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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일고경성 (1) (5/11)
  • 3장. 일고경성 (1)

    환궁 후,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자욱한 물안개가 꼈다. 저녁보다 어두운 새벽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기점이건만, 해는 뜰 생각을 하지 않는 듯 음울한 빛이 전역에 깔렸다. 눅눅한 암청색으로 물든 태얼궁 앞뜰을 차분하게 응시하며 태윤은 두 손을 아랫배에 모으고, 꽉 잡았다. 그러지 않고서는 뒤에서 섬광처럼 작렬하는 이세희의 고함 소리를 견뎌낼 수 없을 거 같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거스르지 않으며, 심연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분노를 삭이는 방법이 없어 태윤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비가 가슴속에서 내렸으면 좋겠다. 이뤄지지도 못하는 이 마음을, 다시 시작된 장마가 거둬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거듭했다.

    “신첩의 가족을 건드리셨으면서, 신첩이 참을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신첩이 도망가기라도 했답니까? 어째서 폐하께선 사 년 전과 달라지지 못하시는 겁니까! 세형이는 이제 아이를 낳고 몸을 추스르는 시기인데!”

    이세희가 악다구니를 쓰더니, 무언가를 던졌는지 날카로운 것이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가 귓전을 사납게 때렸다. 호위내관과 금군 수십 명이 동시에 어깨를 움찔했다. 침전이 거리가 있는데도 이런 소리가 들릴 정도면, 이세희가 진심으로 화를 내며 던진 것이리라. 태윤은 저도 모르게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기다렸다는 듯 다시 한 번 물건이 날아드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쾅, 하고 들리는 소리에 태윤은 참지 못하고 걸음을 성큼성큼 옮겼다. 앞뜰 못지않게 탁 트인 시야가 태윤에게 드리웠다. 차이가 있다면, 스산하고 우울한 빛이 잔뜩 깔린 앞과 달리 뒤는 내관들이 불을 들고 있어 낮처럼 환했다. 그러나 사람이 만들어낸 빛이라, 기분이 상쾌하고 밝아지긴커녕 어둠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는 역효과를 만들어냈다. 태윤은 어릴 적에 황제를 따라 들어갔던 굴을 떠올렸다. 대신들이 암수가 있을지도 모른다며 만류했지만, 황제는 너스레를 떨었다.

    ‘짐이 그렇게 약해 보이느냐?’

    단 한마디로 소란을 잠재웠다. 웃음기를 머금었으나, 정확하게 사람의 비수를 꿰뚫는 예리함이 대신들을 압도했다. 태윤을 품에 안은 황제는 아들의 보들보들한 뺨을 어루만지며 느긋하게 덧붙였다.

    ‘짐을 죽일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있다 해도 짐이 그걸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호언장담에 윤은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저 자가 내 아버지다. 비록 반푼이 황자지만 태윤은 자부심으로 가슴이 부풀었다. 자신을 보며 두려움에 떠는 자들 사이에서, 오롯이 쏟아지는 선망의 시선에 황제는 시선을 내렸다. 이제 여섯 살이 된 어린 윤이 황제를 보며 해바라기처럼 방긋 웃고 있었다. 아바마마, 하며 귀엽고 앙증맞은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며 품에 포옥 안겨오는 아들을 보며 황제는 뿌듯함에 입술 끝을 올렸다. 그는 아들의 포동포동한 엉덩이를 팔뚝에 걸치게 했다. 태윤은 자연스레 오동통한 손을 황제의 목덜미에 대었다. 어미를 닮아 유난히 검은자위가 큰 눈을 빤히 보며 황제는 이마를 스스럼없이 맞대었다. 윤은 간지러움에 까르륵 웃으며 황제의 어깨에 얼굴을 폭 파묻었다.

    ‘아비의 말이 맞지 않느냐, 윤아? 이 세상에서 감히 누가, 이 아비를 건드리겠느냐?’

    평범한 사람이 말했다면 코웃음 칠 소리지만, 세상에서 가장 잘생긴 황제가 근엄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이야기하자 거기엔 마성의 힘이 실린 듯 신뢰가 갔다. 윤은 암, 그렇고말고,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맹목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자가 무술을 익혀, 아바마마를 지켜드릴 것이어요. 반드시!’

    윤이 주먹까지 쥐어가며 약조하자 황제가 자애로운 아비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버릇처럼 윤의 뺨에 입을 맞대며 속삭였다.

    ‘그래, 윤아. 아비를 꼭 지켜다오….’

    뺨에 긁히는 그의 입술이 너무 부드럽고, 그만큼 연약하여 윤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자신을 품에 안고 걸음을 옮기는 황제는 크고, 거대했지만 이상하게 그가 나약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주변은 극락처럼 호화롭고 아름다우며, 그의 양옆에는 이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애첩들이 넘치건만, 그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공허한 눈으로 정면을 보는 황제의 억센 턱을 보며 윤은 그의 옷깃을 꽉 잡았다.

    그때부터였다. 내 손으로 아버지를 지켜주겠다고. 그리하면, 언젠가 어머니도 편하게 사실 날이 올 거라 믿으며 걸어온 날들이 눈앞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넌 실제로 짐을 두고 도망갔다. 그런 널 내가 어떻게 믿겠느냐!”

    아버지가 문 너머에서 이세희에게 고함을 내질렀다. 사자후 같은 소리에 태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침전 문 앞을 지키던 내관들의 얼굴도 창백하게 질려갔다. 이세희가 또 물건을 던졌는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내관들이 이젠 안 되겠는지 태윤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대장께서 들어가 보시지요. 아무래도 사태가 안 좋게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상황을 저지하러 왔다기보단, 아버지가 이세희에게 손을 대지 않을까 싶어 무의식적으로 온 것이라 태윤은 잠시 머뭇거렸다. 태윤이 “그래도 폐하께 먼저 말씀을 올리고….”라고 중얼거릴 무렵, 이세희가 내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대가로 팔다리를 부러뜨렸으면 됐지, 뭘 더 바라는 거야!”

    태윤도, 황제도 섣불리 말을 잇지 못했다. 황제가 멈칫하며 숨을 죽이는 게, 이 거리에서도 느껴질 정도였다. 황제에게 반말을 일삼고, 물건까지 때려 부수고 있는 이세희였지만 황제는 이세희의 터럭도 건드리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가 가까스로 ‘세희야.’ 하고 불렀지만 이세희가 하하, 하고 발작적인 웃음을 터트려 그를 제지했다.

    맑고 경쾌한 목소리로 웃음을 이어가던 이세희는 차츰 눈물을 토해냈다. 흐으, 하고 웃음을 눈물로 뭉갠 이세희가 황제를 향해 소리쳤다.

    “내가 당신을 용서할 거 같아? 그런 짓을 하고도?”

    황제가 걸음을 사뿐히 옮기는 소리가 들렸다. 이세희가 숨을 삼키고, 다독이는 소리가 귀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어떤 식으로 대치하고 있는지, 두 사람의 흐릿한 그림자로 태윤은 짐작했다. 이세희의 그림자가 불에 일그러진다. 황제의 그림자가 빛에 의해 점차 커지더니, 종국엔 이세희를 덮칠 것처럼 위로 솟았다. 이세희는 다가오는 황제를 보며 겁을 먹었는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황제가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이세희의 팔뚝을 잡아 억지로 당겼다. 이거 놔, 하고 소리 치며 이세희가 팔을 비틀며 빠져나가려 하자, 황제가 힘을 더 주어 이세희를 당겼다. 이세희가 ‘아윽….’ 하고 신음을 흘렸다. 태윤의 눈이 앞뜰을 적신 어둠보다 짙게 물들며, 손이 천천히 문가에 닿았다.

    “그러면 그때 내 뺨을 만져주고, 입을 맞춰준 건 무슨 의미였지?”

    문을 양옆으로 잡아 벌리려던 순간 태윤의 순이 멈추었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황제는 미묘한 희망에 차, 이세희를 부둥켜 잡고 다시 물었다.

