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0)

2.

새벽빛이 스민 칼날이 날카로운 이를 세웠다. 검은색 매니큐어를 바른 손끝이 연인을 애무하듯 시린 백광을 더듬었다. 달칵하는 소리도 나지 않도록 조용히 열린 약통에서 백색 크림을 듬뿍 떠 칼날에 발랐다. 손가락에 묻은 크림을 어항에 넣어 닦았다. 물고기가 흰 배를 하늘로 향한 채 둥둥 떴다. 물기가 흠씬 젖은 가죽 장갑을 벗어 어항 옆에 정갈하게 정돈하곤 대거의 칼자루를 쥐었다. 효예한 빛이 크림을 머금어 둔탁하게 흐려진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자는 헝클어진 흑발을 가다듬을 생각도 않으며 무방비한 맨등을 노출하고 있었다. 팔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 하지만 신중함은 그녀의 신조였다. 머리칼에 가려진 경추를 겨냥하여 부러 인기척을 내며 나긋나긋하게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 한 걸음.

남자가 하품하며 그녀의 팔을 꺾어 대거를 떨구었다.

“적당히 해라, 엠마.”

“아이 참.”

엠마 윔므가 입술을 뾰족하게 모았다.

“저희 장사 좀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대령님 암살하려면 음부에 독약이라도 바르고 유혹하는 수밖에 없겠어요.”“끔찍한 소리하지 마. 그럼 너도 죽잖아.”

상상만으로도 치가 떨린다는 기색으로 지크하르트가 질색했다. 바닥에 떨어진 나이프를 주워주려던 그는 “코끼리도 한 방에 보낼 수 있는 독 묻었으니까 조심하세요.”란 말을 듣고는 전문가가 알아서 하도록 손을 거두었다.

“또 누가 나 죽이라고 했냐?”

“늘 그렇죠.”

나이프를 칼집에 갈무리한 엠마가 침대가에 비스듬히 앉은 지크하르트의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탄력성이 좋지 않은 싸구려 침대가 삐걱거렸다. 그리고 막 담배를 꺼내 입에 문 그에게 익숙한 손길로 불을 붙여 주었다. 지크하르트가 담배 연기를 길게 뱉으며 헤드에 기대었다. 밤늦게까지 혹사당한 침대가 위태로이 삐걱삐걱했다.

“이번엔 누군데?”

“안 돼요. 기업 비밀.”

냉정하게 자른 말투와는 다르게 옆에 비스듬히 따라 누운 그녀의 손이 가슴팍의 흉터와 복부를 만지작거렸다.

“대령님이 사령부의 은밀한 비밀을 알고 계시다면 제 이야기를 들으실 수 있을 텐데.”

“됐어. 알아 봤자 뭐 하냐. 내가 반격할 수 있는 것도 아니구만.” 

“어머, 요즘 시대에 정보는 곧 힘의 원천이라고요.”

나직한 속닥거림이 귓불을 간질였으나 지크하르트는 무시하고 담배만 빨아들였다. 그를 제거하려고 하는 세력이야 뻔하다. 적국, 혹은 국내의 정적. 전자라면 신경 쓸 것 없지만 후자라면 귀찮아진다. 힐라리아와 약혼하면서 그는 공공연히 벨포드의 세가 되었고, 벨포드는 적이 많았다.

짐작이 갈 만한 사람을 하나둘 씩 꼽아보다가 열 명째에서 포기하고 재떨이에 꽁초를 비볐다. 어차피 중요한 건 아니었다. 자신은 고작해야 일개 대령이다. 정치 싸움 따위 그의 머리 위에 있는 사람들이 할 테지.

침대 옆의 탁자에 아무렇게나 걸쳐진 옷을 주워 입고 있자니 뒤따라 일어난 엠마가 반쯤 열렸던 커튼을 젖혔다. 파랗게 밝아오는 이른 아침의 빛살이 그에게 쏟아졌다. 아침이 늦게 시작되는 창가는 여직 혼곤한 밤에 젖어 있다.

“조각상은 자연광 아래에서 봐야 제맛이죠.”

창틀에 등을 기대며 엠마가 깔깔거렸다.

“그나저나 대령님께 새 센티넬이 생겼다는 정보가 사실이었나 보네요. 어젯밤에는 어둑해서 제대로 못 뫘거든요.”

지크하르트는 셔츠에 팔을 꿰며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지난 십 여 년 간 머무르다 사라졌던 이름을 대신하여 다른 이의 존재가 그곳에 각인되어 있었다.

“소문 빠른데?”

“센티넬 한 명이 ? 물론 벨포드 소령님이시겠죠 ? 블로섬 광장에서 폭주했다면서요. 아까워라, 화목이 죄 탔을테니 내년 봄놀이는 하지 못할 거 아녜요? 여튼 위급한 순간 불속으로 뛰어들어서 그 센티넬을 진정시킨 대령님이 멋지게 양 팔로 안고 나왔다고 자자하다고요.”

“짐짝처림 메고 나왔는데 어디에서 왜곡된 거지?”

엠마가 키득거렸다.

“사람들은 낭만을 좋아하니까요.”

“세상의 낭만이 다 얼어죽었군.”

구시렁거리며 단추를 잠갔다. 오르피어스의 이름자는 곧 천 밑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일전에는 벨포드 가의 아가씨 때문에 아무도 대령님께 접근할 수가 없었잖아요. 죽느니만 못한 꼴이 된 마가렛 같은 경우도 있었으니까. 그러다 반년 전에 대령님이 홀몸이 되신 후에 노리던 애들이 참 많았는데 남자가 페어로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죽을 것처럼 실망하더라고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지크하르트는 처음으로 오르피어스의 활용 가치를 깨달았다. 그가 바라지 않는 관계 형성을 위해 다가오는 여자들을 가로막을 철벽이 된다면 기꺼이 오르피어스와 동침할 수 있었다.

“대신 남자들이 접근할 지도 모르죠.”

“놀리는 거 재밌냐?”

시들한 대꾸에 엠마가 “재밌죠, 그럼.”하고 받아쳤다.

“그래서 잠자리는 어땠어요? 두 분 다 남자는 처음이실 거 같은데. 벨포드 소령님도 여자 소문은 장난 아니셨잖아요. 하필이면 인기 많은 두 분이 페어가 되시다니 보는 눈이야 즐겁지만 여자 입장에서는 엄청난 손실이라고요.”

“……뭐, 처음…… 인가.”

건성으로 대답을 흘리며 무심코 그날 밤을 떠올렸다. 글쎄, 처음이었던 것 같지는 않지만. 처음이라기엔 꽤……. 혼잣말은 목 안으로 삼키고 그냥 어깨만 으쓱했다.

“후읏, 흐……. 앗!”

목을 그러안지도 못하고 어깨만 겨우 붙잡은 손등이 퍼들퍼들 떨렸다. 굵고 단단한 성기가 구멍을 들쑤실 때마다 머릿속에서 하얀 쾌감이 튀어 자지러지면서도 필사적으로 신음을 참는 오르피어스의 입술에 붉은 핏방울이 비쳤다.

허리를 들썩이며 거친 추삽질에 따라가려 애쓰는 그의 이마를 아이릭이 밀었다. 허벅지 위에 올라앉아 있던 오르피어스는 균형을 잡을 틈도 없이 그대로 침대로 쓰러졌다. 깊이 삽입된 성기가 움직임에 따라 내벽을 주욱 긁어 참았던 교성이 한 줄기 새었다.

“네가 움직여 봐라.”

아이릭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옆으로 벌린 허벅지 사이로 아이릭의 얼굴이 보였다. 드레스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고 바지 지퍼만 내렸을 뿐 의복을 갖춰 입은 그와는 다르게 적나라한 알몸인 자신의 치태에 수치스러워할 겨를도 없이 이를 사리물며 허리를 흔들었다.

“아! 으, 우윽……! 흑!!”

손아래에서 시트가 사정없이 구겨졌다. 가장 예민한 부분이 자극될 때마다 정신없이 울부짖으며 매달리고 싶어졌지만 그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들이었다. 아이릭이 부여하는 쾌감은 동시에 고통과 연결되어 있다.

“혀, 혀엉……. 만져, 도…… 아윽! 돼?”

일렁일렁 흩어지는 담배 연기 너머로 아이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들거리는 손이 제대로 자극받지 못한 채 꺼덕이고 있는 자신의 성기로 내려갔다. 쾌감이 한쪽에서만 부여되는 게 나을지, 양쪽에서 부여되는 게 나을지, 정신을 분산하기에 더 나은 방편을 오르피어스는 찾지 못했다.

「한 달 전의 나에게 넌 남자 것을 만지는 신세가 될 거라고 누가 말했다면 그 자식 목을 잡아 빼놨을 거다」

지크하르트는, 거부감이 있는 듯 몇 변을 주저했지만 결국 성기를 쥐고 훑으며 귓가에 키스했었다. 아, 최악의 방편이었다. 감각이 기억에 닿은 순간 끔찍하리만큼 강렬한 쾌락이 척추를 강타한다.

“그렇지.”

허덕이며 가파르게 절정으로 올라갈 즈음에, 방치하던 아이릭이 불현듯 허리를 숙였다. 땀 냄새와 얽혀 더욱 짙은 담배 냄새가 비강으로 훅 끼쳤다.

“여기는 몇 번이나 이름이 바뀌는 건가. 그야말로 지조를 모르는 창녀로군.”

노골적인 조소를 들어도 반론하지 못하고 짓씹은 신음만 흐리게 뱉던 입술에서 새된 비명이 숨 가쁘게 튀었다.

“아악! 악?!”

이름이 각인된, 바로 그 위의 맨살갗에 담뱃불이 지졌다.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예고 없는 통각이 피부를 뜨겁게 지지며 신경을 갉아먹었고 도망치지도 못하는 상체가 허우적거렸다. 반사적으로 세게 오그라진 항문 안쪽이 질척하게 젖는 느낌이 났다.

아이릭이 그제야 굵게 신음하며 담배를 뗐다. 헐떡거리는 오르피어스의 가슴과 배 언저리에도 뿌연 액체가 튀어 있었다. 토정하고 늘어진 성기에서 손이 주르륵 아래로 떨어졌다.

“흠. 이래도 아픈 걸 좋아하는 게 아닌가?”

삽입당하며 벌어진 그대로 훤히 드러난 사타구니에서 정액이 굼질굼질 흐르는 흔적을 가릴 여력도 없이 울음 섞인 호흡을 맥없이 토하기만 하던 오르피어스는 한참이 지나서야 어눌하게 부정하며 몸을 돌렸다.

“아냐……. 싫단 말이야…….”

그리고 고통인지 쾌감인지 모를 눈물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고는 비척비척 일어났다. “씻을래…….” 후들거리며 욕실로 걸어가는 마른 허벅지 안쪽으로 진득한 액체가 흘렀다.

잠시 뒷모습을 보던 아이릭은 물에 적신 수건으로 정사의 흔적을 닦아내고는 옷을 추슬러 입었다. 더러워진 수건은 침대에 던지고 바닥에 발을 디뎠다. 손가락 한 마디만큼 열린 창들 앞에서 나풀나풀 춤을 추는 커튼을 묶고 창을 모두 밀어 열었다. 바닥과 천장에 닿는 긴 창이 활짝 열리며 너른 시야를 텄다. 서늘하게 밀려오는 첫새벽의 바람은 정사로 인해 달아오른 몸에 적절했다.

씻고 나온 오르피어스는 평소의 기세로 돌아와 있었다.

“내가 콘돔은 꼭 써달랬잖아. 안에다 싸면 배 아프고 하루 종일 찝찝해서 불쾌해. 속도 안 좋아. 긁어낼 때 기분은 얼마나 더러운데. 그리고 내가 재떨이야? 남의 몸에 자꾸 담배 비벼 끄지 말라니까. 재떨이 없으면 내가 하나 사줘?”

잠자코 백자 재떨이를 가리켜 보이니 더 뾰로통한 얼굴이 된다. 아이릭은 자신이 낸 상처가 궁금해졌지만 단단히 여민 베스 가운 탓에 쇄골 아래는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필요할 때마다 새벽부터 호출도 하지 마. 난 콜걸이 아니라구.”

“오기 싫으면 안 와도 된다.”

오르피어스가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안 오면 화낼 거면서.”

그런 일로 화낸 적은 한 번도 없다, 라고 대꾸해 주려다가 자신의 부름을 오르피어스가 단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다는 것도 떠올렸다. 아이릭은 짧게 조소했다. 언제나 결과가 정해진 논쟁이다, 오르피어스와의 언행은.

복종 끝의 사소한 종알거림 정도는 허락하는 그는 너그러움을 약간 더 할애해 주기로 했다. 오르피어스와 오랜만에 갖는 정사도 만족스러웠고 아침의 상쾌한 공기도 기분 좋았다.

까닥까닥 손짓하니 불안한 눈으로 힐끔힐끔 훔쳐보면서도 얌전히 코앞까지 다가왔다. 어깨를 잡아 등을 돌리게 한 후 젖은 머리에 얹은 커다란 수건을 양손으로 들고 머리칼을 털어 주었다. 작게 튀는 물방울이 늦봄의 햇살 사이로 반짝거렸다. 가운에 감춰진 등이 퍼뜩 긴장하는 듯했다.

“아파트를 내놨다고 들었다. 이사할 참인가?”

“아니. 당분간은 호텔에서 지내려구. 호텔이 물리면 사무실에도 잠잘 공간은 있으니까.”

“혼자 살기 불편해서 그런 거라면 관사에 들어가지 않고?”

