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장. 주욕신사 (1) (8/11)
  • 5장. 주욕신사 (1)

    태윤이 한서진의 저택에 방문한 건, 이세희의 동생들을 저택까지 데려다준 후였다. 동생들이 태윤을 못 믿는 눈치였고, 연신 ‘저런 쓸모없는 놈.’이란 눈빛으로 위아래를 훑으니 뭔가 변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둘의 곁에 머물렀다.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된 세형이 마차에서 내릴 때 손을 잡아주려 했으나 세형이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세령의 손을 잡고 내렸다. 태윤이 쓰게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 고마웠다는 말 한마디도 내뱉지 않고 둘은 등을 돌려 대문으로 걸어갔다. 그래도 언니라고, 세령 먼저 황제가 내려준 저택으로 들여보내던 세형이 고개를 돌렸다. 멱리와 검은 머리가 한 번에 넘어가며 세형의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나자 태윤은 고개를 내렸다. 혼례도 치르고, 애도 둘이나 있는 여인을 오래 보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정말 오라버니를 지킬 자신이 있으신 겁니까.’

    세형의 물음에 태윤이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럴 자신이 없었다면 제도에 오지도 않았습니다.’

    의심으로 뭉친 눈으로 태윤을 노려보던 세형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에게 상처 준 이는 제가 잊지 않을 겁니다.’

    세희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겠노라고, 맹세하려는 순간 세형이 휙 돌아섰다. 제 오라버니 일이 아니면 말도 섞기 싫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황제와 관련된 자들을 모두 싫어하는 건, 세희나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세령은 태윤과 같은 공간에서 숨 쉬기도 싫다고 말했다. 태윤은 어쩔 수 없이 말에 올라타 둘을 엄호했다. 둘이 마차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몰라도, 세령은 이젠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이세희가 ‘세령이는 순해.’라고 넌지시 말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세령이 순한 건 이세희 한정이었다.

    금을 바른 듯한, 호화로움을 온몸으로 나타내는 저택을 두리번거리던 태윤은 이곳이 한서진이 사는 곳임을 알고 고삐를 돌렸다. 그도 비슷한 시간대에 퇴궐했으니 지금쯤 저택에서 쉬고 있을 것이다. 해가 뉘엿뉘엿 진 거리를 걸으며 태윤은 사색에 잠겼다.

    전에 한서진이 우스갯소리로, ‘황제는 이세희가 죽는다면 그 시신을 강간할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게 왜 이리 마음에 걸리는 것인지 몰랐던 태윤은, 오늘은 세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의심을 차근차근 되짚어 보았다. 설마, 하며 넘어가려 해도 의심이 한번 날카롭게 서자 꺾일 기미가 없었다.

    “대장님, 웬일이십니까?”

    태윤을 알아본 한서진네 노비가 말을 걸었다. 말에서 단숨에 뛰어내린 태윤은 고삐를 넘기고 제 집처럼 걸음을 옮겼다. 노비들이 달라붙었지만, 그들에게 “되었네.”라고 말한 후 태윤은 능숙하게 한서진이 머무는 침방으로 향했다. 한서진은 안에 있는지, 방이 밝았다.

    “나네, 서진이. 들어가도 되겠는가.”

    태윤이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느긋한 발소리가 들렸다. 대체로 화를 내는 법이 없고, 능구렁이같이 구는 한서진의 성격다운 발걸음에 태윤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곧이어 문이 열렸다. 막 씻고 들어왔는지 한서진의 풍성한 흑발이 젖어 있었다. 흐트러진 침의를 입은 한서진은 교태라도 부리듯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님께서 어인 일로 제 저택까지 오셨습니까? 제가 아파서 제발 와 달라고 빌어도 안 와주시던 분이….”

    어린애처럼 칭얼거렸다. 태윤이 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내가 고기도 묵직하게 보내줬지 않은가.”

    “저는 아플 때 고기가 아니라 어죽을 즐겨 먹습니다. 알아두십시오.”

    새침하게 말한 한서진이 안으로 들어갔다. 태윤도 향긋한 냄새가 풍기는 침방으로 들어가며, 손을 뒤로 뻗어 문을 닫았다.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닦으며, 한서진이 말했다.

    “마침 잘됐습니다. 저도 퇴궐 후, 좀 쉬려고 자작을 하려던 참인데…. 같이 드시겠습니까?”

    “안주는?”

    태윤이 검을 띠돈에서 풀어내며 물었다. 정말 피곤했는지,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관자놀이를 만진 한서진이 대답했다.

    “백주에는 고기 한 점이 최고지요. 간장에 양념한 돼지고기 구이입니다.”

    벌써 입에 침이 고였다. 궁에서 이세희의 희롱을 견뎌야 했던 것만으로도 피곤이 몰려온 참이었다. 이세희의 말대로 침상에서 뒹굴면 모를까, 그 흥분을 참는 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태윤이 한서진이 마련한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술을 한 잔 털고, 곧바로 석쇠에 잘 구워진 고기를 뜯어먹었다. 한서진은 이미 몇 잔 먹었는지, 잔에 술이 반쯤 채워져 있었다. 그는 바로 술을 마시지 않고 팔짱을 낀 채 태윤을 느긋하게 지켜보았다.

    “고민이 많으신 얼굴입니다.”

    “고민이야 늘 많지.”

