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화용월태
황제가 유독 사랑하는 아들, 태윤이 제도에 들었다는 소식에 제도가 잠시 들썩였다. 태윤이 누구던가. 그의 어미는 비록 이름도 없는 공노비이나, 그 외모가 달도 숨을 죽이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워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자였다. 그녀는 단숨에 빈의 자리까지 올랐다. 공노비가 빈이라는 높은 품계를 받았다는 사실에 문무백관들은 놀랐으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공노비에 불과한 여자였다. 법도에 따라, 천민인 그녀가 설령 아들을 낳는다 한들 그 아들은 절대 친왕이 될 수 없었다. 법도에 정확히 명시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천민의 피가 섞인 자는 결코 친왕에 봉해질 수 없다. 단 하나의 예외적인 사항을 제외하고선 말이다. 재해, 민란, 그리고 반정으로 인해 친왕들이 모조리 죽어서 어좌를 이어받을 자가 그자밖에 없다면, 천민의 피가 섞인 황손은 황위를 이어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런 일은 없었으니 문무백관들은 그녀의 출산을 마음껏 기뻐했다. 아들을 낳든 딸을 낳든, 그녀가 낳은 자식은 황족으로 취급받되 쓸모는 없었으니. 어쩌면, 무거운 황위를 이어받지 않아도 되니 가장 편한 자리라고 할 수도 있었다. 부와 권력, 명예는 누리나 그에 따른 의무와 책임은 스스로 짊어질 필요가 없었다. 아주 적당히, 황제의 눈치를 살피며 아양을 떨다 적당한 관직만 누리면 세상 편한 핏줄이었다.
그러나 태윤은 달랐다. 그 핏줄을 타고난 그는 그 당시, 유일하게 황제의 사랑을 받던 애첩의 자식이었다. 총애하는 애첩이 덥석 아들을 낳아줬는데, 그 아들이 자신을 쏙 닮았으니 황제는 단연 그 아들을 품에 안고 금은보화를 다루듯 어여삐 여겼다더라. 얼굴은 담백하고 무게감이 있는 수묵화 같은 황제를 닮아 훤칠하게 잘생긴 태윤은 성정은 어미를 닮아 말이 적고, 다정다감한 사내였다. 너무 꼿꼿하여 부러질지언정 꺾이지 않았다. 황제를 아버지이자 군주로서 성심성의껏 섬겼다. 자신의 어미가 숙빈이어도, 천민인지라 신분 상승에 한계가 있으니 미워할 법도 한데 태윤은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미움을 모르는 사람처럼 제 어미를 사랑하고 아버지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비록, 황제가 늙어가는 애첩에게 마음이 식어 다른 첩에게 마음을 돌렸으나 그 아들의 충심과 효심이 우물처럼 깊으니, 황제의 사랑은 식지 않고 지속되었다.
태윤은 자신의 신분에 만족했다. 천한 핏줄이 섞였다는 이유로, 문관으로서는 상승될 길이 적으니 그는 자연스레 무관의 길에 들어섰다. 일찌감치 황제인 아버지를 지키겠다는 선언을 하였다. 황제는 그런 태윤을 어여삐 여겨, 자신의 충신인 대장군 소윤성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아들이 어느 정도 무술을 익히자 금군에 앉혀 두었다. 금군이 어떤 자리던가. 황제의 목숨을 호위하는 자들이었다. 그만큼 황제는 숙빈의 아들, 태윤을 아낀다는 뜻이었다. 황제는 태윤에게 누누이 말했다.
‘짐은 윤이 널 단순한 금군으로 두지 않을 것이다. 넌 금군을 다스리는 자가 되어, 이 아비를 끝까지 지켜야 하느니라.’
그 말에 태윤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아바마마의 아들로서, 그리고 폐하의 신하로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옵니다.’
황제는 흡족하게 웃으며 아들 태윤의 어깨를 두드렸다. 혼례를 치르고, 어느 정도 금군의 일에 익숙해질 때 금군대장에 앉혀주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천한 핏줄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약조였으나 태윤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제 아버지를 향한 미소에는 음습하고 어두운 의심 한 조각 없었다. 젊었을 적 자신을 동경으로 비춘 것처럼 닮은 아들을 빤히 보던 황제는 등을 돌렸다.
‘짐의 등은 너에게 맡기겠다, 윤아.’
윤은 그 후로 아비의 등을 보며 충직하게 살아갔다. 붓으로 일정하게 줄을 그은 것처럼, 딱히 다를 게 없는 일상들이 지속되었다. 그렇게 태윤이 18살이 된 해, 어머니인 숙빈이 죽었다. 태윤은 황제에게 절을 하며 고했다.
‘법도에 따라 어머니의 산소를 사 년간 지키고 오겠습니다.’
일 년은 법당에 어머니를 모시고, 삼 년은 묘에서 모시는 게 옛 방식이었다. 하지만 점점 간소하게 하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노동력, 시간 낭비라는 이야기가 돌았기 때문이다. 현 황제 태공이 태자가 되기도 전에 이미 간소한 방식이 고착화된지라 그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태윤은 역시 달랐다. 참으로 효심이 깊은 아들이 아닌가. 황제는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선황들보다도 법도를 더 칼같이 지키는 황제는 꼿꼿한 아들의 성격에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다른 황자들은 처가 있으니, 공사가 다망하여, 이러면서 빠져나갈 생각만 하는 마당에 태윤은 물러섬이 없었다. 공노비로 태어나, 가족들도 마땅히 없으니 유일한 가족인 자신이 무덤을 지켜야 하노라고 태윤은 단호히 말했다. 금군들 중에서도 군계일학으로 실력이 뛰어나 보내는 게 아까웠으나, 황제는 법도를 명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윤은 황제의 허락을 받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공노비로 태어났고, 꽃이 봄철에 잠시 핀 것처럼 황제의 사랑을 받았고, 사랑이 식어 결국 그저 그런 중년이 되어 병을 앓다 죽은 어미를 보며 태윤은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소리 없이 눈물을 뚝뚝 떨구던 태윤은 애써 울음을 삼키고서, 부관과 함께 길을 떠났다.
태윤이 어머니를 모시는 동안, 제도는 한 사내로 인해 떠들썩했다. 달도 숨을 죽이게 할 정도로 청아하고 고아하던 태윤의 어미보다 더 뛰어난 미인으로,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은 애첩이었다. 애첩의 이름은 이세희, 나이는 24세. 달은 그의 외모를 보고 구름 뒤로 숨고, 만개하던 꽃은 그 외모에 시들어 버렸다. 물고기들은 그의 외모에 부끄러워 수면 아래로 숨고, 기러기는 하늘에서 그의 외모를 보다 땅으로 떨어졌다. 지나가는 이들 중 그의 외모에 홀려 자신도 모르게 쫓아간 사내, 여인이 수두룩했다. 얼마나 아름답던지, 그의 부모조차 어릴 때부터 병에 걸렸다고 거짓말을 하고 얼굴을 가리게 했다는 말이 떠돌았다. 그 연유는 단 하나였다. 어린 이세희를 데리고 장에 나갔던 부모가 점쟁이로부터 아주 무서운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저 아이의 얼굴을 가리게! 그렇지 않으면, 저 아이의 인생은 파국을 맞을 것이야! 독을 품은 아름다움이야. 저 얼굴은 여인과 사내 모두를 홀릴 것이니, 늘 가려 그 누구의 마음도 빼앗지 못하게 해야 하네.’
황제는 저잣거리에서 물을 길어와 파는 이세희가 땀을 닦기 위해, 잠시 얼굴을 가린 천을 내린 모습을 보고 눈을 뗄 수 없었다고 한다. 조금은 우습지만, 황제의 입을 통해 들은 설화 같은 이야기였다. 애첩인 이세희가 마지못해 자리에 있으면, 황제가 그의 몸을 주물럭거리며 늘 입에 담는 얘기였기 때문이었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대신들은 황제의 손아귀에서 희롱 당하는 이세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절세미인이었다. 나라를 망하게 해도 이해가 되는 아름다운 사내이니, 황제가 그 자리에서 그를 취했어도 모두가 이해한 것이다. 강제로 그 자리에 끌어 앉혀져, 황제의 품에 안겨 술을 입으로 먹여주던 이세희만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얼굴을 찡그리고 고개를 돌리는 이세희의 시선 한 번에 대신들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황제는 그들의 탐욕, 부러움을 은근히 즐기며 이세희의 허벅지나 엉덩이를 마음껏 매만졌다. 참다못한 이세희가 술을 황제의 얼굴을 퍼부어도 황제는 흥분을 참지 못하고, 강제로 그를 깔아뭉갰다. 제도의 사내들과 비교해도 그리 작지 않은 체격의 이세희가 거인이나 다름없는 황제에게 깔려 바르작거렸다. 대신들 앞에서 겁탈당할 위기에 처한 이세희가 황제의 뺨을 후려쳤으나, 황제는 반대로 이세희의 목을 조르며 그를 겁탈했다더라.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겁탈당한 이세희는 금군의 칼을 빼들고 자결을 시도했다. 한 떨기 꽃 같은 목에 자상을 입었으나, 다행히 황제가 빨리 대처한 덕분에 이세희는 살아났다.
그러나 대신 술과 산해진미가 곁들여진 그 사소한 자리에 있던 금군들은 모조리 처형을 당했다. 심지어 금군대장은 사지가 찢겨 죽는 거열형을 당했는데, 그 이유가 이세희가 강간당하는 걸 보다가 발기했다는 이유였다. 이세희는 ‘네놈이나 저놈이나 뭐가 다르냐. 발정기가 온 짐승 같으니!’라고 황제에게 침을 내뱉으며 왜 사람을 죽이느냐고 노발대발했다. 황제는 이세희의 목을 조르며 고함을 내질렀다고.
‘나 말고 다른 사내를 홀려? 이 몸으로? 이 얼굴로? 건방진 놈! 예쁘다, 예쁘다, 해줬다니 아주 머리끝까지 기어올라 짐을 능멸하려고!’
다행히 이세희는 다시 살아났다. 황제는 이세희를 사 년간 감금해, 잔인한 방법으로 길들인 사내였다. 그리고 그만큼 사랑했다. 이세희를 그까짓 실수로 죽일 리 없었다. 살아난 이세희는 또 다시 황제의 아래에 깔렸다. 애첩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세희는 황제의 아래에서 서글퍼 눈물을 흘렸다. 가진 건 날아가는 새도 붙잡는 외모밖에 없었으니,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우는 게 고작이었다. 죽고 싶어도, 황제가 가족의 목숨으로 협박을 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던 중, 금군대장의 자리가 비었다. 황제는 애첩을 노리는 사내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에 머리가 아파왔다. 나이 불혹에 얻은 어리고 예쁜 애첩 때문에 고생이라며 대신들에게 고심을 털어놓았다. 금군대장이라는 막중한 자리에 누구를 세울 것인가. 고자놈을 세울 것인가? 한참을 고민하던 찰나, 감언이설을 내뱉는 한 명이 태윤을 언급했다.
‘꼿꼿하기가 대나무 같으며, 그 충심이 깊고 효심이 바다처럼 넓으니 그를 금군대장에 세우십시오. 그는 화비 마마를 어머니처럼 섬길 겁니다.’
그 말에 황제는 아직 친모상을 치르느라 멀리 있던 태윤을 부르게 된 것이다. 황제의 명을 하늘처럼 받드는 태윤은 당장 달려왔고, 궁에 입성하기 전 부관의 입을 통해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
부관은 서릿발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태윤의 시선에 몸을 움찔거렸다. 의자에 반듯한 자세로 앉아있던 태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부관들을 돌아보았다. 시선이 하나하나, 느리고 분명하게 닿자 부관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나 부정은 없다. 황제의 은밀한 침전까지 지키던 금군들이 모든 것을 보았을 것이고, 들었을 것이다. 하나같이 두려워하면서도 그 말이 다 헛소리였다는 말이 없자, 태윤은 천천히 팔짱을 꼈다. 두툼한 팔뚝의 근육이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폐하께서 여인에게 관심이 많으셔도, 사내에게는….”
“요망하나 몹시 아름다운 화비를 보시면, 저희들의 말을 이해하실 겁니다.”
부관이 입을 열고 제법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망한 화비. 부관들의 그 단어에서 불쾌한 빛을 드러냈다. 표정 변화가 없던 태윤의 잘생긴 얼굴에 미미한 균열이 생겨났다. 믿을 수 없다고 부인하면서도, 귀에 닿던 화비를 향한 독한 말에 태윤은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제도까지 오는 내내, 황제를 향한 모욕적인 말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 여우같은 화비 한 번 보고 싶구만. 얼마나 예쁘면 그 황제가 다리 사이에 폭 빠져 나올 생각을 안 하겠어?’
‘황제가 혹 광증에 걸린 게 아닐까? 아무리 예뻐도 그렇지, 같은 자지 달린 사내놈이 뭐가 좋다고!’
제도를 오는 길에 들었던 모욕들은 그 자리에서 처리했다. 황실모욕죄였다. 그들은 태윤이 내미는 패에 아무 말도 못 하고 납작 엎드렸다. 황제를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죽어 마땅했다. 어머니의 상을 다 치르지도 못하고 오는 길이라, 차마 죽이지는 못했고 관에 넘기고 돌아왔다.
그런데 들은 말이 이런 것들이라니. 사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도대체 제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태윤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황제는 법도에 따라 일을 잘하는 군주였다. 그러나 자신의 처첩들에겐 그리 다정한 남자는 아니었다. 태윤은 황궁에 살면서,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해 시들어 버린 여인들을 너무 잘 알았다.
자신의 어미가 그리 죽었으니까. 황제는 어미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았다. 그는 그 순간의 아름다움에 취해, 잠시만 예뻐만 해줄 뿐 마음이 식으면 떠났다. 사랑은 주지 않은 관계였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수많은 여인들이 그리 죽어갔다.
아버지의 애정은 한 여인에게 속하지 않았다. 매우 빠르게 불탔고, 잿더미도 남기지 않고 식었다. 기간은 일 년을 채 넘기지 못했다. 자신의 어미가 그나마 길게 사랑을 받았는데, 그 기간이 딱 이 년 정도였고 그 후로는 일 년, 혹은 몇 달 정도였다.
그런데 근 사 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 남자를 애첩으로, 그것도 화비로 책봉하고 어여삐 여긴다는 게 실로 놀라울 뿐이었다. 사람들 보는 데서 잠자리를 하는 건 법도라 하지만, 사석에 매일같이 앉혀 몸을 주물럭거리다니. 거기에 무고한 사람들까지 정사를 맺는 걸 보았다는 이유로 죽였다니.
애첩을 어여삐 여기고 정사를 하는 건 자신과 상관없었다. 그러나 출중한 능력을 가진 이들을 애첩 때문에 죽이는 건 황제답지 않았고, 법도와 이치에 맞지도 않는 일이었다. 명분 없는 개죽음이었다. 개죽음이 차근차근 쌓이면, 황제에 대한 오명만이 늘어난다. 지금도 저잣거리에서 화비와 황제의 일에 대해 은밀하게 말을 나누고 즐기지 않는가.
태윤은 진중한 눈으로 부관들을 보다, 몸을 일으켰다.
“내 눈으로 봐야겠다.”
어차피 황제는 제도에 오자마자 바로 황궁으로 오라 했다. 오는 길에 들은 말이 자꾸 가슴에 남아 부관들을 불러 자신이 없던 동안의 이야기를 함축해서 들었으니, 이제 가야 할 시간이었다.
*
신분 때문에 가마에 올라타지 못하고 태은문을 통해 들어온 태윤은 오로지 내정까지 걸어갔다. 황제의 아들이기에 양해를 얻어 가마를 탈 수 있었고, 원리원칙주의자인 황제도 아들이나 딸에겐 가마를 허용해주곤 했다. 그러나 태윤은 황자라는 이유로 특권을 누리고 싶지 않아 한 번도 가마를 달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신체가 멀쩡하니 상관없었다. 그 먼 거리를, 내관과 금군들에게 둘러싸여 내정까지 들어섰다. 그 순간, 가장 먼저 우는 목소리가 귀를 훅 찔렀다.
“아, 아…. 흐읍, 읍…!”
무언가를 억지로 삼키는 듯, 쿨럭이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울음이 채 이어지지 못했다. 드문드문 이어지는 찔걱거리는 소리에 태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물기가 많은 곳에 마찰되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야릇했다. 길을 걷다 말고, 태윤이 뒤를 돌아보았다. 너른 소매에 두 손을 넣고 허리를 숙이던 내관이 너무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태윤이 스물이 넘도록 혼례도 치르지 못했다. 그리고 그동안은 황제가 정사를 맺을 때 태윤을 들이지 않아 그는 정사를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그저 아는 거라곤, 이 소리가 무척 야하게 젖어있다는 것이다. 상쾌한 바람이 이는 계절인데, 그 소리가 공중에 나부끼자 금세 여름처럼 습윤해졌다. 이성을 자극하는 신음소리에 태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혹, 정사를 하고 계신 건가?”
신음소리가 여인과 다르게 낮다. 거슬리지 않게 말끔하고 청아한 저음이었다. 듣는 이로 하여금, 가져서는 안 될 음심을 가지게 하는 목소리에 태윤은 고개를 그쪽으로 돌리지 않았다. 만약 아버지가 애첩과 정사를 하고 있다면, 자신이 자리를 비켜줘야 했다.
“정사를 하고 계신 거라면, 내가 외정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전해 드리게.”
“아, 들어가셔도 됩니다.”
내관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폐하께선 화비 마마와 계십니다. 들어와도 된다고 윤허하셨으니, 염려 마십시오.”
태윤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황제라지만, 아버지였다. 어머니를 마음에서 보내드리지 못했는데 아버지가 다른 애첩과 몸을 섞는 건 그다지 보고 싶은 광경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관이 흔들림 없이 자신을 보는 시선에서 황제의 의중을 알아냈다. 황제는, 태윤이 애첩을 보고 흔들리는지 안 흔들리는지 알고 싶은 것이었다. 아들이지만 제 애첩을 탐한다면 그자처럼 찢어 죽이리라. 그 사실이 몸을 관통하자 태윤은 등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도대체 그 화비가 얼마나 예쁘기에, 그토록 사랑하던 나에게도 이러시는 건가?
“안으로 드십시오.”
내관이 힘을 주어 말했다. 황제의 말을 전하는 내관의 말은, 황제의 뜻이었다. 태윤은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내쉬다가 등을 돌렸다.
그래 봤자 사내지. 태윤은 심드렁하게 투덜거리며 내정에 가장 큰 화요궁에 들어섰다. 화비에게 하사해준 새로운 궁답게 눈이 따가울 정도로 화려하고 우아했다. 화비를 위해 만들어준 것으로 보이는 화원을 통해 걸어가자, 신음이 갈수록 짙어졌다.
“으응, 읍…. 흐읏…!”
찔걱이는 소리가 더욱 빨라진다. 더불어 황제의 탁한 신음도. 태윤은 진심으로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버지의 신음소리는 듣기에 민망했다. 애써 얼굴을 담담하게 유지하며, 보폭을 일정하게 유지하며 걷던 태윤은 시야에 들어오는 정사 장면에 눈을 크게 떴다.
“왔구나, 내 아들.”
황제가 화려한 의자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몸이 예쁘고 좋은 사내가 손이 뒤로 묶이고 자신을 등진 채 황제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무엇을 하는지, 무지한 태윤이라도 알 수 있었다. 축축하고 좁은 곳을 마찰하는 소리, 억지로 무언가를 삼키는 적나라한 신음.
“흐으으읍!”
아비가 쾌락에 젖은 멍한 눈으로 태윤을 보며 거대한 자지를 화비의 입에 쑤셔넣고 있었다. 화비의 긴 머리채가 황제의 거대한 손에 휘어 감겨 있어, 화비는 우는 소리를 내며 강제로 성기를 받아들였다. 그래도 다 삼키지는 못 했다.
“하아, 세희야. 삼켜야지.”
“우읍, 읍…. 하아, 하아!”
목젖을 꾸욱 누르며 들어오는 자지를 참지 못해, 화비가 결국 고개를 돌렸다. 머리채가 잡혀 고개가 반 정도 돌아갔는데, 그 틈에 보이는 화려한 외모에 태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괴로움에 미간이 찌푸려지고, 눈을 세게 감고 있었는데도 그 외모가 출중했다. 날렵하게 쭉 뻗은 콧날과 붉게 달아오른 뺨, 몽글몽글한 타액을 뱉어내고 있는 입술. 모든 것이 일일이 그린 것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세상에서 처음 보는 아름다움에 태윤은 가슴이 아팠다. 도망가고 싶은 아름다움에 굳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황제가 파정한 정액을 보란 듯이 화원에 뱉어낸 화비는 눈물이 맺힌 눈을 치켜뜨고 태윤을 째려보았다. 푸릇한 살의와 독기가 서린 외모에 태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황제가 머리채를 잡고 당기는 바람에 그대로 끌려갔다. 황제는 감히 정액을 뱉어낸 화비의 뺨을 거침없이 후려쳤다. 짜악, 하는 소리가 얼마나 따갑던지, 태윤은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아바마마, 라고 부를 새도 없이 황제가 화비의 머리채를 쥐고 뒤흔들었다. 화비가 앓는 소리를 냈다.
