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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전전반측 (1) (3/11)
  • 2장. 전전반측 (1)

    이세희는 지금쯤 일어났을까. 아니, 잠이나 잘 잤을까. 어젯밤 자면서도 아프다고 중얼거리고, 몸을 웅크리고 눈물을 떨기에 그 모습이 안쓰러워 한참 동안 손을 잡아주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가련하게 덜덜 떠는 그자를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어 멋대로 손을 꼭 감쌌다. 안아줄 순 없어도 온기를 나눠줄 순 있었으니까. 가장 춥고, 어려운 시기에는 서로 체온을 맞대고,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었다. 그가 눈을 뜰까, 촛불이 이세희처럼 외로이 켜진 침전에서 조마조마하면서도 손을 놓지 않았다. 그가 안정을 찾자마자 매정하게 놓고, 돌아서야 했으나 눈을 꼭 감은 채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는 게 눈에 밟혀 그리 할 수 없었다.

    아버지 밑에서 시달릴 만큼 시달렸으니, 잠만은 편하게 자는 걸 봐야 속이 편할 것 같아 태윤은 부대장이 올 때까지 그 자리를 잠자코 지켰다. 손바닥에 땀이 차고, 침상 아래에 무릎을 꿇느라 다리가 저렸으나 개의치 않았다.

    이세희가 눈을 뜨지 않기를 바라며, 밤이 여명에 희석되지 않기를 바라며, 오롯이 무거운 정적을 제 짐처럼 견뎌냈다.

    그러나 그 짐을 주는 게 이세희라면 언제든지 버텨낼 수 있었다. 그가 모든 짐을 주어도, 이렇게 그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달게 받을 자신이 있었다.

    다소곳하게 그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있던 태윤은, 천천히 손을 떼어냈다. 아주 느리고, 부드럽게. 그가 깨지 않게. 이세희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으나 이내 편안한 얼굴로 잠에 빠져들었다. 긴 머리카락이 너울처럼 흘러 그의 얼굴을 가렸다. 조금 욕심을 내어 그의 얼굴을 볼까 싶어 손을 움찔거렸으나 태윤은 고개를 저으며 금침에 손을 대었다.

    그는 몸을 만지는 걸 싫어했다. 아버지의 손아귀에 있을 때도 흠칫 놀라거나 무의식에 덜덜 떨곤 했다. 아마 원하지 않은 관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을 쏘아볼 때, 범람하던 증오와 경멸을 떠올리던 태윤은 그의 턱 끝까지 금침을 덮어주고,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이세희는 제 마음대로 만지고, 다룰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존재였다. 교대를 위해 온 부대장에게 그 자리를 내어줄 때까지, 우직하게 서서 이세희를 따스한 눈으로 보았다. 내일 오겠습니다. 그 말은 소리 없이, 입으로만 달싹여 말하고서 태윤은 등을 돌려 침전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출궁하여 집에 와서도 그에 대한 걱정으로 잠을 자지 못했다. 자는 둥, 마는 둥 하며 들판같이 넓은 침상에서 몸을 뒤치락거렸다.

    아버지가 또 부르면 어떡하지? 이세희 뺨도 그렇게 마구 때리는 사람인데. 그 광경이 자신에게 꽤 충격적이었는지, 아버지가 이세희의 머리채를 잡고 때리는 장면이 자꾸 떠올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좋지 않은 두근거림에 가슴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뒷목덜미는 긴장감에 땀이 맺혔다.

    이세희가 또 아버지에게 맞는다면, 그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세희는 자신에게 손대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아버지는 그와 다르지만, 이세희에게 손대는 걸 싫어할 것이다.

    무엇보다 아버지에게 대들게 되는 것이고, 지엄한 황제의 뜻에 반하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의 눈 밖에 나게 되면…. 영원히 이세희의 곁에 머물 수 없다. 죽을 때까지 이세희의 발가락 하나 보지 못하는 비참한 신세가 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태윤은 이세희가 잠은 잘 잤을까 걱정하는 한편 앞으로 펼쳐질 일들에 대해 가슴이 매섭게 뛰어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다.

    새삼스럽게 황자지만 무능력한 자라는 게 자각이 되자 헛웃음만 나왔다. 누구 하나 제대로 지켜줄 수도 없는 주제에 무슨 황자란 말인가. 태윤은 머리를 감싸 쥐고, 눈을 반쯤 떴다.

    누가 누굴 지켜준다고. 어차피 황제의 뜻에 반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태윤은 눈을 느리게 감고 침상에 늘어지게 누웠다.

    그냥, 잊자. 그게 편할 것이다. 그를 향한 연민의 감정은 독이다. 그를 구할 수 없는 슬픔에 빠지게 되면, 그야말로 빠져나올 수 없는 늪이 되어 평생 죄책감에 물들어 죽으리라. 그는 아버지의 애첩이다…. 나의 것이 아니다. 내 사람이 될 수도 없다. 아버지의 사람이었으니까.

    “…내 사람.”

    태윤은 멍하니 혀를 굴려 발음해 보았다.

    “…내 사람이라.”

    그러고 나서 피식 웃었다. 내 사람이 되길 바라는 거냐? 그러면 너도 아버지와 같을 뿐이야. 태윤은 여명이 새파랗게 물든 천장을 또렷한 눈으로 보았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렸을 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나는 아버지와 다르다. 나는 권력으로 사람을 찍어 누르는 자가 되지 않겠노라고, 몇 번이나 다짐했다. 천천히 주먹을 그러모아 쥔 태윤은 몸을 벌떡 일으키고, 정좌를 틀고 숨을 깊게 내쉬었다.

    반쪽짜리 황자는 생각보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나마 이렇게 황제의 사랑이 지극하니, 금군대장 자리에 앉았지 그게 아니라면 어중이떠중이처럼 살았을 것이다. 황제가 사랑은 하나, 권력을 쥐여 줄 생각은 하지 않아 형제들과도 사이가 좋았다. 황후의 아들이자, 자신보다 한 살이 어린 태자를 전하라고 부르며 그도 충성으로 잘 모시고 있었다. 그들에게 진심 어린 모습을 보여주어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현실에 순응하되 비굴하게 납작 엎드리진 않았다.

    내 위치를 자각하고,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며, 남의 것을 탐하지 않았다. 그래야 아름다운 저승인 황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황제는 법도에 따라 움직이는 냉정한 자다. 자신의 자리를 넘보는 자라면 가차 없이 죽음만을 준다. 그런 자가, 애정이 아닌 동정의 마음으로 제 애첩을 감싸 안는다 하더라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지. 제 아들이, 애첩에게 욕정을 느낄까 봐 일부러 음란하기 짝이 없는 정사 장면을 보여준 아비이니. 아들이라도 남자는 남자라 의심을 멈추지 않았다.

    ‘윤아, 넌 짐이 믿는 아들이다.’

    그러니 이 아비가 정한 선을 넘지 말라는, 그 냉엄한 눈을 떠올렸다. 그 눈빛은 가슴과 머리에 불로 지져도 없어지지 않을 만큼 깊이 새겨졌다.

    ‘이 아비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리라 믿는다. 언제나 아비의 등을 지켜다오. 짐은, 아니, 이 아비는 널 정말로 사랑한단다.’

    물론, 네가 날 거스르지 않는다면. 그의 화사한 눈웃음 속에 숨겨진 예리함에 숨이 콱 멎었다.

    황제의 철저한 사랑 속에서 길들여져, 아무것도 못 하는 주제에 뭘 생각한 거야. 잊어라. 잊어야 그도 살고, 자신도 살 수 있었다. 이미 백성들의 민심은 아버지에게 기울어진 지 오래였다.

    혼란의 끝은 이세희였다. 자신을 경멸 그 자체로 보던 차디찬 눈을 떠올린 태윤은 시무룩해졌다.

    어차피 나만 괴로웠겠구나. 그는 자신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아버지를 싫어해, 아버지를 닮은 이 얼굴도 싫어하니까.

    그래, 이 연민은 잊자. 그를 불쌍히 여기되 동정하는 모습은 겉으로 드러내지 말자. 그의 곁에 머물러 지켜주는 걸로 만족하자. 더 욕심을 내어, 그에게 미움을 받고 아버지에게 의심을 받아 쫓겨나는 건 끔찍하게도 싫었다.

    문제는 아비에게 눈총을 받는 것보다 이세희가 싫다는 표정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철렁였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가슴이 너무 뛰어, 숨을 쉴 수 없었다.

    절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스쳐가도 좋으니까, 단지 옆에만 머물게 해주세요. 전 그거면 충분합니다.

    그에게 무릎을 꿇고 빌고 싶어질 정도라니. 태윤은 자신이 왜 이런 감정에 휩싸이는지 몰라, 눈을 감고 헛헛하게 웃었다.

    *

    입궁하자마자, 태윤은 태천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들로서 아버지에게 아침인사를 드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황궁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 태윤에겐 황제에게 아침부터 엎드리는 게 조반을 먹는 것과 일맥상통한 일이었다. 마침 황제가 삼공들과 강론에 참여하기 전이었기에 그의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새벽부터 일어났을 황제는 그 전날, 이세희를 괴롭힌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게 멀끔했다. 이세희는 아파서 끙끙 앓고 울었는데, 정작 아버지는 멀쩡하니 어딘가 억울했다. 그는 아버지인 현령이 쓰러져서 안절부절못하고, 밤새 울고, 제대로 잠도 못 자서 자신이 달래가며 재웠는데….

    “윤아, 왔느냐?”

    그런데 멀쩡하다 못해, 그런 쪽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단정한 아버지를 보니 기분이 이상하게 뒤틀렸다. 단정을 넘어서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느껴질 만큼 어리게 느껴지기도 했다. 눈빛이 우물처럼 깊고, 안광이 살아있기에 망정이지…. 그것도 아니었다면, 정말 자기 형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달궈진 돌로 주름을 삭삭 펴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정말 이세희가 천하의 절세미인이라, 그를 안을 때마다 정력이 차기라도 하는 건가.

    무엇이 되었든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러나 꿍얼거리는 마음은 가라앉혀 두고 태윤은 천천히 황제의 앞에 엎드렸다.

    “금군대장 태윤, 황제 폐하를 뵙사옵니다. 지난밤은 편안하셨습니까?”

    “세희 덕분에 긴 밤도 무척 평온하게 보냈다. 윤이 너는 제도에 온 지 하루밖에 안 됐을 터인데, 잘 잤느냐?”

    누구 때문에 잠도 못 잤다. 아버지와 이세희가 정사를 맺는 모습이 워낙 충격적이라 잊자, 잊자, 다짐해도 이세희가 우는 모습에 가슴이 저려와 정신을 못 차렸다.

    황궁에서 짧지만 굵직하게 산 태윤은 그런 감정은 전혀 드러내지 않고, 정제된 모습으로 황제에게 대답했다.

    “예, 모두 폐하의 치세와 은덕 덕분에 제도가 평안하여 밤을 잘 보냈사옵니다.”

    “하하, 녀석도.”

    황제는 아들의 아부가 좋았는지 너털웃음을 터트리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고개를 들거라. 사랑하는 윤이 얼굴이 보고 싶구나.”

    윤이 고개를 빠끔 들자 황제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제가 아끼는 사람 한정으로,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는 황제였다. 아직도 자신을 귀애한다는 사실에 윤은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세희를 괴롭히는 걸 생각하면 금수만도 못한 사람이었지만, 자신에겐 봄볕 같은 눈빛을 보내는 아버지였다.

    그래, 저렇게 나를 사랑해 주시는데. 아버지를 실망시킬 수 없지. 이세희가 안쓰럽고, 가엽긴 했지만 황제는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였다. 지나가는 이를 붙잡고 물어도 아버지의 애첩보다 아버지를 더 섬기라고, 말할 판이었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야. 이세희보다 아버지를 섬기기로, 그를 잊기로 마음먹은 내가 나쁜 게 아니다. 스스로의 죄책감을 덜어내려, 애써 자신을 달래던 태윤은 이윽고 들린 말에 가슴이 쿵하고 떨어졌다.

    “화요궁에 가면 세희를 데려오려무나. 오늘은 세희 입으로 술이 마시고 싶구나.”

    “…예?”

    황제가 눈을 감고 턱을 괴더니 노래하듯 덧붙였다.

    “세희가 입으로 먹여주는 술만큼 단 것도 없지. 잔으로 마시는 건 이제 충족이 되지 않아.”

    머리가 멍해졌다. 그 말이 사실이었구나. 황제는 잔으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 이세희를 데려와 태얼궁에 가둬 놓을 땐 언제고, 화요궁이 다 세워지기가 무섭게 이세희를 공식석상에 끌고 왔다. 그리고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이세희의 입으로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 후로도 그건 꾸준히 이어져, 이제 황제는 잔으로 술을 마시지 않고 애첩의 입으로만 술을 마시는 걸로 유명해졌다. 그게 평민들도 따라할 정도이니, 얼마나 자주 그러했는지 체감이 되었다.

    그걸 황제의 뻔뻔한 얼굴을 보며 상상을 하니, 얼굴이 새빨개졌다. 태윤은 목까지 벌겋게 달군 채 황제를 올려다보며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얼굴은 목석같이 딱딱하면서, 달아오른 아들을 보자 황제는 귀여움을 참지 못하고 미소를 지었다.

    “귀엽기는.”

    자신을 향한 칭찬이 좋기는커녕, 어린애 다루는 듯해 태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이가 벌써 스물 둘인데…. 태윤은 묵직한 숨을 내쉬다가, 황제를 보다 고심한 말을 꺼냈다. 어젯밤 이세희가 울다 잠들었다. 몇 번이고 울면서, 아프다고 흐느낀 이세희의 얼굴이 툭 불거져 나온 못처럼 걸렸다.

    과연 황제가 입으로만 술을 받아먹을까. 혼례도 치르지 못한, 나이만 먹은 동정인 몸이었으나 그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이미 부관들 입을 통해 황제가 이세희를 어떻게 다뤘는지 알고 있었다.

    “폐하, 어젯밤 화비 마마께서 많이 아프시다고 하셨습니다. 소신이 보았을 땐 거동이 힘드실 것 같으니, 오늘은 옥체를 편히 쉬게 해주시는 게 어떠실지….”

    황제가 몹시 화를 낼 거 같아 태윤은 가슴이 쿵, 쿵 뛰었다. 화비가 아파 보이니, 오늘은 삼가 달라는 말이 황제에게 충분히 기분 나쁠 수 있었다. 그는 온화해 보이지만, 실상 다 거짓이었다. 그의 부드러움은 굉장히 변덕스러웠다. 실제로, 이세희 이전 애첩 몇 명이 황제의 총애를 믿고 툴툴거리다가 금세 내쳐진 걸 기억했다. 자신도 그리 될 걸 감안하고, 태윤은 용기를 내어 화비를 쉬게 해달라는 말을 꺼냈다.

    “그래?”

    그러나 생각 외로 나온 말은 다정했다. 황제는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상태로 아들을 따스한 눈으로 보더니 눈웃음을 지었다.

    “세희가 아프다고 그러더냐?”

    “…예, 많이 아파 보이셨습니다.”

    그의 다정함이 자신에게 펼쳐질 때, 그걸 빌미로 이세희를 편하게 해주고 싶어 태윤은 약간 과장을 보탰다. 진짜로 그는 아프다고 몇 번이나 울었으니 완전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일까. 황제의 부드러움이,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짙어지자 더 무서워서 철렁거렸다. 가슴이 쿵, 쿵, 쿵, 뛰는 게 귀에 다 들릴 정도로 커졌다.

    무섭다고 하여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태윤은 우직하고, 단단한 눈으로 황제를 지그시 보았다. 겁을 먹긴 했지만, 감당하기로 마음먹었다. 혓바닥을 떠나간 말은 책임져야 했다. 혀가 칼이라면, 그 칼에 베이고 상처받은 자가 마땅히 있을 테니까.

    황제도 태윤의 시선에 눈이 깊어졌다. 응어리가 없고, 맑으면서도, 꺾이지 않는 눈이 대나무와 같았다. 이내 턱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며 침음한 황제가 입을 서서히 벌렸다.

    “세희를 데려와.”

    물러섬이 없는 황제의 명령에 태윤은 느리게 고개를 숙였다.

    “…예.”

    입술이 무겁다. 참담함이 가슴을 짓눌러 아파온다. 잊자고 말할 땐 언제고, 자신을 짓누르는 무력감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태윤이 굴종하는 모습을 태연한 눈으로 지켜보던 황제는 짙은 웃음을 덧그리며 말했다.

    “세희가 어리광을 부려서 내 아이가 몰랐나 보구나. 하긴, 넌 어렸을 때부터 마음이 약했지…. 어린 것들이 어리광을 부리면, 윤이 너는 늘 받아주곤 했으니 이상한 것도 아니지. 착한 녀석. 어쩜 그리 착할까.”

    그 말에 태윤의 눈이 부릅떠졌다. 무언가 잘못 흘러가고 있었다.

    “세희가 진짜 아파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네가 고분고분하게 데려올 터이니…. 세희를 데려와.”

    그의 강압적인 명령에 몸이 떨렸다. 시선이 닿은 손가락 끝이 황제의 위엄에 곱아들었다. 태윤은 아주 잠깐 내렸던 시선을 위로 올렸다. 황제는 잇닿은 시선에 일던 파동이 사라진 걸 보고 나서야 우아하게 웃었다. 황제는 태윤이 시선을 내린 그 찰나, 아들을 향해 의심을 했던 자신을 힐난했다. 아들은, 세희에게 욕심을 부린 게 아니라 동정심에 그런 것이었다. 태윤은 어린 시절부터 올곧으면서도, 어리고 천한 것들에게 고개를 한 번 기울이는 성품을 지녔다. 세희는 그야말로 태윤의 경계 안에 들어서기에 적합한 것이었다. 어리진 않지만, 천한 신분 탓에 가진 게 없었으니 약하다고 여길 만했다. 무엇보다 오자마자 자신의 품에 안기던 이세희를 봐야 했으니, 아무래도 그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윤아.”

    그러나 자신에 대한 충성보다 세희에 대한 동정심이 앞서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아들의 마음은 오롯이 자신을 향해야 했다. 어쩌면, 세희가 일부러 태윤 앞에서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처연하게 행동한 것인가. 그 뛰어난 외모에 사슴같이 청아한 눈을 가진 세희니, 마음만 먹으면 못 할 게 없었다. 턱을 괴고 고민하던 황제는 자신의 명을 기다리는 아들을 보다 몸을 일으켰다. 그의 육중한 몸이 앞으로 쏟아질 것 같자 태윤은 반듯하게 서서, 황제만 보았다.