“관사가 더 불편해.”

“지크하르트가 있어서 불편한 거겠지.”

이변에는 확실히, 등이 굳었다.

아이릭은 등을 손으로 주욱 훑어 내리면 어떤 소리를 낼까 궁금해하며 재차 말을 이었다.

“마주칠까봐 두려우냐?”

대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침묵이 슬슬 지겨워진 그가 소리 없이 하품할 무렵이 되어서야 흐릿하게 꺾인 목소리가 망설이며 올라왔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데?”

“힐라리아가 알고 있는 모든 건 나도 알고 있다.” 

“형한테 숨기는 거 진짜 없었네, 누나는……. 형은 알고 있었으면서도 나와 지크하르트에게 페어가 되라는 명령을 한 거야?” 

오르피어스가 그의 손에서 수건을 빼앗듯이 낚아채고는 마르지 않은 머리칼을 건성으로 쓸어 넘겼다. 베스 가운도 벗고는 정리해 두었던 옷을 찾아서 걸쳤다. 바로 사령부로 등청할 예정이었던지라 물기가 남은 하얀 살갗은 이 내 검은 군복 아래로 감춰졌다.

아이릭이 새 담배를 꺼냈다.

“본가로 들어오지 그러나? 네가 쓰던 밥은 언제나 비어 있다.” 

“이 집구석에 들어오다니 내가 미쳤어?” 

“이 집구석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 대단히 실례되는 발언이로군.”

빠르게 옷을 챙겨 입던 오르피어스가 움찔했다. 벨트를 꿰는 손이 두어 번 헛손질했다.

“아니,뭐……. 나한테만 그렇다구.”

우물우물 변명 비슷한 소리를 중얼거린 그는 칼과 층은 손에 쥔 채 또 이야기를 섞을 새랴 후다닥 방을 나갔다.

짤막하게 인사하고 사라지려는 아우에게 아이릭은 한마디를 덧붙여주었다.

“지크하르트와는 잘 지내겠나?”

“응. 형보다 커.”

나가기 전에 록사나를 보고 가라는 말도 해 주었지만 문이 쾅 닫혀 들리기나 했을지 의문이다. 그렇지만 어련히 알아서 잘 만나겠거니 싶어 곧 신경을 끊었다.

다다닥 잰걸음으로 멀어진 발걸음소리는 또박또박 규칙적인 발걸음소리가 되어 돌아왔다. “유안입니다.” 인기척이 똑똑 노크했다.

“어라, 우리 귀여운 막내 도련님은 또 왜 저렇게 골이 나셨답니까?”

종이를 한 장 가지고 들어온 남자가 오르피어스가 사라진 복도쪽을 곁눈질하며 실소했다. 얼굴의 반 이상을 덮은 흉측한 화상흔에도 밝은 인상의 남자였다. 아이릭은 반 정도 남은 답배를 비벼 껐다.

“저 녀석이야 늘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마음에 안 들지. 넌 다시 웬 일로 돌아왔나?”

“아이릭님께 보고드릴 게 아니면 제가 새벽부터 쫓아오겠습니까.”

차분한 안부 인사였으나 오르피어스와 그가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극소수의 사람 중 하나이다 보니 평연한 인사가 평연하게 느껴지지를 않는다. 아이릭은 남자를 한 번 돌아보고는 암호문이 적힌 종이를 폈다.

“치료해 주라. 응?”

“안 됩니다. 저는 공기관 소속입니다. 사적인 용무로 오지 마십시오.”

“나도 공기관 소속인데 안 돼?”

“안 돼요.”

“나 아파아.”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여긴 군 의무실입니다. 훈련 중에 부상을 당하신 게 아니라면 사설 병원을 찾아가서 치료하십시오.”

“돈 줄게.”

그 한마디는 어떠한 설득이며 재촉보다 샬럿 애듀란의 입을 바로 다물게 하기에 충분했다. 구차하게 흥정할 것도 없이 오르피어스는 지갑째로 책상에 던졌고 그녀는 적당히 몇 장의 지폐를 꺼냈다. 한두 번 있는 거래가 아니었기에 굳이 서로 금액을 세세하게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오늘은 어딜 다치신 겁니까? 멍든 얼굴이요?”

“전신 다 치료해 줘.”

샬럿이 지갑에서 지폐를 세 장 더 가져갔다.

“전신이라고 막연하게 뭉뚱그리지 마시고 구체적인 부위와 증상을 말씀해 주십시오.”

“으음, 오늘 등청하던 중에 뒷골목 깡패들한테 끌려가서 윤간당하고 담배빵까지 당했어.”

“……얼굴 멍도 그래서 생긴 거고요?”

“응, 여기저기 맞았거든.” 

“오늘 아침에 생긴 멍 흔적이 아닌데요?” 

“엊그제도 끌려갔었어.”

솔직히 부상 입은 부위를 말해 줄 것이라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지만 최소한 아귀 맞는 거짓말이라도 해 주었으면 좋겠다.

“저니까 속아주는 겁니다.”하고 포기한 어조를 흘리며 오르피어스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녀가 힘을 일으킴에 따라 그의 전신을 우윳빛의 부드러운 백광이 쓸었다. 빛이 사라지자 누렇게 변색되어 가던 멍 자국도 깨끗이 본래의 피부로 돌아왔다.

“고마워. 센티넬은 치료계가 제일 편리하다니까.” 

“소령님 편리하시라고 발현한 힘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상처를 지정하지 않았기에 샬렷은 두 장의 지폐를 더 가져가고 지갑을 돌려주었다.

“앞으로는 조심하세요. 이 말씀만 벌써 몇 번째 드리는 것 같지만.”

“내가 안 다치면 네 부업이 없어지잖아. 솔직히 너도 내가 다치는 게 좋지? 내일도 윤간당할까?”

오르피어스가 의자에서 일어나며 가볍게 옷을 털었다. 샬럿이 지폐를 갈무리하며 눈매를 찌푸렸다.

“늘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니까 사람들이 소령님을 꺼려하는 거예요.”

“사랑받고 싶은 생각은 없는걸.”

오르피어스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의무실을 나왔다. 무어라 말을 이으려는 듯 샬럿이 입술을 달싹이긴 했지만 그는 이미 등을 돌린 후였고, 한 걸음 내딛었을 때는 그녀와의 대화도 잊었다.

사렁부 청사 3층의 개인 사무실로 돌아온 오르피어스는 벽거울 앞에 서서 재킷을 벗고 드레스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가슴에 붙인 거즈도 떼어냈다. 거즈에는 피와 고름이 약간 묻어났지만 피부는 매끈했다. 샬럿의 치료는 비싸지만 돈 값은 확실히 한다. 담담히 거울을 보던 시선이 살짝 일그러졌다.

Sieghard Casillas. 언젠가, 혀끝으로 핥았던 이름은 이제 그의 가슴에 새겨져 있다.

힐라리아 누나가 알게 되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서 불 같이 노할 상황인데. 힘겹게 고소하며 단추를 잠갔다. 손목으로 눈두덩을 아프리만큼 꾹꾹 눌러 비볐지만 망막에 박힌 지크하르트의 이름은 좀체 사라지질 않았다.

노크 소리가 똑똑 들려왔다. 없는 척 할까 싶었지만 지크하르트의 이름을 뇌리에서 떨쳐내려면 시답잖은 헛소리라도 하여 신경을 다른 곳으로 소모해야 할 것 같았다. 들어오라고 짤막하게 이른 오르피어스는 문이 열리자마자 후회했다. 지크하르트였다.

“옷 갈아입는 중이었냐?” 

“응, 뭐어.”

적당히 얼버무리는 투로 대꾸하고는 재킷을 밉고 목 끌까지 빈틈없이 잠갔다.

“할 말 있어?”

“그런 건 아닌데, 몸은 좀 괜찮으려나 싶어서.”

성큼성큼 오르피어스의 영역 안으로 들어온 지크하르트가 어깨를 어루만졌다. 새된 목소리가 치솟았다.

“뭐, 뭘 하는 거야!!”

깜짝 놀란 지크하르트의 손이 어깨에서 떨어졌다. 소리 지른 오르피어스보다 그가 더욱 대경한 얼굴이었다.

“뭘 하다니? 내가 네 가이드인데 당연하잖아.”

센티넬의 정서를 안정하기 위해서 가이드는 작은 접촉 면적이라도 꾸준히 센티넬과 접하는 것이 여러모로 효율적이었고, 또한 보편적인 방식이었다. 지크하르트 또한 손에 익은 방식이었으며, 좋든 싫든 가이드가 된 이상 수행해야 하는 의무라고 판단했다. 그의 말처럼 ‘당연한’ 행위였다.

오르피어스는 바로 입술을 뗐으나 자신의 목소리가 분노라기보다는 당혹감으로 젖어 있었음을 자각하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거울을 보고 옷매무시를 다듬는 척하며 급작스레 치솟은 감정을 가다듬었다. 이어 입술을 다시 뗐을 때는 평소의 나긋하고 여유 있는 어조를 회복했다.

“그야 나도 여자 가이드와는 자주 부대끼고 얼싸 안고 그랬지. 그렇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여자’였을 때잖아? 내가 왜 시커먼 사내자식이랑 비비적거리고 있어야 해?”

지크하르트는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어이가 없어서 침묵했다. 늘 느끼는 거지만, 늘 새삼스럽다. 자기 목숨이 달린 판국에 태평하게 남자람 접촉하기 싫다는 소리를 지껄이는 입이 저 입인가?

“너 말이야, 페어가 되라고 각하께 명령 받았을 때부터 자꾸 남자 남자 운운하는데 남자랑 처음 잔 것도 아니질 않냐? 왜 유독 남자라는 걸 걸고넘어지면서 사람 신경을…… 긁…… 는…….”

다소 거친 투로 시작하였던 음성은 오르피어스의 낯빛에 차츰차츰 수그러들었다. 욱 하는 심정에 입에서 나오는대로 던졌으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대개 어떠한 상황에서도 ‘넌 지껄여라, 난 내 말을 하련다’같은 천연덕스러움을 잃지 않는 그의 낯에서 표정이 사라지고 하얗게 핏기가 빠졌다.

실수다.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대다수의 단어들이 입술 밖으로 제멋대로 활개 치며 빠져나간 뒤였다. 첫 경험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면전에서 대놓고 퍼부었으니 뺨을 맞아도 할 말이 없다.

당황하여 애꿎은 입술만 깨물었다가, 사과하기 위해 다시 열었을 때였다.

오르피어스가 얼굴을 문지르며 평소처럼 웃었다.

“맞아, 네가 처음도 아니었고 이제 와서 몸뚱이 굴리는 게 별로 거리낄 것도 없거든. 단지 상대가 너라서 싫었던 것뿐이야.” 

“…….”

지크하르트는 말없이 시선 약간 아래쪽에 있는 오르피어스를 보았다. 진심이라기엔 무겁고 거짓이라기엔 가볍다. 물색의 눈동자가 옆으로 살짝 움직이는 듯하다가 직시했다. 눈자위가 미미하게 경련하였다고 여긴 건 자신의 착각일까.

어떻게 해야 할지 짧은 순간 고심하다, 진위는 차치하고 오르피어스가 평소와 같은 태도로 넘기려는 것 같아 응해주었다.

“아하, 그러셨어요? 네 가이드로 지목받은 사람이 하필이면 나라서 거참 미안하게 됐다.”

정답이었나. 눈에 보이지 않는 긴장이 슬금슬금 오르던 공기가 일순간에 완화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르피어스가 지크하르트의 팔뚝을 잡더니 등을 돌려 세웠다. 그리고 그의 등을 밀며 앞으로 걸어갔다.

“꼭 자야 할 것 같은 필요성이 생기면 내가 먼저 연락할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다른 때는 나한테 접근하지 말구.”

“얌전히 몸 씻고 네 부름만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으란 거냐?” 

“말귀 잘 알아듣네.”

기특하다는 듯이 끄덕끄덕하며 그를 완전히 사무실 밖으로 밀어냈다. 그러며 “잘 가, 안녕.”이라고 인사하던 오르피어스가 갑자기 귀를 쫑긋하더니 사무실로 들어가는 대신 냉큼 그의 팔짱을 끼며 친근한 척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뭔데.”

“좀 있어 봐.”

바람 불면 팔랑거리는 종잇장도 아니고 제 멋대로 팔랑팔랑 태도를 전환하는 꼴이 기가 막히기도 하였거니와 심각하게 생각했던 자신의 고민마저 후회될 지경이었다. 스멀스멀 짜증이 일어 팔을 빼내려 했지만 외려 그의 팔꿈치에 옆구리를 퍽 찔렸다. 

범인보다 오감이 예리한 센티넬의 감각을 지나 일반인보다는 예리하지만 센티넬보다는 뒤쳐지는 지크하르트의 감각에도 한발 늦게 인기척이 닿았다. 정갈하고 규칙적인 두 쌍의 발걸음. 체중이 많이 실린 건 아니니 여자다. 한 명은 군인으로서 훈련을 받은 사람이고, 한 명은 군인은 아닐지라도 특정 수준 이상의 훈련을 받은 사람. 전자라면 사령부에 비로 쓸어내도 모자랄 만큼 차고 넘치지만 후자는 아니었다. 군사훈련을 겸임하는 군무원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반듯했다.

해답은 바로 찾아왔다. 중년의 여성과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걸어오던 크루엘라의 낯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좋은 아침, 크루엘라.”

여전히 지크하르트의 어깨에 기댄 오르피어스가 상냥하게 인사했다. 지크하르트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너 이 새끼. 어째서 아침부터 대령님과……!”