    태윤이 담담하게 말했다. 한서진은 그런 태윤을 기특하게 보았다. 예전에는 생기가 없어 보였던 두 눈이 열기로 가득 차 일렁거리는 게 보기 좋았다. 한서진이 소리 없이 웃으며 술을 홀짝였다. 태윤이 한서진의 빈 잔에 술을 채워줬다. 한서진이 술병을 들어 태윤의 잔을 채워주려 하자, 그건 저지했다. 적당히 술기운이 돌았는지, 태윤은 숨을 느리게 내쉬며 뻐근한 뒷목을 문질렀다. 입을 꾹 다물고, 눈까지 내려떠 바닥을 훑던 태윤이 천천히 한서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의 눈에 깊은 의문이 박혀 있었다. 그 주변을 둘러싼 긴장에 한서진이 다정하게 말했다.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하십시오. 어차피 여긴 저의 공간이니까요.”

    “내가 너와 대화를 나누고, 의심하던 게 있었다.”

    “무엇이지요.”

    한서진이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었다. 무릎을 매만진 태윤이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고민을 말했다.

    “아바마마가 이세희의 시체가 강간할 사람이라 그랬지?”

    “폐하의 집착을 보자면,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태윤은 눈을 느리게 감았다. 술기운 때문인지, 불안감 때문인지…. 원인 모를 떨림을 간신히 억누른 후, 눈을 뜬 태윤은 한서진을 보며 말을 이었다.

    “아바마마가 순장을 생각하시는 것 같다.”

    한서진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하지만 가볍게 웃은 후,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 설마 자신이 먼저 죽을 거라고 생각하실까요? 본인의 치세가 오래갈 거라 믿고 계신 분입니다.”

    유언은 보통 병에 들어 골골거릴 때 쓰기 마련이었다. 지금은 사지가 멀쩡하니, 유언까지 생각하지 않으리란 게 한서진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태윤은 고개를 빠르고, 세게 저으며 중얼거렸다.

    “앞으로 병을 얻게 되면 유언부터 생각하실 거야. 그러면 과연 세희를 내버려 둘까? 절대 아니야. 자신이 죽으면, 탐내는 자들이 많으니 세희부터 죽이실 거다.”

    그래주면 좋은데. 한서진의 얼굴은 평온했으나 속으론 혀를 차고 있었다.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던 한서진은 입술을 달싹였다.

    “하긴, 대장께서 반역을 일으키는 최악의 상황은 절대 안 되니까요. 다른 황자가 반역을 일으켜 대장께서 그걸 제압하셔서 죽일 명분을 얻으시면 모를까….”

    중얼거리던 한서진은 얼굴을 뭔가를 눈치챈 듯 눈을 크게 떴다.

    “지금 그걸 노리시고 계신 겁니까?”

    “내가 먼저 검을 드는 일은 없을 거다. 나는 뒤로 빠져 있어야 해.”

    예전의 태윤이 아니었다. 무르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제거해야 할 적을 자신의 손을 최대한 안 쓰고 처리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바마마는 어떻게든 병을 얻어 쓰러지실 거다.”

    세희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한서진은 팔짱을 끼고 흥미롭다는 시선을 보냈다.

    “태자가 정해졌지만, 건이가 거기서 만족할 애가 아니라는 건 내가 알아. 건이가 반란을 일으키게끔 해서 경이와 싸우게 하고…”

    “그 후에는 남은 자들은 반란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대장께서 처리하시고요?”

    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시간은 걸리겠지만,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아마 태윤은 이세희를 최대한 지키고 싶어 내린 결정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아끼는 태건도 살리고 싶은 것이다. 가장 원하는 미래는 건이 경을 제압하고, 건은 황제가 아직 살아있을 때 명령을 받았다는 이유로 윤이 제압해 다른 곳으로 유배를 보내는 것이다. 최악의 상황은 건과 건의 가족을 모두 죽여야 하는 것이다. 역모를 일으킨 자는 9촌, 남녀노소 할 거 없이 전부 처형이었다. 아이가 생겨 기뻐하던 동생의 모습을 떠올리던 태윤은 그것만은 하고 싶지 않아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니 네가 적당히 바람을 잡아봐. 네가 태건 쪽 아이들과 친하니….”

    “너무 빠르면 눈치를 챌 수 있으니, 제가 입김은 넣어 보겠습니다. 그리고 저희 쪽 애들에게도 제가 말을 흘려 놓겠습니다.”

    그러면 대장께서는요? 라고 말하려던 찰나 태윤이 날카로운 눈을 깜박이며 중얼거렸다.

    “아바마마의 칠보함을 찾아야겠어.”

    “저도 돕겠습니다.”

    “아니다. 그 일은 내가 잘 알아.”

    태윤은 단번에 말을 잘랐다. 빈 잔에 술을 직접 따른 태윤은 한 번에 독한 술을 들이켰다. 후, 하고 숨을 흘리자 술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래도 흐트러지지 않은 눈으로 한서진을 본 태윤이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의 침상을 수색하고, 칠보함을 찾아 유언을 찾아내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야. 그걸 바꾸는 건…. 나만이 가능해.”

    아예 없을 수는 없었다. 황제의 성격상 유언을 대충 했을 리가. 한서진도 일리가 있는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바마마가 나에게 글을 직접 가르치셨지.”

    태윤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첫 아들이고, 윤이 워낙 귀엽고 예뻐 윤을 제 품에 앉혀두고 글을 가르친 황제였다. 그의 글을 옆에서 지켜보고, 그걸 따라한 건 윤밖에 없었다. 그의 애정에 이런 식으로 보답해야 하는 현실이 답답하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했다. 사랑하는 두 사람 중 한 명은 비참하게 죽여야 했다.

    고민을 금세 끝낸 태윤은 냉철한 눈으로 한서진을 직시하며 말했다.

