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에디 (Eddie) (19/20)
  • 3. 에디 (Eddie)

    렉시가 공작령으로 돌아온 건 그가 떠나고 대략 다섯 달 뒤다. 봄에 출발한 행렬이 가을에나 돌아왔으니, 퍽 오랫동안 황도에 있었다.

    소공작이 돌아온다는 소식에 공작령은 반쯤 축제 분위기였다. 모두 다 기뻐하며 소공작의 귀환을 기다렸다. 그중에서도 렉시의 귀환을 제일 기대한 건 그의 아버지인 베르크 남작이었다. 물론 순수한 의도로 기뻐한 건 아니라 할 수 있다. 드디어 마누라와 다시 페르귄 영지로 돌아갈 수 있겠어! 라는 것이 순수한 의도라면 세상의 순수란 단어는 그 뜻을 달리해야 한다. 남편의 한결같은 한심함에 그저 옆에 있는 공작만 한숨이 늘었다.

    “들었습니까? 드디어 그 녀석이 오는군요. 오자마자 대충 인수인계하고, 우리 공주님 데리고 페르귄으로 가는 겁니다.”

    “…그대는 참, 한결같군. 도대체 자신이 부친이란 자각은 있는 건가?”

    “다 큰 자식이니 이렇게 행동하는 겁니다. 효도해야지요, 효도. 다 늙은 부모에게 일이나 시키는 게 어디 자식이 할 도리입니까?”

    “…이제 갓 돌아온 아이에게 일을 넘기는 건 뭐 부모 된 도리이고?”

    공작은 주책을 떠는 남편을 보며 혀를 찼다. 대체 저 인간은 언제쯤이면 철이 든단 말인가. 아들이 돌아오면 얼마나 또 입을 털어 댈지 심히 걱정이 될 지경이다. 안 그래도 징징거리는 빈도수가 늘었는데, 돌아오면 그 빈도가 세 배는 늘어날 게 뻔히 보였다.

    ‘저이는 어떻게든 페르귄 영지로 가려고 하겠군….’

    그래, 솔직히 공작도 공작령보단 페르귄 쪽이 맘이 편하긴 했다. 일단 아늑하고, 외부인 들어오지 않는 조용한 영지는 말 그대로 요양에 무척 좋았으니까. 나이 먹고 애를 낳고 보니 뼈마디가 시렸는데 거긴 작지만 온천도 있다.

    허나 그는 이미 황도에서 렉시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대충 들은 상태였다. 어느 정도 예상해서 사람을 뽑아 보내긴 했지만, 원래 황도는 예상만으론 돌아가지 않는 장소. 그래서 공작은 그 번잡함에 시달리다 온 아들에게 휴식을 주고 싶었다. 자기도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먼 길 다녀온 애가 우선 아닌가.

    헌데 저치는….

    공작은 살짝 아파 오는 이마를 누르며 두통을 삭였다. 그래, 살다 보면 나이 먹어도 철 안 드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지. 저이가 저런 게 어디 한두 번이었나….

    ‘그냥 내가 먼저 선수를 쳐야겠군. 수고했으니 당분간 쉬라고 말이야.’

    공작은 기뻐서 방방 뛰는 남작을 보며 몰래 의지를 다졌다. 쉬어라, 내가 조금 더 일해 줄 테니 아들 넌 좀 쉬어라.

    그러나 그의 그런 다짐은, 돌아온 렉시를 본 순간 산산이 부서졌다.

    “어머니… 아니 전하, 아버지. 돌아왔습니다.”

    “…….”

    렉시의 모습을 본 공작 부처는 그야말로 얼이 빠졌다. 그 자발스러운 베르크 남작마저 입을 닥치고 있었으니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만했다. 누가 먼저 무슨 말을 꺼내야 하는가. 진득하고 써늘한 침묵이 잠시 넷 사이를 오갔다. 그리고 곧, 나름 이 일에 있어 전문가(?)인 공작이 입을 열었다.

    “…너, 그 배가 무엇이냐…?”

    “…아, 하하하.”

    렉시는 부끄러운 얼굴로 배를 쓰다듬었다. 내심 살쪘다는 변명을 기다렸지만, 그런 형편 좋은 일이 일어날 리는 없다. 공작은 경악 어린 눈으로 자식을 훑었다. 도저히 눈으로 보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커다랗진 않지만 명백하게 솟은 둥근 배, 왠지 모르게 살이 올라 윤기가 흐르는 얼굴. 슬쩍 허리 뒤를 받치는 것처럼 서 있는 망측한 모습. 마지막으로 아들의 옆에 서서 어색하게 웃는 로메인을 본 순간, 등골에서 곧바로 노화가 솟구쳤다. 속이 타들어 가다 못해 이성이 날아간다. 이렇게 분노를 느낀 건 예전에 공비에게 뻐꾸기 짓을 당한 이후 처음이었다.

    공작의 얼굴이 야수처럼 일그러졌다.

    “너….”

    음산한 목울림에 모두가 움찔했다. 그르렁대는 목울림이 마치 들판의 포식자처럼 쟁쟁했다.

    그리고 곧, 그 포식자의 입에서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야!!!이 망할 것들!!!!”

    이것들이 혼인도 하기 전에… 이, 임신부터 해!!!????

    공작은 뒷목을 잡고 휘청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희망찼던 미래가 악 소리를 내며 엎어진다. 그는 아뜩해지는 눈앞을 간신히 견뎌 냈다. 눈앞이 마치 달 없는 밤처럼 새카맸다.

    “…오 개월입니다.”

