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1. 미인, 기사, 황녀, 황제. (17/20)

1. 미인, 기사, 황녀, 황제.

황도의 제일 미인, 제국의 보물이자 황제의 기쁨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레아누는 그 말 그대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금실을 녹인 것 같은 아름다운 금발, 흰 우유 빛으로 빛이 나는 옥 같은 피부, 푸른 바다가 담긴 것 같은 푸른 눈, 탐스럽게 도톰한 입술과 여성스러운 곡선을 그리는 우아한 몸매까지.

그런 그녀가 한번 나서면 구름 같은 인파가 모여들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황도는 무척 넓었으나, 그 전체의 인구의 반 정도는 그녀의 숭배자들이었다. 사람들의 존경은 황제에게 있으나, 사랑은 황녀에게 쏠려 있다는 뭇사람들의 말이 농담이 아닌 셈이다. 콧대 높은 외국의 사신들도 그녀만 보면 눈을 떼지 못했고, 그녀를 한 번 본 사람들은 기어코 그녀를 다시 보기 위해 애걸복걸하곤 했다.

그녀의 미모는 그저 인기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 미모 덕분에 미혼임에도 불구하고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숭배자들이 매일같이 보내 주는 선물만으로도 그녀는 이미 한 귀족가는 넘어설 재산을 모았다. 황제는 따로 황실 재산을 내주지는 않았으나, 그런 식으로 모은 재산에 대한 소유권은 인정해 주었으므로 그녀의 부는 안전했다.

황녀란 지위, 아름다운 외모, 그에 따른 막대한 재산까지.

실로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 그녀였고, 그녀의 삶이란 모자란 것이 없는 풍요와 맞닿아 있었다.

그 무엇이 그녀의 일생에 암초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그녀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황녀 레아누는, 요 근래 무척이나 기분이 저조한 상태였다. 이해할 수 없으나, 그녀는 현재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아….”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잔을 들었다.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와 여인의 고운 이목구비를 사뭇 어둡게 한다. 그녀가 한숨을 내쉴 때마다, 붉고 투명한 빛의 포도주가 잔잔한 빛을 내뿜으며 흩어지고 주변 사람들은 숨을 죽인다. 그리고 그날 세 번째 이어지는 한숨을 쉬자, 결국 그녀 주변의 숭배자들의 안색이 변했다.

“황녀 전하.”

그들은 우르르 몰려들어 황녀의 발밑에 무릎을 꿇었다. 아름다운 그들의 우상이 한숨을 쉴 때마다 숭배자들의 가슴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들은 안타깝게 황녀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아름다운 레아누, 제국의 보석인 황녀님. 왜 그리 낯빛이 어두우십니까?”

“……내 얼굴이 어두운가요.”

“그렇지 않다면 어찌 그리 한숨을 쉬시는 것입니까? 무엇이 당신의 마음을 혼란하게 합니까. 부디 말해 주십시오.”

황녀의 푸른 눈동자가 일순 일렁거렸다. 자신의 숭배자들을 보는 황녀의 얼굴은 무척 심란해 보였다. 그녀는 잠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예쁜 분홍빛 입술 사이로 흰 치아가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진다. 살짝 희어졌다, 핏기가 도는 입술은 연지 없이도 퍽 붉고 예뻤다. 그녀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하아, 하고 다시 한숨이 나왔다.

“그대들은… 혹 이러한 소문을 들어 본 적 있나요?”

“어떤 소문 말씀이십니까 .”

“그것은….”

그녀는 말을 하려다 말고 잠시 머뭇거렸다. 기세 좋게 말을 흘리긴 했으나, 어쩐지 말하려고 보니 조금 저어된다. 늘 풍족하고 우아하게 살던 그녀가 불만 어린 말을 하려니 어색한 것이다. 허나 이미 시작한 말,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 게다가 얼마 전부터 세간을 들썩이게 하는 소문 몇 가지가 그녀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어둡게 빛냈다. 이내 옥구슬 같은 목소리가 숭배자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제국에 새로운 미인이 나타났다는 말을 들었답니다.”

“미인, 말씀이옵니까?”

“그래요. 아마 들은 분들도 있을 법하군요.”

그녀의 푸른 눈동자 위로 날카로운 빛이 스쳤다. 황녀라는 지위를 가진 여자는 오만했지만, 그 오만에 걸맞은 것을 가지고 있었기에 별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도 그랬다.

“이 거대한 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것이 바로 저, 레아누였죠. 헌데 어찌 된 영문인지 어느 때부터, 다른 이가 내 이름과 같이 불리고 있었답니다.”

“아….”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들도, 그것에 관해서 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프로하우스의 새로운 소공작 말이로군요.”

“그래. 그런 이름이었죠.”

차게 떨어지는 목소리에 사람들은 얼굴을 흐렸다.

“프로하우스의 소공이 무척 아름답다는 소문은 저희도 들었습니다. 허나 황녀 전하, 그것은 그리 고려할 바 못 됩니다. 고작 남자가 어떻게 당신을 능가할 수 있겠습니까?”

“맞습니다. 아름다운 레아누, 이것은 그저 새로운 소공작의 지위를 확고하게 하기 위한 공작가의 술책일 것입니다. 실제로 그자의 외모가 아름답다 말하는 자들은, 공작가의 가신들이 아니옵니까?”

그들의 말을 듣는 동안 황녀의 표정은 시시각각 달라졌다. 그녀는 일부러 고개를 기울여 머리칼을 풀어냈다. 스르르 흘러내리는 머리칼은 그녀의 자랑거리 중 하나였다.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아름답게 보일 수 있는지 잘 알았다. 풍성한 황금빛 머리 타래, 움직일 때마다 찰랑거리는 보석들의 난반사는 그녀를 마치 여신처럼 보이게 만들 것이다. 실제로 많은 이들의 눈동자가 몽롱해진다.

레아누는 나른히 웃었다.

“그래, 나도 그리 생각합니다. 허나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이렇게 명백한데, 어떻게 남자가, 이 나보다 아름답다 말이 나올 수 있단 말인지?”

그리고 어째서, 그자는 내가 아닌 남자를 택했던 것인지.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만졌다. 결점 하나 보이지 않는 이 완벽한 미모를 보고도, 움직이지 않던 그 남자가 생각나자 약이 다시 바짝 오른다.

로메인 드 데퓨탄.

한때, 그녀의 상대로 거론되었었던 빌어먹을 기사.

그 남자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신에게 열망을 가지지 않는 자에 대한 괘씸함은 일종의 집착과도 같았다.

그녀는 생전 처음 겪는 이 불쾌감이 질투임을 알지 못했다. 허나, 한 가지만은 무척 확실했다.

그녀는, 그 소공작이란 자가 무척이나 싫었다.

“나는 이 소문이 무척이나 불유쾌합니다. 고작 공작가의 소공작이 나와 비등하다 여겨지는 것이 몹시 마음 쓰이는군요.”

“황녀시여, 부디 마음을 푸소서. 프로하우스 공작가의 일은 황녀께오서 신경 쓸 것이 아니옵니다. 그 모든 것은 갑자기 나타난 소공작의 지지를 위한 일. 그런 기만책에 마음 쓰시지 마옵소서.”

“아, 그대들은 왜 이리 어리석은가요. 내가 마음 쓰지 않는다 한들,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이 사그라들 것 같나요?”

나는 그 말이 나오는 그 사실 자체가 싫다. 누군가 나와 비슷하다 견주어지는 것 자체가 모욕적이다. 이 내 마음을 어찌 모른단 말인가?

그녀의 차가운 목소리에, 사람들은 고개를 숙였다. 아름답지만 그 미모만큼이나 대단한 성격을 지닌 황녀의 노여움은 얼음으로 만들어진 불 같았다.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가 제 주제를 알기를 원합니다. 감히 이 나와 같은 곳에서 이름이 오르내리는 걸 수치스럽게 여겼으면 좋겠습니다. 허니 다들 말해 보세요. 어떻게 하면 그가 제 주제를 알 수 있겠습니까?”

잠시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숭배자들의 틈에서 몇 가지 의견이 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개중 가장 유효할 것 같은 방안을 그들의 여신에게 바쳤다. 방안을 듣는 황녀의 얼굴에 점차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래, 그런 방법이….”

황녀는 살그머니 미소 지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 위로, 누군가를 골탕 먹일 수 있는 자의 기쁨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몇 달 뒤, 한 파발이 프로하우스 공작가로 급파되었다.

*****

프로하우스 공작이 출산하고, 페르귄 영지로 간 뒤 몇 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난데없이 사라진 이 부부 때문에 공작성은 한때 진통을 겪었다. 최고 결정권자가 하루아침에 사라졌으니 좌초될 일들이 어디 한두 개일까. 허나 소공작 렉시의 노력 덕분에 혼란은 그럭저럭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아직 공작의 업무를 대신하기엔 서투른 렉시였지만, 도와주는 사람이 많으니 어떻게든 돌아가는 것이다.

원래 일이란 게 그렇다. 닥치면 어떻게든 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아무리 닥치면 하게 되는 일이라도 힘은 들게 마련이다. 하여 렉시는 거의 고군분투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옆에서 도와주는 애인의 존재가 없었다면 아마 렉시도 도망치고 싶어졌을 것이다.

물론 주변에선 직책도 없는 로메인이 렉시를 돕는 걸 보고 쑥덕거리는 모양이었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연인이고, 미래엔 혼인까지 할 것이라 여겨지는 사이니만큼 둘 다 귓등으로 넘기고 있었다.

그리하여 적어도 공작령에선 이 둘의 미래에 관해선 별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해도 듣지도 않았겠지만 생각해 보라. 미래에 자기 상사가 될지도 모를 권력자에게 직언할 간 큰 놈이 어디 있단 말인가?

단지 안타까운 건 이렇게 바쁜 나머지 두 사람이 진득하게 연애할 시간이 극도로 부족했다는 점이다. 허나 사정이 이러니 어쩌겠는가.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지.

뭐 그렇다고 두 사람이 아주 연애를 안 하는 건 아니었다. 업무하는 짬짬이 사람들 몰래 뽀뽀도 하고, 남들 안 보는 으슥한 장소에 찾아가 얼굴 붉힐 짓도 좀 하다 걸리기도 했으니까. 혈기 넘치는 청춘들이 어찌 할 짓을 안 하겠는가. 그저, 단지 횟수와 시간이 좀 많이 부족했을 뿐이지.

좀 덜 바쁘면 나아지겠거니, 시간 지나면 나아지겠거니. 그렇게 쉬는 시간 짬짬이 만나는 등으로 부족한 시간을 채우는 둘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나날이 이어지는, 어느 날이었다.

“황도에 가셔야겠습니다.”

“…황도?”

렉시는 이상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에게 이 말을 한 자는 그의 보좌 플로랑 후작이었다. 얼마 전 결혼 후 복귀한 그녀는 렉시의 보좌를 하며 정무를 처리하는 것으로 노선을 정했다. 렉시가 내정 쪽 정무를 담당한다면, 그녀는 외정―주로 외교 쪽을 담당하므로 방금 말은… 외정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일까?

렉시는 얼굴을 찌푸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입니까. 지금 시기에 황도라니…? 무슨 큰일이라도 생겼습니까?”

“큰일이라면 큰일이고, 아니라면 아니겠으나…. 아. 일단 이것부터 드려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성급함을 탓하며 품에서 어떤 목함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렉시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상하게 익숙한 상황이 그의 오래된 기억 하나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이상하다, 어디서 이 상황 본 기억이 있는데. 무엇이었더라?

잠시 잠깐 생각하던 렉시의 등줄기로 순간 땀이 솟구친 건, 바로 그다음 이어진 말 때문이었다.

“일단 이 서신부터 봐 주십시오.”

“서신…?”

서신.

렉시는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반사적으로 몇 년 전의 개판을 떠올린 그는 눈을 파르르 떨었다. 그래, 이 비슷한 상황을 내가 분명 대략 사 년 전에 겪었는데 말이지.

설마….

렉시는 덮쳐 오는 오한에 몸을 떨었다.

아버지가… 또?!

“…플로랑 후작. 혹시 아버지가 무슨 일이라도 벌인 겁니까?”

“예?”

“역시 그런가. 아버지가 또 사고를 친 것이지요? 맙소사. 어디서 또 빚을 졌나…!? 아니면 영지전이라도 선포를…!”

벌떡 일어나 당황하는 렉시를 후작이 재빨리 잡아 앉혔다.

“진정하십시오. 베르크 남작을 말하는 것이라면 아니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서신은 절대 그분과 관련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 신이여 감사합니다.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실로 깊은 안도였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더니 자기가 딱 그 짝이 아닌가.

“맙소사, 그럼 그렇지. 아무리 아버지라도 산모와 갓난아이를 건사하면서 또 다른 헛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렉시는 한결 안심한 표정으로 얼굴을 풀었다. 아버지가 아니라는 말만 들어도 이렇게 속이 편할 줄이야.

“아버지가 사고 친 게 아니라는 것만 해도 안심이 되는군요. 그렇다면 그 서신은 뭡니까?”

렉시가 손을 내밀자 후작이 공손히 서신을 건넨다. 즉시 상신한 걸 펼치려던 렉시는 서신 겉을 보고 얼굴을 조금 굳혔다. 이건…?

“…황가의 문양.”

“예, 그렇습니다.”

황가의 문장이 떡 박혀 있는 서신이라니. 거기다 받는 사람이 아버지도 아니고, 자기였다. 렉시는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후작에게 물었다.

“이걸 가지고 온 사람이… 혹시 누구였나요? 제가 아는 사람입니까?”

“아니요, 그는 르모이 자작이란 자입니다. 황도의 관리를 하고 있는 귀족으로 따로 영지가 있는 자는 아닙니다. 즉 궁중 귀족이죠.”

“궁중 귀족…! 허면 폐하의 특사가 아닙니까?”

“아니요, 폐하의 소환이라면 공한인데, 그걸 설마 제가 대리로 받을 리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공한이 아닙니다. 그저 폐하의 인가가 떨어진, 사사로운 문서이지요. 다만 무시 못 할 인물이 보낸 편지이기에 관리가 대신 온 것일 뿐이지요.”

렉시는 대번에 아리송해졌다. 폐하의 인가가 떨어진, 사사로운 서신을 관리를 통해 보낼 수 있는 인물이라니.

아직 제국엔 황태자가 없는 것으로 아는데…. 대체 누가 그런 망극한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대체 그게 누구죠?”

“…놀라지 마십시오. 바로 레아노르 황녀입니다.”

플로랑 후작은 진지한 표정으로 서신의 주인을 알렸다.

“레아노르 황녀는 황도에서 무시 못 할 세력을 가지고 있는 세력가입니다. 어지간한 황자도 그녀의 세력에는 미치지 못하지요.”

후작의 설명을 듣는 렉시의 안색은 애매했다. 사실 처음 듣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유명한 사람인가? 레아누 황녀는 알아도 레아노르 황녀는 처음 듣는데….

어쨌거나 후작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유명한 사람인 건 확실할 것이다. 황자도 아니고 황녀가 세력을 쌓고 있다니 대단한 일이기도 했다. 아, 혹시 황실에서 물려받을 작위라도 있는 것일까.

“황자도 아니고 황녀가 세력을 키우다니 신기하군요. 황녀에게 물려받을 작위라도 있는 것입니까?”

“아니요, 그녀에게 상속될 작위는 없습니다. 허나 그보다 더한 것이 있으니 문제이지요.”

“더한 것이라니요?”

“대중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게 그녀의 힘입니다.”

“…예?”

신분제 사회에서 평민들의 지지란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황도의 거주민들은 같은 평민들이라도 부유한 자들이다. 적어도 황도에선, 돈이 많은 자들은 어떻게든 귀족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세상이었다.

“황도에서 그분을 능가할 자란 폐하 정도일 겁니다. 프로하우스 공작께서도 명망이 높긴 하셨지만 그분만큼은 못했지요. 사실, 다른 공작들도 죄다 비슷합니다.”

“…그런가요.”

렉시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관절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대단한 인재인 모양이다. 공작들을 넘어서는 인지도와 힘이라니…!

“대중의 사랑으로 세력을 만든 세력가라…. 황가에 그런 사람은 레아누 황녀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놀랍군요. 그런 사람이 둘이나 되다니 황제께서도 고민이 깊으시겠군요.”

렉시의 말에 후작의 얼굴 위로 당혹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경악이란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렉시에게 되물었다.

“소공께선… 레아노르 황녀가 누구인지 모르시는 겁니까?”

“본래 황가의 분들은 구름 위의 분들이었습니다 후작. 존귀하신 분들의 함명들을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남작일 때도 제가 아는 황녀는 레아누 황녀밖에 없었는걸요. 그러니 레아노르 황녀를 알 리가 없지요.”

“…그분이 그분이십니다.”

“예?”

“레아노르 황녀가 레아누 황녀란 말입니다. 레아노르의 애칭이 레아누이지요…. 즉 이것은 레아누 황녀의 서한입니다.”

“……뭣?!”

렉시의 입이 쩍 벌어졌다.

“둘이 같다고요?”

레아누 황녀는 렉시도 잘 안다. 이 제국에서 황제를 모르면 몰랐지 제국 제일미녀인 황녀를 모르는 게 어디 말이 된단 말인가. 아니, 황제보다 유명한 여자가 내게 편지를 보냈다니…?

로메인이란 연인이 있지만 유명인의 관심은 또 다른 영역이다. 렉시는 조금 흥분했다.

“맙소사 이게 그 미녀의 편지…!”

그는 허둥지둥 서신을 펼쳤다. 대체 그 유명한 여인이 왜 내게 이런 걸 보냈지? 알지도 못하는 나에게.

그리고, 내용을 확인한 렉시는 약간 황황한 얼굴로 후작을 바라보았다.

“…초대장?”

“네, 그렇습니다.”

“그럼 황도에 가야 한다는 것이… 이 생일 파티에 가라는 것이었군요?”

렉시는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초대장을 내려다보았다. 엄청나게 별것 같긴 했는데, 과연 별것이었다.

앞으로 두 달 후에 있을 생일에 초대한다는 내용의 서신은 그 자체만으로도 고상한 예술품 같았다. 금박과 보석까지 박혀 있는 초대장이라니. 아마 이런 건 받은 것 자체가 영광일 것 같았다. 허나 그건 다 그렇다 치더라도 굉장히 뜬금이 없는 건 사실이다.

보통…초면에 이런 걸 보내나?

“제가 알기로 그녀와 프로하우스 공작 사이엔 큰 연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 또한 저도 그녀를 모르고 말이지요. 헌데 이런 것을 받아도 상관이 없습니까? 안면 없는 사람치고 굉장히 직접적인 내용인데요.”

“아시는 것이 맞습니다. 본래는 누군가를 중간 다리로 걸쳐 보내지요. 다만 황녀께선 조금 상황이 특별하시니…. 일단 소공께서도 그녀를 알고는 계시잖습니까?”

물론 알고는 있지, 그 레아누인데. 하지만 그거랑 이거랑… 같나? 유명인이니 알아서 감안하라는 뜻이라면 엄청나게 고압적인데.

물론 전 대륙적으로 유명한 명사의 초대는 받기 어려우니,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긴 하다. 허나 그와는 별개로 상황이 참 어처구니가 없긴 했다. 그녀의 이 초대는 기타 귀족들의 상식을 약간 벗어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세력가라도 연결된 사람 없이 이런 서신을 보내는 건 황제나 가능한 일.

거절에 대한 일고의 의심조차 없는 황녀의 자신만만함은 렉시를 당혹스럽게 했다.

렉시는 곧 서신의 답변을 결정했다.

“선물은 보내되, 초대는 거절하지요. 아무리 황녀의 초대라도 전 지금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요. 사정을 설명하고, 그냥 선물만 보내도록 마무리 짓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만…. 안 됩니다. 꼭 참석하셔야 합니다.”

“?”

렉시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가 이렇게 자신의 일에 반대하는 건 처음이었다.

“이상하군요 후작. 내가 거길 꼭 가야 할 이유가 있는 겁니까?”

“레아누 황녀는 상대의 사정을 고려하는 인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공께선 모르시지만, 황녀는 상당히 용서가 없는 성격이지요. 그녀의 초대에 응하지 않은 자는 향후 황도 사교계에서 적응하기 힘들어질 각오를 해야 합니다. 소공께선 제대로 된 사교계를 겪지도 않으셨으니 그런 일이 생기면 곤란하지요. 나중에 사교계 일을 생각하면 가시는 편이 낫습니다.”

“사교계?”

렉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사교계라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어차피 그는 정치를 할 뿐인데, 사교계가 그렇게 필요하단 말인가?

“어차피 난 앞으로 공작이 되어 이곳을 다스릴 예정 아닌가요. 허니 황도의 사교계는 무시해도 좋지 않습니까?”

“아니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소공께서 이곳에 계시지만, 영지의 일이 적당량 마무리되면 전하께선 황도에서 일 년에 서너 달 정도는 계셔야 합니다. 황도 정치는 사교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지요. 허니 사교계의 행차는 필수불가결한 일입니다.”

“예?!”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렉시는 깜짝 놀라 얼굴을 굳혔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아버지, 아니 전하께선 계속 영지에 계셨잖아요?”

“그땐 전하께서 와병 중이었고, 또 후계자도 없지 않았습니까. 허니 특별히 면제받은 것이죠.”

본래라면 기즈 공작 역시 삼사 개월 정도는 황도에 있어야 한다. 허나 건강이 나빴고, 또 제대로 된 후계자도 없는 터라 황제가 약식으로 면제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니 후계도 제대로 서고, 공작도 완쾌한 지금에선 황도의 소환을 거부할 명분이 없다. 아마 곧 황제에게서 제대로 된 의무를 행하란 명령이 올 것이었다. 렉시는 입을 벌렸다.

“마, 맙소사.”

“보좌할 사람들이 있으니 미리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허나 사교계는 보좌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하는 말씀입니다. 제대로 된 황도 정치를 하시려면 사교계엔 필수적으로 참석하셔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사교계라니….

렉시는 아뜩한 얼굴로 후작을 바라보았다. 작은 지역 영지의 사교계도 겪은 일이 없는데, 갑자기 황도의 사교계라니.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갑자기 걱정이 천 근 만 근이 된 렉시였지만 의외로 후작은 태평했다.

“좋게 생각하십시오. 어떻게 보면 잘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때 당장 가서 사교 행사에, 회의에 참석하시려면 몸이 두 개라도 모자라지요. 지금 미리 참석하면, 적어도 사교계에서 적응하실 시간을 줄일 수 있습니다. 그녀의 생일 파티에는 제국의 축제에 버금가는 사람들이 참석하지요. 다른 어쭙잖은 사교계 행사를 참석하는 것보다 더 나을 선택입니다.”

“후작, 나는 제대로 된 사교계를 겪어 본 적이 없어요. 솔직히 여기 와서 일만 했지, 뭐 제대로 된 사교 행사를 해 본 경험도 없고.”

“공식적인 사교 행사라면 문제가 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녀의 생일은 비공식적인 사교 행사고, 따라서 사교계식 예의들이 크게 문제될 바 없습니다. 그러니 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군요.”

렉시는 플로랑 후작의 설득에 점점 마음이 나아졌다. 그러나 저항감은 여전히 존재했다.

“하지만 후작. 저…일들은 어쩌고요?”

렉시는 흐린 눈으로 집무실 이쪽 저쪽을 살펴보았다. 반 정도는 처리했으나, 반 정도는 남아 있는 이 일거리는 하는 만큼 매일 늘어나는 화수분 같았다. 당장 하루만 없어도 난리가 날 텐데, 이건 그럼 누가 한단 말인가?

그러나 놀랍게도, 플로랑 후작은 그 일까지 해결해 둔 뒤였다.

“소공. 페르귄 영지의 전하께 제가 아까 전서를 보내 놓았습니다.”

“…아!”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렸다. 그렇지, 자신에겐 어쨌거나 아버지가 있었다. 눈앞에 안 보이니 가끔 까먹긴 했지만 어쨌거나 이 일이면 과연 올 수밖에 없을 터.

“과연, 이거라면 아버지도 오시겠지. 그럼 일 쪽이야 괜찮긴 하겠지만…!”

“소공. 참고로 하나 더 말씀드리지요. 이런 사교계 행사는… 보통 약혼자가 에스코트하는 것이 관례랍니다.”

“약…혼자요?”

그는 의미 깊은 얼굴로 웃으며 은근하게 속삭였다.

“…정식으로 제법 긴 여행을 떠나실 수 있다는 것이지요. 두 분, 요즘 함께 계시는 시간이 많이 부족했지 않습니까?”

결정적이었다. 렉시의 망설이던 표정이 단박에 혹하게 변한다. 그 모습을 보며 후작은 속으로 웃음 지었다. 연애 시간 부족한 피 끓는 청춘이 이 말을 듣고 혹하지 않을 리가.

―전하 덕분에 나도 청춘을 맛보고 있으니, 이 정도는 하는 것이 신하된 도리겠지.

집에 있는 여우같은 남편을 떠올리며 플로랑 후작은 미소했다. 그리고 뜬금없이 초대장을 보낸 황녀를 떠올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레아누 황녀의 생일이라. 초대가 급작스럽긴 하지만… 나쁘진 않은 행사지.’

주최자의 비위를 잘 맞춰 준다는 전제하에, 그녀의 생일은 나쁜 사교 행사는 아니다. 외려 자신이 말한 대로 퍽 이상적인 사교 행사에 속했다. 적당한 선물, 적당한 아부, 적당한 외모만 된다면 그녀는 퍽 자애롭게 사람들을 대해 주는 축이었다.

‘로메인 경과 한때 혼사를 맺잔 말이 나온 적 있었지만, 황녀 쪽에서 거절했으니 상관없을 것이고.’

물론 렉시는 이 사실을 모른다. 한때 말이 있긴 했지만 실질적으로 뭐 하나 이루어진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애초 황녀 쪽에서도 열의가 없어 파장 난 혼사였으니 이쪽에서 꺼리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아마 기억도 못 하실 거야. 로메인 경보다 나은 남자가 얼마나 많은가?’

로메인이 나쁜 선택은 아니라지만, 그녀는 황녀다. 수없이 쏟아지는 혼사 건에서 얼굴 한 번 제대로 못 본 남자를 기억할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갑작스럽게 소공을 초대한 게 걸리긴 하지만…. 황녀께선 원래 호기심이 많은 편이었지.’

새로운 사람, 새로운 소문, 신기한 것들을 좋아하는 황녀에게 프로하우스의 새로운 소공작은 흥미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무리한 서신을 보냈을 것이고.

‘거친 초대긴 하지만, 황가의 문장을 쓴 이상 태도는 정중할 것이다. 언젠가는 가야 할 황도라면, 지금 가는 것이 낫다.’

그녀는 끝내 의심을 거두었다. 아무리 황녀라도 황제까지 아는 상황에서 심한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제 앞에서 황홀하게 미소하는 렉시를 보고 있자니 의심이고 자시고 할 생각도 별 들지 않았고.

‘좋은 여행이 되시면 좋겠군.’

붉어진 얼굴이 가실 줄 모르는 렉시를 보며, 플로랑 후작은 입가에 흐뭇하게 풀린 미소를 머금었다.

임자가 있거나 없거나, 일단 미인의 미소란 좋은 것 아니겠는가.

*****

일단 여행이 결정되자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멀리 있던 페르귄 영지에서 공작 부부가 돌아오고, 렉시와 로메인은 여행 준비를 하며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렉시가 성을 비운다는 소리에 잠시 잠깐 성안의 사람들이 실망한 나머지 일을 못 하는 부작용이 있긴 했다. 허나 공작이 돌아오자 그 분위기는 이내 사라졌다. 부부와 함께 돌아온 어린 공녀 때문이었다.

공작을 닮은 금발에, 예쁜 벽안을 가진 어린 공녀는 무척 귀여웠다. 사람들은 공녀의 어리광을 보며 그녀의 존재에 흠뻑 빠져들었다.

“음―마! 어―마! 아부!”

공작성 안에서 마지막으로 아이가 운 건 스무 해도 더 전의 일. 잘 먹여서 포동포동한 얼굴에 새 부리 같은 입술을 가진 아기의 존재는 무적이었다. 아무 의미 없는 옹알이 한방에 주변 사람들은 가슴을 부여잡고 도미노처럼 쓰러졌다.

