이 얼마나 가증스럽고 이기적인 행태인가. 직시한 순간, 예리한 칼날이 등골을 깊게 가르고 얼음물이 끼얹어지는 것만 같았다.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오르피어스는 지크하르트로부터 도망쳤다. 그의 존재가 두려워 시선을 마주볼 수가 없고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공포스러워 회피하고 도망치고, 도망치고, 도망치게 되는 이것의 이름이 죄책감이라는 것을 오르피어스는 욕지기하면서 자각했다. 

심부가 칼로 난도질당하듯이 억지로 헤치고 갈기갈기 찢겨 아주 오랫동안 바닥에 함몰되어 있던 것을 떠오르게 하였다. 봉인당했던 죄책감이었다.

강보에서 우는 갓난아기까지 암살하여도, 살려 달라며 애원하는 민간인을 학살하여도, 천장에 매달린 조제의 다리가 눈앞에서 흔들리는 것을 보고도,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자네트의 사고를 조작하면서도 깨지지 못하였던 오랜된 저주에 금이 갔다.

오르피어스는 매우 어린 나이에 발현하였고 가족은 예건하지 못한 그의 힘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며, 그의 힘은 터무니없이 강대하였다. 

오르피어스의 발현으로 소박하지만 안온한 삶을 꾸리던 일가는 삽시간에 잿더미가 되었다. 가이드로서의 자신을 숨기고 있던 어머니는 화상으로 죽을 각오를 하고 간신히 어린 아들을 안정시켰으나 이는 지옥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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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센티넬의 발현과 모친인 가이드의 존재는 센티넬 센터를 통하여 체스터 벨포드의 귀에 들어갔다. 체스터가 소년의 나이를 역산하고 모친의 인상착의에서 그가 10년 전에 다음번의 가이드로 이용하기 위하여 감금하였지만 기어이 탈출하였던 여자의 존재를 떠올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추론이었다.

체스터는 오르피어스와 어머니만이 생존하여 입원한 병원을 방문했고 몸을 가놓 수 없는 중상임에도 필사적으로 아들을 감싸는 어머니를 살해하였다. 

이것은 쓸모 있는 도구다. 체스터는 그렇게 판단하였다. 허황되리만큼 어리고 허황되리만큼 강대하다. 머릿속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주무르고 조각한다면 그 어떠한 총칼보다 유용한 무기가 될 것이다. 그의 특기미자 취미는 세뇌였다.

「체스터 님의 능력은 그분과 같은 지배자의 위치가 아니라면 실효성이 떨어지죠. 반드시 시선을 마주봐야 한다는 조건도 까다롭고요. 실상 정신계에서 썩 상위 능력은 아닙니다. 똑같은 사생아이면서도 비할 바 없는 힘을 지닌 도련님을 질시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유안이 좀체 잠을 이루지 못하는 그를 달래주면서 씁쓸히 중얼거리기도 하였으나 의미없는 헛된 울림이었다. 행위의 근간이 열등감이든 유효성이든 체스터는 아들의 정신을 녹이고 틀에 붓고 굳히고 또다시 녹이기를 반복하였다.

오르피어스는 환상 속에서 무한히 어머니를 죽였다. 선악을 가듬하는 잣대가 깨어지고 조백이 짓뭉개졌으며 가부가 혼탁하게 뒤섞였다. 

오르피어스는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이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면 아버지에게 복종해야 함을 알았으며 자신의 힘을 자의로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정신에 또렷히 새겼다. 

그리고 숱한 사람에게 구타당하여 감정이 이지러져도 억제된 힘을 쓰지 않게 되었다. 그 무렵에는 육체와 정신의 경계가 혼미해져 고통을 감각하는 것이 육체인지 정신인지 구분할 수도 없었다.

「외람되지만 막내를 제게 선물로 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버님에 도움이 되도록 잘 길들여 보겠습니다」

아이릭이 정적을 성공적으로 제거하여 퍽 흡족하였던 체스터는 신뢰하는 장남에게 원하는 것을 말하라 일렀고, 아이릭은 오르피어스를 청했다.

소유권은 그렇게 넘어왔다. 오르피어스가 체스터가 바라는 목표로 굴러떨어지기 직전이였다.

「이것은 강요가 아니라 계약이다. 난 아버지처럼 네 정신을 지배하여 강제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나에게 따르고 복종해라. 그럼 난 네 아버지를 비롯한 모든 것으로부터 지켜주마」

훗날 유안에게 들었지만, 당시의 아이릭은 쿠데타를 천천히 준비 중이었고 하여 그를 필요로 하였다.