    “세희에게 이르거라. 후궁의 본분을 잊지 말고, 어여쁘게 꾸미고 짐의 품으로 오라고.”

    궁에서 사육하는 매처럼, 부리부리하고 예리하게 빛나는 황제의 눈에 감도는 감정에 태윤은 몸을 일으켰다. 완벽하게 위에서 아래로 꽂히는 시선에 압박감이 든다. 어깨가 무거웠다.

    하지만 가장 자신을 세게 짓누르는 건, 세희를 향한 죄책감이었다. 이 사실을 세희가 알게 된다면 자신의 곁에 오게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말도 아예 듣지 않을 것이다. 냉담하다 못해 자신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시선을 떠올리자 가슴이 선뜩해졌다.

    가고 싶지 않았다. 이세희에게 더 미움을 받기 싫어, 발이 굳은 듯했지만 황제에게 길들여진 몸은 먼저 반응했다.

    태윤은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천천히 허리를 숙이고서 느리게 대답했다.

    “…예, 폐하. 명을 받듭니다.”

    이세희는 오늘도 자신의 앞에서 울 것이다. 나 때문에.

    태윤은 비참함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가슴이 떨어져 나가는 시큰한 통증에 앞을 보기가 힘들었다.

    *

    태천궁을 나서자, 그 자리에 같이 참석했던 부관들이 눈치를 보며 태윤의 뒤에 붙었다. 금군을 상징하는 관을 쓴 탓에 태윤의 뒷목이 훤히 드러났다. 삼 년 동안 어머니의 능을 홀로 지켰던 것이 거짓이 아닌지, 원래도 건강한 피부가 더욱 타서 구릿빛으로 잘 영글었다. 옹골찬 느낌이 드는 어깨는 화요궁으로 향하는 내정으로 발을 딛자, 축 늘어졌다. 태윤을 잘 따르던 부관이 냉큼 태윤의 곁에 달라붙어, 태윤의 팔뚝을 잡아주었다.

    “괜찮으십니까? 힘드시면 말씀하십시오. 마마께 고하는 건, 저희들이 하겠습니다.”

    차분한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부관의 얼굴이 아래에서 보였다. 그제야 자신이 황제의 시선 아래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던지 알아챈 태윤은 눈을 내리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다. 폐하께서 내게 명령하셨으니, 내가 가야지. 내가 가야 옳은 일이다.”

    그러면서도 태윤은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부관들은 말없이 자신들끼리 시선을 공유했다. 그들은 모두 좋은 집안의 사생아거나 후계에서 밀려난 자들로, 부모를 따라 황궁에 드나들었다. 원래부터 눈치가 있었고,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아 금군이라는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 지금도 태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심정인지 가늠한 부관이 차분하게 말을 건넸다.

    “대장님, 그리 죄책감 가지실 이유는 없습니다. 폐하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시는 것뿐이지 않습니까?”

    다른 부관은 태윤이 걸음을 떼자, 그 옆을 지키며 넌지시 말했다.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화비 마마께서도 이제 적응하시어….”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라고?”

    태윤이 걸음을 멈추고, 인상을 찡그리며 부관들을 보았다. 그들의 말투에는 익숙함이 배어 있었다. 부관들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태윤은 이마를 짚으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앞으로가 첩첩산중이었다. 벌써부터 치민 고난에 태윤이 비틀거리는데, 그걸 곡해한 부관이 태윤을 잡아주며 말했다.

    “마마께서 태얼궁에 삼 년간 계셨을 때는 아니었지만, 화요궁이 다 지어지고 나서는 밖에서 자주 즐기셨습니다.”

    아, 하고 탄식한 태윤은 절망에 얼굴을 감쌌다. 다시 생각해 보면, 처음 만났을 때 궁인들이나 금군들도 황제와 화비의 교접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저 가만히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며 화비가 우는 모습을 지켜봤다. 화비야 황제의 다리 사이에 처박혀 자지를 빨고 있었으니, 그들의 시선은 몰랐을 테고…. 다만, 자신이 그 자리에 서고 나서 수치스러움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태윤을 똑바로 보며 빈정거렸다.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고.

    “혹시, 태자 전하나 다른 황자들이 있는 곳에서도…?”

    제발 그러지 않기를 바라며 물어보자, 금군이 조곤조곤 대답했다.

    “한 번 그러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황후 마마가 들지 못하신 지 삼 년이 넘어가고, 태얼궁에 남첩이 산다는 소문만 무성했던 때입니다. 그리고 태자와 다른 황자들이 그 광경을 보시더니 납득을 하고 돌아가셨다고….”

    그러면서도 자기도 부끄러운지 부관이 귀를 붉혔다. 그 말에 태윤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황후가 삼 년 동안 황제의 침전에 들지 못했다. 그러나 황후는 태자를 낳은 후부터 황제와 사이가 식어 그럴 수 있었다. 황제는 쉽게 마음이 저무는 자였으니까. 공노비였으나, 그 외모가 아름다워 아버지의 눈에 들었던 어머니조차 금세 버려지지 않았던가.

    “그럼 다른 후궁들은?”

    부관이 쓰게 웃었다.

    “다른 마마들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화비 마마가 궁에 들어오신 후로는 그 누구도 폐하의 침전에 들지 못했습니다.”

    “뭐, 사실 화비 마마가 입궁한 뒤 다들 어느 정도 짐작했을 겁니다. 본래는 다른 후궁들과 같이 쓰게 하지만, 화비 마마만은 화요궁을 따로 만들어서 하사해주시지 않았습니까? 그 전까지는 태얼궁 침전에 삼 년간 계셨지요.”

    부관들도 그 사랑이 참으로 대단하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그러나 태윤은 그게 사랑 같지 않았다. 그 괴로워하는 얼굴을 보고도, 어떻게 그걸 사랑이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이 아는 사랑과 너무 거리가 멀었다.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제가 처음으로 화비 마마가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날,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 자태가 참….”

    부관이 얼굴을 붉히고 입가를 가린 채 헛기침을 했다. 다들 그 부관을 보며 부러운 시선을 보냈다. 태윤만이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파르라니 질렸던 얼굴을 구겼다. 저렇게 나온 걸 보니, 공식적으로 좋게 드러난 거 같진 않았다.

    “얼굴이 상기된 채로 나왔는데 누가 보아도 폐하께 진득하게 안긴 것이었지요. 흐트러진 옷차림에, 머리카락까지…. 그 상태로 폐하께 안겨 나오는데, 참…. 그 후로 춘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더군요.”

    부관이 마지막 말은 자기도 부끄러운지 아주 낮게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태윤은 소름이 확 돋아 몸을 한 번 부르르 떨고는 부관을 경멸 어린 시선으로 보며 중얼거렸다.

    “그 후에 화비 마마는 어떠셨고?”

    그러자 부관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볼을 긁적이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글쎄요. 기억이 안 납니다.”

    태윤은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돌려, 저 멀리 우뚝 솟은 화요궁을 보았다. 금색 기와에 눈이 멀 것 같았다. 자신도 어제 들었던 대로, 화요궁은 저 멀리 보이는 중궁 못지않게 그 자태가 어마어마했다. 온갖 부를 가져와 들어앉힌 모습이지 않은가. 어제는 몰랐던, 새삼 엄청난 황제의 총애에 입안이 쓰게 느껴졌다. 막상 화비는 저 부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화비 입장에선, 난데없는 벼락이지 않았을까. 자신을 보며 경멸, 증오, 서글픔을 쏟아내던 화비를 떠올리자 가슴이 따끔거렸다.

    “화비 마마가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후로는 모두가 그 자리에 들어가려고 안달이었습니다. 한 번이라도 그 고우신 자태를 보려고 난리였지요. 같은 사내이지만 정말 아름다우신 분이지 않습니까?”

    대화는 어느새 태윤을 빼고 두런두런 이어졌다. 훈련 받은 자들답게 워낙 목소리가 낮고, 조곤조곤했다. 그리고 주변에 꾸며진 원림에서 흐르는 시냇물 때문에 목소리가 덮어지는 느낌도 들었다. 모두가 화비에 대해 얘기하지만 화비를 향한 동정심을 가진 이는 없었다. 오로지 태윤만이 덩그러니 있는 기분이었다. 화요궁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아름다운 화비가 자신을 무시하고, 황제에게 안기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의 일이었지만, 생각할수록 가슴과 다리가 무거워졌다. 아버지의 아들이니 아버지를 따라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몸은 본능에 따라 걸음이 느려졌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슬그머니 시선을 내려 굳은살이 박인 손을 보던 태윤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리 달래도, 도통 가시지 않는 태윤의 어두움에 부관이 밝은 목소리로 태윤을 위로했다.

    “그러니 대장님, 너무 죄책감 가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화비 마마 입장에서도 더할 나위 없는 부귀영화이지 않습니까.”

    부관들은 태윤을 좋아했다. 황자이지만, 반쪽짜리라 그런지 신분을 앞세우지도 않았다. 또한 위계질서를 지킨답시고 부관들을 데려와 윽박지르거나, 폭력을 행사하지도 않았다. 맡은 바에 충실했고, 군소리도 없었다. 오히려 힘든 금군들을 위로해주고, 같이 술도 기울이며 그 고충을 덜어주는 좋은 상관이었다. 그런 자가 고작 천민 출신에 불과한 화비 때문에 이리 우중충하니, 그들도 나름 걱정이었다.

    “정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화비 마마께서 폐하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운우지정을 맺는 건, 워낙 유명한 일이고 자주 보았으니까요.”

    그 얘기를 꺼내는 부관의 눈에는 화비를 향한 그릇된 감정으로 번들거렸다. 관음증에 걸린 놈의 눈이었다. 태윤은 이들의 혓바닥에서도 화비가 사람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노리개가 되는 상황에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더 문제는 이걸 황제도 어느 정도 알았을 거란 점이었다. 그러면서도 감추지 않고, 화비를 보란 듯이 안는 그의 그릇된 취미에 몸서리가 쳐졌다.

    “오죽했으면 처음에는 귀한 광경이라고, 내기를 해서 그 자리에 들어서려 하다가 이쯤 되니….”

    시시콜콜 화비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던 이들은 태윤의 서릿발이 서린 눈에 입을 다물었다. 태윤은 보기 드물게 분노를 눈에 담고 있었다. 부관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몰라 입을 다물고 눈을 아래로 내리떴다. 태윤은 주먹을 꽉 쥐고, 무겁게 숨을 내쉰 후에 입을 열었다.

    “금군이란 자들이, 황제 폐하와 마마들을 지켜야 하는 것도 망각하고서 그것을 하나의 유희거리로 여기다니.”

    황궁 안이라, 목소리를 크게 높이지 못했으나 힘이 깃든 목소리가 파도처럼 밀어닥쳤다. 그들도 자신들의 우매한 잘못을 깨닫고 무릎을 황급히 꿇었다. 하지만 태윤은 그들이 잘못된 감정을 가졌다 한들, 그 사실에 대해서는 역정을 낼 수 없었다.

    이 모든 건 황제가 자초한 일이었다. 황제는 삼 년간 이세희를 침전에 두고 산해진미처럼 맛봐야 했던 게 억울했던 건지, 너무 노골적으로 이세희를 보여주고 있었다. 귀애하던 아들인 자신도 이세희를 노리는 남자로 여기고, 그런 짓을 벌였으니…. 더한 짓을 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대장님! 저, 저희들은….”

    부관이 입을 열려는 걸, 손으로 저지한 태윤은 차가운 얼굴로 말을 쏘아붙였다.

    “내, 더는 말을 붙이지 않으마. 그러나 다시는 화비 마마에 대한 이야기를 감히 혓바닥에 올려, 타인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하거라.”

    사람의 혓바닥을 타고 전해진 이야기는 끝도 없이 흘러간다. 화비의 입을 술잔으로 쓴다는 둥, 황제가 화비의 다리 사이에서 정신을 못 차리는 둥…. 그런 이야기가 숱하게 저잣거리에 퍼졌을 때부터 알았어야 했다. 황제도 알고 있으면서도 내버려 뒀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미인을 얻었다는 사실에 더 과감하게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났겠지. 그것이 아니고서야 설명이 되지 않는 황제의 성적 행각에 속으로 치를 떨며, 태윤은 걸음을 저벅저벅 옮겼다. 부관들은 시든 풀떼기처럼 태윤을 따라붙었다.

    가고 싶지 않다고 고집을 부리는 마음을 짓누르며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화요궁이었다.

    끝이 올라간 처마와 햇빛을 받아 그대로 내뿜는 금색 기와. 눈이 멀 것 같은 아름다움에 질식할 것 같았다.

    그러나 화요궁의 아름다움도 주인 앞에선 무색했다. 화요궁 앞, 그리고 원림의 끝자락에 화비는 머리를 어깨로 늘어뜨린 채 묶고 있었다. 옷은 나풀거리고 가벼운 청색 평복이었는데 목깃을 올려 자국을 가릴 수 있었다.

    “세연아, 이리 오렴. 오라버니한테 와 봐. 응?”

    또한 보기 드물게 눈을 휘고, 입꼬리를 올려 환하게 웃고 있었는데 그 미소가 내음이 풀풀 나는 꽃 같아 머리가 핑 돌았다. 태윤이 이세희의 웃는 얼굴에 정신이 팔려 그만 보고 있을 때, 이세희는 태윤의 시선을 눈치채고 고개를 들었다. 넋이 나간 눈으로 자신을 보는 태윤을 보자마자 삽시간에 무표정으로 변했다. 꽃내음이 순식간에 냉기로 돌변하자, 태윤이 침울한 눈을 축 늘어뜨렸다.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친 이세희는 허리를 반쯤 숙였다.

    “아읏….”

    황제에게 쑤셔진 몸이 아픈지, 배를 감싸고 헐떡이던 이세희는 동생의 앞이라 서둘러 표정을 바꾸었다. 이세연, 올해 8살이 된 예쁘장한 아이는 한 사내의 뒤에 서서 얼굴만 내밀고 이세희를 보았다. 막 태어난 강아지의 눈을 빼다 박은 듯한 커다랗고 맑은 눈이 이세희만 담았다. 가고 싶으나, 머리가 길고 어여쁜 오라버니가 어색한지 이세연은 사내의 뒤에서 우물거렸다.

    “세연아, 제발…. 이리 와 봐. 지금이 아니면 오라버니 못 봐.”

    이세희는 황제에게도 보여주지 않던 미소를 보여주다, 동생이 오지 않자 애원했다. 처음 들어보는 이세희의 다정한 목소리, 상냥한 미소. 그것이 향한 곳은 오로지 어린 이세연이었다. 동생이 반응이 없이 자신만 보자 애가 탔는지 이세희가 걸음을 질질 끌었다. 그러나 이세연이 깜짝 놀라며 사내의 다리 사이로 숨었다. 그 모습에 이세희가 충격 받았는지 얼굴을 굳혔다. 사내도 덩달아 놀라, “세연아, 화비 마마시다. 어서 인사드려야지.”라며 다독여 내보내려 했으나 이세연이 엉엉 울며 외쳤다.

    “가기 싫어요…!”

    이세희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으로 이세연을 보았다. 제발, 이라고 말하는 목소리에 태윤은 저도 모르게 이세희를 보았다. 이세희의 몸이 떨고 있었다. 황제에게도 애원하지 않던 천하의 이세희가 8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를 보며, 필사적으로 빌고 있었다.

    “세연아, 오라버니잖아. 기억 안 나?”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매달리는 목소리에 이세연이 드디어 고개를 내밀었다가, 화사한 옷차림을 한 이세희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오라버니 아닌 거 같은데….”

    세연의 진심에 이세희는 눈을 질끈 감고 얼굴을 감쌌다. 그가 충격에 몸을 비틀거리자, 지켜보던 궁녀가 다가와 이세희를 잡아주었다. 이세희는 두 여자의 손에 겨우 몸을 지탱하고 서서 숨을 크게 내쉬며 세연아, 하고 불렀다.

    “오라버니란다. 화비 마마가 맞으니, 세연아. 가서 인사드리렴.”

    이제 불혹이 넘은 듯, 인자하게 생긴 남자가 세연을 달랬다. 저 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태윤은 문득 그 자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남자는 태윤의 의아한 시선에 쓰게 웃다가, 세연을 자신이 직접 안았다. 세연이 발버둥 쳤다. 이세희가 머뭇거리며 세연을 안아보려 하자, 세연이 아아앙! 하고 울음을 터트리며 외쳤다.

    “싫어요…! 마마는 싫어요!”

    그 소리에 이세희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이세희는 아이를 너무 사랑하는 눈으로 봐, 아이가 녹아내릴 것 같았는데 아이는 이세희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세연을 안고, 어르고 달래던 사내는 당혹스러움을 못 참고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세연아, 오라버니가 맞아. 나에게 계속 이리 안겨 있지 말고, 어서 가서 마마께 한번 안겨 보거라.”

    세연의 통통한 복숭앗빛 뺨으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라버니란 말에 고개를 들던 세연은,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청아한 눈망울에 눈살을 구겼다. 노골적인 거부에 이세희는 눈을 감았다. 삼촌이 “세연아.” 하며 연이어 불렀지만, 세연은 사내의 품에서 온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아니에요! 우리 오라버니는 머리가 짧아요! 우리 오라버니가 아니에요! 마마는 오라버니가 아니란 말이에요!”

    얼마나 악다구니를 쓰는지, 아이의 두 뺨이 질주라도 한 것처럼 달아올랐다. 이세연과 닮지 않았지만 삼촌이란 자는 아이의 발악에 이세희의 눈치를 보았다. 눈이 여러 번 오가는 것이, 이세희가 저에게 화가 났는지 관찰하고 있었다. 정말 아이를 돌보는 자의 눈이 아니었다. 그제야 저 자는 아직 궁에 머문 이세희 부모를 돕는 보좌격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령인 아비가 반신불구이니, 일을 하는 자는 따로 있을 거라 짐작했다.

    “저, 마마. 폐하께서 윤허해 주신 배알하는 시간이 끝났습니다. 이제 그만 단장을 하셔야 합니다.”

    이세연은 오랜만에 만나는 걸로 추정되는 오라비인 이세희를 알아보지 못했고, 이세희는 우는 여동생을 허망하게 보다 배알 시간을 쓸모없이 보냈다. 동생을 안아 보려다 만 이세희의 두 손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그래도 그는 미련이 남았는지, 사내의 품에 안겨 끅끅거리는 동생을 다정하게 보았다. 이제 그만 가야 한다는 궁녀의 말에 씁쓸하게 웃던 이세희는, 허공에 대고 손을 까닥였다. 내관과 궁녀들은 이세희의 명령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궁인들이 움직이지 않자, 이세희가 직접 등을 돌려 그들을 보았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닿자, 태감이 대표로 나서서 말을 이었다.