    “유언은 내가 고칠 것이다.”

    “어떤 식으로요?”

    “세희를 나에게 넘겨준다고 써야지. 아바마마는 죽어서도, 세희에게 집착해 나라를 망친 우매한 황제가 될 것이다.”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태윤은 유쾌하게 말했다. 그는 망자가 되어서도, 다른 이의 혓바닥에 희롱당하리라. 그가 이세희에게 그리 했던 것처럼.

    *

    북산에 다녀온 후로 황제의 일과는 조금 달라졌다. 멀리서 볼 때는 그다지 달라진 게 없었으나, 가까이서 보면 그의 일상 틈새에 이세희가 스며들었다. 자신의 가족들을 더 이상 건드리지 않고, 지켜주는 대가로 그에게 반항하지 않기로 해도 황제는 이세희를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네까짓 게 어떻게 나오는지, 내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겠다는 고약한 심보마저 있었다. 그러나 이세희가 힘들어 하는 기색을 보이긴 해도 새벽에 일어나 조반을 챙겨주고, 손수 약도 챙겨주고, 그것도 모자라 황제가 쓰는 곤관까지 본인이 직접 해주자 황제는 의심에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 의심을 완전히 잠재운 건, 이세희가 그간 참석하지 않았던 연회에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보인 순간이었다.

    황제는 연회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기념일이나 절일에는 돈을 아낌없이 써 성대하게 벌이는 편이었으나 소소하게 잔치를 벌이는 연회에는 인색한 편이었다.

    그러나 연회를 열지 않았을 뿐, 황제가 ‘이쯤이 좋겠구나.’라는 말이 나오면 그 자리가 바로 연회나 다름없는 자리가 되었다. 성대한 주안상이 차려지고, 몇 년간 묵힌 인삼주가 올라왔으며, 편히 쉬고 있던 애첩이 총총 걸어 나와 황제의 술놀음을 보필했다. 원래 애첩이란 그런 존재였다. 황제의 품에 안겨 황제를 즐겁게 해주는 하나의 노리개였다. 황후나 비빈들이 자신의 머리에 꽂을 아름다운 비녀나 장식을 고르는 것처럼, 황제도 아름다운 이세희를 자신을 치장하는 데 사용하는 용도로 다루었을 뿐이다. 천자문을 가르친 것도, 천한 자태를 티 내지 말라며 딱 사람구실을 할 수 있을 만큼 가르친 정도였다.

    그게 애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세희는 단 한 번도 그의 손길에서 사람다운 감정은 느껴보지 못했다. 그의 손길은 대부분 아팠다. 고통이었다. 정신을 거의 잃어가는 시점이 되어서야 괴롭고 죽을 것 같은 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삽입을 할 때면, 이세희는 호흡곤란에 경직 상태에 다다랐다. 그가 처음으로 무자비하게 꿰뚫었던 그날이 계속, 몇 번이고 반복되어 이세희는 가물가물 의식을 잃어갔다. 그때 느끼는 바람은 단 하나였다.

    제발, 시간이 빨리 흘렀으면…. 그저 견디는 이 시간이 불어난 물처럼 흘러서 없어지길. 하지만 한 번도 그 소원이 이루어진 적은 없었다. 매일이 감흥 없는 불행이었다.

    “마마, 오늘 무척 아름다우십니다.”

    궁녀가 머리를 빗어주는 것을 동경으로 보며 이세희는 웃기만 했다. 이 얼굴을 황제가 과연 사랑했을까. 재차 생각해도 결코 아니었다. 황제는 자신을 예쁜 노리개, 구하기 힘든 보석같이 여겼다. 애정이 있다 한들, 그것은 애착에 해당하는 애정이었을 뿐이지, 사랑이라는 애정은 아니었다.

    “마마, 이 귀걸이는 어떠신가요? 비녀를 좀 더 꽂을까요?”

    궁녀들 또한 황제가 예뻐하는 인형 정도로 여기며 가꾸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세희는 심드렁한 얼굴로 동경을 보다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과한 장식들에 질려서, 이세희는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기색을 보였다.

    “머리 무거워서 기울어지겠다. 다 내려둬라.”

    “하오나 폐하께서 누구보다 어여쁘게 단장하고 오시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벌써부터 느껴지는 무게감에 머리가 뒤로 당겨져 이세희는 목을 빳빳이 세웠다. 허리도 반듯하게 편 상태로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눈을 위로 올렸다.

    “비빈들도 볼 텐데…. 그녀들이 뭐라 할지…. 정빈의 일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궁녀와 눈을 마주치기가 무섭게 이세희가 지레 겁먹은 듯 중얼거렸다. 궁녀들이 시선을 주고 받았다. 동경으로 그녀들의 눈빛 교환을 빠르게 살펴본 이세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셨지만 비빈들이 보면 어떤 말이 오갈지 뻔히 보인다. 머리는 풀고 가야겠구나.”

    “마마.”

