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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공작령의 용 (12/20)

11. 공작령의 용

플로랑 후작은 밤새 내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루 종일 렉시의 잔소리를 들은 것까진 괜찮았다. 그런데, 시종장을 찾으라고 보낸 사람이 이런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전하, 시종장님이 사라지셨습니다!”

급박한 목소리,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그건 이미 나도 들어 아는 일이다. 걱정 말아라. 이미 사람을 풀어 시종장을 찾으라고 했으니까.”

“아아! 그랬군요. 역시 전하시옵니다. 전하, 그렇다면 시종장님을 납치해 간 그 마차의 정체는 무엇이옵니까?”

“…뭐?”

마차? 납치?!!!

후작은 숨을 삼키다 말고 켁켁거렸다. 당연했다. 그가 아는 것은 아침에 나간 시종장의 소식, 허니 납치당했다는 이 말을 들었을 리 없다. 그는 기겁하는 동시에 진노했다.

납치라니! 우리 시종장을 감히 누가 납치했다고?

‘남작이 한 말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납치 어쩌고저쩌고한 그 말이?’

말이 씨가 된다더니 이 무슨 대역무도한 일이란 말인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음과 동시에 미친 듯이 시종장이 걱정이 됐다. 가련하게 뒤돌아서던 그 뒷모습을 생각하자니 미칠 것 같은 후작이었다. 이런 납치 사건은 한시가 바쁜 법, 그녀는 곧바로 휘하 기사단을 풀어 시종장을 수색하게 했다. 물론 아직까진 비공식 수색이었다. 혹시라도 큰 소란이 일면 시종장의 안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은가.

“그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놈들을 당장 잡아 와라. 내 그놈들이 다음 날 아침 해를 보지 못하게 할 것이다!”

조용히 진노한 공작의 분노는 밤새 내내 타올랐다. 아무리 은퇴를 앞두고 있다지만 공작은 공작, 최고 권력자의 진노란 무서운 법. 기사단들은 뿔뿔이 흩어져 시종장의 자취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가 기다리던 소식은 없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이럴 수가. 플로랑 후작은 이를 악물고 맹세했다. 간만에 잊고 있던 악과 깡이 새록새록 솟아오르는 그였다.

“시종장이 오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미룰 것이다. 은퇴식, 약혼식 모두 다!”

겨우 사람 하나라고 하기에 시종장의 빈자리와 중량감은 매우 크다. 아마 렉시와 로메인도 이 사정을 들으면 필시 고개를 끄덕일 터! 그는 그렇게 시퍼렇게 날을 세웠고, 공작령 전역에 수색령을 내리고자 업무실에 들어섰다.

들어섰는데.

그곳엔,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는 시종장이 있었다.

그녀는 눈을 비볐다.

“???”

환상? 꿈?

“오셨습니까, 전하.”

“…어?!”

납치됐다면서?

“자, 자네!”

“어제는 제가 그만 몸이 좋지 않아 하루 쉬었습니다. 심려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꾸벅 인사하는 시종장의 얼굴은 멀끔했다. 아니 멀끔하다 못해 빛이 번쩍거렸다. 얼굴만 보면 납치된 게 아니라 어디서 며칠 쉬고 온 사람 같다. 후작은 황황한 얼굴로 시종장을 바라보며 말을 골랐다. 이게 대체 무슨 영문인가 알 수가 없었다.

“자네 대체 어떻게 된 건가? 사람들이 다들 자네가 납치되었다고 했다네!”

“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시종장이 갸웃거렸다.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투였다.

“납치라니요? 전 그냥 의원에 다녀온 뒤 하루 쉬었을 뿐입니다. 대체 누가 그런 망발을 했습니까?”

“한둘이 아니야. 수십 명이 그렇게 말했네! 정말 아닌가? 커다란 마차 한 대가 자네를 덥석 들고 갔다고 했는데?”

“마차가?”

시종장은 마차 소리에 고개를 젓다 멈칫했다. 아, 그것 말이군요. 그는 민망한 듯 얼굴을 긁으며 사정을 설명했다.

“맞습니다. 그런 일이 있긴 했었지요.”

“역시!”

“하지만 별일 아닙니다. 그거, 오랜만에 만난 친구였습니다.”

“…뭐? 친구라고?”

“네, 원래 좀 돌아다니면서 상행 다니는 녀석입니다. 원래 이 시기엔 다른 곳에 있는데, 우연찮게 공작령에 들렀다고 하더군요. 저도 그만 깜짝 놀랐지 뭡니까. 하지만 원체 장난이 심한 놈인지라….”

솔직히 하나도 믿기지 않는 변명이다. 하지만 시종장이 그에게 거짓말을 할 리는 없을 터, 하여 플로랑 후작은 시종장의 말이 무척 아리까리했다. 진짜인가? 정말?

‘친구라고? 저이에게 그런 친구가 있었나?’

시종장에게 물론 친구가 있을 수야 있다. 하지만 그 친구가 길 가던 사람을 덥석 들어 나를 정도의 괴벽을 지닌 친구라면 이야기는 다르지. 글쎄, 그가 아는 시종장의 교우 관계란 상당히 상식적인 사람들뿐인 것이다.

‘이상하다. 시종장의 교우 관계가 그렇게 넓었나?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

하지만 친구라고 말하는 그의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녀가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며 진위 여부를 탐색했다. 하지만 시종장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허면 하루 종일 자네 어디 있었는가? 자네를 찾아 어제 하루 내 기사단들이 돌아다녔네!”

“예? 저 여태 공관에 있었습니다.”

“공관?!”

“네, 돌아온 뒤로 계속 그곳에 있었습니다…. 아, 혹시 절 수색한 장소가 성 밖인 겁니까?”

“…….”

후작은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어째서 기사단을 풀어도 소식 하나 없었는지 그제야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그렇지, 집 안에 있는 사람을 집 밖에서 찾으라고 했으니 아무 흔적이 없지…. 그는 긴장을 풀고 어깨를 내려놨다. 밤새 내내 고민하고 고뇌하며 화내던 시간들이 허탈한 순간이었다.

“맙소사. 나는, 정말 자네에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그녀는 아무 의자나 끌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맥이 탁 풀리니 서 있기도 버거웠다.

“조만간 성문 담당 기사와 그 담당 시종들을 교체하고야 말겠네. 어떻게 사람이 오고 가는 걸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단 말인가?”

그들이 일을 안 해서 이런 사달이 벌어진 것이다. 제대로 일했으면 이렇게 난리 법석을 부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은퇴식을 앞두었다고 다들 긴장이 풀린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이를 갈자 시종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원래 하던 일이 아니어서 그런지 확실히 경계가 부실해졌더군요.”

“과연 그랬던 건가! 역시 이상했어, 대관절 성문 담당 기사들을 바꾼 것이 누구인가?”

“그것 말입니까? 전하십니다.”

후작의 입이 콱 막히는 순간이었다.

“…나?”

“네, 본래는 전하의 곁을 지키는 근위 기사들이었지요. 몇 달 전 그들을 그쪽으로 보내시고 새 기사단을 근위 기사들로 선별하셨습니다.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아!”

후작은 헉 하고 입을 다물었다. 진짜 공작이 성을 떠난 뒤, 혹시라도 자기 이상한 거 들킬까 봐 기사들을 모두 바꾼 것이 그제야 생각이 났다.

맞다, 내가 그랬지!

실로 아뿔싸인 상황, 하지만 시종장은 태연자약했다.

“뭐 그때는 응당 그러할 만했습니다. 전하가 쓰러지시고 난 뒤 제대로 대처를 못 하여 바꾼 것이니…. 따지고 보면 몇 달이 지나도록 일도 못하는 그들의 잘못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이번 일은 예전 담당이 가 있었어도 벌어질 일이었을 겁니다. 제가 공관에 있을 것이라 다들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니까요. 그러하니 너무 노여워 마십시오.”

“…….”

내가 그런 이유를 댔었나…?

사소한 것이라 생각해 무슨 변명을 지껄였는지도 기억 안 난다. 어쨌거나 살피고 보니 자기 탓도 좀 있는 상황이라 잘잘못을 따지기 무엇하다. 공작은 무척 무안해졌다. 하지만 그가 겪을 고난은 그게 끝이 아니다. 놀라움과 열받음이 스치고 지나가니, 이제 슬슬 그와 헤어지기 전 일들이 기억이 났던 것이다.

‘화내면서 나갔었지, 내가 말실수해서.’

후작은 얼굴을 붉히며 시종장의 눈치를 봤다. 렉시는 무조건 사과를 하라고 했다. 그도 그래야 하는 것을 알긴 했다. 하지만 이 나이를 먹어도 사과란 어려운 것이다. 어떻게 하면 사과할 수 있나 타이밍을 재던 그녀는 아까 시종장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 낯색을 바꿨다. 맞다, 그러고 보니 아프다고 그랬는데.

“그래, 알았네. 내 그렇게 하지…. 헌데 아프다는 건 무슨 소리인가. 의원이라고?”

“그 말 그대롭니다. 아파서 잠시 나갔다 온 것이지요.”

“왜 밖으로 나가고? 의원은 성으로 부르면 되는 것 아닌가.”

“제가 늘 부르던 이가 바쁘다고 하지 뭡니까. 운동 겸 나갔고, 다행스럽게도 결과는 나쁘지 않으니 걱정 마십시오. 거기다 저보다는 전하의 건강이 더 문제 아니겠습니까.”

“자네의 건강도 문제네!”

“그거 매우 감사한 말씀입니다. 헌데 제 건강을 생각하신다면 이런 일은 자제해 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일? 무슨 일? 그때 시종장이 탁자 위 서류를 가리켰다. 렉시의 채찍질하에 미친 듯이 만들어 둔 인수인계 서류를.

“예를 들어, 이런 서류 말입니다. 제가 하루 없었다고 이렇게 홀로 일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정말 저를 위하신다면 제가 있을 때 일을 하십시오. 저 없을 때 전하께서 쓰러지면 그게 더 악몽입니다!”

“!”

어김없는 잔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진다. 그녀는 어쩐지 얼떨떨해졌다. 혼난 것도 혼난 것이지만 그보다는 다른 게 더 놀라웠다. 잔뜩 토라져 말도 못 붙일 줄 알았는데…?

‘아. 혹시 알아서 풀어 버렸나?’

그렇다면야 참으로 다행이었다. 혼자 토라졌다가 알아서 푸는 거야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물론 여전히 미심쩍은 구석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사람이 알아서 화를 풀었다는데 싫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잠시 복잡다단한 생각에 잠겼던 후작이었지만, 그는 알아서 잘됐다 판단하고 생각하길 포기했다. 사실 더 생각할 것도 없다.

어쨌거나 시종장이 무사히, 안전히 돌아왔으니 된 것 아닐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이 일을 마무리 짓고 말았다.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약혼과 은퇴 관련 연회들은 후작 부인과 만난 시종장이 처리했고, 플로랑 후작과 렉시, 로메인은 인수인계 받을 일들을 의논하며 끝냈다. 이것과 관련하여 약간 일이 있긴 했다. 공비와 버나드, 백작이 뒤에서 슬그머니 방해 공작을 하는 등의 일이다. 하지만 물줄기가 급박하면 막기도 힘든 법. 결국 그들이 한 몇몇 시도가 수포로 돌아간 뒤론 다들 뭘 해야 할지 모르는 모양인지 잠잠했다. 그 정도로 일은 빠르게 진행됐다.

그리고 참 재미있게도, 약혼이 가까워 올수록 다른 귀족들도 덩달아 바빠졌다. 두 사람의 연회 참석 때문이었다. 초대는 받았으니 참석은 해야 한다. 헌데 너무 급박한 일이다 보니 다들 선물 준비를 하나도 못했다. 자고로 약혼과 은퇴연에 참석하는 자들은 선물을 가져와야 하는 법. 헌데 주최가 공작가니 고로 고만고만한 선물로는 택도 없다. 귀족들은 난데없는 지출에 머리를 싸맸다.

“없다! 선물할 게 없어!”

“상점가는? 뭐? 다른 사람들이 다 선점했다고!”

“상단! 상단 쪽을 알아보면 어떤가?”

“아악! 대체 왜 한꺼번에 해치우는 거야! 한 명씩 하지!”

모두 같은 소리를 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마 맘 같아선 돈으로 주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일 것이다. 허나 현금 선물은 자고로 천한 상인들이나 하는 짓이라. 귀족들은 절대 지양하는 일이 바로 현금 선물. 하다못해 돈으로 산 보석이라도 선물해야 면이 서는 것이니 귀족 체면 차리는 것도 참 보통 일은 아니다.

어쨌거나 이들 덕분에 성도 시장은 연일 만원사례였다. 멀리서 소식 듣고 선물을 들고 오는 사람, 원래 성도에 있던 사람들이 만들어 낸 혼란은 공작령의 혼잡함을 가중시켰다. 급기야는 깐깐하다는 동문을 이용하는 객들까지 급증했다. 그 짜증 날 정도의 깐깐함을 감내하겠다는 사람이 늘었다는 건 그만큼 다른 문으로 유입된 사람이 많다는 반증이라. 그저 매일매일이 전쟁 같은 하루란 말이 딱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내일이네.”

약혼 전야.

렉시는 감회 어린 눈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카우치에 길게 누워 있는 렉시의 아름다운 미모를 본 시종들이 얼굴을 붉히고 등등…의 일은 물론 없다. 푹신한 카우치에 기댄 그는 얼굴에 달걀인지 오이인지 모를 팩을 한 채였기 때문이다. 물론 얼굴 아닌 자태만으로도 아리땁긴 했지만 후작 부인이 보내 준 자들은 그야말로 전문가 중 전문가.

렉시는 피부 관리 전문가들에게 몸을 맡긴 채 휴식을 취했다. 물론 편안하게 쉴 정도로 일을 완벽히 끝내진 않았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오늘은 전야다. 약혼 전야.

그리고 전야의 신부는 미용 관리를 받아야만 하는 역사적인 사명이 있는 법이다. 미용의 위대함은 몰라도 쉴 수 있는 특권엔 관심이 많은 렉시는 그 사명과 얼굴 위에 올라온 팩이 생각보다 참 괜찮은 거라고 생각했다. 누워서 있는 게 조금 귀찮았지만, 그 김에 누워 쉴 수 있는 게 어딘가.

그리고 그런 그의 옆엔 얼결에 같이 잡혀 팩을 하는 요수아도 있었다. 얼굴이 예뻐지고 신랑에게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소리에 저요저요를 외치며 저도 같이 누웠기 때문이다. 물론 사용인들은 이 어린애가 참 귀엽다고만 생각해서 같이 해 주었다. 설마하니 정말 요수아가 기혼자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요수아가 말했다.

“진짜 이날이 왔군요.”

“응? 뭐가.”

“영주님을 보내 드릴 날이요.”

그는 렉시를 보며 비장하게 읊조렸다.

“드디어 영주님이… 이 말도 안 되는 약혼을…!”

갑자기 열이 확 치받아 오른 요수아가 벌떡 일어났다. 로메인을 받아들인 것관 별개로, 아직 영주님 배우자에 대한 야망은 버리지 못한 그다. 흑흑 우리 영주님! 그 기세에 화들짝 놀란 시종 시녀들이 요수아를 도로 뒤로 눕히며 왁 외쳤다.

“팩 떨어져요!”

“…죄송합니다.”

“죄송은 제가 아니라 소년의 피부에 하세요. 당장 누워요 시종 소년. 어린 나이라고 주름이 안 지는 건 아니거든요? 옆에 계신 남작님 건드리지 마시구요!”

“네, 넵!”

살기까지 느껴지는 시선이다. 요수아는 얼른 렉시에게 멀찍이 떨어져 누웠다. 이 촌극에 렉시는 웃음을 참느라 배를 끅끅거렸다.

“크큭….”

“웃지 마세요! 주름진다니까요!”

“으, 응. 크흡!”

히스테릭한 사용인들의 시선을 받으며 렉시와 요수아는 그렇게 누워 마사지를 했다. 목욕도 했고. 덕분에 계란처럼 매끈한 발뒤꿈치, 거스러미 하나 없는 손발톱, 윤기 흐르는 머리칼을 얻고 나니 어느덧 이른 밤이었다. 시종들이 물러가며 단단히 말했다.

“저녁엔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되십니다. 오늘은 반드시 저염식을 하십시오. 얼굴 붓습니다.”

“그, 술도 안 될까?”

“술? 맙소사, 진담은 아니시죠?”

“따, 딱 한잔만…!”

“그런 건 내일 드세요. 내일!”

피곤을 풀 와인 한잔이 절실했건만, 모두 기겁하며 꺄악대자 렉시는 그냥 포기했다. 마시는 게 문제가 아니다. 줘야 먹는 것이다. 하지만 렉시에겐 수가 있었다. 좋아, 이럴 때를 위해 너를 데리고 있었다. 가라 요수아! 가서 내게 밥을!

…하고 옆을 본 렉시는 이미 저만치 도망간 요수아를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이놈이?

“죄송해요 영주님! 전 다른 데서 먹고 올게요!”

“이, 이 배신자!”

렉시 옆에 있으면 술은 고사하고 밥도 제대로 못 먹을 걸 안 소년의 판단력은 재빨랐다. 그렇다. 청소년에게 뭘 바라겠는가. 영주님 배우자에 대한 야망은 포기해도 기름진 밥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10대의 위장이라. 렉시는 방으로 운반되는 샐러드와 과일 몇 조각을 보고 슬픈 눈을 했다. 눈치 없는 시녀가 렉시에게 은근히 말했다.

“그, 그래도 우유는 가져왔답니다. 부디 힘내십시오!”

“…….”

우유도 먹으면 안 됐냐….

아몬드와 샐러드, 과일 몇 개는 그야말로 간에 기별도 안 갔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해치운 렉시는 으으 하고 자리에 누웠다. 꼬르르륵 주린 배가 비명을 지른다. 맙소사, 나 지금 체중 조절 중?

“다들 내가 남자인 걸 잊고 있는 것 아닌가?”

가봉해서 입은 옷도 잘 맞았는데 이게 웬 고행인지! 대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처사인지를 모를 일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는 건장한 청년 아닌가. 이런 건 가냘픈 몸매를 원하는 처녀들이 하는 일인 줄 알았는데.

렉시는 한숨을 삼켰다. 하늘에 휘영청 뜬 달이 마치 흰 빵 같아 더욱 슬픈 밤.

“잠이나 자자….”

주린 배를 움켜쥐어 봐야 오는 것은 없다. 요수아도 저렇게 도망갔고, 필립도 없으니까. 참고로 필립은 로메인의 청으로 현재 성문 담당들 일일 교관으로 나섰다. 높은 보수에 단기직이라 간 건데, 렉시는 솔직히 그 기사들이 무척 불쌍했다.

‘참 재수들도 없지. 안 그래도 요즘 심심해하던데.’

그냥 재수가 없는 것도 아니다. 솔직히 그들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반 죽었다고 보면 됐다. 교관 일이라는 말을 들은 필립의 눈이 얼마나 번쩍거렸던가. 그가 저런 눈을 할 때에, 영지에선 사람은 물론이고 말 못 하는 동물들조차 필립을 슬슬 피했다.

