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5장. 주욕신사 (2) (9/11)
  • 화비설화 4권

    목차

    5장. 주욕신사 (2)

    6장. 남면출처

    5장. 주욕신사 (2)

    기세등등하게 제도를 짓누르던 더위가 한풀 꺾였다. 처음 제도에 왔을 때는 초여름이었는데, 폭풍 같은 장마를 경험했고, 이제는 더위가 여린 새싹처럼 부드러워졌다. 온몸을 감싸는 열기가 그리 거북하지만은 않았다.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자세로 나무처럼 서서, 태윤은 활을 쏘는 이세희를 지켜보았다. 황제가 가르쳐준 지가 한참 되었건만 자세는 아직 엉성했다. 그렇게 시위를 당기면 안 되는데, 라고 생각할 무렵 이세희가 손을 내렸다.

    그래도 힘은 무척 좋아 다른 사람들은 연습해야 당길 수 있는 활시위를 이세희는 단번에 잡아당겼다. 자세를 고치고 집중력을 높인다면 좋은 사냥꾼이 될 기질이 있었다. 뒤에서 금군들도 오, 하고 탄성을 내지를 정도로 좋은 실력이었다.

    하지만 이세희는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쯧, 하고 가볍게 혀를 차다가 태윤을 물끄러미 보았다. 시선이 닿은 태윤은 머리를 꿰뚫는 사실에 묘하게 웃으며 말했다. 부관들은 뒤에 기립한 상태라 태윤의 미소 지은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들이 볼 수 있는 건 여유롭게 웃는 이세희의 얼굴이었다. 부관들이 시선을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그 틈을 타, 태윤은 걸음을 옮겼다.

    “활 쏘는 자세를 잊으셨습니까.”

    “제가 워낙 머리가 둔해서 잘 까먹지 뭡니까.”

    이세희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딱 적당한 머리를 소유했다. 힘이 워낙 세서 무엇이든 힘으로 처리하려는 것만 빼면, 좋은 자세였다. 태윤은 이세희와 일직선에서 눈을 마주치고서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세 발자국 정도 물러나 이세희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치고 활 쏘는 법을 아주 친절하게, 몸으로 알려주었다. 이세희는 눈을 내려뜨고 힘줄이 바짝 융기한 태윤의 손등을 보았다. 그 시선이 뜨겁게 피부를 갈라 입안이 바짝 말라갔다.

    “…절 보지 마시고, 과녁을 보십시오.”

    태윤이 머뭇거리며 중얼거렸다. 밖에서는 태연한 척 연기를 잘하는 태윤을 뚫어져라 보던 이세희가 툭 말을 내뱉었다.

    “꼭 뒤에서 박을 때랑 같네.”

    귀에 바짝 붙어, 음란하고 끈적하게 퍼지는 음성에 태윤이 손을 탁 놓았다. 팽팽하게 당겼던 활시위가 튕겨지며 고정되었던 화살이 날아가 과녁을 엇나갔다. 이세희의 질 낮은 농담에 태윤이 입을 꾹 다물었다. 꼭 심통 난 아이가 투정 부리는 거 같았다.

    눈을 또렷하게 뜨고서 과녁을 응시하는 모습이 참으로 잘생겼다. 색채가 단조로우나, 그 덕분에 태윤의 굵직한 느낌이 도드라졌다. 저 얼굴로, 밑에 깔리면 찔러주는 대로 운단 말이지. 침상 밖에서는 세상 고결해 보이는 얼굴에 침상 위에 올라타면 알아서 다리를 벌려주는 순종적인 음란함이 구석구석 남아 있었다. 하루 빨리 저 관복을, 아니, 대례복과 용포를 벗기는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이세희는 벗어나려는 태윤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태윤의 숨이 가늘어졌다. 검지와 엄지를 빠져나가지 못하게 움켜쥔 이세희는, 그 상태로 귀에 대고 숨을 불어넣으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하는 건가요?”

    “아….”

    태윤이 무심코 신음을 흘렸다. 이세희의 더운 뺨이 너무 가까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피어오르는 긴장감에 몸을 움찔거리는 사이, 화살이 다시 한 번 시위에서 튕겨져 나갔다. 힘을 실은 화살은 불어오는 바람도 반으로 가르며, 저 멀리 날아가 나무에 박혔다. 과녁과 나무 사이에 있던 내관은 쉬익, 하고 들려오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에 깜짝 놀라 넘어졌다. 태윤은 넘어진 내관을 보고서 혀를 차며 낮게 말했다.

    “지금 일부러 그러신 거 아닙니까?”

    이세희는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안 죽었으면 된 거 아닙니까.”

    냉정한 말에 태윤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 얼굴을 빤히 보던 이세희가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 궁에 넘쳐나는 게 고자 놈들인데…. 설마, 저 고자 놈하고 정분이라도 나신 거 아닙니까? 그렇지 않고서 넘어진 고자한테 신경을 쓰실 이유가….”

    이세희의 눈이 점차 깊어지고, 의심이 무럭무럭 피어오르자 태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서진하고 대화할 때도 그렇더니, 남자들과 대화만 나누어도 의심하기 바빴다. 억울함에 가슴이 답답했다. 대화하는 소리가 점차 커지자 뒤에 있던 부관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해, 다른 말도 더 할 수 없었다. 태윤은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과녁 바깥에 우수수 박힌 화살을 보며 입을 열었다.

    “머리를 차분하게 하시고 집중하시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오실 겁니다, 마마.”

    활 연습을 한 척, 대화를 바꾸는데 이세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절 자극하는 게 있으니 머리가 차분해지겠습니까?”

    정확히 자신을 바라보며 말을 하니, 태윤은 기가 막혔다. 억울함에 이세희를 바라보는데 그는 허벅지에 고정한 통에서 활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태윤에게 턱짓으로 이쪽으로 오라는 표시를 보였다. 태윤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걸어갔다.

    “제가 자세를 봐드리겠습니다.”

    “보는 것보단 몸으로 하는 게 더 좋은 교육이 아닐지.”

    이세희가 음흉하게 눈웃음을 그리며 넌지시 말을 덧붙였다. 이런 대화가 몇 번 반복되니, 태윤은 ‘내가 죄인이요.’라는 자세로 터덜터덜 다가가 이세희의 뒤에 감쌌다. 이세희가 좀 더 큰 터라, 태윤이 고개를 옆으로 내밀었다. 이세희의 두 팔을 양쪽 팔로 감싸고서, 시위를 느리게 당겼다. 이세희의 숨이 흐트러진 게 느껴졌다. 태윤이 시선을 돌리자, 기다렸다는 듯 이세희가 태윤의 눈동자 속에 자신을 박아 넣었다. 예고 없이 불쑥 들어온 갈망에 태윤은 그만 손을 놓고 말았다. 탕, 하고 튕겨져 나간 활이 슈우웅, 하고 날아가 과녁 주변에 아슬아슬하게 박혔다. 이세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내관이 휘두르는 검은 깃발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직 교육이 필요해 보이지요?”

    그리고 딱딱하게 굳어 있는 태윤을 보며 슬쩍 웃었다. 태윤이 손을 들어 이세희의 시선이 갈고리처럼 박혔던 뺨을 어루만졌다. 이세희의 미소가 진해졌다. 다양한 색채, 감미로운 향기로 범벅이 된 미소를 지그시 응시하던 태윤도 그만 웃고 말았다. 건조한 땅 위로 가열된 바람이 불었다. 태윤은 턱 끝에 맺힌 땀을 닦으며 내관을 불렀다.

    “마마께서 더워하시니 얼음을 띄운 물 한 잔 올려라.”

    “예, 대장님.”

    내관과 궁녀 셋이 슬금슬금 물러났다. 냉수 한 잔 떠오는데도 수발 인원이 몇 명이 달라붙는 것인지. 허례허식에 속으로 혀를 차는데, 저 멀리서 간소한 행렬이 보였다. 검은 천 위로 승천하려는 용이 새겨진 차양막에 태윤은 얼굴을 굳혔다. 저건 태자의 상징이었다. 태자가 무슨 연유로 이곳에 온 것인지. 다가가야 하나, 고민할 무렵 12명으로 이루어진 금군들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태자가 꽤 빨리 걸어왔다. 태윤은 차양막 아래에서 하얗고, 곱게 느껴지는 태자의 얼굴에 고개를 숙였다. 태자는 태윤을 보며 다정하게 “형님.”이라고 불렀다. 한 발자국 물러나 태자를 보던 이세희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왜 윤에게 저러는 거지? 윤은 왜 나 말고도 다른 놈들에게 잘해주는 거야?

    이를 꽉 물며,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삭이는데 태자의 눈빛이 이세희에게 꽂혔다. 닿기가 무섭게, 이세희는 화사하고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둘 사이에 오가는 오묘한 분위기에 태윤은 가슴이 몹시도 두근거렸다.

    애첩 때문에 나라를 망친 황제. 이세희가 어떻게 그걸 노리는지,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이렇게 빨리 진행될 줄은 몰랐을 뿐. 슬슬 다가오는 적기에 태윤이 몸을 낮추고 주변을 살폈다. 겉으로는 무난한 구도였다. 활을 연습하는 후궁과 그 후궁에게 안부차 인사를 거는 태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태자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겠지. 과거였다면 사랑으로 감싸줄 동생이었으나, 이젠 죽어줘야 하는 적에 불과한 태자를 싸늘하게 바라보며 태윤은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활 연습을 하고 계셨습니까?”

    태윤이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는 걸 유심히 보던 이세희는 싱긋 웃었다. 태자가 성급하게 마른침을 삼켰다. 눈빛이 발정 난 것처럼 번들거렸다.

    영특한 황제, 그리고 기품이 넘치고 우아한 황후 사이에 나온 자식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태자는 독선적이고 오만했다. 태자가 된 후로도 주색을 멈추지 않아 황제가 이따금 불러 잔소리를 하는 걸 이세희는 종종 들었다. 심지어 최근엔 황후에게 뺨까지 맞았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게 거짓은 아닌지, 태자의 양쪽 뺨에 희미한 멍이 남아 있었다.

    한심한 놈. 속으론 태자를 비웃으며 이세희는 명령을 받고, 물을 가져오는 내관에게 손을 내밀었다. 얼음이 가득 떠 있었다. 이것 또한 황제의 총애이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지금 절차탁마하여 연습을 해야 훗날 폐하와 사냥대회를 나갈 때, 제 몫을 다할 것이 아닙니까?”

    “아, 아바마마가 사냥대회에 같이 가자고 그러셨습니까?”

    “예. 투계도 보여주신다고 하시더군요.”

    한 번 더 웃어주자 태자가 정신을 못 차렸다. 제 아비보다 더한 놈이었다. 그래도 황제는 이세희가 얌전한 고양이처럼 굴면 좋아하긴 해도, 제 몸을 노골적으로 훑지 않았다. 황제가 아니었다면 어떻게든 한 번 해볼 눈빛이었다. 태자를 향한 역겨운 마음을 견디고, 애써 웃던 이세희는 물을 느리게 마셨다.

    그렇게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 태자가 자신을 한 번이라도 건드리게끔 하면…. 그렇다면 적어도 태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바라는 건 태자의 목이었다. 그 목을 받을 수 있다면 황제의 위에 얼마든지 올라탈 수 있었다.

    “여봐라. 물 한 잔 올려라. 날이 덥구나.”

    태자가 자신도 다른 의미로 목이 탔는지, 짜증을 내며 내관에게 말했다. 내관이 “예, 예. 전하.” 하고 대답했다. 태자는 그를 보며 ‘눈치도 없는 놈들이 수두룩하군.’이라고 투덜거렸다. 이세희는 천천히 잔을 입술에서 떼었다.

    “전하, 많이 더우시면 제가 마시던 물이라도 드시겠습니까?”

    이세희가 부드럽게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태자는 연달아 침을 삼켰다. 그의 눈에 드디어 감춰왔던 갈증이 표면 위로 드러났다. 태자가 말이 없자, 이세희는 천천히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태자를 보살피는 내관이 얼굴을 구겼으나, 태자가 아무 말도 없이 이세희만 보자 눈치를 채고 입을 다물었다. 내관은 몸을 엄습하는 불안감에 “전하….”라고 나직하게 불렀으나 태자는 들리지도 않는지 이세희만 빤히 보았다.

