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비설화 2권
목차
2장. 전전반측 (2)
3장. 일고경성 (1)
2장. 전전반측 (2)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더니, 눈에 물기가 없이 뻑뻑했다. 고의로 눈에 바람을 분 것처럼, 메마르기 그지없다. 태윤은 손바닥으로 눈가를 쓸었다. 푹 잔 날과 다르게 푸석푸석하게 변한 피부가 느껴졌다. 이세희라는 더위가 밤사이 몸을 쓸고 갔더니, 몸의 모든 물기가 바싹 마른 것 같았다. 어젯밤 목구멍에 들어온 불씨는 아직 꺼지지 않아, 명치에 있었다. 명치가 은근하게 뜨거웠다. 그 부근을 손바닥으로 누르듯 문질렀다. 황제의 명에 따라 그가 있는 사냥터로 가는 중이라 겉으로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눈치가 빠른 사내였다. 태윤은 후, 하고 숨을 내뱉었다. 이렇게라도 안에 고인 열을 빼고 싶었다. 숨을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다독이며 내쉬었다. 꽤 긴 거리를 그리 걸으니 머리는 차분해지고 숨도 한결 가벼워졌다. 열기도 냉수를 끼얹은 것처럼 식진 않았지만, 그래도 견딜 만해졌다. 앞으로 자신이 감내해야 할 것이니, 태윤은 입술을 다물고 정면을 노려보듯 보았다. 정신을 놓은 순간 금군대장에서 추락이다. 그의 곁에 있기 위해선 정신을 바늘처럼 곤두세우고 있어야 했다.
정신과 몸에 동시에 힘을 바짝 주었다. 허리가 반듯하게 펴졌다. 걸음을 일정한 간격으로 걷던 태윤은 사냥터 입구에서 멈추었다. 사냥터를 지키던 자들은 태윤을 보자마자 몸을 틀어 비켜주었다. 태윤은 일일이 황제의 명을 받지 않아도 사냥터에 들어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나무가 별로 없는 탁 트인 들판에서 황제는 활을 쏘고 있었다. 눈에 힘을 주어야, 간신히 보일까 말까 한 거리에 과녁이 있었고, 황제는 웃는 낯으로 거길 보며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태윤은 천천히 황제에게 다가서며 허리를 숙였다.
“소신 금군대장 태윤, 폐하를 뵙사옵니다.”
“왔느냐?”
황제가 천연덕스럽게 말을 걸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팔꿈치가 더 뒤로 당겨졌다. 황제의 유려한 입술 끝이 올라갔다.
“오늘따라 피곤해 보이는구나. 밤사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
속으로 흠칫 놀랐으나, 태윤은 겉으로 미동이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못으로 고정시켜 놓은 것처럼, 곤두서서 황제를 보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제도에 왔더니 잠자리가 낯설어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황제가 흐음, 하고 침음하더니 중얼거렸다.
“그럴 만하지. 넌 그간 네 어미의 묘를 지켰으니.”
팅, 하고 시위에서 화살이 튕겨져 나가 과녁으로 날아갔다. 안 봐도 결과는 뻔했다. 명중이었다. 저 멀리 서 있는 내관이 깃발을 흔들었다. 자신감에 찬 눈으로 과녁을 본 황제는 손을 뻗어 태윤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매우 친근한 그의 행동에 태윤은 쑥스러운 듯 어깨를 움츠렸다. 아직도 자신을 어려워하는 아들의 태도에 황제는 소리 내어 웃더니, 태윤의 말랑한 뺨을 꼬집었다.
“이립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어려 보이니, 이거야 원.”
혀를 끌끌 찬 황제가 태윤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그의 눈이 곱게 휘어졌다.
“곧 있으면 황후의 절일이다. 알고 있지?”
“예, 폐하.”
황제의 웃음이 짙어졌다. 그는 아들을 좀 더 품으로 당겨 안았다. 황제의 몸에선 땀에 젖은 풋내가 났다. 흙의 비린내가 뒤섞인 그의 체취를 맡으며 태윤이 고개를 들어 올리자 황제가 시선을 똑바로 내렸다. 그의 지적이고, 부드러운 시선이 태윤을 면사처럼 감쌌다.
“굳이 짐을 호위할 필요가 없다는 건, 귀여운 윤이 네가 더 잘 알겠지.”
즉, 자신을 호위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태윤은 침착한 얼굴로 그를 보다, 바싹 마른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폐하, 소신은 금군대장입니다. 금군대장의 임무는….”
“세희를 지켜.”
황제는 더 이상 듣지 않을 것 같았다. 그의 턱은 치켜세워졌다. 그는 윤을 안은 채, 아주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시선이 닿는 곳은 끝없이 펼쳐진 하늘이었다. 내리쬐는 빛에 눈이 시린지, 잠시 눈을 찡그린 황제는 이윽고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건방지게 또 도망가면 곤란하거든.”
“마마께서 도망가신 적이 있으십니까?”
윤이 넌지시 묻자, 황제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세희를 지켜. 그게 네가 할 일이다. 짐을 지키는 건 짐이 할 터이니.”
태윤의 물음에는 간접적으로 대답을 준 황제였다. 태윤은 검이 박힌 듯, 날이 선 그의 눈빛에 이세희가 도망을 친 적이 있다는 걸, 확실하게 직감했다. 그럼에도 살아남았다니. 이 정도면 사랑이 아니라 중독에 가까운 집착이었다.
황제는 상냥하게 윤을 떼어놓았다. 그리곤 손을 들어, 윤의 뺨을 감싸고서 자신을 보게 하며 입술을 열었다.
“다리 정도는 부러뜨려도 된다. 넌 마음이 약해 못 할 것 같지만…. 아니지.”
나지막이 웃음을 터트린 황제는 윤과 이마를 맞대고서, 시선을 비스듬히 꽂았다. 그의 두 눈이 가슴에 쿡 박혔다. 윤은 옴짝달싹도 못 하고, 그에게 붙잡혀 아버지만 보았다.
“넌 날 닮았으니 할 수 있다. 세희가 도망가려 하면 다리를 부러뜨려.”
예전에는 너무나 자랑스러웠던 그 말이, 미치도록 싫었다. 그를 닮았다는 사실이 자신을 괴롭게 했다. 이세희가 자신을 경멸 어린 시선으로 본다고 상상만 해도 가슴에 가시가 오소소 박힌 듯 아파왔다. 언제는 미워해도 좋으니 옆에 있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이제는 미움 받기 싫다고 칭얼거리는 꼴이라니. 번개가 쳤다가, 맑아졌다가, 다시 비가 내리고, 습윤해지길 반복하는 자신의 감정 기복에 태윤은 고개를 숙였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와 건조한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면서, 손을 떼어내기 전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머리가 아플 때면 자주 하던 행동이었다. 머리 하나는 작은 아들을 무심코 내려다보던 황제는 선뜻 손을 뻗었다.
“아, 아바마마.”
생각지도 못한 그의 행동에 윤은 깜짝 놀라 그의 손목을 잡았다. 반항과 비슷하나, 한없이 여리고 순한 반응에 황제는 웃음을 지으며 속삭였다.
“무엄하긴.”
윤이 담담한 눈을 들어 올려 황제를 보다, 무미건조하던 뺨을 붉혔다. 황제의 두툼한 두 손이 얼굴을 폭 감쌌다. 활, 검, 창 등의 무기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손답게 엄지는 굳은살이 박여 딱딱했다. 자신도 굳은살이 있었으나, 황제는 차원이 다른 힘이 손에 깃들어 있었다. 그 손으로 어디가 아픈지 용케 알고서, 머리를 꾹꾹 지압해주니 절로 입에서 나른한 소리가 나왔다. 두통이 멎고 시원함이 일자 윤의 눈도 흐물흐물 풀어졌다.
“피곤하면 잠시 눈이라고 붙이고 가거라.”
이 다정함이 화비 마마에게도 물들 듯 퍼져 가면 얼마나 좋을까. 윤은 자신에게만은 깊은 우물처럼 한계가 없는 황제의 사랑에 화비를 떠올렸다. 아들과 애첩. 아주 큰 차이라, 사랑의 종류도 달랐지만 그에게 가해진 건 폭력이 더 강해 보였다. 손톱만큼이라도, 그에게 이런 애정을 보여줄 수 없는 걸까. 자신이 낮에는 품을 수도 없는 존재가 아프지 않기를 바라며, 윤은 입술을 달싹여 보았지만 황제의 눈과 마주친 순간 입술을 꽉 깨물었다. 황제가 무지개처럼 찬란한 웃음을 지으며 오롯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이 아비가 너에게 너무 잔인하게 군 것 같구나. 제도에 온 지 며칠도 되지 않은 널 궁에 불러, 세희만 보게 했으니….아비답지 못한 점이 마음에 걸리는 구나.”
가슴이 꽉 막혀 도저히 입을 열 수 없었다. 아버지는 이세희의 이름만 올려도 의심부터 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제도에 오자마자 이세희에게 발기하는지 시험부터 하던 자였다. 그때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아니라 애첩을 사이에 둔 남자와 남자였다. 뼈와 살을 분리하듯, 냉엄하고 예리하게 응시하던 시선이 머리에 쿡 박혀, 전신으로 퍼졌다. 머리 위에 폭우가 내린 것처럼 황제의 시선이 흘러내려 몸을 옥죄었다. 그때만 생각하면 입안이 가뭄이 온 듯 바짝바짝 말라갔다. 사내로서 이세희에게 발기했다면, 자신은 아들로서 결코 인정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세희에게 발정해서 거열형을 당해 죽었다는 전 금군대장의 이야기를 명심해야 했다. 그 전에 아버지의 애첩이었으니, 탐내어서도 안 되었다.
아침이 되면 사라지고, 밤이 되어야 오는 그였다. 아버지가 모르는, 가장 어두운 시간에 은밀하게 맛볼 수 있는 자였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했다. 황제가 죽는다 하더라도 이세희가 자신의 것이 되는 일은 없을 터다.
그가 스스로 날 선택할 리가 없을 테니. 그가 허락해주지 않는 이상, 그의 세계에 발을 디딜 수조차 없다.
태윤은 쓸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것을 자신의 뜻에 맞게 곡해한 황제는 윤의 고개를 들어 자신을 보게 했다.
“쉬고 갈 테냐?”
선이 분명히 그어진 다정함에 윤은 소리 없이 웃었다. 황제는 오랜만에 그려진 아들의 선한 미소에 엄지로 볼을 비비적거렸다. 귀엽고 착한 내 아들. 황제의 뿌듯한 칭찬에 윤은 어색하게 미소를 흐렸다.
“아닙니다, 폐하. 소신은 소신의 일을 하겠습니다. 명을 내리신 대로 황후 마마의 절일에 맞게 호위들을….”
“하하, 아비의 말은 그게 아니란다.”
황제는 윤의 충직한 발언을 웃음으로 잘라먹었다. 윤은 의아함에 눈을 들어 올렸다. 금군이라 하면, 황제를 위해 존재했다. 더불어 황후도 지키는 것이 금군의 법도였다. 지금 태윤이야 황제의 명으로 이세희를 황제의 침전까지 데려오는 데 동행했지만 본래는 그러하지 않았다. 그건 태감의 고유 권한이었다.
황제가 이세희를 태윤에게 굳이 데려오라고 명한 것은, 아마 이세희의 도망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반항을 억누르기 위해서. 서방에서도 이세희의 사지를 누르던 호위 내관들을 생각해 보면, 그게 몹시 익숙해 보였다. 돌덩이 같은 사내 넷이 눌러야 제압이 가능한 이세희니, 황제가 태감이 아니라 태윤을 부른 것도 이해가 가는 상황이었다.
“네 일은 애초에 세희를 감시하는 일이란다, 윤아. 세희가 도망을 가면 잡아오고, 아비의 애첩 노릇을 안 하면 하게끔 만들면 되는 거야.”
아니나 다를까, 황제는 태윤을 화살 같은 시선으로 정확히 보며 말했다. 너의 역할, 임무, 자리는 모두 자신이 정해준 것이라며, 그는 으스대듯 웃고서 태윤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았다. 그의 훤칠하고 잘생긴 얼굴이 한층 가까워졌다. 태윤은 묘하게 어깨를 억누르는 힘에 숨을 그러모아 삼켰다.
“황후가 중요한 게 아니야.”
황제의 안광이 스산하게 깔렸다.
“세희만 봐. 그게 네가 할 일이야.”
“…왜 그렇게 화비 마마께 집착하십니까? 화비 마마의 가족이 여기에 있는 한, 화비 마마도 그리 큰 반항은 하시지 못할 터인데요.”
이번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태윤은 황제가 가만히 있는 이세희에게 왜 그리 화를 내고, 폭력을 휘두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세희는 황제를 싫어하긴 했어도 애첩의 의무를 저버리진 않았다. 반대로 이세희에게 정도를 넘은 정사를 요구한 건 황제였다.
이세희는 사지가 불편한 아버지가 현령으로 있는 한, 도망갈 수 없는 몸이었다. 애초에 그러려고 이세희의 아버지를 현령 자리에 앉힌 게 아니던가. 황제는 제법 도발적으로 나오는 아들의 태도에 입술 끝을 끌었다. 눈빛은 온화했다. 태윤은 무덤덤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화비 마마의 아버지를 현령으로 앉히신 거 아닙니까? 주기적으로 보게 하여, 화비 마마가 도망칠 수 없게끔….”
황제의 성격상, 순수하게 화비의 아버지를 대우하기 위해서 그 자리에 앉힌 건 아닐 것이다. 천민은 문맹이었다. 그들은 글을 배울 수 없게 나라의 법도로 정해져 있었다. 문맹으로 살아온 자를 현령으로 앉히고, 글을 가르친다니. 매우 비효율적이었기에 황제는 그의 곁에 실직적인 현령 일을 하는 자들을 붙여 놓았다. 결국 그에게 준 현령 자리는 이세희를 묶어두는 사슬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이세희의 부모 얼굴이 그리 어두웠던 건가. 자식이 애첩이 된 대가로 받은 자리가 심지어 자식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장치라고 생각하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윤아. 도망가더구나.”
황제가 어깨를 으쓱이며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턱을 검지로 매만지고, 눈은 허공을 덧그렸다. 아련한 과거를 떠올리는 듯 눈빛이 은근히 타올랐다. 아예 사라지기 직전의 석양처럼, 흐릿하게 타오르는 불빛이 황제의 눈에서 이글거렸다.
“한 번 더 그러면 내가 미칠 거 같거든.”
황제의 웃음이 광소로 변한 건 순식간이었다. 그는 이 자리에 있는 게 도망간 이세희라도 된 것처럼, 숨을 크게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더 이상 아무 소리 하지 말고 세희만 봐.”
관용은 거기까지였다. 황제는 더 묻지 말라는 듯 등을 돌렸다. 태윤은 황제가 내미는 활을 받아 들며 고개를 숙였다.
“예, 폐하. 명을 받듭니다.”
내관이 건네주는 하얀 천으로 땀을 닦아낸 황제는 숨을 후련하게 내쉬었다.
“그 활은 세희의 것이다.”
“마마께서 활을 잘 쏘십니까?”
그러자 황제가 픽 웃었다. 묘한 감정이 떠오른 눈으로 아들을 보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궁에서 취미라도 만들라고 활을 주었더니, 짐을 쏘더구나.”
태윤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황제를 보았다. 화비의 성격이 도발적이란 건 알았지만, 황제를 실제로 죽이려 했다는 사실에 등에 소름이 돋았다. 대역죄인의 행태였으나, 황제는 머나먼 과거가 된 기억을 좇으며 말했다.
“다시 주는 활이니, 짐 말고 사냥감이나 쏘라고 전해주거라.”
그리 말하며 싱긋 웃는 그는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도망을 가는 이세희보단, 죽을힘을 다해 자신에게 반항하는 이세희가 더 좋은 것처럼 보였다.
*
이세희가 기거하는 화요궁으로 걸어가는 그 시간 동안 태윤은 같은 고민을 거듭했다. 황후의 절일에, 만약 이세희가 도망을 칠 수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황제의 명에 따라 그의 다리라도 부러뜨려 데려올 것인가, 그가 자유를 찾아 도망갈 수 있게 내버려 둘 것인가.
“하….”
윤회를 반복하듯, 그 고민이 꼬리를 물고 머리에서 맴돌았으나 답은 도통 나오지 않았다. 길을 걷다 답답함이 샘솟듯 치밀어 태윤은 고개를 들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넓게 펼쳐진 하늘이 보였다. 초여름으로 여물어가는 이 시기, 작열하는 태양에 눈이 아팠다. 대지가 후끈하게 달아올라 조금만 걸어도 등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완전한 여름으로 향해 가기 전, 장마가 시작될 것이다. 황후의 절일은 딱 그 중간에 있었다. 습기가 어리긴 했으나, 축하하기엔 나무랄 데 없이 좋은 날씨였다.
태윤이 기억하는 황후는 냉정하지도, 살갑지도 않은 여인이었다. 사도의 딸이자, 태자의 어머니답게 우아하고 고아한 자세로 황제의 옆에 있었으나, 황제의 부드러운 손 한번 잡아보지 못했다. 기도를 드리거나, 향을 피울 때 눈이 맞는 걸 제외하곤 황제는 그녀에게 시선 한번 보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황후만의 일이 아니었다. 황제는 공평하게 처첩들을 대했다. 그의 사랑은 예열이 되기도 전에 홀로 막을 내렸으니. 혼자 애가 타, 끙끙 앓는 건 처첩들의 몫이었다. 황제는 그녀들을 황무지로 만들어 놓고 매정하게 떠났다. 그나마 그 황무지에 작은 새싹이 움터, 아이라도 안게 된다면 삶의 낙이 될 테지만 그러지 못한 여인들도 수두룩했다.
그러고 보면 황제는 참으로 잔인한 사내였다. 사랑을 원하는 여인들에겐 사랑을 주지 않고, 사랑을 죽도록 거부하는 이세희는 곁에 묶어두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태윤은 걸음을 멈추고, 저 멀리서 너울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에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이세희가 오늘도 화요궁에 이어지는 화원에 나와 앉아있었다. 시야를 어지럽히는 이파리들을 파헤치며 좀 더 바짝 다가가자, 그의 형체가 선으로 그린 듯 선명해졌다. 그는 피곤이 역력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긴 검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흐느적거리며 그의 아름다운 얼굴을 가렸다. 그게 못내 아쉬워, 태윤은 걸음을 재촉했다.
그를 보자 설렘이 자신을 부추겼다. 어젯밤의 일은 까마득히 멀어졌다. 단지 그를 보며, 옆에서라도 만끽하고 싶었다. 본능에서 꿈틀거리며 자라난 갈망은 죄책감으로 억누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를 보면, 손끝이 움찔거리고 숨이 흐트러졌다. 더위가 머리를 헤집고 다녔다. 둔통에 가까운 어지러움에 시야가 혼탁한데, 그만이 섬처럼 떠올라 생생하게 다가왔다. 태윤은 이제 걷잡을 수 없는 충동에 걸음을 빨리했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이파리들이 서로 몸을 부딪치며 파스스, 마찰하는 소리가 시원하게 퍼졌다. 반쯤 감겼던 이세희의 눈도 바람의 감촉에 떠졌다.
멍하던 그의 눈이 자신을 담았다. 그의 세계에 발을 디딘 순간, 그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보기가 무섭게, 고개를 돌렸다. 변명도 필요 없는 확실한 거부였다. 태윤은 하루 만에 달라진 그의 냉담한 무시에 이해가 되지 않아,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세희는 엎어져 강간을 당해야 했던 상 위에 올려둔 서책을 집었다. 그리고 펼치더니, 거기에 시선을 고정하고 다가오는 태윤은 결코 보지 않았다. 태윤은 그가 허락하지 않은 곳에 도달할 수 없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 있었다. 이세희는 태윤이 멀거니 서서 자신을 빤히 보는 걸 피부로 감지하면서도, 꿋꿋하게 말이 없었다. 그의 고집은 황제에게만 아니라 태윤에게도 펼쳐진 듯했다. 절망에 서 있는 지반에 균열이 가고 있었다. 이세희가 여기서 물러나라고 명을 내린다면, 완전히 무너질 것 같아 태윤은 안절부절못했다.
어떻게든 그의 곁에 있고 싶어 고민하던 찰나, 손에 느껴지는 단단한 촉감에 눈을 내렸다. 황제가 이세희의 활이라며 준 것이었다. 황제를 말고, 사냥감을 쏘라고 말을 덧붙이기까지 했다. 이것이 좋은 빌미가 될 것 같아 태윤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이세희에게 다가갔다.
“마마, 소신 금군대장 태윤입니다. 폐하께서 하사하신 활을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황후 마마의 절일 땐 제가 마마를 호위할 것입니다. 라는 말을 덧붙이려는데 이세희가 책에서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러더니 싸늘한 웃음을 고아한 얼굴에 띠었다. 나가라는 말보다 더 잔인하게 느껴지는 미소에 태윤은 세상이 번쩍 갈라지는 착각에 빠졌다. 이세희가 몸을 일으켜 손으로 밀면, 그대로 나락에 빠질 것 같은 불안감에 태윤은 활을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마치 그것이 유일한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굴었다. 태윤의 반질반질한 검은 눈은 이세희의 전신에 빨판처럼 달라붙었다. 살갗을 빨아들이다 못해, 질겅질겅 무는 듯한 시선에 이세희는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황제와는 달랐다. 기름과 물이 갈라지는 것처럼 황제의 시선이 끈끈하다면 태윤은 증발할 것 같은 애틋한 시선이었다. 그 탓이었을까. 이세희는 제발 봐달라고 애원하는 시선에 귀찮다는 듯 눈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태윤의 눈이 초가 켜진 것처럼 밝아졌다.
“마마.”
일관된 무시가 아니라, 경멸이라도 던져준 게 고마워 태윤이 허겁지겁 입을 벌렸다. 이세희는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듯, 태연하고 나른한 자태로 태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자신을 비껴 올라가는 시선은 차분하다. 조금 더 다가가도 될까. 태윤의 가슴이 설렘과 두려움으로 박동했다. 입을 열면 가슴이 뛰쳐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숨을 천천히 내리눌러 내쉬면서, 활을 더듬어 만졌다.
“그것을 주러 오셨습니까.”
이세희가 무감한 얼굴에 걸맞게,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태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입술을 열려는데 이세희가 내관을 불렀다. 내관이 총총거리며 다가와 태윤의 앞에서 굽신거렸다. 태윤이 의문을 나타내자 이세희는 심드렁한 눈으로 서책을 훑으며 말했다.
“제 몸에 손대지 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태윤의 눈에 금이 쩍 갔다. 몸이 바짝 굳고, 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세희는 엄지로 책을 슬렁슬렁 넘기며 귀찮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보다 머리도 뛰어나신 분이 기억도 못 하시나 봅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마, 폐하의 명이 먼저입니다.”
태윤이 할 말을 고르다가, 명분을 내세웠다. 자신이 이세희의 옆에 있을 수 있는 이유. 이것이라면, 그의 곁에 머무를 수 있으니까. 이세희는 폐하란 단어에 서책을 넘기던 손을 멈추었다.
“활을 받아라.”
이세희가 내관에게 명을 내렸다. 근엄하고, 차가운 어투에 내관은 서둘러 손을 내밀었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앳된 얼굴의 내관은 태윤을 보며 울상이었다. 이세희가 꽤 무섭게 구는지, 손도 덜덜 떨렸다. 괜히 이세희의 심기를 건드려 어린 내관이 다칠까, 태윤은 한숨을 내쉬며 활을 내관에게 내밀었다. 내관이 눈에 띄게 안도하며 물러났다.
“폐하께서 무슨 명을 내리셨습니까? 저더러 오라고 하십니까?”
이세희가 여전히 서책에 시선을 두고 물었다. 그의 눈은 느리고 진중하게 한자를 훑었다. 궁에 오고 나서 글을 배웠는지 그는 분명히 서책을 읽고 있었다. 마디가 툭 튀어나온, 사내다우나 하얗고 길쭉한 손으로 서책을 넘기는 모습이 한 폭의 산수화처럼 아름다웠다. 긴 검은 머리카락은 그의 등을 감쌌고, 몇 가닥은 내려와 그의 뺨에서 흔들거렸다. 내리깐 속눈썹은 끝이 올라갔다. 그리고 눈을 깜박일 때마다 봉긋한 광대 쪽에 음영이 드리웠다. 밤이면 못 볼 모습을, 시선으로 좇아 뇌리에 각인처럼 새겼다.
한참 대답이 없자, 이세희가 고개를 돌렸다. 태윤은 언뜻 보이는 그의 상처에 막 열려던 입술을 닫았다. 저 이를 저리 만든 이가 아버지였고, 자신은 아버지의 명령을 방패삼아 그의 곁에 있으려고 했다.
가슴이 죄책감에 뭉개졌다. 태윤이 그의 백옥 같은 뺨에 남은 멍을 보고 아연실색하자, 이세희도 덩달아 당황한 듯 눈을 깜박였다. 태윤의 시선이 터진 입가와 딱지가 붙은 입술, 범위가 넓게 물든 멍에 집요히 머물렀다. 연신 뺨을 부드럽게, 그리고 안쓰럽게 더듬는 시선에 이세희는 짧게 조소를 터트렸다. 그래 봤자 같잖은 동정심이었다. 이세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그를 보고 입을 열었다.
“침전에 오라는 명이 아니면,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치료는 받으셨습니까.”
태윤이 대뜸 물었다. 그의 저돌적인 눈빛에 이세희는 무의식적으로 뺨을 문질렀다. 치료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끝나 있었다. 황제의 밤 시중을 들고 나면 정신을 잃기 일쑤였다. 심연 같은 수면에 빠졌다가 일어나면, 몸은 누군가에게 정성껏 돌봐져 있었다. 그렇다 보니 일부러 상처를 치료해 달라고 말을 입에 담은 적은 없었다.
별것도 아닌 걸로 말을 거는 태윤이 귀찮아, 이세희는 얼굴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턱을 괸 이세희는 서책을 덮었다.
“제 몸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그러니 금군대장께서 굳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태윤이 무표정한 얼굴로 이세희를 보다, 눈을 내리깔았다. 과묵하게 다물린 입술이 꿈틀거렸다. 이세희는 더 이상 태윤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아, 몸을 벌떡 일으켰다. 엉덩이 안쪽에서 둔통이 느껴졌지만, 소리라도 냈다간 태윤이 난리법석을 피울까 봐 신음을 삼켰다. 막 걸음을 떼는데, 태윤이 “마마.” 하고 나직하게 이세희를 불렀다. 이세희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마마, 저는 황후 마마의 절일 연회, 연연에 마마를 지키라는 명을 폐하께 받았습니다.”
이세희는 태윤에게 등을 보인 채,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띠었다. 태윤은 그의 등을 통해 퍼져오는 고압적인 태도에도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말씀하신 대로, 몸에 손은 대지 않겠습니다. 하오나 마마를 지켜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반드시, 제 목숨을 걸어서라도 마마를 지키겠습니다. 그게 제 임무니까요.”
걸음을 느긋하게 잇던 이세희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 짙게 물든 경멸에 태윤은 숨을 내쉴 수 없었다. 또 뭐 잘못한 걸까. 그가 몸에 손대지 말라 하여, 손대지 않겠다고 하였는데…. 태윤은 이제라도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물어볼까, 싶어 머뭇거렸다. 이세희는 무감한 눈으로 태윤을 지그시 보더니, 아름다운 입술을 열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이세희가 지겹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는 냉랭하게 고개를 돌렸다. 궁인들이 이세희의 뒤에 꼬리처럼 따라붙었다. 태윤은 이세희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서서 그를 지켜보았다. 입안에 약초를 문 것처럼 쓴맛이 감돌았다.
그래도 아예 오지 말라는 명은 떨어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가 아주 자그마한 공간이라도 내어줘서 고마웠다. 태윤은 간신히 웃음을 입가에 띠고서, 손바닥으로 뺨을 매만졌다. 황제 앞에서 긴장하지 않았던 몸은, 이세희 앞에서 잔뜩 움츠러들었는지 땀으로 축축했다.
*
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아침과 밤은 그나마 태양이 물러나 선선했으나 낮에는 본격적인 더위가 제도를 점령했다. 더불어 습기도 한층 강해졌다. 더위와 꿉꿉함이 한데 어우러지자, 황제는 목욕을 즐겼다. 물론 그 목욕 시중을 드는 것도 이세희였다. 이세희는 황제가 정무를 보는 중에 불려가는 날이 잦아졌다. 그 덕분에 태윤과도 자주 마주쳐야 했는데, 그때마다 이세희는 시큰둥한 시선으로 태윤을 보다가 냉랭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 정도는 연연에 가까워질수록 심해졌다. 처음에는 말을 무시하던 수준이었는데, 이제는 아예 자신을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다. 이세희와 자신 사이에 벽이 세워진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견고하고, 딱딱해, 깨지지 않을 듯한 벽이었다. 다른 금군들도 이세희가 유독 태윤만 싫어하는 걸 알아챘다. 그 때문에 태윤은 황제에게 명을 받으면, 그 명을 자신의 부관에게 넘겨 이세희에게 전했다. 그리고 자신은 이세희의 뒤를 따랐다. 기묘한 형국이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세희가 어디론가 숨어서 나오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왜 그렇게 날 싫어할까. 아버지와 닮은 얼굴, 황족. 그가 싫어할 만한 요소는 다 갖추고 있으니, 사실 고민의 여지가 없었다.
태윤은 땀이 흐르는 그의 하얀 목을 보았다. 땀이 아니라 이슬이 맺힌 듯 피부가 반짝거렸다. 진주분을 바른 것처럼 하얗고, 뽀얗다. 황제의 말에 따르자면, 손에 착착 감기는 부드러운 피부라고 그랬다. 만지지 않고, 눈으로 소중히 더듬어도 알 것 같은 감촉이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평화를 주는 건, 아버지의 흔적이 옅어졌다는 사실이다.