“크, 크윽! 귀여워…!”

“우리 공녀님. 어쩜 저렇게 귀여우실 수가…!”

“귀엽다. 천사 같아!”

아름다운 소공자가 사라지는 것은 슬프지만, 귀여운 공녀가 오셨으니 우린 괜찮아!

그저 느느니 주접이요 하느니 주책이었지만, 렉시에겐 뭐 다행인 일이었다. 아무리 공작이 돌아왔다 한들 산모 아닌가. 어쨌거나 공작성이 잘 돌아가야, 그가 맘 놓고 여행을 다녀올 것이었으므로.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드디어 출발하는 날이 되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이제 가느냐?”

“예, 전하. 이제 출발합니다.”

공작은 계단 위에 서서 떠나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예뻤지만, 최근 들어 렉시는 마치 피어나는 꽃처럼 아름다웠다. 이렇게 환한 햇볕 아래 서 있는 아들을 보고 있자면 부모인 자신도 가끔 넋을 잃는다.

‘저 애가 가면… 수도가 한바탕 뒤집어지겠군.’

공작은 속으로 만족감을 표하며 렉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몸 건강히 잘 다녀오거라.”

“그래, 그리고 최대한 빨리 오고. 고작 생일잔치 때문에 떠나는 아들 넌 물론 모르겠지만, 저기 저 페르귄 영지도 요즘 무척 바빠서 말이…크억!”

옆에서 쓸데없는 추임새를 넣던 베르크 남작이 컥 하고 옆구리를 잡았다. 옆에 서 있던 공작의 응징이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려거든 그대는 들어가게. 자식이 먼 길 떠나는데 할 말이 그따위 말밖에 없나?? 왜, 그렇게 바쁘면 혼자 영지로 가지 그러나?”

“여, 여보….”

공작은 울망대는 남작을 찬눈으로 흘긴 뒤, 렉시에게 재차 당부했다.

“헛소리는 못들은 셈 치거라. 괜히 빨리 다녀온다고 다치는 것보단 그냥 천천히 오는 것이 낫다.”

“……네.”

크흑!

렉시는 파르르 떠는 아버지 쪽을 보며 고소를 물었다. 쌤통이다! 하는 웃음이었지만 공작은 못 본 척했다. 그의 남편이 헛짓하는 것이 어디 한두 번이랴. 이 정도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 정도로 단련된 그다. 그는 아들을 가만히 바라보다 생각에 잠겼다. 어쨌거나 첫 사교계 행차이니, 뭐라도 말을 해 줘야 할까.

“넌 사교계를 경험한 적이 없지.”

“예 전하.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그래, 많이 부담되겠구나.”

어떻게 보면 처음으로 나서는 공식적인 행사다. 아닌 척해도 무척이나 긴장하고 있을 것이다.

“네 어깨에 달린 짐이 크다는 걸 안다. 허나 이것은 큰일이라고 생각하지 말려무나. 넌 모든 사람들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알겠느냐?”

“…예?”

동그랗게 눈을 뜬 렉시를 보며 공작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너는 내 아들이다. 사생아도 아니고, 곧 이 프로하우스를 이어받을 사람이지. 넌 프로하우스란 이름이 어떤 것인지 아직 몰라. 네가 고개를 숙일 대상은 오로지 이 제국의 황제뿐이다.”

광오한 말이었다. 렉시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실수를 해도 괜찮습니까?”

“무슨 상관이냐? 뭘 해도 괜찮다. 뭐든 하고 와라, 뒷감당은 내가 할 테니.”

“!!”

오만하고 단호한 태도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날 때부터 공작이었던 사람다운 배포라고 해야 할까. 내가 과연 저렇게 할 수 있을까?

렉시는 조금 의문이 들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그대로는 할 수 없을지라도, 적어도 위안은 됐기 때문이다.

“허면 황녀는 어떻게 대하면 좋겠습니까? 어쨌거나 그분은 황족이실 텐데요.”

“그 또한 마찬가지다. 아무리 황녀라도 그녀는 그저 황녀고, 너는 다음 대의 공작이야. 서로 대등한 상대로 대하고, 너 스스로를 낮추지 마라. 레아누 황녀에 대한 황제의 총애가 크다 하나, 이 프로하우스의 가치만은 아니다. 그녀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을 거야.”

“후작은 그녀의 인지도 때문에라도 적당히 장단을 맞추어 달라 하더군요. 혹시 이에 대해 고견을 여쭐 수 있겠습니까?”

렉시의 질문에, 공작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황제의 총애로 행동이 퍽 고압적이나, 어쨌거나 황녀는 황족이다. 교언은 외려 이쪽을 천히 볼 수 있으며 만일 대화를 하려거든, 입바른 말보다는 솔직한 말을 하는 편이 좋을 거다.”

“솔직히 말입니까?”

“그래. 예를 들면… 네 아버지같이 하면 되겠구나.”

잘 듣던 렉시의 눈썹이 순간 꿈틀거렸다.

“……아버지요?”

“왜. 내 말이 믿기지 않느냐?”

“그런 것은 아니오나….”

…진심인가. 아버지같이 처신하면 외려 싸움이 나지 않을까 싶은데.

렉시가 눈으로 하는 말을 알아본 공작은 더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하긴 자기가 렉시라도 믿기는 힘들 것이다. 사람이란 평소 행동으로 평가받는데, 자신의 배우자는 그 평가가 바닥을 기는 사람 아니던가.

공작은 그냥 더 말을 않기로 했다. 어떻게 말해도 자신의 말이 와닿지 않을 것이니, 이것만큼은 만나 봐야 알 것일 터.

어차피 이런 종류의 일은 겪어 봐야 아는 법이다.

“그래. 내 말이 믿기지 않겠지. 사람은 일단 겪어 봐야 아는 것이니…. 네 뜻대로 하려무나. 그래도 이것만은 꼭 기억해 두렴. 아무리 단순하다고 한들 꼬이고 꼬인 황도 사람들 틈에서 살았으니 대하기 쉽지는 않을 사람이다. 어느 때나 당당히 나서라. 알겠느냐?”

공작의 거듭된 당부에 렉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로메인.”

공작의 시선이 렉시 뒤에 있는 로메인에게 향했다. 로메인은 즉시 앞으로 나서 공작에게 예를 표했다.

“예! 전하. 하명하소서.”

“…….”

그는 렉시를 에스코트하고 있는 로메인을 보며 입술을 굳게 했다. 이번에 로메인은 렉시의 혼약자이자 통솔자로 참여했다. 렉시의 혼약자이자, 기사 마흔, 병사 백오십을 통솔하는 지휘관으로서 렉시의 옆에 서는 것이다. 물론 본인이 자청한 일이었으나, 그만한 역량이 없었다면 공작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쭙잖은 자를 소중한 아들의 보호자로 보낼 부모란 없는 법이니까.

그는 잠시 숨을 들이켜고, 후 하고 입을 열었다.

“내 이런저런 할 말은 많지만… 길어 봐야 쓸데없는 말이겠지. 자네를 믿는다.”

“걱정 마십시오, 전하. 소공은 제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공적인 자리인지라 소공이라 부르는 로메인의 태도는 여전히 바르다. 깊게 고개를 숙인 로메인의 모습에선 결기가 넘쳐흘렀다. 약혼자와의 여행이니 들뜰 법도 하건만 그는 그런 기색은 하나도 내보이지 않았다.

그래, 이 정도면 됐지.

공작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본래 후계자의 행렬엔 최소 상급 기사 셋을 붙인다. 허나 지금은 세상이 평화롭고,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법이지. 한 집단에 머리가 여럿이면 그대도 병사들을 통솔하기 힘들 거야. 대신 중하급 기사의 편제를 늘렸으니, 그대의 노고가 클 것이다.”

“마땅히 제가 할 일입니다.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것이며, 소공의 옥체의 안위 역시 온전하게 돌아오겠습니다.”

쿵 소리가 나도록 무릎을 꿇은 로메인의 모습은 무척이나 믿음직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로메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일행의 총 책임자로서도, 사교계의 선배로서도 아들을 잘 이끌어 주도록. 내 아들은 제대로 된 사교계를 겪어 보지 못했어. 하지만 자넨 다르지…. 그댄 어쨌거나 황도의 사교계도 겪어 보았지 않은가. 온갖 꼬인 자들이 내 아들에게 접근하겠지. 그들 사이에서 내 아들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게.”

“부족한 몸이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자네만 믿겠다. 어쨌거나 자네는… 내 아들의 혼약자이니.”

“!”

로메인은 놀라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의 눈엔 엷은 흥분이 자리하고 있었다. 옆에 있는 렉시 역시, 무척 놀라 공작을 바라보고 있다. 두 사람의 시선을 받은 공작이 피식 웃었다.

“왜, 설마 너희 둘을 내가 갈라놓을 것이라고 생각했느냐?”

“그, 그것은 아니오나…!”

렉시는 말을 더듬거렸다. 뭐 헤어지라고 난리를 해도 헤어지진 않을 것이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공작이 직접 말을 해 주는 것은 상황부터 다르다. 두 사람은 목하 연애 중이고, 모든 사람들이 이 사실을 다 안다. 허나 아직까지는 이 두 사람에 대한 공식적인 조치가 없던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반대하려면 이미 했을 것이고, 공작도 일종의 묵인은 했다. 그래도 말을 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은 차이가 매우 크지 않은가.

그런데 이런 자리에서 혼약자라 공언을 해 주시다니…!

이건 식이 없더라도 제대로 된 약혼자라 인정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로메인과 렉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전하. 감사합니다!”

“흠! 일어나라.”

일어나자마자 두 손을 꼭 잡는 두 연인의 모습이 아름답다. 공작은 그런 둘을 보며 잠시 헛기침을 했지만, 결국 살짝 웃고 말았다. 그는 온화해진 얼굴로, 짧은 여행을 시작할 두 사람을 향해 마지막 배웅을 마쳤다.

“그럼 내 아들을 잘 부탁한다. 로메인 경.”

*****

렉시는 어마어마한 행렬의 꼬리를 바라보았다.

기사 마흔, 병사 백오십, 기타 수행원 수십이 포함된 대규모 행렬은 성을 빠져나오기까지 퍽 오래 걸렸다. 소공으로 인정된 이후 첫 외유인 데다, 황녀의 선물까지 가져가니 이 얼마나 큰 볼거리이겠는가. 끊임없는 인파와 함성이 그들을 배웅했고, 성을 나왔음에도 아직까지도 그 함성이 환청처럼 들릴 지경이다. 렉시는 애써 환청을 떨치며 창문 밖에 보이는 행렬의 규모를 가늠했다. 작년만 해도 단둘뿐인 수행원이 동행의 다였는데, 지금은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상전벽해라더니…. 저들을 보니 자신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더욱 와닿는다.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저게 다 내 수행원이라 이거지…? 소공작이란 자리가 크긴 크구나.”

옆 지역의 백작령에도 갈 만한 상태가 아니라 빌빌대던 과거가 바로 엊그제 같건만. 지금은 무려 제국의 황도에 가고 있으니 참 어찌 된 영문일까 모르겠다.

“요수아랑 필립이 알면 좋아하려나?”

한때 자신과 함께 여행했던 두 가신은 현재 남작령에 가 있었다. 미뤄 둔 신혼을 만끽하기 위해 렉시가 직접 보냈는데, 이렇게 황도에 갈 줄 알았다면 보내지 말걸 그랬다. 같이 온 모든 사람들이 그의 사람들이고 가신이지만, 그래도 그 둘처럼 가깝고 믿음 가는 신하는 아직 없었다. 렉시는 천천히 입술을 매만졌다. 글로는 알았으나, 처음 겪는 황도는 어떤 곳일지 긴장됐다.

“황도라. …어떤 곳일까.”

들려오는 말로는 황금과 보석으로 이루어진 도시라고 들었다. 물론 도시를 보석과 황금으로 짓는 사치는 용도 못 하는 일이니, 대부분은 거짓일 터다. 허나 이 거대한 제국의 황도이니, 공작성보단 거대하고 화려할 것이 분명했다.

…얕보이면 어떻게 하지.

불현듯 그런 걱정이 들었다. 어찌저찌 프로하우스 공작가의 소공작이 된 렉시였지만, 아직 그의 정체성은 자그만 소영지의 남작과 다를 바 없었다. 공작의 업무야 뭐 열심히 했지만, 정작 그 권력을 만끽할 일이 없었으니 생긴 일이기도 했다. 그가 조금이라도 권력을 누려 보았다면 이런 생각은 들지 않았겠지만….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괜히 긴장되네….”

퉁, 머리를 창에 가져다 대자 찬 기운이 올라온다. 햇볕은 따뜻하지만, 아직은 찬기가 가시지 않은 봄날이라 그늘진 창가는 조금 찼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갑자기 툭, 툭 하고 창문이 작게 떨리며 울음을 울렸다. 그리고 동시에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전으로 스며들었다.

“…렉시?”

렉시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희미한 창 너머, 그가 사랑하는 남자가 말을 탄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혹시 주무시던 걸 제가 깨운 것입니까?”

렉시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깨어 있었어요. 그냥 잠깐 생각 좀 하느라….”

변명을 하다 말고 렉시는 순간 눈을 가늘게 접었다. 로메인의 모습 때문이었다. 아침부터 바빴기에 로메인을 제대로 볼 틈이 없었던 렉시는, 그의 오늘 모습을 자세히 보고 그만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맙소사.’

상급 기사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무슨 외모로 보여 주는 것 같다. 거대한 흑마를 타고, 은빛 갑주를 빛내며, 은발을 휘날리는 기사의 위용이란 실로 압도적이었다. 그가 있는 이 행렬엔 수백 수십의 기사가 있었지만, 렉시의 눈엔 오로지 로메인만 보였다. 그 누구도 이 사람만큼 기사다운 위풍이 넘치지는 않을 것이다.

좋은 것을 보면 웃음이 나온다. 렉시는 자신의 연인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달큰하게 웃었다.

“언제 왔어요? 일을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요.”

“방금 전체 행렬을 둘러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마차의 호위들을 점검하고, 직접 당신께 보고하기 위해 온 것이지요.”

“…세상에. 벌써요?”

떠나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놀라는 렉시를 보는 로메인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걸렸다.

“이 정도야 이골이 났으니까요. 비전투원이 많긴 하지만 다들 잘 따라 주고 있습니다. 이대로면 꽤 순조로운 여행이 될 것 같습니다.”

그는 전체를 휘휘 둘러보고, 말을 마차 가까이 몰았다. 말은 생각보다 겁이 많은 생물이다. 그런 것이 자기 몸의 몇 배나 되는 마차와 나란하게 달리게 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거의 신기에 가까운 기마술에 렉시는 무척 신기해하며 눈을 반짝였다. 그런데, 그런 그를 자세히 살펴보던 로메인이 불쑥 물었다.

“헌데… 렉시.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렉시는 눈을 깜박이며 로메인을 바라봤다. 그는 렉시를 바라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당신… 괜찮습니까?”

“예? 뭐가요?”

렉시는 뜬금없다는 듯 로메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에 눈먼 로메인이라도 눈치란 것은 존재했다. 아니, 반대로 사랑에 빠졌기에 그 눈치가 생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렉시를 잠시 바라보다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바라보는 시선 속엔 의구심이 담겨 있었다.

“…이상하군요. 당신이 제게 거짓말을 하지는 않겠지만, 제 눈엔 당신의 안색이 조금 나빠 보입니다.”

“…….”

렉시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문질렀다. 로메인의 물음에 확신을 주는 행동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짧은 사이 얼굴을 읽혔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렉시는 당황을 최대한 억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그, 별일은 없어요. 아무래도 여기가 어두워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닐까요.”

“괜찮다라….”

대답을 듣는 로메인의 시선이 조금 짙었다. 오후의 태양빛을 받은 푸른 눈동자가 마법을 부리듯 광휘를 발한다. 왠지 속이 읽힐 것 같다는 착각에 렉시는 침을 삼켰다. 시선이 한동안 렉시의 얼굴에 머물렀다. 그러다 못내 넘어간다는 듯, 남자의 고개가 살짝 숙어졌다.

“…그렇군요. 일단은… 그렇게 알고 넘어가겠습니다.”

뉘앙스를 보아하니, 지금만 넘어간다는 말 같았다. 말에서 내리면 꽤 귀찮아지겠구나…. 렉시는 어쩐지 뒷일을 알 것 같았으나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뭐 죄 지은 것도 아닌데 어떠랴. 하지만 저 사람이 귀찮게 하면 밤이 좀 힘드니까…. 렉시는 그가 이 일에 생각을 더 할애하기 전에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

“전 정말 괜찮아요. 그보다 이번 여행 이야기 좀 해 주세요 로메인. 특히 여행 일정이 궁금한데…. 당신이 보기에 이번 여행은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요?”

일부러 말 돌리는 것을 알았는가 보다. 시선이 렉시의 얼굴을 뚫을 것처럼 강해졌다. 그는 잠시 입술을 꾹 눌렀다가, 렉시의 질문에 답했다.

“…일단 가는 일정 자체는 향후 한 달을 잡고 있습니다.”

“그럼 다음 달 초잖아요?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거 같은데요.”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이곳과 황도의 거리가 제법 되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오래 걸릴 거리는 아닌데. 렉시의 의문에 로메인이 답했다.

“인원이 적은 행렬이라면 그 정도면 되겠지요. 하지만 저희는 수가 많습니다. 그들을 데리고 빠른 속도로 행군하는 것은 무리이지요.”

“아…!”

로메인의 설명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그렇구나. 일행이 많았지. 하긴, 시종들까지 합하면 거의 이백이 넘는 대규모 행렬이 빨리 움직이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제가 실수했네요. 당연한 걸 생각 못 하다니….”

소공작이 된 지도 벌써 해를 넘겼다. 헌데 나는 왜 무심코 자신이 예전 여행했던 남작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잘할 수 있을까 걱정한 것이 마치 지금 실수를 예상한 것처럼 보이지 않은가.

렉시는 살짝 눈을 돌려 밖을 바라보았다. 오로지 그의 시중과 안전을 위해 함께한 이백가량의 기사와 시종들의 행렬이 끝이 없다. 자신을 위해 온 가신들이니, 만일 위험한 일이 생긴다면 저들은 몸을 던져 자신을 지킬 것이다.

불현듯 마음이 무거워졌다. 저들의 목숨이 자신에게 달려 있다 생각하니, 갑자기 속이 턱 막혀 왔다.

‘황도에 들어가면 나는 소공작이야. 그리고 내가 하는 바에 따라 저들의 처우가 결정될 텐데…. 정말 이대로도 괜찮은 걸까?’

그가 처음 남작이 되었을 땐 이렇게 깊이 생각하지 않고 일했다. 그리고 별로 무섭지도 않았다. 늘 살아왔던 영지의 영주가 되는 일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봐야 늘 자신이 아는 범위 내의 일이었으니까.

소공작이 되어서는 물론 조금 힘들었다. 일단 업무는 익숙해졌고, 영지에도 익숙해지려고 노력하는 중이긴 하지만. 영지의 사람들은 그에게 호의적이고, 가신들 역시 자신에게 호의적이라 그래도 그럭저럭 일을 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허나 황도는 아예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새로 서는 일이다. 부담이 되지 않을 리 없었다.

‘이런 사소한 것부터 실수하는데. 내가 과연 황도에서 소공작다운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사소한 것도 꼬투리 잡히는 게 황도의 생활이라는데….’

시시각각 렉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런 렉시를 바라보던 로메인이 창을 다시 톡톡 두드렸다.

“…렉시.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은 안 되겠습니다. 부디 제게는 정직하게 말해 주십시오. 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로메인.”

“렉시. 저는 이 일행의 통솔자이지만, 그 이전에 당신의 약혼자이기도 합니다. 통솔자인 제게 하지 못할 말이라면, 약혼자인 저에게 말해 주십시오. 안 되겠습니까?”

엄격했지만, 사실은 다정한 내용이 숨겨져 있는 말에 렉시의 눈썹이 나비처럼 팔랑댔다. 공적인 것이 싫다면, 사적인 관계로서라도 자신을 감싸 안아 주겠다는 이야기 아닌가.

참 저 사람도 저 사람이다.

그렇게 말한대서야… 어떻게 숨길 수 있겠느냔 말이다.

렉시는 결국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자신을 복잡하게 만든, 아니 여행 처음부터 복잡했던 자신의 걱정이 렉시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사실, 여행을 시작하기 전부터 조금 그랬어요. 긴장과 걱정 때문에 즐거워야 할 여행이 영 즐겁질 않네요.”

“제가 모르는 일이 있었군요. 말해 주십시오 렉시. 무엇 때문에 그렇게 걱정을 하는 겁니까.”

렉시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보기 좋은 색의 입술이 하얀 치아에 살짝 씹혔다가, 붉게 달아오른다. 렉시는 조금 붉어진 입술로 작게 속삭였다.

“…저요. 제가, 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어요.”

로메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예? 무슨 말씀입니까.”

“그 말 그대로예요. 제가 소공작으로서 아직 준비가 덜 된 것 같아요. 다들 괜찮다고 하니 떠나오긴 한 건데…. 걱정을 멈출 수가 없네요. 황도에서 실수하면 어떻게 될까. 공작령에서야 상관없었겠지만, 황도에선 비웃음거리가 될 거 아니겠어요. 거기다 전 사교계 출입도 한 적이 없어요. 무도회도 당신하고나 겨우 가 본 거고―.”

“잠깐, 렉시. 잠깐만.”

로메인의 눈가가 살짝 찌푸려졌다.

“―혹시 해서 말합니다만…. 혹 공작성의 누군가 당신께 그런 식으로 말을 했습니까?”

“아니요. 감히 누가 그러겠어요. 그냥 제가 그렇게 생각했어요. 실제로 그게 맞다고 생각되기도 하고….”

시무룩해진 렉시를 보고 있자니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로메인은 속으로 탄식했다. 맙소사, 어쩐지 기운이 없어 보인다 했더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외모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완벽한 사람이 왜 이런 걱정을 사서 하는 것인지.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지만, 렉시가 그렇다 하면 그런 것이다. 그는 깊이 고심하며 입술을 굳혔다. 어떻게 하면 그의 생각을 달리 인도할 수 있을까. 그는 잠시 렉시를 바라보다 입을 뗐다.

“렉시.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은 정말 잘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괜히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좋은 말이지만 객관적이지는 못해 보이네요. 괜히 주관적인 기준으로 말해 주는 거죠?”

“이런, 제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이래 보여도 공과 사는 늘 구분해 왔다고 자부합니다만…. 아무래도 제가 렉시 당신께 못한 모습을 보였나 보군요.”

“…그,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런 적 없어요. 그냥 당신은…! 제게 늘 잘한다고만 해 주잖아요. 그래서 한 말이지 그런 의미는 없었어요.”

렉시는 눈가를 살짝 붉히며 로메인을 흘겨보았다.

“생각해 봐요 로메인. 정말 준비된 사람은 저 같지 않아요. 고작 여행 일정을 착각하는 사람이 뭐가 준비된 사람이겠어요?”

“그런 건 별일이 아닙니다. 사소한 착각은 누구나 하는 것이고, 저도 가끔은 그런 실수를 하지요. 렉시, 당신께선 전하의 말씀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떠났을 때 들었던 말을 하는 것인가? 렉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네, 기억하고 있어요.”

“당신께선 그저 그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그 어떤 걱정도 하지 마시고, 그저 전하의 말씀대로만 하십시오. 그대로면 걱정하실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결과적으로 멋대로 하라는 그 말이요? 진심이에요?”

그게 그렇게 들렸나? 로메인은 살짝 웃었지만 렉시는 퍽 진지했다.

“농담이 아니에요. 어머니는 제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분은 날 때부터 공작이었고, 저는 그분과 다르죠. 허니 똑같이 행동할 수 있을 리가요.”

“렉시. 전하의 말은 진실입니다. 설령 당신이 실수를 하더라도, 그것을 비난할 자는 정말로 아무도 없을 겁니다.”

불신의 눈을 한 렉시를 본 로메인은 좋은 일화를 하나 떠올렸다. 예전에 실제로 있었던, 아주 사소한 사건이었다.

“아주 예전에, 황도에서 이런 일이 있었지요. 드레스 코드가 정해진 파티에 어떤 고위 귀족이 모르고 다른 옷을 입고 왔던 적이 있습니다. 아마, 제대로 연락이 가지 않은 것이겠지요. 사실 그런 행사에선 그런 행동을 한 자는 누구든 배척을 받게 마련입니다. 허나 그땐 누구도 그 사람의 행동을 가지고 손가락질하지 않았습니다…. 외려 극진히 대하고 끝이 났지요. 왜였을 것 같습니까?”

“…모르겠어요. 어째서였나요?”

“그때, 그 실수를 했던 자의 신분 때문이었습니다. 아슬론 공작가의 대공자가 실수한 당사자였지요.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 리 없었습니다.”

황도도 사람이 사는 곳이다. 아무리 사람들의 입이 무섭다 한들, 실제적인 권력보다는 강하지 않다. 아슬론 공작가는 장자 상속제로, 대공자인 그는 차후 공작이 될 자였다. 미치지 않고서야 대공자에게 손가락질을 할 인사란 없다는 것이다.

“…거기도 그런 일이 있다고요?”

“말씀드렸지요?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이라고요. 전하의 말은 정말로, 해도 되는 일이기에 하신 겁니다.”

과거가 어찌 되었건 그는 현재 제국의 단 넷뿐인 공작의 후계자다. 그가 콩을 팥이라고 해도 팥이란 이름의 콩이 등장했다고 말해 줄 사람들은 숱하게 널려 있었다.

“무엇이건 하셔도 됩니다. 전하의 말씀은 진짜니까요.”

“…….”

“그리고, 확실히 말씀드리건대 저는 당신이 그 누구보다도 그 자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공작가를 등지고, 남작가에 맹세를 올렸던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물론 일이 이렇게 되어, 결과적으로 그는 공작가에 남아 있다. 허나 가지 않았다고 한들 맹세는 여전히 그 둘 사이에 반석처럼 새겨져 있었다. 단지 사랑 때문에 그가 그런 맹세를 했을까? 아니, 그가 남작가에 가기로 마음먹은 것은 사랑을 맹세하기 이전이었다.

만일 그가 주군이 될 만한 자질이 없었다면, 그 외모가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따라간다 말하지 않았으리라.

“당신은 그 누구보다 군주의 자리가 어울리는 분입니다.”

“…로메인.”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지요. 자신에 대한 믿음이 흐려지십니까? 그렇다면 공작가의 가신들의 눈을 믿으십시오. 당신이 훌륭한 소공이 아니었다면, 그들이 그렇게 당신의 말을 잘 따르겠습니까?”

연인이라 하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그가 보는 렉시에 대한 진실된 평가였다. 또한 공작가의 봉신들이 보내는 평가기도 했다.

미모는 미모고, 능력은 능력이다. 만일 렉시에게 자질이 없었다면 그들은 공작이 아무리 강권해도 그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으리라. 공작가의 시종들도 마찬가지다. 그만한 자질과 능력이 없었다면, 그들은 렉시에게 쉬이 고개를 숙였을 리 없다.

고작 남작이라 말하며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건 본인뿐인 것을….

사실 갑자기 떨어진 이 거대한 가문을 잘 끌어 가는 것부터가 범상치 않은 자질을 말하는 것이다. 어지간한 자는 어깨에 지게 된 이 가문의 무게에 휘청거려 제대로 된 걸음을 걷지 못한다.

“영지의 크기가 크건 작건 달라질 건 없습니다. 당신은 그저 당신 그 자체로도 완벽한 영주이고, 공작이 될 것입니다.”

렉시의 얼굴에 살짝 화색이 돌았다.

“저를… 제가 정말 그렇게 될 거라 믿으세요?”

“믿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러하기에 하는 말이지요.”

“…!”

사랑이 아닌 주군의 자질을 말하는 남자의 얼굴에선 진지함이 흘러넘쳤다. 얼굴 위로 붉은 기가 스며들었고, 동시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부끄럽고, 동시에 뿌듯함 때문에 당혹스러웠기 때문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이런 것으로 거짓을 말할 남자는 아니다. 다른 누구보다, 이 남자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 기뻤다.