    “언제까지 기다리시겠습니까? 지금 급하시면, 드셔야지요.”

    담담한 어투로 말한 이세희는 잔을 잡도록 했다. 태자의 손이 흥분으로 떨렸다. 이세희는 상냥함을 가장하여, 그의 손등을 옥죄고서 잔을 잡고 그대로 들어 올려 입술에 갖다 대었다.

    “자아…. 그냥 삼키시면 됩니다.”

    태자가 이세희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물을 마셨다. 그가 시원스럽게 남을 물을 다 마시고는, 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후우, 하고 한결 차가워진 숨을 내뱉은 태자가 입술 끝을 씩 올리며 말했다.

    “활 연습은 계속하실 겁니까? 혹시, 아직 활을 능숙히 못 쏘시면 제가 알려드릴까요?”

    자신이 태윤에게 썼던 개수작을 그대로 쓰는 태자를 보며 이세희가 환하게 웃었다. 이럴 땐 말보다 행동이 빨랐다. 이세희는 민첩한 동작으로 통에서 활을 꺼내고, 곧바로 활에 걸었다. 시위가 한 번에 쭈욱 당겨졌다. 태자가 놀란 눈을 깜박였다. 둘을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지켜보던 태윤도 당황하여 이세희를 보았다. 이세희는 여유롭게 웃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멀리 과녁이 보였다. 숨을 가라앉힌 이세희가 시위를 놓기가 무섭게, 활이 바람을 쪼개며 날아갔다.

    활을 말끔히 쏜 이세희가 고개를 돌려 태자를 보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태자는 가슴이 지끈거리는 통증에 숨을 헐떡였다. 그리고 태윤은 ‘내가 속았구나.’ 하는 얼굴로 풀이 죽어 축 늘어졌다.

    “명중입니다!”

    과녁 옆에 있던 내관 둘이 붉은 깃발을 휘둘렀다. 이세희는 후련하게 웃으며, 허리에 손을 올리고 태자에게 말했다.

    “태자 전하의 하해와 같은 마음이 감사하여, 제가 소소한 상을 대접해 드리고자 하는데… 혹, 시간이 괜찮으시면 제 궁에 한번 오시겠습니까?”

    “전 오늘도 괜찮습니다.”

    이세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태자를 보다, 피식 웃었다. 별 볼 일 없는 미소에도 태자는 눈을 빛냈다. 이세희는 너무 아름다웠다.

    “그럼 제 궁으로 가실까요?”

    이세희가 내민 손을 태자는 망설이지 않고 붙잡았다.

    *

    “전하, 가시면 안 됩니다! 그 요망한 화비와 함께 있다간 큰일이 날 겁니다!”

    태자의 소맷부리를 세게 잡은 내관이 엉엉 울며 매달렸다. 내관은 태자가 동궁에 온 13살 때부터 동고동락한 사이였다. 모시는 주인이 황후 다음이라지만, 실세는 황궁의 이인자다 보니 내관도 누리는 부귀영화가 남달랐다. 그가 오래가길 바랐다. 그래야 자신도 황제의 내관이 되어 으리으리한 대저택에서 평화롭게 살 테니까. 태자의 패악과 폭력, 오만함을 견뎌낸 건 다 미래를 위한 발판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태자가 이세희를 호시탐탐 노리는 건 내관도 알았다. 황제의 앞에서는 그런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으나, 사적인 공간에서는 이세희를 생각하며 자위를 하는 횟수가 부쩍 늘어났다. 잘 가던 홍루가도 가지 않았다. 이세희가 웃어주는 모습에 퍽 빠진 게 눈에 보였다. 이러다가 황제의 눈 밖에 날까, 두려워 내관은 그를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전하, 황후 마마께서 오셔서…!”

    손찌검을 한 일을 내뱉자, 태자는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하고 옆에 있던 화병을 들어 내관의 머리를 내리쳤다. 내관의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몸이 흔들거렸다. 소맷부리를 잡은 손에서 힘이 빠지자, 태자는 자신을 지키는 호위내관의 띠돈에서 검을 억지로 빼내었다. 호위내관이 “전하!” 하며 그를 말리려 했으나, 태자는 성큼성큼 걸어가 이마를 짚고 덜덜 떠는 내관의 목을 단숨에 베어버렸다. 피가 폭포수처럼 주르륵 흘렀다. 태자는 흘러내리는 피가 기분 나빠, 뒤로 물러나며 피 묻은 검을 바닥에 내던졌다.

    “다른 예복을 가져오거라. 그리고 이 예복은 태워버려.”

    주변 분위기가 완전히 냉각되었다. 그를 말리려 든 오래된 내관도 무참히 죽여 버리는 모습에 궁인들은 오들오들 떨었다. 태자를 말리려다가 도리어 죽을 수도 있었다, 일개 궁인들이 죽든 말든, 황제도 황후도 신경 쓰지 않으니 그들은 속으로 울면서 태자를 도왔다. 태자는 방금 전 사람을 죽인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고아한 얼굴이었다. 황제와 황후를 적절히 닮은 곱상한 얼굴에 매끄러운 미소를 띤 태자는 다가오는 궁녀를 보며 두 팔을 벌렸다. 탁한 흰색 같으면서도, 기묘한 빛을 내는 예복은 특히 태자가 아끼는 것이었다. 이것을 입을 때만큼은 분위기가 신선같이 신성하고, 우아하니, 홍루가 같은 곳을 갔을 때도 주변으로도 귀가 닳도록 감탄을 들었다. 궁녀들의 선택에 흡족하게 웃은 태자는 허리에 요란한 장식을 달았다.

    “쯧, 이놈의 멍은 언제 사라질지….”

    태자는 동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흰 뺨에 남은 보랏빛 멍을 문지르던 태자의 눈빛에 살의가 감돌았다.

    “낳아준 어머니만 아니었으면 진작 저승으로 보냈을 텐데….”

    궁인들이 움찔 떨었다. 태자가 황후를 무시하고, 어머니 취급하지 않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라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그들의 반응과 다르게, 태연하게 제 뺨을 잡고 이리저리 돌려보던 태자는 동경 속 보이는 궁인들을 보고 말했다.

    “그 입 다물고 사는 게 좋을 거다. 저 놈처럼 죽기 싫으면.”

    “예, 전하.”

    태자는 그들을 향해 거침없이 비웃음을 보이고 걸음을 옮겼다. 핏물이 밴 바닥에 태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죽일 때는 밖에서 죽여야 했는데. 안에서 죽이면, 이런 식으로 핏물이 남고 피비린내가 진동해 골치 아팠다. 동궁 밖으로 나와서야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여름의 잔재가 진동하는 공기가 콧속을 정제했다.

    준비된 가마에 올라탄 태자는 내관을 불렀다. 내관이 총총 다가왔다.

    “심부름은 잘했겠지.”

    태자의 물음에 내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의 동기였던 내관에게 부탁했습니다.”

    태자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 쪽에서 먼저 이세희를 건드리면 안 되었다. 어떠한 상황이 되어도 태자는 명예를 지키는 피해자가 되어야 했다. 이세희야 이제 없어질 평판도 없었다. 여러모로 복잡한 상황 속에서, 태자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이세희에게 미약을 몰래 먹이기로 결심했다. 미약을 먹고 어쩔 수 없이 그 상황이 되었다고 하면 황제는 아무 말도 못하겠지. 심지어 그 약을 이세희가 먹였다면, 황제는 자신을 벌할 수 없다. 그 내관에게는 일을 해준 대가로 금덩이와 저택을 주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그러면 이세희를 건드릴 수도 있고, 벌도 피하고, 자리도 유지할 수 있다. 그 과정에 이세희의 안위는 없었다.

    그 누가 날 건드린다고. 태위 집안의 유일한 손자였고, 황제의 신뢰를 받는 태자였다. 아무리 주색에 빠져도 황제가 자신을 태자 자리에서 내릴 근거가 없었다. 태위는 아버지가 황제 자리에 오르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줬던 사람이었다. 그 공을 높이 사, 어머니를 황후로 앉혔고 자신이 13세가 되자 태자에 앉혀 지금까지도 쭉 이어왔다.

    그래, 그러니 이세희가 나에게 신호를 보낸 것일 테지. 성군이긴 하나, 그에게는 폭군인 아버지를 이세희는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흠….”

    태자는 엷게 웃으며 팔걸이를 건드렸다.

    “전하, 도착했습니다.”

    머릿속으로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하던 태자는 내관의 목소리에 가마에서 내려왔다. 화요궁이 보였다. 중앙에는 이세희가 다소곳하게 서 있었다. 양옆에도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태윤과 한서진. 한서진과도 꽤 친한 태자가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자, 한서진이 웃으며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태윤도 무표정한 얼굴로 태자를 보다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으론 이세희가 고개를 숙이며 태자를 반겼다. 태자가 성큼성큼 걸어와 이세희와 눈을 마주쳤다. 아직 물기가 남은 이세희의 머리가 어깨를 타고 늘어졌다. 태자가 의아한 듯 이세희를 살펴보자, 이세희가 쑥스럽게 웃었다. 그 미소에 태자가 눈을 빛냈다.

    “전하를 뵙는데 땀 냄새를 풍길 순 없으니 씻고 나왔습니다.”

    역시, 나한테 마음이 있는 게 틀림없다니까. 태자는 속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수줍게 웃는 눈과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는 자세, 그리고 자신을 조심스레 살펴보는 시선. 그의 정황들이 자꾸 확신을 들게 만들었다. 태자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눌렀다. 눈이 재차 한 지점에서 마주치자, 이세희가 봄의 햇살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어여쁜 미소에 태자의 눈이 멀었다. 그는 장님이 되어 이세희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렸다.

    이세희는 ‘이거 병신 아냐.’라고 생각하며 태자의 손을 폭 맞잡았다.

    “폐하께서 마음을 푸셔서 이리 대화할 수 있으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앞으론 전하와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어째서요?”

    태자가 되묻자 이세희가 고개를 돌려 중궁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황후 마마께 미움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전하께서 저를 위해, 황후 마마에게 좋은 말씀이라도 해주시면 마마께서 저를 그나마….”

    “어머니가 그러셨습니까? 제가 잘 말씀드릴 테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저 또한 화비께서 이 넓은 궁에서 외로움 느끼시지 않게 대화 상대가 되어드리겠습니다.”

    그러자 화비가 농염한 미소를 지으며 태자의 손을 세게 맞잡았다.

    “저의 외로움은 폐하께서 달래 주신답니다.”

    태자를 보며 나른하게 흘러나온 말에 궁인들이 고개를 들어 이세희를 보았다. 이세희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긴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며 이세희의 얼굴이 반쯤 가려지고 웃고 있는 입매만 보였다. 궁인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태자는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이세희를 바라보다, 손을 서서히 놓았다.

    “하지만 낮의 외로움은 전하께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의 대화 상대가 되어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이세희가 눈웃음을 지으며 재차 손을 맞잡아오니, 뿌리칠 수 없었다. 태자의 몸이 굳어갔다. 이세희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자신을 보며 입술을 달싹여 나긋하게 말했다.

    “제가 폐하께 잘 말씀드릴 테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그 눈빛이 마치 아버지를 죽여 달라는 것 같았다. 자신의 의심이 확신이 되길 바라며 태자는 이세희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궁인들과 금군까지 살폈는데, 그들은 이세희가 태자의 손을 잡는 걸 보면서도 말리지 않았다. 그 소문이 맞았나 보다.

    이세희가 황제 위에 올라타 베갯머리송사를 해, 홍패를 받아내고 가족들에겐 대저택을 선사했다.

    처음에는 베갯머리송사라 해봐야 홍패 정도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이리 체감하게 되자 태자는 태위와 황후의 말을 떠올렸다. 하루 빨리 황제를 죽여야 한다. 이세희가 베갯머리송사로, 더한 걸 받아내면 곤란하다. 태자라는 자리는 고정이니, 황제만 죽어주면 이세희도 가질 수 있고, 황제 자리에도 편히 오를 수 있다.

    오늘 기필코 확인해 볼 것이다, 이세희의 마음을. 이 모든 게 착각이라면, 자신을 능멸한 죄로 황제가 죽을 때 같이 죽여 주리라.