요 근래 황제는 여러모로 겹친 정무 때문에 이세희와 잠자리를 가지지 않았다. 장마와 연연 때문이었다. 장마가 심한 때가 있었는데, 자칫 잘못하면 인가까지 물이 불어나 큰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방둑을 만들고, 수로를 정비한다. 그 외에도 장마를 대비하기 위해 방책들이 나라 곳곳에서 진행되었다. 황후의 절일도 일주일 내내 펼쳐지니, 황제는 목욕을 하는 것 외에는 이세희와 따로 만날 일이 없어진 것이다.
덕분에 이세희는 얼굴이 환하게 폈다. 이세희가 자신을 싫어하는 정도는 켜켜이 쌓여가 산처럼 커졌지만, 이세희가 편하니 태윤은 마음이 날아갈 듯 좋았다.
그만 편하다면 뭐가 안 좋을까. 자꾸 올라가려는 입술을 진정시키며 태윤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실실 웃음이 나오려는데, 서책을 뚫어져라 보던 이세희가 휙 고개를 돌렸다. 태윤은 속으로 깜짝 놀랐으나 얼굴은 평정을 유지했다.
“흐음….”
이세희가 침음하며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길고 새침한 눈매가 기울어지니, 오묘한 빛이 흘렀다. 태윤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얼핏 보면 무뚝뚝한 얼굴이었다. 자꾸만 목이며, 등을 타고 흐르는 시선이 개미 같아 거슬렸다. 간질간질, 털끝을 건드리고 사라지는 시선이 눈에 밟힐 듯, 안 밟혔다. 그래서 참고 기다렸다가, 고개를 돌린 것이었는데 거기엔 황제와 닮은 아들이 우뚝 서 있었다. 자신과 눈이 맞닿아도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았다. 예전에는 시선이라도 스치면 어쩔 줄 몰라서 눈을 굴리더니.
“왜 그러십니까?”
태윤이 물었다. 황제 아들 아니랄까 봐, 목소리도 나긋하고 잘생겼다. 얼굴과 목소리, 체격을 빼면 모두 혐오스러운 황제가 떠올라, 이세희는 얼굴을 찌푸렸다. 태윤의 눈에 잠시 앙금이 가라앉듯 무거운 감정이 침전했지만 그는 능숙하게 태연함을 가장했다.
“혹, 몸이 불편하십니까.”
태윤이 재차 물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귀에 감겼다. 몸이 움찔 떨렸다. 이세희가 파르르, 떨자 태윤이 눈을 크게 떴다. 놀란 듯, 그가 다가와 이세희 앞에 무릎을 꿇었다.
“괜찮으십니까? 어디 아프신 건….”
아프다고 말하면, 당장 안아서 옮겨줄 기세였다. 눈빛은 갑주처럼 단단했다. 무엇으로 뚫어도 뚫리지 않을 것 같은 견고함에 이세희는 고개를 돌렸다. 하, 하고 짧게 한숨을 내쉰 이세희는 자신을 살피려 드는 태윤의 얼굴을 손으로 탁 잡았다.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밀치려는데, 태윤이 손목을 잡고 내렸다. 태윤의 검지와 중지가 이세희의 하얀 손목에 착지했다. 이세희가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태윤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민감하게 굴며 이세희의 손목에 돋아난 핏줄에 검지와 중지를 눌렀다.
혹여나, 자신이 다칠까 봐 섬세하게 핏줄을 만져 맥박을 확인하려는 손길에 이세희는 몸을 굳혔다. 어디선가 경험해본 손길에 의문이 들 무렵, 눈을 내리깔던 태윤이 붉은 입술을 열었다.
“마마, 기억 안 나십니까?”
“무슨….”
이세희가 불쾌함을 감추지 않고 중얼거렸다. 이세희의 시선이 자연스레 목소리의 행적을 따라 내려갔다. 무릎을 꿇은 태윤과 눈이 마주쳤다.
“이것 또한 마마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태윤이 씩 웃었다. 처음 보는 호쾌하고, 맑은 미소에 이세희의 눈이 차츰 커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윤은 담백한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이세희는 그 미소에 혀에 담았던 모진 말들을 잊고 말았다.
황제와 닮은 얼굴로, 가면은 쓴 것처럼 너무 다르게 웃으니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이세희는 무심코 길을 잃은 아이처럼, 황망하게 태윤을 보았다. 태윤은 떨어지는 이세희이 시선을 받아먹으며 황홀함에 젖었다.
눈빛이 방둑을 뚫고 들어오는 물살처럼 자신을 밀고 들어왔다. 거센 압박에 이세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방심할 새가 없는 저돌적인 눈빛에 이세희는 무심코 입술을 비틀었다.
“폐하와 얼굴만 닮은 게 아니시군요.”
얼음을 깎아 만든 듯한 말이 냉큼 굴러오자 태윤의 눈빛이 굳었다. 이세희는 속에서 쾌감이 일어나 피식 웃었다. 꼬리를 흔들 기세로, 당당하게 말하던 태윤이 자신의 한마디에 기가 팍 죽으니, 후련해져 몸을 일으켰다.
“하시는 것도 폐하와 같으니, 더 싫습니다.”
화룡점정으로 이세희가 활짝 웃어주며, 매정하게 손을 뿌리쳤다. 태윤은 무릎을 꿇은 채 빈 터가 되어버린 손을 물끄러미 보았다. 이세희는 떠났지만, 온기는 남았다. 아주 희미하게 남은 온기가 살랑거리는 바람에 채여 사라질까, 두려워 태윤은 주먹을 그러모았다. 이세희는 아직 일어날 생각이 없는 태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순하고 둥글둥글한 눈매가 처진 것처럼, 듬직한 어깨가 늘어진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심한 말을 내뱉어서, 자기 곁에 얼씬도 못 하게 했어야 했다. 그런 후회가 바람처럼 일렁거릴 무렵, 태윤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세희가 의아함에 눈을 위로 치켜뜨자, 태윤이 무심한 얼굴에 엷은 웃음을 띠웠다.
“어차피 뭘 해도 싫어하실 거 아닙니까?”
그러더니 어깨를 으쓱이며 이세희를 망설임 없이 보았다. 예상 외로 불쑥 들어오는 시선에 이세희만 당황한 듯 보였다. 태윤은 입술 끝을 늘어뜨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고, 이세희는 잔잔히 스며드는 미소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요? 뭘 어쩌시려고요? 계속 마음대로 하시게요? 그러다가 제 말 한마디로 그 자리에서 쫓겨나실 수도 있는데요?”
이세희는 저도 모르게 빈정거렸다. 제 아비를 믿고 자신한테 자꾸 얼굴을 들이미는 꼴이 같잖았다. 지금까지 자기 말 하나로, 제 곁에 있다가 잘려나간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황후도 자신을 어쩌지 못하고 있는데, 제까짓 게 뭐라고. 특히, 저 황제와 닮은 얼굴로 저러니 정말 죽도록 싫었다. 만약 이 손에 칼이 주어진다면 가차없이 목을 베어버릴 수 있었다. 물론 가장 먼저 죽여야 할 우선순위에 있는 대상은 황제였다.
팔짱을 낀 이세희는 눈을 내리깔고 태윤을 향해 서슴없이 비웃었다.
“쫓겨나고 싶으셔서 안달이 나신 겁니까? 그렇게….”
“아니요. 마마는 그러실 수 없습니다.”
태윤이 확고한 태도로, 이세희의 말을 뚝 잘라먹었다. 이세희의 눈에 불티가 확 올랐다. 그 불티가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돌아서는 바람의 움직임에 따라, 태윤에게 전염되었다. 태윤의 눈에도 불길이 일었다. 모든 어둠과 빛을 살라먹을 것처럼 불타는 눈으로 이세희를 보며 태윤이 말했다.
“마마는 저를 금군대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실 수 없습니다.”
이세희가 헛웃음을 터트리자, 태윤이 자신만만하게 미소로 갈무리하며 덧붙였다.
“절 물러나게 하고 싶다면….”
묘한 어조로 말을 흘리던 태윤이 턱을 쓸어 만졌다. 눈빛은 개구졌다. 태윤이 말하는 바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황제의 질투심을 이용하면 그만이었다. 보란 듯이 태윤과 잘 지내면, 황제가 알아서 태윤을 처리하리라.
그러나 황제를 연상케 하는 저 자에게 친근하게 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살도 닿기 싫어서 지금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있었다. 그의 살이 닿은 손목은 돌아가서 벅벅 씻을 예정이었다. 이세희가 윽, 소리를 내며 몸서리를 치자, 여태껏 태연하게 굴던 태윤의 눈에 미미한 금이 갔다. 하지만 태윤은 상처 회복이 빠른 남자였다. 황궁에서 치이고, 구른 태윤은 여유로운 눈빛으로 이세희를 보았다. 이세희는 몸을 부드럽게 훑는 시선에 입술을 떼었다.
“제 곁을 내어드리는 일은 결코 없을 터이니, 그리 아십시오.”
완전히 역효과였다. 이세희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태윤을 더 싫어하고 있었다. 태윤은 자신을 더 싫어할 공간이 이세희에게 남았다는 사실에 시무룩했으나,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섰다.
*
물기를 한껏 빨아들인 바람이 눈꺼풀을 툭툭 건드렸다. 당장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은 바람에 태윤은 눈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햇빛이 축축한 물기를 씻어내릴 것처럼 뺨에 미끄러져 내렸다. 금세 뺨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태윤은 끈적한 손등으로 뺨을 문지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평선처럼 끝없이 펼쳐진 너른 초원에 햇볕이 사정없이 내리쬐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눈이 더위에 시려왔다. 쉬기 위해서 눈을 동서남북으로 굴려 보았지만, 더 아파왔다. 구름 하나 없이 청명한 하늘과 대비되게 붉은 차양막들이 이파리가 무성한 곳에 세워져 있었다. 동백꽃을 하늘에서 무수히 뿌린 것처럼 온통 붉은데, 그 위에 금사로 십장생들이 무리지어 수놓아져 있으니 화려함에 눈이 멀 것 같았다.
이 나라는 대대로 절일을 성대하게 기념했다. 특히, 여러 절일 중에서도 원단, 황제, 황후, 태자의 탄신을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축하했다. 일주일 내내 도성에는 붉은 등이 걸렸다. 가장 천한 백성들까지 신당에 가 축하를 드리고, 황제와 황후, 태자를 위한 선물을 바쳤다. 하급 관리들도 말이나 배를 타고 제도까지 올라와 당사자의 발밑에 납작 엎드렸다. 그리고 당사자들은 여유로운 태도로 웃으며, 고맙다는 말을 내리고 선물을 받아들이는 게 관례였다. 그렇게 첫날 아침에 선물과 인사가 오가고, 저녁에는 수연회가 펼쳐졌다. 새벽까지 음주가무를 즐기며 모두가 웃음을 터트리는 즐거운 절일다운 마무리였다.
다음 날 하루는 푹 쉬어 준 후에, 일정한 품계 이상이 모여 소소한 사냥을 즐겼다. 사냥의 우승자는 어차피 황제였으므로, 대신들은 적당한 선에서 사냥을 즐기다 멈추었다. 황제나 대신들의 처첩들은 막사나 차양막에서 지아비를 기다리다, 그들이 돌아오면 냉수를 건네주고 땀을 닦아주는 역할을 했다.
황제의 땀을 닦아주는 건 황후의 몫이었지만 예상대로 이세희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태윤은 황제와 황후의 막사가 차양막이 가까우나 닿지 않을 만큼의 간격을 두고 세워져 있는 걸 보고 속으로 쓰게 웃었다.
황제는 황후를 싫어하고, 황후는 황제에게 뚱하니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이세희는 황제의 곁에 무감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오늘 이세희는 후덥지근한 날씨를 이기지 못했는지,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었다. 끈은 황제가 하사해준 금사인 듯, 여기서도 반짝반짝 눈에 띄었다. 한밤중에 뜬 별처럼, 이세희가 머리에 착용한 금사가 유독 선명하게 빛이 나니 눈이 그리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이세희는 황제에게 부채를 부쳐주었다. 황제는 의외로 얌전히 앉아 이세희의 시중을 받으며 대신과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목이 말랐는지, 황제가 웃는 낯으로 돌려 이세희를 돌려보았다. 이세희의 얼굴이 급속도록 어두워졌다.
“하하, 부끄러워하기는.”
황제가 귀엽다는 듯 이세희에게 농을 거는 목소리가 여기까지 바람을 타고 들렸다. 태윤은 더위 속에서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눈을 흘겼다. 이세희가 난감함에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모로 돌렸다. 그때였다. 어둠에 침몰한 이세희의 시선과 햇볕에서 이글이글 타는 태윤의 눈이 접점을 만들어냈다. 이세희의 눈이 얼음이라도 띄웠는지 서서히 식어갔다. 태윤은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였다. 미간을 잠시 찌푸린 이세희는, 고민이 골똘히 스민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는 급박하나 우아한 손길로 물잔을 집어 들고 입에 머금었다. 황제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이세희를 보던 태윤은 볼이 달아올라, 물기 어린 손바닥으로 얼굴을 매만지는 척하며 얼굴을 좌우로 움직였다. 금군들에게 만전에 또 만전을 기하라는 말을 하려는 찰나, 옆에서 기분 좋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이군.”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박혀들었다. 태자 태경이었다. 윤은 허벅지에 양손바닥을 대고, 허리를 숙였다.
“소신 금군대장 태윤, 태자 전하를 뵙사옵니다.”
“고개를 들게.”
태자의 허락에 태윤이 고개를 들었다. 윤과 신체가 엇비슷한 태자가 눈에 오묘한 웃음을 걸고 있었다. 그의 눈은 부끄러움 없이, 이세희의 입을 통해 물을 얻어 마시는 아버지를 보고 있었다. 태윤은 태자와 달리 아버지를 볼 자신이 없었다. 이세희를 보고 나무에 걸린 것처럼 흔들리는 자신을 보고 의심을 할까 봐, 두려움에 시선을 내리깔았다. 가슴은 지금도 입 밖으로 뛰쳐나올 것처럼 두근거렸다. 술을 머리에 들이부은 것처럼 머리는 현기증이 일었다.
“내 어머니지만, 정말 대단해.”
태자가 입술 끝을 부드럽게 올리며 말을 이었다. 태윤은 자신보다 동생이나, 태자 자리에 있는 태경을 담담한 눈으로 보았다. 그러자 태자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뒤에 있던 내관이 땀을 흘리며 차양막을 태자에게 드리우고, 궁녀들도 쫓아와 커다란 부채로 바람을 일으켰다. 태자는 이세희의 뺨을 지분거리는 황제를 보다, 그 광경을 우두커니 서서 보는 황후인 제 어머니를 보며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태윤은 태자의 시선을 좇다가 여전히 자신이 없어 시선을 내리떴다. 볼은 이세희를 잠깐 보았을 뿐인데 뜨뜻하게 달아올랐다.
“그대가 자리를 비운 동안 어머니가 얼마나 변덕이 심했는 줄 아는가? 찬물에 들어간 것처럼 냉정을 유지하다가도, 아바마마가 화비를 부른 걸 알면 화르륵 달아올라서…. 이제 와서 저러는 걸 보면 정말 웃음만 나온다니까.”
키득거리며 말을 잇던 태자는 볼이 터질 것처럼 달아오른 태윤을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그대는 왜 그리 얼굴이 달아올랐어? 많이 더운가? 하긴, 옷을 이리 입었으니 덥지.”
태자가 손을 들어 태윤의 뺨을 더듬었다. 태윤은 자각도 못했지만, 태윤의 잘 그을린 피부에 홍조가 막 동이 튼 아침처럼 떠 있었다. 뒤늦게 자신의 피부가 달궈진 것처럼 뜨거워진 사실을 깨달은 태윤이 손을 들어 얼굴을 매만졌다. 세상 무서울 게 없어 보이는 우직한 얼굴로,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니 그게 묘하게 귀여워 태자는 웃음을 터트렸다. 수면을 가볍게 뒤흔드는 듯한 산뜻한 미소에 태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날이 더워서….”
좋은 핑계였다. 태자도 인정하지 않았는가. 날이 더운데, 옷을 이리 입어서 덥다고…. 태윤은 그의 말을 곱씹으며 심장이 일으키는 열을 무시하려 들었다. 태양이 머리 위에 올라타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쇠처럼 자신을 뜨겁게 달구니 핏줄도, 심장에도 그 열기가 옮겨간 것이다.
“날이 더워서 얼굴에 열이 오른 것 같습니다, 전하.”
태윤은 흐리던 말을 명확하게 바꾸며, 어색하게 웃었다. 태자는 쯧쯧 혀를 차며 태윤의 등을 다독였다.
“늘 건강해야지. 그래야 그대가 나도 지켜줄 것 아닌가?”
태자는 자신이 황제가 되리라 당연히 믿는 눈치였다. 그리고 태윤이 아버지를 지켜주는 것처럼, 자신도 지켜줄 것이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태윤은 으스대는 듯한 자신감이 넘치는 태자의 눈을 빤히 보다가 웃고 말았다. 어린 아우가 종종 하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정말 소신이 전하를 지켜주길 바라는 것입니까.”
“그대가 약조했잖아.”
그러더니 태자가 슬그머니 태윤의 손을 잡아왔다. 깍지를 껴오는 아우의 수줍음은 긴 소매에 가려졌다. 태윤은 크게 뜨던 눈을 조용히 접었다. 어릴 때처럼, 아버지나 황후의 눈을 피해 손을 잡아오고, 안겨오는 건 여전했다. 만약 황제나 황후가 없다면, 품에 안고 다독여 줬으리라. 태윤은 차양막처럼 붉은 소매에서 얽히고설키는 동생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태경이 안도의 숨을 내쉬더니, 태윤을 보며 열없이 웃었다.
“그때도 소신이 금군대장으로서 가치가 있다면 써주십시오.”
태윤은 다정하게 덧붙이며 서서히 태경의 손을 놓았다. 태경은 뜨뜻하게 손바닥에 맞닿던 형의 온기가 사라지자, 아쉬운 듯 눈을 파르르 떨었다. 태경의 시선을 가만히 두고서, 눈을 돌렸다. 황제가 이세희의 뺨을 손등으로 매만지더니, 이윽고 이세희의 하얀 목을 핏줄을 따라 애무하듯 어루만지고 있었다. 정사를 안 했을 뿐이지, 손으로는 이미 이세희를 흠씬 맛보고 있었다. 그의 손길이 너무 그린 듯이 음란해서, 태윤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거운 응어리가 진 태윤의 한숨을 옆에서 다 느낀 태경은 태윤의 팔뚝을 팔꿈치로 툭 쳤다. 태윤이 의아한 듯 시선을 떨구자, 태경이 장난스럽게 소매로 입가를 가리며 속삭였다.
“솔직히 부럽지?”
“예?”
“예쁘잖아, 화비가.”
태윤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소신은 아버지의 첩을 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과 다르게, 가슴은 죄책감으로 아파왔다. 아릿하게 쿡쿡 찔리는 통증에 체한 것처럼 허리를 펼 수 없다. 그의 시선이 닿지 않는 끄트머리에 서서, 그를 보는 게 고작인 사랑이었다. 살짝 미소만 흘리는 것으로도 죄의식을 느끼는, 넘봐서는 안 될 관계였다. 태윤은 억지로 몸에 힘을 줘서 버텼다.
그가 사랑해줄 리가 없잖아. 나 같은 걸. 더 싫어하면 몰라도, 자신을 안아주거나, 조금이라도 웃어주는 일은 결코 없을 테니까…. 자신을 보기만 해도 찬바람이 부는 이세희를 떠올리자 가슴이 쿵 하고 떨어졌다. 이미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날이 갈수록 증상은 심해질 뿐 익숙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매일이 아픔이었다. 응어리가 켜켜이 쌓여간다.
언제쯤 편하게 숨을 쉴 수 있을까. 그가 시선 속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아릿해와 숨을 쉴 수가 없는데. 태윤은 아버지와 입을 맞추는 이세희를 멀거니 보며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소신의 역할은 화비 마마를 폐하께 모셔다 드리고, 큰일이 없게 지켜드리는 것뿐입니다. 부럽다니요. 그런 마음은 전혀 담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누구나 그러지.”
태경은 너도 다를 바 없다는 어투로 태윤에게 말했다. 태윤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자, 태경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나도 그랬으니까.”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눈 밖으로 드러낸 태자를 보고, 태윤은 숨을 멈추었다. 시선이 딱딱하게 굳어 태자에게 멎었다. 아주 조용히, 몸을 비비는 이파리 사이에 묻힐 정도로 낮은 목소리가 이어져 태윤만 들을 수 있었다. 이세희를 보며 욕정을 드러내는 태자를 보고 놀라 입술을 달싹이던 태윤이 손을 들어 태경의 어깨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태자가 하하, 하고 소리 내어 웃더니 태윤의 손을 말끔히 잡아 내렸다.
“걱정 마.”
제 동생을 몹시 걱정하는 눈으로 보는데, 태경은 정작 거리낌 없이 이세희를 훑었다. 태경의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곳에 이세희가 서 있었다. 그는 황제의 품에 억지로 안겨 황제를 보고 있었는데, 황제는 연신 손으로 이세희의 허리와 엉덩이 부근을 더듬었다. 성에 자유분방한 나라라, 대신들도 황제를 따라 제 애첩이나 아내를 매만지며 즐거운 웃음을 흘렸다. 모두가 행복해 보이는 이곳에 태윤만 모멸감에 눈에 칼날을 머금었다.
“내가 태자니까.”
태윤은 참을 수 없었다. 아버지도 모자라, 제 동생까지? 이세희를 넘보는 자들이 많아 머리와 가슴이 동시에 터질 것 같았다. 이 자식이 미쳤나. 입안에서 욕지거리가 넘치는데, 태경은 태연하게 태윤의 어깨를 잡으며, 태윤에게만 속삭였다.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정말이야.”
“…전하,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태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고개를 더 바짝 숙여 태윤의 귀에 대고 태자가 입술을 움직여 나지막이 말했다.
“형님도 제 것이 될 텐데, 화비도 제 것이 될 자격이 있지요. 제가 황제가 될 테니까요.”
태자의 덧붙임에 태윤은 이를 악물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들어 피가 흐르고 있었다.
*
황후와 비들은 더위에 사냥을 하기 싫다며, 막사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태윤의 빛바랜 과거 속의 황후는 사냥을 즐기던 호쾌한 여성이었다. 어린 태경을 데리고 같이 사냥터를 뛰어놀던 황후가 사냥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가 명확하였다.
눈앞에 있는 이세희 때문이었다. 그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황제의 총애가 뿌리가 썩을 정도로 집요하게 내리니 그녀들이 사냥을 꺼리는 것도 이해가 갔다. 태윤은 단전부터 올라오는 쓴맛을 삼키며, 시선을 앞으로 고정하였다. 말의 꼬리처럼, 길게 늘어뜨려져 흔들거리는 이세희의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는 살이 언뜻 비치는 얇은 백색 행복을 입고 있어, 팔을 움직일 때마다 살결이 비쳤다. 백자처럼 하얗고 매끄러운 살이 보일 때마다 태윤은 연신 가슴이 울렁거려 입술을 다물고 있었다. 얼굴이 제발 달아오르질 않길 바라며, 조심스럽게 이세희의 뒤를 따라붙었다. 앞으로 기울어진 나뭇가지를 손으로 밀치던 이세희가 걸음을 멈추었다. 태윤도 덩달아 걸음을 멈추고 그를 빤히 보았다.
이세희가 뒷목을 주물렀다. 검은 머리카락이 옆으로 기울어지며, 그가 뒷목을 능숙하게 주무르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였다. 힘줄이 툭툭 불거진 하얀 손이 설원 같은 목을 문지르는 모습이 어찌나 농염하던지, 눈이 절로 흔들렸다. 달린 것도 아닌데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뺨에 열이 올랐다. 태윤이 손등으로 척척한 뺨을 매만지는데, 이세희가 고개를 휙 돌렸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빠르게 돌아가며, 말끔한 눈이 드러나자 태윤이 당황한 듯 눈을 모로 돌렸다.
“제가 착각하는 게 아니라면.”
이세희가 뜬금없이 운을 떼었다. 태윤은 손바닥에 맺히는 긴장감에 숨을 멈추었다. 그의 예리한 시선이 심장을 바짝 조인다. 태윤이 눈을 억지로 힘을 주고 바라보자 이세희가 아예 허리를 반듯하게 세웠다. 삐딱하게 서서 팔짱을 낀 이세희가 빈정거리며 말을 이었다.
“뭐 마려운 개새끼처럼 절 보시는데.”
태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황궁에 약 사 년간 있었어도 이세희의 거친 입은 다듬어지지 않은 듯했다. 황제가 알면 난리가 날 입버릇에 태윤이 움찔거리는데, 이세희는 거리낌 없이 입을 열었다.
“그럴 거면 그 자리 다른 사람에게 주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이러다가 절 지키는 게 아니라, 정말 개새끼처럼 저에게….”
“제가 그럴 사람으로 보입니까?”
억울함에 태윤이 소리를 높여 물었다. 이세희는 눈을 깜박이며 잠깐 고민에 사로잡히는 듯하더니,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그렇게 보이는데, 내 눈에는. 아비나, 자식이나.”
이세희가 말끝을 웃음으로 뭉갰다. 태윤은 할 말이 없어, 입술을 혀로 핥았다. 잘 익은 밀색 같은 피부에 대비되는 붉은 입술과 혀를 빤히 보던 이세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짧게 침음한 이세희가 손으로 턱을 매만졌다.
눈빛이 수상한데, 또 이리 마주 보니 멀쩡했다. 반듯하기 이를 데 없는 눈이 시비를 걸어도 강아지처럼 구니, 딱히 빈정거릴 게 없었다. 이세희는 깔끔하게 포기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라면 말고.”
그러더니 태윤을 두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태윤은 다리가 길어 보폭이 넓기 때문에, 금세 시야에서 사라지는 이세희를 쫓아 걸음을 빨리했다.
날 그렇게 보지 말라고 그에게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입에 담았던 수많은 말들을 떠밀려 사라졌다. 그 자리에 남은 건, 그를 향해 뛰는 가슴이었다. 태윤은 그만 보면 할 말을 잊어버려, 우물거리고 마는 자신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이 백치가 된 것 같아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오늘도 그에게 난 아버지와 다르다, 그러니 믿어 달라, 라고 애원하지 못했다. 나날이 미움만 축적된다. 아까도 자신을 향한, 형체가 또렷한 분노를 실감하며 태윤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대장님, 많이 더우십니까?”
뒤를 따르던 금군이 태윤의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태윤이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자, 금군이 걱정스러운 듯 보았다. 그의 시선이 뺨과 귀에 화살처럼 박혔다.
“열이 오르신 것 같습니다.”
“으응…. 좀 더워서 그런 것 같다.”
태윤이 뺨을 문지르며 어색하게 웃었다. 오늘 태자에게도, 금군에게도 지적당한 홍조에 입안 살을 깨물었다. 이러다가 이세희에게도 들키게 생겼다. 그가 알면 그날로 또 다른 천지개벽이었다. 그로 인해 열렸던 새로운 세상이, 이 마음 때문에 닫혀서는 안 되었다.
지금까지 애지중지 품어왔는데…. 들키는 순간, 모든 게 끝이라는 생각에 태윤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고백할 수 있는 상대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다면, 이리 마음에 짐을 얹은 것처럼 불안감과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하루하루가 가시밭길이었다. 가는 길에 살점이 뜯기고, 피가 흘렸지만 그를 곁에서나마 지켜볼 수 있으니 아픔은 가셨다. 지켜보는 것만 허락된 자리에 불과한 자신에게 걸맞는 아픔이었다. 그를 향한 마음이 더욱 커지면, 가시는 사정없이 자신을 찌르리라.
아버지의 말처럼 주제를 알아야 했다. 태윤은 흔들리는 시선에 그를 두려다가, 말았다. 이것조차 불온했다. 단지, 멀리서 지켜보고 이 마음을 금처럼 여겨야 했다.
아버지가, 그리고 태자마저 그를 원한다. 그는 너무 아름답고, 수려하니까. 그는 아버지가 절벽 끝에서 꺾어온 귀한 꽃이었다. 태자 또한 그 꽃을 꺾길 바란다.
하지만 태윤은, 금방이라도 아스라이 스러질 것 같은 그를 보호해주고 싶었다. 귀해서가 아니었다. 그 존재 자체로 아름다웠다. 그래서 그 자리에 두고, 그를 품에 넣고 지켜주고 싶었다. 이조차 갈망이 되어 그를 괴롭힐까 봐 태윤은 속으로 묵직한 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이어지는 자신의 변덕에 쓰게 웃자, 금군이 지켜보다 조용히 속삭였다.
“대장님, 걱정 마십시오. 조금만 더 올라가면 계곡이 나옵니다. 마마도 멱을 감으실 터이니, 잠시나마 곁에서 얼굴을 씻으시지요. 그러면 더위가 가실 겁니다.”
태윤이 정말 더워서, 열이 올라 헐떡인다 생각했는지 금군이 설명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더운 여름이어서, 이 얼굴에 은근하게 떠오른 감정이 더위로 위장되어서. 태윤은 명치가 쓰라려 왔지만, 애써 참으며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내 주제나 알아야지. 내가 뭘 한다고.
자조적인 마음을 뒤섞인 한숨을 내쉰 태윤은 턱에 매달린 땀을 훔쳤다. 이세희는 목적지를 잘 아는지 뒤도 안 돌아보고 홀로 걸어갔다. 금군들과 살이 닿는 것을 싫어해, 그는 성인 네 명이 들어가도 충분한 간격을 두고 있었다. 황제에게 건의해 보았지만, 그는 이세희를 내버려 두란 말로 넘겨버렸다.