성질이 확 치미는 대로 내뱉던 크루엘라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다급히 입을 다물었지만 입 밖으로 토해낸 말이 수습될 리는 만무했고, 잘못 말한 것으로 넘기기엔 그녀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크고 또렷했다.

오르피어스가 생글생글 아낌없이 미소하며 지그시 지크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아침이든 저녁이든 페어 두 명이 한 방에서 단 둘이 뮐 했을 것 같아? 으응? 정말 즐거웠지? 그치, 지크하…… 자기야.”

“너 돌았, 끅!”

등 뒤로 몰래 돌아간 오르피어스의 손이 엉덩이를 야무지게 꼬집었기에 지크하르트는 항변도 못하고 쓰라린 비명만 삼켰다. 거짓말임이 뻔히 보이는 유치한 작태였으나 그렇기에 정면으로 받아치기에도 애매한 형국이었다. 더불어 이 수준 낮은 도발이 크루엘라의 부글부글 꿇는 속에 기름을 부었음도 분명했다.

이 자식이 하는 말 무시하라고 대답해 주려다 한 번, 뭐 하는 거냐고 외치려다가 한 번 더 꼬집힌 지크하르트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사이에 부릅뜬 눈만 이글이글 태우던 크루엘라가 쌀쌀하게 등을 돌렸다. 그 와줌에도 지크하르트와 동행하였던 여인에게 인사를 잊지 않았음이 오르피어스와는 다르게 보편적인 양식이 머릿속에 박혀 있는 상식인이라고 지크하르트는 생각했다.

복도 모퉁이를 돌아 크루엘라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마자 오르피어스는 손을 풀었고, 간신히 해방된 지크하르트는 쭈그리고 앉아 엉덩이를 문질렀다. 눈물이 찔끔 나도록 아팟다. 분명히 멍이 들었을 거다.

“괜찮으십니까, 대령님?”

크루엘라와 동행하였던, 벨포드 총독의 일등비서관이자 그의 가이드인 나오미 메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입을 열면 죽는 소리가 나올 것 같았기에 지크하르트는 신경 쓰지 말라는 뜻에서 손을 내저었다.

아하하하!“

오르피어스가 박장대소했다.

“쟤 진짜 재밌다니까. 안 그래? 너도 웃겼지?”

“오르피어스 님은 여전하시군요.”

나오미가 쓰게 웃었다.

“형이 여전한데 내가 바뀔 일이 있겠어. 그보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기까지 형도 버려두고 혼자 온 거야? 그것도 크루엘라랑 다정하게.”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아이릭 님의 하명이었고,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다음 층에 볼일이 있다는 헬시터 소령님과 우연히 방향이 같았을 뿐입니다.”

나오미가 가방에서 얕팍한 서류 봉투를 꺼냈다. 총독의 전서라면 제삼자인 자신이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아 아구구 신음하며 허리를 폈지만 그가 자리를 피하기도 전에 오르피어스가 냉큼 봉인을 뜯었다. 허기사, 지크하르트가 배석하는 게 안 될 사안이었다면 나오미가 먼저 정중하게 부디 자리를 피해주십사 부탁하였을 것이다.

그리 긴 내용은 아니었는지 부스럭거리며 봉투클 뜯은 오르피어스는 단숨에 안의 내용을 읽었다. 그리고 잠깐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갸웃거리며 지크하르트의 주변을 한 바퀴 휘돌았다.

“……뭐하냐?”

“그냥.”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대답을 아무렇게나 툭 던지곤 봉투를 갈무리하여 품에 넣었다.

“형한테는 알아들었다고 전해. 첨언은 없었구?”

“없으셨습니다. 아이릭 님께는 말씀하신 대로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용무는 정말 그뿐이었는지 나오미는 그대로 물러났다. 또각또각 일정한 굽소리가 복도의 벽과 천장에 잘게 반향을 울리며 멀어져 갔다.

자신도 더 이상의 용건은 없으니 돌아갈까, 하다가 우두커니 옆에 서서 무언가 곰곰이 곱씹는 것 같은 오르피어스에게 툭 내질렀다.

“내 부하 적당히 괴롭혀라.”

“응?…… 아, 아아. 크루엘라?”

한 박자 늦게 생각의 늪에서 빠져 나온 오르피어스가 소리 높여 웃었다.

“괴롭히는 거 아냐. 정말 재미있다구.”

“뭐가 그렇게 재밌는데.”

“크루엘라가 날 당장에라도 죽일 것처럼 미워해서 마음껏 증오를 퍼붓기엔 현실을 잘 알고, 현실에 굴복하기에는 증오를 잊지 못해서 이도 저도 택하지 못한 채 물불소한 살기에 몸과 마음을 사르고 있는 게 너무 즐거워. 걔만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 나를 찢어버릴 것처럼 보는 눈동자가 얼마나 짜릿한데.”

“너 그렇게 살다간 언젠가 등 뒤에서 칼침 맞는다.”

진심이 섞인 충고였지만 오르피어스는 웃음기를 거두지 않았다.

“안 그래도 크루엘라가 유탄인 척 위장하여 날 죽이려고 했던 게 다섯 번은 넘어. 죽을 뻔한 적도 있었구.”

“군법회의 감이군.”

절로 한숨이 나왔다. 크루엘라가 용케도 전선에서 오르피어스와 손발을 맞춘다고 안심했더니, 몰래 죽이려 들었을 줄은. 결과적으로 판단하자면 크루엘라의 과오였지만 원인은 분명히 오르피어스에게 있었다.

“크루엘라와 조제 씨는 친자매보다도 각별한 사이라 들었다. 친구의 죽음에 분노하는 크루엘라를 조롱하는 건 옳지 못해. 네가 조제 씨를 살해한 게 아니라고 해도 친구가 급사한 그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려 주면 좋겠다.”

오르피어스가 흐응, 하고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부정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기도 한 소리를 길게 끌었다.

“내가 조제를 살해했다고 생각해?”

“조사 기록은 나도 열람했는데 완벽한 자살 현장이었다.”

“하지만 최초 발견자는 나야.”

오르피어스의 웃음이 깊어졌다. 동글동글 선한 인상의 눈매가 가늘게 접히어 웃음을 한 자락 머금는 표정이, 마치 새하얀 가면 같았다. 원만한 호선을 그리는 입술이 갈라졌다. 이어 흐르는 목소리는 지나치게 과장되고 부드러워 외려 버석버석하게 허공에서 흩어졌다.

“있지, 지크하르트. 만약에 네가 크루엘라 입장이었으면 어떻게 했을 거야? 날 죽일 거야?”

“나였다면 조제 씨가 자살을 선택하게끔 극단적으로 몰아세운 원인이 무엇인지, 네가 맞는지, 혹은 살해당했는지 스스로 납득할 수 있도록 필사적으로 조사했을 거다. 그리고 네가 어떠한 인간인지 직접 판단하기 위한 교우도 지속하겠지.”

여직 시큰한 아픔이 남은 엉덩이를 문지르며 대답해 주었다. 오르피어스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진짜 내가 맞다면?”

“똑같이 죽여서 복수했을걸. 달리 방법이 잇나? 난 범죄자가 살아남아서 남은 인생을 속죄하고 죄업을 치른다는 스토리는 안 좋아해. 내 손으로 처단하지 않으면 복수가 아냐.”

지크하르트의 시선이 그에게 돌아왔다.

“해서, 자살의 원인은 넌가? 혹은 직접 죽였나?”

오르피어스가 빙그레 미소했다. 언제나와 같이 한 템포 느린 한가로운 걸음이 사무실 안쪽으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웃음은 처음처럼 상냥했다.

“글세. 나도 그게 궁금해.”

코앞에서 문이 탕, 소리를 내며 단호히 닫혔다.

***

짐은 다 쌌다.

오르피어스는 여행 가방을 앞에 두고 멀거니 앉았다. 이삿짐이라고 해 봤자 옷가지와 세면도구, 록사나의 사진이 있는 앨범과 액자가 전부였다. 그러고도 가방에 공간이 남아 액자 틀이 상할까봐 신문지를 구겨 채웠다. 혹여나 빠진 게 있는지 집 안을 한 바퀴 돌고, 또 한 바퀴 돌았다. 그러고 나니 정말 할 일이 없어져 도로 여행가방 앞에 돌아와 앉았다.

집은 수년 간 사용하였던 그대로 그의 시야에 방치되어 있다. 가구도 장식도 소품도 일용품도 자네트가 마지막으로 쓰고 나간 흔적 그대로였다. 그는 심상하게 집 안을 둘러보았다. 커튼은 자네트가 바꾼 거였고 벽지는 자네트 이전의 가이드였던 캐롤이 다시 바르게 했었다. 아니, 마리아였던가. 둘 중 누구였는지 고민하던 오르피어스는 이내 접었다. 누구라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제 와서는 의미가 없기도 하고.

그의 집은 동거, 혹은 반동거하던 가이드가 바뀜에 따라 가이드의 취향대로 조금씩 바뀌었다. 골동품으로 장식된 적도 있었고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소품들이 현관부터 반긴 적도 있었다. 책장의 책이 결벽증이리만큼 순서대로 꽂힌 적도 있었고 세 마리의 강아지를 기른 적도 있었다.

다채로운 색상으로 덧칠되었던 그의 집이었지만 그의 색채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르피어스는 반드시 필요한 일용품을 제하고는 개인적인 물품을 구비하지 않았다. 그때그때 손에 잡히는 대로 사용하고, 쓰고, 버렸다.

아, 저것은 분명히 자네트의 취향이었다.

문득 일어나 시야의 구석을 기웃거렸던 축음기 옆의 냠녀 인형 한 쌍을 쥐었다. 금박과 큐빅이 번쩍번쩍 지나치게 치장되어 오히려 천박해 보이는 도자기 인형. 자네트는 평생을 슬럼가에서 살았기 때문인지 귀품을 분별하는 식견을 끝내 기르지 못했다. 가족과 여행을 다녀오더니 선물이랍시고 사온 것들은 소위 말해 여행객들을 등쳐먹기 딱 좋은 상술의 희생양들이었다.

자네트 사후 전혀 손을 대지 않아 뽀얗게 먼지가 앉은 인형을 도로 내려놓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벽감 옆에는 몇 변 켜지도 않은 바이올린 케이스가 있었다. 누구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의 가이드 중 한 명이었을 그녀는 피아노를 들이려고 그를 졸랐으나 그녀의 허영을 충족시켜 줄 만한 고품 피아노을 발견하지 못했다. 대신 산 것이 삼백 년 전의 명장 아무개 ― 오르피어스는 관심이 없어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 가 제작하였던 명기 바이올린이었다. 사기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마음대로 쓰라고 통장을 넘겨주었다. 교습 선생까지 고용하여 바이올린을 배웠던 그녀는 한 달이 지나기도 전에 진력을 냈다. 그 다음으로 옮겨 간 취미는 골프였고, 골프 연습에 다니기 시작 한 지 오래지 않아 사망했다.

“맞아.”

오르피어스는 손가락을 딱 튕겼다.

“셀리였지.”

바이올린이 진품인지는 감정 받지 않았지만 진품이든 위품이든 다음에 집에 들어올 사람이 알아서 처분할 것이다. 짐을 정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오르피어스는 싼 값에 아파트를 내놨다.

베란다의 박스에는 신문에 시클 기고하였던 캐롤이 쓰던 타이프라이터가 방치되어 있었다. 자네트가 버릴 거라고 치워두었는데 깜빡했던 모양이다. 잉크는 다 굳어 있었다. 의미 없이 자판을 탁탁 두드려보던 오르피어스는 평소에 관심도 없던 물건을 이것저것 살펴보고 있는 이유를 자각했다. 그는 퍽, 무료했다.

오르피어스는 취미가 없었다. 담배는 8년 전에 끊었고 술도 마시지 않았다. 제식 훈련 외의 운동은 하지 않았으며 사격 연습도 근무 시간에만 했다. 그 흔한 신문이며 책도 읽지 않았고 근래 유행하는 무성 영화도 데이트에서 여자가 제의하지 않으면 자의로 본 적이 없었다. 여가 시간에는 가만히 앉아서 쉬거나 잠을 자는 게 전부였지만 이가 소일거리라 칭하는 분류에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관심도, 흥미도 일절 없었다.

여자도 마찬가지였지만 접근하는 여자를 굳이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의 경험상 심심한 시간을 제일 효율적으로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여자와의 데이트였다. 쇼핑에 동행하면 한두 시간은 쉽게 날아갔고 저녁 식사 후 섹스까지 하면 하룻밤은 금방이었다. 그러다 자신에게 소홀히 한다는 이유로 여자가 화를 내면 다른 여자가 접근하곤 했다. 무어래도 벨포드라는 후광은 최적의 액세서리였으니까. 오르피어스는 자신의 외모도 여자들이 좋아할 법한 수려한 축에 들어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가이드와는 동거한 적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적도 있었다. 후자일 경우에도 며칠에 한 번씩은 그의 집에서 함께 묵곤 하였다. 대화를 시도하면 대화를 받아주었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도 그녀들이 문주하게 집 안을 오가거나 가만히 자신의 할 일을 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노라면 어느새 취침 시각이 되곤 했다.

캐롤, 아니면 셀리가 걸었을 벽시계를 보았다. 해가 져서 밖은 깜깜하지만 침대에 누울 시각은 아니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밥 안을 서성이다 자신이 좋아한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을 유일한 것을 떠올렸다.