    담소 자리는 화요궁 앞 화원이었다. 나무 때문에 그림자가 우거진 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 더위를 식히기에도 제격이었다. 자리에 앉자 궁녀가 차를 내왔다. 이세희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차를 권했다.

    “오늘 내관이 새로 받아온 차랍니다. 전하께서 진하게 우린 차는 즐기지 아니 하신다 하여, 한 번만 우렸습니다.”

    그 내관이 미약까지 받아온 건 몰랐을 테지. 태자는 피식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제 취향까지 알고 계시다니….”

    태자가 감탄을 하며 소리 나지 않게 차를 마셨다. 너무 뜨겁지 않은 차라, 마시기 쉬웠다. 차의 쓴맛 덕분에 미약 특유의 향은 잘 느껴지지 않았다. 의심을 받지 않으려고 태자가 먼저 차를 마시자 이세희도 웃으면서 따라서 잔을 들어올렸다. 잔을 기울인 순간, 이세희는 손을 흠칫 떨었다.

    씁쓸한 차 향에 숨겨진 맛이 느껴졌다. 첫 맛엔 몰랐지만, 두 번 정도 삼키자 혓바닥에 감도는 뒤끝이 남는 맛에 이세희는 눈을 위로 들어 올렸다. 태자가 웃었다.

    이 새끼, 약을 넣었구나.

    이세희도 유려하게 눈웃음을 지으며 차를 반 정도 마셨다. 어떤 약을 넣었든, 이 상황에선 의심 받지 않기 위해 적절히 마시는 게 좋았다. 다는 아니라도….

    “차 맛은 어떠십니까?”

    입가에 묻은 차를 소매로 닦으며 이세희가 물었다. 태자가 “맛이 아주 좋습니다.”라고 대답하며 이세희의 얼굴부터 손까지 맛이라도 보듯 게걸스럽게 눈으로 핥았다. 눈으로 강간당하는 기분에 이세희는 숨을 차분히 내쉬며 참았다.

    오늘이 적기였다. 이세희는 뒤를 돌아 태윤을 보았다.

    “대장도 더울 텐데, 안에 가셔서 차를 드십시오.”

    태윤이 “예.”라고 말하며 물러났다. 태윤에게 침전 옆에 있는 방으로 가 기다리라는 뜻이었다. 그곳에서는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니. 태윤도 이세희가 뭘 말하는지 깨닫고서 빠르게 움직였다. 얼굴은 여전히 가면을 쓴 것처럼 무표정했다.

    태윤이 간 사이, 이세희는 태자와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활이라든가 사냥대회, 투계…. 이세희는 빨리 약이 돌아 침전으로 가고 싶었다. 역겨운 황제 놈의 자식과 대화를 나누는 건 고역이었다. 웃어주는 것도 한계에 다다랐다, 라고 생각할 즈음 머리가 멍해졌다. 이세희가 잔을 떨어뜨렸다. 하아, 하아, 하고 거친 숨을 내쉬며 이세희가 머리를 짚고 헐떡이자 태자가 몸을 일으켰다. 이세희는 보지도 않고 손을 내밀어 옷자락을 세게 잡았다. 몸에 힘이 빠지고 있었다. 자꾸만 미끄러지는 손을 잡아준 건, 습윤한 손길이었다.

    “이런, 화비께서 몸이 안 좋으신가 봅니다. 제가 모셔다 드릴까요?”

    태자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세희는 귀를 잘라내고 싶었다. 황제와 관련된 건, 윤이 빼고 모두 죽여서 도려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참고, 또 참아 윤을 황제로 만들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태자의 등에 손을 댔다. 자신의 손마저 잘라내고 싶었다.

    “데려다주시면…. 감읍… 하윽….”

    뒷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흥분이 극에 치달았다. 강제로 이끌어지는 흥분만큼 기분 더러운 것도 없었다. 흥분하는 정도에 따라 죽고 싶다는 마음이 열망처럼 솟아올랐다.

    하지만 열망 끝에 피어난 환상 속에서 대례복을 입은 윤이 보였다. 붉은 대례복에 면류관을 쓴 윤이 만백성의 “만세 만세 만만세!”를 받으며 어좌에 앉고 있었다. 그 상상을 하며 이세희는 이를 악물었다. 잘라내고 싶은 신체가 태윤에게 도움이 된다면 참을 수 있었다.

    태자는 갈수록 심해지는 이세희의 신음에 그를 꽉 끌어안고 침전으로 향했다. 궁인들이 처음에는 수상하게 보았으나, 이세희가 “전하께서 도와주신다 하니, 너희들은 필요 없다.”라고 말하여 궁인들도 다가오진 않았다. 멀리서 기강을 잡는 황제보다 가까운 곳에서 두들겨 패고, 잔소리하는 이세희가 더 무서운 법이었다. 실제로 목소리도 연약하게 흔들거려 도움이 되었다. 태자는 능숙하게 이세희를 침상에 눕혔다. 이세희가 침상 위에서 배를 움켜쥐고 몸을 웅크렸다. 긴 머리채가 침상에 펼쳐지고, 하얀 얼굴이 상기되어 헐떡이는 모습이 무척 요염했다. 춘화에서 보던 그 어떤 사람보다 아름다운 모습에 태자가 손을 대자, 이세희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대는 아름다워….”

    태자가 황홀함에 젖어 중얼거렸다. 그가 상기된 뺨을 만지자 이세희는 눈을 느리게 감고 중얼거렸다.

    “밖에 사람이 있습니다, 전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저는…. 폐하의 비입니다.”

    가련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에 태자는 목소리를 낮추고서 “저런.”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더 숙여, 눈물에 젖은 검은 속눈썹을 엄지로 문지르며 속삭였다.

    “오늘 아바마마는 암행을 나가셨다. 내가 괜히 온 줄 알아?”

    그러니까 조용히 하라며, 그가 이세희를 노려보았다. 눈에 흥분이 일렁거렸다.

    “이러시면….”

    이세희가 태자의 손목을 잡았다. 입술을 꽉 깨물고 쳐다보는 시선엔 힘이 없었다. 흥분에 요동치는 눈을 부드럽게 바라보던 태자가 이세희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세희는 힘이 빠져 가만히 있었다. 그의 시선은 좌로 움직여 침전과 이어지는 곁방을 보았다. 그곳은 심야에 호위를 서는 자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쪽 문이 서서히 열렸다. 태자는 그곳에서 등지고 있어 보지 못했지만, 태윤이 띠돈에서 검을 빼내며 아주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이세희는 없는 힘을 쥐어짰다. 이 정도론 안 돼. 더 해야 해.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태자가 자신을 간음하려 한 걸, 알려야 했다.

    “뺨이….”

    이세희는 갈라지고 쉰 목소리로 속삭이며 태자의 멍든 뺨을 어루만졌다. 태자는 투박한 손끝에서 전해지는 감미로운 위로에 눈을 가늘게 떴다. 태윤은 두 손으로 검을 잡고 반쯤 도착했다. 그 모습을 곁눈질로 살피던 이세희는 고개를 들어 올려 태자의 귀에 입술을 댔다. 하아, 하아, 하고 터지는 신음소리에 태자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네 아비를 닮아 역겨워.”

    태자의 눈이 커졌다. 자신이 생각한 말과 전혀 다른 말에 태자는 놀라 이세희를 내동댕이쳤다. 이세희가 아, 소리를 냈다. 태자가 이세희의 멱살을 잡고, 강제로 입을 맞추려는 순간 태자는 목에 느껴지는 섬뜩한 금속에 몸을 굳혔다.

    “그 손 놓으십시오.”

    익숙한 목소리, 검신에 새겨진 낯익은 문양. 금군을 상징하는 것들. 그리고 그 금군을 통솔하는 자에 태자는 눈을 위로 들어올렸다. 태윤이 그의 목에 검을 바짝 댄 채, 눈을 무감하게 깜박였다.

    “형님, 저는 이 나라의 태자입니다. 형님께서 명령을 내릴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태윤은 검을 떼는 법이 없었다. 더 가까이 붙였다. 살갗에 칼날이 닿으며 피가 흘렀다. 따끔함에 태자가 눈살을 찌푸리고 “형님.” 하고 불렀다.

    “저는 폐하의 명을 받아 움직이는 금군일 뿐입니다. 폐하의 명대로, 이행하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태윤이 주먹을 들어 태자의 옆구리에 꽂아 넣었다. 태자의 몸은 달아오르던 흥분이 식을 정도의 고통으로 뒤덮였다. 악, 소리도 내지 못하고 태자가 바닥에 엎어졌다. 진작 이세희의 소리를 듣고 온 금군들은 이 상황에 침착하게 대응했다. 가장 먼저 태자를 제압했다. 오라를 받게 되자, 태자는 목에 핏대가 설 만큼 소리쳤다.

    “나는 이 나라의 태자다! 황제가 될 몸이란 말이다! 감히 누구에게 손을 대는 것인가!”

    금군들은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버둥거리는 태자를 무릎으로 찍어누르며 소리쳤다.

    “폐하의 어명입니다. 화비께 손을 대려 한 자는 폐하께서 직접 처분을 내리실 겁니다! 그 전까지는 옥에 가셔야 합니다.”

    “이거 놔라! 나는 태자란 말이다! 놔!”

    태자가 거세게 저항하고 발버둥 쳤다. 금군 네 명이 다가와 억지로 끌어내니, 질질 끌려갔다. 태자는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태윤을 바라보며 사자후를 내질렀다.

    “형님! 형님이라고 무사하실 줄 아십니까? 제 몸에 손대다니! 친왕에도 못 오른 사생아 주제에!”

    “어서 전하를 끌고 가라. 폐하의 어명에 따라야 한다!”

    태윤은 태자가 말을 하건, 말건 신경 쓰지 않고 금군들을 재촉했다. 얼마 가지 않아 태자의 악소리가 멀어졌다. 태자를 금군들이 발 빠르게 끌고 가버린 것이다. 이제 남은 금군은 일곱 명이었다. 한숨 돌리려던 찰나, 이세희의 신음이 점차 심해졌다. 몸도 부들부들 떨리고, 보료를 꽉 잡은 손등엔 힘줄이 마구 올라왔다.

    한눈에 보아도 이상 증세였다. 태윤은 옆에 있는 부관을 불렀다.

    “마마가 드신 차를 조사해 보거라. 그리고 너는 태의를 불러오도록. 아무래도 마마께서 약을 드신 듯하다.”

    “예.”

    막 발걸음을 옮기려던 태윤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말했다.

    “너는 위병들을 불러 화요궁을 모조리 막고, 궁인들을 조사하라!”

    속전속결로 금군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태윤은 걸음을 옮기며 태자에 대해 한숨을 내쉬었다. 오만하고 독선적이며, 제멋대로라 일을 쉽게 그르칠 거라 생각했다. 이 일이 아니더라도 주색에 빠져 태자 자리에서 끌어내졌을 것이다. 태자는 진작 도를 지나쳤지만, 황제가 황후의 집안 때문에 여태 봐주고 있던 것에 불과했다.

    아마 이 일로 태자는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 것이다. 황제라 해도, 이세희를 건드리는 건 참지 못할 터이니.

    정말 어려운 건 태건이었다. 태건이 태자 자리에 못 오른다고 하여 체념하고 기다릴 애는 아니었다. 어떻게든 이 기회를 노리고 태자를 노리리라…. 그렇다면 태혁은?

    “흐윽….”

    태윤은 들려오는 미약한 신음에 걸음을 빨리 했다. 이세희가 침상에서 몸을 비틀고 덜덜 떨어댔다. 태윤이 침착하게 이세희의 등을 감쌌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태의를 불렀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으응, 하고 갈라진 목소리로 신음을 흘리던 이세희가 열에 들뜬 눈을 들었다. 흥분하긴 했으나 이성을 잃진 않았다. 역시, 태자가 약을 먹인 게 분명했다. 태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마 태자는 침전과 화요궁 근처에 사람이 없으니, 마음 놓고 이세희를 맛볼 참이었나 보다. 만약 걸리더라도 본인도 이세희도 약을 먹었고, 그 약은 화요궁에서 나온 것이라 안전하게 벗어날 수 있으니. 결국, 어떤 결과든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키고 자신은 피하는 비겁한 계획에 태윤은 이를 갈았다. 한 대로 끝내는 게 아니었는데. 분노에 숨이 흐트러져, 다독이려 하는데 이세희가 태윤의 소맷부리를 단단히 잡았다.