    “맙소사, 아주 작정을 했군. 얼마? 오―개―월?”

    헐레벌떡 달려온 로메인의 백부의 진찰 결과에 공작은 두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는 옆에 있는 로메인을 짐승 보듯 노려보았다. 이 자리에 베르크 남작이 없는 것이 한이었다. 지금 그는 자식의 임신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머리 싸매고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뭐 그 충격이 일 시킬 아들이 임신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임신해서 그런 건진 모르겠지만.

    공작은 이를 갈며 의원에게 이죽댔다.

    “대단한 조카를 두었구나, 아메스. 아주 대단한 조카를 두었어.”

    “…화, 황공하옵니다 전하.”

    로메인의 백부, 아메스는 그냥 닥치고 고개를 조아렸다. 공작은 성난 얼굴로 세 사람을 훑어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경우가 있지 벌써 임신이라니. 약혼자라는 명목으로 보내기는 했지만, 그게 이렇게 돌아올 줄 알았으면 그 자리서 그런 말 따윈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장 본인도 그것 때문에 그 고생을 했는데!

    “너희들이 정신이 있는 것이냐?”

    참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괘씸했다. 당장 그들이 출발한 게 오 개월 전의 일 아닌가. 이건 즉 황도도 아니고 여행 도중 들어선 아이란 말이다. 원래 아이란 편한 상태에서 들어서는 것이 정석이건만, 그 한 달간 대체 뭔 짓을 얼마나 했길래…!

    “일을 하고 오랬더니 애를 만들어 오다니! 특히 로메인. 너는 내 아이의 안전을 생각한다는 놈이, 이런 짓거리를 해? 네가 정말 저 아이의 약혼자가 맞느냐? 알렉시아노의 몸에 무리가 가면 어쩌려고 그랬느냐?!”

    “…송구합니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로메인은 가타부타 않고 고개를 조아렸다. 뭐 로메인으로선 조금 억울한 면이 있긴 했다. 아무렴 공작도 둘을 보냈을 때 손만 잡고 지낼 거라 생각하진 않았을 것 아닌가.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 말은 그야말로 불난 데 부채질하는 격. 그냥 입 다물고 몸을 수그리자, 가만히 듣고 있던 의원이 툭 하니 끼어들었다.

    “저, 전하. 산모… 아니, 소공작께선 무척 건강합니다. 배 속의 아이도 강건하시구요. 그러니 그 건은 걱정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정말인가?”

    “물론이지요. 제 목을 걸 수도 있습니다.”

    “…그래. 여행길에 생긴 아이니 건강은 해야겠지. 하, 나 원 참…!”

    그래도 둘 다 건강하다니 불행 중 다행이긴 했다. 공작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살짝 눌렀다. 생각 같아선 로메인의 싸대기를 몇백 번은 치고 싶은 심정이다. 허나 임산부 앞에서 그러면 큰일 나는 수가 있다. 그는 애써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렉시를 바라보았다. 의원의 말대로 얼굴은 깐 달걀처럼 반지르르한 게 건강은 해 보였다. 허나 자기 생각이 맞다면 저 반지르르한 얼굴도 곧 제 색을 잃을 터. 그는 조심스레 렉시에게 물었다.

    “…너 입덧은 안 하느냐? 네가 나를 닮았다면… 곧 입덧을 시작해 막달 전까지는 고생할 거다. 임신은 보통 일이 아니야. 내 진작 공부를 시켰어야 했는데…. 슬슬 달수가 차면 네 몸엔 여러 가지 변화가 찾아올 거다. 이런 일은 다 알고 있느냐?”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소자는 아직 그쪽 일은 잘 모릅니다. 하지만 저 말고 로메인이 이것저것 많이 준비해서, 걱정하실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입덧은… 현재 저 대신 로메인이 하고 있습니다.”

    “…뭐?”

    엉뚱한 말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로메인에게 향했다. 추궁하는 듯한 그들의 시선에 로메인은 조금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일단은 그렇습니다. 말을 들어보니 일명… 먹덧이라 하더군요.”

    이것은 백작가의 마도구가 일구어 낸 역사였다. 본래라면 모체가 겪을 입덧을 완벽히 부친에게 옮기는 데 성공한 마도구 덕분에, 요즘 로메인은 일명 먹덧 중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잠깐 먹덧이 무엇인가 설명하자면, 간단히 말해 끊임없이 음식을 먹어 대는 입덧을 말한다. 속이 비어 있으면 계속 울렁거리니, 그냥 계속 조금씩 위를 채워 넣는 것이다. 끊임없이.

    보통은 이 과정에서 살이 통통하게 찌곤 하는데, 천만다행인지 당사자인 로메인이 기사라 살이 안 쪄서 모두 몰랐던 것이다.

    “먹덧…?”

    공작은 침묵했다. 머릿속으로 불현듯 요 며칠 만찬에서 계속 먹어 대던 로메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 아들을 임신시켜 놓고도 밥이 입으로 넘어가냐, 저 발칙한 놈! 하고 몹시 얄미워했는데… 그게 먹덧이었단 말인가. 그런데 남이 대신 입덧하는 거, 그게 가능한 일인가? 공작의 의문에 전문가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남자가 애를 낳기도 하는 세상에서 입덧 정도는 대신해 줄 수도 있지 뭘.

    “드문 일입니다만, 그럴 수 있습니다. 사이좋은 부부 사이에선 간혹 그런 일이 있다고 하니까요.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가지가지 하는군. 가지가지 해.”

