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비설화 1권
목차
서장
1장. 화용월태
2장. 전전반측 (1)
서장
이윽고 밤이 도래했다. 여느 날과 같이 내려온 밤 시중 하명에 애첩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명백한 조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웃음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애첩은 만개한 꽃처럼 빛을 발했다.
“결국 이리 되는군요.”
애첩이 허심탄회하게 중얼거렸다.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는 목소리에는 씁쓸함이나 한숨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찌꺼기를 걸러낸 듯, 맑고 청아한 저음이었다. 태어났을 적부터 그 외모가 대단히 아름다워, 아이가 모진 일을 당할까 존재를 감추었던 전적에 걸맞은 아름다운 목소리가 침전했다. 목소리는 자욱한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려, 명령을 가져와 앞에 자리한 무릎까지 내려앉았다. 무릎을 꿇은 이는 반쪽짜리이나 황제의 아들이었다. 어미가 너무 천해 친왕에도 봉해지지 못했으나, 황제의 넘치는 사랑 덕분에 금군대장의 자리에 오른 이였다. 황제의 아들답게, 젊었을 적의 황제를 쏙 빼닮은 이는 정갈하고 굵직한 이목구비를 가진 훤칠한 미남이었다. 애첩이 독을 품은 꽃처럼 화사하고 요요하다면, 애첩의 앞에 고요히 앉은 이는 농담을 조절한 그림처럼 담백하고 고요했다.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눈빛은 거짓을 감출 수 없었다. 황제에게 가기 싫은 애첩은 눈물은 흘리지 않으나 울고 있었다. 어김없이 동요를 내보이는 애첩을 보던 금군대장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 그의 눈꺼풀이 잘게 떨리는 눈동자를 완전히 감추자, 그 아래로 투명한 궤적이 그려졌다. 붉은 발을 애첩과 두고 앉아있던 금군대장의 손이 바닥에 닿더니, 그 사이로 금군대장의 머리가 바닥에 쿵 닿았다.
“가셔야 합니다, 마마.”
금군대장의 등이 부들부들 떨렸다. 참을 수 없는 비통함에 금군대장이 주먹을 으스러지도록 쥐고 울음을 터트렸다. 아무런 말도 잇지 못하고, 자신의 처지에 슬퍼하여 처연하게 우는 금군대장을 집요하게 지켜보던 애첩이 입을 열었다.
“모두 나가거라.”
비의 자리에 있으나, 현재 황제의 지독한 총애 덕분에 황후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애첩의 말을 거역할 이는 없었다. 궁인들이 뒷걸음질로, 아주 빠르고 소리 없이 화요궁을 빠져나갔다. 황제와 정사를 맺는 모습을 보이길 싫어하는 애첩의 요구를 몇 년 만에 받아들여, 황제는 애첩의 명령이 있다면 침전이 아니라 아예 밖으로 나가도록 명해 두었다. 황제의 명령 덕분에 화요궁은 금군대장이 울먹거리는 소리만이 들릴 뿐, 고요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눈을 지그시 내리뜨고 금군대장만 지켜보던 애첩이 손을 천천히 올렸다. 다소곳하게 두 손을 맞댄 채, 허벅지에 올라갔던 손이 향한 곳은 발을 올리고 내리는 끈이었다. 그는 긴 팔을 뻗어, 끈을 잡고 천천히 내렸다. 발부리만 보이게끔 길게 내려왔던 불투명한 붉은 발이 위로 올라갔다.
“고개를 드세요.”
애첩의 나긋한 명령에 금군대장이 손등으로 눈물을 슥슥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울음을 삼키는 얼굴이 아이처럼 말갛다. 황제를 닮았으나, 황제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금군대장이었다. 그와 시선이 맞닿기가 무섭게 입술 끝을 양쪽으로 올린 애첩이 몸을 일으켰다. 금군대장보다 좀 더 큰 그의 몸이 천장에 닿을 만큼 솟아올랐다. 자신의 앞에 드리우는 그림자에 잠시 몸을 움찔거리던 금군대장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시야에 애첩의 하얀 옷자락이 보이자 무섭도록 떨렸다.
