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3장. 일고경성 (2) (6/11)
  • 화비설화 3권

    목차

    3장. 일고경성 (2)

    4장. 배부기가

    5장. 주욕신사 (1)

    3장. 일고경성 (2)

    이세희의 염려와 달리, 이세희의 가족들은 장마가 오는 동안 객들이 머무는 우혜전에 감금되었다. 말은 감금이었으나 딸린 내관, 궁녀, 호위의 수만 수십 명이 넘어갔다. 태의와 의녀까지 우혜전에서 항시 대기하여 이세희의 아버지와 여동생 이세형을 돌봤다. 이세희가 돌아올 때까지 가족들을 우혜전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황제의 어명에 이국영은 반신불수의 몸으로 황제에게 사정했다. 이세희가 가장 싫어하는 짓이었으나, 자식의 일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는 이국영은 두 손을 맞잡고 싹싹 비볐다.

    ‘폐하, 소신이 미천하여 배운 것이 없어 세희를 가르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세희에게 단 한 번도, 폐하의 곁을 떠나라는 말은 한 적이 없사옵니다. 언제나 폐하께 감읍하며, 폐하를 보필하라고….’

    지아비의 말을 이세희의 모친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전했다.

    ‘세희라고 부르면 안 되지.’

    황제는 부드럽게 웃으며 이국영의 말을 칼처럼 싹둑 잘랐다. 어좌에 두 팔을 걸치고, 발을 까닥거리던 황제는 이국영과 그의 아름다운 아내, 그리고 그녀를 닮아 예쁘장한 여동생들을 천천히 보며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세희를 낳았다고 해서, 세희가 그대들 것은 아니다. 화비 마마라고 불러야 하네. 언제까지 짐이 그대들에게 이런 것까지 알려줘야 한단 말인가.’

    이젠 아들의 이름도 빼앗아가는 황제를 보며 아버지는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이번에는 이세희의 어머니가 고개를 조아리며 필사적으로 말했다.

    ‘죽여 주시옵소서, 폐하.’

    이세희 덕분에 호화로운 궁에 드나들고, 호의호식하나 늘 죄지은 것처럼 구는 이들을 보며 황제는 탐탁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 혹시, 저들 때문에 세희가 자기에게 더 까칠하게 구는 게 아닌가 의구심이 들었다. 가능성은 충분했다. 처음부터 이세희는 아버지가 쓰러져서 승은을 받아들인 아이였다. 만약 그가 쓰러지지 않았다면…. 턱을 매만지며 고민에 잠겼던 황제는 픽 웃었다. 이세희 때문에 별의별 짓까지 한다는 생각에 조소를 지었다.

    ‘설마, 그 먼 곳에서도 세희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인가? 화비의 이름은 짐만이 부를 수 있다. 이번 기회에 확실히 알아두도록.’

    이세희의 가족들 얼굴에 한결같은 먹구름이 꼈다. 예, 라고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생기가 없었다. 팔걸이에 새겨진 용의 얼굴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매만지던 황제는 건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정말 세희가 도망가지 않았다고 자신하는가? 세희는 이미 내관 다섯을 때려눕히고 제도를 벗어나려 한 전적이 있다.’

    황제의 얼굴에 불쾌감에 떠올랐다. 그날의 일만 떠오르면 황제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삽입하던 도중에 이세희가 자신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그것이 괘씸해, 목을 조르면서 강제로 박았더니 이세희가 의식을 잃어가며 느낀 것이다. 한 번도 반응이 없던 이세희의 연분홍색 자지에 열이 올라, 어여쁜 선홍색으로 물들었다. 그 사실이 기뻐 세희가 정신이 들었을 때 이야기 했더니, 그의 얼굴이 파르라니 질려갔다. 덜덜 떨면서, 그럴 리가 없다고 부인하는 이세희가 건방지기 짝이 없어 두세 번 더 목을 졸랐다. 목이 빨갛게 부어, 말도 못 하고 죽도 삼키지 못하는 세희를 보며 황제는 처음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이세희는, 황제가 떠나고 나서 내관들을 때려눕히고 도망을 간 것이다.

    분명히 말을 타본 적이 없다고 들었는데, 말은 또 어찌나 잘 타던지 그 몸으로 넓은 제도를 달렸다. 그 사실이 전해지고 나서 황제는 자신을 붙잡는 대신들을 뿌리치고 반쯤 미친 상태로 이세희를 따라 궁궐을 벗어났다.

    이런 수모는 생전 처음이었다.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미안하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강제로 느끼게 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느끼면서 신음하는 얼굴이 너무 예뻐서, 그 순간의 이세희가 정말 아름다워서 머리가 녹아내렸다. 몸이 세희에게 반응해 제멋대로 목을 조르고 있었다.

    그래도 미안함을 느끼고 사과까지 했는데. 그날의 감정은 도저히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황제가 분노가 벼락처럼 내리치는 눈으로 이를 갈자 가족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황제가 이세희의 도망에 길길이 날뛰며 분노한 걸 직접 본 가족들이었기에, 바닥에 납작 엎드려 덜덜 떨었다. 도망 직후 잡혀온 이세희는 진짜 시체나 다름없었다. 온몸에 멍이요, 팔다리는 부목에 대여 힘없이 흔들거렸다. 침상에 널브러진 이세희는 한동안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런 오라비를 황제의 명으로 돌봐야 했던 이세령은 황제를 보며 애걸복걸했다.

    ‘폐하! 오라버니께서는 이제 다시는 도망은 생각지도 않으십니다.’

    나이가 어린 세연만 이 상황이 어리둥절한지, 가족들을 보며 엉성하게 엎드렸다. 황제는 그 아이를 보며 이마를 짚었다. 이세희가 가장 예뻐하는 막냇동생이 있으니, 도망은 안 갔으려나…. 거의 제 딸처럼 어화둥둥 키운 걸 알고 있었다. 이세희보단 아니지만, 예쁘장하게 생긴 이세연을 보고 묘한 웃음을 지었다.

    ‘두고 보면 알겠지. 세희가 돌아올 때까지 그대들은 우혜전에 있으라.’

    황제는 위병들에게 짤막하게 명령을 내렸다.

    ‘저들이 우혜전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이게 해.’

    황제의 눈이 음산하게 가라앉았다. 이세희를 찾아내는 즉시 가만두지 않으리라. 그렇게 예뻐해 줬는데, 돌아온 대가는 항상 부질없었다. 위병들은 바닥에 엎드려 세희에 대한 오해를 거두어 달라고 애원하는 가족들을 잡아 끌어 우혜전에 가두었다.

    이세희가 화낼 것이라고 황제는 진작 판단했다. 그럼에도 저지른 짓이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에게 도자기며, 칠보함 등을 던져 화를 내는 이세희에게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네가 부덕한 탓이라고. 그 말에 이세희는 거칠게 숨을 내쉬더니 황제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사 년 전부터 변하지 않은 눈빛에 쾌감이 짜릿하게 돌았다. 저렇게 생생히 날뛰는 눈으로 째려보고, 그것도 모자라 꺾이지 않는 미인을 강제로 취할 때면 황제는 다시 태어난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랬던 세희가 단 두 번 만져준 뺨을 만지작거리며, 황제는 이따금 생각에 잠겼다. 이세희가 고분고분하게 나온다면 어떤 기분일까. 종종 생각해봐도 가늠하지 못했던 감각은 황제를 백치로 만들었다. 이 궁궐 속에서 가장 귀한 보물이 처음으로 보여준 교태에 황제는 설렘에 사로잡혀 며칠째 혼자 웃곤 했다. 정무를 보는 와중에도 픽 웃고, 대신들과 사사로운 얘기를 나눌 때도 웃음이 비실비실 나왔다. 예의상 웃긴 해도 진심에서 우러나와 웃는 적은 매우 적었다. 대신들은 어좌에서 나직하게 소리를 내어 웃다가, 어깨까지 들썩이는 황제를 보고 동시에 이세희를 떠올렸다. 정빈과 아들 태석이 사약을 받게 된 게, 이세희 탓이라는 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화비를 차마 입에 담지 못했다. 화비가 처음 이 궁에 왔을 때도, 황제가 막무가내로 이세희에게 비의 품계를 내리겠다고 해서 대신들이 반발했다. 사내를 첩으로 들여도 상관은 없었으나 비는 될 수 없었다. 사내는 답응에 그쳤고, 단 한 번도 그 이상으로 올라갈 수 없었다. 어차피 사내는 아이를 낳지도 못할뿐더러, 나이가 먹으면 선황들이 내치는 경우가 허다했기에 법도로 정해 놓은 것이었다.