애초에 이 들판은 황제의 소유였고, 철저하게 관리되었다. 측면과 뒤가 높은 산으로 둘러싸였다. 지면은 탁 트였고, 넓어서 활동하기 편하지만 그 주변은 산세가 험해서 적이 침입하기가 힘들었다. 계곡은 바다로 이어졌는데, 그 길이가 꽤 되었다. 폭도 제법 되어 다리로 이어서 반대편 산으로 이어지게 만들었다. 계곡을 넘어가, 산을 타고 올라가면 아주 오래 전에 지은 별궁이 나온다. 혹, 산에서 길을 잃은 황족이 언제든 쉬어 갈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곳이었다. 다른 궁에 비해 매우 아담한 편이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의 궁이었지만, 있을 건 다 있는 궁이라 간혹 산을 오르다 힘들면 쉬어 가는 곳이었다.
아마 이세희는 그곳에 가려는 모양이었다. 황제는 황후의 절일을 맞아 같이 사냥을 하자고 은근히 유혹했으나, 이세희는 시큰둥했다. 이세희는 덥다는 핑계로 그의 품에서 떨어져 나와, 멱을 감고 싶다고 청했다. 황제는 영 시원찮은 이세희의 반응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세희가 자신의 곁을 떠나는 게 매우 싫다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이세희가 하품까지 해가며 지루하다는 표정을 보이자, 고개를 저었다. 건방지기는. 혀까지 차며 정색했으나 이세희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히려 어깨를 으쓱이며 그를 도발하기까지 했다. 황후의 탄생을 기념하는 절일이다 보니, 황제는 표정을 싸늘히 해도 화를 내진 않았다. 그래도 나름 황후의 지아비라고, 황후를 신경 쓰는 눈치였다.
‘멀리 가지 말거라. 그곳에서 멱을 감고, 다른 사내들 앞에서 살을 보여주지 말도록.’
짤막하게 명을 내린 황제가 등을 돌렸다. 이세희는 금군들을 사내로 보고 경계하는 황제를 보며 코웃음 쳤다. 차갑게 퍼져가는 그의 미소에 긴장감만 팽팽해졌다. 태윤은 달콤함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아버지와 이세희의 관계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가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는 게, 이 비참한 사랑의 유일한 피난처였다.
“그런데 정말 끈적하게 덥습니다. 얼른 비가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같이 길을 걷던 금군은 살갗에 달라붙는 습기에 투덜거렸다. 태윤도 동감하는 바였다. 비가 올 듯, 말 듯한 날씨에 습기만 더욱 기승을 부렸다. 금군은 목 부근의 옷을 잡고 펄럭거렸다. 그러나 시원해지긴커녕, 더위가 훅 밀고 올라왔다.
“저희도 마마 근처에서 멱을 감을까요?”
아직 어린 금군이 절실하게 물었다. 계곡까지 올라가는 산세가 험하니, 더위가 푹푹 찔러 멱을 감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태윤은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그러다간 폐하께서….”
금군들은 화비 곁에서 같이 멱을 감다가, 황제에게 들켜 목이 날아가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목이 순식간에 겨울이 온 것처럼 싸늘해졌다. 마른침을 삼킨 금군들은 더 이상 멱을 감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빨리 산을 올라가, 계곡에서 손이나 얼굴이라도 씻길 바랐다. 더워도, 정말 심하게 더운 날씨에 태윤이 혀를 찼다. 가져온 물은 이제 바닥이 났다.
금군들은 더위에 시든 꽃처럼 픽픽 쓰러지는데, 이 사태의 중심인 이세희는 매우 차분했다. 더위도 타지 않는 건지, 쉬지 않고 걸음을 척척 옮겼다.
오히려 이 더위에 편해 보이는 건 자신의 착각일까. 습기가 잔뜩 자리 잡았지만, 가끔씩 선선하게 부는 바람에 그의 머리카락이 너울거렸다. 반듯하게 허리를 세우고도 아픔을 호소하지 않았다. 활을 느슨하게 쥔 손도 오랜만에 맛본 자유에 흥얼거리는 것처럼, 활을 만지작거렸다. 아주 잠시지만, 이 순간 주어진 자유에 마음을 놓는 그를 보자 마음이 편해졌다.
세상이 온통 그로 푸르다. 조금만 더, 욕심을 부려 이 순간이 오래 갔으면 좋겠다. 태윤은 수줍게 웃으며 속으로 소원을 빌어보았다.
녹음이 우거진 사이로, 그가 모습을 감추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계곡인지, 그의 걸음이 빨라진 것 같았다. 태윤도 따라서 빨리 가려 한 순간, 어린 금군이 “대장님, 제가 먼저 따라가 보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라며 호쾌하게 말하고 뛰듯이 걸었다. 그래, 그러려무나. 태윤이 다정하게 대답하며 웃었다.
“어억…!”
그러나 평화를 단숨에 깨는 화살이 날아와, 비명이 터졌다. 녹음 안으로 몸을 감춘 화비를 쫓기 위해 걸음을 다급히 움직이던 금군의 등에 화살이 꽂혔다. 소리도 없이 정확하게 꽂힌 화살에 태윤은 망설임 없이 앞으로 달려갔다.
“마마! 마마!”
뒤를 따르는 금군은 정확히 다섯 명이었다. 그들에게 호위를 맡기며, 태윤이 뛰는데 금군 한 명이 “대장님!” 하고 외치며 태윤을 감싸고 엎어졌다. 그리고 그 금군 위로 화살이 세 발이나 꽂혔다. 태윤은 자신의 위에서 으윽, 소리를 내며 죽어가는 금군을 흔들리는 눈으로 보다, 그를 단숨에 밀쳤다. 지금은 망설일 순간이 아니었다.
가장 최우선으로 지켜야 할 자가 있었다. 태윤은 달리기 전, 바르작거리는 금군의 옆구리와 등 곳곳에 꽂힌 화살을 살폈다. 화살이 짧고 가늘다. 보통 화살이 아니었다. 소리도 없는 걸 보아하니, 타국에서 사용하는 특수한 화살인 듯했다. 태윤은 낮게 포복하듯 걸어가 수풀 사이로 몸을 숨겼다. 입술을 깨물고, 숨을 다독이며 기어갔다. 옆을 보니, 금군 두 명이 무사히 쫓아온 듯 보였다. 안도의 숨을 삼킨 태윤은 눈을 번뜩이며 보폭을 좁게 하며 빨리 걸었다.
이세희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거지? 마마라고 소리 내어 부를 수도 없었다. 혹시나 앞에서 매복한 적에게 이세희가 당했을까 봐 걱정이 되어 가슴이 매섭게 떨렸다. 죽는 것보다 무서웠다.
안 돼, 라는 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숨이 혀끝에서 덜덜 움직였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왔으나 태윤은 정신력으로 버텼다. 수풀이 움직이면, 기척이 들통 나니 조심스럽게 움직이는데 옆에서 악, 하고 죽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예상대로, 금군이 조급하게 움직이다가 들통 났는지 죽은 모양이었다. 태윤은 그 자리에 멈춰서 숨을 골랐다.
여기서 적을 죽일까. 하지만 죽일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나 있을까.
태윤은 눈을 내리깔고, 자신이 쥔 활을 보다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앞에서 모든 공격을 무마한다 해도, 후미에서 공격을 퍼부으면 모든 게 끝이었다. 태윤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아주 천천히 화살 통으로 손을 뻗었다. 활을 느리게 빼어낸 태윤은 시위에 화살을 걸고, 숨을 죽였다.
그런데 갑자기 앞에서 비명이 터졌다. 위에 솟구치는 비명이 예사롭지 않았다. 누구의 것인지 몰라 머리로 헤매는데, 귀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걸렸다. 뒤에서 누군가 기척을 죽이고 걸어오고 있었다. 땅에 귀를 바짝 댄 태윤은 눈을 가늘게 뜨고, 수를 가늠했다.
그리 많지 않다. 뒤에 매복이 있을 테니까….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한 태윤은 발소리가 지척까지 닿았을 무렵, 몸을 벌떡 일으키고 활시위를 빠르게 당겼다.
“억!”
활은 바람을 쪼개며 날아가 다가오던 적의 목에 정확히 박혔다. 태윤의 눈은 매처럼 움직였다. 그의 눈이 살피는 곳은 그들의 뒤를 지켜주는 이가 숨은 곳이었다. 숨을 만한 곳이 어딜까. 찰나의 순간,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태윤은 숨을 만한 곳을 딱 한 군데 찾았다. 태윤은 그곳을 확인하기가 무섭게 몸을 낮췄다.
반대쪽에서 태윤처럼 적을 기다리고 있던 금군의 화살이 두 개가 날아갔다. 동시에 두 개의 화살을 쏴 적을 단번에 죽인 것이다. 팍, 하고 살에 화살이 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태윤은 다시 수풀에 몸을 숨기고, 시위를 당긴 후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입을 꾹 다물고 활시위를 놓았다. 활을 힘과 탄성으로 더 빠르게 날아가, 적이 매복한 나무 사이를 노렸다. 삼백 년이 묵은 나무가 딱 한 그루 있었다. 몸을 숨길 곳은 그곳밖에 없었다.
“으억…!”
태윤의 예상대로, 그곳에 매복했던 적은 화살에 맞고 위에서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태윤이 매복한 적을 공격한 사이, 금군은 세 명의 적과 대치하고 있었다.
태윤은 땅을 짚고 일어나 앞을 보며 뛰었다. 금군과 태윤은 짧은 사이, 서로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일한 그들은 눈빛으로 서로의 의사를 전했다. 금군은 홀로 후방을 맡아야 했고, 태윤은 이제 화비를 찾아야 했다.
마마, 하고 태윤은 속으로 외쳤다. 숨은 체력이 아니라, 불안에 흐트러졌다. 제발, 무사하길. 이 매복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오로지 머릿속에 이세희뿐이었다.
이세희가 무사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다. 이세희가 없는데, 이 세상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가.
태윤은 눈에 살기를 번뜩이며 화살을 꺼내 들었다. 보이는 즉시 모조리 죽여버릴 작정이었다.
이세희의 털끝 하나 건드렸다간, 사지를 가만두지 않으리라.
분노를 담금질하며 소리 없이 빠르게 뛰었다. 자기들이 날고 기는 암수라고 해도, 자신을 이길 수는 없었다. 자신이 황족 출신이라고 금군대장이 된 게 아니었다. 달리는 말 위에서도 백발백중으로 활을 쏘는 것은 물론이고 검이나 창으로 자신을 이길 자는 이 나라에 없었다. 소년 장수로도 유명해, 어린 나이부터 금군에서 활약한 자신을 우습게 여기다니.
좀 더 달리자,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숨을 차분하게 다스리며 눈을 옆으로 힐긋 돌리자, 아직 죽지 않은 자가 보였다. 그자의 얼굴을 스쳐가듯 본 태윤은 눈을 꿈틀거렸다.
저 자는…. 석연치 않은 기색으로 말을 삼킨 태윤은 단도를 꺼냈다. 슬금슬금 그자에게 다가가자, 그자가 핏물이 범벅이 된 입술을 빠끔거렸다.
“사, 살려….”
이세희를 죽이려 든 주제에 살려 달라고 빌고 있었다. 태윤은 무감한 눈을 깜박였다. 말없이 단도를 치켜세운 태윤은, 반대편 손으로 그의 입을 막고 단번에 단도를 찔러 넣었다. 그자가 파들거리다 몸을 축 늘어뜨렸다.
허리를 숙여 전진했다. 물소리가 더 심하게 귓전을 때렸다. 마찰하는 소리가 시원하다. 이세희가 찾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세희도 여기에 있을까. 희망에 가슴을 쿵쿵 뛰며 다가가는데 이세희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하하, 하고 물소리처럼 시원하게 터지는 웃음소리에 태윤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런 와중에도 그만 느끼면 가슴이 뛰니, 큰일이었다. 태윤은 나무에 몸을 숨긴 상태로 눈을 흘겼다. 이세희의 행복이 나부끼는게 보였다.
“죽는 건 상관없어.”
이세희가 나른한 어투로 중얼거렸다. 태윤은 너무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벌벌 떨었다. 죽는 게 상관없다니! 태윤은 죽지 말라고, 그의 발치에 엎드려 빌고 싶은 마음에 몸을 바로 틀었다. 그건 확실히 잘못된 선택이었다. 길목에서 몸을 드러낸 태윤을 발견한 이세희가 얼굴을 찌푸렸다. 태윤은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었다. 적은 다섯 명이었다. 한 명은 대신이었고, 남은 네 명은 암수였다. 대신은 검을 이세희를 향해 치켜세우며 위엄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 얼굴로 폐하를 홀리다 못해, 이 나라의 조정을 망치려 들다니! 죽어 마땅한데도 어디서 얼굴을 빳빳하게 치켜드는 것이냐!”
대신의 호통에 이세희가 귀를 후비적거렸다. 지루하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안 했어. 황제 혼자 미쳐서 달려든 거지.”
대신은 그 소리에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더니, 검을 쥔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가, 감히! 폐하께 미, 미쳤다는 말을…!”
이세희의 얼굴에 요염한 미소가 머물렀다. 대신은 경국지색, 천하의 절세미인이란 수식어가 어울리는 얼굴에 퍼져가는 미소에 멍한 눈을 깜박였다. 이세희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홀로 중얼거렸다.
“멀쩡히 살아가던 날 강간한 건, 네가 모시는 황제라고. 내가 잘못한 게 아니야.”
그러면서 이세희는 차가운 얼굴로 태윤을 보며 이죽거렸다. 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주 천천히, 살금살금 걸어가 이세희를 보며 고간을 만지작거리는 놈을 노렸다. 태윤이 두 손을 뻗는데 이세희가 대신을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모든 건 황제가 잘못한 거지. 죽이고 싶으면 황제를 죽여. 너희들이 애지중지 모시는 황제가 발정 나서 날 이렇게 만든 거니까.”
이세희의 화려한 아름다움에 홀렸던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모멸감에 그가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이놈이 끝까지 반성을 못 하고! 여봐라, 어서 저 놈을 죽여라!”
암수들은 이세희를 겁간하고 싶어 안달 난 눈을 번들거렸다. 이세희는 너무나 익숙하고, 지겨운 발정 난 눈에 실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그래도 난 너희들한테 죽기 싫거든.”
웃음에 뒤섞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태윤이 피 묻은 단도로 암수의 목을 거침없이 찔렀다. 푹, 소리와 함께 피가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대신이 놀라 뒤를 돌아보자, 이세희는 기다렸다는 듯 들고 있던 활에 화살을 걸고 빠르게 당겼다. 오로지 힘으로 당기는 솜씨에 태윤이 눈을 깜박거렸다. 활을 잘 다루지 못하지만, 힘만은 우세한 이세희가 가볍게 시위를 당기고, 놓아 대신의 팔을 맞추었다.
“아악! 저, 저…! 저 요망한 놈이! 어서 저 놈을…!”
대신이 태윤과 화비를 돌아보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으나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태윤이 그를 용서치 못했다. 활을 한 손에 들고, 반대편 손에 검을 든 태윤은 대신의 목을 그어버렸다. 그의 목에서 살점이 떨어지며 피가 계곡물처럼 흘러내렸다. 암수들은 대신이 한 순간에 죽어버리자, 놀란 듯 태윤을 보았다. 그 사이에 이세희의 시선이 섞여 있었다. 이세희는 쏟아지는 더위 속에서 숨을 흘리며, 태윤을 보고 고혹적인 눈웃음을 지었다. 가슴이 뛰었다. 그가 자신의 가슴에서 달음박질을 하듯,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를 살리고 싶다. 여기서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감히! 네까짓 것들이!”
태윤이 소리를 내지르며 활까지 내던지고, 두 손으로 검을 쥐고 암수들에게 달려들었다. 이세희는 흥미로운 상황에 예쁘게 웃다가, 다가오는 적을 보고 혀를 찼다. 그 적은 이세희의 수려한 얼굴에 침을 꼴깍 삼키고, 아래를 치켜세우고 있었다.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얼굴을 구긴 이세희는 허리를 더듬었으나, 검이 없었다. 황제가 허락한 건 활뿐이었다. 이런, 하고 혀를 차며 이세희가 뒷걸음질 쳤다.
“하여간, 그놈 주변엔 저런 병신들만 넘치지.”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계속 뒤로 걸어가던 이세희가 자갈에 걸려 넘어졌다. 그 틈을 다가오던 적이 무표정한 얼굴의 이세희를 덮치려는 찰나, 그의 상체를 검이 뚫고 나왔다. 적은 신음 한번 내지 못하고 검에 꿰뚫려 파르르 떨었다.
“하아….”
적의 피를 뒤집어쓴 태윤이 눈을 반쯤 뜨고, 이세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후우, 후우, 거칠게 숨을 내쉰 태윤이 턱에 매달린 땀과 피를 닦아내며 이세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계곡 앞, 자갈밭에 우두커니 앉아있던 이세희는 눈을 깜박거렸다. 긴 속눈썹이 나비처럼 팔랑거리며 날아가, 태윤의 가슴께에 앉았다. 가슴에 불티가 마구잡이로 튀어 올라, 불이 커질 것 같았다.
어서 비가 내려 식었으면. 이 불씨는 장마가 내려야 멈출 텐데.
“마마.”
태윤이 손가락 끝을 까닥였다. 피가 뚝뚝 떨어졌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태윤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이세희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 절치부심으로 적을 죽인 태윤을 보고 허무하게 웃었다. 태윤은 자신의 바람과 다르게, 입술에 퍼져가는 자조적인 미소에 몸을 비틀거렸다.
“마마….”
태윤이 눈을 스르륵 감았다. 피가 물에 씻겨 내려갔다. 비가 내리는 것인가. 하지만 자신의 위로 물은 쏟아지지 않았다.
“마마,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울음기 섞인 목소리에 이세희는 그제야 알아챘다. 태윤이 울고 있었다. 자갈밭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말이다. 두 손을 자갈에 둔 태윤은 머리를 박으며, 이세희에게 빌었다.
“마마, 살아주십시오…. 제발….”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이세희가 멍하니 물었다. 오늘이 기회였다. 죽을 수 있는 기회는 오늘뿐이라, 모두를 내치고 절벽에 올라가 몸을 던질 생각이었다. 암수들도 자신을 노리니, 자살이 아니라 타살처럼 위장해 죽을 수 있었다. 자신의 계획을 무참히 깬 태윤을 보며 이세희는 울컥 올라오는 뜨거운 덩어리를 삼켰다.
“내가 왜 살아야 하는데?”
태윤은 고개를 들었다. 피로 범벅이 된 얼굴 속에서 눈이 반질반질 빛났다. 계곡 틈 사이에서, 물의 마찰에 의해 깎여 예뻐진 돌처럼 태윤의 눈이 반짝거렸다. 태윤의 눈은 눈물을 매단 채, 아래로 내려와 이세희의 목을 보았다. 목에 그어진 자상을 다시금 확인한 태윤은 이를 으스러지도록 깨물더니, 서럽게 울음을 터트렸다.
“…제가 싫습니다.”
태윤이 손등으로 입가를 막으며 끅끅거렸다. 이미 반쯤 정신이 나갔는지, 태윤이 몸을 덜덜 떨었다. 무서워서였다. 이세희가 정말 죽을까 봐, 무서워서 태윤은 떨고 있었다. 그 사실이 자신에게도 전해지자 이세희는 비웃던 입을 천천히 닫았다.
“제가, 마마를 좋아합니다.”
이세희는 난데없는 고백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태윤만 물끄러미 보는데 태윤이 여전히 자갈밭에 무릎을 꿇은 채 울음을 뚝뚝 흘렸다. 황제와 닮은 얼굴로, 혼난 강아지처럼 처량 맞게 운다. 그러면서 자신이 내칠까 봐 두려워 눈치를 살핀다.
그게 영락없이 어린 청년이었다. 그러고 보니, 무뚝뚝하고 차갑게 보여도 자신보다 어린 동생이었다. 그 사실을 새삼 자각한 이세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태윤은 이세희가 자결하려는 결심을 조금 놓는 걸 보자, 허겁지겁 일어나 손을 다시 뻗었다.
“제, 제가 잡아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떨면서 날 어떻게 잡아준다고.”
그러자 태윤이 고개를 저으며, 확고한 눈으로 이세희를 보았다.
“이제는 안 떱니다. 보십시오.”
시선을 위로 올려, 피로 물든 손을 보았다. 정말 손이 안 떨렸다. 태윤이 억지로 힘을 주고 있는 것이었다.
“제 손을 잡으십시오.”
정말 자신이 살길 바라는 눈과 목소리였다. 문득 이세희는 고개를 더 올려 하늘을 보았다. 하늘이 말갛더니, 어느새 먹구름이 스산하게 드리워져 있다.
장마가 올 기미가 보였다. 이세희는 짧게 침음하더니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태윤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태윤을 슬그머니 잡았다.
황제의 아들의 손은 매우 따스하고, 척척했다. 피 때문이었지만,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냥 정말 잡고만 있는 수준이었는데 태윤은 이세희가 닿자마자, 힘을 주어 자신 쪽으로 당겼다. 이세희가 비틀거리며 일어나자, 태윤이 피투성이 몸으로 다가와 이세희를 안았다.
이세희는 자신의 품에서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우는 태윤을 어이없는 눈으로 보았다.
“흐으, 마마…. 마마 죽지 마십시오. 저 두고 가지 마십시오…. 가시면 안 됩니다.”
“그만 울어, 좀.”
너무 시끄럽잖아. 이세희는 투덜거리며 태윤의 등을 조금씩 다독였다. 눈으로 먹구름의 농도를 살피던 이세희는 어느 순간, 태윤의 등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머뭇거림은 태윤의 눈물에 따라 사라졌다. 이세희는 태윤의 몸을 완전히 가릴 것처럼 폭 안고서, 한참이나 어르고 달랬다.
*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지. 나는 오늘 죽을 생각이었는데…. 이세희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목욕탕 안에서 코까지 물에 잠근 상태로 눈을 내리떴다. 숨을 뱉고, 내쉴 때마다 방울이 뽀글뽀글 올라왔다. 장난스럽게 몇 번이나 방울 만들기를 반복하던 이세희는 숨이 부족해져 고개를 들어 올렸다. 태윤이 정성껏 데운 물로 인해, 수증기가 어리는 게 생생히 보였다. 이세희는 목욕탕 난간 쪽에 몸을 기대고서 고개를 뒤로 젖혔다.
창가에선 지면을 채찍처럼 때리는 빗소리가 들린다. 피부에 달라붙던 습기가 심상치 않더니, 장마가 시작되었다. 신기하게도 장마가 시작되니 습기는 가시고, 그 자리에 냉각된 공기가 자리 잡았다. 눈을 반쯤 내리감은 이세희는 옅은 수증기에 어리는 울먹거리는 얼굴에 숨을 굳혔다. 죽지 말아 달라고, 어깨를 떨어대며 울던 황제와 똑같이 생긴 얼굴.
하지만 눈을 잔뜩 일그러뜨리면서도 자신을 놓지 못하던 시선에 이세희의 동공이 잘게 떨렸다. 자신을 흠뻑 적시는 그 애틋한 시선에 턱을 괸 이세희는 짜증 섞인 손짓으로 얼굴을 매만졌다.
그 시선의 종착지가 자신이었다. 늘 느껴지던 그 뜨뜻하면서도, 식은 듯한 애정이 수상해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는데, 예상이 들어맞았다.
처음에는 황제와 같은 발정인 줄 알았다. 황궁에서 머물면서 몇 번이나 보았던 시선이라, 으레 그런 줄 알았으나 자신의 상상과 묘하게 빗겨 나갔다. 눈물이 어룽거리던 그 눈은 낯선 것이라, 어떻게 정의를 내릴지 몰랐다.
자신을 좋아하지만, 탐내하는 눈은 아니었다. 그 눈을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덧그려보던 이세희는 몸을 일으켰다.
죽지 말라고 애원하던 음성이 귀에 맺히다 못해, 가슴속에 응결되었는지 떠나질 않는다. 죽으면 저승까지 쫓아와 왜 자길 두고 갔느냐고 매달릴 놈이었다. 귀찮아서 죽지도 못하겠군. 이세희는 어깨를 떨며 웃었다.
정말 살아도 될까, 이런 몸으로…. 가족들 때문에 죽지 못해 억지로 생을 듬성듬성 이어가던 삶이었다. 이젠 다 지겨웠다. 너무 어린 세연이 걱정이었으나, 어차피 세연은 자신을 잊었으니 미련 없이 생을 떠날 참이었다.
그랬더니 그 빈자리를 태윤이라는 수상하고 모호한 자가 자리 잡았다. 세연이도 아니면서, 순진한 척 굴고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입가를 피투성이 손으로 가리고 훌쩍거리던 게, 어찌나 발목을 잡던지 두고 오지 못했다. 그냥 두고 계곡에 몸이나 던져버릴까, 생각하고 실행하려 하자 태윤이 옷깃을 슬며시 잡고 놔주지 않았다. 이세희가 어이가 없어서 빤히 쳐다만 보자, 울음을 삼키며 옷깃만 꼭 쥐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게 아닌가. 거기서 손을 뿌리치고 죽었어야 했는데, 처량 맞은 그 눈이 눈밭에 처음 난 발자국처럼 선명해 두질 못했다. 또 시작된 자신의 미련에 이세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성격 때문에 황제에게 질질 끌려왔는데, 이젠 그 자식과….
“미쳤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고개를 휘저어 막은 이세희는 몸을 천으로 닦아내고 밖으로 나갔다. 장마 때문에 어둠이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침전에 태윤이 서 있었다. 어둑어둑한 창밖을 바라보는 뒷모습은 굳건했다. 금군대장답게 훤칠한 모습에 이세희는 팔짱을 꼈다.
아무리 보아도 황제였다. 자신을 범하던 자가 떠올라, 절로 욕지기가 치밀었다. 역시, 저런 놈의 손을 잡고 별궁에 오는 게 아니었다. 그것도 적이 별궁에 올까 봐 다리까지 끊어 놨으니, 장마가 끊길 때까지 이곳에 있어야 했다. 자신에게 욕을 퍼부으며 걸음을 옮기는데, 발바닥과 바닥이 달라붙었다가 떨어지는 소리에 태윤이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태윤의 차분한 시선이 정확히 이세희를 뚫었다. 어둠 속에서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태윤의 눈빛에 이세희는 입술을 닫았다.
태윤은 어둠이 물들었으나, 더욱 하얗게 도드라지는 이세희의 얼굴에 가슴이 두근거려 눈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숨이 떨린다. 그리고 숨에 따라, 가슴도 주체할 수 없이 달린다. 질주는 시작되었다. 태윤은 이 질주의 끝을 알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어둠이 주인이 된 침전에 아버지의 애첩과 단둘이 되니 기분이 묘하게 달아올라, 자꾸만 감각이 예민해졌다.
혼자 너무 앞서간 걸까. 차가운 물로 씻은 몸이 긴장으로 더 차갑게 식어갔다. 그에 비해 심장은 한계가 없이 달아올랐다. 이 열기가 혈관까지 데우기 전에 도망가야 했다.
“왜 이렇게 차가워.”
이세희의 뜨거운 손바닥이 뺨에 닿았다. 태윤이 흠칫 놀라 눈을 위로 들어 올렸다. 언제 다가왔는지, 이세희가 무감한 눈으로 자신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태윤은 두 뺨을 감싸고 광대 근처에서 꺼진 눈가를 지분거리는 엄지에 눈을 굴렸다. 이세희를 차마 볼 수 없어서 시선을 내린 것인데, 쭉 뻗은 이세희의 다리가 보였다. 다리가 길고 상앗빛으로 예뻤다.
“…차가워.”
이세희가 습기 어린 목소리로, 느릿하게 내뱉었다. 물에 젖은 체취가 확 쏟아지며 그의 음성이 나부꼈다. 태윤이 떨리는 눈으로 그를 보자, 이세희가 눈을 내리깔고 태윤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에 열이 고였다. 혼란스러움이 밀려와 태윤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당신이 왜 날 그리 보느냐고, 묻고 싶은 입술에 말랑한 촉감이 느껴졌다. 태윤의 눈은 아무것도 몰라 깜박거렸다. 능숙하게 눈을 반쯤 감은 이세희가 입술을 벌려 태윤의 말캉하고 부드러운 입술을 삼켰다. 아랫입술의 도톰한 살점이 안으로 빨려들고, 이세희의 이 사이에 물렸다. 따끔한 통증에 드디어 태윤은 자신이 무슨 짓을 당했는지 깨닫고 눈을 떴다.
“아…!”
아버지의 애첩과 입을 맞추었다.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거칠게 이세희를 밀어냈다. 숨과 함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태윤이 손을 들어 입술을 가리고, 마구 떨리는 눈으로 이세희를 보았다.
그러자 이세희가 붉은 입술을 느릿하게 올려 웃었다.
“이제 따뜻해?”
“예…?”
태윤이 멍청하게 되묻자, 이세희가 손에 힘을 줘 태윤을 당기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뜨겁게 해줄까?”
“그게 무슨….”
전혀 뜻을 몰라, 태윤이 눈을 깜박거리며 의문을 표하자 이세희가 말없이 태윤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손을 맞잡더니, 고개를 숙여 다시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압력에 의해 빨려 들어갔다. 태윤이 서서히 눈을 크게 뜨면서도,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자 이세희가 입술을 서서히 떼어냈다. 그리고는 자신의 타액으로 물든 그곳에 입을 쪽, 맞추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눈 감고 입 벌려.”
태윤이 마른침을 삼켰다. 이세희는 반대편 손으로 태윤의 뺨을 덧그려 만지며, 고개를 차츰 가까이 대었다.
“춥잖아.”
“…마마도…. 춥습니까?”
태윤이 용기를 내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이세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더니, 말없이 두 눈을 휘어 웃었다. 그의 얼굴에 퍼지는 미소에 태윤의 눈이 한 순간에 멍해졌다. 너무 아름다워…. 탄성을 내지르듯 중얼거렸다. 이세희는 자신을 보며 물기 어린 입술을 엄지로 매만지며 대답했다.