    내관도 와서 달랬으나 이세희는 비녀를 모조리 빼내고 단출하게 작은 머리 장식만 하나 했다. 그러나 둥근 원이 세 개나 주렁주렁 달린 귀걸이와 팔찌, 가락지와 발찌는 착용해야 했다. 이 나라는 성적으로 개방적이었으며, 남자가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 공작새같이 화려한 치장을 했다. 여자가 여자를 첩으로 두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동경 속에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딱 그 짝이라 이세희는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가장 하기 싫어서 여태껏 피해왔으나. 더 이상 피할 길이 없었다. 황제의 손길이 닿는 게 역겹게 느껴졌다. 그의 눈빛, 숨소리, 모든 게. 그 손길을 인내하는 게 얼마나 고역이던지. 팔뚝을 벅벅 문지르며 걷던 이세희는 위로 솟은 둥근 머리에 입술 끝을 올려 웃었다. 황제를 닮지 않은 몇 안 되는 신체 부위기도 했다. 앞도 볼록, 뒤도 볼록, 하게 나온 잘생기고 날렵한 옆모습을 응시하자 태윤이 눈치채고 슬쩍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일순 부는 바람에 흩날렸다. 동요 없는 태윤의 시선이 닿는 것 자체가 마음의 안정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미안함이 다시 밀려왔다. 태자야 자신의 손에서 처리할 수 있겠지만, 태건과 태혁이 문제였다. 태건은 자신을 혐오하니 살려두면 안 되는 존재였다. 어떻게든 죽여야 했는데, 과연 태윤이 그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렇다면 황제의 손으로 태건을 죽이게 설득해야 했다. 어떻게 한담. 이세희는 골치가 아파 미간을 찌푸렸다. 태혁이야 별 볼 일 없고, 제일 하찮아 황위를 이어받는다면 비웃음만 살 녀석이었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정신없이 이세희의 전신을 훑어 황제에게 으름장까지 들었다.

    “마마, 얼굴에 왜 그리 근심이 깊으십니까?”

    가마에 올라타도 풀릴 기미가 없는 얼굴에 새로 온 궁녀가 물었다. 그녀는 전에 아이들과 달리 다정다감하고 온순했으며 눈빛이 날카로웠다. 이세희는 별거 없다는 듯 손을 휘젓고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큰 손에 적의 어린 눈빛이 가려졌다.

    태건을 죽이자고 했다간 윤이가 미워할 테고, 태건을 살리자니 후한이 두렵다. 하필이면 왕비가 임신을 한 상태라, 다음 달에 아이를 출산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 아이가 아들이면 더 난감했다. 태건이 불의의 사고로 죽는다 하면, 그 아이가 황위에 오른다. 태윤이 반쪽짜리 황자라는 게 지금까지 태윤을 살게 했지만, 이 상황이 오자 결국 마지막은 최악의 상황이 되어버리니 마음이 저절로 무거워졌다. 사실, 그들을 향한 죄책감은 하나도 없었다. 태건의 아이든, 왕비든…. 모두가 적으로 보일 뿐, 살려줘야 할 생명체로 여겨지진 않았다.

    이세희가 태윤이 태건을 죽일 생각이 없다는 건 짤막한 대화만으로도 눈치챘다. 태자 땐 난감하게 웃었고, 태혁은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으면서, 태건의 이름이 언급되면 동공이 흔들거렸다. 윤이 건과 대화를 나눌 때 환하게 웃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둘 사이에는 자신이 모르는 끈끈한 유대관계가 있었다.

    과연 그걸 어떻게 끊어낼지…. 태윤에게 자기 말고 다른 남자가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서진과도 그렇고, 다른 부관들과도 왜 그리 사이좋게 지내는 건지…. 자신이야 어쩔 수 없이 강압에 의해 묶여 있지만, 윤은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질투에 점차 짜증이 치밀었다.

    황제가 되면 후궁도 들여야 할 텐데 그 꼴을 어떻게 보지? 황후는? 그 생각에 이세희의 눈빛이 딱 굳었다. 후사를 어찌한담. 태윤을 황제로 만드는 데에 정신이 팔려 후사를 잊고 있었다.

    절망에 이세희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주먹을 쥐었다, 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한 번 후사를 생각하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마마, 도착했습니다. 내리시지요.”

    무표정한 얼굴로 앞날을 그려보던 이세희는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대낮부터 요란스럽게 꾸민 소월각이 보였다. 뾰족한 탑 형태로 기와를 쌓고, 아래는 뻥 뚫려 있었는데 바람이 시원스럽게 불어 여름엔 이곳을 연회 장소로 사용했다. 이세희는 내리자마자 자신에게 쏟아지는 묵직하고 차가운 시선에 숨을 단단히 붙잡았다.

    여리박빙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사방이 적이다. 태윤을 황제로 옹립하려면, 황제가 살아있을 때 그를 적절하게 이용해야 했다. 이 나라에서 가장 큰 권력을 쥐고 있는 황제를 자신의 말 하나면 뭐든 할 수 있게끔….

    “세희야.”

    사람들의 시선이 닿자 입술을 깨물고, 미세하게 떨던 이세희는 다가오는 황제를 보았다. 태윤이 좀 더 나이를 먹으면 저런 얼굴일까. 유능한 학자처럼, 지적인 미가 넘치는 황제는 늠름하고 건장했다.

    “세희야?”

    황제가 미동도 없이 자신만 빤히 보는 이세희가 이상했는지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이세희는 불현듯 가슴에 확 퍼지는 냉기에 입술을 벌렸다. 눈빛이 확실히 달랐다. 황제는 인간미가 없이 찬바람을 뭉쳐 만든 듯한 눈이라면, 태윤은 그 냉기마저 녹일 듯한 온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 자식은 잘한 게 윤을 낳은 거밖에 없구나. 이세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보다, 부드럽게 웃었다. 황제의 눈이 단숨에 멍해졌다. 한 번 웃어준 이세희는 두 팔을 벌려 황제를 끌어안았다.

    역겨운 체취. 그의 품에서 눈을 날카롭게 빛낸 이세희는 숨을 느리게 내쉬었다. 닿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온기를 이를 악물고 참아내며 입술을 달싹였다.