여행 가방을 달칵달칵 열고 록사나의 사진들을 꺼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찍은 사진들을 정리한 앨범도, 사진을 하나씩 장식한 액자도 모두 그가 손수 고른 것들이었다. 늘 여자들의 지갑 대용으로 동행했던 가게에서 자신의 뜻으로 자신을 위해 직접 물건을 고른 건 처음이었다.

록사나는 사진 찍는 걸 아주 좋아했다. 사진의 대부분은 벨포드 본가의 앨범에 보관되어 있지만 오르피어스가 소지하고 있는 앨범도 벌써 두 권이었다. 강보에 싸여 빽빽 울기만 하던 아기 때부터 가장 최근에 가정교사와 함께 찍은 사진까지 록사나의 시간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수십, 수백 번을 보아 몇 페이지 사진의 어느 모서리에 흠집이 있는지, 인화할 때 자국이 생겼는지 외우고 있을 지경이지만 보아도 보아도 새롭고 지겹지 않았다. 불명확하게 흐려지고 퇴색되는 기억에 비하여 흑백일지언정 선명하게 각인되는 사진이란 건 굉장하구나, 하고 재삼 감탄했다. 지금은 죽고 없는 록사나의 친모도 여전히 사진에 남아 무뚝뚝한 얼굴로 빤히 바라다보았다.

액자는 총 여덟 개였다. 한 살 생일, 두 살 생일, 그리고 한 달 전의 일곱 살 생일에 이르기까지 해마다 기록된 록사나의 환한 미소가 기꺼웠다. 올해는 꼭 글자를 제대로 배울 거라고 다짐하는 록사나를 위해 플랩북 동화책을 선물해 주었다. 다음해 생일에는 뭘 사주는 게 좋을까 고민하는 건 해마다 제일 즐거운 일이었다.

그렇게 록사나의 사진을 테이블에 늘어놓고 하나씩 공들여 보다가 깜빡 선잠이 들었다. 오르피어스는 옆집 고양이가 앙칼스럽게 우는 소리에 깼다. 끝까지 수면을 방해할 소리인가 보다, 저 고양이는. 테이블에 엎드려서 불편하게 자느라 어깨가 뻐근하고 팔이 저렸기에 한동안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주인이 집을 비웠는지 고양이는 계속 울어댔다.

몸이 풀리자 사진을 다시 여행 가방에 정리했다. 시간은 이르지만 눈을 붙이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전에 저 고양이가 얌전해진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자기 전에 내일 입을 옷을 정돈하러 의자 등받이에 걸쳐 둔 재킷을 들어 올리자 종이봉투가 하나 팔랑 떨어졌다. 나오미 편으로 받았던 아이릭의 서한이었다. 오르피어스는 봉투를 열어 내용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적혀 있는 문구는 간단하다. 아이릭의 필체로 적힌 성경의 문구 세 줄을 눈으로 따라 읽으며 머릿속으로 암호 해석을 되짚었다. 글래스팅 군이 사용하는 군용암호가 아닌 벨포드에서 자체적으로 고안한 암호문은 하나의 정보를 명시했다.

가이드. 암살 기도. 최소 두 번.

다시 확인하여도 해석이 잘못된 건 아니다.

오르피어스는 손끝에서 발화하여 종이를 봉투와 함께 태웠다. 시커먼 재들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폭탄이 투하되어도 살아남을 것 같은 녀석이니 이제 와서 지크하르트의 걱정은 하지 않았다. 문제는 역시, 배후다.

“또 전쟁일까?”

짐짓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가벼운 어조로 중얼거려보았지만 기문은 딱히 나아지지 않았다. 외침이라면 상관없었다.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 상대는 적성국이고 정당성은 아군에게 있다. 시키는 대로 태우고, 폭파하고, 죽이면 그만이다. 무차별적인 살인이 정당한 명분으로 허용되는 무법의 땅에서 오르피어스는 자유로웠다. 누구를 죽여도 거리낌이 없었으며 죽은 이들을 기억할 필요도 없었다. 그의 손에 죽은 자들의 가족이 원망을 쏟아내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전은 다르다. 분리 독립이 허용되지 않는 이상 적군이든 아군이든 그들을 묶는 하나의 거대한 틀은 오시안 왕국이었다. 베아트리체 2세의 발밑에 무릎 꿇어 복종과 충정을 맹세하는 신민이었다. 내전은 공멸하지 않는 이상 반드시 종전하게 되어 있고 적당한 타협, 혹은 굴종이 끝나면 방금까지 피에 젖은 총칼을 맞대었던 이들이 다시금 하나 된 틀에 묶이게 된다는 것이 오르피어스는 역겨웠다.

암살은 더욱 싫었다. 차라리 일가를 몰살하는 게 낫지 타깃 하나만 처리하는 건 몸서리났다.

그런 의미에서 강박적이리만큼 무차별적으로 참초제근하려드는 아버지보다는 적절한 한 수로 최대의 반향을 이끌어내는 형에게 부림 받는 게 심적으로도 훨씬 안정되었다. 아이릭의 밑이었으니 지금까지 잘 버텼고 앞으로도 버틸 수 있을 테지만, 아버지의 밑에 계속 있었다면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며 살아있었을지나 의문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바란 것 또한 그것이었을 터다.

썰렁한 침대에 누워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던 오르피어스는 끝내 이불을 박찼다. 고양이 울음소리는 멎었지만 애매하게 선잠을 자다가 깨서 그런지 잠이 전혀 오지 않았다.

따뜻한 물에 샤워도 하고 우유도 데워 먹어 봤지만 별무소용이었다. 분주하게 움직였더니 오히려 잠이 더 달아나는 기분이라 텅 빈 우유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의자에서 일어났다. 차라리 밖에 나가서 주변이라도 둘러보며 걷는 게 나을 성 싶었다. 걷다가 피곤해져서 잠을 잘 수 있으면 좋고, 밤을 지새우게 되어도 지루한 집 안보다는 밖에 있는 편이 시간을 보내기에 수월할 것이다.

오시안 왕국은 세 지구가 동량으로서 지보하고, 또한 형성한다.

제도 입시니아, 남부 글래스팅 성, 북부 속령 뮈르달이 그것이다.

왕국의 역사와 거의 시기를 같이 하고 있는 세 지구는 지역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융화되지 못하고 물 위의 기름처럼, 또는 세 개의 단층처럼 서로를 견제하고 경계하였다. 세 지구의 오랜 알력은 오시안이 세계 제일의 군사 강국임에도 대국이 되지 못하는 원인이었다.

불과 수년 전에도 현왕 베아트리체 2세를 옹립하기 위한 내전의 불꽃이 글래스팅과 뮈르달에 튀었으며, 이 불꽃이 채 소화되기도 전에 일제키아 공화국과 전쟁이 발발하였다. 십 년 남짓한 기간에 한 차례의 쿠데타와 두 차례의 전란을 거친 글래스팅의 성도 헤임은 종전 후 반년이 지났지만 과거의 활기를 온전히 회복하지는 못했다.

주변에 썩 관심이 없는 오르피어스의 눈에도 번화함이 한풀 꺾였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다고 하여 과거의 헤임이 얼마나 번성하였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라 요구되면 ‘그냥 시끄러웠어.’라는 정도의 감상밖에 말하지 못하겠지만.

아파트에서 막 내려왔을 때는 옆을 지나가는 행인이나 깊어가는 밤거리에서 서서히 닫히는 가게 등을 둘레둘레 구경하며 걸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지겨워져 땅만 보고 발길이 닿는 대로 정처 없이 걸었다. 차가 지나가면 서고, 도로가 트이면 걷고, 행인이 부딪히면 비키기를 얼마나 하였을까, 문득 주위를 보니 낯선 공원 앞이었다.

시계를 가져 오지 않아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가늠하기 힘들었지만 거리에서 마주치는 취객이 하나둘 늘어나고 거리에 불을 밝히고 있는 상점이 유흥가뿐인 걸 보니 적어도 전차 운행은 종료되었을 시간이었다. 잠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

돌아가려고 해도 도중에 어디를 어떻게 꺾어서 여기까지 왔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고 슬슬 다리도 아파왔기에 하릴없이 공원으로 들어갔다. 야간 경비도 없고 썩 깔끔해 보이는 외관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벤치 정도는 있을 테니까.

야심한 시각의 공원은 조용했다. 벤치나 가로등 밑에 드문드문 홀로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인기척이 거의 없었다. 헤맬 필요도 없이 선객이 없는 벤치 중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았다. 가로등의 전구가 깨져 있어 빛은 들어오지 않았지만 어둠이 무서운 것도 아니고 공원을 감상할 이유도 없었으니 상관없었다. 봄과 여름 사이에 걸친 밤공기는 쌀쌀했지만 하룻밤을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벤치에 앉아 조금 뻐근한 무릎을 톡톡 두드리다가 그냥 드러누웠다. 하늘이 아주, 새까맣다. 인류는 밤의 어둠을 정복하고 있지만 밤은 여전히 밤이었다. 양을 헤아리는 기분으로 별을 헤아리면 잠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록사나에게 동화책을 읽어줄 때 보았던 별자리가 있는 것 같았다. 별자리에 관심이라고는 일절 없던 식견이 갑자기 풍부해 질리는 없었으므로 그저 애매한 판단일 따름이지만. 그러고 보니 어제 본가에 들렀을 때 록사나가 잠들어 있어 얼굴만 잠깐 보고 나온 게 아쉬웠다. 잠이 안 온다고 밤거리를 방황하는 대신 록사나를 만나러 갈 것을 잘못했다는 후회가 든다. 아이를 팔에 안고 눈을 감으면 마음이 푸근하게 풀려 평온한 잠이 찾아올 것이다. 잠이 들지 않아도 록사나의 얼굴을 밤새도록 볼 수 있다면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을 텐 데.

“이봐, 자넨 얼마인가?”

오르피어스는 누운 그대로 눈동자만 돌렸다. 설마하니 자신에게 용건이 있으리라고는 여기지 않아 무시하였던 인기척 중의 하나가 그의 머리맡에 있었다. 두툼하게 오른 살집만큼이나 부유해 보이는 중년 남자였다.

느닷없이 다가와서 가격 운운하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눈썹만 깜빡거리고 있자니 남자가 헛기침을 큼큼했다.

“엉덩이까지 쓰게 해 주면 다섯 장 주마.”

아하. 그제야 상황이 이해가 갔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찬찬히 주변을 살폈다. 면면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눈에 띄는 벤치와 가로등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이 그가 막 공원에 들어왔을 때와 전부 동일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그가 누웠던 옆 벤치에 처음 있었던 사람은 분명히 남자였으니까. 화장실에서 스커트로 갈아입고 가발까지 쓴 게 아니라면.

홍등가를 장악하고 있는 조직들에 속하지 않는 창부들이 손님을 기다리는 공원이었다. 데이트하던 남녀가 춘정에 못 이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들으면서도 무시했던, 나무 뒤쪽의 격한 방사의 주인은 애인 관계가 아니라 손님과 창부일 테고. 어쩌다 굴러들어와도 이런 곳으로 굴러들어온 건지. 조금, 짜증이 났다.

그가 대답하지 않고 있자 흥정을 하는 거라고 판단했는지 남자가 손가락을 세 개 더 폈다.

“여덟 장 주지. 대신 두 번은 쓰게 해 줘야 한다.”

두 번 할 기운도 없어 보이는 주제에.‘

오르피어스는 두꺼운 반지로 치장한 남자의 두툼한 손가락을 빤히 보았다.

“아저씨. 콘돔 있어?”

“큼. 콘돔을 쓰겠다면 가격을 깍.”

“난 콘돔 안 쓰는 사람이랑은 안 해. 손가락 똑 꺾어서 분질러버리기 전에 얼른 가.”

길게 말을 섞기도 귀찮아 꺼지라며 훠이훠이 손을 내저었지만 이게 남자의 심기를 언짢게 한 모양이었다.

“얼굴 하나 반반하다고 건방지기 짝이 없군.”

남자의 언성이 높아지고 뒤로 손짓하자 공원 밖에 주차해 두었던 차에서 건장한 사내가 내렸다. 오르피어스는 엷게 하품했다. 실로 식상하리만큼 뻔한 전개다. 이렇게 지루한 전개인데 왜 잠은 안 오는 거지.

“강간하려고 하면 소리 지를 거야.”

물정 모르는 순진한 대꾸에 비웃음이 어렸던 남자의 낯은 태연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차츰 창백해졌다.

“경찰서에 가서도 소리 지를 거야. 중지의 반지, 쉬른슈트 대학 224회 졸업생들이 나눠 낀 거 맞지? 그렇다면 검지의 반지는 골든데이즈 클럽 회원들끼리 맞춘 게 뻔하고, 쉬른슈트 대학 골든데이즈 클럽 소속이면서 224회 졸업생이고, 히페 사의 올해 신차인 청남색 쿠린토를 타며, 수잔나의 수제 지팡이를 갖고 다니는 남자가 강간했다고 소리 지룰 거야.”

사자가 장식된 은제 지팡이 손잡이를 쥐고 부들부들 떨던 남자는 노여움을 당장 해소하는 것과 오르피어스의 입에서 자신에 대한 정보가 세어나가는 것 중 맹렬히 고민하는 듯하다 침을 바닥에 퉤 뱉으며 등을 돌렸다.

‘와. 침 뱉고 싶은 사람은 난데.’

오르피어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권력이나 재화라면 뒷일을 무마할 수 있을 테지만 저런 치들은 체면에 손상 가는 걸 매우 꺼린다. 그렇다고 하여 자신의 흠결을 완전히 덮을 위치는 되지 못하는 애매한 상류층. 생각하니 거의 다가오지도 않는 졸린 기운이 그나마 달아날 거 같았기에 머릿속을 비웠다.