    전문가의 호언에 공작은 툴툴댔다. 허나 얼굴은 아까보단 명백히 물러져 있었다. 아들 대신 입덧 정도는 해 준다니, 그나마 맘이 약간 풀어졌던 것이다. 손가락으로 살짝 숫자를 헤아려본 본 공작이 의원에게 물었다.

    “허면 아이는 언제 나오는 건가.”

    “전하의 선례로 미루어 본다면… 반년 안엔 출산하실 겁니다. 일단 최장 10개월을 봅니다만, 상태에 따라 빨라진 순 있습니다.”

    “…그래. 대충 출산까지 4~5개월 정도 잡아야 한다 이거로군.”

    공작은 떼꾼한 눈으로 아들 부처를 바라보았다. 걱정이 그야말로 태산이었다. 당장 자신도 애 낳느라 죽을 뻔했는데, 그 고통을 얘도 느껴야 하는구나. 아들 부처라곤 해도, 애를 낳는 게 자기 아들이다 보니 마치 딸자식을 보내는 느낌이었다.

    “…알렉시아노.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임신과 출산이란 거, 보통 일은 아니다. 너 그거, 잘 견딜 자신 있느냐?”

    “세상의 반은 다 겪는 일 아닙니까. 전하께서도 하신 일인데, 설마 아들인 제가 못하겠습니까. 입덧도 로메인이 대신해 주는걸요. 걱정 마십시오 전하. 다 잘될 겁니다.”

    “그래….”

    생긋 웃으며 자신만만한 대답을 하는 꼴을 보자니 속이 답답하다. 공작은 어쩐지 눈앞이 캄캄해졌다. 자신만만한 걸 보니, 정말로 뭘 모르는구나 싶어서였다. 만일 뭘 알았다면 저렇게까지 신색이 편할 리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걱정하는 티를 내지.

    공작이 겪은 바에 의하면, 아이를 낳을 땐 입덧 말고도 갖가지 것들이 모체를 습격한다. 체중 증가, 소양증, 유즙 분비, 소화 불량, 부기, 시력 하락, 치아 흔들림, 가외로 밑이 빠질 것 같은 고통 등등등.

    공작은 렉시가 속곳의 효력을 엄청나게 믿고 있기에 저렇게 흔들림이 없다는 걸 상상하지 못했다. 아들 걱정으로 공작의 머리카락 속에 새치가 늘어나는 사이, 조용히 있던 로메인이 잽싸게 대신 질문했다.

    “백부, 헌데 혹시 아기씨의 성별은 알 수 없습니까.”

    “모른다. 보통 그런 건 산파들이 더 잘 알지.”

    “산파…?”

    “사람을 치료하는 거야 내 전문이지만, 그들은 출산 전문이니까. 하지만 확신할 순 없을 거야. 그들도 사람이라 가끔은 틀리거든.”

    “그렇군요… 산파라.”

    심각해진 로메인의 얼굴을 본 백부가 슬쩍 웃었다. 예전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도 아내가 첫 아이를 가졌을 땐 저랬었지…. 어쩐지 예전 일이 생각난 그는 너그러운 얼굴로 조카에게 권했다.

    “원한다면 괜찮은 산파를 소개해 주마. 출산 시엔 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 사람들의 도움도 필요할 거다.”

    “네, 그래 주십시오.”

    최대한 많이 소개받으리라. 자고로 전쟁에 임할 땐 그 분야의 전문가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니.

    로메인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이렇게 렉시의 일로 공작 부처가 발칵 뒤집혔지만, 사실 그건 비단 공작 부처만의 일은 아니었다. 공작성에서 일하는 모든 시종들도 이 일로 큰 충격을 받았다.

    모두의 연인이라고 생각했던 소공작님이 애를 낳는다니. 말도 안 돼, 천사가 임신이라니? 천사는 무성 아니었어?

    사람들은 현실 도피를 하고자 했지만 그렇다고 맞닥뜨린 현실이 어딜 도망가진 않는다. 그들은 흑흑 울며 하늘을 원망했지만, 커다래진 배를 안고 돌아다니는 렉시의 모습에 결국 익숙해졌다. 그리고 그런 그의 뒤를 늘 로메인이 따르고 있는 모습까지도.

    “자, 렉시. 저쪽이 햇볕이 좋군요. 황도의 최신 의학 상식 중엔 하루에 일정 시간 이상 햇볕을 받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가서 햇볕도 쬐고, 꽃도 좀 봅시다.”

    “이쪽은 계단이 조금 가파르니, 절 잡고 조심히 내려오십시오.”

    “다리가 아프다고요? 저런, 이리 오십시오. 제가 안아 드리지요. 부끄러워 마시고… 자, 이리 오십시오.”

    불면 날아갈까, 잡으면 꺼질까 고이고이 모시는 로메인의 모습은 완벽한 배우자의 이상이었다. 시종들은 두 사람이 저 짓거릴 할 때마다 눈에 가시가 돋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저것이 염장이로구나. 눈꼴시어! 닭살이야!

    그들은 최대한 두 사람을 피해 다니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곧 그 노력도 소용없는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배우자가 렉시의 출산을 위해 갖가지 일을 벌이기 시작하자, 이젠 성안에서도 도망갈 장소가 없었던 것이다.

    “자네 들었나, 요즘 성의 남쪽 방 중 가장 크고 좋은 방을 지금 크게 트고 있는 거.”

    “…아네. 거기가 육아실이라지?”

    “살다 살다 그런 건 처음 봤다네. 방이 춥다고 방안 전체를 목화솜과 비단으로 감싸 안았더군. 아니 성에서 가장 따뜻한 위치의 방인데, 추울 일이 뭐가 있다고?”