    “왜 비녀를 하고 오지 않았지? 세희 너에게 잘 어울릴 거 같아 짐이 직접 고른 것인데.”

    황제가 낮은 목소리로 타박했다. 이세희는 그의 품에서 고개를 비스듬히 내렸다. 이 정도면 되려나. 눈은 아래로 깔아주고, 입술은 난감하다는 듯 깨물었다. 혼자 있을 때 동경을 곁눈질로 보면서 연습했다. 황제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옆에 궁녀를 보았다. 그녀가 총총 다가와 황제의 귀에 대고 그만 들을 수 있게 속삭였다. 그 말을 들은 황제가 하! 하고 웃더니 고개를 돌려 후궁들을 살폈다. 그 시선 끝에 닿은 황후는 모진 황제의 시선에도 굴하지 않고 그를 쳐다보았다. 같은 연회에 초대 받은 태위는 심상치 않은 시선에 황후에게 입술을 갖다 대고 속삭였다.

    ‘왜 그리 꼿꼿하게 구십니까? 이러니 마마께서….’

    황후가 단번에 고개를 돌려 태위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살의가 풀풀 넘치는 눈빛에 태위가 입을 다물자 황후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입 다무세요. 아버지가 뭐라 하든, 폐하의 정실은 접니다.’

    태위는 그녀를 보며 ‘저러니 사랑을 못 받지.’라고 생각하며 코웃음 쳤다. 태위에게 그녀의 쓸모는 손자인 태경을 낳아주는 것에 그쳤다. 그녀가 사랑을 못 받든, 받든, 그녀가 못한 것이라 넘어가며 이세희와 달달함이 뚝뚝 떨어지는 대화를 나누는 황제를 보았다. 황제의 덩치에 가려져 이세희가 다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건, 황제의 허리에 둘러진 이세희의 굵직한 손이었다. 손만 보면 영락없이 사내인데…. 태자, 무혁왕, 그리고 호윤왕 태혁도 처음에는 감흥 없이 이세희의 팔뚝과 손을 보았다.

    그러나 황제가 소월각을 보며 이세희의 손을 잡고 걸어오자 눈을 깜박였다. 이세희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웃고 있었다. 사람의 시선이 닿자 눈을 깜박이던 이세희가 고개를 올려 황제를 보았다. 황제의 어깨가 뿌듯하게 올라갔다. 웃고 싶은 입술이 씰룩거리는 게 소월각을 채운 대신들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몇 년 만에 얻은 애첩의 교태에 황제는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아 보였다. 후궁들과 황후는 입을 다문 채 목석처럼 자리를 지켰다. 이세희가 제 발로 참여하는 첫 연회라며, 황제가 모두를 불렀으니 갈 수도 없었다.

    “하, 세상 모든 근심이 다 사라지는 기분이구나.”

    가장 상석에 앉은 황제가 호쾌하게 웃었다. 왼쪽에 앉은 대신들은 황제를 따라 웃었고, 후궁들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황후는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앉아서 황제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러다가 속없이 웃는 태위와 태자를 보고, 눈을 돌려버렸다. 그리고 속이 타는지 꽤 독한 술을 한 번에 들이키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대는 이 좋은 날 어디 가는가?”

    황제가 물었다. 황후가 입술을 가볍게 올려 냉소를 지었다.

    “몸이 좋지 않아 가볼까 합니다. 괜히 신첩이 이곳에 머물러 폐하의 기분을 어지럽힐 수는 없지요.”

    그리고는 황후는 이세희를 바라보았다. 이세희도 말없이 황후를 응시했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긴장감에 태자는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태위는 눈치를 살폈고, 태건은 모른 척했으며 태혁은 말없이 웃고만 있었다.

    “좋지 않다니…. 요새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가?”

    황제가 물었지만 그녀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말이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갈증처럼 느껴지는 얼굴이었으나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화비가 올 줄 알았으면 신첩이 궁으로 불러 주안상에 대해 가르칠 걸 그랬습니다. 화비가 아직 궁 생활에 미흡하여 혹, 폐하께 심려를 끼칠까 걱정이 되옵니다.”

    황후가 너그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는 하하, 하고 웃더니 이세희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훑었다.

    “세희는 이 자리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잘하고 있으니 걱정 말고 가보게. 아프면 쉬어야지.”

    한 번이라도 아프냐, 괜찮으냐, 라고 묻는 기색도 없으니…. 황후는 소매 안에 넣은 손을 꽉 잡고 걸음을 옮겼다. 소월각을 벗어나기 전까지는 웃고 있던 얼굴이 그곳을 벗어나기 무섭게 얼음처럼 굳어갔다. 궁녀들이 “마마.” 하며 붙었으나 황후는 모멸감에 가득 찬 얼굴로, 이를 갈며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천한 것이…. 나와 눈을 마주쳐?”

    태위가 넌지시 말한 적이 있었다. 이세희가 아예 포기하고, 황제를 제 품에 넣고 주무르려 할 때 그를 사고로 위장해서 죽이고, 황제도 독살하자고. 이세희는 후사를 낳을 수 없었으나, 제 마음에 드는 황자를 그 자리에 앉힐 수 있다는 게 태위의 뜻이었다. 그 전에 싹을 잘라야 했다. 처음에는 호들갑을 떤다며 까르륵 웃던 황후는 마음을 다잡았다.

    태자를 하루 빨리 옥좌에 앉혀야겠다. 아들로 태어난 쓸모는 딱 그것밖에 없었다.