아무래도 오늘 밤에 잠을 자긴 글렀다. 계속 있다가는 또 어떤 작자와 엮일지 모르고 홍등가와 가깝다면 근처에 호텔 정도는 있을 테니 거기에서 밤을 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방음이 거의 되지도 않을 얇은 벽면을 투과하는 신음 소리를 듣고 있으면 혼자 있는 것보다는 덜 심심하지 않을까.

또 다시 정처 없이 거리를 방황하기 시작한 오르피어스의 걸음은 이번에도 훼방꾼을 만났다. 차 한 대가 그와 속도를 맞추어 도로변에서 계속 따라오며 안쪽에서 무어라 부르는 기척이 있었다. 오르피어스는 돌아보지도 않고 시큰둥하게 외쳤다.

“남창 아니거든!”

차가 끼익 유턴하며 앞을 가로막았다. 전쟁터였으면 엔진을 폭파시켜버리는 건데. 오르피어스는 미간을 한껏 모으며 보닛 앞을 돌아가려 했다. 운전석이 열리고 화상흔의 남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유안 페인이었다.

“막내 도련님. 저라고요.”

오르피어스의 낯이 한껏 일그러졌다. 오늘은 힐라리아의 꿈을 꾼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일진이 안 좋지. 유안이 너스레를 떨었다.

“와우. 사람 앞에서 표정이 그게 뭡니까?”

“네 앞이니까 괜찮아.”

“그 나이 먹으셨으면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도 생글생글 웃을 수 있는 사교성은 기르십쇼. 암튼 타세요. 목적지까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일없어.”

문을 뻥 걷어차고 무시하려고 했지만 능청스럽게 꼬리를 끈 뒷말은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

“카시야스 대령님 만나러 여기까지 오신 거 아닙니까?”

“……지크하르트가, 왜?”

저자가 바라는 게 이거라는 걸 알면서도 오르피어스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고 유안은 시치미를 뚝 떼고 실실거리기만 했다. 그를 매섭게 노려본 오르피어스는 차체를 한 번 더 걷어차곤 조수석 문을 열었다.

“뽑은 지 일 년도 안 됐다고요. 절 닮아서 연약한 앱니다. 살살 때리세요.”

“시끄럽고, 지크하르트가 왜 나와?”

유안이 차를 출발했다.

“알고 오신 거 아녔습니까? 저~기 어퍼 돌덤 거리 안쪽 골목에 카시야스 대령님이 자주 찾아가시는 단골 창부가 있는데요.”

“……그 녀석이 만나는 창녀가 있었어?”

“네. 꽤 오래 됐는데 얘기는 못 들으신 모양입니다? 아, 힐라리아 아가씨와 약혼 관계가 성립되었을 때는 한 번도 창가에 걸음하지 않으셨으니까 오해는 하지 마십쇼.”

차를 운전하며 유안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어차피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면 타인의 귀에 들어가도 상관없는 사안이라는 뜻이기에 오르피어스도 잠자코 경청했다.

“엠마라고 하는 여자인데요, 처음 알게 된 건 힐라리아 아가씨가 약혼 전에 뒷조사를 시키셨을 때였습니다. 도련님도 아시다시피 대령님이 그간 여자들과 깊이 사귀지는 않으셨잖아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종종 만나는 여자가 있더라고요, 그것도 창녀가. 더 이상한 건 창녀 주제에 과거가 너무 깨끗하다는 점이었죠. 아가씨가 주목한 이상한 점은 당연히 전자였고 굉장히 노하셨습니다만, 다음날 정식으로 제가 찾아가기도 전에 이미 사라지고 없었어요. 아가씨는 천한 것이 분수를 알고 제 발로 도망쳤으니 과거의 실태는 너그러이 용서하겠다고 하셔서 제 조사도 거기에서 끝났습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헤임에서는 종적이 잡히질 않아서 저도 잊고 있었는데 아가씨가 돌아가신 후에 다시 나타난 모양입니다. 대령님과 재회한 것도 그 무렵인 거 같고요. 지금도 종종 만나십니다, 어제 아침에도 엠마의 가게에서 바로 사령부로 등청하셨는걸요?“

―어제 아침이라면, 바로.

시틋하게 턱을 괴고 있던 오르피어스의 주먹이 안으로 꾹 말렸다.

유안이 태평하게 말했다.

“도련님과 자고 난 바로 다음날이네요.”

“……네 입술을 자글자글 태우면 어떤 노린내가 날지 정말 궁금해.”

“적어도 삼 일은 굶을 만큼 식욕 떨어지는 냄새가 날 거니까 부디 궁금증은 거두어 주십쇼.”

차가 교차로에서 우회전하고는 속도를 더했다. 데려다 주겠다고 한 주제에 멋대로 행선지를 잡아 시가지로 접어 들고 있는지 도로의 차가 하나둘 늘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전 도련님을 뵀을 때 암살 기도도 있었으니 혹시 카시야스 대령님을 경호하러 오신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 뭡니까.”

“내가 걔를 왜 경호해. 나보다 더 쎈데.”

“아, 그건 그렇지만요. 대령님이 죽을 위험이라면 도련님이 먼저 시체가 되어서 바닥에 얌전히 누워있으실 테니 폭주 염려는 없네요.”

이 따위로 얘기하니까 사람들이 꺼려한다는 힐난을 오늘 아침에 들은 거 같기도 한데. 오르피어스는 설핏 짜증을f 내며 화제를 돌렸다.

“걔한테는 경호팀 없어?”

“요인 센티넬의 가이드들에게는 경호팀이 붙긴 합니다만 대령님께도 의미가 있을지는 의문이군요.”

그 말도 맞았다. 경호팀의 조력까지 빌려야할 상황이라면 지크하르트의 목숨은 이미 저승의 강을 건너기 직전일테고 그가 버티지 못한 상대를 대적하는 경호팀이라고 승산이 있는 건 아니니까.

“근데 넌 야밤에 태평하게 드라이브나 해? 나오미 지키러 안 가니? 지크하르트만 암살하려 한 건 아닐 거 아냐.”

“제가 누님을 왜 경호합니까, 저보다 더 센데.”

오르피어스가 가자미눈을 뜨거나 말거나 차는 주저 없이 밤거리를 질주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오늘 밤에는 모처럼 어울려 주십쇼. 애들은 죄 기숙학교 들어가 있고 마누라는 친정 부모님 결혼기념일이라 두 분 모시고 여행을 떠난 바람에 밤이 너무 길어서 외로워요.”

“너 보기 싫어서 영영 집을 나간 건 아니고?”

“실은 저도 마누라가 여행지에서 이혼장만 우편으로 보내는 게 아닐지 걱정입니다. 우편물 확인할 때마다 심장이 벌렁거린다니까요.”

“이런 칙칙한 아저씨가 뭐가 이쁘다고 내가 놀아줘야 하는 건데?”

“도련님은 언제까지고 이십대일 거 같으십니까? 도련님도 제 나이, 아니 5년만 지나보세요. 나잇살이 배에 붙어서 떨어지지도 않고 날씨가 궂은 날은 예보가 아니라 뼈마디가 쑤셔서 알게 된다니까요.”

무심코 배로 시선이 내려간 오르피어스의 옆에서 유안이 킬킬거리며 핸들을 돌렸다.

시체다. 이것은 시체다.

“…….”

“좋은 밤입니다.”

좋은 새벽이라고 쌀쌀맞게 정정해 주고 싶었지만 웃는 얼굴에 ― 비록 그 웃는 얼굴이 술에 취하여 불쾌할지라도 ― 침 뱉기는 뭣하여 지크하르트는 애매하게 웃어 주었다.

“아, 네……. 오랜만에 뵙습니다, 페인 중령. 많이 취하신 것 같군요.”

시체를 부축하고 문 앞에 선 유안이 별것 아닌 말에도 으하하 웃어젖혔다. 어딜 봐도 난 지금 매우 취하였소, 라고 얼굴에 붙여 놓은 듯하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남자였다. 총독 직속보좌관인 그와 지크하르트의 접점은 그리 교차하지 않았으니까. 공식 행사나 총독이 전선 시찰을 나왔을 때 몇 발자국 뒤에 서 있는 모습을 몇 번 본 것이 전부였다.

사람의 낯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지크하르트가 몇 달 전에 드문드문 봤었을 뿐인 유안을 잊지 않고 있었던 건 잊기 힘든 인상 탓이다. 젊은 시절 ? 이라고는 해도 그는 현재 마흔 전이라고 알고 있지만 ? 사고로 화상을 입었다던 흔적은 얼굴뿐만이 아니라 그의 반신을 강렬하게 할퀴고 지나갔다고 들었다.

즉, 새벽 3시에 술 마시고 들이닥칠 관계는 절대 아니라는 뜻이다.

썩 좋지 못한 예감이 들었기에 시체 쪽으로는 일절 눈길도 주지 않고 유안의 얼굴만을 똑바로 바라보며 애써 미소했다. 빨리 나가줬으면 좋겠다. 그 하나의 일념만을 담아 지크하르트는 옆 숙실까지 시끄러울 게 뻔한데도 집 안으로 들어오라는 예의상의 말도 하지 않고 현관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저희 도련님과 간만에 마시다 보니 기문이 좋아져서 말입니다.”

도련님이라니 무슨 망언이냐. 저건 시체인데.

“아직 해가 뜨려면 멀었으니 이제 2차 하러 가야죠. 같이 갈 친구도 관사에 살고 있어서 겸사겸사 찾아뵀습니다. 아, 대령님도 알고 있으실 거예요. 기갑여단의 자이넷 중령인데요.” 

현실을 열심히 부정 중인 지크하르트의 어깨가 살짝 움찔했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부어라 마셔라 2차를 가야 하니 이 귀찮은 짐짝, 아니 시체 처리를 부탁한다고 떠넘길 심산인 건 아니겠지.

“도련님 댁은 이사 준비 중이라 어수선하고, 본가로 모시고 갔다가는 도련님이 아침에 역정을 내실 테고, 저희 집은 마나님께서 여행 중이라 비어있으니 안 되고……. 대령님 댁 말고는 도통 마땅한 사람이 없질 뭡니까. 아시다시피 저희 도련님이 친구가 없으시잖아요. 하하하.”

“저도 친구 아닙니다.”

정색하여 부정했지만 술 취하여 제 내키는대로 떠벌리는 사람의 귀에는 제대로 입력되지 않은 모양이다.

술 냄새를 풀풀 풍기는 불콰한 낯 그대로 들이밀고 들어온 유안은 뻣뻣하게 서 있는 그에게 무작정 시체를 넘겼다. 움찔거리며 미약하게 저항하던 지크하르트도 도리 없이 오르피어스를 받아 부축했다. 술통에 빠져 죽은 시체의 뒤치다꺼리라니, 최악이다.

몸이 꽤 흔들거렸는데도 미동 하나 없이 늘어진 그는 평소와 비교하면 아주 놀라우리만큼 얌전하게 지크하르트의 어깨에 기댔, 쓰러졌다. 정말 죽은 거 아닌가, 이거.

“어쩌다가 이 녀석이 술을 이렇게 마셨습니까? 녀석은 술을 안 마시지 않습니까?”

오르피어스는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안 마시는 케이스였다. 아주 가끔 술을 입에 댈 때를 보면 주량도 제법 세고 알레르기가 있거나 건강이 좋지 못한 것도 아닌데 단지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시지 않았다. 오르피어스이니 당연하지만 당연한 문제는, 혼자 마시지 않는 게 아니라 분위기까지 와장창 박살내고 힁하니 사라진다는 점이었다.

사관학교 시절 기숙사에서 죽을 각오를 하고 몰래몰래 갖던 술자리도, 동기들끼리 가진 모임에서도, 회식 자리도, 전투가 끝난 후 한 모금씩 술을 나눠 마시던 때도, 그가 깨부수지 않은 분위기가 없었다. 왁자지껄한 술자리 특유의 소란에 어울리지 않고 가장자리에 앉아 물이나 음료 정도만 마시고 있는 그가 외로워 보였든, 안쓰러워 보였든, 혹은 본인이 술에 취하여 쓸데없는 오지랖이 생겼든 술잔을 들고 권유하러 가면 그 즉시 분위기는 파탄이 난다고 봐도 좋았다.

가만히 놔두면 먼저 시비는 걸지 않음을 숱한 경험으로 깨달은 사람들은 오르피어스를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고, 점차 따로 술자리에 부르지도 않게 되었다.

“요즘 날이 많이 서 있으신 거 같아서 억지로 드시게 했죠.”

술 마시라고 다그쳤겠거니, 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지크하르트는 이어지는 말에 살짝 식은땀을 흘렸다.

“입에 술병을 쑤셔 넣으면 아무리 도련님이시더라도 안마시고 배기시겠어요?”

술이 꼭뒤까지 올라 히히덕거리는 발언이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마터면 오르피어스가 급성 알코올 중독으로 진짜 시체가 될 뻔했다는 건 알았다.

오르피어스를 넘기고 한결 가뿐해진 기색이 된 유안이 어깨를 주물렀다. 도련님도 처리했으니 더 놀아야지, 라는 말은 듣지 않은 것으로 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밤중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마구잡이로 문을 쾅쾅 두드리고 시끄럽게 벨을 울려 잠을 깨운 무례한 장본인치고는 작별 인사가 정중했다. 유안은 가볍게 목례하고는 뒤를 돌아 나갔다.

