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변태가 아닐 것 (18/20)

2. 변태가 아닐 것

“…기분이 나빠.”

“…예?”

렉시가 중얼거렸다. 옆에서 렉시에게 부채를 부쳐 주고 있던 시종의 손이 순간 삐끗했다.

“소, 송구합니다 작은 주인님. 부채를 더 세게 부칠까요?”

“너에게 한 말이 아니야. 그냥 기분이 나쁘다는 거지.”

렉시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크고 둥근 라운지체어 위에 몸을 기댔다. 시종들은 안절부절못하며 렉시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면 이분의 화를 누그러트릴 수 있을까. 그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시종들의 조바심은 천천히 움직이는 몸짓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허나 그걸 알면서도 렉시는 자신이 기분 나쁘다는 걸 숨기지 않고 내보였다. 사실, 지금 상황에선 그 수밖엔 달리 없었다.

뭐 지금 상황이라고 하니 렉시가 현재 대단히 나쁜 상황에 빠져 있다 상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허나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자. 일단 렉시의 몸만큼은, 현재 천국에 있다.

머리 위에서 살랑대며 부치는 타조 털 부채, 옆에는 향미 좋은 과실주와 뜨거운 차, 그 아래쪽엔 각종 씨앗을 갈아 만든 쿠키와 푸딩, 먼 이국의 과일이 넓게 펼쳐진 테이블. 그뿐인가? 옆엔 시중을 들어 줄 시종들이 열댓 명은 와 있었고, 한쪽에는 악사가 와서 하프의 현을 퉁기고 있다.

가히 천국과 비견될 만한 완벽한 여가와 휴식 아닌가.

그러나 몸은 천국이라도 마음이 지옥이면 하등 소용이 없는 법. 지금 이 모든 것을 누리고 있는 사람의 현재 기분은 무척이나 나쁜 상태였다. 얼마나 나쁘냐면,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다 부숴 버리고 싶은 욕구에 휩싸여 자신을 제어하지 못할 정도다. 렉시는 잘근잘근 입술을 씹다 결국 또다시 한마디 했다.

“정말로 미치겠다. 왜 다 이 모양 이 꼴이지.”

“고정하십시오, 작은 주인님. 몸에 좋지 않습니다.”

“내가 그걸 몰라서 이럴까. 알아도 속이 터져서 문제지! 누가 한번 말해 보렴. 내가 겪은 이 일들, 너희가 겪으면 화를 안 낼 수 있겠어? 응?”

“…….”

시종들은 조용히 입을 닫았다. 솔직히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으니까.

현재 렉시는 두 달째 황도살이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 황도살이가 언제 끝날지는, 현재로선 기약이 없는 상태다.

황도살이가 좋아서 그런 것은 단연코 아니라 할 수 있다. 기실 렉시는 이 황도의 삶이 너무 불편해서, 어지간하면 집으로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왜 베일을 안 써서 이런 고행을….”

렉시는 과거의 자신을 한 대 때리고 싶었다. 황녀에게 화가 난 나머지 너무 뒷일을 생각 안 한 것이 문제였을까?

연회에서 얼굴 보인 날 이래 그의 평온한 삶은 사라지고 없었다. 남작일 때와는 또 다른 고생길이었다. 그땐 가두고 위협하려는 자들로 골치가 아팠다면, 지금은 반대로 꼬리를 흔드는 공작새들 때문에 골치였다.

추종하는 자들이 저택 앞에 찾아와 노래를 부르고, 심심하면 저택을 마비시키는 초대장이 넘쳐흐르며, 어떻게든 자신의 얼굴을 보고자 담치기를 하는 또라이들이 넘치는 삶은 다른 의미로 그를 괴롭혔다.

“지겨워. 시끄럽다고!”

황녀는 어떻게 이런 삶을 견뎌 냈을까? 도통 알 수가 없다. 황도에서 오래 살면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그는 그저 여기서 도망가고 싶을 뿐이었다. 렉시가 이 시끄러운 생활을 견디는 이유는 로메인의 존재 하나뿐으로, 오로지 그 덕분에 이 미친 생활을 이겨 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렉시가 로메인을 부르면, 어디선가 나타난 정의의 기사가 저택을 소음으로 오염시키는 인사들을 죄다 쫓아내 주고 렉시를 위로해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만큼 때리고 몰아내도, 비슷한 사람이 매번 몰려오고 있었으므로 렉시의 짜증은 그칠 길이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뭐,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단 나으니까.

허면 그가 어째서 여태까지 황도에 있는 것일까? 저 정도로 싫으면 공작령으로 돌아가는 것이 응당 맞을 텐데.

이건 황도에서 예상치 못한 사건 사고가 계속해서 이어진 탓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상하게도 그가 황도를 벗어나려고 할 때마다 재수 없는 일들이 연달아 터졌다. 그게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황당한지…. 말하면 누가 믿지도 못할 것이다.

처음은 마차 바퀴가 고장 난 것이었다. 달려가던 마차 바퀴의 축이 똑 하니 부러졌는데, 자칫 잘못하다간 큰 사고가 날 뻔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소공작이 탈 마차였기에 사람들은 기겁했고, 결국 그날은 그렇게 귀환을 관뒀다.

그 다음 가는 날엔 도로에서 마차 몇 대가 전복됐다. 사람을 태운 것이면 모르겠으나, 문제는 이 마차가 닭들을 실은 마차였다는데 있다. 그 길로 닭 일만 마리가 도로에 쏟아졌으니 그 혼란함이야 어찌 말로 다 할까. 그 닭들을 잡느라 근처 주민과 병사들이 총동원되었는데, 설상가상인 건 그것이 또 폐하의 공물이란다. 폐하의 공물을 잃어버리면 연관된 당사자들은 최소 태형에 최고 사형이다. 이 상황에서 집에 갈 것이니 길을 내달란 요구는 아무리 렉시라도 할 수 없었다.

세 번째는 더욱 기가 막혔다.

오늘이야말로! 하는 마음가짐으로 마차를 타고 나간 렉시는 최대한 빠른 발걸음으로 황도를 벗어나길 주문했다. 초반엔 그럭저럭 괜찮았다. 중반까지도 나쁘지 않아서 오늘은 정말이지 집에 갈 줄 알았지. 헌데 황도를 나가는 막바지 길에 접어든 마차 앞에서, 그만 16중 충돌사고가 벌어진 것이다. 세상에….

그것도 그냥 충돌이면 말도 안 한다. 사고야 수습하면 되고, 그는 그걸 피해 나가면 되는 일이니까. 허나 이 사고로 황도에서 밖으로 나가는 관문이 대파되어 그만 모든 출입 업무가 마비되고 말았다. 즉, 그는 오늘도 못 나간다.

그리하여 이날의 귀환도 이렇게 취소.

그리고 대망의 네 번째가 이번 주였는데…. 이건 시도도 하기 전에 그만 쫑났다. 사교 시즌이 시작된 것이다.

렉시는 황도의 사교 시즌을 겪어 본 적이 없었기에 그 심각성을 미처 알지 못했다. 그가 그 심각성을 눈치챈 건 잠깐 밖에 나가려고 마차를 타고 나갔을 때였다.

“…저게 뭐야?”

평소에는 대여섯 대 보이는 귀족 마차가 도로를 꽉 채운 장면을 본 렉시는 처음에 자기가 뭘 잘못 본 줄 알았다. 렉시는 황도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들어올 수 있을 것이라곤 상상조차 한 적이 없었다. 아니 제국에 이렇게 많은 귀족이 있었다고!?

“슬슬 시작되었군요.”

“뭐가요 로메인?”

“황도의 사교 시즌 말입니다. 전국의 귀족들이 모이는 행사죠. 아마…앞으로 두어 달은 이렇게 혼잡할 겁니다.”

렉시는 기겁했다. 사람이 많으면 필연적으로 정체가 발생하는 법이지만 이건 그가 상상한 것보다 더 심했다.

“그럼 저 공작령은?”

“…죄송합니다 렉시. 당분간은 못 갈 것 같습니다.”

“…!!”

어쩐지 사교 시즌이 시작되었단 소리에 로메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했다. 마차로 십 미터 떨어진 곳을 가는 데 삼십 분이 걸리는 걸 보고 렉시는 그만 울고 싶었다. 이래서야 나가기는커녕 저택 근방이나 겨우 다닌다. 이 빌어먹을 사교 시즌이 끝나야만 정체가 풀린다는 소리에 그가 얼마나 절망했는지!

대체 왜 황도를 나가려고 할 때마다 이 모양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올해 운수가 왜 이따위지? 황도에 올라온 건 역시 실수였던가!

이 모든 것을 되새기던 렉시는 새삼 괴로워져 우우 하고 우짖었다. 

“마가 꼈나? 그래서 그런가? 혹시 누가 날 저주라도 하는 걸까?!”

“황제께서 계신 황도에 어찌 그런 삿된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그저 운이 조금 없으셨던 것이지요.”

옆에 있는 시종이 렉시를 달랬다. 렉시는 한숨을 푹 쉬며 이마를 짚었다. 그래, 그도 알고는 있다. 세상에 저주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으며, 그저 요즘 묘하게 운이 나빴을 뿐이란 걸.

하지만 안다 해서 분이 풀리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묘하게 콕콕 찌르는 듯한 두통에 렉시는 얼굴을 찌푸렸다.

“…안 되겠다. 로메인 경을 좀 불러 다오. 그를 보아야겠어.”

“예, 작은 주인님!”

안절부절못하던 시종들의 얼굴이 거짓말처럼 밝아졌다. 요즘 시종들 사이에서 로메인은 소공작 전용 만능 해결사로 등극 중이었다. 그가 나타나면 날카롭던 렉시의 기분이 노곤하게 풀렸기 때문이다.

소공작의 약혼자라면, 소공작의 오늘 울증도 조금은 낫게 해 주겠지!

시종 하나가 부리나케 로메인을 찾으러 나갔다. 그리고 얼마 뒤, 묵직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로메인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렉시. 저를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로메인!”

은발에 벽안을 한 당당한 체구의 미남자는 미인이 내민 손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그런 그를 보는 렉시의 얼굴이 슬며시 풀렸다.

“무슨 일입니까. 누가 또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했습니까?”

“…알려 주면 어떻게 하게요?”

“당신의 적은 제 적이니, 기사는 그저 행동으로 말할 뿐이지요.”

싱긋 웃는 얼굴 뒤로 어쩐지 피비린내가 느껴지는 것은 착각일까. 시종들은 로메인의 대답에 식겁했지만, 렉시는 그 말이 퍽 마음에 들었다.

“당신이 죄 짓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기분을 풀어야겠네요.”

“제가 어쩌면 되겠습니까?”

“…다 알면서.” 

렉시가 얼굴을 붉히며 제 가슴을 탁탁 치자, 로메인이 낮게 웃으며 렉시를 안아 들었다. 기사의 품에 폭 안긴 미인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시종들이 둘의 모습을 힐끔거리며 얼굴을 붉히는 사이, 로메인은 렉시가 편하게끔 자세를 고쳤다. 그 사이 렉시는 로메인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 정말 너무 좋아.

그가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느낌이 신기하기까지 하다. 렉시의 얼굴이 확연히 풀린 것을 본 로메인은 렉시의 볼에 짧게 입술을 부딪쳤다.

“기분이 풀렸습니까?”

“응, 무척요.”

“다행입니다. 당신의 얼굴에 근심이 서리는 걸 내버려 둬서야 어떻게 약혼자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고마워요 로메인. 내가… 요즘 당신을 많이 귀찮게 하죠?”

“당신을 위한 일인데 귀찮을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말 마십시오.”

정색하는 대답에 렉시가 살짝 웃었다. 오늘 처음으로 웃는 렉시의 미소에 시종들이 한결 안심했다. 과연, 소공작 전용 해결사!

“미안해요. 제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화를 참을 수가 없어요. 하루 온종일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하는데…. 요전엔 글쎄, 밀라디 부인에게 화를 낼 뻔했다니까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무마는 했지만 그런 실수를 할 뻔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다. 렉시는 그때를 생각하면 눈앞이 다 아찔했다.

“괜찮습니다. 어쨌거나 결국 화를 낸 건 아니었지 않습니까? 사람이 예민해지면 그럴 수도 있지요. 너무 자신을 책하지 마십시오.”

“역시…그럴까요?”

“사람은 누구나 다 그렇게 화를 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인간에게 감정이 있는 한 그건 언제고 벌어질 수 있는 일이지요. 저 또한 종종 그럴 때가 있습니다.”

“당신도요? 언제요?”

“글쎄요. 예를 든다면….”

여기서 로메인은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서늘한 시선이 테라스의 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동시에 렉시 역시 얼굴을 찌푸렸다. 잠시 조용하더니, 또 바깥 놈팡이들의 패악질이 시작됐다.

“딱, 이럴 때 그렇겠군요.”

―오, 이 아름다운 낮의 태양이 웃음짓고

아, 이 푸르른 대지의 바람이 속삭이네

적막한 달빛, 나의 꿈에 나타난 그대여

아름다운 그대의 모습에 내 애간장이 타네

잠시라도 잊지 못할 빨간 장미 같은 그대여

아! 사랑스러운 나의 연인 부디 창밖으로 나와 주오…

다정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진다. 쫓아내고 쫓아내도 쥐새끼처럼 기어들어 오는 저 놈팡이들!

“저치들은 지치지도 않는군요. 누가 죽어 나가야 겁을 먹을 건지…!”

그는 뚜벅대며 발코니로 다가가 창 너머를 노려봤다. 거기엔 렉시의 미모를 찬양하는 찬미자들이 꿀에 모인 개미 떼처럼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매일같이 패고 없애도 똑같은 저치들은 포기도 모르는 듯했다. 로메인의 차가운 눈동자가 아래 있는 머저리들을 잡아 죽일 듯이 노려본다.

‘여기가 황도만 아니었어도!’

그나마 황제 덕분에 귀족들이 오지 못한 것이다. 황제가 직접 치른 약혼 관계를 망치기라도 하면 황제의 노여움을 살 게 뻔했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자기가 직접 오지 못하는 대신 가객들을 섭외해 보낸다는 미친 짓을 자행하는 중이었다. 덕분에 렉시의 저택은 밤이고 낮이고 이 빌어먹을 소음에 시달렸다.

“빌어먹을 것들!”

실로 이해가 안 가는 처사였다. 과연 저렇게 노래를 부르고 사랑을 고백한다고 렉시가 자신들을 봐줄 것 같은가? 아니 그보다, 약혼자인 자신이 떡하니 있는데도 저렇게 달려들고 싶을까?

“조금 후에 다 쫓아내겠습니다. 반드시!”

그는 이를 갈며 발코니에서 멀어졌다. 이러다 렉시의 얼굴을 저놈들이 보기라도 하면 또 개난리가 날 것이다. 품에 얌전히 안겨 밖을 구경하던 렉시가 진저리치며 고개를 저었다.

“참 이상하단 말이죠. 정문에 병사들을 늘 세워 놓는데…. 여긴 어떻게 계속 들어오는 걸까요?”

“쥐가 들끓는 곳엔 당연 쥐구멍이 있는 법입니다. 황도의 쥐새끼들은 그런 뒷구멍들을 아주 잘 알고 있지요.”

아마 저들이 이용하는 쥐구멍은 이곳에서 오래 거주한 하인들일 것이다. 병사들은 대부분 공작령에서 데려온 자들이지만, 하인들은 다르다. 아무리 철통같은 경비를 해도 내부에서 길을 터 주면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로메인은 하인들의 불충을 알아채고 집사에게 의논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황도에서 살아온 자들의 내밀한 거래는 지금으로선 손쓸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 저택의 모든 하인들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일단 이곳을 비우고, 차츰 차츰 바꿔 나가야겠지요.”

“…황도는 참 이상한 곳이에요….”

렉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영지에 있을 땐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이 여기선 당연한 듯 벌어진다. 어떻게 자기가 모신 귀족의 정보를 팔 수가 있는 걸까. 하다못해 남작령에서도 이런 일은 벌어진 적이 없다. 황도 출신 하인들은 충성심들이 없다는 말이 이래서 나오는구나 싶었다.  

“…어쨌거나, 저조차도 이러는데 당신은 어떻겠습니까. 당신의 화는 온당한 것입니다. 저렇게 신경을 건드리는 것들이 있는데 견디는 것이 이상한 일입니다.”

렉시는 조금 갠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로메인의 말이 무척이나 그럴듯했다. 저놈들 때문에 짜증나고, 화가 나는 것이다. 공작령에 갈 수가 없으니 화는 더욱 축적되는 것이고.

그래, 내가 요즘 오르락내리락하는 건 다 저놈들 탓!

렉시는 밖에 있는 불법 침입자들을 향해 적개심을 불태웠다.

“…역시 그런가 봐요. 저 사람들, 솔직히 귀찮아 죽겠거든요.”

“귀족이 고용한 가객들이 본래 그렇습니다. 무례하고 눈치가 없지요.”

”맞아요. 눈치가 있었다면 여기에서 저렇게 버틸 리가 없죠. 차라리 황녀한테라도 가면 의리는 있다는 말을 들을 텐데…. 안 그래요?”

렉시와의 일 이후, 황녀는 요즘 두문불출 중이었다. 그 드높은 자존심이 와장창 무너져 속병을 얻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여하간 그렇게 아프다는 핑계로 자택 밖을 나오지 않는다니, 어떻게 보면 렉시보다 더 만나기 힘든 것이 황녀일지도 모른다.

“약을 가지고 가도 내친다 하니 아마 정말 아픈 것은 아닐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뭐 자존심이 다친 건 맞겠지만요.”

정말 아팠다면 황실에서 나온 의원이 저택을 드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황실에서 누가 나왔단 소식은 없었다.

“아마 저희 말고도 황녀 쪽으로도 누군가를 보냈긴 했을 겁니다. 황도의 귀족들은 늘 양쪽에 줄 대기를 즐겨하니까요. 간사한 자들이니 그런 것을 생각하지 못했겠습니까. 이래저래 건방진 놈들입니다.”

로메인의 성난 얼굴을 보아하니 밑에 있는 놈들 중 태반은 어딘가 멍들어서 나갈 모양이다. 사실 렉시의 저택에 온 가객들 중 얼굴이 성해서 나간 놈은 없다시피 했다. 렉시는 속으로 혀를 찼다.

매일같이 기사에게 얻어맞는 것보단, 만나지 못하더라도 덜 맞는 황녀에게 가는 게 더 나은 선택 같은데 말이야. 

‘그나저나 저 꼴을 언제까지 더 봐야 할까. 공작령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렉시는 흥 하고 웃다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가, 집을 생각한 순간 다시 급격하게 속이 답답해졌다.

대체 언제쯤 돌아갈 수 있을까?

어차피 가면 일 때문에 바쁠 거라고 해도, 이 시끄러운 황도보단 나을 게 분명한데 말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이렇게 심란하진 않았던 것 같았다. 렉시는 다시 둔중하게 올라오는 두통에 미간을 찌푸렸다. 찌르는 것 같은 고통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이 로메인 말대로 스트레스를 받아서인가 보다. 이 망할 두통은 왜 시도 때도 없이 올라오는지 원.

“로메인, 저 좀 내려 줘요.”

“…? 렉시, 괜찮습니까?”

렉시의 얼굴을 본 로메인이 깜짝 놀라 그를 의자에 내려놓았다. 렉시는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이마를 꾹꾹 눌렀다.

“무슨 일입니까. 어디가 아픕니까?”

“두통이에요. 아마 스트레스 때문이겠죠…. 요즘 들어 자주 머리가 아프네요.”

아프다는 소리에 로메인의 얼굴빛이 검게 변했다.

“의원을 부를까요? 아니, 부르겠습니다.”