    차라리 그 전에 그렇게 해서 속이라도 편했어야 했다. 도대체 그가 뭐라고 이 외로운 짝사랑을 지속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땅에 꾸물꾸물 기어 다니던 개미를 짓밟은 그녀는 고개를 치켜세웠다.

    “연회가 끝나면 폐하를 침전으로 오시라고 해라.”

    황후의 나직한 명령에 궁녀가 “예.”라고 대답하며 뒤로 물러났다. 짧게 조소를 터트린 그녀는 우아하게 걸음을 옮기면서, 약지와 소지에 낀 호갑투를 빼내었다.

    “마마, 목욕물을 준비할까요?”

    목욕을 담당하는 궁녀가 물었다.

    “상과 술을 올리고 모두 나가라.”

    느리게 비녀를 하나씩 빼내며 그녀는 웃었다.

    “같이 가실 땐 외롭지 않게 해드려야지.”

    황후가 품을 뒤적여 꺼낸 건 작은 환이었다.

    *

    연회가 끝나고, 동궁으로 돌아온 태자는 황급히 예복을 벗었다. 아래가 터질 것 같았다. 저 멀리서 다가온 내관이 ‘황후께서 부르십니다.’라며 채근했지만 그건 들리지 않았다. 이세희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황제가 닿을 때마다 무서워서 움찔 떨면서, 애써 좋은 척 웃었다. 미미하게 떨리는 볼 근육에 태자가 술을 마시며 힐긋거리자, 이세희와 눈이 마주쳤다. 이세희가 수치심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옆으로 숙인 것이다. 처음에는 우연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두 번이 되고, 세 번, 네 번이 되자 우연은 우연이 아니게 되었다. 이건 필시 운명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이세희가 안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어찌 저렇게 처연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며 촉촉하게 눈을 적신단 말인가? 그것도 모자라, 술을 건네고 웃어주기까지 했다.

    ‘전하.’ 하고 부르는 목소리는 중저음에 달콤했다. 눈빛은 조실부모한 아이처럼 처량했다. 이제야 그가 왜 황제에게 고분고분하게 구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을 그렇게 괴롭힌 자에게 체념한 것이다.

    그러나 너무 싫었겠지! 왜냐하면 마음에 둔 이가 젊고 팔팔하며, 훗날 황제가 될 자신이니까. 지금의 황제는 곧 늙을 것이다. 현재는 건장하고 체력이 좋지만, 어떻게 젊은이와 비교할 것인가. 이세희도 자신보다 16살이나 많은 사내에게 안기기 싫은 거다. 자신을 보는 이세희의 눈빛이 의심을 확신으로 다졌다.

    불안감, 두려움에 흔들리면서도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그 두 눈. 눈물이라도 톡 흘릴 것 같은 어여쁜 눈빛에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확인해 보지. 침상에 엎드려 혼자 손을 움직이던 태자는 잇새로 욕을 내뱉었다. 거친 숨과 신음이 한 번에 터져 나왔다. 한참을 바들바들 떨던 태자는 멍한 눈으로 허공을 훑었다. 이세희…. 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보던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항시 그의 곁에 그림자처럼 붙어있는 제 형이 걸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눈을 내려뜨고 항상 이세희를 직시한다. 둘이서 가끔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긴 해도 깊은 대화는 없는 듯했다. 윤은 주로 이세희 때문에 난처한지 얼굴을 찌푸렸고, 이세희는 비틀어진 미소를 지었다. 형은 이세희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렸다. 간혹 이세희가 형을 한두 대 툭툭 때리면 태윤이 비틀거렸다. 맞은 부위가 아팠는지 몸을 감싸고 바들바들 떨면 금군들이 달려와 대장을 달랬다. 그러면 이세희는 이 정도 가지고 아프냐며 더 때리거나, 태윤의 뒷목을 콱 잡고 질질 끌고 갔다.

    아바마마의 명이라 해도, 완전히 기가 죽어 사는 모습에 태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지아비가 될 나에게도 그러면 안 되지.

    무엇보다 지금은 확인을 해야 할 단계였다. 그러나 그렇게 힘이 세서는…. 아버지 다음으로 무예로는 이길 사람이 없는 제 형도 우습게 다루는 모습에 태자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황제도 이세희가 홧김에 내지른 주먹을 맞고 코피를 쏟은 적이 있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에 깜짝 놀란 태자가 뒤로 물러나자, 황제가 달려들어 이세희를 두들겨 팼다. 이세희도 거기서 멈추는 게 아니라, 옆의 화병을 집어 황제의 머리를 단숨에 깨버렸다. 이마에서도 피가 줄줄 흐르는 황제를 보고 태자는 허겁지겁 도망가 금군들을 데리고 왔다. 금군들이 여섯이 달려들어 이세희를 제압하고 나서야 황제는 치료를 받았다.

    그 후에는 이세희도 황제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 피떡이 되어가며 정신을 잃어가는 이세희를 엎어놓고 강간을 일삼는 황제를 떠올린 태자는, 거의 확신을 움켜잡았다.

    그래, 그런 식으로 자신을 두들겨 패고 강간하는 자보단 내가 낫다 이거지…. 히죽 웃은 태자는 몸을 일으켰다.

    “전하, 마마께서 부르십니다. 가셔야 합니다.”

    어머니가 부른다는 이야기에 태자가 얼굴을 찌푸렸다. 이세희가 술을 연신 건네주다 보니, 머리가 술에 취해 어지러웠다.

    “어머니가? 미래의 황제가 될 내가 왜 어머니에게 직접 간단 말이냐?”