“언제까지 그딴 식으로 굴 거냐?”
“못 삼키겠습니다.”
화비가 우는 목소리로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묶인 손이 황제를 두들겨 패고 싶은지 꿈틀거렸다. 꽤 오래 묶여 있었는지, 등 뒤에 단단히 고정된 손목은 새빨갛다 못해 피가 나올 것 같았다.
“못 삼키는데, 어쩌라는 말입니까?”
화비는 황제에게 얻어맞고서도 대들었다. 황제는 화비의 머리채를 강제로 잡아다가, 다기가 올라간 자그마한 상에 엎드리게 했다. 너른 어깨의 끝이 상에 거칠게 눌렀다. 태윤은 옴짝달싹도 못 하고,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화비를 봐야 했다. 황제의 자지를 억지로 빠느라 붉어진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여 태윤에게 말했다.
‘발정 난 아비의 자식이군.’
후, 하고 웃던 화비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지더니, 눈물이 하염없이 맺혔다. 아비가 뒤에서 화비의 머리채를 잡고 삽입을 하고 있었다. 화비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뒤로 들어오는 황제를 받으며, 태윤을 꼼짝없이 마주 봐야 했다.
“아흑….”
화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눈물이 툭, 툭 떨어졌다. 긴 속눈썹이 팔락거리더니, 태윤의 마음에 착지해 날갯짓을 시작했다. 하얀 얼굴에 괴로움이 가득 찼다.
“하아, 정말…. 세희야, 네 몸은…. 하아…!”
삽입만 했을 뿐인데 황제는 욕정에 달아오른 얼굴로 신음을 뱉었다. 화비는 황제의 넓고 탄탄한 상체에 가려져 울음을 억지로 삼켰다. 우는 소리가 황제를 자극하는 걸 알기에, 울음을 애써 꾹꾹 누르며 태윤만 죽어라 보았다. 그 어떤 사람보다 뛰어나게 아름다운 얼굴이 눈물에 젖어 고통을 호소한다.
정말, 예뻐….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태윤은, 화비의 시선에 사로잡혀 그만을 보았다. 화비도 눈을 깜박거리면서 태윤을 도피처로 삼았다.
“아윽! 아! 아응…!”
황제가 뿌리까지 다 처박더니, 화비의 허리를 꽈악 잡고 뒤로 당기며 삽입을 거칠게 이었다. 여린 점막이 황제의 몽둥이 같은 성기에 푹, 푹 비벼지는 소리에 태윤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태윤은 화비의 물기 어린 눈이 닿을 때마다, 가슴이 쿵, 쿵, 뛰어 아팠다. 세상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아니, 쪼개지고 있었다. 화비를 보지 못했던 과거와 화비를 마주한 지금으로. 완벽하게 분열된 세계의 중심에 태윤은 덩그러니 서서, 황제의 거친 삽입에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화비를 응시했다. 푸욱, 하고 여린 점막을 자지가 가르며 꽂히는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태윤이 얼굴을 붉히자 황제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터트렸다. 화비는 황제와 상 사이에 완전히 짓눌려, 숨만 간신히 내쉬었다. 황제가 자지를 느릿하고, 얕게 움직이자 화비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지며 아픔이 맺힌 신음이 나왔다.
“흐윽….”
눈물이 엉겨 붙은 속눈썹이 무겁게 처졌다. 화비는 탱탱한 고환이 납작해질 만큼 깊게 삽입된 황제의 자지에 입술을 꽉 깨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배에 자지가 꽉 찬 느낌에 구역질이 일었다. 그래도 입술에 피가 날 정도로 깨물고, 신음을 안으로 욱여넣었다. 화비가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고집 아닌 고집을 부리는 게 보였다. 황제는 흐음, 하고 만족스러운 신음을 흘리더니 그대로 자지를 빼내었다. 집요하게 달라붙어, 혈관까지 빨아들이려 하던 점막이 떨어졌다. 미열이 이는 것처럼 내벽이 뜨거웠다.
“아….”
화비의 상체가 덜덜 떨렸다. 황제의 자지 모양대로 벌어진, 빨갛게 부은 입구가 힘겹게 오므라질 때를 노려 황제가 꺼덕이는 자지로 세게 삽입했다. 빠르고, 정확하게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자 화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상체가 위로 치솟고, 장골이 상에 닿아 아팠다. 내벽의 주름이 모조리 귀두에 쓸려 마모될 것 같았다. 몸이 굳고, 힘이 바짝 들어가 황제의 자지를 꾸욱 조였다.
“하아…! 앗!”
울음을 삼키려 해도, 황제가 푹, 푸욱, 하고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고 집요하게 삽입하자 끝내 소리를 내었다. 화비의 신음에 눈물이 스며들어 길게 이어지자 태윤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화비에게 완전히 시선을 빼앗긴 듯, 거의 정신을 놓고 있었다.
아래로 처져 순한 눈매가 유독 슬퍼 보였다. 그는 황제와 닮은 눈으로, 전혀 다른 감정을 보이며 미간을 구기고 있었다. 그게 이상해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아흑, 아, 아앗…! 아!”
화비의 눈이 힘겹게 뜨여 태윤을 보았다. 시선이 올곧게 맺히지 못했다. 황제의 손에 얻어맞아 붉어진 뺨 위로 굵고 투명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고개가 숙여지려 하자, 황제가 반대쪽 손으로 잡고 있던 머리채를 더 세게 당겨 고개를 들게 했다. 화비의 목에 핏대가 섰다.
“아, 아아! 아파…! 흐읏…!”
머리채가 뒤로 당겨지고, 긴 머리카락이 황제의 손에 잡힌 채라 사슴같이 단아한 목이 선명하게 보였다. 태윤은 목젖 아래에 깊게 새겨진 자상에 가슴이 쿵, 하고 떨어졌다. 온통 화비로 짙게 물들었던 세상이 어지럽게 일그러졌다. 태윤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뒤로 물러났다.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 무렵, 눅눅하게 젖은 황제의 시선이 정확하게 태윤을 꿰뚫었다. 화비에게 뺏겼던 시선은 자연스레 침전했다.
황제의 애첩은 황제의 소유였다.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존재. 태윤은 자신의 무례를 뒤늦게 알아챘다.
“아, 아바마마, 어찌….”
울고 있는 건 화비인데, 목소리가 엉망이 된 건 태윤이었다. 태윤은 고혹적으로 웃는 황제의 얼굴에 볼을 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주먹을 꽉 쥐고, 살짝 떨었다. 감히 황제를 보고도, 황제의 애첩에게 시선이 뺏겨 이상한 생각만 늘어놓았다. 가슴까지 두근거리다니. 황제가 알았다면, 전 금군대장처럼 거열형에 처했으리라. 오싹한 생각에 머리가 차갑게 식어갈 무렵, 황제가 짤막한 웃음을 흘렸다. 얼굴과 목덜미까지, 뜨끈뜨끈한 열이 오를 만큼 얼굴을 붉힌 아들을 귀여워하는 웃음이었다.
“아바마마, 소, 소자가 아바마마에게….”
“쉿, 윤아. 고개를 들거라.”
황제가 봄바람처럼 살랑거리는 목소리로 태윤을 불렀다. 태윤은 머뭇거렸으나,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황제의 명령은 절대 거역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제발 그러지 말라는 듯 잘게 떨리는 눈으로 황제를 보았다. 가슴속에 작은 북이 있는 것처럼 쉴 새 없이 가슴이 둥, 둥 뛰었다.
“하읏….”
화비의 축축한 신음이 귀에 걸리자, 태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했다. 울음소리가 너무 야릇했다. 황제는 박힌 자지를 바짝 조이는 점막에 신음을 흘리며, 의자에 풀썩 앉았다. 당연히 화비의 몸도 따라 움직여 황제의 돌덩이 같은 허벅지에 앉혀졌다. 아래에서 위로, 점막을 귀두로 긁으며 들어오는 자지에 화비의 고개가 아래로 처졌다. 아프다는 소리는 일절 내지 못하고, 버티는 게 전부였다. 그의 몸이 고통에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언제쯤이면 이 고통에 무뎌질까. 결합된 부위는 화끈하고, 아릿했으며 그 열은 칼처럼 뾰족하게 달궈져 몸을 둘로 나눌 것 같았다. 언제쯤이면…. 화비는 자신의 상체를 길고 두툼한 팔로 안는 황제의 품에서 눈물을 소리 없이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평균보다 체격이 좋은 화비를 뒤에서 편하게 감싸고 야들야들한 허벅지를 손으로 매만지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내 아이에게 보여줘. 그래야 알 수 있으니까.”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 시야가 안개처럼 탁해져 태윤이 보이지 않았다. 화비는 이제 자신을 누가 보고 있는지도 감을 잡을 수 없어, 입술을 느리게 달싹였다.
“폐하의 아들입니다…. 아들에게까지 그러고 싶으십니까?”
그 순간, “아바마마.” 하고 다시금 들리는 조마조마한 목소리에 화비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뿌옇게 변한 시야에 우두커니 서 있는 사내가 보였다. 황제의 젊은 시절을 과거에서 가져온 듯 반듯하게 잘생긴 사내가 얼굴을 붉힌 채 서 있었다. 시선을 어디에 둘지도 모르고, 당황하여 주먹을 꽉 쥐고 있다. 그제야 자신을 누가 보는지 재차 깨달은 화비는 고개를 숙이며 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손을 움직이고 싶어도 두 손목이 등 뒤에 고정되어 단단히 묶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황제는 어서 보여주라고 채근했다. 화비는 울음을 터트리며 다리를 오므렸다.
“아, 싫어….”
화비가 고개를 저었다. 수치스러움에 젖어, 몸을 덜덜 떠는 모습에 태윤은 가슴이 찢어지게 아프다는 걸 느꼈다. 저 자는 지금 아비에게 유린당하고 있었다. 싫다고, 크게 소리 내지도 못하는 것이 너무 가여웠다.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자신이 아비를 막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화비를 뚫어져라 보는 궁인들의 시선을 거둬줄 수도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화비가 부끄러워하지 않는가. 다리를 필사적으로 오므리고, 고개까지 숙여 시선을 회피하려는 화비를 물끄러미 보던 태윤이 입을 열었다.
“폐하, 아직 소신은 금군대장으로 부름 받지 못한 몸이옵니다. 또한 모친상으로 오래 현에 있었던 몸이니…. 금군대장직을 하사 받은 후에….”
어떻게든 핑계를 대어 화비가 부끄럽지 않게끔 물러나려던 태윤은 황제의 서늘한 눈웃음에 주먹을 느슨하게 쥐었다. 황제는 태윤이 물러나길 원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태윤의 훤칠한 얼굴에 닿았다가, 아래로 뚝 떨어졌다. 그의 시선이 아직까지 얌전한 아랫도리에 꽂히더니 이내 활짝 웃었다.
“윤아, 이 아비가 널 부른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느냐?”
황제가 아들을 향한 사랑을 듬뿍 담아 물었다. 태윤은 답을 알고 있었으나, 황제의 허벅지에 앉혀져 잘게 떠는 아름다운 애첩을 보자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그 말을 들으면 화비의 마음에 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모른다고 잡아떼기엔, 황제의 주변에 감도는 날카로운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고뇌하던 찰나 황제가 두 손으로 화비의 허벅지를 잡아 냉큼 벌렸다.
“흐윽, 싫어…!”
화비가 힘을 주어 다리를 오므리려 하자, 황제가 손으로 허벅지를 눌렀다. 하지만 화비는 아무리 용을 써도 힘으로는 이길 자가 없는 황제를 이길 수 없었다. 허벅지의 고운 살결에 붉은 자국이 새겨지며 다리가 활짝 벌어졌다. 체격이 맞게, 대물인 화비의 자지가 보였다. 태윤은 생각지도 않은 일에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고, 몸이 굳었다.
“그대를 지켜주고 싶어서 그런 거야. 짐은 같은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
황제의 나른한 입술이 화비의 귓가에서 나붓하게 움직였다. 화비는 뭉개진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황제는 쾌감을 느끼지 못해 축 늘어진 화비의 대물을 쥐고 슥슥 문질렀다. 그리고 화비가 적응이 될 때까지 박아만 두었던 자지를 슬슬 움직이기 시작해, 안을 찔러댔다. 태윤은 화비의 납작하고 탄탄한 배에 자지의 윤곽이 드러난 것을 보고 충격에 휩싸였다.
저게 가능한 일인가? 하얀 엉덩이 사이로, 웬만한 몽둥이보다 크고 두꺼운 것이 꽂히는 것도 깜짝 놀랐는데, 배까지…. 황제는 화비의 목덜미를 잘근잘근 물며 아들을 보았다. 태윤은 어떤 소리도, 반응도 보이지 못하며 멍하니 교접을 하는 둘을 보았다.
황제는 화비를 보고도 잠잠한 태윤의 아랫도리에 만족스럽게 웃더니, 화비의 자지를 마음껏 주무르며 허리를 세게 움직였다. 푹, 푹, 하는 소리가 이젠 반복적으로 빠르게 들렸다. 태윤의 귀가 붉어졌다.
“이 아비가 정말로, 널 왜 불렀는지 모르겠느냐? 응?”
황제의 검붉은 자지가 하얗고 탱글한 엉덩이로 빨려 들어가는 광경에 태윤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바닥에 엎드리며, 말했다.
“폐하, 소신 태윤, 화비 마마에게 음심을 품고 있지 않사옵니다. 이것은 소신의 몸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믿어주십시오.”
황제는 하하, 하고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더니 울음을 떨구는 화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앞으로 짐의 아들이 그대를 지킬 것이다. 윤은 다른 이와 다르다. 절대, 아비의 것을 보며 탐하지 않지.”
아름다운 목선을 타고 흐르는 축축한 목소리에 화비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떨면서 중얼거렸다.
“…이제 그만하십시오….”
그리고 화비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요사스러운 눈을 돌리자, 그 시선에 홀린 황제가 안에 성기를 쿡 박으며 신음을 흘렸다. 화비의 자지도 적당히 반쯤 발기해 손에 쥐고 만지는 맛이 있었다. 연한 분홍빛이던 자지가 쾌감이 일자 붉게 변해가는 것도 어여뻤다. 황제는 “그대는 정말 다 예뻐.”라고 속삭이며 요도구를 엄지로 비볐다. 화비의 신음이 달게, 높게 변해갔다.
“그만, 하읏…!”
아래를 조이면서 애원하자 황제가 화비의 손목을 풀었다. 태윤은 그때까지도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화비의 신음이 어여쁘게 물들어 공중에 배회하니, 자꾸만 그를 보게 될 거 같아 차라리 엎드리고 있는 게 편했다. 가슴의 동요가 머리까지 치달았다. 머리가 어지러워, 호흡까지 혼탁하게 변했다.
“폐하, 아, 아아! 앗!”
그때,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황제의 거친 신음이 화비의 울먹거리는 신음을 뒤덮었다.
“윤아, 하아, 세희가 부끄러워하니, 이만 가 보거라.”
“명을 받듭니다, 폐하.”
태윤이 고개를 들자, 황제의 등이 보였다. 태산처럼 넓은 어깨에는 화비의 상앗빛 다리가 걸쳐져 있었다. 화비는 두 손이 풀어졌다. 복수심에 불타는 손은 무엄하게도 황제의 머리채를 세게 잡는데도, 황제는 그 손길조차 좋은지 신음을 흘리며 화비에게 자지를 박고 있었다. 황제의 몸에 가려져 보이는 것이라곤 화비의 새하얀 발바닥, 다리, 그리고 자국이 깊게 남은 손목뿐인데도 그가 째려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하아…! 아!”
황제의 더운 신음이 와락 터졌다. 화비는 인정사정없이, 느끼는 부위만 쿡쿡 찔러대는 자지에 헐떡이며 그를 노려보았다.
“아응, 아…!”
황제의 머리채를 잡고 당기던 화비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황제가 둔탁한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숙여 화비에게 입을 맞추었다.
“으음….”
화비의 길게 쭉 뻗은 하얀 손가락이 오므라들었다. 발가락도 마찬가지였다. 태윤은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르게 피했다.
*
가슴이 연신 쿵쾅거려 숨을 제대로 쉬는지, 머리는 이성을 차리는지 알아채지도 못했다. 그저 빨리 화요궁을 벗어나 냉수에 머리를 처박고 싶었다.
화비의 얼굴이 떠나지 않았다. 웃는 모습은 전혀 없었다. 머릿속의 화비는 흐느끼고, 눈을 감고 울음을 터트리고, 고개를 젓는 게 대부분이었다. 가슴을 아찔하게 하는 처연한 모습이 머리에 각인이라도 됐는지, 도저히 잊히지 않아 가슴이 답답했다.
잊어야 했다. 그 모습을 감히 담아서는 안 되었다. 아버지의 남자였다.
답답한 마음에, 어서 내정을 완전히 벗어나고 싶은데 황제로부터 다급히 명이 내려왔다. 오늘부터 금군대장이 되었으니 화비를 호위하라는 명이었다. 결국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태윤은 황제가 나올 때까지 화원 입구에서 기다렸다. 그래도 해가 기울어지면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니 얼굴에 올랐던 열이 식어갔다. 두 뺨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원래대로 돌아오길 바랐다.
이곳은 화비의 신음이 들리지 않아 다행이다. 태윤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정면을 응시했다. 저 멀리 우뚝 솟은 태얼궁이 보였다. 황제의 궁이었다. 황제는 내정 안까지 드나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후궁들이 기거하는 내정에서 원하는 첩을 데려오도록 시켰다.
그런데 화비는 달랐다. 화비만은, 더없이 소중하다는 듯 직접 찾아와 화원에서 정사를 맺었다. 물론 화비는 그리 달가워하는 거 같지 않았다. 절망과 분노, 증오가 선연하게 불타는 눈과 목에 일직선으로 그어진 자상이 그의 심정을 대변했다.
그는 근 사 년 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던 걸까. 부관들은 그를 요망하다고 욕했다. 궁 밖의 백성들은 화비에 대해 황제를 구워삶은 희대의 애첩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부관들이나 백성들은 황제가 곧잘 즐기는, 잔 없이 술 마시는 행위를 따라 하는 것을 즐겼다. 바로 화비를 품에 안고, 화비의 입안에 술을 머금게 한 후 그것을 입으로 다시 받아먹는 행위였다. 태윤이 그 말을 들었을 땐, 화비가 정말로 그 얼굴과 몸으로 아버지를 유혹한 줄 알았다.
하지만 화원에서 만난 그는 약하고, 가련한 존재였다. 자신이 지켜주지 않으면 그대로 무너질 것 같은 처연함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아비의 근육질 몸에 짓눌려 숨만 가늘게 내쉬며 헐떡이던 그를 떠올리던 태윤은 얼굴을 감쌌다.
내가 아는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화비 이세희도 내가 멋대로 판단할 자가 아니었다.
그가 황제를,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미워하는 건 당연했다. 자신은 황제의 아들이었으니까.
그런 그가 밉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에게 분노라도 퍼부으면서, 그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하길 바랐다.
어여쁜 이세희가 꽃처럼 한 번이라도 웃기를. 그러려면 우선 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나야 할 것 같았으나, 그게 가능할지가 걱정이었다. 황제는 진심으로 이세희에게 미쳐 있었다. 목덜미를 집요하게 깨무는 그의 행위에선 짙은 소유욕이 풀풀 풍겨 나왔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머리에 일던 이세희의 생각이 저물어갔다. 낯선 금군들과 나란히 서 있던 태윤은,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황제가 후련한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화려한 용포 자락이 흩날렸다.
“윤아.”
그가 친근하게 부르는 소리에 태윤이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황제는 오랜만에 보는 아들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태윤은 예전이라면 좋아서 웃었을 테지만, 지금은 어색하게 입꼬리만 올렸다. 경직된 태윤의 미소를 차디찬 눈으로 관찰하던 황제는 픽, 웃으며 태윤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넌 아비를 배신한 적이 없었지. 이번에도 그러리라 믿는다.”
“아바마마, 소자가 어찌 아바마마에게 불효를 저지르겠습니까?”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작게 대답했다. 황제는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그의 눈빛이 묘하게 따스해졌다. 화비를 볼 땐 뜨겁게 일렁거리던 그의 눈은 성욕이 가시자, 제법 아비처럼 보였다.
“세희를 잘 부탁한다. 까다로운 아이지만, 고분고분하니 걱정 말거라. 그저 아비가 원할 때, 아비에게 세희를 데려오면 돼.”
“예, 폐하.”
그는 화비를 이름으로 불렀다. 얼마나 사랑하면…. 속으로 중얼거리던 태윤은 귀에 서슬 퍼렇게 꽂히는 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세희가 반항하면 때려서라도 데려와. 단, 얼굴은 안 돼. 만약 도망치려 하거든, 발목은 부러뜨려도 상관없다.”
발목을? 그 불쌍한 자를, 못되게 구는 아비가 이해되지 않았다.
“…예?”
“말을 안 들을 때가 가끔 있거든. 귀엽게도.”
황제가 눈웃음을 부드럽게 짓더니, 태윤의 어깨를 잡고서 고개를 숙였다. 태윤이 창백한 낯으로 자신을 보자, 황제는 걱정 말라는 듯 속삭였다.
“물론 가끔이야. 늘 그러면 곤란하지. 세희가 제 발로 걸어오는 게 제일 예쁘거든.”