“저희 도련님, 잘 부탁드립니다.”

그가 남기고 간 마지막 인사가 느직하게 꼬리를 끌며 사라졌다.

……어쨌든, 계속 부축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 이걸 치우든지 눕히든지 방치하든지 뭐든 하기는 해야 했다. 지크하르트는 왼팔로는 어깨에 감은 오르피어스의 팔을 붙잡고, 허리를 안은 오른팔로는 무너지지 않도록 추어올리며 침실로 걸어갔다. 전혀 움직일 낌새가 없는 그의 다리가 바닥에 질질 끌렸다.

침대에 내동댕이치려다 너그러이 마음을 고쳐먹고 조심스럽게 눕혀 주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안색마저 아주 새하얀 것이 간간이 호흡하는 기척이 없었다면 시체라고 다시금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술 마시면 빨갛게 되는 게 아니라 하얗게 되는 놈이었네.’

오르피어스에 대한 지식이 하나 생겼다. 전혀 쓸모는 없지만.

얼마나 퍼마셨는지 머리부터 술통에 거꾸로 처박기라도 한 양 술 냄새가 지독했으므로 일단은 창문을 열었다. 밤공기가 쌀쌀했지만 골이 지끈지끈 아플 정도로 독한 술 냄새보다는 나았다.

편하게 잘 수 있게 신발을 벗기고 벨트와 셔츠 단추 두어 개를 풀어주고 나니 더 해 줄 일은 없었다. 더 해 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하나밖에 없는 침대는 시체에게 빼앗겼으니 남은 건 거실의 소파였지만 문제는 그 소파가 2인용이라는 점이다.

굳이 그가 장신이라는 점을 들지 않아도 두 다리 뻗고 잠을 자기엔 여러모로 애로가 있는 사이즈였다. 침낭이야 있지만 야전도 아닌데 궁색하게 허리 쑤셔 가며 바닥에서 잠자는 건 싫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르피어스 때문이라면 더욱이나. 침대에서 좁게 부대낀다면 잠을 자지 못할 건 아니었으나 술 취한 사람 옆에서 눕는 건 절대 사양이었다.

이리저리 궁리하던 그는 1층 휴게실이 이 시간이면 비어 있을 거란 걸 떠올렸다. 이불과 베개만 갖고 가면 불편하나마 하룻밤을 보낼 수는 있을 것이다. 남이야 어떤 고민을 하든지 말든지 아주 편안하게 뻗어있는 시체를 노려보며 침대를 지나쳤다. 장롱은 침대 뒤편에 있었다.

“으음…….”

그때 갑자기 시체가 신음했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힘겹게 팔을 올려 부비는 것이 아무래도 막 잠에서 깬 시야에는 퍽이나 눈부신 모양이다. 가지가지 한다고 구시렁거리면서도 전등을 꺼주려 했다.

“……지크하르트?”

시체 주제에 말을 하다니.

무시하고 협탁에 있는 전등으로 내민 팔이 턱 붙잡혔다. 감긴 목소리가 침대로부터 웅얼웅얼 올라왔다.

“굼, 이야……?”

“나도 꿈이었으면 좋겠다. 이 자식아.”

그쯤에서 팔을 놓고 불을 끄고 잠이 들었으면 일말의 소란은 있었으되 비교적 순탄한 밤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만 했다. 적어도 왜 이때 팔을  뿌리치고 가지 않았는지 지크하르트는 몇 시간 후에도 뼈저린 후회를 했다.

“지크하르트으…….”

오르피어스는 그의 팔을 놓고 얌전히 잠드는 대신 나직이 그의 이름을 길게 부르며 외려 팔뚝을 더듬어 을라가, 목을 끌어안았다.

순간 등 뒤에 크루엘라라도 있는지 지크하르트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고, 곧 자신의 멍청함에 얼굴이 붉어졌다.

“거참, 술주정 고약한 놈이네.”

엿본 사람이 없음에 안도하면서도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부러 퉁명스럽게 내질렀다. 목에 엉긴 팔을 풀어내려고 했지만 술 취한 놈이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났는지, 아니면 술에 취했으니 막무가내로 용을 쓰는 건지 팔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엉겁결에 끌려가 오르피어스의 몸 위에 반쯤 엎드리게 되어 술 냄새에 직격당하고 있는 지크하르트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나 목 아프거든? 언제는 만지지 말라며? 안 떨어질 거냐?“

“……지 마아.”

“어?”

“누나랑, 결혼하지 마…….”

술에 취하여 뭉개진 발음으로 웅얼거리고 있는 탓에 잘못 들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지만 눈가에 흐리게 맺힌 눈물은 진짜였다. 처남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친, 아니 사관학교 동기가 누나와 결혼하지 말라며 울먹거리는 상황 앞에서 지크하르트는 매우 당황하기 시작했다.

“야, 야. 네 누나랑 결혼 안…… 모, 못했잖냐. 너도 알고 있을 거 아냐.”

“……안 돼. 결혼, 흑, 하면 안 돼애,”

“그러니까 하지 말고 자시고 안 했다니까. 맞아, 네가 아직 덜 취해서 그래! 빨리 자라! 코낸내!!”

당황하여 앞뒤도 안 맞는 소리를 되는 대로 내뱉고는 완력으로라도 엉겨 붙은 팔을 풀어내려 했지만 매달리고 있는 주정뱅이도 필사적미였다.

“안 해? 결혼 안 해? 누나 싫어?”

“아 놈! 안 했다고! 잠이나 자!”

“진짜? 진짜야?”

차라리 때려 눕혀서 기절시키는 게 내 정신건강을 위해서나 이놈이 술 매고 난 다음에 걷어찰 이불을 위해서나 이롭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게 아니라 즉시 행동에 옮겼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오르피어스가 목을 더 꽉 끌어안아 당기며 입을 맞추는 일은 없었을 데니까.

“……,”

처음에는 솔직히 술 냄새가 끝장나게 지독하다는 생각이 퍼뜩 먼저 들었다. 그리고 이어 닿는, 부드러운 입술. 목소리. 목소리. 목소리.

“지크하르트……. 지크하르트, 지크하르트…….”

지크하르트는, 인식이 주위에 미치게 되었을 때부터 수십 수백 수천 번은 들어왔을 자신의 이름이 이렇게까지나 달콤한 울림을 갖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지크하르트. 지크하르트. 나직이 속삭이는 이름이 끊임없이 피부를 간질이고 깃털처럼 나긋나긋한 입맞춤이 뺨으로, 콧등으로, 입술로, 떨어졌다.

얼굴이 붉어진 건 주정뱅이에게 화가 나서도 아니고 술 냄새에 취기가 오른 탓도 아니다. 지크하르트. 별 것 아닌 알파벳의 조합인 자신의 이름이 낯간지러울 만큼 달콤한 향내를 풍기면서 간질간질 피부를 더듬어 올랐다. 단어에 색이 있다면 분명 지금 자신의 이름은 솜사탕처럼 달큰하게 허공으로 둥실둥실 떠오르는 핑크색일 것이다.

“……오르피어스.”

허면 그의 이름은 어떤 색일까. 반사적으로 낮게 되흘린 이름에 그는 색을 지정하지 못하였지만 적어도 오르피어스에게는 선명한 색채로 닿았음이 확실했다. 창백하게 희었던 오르피어스의 낯이 새빨갛게 되었다고 느낀 순간, 키스가 파고들었으니까.

생각해 보면, 그와 몸을 섞은 적은 있어도 키스는 처음이었다. 의식적미든 무의식적이든 반나절을 한침대에서 뒹굴면서도 정작 키스는 하지 않았었다. 지크하르트 자신은 얼굴을 서로 맞대어 키스한다는 상황 자체가 어색하고 껄끄러워 피하였던 것이지만, 오르피어스는 무엇 때문미었을까. 자신과 같은 이유였다고 여기기엔 그의 입 안에 엉겨 드는 혀가, 숨결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후우, 하아……. 지크하르트…….”

혀끝에 걸린 이름은 여전히 달콤했다. 오르피어스가 잘게 숨을 헐떡이며 그의 이름을 부르고, 키스하고, 부르고, 키스했다. 침대가 출렁였다. 그를 침대로 쓰러트리고 허리 위에 앉은 오르피어스의 물색 눈동자에 뿌연 열기가 올랐다. 지크하르트는 조금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하고 고민하는 것도 잠시였다. 오르피어스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으며 키스를 퍼부었다. 달콤하게 부르던 이름이 신음이 되어 목 안으로 울렸다.

“네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중얼거려 보았지만 대답은 기대하지 않았다. 지크하르트는 낯간지러우리만큼 붉게 달아오른 자신의 이름을 덮기 위해 키스에 응하고, 키스했다.

맞닿은 입술에서 섞이는 호흡이 거칠었다. 그의 가슴 위에서 오르피어스가 엷게 신음하며 허리를 비틀었다. 지크하르트는 잠깐 숨을 삼켰다. 남자라면 모를 수가 없는 뚜렷한 흥분의 증거가 그곳에 있었다. 꼼지락거리는 듯하던 오르피어스가 자신의 허리를 감고 있는 손을 나란히 겹친 몸과 몸 사미로 당겼다. 손끝이 움찔했다. 지크하르트는 그가 무얼 말할지 알 수 있었다.

“지크하르, 트. 만져 줘……. 응……?”

오르피어스의 말마따나 짐승처럼 뒤엉켜서 정사 중이었을 때보다는 한결 맑은 정신이었기에 주춤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이내 지퍼를 열고 손을 밀어 넣었다.

“아응, 아, 아, 하으?”

속옷 위로 더듬었을 뿐인데도 오르피어스는 그의 어깨에 손톱을 세우며 신음했다. 답답하게 죄는 속옷을 젖히며 뜨겁게 맥박 치는 살덩이를 찬찬히 쥐었다. 키스만으로도 한껏 부풀어 오른 성기는 이미 선단이 미끈거렸다. 선액으로 젖은 요도 구멍을 단단한 손톱으로 자극하며 기둥을 훑었다. 확연한 비음이 섞인 신음이 높이 꺾였다.

“음, 응음! 좋아, 좋……! 으, 계속, 만져 줘. 흐웃.”

조르고 조르는 목소리에 대꾸하려 입술을 열었던 지크하르트는 자신의 숨소리도 오르피어스 못지않게 숨 가쁘다는 것만 자각하고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살과 살이 부대끼는 소리와 오르피어스의 가파른 신음만이 침실에 내리깔렸다. 그의 몸 위에서 오르피어스는 발긋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가장 민감한 부위에 전해지는 쾌감을 고스란히 내비치며 헐떡였다. 꿀꺽. 지크하르트는 자신이 마른 침을 삼키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우웃, 응, 으읏一 하악!”

오르피어스가 몸을 웅크리며 잘게 떨었다. 손바닥 안이 축축하게 젖었다. 땀에 젖은 이마를 목덜미에 부비는 오르피어스의 뒷머리를 쓸어주며 지크하르트도 그제야 참았던 숨을 거칠게 토했다. 사타구니가 묵직했다. 뒷머리를 안고 있던 손이 목덜미와 등골을 더듬으며 스르륵 미끄러졌다. 사정 후의 나른함으로 축 늘어져 있던 등줄기에 뻣뻣하게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지크하르트는 반쯤 풀어헤쳐진 바지 안쪽으로 손을 넣어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히윽, 하고 오르피어스가 허리를 들썩였다.

이대로 다리를 벌리고 삽입한다 한들 먼저 술 마신 사람도 오르피어스이고 먼저 붙잡은 사람도 오르피어스이고 먼저 키스한 사람도 오르피어스이고 먼저 유혹한 사람도 오르피어스이니 하등 거리낄 것이 없지만, 자는 사람을 어째서 수면강간하지 않았냐고 짱알거리는 누구와는 달리 지극히 상식인인 지크하르트는 먼저 동의를 구했다.

“넣도 되냐……?”

질문은 하였지만 오르피어스가 거부할 것이라는 예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엉덩이 구멍 근처로 슬슬 손가락을 움직이는데도 오르피어스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이에 준하는 행동을 하지도 않았다.

그는 지크하르트의 가슴에 엎드린 채 아무 말 없이 입술만 앙다물고 있었다. 느낌 때문인지 안색이 다시 창백하게 돌아간 것 같기도 하다. 아니다. 느낌이 아니었다. 진짜 창백하다. 무연가를 참고 있는지 미간에 주름을 가득 세운 채 입술을 움찔움찔 떨며……. 흥분이 싹 달아났다.

“야, 야! 잠깐만!! 너, 내 몸에 그거 하면 죽인다!!”

이건 그것이다. 분명히 그것이다.

지크하르트는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우선 입부터 틀어막고 화장실에 내던져 놓아야, 잠깐, 어느 손으로 입을 틀어막지? 공황에 빠진 지크하르트가 오르피어스의 정액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오른손과 엉덩이를 주무르고 있던 왼손 중 어느 쪽 손을 써야 하는지 맹렬하게 고민하는 그 찰나의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오르피어스는 그가 두려워하던 그것을 해치웠다.

가슴팍에, 허리에, 아주, 성대하게.

“…….”

몸도 속도 개운해진 오르피어스는 침대 끝으로 도르륵 굴러가 얌전히 잠들었고, 지크하르트는 허공을 둥실둥실 떠도는 술 냄새에 섞이기 시작한 다른 냄새를 애써 외면하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

센티넬 센터의 크리스 세브란 하사 데스크의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한 건 출근 후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이었다. 정각에 맞춰서 전화하다니 어지간히도 인내심 없는 사람이라는 불평을 하며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센티넬 센터 등록과입니다.”