    내가 보고 싶다면, 어머니 보러 오라 하란 말이다! 태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태자의 발언에 궁인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전하! 마마께선 이 황궁의 어른이십니다.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 됩니다.”

    “흥!”

    그러나 곧이어 주변이 싸늘해졌다. 황후가 오후의 햇살을 가로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 저녁이 오지 않아, 밝은 터라 태자는 길고 넓은 회랑을 우아하고 정갈하게 걸어오는 어머니를 보고 버석한 웃음을 지었다.

    “어어, 어머니. 어머니가 무슨 일로….”

    태자가 손가락을 치켜들고 비실비실 웃었다. 황후는 차가운 얼굴로 태자를 보다가, 거침없이 손을 들어 뺨을 후려갈겼다. 짜악! 하고 터지는 소리에 모두 입을 틀어막고 굳었다.

    “어머니…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미래의 황제가 될 소자에게…!”

    태자가 이를 갈며 다시 한 번 소리를 지르려던 순간, 황후가 반대편 손으로 태자의 뺨을 채찍처럼 때렸다. 술에 취한 태자가 심하게 비틀거리다가 뒤로 넘어졌다. 황후는 흐트러짐 없이 고고한 태도로 서서 아들을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다, 옆에서 덜덜 떠는 내관의 뺨도 짝, 짝, 소리 나게 때렸다.

    “태자를 보필하라고 있는 놈들이 하나같이 이 모양이니 태자가 술에 취해 경거망동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쓸모도 없는 놈들!”

    황후가 연달아 뺨을 때리자 궁인들이 아연실색하여 바닥에 엎드렸다. 호흡이 흐트러진 황후는 가벼이 웃음을 지으며 뺨을 감싸 쥐고 있는 아들을 보았다. 태자가 눈을 일그러뜨리며 일어나 황후에게 빠르게 걸어갔다. 황후는 거대한 덩치로 멧돼지처럼 다가오는 아들을 보고도 눈 한번 흔들리지 않았다.

    “아무리 어머니라고 하셔도 소자를 이리 때리실 순 없습니다!”

    “태자의 자리라 해도, 폐하께서 마음이 돌아서면 끝인 자리입니다. 요새 주색에 빠져 공부도 게을리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무혁왕이나 호윤왕이 친왕이 아니라 태자가 된다면요? 폐위 되신다면요?”

    황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다그쳐도 태자는 느물거리며 웃었다. 제 아버지를 닮은 미소에 황후의 눈빛이 한결 더 어두워졌다. 태자의 성격이 저리된 것은 처가의 잘못도 있었다. 손자이자 황자를 우리 태자, 우리 태자, 이러면서 감싸고 돈 게 누구던가. 잘못을 혼내려 해도 제 아버지가 ‘아들을 귀히 여기셔야죠. 하나뿐인 아드님이십니다.’라며 황후에게 삐딱한 시선을 보냈다. 태어나자마자 딸이란 이유로 아버지의 품에 안기지도 못했던 황후는 이를 갈았다. 주먹을 움켜잡고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놈의 아들, 아들. 다리 사이에 그것 좀 달고 태어났다고 유세를 떠는 모습이 같잖았다. 황후는 고개를 치켜들고 아들을 올려다보았다. 어머니의 엄한 눈빛에 태자가 움찔 떨었다. 황후는 손을 들어 아들의 턱을 콱 움켜잡고 아래로 당겼다.

    “잊지 마십시오. 그 자리는 전하가 아니라 이 몸이 만들어드린 겁니다. 제 몸에서 귀한 핏줄을 이어받지 않으셨다면, 태윤처럼 하찮은 대장 자리나 하며 사셨을 거라 이겁니다.”

    아들이 말을 잇기도 전에, 더러운 걸 만졌다는 것처럼 아들을 밀쳐낸 황후는 걸음을 옮겨 침전으로 들어갔다. 태자는 여전히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멍한 눈에 조금씩 이지가 들어오고 있었다. 황후는 오랜만에 와보는 아들의 침전을 두리번거리며 보다가, 곁방으로 향했다. 그곳은 대신들과 은밀한 얘기를 나눌 때 사용하는 용도였다.

    시큰둥한 얼굴로 어머니를 위아래로 건방지게 훑어보던 태자는 부풀어 오른 뺨을 매만졌다. 가녀린 손이라고 생각했는데, 힘을 싣고 때리자 두 뺨일 퉁퉁 부었다. 아야, 하고 소리를 내며 어머니를 따라 곁방으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황후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 소름끼칠 정도로 냉엄한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연지를 바른 붉은 입술이 열렸다.

    “태위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요?”

    황후는 무거운 숨을 천천히 내쉬며 입술 끝을 올려 웃었다. 고양감에 찬 고양이처럼 웃는 모습에 태자는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어머니가 웃는 모습은 어릴 때를 빼고 처음인 듯했다. 늘 어머니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버지의 곁을 지켰다. 이세희가 와도 말이다.

    “이세희가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폐하께 잘한다고 보십니까. 절대 아닙니다. 그자는 태자라든가, 자신이 살 길을 찾고자 다른 이를 황제로 만들게 분명합니다.”

    “하, 이세희가요? 그 미천한 것이요?”

    태자가 하하, 하고 경박하게 웃었다. 황후는 매섭게 아들을 노려보며 손바닥으로 상을 세게 내리쳤다. 태자가 얼굴을 찌푸리며 “어머니, 정말 왜 이러십니까?”라고 투덜거렸다. 황후는 눈을 위로 치켜뜨며 아들을 보고 입술을 벌렸다.