    “왜 나에게 그런 여지를 주는 거야. 마치…. 날….”

    황제가 비통한 목소리로 말을 끌었다. 그건 설렘이었다. 태윤도 겪어본 감정이었기에 미치도록 잘 알았다. 손끝이 오므라들었다. 태윤은 문을 열려던 손을 그 상태로 멈춰 있었다. 내관들은 송곳 위에 올라선 듯한 아슬아슬한 상황에 마른침을 삼키며, 여차하면 문을 열고 태윤을 들여보낼 작정이었다. 태윤은 눈을 내리깔고 족의를 물들이는 노란 빛을 보았다. 저 빛 속에서 부드럽게 웃던 이세희의 얼굴을 떠올리자 가슴이 쿵, 쿵 뛰었다. 그는 그만두라고 말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끝을 보는 관계를 알면서도 태윤은 가슴을 으스러지게 만드는 통증에 눈을 질끈 감았다. 물러나자. 내가 난입해서는 안 되는 관계니까. 그리 마음먹으며 손을 떼어내는데, 이세희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왜? 사랑한다는 말을 바란 거야? 고작 그거 가지고?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이세희의 말은 지독하게 차가웠다.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말이 이어지자, 황제는 그럴 리 없다며 중얼거렸다. 그는 혼란을 느끼는 듯, 이세희에게 매달렸다.

    “지난 기간 넌 나에게 한 번도 그런 짓을 하지 않았어! 그런데 그날은…!”

    황제는 지독한 첫사랑에 방향을 잃었다. 태윤은 눈을 번쩍 뜨며 문을 거침없이 잡아당겼다. 금운을 향해 날아드는 용이 새겨진 문이 양옆으로 열리면서, 엉망이 된 침전이 드러났다. 이세희는 나신에 황제의 용포를 입고 사금파리 조각을 밟은 채 서 있었고, 황제는 이를 악물며 붉어진 눈으로 이세희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세희는 눈을 아주 빠르게 흘겨, 누가 들어왔는지 확인하더니 조소를 지으며 나긋하게 말했다.

    “당신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야.”

    황제의 눈이 분노로 물들어 파들파들 떨렸다. 이세희의 팔뚝을 움켜쥐는 손에 얼마나 힘이 들어갔는지 힘줄이 툭툭 융기했다. 꾹 다물렸던 이세희의 입에 악력으로 인한 틈새가 생겼다. 이세희의 잇새로 신음이 흘러나오자, 황제가 흠칫 떨며 그를 무심코 놓아주었다. 이세희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손을 높이 치켜 올려 황제의 뺨을 후려쳤다. 짜악, 하고 황제의 뺨을 마편처럼 때리는 힘에 내관들도 놀라 “화비마마!” 하고 불렀다. 태윤이 너무 놀라 휘둥그레 눈을 뜨고 이세희를 보는데, 이세희의 손이 전처럼 높이 올라가더니 이내 황제의 뺨에 깃털처럼 내려앉았다. 뺨을 수놓은 얼얼함에 제정신을 못 차리고 멍하니 있던 황제는 뺨을 덧그리듯, 상냥하게 만져주는 손길에 이세희만 뚫어져라 보았다.

    “이게 그렇게 좋았어?”

    이세희가 황제를 비웃었다. 그것이 조롱임을 알면서도, 황제는 붉어진 뺨을 안쓰럽다는 듯 만져주는 손길이 좋아 입을 조개처럼 다물었다. 이세희의 입술에서 흐느끼는 듯한 웃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태윤이 마른침을 삼키며 “화비마마.” 하고 부르자, 이세희가 휙 고개를 돌렸다. 그의 긴 머리가 너울처럼 우아하게 움직이고, 그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이자 태윤은 숨을 멈추었다. 아버지에게 시달린 얼굴이 색욕에 젖어 매혹적으로 빛났다. 너무 울어서 붉게 부은 눈과 아버지에게 몇 날 며칠 빨려 오동통하게 변한 입술. 그 아래로, 푸른 용포에 가려지지 못한 나신은 멍과 손자국, 입술 흔적으로 얼룩덜룩했다. 태윤이 고통스러운 시선을 보내자, 이세희는 엄한 눈으로 태윤을 노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금군대장은 참견 마십시오.”

    그러더니, 자신을 따라 태윤을 보려는 황제의 뒷목에 팔을 둘러 자신을 보게 했다. 태윤과 황제는 이세희의 기습에 숨도 못 쉬고, 그만 보았다. 이세희는 발돋움을 해 황제의 두 뺨을 감쌌다. 그 별궁 앞에서, 자신을 공격하려 한 자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할 때처럼 뺨을 잡고서 자신 쪽으로 당겼다. 황제의 입술에서 신음이 나오며 고개가 아래로 숙여졌다. 그의 큰 덩치가 움찔 떨렸다.

    “세희야.”

    이세희가 자신을 때렸음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설렘에 차 그의 손등에 자신을 손을 겹쳤다. 황제의 손길이 진저리가 난다는 듯 매몰차게 밀치며 이세희가 으르렁거리듯이 덧붙였다.

    “가만히 있어.”

    황제 때문에 우느라, 갈라진 목소리조차 그의 아름다움에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황제는 거의 이세희의 발치에 무릎 꿇을 기세로, 고개를 숙이고 이세희만 보았다. 주변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는 듣지도 못하고, 오로지 이세희에게 모든 신경을 쏟았다. 이세희는 엄지로 그의 눈가를 투박하게 만지고, 자신이 때려 붓기 시작한 뺨을 쓸었다. 황제의 눈이 흐려졌다. 이세희는 낮은 목소리로 웃더니, 황제의 입에 자신의 입을 맞추었다. 고개를 틀고, 벌어진 그의 입술에 자신의 혀를 밀어 넣었다. 처음에는 이세희의 입맞춤에 눈을 크게 뜨고 이리저리 굴리던 황제도 어느새 신음을 연신 흘리며 이세희의 허리에 자신의 팔을 휘어 감았다. 이세희의 발가락이 위태롭게 그의 몸을 지탱했다.

    “으응….”

    이세희는 달콤한 신음을 흘리며, 황제의 도톰한 입술을 물고 빨았다. 농염하게, 넝쿨처럼 허공에서 얽히는 두 사람의 혀에 타액이 엉겨 붙었다. 타액은 입술 사이에 매달리지 못하고, 두 사람의 매끈한 턱에 달라붙었다. 황제가 고개를 들어, 이세희의 날렵한 턱을 적시는 타액을 빨아들이며 혼탁한 신음을 뱉어냈다. 이세희는 굶주린 짐승처럼 달라붙는 황제의 이마를 잡아 밀어내며 속삭였다.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이세희의 확신에 황제의 세상이 부서졌다. 황제가 입술을 떼어내며, 이세희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비가 내리는 세상처럼 그의 눈이 소란스러웠다. 이세희는 보란 듯이 황제의 뺨을 어루만지며 다정한 어투로 덧붙였다.

    “이런 건, 그냥 할 수 있는 거거든….”

    그러면서 이세희가 피식 웃었다. 자신의 발밑에 부서진 도자기 조각들처럼, 황제의 마음이 요란스럽게 망가졌다. 알면서도 속아 넘어간 자신이 한탄스러우면서도, 이세희가 또다시 그리하면 넘어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며 황제는 이세희를 억세게 안았다. 이세희의 얼굴이 불쾌감으로 일그러졌다.

    “세희 네가 그럴 리가 없는 걸 알면서도.”

    황제는 넋두리처럼 중얼거리며, 이세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세희가 황제를 서슬 퍼런 눈으로 노려보면서 쇳소리가 낀 목소리로 말했다.

    “적어도, 신첩에게 사랑을 받고 싶으셨다면 신첩의 가족은 건드리지 마셨어야죠.”

    “…그런데 말이다, 세희야. 처음으로 돌아간다 해도 짐은 그리 했을 것이다.”