“아뇨, 그러지 마세요. 하인도 정보를 파는데 의원이라고 다르겠어요?”

돈과 인맥으로 엮인 동네에서 의원 불렀다가 무슨 소문이 더 나려고. 렉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이었다.

“자면 좀 괜찮아져요. 전 스트레스를 받으면 잠이 오는 타입인가 봐요. 요즘 시도 때도 없이 졸리는데…어휴. 하여간 요즘 컨디션이 최악이에요.”

“…당신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따르겠습니다.”

로메인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식사는 어떻습니까. 잘 드시고 계시는 겁니까?”

“밥은 뭐, 그럭저럭이요. 봄을 타는지 입맛이 조금 떨어지긴 했는데… 대신 과일을 많이 먹는 거 같아요. 귤이나, 자몽이나, 딸기나. 이상하게 신 게 당기네요.”

“뭐든 잘 먹는 것은 좋은 겁니다. 봄에 먹는 과일은 약보다도 좋다는 말도 있지요. 가서 주방에 이야기해야겠습니다. 식사에 과일류를 많이 올리라고.”

로메인은 무릎을 꿇고 렉시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이렇게 보니 얼굴 살이 조금 내린 것 같기도 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렉시를 끌어안다가 얼굴을 살짝 굳혔다.

…허리가 좀 가늘어진 것 같은데.

그는 슬그머니 렉시의 팔목을 보았다. 날이 풀림에 따라 얇아진 옷 사이로 보이는 흰 살결이 눈이 부시다. 그는 자기 팔과 렉시의 것을 견주다가 눈썹을 찌푸렸다. 렉시의 팔목이 이렇게 가늘었었나 싶어서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안았을 때도, 평소보다 가벼운 느낌이었지.

그는 대번에 얼굴이 복잡해졌지만, 아무 말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괜히 여기서 한마디 하면 안 그래도 심란한 렉시에게 걱정거리만 더 안겨 줄 것 아닌가. 그에게 뭐라 하느니 주방을 족치는 것이 백배 나았다.

“앞으로도 식사는 열심히 하십시오. 뭐든 드셔야 버티지요.”

“응, 알았어요. 참 스트레스가 무섭긴 무섭네요. 두통에, 잠에, 입맛까지 이 모양이 되다니…. 무슨 병도 아니고 참.”

“그렇군요.”

두통에 기면증, 갑작스러운 입맛 변화, 더해서 울증. 여기에 좋은 음식이 뭐가 있을까. 렉시의 증세를 기억에 새기던 로메인은 문득 이 증상에서 기묘한 것을 감지해 냈다.

두통, 간헐적으로 늘어난 잠, 식욕 부진, 특정 과일 호오 증가, 울증…?

‘…어디서 본 내용들 같은데.’

그는 공부하는 걸 즐겨하지 않았지만, 기억력은 제법 좋았다. 이건 분명 그가 어디선가 보았던 사항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던 로메인의 눈가가 살짝 좁혀졌다. 어디선가 보았다는 건 내가 책을 읽었다는 건데. 내가 최근에 책을 읽을 일이 언제 있었지…?

‘…설마!’

그의 눈동자가 순간 확 빛났다.

“렉시. 두통, 기면증, 식욕 변화, 울증. 맞습니까?”

“…? 네, 그거 맞아요.”

“혹시 배는 아프지 않습니까?”

가만히 생각하던 렉시는 앗, 하고 작게 외쳤다.

“오, 그러네요. 가끔 배가 싸르르 아프다 말다 하긴 했거든요. 스트레스성 질환에 배탈도 포함되어 있는 건가요?”

“…!!”

렉시는 로메인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기 증상을 되물은 그는 어쩐지 크게 놀란 것처럼 보였다. 경악…? 기쁨…? 뭐지? 그 얼굴에 떠오른 기색을 읽어 내려 애쓰던 렉시는 순간 떠오른 생각에 깜짝 놀라 외쳤다.

“설마 이거, 큰 병에 걸렸을 때 보이는 증상인가요?!”

“…무슨 소립니까? 아닙니다!”

로메인은 렉시의 말에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닙니다. 그보다는, 제 생각엔 어쩌면….”

“어쩌면…?”

로메인의 눈동자는 감정이 격해질 땐 조금 짙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지금도 푸른 눈동자가 마치 심해처럼 짙어져 있다. 그렇게 잠시 뭔가를 말하려던 그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을 닫았다. 그의 못마땅한 시선은 시종들과, 저 커튼 너머에 있는 불청객들 쪽으로 닿아 있었다. 렉시는 그를 보며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왜 말을 하다 말아?

“어쩌면, 뭐요?”

“…아닙니다.”

짧은 한숨 뒤, 그는 렉시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겹쳐진 손등 위로 느껴지는 손이, 어쩐지 조금 떨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일이지, 렉시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로메인이 조용히 말해 왔다.

“…빨리 무언가 조치를 취하긴 해야겠군요.”

렉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령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제일 좋겠지만 안 된다면서요. 이번 사교계가 끝날 때까진 못 간다 하지 않았나요?”

“그랬죠. 그랬지만….”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짧지만 깊은 고뇌가 그의 얼굴 위를 스쳤다.

“상황이 복잡하긴 하지만 어떻게든 타개해 내겠습니다. 어쨌거나 당신을 이대로 두면 안 되는 건 확실할 것 같으니…. 일단 이번 첫 사교 연회가 열릴 때까지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해 보겠습니다.”

“…정말요? 뭘 할 건데요?”

렉시는 조금 밝아진 얼굴로 로메인을 올려다보았다. 로메인은 그런 렉시의 얼굴에 손을 대 다정하게 쓸어내렸다.

“공작령에 돌아갈 방도를 찾겠습니다. 물론 힘들 수도 있을 겁니다. 만일 불가능하다면, 일단 당신 기분부터 풀어 줄 다른 방도를 찾아볼 수도 있겠지요.”

로메인의 단호한 대답에 렉시의 얼굴이 환해졌다. 늘 좋은 말을 해 주는 남자지만 저렇게 단호한 말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확실히 뭔가 수가 있는 모양이었다. 렉시는 기쁜 나머지 로메인에게 다짜고짜 달려들어 입술에 키스했다. 말캉하고 따뜻한 두 입술이 순식간에 착 붙었다.

“!”

안고 있던 로메인의 눈동자가 순간 크게 떠졌다가 내려앉는다. 그는 곧 익숙한 몸짓으로 키스에 화답했다. 연인이 붙었으니 키스가 깊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는 시종들이 서로 눈짓하며 방 밖으로 황급히 나갔다.

단 사탕을 먹는 것처럼 달콤한 오후의 시작이었다.

*****

확답을 한 것과 달리 그의 처치는 시간이 좀 걸리는 모양이다. 로메인의 말이 있은 후로도 렉시의 생활은… 크게 달라지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나태의 극치처럼 생활했더니 살만 조금 쪘나?

렉시는 거울을 보며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흠, 쪘나 빠졌나.

‘쪘겠지 뭐.’

먹고, 자고, 화내고, 자고, 참고, 웃다가, 우울하다가, 로메인이 와서 달래 주고, 자고, 먹고.

이렇게 사는데 살이 빠지면 뭐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렉시는 자신의 최근 행동들을 복기하다 조금 놀라고 말았다.

내가, 내가 이렇게 놀다니?!

놀고먹고 할 땐 잘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아주 가관도 아니다. 렉시는 가벼운 환멸감에 빠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렉시는 나름 부지런하게 살아온 사람이다. 아버지 남작 때문에 노는 귀족들에 아주 학을 뗐기 때문이었다.

헌데 이랬던 그가 요즘은 아주 딴사람처럼 변했다. 예전 그를 아는 사람들이 보면 아마 믿지도 않을 것이다. 당장 그 자신부터도 자기 변모가 놀라울 지경이었으니까.

‘…나 요즘 이상한 거 같아.’

렉시는 속으로 생각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아무리 스트레스를 받았다지만 그게 사람을 이렇게 바꿔 놓을 수 있는 걸까?

아무리 상황이 사람 환장하게 만든다고 해도 그렇지, 요즘 그는 참 이상했다. 도무지 자기 몸을 자기가 컨트롤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스트레스야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잠이 미친 듯이 늘었다.

춘곤증이라고 해도 묘한데. 나 원래 이렇게 노는 게 체질이었나?

“그럴 리가 없는데…. 희한해. 너무 이상해.”

렉시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밖에 누구지?”

“소공.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아, 식사….”

익숙한 하인의 음성에 렉시는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멈칫했다. …밥 아까 먹었던 거 같은데. 얼마나 지났다고 또 먹어?

이상함에 시계를 본 렉시는 시침이 가리키는 숫자를 보고 멍해졌다. 벌써 점심이었다. 분명 눈을 감기 전엔 열 시였는데, 왜 벌써 한 시지?

설마 잠깐 눈을 감은 사이 두 시간이 흘러갔단 말이야!?

이 어마어마한 시간 감각에 렉시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게을러지면 시간도 빨리 가나?”

물론 그럴 리가 없다는 건 렉시가 더 잘 안다. 시간이 빨리 간 게 아니라 자기가 시간 흐름을 망각한 거겠지. 생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렉시는 입맛이 확 달아났다.

“안 먹…!”

꼬르르르륵.

너는 안 먹어도 나는 먹겠다. 배 속의 주장이었다.

“예? 하명할 것이 있으십니까?”

“…곧 나간다고.”

렉시는 허탈한 얼굴로 제 배를 내려다보았다. 뭐니 너?

“배에 거지라도 들었나.”

밥 소리를 듣자마자 꼬르륵대고 있는 이 어처구니없는 몸의 주장은 실로 강력했다. 밀려오는 강렬한 허기에 결국 렉시는 밥을 먹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렉시는 게을러진 뒤 처음으로 위기감이 들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래선 안 돼, 이거 이상해!

이 일로 가까스로 상황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그는 어떻게든 게을러진 몸에서 벗어나려 애를 썼다. 하지만 아무리 정신이 원해도 몸이 그걸 원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모양인지 번번이 실패였다. 조금 일이라도 하려 하면 찾아오는 잠 때문에 뭘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을 하려고 하면 졸리고, 밥을 먹다가도 졸리고, 심지어 저 시끄러운 세레나데를 들을 때도 멍해진다. 덕분에 그는 요즘 화내는 시간도 줄어들었는데 이걸 좋다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이 이상한 몸 상태에 며칠 고민하던 렉시는, 깊은 고뇌 끝에 제법 타당한 이유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스트레스를 받을 만한 상황 자체를 몸이 거부하는 것이라고.

그럴듯했다.

“…대단한데. 나름 괜찮은 방도를 찾아냈잖아?”

반대급부로 게을러지긴 했지만, 그간 화내고 울고 하느라 진이 빠진 걸 생각하면 이편이 낫긴 하다. 아닌 척해도 몸이 굉장히 피로감을 느꼈었나 보다. 이 얼마나 대단한 생존 본능이란 말인가? 그는 심지어 시끄러운 노래를 들으면서 숙면까지 하고 있었다. 덕분에 스트레스가 퍽 줄긴 했다.

하지만.

“…계속 이러면 곤란할 것 같은데.”

렉시는 중얼거렸다. 그 말 그대로 놀아서 좋긴 한데, 미래를 생각하면 이래선 안 됐다.

그는 소공작이고 사람들을 다스려야 하는 자다. 사람의 몸이란 간사해서 한번 게으름에 익숙해지면 다시 돌아오기 무척 힘들다. 이 새로운 게으름에 매몰되어 일처리가 터덕대면, 결과적으로 그만 손해였다.

그가 이 게으름에서 벗어날 방법은 지금으로선 단 하나밖에 없었다.

―공작령에 한시바삐 돌아가는 것.

“로메인은 아직 방법을 못 찾았겠지?”

렉시는 입술을 삐죽였다. 첫 연회까지는 참아 달라는 걸 보면 그때를 지나야 시도할 수 있는 방도인 걸까. 저번에 렉시에게 집에 갈 방도를 찾거나,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찾아낼 거라고 말한 뒤 그는 묘하게 바빠졌다.

“하긴 그렇게 빨리 찾아내긴 힘들겠지.”

거짓말과 허언은 절대 하지 않는 남자다. 언행일치의 화신 같은 남자이니 분명 목적을 위해 한 몸 불사르고 있을 터. 자기가 받는 스트레스 때문인지 사소한 건 말해 주지 않으려 했지만 원래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법이다.

렉시는 속으로 기도했다.

로메인이 하는 일이 잘 됐으면. 그게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진 몰라도 빨리 이루어졌으면. 나 좀 빨리 집 좀 갔으면. 그래서 로메인이랑 알콩달콩 공작령에서 놀았으면.

…나름 간절한 기도였다.

*****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첫 사교 연회 당일.

거대한 연회장에 홀로 선 렉시는 길고 긴 탄식을 내쉬었다. 울증은 나아졌지만, 수면욕이 늘어난 몸으로 파티에 오려니 참 귀찮기 그지없었다. 혹시라도 잠에 빠질까 봐 커피라도 마실까 했는데, 로메인이 안 된다고 말려서 마시지는 못했다.

이게 황제가 참석한단 소리만 없었어도 안 오는 건데.

렉시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황제도 참석하는데 안 오면 불이익이 있다니 뭐 그딴 게 다 있담?’

이래서 황도가 귀찮은 것이다. 생각하고 견줘야 할 것들이 많으니 개인의 자유가 제한된다. 들어오자마자 머리가 띵 하고 아파 오는 것이 심상찮아 렉시는 혀를 찼다.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가? 공기도 좀 탁하고 먼지도 많다. 안 그래도 심란해 죽겠는데 환경까지 한술 더 뜨네. 렉시는 잠깐 이마를 짚었다가 얼른 몸을 바로 했다. 멀리서, 아는 얼굴이 다가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프로하우스 소공. 편안한 오후로군요.”

“안녕하십니까, 밀라디 백작 부인. 황홀한 하루입니다.”

렉시가 인사하는 밀라디 백작 부인은 공작이 직접 구해 준 그의 예법 선생이다. 렉시가 조금 일정이 길어질 것 같다는 소식을 보내자 공작이 소개한 이 귀부인은, 황도 내에 모르는 이가 없는 마당발로 유명했다. 본래 레이디들만 가르치는 밀라디 부인이었지만 프로하우스 공작의 부탁은 특별했다. 하여 그녀는 렉시를 만나 여태껏 고위 귀족의 연회 예절을 가르쳤다.

“오… 소공. 정말이지 이제는 모든 게 완벽하시군요. 예법 수업은 종료해도 되겠습니다.”

그녀는 렉시의 인사를 보며 흡족하게 미소했다. 교육을 마치고, 그 마지막 시험으로 파티에 참석한 렉시의 모습은 완벽했다. 고상하고 우아한 예절의 표본 같은 모습은 흠 하나 잡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렉시가 생긋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백작 부인. 드디어 부인의 합격이 떨어지다니 무척이나 기쁘군요.”

“워낙 학생이 훌륭해야 말이죠. 공작님께서도 퍽 자랑스러워하실 겁니다.”

“부인의 교수법이 아니면 제가 이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허나 고백건대, 수업이 종료된 기쁨보단 오늘 부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직접 목도한 것이 그 배는 더 기쁜 것 같습니다. 오늘 무척 아름다우십니다, 백작 부인.”

“어머… 호호호.”

백작 부인은 말도 안 된다며 손을 흔들었지만 얼굴은 밝았다. 칭찬은 짐승도 춤을 추게 한다는데 그녀는 사람 아닌가. 자고로 칭찬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그것이 미인의 말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소공, 절 너무 띄우지 마세요. 제가 마치 착각을 할 것 같지 않습니까? 정말 아름다운 분께 그런 말을 들어 봐야 기쁘지도 않은걸요. 그냥, 오늘 봐서 반갑다 정도만으로도 괜찮습니다.”

“이런, 슬프군요. 어떻게 하면 부인께 제 진심을 전달할 수 있을까요? 혹 제가 고르곤 백작께 결투장이라도 보내야 하는 것입니까?”

“호호, 어머나 소공도 참….”

밀라디 백작 부인은 결국 얼굴을 붉히며 눈가를 좁혔다. 파닥파닥, 공작 깃으로 만든 부채가 움직이며 얼굴을 살짝 가렸다.

“그나저나 소공, 사람들을 보니 지금 기분이 어떠십니까?”

렉시는 순간 뜨끔했다. 며칠 전, 그녀에게 화를 낼 뻔한 사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물론 나쁘지 않습니다. 이런 큰 연회는 처음 참가해 보는걸요. 약간 긴장이 되긴 합니다만…. 헌데 그걸 물어보시는 연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가리고 있던 눈가가 화사하게 접혔다.

“어머나, 역시 소공이시네요. 남들 같으면 들떠 있을 텐데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시다니!”

마치 뭔가 놀라야 할 이유가 있다는 말처럼 들린다. 내가 화내려고 했던 그 일이 아니면, 뭘 말하는 걸까?

“…제가 오늘 놀라야 할 뭔가가 있나요 부인?”

“주변을 보세요, 소공. 오늘 여기저기 보이는 꽃들이 참으로 아름답지 않습니까. 모두 가슴에 꽃을 한 송이씩 장식하고 다니는데 마치 꽃밭에 온 기분입니다. 제 생각엔, 이 광경이 소공께는 퍽 각별할 것 같은데…?”

“…아!”

렉시는 주변을 둘러보고 나서야 그녀의 질문을 이해했다. 전번 황녀의 생일 파티에서 그가 보여 주었던 꽃장식이 벌써부터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장미, 프리지아, 백합, 수국, 민들레…. 그녀의 말대로였다. 사람들을 보는 렉시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맺혔다.

“…벌써 소문이 돌았군요. 공식적인 지침은 내려오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요.”

“벌써라고 하기엔 시간이 많이 지났죠. 사교계의 소문은 원래 빠른 법이고요. 그 일이 있은 지 일주일도 안 돼 수도의 평균 꽃값이 올랐단 사실을 알고 계세요?”

“일주일?”

그녀는 곤혹스러워 보이는 렉시를 보며 은근히 속삭였다.

“직접 유행을 창조하신 기분이 어떠신가요?”

“그, 엄밀히 따지자면 유행이라기보단…그래요. 관련 예칙 쪽이 변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호호, 지침이 내려오지 않았는데도요?”

자기가 한 말로 반박당한 렉시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쨌거나 보석보단 꽃이 더 싸고 얻기도 쉽죠. 굳이 사람들이 꽃을 치장하고 온 이유는 그편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흐응… 뭐, 그렇기도 하겠네요.”

사교계 교육을 퍽 열심히 하긴 했지만 역시 이런 뉘앙스는 교육하기 어렵다. 렉시가 좀 더 자세히 사람들을 살펴보았다면, 비싼 꽃보단 노란 민들레를 치장한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장미나 비싼 꽃을 놔두고 굳이 민들레를 장식한 자들이 대다수인 의미를 그는 아직 모르는 모양이었다.

하긴, 아직 어린 청년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것도 우습지.

그녀는 속으로 혀를 찼다.

‘지금 입은 예복이 유행하면 좀 깨달으시려나?’

렉시가 입은 예복과 가슴에 꽂힌 민들레를 매의 눈으로 살펴보던 그녀는 진득한 시선들을 느끼고 눈썹을 찌푸렸다. 둘러보니, 주변에 있는 사람들 거의 모두가 이쪽을 흘끗대고 있었다.

‘어머나, 깜박했네.’

그녀는 재빨리 렉시 곁에 가 주변을 경계했다. 오랫동안 황도에서 살아온 그녀는 나름 사교계에서 위신이 있었다. 그녀가 있는 한 별 볼 일 없는 자들은 말을 걸지 못했다.