    그걸 황제가 모조리 무시하고, 제멋대로 화비에 앉혔다. 대신들이 정도가 넘어섰다고 은근히 내비치자, 황제는 행동으로 보여줬다. 태얼궁 침전에 갇혔던 이세희를 끌고 온 것이다. 두 볼이 상기된 채, 황제의 품에 안겨 온 이세희의 자태에 대신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숨만 쉬어도 그 자체가 아름다운 자였다. 황제는 자꾸만 대신들의 시선을 피해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는 이세희가 귀여웠는지 눈웃음을 지었다. 긴 상의 하나로 겨우 나신을 가리고 있던 이세희의 다리가 안으로 말려들어갔다.

    ‘백문이 불여일견이지.’

    황제가 웃음을 터트리며 이세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수치심에 물들어, 입술을 꽉 깨물던 이세희가 모멸감에 부들부들 떨며 황제를 노려보았다. 황제는 이세희의 뺨을 음란한 의도로 문지르며 대신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정무에 시달리는 짐을 위해, 침상에서 가장 고된 일을 하는 세희니 비의 자리를 주어도 합당하다. 현재 있는 후궁들 중 짐을 이렇게 기쁘게 하여 정사에 몰두하게 해주는 자는 없지 않은가.’

    대신들은 황제의 품에서 바들바들 떠는 이세희를 보며 머뭇거렸다. 틀렸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인지라 그들은 난감했다. 황제가 가장 예뻐하는 애첩이고, 그 얼굴이 워낙 빼어나게 아름다우니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한마디도 벙긋하지 못할 때 무혁왕 태건만이 불쾌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나 태건도, 파리하게 질려가는 이세희와 눈이 마주치자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휙 돌렸다. 태건의 뺨이 붉었다. 꿋꿋하기론 태윤 못지않은 태건도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하자, 황제는 만족스럽게 세희를 꽉 안았다.

    그렇게 남자로서 비의 자리에 올랐으나, 이세희는 한 번도 황제에게 직접적으로 뭘 원한다고 한 적이 없었다. 대신들은 이세희가 애첩으로서, 황제에게 베갯머리송사로 원하는 걸 얻으리라 생각했으나, 이세희는 오로지 자유만을 원했다. 황제는 이세희가 벗어나려 할 때마다 벗어나지 못하게 신체를 망가뜨려서라도 가두었다.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강간도 서슴지 않았고, 폭행도 빈번했다. 뺨을 때리는 건 일상이었다. 크고 묵직한 주먹으로 멍석말이라도 하듯이 두들겨 팼으니, 오죽했으면 대신들이 그러다 죽겠다고 말릴 정도였다.

    그랬던 황제가 거의 사 년 만에 이세희에게 가족을 온전히 대면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도망이라도 도모할까 전전긍긍해 발 너머에서만 만나게 하고 위병들에 둘러싸이게 하던 황제가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주었다. 가족들을 만날 때, 꼭 마지막에 그 자리에 참석해 이세희가 가족들과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내관과 위병들에게 이야기를 듣고 모두의 이야기가 맞는지 확인하던 황제였다. 그게 싫어 이세희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나는 것도 포기했다. 대신들은 저희들끼리는 이세희가 무슨 짓을 한 것이 아니냐며 떠들썩하게 떠들었지만 정작 황제의 앞에서는 침묵을 지켰다. 이세희가 지금까지 한 것이라곤 정빈을 죽이라고 황제에게 부탁한 것과 가족들을 다시는 궁에 들이지 말라는 청밖에 없었다. 그 독을 품을 화려한 얼굴로 황제를 뒤흔들고, 정사까지 침범하지 않았으니 대신들이 나설 명분이 없었다.

    혹, 가족들을 더 높은 자리에 앉히려는 게 아닌가 주시했으나 이세희는 가족들을 만나자마자 이 이후로 자신을 보기 위해 다시는 궁에 오지 말라는 부탁을 남겼다. 사 년 만에 처음으로 여동생이 낳은 아이를 한참 동안 안고 있었다는 말에, 몇몇 대신은 한숨을 쉬기도 했다.

    *

    가족들을 만나게 해주겠다는 말에 이세희는 그 즉시 우혜전으로 향했다. 발바닥에 입은 자상이 심해 당분간 걸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황제가 하사해준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황제만이 말을 탈 수 있는 궁에서 애첩이 마차를 탄다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본래는 가마를 타게 했겠지만, 황제는 이세희가 여름 볕에 정신이라도 잃으면 어떡할 거냐고 난리를 쳐서 마차를 타게 해준 것이다. 이세희도 더위가 싫긴 싫었는지, 냉큼 마차에 올라탔다. 궁녀들이 마차에 올라타려 하자, 이세희는 마차에서 시큰둥하게 궁녀들을 보더니 부채를 빼앗아 태윤에게 던졌다. 멀찍이 서 있던 태윤은 정확하게 날아온 부채에 가슴팍을 얻어맞아 신음을 흘렸다.

    “금군대장께서 타세요.”

    그리고는 궁녀들은 내쫓았다. 원래 성격이 괴팍하고, 예민하기로 유명한 이세희라 궁녀들도 순순히 물러났다. 이세희가 순하게 구는 건 제 가족들밖에 없었다.

    태윤이 부채를 들고 마차에 탄 이세희를 보다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폐하께서 명을….”

    또다시 자신과 얽혀 이세희가 다칠까 봐 태윤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이세희는 지그시 태윤을 바라보더니 아름다운 입술을 열었다.

    “폐하껜 제가 말씀드릴 테니, 얼른 타기나 하세요.”

    나긋나긋한 어투에 배인 짜증에 태윤이 움찔거렸다. 지켜보던 태감이 총총 다가와 태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얼른 타십시오. 마마께서 짜증을 한번 내시면 오래가시는 편이라…. 또 큰일이 날지 모릅니다.”

    귀동냥으로 이세희가 마음에 안 드는 궁녀나 내관들을 내친 것을 주워 들었기에, 태윤은 한숨을 내쉬며 잠자코 마차에 올라탔다. 의자에 나른하게 기대고, 무릎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던 이세희가 태윤이 타기가 무섭게 장막을 내렸다. 아주 얇은 장막이 바람에 흔들거렸다. 태윤이 묵묵히 이세희의 옆에 앉아 부채질을 시작한 것이다. 그때까지도 입을 다물고, 뚱한 얼굴로 턱을 괴고 있던 이세희가 눈을 돌려 태윤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무감한 얼굴의 태윤의 귀만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귀엽다는 듯 빤히 보던 이세희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더 세게 해. 더워.”

    이세희가 진짜 더웠는지 옷섶을 파헤쳤다. 태윤이 눈을 돌리고 부채를 세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귀만 새빨갛게 물들이고, 부채를 허우적거리듯이 움직이는 태윤을 무심한 눈으로 보던 이세희가 말을 툭 내뱉었다.

    “날 안 보면 어떻게 부채질을 하겠다는 거야? 똑바로 안 해?”

    “하, 하지만 마마, 그렇게 가슴을….”

    태윤이 허둥지둥 말했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말까지 더듬는 태윤을 보며 이세희가 상체를 숙여 태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물씬 풍기는 이세희의 체취에 태윤이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이세희의 손이 태윤의 허벅지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거기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이세희는 손으로 오므려 태윤의 허벅지를 꽉 잡았다. 태윤의 입에서 달뜬 신음이 드문드문 끊기듯 나오자, 이세희가 반대편 손을 들어 태윤의 입가를 막았다.

    “쉿….”

    이세희의 아주 낮은 중저음에 태윤은 뒷목이 오싹해졌다. 유려하게 눈웃음을 지은 이세희의 손이 허벅지를 더듬자 몸이 움찔, 움찔 떨렸다. 강직하던 태윤의 눈이 점차 쾌감에 흐트러지자, 이세희는 귀에 입술을 대었다. 태윤의 상체가 크게 들썩이려 하자, 이세희는 허벅지를 만지던 손을 빠르게 움직여 자신의 품에 안았다. 나름 건장한 태윤의 몸이 이세희에게 가려졌다. 이세희가 은근히 소리를 내어 웃자, 태윤은 몸을 굳히고 이세희를 물끄러미 보았다. 이세희는 태윤이 신음을 삼키고 얌전히 구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입을 가렸던 손을 풀어 태윤의 뺨을 감쌌다.

    입이라도 맞출 생각인가? 태윤은 두근거림을 참을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로 안 된다고 외치지만, 몸은 이미 이세희에게 불가항력으로 끌리고 있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거 같아 꾹 참는데 갑자기 몸을 폭 감싸는 뜨끈한 체온에 태윤은 슬그머니 눈을 떴다.

    이세희가 자신을 더욱 품에 욱여넣어 안고 있었다. 두 손을 등에 대고, 어루만지며 어깨에 턱을 대더니 나른한 숨을 내쉬었다.