    황제가 이세희의 말에서부터 쏟아지는 분노를 심드렁하게 받아내며 이세희의 턱을 잡았다. 그의 오만한 자태에 이세희의 유려한 눈매가 찌푸려졌다. 자신을 밀어내는 반대편 손목까지 단번에 잡아 비틀자, 이세희의 입에서 “아흑….” 하는 울음이 터졌다.

    “아바마마, 그만하십시오! 그런 방식은 옳지 않습니다!”

    보다 못한 태윤이 중재에 나섰다. 손을 바로 뻗어 이세희의 허리와 엉덩이를 희롱하는 황제의 손목을 잡아 떼어냈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이세희를 꽉 잡아 안아준 태윤은 우직한 눈으로 황제를 보았다. 황제가 하, 하고 짧게 웃음을 터트리더니 가소롭다는 듯 자신의 손목을 매만졌다.

    “지금 네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알고 있느냐?”

    태윤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황제를 보았다. 거칠어진 숨을 다독이며, 이세희는 눈을 돌려 불안하게 태윤을 보았다. 태윤은 자신의 뺨에 후드득 떨어지는 불안한 시선을 알면서도,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 이건 옳지 않은 일입니다. 마마의 가족을 가두고, 마마를 태얼궁에 감금하고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은, 사가의 범부도 하지 않을 짓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애첩을 대하는 태도란 말입니까?”

    태윤의 목소리는 지극히 낮고, 단조로웠다. 태윤은 자신의 품에서 바르작거리며 벗어나려는 이세희를 보란 듯이 놔주었다. 그에게 시선을 주어 그의 상태를 차근차근 확인하고 나서야 재차 황제를 응시했다. 황제의 눈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태윤은 시선을 내렸다. 황제의 발바닥은 멀쩡했지만, 황제만 보고 걸어오느라 이세희의 발바닥은 사금파리에 찔려 온통 피투성이였다. 그 모습에 눈살을 찌푸린 태윤은 시선을 확 올려, 황제를 보며 말을 이었다.

    “아바마마! 지금 마마와 아바마마를 돌이켜 보십시오. 아바마마도 이미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아바마마!”

    그리 말한 태윤은 사금파리가 있음에도 무릎을 꿇었다. 옷을 뚫고, 살을 찌르는 날카로운 통증을 억누르며 태윤은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황제도 아들의 도발적이나, 듬직한 자태에 팔짱을 끼었다. 별궁에서는 둘이 묘하게 애틋한 것이, 잠이라도 잔 것 같아 의심스러웠는데 이제 보니 태윤은 이세희에게 제 어미를 비춰보는 것 같았다.

    한때, 아들을 향해 가졌던 의심이 스멀스멀 가라앉았다. 그래, 저런 아이가 어떻게 이세희와 동침을 했겠는가. 이세희의 입맞춤에 홀려, 갖고 있었던 의심을 잠시 잊은 황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의심이 사라진 것과 별개로, 자신과 애첩 사이에 끼어들어 저런 눈빛을 보낸 건 불쾌한 일이었다. 황제는 차츰 피어오르는 분노에 눈을 형형하게 빛냈다. 야산에서 쿵쿵거리며 내려오는 범 같은 매서운 눈빛에 태윤은 덜덜 떨었다. 이세희에게 쏟아졌던 분노가 이제 태윤에게 벼락처럼 퍼붓고 있었다.

    “내 너를 사랑하여, 금군대장 자리에 앉혔는데.”

    황제가 한탄을 하며 중얼거리자, 태윤이 눈을 내리깔았다.

    “알고 있습니다.”

    정중하게 대답한 태윤은 고개를 들어 황제를 직시하며 충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소자는 별궁에서 마마를 보아 알고 있습니다! 마마는 도망가지 않고, 오로지 아바마마가 오시길 기다리셨습니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아바마마의 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황제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그것이 정말 진실이냐며, 황제가 은연중에 이세희를 갈망 어린 시선으로 보았다. 한자리에 서서 일부러 황제만 응시하고 있던 이세희가 웃음이 뒤섞인 말을 내뱉었다.

    “역시, 당신은 아들만도 못해. 당신 아들은 당신을 생각해서 말하는데도, 당신은 여전해.”

    이세희는 날카로운 조각을 개의치 않고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붉은 피가 바닥에 궤적을 남겼다. 황제는 그제야 이세희의 발바닥이 찢어져, 피가 흐르는 걸 깨닫고 허겁지겁 이세희를 품에 안았다. 이세희는 황제의 품에 웬일로 고분고분하게 안기며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이런 거라도 받고 싶잖아. 사랑은 못 받아도. 그렇지?”

    눈웃음을 흘리며 이세희가 뺨을 어루만지더니, 그 손을 내려 황제의 목을 더듬었다. 태윤은 아직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세희는 넘어지지 않게, 등 뒤에서 자신을 받쳐주려는 태윤을 의식하며 눈을 깜박였다. 이지가 흐트러진 황제의 귀에 대고, 이세희는 태윤이 듣지 못하게 속삭였다.

    “신첩을 위해 그녀를 죽인 건 잘하셨습니다.”

    “세희야….”

    황제의 중저음이 떨렸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고 애타는 눈으로 이세희를 보았다.

    “그러나 신첩에게 더 예쁨을 받고 싶다면, 아들을 의심하는 추한 아비가 되진 마십시오. 또한 신첩도 의심하지 마시고요. 신첩은 이제 도망가지 않습니다.”

    이세희가 황제의 옷자락 안으로 손을 밀어넣자, 황제는 다급하게 숨을 내뱉으며 이세희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죽어라 싫어하던 품에 스스럼없이 안긴 이세희는 황제의 귀에 대고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 그만 금군대장은 밖으로 내보내시고, 신첩의 가족도 출궁시키십시오.”

    이세희의 차디찬 눈빛에 황제는 몸에 쫙 돋는 쾌감과 소름에 떨었다.

    “신첩을 죽음에서 지킨 자를 기억하십시오.”

    싸늘한 눈초리에 황제는 느리게 조소를 짓다가, 천천히 입술을 혀로 핥았다. 그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두꺼운 황제의 가슴팍이 위로 부푸는 게, 침의 자락이 장막처럼 움직이는 걸로 확인되었다. 그는 분노를 심호흡으로 삭이고 있었다. 황제의 눈치를 보는 걸로 인생의 절반을 넘게 살아온 태윤은, 언제 떨어질지 모를 그의 역정에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아도 황제의 차디찬 눈초리가 한 번 닿은 자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알기에 태윤은 함부로 그에게 대들지 못했다. 이세희는 황제가 눈을 감은 틈을 타 태윤을 흘깃 돌아보았다. 태윤의 듬직하던 등이 접촉을 감당하지 못하고 오므라드는 미모사처럼 움츠러졌다. 이세희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입가에 연꽃처럼 미소가 떠올랐다. 화사하게 피어난 그의 외모에 태윤의 눈이 떨릴 무렵, 이세희는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마침 황제가 눈을 떠 태윤을 지그시 보고 있었다. 무슨 감정이 스몄는지 도통 알 수가 없는 모호한 눈빛에도 태윤은 물러섬이 없었다.

    황제가 이세희에게 잘못한 건, 만백성이 알지 못해도 자신이 알고 있었다. 후안무치한 그의 태도에 태윤이 꼿꼿한 눈빛을 보냈다. 황제의 눈에 엷은 동요가 배었다. 황제가 시선을 돌려 품에 안기다시피 한 이세희를 보자, 이세희가 싱긋 웃었다. 얼굴에 퍼지는 화려함에 이끌려 태윤을 잊었다. 황제가 갈증에 이는 눈으로 자신을 탐욕스럽게 훑자, 이세희는 본능적으로 이는 증오에 몸서리를 쳤다.

    “폐하가 이런 식으로 나올 때마다, 없던 정도 다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이세희가 너무 싫어서, 그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치를 떨며 말하자 황제가 도리어 미간을 찌푸렸다.

    “너야말로 언제까지 오만방자하게 나올 것이냐? 인정할 때도 오지 않았느냐? 너는 짐의 비다. 그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는데….”