하하, 하고 웃음을 아름답게 터트린 황제가 두 팔을 벌려 윤을 꽉 안아주었다. 오랜만에 안겨보는 아비의 품에선 화비의 체취가 묻어나왔다. 윤이 멍청하게 눈을 깜박이자, 황제는 눈을 감고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귀여운 내 아들…. 앞으로 금군대장으로서 이 아비와 세희를 잘 지켜주겠지?”
무거운 숨이 터질 것 같았다. 태윤은 자신이 아는 아버지에서 점점 멀어지는 황제에게 다소곳하게 안겨, 고개를 끄덕였다.
“…예.”
황제가 싱긋 웃고는 떠났다. 황제가 입을 맞춰준 이마를 만지작거리던 태윤은 어둑하게 변한 화요궁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낮에 정사를 맺은 걸로 아는데, 벌써 저녁이 오고 있었다. 태윤은 이제 자신에게 내려진 임무와 역할에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이세희를 지켜야 했다.
황제는 다른 이도 아닌 아들에게 이세희를 지키게 했다. 이세희가 다른 놈과 놀아날까 봐 심히 걱정을 한 모양이었다. 실제로 유사한 일이 있었으니, 금군들도 바짝 긴장한 게 보였다. 그들의 앞에 서서, 걸음을 옮겼다. 이세희에게 제대로 된 인사를 하지 못한 게 걸렸다. 만약에 그가 깨어 있다면, 사죄를 할 참이었다. 그의 의사가 아니라, 황제의 명령에 의해 정사를 맺는 걸 봤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는 수치스러워했고, 울었다.
그게 마음에 돌부리처럼 튀어나와 자신을 쿡쿡 찔렀다. 만나면, 가장 먼저 사과를 하고…. 그에게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하자. 자신의 시선에 상처 받고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도무지 지워지지 않았다. 가슴에 원망이 돌탑처럼 쌓여갔다.
화비는 멀리 있지 않았다. 금군들을 대동해 화원으로 들어서자마자, 황제가 있었던 그 의자에 화비가 늘어져 앉아 있었다. 두 볼은 붉게 상기되었고, 머리카락은 마구잡이로 흐트러져 있었다. 입가엔 황제가 싸지르고 간 정액으로 추정되는 백탁액이 묻어 있었다. 일어날 기운도 없는지, 화비는 상의만 걸치고 늘어지게 앉아 있었다.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숨을 내쉬던 화비는 태윤을 보자 인상을 찡그렸다.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표정에 태윤은 시무룩해졌다.
“화비 마마, 소신은 금군대장 태윤….”
“알고 있습니다.”
화비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중얼거렸다. 고뿔을 심하게 앓은 사람처럼 목소리에 쇳소리가 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곱고 우아한 자태와 걸맞은 목소리에 태윤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대답에 증오가 넘실거린다. 뾰족하게 곤두선 감정이 자신을 연신 옥죈다.
어떤 말을 내뱉을지 몰라 입술만 달싹거리는데 화비가 몸을 일으켰다. 태윤은 깜짝 놀라 눈을 들어올렸다. 처음으로 가까이서 마주본 화비는 태윤과 엇비슷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조금 더 그가 컸다. 어깨도 떡 벌어져 사내답게 넓었다.
자신의 뺨을 매만지는 손도 매우 크고, 거칠었다. 원래 천민 출신으로 물을 길어다 판 사람답게, 손힘도 제법 있었다. 태윤이 그의 얼굴에 홀려 정신을 놓은 사이, 태윤의 얼굴을 제멋대로 꽉 잡은 화비가 고개를 숙여 중얼거렸다.
“뭘 해도 상관없습니다.”
“윽….”
태윤은 볼이 양쪽으로 눌려 괴로워했다. 그러나 화비의 몸에 상처를 내고 싶지 않아, 두 손만 허공에 올린 채 가만히 있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금군들은 눈치만 볼 뿐, 화비에게 손도 대지 못했다. 황제의 총애를 받으니, 그를 무시하지 못하는 것인가. 볼에서 느껴지는 아픔에 인상을 찡그리는데 화비가 태윤의 얼굴을 거칠게 밀치며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제 몸에 손대지 마십시오.”
“예?”
화비가 냉소를 지으며 또박또박 말했다.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 개자식아.”
평민이나 천민들이 뭉쳐 사는 흙길에서 들을 법한 험한 말에 태윤은 당혹스러웠다. 생각지도 못한 발언이었고, 유려하고 붉은 입술에는 어울리지 않는 까칠한 말투였다. 지나친 정사에 지친 듯, 가라앉은 목소리는 미묘한 울음기가 남아 미련이 켜켜이 쌓여갔다. 화비는 태윤의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눈빛을 서슬 퍼런 눈으로 노려보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제대로 여미지 못한 상의가 들춰지며 그의 얼룩덜룩한 상반신이 보였다. 뽀얗고, 하얀 피부 위로 낙인처럼 새겨진 아버지의 흔적에 태윤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손등으로 입가를 가린 태윤이, 차마 화비를 보지 못하고 시선을 떨구자 화비가 처음으로 소리를 내어 웃었다.
기분이 좋아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날이 선 비웃음에 태윤은 떨리는 눈을 들었다. 화비는 태윤의 시선이 힘겹게 얼굴 언저리에 맺히자, 팔짱을 꼈다. 가소롭다는 듯 눈을 흘긴 그는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을 연신 쓸어 올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흩날리는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도드라지게 보이는 하얀 얼굴, 그리고 붉은 뺨에 태윤은 자신도 모르게 자꾸 눈을 움직여 화비를 살폈다.
화비는 그런 태윤의 반응에 싫다는 감정을 수면 위로 드러내며, 입술에 묻은 정액을 손으로 닦아냈다. 그리고 무감한 눈으로 손에 묻은 백탁액을 보다 입을 열었다.
“네 아비와 닮은 얼굴로 날 만지지 마.”
후궁 주제에 황제의 아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하대를 하는 화비의 태도에도 궁인들은 잠자코 있었다. 그들은 오히려 태윤이 화비에게 고함을 지를까 봐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제발 화비의 심기를 거슬리지 말라는 듯 눈치를 주었다. 금군 중 한 명은 나서려다가, 화비의 손짓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화비는 불어오는 바람에 얼굴을 찡그리더니 투덜거렸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그러면서 태윤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건방진 시선으로 태윤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그의 시선에 담긴 분노와 증오의 대상이 자신을 낳게 해준 아비라는 건 진작 깨달은 태윤은 할 말이 없어 묵묵히 그의 시선을 감내했다.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황제를 그토록 싫어하는데, 황제의 아들이며 황제를 떠올리게 하는 자신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알면서도 처음 대면한 순간부터 분노를 서슴지 않고 드러내자 가슴이 욱신거렸다.
나는 아버지와 다르다. 당신을 음욕을 담은 눈으로 본 게 아니었다. 그저, 이 찬바람에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미세하게 몸을 떠는 게 안쓰러워서…. 그리고 아버지에게 얻어맞아, 멍이 들 것 같은 뺨이 아파 보여 어의를 불러주고 싶어서 그런 것이라고, 설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어떤 말을 해도 그는 단칼에 자를 것 같은 냉담한 얼굴이었다. 시선이 닿는 것도 극도로 싫어했다. 태윤은 가슴에서 쿡쿡 치미는 고통을 견뎌내며 입을 열었다.
“전 폐하의 명을 받아, 화비 마마를 지키고자 왔습니다. 음심을 품고 화비 마마를 눈으로 바라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고저 없는 담담한 말에는 충심이 가득했다. 진심을 담아, 한 글자씩 힘을 담아 말했다. 그러나 화비는 그 말이 귀에 꽂히자 심드렁한 얼굴로 귀를 후비며 중얼거렸다.
“그 아비에 그 자식이지.”
궁인들은 황제를 향한 모욕적인 발언에 몸을 움찔거렸다. 화비의 당돌한 발언에 궁인들은 안절부절못했다. 태윤도 그중 하나였다. 황궁에서 태어나고 자란 태윤은, 황제의 위엄을 잘 알았다. 그의 명이 있기 전까진 얼굴도 들지 못하는 곳이 황궁이었다. 황제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로 생이 오가는 이 궁에서, 황제를 혓바닥에 올리고 능멸하는 자는 처음이었다.
태윤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고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화비는 입술 끝을 올려 비릿하게 웃었다.
“제 몸에만 손대지 마십시오. 그러면 무엇을 하든 상관없습니다.”
태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똑바로 보았다. 고요하고, 묵직하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림이 없는 태윤의 고고한 시선에 화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뭔가 거슬렸는지, 이마에 힘을 주었다. 미간에 깊은 계곡이 파였으나, 이내 표정을 편 화비는 등을 돌렸다.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그의 머리카락에선 향이 났다. 그리고 날씬하게 쭉 뻗은 다리 사이로는, 황제의 것이 분명한 탁한 정액들이 꾸물꾸물 흘러내렸다. 황제의 애첩이란 증거였다. 엉덩이 아래를 가리나, 허벅지까진 가려주지 못하는 상의는 화비의 손끝을 가리고도 남았다. 등에 새겨진 봉황에 태윤은 그것이 황제의 상의임을 알아챘다.
“폐하의 명을 받았으나, 저는 제 소신대로 마마를 지킬 것입니다. 제 몸과 마음을 바쳐 지켜드리겠습니다.”
태윤의 나지막한 발언에 힘이 빠진 다리로 힘겹게 걷던 화비가 느리게 고개를 돌려 태윤을 보았다. 흘러내린 앞머리를 손으로 올린 화비가 픽 웃었다. 조롱이 명백한 아름다운 얼굴에도 태윤은 가면을 쓴 것처럼, 무표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가슴은 화비의 시선에 따라 매섭게 뛰었다. 가슴이 너무 뛰어서 아팠다. 체력 단련을 위해 산을 뛰어올라 가슴이 두근거릴 때보다 더 매섭게 뛰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것 또한 화비가 주는 것이라면, 자신이 견뎌야 했다. 태윤은 우직한 얼굴로 화비를 응시하며 주먹을 쥐었다. 화비가 두 눈을 초승달처럼 휘며 곱게 웃었다.
“몸을 바친다고?”
흐음, 하고 침음한 그가 태윤을 보더니 소매로 입가를 가리며 소리 내어 웃었다. 장난기를 다분히 드러내자 그의 눈이 처음으로 맑게, 그 나이 때의 청년으로 느껴졌다. 입술은 조롱과 비웃음을 띄우나, 눈만은 죽은 것처럼 생기가 없었으나 지금은 달랐다. 태윤은 우습게 보이지 않으려 노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마를 위해서라면, 제가 무엇이든 못 하겠습니까?”
화비가 입술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묘한 눈으로 태윤을 살폈다. 그들의 대화를 유심히 듣던 내관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화비의 옆에 서서 태윤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태윤은 무슨 뜻인지 몰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관이 고개를 소리 없이 빠르게 저었다. 그때까지도 영문을 알지 못해 태윤은 눈을 돌려 주변을 보았다. 금군들은 고개를 숙이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어떤 이는 태윤을 보며 그냥 입이나 다물라는 듯 검지로 입술을 가렸다.
태윤이 퍽 순한 눈으로 미간을 찡그리자 화비가 말했다.
“원래 눈치가 없으십니까?”
“…제가 무슨 말이라도 잘못했습니까?”
윤이 시무룩해져 되물었다. 쌍꺼풀 없이 큰 눈을 도록도록 굴리며, 눈치를 보는 모습이 커다란 강아지 같았다. 화비는 어느새 웃음을 완전히 지운 얼굴이 되어 태윤을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짜증 나게 구는 건 폐하와 같으시군요. 제 곁에 오지 마십시오. 보기만 해도 화가 치밉니다.”
화비가 획 몸을 돌려 걸어갔다. 궁인들이 화비의 뒤를 서둘러 쫓았다.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몰라, 멍한 눈으로 화비의 흔들리는 몸을 보던 태윤이 소리쳤다.
“곁에 가지 못하면 제가 마마를 지켜드리지 못합니다.”
그러자 화비가 걸음을 우뚝 멈추더니, 태윤을 노려보았다. 분노로 안광이 불꽃처럼 솟았다. 번들거리는 눈에 태윤이 머뭇거렸다.
“…곁에라도 있게 해주십시오. 전 그거면 됩니다.”
태윤은 그의 부정적인 감정을 온몸으로 받으면서도, 물러섬이 없었다. 이곳은 너무 위험했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 화비를, 저곳에 사는 후궁들이 가만히 둘리가 없었다. 그와 같이 약하고 가련한 자는 언제든 위험에 처했다. 자신이 지켜주지 않는다면, 뿌리째 뽑혀 죽을지도 몰랐다.
그것만은 싫었다. 태윤은 진심을 담아 그를 보았다. 내치지만 말아달라고, 그에게 빌 수도 있었다.
“금군대장께서 하실 일은 하납니다.”
화비가 계단에 올라갔다. 그의 몸이 좀 더 위로 솟아, 땅에 기립한 태윤을 자연스레 내려다보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내정에서, 화요궁만이 화사하게 빛났다. 그 중앙에 선 화비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은 우아한 자태로, 손을 들어 올려 태천궁을 가리키며 말했다.
“폐하가 절 부르시면 그때 데려다주시면 됩니다. 폐하가 원하는 게 그거니까요.”
지긋지긋하다는 어투로 쏘아붙인 화비가 송아지처럼 맑은 태윤의 눈을 찌를 듯이 노려보았다.
“그러니 지켜준다거나, 곁에 있고 싶다는 가식적인 말은 하지 마십시오. 그 얼굴로 말해 봤자 한 톨도 믿고 싶지 않으니까.”
화비가 코웃음 치며 태윤을 두고 화요궁으로 들어갔다. 쌀쌀맞은 그의 태도에 태윤은 고개를 숙였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손을 들어올려, 얼굴을 감싼 채 숨을 다독이던 그의 곁으로 금군이 다가왔다. 태윤이 시선을 돌리자 금군이 눈치를 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것이냐?”
자연스레 하대를 하자, 금군이 입술을 달싹였다.
“저, 대장님께선 의아하게 여기실지 몰라도…. 원래 화비 마마께선 닿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런 분이시니 너무 상심 마십시오.”
“그럼 원래 다른 자들도 저렇게 미워하시는가?”
태윤이 어쩔 수 없이 침울한 얼굴로 물었다. 적당한 말을 골라보려 애를 쓰던 금군은, 태윤의 분위기에 물들었는지 축 늘어진 태도로 대답했다.
“그건 아닙니다.”
결국 황제를 닮은 자신만 미워한다는 사실이었다. 태윤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화요궁을 빤히 보았다. 그의 눈빛이 머리에 각인이라도 됐는지 잊히지 않았다. 자신의 곁은 절대로 내어주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는 수준을 넘어, 살과 살이 맞닿는 것조차 경멸하는 눈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가슴에서 재차 통증이 시작되었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올려 가슴팍을 문질렀다.
“어쩔 수 없지.”
담담하게 중얼거린 태윤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지금은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화비가 조금이라도 곁을 내어주길 바라는 수밖에.
*
제도에 온 지 이틀이 되었다. 비공식적으로 화요궁 화원에서 금군대장이 되었지만, 공식적으로 황제가 자리를 내린 것이 아니었다. 태윤은 성지를 받기 위해 소각전으로 향했다. 성지를 받는 건 무료하고, 따분한 일이었다. 문 앞에 서서 황제의 명이 떨어지기 전까지 엎드린 채 기다렸고, 황제가 명을 내리고 나서야 일어서서 대전에 들어설 수 있었다. 황제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어좌에 앉아 위엄에 찬 미소를 은은하게 지으며 태윤을 내려다보았다.
화비가 치를 떨며 싫어하는 얼굴이었다. 그 사실에 손이 움찔거리며 오므라들었다. 황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만약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왜 화비를 다정하게 어루만져주지 않을까? 그는 사랑을 받아 마땅한 존재였는데.
사실 답은 듣지 않아도 알았다. 황제는 화비를 소유하려 들었다. 그의 마음까지 찍어 누르면서. 황제와 화비가 어떤 식으로 이어졌는지 모르겠지만, 감히 자신의 자리에서 추측해 본다면 황제는 화비를 매우 거칠게 다루는 것 같았다. 어제만 해도 머리채를 잡고 뺨을 때리질 않나, 머리채를 쥐고 흔들지 않나…. 지금 생각해도 뒷목이 송연해졌다.
그는 계속 울었다. 아파서, 괴로워서, 힘들어서. 그의 신음이 생생하게 귓가에 맺혔다. 아예 밀랍을 부어 응고시킨 듯, 딱 달라붙었다.
화비와 떨어져 있으나, 어제부터 떠나지 않는 화비의 생각으로 머리가 멍했다. 성지를 어떻게 받았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손에는 두루마리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소각전 밖이었는데, 황제를 모시는 내관이 따라 나와 명을 전했다.
“지금 화요궁에 현령 이국영과 그의 부인이 들었습니다. 그들을 데리고, 화비 마마가 있는 청예전에 드시면 됩니다.”
현령 이국영.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태윤이 눈을 들어 올리자, 내관이 속삭였다.
“화비 마마의 아버지이십니다. 화비 마마를 배알하려 유현에서 올라오셨습니다. 폐하께선 정무를 마친 후에 가실 겁니다. 먼저 가셔서 화비 마마를 지켜보라는 명이십니다.”
자식이 후궁이 되면, 황제에게 따로 청을 넣어 자식을 만나야 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까지 금군이 선 적은 거의 없었다. 사사로운 대화를 나눌 때 무관들은 밖에서 기다리고 궁인들만 최소한으로 안에 두어 시중에 들게 했다. 그게 법도였다. 법도와 다른 명이 이해가 되지 않아 태윤이 성지가 적힌 두루마리를 만지작거렸다.
“폐하의 첩이지만 본래 부모와 자식 관계인데…. 사사로이 만나 담소를 나누는 것에 불과한데 금군이 거기에 들어가도 된단 말인가?”
태윤의 물음에 내관은 눈을 내리뜨다, 총총 다가왔다. 태윤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내관은 너무 작아,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들릴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선 화비 마마의 청에 따라, 특정한 장소를 제외하고는 화비 마마를 혼자 두지 않습니다. 가셔야 합니다.”
청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태윤이 눈을 가늘게 뜨자, 내관이 무감한 시선으로 태윤을 보았다. 어서 가라는 듯 채근하는 그의 시선에 따라 태윤은 묵직한 숨을 삼키며 걸음을 옮겼다.
후궁들이 원할 때, 혹은 후궁들의 가족이 원할 때 황제에게 청을 넣으면 언제든지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병사들은 밖에 세워두고, 안에는 내관과 궁인을 두는 게 법도인데…. 태윤은 묘하게 신경이 쓰이는 황제의 명을 곱씹으며 청예전으로 향했다.
들어서자마자 치미는 삼엄한 분위기에 태윤은 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태천궁 못지않은 인력들이 여기에 치중되어, 화비 하나와 가족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창문은 활짝 열려 있고, 금군들은 무장을 하고 청예전을 둘러싸고 있다. 그들과 시선을 교환한 태윤은 내관의 안내에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태윤은 자신을 반기는 놀라운 광경에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슬쩍 구겼다.
발이 내려져 있었다. 외간 남자를 보는 것도 아닌데, 화비와 현령 이국영으로 추정되는 중년 남자 사이에 불투명한 붉은 발이 내려와 시야를 막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국영은 앉아서도 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인 것을 보니, 몸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의 부인이 몸을 지탱해주지 않으면 그대로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런 자를 의심하는 것이었다, 황제는. 태윤은 기이한 황제의 집착에 숨이 턱 막혔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태윤이 이국영과 그의 아내를 보자 이국영이 벌벌 떨며 몸을 움직였다.
“저, 저, 저는…. 혀, 혀, 현령….”
이국영이 반밖에 움직이지 않는 입술로 말을 더듬더듬 이어갔다. 천민 출신이나, 아들이 총애를 받아 현령까지 올랐다. 그런데도 이국영은 잔뜩 오그라든 자세로 눈치를 보며 혹여나 아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 태윤에게 굽신거렸다. 황족이긴 하나, 몸이 편치 않은 연상의 사내가 이리 나오자 태윤도 마음이 편치 않아 손을 들어 저지했다.
“앉으시오. 나는 금군대장 태윤으로, 화비 마마를 지키러 온 것뿐이니.”
이국영이 떨리고 뭉개진 발음으로 ‘황송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전혀 현령답지 않은 태도였다. 옷은 비단이고, 관도 황금이고, 쥐고 있는 지팡이도 제법 좋은 것이었으나 그는 모든 것이 버겁다는 듯 힘겨운 얼굴로 자리만 보전하고 있었다. 그의 부인이자 화비의 어미도 화려한 비단 옷을 입었으나, 우중충한 얼굴로 간신히 인사만 건네었다.