    “마마, 오늘은 폐하께서 단장을 하고 오라고 명을 하셨습니다. 지금 단장을 하시고, 폐하께 가셔야 합니다.”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로 궁인들을 차례차례 보던 이세희의 시선이 이윽고 태윤에게 머물렀다. 자신을 향한 가감 없는 노기에 태윤은 고개를 숙였다. 목뒤가 싸늘하고, 따가웠다. 하, 하고 짧게 웃던 이세희는 등을 돌려 성큼성큼 걸었다. 궁녀들이 쫓아와 마마, 마마, 하며 매달렸지만 그녀들을 매정하게 뿌리치고서 내관이 들고 있던 함에 손을 대었다.

    “마마, 세연은 제가 다시 데리고 올 터이니 이만 폐하께 가시옵소서.”

    우는 세연을 달래던 자가 이세희에게 말을 걸었다. 모두 이세희에게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고 가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함을 열어, 막 무언가 꺼내려던 이세희가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내 동생에게 옷 한 벌 주지도 못한단 말인가? 어차피 폐하께 안기고, 고생하는 건 나인데 왜 너희들이 난리란 말이냐?”

    이세희의 짜증이 버럭버럭 울려 퍼졌다. 일부러 눈에 힘을 주고 궁녀, 내관들을 보던 이세희는 함에서 곱게 접힌 옷을 꺼냈다. 태윤은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산호색 예복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딱 보아도, 이세희가 여동생인 세연을 위해 고심해서 준비한 예복이었다. 무릎까지는 산호색 긴 상의가 내려오고, 안에 새파란 바지를 입히는 형태였다. 그 옷을 아주 소중히, 동생처럼 안아 만지작거리는 이세희의 눈이 깊은 우울이 졌다. 눈가에 드리운 음영에 태윤은 손끝을 움직여, 손바닥을 만졌다. 이세희 때문에 알알이 맺힌 땀이 만져졌다. 이상하게 그를 보면 자꾸 긴장이 되어 가슴이 오그라들고, 손바닥에 식은땀이 맺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시선을 돌려, 자신을 자연스레 스칠 때면 세상이 멈춘 듯 그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싫어하는데도 그의 시선이 달게 느껴졌다. 회색빛 세상에, 그만이 초록빛으로 생생하게 빛났다. 그때가 되어서야 가슴이 뛰었다. 차갑게 얼어붙었던 심장에 그가 온기를 불어넣어준 것처럼.

    지금도 그는 자신을 눈에도 두지 않고, 고개를 돌려 이세연을 보았다. 어느 정도 울음이 멈춘 아이를 멀찍이 서서 내려다보더니, 손에 든 옷을 펼쳐서 보여주었다.

    “널 위해 주는 거야. 네 거야. 이런 거 갖고 싶다고 예전에 그랬잖아.”

    그래 놓고는 슬픔을 감추고서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까닥였다. 그러나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아이는 이세희를 밀어내고 있었다. 완전히 싫어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여동생의 시선을 감내한 이세희는 내관을 불러 옷을 내밀었다.

    “아이에게 다오. 난 이만 가 봐야겠다.”

    그러고는 이세희가 태윤을 보며 싸늘하게 웃었다.

    “금군대장이 왔으니 가야지.”

    나약한 소리를 내지른 태윤은 가슴팍을 문질렀다. 그의 시선이 화살처럼 날아와 부드럽게 꽂혔다.

    *

    처음이었다. 사실, 이세희를 만난 후로 모든 게 처음처럼 느껴졌다. 태윤은 단장을 마치고 나온 이세희를 보고 가슴이 너무 뛰고, 숨이 멎어 그 자리에 굳었다.

    머리를 틀어 올린 이세희는 부러 머리카락 몇 가닥을 내려 하얗고 뽀얀 목 뒤에 흘러내리게 했다. 단순히 하나로 말아 올렸으나 심심하지 않게 비녀와 생화를 꽂아 흑단 같은 머리를 장식했다. 얼굴은 워낙 아름다워, 딱히 분칠은 하지 않고 입술을 좀 더 도톰하게 하는 붉은 연지를 발랐다. 옷은 사내들이 입는 것보다 좀 더 하늘하늘한 평복이었다. 팔이나 다리 부분은 은근히 살이 드러나게 나삼으로 만들었다. 허리는 차분히 조여 그의 신체를 강조했다.

    정말 아름답구나, 이세희는.

    꾸미지 않았을 때도 우아하고 화려하던 이세희가, 완벽히 사랑 받는 후궁이 되어 꾸미자 눈을 뗄 수 없었다. 태윤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옮기는 이세희를 빤히 보았다. 얼마나 그를 보았는지, 이세희가 의아함을 느끼고 저 앞에 서도 눈치채지 못했다. 무표정하고 차분한 얼굴로 얼굴을 붉힌 태윤을 보던 이세희가 엄지와 검지를 대고, 딱 소리 나게 마찰했다. 그 덕에 태윤이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리자, 이세희가 비아냥거렸다.

    “뭐 하십니까? 저를 폐하께 데려다주셔야지요. 그게 금군대장의 일일 텐데요.”

    그러면서 이세희가 손을 내밀었다. 금가락지를 낀 이세희의 길고 하얀 손가락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또렷한 눈으로 이세희의 화려한 이목구비를 살피던 태윤의 눈이 추락했다. 이 손은 지금은 내가 잡지만, 내가 데려다주고 나서 황제의 손을 잡겠지. 그리 생각하자 정신이 번쩍 들면서, 가슴도 싸늘해졌다. 붓으로 그린 듯 섬세하고 우아한 손이 황제의 어깨를 잡고, 그를 안는다 생각하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왜 그런지 자신도 모른 채, 태윤은 떨리는 손으로 이세희의 손을 꼭 잡았다. 이 순간은, 그가 자신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게 또 좋다니 모순 그 자체였다. 아버지에게 데려다주는 게 싫으면서도, 이세희가 그 이유로 자신을 잡아주는 게 좋다니.

    태윤은 천천히 시선을 위로 올렸다. 이세희가 눈웃음을 지으며 태윤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그러더니 힘을 주어 태윤을 자신 쪽으로 당겼다. 힘이 얼마나 좋던지, 금군대장인 태윤의 몸이 질질 끌려갔다. 태윤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이세희는 태윤이 넘어질까 봐 반대쪽 팔로 태윤의 허리를 딱 잡아주었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 보니 이세희의 널찍한 품에 안긴 상태였다. 그의 향긋한 체취에 귀가 순식간에 달아오르고,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흐음….”

    이세희가 태윤의 귀에 대고 나른한 숨을 내쉬었다. 그의 허벅지가 더듬더듬 다리 가랑이를 비볐다. 태윤이 앗, 하고 짤막한 신음을 흘리며 몸을 비틀자 이세희가 아주 작게 속삭였다.

    “안 서네. 아쉽게.”

    그러더니 미련 없이 태윤을 밀치고 가마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태윤은 이세희의 나긋하고 부드러운 음성이 꽂힌 귀가 간지러워 손을 들어 귀를 만지작거렸다. 팔걸이에 팔을 걸친 이세희는 더위를 참지 못하고, 짜증 섞인 손으로 부채를 부쳤다. 궁인들은 이세희의 작태에도 아무런 말이 없이 자리를 지켰다. 귀를 세게 문지른 태윤은 빠르지만 정갈한 걸음으로 가마 앞에 섰다.

    “이제 갑시다.”

    태윤이 말했다. 장정 여섯 명이 이세희가 탄 가마를 번쩍 들어올렸다. 이세희는 부채를 고양이꼬리처럼 느리게 살랑거리며, 땀이 맺힌 태윤의 구릿빛 목을 유심히 보았다. 핏줄이 곤두선 목은 길고 탄탄하다. 제 아비를 닮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그 사실에도 이세희는 말없이 태윤의 듬직한 등만 보았다.

    초여름, 아직 더위의 절정으로 향하기 전이지만 벌써 후끈했다. 왜 이리 더운 걸까. 제도보다 더 더운 현에 있어도 이리 더위를 타지 않았는데. 태윤은 소매를 들어 올려 땀을 닦았다. 더위의 원인을 알 수 없어,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기던 태윤은 귀신에 홀린 듯 뒤를 보았다. 그곳엔 가마에 타서 부채를 살랑거리고 있는 이세희가 있었다. 이세희는 반듯하게 앉아 태윤만을 보고 있었는데, 태윤이 갑자기 시선을 돌리자 당황한 듯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새치름한 눈가가 보이자, 태윤도 쥐라도 밟은 사람처럼 놀라 황급히 앞을 보았다.

    이세희와 눈이 마주치자 더 더워졌다. 그제야 자신이 제도에서 더위를 유독 타게 된 게 이세희 때문이라는 걸 안 태윤은 허심탄회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거라면 이해가 되었다. 태윤은 손으로 파닥거려 바람을 일으켜 땀을 식히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아예 이세희만 보고 더위를 더 타던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황이니 이 모호한 더위가 더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이 더위가 오래 지속되면 좋겠다. 자신이 앞에서 충성스럽고 용맹하게 그를 지키고, 그는 자신의 뒤를 따르고…. 비록 그 끝에 이세희의 손을 잡을 아버지가 있었지만…. 태윤은 자꾸만 가까워지는 태얼궁에 가슴이 턱턱 막혀왔다. 아버지의 우람한 신체처럼 우뚝 선 태천궁이 자신의 신분과 위치를 깨닫게 하며 꾹꾹 짓눌렀다.

    네가 그래 봤자 너는 후궁을 데려오는 하찮은 황자밖에 되지 않는다고. 그의 손을 잡을 순간은, 아버지에게 데려다주기 위한 그때밖에 없다고 말하며 비웃는 거 같아 눈을 감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현실을 부인해도 가마는 멈추었다. 황제가 대신들을 접견할 때 사용하는 태중전 앞이었다.

    태윤은 태전문 앞에 서서, 손을 내밀었다. 가마에서 후궁이 내리고, 올라탈 땐 항상 누군가의 손을 잡아야 했는데 이 일은 태윤이 해야 했다. 황제가 그러라고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찰나가 아니면 이세희에게 닿을 수 없다. 이렇게라도 그의 곁에 있으려면, 이 모든 걸 감내해야 했다. 태윤은 가슴이 찢기고, 쓰라린 통증을 참아내려 했다.

    그에게 다가갈 때마다 가슴에 칼이 닿아, 북북 찢는 느낌이었다.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애써 잊고 있었던 한 가지 사실이 그의 몸을 내리눌렀다.

    아버지는 오늘, 이세희를 아프게 할 것이다. 태윤이 이세희를 지키기 위해 내뱉었던 말 때문에…. 그가 진짜 아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했다. 이세희의 아름답고 요요한 모습에 정신이 팔려, 그 중요한 말을 잊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그에게 말을 해야 할까. 태윤의 머리를 고민이 구름처럼 피어오르는데, 이세희가 태윤을 빤히 보더니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아.”

    태윤이 멍청하게 소리를 내었다. 이세희는 태윤의 손목을 잡고, 벌떡 일어났다. 태윤이 이세희의 악력에 비틀거렸다. 올 때처럼, 이세희는 태윤을 자신의 몸으로 지탱해 안아주었다. 태윤이 자신의 품에 안겨 얼굴을 들어 올려, 순박한 강아지처럼 눈을 깜박이자 이세희가 미간을 찌푸렸다.

    얼굴을 찡그려도 예쁘구나…. 그의 얼굴에 감탄하는 사이, 이세희가 짐짝처럼 태윤을 던지며 투덜거렸다. 다행히 타고난 신체 감각으로 넘어지진 않았다. 태윤은 발을 이상하게 움직이긴 했어도, 재빨리 자세를 잡고 섰다.

    “그래가지고 절 지켜 주시겠습니까? 정신 차리십시오!”

    이세희가 뒤를 돌아보며 위엄 있게 외치더니, 저 먼저 태중문 안으로 들어갔다. 태윤은 머쓱한 얼굴을 손등으로 문지르다, 그의 뒤에 적당한 간격을 두고 따라갔다. 이세희는 내관의 안내에 따라 황제가 있는 곳까지 안내받았다. 태중전은 두 가지 용도로 크게 동서로 나뉘었는데, 동쪽은 황제가 대신들과 나랏일로 정무를 보거나, 대화를 나눌 때 쓰는 곳이었고 서쪽은 보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황제가 술이나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안락한 공간이었다. 태윤도 황자 시절에 종종 서방으로 가, 황제와 차를 마시거나 그날 읽은 책에 대한 담소를 나누곤 했다. 가운데에 원 형태의 상이 있었고, 가장 중심에는 황제가 즐겨 앉는 침상 형태의 의자가 있었다. 그리고 양쪽에는 객들이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있었다.

    이세희는 서방 문턱까지 도착했지만, 후궁답게 명이 있을 때까지 그 앞에 앉았다. 그러나 무릎은 꿇지 않고, 두 손을 늘어뜨리고 서 있었다. 태윤은 창가에서 들어오는 햇살을 고이 받으며 우뚝 서 있는 이세희의 뒷모습을 유심히 보았다. 날씬하나 체격이 얇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근육이 사내답게 딱 붙어 있었는데, 옷을 입혀 놓으면 좀 더 가늘게 느껴지는 체격이었다. 팔다리는 길어서 무슨 옷을 입히든 잘 어울릴 몸이었다.

    그중에서도 시선을 이끄는 곳은 황제의 입술 자국이 남은 뒷목이었다. 옷깃에 가려졌지만, 그가 고개를 숙이거나 돌릴 때 언뜻 보이는 붉고, 푸른 자국에 시선을 다른 데 둘 수 없었다. 하얀 설원에 핀 꽃 같으면서도, 벼랑 끝에 겨우 매달린 초목 같아 잠시 시선을 돌리면 금방 져버릴 것 같았다. 그는 사내지만, 비에 맞은 꽃처럼 처연하고 가련한 구석이 있었다.

    저 자를 지켜주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그의 등을 지켜보고만 있는데, 그가 따가운 시선을 감지했는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다시 열기에 휩싸이게 될 것 같은 느낌에, 온몸에 짜릿함이 울리는데 그 순간, 문이 탁 소리를 내며 열렸다.

    “왔구나.”

    그리고 뜨겁게 달아오른 공기를 가르는 팔이 잽싸게 화비의 허리에 휘어 감겼다. 화비가 소리를 내기도 전에 황제가 거침없이 화비를 안으로 끌어당겼다. 태윤도 덫에 걸린 것처럼 화비를 따라 움직이다가, 자신을 뒤따르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서 걸음을 멈추었다. 서방 안으로 발을 디디려던 태윤은 문을 손으로 잡고, 들어오려는 이들을 막으며 말했다.

    “이곳은 내가 지킬 터이니, 너희들은 밖을 지켜라.”

    “하지만 대장님, 대장님 혼자 안을 지키시기엔 인력이 부족합니다.”

    부관이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과연 정말 황제와 화비를 지키기 위해서 일까? 태윤은 시선을 내려 부관의 눈을 빤히 보았다. 답은 간단했다. 묘한 열기에 감싸인 건, 자신만이 아니었다. 태윤은 깔끔하고 단호하게 꾸짖듯이 말했다.

    “어차피 안에는 호위 내관들도 있지 않은가. 호위 내관만 안에 다섯이 있다. 그리고 나까지 들어가면 총 여섯이 폐하를 호위하니, 괜찮을 것이다. 너희들은 밖을 지켜라.”

    부관이 저, 하며 입술을 달싹였으나 태윤은 듣지 않고 문을 매정하게 닫았다. 화비가 황제와 몸을 섞는 걸 내기를 걸고 지켜본 놈들에게, 더 이상 이야깃거리를 주고 싶지 않았다. 화비의 치욕은 이 안에서 자신이 버겁게 견디는 걸로 족했다. 그리 마음을 먹고, 문을 꼭 닫고서 고개를 돌렸다. 서방 안에는 황제와 이세희, 호위 내관 다섯 명, 그리고 황제의 시중을 드는 내관 넷, 궁녀 여섯이 있었다. 또한 중심에는 담소를 나누는 세 명의 사내가 있었다. 세 명의 사내는 무표정한 얼굴의 이세희를 보고 방긋 웃으며 예의를 차려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화비 마마. 그간 평안히 잘 계셨는지요?”

    이세희는 자신을 보며 담담히 인사를 내뱉는 이를 보고 머뭇거렸다. 대답을 해야 할지, 말지, 고민하던 이세희는 황제를 보더니 그에게 물었다.

    “대답을 해도 될는지요.”

    황제는 일일이 확인을 받는 이세희가 예뻤는지 고른 치열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렴. 너희 부모를 도와 유현을 이끌어가는 자이니, 그래도 된다.”

    확답을 받은 이세희가 안심한 얼굴로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황제의 시선은 이세희가 들어온 순간부터 연지를 바른 입술에 꽂혀 깜박이지 않았다.

    “부모님은 유현에서 잘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세령이나, 세연이도 잘 있는지….”

    이세희의 질문을 유심히 들은 늙은이가 허허, 하고 웃었다. 그 작은 울림에도 잔뼈가 굵은 관료답게 힘이 가득했다.

    “현령께선 예전보다 건강해지셨습니다. 말씀도 곧잘 나누시고, 현의 일에도 익숙해지셔서 직접 처리하기도 하십니다. 부인께서야 한결같이 현령을 돌보시느라 바쁘시고요. 작은 아가씨는 요새 수놓기에 관심이 부쩍 많아지셨습니다. 아무래도 이제 혼기에 드셨으니, 직접 지아비가 될 자에게 옷을 선물하고 싶으신 것 같았습니다.”

    작은 아가씨는 세령을 말하는 것 같았다. 세형이란 여동생은 아이를 낳았다고 들었다. 가장 어린 세연은 이곳에 따라왔으니, 딱히 얘기가 없었다. 대답을 들은 이세희는 조금 안심이 된 얼굴로 희미하게 웃었다. 황제의 품에선 피어나질 않던 미소가, 가족들로 인해 움트자 황제는 묘한 감정이 들었는지 이세희의 뺨을 어루만졌다. 자신의 피부에 닿는 탄력적인 손길에 이세희가 고개를 돌리자, 황제가 웃으며 이슬이 맺힌 술병을 툭 건드렸다. 문가에 서서, 두 사람의 뒤를 보던 태윤의 눈이 슬쩍 찌푸려졌다.