    “마마.”

    태윤이 진정시키려 손을 뻗어 이세희의 손등을 잡는데, 바들바들 떠는 이세희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난데없는 폐하 소리에 태윤은 놀라서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폐하는 이곳에 없었다. 태윤이 어색하게 웃으며 이세희를 떼어 놓으려는데, 이세희가 고개를 천천히 들고 태윤을 보며 정확하게 말했다.

    “폐하…. 신첩의 몸이 이상합니다….”

    미약이 너무 심하게 돌아 정신까지 혼란스러워진 건가. 걱정되는 마음에 이세희를 유심히 보았다.

    “폐하, 신첩을….”

    그러나 이세희의 눈빛은 확실히 또렷했다. 미약을 먹긴 했으나, 정신까지 망가질 정도는 아닌 듯했다. 자신을 보면서 ‘폐하.’라고 연이어 말하는 이세희를 보며 태윤은 손을 천천히 뻗었다. 완벽한 위장이었다. 겉에서 보면, 이세희는 자신을 보며 아버지를 생각하는 것일 테지만 이세희는 실제로 황제가 된 자신을 생각하는 것이니. 둘만 아는 감정의 강물로 태윤은 기꺼이 빠졌다.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얼굴을 만지자, 이세희는 태윤의 목에 팔을 두른 채 헐떡이며 속삭였다.

    “폐하, 폐하…. 신첩을… 아아, 신첩의 몸이 이상해요.”

    이세희가 다리를 벌렸다. 태윤은 침을 삼키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마마, 조금만 기다리시면 폐하가 오실 겁니다. 암행에 갔다가 돌아오실 터이니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아아, 폐하…. 폐하께서 여기 계시는데….”

    이세희가 정신을 놓은 것처럼 이야기를 하더니, 다른 손을 바지 안으로 넣었다. 더 이상 흥분을 참을 수 없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세희가 발기해서 더 거대해진 자지를 꺼냈다. 태윤이 뒤를 돌아보았다. 난감함에 젖은 얼굴을 본 금군들도 어쩔 줄 몰라 했다. 황제는 오지 않지, 화비는 약에 취해 그의 아들을 보고 폐하라고 부르며 자위를 하려 하지…. 당혹스러운 상황 속에서 이세희는 당당하게 붉게 물든 자지를 꺼내고, 손으로 비볐다.

    “하아, 폐하…. 폐하, 신첩을 봐주세요….”

    처억, 척, 하고 자지와 손바닥이 마찰하는 젖은 소리가 메아리처럼 퍼졌다. 금군들의 귀가 붉어졌다. 태윤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음란한 광경을 빠짐없이 보았다. 폐하, 라고 연신 부르는 입술이 붉고 하얀 손에서 모습을 비쳤다, 사라지는 자지도 입술처럼 붉었다. 귀두는 아이 주먹, 아니, 그 이상인 듯했다. 연한 분홍빛인 귀두가 제 몸으로 파고들었을 때를 생각하자 허리가 저릿했다. 혈관이 툭툭 불거진 굵은 자지가 이세희의 손에서 감춰지는 광경이, 왠지 자신의 안으로 쑥쑥 들어오는 것 같아 태윤은 몸이 뜨거워졌다. 이세희는 붉어진 얼굴을 들어 태윤을 물끄러미 보았다. 붉은 입술에서 색색거리는 들뜬 신음이 나왔다.

    “폐하… 신첩을 어서 어여삐 여겨주세요…. 아읏, 폐하….”

    태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은 아직 폐하가 아니었다. 태윤은 목이 매여 말을 참다가, 겨우 내뱉었다.

    “마마, 소신 태윤이옵니다.”

    그러나 이세희는 태윤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아닙니다, 폐하세요.”

    가슴을 울리는 발언에 몸이 울렸다. 쾌감이었다. 장차 자신이 황제가 되었을 시, 느낄 권력의 쾌감에 몸이 요동쳤다. 황제가 되고 싶다. 그 자리에 올라, 이세희에게 마음껏 안기고 그를 예뻐해주고 싶었다.

    태윤은 천천히 입을 움직여 소리 없이 말했다.

    응.

    그 대답에 이세희는 눈을 감고 웃으며, 손을 더 빨리 했다. 척, 척, 하고 마찰 소리가 빨라졌다. 물기에 어려 젖은 소리가 점차 커지자 금군들은 아예 고개를 돌렸다. 태윤은 자신을 보며 자위하는 이세희를 계속 바라만 보았다. 이세희는 보는 것만으로도 느끼는지, 다리를 더 벌려 등까지 젖히며 자위를 이어갔다.

    “하아, 폐하, 보이세요? 폐하 때문에…. 으응, 폐하….”

    이세희의 눈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세희의 요도에서 정액이 피핏, 하고 튀어나왔다. 몇 방울이 태윤의 얼굴에 튀었다. 이세희가 탈력감에 침상에 널브러져 하아, 하아,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묵직한 시선으로 이세희의 나신을 음미한 태윤은 손을 들어 얼굴에 묻은 정액을 닦아냈다. 그 손가락은 곧장 태윤의 입으로 사라졌다. 혀를 굴려 정액을 빨아먹었다. 이세희는 그 장면을 보며, 또 성기를 세웠다. 아아, 하고 이세희가 신음하며 자지를 잡는데 다급한 발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렸다. 태윤이 고개를 돌렸다.

    “세희야!”

    암행을 다녀온 황제가 바람 비린내를 물씬 풍기며 화요궁에 들이닥친 것이다. 그 와중에도 이세희는 태윤을 보며 “폐하. 폐하…. 신첩을 어서…”라고 말하고 있었다. 눈은 저리 빛내면서 말이다. 태윤은 이세희를 내려다보다,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황제를 보았다.

    “아바마마, 화비께서….”

    “폐하….”

    이세희가 드문드문, 거칠어진 목소리로 태윤을 보고 폐하라고 말했다. 황제는 태윤을 보고, 이세희를 내려다보았다. 하얀 몸을 붉게 물들이고, 신음하는 모습을 보더니 눈살을 확 구겼다.

    “세희가 왜 갑자기 저러는 것이냐.”

    “사람을 보내 조사 중입니다. 태의도 불렀으니, 곧 올 것입니다.”

    아직 약을 먹었다는 건 확증이 없으니, 태윤은 말을 둘러댔다. 황제는 심해지는 신음 소리에 걸음을 옮겨 이세희에게 다가갔다.

    “세희야, 짐이 왔다. 괜찮으냐?”

    “아아….”

    이세희가 멍한 눈을 깜박였다. 태윤을 보고, 황제도 번갈아가며 본 이세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가 둘….”

    황제가 지그시 이세희를 보다가 혀를 찼다. 평상시와 다르게, 몸에 열도 많고 헛소리를 하는 것에서 태자가 작정을 하고 약을 먹인 걸 알아챘다. 황제는 이세희의 얼굴을 붙잡고 자신을 보게 했다.

    “폐하는 짐이다. 태윤이는 짐의 아들이고.”

    태윤을 보았을 때와 다르게 눈을 흐리게 뜬 이세희는 말없이 황제의 품에 안겼다. 다리까지 벌려, 황제를 받아들인 이세희는 들뜬 신음을 일부러 황제의 귀에 흘리며 애원했다.

    “폐하, 어여삐 여겨주세요….”

    황제가 숨을 멈추고 이세희의 등을 더듬었다. 그의 신음이 흘러나오자, 금군들은 침전에서 한 명씩 빠져나왔다. 마지막으로 태윤이 뒤로 걸어가며 이세희를 보았다. 이세희는 황제의 어깨에 얼굴을 올린 채 태윤을 차가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유려하게 웃는 입매는 애틋하게 “폐하.”라고 불렀다.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

    태자는 모든 일에 대해 부인했다. 이세희가 자신에게 약을 먹이고, 겁간하려 했다며 억울하다는 뜻을 보였으나, 차를 가져온 내관이 고문 끝에 모든 걸 실토하면서 끝이 났다. 일을 해보기도 전에 모든 것이 끝났다며 태위는 실성했다. 자기 집에서 벽을 머리로 들이박으며 자살을 하려다가, 위병들에게 들켜 몸이 묶인 채 넋이 나갔다.

    중궁도 무사하지 않았다. 황제의 명에 수십 명의 위병들이 중궁을 둘러쌌다. 형부상서는 가마를 타고 등장했는데, 황후의 죄명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사태가 최악으로 치달아 태자가 사형에 내려진다면 9척은 모두 목이 베여 죽어야 했다. 유배를 간다면, 황후도 마찬가지로 유배형이었다.

    형부상서는 흐느끼는 소리가 넘치는 황후궁을 무표정한 얼굴로 걸었다. 황후가 유폐된 침전 앞에 섰다.

    “문을 열어라.”

    황후가 있을 때는 소리 없이 스르륵, 열리던 두 문이 쿵,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열렸다. 이제 황후로서 예는 다했다는 뜻이었다. 형부상서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띠고, 침전으로 발을 넣었다. 그러나 황후가 보이지 않아 시선을 돌렸는데, 가장 구석에 허공에서 흔들거리는 발에 불안감에 눈을 깜박였다.

    “마마!”

    형부상서가 손에 든 두루마리까지 내던지고 달려갔다. 높이 세워진 장식 때문에 보지 못했던 것이 드디어 드러났다.

    “아, 안 돼…!”

    그는 충격에 뒤로 넘어지며 더듬거리며 말했다. 황후의 족의가 허공에서 아름답게 흔들거렸다. 미풍에 살랑이는 이파리처럼, 양옆으로 자유롭게 움직였다. 형부상서는 경악스러운 얼굴이 되어 입을 떡 벌리고 황후를 살폈다.

    혼례를 치렀을 때처럼, 황후는 붉은 대례복을 입었다. 황후를 상징하는 봉관이 햇볕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축 늘어진 손발과 대비되는 아름다운 모습에 형부상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형부상서는 황후가 발을 딛고 섰을 의자 근처에 떨어진 서신을 발견했다. 그 서신은 그대로 황제에게 전해졌다. 그녀가 남긴 유언은 그녀답게 우아하고 단출했다.

    ‘태자비만은 편하게 보내주십시오.’

    아들 때문에 죽게 된 탓일까. 그녀는 아들에 대한 얘기는 한 줄 적어 놓지 않았다. 자기 아버지에 대한 위로도 없었다. 궁에 와, 태자의 사랑 한번 받아보지 못한 태자비를 향한 안쓰러움만이 남아 있었다. 황제는 한동안 그 유언을 보았다.

    아들을 죽여야 하나. 제 애첩을 건드린 대가는 혹독해야 했으나, 아들은 태자였고 태위의 손자였다. 세희를 건드리기 직전에 태윤에게 걸려 끝났다.

    그러나 부인에 부인, 그리고 세희에게 죄를 덮어씌우려는 그 작태가 너무 괘씸했다. 세희를 건드린 것도 모자라 세희를 그렇게 만드려는 아들을 살려두고 싶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죽이고 싶었으나, 아들을 죽인 친아버지라는 오명에 둘러싸일 걸 생각하자 머리가 아파왔다. 더불어 대신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야심한 시각, 황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신음했다. 태자의 처분이 너무 괴로웠다. 이미 아들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제 것을 탐내는 아들이라니! 세희를 생각하며 이를 갈던 황제는 어깨를 감싸는 단단한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폐하, 왜 그리 괴로워하십니까.”

    이세희가 창백한 얼굴로 웃었다. 미약 때문에 정신없이 황제에게 안기고 난 터라 기력이 없어 보였다. 황제가 두 팔을 벌리자, 이세희가 살갑게 안겨왔다. 황제의 등을 더듬으며 숨을 느리게 내쉰 이세희가 황제에게 속삭였다.

    “폐하, 신첩을 계속 지켜 주실 거지요? 신첩을 이 궁에서 지켜 주실 분은 폐하뿐입니다.”

    그리 말하며 어깨에 뺨을 대자 황제는 마음이 충만해졌다. 애첩의 애교가 이리 좋은 것이구나. 그리 생각하며 입가에 미소를 띠는데, 이세희가 몸을 들어 올렸다. 품이 다시 차가워지는 게 기분이 나빠 눈살을 찌푸리는데, 이세희가 청아한 미소를 지으며 책상에 올려 두었던 술병을 가져왔다. 황제가 쓰게 웃었다.