프로하우스 공작께서도 참 너무하셔. 이게 무슨 편한 일이야?

공작을 떠올린 그녀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렇게 까다로운 일이라곤 말한 적이 없었잖아.’

이렇게 귀찮은 일이 될 줄 알았다면 뭐 대가라도 받았을 것이다. 그냥 사교계에서 버틸 수 있을 정도의 길라잡이만을 원하는 줄 알았더니, 무슨 팔자에도 없는 샤프롱인지.

하지만 그렇다고 뭐, 당장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어려운 일이란 자고로 해낼수록 그만한 보람이 생기는 것 아니겠는가. 일단 이런 미인의 옆에 서 있는 것 자체가, 은근한 자부심을 심어 주기도 했고.

‘특히 그 훤칠한 청년을 보는 것도 즐겁고 말이지.’

로메인 드 데퓨탄, 이 아름다운 미인의 약혼자를 생각한 부인의 얼굴이 즐거워졌다. 이 나이쯤 되면 나이 젊은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게 마련이다. 사랑스러운 약혼자를 지키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는 로메인의 모습을 지켜보는 건 그녀의 조그마한 오락거리 중 하나였다. 생각해 보라, 눈앞에서 책에서나 보는 로맨스를 하고 있는 두 청년을.

돈 주고도 못 볼 장면을 생으로 보는 일이다. 그깟 대가 따윈 안 받아도 그만이었다….

‘그런데 잠깐.’

백작부인은 갑자기 떠오른 어떤 사실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내가 로메인 경을 봤던가?

주변을 살짝 살핀 그녀는 렉시의 귓가에 살짝 속삭였다.

“헌데 프로하우스 소공.”

“예, 부인.”

“슬슬 소공의 팔이 허전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제 그 팔을 채워야 할 것 같은데…. 소공의 한쪽 팔을 지탱해 줄 소공의 검은 어디 있나요?”

“…로메인 경 말씀이시지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혹 따로 오셨나요?”

말을 하면서도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는 그녀다. 로메인은 어디서나 약혼자의 곁에서 붕어똥처럼 떨어지지 않기로 유명했으니까. 렉시가 저택을 나설 때마다, 그가 구름처럼 밀려드는 인파를 때려눕힌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덕분에 그에겐 유치찬란한 별명까지 생겼는데 그 유치한 별명이란 대략 이랬다.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금붕어 똥!

물론 저런 미인을 차지했으니 그런 소리를 들어도 어쩔 수는 없을 테지만, 그래도 기사에게 저런 별명은 수치 아닐까. 뭐 정작 로메인은 그 별명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참, 사랑이 뭔지.

“로메인 경이, 오늘 같은 날 소공과 떨어질 리가 없을 테지요. 헌데 어디서도 보이지 않으니 기묘하군요.”

“그게…. 오긴 왔습니다.”

오긴 왔다. 정말로.

“어머, 그럼 어디에 있나요? 인사를 하고 싶은데요.”

“지금 여기 없습니다.”

응? 잘 못 알아들은 것이 분명해 보이는 부인에게 렉시는 떨떠름하게 웃어 보였다.

“기사의 의무를 수행하러 갔습니다.”

“…무슨 의무요?”

“아마 아실 겁니다. 오늘 같은 특별한 날엔 기사들이 종종 차출된다는 것을요. 아마도 오늘 연회에 필요한 기사의 수가 좀 부족했었던 모양입니다. 거기 갔습니다.”

렉시의 말을 듣던 부인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흔들렸다. 연회 날 기사가 해야 할 의무란 레이디의 에스코트다. 그 로메인이 약혼자를 놔두고 그걸 하러 갔다고…?

“세상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했다.

“로메인 경께서 기사 작위를 가지고 계신 건 물론 압니다. 헌데 그 의무는 황실 기사들이 알아서 하는 걸로 아는데…. 이상하네요. 혹 그들이 직접 로메인 경을 모셔 갔나요?”

“네, 그랬습니다. 참 어찌나 야박하던지….”

잘하면 울겠다. 그녀는 재빨리 렉시를 달래며 부채를 세게 부쳤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람. 세상에 무슨 그런 경우 없는 일이 다 있어!?

“맙소사, 올해가 특히 참가하는 아가씨가 많다더니 이런 낭패가 있나요. 허면 홀은 어찌 오셨습니까? 홀로 오셨어요?”

“홀까지는 그와 동행했습니다. 홀을 목전에 두고 헤어졌지요.”

“그들도 참으로 너무하군요. 어쩜, 약혼자가 있는 분에게!”

“…기사의 의무라니까요. 어쩔 수 없지요.”

렉시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물론 약혼자인 제가 있으니 거절할 수도 있었겠지요. 허나 아시다시피 그는 기사의 명예를 중하게 여깁니다. 기사가 의무를 행하는 일에 영주인 제가 나설 수는 없지요. 명예가 달린 문제니까요.”

아무래도 소공작은 금붕어 똥이란 별명을 모르는가 보다. 그녀는 그 말을 할까 말까 하다 입을 다물었다.

“황도의 의무란 그렇게 갑작스러울 때가 있지요. 무척 당황스러우셨겠어요 소공. 괜찮으세요?”

“글쎄요. 일단 조금, 쓸쓸하긴 하네요.”

장난처럼 말하며 웃는 모습에 백작 부인은 부채를 떨어뜨릴 뻔했다. 애써 웃는 애달픈 미인의 미소는 참으로 보기 드문 정취였다. 맙소사, 미인은 어떤 모습을 해도 아름답다더니…. 그녀는 슬그머니 주위를 둘러보았다가 한숨을 삼켰다.

‘아이고, 일 났군 일 났어.’

어느 정도 그 미모에 익숙한 자신도 이 지경인데 남들이야 오죽할까. 렉시 주변 반경 십 미터 안쪽의 사람들은 현재 초토화였다. 다들 멍해진 얼굴로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는데 눈빛들이 죄다 제정신이 아니다. 그들 대부분은 어디서 나온 건지 모를 손수건을 들고 있었다. 여기서 렉시가 울기라도 하면 당장에 달려올 심산인 듯했다. 심지어 그중 한 명은….

‘저거 설마 법무대신 피케트 경?’

그녀는 경악한 얼굴로 상대를 바라봤다. 향년 칠십을 바라보는 저 노인네는 프로하우스 공작가와 사이가 안 좋기로 유명했다. 헌데 그 노친네가 손수건을 빼들고 지팡이를 짚고 있는 꼴이라니 참 살다 살다 별꼴을 다 본다. 강렬한 위기감이 그녀를 강타했다. 이러다 잘못하면 큰일나겠다.

‘안 돼, 안 되지!’

공작에게 신신당부도 받은 마당에 약혼자까지 자리를 비웠으니, 이 아름다운 소공작의 신변은 이제 자기 책임이다. 로메인 경까지 없는 상황에 사람들이 달려오는 일이 생기면 옆에 있던 자기가 제일 욕먹을 것이다. 그녀는 재빨리 렉시에게 다가가 부채를 쥐여 주었다. 이럴 땐 일단 가리는 게 우선이었다.

“소공, 일단 이걸로 얼굴을 좀 가리시고.”

“…아. 네, 감사합니다.”

렉시는 부인이 건네준 부채로 눈 아래를 가렸다. 얼굴이 반쯤 가려지자,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씩 차단됐다. 동시에 울 것 같은 사람은 좀 줄어들었으나, 그 말은 즉 대부분은 남아 있단 뜻이다.

“…일단 자리를 옮기지요.”

“죄송합니다 부인. 제가 불편을 끼쳤군요.”

“꽃에 나비가 날아드는 걸 뭐라 할 수는 없지요. 늘 보는 장면이지만, 참 볼 때마다 새롭습니다. 물론 소공께서 아름다우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긴 하지만…. 저래 봐야 소공께선 임자가 있는데 말이에요. 어쩜 다들 저렇게 겁들이 없을까요?”

“글쎄요.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제 미모가 죄라면 죄일 것이나…. 말을 줄이는 렉시를 향해 백작 부인이 코웃음쳤다.

“소공께선 잘못이 없다니까요. 정신 못 차리는 저들이 바보지요.”

물론 백작 부인도 눈이 있으니 렉시가 탐나는 건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녀는 탐욕보단 제 보신이 중요했다. 백작 부인의 시선이 렉시의 에메랄드 반지로 향했다. 저것을 누가 직접 사 준 것인지 아는데, 어찌 렉시에게 손을 대겠는가.

황제는 자신의 위가 손상되는 일엔 가차가 없는 인물이다. 자칫 이 약혼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폐하께서 직접 선언하신 약혼인데, 황명이 무섭지도 않은 것인지!”

“하하하하….”

“농담이 아니랍니다. 솔직히 제 입장에서 저들은 모두 목숨이 두세 개는 있는 거 같다구요?!”

렉시는 열없이 웃었다. 아! 또 어디선가 그의 얼굴을 본 누군가가 황홀한 탄성을 내뱉는다. 백작 부인은 안 되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미 부채로 무마할 단계는 지난 듯했다.

“그나저나, 이래서야 어쩔 수 없군요. 소공, 엊그제 모임에서 나온 이야기… 기억하시죠?”

“…네, 기억합니다.”

렉시는 대답하며 가슴 어림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행커치프 대신 끼워 넣은 엷은 베일 끄트머리를 살짝 끄집어냈다. 스르륵, 소름 끼치도록 미끄러운 소리를 내며 엷은 젖빛 베일이 끌려 내려온다. 백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지금 가리도록 하죠.”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로하우스 소공. 솔직히 이게 더 편하실 거예요. 저희들이야 모두 기혼이고…. 적당히 추태를 부리지 않을 자신은 있어요. 허나 여기에 저희 같은 이들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네, 저도 이해합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예전에도 이렇게 하고 다닌 적이 많았으니까요.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렉시는 눈을 들어 먼 곳에 보이는 거대한 샹들리에를 바라봤다. 샹들리에 아래 반짝이는 황실의 문양이 그가 지금 어디 와 있는지 깨닫게 한다.

그들이 있는 이 자리는 황도에서 가장 거대한 황실의 무도회장이고, 그들이 즐기려고 하는 이 연회는 일 년 중 가장 특별한 연회다.

그 연회의 정체란 바로 제국의 귀족 청년들의 첫 사교 파티. 즉 첫 사교계 데뷔하는 날로, 제국 사교계 행사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

렉시가 참석한 이 자리는 직전 그 부모와 다른 기혼자들이 모이는 자리였다. 대부분 나이가 지긋하거나, 아니면 약혼과 결혼이 예정된 자들만 참석한다. 물론 여기엔 약혼자가 있는 이들도 포함되어서 렉시도 참석할 수 있었다.

이들의 만남이 끝나면, 뒤이어 첫 사교 파티를 시작하는 여성과 청년들이 입장한다. 벌써부터 들어올 자식들 생각에 부모인 귀족들은 무척 흥분해 있었다. 그리고 개중 몇몇 귀족들은 아주 긴장한 채 렉시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어제 렉시를 귀찮게 한 장본인들이다.

―불특정 다수의, 애들 부모들.

렉시가 가지고 온 베일은 사실상 저들 작품이다. 그들은 이 훌륭한 연회를 성황리에 끝마치기 위해 대단한 일을 했다. 무려 어제 직접 수도의 한 살롱에 모여 렉시에게 직접 부탁을 했던 것이다.

―프로하우스 소공, 이번 첫 사교 파티 때 부디 얼굴 좀 가려 주세요!

라는, 황당한 부탁을.

어제의 일이다.

“갑자기 왜 얼굴을 가려 달라고 하시는지…? 그보다 다들 누구십니까?”

“죄송합니다, 프로하우스 소공. 저희는 내일 첫 사교 파티에 나서는 아이들의 부모랍니다. 정말이지 무례한 부탁이란 걸 알고 있습니다. 허나 이렇게 고개 숙여 부탁드립니다. 제발 저희의 청을 들어주십시오!”

밀라디 백작 부인이 소개한 살롱에서 렉시는 이 황당한 부탁을 듣고 무척이나 당황했다. 아니 밑도 끝도 없이 얼굴을 가려 달라니, 이게 무슨 해괴한 부탁이란 말인가?

“이봐요! 당신들 이게 대체 무슨 짓거리인가요?”

밀라디 백작 부인은 제가 소개해 준 이들이 이런 짓거리를 할 것이라곤 상상조차 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새하얗게 변한 얼굴로 방방 뛰며 그들을 힐난했다. 이건 그녀의 명예와 위신 문제였다.

“앞으로 당신들은 이 살롱에 오지 못합니다. 아시겠어요?!”

“미안합니다 부인. 죄송합니다 프로하우스 소공. 저희도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제발 저희들의 사정을 봐주십시오.”

“정말로 절실한 마음으로 부탁드리오니 소공…. 이번 한 번만 저희의 청을 들어주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허, 거참….”

렉시는 혀를 찼다. 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이렇게 소란들인지. 그들이 있는 살롱은 어느 정도 이상의 작위와 사회적 영향력이 있어야만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었다. 아마 이 일이 끝나면 그들은 이 자리에 들어오지 못할 수도 있다. 허나 그들은 그 모든 걸 감안하고서라도 이런 일을 계획한 것이 분명했다.

골똘히 생각하던 그는 결국 쯧 하고 혀를 찼다. 기분은 조금 그랬지만…. 뭐, 저렇게 비는데 못 해 줄 것도 없었다. 사실 그는 이번 연회가 그렇게 절실한 편도 아니었으니까.

렉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냥 안 가면 되지 뭐.

“알겠습니다. 이번 파티엔 제가 자숙을 하죠. 파티에 불참하면 되는 것이지요?”

“그건 안 됩니다! 그랬다가는 폐하께서 저희에게 벌을 내리실지도 몰라요!”

“…그럼 어쩌라구요?”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닙니다. 오실 때 가리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참석하시는 도중에, 아이들이 소개되는 때에만 좀… 제발 부탁합니다.”

황제가 이 아름다운 소공작의 약혼식을 치러 줬다는 건 온 수도의 귀족이 다 안다. 사정이 어쨌건 황제가 뒤에 있다는 소리다. 헌데 이런 사람을 어찌 파티에 못 오게 만든단 말인가? 사실 얼굴을 가리게 하는 것도 무서워 죽겠다. 허나 자식을 위해서라도 그들의 요구는 관철되어야 했다. 부모들은 납작 엎드려 렉시에게 빌었다.

“딱 그때만 부탁드립니다. 소공, 제발!”

“이번 파티에는 간만에 많은 청년들이 나오는 모양입니다. 거기다 지위도, 외모도, 능력도 출중한 이들이라고 해요. 소공께선 모르시겠지만 첫 사교 파티 때 많은 청년들이 약혼을 한답니다. 황도, 지방 귀족 너나 할 것 없지요. 이 시기를 놓치면 약혼은 내년으로 기약 없이 미뤄지는데, 그땐 좋은 배우자감이 없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염치 불고하고 부탁드리는 겁니다. 소공, 소공께서 얼굴을 드러내고 계시면 이번 사교 파티엔 어떤 약혼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 뻔하지 않겠습니까. 소공의 용모가 어디 보통 미모입니까?”

황제가 뒤에 있는 걸 알아도 달려드는 미친놈들이 나오는 미모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 이 미모의 파괴력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단 말인가? 헌데 이런 외모의 렉시가 사교 파티에 나타난다면 어찌 되겠나.

“소공의 외모를 본 아이들은 약혼하기 힘들 겁니다. 데뷔를 망칠 거예요!”

“…그, 꼭 망칠 거란 보장은 없지 않을까요….”

“망합니다. 망해요! 다들 서로에게 관심이 없어질 거라구요!”

이리 굴러가서 보고 저리 굴러가서 봐도, 모든 각이 망칠 거란 미래를 가리키고 있는데 어찌 그러지 않으랴. 길이 보이는데도 돌아가는 건 멍청한 짓이다. 그들은 사력을 다해 렉시를 설득했다.

“소공, 이 일이 소공께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요즘 무척 귀찮은 일들이 많지 않습니까? 거기에 또 다른 사고가 더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 나이대의 젊은 애들은 정말이지 앞뒤를 가리지 않으니까요. 제 딸만 해도 원하는 게 있으면 소 떼처럼 달려들지요. 한번 깊이 생각해 주십시오.”

“…소 떼요? 자작. 자작의 딸은 얌전하다 하지 않았습니까?”

“소공, 제가 할 말은 아닙니다만…. 원래 이런 데에 있어선 남자보다 여자들이 더 용맹합니다. 그리고 제 딸은…더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죠.”

렉시는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이 일을 어쩌면 좋지. 그는 잠시 고민하다 뒤를 돌아 로메인에게 손짓했다. 늘 그를 따라다니는 호위이자 약혼자, 로메인에게 이 일의 중재를 부탁할 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좋은 생각이군요. 저도 찬성입니다.”

뭐?

렉시는 입을 벌렸다. 아니, 나 말도 안 꺼냈는데?

“…로메인. 당신 너무 빨리 말하는 거 아니에요? 지금 깊이 생각하고 말하는 건가요?”

“충분히 생각하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저건 아주 좋은 의견입니다, 렉시.”

아침저녁으로 몰려드는 가객들을 쫓아내는 것만 해도 일거리가 넘치는 마당이다. 그는 여기에 어린 소년 소녀들을 더하고 싶은 마음이 전연 없었다.

“렉시, 당신은 그 또래의 청년들을 만나 본 적이 없으시지요?”

“…솔직히, 요수아 말고는 거의 없긴 해요.”

“그렇다면 저들의 말을 들으십시오. 그들은 안하무인이라기보단 겁이 없는 나이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황명을 무섭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는 겪어 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에이, 아직 어린애들이잖아요. 설마 기사가 임자인데 들러붙겠어요?”

“설마가 사람을 잡습니다. 그들은 폭력조차 어찌할 수 없는 무적의 나이입니다. 오히려 고난이 생기면 더 불타오르지요. 렉시, 첫 사교 파티에 나서는 이들의 평균 연령대를 알고 있습니까? 여자, 남자 둘 다 똑같이 18세입니다.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라지만 그런 어린애들에게 결투를 청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렉시는 침묵했다. 말이야 저렇게 하지만 문제가 생기면 제일 먼저 검을 빼 들 것이 바로 로메인이다. 농담이 아니고 정말로 할 거다. 18세와 30세의 결투라니…! 듣기만 해도 끔찍했다.

“그러니 아예 원천 차단하는 방법이 제일 좋습니다. 부디 저 안을 허락해 주십시오 렉시.”

“…하아.”

렉시의 눈이 맥없이 축 처졌다. 이렇듯 다들 두 손 들고 부탁하는데, 그가 홀로 그걸 어찌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하여간 부모란 대단한 존재였다.

“때마침 마지막 음악이 끝나 가고 있으니 잘 되었습니다. 조금 도와드릴까요?”

“아니오, 괜찮습니다. 혼자 할 수 있어요.”

렉시는 가슴의 포켓에서 베일을 완전히 꺼냈다. 베일에 달린 은 체인이 차르르 떨어지는 소리가 무척이나 차갑다. 렉시는 체인에 달려 있는 핀을 머리에 꽂고, 베일을 단단히 고정했다. 렉시가 얼굴을 가리자, 여기저기서 아쉽다는 듯 한숨이 새어 나왔지만 몇 명은 얼굴이 확 피었다. 어제 그 애들 부모들이었다. 그들은 렉시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자리를 떠나갔는데, 누가 봐도 감시하러 온 게 분명했다. 그저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안 하면 직접 해 주려고 했나 보군요. 그걸 또 와서 보고 가다니….”