기쁨은 불시에 찾아와 충동을 재촉했다. 렉시는 그 충동에 몸을 맡겨 조용히 창을 밀었다. 드륵, 차가운 소리와 함께 제법 센 바람이 마차 안쪽으로 들어왔다. 옆에 서 달리고 있던 로메인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날이 아직 춥습니다. 바람이 차가우니 창을 닫으십시오.”

“―이 정도는 괜찮아요. 그보다 로메인. 잠시 제게 손을 주시겠어요?”

“…손?”

로메인은 잠시 눈썹을 위로 올렸다. 어떤 연유로 손을 찾는 것일까. 그러나 그는 곧 순순히 손을 렉시에게 넘겼다. 로메인의 손을 잡은 렉시는 잠시 손을 살피다 건틀릿을 벗겨 냈다. 로메인의 얼굴이 일순 곤혹스러워졌다.

“렉시. 건틀릿은 왜….”

“잠시요 로메인. 잠시만….”

렉시는 잠시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크고, 못이 박인 남자의 손가락. 처음 이 남자를 보았을 때가 떠올랐다. 정확히는, 이 남자를 처음 보며 떠올렸던 갖가지 감정들이 떠올랐다.

동경했고, 부러웠으며,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눈을 떼기 힘들었던 그때.

가끔 렉시는 가정법을 곁들여 과거를 상상해 보곤 했다.

만일 그때, 자신이 이 남자의 집으로 가지 않았더라면… 미래는 어떻게 변했을까?

생각해 보면 그때 자신은 뭔가 조금 이상했다. 평소의 자신이었다면 남자가 아무리 믿음이 가더라도 따라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로망스에 나오는 기사 같은 반듯함에 마음을 빼앗겼다고 따라간 자신이 어처구니없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자신은 그때 조금 지쳐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정정한다. 지쳐 있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세상은 그에게 친절하지 않았고, 모든 악덕들을 담은 것들은 다가와 그를 강탈하려 했다. 그런 와중에 거짓말처럼 나타난 이 단단한 남자는 어떤 모진 풍파도 막아 내 줄 수 있는 거대한 성벽처럼 보였다. 그 진실함을 마주했을 때, 자기도 모르게 마음을 빼앗겼던 것 같다. 거센 폭풍이 몰아치더라도, 그 자리에서 우뚝 서 상대를 지켜 줄 거대한 버팀목 같던 남자에게.

그땐 자신 외엔 그 어떤 의지처도 없었다. 그랬던 자신에게 이 남자가 얼마나 이상적으로 보였던가?

헌데 그런 이상적인 사람이, 이젠 자신의 옆에 머물러 그만의 기사가 되었으니….

…나의 기사.

나만의 기사.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속삭였다.

“당신이 …저의 기사라서 다행이에요.”

“…예?”

당황하는 로메인에게 렉시가 재차 속삭였다.

“프로하우스 공작가의 후계자가 된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제 가장 큰 행운은 따로 있어요.”

“그게, 무엇입니까?”

“당신이요.”

렉시는 그의 손을 들어 입가에 가져다 댔다. 새빨간 입술이 단련된 손가락 위에 뜨거운 화인을 남긴다. 수백 수천의 적을 무찔렀던 남자의 손이 그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움찔 떨었다.

“당신이 제 연인이 된 게 제 제일 큰 행운이에요.”

“…렉시.”

“사랑해요.”

그 말을 끝낸 후, 내렸던 시선을 올린다.

밝은 빛 아래 달리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곤혹스럽게 변해 있었다. 아니,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다. 저것은 당황하지만, 동시에 행복해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약간 굳은 입매는 웃음을 참는 것, 달아오른 귀는 부끄러워 그런 것.

렉시는 눈을 살짝 접었다. 볼에 닿는 시선이 탈 듯이 뜨겁고, 동시에 가슴이 간지러워 파닥거린다. 보이지 않지만, 자신을 보고 있는 눈은 필시 타오르고 있으리라.

자신처럼.

렉시는 입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와요.”

“…예?”

“이 일행의 소공은 지금 지휘관이자 통솔자인 기사 로메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거든요. 이건 아마… 조금 긴 이야기가 될 것 같네요.”

“……이야기.”

“예. 그리고 어쩌면 기사 로메인은, 안에서 약혼자로서의 의무를 행할 수도 있겠네요.”

약혼자의 의무. 실로 노골적인 유혹이었다. 그리고 이 소리를 들은 로메인의 표정 역시 확 변했다. 연인으로서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으나, 이렇게 렉시가 유혹하는 것은 생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로메인은 한참 그런 렉시를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깊고 강렬한 고뇌가 그의 얼굴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젠장.”

그는 렉시가 듣지 못하게 작게 중얼거렸다. 고뇌의 끝에 모든 걸 내던진 남자의 몸이 불쑥 움직였다.

“잠시 뒤로 물러서십시오.”

쿵!

거침없는 몸짓으로 남자가 마차에 올랐다. 오르자마자 남자는 즉시 문을 닫고 창에 있는 덧창을 내렸다. 갑자기 마차 안이 더워진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바라보는 시선마다 온몸의 피부가 얕게 솟았다. 렉시는 어쩐지 부끄러워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불쑥 솟아 그의 뒷목을 잡아끌었다. 남자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숨이 섞였다.

“…흡!”

수없이 많은 입맞춤을 나누었으나 처음은 늘 뜨거웠다. 입안을 가르고 들어오는 혀가 뜨겁고, 동시에 사탕처럼 달콤했다. 바깥바람에 차게 식었던 입술이, 거칠게 비벼지며 용암처럼 뜨거워졌다. 혀뿌리가 뽑힐 것 같은 강한 압력에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헐떡였다. 젖은 소리가 귓전을 적시며 몸이 점점 달떴다. 귓전으로 느껴지는 소리가 음란했다. 렉시는 감았던 두 눈을 살짝 떠 남자를 바라보았다. 새파란 눈동자가 욕망과 흥분으로 달아오른 것이 똑똑히 보였다. 시선을 눈치챈 로메인이 입술을 떼며 급히 속삭였다. 마치 짐승이 그르렁대는 것 같은 목소리.

“맙소사… 언제 이런 걸 배웠습니까.”

“으응,… 전 그냥. 아, 로메인!”

성급히 각도를 맞춘 입술 사이로 뜨거운 혀가 가르고 들어왔다. 내부가 샅샅이 훑어진다. 혀가 서로 감기며 느른하게 매만져졌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모를 열기가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눈앞이 아뜩해졌다.

“아…응!”

질척거리는 소리가 마차 안을 메웠다. 음란한 소리에 저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뒤를 조였다. 저절로 뒤가 젖었다.

로메인의 것은 이미 발기해 있었다.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뜨거운 것이 배 속을 헤집을 때마다, 온몸을 강타하는 강한 쾌락이 그리웠다. 렉시는 스스로 옷을 풀어헤쳤다. 반쯤 벗기 시작한 흰 몸을 보는 로메인의 시선이 강렬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렉시가 로메인의 것에 손을 댄 순간, 로메인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끝까지는 하지 않을 겁니다.”

“왜…? 어째서요?”

“…이런 곳에서 당신을 안을 순 없으니까요.”

“으, 응, 하지만…!”

“안…됩니다.”

“너, 너무해…!”

렉시는 원망 어린 눈으로 로메인을 바라봤다. 잔뜩 달아오른 몸은 어쩌라고 이러는 건가. 그러나 로메인은 끝끝내 넘어가지 않았다.

“여긴… 여긴 안 됩니다. 소리가 들릴 테니까요.”

“그게 왜… 난 괜찮은데…!”

“…제가 괜찮지 않습니다.”

로메인의 동공이 날카롭게 좁혀졌다. 아무리 그가 욕정에 미쳤어도, 자신의 약혼자를 늑대 사이에서 헐떡이게 할 수는 없다. 이 행렬의 반수 이상은 그를 몰래 사모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에게 렉시의 야한 목소리를 들려줄 수는 없었다.

렉시는 모를 것이다. 그가 마차 밖으로 나올 때마다 튀어나오는 열망의 시선들이 얼마나 강렬한지를.

그가 상급 기사이고, 공작이 그나마 혼약자라 말이라도 해 줘서 저들이 이성을 챙기는 것이다. 허나 가끔은 본능이 이성을 이기기도 하는 법. 혈기 넘치는 기사들에게 렉시의 생생한 신음이 어떻게 다가올지는 같은 기사인 그가 더 잘 안다. 거기다 어쩌면, 두 눈이 벌건 누군가가 두 사람이 아직 약혼식을 하지 않았다는 걸 떠올릴지도 모르고.

‘그렇게는 안 되지.’

안 그래도 예쁜 연인 때문에 신경이 곤두선 나날이다. 그는 이 이상 경계할 거리를 늘리고 싶진 않았다.

렉시가 울먹였다.

“너무해….”

“지금은… 이것으로 참으십시오.”

그르렁거리는 신음이 관능적이다. 반쯤 벗겨진 바지 위로 튀어 오른 성기는 이미 흉흉하게 발기해 있었다. 그는 렉시의 다리를 벌려 자신과 마주 보고 앉혔다. 새하얀 다리 위, 반쯤 솟아오른 성기는 그 얼굴만큼이나 예쁜 핑크빛이었다. 이내 커다란 손이 두 성기를 겹쳐 쥐었다. 렉시는 몸을 굳혔다.

“아…!”

단지 잡힌 것만으로도 허리가 떨린다. 메마른 손아귀에 잡힌 중심이, 미치도록 생생했다. 아랫배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쳐 절로 헐떡였다. 기둥을 타고 무언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빠르군요. 애가 탔습니까?”

“아, 응!”

성기가 거칠게 애무당했다. 이미 한번 가볍게 간 뒤라 더욱 예민해진 성기로 폭력적인 쾌락이 쏟아졌다. 흥분이 등줄기를 달린다. 머리끝까지 오싹해졌다.

“으흐…읍!”쾌락으로 흐느끼는 입술이 재차 삼켜졌다. 목 밖으로 튀어나오려던 신음이 다시 입안에서 뭉그러졌다.

“조용히…”

“으, 흣…!”

로메인은 흐린 절정으로 떠는 렉시의 입술을 자신의 것으로 꾹 눌렀다. 헐떡거리는 신음까지 모조리 삼켜 자신의 안으로 수렴한다. 흐느끼는 몸이 자신에게 안기듯이 쓰러진다. 순간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머리를 강타했다. 당장이라도 소리를 질러 이 사람이 내 것이라 알리고 싶기도 했고, 그 반대로 꼭꼭 숨겨 자신만 보게 하고 싶기도 했다. 서서히 쾌락이 뇌리를 잠식했다.

“우웃!”

뜨거운 손이 성기를 강하게 마찰한다. 온몸의 열기가 그쪽으로 향하는 것 같다. 렉시는 애타는 몸짓으로 남자의 목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흔드는 손이 빨라질수록 렉시의 헐떡거림이 거세졌다. 질척하게 흘러나온 선액이 미끄덩거리며 마찰을 돕고 욕망이 똬리를 틀었다. 점점 부푸는 쾌감에 머리가 울렸다. 손이 빨라질수록 키스가 격해졌다. 영혼까지 상대에게 삼켜지는 것 같은 강한 압박.

눈앞이 아찔했다. 아래로 느껴지는 강렬한 자극, 상대의 입안으로 삼켜지는 강렬한 키스.

그리고.

“――흡!”

날씬한 허리가 활처럼 휘며 파들파들 떨린다. 허리와 허벅지가 강하게 굳으며 렉시는 비말을 쏟아 냈다. 동시에 다른 쪽 성기에서도 뜨거운 것이 핏핏 솟았다.

“아…흡!”

아찔한 것이 머리끝을 내달린다. 앞이 하얗게 명멸했다. 헐떡이는 숨을 참지 못하고 입술을 뗐다, 다시 뜨겁게 강탈했다. 다정하지만 거친 입맞춤이 몇 번이고 이어졌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러움이 넘쳐흐른다. 그 애정을 견디지 못하고 로메인은 렉시를 꽉 끌어안았다. 쾌락을 억누른 채 제 안으로 삼키는 목소리가, 무척이나 예뻤다.

*****

마차에서의 그날 이후, 렉시는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몸과 몸의 대화 때문일까? 아니면 로메인이 믿는다 말해 준 덕분일까. 굳이 따지자면 렉시는 후자가 상당히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하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믿어 준다는 건, 생각보다 당사자에게 큰 힘이 된다. 아마 겪어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사랑은, 생각보다 상당히 만능이다.

그러나 오로지 사랑으로 그의 기분이 나아졌다면 그건 또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사실 렉시가 기운을 완전히 차린 것엔 누군가 은근히 꾀한 상황이 상당수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그 은근한 상황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로메인. 로메인 경.”

“예. 말씀하십시오.”

“우리, 다음 머물 영지는 어디인가요?”

“다음 영지는 웰링턴 영지입니다. 머물 곳은 그곳의 영주저이지요. 대략 세 시간 후면 도착합니다.”

“웰링턴?”

“네, 황도 근방에 있는 영지이지요. 이 영지를 지나고 나면, 사흘 안에 황도에 도착합니다. 웰링턴의 영주는 자작위를 가지고 있지만 상당히 부유한 편입니다.”

황도 근방의 자작에, 부유한 편이라. 하긴 황도에 가까울수록 물자가 많이 오가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허면 그 자작은 어떤 사람인가요?”

“그는….”

로메인은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

“황도에서 작은 직책을 맡고 있고… 정보가 빠른 자입니다.”

“정보?”

“예. 관련 행정직을 맡고 있지요.”

황도의 정보를 맡은 행정직이라. 말은 작은 직책이니 어쩌니 해도, 실상은 반대일 거다. 직위는 밑이라도, 뭔가 알짜를 담당하거나 발이 넓겠지.

“자작에 대한 다른 정보가 필요하십니까?”

“…뭐, 그 정도면 됐어요. 충분하네요.”

렉시는 씩 웃으며 몸을 뒤로 눕혔다. 어떤 사람일지는 뭐, 만나면 각이 잡힐 테니까.

보통 이렇게 큰 인원이 옮겨 다닐 땐 적당한 마을을 찾아 여관이나 적당한 집에서 유숙한다. 허나 렉시는 이 여행 내내 그 지역의 영주관에서 숙박했다. 그들은 그냥 영주가 아니었다. 그들은 때때로 공작가의 봉신이었고, 명망 높은 가문의 수장들이었다. 혹은 황도에서 어떻게든 이름을 날리는 영주들이기도 했다.

여행 내내 이런 자들을 만나니, 렉시는 자연스레 자신의 태도를 조금씩 교정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 변모를 여행의 중반 지점쯤에 뒤늦게 깨달았다. 깨닫고 나서 그가 얼마나 놀랐는지 그 감정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맙소사.

이 여행은, 일종의 수업이었다.

뜻대로, 멋대로 하라고 보낸 공작의 말은 그저 말뿐이었던 거다.

그는 아무런 준비 없이 렉시를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이거였구나.’

렉시는 헛웃음을 켰다.

그들과 만나며, 렉시의 내면은 서서히 변했다. 한때 변방의 소영주였던 그는 이제 거대한 영지를 다스리는 후계자로서의 면모가 개화하고 있었다. 이젠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그는 당당한 대영주의 후계자처럼 보였다. 당당하고, 비루해 보이지 않았으며, 어느 때나 대영주의 후계자로서 자신을 정의했다.

이 모든 것이 단 몇 주 동안 벌어진 일이다.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로메인. 혹시 이 여행의 여로는 당신이 정했나요?”

“글쎄요. 저는 그저 명받은 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그 명을 내린 건 아버지…아니, 어머니였죠?”

다시 물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그 자체가 긍정이라는 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렉시는 속으로 그만 웃고 말았다. 솔직히 감탄이 나왔다.

과연 공작은 공작이다. 육아 때문에 쉬고 있다고 해도 유능함은 여전히 빛을 발한다. 그는 자신의 아들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알고 유효적절하게 처방했다.

‘대단하신 분이네,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가 자신을 키웠다면 어땠을까 싶을 정도다. 속았다는 생각보단, 등 뒤가 든든하다는 안정감이 대단했다. 렉시는 피식 웃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번 영주는 어떤 사람일까. 이젠 부담보단 은근히 기대가 됐다.

“어서 오십시오, 프로하우스 소공.”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웰링턴 자작.”

로메인의 에스코트하에 마차에서 내리자, 웰링턴 자작저의 전경이 한눈에 보였다. 렉시는 우아한 몸짓으로 그 모든 것을 훑어보았다. 규모는 작았지만 장식성이 화려했다. 남쪽에서 위로 올라올수록 이런 형식의 저택이 늘어났다. 황도에 가장 가까운 저택이 여기이니, 아마 이것이 수도의 유행인 모양이었다. 렉시는 자작저를 훑어보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눈치채고 고개를 틀었다.

“어… 그러니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미 넋이 한 반쯤 나간 것이 눈에 보인다. 그런 자작을 보며 렉시는 부러 방긋 웃었다.

“예, 자작.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가 누군지는 아실 거라고 생각하고…. 아, 이쪽은 제 약혼자인 로메인 드 데퓨탄 경입니다.”

“그, 알고 있습니다! 그는 예전에 보았지요.”

자작의 노골적인 시선이 로메인에게 막혔다. 로메인이 무섭게 노려보자, 그는 그제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듯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로메인 경.”

“예, 웰링턴 자작님. 안녕하십니까.”

절도 있는 인사였지만 눈빛만은 형형하다. 그 은은한 기합에 자작은 깨갱 하고 뒤로 물러섰다. 둘의 기 싸움을 보며 렉시는 은은한 미소만을 지어 보였다.

“제 약혼자인 로메인 경은 상급 기사로서 이 일행을 책임지고 있답니다.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택이 무척 아름답군요. 고용인들의 절도 역시 굉장히…좋고 말이지요.”

“…험! 험험! 감, 감사합니다.”

자신을 보느라 턱이 빠진 고용인을 칭찬하는 건, 일종의 비꼼이다. 허나 겉으로는 칭찬이었으니, 자작 역시 어설프게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반쯤 허둥대며 렉시를 안으로 안내했다. 더 있어 봐야 좋은 소리는 없을 터였다. 그러나 자작저 안의 고용인들이라고 밖과 별반 다르지는 않아서, 자작은 결국 얼굴을 붉혔다.

“이, 이것들이!”

“아하하, 괜찮습니다.”

구슬이 굴러가는 것 같은 고운 목소리에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어차피 거쳐 온 거의 모든 저택들이 다 이 모양이었으니, 딱히 새삼스럽지는 않은 일이었다.

“제 시중은 함께 온 시종들이 들 것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하, 하오나…!”

“괜찮습니다. 그럼 만찬 때 뵙지요.”

생각보다 이번 영주도 대하기는 쉬울 것 같다. 렉시는 속으로 상대의 견적을 재 보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런 그의 등 뒤를 자작가의 고용인과 자작이 멍청하니 보고 있었다.

*****

“맙소사.”

웰링턴 자작은 손을 떨었다. 방금 자신이 본 광경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아직도 손이 떨리고 다리가 후들댄다. 상대를 본 순간 느낀 충격에 황녀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세상에. 어떻게 그렇게 생긴 사람이 존재할 수가 있지?

“거짓이 아니었어. 진짜였잖아!”

그는 절규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황도에 공작의 새 후계자가 온다는 소식은 이미 황도 귀족 대부분이 알고 있었다. 실로 아름답기 그지없다는 소공작에 대한 소문은 이미 그 이전에 다 났다. 미인에 대한 소문은 본래 바람처럼 빠른 법. 허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말을 믿고 있지 않았다.

왜냐.

그 소문의 출처가 대부분 공작의 사람들에게서 나온 소문이었기 때문이다.

“화, 황녀께는 뭐라 말해야 한단 말인가.”

공작이 이 영지를 여정의 마지막 경유지로 선정한 이유는 간단하다. 영지의 주인인 자작이, 황도의 소문에 재빠른 귀족이라서였다.

물론 그의 정치성이 중도를 걷고 있다는 것 또한 선정의 주요한 이유 중 하나였으나…. 당파와, 사적인 친분은 무척이나 다른 법. 황도에 가까운 대부분의 귀족들처럼 그 또한 황녀에게 큰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자세한 건 말하지 못할지라도, 어떤 이인지는 미리 보고 소식을 전해야겠다 생각했는데….”

자작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매일 접하는 것이 바로 정보다. 그는 황녀가 어째서 렉시를 초대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토록 아름답다 하니, 내 직접 그를 초대하여 비교하는 자리를 만들어 주겠노라.

소공작의 미모가 세간의 뜬소문이라 생각한 황녀는, 그를 직접 자신의 생일에 초대했다. 그 자리에 그녀는 여신처럼 분장하여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직접, 소공작과 마주하여 세간의 소문이란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알려 줄 계획이었다.

황도엔 공작의 우방이 많지만, 요 몇 년간 그는 황도를 멀리했다. 소문을 믿지 않는 자들은 소공작이 이 초대에 큰 망신을 당할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심지어 이 일엔 황제까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마저 돈다. 자작은 그게 소문이 아니라, 반 정도는 진실이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어쩌면 황녀의 생일에 황제가 직접 행차할지도 모른다. 그 위명 쟁쟁한 소공작의 미모를 보기 위해서.

소공작으로서는 불행한 일이나, 주제에 넘치는 명성을 얻은 이는 다 이렇게 되는 법.

공작을 싫어하진 않는다. 허나 소나기는 일단 피하고 봐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자작은 이번 일에 있어선 공작가를 멀리서 그저 관망할 계획이었다. 공작의 요청으로 성은 빌려주지만, 그냥 그뿐. 자고로 자신 같은 궁중 귀족들에게는 그게 제대로 된 보신이니 공작도 뭐라고는 하지 못하리라.

분명, 그럴 계획이었는데….

“이…일을 어쩌지?”

자작은 속이 답답해졌다.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황녀가 꾀한 일이 성공하면 좋을 것이다. 허나 아무리 보아도, 이번 일에 있어 수치를 당할 건 공작가가 아니라 황녀다. 세간에 무성한 소문의 소공작은 모두의 상상을 초월하는 미인이었다.

아무리 팔은 안으로 굽는다지만, 때론 주관성을 까부수는 객관적인 미모란 게 있는 법.

황녀는 분명 미인이다. 허나 이 소공작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보는 순간 황홀감을 선사하는 렉시의 외모는 인간으로서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미의 총체였다.

눈이 달린 자라면 그 누구라도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텐데….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럴 게 아냐. 일단 황도의 집에 편지부터 보내야겠어.”

자작의 가족은 현재 딸의 첫 사교계 데뷔를 위해 황도의 저택에 가 있다. 딸 둘, 아들 하나. 셋 다 황녀의 생일에 초대되진 않았으나, 그가 아는 부인이라면 어떻게든 초대장을 구했을 터.

허나 이번은 절대 가지 말라고 해야 한다.

황녀의 성격상, 자기의 수치를 본 자들에게는 어떻게든 앙갚음을 하려 할 테니.

자고로 소나기와 재해는 피하는 것이 상책인 법. 언제 소나기가 올 줄 안다면, 우산이라도 준비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

그는 그래서 가족에게 편지를 썼다.

부디, 렉시가 도착하기 전 가족에게 편지가 가길 기도하면서.

*****

“웰링턴 영지의 자작은 굉장히 예의가 바른 사람이네요.”

렉시는 중얼거렸다. 두어 시간가량 이어진 만찬은 굉장히 유용했다. 첫 만남의 멍청함을 어떻게든 만회하겠다는 듯 그는 열정적으로 렉시와 대화했다. 그리고, 그 대화에서 얻은 정보는 렉시에게 퍽 기꺼운 것이었다.

“그가 아버지와 가까운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물론 얼굴은 알고 지내시지만요.”

“그런가요? 의외네요.”

하도 자세히 알려 주기에, 렉시는 그가 아버지와 친한 것으로 알았다. 허니 아니라니…. 렉시는 아리송해졌다.

친하지도 않고, 그저 얼굴만 알고 지내는 사이인데 이런 걸 알려 주지? 그가 알려 준 황도의 정보들은 상당히 중요한 것들이다. 현 황실의 세력도부터, 고위 귀족간의 아귀다툼까지 아주 상세하다. 심지어 그 중엔 로메인도 모르는 세력 다툼들도 있었다. 알고 있으면 필시 유용하게 쓰일 만한 것들이다. 그런 걸 왜 남이나 다름없는 자신에게 알려 준 걸까.

“나에게 반한 건 아니었어요. 눈이 달랐으니까요.”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허나 수이 봐선 안 되는 일이지요. 황도에 가까운 영지를 가진 자이니 뭔가 꿍꿍이가 있을 겁니다. 어쩌면 뭔가 꾀하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 어느 파벌에 속하지도 않았으면서, 오랫동안 가문의 성세를 유지해 온 건 운 때문만은 아니니까요.”

꿍꿍이?

“혹시 우리에게 거짓 정보를 흘린 걸까요? 그래서 그렇게 다 알려 줬나?”

“그런 눈에 빤한 짓을 할 인물이었다면 여태 황도에서 버티지 못했을 겁니다. 굳이 생각하자면, 이것으로 저희에게 빚을 지우겠다는 심산일 수도 있습니다만…. 어쨌거나 우리에게 나쁜 일은 아닙니다. 그가 일러 준 말들은 매우 유용한 것들이니까요. 허니 깊이 새겨들으십시오.”

렉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모르지요. 이제라도 아버지와 같은 파벌에 속할 수도 있고….”

로메인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자작이 렉시에게 한 일은 향후 사교계의 태풍이 될 이를 위한 것. 허니 꿍꿍이라기보다는, 자기 일신의 안위를 위한 것이다.

“황녀의 생일 때 만나면, 제대로 알게 되겠지요.”

렉시는 모른다. 앞으로 자작은 렉시가 가면 한 달간 와병 중이라 바깥나들이를 하지 못할 예정이란 걸. 하여 황녀의 생일에도 못 갈 것이므로 둘이 만날 수 있을 리는 없다.

그러하다. 이것이 바로 로메인이 말한, 자작의 황도식 보신법.

자작, 그의 일신의 안위는 앞으로도 퍽 평안할 것이다.

*****

자작의 저택에서 벗어나, 반나절을 더 달리자 황도였다. 거대한 삼공식 아치문을 통과해 황도로 들어온 뒤, 대략 한 시간을 더 가자 저택에 도착했다. 렉시는 로메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맨 앞에 있는 집사를 위시해, 저택의 사용인 전원이 나와 있었다.

렉시가 자리에 서자, 집사가 다가와 정중히 묵례했다.

“작은 주인님, 로메인 경. 어서 오십시오. 만나 뵙길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대는…?”

“저는 이 저택의 집사, 구아니입니다.”

렉시는 구아니라 불린 남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남국 사람 특유의 가무잡잡한 피부가 햇빛 아래서 눈부시게 빛났다.

“연합국 출신인가?”

“예, 키이스 왕국 출신입니다.”

렉시는 두 눈을 반짝였다. 내륙에서 살았기에 이렇게 피부색이 다른 이는 처음 보았다.

“그렇군. 앞으로 잘 부탁한다.”

“…예, 작은 주인님. 오랫동안 비운 저택에 주인께서 다시 오셨으니, 이보다 더한 광영이 없는 듯합니다.”

황도의 저택을 공작이 비워 둔 것이 오 년을 넘었다. 무뚝뚝해 보이는 얼굴 위로, 살짝 기쁨이 스쳐 지나가는 건 아마 그 때문일 터.

공작령에서 미리 연통을 받은 그는 조심스레 눈을 들어 렉시를 살폈다. 소공작을 대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상세히 서술한 그것이 진짜인가.

그리고 그 서술을 직접 확인한 그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아름다우시군요.”

“그런 말 많이 듣네. 고맙군.”

“아닙니다. 정말로….”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그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했다. 아름답다더니, 정말 명불허전 아닌가.

실로 황홀하고, 또 찬란한 미모였다. 황도에서 온갖 화려한 미녀를 본 그도 새 주인의 아름다움 아래선 말을 잃을 정도다.

그는 잠시 주변을 훑어 사용인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 정도의 미모라면 사람을 새로 뽑아야 한다. 그들 중 넋이 나간 몇몇을 마음속 리스트에서 제외한 그는, 렉시를 이끌고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들어오십시오 작은 주인님. 저택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러지.”