그가 다가오고 있다. 아버지의 애첩이, 발도 거두고 자신에게…. 금기를 범하는 죄인이 된 금군대장은 마른침을 삼킬 새도 없이 멍하니 애첩을 좇아 눈을 서서히 위로 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고 싶었다. 금기를 범해, 아버지에게 사지가 도륙난다 하더라도. 그가 자신에게 다가온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너무 좋아서, 몸이 떨렸다.
“윤아.”
애첩이 이름을 불렀다. 금군대장의 눈가에 그렁그렁 맺혔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입술을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금군대장 태윤의 입가가 하얗게 질려갔다. 입술은 애첩의 것보다 더욱 붉어졌다. 애써 울음을 삼키던 태윤은 두 팔을 뻗었다. 애첩이 기다렸다는 듯 태윤을 끌어당겨 안았다.
“미안해, 미안해…. 내가 힘이 없어서…. 내가 너무 약해서, 그대를….”
윤이 당과를 빼앗긴 아이처럼 서럽게 울음을 터트리며 애첩의 너른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애첩은 눈을 내리뜨며 윤의 등을 토닥였다. 엇비슷한 신체를 가진 둘이었지만, 유독 윤이 작아 보였다. 한참이나 그의 우는 소리를 들어주던 애첩은 윤의 둥글둥글한 머리를 매만지며 입술을 달싹였다.
“언제까지 신첩을 아버지의 품에 안겨드릴 생각이십니까?”
윤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묘하게 자신을 타박하는 듯한 애첩의 목소리에 윤이 어깨에서 얼굴을 들어 올리더니, 애첩과 눈을 마주쳤다. 눈물을 흠뻑 머금은 윤의 얼굴을 보자 엄격하던 애첩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힘이 약하다고 울기만 하시면 어떡합니까? 그런다고 누가 힘을 준단 말입니까?”
“그대를 구하기 위해 나도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어. 하지만, 그 누가 나를 황제로 만들어 주겠어? 나는 반쪽짜리에 불과해. 그 누구도 나를….”
윤이 울적한 얼굴로 눈을 내리떴다. 사랑스럽다는 듯, 윤의 얼굴을 천천히 살피던 애첩이 두 손을 들어 윤의 얼굴을 감싸 올렸다. 당황스러웠는지 윤이 눈을 느리게 깜박거렸다. 황제의 품에서 어화둥둥 컸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남자였다. 황제와 닮았으나, 그와 다르게 표독스럽지 못하고 맑은 샘물처럼 느껴지는 윤을 사랑에 빠진 눈으로 보던 애첩이 입을 열었다.
“신첩이 드리겠습니다.”
윤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애첩은 화려한 얼굴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미소를 한껏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널 황제로 만들어 주겠어.”
그리고 그대로 고개를 숙여 윤에게 입을 맞추었다. 고개를 틀어 입술을 빨아들이고, 으응, 하고 신음을 흘리는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는 애첩을 따라 윤이 헐떡거렸다.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움직여 애첩을 와락 끌어안았다. 안겨서, 매달리지 않는 한 버틸 수 없는 힘이었다. 윤은 화비 이세희에게 안겨 입을 맞춘 채, 아래를 세웠다. 애첩의 손은 이미 예고된 일에 웃음을 청아하게 터트리며 손을 아래로 뻗어 기립하기 시작한 남근을 잡고 애무했다.
“아, 세희야, 아…!”
윤이 눈을 찡그리며 울음을 터트리자, 이세희가 귀에 대고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 아비에게 안기는 날 보고 싶어?”
“아니…. 싫어….”
윤이 “아니야, 난, 그게 싫어서 널….”이라고 중얼거리고 이세희의 옷깃을 세게 잡았다. 아비가 이세희에게 하사해준 비단 옷이 구겨졌다.
“널 구할 거야.”
“그래.”
이세희가 사랑스러움을 참지 못하고 윤의 젖은 뺨에 입을 맞추며 덧붙였다.
“날 너의 애첩으로 만들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