    “그걸 아시는 분이 왜 신첩에게 그리도 잔혹하게 구시는 겁니까?”

    이세희의 눈빛이 한계 없이 차가워졌다. 한겨울에 부는 바람보다 날카롭고, 한기가 스민 분위기에 황제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거렸다. 이세희는 도망가지 말라는 듯 그의 멱살을 잡고 자신 쪽으로 바짝 당기며 쇳소리가 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네가 그러니까 안 되는 거야.”

    “네까짓 게, 짐에게….”

    멱살을 잡는 이세희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 내리누른 황제가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숨이 오르락내리락 했다. 잠시 숨을 멈추고 나서야 황제는 입안에 돌멩이처럼 굴러다니던 말을 외칠 수 있었다.

    “짐에겐 냉정하게 굴면서, 왜 짐의 아들을 두둔하는 것이야? 그러니 짐이 오해를 할 수밖에!”

    화를 내고 있었으나, 그는 이세희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비록 스쳐 지나가는 손길이라도 한 번이라도 더 받고 싶어 안달 난 그의 태도에 이세희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을 품에 가두는 것도 모자라, 도망을 엄두도 못 내게 팔다리를 아작 내놓고서 사랑까지 바라는 그의 태도가 가증스러웠다.

    무엇보다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듯한 그의 일렁거림에 이세희는 점차 몸이 증오로 달궈졌다. 여태껏 몸과 얼굴만 바란 것처럼, 인형을 다루듯이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외면해왔다.

    궁에 온 지 근 사 년이 된 지금에서야, 마주 본 황제의 얼굴은 우아하고 부드럽게 잘생긴 사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천한 이세희에게 매달릴 남자가 아니었다. 자신이 사랑해주지 않아도, 그를 사랑할 사람들은 궁에 넘쳐났다.

    “널 보자마자 짐이 취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널 탐하려 한 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만약 다른 자가 널 가졌다고 생각하면, 짐은 참을 수가 없어.”

    이세희가 진저리를 치며 황제의 두툼한 가슴팍을 밀쳐냈다. 황제는 이세희가 자신을 때려도 그것이 이세희의 자발적인 의사라면 좋다는 듯 묵묵히 받아냈다. 이세희는 황제를 서릿발 같은 눈으로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금군대장이 아니었다면, 폐하가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잔인무도한 자들에게 강간당해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고작 황제의 애첩이라는 이유만으로요! 그런 저를 목숨 걸고 구해 주셨어야죠! 폐하께서! 정녕 신첩을 사랑하시고, 절 애첩으로 여기신다면!”

    이세희의 목소리는 차츰 높아지고, 끝이 갈라졌다. 이세희가 손을 들어 황제를 때리려 하자, 이번엔 황제가 손목을 잡아 막았다. 두 사람의 거친 몸싸움이 드문드문 이어졌다. 태윤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둘을 보다,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세희가 악, 소리를 내지른 것이다.

    “아, 아파…!”

    달려드는 황제를 피하기 위해, 뒷걸음질을 치던 이세희가 칼날처럼 날카로운 사금파리를 그대로 밟은 것이다. 안 그래도 작고 큰 조각들에 의해 상처가 났던 피부는 여지없이 찢어져 피가 줄줄 흘렀다. 황제도 이세희의 비명에 시선을 내렸다. 이세희의 발바닥을 꿰뚫은 조각을 본 황제가 “세희야!” 하고 이름을 불렀다. 치미는 통증을 이기지 못한 이세희가 신음과 눈물을 흘리며, 황제의 옷자락을 꽉 잡았다. 자신에게 매달리는 이세희의 손을 천천히 관찰하던 황제의 입가에 엷은 웃음이 감겼다. 좋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미소에 태윤은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아무리 보아도 자신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리고 끼어들수록, 황제의 의심은 깊어지고 이세희만 다칠 뿐이었다. 이세희의 말대로 이 마음을 감춘 채 그림자처럼 살아가야 하는 것을, 어째서 황제가 이세희를 맛보듯 눈으로 훑고, 손으로 주물럭거릴 때마다 몸이 반응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세희는 잡을 것이 없어서 황제의 옷자락을 쥔 채 숨을 헐떡였다. 발바닥의 통증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고통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이 와중에도 이세희는 고개를 들었다. 삽시간에 창백해진 이세희의 얼굴을 본 황제가 놀란 듯 얼굴을 더듬었다. 그 손길을 가차없이 쳐낸 이세희는, 멍한 눈으로 발을 보다 충동적으로 손을 뻗었다.

    “마마, 그러시면…!”

    태윤이 말리기 위해 손을 뻗는 게 보였다. 황제도 자신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이세희는 그 둘보다 빠르게 발에 박힌 조각을 뽑아냈다. 발바닥에서 피가 툭, 툭 떨어지고, 조각을 잡던 손에도 상처가 나 피가 시냇물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흐….”

    낮게 웃음을 터트린 이세희가 조각을 내던지며 황제를 보았다. 황제의 얼굴은 이세희의 낯빛보다 훨씬 창백했고, 위태로워 보였다. 자신으로 인해 흐트러지고, 화를 내고, 그러다가 매달리기까지는 황제를 보며 느릿하게 웃은 이세희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사랑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황제의 얼굴이 멍해졌다. 비릿하게 웃은 이세희가 지쳐서 쓰러지려 하자, 그를 서둘러 안아준 건 태윤이었다. 황제의 손끝이 충격으로 굳어 움직이지 못해, 이세희를 놓친 것이었다. 둘을 유심히 지켜보던 태윤은 이 찰나를 놓치지 않고 이세희를 품에 꼭 안았다. 익숙한 체향에 몸을 떨던 이세희는 차츰 숨을 안정적으로 찾아갔다.

    “아바마마, 태의를 불러야 합니다. 어서요.”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황제가 “태의를 들라 하라!”라고 소리쳤다. 내관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렸다. 태윤은 신음을 흘리는 이세희를 안고, 식은땀을 연신 닦아주며 황제를 보았다.

    “아바마마.”

    태윤이 나직하게 부르는 소리에 황제가 고개를 돌렸다. 아주 천천히, 태윤을 마주한 황제의 눈은 질투로 사로잡혀 있었다. 본능적인 질투였다. 아버지가 아들을 연적으로 여기고, 질투를 퍼부어대는데도 태윤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소자는 아바마마의 명에 따라, 마마를 지킬 뿐입니다. 소자의 사심은 전혀 없사옵니다.”

    눈을 내리깔았다. 그림자에 숨은 태윤은 그제야 숨을 토해내며, 오롯이 이세희를 볼 수 있었다. 이세희의 눈은 힘이 없었다. 황제에게 며칠이나 당한 몸이 물 먹은 천처럼 무겁고 늘어졌다. 담담하게 이세희와 눈을 마주친 태윤이, 슬쩍 웃어준 후에야 황제를 뚫어져라 보았다.

    “마마는 아바마마의 소유인데, 소자가 탐을 낼 리가 없습니다. 소자는 아바마마의 충직한 신하이자 아들입니다. 아바마마의 뜻에 거스르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바마마가 마마를 지키라는 명을 내리셔서, 어머니의 묘를 지키는 일도 뿌리치고 온 소자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아들의 자세에 황제는 드디어 의심을 거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민망하였는지, 자신의 얼굴을 긴 소매로 가리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세희에게 정신이 팔려 잊고 있었다. 사냥터에서 습격한 자들이 꽤 많아, 윤이 너도 죽을 위기를 처했을 텐데….”

    “하지만 마마가 파렴치한 이들에게 몹쓸 짓을 당할 뻔했습니다. 그자들은 감히 해서는 안 될 말을 입에 담았고, 실제로 마마에게 그 짓을 하려 했습니다.”

    황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태윤은 그의 얼굴에 켜켜이 쌓여가는 적개심을 응시하며 뒷말을 이었다.