    이세희의 손이 느리게 움직였다. 그다지 하고 싶어 하지 않는지 손이 굼떴다. 그래도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 술병을 느슨하게 잡았다. 황제는 나른하게 긴 의자에 등을 대고 앉더니, 이세희의 허벅지를 다분히 음란한 손길로 어루만졌다. 대신들은 슬쩍 시선을 피하며 제 앞에 있는 술을 아주 느리게 홀짝였다.

    “세희야, 짐에게 고맙지 않으냐?”

    허벅지를 꽉 잡는 손길에 이세희가 손을 내려, 그의 손을 떨쳤다.

    “늘 감읍할 따름입니다.”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황제에게 고맙다고 표한 이세희가 술병을 집어 들었다. 익숙하게 술병을 자신의 입가에 기울여, 술을 한 모금 머금은 그는 그대로 황제에게 다가갔다. 황제가 기다렸다는 듯 눈을 또렷하게 뜨며 팔을 벌렸다. 이세희는 그와 반대로 눈을 지그시 감으며, 황제의 어깨에 두 손을 올렸다. 이세희의 고개가 틀어졌다. 그 상태로, 이세희와 황제의 입술이 맞닿고 황제가 소리를 울리며 웃었다. 황제의 손은 더듬거리며 올라와 이세희의 뒷목을 잡았다.

    “으음….”

    황제에게 맞닿았던 이세희의 입술이 벌어졌다. 붉은 연지가 묻은 입술이, 황제에게 빨리더니 이윽고 머금었던 술이 황제에게로 넘어갔다. 황제의 사내다운 목젖이 위아래로 움직이며 이세희가 입으로 넘겨주는 술을 받아먹었다. 황제의 손은 뒷목에서, 등을 타고 내려와 이세희의 엉덩이에 머물렀다. 그사이를 참지 못하고 대신들 앞에서 이세희의 엉덩이를 마구 주물렀다.

    “앗!”

    그는 도망가려는 이세희의 몸을 단숨에 잡아, 자신의 위에 올려 태웠다. 당황한 이세희가 황제의 두툼한 팔뚝을 밀어내려 했지만, 상체를 일으켜 입을 맞추는 황제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입술을 벌려야 했다.

    “으응…. 음, 으음….”

    이세희와 황제의 맞닿은 입술에서, 연신 젖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의 먹어치우듯이 이세희의 입술을 입에 넣고 쪽쪽 빨던 황제가, 거친 신음을 흘리며 상 위를 더듬거렸다. 술병을 거칠게 잡아채느라 술이 바닥에 조금 흘렀다. 황제는 이번엔 자신의 입에 술을 머금더니, 이세희의 두 뺨을 손으로 잡고 거칠게 입을 맞추었다.

    “흐읏…! 으응…!”

    너무 강압적인 손길에 이세희가 여린 신음을 흘리며 눈을 위로 힘겹게 떴다. 짧은 사이, 황제에게 물리고 빨린 터라 아픔이 올라왔는지 이세희의 눈가가 무척 붉었다. 그 시선이 태윤에게 닿자, 태윤은 형용할 수 없는 더위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또, 이세희 때문이다. 이세희를 보면 열탕에 오랜 시간 있는 것처럼 머리가 혼미해졌다. 그의 눈빛이 스친 자리엔 화상이 남은 것처럼 열감이 지글지글 끓었다. 가슴은 이미 열에 녹을 대로 녹아 형체도 알 수 없었다. 심지어 가슴은, 아버지로 인해 칼이 박히고 찢기니 넝마가 되고도 남았다.

    “으으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윤은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이세희만 보았다. 아니, 그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시선에 옭매여 발등에 못이 박힌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가슴은 쉴 새 없이 두근거리나, 이세희와 아버지가 술을 주고받기 위해 고개를 틀며 입을 맞출 때마다 머리는 찬물을 끼얹은 듯 식어갔다. 다른 종류의 두근거림이 가슴을 탁, 때리고 전신으로 퍼지자 주먹이 쥐어졌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고서야, 정신이 사금파리처럼 쪼개져 자신을 일깨웠다.

    불쾌감이었다. 그리고 방향을 잃은 질투에 입안 살을 우득 깨물었다.

    “흐읏, 아….”

    황제의 집요한 입놀림에, 입술이며 혀가 붓고 아리자 이세희가 신음을 흘리며 그의 품에서 상체를 뒤틀었다. 이세희가 몸부림치며 도망가려 하자 황제가 웃음을 터트렸다. 입안에 미끄덩거리는 혀에, 웃음까지 비벼지자 이세희는 아미를 찌푸렸다.

    발정 난 수캐 같으니라고.

    지금도 엉덩이를 쿡쿡 찌르는 대물에 욕지기가 절로 나왔다. 지금이야 부모를 보필하는 문관들이 있으니 말 한마디도 못 내뱉고, 그의 혀를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그들만 나가면 저 술병으로 그의 머리를 깨버리고 싶었다. 이미 그러고 싶어서 손톱들은 그의 나무같이 억센 목을 긁고 있었다.

    망할 자식, 개자식…. 눈에는 그를 향한 분노를 피우는데, 그 불꽃이 일렁거리는 곳에 황제를 닮은 자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불꽃이 타닥거리며 일렁일 때마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래서 황제와 입술을 부딪치면서도, 인식하지 못했다. 흔들거리는 불꽃이 튀어올라 그가 어떤 식으로 자신을 보는지 몰랐다.

    얇은 막이 한 겹 둘러싸인 세상은 고요해 보였다. 자신을 산해진미처럼 먹어치울 것 같은 황제의 거칠고, 습윤한 입술과 다르게, 그의 아들은 자신을 사뭇 담담한 눈으로 보았다. 언젠가 보았던 새벽의 바다와 닮았다. 밤과 아침, 그 미묘한 간극 사이에 머문 바다처럼 어둠에 몸을 숨기나 일렁거리는 것이, 딱 저 눈과 닮았다. 너무 조용해 닿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깊은 세계였다. 그리고 깊고 어두운 곳에 빠지고 나면, 그 여파는 감당할 수 없다.

    조금만 발을 헛디디면 빠질 것 같은 수면에 이세희는 전율하듯 몸을 떨었다. 발가락부터 몸을 관통하는 예리한 소름에, 그는 황제의 어깨를 짚고 숨을 잘게 헐떡였다. 무서워. 이세희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손에 힘을 바짝 주었다. 손가락이 곱아들며 황제의 옷깃을 구겼다. 숨결은 오래 달린 것처럼 뜨겁게 달궈져, 황제의 날렵한 콧날로 미끄러져 내렸다.

    “세희야.”

    황제는 눈으로 자신을 보지만, 그 안에 자신을 두지 않는 이세희의 시선에 불쾌감을 여실히 드러냈다. 정말, 물에 빠져 막 나온 사람처럼 몸을 떨었다. 황제가 아니라 태윤으로 인한 떨림을 잠재우려 이를 악무는데, 황제가 턱을 강하게 낚아챘다. 커다란 손아귀에 잡힌 턱에서 빠득, 하고 뼈가 엇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세희가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상체를 비틀자, 황제가 허리에 두툼한 팔을 감으며 자신 쪽으로 당겼다.

    “세희야. 그런 눈으로 남자를 보면 안 돼. 고자도 남자란다.”

    귀에 대고 사근사근 속삭이지만, 서방에 머문 사람들은 모두 노골적인 그 말을 들었다. 목소리는 낮춘 상태였지만, 그윽하고 성량이 풍부한지라 목소리는 넓은 서방에 산들바람처럼 퍼졌다. 대신들은 그 소리를 듣고 입가를 가리며 헛기침을 했다. 정작 고자란 사실이 다시 알려진 호위 내관들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 태윤 또한 불쾌감에 눈썹을 살짝 꿈틀거리기만 할 뿐,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황제는 고개를 돌려 이세희와 시신이 닿은 자들을 돌아보다가, 제 아들을 보고는 픽 웃었다.

    결코 그럴 리 없다는, 확신의 미소가 황제의 입술에 흠뻑 맺혔다. 제 아들은 우직한 자태로 자신의 뒤를 지키며 자신만 보고 있었다. 제 품에 안긴 이세희는 결코 시선 안에 두지 않을 담백한 눈빛에 황제는 보란 듯이 고개를 돌리며, 이세희의 턱을 놔주었다. 백도같이 하얗고 말랑하여, 탐스럽다고 느껴지는 두 뺨이 금세 붉어졌다. 아릿한 통증이 얼굴에 치미는지 이세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새치름한 눈매와 달리, 눈빛이 매서운 게 당장이라도 황제를 한 대 후려칠 것 같았으나 이세희는 잠자코 그의 품에서 내려와, 자신의 자리에 조신하게 앉았다. 그리고는 후, 하고 낮게 숨을 내쉰 후 대신들을 물끄러미 보았다.

    “부모님을 모시고 제도까지 와 주시느라 감사합니다. 세연이도 아직 나이가 어려 자주 칭얼거리는데…. 그 아이를 위해 훈육관도 붙여 주시고. 여러모로 감사합니다.”

    태윤은 이세희가 왜 저리 조곤조곤 말을 하고, 얌전히 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세희의 입에서 나온 부모님, 그리고 아직 혼인을 하지 못한 동생들의 얘기가 나오자 그제야 하나씩 의문이 풀렸다.

    이세희는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요망한 화비가 아니라 부모님과 동생들을 지극히 사랑해, 아무것도 못 하는 사내였다. 다시금 그의 효심이 얼마나 깊은지 체감이 되자, 태윤은 씁쓸함이 몰려와 속으로 한숨을 되뇌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세희를 볼 때마다 피어오르는 이 열기, 그 열기로 인해 발생되는 습윤한 공기와 답답함이 가시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닙니다. 모든 것이 폐하의 은덕 덕분이지요. 폐하께서 유현령에 대해 늘 걱정을 놓치지 않으시어, 저희에게 서신을 보내주신 답니다. 더불어 유현령에게 좋은 약재가 있으면 서슴지 않고 보내주시니…. 이 하해와 같은 은혜에 저희가 몸과 마음을 바쳐 일할 수밖에 없지요. 그게 저희의 도리이고, 해야 할 일입니다.”

    이세희가 현령을 보좌하는 이들에게 고맙다고 전했지만, 현령들은 대놓고 황제를 추켜세우며 이세희에게 압박을 넣었다. 황제가 네 아비에게 얼마나 잘하는지 알겠느냐고, 노골적인 물음을 이세희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는지 점차 시들어갔다. 오랜 시간 물을 잘 빨아먹다가, 어느 순간 끊긴 물을 그리워하며 점차 꺾인 꽃처럼 이세희는 고개를 숙였다. 황제가 손을 뻗어 달래려는 듯 머리카락이 삐져나온 뒷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이세희는 그때도 가만히 있었다. 황제는 이세희의 뒷목의 보들보들한 살을 엄지와 검지로 문지르면서도, 애가 타는 듯 대화 중에 그를 갈증 서린 눈으로 보았다. 대신들도, 환관들도, 그것이 당연하다 여기며 둘을 지켜보는데 태윤은 가슴이 너무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그 누구도 모르는 수풀로 들어가, 악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에 태윤은 띠돈을 꽉 잡고 버텼다.

    내가 해야 할 일을 기억해야 했다. 내 자리를 기억하고, 이 자리에서 그를 봐야 했다. 그의 존재 자체로 주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아버지의 아들이니까.

    태윤은 먼지가 목화솜처럼 이는 부연 서방에서, 아버지가 이세희의 뒷목을 어루만지는 광경을 뚫어지게 보았다. 아버지의 손이 안으로 오므라들며 이세희의 목, 움푹 파인 부분을 만졌다.

    뒷자리에서도 아버지의 사내다운 엄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생생하게 잘 보였다. 그의 엄지는 이세희의 목에 엷게 자리를 잡은 핏줄을 타고, 아래로, 그리고 양옆으로 움직여 보드라운 살결을 음미했다. 백옥같이 하얗고, 좋은 향이 날 것 같은 피부가 황제의 구릿빛 살 밑에 밀리면서 붉은 자국이 남았다. 애정보단 음란한 의도가 다분한 손길에 이세희의 옷깃이 자꾸만 아래로 내려갔다. 자칫 잘못하면, 각지고 다부진 어깨선이 보일 지경이었다. 이세희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대신들도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 모든 게 아주 느리게, 붓으로 그린 것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태윤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대신들이 보는 자리에서 더듬더듬 이세희를 만지는 광경이 심히 거슬렸다. 툭 튀어나온 모서리처럼 쿡쿡 찌르는 불쾌한 감정에 무의식중에 띠돈을 만지작거리는데, 그때까지도 가만히 있던 이세희가 황제의 손을 슬그머니 밀쳐냈다. 느리고 부드럽지만, 확실하게. 아버지가 이세희를 옆에 앉혀두고, 희롱하는 장면을 모조리 보던 태윤은 처음으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쾌감이 인 것이다. 이세희가 아버지를 거부했다는 사실에, 온몸에 짜릿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그러나 이내 그 감정은 시든 이세희처럼 풀이 팍 죽었다. 내가 좋아해서 무얼 한단 말인가. 나는 이렇듯 뒤나 앞에서 지켜보며 안절부절못할 뿐, 이 모든 수치를 감당해야 하는 건 이세희인데.

    왜 나는,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서….

    부연 먼지들이 목화솜처럼 퐁퐁 피어난 서방에서 꽃이 피는 걸 보았다. 그 먼지들은 하얀 눈발이 되었고, 이세희의 검은 머리카락은 겨울바람에 흩날리는 잎이었다. 그리고 눈을 내리뜨던 이세희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자신을 보았을 때, 눈은 한 순간에 녹아 꽃만이 남았다.

    꽃이 지고, 피는 게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데 몹시 아름다워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다시 겨울이 올까 두려웠다. 봄을 눈으로 맡고 싶었다.

    그들이 이세희를 보며, 눈에 정액 냄새를 풍길 시 눈을 베어버릴 작정이던 손은 띠돈에서 멎었다. 태윤은 이세희의 느린 미소에 손에 힘을 완전히 빼고, 두 손을 꽉 맞잡았다. 어린 시절, 황제 앞에서 서예를 검사받는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가 웃으면 합격이고, 코웃음 치면 불합격인 시험 앞에 섰다. 태윤이 눈을 부릅뜨고 이세희를 보는데, 이세희가 고개가 반대로 돌아갔다. 태윤은 멍청하게 눈을 깜박였다.

    “세희야.”

    그곳에 아버지가 이세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세희가 자꾸 왜 그럴까.”

    그리고 자신의 소유인 것처럼 세희야, 라고 불렀다. 그것도 모자라 이세희의 어깨를 잡던 손의 종착지를 바꾸어, 목을 틀어잡더니 세게 힘을 주었다. 이세희는 목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마른침을 삼키며 황제를 물끄러미 보았다. 황제가 목젖 부근을 엄지로 누르며 은근하게 웃자, 이세희가 눈을 위로 치켜뜨며 중얼거렸다.

    “폐하가 싫어서 그렇습니다.”

    담담하나 뾰족한 어투에 황제는 하,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이세희를 눈으로 강간하던 대신들은 입을 꾹 다물고, 팽팽한 분위기가 감도는 이세희와 황제를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황제는 이세희의 목을 쥐던 손을 내려놓더니,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그 상태로 고개를 숙인 황제는 등을 뒤에 기대고, 대신들을 보았다.

    “그대들의 부인도 저리 나오나? 잘해줘도 앙칼진 고양이처럼 구니, 이거야 원.”

    대신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다, 그중 오른쪽에 있는 늙은이가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어찌 감히 폐하의 비빈 마마들과 한낱 범부인 소신들의 아내들을 비교하겠습니까? 하지만 이 나라의 주군이시자, 천자이신 폐하께 해야 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는 건 분명하옵니다.”

    왼쪽에 있는 대신은 고개를 조아리며 느긋하게 대답했다.

    “하늘의 아드님이신 폐하를 모시는 자로선,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판단되옵니다.”

    오른쪽에 있는 자는 유하나 엄격했고, 왼쪽에 있는 자는 화비에게 상당히 직설적이었다. 화비는 이제 참을 생각도 없는지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폐하께 다리 벌린 덕택에 그 자리에서 돈을 버는 주제에 할 말은 참으로 많군.”

    대신 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황제는 “네 부모를 도와 현을 윤택하게 하는 이들이다. 그리 말하면 못쓰지.”라고 타박했으나, 이세희는 싸늘하게 웃으며 이죽거렸다.

    “신첩의 부모를 돕는 게 아니라, 감시하는 것이겠지요. 지금도 신첩의 부모님을 여기에 모셔와 협박하는 것이지, 뭐가 다르겠습니까? 신첩이 도대체 어디까지 폐하의 몹쓸 짓을 받아들여야 합니까?”

    한번 터진 화는 참을 새가 없었다. 이세희는 황제를 향해 사근사근한 어투로 그간 쌓인 분노를 쏟아냈다. 자기 부모 앞에서 몸을 더듬더듬 만지는 황제에게도 화를 냈던 이세희였다. 대신들 앞에서 희롱을 하며, 부모를 혀에 담고 협박을 일삼으니, 여태까지 참은 게 용했다.

    “몹쓸 짓?”

    황제는 턱을 손으로 감싸고, 여유로운 미소를 짓더니 되물었다. 대신들은 점점 아슬아슬하게 변해가는 분위기에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슬쩍 일어났다. 그러나 황제가 검지와 중지를 붙이고, 위에서 아래로 까닥이니 그들은 울상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대로 다시 착석하게 된 대신들이 입을 열기도 전, 황제가 이세희 쪽으로 허리를 당기며 물었다.

    “지금 몹쓸 짓이라고 하였느냐? 짐이 세희 너에게 한 짓이, 몹쓸 짓이라고?”

    “그럼 여태까지 뭐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이세희가 무표정한 얼굴로 황제를 보며 쐐기를 박았다.

    “신첩은 한 번도 폐하께 좋다는 소리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 순간, 황제의 손이 이세희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짝, 소리가 아니라 둔탁한 소리가 서방에 폭발적으로 울려 퍼졌다. 이세희의 몸이 의자와 함께 나동그라졌다. 충격이 상당했는지 이세희가 바닥에 손을 짚고 몸을 바들바들 떠는데, 황제가 발을 들어 올려 이세희의 등을 밟았다. 어찌나 세게 밟았는지 상체가 일어서질 못했다.

    “아윽…!”