아아 불쌍한 이름 모를 기사들이여.

어쨌거나 그들은 오늘 하루를 보내고 나면 좀 다른 세상을 살게 될 것이다. 자신들이 얼마나 자비로운 상사 밑에서 일하고 있었는지를 싫어도 알게 되었을 테니.

렉시는 뒤척거리다가 침대 옆에 있는 종이를 주워 들었다. 내일 있을 식 순서를 적어 놓은 종이였다. 아까 요수아가 먼저 보라고 가져온 것이었는데, 자기 전에 이것이나 보고 있을까.

첫 장에 쓰여 있는 글자를 읽으며 내용을 머릿속에 집어넣는다. 생각보다 조금 긴 식 순서를 읽고 있자니 어쩐지 졸리는 것도 같다. 이대로 잠을 자면 딱 좋겠는데…. 그렇게 반쯤 감긴 눈으로 종이를 보던 렉시는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똑똑!

짧게 두 번씩 끊어 치는 노크 소리.

“…요수아?”

렉시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상대가 누군지 밝히지 않았지만 누군지는 확연했다. 아무리 이른 밤이라지만 이곳은 예비자가 붙은 신부의 방. 허니 이렇게 문을 두드릴 만한 건 렉시의 측근들밖에는 달리 없기 때문이다. 사람 괴롭힐 기회를 잡을 필립이 벌써 올 리는 없고… 남은 것은 뭐, 요수아일 수밖에.

근데 왜 벌써 왔대?

“들어와. 왜 벌써 왔니?”

날 배신하고 갔으면 더 먹고 와야지. 배가 터지게! 응?

렉시는 일부러 척하니 요수아를 등졌다. 혼자 배터지게 드시고 온 배신자가 뭐가 이뻐서 반기리. …아, 가만?

“너… 혹시 나 준답시고, 뭐 먹을 거라도 가지고 온 건 아니겠지?”

렉시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좋아도 한 번은 튕기는 것이 밀당의 기본이다.

“만일 그렇다면 너 생각 잘못한 거야. 이제 와서 내가 그냥 넘어갈 것 같아? 하지만 요수아 네가 사과하고 준다면야 뭐 한 입 정도는 먹어는 줄 수 있어. 물론 아주, 아주 약간만―.”

“그, 죄송합니다. 요수아가 아닙니다.”

휙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요수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 자리엔 로메인이 있었다. 로메인이 웃음을 참는 표정으로 렉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대충, 뭔가 알 만하다는 얼굴로…. 렉시는 조용히 무너졌다.

“…로, 로메인 경 오셨어요?”

크흐흠…. 로메인이 웃음을 참는 듯 일부러 길게 목울음을 냈다.

“그, 음식을 제한당하셨습니까?”

“…네. 조금 약간….”

렉시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망신이었다. 로메인이 사람 좋은 얼굴로 슬쩍 물었다.

“많이 배가 고프시면 제가 가서 뭐라도 가지고 오겠습니다.”

“아뇨! 아뇨! 괜찮아요.”

너그러운 제의였지만, 렉시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당한 망신에 더한 망신을 얹을 수는 없었다. 저 말에 좋다고 달라 하면 자기가 어떻게 되겠는가. 렉시는 달아오른 얼굴에 부채질을 했다. 대체 이 시간에 왜 오신 걸까?

“그, 이 시간에 어떤 일로 오셨어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웃음기가 섞인 로메인의 얼굴이 무척 다정했다. 그는 무안해하는 렉시를 보며 살짝 입술을 올렸다.

“주변에 물어보니, 사이좋은 약혼자들은 그 전날에도 시간을 가진다더군요.”

렉시의 눈이 확 커졌다. 확실히 그런 소리가 있긴 했다…. 그 속설은 자신도 알고 있는 바였고. 하지만 로메인도 자신도 바쁜 데다 이 약혼은 가짜 아닌가. 허니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어 별말을 안 한 것이었는데.

“굳이 이렇게 오시지 않으셔도 되셨는데… 바쁘셨잖아요.”

“바쁘다고 약혼자를 등한시할 사람은 없습니다. 게다가… 저 개인적으로도 당신을 뵙고 싶었으니까요.”

“저를요…?”

“예. 그간 얼굴은 조금씩 보았지만… 깊이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지 않습니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말하길… 약혼 전날 만나는 시간이 없는 연인, 들은 혼인까지 못 간다는 징크스가 있다고 합니다. 당신은 저에게 소중하신 분입니다. 뭇 사람들에게 그런 하잘것없는 것으로 말을 듣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로메인 경….”

삽시간에 몸이 달아올랐다. 다정한 말 한마디에 눌러 놓은 감정이 제 색을 띠고 올라온다. 렉시는 지금 당장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만일 자신이 진짜 그의 연인이었다면 이 말에 모든 서운함과 피로가 사라졌을 것이다. 그저 계약 관계인데도 이렇게 다정하면, 진짜 연인에겐 얼마나 다정할까. 미래의 정체 모를 누군가가 무척이나 부럽고 질투 나는 순간이었다.

대체 누굴까, 이런 당신이 마음을 줄 사람은.

누군지는 모르지만, 필시 복 받은 사람일 것이다.

렉시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지금 입을 열면, 저 몰래 숨겨 왔던 말이 불식간에 나올 것 같았다.

렉시가 한참 말을 잇지 못하는 걸 이상하게 본 로메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피곤하시거나… 이게 너무 부담스러우십니까. 그렇다면… 그냥 가겠습니다.”

“아니요! 설마요!”

자기도 모르게 로메인의 소매를 잡아챘다. 혹여나 갈까 싶어 다급해진 마음의 발로였다. 렉시의 손에 손목을 잡힌 로메인의 표정이 약간 어리둥절해 보인다. 렉시는 재빨리 로메인에게 가지 말라 만류했다.

“가지 마세요. 저도, 아니 전혀 부담스럽지 않아요.”

“……예. 알겠습니다. 안 가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후에야 손을 놓았다. 말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섞인 다정함에 설레고, 또 무척이나 부끄러웠다. 이게 무슨 아이 같은 짓일까. 렉시는 울렁대는 속을 부여잡고 미소했다. 다행스럽게도, 뒤이어 나온 간소한 일상 대화는 무척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식사는 하고 오셨나요?”

“조금 이르게 먹고 왔습니다. 연무장에서요.”

“요수아가 필립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필립도 함께 왔겠네요.”

“아, 필립은 조금 더 있다 올 겁니다. 스스로 업무 연장을 신청하더군요.”

“…필립이요?”

걔가 그럴 놈이 아닌데. 렉시가 되묻자 로메인의 얼굴에 뜻 모를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었다.

“그는 실로 좋은 교관의 귀감입니다. 하루 동안 교관을 하겠노라 하였으니, 적어도 자정 전까지는 자기가 담당이 아니겠느냐며 스스로 저녁 훈련을 자청했지요. 그가 보기에도 제 옛 부하들이 나태해졌다는 것이 보였나 봅니다. 좋은 교관을 만났으니 다들 뼛속 깊이 오늘의 가르침을 새겨 둘 것이라 생각합니다.”

“…….”

렉시는 로메인을 바라봤다. 좋은 교관이라고…. 진심인가?

“로메인, 저도 필립이 어떤 녀석인지는 알아요. 제가 알기론 그가 그렇게… 모범적인 교관은 아니거든요. 혹시 그 기사단이 공비의 기사단이고… 뭐 그런 건가요?”

“저는 사심을 가지고 공적인 일을 처리하진 않습니다. 실제로 좋은 교관이니 하는 말이었습니다. 아마 제가 했어도 그보다는 덜하지 않을 것이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아마 그들도 저 대신 필립을 만났으니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좀 말려야 하는 타이밍이 아닐까?

렉시는 생각했지만 곧 포기했다. 당장 내 코가 석 자인데 무슨 말을 하겠는가. 게다가 로메인이 저러는 걸 보니 그놈들이 뭘 크게 잘못을 했겠지…. 어색하게 웃는 와중에 로메인이 부드럽게 물어 왔다.

“요 며칠 바쁜 와중에 걱정이 많았습니다만… 건강해 보이셔서 기쁩니다. 어머니께서 많이 귀찮게 해 드렸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오늘 일 같은 일은… 자주 있었을 것 같군요.”

식사 제한을 말하는 거구나. 렉시는 다시 빨개지려는 얼굴을 붙잡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절 생각해서 해 주시는 일이니 감사히 생각하고 있어요. 여자 분들은 늘 하는 일이라는데 제가 우는 소릴 해선 안 되겠지요.”

“어머니를 너무 좋게 봐 주시는군요. 무리한 일은 거절하셨어도 됩니다.”

“그렇게 무리한 일은 아니었어요. 그냥 식사 제한이었으니….”

“저희 어머니는 제한된 식사가 아름다움을 만든다고 생각하시는 분이지요. 여성 분들이 체중 조절을 위해 식사 제한을 한다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건 그분들이 원하시는 일이니, 제가 참견할 바는 아니지요. 허나 당신은 그냥 그 자체로 아름다우시지 않습니까. 그 어떤 것도 하등 필요 없는 일이지요.”

하는 말 하나하나가 심장을 간지럽히는 깃털 같다. 렉시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손을 세게 쥐었다. 따끔한 아픔이 달떠 오는 심장을 애써 내리누른다. 애인에게 한 말이라면 달콤한 말이었을 테지만, 그의 평소를 살펴본다면 이건 그저 사실 적시일 터. 그래도 그의 눈에 내가 예뻐는 보이나 보구나.

렉시는 살그머니 웃으며 입가를 가렸다. 어쨌거나 사모하는 상대에게 아름답다고 듣는 상황이니, 기분이 좋은 걸 감출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 고맙습니다. 걱정해 주시는 게 참… 기쁘네요.”

렉시는 눈을 곱게 접고 미소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이 지긋하다. 자칫 잘못하면, 그것마저 열렬하다 착각할 것 같아 렉시는 숨을 가다듬었다. 지긋하던 시선이 조금 옆으로 떨어진다. 그의 시선이 자리한 건, 아까까지 렉시가 보고 있던 내일 연회의 식 순서였다.

“저건 내일의 식 순서입니까.”

“아… 네 맞아요. 아까까지 외우고 있었던 중이었지요.”

“아무에게나 주는 것은 아닌데…, 저것도 요수아가 가져왔겠군요.”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모르지만 요수아는 이 성에서 매우 잘 지내고 있었다. 몇 년간 일한 시종도 그보다는 못할 정도로 방대한 인맥을 만들어 낸 요수아의 능력은 로메인이 감탄할 정도였다. 웃음 섞인 말에 렉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아무리 그래도, 자기가 주인공이니 못 받을 물건은 아니었으니까.

“얼마나, 많이 외우셨습니까?”

“한 반 정도는 외웠어요. 일정 거리를 정해진 속도로 걷고, 전하께서 계신 반석 위로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전하께서 예비 동맹과 관련된 선언문을 읊으실 거고, 저는 그에 동의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약혼 선서를 읊고 맹세한다.”

“네, 훌륭하시군요. 완벽합니다.”

“아직 완벽하진 않아요. 사실 제가 이곳을 잘 몰라… 동선이 애매해서요. 시간이 조금 더 있다면 그곳에서 연습을 해 볼 텐데, 워낙 급박한 약혼 일정이라 갈 수가 없었지요.”

“그렇습니까? 허면 제가 도와드리는 것은 어떨까요?”

“경께서요? 어떻게요?”

뜻밖의 말이었다. 렉시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러자 로메인이 손으로 길의 모양을 만들며 찬찬히 설명했다.

“당신께선 모르시지만, 저는 식장에 자주 가 보았습니다. 해서 그곳의 길이, 꺾어진 굴곡, 동선들을 알고 있지요. 그것만 알고 있으면 장소가 어디건 맞추어 보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로메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쓰게 웃었다.

“사실… 어머니께서도 조언하셨지요. 사전에 두 사람이 맞추어 연습한다면, 당일 실수를 줄일 수 있을 거라고요. 외우는 것과 몸으로 해 보는 것은 많이 다르니까요.”

고리타분한 말 같지만 렉시는 그 말에 납득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론은 이론, 실전은 실전이다. 백날 이론을 알아 봐야 실전에서 실수한다면 모든 것이 허탕이니 그녀의 걱정은 옳았다. 렉시는 후작 부인의 선견지명에 감탄하며 말했다.

“어머님께서는 무척 현명하신 분이시네요. 예전에 겪어 보신 일이 있으실 테니 이건 확실히 좋은 조언이시지요. 하긴 저도 확실히 외웠던 일을, 실전으로 하면서 실수한 적이 왕왕 있었으니까요. 경께서도 이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예, 물론이지요. 저는 무슨 일을 하건 사전에 늘 연습을 해 봅니다. 충분한 연습 없이는 저도 실수를 하니까요.”

렉시는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와. 경도 실수를 하세요?”

“그러합니다. 본디 완벽함이란 부단한 노력과 연습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기사란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배웠고, 그걸 행하기 위해 늘 노력하고 있지요.”

“그랬군요….”

렉시는 오 하고 입을 동글게 오므렸다. 그런 렉시를 보며 로메인이 권유했다.

“어떻습니까? 허면 함께 연습을 해 보시겠습니까?”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까. 렉시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네, 좋아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로메인은 테이블을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서자, 뜨거운 체향이 훅 하고 코끝까지 밀려와 렉시는 순간 가슴이 설렜다. 약간 멀리 떨어져 있던 남자가 두어 걸음 걷자, 두 사람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 든다. 로메인이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일단 일어나 보시겠습니까.”

“아…네.”

손을 잡자, 약간 못이 박인 손이 렉시를 부드럽게 잡아 온다. 렉시는 그 손에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먹 두어 개가 들어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그는 렉시와 자신 사이의 거리를 적당히 조절한 뒤, 부드럽게 에스코트하는 자세를 취했다.

“이렇게 제 팔에 손을 대십시오. 그리고, 저를 따라 천천히 저 중앙까지 걷는 겁니다.”

매끄러운 옷감 너머 남자의 근육이 느껴진다. 렉시는 살며시 로메인의 팔에 손을 얹고, 그를 따라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서자 조금씩 부딪치는 몸 같은 것에 신경 쓰며 걷다 보니 머리가 영 복잡했다. 뚜벅뚜벅, 천천히 발을 맞추는 소리가 마치 지금 두근대는 심장 소리처럼 들려왔다. 렉시는 입술을 깨물고 정신을 집중했다.

“여기서는 이 속도로 걸으십시오.”

대략 열 발자국 정도 걸어 중앙에 도착하자, 로메인은 천천히 렉시의 몸을 돌려세웠다. 그리고 다시 온 곳으로 반복해 렉시를 걷게 했는데 그것이 대략 두 번이었다. 아무리 방 안이라도 이렇게 왕복을 하면 제법 걷는다. 그는 렉시가 보는 방향을 테라스의 창 쪽으로 맞추며 마지막 왕복을 마쳤다. 그리고 가늠해 보라는 듯, 렉시에게 말을 걸었다.

“이게 딱 반입니다.”

“…그… 무엇의 반이죠?”

“방금 걸어온 길이의 딱 두 배가, 홀까지의 거리라는 의미입니다.”

“아, 허면 몸을 돌리는 것도 포함인가요?”

어쩐지 헷갈려서 묻자, 로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복한 것을 빼고, 방금 테라스를 향한 이것 역시 정해진 동선입니다. 저것이 문이지요. 그리고 이제 저 앞으로 다시 걸어갑니다.”

로메인은 그렇게 말한 뒤, 렉시의 손을 잡고 다시 앞으로 걸었다. 뚜벅뚜벅, 이번엔 조금 천천히 걸어 렉시를 테라스의 창 앞에 데려갔다. 렉시는 속도를 기억하기 위해 애썼지만 잘되진 않았다.

테라스 창 앞에 멈춰 선 로메인이 렉시를 향해 속삭였다.

“이 테라스가 저희가 설 섬돌입니다. 그리고 테라스 바깥쪽을 단상 위로 치시면 됩니다. 아마 실제로는 큼지막한 섬돌 위에서 저희를 내려다보시겠지요. 저희는 그 아래서 각하의 선언을 듣게 됩니다.”

“그건 얼마나 걸릴까요?”

“…아마 대략, 삼십 분 정도 걸리겠군요.”

선언서의 내용 전에 이런저런 말씀을 하실 테니까요. 로메인은 속으로 셈을 해 본 듯 혼자 주억거렸다.

“선언을 끝내시면 저 위에서 당신 앞으로 이렇게 다가오실 겁니다. 선언서를 드시고서요.”

“혹시 제가 펜을 들고 가야 하는 건 아니죠?”

진심 반, 농담 반인 질문에 로메인이 짧게 웃었다.

“당신께선 그저 몸만 오시면 됩니다. 다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 제가 먼저 쓰고, 직접 손에 펜을 들려 드리지요. 그리고… 서명은 맨 하단에,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들고 렉시의 손가락을 가져왔다. 그리고 자신의 손이 종이인 것처럼 글씨 쓰는 흉내를 내게 했다. 왠지 모를 간지러운 기분에 렉시는 어깨를 움츠렸다. 자신의 이름이 상대의 손바닥 위에 희게 쓰이다 사라진다. 단련된 손바닥 위로 손톱이 긁히는 느낌이 설렌다면 이상한 걸까. 렉시는 작게 웃다가 손을 멈췄다.

헌데 서명의 성은, 페르귄인가?

“저, 서명의 성은 페르귄인가요?”

“예. 혼인 때는 다르지만, 약혼이니까요. 허니 그대로 쓰시는 게 맞습니다. 그래요…. 그리고 서명이 끝나면, 선언서의 마지막을 읊으시면 됩니다.”

“마지막만 읊는다….”

“네, 보통 이런 선언서는 무척 깁니다. 그래서 마지막만을 읊는 것이지요.”

“아.”

그렇구나. 자신과 달리 그는 이런 행사 자체에 무척 익숙해 보였다. 렉시는 로메인이 이걸 연습해 보자고 한 걸 무척 다행으로 여기게 되었다. 식순은 읽었지만, 이런 건 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선언서는 외워야 하는 건가요?”

“아니요, 그냥 보시고 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중요한 건 선언의 마지막이지요.”

“그게 뭔가요?”

“저와 당신이 직접 약속을 외치는 겁니다. 나, 데퓨탄가의 로메인 드 데퓨탄은 페르귄가의 알렉시아노와 미래를 약속한다. 이렇게요.”

렉시는 잠시 생각한 뒤, 이름만 바꿔 뒤를 따라했다.

“―나, 페르귄가의 알렉시아노 드 페르귄은 데퓨탄 가의 로메인과 미래를 약속한다.”

“네, 그겁니다.”

로메인은 자신이 잡은 렉시의 왼손을 슬쩍 끌어당겼다. 그리고 어깨를 돌려 렉시를 자신과 마주 보게 했다. 아, 이것 역시 식순인가. 마주하고 손을 맞잡는 건가? 다음 동작을 눈치챈 렉시가 오른손을 내밀자 로메인이 살짝 두 손을 잡는다. 그리하여 렉시는 로메인과 두 손을 맞잡은 채 마주하게 되었다. 어딘지 모르게 간지러운 모양새였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약혼식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다음은요? 이렇게 끝인가요?”