    “기분을 푸는 데 술만큼 좋은 것도 없지요, 폐하. 신첩이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그래.”

    이세희가 눈웃음을 농염하게 지으며 입술을 벌려, 입안에 술을 머금었다. 황제에게 먹이기 전, 이 안에 든 버섯꽃의 향이 나는지 확인했다. 태자가 준 차를 마시면서 차향으로는 미약이나 독을 숨길 수 없음을 알기에 이세희는 가장 독한 술을 준비했다. 민감한 자신의 입안에도 버섯꽃의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안도의 숨을 내쉰 이세희는 눈을 감고, 황제에게 입을 맞췄다. 그가 입을 벌려 독주를 받아 마셨다.

    이세희의 눈웃음이 더욱 진해지며 깊어졌다. 입안에 남은 독주도 모조리 황제가 핥아먹었다. 입안이 얼얼해질 정도로 강한 술에 황제가 눈을 찌푸렸다.

    “왜 이리 독한 걸 가져왔느냐.”

    “마음이 어지러울 땐, 독한 술이 보약이지요.”

    그리 말한 이세희는 몸을 숙여 황제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았다. 황제의 다리가 알아서 벌어졌다. 이세희는 무릎을 꿇고 앉아, 황제의 바지를 손으로 벗겼다. 황제는 슬슬 도는 술기운에 눈을 감고 더운 숨을 내뱉었다.

    “태자가….”

    황제가 얼굴을 감싸며 역성을 드러냈다.

    “태자가 널 건드리려 했어. 그것도 모자라 너에게 죄를 덮어씌우려고 했지. 이건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세희는 반쯤 발기한 그의 자지를 잡고서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는 만승지존의 존재. 태자도 폐하께서 세우시는 것이지요.”

    그리고 눈을 들어 올려 황제를 본 이세희는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폐하의 애첩을 건드린 일이 과연 단순한 일일까요? 다른 대신들의 말처럼, 폐하의 위엄과 명예를 더럽힌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너는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느냐.”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래.”

    이세희는 몸을 일으켜, 황제의 어깨에 양손을 올렸다. 그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이세희는 적의를 담아 말했다.

    “태자를 죽여 폐하의 위엄을 다시 보여주세요. 그리고 신첩의 억울함을 풀어주세요….”

    이세희가 눈물까지 글썽이며 애원하자, 황제는 멍하니 이세희를 보았다. 이세희는 눈물 젖은 얼굴로 웃다가, 술병을 집어 들었다. 입에 술을 머금은 이세희는 황제에게 입을 맞추었다. 입맞춤이 깊어질수록 그의 죽음이 가까워지자, 이세희는 쾌감에 전율했다. 입안에 남은 술 한 방울도, 이세희가 닿았다는 이유로 발정해 빨아먹으니 이만큼 좋은 해독제가 없었다. 이세희는 황제의 뒷머리를 칭찬하듯 쓰다듬으며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신첩을 사랑하시죠?”

    “…그래.”

    이세희는 잠시 말이 없다가, 느리게 미소 지으며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일을 겪고 나니 신첩도 알게 되었습니다. 신첩을 위해주고, 신첩을 진정으로 지켜주는 분은 폐하뿐이라는 사실을….”

    “그렇다면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겠느냐?”

    황제가 갈증에 범벅이 된 얼굴로 애원했다. 그가 너무나 바랐지만, 평생 듣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말. 그 말을 들을 생각에 그는 애가 탔는지, 이세희를 끌어안으며 “제발….”이라고 부탁했다. 그에게 안겨 감흥 없는 눈을 깜박이던 이세희는 가소롭다는 듯 미소를 짓고서, 그에게 말했다.

    “사랑합니다, 폐하.”

    황제가 몸을 떨었다. 거짓된 고백에도 그는 하늘을 날듯이 기뻐했다. 이세희는 제 품에 안긴 곰 같은 사내를 보며 냉소를 보냈다.

    태경, 태건, 태혁 모두 제 손으로 죽여준다면 이 사랑한다는 말은 수십 번도 해줄 수 있었다.

    이세희는 그의 머리를 연신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너무 쉬운 말을 거리낌 없이 내뱉었다.

    “사랑합니다, 폐하….”

    황제가 발정하여 이세희에게 달려들었다. 그대로 책상에 엎어지게 된 이세희는 몇 번이고 같은 말을 속삭이며 황제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마지막 말은 달랐다. 이세희는 태자를 죽이라고 말했다.

    *

    태자의 사형이 결정되었다. 대신들은 두 패로 갈라져 조정에서 매일같이 싸웠다. 아무리 그래도 애첩을 건드린 걸로 사형은 정도를 지나쳤다는 대신들과 아버지의 애첩을 건드린 것을 어찌 단순하게 처벌할 것이냐며, 그것은 당연하다고 두둔했다. 반대한 파는 태자를 미는 쪽이었고, 찬성한 파는 무혁왕을 은연중에 태자로 밀던 자들이었다.

    무혁왕은 태자의 처형에 반대했다. 제 형이 해서는 안 될 짓을 벌인 건 맞지만, 처형이 아니라 유배 정도로 끝내자는 것이었다. 태자에겐 태자비와 막 태어난 자식도 있었다. 자신도 아버지가 되는 사람이니, 그 아이에게 마음이 간 것이다.

    그러나 황제는 물러섬이 없었다. 그는 태자와 태자비에게 사약을 내렸다. 태어나지 얼마 안 된 아이도 예외는 없었다.

    그렇게 일이 마무리되는 줄 알았는데, 궁에 기묘한 소문이 들었다. 소문의 출처는 화요궁 궁녀이기도 했고, 태얼궁 궁녀이기도 했다. 혹은 내관이었다. 결국 누군지도 모르는 입에서 ‘이 모든 게 이세희가 조작한 것이더라. 이세희가 황제를 가지고 놀더라.’라는 말이 커져가, 그 소문은 백성들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백성들의 반응도 다양했다.

    가장 극렬히 반대한 것은 유생들이었다. 그들은 아예 문 앞에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서, 조정을 한마디로 좌지우지하는 요망한 화비를 내치라는 청을 올렸다. 황제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반대가 심해지고, 반란의 기미까지 보이자 황제는 위병들을 보내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피를 흘리는 자가 매일같이 늘어났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 배후가 이세희라는 소문이 돌자, 그때까지는 수군거리던 백성들도 목소리를 높였다. 이세희 때문에 조정도, 죄 없는 유생들도 다친다며, 이세희가 문제라고 입을 모아 얘기했다. 대신들도 눈치를 보았으나 황제는 노발대발하며 “모든 것은 짐이 결정한 것이다! 한 번만 더 세희 탓을 하면 사약을 내리리라!” 하며 엄포를 놓았다.

    황제는 지금은 태자를 정해야 할 때지, 이세희의 관한 문제를 논할 것이 아니라고 딱 잘랐다. 태자가 사약을 받고 죽었으니, 이제 무혁왕 아니면 효윤왕이 태자로 올라가야 했다. 처음에는 무혁왕 쪽으로 기울던 패가 어느 순간 효윤왕으로 기울어졌다. 무혁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효윤왕은 반대편에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손을 들어주는 건, 황제의 몫이었다.

    황제는 좀 더 생각해 보겠다며 조정을 중지하고 물러났다.

    하지만 무혁왕은 이미 황제의 마음이 ‘효윤이 차분하고 대신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어진 성품.’이라고 말했을 때부터 기울어졌음을 알아챘다. 무혁왕은 비밀리에 황제의 스승이자, 자신의 할아버지인 대장군과 접촉한다. 사병들이 밀집했다.

    삼 일 뒤, 수도의 동서남북에 있는 모든 문이 닫히고 사병들이 위병들을 죽이기 시작한다. 무혁왕이 ‘악첩 이세희를 밀어내고 조정을 바로 세운다.’는 뜻을 비치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 뒤를 유생과 대장군을 따르는 충신들이 있었다.

    그 소식을 제일 먼저 전한 건, 황궁의 4층 전각에서 순찰을 돌던 위병이었다. 남쪽을 담당하던 위병은 저 멀리서 다가오는 일렁거리는 불빛에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그러다 파도처럼 위아래로 출렁이고, 위로 치솟는 연기에 반란을 깨닫고 허겁지겁 뛰어 내려갔다. 외정에서 내정까지 가는 시간이 있기에 위병은 북을 이용해 반란을 알렸다. 그 소리를 멀리서 들은 태윤도 심상치 않은 낌새에 태얼궁 침전 문 밖에서 나와 앞뜰로 달려갔다. 그러자 앞뜰에선 숨을 거칠게 헐떡이는 어린 금군이 있었다.

    “무슨 일이냐!”

    태윤이 소리쳤다. 금군이 바닥에 엎드려 엉망진창인 얼굴로 소리쳤다.

    “반란입니다! 무, 무혁왕께서 사병과 위병을 이끌고 황궁으로 전진하고 계십니다!”

    “뭐?”

    태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반란이라니! 황위에 욕심이 많긴 했지만, 직접적으로 드러낸 적은 없던 태건이었다. 머리에 현기증이 일어 태윤은 비틀거렸다. 한서진이 다가와 태윤의 단단한 팔뚝을 잡아주었다. 이마를 짚고 숨을 불규칙적으로 내쉬던 태윤은 한서진과 눈을 마주쳤다. 한서진의 눈이 어느 때보다 냉정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서슬 퍼렇고 담담한 말에 태윤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가장 피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늘 상상만 하던 일이 실제로 벌어지려 하자, 손이 덜덜 떨려왔다. 억지로 힘을 줘 주먹을 꽉 쥔 태윤은 한서진을 밀치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은 이미 하고 말았다. 자신을 낳아주고, 키워준 아버지도 죽이겠다고 결심한 마당에 동생이라고 못 죽이겠단 말인가? 이런 마음으로 어떻게 황제가 되고, 백성을 지키고, 세희를 지킨단 말인가? 적은 적이었고, 아군은 아군이었다. 태건을 죽여야만 세희를 지키는 군주가 된다면 그리 해야 마땅했다.

    죄책감에 후회하고, 괴로워한다면 그 순간 적에게 목을 내어주고 만다. 인간적인 감정이 아니라 미래를 도모하며 이성으로 자신을 다스려야 했다.

    태윤의 눈은 더 이상 동정심이나, 죄책감으로 물들지 않았다. 단단하게 자신을 동여맨 태윤은 자신을 막아서는 내관들을 힘으로 밀치며, 굳게 닫힌 침전을 열었다. 침전 안에서는 달콤한 향유, 독주 냄새가 진하게 풍겨 나왔다. 그 중심에는 벌거벗은 황제가 등을 보이고 있었다. 이세희는 황제의 종마 같은 허벅지 위에 올라타, 얼굴을 감싼 채 입을 맞추고 있었다. 눈을 반쯤 내리감고 있던 이세희가 태윤을 알아보고 눈을 치켜떴다. 태윤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말없이 눈웃음을 치며 고개를 뒤로 물렸다. 흘러나오는 탁한 신음소리는 황제의 것이었다.

    “폐하, 금군대장이 왔습니다.”

    이세희가 세상 나긋나긋하게 황제의 뺨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등이 오싹할 정도로 감미로운 목소리에 황제가 후우, 하고 숨을 내쉬며 이세희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었다. 이세희는 더할 나위 없이 싸늘한 눈빛으로 황제의 등을 노려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황제가 일어날 기미도, 태윤을 신경 쓰는 눈치도 보이지 않자 태윤은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폐하, 무혁왕이 현재 병사를 이끌고 황궁으로 전진하고 있습니다! 반란입니다!”

    “…뭐라?”

    반란이란 소리에 이세희도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때까지만 해도 술에 반쯤 취해 늘어져 있던 황제가 몸을 느릿하게 일으켰다. 아직 술이 다 깨지 않아 머리가 아픈지 이마를 짚고 비틀거리던 황제는 이세희가 내미는 손을 잡고 중심을 잡았다.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깜박거리던 황제가 입술을 느리게 움직였다.

    “뭐라고 했지? 반란?”