“그들을 이해해 주세요 소공. 무례한 자들이긴 합니다만…. 부모 마음이 다 그렇답니다. 생에 한 번뿐인 중요한 날인데 사고가 생기면 얼마나 속들이 상하겠어요. 하물며 황도에서 사는 귀족들도 아닌 지방 귀족들이니 더 눈이 뒤집힐 밖에요. 나중에 그, 로메인 경과 혼인하시고 아이가 생기시면 조금쯤 이해는 하게 되실 거예요.”

“아이?”

“혼인하시면 응당 아이를 키우시지 않겠어요.”

렉시는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아이라… 그러고 보니 그쪽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 맞다, 나 아이를 가질 수 있었지. 새삼 떠올린 사실에 렉시의 얼굴이 조금 복잡해졌다. 

아이, 아이라.

‘분명 언젠가는 그렇게 되긴 할 텐데.’

하긴 로메인과 밤 생활을 안 하고 있지는 않으니 언젠가는 그도 수태를 할 것이다. 그간 그가 이 사실을 떠올리지 못한 건 바쁘고, 또 남자인 자신이 아이를 낳을 수 있단 걸 가끔 까먹었기 때문이 컸다. 스무 해 넘게 남자로 살아온 렉시다. 허니 어찌 출산이 자신의 일로 와 닿았겠는가. 어쩐지 얼굴이 조금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렉시는 입가를 조금 가렸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저도 언젠가는 부모가 되겠지요.”

“어머, 당연하죠. 그러라고 있는 입양 제도인걸요. 낳은 정도 무섭지만, 가장 중요한 건 키운 정이랍니다.”

물론 백작 부인이 뭘 알고 한 말은 아니다. 그녀는 렉시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으니까. 기즈 공작이 내린 함구령은 실로 철두철미했던 것이다. 렉시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걸 아는 건 그때 그 자리에서 공작의 고백을 들었던 봉신들뿐으로, 기실 그들이 다였다. 하여 그녀가 말하는 아이의 의미는 입양아로, 아이를 낳지 못하는 두 사람이 나중에 아이를 입양하는 걸 전제해 이야기한 것이었다.

렉시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고견 감사드립니다 부인.”

“소공께서 너그러움을 보여 주시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부인의 말에 렉시의 눈가가 살짝 접혔다. 살짝 흔들리는 베일 아래, 희미하게 웃는 입술이 보이는 듯했다. 화려한 샹들리에의 불빛 아래서 보석처럼 흔들리는 눈동자가 무척이나 아름답다.

어쩜, 세상에.

그녀는 살그머니 달아오른 얼굴을 부채로 식혔다. 실로 마력적인 미모에 빠질까 두려워 주변을 둘러보니, 때마침 사람들이 우수수 빠져나간다. 그녀는 황급히 렉시를 이끌었다.

“소공. 파티가 곧 시작하려나 봅니다. 어서 이리로 오셔요.”

평소 연회라면 자리가 정해져 있겠지만 오늘은 어디든 맡는 자가 주인이다. 밀라디 백작 부인은 누구보다 잽싸고 빠르게 테이블을 잡았다. 상석에, 소년 소녀들이 잘 보이며, 동시에 그들은 이쪽을 잘 볼 수 없는 명당자리였다.

“훌륭합니다, 백작 부인. 어떻게 이렇게 자리를 빨리 잡으실 수가 있지요?”

“후후후, 제가 이래 보여도 이 행사만 30년 넘게 참석한걸요. 이 정도는 일도 아니지요. 어머, 저기 남편이 보이는군요. 여보? 여기예요!”

밀라디 백작 부인은 남편 고르곤 백작에게 부채를 흔들었다. 멀리서 아내를 알아본 백작이 서둘러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이윽고 적당히 통통하고 멋들어진 콧수염을 지닌 남자가 탁자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여보!”

“오, 밀라디 내 사랑. 당신을 보니 정말 너무 반갑군.”

렉시는 인사하는 두 사람의 옆에서 살짝 숨을 참았다. 땀을 뻘뻘 흘리는 백작의 몸에서 조금 역한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떡 하니 꽂아 놓은 꽃이 무색할 정도의 암내에 렉시는 슬그머니 백작 옆에서 조금 멀어졌다. 이렇게 냄새가 역한데 아무렇지도 않게 남편을 맞이하는 부인이 대단해 보였다. 부인과의 인사를 끝낸 백작이 렉시에게 반갑게 말을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프로하우스 소공. 연회는 잘 즐기고 계십니까.”

“예, 반갑습니다 고르곤 백작. 아름다운 오후입니다.”

얼굴을 가렸지만 그는 렉시가 누군지 금방 알아챘다. 하긴 자기 아내와 돌아다니는 사내가 누군지 모르면 그게 바보일 것이다. 세 사람이 앉자, 돌아다니는 시종이 다가와 차가운 음료를 세팅했다. 모여든 사람들로 인해 연회장은 조금 덥고 건조했다. 무의식적으로 잔을 들어 마시려던 렉시는, 순간 음료에서 올라오는 희미한 비린내를 맡고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이 많다고 음료에 돈을 덜 썼나?’

아무리 그래도 오늘 같은 날 음료에 돈을 아끼냐. 황가가 생각보다 많이 쪼잔했구나. 한숨을 내쉰 렉시는 단숨에 잔을 비운 백작에게 자신의 것을 내줘 버렸다. 고맙다며 마시는 백작에게서 다시 조금 멀어지며 렉시는 슬쩍 숨을 가다듬었다. 비린내와 암내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감사합니다 소공. 어이고, 이제야 살 거 같군요.”

“…음. 이번 연회가 즐거우셨나 보군요 백작. 목이 마를 정도로 오래 돌아다니셨습니까?”

“뭐 오늘은 날이 날이니 평소보단 흥미로운 일들이 많을 수밖에요. 특히 오늘은 제 친구 자식들이 나와서 대화를 좀 나눴죠.”

“오늘 아는 가문의 자녀분들이 오셨나 보군요?”

“예, 동부 지역에서 올라온 친구의 딸들이죠. 아주 절친한 녀석들입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밀라디 백작 부인이 호들갑을 떨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머 혹시 그 아카데미 친구 분들의 따님들이에요?”

“맞아요 여보. 내가 이야기 안 했나?”

“세상에, 그 애들이 벌써 그럴 나이가! 세월 참 빨라요.”

공통 주제를 발견한 백작 부처가 자기들의 세계에 빠지는 건 필연이었다. 그 누구 딸이 어릴 적에 뭘 얼마나 먹었느니, 누구 딸은 또 얼마나 똑똑했느니…. 렉시는 멍하니 그걸 듣다 그냥 귀를 닫았다. 솔직히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얼마나 듣고 싶겠는가. 두 사람이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는 걸 보고 있자니, 단지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이 조금 그리웠다.

‘…조금 외로운 건가.’

이게 바로 옆구리가 시리다는 것일까. 불현듯 느껴지는 한기에 렉시는 한숨을 삼켰다. 따뜻한 연회장인데, 어쩐지 몸 안쪽에 소슬한 한기가 맺혀 있는 것 같았다. 두 부부가 말하는 걸 봐서 그런지 이상하게 가슴이 텅 빈 듯했다. 여태까진 부인이 옆에 있어 느끼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부인이 없으니, 없는 사람이 더 아쉽고 그립다.

‘뭐 하고 있을까.’

지금 로메인이 옆에 있었다면 이런 생각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멍하니 있으면 그의 손을 잡거나, 다정히 웃어 주며 이것저것 물어보고 대화를 했겠지.

이 많은 군중들 속에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독하다니….

렉시는 로메인을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연애란 게 원래 이러나. 연애를 시작하면 원래 사람은 이렇게 변하는 건가? 상대 없이도 오랫동안 살아왔는데, 그가 잠시 없는 것만으로도 외로워진다. 스스로가 의존적이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아무래도 아니었던 걸까.

‘괜히 왔어.’

어쩐지 확 짜증이 올라와 렉시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지 말걸, 이상한 후회도 든다. 사교계 시즌이니 한 번 정돈 오긴 했어야 하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었다. 아까 로메인이 기사들과 사라지기 전에 남긴 말이 자꾸 아른거렸다.

‘에스코트라뇨, 로메인. 아까까지 그런 말 없었잖아요.’

‘금방 다녀올 겁니다. 그러니 잠시만 백작 부인과 함께 계십시오.’

‘하지만 어떻게 이렇게 저만 놓고 갈 수가…. 안 가실 수도 있잖아요 로메인. 그냥 안 가시면 안 되나요?’

‘…죄송합니다. 중요한 일이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누가 중요한 일인지 아닌지 물어봤나요? 당신이 아니라도 할 사람은 많을 거예요. 꼭 당신이 갈 필요는 없잖아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빨리 끝내고, 어떻게든 빠져 나오겠습니다…. 첫 춤을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춤? 갑자기 무슨 춤이요?’

‘그건….’

안타깝게도 렉시는 로메인의 대답은 듣지 못했다. 그 말을 듣기도 전에 기사들이 로메인을 데리고 가 버렸기 때문이다. 나쁜 사람들….

여지도 없이 로메인을 데려간 기사들을 욕하며 렉시는 숨을 삭였다. 그깟 거 그냥 거절하면 그만일 걸 왜 그리 성실하게 가서는. 거기다 첫 춤을 함께 하지 못한다는 말은 뭐란 말이야. 첫 사교계를 경험하는 그 애들 에스코트만 하고 나와 춤을 추면 될….

‘…응?’

“이런, 프로하우스 소공. 죄송해요. 너무 저희끼리 이야기했군요.”

“…아, 아닙니다. 재미있는 이야기였습니다.”

백작 부인의 사과에 렉시는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솔직히 기분은 나빴지만 지금은 다른 게 더 급하다. 혹 자신의 기분이 상했을까 쩔쩔매는 부인에게 렉시는 괜찮다고 웃으며, 얼른 질문 한 가지를 던졌다.

“저 헌데 백작 부인. 혹 첫 사교계 연회에선 에스코트한 사람과 첫 춤을 추던가요?”

“보통은 그러는 것이 관례죠. 하지만 걱정 마세요 소공. 그러지 않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기사보다, 함께 첫 연회를 맞이하는 사람들끼리도 자주 춘답니다.”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덕분에 의문이 풀리네요.”

“예?”

“아무것도 아닙니다.”

렉시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몸을 세웠다. 로메인이 말한 춤의 의미가 뭔지 이제서야 명확해졌다. 

‘그러니까, 그 에스코트하는 여자애랑 춤을 추겠다 이거네?’

춤이 어쩌고저쩌고한 게 뭐냐 싶었더니…!

여자애랑 춤 한번 춰야 할 것 같으니, 미안해서 미리 말하고 간 거였다. 기가 막혔다. 

놀라울 정도로 로메인답고, 놀랍도록 멍청한 생각이었다.

렉시는 불퉁한 표정으로 속을 삭였다.

그의 성실함과 자신에 대한 애정을 의심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허나 지금 당장은 짜증이 나 견딜 수가 없었다. 

‘정말 너무해. 나와는 춤 한번 춘 적도 없으면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속에서 욱하고 화가 올라왔다. 이렇게 화를 낼 일이 아닌 것을 아는데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해는 한다. 이왕 하는 일 확실히 하고 싶었나보지. 

하지만 일에 요령 좀 끼워 넣어 주면 안 되나.

꼭 그렇게 일을 해야 해?

일보다 나를 먼저 봐 주면 안 돼?

이제 약혼했으니 나는 다 잡은 고기다 이거야?

평소의 렉시라면 이렇게 날카롭게 반응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비이성적인 생각 역시 하지 않았을 터. 허나 애초부터 오고 싶지 않던 연회에 홀로 떨어진 렉시의 스트레스는 상상외로 컸다.  

외로웠다가, 짜증스러웠다가, 화가 났다가… 아주 기분이 몇 분 사이 널을 뛰고 있었다.

‘…어디 한번 추기만 해 보라지.’

황제만 아니었으면 이런 연회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온갖 데서 나는 쓰레기 같은 냄새도 짜증나고, 홀로 있는 이 상황도 어처구니가 없다. 렉시는 이를 사리물었다. 저 문 너머, 에스코트를 기다리고 있을 멍충한 약혼자는 어쩌려나 모르겠지만 자기는 그 꼴 못 본다.

과연 네가 그 춤을 출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할 거다.

서서히 시작하는 연회를 바라보며 렉시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

“안녕하십니까, 라니스터 영애. 소관은 로메인 드 데퓨탄이라 합니다. 오늘 영애의 에스코트를 맡게 되어 영광입니다.”

“안녕하세요, 데퓨탄 경. 저는 필리아 드 라니스터, 라니스터 가의 장녀입니다. 오늘 제 에스코트를 맡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필리아 드 라니스터는 오늘의 에스코트 상대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아버지인 변경백에게 몇 가지 수업을 받았기에, 필리아는 기사들의 경지를 알아볼 줄 알았다. 눈앞의 남자는 아버지만큼이나 거대한 기를 가지고 있었다. 기사들이 많은 라니스터령에서도 보기 드문 이 기사의 기세라니.

게다가 저 대단한 얼굴은 또 뭐람? 황도라서 그러나?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머, 세상에. 저렇게 잘생긴 기사도 있구나. 못생긴 기사만 있는 게 아니었어.’

여기서 잠깐 오해를 정정하자면, 기본적으로 몸을 쓰는 기사들의 외모는 평균 이상. 따라서 라니스터령의 기사들도 대충은 생겼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라니스터 영애는 눈이 높은 편이었다. 라니스터 영지의 추남들만 보다 이런 미남을 처음 본 눈 높은 영애의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녀는 머리를 팽팽 굴리며 자신의 배우자 조건을 되새겼다.

‘일단 기사. 경지 높은 기사. 기왕이면 잘생긴 경지 높은 기사.’

라니스터령은 기사들로 이루어진 영지. 그곳의 장녀인 그녀의 배우자는 무조건 기사여야 한다. 그러나 라니스터 영지에서 구할 수 있는 기사들은 대부분 추남들뿐이라 그녀는 실망이 컸다.

‘기왕이면 잘생겨야 하고말고. 남자는 외모가 다야. 속은 다 거기서 거기니까!’

하여 그녀는 이번 사교 행사에서 검 잘 쓰는 미남 기사를 찾아야 하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있었다.

헌데 떡하니 나타난 이 잘생긴 기사를 보라. 그것도 내 에스코트 상대라고?

이것은 운명이었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곧 있을 그녀의 인사 순서 따윈 이미 뇌리에서 날아가고 없었다.

“저, 데퓨탄 경. 실례가 아니라면 하나 여쭈어도 될까요?”

“…무엇이건 여쭈십시오. 어떤 것이 궁금하십니까. 라니스터 영애.”

“그, 혹시… 경께선 기사의 경지가 어느 정도 되시는지요?”

뜬금없는 물음이었지만 로메인은 성실했다. 그는 잠시 영애를 내려다보다 대답했다.

“상급 기사입니다.”

“사, 상급!”

심봤다! 라니스터 영애의 눈동자가 별이 박힌 듯 빛났다. 상급에 이런 몸매에 잘생긴 기사라니! 그, 그럼 나이는?

그녀는 머리를 재빨리 굴렸다.

“굉장하시네요. 아직 이십 대이신데 상급 기사인 분은 처음 뵈었답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빠른 성취를 보실 수 있나요? 역시 수련을 열심히 하셨겠지요?”

“아, 아닙니다 영애. 저는 올해 서른하나입니다.”

“아, 그렇군요. 하지만 서른하나라도 굉장하신 것 같아요.”

나이를 알아낸 그녀는 살짝 실망했다. 솔직히 이십 대면 했었으니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딱히 실망할 일은 또 아니었다. 내가 올해 열아홉이니 서른하나면 고작 열두 살 차이.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15세 차니, 나름 승산 있는 나이 차 아닌가.

그녀는 얼른 얼굴을 붉히며 얌전하게 웃었다.

“여하간 죄송합니다 경. 하지만 굉장히 젊어 보이셔요.”

“…그렇습니까?”

어쩐지 젊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진 듯,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필리아의 마음에 희망의 추가 왔다 갔다 했다. 내 말에 웃다니, 저건 분명 내게 호감이 있다는 것이겠지? 그래, 남자들은 원래 좋아하는 여자들의 말에만 웃는다고 했어. 자고로 남자란 호감 있는 여성을 헷갈리게 하지 않는 법이라고.

‘좋아, 이분이야. 라니스터령의 새 백작감은 이분이야!’

마음을 정했다면 밀어붙여야 한다. 그녀는 재빨리 로메인의 옆에 가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해 달라는 여인의 청에 로메인이 자연스레 그녀의 손을 잡았다. 미친, 손까지 커! 그녀는 두근대는 가슴을 부여잡고 생긋 미소했다.

“상급 기사께서 해 주는 에스코트라니 너무나 영광이에요. 전 상급 기사는 저희 아버지 말곤 본 적이 없거든요.”

“라니스터 변경백 경께선 뛰어난 기사시지요. 이번 연회엔 아버님도 함께 오셨지요?”

“아, 아니요. 아버진 못 오셨어요. 대신 어머니가 함께 오셨죠. 갑자기 중요한 일이 생기셔서요.”

“…이런. 그런 말은 듣지 못했는데.”

그녀 말을 받아 주던 로메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지켜보던 필리아가 다 놀랄 정도였다. 갑자기 벌어진 온도 차에 그녀는 당황했다.

뭐지? 아버지랑 아나?

“…저기. 데퓨탄 경. 혹시… 저희 아버지와 연회 때 만나기로 약속하셨었나요?”

예상이 맞았다. 로메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오늘 에스코트도 그래서 온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예?”

필리아의 얼굴이 멍하게 풀렸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지 파악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아니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가요? 아버지 때문에 제 에스코트를 오셨다니요?”

“아, 저는 자원한 에스코트 기사입니다. 황실에서 제공한 기사가 아니라.”

“…이, 해가 안 되네요 데퓨탄 경. 그게 저희 아버지와 대체 무슨 상관인가요?”

“이 에스코트가 거래라는 이야기지요. 제가 영애의 에스코트에 자원한 건 거래 때문입니다. 저는 영애의 부친과 모친께 원하는 것이 있었고, 영애의 부친과 모친께선 저 같은 기사가 필요했지요. 영애의 에스코트 순서를 조절할 수 있는 기사가.”

사교계의 첫 데뷔는 고려해야 할 것이 제법 많다. 특히 소개 순서가 그렇다. 너무 앞은 곤란하고, 그렇다고 또 뒤도 안 된다. 앞은 기억이 잘 남지 않고, 뒤쪽은 가면 갈수록 집중도가 떨어져 이름도 헷갈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저는 가문의 지위도 높고, 스스로의 작위도 있으며, 또한 경기가 높은 기사입니다. 가문이 비슷하다면, 에스코트하는 기사의 능력에 따라 순번이 결정되죠. 저는 영애를 적당한 시기에 소개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사입니다. 본래 저는 이런 사교계의 일에서는 손을 뗀 사람입니다만…. 이번만큼은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그 자리를 두고 영애의 부친과 한 가지 거래를 했으니까요.”

“!!!”

실로 놀라운 이야기였다. 필리아는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에스코트 순번이 그런 식으로 결정되는 거였어? 그보다, 그걸로 엄마 아빠가 거래를 했다고?

“지, 진짜인가요?”

“예. 헌데 실망스럽군요. 약속한 걸 받기 위해 약혼자에게 미안한 짓까지 하고 왔습니다만, 정작 부친께선 오지도 않으시다니….”

야, 약혼자도 있었어?!