“…아니요. 한 순서가 남아 있습니다.”

그놈의 순서 참 길기도 길다. 렉시는 천천히 그가 마지막 순서를 마치길 기다렸다. 헌데, 아까까지만 해도 빠르게 식순을 마치던 로메인이 이번엔 영 움직일 기색이 없었다. 렉시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로메인 경. 다음은요?”

“…다음은.”

짧은 침묵. 그리고 렉시가 이 짧은 침묵을 이상하다 여길 때쯤, 로메인의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입맞춤입니다.”

“예?”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 번쩍 들었다. 입맞춤이라니. 그러나 뒤이어 이어질 물음은 로메인의 얼굴을 보면서 그만 멈추고 말았다. 렉시는 질문 대신 짧게 숨을 들이켰다. 아까까지만 해도 평온하던 남자의 얼굴이 약간 붉게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다음은…. 그땐 각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미래를 약속한 두 사람, 맹세의 입맞춤을 하라.”

“…….”

냉정과 냉철함을 사람으로 빚은 그대로의 남자였다. 화를 내더라도, 당혹하더라도 결국은 절제하며 자신을 추스르는 것을 몇 번이고 보았다. 헌데 지금 이 순간, 자신을 보는 얼굴엔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딱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익히 자주 보아 잘 아는 감정이었으며, 그리하여 절대 모를 수가 없는 감정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로메인이.

그가…?

렉시는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멍해진 머리가 다시 한번 사실을 확인하길 종용했다.

그러나, 몇 번을 보아도 똑같았다.

몇 번을 보아도.

렉시는 떨리는 입술을 열어 간신히 물었다.

“입맞춤이라고, 하셨나요?”

“……예.”

말을 하자, 더욱 짙어지는 시선.

맙소사.

순간, 맞잡은 손에서 시작된 맥박이 심장으로 미친 듯이 내달렸다. 온몸이 갑자기 뜨거워졌다. 어쩌면 그도 로메인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을지도 몰랐다. 평소 같으면 어떻게든 무마하려 노력했을 것이지만, 지금 이 순간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아예 어찌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가슴이 뛰었고, 머리는 어지러웠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모든 것이 아뜩했다. 허나 이런 와중에도 가슴 저 안쪽에서 피어오르는 무언가를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다.

설마.

“그건… 연습하지 않나요?”

“…연습을, 원하십니까?”

어딘지 모르게 묵직해진 음성이 귓전에 다가온다.

렉시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남자를 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발갛게 익어 버렸다. 남자의 관자놀이 부근만 붉었던 것이, 점점 면적을 넓히며 귀 끝까지 가는 것이 눈에 보이고 있었다. 정확했다. 도저히 아니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가, 그가 나를.

세상 모든 것이 이 순간 숨을 죽이는 것 같았다. 또한 동시에 모든 것이 빨리 감기는 듯했다. 환희 같기도 했고, 또한 그 반대 같기도 했다. 렉시는 할 수 있는 모든 용기를 끌어모았다. 단 한 발짝만 더 나간다면, 단 한마디를 하여서….

“…원한다면…요?”

움찔.

그리고, 맞닿았던 남자의 몸이 크게 튀었다. 겨울 하늘을 연상시키는 푸른 눈동자가 이 순간은 마치 밤처럼 검다. 검은 불꽃이 튀는 것 같은 시선에 렉시는 입술을 핥았다. 그러자, 혀가 움직이는 궤적 그대로 시선이 움직였다. 렉시의 내부에서 온갖 생각들이 꽃처럼 피었다가 흩어졌다. 눈앞이 빙글거리고, 가슴이 꽉 조여 더 이상 생각이란 것을 하기 힘들었다. 불안증이 물밀 듯이 몰려오다 뒤로 물러났다. 조용하면 할수록, 자꾸 아까 자기 자신이 본 것이 거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잘못 본 것일까.

내가 착각을 했던 걸까?

내가 그를 너무 원해서… 그래서 혹 착각했던 것이라면…!

그러나, 그런 모든 걱정들은 이내 사라졌다.

로메인이 움직이고, 마주 잡았던 손이 강하게 이끌리며 두 몸이 자석처럼 붙었다. 강한 접촉,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딱딱한 손가락이 뒷머리를 잡고 렉시의 얼굴을 위로 올렸다. 렉시는 떨리는 눈으로 로메인과 마주했다. 맞닿은 시선이 얽히고설켜,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처럼 보였다.

“로메…”

그리고 그 순간, 뜨거운 숨이 렉시를 삼켰다. 렉시는 눈을 크게 떴다가 감았다. 뒷목을 감싸 안은 남자의 손이 렉시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

입술을 덮은 체온은 뜨거웠다. 마치 뜨거운 불이 온몸을 덮는 듯했다.

‘마치 온몸에 불이 붙는 것 같아.’

렉시는 그렇게 생각했다. 실로 그 외엔 말할 것이 없었다.

어느 순간 렉시의 입술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감각이 선명한 가운데 상대의 움직임에 속절없이 끌려간다. 분명 자신의 몸이건만 강탈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물에 젖은 소리가 둘 사이를 계속해서 오고 갔다.

그의 입술이 렉시를 핥을 때마다 음란한 소리가 귓전을 간질였다. 체액이 입안에 넘쳐 조금씩 흘렀다. 미칠 듯이 부끄러웠고, 또 동시에 설렜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머리가 징징 울렸다. 부드러운 살갗 너머 뜨거운 숨이 렉시의 것을 채어 갔다. 렉시가 몸을 흠칫 떨었다. 남자의 팔이 렉시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팔 안에 온몸이 갇혔다.

천천히 자신을 핥아 가던 그의 입술은 이제 삼킬 듯이 렉시를 탐하고 있었다. 애타게 무언가를 원하는 몸짓이었다. 렉시는 견디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숨이 가쁘고 가빠 견딜 수가 없었다. 로메인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 안쪽을 파고들었다. 단박에 깊은 곳으로 혀가 밀려왔다. 둘 사이의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틈 하나 없이 가까워진 사이로 습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응….”

로메인의 혀는 그야말로 불이었다.

그것이 움직일 때마다 렉시의 몸 안에서 기이한 열기가 피어났다. 얼어붙어 있는 렉시의 몸이 불을 만난 얼음처럼 녹았다. 말을 할 때나 쓰이던 살덩이가 몸 안으로 파고들자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나른해진다. 그의 혀가 입안 점막을 농염하게 애무했다. 렉시의 숨이 거칠어졌다.

한참을 그렇게 입술을 빨렸다.

“흐윽…!”

렉시의 몸은 어느샌가 로메인에게 매달려 있었다. 거의 기대어 있다고 해도 좋았다. 로메인은 그런 몸을 슬쩍 안아 들었다. 성인 남자를 들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그가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각도가 다르게 렉시의 안을 찔러 온다. 혓바닥의 움직임이 마치 무언가를 연상케 했다.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흐으응… 아흑!”

자기도 모르게 비음을 흘려 와 렉시는 몸을 흠칫 떨었다. 자기 귀로 듣는 것이었지만 놀라울 정도로 농밀했기 때문이다. 누가 들어도 흐물흐물하게 녹은 목소리였다. 그것은 무척이나 자극적이었다. 그리고 그런 목소리를 로메인이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그는 그 소리를 듣자 더욱 집요하게 달려들었고 렉시는 그 아래서 헐떡이며 흥분한 그와 계속해서 입 맞출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렉시는 자신이 설령 힘을 쓸 수 있더라도 그 품에서 벗어 나올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 안에 이런 열망이 숨어 있다니….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로메인이었다. 익숙지 않은 키스일 텐데도, 로메인은 놀라울 정도로 렉시를 리드했던 것이다. 염문 한 번 없던 남자가 이렇게 능숙하다니 반칙 아닌가. 어쩌면 이런 것은 본능의 영역인 것일까. 그는 숨이 모자라 헐떡대는 렉시를 잠깐 잠깐 쉬게 하면서 입을 맞췄다.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날 것 같다.

렉시는 로메인의 몸에 매달리며 생각했다.

‘이래도 되나?’

그건 의문이라기보다는 사실 망설임에 가까웠다. 처음 자극한 건 그였지만, 그것은 오롯이 충동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렉시는 몰랐다. 지금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몇 개 없다는 사실을…. 시작은 그가 먼저 했어도, 끝을 내거나 중단하는 것은 그에게 달려 있지 않았다. 그때 로메인의 키스가 더 거칠어졌다. 렉시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점막을 핥는 로메인의 혀를 느낀 순간, 이성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저 너머로 사라졌다…. 잠시 반짝였던 머릿속이 다시 뿌연 안개처럼 흐려졌다.

어느 순간 렉시는 로메인의 몸 아래 눌려 있었다. 푹신한 것이 등 뒤로 와 닿고, 남자의 무게가 온전히 그에게 실린다. 렉시는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리고 눈을 뜬 순간, 로메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

강탈하듯 하던 입맞춤이 그제서야 멈췄다. 로메인이 천천히 입술을 떼자 렉시는 할딱대며 숨을 들이켰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둘 사이를 가로질러 갔다. 성적인 긴장감이었다. 달궈진 성감으로 열이 오른 두 사람은 숨을 멈춘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순간, 둘은 서로를 무척이나 원했다. 그것만은 아주 명백했다.

렉시는 생각했다.

이래도 될까?

아까 그를 흔들고 지나갔던 상념이었다. 로메인을 그만큼 덜 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조금 무서웠다. 자신은 이 열정에 기꺼이 몸을 던지고 싶었지만, 만일 로메인이 후에 후회한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그런 공포.

아무 생각 없이 몸을 던져도 될 것이다. 그저 그런 열정이라면 그래도 괜찮았다. 하지만 그는 아니었다. 그냥 헌신짝 던지듯 던지고 싶지 않았다. 처음 겪는 감정이라 그런가 무서운 것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그때였다.

“…싫습니까?”

“예?”

잔뜩 쉰 목소리였다.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렉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싫다면 지금 말해 주십시오.”

로메인의 손가락이 렉시의 얼굴을 살짝 쓰다듬었다. 마치 닿기 두려운 것처럼, 그 손가락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로, 로메인.”

“저는 당신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만일 싫으시다면… 그만두겠습니다.”

렉시는 로메인의 눈동자를 보았다. 그리고 날카롭게 숨을 들이켰다.

늘 반듯하게 빛나던 푸른 눈동자는 까맣게 가라앉아 있었다. 욕망으로 검어진 눈동자는 정염으로 뜨거웠다. 깊게 침잠한 그 속에서 렉시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마치 환영처럼 그 위에 자신의 모습이 드러났다. 렉시는 몸을 굳혔다.

그 안에서 렉시의 모습은 나신이었다. 아무것도 없이, 태초의 모습으로 울부짖는 자신.

“저는 당신을 원합니다.”

로메인이 말했다.

렉시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대답하기 전, 그의 뇌리로 불현듯 어떤 대화가 떠올랐다. 과거에, 로메인이 후작과 나누었던 대화였다.

‘제가 아직 약혼하지 않은 건 제가 진심으로 마음을 바칠 만한 분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염문이 없었던 건 그의 연장선상이구요. 맙소사! 그렇다고 고자라니. 그럼 제가 짐승처럼 아무하고 밤을 지새워야 했단 말입니까?’

“…저는.”

렉시는 눈을 내리깔았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고, 손끝이 긴장되어 저릿했다. 긴 속눈썹이 흔들리며 볼 아래 은근한 그림자를 남긴다. 긴장으로 입술이 타들어 갔다. 목이 칼칼하게 잠겼다. 입을 열었다.

“저도…. 당신을 원해요.”

“!!!”

로메인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깊은 대양 같던 눈동자에 빛이 사라져 까맣게 탔다. 그는 망설임 없이 침대 기둥에 묶인 끈을 풀어냈다. 스르륵 내려온 가림막이 침상 위의 빛을 살랐다. 순식간에 어두워진 침상 안엔 어슴푸레한 빛만이 남아 둘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누워 있는 렉시의 몸을 침대의 가운데로 이끌며 천천히 렉시의 옷섶을 헤쳤다. 커다란 손이었지만 움직임은 대단히 세심했다. 렉시는 긴장으로 꼼짝도 하지 못한 채 그가 자신의 옷을 벗기는 걸 보고만 있었다. 사그락거리는 소리가 무척이나 자극적이었다.

옷이 거의 다 벗겨지자, 그는 찬탄의 눈으로 렉시를 내려다보며 이젠 자신의 옷을 벗어 내렸다. 목부터 빼곡하게 박혀 있는 단추를 마치 쥐어뜯듯 떼어 내니, 로메인의 상반신 역시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빛에 비추어진 근육이 매끄럽게 빛난다. 검을 쓰는 사람인 만큼 놀라울 정도로 잘 짜인 근육은 마치 대리석으로 만들어 놓은 조각처럼 보였다. 그 잘 단련된 상체가 움직일 때마다 근육이 물결치듯 꿈틀대 시선을 사로잡는다. 렉시는 그 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다 얼굴을 붉혔다. 방금, 로메인의 하체를 감추고 있던 천이 사라졌다.

로메인의 성기는 컸다.

천이 사라지자, 퉁 하고 위로 솟아오른 성기는 얼핏 보면 성기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몸집이 크기에 성기 역시 큰 것인지도 모른다. 렉시 역시 작지는 않았으나 그의 것에 대자면 조금 손색이 있었다.

발기한 성기는 조금 젖어 있었다. 그는 위에서 조금씩 흘러나온 자신의 선액을 성기 위로 펴 발랐다. 젖은 기둥이 흔들릴 때마다 빛이 그 위를 흐르고 지나갔다. 자신이 아닌 타인이 성기를 잡고 자위하는 걸 본 것은 처음이었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고개를 돌리자, 작은 웃음소리가 로메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흥분에 젖은 목소리였다.

“부끄러우십니까?”

렉시는 말도 하지 못하고 얼굴을 가렸다. 로메인이 렉시의 몸을 타고 눌렀다. 묵직한 몸이 자신을 누르자 자연 입술을 열게 된다. 강렬한 체향이 코끝으로 훅 들어오고, 정신을 차리고 나니 다시 키스하고 있었다. 맞닿은 가슴 위로 조금씩 땀방울이 맺혀 미끌거리기 시작했다. 넋을 잃고 로메인과 키스하던 렉시는 순간 몸을 크게 울렸다. 한 손으로 렉시의 얼굴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렉시의 몸을 애무하던 로메인의 손이 그의 성기로 와 닿았기 때문이다.

자신과 렉시의 것을 한꺼번에 잡은 그는, 그걸 잡고 천천히 흔들고 있었다. 짜릿한 쾌감이 등줄기를 관통하며 온몸이 뒤틀린다. 렉시가 할딱이며 로메인을 바라보자 그가 눈꼬리를 곱게 휘며 말했다.

“함께 해 보시겠습니까.”

“흐윽!”

그는 렉시의 남는 손을 가져다 다른 쪽을 잡게 했다. 잡기만 해도 뜨거운 것이 두 손안에 갇히자 미친 듯이 몸이 달아올랐다. 그리고 그는 다리를 벌려 렉시를 가운데 가두고, 허리와 손을 움직여 마찰을 지속했다.

“흐윽! 아!”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헐떡거렸다. 이렇게 강렬한 수음은 처음이었다. 손과 허리가 꿈틀대며 움직일 때마다 더운 숨과 뭉근한 쾌락이 렉시의 뇌를 연이어 강타했다. 손으로 하는 것은 새삼스러울 일이 없었으나, 이 상황이 너무도 음란했다. 움직일 때마다 나는 젖은 소리까지 애무의 하나 같다. 렉시는 그야말로 넋이 빠졌다.

“하으…아! 아아!”

“흐읍!”

사정은 빠르게 찾아왔다. 복부가 꽉 조임과 동시에 아찔한 쾌감이 머리를 강타했다. 렉시는 손에 힘을 빼고 허리를 떨었다. 손의 마찰이 너무 강했기도 했고, 또 처음 겪는 이 상황이 너무 자극적이어서일지도 몰랐다. 성기에서 핏 핏 하고 액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로메인의 것은 렉시보다 조금 더 늦게 파정했지만 시간은 그보다 길었다. 그가 마저 사정하고 나자, 미끈거리는 액체가 손을, 그리고 다리 사이까지 흘러내려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렉시는 젖은 눈동자로 로메인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이상하게도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걸 알아챈 로메인이 렉시의 입술을 다시 잡아채 갔다. 오랜 입맞춤이 다시 이어졌다. 키스하는 내내 로메인의 손은 쉬지 않고 렉시의 몸을 만지고 있었다. 날렵하게 빠진 다리와, 그 위로 착 달라붙은 모양 좋은 엉덩이, 작은 유실이 매달려 있는 가슴, 판판하고 부드러운 허리와 배….

렉시는 키스를 하면서 작게 웃었다. 맞닿은 배 쪽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찌르고 있었다. 길게 사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메인의 것이 다시 섰던 것이다. 로메인이 그런 렉시의 얼굴에 키스를 퍼부으며 속삭였다.

“옆으로… 누워 보십시오.”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렉시 역시 남자였기에 알 수 있었다. 로메인이 무얼 원할지를 알아챈 그는 옆으로 누워 다리를 모았다. 렉시를 뒤로 안은 듯한 자세를 취한 로메인이 한숨을 쉬듯 속삭였다.

“아쉽군요….”

그의 시선은 꼭 다물린 렉시의 구멍으로 향해 있었다. 그는 조심스레 그 부위를 손으로 덧그렸지만, 이내 결심한 듯 그곳에서 손을 뗐다. 당장이라도 파고들고 싶은 욕망을 간신히 멈춘 것이다. 그 움직임에 은근히 몸을 굳히고 있던 렉시 역시 속으로 조금 안도했다. 그래, 솔직히 말해서 기대가 되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허나 그래도….

“흐읏!”

렉시는 부지불식간에 신음을 삼켰다. 허벅지 사이로 뜨거운 기둥이 불쑥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눈을 내리자, 하얀 허벅지 사이로 뜨겁게 발기한 성기가 튀어나와 있었다. 잔뜩 젖은 허벅지 사이로 성기가 천천히 움직이자, 질척거리는 음란한 소리가 귓전을 간질였다. 검붉은 성기가 허벅지 사이로 드러났다 사라지는 장면이 몹시도 야했다.

등 뒤에서 로메인이 속삭였다.

“부드러워….”

이후 그는 입을 꼭 다물고 행위에 열중했다. 뜨거운 기둥이 허벅지 사이를 가를 때마다 렉시는 고양이처럼 가르릉댔다. 페니스가 마치 불처럼 달궈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이 회음부를 가르고 자신의 성기를 찌를 때엔 허리가 튀어 올랐다. 렉시는 헐떡거리면서 다리를 조이려 애썼다.

“아…흐흐!”