“나도 추워.”
이세희가 눈을 내리감으며 입을 맞추었다. 세 번째 입맞춤에 이르러서야 태윤도 눈을 감고, 입을 벌렸다. 제정신을 다 잡고 겸허히 받아들인 입술은 촉촉하고, 말랑거렸다. 온기가 감도는 입술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그리고 벌어진 입안으로 들어오는 혀는 불길을 머금은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선, 점막을 이리 민감하게 태울 리가 없었다.
“음….”
태윤은 입천장을 긁고, 혀를 옭아매는 살덩이에 숨을 흐트러트렸다. 숨이 이상하게 자꾸만 차올랐다. 그의 혀가 입안을 제 공간인 것처럼 드나들자 마찰에 의해 타액이 고였다. 이걸 뱉어야 할지, 삼켜야 할지 몰라 눈을 파르르 떨었다. 열기가 피어오르는 맞닿은 입술에서 웃음이 흘러, 입술을 매만졌다. 그 감촉이 어찌나 간지럽던지, 태윤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떼어내고 숨을 헐떡였다. 반쯤 벌어진 입술에서 타액이 주르륵 흐르자, 이세희가 엄지로 타액을 뭉개듯 닦아주었다.
“마마, 이, 이상합니다.”
태윤이 조르듯 매달리자, 이세희가 태윤의 허리에 감은 팔에 힘을 더 주었다, 자신에게 기대라는 듯, 덜덜 떨리는 태윤의 팔을 잡아 끌어 자신의 목에 두르게 했다. 그의 능수능란함에 태윤은 입에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반사적인 행동에 이세희가 눈웃음을 짓더니,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렇게 삼키면 돼. 알았지?”
이세희가 어린아이에게 글을 가르치듯, 차분하고 상냥한 어조로 알려주었다. 태윤은 이미 반쯤 쾌락에 동한 눈을 깜박거렸다. 그저 이세희와 살이 맞닿고, 안겨 있는 것만으로도 날아갈 듯 좋아서 머리에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머리가 이세희로 모두 물들었다. 그 무엇도 존재할 수 없는 낙원이 되었다. 태윤은 칭얼거리듯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말없이 웃음을 덧그린 이세희는 태윤의 열이 오른 뺨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너 더워서 얼굴 빨개진 거 아니었구나.”
막사 안에서 뙤약볕 중앙에 있던 태윤을 보았다. 건강하게 잘 탄 피부가 묘하게 붉었다. 태자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마다, 웃으면서도 자신을 흘기는 시선 끝은 흔들거리기도 했다. 그 시선은 심지어 빨리 떨어지지 않고, 햇볕 속에서도 도드라지게 빛나며 자신을 이끌었다. 마치 자신을 보라는 듯 애정을 뿜어냈다.
이런 무분별한 애정은 처음이라 이세희는 당혹스러웠다. 자신의 의도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어둠의 주인인 것처럼, 듬직하게 서 있는 이 자를 황제가 의심해, 황제의 손으로 무너뜨리고 싶어서 접근했다. 춥다는 건 다 핑계였다. 태윤이야 오자마자 찬물로 대충 씻어서 추웠을 테지만, 자신은 태윤이 정성껏 데워준 물로 씻어 하나도 춥지 않았다.
오히려 더위가 한층 심해져 얇은 침의마저 벗고 싶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태윤으로 인한 열로 몸이 뜨뜻했다. 이세희는 발바닥까지 퍼진 열기에 미간을 찌푸렸다. 미소가 천천히 평온을 잃고, 본능으로 물들기 시작하자 태윤은 무력하게 끌려갔다.
“좋아서….”
태윤이 멍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이세희의 눈이 차츰 가늘어졌다. 짙푸른 어둠 속에서도, 노골적으로 붉어진 얼굴이 오롯이 자신을 향해 있었다. 도착지가 분명한 시선은 표창같이 날아들어 가슴에 박혔다. 처음에는 다분히 못된 의도로 입을 맞춘 것이었는데, 이리 열렬히 보자 난감함이 가슴을 간질거렸다.
죄의식이었다. 이세희는 황제를 거푸집으로 찍어낸 것처럼 닮은 아들이 보내는 시선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을 자신으로 망가뜨린다는 생각에 가슴이 조였다.
“마마, 좋아합니다. 정말입니다.”
이세희는 기습적으로 이어진 고백에 눈을 내리떴다. 태윤의 붉어진 뺨을 고급 장식품을 더듬는 것처럼, 섬세하게 매만졌다. 탄탄한 피부 밑에 고인 열이 터질 듯이 피부에 들러붙었다. 미성숙하고, 들뜬 고백처럼 풋내가 나는 열기에 이세희는 가슴이 자꾸 흔들려 머뭇거렸다. 이세희가 자신의 고백에 균열을 보이자, 태윤은 아예 산산조각 낼 기세로 고개를 들어 쐐기를 박았다.
“그냥…. 좋아하게만 해주세요. 더 안 바라지 않겠습니다. 전 그거면 되니까….”
처음의 의도와 방향이 달라져, 상황이 바뀌었다. 자신에게 은근히 치근덕거리는 무조건적인 애정이 귀찮아, 완전히 잘라버릴 생각이었다. 황제와 닮은 아들을 황제 대신으로 삼고 분노를 퍼붓고 싶었다. 그리고 태윤을 이용해, 태공에게도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싶었다. 그가 이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기에, 이 자가 자신을 건드리려 했다는 걸 보여 태공의 손으로 직접 아들을 죽이게 할 작정이었다.
태윤의 얼굴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단지 상상한 것에 불과했다. 그러기엔 감당해야 할 폭풍들이 너무 많았다. 자신은 가진 게 없는 천민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지켜줄 뒷배도 없었으니….
하지만 어둠을 가르며, 자신을 돌아보는 그 얼굴이 젊은 시절 황제를 떠올리게 해 가슴에 불이 일었다. 태윤의 잘못이 아닌 걸 알면서, 저 얼굴을 물려준 이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싶어 걸음을 옮겼다. 황제의 얼굴에 절규가 벼락같이 내려치는 걸 생각하면 기분이 미치도록 좋았다. 눈이 쾌감에 번들거렸다.
사랑하는 아들을 제 손으로 죽이고, 아들을 죽인 아비라는 호칭에 영원히 억눌린 황제를 생각하자, 손이 이미 뻗어진 후였다. 그리고 그의 뺨을 춥다는 핑계로 감싸고 입을 맞추었다. 머리는 차갑게 식어가고, 가슴은 분노로 뜨겁게 달아오를 무렵 그가 불쑥 고백을 한 것이다.
좋아한다고 말하더니, 이제는 좋아하는 마음만 간직하게 해달라고 부탁해왔다. 분노로 흐렸던 시야가 태윤의 앳된 고백에 점차 뚜렷해졌다. 걷잡을 수 없이 떨리는 이세희의 시선에 불안함을 느꼈는지, 태윤이 마른침을 삼켰다. 태윤의 목젖이 위아래로 느리게 움직였다. 이세희는 뺨을 어루만지던 손가락을 내려 그의 목을 더듬어 만졌다. 쿵, 쿵, 쿵, 자신을 향해 뛰는 맥박이 느껴졌다.
“정말 날 좋아해?”
이세희는 확신을 듣고 싶은 눈이었다. 그의 입술이 두려움에 젖어 떨렸다. 천하의 이세희가 슬쩍 겁을 먹은 듯한 모습에 태윤은 두 팔을 벌려 그를 와락 안았다. 귓전에 그의 가슴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연모하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거짓 따위는 없는 고백에 이세희는 그의 턱을 잡아 올렸다. 태윤의 눈가 아래를 엄지로 한 번 쓸어 보았다. 용감무쌍하게 고백한 것과 다르게, 얼굴은 홍시처럼 발갛게 익었다. 그 차이가 귀여워 이세희는 그만 웃고 말았다. 태윤은 그의 얼굴에 퍼져가는 낯선 미소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눈을 내리감으며 울먹거렸다.
저렇게 예쁘게 웃는 사람을, 아버지는 무참하게 밟았다. 자신이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아니, 상상조차 못할 정도로 예쁜 그를 보며 가슴이 설레고 아팠다. 보는 걸로 만족해야 했고, 지켜줄 수 없었다. 태윤이 우윽, 하고 울음을 토해내자 이세희는 웃음을 터트렸다.
“마마, 죄송합니다. 제가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분위기에 휩쓸려, 그에게 충동적으로 고백을 하고 만 태윤은 입가를 가리며 사과했다. 이 마음은 용서 받을 수 없으니까, 이제 감춰야 했다. 밤에만 품던 마음을 드러내다니. 아직 낮이었지만, 비가 많이 내려 밤처럼 느껴져 자신이 착각을 한 모양이었다. 태윤이 고개를 숙이고 도망가려 하자 이세희가 태윤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태윤이 눈을 천천히 위로 뜨자, 이세희가 고개를 대뜸 숙여 입을 맞추었다. 마마, 라고 말하던 젖은 음성이 이세희의 말캉한 혀에 밀려들어, 목젖까지 닿았다.
“으응….”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달콤한 소리가 울렸다. 이세희는 입을 좀 더 벌려 태윤의 입술을 힘을 줘 빨았다. 이세희의 붉은 입술에 빨려 들어간 입술이 이번엔 세게 깨물렸다. 아픔을 호소하며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 하자, 그가 힘을 슬슬 빼며 입술을 놔주었다.
“마마, 잠시…. 아읍…!”
연신 이어지는 입맞춤에 머리가 혼미해져, 태윤이 다급히 말하는데 이세희가 득달같이 쫓아왔다. 그의 혀가 이젠 집요하게 입안으로 들어와 타액을 빨았다. 그리고 자신의 타액을 입안으로 흘리며, 삼키길 종용했다. 태윤은 방금 전 그가 가르쳤던 대로 그의 타액인지, 자신의 타액인지 모르는 것을 느릿하게 삼켰다. 입천장을 긁고 점막을 더듬던 혀가 빠져나가더니 이세희의 숨이 마구 나부꼈다.
“여기에 너랑 나 둘뿐이야.”
그의 음성이 조급하게 느껴졌다. 늘 자신을 보며 경멸을 드러내던 눈에 욕구가 반들거리자, 태윤은 움찔거렸다. 무지해도 자신을 향해 곤두선 본능까지 모르진 않았다.
“마마, 마마는 아바마마의….”
“여기에 네 아버지가 있어?”
이세희가 거칠게 되물었다. 눈을 돌리지 않아도 대답할 수 있었다. 이곳에 아버지는 없었다. 주변은 장마로 인한 어둠이 자욱했다. 불을 켜지 않으면, 가까이 오지 않는 이상 형체를 제대로 분간할 수 없다. 그러니 여기서 입을 좀 더 맞추어도 상관없지 않을까. 여기엔 그의 말대로 자신과 그뿐이었다. 지금이 아니라면, 그의 입술을 맛보고, 그의 품에 안길 수 없었다. 한시적으로 허용되는 이 순간을, 있지도 않은 아버지 때문에 놓을 셈인가?
태윤은 자신의 뒷목을 더듬는 손길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버지의 애첩이잖아. 그런 생각이 머리에 들고, 눈을 뜬 순간 이세희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눈으로 자신을 직시했다. 설렘은 이제 설렘으로 머물지 않았다. 태윤은 손가락을 오므려, 그의 옷깃을 꽉 잡았다.
“그래.”
이세희가 착하다는 듯, 태윤에게 나긋하게 속삭이며 뒷목을 잡고, 자신 쪽으로 바짝 당겼다. 그의 시선이 뺨을 노골적으로 더듬어 피부가 더 뜨거워졌다. 그에게 집어삼켜진 것처럼 온몸에 끈적한 욕구가 달라붙었다.
“그렇게 하는 거야. 윤아.”
그가 불러주는 이름에 태윤은 가슴이 터져버리는 통증에 헉, 하고 숨을 내뱉었다. 이세희는 웃음을 흘리며 윤의 목을 더듬던 손을 내려, 척추를 타고 내려와 허리를 매만졌다.
“입맞춤도, 이런 것도 다 처음이지?”
이세희가 거칠고, 쉰 목소리로 물었다. 자신 때문에 그도 흥분한 것이다. 그 사실에 태윤은 자지에 열이 몰리고, 욱신거리며 아파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입을 열면 이세희로 달궈진 신음이 형편없이 나올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가 자신을 더럽게 볼까 봐. 아버지와 닮은 얼굴로, 이런 모습으로 그에게 발기하는 것도, 그에게 미움을 받을까 봐 태윤은 전전긍긍했다.
“대답해, 윤아. 내가 처음이야?”
“하읏, 네…. 마마, 처음입니다.”
그가 윤의 엉덩이를 잡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태윤은 목을 메이게 하는 눈빛에 눈을 감았다. 이번엔 눈꺼풀이 따가웠다.
“나도 처음이야.”
처음이라는 소리에 태윤이 의문을 가지고 위를 보았다. 그러자 그가 숨을 고르게 내쉬려고 노력하다가 자신과 시선이 맞닿자 입을 맞춰왔다. 고개를 틀어, 입술을 빨아들였다. 이세희는 너무 잘했다. 아버지가 입을 이렇게 맞췄겠지. 그를 품에 안고, 그가 원하지도 않는데 억지로 누르면서. 그가 이세희에게 하던 걸 생각하자 질투로 머리가 폭발할 것 같았다.
“앗…!”
그런 와중에 엉덩이로 손이 들어왔다. 뜨거운 손이, 차갑게 식은 엉덩이를 꽉 잡고 주물럭거렸다. 엉덩이를 잡고 벌려, 여리고 부드러운 회음부를 검지로 더듬었다. 오밀조밀하게 뭉쳐진 주름의 확인하려 드는 섬세한 손길에 태윤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세희는 의문을 표출하는 태윤의 시선에 예쁜 웃음으로 화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태윤은 그의 미소에 머리가 어지러워 바로 입을 열지 못했다. 이세희는 꽉 다물려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구멍을 매만지다, 아예 바지를 벗겼다. 차가운 공기가 종마 같은 허벅지를 스치자 태윤이 바르르 떨었다. 이세희는 자신으로 인해 경직된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쓸어 만지며 귀에 대고 나른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나도 처음이야.”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에게 처음이 되는 거야. 그렇게 덧붙인 이세희가 태윤의 귓불을 깨물었다. 여린 귓불에서 퍼지는 쾌감에 눈이 흐려졌다. 비가 너무 내려서일까. 아닌데, 여기엔 비가 내리지 않는데, 왜 물안개가 이는 것처럼 시야가 탁할까. 태윤은 귓불을 깨물던 이세희가 혀를 내밀어 귀를 핥자 하윽, 하고 달아오른 신음을 터트렸다. 등을 스치는 쾌감이 너무 소름이 끼쳐, 이세희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태윤의 사내다운 손등에 핏줄이 바짝 융기했다.
“괜찮아.”
이세희가 반대편 손을 내려, 태윤의 왼쪽 엉덩이를 잡아 벌리며 말했다.
“안 아프게 해 줄게.”
그가 말하자 왠지 믿음이 갔다. 이렇게 소중하게 대해주는 손길을 가진 그라면, 자신을 정말 아프게 하지 않을 것 같았다. 태윤은 그의 어깨에 턱을 올리고, 숨을 불규칙적으로 내쉬며 입술을 달싹였다.
“네, 마마.”
그리고 그를 범하는 건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에게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았고, 그가 자신의 얼굴을 보고 아버지를 떠올리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태윤은 착하게 대답하고서 그를 안았다. 이세희는 자신과 살을 맞대고, 가만히 안겨 심호흡을 하는 태윤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열에 들뜬 미소를 지었다.
“기분 좋을 거야, 윤아.”
“마, 마마가 해주시는 거라면 뭐든….”
태윤이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한한 신뢰, 애정을 아직도 마구 퍼붓는 윤을 보며 갈증을 드러냈다.
“나도 기분 좋을 거고.”
“마마가 좋으시다면, 전 더 좋습니다.”
더듬듯이 나오지만, 망설임 없이 흘러들어오는 말에 이세희는 눈을 감고 미소 지었다. 다시 피는 그의 미소가, 그의 아름다움을 절정에 이르게 한다. 아버지는 이 얼굴을 보지 못했다. 나만이 볼 수 있는 얼굴이었다. 그 사실이 머리를 스치자, 태윤은 참을 수 없는 욕정을 느꼈다. 어서 해달라는 듯 말없이 조르며 그의 손목을 잡아당기자 그가 입을 맞춰왔다. 차가운 공기가 금세 격렬하게 달아올랐다. 이세희는 태윤을 거의 먹어치우듯 입술을 빨고, 깨물다가, 기분 좋은 신음을 내뱉었다.
“우선, 빨아볼래?”
그렇게 말한 그는 태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래로 짓눌렀다. 무릎을 꿇으라는 그의 손짓에 태윤은 흥분이 감도는 얼굴로 바닥에 꿇어앉았다. 그가 손을 내려, 뺨을 감싸더니 엄지로 입술을 두드렸다. 열라는 뜻이었다. 태윤이 천천히 입을 벌려 그의 엄지를 삼키자 이세희가 왼손으로 머리를 어루만졌다.
“잘하네.”
그가 머리를 만지던 손을 내려 귀를 매만지며 웃었다. 이젠 엄지가 빠져나가고, 검지가 들어왔다. 마디가 불거져 나온 긴 손가락이 들어오자 목젖이 찔려 오심이 일었다. 태윤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도 끝까지 손가락을 삼키고 놓지 않자 이세희가 침을 삼켰다. 아래가 벌써 뻐근했다. 빨리, 저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어 울리고 싶었다. 가학심을 불러일으키는 순진무구한 눈이 벌써부터 붉게 물들었다. 습윤하게 젖은 검은 눈망울에 이세희가 담기자, 수면이 일렁거리며 파동이 퍼져 나갔다. 그걸 위에서 아래로, 빨아들이듯 응시하던 이세희는 입술을 짓씹으며 손가락을 하나 더 넣었다.
“아프지 않아야 하니까….”
머리가 쾌락에 둔해져, 손가락을 넣는지 몰라 눈을 깜박이던 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달래는 그의 목소리가 미풍처럼 부드럽고 따스했다. 아프지 않게 해 줄게. 정말이야. 이세희는 귓불을 매만지던 손을 얼굴 쪽으로 더 당겨, 뺨을 쓰다듬었다. 손가락 밑 피부에 엉겨붙는 체온이 좋았다. 처음에 뺨을 감쌌을 때는 얼굴처럼 차갑더니 어느새 이렇게 뜨거워졌다. 차근차근 달아오르는 게 아니라, 오로지 자신으로 인해 열병을 앓듯 뜨끈뜨끈해진 뺨을 만지자 이세희의 입술이 위로 올라갔다. 붉은 입술이 희열과 쾌감에 젖었다.
“진짜 넌 울리고 싶게 생겼어.”
이세희가 눅눅하게 젖은 목소리를 태윤의 얼굴 위로 흘렸다. 태윤은 얼굴을 와락 덮치는 끈적한 목소리와 공기에 숨을 헐떡이며, 좀 더 대범하게 손가락을 머금었다. 그를 기쁘게 하고 싶었다.
“흐읏…. 읍… 우읍….”
이세희의 입술이 더 벌어지며 고른 치열이 드러났다. 그리고 입이 벌어지더니, 그 사이에서 붉은 꽃잎 같은 혀가 나와 입술을 핥았다. 이세희는 자신의 손가락을 자지처럼 빠는 태윤을 보며, 아래가 달아올라 미간까지 찌푸렸다. 태윤의 눈이 황홀함에 사르르 풀렸다. 양 허벅지에 조신하게 올린 손이 쾌감을 못 이겨, 바들바들 떨렸다. 손등으로 힘줄이 솟았다가, 꺼졌다.
“흐응….”
태윤은 양 볼이 움푹 파일 정도로 힘을 주어, 이세희의 손가락을 빨아들였다. 그것도 모자라, 혀끝을 세워 단정한 손톱 밑을 핥았다. 여리고 약한 부근을 서툴지만 정성껏 빨아주는 혀 놀림에 이세희의 잇새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하아, 하읏….”
이세희의 눈가가 쾌감으로 붉었다. 그의 입술도 농염하게 익었다. 태윤은 그의 손가락이 목젖을 찌르고, 혓바닥을 집요하게 문지르자 오심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틀었다. 이세희의 손가락과 입술 사이에 타액이 다리처럼 이어졌다.
“흐으…. 하아….”
장막이 드리우듯 타액이 입술을 적시고, 턱에도 잔뜩 흘러넘쳤다. 태윤이 손등으로 타액을 슥, 닦으며 고개를 위로 올리자 이세희가 나른한 숨을 내쉬며 태윤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태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윽고 감겼다. 맺혔던 눈물이 이슬처럼 뺨에 궤적을 그리고 흘러내렸다. 너무 좋아서 가슴이 폭발할 지경이었다. 그가 하는 모든 게 다 쾌감으로 전이되었다. 태윤은 어리광을 부리는 것처럼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어가 그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심호흡을 하며 그의 체취를 빨아들였다. 향긋하고, 쾌청한 향이 코의 점막에 닿자 아래가 뻐근해졌다. 가슴의 박동이, 자지에서도 느껴졌다. 터질 것처럼 발기한 자지 때문에 아파와 태윤이 그의 다리를 끌어안고 헐떡였다.
“흐읏, 마마, 아…!”
이세희는 곱고 날씬한 발을 태윤의 다리 사이에 넣었다. 발등으로 고간을 더듬자, 바지를 뚫을 기세로 단단하게 선 자지가 느껴졌다. 발등으로 태윤의 자지를 매만지자 태윤의 숨이 넘어갈 듯 가파르게 변해갔다. 성적으로는 무지한지, 만지는 족족 반응했다.
“아아, 마, 마마…. 으읏, 그리하시면….”
지금도 고환 부근을 발가락으로 꾹, 누르자 태윤이 이세희의 허벅지에 얼굴을 대고 흐느꼈다. 너무 좋아서, 전율하듯 떨어댔다. 자신에게 듬직한 뒷모습을 보여주던 정갈한 무사가 쾌감에 들떠 무너져 내리니 이상야릇한 쾌감이 솟구쳤다. 더 울리고 싶다. 더 잔혹하게 굴리고, 울면 달래주고 싶었다. 울리고, 다정하게 대해주고, 안아주고…. 그리고 내치고 싶어지는 모순적인 감정이 오로지 태윤에게만 느껴졌다.
“아, 안 돼요, 그, 그렇게 하시면, 흐윽….”
그리고 사랑스러웠다. 멍한 눈에 애정을 가득 담고 뺨을 마구 비벼온다. 이런 자를, 그것도 황제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제 마음대로 범할 생각에 흥분으로 손끝이 떨려왔다. 이세희는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웃었다.
“앞으로 더 울어야 돼. 뚝.”
이세희가 다그치자 태윤이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태윤 때문에 흥분이 가중되었다. 태윤처럼 묵직하게 발기한 자지를 만진 이세희는 그를 일으켰다. 이제 참을 수 없었다. 이세희는 태윤의 손목을 잡고, 빠르게 침상으로 이동했다. 초가삼간처럼 작은 궁이라, 조금만 걸어도 침상이라 다행이었다. 이세희는 엄지로 태윤의 손등을 슬슬 어루만졌다. 힘줄이 울퉁불퉁하게 일어선 손이 거칠었다. 태윤으로 인해 뜨뜻해진 타액을 느리게 삼킨 이세희가 입을 열었다.
“그만해 달라고 해도 못 멈출 거 같아. 그래도 괜찮아?”
이세희가 열에 들뜬 얼굴로 물었다. 그가 무슨 의도로 말하는지 알고 감격을 한 듯, 수줍게 눈을 내리뜬 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직접 옷을 벗기 시작했다. 이세희는 적극적으로 나오는 태윤을 눈으로 훑었다. 어깨도 넓고, 상박도 두텁다. 얼굴과 달리 속살은 볕을 받지 못해 잘 익은 밀색이었다. 황제처럼 다부지고 우람한 느낌이 아니라, 날씬하면서도 탄탄한 느낌의 근육이 촘촘하게 짜여 있었다.
“…분홍색이네.”
툭 튀어나온 유두가 분홍색이라, 앙증맞고 귀여웠다. 빨고 싶게 생긴 유두를 탐욕스럽게 바라보자, 태윤이 잠시 주춤거렸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이세희와 동침할 수 있는, 하룻밤만 주어지는 달콤한 열락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태윤은 스스럼없이 자신의 몸을 보여주었다. 그 순간, 이세희는 태윤의 손목을 잡고 자신의 상체로 무너뜨렸다. 태윤이 아, 하고 짤막한 신음을 흘리자, 이세희는 근육으로 탄탄한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며 속삭였다.
“…네 아버지가 왜 그러는지 알 거 같아.”
그리고 그가 태윤의 뒷목을 잡아, 거칠게 입술을 눌러왔다. 입술이 허공에서 끈끈하게 뒤엉켰다. 마치 넝쿨처럼, 서로가 없으면 자라날 수 없는 초목같이 혀와 혀가 얽히고 타액이 고여 흘러내렸다. 누구의 타액인지도 모르는 것을 주저 없이 삼켰다. 입술을 떼어내자, 타액이 연결되어 축 늘어졌다. 입술을 혀로 핥아, 그걸 끊어낸 이세희는 붉게 달아오른 눈으로 태윤을 지그시 보았다.
“하지만 난 네 아버지랑 달라. 미치게, 기분 좋게 해줄 거야. 처음은 그래야 하는 거니까.”
이세희의 말에 태윤은 고개를 세게 끄덕이며, 그의 위에 올라탔다. 아버지와 이세희가 어떤 식으로 정사를 맺는지 알고 있었다. 이세희는 그러고 싶지 않다고,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가 자신을 그리 생각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감격스러웠다. 단 하루였지만, 이건 잊을 수 없는 전부가 될 것이다. 태윤은 그의 얼굴에 쪼듯이 입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저도… 아버지와 다릅니다.”
이세희의 눈이 가라앉았다. 자신의 얼굴을 보며, 아버지를 생각하는 이세희는 가장 먼저 선연한 분노를 드러냈다. 그건 자신이 아무리 잘한다 해도 가시질 않을 것이다. 지금도 자신을 완전히 믿지 못해 벽을 세우고 있었다. 입을 격렬하게 맞추고, 서로의 몸을 부대끼며 온기를 나누어 가졌어도 미처 주지 못한 한 공간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처음을 아프지 않게 해주겠다고 다짐하듯 이야기해주는 그가 좋았다. 그는 착하고 좋은 사내였다. 아버지에게 강간당하지만 않았다면, 훌륭하고 다정한 아버지가 되었으리라.
태윤은 그를 보며 조용히 웃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 퍼져가는 봄볕 같은 미소에 이세희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태윤은 자신의 뺨을 버릇처럼 어루만지는 그의 손목을 잡고, 그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딱딱한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좋아 뺨을 가만히 대고 있자, 이세희가 간신히 숨을 내쉬었다.
“…잊으면 안 돼.”
그와 눈을 마주쳤다. 이세희의 깊고 우수 어린 검은 눈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무엇을 두려워하는 걸까. 태윤은 그와 시선을 허공에 고정하고서, 입술을 내려 그의 손바닥에 조심스럽게 부딪쳤다. 탄력적인 피부를 통해 느껴지는 태윤의 애정이 너무 애틋하고 간지러워, 이세희의 손가락이 굽어들었다.
“네.”
태윤이 목이 메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이렇게 아름다우시니 잊을 수도 없을 겁니다.”
그 한마디에 이세희는 태윤의 어깨와 허리를 잡고 침상에 눕혔다. 태윤은 이미 이세희의 접근을 알아채고, 몸에 힘을 뺀 상태였다. 스스로 누워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침상에 태윤을 눕히고, 태윤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이세희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술이 닿은 곳은 분홍색이라고 이야기했던 유두였다. 태윤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으로 멀뚱히 깜박이다가, 여린 표피에 닿는 말캉하고 미적지근한 감촉에 눈을 크게 떴다.
“아…!”
추웁, 하고 이세희의 입술이 뾰족하게 곤두선 유두를 빨았다. 유두가 치아 사이에 잡혔다. 말랑한 유두가 반쯤 짓눌리자, 찌릿한 쾌감이 몸을 단번에 때렸다. 태윤은 생각 외로 진득하게 느껴지는 쾌감에 허리를 뒤틀었다.
“아, 이상…. 흐윽, 이상하…! 아!”
그때, 이세희가 태윤의 자지를 위에서 아래로 쓸어 만졌다. 자지 기둥에 손가락이 달라붙고, 혈관부터 민감하게 매만졌다. 태윤의 목소리가 점차 희미해졌다. 이세희의 손이 닿는 것만으로도 미치겠는데, 그가 능숙하게 자지를 귀두부터 고환까지 힘을 줘 만지자 몸이 덜덜 떨렸다. 태윤이 손을 뻗어 이세희의 머리카락을 잡으려다가, 눈을 들어 자신을 빤히 보는 시선에 손을 멈추었다. 이세희의 눈가가 온통 붉었다. 그리고 흰자위도 쾌감에 붉게 물들었다.
“하아, 마마, 워, 원래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건가요, 라고 물으려는데 그가 귀두를 힘껏 조이자 탁한 신음이 나왔다. 하으읏, 하고 태윤이 자지러지게 좋아하며 다리를 움찔거렸다. 이세희는 눈을 다시 내려뜨고, 태윤의 유두를 빨아들였다. 유륜까지 머금은 상태에서, 혀를 내밀어 톡톡 장난치듯 건드리자 태윤의 숨이 더 가파르게 변했다.
“아흑, 마마…!”
태윤의 요도에서 끈적한 액이 나와, 자지를 만질 때마다 탁, 탁, 하는 소리가 나왔다. 더불어 살과 살이 닿아 마찰하는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들렸다. 이세희는 양쪽 유두를 번갈아 가며 빨고, 물면서 태윤의 반응을 살피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흐트러진 숨이 붉어진 유두를 건드리자 몸이 파르르 떨렸다. 이렇게 좋은 적은 처음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자위를 하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으응…!”