영 달갑지 않은 인사에 태윤은 고개를 끄덕이고 발걸음을 옮겼다. 현령과 부인의 뒤로 세 명의 금군이, 그리고 태윤을 비롯한 다른 세 명의 금군이 화비를 감쌌다. 발 안에 다소곳한 자세로 앉아있던 화비는 태윤을 보자 소리 없이 비웃었다. 그사이 그의 시선에 익숙해졌는지, 태윤은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고 그의 옆에 섰다. 화비는 태윤의 손에 들린 성지로 추정되는 두루마리를 힐끗 보았다. 황제의 명령을 받고 온 태윤을 저지할 힘이 없는 걸 알아챈 화비는 눈을 지그시 감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겹다는 듯한 한숨이 발 너머에도 퍼지자 현령 이국영이 입을 열었다.
“마, 마마, 그, 그러지 마, 마, 마십시오. 하, 하, 한숨은…”
화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꽃 같은 얼굴이 구겨져도 어여뻐 태윤은 떨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 몸으로 왜 오셨습니까? 편치 않으시면 유현에서 가만히 계시지.”
불퉁한 음성으로 화비가 말을 건넸으나, 그 안에는 아비를 향한 애정이 가득했다. 현령 이국영이 부인을 보았다. 부인은 지아비의 손을 꼭 잡더니, 불투명한 발 너머로 보이는 아들의 얼굴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이때가 아니면 저희가 언제 마마를 보러 오겠습니까?”
태윤의 고요한 얼굴에 미미한 금이 갔다. 저 말은, 황제가 배알의 기회조차 제대로 주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화비는 고개를 푹 숙이고, 손을 맞잡았다. 그의 손끝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긴 검은 머리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려 고운 선을 그리는 옆얼굴을 가렸다. 아무리 발을 내렸어도, 생생히 느껴지는 부모의 애정 어린 염려에 화비는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었다.
“…몸도 아프신데 그만 오셔도 됩니다. 저는 여기서 괜찮습니다.”
목소리는 차분하나, 조금만 건드리면 울 것 같았다. 미미한 떨림은 서러움으로부터 생겨난 것이었다. 태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고개를 숙인 화비를 보았다. 황제의 흔적이 남은 하얀 목덜미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결코 좋지 않은 두근거림에, 입술을 슬며시 깨물었다.
“마마, 조반이나 석반은 거르지 않고 잘 드시고 계시지요?”
부인이 물었다. 화비는 입을 열지 못했다. 고개만 느리게 끄덕였다. 현령 이국영이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몸의 반이 굳어, 입술도 잘 움직이지 않는 현령을 대신해 부인이 입을 열었다.
“혹, 옥체가 미령하신 건 아니신지…. 만약 그러시다면, 어의를 꼭 만나 옥체를 살피십시오.”
윗사람을 대하는 태도였지만, 발을 통해 들어오는 감정은 부모가 자식에게 퍼붓는 사랑 그 자체였다. 부인은 아들에 대한 걱정으로 초조해하고 있었다.
화비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떨리는 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인 채. 부모가 제 우는 얼굴을 볼까 봐 두려워 울음을 힘겹게 삼키고 있었다. 그 모습에 태윤은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왜 그리 우느냐고, 울지 말라고…. 그냥 품에 저 가련한 사람을 안아 다독여주고 싶었다. 그의 울음이 가슴을 갈가리 찢고, 미어지게 했다.
“제 걱정은 마세요.”
화비가 울음이 젖은 목소리로 태연한 척 굴자, 끝내 부인이 어흑 소리를 내며 울었다. 현령 이국영도 비통함을 참지 못하고 부인의 품에 쓰러졌다. 화비는 아비에 대한 걱정을 참지 못하고, 옆에 있던 태윤의 소매를 덥석 잡았다. 태윤이 깜짝 놀라 내려다보자 눈물을 가득 머금은 이세희의 갈색 눈이 보였다. 붉게 물든 눈가와 물기가 어린 눈에 태윤은 손을 뻗었다.
그러나 닿지 못했다. 그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은 손은 허공에서 굳었다. 화비는 태윤의 소매부리를 꾹 잡고, 당기며 애처럼 매달렸다.
“아버지가 또 쓰러지시면 큰일입니다. 어서 어의를, 어의를… 제발, 어서….”
화비가 눈물을 뚝뚝 떨구며 애원했다. 태윤은 진정하라는 듯, 손을 들어 그의 손목을 잡고 내리며 침착하게 말했다.
“어의를 부르면 너무 늦습니다.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화비가 눈을 내리뜨자 눈물이 붉은 뺨을 타고 또르륵 흘러내렸다. 그 모습에 태윤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소매로 슥슥 닦아주며 다정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러니 울지 마십시오.”
태윤은 듬직한 얼굴로 그의 손에서 스스로 떨어져 나갔다.
“전 마마를 위해 온 자입니다. 마마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을 겁니다.”
태윤의 눈이 잘 벼려진 칼날처럼 빛났다. 그 눈빛은 화비의 가슴에 꽂혔다. 화비의 눈물이 점차 굵게 변하자 태윤은 자신도 모르게 눈이 뜨끈해졌다. 저리 보면 영락없이 물가에 내놓은 아이가 아닌가? 가진 거라곤 막 비를 맞은 듯한 여린 꽃잎 같은 얼굴에, 옥을 깎아 만든 듯한 아름다운 나신뿐이었다. 아버지가 현령이면 무얼 하겠는가. 결국은 황제가 쥐여 준 거짓 부에 불과했다. 또한 아비와 어미는 아들에게 해가 갈까 큰소리 한 번 못 하는 여린 심성의 자들이었다. 가슴에 돌이 쌓인 것처럼 묵직하고 답답해졌다. 달래주고 싶어도 만질 수 없다. 주먹을 으스러지도록 쥔 태윤은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화비의 눈이 위로 슬쩍 올라왔다. 물기가 서린 눈에 가슴이 지끈거려, 태윤은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었다.
더 보았다간 그를 정말로 무심코 안아버릴까 봐 무서웠다. 아비의 것을 탐내는 아들은 결코 될 수 없었다. 사실 그것보다도 그가 싫어하는 짓을 해, 그에게 더 미움을 받기 싫었다. 화비의 시선에서 물러나자, 화비가 허겁지겁 손을 뻗어 손끝으로 소매부리를 잡고 당겼다.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잘게 떨던 화비가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의는 화요궁 태감에게 가면 바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황제가 아예 따로 어의를 뒀나 보군. 태윤은 자조 섞인 어조로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의 손을 떼어놓았다. 화비의 손이 툭, 낙엽처럼 떨어지고 고개가 들렸다. 아무 말 없이, 입술만 질끈 깨물고 자신을 보는 처연한 시선에 태윤은 엷게 웃었다.
“기다리고 계십시오. 제가 현령을 업고 다녀올 테니. 그게 빠를 겁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태윤은 부대장에게 호위를 맡기고 발을 돌아 나갔다. 현령은 긴 의자에 실신한 상태였다. 맥박을 확인하자, 비정상적으로 빨리 뛰고 있었다. 두 눈은 초점이 맞지 않았고, 입은 벌어져 타액이 주르륵 흘렀다. 부인은 연신 옆에서 지아비의 타액을 닦아주느라 바빴다. 화비는 참담한 광경을 황제의 명 때문에 나가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앉아 지켜보고 있었다. 붉은 발, 아주 촘촘한 간격으로 언뜻 보이는 늙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그들 앞에 서서 능숙하게 달래는 태윤을 보자 눈이 흔들렸다. 아버지는 괜찮으실까. 화비는 걱정되는 마음에 몸을 살짝 일으켜 발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금군이 손을 들어 화비를 저지하며, 화비만이 들을 수 있게 속삭였다.
“폐하의 명을 기억하십시오, 마마.”
화비가 휙 고개를 들어 새치름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금군은 백옥같이 고운 피부와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 그중에서도 꽃물을 부어 물들인 것 같은 눈가에 흠칫 놀랐다.
“폐하께서 아버지를 걱정하지 말라고 않으셨다. 다가가지 않을 터이니 놓거라.”
“안 됩니다.”
화비를 감시하는 태감이 말을 엄격하게 내뱉었다. 소매를 들어, 입가를 가린 상태로 아주 조용히 속삭이며 눈을 돌려 태윤을 보았다. 태윤은 부인을 달래고 있었다. 자신의 일을 대신하는 태윤, 태윤을 보며 훌쩍이는 어미, 태윤에게 안긴 아버지를 보던 화비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같은 사내의 품에 안겨 교태를 부리며 부모의 안위를 구해야 한다는 사실에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난 현령을 데리고 갈 터이니, 그대는 화비 마마를 잘 보살펴 주시오.”
태윤은 자신에게 무수히 쏟아지는 시선을 담담하게 견뎌내며 부인을 보았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고운 부인의 외모에 태윤은 쓰게 웃었다. 화비 이세희는 어머니를 닮아서 저리 예뻤구나. 화비가 나이를 먹으면, 저렇게 우아하고 수려하게 변하려나. 태윤은 엉뚱한 속마음과 다르게 듬직한 태도로 현령을 안아 올렸다. 화비의 거푸집처럼 닮은 부인을 따스한 눈으로 본 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령은 괜찮을걸세. 그러니, 너무 걱정 마시게. 그리 울면 화비 마마의 염려도 깊어지지 않겠는가?”
태윤은 그대로 현령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 밖은 쾌청했고, 바람은 선선했다. 자유롭게 바람을 만끽한 태윤은, 화비만은 그럴 수 없다는 사실에 입안이 씁쓸해졌다. 불쌍하기 짝이 없다. 안쓰럽고, 연약하고…. 진심으로, 화비는 곁에 늘 머물러 마냥 지켜주고 싶은 사내였다.
하지만 자신의 염원과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 그를 생각하는 마음을 숨겨야 했다. 아버지가 자신을 죽일 것이다. 화비의 목덜미를 깨물며 자신을 냉철하게 관찰하던 시선을 떠올린 태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아 몸을 살짝 떨었다.
“으으….”
현령이 괴로워하는 소리에 정신을 퍼뜩 차린 태윤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걸음은 뛰듯이 바뀌었다. 본래 황제의 위엄을 나타내는 황궁에서는 절대 뛰어서는 안 되었지만 화비의 아비의 생사가 걸려 있으니 황제도 용서해줄 것이다. 그런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다행히 화요궁과 청예전은 그리 멀지 않아 금세 도착했다. 주인이 없는 화요궁을 지키던 이들은 흐트러짐 하나 없으면서도, 단번에 도착한 태윤을 보고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의를 불러라, 현령이 쓰러졌다!”
그러나 그 우렁찬 소리에 그들은 능수능란하게 움직였다. 궁녀가 다가와 화요궁에 딸린 부속 전각으로 태윤을 안내했다. 화요궁이 중궁에 버금가게 화려하다면, 부속 전각은 소담스럽고 운치가 있었다. 옆에는 인위적으로 만든 물줄기가 흘렀고, 주변엔 화원을 응축시킨 듯 갖가지 꽃과 초목들이 있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지상낙원이 있다면 이곳이리라. 그곳을 따라 걸은 태윤은 침전에 도착했다. 침상에 이국영을 눕히고, 그의 호흡을 우선적으로 확인했다. 호흡은 거칠고, 가래가 낀 듯 숨소리가 탁했다. 목에서 끓는 소리가 났다. 이대로 가다간, 이국영이 호흡에 문제가 생겨 죽을 수도 있었다.
“어의는 아직 멀었는가?”
태윤이 초조한 마음에 궁녀를 보았다. 궁녀는 인간 같지 않게 차가운 눈으로 이국영을 보더니, 옆으로 다가와 그의 맥박을 확인했다. 궁녀의 얼굴이 심상치 않게 변할 무렵, 문이 벌컥 열렸다. 후아, 후아, 하고 방정맞은 숨소리에 인상을 찡그리며 뒤를 보는데 함을 품에 안은 늙은 태의가 보였다. 어의가 아니고, 황제를 치료하는 태의가 아이고, 소리를 내며 허둥지둥 들어오는 모습에 태윤의 얼굴은 점차 어둡게 변했다.
화비를 향한 황제의 총애가 대단하다. 본래 내정에는 후궁들을 위해 배정된 어의가 있었고, 워낙 어의의 존재가 귀해 후궁들도 진맥을 받고 싶으면 부탁에 부탁을 거듭해야 받을 수 있었다. 총애를 받으면 그나마 빨랐지만, 그렇지 않으면 치료는 하염없이 뒤로 밀리기 십상이었다. 헌데 그냥 어의도 아닌 태의라니.
“언제 쓰러졌습니까?”
태의는 오자마자 현령의 진맥을 보더니, 치료를 할 때 사용하는 묵직한 함을 열었다. 그의 상태를 이미 알았는지 빠르고 정확한 손놀림으로 침을 놓았다. 태윤은 그의 옆에 서서 고저 없는 담백한 목소리로 현령이 어떤 연유로 쓰러졌는지 알렸다.
“화비 마마를 배알하기 위해 청예전에 왔는데, 화비 마마와 담소를 나누시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더니 쓰러졌습니다. 가래가 많이 끓고, 초점이 맞지 않았으며….”
태의가 한숨을 내쉬더니 쯧쯧 혀를 찼다.
“심병 때문에 쓰러진 것 같습니다. 전에도 궁에서 한 번 쓰러진 적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한 바라 태윤은 굳이 되묻지 않았다. 아들이 희대의 애첩이 되어 사람들의 혓바닥에서 농락당하는 것도 모자라 저런 감시를 받고 사니 마음이 편할 리가 있나. 평범한 아버지라면, 제 자식을 뺏긴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화비는 사내이지 않은가. 아이도 못 낳는 사내가 애첩이 되어 봤자, 뒤가 편하지 않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원래 몸이 약했나 봅니다, 현령은.”
태윤이 담담하게 말을 내뱉었다. 원래 천민이었으니, 몸이 좋지 않았겠지. 그런 상황에서 아들이 첩이 되어 심병을 앓아 쓰러진 걸로 생각했는데, 태의는 전혀 다른 소리를 내놓았다.
“아닙니다. 현령이 되기 전에는 무척 건강했다고 들었습니다.”
태의는 부싯돌을 마찰시켜, 불티를 틔웠다. 심신 안정에 도움이 된다는 향을 피워 이국영의 머리맡에 두었다. 침을 맞은 뒤 시간이 조금 흐르자 현령의 파리하던 얼굴에 조금씩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현령이 나아지는 걸 보고 나서 돌아갈 생각이라, 태윤은 자리를 비키지 않았다. 여전히 시선은 곧게 현령에게 고정한 상태로, 태윤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원래 반신불수가 아니었습니까?”
나긋하나 힘이 실린 말투에 태의가 고개를 들었다. 황제의 젊은 시절을 연상케 하는 잘생긴 얼굴을 마주 보던 태의는 잠시 고민하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굳이 숨길 이유가 아니었다. 이세희가 납치되듯 끌려와 애첩이 된 건, 워낙 유명한 사건이었으니까. 그 정도의 외모를 가진 이가 이십 년 동안 소문이 안 난 것도 유명했고, 더불어 그런 미인을 찾아내 애첩으로 들어앉힌 황제도 대단하다는 이야기 알음알음 쭉 퍼졌다.
“아니었습니다.”
태의는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입술로, 신음을 내뱉는 현령을 일렁거리는 눈으로 보다 입술을 떼었다.
“아주 건강한 물지기였습니다. 이십 몇 년을 물을 길어 저잣거리로 나르며 살았으니 몸은 다부지고 좋았습니다. 실제로 이 손을 보시면, 끝이 아주 다부집니다. 물뿐만 아니라 쌀, 돌도 나르는 건강한 사내였지요.”
태의의 말에 따라 태윤은 굽어든 현령의 손을 보았다. 지금은 마르고, 마디가 불거져 나왔지만 끝은 굳은살이 박여 다부졌다. 손바닥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천민으로 힘들게 살아온 세월이 고스란히 손에 남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뺨에 닿았던 화비의 손도 거칠었다. 얼굴은 무척 고왔으나, 손끝은 웬만한 금군들보다 닳았고 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악력도 꽤 센 편이었다. 태윤의 시선이 현령의 얼굴에 닿았다. 반은 굳고, 반은 멀쩡한 얼굴에 병색이 완연하다. 오랜 치료가 아니라면 진작 죽었을 것이다.
“그러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온 겁니까?”
태윤이 묘하게 비꼬듯 묻자, 태의가 불쾌했는지 즉각 대답했다.
“저의 치료 덕분에 현령은 살아난 것입니다. 평민들이나 드나드는 의원에서 관리했다면 진작 죽었을 목숨입니다. 현령은 화비 마마가 첩지를 받고 입궁한 날, 충격으로 쓰러졌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그 상황에 없었지만 심각한 상황이었고…. 화비 마마께서 애걸복걸 하셔서 같이 궁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제가 치료에 나서, 일상생활 정도는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현령도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습니다. 지금도 걸으려고 무던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태의가 고개를 들어 태윤을 보았다. 돌같이 단단한 눈빛에 태윤은 긴장감이 들어 그를 반듯한 태도로 응시했다.
“현령은 살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기가 무섭게 다시 걸으려고 무수히 노력했습니다. 현령이 살아야 화비 마마도 사시니….”
언뜻 태의의 눈에 건조한 씁쓸함이 감도는 것 같았다. 태윤은 가슴에서 퍼지는 지끈거리는 통증에 숨을 쉴 수 없었다. 이야기만 들어도 눈가에 열이 올랐다.
그래서 화비가 그렇게 아연실색하고 매달렸구나.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으나, 황제의 명 때문에 가지도 못하고 얼마나 안절부절못했을까. 그가 자신의 소매를 붙잡고 유리구슬 같은 눈으로 눈물을 떨구던 걸 떠올리자, 숨이 자꾸만 엷어져 태윤은 얼굴을 가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해야 했다. 감정의 동요를 드러내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하며 태윤은 손을 내리고, 현령을 빤히 보았다. 태의는 매끈하고 날렵한 턱 선을 가진 태윤을 한 번 보더니, 웃음기 밴 어투로 덧붙였다.
“폐하께선 기뻐하실 겁니다. 총애하는 화비 마마의 아비를 살렸으니, 금군대장께서 원하시는 걸 들어주실 겁니다. 그 공이 대단하시니까요.”
“폐하께선 화비 마마를 정말 사랑하시나 봅니다.”
떠보기 위한 질문은 태연자약했다. 태의는 그 질문에 짧게 웃음을 터트리더니, 노련한 손놀림으로 침을 빼내었다.
“무척 연모하시지요. 그러니 마마께서 제법 당돌하게 구셔도 다 봐주시지 않습니까?”
너도 알지 않느냐는 눈빛으로 태윤을 보며 태의가 웃었다. 하긴, 자신에게도 하대를 서슴없이 하고, 황제에게도 툭툭 반말을 내뱉는데 황제는 한 번도 혼을 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정작 화비는 황제가 그럴 때마다 길길이 날뛰었지만. 두 사람의 상반된 감정을 떠올리던 태윤은 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태의도 그 웃음의 의미를 알았는지, 구태여 말을 잇진 않았다.
“청예전으로 돌아가시면 원하시는 건 무엇이든 폐하께 부탁드려 보십시오.”
대신, 화비를 이용해 갖고 싶은 걸 가지라는 조언을 냉큼 말했다. 태의도 화비 마마의 아비를 살린 덕택에 제법 쏠쏠하게 살았나 보다. 화비의 가족들도, 이세희가 후궁이 되면서 현령 자리까지 올랐으니 화비 곁에 있던 자들은 화비를 통해 부와 명예, 권력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당신의 슬픔과 서러움, 치욕을 짓밟고 대가를 받고 싶지 않았다.
“제가 무엇이 필요해서 그러겠습니까. 제가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태윤의 눈빛에 굳건한 마음가짐이 드러났다. 꾸밈이 없는 그의 충심에 태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니 황제가, 다른 사내라면 질색하는데도 제 아들을 후궁에게 붙였구나 싶었다. 태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금군대장은 참으로 변함이 없으십니다.”
“저는 제 일을 할 뿐입니다.”
눈을 내리깐 태윤은 무심코 생각했다.
원하는 걸 들어준다라… 그렇다면, 나는….
“제 일은 화비 마마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할 뿐인데 대가를 받고 싶진 않습니다.”
고개를 든 태윤은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에도 눈을 또렷하게 떴다.
*
현령의 상태가 좋아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태윤은 청예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부모님을 극진히 생각하는 화비가 이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좋아할까? 내가 얼마나 열심히 뛰어서 아버지를 데려가줬는지 말하면, 날 손톱만큼이라도 받아들여 줄까? 벌써부터 이세희에게 칭찬을 받을 생각이 기분이 좋아져 발걸음이 가벼웠다. 설렘에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싶었다. 가슴이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라, 태윤은 입술 끝이 씰룩거렸다.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져 볼이 아파왔다.
그런데 청예전에 다시 들어서니, 가슴이 쿵 하고 발치까지 떨어졌다. 화비 이세희가 황제의 허벅지에 인형처럼 안겨 있었다.
“세희야, 괜찮다고 짐이 말하지 않느냐?”