필리아는 얼굴이 그만 새빨개졌다. 아까까지 잔뜩 꼬시려고 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이렇게 잘난 사람이 약혼자가 없을 리가 없지. 사실 결혼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 아닌가. 그저 자신이 이 잘난 남자를 보고 그만 눈이 멀었던 것뿐이다.

‘쪽팔려. 쪽팔려!’

헛꿈이 가시니 남은 것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뿐. 대체 아버지가 뭘 약속했길래 이런 남자가 자신에게 와 주었던 걸까? 약속한 게 뭔데 상급 기사가 이런 일까지 하면서 받으려고 하는 것인지 그녀는 참으로 궁금했다.

“죄송해요 데퓨탄 경. 저희 아버지 때문에 헛걸음을 하게 되셔서….”

“…아닙니다. 일단 혹시 모르니 모친을 뵙긴 할 테니까요. 영애의 양친과 저 사이의 일이니 영애께서 죄스러워할 일도 아니지요.”

“어, 어머니를 만나신다고요?”

필리아는 어머니를 만나겠단 기사의 말에 입을 벌렸다. 아버지도 없는데, 그 부인에게 인사를 하겠다고?

“혹시 경은 저희 어머니도 알고 계시나요?”

“직접적으로 알지는 못합니다. 허나 아주 초면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서신으로 몇 번 이야기를 나누었으니까요. 물론 라니스터 경이 계실 때 만나 뵙는 것이 옳다는 것은 압니다. 허나 약속은 약속이고, 거래는 거래이지요. 어쩌면 그 물건을 부인께 전해 주셨을 수도 있을 테니 저는 반드시 모친을 만나 뵈어야 합니다.”

“…….”

필리아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래, 약속 좋지. 거래도 지키는 것이 맞고. 자길 위해서 거래를 했다는데 뭐라 하는 것도 이상한 일. 허나 이쯤 되면 꼭 물어보라고 말하는 것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대체 그 물건의 정체가 뭐야?

필리아는 결국 입을 열었다.

“…네 알겠습니다. 약속을 하셨다니 응당 받으셔야겠지요. 헌데 데퓨탄 경, 부모님께 대체 뭘 약속받으셨는지 한번 여쭈어봐도 될까요? 저와 관련된 일인데 응당 저도 아는 게 맞지 않을까 해서요.”

“약속한 물건이 궁금하십니까?”

“예.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말해 주십사 합니다. 안 될까요?”

“딱히 비밀은 아닙니다만 글쎄요….”

로메인은 빨갛게 변한 필리아의 얼굴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 말대로 비밀은 아니지만 어디에 대놓고 할 이야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런 이야길 아직 어린 영애에게 해도 되나? 그녀가 듣기에 조금 이른 말은 아닐까.

잠시 잠깐 고민이 들었으나 거기까지였다. 잘 생각해 보니, 그녀에게 어머니를 소개해 달라면 될 것이란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에스코트한 기사를 어머니에게 소개해 주는 건 꽤 괜찮은 그림이었다. 그는 망설임을 떨궈 내고 몸을 바로 했다. 생각해 보면 자기는 정당하다. 애초 잘못한 건 자신이 아니라 라니스터 변경백인걸.

“좋습니다.”

로메인의 허락에 필리아가 반색했다. 로메인의 음성이 천천히 대기실에 울려 퍼졌다.

“라니스터 변경백, 그러니까 라니스터 영애의 양친은 다복함으로 유명하시지요. 라니스터 양은 장녀시지만, 아래로 동생 분들이 다섯이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예, 그렇답니다.”

“이는 귀족가에 참으로 보기 드문 다복함입니다. 오늘날 귀족들은 아이를 많이 낳질 않죠. 많아야 두서넛이 다입니다. 헌데 듣자 하니 백작 부인의 연령이 중년에 접어드셨음에도 불구하고, 라니스터 백작께선 근래 들어 또 다른 자식을 보셨다고 하더군요. 제 말이 맞습니까?”

“…그것도 맞긴 합니다만….”

“가장 대단한 건 바로 이것이지요. 백작 부인께선 단 한 번도, 건강을 해친 적이 없다는 것. 저는 바로 그것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라니스터 백작님께 그 비결을 여쭈었지요. 어찌하면 백작 부인처럼 건강히 다복한 자손을 얻을 수 있는가. 백작께선 비결은 알려줄 수 없다 하셨습니다만, 제가 거듭 청하자 도움이 될 만한 걸 주겠다 하셨지요. 저는 바로 그걸 받고, 이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필리아의 얼굴이 점점 괴상하게 변했다. 대체 왜 여기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다복함이 나오는가. 왜 여기서 아이 이야기가 나오지?

어쩐지 느낌이 불길했다. 그녀는 가능하다면 이걸 물어본 자신의 주둥아리를 찢어 버리고 싶었다. 절대 자신에게 좋을 말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애타는 눈으로 로메인을 바라봤다.

그만해! 거기서 그만해! 하는 애절한 눈빛이 로메인에게 쏟아졌다.

그러나 로메인은 한번 칼을 뽑으면 무라도 썰어 넣는 인사였으니….

하여 그는 단 한 점 거리낌 없이 자신이 받기로 한 물건을 입에 담고야 말았다.

“제가 받기로 한 건.”

“…한 건?”

“속곳입니다.”

“……뭘 받아요?”

필리아의 입이 떡 벌어졌다.

*****

연회가 시작하자마자 렉시는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테이블을 떠났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다고 했지만 목적지는 당연히 거기가 아니다. 목적지는 로메인, 정확히는 그가 에스코트할 아가씨가 자신을 소개할 자리다. 연회장의 앞은 렉시와 달리 약혼자를 찾는 자들이 대다수일 자리이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얼굴도 가린 마당이니 거절하면 그만이다. 이들이 자기가 누군지 알 리가 없었다.

렉시가 있던 장소를 빠져나오니 사람들이 우글거렸다. 고위 귀족들이 모여 있던 좌석과 달리, 이곳은 하급 귀족들과 아이들의 부모들이 섞여 있어 북새통이었다. 얼굴을 가린 베일 틈으로 온갖 사람들이 내뿜는 암내가 뚫고 들어왔다. 솔직히 역겨웠지만, 아주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렉시는 신물이 올라오는 걸 꾹 참고 앞으로 나갔다.

목적지는 금방이었다. 아가씨와 청년들이 서로 소개하는 장소엔 벌써부터 여러 사람들이 서서 기웃거리고 있었다. 렉시는 올해 소개받는 청년들을 위한 원에서 살짝 비켜섰다. 그리고 다른 여타 사람들처럼 소개되는 청년들을 구경하는 척했다. 재수가 없으면 한참을 기다리고, 운이 있다면 크게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렉시는 운이 있었다.

“라니스터 영지의 필리아 드 라니스타 영애! 로메인 드 데퓨탄 경 입장!”

‘저깄다.’

호명관의 외침을 들으며 렉시는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어여쁘게 생긴 아가씨를 에스코트하는 로메인의 모습이 눈에 아프게 박혔다. 주변에서 라니스터 영애를 보며 환호성을 쏟아 냈다.

“오오오오!”

많은 영애들이 앞서 지나갔지만, 지금 나오는 라니스터 영애에겐 뭔가 특별한 게 있었다. 마치 나비의 날갯짓이나, 꽃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몸짓 같다. 크고 강해 보이는 기사의 인도에 대비된 라니스터 영애의 모습은 무척이나 가녀리고 아름다웠다. 검은 머리칼에 흰 장미를 꽂고, 흰 비단 드레스를 차려입은 모습이 마치 시인의 시처럼 서정적이었다.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에 긴장한 듯 잠시 몸을 떨었으나, 이내 조심스레 예를 올렸다. 조심조심 몸을 숙이는 여인의 모습이 물에 젖은 수선화처럼 청초하다.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변경백의 따님이야. 기사와 무척 잘 어울리는 아가씨로군.”

“저 영애와 춤을 추려면 어째야 하지?”

“일단 첫 춤은 기사와 출 테니 그 다음 순을 정하는 게 좋겠어. 첫 춤이 끝나면 곧바로 가 보지.”

당치도 않은 말이다. 렉시는 두 눈을 위로 치켜떴다. 감히 내 앞에서 저 둘이 춤을 춘다고?  당장 가서 난장 피울 생각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렉시는 앞으로 성큼 나서 공간 안쪽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그런데, 그가 하는 행동은 딱 거기까지만 이어졌다. 보다 가까운 장소에서 둘을 본 순간, 어쩐지 이글거리던 화가 훅 하고 사그라들고 말았던 것이다.

‘…둘이 싸웠나?’

렉시는 희한한 얼굴로 둘을 바라봤다. 이상한 일이었다. 멀리서 봤을 땐 몰랐는데, 가까이서 본 두 사람은 뭔가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특히, 라니스터 영애의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어쩐지 비틀거리고 뭔가 꺼리는…. 헉, 잠깐. 왜 손이 공중에 떠 있어?’

여성이 남성의 에스코트를 필요로 하는 건 중심을 잡기 위해서다. 풍성한 드레스가 유행인 요즘, 긴 하이힐 위에서 버티기 위해선 남성의 보조가 필요한 것이 현실. 헌데 라니스터 영애는 로메인의 손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는 척하고, 그냥 공중에 손을 올려놓는 신기를 선보이고 있었다.

물론 아주 안 잡진 않는다. 단지 조금 비틀거릴 것 같으면 로메인이 보조해 주는데, 그 잠깐이 그렇게 끔찍한 모양이었다. 옆에 있는 로메인이 다가서면, 최대한 그 손에 닿지 않게 하려 다시 발을 내딛는 게 다 보였다. 그건 마치 손에 닿는 것마저 심란하다는 몸짓이었다.

하지만 그게 또 퍽 음전한 아가씨의 전형 같았고, 또 여린 처녀처럼 아슬아슬해 보이기도 했다. 덕분에 일부 사람들 사이에선 영애의 주가가 퍽 높이 올라가고 있었다.

“과연, 저런 음전함이야말로 진짜 숙녀라 할 수 있지.”

“기사들이 많은 영지의 장녀이니 거칠 것이라 생각했건만, 잘 가르친 모양이야.”

“라니스터 백의 가문도 중앙에 나오지 않았다 뿐, 퍽 명문가지. 아무렴.”

쏟아지는 호평에 앞서 나온 영애들은 새침해졌다. 반면 영식들은 흥미로운 얼굴로 라니스터 영애를 주시하는 중이었다. 라니스터 영애는 쏟아지는 시선에 부끄러운 듯했지만, 그래도 끝내 인사를 하고 사람들 틈으로 섞였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로메인에게 단 한 번도 도와달라 하는 법이 없었다. 어쩐지 거센 허무함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부끄러워졌다. 자신이 왜 그렇게 화가 나고 안절부절못했는지. 그 둘을 보는 순간 확실히 인지했던 것이다.

그건 질투였다.

자신을 내버려 둔 로메인에 대한 화가 아니라, 스무 살도 안 먹은 아이에게 질투를 했던 것이다! 내가!

렉시는 얼굴이 빨개졌다.

이게 뭐람, 세상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떻게 스물도 안 된 어린아이와 서른하나 먹은 로메인 사이를 의심했단 말인가? 

‘…돌아가자.’

렉시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어쩐지 자신이 바보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 춤은 어찌 되었건 상관없었다. 상대가 저렇게 싫어하는 춤 따위, 춘다 해도 어쩐단 말인가.

‘…아무래도 내가 요즘 예민해져 있었나 봐.’

렉시는 한숨을 삼켰다. 아무래도가 아니라, 진짜로 좀 예민해진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그가 요즘 겪은 일들은 예민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네 번에 걸친 귀향 허사, 그 이전에 황제와의 뜻밖의 대담. 사소하겐 매일 아침 귀찮게 하는 추종자들의 노랫소리까지.

하지만 그렇다고 히스테리를 부리는 게 약혼자가 할 짓인가.

자고로 성인이라면 그런 스트레스를 잘 조절해야 함이 마땅한 일이다. 고작 이런 사소한 것 가지고 로메인을 닦달하려 생각했다니,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어이가 없었다.

가서 좀 쉬고, 로메인을 기다리고… 그러다가 그가 오면 어서 오라고 말이나 해 주자. 자리에 없는 자신 때문에 퍽 놀랄지도 모르니까. 렉시는 터덜터덜 힘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이쪽으로 몸을 돌리던 누군가와 몸을 세게 부딪치고 말았다.

“윽!”

“아이 씨, 재수 없게.”

거친 욕설이 터져 나오며 상대가 렉시를 꼬나보았다. 렉시도 자연스럽게 상대를 응시했다.

“하 별, 이런 데 오면서 얼굴 가린 놈은 또 처음 보네.”

“…….”

어린애였다. 잘해 봐야 20대, 10대 후반이나 된 얼굴이다. 어린애치고 성격은 더러웠지만. 아니, 어린애라 저러는 건지도 모르겠다.

평소 같으면 한마디 했겠지만 지금은 피곤하다. 렉시는 가타부타하지 않고 그냥 사과했다. 저런 애들하고 드잡이할 시간이 있으면 가서 쉬는 게 백번 나았다.

“미안합니다. 다른 쪽을 보다가 그쪽을 못 보았군요.”

“허, 그래서. 그게 다야? 손해 배상 얘기는 안 해?”

“…손해, 배상?”

“이거 봐, 옷이 구겨졌잖아!”

말하는 곳에 구김이 있긴 했다. 아주 손톱만큼.

…사기꾼인가. 렉시는 그냥 가려 하던 발을 멈추고 상대를 훑었다. 고급 예복, 제법 반짝이는 사파이어 브로치와 장미 부토니에. 뭐 하러 두 개 다 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재력이나 지위는 있는 집안 출신인가 보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안하무인으로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군요. 하지만 공자도 절 보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서로 실수했으니, 그냥 피차 없던 일치고 가던 길 갑시다.”

“뭐?”

‘재수도 없네. 어서 가자.’

너 오늘 복 터진 줄 알아라. 렉시는 욱 하는 마음을 참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상대는 이번 일을 이렇게 어영부영 넘길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야, 이봐 너. 지금 뭐라고 했냐?”

“하아….”

렉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오늘은 득보다 실이 많고, 덧붙여 재수까지 없는 듯했다. 대체 왜 무도회에 이런 양아치가 와 있는 거야….

“공자, 제가 아까 사과하지 않았습니까. 헌데 왜 이러시는 겁니까.”

“하 이 새끼 보게. 야, 넌 이게 사과냐? 응?”

“후우…. 뭐 이런.”

사라졌던 두통이 다시 올라온다. 초면에 놈놈 하는 치고 제대로 된 놈은 본 적이 없었는데 이놈이 딱 그 짝이다. 렉시는 상대가 개, 아니 개 이하라고 판단했다. 짐승보다 못한 놈에게 말을 해 봐야 알아들어 먹을 리는 없을 터…. 그는 슬그머니 눈을 돌려 경비 기사들을 찾았다. 소란을 일으키는 놈들 잡으려고 잠입한 자들이 분명 있을 텐데.

그런 렉시의 기색을 눈치챘는지, 앞에 선 양아치가 이를 드러냈다.

“왜, 기사 찾냐? 근데 어쩌지? 아마 나 때문에라도 안 올걸?”

“…영식은 참 자신만만하신 분이군요. 황궁 기사들이 공자 때문에 오지 않는단 이야기도 그렇고 말입니다. 혹 영식의 아버님이 폐하입니까?”

툭 내뱉은 렉시의 말에 상대의 얼굴빛이 변했다.

“뭐? 이거 미친놈 아냐? 너 내가 황자 전하로 보여? 지방 촌놈이 어디서 폐하 운운이야?”

황자는 못 봤어도 황제는 봤다만…. 렉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내애는 콧방귀를 끼며 렉시를 조롱했다.

“어디 지방 촌놈이 올라와서 앞뒤도 몰라보는 모양인데, 이 몸이 바로 그 이하트 가문의 삼남이야. 우리 아버지가 황도에서 얼마나 힘이 센지 알아? 황궁 기사 따위는 단박에 날려 보낼 수 있어. 그런데 그놈들이 감히 여길 오겠어?”

렉시는 눈썹을 찌푸렸다. 저 바보 같은 놈은 대체 어디서 공공연하게 비리를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그런데 잠깐, 분명 이하트 가문이면….

“…메르디스 전 공비의 친정?”

렉시의 눈이 번쩍 뜨였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이게 무슨. 렉시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도 안 나왔다. 아니 그 집안사람들은 왜 다 이 모양이래?

렉시가 황당해 말을 못 잇는 사이, 사내애는 렉시의 속엣말을 용케 알아듣고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이 미친놈이, 너 우리 고모님 이름을 어떻게 알아. 어?”

“…고모님이라. 그렇군요.”

과연 저 오만한 성질머리는 집안 내력인가 보다. 그나마 따지고 보면 전 공비가 조금 나았다. 예절 따윈 개나 준 이놈과 달리, 그녀는 최저한의 예의는 지킬 줄 알았다.

“그분이 공작 전하와 이혼한 건 꽤 흥미로운 스캔들 아니었습니까. 당신 말대로, 지방 귀족 따위라도 이름 정도는 알 수밖에 없지요.”

“이…건방진 자식! 감히 어디서 스캔들 운운하며 고모님을 모욕해?”

턱!

렉시의 목덜미를 쥐고 흔들려던 사내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재빨리 피해 버린 렉시를 보며 이를 갈았다.

“이게 감히 피해?!”

“허면 그냥 맞아 주란 말입니까? 이하트 가문의 공자께선 어쩐지 몰라도, 저는 그런 성벽을 가진 사람은 아닙니다.”

“이 천한 놈이 입만 살아선…!”

서툰 몸짓으로 사내애가 다시 렉시를 잡아챘다. 그러나 이번에도 실패했다. 기본적으로 몸 따위 써 본 적 없는 남자애에게 잡힐 그가 아니다. 여기서 잡힐 거였으면 몇 년간 도망도 못 다녔다.

“고모님이 공작과 이혼하게 된 건 음모에 희생돼서다. 선제께서 살아 계셨다면 이런 치욕은 없었어!”

“그거야 그쪽 말이지요. 유책 배우자의 말을 대체 누가 믿습니까?”

“이런 잡것이 또…!”

아웅다웅하는 두 사람의 싸움은 제법 눈길을 끌었다. 하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구경이 불과 싸움 구경이라지 않는가. 아직 소개되고 있는 청년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슬그머니 싸움하는 둘 주변으로도 슬슬 모였다. 설명은 주변에서 듣고 있던 사람들이 알아서 했다.

“어머나 저게 뭐람.”

“저쪽은 모르겠는데, 이쪽은 이하트 가문의 삼남 아니었어? 아까 소개된 걸로 아는데….”

“폭력적이네. 상대는 누군지 모르겠지만.”

“나 들었어, 이하트 가문의 공자가 상대에게 손해 배상을 해 달라고 하더라고. 잠깐 부딪친 걸로 너무하지 않아? 이런 날 너그러움을 보여야지 저런 폭력성이라니 얼마나 안하무인인 거야.”

“짠돌이야? 아니면 폭력성인가. 뭐 어느 쪽이건 별로네.”

“가문이 아무리 좋아도 저건 안 되지. 리스트에서 지워.”

사내애가 정신을 차린 건, 그들 주변에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인 후였다. 남자애의 얼굴이 상황을 깨닫고 시뻘게졌다. 어쨌거나 그도 약혼자를 찾아 나왔다. 헌데 이런 꼴불견이라니…! 자신의 꼴이 이만저만 아니게 된 걸 안 사내애는 렉시를 보고 광분했다.

“이런 씹어먹을 자식! 너 일부러 이런 거지!”

“말은 바로 하지요 공자. 폭력을 행사한 건 영식이 먼저 아닙니까?”