그가 좀 더 손을 둥글게 오므려, 삽입한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 상태로, 위아래로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흥분으로 곤두선 혈관에 액이 마구 비벼졌다. 음모까지 그 액이 흘러넘칠 것 같은 끈끈한 소리가 태윤의 귀를 감쌌다. 태윤과 이세희의 숨이 동시에 조급해졌다. 뜨겁게 예열된 숨을 삼키고, 뱉길 반복했다. 태윤은 앞이 너무 부옇다는 생각을 했다. 이세희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면서 느끼고 싶었는데, 이세희의 손에서 느끼는 감각이 너무 강렬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아…!”
그 순간, 귀두를 감싸는 온기가 느껴졌다. 아주 부드럽고, 말랑한 점막이 자지를 덮었다. 태윤의 눈이 부릅떠졌다. 능수능란하게 자지를 덥석 물고, 힘껏 빨아들이는 힘에 세상이 하얗게 점멸했다. 하으으, 하고 덜덜 떨리는 신음을 뱉는 것과 함께 요도가 벌름거리며 하얀 액이 핏, 하고 터져나왔다. 이세희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입에 고인 정액을 머금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긴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며 고개를 들자, 요동치는 복근이 보였다. 태윤은 사정에서 느껴지는 탈력감에 손끝도 까닥이지 못하고, 침상에 널브러져 숨을 거칠게 내쉬고 있었다.
이세희는 그 모습을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직시했다. 잊을 수 없는 첫 경험이었다. 그는 입을 벌려, 태윤이 자신의 혓바닥에 사정한 정액을 손바닥에 뱉어냈다. 그리고 얇은 발목을 잡아 벌렸다. 태윤은 여린 살갗에 느껴지는 단단한 감촉에, 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 이세희가 보였다. 그의 하얀 나신이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보였다. 그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보더니 백탁액에 젖은 입술을 혀로 내밀어 핥았다. 그 모습 하나 하나가, 야릇하고 아름다웠다.
그제야 자신이 울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태윤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묘한 수치심을 억누르는 태윤의 얼굴을 보며 귀엽다는 듯, 웃은 이세희가 본격적으로 엉덩이를 더듬었다. 소량의 정액을 이용해 태윤의 꽉 닫힌 입구를 문질렀다.
“읏….”
그 누구도 뚫지 못한 성역이었다. 그곳에 들어간다는 상상만으로도 몸이 달아올랐다. 이세희는 점차 참기 힘들어지는 발기를 이성으로 애써 다독이며, 입을 벌렸다.
“넣을게.”
이세희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태윤의 뺨을 잡아, 자신을 보게 하며 가장 먼저 검지를 넣었다.
“아….”
숨을 참고 있던 태윤은, 뜨거운 내벽을 더듬는 검지에 눈을 찌푸렸다. 아픔보단 이물감이 먼저였다. 그 후에 주름에서 느껴지는 아릿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세희는 넣기가 무섭게 바짝 쫓아와, 손가락을 빨아들이는 조임에 웃음을 흘렸다. 쾌감에 물들어, 갈라지고 쉰 목소리가 고혹적이었다.
“괜찮아.”
이세희가 태윤을 달래며 손가락을 좀 더 밀어 넣었다. 내벽을 꿰뚫는 손가락에 태윤은 숨을 헐떡였다. 안으로 더 들어오자 통증이 조금씩 일었다. 이세희의 검지 끝이 구부러지더니 내벽을 긁었다. 이물감이 너무 센데, 내벽의 주름까지 건드리니 태윤은 보료를 꽉 잡았다. 그래도 참아야 했다. 이세희가 좋아하니까…. 그리고 기분 좋게 해준다고 했으니까….
“뜨거워. 말랑하고….”
감탄 어린 목소리로 속삭인 이세희가 숨을 낮추었다. 아래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연분홍색 구멍이 손가락 하나를 간신히 물고 있었다. 자신의 것을 넣으려면, 더 넓혀야 했다. 이 상태로 넣다간 태윤이 아파서 엉엉 울리라. 태윤을 오로지 쾌락에 젖어 울리게 할 작정이었다. 이세희는 틈새가 거의 없어 보이는 구멍에, 힘을 줘 중지까지 넣었다. 입구가 강제로 벌어지며 들어오는 이물감과 통증에 태윤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의 사내다운 목에 핏줄이 융기했다. 이세희는 태윤을 위에서 아래로 덮으며, 고개를 숙여 목덜미를 깨물고 핥았다.
“괜찮아, 윤아.”
그러면서 윤을 달랬다. 윤은 억누르고 있던 신음과 숨을 토해내며, 이세희를 끌어안았다. 이세희도 긴장했는지 땀으로 축축하고, 뜨거운 몸이 느껴졌다.
“흐윽, 마마…. 아, 아래가….”
이세희는 대답 대신 웃음을 귓가에 흘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윤이 생리적인 고통에 힘만 주자 이세희는 입을 벌려 귓불을 삼켰다. 말랑하고 보드라운 귓불을 입에 머금고서, 유두를 빨 때처럼 쪽쪽 빨아주자 태윤의 신음이 다시 달콤하게 변했다.
“앗!”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세희는 귓불을 깨물고, 빨기를 반복하면서 구멍에 처박은 손가락 두 개를 느릿하게 움직였다. 자지를 넣고 흔들 때처럼 집요하고 확실하게. 마디가 불거진 손가락이 내벽을 꾸욱 누르며 빠져나갔다가, 주름을 펼 것처럼 세게 들어왔다.
“흐읏, 읏…!”
이세희가 혀를 내밀어 귀를 쓸었다. 소름이 돋았다. 으읏, 하고 숨을 들이마신 태윤은 열이 오른 눈을 깜박였다. 태윤이 멍한 눈을 깜박여 자신을 보자, 소리 내어 웃은 이세희는 뺨에 입을 맞추었다.
“아…! 앗!”
처음에는 느릿하게, 길을 들일 것처럼 움직이던 손가락이 속도가 빨라졌다. 손가락 두 마디가 달라붙는 내벽을 뿌리치고, 바로 빠져나갔다. 손톱 끝까지 빼낸 이세희는 정을 박듯 손가락을 푸욱, 꽂아 넣었다. 태윤의 눈이 커졌다. 신음도 내지 못하는 입술이 바르르 떨리며 열렸다. 삼키지 못한 타액이 주르륵 흘러내려 보료에 고였다.
“하아….”
이세희의 입술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내벽이 잘게 떨렸다. 그러면서도 조임은 풀지 않았다. 손가락을 끝까지 물고, 자신이 느끼는 지점까지 빨아들였다. 이건 본능이었다. 아픔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좋아서 내벽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그 전율을 손가락으로 느끼는 것만으로도 쾌감이 일어, 귀두가 액으로 젖어 번들거렸다. 이세희는 손가락을 여전히 깊숙이 넣은 상태로 검지와 중지를 구부렸다.
“아아앗…!”
태윤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고, 자지가 위로 튕겨져 올라오듯 섰다. 처음 넣었을 때는 아파서 축 처져 있던 자지가, 어느 지점을 세게 문지르고 손가락으로 굽혀서 지분거리자 느낀 것이다. 이세희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흐느끼듯 숨을 내뱉는 태윤을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물고 빨아 축축하게 젖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좋지?”
태윤이 “마마….” 하고 이세희를 불렀다. 정갈하고, 이지적이던 목소리가 신음이 일그러졌다. 혼탁함은 전부 자신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음미하던 이세희는 박아넣었던 손가락을 느리게 빼내었다. 태윤이 아프지 않게, 섬세한 동작으로. 마찰로 인해 구멍이 빠끔거리는 게 보였다. 이세희는 태윤의 두 다리를 들어 올려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더 기분 좋을 거야.”
태윤은 시선을 내렸다. 아랫배에서 꺼덕거리는 이세희의 대물이 보였다. 음모가 없어 자지의 크기가 더 실감나게 느껴졌다. 선홍색으로 물든 자지에 공포를 먼저 느낀 태윤이 침을 꿀꺽 삼키자, 이세희가 미소 지었다.
“아까 좋았잖아. 그렇지?”
“…네.”
좋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태윤은 볼을 붉히며 대답했다. 순종적이고 착실한 태윤의 반응에 이세희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는 금세 닫히려는 것처럼 보이는 구멍에 귀두를 대고, 위아래로 문질렀다. 태윤은 넣었을 때와 다르게 느껴지는 이상야릇한 쾌감에 보료를 더듬어 만졌다.
“아, 마마, 그, 그렇게 하시면…. 으응…!”
회음부의 살갗이 매끈한 귀두에 의해 벗겨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홧홧한 불길이 일었다. 쾌감에도 각기 다른 느낌이 존재한다는 걸 이세희로 인해 알았다.
그렇다면, 이세희가 들어오는 것도 기분이 좋지 않을까. 태윤은 그의 흉기 같은 자지가 자신을 뚫는 걸 상상하다, 고개를 들었다. 이세희도 쾌락에 젖은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둠을 등진 그의 얼굴을 보던 태윤은 덜덜 떨리는 손을 뻗었다. 아버지의 취향에 따라 기르게 된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상기된 그의 뺨, 물기가 어려 더 원색적으로 느껴지는 검은 눈. 자신 때문에 붉게 물든 입술. 그 사이에서 흐트러지며 나오는 신음과 숨.
태윤은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던 손을 내려, 그의 뺨을 감쌌다. 이세희의 눈이 아래로 내려뜨였다. 그의 긴 눈초리가 파르르 떨리는 걸 지켜보던 태윤은, 괜찮다는 뜻을 담아 눈가 아래를 만졌다. 이세희가 다시 눈을 들어 올려 태윤을 보았을 때, 태윤은 웃고 있었다.
“…들어오세요, 마마.”
쏴아아, 귀를 적시는 빗소리에 드문드문 퍼지는 목소리는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이세희의 눈이 폭풍을 맞이한 바다처럼 소란스럽게 떨렸다. 처음에는 분명 계획이 있었다. 그를 닮은 얼굴로, 괜스레 다정하게 굴어 자꾸만 눈에 밟히는 그를 완전히 쫓아내려고 그랬는데….
“괜찮으니까…”
이 자를 황제 대신으로 삼아, 분노를 풀려고 했던 것뿐인데 점점 그의 상냥함에 착각하게 되었다. 밀어내려 해도, 그가 거침없이 손목을 휘어감아 당기니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의심 같은 거 가지지 말고, 그대로 들어오라는 듯 그가 손을 뻗어 이세희의 뒷머리를 감쌌다.
“오늘이 아니면, 우리는 다시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될 겁니다.”
태윤은 담담한 척 말을 내뱉었지만, 속은 무너지고 있었다.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사이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을 참아내며, 태윤은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슬슬 쓰다듬었다. 말없이 전해지는 진중한 시선에 이세희는 숨을 멈추더니, 태윤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단단한 손바닥이 근육으로 뭉쳐진 어깨를 꽉 잡더니, 이내 고개를 숙였다. 그의 긴 머리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아무것도 아닌 사이라고?”
이세희가 비웃듯 중얼거리더니, 태윤의 닫힐락 말락 한 입구에 대고 귀두를 눌렀다. 좁은 입구를 귀두로 무지막지하게 압박하며 들어오려 하자 태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손가락과는 비교가 안 되는 쓰라린 고통에 입이 벌어지고 숨이 갈라지며 나왔다. 그에 비해 이세희는 귀두만 넣었을 뿐인데 기다렸다는 듯 꽉 조이는 내벽에 숨을 멈추었다.
처음 겪어보는 쾌감에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넣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짜릿해진다. 자지를 중심으로 퍼지는 전율에 이세희는 고개를 더 숙였다.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의 아래에서 고통에 신음하는 태윤을 보았다.
“흐윽, 마마….”
태윤이 아픈지 고개를 젖히고 있다. 굳건한 목이 바들바들 떨렸다. 핏줄이 융기한 사내다운 구릿빛 목이 탐스러워 보였다. 그 목에 맺힌 식은땀을 멍한 눈으로 보던 이세희가 입술 끝을 올렸다. 요사스럽게 그의 웃음이 퍼진 순간, 태윤은 흐려졌던 시야가 맑아지는 경험을 했다. 그의 아름다움이 세상을 뒤흔들었다. 그의 얼굴에 홀려 눈을 깜박이는데, 점점 아래를 벌리고 들어오는 기다랗고 단단한 자지에 입술이 일그러졌다. 눈가에는 눈물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입술은 빠끔거렸으나, 소리는 나오지 못했다. 이세희는 봐주지 않고, 오롯이 힘을 실어 연약한 구멍을 꿰뚫었다.
“그러기엔 이미….”
이세희는 흐읏, 하고 짤막한 신음을 터트리며 천천히 전진했다. 내벽이 벌어지는 감촉에 자지에서 느껴졌다. 내벽은 힘이 바짝 들어갔고, 뜨거웠다. 말랑한 내벽은 조금만 스쳐도 부을 것처럼 연약했다. 겉모습과 다른 여림이 자지에 착착 감기자,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에 이세희는 고개를 젖히고 신음했다. 엉덩이가 반으로 갈라지는 뜨거운 고통 속에 몸부림치던 태윤은 너울거리는 검은 머리를 보고 눈에 힘을 주었다. 이세희의 눈이 반쯤 감기고, 입술은 벌어져 더운 숨을 느리게 뱉어냈다. 그 모습이 지독하게 요염해, 시선을 다른 데 둘 수 없었다.
“하, 좋아….”
태윤의 엉덩이에 반 이상을 넣은 이세희가, 태윤의 엉덩이를 움켜잡으며 탄성을 내질렀다. 태윤의 엉덩이를 잡고 벌린 이세희는 바로 푹, 하고 자지를 박아 넣었다. 배꼽 아래, 가장 깊은 곳까지 자지가 못처럼 뚫고 들어와 자리 잡았다. 안에 촘촘히 있던 주름들이 모두 펴진 화끈함에 태윤은 고개를 수그린 채 파들파들 떨었다. 태윤의 눈가에 맺혔던 눈물들이 움직임에 따라 추락했다.
“윤아, 하아….”
이세희가 고개를 숙여, 태윤과 입을 맞추었다. 그와 하나로 연결된 접합부는 쓰라리고, 아릿해서 죽을 것 같았으나 그가 입술로 달콤하게 달래주자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났다. 윤이 훌쩍거리며 울면서도, 더 해달라는 듯 입술에 매달리자 이세희가 웃음을 흘렸다. 그와 입을 맞춘 그 틈새에서 울음에 젖은 웃음이 나부꼈다. 이세희는 눈을 감고, 입술만 움직여 태윤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허리는 그대로였다. 그는 처음이라 본능적으로 힘을 줘 조이기만 하는 내부를 천천히 길들일 생각이었다. 연신 태윤과 입을 맞추고, 태윤의 몸을 쓸어 만졌다. 까칠하고 단단한 손바닥에 유두가 비벼지자 아랫배에 쾌감이 찌르르 느껴졌다.
“으응…. 읏…!”
이세희가 검지와 엄지로 유두를 꽈악 잡았다. 원래는 아무 용도도 없던 살덩이었는데, 그가 빨아주고 만져주는 것만으로도 자지가 벌떡 섰다. 이세희가 만져주는 모든 곳이 성감대가 되어가고 있었다.
“흐응, 마마, 부, 부끄러워요….”
하지만 자신이 너무 좋아해, 민감하게 구나 싶어 태윤은 얼굴을 가리고 울먹였다. 내부는 쾌감에 따라 이완과 수축을 반복하며, 이세희의 자지를 끈끈하게 조였다. 이세희는 이완이 어느 정도까지 진행되었는지, 자지로 느끼다가 태윤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고 눌렀다. 그리고 무릎은 더 침상에 대고, 허리를 세웠다. 그러자 그 움직임에 따라 태윤의 몸이 서서히 위로 들렸다. 훨씬 깊어진 삽입에 태윤은 배가 꽉 찬 느낌이 들어, 아랫배에 손을 대고 숨을 멈추었다.
“윤아, 이래도 내가 너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이세희가 물었다. 태윤은 그의 직접적인 물음에 울음을 삼켰다. 아무것도 아니라니. 어떻게 그런 잔인한 말을 할 수 있을까. 태윤이 고개를 느리게 젓자 이세희가 웃음을 지으며 허리를 뒤로 뺐다. 자지에 달라붙었던 붉은 내벽이 투둑, 떨어졌다. 귀두가 내벽을 느릿하게 긁어내리는 느낌에 태윤은 숨을 멈추고 덜덜 떨었다.
“…나한테도 네가 아무것도 아닐 리가 없잖아. 이렇게 좋은데.”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세희가 허리를 뒤로 쭉 뺐다. 이세희의 귀두가 점막을 마구 긁고, 비비며 빠져나갔다. 몸을 짓누르고 머리를 멍하게 만드는 고통에 입이 벌어졌다. 처음 겪는 통증에 몸이 뒤틀리려 하자, 이세희가 두 손으로 강하게 눌렀다. 그의 신음이 쏟아졌다. 태윤은 얼굴에서 춤을 추는 듯한 그의 숨과 신음에, 떠지지 않는 눈에 힘을 줘 떴다. 그의 얼굴이 보였다. 얼굴을 찌푸리고 있으나 눈은 쾌감에 흐려졌고, 두 눈가는 몹시 붉었다. 입술은 웃고 있었다. 그의 혀가 느릿하게 나오더니, 제 입술을 핥고 행적을 감추었다.
저 혀가 내 입안으로 들어왔으면. 그런 갈망에 입술을 달싹거리는데, 이세희가 눈을 휘며 웃었다.
“예쁘게 울어줘.”
“저는 예쁘지 않은데….”
태윤이 소심하게 중얼거리자 이세희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웃음이 한결 가벼워 보였다. 그는 손등으로 태윤의 눈가를 흠뻑 적신 눈물을 닦아주더니 느긋하게 말했다.
“충분히 예뻐.”
그 손은 다시 어깨를 잡고, 강하게 눌렀다. 태윤이 몸에 힘을 빼고 그를 받아들이려는데, 그러기도 전에 이세희가 빼내었던 자지를 단번에 쑤셔 넣었다. 처음 겪는 삽입에 빠르게 좁아들던 내벽이 다시 벌어졌다. 엉덩이 안이 쪼개지는 통증에 숨을 쉴 수 없었다. 배가 자지로 꽉 찬 느낌에 보료를 움켜잡고 버텨냈다.
“하아, 하아…. 아, 너무 좋아….”
이세희가 눈을 찌푸렸다. 그의 눈에 쾌락이 몰려 울 것처럼 물기가 어렸다. 태윤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아프지만, 아프다고 말하면 그가 주저할까 봐 꾹 참고 있었다. 태윤은 생각보다 아픈 정사에 이를 세게 물었다.
“아흑!”
다시 그의 자지가 뚫은 길을 빠져나갔다. 그러더니 숨을 쉴 틈도 주지 않고, 살을 가르며 꽂혔다. 엉덩이가 반쯤 들린 채, 위에서 아래로 직격하며 들어오자 숨이 턱턱 막혔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통증에 엉덩이에 힘이 들어가 그의 자지를 꽉 조였다. 이세희의 턱이 경련했다. 자지를 오물오물 빨아들이고, 놔주지 않는 내벽에 눈앞이 흐렸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박아보는 이 느낌은 극락이었다. 뒤로 느낄 때와는 또 다른 쾌감에 몸이 떨렸다.
“흐으으….”
그리고 그 떨림은 태윤의 안에 박힌 자지에서도 느껴졌다. 태윤은 내부에서 느껴지는 그의 맥박에 같이 가슴이 뛰었다. 왠지 기분이 좋았다. 그의 것이 안에 박히고, 그의 모든 걸 아래로 느낀다는 사실이. 아프긴 했지만, 그가 길을 천천히 빠져나가고 박히자 참을 만해졌다.
“하아…. 앗, 아윽…!”
그런데 이세희의 자지가 갑자기 빠르게 빠져나갔다. 귀두가 내부를 긁자, 태윤의 입이 벌어졌다. 배를 꽉 채운 자지가 빠져나가 압박감은 사라졌으나, 귀두가 입구에 걸려 팽창한 느낌이 들어 아픔이 밀려왔다. 느리게 움직이던 그의 변모에 태윤은 당황스러워 눈을 돌렸다. 이세희가 열에 들뜬 눈을 애써 침착하게 위장하는 게 보였다. 그는 태윤으로 인해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키더니, 빼낸 자지를 단번에 꽂아 넣었다. 서로 달라붙으려는 내벽을 한 번에 가로지르며, 두툼한 귀두는 한 곳을 눌렀다.
“아!”
귀두가 어느 지점을 꾸욱, 누르고 비비자 태윤의 눈이 커졌다. 태윤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이세희의 손목을 잡았다. 저도 모르게 손톱을 세우고 이세희에게 매달렸다.
“아, 싫…! 아!”
그 순간, 이세희의 자지가 또 같은 방식으로 빨리 빠져나갔다. 내벽의 화끈함이 가시기도 전인데, 그 위에 아릿함이 덧대어졌다.
“너무, 뜨거… 워… 아아앗!”
뜨겁다고, 조금만 천천히 해달라고 빌려는데 그가 웃음을 짧게 흘리더니 자지를 푹 꽂았다. 밀색 엉덩이 사이에 선홍색 자지가 먹혀 들어갔다. 고환이 납작하게 눌릴 정도로, 깊이 집어넣자 태윤의 신음이 가라앉았다. 숨을 어떻게 쉬는지도 잊은 것처럼, 숨은 엉망이 되었다. 태윤은 그의 손목을 움켜잡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그와 깍지를 끼고 있었다. 이세희는 태윤과 깍지를 끼고서, 침상에 그 손을 누른 상태로 허리를 움직였다. 푸욱, 푹, 하고 여린 점막을 파헤치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퍼졌다. 그의 속도에 맞게 소리가 빠르게 울려갔다.
“흐응, 응, 마, 마마…! 앗, 이상해…. 흐윽…!”
태윤은 고개를 젖히고 이를 악물었다. 턱이 덜덜 떨렸다. 그가 완전히 빠져나가지 않고, 집요하게 한곳만 쑤셔댔다. 눈앞이 하얗게 물들어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온통 하얀 세상에서 불꽃이 터졌다. 처음 보는 빛의 향연에 태윤의 시선이 흐려졌다. 무엇을 보는지도 모르겠다. 아랫배는 찌르르, 하고 울렸고 그 느낌은 전염처럼 퍼져가 몸을 물들였다.
“아흑…. 으읏…. 아, 아아, 앗! 아!”
그곳만 푹, 푹, 찌르고 아이 주먹만 한 귀두로 세게 비비자 태윤의 신음이 조르는 것처럼 높아졌다. 너무 느껴서 자지는 이미 꺼덕거리고, 아랫배를 때리고 있었다. 쾌감을 느끼자 조임은 강해졌지만, 내벽은 부드러워졌다. 아마 지속된 삽입으로 내부가 부으면서 감촉이 좋아진 것 같았다. 이세희는 자지에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내벽을 자지로 음미했다. 아무리 박아도, 갈증이 일었다. 더 박고 싶었다. 이 구멍이 흐물흐물하게 풀려 정액을 뒤로 싸는 걸 꼭 보고 싶었다.
“아아앗!”
그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귀두를 입구에 걸친 상태에서 단번에 찔러 넣었는데 태윤의 신음이 커졌다. 겹겹이 쌓이는 빗소리도 뚫을 만큼, 탄성처럼 터져 나왔다. 이세희는 전과는 달라진 쫀득한 조임에 눈을 감고 고개를 젖혔다. 하아, 하아, 이세희의 입에서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둔탁한 신음이 흘렀다. 태윤은 이세희의 자지를 꽉 문 채 몸을 바들바들 떨어댔다. 두 눈가는 이미 눈물로 빨갛게 젖었다.
“좋아서, 하아, 그런 거야.”
이세희가 잇새로 신음을 내뱉더니, 태윤의 내부에 박힌 자지를 쑥 빼내었다. 그리고 시선을 내려 보자, 태윤의 밀색 엉덩이 사이가 붉고 온통 젖었다. 입구는 아무것도 없는 게 믿을 수 없다는 듯, 벌어졌다가, 입을 다물었다. 검붉은 내부가 어둠에 물들어 보일 듯 말 듯 하자, 엄청난 쾌감이 자신의 몸에 벼락처럼 몰아쳤다. 이세희는 태윤이 쉴 시간도 주지 않고, 그를 엎드리게 했다. 아픔에 벌벌 떨던 태윤이지만, 이세희가 하라는 대로 고분고분하게 개처럼 엎드리고 엉덩이를 위로 올렸다. 이세희는 아랫배에서 꺼덕거리는 자지를 잡고, 위에서 아래로 문질렀다. 귀두에서 나온 액으로 자지가 번들거렸다.
“좋지, 윤아?”
다시 물으며 귀두를 퉁퉁 부어, 주름이 커진 입구에 대고 눌렀다. 처음과 달리 녹진하게 풀린 입구가 사르르 열리며 귀두를 머금었다. 태윤은 보료에 뺨을 댄 채, 다시금 시작된 삽입을 견디며 입술을 달싹였다.
“모, 모르겠….”
말을 다 잇기도 전에, 이세희가 짓이기듯 박아 넣었다. 머리가 위로 쏠렸다. 상체가 자지의 삽입에 따라 위로 올라간 것이다. 태윤이 보료를 짚고 상체를 세우려다가, 시도가 실패가 되고 보료에 흐느적거렸다.
“흐으…!”
자지가 너무 깊이 들어왔다. 배가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구역질이 일었다. 태윤이 상체를 웅크리고 미세하게 떨자, 이세희가 태윤의 등에 엎어졌다. 그가 손을 앞으로 뻗어, 태윤의 턱을 잡고 돌렸다. 태윤의 얼굴을 차근차근 살피던 이세희가 허리를 슬쩍 뒤로 뺐다. 아주 살짝 뒤로 빠진 그가, 거침없이 한 부근을 꾸욱 눌렀다. 정확하게 그 부위만 귀두로 부드럽게 마찰하는 느낌에 태윤이 입술을 벌렸다. 신음이 흐으으, 하고 추락했다.
“이래도 모르겠어?”
이세희가 다시 물었다.
“하으, 마, 마마, 아, 아래가…. 으응…!”
찌르르, 하고 퍼지는 감각에 눈이 크게 떠졌다. 점막이 쾌감에 파들파들 떨며 이세희의 자지를 조였다. 이세희는 눈을 감고 태윤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그는 삽입을 깊이 유지한 상태로, 태윤의 입술을 제 것처럼 빨아댔다. 그거로도 모자라 혀를 집어넣어 그의 입안에 고인 신음을 앗아갔다. 입맞춤으로도 느끼는지 태윤은 연신 이세희의 자지를 꾹꾹 조였다. 빠져나가지 말라는 듯, 엉덩이에 힘을 줘 이세희의 자지를 빨아먹기까지 했다. 기특하고, 요망한 내부에 이세희가 혼탁한 웃음을 흘렸다. 그는 태윤의 턱을 느리게 놔주었다. 태윤의 고개가 힘없이 아래로 수그러졌다. 발갛게 물든 귀를 번들거리는 시선으로 보던 이세희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난 알겠는데….”
그가 나지막이 웃음을 터트리더니, 태윤의 귓불을 이로 깨물었다. 그의 입술이 서서히 멀어지더니 이윽고 엄청난 쾌감이 몸을 덮쳤다. 그가 박혔던 자지를 빼내고, 태윤의 상체가 무너질 만큼 세게 박아넣은 것이다. 장골과 엉덩이가 서로 부딪치며, 퍽, 하는 소리가 터지고 고환이 납작하게 눌렸다.
“아아아앗!”
태윤의 신음이 높아졌다. 오로지 뒤로만, 자지러지게 느끼는 태윤을 뒤에서 와락 끌어안으며 이세희가 나른한 신음을 흘렸다. 태윤은 느끼는 지점에서 퍼지는 미적지근한 감각에 그제야 울음을 제대로 흘릴 수 있었다.
“…하아, 좋잖아….”
이세희가 태윤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서로 잊을 수 없을 거야.”
우리는 처음을 나눠 가졌으니까.
이세희가 태윤을 뒤에서 꽉 안으며 덧붙였다. 눈을 뜬 이세희는 이 순간을 잊을 수 없다는 듯, 또렷한 시선으로 윤을 보았다. 그의 시선 속에 윤이 녹아내렸다. 태윤의 입술이 느릿하게 달싹였다. 그의 자지를 놓고 싶지 않아, 본능적으로 꽉 조이며 속으로 내심 기대에 차 중얼거렸다.
우리, 이대로 도망갈까요. 아버지가 모르는 곳으로, 단둘이. 내 곁에 있지 않아도 좋으니, 당신이 조금이라도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소원이 울컥 솟아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자신의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자신도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공노비라는 이유만으로 황위를 잇지 못했다. 심지어 문관으로 출세할 길조차 막혔다. 무관의 길을 걸으며 아버지의 곁을 지키는 것으로, 자신의 신분에 만족했다. 그리 하지 않으면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부정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바라는 것 없이, 그저 무탈하게 하루하루를 실처럼 엮어가는 걸로 만족하는 나날이었다. 어차피 무엇이든 이룰 수 없으니 이렇게 살다 죽겠지. 어쩌면, 자신은 일찌감치 모든 걸 포기했을 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없는 삶에 처음으로 바라는 게 생겼다. 이세희의 행복이었다. 욕심을 좀 더 부려 그의 손을 잡고, 그를 곁에 두고 싶었지만 그가 싫다면 고집 부리지 않고 보내줄 생각이었다. 그가 행복하다면, 자신도 행복할 테니까. 그가 마음이 편해지고, 자신을 받아들일 날이 오면 그때 만나도 좋았다. 그러고 나면 눈을 편안히 감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태윤의 입이 벌어지며, 나온 건 소원과는 완전히 반대에 있는 말이었다.