황도의 저택은 여태 보아 온 저택들과 비슷한 형식이었다. 화려하고, 장식성이 짙은 자재들이 어디서나 보였다. 하나같이 고급스럽고 우아한 장식들은 보는 자들의 시선을 잡아끈다. 오랫동안 주인이 없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아름다움이다. 렉시가 감탄하며 말했다.

“저택 관리가 무척 잘 되어 있네?”

“공작 전하께오서 계실 적처럼 꾸며 두었습니다. 하여 유행에는 조금 뒤처졌지요. 요 몇 년 황도의 유행이 몇 번이고 바뀌었으니…. 허나 이젠 다르겠지요. 명하신다면, 최대한 유행에 맞추어 꾸미겠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데…. 조금 궁금하군. 듣기론 전하께선 자네에게 전권을 일임했다 하였네. 허니 그 정도는 알아서 꾸며도 되지 않나?”

“주인께서 아니 계시는데 어찌 일개 집사가 그리하겠습니까. 안주인이라도 계신다면 모르겠으나, 그렇게 재정을 낭비할 수는 없지요.”

주인이 없으니, 적당히 유용해도 될 텐데…. 고지식한 건지, 충성스러운 건지. 과연 공작이 들여놓은 집사다웠다.

“작은 주인님께서 이렇게 와 주시니, 모두가 기뻐할 겁니다. 주인께서 계시지 않는 저택은 향기 없는 꽃이나 다름없지요.”

무뚝뚝한 어조였지만, 내용은 상당히 들떠 있다. 주인이 왔으니 슬슬 저택 분위기를 바꿀 생각인 모양이었다. 이런 어쩌나….

렉시는 어쩐지 곧 가야 한다는 말을 하기가 미안해졌다.

“구아니. 나는 이곳에서 한 달간만 머무를 계획이야. 혹시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중에 말하도록 해. 집 꾸미는 거나, 고용인들 월급이나.”

“한 달 말씀입니까…!?”

그렇게 짧은 기간이면 아무것도 못 하는데!

시무룩해진 집사를 보며 렉시는 혀를 찼다. 오랜만에 주인이 왔으니 하고 싶은 일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심정은 이해하지만….

“조금 더 있다 가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곧 있으면 사교계 시즌입니다. 최소 그때까진….”

“이곳을 비워 둔 건 미안하네 집사. 허나 난 황녀의 생일에 초대되어서 온 거야. 게다가 영지의 일도 급하고. 허나 약속하지, 프로하우스령의 일이 마무리 지어지면 이곳을 계속 비워 둘 일은 없을 거야 .”

후작의 말대로라면, 싫어도 그렇게 된다. 그가 제대로 공작의 일을 물려받게 된다면 말이다. 일 년 중 삼사 개월 정도는 황도에서 살아야 한다니… 뭐 할 게 있다면 그때 하면 되겠지.

헌데, 렉시의 이 말에 집사가 고개를 들어 물어 왔다.

“…화, 황녀 전하의 생일에 초대되셨습니까?”

연통엔 그저 작은 주인이 간다고 되어 있었으니 몰랐나 보다. 렉시는 긍정했다.

“연통엔 그런 내용까진 없었나 보군. 그래, 거기에 초대되어 왔어. 그래서 머무는 기간이 짧은 것이지.”

“맙소사!”

렉시는 깜짝 놀라 구아니를 보았다. 짙은 색 얼굴이 눈에 띌 정도로 색이 바랬다.

“허면… 그 세간에 떠도는 말이 정말이었단 말씀입니까…!?”

“자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세간에 떠도는 말이 뭔데?

렉시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얼마 전, 황도에서 작은 주인님과 관련해 사건 하나가 있었습니다.”

사람이 많이 오가는 황도엔 온갖 지역의 사람들이 줄줄이 모인다. 그리고 그중에 렉시의 외모를 직접 보았던, 공작령의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상대는 수도와 지방을 다니는 상인이었습니다. 헌데 그가 작은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 그만 옆자리 남자와 크게 싸움을 벌였지요. 술집의 기물이 파손될 때까지 다퉈, 결국 치안대로 둘 다 이송되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로메인이 물었다.

“황도 내의 소요는 치안대의 일. 허니 잡혀간 건 당연한 일이다. 허나 그것이 어째서 소공과 관련이 된단 말인가? 상인이라면, 공작가의 봉신도 아니었을 텐데.”

“그자의 신원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싸움의 내용이었지요. 그리고 그 싸움 내용이 장안에 퍼져… 사람들이 은근히 프로하우스 공작가를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뭐라고?

“…대체 무슨 내용이었길래?”

집사는 크흠, 하고 목을 울렸다.

“그것이… 작은 주인님과, 레아누 황녀 전하 중 누가 더 아름답냐… 하는 그런 다툼이었다고 합니다.”

“…….”

렉시는 입을 딱 벌렸다. 아니… 무슨 그런 쓸데없는…!?

“그딴 걸로 싸웠다고?”

“그딴 것이 아닙니다! 황도에서 레아누 황녀 전하와 관련된 일이 얼마나 잘 퍼지는지 모르셔서 하는 말씀입니다. 매우 심각한 일이지요!”

렉시는 새뜩한 집사의 얼굴을 보며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 알았어. 황도에서 레아누 황녀 전하의 인기가 많다는 건 나도 들어 아니까…. 사람들은 견주어 보길 좋아하니, 그런 걸 가지고 싸울 만한 인사도 과연 있겠지. 헌데 내가 이해가 안 가는 건 이거야. 왜 그걸 가지고 공작가를 비웃나?”

렉시의 감성으로서는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다. 고작 말하기도 쪽팔린 미모 다툼으로 가문이 오르내리다니.

허나, 의외로 로메인이 이 일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구아니. 하나 묻겠네. 그 소문이 치안대에 간 후에 퍼진 것인가, 아니면 가기 전에 퍼졌나?”

잠시 생각하던 구아니가 대답했다.

“처음엔 싸움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치안대에 끌려간 뒤, 내용이 퍼졌지요.”

“……. 알 만하군.”

로메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 구아니에게 물었다.

“구아니, 혹시 그들을 방면시킨 것이 레아누 황녀였나?”

“예? 네, 맞습니다. 혹시 경께선 이미 그 사건을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 방금 알았지. 허면 혹 이런 소문도 돌고 있는가? 예를 들어, 아직 사교계에 발을 딛지 않았는데도 이리 시끄러운 소공작의 외모가 참으로 궁금하다. 대관절 얼마나 대단하기에 이 야단인지, 황녀께서 꼭 보고야 말겠다고 하였다… 뭐 그런 식의 소문 말이네.”

“…비슷합니다! 정확히는, 귀족 분들 사이에 이런 이야기가 돌았다고 합니다. 그분의 생일 연회에 작은 주인님을 초청했으니, 그가 궁금한 자는 연회에 필참하라…고 말이지요.”

“역시… 그랬군.”

로메인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렉시는 초조해 보이는 로메인을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도통 그가 왜 이러나, 알 수가 없었다.

“렉시. 저 일은 아마도 황녀의 농간일 겁니다.”

“예?”

무겁게 내저은 로메인의 눈가로 희미한 경멸이 스쳤다. 그는 이 일이 어찌 되었는지 아주 잘 알 것 같았다.

“이번 생일 연회도 그녀의 농간일 가능성이 크군요. 도착하자마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아무래도, 최근 황도의 사교계가 퍽 심심했나 봅니다.”

그 성격 나쁜 여자의 성미가 간만에 빛을 발했나 보다. 대체 이번엔 뭐가 기분이 나빠서 이런 짓을 저지른 걸까? 황도 사교계가 매일같이 시끄러운 건 그 여인의 성격 탓이 컸다. 내가 이래서 황도 사교계에서 벗어나 공작령에 왔었던 것인데….

그는 이마를 짚었다. 옆에서 두 눈을 깜박이는 연인에게, 이 사건을 어떻게 알려 주어야 할지 머리가 아파 왔다.

“이건… 사교계식 암투입니다.”

“사교… 뭐요?”

렉시는 로메인의 설명에 눈을 깜박였다. 갑작스레 들은 말이 너무나 황당했다. 상인이 저 혼자 싸운 일로 공작가가 비웃음을 당한다더니, 그 끝이 사교계 암투라니? 어처구니가 없기 이전에, 무언가 이해가 가질 않는다.

내가 머리가 나쁜 게 아니야. 상황이 이해가 안 가는걸. 아니, 그보다 사교계에 발 디딘 적도 없는데 시작도 전에 암투라고?

“그 암투라는 게, 제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 맞나요?”

“예. 또 다른 의미의 전쟁터가 사교계이고, 이건 그 사교계에서 자주 벌어지는 물밑 발길질 같은 것이지요. 직접적인 전투가 아니라 여론으로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는…. 아주 전형적인 수법입니다.”

시작은 평민들의 가벼운 싸움이었지만, 결과적으론 공작가의 체면이 떨어졌다. 렉시는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도무지 상황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조악하고 조잡한 것으로… 사람들이 넘어가요? 저는 황도에 있지도 않았잖아요.”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원래 이런 스캔들은 재미와 흥미가 다이니까요.”

조악하고 단순하나, 그렇기에 직관적이다.

황녀는 그런 것으로 황도 사교계를 쥐락펴락하는 데 선수였다. 황도에서의 지위와 인기가 한 몸에 있는 인사란 때론 없는 사실도 만들어 낼 수 있다.

“황도의 사람들은 그녀를 사랑하다 못해 숭배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지요.”

“…….”

사교계란 대관절 뭣 하는 동네란 말인가. 들으면 들을수록 자기가 저기서 잘 적응할 수 있을 것인지 가늠이 안 갔다.

“그럼 그 암투에 우리가… 일단 밑지고 들어간 거네요?”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 맙소사.”

뭔가 화가 나는데 어디에 화를 내야 할지를 모르겠다. 이런 이상한 소문을 퍼트린 황녀? 아니면, 그 말에 넘어간 황도의 시민들?

렉시는 황당해 부들부들 떨었다. 이 내가 함정에 빠지다니, 이럴 수가!

“성격 좋은 미인이라고 들었었는데…! 어떻게 이런 짓을!”

“너무 속상해 마십시오. 레아누 황녀는 어릴 적부터 황도에서 산 여인입니다. 허니 저렇게 사소한 소문을 부풀려 자기 뜻대로 휘두르는 게 뛰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를 높게 쳐 주는 것인지, 자기를 위로해 주는 것인지. 물론 의도는 후자일 것이다. 허나 은근히 자존심이 상한다.

렉시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이해가 안 가네요. 그녀와 프로하우스 공작가 사이에 무슨 해묵은 원한이라도 있나요? 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것일까요.”

혹시 황제의 뜻일까?

허나 듣기로, 현 황제는 공작과 그럭저럭 사이가 괜찮다 들었다. 허니 굳이 이런 일을 할 필요야 없을 텐데. 렉시의 뇌리에 문득 이혼당한 전 공비가 떠올랐다.

“…혹시. 전 공비가 지금 황도에 있나요? 그녀라면 사적으로 원한이 있으니 가능할 법한데. 그녀가 이번 일을 부추겼을까?”

“그것은 제가 대답할 수 있을 듯합니다. 작은 주인님, 전 공비 전하께선 황도에 들어오시지 못하십니다. 황제 폐하의 명으로, 당분간 황도에는 오지 못하신다고 이미 소문이 파다하지요. 게다가 전 공비 전하와 레아누 황녀 전하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못하셨습니다. 새삼 그럴 일은 없다는 이야기지요.”

그나마 듣던 중 반가운 소리긴 했다. 만일 둘 사이가 좋았다면 이것보다 더 난감한 소문들이 돌아다녔을 게 뻔했으니까. 로메인이 그 말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맞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황제 폐하의 의도는 절대 아닐 겁니다. 이런 저급한 소문을 흘리는 분은 아닙니다. 게다가 사교계의 일엔 손을 쓰지 않는 게 그분의 자랑이지요.”

그렇다면, 역시.

“황녀가 한 것이란 말이군요. 하지만 전 그녀와 척을 진 적이 없는데….”

“글쎄요. 그것도 사실 모르는 일입니다. 레아누 황녀의 성격은… 좋게 말하자면 자기애가 뛰어나고, 나쁘게 말하자면 자기중심적이니까요. 실제로 했든 안 했든 자기 기분에 거슬리면 그게 끝입니다.”

자기중심적이라고? 렉시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럼…제가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고요?”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상대가 의도치 않았다 하더라도 자기의 맘에 들지 않는다면 공격하지요. 허니, 무언가 계기가 있었을 겁인데….”

“그거야 알아내기 어려운 일은 아니죠. 로메인, 그녀는 무얼 가장 소중히 여기나요?”

“제가 알기론… 자신의 미모입니다.”

허. 코웃음이 나왔다. 로메인의 말을 듣는 순간, 그 계기가 무엇이었을지 불현듯 깨달았기 때문이다.

“알겠군요. 알만해요. 그녀의 자신감은 인기에서 비롯되고, 그 인기는 절세미인이란 칭호에서 나오죠. 그래, 제가 예쁘다는 소문이 퍽 불쾌했나 보군요.”

세상에. 렉시는 믿을 수가 없었다.

“살다 살다 별꼴을 다 보는군요. 고작 외모가 예쁘다는 소문 하나로, 이렇게 사람 황당하게 만들어?”

그 빌어먹을 생일 축하연 초대를 왜 했는지 이제야 알겠다. 날 엿 먹이려고 불러온 것이다. 오로지 엿을 먹이려고! 맙소사, 뭐 이런 게 다 있어? 어쩐지 처음 봤을 때 오기가 무척 싫더라…. 그녀를 위해 바리바리 싸 온 귀한 선물들이 아까운 순간이었다.

“…외모가 관련된 것이라면 그럴 수 있습니다. 레아누 황녀에겐 고작이 아니었을 테니까요. 당신의 말대로입니다. 그녀가 가진 인기와, 황도의 영향력은 그 외모로 비롯된 것이 크지요. 허니 당신의 소문이 퍽 불쾌했을 법합니다.”

“기가 막히네요. 고작 외모가 뭐가 중요해서.”

아, 아닌가. 그 인기를 미모로 얻었으니 중요한 건 맞다. 지금 그녀는 그 미모로 얻은 인기를 양분할 수 없어서 자신에게 싸움을 건 것이고.

“…….”

렉시는 입을 다물었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할지, 참으로 판단이 안 섰다.

“사교계 적응 때문에 온 건데 그냥 그 단계를 뛰어넘게 해 주는군요. 참 고맙다고 해야 할지….”

정보통 플로랑 후작이 이 사건을 몰랐던 건, 모든 일이 자신을 초대한 뒤 벌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여기엔 그녀가 신혼이라 정신없는 탓도 일부 있었겠지만….

렉시는 턱을 톡톡 두드렸다.

“문을 지나왔으니, 내가 왔다는 건 이미 알려졌겠고.”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참석은 건너뛰어도 됩니다. 황녀도 어느 정도는 그럴 걸 알고 일을 꾸민 것일 테니까요. 조악한 수이니만큼 사람들도 이미 눈치챘을 겁니다. 내키지 않으시면, 그저 선물만을 보내십시오.”

“저도 그러곤 싶네요. 하지만 공작가의 명예는 어쩌고요? 황도에 비웃는 소문이 파다하다면서요.”

내가 능력이 부족해서 명예에 흠집이 나면 또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어처구니없는 계략 때문에 비웃음을 당하다니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일 아닌가.

“어차피 이런 일은 황도에선 비일비재한 일입니다. 소공작의 명성을 위해 공작가가 일부러 낸 소문 때문이라고 여길 것이고, 그저 그게 끝이겠지요.”

한때 이런 일 많이 겪어 본 로메인이다. 어차피 황도의 사교계란 각종 사건 사고가 연속되는 장소. 지금이야 이 일이 뜨거운 감자이니, 여기저기서 오르내리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얼마 후면 사교계가 시작된다. 진정한 스캔들의 시즌이 돌아오는 것이다.

렉시는 몰랐지만, 진정한 황도의 스캔들은 바로 이 사교계 시즌에 벌어졌다. 허니 렉시의 일 정도는 곧 퍼질 다른 소문들 틈에 금세 묻힐 터였다.

“당신의 말대로 하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에요. 저도 알아요, 당신이 절 걱정하는 거. 괜한 일로 신경 쓰느니 저도 당신과 여행이나 하고 놀고 싶다구요.”

“허면 그리 하십시오. 누구도 당신을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거절하라 하는 로메인의 말은 달콤했다. 사실 그 말 그대로 넘어가도 괜찮긴 할 것이다. 어차피 이리된 거 그냥 꼬리를 내려도 뭐라 말은 안 듣겠지.

그러나….

렉시는 멀뚱히 서 있는 집사에게 질문했다.

“구아니. 황도 시민들이 뭐라고 비웃고 있었지? 뭐라고 소문이 났는지 상세히 말해 주게.”

집사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잠시 머뭇대다, 입술을 조심스레 열었다.

“…부디 불쾌히 여기지 마십시오. 현재 세간에선 이렇게 떠돌고 있습니다. 프로하우스 공작전하께서, 소공의 명성을 위해 너무 큰 욕심을 부렸다고…요.”

“……그래, 그럴 것 같았네.”

렉시는 기도 안 차 콧방귀도 안 나왔다. 아니 뭐 이런 놈들이 다 있나 모르겠다.

아니 황도 사람들에겐 뇌가 없나? 대체 자기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판단이 안 드나 보다. 세상천지 어떤 놈의 영주가, 자기 뒤를 이을 후계자 칭찬을 외모에 할당한단 말인가?

그래, 백번 생각해서 후계자의 외모가 예쁜 건 이득이 될 수는 있다. 허나 그렇다 해도 중요한 건 그 능력과 실력이 아니던가?

왜 다들 상식에 어긋난 판단을 하는 걸까. 미인의 미모가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하지만, 이건 좀 너무하잖아.

“…봐요 로메인. 저런 마당에 제가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요. 이건 어떻게 보면 절 후계자 삼은 전하를 비웃는 이야기예요. 또한 절 비웃는 것이기도 하고요. 새로운 후계자인 절 칭찬할 것이 외모밖에 없다는 소리 아닌가요?”

물론 이것은 사실과는 무척 다른 이야기다. 렉시의 외모가 세간에 오르내리게 된 건 바로 그 외모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 아닌가.

“렉시. 진정하십시오. 그들은 그렇게까지 생각할 머리가 없습니다.”

“대부분은 그렇겠죠. 하지만 그중 몇은 그럴 머리가 있을 거예요. 그런 놈들은 또 혓바닥이 길어서 다른 사람들을 충동질할 거고요. 허니 로메인, 절 말리지 마세요. 이건 제가 소공작이 된 이후 나서는 첫 공식 행사예요. 이대로 물러설 순 없어요.”

전쟁에선 물러서야 할 때와 물러서지 말아야 할 때를 잘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이 전쟁은 후자였다. 이대로 물러서면 자신은 여자에게 꼬리를 만 멍청한 후계자가 된다. 하물며 그를 위해 여러 안배까지 해 준, 공작은 또 어떻게 된단 말인가?

“로메인, 솔직히 말해 봐요. 이 자리에 전하께서 있었다 해도 같은 말을 할 건가요?”

“…그것은….”

로메인은 뜨끔해서 말을 멈췄다. 현 프로하우스 공작이라면 당연히, 그런 말을 하지 않았겠지. 렉시보다 더 오랫동안 가문과 명예를 지켜 온 그다. 얼마 후 잦아들 소문이라고 해도 모욕을 참을 리가 없었다.

“저 또한 전하와 같아요. 이런 사소한 수 때문에 가문의 이름이 창피를 당하는 걸 어떤 후계자가 보고만 있겠어요. 그래선 안 되는 일이지요.”

“…허면, 어떻게 하실 예정입니까.”

렉시는 삐쭉 웃었다.

“뭐 별거 있겠어요? 그렇게 내 얼굴이 보고 싶다니… 당당히 보여 주죠.”

“…베일을 안 두르시겠다는 이야기군요.”

곧바로 알아듣는 건 로메인과 사전에 베일과 관련해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본래는 렉시는 이번 생일 연회엔 베일을 두를 셈이었다. 황녀에 대한 예의와,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자신을 위한 보신으로서 그러고자 했다.

허나 이렇게 된 이상, 이야기가 다르지.

“…꼭 그래야겠습니까?”

어쩐지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긴 한숨이 로메인의 어깨에 무겁게 내려앉는다.

“예. 치졸하고 유치해도 꼭 해야겠어요.”

“…….”

맘에 들지 않는 듯, 로메인의 입매가 내려앉았다. 동시에 벽안이 시퍼렇게 빛을 발하는 게, 이번 결정이 참 맘에 안 드나 보다. 허나 렉시는 절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자고로 걸어 온 싸움은 받아 주는 것이 도리이고, 뺨을 맞았다면 맞서 때려 주는 것이 싸움의 도 아니던가.

비록 지금은 첫 전투에선 처참하게 패배했다. 허나 전쟁의 승패란 마지막에 가서야 아는 법.

좋다, 황녀.

결투다.

렉시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빛냈다.

살다 살다 여자랑 용모로 대결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지만…. 한번 칼을 뽑은 이상 그냥 넣진 않으리.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어디 해 보자. 그는 그렇게 눈을 빛내며 전의를 다졌다.

…그러나, 생각보다 일은 간단히 풀리지 않았다.

*****

“…연회용 준비물들을 구할 수가 없다고?”

“송구합니다. 작은 주인님, 어떻게 해도… 사람들이 팔지를 않습니다.”

렉시는 찌푸려진 얼굴로 집사의 변을 들었다. 세상천지 돈 싫어하는 놈들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지금 황도의 놈들이 그런단다. 아니 돈을 줘도 물건을 안 판다니 이 무슨 경우일까.

“정말로 죄송합니다 작은 주인님. 이 일을 어찌해야 할지….”

“…이거 아주 단단히 작정을 했네.”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선 사전에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간단하게는 옷과 마차였고, 조금 복잡한 것으론 황도의 장신구가 있다. 명성에 손을 대는 것뿐만이 아니라, 아예 연회 준비 과정을 하지 못하게 손을 대다니. 실로 놀랄 노 자였다.

생각보다 손이 빠르잖아?

하긴 이 정도는 되어야 싸울 맛이 나겠지.

렉시는 코웃음을 쳤다.

“허나 참 신기할 정도로군. 아무리 전하께서 자리를 비우셨다 하나…. 황도에서 프로하우스 공작가의 이름이 그토록 바닥에 떨어졌던 건가? 고작 장신구 하나 구하지 못할 정도라면, 식료품 같은 생필품 수급에도 문제 있는 것 아닌가?”

“아니요! 아닙니다. 이건 오로지 보석상… 그러니까, 사치품을 대상으로 하는 상인들이라서입니다.”

“…사치품?”

사치품이라면 확실히 여기선 보석 같은 장신구 상점밖엔 없지. 옷이나 신발은 사치재라기보단 어쨌거나 필수 항목이다.

“그러니까, 귀족들 대상으로 하는 보석 상점들 한정으로 이렇게 나온다 이건가.”

“…예. 그렇습니다.”

“와…. 이거 참 대단하네. 내게 팔면 뭐 보복이라도 한다고 했나 본데.”

황녀의 보복과 공작의 보복 중 황녀의 보복을 더 두려워한다 이건가. 이거 은근 자존심 상하는데. 가문이 없는 황녀의 보복이 가문의 보복보다 더 두렵다니, 황도에서 그녀는 어떤 존재란 말인가?

“…플로랑 후작의 말이 맞군. 무시 못 할 세력가라더니….”

물론 여기엔 공작이 오 년 넘게 자리를 비운 탓도 있을 것이다. 허나 그걸 감안하고라도 참 감탄스러울 정도의 장악력이다. 이 자리에 후작이 없는 것이 참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있었다면, 뭐라도 자기 대신 생각을 좀 해 줬을 텐데….

렉시는 찌뿌둥한 몸을 비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의 뒤를 집사가 황급히 따라오며 뒤에서 속삭였다.

“작은 주인님, 용서하십시오. 그들이 공작가를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보석상들의 입장상… 공작가보다 황녀가 더 무서운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레아누 황녀는 황도의 유행을 선도한다. 그녀가 차는 장신구, 보석, 옷, 신발… 그 모든 것들이 한 해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분의 눈에 들면 흥하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반대로, 거슬리면 망하는 것도 순식간이지요. 몇 년 전, 황녀께 사파이어를 바쳤던 보석상이 한순간에 망한 것도 그분 탓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긴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녹색 눈동자가 흥미로 반짝인다. 그녀가 어떤 수로 상대를 망하게 하는지 한번 들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황녀께 바친 사파이어는 그 질이 상당히 좋았습니다. 순도가 높고, 커팅이 아름다웠지요. 그분은 그걸 한동안 펜던트로 만들고 다니셨는데…. 문제는, 얼마 후 그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사파이어가 발견되었다는 겁니다.”

황녀 덕분에 폭증한 사파이어 수요는 가파른 시세 차익을 불러 왔다. 한참 이 푸른 사파이어로 재미를 보던 보석상은, 이번 사파이어는 경매에 내놓기로 결정했다.

“보석상은 생각보다 더 높은 가격에 사파이어를 팔 수 있었습니다. 큰돈이 들어왔고, 그는 무척 기뻐했지요. 그런데…. 이듬해에, 그만 보석상이 망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째서? 큰돈이 있었다고 했지 않나?”

“원래 장사하는 치들은 늘 빚을 깔고 삽니다. 게다가 번 돈은 다시 원석을 사 재투자를 했을 것이구요. 보석상들은 보석을 팔고, 다시 원석을 사들여 그걸 가공하지요. 헌데 보석상의 보석이 전혀 팔리질 않으니 어찌 원석 값을 줄 수 있었겠습니까?”

요는 돈 융통이 되질 않아 부도가 났단 소리다. 뭐 어떻게 쫄딱 망하게 했나 했더니….

“…그걸 레아누 황녀가 지시했다고?”

“지시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단지, 그 보석상이 바친 보석을 걸지 않고 다른 것을 걸고 다니시기 시작하셨을 뿐이니까요. 허나 황도에선… 단지 그것만으로도 상점이 망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모든 유행의 기준이 황녀이니 가능한 일. 렉시는 그만 실소를 머금었다.

“대단하군. 그래서 나는 이번 연회 때 하고 갈 장신구를, 구할 수 없을 것 같다 이건가.”

“…… 정말로 죄송합니다!”

아주 머리를 땅에다 박을 것 같다.

충성스러운 사람을 저렇게 놔둬야 어디 쓰나. 렉시는 어깨를 한번 으쓱한 뒤, 집사에게 명했다.

“뭐 예복은 미리 가져왔으니 다행이로군. 적어도 입고 갈 건 있으니까 말이야. 됐네, 더 이상 장신구는 찾지 말도록 해.”

없으면 없는 대로 가는 거지 뭐. 내가 언제부터 그런 걸 따지고 살았다고?

렉시의 말에 멍청하게 있던 집사가 펄떡 뛰었다.

“작은 주인님, 황도의 사교계는 그렇게 녹록한 곳이 아닙니다. 정식으로 초대받으신 이상, 황도의 예법에 맞는 장식은 필수적으로 하셔야 합니다.”

“알아, 알아. 그것도 그 해, 황도에서 난 것으로만 해야 한다 그랬지. 그래서 나도 따로 챙겨 오진 않았던 거고.”

그 부유한 공작가에 설마 장신구 하나가 없겠는가. 단지 황도 연회의 특수성이 참 지랄맞다 보니 생긴 일이다. 크건 작건 황도에서 난 장신구를 착용해야 하는 것이 황도식 연회. 특히나 보석을 사랑하는 레아누 황녀의 연회이니, 보석을 착용하지 않은 자는 눈에 크게 띌 것이다.

‘아주 작정하고 창피를 줘 보겠다 이건가.’

무슨 치밀한 정치적인 위협도 아니고 이딴 걸로 골치를 썩이고 있자니 우습기 그지없다. 사실 보석이야, 어떻게든 구하려면 구할 수는 있을 것이다. 과거 공작이 착용했던 것을 찾아보면 몇 개는 있을 것이고.

허나, 모두 유행이 지난 것이니 그것만으로도 또 말이 오가겠지.