렉시가 반론했다. 허나 이미 이 양아치의 머릿속에선 모든 일이 상대의 탓으로 돌아간 지 오래였다. 원래 진정한 진상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법. 그는 이글대는 눈으로 렉시를 노려보다 갑자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나 혼자만 망신당할 수는 없지.”

“…?”

렉시는 갑자기 웃는 남자애에게 한발 물러섰다. 뭔가 이상하게 기분이 나쁜데. 남자애는 본격적으로 무언가를 시작할 듯, 손에 낀 장갑을 벗기까지 하며 고개를 풀었다. 렉시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진상을 보며 몸을 팽팽히 유지했다. 달려들면 당장이라도 도망칠 거리를 재면서. 그러나 이번 공격은, 렉시의 허를 찌르는 것이었다.

―철썩!

“!”

따끔한 아픔이 왼쪽 뺨을 스쳤다. 동시에 북,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며 무언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렉시는 기함한 얼굴로 왼쪽 얼굴에 손을 댔다. 바닥엔 아까 남자가 벗었던 장갑이 떨어져 있었다. 언제 끼워 놓았는지, 날카롭게 소제된 커프스 장식이 달려 있는.

주변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렉시는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화가 나기 시작했다. 저게 미쳤나. 이하트 가문은 삼남의 교육을 하지 않은 것인가?

“…지금 제정신입니까 영식? 어떻게 감히 이런 짓을!”

“왜, 약 오르냐? 그따위로 얼굴을 가린 거 보면 오죽이나 못생겼을까. 너도 나처럼 망신이나 당해 보라고 했다, 왜!”야비하게 웃는 남자애의 얼굴에는 한 점 두려움이나 고민이 없었다. 이 일의 중요성이 전혀 와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 아예 자기가 한 일이 뭔지도 모르는 듯했다. 외려 이 일의 중요성은 주변 사람들이 더 잘 알아보았다. 차갑다 못해 써늘해진 분위기가 그 반증이었다. 그러나 삼공자는 이 상황이 뭔지 알아볼 생각이 없었다. 그저, 자신이 반격해 다들 놀란 것으로 알았다.

“그 잘난 얼굴 한번 보여 보지그래? 이미 다 찢어진 걸 뭐 하러 붙들고 있지?”

렉시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베일은 아까 일로 끄트머리가 쭉 찢어졌다. 현재는 그것을 렉시가 붙들고 있는 상태였다. 그는 렉시가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워 그러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정말 비열하군. 이하트의 삼공자, 이 일을 감당할 자신이 있습니까?”

“감당? 무슨 감당?”

“…맙소사. 이하트 가문은 아들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 건가? 장갑을 던지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른다고?”

렉시가 어처구니없어하며 중얼거렸다. 주변 사람들도 이 상황에 있어선 동감이었다. 그들은 장갑을 얼굴에 던진 양아치를 보며 쑥덕거렸다.

“결투 신청인 걸 몰랐나 봐요.”

“…그게 말이 돼? 애들도 알겠다!”

“소문에 이하트의 삼공자가 멍청하다는 소리가 있긴 했는데….”

다행히도 양아치의 귀는 머리만큼 나쁘진 않았다. 그는 수군대는 소리를 알아듣고 처음으로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겨, 결투라고?”

“그것도 얼굴을 겨냥하고 던졌으니 목숨을 걸고 하는 결투지요.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군. 맙소사, 이 무슨….”

렉시가 한탄하며 중얼거렸다. 잘해 봐야 19세나 되었을 어린애와 이게 무슨 황당한 짓거리란 말인가. 로메인이 하던 말이 맞았구나. 이 나이대 청년들은 앞뒤 가리는 게 없다더니!

“…모르고 한 짓이니 한번은 무를 기회를 주겠습니다. 성년이라도 다 똑같은 성년은 아니니까요. 사과하고, 무르십시오.”

“!!”

당황하던 양아치의 얼굴 위로 분노가 스쳤다.

“건방지게… 지금 내가 어리다고 우습게 보는 거야?”

“어려서 우습게 보는 게 아닙니다. 무지에서 비롯된 일을 용서코자 하는 것이지.”

렉시는 그의 말을 정정했다. 어리기에 봐준다는데 왜 저 지랄인가? 외려 좋아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렉시는 몰랐다. 이제 갓 성인된 청년에게 이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를. 미래의 약혼자를 찾으러 온 성년의 청년에게, 어리다는 말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너 이 새끼…!”

그는 이를 부드득 갈며 눈을 부라렸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놈은 요절을 내 버리겠다. 감히 이 날 어린애 취급해? 분노로 집중력이 발휘된 양아치의 눈에 가검을 찬 자가 들어온 것은 불행이었을까, 행운이었을까. 그는 재빨리 그쪽으로 다가가, 장식용 검을 찬 자의 허리춤에서 검을 빼앗아 들었다. 이미 자신이 황제의 홀에 있단 자각도 없었다.

―스릉

소름끼치도록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헉 소리도 내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결투? 좋다, 지금 하지!”

부웅!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아래로 내리꽂혔다. 검을 휘두를 줄 모르는 자의 손속은 거칠었다. 구경꾼들이 놀라 악 소리를 내며 달아났다. 설마 검을 뽑아 휘두를 줄이야! 렉시는 당황하며 옆으로 피했다.

파창!

거센 파열음이 일며 바닥의 대리석이 튀었다. 가벼운 쇠와 통자 쇠로 만드는 가검이 있는데, 저건 무조건 후자다. 맞으면 크게 다칠 게 뻔히 보였다. 렉시는 당황하며 거리를 벌렸지만 분노한 청년의 발걸음이 더욱 빨랐다.

“너 이놈! 감히 날 놀려?”

긴 쇠몽둥이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렉시에게 다가왔다. 저건 무조건 맞을 수밖에 없다. 렉시는 즉시 다리에 힘을 빼 바닥을 굴렀다. 검이 아슬아슬하게 렉시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렉시는 옆으로 재빨리 구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번엔 다른 각도에서 몽둥이가 날아들었다. 이번엔 굴러도 피할 수 없을 정도의 각도였다.

“꺄아아악!”

보고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에 놀라 뒤돌아본 렉시는 자신의 머리를 가격하려는 검을 보고 소름이 오싹 돋았다.

맞는다!

렉시는 코끝까지 다가온 검을 보며 머리를 감싸 안았다. 머리만 무사하다면 어떻게든…!

퍼펑!

“으억!!”

무언가 북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동시에 비명 소리가 나며 무언가가 쓰러졌다. 렉시는 꼭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쓰러졌나? 그런데 맞은 소리는 났는데? 하지만 안 아픈데? 뭐지?

그때, 익숙한 품이 렉시를 꼭 끌어안았다.

“…세상에. 다치지 않았습니까? 렉시, 맙소사.”

“…로메인!”

렉시는 자신을 안은 남자를 믿어지지 않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분명 사람들 틈으로 사라졌던 로메인이 자신을 안고 있었다. 자신을 공격하던 양아치를 단박에 때려눕힌 그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새하얬다. 로메인은 정신없는 얼굴로 렉시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대체 저치는 어떤 미친놈입니까. 여기엔 왜 있습니까? 아니 그보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배는 안 아픕니까?”

“어, 어떻게 왔어요?”

“시끄러운 소리가 나기에 와 봤다가 발견했습니다. 맙소사, 제가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그는 부들부들 떨며 렉시의 얼굴을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찢겨진 베일 안쪽에, 희미하게 긁힌 생채기를 보고 이를 악물었다. 푸른 눈동자 너머 불꽃이 일렁거렸다.

“이게 뭡니까.”

“…그게, 장갑을 맞았어요.”

“…장갑? 맙소사, 저자가 그랬습니까?”

“네. 헌데 로메인, 저 애는 알지 못하고 한 것 같아요. 그래서 봐주려고 했지만….”

“…일단 이것부터 두르십시오. 상처는 나중에 봅시다.”

그는 어깨의 망토를 벗어 렉시의 머리 위에 씌웠다. 찢어진 베일로 드러날락 말락 했던 얼굴이 망토 안쪽으로 다시 가려졌다. 그는 렉시의 얼굴이 드러나지 않게 꼼꼼히 점검한 뒤, 무서운 표정으로 이하트의 삼공자에게 다가갔다.

“으, 으윽….”

양아치는 배를 잡고 부들부들 떨었다. 로메인의 강격이 직격한 배가 마치 터질 것처럼 아팠다. 이마 위로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누가 감히 나를 쳐… 나를…? 흐릿한 눈을 뜬 양아치의 눈앞에, 검은 가죽 부츠를 신은 남자의 발이 들어왔다.

“으… 기, 기사?”

“…….”

로메인은 차가운 눈으로 양아치를 내려다보았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숨 하나 쉬지 못하고 기사가 뭘 하나 지켜보고 있었다.

“너…으, 황궁 기사냐?”

“…네놈은 누구냐. 누구길래 내 약혼자에게 위협을 가했나.”

“흐…! 뭐, 약혼자? 미친, 남자가 남자와 결혼을 해? 더럽긴…!”

퉤!

양아치의 침이 로메인의 구둣발 위로 떨어졌다. 로메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걸 그대로 양아치의 머리칼에 가져다 닦았다.

“…! 이, 이씨! 이 개새끼가!”

“정말 개새끼가 보고 싶다면 못 보여 줄 것도 없다. 감히 폐하의 궁에서 이런 소란을 일으킨 죄, 단죄받아야 마땅하지. 허나 그 이전에 일단 네 신원을 알아야 하니 묻겠다. 너, 누구냐. 누구길래 감히 이런 짓을 저질렀지?”

사내애는 씩 하고 이를 드러냈다. 감히 주제넘게 내 신분을 물어봐?

“나, 나는… 이하트 가문의 삼남 쿠퍼 드 이하트다. 내 아버지인 이샤크 드 이하트는 황궁의 신료이자 이하트 가문의 가주지. 너… 죽었어. 감히 날 치고 이따위로 굴린 거, 가만두지 않을 거야. 고작 황궁 기사 따위가!”

“황궁 기사? 누가 황궁 기사라는 거냐.”

로메인은 냉정한 눈으로 쿠퍼를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이놈의 머리를 짓눌러 죽이고 싶다는 욕구가 샘솟았다. 실제로 그래도 그의 신분상 정상 참작은 가능할 터. 그러나….

그는 슬쩍 눈을 들어 2층에 있는 커튼 뒤를 바라보았다. 저 위에서,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는 황궁의 주인은 그것까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로메인 드 데퓨탄, 프로하우스 공작가의 기사다. 너는 내 주군을 모욕했고, 동시에 나의 약혼자 역시 모욕했다. 감히 멋대로 흥겨운 연회 자리에 결투를 일으켰고, 허락되지 않은 무기류를 반입해 아녀자와 무고한 자들을 위협했으며, 나아가 폐하의 위신까지 손상 입혔다. 나는 황궁 기사가 아니니 너에게 처벌은 내릴 수 없다. 허나 그런 나라도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지.”

로메인은 흰 장갑을 벗어 쿠퍼의 얼굴을 후려쳤다.

짝!

장갑에 맞은 쿠퍼의 얼굴이 붉게 부어오르는 걸 보며 로메인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장갑을 얼굴에 떨어트린 뒤, 휙 일어났다.

“사흘 후 아침 여섯 시, 프로스토린 공원이다. 결투의 증인은 각 세 명까지 가능하니 알아서 데려오도록. 무기 없는 자에게 그토록 대단하게 검을 휘둘렀으니, 검이 있는 자에겐 더 대단하겠지. 네 검이 얼마나 대단한지 똑똑히 봐 주마.”

“뭐…?! 너, 이…!”

바르작거리는 쿠퍼를 벌레 보듯 보며, 로메인은 렉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를 휙 들어 안은 뒤, 홀을 빠져나갔다. 도중에 달려온 황궁 기사가 로메인을 막으려 했지만, 뒤이어 달려온 다른 기사가 막고 로메인을 내보내자 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온갖 사람들이 두 사람이 누구인지 쑥덕거렸다. 그러나 뒤이어 달려온 황궁 기사단에 의해 소요가 잦아들었고, 곧 끊어졌던 호명관의 소개식이 다시 시작되자 소란은 잦아들었다. 그들은 곧 이 짧은 개판을 잊고 본래 행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미안합니다. 당신을 그렇게 혼자 두는 것이 아니었는데….”

저택에 도착한 로메인은 렉시를 안고 방으로 들어와 그의 얼굴부터 살폈다. 푹신한 침대에 앉힌 뒤 렉시의 얼굴을 살핀 로메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놈을 죽일 걸 그랬습니다. 아니면 팔다리 하나라도 부러트릴 것을….”

까드득, 로메인이 이를 갈았다.

“아프진 않은데… 혹시, 피라도 나요?”

“…얼굴이 긁혔습니다.”

대단한 놈이다. 그 한 번으로 얼굴까지 긁다니…. 로메인이 가져다 준 쪽거울로 얼굴을 본 렉시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 말대로, 조금 왼쪽 얼굴이 긁혀 있었다. 어쩐지 조금 따갑더라….

“그래도 많이 긁히진 않았네요. 이 정도면 금방 나을 거예요.”

“젠장… 미안합니다. 하지만 정말이지 욕이 나올 수밖에 없군요.”

로메인은 욕설을 내뱉다가 멈칫하고 사과했다. 그는 한참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마음을 다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내일… 그놈을 꼭 죽이겠습니다.”

“그거 사흘 후 아니었어요?”

“…사흘 후. 마음이 급해져서 그만 말이 헛나왔군요.”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사실 웃을 상황은 아니었다. 에스코트부터 시작해서, 베일에, 생채기에…. 양아치 때문에 크게 다칠 뻔까지 했으니 웃음이 나올 수가 없지. 허나 이렇게 앉아,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약이 올랐지만 현실이 그랬다. 이 남자가 자신의 행복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하고 싶다는 일을 막을 수는 없지.

렉시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까진 모르겠지만, 팔다리 하나 정도 아작 내는 건 허락할게요.”

“당신을 그리 만든 자이니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이 얼굴에 상처를 낸 것도 모자라, 그 거대한 몽둥이로 당신을 공격했습니다. 게다가 중요한 건 그자가 그 짓을 저지른 것이 황제 폐하의 파티였다는 겁니다.”

“어린 청년인데… 적당히 봐주는 게 아니고요?”

“그런 무엄한 짓을 저지르는 건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당장 그 자리에서 즉결 처분당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으로 여겨야 합니다. 폐하의 명이 없었기에 황궁 기사들이 조용했던 것입니다. 만일 그분이 만류하지 않았다면 황궁 기사들도 가만있지 않았을 겁니다.”

묵과할 수 없는 말이 지나갔다. 렉시는 한쪽 눈을 살짝 치켜떴다.

“…폐하께서 그 일을 알고 계셨다고요? 아니, 그 일을 보셨어요?”

“2층 귀빈석에 폐하께서 계셨었습니다. 혹 모르고 계셨습니까?”

“…!!”

알 리가 있냐! 그보다, 그러면 내가 한 헛짓을 다 보았다는 건가? 깜짝 놀랄 사실에 렉시가 허둥거리는 사이, 로메인이 얼굴을 굳혔다. 알릴 것은 대충 다 알렸으니, 이제 렉시에게 그가 오늘 한 일이 얼마나 위험했는지를 알려 줄 때였다.

“일단 당신을 비난하려고 하는 말은 아니라는 걸 알아 주십시오. 허나 오늘 당신이 얼마나 위험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라 생각합니다. 렉시, 대체 왜 거기 홀로 나와 계셨던 겁니까. 밀라디 백작 부인과 함께 있었던 것 아니었습니까?”

“…….”

로메인의 물음에 렉시의 입이 꽉 닫혔다. 할 말이 많긴 한데… 할 수 있는 말이 참 없다.

“그녀와 함께 있을 자리는 고위 귀족들의 전용 좌석입니다. 체면 때문에 같은 귀족들끼리도 처신을 위해 움직이지 못하는 자리죠. 제가 당신을 놓고 안심하고 있었던 건 그 탓이 큽니다. 거기면 적어도 사람들 틈에 휩쓸리진 않을 테니까요. 실제로 나오자마자 시비가 걸렸지 않습니까. 거기서 그렇게 있는 당신을 보고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압니까? 정말이지 심장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로메인은 걱정과 동시에 렉시를 질책했다. 렉시는 살짝 놀라 눈을 깜박였다. 어지간해선 화도 안 내는 남자가, 그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아예 밀라디 부인과 만나지도 않은 겁니까. 그랬습니까?”

“…그, 그건 아녜요. 처음에 그녀와 있던 건 맞아요. 그녀와 그, 고위 귀족들 전용 좌석에 가기도 했고요.”

얼결에 변명하자 로메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렇다면 대체 그곳은 왜 갔습니까. 그냥 앉아 계셔야죠!”

“…그게.”

렉시는 입술을 달싹이다 말을 꾹 눌렀다. 말을 하긴 해야 하는데, 솔직히 좀 쪽이 팔렸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어린 여자아이에게 질투해서 에스코트 망치려고 따라갔다는 이야기를 대체 어떻게 곱게 포장한단 말인가?

그러나 렉시가 입을 닫을수록 로메인의 시선은 더욱 그를 압박했다. 어떻게든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괄게 타오르는 불길처럼 뻗어 오른다. 말보다 더 무서웠다. 아무리 렉시라도 이런 남자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법이었다. 게다가 전직 기사단장, 현직 약혼자의 심문이니 더욱 그럴 것이고.

렉시는 결국 시선을 딴 데로 돌리고, 진실을 밝힐 수밖에 없었다.

“…지, 질투….”

“예?”

“에잇! 당신 에스코트 방해하러 갔어요. 질투 나서!”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물끄러미 자신에게 닿아 오는 시선에, 얼굴이 달아오르다 못해 탈 것 같았다.

“에스코트 기사는 에스코트하는 아가씨와 첫 춤을 추는 것이 관례니까. 그거 망치려고 갔어요. 그거 방해하려고!”

“……질투…하셨습니까?”

로메인이 고개를 수그려 눈을 맞췄다. 뜻밖의 말에 당황했다. 성이 났던 얼굴은 물을 끼얹은 것처럼 식어 있었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건, 당황과 동시에 연유 모를 설렘.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정말로 그런 것이 자리하고 있었다. 렉시는 로메인의 표정을 보지 못한 채 눈을 피했다. 마주 보기엔 수치심이 지나쳤던 것이다.

“그래요! 질투했어요. 왜요, 꼴불견이에요?!”

로메인은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저, 저는 단지… 당신이 저를 질투할 줄 몰랐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렉시의 눈썹이 위로 휙 올라갔다.

“무슨 소리예요, 저는 질투 따위 할 줄 모른다는 건가요?”

“…그게 아닙니다. 저는, 저 따위는…. 당신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게 무슨 소리야. 아무것도 아니라니?

“아무것도 아닌 사람과 약혼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전 당신을 사랑해서 약혼했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나도 못 춘 첫 춤을 다른 사람하고 춘다는데 당연히 질투 나죠. 로메인 당신, 나와 춤 한번 춘 적 없잖아요. 기억도 못 하죠?”

렉시의 말에 로메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정말 …그런가?

“제가… 말입니까?”

“거봐, 모르네. 내 이럴 줄 알았지.”

렉시는 입술을 깨물었다.

“질투할 줄 몰랐네 어쩌네도 다 말뿐이죠? 약혼했으니 나는 이제 잡은 물고기다 이거예요? 그 사람 많은 곳에서, 혼자 서서 내가 얼마나 심란했는지 알아요? 밀라디 부인이 있으면 무엇 하나요, 당신이 아닌데. 당신은 그 에스코튼지 뭔지 한다고 가는데 사람 염장은 질러 놓고. 알고 보니 에스코트하면 꼭 춤을 춰야 한다면서요. 그래서, 내가 그래서….”