“마마….”
이 날이 지나고 깨질 꿈이라면, 더 오래 그를 맛보고 싶었다. 태윤은 눈을 감고 먼저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얼마나 떨리던지, 입술이 바들바들 떨려 이세희처럼 삼키진 못하고 진짜 살과 살이 맞닿은 수준이었다. 이세희는 울음을 삼키려 노력하는 입술에, 눈을 따라 감으며 입을 벌렸다. 그리고 그새 부은 입술을 느릿하게 삼켰다. 태윤의 울음이 점차 이세희의 입안으로 먹혀 들어갔다. 울음은 금세 이세희의 내부에 뿌리를 내렸다. 이세희의 자지가 다시 태윤의 안에서 발기했다. 태윤은 퉁퉁 부어, 유독 민감하게 느껴지는 내벽에 쿵쿵거리며 느껴지는 맥박에 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축 늘어뜨린 태윤의 뒷모습을 유심히 살피던 이세희가 근육으로 탄탄한 허리를 잡았다. 땀이 축축하게 맺힌 태윤의 목덜미를 보자 자꾸 가학심이 일어났다.
이러면 안 되는데, 머리로 생각하면서도 마음은 태윤으로 인해 이리저리 흔들렸다. 좀 더 그를 탐하고 싶었다. 아주 깊은 곳까지, 자신을 영원히 잊을 수 없도록 상처까지 내고 싶었다.
멈출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손끝이 저릿했다. 그의 안에 자신을 새기고 싶은 마음에 불이 붙었지만, 그가 다칠까 봐 머뭇거리게 되었다. 태윤이 느껴서 덜덜 떠는 게 좋으면서도, 극한으로 몰아붙여 울리고 싶어졌다.
태윤이 자신을 황제처럼 생각할까 봐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를 이용하려 들었던 게 방금 전이면서 이렇게 바뀐 자신이 이해가 가지 않아 이세희는 얼굴을 찌푸렸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것처럼, 자꾸 뒤를 보고 있지 않은가.
그러자 태윤이 자신만 보라는 듯, 내벽에 힘을 줘 자지를 빨았다. 혈관까지 부드럽고 말랑한 점막이 달라붙자 이길 자신이 없었다. 이세희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짤막한 신음을 등 뒤로 흩뿌리자 태윤이 뒤를 돌아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마마, 비는 쉽게 그치지 않을 거고….”
차마 적극적으로 더 해달라는 말을 하지 못해, 태윤이 장마 핑계를 대기 시작했다. 이세희가 태윤의 엉덩이를 슬슬 쓸어 만졌다. 태윤은 입안에 고인 침을 꿀꺽 삼키더니, 보료에 후들거리는 손을 대고 몸을 일으켰다.
“계곡도 불었을 텐데….”
이세희가 눈을 내리깐 채 웃었다. 음욕에 젖은 얼굴이 어둠을 물리치려 수려하게 빛이 났다. 그에게 시선을 뺏긴 태윤이 멍한 눈을 깜박였다. 이세희는 얼굴에 수줍음을 물들이면서도, 자신을 좋아한다고 온몸으로 말하는 태윤이 귀여운지 처음으로 환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린 이세희가 말했다.
“이대로 비가 계속 왔으면 좋겠어.”
그가 태윤의 허리를 꽉 쥐고, 자지를 스윽 빼내었다. 나가지 말라고, 계속 자신 안에 머무르라고 이세희의 자지를 빨던 내벽이 드디어 떨어졌다. 태윤이 이를 악물며 보료를 꽉 쥐었다. 느끼는 지점을 떠나가는 자지는 내벽에 그대로 머물러, 구멍을 벌리는 느낌이 선연했다. 특히, 그의 자지가 아주 느리게 빠져나가 입구에 걸렸을 때는 거북함마저 느껴졌다. 입구가 팽창하는 느낌이었다. 그의 귀두 모양대로 불거져, 아예 열려 있을 것 같은 불안함에 태윤은 그를 돌아보았다. 장막처럼 드리워진 머리카락 사이에서 선뜩하게 빛나는 이세희와 눈이 마주쳤다. 드디어 본심을 드러낸 이세희의 눈이 습기에 어려 축축했다. 그의 욕구가 산산조각 나 빛을 발했다.
“비가 내려서, 너를….”
이세희가 입구에 걸쳐 놓았던 자지를 힘을 실어 쑤욱 밀어 넣었다. 퍼억, 하고 탄탄한 둔부에 이세희의 장골이 부딪쳤다. 내벽을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듯한 아찔한 둔통에 태윤이 비명을 지르듯, 신음을 흘리며 침상에 쓰러졌다. 내벽은 갑작스러운 침입에도 자지를 마음껏 빨아들였다. 안에 고였던 정액이, 강한 삽입에 의해 내부에서 으깨지며 자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흐윽, 마마, 아…!”
정액 때문에 훨씬 부드러워진 안으로 이세희의 자지가 밀려 들어왔다. 이세희는 주름 하나 없이 매끈하게 펴진 붉은 구멍에 포말처럼 인 정액을 보고, 더 이상 자신을 잡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너무 좋았다. 비가 내리고, 태윤의 안에는 자신의 정액이 내렸다. 이 순간이 황홀하게 좋았다.
“윤아, 하아!”
이세희가 눈을 감고, 얼굴을 찡그린 채 태윤의 안을 뭉개기 시작했다. 전과는 달라진 움직임에 태윤의 눈이 부릅떠졌다. 불티가 계속 커져, 불이 되어 자신의 몸을 살라먹으려 하고 있다. 내부에서 끓는 열에 태윤은 고개를 저었다. 아아, 안 돼, 태윤의 입이 덜덜 떨리며 이세희의 움직임을 둔하게 하려 했다. 내벽도 그의 것을 밀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세희는 그것을 조임으로 인식하는 듯,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삽입에 따라, 태윤의 잘 짜인 등 근육이 요동쳤다. 빼내면 근육이 이완하며 결이 사라졌고, 푸욱, 하고 연약한 살을 가로지르며 박아넣으면 근육이 확 수축하는 게 느껴졌다. 그게 마치 바르르 떨며 제 것을 조이는 내벽을 눈으로 보는 것 같아,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거칠게 하고 싶지 않아도, 이렇게 예쁘니까 자지에서 흥분이 일었다. 이 욕구를 풀 수 있는 곳은 이제 태윤밖에 없었다. 황제와 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쾌감은 달았다. 강제로 깔리고, 희롱당해 느낀 쾌감 끝에는 죄책감과 자괴감밖에 없었으나, 태윤과 앞으로 하는 이 느낌은 지상낙원이었다.
“아흑!”
“윤아, 하앗….”
연신 윤의 이름을 혀에 담아, 입으로 소중하게 발음하며 이세희는 태윤을 보았다. 태윤은 깊어지고, 빨라진 삽입에 못 견뎌 보료에서 자신도 모르게 엉금엉금 앞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무릎으로 빠져나가자, 자지에 딸려 있던 점막이 스르륵 떨어졌다. 그 감촉이 선연해 태윤은 상체를 숙이고 입을 벌렸다. 입에 고였던 타액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도망가면 안 돼, 윤아.”
이세희가 거친 음성으로 나직이 속삭였다. 그 음성이 등에 떨어지자 윤의 몸이 저절로 구멍을 조였다. 자지의 반이 내부와 연결된 상태에서, 이세희는 태윤의 허리를 쥐고 자신 쪽으로 확 당겼다. 내부가 부욱, 귀두에 의해 갈라지는 느낌이 선명하게 몸을 꿰뚫었다. 태윤의 눈이 크게 떠지며, 눈물이 맺혔다.
“흐으…!”
귀두가 느끼는 지점을 누르고, 그 부분만 노려 푸욱, 푹, 꽂히고 빠져나가길 반복하자 입이 닫힐 기미가 없었다. 눈앞이 흐려지다가, 어느 순가에 하얗게 변해갔다. 멈추지 않는 쾌감은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였다. 계속해서 암전이었고, 자신을 놔주지 않았다. 태윤이 보료를 세게 움켜잡고 흐느끼는데도, 이세희는 봐주지 않고 삽입을 지속했다.
“하아, 지금 네가 해달라고 조르고 있잖아. 응? 해달라며.”
이세희가 잇새로 말을 내뱉으며 태윤의 허리를 잡고 허리를 빠르게 박아댔다. 자지를 빼내자, 내벽이 그대로 딸려 나왔다. 그리고 자지를 푹, 넣으면 살점이 다시 안으로 말려들어갔다. 태윤은 내벽에 이는 불이 온몸에 달라붙자 참지 못하고 몸을 뒤틀었다. 아래가 너무 뜨거웠다. 그의 자지가 박히고, 빠져나갈 때마다 극심하게 이는 쾌감에 눈앞이 보이지 않았다. 아래에 모든 감각이 쏠린 듯, 그의 것이 구멍을 벌리며 드나드는 것만 느껴졌다.
“하아, 아, 아윽…! 흐윽, 아, 마마…!”
이세희가 허리를 두 손으로 바짝 조였다. 안 그래도 그의 것이 커서, 안을 때리는 듯한 둔한 통증이 일었는데 허리까지 조이고 배를 엄지로 압박하니 숨이 턱 막혔다. 그런데 좋은 것 같았다. 태윤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입술을 깨물었다. 미처 삼키지 못했던 타액들이 떨어져 턱을 적셨다. 이세희는 태윤의 목소리에 물든 쾌감에, 입술 끝을 올리며 웃더니 고환이 눌릴 정도로 삽입을 이었다. 태윤의 몸이 확 굳었다. 조임이 강해졌다. 이세희는 배꼽 아래를 엄지로 더듬어 누르더니, 볼록하게 솟은 아랫배를 느끼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게 더 좋을걸?”
“네, 네?”
태윤이 혼미해진 머리를 뒤흔들며 물었다. 이세희는 자신의 자지 모양대로, 부푼 태윤의 아랫배를 그대로 양쪽 엄지로 눌렀다.
“아, 아앗…! 아!”
느끼는 지점에 귀두가 비벼졌다. 태윤의 동공이 쾌감에 뭉개지더니, 자지에서 정액이 피핏, 하고 터져 나왔다. 이세희는 태윤의 어깨에 턱을 대고서, 숨을 몰아쉬더니 엄지를 서서히 떼어냈다. 태윤은 아직 남은 쾌감에 눈을 거의 반쯤 뒤집고 전율하다가, 이세희가 빠져나가는 감각에 흐느꼈다.
“마, 마마, 그, 그러면 망가져요….”
“아니야.”
이세희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그는 후, 하고 숨을 길게 내쉬더니 태윤의 입구를 만지작거렸다. 완전히 벌어져, 주변이 다 붉게 부었다. 이대로 빼내면, 붉은 구멍이 뻥 뚫린 채 내벽과 그 안에 고인 백탁액을 보여주리라. 탐욕에 이세희의 눈이 번들거렸다. 입을 벌려 달뜬 숨을 뱉은, 이세희는 반쯤 자지를 빼내다가 느릿하게 넣었다. 태윤은 재차 시작되는 정사에 겁을 먹었다.
“마, 마마, 더, 더 하면….”
“안 망가져.”
이세희가 쉰 목소리로 덧붙이더니, 태윤의 내부에 사정했다. 흐물흐물하게 풀린 내벽 안에 정액이 퍼져가는 그 기묘한 느낌에 태윤은 눈을 연신 깜박거렸다. 고였던 눈물이 눈꺼풀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후드득 떨어졌다. 이세희는 태윤의 허리를 잡던 손을 내려, 양쪽 엉덩이를 잡고는 자지를 느리게 빼내었다.
“이 정도로 안 망가져. 걱정 마.”
이세희의 단언에 묘한 신뢰가 갔다. 태윤이 울음을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세희의 자지가 입구를 가장 넓게 벌렸다가, 퉁 하고 튕겨져 나갔다. 태윤의 입구가 다 닫히지 못하고 벌름거렸다. 태윤의 내부와 자신의 자지 끝이 불투명한 액으로 연결되어 있자, 식었다고 생각한 쾌감이 고개를 들었다.
“흑, 마마, 아, 안이 너무 뜨거워요….”
태윤이 얼굴을 감싸며 흐느꼈다. 장마가 온다느니, 계곡이 흘러넘친다느니, 그런 말로 자신을 유혹했으면서 이제 와서 망가진다고 흐느끼는 모습이 퍽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이세희는 “응, 알았어.”라고 곱게 대답하며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다물어지지 못한 구멍은 삽입 전보다 훨씬 부어 있었다. 오밀조밀하게 뭉쳐 있던 주름도 부어서 더 커졌다. 구멍은 빠끔거리면서 자신의 내부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 안에 고여 있던 정액이 점액질처럼 아주 느리게 흘러내려 붉은 구멍에 맺혔다. 그 모습에 이세희의 눈이 점차 흐려지고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숨결이 부은 구멍에 비벼지자, 태윤은 묘하게 일렁거리는 쾌감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삽입했을 때는, 자지가 내벽을 너무 세게 마찰해서 풀리는 느낌에 두려웠는데 이번에는 뱃속부터 근질근질한 감각이 넘쳐 참을 수 없었다. 이세희는 엉덩이를 잡아 벌려, 자신이 싸지른 정액이 꾸물꾸물 나오는 걸 유심히 보다 입을 벌렸다.
“아직도 뜨거워?”
이세희의 목소리가 어찌나 부드럽던지, 눈물이 절로 맺혔다. 태윤은 안을 긁고 싶은 간질거림에 구멍을 조였다. 차라리 이 간지러움을 자지가 들어와, 세게 비벼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마음에 애가 타, 구멍을 자신도 모르게 조였다, 풀면서 입을 벌렸다.
“안이….”
“솔직하게 말해.”
이세희가 다그쳤다. 태윤은 마마, 하고 울먹거리며 그를 불렀다. 이세희는 퉁퉁 부어, 딱 봐도 아파 보이는 구멍에 검지와 중지를 쑤셔 넣었다. 처음과 다르게 구멍은 적당하게 풀려 손가락이 무리 없이 들어갔다.
“정말 뜨겁네.”
“흐으…. 마, 마마…. 안이 너무….”
“녹아내릴 거 같아.”
처음 손가락을 넣을 때와 완전히 달라진 온도에 이세희가 희열에 차 중얼거렸다.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다. 그 사실에 머리가 쾌감에 터질 것 같았다. 이 사내를 내가 이렇게 만들었다. 아무도 지배하지 못한 영역을 자신이 처음 뚫었다는 생각에 숨까지 떨려왔다. 이세희는 손가락을 구부려 안에 고인 정액을 긁어냈다. 태윤은 그 약간의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손가락을 조였다. 이세희의 연분홍색 손톱이 붉은 구멍에 걸쳐졌다가, 탁한 액과 함께 빠져나왔다. 태윤은 내벽과 구멍에 일일이 남은 그의 흔적에 바르르 떨었다. 아직 남은 정액을 다 빼낸 이세희는 엉덩이를 잡고 벌렸다.
“뜨거워, 윤아?”
이세희의 물음에 윤은 착한 아이처럼 대답했다.
“네, 마마….”
숨을 죽인 답은 순종적이었다. 거부를 모르는 아이였다.
“그래… 그렇게 솔직해져야 해. 내 앞에서는, 거짓말하면 안 돼.”
“네, 마마.”
태윤이 울먹이며 대답했다. 제가 어떻게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겠냐고, 반문하고 싶었으나 그것조차 욱여 삼켰다. 그에겐 반기를 들 수가 없었다.
“나에겐 다 보여줘…. 나도 그럴게.”
그 말을 넋두리처럼 중얼거린 그는, 혀를 내밀어 태윤의 부은 구멍을 핥았다. 하아…! 태윤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태윤의 허벅지 근육이 쾌감으로 바짝 수축했다. 이세희의 입술이 아기 새의 부리처럼 벌어져 태윤의 통통 부은 입구를 쭈웁, 빨아들이자 태윤이 눈을 크게 떴다.
“흐으으…!”
입구에 몽실몽실 닿는 타액에 눈앞이 단숨에 하얗게 변해갔다. 온몸이 꿀에 절여진 듯 녹진해졌다. 태윤은 저도 모르게 앞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삽입 때는 고통과 쾌감을 그네 타듯 오가서 현실을 자각할 수 있었는데, 이세희가 정성껏 공들여서 구멍을 핥아주자 온몸이 떨려서 참을 수 없었다.
“으으응…!”
너무 좋아서 머리가 멍해졌다. 좋아, 라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이세희가 뽀얀 밀색 엉덩이에 얼굴을 박은 채 웃음을 흘렸다. 습윤한 웃음이 부어서 한층 예민해진 회음부에 나부끼자 그것도 쾌감으로 느껴져 태윤은 보료를 긁어내렸다.
“아아!”
이세희는 바르작거리며, 도망가려는 태윤의 허리를 잡아끌며 혀를 뾰족하게 세웠다. 혀는 머뭇거림 없이 태윤의 통통해진 주름을 벌리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뜨거운 내벽을 질척거리는 혀로 지분거렸다. 깊이 들어가진 않고, 귀두가 안착하여 벌어지는 부분을 주름 하나하나, 섬세하게 핥아주자 태윤의 숨이 높이 변해갔다. 끝이 갈라지는 신음은 더한 걸 조르고 있었다.
“하아, 아…! 아앗! 으읏, 마, 마마, 하아, 아아앗…!”
쭈웁, 하고 이세희가 주름을 입의 압력으로 모아 빨아들였다. 매끈하던 두 볼이 홀쭉해졌다. 그리고 입안 근처까지 들어온 구멍을 혀로 위아래로 쓸듯이 핥자 태윤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내벽이 간지러웠다. 아무것도 없는 빈 곳을 꾹꾹 조이자, 애탄 마음이 쾌감을 타고 등으로 전해졌다. 전신을 짓누르는 지독한 쾌감에 발가락을 계속 오므리고 있었다. 두 손은 어느새 보료에서 떨어져, 이세희의 긴 검은 머리카락을 밀어내고 있었다.
“하읏, 마마, 이, 이상…. 흐으읏…!”
회음부에 장마가 내렸는지 축축했다. 타액이 주르륵 흐르는 느낌에 태윤은 눈을 질끈 감고 허벅지를 벌벌 떨어댔다. 경련하는 탄탄한 피부를 손바닥으로 쓸어 만지던 이세희가 고개를 떼어냈다. 태윤이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돌아보자, 뺨이며 턱이 온통 타액으로 젖은 이세희가 나른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는 태윤 때문에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더니 타액에 흠뻑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닦아내었다. 눈은 반쯤 내리깔고, 두 볼은 구멍을 빠느라 상기되어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묘하게 야릇해 태윤은 다리를 오므렸다. 그의 자지가 쓸고 갔던 내벽이 그를 원하고 있었다. 아주 깊은 곳까지 들어와, 구멍이 흐물흐물 풀릴 때까지 박아줬으면 좋겠다는 음란한 소망이 들었다.
이세희는 시선을 내렸다. 구멍은 삽입으로 인해 반쯤 열린 상태였다. 타액에 흠뻑 젖은 구멍은 막에 씐 것처럼 번들거렸다. 구멍 자체가 연약하고, 예민하다 보니 한두 번만 삽입해도 금방 붓기 마련이었다. 더 했다간, 며칠을 앓을 정도로 구멍이 너덜거리고 헐게 될 것이다.
“흐윽, 마마…. 안이…. 안이 이상합니다….”
보료에 얌전히 엎드려 있던 태윤이 연신 구멍에 힘을 주고, 풀며 뒤를 돌아보았다. 본능적으로 자신을 유혹하는 붉은 구멍을 보던 이세희의 시선이 창가로 향했다. 쏴아아, 하는 빗소리가 거세지면 거세졌지, 멈출 생각은 없어 보였다. 어둠은 비의 세기에 따라 농도가 짙어졌다.
“안이, 너무… 뜨거습니다….”
태윤은 처음 겪는 쾌락을 이상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뜨겁고, 간지러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태윤을 보던 이세희는 손을 뻗었다.
장마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적어도 일주일은 지속되는 장마였고, 계곡도 바다처럼 불어나 황제가 함부로 건널 수 없다. 애초에 이 궁의 용도가 피난처였으니…. 이세희는 언제 황제가 올지 몰라, 긴장되었던 어깨에 힘을 풀었다. 그사이, 태윤은 구멍이 간지럽다며 손을 뻗어 만지려 했다. 이세희는 그 손목을 부드럽게 잡고, 태윤의 머리맡에 대게 했다. 태윤의 눈에 의아함이 물들었다. 성적으로 너무 무지한 태윤을 보고 상냥하게 웃은 이세희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도 뜨거워, 윤아.”
이세희는 일어나려는 태윤의 머리를 잡고 세게 짓누르며, 다른 손으로 자신의 자지 뿌리를 잡았다. 처음과 달라진 강압적인 태도에 태윤의 눈이 떨렸다. 몸도 긴장으로 수축되었다. 등 근육이 척추를 중심으로 뭉쳐지는 걸 눈여겨보던 이세희가 자지를 넣지 않고, 회음부부터 고환까지 슬쩍 비벼댔다. 매끈하고 둥글둥글한 귀두가 예민한 주름을 눌렀다가, 더 민감한 고환까지 뭉개자 태윤의 눈에서 동공이 흐려졌다.
“내가 말했잖아….”
이세희가 탁한 신음이 섞여, 더욱 낮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정염으로 들끓고 있었다. 태윤은 이제 주변에 서린 찬 기운을 느낄 수 없었다. 이세희가 전해주는 온기로 몸이 너무 뜨거워, 견딜 수 없었다. 태윤은 안에 고여서 빠져나갈 생각을 하지 않은 열기에 다리를 느리게 벌렸다.
“…난 너에게 좋은 기분만 느끼게 해줄 거야.”
잠자리가 무서워서는 안 되니까. 그 말을 덧붙인 이세희가 뺨에 입을 맞추고 물러났다. 그가 뒤에서 자리를 잡는 게 느껴져 태윤은 벌벌 떨며 몸을 웅크렸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이세희가 고개를 숙이고 웃고 있는 게 보였다. 동서남북, 모든 곳이 짙푸른 어둠인데 그만이 통통 튀는 색감으로 빛이 났다. 아름다웠다.
“아흑, 마마…!”
이세희의 귀두가 좁아드는 구멍에 닿았다. 그리고 이제 망설임 없이 힘을 실어 한 번에 뚫었다. 여린 점막에 불이 붙었다. 쫀쫀하게 달라붙는 점막을 파죽지세로 뚫고 들어간 이세희의 자지는 태윤이 느끼는 그 부위에 바로 도착했다. 말캉하고 부들부들해진 점막을 귀두로 푹푹 쑤시고, 비벼대자 태윤의 목이 뒤로 젖혀지며 달콤해진 신음이 자지러지게 튀어나왔다.
“하아, 아! 아아! 아앗, 아!”
이세희가 태윤의 탄탄한 목을 감싸며 허리를 퍽퍽 쳐댔다. 이세희의 허리가 방금 전과는 다르게, 매우 강압적이고 빠르게 태윤의 구멍을 헤집어 댔다.
“하아, 우리 윤이, 좋다고 말해 볼래?”
“흐윽, 마마, 조, 좋아요…!”
태윤이 흐느끼며 말했다. 실제로 좋아서 엉덩이에 힘이 꽉 들어갔다. 이세희의 허리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태윤의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태윤은 이세희의 아래에 짓눌려, 옴짝달싹도 못 하고 엉덩이만 치켜세운 채 그를 받아야 했다.
“흑, 아, 아앗, 아!”
이세희가 자지를 빼내고, 한 번에 퍽, 소리 나게 박아 넣으면 몸이 위로 올라갔다. 그러면 이세희가 허리를 잡고 내려 삽입을 지속했다. 삽입이 지독하게, 깊숙한 곳까지 연결되고 빠져나가면 구멍이 자줏빛으로 익고 액에 젖어 번들거렸다.
“하아, 하아…! 윤아, 흐읏…!”
태윤이 보료를 잡고 버티느라, 힘줄이 돋아난 손등에 이세희의 고운 손이 겹쳤다. 하얀 손이 태윤의 손가락에 깍지를 끼고, 힘을 주었다.
“마, 마마…! 앗…!”
이세희의 자지가 쑤욱 빠져나갔다. 귀두의 모양대로 내벽에 울퉁불퉁하게 벌어졌다. 태윤은 원래는 맞닿아 있어야 할 내벽이, 자지로 벌어진 그 화끈함에 이를 악물었다.
“아!”
그러나 이세희의 자지가 머뭇거릴 새를 주지 않고, 쭉 뻗은 모양대로 박혔다. 태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세희는 도망가려는 태윤을, 한 팔로 억세게 끌어안으며 가파르게 변한 숨을 뱉어냈다.
“도망가지 마.”
“하아, 마마, 도, 도망가는 게….”
“…아직 안 끝났어.”
이세희의 뇌까려진 목소리에 태윤은 등에 소름이 돋았다. 이내, 안에 흩뿌려진 정액에 태윤은 으응, 하고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틀었다. 이세희의 상체에서 벗어나려 하는데 그때마다 이세희가 몸을 넝쿨처럼 안고 놔주지 않았다.
“마, 마마….”
그런데 사정이 끝난 이세희의 자지가 다시 둥, 둥 맥박을 뛰며 발기하고 있었다. 태윤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이세희가 젖은 붉은 입술을 위로 올리며 웃었다. 눈을 내리깔고 미소 짓는 모습에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새삼스럽게 그의 아름다운 외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태윤이 숨을 몰아쉬며 머뭇거리는 사이, 이세희는 태윤의 뺨에 쪼듯이 입을 맞추었다. 그 다정함에 태윤은 몸을 꿩의 깃털로 쓸어내리는 듯한 간지러움에 몸을 움츠렸다.
“장마도 안 끝났잖아.”
사근사근 어투였으나 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세희는 쉬이, 하고 태윤을 어린애처럼 달랬다. 그가 땀에 젖은 머리를 어루만져주고, 어깨도 양손으로 시원하게 주물러주니 마음이 금세 노곤해졌다. 어린 아우를 대하는 것처럼, 그가 섬세하게 몸을 주물러주자 입에서 나른한 신음이 나왔다.
“이제 괜찮지?”
“네, 마마.”
윤이 착실하게 대답하자 이세희가 태윤을 똑바로 눕혔다. 늘어진 두 다리를 잡아 자신의 허리에 휘감게 했다. 그가 손을 내려, 전보다 더 부어 뜨끈뜨끈해진 구멍에 손을 넣었다. 태윤이 고개를 젖히며 아픔을 호소하자, 이세희가 고개를 내려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술이 능숙하게 입을 빨아들이고, 벌어진 이 사이에 혀를 집어넣어 애무해주자 손끝이 보료를 유영했다. 쭈웁, 쭙, 소리 나게 태윤의 입을 게걸스럽게 빨던 이세희가 눈을 느리게 떴다. 그리고는 자신의 밑에서 흐릿한 목소리로 신음하는 윤을 보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 목에 팔 감아.”
“제, 제가….”
마마를 감히 안아도 되겠습니까, 라고 묻기도 전에 이세희가 손을 내려 태윤의 손목을 잡았다. 그 손을 잡아 자신의 목에 두르게 하더니, 이세희는 좀 더 안으로 파고들었다. 완전히 이세희의 안에 파묻히게 된 태윤이 수줍은 지 눈을 내리깔았다.
“…이대로 비가 계속 내렸으면 참으로 좋겠지?”
태윤은 무심코 훅 들어오는 그의 질문에 눈을 깜박였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태윤의 눈이 흔들렸다. 사실은 그랬으면 좋겠다고, 계곡 물이 바다처럼 넘치고 넘쳐, 아버지가 이 가파른 곳까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세희는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태윤을 물끄러미 보더니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의 입술은 웃음기가 사라지고, 아래로 가라앉았다. 말이 없어진 두 사람 사이를 메운 것은 끈적한 입맞춤이었다. 태윤은 이세희의 입안에서 애써 참은 울음을 흘렸다. 이세희는 담담하게 체념 속에 숨겨진 갈망을 받아먹었다.
이 찰나가 영원인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았다.
*
토옥, 톡…. 수면을 가볍게 때리는 빗소리가 경쾌하다. 장마가 처음 시작될 때는 무섭게 지면을 채찍처럼 때려 섬뜩함마저 느껴졌는데, 어느 지점에 이르자 빗줄기가 가늘어지더니 고요한 가락처럼 부드럽게 들렸다. 그 때문이었을까. 태윤은 머리를 어루만지는 딱딱한 손길과 나붓하게 들리는 물소리에 그만 잠이 들었다. 간간이 누군가 노래를 흥얼거리는 게 들렸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가락에 눈을 뜨려던 윤은 눈가를 가리는 따스한 온도에 힘을 풀었다.
힘들게 살아오던 시간 속에 잠시나마 주어진 이 안온한 틈새가 좋았다. 너무 짧게 지나가지만, 그래서 더욱 소중하게 간직할 순간이었다.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열렬한 기간 동안에도, 돌이켜볼 수 있는 듯한 애틋함마저 느껴져 윤의 눈가에 눈물이 촉촉이 맺혔다. 왜 눈물이 나는지 몰라 훌쩍이는데, 자신의 등을 토닥여 주던 이가 웃음을 느긋하게 터트리며 눈가를 엄지로 닦아주었다. 그 손길에 그만 눈이 스르륵 떠졌다.
“어….”
윤이 잔뜩 쉬고, 갈라진 목소리로 멍청하게 탄성을 내뱉었다. 눈을 위로 들어 올리자, 윤의 머리와 목 부분을 만져주던 이세희와 마주쳤다. 이세희는 얇은 침의를 걸친 채 침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한쪽 손을 내려 태윤의 머리를 습관적으로 만져주던 이세희가 손을 들었다. 그가 떠나가려 한다. 그게 눈으로 확인되자, 태윤은 허겁지겁 일어나려 했다.