    “천것의 말 한마디에 넘어가는 폐하가 있습니다. 천것이 무서운 게 아니라, 폐하가 무서운 겁니다. 아셨습니까?”

    “폐하께서 삼대가 태위를 지내온 저희 가문을 버리겠습니까, 어머니. 고작 애첩 때문에?”

    별것도 아닌 걸로 유난 좀 떨지 말라는 태자의 어투에 황후가 입을 다물었다. 처음에는 능글맞게 웃던 태자도 어머니의 눈빛에 생각이 엇나갔는지, 자세를 바로 하고 어머니를 무표정한 얼굴로 물끄러미 보았다. 황후는 입술 끝을 올리며 웃었다.

    “그걸 아셔야죠. 폐하께 지금 중요한 건, 태자가 아니라 애첩 이세희입니다. 그자가 하는 말에 가족들에게 홍패까지 내어주셨고, 대저택에 하인들까지 내려주셨지요. 그것뿐이겠습니까? 화요궁의 궁녀와 내관들이 한 번에 다 쫓겨났습니다. 시작은 겨우 그것에 불과하지만, 총애가 더욱 깊어지면 태자를 갈아치우는 것도 일이지요.”

    “소자의 자리를 누가 건든단 말입니까.”

    제 자리를 건든다는 말에 태자가 본색을 드러냈다. 안광이 서슬 퍼렇게 돌았다. 황후는 느긋하게 웃으며 말했다.

    “폐하가 있지 않습니까? 태자를 제 마음대로 바꾸실 수 있는 분은 이 황궁에 한 분이지요.”

    우아하게 웃는 어머니의 얼굴을 유심히 보던 태자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내 웃음을 지운 태자는 고개를 느리게 저으며 중얼거렸다.

    “지금 폐하를….”

    뒷말을 잇지 못하겠는지 태자가 뒷말을 꺼내지 못했다. 목이 타는지 내관을 부르려던 태자를 저지한 건 황후였다.

    “폐하께서 이세희를 전하에게 줄 거라 믿으시는 겁니까.”

    황후가 냉소를 지었다.

    “그 이세희를요? 절대 주지 않을 겁니다. 줄 바에 차라리 제 손으로 죽이시겠다고 하실 분입니다. 아마 순장까지 생각하실지도 모르지요.”

    태자가 멍하니 황후를 보자, 황후는 소매 안에 넣어두었던 환을 꺼내 태자 앞에 내밀었다.

    “감을 원한다고 감나무 밑에서 입을 벌리면 감이 떨어집니까? 원하는 게 있으면 지금 가지셔야죠. 폐하가 노환이 들어 죽어 가시는 걸 원한다면…. 그때는 이세희도 늙습니다. 늙은 사내를 안아서 뭘 하시겠다는 겁니까.”

    “이걸 소자가 먹이라… 이겁니까.”

    환을 집어 드는 아들을 보며 황후가 정확하게 말했다.

    “멍청하긴.”

    태자가 불쾌감을 역력히 드러냈다. 후, 하고 숨을 내쉬며 땀에 젖은 이마를 닦은 황후가 고혹적인 입술을 열었다.

    “그건 만약을 위한 환입니다. 실패할 경우, 자결하십시오.”

    “어머니!”

    황후는 침착한 눈으로 아들을 보았다. 태자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갔다.

    “방법은 많습니다. 암수를 두는 방법도 있고, 독살도 있고….”

    “…이세희를 저희 편으로 만드는 건 어떻겠습니까?”

    태자의 말에 황후는 아예 듣는 시늉도 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태자가 허겁지겁 일어나 어머니 곁으로 다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머니, 이세희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또 그도 아버지에게 원한이 많지 않습니까? 서로 손을 잡는다면….”

    그때, 짜악, 하는 매서운 소리가 다시 한 번 태자의 얼굴에서 터졌다. 황후는 손바닥에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아들의 뺨을 갈겼다. 태자가 이제 진짜 참지 않겠다는 얼굴로 이를 가는데도, 황후는 무덤덤한 얼굴로 손바닥을 매만지며 말했다.

    “내 앞에서 이세희 이름도 꺼내지 말거라. 네가 황제가 된 후에는 어떻게 얘기해도 좋아.”

    황후가 한 걸음 바짝 다가갔다. 태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났다. 황후는 옥가락지를 낀 검지를 내밀어 아들의 가슴을 쿡 찌르며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죽이든, 윤간하든, 강간하든, 그건 네 마음대로 해. 내 자리만 건들지 마. 그 더러운 남창이나 먹고 황제 자리에 올라.”

    태자가 입을 천천히 다물고 묘하게 웃자, 황후는 더욱 아름답게 웃으며 읊조렸다.

    “그 외에 네가 쓸모가 있겠니? 넌 내 자리를 견고히 해주는 도구에 불과해.”

    “도구라뇨. 동지 정도는 되겠죠, 어머니.”

    태자가 피식 웃으며 뺨을 매만졌다. 황후가 등을 돌려 걸어가자, 태자는 그 등을 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나가지 않을 터이니 조심히 가십시오.”

    태자가 어머니의 등을 보며 빈정거렸다. 문을 닫으려던 황후는 말없이 아들을 빤히 보더니, 입술을 느리게 열었다.

    “태자비는 아무것도 모르니, 그 아이는 끼어들게 하지 마십시오.”

    “아들을 낳아야 하니 태자비는 중요하지요.”

    아들의 담담한 말에 황후는 눈살을 확 찌푸렸다. 한심한 놈. 황후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걸음을 우아하게 옮겼다.

    4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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