    “태어나지 않은 아기씨가 벌써부터 호사를 하는군. 들어 보니 이미 산파들도 셋이나 모아 놨다던데 무슨 짓인가 모르겠단 말이야. 아직 출산도 훨씬 전 아닌가?”

    “자기 돈 쓴다는데 우리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나마 산파면 다행이지요. 듣자 하니 미리 유모도 뽑아 놨답디다. 젖유모를 포함해도 수가 다섯이 넘는대요, 다섯이.”

    그들로선 이해가 안 가는 일이다. 대체 유모를 그렇게 많이 뽑을 필요가 있을까. 대충 두셋만 뽑으면 자기들이 알아서 대충 정리할 텐데.

    “생각해 보면 로메인 경은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성미였지요…. 예전 그가 성의 경비대장을 할 때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뭐든 필요하다면 끝까지 털어 내던 성미였지요.”

    뭐든 정론대로 하는 사람이니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건 가져다 놓을 것이다. 적당히란 단어는 그의 인생에 없는 단어였다.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이번엔 그보다 더하네. 자네들, 요즘 성안에서 제일가는 기술자가 하는 일이 애들 식기와 장난감 만드는 거라는 건 알고 있나?”

    “…예?”

    사람들은 식겁한 얼굴로 말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식기라니. 아니 태어나지도 않은 애의 식기와 장난감은 왜?

    “그걸 왜? 전하께서 어릴 때 쓰셨던 은식기가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건 안 쓴답니까?”

    “산파들이 애들은 숟가락이 차가우면 안 먹는다고, 어릴 땐 나무 식기 쓰라고 했다더군.”

    “…산파들이라니, 참 쓸데없는 말들을 하지요. 왜, 아주 옷도 미리 만들라고 하지 그런답니까.”

    “오, 왜 아니겠나? 이미 예전 전하의 옷으로 본을 떠 마련하는 중이라네. 그게 무슨 헛짓인지…. 아기씨의 성별이 뭔지도 확실하지 않은데 옷을 만들어서 뭐 하게?”

    “그 사람이라면 그냥 두 벌 만들고 말겠지요…. 원래 그런 사람이잖습니까.”

    “…….”

    하긴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이 뭔들 못할까. 사람들은 로메인의 이 너무나도 이른 준비에 혀를 내둘렀지만 욕은 못했다. 만사불여튼튼이요, 철두철미함이 뭐 얼마나 그른 일이겠는가. 게다가 그 집요함의 수혜자가 소공작이니, 그를 따르는 자들은 결국 고개를 젓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산파를 셋을 들여왔다는 건 안전한 출산을 위해서이겠지.”

    “성에 머무는 의사들에게 백부의 의술을 가르치고 있다더군요. 혹여 모를 불상사 때문에 말이죠.”

    “산부들을 찾아다니면서 뭐가 제일 필요한지 묻고 다니기도 한다고….”

    그들은 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러니저러니 해도 다 소공작 좋으라고 하는 짓이란 건 부정할 수 없다. 게다가 로메인이 저렇게 다닌 이후, 소공작의 얼굴색이 몰라보게 좋아진 건 주지의 사실. 최근 천사같이 얼굴이 핀 렉시의 얼굴에선 행복의 물결이 넘쳐흘렀으니….

    “저렇게 행복해하시니… 그래, 우리가 뭐 어쩌겠나.”

    “로메인 경 이 복 터진 놈…. 무슨 복으로 저런 분이랑.”

    모두의 님을 훔쳐 간 놈에게 존대는 사치다. 그들은 로메인이 지나갈 때마다 음습한 눈으로 그를 흘낏거렸다. 언젠가는 상사가 될 그이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물론 로메인도 이들의 이런 날카로운 눈초리들은 알았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성을 다니며 렉시와 함께 행복을 흩뿌릴 뿐이었다. 니들이 그래 봤자 나랑 이 사람은 부부고 애도 가졌다.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당당한 모습에 결국 무릎을 꿇은 쪽은 그들일 뿐이다.

    하… 인생 뭐 있나.

    공작성의 사람들은 한숨을 푹푹 쉬다 결국 서로를 향해 질문했다.

    “…그래서 두 분, 혼인은 언제 하신다나?”

    *****

    “나중에요.”

    렉시가 말을 내뱉은 순간 내실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내가 무슨 소릴 들었나. 잠깐 귀를 후볐던 공작은 곧 눈을 부라렸다. 이게 무슨 개소리지?

    “너, 지금 뭐라고 하였느냐?”

    “혼인식은 안 하겠습니다 전하. 솔직히, 지금 그걸 할 상황이 아니잖아요.”

    “…너…! 혼인을 안 하면 뭘 어쩌려고? 임신도 한 녀석이 그게 무슨 소리야!”

    철없는 소리에 공작은 분노했다. 아이를 임신한 놈이 혼인을 안 해? 그럼 아이를 사생아로 놔두려고?

    “나는 그 꼴 못 본다. 내 손주가 사생아라니! 나는 그 소리가 싫어서 네 아버지와 혼인까지 한 사람이야. 너, 지금 제정신이냐?”

    펄펄 뛰는 공작을 보며 렉시는 얼른 손을 저었다. 그 뜻이 아니었는데, 돌이켜 보니 확실히 오해할 만했다.

    “전하, 진정하세요! 그게 아닙니다, 오해세요. 사생아라뇨. 그건 저도 싫습니다! 저는 단지, 식을 미루고 서류만 내자는 말이었어요. 정확히는 서류 먼저! 식은 나중에. 이해하시겠습니까?”