어쩐지 말을 하다 보니 속이 욱 하고 받쳐 올랐다.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나와 눈을 꼭 감았다 떴다. 여기서 울기까지 하면 안 되는데, 이상하게 조금 눈물이 나왔다.

“정말 너무해. 그깟 에스코트, 거절하면 그만이잖아요. 그 에스코트가 나보다 중요해요? 당신은 황궁 기사도 아니고, 이제 우리 가문 기사고. 그리고 당신은 내 건데… 내가 왜 다른 여자랑 춤추는 당신을 보아야 해요?”

“…렉시.”

“내 말 끊지 말아요. 생각해 보니 열 받으니까. 그래요, 내가 그쪽으로 간 게 잘한 일이 아닌 건 알아요. 하지만 당신도 잘한 거 하나도 없어요. 그렇게 걱정되었으면 날 지킬 방도를 마련해 놨어야죠. 엉뚱한 일로 날 내버려 두기나 하고. 뒤늦게 와서 화나 내고. 그래서, 내가 그래서…!”

“렉시. 지금 웁니까? 울지 마십시오. 예?”

울먹이는 렉시의 목소리를 눈치챈 로메인이 렉시의 손 위에 자신의 것을 얹었다. 못 이겨 손을 치우자, 로메인의 입술이 렉시를 찾아들어 왔다. 살짝 젖은 눈가 위로 그의 입술이 화인처럼 스며들었다.

“미안합니다. 당신이 그토록 서운해할 줄 몰랐습니다. 제가 나빴습니다.”

“…흑.”

“제 잘못입니다. 화를 내어 서운했습니까? 미안합니다. 화를 낸 것이 아니라, 놀라서 그랬습니다. 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미안하다는 말이 끝나면 입맞춤이 내려온다. 부드러운 입술이 얼굴 위로 비벼졌다. 이마, 눈가, 볼, 입술…. 희게 질려 있던 얼굴 위로 부드러운 마찰이 거듭될 때마다, 몸이 조금씩 녹아드는 것 같았다.

“울지 마십시오. 당신이 울면 제 심장이 멈추는 것 같습니다.”

로메인의 손바닥이 렉시의 손등 위에 올라왔다. 그 따뜻한 손에 억울했던 마음이 조금씩 풀리는 것일까. 물에 젖은 녹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로메인이 절절함을 담아 속삭여 왔다.

“정말로 잘못했습니다. 그러니 울지 마십시오….”

“…….”

손가락 사이로 살짝 마주한 로메인의 얼굴엔 미안함이 가득했다. 그 표정만으로도 용서할 마음이 들 정도로, 애절한 얼굴에 렉시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정말로 잘못했다고 하다면…. 정말 본인이 뭘 잘못한 건지, 알고는 있는 걸까?

“…좋아요. 그럼 말해 보세요. 제게 뭘 잘못했나요?”

“제 잘못은….”

로메인은 잠시 눈을 깜박였다. 곧 그는 심각한 얼굴로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일단 당신을 놓아두고 간 잘못이 있습니다. 아무리 목적이 있었다고 한들 당신껜 확실히 설명을 해야 했지요. 또한 밀라디 부인 대신 제대로 된 호위를 구해 놓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요.”

“당신께 소리를 지른 죄가 있습니다. 아무리 상황이 급했다 한들, 당신께 소리 지르는 건 배우자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화를 내서 미안합니다. 아무리 갑갑했더라도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제 화를 이기지 못하고 당신을 슬프게 했습니다.”

“또?”

“…에스코트… 춤을 기억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마지막 말은 바닥에 깔리는 것처럼 낮았다. 긴장한 남자의 말을 들으며, 렉시는 조금 꼬인 속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래, 대충 알고는 있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걸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으니 조금 답답하다고 해야 할까. 렉시는 한숨을 푹 쉬었다.

“…좋아요, 다 정답이에요. 물론 지금 제일 잘못하고 있는 게 뭔질 모르고 있지만요.”

렉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로메인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목소리가 종전보다 조금 재빨라졌다.

“또…또 있습니까? 죄송합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지금 한번 생각해 봐요. 당신, 지금 내게 제일 잘못하고 있는 게 무엇인 거 같아요?”

“…모르겠습니다. 다 잘못한 것 같습니다.”

렉시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로메인을 응시했다. 푸른색 눈이 당혹과 답답함을 끌어안고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두 무릎을 꿇고, 자신을 보는 남자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 이상 심술부릴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래, 앓느니 죽지.

렉시는 아무 말 없이 로메인의 목덜미를 콱 잡아 자신에게 당겼다. 당황하는 로메인의 눈동자가 가까워지는 걸 보며, 렉시는 살짝 입을 열었다. 그리고 가까워진 그의 코를 콱 깨물고 입술을 핥았다.

“!”

머무는 숨에서 밭은 소리가 났다. 서로의 입술이 맞닿은 순간, 내쉬는 숨이 섞였다가 허공에 흩어졌다. 가장 보드라운 부분이 맞닿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충격이 심장을 크게 뒤흔들었다. 렉시는 조금 보드라워진 눈동자로 로메인과 눈동자를 마주했다. 바다를 연상시키는 푸른 눈동자가 풍랑을 만난 것처럼 거칠게 일렁인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혼란해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질투할 줄 몰랐다는 말이 어디 있어요. 내 사랑을 의심한다는 말이잖아요. 당신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지막한 책망에 로메인이 퍼뜩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그런 의미가…!”

“나는 당신의 애인이자 연인이고, 약혼자예요. 더 좋은 다른 사람이 있는 것처럼 굴지 마요. 그건 내 사랑을 모욕하는 거니까.”

왜 내 마음속에 자신이 첫 번째라는 걸 인정하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다른 땐 자신이 만만하면서. 렉시의 으름장에 남자의 표정이 조금씩 변해 갔다.

“…죄송합니다. 제가 또 그랬군요.”

“로메인. 날 위해 폐하께 반지까지 뜯어낼 사람은 세상에 당신밖에 없어요. 당신이 내 최선이고, 그 이상의 수는 없어요. 알았어요?”

가만히 있는 로메인의 입술에, 살짝 자신의 것을 맞댔다. 윗입술을 살며시 잡아당겼다가, 아랫입술을 살짝 물자 목덜미 쪽으로 침을 삼키는 것이 보인다. 잠시 그렇게 입술을 마주하던 렉시가 하, 하고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움직이고 있는데 목석처럼 있다니.

설마… 이게 벌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로메인. 지금 이게 뭐 같아요?”

“…벌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 인내하라는…. 아닙니까?”

눈썹을 찡그리자 급하게 추가된 질문에 렉시는 그만 웃고 말았다. 어쩐지 이쪽으론, 하나를 알려 줘도 하나 반 이상은 나가지 못하는 것 같았다.

“로메인. 사람이 실수를 했으면, 그다음은 용서를 구해야죠. 벌이 아니라.”

“……벌이 아닙니까? 허면 용서는 어떻게 구해야 합니까?”

“정말로… 지금 몰라서 물어보는 건 아니죠? 내가 진짜 그런… 말까지 해야겠어요?”

눈치 없긴…. 빨개진 얼굴로 살짝 중얼거리자, 로메인의 눈이 느리게 깜박였다가 확 뜨였다.

“…!!”

렉시를 바라보던 푸른 눈동자가 확 풀리며 열기가 피어올랐다. 광대뼈에 은근하게 올라온 붉은 기는 그가 제대로 알아들었다는 걸 알려 주고 있었다. 그의 장점은 생각과 행동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꿇고 있던 남자가 급하게 침대 위로 올라오자, 렉시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성급한 숨이 얼굴 위로 쏟아졌다. 코가 맞닿고, 입술을 벌렸다.

기다렸다는 듯 뜨거운 것이 안쪽으로 밀려왔다.

“응….”

입안에 침범한 혀가 입천장을 훑고 지나갔다. 거칠지만 느릿한 침입에 렉시는 신음을 흘렸다. 느릿하게 천장을 자극하고, 혀를 사탕처럼 거침없이 빨자 허리가 떨려 왔다. 손끝에 살짝 힘을 줘 남자의 등을 잡자, 젖은 소리가 나며 로메인의 혀가 빠져나왔다. 나오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어쩐지 아쉬운 느낌에 칭얼대자, 나지막하게 웃는 소리가 나며 다시 따뜻한 것이 입술 위로 내려앉는다. 새가 쪼는 듯한 귀여운 키스 뒤엔 전신이 녹아내릴 것 같은 격정적인 키스가 뒤따랐다. 오래도록 입술이 빨려 퉁퉁 부었다.

시종들이 심혈을 기울였던 예복은 이미 반쯤 구겨져 저쪽에 던져져 있었다. 로메인의 옷도 바지만 남기고 모두 벗겨졌다. 남은 바지도 허리춤을 추스른 끈과 함께 사라지자, 검붉게 달아오른 분신이 퉁 하고 위로 솟았다.

“으응…!”

로메인의 거친 손바닥이 한 장 남은 속옷을 위로 벗겨 올렸다. 렉시의 입가에서 단숨이 빠져나왔다. 렉시의 성기 역시 달아올라 솟아 있었다. 그의 얼굴만큼이나 예쁘고 야한 것이 공기 중에 펄떡대며 자신을 드러내자, 나지막한 웃음이 남자의 입가에 맺혔다. 욕망으로 젖어 있는 남자의 눈동자는 이젠 푸르다기보단 까맸다. 어쩐지 입이 말라 오는 느낌이다. 렉시는 침을 삼켰다.

로메인은 렉시의 무릎을 위로 들어 자리를 잡았다. 날씬한 엉덩이가 위로 추켜 올라가자, 다리가 벌어지며 넓게 퍼진다. 여과 없이 드러난 음란한 부위에 뜨거운 시선이 와닿았다. 이유 모를 수치심에 렉시는 고개를 돌렸다. 위에서 남자가 작게 웃었다.

“당신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이 저뿐이라는 게 좋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이라니….”

“…그,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렉시가 얼굴을 붉히며 작게 항의했다. 나중에 진정한 아름다움이 운운하며 말이라도 하면 곤란하지 않은가. 그는 대답 없이 침대 협탁 위로 손을 가져가 서랍을 열었다. 덜컹거리며 손이 안쪽을 훑다가 살짝 멈춘다. 열기에 달뜬 얼굴 위로 곤란함이 스치고 지나갔다.

“왜요?”

“…향유가 없군요. 가져와야겠습니다.”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당치도 않은 말이었다. 이 와중에 그걸 가져오겠다고? 말도 안 된다. 렉시는 진지하게 고개를 흔들며 로메인에게 말했다.

“아뇨, 괜찮아요. 이번은 그냥 해요. 응?”

로메인의 입술이 잠시 움찔거렸다.

“그냥이라니요…?”

“괘, 괜찮아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두 사람은 이미 여러 번 몸을 겹친 사이였다. 이미 여러 번 그를 받아들인 자신의 몸을 렉시는 믿었다. 무모한 자신감이었다. 로메인은 아랫배에 열기가 모였지만, 애써 참아 냈다. 용서를 구하는 마당에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지를 수는 없었다.

“…안 됩니다. 다칠 수가 있으니까.”

“그럼 가져온다고요…?”

“당신이 싫어하는 일은 안 합니다. 다른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그 말을 마친 뒤, 그는 렉시의 허벅지를 넓게 벌렸다. 뜨거운 시선 아래 렉시의 페니스가 위로 솟은 게 보였다. 열기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로메인이 쑥, 렉시의 하반신 위로 얼굴을 묻었다. 갑자기 느껴지는 습윤한 압력.

렉시의 얼굴이 충격으로 달아올랐다.

“아, 앗! 자, 잠깐!”

한꺼번에 삼켜진 음경이 거세게 빨렸다. 렉시는 몸을 비틀며 신음했다. 자신 쪽이 한 적은 있지만, 이렇게 빨린 것은 처음이었다. 의식 없이 밀어내려 머리를 잡았지만, 거침없는 애무에 자꾸 손이 떨렸다.

“흐, 응, 아앙!”

허리가 떨리며 위로 솟는다. 허벅지를 움켜쥔 남자의 축축한 혓바닥이 움직일 때마다 렉시는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회음부와 음낭 사이가 꾹꾹 눌러지고, 축축한 혀가 귀두부를 자극했다. 결국 반항조차 못 하고 쾌락에 쓸려갔다. 중심을 거칠게 삼키고 빨아당기자 렉시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안쪽이 자극되는 것과는 다른 감각이 렉시의 머리를 후려쳤다.

“아흐, 아, 아응, 앗, 아앗!”

눈앞이 반짝이며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고, 뒤이어 무언가가 쏟아졌다. 바르르 허벅지를 떨며 잠시 있자, 곧이어 로메인이 무언가를 삼킨 뒤 성기를 뱉어 냈다. 그걸 본 렉시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그, 그걸 왜 삼…!”

“아, 이런. 실수했습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렉시의 허벅지를 잡아 눌렀다. 그리고 다시 하반신 쪽으로 얼굴을 묻었다. 렉시는 버둥대다 말고 다시 허벅지를 덜덜 떨다 흠칫했다. 회음부와 음낭 주위를 맴돌던 입술이 더 아래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잠, 잠깐 거긴…!”

굳게 닫힌 문 앞으로 습한 숨과 함께 혀가 닿았다. 뒤이어 축축한 것이 구멍 위를 살짝 핥으며 주름을 폈다. 렉시는 진저리치며 다리를 들었다. 맙소사, 어떻게 그런 곳을 핥을 수가?! 그러나 허벅지를 꽉 잡은 로메인의 팔은 굳건하기만 했다. 렉시는 울먹거렸다.

“더, 더러워, 거기 하지 말, 아, 아아!”

들어왔다.

렉시는 눈을 크게 뜨며 몸을 떨었다. 혀임이 명백한 것이 내벽 안쪽을 살짝 밀고 들어오자 숨이 헐떡거렸다. 말캉한 살덩어리가 끝을 뾰족하게 세우고 안쪽을 핥는 감각이 너무나 창피했다. 헌데 이상도 하지. 수치심과 함께 흥분이 몸을 내달려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더럽기 짝이 없는 안쪽을 남자가 거침없이 핥을 때마다, 몸이 흥분으로 덜덜 떨렸다. 내 몸의 가장 더러운 곳마저 사랑받는다는 감각이 수치심을 흥분으로 탈바꿈시켰다.

“으, 응, 아, 앗, 흐!”

혀가 안쪽을 찌를 때마다, 성기와는 다른 쾌락이 차곡차곡 쌓인다. 흐느끼며 신음하던 렉시의 음색이 조금 더 깊게 변해 갔다. 혀가 적당히 안쪽을 적시자, 대신 손가락이 내벽 안을 녹이기 시작했다. 이미 쾌감에 몸을 잠식당한 렉시는 움찔거리며 로메인의 애무를 받아들였다. 손가락이 능숙하게 안을 넓혀 갔다.

“으, 응, 흐으…!”

렉시의 성기는 이미 한차례 쏟아 내린 선액과 체액으로 번들거렸다. 내벽 안쪽으로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렉시는 허리를 움찔댔다. 길고 단단한 것이 내벽을 애무할 때마다, 저절로 안쪽이 조여졌다.

“손가락이 끊어질 것 같습니다. 성기보다는 이쪽이 좋습니까?”

“그, 그런 소리 하지… 아!”

나지막한 웃음과 함께 손가락의 개수가 늘어났다. 젖어 있는 로메인의 얼굴을 도저히 볼 엄두가 나지 않아 눈을 꼭 감았다.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눈을 감자, 몸의 변화가 더 적나라하게 검은 시야 안쪽에서 느껴졌기 때문이다.

“으, 흐윽!”

로메인이 짓궂게 안쪽을 넓힐 때마다 렉시의 신음 역시 거세졌다. 손가락이 네 개로 늘어나자 안쪽이 팽팽하게 넓혀졌다. 내벽에서 꿈틀대는 손가락들이 각기 다른 쾌락점을 짚었다. 견딜 수 없었다. 렉시는 벌벌 떨다 결국 손가락만으로 끝에 도달하고 말았다.

“아, 아응, 앗, 아, 흐윽, 안 돼, 앗, 응, 아아아!”

시야가 순간 하얘지며 온몸이 굳었다. 쾌감이 불처럼 솟으며 온몸의 신경을 태워 나갔다. 렉시는 등을 뒤로 휘며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짧은 절정, 정신을 간신히 차려보니 성기의 선단에서 사출된 정액이 하반신 위로 쏟아져 있었다. 희고 비릿한 정액은 아까보다 묽었다. 두 번째 사정으로 색이 옅은 정액을 본 로메인이 웃으며 액을 떠내듯 비볐다.

“마음에 드는 향유군요.”

“…!!”

렉시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는 정액을 자신의 성기에 발랐다. 이미 흉흉하게 발기한 로메인의 남근 위론 조금씩 선액이 흐르고 있었다. 굳이 정액까지 필요할까 싶을 정도였다. 두터운 귀두에서 뿌리 끝까지 렉시의 정액을 바른 뒤, 그는 렉시의 허벅지를 우악스럽게 벌렸다. 방금 절정을 지나쳤던 렉시는 흑 하고 숨을 들이켰다. 번들대는 남근이 구멍에 닿았다.

“…흐, 흐윽, 하앗, 앗….”

묵직한 것이 서서히 삽입되는 감각.

구멍이 팽팽하게 펴지며 성기를 삼켰다. 귀두부터 시작된 것이 내벽을 넓히며 안을 치고 들어왔다. 삽입은 성급하지 않고 느렸다. 귀두부 끄트머리 정도만 삽입되었다가 나가고, 또 다시 반쯤 삽입했다 빠져나갔다. 삽입이 거듭될수록 내벽이 뻐끔대며 성기를 머금었다. 렉시는 애가 탔다. 이미 정사를 아는 몸은 남자의 것이 들어오기만을 애태우며 기대하고 있었다. 체액으로 잔뜩 젖은 구멍이 벌름대며 삽입을 애걸하는 것 같아 머리가 아찔했다. 렉시는 허덕이는 숨을 부여잡으며 신음을 쏟아냈다.

“흑, 읏, 아흑….”

어째서 이렇게 느린 걸까. 원망하기가 무섭게, 또다시 성기가 천천히 안쪽으로 박혀 들어온다. 구멍은 이미 팽팽하게 늘어나 성기를 삼키고 있었지만, 남자의 삽입은 여전히 느지막하기만 했다. 렉시는 흐느꼈다. 자기도 모르게 애원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빠, 빨리이….”

느긋하게 쌓인 쾌락이 가슴 언저리에서 찰랑대며 렉시를 간질였다. 차라리 빨리 들어와, 거세게 자신을 정복해 주었으면 했다. 강렬한 쾌감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그러나 로메인은 렉시의 청을 거절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그는 천천히 하는 수고로움을 끝낼 기색이 없었다.

“아직은, 안 됩니다.”

“으, 아…!”

좁은 내벽을 확실하게 넓히며 성기가 박혀 든다. 좁은 내벽을 밀고 들어올 때마다 렉시의 입에서 습한 숨이 흩어졌다. 그리고 드디어, 거대한 것이 말뚝 박듯 내벽 안쪽에 완벽히 들이박혔다.

“…!!”

렉시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하반신이 한 치의 틈 없이 완벽하게 맞닿은 것이 느껴졌다. 철퍽, 까슬한 음모와 고환이 엉덩이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숨이 턱턱 막혀 제대로 쉴 수가 없다. 렉시는 벌벌 떨며 배 위를 만졌다. 날씬한 배 위로 마치 임신한 것처럼, 일부분이 도톰하게 솟아 있었다.

