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라그라스
묵직한 심연, 혼몽처럼 헤매이던 정신이 수면 위로 솟아오른다.
죽음 같던 잠은 마치 밤처럼 까맣다. 까만 파도 위, 흰 모래 언덕이 나타나며 억지로 드러난 뭍에 발을 내딛는다. 그러자 서서히 차오르는 정신이 유리처럼 명료해졌다. 흐릿하던 이지가 점점 맑아지자 스며드는 감정은 당혹.
‘…내가 왜 깨어났을까?’
마지막으로 깨어났을 때, 용은 인간에 섞인 그의 피가 거의 사멸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의 오랜 기다림도 끝이로구나. 그는 오랜 세월 그를 잡아 두었던 기억에 작별을 고하고 잠에 빠졌다. 앞으론 더 이상 깨어날 일이 없을 것이구나. 그래, 그렇구나.
헌데 어째서 내가 잠에서 깨어났을까.
무엇이 날 잠에서 깨운 것이지?
힐라그라스는 당혹을 감춘 채 주변을 살폈다. 천천히, 눈을 돌리며 그를 각성시킨 무언가를 찾으려 애썼다.
그리고, 그는 곧 이유를 찾아냈다.
동족들이 이 세계를 떠난 뒤, 그는 대부분의 생을 잠으로 보냈다. 같은 용들이 없는 세계에 혼자 눈 뜨고 있어 봤자 누적되는 건 심심함과 무료함뿐. 하여 수만 년간 살아온 용이 제대로 깨어 있던 세월은 합해서 천 년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용이라도 가끔은 깨어서 활동을 해야 몸이 녹슬지 않는 법이다. 무생물처럼 거대한 몸이라도 그 내부는 살아 있는 생물의 것이라. 워낙 게으른 그는 그런 외유를 의무 방어전처럼 했다. 짧은 외유, 그리고 또 다른 잠.
그런 그가 자손을 남긴 건 그런 외유 중에 벌어진 사고 때문이었다. 무심코 구한 사람에게 코가 넙죽하니 꿰였던 것이다.
“…그대가 나를 구했소?”
“뭐, 그렇지요. 대체 그런 덴 왜 들어갔어요?”
용은 무심한 얼굴로 몸을 툭툭 털었다. 모래 늪에서 나오려고 안간힘을 썼더니 온몸이 온통 모래투성이였다.
“이 시기의 타클란 사막은 길잡이 없이는 지나가선 안 되는 곳이랍니다. 누가 안 알려 주던가요?”
“…길잡이는 구했었소.”
“그거참 놀랍군요. 그런데 왜 그 모양이 되셨는지?”
“사막을 건너는 중에 날 겁탈하려고 하길래 잡아 죽였지. 돌아가는 길은 외워 놨기에 이렇게 될 줄은 몰랐소.”
용은 황황한 얼굴로 남자를 바라봤다. 까끌한 모래가 덕지덕지 붙은 얼굴, 머리칼, 몸을 차분히 훑는다.
그가 결국 물었다.
“…남자 아니었어요?”
“세상엔 남자를 탐하는 남자도 있는 법이라오.”
“…그러겠네요.”
용은 남자를 지그시 보다가 납득했다. 과연, 그럴 외모긴 하다.
용은 어지간해선 타인의 죽음에 관여치 않는다. 멋대로 살리면 죽음이 다가와 귀찮게 굴기 때문이었다. 평소 같으면 내버려 두었을 남자의 죽음을 친히 걷어 낸 건, 이 남자가 용들이 보기에도 참 보기 드문 용모를 가지고 있어서였다.
저렇게 예쁜데, 죽으면 아깝잖아.
사실, 용은 다들 용들보다도 유독 예쁜 것에 약했다.
‘허 거참, 왜 저렇게 이쁜 거야?’
힐라그라스는 툴툴대며 남자를 탓했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너무 이쁜 이 생물 탓이라 하면서.
“…그런 얼굴을 가지고 다니면 좀 가리고 다니고 그래요. 니미럴, 그렇다고 사막에서 길잡이를 죽이다니 목숨이 여러 갠가요? 이 시기에 타클란 사막을 지나가는 나 같은 미친놈이 없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뭐?”
용은 당황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남자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됐고, 목적지나 말해요. 데려다줄 테니.”
툭툭 털며 남자를 일으키자 그는 망설이는 얼굴로 손을 잡았다. 일어난 남자의 키는 용보다 머리 하나 정도 컸다. 단단한 손은 검을 잡는 사람 특유의 것으로, 용이 현재 분한 몸보다 모든 것이 크다. 이렇게 거대한 몸인데도 겁탈을 시도한단 말이지? 인간은 참으로 이상한 생물이었다.