미끄덩거리던 것이 회음부와 성기 부분을 쿡쿡 찌를 때마다, 몸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다리가 덜덜 떨린다. 철썩거리는 소리가 지극히 음란했다. 로메인 역시 신음하며 허리를 빠르게 움직였다. 로메인의 페니스가 렉시의 허벅지를 왕복할 때마다 가운데가 빠르게 붉어졌다. 어쩌면 조금 쓸렸을지도 몰랐다. 허나 렉시도, 로메인도 도저히 행위를 멈출 수가 없었다.

“흐으응!”

렉시는 번개를 맞은 듯 몸을 덜덜 떨었다. 로메인이 자신의 성기를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굳은살이 박여 있는 그의 손은 만질 때마다 자극이 극심했다. 렉시는 고개를 흔들며 로메인의 손을 잡아챘지만, 그럴수록 압박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아아아아!”

렉시는 결국 짐승 같은 비명을 지르며 사정했다. 렉시의 성기에서 나온 액이 넘쳐 로메인의 손을 적시자, 그는 웃으면서 귀두 끝을 문지르며 자극을 더했다. 렉시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바르르 떨었다.

“아, 안 돼요. 놔줘요. 아, 아!”

“조금만 더….”

로메인이 렉시의 목을 잘근잘근 깨물며 움직임에 박차를 가했다.

퍽, 퍽!

철썩대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진다. 렉시의 목을 핥던 로메인은 견디지 못하고 렉시의 입술을 삼켰다. 렉시의 혀를 마치 삼킬 듯이 빨아 대던 로메인의 허리 짓이 마지막을 향한 것처럼 빨라졌다.

“크윽!”

이윽고 그의 배가 크게 꿈틀거렸다. 뒤이어 음란한 향이 침상을 적셔 갔다. 허벅지로 줄줄 흘러넘치는 체액에 넋을 놓던 렉시는 자신을 안아 드는 로메인의 팔에 몸을 맡겼다.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로메인이 말했다.

“사랑합니다.”

마주 안았던 몸이 왠지 더 단단하게 맞물린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렉시는 지쳐 늘어진 몸을 가까스로 들어 로메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시야는 가물가물했지만, 그런 자신을 보며 눈을 빛내는 로메인의 모습에 왠지 가슴이 설레고 벅찼다.

“키스….”

“예?”

“키스해 주세요.”

렉시는 그저 입맞춤만을 요구했다. 하지만 로메인의 가슴이 크게 부푼 것은 그 안에 함의된 어떤 뜻을 알아챘기 때문이리라. 다시금 거세게 자신을 삼키는 로메인의 입술이 느껴진다. 그리고, 두 번이나 사정했음에도 다시 힘을 얻어 일어서는 그의 페니스까지도.

그것이 어쩐지 고단한 이 밤을 예고하는 것 같았다. 렉시는 몸을 떨었다. 달콤한 쾌락이 공포 섞인 기대감으로 굳은 몸을 조금씩 잠식한다.

“사랑합니다.”

재차 속삭이는 로메인의 목소리. 벌어진 다리 사이로 느껴지는 남자의 무게를 느끼며 렉시는 눈을 감았다. 호흡이 다시 거칠어졌다.

…약혼은 내일이었다.

*****

밤은 오래도록 깊었다.

로메인과 렉시의 밤 역시 깊고 농염했다.

두 사람이 얼마나 침대에서 노닐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 두 사람도 잘은 모를 것이다. 그런 걸 일일이 셀 정도로 피차 냉철한 이성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 있었다.

결국, 삽입 섹스는 없었다는 것.

이것은 유사 섹스만으로도 힘이 들었던 렉시가 중간에 나가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둘 다 남자라도 로메인은 기사. 기사의 체력은 같은 남자라도 따라가기 버거웠던 것이다.

물론 단지 그 이유만으로 둘이 끝까지 가지 않은 건 아니었다. 렉시는 몰랐지만, 사실 로메인이 정말로 인내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건 바로, 그 다음날이 두 사람의 약혼식이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잘 풀고 세심히 한다 해도 삽입 섹스는 당사자에게 무리를 준다. 여자도 그러한데 하물며 남자는 어떻겠는가.

만일 로메인이 눈 딱 감고 했더라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렉시는 오늘 걷기는 고사하고 일어나기조차 힘들었을 것이다. 크기가 작다면 또 모른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로메인의 성기는 매우 크고 거대했다. 아프지 않을 리 없다.

때문에 렉시는 로메인이 아쉬워하면서도 끝까지 가지 않은 것이 매우 고마웠다. 그리고 자신이 매우 행운아란 생각이 들었다.

‘어쩜 그렇게 다정할 수 있지?’

렉시도 남잔데 모르겠는가. 자고로 허리 아래 짐승은 제어하기 힘든 물건이다. 하물며 침대 위에서 개처럼 변하지 않는 연인이란 만나기 매우 어려운 법 아닌가. 만일 자신이 로메인이었다면? 자긴 그 상황에서 끝까지 가는 걸 참을 수 있었을까?

‘음, 자신 없는데.’

렉시는 자기 허벅지를 내려다보며 얼굴을 붉혔다. 지금은 옷으로 가려져 있지만, 새벽에 일어나 목욕하면서 본 자신의 허벅지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멍 자국은 물론, 붉게 쓸린 자국이 한가득이다. 어쩐지 아직도 허벅지 사이로 성기가 있는 것 같다. 지난밤 열정적으로 자신을 탐했던 로메인의 욕망의 흔적이었다.

침대에서 시작했던 둘의 열락은 제법 오래갔다. 잘은 모르지만 거의 새벽녘이 되어서야 끝이 났으니…. 뒤처리는 로메인이 했지만 사실 뒤처리하면서도 조금 위험한 순간이 몇 번쯤 있었다. 사정한 횟수는 아예 셀 수도 없다. 허니 아무리 삽입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어떻게 보면 그 정도인 것도 다행일 정도인 것이다.

“하아….”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쉰다. 어딘지 애달프고 달뜬 한숨이다. 아, 그런가. 이것이 바로 신랑(?)을 보낸 신부(?)의 마음?!

렉시는 아쉬움을 숨기지 못하고 돌아간 로메인을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생각하자, 온몸이 다시금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조금 후면 볼 수 있겠지?’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배시시 웃었다. 떠나기 전 구구절절 아쉬움을 토로하던 로메인이 생각났던 것이다. 냉정한 얼굴이었지만 그 속은 마치 뜨거운 용암 같았다. 그가 자신의 귀에 속삭이던 달콤한 말들은 차마 말하기 힘들 정도로 직설적이었다. 돌아서면서, 몇 번이고 아쉬움에 키스하고 보냈는지는 아마 말해도 믿지 못할 것이다.

생각하니 얼른 다시 보고 싶어졌다. 렉시는 촉촉하게 젖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때마침 옆에서 렉시를 보조하기 위해 온 시녀 시종들은 그걸 보고 몹시 황홀해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그들은 속으로 이미 소리를 치고 있다. 실로 열렬한 추종자들의 탄생이었다.

‘로메인 경이 복이 터졌구나. 어쩜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세기의 미인보다 더 아름답다더니…. 정말이었어!’

놀랍게도 이들 대부분은 로메인 경을 후계자로 지지하는 이들이었다. 때문에 어지간해선 로메인이 더 잘났다고 해 줄 만했다. 하지만 그들도 이 건에 한해선 냉정했다.

솔직히, 아무리 봐도 렉시가 아까웠던 것이다.

지위와 돈은 언제고 다시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처럼 아름다운 미인은 백 년이 지나도 나올지 말지 아무도 모르는 일. 그것도 무려 그 황녀를 넘어서는 미모라는데!

“아, 아름다우시다!”

“세상에 어쩜 저렇게 아름다운 분이!”

“남작님께서 예복이 마음에 드시나 봐!”

“어쩐지 어제보다 더 아름다우신 것 같지 않아?”

급기야 커진 수군거림은 렉시에게도 들렸다. 원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귀족을 상대하는 사용인들의 미덕은 바로 침묵. 하지만 렉시는 너그럽게 모른 척 넘어가 주었다. 원래 진정한 미인이란 이런 수군거림 정도는 들어도 안 들은 척 못 들은 척해 주는 법이다.

게다가….

‘어쩐지 어제보다 더 아름다워진 것 같다고?’

렉시는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어제보다 아름답다니, 이유는 딱 하나뿐 아닌가.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살짝 달아오른다.

‘사랑을 하면 티가 난다더니 진짜로구나.’

너무 궁금했다. 어떤 게 티가 난 걸까. 역시 볼이 많이 붉어졌나? 막 피부에 윤기가 도나? 입술이 많이 촉촉해 보였던 걸까? 그런, 막 그런 분위기가 풍기나?

어쨌거나 정말로 이제 곧 약혼식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시종들은 재잘거림을 멈추고 렉시의 치장을 도왔다. 빨라지는 시종들의 손에 렉시 역시 딴생각을 멈추고 성장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팔을 들어 주십시오, 남작님.”

“착의하실 때 불편하신 점은 없으십니까?”

“머리 모양은 이대로 하겠습니다. 반 정도 묶어 넝쿨처럼 엮은 것이 보이십니까? 이게 남작님의 얼굴형에 참으로 잘 어울리는군요.”

쏟아지는 말들 가운데서 렉시의 옷이 착착 입혀졌다. 렉시는 약간 어지러워지는 머리를 다잡고 그들이 하라는 대로 이리저리 움직였다.

“피부가 워낙 좋으시니 입술연지만 발라 드리겠습니다. 입술 색과 같은 빛이니 잘 보이지 않을 겁니다.”

“들어가실 때, 남작님께선 베일을 쓰게 되십니다. 반투명한 것이므로 시야에는 어려움이 없습니다.”

대부분은 이렇게 자기들이 알아서 했다. 워낙 솜씨가 좋은 이들이라 렉시가 딱히 입 댈 것도 없었다. 하지만 개중에서도 렉시의 의견이 필요한 것이 물론 있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 그랬다.

“마지막으로는 장신구를 선택하여 주십시오. 전하께옵서 보석을 내리셨습니다. 이중 어떤 것을 하시겠습니까?”

“…장신구라고? 뭘 해야 하지?”

“목걸이, 허리띠, 팔찌를 선택하시면 됩니다.”

“그렇게나 많이?”

렉시가 오 하고 놀라자 시녀들이 고개를 저였다.

“이것도 최소한의 것입니다. 만일 남작님께서 아가씨였다면 여기에 최소 세 가지는 더 추가되었을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시녀들이 옹기종기 모여 수 개의 함을 보인다. 얼핏 보아도 스무 개는 넘는 보석들이 비로드 방석 위에서 빛을 받아 반짝였다.

“으음….”

렉시는 신음을 내뱉었다. 가짜 약혼이라도 제대로 하겠다는 듯 공작이 내려 준 보석은 눈이 부셨다. 과연 부자다운 배포인가?

‘이거 다 나 주는 거겠지?’

렉시는 눈앞에 들어 올려진 함을 보며 조금 고민했다. 가만히 보니 일단 보석 종류만 고르면 나머지는 세트로 따라 하게 되어 있는 것 같다. 다들 하나같이 아름다운 보석이었지만 문제는 자신이 무엇이 나은 것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가 유일하게 아는 보석은 진주인데, 약혼이나 결혼식에 진주를 착용하는 사람은 없다. 렉시는 곤란한 얼굴로 시녀에게 물었다.

“이중 어떤 것이 나을 것 같은가?”

“하나같이 귀한 패물들이옵니다. 어떤 것을 고르셔도 아름다우실 것입니다.”

“그러겠지. 하지만 아름답다고 죄다 고를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나?”

렉시는 혀를 찼다. 그 말이 아니라고.

“이봐, 나는 여인이 아니라 이런 장신구는 몰라. 그러니 자네들이 한번 조언을 줘 보라고. 그래, 보통 여인들은 약혼식 때 어떤 장신구를 고르나?”

“아….”

그녀들은 신음을 삼키며 말을 골랐다. 원래 마지막 보석만큼은 신부가 고르므로 오롯이 그녀의 영역이다. 하지만 이 경우엔 렉시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하기야 보석은 여성들이 주로 착용하니, 남자들이 그 가치를 알 리도 없고…. 그들은 서로 잠시 눈치를 보다 고개를 숙였다. 이럴 땐 정석적인 답변이 제일이었다.

“보통 아가씨들은, 약혼자 분과 관련된 색상을 고르셨습니다.”

약혼자?

“그것은 예복의 색을 말하는가, 아니면 터럭이나 눈의 색을 말하는 건가?”

“보통은 후자입니다.”

“흠. 그래?”

렉시는 하나하나 훑어보며 생각에 잠겼다. 루비, 녹옥, 청옥, 진주, 오팔, 다이아몬드…, 이외 이름 모를 보석들이 반짝이며 눈앞에서 흔들거렸다. 그의 약혼자 로메인의 머리칼은 은발이요, 눈은 짙은 푸른색이었다…. 그렇다면.

“이걸로 하지.”

렉시가 고른 것은 청옥, 짙푸른 사파이어였다. 로메인의 눈동자 색을 고른 것이다.

“장식해 주겠나?”

“명 받잡겠습니다.”

렉시의 선택에 시녀들은 반색했다. 그가 입은 흰 예복에, 사파이어는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보석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몸을 오가던 손들이 사라졌다.

“이제 끝났나?”

“네, 남작님. 이제 나가실 때 쓰실 베일만 남았습니다.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렉시는 사용인들의 손에 이끌려 큰 전신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작은 거울로 얼굴이나 다른 건 보았어도 전신은 보지 못했다. 해서 그는 지금 자기 모습이 무척 궁금한 상태였다. 얼마나 잘 치장했을까?

그리고 거울에 서 자기의 전체 모습을 본 그는, 자기도 모르게 날카롭게 숨을 삼켰다. 자신이지만, 생전 처음 보는 또 다른 자신이 그곳에 있었다.

재봉사들이 있는 힘껏 만들어 낸 흰 예복은 렉시에게 무척 잘 어울렸다. 방금 전 렉시가 골랐던 청옥 보석 세트 역시 흰 예복 위에서 찬란하게 빛이 났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그것을 입은 사람, 즉 자신이었다. 흰 예복으로 갈아입은 그는 실로 매우 아름다워서 그조차도 눈길을 떼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이게 …나라고?”

후작 부인이 그랬다. 미인의 완성은 미용이라고. 그는 그녀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그제야 이해하고 말았다. 이건 마치 꽃이 피기 전과 만개한 뒤의 상태와도 같지 않은가. 꽃은 피기 전도 예쁘지만 피고 나면 더욱 아름다운 법. 전문가의 손으로 갈고 닦은 그는 현재 위험할 정도로 아름답고 빛이 났다. 렉시는 신음을 삼켰다.

“굉장하군….”

내 얼굴이지만 진짜 심하게 예쁘다. 뭐 이렇게 생겼냐….

렉시는 넋을 잃고 자기 얼굴을 살폈다. 오늘 생전 처음으로 그에게 목매던 과거 범죄자들이 이해가 가고 있었다. 그래, 이래서 다들 눈이 뒤집혔었군….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를 보좌하던 사용인들의 얼굴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다들 한결같이 얼굴을 붉히며 자신만을 보고 있다.

‘이런….’

렉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일단 치하부터 해야겠다.

“수고 많았다. 매우… 대단한 미용술이다. 이런 건 처음 해 보지만 그대들의 노고가 가히 대단하군.”

“황공한, 아니 망극한 말씀입니다 남작님. 남작님은 본래 아름다우시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공작령, 아니 제국을 통틀어도 남작님보다 아름다우신 분은 없을 것입니다.”

안 되겠다, 다들 반쯤 넋이 나갔어. 렉시는 어색한 얼굴로 그들을 향해 물었다. 그래, 나도 오늘은 진짜로 그런 거 같다.

“그래, 알겠다. 그보다 베일은 어디 있지?”

누군가 엉거주춤 들고 있던 베일을 얼른 가져왔다. 작은 티아라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는 베일은 그 끄트머리에 수정과 유색 보석들이 실로 꿰매져 있었다. 덕분에 멋대로 홀라당 뒤집히지는 않을 것 같은 모습이 왜 이리 든든한지 모를 일이다.

어딘지 모르게 아쉬운 시종들을 뒤로 한 채, 그는 얼른 베일을 머리 위에 썼다. 무시무시한 미모가 반쯤 베일에 가려진다. 이제 이 미모를 볼 수 있는 사람은 로메인 하나뿐. 렉시는 자리에서 즉시 일어섰다.

“이제 홀로 가자.”

홀로 가는 길은 부산했다. 렉시가 밖으로 나와 통로를 거닐자, 사람들은 렉시를 알아보고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이 매우 일사 분란했다. 순식간에 만들어진 인파 사이의 길, 렉시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대부분은 태도가 매우 정돈되었지만, 개중 몇몇은 렉시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슬쩍 눈을 들어 렉시를 살피는 게 느껴졌다. 아마, 이렇게라도 위명이 자자한 그 미모를 보고 싶은 것이리라. 물론 고개를 든 자들은 렉시의 얼굴이 베일로 감싸인 걸 보고 실망했지만, 그도 잠시. 그들은 곧 드러난 부분만을 보고도 입을 헤쭉 벌렸다.

원래 아름다움이라는 게 그렇다.

다 드러낸 것보단 적당히 감춘 게 더 사람의 상상을 자극하고 신비하게 만드는 법. 렉시가 뒤집어쓴 베일은 본의 아니게 그들의 상상력을 더 자극하고 있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렉시는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미인이 되어 있으리라.

“흐읍….”

급기야 누군가 신음을 삼킨다. 안 그래도 안절부절못하던 시종이 재빨리 움직였다.

“이쪽이옵니다, 남작님.”

“…통로에 사람이 많군.”

그것도 평소보다 더.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움직이며 렉시가 혀를 찼다. 이 성에 머무는 동안 이렇게 많은 시종들을 본 것은 처음이다.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지 모를 시종들이 복도에 쫙 깔린 걸 보자니 기가 질리는 그였다. 평소 그가 보던 시종들이 열두엇이라면, 이곳엔 줄잡아도 백여 명이 줄을 서서 이러고 있으니 응당 나올 말이다.

렉시의 말에 시종이 황공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불편을 끼쳐 드려 송구스럽습니다.”

“괜찮아, 책하는 말이 아니니까. 그저 이곳에 사람이 이렇게 많았는지 몰랐어. 오늘 연회라 이렇게 많은 건가?”

렉시가 묻자 옆에 있던 다른 자가 대답했다.

“그것은 아닙니다. 이 성의 시종들은 늘 규칙적인 일정으로 움직이니까요. 늘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그간 내가 바빠서 못 본 건가.”

렉시가 중얼거리자 그가 얼른 첨언했다.

“아니요, 남작께서 보지 못했던 것이 당연합니다. 평소엔 다들 뒤쪽 통로로 돌아다니니 보실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뒤쪽 통로?”

“아, 귀족께선 모르는… 아니, 분리되어 저희만 돌아다니게끔 하는 통로가 따로 있습니다.”

렉시는 그가 말하는 통로가 무엇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저번에 로메인이 자신을 데리고 돌아다녔던 그 통로를 말하는 것이다.

“허면 오늘은 어찌 이러지?”

“그것이….”