「군무청 카시야스 대령이다. 등록 담당자였던 크리스 세브란 하사에게 상담할 내용이 있는데 연결해 주게」

드디어 을 것이 왔다. 크리스는 침을 꼴깍 삼켰다. 가능하다면 수화기를 놓고 모른척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지나치게 두꺼운 현실이라는 장벽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제가 세브란 하사입니다, 대령님. 어떤 일이십니까?”

「아, 그래. 마침 잘 됐군. 센티넬 이거 반품 안 되나?」

'이거'라고 했다. 이 사람도 아니고, 이거.

실소가 나을 법한 농담이었지만 수화기 건너편으로 들려오는 음성은 사뭇 진지하기 짝이 없다.

기실 센티넬 센터에서 오르피어스 벨포드와 지크하르트 카시야스 페어는 으뜸가는 화제였다.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만 아니었다면 몇 달만에 이 페어가 파국을 맞을지 판돈이 걸렸을 것이다. 지금도 대령님이라는 한마디로 혹시나 하여 옆 데스크의 직원이 힐끔힐끔 곁눈질 중이었다.

“어떠한 연유가 있으신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크리스는 대령님 마음 잘 압니다라고 위로를 해 주고 싶었다? 한번 각인한 센티넬과 가이드의 절연은 사망이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합니다.”

「반드시 죽어야만 하나? 죽이기 직…… 죽음 직전에서 정신이 죽음이라고 인식하게 되는 상황이 되어도 어려운가?」

분명히 죽이기 직전, 이라고 말하려다가 바꾼 게 맞을 것이다. 이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었나 싶어 식은땀마저 흘렀다.

오르피어스의 평판이 좋지 못한 것이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가이드들과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는데 첫 단추부터 잘못 꿴 것이 문제였을까. 정식 페어가 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건지. 지크하르트의 상황이야 딱했지만? 지크하르트가 실수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一 그가 할 수 있는 대답이야 정석적인 매뉴얼뿐이었다.

“확실히 숨이 끊어져야 합니다.”

「가이드나 센티넬 중 한 명의 능력이 소멸된다면?」

"능력의 소멸이 전례가 없던 건 아닙니다만 인위적으로 조절 가능한지의 여부는 아직 판별되지 않았습니다.“

「……단 하나의 방법도 없나?」

침통하게 울려온 목소리가 매우 심각했기에 크리스는 제가 잘못했다고 사과할 뻔했다.

"어, 없습니다.”

「빌어먹을!!」

전화는 욕설과 함께 일방적으로 탕 끊어졌다. 언짢기보다는 안쓰러울 지경이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방법이 없는 줄 알면서도 굳이 전화해서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했을까.

부부는 이혼이라도 할 수 있지 페어는 서로간에 혐의만 진득하게 증오처럼 교차해도 평생을 이고 지고 안고 가야 한다. 덕분에 벨포드 총독의 중매 능력은 아주 꽝이라는 수군거림까지 돌고 있을 정도다.

옆 데스크의 직원이 카시야스 대령이 맞으냐며 호기심을 드러냈지만 크리스는 대강 고개만 젖고는 전화 내역을 정리할 상담 철을 꺼냈다. 사사로운 사안에까지는 잘 지켜지지 않는 법률이긴 하였으나 군속 센티넬과 가이드의 상담 내용은 본래 3급 비밀이었다.

“빌어먹을!!”

지크하르트는 애꿎은 수화기를 내던지듯 놓고는 공중전화 박스에서 나왔다. 행여나 다른 이가 엿듣기라도 할까 사무실 전화를 쓰지도 못하고 밖까지 나와 아침부터 기분만 잡치고 있는 자신의 상황이 짜증났다. 정확히는, 새벽 3시부터 시작된 짜증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지만.

사워를 다섯 번이나 했는데도 몸에 냄새가 남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영 불쾌하다. 아슬아슬하게 상체라도 들어서 망정이지 자칫하다가는 얼굴에 토사물을 직격당할 뻔하지 않았던가. 제 침대처럼 태평하게 잘 자고 있는 놈을 창문 밖으로 집어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고 토사물이 쏟아진 침구와 옷가지를 둘둘 말아 욕실로 옮겨서 팔이 끊어지도록 빨았다. 전문 세탁인의 손을 거쳐야 하긴 하겠지만 당분간은 덮고 잘 수 있을 정도로 겨우 깨끗해졌나 싶었을 때는 창밖에서 해가 뜨고 있었다.

결국, 한숨도 못 잤다.

지크하르트는 짜증을 곱씹으며 근처 벤치에 앉았다. 엉거주춤하게 쪼그린 채 빨래한 탓에 혹사당했던 허리를 쭉 펴자 않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밤새도록 뻑뻑 문질러대느라 지금도 후들거리는 팔로 담배를 입에 물고 성냥을 탁탁 켰다. 성냥마저 불이 잘 붙지 않는다. 아침 식사도 못 하고 군복으로 갈아입고 있을 때에도 오르피어스는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등청이 급하지만 않았으면 그대로 들고 쓰레기통에 투하하고 왔을 것이다.

짜증의 원인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술 취한 녀석이 엉겨 붙으면서 결혼하지 말라고 매달리며 떨어트린 눈물도 못내 심란하게 속을 휘저었다. 도통 영문을 알 수 없으니 더 복잡했다. 분노를 담아 빨래하면서 곱씹어보았지만 이렇다 할 해답은 보이지 않았다.

보편적인 상황이었다면 저 녀석이 날 좋아했나, 라는 고민도 해 보았을 법하다. 허나 오르피어스와 자신 사이에 이러한 감정적 흐름이 절대 통용되지 않을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세상의 그 어느 사람이 좋아하는 이가 목숨을 걸고 자신을 구해 줬는데 첫 마디가 ‘너 미쳤어? 웬 헛짓거리야?’이겠는가. 아니지. 미건 호오의 감정을 떠나 도리를 아는 인간이라면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이었다.

“…….”

생각하다 보니 또 부아가 울컥 치밀었다. 워낙 예전의 일이기도 하고 떠올려 봤자 자신의 수명만 깎이는 느낌이라 잊자 잊자하고 의식 아래에 묻어 두었는데 낚싯줄에 엮이듯 또로록 기어올라오는 당시의 기억은 여전히 선명했다.

성냥을 탁탁 켜는 손이 더욱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뚝. 뚝. 뚝. 불이 붙기는커녕 성냥 세 개가 차례대로 꺾였다.

“젠장! 성냥까지 왜 이 모양이야!!”

성냥갑채로 구겨서 쓰레기통에 확 집어던진 그의 앞으로 라이터를 컨 손이 다가왔다.

“자.”

갑작스러운 불길에 잠깐 움찔한 지크하르트는 곧 고개 숙여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를 목 안까지 깊이 빨아들이자 갑갑하던 속이 일말이나마 트이는 착각이 든다. 오르피어스가 자신의 페어인 이상 담배를 끊을 날은 요원했다.

“고맙다.”

“라이터 하나 장만하래도.”

“크고 무거워서 귀찮아.”

“그렇긴 하지.”

자신의 담배에도 불을 붙이고 손바닥만 한 크기의 라이터를 주머니에 넣은 클라우드 에베르차가 옆자리에 앉았다. 클라우드는 검은색의 색유리로 만든 안경을 벗으며 등받이에 허리를 기댔다. 담배 연기 한 쌍이 나란히 허공으로 올라가며 흐물흐물 일렁였다. 아침 업무가 시작된 시각이라 위관 이하 장교들은 청사 내에 있어 사람들이 많이 오갈 수밖에 없는 전화박스 부근도 한적했다.

“소문 들었는데, 오르피어스의 가이드가 되었다고?”

“……물리고 싶지만 일단은.”

“진심으로 마음 깊이 애도를 표한다.”

묵직한 침음이 지크하르트의 입술에서 담배 연기와 함께 흘러 나왔다. 조롱이나 농담이라면 좋겠는데 클라우드의 말은 진정이었다. 입길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오르피어스의 소문과 관련한 출처는 대부분이 전쟁터에서 비롯된 것이라 임무라면 무표정하게 민간인까지 학살하는 잔인함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비정함 등이지만, 클라우드는 지크하르트의 사관학교 동기였다. 즉, 오르피어스의 인성도 아주 잘 알고 있다.

사관학교에서 성적이 뒤떨어져 유급하게 되는 생도는 더러 있지만 출석 일수 미달로 유급이 된 경우는 오르피어스가 전무후무했다. 성적까지 한없이 0점에 수렴하고 있었기에 다른 생도였다면 더 이상 볼 것도 없이 퇴학 처리가 되었을 것을 벨포드의 이름에 힘입어 유급으로 끝났다. 수업 시간에는 빠지지 않으면 책상에 엎어져 자고 있고, 훈련 시간에는 노상 아프다는 핑계로 땡땡이 치곤 그를 졸업이라도 시키기 위한 교사들의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벨포드 총독의 쿠데타에서 제법 화려한 군공을 세웠기에 기대하였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총독이 연차도 많이 지는 어린 막냇동생을 귀애하여 일부러 전공을 쌓을 수 있게 해 주었다는 의심까지 돌 정도였다.

교우 관계도 좋지 않아 선후배를 막론하고 잊을 만 하면 시비 거리가 터졌다. 이번에도 또한, 벨포드의 이름만 아니었다면 졸업까지 무탈하지 못하였으리라.

간신히 일 년 늦게 졸업 후 다른 동기들과는 달리 그는 즉시 내전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낙제를 거듭하던 학창 시절과는 대조적으로 전선에서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뛰었다. 적어도 재능은 진짜였다.

그 재능마저도, 천성으로 지니어야 할 사람을 잘못 선택하였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있지만.

‘조제 씨가 자살한 게 그 무렵이었던가.’

저주이니 하는 수군거림은 믿지 않았지만 유독 오르피어스의 가이드만이 하나씩 죽어 가는 것도 굉장히 이상한 일이긴 하였다.

“오르피어스와는 어때?”

당장에라도 절연하고 싶은 충동과는 다르게 현실적으로 그의 가이드는 현재 자신이라 복잡한 고심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지크하르트는 상념에서 빠져 나왔다. 평연히 안부를 묻는 여상스러운 질문에 억지로 가라앉힌 속이 다시금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그 자식이랑 잘 지낼 수 있을 거 같냐. 오늘 새벽에만 해도……. 됐다. 말을 말자.”

아침 댓바람부터 남의 몸에 토악질을 했다는 둥의 이야기를 들으면 클라우드의 기분도 잡칠 것이다. 클라우드가 반응한 부분은 예상외의 지점이었다.

“……오늘 새벽이라면 어제 오르피어스가 네 방에서 묵었던가?”

“음. 새벽 3시에 술떡이 돼서 페인 중령이랑 같이 왔는데……. 시끄러워서 깼냐? 미안. 페인 중령이 취해서 말이 많더라고.”

서로 바빠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클라우드의 숙실은 지크하르트의 바로 옆방이었다. 역시나 잠을 깨웠는가 싶어 사과하자 클라우드가 고개를 저었다.

“새벽에 술주정 부리는 사람들이야 가끔 있으니까 괜찮지. 그런데 지크하르트. 친구로서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클라우드의 목소리가 심각하게 내깔렸기에 지크하르트도 움찔하며 몸을 바로 했다.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입술에서 뗀 것도 물론이었다. 지크하르트보다 빠르게 담배를 태워 꽁초를 버린 클라우드가 어려운 말을 하는 중대한 낯으로 양 손을 깍지 꼈다.

“가이드든 애인이든 누굴 데려와서 떡 치는 건 상관 안 하겠는데, 제발……. 창문은 닫아줬으면 좋겠다. 부탁이야.”

지크하르트의 손에서 담배가 툭 떨어졌다.

바로 대답도 하지 못하고 어버버거리기만 하던 그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귓불이며 목덜미까지 잘 익은 홍시처럼 아주 새빨겠다.

“미, 미, 미안.”

“미안할 건 없고……. 앞으로만 주의해 다오.”

오르피어스와는 다르게 단어적인 의미 그대로 십년지기인 친구에게 이런 말까지 들었으니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클라우드가 그를 슬며시 외면하며 일하러 가 봐야겠다고 사라진 후에도 지크하르트는 한참 동안 벤치를 떠나지 못했다.

눈을 떴을 때 천장이 쏟아져 내리는 감각을 맛 본 건 자주 있었지만 아예 생판 모르는 천장으로 바뀐 건 처음이었다. 잠이 덜 깼거나 꿈을 꾸는 중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눈을 부릅뜨며 제정신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미색 벽지로 발린 천장이 은은한 꽃무늬로 바뀌는 일은 없었다.

자신에게 닥친 사태를 불신하며 일어나려던 오르피어스는 천장뿐만이 아니라 침대며 전등까지 모두 낯설다는 것을 재삼 확인하고는 안색이 조금 안 좋아졌다. 여긴 어디지. 호텔인가. 조금씩 생각을 더듬으며 펼쳤지만 깊이 고민을 할 수도 없었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속도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콕콕콕 쓰라렸다. 자주 겪는 증상은 아니지만 이유 정도는 그도 알고 있다. 숙취다.

“유아안……!”

칼칼하게 쉰 목소리로 원흉의 이름자 하나하나를 살벌하게 짓씹었다.

혹시 위험하게 될 지도 모르니까 안 마실 거라고 거부하는 그를 유안이 막무가내로 권하여 강제로 술나발을 불게 된 것까지는 기억났다. 술기운이 확 돌아서 유안과 함께 아이릭을 신랄하게 욕하며 술병을 더 딴 것도 기억이 났다. 그 뒤는 깜깜했다. 깜깜해야만 했다. 지크하르트에게 울면서 매달린 광경이 현실은 아니어야 하니까.