    이세희가 일어나려 발버둥치려 할 때마다, 황제의 발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런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돼지. 짐도 상처를 받는단다.”

    대신들도 놀라, “폐하! 그만 멈추십시오! 화비 마마를 용서하여 주십시오!”라고 외쳤다. 태윤은 황제가 발을 올리는 걸 지켜보다, 몸을 움직여 화비와 황제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리고 두 팔을 벌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바마마, 이제 그만하십시오. 마마께서 잘못하신 일이 있다 하여도,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손찌검을 하는 건 지아비가 할 일이 아닙니다!”

    황제는 자신에게 흔들림 없이 보는 아들을 보더니,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난감하다는 듯 머리를 만지작거리던 황제가 다정한 어투로 ‘하여간…’이라고 중얼거렸다. 그사이, 태윤은 얻어맞은 뺨을 감싸고 일어나려는 이세희를 안아 지탱해주려 했다. 그는 갑작스레 얻어맞은 뺨도 뺨이지만, 그대로 나동그라지고 등까지 밟힌 충격이 커 정신을 다잡지 못했다. 지금도 간신히 바닥을 짚고 숨을 헐떡이는 게 전부였다. 그런 자를 내버려 둘 수 없어 잡아주려는데 손목에 엄청난 통증이 밀려왔다.

    “만지지 마라.”

    “아, 아바마마….”

    황제가 비린내가 풀풀 풍기는 눈으로 활짝 웃으며 태윤에게 말했다.

    “세희는 내 것이란다. 그러니, 아비 걸 만지면 안 돼.”

    그 상태에서 황제는 태윤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리 힘을 싣지 않았기에 몸이 몇 발자국 밀리고 끝이 났다. 이세희에겐 진심을 담해 때렸어도, 태윤은 아들이라 자신의 선에서 봐준 듯하였다. 황제는 자신에게 다시 강아지처럼 달려들 기세인 아들을 제지하며 나긋하게 덧붙였다.

    “윤아, 네가 후궁들의 일에 얼마나 다정다감하게 나섰는지 안단다. 세희도 마찬가지겠지.”

    황제는 비틀거리며 일어나려는 이세희의 머리채를 확 잡아당겼다. 이세희의 상체가 위로 당겨졌다. 두피가 뜯기는 고통에 이세희의 입술이 떨렸다.

    “아바마마, 제발…. 마마께 그러지 마십시오. 마마는 아바마마의….”

    이세희는 아바마마의 애첩이지 않습니까? 그 말이 입안에서 맴도는데, 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그리 말했다간 정말 그가 아버지의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말 거 같아, 태윤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황제를 애원 섞인 눈으로 보았다.

    그러나 황제는 자신이 이끄는 대로 딸려와 숨을 거칠게 내쉬는 이세희를 보았다. 무참하게 떄린 주제에, 사랑하는 눈으로 이세희를 더듬었다. 헝클어진 머리, 붉어진 뺨…. 피를 흘리는 입가까지 황홀한 시선으로 맛본 황제가 입술을 열었다.

    “내 것이지.”

    그는 손을 뻗어 다시 한 번, 가차 없이 이세희의 뺨을 후려쳤다. 손바닥과 관자놀이부터 턱까지, 붉은 자국이 낙인처럼 남았다. 이세희는 앓는 소리를 미약하게 내더니, 고집스럽게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천천히 돌려 황제를 보았다.

    “내 세희고.”

    덧붙여 말한 황제는 신음 한번 내지 않으려 버티는 이세희의 턱을 잡고 당겼다. 사랑이 범람하는 눈으로 이세희를 내려다보던 황제가 고개를 돌려, 바들바들 떠는 태윤을 보고 또박또박 말했다.

    “그리고 내 애첩이란다. 내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다는 뜻이야.”

    황제는 이세희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더니, 그대로 상으로 내던졌다. 이세희가 집어 들었던 술병이 산산조각이 났다. 중심을 잡지 못해 상을 떨리는 손으로 잡고 버텨 보려 하던 이세희는, 뒷목을 과감하게 잡고 꾹 누르는 힘에 흐느꼈다. 그러나 제발, 이라던가 그만, 이라고 비는 목소리는 결코 나오지 않았다. 잇새로 새는 울음만이 그의 고통을 알려주고 있었다.

    황제는 이세희의 목을 한 손으로 가볍게 쥐고, 눌러 제압하고서 아들을 돌아보았다. 핏줄이 곤두선 눈이 붉었다. 태윤이 아바마마, 하며 부르며 다가가려 하자 황제가 이세희의 둔부를 손으로 주물럭거렸다.

    “세희가 아픈 모습이 보고 싶다고 그랬지?”

    황제의 물음에 태윤은 고개를 세게 저었다.

    “아닙니다! 소자는 그런 적이…!”

    “제대로 보거라. 세희가 좋아할 땐 어떤 소리를 내고.”

    태윤이 거친 목소리로 매달려 보아도, 황제는 단칼에 잘랐다. 그는 연이어 이세희의 바지를 내려, 하얀 엉덩이를 콱 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세희가 아파할 땐 어떻게 우는지 알려주마.”

    황제는 웃음기를 싹 지우고서 태윤을 보고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그러니 다시는 나를 막지 말거라. 아무리 사랑하고 예뻐하는 윤이라도 참을 수 없으니.”

    그의 시선이 내리꽂히자, 윤은 그에게 종속된 것처럼 눈빛을 돌릴 수 없었다. 숨을 쉬는 당연한 행위조차 그에게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전신을 눌렀다. 이 느낌은 어릴 때부터 황제에게 종종 받아오던 감각이었다. 그는 자식들에게 나름 다정한 아버지였지만,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거나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면 사람이 바뀐 것처럼 냉정해졌다. 자식이 아니라 의미가 없는 존재를 보는 듯한 눈빛은 망설임 없이 그 상대를 향해 날아갔다. 가슴을 마구잡이로 억누르는 눈빛이 켜켜이 쌓이면, 가슴이 못 견디고 터질 것 같았다.

    수십 개의 칼날이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조금만 움직이면 잘 벼려진 칼날에 살이 베어질 거 같아, 태윤은 마른침을 삼키며 황제를 응시했다. 웃음기가 정제되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의 얼굴은 살얼음 같았다. 눈을 그의 내면 안에 넣으면, 그대로 쨍하고 얼어붙을 것 같은 한기에 태윤은 천천히 바닥에 무릎을 대었다.

    그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여기서 모든 게 끝이었다. 시야 언저리에 잡혀 황제의 강간을 기다리는 이세희를 도와줄 수도 없었다. 태윤은 자신의 나약함에 무릎을 꿇었다. 으스러지도록 이를 악물면서, 황제의 앞에 납작 엎드려 이마를 대었다.

    “폐하, 소신이 어찌 지엄하신 폐하의 앞을 막겠습니까? 그런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소신은 그저….”

    “그저?”

    뒷말을 이어야 했는데, 숨이 너무 떨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뱉을 말은 쉬운 단어들로 이루어진 문장이었는데 혓바닥에 올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화비 마마는 폐하의 소중한 분이 아니십니까? 그분을 소중히 대해주십시오.

    그럴싸하게 말을 치장해서 황제의 환심을 사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태윤은 이세희만 생각해도 턱 막히는 숨과 굳어버리는 혀에 자신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린 시절 걸린 열병처럼 머리는 뜨겁게 달아올라,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럴 여력이 없다는 게 더 걸맞은 표현이었다. 이 날씨에 고뿔이 아닌가 싶어 과거 경험을 유추해 보았으나 열은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러는 건가. 어째서 그만 보면, 어린애가 된 것처럼 어리숙해지고 한없이 작아드는 건지.

    이런 주제에, 그를 지켜주겠다고 마음을 먹은 자신이 우스워 보였다. 오히려 아버지에게 할 말을 다하는 것도 모자라, 비아냥거리는 이세희가 대단해 보였다. 아버지의 눈빛에도 굴하지 않는 그의 기개도 얼굴만큼 아름다워 보였다.

    “…아들에게도 질투하시는 겁니까?”

    이세희로 민들레 홀씨처럼 부풀던 마음이, 이세희의 나지막한 읊조림으로 바람이 일어 저 멀리 사라졌다. 남은 건, 홀씨들이 모두 떠나 허해진 꽃대였다. 씨들이 떠나간 흔적만이 무수히 남아 텅텅 비어버린 민들레. 태윤은 두근, 두근, 박동하는 심장을 감지하며 천천히 눈을 위로 들어올렸다. 이세희가 황제의 손 아래 납작하게 눌린 채, 황제를 가감 없이 비웃고 있었다.

    “형편없긴. 할 줄 아는 거라곤, 몹쓸 짓밖에…. 읏!”

    태윤은 눈을 황급히 아래로 내려떴다. 바람을 타고 두둥실 떠다니는 홀씨는, 마음을 떠나 자신의 전신에 싹을 내렸다. 이제 전신에 이세희가 필 시기였다. 막을 새도 없었다. 홀씨는 바람을 타고 자연스레 흘러 들어온 것뿐이었으니까. 문을 닫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었다. 태윤은 주체할 수 없는 떨림에 악문 이에 힘은 서서히 풀었다. 이 떨림 또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으므로.

    태윤은 둘 곳을 모르고 떠돌던 눈을 바닥에 두었다. 봉황이 밟던 구름을 형상화한 문양이 새겨진 바닥을 보며 태윤은 호흡을 골랐다.

    이세희는 불가항력이다. 그래서 내가… 그를 보면 흔들린 것이다. 타인이 무수히 많은 공간에서도, 오로지 이세희밖에 보이지 않는 감정은 단호하게 정의되었다.

    “입 다무는 게 좋을 텐데, 세희야.”

    그러나 그 감정은 사계절 중 가장 짧은 봄처럼, 스쳐갈 뿐이었다. 황제의 분노와 살기가 뚝뚝 흐르는 말이 사방이 물방울처럼 퍼지자 태윤은 정신을 다잡았다. 자신뿐만 아니라 황제 주위로 포진한 이들은 모두 숨을 멈추고 눈을 내리떴다. 황제의 걷잡을 수 없는 분노는 갈고리와 흡사했다. 살갗에 박혀, 아픔을 주는 것도 모자라 발버둥칠수록 더 박혀 조이듯 고통을 준다. 그러다 서서히 숨이 막혀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태윤은 등에 쿡 파고들어 살갗을 파고, 신경까지 예민하게 긁는 그의 살의에 눈을 위로 떴다. 무서웠지만 봐야 한다는 감정이 다급한 말처럼 앞섰다. 그의 분노에 가슴이 쿵, 쿵, 뛸 때마다 말이 자신의 심장에서 사정없이 발을 구르는 것 같았다.

    터질 듯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눈을 완전히 위로 떴을 때, 황제는 이세희의 머리채를 잡아 올린 상태였다. 이세희의 바지가 무릎에 걸렸지만, 상의가 길어 그의 둔부를 다 가렸기에 민망한 상황은 면할 수 없었다. 황제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작은 이세희는, 반항할 생각은 없는지 머리채가 잡힌 상태로 황제를 노려보았다. 서방의 너른 방에서 황제를 응시하는 자들은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는 그들의 시선은 인식도 못 하는 듯, 붉게 달궈진 눈으로 이세희를 쏘아보며 이를 갈았다.

    “감히 짐을,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모욕해? 천하고 멍청한 네까짓 게?”

    이세희는 머리채를 강하게 앞으로 당기는 힘에 잇새로 신음을 흘렸다. 신체적으론 그에게 밀리고 있었으나 이세희의 눈빛은 황제에게 한 번도 밀리지 않았다.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그를 형형한 눈으로 바라보며 이죽거렸다.

    “그럼 죽이세요.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분 아니십니까?”

    냉소를 터트리는 이세희의 입술은 그 순간에도 아름답게 빛이 났다. 햇빛 때문에 창살의 문양이 그대로 그림자로 바닥에 드리워졌는데, 그 그림자 끝에 서 있으니 마치 하늘에서 빛의 계단을 밟고 내려온 선녀같이 우아하고 신비로웠다. 서방 안에 더위가 넘실거렸으나, 열린 창문으로 적당히 상쾌한 바람이 불어오니 정말 사람 같지 않은 고아한 분위기가 흘러 태윤은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정말 어쩌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태윤은 저도 모르게 그 말을 속으로 읊조리며 하염없이 그를 눈으로 부드럽게 감쌌다.

    그는 그런 존재였다. 아버지가 다루듯이, 함부로 대할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기엔 그의 모든 것이 소중하고 아름답지 않은가.

    태윤이 그를 사정없이 다정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이세희는 이끌리듯 눈을 돌렸다. 너무 다정해, 혀가 절 것 같은 달콤함이 밀려와 날카롭던 정신이 살짝 엉망이 되었다. 폭풍우가 이는 머리에 아주 약한 나비가 날아든 것처럼,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재해에도 지킬 것은 있었다. 자신의 어린 여동생들을 연상케 하는 간지러운 감각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황제와 닮은 이가 있었다. 황제의 젊은 시절을 그대로 거푸집으로 찍어낸 듯한 늠름한 사내가 자신을 보며, 황제와 전혀 다른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 눈빛은 황제의 날이 선 분노보다 무겁게 응축된 눈이었다. 지나쳐 보면 가벼워 보이나, 피부에 알알이 맺혀 떨어지지 않는다. 그 무게는 가히 잴 수 없었다. 그렇다 보니 몸이 그쪽으로 기우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세희는 황제에게 잡힌 몸에서, 시선을 비스듬히 내리박았다. 망설임도, 흔들림도 없는 사내가 우직하게 자신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쳐도 혐오를 드러내지 않으며, 천한 것을 보듯 하대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만 보고 있었다. 오롯이 이세희만. 그 눈빛은 형체가 또렷했고, 방향도 잃지 않았다.

    그 시선에 수면에 이는 파동처럼 눈을 흔들던 이세희는, 뺨을 내리치는 작열감에 정신이 멍해졌다.

    “건방진 것! 짐이 널 이리 사랑하는데도, 언제까지 죽이라는 말만 거듭할 것이냐?”

    옆구리에 꽂히는 주먹에 이세희는 처음으로 아픔에 물든 소리를 터트렸다. 황제는 이세희가 죽이라고 대들거나, 이런 식으로 대신들 앞에서 이죽거리면 참지 않고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얼음 같으나 그 안은 따스한 군주라고 일컬었으나, 이세희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발밑에 있는 자들은 어리석고 낮으니, 자신이 감싸줘야 하는 그릇된 사상으로 보는 자였다. 따스함이 아니었다. 그의 바탕에 전제된 감정은 언제든 식을 수 있는 한 순간의 애정이었다.

    그래서 버티고 버텼다. 언젠가 이 감정이 식을 테니까. 이세희는 황제가 머리채를 놓자마자, 바닥에 쓰러지며 배를 감싸 쥐고 숨을 헐떡였다. 황제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숨을 몰아쉬더니 완전히 얼어붙은 대신들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환관들과 금군대장만 남으라.”

    그 외의 사람들에게 내려진 하명에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소리 없이 빠르게 빠져나갔다. 이세희는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서 비틀린 웃음을 터트렸다. 황제는 울음이 잔재된 웃음에 고개를 돌렸다. 전신에 작열하는 고통에 몸을 웅크리고 떨던 이세희는 집요하게 꽂히는 시선에 얼굴을 힘없이 들었다.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눈시울을 붉게 물들이며 화를 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놓지 못하는 절박한 감정에 이세희는 미간을 찡그리며, 입술을 삐뚜름하게 올렸다.

    “사랑? 개 같은 소리 하네.”

    이세희의 축축하게 젖은 입술에서 아릿한 신음이 섞여 나왔다. 황제는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다른 무릎은 세웠다. 그 자세에서 긴 팔을 내려 우아한 손짓으로 이세희의 날렵한 턱을 들어 올렸다. 양쪽 턱을 비틀 것처럼 우악스럽게 힘을 준 탓에 이세희는 통증에 몸을 떨어야 했다.

    “내가 널 놔줄 것 같으냐. 어리석은 것.”

    황제의 말이 고저 없이 흘렀다. 속삭이는 듯한, 나긋한 말투는 짐짓 상냥하게 느껴졌다. 황제는 뺨을 연달아 얻어맞아 붉게 부은 이세희의 뺨을 엄지로 문질렀다. 얼얼하고 화끈하던 볼 위를 황제가 덧그리듯 연신 어루만지자, 따끔한 통증이 일어 이세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담백하게 가라앉은 시선을 내려, 이세희의 붉은 입술을 더듬었다. 주름 없이 매끈한 입술은 붉은 꽃잎을 으깨 물들인 것처럼, 화사하게 붉었다. 안 예쁜 구석이 없는 얼굴을 조목조목 살펴보던 황제는 반대편 손도 뻗어 이세희의 얼굴을 감쌌다. 이세희는 그가 다시 자신을 때리는 줄 알고,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전율하듯 떨었다.

    “계속 그렇게 해 봐. 나도 내 마음대로 할 테니. 어디 한 번, 이렇게 저승까지 떨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리고 황제는 고개를 숙여 이세희의 입술을 머금었다. 먹여 삼켜지는 것 같았다. 흐윽, 하고 우는 소리를 낸 이세희는 황제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쳤다. 온몸이 싫다고, 그에게 증오를 표현하고 있었으나 황제가 엄청난 덩치로 내리누르니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황제가 고개를 틀어가며, 아랫입술, 윗입술을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었다. 피가 흐르는 것 같은 아픔에 이세희는 숨을 거칠게 내쉬며 눈을 떠 황제를 보았다. 절대 꺾이지 않을 단단한 기세의 눈빛에 황제는 입술과 혀를 빨아들인 채 눈을 진득하게 휘어 웃었다. 이세희는 전신이 꿰뚫린 듯한 집요함에 몸서리를 치다 눈을 돌렸다. 그를 보고 싶지 않은 반발감에 무의식적으로 행동한 것이었는데, 시선 중앙에 황제의 아들이 있었다.

    자신의 발목을 붙잡는 듯한 시선에 이세희는 눈시울을 떨었다. 황제에게 붙들린 자신의 몸이 쓰러지면, 그대로 달려와 받쳐줄 것 같은 눈빛이 가슴에 쿡 박혔다. 쉴 새 없이 날아드는 눈빛은 그림자 없이 자신만 보았다.

    깊이를 알 수 없어 떠밀리고 싶지 않았던 새벽 바다였다. 어둠이 짙게 깔려 있어 그 깊이가 가늠이 되지 않으니까. 머뭇거리는 사이, 몸은 황제의 무게의 의해 떠밀렸다.

    “아아….”