렉시는 머리를 긁적였다. 뭐 이렇게 신경 쓸 게 많은 건지 머리가 아팠다.

난생처음 접한 사교계란 참 귀찮은 존재였다. 이 동네의 명분은 자신이 생각한 것과 매우 달랐다. 지켜야 할 예절,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상상외로 많았고 또 별스러웠다. 아, 앞으로 여기서 해마다 몇 개월씩을 살아야 한다니.

로메인은 대체 여기서 어떻게 버텼던 거야?

렉시는 로메인의 빈자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집사의 말을 듣고 자기가 해결해 보겠다며 나간 그는 세 시간이 넘도록 아직 소식이 없었다. 렉시의 시선을 눈치챈 집사가 한줄기 희망을 안고 속삭였다.

“작은 주인님. 로메인 경께서 성공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여기 있겠지. 자네가 못한 걸 과연 그가 구할 수 있을까 싶지만.”

뭐 그가 조금 요령을 부려 본다면 가능할 법도 하다. 허나 그가 그런 걸 할 줄 알면 그게 어디 로메인 드 데퓨탄 경이겠는가?

그는 그런 거 할 줄도 모르고 할 생각도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내가 사랑에 빠진 거지.

렉시는 어깨를 으쓱했다.

“구하지 못해도 괜찮아. 아슬론 대공자 같은 경우도 있지 않나? 그땐 누구도 그를 무시하지 못했다 했었고.”

“그 일화를 알고 계시다니 훌륭하십니다, 작은 주인님. 허나 그때 그분이 무사했던 것은…. 그분이 그곳에서 가장 지위가 높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요는 내가 가는 자리엔 황녀가 있다 이 소리인가. 아, 자연스레 황녀를 자신의 위로 두는 집사라니. 황도에서 그녀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한가 싫어도 알게 된다.

“집사, 자네의 걱정은 안다. 레아누 황녀의 영향력은 인정해. 허나 나는 프로하우스 소공이고, 미래의 공작이야. 여기에 과연 지위의 고하가 끼어들 여지가 있을까?”

황도에서 오래 산 사람은 어쩔지는 모르나, 누가 봐도 자신과 그녀는 대등한 관계다. 실제로 공작도 그런 말을 한 바 있지 않은가? 또한 그는 뒤이어 자신에게 이리 말했다.

자신이 뒤에 있으니, 걱정 말고 가슴 쭉 뻗고 나서 보라고.

눈가에 유쾌한 웃음이 떠올랐다.

“부모의 면을 세우는 것도 효도겠지만, 부모가 한 말을 따르는 것 또한 효도겠지. 뭐 좋아. 이 기회에 스무 해 넘도록 못 다한 효도나 한번 해 보지 뭐.”

“…예?”

뚱딴지같은 소리에 집사만 멍청한 얼굴이 되었다. 대체 이 주인이 뭔 소리를 하고 있느냐, 알아듣지 못하겠노라 이런 생각일 것이다. 뭐 알아듣건 듣지 못하건 큰 문제는 없으리라.

뭐가 대수겠는가?

중요한 건, 그저 자신은 들었고, 그 들은 대로 따라 할 결심이 섰다는 것이니까.

그러기 전에 일단, 이것부터 해 볼까…?

렉시는 오른쪽 주머니에 넣어 놓았던, 사라와 연결된 거울을 꺼내 들었다. 톡톡 치자, 안쪽에서 사라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오랜만입니다 어린 페르귄.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 사라. 내가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말이야. 혹시 서관에 내가 말하는 시기의 역사서가 있는지 확인해 주겠어?”

‘그거야 어렵지 않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유능한 장서관의 사서는 곧바로 그가 원하는 장서를 전송했다. 렉시는 재빨리 하나하나 내용을 확인했다.

“제국의 역사, 역사… 좋아. 여기 있네.”

몇 번의 검색을 더해, 사라가 보여 주는 역사의 가장자리를 거닌 렉시의 얼굴이 퍽 진지하다. 지피지기 백전불태. 일을 시작하기 전, 사전 공부가 필요한 이유다. 렉시는 그렇게 아무도 모를 자신만의 전투 준비를 시작했다.

*****

공작저의 저택에서 렉시의 시중을 드는 건 성에서 데려온 자들이다. 아직 저택의 시종들은 렉시의 용모에 적응하지 못해서, 일부러 그렇게 인선을 했다. 물론 그 미모가 몇 개월 가지고 크게 익숙해지는 그런 미모는 아니다. 외려 보면 볼수록 감탄해서 빠져드는 축이지.

허나 적어도 만난 지 며칠 되지 않는 저택의 고용인들보단 이들이 백배 낫다. 일단, 이들은 렉시의 얼굴을 보고 주저앉지는 않기 때문이다.

“미용수를 도포하겠습니다.”

“장미 기름으로 향을 내겠습니다.”

“소공, 손을 들어 올리겠습니다. 잠시 힘을 빼 주시겠습니까?”

“소공, 눈을 감아 주십시오. 약간의 금분을 뿌리겠습니다.”

“피부는 늘 밝고 아름다우시니, 생기 있는 안색을 위해 입가에 꽃물을 들이겠습니다.”

연회 날을 맞이한 저택의 거대한 방, 중앙의 소파에 반쯤 기댄 렉시의 자태는 실로 우미했다. 본래도 아름다운 사람이었으나 시녀들의 손길이 닿을수록 아름다움이 더해지니 어찌 된 노릇인가.

저택의 고용인들은 멍한 눈으로 렉시를 치장하는 시녀들을 보았다. 다들 한결같이 한마음 한뜻으로 주인을 받드는 모습이 대단해 보였다.

“거기, 돕지 않을 것이면 방이라도 치워요.”

본성에서 온 시녀 하나가 저택 고용인의 등을 툭 친다. 기분이 나쁠 행동이었지만, 자기들 행동을 알다 보니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그렇게 느릿느릿 방을 치우는데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들의 귀를 때린다.

“음… 미용수가 조금 차가운 느낌이야. 원래 이런가?”

“송구하옵니다 소공. 허나 미용수는 본래 차가워야 피부 탄력에 도움이 되오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옵소서.”

렉시가 장신구를 구하지 못해 연회에 맨몸으로 나간다는 소문은 이미 저택 내에 쫙 펴졌다. 로메인과 집사가 발 벗고 뛰어다닌 걸 본 사람이 많다 보니 어찌 숨길 수도 없다. 복잡한 수도 상황은 모르나, 어쨌거나 귀족가의 시종들이니 대강 일의 진행은 알아서 판단했다. 그들은 두 눈을 불태우며 황녀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웠다.

감히 우리 소공작님을 물 먹이려고 하다니. 이러한 치졸한 짓으로 우리 소공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은가? 자기가 황녀면 다냐!

황녀의 숭배자가 가득한 황도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 이 저택에선 당연한 일이다. 심지어 황녀를 숭배했었던 저택의 고용인들도 그편으로 돌아섰다. 원래 먼 곳의 님보단 내 품 안의 님이 더 귀한 법이라. 물론 황녀보다 렉시가 더 아름다워 그런 것도 물론 있겠지만.

그들은 적개심을 불태움과 동시에 서로 결의했다.

“우리 소공께서 아름다운 것이 무슨 죄라고!”

“질투 나서 그런 게 분명해. 질투가 나서. 감히 우리 소공의 용모에 못 미칠 것 같으니 치졸하게 나오는 거지.”

“진정한 미인이란 장신구 따위에 의지하지 않는 법이지요. 황녀께서 아름다운 건 사실이나, 우리의 주인님은 장신구 따위에 의지하지 않고도 오롯이 아름다우신 분이죠. 우리 모두 황도에 소공의 진정한 면모를 보여 줍시다.”

“좋소! 콧대를 꺾어 줍시다!”

그럽시다!

모두 두 눈이 번쩍이며 광망이 치솟았다. 렉시를 치장할 생각을 하니, 없던 힘이 다 솟는 그들이었다.

하여 오늘따라 시종 시녀들의 어깨에 힘이 많이 들어갔으나, 그들의 이런 속을 모르는 렉시는 그래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째 오늘 다들 분위기가 좀…?

“…오늘, 다들 무슨 일이 있나?”

“특별한 날 아니옵니까. 소공께서 처음으로 황도의 사교계에 나서시는 날이지요. 허니 저희 모두 소공을 위해 이 한 몸 바치고자 노력하는 중입니다.”

“맞습니다 소공. 이 모든 것은 다 저희 충성의 증거로 여겨 주소서.”

“소공. 이제 일어나 이쪽으로 앉아 주십시오. 인두로 머리 모양을 만들 것입니다. 향유는 그 이후입니다.”

“어…어?”

한마디 했다가 본전도 못 찾았다. 얼굴과 몸에 와 닿는 손에서 느껴지는 까닭 모를 기합도 더욱 세졌다. 렉시는 잠시 눈을 치켜떴지만, 이내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이유는 몰라도… 뭐 일들을 열심히 한다는데 뭐라 할 건 아니니까.

“…그래, 너희가 알아서 잘해 주겠지. 본성에서 너희를 괜히 뽑았을 리 있겠느냐. 걸맞은 자격을 갖추었으니 다들 내 곁에 있는 것일 터.”

“소, 소공!”

“너희만 믿겠다.”

믿겠다.

이 말은 고용인들의 마음에 불을 싸질렀다. 잉걸불이 확 하고 번져 주변이 마치 불바다처럼 활활 타올랐다. 렉시를 치장하는 손길들이 더욱 섬세하고 빨라진다. 모두의 두 눈에 불같은 열정이 치솟았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보는 저택 고용인들 머리엔 동시에 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와. 정말 너무너무 부럽다….

로메인은 마차에 기대 렉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렉시의 성공적인 연회를 위해, 로메인 역시 시녀들의 손길을 일정 부분 거쳤다. 때문에 그도 평소보다 배는 더 외양이 눈에 띈다. 공작가의 연회용 마차에 어울리는 기사복을 입고 선 남자는, 멀리서도 눈에 확 띌 정도로 늠름했다. 그와 함께 렉시를 기다리는 고용인들의 시선이 남자에게 찰싹 달라붙을 정도였다. 그러나 로메인은 그들에게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단지 기다리는 동안, 입매를 조금 비틀었을 뿐.

제기랄.

좀처럼 쓰지 않는 욕설을 속으로 삼킨 그는 눈을 어둡게 빛냈다. 며칠간 노력했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이 이렇게 연회 날이 되니 속이 비틀려 참을 수가 없었다.

레아누.

그는 이름 앞에 살짝 욕설을 덧붙였다.

빌어먹을 레아누.

아름다운 여인에게 맘이 가는 것은 남자의 당연한 도리일지나, 예전에도 그는 그녀에게 별로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외양은 인정하나, 그로선 단지 그뿐. 이하 하등 매력적인 요소가 없으니 어찌 좋다고 할 것인가.

‘이러니 내가 그녀가 싫었던 것이지.’

오가던 정혼을 그녀가 고사하지 않았다면 그가 먼저 나서 거절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이런 그의 생각을 알고 미리 선수를 쳤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오랜만에 그녀의 진면목을 다시 보니 속이 들끓는 걸 견딜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괜한 짓을 해서, 이것이 무슨 꼴인가.

‘그녀만 아니었다면 렉시가 얼굴을 드러낼 일이 없었을 것인데!’

그는 집사와는 다른 견지에서 이번 연회를 걱정하고 있었다. 렉시가 창피를 당할 걸 걱정하는 집사와 달리, 그는 렉시의 미모가 만천하에 드러날 것을 심려했다.

소문만으로 황녀를 접한 집사는 둘 중 누가 승리할지 그 저울의 향방을 알 수 없었다. 허나 둘 다 곁에서 자세히 본 바 있던 로메인에게 향후 일을 내다보는 건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감히 누가 나서 그를 욕되게 할 것인가?

설령 레아누가 종용하더라도 사람들은 조용할 것이다. 로메인은 렉시가 그녀를 압도하리라는 데엔 단 한 조각 의심조차 없었다.

렉시의 미모는 고작 장신구 따위로 어떻게 될 만한 것이 아니다. 생각기로, 장신구를 안 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그를 가장 곤란케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혼인해도 문제일 외모이거늘, 하물며 혼인 전이어서야….’

그렇다. 그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거다.

공작령에서야 공작의 힘이 막강하니 그 외모가 어찌저찌 무마되었다. 그러나 황도엔 같은 공작가만 넷인 데다 고위귀족들도 널리고 널렸지 않은가.

그 또한 후작가의 자제이나, 그로서는 어찌 못 할 자들이 수두룩하다는 이야기다. 물론 렉시의 지위가 높으니, 그 스스로가 거절한다면 될 일이다.

허나 그래서야 어찌 약혼자라 하겠는가?

자고로 약혼자란 사랑하는 상대를 모든 위험에서 물샐 틈 없이 보호해야 하는 법.

하물며 그는 기사 아닌가. 기사가 어찌 혼약자의 위기를 수수방관할 수 있겠는가? 만일 그렇게 된다면 지나가던 개조차 자신을 비웃으며 약혼을 무효로 하라 숙덕댈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를 준비하기도 전에, 이렇듯 갑작스레 상황이 흘러가고 있으니…. 천하의 로메인이라도 고민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렉시를 사람들에게서 보다 안전히 보호할 수 있을까?

…아니,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자.

대체 어떻게 하면 렉시가 자신이란 임자가 있단 사실을 사람들이 인지할 수 있을까.

그렇게 고뇌하는 로메인에게 옆의 기사가 슬쩍 언질했다.

“로메인 경. 저택 문이 열렸습니다.”

“!”

그는 기댄 몸을 벌떡 일으켜 계단 아래 섰다. 붉은 카펫이 깔린 중앙의 계단 아래로 렉시가 천천히 내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로메인을 본 렉시가 손을 흔들며 미소했다.

“로메인. 기다렸어요?”

“아닙니다. 렉시, 오셨습니까.”

로메인은 부드럽게 웃으며 내려오는 렉시를 응시했다.

그리고, 웃는 얼굴 그대로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

레아누 황녀의 생일을 맞이한 황도는 무척이나 시끄러웠다. 황도에서 가장 사랑받는 여인의 생일이니만큼 황도는 축제 아닌 축제의 장이 되어 있었다.

“과일이오! 과일! 레아누 황녀 전하가 가장 사랑한다는, 남국의 리치가 왔소!”

“사탕 사세요, 사탕! 황녀 전하가 가장 사랑하신다는 보석 같은 사탕이에요!”

“꽃 사세요. 꽃이에요! 황녀 전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오월의 장미가 있어요!”

축제란 대목의 다른 이름이다. 돈에 미친 장사꾼들은 황녀가 좋아하는 음식, 과일, 꽃, 여하간 황녀와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건 이름 붙여서 팔아 젖혔다. 개중엔 진짜도 있고, 가짜도 있었지만 황녀가 좋아한다는 건 뭐든 잘 팔린다. 황도 시민들은 황녀가 붙은 것들은 뭐든 좋아했다.

이렇듯, 황녀의 생일을 축하하는 인파들은 어디서나 보였다. 황녀의 생일 연회가 벌어지는 대저택 부근은 아예 인산인해였다.

최근 황녀의 소유로 인정된 이 저택은 그녀를 사모하는 자들이 십시일반 모아 선물한 것으로 그 규모가 매우 크고 아름다웠다. 평소에도 다니는 사람이 많은 만큼, 근처엔 꽤 커다란 주차용 공터도 있었고. 허나 워낙 많은 마차들이 들고 나니 다 쓸모없었다. 그 거대한 저택의 정문은 마차들의 병목 현상으로 들고나기도 벅찼다. 근처 대로변은 주차해 놓은 마차들로 붐볐고, 사람들은 그 마차꾼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등 혼잡하기 이를 데가 없다.

“거기, 이봐 꽃 파는 행상. 거기?”

양철통에 꽃을 담아 팔고 있던 행상은 고개를 휙 들었다.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에게 호객을 하다 잘못하면 손님을 놓칠 뻔했다. 그는 재빨리 마차로 달려갔다. 저택으로 들어가는 순번을 기다리고 있는 마차였다.

“예! 어르신, 부르셨습니까?”

“그래. 내 꽃을 좀 살까 해서. 요즘 황도에선 어떤 꽃이 가장 인기 있나?”

상인은 얼른 손바닥을 비볐다. 가장 인기 있는 꽃이라면 당연 장미지.

“아무래도 장미일 겁니다요, 어르신. 황녀 전하가 가장 사랑하는 꽃이 바로 장미 아니겠습니까.”

반쯤 내려진 커텐 안쪽에서 흥, 하고 살짝 비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그렇다면 그건 안 되겠군. 생각해 보니 인기 있는 꽃보단 없는 꽃이 낫겠어. 이봐, 요즘에 가장 인기 없는 꽃은 무엇인가?”

“…인기 없는 꽃 말씀입니까? 그것은….”

어려운 질문이었다. 상인이 머뭇대자 상대가 재차 물었다.

“모르겠나? 그렇다면 다시 묻지. 이 시기에 황도에서 가장 흔한 꽃은 무엇인가?”

흔한 꽃? 그는 눈알을 굴리다 대답했다.

“그거라면 물론 민들레겠습니다만…?”

어디든 피어나고, 생명력이 강한 민들레는 이 시기 황도 어디서나 피어나는 꽃이다. 때문에 굳이 누가 돈을 주고 사거나 재배하지도 않는다. 흰 민들레야 약재로는 써도, 노란 민들레는 꺾어 차로나 만드는 것이 다였기 때문이다.

상인의 대답에 마차 안의 상대가 반색했다.

“그래? 그랬군. 그럼 민들레를 주게.”

“예? 송구하오나 민들레는 딱히 파는 꽃이 아닙니다요 어르신. 아무리 저라도 민들레는 팔지 않는뎁쇼.”

“방금 자네가 가장 흔한 꽃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자네가 내게 몇 송이 꺾어다 줄 수 있지 않을까?”

마차에서 무언가 휙 떨어진다. 상인은 얼결에 떨어진 주머니를 주웠다. 입구를 열자, 누런빛의 금화가 수북하게 들어 있다. 양철통 수백 개를 팔아도 벌 수 없는 돈. 그는 힉 하고 숨을 삼켰다. 재, 재신이다!

“기, 기다리십시오!”

그는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인위적으로 조성된 화단에는 그의 말대로 어디서나 있는 민들레가 천지였다. 개중 송이가 크고 예쁘게 핀 것들을 재빨리 따 마차로 달려가자 차창으로 손이 나와 재빨리 꽃을 채 간다.

곧, 마차 안에서 만족한 듯 웃음이 새어 나왔다.

“좋군. 이거 무척 예쁘네.”

“헤헤, 맘에 드셔서 다행입니다요 어르신. 좋은 하루 되십시오!”

때마침 마차가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간다. 상인은 재빨리 고개를 숙이는 척하며, 멀어지는 마차 안쪽을 흘낏거렸다. 돈을 받고 나니 슬슬 상대의 정체가 궁금해졌던 것이다.

누굴까. 대체 어떤 재신이 고작 민들레를 사면서 이런 큰돈을…응?

“…헉.”

그는 입을 턱 벌리고 눈을 부릅떴다. 마차가 지나가며 흔들린 커튼 사이로, 순간 슬쩍 보인 얼굴은….

그는 찢어질 듯 커진 눈으로 멀어지는 마차 뒤를 응시했다.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텅 비었다. 손아귀에 들려 있는 주머니의 무게가 느껴지질 않았다. 아니, 자기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부터가 인지가 안 됐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숨을 쉬는 것조차 순간 잊었다가 허파로 가파르게 숨이 들이찬다. 그는 잠시 그렇게 서 있다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가 후들거려,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떨리는 목소리가 남자의 목구멍에서 새어 나왔다.

“세, 세상에….”

내가 지금 뭘 본 건가.

처, 천사?

*****

황녀의 거대한 저택 안쪽은 모여든 사람들로 넘쳐났다. 황도엔 본래도 귀족이 많았지만, 한 달 뒤 있을 사교계 시즌 때문에 더 북적댔다. 사교 시즌에 참여할 귀족 가문 사람들에게 있어 황녀의 생일 연회는 상당히 중요한 행사였다.

사교 시즌엔 지역별로 사람들이 모이기에, 좋은 사람이 있더라도 모를 수가 있다. 때문에 이 자리는 사교계에 나올 새 얼굴들의 면모를 미리 염탐하기에 좋은 자리였다. 사교계의 여왕이 친히 주최하며, 또한 사교계에 중요한 인물들이 대거 참석하는 자리. 허니 초대장이 없더라도 기어코 오는 자들마저 있는 것이다.

물론 ‘너그러운’ 황녀는 그런 사람들마저 다 포용했지만, 글쎄. 과연 그녀가 너그러운 마음만으로 그들을 포용하는지는 퍽 미지수라 하겠다.

어쨌거나 연회는 이미 시작되었다. 생일이라 그런 것인가? 여느 때보다 배는 화려한 연회에 감탄하며, 귀족들은 삼삼오오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연하지만, 그들 대부분의 대화 주제는 오늘 생일을 맞이한 황녀였다.

“황녀 전하는 아직이신가?”

“아직 연회 초반이지 않나. 오시려면 멀었지.”

그들은 연회석을 어슬렁거리며 언제쯤 황녀가 나오나 살폈다. 다른 귀족들도 좋지만 어쨌거나 오늘의 주인공은 레아누. 생일을 맞이한 황녀의 오늘 모습은 과연 어떠할까.

“오늘은 언제쯤 나타나시려나?”

“아무래도, 이전같이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 나서시겠지.”

레아누 황녀는 사람들의 흥이 가장 높을 무렵 나타나길 즐겨 했다. 흥이 높아지면 보다 빨리, 흥이 느지막하면 보다 늦게. 덕분에 사람들은 연회가 끝날 때까진 꼼짝없이 그녀를 기다려야 했다. 본래라면 해서는 안 되는 일. 그러나 오로지 그녀이기에 용인되는 일이다. 어차피 다들 그녀를 보고 눈도장 찍는 것이 목적이니 아쉬운 자가 우물을 파는 것이 맞기도 하고.

“오늘은 어떤 의상을 입고 나오시려나 모르겠군.”

“저번에 누군가 듣자 하니 …여신처럼 가장하여 나오신다는 소리가 있었네.”

“여신?”

“시녀들의 복장도 보게, 여신의 신관 복장이잖아?”

엄청 어울리겠네. 남자가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아름다운 여인이 여신처럼 가장한다니 보기만 해도 쓰러지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이번 연회 땐 보다 더 화려하게 치장하고 나오실 작정인가 보군.”

“그래, 그렇지. 아무래도 그 일 때문 아니겠나?”

“그 일? 아… 그거?”

짓궂은 웃음이 귀족들 사이를 훑고 지나간다. 모두 대놓고 말은 하지 않으나, 무얼 말하는 건지는 다 알아들었다.

“아무리 아들이 예뻐도 그래선 안 되는데 말이야.”

“맞네. 프로하우스 공작도 참 되도 않는 수를 쓰셨단 말이지…. 본래 이성적인 분 아니었나?”

“누가 봐도 무리수인 일을 왜 하셨을지…. 뭐 아프셨다 하니 그 탓일지도 모르지만.”

“쯧쯧, 자식 앞에선 부모란 다 똑같으니 말일세.”

프로하우스 공작이 황도를 벗어난 지도 벌써 오 년 남짓. 슬슬 그를 만나지 못했던 자들이 사교계를 채우고 있다. 이곳에 있는 자들은 그래도 공작을 만난 전적이 있는 자들이라 험한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허나, 이제 갓 사교계에 들어온 자들은 달랐다.

“다들 소문 들었지? 그 대단하시단 프로하우스 소공작께오선 행차하셨는가?”

“와핫핫, 나 같으면 절대 못 올 걸세. 아무리 황녀께서 초대하셨다 한들 말이야. 함께 있으면 대놓고 비교가 될 텐데….”

왁자지껄 떠드는 젊은 귀족들을 보며 나이든 귀족들은 혀를 찼다. 아무리 그래도 공작은 공작, 저들이 감히 말을 떠들 만한 상대는 아닌 것을.

“저들에게 적당히 하라고 누가 좀 말해 줘야 하나.”

“늙은 것들이 말해야 뭐 누가 듣겠소. 뭐, 그분이 돌아오면 좀 나아지겠지….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우셨으니 저런 것들이 설치는 걸세. 이제 새로운 후계자가 생겼으니 텅 빈 저택도 다시 차겠지.”

프로하우스 공작이 소공작을 위해 벌인 일들을 모르는 귀족들은 이 자리에 없다. 황녀의 의도대로 소문이 일파만파 퍼져 심지어 황제조차 이 일을 아니 말이다.

“헌데 소공작이 황도에 있긴 있나?”

“함께 온 수행원만 이백여 명이라 하지 않나. 그 큰 저택이 사람들로 가득 찰 정도인데 본인이 안 왔을 리가 있겠어.”

아들의 이번 황도행에 공작이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무리 공작가라도 무장 수행원을 그 정도까지 황도 안에 들이려면 해야 할 일이 무척 많다.

“황제께서 새 소공작을 궁금해하시겠군. 그분은 늘 프로하우스 공작가에 신경을 많이 쓰셨지.”

“글쎄, 폐하께선 이미 대부분을 알고 계시지 않을까 하네만.”

거의 진실에 가까운 추측을 하며 다들 포도주를 홀짝였다. 고대 여신을 모시는 신관 복장을 한 시녀들의 드러난 살결을 훑으며, 그들은 그 얼굴 모를 소공작이 언제쯤 올지 가늠했다.

“올까, 아니면 아니 올까. 그대들은 어찌 생각하나?”

“글쎄올시다. 반반 아니겠소? 물론 나라면 일단 몸을 좀 숙이겠지. 레아누 황녀 전하의 성격은 우리 모두 알지 않나.”

단지 이름이 동등하게 오르내렸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상황을 몰아세웠다. 귀족들도 대충은 다 안다. 아름다운 얼굴에 예민한 성격을 자랑하는 제국의 황녀가 무슨 짓을 하는지 정도는.

단지 황제의 총애와 사람들의 입방아가 우려되니 반쯤 눈을 감는 것뿐이다.

“젊은 객기로 온다면 어쩌실 거요? 아직 어린 청년인 데다 지방에서 자랐다니 이쪽 생리는 잘 모를 텐데.”

“뭐… 오면, 일단 말은 걸어 주세. 이런 일로 프로하우스 공작가와 척을 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아니겠나.”

그 정도라면 황녀도 눈 감아 줄 것이다. 어차피 오게 된다면 망신은 예견된 일이니, 예민하고 까칠한 황녀의 맘도 조금은 풀리겠지.

“어린 청년이 사교계 신고식을 호되게 치르겠군.”

뭐 그 나이 때엔 고생도 한 번쯤은 사서 해 본다지. 그들은 대충 입장을 정리하고 자리에 앉았다. 연회 분위기가 점차 무르익는 것이 눈에 보인다. 호탕하게 웃는 사내, 아리땁게 춤추는 여인들이 뒤섞여 분위기가 점차 흥겨워진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저택을 뒤덮어 밖으로 빠져나갈 때 즈음.

드디어, 그들이 기다리던 사람이 도착했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과 함께.

“제국의 빛, 제국의 영광, 제국의 어버이신 황제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모두 일어나 폐하께 예를 갖추십시오!”

“제국의 꽃, 제국의 보물, 제국의 꿈이신 레아누 황녀께서도 함께 납시십니다! 모두 두 분께 예를 갖추십시오!”

시끄럽던 홀 안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기함하며 자리에 일어나 바로 섰다. 맙소사, 황제라고. 황녀의 생일에, 황제 폐하가?!

다들 기겁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귀족들을 향해 황제가 쾌활한 웃음을 터트렸다.

“모두 즐거워 보이는군. 내 친애하는 누이의 생일에 이렇듯 많은 사람이 있을 줄은 내 참으로 몰랐다. 즐겁겠구나, 황녀?”

“물론 매우 즐겁나이다 폐하. 이렇듯 폐하께서 제 연회에 납시어 주시니 어찌 즐겁지 아니하겠습니까?”

“그러한가. 하긴, 내 너의 생일을 친히 축하한 적은 없었지.”