    “윤아, 잠깐만 이러고 있자.”

    입맞춤이 아니라 겨우 안기는 거라는 사실에 태윤은 묘한 실망감에 사로잡혀 침울해졌다. 이세희는 눈을 감고 태윤의 등을 토닥였다. 장막이 바람에 너울거리는 걸 멍하니 보던 태윤은 이세희를 조금씩 밀어냈다.

    “마마, 아바마마가 아시면….”

    “이걸 어떻게 알아. 네가 말만 안 하면 돼.”

    이세희는 태윤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쩐지 피곤해 보이는 모습에 태윤은 주춤하다가, 그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너무 상냥해, 애틋하게 느껴지는 손길에 소리 내어 웃던 이세희가 은근슬쩍 본심을 드러냈다.

    “이제 이 궁에서 날 위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너만은 날 진심으로 지켜주겠지.”

    고개를 느리게 든 이세희가 태윤을 보았다. 그의 눈이 몹시 지쳐 보였다. 오래는 아니지만, 최근 들어 그의 곁에 좀 더 머물게 된 태윤은 안타까움에 그의 뺨을 만졌다. 이세희는 궁에서 잠을 깊이 자지 못했다. 울화병이 문제였다. 황제와 정사를 맺고 나서 지쳐 잠드는 거 빼고는 이세희는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황제도 그걸 알고 나서 아예 이세희를 지쳐 잠들게 할 작정으로 거친 정사를 맺었다. 그러고 나면 이세희의 울화병이 더 심해지는 걸 체감했으면서도 황제는 제멋대로였다.

    “마마, 제가 죽는 한이 있어도 마마를 지켜드릴 겁니다. 걱정 마십시오.”

    이세희는 조용히 웃었다. 자신의 뺨을 어루만져주는 태윤의 손길이 좋았는지, 눈을 느리게 깜박거리던 이세희가 고개를 숙였다. 그의 긴 머리카락이 쏟아져 내려 태윤의 손등을 가렸다.

    “…무서워.”

    처음으로 듣는 겁에 질린 목소리에 태윤이 상체를 띄웠다. 이세희가 고개를 숙인 채 무기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빈만 내가 죽길 바랐을까? 아닐걸…. 황후도, 대신들도….”

    태윤은 두 팔을 벌려 이세희를 와락 안았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우혜전과 태얼궁이 꽤 거리가 멀어, 마차로도 오래 걸린다는 사실이. 이세희는 태윤의 품에 안긴 채로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나는 궁에서 살아서 나갈 수 없을 거다. 날 가만둘 리가 없어. 황제가 버려도, 버리지 않아도 나는….”

    그가 고개를 들며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의 앞날을 일찌감치 직감한 듯, 이세희는 생기가 없었다. 아이라도 낳는다면 어떻게 목숨을 부지할 가능성이 있겠지만 사내라 아이도 못 낳는다. 황제가 붕어한다면 가장 먼저 자신이 정빈처럼 사약을 받거나, 더한 벌을 받을 거라는 생각에 이세희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이야 총애가 이어지니 비참하게 목숨을 이어갈 수 있으나 총애가 식는 순간 안 봐도 뻔했다. 출궁하는 즉시, 검이 날아오리라. 그 후에 가족들은? 이세희는 그 생각을 하루하루가 불안했다. 총애를 받고, 비에 자리에 올라도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하고 안절부절못했다. 풍전등화의 상황에 이세희는 시들어갔다. 그걸 알아주는 건 태윤밖에 없었다.

    “마마, 그런 말은 하지 마십시오. 아바마마가 마마를 버리시면….”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지길 바라며 태윤은 마른침을 삼키고 쐐기를 박았다.

    “제가 마마를 모셔가도… 되겠습니까? 그리할 수 있다면, 제가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마마를 건드리지 못하게 지켜드리겠습니다. 그때처럼, 아무도 마마에게 음험한 손길을 뻗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태윤의 눈이 살벌하게 빛났다. 이세희는 사냥터에서 무자비하게 암수들을 죽이던 태윤을 떠올리고 희미하게 웃었다.

    “정말, 윤이 네가 날 지켜줄 거야?”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나긋한 목소리에, 물기가 서린 눈동자까지. 우수에 찬 수려한 미인의 처연한 모습에 태윤은 무너져 내렸다. 저리 약한 자를 내가 지켜주지, 누가 지켜주겠는가. 태윤의 가슴이 매섭게 다시 뛰었다. 태윤은 흘러내린 이세희의 머리를 쓸어 올려 주었다. 불안에 떠는 이세희의 뺨을 다정하게 어루만져주자 그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그 아름다운 모습에 가슴이 쿵쿵 움직였다.

    “너만은 날 버리면 안 돼. 난….”

    “마마께서 절 버리시는 한이 있어도, 제가 마마를 버리는 일은 없습니다.”

    태윤이 이세희에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기세가 느껴지는 어투에 이세희의 눈이 떠지더니, 이내 녹아내릴 듯한 교태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황홀함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이세희는 고맙다는 말 대신, 태윤이 기다렸던 입맞춤을 선사했다. 태윤은 입술에 포개어지는 부드럽고 말캉한 감촉에 눈을 감았다.

    “읏…!”

    저돌적인 이세희의 혀에 태윤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좋아서 몸이 사르르 풀렸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저릿저릿 저려왔다. 태윤이 손을 뻗어 이세희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꾸 몸이 힘이 빠져 넘어질 것 같았다. 이미 손에 든 부채는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이세희는 자신에게 매달리면서도, 어설프게 혀로 쫓아오는 태윤이 귀여워 입을 맞춘 채 웃었다. 으응, 하고 달콤한 신음을 흘리자 태윤이 흠칫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이세희는 입술을 느리게 떼어냈다. 두 사람 사이에 긴 타액이 연결되었다. 이세희가 엄지를 움직여 태윤의 부풀어오른 입술을 문질러 타액을 닦아내며 낮게 속삭였다.

    “괜찮아.”

    그의 음성이 사뭇 들떴다. 이세희의 이런 모습을, 아바마마는 모르시겠지. 그가 진짜 기분이 좋으면 저렇게 쾌청하게 웃는 걸. 태윤은 뱃속부터 시작되는 짜릿함에 입을 손등으로 가렸다. 후우, 후우, 하고 숨을 내쉬던 태윤은 마차가 멈춘 걸 뒤늦게 알고서 허리를 폈다. 이세희가 손을 내려 떨어진 부채를 쥐어 태윤에게 건넸다. 태윤이 잡기 위해 손을 뻗자, 이세희가 다가오는 태윤을 향해 고개를 바짝 대고 속삭였다.

    “내가 있는 한, 넌 위험하지 않아. 네 아버지가 널 건드리는 일은 없을 거야.”

    알고 있었다. 그가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가 자신에게 시선을 두지 못하도록 몸으로 막고 있었다. 태윤은 연심이 들끓는 눈으로 이세희를 지그시 보다, 입술을 달싹였다.

    “제 목숨을 바쳐 지켜드릴 테니, 마마가 죽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걸 두고 보지도 않을 것이고요.”

    이세희가 피식 웃으며 등을 돌렸다. 들어차는 햇빛에 눈살을 찌푸린 이세희는 녹음이 우거진 우혜전을 보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발 너머에서만 보던 가족들을 지척에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감개무량했다. 문을 잡고 흔들리는 눈으로 우혜전을 보던 이세희는, 자신의 앞에 무릎 끓는 내관을 보다 밀어냈다.

    “내 발로 걷겠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내관이 아픔을 참으며 말했다.

    “마마, 발을 혹사해선 안 됩니다. 무리하게 걷다간 상처가 벌어질 거라고 태의께서 그러셨습니다.”

    이세희가 차디찬 눈으로 내관을 응시했다. 당장이라도 자신의 뼈와 살을 분리할 것처럼 날카로운 눈에 내관이 난처했다. 황제는 이세희에게 발기할 수가 없는 고자들에게만 신체 접촉을 허용했다. 발을 다쳤으니, 태윤이 업어서 모시겠다고 했으나 황제는 기어코 안 된다고 말하며 호위 내관을 불러 이세희를 안아서 옮기라고 명령했다. 그때도 헛웃음을 지으며 불쾌감을 역력히 드러내던 이세희가 결국 내관을 거절한 것이다. 이걸 황제가 알면 불호령이 떨어질 걸 알기에 내관이 애걸복걸했다.

    “마마, 소신이 업어서 우혜전까지 모시겠습니다. 폐하께서도 명을 하셨습니다.”

    “내 가족들 앞에서, 폐하 때문에 다친 모습을 보이라고?”