녹아내릴 것 같은 말투는 난생처음 들었다. 자신에게도 저런 말투를 쓴 적이 없던 황제였다. 황제는 새초롬하게 앉아 눈을 내리깔고 있는 이세희의 눈가를 손등으로 닦아주었다. 이세희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허벅지에 올린 채로, 얌전히 그 손길을 받고 있었다. 천하의 이세희가 말이다. 왜 그런지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으나, 이세희를 안고 있는 황제 앞엔 이세희의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 앞에선 차마 황제에게 대들 수 없었는지, 이세희는 움찔거리지도 않았다. 긴 머리카락은 황제의 손가락 사이에 파고들었다. 황제가 이세희의 쏟아지는 긴 앞머리를 쓸어 올려주었다. 그러자 사슴같이 흰 목덜미에 남은 황제의 입술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부인의 얼굴이 달아오르고, 손이 벌벌 떨렸다. 이세희는 그게 싫었는지 황제의 널찍한 품에 파고들며 그의 귀에 대고 그만이 들을 수 있게 속삭였다. 그 소리를 듣던 황제가 소리 없이 웃었다. 이세희의 허리에 감긴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 모든 걸 눈으로 확인하자, 태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참해졌다. 설렘으로 달궈지던 가슴은 차갑게 식어갔고, 등 뒤로 식은땀이 배었다. 당장이라도 아버지에게 달려가 이세희를 내려놓으라고 꾸짖고 싶었으나, 태윤은 눈을 내리깔며 자신의 자리로 걸어갔다.
“왔구나, 윤아.”
황제가 입을 열어 아들을 반겼다. 황제에게 어쩔 수 없이 교태를 부리던 이세희가 반사적으로 태윤을 보았다. 아버지의 안위를 걱정하는 눈이 매섭게 떨리고 있었다. 물기가 축축하게 서린 갈색 눈에 뜨거운 응어리가 목구멍을 타고 오르는 것 같았다.
“현령은 괜찮더냐?”
태윤은 충직한 신하이자 효심 깊은 아들로 돌아온 얼굴로 대답했다.
“예. 태의가 와서 그를 보살펴 주었습니다.”
이세희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긴장이 탁 풀린 몸이 무너지자, 황제가 웃음을 터트리며 이세희의 몸을 바짝 당겨 안았다. 여유롭던 손은 이세희의 허벅지와 엉덩이 주변을 주물럭거렸다. 습관인 듯, 황제는 무의식적으로 행동했고 이세희도 익숙해졌는지 그를 내버려 두었다. 부끄러웠는지 황제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제 울지 말거라. 알았느냐?”
황제가 이세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세희가 아주 작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폐하.”
흡족한 얼굴로 웃은 황제는 식은 차만 어색하게 홀짝이는 현령의 부인을 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자 부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더니 몸까지 덜덜 떨렸다. 참으로 가여운 모습에 태윤은 자꾸만 시선이 부인에게 닿았다.
“오늘 밤은 궁에 머물다 가게나. 현령이 나아지는 걸 보고 나야 세희도 마음을 놓을 테니까.”
부인은 거부하지 않았다. 아니, 거부할 수가 없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의 명령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부인이 떠났다. 도망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노골적으로 큰 손으로 아들의 몸을 더듬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저 멀리 나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나자, 이세희는 진저리를 치며 황제의 품에서 빠져 나오려 했다. 물론, 황제는 길고 두툼한 팔로 이세희의 허리를 휘어 감고 자신에게 다시 당겼다. 그 우악스러움에 태윤은 손끝을 움찔거렸다. 이 모습을 계속 봐야 한단 말인가. 암담함에 눈앞이 흐려졌다.
“어머니 앞에서는 만지지 말란 말입니다!”
이세희가 버럭 소리를 쳤다. 부들부들 떨리는 얼굴이 모멸감에 물들었다. 황제는 아, 하고 짤막한 소리를 내더니 눈웃음을 지었다.
“짐의 손이 그냥 닿는데 어쩌지.”
이세희는 달아오른 눈으로 황제를 노려보았다. 긴 머리카락이 나부끼며, 뚜렷하게 드러나는 요요한 눈빛에 황제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여러 번 겪은 상황이 다시 도래하려 하자, 이세희는 황제의 얼굴을 밀치고 화를 냈다.
“싫다고 하지 않습니까! 폐하는 시도 때도 없이 신첩에게 이러고 싶으십니까?”
황제는 발버둥치는 이세희를 귀엽다는 듯 보았다. 그러나 그 웃음이 길어지기도 전에, 황제는 거친 손길로 이세희를 바닥에 내던졌다. 쿵, 하고 제법 큰 소리가 나 태윤이 깜짝 놀라 황제를 보았다. 아바마마, 하고 띄엄띄엄 불렀으나 황제는 들리지도 않는지 저벅저벅 움직여 도망가려는 이세희의 머리채를 잡고 당겼다.
“아!”
이세희가 울부짖었다.
“싫어, 놔…! 하윽…!”
황제는 자신을 밀치는 손목을 잡아 뒤로 틀었다. 뼈가 뿌득거리며 뒤틀렸다. 이세희가 소리도 못 내고 고개를 숙이며 바들바들 떨었다. 길고 날씬한 몸이 고통에 바르작거렸다. 황제는 열기가 움트는 눈으로 이세희의 뒷모습을 지그시 관찰하다, 입을 열었다.
“잘해줘도 싫다 하고, 못 해줘도 싫다 하니…. 짐도 짐의 마음이 가는 대로 할 것이다. 어차피 무슨 짓을 한들, 세희 넌 싫다고 할 테지.”
그 소리에 이세희가 숨을 헐떡였다. 황제를 뒤돌아보려 하는지 목에 힘이 들어가고 핏줄이 곤두섰다. 이세희의 완벽한 패배에 태윤은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질끈 감고 돌렸다. 주먹이 이세희의 몸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겁탈당하려는 이세희를 지켜줄 수 없는 자신이 너무 한심스러웠다. 도망가고 싶어서 발끝이 움찔거렸다. 아버지를 말릴 수도 없다는 사실이 참담해, 태윤은 눈을 끝까지 뜨지 못했다. 그저 그들의 거친 대화를 듣기만 했다.
아흑, 하고 소리 내어 울던 이세희가 소리를 질렀다.
“신첩이 이러니, 폐하를 싫어하는 겁니다! 폐하만 아니었으면, 제 가족은….”
이세희가 아이처럼 목 놓아 엉엉 울었다. 서러움에 복받쳐 우는 소리가 너무 구슬퍼, 태윤은 눈을 힘겹게 떠 이세희를 보았다. 이세희의 옷이 반쯤 벗겨져 나신이 보일락 말락 했다. 그의 둔부는 반쯤 허공에 드러난 상태였는데, 포도알처럼 둥글고 하얀 엉덩이는 황제의 손아귀에서 주물럭거려지고 있었다. 이세희는 황제의 두툼한 몸에 짓눌린 채, 뺨을 바닥에 대고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폐하 때문입니다, 다! 네놈 때문에 나도, 내 가족도….”
이세희가 괘씸한 어투로 네놈, 거리는데 황제는 듣는 시늉도 하지 않고 냉큼 말했다.
“그래서 짐이 책임지고 너의 아비도 살려주고, 현령 자리에 앉혀 주었다. 네 동생들도 명문가에 시집을 가 며느리가 되었지.”
“누가 그런 걸 원했어? 우리 가족은 원하지 않았어!”
이세희가 울음을 꾹 누르며 외쳤다. 황제는 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리더니 이세희의 바지를 찢어버렸다. 비단 옷이 단숨에 넝마가 되었다. 어젯밤 정사의 흔적이 가득 남은 이세희의 낭창한 다리가 햇볕 아래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태윤의 눈은 먹물이 번져가듯 어두워졌다.
보고 싶지 않다. 듣고 싶지 않다. 이대로 도망가고 싶었다. 태윤은 이를 억세게 물었다.
그러나 도망간다 한들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 지켜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지키는 게 정말 도리에 맞단 말인가? 태윤은 머리가 혼란스러워 터질 것 같았다.
황제는 포기를 모르고 도망가려 드는 이세희의 두 손목을 잡고 바닥에 눌렀다. 바닥에 엎드려진 채, 손목까지 눌린 이세희는 “싫어….”라고 말하며 헐떡였다. 황제는 이세희의 귓가에 고개를 바짝 대고 입술을 달싹였다.
“이곳은 짐의 나라다. 너, 너의 가족. 모두 나의 소유란 뜻이지.”
“누가 네 거야?”
이세희가 뾰족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황제는 건방진 이세희의 태도가 좋았는지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귀히 여기는지 눈에 사랑이 가득이었다. 태윤은 그 위화감에 고개를 돌렸다.
“폐하가 다 망쳤습니다. 전부! 그래 놓고 이제 와서 책임을 지셨다고요? 애초에 그러지 마셨어야죠!”
서러움을 못 이겨 이세희가 바득바득 이를 갈며 말했다. 황제는 침음하더니, 이세희의 뺨에 입을 쪽 맞추었다. 이세희가 싫었는지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입술이 벌어지고, 더운 숨이 헐떡여 나왔다. 이세희의 시선은 갈 곳을 잃고 헤매다가, 이내 태윤의 가죽 신 앞코에 닿았다. 태윤도 이끌리듯 눈을 내려 이세희를 보았다. 눈가가 새빨갛게 물든 채 이세희가 울고 있었다. 아비에게 꽉 잡힌 손목은 빨갛게 변했고, 입술 또한 누군가에게 빨린 것처럼 젖어 있었다. 하지만 야릇해 보이지 않았다. 달래주고 싶은 얼굴이었다. 태윤은 침울하게 젖은 얼굴로 금세 울 것 같은 눈으로 이세희를 보았다. 그 눈빛에 눈이 흔들리던 이세희는 다시금 다가오는 황제에 몸을 덜덜 떨었다.
“흑….”
이세희가 입술을 꾹 깨물고 울음을 뚝뚝 떨군다. 황제는 이런, 하고 짧게 중얼거리더니 음욕에 물든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그러면 망쳐만 줄까? 정말 그걸 원하느냐? 아무것도 주지 않고, 그저 망쳐만 주는 삶을 원해?”
“…애초에 하지 말란 뜻이었습니다.”
“만약에 내가 널 그 자리에서 발견하지 않았다고 치자고.”
황제가 심드렁한 어투로 말했다. 황제가 아니라, 인간 태공다운 날것의 말투였다. 태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태공은 굳어가는 이세희의 뺨에 입술을 문지르다가 나긋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돈 벌어서, 동생들 혼례 시켜준다고 치자. 그래서, 네 동생들이 지금처럼 안락한 명문가에서 아이 낳고 행복하게 살았을 것 같으냐? 너의 어미는 그래도 너의 아비에게 사랑을 받았지만, 정말 너의 동생들은 지아비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았을 것 같아? 아닐 걸. 절대 아니지…. 너도 잘 알잖아. 천민들이 어떻게 비참하게 살아가는지, 죽어 가는지.”
이세희는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짐승만도 못하게 살다가, 죽었을 텐데? 그걸 원했던 거냐?”
황제는 이제 반항의 의지를 상실한 이세희의 상체를 마음껏 더듬었다. 뾰족하게 곤두선 유두를 꼬집고, 그의 어깨를 이를 세워 물었다. 이세희는 아픔에 상체를 안으로 말았다. 손가락이 안으로 곱아들며 딱딱한 바닥을 긁으려 들자, 태공이 깍지를 껴 저지했다. 이세희의 입술이 벌어지더니 울음과 함께 묘한 신음이 나왔다. 황제가 이세희의 유두를 거칠게 비튼 것이다. 유두 끝에 피가 몰려 새빨갰다.
그 상태에서, 황제가 귀에 대고 쐐기를 박았다.
“그 얼굴이 어여뻐, 짐이 응당 맞는 것들을 하사했으니 그대는 그저 받으면 돼.”
“…흑….”
이세희가 눈을 감고 울음을 터트리자 황제가 이세희를 끌어안더니, 울지 말라고 달랬다. 이세희는 의지를 상실한 듯 보였다. 황제의 두툼한 손가락이 이세희의 둔덕에 들어가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여리고 부은 점막이 손가락 끝에 비벼지자 이세희가 헐떡이며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이세희를 바닥에 엎드리게 하더니, 그 뒤에 무릎을 대고 앉아 자지를 꺼내었다.
“네 부모는 현령으로 부유하게 살 것이고.”
“아흑….”
황제의 귀두가 이세희의 구멍에 닿더니, 망설임 없이 꾸욱 눌렀다. 주름이 펼쳐지고, 열상이 남은 안으로 들어오자 이세희가 눈을 크게 떴다. 윤활유도 없이 그저 들어오는 뭉툭한 자지에 이세희가 손을 뒤로 뻗어 황제를 밀어냈다. 황제는 그 손을 낚아채 억지로 비틀어 구멍으로 파고드는 자지를 강제로 만지게 했다. 주름이 펴지고, 그 펴진 입구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손가락에 닿자 이세희가 소리 내어 울었다.
“하윽, 아…. 싫어…!”
“그리고 네 동생은 지아비의 사랑을 받는 유일한 처가 되어, 자식을 낳았지. 남은 동생 둘도 행복하게 살아갈 거야. 그런데, 내가 망쳤다고? 천민인 너를 내가 어여삐 여겨, 이 자리까지 데려와줬거늘.”
“흐윽…!”
황제는 자꾸만 곱아드는 이세희의 검지와 중지를 펴, 완전히 벌어진 입구를 만지게 했다. 이세희는 흐느껴 울며 황제의 자지가 박히는 입구를 억지로 만져야 했다. 원래는 촘촘한 주름이 있었을 구멍은 이제 주름 하나 없이 매끈하져 펴졌고 퉁퉁 부어 뜨거웠다. 검붉은 자지가 박힌 회음부가 온통 붉게 물들어갔다.
“내가 널 망친 게 아니야, 세희야.”
“아아…!”
황제는 반쯤 남은 자지를 세게 박았다. 이세희의 등에 황제의 배가 닿았다. 황제는 묵직한 근육질의 몸으로 이세희를 덮었다.
“네 구멍 덕분에 너의 가족이 행복해진 거야. 알아들었어? 네 예쁜 얼굴과, 음, 구멍 덕분에…!”
“아아, 아…! 아, 너무…!”
이세희는 푸욱, 하고 꽂히는 자지에 말을 잇지 못했다. 건성으로 풀고 들어온 자지에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구역질이 치밀고, 아래가 쪼개지는 통증에 이세희는 결국 황제의 품에서 실신 직전까지 이르렀다. 황제의 것은, 너무 크고 두꺼웠다.
“그러니까 더 예쁘게 굴어봐.”
황제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이세희의 목덜미를 굶주린 것처럼 빨아들였다. 이세희의 신음이 차츰 얇아졌다. 입안으로 빨려 들어간 하얀 살이, 혀에 쓸리고, 가지런한 치아에 갓 나온 물려 납작해졌다. 이세희가 눈을 감고서 하아, 소리를 내며 황제의 상체 안에 욱여져 바들바들 떨었다. 목에서부터 시작되는 고통에 떨림은 전신으로 이어졌다. 본능적으로 엉덩이에 힘이 들어가고, 황제의 자지를 안으로 끌어당기며 조였다. 살이 가득 맺힌 황제의 입안에서 묵직한 신음이 흘러나와 이세희의 보들보들한 살에 미끄러졌다.
“으응, 아….”
황제의 오므라든 입술에서 쭈웁, 쭙, 하고 살을 빠는 소리가 들리고, 그 뒤를 이어 이세희의 붉고 여린 내벽을 꾸욱, 꾹 누르는 젖은 소리가 이어졌다. 태윤은 거의 보이지 않는 이세희를 보려 노력했으나, 보이는 건 황제의 듬직한 등과 어깨에 비해 날씬한 허리, 그리고 이세희의 다리 사이에 얽힌 다부진 다리였다. 황제의 휘황찬란한 용포 아래 이세희의 상앗빛 다리가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흐읏, 아으…! 아!”
황제가 후우, 하고 여유롭게 신음을 흘린 직후, 이세희의 양손에 깍지를 끼고서 허리를 세게 움직였다. 이세희의 발끝이 땅에 닿았다. 통증을 참을 수 없어 발악하는 발가락이 바닥을 긁어내며 황제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게 보였다.
“아아아!”
그러나 황제가 망치로 정을 박듯 곧장 꽂아 넣자 이세희의 발가락이 툭 미끄러졌다. 두꺼운 자지가 아주 좁고 연약한 내부에 파고들자, 이세희의 상체도 바닥에 무너졌다. 이세희의 긴 머리카락이 해초처럼 바닥에 늘어졌다. 황제의 큼지막한 손아귀에 잡힌 이세희의 손가락이 안으로 오므라들었다.
“폐하, 아프… 으… 아아…!”
“세희야, 정말 아프냐?”
황제가 삽입을 이은 채로 고개를 숙여 물었다. 이세희의 긴 머리카락을 거두도 상체를 띄우자, 이세희의 멍한 얼굴이 보였다. 태윤은 처음 보는 이세희의 얼굴에 눈조차 깜박이지 못했다. 붉은 입술은 달싹거리나 신음도 내지 못했다. 쾌락인지, 아픔인지 모를 감정이 차오른 두 뺨과 눈가가 무척 요염하게 붉었다. 두 눈가에 고였던 눈물을 꽃잎처럼 바닥에 흩어졌다. 이세희는 태윤의 다리를 보면서도, 누구를 보는지 모를 탁한 눈을 깜박이며 중얼거렸다.
“아파…. 으응…!”
황제가 이세희의 배에 팔을 두르고서, 자신에게 바짝 당겼다. 찔꺽, 거리는 소리가 아주 느릿하고 반복적으로 들렸다. 태윤은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의 품에서 무력하게, 울음과 신음만 흘리는 이세희는 아름다웠으나 그만큼 아파 보였다. 아프다고 호소하는 입술은 진심이었다. 아픔에 초점까지 풀려 정신없이 허공을 더듬는 맑은 눈에 가슴에 울혈이 맺혔다.
그러나 그런 자를 품에 안고도, 황제는 만족하지 못하고 거친 신음을 흘리며 이세희를 괴롭혔다.
“폐하, 흐윽, 정말 아픕니다…. 제발, 그만….”
이세희가 오열하며 애원했다. 태윤은 그 소리에 정신없이 이끌려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자세를 바꾸어, 황제의 위에 올라탄 이세희가 있었다. 황제는 바닥에 나른하게 앉은 상태로 이세희를 위에 앉혀두고, 유두를 양쪽에서 꼬집었다. 얼마나 물고 빨았는지, 살갗이 까져 붉게 달아오른 유두가 황제의 구릿빛 손가락에 뭉개졌다. 끝을 손톱으로 꾹 누르자 이세희의 입술에서 교태 섞인 신음이 흘렀다.
“읏, 아파….”
이세희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헐떡였다. 목젖이 위아래로 움직이며, 하얀 목에 곤두선 핏줄 또한 요동쳤다. 땀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이 버드나무 잎처럼 흔들거렸다. 황제는 그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꽉 쥐고서, 자신 쪽으로 당기며 입을 맞추었다.
“으응… 음….”
눈물을 흘리던 이세희가 황제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입술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눈까지 꼭 감고, 울음을 삼키며 입을 맞추는 행동에 태윤은 주먹을 쥐고 고개를 숙였다.
“폐하, 어제도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세희가 없는 힘까지 모아 애원했다. 반항이 먹히지 않으니 비는 것이었다.
“그제도 했지.”
황제가 제발 그만해 달라고 간접적으로 부탁하는 이세희의 애원에 농으로 대처하며, 두 손을 내려 이세희의 하얀 둔부를 꽉 잡았다. 두 손으로 뽀얀 엉덩이를 벌리자, 거기에 반 정도 박힌 검붉은 자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반들반들하게 젖은 자지는 이세희의 좁은 구멍을 익숙하게 들락날락했다. 그때마다 이세희의 회음부는 젖어가고, 붉게 달아올랐다. 황제는 찌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구멍을 손끝으로 더듬다가, 이세희의 상의를 들어 올려 엉덩이를 주물럭거렸다.
“늘 해둬야 구멍이 적당히 풀어져서 안 아플 것이다. 짐이 다 세희 너를 배려해서 하는 것이니…. 아프다고 그만 울거라. 정말 아프기만 한 것도 아니니.”
이세희는 자신을 앉혀두고,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이는 황제의 허벅지 위에서 잘게 숨을 뱉어냈다. 더 이상 말을 섞을 힘도 없는지 이세희는 그대로 고개를 황제의 어깨에 파묻었다. 황제는 체념 섞인 이세희의 행동에 흥분이 차오른 신음을 뱉어냈다. 자세가 불편했는지, 그는 혀를 차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앗!”
이세희가 넘어질 일은 없었다. 황제의 말뚝 같은 자지는 이미 이세희의 엉덩이에 깊숙이 박혀 있었고, 황제는 이세희가 넘어지지 않게 상체를 꼭 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황제가 성큼성큼 움직일 때마다 박힌 자지가 멋대로 내부를 쑤시자, 이세희의 신음이 점차 가늘게 변해갔다.
태윤은 황제의 등에 감긴 이세희의 상앗빛 팔을 보았다. 어제 묶여 있던 터라, 두 손목엔 여명 같은 멍이 남아있었다. 두 손은 넘어질까 두려워, 얼떨결에 황제의 옷자락을 꽉 잡았다. 황제의 허리 바깥으론 이세희의 다리가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흣, 아, 아앗, 아!”
