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필로그 (15/20)

에필로그

혼인을 치른 그해 가을, 공작의 출산이 있었다.

출산이 시작되자 렉시는 사람들을 물리고 최소한의 인원만 성을 드나들게 했다. 그리고 로메인의 백부와 다른 의원들을 불러 공작의 출산을 도왔다. 공작은 예전 기억을 더듬어 출산이 빠를 것이라 예상했다. 허나 예상과 달리 진통은 길었다.

“대, 대체 왜 산통이 끝나질 않는 건가?!”

“송구합니다 전하, 그때와 지금은 신체가 퍽 다르셔서 그렇사옵니다. 조금만 더 힘을 줘 보시옵소서!”

공작은 땀을 뻘뻘 흘리며 이를 악물었다. 실로 후회가 막심했다. 이 나이 먹고 왜 내가 애를 가졌단 말인가. 뒤늦은 후회와 노여움이 또 다른 씨앗 제공자에게 가는 것은 따라서 퍽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여 공작은 기나긴 진통 내내 베르크 남작을 욕했고, 베르크 남작은 그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공작에게 머리를 쥐어뜯겼다. 렉시는 그 옆에서 약간 꼬소하다는 시선으로 둘을 보면서 일을 했다. 외려 안절부절못한 건 로메인 쪽이었다.

“괜찮겠습니까?”

“뭘요. 아, 어머니요?”

“…아무리 강건하신 분이라도 나이가 있으시지 않습니까.”

“전쟁터에서 날 낳으신 분인걸요. 별일이 생기려면 그때 생겼겠지요.”

냉정한 말 같지만 렉시는 자신이 있었다. 용의 영지에서 용의 후손이 애 낳다 죽을 리가. 아마 죽더라도 용이 알아서 살려 주지 않을까?

렉시는 어깨를 으쓱하며 일을 계속했다. 하지만 로메인은 퍽 심각해졌다. 그가 보기에 이 일은 그렇게 넘길 일이 아니었다.

렉시는 아버지의 곤란으로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지금 보이는 저 모습은…. 머지않아 있을 그들의 미래였던 것이다.

‘임신 출산이 저렇게 어려운 일이었다니!’

여자도 힘든 일인데 하물며 남자는 어떻겠는가. 새로이 깨달은 진실에 로메인은 대오각성했다. 그는 렉시 몰래 산실에 찾아가 둘을 관찰하고 보살폈다.

‘내가 지금 하는 고생이 미래 우리 둘을 지킬 것이다.’

혼인도 전인데 내조부터 시작하시는, 실로 우리의 훌륭한 로메인 경 되시겠다.

어쨌거나, 이렇게 기나긴 진통 끝에 공작은 무사히 아이를 낳았다. 아이도, 공작도 무척이나 건강했고 긴장하던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태어난 아이는 여자아이였다. 참고로, 애는 무척 귀여웠다.

“내, 내가 딸을! 우리 집안에 딸이!”

남자와 남자 사이에서 딸이 나올 줄 몰랐던 남작의 기쁨은 컸다. 물론 아들이어도 기뻤겠지만 딸이어서 더 기쁘다. 그는 그 순간 세상에서 뭐 하나 남부러울 것 없는 사람이었다.

듬직한 아들, 토끼 같은 딸, 여우 같은 아내를 가진 남작은 이 시대의 승리자였다.

“주접도 좀 정도껏 하시지….”

렉시는 혀를 차며 아버지를 욕했다. 동생 생긴 큰 애의 질투는 물론 아니다. 이 나이 먹고 부모 뺏겼다고 질투는 무슨 놈의 질투? 그도 새로 낳은 여동생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어린것이 두 눈을 반짝거리는 걸 보고 있자면 가슴이 짜해지고 뭐 그랬으니까.

하지만 아버지의 주책은 그 귀여움을 상쇄할 정도로 장한 것이었다. 아이고 저 진상, 작작 좀 하시지. 렉시는 고개를 저으며 아버지의 주접을 욕했다.

“저러다 사고 치지. 사고 쳐.”

렉시는 투덜투덜 중얼거렸다. 아버지를 다시 만난 이래 저 말은 렉시의 버릇이 된 지 오래였다. 아이고 저 진상,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즉 이건 뭔가 알고 한 게 아닌 그냥 입버릇으로, 입이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헌데, 설마하니 그 말이 씨가 될 줄이야.

렉시는 아침부터 받은 보고서를 들고 부들부들 떨었다.

“이게 뭐야…?”

“죄송합니다. 저희가 미처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와 미친 잠깐. 진짜라고?”

렉시는 황당한 얼굴로 남자들, 그러니까 시종들을 내려다봤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사태였다. 다른 데도 아니고 여긴 공작저다. 사람도 수십이 왔다 갔다 하는 곳이 공작의 내성이고. 헌데 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이 모양인가. 아니 어떻게 공작 부처와 애가 사라지는 걸 밤새 내내 몰랐단 말인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 현실에 렉시는 재차 물었다. 아, 차라리 이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진짜 어딜 간 게 맞아? 누군가 납치한 게 아닌 거 확실해?”

“이것을 봐 주십시오.”

렉시는 시종들이 올린 편지를 냅다 폈다. 거기엔 지난 밤 홀랑 사라져 버린 남작이 렉시에게 보내는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 렉시는 딱딱한 얼굴로 편지를 끝까지 다 읽었다. 파르르 떠는 손가락이 현실을 지극히 부정했다.

으악! 렉시는 결국 괴성을 내질렀다.

“이, 이, 이 망할 아버지!”