    “소자는 마마와 아바마마를 위해, 이 한 목숨 바쳐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소자가 두려운 것은 이 일로 인해 이 나라의 만승지존이신 아바마마의 명성에 흠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들의 절절한 충심에 황제는 한숨을 토해내고 이마를 짚었다. 그는 마침 들어온 태의에게 이세희를 진료하라는 말을 내리고 침상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턱을 괸 채 아들을 보고, 아들의 품에 안겨 눈을 감은 채 치료를 받는 이세희를 보다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스스로에게 속삭이면서, 주먹을 쥐었다 펴던 황제는 거대한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어둠에 가려져 미처 보이지 않았던 황제의 형형한 눈빛에 태윤은 잠자코 있었다. 황제는 제 애첩을 안은 아들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며 팔을 뻗었다. 황제가 이세희의 허리에 팔을 집어넣어, 단번에 그를 안아 올렸다. 반동으로 발에 통증이 다시 치민 이세희가 고개를 젖히며 헐떡였다.

    “아, 발이….”

    이세희의 발바닥에서 피가 뚝, 뚝 떨어졌다. 살에 파고든 사금파리 때문에 살점이 아예 헤집어진 듯했다.

    “세희를 지켜줘서 고맙구나, 아가.”

    황제가 다정한 아비가 되어 태윤을 어린 시절처럼 부르더니, 아들의 뺨을 슬쩍 매만졌다. 아버지의 애틋하고 다정다감한 손길에 태윤의 눈이 흐려졌다. 이세희에겐 냉담하게 굴던 태윤의 눈이 순식간에 물기로 촉촉해지자 황제는 의심을 한 번에 거두었다. 제 손길에만 반응하는 아들인데, 어떻게 세희에게 음심을 품을 리가. 제 아이에게 질투를 하고, 의심까지 품었던 자신이 너무 추레해 황제는 한숨을 내쉬며 태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착한 네가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지…. 이 아비가 못 볼 꼴을 보였다. 잊어다오.”

    황제가 더 이상 의심을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한 이세희가 황제의 품에서 실신했다.

    *

    태자가 문후인사를 제외하고 사적으로 황후궁에 든 건 태자가 되고 나서 오랜만이었다. 낮에 이세희를 제외한 비빈들과 소소한 담소를 나누던 황후는 아들이 왔다는 소식에 의아함을 내비쳤다. 황후는 태자와 그리 친한 모자 관계가 아니었다. 남보단 가깝지만, 가족이라고 하기엔 상당히 미적지근한 사이였다. 자신뿐만 아니라 궁에서 자식을 낳은 비빈들은 대체로 자식들과 사이가 사가의 부모자식처럼 좋진 않았다. 예우를 보이긴 하나, 그것이 진짜 어머니를 사랑하고 효도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녀들은 아이들이 걷기가 무섭게, 강탈당하듯 아이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교육을 목적으로 황손들이 생후 1년이 지나면 생모와 떨어져 다른 궁에서 자라게 된다. 그곳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고, 황자들은 12세에 출궁하였으며 황녀들은 좀 더 나이가 차면 혼례를 치르는 게 흔한 일이었다. 그렇다 보니 비빈들도 자식들에게 정을 붙일 틈이 없었다. 물론, 태윤처럼 의외로 어머니를 살뜰하게 모시는 황자도 있었으나 그건 아주 예외였다. 한때는 제 아들에게 태윤 같은 효심을 바라긴 했으나, 태경이 문후인사를 와서도 시큰둥한 걸 본 후로는 황후는 마음을 돌렸다.

    이제 아들에게 바라는 건 하나였다. 무사히 황제가 되는 것뿐. 그렇다면 자신은 태후가 되어, 황제의 사랑이 떠나가도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딱 지금의 상황이 이어지길. 황제가 이세희에게 거의 사 년이라는 기간 동안 빠져 다른 비빈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황후가 거처하는 궁과 육궁이 뻔히 있건만, 황제는 비빈들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오로지 이세희만 보았다. 처음에는 얼굴도 보지 못한 사내에게 제 지아비를 빼앗겼다는 사실에 분노했지만, 시간이 흘러 모두가 공평하게 비구니 신세가 되자 황후는 이것이 낫다는 생각을 했다.

    이세희는 아이를 낳지 못하니까. 총애가 식으면, 그의 목숨은 그때 거두면 그만이었다. 황제는 뭐든지 정도를 아는 사람이었다. 가져도 그만, 안 가져도 그만인 태도로 비빈들을 대했으니 이세희도 다르지 않을 거라고 호언장담했다. 가축보다 못한 천민 주제에 때 아닌 호사를 누린다며 비빈들끼리 비웃기도 서슴지 않았다. 비록 이세희가 태얼궁의 침전을 차지했지만, 그것은 그를 육궁에 두면 사내와 여인이 눈이 맞을까 봐 황제가 내린 처사라고 생각하며 그리 주의 깊게 여기지 않았다. 정빈이 손톱을 물어뜯으며 질투를 은연중에 드러내긴 했으나 비빈들이 그녀에게 조소를 보였다.

    ‘아이도 낳지 못하는 사내야. 사내가 아름다워 봤자 얼마나 아름답다고, 폐하께서 사내에 불과한 첩에게 빠지시겠는가? 가끔 흥미로운 것에 빠지시는 때가 있으시니…. 우리는 그저 기다리면 그만일세. 그러니 경거망동하지 말고 기다리게.’

    ‘하오나, 마마! 폐하께서 보이시는 태도가 묘하게 달랐습니다. 예전에는 적어도 누구와 동침할지 고민은 하셨는데, 지금은 그런 것도 보이지 않으십니다!’

    정빈이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징징거리는 꼴이 보기 싫어, 황후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잔에 술을 따랐다.

    ‘이 사람아, 왜 그러는가. 어차피 폐하께서 가장 예뻐하는 첩은 그대뿐인데. 그대가 그간 고생이 많았어. 같은 지아비를 모시는 여인으로서, 그대가 참으로 어여뻐 주는 술이니 달게 마시게. 한때의 시름은 이렇게 우리끼리 달래면 그만 아니겠는가?’

    ‘마마…. 소인이 너무 우매한 모습을 보여드렸습니다.’

    훌쩍이던 정빈이 술에 취해 배시시 웃었다. 예쁘장한 얼굴에 걸맞는 미소가 떠오르자,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금세 풀어졌다. 비빈들은 술자리에서 이세희가 총애를 언제 잃을지 내기까지 일삼았다. 황후는 가장 좋은 상석에서 그녀들을 보며 조용히 웃기만 했다. 그녀는 태자가 있으니, 지아비의 애정을 원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였다. 자신만이 여유롭고, 이 상황을 즐겼다. 황후를 제외한 비빈들만 은연중에 이세희를 질투하고, 그 자리를 탐내하는 게 가소로웠다.

    그녀는 구차하게 태공에게 사랑을 구걸하고 싶지 않았다. 고관대작을 배출해온 집안의 딸로 태어나, 그녀는 갖고 싶은 걸 다 누리고 사는 여자였다. 황후란 자리도 그녀에겐 당연한 것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처음으로 너무 갖고 싶었던 사람은 황제였다. 16세, 혼례날 처음으로 본 황제는 늠름한 사내였다. 자신보다 2살 연상이었던 황제가 햇볕 아래에서, 면류관을 쓰고 자신을 보며 웃는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저런 사내의 사랑을 받는다 생각하면 마음이 아찔했다.

    하지만 구걸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사랑을 받아야 마땅한 존재지, 사랑을 받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존재가 되어선 안 되었다. 고관대작 집안의 딸이자, 태자의 어미이자, 황제의 유일한 본처였으니까. 그녀는 늘 그렇듯 그가 자신을 사랑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황제는 머물지 않는 바람이었다. 이리저리, 후궁들의 궁을 품평하듯 고르고 다녔다. 그것도 모자라 종종 암행을 나가, 천한 기생과 잠자리까지 가졌다. 한 번도 품어보지 못했던 감정에 눈물을 흘리던 그녀는 이를 악물며 눈물을 참았다.