황제가 걸음을 옮겨, 안을 쿡쿡 찌를 때마다 이세희의 신음이 갈라졌다. 아픔과 쾌감이 공존하는 목소리가 청예전에 물들었다. 금군들은 요동도 없이 그 자리에 서서 황제가 이세희를 짓누르는 소리를 들었다. 태윤만이, 그곳에 속하지 못하고 모멸감에 덜덜 떨며 이세희가 침상 같은 의자에 눕혀져 황제에게 강간당하는 장면을 빠짐없이 보았다. 이세희의 두 다리가 황제의 어깨에 걸쳐지고, 황제가 이세희를 품에 가둔 채 허리를 난잡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하아, 하아…, 세희야….”
“흐읏, 읏, 아…! 아앗, 아! 폐하, 아아…. 아흑…!”
황제의 신음이 드문드문 구름처럼 떠다니고, 이세희의 애원 섞인 울음이 밑에 짙게 깔렸다. 태윤은 너무나 다른 층 사이에서 괴로움에 떨며, 이를 억세게 물었다.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들며 살점이 뜯겼으나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세희의 울음과 신음만이 잔재하여, 모든 감각이 사라졌다.
*
몸이 흔들거렸다. 미약한 움직임에 정신을 잃었던 이세희가 으읏, 하고 나약한 신음을 내뱉었다.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몸을 감싸던 팔에선 힘이 더욱 들어갔다. 놓지 않겠다는 의지가 진하게 밴 손길에 이세희의 눈꺼풀이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뿌연 시야라, 제대로 보이지 않아 눈에 힘을 줘야 했다.
그러나 황제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린 몸은 쉽사리 힘을 주지 못했다. 눈을 겨우 뜬 것도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상태였다. 며칠 내내 황제에게 박히고, 물리고, 빨린 몸은 기력이 없었다. 목은 누가 내부를 긁어 놓은 것처럼, 타액만 삼켜도 따끔했다. 눈을 감고 열기가 맺힌 숨을 내뱉는데, 몸이 아주 조심스럽게 폭신한 곳에 눕혀졌다. 상냥하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혹여 자신이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덜덜 떨리는 손길에 이세희는 눈을 들어 올리려 했다.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손길에 자연스레 시선이 위로 향하는데, 투박한 손이 눈가에 닿았다. 굳은살이 박인 꽤 거친 손이었다. 부드러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 손이 자신을 데려온 걸까?
그러나 너무 부드러웠다, 이 자의 몸은 오후의 햇살에 데워진 몸을 가지고 있었다. 딱딱하지만, 온기에 데워진 몸에 더 기대고 싶어졌다. 이세희가 입술을 달싹여 가지 말라고, 옆에 있어 달라고 부탁하려 찰나 그자가 쉿, 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무세요. 다정한 목소리가 자신을 달랬다. 그자는 눈을 가려준 것도 모자라, 손을 들어 호흡이 불안정한 이세희의 가슴팍을 토닥거렸다. 일정한 간격으로, 힘을 뺀 손으로 재워주는 손길에 이세희의 호흡은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잊고 있었다, 이 손길을. 궁에 온 후로는 늘 혼자였으니까. 그 사실에 문득 서러워져, 눈가가 차츰 빨개지고 눈물이 맺히자 그자가 무거운 숨을 내뱉었다. 낮고 안정감이 있는 중저음으로 그자가 말했다.
울지 마세요. 저는 아무것도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세희는 그 말에 슬쩍 웃었다. 이거라도 괜찮다는 말을 해주려다가, 이세희는 정신을 잃었다.
아주 오랜만에 가족들을 보았다. 아버지는 물을 길러 가셨고, 어머니는 어리고 올망졸망한 여동생들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 자신은 아파서 가족들이 함께 자는 곳에 누워 있었다. 어제 땡볕에서 얼굴과 몸을 가리고 일을 했더니, 더위를 먹었는지 열이 오른 것이다.
어릴 때, 열이 올라 아파서 훌쩍거리며 울고 있으면 부모님이 다가와 꼭 가슴을 두들겨 주었는데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괜찮니, 세희야?’
어머니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언제쯤 열이 떨어질까 걱정하며 어린 뺨을 매만졌다. 동생인 세령이가 다가와 나도 오라버니 만질래, 하며 굴러오면 어머니가 오라비 아프게 하지 말라며 툭툭 밀어냈다. 그러다가 까무룩 잠이 들다가 자신을 만지는 투박한 손길에 눈을 뜨면 아버지가 있었다. 밤이 찾아온 작은 방에 우두커니 앉아있던 아버지는 말없이 씩 웃으며 손에 들린 고기를 보여주었다. 없는 형편인데도 아들이 아픈 걸 알자, 종일 일해 번 돈을 털어 고기를 사온 것이다. 고기를 잘 못 먹는 사정인 걸 아니, 이세희는 그러지 말라고 툴툴거리면서도 아버지의 애정이 좋아 말없이 웃었다. 열이 올라 붉어진 아들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예쁘장하게 빛나자, 아버지는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만져주며 속삭였다.
‘어디 가서 절대 얼굴 보여주면 안 된다. 그때 무당이 한 말 기억하지?’
‘네, 아버지.’
기억해요…. 그 말을 중얼거린 이세희는 눈을 감았다. 하루 푹 자고 나니 몸은 한결 나아졌다. 아버지가 잠들어 있는 걸 보던 이세희는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싸늘한 바람에 몸이 떨렸으나, 허기가 져 참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사온 고기가 먹고 싶지 않을 만큼 입맛이 없어서 하루를 공복으로 넘겼다. 그러고 다음 날이 되니 너무 배가 고팠다. 과실수가 심어진 작은 정원을 지나, 군방으로 향했다. 부싯돌을 이용해 초에 불을 붙이고, 은은한 불빛에 의지해 고기를 넣고 끓인 간소한 국을 먹었다. 조용히 홀로 허기를 채우는데, 저벅저벅 흙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고기를 우물우물 씹으며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올해 14살이 된 여동생 세형이 있었다. 세희는 말없이 그릇을 내밀었으나, 세형은 고개를 저으며 거절하고 군방으로 들어왔다.
‘왜 왔어?’
더 자도 된다는 뜻으로 은근히 물어보는데, 세형이 세희를 빤히 보더니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굳이 저 때문에 오라버니가 고생해서 돈 버실 필요 없어요. 어차피 정해진 혼인이니, 돈 좀 더 모은 후에 가면 되어요.’
세형은 어제 더위 먹은 세희가 쓰러진 게 신경 쓰였나 보다. 얼굴에 근심이 한가득이었다. 세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깃국을 후루룩 마시면서 뜰 근처에 있는 작은 방을 보았다. 불만 은은하게 들어온 방은 조용하다. 12살, 6살 동생들이 잠이 깨지 않게 살금살금 나온 모양이었다. 그게 묘하게 귀여워 픽 웃었다. 세형은 세희가 아직도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게 기분이 나빴는지 볼에 바람을 넣었다. 세희는 키득거리며 세형의 젖살이 남은 뺨을 꼬집고서 다정하게 말했다.
‘네 서방이 될 서혁은 좋은 애잖아. 그런 애를 놓치면 안 되지.’
세희가 어깨를 으쓱였다. 세형은 매몰차게 세희의 손을 밀쳐내며 투덜거렸다.
‘어차피 걔는 저한테 홀라당 빠져서 저랑 혼인하기로 일찌감치 약조한 애여요.’
‘오라비는 걔가 널 버리는 걸 걱정하는 게 아니야.’
세희의 묵직하고 고요한 목소리에 세형은 움찔거렸다. 오라비인 세희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세희만큼은 아니지만, 고운 외모의 세형을 노리는 사내들이 있었다. 혼인 전의 여인이 겁탈을 당하면 강제로 그자와 혼인을 맺어야 하는 민간의 법이 있었으니, 세희는 그게 싫어 세형을 어릴 때부터 좋아한 서혁에게 보내기로 결심한 것이다. 실제로 세형을 노리는 자들이 몇 번 있었으나, 그때마다 쫓아온 세희가 두들겨 패 보냈다. 그 덕분에 세형이나 세령, 세연은 무사히 클 수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자신이 돌봐줄 수 없는 노릇이기에, 세희와 부모들은 적당한 혼처만 정해지면 아이들을 보낼 생각이었다. 모르는 이에게 팔려가듯 보낼 바에야, 아는 자에게 보내 가난하더라도 행복하게 사는 게 아이들에게 더 나은 삶이라고 생각했다.
세희는 손을 들어 장난스럽게 세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형은 ‘저 어린애 아니에요!’라며 표독스럽게 말했으나, 오라비의 손길이 좋았는지 가만히 있었다.
‘얼른 혼인해. 그래야 나도 편하게 살지.’
세형, 세령, 세연 세 자매는 오라비를 너무 좋아해 오라비와 떨어지면 엉엉 우는 울보들이었다. 일만 나가려고 하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우는 동생들이 귀찮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는 오라비를 보며 세형은 배시시 웃었다. 세형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준 세희는 마저 허기를 채웠다.
늘 그렇듯, 세희는 얼굴을 꼼꼼히 가렸다. 일을 할 때, 햇볕을 피하기 위한 차양 같은 것을 머리에 썼다. 눈가 아래는 두툼한 천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고 나서야 세희는 아버지와 함께 길을 나설 수 있었다. 세형의 혼례, 그리고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선 아버지와 같이 일을 할 수 없었다. 각자 맡은 일을 해야, 돈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세희는 어깨에 지게를 이고 홀로 길을 걸었다. 세형을 위해 돈을 모으고 있다지만, 턱도 없이 적었다. 서혁이야 얼마든지 기다려준다고 했지만, 서혁의 부모는 그래도 어느 정도의 돈을 모아오길 원했다. 몇 년 전에는 소작을 했으나, 이제는 소작에서도 쫓겨나 지주가 일이 많을 때 대신 일을 도맡아 해주는 걸로 돈을 벌고 있었다. 그 돈은 지금 차곡차곡 모여 어느 정도 모은 상태였다.
힘든 일을 도맡아 돈을 벌지만, 세형이 혼례 생각을 하면 마음은 편했다. 오늘도 지주 집에서 계곡에 있는 맑은 물을 떠오라는 말에 따라, 지게를 이고 계곡까지 가 물을 길어왔다. 금세라도 어깨가 빠질 것 같고, 다리가 후들거렸으나 세희는 이를 악물고 몇 번이고 그 일을 반복했다. 밥을 주는 대신 돈을 더 달라고 부탁한 터라 밥도 먹지 못해 배가 고팠다. 거기에 이 더위에 얼굴까지 가리고 일을 하려니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다시 열이 오를 것 같아, 세희는 걸음을 멈추고 지게를 내렸다. 무릎에 손을 대고 호흡을 고르고 나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허리춤에 찬 물병을 들었다.
물을 마시기 위해선 얼굴을 가린 천을 내려야 했다. 주변을 훑어보던 세희는, 으슥한 곳에 고개를 대고 천을 내렸다.
그때, 세희를 지나쳐 오던 짙은 푸른빛의 철릭을 입은 한 사내가 세희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차양처럼 내려온 허름한 것을 머리에 쓰고 있어 어둑한 그림자가 우거졌으나, 세희의 수려한 턱선과 콧날, 그리고 요사스럽게 붉은 입술까진 가리지 못했다. 햇볕을 피하기 위해 천민이나, 평민들이 쓰거나 두르는 두건과 다르게 그는 아주 고급스러운 것을 머리에 쓰고 있었다. 평범한 사모나 문라건은 아니었다. 멱리와 비슷하나, 좀 더 짧았고 얼굴을 가리는 면사도 길이가 짧아 턱에서 찰랑거렸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 사내들이 쓰는 차양 같은 것이었다. 더불어 사내는 부채를 흔들고 있었는데, 그것을 코 아래까지 대고 얼굴을 가린 채로 묘한 웃음을 짓더니, 손가락을 허공에 까닥였다. 사내의 손짓에 뒤에서 따르던, 비슷한 철릭을 입은 사내들이 쫓아와 얼굴을 바짝 갖다 대었다. 사내가 부채를 내리더니, 지적이고 부드러운 중저음으로 속삭였다.
“저 자를 네 집으로 불러라.”
명령을 받은 이는 눈치가 빨랐다. 고개를 숙이고, 사내의 흥미로움이 서린 얼굴을 눈여겨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물을 가져오라 말을 하겠습니다.”
그 말에 사내는 흡족하게 웃으며, 부채를 살랑거리더니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딱 보아하니 천민이야. 돈을 넉넉히 줄 터이니, 꼭 오라 하라.”
그리고 눈을 돌려, 아름다운 눈웃음을 지은 사내는 면사를 부채로 들어 올리며 그를 쏘아보았다. 날카로운 시선에 명령을 받은 이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애써 대답했다.
“저 자가 어떤 이인지 알아오겠습니다. 저리 아름다우니, 마을 사람들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러겠지.”
자신을 노리는 사내들의 대화도 모르고, 이세희는 다시 주섬주섬 얼굴을 가렸다. 사내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여유롭게 이세희를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도, 뒤를 돌아보며 이세희의 굳건하고 날씬한 뒷모습을 제 맘대로 감상했다. 얼굴을 가린 게 퍽 귀여웠는지, 소리 내어 웃던 사내는 웃음기 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암행을 나오길 잘했구나. 저런 보옥도 발견하고.”
명령을 받은 이는 떠났고, 남은 두 남자가 훤칠한 사내의 뒤를 따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신분도 천한데….”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자신이 보옥을 발견했다는 사실에 뿌듯하게 웃은 사내, 태공은 허리에 손을 올리고 호쾌하게 말했다.
“저런 건 누가 채가기 전에 내가 가져야 해. 아름다운 건, 누구라도 탐내기 마련이니까.”
사내의 눈이 안광에 휩싸여 번들거렸다.
“난 남이 손댄 건 질색이야. 내가 손댔다 버리면 몰라도.”
그러고서 부채로 입가를 가린 사내가 눈웃음을 지었다. 좋아 어쩔 줄 모르는 흥분에 감싸인 얼굴이, 소년같이 맑았다. 그러나 뒤에서 따라오던 자들은 사내의 미소에 식은땀을 흘렸다. 예사롭지 않았다. 사내가 저런 식으로, 해사하게 웃는 횟수는 적었지만 그때마다 파란이 일어났다. 새로운 파란이 일 것이라는 강한 직감이 들었고 사내들은 파란을 맞을 준비를 위해 재빠르게 움직였다. 사내만이 태연자약한 태도로 부채로 바람을 만들어내며 미소를 한껏 머금었다.
“날이 덥군.”
밤이 늦게 오겠어. 사내는 건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해가 동에서 서로 지며 그림자가 짙어질 무렵 이세희는 땀에 완전히 절여졌다. 계곡은 천민들이 모여 사는 산턱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그곳부터 황족이나 관료들이 모여 사는 부촌까지 옮겨가려면 꽤 시간이 지체되었다. 무게가 꽤 나가는 지게에, 물을 담은 항아리까지 이고 가야 했으니 몸은 조금만 걸어도 땀이 뚝뚝 떨어졌다. 이세희는 얼굴까지 가리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지게를 진 어깨는 금방이라도 빠질 것처럼 아팠다.
얼굴을 가린 천을 내리고 땀을 닦아내고 싶었으나, 아버지의 세뇌 아닌 세뇌와 무당의 소름 끼치는 눈빛이 떠올라 이세희는 더위를 참아냈다.
이제 마지막 한 번이 남았다. 저택의 어르신이 부탁했던 일을 떠올리며 더운 숨을 몰아쉬는데 뒤에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세희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눈이 시릴 정도로 시퍼런 보라색 철릭을 입은 굳건한 신체의 사내가 서 있었다. 그는 얇은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이세희와 눈을 마주치기 위해 면사를 들어 올렸다. 이세희가 투명한 맑은 눈에 의한 빛을 띠고 그를 보다, 천천히 땅에 무릎을 대고 인사를 했다. 윤기가 줄줄 흐르는 비단 옷으로 그의 신분이 가늠이 되었다. 적어도 4품 이상의 관료다. 특히 저 솥뚜껑만 한 손이 어루만지고 있는 검의 손잡이를 보아하니 힘이 센 무관 같았다. 혹시 내가 뭘 잘못했나?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죽일 수도 있는 자라는 걸 알기에 이세희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직 세형이랑 세령이, 세연이가 있는데…. 고만고만한 나이대의 동생들을 생각하자 가슴이 덜컹거렸다. 자신이 잘못한 걸 찾아내기 위해 머리를 열심히 굴리던 이세희는 마음에 걸리는 것들을 대충 추측해 보았다. 저택에 드나들며 물이나 쌀 같은 걸 나르는 놈이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싫었나 보다.
하지만 이미 이곳에서 일한 지 좀 되었다. 또한, 일을 하기 위해서 아버지가 이미 자신에 대해 넌지시 얘기를 건네놓았다. 이세희가 어렸을 때 화상을 입었는데 목까지 흉한 흉터가 남았기에 높으신 분들이 보시면 괴이하게 여길 거라고. 그러나 자신을 닮아 힘이 좋고, 몸이 빠르니, 일은 잘해서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거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사실 마음에 안 들면 내칠 수도 있었으나 아버지가 워낙 이곳에서 성실하고 싹싹해 가능한 일이었다.
대충 말을 에둘러야겠다, 생각하며 입을 떼려는데 사내의 발이 자신에게 다가왔다. 깜짝 놀라 이세희가 벌벌 떠는데 사내가 대뜸 통보를 던졌다. 어림짐작해도 고기 몇 근은 살 수 있는 돈에 이세희는 눈을 크게 떴다.
“내 너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네, 네. 어르신, 무슨 일을 부탁하고 싶으십니까?”
이세희는 고기 몇 근을 살 수 있는 돈, 즉 어린 여동생 이세형의 혼례를 치를 수 있는 금액에 뛸 듯이 기뻐했다.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통보를 어서 가져가고 싶었다. 저것만 있다면…. 세형이는 무사히 혼례를 치를 수 있었다. 그리고 돈이 남는다면 그 돈으로 가족들과 고기를 배불리는 먹지 못해도 우리고, 또 우려내 고깃국을 며칠 먹을 수 있었다. 그 생각에 이세희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사내는 등 위로 피어오르는 이세희의 설렘에 웃음을 터트렸다. 제 앞날도 모르고, 기뻐하는 모습이 어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아까 이세희를 관찰하던 황제의 곁에서 지켜보았을 때도 피부가 무척 곱게 영근 것이 청년이나 앳되다는 게 느껴졌다.
저 사내는 오늘밤 황제의 후궁이 될 것이다.
무감한 얼굴로 이세희의 날씬한 뒤태를 눈여겨보던 남자는 통보를 발로 툭 쳤다. 묵직한 통보에 얼굴을 맞을 뻔했으나 이세희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사내가 무슨 일이든 시키길 바랐다.
“별 건 아니다. 네 아비가 여기서 유명한 물지기라고 들었다. 내 저택에도 물 좀 길어다오.”
사내가 무릎을 꿇었다. 이세희는 사내에게서 풍겨 나오는 향에 엉뚱한 생각을 늘어놓았다. 아, 관료들은 이 더위에도 체취가 좋구나. 바닥에 이는 흙먼지를 보는데, 사내는 이세희에게 이상한 말을 내뱉었다.
“그 전에 깨끗이 씻고 오거라. 알았지?”
몸에서 냄새가 나나? 일한 지 좀 되었으니, 땀내가 날 만했다. 이 높으신 분은 냄새가 나는 천민들을 싫어하는 듯했다. 이세희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르신.”
“물도 길어다 주고, 내 저택에서 쌀가마를 옮겨주면 돈을 더 주겠다. 자질구레한 일이 많아 돈을 두둑이 주는 것이다.”
돈을 더 준다는 말에 이세희는 천 안에서 활짝 웃으며 고개를 굽실거렸다. 사내는 이세희를 보며 나직하게 웃더니, 이세희에게 어서 가 보라며 손짓했다. 그는 자신의 저택 위치를 상세히 알려주고 나서 유유히 자리를 비웠다. 이세희는 사내가 주고 간 무거운 통보부터 챙겨 집까지 뛰어갔다. 지게와 항아리를 지고서도 이세희는 몸이 가벼웠다. 집에 가니, 어머니와 세형은 있지 않았다. 아마 어머니는 다른 부인의 집에 가서 바느질을 도와주고 있나 보다. 세형도 어머니의 일을 종종 거들곤 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세희는 돈을 정방에 잘 숨겨두고 어린 여동생 둘을 매만져준 후, 몸을 깨끗이 씻었다. 계곡은 집에서도 멀지 않았는데, 그 계곡은 얕은 시냇물처럼 집 인근까지 흘러와 씻는 건 어렵지 않았다. 몇 년을 입어 해진 옷 중 가장 깨끗한 옷을 꺼내 입고, 이세희는 다시 길을 나섰다.
그사이, 해는 좀 더 기울어져 더위가 식었다. 바람이 상쾌하게 불었다. 이세희는 얼굴에 쓴 천 안에서 그나마 아는 가락을 흥얼거렸다.
오늘은 날이 무척 좋았다. 어제보다 덥지 않았다. 일도 빨리 끝났고, 후한 어르신을 만나 큰 액수를 받았다. 쌀가마를 나르는 게 뭐가 어려울까. 기분이 좋아진 이세희의 발이 가벼웠다.