    “서류…?”

    씨근덕거리던 공작의 숨이 서서히 멎었다. 그는 칼처럼 번뜩이는 눈동자를 내리누르며 자신이 파악한 걸 되물었다.

    “…그러니까, 너는 서류상 혼인을 먼저 하자? 혼인식은 나중에 하고?”

    “네, 전하. 저라고 혼인식을 넘기고 싶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래도 몸이 무거우니 미루자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 눈도 있고요…. 서류를 먼저 처리하면 아이의 신분은 일단 해결되니까요. 조금 복잡하긴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으려면 이게 제일 편할 것 같습니다.”

    “…흠.”

    꼭 몰래 야합하는 기분에 공작은 얼굴을 구겼다. 아무리 그가 혼인식에 대해 큰 로망이 없다지만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혼인을 해치우는 건 원치 않았다. 그의 시선이 동그랗게 솟은 렉시의 배에 닿았다. 그래, 저 배로 혼인하려면 확실히 문제긴 문제지. 그는 결국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도 배는 과식해서 불렀다고 말하기도 그렇다.

    “…그래. 식은 애 낳고 나서 하면 되겠지. 그렇게 하자.”

    “감사합니다.”

    공작은 못마땅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머리에서 치열하게 계산이 섰다. 황제가 이번에도 도장 잘 찍어 줄까. 이번엔 또 얼마나 뇌물을 바쳐야 하나. 헌데 옆에서 뚱하게 보고 있던 베르크 남작이 웬일로 렉시의 의견에 찬동했다.

    “뭐 맞습니다. 식이야 나중에 해도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우리도 그랬는걸요. 말 나온 김에 쟤들도 식은 한 십 년 후에나 시켜 버립시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아주 공작령의 전통으로 만드는 겁니다. 출산 후 결혼, 꽤 독특한 전통 아닙니까?”

    “……응 그래, 참으로 재미있는 의견이야 그대. 물론 제대로 듣진 않았네만.”

    슬슬 남작을 다루는 법을 안 공작이 말을 귓등으로 흘렸다. 사랑해 마지않는 마나님의 그런 모습에 베르크 남작의 얼굴이 불퉁해졌지만, 그걸 보는 렉시는 그저 웃길 뿐이었다. 어차피 내 일도 아니고, 아버지는 늘 말하지만 조금 당해도 싸다. 둘을 보며 조금 웃다가, 렉시는 고개를 내려 로메인의 이마에 키스했다. 아까부터 자신의 발을 주물러 주고 있던 로메인이 그 통에 고개를 살짝 들었다. 파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렉시가 살짝 미소했다.

    “어때요? 괜찮죠?”

    “네, 합리적입니다. 저도 서류만 정리된다면 식이야 나중에 해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건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니까요…. 그보다, 발은 좀 어떻습니까? 여전히 쑤십니까?”

    속곳이 두 개였다면 좋았을 텐데 하나라 빨래할 땐 꼭 이렇게 몸이 붓는다. 렉시는 잠시 발을 움직여 보았다. 음, 역시.

    “이따가 방에 가서 뜨거운 물로 족욕을 좀 해야겠어요. 주무르는 걸론 한계가 있네요.”

    “알겠습니다. 마침 황도에서 제대로 된 향유가 도착했으니, 그것으로 마사지하면 조금 괜찮아질 겁니다. 부기를 빼는 허브가 들어간 것이라더군요.”

    로메인은 주무르던 걸 마무리 짓고 손을 닦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도로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남자의 시선이, 크게 솟은 자신의 배에 와 닿아 있었다. 기왕 이렇게 앉은 거 배도 쓰다듬으려나 보다. 렉시의 생각대로, 로메인은 조심스럽게 배를 쓰다듬었다. 시시때때로 이어지는, 로메인 나름의 태교였다.

    “…아이가 많이 컸군요. 많이 힘들겠습니다.”

    “뭐… 이젠 출산까지 얼마 남지 않았잖아요. 그래도 견딜 만해요 로메인. 너무 걱정 말아요.”

    “당신은 고통을 맡고 있으니, 걱정은 제 몫으로 남겨 주십시오. 이런 당신을 걱정조차 하지 않는다면 모든 배우자들이 저더러 욕을 할 겁니다. 결혼할 자격이 없다고 말이죠.”

    “당신도 참….”

    렉시가 얼굴을 붉히자, 그는 말없이 그의 배에 키스했다. 상대를 응시하는 눈동자가 마치 봄날의 바람처럼 부드럽다. 배가 이렇게 크지만 않았다면 입술에 했을 텐데…. 렉시는 어쩐지 아쉬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렉시의 배는 임신한 것을 속일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부풀어 있었다. 여성이 아닌 남성이 수태했기에 그의 배는 같은 개월 수의 여성보다 조금 더 컸다. 때문에 수시로 소피가 마려웠고, 위장은 만성 소화 불량이었다. 순환 문제로 다리가 밤이면 붓는 것은 양반 축이다. 저려서 잠을 못 자는 것보단 그냥 붓는 것이 낫다. 그나마 다행인 건 소양증이 없다는 것인데, 이건 아마 로메인이 매일 해 주는 향유 마사지 덕분인 듯했다.

    렉시는 요즘 들어서야 공작이 왜 자길 걱정했는지 알아 가고 있었다. 절로 그 연유를 파악할 수밖에 없는 변화들이 어찌나 많은지.

    그래, 그의 말대로 임신은 참으로 별일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도 하단 말야. 몸은 힘든데… 왜 마음은 이렇게 평온하고 행복한 걸까.’