    이세희가 눈살을 확 찌푸리며 되물었다. 내관이 머뭇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자, 이세희는 짧게 웃음을 터트리며 땅에 발을 디뎠다. 땅에 닿자마자 치미는 통증에 이세희가 앓는 소리를 냈다.

    “마마, 제발….”

    이세희의 발바닥에 난 상처가 심해지면 황제가 자신을 가만두지 않으리라. 내관이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다가왔으나, 이세희는 이를 악물고 제 발로 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통증에 비틀거렸으나 감내하면서 걸음을 매끄럽게 이어갔다. 당장이라도 쓰러지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이세희는 겉으로 아픔을 드러내지 않았다.

    더 이상 가족들에게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떠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오지 말라고 만류해도, 자식이 걱정되어 계절마다 자신을 보러 오는 부모님을 떠올리던 이세희는 눈이 시큰해졌다.

    위험해지는 건 자신으로 충분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쉰 이세희는 애써 웃음을 띠고 우혜전으로 들어갔다. 차를 마실 수 있게 마련된 오붓한 자리에 가족들이 초췌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세희…. 아니, 화비 마마.”

    가장 먼저 어머니가 뛰어오다가, 걸음을 멈추고 멀찍이 서서 이세희를 보았다. 이제 이름이 아니라, 화비 마마라고 부르는 어머니를 보며 이세희는 가슴이 미어져 입을 열지 못했다. 울음이 먼저 나올까 봐 꾹 참았다. 그녀는 천천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이세희는 멍하니 서서, 울음을 터트리며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어머니를 보며 주먹을 쥐었다.

    “마마,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폐하께서도 걱정이 많으셨습니다. 폐하께서 마마를 얼마나 귀히 여기시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어머니.”

    이세희가 힘을 쥐어짜 어머니를 불렀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자신을 보자, 이세희는 힘겹게 웃으려다 머뭇거렸다. 도저히 웃을 수가 없어, 눈물을 느리게 흘리며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그러지 마세요…. 어머니마저 절 비참하게 만들지 마세요.”

    “마마! 비참하게 만들다니요! 아닙니다, 저는 마마께서, 더 이상….”

    이세희가 숨을 고르며, 눈을 떴다. 이세희의 어머니는 원하지도 않는 비 생활을 강요했다는 생각에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했다. 아들이 너무 안쓰러웠다. 옆에서 안아주고 싶어도, 황제가 보낸 위병들이 호시탐탐 노려보고 있었다. 그걸 지켜보던 세형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다가왔다. 딸을 안고, 한 손에는 아들을 잡고 있던 서혁도 따라왔다.

    “어머니, 그만하고 일어나세요.”

    세형이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 그녀가 힘없이 일어났다. 이세희보다 머리 하나 반은 작은 세형이 꼿꼿하게 서서, 제 오라비를 지켜보다 뛰어와 안겼다. 사 년 만에 안아보는 여동생이었다. 이세희가 탄성을 내지르며 머뭇거림 없이 여동생을 꼭 끌어안았다. 위병들이 주춤했으나 태윤이 손을 들어 그들을 저지했다. 그들을 뒤에서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움직이지 말게.”

    “하오나, 대장님.”

    “이 일의 총 책임자는 나다. 너희들이 나설 게 아니야.”

    금군대장이자, 황제의 아들이 나서서 으름장을 놓자 위병들이 눈치를 살폈다. 태윤은 그들이 움직이지 못하게 하나하나 노려보다가, 재차 이세희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세희는 하염없이 여동생을 끌어안고 달랬다. 이세형이 안기자 뒤에서 그를 지켜보던 세령도 뛰어와 오라비에게 매달려 끅끅거렸다. 이세희는 두 여동생을 너른 품에 안고, 등을 다독였다.

    “왜 그리 울어. 혼례도 치른 녀석들이.”

    이세희가 예전처럼 유쾌한 목소리로 말하며 머리를 매만져주자, 이세형이 코를 훌쩍였다.

    “오라버니, 괜찮으세요?”

    “그럼.”

    발바닥에서 시큰한 통증이 올라와 머리가 아득히 멀어졌지만 이세희는 쾌활하게 웃어보였다.

    “난 괜찮다. 폐하도 예전보단 부드러워졌으니…. 걱정하지 마.”

    태얼궁 침전에 삼 일간 이세희가 갇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이세형은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세연이는?”

    이세희가 물었다. 세형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세연이는 유모와 놀러 다니느라 바쁩니다. 궁이 너무 예쁘다며 살고 싶다고 난리예요. 애가 철이 없어서….”

    그러자 이세희가 웃음을 터트리며 웃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어리니 그럴 만도 하지. 참, 아이는 잘 크고 있니?”

    황제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사근사근한 태도로 여동생을 대했다. 대체로 신경질적이고, 웃는 일이 거의 없던 이세희의 다정한 태도에 위병과 내관도 놀란 눈으로 그를 살폈다. 얼굴에 감도는 감미로운 미소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참, 오라버니. 제 아들이랑 딸이에요.”

    “그사이에 애를 둘이나 낳다니, 서혁이랑 사이가 좋은가 봐.”

    이세희가 웃으며 서혁을 보았다. 얼굴을 가린 채 생활하던 때의 이세희만 알던 서혁은 이제야 제대로 보는 이세희의 얼굴에 낯을 붉혔다. 웃으니 세상이 꽃밭이 되는 것 같은 아름다움에 서혁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무심코 쑥스러움에 몸을 꼬던 서혁은 딸의 칭얼거림에 제정신을 차리고, 허겁지겁 이세희에게 다가갔다.

    “저, 형님. 저희 딸입니다. 이름은 유란이라고 지었습니다.”

    “이름이 유란이구나.”

    서혁이 조심스레 강보에 싸인 딸아이를 안겨주었다. 이세희 덕분에 천민이었다가, 졸지에 신분이 상승 된 서혁은 죄스러운 감정에 고개를 숙였다.

    “유란아, 안녕.”

    잠에서 막 깨어 칭얼거리는 아이가 까르륵 웃었다. 이세희도 아이를 빤히 보며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태윤은 그 모습을 멀거니 지켜보며 속으로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황제만 아니었다면, 천민이어도 가족들과 행복하게 지냈을 이세희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왔다. 저런 자를 지난 세월 내내 유린하다니. 태윤은 그를 지켜보기가 미안해, 고개를 떨구었다.

    “…유란이는 서혁을 많이 닮았네.”

    “아들 녀석은 세형이를 닮아서 잘생겼습니다.”

    서혁이 민망함에 웃음을 터트리며 볼을 긁적였다. 이세희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서혁의 뒤에 숨은 세형의 아들을 보았다. 세희가 궁에 끌려오고 나서, 그 즉시 서혁과 혼례를 치렀고 세형은 아들을 임신했다. 세희를 강탈당하듯 뺏긴 부모는 남은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무리하게 혼례를 진행한 것이다.

    “아들 이름이 유한이라고 했나?”

    “네. 아들은 유한이, 딸은 유란이에요. 유한아, 삼촌한테 인사해야지.”

    어린 유한은 낯을 많이 가리는지 아버지 뒤에 후다닥 숨었다. 서혁이 나오라고 일러도, 유한은 으으응, 하고 거절하며 아버지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꼭 세연이를 떠올리게 하는 유한의 행동에 이세희의 눈이 흐려졌다. 눈을 내리뜨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으려 손을 휘젓는 유란에게 손가락을 내밀었다. 유란이 해맑게 웃으며 이세희의 검지를 꼭 쥐었다.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세형의 딸을, 애정이 가득한 눈으로 보던 이세희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 이제 궁에 오지 마세요.”

    그 말에 울음을 겨우 달래고, 이세희의 눈치를 살피던 어머니는 가슴을 꽉 틀어잡았다. 거동이 힘들어 가족들의 재회를 앉아서 지켜보던 이세희의 아버지도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반신불구라, 그는 오래 서 있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아이고, 세희 아버지!”

    그녀가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뛰어가 이세희의 아버지를 안아주었다. 힘이 부쳐 그를 완전히 일으키지 못했다. 바닥에 주저앉아, 아버지를 꼭 안고 있는 어머니를 차분한 눈으로 보며 이세희가 말했다.

    “아버지도 오지 마시고요. 오실 필요 없습니다. 폐하께도 말씀드렸습니다.”

    “마마, 제가 아까 드렸던 말씀 때문에 그렇습니까?”

    아들을 못 본다는 생각에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세희의 아버지는 말을 하고 싶으나, 입술이 굳어 어, 어, 하고 신음만 내뱉었다.