그는 움찔대며 눈치를 봤다. 하지만 렉시가 지긋이 바라보니 수가 없다. 그는 더 버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사실, 시종장님께서 명하셨습니다. 오늘은 그 통로를 이용하지 말라고 말이지요.”

“시종장이?”

그가? 정말? 렉시는 이상한 얼굴을 했다. 연회가 연이어 둘이나 있는 날은 어쨌거나 바쁘다. 그런 바쁜 날 왜 굳이 통로를 쓰지 말라고 명을 내렸단 말인가.

“후작 부인께 들은 바가 없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저도 잘은 모릅니다. 단지 이번 연회 때문에 들여올 물품이 퍽 많은데 그곳을 통해서 들여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

렉시는 눈썹을 찌푸렸다가 납득했다. 하긴 실행은 어쨌거나 시종장이 하니 부인이 모를 만도 했다. 생각해 보면 이번 연회가 크긴 크지 않은가. 무려 약혼과 은퇴식을 연이어 개최하니 들여올 물건이 배 많아졌던 모양이었다. 거기다 시간까지 급박했으니….

렉시는 픽 웃었다.

“공작가의 창고가 생각보다 작은 모양이야.”

“예?”

“하긴 그럴 법하지. 연회 두 번이면 어지간한 가문들도 창고가 바닥날 정도로 엄청난 것이니 공작가라도 어쩔 수 없었을 거고.”

렉시로서는 정말로 그냥 한 말이다. 솔직히 일종의 우스개로, 별생각 없었다. 허나 이게 생각보다 시종의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는 렉시의 말이 천부당만부당하다는 듯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설마요! 저희 성의 창고는 성안 사람이 적어도 반년간은 버틸 수 있도록 늘 물자를 비축해 놓습니다. 겨우 연회 두 번으로 소진될 양이 아닙니다.”

아무리 미인이라지만 공작성의 부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시종의 애사심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 그런가?”

“물론입니다. 이백 년도 더 전의 일이긴 하지만 전쟁을 겪은 초대 공작께옵서는 성안을 대대적으로 개축하셨습니다. 특히 물자용 창고의 수를 늘렸지요. 마법은 걸려 있지 않지만 대신 무척 큽니다.”

“그렇…군.”

떨떠름한 얼굴을 하던 렉시가 뭔가 하나 더 물었다.

“이 일은 전하께서도 아시는가?”

“전하께옵서요? 잘은 모르겠지만, 이런 하잘것없는 행정 업무는 보통 시종장님께서 처리하십니다. 아실 수도 있겠지만, 모르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알려 줘서 고마워.”

“…감사합니다!”

무엇이 감사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렉시는 대충 말을 받았다. 조금 늦춰졌던 발걸음을 다시 빠르게 했다.

흠…. 그렇다면.

렉시는 조금 미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이상한걸. 그렇게 물자가 많은데 뭘 더 옮긴다는 거지?’

후작가의 물건은 엊그제 로메인이 다 옮긴 걸 확인했다. 그 외로 뭘 더 옮긴다면 음식이나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각하께선 이거 모르는 눈치던데…. 각하의 말론 대충 화해했다고 했는데 사실 아니었나?’

이상한 걸 눈치채니 미심쩍은 것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왠지 모르게 불길해진 렉시는 잠깐 고민하다 발걸음을 멈췄다.

“남작님?”

“잠시만, 뭣 좀 하나 가져올 것이 있어.”

“저희가 가져오겠습니다.”

“아니, 내가 가져와야 하는 것이라.”

렉시는 짧게 말한 뒤 재빨리 방으로 갔다 돌아왔다. 돌아온 렉시의 손에 아무것도 없었지만, 시종들은 별반 의문 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제 가자. 정말로 시간이 촉박하군.”

도착한 준비실엔 로메인이 이미 와 있었다. 왠지 모르게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그는 렉시가 도착한 걸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남작님!”

벌떡 서서 이쪽을 응시하는 로메인은 매우 눈이 부셨다. 각이 잡힌 흑색 예복 위를 장식한 것은 녹색 에메랄드였다. 렉시와 같이 상대의 눈 색을 택한 것이다. 다만 그가 선택한 보석 개수는 렉시보다 많았다. 신부(?)가 미모가 워낙 화려하다 보니, 그에 빛바래지 않기 위해 사용인들이 주렁주렁 더 매달았던 것이다. 에메랄드가 주렁주렁 박혀 있는 허리띠엔 비슷하게 화려한 장식용 검이 하나 달려 있었다. 아마 신분이 기사이니, 그것을 확인하기 위한 예식용 검인 듯했다.

세상에…. 렉시는 순간 말을 잊었다.

“기다렸습니다.”

“…제가 많이 늦었군요.”

“아닙니다, 정확히 오셨습니다. 단지 제가 일찍 온 것이지요.”

렉시를 바라보는 로메인의 눈에선 애정이 철철 넘쳤다. 어제 이후 로메인은 이미 마음의 고삐를 훅 푼 상태였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하다. 그의 나이 이제 서른, 간신히 만든 연인이 얼마나 예쁘고 귀하고 사랑스러울 것인가. 노총각의 마음의 향방은 이제 늘 곧은 직진, 직진뿐이었다.

그는 성큼성큼 렉시에게 다가가 손을 덥석 잡았다. 뒤에서 안 됩니다! 하고 시녀들이 소리쳤지만 소용없었다. 참으로 저돌적인 애인의 돌격이다. 렉시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보고 싶었습니다. 시간이 가지를 않아 무척이나 초조했지요.”

“오래 기다리셨어요?”

“고통스럽지만 또한 달콤한 기다림이었습니다. 시간이 너무도 가지 않아 몇 번이고 시계를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보답을 받았으니 괜찮습니다.”

마치 단 꿀이 떨어지는 것 같은 말이 렉시 위로 쏟아진다.

그리고 로메인은 렉시의 얼굴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뜨거운 시선이 베일을 뚫을 듯 강렬했다. 아무래도 가까이서 보니 렉시의 막강한 미모가 그제야 눈에 보인 것 같았다.

하아…. 그는 한숨을 삼키며 렉시에게 속삭였다.

“…아름답습니다. 천사도 당신에 비한다면 빛을 잃겠군요.”

렉시도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경도 무척 멋있으세요.”

“경이 아니라 로메인입니다.”

“저는 남작이라고 부르시고?”

“이런. 애칭을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로메인의 얼굴이 마치 꽃처럼 폈다. 내가 어제 하라고 안 했나…? 하고 반추하던 렉시는 아 하고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그거 하느라 …그런 말 할 정신이 없었다. 렉시는 잡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말했다.

“…뭘 그런 걸 물어보고 그러세요.”

하시고 싶으시면 부르는 거죠, 렉시가 조그맣게 말하자 로메인이 렉시의 손에 입을 맞췄다.

“렉시, 정말로 기쁩니다.”

“로메인….”

아앗…!

흐억!

두 사람이 이렇게 닭살을 떠는 사이 주변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그들의 입장에선 그럴 것이, 그간 로메인이 좀 무뚝뚝했는가. 물론 렉시를 약혼자라고 데리고 왔고, 예의 바르게 대했으며, 또 갖은 편의를 봐 주긴 했다. 하지만 그들은 여태 로메인이 직접적으로 애정 행각을 벌이는 건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저렇게 미인이 약혼을 한다고 나서니… 둘이 애인처럼 행동할 무언가와 무언가를 하기야 했겠지.

그러나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그 파괴력이 남다른 법. 그들은 로메인과 렉시가 날리는 닭털 사이에서 황홀한 괴로움과 질투에 휩싸였다.

‘컥, 배알이 꼴려!’

‘잘 어울리지만 배가 아파!’

‘로메인 경 두 분 정말 애인이 맞구나. 흐흑!’

‘아니 왜 약혼 앞두고 저러는 건데…?’

이런 데서 애정사 보고 싶지 않다…. 아 왠지 옆구리가 시리구나. 흑흑 이 일 끝나면 우리도 애인을 만들고 말 테야. 어쩐지 착시인지는 몰라도 저 주변만 분홍빛인 것 같은 환영마저 인다. 아아…앗! 눈이, 눈이 머는 것 같아!

그때였다.

“로메인 경, 남작님. 약혼식 시작할 시간입니다.”

약혼식을 알리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두 사람이 서로의 손을 놨다. 사용인들의 괴로움 역시 그때로 끝이 났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허나 그들의 괴로움은 끝날 때까진 끝난 것이 아니었으니…….

“약혼이 끝나면 우리 둘의 미래를 의논해 봅시다.”

“그래요. 저도 그때가 무척 기다려지네요.”

“지금 당장이라도 렉시, 당신을 모시고 둘만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습니다.”

쪽, 쪽, 손에 하는 손 키스가 배경음으로 들리기까지 하는 환장함이란!

“이토록 아름다운 당신을 누군가 보는 것이 괴롭습니다. 이런 제가 너무나도 한심합니다.”

“아니요, 사실 저도 그런걸요. 로메인 경이 너무 멋있어서…. 저와 같은 베일을 씌우고 싶어져요.”

“당신이 원하신다면 저도 쓰겠습니다. 뭐든 못 하겠습니까?”

아아 안 되겠다. 이젠 그만!

결국 그들은 침침해지는 두 눈을 비비며 둘을 떼어 내 제자리에 세웠다. 떼어 내자 너무나도 아쉬워하며 얼굴을 굳히는 둘을 보니 대체 이해를 못 하는 그들이었다. 아니, 오늘 약혼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왜 이래?

연애 처음 해?

…….

어쨌거나, 드디어 향후에도 참 말이 많아질 약혼식이 시작됐다.

홀 안엔 사람이 넘쳐났다.

반 정도는 이 부근에서 사는 귀족들, 나머지 반은 공작가와 관련 있는 귀족들이었다. 실로 어마어마한 인파였다.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대부분 다들 이 정도는 각오하고 약혼식에 왔다. 인파가 보통이 아닐 걸 다들 내심 알고는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 귀족가의 약혼은 당해 귀족의 인맥에 따라 오는 인원들이 결정된다. 하지만 오늘의 약혼은 보통 귀족이라고 말하기엔 어려운 면이 많다.

왜냐, 당사자가 곧 공작가의 후계자가 될지도 모르는 이 아닌가.

게다가 중요한 건 무려 그 공작이 자신의 대리까지 맡겼단 사실이었다. 공비가 기를 쓰고 소문이 퍼지는 걸 막았어도 이건 막아질 수 없는 소문이다. 공작이 결정한 이 일은 귀족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사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간 공작은 공적으로 중립이었다. 사적으론 몰라도 공적으론 누구를 더 총애한다 드러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게 이번 일로 바뀌었다. 아주 대놓고 한쪽 편을 든 것 아닌가.

응당 시선이 달라질 만했다.

게다가 사건은 또 있었다.

그건 바로 오늘 약혼하는 로메인의 약혼자에 대한 소문이었다.

로메인의 약혼자가 남자래. 그런데, 그 레아누 황녀를 넘어서는, 대륙 제일가는 미인이래!

물론 이건 말만 있었으므로 듣기에 따라선 그냥저냥 허언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간 레아누 황녀의 유명세를 따라 보고자 너도나도 나도 제일미요! 하는 사람들이 없진 않았으니까. 물론 대부분은 허언으로, 뚜껑을 열어 보면 그 정도는 아닌 정도로 마무리됐다. 그럼 그렇지, 어디 그런 미인이 또 있으려고? 때문에 처음 소문을 들은 사람들도 다들 이 정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 양상이 과거와 달랐다.

그를 본 목격자들이 다들 단체로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아누 황녀? 오! 그래, 그녀는 아름답지.

하지만 다들 로메인 경의 약혼자를 본 적 있는가?

로메인의 약혼자에 비한다면 그녀는 그의 발끝도 못 따라간다네. 어느 정도냐고? 보름달 옆의 반딧불이요 태양 아래 켜 놓은 등불 격이지. 농 같지? 진짜야!

실로 충격적인 증언이었다.

심지어, 그이를 처음 본 버나드까지 홀랑 빠져 추태를 부렸다는 소문마저 은근히 돌고 있었으니 어떻겠는가. 사람이라면 다들 호기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아니, 얼마나 예쁘기에?!

우리도, 우리도 보고 싶다!

렉시가 마구 돌아다니거나 화려한 취향이면 그들도 얼굴 볼 기회가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렉시는 모종의 이유로 거의 칩거(?) 중이었고, 못 본 사람들은 손가락만 빠는 실정이었다. 그렇다고 남의 약혼자 얼굴을 멋대로 보자고 할 수는 없다. 허니 못 본 이들은 그저 애만 달 수밖에.

그런 와중에, 합법적으로 그 얼굴을 볼 수 있는 판이 벌어졌던 것이다. 약혼식이라는 판이.

그러니 이 약혼식에 사람이 없을 리가 없었다. 중병 걸려 아픈 사람도 아득바득 기어 나올 마당이었으니까….

“엄청난 인파로군. 마치 전하의 혼례 때를 보는 것 같은데.”

“당연하죠. 누구 약혼인데요?”

“맞소. 그 로메인 경이 약혼을 다 하다니… 그야말로 천지가 뒤집힐 일이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주변을 둘러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이렇게 많은 귀족들을 보다니 황도에서나 있을 일이다. 얼마나 사람이 많은지, 본래는 놓았을 의자도 테이블도 빼고 없다. 식이 끝나면 시종들이 들고 오자고 아예 계획을 바꾼 것이다. 그 정도로 사람들이 넘쳐났다.

온 사람들은 자기들이 알아서 모여 있었다. 대부분 파벌, 작위, 나이대, 집안 인맥에 따라 갈렸다. 어디에 누가 있을까? 휘휘 주변을 둘러보던 남자가 갑자기 휙 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옆에 있던 부인이 질색하며 남자를 때렸다.

“천박하긴! 무슨 짓인가요?”

“아얏! 미안해. 하지만 여보, 저기 누가 왔는지 좀 보라고.”

남자의 손끝을 바라본 사람들은 헉 하고 놀랐다. 그가 가리킨 것은 공비파로 알려진 귀족들이었던 것이다. 이럴 수가, 공비파가 로메인의 약혼에 오다니….

아니 물론 약혼 잔치는 파벌 가리지는 않는다지만… 그래도 좀 그렇지 않나? 어쨌거나 그들은 주변의 시선에 조용히 빗겨, 그들은 자기들끼리 서서 조용히 담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변의 시선을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긴장한 이마 사이로 또륵 떨어지는 땀방울이 멀리서도 다 보인다.

사람들이 쯔쯔 혀를 찼다.

“공비 전하 쪽에 줄 선 이들이 여긴 왜 왔을까?”

“그러게 말이오. 얼굴도장 찍기엔 이미 늦은 것 같은데.”

“아이 참! 또 휘파람! 천박하다니까. 너무 바라보지 마시라니깐요?”

하지만 바라보지 말라고 해도 시선이 절로 가는 것을 어찌하라고. 거기다 저렇게 자랑스럽게 온 건 좀 봐 달라고 온 거 아냐? 원래 귀족들이란 이렇게 사람 괴롭히는 재미에 사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작은 다툼이 있었지만 그들은 보는 척 안 보는 척, 저들끼리 쑥덕쑥덕 공론을 이어갔다.

“저치들도 참 재미있단 말이야. 공비 전하가 안 무섭나?”

“미인이 궁금해서 왔을 수도 있지. 참 별일이긴 하군. 와야 할 사람은 안 오고, 안 와도 되는 사람은 오고 말이오.”

“와야 할 사람이라니. 누구 말인가요?”

누군가 툭 던진 말에 사람들이 귀를 쫑긋댔다. 올 사람이 안 와?

“플로랑 후작 말이오. 혹시 해서 찾아봤는데 역시나 안 보이더군. 여기서 요즘 그이 본 사람들 없지 않소?”

“…아아! 그녀 말인가? 그렇군!”

플로랑 후작, 오랜만에 듣는 그 이름에 사람들이 아 하고 깨달은 얼굴을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공작의 한쪽 팔이 안 와선 안 되지. 처음엔 몰랐는데 듣고 보니 또 그렇다. 그녀가 왜 여길 안 왔지?

“바쁜가? 생각해 보니 못 본 지 몇 달 된 것 같은데.”

“어쩐지 요즘 사교계가 조용하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군요.”

누군가 코웃음을 쳤지만 반론은 하지 않았다. 맞는 말이긴 했기 때문이다.

카트린느 드 플로랑, 통칭 플로랑 후작. 그녀가 한번 사교계에 나타나면 때아닌 밤중에도 날벼락이 쳤다. 추종자와 적과 기타 등등을 줄줄이 끌고 다니기 때문이었다. 워낙 방종한 행동 덕에 원성이 잦았지만 작위가 무려 후작이니 누가 뭐라고도 못 했다.

그저 공작이나 공비 정도만 뭐라 할 수 있을 폭이었지만, 공작은 그런 거 원래 신경 안 쓰고 그녀는 공비 말도 안 듣는다. 그녀가 공비와 괜히 사이가 안 좋은 게 아닌 것이다. 하여 그저 나머지가 바라는 것은, 그녀 스스로가 큰코다칠 일을 만드는 것뿐이었지만….

과연?

“별일이군요, 공작 전하의 추종자가 이런 일에 안 오다니?”

“혹 모르지. 공비 전하 쪽과 뭔가 손을 잡은 것일지도.”

“말이 되는 소릴 하세요! 그 견원지간이 그럴 리가 있겠어요? 얼마나 사이가 나쁜데요.”

“맞소, 차라리 바위에 뿔이 나길 기다리시오. 하늘이 무너져도 둘이 가까이 지낼 일은 없을 것이니. 내 마지막에 듣기론 영지에 일이 있다고 했었소.”

그렇다. 이것은 실제로 그녀가 돌아가면서 주변에 한 말이다. 정확히는 몰래 돌아가는 척하며 다시 돌아왔지만, 어쨌거나 그랬다. 물론 현재 그녀의 영지는 아주 무탈하다. 믿을 만한 다른 이가 대신 운영 중이기도 하고….

하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알 리는 물론 없었다. 어쨌거나 증언이 나오긴 했다. 해서 의견은 그쪽으로 흘러갔다.

“바빠서 못 온 모양이군.”

“그렇죠 뭐. 그 전하 바라기가 못 올 정도라니, 큰 문제라도 생겼나 보죠?”

사실 억지를 부리면 언제든 올 수 있는 인사지만 다들 그냥 그러려니 했다. 워낙 평소 제멋대로인 사람이라 그 이상 생각이 나가진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사실 그녀는 와도 문제다.

“솔직히 안 온 게 다행 아닙니까? 필시 인파가 이보단 많았을 텐데요.”

핫, 그건 그렇네.

다들 두 눈을 깜박이며 슬쩍 그 말에 동감했다. 안 그래도 혼잡한데 여기서 더 북적일 미래를 생각하니 진력이 나는 그들이다. 그들은 그냥 그녀의 말은 그만하기로 했다. 어차피 그녀 아니어도 할 말은 산더미니까.

흐름은 이제 공비로 넘어갔다.

“그나저나 공비 전하도 이렇게 꺾이시는 거로군. 생각보다 싱거운 마무리야.”