    솔직히 말하자면 임신은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다. 그가 마련해 준 마도구는 자신의 몸 상태를 최상으로 만들어 주긴 했다. 하지만 그건 고통의 경감이지 증상을 아예 사라지게 하진 못했다. 처음 겪는 고난은 사람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해서 초반엔 자신도 모르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다니기도 했고.

    허나 이상도 하지….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론, 이상할 정도로 불툭대던 신경이 노곤히 풀어졌다. 신경이 곤두선 이유를 알아서 그런 걸까? 사람은 아픈 이유를 알게 되면 이상할 정도로 안심하게 되는데 그런 이유에서?

    어쨌거나 그 이후론 렉시는 매일이 그저 즐겁고 행복했다. 퍽 희한한 일이었다.

    “렉시. 무슨 생각 합니까?”

    “…음. 당신 생각?”

    “이런, 영광이군요. 아이보다 먼저 제 생각을 해 주시다니… 기쁩니다.”

    로메인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길쭉한 눈꼬리가 살짝 접히며, 푸른 눈이 어여쁘게 빛이 난다.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눈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살짝 휘어진 곳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자, 남자가 싱긋 웃으며 제 손가락을 살짝 깨물었다.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자신을 보며 근사하게 웃는 남자의 미소에 렉시는 새삼스레 가슴이 크게 뛰었다.

    “어때요. 꼬물이가, 슬슬 일어나는 것 같습니까?”

    “우리 꼬물이는 잠꾸러긴가 봐요. 도통 일어날 생각을 안 하네요…. 아무래도 오늘은 꼬물이가 늦잠을 자려나 봐요. 서운해서 어쩌죠?”

    “아 이런…. 꼬물이가 아니라, 잠꾸러기로 태명을 바꿔야 하나 봅니다. 아버지가 와도 눈을 뜨지 않다니, 요 깜찍한 녀석.”

    로메인이 낮게 웃으며 배를 향해 말을 걸었다. 배 속의 아이에게 장난스레 말을 거는 그의 모습 뒤로 흰빛이 새어든다. 렉시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마치 눈을 뜬 채로, 꿈의 한순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아니, 꿈이라기보단 묘하게 그 모습이 익숙했다.

    ‘데자뷰? 이런 비슷한 거, 어디서 분명 봤었는데….’

    소파의 팔걸이를 툭툭 치던 렉시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갑자기 머릿속이 환해지며, 아주 작은 것까지 선명하게 떠오른다. 뒤늦게 찾은 기억의 편린은 아주 예전 일이었다. 그가 로메인을 처음 만났었던, 아직 모든 것이 시작하기 전의 일.

    사람들에게 쫓기고, 간신히 잠에 빠졌다가 갑자기 들어온 로메인을 보았던 그날의 일이다.

    창틀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우아하게 자신에게 인사하던 로메인의 모습을 보았던 그 순간.

    ‘놀랐었지. 잘생겼어서….’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렉시는 로메인을 처음 만났을 때 무척이나 놀랐다. 갑작스레 마차 안으로 들어온 무뢰배를 본 놀람이 아니다. 그렇게 잘생긴 기사를 처음 봐서 놀랐었다. 억지로 깨어나 일어났을 때, 눈앞에 나타난 로메인은 마치 갓 이야기에서 빠져나온 사람 같았다. 은빛으로 빛나는 머리칼에 대비된 선명한 푸른 눈동자, 서늘한 얼음으로 조각된 것 같은 반듯한 얼굴.

    꿈인지 생시인지 까마득해, 순간 말을 까먹었을 정도였으니 그 놀람이야 오죽할까. 물론 곧 남자의 정체가 공작령의 기사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첫인상이란 원래 오래 가는 법.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겪게 된 일은 렉시의 마음을 폭풍처럼 흔들고 뒤이어 뿌리까지 송두리째 뽑았다.

    자신의 어려움을 듣고, 부디 자신이 당신을 돕게 해 달라 청하는 남자와 자신의 모습은 그가 늘 꿈꿔 오던 이상향의 현신이었다. 그는 로망스 속의 기사였고, 자신은 그런 그에게 도움받는 가련한 약자였다. 그러한 로망스의 끝은 늘 같았다. 가련한 약자는, 자신을 도운 기사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어쩌면 그에게 로망스의 기사를 이입했을 때, 이런 결과는 예정된 것인지도 몰랐다.

    자신이 그저 자신이 어리숙했기에 그 사실을 늦게 알아챘을 뿐, 속절없던 끌림과 애정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아, 그렇구나.’

    거기까지 생각하던 렉시는, 왜 계속 이 고통이 기뻤던 건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라서. 그와 나의 결실이라.’

    부드러운 얼굴로 배 속의 아이에게 말을 거는 로메인을 바라본다. 몸은 분명 힘들고, 이 일은 그가 겪었던 어떤 일보다 더 고되다. 그러나, 그렇게 힘듦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렇게 기뻐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아이는, 그와 자신이 사랑한다는 애정의 증거였다. 그가 자신을 위해 오랜 시간 쪼그려 앉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처럼, 자신도 그를 위해 기꺼이 이 고통을 감내한다. 그의 웃음을 보며 느끼는 행복이, 아이를 수태하며 얻는 고통보다 더 컸다.

    기사도 문학들의 끝은 판본들과 작가마다 제각기 다르다. 희비극이 적절하게 섞인 그것들은, 제각기 다른 서사들을 차용해 이야기를 만든다. 그러나 아무리 다른 이야기더라도 그 맥을 꿰는 공통점은 존재했으니 그게 바로 끝부분. 그들 대부분은 기사가 공주와 결혼해 새 제국이나 왕국의 왕이 되곤 했다.