황제의 눈이 여동생을 아래위로 내리 훑는다. 레아누는 푸른 눈을 작게 접으며 호호 웃었다.

고대의 여신 복장을 한 그녀는 오늘 눈이 부시도록 요염했다. 몸매를 훤히 드러내는 고대 여신의 복장부터 아주 작정하고 꾸민 태가 훤히 난다. 훤히 드러난 팔과 어깨는 금으로, 황금빛으로 빛나는 머리칼은 보석 체인으로. 금과 은, 에메랄드가 박힌 샌들은 하얀 레아누의 발을 예쁘게 장식해 사람들의 시선을 현혹하고 있었다.

“오늘 아주 예쁘구나.”

“황공하옵니다 폐하. 오늘은 특별한 날이온지라, 많은 신경을 썼답니다.”

“그래, 그래 보이는군.”

그는 여동생을 흘낏 보고, 입가에 살짝 웃음을 걸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자들을 향해 손을 뻗어 올렸다.

“나는 이 자리에 황녀의 오라비로 온 것이니, 그대들은 마음껏 즐겨라. 잔치는 흥겨워야 마땅하니 향후로도 계속 이리 조용하면 짐은 그대로 돌아갈 것이다.”

“여러분! 황제 폐하의 명이시니, 모두 흥겨이 즐기십시오. 이 레아누, 여러분들이 즐기시지 않는다면 무척 슬플 것 같네요.”

황제에, 레아누까지 이렇게 나서 말하니 억지로라도 흥겨운 티를 내야 한다. 그들은 조금씩 소리를 내다 결국 에라 하고 아까처럼 소리를 높였다. 찬물이 끼얹어진 것 같던 연회 분위기가 조금씩 살아난다. 그녀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황제에게 포도주를 권했다. 상석을 양보하게 되었으나 불만은 없다.

황제가 와 준다면 그깟 상석, 백번도 더 줄 수 있었다.

“급히 오느라 선물을 가지고 오지 못했군. 시종장을 통해 뭐라도 보낼 터이니 말해 두거라.”

황녀는 정말로 깜짝 놀라 고개를 흔들었다.

“설마요! 저는 오늘 일로 이미 선물 다 받았습니다. 공사다망하신 폐하께서 이리 친히 왕림하여 주시다니요…. 제국의 그 누가 이런 호사스러운 연회를 누리겠습니까?”

이로써 그녀의 연회는 더욱 격이 높아졌다. 사교계에서 다른 이들보다 한발 더 앞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이미 견고한 발판을 가지고 있으나, 황제가 나서 반석을 다져 준다는 건 황후도 받지 못한 황은이다.

“대관절 무엇이 폐하의 발걸음을 이곳으로 이끌었을지 참으로 궁금하옵니다. 폐하께오선 이토록 급작스럽게 무엇을 하신 일이 없지 않습니까.”

“네가 날 잘 아는구나. 그래, 기실 네 말이 맞다. 짐은 본래 이곳에 올 생각이 없었다.”

황제의 눈가에 은근한 웃음이 스쳤다.

“허나 아무리 나라도 가끔은 호기심이 생길 때가 있단다. 황궁의 심처에 있어도 세간의 흥겨운 소문은 들려오는 법이지. 특히 이번 일은 참으로 흥미로워, 이 나조차 친히 무거운 걸음을 떼게 만들었지… 레아누.”

에둘러 말하는 황제의 말에 레아누는 풍성하게 올린 속눈썹을 깜박였다. 길게 뻗은 속눈썹이 황녀의 얼굴에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무엇일까, 이 말은.

황제의 말은 매우 은밀하고, 또 이상한 비밀이 숨겨져 있어 알아채기 퍽 어려웠다.

“소녀가 어리석어 폐하의 뜻을 감히 헤아리지 못하겠나이다. 소문이라 하시오면… 제 생일을 말씀하시는 것이 맞는 것일까요?”

“크게 보면 맞긴 하다. 허나 정확하지는 않지. 짐은 그 생일에 수반된 소문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란다. 그 소문엔 아무리 나라도, 차마 무시 못 할 이름이 하나 엮여 있었으니 말이야.”

황제는 천천히 색을 달리하는 여동생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짙어진 푸른 눈동자 너머 경악이 서려 있는 모습을 보자니 온 보람이 있는 것도 같았다.

“…프로하우스 소공작을 말하시는 것이로군요.”

“너의 영민함이 참으로 기껍구나.”

황제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가 여동생을 귀애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빼어난 외모는 황가를 찬양하기 좋았고, 영민한 눈치는 적당한 선을 지켜 사교계를 조율했다. 본디 황후에게 주어질 일을 내버려 둔 건 바로 그 탓이었다.

하지만 몰래 이렇듯 재미있는 일을 꾸며 주다니….

그 재주가 용하다고 해야 할지, 참으로 겁이 없다고 해야 할지.

“폐하. 저는….”

“네 생각 정돈 나도 안다. 황도에 내 눈과 귀가 없는 곳이 어디 있겠느냐? 소공작이 너와 같이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이 싫었겠지. 또한 그가 로메인 경과 혼약한다는 소문에 퍽 불쾌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깜찍한 일을 기획했던 것이겠지…?”

황제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여동생을 응시했다. 레아누는 순간 오한이 일었으나 참았다. 어쨌거나 황제는 그녀를 아낀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이리 말을 하지도 않았을 터. …그것을 믿어 보기로 했다.

“…단지 사교계의 일일 뿐이에요 폐하. 일종의 유희랍니다. 어차피 곧 있으면 잊힐 일이지요. 아시잖아요? 이런 사소한 건, 사교계 일정이 시작되면 다들 잊는답니다.”

“글쎄, 다른 건 몰라도 이번 일은 그리 쉽게 끝나지는 않을 거란다. 만일 그랬다면 짐이 왜 여기까지 친히 왔겠느냐?”

공작을 모르는 바 아니면서 어찌 이런 짓을 했을까. 오 년이란 시간은 황녀에게도 망각을 선사했단 말인가. 그녀가 제대로 기억했다면, 소공작에게 이런 일을 행하지 않았을 텐데.

“프로하우스 공작은 보기 드물게 이성적인 자이지. 허나 그만큼 자존심이 세고, 다루기 퍽 힘든 작자야. 그자가 어느 편에도 넘어가지 않고 중앙을 지켜 주기에 짐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정국을 조율할 수 있었다. 허나 이번 일로 그들 사이에 알력이 생기면, 짐은 퍽 고단해질 것 같구나.”

황가의 금안이 살짝 빛을 낸다. 레아누는 고개를 숙이고 몸을 떨었다. 적통 황가에서 드물게 나온다는 금안은 보는 이에게 은근한 위협을 주는 존재였다. 황제는 그런 여동생을 보며 혀를 찼다.

“뭐 그렇다고 널 탓하지는 않을 것이다. 짐은 귀찮은 것이 무척 싫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는 것이란 건 잘 알고 있다.”

“……망극하옵니다 폐하.”

조금씩 떨려 오는 손을 손가락이 톡톡 두드린다. 황제는 겁먹은 여동생을 향해 은근히 일렀다.

“걱정 마라. 짐이 이번 일로 널 벌하는 일은 없을 것이니…. 프로하우스의 새 후계자를 만나는 것도 네 마음대로 하려무나. 그와 무슨 대화를 하건, 짐은 손대지 않을 것이다. 허나 알아 두거라. 이번 네가 한 일로 인해 사교계에 벌어질 일들은, 오롯이 네가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짐도 도울 수가 없으니 말이야.”

“폐하.”

레아누는 숙였던 고개를 살짝 들었다. 설핏 굳은 얼굴 위로, 희미하게 붉어진 기가 노을처럼 스며 있다. 자존심이 상한 나머지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제가 여파를 감당치 못할 일을 꾀했겠사옵니까. 정치는 모르오나 사교계라면 마땅히 제 선에서 끝낼 수 있사옵니다. 정치는 폐하의 일이나, 사교계의 일은 제 일이지요.”

“호오. 그러하냐?”

“물론이옵니다.”

황녀는 눈을 빛내며 몸을 바짝 세웠다. 오래전에 사라진 망국에서 섬겼던 고대 여신의 복장이 그녀의 몸 위에서 찰랑대며 빛을 발한다. 이것은 미모를 무기 삼는 여인의 전투복이다. 사교계는 전장이요, 그는 무기일지니.

그리고 그녀는, 나이를 먹고 난 뒤론 단 한 번도 그 전장에서 져 본 기억이 없었다.

“폐하의 말씀대로, 저는 그에게 잠깐의 망신을 줄 계획입니다. 공작의 지나친 선전으로 거품이 낀 외모에 대한 찬양이 그것이지요. 망신을 당한 그에게 저는 너그러운 용서를 내릴 것이고요. 애초 황가와 공작가의 사이에 흠이 갈 일은 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저는 외려 그를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도 조금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분에 과한 명성은, 사교계에선 독일 뿐이지요.”

“과한 명성이라….”

황제는 고개를 외로 숙여 머리를 괴었다. 짐짓 재밌다는 기색이 눈가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누가 그러더냐?”

“무엇이 말이옵니까?”

“네가 이 웃기는 겨룸에서 이길 거라, 누가 말하더냔 말이다.”

레아누의 눈가가 미세하게 굳었다. 누구냐니, 대부분의 사람이 그리 생각하는데.

“…뭇 사람이 제게 붙여 준 말은 허명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붙여 준 말은 제국 제일미. 즉, 다른 미인이 있다면 그런 말이 붙을 리 없다는 의미다. 딴은 맞는 말이었다. 허나 황제는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랬지. 제국 제일미라….”

“제가 자만하고 있다 생각하시옵니까? 허나 폐하, 저는 자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말을 믿을 뿐입니다. 진실로 저보다 아름다운 이가 있다면, 제가 그 자리에 오를 리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렇게 생각하느냐?”

“예, 폐하. 몹시 그러합니다.”

“그러하냐? 그래, 그렇단 말이지.”

쾌활하기도 하고, 재미난 것을 보는 것 같기도 한 시선이 황녀를 응시한다. 그는 제법 긴 시간 자신의 여동생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선황제의 딸인 그녀는 사실 선황녀라 부름이 옳다. 허나 아버지의 늦둥이로 태어난 그녀는 황제와 부모 자식뻘 간의 차이가 났고, 본인도 선황녀란 말이 싫어 황녀로 부르게 했다. 그런 그에게 여동생은 퍽 귀여운 존재였다. 황자도 아니고, 그저 여동생이었기에 예뻐하기도 좋았고. 더더군다나 얼굴까지 아름다웠으므로 그는 의도적으로 그녀에게 제국의 보물이란 이명을 씌워 주었다.

그게 잘못이었던 걸까.

황제는 처음으로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나 의심했다. 내가 잘못 생각했었을까. 여태 그녀의 그 큰 자부심은 저 외모에서 나왔고, 자신이 붙여 준 이명에서 나왔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저렇게 용모에 모든 것을 거는 듯한 행동은 좋지 않다. 몇 년간은 그녀가 하는 행동을 그저 두고 봐 왔지만…. 저토록 하나를 믿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다 보면 언젠가는 황가가 어찌 못할 상황에 빠질 수도 있는 법.

아무리 그녀를 귀애한다 해도, 황가보다는 중요하지 않다.

새는 언젠가는 알을 깨고 날아가야 한다. 그녀가 용모라는 알 속에 갇혀 있다면, 그 자신감을 깨어 주는 것도 마땅히 좋은 일이다.

그는 눈을 들어 연회장의 열린 문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그가 기다리고 있던 자가 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좋군. 아주 좋구나.”

황제의 시선을 따라 황녀의 시선이 천천히 옮겨 간다. 연회장 문을 통해 누군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가 안으로 들어올수록, 멀찍이 있던 귀족들이 개미 떼처럼 와글와글 모였다가 훅 쓰러진다. 그게 계속 이어졌다.

“…뭐, 뭐죠?”

황녀는 희한한 걸 봤다는 듯 그쪽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리고, 그들이 쓰러진 게 일부러가 아니란 걸 알아챘다. 다들 다리가 풀려 있었다. 거기다 눈과 머리는 들어오는 사람 쪽으로 쏠려, 차마 다른 곳으론 눈길도 돌리지 못한다.

곱게 단장한 얼굴 위로 살짝 실금이 생겼다.

“뭐지? 대체 저 모습은….”

“보이지 않느냐?”

짐은 보이는구나. 황녀는 고개를 흔들며 보이지 않노라 대답했다.

“소녀의 안력으론 저곳을 볼 수 없는 듯합니다. 폐하, 저들이 왜 저러고 있는지 제게 말하여 주실 수 있으신가요?”

“직접 보거라. 이제 거의 다 왔구나.”

그의 말대로, 그들은 이미 가까이 왔다. 이 정도면 그녀도 볼 수 있었다. 황녀는 눈에 힘을 주고 둘을 응시했다.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시간이 간다. 머나먼 상석에 있어 보이지 않던 상대의 모습이, 서서히 커졌다.

그리고.

“…!”

심장이 멎었다.

*****

상대는 남자였다.

붉은색과 흰색이 적절히 조화된 예복을 입고, 무릎까지 오는 검은 망토를 한 남자. 기사의 에스코트를 받고 있으나, 입고 있는 예복이나 체격을 보면 분명 남자임이 분명하다.

머리칼은 갈색이다. 공들여 빗은 듯한 머리칼은 퍽 길고, 또 윤기가 흐르지만 그저 그뿐. 그걸 헐렁하게 땋아 목 아래 늘어트리고, 어디선가 꺾은 것 같은 노란 민들레로 사이사이를 장식했다.

저잣거리의 아이도 그렇게는 꾸미지 않을 것이다. 하다못해 장미도 아니고 고작 민들레라니. 길거리에 피어난 민들레만큼 흔하고 쓸모없는 것이 어디 있다고.

그러나 그런 실소도, 상대의 얼굴을 본 순간 자연스레 잊는다. 반쯤 비웃고 있던 생각도, 시선도, 모두 일거에 사라지는 충격.

―아름답다.

순간, 그 한마디만 생각이 났다.

발걸음을 따라 흔들리는 머리채 위로 빛이 떨어지는 것 같다. 똑같은 샹들리에 아래인데, 이상하게도 그를 제외한 주변만이 흐리게 옅어진다. 누군가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홀로 고고히 빛을 낸다. 주변이 온통 어둠으로 잠긴 곳에서, 홀로 은은한 빛을 발하는 것처럼 보였다.

갓 짜낸 우유처럼 희고 윤기가 흐르는 얼굴, 붉은 꽃잎이 머무는 것 같은 입술은 사람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는다. 그러나 그 위에 자리한 것은 그저 말로는 표현하기도 힘들 정도였으니….

우아하게 아치를 그리는 눈썹, 그 아래 자리한 초록빛 눈동자와 부드럽게 솟아오른 오똑한 코.

정확한 대칭으로 자리한 이 이목구비는 화가가 있었다면 제발 그리게 해 달라 빌 정도로 완벽했다.

가까이서 그를 본 자들은 이미 몇몇은 실신 상태였다. 태양 아래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싱그럽고, 사람의 한숨을 자아낼 정도로 반짝이는 눈동자는 보는 이의 혼을 앗아 갔다. 그건 무척이나 여린 초록빛이었다.

섬세하고, 조화로우며, 더불어 그 이상 아름다울 수 없을 것 같은 용모.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곱고, 화려하며, 동시에 우아하다.

만일 세상에 신이 있다면 저이 한 명을 위해 모든 힘을 쏟았을 것이다. 혹은 세상에 신이 존재한다면, 아마 저런 얼굴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완벽하고 찬란한 존재였다.

“저, 저이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신음했다. 실로 충격적이고 믿어지지 않는 상황이다. 이는 레아누도 똑같았다. 그녀는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그저 입만 멍청하니 벌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상대가 미친 듯이 궁금해졌다.

대체 저이는 누구지. 누구이길래 저토록 아름다운가?

그렇게 조용해진 연회장에서, 아름다움을 사람으로 빚은 것 같은 존재가 입을 열었다.

“제가 조금 늦었군요, 레아누 황녀 전하. 생일을 축하드립니다. 마차 때문에 길이 막혀, 도저히 제시간에 올 수 없었답니다. 하마터면 이런 화려하고 고상한 생일 연회에 오지 못할 뻔했지요. 초대해 주셔서 무척이나 영광입니다.”

헉… 떨리는 옥음에 사람들은 숨을 헐떡거렸다. 저 얼굴에, 목소리까지 완벽하다니.

모두가 조용한 채 그만을 바라본다.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정신을 차리고 있던 황제가 친히 그에게 하문했다.

“내 누이의 생일 연회에 온 것을 환영한다. 그대는 늦었다고 말하지만 사실 내 누이의 연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대 또한 늦은 것이 아니지. 헌데 오늘따라 호명하는 자가 게을러 모두 그대가 누구인지 듣지 못했구나. 그대는 누구인가? 짐은 이 제국의 황제인즉, 그대가 누구인지 직접 밝히거라.”

“!”

황제를 바라보던 남자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맙소사 폐하! 신 알렉시아노 드 프로하우스, 제국의 하나뿐인 태양께 인사 올립니다.”

“신 로메인 드 데퓨탄, 제국의 창대한 미래에 감히 인사 올립니다.”

연이어 두 사람이 황제에게 예를 올렸다. 목소리는 작았으나, 여파는 거대했다. 가만히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헉 소리를 내며 속삭였다.

…프로하우스 소공작!?

모든 이가 경악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것은 레아누도 마찬가지였다. 저, 저이가 소공작이라고? 소문의… 그?!

“프로하우스 소공, 로메인 드 데퓨탄 경은 자리에서 일어나라.”

“황공하옵니다!”

“황공하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로메인은 그림자처럼 렉시의 등 뒤에 섰다. 이번 연회에선 철저하게 기사의 역만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이를 눈치챈 황제는 일부러 로메인을 무시했다. 평소라면 한 두어 마디 더 건넸을 것이지만, 지금은 눈앞의 미인이 먼저다. 황제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하문했다.

“그대가 정말 기즈 공작의 아들이라고?”

“그러하옵니다 폐하. 신의 아버님이 기즈 공작 전하십니다.”

“…참으로 놀랍구나. 역시, 그랬군. 과연 그랬어.”

무엇이 역시인지 모르겠으나, 황제는 매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크게 웃었다.

“기즈 공작이 헛말을 할 리 없지. 소문이 과하다는 말이 있어 혹시나 하였으나 역시 그게 허언일 뿐이었다. 외려 소문이 실물보다 덜하잖은가?”

“말하기도 부끄러운 소문입니다. 허나 그것이 폐하의 성심을 흡족하게 하였다니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프로하우스 소공의 얼굴 위로 슬며시 붉은 기운이 서린다. 수줍어하는 얼굴로 몸을 숙이며, 가슴에 손을 대 죄를 청한다. 하는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고상하고 아름답기 이를 데가 없었다. 몸짓 하나하나가 마치 망막에 새겨지는 것처럼 선명했다.

황제가 무릎을 탁 쳤다.

“공작이 후계자를 들이지 않아 늘 걱정스러웠지. 허나 짐은 지금 그대를 만나 매우 흡족하구나. 내 걱정도 사라졌지만, 그대야말로 프로하우스 공작가의 사람들 눈이 제대로 달려 있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움찔하며 황제를 바라봤다. 자연스레 옆에 있던 황녀와, 상석 아래서 예쁘게 미소하는 렉시를 동시에 비교한 그들은 탄식했다. 아아 이럴 수가.

‘공작이 왜 그런 소리를 했는지 알겠구나! 그의 말이 맞았어!’

짙고 묵직한 후회가 사람들을 뒤덮었다.

황제의 말은 그간 저잣거리를 휩쓸고 있는 예의 소문을 꿰뚫는 것이었다. 거짓인 줄 알았으나, 실은 무척이나 진실을 담고 있던 그 소문.

그리고 이곳엔 그 소문에 이래저래 일조한 자들밖에 없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황녀에게 망신을 당할 거라 단언하던 자들은 제 입을 치고 싶었다. 민망함과 부끄러움, 후회가 얼굴 위를 내리 달렸다.

“그저 황공할 뿐입니다. 저에 대해 사람들이 그리 말하고 다녔다는 것을 이곳에 온 뒤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말들이 황도를 들끓고 다닌 것 또한 뒤늦게 알았지요. 황도에 오기 위해 긴 여행을 마친 터라, 소문이 늦었습니다.”

“본래 자신의 소문은 자신이 가장 늦게 아는 법이지. 게다가 여행 중이었으니 응당 몰랐을 것이고. 짐은 이해한다.”

“참으로 당혹스럽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미 벌어진 일은 제가 돌릴 수도 없을뿐더러, 가문의 이름까지 오르내리니 솔직히 많이 당혹하였지요. 본의 아니게 황도를 시끄럽게 하였으니 황송할 뿐입니다. 황도의 사정과 사교계의 사정을 아직 모르는 저이기에 대처가 힘들었던 점, 용서해 주십시오.”

황제는 렉시의 정중한 사과에 짧게 웃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건 그대가 사과할 일이 아니다. 이곳이 초행인 그대에게 내 친히 가르침을 내려 주지. 혹 들어 본 적 있나 모르겠구나. 황도에서 가장 좋은 건 좋은 소문이고, 가장 나쁜 건 소문이 아예 없는 것이란 말을 말이야. 과정이야 어떠하건, 황도에선 이름이 오르내리면 좋다. 자연스레 명성이 높아지는 일이기 때문이지. 그러니 이번 일을 전화위복 삼으면 좋을 것이다. 이렇게 자네가 사교계에 첫발을 내디뎠으니, 곧 제대로 된 소문이 퍼질 것 아닌가?”

“참으로 황공하기 이를 데 없사옵니다. 허나 폐하, 이렇게 말하는 저를 부디 용서하십시오. 적어도 신은 그렇게 명성을 높이는 일을 좋아하긴 힘들 듯합니다.”

“…오호?”

황제의 입가에 보기 드물게 진한 미소가 맺혔다. 아까부터 계속 미소 짓는 황제 때문에 사람들은 얼떨떨했다. 제국의 황제는 어지간한 일론 기쁜 기색을 드러내는 법이 없다. 헌데 이런 일상적인 대화에서 그가 이토록이나 호감을 표하는 건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황도에서 명성을 높이기 위해 암약하는 자들이 들으면 무척 실망하겠구나. 명성을 드높이는 일에 관심이 없다니 말이야. 어째서 그리 생각하느냐?”

“존경하옵는 폐하, 황도에서 명성이 중요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 허나 영지를 다스리는 데 있어 필요한 것은 명성이 아니라 일신상의 능력입니다. 저는 차후 공작령을 다스릴 것인데, 드높은 명성에 비하여 실력이 일천하다면 사람들이 크게 실망하겠지요. 차라리 명성 없이 무난히 다스리면 실망 없이 무난한 세월이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하여 제가 영지를 지혜로이 다스린다면 명예는 알아서 높아질 것이니…. 허니 굳이 그렇게 명성에 목매고 싶진 않습니다. 그리고 특히나 이번 일은 제 외모에 관련된 일이지 않습니까. 신은 저의 외모가 남들 입에 오르내리는 걸 기꺼워하는 편은 아닙니다. 외려 조금, 불편해하는 편이지요.”

황제의 눈가가 의아하다는 듯 좁혀졌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뒷말은 그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째서 그렇지? 이 황도에서 잘생기고 아름다운 자들은 사람들의 호감을 산다. 명성에 개의치 않는다지만, 그대의 외양은 사교계 생활에 있어 큰 이득이 될 것이다. 황궁 역시 사교계의 상황과 대동소이하니, 이는 황궁 생활에도 도움이 되겠지. 가상으로 꾸민 것이라면 비웃음을 사겠으나, 자네의 것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허니 기왕 가진 재산을 편리하게 쓰면 되지 않나?”

“폐하, 자고로 단것을 너무 먹다 보면 병이 들게 마련입니다. 한 가지에 너무 의존하다 보면 어느 순간 다른 것까지 잃게 되는 것이 순리지요. 게다가 외모란 것이 어디 평생 가는 것이던가요? 저 또한 언젠가는 늙을 것이고, 그리하면 그것으로 얻는 것 또한 사라질 겁니다. 저는 제 외모를 앞세워 뭔가를 얻기보다, 제 스스로의 능력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되길 희망합니다.”

마치 누구 들으라고 하는 것 같은 이야기였다. 물론 뜻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실로 그렇게 들렸다. 아무리 넋이 빠져 있었다 한들 황녀의 귀에도 이 말은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에 노기가 스며들었다.

―건방진 것, 나를 비난하는 것이지 지금?

렉시의 말에 황녀는 바르르 떨었다. 사정 모르는 사람이 듣기엔 참으로 겸손한 말이다. 허나 그녀에겐 저것이 자신을 욕하는 것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황녀는 분노하며 렉시를 노려보았다.

감히 폐하 앞에서 날 욕 먹이다니, 저자가 제정신인가?!

분노로 부들부들 떠는 황녀의 모습은 멀리서도 잘 보였다. 그러나 황제는 그저 렉시를 향해 질문을 계속했다.

“재미있군. 그대는 본인에게 상당히 박한 편이야. 자네 같은 용모는 짐도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이다. 가히 제국 제일이라고 말해도 될 정도이지. 헌데 자네는 그런 용모가 고작 나이 좀 먹는다고 사라질 거라 생각하나?”

“꽃은 피면 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참으로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지요. 세월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앗아 갑니다. 세상 누구도 시간이 가져오는 세월에선 빗겨 나갈 수 없습니다. 저는 이런 세월과 끝이 보이는 도박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런, 이런.”

금빛 눈동자가 달처럼 깊게 휘었다. 깊은 배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은 묵직한 목소리가 홀을 울렸다.

“프로하우스 공작이… 참으로 지혜로운 후계자를 얻었군. 훌륭하구나.”

“!!”

전례를 넘어선 파격이다. 사람들은 입을 벌리며 위를 바라보았다. 황제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다니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쳐도 이것보단 덜 놀랄 거다. 아무리 그냥 생일 연회라도 이정도 규모면 거의 공식적인 자리다. 헌데 거기서 친히 공작의 후계자를 크게 인정하는 말씀을 내시리다니…?!

이건 다른 후계자들도 받지 못했던 크나큰 황은이다. 허나 정작 당사자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고개만 숙였다. 아무것도 모르니, 보물이 보물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허나 신은 그저 당연한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 당연한 것이 제일 어려운 것이다. 가진 것에 취한 나머지 이리저리 일을 저지르는 무지몽매한 이가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프로하우스 공작도 참 복이 많구나. 용모에, 지혜까지 갖춘 자를 후계자로 삼다니 말야.”

가일층 기가 막힌 상황이다. 레아누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잊고 입을 떡 벌렸다. 총애받는다는 그녀조차도 저렇게 한자리에서 저런 찬사를 들은 바 없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안 되겠다. 내 직접 나서야겠어.’

황도에서 그녀는 사교계의 여왕이었다. 황후가 있음에도, 그녀는 늘 사교계를 평정했다. 누구도 그녀의 지위에 대적할 수 없었다. 그녀의 처세, 지위, 외모가 그걸 가능케 했다.

허나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철통같던 지위가 내려앉을 기미가 보였다. 수년간 황실에서 단련된 레아누는 이것이 매우 안 좋은 전조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불길한 건 황제가 저 프로하우스 소공작에게 잔뜩 호의를 베푼다는 것이다. 여태까진 자신만이 특별했건만, 특별한 자가 둘로 늘었다.

그녀는 재빨리 황제에게 말을 걸었다.

“폐하.”

“응? 왜 그러느냐 레아누.”

“폐하께선 저이가 참으로 맘에 드시나 봅니다. 근래 폐하께서 그리 좋게 평한 이는 저이가 유일한 듯하군요. 프로하우스의 소공이 그리 마음에 드십니까?”

“그래. 참으로 요즘 사교계에선 보기 드문 인물 아니겠느냐. 저 외양도 그러하나, 속에 든 것은 더욱 맘에 든다.”

“이런, 다행입니다. 제가 저이를 초대한 것이 폐하께 이토록 큰 기쁨을 주다니, 이 레아누 역시 기쁘기 짝이 없답니다. 폐하의 기쁨이 곧 저의 기쁨 아니겠습니까?”