“아앗….”
그때, 엉덩이 안쪽에서 느껴지는 둔통에 태윤이 바들바들 떨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이세희가 태윤을 안아 조심스레 침상에 눕혔다. 흐트러진 금침을 잡아당겨 나신에 덮어주고, 등을 차분하게 토닥였다.
“더 자라. 아직 비가 오니까 괜찮아.”
윤은 말없이 이세희를 올려다보았다. 이세희는 한 번 더 씻고 나왔는지, 피부가 매끈해 보였다. 윤기가 흐르는 백자 같은 이세희의 피부와, 그의 얼굴을 신비롭게 감싸는 검은 머리카락을 보던 태윤은 무심코 손을 들었다. 태윤의 손이 만진 건 이세희의 얼굴을 반쯤 가리는 긴 머리카락이었다. 어둠을 등진 채라, 안 그래도 얼굴이 잘 안 보여서 답답했다. 처음에는 그가 거부할까 두려워 미세하게 떨리던 손은 이세희가 잠자코 있자 용감해졌다. 태윤은 말없이 몇 번이고, 흘러내린 이세희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의 곱고 수려한 얼굴이 보이자, 만족하고 목침에 얼굴을 대었다.
“착한 아이로구나.”
이세희가 말했다.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말투에 잠시 울컥했으나, 그가 자신보다 연상이라는 사실에 태윤은 가만히 있었다. 태윤은 무심한 듯 보이나 자신을 은근히 따사롭게 비추는 눈빛에 몸이 쏠렸다. 태윤은 그의 외모에 잠이 달아난 김에, 아예 그를 노골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이세희는 어둠을 밝히는 눈빛에 그만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그렇게 좋아?”
이세희의 물음에 태윤은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자결하려던 결심을 어찌 알고, 죽지 말라고 빌던 태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자갈밭에서 주저 없이 무릎을 꿇은 태윤은 흐느껴 울며, 자신이 좋아하니 죽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다. 어떻게 보면 이기적인 소원이었다. 과거를 드나들고, 다시 현재로 돌아온 이세희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태윤을 보며 말했다.
“…비 때문이었어, 모든 건.”
이세희가 윤의 뺨을 감쌌다. 그 손길은 몹시 다정했다. 피부를 데우는 손길에 태윤은 이끌리듯 그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세희는 고양이처럼 살갑게 구는 태윤을 일렁거리는 눈으로 보다가, 손을 들어 올려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자신의 동생들을 대하는 것처럼, 이세희는 다정다감한 손으로 태윤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비가 그치면 원래대로 돌아가야겠지. 너와 나눠 가졌던 처음도… 다시는 누릴 수 없겠지. 고작 비가 내려서, 비 때문에…. 이리 된 건데 참으로 이상하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 그게 당연한 건데….”
이세희가 자조적으로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있는 척하고 있었다. 언제 죽어도 상관없는 목숨이었다. 다 아버지 때문이었다. 멀쩡하게 살아가던 이의 유일한 희망마저 앗아갔다.
“모두 내가 죽길 바랄걸.”
이세희가 담담하게 말했다. 태윤의 눈이 커졌다.
“날 죽이러 온 암수들과 대신들뿐만 아니라, 황후도, 후궁들도…. 그리고 숨죽이고 있는 대신들도…. 내가 살길 바라는 자는 궁에 없어.”
“마마….”
“암살 시도가 이번뿐이었을 거라고 생각해?”
이세희가 차분하게 되물었다. 그의 눈에 고통은 없었다. 현실을 직시하는 그는, 자신이 죽기를 바라는 자들의 소원처럼 언제든 죽어줄 것 같았다. 태윤은 고통도 잊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떨리는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
“마마, 설마 또 다른 이가 마마를 죽이려 들었습니까? 어떤 자입니까? 저에게 말씀하십시오, 제가….”
“윤아, 쉿.”
이세희가 분노를 토해내는 태윤의 입을 막았다. 그는 이세희가 죽는다는 생각으로 이미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입을 가렸던 손을 떼어내면 윤이 울음을 토해낼까 걱정되어 이세희는 계속 윤의 입을 막고 있었다. 그 상태로, 그는 반대쪽 팔을 뻗어 태윤의 몸을 감싸 안으며 입을 열었다.
“네가 나를 지켜준다 해도 그건 한 순간에 불과한 일이야. 내가 설령 살아남는다 해도, 네 아버지가 죽으면 사태는 더욱 안 좋아질 거다. 날 멀쩡히 살려 둘 리가 없어.”
이세희는 자신에게 들이닥칠 일들을 어느 정도 예감한 듯, 체념했다. 태윤이 황급히 자신의 입을 가린 그의 손목을 잡아 내리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제가,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 말에 이세희가 싸늘하게 웃었다.
“날 도와주고 싶다면, 네 아버지가 내 인생에서 없어져야 해. 그렇다면 네 아버지와 태자를 네 손으로 죽일 수 있어?”
태윤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이세희는 가소롭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럴 리가 없지, 너는 그럴 수 없어. 읊조리듯 그 말을 중얼거린 이세희는 웃음을 따사롭게 희석시키며, 손을 뻗어 굳어 있는 태윤의 뺨을 감쌌다.
“너는 나를 지켜줄 수 없어.”
“…마마.”
너무 잔인한 말에 가슴이 찢어졌다. 이세희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려 했다. 비가 옅어짐에 따라, 그는 현실을 자각하고 등을 돌리려는 것이다. 태윤은 떨리는 손으로 그의 옷깃을 잡았다. 내칠까 봐 두려움에 떠는데, 그는 가만히 태윤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너는 아버지를 죽일 수 없어…. 네가 할 일은 날 네 아버지에게 데려다주면 되는 거야.”
“마마, 제가 방도를 알아보겠습니다. 그러니 그런 말씀은 말아주십시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이 궁을 벗어날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태윤이 눈물 젖은 목소리로 호소했다. 아버지, 황제를 죽이면 대역죄인이 된다. 차라리 반역이라도 일으켜 황위를 받으면 모를까, 적통이 있으니 그리 할 수도 없다. 자신을 지지해주는 세력도 없다는 걸 잘 아는 이세희는 태윤의 도움을 거부했다. 그는 강직한 시선으로 태윤을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잠시 살고자 하는 이유는….”
이세희는 말끝을 흐렸다. 죽으려면, 태윤이 잠든 동안 언제든 죽을 수 있었다. 목을 매달아도 되고, 계곡에 빠져도 되었다. 그러나 자신이 죽어버리면? 윤은 살아남을 수 없었다. 잠시나마 몸을 섞었다고 정이 든 건지 윤이 아버지의 손에 죽는다는 생각에 몇 번이나 주저했다. 눈물이 가득 밴 그 커다랗고 반질반질한 검은 눈이 자신의 발목을 잡았다. 이대로 가다간, 저승까지 윤이 따라와 마마, 하며 울 거 같아 이세희는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잠시만 더 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이세희는 몇 번이나 말을 더듬다가,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했다.
살고 싶었다. 머릿속에 그 생각이 들자, 이세희는 입을 다물었다. 울컥하고 뜨거운 덩어리가 치솟을 거 같아, 속으로 숨을 욱여넣은 이세희는 태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이 닿은 곳은 한결 가늘어진 빗줄기였다. 창가 너머로 보이는 얇은 비를 보던 이세희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더 이상 궁에서 사람들의 광대 노릇이나 하며 살고 싶지 않아.”
하지만 사람답게 살지 못한다면, 죽음이 나았다. 모든 걸 정리한 이세희는 고개를 돌려 태윤을 보았다. 태윤은 가면을 쓴 것처럼 무감한 얼굴이었다. 그의 눈이 두려움에 떨리고 있지 않았다면, 그가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태윤은 죽음을 담대하게 받아들이는 이세희의 눈을 빤히 보다,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었다.
“…제가 바라는 건 하나뿐입니다, 마마.”
비가 내리고, 물안개가 자욱한 이 밤 같은 오후에 그가 안아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도 잊을 수 없겠지. 그거면 되었다. 자신은 그저 그의 시간 속에서 잠시나마 스쳐 간 사람이라도 상관없었다. 태윤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이세희는 말없이 태윤을 보았다. 태윤은 애써 웃으며 이세희에게 있는 힘을 다해 말했다.
“제 곁을 떠나셔도 좋으니…. 살아주십시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이세희의 눈이 커졌다. 태윤은 후련한 얼굴로 서글프게 웃으며, 달아오른 제 뺨을 문질렀다.
“…그냥, 이날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저라는 사람을, 한 번이라도 기억해주신다면 그걸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마마, 죽는다는 말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살아주십시오. 아바마마 때문에 마마께서 스스로 이 목숨을 버리시기엔….”
태윤은 떨리는 손으로 이세희의 뺨을 톡, 건드리다 머뭇거리다 용기를 내었다. 손으로 감싼 태윤은 눈을 스르륵 감으며 속삭였다.
“마마는 그 무엇보다 소중하시니까요. 궁의 모든 사람이 마마가 죽길 바라지 않습니다.”
묘한 질감을 남기는 말에 이세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말은 가슴에 뿌리를 내리고,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슴에 미적지근하게 담기는 태윤의 진심에 이세희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입술을 달싹이다가, 시선을 내려 태윤의 손 언저리를 보았다. 태윤이 몹시 떨고 있었다. 가늘어졌지만, 여전히 빗줄기가 매서워 추위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이세희가 떨어진 금침을 들어 태윤에게 덮어주려 하는데, 태윤이 고개를 서서히 들어 이세희를 뚫어져라 보았다.
떨림은 토독, 톡, 하는 빗소리에 차츰 가라앉아 제 상태로 돌아왔다. 이세희는 팔짱을 끼고 태윤의 시선에 응수했다.
“제가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러니 절 버리고 도망가십시오.”
전 그거면 됩니다. 태윤이 덧붙이며 웃었다. 도망이란 말에 이세희의 오른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힘겹게 용기를 내어 한 말은 다시금 거칠어진 빗소리에 자취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이세희의 얼굴이 우아하게 돌아갔다. 비로 인해, 해가 뜨지 않고 종일 어두침침하여 이세희의 얼굴에도 그늘이 졌다. 농담을 조절해 그린 산수화 속에서 튀어나온 선녀같이, 그의 옆선이 두드러졌다. 고아하고, 차분한 눈빛에 태윤은 갑판 위에 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입을 열면 마마, 하고 떨리는 목소리를 그를 부를 것 같아 입술을 깨물어 버텼다. 견뎌야 했다.
앞으로 이것보다 더한 일을 인내해야 했으므로. 아버지의 애첩에게 안긴 것만으로도 황송할 일이었다.
“도망이라….”
이세희가 입을 달싹거리며 뜸을 들였다. 그의 혓바닥에 올라간 도망이란 단어가 유독 쓰게 느껴졌다. 같은 도망이라 하여도, 태윤과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온 도망은 각기 다르게 느껴졌다. 이세희는 고개를 숙이고 피식 웃었다. 짤막하게 퍼지는 조소에 태윤의 얼굴에 금이 미미하게 갔다. 손을 뻗어 그를 잡으려는 순간, 이세희가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눈을 돌렸다.
“도망은 안 돼.”
그의 뒤로 맞장구를 치듯 빗줄기가 내리쳤다. 지면을 후두둑, 때리는 빗소리는 화살 같았다. 온몸이 뚫릴 것 같은 강도의 비에 태윤은 바짝 굳었던 몸을 풀었다. 어둠이 음습하고 꿉꿉하게 깔릴수록 아버지가 오는 것은 지체된다. 그 사실만으로도 두려움은 점차 희석되어 옅어졌다. 태윤은 좀 더 용기를 내어 입을 벌렸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진심입니다, 마마. 언제까지 아바마마께….”
“도망은 이미 실패로 끝났다.”
이세희가 장수처럼 묵직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태윤이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있자, 이세희는 가벼운 미소를 입가에 덧그렸다. 그러나 과거를 회상하는 이세희의 눈은, 장마로 인해 자욱하게 깔린 어둠보다 더욱 침침하게 변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처럼 그의 눈은 한없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마치 무저갱 같았다.
“내가 괜히 죽음을 선택한 게 아니야. 네 아버지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죽음밖에 없어.”
결사코 죽음을 주장하는 이세희의 얼굴은 이미 생을 포기한 것처럼 담백하기 그지없었다. 정작 그걸 지켜보는 태윤만 애가 타서 눈에 물기가 서렸다. 무표정하다 못해 서릿발이 치민, 까무잡잡한 얼굴에 검은 눈만 촉촉하니 다시 가학심이 일었다. 이세희는 자신의 뺨을 손으로 감싸며 흥미진진한 눈으로 태윤을 훑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를 것입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애절한 태윤의 목소리를 이세희는 고개를 저어 저지했다. 묘한 시선으로 태윤을 보더니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구나.”라고 중얼거렸다. 태윤은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이세희의 태도에 눈에 불을 밝혔다.
“저는 아바마마와 다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아바마마께….”
“너는 내가 당한 일을 몰라서 하는 말이야.”
이세희가 담담하게 말했다. 태윤의 입이 그 말 하나에 조개처럼 다물렸다. 그날의 일을 떠올리는 이세희는 입술을 벌렸다가, 힘겹게 나직한 숨을 내뱉었다. 뜨끈한 손으로 얼굴을 느리게 비비적거린 이세희가 침상에 두 손을 대고 허리를 젖혔다. 머리까지 뒤로 젖힌 이세희가 눈을 감고서 중얼거렸다.
“네 아버지는 미쳤어.”
고저 없는 목소리는 분노가 범람했다. 비가 몰아치는 밖처럼, 그의 목소리에는 증오가 빗발쳤다. 너무 맞는 말이라 태윤이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이세희가 눈을 천천히 뜨며 주변을 살폈다. 화요궁이나, 태얼궁에 비교하면 너무나 작아 초가삼간이라고 불려도 할 말이 없는 궁이었다.
하지만 천장 무늬는 근 사 년간 보았던 태얼궁과 같았다. 금색 봉황이 구름을 드나들고, 무지개를 넘고, 지상낙원을 유영하는 그림이었다. 꼼짝없이 삼 년간 누워서 봐야 했던 천장을 눈으로 일일이 더듬어 보던 이세희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운을 떼었다.
“도망을 치자마자, 하루 만에 붙잡혔지. 당연한 결과야.”
문제는 그 후였다. 이세희는 그날을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지, 덜덜 떨리는 몸을 감싸 안았다. 태윤이 겁에 질린 듯, 오들오들 떠는 이세희를 보다 자신의 몸에 두른 금침을 가지고 그의 곁으로 무릎걸음으로 다가갔다. 도톰한 금침을 그의 몸에 감싸주려는데, 이세희가 시선을 돌렸다.
“아….”
그러더니 태윤의 얼굴을 보고 흠칫 굳었다. 제 얼굴을 보고, 아버지를 떠올린 것이다. 이세희의 낯빛이 밀랍을 굳힌 것처럼 하얗게 말라갔다.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태윤의 구멍에 정액이 샐 정도로 박아대던 이세희도, 새삼스럽게 황제를 떠올렸는지 시선을 돌렸다. 그의 호흡이 거칠었다. 금침을 잡고 있는 태윤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으나, 묵묵히 이세희의 몸에 금침을 둘러주었다. 입가를 가리고 호흡을 가다듬던 이세희가 이윽고 말을 이었다.
“…네 아버지가 내 팔다리를 다 부러뜨렸어.”
생각지도 못한 진실에 태윤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세희는 태윤이 둘러준 금침의 끝자락을 양손으로 슬며시 잡고, 천천히 눈을 들었다. 과거에 흠뻑 젖은 이세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그가 떨었다. 나신으로 우두커니 앉아있는 태윤은 망치로 얻어맞은 듯 머리가 얼얼해져, 그만을 멍하니 보았다. 이세희는 한참을 말없이 태윤을 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연약한 불꽃처럼, 나약하게만 느껴지던 그의 눈이 정신을 차리자 강하게 돌아왔다. 이세희는 작게 한숨을 내쉰 뒤 다소곳하게 앉아있는 태윤의 손목을 잡아 자신 쪽으로 끌었다.
“하나가 부러질 때마다 정신을 잃어가자, 네 아버지가 고문을 해서 깨웠지…. 내가 정신을 못 차리면 내 부모님이 맞았거든. 하지만 그래도 눈을 뜨고 싶지 않았어. 부모님이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눈을 싶지 않았지…. 그러나 억지로 떠야 했어. 그때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이세희가 아주 나직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태윤은 귀를 적시는 끔찍한 과거에 이를 세게 깨물었다. 그 짓을 벌인 자가 아버지라니. 미쳐도, 제대로 미쳤다. 그래 놓고는 이세희에게 지금도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세희는 자신을 이리 만든 자의 아들의 뺨을 쓸었다. 이세희의 부드러운 손길이 전해주는 온기에 태윤은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자신은 그에게 이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사지가 부러져서, 그대로 태얼궁에 갇혔어. 그 상태로 네 아버지를 받아들여야 했지. 그리고 내 병간호를 자처한 사람은 내 동생들이었고…. 곁에서 꼼짝없이 봐야 했지. 그래도 막냇동생은 너무 어리다고 빼주더군. 참 감사한 일이야.”
그러면서도 그는 황제를 향한 날 선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이세희는 증오가 켜켜이 쌓인 눈으로 태윤을 보며 웃었다. 그 미소는 자신을 닮은 아버지를 향해 있었는데도, 그의 눈에서 안광이 뿜어져 나와 몸이 떨렸다. 이세희는 태윤의 뺨을, 머리카락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입술을 더듬어 만지면서 중얼거렸다.
“왜 동생들 앞에서 날 강간했을까…. 한참을 생각했지. 그러다가 그가 답을 주더군.”
이세희가 양손으로 태윤의 상박을 꽉 쥐며 분노로 드글드글 끓는 눈을 치켜세웠다. 오롯한 그의 분노에도 태윤은 물러섬 없이 그를 보았다.
“널 대신할 존재가 셋이나 있다…. 그러니 내가 도망갈 수 있겠어? 나야 남자지만, 내 동생들은….”
이세희의 눈이 가늘어졌다. 후, 하고 짧게 웃음을 흘린 이세희는 태윤을 서서히 놔주며 말했다.
“도망은 안 돼. 죽음밖에 답이 없어. 그는 날 놔주지 않을 거야.”
“…마마.”
“네 아버지를 죽일 생각이 아니면 여기서 그까짓 애정은 그만 둬.”
이세희가 딱 잘라 말했다. 그의 차디찬 발언에 태윤은 몸에 찬물이 뿌려진 듯한 감각에 부르르 떨었다. 태윤이 고개를 수그리자, 이세희가 한숨을 뱉어내며 긴 머리카락을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말은 애정을 그만두라 하면서도, 손길은 몹시 다정했다. 봄볕을 그대로 녹여 만든 듯한 손길에 태윤은 눈시울을 붉혔다. 눈가가 시큰해졌다.
“내가 잠시나마 살고자 하는 이유는…. 내가 이대로 가면, 너도, 내 가족도 위험하기 때문이야. 황제가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결국 죽겠다는 것인가. 태윤은 소리 없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버지를 죽일 생각이 아니면 애정도, 자신을 도와주겠다는 마음도 접으라는 모진 말에 서글피 눈물이 나왔다. 이세희는 차마 고개를 들 용기도 내지 못하고 우는 태윤의 모습이 가여웠는지 팔을 등에 둘렀다. 언제는 이 사내를 범한 후, 황제에게 보여줘 내칠 생각이었는데…. 그놈의 비가 뭔지, 축축하고 뒤틀린 분위기에 쓸려 이 사내를 살리게 되었다. 마음에 안 들면 내치고, 죽인 게 수두룩했는데 황제의 아들이 도대체 뭐라고, 이리 신경을 쓰는지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흐으, 마마….”
아마 이 강직한 눈빛 때문이었던 것 같다. 막냇동생 세연이가 한때 보여주던 그 맑은 눈빛을 닮아서 시선이 그리로 흘러갔다. 자신도 모르게, 이끌리듯 보게 되었다. 무사답게 냉철하고 딱딱하지만, 자신을 볼 때만은 모서리가 마모된 듯 누그러진 눈빛에 물리고 만 것이다. 태윤을 토닥이면서 어두컴컴한 정면을 노려보는 이세희의 눈은 차가웠다. 냉수를 한껏 빨아들인 듯, 살얼음까지 떠다니는 눈으로 궁 벽을 훑던 이세희는 자신의 품에 엉겨붙은 태윤을 떼어놓았다.
“마, 마마, 제, 제가…. 저는….”
태윤이 끅끅거렸다. 눈물이 차올라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이세희는 태윤을 보면서 조용히 웃었다.
“너는 아버지를 못 죽여. 내가 알아. 나에겐 죽이고 싶은 사람이라도, 너에겐 하나뿐인 아버지니까.”
태윤이 허으, 하고 소리 내어 울며 이세희의 옷깃을 잡았다. 그걸 이세희가 내치며,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말했다.
“운명인 거야, 윤아.”
눈물이 그렁그렁한 태윤의 눈이 위로 올라갔다. 이세희는 차분한 손길로 연신 태윤의 눈물을 닦아주며 다정하나, 선을 긋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원래 너랑 나는 이렇게 될 수 없는 인연이었지. 비가 내려서, 잠시나마 이어진 운명인 거야. 그러나 비가 그치면 우리는 원래대로 돌아가야 해. 너는 지켜볼 수밖에 없어. 그게… 너와 나의 필연이야.”
비가 내린 건 우연이었나, 이후의 기로는 필연이었다. 그 기로에서 이세희는 스스로 짊어지고 떠나는 걸 택한 것이고, 태윤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해 지지부진하게 서 있었다. 한 번도 무언가를 갈망해본 적이 없는 태윤은, 그를 원하는 것조차 무서워했다. 늘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아버지가 선택해준 길을 걸어왔다. 그를 벗어난다는 건 태윤의 기둥이 무너진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넌 네 세상을 살아.”
이세희가 부드러우나 강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윤은 그를 바로 선택할 수 없는 자신의 우유부단함에 고개를 숙였다. 이세희는 태윤의 등에 둘렀던 팔을 떼어내기 직전, 귀에 대고 말했다.
“너의 세상에 나는 없어. 있을 수도 없고.”
태윤이 눈을 힘겹게 들어 이세희를 보았다. 매몰찬 이세희는 아름답게 웃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붉어진 태윤의 눈가를 톡 건드리며 말했다.
“그 세상에 돌아가면 이런 눈으로 보면 안 돼. 네 아버지가 널 가만히 두지 않을 거니까. 그래도 명색이 처음을 나눠 가진 사인데….”
손길을 거둔 이세희는 태윤의 눈물 젖은 뺨을 쓸다가 턱을 잡고 들어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가까이 대었다. 그의 새초롬한 붉은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졌다. 덜덜 전율하는 태윤의 숨을 가볍게 빨아들인 이세희가 아주 느리게 중얼거렸다.
“…비가 그치면, 다시 돌아가는 거야.”
“마마께서… 원하신다면 그리 하겠습니다.”
이세희가 입술을 맞댄 채 웃었다. 그의 나붓한 웃음소리가 입술 표피를 건드리자 묘한 쾌감에 태윤이 몸을 떨었다. 이세희는 눈을 감고, 태윤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흐읏, 하고 태윤이 신음을 흘리자 이세희가 근육으로 단단한 허리를 더듬었다. 그의 손에 허리가 잡혀 쑥 당겨졌다. 태윤이 헐떡이며 눈을 바르르 떨자 이세희가 눈꺼풀에 입을 맞추었다. 그 입맞춤이 어찌나 애틋하던지, 태윤은 이 상태로 장마가 지속되길 바랐다.
그를 아버지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아버지를 죽일 수는 없었다. 그는 아버지이자 자신의 주군이었다. 애첩 때문에 아버지를 죽인다면, 그것은 곧 패륜이며, 이세희의 보잘것없는 집안도 풍비박산이 난다.
모두를 위해서라도, 자신이 이 마음을 접고 물러나야 했다. 이세희의 말이 옳았는데도 자꾸만 그의 손을 잡고 싶었다.
이제 그의 손을 잡을 수 있는 일은 아버지에게 데려다주기 위해, 손을 내미는 순간밖에 없었다. 비가 그치면, 그의 말대로 원래대로 돌아간다면…. 그 생각의 끝에 확답을 맺어야 했는데,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아직 비가 와.”
이세희가 매혹적인 중저음으로 말했다. 아직, 이란 말에 새겨진 욕정에 태윤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세희는 소리 내어 웃으며, 양손으로 눈물 젖은 뺨을 감쌌다.
“더 울어도 돼.”
그러면서 그가 눈을 감고 다가와 입을 맞추었다. 진득하고 농염한 입맞춤에 태윤은 손을 들어 그의 등을 감싸 안았다. 마치 둘의 염원을 아는 듯, 비가 그치지 않았다. 지독한 장마였다.
*
몸이 아예 뻥 뚫린 것 같다.
“흐으윽, 아, 마마…!”
이제는 통증이 아니라, 길이 난 구멍으로 뜨거움이 작렬했다. 붉은 내벽 안에 촘촘하게 났을 주름도 모조리 펴진 것 같았다. 이세희의 굵고 단단한 자지가 여린 점막을 꾸욱, 누를 때마다 허벅지가 전율했다. 이세희의 자지를 물기 위해, 본능적으로 아래에 힘이 들어가자 허벅지의 근육도 바짝 수축한 것이다. 이세희는 눈을 반쯤 내려뜨고, 자신의 아래에서 신음하는 태윤을 보며 허리를 세웠다.
“흐응, 응, 마, 마마, 너무 깊…!”
이세희의 새초롬한 붉은 입술 끝이 위로 올라갔다. 초승달처럼 완연한 호선을 그리는 미소를 보자, 태윤의 눈이 흐리멍덩해졌다. 호수 위에 빗물이 후두둑 떨어져 파동이 이는 것처럼 쾌감이 퍼져가는 걸 자신의 눈으로 본 이세희가 고개를 숙였다. 이세희의 입술이 벌어지며 뜨뜻한 숨결이 신음과 뒤섞여 떨어지자 태윤의 눈이 힘겹게 떠졌다. 아슬아슬하게 눈가에 매달려 있던 눈물이 아래로 떨어졌다. 이세희는 뜨거운 눈물을 엄지로 닦아주며, 허리를 느릿하고 얕게 움직였다.
“하아…! 마마, 거긴…!”
뭉툭한 귀두로 배꼽 밑, 가장 느끼는 지점을 위아래로 마찰하자 찌르르한 쾌감이 일었다. 손가락과 발가락이 동시에 오므라들었다. 이세희의 훤칠한 등에 감겼던 팔은 안으로 바짝 움직였다. 태윤의 손등에 힘줄이 융기하고, 동시에 이세희의 얼굴을 쾌감으로 일그러졌다.
“윤아, 너무 좋아도…. 흐읏, 그렇게 물면 안 돼.”
이세희의 잇새에서 정제되지 못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쾌감에 양 뺨이 상기되었다. 태윤은 멍한 눈으로 그를 좇다, 손을 뻗어 그의 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손가락에 휘어 감기는 머리카락이 비단보다 부드러웠다. 마마, 하고 갈라지고 쉰 목소리로 부르자 이세희가 흐릿하게 웃었다. 그의 머리카락을 힘없이, 여러 번 매만지던 태윤의 탄탄한 손등이 그의 어깨에 닿았다.
“마마….”
그를 보는 태윤의 시선이 더할 나위 없이 애틋했다. 시선 언저리에도 듬뿍 뿌려진 애정에도 이세희의 시선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미 그는 이별을 예고했다. 그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그는 자신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리란 걸 태윤은 두근거리는 그의 심장 박동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달콤함도 아픔도 준 그를 기억하는 건 온전히 자신의 몫이었으니까.
“연모합니다.”
계속 그 말을 담고 있으면 혀와 가슴에 멍이 들 것 같아, 태윤은 그를 향해 서슴없이 고백을 퍼부었다. 지금이야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비가 내리지만, 곧 있으면 이 비도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완연한 여름이 드리우리라. 그러니 지금이 아니면, 이 마음을 다 줄 수 없었다. 태윤은 내벽에 달라붙는 그의 자지를 놓치고 싶지 않아, 은연중에 계속 힘을 주었다. 마찰로 부들부들해지고 부은 점막으로 둥, 둥, 거리는 그의 맥박이 느껴졌다.
“하읏, 응….”
이세희가 벌을 주듯, 세게, 느리게, 자지를 위아래로 움직여 그 부근을 긁어내리자 태윤의 신음이 달콤하게 젖었다. 가느다랗게 갈라지는 목소리가 사내를 조르고 있었다. 이세희는 태윤의 두툼한 허리를 손으로 꽉 잡고, 엄지로 자지가 들어가는 부근을 꾹꾹 누르며 허리를 추켜세웠다.
“하아, 하아…!”
이세희의 거친 신음이 태윤의 위로 쏟아졌다. 태윤은 이를 악물고 이세희의 어깨를 더듬었다.
“흐윽…! 으읏, 아…!”
태윤은 연신 아래에서 터지는 산발적인 쾌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눈앞이 하얗게 점멸하고, 어둡게 물들기를 반복하며 머리가 쾌감으로 둔해졌다.
“윤아, 하아…! 흐읏…!”
이세희가 허리를 꽈악, 조이며 자지를 정을 박듯 넣었다. 점막이 안으로 말려들어가는 느낌이 생생했다. 세상이 전부 백색으로 물들었다. 그 틈새에, 금이 번쩍거리듯 빛이 반짝거렸다.
“흐으읏….”
느끼는 지점에 밀물처럼 퍼지는 정액에 태윤의 발가락이 곱아들며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너무 좋아서, 눈물은 마구 터졌다. 태윤의 대물 끝에서 정액이 아니라 묽은 액이 피핏 하며 터져 이세희의 배를 적셨다. 사정 후, 물안개처럼 퍼지는 탈력감에 태윤은 완전히 몸을 늘어뜨리고 숨을 헐떡였다. 이세희는 여전히 태윤의 안에 자지를 박아 넣은 채 눈을 깜박였다.