    규모의 차이는 있으나, 바로 그게 해피엔딩이라는 것이다.

    즉, 이야기대로라면 두 사람은 이어질 수 없는 사이이며, 이것 역시 해피엔딩이 아니다.

    하지만.

    “…흥, 그런 게 어딨어. 시대가 변했으면 내용도 변해야지.”

    “예? 뭐라고 했습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잠깐 헛생각이 나서요.”

    어리둥절한 남자의 이마에 살짝 키스하며, 렉시는 생긋 웃었다. 이야기는 이야기, 현실은 현실. 그리고 새로운 해피엔딩은 바로 여기 이곳.

    렉시는 자신의 배를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조용하게 아이를 향해 말을 걸었다.

    “우리 꼬물이, 아빠가 이렇게 기다리는데 일어나야지. 자, 어서 눈 뜨고 아빠랑 놀아 보렴.”

    “하지 마십시오. 애가 잔다는데 굳이 깨울 필요는 없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아요. 애는 강하게 키워야죠. 자고로 기사의 아들이란 씩씩해야 하는 법이니까요.”

    “아들인지 딸인지는 아직 모르지 않습니까? 산파들도 성별을 알지 못하던데요.”

    “아들이에요.”

    “…예?”

    여자와는 다른 배 모양에 오랜 경력을 가진 산모들은 배 속 아이의 성별을 맞히지 못했다. 하지만 렉시는 확신했다. 아이를 품은 모친이 가지는 본능이라고 해도 좋았다.

    배 속의 아이는, 분명 아들이었다.

    “아들 맞아요. 그렇지 않고선 이렇게 활발할 리 없죠.”

    렉시는 옷깃 안쪽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배에 닿는 손이 차가웠다가 순식간에 미지근해진다. 렉시는 눈을 멀뚱하게 뜨고 있는 로메인의 손을 잡았다. 뜨거운 체온이 미지근해진 피부 위로 와 닿았다.

    “만져 봐요.”

    망설이던 로메인의 손이 천천히 셔츠 안쪽으로 밀려왔다. 렉시는 로메인의 손가락에 자신의 손을 끼워 배를 문질렀다. 로메인의 손은 따뜻했다. 늘 운동을 하는 기사이니 몸이 따뜻한 모양이었다. 두 손이 순차로 배를 쓰다듬었다. 그러다 결국 배 속 안에서 굼질대던 아이가 꼬르륵, 하고 기지개를 켰다. 무언가 퐁 하고 터지는 느낌과 함께 안쪽이 툭 하고 차였다. 태동이었다.

    “…일어났군요.”

    심각했던 로메인의 푸른 눈동자가 웃음으로 가득 찼다. 그는 툭툭, 하고 인사하는 것처럼 태동이 울린 곳으로 손가락을 톡톡 쳤다. 그러자 퉁퉁, 마치 마주 인사하듯 아이의 태동이 아빠를 반긴다.

    “안녕, 꼬물아. 오늘은 뭐 하고 놀까?”

    배에 얼굴을 가져다 대며 말을 건네는 남자의 모습이 무척이나 행복해 보인다. 가슴 속 어딘가에서 뿌듯함과 함께 충만함이 스며들었다. 어디에 가져다 놓아도 완벽한, 행복의 풍경이었다.

    *****

    말은 많았지만 탈은 별로 없었던 렉시의 임신 기간은 그렇게 꼭 아홉 달을 채웠다. 그동안 로메인은 데퓨탄의 성을 버리고 프로하우스가 되었고, 렉시의 배는 점차 불러 풍선처럼 커다랗게 변했다. 출산일이 다가오자 로메인은 렉시의 곁에 꼭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뒤뚱거리는 렉시가 힘들어하면, 그를 안고 어디든 가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성 어디든 렉시가 있다면, 그 옆엔 반드시라 할 정도로 로메인이 있었다. 그가 임신 기간 중 렉시의 곁을 떠나 있었던 건, 그가 출산을 했던 그때뿐.

    총 열두 시간의 진통 끝에, 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자 로메인은 자리를 박차고 산실로 뛰어들었다.

    “렉시!”

    깜짝 놀라 까마귀 울음소리를 내는 산파들을 제치고, 그는 렉시를 찾았다. 잦은 전투에서도 명료하던 눈이 이때만큼은 혼탁했다.

    “어떻게 되었나. 그는, 렉시는?”

    “아이쿠 이런, 성급도 하시지! 소공작께선 무사하십니다. 그리고 축하드립니다 로메인 경. 아주 건강한 아드님이시랍니다.”

    “아들이라고…?”

    아들이란 소리에 로메인의 눈이 커졌다. 렉시의 말이 맞았던 것이다.

    “자, 한번 보십시오. 얼마나 건강하고 예쁜 아기씨인지 모른답니다. 그간 제가 받은 아이들 중에서 이렇게 예쁜 아이는 처음인 듯하답니다.”

    “아이는 건강하다면 일단 그것으로 됐다. 그보다 그분은 어떻나? 왜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인가. 혹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진정해라 로메인. 소공작께선 괜찮다. 지금 피곤해서 잠에 빠져드셨을 뿐이야.”

    로메인은 벌떡 고개를 돌렸다. 희게 둘러친 천 안쪽에서 백부가 나오고 있었다. 로메인은 성큼 걸린 천 안으로 들어갔다가 순간 희게 질렸다. 익숙하고 끔찍한 냄새가 머리를 어지럽혔다. 피로 붉게 물들어 있는 시트에 렉시가 힘이 빠진 채 누워 있었다.