    그때였다. 잠자코 지켜보던 태윤이 뛰어와, 이세희의 아버지를 번쩍 안았다. 의자에 그가 넘어지지 않게 앉혀주고, 혹여나 다시 넘어질까 걱정되어 그를 곁에서 지켜보았다. 이세희는 떨리는 눈으로 태윤과 태윤의 손을 잡은 아버지를 지켜보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그러려면 자신은 궁에 있어야 했고, 가족들은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놓는 게 좋았다. 황제가 이 이상으로 가족들을 건드리는 건 두고 볼 수 없었다. 또한 세연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했다. 이제 저 가족들 틈에 자신이 들어갈 일은 없었다. 세형은 혼례를 치러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세령도 혼례를 치러 다른 곳에서 나름대로 잘 살아갔다. 세연이야, 이제 여덟 살이고 유모와 어머니의 손에서 천방지축으로 크는 듯했다. 그곳에 함께하고 싶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이제라도 인정하고, 자신은 가족을 포기해야 했다. 이세희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조카를 품에 꼭 안고 보드라운 뺨을 만지며 말했다.

    “언제까지 이런 모습을 보여드릴 수도 없고….”

    어머니가 눈을 세게 감았다. 세령도 소매로 얼굴을 가리며 훌쩍였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이세희가 황제에게 맞고, 강간당하는 걸 지켜봤던 가족들은 입을 다물고 홀로 울음을 삼켰다.

    “더 이상 저 때문에 가족들이 끌려오는 건 보고 싶지 않습니다. 다 제가, 저 때문에….”

    “오라버니 잘못이 아니에요.”

    입을 다물고 있던 세형이 불쑥 말했다. 이세희가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세형을 보자, 세형이 호젓하게 웃으며 이세희의 뺨을 매만졌다. 이세희가 우는 여동생을 달래줄 때 자주 쓰던 방법이었다. 뺨을 양손으로 감싸고, 아래로 당겨 이마를 맞댄 세형은 당당한 태도로 말했다.

    “전 한 번도 오라버니가 부끄러운 적이 없었어요. 가족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 그런 말씀 마세요. 왜 오라버니 때문인가요.”

    세형은 물기가 서서히 차오르는 이세희의 눈가를 느리게 지분거리며 웃어주었다.

    “오라버니는 제 마음속에 항상 같은 사람이에요. 그 누가 뭐라 해도, 오라버니는 제가 무척 존경하고 사랑하는 분이에요. 오라버니 탓으로 돌리지 마세요. 오라버니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어요.”

    그리 말한 세형도 치미는 울분은 욱여넣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세형은 이세희를 올려다보며 한 번도 하지 못했던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 늘 마지막인 것처럼…. 굴지 마시고, 오라버니의 삶을 사세요. 저희 걱정은 하지 마세요. 이제 오라버니만 생각하세요. 그래야 하고…. 그래야 살 수 있어요.”

    작고 여린 손으로, 세형이 덜덜 떨리는 세희의 손을 맞잡았다. 세희가 반사적으로 세형의 손을 꽉 잡고서 고개를 숙였다.

    “사셔야 해요.”

    세형은 누구도 듣지 못하게, 이세희에게만 속삭였다.

    *

    황제의 명에 따라 이세희의 가족들은 그 즉시 자리를 떠났다. 이세희의 뜻이 강하기도 했고, 황제 또한 이세희만 궁에 있다면 그의 가족들이 무엇을 하든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세희는 쾌청한 하늘 아래, 궁에서 가장 풍경이 아름답다고 소문난 길목에 서서 가족들이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한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다가 머리 위에 부는 후덥지근한 바람에 고개를 들어 맑은 하늘을 바라보더니,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우혜전으로 걸어갔다. 태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는 발바닥에 심한 자상을 입은 상태였다. 발을 땅에 디디기만 해도, 상처가 아플 터인데 내색하지 않고 걷는 그가 걱정되었다.

    그에게 다가갈지 말지 고민하던 태윤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이세희는 한 폭의 그림처럼 녹음에 둘러싸인 우혜전 앞에 서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지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몸을 미세하게 떠는 그를 보자마자 태윤은 주저하는 자신을 향해 혐오감을 느꼈다.

    언제까지 주저한단 말인가? 언제까지 아버지에게 고통 받으며 울고, 홀로 감내하는 이세희를 보고만 있을 것인가?

    그제야 태윤은 자신의 마음을 추처럼 뒤흔들던 감정의 근원을 알아냈다. 아버지의 명이란 이유로, 그가 유린당하는 걸 다른 궁인들처럼 지켜보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의 아름다움에 취해…. 방관자가 되어, 그를 사랑하면서도 나서지 못했다. 그저 그의 근처에 서서 지켜보는 것으로만 만족하는 걸 사랑이라 여기며, 감히 그를 마음에 담으려 했다.

    방관이었고, 범죄였고, 자신도 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사랑한다는 핑계로 나의 안위만을 찾고 있었다.

    “아윽….”

    이세희는 발바닥에서 치미는 고통에 무릎을 짚고 헐떡였다. 발을 떼어낼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피부가 아려왔다. 고통을 억지로 인내하느라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이세희는 입술도 벙긋하지 못했다. 그런 이세희를 보며, 태윤은 아주 천천히 땅에서 발을 떼어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부관 한서진이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알면서도 태윤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 주저하지 않으리라. 태윤은 어느 순간 뛰었다. 궁에선 뛰면 안 된다는 법도를 잊고서, 태윤은 쓰러질 것 같은 이세희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뒤에서 부관 한서진이 “대장님!” 하고 불렀지만, 태윤은 그 외침을 뿌리치며 이세희를 뒤에서 끌어당겨 안았다. 태윤의 두툼한 팔이 이세희의 허리에 감겼다. 강하게 끌어당기는 힘에 이세희는 속절없이 끌려갔다. 이세희의 긴 머리칼이 태윤의 목덜미에 닿았다. 하아, 하아, 하고 거칠게 숨을 내쉬던 이세희는 자신을 능숙하게 끌어안는 품에 입술을 달싹였다.

    “안 돼….”

    보지 않아도, 미열이 인다고 느낄 정도로 뜨거운 피부에 자신을 안는 이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자신이 파고들었던 이였으니까. 본능적으로, 태윤임을 느낀 이세희는 고개를 숙이고 태윤만 들을 수 있게 말했다.

    “이거 놓고 가.”

    “지켜 달라고 하셨죠.”

    태윤은 버둥거리는 이세희를 간단하게 제압하고서 귀에 대고 속삭였다. 뒤에는 위병들이 있으니, 목소리를 낮춰야 했다. 자연스럽게 이세희를 지탱해, 일으켜 세우는 척하며 태윤은 그에게 연이어 말했다.

    “…궁에서 나가게 해드리겠습니다.”

    “개소리하지 마.”

    이세희도 만만치 않은 눈빛으로 태윤을 노려보며 서슬 퍼런 목소리로 속삭였다. 태윤의 가슴팍을 팔꿈치로 세게 때려 밀쳐냈다. 천민으로 태어나, 노동으로 다져진 몸은 힘이 엄청나 맞는 것만으로도 신음이 절로 나왔다. 이걸 맞고도 이세희에게 덤벼드는 아버지가 신기할 정도라고 생각하며, 쓴웃음을 짓던 태윤은 흐트러진 자세로 숨을 고르는 이세희를 보았다. 가족들이 떠나기가 무섭게 그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 눈빛은 고통으로 물들어 초점이 뭉개졌고, 입술을 신음을 삼키느라 꽉 깨물어 피가 맺혔다.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네 아버지로부터 날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빛은 섬뜩했다. 예전이라면 그가 미는 대로 밀렸을 것이다. 태윤은 말없이 그를 지켜보다, 보폭을 좁혔다. 이세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름다운 얼굴에 스미는 짜증에 태윤은 능글맞고 태연하게 웃었다.

    “왜 마마는 안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가 원하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부귀영화는 누리지 않아도, 소소하게 가족들과 행복을 누리는 삶을 원하고 있었다. 조카를 안으며 아버지처럼 자애롭게 웃는 이세희는 그 자체로 행복해 보였다.

    “왜 자꾸 다가와. 저리 안 꺼져? 너 때문에 내가 언제까지….”

    태윤이 밀리지 않고, 역으로 순풍처럼 다가오자 당황한 이세희가 되물었다. 그보다 손가락 한마디 정도 작은 태윤은 입이라도 맞출 것처럼 가까이 다가갔다. 보다 못한 부관 한서진이 “대장님, 마마께 필요 이상으로 접근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근엄하게 말했다. 태윤은 손을 들어 그를 저지하고서, 이세희를 흔들림 없는 눈으로 직시했다. 한서진이 다가오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 아슬아슬한 대치 상황에서 태윤은 이세희를 보고 씩 웃었다.

    “절 버리십시오.”

    “뭐?”

    태윤이 고개를 숙여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궁에서 떠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너는?”