    잔뜩 낮아진 목소리에 분노가 배여,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아무리 술에 취하고, 나신 상태라 해도 지울 수 없는 위압감에 태윤은 마른침을 삼켰다. 태윤이 막 입을 벌려 똑같은 말을 반복하려던 찰나, 저 멀리서 예법에 맞지 않게 요란스러운 발소리가 들렸다. 철컹거리는 쇳소리가 익숙했다. 갑옷이 움직이면서 나는 소리였다. 황제의 눈에 차츰 이채가 감돌고, 그는 긴 팔을 뻗어 바닥에 널브러진 침의를 걸쳤다. 그리곤 이세희를 보며,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 주고서 말했다.

    “그대는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게 짐이 지켜주겠다.”

    그와 시선을 마주치면 지금 심정을 들킬까 봐 눈을 내리깔았다. 가슴이 불안으로 두근두근 뛰었다. 반란은 어림짐작도 못한 일이었다. 황궁에 사는 그 누가 무혁왕의 반란을 생각했을까. 만에 하나, 무혁왕의 반란이 성공한다면? 자신이 죽는 거야 상관없었지만, 가족들이나 태윤에게 일이 생길까 두려워져 이세희는 시선을 힐끔 돌렸다. 태윤은 여전히 무릎을 땅에 대고 앉은 채,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황제를 응시했다. 마치, 이세희와 아무런 연이 없는 것처럼.

    “폐하! 무혁왕이 대장군 양승협과 함께 화비 마마를 이 나라에서 추방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백성들을 선동해 화비 마마를 악첩이라 부르게 하며, 황궁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폐하를 애첩에 빠진 황제라 부르며 능멸하기까지 했습니다!”

    태건이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았다. 이세희는 불쾌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태자가 아니라 태건을 먼저 죽였어야 했다. 태자를 없애면, 태건과 태혁이 태자 자리를 두고 싸울 줄 알고서 저지른 일이었다. 오히려 이 일이 시발점이 되어 자신을 없앤다는 빌미로 태건이 반란을 일으킬 줄이야…. 이세희의 눈이 한없이 어두워졌다. 침전을 메운 대신들을 훑는 이세희의 시선을 두려움으로 읽은 황제가 혀를 찼다.

    “위병들은?”

    “…그것이 제도 내에 있는 위병들은 무슨 일인지….”

    위병들을 통솔하는 장군이 우물쭈물 거리자, 그를 힐끔 보던 다른 장군이 말을 이었다.

    “대장군 양승협과 도독 고욱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선, 동서남북의 모든 문을 통제하고 위병들이 나서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고욱이?”

    황제가 허망하다는 어투로 중얼거렸다. 그 장군은 참담함을 억누르지 못하고, 이마를 땅에 짚으며 말했다.

    “화비 이세희를 폐위 시키고, 유배 보낼 것을 유생들과 주청을 올리다가…. 그것이 통하지 않자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추정되옵니다.”

    그 소리에 이세희는 숨을 다독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나만 물러나면 된다는 것이냐?”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일이옵니다, 마마.”

    그 말을 칼로 냉정하게 자르듯, 단숨에 맺은 건 태윤이었다. 태윤은 우직한 자세로 앉아 황제를 응시했다. 이세희는 불안함에 황제와 태윤을 번갈아가며 보다, 황제의 손을 덥석 잡았다. 황제는 걱정 말라는 듯 그 손을 맞잡았다.

    “아바마마, 태건과 스승님의 처분을 소자에게 맡겨 주실 수 있습니까.”

    태윤의 벼락같은 한마디에 사방에 찬물을 뿌린 듯 조용해졌다. 여러 장군들도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예법에 따른다면, 제도 내에 총사령관인 도독이 반란을 제압해야 했으나 그 도독이 반란의 주동자가 되었으니 좌도독이나 우도독이 나서야 했다. 그러나 그 둘은 제도에서 멀어진 두 개의 주에 있었다. 지금 봉화를 올려 좌도독과 우도독을 부를 테지만, 이미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다.

    총사령관의 역할을 할 수 있으며, 군사들의 사기를 올려 반란군을 제압할 수 있는 사람으로 태윤만 한 자가 없었다. 황제의 아들이며, 이 나라에서 무예 실력으로 이인자가 아니던가. 창술로 유명한 태건도 태윤 앞에선 하룻강아지처럼 지고 말았다.

    하지만 태윤이 나서겠다는 마음이 과연 순수하게 태건과 도독, 스승인 대장군 양승협을 제압하는 것뿐인지 의아함이 앞서, 승상이 입을 열었다.

    “혹, 금군대장께서 태자 자리를 노려 무혁왕의 반란을 제압하려는 것은 아닙니까?”

    그 소리에 장군이 어허! 소리를 내며 바닥을 검으로 내리쳤다.

    “작금의 상황에서 태자 자리보다 폐하의 안위와 황궁을 지키는 것이 우선인 것을! 그리고 여태 폐하에게 충성을 바쳐온 금군대장께 심한 말씀 아닙니까?”

    “오히려 작금의 상황에서 무혁왕이 사라지면 태자 자리에 오를 수도 있으니 그런 것이 아닐지….”

    승상의 오른팔인 문관 하나가 풍성한 수염을 매만지며 의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태윤은 입을 꾹 다물고 황제만 직시했다. 태윤과 시선이 마주친 황제는 발로 바닥을 세게 내리쳤다. 쿵, 하고 울리는 천둥 같은 소리에 비상성 조정처럼 모인 대신들이 허둥지둥 바닥에 손을 짚고 고개를 숙였다.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모두 입을 다물라! 정녕 중요한 것을 모르겠느냐? 지금 무혁왕이 감히 짐에게 반기를 들어 황궁으로 오고 있다!”

    황제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사자후를 내지르자 대신들이 읍소했다. 태윤은 검을 꽉 잡은 채 황제의 명을 기다렸다. 거칠어진 숨을 다독인 황제는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 손으로 네 아우와 스승을 죽일 수 있느냐?”

    황제의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태윤은 숨을 한 번 고르고 대답했다.

    “소자에게 중요한 것은 아바마마입니다. 아바마마를 위협하는 자라면, 소자에게 더 이상 아우나 스승의 의미는 없습니다. 그저 소자의 앞에 선 적일 뿐입니다.”

    그리고 아바마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말은 속으로 삼킨 태윤은 눈을 천천히 치켜올렸다. 그곳에 황제의 품에 안긴 이세희가 있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태건을 죽이고, 태혁을 없애고… 그리고 최종적으로 황제를 없애면, 이세희를 자신의 품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태윤은 머지않은 그날을 기다리며 입을 움직여 확고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자가 역모를 일으킨 태건과 양승협, 고욱의 목을 새벽이 오기 전까지 베어오겠습니다. 소자에게 맡겨 주십시오.”

    말없이 태윤을 보던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태윤은 망설임 없이 몸을 일으켰다. 군의 통솔권을 위임 받아 온 태윤은 금군의 반절을 황궁에 두고, 남은 금군과 함께 갑옷을 입었다. 금군대장을 상징하는 검을 허리 뒤쪽에 둔 태윤은 떨리는 손으로 언월도를 집었다. 빛을 받아 퍼렇게 빛나는 언월도를 떨리는 눈으로 살폈다. 스승인 양승협이 태건과 자신에게 선물로 준 언월도였다. 자신의 신체만큼 크고, 묵직한 언월도를 연습 삼아 휘둘러보던 태윤은 자신을 보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한서진이 서 있었다. 두 손에 투구를 들고 온 한서진은 뚜벅뚜벅 걸어와 제 손으로 태윤의 머리에 투구를 씌워주고, 매듭까지 맺어주었다.

    “정말 절 안 데리고 가셔도 되겠습니까.”

    한서진이 안타까운 어조로 물었다. 태윤은 이세희의 안전을 위해 한서진을 궁에 두고 가기로 한 참이었다.

    “너라도 여기에 있어야 내가 안심이 돼. 넌 세희를 지켜.”

    “…일부러 가시는 것이지요?”

    태건과 연무장에서 무예를 연습했던 한서진도 내키지 않는지, 머뭇거렸다. 태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한서진을 빤히 보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건은 이제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야. 능지형에 처할 게 뻔한데 내 눈으로 그걸 어떻게 본단 말이냐. 차라리 내 손으로 빨리 보내주는 것이, 형으로서 할 도리다.”

    살이 한 점, 한 점 떼어져 차츰 죽어가는 것보단 단숨에 목이 베어져 죽는 게 훨씬 나았다. 태건도 알고서 스승님과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 위험을 감수하고서 반란을 일으켜, 세희를 죽였어야 했단 말인가. 태윤은 무거운 눈으로 달과 별이 새겨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발을 빠르게 움직였다. 넓은 연무장에는 어마어마한 병력이 서 있었다. 무장을 한 위병들을 향해 태윤은 복부에 힘을 주고 소리쳤다.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말고 죽여라! 아이, 여자는 제외하고 모든 남자는 죽여서 목을 베어라!”

    와아아아아! 하고 소리가 요동쳤다. 태윤은 말에 올라타 태중문까지 달려갔다. 그 뒤를 군사들이 이었다. 황제를 상징하는 붉은 깃발이 불빛과 함께 일렁거렸다. 황궁 밖으로 나가자, 태윤은 귀를 스치는 소름끼치는 소리에 숨을 멈추었다.

    “악첩 화비 이세희를 죽여 조정을 바로 세운다!”

    진심으로, 이세희를 죽이고 싶어 하는 소리에 태윤은 이를 악물었다.

    ‘진정한 복수는 말입니다, 황자 마마. 아예 그런 복수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다 죽여 버리면 그만입니다.’

    ‘네?’

    과거에 묻어두었던 스승의 말에 태윤은 다시 한 번 소름이 끼쳐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스승은 기마부대를 이끌던 대장군으로, 들판을 내달려 유목민들을 평정한 자였다. 복종을 하지 않는 자에겐 그 마을의 인원을 모두 죽여 반란의 꿈도 못 꾸게 하였다. 그 일을 얘기하며 스승은 태윤에게 감미로운 말을 내뱉었다.

    ‘괜히 반란을 일으킨 역모 주동자에게 9촌을 죽이고, 그 가문을 멸문시키는 게 아닙니다. 아예 일어나지 못하게 짓밟으십시오.’

    ‘하지만…. 복수는 복수를….’

    ‘그건 다 힘이 없는 자들이 하는 말입니다.’

    스승은 호탕하게 웃으며 태윤에게 말했다.

    ‘그러니 복수가 복수를 낳지 못하게 다 죽이라는 겁니다. 간단하지요?’

    그렇다면 스승도 자신과 아바마마, 이세희를 다 죽일 작정으로 달려오고 있다는 뜻이겠지…. 반란의 승리든, 패배든, 한쪽은 모두 죽을 각오로 싸워야 했다. 태윤은 언월도를 억세게 쥐고 숨을 한 번 크게 삼키고, 내뱉었다.

    앞을 가로막는 자는 다 죽인다. 그게 세희를 지켜주는 방어막이 되어준다면, 다 죽여서 그 뼈로 탑을 만들리라.

    태윤의 언월도가 허공으로 올라갔다. 가장 먼저 앞을 가로막는 병사의 목을 단숨에 베고, 말발굽으로 상체를 밟아 내달렸다.

    “다 죽여라! 모조리 죽여!”

    태윤의 고함에 따라 같이 달려온 군사들과 앞을 막는 반란군이 검과 검을 맞댔다. 카아앙, 하고 요동치는 파열음에 귀가 쨍했다. 태윤은 빠르게 눈을 움직였다. 개미 떼처럼 밀려오는 사병의 수에 혀를 찼다. 황족이 호위를 위해 모집할 수 있는 사병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는 뜻은, 대장군 양승협이나 태건의 외할아버지인 고욱이 따로 모은 살수라는 뜻이었다. 검을 쓰는 방법이 위병들과 다른 검술에 태윤은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단기간에 생각한 계획이 아니었다. 필시, 최악의 수를 염두하고 그 전부터 살수들을 모집한 듯했다. 태윤은 자신에게 서슴없이 갈고리 같은 검을 휘두르려는 살수의 손목을 언월도로 찔렀다. 살수가 악,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다시는 살수가 일어나지 못하게, 말발굽으로 가슴을 밟은 태윤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무혁왕을 찾아라!”