    “렉시…!”

    그는 신음을 내뱉었다. 오랜 진통으로 눈 밑은 새카맸고, 얼굴은 퉁퉁 부어 안쓰러웠다. 다행인 건 숨소리와 혈색은 안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로메인은 허물어지듯 무릎을 꿇고 침대 밖에 나온 손을 잡았다. 손은 차갑지 않고 뜨거웠다. 로메인의 손에 자극을 받은 듯, 잠들어 있던 렉시의 눈이 살짝 들렸다.

    “로메인…?”

    “…아, 신이여 감사합니다. 깨어났군요…!”

    로메인은 헐떡이며 외쳤다. 자신이 오자, 잠에서 깨어난 렉시가 안타까워 미칠 것 같았다.

    “정말 고생했습니다. 무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맙소사, 열두 시간 동안 당신이 어떻게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이는….”

    렉시는 조금 웅얼대는 목소리로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그야말로 죽을 뻔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긴 진통이었다. 공작 전하, 그의 모친은 이 고통을 어떻게 두 번이나 견뎠단 말인가. 깜박깜박 정신을 잃을 때마다 산파들이 잠을 깨우고, 정말이지 두 번 다신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애 울음소리를 들으며 잠깐 기절을 했었던 것도 같은데….

    렉시는 잠시 이맛살을 찌푸리며 숨을 삼켰다. 둔중하게 아픈 배, 지끈거리는 머리, 그리고….

    “어때요 로메인. 우리 꼬물이…. 아들 맞죠…?”

    “…예. 아들입니다. 무척 건강합니다.”

    “그래요? 다행이다….”

    이 상황에서도 그것이 제일 궁금한 걸 보니 괜찮은 건 맞는 것 같다. 로메인의 눈짓에 멀리 비켜 있던 산파가 아이를 데려왔다. 깨끗이 닦고, 흰 천으로 칭칭 싸맨 아이의 얼굴이 두 부모에게 처음으로 소개됐다. 렉시는 떨리는 손으로 천을 헤쳐 손가락과 발가락의 개수를 제일 먼저 확인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좋아, 모두 정상이다.

    손발을 확인한 렉시에게 아이를 안긴다. 렉시는 다시 새삼 놀랐다. 깜짝 놀랄 정도로 작은 이 아이를 낳느라 죽을 뻔했다니. 무게가 느껴지지도 않는 이 작은 것을 낳느라 고생한 게 억울하기도 하고, 건강하게 태어나 기특하기도 했다.

    자, 우리 꼬물이. 얼굴 좀 한번 볼까?

    렉시는 흰 천을 살짝 들춰 애 얼굴을 찾아냈다. 곧 두 사람의 눈앞에 애의 얼굴이 대령됐다.

    쭈글쭈글하고 붉은 얼굴, 희게 빛나는 배냇머리는 은발이다. 방금 태어난 아이답지 않게 또랑또랑 뜬 눈은 연한 녹색이었다.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겠지만, 영리해 보이는 눈동자가 퍽 맘에 든다. 아이답게 작은 코, 그리고 새 부리같이 뾰족한 입술. 꼭 쥐고 있는, 두 작은 주먹까지.

    그렇게 갓 태어난 아들을 가느스름한 눈으로 관찰한 렉시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로메인….”

    “네, 말씀하십시오.”

    렉시의 부름에 로메인은 몸을 바짝 세웠다. 아들을 바라보는 렉시의 얼굴이 퍽 심란했기 때문이다. 어째서 저런 얼굴일까, 건강하고 예쁜 아기일 텐데. 그렇게 긴장한 로메인의 귓가로 렉시의 작은 한탄이 새어 들어왔다.

    “…못생겼네요.”

    “예?”

    “못생겼어요. 세상에…. 애가 날 안 닮고 우리 아버지를 닮았나? 정말 너무 못생겼다…. 이 일을 어쩌지…?”

    렉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실로 생각지도 못한 사태다. 자기도 로메인도 어느 정도 생겨서, 다른 건 몰라도 애 얼굴 걱정은 안 했는데. 나도 로메인도 제법 생겼으니 애도 예쁘겠지 짐작했는데 이럴 수가.

    세상에… 어쩜 저렇게 못생겼을 수가 있을까!

    “…얘, 나중에 크면 날 엄청 원망하겠어요. 쪼글쪼글해선 무슨 원숭이 같네…. 어떻게 우리 집안에서 이런 박색이 태어났지?”

    렉시는 몰랐다. 원래 아이가 태어날 땐 양수에 불어서 쭈글쭈글 못생겨 보인다는 걸. 렉시의 한숨에 로메인은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간신히 삼켰다.

    “음 …못생겼습니까? 전 그래도 무척 귀여운 것 같습니다.”

    “그래요 뭐…. 손가락 발가락 열 개씩, 제대로 붙어 있고. 눈 두 개, 콧구멍 두 개 붙어 있는 게 잘 보면 귀엽긴 하네요.”

    “…그, 그렇지요. 콧구멍 두 개가 귀엽….”

    거기까지였다. 간신히 웃음을 참던 로메인의 웃음보가 터진 것은. 그의 커다란 웃음은 잠이 들었던 아이가 앵 하고 울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렉시는 그런 그를 뚱한 얼굴로 바라보았지만, 어째서 부군이 그리 웃는지는 꽤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고 한다.

    에드워드 드 프로하우스.

    애칭 에디.

    두 사람 사이의 첫 결실이 세상에 태어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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