얼른 일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고기를 사가고 싶었다. 오늘 새벽에 먹은 한 끼가 고작이라, 배가 몹시 고팠다. 돌아가면 뜨끈한 쌀밥에 고기를 먹을 생각에 기분이 좋아져 입술 끝이 자꾸 올라갔다.
어르신의 집은 관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도 으리으리한 대저택이었다. 이세희는 부에 압도되는 기분에 움츠러들어, 지게를 꽉 쥐고 걸음을 옮겼다. 물은 군방에 있는 항아리에 넣어주었다.
“쌀은 저기에 있소.”
이 저택을 관리하는 늙은이가 꽤 많은 쌀가마를 어디에 옮겨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저택 입구에 있는 쌀가마는 군방 뒤에 있는 뜰에 옮겨주면 되었다. 뜰에는 이 저택의 노비들이 쓰는 작은 집이 있었다. 노비들이 쓴다고 해서 낡았을 줄 알았으나, 자신이 사는 집보다 훨씬 좋은 집에 이세희는 쓰게 웃었다. 이제 쌀을 옮기기 위해서 걸음을 옮기는데, 늙은이가 갑자기 자신을 보더니 손을 저지했다.
“잠시 기다리게.”
“지금 쌀을 옮기지 말까요?”
“내가 오면 나르게. 객이 오셔 종이 울렸으니, 맞으러 가야 해.”
그러고 보니 방금 전 종이 영롱하게 울렸다. 이세희는 군소리 없이 군방과 하인들이 머무는 집 사이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바람이 불어 땀이 맺힌 목덜미를 건드렸다. 땀이 식어가는 기분에 기분이 좋아져 눈을 감고, 천 안에서 흐릿하게 웃었다.
시원해. 이거 벗고, 땀 좀 식히고 싶다…. 이세희는 손끝으로 얼굴을 감싼 천을 만지작거렸다. 바람이 이파리를 쓸고 가는 소리가 정신없이 귀를 적셨다. 그 소리에, 누군가의 정갈한 발소리가 섞인 걸 알아챈 건 아주 뒤늦은 일이었다.
“응?”
의문이 들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뒤에서 다가온 이가 이세희의 입을 꽉 틀어막았다. 이세희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아, 하고 소리를 낼 여력도 되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힘을 자랑하는 사내의 팔에 휘어 감겨 그대로 무력하게 끌려갔다.
“으읍!”
입이 코부터 턱까지 잡혀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손을 뒤로 뻗어 저지하려 해도, 자신을 우악스럽게 잡은 사내의 팔에 상체가 옭매여 그럴 수 없었다. 숨을 쉬지 못해 점점 눈이 뒤집혔다. 이세희의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가더니,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발이 매섭게 바닥을 두들겼다.
“쉬잇…. 조용히 해야지.”
“흐으읍…!”
뒤에서 이세희를 안은 자가 웃음을 터트리며 이세희를 달랬다. 목소리가 매끄럽고 그윽했다. 듣기만 해도 그의 얼굴이 제멋대로 생각될 정도로 좋은 목소리였다. 도대체 누구지? 이세희는 숨을 쉬지 못해 멍해지는 머리로 생각해 보려 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숨을 쉬지 못한 탓에 머리가 아득해졌다. 그렇게 오락가락한 상태로, 하인들이 쓰는 집까지 끌려갔다.
“아…!”
정신을 차리게 된 건 사내가 이세희를 어떤 침상에 던진 후였다. 이세희가 고개를 들고 도망가려 들자, 사내가 뒤에서 이세희의 머리를 침상에 처박았다. 이세희가 손바닥으로 침상을 두들기며 발버둥치려 해도, 사내의 힘이 엄청나 이길 수 없었다. 머리채가 사내의 손아귀에 잡혀 두피가 뜯길 것 같았다. 처음 겪어보는 통증에 이세희의 몸이 바르작거렸다. 머리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로지 단 하나, 여기서 도망가지 못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명의 위협만이 머리에 맴돌았다.
사내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이세희의 반항이 멎길 기다렸다. 물을 기르며 생계를 이어왔다고 하더니, 정말 힘이 날뛰는 망아지처럼 좋았다. 슬쩍 만져본 몸은 근육으로 다져져 탄력적이고 탱탱했다. 만지기 좋은 몸은, 햇볕에 그을리지 못했다. 살결이 보드랍고 곱고, 뽀얗다. 햇빛도 절세미인을 감추지 못한 것이다. 사내는 입술을 벌려 소리 내어 웃었다. 머리카락이 천민답게 짧아 쥐는 재미가 없었다.
“머리부터 길러야겠구나. 머리가 긴 게, 더 예쁘겠어.”
“우웁!”
사내는 고개를 들려 하는 이세희를 강압적으로 저지했다. 숨을 적절하게 쉬게 해주고, 막길 반복하며 몸에 힘을 뺐다. 두 사람의 몸에서 땀이 주르륵 흘렀다. 창문을 열어놓아도 더위가 식지 않았다. 그리고 격렬하게 반항하는 이세희를 제압하다 보니, 사내의 몸도 흠뻑 땀으로 젖었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승천할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발버둥치는 이세희를 제압하는 기분이란, 끝내주었다.
침상의 보드라운 보료를 물어뜯는 이세희의 손끝에서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얼굴을 가린 천 때문에 숨 쉬기가 더 힘들었다. 이세희가 혼절 상태에 이르고 침상에 축 늘어지자, 사내는 망설임 없이 두 손목을 교차해 뒤로 고정시켰다. 그리고 눈가 아래부터 턱까지 가리고 있던 천을 잡아당겼다. 타액이 주르륵 흐르는 붉은 입술, 열기에 차오른 붉은 뺨…. 차례차례 이세희의 아름다운 얼굴을 훑어보던 사내가 탄성을 내뱉었다.
“정말 아름답군….”
그 소리에 이세희가 눈물 젖은 속눈썹을 꿈틀거렸다. 눈을 뜨려는 것이었다. 사내는 아직 자신의 얼굴을 보게 할 수 없어, 이세희의 눈가를 두툼한 손으로 가렸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이세희의 바지를 벗긴 후, 탄력적인 엉덩이를 한 손에 쥐고 주물렀다.
“으읏, 싫어… 아, 안 돼….”
이세희가 본능적으로 덜덜 떨며 쉰 목소리로 거부했다. 사내는 거친 신음을 이세희의 귓가에 흘려보냈다. 겁에 질린 이세희의 떨림이 더욱 커져갔다. 처음 겪는 이 상황이 무서운 듯, 이세희가 울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숨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몸을 더듬는 손길이 끈적했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미래의 일에 이세희는 애원했다.
“싫어…. 저, 저는 사내입니다. 이러지 마십시오, 어르신!”
이세희가 애원했다. 그러나 사내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세희의 귓불을 콱 깨물었다. 날카로운 송곳니에 말랑한 귓불이 씹히자 이세희가 흐윽,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 소리에 사내는 달래려는 것처럼 이세희의 귓불을 입에 넣고 살살 굴렸다.
“아앗….”
몸이 순간 오싹해졌다. 등부터 스치는 저릿한 쾌감에 이세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상했다, 이런 기분은. 싫었는데, 묘하게 아래가 움찔거리는 느낌에 이세희는 저절로 입을 벌리고 더듬거렸다.
“뭐, 뭘 하시려는….”
사내가 웃었다. 웃음은 점차 크게 확장되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하하하! 귓전을 때리는 날카로운 웃음소리에 이세희는 몸을 움츠리고 손을 꿈틀거렸다. 손목이 아릿하게 아팠다. 사내는 이세희의 바지를 아예 확 내려, 무릎에 닿게 하고 거침없이 둔부를 벌렸다. 이세희는 회음부를 더듬는 노골적인 손길에 몸을 굳혔다. 설마, 하는 가슴이 철렁이는 생각이 몸을 두드렸다.
“앗, 싫어…! 아파!”
사내의 손가락이 망설임 없이, 그 누구도 침입한 적이 없는 구멍에 들어왔다. 이세희의 눈이 질끈 감겼다. 아프다는 소리가 여러 번 튀어나왔다. 미치도록 아팠다. 겨우 손가락이 들어온 것뿐인데 마르고 좁은 구멍이 찢어질 것 같았다.
“어르신, 제발, 제발…! 이러지 마세요, 흐윽…! 저는…!”
여기서 더 당하면, 죽을지도 몰랐다. 이세희는 필사적으로 사내를 향해 애원했다. 아무리 천민이고, 글도 모르는 아둔한 자라 하여도 이세희는 이 의미를 모르는 게 아니었다. 사내는 자신을 강간하려 한다. 도대체 왜? 이해가 되지 않아 이세희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자신을 잘못한 게 없었다. 만약 잘못한 게 있다면 너무 가난해 돈을 아주 조금, 탐한 죄였다.
“도, 도, 돈은 다시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여기서…!”
“나는 돈이 필요 없다.”
사내는 딱 잘라 말하더니, 이세희의 귀에 대고 또박또박 말했다.
“난 널 갖고 싶어.”
“안 돼요, 어르신. 저, 저는…. 저는….”
이세희가 흐느껴 울었다. 그사이에도, 사내의 손가락은 어느새 두 개가 되어 구멍을 푹, 푹 쑤셔대고 있었다. 내부를 부드럽게 해주는 것도 없이, 무작정 들어와 주름을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구멍을 확장시켰다. 이세희는 여전히 사내의 손바닥에 눈이 가려진 채 구멍을 희롱당했다. 어찌나 손가락이 길고, 두툼한지, 손가락 두 개만으로도 배가 찬 느낌이었다. 이물감에 몸을 비틀어 보려 해도 손목이 잡혀 불가능했다. 툭 불거져 나온 마디가 여린 점막을 누르는 느낌이 너무 아파, 이세희는 소리도 내지 못했다. 사내는 시선을 내려, 붉게 붓기 시작한 입구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궁에 가면 더 좋게 해줄 테니, 아파도 참거라.”
하지만 이세희는 사내의 말을 완전히 듣지 못했다. 사내가 이세희의 구멍에 꽂힌 손가락을 망설임 없이, 긁어내듯 세게 빼냈다. 점막에 열기가 확 끼쳤다. 홧홧하고 아릿한, 쓰라린 느낌에 이세희가 다리를 오므렸다.
“아파….”
울먹거리며 중얼거리는데, 둔덕에 매끈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두툼하고, 컸다…. 처음에는 그게 무엇인지 몰라 멍하니 있던 이세희는 이윽고 구멍에 비벼지는 액에, 자신을 뚫으려 하는 걸 알아챘다. 사내의 자지였다.
“아, 싫어! 제발, 제발! 어르신, 안 돼요!”
“괜찮다. 내, 너를….”
“아으윽…!”
안 된다고, 소스라치게 놀라 빌었으나 돌아온 것은 여리고 좁은 구멍을 힘으로 뚫고 들어오는 자지였다. 귀두가 점막을 누르며 꾸욱 들어왔다. 하얀 엉덩이 사이로 검붉은 자지가 꾸물꾸물 뱀처럼 들어가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 내에, 마찰에 의해 부었던 주름들이 자지의 삽입에 따라 느릿하게 펴졌다. 그 주변은 삽시간에 더 빨갛게 부었다.
“후우….”
사내는 눈을 나른하게 감고, 탄성에 찬 신음을 흘렸다. 자지가 다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이것만으로도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다. 처음인 듯, 구멍은 자지에 쫀득하게 달라붙어 마구 조였다. 더 들어오라는 것처럼 꽉 물고 놔주지 않는 점막에 사내의 입꼬리가 떨리며 위로 올라갔다. 더, 더, 더….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힘을 싣고 그대로 쭉 박아 넣었다. 이세희의 자지의 삽입에 따라 위로 올라갔다. 점막이 자지에 따라 찌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세희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말자지나 다름없는 자지에 꿰뚫린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실신한 것이다.
“하, 정말…. 짐을 위해 태어난 절세미인이로다.”
사내는 기절을 하고서도, 자신을 위해 조임을 풀지 않는 이세희의 둔부를 문질렀다.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손을 슬쩍 내리자, 눈물이 맺힌 긴 속눈썹이 보였다. 빗물이 맺힌 처마처럼 풍성하고 긴 속눈썹을 보자 가슴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정말 예뻐.”
사내는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이세희의 뺨을 엄지로 문지르며, 본격적으로 허리를 움직였다. 이세희가 그때마다 기절한 채로 흐느꼈다. 읏, 읏…. 아…. 이세희의 새된 신음이 더위 속에 나부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세희는 아래에서만 느껴지는 통증에 신음하며 눈을 떴다. 점막을 세게 가르고 들어오는 자지 때문에 아래가 너덜너덜해지는 기분이었다. 묶인 손목은 움직이지도 못했다. 눈을 떠도 보이는 건, 암흑뿐이었다. 사내는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리고 있었다.
“흑… 아파…. 아파요….”
이세희는 사내의 아래에 깔려 흐느꼈다. 눈이 한쪽 손에 가려지고, 다른 손으로는 자신의 어깨를 누른 채 사내는 삽입을 지속하고 있었다. 엉덩이 안이 뜨거웠다. 피가 흐른 것이지, 회음부가 질척였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몸이 열에 휩싸였다. 몸이 반듯하게 눕혀진 채라, 손끝을 움직이면 보료를 잡을 수 있었다. 아픈 몸으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의지였다.
“흐으윽…!”
이세희는 상체가 들린 채, 위에서 아래로 꽂히는 자지에 입술을 깨물었다. 보료를 손으로 콱 잡고 버티려 해도, 사내의 힘을 못 이겨 몸이 위로 들리고 있었다. 너무 깊숙하게 푹, 푹, 소리 나게 들어오는 자지에 속이 뭉개져 구역질이 밀려왔다. 입을 벌리자 타액이 흘러나왔다.
“…아, 그만… 제발….”
그러나 끝없이 이어진 애원에 돌아온 것은 사내의 흥분이었다. 사내는 제발이라는 소리에 흥분하는 듯, 발정기 때 종마처럼 이세희의 구멍에 자지를 박아댔다. 다시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때는 아직도 어둠이라, 이세희는 밤인 줄 알았으나 사내의 손에 눈이 가려진 상태였다. 몸은 침상에 기댄 채로, 짐승처럼 박아오는 사내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 앗…! 아아, 아응…!”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거지? 안이 질척거렸다. 이젠 무엇인지도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빨리 어서 이 교접이 끝나기를….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잊을 셈이었다. 어차피 자신도 사내의 얼굴을 보지 못했으니, 자신만 말을 안 한다면 아무도 모를 테니까. 그러니, 어서 원하는 만큼 하고 자신을 버리고 갔으면 좋겠다. 그는 높은 집안의 어르신이고, 자신은 아무 힘도 없는 천민이니, 억울할 것도 없었다.
그 누가 이 서러움을 알아주겠는가.
“흑….”
그러나 왜 이리 슬픈 건지, 이세희는 알 수가 없어 사내의 아래에서 박히면서 울었다.
*
귀를 스치는 맑은 새소리에 이세희는 눈물에 흠뻑 젖은 눈을 떴다. 눈꺼풀을 찌르는 햇살에 미간을 찡그리며, 손을 들어 올려 눈가를 더듬다가 손목에서 퍼지는 통증에 신음을 흘렸다. 왜 이리 몸이 아프지…. 특히 다리 사이가 너무 아팠다. 아니, 엉덩이 안에 열이 감돌고 있었다. 다리를 조금만 움직여도 악, 소리가 나올 것 같은 통증에 이세희는 배를 감싸 쥐고 덜덜 떨었다.
“어, 어머니…. 나 아파요….”
이세희는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어머니를 찾으며 흐느꼈다. 그러나 대답이 없다는 사실에 의문을 가지고 눈을 위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낯선 천장에 하얗게 질려 몸을 느릿하게 일으켰다. 아, 하고 짤막한 신음을 흘린 이세희는 자신이 당한 일을 떠올리다가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눈물이 펑펑 솟았다. 아픔에 끅끅거리며 울던 그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 일도 없던 거야.”
이세희는 몸을 보았다. 옷은 멀쩡했다. 거기다가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천도 말끔하게 놓여 있었다. 그 천을 힘없는 손으로 잡아챈 이세희는 서둘러 얼굴에 둘러맸다. 그 상태에서 멍하니 침상에 앉았다가 쇳소리가 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아파서 잠깐 정신을 잃었던 거야.”
내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 부모님께 강간을 당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이세희는 절망감에 눈가가 시큰하게 달아올랐으나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움직였다. 걸을 때마다 몸이 쪼개지는 고통에 무너질 뻔했지만, 어서 이 공간을 벗어나고 싶어 이를 악물고 저택을 빠져나왔다.
아직 해가 중천에 걸리지 않아 그리 덥지 않았다. 이세희는 자신이 지게도, 항아리도, 들고 오지 않았다는 사실마저 잊고 홀로 중얼거리며 그 긴 길을 걸었다.
나는 괜찮다. 아무에게도 말을 안 하면 되는 거다. 그 누가 믿겠는가. 이세희는 자조적으로 힘없이 웃으며 집까지 향하는 긴 길을 걸었다. 그리 덥지 않은 날씨였는데도 조금 걷자 몸이 후덥지근해졌다. 아마,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내에게 강간을 당한 여파가 컸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천민들이 사는 움막 같은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로 들어서자 안도감에 힘이 풀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천민들이 모두 땅에 엎드려 땅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처럼 몸을 벌벌 떨었다. 이세희는 멍한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다 걸음을 옮기는데, 자신의 집 근처에 서 있는 꽃가마에 눈을 서서히 크게 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설마, 누가 내 동생들을 데려가려고 온 것인가? 내가 당한 일을 동생이 당한 것인가?
“아, 안 돼….”
이세희는 창백한 낯으로 뛰었다. 다리가 질질 끌렸으나 힘을 주어 헐레벌떡 다가갔다. 그러자 가마 근처에 서 있는 금군, 궁인들이 알아서 길을 비켜주었다. 마치 기다린 듯한 행동이었으나 이세희는 거의 반쯤 정신이 나가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아버지! 어머니!”
가래가 낀 듯한 탁한 목소리로 부모님을 찾았다. 부모님은 집 뜰에 겁에 질려 덜덜 떨며 엎드리고 있었고, 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어린 세연이는 울음을 멈추지 않고 헐떡이고 있었다. 눈이 반쯤 돌아간 상태로 이세희가 누가 이런 짓을 벌였는지 찾는데, 뒤에서 들리는 저벅거리는 발소리에 몸이 굳었다.
나쁜 예감이 어제와 같았다. 어서 도망가야 했는데, 그러지 않으면 또 당할 텐데….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머리는 도망가라고 소리를 치는데, 몸은 공포에 사로잡혀 매섭게 떨렸다.
“짐을 기다리게 하면 안 된다.”
그때, 자신을 안는, 그사이 익숙해진 사내의 품에 이세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풀썩 쓰러지려 하는데 사내는 웃음을 터트리며 이세희를 두 팔로 꼭 안아주었다. 손에 닿는 부드러운 비단의 감촉에 이세희는 시선을 떨구었다. 자신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팔뚝은 매우 두꺼웠고, 그 팔을 가리고 있는 소매는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한 검은 비단이었다. 그 비단에 새겨진 봉황에 이세희는 자신을 범한 자가 황제임을 알아채고, 몸을 덜덜 떨어댔다.
“그 어여쁜 얼굴을 다시 보여다오.”
안 돼, 라는 소리를 할 새도 없이 황제가 여유로운 손을 앞으로 가져와 이세희의 얼굴을 가린 천을 거침없이 벗겨냈다. 천이 쾌청한 하늘에 깃발처럼 날아들고 땅에 착지했다. 하얀 천이 시야에 들어오자, 그걸 본 이세희의 아버지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천이 벗겨진 아들이 황제에게 폭 안겨 무너질 것처럼 울고 있었다.
황제는 자신에게 꽂히는 시선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황제가 쓰고 있는 곤관에서 차르륵, 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황제는 스스럼없이 시선을 내려 자신을 애원 섞인 눈으로 보는 아비를 보고 웃었다.
“짐의 비를 낳아줘서 고맙구나. 이 공은 짐이 잊지 않고 호화롭게 보답하겠다.”
“저는… 그럴 수가….”
이세희가 거부하려 들자, 황제가 소리 내어 웃었다. 이내 웃음이 잦아들고 나서, 다 들으라는 식으로 위엄이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승은을 입었으니, 비가 되어야 마땅하지.”
황제는 이세희의 몸을 돌리게 해, 자신을 보게 했다. 이세희가 시선을 피하려 들자 날렵하고 아름다운 턱을 들어 올려 고정시켰다. 궁인들은 이세희의 눈부신 외모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 가족들의 어머니와 여동생들도 미인이었지만, 진정한 미인은 그였다. 저리 아름다운 사내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화용월태 그 자체였다.
황제는 보란 듯이 이세희의 도톰한 아랫입술을 엄지로 누르며 속삭였다. 이세희의 눈에 공포가 스몄다.
“그대는 첩지를 받으라.”