설사 명징한 정신이었다 하여도 어린 오르피어스가 또렷하게 이해하지 못했을 테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미릭은 정신이 아닌 육체를 가다듬기 위하여 혹독한 훈련을 시켰고 훈련의 일부를 담당하였던 작은 형 도젠은 난폭하게 그를 다루기는 하였으나 적어도 그는 더 이상 어머니를 죽이지 않았다.

레베카가 임시 가이드가 된 것도 그때였다.

살인에 쓰기 위하여 만든 도구에게 죄책감은 무가치하고 불필요한 것이다. 체스터는 처음으로 사람을 죽이고 몇 날 며칠 울며 괴로워하는 그의 머릿속에서 제일 먼저 죄책감을 거세하였다. 아이릭은 본인이 보편적인 감정을 이해 하지 못하는 사람이였기에 동생의 정신이 망가져 있다는 것도, 이를 치료해야 한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언제 체스터의 변덕으로 제거당할지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감에 젖어 있던 도젠은 사생아일지언정 친자인 오르피어스에게 이따금 비틀린 우월감과 열등감을 분출하였으며, 힐라리아는 오르피어스를 험오하였다. 

나오미와 유안, 엘빈은 그를 동정하고 보듬어주려 애썼지만 어디까지나 종이였고, 그들의 주인은 오르피어스가 아닌 아이릭이였다. 

레베카는 온화하였고 친자식처럼 사랑하였으나 벨포드라는 휘황한 이름자 이면의 그림자를 알지 못겠기에 온전히 그를 품지 못했다.

때때로 짜증과 매스꺼운 거부감으로 가슴에 파문을 일으키게는 하였으나 죄책감은 그렇게 오르피어스의 안에서 봉인되었고, 이제야 간신히 꽁꽁 짓누르고 있던 두꺼운 사슬과 자물쇠를 깨트렸다.

나는 여태 지크하르트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던 걸까. 그 하나의 문장만이 죄책과 죄악이라는 효예한 칼날을 세우고 내부를 진탕시켰다. 

오르피어스는 구토와 오열을 반복했다. 내가 괴롭고 힘들어서, 내가 모든 걸 앗아간 그를 마음에 품고, 품었다는 사실을 자꾸만 인식하게 하는 그와 맞부딪치는게 괴롭고 힘들어서 거리를 두어서는 안 되었다. 

그에게 먼저 속죄 해야 했다. 두려워서 속죄할 수 없으면 자신이 아니라 그를 위하여 거리를 두어야 했다. 피해자는 자신이 아니라 지크하르트였다.

'가야 해. 지크하르트에게 돌아가야 해'

돌아가서 그를 만나, 모든 것을 고백하고 사죄하여야겠다. 용서를 받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자신이 가져간 것이 너무나 컸다. 그는 지크하르트에게 단죄 받아야 했다.

비척비척 일어나려던 무릎은 힘없이 꺾였다. 눈물로 흠뻑 젖어 흐리고 뭉개진 시야로 움켜쥔 손등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오르피어스는 몇 번이고 벽을 후려쳤다. 

손등의 피부가 깨지고 붉은 핏방울이 스며올랐다. 그래도 떨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무서웠다. 지크하르트를 다시 만나야 하는 게 무서웠다. 

그를 만나, 자신의 죄악을 고하고, 그로하여 쏟아질 증오를 감내해야 하는 게 무서웠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한없이 역겹고 몸서리쳐졌다.

"허, 씨발. 재수가 없으려니."

문이 끼익 여닫히는 소리와 나직한 욕설이 동시에 섞여 떨어졌다. 건물 안으로 다시 들어가려던 크루엘라의 바짓단을 붙잡은 건 의식 없이 튀어나간 본능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붙잡은 오르피어스의 손목을 잘라내기라도 할 것 같은 험악한 기세로 쳐냈다.

"놔."

"난 조제에게---"

오르피어스는 엉금엉금 기다시피 크루엘라를 다시금 붙들었다. 험악하게 치뜬 그녀의 눈매 위로 허공에서 대롱거리던 조제의 다리가 보였다. 욕지기가 치밀었다. 가까스로 억누르며 힘겹게 단어를 뱉어냈다.

"조제에게 청혼했어. 며칠 후에 대답해 주기로 했는데 그 대답이 자살이었다구. 조제는 내가 죽인 거야? 내가 청혼해서? 방아들이지 못해서? 내가 청폰하지 않았으면 조제는 안 죽었을까? 응?”