    내가 누군데, 황제의 사랑에 매달린단 말인가. 자신은 다른 비빈들과 달랐다. 너무 울어서 가슴이 아프다는 것도 그때 깨달았다. 가슴이 아파서 그녀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후는 단 한 번도 황제에게 사랑한다는 표현이나, 그의 사랑을 원하는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 게 이 세상의 이치였으니까.

    그래서 이세희가 오기 전까지 버틸 수 있었다. 황제는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 애정을 준다 한들, 그마저 오래가지 못하고 식었으니….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모든 자가 가져선 안 되었다. 황제의 사랑은 미풍에 불과했다. 잠시 불다, 떠날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황후는 제 자리를 지키고 이세희를 향한 총애가 식길 기다렸다. 그러리라 믿었다. 다른 비빈들이 초조해할 때, 황후만이 고고하게 조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세희를 향한 황제의 총애가 깊어졌다. 이세희를 아끼다 못해, 누가 보면 닳는 것처럼 여겨 화요궁이 완성될 때까지 밖으로 내보낸 적이 없었다. 태얼궁 침전에서 일하던 내관의 말에 따르면 이세희는 나신으로 침상에서 머물 뿐이라고 하였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황후가 눈을 서슬 퍼렇게 빛내자, 내관은 오들오들 떨며 황제가 이세희에게 내렸던 벌을 읊었다.

    ‘하지만 폐하의 총애가 오래가지는 않을 것 같사옵니다. 이세희가 내관들을 때려눕히고서, 그 옷을 훔쳐 입고 달아났다가 하루 만에 잡혔습니다. 그 일로 팔다리가 부러지고, 뭇매를 맞았으니 폐하께서 용서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을 보이신 것이지요. 그 후로도 반항할 때마다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맞았습니다. 폐하께서도 오만하다며, 그 버릇을 꺾어 놓으시겠다고 벌을 내리시지만…. 아마 계속 그렇게 반항하면, 폐하께서 금방 질리시지 않을까 판단되옵니다.’

    얼마나 때리는지, 침전 근처에선 항상 태의와 의녀들이 머문다는 얘기까지 덧붙였다. 내관의 말에 의하면 고집이 무척 세서, 황제가 꺾기 힘들어 해 금방 포기할 거라고 했으나 황후는 느낌이 썩 좋지 않았다.

    그리고 우연치 않게 황후는 이세희를 만났고, 그 불길한 예감을 확신으로 굳혔다.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걸음을 옮기던 황후는 채찍이 살을 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궁녀들이 만류했지만, 그녀는 쿵쿵거리는 심장소리에 이미 머리가 멍해져 그녀들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짜악, 짝, 하고 채찍이 살을 매섭게 내리치는 소리에 몸이 깜짝 놀랐다. 그녀가 넘어질 뻔하자 궁녀가 잡아주었다.

    ‘이래도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냐!’

    황제가 저리 화를 내는 걸 듣다니…. 황후는 떨리는 가슴팍을 꽉 잡고 비틀거리며 걸었다. 역정을 내고 있었으나, 그 속에는 누군가를 향한 깊은 연심이 요동치고 있었다. 자신을 봐주지 않는 이에게 관심 한 자락 받고 싶어서 안달 난 목소리에 황후의 얼굴이 밀랍처럼 하얗게 변해갔다.

    그곳은 태얼궁 앞뜰이었다. 햇볕이 쏟아지는 드넓은 들판 같은 곳에, 이세희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두 손목은 앞으로 모아져, 말뚝에 고정되었다. 사내답지 않게 하얗고 뽀얀 피부에 땀이 맺혀 무척 부드러워 보였다. 사내라고 생각하면, 모두 황제 같거나 딱딱하다고 생각했는데 저렇게 아름다운 선을 그리는 몸은 처음이라 황후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향긋한 살내음이 날 것 같은 고운 피부에 황후는 놀랐고, 두 번째로 고개를 강제로 뒤로 당겨졌을 때 살짝 보이는 옆얼굴에 숨이 멎고 머리가 아득해졌다. 눈을 반쯤 감은 채, 신음하는 얼굴이 미치도록 수려하고 아름다웠다.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얼굴에 얼이 빠진 상태로, 이세희를 보느라 황후는 이세희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이세희는 뒤에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채찍으로 맞고 있었다.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자 황제가 얼굴이 보고 싶어 내관에게 채근해 고개를 들도록 명령한 것이다. 내관이 머리채를 잡고 당겨 황제를 보게 하자, 황제의 눈이 소년처럼 반짝거렸다. 이세희의 아름답고 요요한 자태에 홀렸던 황후는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 황제의 삐뚤어진 사랑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제 잘못했다고 말하거라. 설마, 또다시 사지가 부러지고 싶은 것이냐.’

    황제가 달래듯이 말하자 이세희가 눈을 감았다. 등에서 전해지는 고통에 정신을 놓을 것 같은지, 억지로 제정신을 다잡고 있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입술이 벌어졌다가 닫히길 반복하며 무슨 말을 했지만 황제는 듣지 못해 안절부절못했다. 결국 참다못해, 어좌에서 성급하게 내려와 이세희의 앞에 성큼성큼 섰다. 이세희의 눈이 흐려졌다. 뒤에서 그 모든 상황을 보던 가족들은 울음을 흘리며 ‘제발, 한 번만 용서하여 주십시오.’라고 빌었다. 정작 이세희만 고통 어린 눈으로 황제를 보며 침묵을 지켰다.

    ‘어서 말하거라. 짐을 죽이려 한 것이 아니라고. 그저 실수로, 사발을 깨고 그 조각을 쥐다가….’

    황후의 얼굴이 기이하게 변해갔다. 누가 보아도 황제가 애원하고, 매달리는 형국이었다. 이세희는 가혹한 매질을 당하고 있었으나 한 번도 용서해 달라거나, 착각이라는 말을 내뱉지 않았다. 황제의 추궁 아닌 추궁을 얌전히 듣고 있던 이세희는 보란 듯이 머금고 있던 침을 뱉었다. 고통을 참느라, 입안 살을 깨무는 통에 맺혔던 피가 턱을 타고 흘렀다.

    ‘죽여, 지금.’

    가뭄이 온 듯,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애써 말을 이었다. 가족들이 뒤에서 ‘안 돼, 제발!’이라며 빌었다. 그러나 이세희는 가족들은 뒤돌아보지 않고 꿋꿋하게 황제를 보며 말했다.

    ‘아니면 당신이 죽을 거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황제가 이세희의 뺨을 후려갈겼다. 짜악, 하는 소리와 함께 이세희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말뚝을 박아놓고, 거기에 몸을 고정해 놨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이세희가 돌을 박아 넣은 바닥에 크게 넘어질 뻔했다. 손목이 밧줄에 쓸려, 살이 벗겨져 피가 맺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이세희는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황후가 보아도 머리가 멍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자가, 독기를 품고 눈물을 흘리자 분위기가 기묘하게 야릇해졌다.

    ‘이런 놈이 황제라고 나라를 쥐고 있으니….’

    얻어맞아서 시신이나 다를 바 없는 상태로 이세희가 희미하게 웃었다. 거의 발악에 가까운 말이었다. 목소리는 힘이 없었고, 이어지지 못해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해야 했다. 황제는 주먹을 으스러지도록 쥐면서 부들부들 떨며, 이세희를 노려보았다. 황후는 그 모습에 입을 틀어막고 뒷걸음질 쳤다.

    ‘이런 놈? 이런 놈이라고? 짐에게! 너 따위가!’

    황제가 이세희의 머리채를 꽉 잡고, 뺨을 연달아 때렸다. 뺨을 후려치는 큼지막한 손에 이세희의 정신은 금세 무너졌다. 엄청난 통증에 이세희는 정신을 놓았고, 황제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손을 놓았을 때 몸은 축 늘어졌다.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숨을 크게 몰아쉬던 황제는 내관에게 명령해 손을 풀도록 했다. 그러나 말뚝에서 밧줄을 풀어낼 수 없었다. 황제가 너무 세게 묶은 탓이었다. 호위 내관의 허리에 있던 검을 뽑아내 단번에 밧줄을 절단한 황제는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는 이세희를 유심히 보다, 하의에 손을 댔다. 꼭 감겨 있던 이세희의 눈이 가물가물 떠졌다.