“힘들어?”
이세희가 탁한 목소리로 물었다. 태윤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대답하기 전, 고개를 돌려 침상 아래에 깔린 어둠의 농도를 확인했다. 아무리 어두워도, 낮과 밤에 따라 어둠의 진득함이 다르기 마련이었다. 지금은 적당히 사물이 분간이 갔다. 단출하고 작은 침전 내부를 천천히 확인하던 태윤은 침을 모아 삼켰다. 얼마나 울었는지 침만 삼켜도 목이 홧홧했다. 태윤이 후들거리는 손을 들어, 목젖 부근을 문질렀다.
“목말라?”
이세희가 퍽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실제로 어린 동생들이 여럿 있어서 그런가 태윤을 대할 때에도 동생을 대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애정의 기반이 조금 다르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씩 먹이처럼 뿌려지는 애정이 좋아 태윤은 희미하게 웃었다.
“조금….”
이세희가 태윤의 무릎 안쪽에 손을 넣더니, 빠르게 자지를 빼내었다. 퉁퉁 부은 입구에 걸렸던 귀두가 퉁, 하고 튕겨져 나왔다.
“흐으윽….”
마찰로 인해 붉게 부은 입구에 귀두가 마지막까지 비벼지니 태윤의 입에서 아릿한 신음이 나왔다. 자지 모양대로 길이 난 입구는 다물리지 못하고 붉은 내벽을 그대로 보인 상태로 정액을 줄줄 쏟아냈다. 정액이 뚝, 뚝, 빗물처럼 보료로 떨어져 그 부근이 짙게 물들었다. 이세희는 자신의 흔적을 찾아 오므렸다, 벌리기를 반복하는 구멍을 하염없이 보았다. 다시 아래가 설 것 같았다. 실제로 아직도 열이 풀리지 않아 자지는 꼿꼿했다. 아랫배에서 꺼덕거리며 존재를 드러내는 선홍색 자지를 보던 이세희는 탈력감에 널브러진 태윤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마마, 더 하셔도….”
태윤은 더 해도 좋다는 뜻으로, 이세희를 보았지만 그는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리며 거절했다.
“곧 비가 그칠 거야.”
관계의 끝을 의미하는 말에 태윤의 눈이 침울해졌다. 안길 때는 아파도, 좋아도, 그저 좋다고만 울던 자가 슬픔에 젖자 이세희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너도 알고 있었잖아.”
이세희는 침상에서 내려가며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이 물끄러미 태윤에게 닿자, 태윤은 쓰게 웃었다. 그가 자신을 순전히 좋아해서 안은 게 아니라는 건,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그의 시선에도 거리를 두는 게 보였으니까. 태윤은 침상에 손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허리에 둔통이 일었지만 개의치 않고, 한숨을 내쉬며 그를 보고 말했다.
“시작이 잘못되었다 해도, 끝이 좋았으니 됐습니다.”
태윤은 그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아마 절 죽이기 위해 안으셨다고 해도, 안겼을 겁니다.”
이세희는 짜증 섞인 눈빛을 보내며 고개를 돌렸다. 그가 작게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뭐라고 하는지 들리진 않았다. 그가 완전히 몸을 일으키자 긴 머리카락이 허리 끝자락까지 쏟아져 휘장처럼 흔들거렸다. 나신에 침의를 대충 걸친 그는 침전을 나갔다. 태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침상을 지키고 있었다.
잠시 후, 돌아온 그의 손에는 백자가 들려 있었다. 보통 술이나 물을 담아두곤 하는 병이었다. 학이 그려진 고급스러운 백자를 보아하니, 필시 별궁을 관리하는 내관이 재해를 대비해 두고 간 것이었다.
“술입니까?”
태윤이 물었다. 가뭄이 온 듯,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를 듣고 피식 웃은 이세희가 백자를 들고 흔들었다.
“나는 원래 술을 못 해.”
이세희가 어깨를 가볍게 털며 웃었다.
“네 아버지 때문에 강제로 마시게 됐지. 의식이 있을 땐 잘 못 느껴서 네 아비가 싫어했거든.”
듣기만 해도 괴로운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하는 이세희를 보며, 태윤은 움찔했다. 정작 이세희는 태연자약했다. 그는 백자 입구를 입가에 갖다 대더니, 천천히 투명한 액체를 흘려보냈다. 손을 뻗어 백자를 받으려는 작정이었던 태윤은 당황해서 눈을 깜박였다. 이세희는 눈을 반쯤 내려뜬 채 태윤을 빤히 보면서 백자 병을 떼어냈다. 그리고 반대편 손을 확 뻗어, 도망가려는 태윤의 뒷목을 잡고 단번에 뒤로 당겼다.
“아…!”
태윤의 눈가가 미미하게 일그러지며 입이 벌어졌다. 이세희는 닫히는 틈을 주지 않고 곧장 부딪쳐왔다. 아플 줄 알고 눈을 질끈 감았으나, 입술에 닿은 건 보드랍고 말캉한 피부의 감촉이었다. 달콤한 감각에 태윤의 눈이 바르르 떨리며 떠졌다. 태윤의 눈이 짜릿한 쾌감에 멍해지는 순간, 이세희가 눈웃음을 요염하게 지었다. 곱게 휘는 눈웃음에 따라 물이 흘러들어와 건조해진 목을 적셨다.
“흐음….”
태윤이 어색하게 입술을 오므리며 물을 느리게 삼켰다. 이세희는 한 번에 많은 양을 넘기지 않고, 태윤이 받아먹는 걸 확인하며 물을 넘겨주었다. 태윤이 세 모금으로 나누어 마시고 나서야 이세희가 천천히 떨어졌다. 이세희와 태윤의 거리에 딱 손가락 하나 길이 정도의 타액이 연결되었다.
“더 줄까?”
이세희가 백자의 오목한 부분을 쥔 채, 능글맞게 물었다. 아버지에게 술을 먹여주듯, 자신에게 물을 먹여주는 이세희의 자태에 태윤은 반쯤 넘어간 상태였다. 흐물흐물하게 녹아든 눈으로 흐릿하게 웃은 태윤이 엉겨 붙자 이세희는 웃음을 터트리며 태윤의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리 구니….”
이세희가 고의적으로 말을 흘리며, 백자 입구에 입술을 대었다. 방금 했던 것처럼 적당량의 물을 입에 머금은 이세희가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 이세희는 눈을 감고 있었다. 태윤도 그를 따라 느리게 눈을 감으며 손을 뻗어 그의 목을 감쌌다. 고개까지 틀어가며 알아서 아기 새처럼 물을 받아먹자 이세희가 웃음을 흘리며 머리채를 놓아주었다.
“으음….”
태윤의 목젖이 위아래로 움직이고 꿀꺽, 물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세희의 웃음은 물의 흘러감에 따라 점차 고혹적으로 변했다. 그는 입술을 맞댄 채 웃음을 보냈고, 그 웃음이 입술을 간지럽히자 태윤은 몸을 움츠렸다.
“네 아버지가 오면.”
이세희가 입술을 완전히 떼어내기 전, 이마는 붙인 상태로 속삭였다. 그의 손이 태윤의 뺨을 감쌌다. 시선을 떼지 말고 자신을 보라는 그의 저의에 태윤은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널 걱정하게 만들지 마. 알았어?”
많은 의미가 담긴 말에 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세희가 “착하네.”라고 덧붙이더니, 태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침상에서 내려가더니, 바닥에 떨어진 태윤의 옷을 손에 건네주었다. 여름에 입기 좋도록 얇게 만들어진 검은 철릭과 붉은 비단끈을 매만졌다.
돌아가고 싶지 않다. 이 상태로 별궁에 머물고 싶었다. 이루어지지 않을 소망을 그려보며, 태윤은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몸이 후들거렸지만, 이제 몸 안에 남은 흔적을 씻어내고 황제를 맞이해야 했다. 정사 중에 계속 귀를 적시던 빗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느 때인가부터 어둠도 쾌청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발끝에 햇빛이 걸리기 시작했다. 비가 그친 것이다. 이세희도 점차 어둠을 씻어내는 빛을 무감한 얼굴로 보다, 고개를 돌려 태윤을 보며 말했다.
“장마가 끝났어.”
이세희의 얼굴에 무지개 같은 웃음이 걸렸다. 아름답지만, 금세 사라질 화려한 미소에 태윤은 눈을 떼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얼굴을 붉히고 버벅거렸을 테지만 이젠 기억해야 할 때였다. 태윤은 그의 고운 아미를, 사슴 같은 검은 눈에 찬 우수를, 쭉 뻗고 끝이 둥근 코를, 그리고 고양이처럼 위로 올라간 그의 붉은 입술을 애무하듯 눈으로 훑었다.
사슴처럼 쭉 뻗은 하얀 목, 떡 벌어진 어깨, 사내답게 단단한 손. 그 모든 것을 일일이 훑던 태윤은 경건한 태도로 그의 손을 잡았다. 이 이별이 너무 슬퍼, 울 것 같은 눈을 하면서도 태윤의 손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보내드리겠습니다.”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태윤은 고개를 숙여 이세희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태윤의 입술이 울음을 삼키느라 파르르 떨렸다. 이세희는 살결에 닿는 그 떨림 하나하나가 애달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이세희는 태윤의 입술이 떨어지기 직전, 스스로 손을 가져갔다. 이별은 말없이 전해졌다. 태윤은 입술에 남은 그의 온기가 사라질까 두려워 손가락으로 입술을 더듬어 만졌다.
*
비가 그쳤어도 황제는 염왕처럼 들이닥치지 못했다. 사냥터부터 이 산턱까지 이르는 계곡이 불어 쉽게 건너지 못한 것이다. 아마 이삼 일 정도는 지난 후에야 그가 올 것이라 짐작이 되어, 두 사람은 정사를 하느라 느끼지도 못했던 허기를 채웠다.
계곡이 불어난 덕분에, 태윤은 이세희로 인해 지쳤던 몸을 금세 회복하고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세희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고한 자태로 별궁 앞에 서서 황제를 기다렸다. 팔짱을 끼고, 발로 바닥을 까닥거리며 황제가 올 길목을 지켜보는 이세희의 눈이 날카로웠다. 애첩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명예롭게 받아들이는 적군의 장수 같은 기개마저 흘러 태윤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저러다가 또 이세희가 황제에게 맞을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이세희는 지루함마저 느껴 하품을 했으나, 태윤은 황제가 두려워 노심초사했다.
만약, 정말 만약에 하나라도 그가 이 사실을 안다면 가만두지 않을 텐데. 차라리 날 죽이고 이세희를 용서해달라고 빌까. 태윤은 자신과 이세희가 적들과 장마를 피해 뛰듯이 걸어왔던 길목을 보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손이 불안감으로 저릿저릿해 아팠다.
이세희는 어찌 저리 태연할까. 태윤은 감탄 어린 시선으로 꼿꼿한 이세희의 뒷모습을 보았다. 긴 머리는 앞으로 흘러내려 묶고, 궁에 있던 검은 평복을 입자 마치 오릉의 공자같이 기품이 흘렀다.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감출 수 없는 설렘이 이세희에게도 닿았는지, 그가 마지못해 고개를 돌렸다.
“윤아.”
그만해라, 라고 말할 찰나 저 멀리서 뿔피리 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 바로 옆에서 북을 둥, 둥 친 것처럼 고막이 얼얼한 뿔피리 소리가 문을 박살내고 들어가려는 적 같았다. 태윤은 몸을 긴장으로 바짝 곤두세웠다. 이세희는 귀찮다는 듯 심드렁한 얼굴로 정면을 보았다. 뿔피리 소리가 발걸음처럼 바짝 달라붙었다. 가슴에 말이라도 뛰는 것처럼, 매섭게 쿵쿵거렸다.
긴장감이었다. 황제가 온다는 사실만으로도, 침이 고이고 머리가 팽팽 돌았다.
아버지 몰래 이세희와 교접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날까 봐, 무서움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꿰뚫었다. 천둥이 몰아치기 직전의 하늘처럼 먹구름이 드리운 것 같았다. 식은땀이 관자놀이에 맺혔다. 어쩔 수 없는 죄악감에 가슴의 울림이 세질 무렵, 저 길목에서 황금색 평복이 흩날리는 게 보였다. 황제를 상징하는 색이 햇살처럼 어두컴컴한 길목에서 드리웠다. 본래는 내관이나 금군들을 앞세우고 왔어야 할 황제가, 가장 선두에 있다. 그만큼 황제도 급했다는 뜻이리라.
태윤은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띠며 성큼성큼 걸어오는 황제를 보고 흠칫 떨었다.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를 보자 몸에 소름이 쫘악 돋았다. 황제는 이세희의 너머의 아들을 빤히 보며 눈을 가늘게 뜨면서 턱을 매만졌다.
“흐음….”
그가 침음하는 소리가 정적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태윤이 예의바르게 바닥에 엎드려 황제를 받들었다.
“소신 금군대장 태윤, 황제 폐하를 뵙사옵니다.”
우직하고 담백한 태윤의 인사에도 황제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무거운 차양막을 들고 오는 내관보다 더 빨리 걸어와, 이세희의 앞에 섰다. 이세희는 자신 앞에 드리우는 거대한 그림자에 눈썹만 꿈틀 거릴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무릎을 꿇는 예의는 애초에 보이지도 않았다. 팔을 늘어뜨리고, 황제가 무슨 말을 할지 서늘한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황제는 여전히 비정한 웃음을 띤 채로, 바닥에 납작 엎드린 태윤과 무심한 얼굴로 서 있는 이세희를 번갈아가며 보았다. 그럴수록 그의 눈은 음습하게 깊어졌다. 황제는 이세희의 턱을 잡고 위로 치켜세웠다. 이세희의 하얗고 뽀얀 목덜미를 관찰하던 그는 손가락을 옷깃 안에 집어넣어 들추더니 들끓는 목소리로 물었다.
“분위기가 이상하단 말이지….”
이세희의 눈이 분노로 달아올랐다. 그걸 본 황제의 눈에서 웃음기가 가시고 냉기가 뚝뚝 흘렀다.
“왜 둘이….”
황제의 입술이 다 벌어지며, 말이 다 이어지기도 전이었다. 황제의 잘생긴 얼굴이 퍼억, 소리가 나며 돌아갔다. 황제의 눈이 놀라서 크게 뜨여지고, 그의 손이 얼얼한 자신의 뺨에 닿았다.
“세희야, 너….”
황제는 자신이 이세희에게 얼굴을 맞았다는 사실에 놀랐는지, 멍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미쳤습니까?”
황제를 뺨을 주먹으로 때린 자는 이세희였다. 진심으로 때렸는지, 이세희는 얼얼한 손을 허공에 털어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발정 나더니, 눈에 뵈는 것도 그런 것밖에 없으신 모양입니다?”
황제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휘둥그레 커졌던 눈은 그와 반대로 감기면서, 매혹적인 웃음을 만들어냈다. 잘 영근 초승달 같은 눈웃음은 선했으나, 선뜩하게 벌어진 입술에서 나오는 소리는 냉엄하기 짝이 없었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이세희에게 난데없이 맞은 게 몹시 분했는지 황제의 안광이 노르스름하게 번뜩였다. 주변에 있던 내관들은 수풀을 헤치고 나온 야수를 맞이하는 기분에 휩싸여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태윤은 자신의 등을 짓누르는 위압감에 입술을 앙다물고 식은땀을 뚝뚝 흘렸다. 이 사태의 중심인 이세희만이 아무렇지 않은 듯 황제를 응시했다. 파문이 일지 않는 태평성대의 세상처럼, 이세희의 눈은 평온했다.
“…네가 정녕 미쳤느냐? 감히 황제의 용안에 손을 대?”
황제가 이세희의 주먹이 닿았던 뺨을 문지르며 으르렁대듯 말했다. 감히, 에 힘을 주는 목소리가 격노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반대편 소매에 가려진 손이 당장이라도 날아와, 이세희를 두들겨 팰 것처럼 떨리기까지 했다. 풍전등화의 상황에 고개만 숙이고 있던 태윤도 고개를 슬며시 들었다. 만약 황제가 이세희에게 손을 대면 망설이지 않고 달려들 기세로 무릎도 살짝 띄운 상태였다. 마른침을 삼키며, 이세희의 너른 등을 응시했다. 황제를 보고 싶지 않아도 그가 이세희보다 머리 하나는 큰 체격이기에 태윤은 이세희의 뼈와 살을 분리할 것처럼 노려보는 황제의 시선을 엿볼 수 있었다.
분노, 배신감, 상처, 그리고 연모.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황제의 눈에서 안광이 소용돌이처럼 일렁거렸다. 그 중심에는 고요한 이세희가 있었다. 자신을 덮칠 폭풍을 뻔히 알면서, 이세희는 고고하게 팔짱을 끼며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이 습윤한 바람을 타고 끈적하게 흐를수록 황제의 눈빛은 매섭게 불타올랐다. 소매가 들춰지는 게 심상치 않아 태윤이 한쪽 발을 땔 무렵, 이세희가 손을 들어 황제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놀랍게도, 황제의 불길이 한 번에 멎었다. 장마가 내려 모든 화마를 잠재운 것처럼 이세희의 접촉에 격노가 무뎌진 황제는 어느새 순한 양이 되어 이세희를 물끄러미 보았다.
“신첩을 위험에 두신 것만으로도 폐하는 맞을 만합니다.”
황제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뭐라?”
그러나 이세희가 엄지로 입술을 꾹 눌러, 조용히 하라고 종용하자 황제는 입을 벌리지 않았다. 커다란 덩치를 숙여 이세희를 내려다보았다. 황제가 숨을 죽이자, 내관들도 고개를 조아리며 눈치를 살폈다. 태윤은 이세희의 난데없는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아 멍한 시선으로 이세희의 등을 보았다.
그는 아버지를 싫어하는 게 분명한데, 어째서…. 이세희가 아버지를 두들겨 패는 건 이해가 갔지만, 다정하진 않아도 만지는 건 도통 이해할 수 없어 자꾸만 시선이 향했다. 가슴이 제멋대로 뛰었다. 뼈를 뚫고 나올 듯한 박동에 신음이 나올 거 같아, 입술에 피가 날 정도로 깨물었다. 바닥을 짚고 있는 손은 갈고리처럼 휘어, 질퍽한 진흙에 자취를 남겼다. 이세희가 가슴에서 미친 말처럼 날뛰자, 머리에 먼지바람이 일며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신첩을 탐하려 한 자는 따로 있습니다, 폐하.”
무미건조한 말투에 주변에 떠돌던 습기마저 건조해졌다. 긴장감이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언제 시위가 놓일지 몰라, 내관들은 숨도 못 쉬고 황제의 널찍한 어깨와 탄탄한 등을 살폈다. 황제는 이세희를 빤히 내려다보다 입술 끝을 미려하게 올리며 손을 움직였다. 그의 손이 닿은 곳은 이세희의 날씬한 허리였다. 당연하다는 듯 이세희의 허리를 휘감는 그의 손을 보며 태윤은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단번에 파고들었다.
“너를 탐하려 한 자가 있었다는 것이냐.”
황제의 의미심장한 말투가 이세희에게 당도했다. 태윤은 그의 허리를, 위에서 아래로 은근히 쓸어 만지는 투박한 손을 보며 눈을 감았다.
이제야 깨달았다. 자신은 아버지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었다. 그에게 안기고, 사랑을 퍼부은 것도 모자라 그의 손길을 받는 자리를 은연중에 바라고 있었다.
가소로운 자신의 욕심에, 태윤은 속으로 헛헛한 미소를 삼키며 다시 눈을 떴다. 이세희는 태윤이 아주 짧은 사이, 정신을 가다듬는 동안 황제의 품에 안겨 있었다. 하지만 본인은 원하지 않았는지 상체를 들썩거렸다. 그런 이세희를 황제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 쪽으로 바투 안았다.
“아까처럼 해봐, 세희야.”
황제가 조르듯이 채근했다. 이세희가 눈을 날카롭게 치켜떠 황제를 바라보자, 황제가 이세희의 뺨을 매만졌다. 엄지로 천천히 눈가를 쓰는 손길에 이세희의 눈꺼풀이 파들파들 떨렸다. 시원하게 트인 황제의 눈매가 휘었다.
“이렇게 말이야. 응?”
“신첩이 다정하게 나오길 바라시는 겁니까, 폐하께서? 신첩을 이렇게 위험에 처하게 두시고요?”
이세희가 점차 끓는 화를 참지 못하고 역정을 냈다. 그의 어깨를 밀어내려 했으나, 그 손목은 황제에게 잡혔다. 황제의 악력에 이세희가 앓는 듯한 신음을 내다가, 입술을 깨물어 참았다. 이세희는 표독스러운 시선으로 황제를 죽어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폐하께선 정작 충성스러운 아들을 의심하시다니요! 신첩이 장정 네 명에게 강간당할 위험에 처했을 때, 신첩을 지켜주려 나선 건 폐하가 아니라 폐하의 아들이었습니다. 폐하께선 신첩이 무서움에 떨고 있을 때 무엇을 하셨습니까? 비빈들과 연회를 즐기지 않으셨습니까?”
“나도 세희 널 찾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장마가….”
자신을 다그치는 이세희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얻기 위해 황제가 조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세희는 황제의 손목을 강하게 뿌리치며 비웃음을 지었다. 황제는 늘 무심하게 굴거나 대들던 이세희가 자신의 탓을 하고, 토라진 것처럼 굴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면서도 그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조마조마한 게 보였다. 태윤과 내관들은 처음 보는 황제의 어린애 같은 구석에 어안이 벙벙해 눈을 깜박였다.
이세희는 자신의 허리를 더듬는 황제의 손까지 뿌리치며 상체를 틀었다. 그의 고개가 돌아가며 태윤을 슬그머니 보았다. 멍하니 자신을 보는 태윤을 보고 이세희가 묘한 눈빛을 보내더니 황제의 이끌림에 끌려갔다. 황제가 두 손으로 이세희의 허리를 휘어감아 안은 것이다. 이젠 놔주지 않을 작정인지, 아예 힘을 줘 바짝 안았다. 이세희는 어쩔 수 없이 황제의 상체에 손을 대고 그를 봐야 했다.
“세희야, 짐도 노력했다. 하지만 너도 알지 않느냐. 장마가 시작되면, 사나흘이고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래도 오셨어야죠.”
이세희가 빈정거렸다. 개선장군처럼 당당한 태도는 여전했으나, 전과는 미묘하게 달라진 행동으로 황제를 살피고 뺨을 어루만졌다. 황제의 눈가가 설렘으로 일그러졌다. 이세희는 고개를 젖히고, 스산한 미소를 입가에 깔며 낮게 속삭였다.
“이제 보니 황제라는 자리도 보잘것없습니다. 장마 따위에게 밀려 신첩도 구하지 못하고….”
황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존심이 구겨졌는지, 그의 입매가 꿈틀거렸다. 이세희가 은근히 태윤을 칭찬하자, 황제의 눈에 태윤을 향한 질투가 서렸다. 이세희는 지그시 그를 눈여겨보다, 그가 태윤을 보지 못하게 손으로 그의 뺨을 완전히 감싸며 그를 보았다. 황제의 시선이 홀린 듯 이세희에게 빨려 들어갔다,
“폐하의 아들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는 폐하의 충신이고, 신첩을 강간당할 위기에서 구해준 은인이니까요.”
“…내 아들을 보는 너의 시선이 묘하게 다정해, 짐이 의심했다. 미안하구나.”
황제의 입에서 나온 사과에 태윤의 가슴이 쿵 하고 떨어졌다. 내관들도 화들짝 놀라 황제의 굳건한 등을 보았다. 황제는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는 이세희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그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의 사내다운 입술에서 설렘으로 인한 떨림이 숨결로 나왔다. 그가 눈을 감은 찰나, 이세희는 혐오스러운 시선으로 황제를 노려보았다.
“금군대장은 신첩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폐하의 명대로 절 지켜 주고, 보살펴 주었습니다.”
진실은 진실이었다. 이세희가 짐승처럼 태윤을 탐했고, 태윤은 얌전히 다리를 벌려주었으니까. 태윤은 거짓인 듯, 진실인 이세희의 고백에 어깨를 움찔거렸다. 황제는 자꾸만 태윤을 칭찬하는 이세희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토라진 듯한 눈빛을 보냈다. 이세희는 목을 울려 침음하더니 묘한 말을 중얼거렸다.
“생각할수록 황제라는 자리도 참 헛것이라니까요. 정작 위험할 땐, 신첩을 지켜주지 못하시니.”
“내, 너를 지켜 주기 위해 짐의 아들을 준 것이다.”
황제가 조곤조곤 말했다. 늠름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쉼 없이 흔들리는 그의 눈은 이세희의 마음을 원하고 있었다. 이세희는 쉽게 마음을 줄 생각이 없었는지, 그를 겨울바람이 이는 눈으로 바라보며 속삭였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랍니까. 폐하는 하신 게 없는데.”
정곡을 찌르는 이세희의 말에, 황제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정적이 이어졌다. 이세희는 처음부터 끝까지 태연자약한 태도를 유지하며 황제를 살폈다. 이세희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황제를 올려다보다, 손을 올렸다. 황제의 눈이 저절로 이세희의 손끝을 따라갔다. 이세희의 손이 닿은 곳은 황제의 어깨였다. 이세희는 황제의 어깨를 양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쥐더니, 발돋움을 해 황제의 귀에 대고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폐하가 이 나라의 지존이시라면, 신첩을 궁에서 완벽하게 지켜 주셨어야죠….”
말끝을 고의적으로 흐린 이세희가 손을 들어 황제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었다. 황제가 마른침을 삼키며 허겁지겁 이세희를 보았다.
“신첩이 폐하의 곁을 지키겠다고 약조했을 때, 폐하께서 뭐라고 하셨지요? 신첩이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주겠노라고 하셨지요?”
“…그러했다.”
황제가 침묵 끝에 대답했다. 그러자 이세희는 거침없이 황제의 뒷목을 감싸 쥐고, 자신을 보게 만들더니 쐐기를 박았다.
“그렇다면 진짜 범인을 찾으십시오. 감히 폐하의 애첩을 강간하려 했던 자들을, 그리고 그들의 뒤에 있는 자를. 그게 먼저 아니겠습니까?”
할 말을 다 끝낸 이세희는 미련 없이 황제에게서 손을 떼더니 팔짱을 끼고 고혹적으로 웃었다.
“애먼 자를 공격할 게 아니라는 겁니다, 폐하. 설마, 폐하의 아들이 절 탐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리 말하며 이세희가 뒤를 돌아봐 태윤을 보았다. 태윤은 여전히 무릎을 땅에 대고, 충성스러운 자세로 있었다. 황제도 이세희를 따라 태윤에게 시선을 주었다. 태윤은 설원을 뚫고 자란 대나무같이, 푸르게 빛났다. 변명을 할 법도 한데, 그러지도 않고 그 자리를 지키는 아들의 충성심에 황제는 얼굴을 감쌌다. 후, 하고 한숨을 내쉬고 생각을 정리한 황제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의 눈이 엄숙하게 변해 태윤을 보더니, 다시 돌아와 이세희에게 꽂혔다.
“너의 아름다움에 모든 이가 홀릴 거라 생각했다.”
태윤은 가슴이 죄악감으로 조였다. 이세희의 아름다움에 홀린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자신도, 태자도, 그리고 이세희를 강간하려 했던 자들도 있었다. 이세희는 그윽한 목소리로 웃음을 터트리더니, 빈정거렸다.
“폐하의 애첩인데 그 누가 신첩을 원하겠습니까? 신첩은 폐하의 것인데요.”
이세희가 피식 웃으며 황제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황제가 두 걸음 정도, 자신도 모르게 도망가려 하자 이세희가 그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내관들이 깜짝 놀라 “마마!”라고 외쳤지만 황제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황제는 흥분으로 일렁거리는 눈으로 이세희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신첩을 강간하려 들었습니다. 암수 넷이나요. 그것도 폐하의 사냥터에서, 황후 마마의 절일에요. 상상도 못할 이런 일을 저지른 자를 가만히 내버려 둘 작정이십니까? 신첩을 강간하려 한 건, 이 나라의 지존이신 폐하의 명예도 더럽히려 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일을 저지른 자는 이미 찾아냈다.”
황제는 그저 이세희가 자신에게 먼저 손을 댄 사실에 기쁜 듯 보였다. 이 기회를 삼아 이세희에게 더 만져짐을 당하고 싶었는지 고개까지 들이밀었다. 태윤마저 그간 보았던 이세희와 다르다고 느꼈으니, 황제는 오죽했을까.
이세희는 눈을 차갑게 빛내며 황제에게 또박또박 말했다.
“신첩이 원하면, 다 들어주시기로 하셨지요.”
“무얼 원하지?”
황제의 목소리에 열망이 피었다. 이세희는 그 열망 속에서 매혹적으로 웃었다. 황제의 눈이 서서히 풀리고, 그의 모든 본능은 이세희에게 쏠렸다.
“…죽이세요, 전부.”
황제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세희가 발돋움을 해, 황제의 양 뺨을 감싸더니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하셨습니다. 신첩을 위하신다면, 그리 하셔야지요.”
그러더니 눈을 감고 황제에게 직접 입을 맞추었다. 황제의 눈이 크게 뜨여지다, 신음이 나옴과 동시에 감겼다. 그의 손은 이세희의 허리를 마구 더듬었다.
자신이 이세희를 살려주었듯이, 그도 태윤을 살려주었다. 아버지의 날카로운 감이 지속되었고, 이세희가 방관했다면 꼼짝없이 죽었으리라.
하지만 태윤은, 살아남의 대가로 심장이 갈라지는 고통에 허우적거렸다. 태어나 처음으로 겪는 비참함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태윤은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고개를 숙였다.
얇은 비가 손등에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