    태윤은 단 한 손으로 창을 가볍게 움직여, 살수들의 목을 베어버리며 금군들을 능수능란하게 지휘했다. 태윤의 아래에서 훈련을 받은 금군들은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반란군을 제압했다. 그때, 태윤의 시선 끝에 익숙한 갑옷이 스쳤다. 용의 비늘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붉은 갑옷에 태윤은 숨을 고르며 고삐를 당겨, 앞으로 달려갔다. 금군들이 따라 붙으려 하자 언월도를 평행으로 만들어 그들을 막고서 입을 열었다.

    “스승님!”

    우렁찬 목소리에 스승 양승협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가 이순이 넘었어도 정정하고 활달한 모습에 태윤의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자신과 태자, 태건을 일렬로 세워 두고 호탕하게 웃던 스승의 젊은 얼굴 위로 겹치는 위엄 서린 모습에 태윤은 이를 악물었다. 그에 비해 양승협은 한결같이 차분했다. 그리고 양승협의 뒤에 비스듬히 선 태건도. 생각 외로 태건은 흐트러짐 없고, 당당한 모습으로 반란군의 중심에서 빠져나와 태윤을 직시했다. 사방에서 일렁거리는 횃불에 태건의 얼굴이 유독 도드라지고, 선명하게 보여 태윤의 가슴이 아려왔다.

    정말 저 아이를 내 손으로 죽여야 한단 말인가. 태윤의 손등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건, 머리로 알고 있었다. 태건도 밀치고 그 자리에 올라야 했다.

    하지만 이것만은 진심으로 피하고 싶은 일이었건만…. 태윤은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눌러 삼키며, 눈을 사납게 떴다. 태건도 태윤의 눈에 깃드는 감정을 읽었는지 무거운 숨을 내뱉었다. 둘이 시선만 마주치고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우측에 있던 도독 고욱이 말을 움직였다. 간격을 두고 대치한 반란군과 금군이 으르렁거리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태윤이 드디어 본심을 드러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전하. 사병을 이끌고 물러가십시오. 폐하께는 제가….”

    “형님, 저와 함께해 주십시오.”

    태건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태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태윤이 헛헛하게 웃으며 언월도를 기울였다. 태건은 자신을 말리는 양승협의 손에서 빠져나와, 태윤에게 외쳤다.

    “화비 이세희가 폐하를 유혹해 조정을 좌지우지하고 있습니다! 태경이 왜, 어떻게 죽었는지 형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전부 이세희가 요청한 것이었습니다! 죽여 달라고! 태석이도 그리 죽이더니, 이젠 경이까지 죽였습니다. 제 가족들에겐 홍패를 요구한 것도 모자라, 대저택까지! 요망한 화비가 이 나라를 망치려 하는 겁니다!”

    이 나라를 망치는 건 화비 이세희가 아니었다. 답답한 마음에 태윤이 입을 열려는 순간, 태건이 흰자위를 붉게 물들이며 소리쳤다.

    “아바마마는 이미 이세희 때문에 이성을 잃으셨습니다. 사내를 비에 앉혔을 때부터 아바마마는 이세희에게 홀리신 겁니다. 그런 아바마마에게 이 나라를 과연 맡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사방엔 오랑캐요, 조정엔 간신이 득실합니다. 이 나라엔 아바마마 같은 주색에 빠진 황제가 아니라, 올곧은 정신을 가진 성군이 필요합니다!”

    “그 성군이 지금 전하라, 그 말씀이십니까.”

    태윤의 나직하고 힘 있는 물음에 태건이 살짝 굳었다. 그러다가 피식 웃더니 태건이 빈정거렸다.

    “제가 안 될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형님.”

    “그건 제가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단호하게 말을 자른 태윤은 태건을 노려보며 사납게 일갈했다.

    “지금 전하야말로 정해지지도 않은 태자 자리가 탐이 나,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닙니까? 화비 이세희는 명분에 불과한 것이겠지요!”

    정곡을 찌른 태윤의 말에 태건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양승협은 금방이라도 싸움을 일으킬 것 같은 둘을 보다가 중간에 나섰다. 스승인 양승협의 등장에 태윤이 흠칫 몸을 떨었다. 양승협은 흰 눈썹을 치켜 올리고, 바둑알 같은 검은 눈으로 태윤을 보았다. 태윤이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윤아. 오래 얘기하지 않으마.”

    “스승님….”

    윤이 애절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양승협은 윤과 대척점에 서서 입을 열었다.

    “태자가 죄를 저지른 것은 맞다. 폐하의 애첩을 탐하다니, 그건 벌을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태자가 목이 잘릴 정도로 큰 죄란 말이더냐? 태자비는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태자비의 가문과 태자의 가문 모두 멸문당했다. 황후 마마는 자결로 생을 마감하셨다. 겨우, 화비 이세희가 태자를 죽여 달라 부탁한 것 때문에 말이다.”

    스승의 길고 담담한 추궁에 태윤은 세희가 모두 나 때문에 벌인 짓이라고 변명할 수 없었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양승협은 느슨하게 쥐고 있던 언월도를 올려 날을 태윤에게 세웠다. 명백한 적의에 태윤도 언월도를 꽉 쥐고 스승을 바라보았다. 말이 당장 날뛸 것처럼 히히힝, 하고 울었다. 달이 언월도의 날처럼 번쩍였다.

    “네 생각에도 이세희에게 죄가 없는 것 같으냐? 태자의 죽음을 요구한 그 베갯머리송사가, 훗날 조정을 더럽히리라.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건 볼 수 없다. 그러니 비키거라. 너도 생각이 있다면….”

    “비킬 수 없습니다.”

    태윤은 스승의 말을 자르며 말 위에서 내려왔다. 금군들이 사방에서 “대장님! 안 됩니다!” 하며 외쳤다. 하지만 태윤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저벅저벅 걸어가 스승을 서슴없이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만약 화비 마마를 죽이고 싶으시다면 저를 죽이고 지나가십시오. 그 전까지는 비키지 않을 것입니다.”

    스승의 눈썹이 부르르 떨렸다. 태윤이 교본처럼 자세를 취하고 언월도를 양손으로 잡았다. 그 모습을 본 태건이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힘을 주고 소리를 내질렀다.

    “형님! 이세희를 지키겠다 이 말씀이십니까?”

    태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저는 폐하의 명에 따라 움직일 뿐입니다.”

    “이세희가 제 가족을 현령 자리에 앉힌 것도 모자라 제도까지 불러들였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저는 이세희의 악행을 두고 볼 수 없습니다. 태자의 죽음을 요구한 그 오만함을 꺾고, 오명으로 뒤덮인 나라의 명예를 다시 세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를 죽이고 가십시오.”

    태윤의 언월도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스승은 이제 두말할 것도 없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자신에게 언월도를 주고, 가르친 스승을 제 손으로 죽여야 하는 순간이었다. 멀리서 보았을 땐 몰랐지만, 가까이서 마주하자 스승의 눈은 울분으로 물들어 있었다. 사랑하는 제자와 죽음을 두고 싸워야 하는 이 상황이 견디기 힘들어 했다. 어째서 태건과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켰는지, 태윤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 천민의 피가 흘러 황제가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스승은 누누이 태윤에게 말했다. 황제가 될 수 없어서 자신이 이토록 열심히 무예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태윤은 왜 그러느냐고 묻지 않았다. 황제도, 스승도, 자신에게 바라는 건 늘 하나였다.

    황제의 그림자로 충성스럽게 살아갈 것. 황제가 자신을 마음껏 사랑한 것도 그 이유였다.

    황제가 될 수 없지만, 쓸모가 많은 아이니까. 스승도 황제와 다를 바 없었다. 자신에게 무예를 가르친 것도, 남은 형제들을 지키는 호위로 삼기 위해서였다.

    황제는 입이 닳도록 말했다. 욕심을 내지 말라고. 너는 욕심을 내서는 안 되는 아이라며, 충성을 맹세하도록 강요했다.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다. 여태껏 그렇게 살아왔고, 죽을 때까지 황제든, 태자든 누군가를 지키다가 죽음을 맞이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애타게 갖고 싶은 게 생겼다. 가지고 싶었다. 처음엔 그저 예뻐서, 애틋해서…. 서로에게 처음으로 간직하고 싶었으나, 이젠 아니었다.

    서로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고 싶었다. 이세희를 미치도록 갖고 싶었다. 이럴 때만큼은 태윤이 자신이 태공의 자식임을 실감했다. 얼굴만 닮은 게 아니라 성격, 이세희에게 집착하는 것마저도.

    “스승님, 다시 한 번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지금이라도 전하를 모시고 도망가십시오. 그렇다면 제가 폐하께 말씀은 잘 드리겠습니다.”

    “추하게 뒤를 보이고 도망가란 말이냐? 그럴 바엔 너와 장렬히 싸우다 죽겠다.”

    스승의 차디차고 확고한 말에 태윤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다. 짧은 기함과 함께 뛰어나간 태윤의 언월도가 스승의 머리 위를 스쳤다. 엄청난 속도와 힘이 바람을 휘익, 가르자 스승의 눈이 살짝 떨렸다. 제자의 놀라운 실력에 스승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자, 태윤은 거침없이 언월도를 찔러 스승을 압박했다. 늙은 스승은 젊은 제자의 압도적인 실력에 발이 점차 밀려갔다. 승패가 완벽하게 갈린 대결을 보던 태건이 보다 못해 끼어들려 하자, 고욱이 막았다. 고욱의 엄한 눈빛에 태건이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고욱은 옆에 있던 사병의 손에서 활과 화살을 뺏었다.

    “언제까지 두고 볼 것인가! 반격하라!”

    고욱의 노성에 사병들이 달려들었다. 양승협이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고, 그때 고욱의 손에 팽팽히 당겨졌던 화살이 날아갔다. 표적은 태윤이었다. 태윤은 당황하지 않고, 방심한 스승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크억…!”

    스승의 목에 화살이 콱 박혔다. 피가 주르륵 흐르고, 스승의 고개가 파들파들 떨리다 축 늘어졌다. 태윤은 냉철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다, 스승의 등을 발로 후려쳐 밀치고서 스승의 허리에 있던 검을 빼들었다. 그리고 달려오는 사병의 목을 한 번에 꿰뚫었다.

    “전하를 지켜라! 전하를 반드시 황궁까지 모셔야 한다!”

    고욱이 사병들을 모아 태건을 지키도록 명령했다. 태윤은 죽은 사병의 띠돈에서 새로운 검을 빼내었다. 왼손엔 검을, 오른손엔 언월도를 든 태윤이 피에 젖은 눈을 뜨고 태건을 보았다. 태건은 처음 보는 형의 소름끼치는 눈빛에 몸을 떨었다.

    “내려와.”

    태윤의 입술이 벌어졌다.

    “날 죽여야 황궁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내려와!”

    그 누구도 이세희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날 쓰러트리지 못한다면 아바마마도 쓰러트리지 못할 터. 그런 마음가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면 여기서 물러가거라!”

    태윤의 윽박지름에 태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더니, 말에서 뛰어내려왔다. 고욱이 내려와 태건의 팔뚝을 잡았다.

    “전하, 정신 차리십시오! 지금 저 말에 휘둘리시면 안 됩니다! 천한 사생아 따위의 말에 넘어가시다니요!”

    “천한 사생아라 해도, 형님의 말이 맞다. 형님을 쓰러트리지 못한다면….”

    눈을 내리깔고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스승을 보던 태건의 눈이 단단해졌다. 잠시 약해졌던 마음을 다잡았다. 피를 뒤집어쓰고 악귀처럼 자신의 죽음을 원하는 형님이 있었다. 저 자를 잊고 있었다. 형님은 결코 자신의 편이 되지 못할 텐데…. 태건은 당연히 형님이 자신의 호위가 되어줄 줄 알고, 방심한 자신을 탓하며 띠돈에서 검을 빼내었다. 스르릉, 하고 검이 나오는 소리에 태윤도 언월도를 내던지고 검을 한손으로 잡았다.

    “형님을 쓰러트리지 못한다면, 아바마마를 쓰러트리지 못하는 것과 같다. 아바마마의 검술 실력은 자네도 알지 않는가.”