    ‘…아, 싫어….’

    이세희가 혼신의 힘을 쥐어짜 거부했다. 황제는 탐욕스러운 눈으로 자신의 밑에서 바르작거리는 이세희를 보며 말했다.

    ‘너도 여기서 당하는 건 싫어하겠지.’

    어떻게든 동침을 하겠다는 말에, 이세희는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울었다. 맞을 때도 숨을 죽여 가며 울음을 삼키려던 자가 처연하게 눈물을 토해내는 모습에 황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

    총애를 넘어서, 황제는 이세희에게 빠져 있었다. 깊이를 모르는 사랑에 한없이 허우적거리는 형편없는 자태에서 황후는 금침을 물어뜯으며 울음을 흘렸다.

    자신이 받지 못하는 사랑을, 천한 사내가 받는 게 부러웠다. 누군가를 향해 미치게 부럽다고 생각하는 감정은 처음이라, 그녀는 금침을 내리치고 온갖 호화로운 물건을 부수며 괴성을 토해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황제는 단 한 번도 황후를 찾지 않았다. 이제 그 사실이 비참하지 않았다.

    허망했다. 모든 것이 폐허가 된 듯, 다 엉망이 되었다. 그리고 앞으론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을 황무지가 되리라. 씨앗을 틔울 햇볕이 영영 떠나갔으니 싹이 트지 못하는 건 자연의 섭리였다. 그래도 그것이 내 터전이라면, 그녀는 떠나지 않고 그곳을 지키리라 마음먹었다.

    황제의 사랑을 얻을 수 없다면, 아이라도 낳을 수 없는 이세희가 차지하는 게 나았다. 자신에겐 태자가 있지만, 이세희를 지켜줄 수 있는 이는 이 궁에 단 한 명도 없었다. 황제의 총애가 깊은 애첩은 오래 살 수 없었다. 황제가 붕어하고 나면, 가장 먼저 죽는 건 애첩이었다. 순장을 당하든가, 아니면 다른 비빈들의 손에 죽든가. 둘 중 하나였다. 지금도 이세희를 죽이고 싶어서 이를 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충성스러운 대신들은 황제의 명예에 이세희 자체가 누가 된다며 싫어했고, 비빈들은 그에게 지아비를 빼앗겨 증오했다. 황후만이 조용히 기다릴 뿐이었다.

    이세희가 가장 비참하게 죽는 모습을, 태후가 된 자리에서 지켜볼 것이다. 황제와 함께 순장되지 않는다면 제 손으로 직접 저승으로 같이 보내주리라. 그렇게 좋아하던 애첩이니, 저승에서도 끼고 사시라고.

    내 아이가 태자인데. 사랑하지도 않던 아이였지만, 이때만큼은 쓸모 있다는 생각에 황후는 흡족하게 웃었다. 매일 마주하던 모후의 얼굴에 정말 오랜만에 미소가 뜨자 태자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처음에는 의아함이 물들었던 태경의 눈에 여유로운 웃음이 감돌았다.

    “어머니도 골칫거리였던 정빈이 죽어서 기분이 좋으신가 봅니다.”

    황제의 애첩, 이세희에게 근 사 년간 저주를 내리다가 저주가 통하지 않자 뜻이 맞는 대신들과 함께 이세희를 죽이려 했던 정빈이 사약을 받고 죽었다. 문제는 정빈만 죽은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정빈의 가문은 멸문당했다. 그리고 정빈이 낳은 오황자 태석까지 죽어야 했다. 본래 법도에 따르면, 아들을 낳은 비빈은 사형까지는 당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정빈은 이세희가 오기 전까지 황제의 총애를 받던 애첩이었다. 그녀가 낳은 아들도 황제에게 꽤 사랑을 받은 아들이라 둘 다 사약을 받을지는 몰랐던 것이다. 이 일이 그렇게 사랑하던 어린 아들까지 죽여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본다면, 황제의 처사는 과한 부분이 있었다.

    발을 올리라고 궁녀에게 넌지시 말을 한 후에, 황후는 차를 우아하게 마셨다. 천천히 내려떴던 눈을 올려, 아들을 차분하게 마주한 황후가 입을 열었다.

    “제가 그래 보였습니까?”

    태경은 말없이 능글맞게 웃었다. 제 아비를 닮아 얼굴은 잘생겼지만 성격은 삐뚤어진 면모가 강한 아들을 보며 황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태경은 오만하고, 독선적인 면이 강했다. 영특하지만 그런 점 때문에 황제에게도 몇 번 꾸지람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고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동갑이지만, 두 달 차이라 동생이 된 태건도 정숙하고 얌전한데 유독 태경만 저러니 황후는 혹 아들이 황제의 눈에 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언제 어디서든 군주의 면모를 보이라고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다가 폐하께서 또 전하를 불러, 혼이라도 내실까 봐 무섭습니다.”

    말은 그리하면서, 눈으로는 자중하라는 뜻을 엄하게 보이고 있었다. 태경은 어깨를 으쓱이고서 가볍게 넘겼다.

    “그런데 어머니, 정빈과 태석이 사약을 받게 된 연유가 이세희 때문인 건 아시고 계십니까?”

    이세희, 라고 부를 때 묘하게 아들의 목소리에 설렘이 느껴졌다. 황후는 사약을 받은 연유보다 아들이 이세희에게 보이는 관심에 화들짝 놀랐다. 태경은 그것을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 줄 알고 흥미롭게 웃었다.

    “화비가요?”

    “예. 그렇습니다. 궁에 와서, 아바마마에게 뭘 해달라고 한 번도 부탁한 적이 없던 자였는데…. 이번에는 좀 달랐던 것 같습니다.”

    태경이 매끈하나, 사내다운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황후는 눈살을 찌푸렸다. 정빈이 사약을 안 받겠다고 난리를 쳐서 형리들이 애를 먹었다는 이야기만 들은 터였다. 첩이 일방적인 질투로, 다른 첩을 죽이려 든 건 사료에도 몇 번이나 나왔다. 정빈의 경우도 그리 놀라운 경우가 아니라 황후도 정빈이 냉궁에 가는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사태가 비정하게 흘러가 당혹스러울 찰나, 아들이 와서 이렇게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으니 가슴이 안 좋은 의미로 쿵쿵거렸다. 마치 그때 같았다. 이세희에게 꽂히는 황제의 일방적인 사랑을 직접 본 상황을 떠올리게 하는 아들의 난입에 황후는 눈을 치켜떴다.

    “화비가 그랬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태경이 소리 내어 웃었다. 성량이 풍부하고, 그윽한 목소리라 웃는 것도 듣기 좋았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아들의 웃음소리는 황후에게 어떤 즐거움도 주지 못했다.

    “제가 이세희에게 관심이 좀 있어서요. 매번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태얼궁 침전에서 일하는 내관에게 들은 것이니….”

    막 말을 이으려던 태자는 상을 내리치는 소리에 놀라서 앞을 보았다. 작은 상을 내리친 황후는 몸을 반쯤 띄운 채였다.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입술은 모멸감에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관심이라니요? 전하,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거의 잡아먹을 듯이, 앞으로 다가오는 그녀를 피해 상체를 뒤로 밀어내며 태자가 말했다.

    “아니, 천하의 화비가 아닙니까? 아바마마의 총애를 거의 사 년째 받고 있는 애첩이니, 관심이 갈 수밖에요. 거기다가 외모가 워낙 아름다우니, 관심이 안 가려고 해도 안 갈 수가 없지 않습니까?”

    “태자!”