    이세희가 불안감과 희망에 차 묻자, 태윤은 대수롭지 않게 바로 대답했다.

    “저는 그 자리를 지켜야지요. 마마께서 지켜 달라고 하셨으니. 그게 제 임무입니다.”

    그리고 뒤로 물러난 태윤은 다가오는 한서진을 뒤돌아보더니, 위엄에 찬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마마께서 잠시 원림을 보고 싶다고 하신다. 마마를 모시고 원림에 갈 테니, 너희들을 뒤에서 따라와라.”

    초반에만 해도 자기를 보고 얼굴을 붉히고 수줍음을 느끼던 태윤은 사라졌다. 내가 알던 태윤이 맞냐고, 이세희가 물으려던 찰나 태윤이 다가와 이세희를 번쩍 안아 들었다.

    “이게 무슨…!”

    “발이 아프시니 제가 안아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주저함이 전혀 없었다. 어딘가 조급하게도 느껴졌다. 태윤의 강직한 눈을 휘어 감는 열기에 이세희는 당황해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발이 아픈 건 사실이라, 이세희는 얌전히 태윤의 품에 안겼다. 도대체 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고 싶어 눈을 가늘게 뜨고 태윤을 훑었다. 이러다 자칫 잘못하면 애 하나 죽겠구나 싶어, 어쩔 수 없이 눈이 태윤에게 닿았다. 그래도 몸을 섞었던 사이라고, 자신의 밑에 깔려 마마, 마마, 하며 울던 애를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너 진짜 왜 이래? 죽고 싶어?”

    이세희는 불안감에 떨리는 가슴을 다독이며 아주 느릿하고,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태윤은 뒤에서 화살처럼 꽂히는 시선에 말을 아꼈다. 수풀이 우거진 원림 안으로 들어오자 햇볕 아래에 있을 때보단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이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그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멋대로 안고 들어왔지만 자신도 두려움에 덜덜 떨고 있었다. 혹 누가 목소리를 들었을지 모르고, 이 사실이 알려지면 자신은 바로 사형일 테니까.

    그러나 더 이상 망설일 수 없다는 생각에 태윤은 몸을 먼저 움직였다. 지켜보기만 하는 건 의미가 없는 행위였다. 그는 아버지에게 희롱당하고 다쳐야 했다.

    그걸 보기 위해 자신은 금군대장에 온 게 아니었다. 그를 지켜 주기 위해서 온 것이었다. 운명이 자신을 이곳으로 이끌었다. 그가 자신의 손을 떠났을 때, 환하게 웃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다시 보여준다면 자신은 만족할 수 있었다.

    그것이 내가 태어난 의미였고, 전부였다.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는 삶에 그가 행복해진다면.

    그 가능성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잊고 있었던 희망이 부질없던 삶에 초를 밝혔다.

    태윤은 숨을 느긋하게 내쉬며 걸음을 멈추었다. 앞에는 발목이 잠길 정도의 물이 흘렀다. 궁 중심에는 태월호가 있었고, 그 호수물이 궁 주변을 감싸 안듯 흘렀다. 이것도 그 호수에서 흘러내려와 시냇물처럼 형성된 물줄기였다. 그 앞에 놓인 돌에 이세희를 앉혀 두었다. 그가 의심 어린 눈으로 태윤을 노려보았다. 태윤은 짧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에 발을 담가 보십시오. 더위가 좀 가실 겁니다. 다치신 발은 저에게 보여주시면, 상처를 봐드리겠습니다.”

    “차라리 태의를 부르지 그래?”

    이세희가 비꼬듯이 하대하자 지켜보던 한서진이 얼굴을 구기며 다가왔다.

    “마마, 금군대장께 그리 하대하시면….”

    “꺼져. 너한테 입 열라고 안 했어.”

    날이 바짝 선 이세희의 말에 한서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눈빛에 서리는 혐오감에 이세희는 비릿하게 웃으며, 위병들에게도 가소롭다는 듯 명령을 내렸다.

    “금군대장 빼고 모두 두 발자국씩 물러나라. 그리고 넌 태의나 불러와. 당장!”

    태윤과 자신의 사이에 끼어, 난입하려 드는 한서진에게 불호령을 내렸다. 그간 궁 생활로 다져진 이세희의 우렁찬 목소리에 한서진이 움찔했다. 그들을 따라오던 태감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이세희의 말에 따라 두 발자국씩 물러나라고 말했다. 이 일에 대해서 판단은 황제가 하는 것이니. 태윤도 태감에 의해 황제에게 말이 들어갈 것을 알면서도 말없이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골치 아픈 시선으로 태윤을 묵묵히 지켜보던 이세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다가 자신들에게 귀를 쫑긋 세우는 태감을 보며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너도 꺼져.”

    “하오나, 마마. 소신은 마마의 손이자….”

    “손이라는 녀석이 내가 발이 아파 쓰러지려는데도 가만히 보고 있었느냐? 금군대장께 임시로 치료를 받을 터이니, 저기 앉아 있어라. 널 보면 폐하가 생각나 속이 미식거려 못 참겠으니.”

    태감은 고개를 조아리며 난감한 눈빛을 보냈다. 희미한 분노로 달궈진 시선으로 태감을 보던 이세희가 말없이 묵직한 주먹을 치켜들자 태감이 창백해진 낯으로 총총 뒤로 물러났다. 궁을 벗어날 때, 호위 내관 다섯을 오로지 주먹질로 쓰러트리고 도망쳤던 이세희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태감도 내려쳐서 기절시킨 이세희였기에, 그 주먹맛을 아는 태감은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떨었다. 그러나 한 번만 더 이세희가 도망가면 황제가 자신을 담금질하듯 죽일 게 분명했기에 이세희의 말대로 그를 멀리서라도 지켜볼 작정이었다.

    의심 가는 세력들을 모두 내쫓고서, 이세희는 다친 발을 당당히 내밀었다. 태윤은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서 이세희의 발목에 손을 대었다. 태윤의 고개가 가까워졌다. 흔들리는 눈으로 태윤의 둥근 뒤통수를 바라보던 이세희가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시도했다.

    “…너, 무슨 작정인 거야.”

    태윤은 잠자코 이세희의 발에 감긴 천을 풀어냈다. 천은 피로 얼룩덜룩했다. 심각한 상황에 혀를 차던 태윤은 임시방편으로 들고 다니는 주머니에서 깨끗한 천을 꺼냈다. 그걸 이세희의 발바닥에 대고, 흘러내리는 피를 지혈하며 눈을 들어 올렸다. 딱 두 발자국 뒤에 위병들이 있다. 평화로움을 가장하고 흐르는 위태로움에 마른침을 삼킨 태윤은, 눈을 내려뜨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망가게 뒤를 봐드리겠다는 뜻입니다. 가족들과 마마 모두.”

    이세희의 눈이 잘게 떨렸다. 혹하지 않는다면 거짓이었다. 가슴에 천지개벽이 내려온 것처럼, 꽉 죄어오는 통증에 이세희는 입을 꽉 다물었다. 정말, 이대로 도망갈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증오하는 황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궁에 갇힌 지난 세월 미치도록 염원했던 갈망이 미풍처럼 불어 손가락을 건드리자, 이세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잡아서는 안 된다. 놓아야 한다. 자신이 놓자고 말한 손이었으니까.

    “마마, 절 버리고 가십시오. 아바마마는 삼 일 후, 법도에 따라 제사를 드리러 궁을 나가십니다. 그때가 기회입니다.”

    한 번도 선뜻 손을 잡지 않던 태윤이 제 의지대로 이세희의 손을 맞잡았다. 이세희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자, 태윤이 좀 더 힘을 줘 깍지를 끼며 햇살처럼 웃었다. 제 아버지를 닮은 얼굴로, 미련 없이 웃어주는 태윤을 보며 이세희는 가슴이 울렁거려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처음 봤을 때는 미숙하기 그지없는 소년 같더니, 이제는 영락없는 사내가 되었다. 장마 이후로도 미적지근하게 거리를 유지하며 지켜보기만 하던 그가 어느 순간 이렇게 불쑥 다가왔단 말인가. 너무 짧은 사이에 어른이 되어버린 태윤을 보며 이세희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달래 줄 수 없으니, 울지 마십시오.”

    그리 말하면서, 태윤은 묘한 손길로 이세희의 고운 손등을 문질렀다. 다행이었다. 바깥쪽에서 볼 때는 발목을 잡는 자신의 손만 보이기에. 이세희와 태윤은, 몸에 가려진 그 틈 사이에서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지 마. 네 아버지를 닮은 얼굴로….”