“어디로 가요?”
“…달리아. 허면 그대는… 길잡이인가?”
“뭐 그래요. 요 옆 페루하 부족의 마사린이라고 합니다. 잘 팔리진 않지만, 어쨌거나 한몫을 하고 있죠.”
타클란 사막의 길잡이는 그 지역에서 대대로 사는 부족의 남아들이 주로 한다. 용이 분한 건 그렇게 길잡이를 하다가 그만 죽어 버린 한 청년의 몸이었다. 용의 외유는 대체적으로 이런 식이다. 죽은 자의 모습을 대신하고, 또 그의 일을 하며 살다가 자연스레 죽는다.
“…그렇군. 나는… 달리아의 아힐란이오.”
“이름 이쁘네요, 아힐란 씨. 자, 그럼 이제 일어나세요. 여기서 계속 있으면 밤에 얼어 죽어요.”
용의 채근에 남자는 천천히 여장을 챙겼다. 챙기는 내내 망설이는 얼굴로 슬쩍슬쩍 용을 보긴 했지만, 뭐 그러려니 했다.
본새 보니 어딘가의 귀족 같은데, 그가 아는 귀족들은 다들 저렇다. 내버려 두면 혼잣말하고, 구시렁거리고, 혼자 화내다가 혼자 가라앉고. 뭐 거칠게 대했다고 삐졌나 본데 나중에 알아서 풀리겠지?
…라고, 그렇게 태평하게 생각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때 그 남자가 왜 그런 얼굴을 하는 건지 알았더라면, 용은 남자를 데려다주는 대신 빙 돌아 튀었을 것이다. 괜히 데려다주면서 이 일 저 일 하다 정도 안 들었을 거고, 성별을 의심한 남자에게 나신을 보여 주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특히 멍청했던 건 남자의 유도 심문에 걸려 그가 성별 막론하고 애를 낳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 버렸다는 거다. 저 말을 들었을 때 눈에서 광채가 나는 걸 이상하게 생각했어야 했는데…. 눈치가 박치인 용은 남자가 왜 그러는지 왕국에 들어서기 전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남자의 의도를 알아챈 건, 왕국에서 나가서는 그의 발목을 잡은 남자가 그를 잡고 청혼한 이후였다.
맙소사!
용은 혀를 찼다. 죽어 가던 놈 살려 줬더니 혼인해 달라니. 물에 빠진 놈 구해 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란 것도 이것보단 양심적일 터다. 물론 용은 식겁하고 돈이나 달라고 요구했다. 허나 자기 외모를 활용할 줄 아는 남자의 유혹이란 실로 가공할 노릇이었다.
“혼인해 주시오.”
“미쳤어요? 돈이나 내와요!”
“돈을 주면 혼인해 줄 거요?”
“돈을 받으면 가야지 뭔 놈의 혼인이에요. 예쁜 여자나 찾으라고요, 태자라면서요!”
“그대도 아이는 낳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소? 허면 그대도 여자라고 볼 수 있지. 우리나라 법으로 따져 보아도 이치에 맞소. 여인에게 목숨을 구함 받으면 청혼하는 것이 이 나라의 법도지.”
“아니 멀쩡한 남자한테 왜 애 낳고 들어앉으래. 아니 막말로, 내가 당신 부인이 되면 뭐가 좋은데요?”
“…내 외모를 좋아하지 않소? 나와 함께하면 평생 이 얼굴을 볼 수 있소.”
“이…이잇!”
아마 그때, 용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을 것이다. 생각만 하던 걸 정면으로 들키는 건 용이나 사람이나 비슷하게 무안한 일. 아 나는 왜 외모에 약한 용으로 태어났단 말인가? 참으로 한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대가 어떤 이라도 상관없소. 나는 오로지 그대만을 사랑할 거요.”
“오로지 그대만을 비로 맞을 것이오. 그대 하나만을 생을 걸고 사랑할 테니 부디 혼인해 주면 안 되겠소?”
이건 뭘까?
용은 가끔 그때를 기억하면 비늘이 곤두설 것 같은 감정을 느끼곤 했다. 오랫동안 살면서 그런 이상한 기분을 느낀 것은 남자가 유일했다.
용들은 타 종족과의 사이에서 피를 남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남자와의 사이에선 무언가를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인간의 몸으로 자손을 남기기로 결정한 것은.
‘용의 표식을 이은 이를 해하는 자, 용의 저주가 내리리라. 그의 피가 이 땅 위에 흐르는 그날 용의 분노가 도래하리니, 이것은 용의 이름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이어질 맹세로다.’