“너무 빠른 판단 아닌가요? 그 공비 전하인데요.”

“맞소, 아직 황가가 있지 않은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공비는 공비다. 그녀를 잘 아는 이들은 그 점을 우려했다. 혹시 이 뒤에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일어나는 건 아냐? 음모론에 빠진 누군가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허나 어쩌겠습니까? 이게 후계자 임명식이면 또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고작해야 약혼식 아닙니까?”

공비와 황가라는 단어가 모든 걸 해결해 주진 않는다. 반대도 명분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이게 후계자 발표하는 자리면 또 모를 것이다. 하지만 이건 후계자 발표가 아니라 노총각 장가가는 축하연이었다.

“이 약혼을 막으면 막는 대로 비웃음거리죠. 가장 좋은 건 대리청정을 없던 일로 하는 방법입니다만 이미 말이 나오는 걸 넘어 귀족들 앞에서 선언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은퇴를 막는 일뿐인데…. 이게 되겠습니까?”

“은퇴연을 막거나 미루면 되지 않겠는가?”

“아무리 두 분 사이가 안 좋다고 해도 그렇지요. 쉰다는 사람을 대체 어떻게 막는단 말입니까?”

젊어 보이는 귀족의 말이었다. 중년의 남자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동감했다.

“자네의 말이 맞네. 이제 공은 이쪽으로 넘어온 거지. 전하께서 이렇게 판을 뒤흔들어 버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원래 정론만을 따르시던 분이 이렇게 나오시다니 놀라울 뿐이야.”

“실로 그렇지요. 저 또한 놀랍습니다. 전하께오서 아프신 뒤로 정치 방식을 바꾸셨어요.”

“슬슬 그분도 교활해지실 때도 된 게야. 자고로 세월과 병마만큼 사람을 바꾸는 게 어디 있단 말인가?”

별말이 다 나왔다. 공비는 이렇고, 공작은 저렇고. 누구는 이럴 것이고 저거는 저럴 것이다. 말만 들어 보면 공작과 깨벅쟁이 친구들이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지만 사실 여기에 공작과 친한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없다.

원래 이런 대화는 친하지도 않은 타인들이 하는 법이다.

하여간 이말 저말 다 나오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홀이 아주 떠나갈 것 같았다. 아무리 작은 소리라도 그 수가 수십 수백이면 그것만으로도 웅웅대는 소음을 만들어낼 수 있다. 대체 언제쯤이면 이 소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나마 입 다물고 정신을 차리고 있던 사람들은 그래서 종이 울리자 아주 기뻐했다.

댕, 댕, 댕.

“모두 중앙에 길을 내어 주십시오! 약혼식이 시작됩니다. 카펫 위에서 내려가시어 길을 내어 주십시오!”

드디어 약혼식이 시작되는구나!

사람들은 알리는 자의 말에 따라 발을 옮겼다. 중앙에 놓여 있던 붉은 카펫이 드러나고, 귀족들은 그 옆에 열을 맞춰 자리를 찾아갔다. 잠시 소란이 있었지만 홀은 곧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그들이 조용해지자, 기다렸다는 듯 호명관과 나팔수가 크게 외쳤다.

“프로하우스 공작 전하께서 드십니다!”

날카로운 나팔 소리가 홀 안을 울리면서 사람들은 두 눈을 크게 떴다.

“헉, 전하께오서?!”

“진짜다!”

사람들은 호명관의 말에 크게 놀랐다가, 정말로 등장한 공작의 모습에 두 번 놀랐다. 원래 이런 식에서 가장 늦게 등장하는 것은 지위가 높은 이로 정해져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약혼 당사자가 나타나지도 않은 상태. 왜 전하가 벌써 나오지?

허나 그가 성큼성큼 걸어 단상 위에 올라가자 사람들은 그제야 상황을 알아채고 놀라워했다.

공작이, 이 약혼의 주례였다!

“모두 조용히 하라.”

사람들은 으악 소리를 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 냈다. 저절로 얼굴이 원망의 눈길을 쏟아낸다. 너무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조용히 하라고?

하지만 늘 그렇듯 지위가 깡패이므로 그들은 곧 공작의 눈초리에 억지 정숙을 하게 됐다. 아프다는 사람답게 퀭했지만, 눈에서 나오는 정광이 실로 무지막지했기 때문도 있다. 마치 밤하늘에 갑자기 뜬 달처럼 그는 두 눈을 번뜩댔다. 그리하여 바늘 하나 떨어트려도 소리 날 것 같은 홀을 만든 그는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내 사랑하는 조카의 약혼에 와 준 것을 환영하네.”

말은 없지만 술렁대는 공기가 홀을 뜨겁게 달군다. 그는 할 말이 많아 보이는 귀족들을 보며 씩 웃음을 지었다.

“경사는 기쁨을 나누는 자리이지. 자네들이 이곳에 이토록 많이 모여 주다니 참으로 기쁘군. 그럼 이제 약혼식을 시작하도록 하겠네.”

맨 앞줄에서 이제나저제나 하던 데퓨탄 후작 부처가 그 소리에 두 손을 꼭 잡는다. 그는 그들에게 짧게 시선을 주었다가 손을 위로 들었다. 호명관이 그 손짓에 재차 크게 외쳤다.

“로메인 드 데퓨탄 님, 알렉시아노 드 페르귄 님 입장하십시오!”

쿵.

방금 공작이 들어왔던 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오늘의 두 주인공이 빛을 뿌리며 등장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빛이었다.

“오오!”

그것은 매우 신기한 광경이었다.

두 사람이 들어오자 기다린 것처럼 하늘이 열렸다.

정확히는, 하늘이 아니라 창이었다. 수년간 그곳에 있는지도 몰랐던, 성 지붕의 창이 버진 로드를 따라 죽 열렸다.

마치 배가 파도를 가르듯 창이 연이어 열리고, 동시에 위에서 빛이 쏟아진다. 빛의 색은 다양했다. 빨강, 노랑, 파랑, 녹색, 보라…. 그것이 줄잡아 백여 미터는 되어 보였다. 순식간에 엄청난 길이의 무지갯빛 길이 완성됐다. 사람들은 입을 떡 벌린 채 그걸 구경했다.

“맙소사…!”

“저건…색유리! 어머, 그림도 있어요. 유리화군요!”

“아름다워라!”

아직 시린 겨울이었지만 햇빛은 마치 여름처럼 강렬했다. 때문에 갖가지 모양을 그리고 있는 스테인드글라스가 더욱 빛났다. 붉은색의 융단 위, 수놓이는 빛의 그림자는 이젠 잊힌 옛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아름다운 여자, 용, 기사, 거대한 성…. 이것들은 이젠 사라진 옛 달리아의 이야기들이다. 일부는 알아보았지만, 대부분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보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미 그 옛일은 역사 속으로 들어선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저 그 존재만으로도 아름다웠다. 사람들은 탄성을 내뱉었다.

“저곳에 창이 있었나?”

오랫동안 공작성을 오가던 사람들도 저기에 저런 것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오지 않은 자들에게 이 광경을 이야기하면 과연 믿기는 할까? 이건 그 정도로 오랫동안 보이지 않았던 과거의 유산이었다. 황실에도 이런 빛의 길은 없을 거야. 아무렴! 그들은 입을 떡 벌린 채 빛의 그림자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렉시와 로메인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위에서 폭발적인 빛이 화답하듯 일렁거린다. 빛의 조각들이 그들의 위를 흐를 때마다 옷에 달린 보석들이 빛을 머금고 반짝댔다. 그건 마치 신화나 전설의 한 장면을 그대로 똑 떼다 놓은 것 같은 장면이었다.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압도적이고 신비한 분위기가 그들의 마음을 고양시켰던 것이다.

게다가―

“세상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이 또 있을까요?”

“오, 로메인 경을 봐요. 그리고 그 약혼자도!”

“어쩜 저렇게 아름다운지….”

“정말 황녀는 대지를 못하겠군요. 어떻게 저런 미인이 있을 수가….”

렉시를 처음 본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시 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마치 못이 박힌 듯 렉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해도 시선을 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쏟아지는 빛 아래, 베일을 쓴 미인은 마치 성화의 한 장면처럼 경건하고 신비로웠다. 희뿌연 베일과, 위에서 내리쬐는 빛 때문에 그 미모가 선명하게 와 닿지는 않는다. 얼핏 얼핏 보이는 선과 면으로 그 생김새를 파악하지만, 이내 빛이 그 진정한 아름다움을 가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실로 그랬다.

렉시와, 그 주위를 일렁이는 기이한 일렁임이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여기, 고금을 통틀어도 다시없을 이가 서 있노라고….

그는 그 정도로 아름다웠다.

허니 누군들 이 아름다움에 저항할 수 있으랴? 지금 이 순간만큼은 파벌 성별 모든 것이 무용일 뿐이다. 이 자리에 있는 것은 그저 아름다움이란 개념에 매몰되어 넋을 잃은 사람들뿐…. 속절없는 매혹이란 그저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이 기막힌 황홀경에 도취된 사람들은 신을 찾았다. 또 어떤 이는 훌쩍거리며 울기도 했다. 참으로 혀를 내두를 상황과 연출이었다. 이 먹먹한 광경을 보며 감격한 사람들엔 물론 후작 부처도 포함이었다. 후작은 감격한 나머지 옆에 있던 부인을 쿡 찔렀다.

“이런 깜짝 놀랄 일을 준비하다니, 당신 참으로 멋진 사람이오.”

“무슨 엉뚱한 말을 하시나요?”

“오늘 연회는 모두 당신이 준비했잖은가? 하지만 나한테까지 저런 걸 숨기다니…. 당신 생각보다 사람 놀래키는 데 소질이 있군그래.”

데퓨탄 후작이 싱글거리자 엘자는 애매하게 미소했다.

“연회는 제가 준비한 게 맞긴 하지만…. 저 빛의 길은 제가 아니에요.”

“당신이 아니면 누가 한다고?”

“오라버니와 시종장이 했겠죠. 또 누가 있겠어요?”

어쨌거나 자신은 아니라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묘하게 분주해 보이더니 이런 걸 준비하고 있었을 줄이야. 엘자는 감격에 찬 얼굴로 하늘을 보았다.

“감격스럽네요. 오라버니와 시종장이 이렇게 세심할 줄이야….”

“정말 당신이 준비한 게 아니라고?”

“여보, 전 우리 성에 저런 창이 있는지도 몰랐답니다. 이 성은 매우 오래됐어요. 아무리 저라고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니랍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 어깨를 으쓱했다.

“게다가 여보, 생각해 보세요. 제가 이런 것이 있는 줄 알았다면 제 결혼식 때 하지 않았겠어요?”

“……허어.”

듣다 보니 그렇다. 하긴 알고 있었으면 당연 했을 사람이지. 후작이 납득하자 이내 주변이 조용해진다. 엘자는 조용해진 남편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앞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모두 아닌 척하지만,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귀가 이쪽으로 꽂혔다. 뭐 일부는 자기가 일부러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는 무척 당당했다. 아무리 자기가 공녀라도 그렇지, 애초 성의 모든 걸 다 아는 공녀가 어딨단 말인가? 비밀 통로면 몰라도 이런 성의 부대시설은 일하는 사람이나 아는 것이다.

어쨌거나….

그녀는 두 손을 꼭 쥔 채 아들의 약혼식을 바라보았다. 올해 자기가 복이 터지려는지 어쩜 하는 일마다 이렇게 극적이고 맘에 드나 모르겠다. 자기가 준비한 것 이상으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녀는 몰래 눈시울을 붉혔다.

“오라버니는 이런 게 있는 줄 알면 저도 좀 해 주시지….”

감격하는 와중에도 살짝 원망 섞인 투정이 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입가에는 미소가 감도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자기 자식 약혼 아닌가. 오라버니가 이렇게 신경 써 준 성대한 약혼식이 싫을 이유는 없다. 그냥 사소한 투정을 해 볼 뿐이지.

여하간 그녀가 말한 이 사실은 금방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성에서 아주 크고 자랐던 엘자조차도 모르는 창이란다. 생각해 보니 저건 현 공작이 결혼했을 때에도 쓰지 않았다.

“그렇단 말인가?”

사람들은 놀라운 얼굴로 방금 들은 이야기를 건너 건너 전했다. 어떻게 된 것이 파면 팔수록 고구마 엮듯 놀라운 것만 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저 말은 즉….

“전하께서 정말 제대로 로메인 경을 밀어 주시는군.”

“당신도 하지 않았던 것을 해 주시는 저 배포라니. 이제 보니 차기 후계자는 그냥 결정이 난 것이었네요. 경쟁이 아니라.”

그들은 단상에 서 있는 공작을 힐끔거렸다. 일부는 경악, 또 일부는 경탄 어린 시선이었다. 그 안에 담긴 뜻들은 대부분 이랬다.

그렇게 지지부진 후계자 선정을 끌어 오더니 이렇게 하루아침에 모든 걸 다 해치울 줄이야. 실로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속도다. 이래서 늙은 생강이 맵다는 것인가.

이런 시선들을 한 몸에 받고도 공작은 눈 하나 깜작하지 않았다. 하잘것없는 데엔 맘 쓰지 않는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는 그저 망부석처럼 우뚝 서서 걸어오는 두 약혼 당사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위엄 있는 얼굴 위로는 약간 핏기가 비쳤는데 아마 이 광경에 자신도 모르게 고무된 모양이었다.

“버나드 공자는 아예 기회조차 없겠군요.”

“자기 자식이라도 기준에 맞지 않으면 무 자르듯 자르다니 대단하시단 말이지.”

“너무 냉정하긴 하지만….”

아무리 맘에 안 드는 자식이라도 좀 지나치긴 하다. 자고로 군주의 덕목 중엔 자비도 있지 않은가. 기실 그간 공작이 해 온 정치란 그런 것이었기도 하고.

하지만 다들 말만 그럴 뿐, 공작의 선택을 크게 비난하진 못했다.

기실 그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 일은 필요한 일이었다는 것을.

이미 정한 일이라면 미련 따위는 두지 말고 깔끔히 처리해야 한다. 여기서 발휘하는 자비심이야말로 실로 쓸데가 없는 것. 고래부터 무수한 치자(治者)들이 한 실수가 그런 것 아닌가. 후계자를 정함에 있어 정에 휘둘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저 칼 같은 냉정함만이 미래 다스릴 자를 위한 올바른 초석이 될 뿐이었다.

“로메인 드 데퓨탄, 그리고 알렉시아노 드 페르귄이여.”

사람들은 귀를 쫑긋 세웠다. 어느새 길이 끝나고, 두 사람의 발걸음 역시 멎어 있었다.

드디어, 로메인과 렉시가 단상 바로 아래 섰던 것이다.

“네. 전하.”

“예, 전하.”

깨끗하고 명징한 목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술렁이던 좌중이 한순간에 잦아들었다. 공작이 그들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애타게 기다리던 것을 이제야 시작한다. 그는 입술을 축이며 크게 입을 열었다.

“오늘은 참으로 기쁜 날이다. 공적으로는 이 공작령의 유능한 기사이자, 사적으로는 내 조카인 로메인 드 데퓨탄경이 페르귄의 남작과 약혼 선언을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는 침착한 얼굴로 준비한 양피지를 폈다. 길고 긴 약혼 전 집안끼리 합의하는 계약문들이 그의 눈을 어지럽혔다. 이건 전날 렉시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준비한 것이다. 물론 데퓨탄 후작 역시 동의했다. 가짜(?) 약혼에 뭐 이런 걸 다 하냐 하겠지만 귀족의 약혼이란 원래 까다로운 것이다. 애초 약혼 자체가 혼인을 전제로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두 사람은 파혼을 전제로 약혼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남들에게 책잡힐 계약서를 만들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기왕지사 하는 것 뭐든 확실히 한다는 성미인지라 계약서는 진짜처럼 만들었다.

“이것은 두 가문이 약혼에 앞서 합의한 내용으로, 이것을 듣는 모두가 이 일의 증인이 될 것이다.”

공작은 계약서를 읽었다. 내용은 길고도 길었다.

양 측이 현재 가지고 있는 재산, 향후 받을 작위, 혹은 소유하고 있는 현 작위, 그 작위에 따른 땅에 대한 소유권, 혹여 생길지도 모르는(!) 자손에 대한 상속권, 두 당사자가 주고받을 재산들…. 한도 끝도 없는 그 계약서엔 물론 렉시가 받을 지참금의 액수 역시 정확히 적혀 있었다.

천만 크레아.

사람들은 금액을 듣고 침을 꼴딱 삼켰다.

“처, 천만!”

렉시는 몰랐지만, 저 천만 크레아란 액수는 어지간한 황족조차도 받지 못했던 지참금 액수였다. 역대로 따지면 한두 번째 정도는 되는 액수일까?

하지만 놀람과는 별개로, 사람들은 금액에 크게 납득하고 있었다. 그의 미모가 모든 것을 긍정케 했던 것이다.

‘천만이 큰돈이긴 하지만 저런 미인이니까.’

‘솔직히 더 줘도 모자랄 판이지. 겨우(?) 천만 크레아면 싼 거야. 아무렴!’

그들은 로메인이 내준다는 금액보다, 외려 다른 것에 집중했다. 그것은 바로 천만을 내주고도 훨씬 남는, 로메인의 재산 규모였다. 천만 크레아란 현물을 내주고도 로메인은 상당한 액수의 현금과, 작위가 딸린 제법 큰 영지를 가지고 가겠다 말했던 것이다. 둘째를 사랑하는 후작가의 마음이 저 정도였는가? 사람들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후계자도 아닌 자식을 저렇게도 챙기다니 이례적이군요.”

“데퓨탄 후작이… 로메인 경을 귀히 여기긴 했지.”

“저건 소후작도 동의한 일이겠지요? 우애가 남다른가 보네요.”

아무리 귀애하는 자식이라도 보통은 후계자에게만 작위와 재산을 몰아 준다. 이렇게 로메인처럼 둘째가 작위와 재산 챙겨 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여간 여러모로 세기의 약혼이다.

사람들이 쑥덕공론을 하는 와중에도 공작의 입은 쉬지 않고 양피지를 읽었다. 그리하여, 그는 기나긴 계약 합의의 마지막에 도달했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두 사람에게 동의를 구했다.

“두 사람은 이 계약에 동의하는가?”

“네, 동의합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다시 동시에 둘이 말했다.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묻겠다. 알렉시아노 드 페르귄, 그대는 로메인 드 데퓨탄과의 약혼을 받아들이는가?”

“―나, 페르귄가의 알렉시아노 드 페르귄은 데퓨탄 가의 로메인과 미래를 약속합니다.”

“로메인 드 데퓨탄, 그대는 알렉시아노 드 페르귄과의 약혼을 받아들이는가?”

“데퓨탄 가의 로메인 드 데퓨탄, 페르귄가의 알렉시아노 알렉시아노와 미래를 약속하겠습니다.”

“둘 다 이견이 없다면, 이곳에 서명하라.”

두 사람은 단상 위에 마련된 펜과 잉크로 서명했다. 알렉시아노 드 페르귄, 그리고 로메인 드 데퓨탄의 이름이 말미에 새겨졌다. 공작은 잉크가 스며드는 양피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정말로 마지막 순서만 남았다.