지나치게 현실감이 없었기에 꿈으로 쉽게 치부한 오르피어스는 낯선 침대에서 一 침대인데 시트도 깔려 있지 않았고 몸 위에 덮인 이불 한 채가 전부였다 一 일어나려다 신음하며 도로 널브러졌다. 끝내준다. 세상이 빙글빙글 뒤집히는 것도 모자라서 둔기가 머리를 쿵쿵 내려찍는 것 같았다.

머리를 싸매고 신음하다 옅은 수면에 슬쩍 담겼다. 정신이 들었을 때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머리는 조금 덜 아팠고 대신 배에서 꾸루룩하는 소리가 올라왔다. 위가 쓰라려 식욕은 전혀 당기지 않았지만 허기가 지는 것도 고역이었다.

유안을 조질 방법을 강구하며 가까스로 침대에서 몸을 떨어트린 그는 일으키자마자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정확히는, 바닥이 벌떡 일어나 그를 덮쳤다.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끙끙끙 않다가 따끔한 눈물이 맺힌 눈가를 손등으로 훔치며 힘겹게 기어갔다. 침대는 1인용이었으니 적어도 호텔 방은 아니고 이 소란이 있어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으니 타인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한낮치고는 밖도 조용하니 시가지 또한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훈련 받은 생존의 감각은 숙취로 골골 않는 중에도 주변의 정왕을 파악하게 했다. 서글픈 본성이라고 향방도 없는 욕을 하다, 욕의 화살을 모조리 유안에게 돌리며 다시 끙끙끙 기어 나갔다. 적어도 밖에 전화라도 있었으면.

거실은 가정집이라기에는 호델 같은 분위기였다. 세간은 갖추어져 있었으나 꼭 필요한 것들만 구비되어 있고 자질구레하고 불필요한, 그렇지만 한 곳에서 오래 머물며 자신의 집을 꾸미는데 사용하는 소품들이 거의 없다는 의미에서. 기껏해야 스탠드에 보관된 칼 네 자루가 전부였다. 그나마도 특색 없는 군도다. 골을 텅텅 튀게 하는 술의 바다에서 오르피어스는 베른하르트가 또 이혼해서 요즘은 관사에서 숙식하니 그놈 끌고 2차 가자고 한 유안의 말을 힘들게 주워냈다.

……그래서, 어디에 있는 거야. 이 화상은.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다행히 벽에 고정된 전화기가 있었다. 오르피어스는 세상이 무너지고 바닥이 자신을 끌어당기며 온몸에 척척 휘감기는 듯한 끔찍한 기분 속에 벽을 짚으며 무릎과 허리를 폈다. 전화와의 거리가 너무나 멀었다.

세 번의 헛손질 끝에 총독부 보좌관실과 연락은 닿았지만 젊은 보좌관은 술기운이 텁텁하게 남은 그의 목소리를 단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나 오르피어스, 라고……. 유안 이 자식…… 빨리 바꿔.”

「죄송합니다, 소령님. 페인 중령님은 오늘 병가를 내셨습니다」

“왜?”

「……술병이 나셨다고 하셨습니다」

망할 인간 같으니. 종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아마도 관사의 어딘가에 뻗어있긴 할 테지만.

알았다고 전화를 끊으려는 그에게 보좌관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아침에 함께 부탁하셔서 벨포드 소령님의 병가도 제가 군무청에 제출했습니다」

“……그것 참 고맙네.”

전화를 탕 끊은 오르피어스는 한참을 주저앉아 머리를 싸매고 있다가 비척비척 기어갔다. 물이라도 마셔야지 안 될 것 같다.

주인 모를 낯선 주방에 들어가 냉장고를 뒤졌다. 꿀물이나 숙취 해소 음식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지만 냉장고 안에 있는 건 정말 술과 물뿐이었다. 이 집 주인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와 맞먹을 정도로 집에서 음식 해 먹기를 귀찮아하는 것 같다. 하기사 관사에 있으면 식당 밥을 먹으면 되긴 하니.

물통을 거꾸로 들고 서늘한 물을 꿀꺽꿀꺽 들이키자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것 같기도 하고 위가 더 쓰라린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긍정적인 변화가 된 거라고 애써 믿으며 냉장고에 기댄 채 뻗었다가 도로 돌아가 잠이나 자자는 생각에 끙차 일어나 침실로 갔다. 기어 나왔을 때와는 다르게 구부정하긴 했지만 두 발로 문턱을 넘었으니 장족의 발전이었다.

센티넬의 오감은 일반인에 비하여 월등하게 날카롭다. 오르피어스는 침실로 들어서며, 나갈 때는 반대쪽에 있어 보지 못하였던 콘솔을 볼 수 있었다. 시든 꽃다발이 성의 없이 장식된 꽃병과 그 옆의 작은 액자도.

가느다란 웨이브가 있는 흑발을 대충 넘긴 불퉁한 얼굴의 소년과, 그를 몹시 닮은 남자와, 흑발을 틀어 몰린 여자와, 그녀에게 안겨 있는 소녀.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화목한 가족의 초상. 지크하르트. 지크하르트. 지크하르트.

??지크하르트의 방이었다.

센티넬의 억제력은 감정에 닿아 있다. 감각이 무너진다.

오르피어스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체내가 아닌 귀로 들었다. 두근두근. 일정하게 박동하던 심장이 차츰 빠르게 달음박질치며 질주했다.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피부로 스미어 들던 고동이 피부를 찢어발기며 침투했다.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형상화된 소리는 그 자체가 하나의 흉기였다. 심장이 한 번 쿵쿵 뛸 때마다 뇌가 쿵쿵 처박힌다. 비스듬히 비쳐 들던 하오의 햇살이 효예한 각을 세우며 그에게 날을 갈았다. 기숙사 밖의 식당 건물에서 설거지를 하는지 독한 세제 냄새와 섞인 음식물 냄새가 역겹게 뒤엉겨 후각을 좇았다. 지평선 너머에서 일순간에 밀려와 정복하는 파도처럼 소리가 그의 전신을 후드려쳤다. 오늘 날씨 좋네. 모레. 휴가는. 저녁 먹고 싶은 거 있으세요. 차 한잔할래요. 병기 개발부에서 개량한 병기의 시험으로. 몸이 안 좋아. 소위님께 얘기를 들였는데. 급한 사안이니 빠른 결재 부탁드립니다. 보고는 아직인가. 불. 불. 불이 난 것 같은데. 어디지. 저긴. 불. 불이야. 창이 불길에 터져 나가는 소리가 또 한 번 그의 신경을 절단했다.

고통스럽다. 고통스럽지 않다.

머리를 감싸고 웅크린 자신과 그런 그를 비웃으며 관조하는 자신이 있었다.

아픔을 알아주길 바라는 자신과 아파할 자격도 없다고 방치하는 자신이 있었다.

모든 것을 불사르는 화마가 그만은 침투하지 못했다. 늘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제일 먼저 불태워져야 하는 사람은 나일텐데. 그래. 아홉 살에, 그때에, 불은 바로 오직 나에게만 왔었어야 했어. 머리카락 한 올, 뼈 한 조각 남기지 않고 아주 활활. 모든 것을.

그랬다면. 

그랬다면. 

나는.

너는??

오르피어스.

저음의 목소리가 안온하게 감쌌다.

귀로 듣기도 전에 영혼이 앞서 인지한 존재가 정신에 닿은 순간 청량하고, 투명하게 씻기어 가신다. 난폭하게 들놀며 후벼 파던 빛살과 소리와 냄새와 일체의 감각이 불길이 사그라지는 것처럼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오르피어스.

안유하게 품은 목소리에서 등 뒤에서 자신을 억세리만큼 단단하게 끌어안아 가둔 강인한 팔과, 너른 가슴과, 눈물에 젖은 뺨을 따스하게 훑는 손길과 입맞춤도 인지했다.

“오르피어스.”

자신의 이름이었다.

그가 부르는, 자신의 이름이었다.

“……지크하르트.”

오르피어스는 헐떡이며 그의 어깨를 부둥켜안았다. 심장이 고동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두근. 두근. 두근. 일정하게 맥박 치는 그의 고동이 들렸다. 지크하르트다. 지크하르트였다.

“이제 괜찮냐?”

지크하르트가 이마에 입술을 누르며 속삭였다. 응, 으응. 하고 답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젖어 있었다.

단단한 품에 안겨 있는, 어색하지만 완전히 설지는 않은 감촉이 해일처럼 쏟아지는 오감에 묻혀 있던 기억을 되살리게 했다. 오르피어스는 본능적으로 부비고 있던 얼굴을 화닥닥 들며 더듬거렸다.

“어, 어젯밤에 내가 너한테.”

하지만 당혹한 음성이 채 마무리되기도 전에, 그윽하리만치 낮게 내깔렸던 지크하르트의 목소리 톤이 갑자기 높아졌다.

“아. 그래? 괜찮다 이거지?”

목소리에 살기가 섞여 있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숙취와는 비교도 되지 않은 짜릿한 아픔이 이마를 꽈앙 치받았고 오르피어스는 으아악 비명하며 이마를 싸맸다. 그의 이마를 들이박은 장본인은 그보다 더 큰 비명을 아아악 지르며 뒷목을 부여잡았다. 단순한 신체적 고통이 아닌, 울분이 치민 통한이었다.

“너, 너, 너……! 나한데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남의 방을 홀랑 다 태워먹냐!!!!”

어질어질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도 힐끔 주변을 살펴본 오르피어스는 그답지 않게 입을 닥쳤다. 건축적인 지식이 전무한 오르피어스는 수리하는데 얼마나 걸릴지 비용이 얼마나 나올지 수리가 가능한지도 짐작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이 방의 주인이 오늘부터 이곳에서 살 수 없으리란 건 아주 확실했다.

“이걸 갖다 버릴 수도 없고!! 아오! 그냥 오늘 아침에 망설이지 말고 이걸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렸어야 하는 건데!! 네놈한데 이불 덮어준 내 손모가지를 자르고 싶다!! 어제는 남의 몸에 오바이트를 하더니 오늘은 아주 그냥 불을 싸질러?! 내가 싫으면 싫다고 뒤에서 총 들고 덮치든 칼부림을 하든지 해!! 야금야금 신경 갉아먹지 말고! 이 빌어처먹을 새끼야!!”

입에 잘 올리지 않는 험한 욕설까지 거침없이 내뱉는 험악한 기세에 눌려 얌전히 듣기만 하던 오르피어스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저기……지크하르트.”

“뭐!!”

“내가 너한테 토했어?”

지크하르트의 눈에 쌍심지가 섰다. 신중한 물음에 대한 대가로 오르피어스는 자신이 간밤에 어떻게 침구 위에 저녁 식사와 술안주를 증명했는지, 그 대가로 지크하르트가 밤새도록 팔이 끊어지고 허리가 꺾일 만큼 빨래를 해야 했는지, 그 보람도 없이 숙실에 센티넬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했다는 호출을 받고 급히 사령부에서 달려오니 홀랑 다 타버렸다는 결과와, 그로 인해 도출된 격분을 고스란히 들어야 했다. 필요 없는 뒷말이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면서도 설핏 안도했다. 어젯밤의 그건, 역시 꿈이었던 모양이다.

“이불이야 그렇다쳐도 집구석이 다 탄 건 어쩔 거야! 개인 과실이니까 내가 다 배상해야 한다고!!”

“내가 무, 물어주면 되잖아.”

“당연하지, 인마!!”

딴에는 미안하기도 하여 꾸물꾸물 나간 대답에 지크하르트가 왈칵 언성을 높였다. 너무 소리를 질러 어지럼증이 나는지 그는 온통 시커멓게 탄 바닥에 주저앉은 그대로 심호흡을 몇 차례 했다. 효과는 있었는지 한참이 지나서 나온 목소리는 그럭저럭 안정적이었다. 화가 가셨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었지만.

“야, 빨리 통장 내놔. 통장.”

“토, 통장?”

“물어준다며?! 너 뜯어먹던 꽃뱀들한테는 넙죽넙죽 잘도 갖다 바치더니 나한테는 못 주겠다, 이거냐?”

“줄게, 준다구. 근데 지금은 없고 집에 가야 돼.”

“그럼 당장 갔다 와!!”

숙취가 남아 있다든지, 막 진정된 상태라 현기가 아직 남아 있다든지 같은 변명은 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합죽이가 되어 엉덩이를 털었다. 예상대로 아주 화려하게 불길이 머문 흔적만이 남은 거실을 지나 현관으로 나가려다, 마지막으로 힐긋 돌아보았다.

“넌 여기 계속 있을 거야?”

땅이 꺼지랴 한숨만 푹푹 쉬고 있던 지크하르트가 왜 꺼지지 않느냐는 험상궂은 기색으로 눈을 부라렸다.

“총독 동생이라는 빽이 있어서 무단결근을 하든 말든 술 처먹고 병가를 내든 말든 철밥통인 누구누구와는 다르게 나는 밤을 꼬박 새도, 컨디션이 최악이어도, 내 방에 불이 나서 다 태워먹어도 일을 해야 안 잘리는 일개 장교거든?!”

“……금방 갔다 올게.”

오르피어스는 어깨를 움츠리고 후다닥 지크하르트의 숙실을 빠져 나왔다. 골을 뎅뎅 울리는 숙취에 햇살은 너무 나도 밝고 눈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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