    황제가 이세희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헤집으며 심한 갈증에 이는 이처럼, 입술을 물고 빨아 타액을 삼켰다. 황제의 체온에 의해 달아오른 타액을 빨아먹으면서, 이세희는 멍하니 일렁거림 없는 바다를 보았다.

    어쩌면.

    그리 생각할 때, 몸이 바닥에 엎드려졌다. 거친 입맞춤에 달린 것처럼 달궈진 숨이 터져 나왔다. 환관들이 기다렸다는 듯 손을 짓누르고 다리를 벌렸다. 앞에 있는 태윤은 갑작스럽지만 예고된 것처럼 다가온 상황에 눈을 잘게 떨었다.

    “윤아.”

    황제의 아들임을 깨닫게 해주는 외자 이름에 세희는 눈을 깜박였다. 황제의 아들이잖아. 나를 강간한 자의 자식이었다. 그것도, 황제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 만약 핏줄만 깨끗했다면 당장 황위를 잇는 자에 올랐을 자식. 어머니가 공노비라는 이유만으로 자리에서 내쳐졌으나, 담담히 그걸 받아들여 황제의 환심을 산 자식답게 지금도 황제의 애정을 듬뿍 받고 있었다. 감히 황제의 면전에서 소리를 높여도, 아직까지 살아있지 않던가.

    이세희는 드러난 둔부를 매만지는 뜨거운 온도에 미간을 찡그렸다. 굳은살이 박인 손이 엉덩이를 문지르고 갈라진 회음부를 단단한 엄지로 만지작거렸다. 절로 욕지기가 치미는데, 이세희는 위를 더듬으며 시선을 올렸다. 황제의 아들이 올곧은 자세로 황제를 보고 있었지만, 자신을 향하던 시선과 달랐다. 담담한 껍질은 같았으나, 입안이 껄끄러운 다름에 이세희는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궁금증에 자꾸만 시선이 위로 올라갔다. 황제의 아들은, 아래에서 위로 치켜드는 시선에 숨을 다독이며 주먹을 쥐었다.

    “예, 폐하.”

    황제는 바지 여밈을 풀었다. 천과 천이 부대끼는 소리에 이세희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떨었다. 근 4년간 겪은 일이었지만, 처음과 달라지지 않았다. 무섭고, 또 무서웠다. 황제는 사랑이라 불렀으나 이세희는 한 번도 사랑이라고 느껴보지 못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버티면 이 시간도 끝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기에 바빴다.

    이건, 나에게 아무 일도 아니야. 이 시간만 흐르면 돼. 그러면, 나는…. 나는….

    “흑….”

    이세희는 열상이 남아 부은 회음부에 닿는 매끈한 감촉에 이를 악 물었다. 비참하게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니까. 그리 생각하며 눈에 힘을 주는데, 마침 황제의 명에 따라 눈을 내리뜨는 태윤이 시야에 들어찼다.

    “이 아비가 잔인하다고 생각이 드느냐?”

    황제가 물었다. 이세희는 메마르고 뜨거운 구멍을 무지막지한 힘으로 뚫고 들어오는 자지에 눈을 크게 떴다. 당황한 태윤의 시선에 그새 아래에 고였다. 고인 눈은 이세희의 눈물과 닿는 순간, 바다가 되었다. 이세희는 무력하게 그 바다에 빠졌다.

    “이 아비는 길들이는 거다. 세희는 이러지 않으면 말을 안 듣거든.”

    악, 소리 나게 뚫리는 고통에 손을 뒤트는데 환관에게 붙잡혀 바닥을 긁는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태윤은 귀를 감싸는 기분 나쁜 말에 주먹을 쥐었다. 말은 나오지 않았다. 밑에서 고통을 호소하며 소리 없이 우는 이세희를 보며 도저히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말을 길들일 때도 당근과 채찍을 쓰기 나름이지. 세희도 그와 같아. 세희는 천한 핏줄 때문에 멍청해서 말을 해도 못 알아들으니까.”

    태윤은 열기에 감싸여 혀가 말라가는 기분에 휩싸였다. 대답을 해야 했는데, 황제의 잔인한 횡포에 몸을 경직시킨 이세희가 시야에 잡힐 때마다 숨통이 조여들었다. 이세희가 뒤에서 사정없이 목을 조이는 것처럼, 턱턱 막혔다.

    그러나 이제 더 볼 수 없었다. 하얀 둔부에 황제의 거대한 자지가 반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이세희가 몸을 덜덜 떨어댔다. 하아, 하아, 하고 터지는 숨소리도 금방 꺼질 듯이 아슬아슬했다. 더 하면 그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태윤은 죽어도 하고 싶지 않은 말을 입에 담았다. 그래야 그가 살 수 있다면. 태윤은 절박한 마음에 황제의 앞에 납작 엎드렸다.

    “…아바마마, 잘 알겠습니다. 소자가 아둔하여,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해주십시오. 화비 마마가….”

    “흐음, 나는 그러기 싫은데.”

    황제는 이세희의 어깨를 누르면서, 잘 들어가지 않는 자지를 힘으로 넣었다. 슬쩍, 웃던 그는 귀두를 꽉 조이는 조임에 만족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이세희의 하얀 엉덩이를 움켜잡았다. 이세희는 작열하는 고통에도 정신을 쥐어짜 앞을 보았다.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태윤의 눈이 보였다.

    용기를 내어 마주 본 심해는 봄이었다. 담담하게 일렁거리는 수면은 따스해서 온수가 아니라 미풍에 갇힌 줄 알았다. 자욱하던 어둠과 다르게 빛 알갱이를 으깬 듯 환하게 반짝이는 바다 안에 태윤이 있었다. 조금만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 속에서 그는 오로지 자신을 보며 울고 있었다. 입술을 짓이길 듯 깨물고, 괴로움에 몸을 비트는 태윤을 보며 이세희는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한마디를 뱉었다.

    안 돼.

    태윤의 눈이 커졌다. 소리 없이, 입모양으로 말한 이세희는 좁아든 길을 파고드는 황제를 버텨내며 다시 내뱉었다.

    나만 봐. 그냥.

    문을 닫을 새도 없이 태풍이 일어 이세희를 점령했다. 저 멀리서 바다가 자신에게 밀려드는 걸 보면서도, 이세희는 눈을 감지 못했다. 거의 달려드는 것처럼 다가오는 바다는 이세희의 눈꺼풀이 두려움이 무거워져 내려갈 때, 이세희를 사정없이 덮쳤다. 숨이 옥죄듯이 막혀왔다.

    “흐윽….”

    완전히 뒤를 뚫은 자지가 배를 가득 채우며 압박감이 느껴졌다. 다리가 저절로 벌어지자, 황제가 고환까지 욱여넣을 기세로 더욱 꾸욱, 꾹 넣었다. 뭉툭한 귀두가 가장 깊은 곳까지 진입할 것처럼 얇고 여린 점막을 비벼대자 이세희의 눈이 커졌다. 선이 짙고, 길게 빠진 눈가에 눈물이 점차 차올랐다.

    “으윽…. 아… 아아…! 아!”

    그리고 황제가 후우, 하고 만족스럽게 소리를 내며 자지를 빼내자 이세희가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붉은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더운 숨이 마구 쏟아졌다. 그러지 않고서는 숨을 쉴 수 없다는 것처럼 필사적이었다. 그 숨결은 묵직하게 가라앉아, 바닥에 납작 엎드린 태윤에게 넘실거리며 다가갔다. 그의 숨결은 매우 뜨거웠고, 두 손에 잡혀 비벼진 것처럼 얇고 거칠었다.

    “…아파….”

    이세희가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태윤을 보며 느리게 말했다. 아프다고, 본능적으로 속삭이는 목소리는 듣자마자 가슴에 머물렀다. 그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태윤을 괴롭혔다. 눈 둘 곳을 찾지 못해 자신을 보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이세희를 보자 태윤의 눈이 고통이 전염된 듯 일그러졌다. 참을 수 없는 모멸감, 고통에 태윤이 이를 악물고 떨기 시작하자 황제의 입에서 나른한 신음이 나왔다.

    “아버지의 애첩을 그리 보면 안 되지.”

    황제가 부드러우나, 상당히 위협적인 어조로 태윤에게 직접적으로 말했다. 태윤은 자신을 향한 뚜렷한 협박에 마른침을 삼켰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져, 숨을 고르고 있던 이세희를 줄곧 보던 시선이 서서히 위를 밟으며 올라갔다. 이세희와 다르게 평온을 유지하며 오르락내리락 하는 황제의 가슴팍이 보였다. 거기서 더 위로 올려야 했는데, 태윤은 주변에 시냇물처럼 고요히 흐르는 예리한 압박감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누가 보면 아버지의 애첩과 연인 놀음이라도 하는 줄 알았겠구나. 아무리 네가 다정하다 하더라도, 세희에게도 다정하면….”

    “아흑…!”

    “자꾸 착각하게 되잖느냐? 거기다가 넌 사내고.”

    황제는 태윤을 타박하며, 태윤과 눈빛을 주고받은 이세희에게 거침없이 벌을 주었다. 반쯤 뺀 자지를 불쑥 빼내어, 주름이 없어진 붉은 입구에 걸쳤다. 황제의 덩치에 맞게, 자지도 두껍고 매우 큰 편이라 들어올 때만큼 나갈 때도 아릿했다. 내벽 전체를 불거져 나온 귀두가 긁어버린 자리에 빠르고 선명한 열감이 남아, 괴로움에 몸을 비틀었다. 황제의 잔인한 허리 놀림에 이세희는 소리를 지를 뻔했으나, 구깃구깃 남은 자존심 하나로 버텼다. 해초처럼 풀어헤쳐진 긴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붉은 입술에 황제는 픽 웃으며 둔부에 고환이 납작해질 정도로 세고 깊게 자지를 박아 넣었다. 붓고 붉은 여린 살에 단단한 살덩이가 푹 꽂히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렸다. 이세희의 눈이 부릅떠지고, 눈물이 떨어지며 벌벌 떨리는 입술에 고통에 절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으윽…!”

    황제는 흐음, 하고 만족스러운 신음을 흘리더니 이세희의 허리를 양쪽에서 잡았다. 두툼하고, 구릿빛 손등에 힘줄이 기둥처럼 불거졌다. 황제가 억지로 힘을 줘 이세희의 허리를 조인 것이다. 허리가 두 손에 꽈악, 잡히자 이세희의 입술에서 둔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지를 물고 있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황제가 허리를 조이니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폐하, 아, 싫어….”

    이세희가 손을 들어 황제를 막으려 하자, 내관이 이세희의 손목을 잡아 눌렀다. 완전히 바닥에 눌려, 우는 것 외엔 아무것도 못 하는 이세희를 황망한 시선으로 보던 태윤은 소리가 날 정도로 땅에 머리를 박았다. 등은 식은땀으로 젖어, 바람이 불자 오한이 들 정도였다.

    자존심이 뭐가 중요할까. 황제는 자신과 이세희가 눈빛을 나누었다고 분명히 의심하고 있었다. 평상시엔 온유하게 가라앉아 있던 그의 눈이 희번덕거리며 자신을 꿰뚫을 것처럼 보았다. 오한은 착각이 아니었다. 황제는, 이세희와 윤이 지그시 눈을 마주친 걸 그 위에서 등대처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바마마,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구차해도 이승이 나았다. 저승에는 이세희가 없었다. 변함없는 사실에 태윤은 빌어먹고 사는 개가 되어도 살아야겠다는 결정을 했다. 자신의 기개를 지켜 죽음을 맞이하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죽으면 모든 게 끝났다. 나의 명예도 부스러기가 되어 허공에 흩어진다.

    살고 싶었다. 살아서 그가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이세희가 아버지의 품에 안겨 치욕에 떨며 우는 모습이 너무 강렬하게 남았기 때문일까. 잔상은 아지랑이가 되어 밤마다 피어났다. 가련하게 눈물을 뚝뚝 흘리는 미인은 날이 갈수록 짙어졌다.

    자신이 왜 그러는지도 모르는 채, 태윤은 머리를 들어 올려 과감하게 땅에 머리를 박았다. 살갗이 벗겨지며 피가 흘렀다. 이세희는 뺨에 튄 핏방울에 멍하니 눈을 위로 들어올렸다. 주변이 전부 피였다. 태윤의 반듯하던 이마가 마찰로 인해 살갗이 뭉개져 있었다. 이세희는 자신의 허리를 만지작거리는 황제의 손길을 참아내며, 눈빛을 매섭게 빛내는 태윤을 보았다. 태윤은 이제 더 이상 이세희를 보지 않았다. 그는 충직한 신하가 되어 황제만 보았다.

    “아바마마, 지금 소자에게 벌을 내려주십시오. 아바마마가 소자를 믿고 금군대장이라는 자리까지 주셨으나, 소자는 아바마마의 명을 어기고 말았습니다. 하늘처럼 받들어야 하는 명령을 소홀히 한 점에 대하여 죗값을 치르게 해주십시오.”

    진심이 깃든 어조가 황제를 향해 빠르게 퍼져갔다. 순항이었다. 황제는 이세희를 보던 태윤의 눈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았다. 먹먹하게 물기가 밴 그 눈은 얼핏 보면 사랑에 빠진 눈이었다. 너무 다정하지 않은가. 꿀물이라도 탄 것처럼, 단내가 퍼지는 눈이었으나 태윤은 사실 두루두루 다정함을 퍼주던 아이였다.

    그래서 자꾸 마음이 이상하게 기울어졌다. 태윤만은 믿게 되었다. 믿음으로 빛나는 눈은 영롱한 보석이었다. 아이는 한 번도 자신에게 타락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제 어미가 천민이라,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한계가 있는데도 순순히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아들이었다. 과연 그 착한 아들이 나의 세희를 탐할까? 이윽고 황제의 입술엔 만족스러운 미소가 짙게 깔렸다. 그는 손을 뻗어, 이세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세희가 짤막한 신음을 흘리며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을 주어, 황제의 자지를 꾹 조였다.

    “그럴 필요는 없는데, 윤아.”

    그러면서도 황제는 안심한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황제가 미처 소리가 되지 못한 웃음을 삼켰다. 이세희는 느릿하게 출입을 반복하는 자지에 헐떡였다. 황제의 것은 너무 커서, 처음엔 아픔이, 그다음 마음대로 쑤셔 넣고 움직이면 구역질이 치밀었다. 안에 든 것들이 모두 자지에 따라 위로 밀리는 느낌이 들었다. 손톱을 세워 바닥을 긁으며 고통을 참아냈다.

    “아아!”

    억지로 참아보려 하던 신음은 무력하게 터져 나왔다. 황제가 탱탱한 고환이 납작해질 정도로 세게 박아넣고, 고개를 바짝 태윤에게 갖다 대었다. 이세희는 황제의 우람한 체격에 더 눌려 엉덩이만 세운 채, 황제를 받아들였다.

    “흐윽, 흑…. 아, 너무…! 아아! 아파….”

    이세희가 흐느껴 울었다. 태윤은 덜덜 떨면서 시선을 아래로 내려뜨려다, 황제의 손에 턱이 잡혀 그를 보지 못했다. 황제가 엄지로 태윤의 입술을 느릿하게 매만지며 웃음기 밴 목소리로 말했다.

    “내 손으로 사랑하는 널 죽이게 하지 마라. 너만은 죽이고 싶지 않아.”

    “아바마마….”

    태윤의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잘못을 하고, 혼날 때면 입술을 꾹 깨물고 눈가부터 붉히던 버릇이 어릴 때와 똑같았다. 아들이 진심으로 잘못했다고 비는 걸 안 황제는 눈까지 휘어가며 웃었다. 그는 이세희의 내부에 좀 더 자지를 박아, 몸을 고정하며 무릎을 꿇고 있는 제 아들을 보았다. 황제는 아들의 뺨을 매만졌다. 이세희를 때리던 손은, 제 아들에게만 다정다감했다. 그 손길에 태윤은 긴장이 풀렸는지, 눈물을 머금었다. 그러나 흐르지는 않았다. 황제가 “울지 말거라.” 하며 태윤의 눈물을 엄지로 닦아주었다.

    “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겠지?”

    태윤이 다시 우직한 얼굴로 돌아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키운 아들은 조금만 선을 넘으면 어쩔 줄 모르는 순한 아이였다. 제 명이 없을 때까진 혼례도 치르지 않은 아인데, 제 것을 넘본다고?

    태윤은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 얼굴은 자신을 닮았으니, 이세희가 사랑할 리도 없었다. 이세희는 태윤을 싫어했다. 그 사실을 새삼 깨달은 황제는 입술 끝을 올렸다.

    “넌 날 닮았지.”

    태윤의 몸이 굳었다. 황제를 보는 태윤의 눈은 긍정으로 물들었다.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둘은 닮아 있었다. 황제는 이세희에게 자지를 박은 채로, 그 사실을 태윤에게 또박또박 일러주었다.

    “넌 날 닮았어. 내 아들이니까.”

    그 뒷말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태윤은 그의 말을 새겨들으며, 희미한 물기가 남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맞습니다, 아바마마. 소자는 아바마마의 아들이옵니다.”

    황제는 마지막으로 태윤의 뺨을 어린아이 대하듯 문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그는 그사이 정신을 잃은 이세희를 보고 혀를 찼다. 흩어진 긴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모은 그는 이세희의 붉은 뺨을 빤히 보았다. 눈물이 맺힌 검은 속눈썹은 축 처졌으나, 길게 뻗은 건 여전했다. 간신히 숨만 색색 내뱉는 이세희를 보던 황제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길고 시원스러운 눈을 움직여 태윤을 직시했다. 꿍꿍이가 음습하게 피어오르는 황제의 눈에 태윤은 쉽게 이 상황이 끝나지 않으리라 직감했다. 애초에 황제가 태윤이 보는 앞에서 이세희를 강압적으로 안은 건 단 하나의 이유였다.

    반항하지 말고, 그를 얌전히 데려오라는 것이었다. 이세희가 아프다고 울어도, 쓰러질 거 같아도…. 그가 원한다면 안겨야 하는 게 이세희였다. 태윤은 주먹을 안으로 말아 쥐며 짧은 순간 고민에 빠졌다. 다시 말을 꺼내, 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돌려볼까. 아니면 그가 하는 걸 빨리 보고 알겠다고 말할까. 무엇을 하든, 다 내키지 않았다. 도대체 뭐가 이리 마음을 껄끄럽게 하는지 몰라 답답한 찰나, 이세희가 흐릿한 신음을 흘리는 게 들렸다.