“이 마지막 식이 끝나면, 두 가문은 영원한 우방이 될 것이며 두 사람 역시 미래에 배우자가 될 것임을 약조하게 된다. 이는 나 기즈 드 프로하우스의 이름으로 증언하게 될 것이니, 이에 이의 있는 자는 지금 나서야 한다. 이 약혼에 이의 있는 사람이 있는가?”

물론이지만 나서는 이는 없었다. 누구 하나라도 나서면 참 재밌을 것 같은데. 공작은 왠지 삐뚤어진 생각을 하다 피식 웃었다.

‘나도 참 성격이 나쁘다니까.’

눈앞에 있는 둘은 바짝 굳어 자신만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홀 안을 채운 귀족들도 그랬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약간 소란했던 홀은 바늘 하나 떨어트려도 소리가 날 정도로 조용했다. 누군가는 볼을 붉히고, 다른 누군가는 기도하듯 손을 깍지 끼고, 다른 누군가는 입술을 잘근 잘근 씹은 채 숨을 죽인다. 공작은 속으로 킥 웃었다. 저들 생각이 빤히 보인다. 저거 다 다음 수순이 뭔지 알아서 저러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제 정말로 끝이다. 그는 천천히 마지막 말을 읊으며 식의 끝을 선언할 준비를 했다.

“그렇다면 미래를 약속한 두 사람, 이제 맹세의 입맞춤을 하라.”

그는 이제 뒤로 한발 서서 이 가짜(?) 연인의 키스를 구경했다. 마치 물 흐르듯 모든 것이 이어졌다.

로메인과 렉시가 서로를 마주하며 가까이 선다. 로메인의 손이 목 아래까지 내려져 있는 렉시의 베일을 조금 걷어 냈다. 그러자 마치 옥을 깎아 내고 꽃물을 들인 것 같은 턱과 입술이 드러난다. 로메인의 입술이 렉시의 입술을 삼킬 듯 가까워졌다. 사람들의 눈이 열기로 이글거렸다. 이 순간 사람들의 머릿속엔 모두 한 단어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뽀뽀! 키스! 입맞춤!!!

그리고.

“잠깐!”

거대한 홀 안을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폭풍이 도착했다.

당연하겠지만, 목소리의 반향은 매우 컸다.

모두 앞만 보고 있던 사람들이 뒤를 돌아봤다. 참고로 이들은 그냥 앞을 보고 있던 게 아니다. 다들 렉시의 미모에 반쯤 홀린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뒤를 돌아봤으니 얼마나 이게 충격적인 일인지 미루어 알 수 있지 않을까. 모두 하나같이 얼빠진 얼굴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입만 쩍 벌렸다.

아니, 약혼식 중반에 이런 개판이? 대체 누구야?

대단한 놈이네, 나는 생각만 하고 못한 짓인데!

목소리의 주인공은 곧 나타났다.

정확히는 일단의 무리들과 함께 나타났다는 것이 옳겠다. 얼핏 봐도 한 둘이 아닌 수십은 되어 보이는 숫자가 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착각인지는 몰라도 그들이 들어오자 조도까지 어두워졌다.

약혼식과 하나같이 동떨어진 모습을 하고 있는 그들은 허리춤에 무기들을 하나씩 매달고 있었다. 그들이 걸어 들어올 때마다 절그럭, 절그럭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 그들이 패용한 무기들을 확인한 사람들은 어이가 없어졌다. 아니, 없다 못해 넋이 달아날 것 같다.

약혼식에서 무기라니!

설령 황제라 하더라도 혼사와 관련된 의식에선 무장을 해제한다. 그것은 동서고금, 제국 전역을 통틀어 망라하는 예법이었다.

실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단상 위에서 흉흉한 얼굴을 하고 있던 공작이 노기 띤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네놈들은 누구냐?! 감히 누구의 명으로 이곳에 들어온 것인가!”

검도 문제지만 일단 들어온 것부터가 이해가 안 가는 상황. 하나하나 열 맞춰 걸어오던 그들이 공작의 외침에 발을 멈췄다. 그리고 척! 소리가 날 정도로 발을 크게 구르는데, 그런 사소한 몸짓 하나마저 어찌 된 게 똑같다.

수십 명이 동일한 움직임을 하는 것은 보는 이들에게도 큰 압박이었다. 공작의 상체가 미미하게 움찔거렸다. 그런 공작을 바라보던 무리들은 입을 벌려 마치 한 몸처럼 동시에 외쳤다.

“우리는 이 공령의 수호자이며.”

“오래된 약속을 지키는 계약자이며.”

“삿된 이를 처단하는 복수자이다.”

우렁우렁한 소리가 홀을 울렸다. 사람들은 이들이 하는 말에 귀를 쫑긋거리며 온 신경을 기울였다. 수호자? 계약자? 복수자? 대체 저게 무슨 소리야?

곰곰이 생각하던 사람들 중 누군가가 작게 속삭였다.

“저것 꼭 최우선 신서를 읊는 것 같군. 혹 저들은 기사들인가?”

“비슷하긴 한데, 그건 그냥 전쟁 때 그쪽에 서겠다는 약조네. 저건 그거랑은 다른 것 같아.”

“그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네. 이건 그냥 약혼식 아닌가?”

그렇다. 보통 저런 계율 읊는 기사단이 등장할 땐 전쟁통이나 그렇다. 아니면 영지에 중대한 위협이 있을 때라던가…. 여하간 전시에 준할 때나 등장한다. 허나 지금은 평화롭기 그지없던 약혼식이니, 영 상관없는 등장일 수밖에.

공작이 날카롭게 외쳤다.

“그것이 이 약혼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대들은 대체 누구인가. 감히 이 신성한 장소를 흙발로 짓밟은 그대들의 정체를 밝혀라!”

수많은 귀족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홀로 분연히 나서는 공작은 실로 당당했다. 과연 지배자의 귀감이라 할 법한 모습이었다. 많은 귀족들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수백의 기사들을 홀로 호령하는 군단장의 모습이 실로 저러했을까?

그때였다.

“그대 그릇된 자, 그 단상에서 내려오라!”

“그곳은 감히 그대가 서 있을 자리가 아니매.”

“어찌 용의 피가 아닌 자가 망령되이 그 자리에 서 있단 말인가!”

웅!

고함이 우레 같았다. 남자들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온 말은 홀을 넘어 공작령 전체로 퍼질 것처럼 우렁우렁 울렸다. 억제된 화가 느껴지는 고함에 사람들은 귀를 잡고 괴로워했다. 알게 모르게 기사의 기세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고함이 지나자, 이 자리에서 그럭저럭 제자리에 서 있는 건 로메인과 렉시, 그리고 공작뿐이었다. 로메인 덕분이었다. 상대들이 무슨 짓을 할지 눈치챈 로메인이 재빨리 렉시를 품 안으로 이끌어 보호했던 것이다. 가까이 있던 공작은 그 김에 얼결에 수혜를 입었고. 물론 렉시처럼 아주 피하진 못해서 그도 조금은 휘청했다.

로메인이 다급히 렉시를 향해 물었다.

“괜찮습니까?”

“네, 괜찮아요. 그런데 대체 저들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가당찮은 족속들입니다. 어떻게 기사들이 일반인들에게 기파를…!”

“기파요?”

“기사들이 쓰는 기술의 일종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고막이 상하는 기술이지요. 때문에 전쟁터에서만 쓰는 것을 어찌….”

로메인은 렉시를 품에 안고 이를 악물었다. 저 이름 모를 기사단을 바라보는 로메인의 눈에 시퍼렇게 날이 섰다. 이것이 무슨 일일까? 자칫하면 연인이 다칠 뻔했다. 일단 저것이 무엇이건 무슨 상황인지 사태를 관망하려 했건만. 그는 즉시 기세를 펴 올렸다. 상급 기사의 투기가 일어나자 그를 중심으로 휙 하고 바람이 불었다. 로메인의 기세를 눈치챈 기사들이 경계하기 전, 로메인은 그들을 향해 똑같이 내질렀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마음대로 기파를 내쏘는가!”

쾅!

기사들의 앞 대열이 순식간에 조금 무너졌다. 상급 기사 정도면 기파를 조절해 그들에게만 집중하는 것이 가능하다. 통상 가장 앞에 선 기사들 무력이 높으니, 이것으로 타격을 입었다면 상급 기사들은 아닐 터.

로메인은 그들의 수준이 대략 중하급에서 머무는 것임을 눈치챘다. 하지만 안심하기는 조금 일렀다. 통상처럼 전방 후방에 가장 강한 기사들을 배치한다 치면, 후방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보통 기사단에 아무리 못해도 상급 기사 하나는 있다. 로메인은 주변을 은근히 경계하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요 몇 년 평화로이 살았어도 상급 기사는 상급 기사다. 실제로 로메인이 기세를 올리자 기사들이 눈에 띄게 동요했다. 그들은 로메인을 보며 이를 갈았다.

“감히!”

“너, 네놈도 그 삿된 자와 같은 것이냐?”

로메인은 그들의 외침에 얼굴을 굳혔다.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군. 삿된 자라니,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지금 사정 하나도 모르고서 우리를 공격했단 말인가!?”

그야말로 적반하장이었다. 로메인은 기가 막혀 웃음도 안 나왔다. 지금 화를 낼 건 저들이 아니라 자신 아닌가.

“여기서 삿된 자라 불릴 것은 네놈들뿐이다. 내 약혼식을 망친 너희들에게 내가 왜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한단 말이지?”

“―그건 내가 대답해 주지.”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

로메인은 얼굴을 찌푸렸다.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퍽 낯이 익은 목소리였다.

누구였지?

그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지만, 그런 그의 고뇌는 곧 쓸데없게 되었다. 기사들이 가리고 있던 중단에서, 사람 하나가 툭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로메인도, 그리고 모두도 퍽 잘 아는 사람이었다.

이럴 수가….

로메인은 입술을 딱딱하게 굳히면서 튀어나온 사람을 응시했다.

“…공비 전하?”

“좋은 하루 되고 있나, 로메인 경?”

로메인에게 불린, 프로하우스의 공비는 눈을 화사하게 접었다. 진짜로, 그녀였다.

여느 때와 같이, 아니 그보다 더 화려하게 차려입은 여인은 매우 당당했다. 직속 시녀들도 아니고 기사단을 위시한 채 약혼장에 난입한 주제에 당당하기론 황제 못지않았다.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인 붉게 펼쳐진 드레스 자락이 이상하게도 불길한 미래를 암시하는 듯했다. 사람들은 경악했다.

“전하?”

“공비 전하께오서 어째서 이런 짓을!”

설마 로메인이 후계자가 된 것을 앙심품고 저러는 건가?

여기저기서 장탄식이 터져 나온다. 그녀는 입꼬리를 위로 올려 웃어 보였다.

“고대하던 약혼식이 이렇게 파장나다니 퍽 안타깝네. 이건 진심이라네, 로메인 경.”

“!!”

로메인은 이를 악물었다. 누가 들어도 진심이 아닌 소리였다. 대관절 이게 어떤 일인지 영문을 모르겠다. 아무리 피차 정적 관계라지만, 이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공비 전하,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약혼식에 난입한 것도 모자라 무기를 든 기사들까지 데려오시다니요? 이것이 사람이 할 일입니까?!”

“후후….”

공비는 로메인의 항의에도 그저 미소 지을 뿐이었다. 비난을 받으면서도 표정이 좋으니, 보는 사람이 다 기분이 나빠진다.

“공비 전하! 대답해 주십시오. 저는 공작성의 경비대장 지위를 내려놓았습니다만 여전히 영광의 기사단장입니다. 경우에 따라선 기사단 전원을 소집할 권한이 있습니다.”

“그걸 내가 모를까. 당연히 알고 있다.”

“허면 대답하십시오. 이 행패의 연유가 뭡니까?”

“오, 행패라니? 오해야, 로메인 경. 나는 외려 자네를 구해 주려고 온 것일세. 자네, 아니 나아가 이 공작령 전체가 현재 도탄에 빠질 위험에 처했으니까.”

“예?”

뚱딴지같은 소리였다. 로메인은 당혹한 얼굴을 했다. 이것은 로메인의 품에 안긴 렉시도 마찬가지였다. 로메인 경이 위험에 처했다고? …언제?

그때, 그녀가 렉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저이와 자네의 약혼은 무효일세.”

“?!”

“…이상한 말씀이로군요. 공비 전하, 이 약혼이 왜 무효란 것인지요?”

공비의 말에 로메인은 물론이고 렉시도 놀랐다. 얼마나 놀랐는지 질문하는 목소리도 갈라졌다. 사실, 그녀가 온 것 자체가 렉시에겐 놀라움투성이였다. 이 약혼식을 하기 전 수없이 많은 미래를 상정해 본 그다. 하지만 그 어떤 상정에도 이런 난장판을 치는 것은 없었다.

“…이유가 궁금한가? 아름다운 남작이여.”

렉시와 공비의 눈이 마주쳤다. 렉시를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 없던 그녀의 눈에 살짝 찬탄의 기색이 섞였다. 상황이 급하긴 하나 그녀도 눈은 달려 있다. 그녀 역시 이처럼 생긴 사람은 생전 처음 봤던 것이다.

“네, 궁금합니다.”

“하긴 그렇겠지.”

그녀는 마치 씁쓸한 것처럼 말을 줄였다. 하지만 렉시는 속지 않았다. 그가 아는 바로, 공비란 여인은 상당히 교활했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란 이야기다.

“저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다 그럴 겁니다 공비 전하. 이유를 말해 주십시오. 혹시 제 출신이 문제입니까?”

“자네가? 설마, 전혀 그렇지 않네.”

“허면 로메인 경이 문제입니까?”

“오, 그럴 리가…! 오해 말게, 자네들에겐 문제가 없어. 전혀 없어.”

그녀는 집요하게 묻는 렉시의 질문에 웃음을 날렸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란 말입니까. 왜 약혼이 무효입니까?”

“그것은 바로 제국의 법 때문이야, 아름다운 남작. 알고 있나? 약혼식을 관장하는 이가 자격이 없는 이라면 그 약혼은 응당 무효라네.”

“!!”

뭐라고?

렉시와 로메인은 반사적으로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뒤를 돌아 공작을 보았다. 공작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공비를 보고 있었다. 그녀가 올 때부터 그는 계속 그랬다. 빠드드득. 공작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이를 갈았다. 곧 노기가 형형한 목소리가 홀 안에 울려 퍼졌다.

“공비. 이것이 무슨 경우요. 자격이라고?”

“어머나 뻔뻔하기도 해라. 아직도 그렇게 얼굴을 들고 있다니, 간도 크지!”

“공비!”

공작이 으르렁거리며 공비를 불러 젖혔다.

“어디서 감히 그런 막말을…!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가!!”

“그래, 나는 네가 누군지 모른다 도적아. 그리고 나를 공비로 부르지 마라! 내 수많은 사람을 보았으나 너처럼 간 큰 도적놈을 보지 못했다. 공작 전하의 모습을 훔친 가짜 주제에! 감히 어디서 내게 말을 건네느냐!”

…가짜?!!!!

공비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입을 쩍 벌렸다.

실로 엄청난 말이었다.

공작이 …가짜라고?

사람들의 시선이 공작에게 모두 몰리는 것은 필연이었다. 그들은 모두 공작을 뚫어지게 봤다.

허나 아무리 보아도 거기에 있는 것은 공작이었다. 얼굴은 그렇다 치더라도 머리에 난 뿔은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들 공비가 왜 저러나 속으로 고뇌했다.

가짜라니, 설마 공비는 공작을 여기서 죽이려고 하는 것인가?!

하지만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그녀는 떳떳했다. 외려 그녀는 공작을 거세게 몰아쳤다. 사람들이 어찌 생각하는지는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단 하나.

바로 저 발칙한 놈의 정체!

“이 내가 모를 줄 알았는가, 도적아.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내가 아는 전하는 이렇게 모든 일을 급히 처리하지 않으셨다.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그녀의 두 눈이 광인처럼 희번덕거렸다. 그녀는 금빛 눈을 형형히 뜬 채 공작에게 외쳤다.

“네가 누군지는 모르겠다. 허나 네가 기도하는 공작령 전복은 여기서 끝이야!”

“…미쳤군.”

한참 그녀를 바라보던 공작이 이를 드러냈다.

“내 도저히 더는 들어 줄 수가 없어. 전복이라고? 하!”

공작은 진저리를 치며 머리를 짚었다. 온갖 상념이 가득한 표정에서 곧 한 가닥 결기가 느껴졌다. 생각을 끝낸 남자가 손을 내렸다. 공비와 마주한 녹색 눈동자가 북풍한설처럼 싸늘했다.

“그래, 이젠 이 지리멸렬한 대치를 끝내는 것도 좋겠지. 내 황제 폐하를 보아 여태 그대를 봐 주었지만, 이젠 더 이상 봐 넘겨 주지 않겠다. 미쳐도 아주 단단히 미쳤으니 그분도 뭐라 하지 못하실 것이다! 다들 뭣들 하느냐!”

“예, 전하!”

차라라랑!

공작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방에서 은빛 성광이 일었다. 홀 곳곳에서 은밀하게 몸을 숨겼던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몇은 홀 안에서 대기하던 기사였고, 나머지는 좀 뒤늦게 모였다. 모두 모이긴 했으나 수는 평소보다 적다. 경사에 이런 흉사가 있을 줄 누가 알았을 것인가. 때문에 남는 잉여 인력들은 성 외부에서 경계를 서고 있었다. 홀에서 기파가 터져 나온 뒤,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 수가 크게 많진 않던 이유다.

그래도 상황은 퍽 나쁘지 않았다. 서로간의 실력은 모르나 일단 숫자만큼은 서로 엇비슷해졌으니까.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더 괜찮아질 거다. 공작의 입가로 날 선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지금 당장 공비를 끌고 나가 구금하라. 이에 반항하는 자가 있다면 공비를 제외하고 사살해도 좋다!”

“존명!”

“어딜 감히!”

기사들이 공비를 향해 다가간다. 그러자 공비가 데려온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촹!

채채챙!

대치는 무자비하고 공포스러웠다. 귀족들은 물론이고 렉시와 로메인마저 정신이 하나도 없는 전개. 두 세력은 서로의 기량을 견주며 상대를 살폈다. 기사들은 공비를 중심으로 검진을 형성했고, 공작의 기사들은 그런 검진을 파훼하기 위해 날 선 창처럼 모였다. 강맹한 기파가 휘몰아치고, 두 기사단의 기세가 엎치락뒤치락 서로 겨루기 시작했다.

저기에 자칫 잘못 휘말리면 죽는다. 상황을 파악한 귀족들은 이미 멀찌감치 물러섰다. 조금 남은 귀족들도 그걸 따라 우르르 몰려갔다. 방금 전까지 그들이 있던 홀의 안쪽은 이제 검을 잡는 사람들의 영역이 되어 있었다.

렉시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채 뒤에 못 박혀 서 있는 공작을 바라봤다. 방금 보인 그의 대처는 매우 의연하고 기민했다. 과연 담대무비한 여인다운 행보. 하지만 렉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걱정됐다. 아무리 그녀가 공작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한들 그 이면은 다른 사람. 그러니 이 일이 퍽 부담이 되었을 것이 뻔했으니….