    태윤이 쓰게 웃었다. 그네를 타듯, 흔들거리는 이세희의 눈빛에 태윤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의 흔들림이 이리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이세희가 멀어질수록 자신의 죽음은 가까워질 테지만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도저히 지켜볼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품에서 뭉개지고, 가족들을 멀찍이서 바라보고, 그들을 사랑하기에 놔줘야 하는 이세희가 너무 가여워서.

    “전 아바마마를 닮았지만 아바마마와 다릅니다.”

    태윤은 웃음을 슬그머니 지우고서, 충직한 얼굴로 이세희를 응시했다.

    “세희 널 지킬 거야. 난 어차피 잃을 게 없어. 너만, 날 기억해주면 돼.”

    “건방지게, 누구 이름을 함부로….”

    이세희가 입술을 깨물며 토라진 듯 중얼거렸다. 태윤은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의식하며 이세희의 손을 미련 없이 놓았다. 그의 발목에 천을 맞댄 채, 몸을 일으키며 그의 귀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너무 늦어서 미안해.”

    이세희가 눈을 감았다. 눈물이 넘쳐흐를 것 같은 위태로움에 태윤은 가슴이 아파와 눈을 내리떴다. 안아주고 싶은 손은 주먹을 쥐었고, 뒤로 물러났다.

    이세희를 만난 것이 우연이라면, 그를 지켜주는 것은 필연이다. 그렇다면 망설일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태윤은 담담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장마가 끝난 하늘이 참으로 맑았다.

    *

    이 세상에 안 되는 건 없다. 모름지기 마음먹기에 달렸다. 태윤은 퇴궐하기가 무섭게, 침방 문을 걸어 닫고 불을 켰다. 그리고 불빛 아래에서 궁의 지도를 펼치고 양쪽 끝에 말리지 않게 물건을 올려두었다. 관복도 갈아입지 않고, 턱을 괴고서 날카로운 눈으로 지도를 살폈다.

    이세희는 도망에 한 번 실패했지만, 이번엔 달랐다. 자신이 있었으니까. 자신은 이세희와 다르게 궁과 제도의 지리에 대해 자세히 꿰뚫고 있었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렇다고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지체는 이세희의 고통에 짐을 더 얹을 뿐이었다. 그의 가족이 이세희의 말에 따라 퇴궐했고, 현에 가기 전에 그를 궁에서 빼내 가족과 함께 다른 나라로 도피시켜야 했다. 제도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의 거리를 가늠해보던 태윤은 고민에 잠겼다.

    하지만 이세희가 가지 않겠다고 한다면…. 흔들리긴 했으나, 흔들릴 뿐 제 손을 잡지 않았다. 태윤은 용기 내어 꽉 잡았던 이세희의 손을 떠올렸다. 노동으로 인해 거친 손은 큼직하고 사내다웠다. 그 손을 잡는 데까진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놓아주는 시간은 너무 빨라 아쉬웠다.

    “세희야.”

    혼자가 되고 나서야 온전히 불러보았다. 황제가 버릇처럼 부르던 이름은 예쁘고 고왔다. 혓바닥에서 굴려지고, 나가는 것도 애가 타고 아까웠다. 그런 자가 유린당하는 걸 여태 어떤 심정으로 보았던 건지. 자신이 한심하고, 혐오스러워서 태윤은 얼굴을 감싸고 침음했다.

    내 미숙함에 그를 아프게 하고 말았다는 사실에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다. 이게 사랑인지도 모르고, 홀려서 그저 바라보기만 하고….

    욱신거리는 통증을 참지 못하고 태윤은 몸을 일으켰다. 마음을 과거에 두어서 무얼 한단 말인가. 달라지는 건 없었다.

    “우선 돈부터 바꿔야겠군.”

    태윤은 침상으로 차분하게 걸어갔다. 그의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숙빈으로 살아오면서 하나둘 모아온 패물을 태윤에게 주었다. 부인을 맞이하면 이 패물들을 주라며 어머니가 남겨준 유물이기도 했다. 그것들은 모두 소중하게 작은 함에 보관해 두었다. 태윤은 흐릿한 불빛 아래에서 하염없이 함을 쓰다듬었다. 모퉁이가 닳고, 험하게 굴러진 함은 황제가 어렸을 적 준 선물이었다. 그 함을 일렁거리는 눈으로 쓰다듬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황제의 뜻을 거스른 적이 정말 단 한 번도 없었다. 황제가 원하는 이상적인 아들이 되어 그를 보필하고, 어머니를 지켰다. 그의 앞에서 고개 한번 치켜든 적도 없던 자신이, 이세희 때문에 돌아선 걸 알면, 황제가 얼마나 실망할까 생각하자 가슴이 쿡쿡 찔렸다.

    다른 의미의 울렁거리는 죄책감에 태윤은 쓰게 웃었다. 모든 걸 가질 수 없는 게 세상의 이치였다. 하나를 얻으면, 두 개를 잃을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이었다.

    “…이젠 돌이킬 수 없겠지.”

    쉬고,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린 태윤은 눈빛을 굳히고 함을 열었다. 여기서 머뭇거리면 모든 것이 다시 원상 복구 되고 만다. 이세희를 살리기로 결정했으니, 황제의 마음을 잃는 건 당연지사였다. 숨을 느릿하게 내쉰 후에야, 태윤은 떨리는 손으로 함에 든 패물을 꺼냈다. 적지만 값어치가 상당한 패물들을 손끝으로 매만져 보았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받은 패물, 혹은 대신들에게 선물로 받은 것들….

    “죄송합니다, 어머니.”

    어차피 죽음만이 유일한 친우가 된다면, 이것은 마땅히 의미 있게 쓰여야 했다. 태윤은 어머니가 주신 패물, 자신이 녹봉으로 받은 후 하나씩 사 모았던 검이나 단도, 활을 챙겼다. 지금 당장 모든 걸 돈으로 환산한다면 의심을 받을 것이다. 태윤은 나누어서 돈으로 바꾸기로 결정하고, 관복에서 평범한 철릭으로 환복했다.

    “주인님, 어디 가십니까?”

    마당을 쓸던 노비가 후다닥 뛰어나와 태윤 앞에서 고개를 조아렸다. 태윤은 상냥하게 웃어주며 노비의 등을 토닥였다.

    “내 가볼 데가 있어서 그러니 먼저 자고 있거라. 좀 늦을 수도 있으니.”

    “아이구, 주인님이 안 계신데 소인이 어떻게 먼저 잡니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노비가 천민이라, 함부로 대할 법도 한데 태윤은 한 번도 노비들을 무시하거나 학대한 적이 없었다. 자신의 어머니 숙빈도 공노비였다. 아버지의 총애가 떠나고 나서, 공노비라고 무시 받던 어머니의 눈물이 뼈에 사무쳤기에 태윤은 천민이라고 사람을 무시하는 일이 없었다. 자신과 친한 친구이자 부관인 한서진의 생각 역시 태윤과 일맥상통했다.

    “괜찮다. 설마, 내가 어디서 습격이라도 받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냐?”

    태윤은 서슴없이 노비에게 농을 걸며 어깨를 으쓱댔다. 태윤의 무예 실력을 아는 노비는 볼을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태윤도 부드럽게 마주 웃어주고서 발걸음을 돌렸다.

    등을 돌리기가 무섭게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태윤은 어둠 속에서 가장 환하게 빛나는 홍등가로 향했다. 분내와 술내음이 넘실거리는 홍등가를 앞마당처럼 거닐며 태윤은 눈을 흘겼다. 패물을 팔 노상이 음습한 길목에서 보였다. 낮에 패물을 돈으로 바꾸면 신분이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 조금이라도 위험을 덜 무릅쓰기 위해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홍등가로 온 것이었다. 홍등가에서 터전을 잡은 이들은 패물을 화대로 받으면 바로 돈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거리마다 패물을 돈으로 바꿔주는 노상이 있었는데, 이들의 좋은 점은 신분 따위는 신경 쓰지 않으며 입도 무겁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위험도 있었으나, 지금 같은 시기에 패물을 돈으로 바꾸기에 이보다 적합한 곳은 없었다.

    무채색에, 무늬는 없었으나 고급스럽게 흐르는 색감의 옷을 입은 태윤을 보고 노상 주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에게서 한 푼이라도 더 뜯어내려는 주인의 눈을 안광을 빛내며 받아친 태윤은 말없이 패물을 던졌다.

    “이건….”

    패물을 보자마자 주인이 눈을 희번득 떴다. 태윤은 걸음을 성큼성큼 옮기며 상에 두 손을 짚고 고개를 숙였다. 눈에 서리는 예사롭지 않은 빛에 주인이 딸꾹질을 하자, 태윤은 품을 뒤적여 또 패물을 내밀었다. 품에서 우수수 나오는 패물들에 처음에는 의심 섞인 시선을 보내던 주인도 눈을 빛냈다. 태윤이 가져온 패물은 하나같이 이 길거리에서도 보기 드문 것들이었다. 커다란 비취, 영롱한 호박, 흑진주까지…. 크기가 크고, 표면이 매끄러운 흑진주에 주인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나리, 정말 이 물건들을 파시는 겁니까? 저에게 딴말하시면 안 됩니다?”