    황후가 발악하듯 태자를 불렀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지아비에 이어 제 아들까지 이세희 이야기를 하며 갈증을 느끼는 듯 입맛을 다시고 있으니 가슴이 막막했다. 이세희가 아름다운 건 맞으나, 가지고 싶어서 저런 눈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제 아비보다 더한 눈빛이었다. 가지지 못할 것을 탐내고 있었다. 가져서도 안 되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금기를 넘으려는 눈에 황후가 소리쳤다.

    “전하, 정신 차리십시오! 장차 이 나라를 이끌어 가셔야 하는 분이, 아비의 애첩을 노리다니요!”

    태자가 얼굴에서 미소를 싹 지우며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아바마마와 다릅니다. 당당히 이세희를 얻을 겁니다.”

    황후는 치미는 현기증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궁녀들이 “마마!” 하고 다녀와 황후를 붙잡아 주지 않았다면 상을 붙잡고 넘어졌을 것이다. 간신히 의자에 앉은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태자를 노려보고 말을 이었다.

    “이 일을 폐하께서 아시면 어쩌시려 하십니까? 예?”

    태자가 느릿하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 일은 어머니와 형님만 아십니다. 왜요, 아바마마께 고하시려고요? 그럼 어머니도 황후 자리를 내놓으셔야 할 텐데요.”

    자신을 협박하는 아들을 보며 황후도 눈을 번뜩였다.

    “이 자리는 전하 때문에 얻은 자리가 아니라 제 스스로 얻은 자리입니다. 제가 황후가 되었기에 전하도 태자가 된 것이니, 오만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소자와 어머니가 친근한 사이도 아니니…. 뭐, 긴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이세희는 안 됩니다. 그자는 안 돼요. 훗날 황제가 되실 분이, 폐하의 애첩을 데려오면 대신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습니까?”

    목소리를 낮춘 황후가 다급하고 거친 어투로 말을 이었다. 혹, 누가 이 말을 들을까 노심초사하는 눈치였다. 이 파란을 이끌고 온 태자는 담담하고 강직한 태도였다. 황후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 태자를 멍하니 보다 눈을 질끈 감았다. 가슴이 참담했다. 시퍼런 멍이 든 것도 아픈데, 그 자리를 아들이 치고 지나가니 무너질 지경이었다.

    “어머니께 혼나려고 이 자리에 온 게 아닙니다.”

    태자는 듣기 싫다는 듯, 확고한 어투로 말하며 그녀를 직시했다. 태자와 황후의 눈이 허공에서 딱 맞닿았다. 한 치의 피함도 없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아들을 죽어라 노려보았고, 아들은 어머니의 역정에도 차분했다.

    “이세희가 마음만 먹으면 후궁들을 다 정리할 수 있습니다. 아바마마가 윤이 형님마저도 의심을 하셨는데, 이세희가 적당히 날뛰어서 막았다고 합니다.”

    적당히, 에 힘을 주는 태자의 목소리에 웃음이 넘실거렸다.

    “그래서요? 뭐 어쩌시려고요? 이세희에게 부탁해서, 황제 자리에 앉혀 달라고 하려고요?”

    황후가 조롱을 퍼부었다. 태자는 여유롭게 차를 소리 내지 않고 마셨다. 황후는 끓어오르는 화를 심호흡으로 다스리며 말을 이었다.

    “황제 자리는 어차피 소자의 것입니다.”

    “하! 제가 드린 자리입니다. 그러니 경거망동하지 마세요. 태자께서 이리 날뛰어 폐하께서 아시는 날이면, 저와 태자 모두 저승으로 가는 길이니까요.”

    “소자가 어머니를 저승에 가게 내버려 두겠습니까?”

    찻잔을 내려놓은 태자가 얼굴에 호젓한 미소를 띠었다. 의미심장한 미소에 황후는 눈을 찌푸렸다. 이제 아들 같지도 않았다. 이미 멀어질 대로 멀어졌고, 서로의 이득을 위해 손을 잡은 관계였다.

    “소자가 어머니도 지켜드리고, 태후 자리까지 무사히 가실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이세희는 내버려 두어라, 그 뜻입니까?”

    태자가 고르고 하얀 치열을 드러낼 정도로 입술을 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처음 보는 아들의 환한 미소에 황후의 눈이 겁에 질린 듯 떨렸다.

    “그렇게 무언가를 갖고 싶은 건 이세희가 처음이었습니다. 아바마마와 동침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더군요. 솔직히 그 후안무치한 자들이 이세희를 노리고, 간음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이해가 갑니다만….”

    황제의 아들답게 잘 달궈진 검처럼 눈빛이 날카롭다. 일순 황후는 압도된다는 느낌에 허리를 뒤로 당겼다. 태경은 활짝 지었던 미소를 지우고,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 나직하게 말했다.

    “소자도 이제 소자의 것을 지키고 싶습니다. 후궁들이 이세희를 노리지 않도록 단도리를 잘 시켜주십시오.”

    “지금, 저에게 명령하시는 겁니까?”

    황후가 이를 갈며 되묻자 태경이 피식 웃었다.

    “권유죠. 어머니도 어머니의 자리를 지키고 싶으시지 않으십니까. 소자도 같은 마음입니다.”

    “이세희는 태자의 소유가 아닙니다. 폐하의 것이지요.”

    “평생 아바마마의 것은 아니지요.”

    단호하게 말을 자른 태경은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말은 모두 다 했는지, 고개를 가볍게 까닥인 태경이 단출하게 말했다.

    “그렇다고 지금 나설 생각은 아닙니다. 이세희에겐 윤이 형님이 있으니까요.”

    황후는 차라리 효심이 깊고, 충성스러운 태윤이 제 아들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태윤은 황제의 아들들 중 가장 듬직한 사내였다. 외모도 훤칠하게 잘생겼고, 문무도 출중했다. 후궁들에게도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다. 대신들에게도 예의가 발라 평이 좋았다. 자신에게도 깍듯이 대하며, 가끔은 귀엽게 얼굴도 붉히는 태윤이 그리워졌다. 이 궁에서 유일하게 믿을 만한 자라면, 태윤밖에 없을 정도로 우직한 사내였다.

    “어머니는 태후 자리에 오르십시오. 소자는 황제 자리에 올라, 이세희를 가져야겠습니다.”

    “그렇게까지 위험을 감수하면서 갖고 싶으신 겁니까?”

    도통 사내들이란, 이해가 가지 않아 황후가 질색하며 물었다. 태경은 천천히 할 말을 고르더니, 집착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본래 아름다운 꽃이 벼랑 끝에 달려 있으면, 더 꺾고 싶어지는 법이지요. 이세희도 그렇습니다.”

    “이세희도 사람입니다. 꺾다간, 그도 죽는 수가 있습니다.”

    황후는 가끔 이세희가 서럽게 울음을 터트리던 걸 떠올렸다. 화제의 손길이 치가 떨리게 싫어, 몸을 덜덜 떨어대며 끅끅거리던 이세희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을 미어지게 만들었다. 약간의 동정심이 인 황후가 지친 음성으로 말을 하자 태경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바마마에게 그토록 맞아도 대드는 이세희인데, 몇 번 더 당한다고 해서 죽겠습니까?”

    일방적인 말을 마치고 나서 태자가 나간 뒤 황후는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황후는 눈을 느리게 움직여 자신을 오랫동안 보필하던 궁녀 둘을 보았다. 일말의 감정이 없는 황후의 눈빛에 궁녀들이 몸을 움찔거렸다. 짧게 소리 내어 웃던 황후는 그녀들의 어깨를 토닥이며 속삭였다.

    “수고했다.”

    차갑게 굴던 황후의 나긋나긋한 칭찬에 궁녀들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황후는 울지 말라는 말을 덧붙이고 나서, 조용히 몸을 움직여 침전으로 향했다. 그녀는 입궁 때부터 같이 한 사가의 유모에게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같이 들어간 궁녀 둘은 죽여라.”

    그녀가 고개를 조아렸다. 그다음 날, 거적에 둘러싸인 시체 두 구가 달구지에 태워져 궁을 빠져나갔다.

    3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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