"조제는!!”

크루엘라가 비명처럼 울부짖으며 멱살을 움켜쥐었다. 반쯤 쓰러져 있던 육체가 허공으로 주욱 당겨 올라갔다.

"네 청혼을 승낙했어. 나는 조제가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은 처음 봤어! 너무 가슴이 떨려서 네게 바로 대답하지도 못할 만큼 기뻐했단 말이다! 너에게 대답해 주겠다고 해서 내가 직접 데려다 주고 아파트 안에 들어가는 것까지 봤는데 몇 시간 후에 자기 집에서 시체로 발건된 이유를 뭐라고 생각해야 하지?! 널 만나기 직전까지 그 애가 자살할 원인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고!!”

꽉 죄인 목이 고통스러워 기침을 쿨럭쿨럭하며 듣던 오르피어스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그날 조제가 날 만나러 왔었어 ……?"

경악으로 물씬 젖은 눈동자는 이내 참람하게 가라앉으며 까맣게 흐려졌다. 이제야 상황이 맞아떨어진다. 오르피어스는 눈을 감았다.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또르륵 굴러떨어졌다.

"……나 때문에 죽은 게, 맞구나……."

벨포드으一!!

크루엘라의 외침은 단말마의 비명 같기도 하고, 단장의 고통 같기도 하고, 응축된 증오가 터져 나오는 것 같기도 하였다. 

멱살을 움켜쥐었던 손이 흉흉한 흉기가 되어 목을 졸랐다. 호흡이 꽉 막히고 폐가 옥죄였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허공에 뜬 다리가 바르작거리며 흔들리던 양손이 반사적으로 크루엘라의 손목을 움켜쥐었지만 거기에 오르피어스의 의지는 없었다. 

의식이 새빨갛게 멀어지고, 끔찍한 고통이 뇌를 두드리고, 틀어 막힌 숨이 몹시도 괴로웠지만 오르피어스는 저항하지 않았다. 

차라리 이대로 죽으면 지크하르트도 그가 부채처럼 평생을 짊어져야 할 자신의 목숨에서 해방되지 않을까. 시야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꽈득. 목뼈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였다.

“소령님!! 소령니이임!!!"

멈춰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소령님, 제발, 제발. 간곡하게 매달린 애원의 주인이 모니카였다는 것은 크루엘라의 손아귀에서 해방된 후에야 알았다. 

내팽겨쳐지자마자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산소에 폐가 찢어질 듯이 아프고 머릿속이 먹먹했다. 정신없이 기침하며 헉헉거리는 그의 앞을 크루엘라가 일그러진 걸음으로 짓쳐갔다.

"소령님. 괜찮으세요?"

얼른 치료를 받으러 가자면서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부축하는 모니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말을 하려 목소리를 밀어 올렸지만 목 안 쪽에서는 쌕쌕 갈라진 소리만이 거칠게 날뛰었다. 성대가 상한 모양이었다.

"피부도 찢어지셨으니 무리해서 말씀은 하지 마세요. 의무실까지 부축해드리겠습니다."

목을 문지른 손바닥에 피가 묻어났다. 크루엘라의 손가락이 파고들었던 것 같았다. 일으켜 세우려는 그녀에게 고개를 내저으며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글씨를 썼다. 사령부. 샬럿.

"사령부로 돌아가려면 너무 멀어요."

비밀. 조용히.

살해당할 뻔하였으면서도 더 이상 일을 확대하지 않겠다는 그의 태도가 모니카는 못내 이해되지 않는 듯하였으나 길게 추공하지 않고 수긍했다. 

그녀의 손수건으로 얼추 얼굴을 닦고 재킷을 여몄다. 주의 깊게 본다면 이상을 감지 할 터이지만 건물 쪽에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오르피어스는 모니카의 부축을 받아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고 차를 타 헤임의 사령부까지 무사히 돌아오는데 성공했다. 

모니카가 샬럿을 데려오겠다며 서둘러 주차장 밖으로 달려 나가는 뒷모습을 곁눈으로 흘리며 좌석에 몸을 깊이 기댔다. 너무 피로했다.

영문도 모르고 내려온 샬럿은 크게 놀라기는 하였으나 바로 치료해 주었다.

"목소리는 제대로 나오려면 몇 시간 쉬어야 할 겁니다. 치료비는 외상으로 달아뒤요."

옷을 뒤져 지갑을 꺼내려는 그에게 살럿은 고개를 내젓고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돌아갔다. 안달이 난 건 오히려 모니카였다. 