    흑진주와 진주가 수두룩하게 박힌 머리 장식을 소중하게 안으며 주인이 물었다. 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매끄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돈이나 주게.”

    이 돈들은 모두 이세희와 그의 가족들을 위한 자금으로 쓰이리라. 태윤은 흡족하게 웃으며 주머니에 돈을 주섬주섬 넣었다. 주머니는 안전하게 품에 넣고 걸음을 옮기는데, 막 들어서던 이와 어깨가 딱 부딪쳤다. 태윤이 무심코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드는데 의외의 인물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어, 대장님?”

    고운 얼굴에 화사한 철릭을 입은 한서진은 투박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고상한 오릉의 공자처럼 느껴졌다. 비슷한 의복을 입었어도, 무사의 자태가 풀풀 나는 태윤과 정반대였다. 태윤이 난감한 듯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을 하자, 한서진이 능글맞게 웃으며 다가와 어깨에 팔을 걸쳤다.

    “우리 대장님께서 어디 가시나 했더니…. 이제 부인이라도 만드시나 봅니다?”

    “그러는 너야말로 여기서 뭐 하는 거냐?”

    태윤이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한서진이 음험하게 웃으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야 요새 유행하는 화비 놀이 하러 왔지요.”

    하하, 하고 너스레를 떨며 웃는 한서진을 보며 태윤이 경멸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한서진은 거리낌 없는 태윤의 시선에 묘한 미소를 덧그리더니, 제 품에 안겨있던 여인을 떼어놓았다. 어머, 하고 애교 있는 목소리를 터트리는 여인에게 저절로 시선이 향했다. 여인은 백자를 들고 있었는데, 손에는 잔이 없었다. 이세희가 황제에게 술을 먹이는 행동이 저잣거리에도 뻔히 퍼진 걸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 눈으로 보자 불쾌감이 일었다. 이세희가 원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속이 터져 미칠 지경이었다. 안 그래도 이세희의 도망 문제로 머리가 복잡한데, 믿었던 부관인 한서진마저 번듯하게 차려입고 여인과 저러고 있으니 가슴이 분노로 달궈졌다. 태윤이 경멸을 못 참고, 한서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고서는 못 참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한숨을 거칠게 내쉬는 걸 보고서 한서진도 웃음을 가라앉혔다.

    “대장님, 화비 마마에게 동정심을 느끼실 필요 없습니다. 저희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화비 마마는….”

    “어떻게 사람이 그런단 말이냐?”

    태윤은 묵직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한서진이 동요 없는 시선으로 태윤을 빤히 보았다. 자신의 속내라도 캐낼 듯이, 깜박이지도 않고 쳐다보는 께름칙한 눈빛에도 태윤은 뒤로 밀려나지 않았다. 물러날 이유가 없었다.

    “난 그러지 못하겠다. 응당 사람이라면….”

    울분을 참지 못하고, 태윤이 서러움을 터트리려 하자 한서진이 발 빠르게 다가와 입을 틀어막았다. 태윤이 놀라 눈을 치켜뜨자 한서진이 유려한 눈웃음을 지었다. 이세희만큼은 아니지만, 예쁘장하기로 소문난 한서진의 미소에 주변이 화사하게 반짝였다.

    “우선, 저와 얘기하시죠. 여기는 듣는 귀가 많으니까요.”

    여인이 들고 있던 백자를 뺏어들고, 대신 그녀에게 돈을 쥐여 준 한서진은 태윤과 함께 나란히 길을 걸었다. 밤이 되어 더위는 한풀 꺾였다. 강변을 따라 움직이니 선선한 바람까지 불어, 언뜻 느끼면 일찍 가을이 온 듯했다. 한참을 걸어, 인적이 드문 거리까지 온 두 사람은 음산한 나무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제도 사람들은 여름이 되면 강가로 나와 술을 자주 마셨기에, 두 사람도 그리 이상한 모습은 아니었다.

    “자꾸 그러시면 폐하의 눈 밖에 날 수도 있습니다, 대장님.”

    한서진은 곱상하고 고생 모를 것같이 생겼으나, 얼굴과 다르게 괴팍하고 제멋대로인 성격이었다. 자신처럼 반쪽은 천민의 피가 흘러 집안에서 냉대를 받고 자라서인지 한서진은 삶에 냉소적이었고 타인에게 마음을 내주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한서진이 유일무이하게 기대고, 마음을 터놓는 건 태윤뿐이었고 태윤에게도 한서진은 친구 이상이었다.

    “화비 마마에게 동정심을 갖지 마십시오. 그분은 폐하의 것입니다. 저희가 어떻게 도와드릴 수가 없는 분이니, 이만 포기하세요. 대장님께서 착하고 너그러운 분인 건 알지만, 그분에겐 안 됩니다. 인정을 베풀지 마세요.”

    한서진이 비릿하게 웃으며 태윤에게 비수를 날렸다. 태윤은 한동안 말없이 어둠이 춤을 추는 수면을 보았다. 등과 달의 반짝임에 따라 수면이 제각각 다르게 보였다. 마치 자신의 속내 같이 어둡고 눅눅하기 그지없었다.

    고개를 돌렸다. 한서진이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난간에 팔 하나를 걸치고 파락호처럼 거들먹거렸다.

    “대장님께서 황제가 된다면 모르겠지만요.”

    “서진아!”

    태윤이 호통을 치듯 이름을 부르자 한서진이 성큼 다가와 태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때까지와는 다른 눈빛으로 태윤을 노려보듯 응시하며 한서진이 서슬 퍼런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가 왜 안 된다는 거야? 천민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로?”

    “내가 어떻게 어좌에 앉는다는 말이냐.”

    한서진은 흐음, 하고 짧게 침음하더니 조소를 머금었다. 고개를 살짝 숙여 태윤과 눈을 마주친 한서진이 요사스러운 입술을 열었다.

    “그런 마음이 아니라면, 이세희에게 갖는 동정심은 갖다 버려.”

    한서진은 호탕하게 소리 내어 웃더니, 손에 든 백자를 입에 갖다 대었다. 술을 마시기 직전, 또렷한 눈으로 태윤을 보며 한서진이 농을 하듯 덧붙였다.

    “아니면 그 동정심이 널 죽일 거다. 애첩 때문에 아버지 손에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여기서 그만두고 금군대장에 만족하며 지내.”

    “다른 방식으로 이세희를 구해준다면?”

    “집어치워.”

    거칠게 대꾸한 한서진이 무표정한 얼굴이 되었다. 눈빛만은 누그러졌다. 술을 느리게 삼킨 한서진은 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넌 이세희가 얼마나 맞고, 괴로워했는지 몰라서 그렇게 나오는 거야. 그가 도망쳤다가 잡혀왔을 때, 우리 모두 이세희가 죽길 바랄 정도로 맞았으니까. 그런 그를 지키는 방법은 하나야. 네가 어좌에 앉는 수밖에 없어.”

    태윤이 농에 반응하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서진이 눈을 나른하게 깜박였다. 동요가 없는 눈빛은 예전과 다르게 단단한 돌덩이 같았다. 난간에 기대었던 몸을 쭉 편 한서진은 팔짱을 끼며 고개를 숙였다.

    “어설픈 동정심은 서로를 죽일 뿐이다. 전쟁에서 칼을 빼든 자에게 동정심은 필요 없다는 사실을 네가 잘 알 텐데. 칼을 빼들었으면 모두 죽여야 해. 그래야 내 사람, 내 가족에게 우환이 없지. 그를 네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면….”

    “이세희를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게 아니야. 나는 그가….”

    숨을 죽이고 말을 흐리던 태윤은 시선을 강가에 두었다. 수면의 움직임에 따라, 눈이 일렁거렸다. 그 미묘한 찰나에 피어나는 갈망에 한서진은 의아함에 눈을 크게 떴다. 태윤은 숨을 켰다가, 힘겹게 내뱉으며 한서진을 똑바로 보았다. 난간을 꽉 잡은 채, 태윤은 허리를 펴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세희가 행복하게 웃었으면 좋겠어. 그거면 될 거 같아.”

    한서진의 눈가가 설피 서리는 불안감에 일그러졌다. 태윤은 꼿꼿하게 서서 편안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게 사람이라면 가져야 할 마음이잖아. 이건 기본적인 거야. 나는 그가 사람답게 살길 바랄 뿐이야.”

    그 말을 하는 태윤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의 미소에 한서진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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