“너의 연회는 언제나 즐거웠으나, 이번 연회는 특히나 더 즐겁구나. 황녀의 이번 생일은 특별하니 나중에 상을 내려 주마.”

“황공하옵니다 폐하. 이 레아누 무척이나 기쁘옵니다. 헌데 혹 가능하다면, 그 생일 선물. 지금 미리 받으면 아니 되겠습니까?”

“……지금?”

레아누의 청에 황제는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자신의 여동생을 잘 아는 그다. 그는 자신의 여동생이 무언가 꾸미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생일 선물이라…. 그래, 좋지. 무얼 받고 싶으냐.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사람을 보낸다면 연회가 끝나기 전엔 줄 수 있단다.”

“아니옵니다 폐하. 소녀가 받고 싶은 선물은 폐하께서 지금 당장 주실 수 있는 것이랍니다. 감히 어찌 폐하께 그리 어려운 선물을 청하겠습니까?”

“…그래? 허면 말해 보려무나.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폐하, 제가 원하는 것은…. 저 아름다운 소공과의 대화입니다.”

“뭐라?”

잠시 생각한 황제는 그녀가 무얼 원하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황제가 저이와 말하는 걸 그만두길 원하는 것이다. 허나 그는 그저 웃었다. 참으로 건방지기 짝이 없으나, 오늘은 그녀의 생일이다.

“레아누. 참으로 흥미로운 요구로구나. 저자와의 대화를 선물로 달라…. 아무리 짐의 총애가 깊다 하지만 짐의 기분이 상하는 건 생각지 않느냐?”

“폐하, 통촉하여 주소서. 소녀는 단지 저토록 아름다운 이를 처음 보아 궁금했을 따름입니다. 제가 어찌 폐하의 성심을 흐리게 하겠습니까?”

이쯤 되니 기대까지 된다. 분명 만만찮은 짓들을 할 게 뻔한데, 절대 황제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을 거라니.

황제는 불쾌한 마음을 접고 여동생을 응시했다. 은근슬쩍 총애의 한계를 넘어서는 여동생이 괘씸했지만, 동시에 그걸 보고 싶다는 욕망 역시 존재했다.

무슨 꿍꿍이인지. 어떤 짓을 할 것인지.

“…좋다. 어쨌거나 오늘은 너의 생일이니, 짐이 친히 자비로움을 하사하마.”

“황공하옵니다 폐하. 감사하옵니다!”

“그대의 생일을 축하하노라 황녀. 내가 널 위해 뭐든 못해 주겠느냐?”

비록 서로 다른 속셈을 품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보기 드문 남매간의 우애다. 특히 황제의 우애였으니 보기 참 각별했다. 보는 사람들은 모두 다 두 사람의 우애를 칭송했다. 렉시 역시 이 우애엔 상당히 놀랐다.

‘대단하군. 황제의 총애가 정말로 깊구나.’

하긴 스물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황도에서 버틴 거 보면 알 만하다. 보통 선황제가 죽고 새 황제가 즉위하면, 황제의 여형제들은 타국으로 시집을 간다. 허나 레아누는 그 외모와 황제의 총애로 여태 황도에서 살면서 그 부와 세력을 축적했다. 그것만 보아도 그 총애의 깊이는 능히 짐작할 만했다.

‘분명 뭔가 꾸미려고 대화를 청한 거겠지. 정신 바짝 차리자.’

렉시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이상한 소문까지 퍼트린 여자가 새삼 자기에게 좋은 일을 할 리는 없을 것이다. 뒤에 있던 로메인이 앞으로 나오려 하자, 렉시는 손으로 그를 막았다. 맘은 고마우나 지금은 로메인이 나설 수 없는 자리. 독대한다 하였으니 로메인은 존재해도 존재하지 않는 자와 같았다. 렉시는 로메인에게 살짝 속삭였다.

“나서지 말고 계세요. 황녀가 청한 건 독대였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로메인이 다시 뒤로 갔다. 그의 체온이 떠나가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렉시는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드디어 황녀가 고개를 돌리며 그에게 인사했다. 생각보다 시작은 무척 평범했다.

“반갑습니다 프로하우스 소공. 먼 곳에서 오시느라 노고가 무척이나 크셨겠어요. 여행이 퍽 길었을 텐데, 여행길은 순조로웠는지 참 궁금하네요.”

“황녀 전하의 염려 덕분으로 안전한 여행이었습니다. 덕분에 세상이 이토록 크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기도 했지요. 아마 이번 연회가 아니었다면 겪지 못했을 것입니다. 황녀 덕분에 세상 구경을 하게 되었으니, 퍽 좋은 여행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머, 그렇군요 세상 구경이라…. 조금 의외네요. 보통은 좀 더 어릴 때 다 끝내는 과정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지요. 하긴 소공께선 꽤 오랫동안 지방에서 자라셨다 하지요? 그렇다면 응당 제국의 거대한 면면을 보기 어려우셨을 만하군요. 호호….”

말투는 상냥하나 내용은 비수 같다. 겸양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상대를 비웃는 황녀의 특기란 목도하니 실로 무시무시했다. 와, 저 말에서 저런 거리를 곧바로 찾아내…? 과연 사교계의 여왕이란 단어가 무색하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고작 그거 가지고 물러설 렉시는 아니다. 그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그녀의 말을 웃어넘겼다.

“예, 아무래도 조금 늦긴 하였지요. 하지만 딱히 지방에서 자라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른 지방의 귀족 분들은 아마 저보다는 이르게 세상을 보셨을 테니까요. 저는 단지 절 키워 주신 아버지의 당부 때문에 어쩔 수 없게 그리된 것이랍니다.”

“키워 준 아버지라면… 저도 들어 안답니다. 그 페르귄 자작이라는 분이셨지요?”

“비슷합니다. 페르귄의 남작이셨지요.”

“어머, 이런 실수했군요. 미안합니다 소공. 제가 남작을 자작으로 잘못 알았네요.”

미안하긴, 일부러 그랬으면서. 남작이란 걸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언급까지 한 걸 자기가 모를 줄 아나 보다. 렉시는 기가 차 웃음도 안 나왔다.

‘진짜 대단하네, 저런 식으로 하는 거였나?’

이 말만 고운 개싸움이라니 너무나 새롭다. 황도의 사교계란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그간 걱정하고 고뇌했던 시간들이 다 아까워지는 순간이었다. 렉시는 슬슬 열이 받았다. 저걸 대체 어떻게 해 줘야 잘했다고 소문이 날까.

―아들, 사교계에선 뭘 하든 네 아버지같이만 해라. 그리고 실수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원하는 대로 해. 뒷일은 내가 책임지마. 내가 이래 봬도 공작이야. 응?

‘과연, 어머니. 이런 상황까지 예상하셨군요.’

순식간에 스치고 지나가는 목소리. 마치 이때를 대비한 것처럼 보이는 내용이 얼마나 놀라운지 모르겠다. 렉시는 결심했다.

그래, 인생 뭐 있냐. 한번 질러 보지 뭐.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이다. 권력자가 뒤 봐준다는데 한번 깽판 정도는 쳐 봐야 하는 게 아들 된 도리 아닐까?

그리하여, 그렇게 렉시의 깽판 아닌 깽판이 시작되었다. 아는 사람만 안다는 페르귄 남작의 전매특허. 철판과 무적의 수다가 아들의 몸을 통해 현현된 것이다.

“사실 저는 어릴 때 지금보다 더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뭐 제 얼굴이니 잘은 모르겠지만, 남들이 그렇다 하더군요. 사실 당시의 저는 제 외모에 상당히 무지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가 예쁘단 사실도 몰랐죠.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 사람이 예쁜 걸 어떻게 모를 수 있느냐? 하실 겁니다. 허나 생각해 보면 당연합니다. 페르귄 가문이 페르귄 남작령을 다스린 기간이 물경 천년. 저는 그 가문의 독자였으니, 영주민들이 뭐라 말한들 당연한 걸로 알아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 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허나 다행스럽게도 이런 제겐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제 아버지께선 이 외모의 위험성을 무척 잘 알고 계셨던 것이지요. 아버지는 저와 달리 전쟁에도 다녀오셨고, 세상살이에 눈이 뜨인 분이셨지요. 그래서 그분은 저를 나가지 못하게 막으셨던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알 게 뭔가, 내가 그렇다는데.

갑자기 시작된 수다에 황녀의 눈빛이 따가웠지만, 렉시는 무시했다. 사교계든 어디든 과도한 자기 자랑은 미덕이 아니긴 하지. 허나 이곳은 수도고, 미인이 하는 일은 뭐든 용서가 된다 그랬다. 아까 황제가 공언하지 않았나?

그리고 장담컨대, 이 자리에서 렉시만큼 아름다운 사람은 없었다.

“물론 생각기로, 제가 아름답다고 아버지가 말해 주면 좋을 일이긴 했습니다. 허나 아버지는 제겐 제 외모에 대한 이야길 금하셨지요. 왜 그랬을까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건 아마 알아 봐야 좋을 일 없다 생각하신 게 아닐까 합니다. 하긴 맞는 말입니다. 어릴 때 자기가 잘난 거 아는 애들은 커서 안하무인이 되곤 하지요. 저는 남작령을 이을 독자였고, 엇나가면 골치 아픈 처지였으니 아버지가 강하게 키우려고 하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아버님이 퍽 원망스러웠습니다. 자라나는 청년에게 영지 내에서만 놀라니, 어디 말이나 됩니까? 그러나 제가 나이를 먹고, 영지 내의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 밖으로 나섰을 땐 아버지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말이지, 너무나 미친놈들이 많았으니까요. 여행 내내 납치와 감금을 시도했고, 자칫 위험할 뻔했던 순간은 셀 수가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나마 제가 나이가 좀 들었고, 젊은 남자였으며, 누구보다 검 잘 쓰는 호위가 있어 별일이 나지 않았던 겁니다. 그것들이 아니었다면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있기 힘들었을 테지요.”

“…저, 저런! 그런 안타까운 일이.”

반쯤 흘려들을 줄 알았는데 누군가 듣고는 있었나 보다. 렉시가 말이 나온 방향으로 웃으며 인사했다. 황홀한 미소를 받은 사람들이 순간 헉 하고 숨을 삼켰다.

“감사합니다. 제 고통에 동감해 주시다니 맘이 퍽 편안해지네요. 뭇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이 좋다고 합니다만, 솔직히 전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저만큼 생기다 보면 별일들이 참 많이 생기거든요. 전 지금도 거리에 나설 땐 베일을 쓰고 다닙니다. 귀찮지만, 더 귀찮은 일을 피하려면 이 정도 불편함은 감안해야 하더군요. 안 그렇습니까 황녀 전하?”

“예…예? 아, 네. 그렇…죠.”

당황한 황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변한 분위기에 어떻게든 적응해 보려고 하는 모양인데, 내가 그런 시간을 줄 리 없지.

“어린 시절 제국을 보았다면 참 좋았을 겁니다. 하지만 안전한 청소년기 역시 무척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젠 압니다. 저는 제 아버지의 선택을 존중하고, 또 옳다고 생각한답니다. 어떻습니까 황녀 전하, 황녀께서도 그리 생각하시지요?”

“…제가 무슨 말을 하겠나요.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이 물론 우선이겠지요.”

“황녀께서도 필시 힘든 세월을 보내셨겠지요. 황녀께선 거리에 나설 때 어찌하고 다니십니까?”

“전…베일은 쓰지 않죠. 이 황도에서 제게 손댈 간 큰 자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수행원을 데리고 다니긴 하죠. 감히 제게 다가오지 못하게 말이죠.”

“그렇군요. 하긴, 수행원도 좋은 선택입니다. 이번 여행에선 베일 대신 저도 수행원을 데리고 여행을 했으니까요. 공작 전하께서 마련해 주신 수행원의 수가 이백이 조금 넘는데, 여행 시일은 오래 걸렸지만 안전은 했습니다.”

“…이, 이백 명?”

레아누는 기함한 얼굴로 렉시를 보았다. 사실 레아누 아닌 다른 귀족들도 비슷한 모습이었다. 자고로 수행원의 수는 재력과 권력에 비례해 정해진다. 특히 황도 안에 들일 수 있는 수행원의 수는 법적으로 정해져 있어, 그 이상 들이려면 황제의 재가가 필요하다.

―프로하우스는 프로하우스다.

잔잔한 경악이 오 년의 간극을 메웠다. 그들은 그제서야 프로하우스가 제국의 공작가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오 년간 자리를 비웠으나, 제국에서 황실 다음으로 부유한 영지의 주인. 대체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걸까. 사람들은 골치 아픈 얼굴로 황녀를 외면했다. 그리고 그걸 보는 레아누의 속은 바짝 타들어 갔다. 간신히 배경을 느끼지 못하게 가문의 명예를 떨어뜨려 놓았다. 헌데 수행원의 숫자, 고작 그것 하나로 그게 다시 각인되다니!

‘이런 능구렁이 같으니. 아닌 척하며 눙치는 것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어!’

“물론 황녀껜 이 정도는 별것도 아니겠지요. 필시 저보다 많은 수행원들을 데리고 다니실 텐데 말입니다.”

“어머, 호호호….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그녀는 경련하는 얼굴을 웃음으로 무마했다. 이백은커녕 쉰 명도 간신히 채우는데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황녀는 살짝 질린 눈으로 렉시를 바라봤다.

‘어째서 저렇게 능숙한 거야. 초반에 조심스러운 태도는 그저 가장이었나?’

당당한 것은 필시 공작과 비슷하나, 능글맞은 저 태도는 공작의 태도완 상반되어 있다. 그녀는 조심스레 살피며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부담을 느끼는 상황이니 당장은 뒤로 물러서야 했다.

“그렇게 힘든 여행을 제 청을 듣고 와 주시다니 감사하기 이를 데 없네요. 그런 사정이 있으셨던 건 몰랐지 뭡니까. 저 때문에 괜히 어려운 걸음 하신 것 같아 마음이 쓰이는군요.”

“아닙니다. 어찌 황녀님의 초대에 응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황녀께선 제게 황가의 초대장까지 직접 발송해 주셨지 않습니까. 이제 갓 후계자가 된 제가 황가의 인장을 받는 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란 거, 저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과거 그 어떤 인연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황가의 문장을 사용해 초대해 주신 황녀 전하의 너그러운 마음씨는 그저 감탄만이 나올 뿐입니다.”

“…!”

황녀의 눈가가 살풋 떨렸다. 뜻밖의 말에 당황해, 그만 표정 관리를 못한 것이다. 그녀는 당황해 뭐라고 말하려 했으나, 이미 말은 밖으로 흘러나온 뒤였다. 말을 들은 귀족들은 이미 애매한 얼굴로 황녀를 보고 있었다.

“황가의 문장…?”

“인연이 없다…?”

고운 말이지만 포인트는 알아먹는 것이 과연 사교계의 인물들이다. 렉시는 고소를 머금으며 활짝 눈을 접었다. 인연 없는 자의 초대는 중간에 끼인 누군가를 통해 해야 하는 법. 허나 그는 중간을 구하는 대신 황실의 힘을 이용해 그를 초대했다. 사람들은 당황해하며 서로를 향해 속삭였다.

“아무리 레아누 님이라도 그건 좀… 심한 것 아닌가.”

“폐하께서 레아누 님께 황가의 문장을 사용하게 두실 리 없지요. 잘못하면 정치적인 사안이 되는 일인데….”

레아누는 선황제의 직계로, 황제가 등극하며 계승권을 박탈당했다. 이후 그녀에게 황가의 문장은 써서는 안 되는 금기가 되었다. 그녀에게 허락된 건 오로지 사교계의 생활 하나뿐. 헌데 감히 몰래 황가의 문장을 사용하다니!? 물론 그녀가 그렇게 깊게 생각하고 일을 쳤을 리는 없었지만 이는 황제를 기만한 행위였다. 사람들은 조마조마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황제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그녀의 처벌이 결정된다.

그리고, 가만히 듣고 있던 황제는 피식 웃었다.

“재미있군. 황가의 문장으로 초대장을 보냈다라….”

“폐하. 아니옵니다. 저는 그저…!”

“왜 그리 당황하느냐? 괜찮다. 고작해야 초대장 하나 보낸 것 가지고 내가 네게 무슨 큰 화를 내겠느냐. 네가 어리니 그 일의 중대함을 모를 수도 있는 것이지. 다만 그 일을 행한 자들은 처분을 해야겠지만.”

황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여기서 말하는 처분은 최소 파면, 최대 사형. 황제가 말하는 황실의 궁중 귀족들은 황녀의 가장 유능한 손이었다. 그걸 이렇게 한순간에 잃다니…! 렉시를 보는 황녀의 눈초리가 그 이상 험할 수가 없었다.

“…소공께선, 상당히 말이 많으신 분이군요.”

렉시는 빙긋 웃었다.

“살면서 황가의 문장을 받는 것이 소원인 지방 귀족도 있답니다. 저는 황녀 전하 덕분에 그런 큰 것을 받지 않았습니까. 허니 마땅히 감사를 표해야 마땅하지요.”

“…그것이 소원이었다라. 재미있네요, 생일은 저인데 선물은 그대가 받았으니.”

“서운케 생각지 마십시오. 귀한 선물을 받았는데 제가 어찌 보답하지 않겠습니까? 때마침 공물로 적당한 것이 들어와, 황녀께 바치고자 가져왔습니다. 여기, 아드리아 해역의 붉은 진주를 황녀께 바칩니다.”

렉시의 손 위에서 조개처럼 열린 상자 안쪽, 거대한 진주알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붉은 진주알은 경매로 나와도 호가를 칠 정도로 그 크기가 크고 질이 좋았다. 황녀가 아니라, 황제가 받아도 될 만한 공물이다. 허나 황녀의 얼굴은 싸늘했다.

“…멋지고 귀한 선물이네요. 참으로 고맙군요. 헌데 이렇게 귀한 것을 받아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황녀를 위한 물건이니 응당 받으셔야죠.”

“하지만 정말 받아도 되나 모르겠네요. 제가 보기엔 공작가의 재정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데 말이죠.”

“예?”

렉시는 웃다 말고 눈을 껌벅였다. 재정이 안 좋다니…? 누가?

“황공하오나 황녀 전하. 혹 말씀하시는 것이 저희 공작가의 재정입니까?”

“말해 무엇 할까요. 혹 이 진주 때문에 큰 무리를 하셨다면, 저는 굳이 받지 않아도 된답니다. 선물 때문에 상대를 곤혹스럽게 할 수는 없잖겠어요?”

황당한 말이었다. 황실 다음으로 재정이 탄탄하고 부유한 영지가 바로 프로하우스 영지인 건 온 세상이 다 아는 일.

“송구하오나 황녀 전하. 가문의 재정은 매우 탄탄하고, 고작 이 진주 하나로 어떻게 될 재정 역시 아닙니다. 제게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이런, 그런가요? 오늘 소공께서 그 어떤 장신구도 하고 오지 않으셔서 전 그런 줄로만 알았지요. 미안합니다, 제가 잘못 생각했군요.”

“…!!”

사람들은 그제서야 렉시를 바라보고 크게 놀랐다. 그러고 보니, 정말… 장식이 없네? 얼굴에 정신이 팔려 장식이 없는 걸 모르다가 황녀 때문에 이제야 알게 되었다. 황녀가 웃었다.

“헌데 재정이 문제가 아니라면… 조금 궁금하긴 합니다. 소공께선 황도의 연회에 어째서 그런 차림으로 온 것일까요? 황도의 연회에선 황도의 것을 패용하는 것이 법도. 황실에 대대로 내려온 예법이니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인데…. 소공께선, 황실의 법도가 마음에 드시지 않으시나 봐요.”

“……아하.”

렉시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과연 사교계의 여왕은 공으로 얻은 것은 아니구나. 그래, 순전히 용모로 여왕이 된 거면 억울할 일이지. 이러려고 그렇게 내 연회 준비를 막았던 거군? 약점을 잡으려고.

렉시는 어깨를 으쓱했다.

“설마 제가 그러겠습니까. 황도의 법이 지엄한 건 저 역시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아시는 분이 그리 오셨습니까? 설마 프로하우스 공작가의 권력이면 그런 법 정도는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하신 건 아니겠지요?”

“설마요. 저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법도를 어긴 적이 없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구요.”

“어머, 그렇습니까. 지금 혹 제가 못 보는 곳에 장신구를 하고 오셨나요?”

“아뇨, 여기 있잖습니까, 여기.”

렉시는 헐겁게 땋은 자신의 머리칼을 가리켰다.

“여기 이 꽃이, 제 장식입니다.”

황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봐요 프로하우스 소공. 지금…저와 장난하십니까?”

그녀는 씨근덕대며 렉시를 향해 소리쳤다. 지금 들판에 천지로 피어 있는 저 꽃을 장식이랍시고 해 왔다 이건가?

“소공, 황도에서 말하는 장식이란 보석을 말합니다. 꽃이라니요? 그것이 어찌 연회의 장식이 될 수가 있단 말인가요. 로메인 경, 그리 뒤에 있지 말고 나와 말해 보세요. 이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저 장식이 보석이라고 우기는 것이 맞나요?”

“…네, 황녀 전하. 소공작께선 그리 말하고 계십니다.”

있는 줄도 몰랐던 로메인이 등장하자 사람들은 눈을 부릅떴다. 렉시만큼은 아니어도 로메인 역시 한때 황도에서 유명했다. 황녀가 얼굴을 험하게 일그러트렸다.

“세상에. 그대는 알면서 그대의 약혼자를 저리 내버려 두었군요. 약혼자가 아무것도 모르면, 마땅히 그대가 나서서 설명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꽃이라니요. 이게 무슨 해괴한 짓입니까?”

“…….”

로메인은 침묵했다. 트집 잡는 말이란 걸 알았지만 딱히 할 말도 없었다. 그러나 렉시는 달랐다.

“황녀 전하, 오해십니다. 그는 분명 제게 황도의 법도에 대해 알려 주었으니까요.”

“그걸 듣고도 그리 오셨단 말인가요? 소공은 황도의 법도가 장난인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황녀 전하. 장난이라니요? 이것만큼 황도의 법도에 맞는 물건은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정통성 있는 장식인걸요.”

렉시는 발갛게 달아오른 황녀를 향해 머리칼을 들어 보였다.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 잠시 역사 강의를 할 시간이다.

“시황제께선 제국을 건국하신 뒤, 그를 기념하여 첫 연회를 여셨지요. 황실의 연회에 황도의 것을 패용하라 하는 법도 역시 그때부터 생긴 것이고요. 헌데 알고 계시나 모르겠습니다. 폐하의 이 명은, 사실 새로운 신하들을 시험해 보기 위해 내리신 명이었지요.”

“…?”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황도입니다. 사치품을 차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이었겠습니까. 또한 시황제께선 검약하신 분으로, 이러한 사치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신 분이었죠. 고민하던 귀족들은 결국 보석 대신 꽃을 장식으로 대신했습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그 자리는 보석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만, 당시 황제께서 그들의 선택을 만족스러워했다는 건 분명 역사서에 기재되어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

황녀는 말문이 막혔다. 설마하니 이 자리에서 시황제의 이야기가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보다 꽃이라니…정말? 정말 저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분명 시황제 때부터 그런 연회의 법도가 생겼다는 말은 들어 안다. 황실 율법 학자들이 그랬지. 하지만 그 상세한 사유는 배운 바가 없었어.’

택도 없는 개소리라면 무시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렉시의 설명은 이상할 정도로 앞뒤가 맞았다. 전쟁이 끝난 뒤 첫 연회는 충성심을 시험하기 좋은 행사였고, 저 행위는 시황제라면 응당 할 법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황으로 굳어 있는 황녀에게 렉시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러한 과거가 있더라도…. 확실히 저는 고작 변방에서 자라온 사람이지요. 또한 황실에서 나고 자라신 황녀 전하보다, 황실의 역사와 사정에 어두운 것도 사실이고요. 허니 황녀 전하, 부디 제게 고견을 들려주십시오. 저의 이 행위가, 정말로 황실의 의도에 어긋나는 행위입니까?”

“……!”

시선이 황녀에게 쏟아졌다. 레아누는 몹시 경악했다. 설마 공을 이쪽으로 넘겨 버리다니. 본인이 직접 밝히는 게 아니라, 내가 밝혀라 이 말인가?

‘맙소사,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이지. 뭐라고 해야 한단 말이야? 나는 이런 것 모른다. 들은 적도 없어!’

황녀는 혼란스러웠다. 머릿속에서 되다 만 말들이 빙빙 맴돌았다. 황실 율법학자들에게 수업받을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 보려 애썼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낭패였다.

‘저자는 대체 어떻게 이런 것을 안단 말인가. 나도 모르는 일을 어떻게?’

이건 일반인이 알 법한 일이 아니다. 최소 상아탑의 학자나, 황실의 율법학자들이나 알 법한 일이다. 허나 사람들이 그것을 알 리 있겠는가. 그들은 눈앞의 상황만 보고 판단한다. 그들의 그런 기질은 누구보다 그녀가 제일 잘 알지 않는가.

거기다, 그녀는 황가의 인물이었다. 그냥 귀족이면 몰라도 황가의 사람이니 이를 모르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여길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일종의 편견으로, 아무리 황가의 인물이라도 알지 못하는 일들은 종종 있다. 허나 렉시는 교묘하게 황가의 인물들은 응당 이 사실을 알 것이라 호도해 말했다. 사면초가였다.

“나, 나, 나는….”

그녀는 희게 질린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앞으로 있을 수치를 생각하니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귀족들은 그런 그녀를 보며 은근한 충격을 받았다. 황녀는 늘 자신만만하고, 아름다우며, 사람들을 자신의 뜻대로 휘둘렀다. 그녀의 아름다움과 당당함에 사람들은 홀렸고, 그녀는 그렇게 사교계를 장악했다.

사교계의 여왕. 황도의 사교계를 한 손에 거머쥔, 사교계의 여제.

때문에 귀족들은 그녀의 이런 모습이 너무나 낯설었다. 파리해져 한마디의 말도 하지 못하는 황녀는, 그들이 알던 당당한 여왕이 아니었다. 귀족들의 시선에 실려 있던 존경이란 감정이 점차 식어 갔다. 어쩌면 누군가는 그 끝에 경멸의 마음을 내비쳤을지도 모른다. 시선에 민감한 황녀는 그 사실을 빠르게 눈치챘다. 허나 이 상황에서 벗어날 길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런 그녀를 보다 못한 황제가 나서 상황을 정리했다.

“그만, 이제 그만하라.”

“…폐, 폐하.”

“그것은 황녀가 대답할 수 있는 건이 아니다. 오로지 짐만이 대답할 수 있는 것이지. 프로하우스 소공, 그대는 지식 수준이 상당한 편이로군. 방금 말한 것은 이 제국의 황태자가 받는 수업 내용 중 일부였다.”

“…!!”

사람들은 경악한 얼굴로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폐하, 그, 그렇다는 건 즉…!”

“그래. 저이의 말이 맞다. 확실히, 그것은 한때 존재했던 역사였지.”

황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황녀는 자리에서 비틀거렸다.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긴장했는지,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었다.

“레아누. 괜찮은가?”

“폐하. 소, 소녀는….”

괜찮다.

그렇게 말하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때려죽여도 괜찮다는 말을 하기가 싫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괜찮다는 말이 나온단 말인가. 레아누는 파리한 얼굴로 황제를 보다 그만 눈물을 흘렸다. 처음 겪는 처절한 패배감과 모욕감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황녀? 의원을…!”

“저, 저는… 괜…괜…!”

파르르 입술이 떨린다. 그녀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뒤를 돌아 밖으로 달아났다. 사람들은 멍한 얼굴로 도망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생일날, 황녀가 쫓겨나듯 달아나는 광경은 제국의 건국 이래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자존심이 상한 것인가.”

적어도 몸 쪽은 건강한 모양이로군. 저렇게 힘차게 뛰어가는 걸 보니.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황제가 쓰게 웃었다. 의도한 바대로 이루어진 일이나, 어딘지 모르게 뒷맛이 썼다.

“…내 동생에게 아주 큰 선물을 주었군, 프로하우스 소공.”

“송구하옵니다 폐하. 제가… 황녀 전하의 심기를 퍽 불편하게 한 듯합니다. 허나 실로 뜻한 바는 아니었습니다.”