    태윤은 깜짝 놀라 눈을 위로 떴다. 황제가 내관들을 내쳤다. 내관 중 한 명이 재빠르게 움직여, 바닥에 도톰한 보료를 깔았다. 저런 게 서방에도 구비되어 있다는 사실에 태윤은 질색했다. 소소한 담소를 나누는 용도의 서방이었는데…. 태윤은 자신이 알던 아버지와 점점 다른 모습을 보이는 황제를 보며 허탈해졌다.

    황제는 두툼한 보료에 앉더니, 통나무 같은 허벅지에 이세희를 앉혔다. 아직 기절한 상태라, 이세희의 고개가 축 늘어져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분홍빛 대물은 가려지지 않았다. 장막 같은 검은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틈새가 발생하고 그 사이로 이세희의 자지가 보였다. 고통에 쪼그라들었지만 그래도 컸다. 음모가 없어, 매끈한 게 더욱 도드라지게 보였다. 얼굴만큼이나 자지도 예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색도 고운 연분홍색에, 모양도 곧게 잘 뻗었다.

    “세희는 말이다, 앞으로 느끼는 편이거든.”

    아주 은밀하고,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처럼 목소리를 낮춘 탓에 태윤은 뭔가 긴장이 되어 몸을 바짝 굳혔다. 황제는 자신의 말 하나에 움찔거리고, 소심하게 구는 윤을 보며 귀엽다는 듯 웃었다.

    “자, 보거라.”

    “…제가 어찌 화비 마마를….”

    태윤이 눈을 아예 감을 것처럼 내려뜨며 말했다. 더듬거리지 않고 매끄럽게 나왔으나, 말투도 긴장하여 난감해하는 기색이 있었다. 황제는 괜찮다, 라고 말하며 이세희의 긴 머리를 거두었다. 한쪽 뺨에 멍이 들 기세로 붉어진 이세희의 수려한 얼굴이 보였다. 의식을 잃은 입술은 반쯤 열려, 희미한 신음을 내뱉었다. 눈이 꿈틀거리지 않는 걸 보니 꽤나 고통스러웠나 보다. 안타까운 마음에 심장이 떨렸다. 이대로 아예 의식을 잃어, 아버지와 정사를 맺는 동안 감각을 느끼지 않기를 바랐다.

    “윤아.”

    그러나 황제는 물러섬이 없었다. 오만방자한 그의 행동과 발언에 태윤은 눈을 질끈 감았다. 겨우 숨을 내뱉은 태윤은 이때가 죽음보다 두려웠다. 눈을 뜨면, 이세희가 경멸을 드러내며 자신을 볼까 봐. 제발, 그가 눈을 뜨지 않기를. 제발, 제발…. 수없이 빌며 태윤은 눈에 힘을 줬다.

    시야가 밝았다. 아버지의 탄탄하고 넓은, 근육으로 뒤덮인 근육질 상체에 힘없이 안긴 이세희가 보였다. 이세희는 두 다리를 활짝 벌리고 있었고, 고개만 옆으로 치우쳐졌다. 호흡은 가늘었다. 손도 황제의 팔뚝에 걸쳐져 축 늘어졌다. 그가 의식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에 안심하는데, 황제가 여유로운 왼손으로 이세희의 대물을 잡았다. 구릿빛의 큰 손에 다 들어오지 못하는 자지를 쥐고, 황제가 능숙하게 문지르자 이세희의 입술에서 처음 듣는 달콤한 신음이 나왔다.

    “으응…. 응….”

    처음 이세희를 만났을 때와 비슷한 광경이었다. 자신은 바라보고, 아버지는 이세희를 안으며 이세희의 자지를 보여줬다. 처음과 지금이 다른 점은 이세희는 그때 서글피 흐느꼈고, 지금은 정신을 잃고 황제의 손길에 느끼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긴 검은 머리카락이 거두어지며, 나타난 붉은 입술은 타액에 축축이 젖어 도드라지게 붉었다. 그 입술이 몇 번 달싹이더니, 찌르르하고 울리는 쾌감을 이기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치아로 깨물었다.

    “읏….”

    이세희의 눈이 찌푸려졌다. 숨은 더욱 달아오르고, 황제의 손이 탁, 탁, 소리가 날 정도로 빨라지자 고개를 뒤로 젖혔다. 고개가 정면으로 돌아왔다. 검은 머리카락이 너울처럼 움직이며 이세희의 얼굴에서 떨어지고 몇 가닥만이 땀에 달라붙었다. 이세희의 눈꺼풀이 꿈틀거렸다. 입술이 달싹여지고 치아가 보일 듯, 말 듯하더니 더운 숨이 터졌다.

    “아, 아….”

    이세희의 아미가 찡그려졌다. 황제가 이세희의 흥분에 맞게, 자신도 달아올랐는지 숨을 몰아쉬며 이세희의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곳에 코를 파묻고 냄새를 빨아들이는 아버지는 완전히 짐승 같았다. 두 사람은 정사가 아니라 교미를 하고 있었다. 안광이 번들거리는 황제는 이세희를 잡아먹을 것처럼,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짙은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이세희의 목덜미를 깨무는 그를 보며 태윤은 속이 울렁거렸다. 항해를 하는 것처럼, 발바닥이 움직여 몸이 어지러웠다. 하얀 몸이 파들거리자, 태윤은 입술을 깨물고 멀미와 비슷한 것을 참아냈다.

    또다. 이세희만 보면, 이 내부에서 열기가 피어오른다. 열기는 갈수록 식는 게 아니라, 그를 만나는 횟수가 늘수록 불길처럼 거세지고 있었다. 더 웃긴 사실은 불길이 커지면 사물이 또렷하게 보이지 않아야 했는데 그를 볼 때마다 시야가 선명해지고 형체가 뚜렷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품에 안겨 먹히고 있는 이세희만 시야에 들어왔다.

    “으읏…. 응….”

    이세희는 크고 거친 손길에 정신을 잃은 채 느끼고 달뜬 신음을 뱉었고, 아버지는 이세희의 신음에 멍한 눈으로 그를 훑으며 귀두를 엄지로 비볐다. 이세희의 신음이 조르듯이 높이 올라갔다. 신음에 눅눅해진 목소리의 끝이 갈라졌다. 누가 들어도, 완전히 쾌감에 달한 사내의 목소리였다. 황제는 그 상태에서 태윤을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진짜 아팠을 땐 아프다고 말도 못하지만, 좋을 때는… 흐음…!”

    “으으읏…!”

    절정에 달했는지, 이세희는 황제의 손에서 핏 하고 사정했다. 태윤은 절벽에서 떨어진 듯한 절망감에 눈을 잘게 떨었다. 심장이 툭 하고 떨어져 발치에 채였다. 그 섬뜩함에 이 자리를 뛰쳐나가고 싶을 때쯤, 이세희가 눈물 젖은 눈을 떠 태윤을 보았다.

    눈이 허공에서 접점을 만들어 냈다. 태윤은 멍하지만, 자신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이세희를 보고 다리에 힘을 줬다. 슬쩍 눈을 돌려,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는 숨을 헐떡이며 이세희의 피부를 빨고, 맛보고 있었다. 고개는 이세희의 등과 목덜미 쪽에 숙여, 자신을 보지 못했다.

    그때를 노려 태윤은 눈을 힘없이 뜨고 있는 이세희에게 입모양으로 말했다.

    나를 봐.

    이세희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왜? 라고 물으려는 눈에서 퍼지는 대가 없는 다정함에 천천히 물음을 삼켰다.

    태윤은 흐릿하게 웃었다. 이세희는 황제의 손아귀에 바닥에 엎드리게 되었다. 두 손으로 땅을 짚은 이세희는 뒤를 파고드는 손가락에 윽, 하고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태윤의 단단한 검은 눈이 자신을 햇빛처럼 감싸고 있었다.

    내리쬐는 빛이 따사롭다. 몸이 간질간질해지는 부드러움은 한입 베어 물면, 몸에 내리녹아 퍼질 것 같았다. 혀를 내밀어 보고 싶었으나, 나온 것은 황제의 거친 삽입에 의한 신음이었다. 부은 내벽을 망설임 없이 가르고 들어온 묵직한 자지에 이세희의 상체가 흔들렸다. 고개가 아래로 숙여지고 머리카락이 흔들거렸다.

    그러나 이세희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올려 태윤을 보았다. 그러자 처음과 같은 태윤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사시사철 봄이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빨리 시선을 내리고, 바닥을 보았으나 아무것도 없던 딱딱한 바닥에도 꽃이 피었다. 이른 계절에, 겨우 피어난 꽃들이었다.

    “아…! 아흑….”

    하지만 뿌리를 움튼 꽃들은 미처 살아 보기도 전에 황제의 무참한 허리짓에 뭉개졌다. 순간 힘으로 밀고 들어오는 자지에 팔이 꺾인 이세희의, 상체가 무너졌다. 터져 나오려던 비명은 입안에서 짓이겨졌다. 마치 황제의 자지에 쓸리고, 비벼지는 여린 점막처럼. 흐으, 하고 우는 소리를 내던 이세희는 눈물 젖은 눈꺼풀을 깜박였다. 시야가 까맣다. 황제가 너무 세게 박은 탓에 잠깐 의식을 잃은 건가. 하지만 너무 아파서 혼절했다고 하기엔 자신을 받쳐주는 공간은 아늑했다. 나무판을 덧댄 것처럼 딱딱하지만, 자신을 보옥 다루듯 소중하게 감싸는 품에 눈을 감고 싶었다. 머리카락을 머뭇거리며 넌지시 만져주는 손길에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심연부터 눈물이 울컥 솟았다. 황제가 뺨을 때리고, 발로 배를 걷어찼을 때도 웬만해서 울지 않았다. 없는 자존심을 뻣뻣하게 세운다며 황제는 비아냥거렸지만, 그것만이 이세희에게 남은 재산이었다. 황제를 비롯한 황궁 사람들이 고개 숙일 줄도 모른다며 비웃었으나, 이세희는 모든 굴욕과 수치심을 참아내며 황제에게 한 번도 애원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것만이 이세희를 살아가게 하는 구심이 되었다. 황제가 분노와 굴욕으로 점철되는 걸 보면, 속에서 짜릿함이 밀려왔다. 물론, 거기에 상응하는 폭력과 강간이 돌아와 피를 흘려도 황제가 길길이 날뛰는 걸 보면 절로 웃음이 나왔다.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너에게 좋다는 말은 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제발, 이라는 애원도 궁에 끌려온 초반을 제외한 후로 내뱉은 적이 거의 없었다. 그가 좋아하는 건 전부 보여주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가진 것이 너무 없었던, 자신이 할 수 있는 하나이자 전부인 복수였다.

    황제가 뒤에서 뭐라고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너무 오래 들어서 듣기만 해도 황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주 낮고, 속삭이는 듯 나긋한 어투. 그의 성품과 어울리지 않는 상냥한 말투라 종종 비웃곤 했던 말투가, 자신을 향해 물살처럼 퍼졌다. 드문드문 꺼지고, 돌아오길 반복하던 의식은 내벽을 짓이기는 귀두에 다시 아지랑이처럼 흩어졌다. 하아, 하아, 입에서 다급한 숨이 거칠게 흘러나오자 자신을 어루만지던 이가 황제를 향해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아바마마, 자리를 옮기시지요. 화비 마마께서도 버거워하시니, 이곳은 무리인 것 같습니다.”

    고저 없이 담백하게 이어지는 말투가 사뭇 다정했다. 그러나 그 말투보다 자신을 안고 있는 이의 품이 더 따스했다. 잘 데워진 돌 같았다. 추운 겨울이 오면, 어머니가 군방에서 돌을 뜨뜻한 불에 넣어 데우고 나서 주신 적이 있었다. 가는 길에 춥지 말라면서, 꼭 손에 쥐고 가라고 하셨다. 돌에서 느껴지는 온기보다, 그 안에 은은하게 배인 어머니의 애정이 더 뜨거워 가는 길이 춥지 않았다.

    왜 그때가 생각이 나는 것일까. 이세희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온기에 눈을 깜박였다. 눈가에 진주처럼 맺혔던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려 뺨을 적셨다.

    그냥 안아줬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치부했던 일들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자, 이세희는 떨림을 멈출 수 없었다. 너무 추웠다. 극심한 추위에 몸이 떨려와 허겁지겁 온기에 집착하게 되었다.

    “아으…. 읏, 아…! 아!”

    그러나 그조차 황제에 의해 사금파리처럼 쪼개졌다. 황제는 자꾸만 자신을 피해, 아들의 품에 파고드는 이세희를 의심 어린 시선으로 보며 머리채를 손에 휘어잡아 당겼다. 고개가 엄청난 힘에 뒤로 젖혀졌다. 가물가물 감기던 이세희의 눈이 커지고, 눈물이 바람에 지는 꽃잎처럼 후드득 떨어졌다. 붉은 뺨 위로 흩어지는 투명한 눈물에 태윤은 당황하여 무릎을 땅에 대었다. 황제는 입술을 비틀며 조소하더니, “이상하지?”라는 말을 내뱉었다.

    “아흑, 아…! 아아!”

    이세희는 둔부를 장골로 뭉갤 것같이 계속 세게 들어오는 자지에 손끝을 오므렸다. 땅에 손톱이 긁히며 기기긱, 소리가 났다. 자지가 빠져나가자, 이세희는 빈 곳을 자신도 모르게 조였다. 그곳에 길고 단단한 자지가 없는 게 믿기지 않는 듯, 자지를 찾아 조이고 있었다. 이미 내벽은 자지의 오돌토돌하게 일어난 혈관까지 기억할 정도로 길들여졌다. 황제의 자지는 내벽을 강하게 찧을 듯이 박아, 무두질하듯 내벽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 자지가 익숙하게 길을 만들 듯 깊숙이 들어오자, 이세희는 숨을 멈춘 채 바들바들 떨었다. 등을 스치는 묘한 감각에 몸을 비틀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아…! 앗, 너무…!”

    그러나 황제가 고의적으로 빠르게 빼내고, 좁은 둔부 사이에 다 먹혀 들어가게 넣자 이세희가 입술을 벌리며 헐떡였다. 그의 검은 동공이 흐물흐물하게 풀린다. 고통이 다분한 흐림에 태윤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입술이 잘게 떨리더니, 아픔을 억누른 신음이 열기와 불분명하게 뒤섞여 나왔다. 이세희는 그런 식으로 뒤에서 절구를 찧듯, 자꾸만 안을 쿵쿵 박아대는 황제의 자지에 못 이겨 흐느끼며 손을 뒤로 뻗었다, 황제의 배를 어설프게 밀어내려 하자, 황제가 그 손목을 잡고 등에 고정시켰다.

    “아으… 읏…!”

    이세희의 고개가 앞으로 숙여지며, 태윤은 원치 않게 봉긋 솟아오른 하얗고 둥근 둔부로 빨려들어가는 검붉은 자지를 봐야 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난생처음이었다. 다시 보아도 놀라운 삽입이었다. 왜 이세희가 그토록 아프다고 흐느껴 우는지, 선명하게 느껴졌다. 굵직한 몽둥이에 혈관이 돋아났는데, 그게 아주 좁고 여린 구멍으로 제 집 드나들듯 푹푹 들어가고 있었다. 이세희는 자지가 들어갈 땐 상체가 낮아지고, 빠져나가면 숨을 아슬아슬하게 내쉬며 견뎌내고 있었다. 황제는 보란 듯이 이세희의 하얀 둔부가 붉어질 정도로 장골을 치대며, 깊숙한 곳까지 범했다.

    “윤아, 보거라.”

    태윤은 아무 감정이 없는 듯 가라앉은 눈으로 이세희의 둔부를 보았다. 황제의 우람한 자지가 이세희의 점막을 모질게 떼어내며 나왔다. 이세희는 내벽에 퍼지는 열감이 상체를 웅크리며 흐느꼈다. 태윤은 발끝에 치미는 그의 울음에 마른침을 삼키며, 주먹을 쥐고 일부러 황제만 보았다. 황제는 아들의 진중한 시선에 입술 끝을 비틀며 웃더니, 이세희의 둔부에서 자지를 완전히 빼내었다. 퉁, 하고 튕겨져 나온 귀두 끝에는 백탁액이 맺혀 있었다. 자지에도 막이 둘러진 것처럼 불투명하게 빛났다. 이세희의 구멍은 자지가 나가고 나서, 빈 곳이 허무하다는 듯 이완과 수축을 반복하며 실금처럼 정액을 흘려보냈다. 하아, 하아…. 세 사람의 빈 공간을 이세희의 쉬고 갈라진 신음이 매웠다.

    “세희가 아파하는 모습은 말이다, 윤아.”

    아이에게 다정하게 세상의 이치를 알려주는 어른처럼, 황제는 화사하게 웃으며 이세희의 머리채를 확 잡아 당겼다. 이세희가 아, 소리를 내며 다급하게 땅을 손바닥으로 짚었다. 이세희가 하지 말라는 듯 황제를 붉어진 눈가로 노려보자, 황제는 웃음으로 보답하더니 곧장 자지를 세게 박아 넣었다. 고환이 한 번에 납작해질 만큼 강압적으로 들어온 자지에 이세희의 눈이 질끈 감겼다. 고통에 일그러져도 수려한 얼굴은 그대로였다. 이세희는 이를 악물며 황제의 지독한 삽입을 견디었으나, 점막에 상처를 낼 작정으로 빠져나가는 자지에 신음을 터트렸다.

    “흑…! 아, 아윽…!”

    “이게 아파하는 거란다. 지금도 아파서 씹듯이 조이고 있지.”

    황제는 유쾌하게 말했다. 정작 태윤은 얼굴은 하얗게 질려갔다. 전혀 알고 싶지 않은 내용이었다. 무엇보다 이세희가 너무 고통스러워했다. 그가 신음을 삼키고, 뱉을 때마다 목울대가 느리고 불규칙적으로 움직였다. 땀에 젖은 목덜미는 열이 올라 아파 보였다. 축축하게 젖은 입술은 늘 울음으로 적셔져,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태윤은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눈물을 뚝뚝 떨구는 이세희를 보았다. 눈물에 흠뻑 적셔진 얼굴이 수척하게 아름다웠다. 처마같이 뻗은 속눈썹은 비가 온 듯 눈물이 맺혔고, 그가 눈을 찡그리거나, 깜박일 때마다 아래에선 장마가 일었다. 눈물방울이 더운 지면을 때리자, 수증기가 발생한 듯 뜨거운 열기가 서렸다. 태윤은 턱 끝까지 차오른 갈증에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이세희는 자신을 보며 눈을 떼지 못하는 태윤을 보다 자조적으로 웃었다. 수많은 감정이 뒤섞인 미소 뒤로 퍼진 건 황제의 폭력에 못 이긴 이세희의 눈물이었다. 웅덩이가 고인 지면을 때리는 물방울에 태윤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풋내가 서린 체향이 너무 가깝게 다가왔다. 황제가 고아하게 웃음을 흘리며 이세희의 내벽에 자지를 쑤셔 넣은 탓에 이세희의 얼굴이 바짝 다가온 것이다. 태윤은 순간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어루만질 뻔했다.