인간의 몸에 섞인 용의 피는 언젠가는 사멸한다. 그렇다면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용의 권역 선언에 죽음은 지랄을 했지만 용의 의지는 굳건했다. 어차피 천 년도 못 갈 선언인데 그것 하나 못 들어주느냐?
실제로 대륙 전쟁 마지막에 모습을 드러냈던 그는 자기 생각대로 피가 사멸에 접어든 걸 알고 죽음을 얼렀다.
거봐, 곧 없어질 거라고 그랬잖아.
영원한 건 없다니까.
‘…없어질 거라면서요?’
그리고 그 말을 내뱉은 지, 천 년하고도 삼십 년 뒤.
용은 죽어 가던 예쁜 아이의 부름을 받고 다시 눈을 떴다. 반쯤, 아니 거의 죽었던 예쁜 자손을 재빨리 살리고 몸에 생기를 불어넣자 어린것이 다시 살아나는 광경이 퍽 기껍다. 죽음이 방방 뛰며 용에게 화를 냈다. 용은 어색한 얼굴로 죽음에게 사과했다.
‘미안, 나도 내 피가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지 뭔가.’
‘미안하면 돌려주시지요. 내 손에 조금 전까지 들어왔었는데!’
그렇게 예쁜 혼은 몇 백 년 만에 처음이라고요! 죽음이 방방 뛰자 용은 눈을 찌푸렸다.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이건 이거다.
‘안 돼. 내가 권역에서 어떤 언령을 말했는지는 그대도 알잖나?’
세상에 마지막 남은 용의 권능은 실로 광대하니, 죽음은 그의 권역과 약속에 감히 저항하지 못한다. 죽음은 애써 힘을 써 보았다. 허나 결국 용의 권능은 지고하다는 것만 알게 되었다.
‘제기랄!’
결국 죽음의 분노는 다른 이에게 향하고 말았다. 하나는 죽음이 친히 강림하게 했던 자였고, 다른 하나는 그자와 손을 잡았던 또 다른 누군가라.
용은 그 행동에 대해선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솔직히 무슨 상관이겠는가, 어차피 내 자손도 아닌걸.
게다가 개중 한 명은 대륙의 주인이라 자처하던 그 얄밉기 그지없는 황제의 혈손.
용이 손대지 않을 이유란 참으로 차고 넘쳤다.
‘원래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법이지.’
어차피 사람 죽이려고 시도했던 놈이니 저 정도 벌은 받을 법하지 않은가. 게다가, 아무리 죽음의 낙인이 찍혔다 하더라도 죽음을 자극하기 전엔 저주는 발동하지 않는다. 즉, 착하게 살면 낙인이 있어도 제대로 살 수 있다는 의미.
‘결국 살아도 자기 탓, 죽어도 자기 탓이지.’
용은 파르르 떠는 죽음을 뒤로 한 채 눈을 감았다.
어쩐지, 죽기 전 남자가 했던 말들이 귓전에 맴도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대가 날 기억하는 한, 나는 영원히 이 땅에 남아 당신을 찾아가겠소. 내 후손, 그 후손들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이것은 언령일까?
용은 생각한다.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먼저 들지만, 이상하게도 생각은 용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언령은 용의 것, 인간은 언령을 쓰지 못한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은 우연의 소산일 가능성이 높았으며 그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내가 기억하는 한, 이라.’
용은 피식 웃으며 눈을 감는다. 남자를 만나고 살아왔던 생들이 어제와 같이 떠오른다. 실로 오래전에 남자는 죽고 사라졌으나, 그는 그에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
생과 사를 초월한 용에게 중요한 건 실존이지 현존이 아니다.
그렇다, 그에겐 그저 존재 자체가 의미가 있다.
순간을 영원처럼 살고, 영원을 순간처럼 사는 용에게 있어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그는 단지 남자가 존재했다는 사실 하나만이 의미가 있다. 그리하여 그 흔적이 남아, 가끔 이렇게 그에게 손을 내밀 이 순간이 몹시도 중요하게 된 것처럼.
‘…영원이라.’
그리하여 어쩌면, 그의 혈손은 약속했던 천 년을 넘어서 더 먼 곳을 바라볼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까지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을 것이나, 그래도 혹시 모르지.
사막을 건너다 본 남자를 우연히 구했던 것처럼, 정해진 시간이 우연히 늘어난 끝에 그 남자가 다시 그에게 손을 내밀어 올지… 그 누가 알겠는가.
용은 그렇게 죽음을 일별하며 멀어지는 자손을 주시한다.
언젠가 다시 올지 모를, 미래의 어느 날이 새로이 시작되는 것을 꿈꿔 보면서.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