기운이 파죽지세와 같은 황제의 발언에 주변은 삽시간 냉수를 끼얹은 것처럼 차가워졌다. 같은 공간, 시간 속에 존재하나 서 있는 자와 엎드린 자의 공기는 확연히 달라졌다. 서 있는 자들은 여유롭게 신선한 공기를 만끽하며 이세희의 체념을 요구했다. 그리고 아래에 버러지같이 납작 엎드린 천민들은, 그들이 마시다 뱉은 공기를 주워 마시며 무사히 살아남기를 바랐다. 이세희는 자신의 얼굴을 소중하게 어루만지는 황제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며 이게 현실이 아니기를, 제발, 눈을 감았다 뜨면 원래대로 낡은 집 안에 있기를 바랐다. 분명히 시야 중앙에 집이 있는데, 어째서 난 여기 서 있는 것인지.
“이름이 세희라고 하던데…. 이름도 얼굴에 맞게 어여쁘구나. 잘 어울리는 이름이야.”
황제의 사내답게 탄력적이고, 적당히 부드러운 손등이 뺨에 비벼졌다. 뺨으로 통해 오는 그의 온기에 이세희는 참을 수 없는 현기증에 비틀거렸다. 넘어지려는 찰나, 황제가 탄탄하고 두툼한 팔뚝으로 이세희의 상체를 안아 자신의 품으로 당겼다.
그때, 코의 점막으로 훅 치고 들어오는 그의 짙은 체향에 이세희는 악, 소리를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어제 그 사내가 맞았다. 자신을 하인들의 집으로 끌어들이고, 머리채를 잡아 강간한 자였다. 자신의 몸을 은밀하게 더듬는 억센 손길, 산에서 성큼성큼 내려와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새파란 눈. 그 눈에 아래로 내려와 이세희의 시선을 꿰뚫자, 이세희는 덜덜덜 떨며 말했다.
“시, 싫어…. 싫습니다!”
이세희가 예의범절도 갖추지 못하고 거부하자, 옆에 있던 늙은 태감이 어허! 소리를 내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느냐! 천한 것이!”
황제는 아버지와 같은 태감의 꾸짖음에 때 아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손아귀에는 여전히 미약한 힘으로 바르작거리는 이세희를 움켜쥔 상태였다.
“아직 어리고, 모르는 것이 많으니 차차 가르치면 그만이다. 그리고 이리 날뛰니 제법 귀엽지 않느냐?”
머리가 짧아, 뒷목덜미에도 닿지 못하는 덥수룩한 머리를 시작으로 황제는 음습한 욕정이 감도는 눈으로 이세희의 전신을 훑었다. 야산에서 내려온 범 같다는 칭호가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황제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신체를 가졌다. 즉, 황제의 나라에 사는 평범한 백성들보다 머리 하나 반 정도는 크다는 사실이었다. 어깨도 돌덩이 같은 아버지의 몸을 닮아서 그런지 너른 편이었다. 매일 같이 지게를 인 흔적이 남은 어깨는 굳은살이 박여 딱딱했고, 그 아래 이어지는 팔뚝도 근육이 튼실하게 붙어 있었다. 척추는 올곧은 편이었고, 그 양옆으로 딱 벌어진 근육들이 오밀조밀 뭉쳐 있었다. 가장 예쁜 곳은 힘이 바짝 들어간 엉덩이였다. 한 손으로 쥐기 좋은 작고 말랑하며, 부드러운 하얀 엉덩이는 백도같이 탐스러웠다.
황제는 자신의 시선이 닿자, 흠칫 놀라 하얗게 질린 얼굴로 파르르 떠는 이세희를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지적이고, 담백하게 잘생긴 얼굴은 유독 안광이 또렷해 살벌하여 웃음을 지어도 날 선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았다.
이세희는 이 수많은 사람들 속에 명백하게 자신을 노리는 시선에 굴하지 않고, 입술을 달싹였다. 이 길을 걸어오는 내내 수없이 되뇐 말이 있었다.
나에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냥 아파서…. 단지 너무 아파서, 정신을 잃고 저잣거리에 쓰러져 잠들었을 뿐이다. 그 사실을 재차 머리에서 떠올린 이세희는 황제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황제의 시선은 만개한 꽃처럼 달싹거리는 붉은 입술에 꽂혀 떨어질지 몰랐다.
“폐하께서 착각하신 것 같습니다. 어젯밤 저에겐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승은을 입은 다른 이와 미천한 저를 착각하신 듯합니다.”
황제는 흐음, 하고 짧게 목을 울렸다. 머리카락이 천민답게 짧아 눈빛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다 알 수 있었다. 이세희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 겁을 잔뜩 먹어 오그라든 눈으로 말해 봤자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도 밉지 않았다. 묘하게 귀여워 계속 괴롭혀주고 싶은 못된 마음이 들었다.
“저는 아파서 잠시 정신을 잃어, 길에서 잠들었을 뿐입니다. 천하디천한 제가 폐하께 승은을 입다니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세희는 마르게 변한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리며, 황제를 애원 어린 눈으로 보았다. 제발, 이러지 말라는 듯 자신을 밀어내고 있었다.
“건방지게도.”
황제는 이세희를 향해 웃음이 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세희는 황제의 두 손에 잡혀 벗어나지 못해, 그대로 굳은 채 미세하게 떨었다. 떨지 않으려고, 태연함의 가면을 쓰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가상했다. 천민이니 납작 엎드려서 폐하의 말이 하늘의 뜻과 같다고 받들어도 모자랄 마당에, 아니라고 잡아떼는 저 괘씸한 성질머리가 귀엽게 느껴지다니. 얼굴이 밤중에 떠오른 달처럼 신비롭고, 청순하면서도 화려한 꽃처럼 예뻐서 그런가. 뭘 하든 웃음이 나왔다.
“그런 일이 없었다고?”
황제가 이세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물었다. 그 소리에 이세희의 아버지의 굳건한 등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안도감이었다. 제 아들이, 다음 날 아침이 되어 돌아왔어도 아무 일이 없었을 거라는 거짓된 안위였다. 옆에 있던 이세희의 어머니는 거친 숨을 띄엄띄엄 몰아쉬며 울었다. 그들 중에서 이 상황을 제일 빨리 알아챈 건 장녀 이세형이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치밀어 오르는 비통함을 참아내려, 울음을 절구로 찧듯 누르며 흙더미에 얼굴을 처박았다.
황제는 오라버니를 작정하고 찾으러 온 자였다. 천민들이 사는 곳까지 황제가 직접 행차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보통 꽃가마를 보내는 게 전부였는데…. 본인이 스스로 와, 오라버니 이세희를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는 모습에 가족들을 서로를 부둥켜안지도 못했다. 황제의 눈빛이 너무 무서웠다. 미남으로 소문난 얼굴이 섬세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그의 눈빛은 칼날을 박은 듯 날카롭고 차가웠다.
그의 눈은 이미 오라버니를 마음껏 맛본 자의 것이었다. 이세형은, 오라비가 아무리 발버둥치려 해도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닫고, 제발 오라비가 더 이상 다치질 않기를 바랐다. 그가 영원히 이 집에 오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
그러나 제 동생의 마음도 모르고, 이세희는 황제에 의지해 서서 황제만을 보았다. 다른 곳을 보았다간 그가 허리에 찬 대도로 자신의 목을 베고도 남을 것 같았다. 무서웠다.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황제가 무섭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폐하. 이세희라는 이름을 가진 이를, 저와 착각하신 게 아닐는지요?”
이세희가 침착한 어투로 말했다. 황제는 자신보다 한 뼘 정도 작은 이세희를 가늠하는 듯한 시선으로 보다, 꽃내음이 묻어날 것 같은 예쁜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불혹에 가까워지는 나이가 믿기지 않게 청량한 미소에 이세희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손길, 그의 향에 짓눌릴 때마다 몸이 떨린다. 그의 손길에 두려움, 공포를 감출 수 없었다.
생각보다 그의 자지에 꿰뚫린 몸은 나약했다. 도무지 진정하지 못했다. 오로지 정신력 하나로, 땡볕 아래에서 땀을 흘리며 버텼다. 저기서 엎드려 있는 부모님, 동생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이세희는 점점 아득하게 멀어져가는 의식을 붙잡으며 숨을 가늘게 내쉬었다.
그때, 땀을 흘려 좀 더 농후해진 황제의 체향이 지척까지 닿았다. 이세희가 멍한 눈을 들어 올리자. 소년같이 맑은 황제의 눈이 보였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 감도는 화염 같은 눈빛이 심상치 않아, 이세희는 입술을 깨물고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럼, 그런 일을 만들면 되겠구나?”
황제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장난기가 다분한 목소리에 이세희는 가슴이 철렁였다. 그런 일을 만들면 된다고? 여기서? 순식간에 머리가 새하얗게 질려 어떠한 생각도 들지 않았다. 손끝이 벌벌 떨리고, 떨림은 예고치 못한 파도처럼 온몸을 치고도 남았다. 안 돼, 라는 미약한 반항은 말이 되지 못했다. 몸이 완전히 돌처럼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혀조차 석화된 것이다. 이세희의 순진무구한 눈이 산산조각이 나, 사금파리처럼 내동댕이쳐져 망가지는 걸 유심히 지켜보던 황제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언행은 파죽지세였다.
“이세희에게 승은을 내리도록 하겠다! 잠자리를 준비하라!”
그 소리에 다들 화들짝 놀라 황제를 보았다. 황제를 따르는 자들은 어찌 미천한 것들이 사는 곳에서 잠자리를 갖느냐며, 제발 통촉해 달라고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저 귀한 옥체를 천것들과 같이 할 수 없다는 게 그들의 뜻이었다.
“어억…!”
그리고 반대편에서 넙치처럼 땅바닥에 붙어있던 이세희의 아버지가 땅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끄으윽, 소리를 내며 그가 땅바닥에서 몸을 괴상망측하게 비틀었다. 어린 시절부터 온갖 고생을 해, 노동으로 만들어진 근육질 몸이 뒤틀린 날개처럼 움직였다. 귀하신 분들이 자신을 천것이라 부르며, 모욕을 할 때는 멍하던 이세희는 아버지의 비명, 그리고 아버지를 부르는 어머니의 울부짖음에 고개를 돌렸다.
“세희 아버지! 안 돼요!”
이세희의 어머니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위병이 땅에 발을 굴렀다. 고개를 들지 말라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이세희의 어머니가 꺽꺽 울음을 터트리며 이세희의 아버지에게 다가가려 했다. 여동생들도 겁에 질려,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엉엉 울었다. 황제는 그들을 저지하려는 위병들에게 손을 들어 올려 물렸다. 위병들이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안 돼요, 아버지….”
어느새 이세희는 땅바닥에서 눈을 뒤집으며 쓰러진 아버지를 보고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이세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들이 황제에게 강간을 당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던 아버지에게, 이 자리에서 승은을 내리도록 하겠다는 명은 엄청난 충격이었는지 그는 다시 눈을 뜨지 못했다. 황제의 품에 안겨 아버지를 연달아 불러도 대답이 없자, 이세희는 황제를 뒤돌아보았다. 황제도 이 상황이 난감했는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폐하, 제발….”
하얀 뺨 위로 흐르는 투명한 눈물에 황제의 눈이 흔들렸다. 어제는 요염하고, 품에 안겨 울 때는 이리도 청아하니, 여러모로 제 마음을 가지고 노는구나 싶었다. 맑은 갈색 눈에 차오르는 눈물은 보옥같이 고와 보였다. 황제는 소매로 이세희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이세희는 제 어미와 여동생들이 자신을 보는 것도 잊고서, 그의 손등을 감싸 쥐며 부탁했다.
“아, 아버지가…. 아버지부터 의원에게…!”
부모를 잃은 아이처럼 이세희가 얼굴을 잔뜩 구기며 서럽게 울음을 터트렸다. 아버지는 안 돼요, 제발, 제발! 이세희가 황제인 것도 잊고 그의 품에 안겨 애걸복걸했다. 황제는 이세희를 품에 안으며, 고개를 들고 자신을 보는 이세희의 가족들을 응시했다. 이세희의 어머니는 허겁지겁 일어나 찬물을 끼얹으며 일어나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이세희의 여동생 중 제법 똘똘해 보이는 아이는 자신을 원망스럽게 보았으며, 고만고만한 코흘리개 여자아이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아아앙…. 오라버니….”
강아지같이 생긴 가장 어린 여자 아이가 이세희를 부르며 울었다. 이세희의 몸이 이제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가족들이 살길 바라느냐?”
은근한 다정함을 담아 물어보는 목소리에 이세희가 대답도 못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황제의 용포에 이세희의 뺨이 닿아 비벼졌다. 그것 자체가 좋아 황제는 입가에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서 이세희에게 상냥하게 속삭였다.
“아비를 도와줄까?”
“그, 그래 주실 수 있습니까?”
황제의 두툼한 팔을 잡고 이세희가 고개를 들었다. 희망이 넘실거리는 눈이 오로지 자신만 보고 있었다. 허리에 짜릿한 쾌감이 요동쳤다. 눈은 아기 사슴같이 청순하고 말간데, 전체적인 생김새는 요사스러운 미인. 피부는 대나무의 속살같이 하얗다. 팔다리도 길고, 허리도 자신의 두 손으로 딱 잡기에 좋았다. 그렇다고 너무 약하지도 않은, 아주 건장한 사내였다.
이 자를 본 순간 마음을 먹었다. 결단코 남에게 주지 않겠노라고. 차라리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망치면 모를까, 남의 손에 들어가 닳고 닳은 것이 되는 건 볼 수 없었다.
황제는 길고 탄탄한 손을 들어 이세희의 턱을 잡아채 자신 쪽으로 당겼다. 정신이 혼미하여 이세희는 고통도 느끼지 못했는지, 그대로 황제에게 끌려갔다. 턱이 잡혀 중심을 잡기 힘들었는지 무의식적으로 황제의 넓은 어깨에 손을 대었다. 그 모습이 마치 입을 맞추기 직전의 연인 같았다.
“그대는 첩지를 받으라.”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었다. 물러나면, 다 같이 죽는 낭떠러지였다. 나 혼자 죽는다면 모르지만, 저 뒤에서 자신을 부르며 목 놓아 우는 동생들이 있었다. 아직도 아기 같은 세연이의 얼굴을 떠올린 이세희는 눈을 감았다. 돌아갈 곳도, 물러날 곳도, 도망칠 곳 하나 없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건 애초에 아무것도 없었다.
이세희는 쏟아지는 시선을 감당할 수 없어 황제의 어깨에 이마를 파묻었다. 사실 버틸 힘이 없었다. 황제의 첩이 되겠노라고 받아들인 순간, 온몸의 힘이 발바닥을 통해 빠져나갔다. 피가 모조리 사라진 것처럼 몸은 식어갔다. 덜덜 떨리는 몸을 감싸준 황제는 이세희의 눈물 젖은 뺨에 입을 맞추더니, 위병들을 향해 나긋하게 말했다.
“화비의 아비를 데리고 먼저 궁으로 가거라. 짐의 소중한 화비의 아비이니, 절대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황제의 입에서 이세희가 아니라 화비란 소리가 나오자, 궁인들은 이세희가 첩지를 받음을 알고 받들었다. 이세희의 어머니 또한 울다 실신한 듯 이마를 붙잡고 쓰러졌다. 세형이 재빠르게 움직여 어머니를 품에 안고 울음을 삼켰다. 다행히 이세희의 어머니는 아버지처럼 아예 정신을 잃진 않았다. 그녀는 시름시름 앓으며 눈을 겨우 떠, 황제의 품에 안겨 있는 아들을 보고 중얼거렸다.
“세희야…. 세희야…. 내 아이가….”
황제는 이세희를 번쩍 안았다. 걸어 다니는 태산이란 별명에 걸맞게 황제는 매우 육중하고 거대한 몸을 가지고 있어, 평균보다 큰 이세희도 서슴없이 안아 들었다. 이세희는 황제에게 소중한 보옥처럼 안긴 채, 눈을 반쯤 내리뜨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미어지게 만드는 처연한 얼굴에 궁인들은 묘한 눈으로 그를 뚫어져라 보았다.
“황궁에 빈 궁이 있던가?”
황제가 이세희를 안고 등을 돌리며 물었다. 이세희는 눈을 둘 곳이 없어 땅에 시선을 박은 채였다. 머리에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자신이 숨을 쉬고 있는 건지도 느낌이 오지 않았다. 모든 것이 망가져 버렸다. 사내가 되어 사내에게 강간을 당하고, 부모에게도 밝혀지고…. 들키지 않으려 노력했던 것들은 하루 만에 진흙탕 속에 처박혔다. 자신이 이십 년 동안 살아온 것들이 모두 부질없이 변해버렸다.
“세희야.”
황제는 이세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자신을 보길 묘하게 종용했다. 죽어도 하기 싫었지만, 아직 가족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자각하고 이세희는 천천히 고개를 움직여 황제를 보았다. 황제가 웃고 있었다. 초여름의 햇살을 빚어 만든 듯한, 그의 훤칠한 얼굴에 자신도 몰랐던 악이 치밀어 올랐다. 저 얼굴을 한 대 후려치고 싶어 그의 용포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자신의 손에 구겨진 봉황을 보고서야, 그는 자신이 손댈 수 없는 자라는 걸 새삼 느꼈다. 그는 황제였고, 자신은 아무것도 없는 천민이었다. 황제가 마음만 먹으면 자신의 가족이 아니라 이 천민 소굴을 다 짓밟을 수 있었다. 지금도 이 인근에 올 때, 황제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고개를 들지 못하고 태양같이 받들고 있었다.
“네 아비는 짐이 책임지고 낫게 해주겠다. 그러니 울지 않아도 된다.”
황제는 이세희가 이를 악물고 우는 게 아버지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연신 달래며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에서 짙게 피어나는 성욕에 이세희는,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달래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는 건, 나중에 하거라. 울 일은 앞으로도 많을 터이니.”
“절… 또 아프게 하실 건가요?”
이세희는 엉덩이에서 아직까지도 느껴지는 고통에 몸서리쳤다. 또다시 그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생각에 도망가고 싶어졌다. 황제는 자신을 보며 겁에 질린 이세희의 뺨을 매만졌다. 손끝에 걸리는 살이 보들보들하다. 스물이라 하더니, 솜털이 남아 그런 것이었다. 어쩐지, 막 여문 과실처럼 달다고 느꼈는데. 황제는 입술 끝을 올리며 웃더니, 사근사근하게 덧붙였다.
“앞으론 저가 아니라 신첩이라고 칭하거라. 세희, 너는 앞으로 화비가 되어 짐을 제외한 모든 이를 네 마음대로 다룰 수 있을 것이다.”
황제의 직설적인 발언에 궁인들은 황후와 후궁들을 떠올렸다. 이세희가 들어가면 그녀들은 어떤 식으로 나올 것인가? 태자, 황자들은? 황녀들은?
하지만 확실한 건 그녀들이 발악을 해도, 이제 이세희는 황제의 공식적인 애첩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는 것은, 이세희가 어떤 짓을 해도 황제가 암암리에 봐준다는 뜻이었다. 이세희는 이제 황제 다음으로 가장 센 권력을 쥔 것이었다. 이세희의 신비롭고 우아한 옆모습을 보는 궁인들의 눈에 탐욕이 일렁거렸다.
그 사실은 이세희만 몰랐는지, 그는 눈을 내리깔며 소극적으로 중얼거렸다.
“…여기선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말에 황제가 귀여웠는지 픽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앞으론 귀가 닳도록 들을 터이니…. 상관없지.”
이세희는 무심코 황제를 안았다. 몸은 쪼개질 듯이 아프고, 힘드니 어쩔 수 없었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이세희는 침상에 눕혀져, 황제의 아래에 깔려 있었다. 두 다리는 황제의 어깨나, 허리, 팔 같은 곳에 걸쳐졌다. 자신의 몸은 이미 의지를 상실하고 황제가 쑤셔 박는 대로 흔들렸다.
언제쯤이면 이 지옥이 끝날까. 이세희는 신음을 삼키며 주먹을 쥐었다. 아, 죽고 싶어…. 차라리 이대로 사라져서 없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황제가 자신을 놓아주길 바랐으나, 해가 갈수록 심해지는 집착에 몸이 남아나질 않았다. 그는 아예 자신이 아니면 그 어떤 후궁도 부르지 않았다. 황제를 빼곤 가진 게 없는 자신은 늘 칼날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는 기분이었다.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그 순간, 칼날 위에서 미끄러져 치명상을 입을 것이다.
아침이면 매일같이 솟아오르는 비통함에 이를 억세게 무는데, 손등에 햇볕에 데워진 온기가 닿았다. 딱딱하지만 부드럽고, 어색하게 움직이는 손길.
이 자는 사람을 다루는데 능숙하지 못한 듯, 그저 이세희의 고운 손등을 쥐고만 있었다. 처음에는 황제와 비슷한 느낌에 흠칫 놀랐으나 엄지로 살살 손등을 문지르는 체온에 서서히 억센 힘이 빠져나갔다. 그자는 이세희의 손을 등처럼 토닥거리며 아주 낮고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마가 울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에 비웃음이 나왔다. 황궁에 사는 놈답게 거짓말로 위장하고 있었다. 이곳에 믿을 사람은 없었다. 가끔 자신을 보기 위해 오는 부모님이나 세형, 세령, 세연을 제외하고 모두 적이었다. 열이 올라 가물가물해지는 의식 속에서 이세희는 귀를 비단처럼 감싸는 목소리에 눈을 뜨고 싶어졌다.
“…마마가 고통스러워하시는 걸 보면, 저도 고통스럽습니다.”
그 목소리는 힘겹게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