―아들아. 나 네 엄마 데리고 페르귄 영지 좀 가 있을게. 산모는 푹 쉬어야 하지 않겠니? 성에 있으면 니 엄마가 못 쉬겠더라. 아들, 솔직히 말해서 산모에게 일 시키는 게 어디 말이나 되니?

페르귄 영지는 조용하고 공기도 좋으니까 네 여동생에게도 좋을 거야. 대충 몸 풀고, 일 좀 정리되면 올라갈게. 그럼 수고해라!―

찌지직.

렉시의 손에서 편지가 찢겨 나갔다. 그는 부들부들 떠는 얼굴로 찢겨지는 편지를 바라보았다. 공작의 시종들은 숨을 죽였다. 시일이 꽤 지났지만 아버지를 열심히 팬 렉시의 무용은 여전히 이들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렉시는 외쳤다.

“이 주책바가지 영감탱이 같으니! 내가 일을 시키면 얼마나 시킨다고 어머니를 데리고 냅다 튀어?”

아무리 그래도 그가 산모에게 얼마나 많은 일을 시키겠는가. 단지 공작이 아직 자리를 물려주기 전이니, 필수적으로 도장 찍고 봐야 할 몇몇 일이 꼭 필요하다 말한 것뿐인데. 제대로 된 법적 근거에 기한 일 처리가 얼마나 중요한가? 헌데 고작 그거 시킬 거 같으니 튀어?

그 빌어먹을, 작위로 대출받아 산 마도구를 가지고서?!!

“내가… 그 빌어먹을 마도구를 압수했어야 했는데. 내가 그걸 왜 냅둬서!!!!”

렉시는 땅을 치며 후회했다.

늘 그렇듯, 뒤늦은 후회였다.

여하간, 이미 일은 벌어졌고 떠난 사람은 오지 않는다. 결국 렉시는 공작이 여행을 떠났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공표했다. 혹여나 있을 혼란을 대비해서였지만, 재미있게도 사람들은 이 상황에 제법 잘 적응했다. 의외의 사실 같지만 사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요 일 년 사이 별별 일을 다 겪었다. 가짜 공작, 지진, 땅에서 솟아오른 용, 새로이 나타난 예쁜 소공작, 공작의 출산까지. 그런 그들이니 고작 공작이 여행 간 게 뭐 얼마나 별일이겠는가. 죽은 것도 아니고, 고작 여행인데!

설령 용이 날아올라 하늘에서 줄넘기를 해도 그들은 적당히 넘길 것이다. 참으로 대단한 오픈 마인드의 소유자들이 된 공작성의 사람들을 보며 그저 렉시만 한숨이 깊었을 뿐이다.

렉시는 그렇게 공작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소공작으로서 공작의 대리를 하는 일은 힘들었지만, 렉시는 어떻게든 해냈다. 이건 아마 렉시의 곁을 줄곧 보좌하는 로메인 덕분도 있을 것이다. 이듬해엔 휴가와 동시에 혼인까지 끝낸 플로랑 후작이 복귀했고, 이후 알렉시아노 공작의 정치는 이 두 사람을 양 날개로 한 형태로 계속해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약간 벗어난 언급을 하나 하자면, 플로랑 후작이 혼인한 상대는 그녀의 애증의 첫사랑 제퍼슨이다. 뜬금없는 혼사 같지만 사실 이 둘은 젊은 시절 한때 서로 불장난을 한 사이였었다. 나이가 든 이후 서로 길이 갈라진 뒤 헤어졌던 바 있었는데, 파직당한 그를 후작이 데려갔다가 뒤늦게 다시 불이 붙었던 것이다.

사랑은 그저 혼돈 파괴 망각이어라.

이 결혼을 두고 갖가지 말들이 오고 갔고, 그것을 쓰라면 또 꽤 긴 이야기가 될 것이지만… 남은 지면이 퍽 부족하여 길게 적지는 않는다.

다만, 차후 이 둘의 혼인 사정을 들은 렉시의 평만 여기에 짧게 적고 갈 뿐이다.

“…이런 미친!”

렉시는 공작의 자리를 대신한 이듬해, 황녀의 초대를 받아 황도로 간다. 속 시꺼먼 귀족들이 넘치고 넘치는 있는 황도인 만큼, 올라갔을 때에도 몇 가지 사건이 있었지만 그는 위기를 잘 넘기고 사람들의 호감을 샀다. 그 아름다운 외모 덕분에 벌어진 일들은 아직도 전설처럼 남아 있다. 그들은 그렇게 황도 생활을 끝내고, 무사히 영지에 돌아와 성대한 혼인을 치른다.

둘은 슬하에 아들 셋과 딸 둘을 두었다. 아이들은 자기 부모와 조부를 적당히 닮아서 다들 영특하고, 예쁘고, 사랑스럽고, 그리고 쉴 새 없이 사고를 쳐 댔다. 부친의 일로 어지간한 일론 놀라지도 않는 렉시조차 아이들이 치는 사고엔 가끔 얼굴이 희어질 정도였다.

이 다섯 아이들이 적당히 자란 이후엔, 공작령은 조용할 날이 단 하루도 없었으나….

그래도, 그들이 늘 행복했다는 것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렉시와 로메인은 그렇게 자신들의 부모 못지않게 금실 좋은 모습을 보이며 공작령을 지혜로이 통치했다. 렉시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지혜로운 통치자가 되었으며, 로메인은 그런 렉시를 지혜로이 보좌하여 현명한 부군의 귀감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정말 정말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한다.

[호박이 넝쿨째, end]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