    “전하! 여기서 전하가 돌아가시면 저희도 죽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고욱이 악을 썼다. 어떤 마음으로 태건을 설득했는가. 태자가 죽었을 땐 환호를 내질렀다. 이세희 덕분에 굳이 힘을 들이지 않아도 쓸모없는 태자를 죽일 수 있었다. 태자는 황후 덕분에 너무 손쉽게 태자가 되었을 뿐, 능력은 태건이나 태혁, 태윤보다 못한 놈이었다.

    이세희를 건드리려다가 목이 잘려 죽었고, 그 명분으로 이세희까지 죽일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그 상황을 이용해 태건이 황제가 된다면…! 유생들을 앞세우고, 그 뒤에 백성을 깔아 지지까지 얻었건만! 태윤의 말에 진심으로 붙으려는 태건이 이해가 가지 않아 고욱은 눈에 핏줄을 세우고 소리쳤다.

    “지금 모든 기회가 전하에게 주어졌는데, 사생아 때문에 망칠 생각이십니까? 이세희의 곁에 머물러, 입발림만 배워 전하를 모욕하려 드는 것입니다!”

    “한 번도 형님을 이기지 못했어.”

    태건은 고욱을 밀치고 스승의 시체를 넘어, 태윤에게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네 형제가 스승의 아래에서 검술이나 창술을 대련하면, 이기는 건 항상 태윤이었다. 황제는 그런 태윤을 보며 ‘짐을 닮은 유일한 아들.’이라고 칭찬했다. 그 칭찬에 태윤은 묘하게 씁쓸한 얼굴로 웃었다. 그걸 보면서 안심하는 자신이 있었다. 형님은 열심히 해도, 어차피 황제가 못 될 테니까.

    그래서 더욱 형님에게 의지하는 면도 있었다. 형님만은 욕심 없이 자신을 지켜 주리라 믿었다.

    그것이 얼마나 오만하고, 형을 무시하던 생각이었는지 이제야 알게 된 태건은 형 앞에 온전히 섰다.

    “…만약에 제가 죽는다면.”

    아주 낮고 스산한 목소리가 바닥에 깔렸다. 태윤이 눈썹을 치켜세우기가 무섭게, 태건이 기합을 내지르며 달려왔다. 검과 검이 캉! 소리를 내며 맞붙자, 곁에서 대적하던 군사와 사병들이 동시에 둘을 돌아보았다. 태윤이 무덤덤한 기색으로, 검을 튕기려 하는데도 태건을 이를 악물고 검을 부딪쳤다.

    “형님, 저를 만약에 여기서 죽이신다면….”

    “말이 너무 많구나.”

    태윤이 힘을 줘 태건을 밀쳤다. 태건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그래도 바로 중심을 다잡고, 다시 달려들었다. 캉, 캉, 하고 파열음이 연신 터져 나왔다. 태건의 입매가 점차 일그러졌다. 아버지가 같고, 신체도 엇비슷한데 어찌 이리 형만 힘이 유달리 센지…. 태윤이 검을 비틀거나, 정면에서 내리칠 때마다 흔들리는 자신이 야속했다. 당황한 태건의 동공이 잘게 떨리는데, 태윤은 침착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고요한 수면 같은 형의 시선에 태건은 등에 한기가 끼쳐 몸을 잘게 떨었다.

    태윤이 진심으로 자신을 죽이려 마음먹었다. 자신도 태윤을 죽이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생각에 태건은 악 소리를 내며 검을 위에서 아래로 쪼개듯이 내질렀다. 태건은 능숙하게 그 검을 받아치고, 허점을 찾아내 검을 재빠르게 뒤로 물리고 검 등으로 태건의 옆구리를 후려갈겼다. 태건의 몸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허점은 금방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같이 대련해온 사이라면 더더욱.

    태윤의 검 끝이 태건의 갑옷 빈틈으로 파고들었다. 푹, 하고 꽂히며 들어오는 검날에 태건의 눈이 크게 뜨였다. 몸을 뒤덮는 뜨거운 고통에 태건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손을 간신히 뻗어 태윤의 등을 꽉 안았다. 그러자 검이 더 안으로 파고들어, 태건의 몸이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움직였다. 태윤은 자신의 등에 매달리듯 안긴 동생의 등을 떨리는 손으로 감쌌다. 한 손으로는 더욱 검을 밀어 넣자, 피가 아래로 떨어졌다.

    “…제 아이가….”

    피에 젖은 태건의 입술이 떨렸다. 너무 아파서, 울음이 나올 것 같은 걸 참으며 태건은 무너지는 정신 속에서 누군가를 애타게 불렀다.

    “왕비가…. 현아가… 쿨럭…!”

    현아란 이름에 태윤의 눈이 흔들렸다. 눈가엔 참았던 눈물이 맺혔다. 무릎이 꺾여 쓰러지려는 태건을 양손으로 꽉 끌어안은 태윤은 고개를 숙여 태건의 어깨에 파묻었다. 태건의 몸에서 힘이 빠져 흐느적거렸다. 그래도 태건은 힘을 줘, 태윤의 등을 억지로 움켜잡고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피를 흘리며 외쳤다.

    “현아가…. 아이를…. 형님…!”

    태건의 부름에 태윤이 태건을 서서히 떼어놓으며 눈을 마주쳤다. 태건은 피를 왈칵 흘려보냈다. 경직된 손을 움직여 태윤의 투구에 올린 태건이 멍한 눈을 깜박였다.

    “아이를…. 살려….”

    “…현아가 어디로 갔지?”

    태윤이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태건은 이제 거의 죽어 가는지, 입술을 겨우 달싹거려 말했다.

    “북산…. 내 아이가…. 현아가….”

    태건의 팔이 축 늘어졌다. 태윤의 흔들리는 시선이 땅에 꽂혔다. 태건과 태윤, 그리고 스승의 시체가 널브러진 곳은 피 웅덩이가 범람했다. 전부 태건의 피였다. 팔과 옆구리 사이의 빈틈을 노려, 갈비뼈 사이를 찔렀으니 죽는 게 당연했다. 태윤은 소리 없이 오열하며 동생의 시체를 바닥에 놓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도끼를 가져와.”

    태윤의 건조한 목소리에 금군이 머뭇거리며 무기로 쓰던 도끼를 가져왔다. 태윤은 죽은 태건의 머리에 발을 올리고, 도끼를 힘껏 위로 올렸다. 역모는 주동자의 목을 가져가는 게 법도였다. 법도에 따라, 태건의 머리를 자른 태윤은 피 묻은 손으로 언월도를 들었다.

    이제 남은 건 고욱이었다. 태윤의 광기 어린 시선이 자신에게 닿자, 고욱은 히죽 웃더니 검으로 목을 찔렀다. 그가 자결하는 걸 본 태윤은 무덤덤한 눈을 돌려, 금군들에게 툭 내뱉었다.

    “남은 반란군들을 죽여라.”

    “예!”

    “대장님은 어딜 가십니까?”

    달라붙는 부관을 떼어놓고, 태윤은 말 위에 올라 옆구리를 발로 찼다.

    “왕비를 찾으러 간다!”

    *

    천민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로 황제 자리는 엄두도 내지 못했고, 문관도 되지 못했으며, 북산에 오르지도 못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북산에 오르는 게, 제 손으로 죽인 동생의 아내와 아이를 찾기 위함이라는 사실에 태윤은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하늘도 태윤의 울분을 아는지 비를 억수로 퍼부었다. 한여름인데도 빗물이 얼음장 같았다. 태윤은 무거운 갑옷을 벗어던지고 숨을 거칠게 헐떡이며 눈을 닦아냈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시야가 탁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북산엔 신당이 있었다. 그곳엔 사람이 없어도, 지붕이 있으니, 피하기 적절할 것이다. 지도로 보았던 북산을 머리로 그리며 태윤은 차디찬 몸을 이끌고 북산을 계속 올랐다.

    그렇게 얼마나 올랐을까. 비가 그치고, 달이 그 자리를 메우더니 축축하게 젖은 북산이 어렴풋이 보였다. 태윤은 신당을 알리는 깃발을 보고 허겁지겁 뛰어갔다. 제발, 그곳에 왕비와 아이가 있길 바라면서.

    “제발, 제발…!”

    어느 순간 기도는 절박해졌다. 저 멀리, 붉은 기와가 보이자 태윤은 박차를 가해 달렸다. 몇 번이고 젖은 돌에 넘어질 뻔했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관복이 모두 물에 젖어 살갗에 달라붙어 기분이 나빴다. 태윤은 흘러내린 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숨을 잘게 내뱉었다. 비에 젖은 신당이 시야에 꽉 들어찼다. 난생처음 보는 신당의 화려한 모습에 눈을 멍하니 깜박이던 태윤은 소름끼치게 조용한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가 따라왔을까 노심초사하며 숨을 죽이고 신당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나는 금군대장 태윤이오. 죽이지 않을 테니, 살아 있다면….”

    낮은 목소리로, 달래듯이 얘기하던 태윤은 바닥에 흐릿하게 보이는 핏자국에 눈을 크게 떴다. 놀라서 뒤로 물러나 횃불을 좀 더 가까이 갖다 대었다. 피는 궤적처럼 이어져 있었다. 무언가에 쓸린 듯, 바닥에 난 핏자국을 빠르게 쫓아갔다.

    “응애, 응애…!”

    놀랍게도 그곳에선 아이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뭔가에 꽉 막힌 듯, 소리를 다 내지 못하지만,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우는 소리에 태윤은 다시 제사상 쪽으로 걸어가 초를 가져왔다. 횃불을 이용해 심지에 불을 붙이고, 초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횃불은 발로 짓이겨 껐다.

    “설마….”

    태윤이 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자의 신음 소리는 안 나고, 아이 울음소리만이 쩌렁쩌렁하게 나는 게 불안했다. 제 손으로 태건을 죽인 주제에…. 허무하게 웃은 태윤은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숙이자, 제사상 아래에 쭉 이어진 넓은 공간 안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여자로 추정되는 작은 체구의 사람은 필사적으로 아이를 가리고 있었다. 죽기 전에도 제 몸으로 아이를 지키고 죽어간 왕비의 모습에 태윤은 가슴이 미어졌다. 눈물은 다 말라버린 듯, 나오지 않았다.

    그저 이 상황이 비참했다. 태건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태자가 밀려나서, 태혁과 싸웠다면. 그 결과로 인해 유배만 갔다면. 여러 가지 상황을 꿈처럼 그려보던 태윤은 고개를 저었다.

    이런 머뭇거림이 이 상황을 만들었다. 이세희를 통해 알지 않았던가. 모두가 행복해지는 현실은 없었다. 황위를 두고 형제들과 싸운다면 형제들을 죽여야 했고, 이세희를 두고 아버지와 싸운다면 아버지를 죽여야 했다. 애첩도 권력의 상징 중 하나이니, 그걸 자식과 나눌 아버지는 이 세상에 없었다. 그래서 태자가 죽지 않았던가.

    복수 대신 악수를 건네고 싶었지만 그걸 거부한 건 태건이었다. 권력 앞에 생은 단지 흩날리는 낙엽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태건과 대립하는 상황이 온다 해도, 자신이 태건을 죽이리란 것을 알기에 태윤은 울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태건을 죽이지 않았다면 태건은 자신을 죽였을 것이고, 이세희도, 이세희의 가족도… 자신처럼 모두 죽였을 테지.

    후회는 없었다. 태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왕비의 시신을 거두고, 그 안에 숨겨진 아이를 꺼내 들었다. 왕비의 옷가지에 둘러싸인 아이는 전체적으로 연한 분홍빛이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는지, 몸이 젖어 있었다. 왕비의 옷으로 물기를 더 닦은 태윤은 밖으로 빠져나와 촛불에 아이를 확인했다.

    “응애!”

    사내아이였다. 아주 건강했다. 태건과 왕비의 아이를 어룽거리는 눈으로 보던 태윤은 소중하게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아이의 부모를 아무도 모른다면, 이 아이는 죽지 않아도 된다. 모순적이지만 아이만은 살리고 싶었다.

    “나와 가자.”

    태윤은 다정한 목소리로 아이에게 말했다. 아이는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우는 소리를 멈추고 손을 꼼지락거렸다.

    “…너만은 내가 지켜 주마. 내 아이가 되는 거야.”

    그 누구도 모를 테지. 그러면 되는 거야. 태윤은 그제야 자신이 추위와 어둠 속에서 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이를 안은 채 주저앉았다.

    이윽고 새벽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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