오르피어스와 크루엘라의 악연을 모르는 건 아니었으나 방금 전의 일은 단순한 위협이나 분노를 표출 하는 선을 넘어선 명백한 살인 미수였다. 

일반인인 그녀는 일대일의 격투에서 물리계 센티넬인 크루엘라를 이기지 못한다. 크루엘라가 자의로 오르피어스를 해방하지 않았으면 그는 필시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아파트로 운전하며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냐는 염려를 무시하며 눈을 감고 있자니 모니카도 곧 잠잠해였다. 그 뒤로는 침묵이었다. 시끄러운 한낮 시가지 특유의 활기가 철판 안쪽의 자동차까지 전달되고 있음에도 죽은 듯한 침묵의 무게만이 내려앉았다.

"들어가십시오. 소령님."

그를 바래다준 모니카의 인사가 일순간 흔들었을 뿐, 침묵은 그림자처럼 오르피어스의 꼬리에 길게 끌렸다. 휘청 휘청 4층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었다. 밖은 여전히 훤했고, 시끄러웠으며, 활력이 있었다.

오르피어스는 소파에 앉았다. 체중이 실린 소파가 삐걱거리며 신음했다. 기다리고 있으면 지크하르트가 귀가할 것이다. 다쳤다는 핑계로 지크하르트를 찾으러 가지 못했다. 

오르피어스는 일 각이라도 그와 만나는 걸 미루고자 하는 자신을 부정하지 않았다. 끝까지 비겁하고, 추했다.

망연히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는 시간미 그를 비껴갔다. 창에서 비쳐드는 햇살이 서서히 기울어지며 그림자가 길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보도를 울렸다. 이윽고 어둑한 저녁놀이 사방으로 깔리고 가로등이 하나둘 켜졌다. 

달칵.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에 오르피어스는 퍼뜩 시선을 올렸다. 끼이, 경첩이 마찰하고 한두 번의 발 걸음소리 이후 다시 닫혔다. 자물쇠가 달칵 잠겼다. 고른 걸음걸이가 뚜벅뚜벅 그를 향했다. 

많은 상념이 가득 차올라 되레 무념히 비어 있던 뇌리가 전류를 맞은 듯 경직했다. 소파에 늘어뜨린 손이 바들바들 경련했다.

"지...."

지크하르트, 라고 부르려던 목소리는 칼칼하게 갈라진 채 먹혔다. 잔기침을 하는 그의 앞으로 지크하르트가 걸어 왔다. 희미하게 비껴드는 가로등의 불빛만이 광원인 방에서는 지크하르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지크하르트는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평범하게 인사하며 시작을 하든 사죄하며 시작을 하든 화두들 떼어야 하는데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른 침이 깔끄러운 목 안으로 잔가시 덩어리처럼 넘어갔다. 

오르피어스는 목을 감싸면서 기침을 콜록였다. 말을 해야해. 말을 해야 하는데…….

"너, 나 좋아하냐?"

그 질문은, 예고 없이 튀어나온 놀라움만큼이나 냉랭하게 그의 머리를 후려쳤다. 아연히 달싹이기만 하던 입술은 어물어물 흐려지는 맥없는 대답밖에 흘리지 못했다.

"언제부터?”

"학교, 다닐 때부터……"

"하하."

지크하르트의 입술을 갈라 열며 튀어 나온 짤막한 웃음은 온전한 형태로 그려지지 못하고 퍼석퍼석 부스러졌다. 바닥에 부슬부슬 떨어져 쌓인, 웃음이라 칭하지도 못할 건조한 감정의 잔해가 날카롭게 찔러오는 것 같아 오르피어스는 발을 웅크렸다.

"난 널 이해할 수가 없다."

소파 앞의 테이블에, 지크하르트가 품에서 꺼낸 물건을 놓았다. 가로등의 불빛이 테이블 위에 기울어 있었다. 젊은 부부와 그들의 자녀가 시간 속에 멈춘 채 새겨진 하나의 사진. 호흡이 턱 틀어 막혔다. 검고 커다란 그림자가, 심장을 사납게 움켜쥐었다. 

그 혼자만이 어둠에 감춰두었다고 여겼던 끔찍한 과거가 일순간에 까발려져 현실로 내동댕이쳐졌다.

지크하르트가 얼굴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내 가족을 죽였으면서도 어떻게 날 좋아할 수 있지? 너, 나를 봤을 때부터 알고 있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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