“다, 다 들어 왔…!”

퍽!

그때, 박혀 있던 남근이 뒤로 빠르게 물러났다 안을 때렸다. 렉시는 헉 소리도 내지 못하고 몸을 굳혔다. 빠르게 한 번, 느리게 여러 번. 그러다 종내엔 빼지 않고 그저 안쪽을 맛보듯 뭉근하게 휘젓는다. 묵직한 것이 안쪽을 휘저을 때마다 억 소리가 나왔다. 그저 휘젓기만 하는데도 미친 듯이 느끼는 자신의 몸이 원망스러웠다. 렉시는 허덕거리며 손톱을 세웠다. 뒷구멍을 꽉 채운 남자의 성기에 숨을 쉴 수가 없다. 차라리 빠르게 하는 피스톤질이 견디기 나았다. 렉시는 로메인의 팔을 잡으며 애원했다.

“아, 아응, 흣, 빨리…빨리 해 줘요.”

“…빠르게?”

“응, 제발… 견디기 힘들어. 응? 아, 아앙, 앗!”

렉시의 애원에, 기다렸다는 듯 로메인의 추삽질이 빨라졌다. 철벅거리는 소리가 아까보다 선명해지며 내벽이 환영하듯 그를 반겼다. 렉시는 바르르 떨며 그의 몸 아래서 흔들렸다. 흥분이 머릿속을 빠르게 치고 올라왔다. 단단해진 성기 끝이 내벽 안을 빠르게 마찰할 때마다 눈앞이 번쩍거리며 가벼운 오르가슴이 계속됐다.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달콤하게 신음했다.

“아, 앗, 아응, 앙, 흣, 흐아!”

로메인의 성기는 귀두 부분이 특히 굵었다. 그것이 안쪽을 찍어 누를 때마다 렉시는 온몸이 번개라도 맞은 듯 파르르 떨렸다. 나무뿌리처럼 굵은 기둥은 그저 드나드는 것만으로도 내벽을 자극해 온몸을 쾌락으로 이끌었다. 성기를 머금은 내벽이 움찔대며 안을 조여 댔다.

퍽!

로메인이 다시 힘을 주어 안쪽을 때렸다. 그리고 순간 렉시의 몸이 움찔 떨렸다.

“아, 아?!”

렉시는 헐떡이며 눈을 크게 떴다. 로메인이 다리 한쪽을 조금 더 위로 올리면서, 눌린 지점이 방금 변했다. 갑자기 내벽이 로메인을 쥐어짜듯 조였다. 격렬하게 조이는 내벽에 피스톤질을 하던 로메인이 신음하며 웃었다.

“새로운, 자리로군요. 좋습니까?”

“아, 아니, 흑, 아, 잠깐, 거기 안…!”

아아앗!

렉시는 비명을 내질렀다. 선단 끝이 짓누르듯 방금 지점을 재차 때리자, 자기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 도저히 몸을 뜻대로 할 수가 없는 강렬한 쾌감이 몸을 훑었다. 열려서는 안 되는 곳이 열리는 감각에 렉시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머리에서 번개가 치며 숨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 아안 돼. 안 돼, 거긴…! 아냐, 아앗!”

로메인이 허리 짓을 크게 하며 재차 동일한 곳을 밀어 올렸다. 렉시의 배 속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안쪽이 미친 듯이 경련했다. 내벽이 남근을 쥐어짤 것 같은 감각에 로메인이 신음했다.

“아, 아악, 앗, 아으, 안…!”

퍽! 재차 안쪽을 때리는 남근에 렉시는 비명을 질렀다.

마치 천둥이 치는 것 같은 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온몸에서 땀이 나며 손발이 떨렸다. 자신이 로메인을 향해 뭐라고 소리 지르는 것 같았지만 무엇인지는 그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헐떡거리는 숨이 목 끝까지 치받혀 올라왔다. 핏, 핏, 한번 사정했던 페니스는 이미 솟아올라 정액을 사출하고 있었다. 아니, 정액이 아닐지도 몰랐다. 마치 물 같은 것이 조르르 나와 두 사람을 적시고 떨어졌다. 수치심을 느낄 새도 없었다. 뒤이어 거센 파도 같은 절정이 폭풍처럼 그를 덮쳤다. 렉시는 비명을 지르며 로메인을 끌어안았다. 겪어 본 적 없는 절정은 깊고 강렬했다. 온몸이 성기처럼 변해 쾌감만으로 숨을 쉬는 듯했다. 어느 순간, 올라왔던 다리가 내려가고 대신 로메인이 그의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어진 하반신에선 철벅대는 소리가 끊임이 없었다. 마주한 눈동자는 욕망과 감탄으로 달아올라 끝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깊은 바다를 보는 것 같은 눈동자의 남자는 렉시를 삼켜 이름 모를 어느 곳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아낌없이 그를 침탈했다.

“아, 아….”

힘없이 벌려진 입안에서 가냘픈 신음이 흘렀다. 쌕쌕거리는 소리와 함께 고여 있던 눈물이 기어코 볼 위로 흘렀다. 머릿속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정리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그저 미묘한 수치심과 쾌락만이 파도처럼 일렁인다.

“…이제 용서를 청할 수 있을까요?”

긁히는 것 같은 음성이 렉시의 귓전에 떨어졌다. 관능적인 목소리에 소름이 쭉 돋았다. 연결된 하반신 쪽으로 뭉근한 쾌락이 계속된다. 짜릿한 것이 뒤통수를 계속 후려쳐, 제대로 된 생각을 하기 힘들었다. 로메인의 입술이 렉시의 귓가를 지분거렸다.

“오늘은 정말 미안했습니다. 당신이 요즘 너무 힘들어해서…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거래가 급해도 당신의 안전을 우선했어야 했는데….”

“…?”

렉시는 눈물이 번진 얼굴로 로메인을 응시했다. 뭔가, 이상한 말이었다. 거래라니…?

“당신을 슬프게 해서 미안합니다. 앞으론 절대 이런 일 없을 겁니다.”

“로메…무슨…?”

“그건 이미 받아 왔으니….”

“…로….”

렉시는 머릿속을 더듬대며 언어를 떠올리려 애썼다. 뭔가 질문을 해야 하는데, 자꾸 짜릿하게 올라오는 쾌감이 질문을 지우고 흩어 놓는다. 안쪽에서 계속 자신을 자극하는 성기가 그의 언어 중추를 마비시키고 있었다. 렉시는 떨리는 숨을 간신히 삼키며 로메인의 얼굴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간신히 질문을 떠올리며.

그러나.

“…앗, 아, 아응, 응!”

잠시 쉬었던 피스톤질이 점차 속도를 올렸다. 잠시 쉰 것이 언제냐는 듯, 재개된 정사에 렉시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떠올렸던 모든 것이 구름처럼 흩어진다. 자비 없이 다가오는 쾌락에 모든 것이 물처럼 녹아내렸다. 예민하게 달아오른 몸이 계속된 절정으로 벌벌 떨렸다. 헐떡이던 입가에서 쾌락에 잠긴 비명만이 간헐적으로 흘러나왔다.

“열심히 사과하겠습니다. 당신의 마음에 들도록….”

“아….”

거친 숨을 내쉬며 로메인이 속삭였다. 렉시는 아무 말 하지 못하고 그의 아래서 신음했다. 무언가 조금씩 떠오르는 것이 있었으나, 빠르게 잠식하는 절정의 파도에 모든 것이 쓸려갔다. 묵직해지는 쾌감이 온몸을 부술 듯이 엄습한다. 성감이 계속 지속되며 이성을 마비시켰다. 까마득한 절정, 이성이 인지 너머의 어딘가로 쓸려 들어간다.

허덕대는 신음을 내뱉으며 그는 그렇게 오랫동안 로메인의 ‘사과’를 받았다.

*****

“안녕하십니까, 라니스터 영애. 저는 보르누이의 윌리엄이라고 합니다.”

“어머.”

필리아 라니스터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청년을 보며 미소지었다. 멋들어진 미모가 제법 그녀의 구미에 맞는다. 이번 그녀의 사교계 데뷔는 아주 크게 성공했다. 눈앞의 청년만 해도 벌써 열다섯 번째로 그녀에게 다가온 청년이었으니까. 그녀는 살며시 눈을 접으며 청년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보르누이 공자.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예…!”

남자의 얼굴이 살짝 환해졌다. 반갑다는 말에 기뻐졌던 것이 분명했다.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영애, 아까부터 계속 영애만을 보고 있었습니다. 부디 제게 영애와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저돌적인 돌진에 필리아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남자의 청을 거절했다.

“…감사합니다. 헌데 이 일을 어쩌지요. 제가 지금 발이 너무 아파서….”

필리아는 일부러 한숨을 내쉬었다. 은근슬쩍 댄스 카드를 보이는 것도 포함해서.

“오늘 벌써 열 분이 넘는 분과 춤을 추었더니…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아, 그렇군요. 그럼 조금 쉰 이후에….”

“그게, 오늘은 이만 물러갈까 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너무 피로해서 더 이상은 연회에 머무르기가 힘들 것 같아요.”

일부러 머리에 손을 올리며 아픈 척을 했다. 어지럼증을 느끼는 여인처럼 보이게. 가녀린 허리와 하얀 옷차림, 흰 피부와 어우러진 꾀병은 확실히 위화감이 없었다. 남자는 여인의 엄살에 홀딱 넘어갔다.

“그렇군요. 제가 너무 무리한 부탁을 드렸습니다. 피곤하신데 붙잡아서 미안합니다. 춤은 나중에 다시 청하지요. 그때엔 꼭 제 청을 들어주시길 기대하겠습니다.”

“물론이지요 공자. 양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거절당했어도 똑 부러지게 청을 하는 게 꽤 귀엽다. 필리아는 멀어지는 그의 모습을 보다가 얼굴을 살짝 굳혔다.

…아, 아깝다. 외모랑 성격 모두 취향인데.

“…기사가 아니라니 어쩔 수 없네.”

그녀의 이상형은 어쨌거나 기사. 아무리 성격 외모가 좋아도 그녀는 기사라는 직종은 포기 못 했다. 혀를 차는 그녀의 등을 누군가 살짝 때렸다. 깜짝 놀라 뒤를 도니, 그녀의 어머니인 라니스터 백작 부인이 서 있었다. 필리아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머니, 놀랐잖아요.”

“그럼 놀랄 일을 하지 말았어야지. 혀 차지 마렴. 다 보인다.”

그녀는 딸의 댄스 카드를 넘겨 보고 눈을 살짝 접었다. 첫 데뷔 날 이후 닷새나 지났는데 오늘도 열넷이나 춤을 청했다. 방금 한 명은 그냥 보냈으니, 그것까지 합하면 총 열다섯. 지난 닷새를 모두 더한다면 최소 서른은 넘는 청년들이 딸에게 호감을 표했다는 뜻이다. 아마 이번 데뷔 중 가장 성공한 건 그녀의 딸일 것이다. 백작 부인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어떻니 얘야. 맘에 든 사람은 있니?”

“뭐… 두어 명 있어요.”

“두엇이라. 네 눈 높은 건 이 어미가 잘 알지.”

필리아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말대로 어지간하면 그 두엇이 최종 후보가 될 것이다. 어머니의 말대로 그녀의 눈은 꽤 높고, 그 이상 가는 남자는 나타나기 어려울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머니를 따라 홀 바깥으로 나갔다. 그 짧은 순간에도 제법 괜찮은 청년들이 필리아의 뒤를 따라다닌다. 이번 그녀의 데뷔가 아주 성공적이었다는 반증이었다.

‘대단하네 정말….’

그 얼굴만 멀쩡한 변태 기사의 말대로다. 자기 말대로만 하면 뭐든 잘될 거라더니…. 필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기 객관화가 잘된 그녀다. 그녀는 자기가 잘나서 이렇게 사람들의 시선을 차지한 게 아니란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자, 여기 앉자. 오늘은 좀 쉬고.”

백작 부인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훑었다. 이 짧은 시간에도 괜찮아 보이는 남자가 누구인지, 속으로 셈을 하는 것일 게 분명했다. 딸의 혼사를 위해 열정적인 어머니의 귀감다운 모양새다.

“어머니.”

필리아가 조심스럽게 백작 부인을 불렀다.

“응? 왜 그러니?”

자신을 돌아보는 어머니를 보며 필리아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하기 싫다. 정말 하기 싫지만… 결국 해야만 하는 질문을 해야 할 때였다.

“…그 기사…분한테. 그거…정말로 줬어요?”

말이 떨어진 순간, 시종일관 생글거리던 라니스터 백작 부인의 얼굴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그녀는 하고픈 말이 많은 얼굴로 딸을 응시했다. 하나, 둘, 셋…. 그러다 슬쩍 눈길을 떨구며 작게 속삭였다.

“…조용히 하렴.”

“맙소사. 정말 줬어요?!”

설마설마했던 것이 현실로 다가왔다. 필리아는 경악을 감춘 채 어머니에게 되물었다. 믿어지지 않는다. 그걸 정말로 줘? 들키면 안 되는 걸 알기에 목소리는 작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부끄러웠는지 백작 부인이 몸서리쳤다.

“조용히 하래도? 넌 부끄러움도 모르니!?”

“…알긴 아시네요. 부끄러운 거. 그걸 아시는 분이 그건 왜 그러신 건데요?”

“왜냐니.”

백작 부인은 다소 뚱한 눈초리로 딸을 건너보았다. 어쩜 네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니? 이런 함의를 가득 담은 시선이었다.

“정말 몰라서 묻니. 다 널 위한 거잖니?”

“…절 위한 일인 건 물론 알지요. 하지만 그거, 그렇게 아무렇게나 줄 거 아니잖아요.”

백작 부인의 목덜미로 붉은 기가 비쳤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본인의 속곳이다. 아무리 목적성이 있다 한들 그걸 건넨 수치심이 사라질 수는 없었다.

“나도 알아. 하지만 어쩔 수 없잖니.”

사실 수치심보단 아까운 마음이 더 크다. 그 물건의 진가는 겪어 본 그녀가 제일 잘 알기 때문이다. 그 물건으로 무려 여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탈 없이 낳은 것이 바로 그녀 아닌가. 그녀도 어지간하면 그걸 타인에게 양도하고 싶진 않았다. 딸이나, 앞으로 생길 미래의 며느리에게 주고 싶었지.

…하지만.

“우리 가문은 다른 곳에 비해 특출난 게 없어. 있는 것이라곤 이젠 쓸모없는 기사들뿐이지. 물론 지금이 전란의 시대라면 무척 매력적인 요소일 테지만… 알다시피 요즘 시대가 그런 시대니. 그나마 이 어미는 외동에, 라니스터 백작가란 혼수가 있어 너희 아버지와 혼인할 수 있었다. 허나 너는 그런 것도 없잖니. 있는 것이라곤 라니스터 변경백의 장녀라는 허울뿐인 자리뿐. 지참금이야 잘 줄 테지만, 그거야 우리만 그러겠니. 다 똑같겠지.”

그런 자신의 딸이 제대로 된 약혼자를 찾기 위해선 첫 사교계에서 눈도장을 찍을 필요가 있다. 자신의 딸은 제법 예쁘지만 사람이 많은 자리에서 돋보이게 하는 기술은 몰랐다. 가뜩이나 눈도 높은데, 데뷔마저 순탄치 않다면 연애는 고사하고 남자 찾기도 힘든 것이 바로 이 바닥이었다.

그렇다면, 그걸 해낼 수 있는 사람에게 부탁할 수밖에.

“그 덕분에 네 데뷔가 이렇게 성공했다. 서로 정당한 거래였으니, 넘겨주어야지. 네 혼삿길만 탄탄할 수 있다면, 이 어미는 뭐든 할 거야. 이제 우리 집안엔 그런 물건은 존재한 적이 없는 거야. 앞으로도 이야기 꺼내지 말았으면 한다, 딸. 알았지?”

“…예. 알겠어요.”

필리아는 복잡한 얼굴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말대로 그녀의 사교계 데뷔는 크게 성공했다. 정당한 거래이니 줘야 하는 것이 맞다면… 그래, 어쩔 수 없겠지.

그녀는 조용히 앉아 어머니를 응시하다 시선을 떨궜다. 그리고 한때 그녀의 어머니가 가졌다가, 거래로 넘긴 것을 생각했다.

라니스터 백작령에는 대대로 전해지는 물건이 하나 있다.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에게로 이어지던 이 물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순산 기원 마도구.

입덧과 산모의 각종 건강을 보조해 주는 이 마도구는 다산 체질인 라니스터 백작가를 조력한 숨은 일등공신이다. 물론 완벽한 마도구는 없는 관계로, 몇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긴 하지만.

그 하나는 입덧만큼은 사라지지 않고 타인에게 전가된다는 것이고, 둘로는 마도구를 꼭 착의하고 있어야 효과를 본다는 것. 그래서 후손들은 마도구를 속옷 형태로 만들어 입었고, 입덧은 부친 쪽이 전담해 임산부의 고통을 일부나마 느끼게 했다.

‘…로메인 드 데퓨탄.’

필리아는 물건을 강탈해 간 변태 기사의 이름을 되뇌었다. 알고 보니 그 기사는 생각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었다. 후작가의 차남이자, 제국의 몇 안 되는 상급 기사이며, 최근 무척 유명해진 프로하우스 소공작의 약혼자라고. 약혼자가 남자라는 사실에 깜짝 놀라긴 했지만, 뭐 높으신 분들은 가끔 그런 혼인을 한다니 그런가 했다.

―단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그걸 대체 왜 가져간 걸까? 둘 다 남자니까 임신할 사람도 없잖아.’

그게 귀하긴 하지만… 쓰지 않을 사람들에겐 그냥 쓰레기 같은 거 아닌가?

그녀의 의문은 합당했다. 어쨌거나 그 물건은 산모의 안전을 위한 것. 즉 임신하지 못하는 남자들에겐 필요가 없었다.

‘…주변 사람 중 임신한 사람이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가능할 상황은 그것뿐이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좀 이상한 건 남았다. 남 주려면 굳이 어머니와 아버지의 다복함이 맘에 들었다고 입을 털 리가 없지 않을까?

이래저래 복잡한 계산을 하며 머리를 싸매던 필리아는 결국 생각을 그만뒀다. 이렇게 생각해 봐야 뭐 하겠나. 어차피 물건은 이 손을 떠나 그쪽으로 갔을 뿐인데.

‘그래, 내가 그 변태 미남의 생각을 알아서 뭐에 써먹겠어.’

변태의 생각을 알면 같은 변태밖에 더 될까. 같이 손잡고 춤춘 것도 소름끼쳐 죽겠는데.

그저 그 변태 미남의 생각이 계속 떠오르는 건, 그 물건이 무척 아까워서가 클 것이다. 집안 대대로 내려온 물건이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졌으니 아깝지 않으면 그게 어디 사람인가.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래. 그리 아까워할 일은 아니었다. 세상은 넓고 마도구는 많으니 찾아보면 그런 물건 하나쯤은 어딘가에서도 나오긴 할 테니까.

그러니까 요는 선택과 집중이다.

‘어머니 말이 맞아. 지금 중요한 건 그딴 물건이 아냐. 괜찮은 남편을 찾는 일이지.’

물건은 나중에 찾아도 되지만, 배우자는 지금 아니면 못 찾는다. 필리아는 어머니의 의견에 깊이 동감하며 이번에 모은 배우자 리스트를 정리했다. 자신이 늘 새기고 있는 배우자 조건과, 최근에 새로 추가된 배우자 조건을 주의 깊게 유의하면서.

기사.

경지 높은 기사.

미남.

그리고, 추가 하나.

변태가 아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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