    “하아….”

    이세희가 눈을 감으며 입술을 벌려, 체념 어린 신음을 흘리자 태윤의 눈은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이세희는 얼굴 위를 깃털처럼 더듬으며 기어가는 애틋한 시선에,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눈을 차츰 떴다.

    “흣… 아!”

    태윤이 황제에게 범해지고 있는 자신을 보고 있었다. 때 아닌 꽃내음이 나는 눈으로. 그였다. 황제의 아들 주제에 자신을 저런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이세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다, 황제가 어느 지점을 비비듯 쿡 찌르자 이세희의 눈이 감기며 고개가 양옆으로 저어졌다.

    “싫어…. 앗!”

    싫다고 자지러지듯이 외치는 얼굴이, 아프다고 소리칠 때와 묘하게 달랐다. 눈시울이 좀 더 붉었다. 확 조이던 동공과 다르게 이세희의 동공은 나른하게 풀어져 있었다.

    그러나 왜 더 서글피 우는 거 같을까. 쉴 새 없이 맺히는 그의 투명한 눈물에 태윤은 가슴이 시려왔다.

    “이건 좋아하는 얼굴이지. 흐음, 조임이 확실히 달라졌어. 아주 부드럽게, 조이고 풀기를 반복하고 있지.”

    황제의 신음이 뒤섞인 낮은 속삭임에 이세희는 고개를 숙이려 했다. 그가 자신을 보는 게 싫었다. 근간이 없는 두려움에 이세희는 몸을 덜덜 떨었다. 막 서려던 연분홍색 자지도 시들어가기 시작했다. 황제가 머리채를 쥐고 당기고 있지 않았다면, 태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웠으리라.

    “아윽!”

    “또, 버릇없이 굴고 있구나. 세희야.”

    황제가 씹듯이 말을 내뱉더니, 이세희의 머리채를 쥐던 손을 내려 자지를 잡았다. 왼쪽 손은 이세희의 손목을 비틀어 잡아 등에 고정시켰고, 오른쪽 손은 이세희의 연한 붉은색 자지를 잡고 손바닥으로 마찰했다. 딱딱한 손바닥에 뭉근하게 비벼지자 이세희의 신음이 끝부터 연하게 달콤해졌다. 부인할 수 없는 쾌감이었다.

    “흐응, 응…! 읏, 아응, …시, 싫…! 싫어…. 아아…!”

    싫다는 소리가 마치 조르듯이 느껴졌다. 태윤은 그의 변화에 차분히 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황제만 좋아서 안달 난 관계였으니, 그가 좋아할 리 없었다. 모두 아버지가 강제로 끄집어 낸 쾌감이었다.

    “하아, 세희야… 세희야, 좋다고 해 봐. 응?”

    그러나 황제만은 이세희의 신음에 휩싸여, 이세희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귓불을 씹었다. 이제 태윤은 온데간데없는 사람처럼 대했다. 이 세상에 이세희밖에 보이지 않는 듯, 이세희를 품에 감싸 안고 교접하는 속도를 빨리했다. 이세희는 딱딱한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엉덩이만 세운 채 황제를 받아들였다. 황제는 지속된 삽입으로 느슨하게 풀린 구멍에 망설임 없이 자지를 넣었다. 출입을 반복할 때마다 안에 고였던 정액이 점막과 함께 딸려 나와 바닥에 고였다. 황제의 자지가 맞닿은 붉고 팽팽한 입구에는 하얀 정액들이 구슬처럼 맺혔다. 그러나 다시 푹, 하고 박아 넣자 정액들이 으깨지면서 안으로 말려들어갔다. 태윤은 그 모든 것을 다 보진 못했으나, 어림짐작하며 쿵쿵 튀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했다.

    착, 착, 하고 젖은 살과 살이 달라붙는 소리가 동방의 적막함을 깨트렸다.

    “아읏, 응…! 읏!”

    더불어 이세희의 갈라진 신음과,

    “하아, 건방진 새끼…!”

    그리고 황제의 탁한 중얼거림이 한데 뒤섞여 방을 적셨다. 황제가 으음, 하고 침음하며 이세희의 내부에 자지를 밀어 넣고 눈을 감았다. 사정이었는지, 이세희의 헐떡임도 잠시 잦아들었다. 후, 하고 후련하게 숨을 내뱉은 황제는 자지를 빼내었다. 기립하고 있던 내관이 다가와 부드러운 천을 내밀자, 황제는 보지도 않고 당겨 자지를 닦으며 말했다.

    “잘 보았지?”

    황제는 태윤을 웃는 낯으로 보았다. 눈은 돌멩이처럼 굳어 풀어지지 않아, 자연스럽게 응축된 긴장감이 맴돌았다. 태윤은 시선을 내려 이세희를 보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난 이세희는, 흐트러진 옷을 여미며 시선을 위로 들어올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스치듯 맞물렸다. 이세희는 여전히 물기가 서린 눈으로 태윤을 힘없이 보았다. 태윤은 한 번도 변하지 않은, 그대로의 눈으로 이세희를 보다가 눈을 내리떴다.

    태윤은 침을 느리게 삼키며 황제를 보고 입을 열었다.

    “예.”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차마 떨어지지 않는 말을 내뱉었다.

    “마마께서 만족해하시는 모습은 잘 보았습니다. 앞으로 소신이 마마를 책임지고 모셔오겠습니다.”

    가슴이 아예 몸에 떨어져, 바닥에서 산산조각 나는 고통이 치밀었다. 숨을 쉴 수 없는 고통에 태윤은 머리가 고꾸라질 것 같았다. 가슴이 온통 이세희로 가득 차, 부풀다 터져버린 것이다.

    자신을 관찰하는 듯한 이세희의 뾰족한 시선을 감수하며, 태윤은 황제를 보고 충심을 보였다. 황제는 변함이 없는 아들의 의젓함에 만족스럽게 웃고, 숨을 고르게 내쉬는 이세희를 지그시 보았다.

    태윤은 이세희가 황제를 억지로 봐야 하는 틈을 노려 그를 보았다. 정사의 기운이 완연하게 남은 옆얼굴을 보던 태윤은 절벽에서 추락하는 기분에, 입을 벌렸다. 미적지근하게 혈관을 돌던 피가 한 순간에 뜨거워졌다.

    속으로 탄성을 내뱉은 태윤은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어루만졌다. 눈을 질끈 감았다, 느릿하게 뜬 태윤은 황제와 입을 맞추는 이세희를 보며 자신이 가져서는 안 될 소원을 품었다.

    제가 당신을 마음에 담아도 될까요?

    *

    집에서 일하는 노비는 오늘도 제 주인을 위해 초에 불을 밝혔다. 불빛이 어둠을 살라먹을 것처럼 크게 자라나 있었다. 의아함에 눈을 깜박이던 태윤은 창가를 지그시 보고서 그 이유를 알아챘다. 노비는 일찌감치 안 것이다. 오늘은 구름이 연기처럼 짙고 자욱하게 깔려, 달이 길을 내지 못했다. 촛불이 아니면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어둠이었기에, 노비는 주인인 태윤이 다칠까 봐 불을 사방에 켜둔 것이었다. 그의 씀씀이가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쓸모가 없어 태윤은 입술을 슬며시 끌어당겼다.

    “고맙구나. 그만 돌아가거라.”

    애석하게도, 고맙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태윤은 노비가 돌아간 즉시, 옷을 벗고 모든 불을 끌 참이었다. 눈을 반쯤 내리깐 태윤은 바닥에 구름처럼 도톰히 깔린 빛을 보며 조소를 머금었다. 그를 마음속에 품기엔, 너무 밝은 밤이었다. 잘못하다간 빛이 자신을 비추어 이 마음을 그가 알아차릴지도 몰랐다. 아버지도, 이세희도 모르게 어둠에 웅크려야 할 감정이었다. 이건 자신 혼자 삼켜야 했다. 뱉을 수 없는, 안에 고여 자신을 썩게 할 사랑임을 알면서도. 삼키면 삼킬수록 중독이 되어, 자신을 집어삼킬 걸 뻔히 예상하면서도 입을 벌렸다.

    이세희가 다가오는 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가 더 다가오길 갈망하고 있었다. 가슴이 크게 두근거렸다. 지면을 세게 때렸다가, 올라오는 박동에 숨을 흐읍, 하고 멈추었다.

    그냥 그가 좋았다. 이유를 심연에서 샅샅이 찾아내고, 명분을 달 이유가 없었다. 아버지와 입을 맞추는 이세희를 보면 손끝이 저릿하고, 가슴이 바들바들 떨렸다. 자신도 모르게 그가 좋다, 라고 인식한 태윤은 눈을 슬며시 감았다.

    “그럼 소인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노비가 태윤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그때까지 빛이 켜켜이 쌓인 침상을 차분하게 바라보던 태윤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노비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 눈빛을 보인 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허락에 노비가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노비 스스로 뒤로 걸어가는 것이었는데, 뒤에 펼쳐진 어둠이 마치 동굴 같아 그가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태윤은 그가 완전히 어둠에 사무쳐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 그제야 손을 펼쳐 문을 닫았다.

    “아….”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태윤은 앓는 소리를 삼키며 문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어떻게 돌아왔지. 그는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서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호흡이 거센 바람에 요동치는 수면처럼 떨렸다. 그를 생각하자 온몸의 감각이 예민해졌다. 감각에 한계란 없어 보였다.

    “마마….”

    입에 담기만 해도 가슴이 아려온다. 그는 이곳에 없는데도, 있는 것처럼 이세희의 모든 게 또렷하게 서렸다. 그는 지금도 울고 있었다. 아버지의 강압적인 폭력을 꿋꿋하게 견뎌 내면서도, 고통스러워서 일그러진 그의 얼굴이 보였다. 고운 아미가 찡그려졌다. 주름이 파인 미간을 따라 내려오면, 끝이 날렵하고 쭉 뻗은 눈이 나타난다. 눈은 반쯤 감겨 있고, 속눈썹은 눈물에 엉겨 붙어 무겁게 내려앉았다. 광대와 이어지는 눈가는 너무 울어서 붉어졌다. 날렵하나 끝이 둥근 코도 붉고 입술은 연지라도 바른 것 같다. 아버지에게 머리채가 잡혀,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선명히 봐야 했던 태윤은 눈을 감았다.

    “아아….”

    그러나 눈꺼풀 속에서 그가 석양처럼 강렬하게 떠올랐다. 온통 검은 세상에 그만이 붉게 빛났다. 가슴이 뛰었다. 자신의 손끝은 이제야 움직여 그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가 웃었다. 새치름한 눈 끝을 접어서, 고맙다는 듯 자신을 보며 웃었다. 그 미소 한 번에 붉던 세상이 점멸하듯 하얗게 변했다. 처음 보는 백의 향연에 태윤은 상박을 감싸며 땅에 쓰러졌다. 이세희를 생각하자, 어딘가 구멍이 생긴 것처럼 앉을 힘마저도 다 빠져나갔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데, 닿자마자 그는 연기처럼 흩어졌다. 남은 건 그의 머리카락을 머뭇거리며 만졌을 때 느낀 온기뿐이었다. 태윤은 그 온기도 밤의 냉기에 사라질까 두려워, 주먹을 쥐며 신음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열기가 이는 곳에 손을 대었다. 가슴의 열기는 금세 아래로 퍼져 꼿꼿하게 서 있었다. 바지를 뚫을 것처럼 선 자지가 윤곽으로 느껴졌다. 비단으로 만들어진 바지임에도 자지의 열기가 느껴졌다. 태윤은 흐느낌을 억지로 내리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어느새 눈물이 맺혔는지, 눈을 뜨자 시야가 일렁거리고 뿌옇다. 태윤은 눈꺼풀을 쿡쿡 찌르는 빛을 거부하며 중얼거렸다.

    “아니야, 나는….”

    태윤은 아버지의 밑에 깔렸던 이세희를 생각하며 고개를 세게 저었다. 그가 울고 있다. 아파서, 고통스러워서. 벗어날 수 없어서. 그의 괴로움이 바람으로 전염된 것처럼 태윤의 전신을 덮쳤다. 태윤은 빛이 부챗살처럼 퍼진 바닥을 긁으며 나지막하게 외쳤다.

    “아니야!”

    태윤은 바닥에 손을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혹, 누가 자신을 볼까 두려워 시선을 더듬거려 사방을 살폈다. 이 마음을, 이세희를 향한 발정을 알아채고 손가락질을 할 것 같았다. 태윤은 초점이 반쯤 나간 시선으로 주변을 기민하게 살피고서 서둘러 불을 껐다. 낮에 그를 넘볼 수 없는 것처럼, 이리 밝으면 그를 품을 수 없다.

    나에겐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 그는 아버지의 남자였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호위에 불과하니까.

    그를 응시할 수만 있는 낮처럼 밝은 방을 어둡게 만들고 나서도 안심이 되지 않아 태윤은 눈을 스르륵 감았다. 그제야 성나게 달궈졌던 감각이 조금씩 가라앉으며, 오로지 그를 향한 마음을 자각할 수 있었다. 태윤은 바지를 거침없이 내렸다. 발기된 자지가 번들거리며 튕겨져 나왔다.

    분명히 하면 안 되는 걸 알고 있다. 넘봐서는 안 될 존재다.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큰 죄를 저질렀다.

    “하아….”

    태윤은 오른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왼손으로 자지를 잡았다. 엄지로 움푹 파인 요도를 긁자 찌릿한 감각이 전신을 두들겼다. 금세 몸이 전율하듯 부들부들 떨렸다. 본능적으로 이세희를 생각했을 뿐인데.

    “흐읏, 흣…! 읍…. 으음…!”

    눈을 질끈 감고, 태윤은 손을 불규칙적이게 움직였다. 고생을 해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이 거칠고 형편없이 자지를 지분거리는데도, 좋아서 허벅지 근육이 팽창했다. 투박한 살과 매끈하고 단단한 자지가 맞닿는 질척거리는 소리가 연신 울렸다. 태윤은 그를 생각하며 자위를 하고, 신음을 내뱉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느껴 눈을 한 번도 뜨지 못했다.

    “흑….”

    그런데 그럴수록 더 예민하게 느껴졌다. 생생하게, 그가 느껴졌다. 정말 그가 자신의 앞에 존재하고 자지를 만져주는 것 같았다. 그의 손도 이렇게 딱딱했다. 예쁘장한 얼굴과 달리, 손은 고생을 많이 해 끝이 닳고 굳은살이 틈틈이 박여, 만질 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그 손은 자신보다 커서, 자지를 잡아주면 적당할 것 같았다.

    “흐읏… 아, 읏…!”

    그가 자신을 부둥켜안고, 자지를 탁, 탁, 소리 나게끔 세게 문질러주자 좋아서 몸이 파들파들 전율했다. 눈물이 절로 아래로 떨어졌다.

    “마마, 마마, 흐윽…. 좋아요….”

    그의 나긋한 신음이 느껴졌다. 이세희가 팔을 뻗어, 자신을 안고서 품으로 당겼다. 그의 상체는 안아서 옮겼을 때도 느꼈지만 크고 널찍했다. 어깨가 넓은 편이었다. 그의 품에 중독되듯 빠져 들어갔다. 안아달라고 조급하게 애원하자,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며 자신을 안아주었다. 그가 고개를 숙여 귓가에 신음을 흘렸다. 울음이 없는 그의 신음은 미치도록 요사스러웠다. 듣는 것만으로도 등이 오싹해졌다. 온몸이 안으로 말려들어가며, 손끝이 오므려졌다.

    “아….”

    태윤은 눈물이 가득 맺힌 눈을 깜박이며, 손바닥에 흐르는 정액을 느꼈다. 사정 후 온몸을 물처럼 흠뻑 적시는 탈력감에 태윤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몽정을 겪은 후로, 홀로 하던 자위 중 최고였다. 제일 좋았다. 처음에는 죄책감에 발가락을 오므리며 반항했지만 그를 생각할수록 손짓은 빨라졌다. 멈출 수 없었다. 자각보다 질주가 먼저였다.

    “하… 미치겠군.”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손바닥의 질척거림에 태윤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를 보고 발기한 것도 모자라 자위를 하고, 사정을 했다. 심지어 그도 없는데, 앞에 그가 있다고 상상을 하면서.

    손을 툭 늘어뜨린 태윤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 그제야 숨을 내뱉었다.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이 마음은 빛에 드러나서는 안 된다. 아버지의 애첩을 뺏는 아들이 가당키나 한가. 불효도 이런 불효가 없었다. 이 마음의 끄트머리라도 들킨다면, 그 순간 목이 베일 것이다. 자신만 처형당하면 그만이지만, 이세희는? 아버지에게 또 다시 모질게 맞겠지. 뺨은 예사였고, 아버지는 그의 배에도 주먹을 내리꽂았다.

    “싫어….”

    태윤은 이를 악물었다. 이세희가 맞는 건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상상만 해도 치가 떨리고 목에 메였다. 눈이 절로 시큰해졌다. 정액이 묻지 않은 손을 들어, 눈가를 쓸어 만졌다. 눈 끝이 울 것처럼 달아올라 있었으나, 울진 않았다. 태윤은 그 와중에 다행이라 생각했다. 내일도 그를 만나야 하는데 울면 볼썽사나우니까.

    그가 자신을 볼 때 이상함을 느끼지 말아야 했다. 그렇다면 아버지도 그의 궤적을 따라와, 자신을 의심스럽게 볼 것이다. 그러니 울지도 말고, 슬퍼하지도 말자. 설렘으로 인한 떨림, 이 고통은 나만 삼키면 그만이다.

    그가 날 사랑할 리가 없을 테니.

    방심한 사이, 불쑥 들어온 무의식에 태윤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목구멍이 불씨를 쑤셔넣은 것처럼 뜨거워졌다. 메마른 왼손으로 목울대 주변을 만지던 태윤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설렘은 달콤하고 구름처럼 폭신할 줄 알았는데, 뜨겁고 제멋대로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그 상처가 낫질 않길 바라는 건, 무슨 변덕일까.

    2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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