“그래. 일단의 일들은 자네 스스로를 구명하기 위해 행동한 것이지. 그러나 아주 사심 없이 행동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거야. 그렇지?”

황제의 말에 얼굴이 조금 뜨거워졌다. 그래, 사실을 말하자면 그의 말이 백번 옳다. 정말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그녀를 몰아붙였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폐하. 신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솔직히 자네가 조금 괘씸한 건 사실이다. 그대가 방금 쫓은 황녀는 짐이 귀애하는 동생이자, 제국의 보석이지. 헌데 본인의 생일 연회에 그리 체면을 깎았으니 어찌 그 모욕을 견딜 수 있었겠는가.”

황제는 짐짓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허나 이것은 오라비의 입장이지, 황제의 의견은 또 다르네. 이 제국의 황제는 방금, 자네 덕분에 이 연회의 역사적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되었다. 또한 그것으로 요 몇 달간 짐을 귀찮게 하던 사안 하나를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지. 귀족들 사이에서 흥하는 사치품들의 소비를 조절할 방안이 이렇게 쉽게 나올 줄은 짐조차 알지 못했으니…. 좋아, 짐은 자네의 무례를 용서하겠다.”

표정 없이 말하는 황제의 모습에선 위엄이 넘쳐흐른다. 갑자기 주어진 황제의 호의에 렉시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 무슨 황황한 상황 전개인가. 게다가… 뭐? 사치품?

“황도의 사치품 수요는 꾸준하지만, 특히 사교계가 시작될 시기엔 그 수요가 폭증하지. 적절한 수요는 나쁘지 않으나, 그것으로 투기 현상이 일어나 큰 문제였다. 그것으로 황도와 지방 귀족들 사이의 위화감이 조성되니 국정이 잘 돌아갈 리 없었고 말이야. 허나 자네 덕분에 그 수요를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 있을 것 같으니… 이런, 생각보다 더 공을 세운 셈인가.”

황제는 몸을 왼쪽으로 기대며 턱을 괴었다. 나른히 빛나는 두 눈동자가 재미있다는 듯 번뜩이고 있었다.

“생일에 황녀를 당황케 해 도망치게 한 그대의 죄는 퍽 크다. 허나 황녀 역시 그대에게 비슷한 곤란함을 안겨 주었지. 그러니 이것은 그것으로 상계가 가능할 것 같군. 허면 남은 것은 새로운 국정 운영 향방을 제시한 치하인가.”

“예?”

“프로하우스 소공. 무슨 상을 원하나?”

렉시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무리 그라도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황녀를 엿 먹이고, 당면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과거의 역사서를 읽었을 뿐이다. 헌데 그걸 두고 상을 줘?

그는 당황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여기서 상을 받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안 받고 싶을 뿐인 렉시는 얼른 황제에게 말을 올렸다.

“아닙니다, 폐하. 그저 용서해 주신 것만으로도 광영입니다. 상이라니, 참으로 무거워 받들기 어렵습니다.”

“그대는 지금 원하는 것이 없다 이 말인가?”

“황공하옵니다 폐하. 실로 분에 넘치옵니다.”

황제는 깜짝 놀라 상을 거부하는 렉시를 보며 속으로 웃었다. 프로하우스 공작의 아들답지 않게, 속은 아직 말랑말랑하지 않은가. 그라면 이 자리에서 가타부타 않고 뭐든 챙겨 먹었을 것이다. 물론 그랬다면, 이후 괘씸죄가 더해졌겠지만.

―미래가 기대되지만, 아직은 어리다 이거군.

그래, 아직은 젊은 청년이니 이런 것도 좋을 것이다. 살짝 경계하던 수위를 낮춘다. 상대에게 조금 너그러운 마음을 먹은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대가 굳이 거부한다면, 그래. 그대에게 줄 상은 그만두겠다. 허나 황제란 본디 말을 꺼낸 이상 그 말을 꼭 지켜야 하는 자이다. 내 직접 상을 내린다 말하였으니, 누군가는 그것을 필히 받아야 할 것인즉….”

황제의 시선이 렉시를 건너, 그 뒤에 서 있는 로메인을 향한다. 황제의 시선을 눈치챈 로메인은 퍼뜩 긴장하며 몸을 굳혔다.

“예부터 부부란 일심동체라 하는 말이 있다. 물론 프로하우스 소공은 아직 미혼이지. 허나 소공은 그대와 연인이고, 또한 혼인할 예정 아닌가? 그렇다면 이 상은 로메인 드 데퓨탄 경. 그대에게 대신 내릴 수밖에.”

“…!”

홀이 술렁거렸다. 황제의 말이 끝나자마자 로메인은 고개를 퍼뜩 들었다. 나? 내게 상을? 갑자기 떨어진 상에 로메인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런 로메인에게 황제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지정하여 주진 않겠다. 조건은 아까와 똑같아. 로메인 경, 지금 그대가 가장 받고 싶거나 필요한 것을 말하도록.”

“…상, 말입니까?”

“그래. 무엇이건 그대가 원하는 걸 이루어 주지. 무엇을 원하는가? 짐은 인내가 길지 않으니, 빨리 말하는 것이 좋을 거야.”

“!”

그는 얼떨떨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한 말이 가슴에서 휘몰아쳤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준다고? 무엇이건?’

로메인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만일 저 말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지금 당장 받을 만한 것이 딱 하나 있었다.

“폐하.”

그는 혹여 욕심이 새어 나올까 갈무리하며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야 하는 것이 세상 이치. 청을 하기 전, 그의 말을 한 번 더 살필 필요가 있었다.

“정녕, 어느 것이건 상관이 없습니까.”

“재미있군, 자네는 정말로 가지고 싶은 것이 있었던 모양이야? 그대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이야.”

“송구하옵니다 폐하. 허나 정말로 어떤 청이건 할 수 있다면… 폐하께 꼭 청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래?”

예전이라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남자의 청이다. 황제는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로메인을 바라보았다.

“군주는 일구이언하지 않는다. 말해 보라, 로메인 경.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꿀꺽. 목울대를 크게 울린다. 로메인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을 조마조마한 얼굴로 보고 있는 렉시와, 그런 두 사람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황제. 그가 무엇을 말하나 흥미진진해하는 홀 안의 귀족들의 시선이 오로지 그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다. 그가 원하는 것을 말하기 딱 좋은 상태다. 로메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가 현재 가장 원하는 것.

그것은.

“폐하. 신이 원하는 것은….”

*****

밤이 이슥하고, 하늘 위로 뜬 달이 정중앙에 오른 시각.

차가운 밤바람을 가르며 프로하우스 공작저에 렉시를 태운 마차가 도착했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한 렉시의 행차에 집사 구아니는 몹시 슬퍼했다. 혹시 했으나, 역시였는가. 황녀의 연회는 밤새 이어지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연회에서 일찍 돌아왔으니 뭐 얼마나 좋은 일이 있었으려고. 모르긴 몰라도 필시 큰 곤욕을 치르고 돌아왔을 것이다.

그런 그의 생각은 마차에서 내린 렉시를 본 뒤, 확신이 됐다.

마차에서 내린 렉시의 모습은….

“오셨습니까 작은 주인님.”

“…어. 와, 왔어.”

마차에서 느릿느릿 내려온 렉시는 어딘지 모르게 조금 이상했다.

일단, 얼굴이 무척 빨갰다. 표정은 뭔가 꿈꾸다 일어난 것 같았고, 입술은 살짝 부풀어 도톰해 보인다. 아침에 곱게 빗은 머리칼은 어쩐지 조금 붕 떠 있었고, 예쁘게 각 잡혀 입혀 놓은 예복 역시 상당히 구겨져 있다. 게다가 서 있는 모습은 어떠한가. 늘 반듯하고 우아하던 몸은 애매하게 엉거주춤한 듯 보였고, 심지어는 가끔 허리 주변을 툭툭 두드리기까지 한다.

…뭔가….

집사는 말을 잇지 못했다. 뭔가 생각이 날 듯 말 듯 머릿속이 혼란했다. 대체 저 모습은 어찌 되신 것일까. 연회에서 무슨 큰일이라도 있으셨던 걸까?

그는 조마조마한 얼굴로 렉시에게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비통하게 떨려 나왔다.

“작은 주인님, 대체 이게 무슨 난리입니까. 곱게 치장하신 모습이 왜 이리되셨습니까? 혹 연회에서 사람들이 주인님을 괴롭혔습니까?”

막 주인님을 때리던가요? 황녀보다 못한 외모라고 작은 주인님을 괴롭힌 겁니까?

애절한 집사의 물음에 허리를 두드리다 만 렉시가 얼굴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뭐…? 무슨 소리야. 아니야. 연회는 잘 참석하고 왔어.”

“수도의 귀족들이 남 놀릴 일을 놓칠 리 없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성격들이 나쁜지는 제가 제일 잘 압니다. 작은 주인께서 아름다운 걸 질투하는 자들도 분명 있었을 것이지요! 당장 황녀께서도 그랬지 않습니까?”

그는 매의 눈으로 렉시를 훑었다. 그리고 급기야, 렉시의 목깃 사이로 붉은 음영을 찾아냈다. 집사의 두 눈이 분노로 퍼렇게 타올랐다. 역시 그의 의심이 맞았다. 폭행 자국이었다. 그래, 맞다. 어딘지 모르게 엉거주춤하고, 제대로 서 있지 못하는 주인의 이 모습은 역시 폭행의 결과…!

그는 통곡하듯 외쳤다.

“황녀가 사주한 자에게 해를 입으셨습니까. 아무리 황녀라지만 어떻게 공작가의 자제에게 이런 짓을…! 이런 천벌 받을 짓을 감히!”

“무슨 소리야. 맞다니? 아니야, 난 단지…!”

“숨기지 마십시오. 허면 목은 어째서 그렇게 멍이 드셨습니까. 허리는 어째서 그리 구부정하신겁니까? 마치 무슨, 거대한 말 같은 것에 크게 걷어차인 것처럼 비실비실해서!”

“지, 집사! 대체 왜 그런 망측한 소릴 하는 거야!?”

렉시는 왁 소리치며 빨개진 얼굴로 손부채를 퍼덕였다. 집사는 그런 렉시를 유심히 보다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활짝 펼쳐진 손가락 위, 알이 제법 커 보이는 에메랄드 반지 하나가 반짝이고 있었다.

얼핏 봐도 귀족들이 살 법한 질 좋은 색감에, 커팅까지 예술이다. 그는 깜짝 놀라 렉시에게 물었다.

“…작은 주인님. 그 반지는 뭡니까?”

분명 패물 하나 없이 나가셔야 했던 주인님인데. 대체 어디서 저런 것을? 그의 질문에 렉시가 조그맣게 대답했다.

“이건… 이건 그냥… 받았어.”

집사의 얼굴이 더욱 아리송해졌다. 받다니. 대체 누가 그에게 저런 반지를 주었단 말인가.

“…대체 누구입니까? 공작가와 관련된 집안의 분인가요? 아니면 모르는 분입니까. 연관 없는 자라면 도로 돌려보내셔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수도에선 꿍꿍이 없이 상대에게 뭔가를 주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럴 필요 없어. 이, 이 반지는 그러니까…!”

답지 않게 자꾸 말을 더듬거리는 렉시의 행동에 집사는 답답증이 일었다. 그간 똑똑하고 영민한 모습만을 보이던 작은 주인님이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걸까. 왜 자꾸 말을 더듬고, 달아오른 얼굴을 하시는 것인가…? 속이 터져 가슴을 치며 렉시를 바라보던 집사였지만, 곧 일어난 일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쿵!

이렇게 큰 소리와 함께 렉시가 내린 마차에서 로메인이 튀어나왔던 것이다.

“렉시. 먼저 나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로, 로메인.”

로메인은 굴러떨어지듯 달려 나와 렉시를 끌어안았다. 체격 차가 제법 있어 그런지 렉시의 몸이 남자에게 반 이상 가려졌다. 안 그래도 붉었던 얼굴은 만지면 델 것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너무 놀라게 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없으면 이제 불안해 살 수가 없다는 걸 알고 계시잖습니까.”

“제가 가긴 어딜 간다고….”

새빨개진 렉시가 뭐라고 대답하는 것을 들으며 그는 작게 웃었다. 그러고는 품에 안긴 렉시의 머리칼에 파묻듯 얼굴을 묻는다. 참 사이좋고… 금실 좋은 연인의 모습이긴 했지만. 그 모습이 참…약혼자인 걸 알면서도 별스럽다 해야 할까.

혀를 차는 집사를 발견한 로메인이 어색한 얼굴로 사과했다.

“미안하게 되었네, 집사. 내가 좀 놀랐어서 말이야….”

“…저야 상관없습니다만, 말들은 좀 놀랐을 겁니다. 그놈들이 놀라면 사람이 다치니 주의해주십시오. 나 원, 대체 무엇이 그리 급하셔서는….”

집사는 끌어안은 두 사람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어쨌거나 나름 다행이었다. 어쩐지 대화가 힘들어 보이는 렉시를 대신할 로메인이 등장했다. 오늘 연회에 있었던 일을 물어볼 타이밍이었다.

“로메인 경, 그보다 오늘 연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대체 어찌 된 겁니까.”

“무슨 소리인가? 소공껜 별일 없었는데.”

“하지만… 아무리 봐도 소공의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모르는 자가 주인께 반지도 주었다는데….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게 맞습니까?”

로메인의 눈가에 살짝 웃음이 맺혔다.

“정말이야. 아주 좋게 끝났네. 날 믿게. 내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어디 있겠나?”

로메인이 단언했다. 허나 집사의 머리에서는 미심쩍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럼…장식 건은 어찌 되었습니까. 황녀께서 그냥 넘어가지는 않았을 텐데요.”

“아. 그 건은 약간 설전이 있긴 했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잘되었고, 소공께선 그 일로 공까지 세웠지. 앞으로 황도엔 꽃장식이 유행할 것 같더군.”

“예? 공이요?”

어째 대화를 하면 할수록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다. 공을 세워? 꽃장식이 유행한다는 말은 또 뭔데? 집사가 이해할 수 없는 얼굴을 하자, 로메인이 고개를 저었다.

“뭐 직접 지금 이야기해 보았자 믿지 못할 것이네. 그냥 천천히 알아 가게.”

당장 내일부터 소문이 돌면 싫어도 이 일을 알게 될 거다. 로메인은 길게 말하지 않고 본론만 말했다.

“그의 반지는, 약혼반지네.”

“예?”

집사는 무슨 소리냐는 듯 추가 설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로메인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는 설명 대신 렉시의 손을 잡고 손가락에 키스했다. 입 맞추자,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과 반지가 퍽 아름답다. 그는 곧 발간 석탄처럼 달아오른 렉시의 입술에 강하게 키스했다. 난데없이 벌어진 노상의 애정 행각에 집사 이하 고용인들은 고요해졌다. 약혼자인 둘이었지만 이 저택에선 상당히 담백하게 지냈기에 그들의 충격은 매우 컸다.

“어, 어, 어?”

집사는 입을 사과만큼 크게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왕국 출신, 고지식한 집사의 두 눈에 지진이 일어났다. 아직 약혼식을 올리기도 전인데 저래도 되나. 물론 대외적으로 다 약혼할 사이인 건 알긴 하지만 저래, 저래도 돼?

“으응…. 로메인!”

“알겠습니다. 이후는 나중에.”

렉시의 앙탈에 겨우 키스가 멈췄다. 로메인은 싱글거리는 얼굴로 렉시를 놓은 뒤, 주변을 둘러봤다. 그게 참 이상할 정도로 의기가 양양했다. 집사는 뻘게진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로, 로메인 경. 어찌 이런 노상에서, 이런…!”

“자네가 혼란해하는 것 같으니, 간단히 설명해 주지. 소공께선 연회에 참석한 뒤 황녀 전하와 약간 언쟁을 벌이셨지. 허나 이기셨고, 그 와중에 나라에 큰 공을 세우셨네. 그 자리에 계셨던 폐하께오선 소공께 상을 주시겠노라 천명하셨지. 허나 소공께서 받지 않으셔서 내가 그 상을 대신 받아 소원을 말했네.”

로메인의 눈동자가 짙게 빛났다. 뭔가 통쾌한 것 같은 가뿐함과 기쁨이 안에서 공처럼 톡톡 튀고 있었다.

“―우리 둘의 약혼을 말야.”

“…예?”

집사는 귀를 후볐다. 자기가 지금 무슨 소릴 들었나. 약혼?

“저, 로메인 경. 그러니까 그 말은…. 약혼식을 치르셨단 말입니까?”

“그래. 바로 그거야.”

“…언제요?”

“대략 한 시간 전에 끝났네. 아주 멋진 약혼식이었지.”

“…예???”

집사는 경악했다. 아니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것도 아니고 무슨 약혼을 몇 시간 만에 해? 아니 그보다 약혼을 했다고? 공작에게 말은 했고?

그는 놀라 버럭 소리쳤다.

“제정신입니까? 약혼이라니요?! 어, 어떻게 그런 짓을 하실 수 있습니까? 공작령의 전하께선 알지도 못하시는 일 아닙니까!!”

“어차피 언젠가는 했을 일이야. 전하께선 이번 여행 전 나를 약혼자로 인정하셨네. 그러니 괜찮은 것 아닌가?”

“…그거랑 이거랑 같습니까? 맙소사, 로메인 경. 그분, 생각보다 더 격식에 예민하신 분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어찌!”

실로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온다. 집사는 갑작스레 떨어진 이 날벼락에 머리가 아팠다. 대체 전하께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이러다 나 쫓겨나는 거 아니야?

그러나 그는 몰랐다. 진정한 기가 막힐 일은 바로 다음 나올 말이라는걸.

“걱정 마, 구아니. 아무리 전하라도 이 약혼은 뭐라고 하지 못할 테니까.”

“근거 없는 자신감이 뛰어나십니다 로메인 경. 대체 왜 그렇게 믿으십니까? 어째서요?”

“왜냐하면.”

그는 짧게 웃으며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이제 우리 약혼의 신성한 수호자는… 폐하시거든.”

“…예?”

*****

황궁에 돌아온 황제는 긴 복도를 한참 걸어 심처에 들어갔다. 오자마자 그림자 몇이 붙어 황제에게 몇 가지 보고를 건네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집무실론 들어가지 않았다. 오늘은 얼마 없는 그의 휴일이다. 휴일엔 휴일답게 지낼 권리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폐하.”

“시종장. 여태 기다렸나?”

“폐하께오서 자리를 비우셨는데 제가 어찌 일신의 안위를 찾겠습니까.”

“자네도 참 어쩔 수가 없군. 오늘 같은 날은 자네도 쉬는 게 나았을 텐데.”

“시종장이 쉴 날은 관에 묻힌 이후뿐입니다. 그 이전엔 군주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좌할 뿐입지요.”

황제가 누운 쿠션을 가지런히 정리한 그는 세숫대야를 가져왔다. 은으로 만들어진 세숫대야에 담긴 향수와 물로, 그는 황제의 발을 정성스레 씻어 냈다. 황제는 신음하며 발가락을 굽혔다 폈다. 뜨거운 물이 발 사이사이를 누빌 때마다, 싫어도 절로 신음이 나온다.

“아…시원하군. 내가 없는 사이 별일은 없었나?”

“레아누 황녀님께서 울면서 궁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얼굴빛이 과히 좋지 않아, 그쪽으로 의원을 보냈지요.”

“그 애가 궁으로 왔나?”

“예, 수행원 없이 홀로 오셔서 다들 크게 놀랐습니다.”

“…그래.”

황제는 거기까지 말한 뒤, 고개를 끄덕이고 침묵했다. 시종장은 여러 가지 마련해 놓은 황녀 관련 소식을 마음속에서 지웠다. 평소라면 황녀의 상태를 물어볼 황제이거늘 오늘따라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는 건 뭔가 일이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것치곤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데.

시종장의 하얀 눈썹이 살짝 아래로 내려온다. 황녀가 저렇게 울며 오신 연회인데…. 거기서,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그때였다.

“…시종장. 데퓨탄 후작의 둘째 아들을 아나?”

시종장은 얼른 대답했다.

“하문하신 바, 알고 있습니다. 로메인 드 데퓨탄, 제국 기사 총람 열 번째 페이지에 오른 자이지요. 한때 황녀님과 혼담이 오간 바 있으나 파하였고, 이후 낙향해 프로하우스 공작가의 봉신으로서 생활하고 있다고 압니다.”

“그래. 바로 그다. 오늘 연회에서 그자를 보았지.”

“그렇다면 프로하우스 공작가의 소공을 봉행했겠군요.”

“자네는 이런 게 좋아. 하나를 말하면 둘을 아니 말이야.”

“황공하옵니다. 다 폐하의 은덕이지요.”

입안의 혀처럼 구는 시종장이지만 그에게 있어 이것은 진실일 터. 황제는 조금 식은 물에서 발을 빼 위로 들었다. 시종장이 차분히 닦아 내는 걸 기다린 그는, 마른 발로 몸을 뒤로 물렸다. 쿠션 위로 기울이듯 앉은 황제의 입가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한때 그자에게 고자라는 소문이 돌았었다. 레아누 때문이었고. 사실 짐도 그 사실을 적잖이 믿은 축에 속했으나… 오늘 보니 그게 아니었어.”

그냥… 그놈 눈이 좀 높더군.

그 말에, 시종장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아닌 듯하나, 명백한 흥미였다.

“프로하우스 공작가의 소공이, 그리 아름다웠습니까?”

“실로 놀라운 미모였다. 사교계가 발칵 뒤집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지.”

“황녀님이 계셨는데도 그 정도였단 말입니까?”

“황녀가 있었으니 그 정도였다. 아니었으면 대단한 꼴불견들을 목격했을 것이니.”

그보다는 못하나, 단계적으로 본 미모라 나름 저항은 했다는 의미였다. 시종장의 눈이 크게 뜨였다가 도로 감겼다. 허언은 하지 않는 황제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진실이 아닐 리 없었다. 그는 차분히 한마디를 건넸다.

“…놀라운 일이군요.”

“그래, 놀라운 미모였지. 허나 그보다 더 놀라운 건 철벽 공의 변모였어. 그 고지식한 자가 그런 요구를 하다니….”

“요구라니요?”

황제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 짐은 막 한 쌍의 약혼식을 치러 주고 오는 길이다. 여기서 말하는 한 쌍이 누군지는… 내가 굳이 말 안 해도 알 것 같군, 시종장.”

황제의 말에 시종장이 당황했다. 약혼식?

“…폐하. 지금 연회에서 약혼식을 주관하고 오셨단 말입니까?”

“주관하다 뿐일까. 내 직접 반지까지 사 주었는걸.”

늦은 밤이지만, 황제의 명은 문 닫은 보석상의 문 정도는 간단히 열게 할 수 있다. 황제는 사 온 보석을 떠올리며 혀를 내둘렀다.

“황명으로 공출하였으니 그 값은 나중에 자네가 치르도록.”

“…지금 그런 것이 문제입니까. 어찌 귀하신 몸께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하셔서…!”

시종장은 기겁하며 온몸을 떨어 댔다. 어떻게 황제가 그런 황당한 일까지 해야 했단 말인가. 그러나 정작 그 일을 해낸 황제는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짐의 입으로 직접 말했다. 대단한 미인이 훌륭한 공을 세웠으니, 친히 상을 내리겠다고. 헌데 그 상으로 요구한 게 그 일이었으니, 짐은 그저 황제의 권한으로 두 사람의 약혼을 승인했을 뿐이야.”

생각하자, 다시금 웃음이 치밀어오른다. 살면서 그처럼 당황한 일은 또다시 없을 것이다. 약혼이라니, 대체 어떤 간덩이를 가지면 감히 황제에게 그런 요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사랑이 뭐길래란 단어가 떠오를 수밖에 없는 행동 아닌가.

“고육지책이었을 것이다. 황도엔 후작가조차 어찌 못할 자들이 많다. 짐은 차치하더라도 짐의 장자와 차자가 아직 미혼이고, 다른 공작가의 후계자들도 미혼인 자들이 있지. 그들이 맘만 먹으면 후작가의 자제 하나 어찌 못할까. 그 정도 미인이면, 얻으려고 뭐든 하려 할 자가 차고 넘칠 것인데.”

“…그리하면 필시 황도가 시끄러워질 것입니다. 폐하께서 계시는 이 황도에서 감히 누가 그런 간악한 짓을 저지르겠습니까?”

“자네는 그 용모를 못 봐서 하는 소리다. 짐이 조금만 더 젊었다면, 그 상황에서 어찌했을지는 짐조차 알 수 없었으니. 허나 걱정 마라. 오늘 짐이 직접 그 약혼을 축복하고 수호했으니, 이제 감히 누가 나서 짐의 뜻을 거역하겠는가?”

황제의 말을 들은 시종장이 얼굴을 구겼다.

“…참으로 교활한 자로군요. 건방지기 짝이 없습니다. 어찌 폐하를 그런 용도로…!”

“그러니 내가 웃는 것이다. 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이란 말인가? 그토록 성실하고 고지식하던 사내가 사랑을 하며 교활함을 배웠다. 자네도 그걸 보았다면 웃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을 거야.”

“…….”

로메인이 한 짓은 건방지지만, 간만에 웃는 황제를 보는 것은 나쁜 일은 아니었다. 결국, 시종장은 고개를 숙이며 황제의 뜻에 따랐다.

“…폐하께서 마음 쓰지 않으신다면 그것만으로도 옳은 일이겠지요. 또한 기꺼이 웃으셨으니, 저 또한 폐하의 의도에 만족합니다. 오늘 연회가 무척 마음에 드셨습니까 폐하?”

“그래. 아주 마음에 들었다.”

황제의 금안이 서늘하게 휘었다. 늘 말에 한마디 함정을 넣는 그이나, 지금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잃은 것보다 이처럼 얻은 것이 많은 연회는 오랜만이었다.

늘 고민이었던 여동생의 자만심도 꺾어 놓았고, 계속 잡을 길 없던 황도의 투기 세력도 일소할 방안을 찾아냈다. 더해, 사소한 웃음까지 얻게 되었으니…. 그간 이렇게 마무리가 좋았던 연회란 달리 없었다. 그는 포도주를 입에 머금었다가 살짝 넘겼다. 싸하고 짜릿한 기운이 목구멍에 느껴진다.

오늘 이토록 짐을 기껍게 한 자들에게 반지 하나론 면이 서지 않을 터. 그는 고개 숙인 시종장을 향해 손을 까닥였다.

“명일 프로하우스 공작가에 약혼 축하 선물을 보내도록. 기왕 시작한 것, 마무리도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나.”

“―예, 폐하. 신 명을 받듭니다.”

깊이 고개를 숙이는 시종장,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먼 데서 반짝이는 별빛 아래, 공작가의 것이 분명해 보일 저택이 밝게 빛난다.

“…알렉시아노 드 프로하우스, 그리고 페르귄이라.”

사교계의 여왕이 패퇴하고, 새로운 이가 떠오를 것이다. 레아누가 이번 사교계에 어찌 나올지는 모르겠으나, 시누이의 기에 밀려 있던 황후는 이때를 놓치지 않을 터. 아마 생각보다 더한 개판이 펼쳐질지도 모르겠다. 그는 피식 웃었다.

“이번 사교 시즌은 퍽 재미있겠어.”

귀족 간의 화합만 깨지지 않는다면 사교계의 축이 바뀌는 건 괜찮은 일이다. 외려 주기적으로 여왕이 바뀌는 것이 황제인 그를 위해 좋은 일이기도 하고. 이번 여왕은 그의 총애를 입고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켰지만, 오늘 일로 그 명성에 치명타를 입었다. 쌓기는 어려워도 잃기는 쉬운 것이 바로 사교계의 지위이니 황녀는 그 자리를 온존하기 어려우리라.

“그러니 되도록 프로하우스 소공은 황도에 오래 머물러 주어야겠어.”

그것이 이 사교계의 고인 물을 휘저은 자의 의무이자 권리이다. 사교계의 새로운 여왕이 누가 되건, 그 자리엔 반드시 그가 있는 것이 마땅한 귀결이 될 것인즉.

그리하여 그렇게 황제는 자리에 눕는다. 앞으로 소공작에게 있을 사소한 불행의 씨앗을 주변인에게 명령하면서.

아직은 차가운 봄바람이 서글픈, 달이 환한 어떤 밤에 일어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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