‘…역시, 긴장했어.’

보이지 않게 떠는 공작, 플로랑 후작의 몸을 보며 렉시는 한숨을 삼켰다.

역시, 생각대로다. 떠는 것뿐만이 아니라, 자세히 보면 이마 위로 구슬 같은 땀방울도 맺혀 있지 않은가. 남들 눈 때문에 시치미 딱 떼고 있었지만 속내는 무척 놀랐던 거다. 저것은 자신이 벌인 일에 순간 짓눌린 사람 특유의 반응이었다. 물론 정체를 들킨 일로도 놀란 것이 있겠지만….

렉시는 몰래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어떻게 알아낸 거지?’

공비가 외쳤을 때 놀란 건 플로랑 후작뿐만이 아니다. 렉시와 로메인도 심장이 떨어질 만큼 크게 놀랐다. 둘이 동시에 후작을 본 것도 그래서였다. 혹시 마법이 풀렸나? 하는 그런 걱정 때문에.

그러나 두 사람이 봤을 때, 마법은 여전했다. 겉으로 보아선 누구도 그를 공작이 아니라고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그 기묘한 것이 불러낸 마법은 실로 완벽했다.

하지만.

마법과는 별개로, 지금 공비가 하는 일은 확신이 없어선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감히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공작성 내부로 검을 다잡고 들어온단 말인가. 그것은 반역에 준하는 행위였다. 대체 그녀는 어디서 그런 확신을 했단 말인가?

렉시는 고민에 휩싸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외적으론 절대 알 수 없는데. 이상하군…. 혹시 그런 걸 간파하는 마도구 같은 걸 손에 넣은 걸까?’

허나 그들에게 새로운 마법을 부여해 주고 간 그 신이한 것이 그렇게 부주의할 리는 없다. 그 기이하고 공포스러운 자가 고작 마도구로 탄로날 마법을 쓰고 갔을 리가?

참으로 답이 없는 문제였다. 시간이 있다면 뭐라도 찾아냈을지도 모르지. 허나 아무리 렉시라도 아무런 정보 없이 전체 상황을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설령 여기서 공비를 잡아들이더라도…생각보다 일이 많이 복잡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잠깐.’

시야에 잠시 후작을 담은 렉시가 혀를 찼다. 단상 위에 선 그녀의 몸이 점점 더 흔들리기 시작했다. 워낙 연기의 달인인지라 아직은 가까운 렉시만 알아보고 있었지만, 이대론 다른 사람들도 다 눈치챌 것이다. 아무리 후작이 공작처럼 보이더라도 저렇게 흔들리는 모습은 좋지 않았다. 공비에겐 그것조차 무기가 될 것이다. 그게 렉시에겐 빤히 보였다.

어떻게 하지. 적어도 공비를 잡기 전까진 잘 버텨 줘야 할 텐데….

렉시가 후작의 이변을 알고 그를 잡아 주려던, 바로 그때였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렉시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이 목소리는?!

“시종장!”

렉시는 두 눈을 의심했다. 아까까지 아무것도 없었던 그들의 등 뒤에, 시종장이 떡 하니 버티고 서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마치 땅에서 솟은 것처럼 나타나 그림자마냥 공작 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렉시는 정말로 놀랐다. 사람 하나가 등 뒤에 올 때까지 눈치채질 못했다니…. 아무래도 저 눈앞의 대치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오는 것조차 몰랐던 모양이었다. 물론, 모른 것은 둘뿐이고 로메인은 알았다. 그저 기감에 잡힌 것이 아는 자여서 내버려 두었을 뿐…. 그는 슬쩍 뒤를 확인하고 다시 앞을 보며 경계를 높였다. 혹시 날아올지 모르는 기사들의 공격에 대비하려면 정신을 분산시켜서는 안 된다.

공작이 반갑게 외쳤다.

“자, 자네!”

“―늦어서 죄송합니다.”

굳었던 공작의 얼굴이 눈이 녹듯 풀리는 건 마치 마법 같았다. 한때는 싸웠고, 어색한 시간이 흘렀어도 그는 공작이 제일 의지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자네 언제 왔나? 그보다 어째서 여기에 있나?”

“당연히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는 것 같아 서둘러 왔지요. 몸은 괜찮으십니까?”

의외로운 상황임에도 시종장은 무척이나 침착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놀라움보다 먼저 공작의 상세부터 살피는 세심함마저 보였다. 실로 시종장의 귀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둘의 모습에 렉시는 왠지 모르게 슬쩍 양심이 찔렸다. 아까 오기 전 순간 느낀 미심쩍음 때문이었다. 내가 괜한 사람을 의심했던 건가.

렉시는 자신이 조금 예민했었다고 뒤늦게 반성했다.

‘저렇게 전하를 잘 모시는데…. 역시 아깐 내 착각이었어.’

렉시가 그렇게 자기반성을 하는 사이 공작은 시종장을 매우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아까완 달리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한 그는 곤두선 긴장을 풀었다.

“나는 괜찮네,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렇습니까.”

“그래. 하지만 자네가 있어서 안심이 되는군. 자네도 저 기사들 때문에 두려웠을 텐데… 이렇게 와 주다니. 역시 내겐 자네밖에 없어.”

공작답지 않은 간지러운 말이었다. 평소 같으면 시종장은 씩 웃으면서 이런저런 말을 했을 터. 하지만 그 말을 듣고도 시종장은 미미하게 웃을 뿐 별말 없다. 평소보다 좀 딱딱한 모양새였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당연할 터였다. 렉시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공작에게 다가오는 걸 보고 옆으로 비켜 줬다. 은근한 언질도 살짝 줬다.

“시종장, 전하를 모셔 주세요. 의연한 것처럼 보이시지만…. 사실 말뿐입니다. 방금 일로 크게 놀라셨어요.”

“…예, 그러지요.”

렉시의 언질에 시종장이 그를 살짝 본다. 그는 약간 일그러진 눈매로 렉시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런데, 그게 참 뭐라 그래야 할까. 굉장히 마지못해하는 기분이다. ―나도 알아. 마치 그런 말을 한 것 같은 태도엔 찬바람이 돌고 있었다. 렉시는 살짝 움찔했다. 내가 해선 안 될 말을 했나?

‘…전하의 일에 참견하지 말라는 건가?’

아리송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렉시가 옆을 비킨 사이 시종장은 재빨리 공작을 부축했다. 그리고 주변을 살피며 공작을 뒤로 물렸다. 단상은 화려한 만큼 이런 상황에서 있어선 안 되는 자리다. 일단 눈에 띄니 제일 먼저 공격당할 자리가 바로 여기다.

여하간 그 덕에 공작은 보다 편안한 숨을 내쉬며 시종장에게 몸을 기댔다. 역시 어설픈 렉시보다는 익숙한 손이 낫긴 나았다. 그는 감격이 넘치는 얼굴로 시종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드물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자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감당할 수 없는 말씀이십니다. 제가 뭐라고요.”

“하지만 난 정말로 감동했어. 자네가 이렇게 날 데리러 와 줄 줄은 몰랐거든.”

“전하를 모시는 건 제 의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아니더라도, 이 성의 사용인이라면 누구든 전하께 충성을 바칠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공작은 콧방귀를 흥 뀌었다.

“허나 보게, 지금 누구도 그 의무를 지킨 자가 없다네. 현재 내 곁에 있는 건 자네밖에 없지 않나?”

“…그건.”

공작은 입이 딱 붙은 시종장을 향해 싱긋 웃었다.

“자넨 참 겸손해. 하지만 이런 건 자랑스러워해도 되네, 제퍼슨.”

공작은 흠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 공작령에서 자네만큼 날 생각해 주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접때 내가 자네에게 실수를 했을 때도 솔직히 난 자네를 믿었네. 자네라면 날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거든.”

“실수…말이군요.”

“그래. 자네라면 내 진심을 알아 줄 거라고 생각했지. 실제로도 그랬고…. 이 공작령에서 자네만큼 날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렇군요. 그 말은, 맞습니다.”

시종장은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이 영내에서, 저만큼 전하를 잘 아는 사람은 없지요.”

시종장은 알 수 없는 눈으로 공작을 바라봤다. 의자에 앉은 공작은 얼굴이 조금 파리했다. 방금 크게 놀란 탓에 새하얘진 피부과, 살이 빠져 바짝 마른 얼굴. 어쩐지 애달픈 병자 같은 안색. 그것에 잠시 시선을 준 시종장의 시선이 천천히 그 주위를 맴돌았다. 머리, 옷, 신발, 손에 매단 보석들…. 그리고.

시종장의 눈가에 일순 알 수 없는 빛이 스쳤다.

“그나저나 참 알 수 없는 일이야. 공비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일을 벌인 것인지.”

“글쎄요…. 뭔가 생각이 있긴 할 겁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 하는 짓이 반역인가?!”

공작이 이를 갈았다. 시종장은 그런 그의 목줄기를 천천히 주물렀다. 마치 화를 풀라는 듯한 몸짓에 공작이 등을 기대고, 시종장의 안마는 자연스레 아래로 내려갔다. 어깨, 팔뚝, 그리고 손목, 손.

한참 그 천천히 안마하던 시종장이 여상하게 말했다.

“전하, 제가 전하를 뫼신 지 벌써 마흔 해가 넘었지요.”

“―벌써 그렇게 되었나?”

“네, 제 나이가 열 살이 채 안됐을 때였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전하를 배알하게 되었죠. 저는 그때 전하가 누구신지는 몰랐습니다만… 보는 순간 알았습니다. 전하께오서 제 주인이 되실 거라는 걸 말이죠.”

시종장의 눈동자가 과거를 헤매는 듯 깊어졌다. 그가 일평생 섬겨 왔던 주인을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은 햇빛이 오늘처럼 눈이 부셨다. 전대 공작 부처가 살아 있던 시절,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살아 있던 시절의 이야기.

그때 그의 전하는 아주 작았지만, 매우 예쁜 아기였다. 그리고 아주 순했다. 하얀 요람 안에서 곱게 자던 아기는 시종장이 다가오자 잠에서 깼지만, 울지 않고 그를 빤히 바라봤다. 그때 아직 어렸던 시종장은 좀 당황했다. 아기님이 분명 울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린아이를 몇 번 본적이 있던 그의 경험상, 이건 거의 확정적인 미래였다. 그러나, 그렇게 그를 빤히 바라보던 아기는 울지 않았다.

대신, 아부부! 하고 웃었다. 손뼉을 치면서.

아, 그때 그가 겪었던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햇빛에 부서지는 머리칼은 마치 금실 같았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던 눈동자는 아주 고운 녹빛으로 반짝였다. 피부는 마치 우유처럼 희었고, 자신을 보며 옹알대는 옹알이는 방울처럼 고왔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고, 햇살이 마치 축복하듯 아기님을 감싸 안았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거기 있었다. 아주 완벽하고 멋진 풍경이었다.

그때 그는 생각했다.

―내 주인님.

“아직 어려서 전하를 정식으로 모실 수 없었던 게 참 불만이었지요. 나중에 정식으로 전하를 모시게 되자, 그때 기념으로 전하께서 제게 기념품도 내려 주셨습니다. 그때 주신 것은 늘 품에 품고 다닌답니다. 기억하고 계십니까?”

“…음, 물론 기억하지.”

“네, 물론 그러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시종장은 부드럽게 웃으며 공작의 손을 안마하던 걸 멈췄다. 천천히 손을 보는 그의 시선 끝에 붉은 마석이 달린 반지가 걸렸다. 그것은 공작이 언제부터인가 계속해서 끼고 다니던 반지였다.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끼고 다닌다 그랬던가. 그래, 그땐 그저 사소한 변덕이라고 생각했었지….

진작 알아차렸어야 했다.

시종장의 눈에 차가운 것이 스쳤다.

“…전하.”

“응?”

“―죄송합니다.”

응? 공작이 무슨 이상한 소리냐는 듯 그를 본다. 시종장은 품에서 공작이 주었던 선물을 꺼내들었다. 그것은 날이 시퍼렇게 든 비수로, 그가 전하에게 받았던 첫 기념품이다.

달칵! 비수의 칼집이 떨어지고, 그는 품에서 꺼내든 비수를 그대로 앞을 향해 휘둘렀다.

공방에서 만든 최고급 비수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잘 들었다.

사람 손가락 하나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를 정도로.

투둑.

땡그랑!

“아, 아아아아악!”

소름끼치는 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처절한 비명 소리였다. 고막을 찢는 것 같은 날카로운 소리에 사람들은 식겁하고 몸을 움츠렸다. 이건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서로 견주느라 검 하나 못 맞댄 상황이다. 헌데 갑자기 비명이 들려오다니…. 아무리 피에 익숙한 그들이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누구냐! 암습인가?!!”

“다친 자가 있나?! 어서 점검하라!”

당혹한 기사들이 주변을 둘러보며 부상자를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부상자는 없었다. 당연했다. 애초 그들 사이에서 터져 나온 비명이 아니었으니까.

“저, 저기!”

누군가 어딘가를 바라보며 외쳤다. 사람들의 시선이 휙 하고 돌아갔다. 남자의 손이 가리키는 곳은 그들의 뒤. 그러니까, 오늘의 주인공들이 서 있던 자리였다. 휙 돌아간 시선들이 재빨리 그쪽을 훑었다. 누구냐, 누가 이런 소리를 내었는가.

그리고, 사람들은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저, 저것은?!”

“어디, 어…헉!!”

단상 너머 보이는 광경은 끔찍했다. 정확히는 공작의 모습이 그랬다. 안 그래도 병자처럼 파리한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고통을 호소했고, 온몸은 피칠갑이었다. 좋은 날이라 잘 차려입었던 것이 무색할 정도다.

저것이 뭐지?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아연한 얼굴을 했다. 다들 반 정도는 이 상황을 이해하질 못했다. 뭐지? 왜 공작 전하가 피칠갑이지? 꿈에서조차 공작이 다친다는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갑자기 퍼부어진 최악의 상황에 사람들은 넋을 잃었다.

“아, 아아아악! 손, 내 손이!”

뒤이어지는 비명 소리에 그들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저것은 공작의 피다. 공작이 다쳤다! 귀족들의 안색이 죄다 급변했다. 온몸의 피가 사라지는 듯했다. 귀족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저, 전하가 암습당하셨다!!”

실로 무지막지한 사태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공작이 암습을 당하다니!!! 이 뜻밖의 사태에 공작가 기사들의 기세까지 흔들렸다. 그들이 이러는 와중 전하께서 암습을 당하시다니! 통렬하기 그지없는 사태였다.

“전하의 손이 잘렸다!!!”

“손, 손가락이 잘리셨어!”

먼 곳이었지만 상처 부위는 선명히 보였다. 손가락이 있어야 할 자리엔 피가 샘솟았고, 잘린 손가락은 바닥에 흥건하게 고인 핏속에 잠겨 있다. 실로 소름끼치는 장면이었다.

“공비 전하! 어찌 이런 일을 하셨습니까!”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그녀를 탓했다. 실로 온당한 의심이었다. 그녀가 오고, 대치하다 공작이 다쳤으니 누가 보더라도 배후는 공비 아닌가. 그러나 그런 그들의 확신은 습격자를 본 순간 흐려졌다. 공작의 등 뒤, 아직 검을 들고 있던 습격자는 다름 아닌 시종장이었던 것이다.

시종장.

공작이 가장 믿는 사람 중 하나인 시종장이, 암살자라니!!!

혼란이 끝을 모르고 치솟았다.

“시종장이… 암살자?!”

“말도 안 돼!!!!”

그러나 아무리 부정해도 현실은 현실. 시종장은 오른손에 시퍼런 비수를 든 채 공작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가까이서 있었던 탓에 그의 몸 곳곳에도 피가 튀었다. 파리한 얼굴이었지만, 그 얼굴에 서린 냉담한 기색은 멀리서도 잘 보였다.

“꺄아악!”

풀썩, 짧은 비명 소리와 함께 누군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데퓨탄 후작 부인이었다. 가까이 지냈던 시종장의 일탈에 기절한 그녀를 후작이 안아 들었다. 넋이 나간 부부를 둘러싸고 사람들이 모였다. 모두 얼굴이 무섭도록 굳어 있었다. 설마 시종장이 배신을 할 줄이야. 그들은 정신을 차리고 단상 위로 우르르 몰려갔다. 어떻게든 공작을 구해야 했다. 그러나 일은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들이 움직인 순간, 시종장이 시퍼런 비수를 공작의 뒷목에 가져다 댔던 것이다. 사람들은 소스라치며 뒤집어졌다.

“오지 마십시오. 더 오면 이걸 목에다 박겠습니다.”

“시, 시종장!!!”

“농담이 아닙니다. 방금 제가 한 일을 보셨지요?”

시종장은 귀족들을 한마디로 제압했다. 귀족들을 향한 경고를 끝낸 그는 눈동자를 굴려 로메인을 바라봤다. 사실 이건 귀족들보단 그를 겨냥한 경고였다.

이 자리에서 자신에게 가장 가까이 있고, 당장이라도 자신을 벨 수 있는 자를 향한 경고.

그리고 그것은, 매우 유효했다.

“…젠장!”

로메인은 이를 갈며 슬쩍 내지르려던 단검을 도로 품 안으로 돌려놨다. 방금 한 말이 아니었다면 곧바로 단검을 투척했다. 때문에 실로 절묘한 방해였다. 대체 어떻게 공격을 눈치챈 걸까? 눈치채지 못하게 몰래 움직였는데.

시종장이 희미하게 미소했다.

“어떻게 눈치챘는가 궁금합니까? 간단합니다. 저 또한 한때 기사 수련을 한 바 있기 때문이지요.”

“뭐요?”

“비밀이긴 했습니다만….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시종장은 고통으로 몸을 옹송그린 공작의 멱살을 잡아챘다. 질질 끌려가는 공작의 몸이 마치 인형 같았다. 극한 고통으로 버틸 힘조차 없는 것이다. 그저 보는 사람들만 발을 동동 구를 뿐.

당장에라도 저이를 구해야 하는데 어떻게 한단 말인가! 로메인은 입술을 짓씹었다. 속이 타 견딜 수 없었다.

‘…기사 수련만 받은 게 아니야. 실제로 기사 서임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틈이 안 보일 리 없었다. 로메인은 칼을 꼭 쥐고 시종장을 노려보았다.

‘어떻게 하지. 틈이 보이지 않는다.’

인질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당장이라도 벨 수는 있을 것이다. 허나 지금 중요한 것은 인질의 안전! 로메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시종장을 향해 크게 고함쳤다.

“거기 서시오! 시종장, 이것이 대체 무슨 짓이오!”

“……글쎄요. 이것이 무슨 짓일 것 같습니까.”

“당신이 어떻게 이럴 수 있소? 어떻게 당신이 전하를!”

“로메인, 잠시 기다려 주세요. 시종장, 당신은 공비와 손을 잡으신 건가요?”

분통 터지는 로메인을 대신해 렉시가 나섰다. 놀랍게도 렉시는 얼굴을 가린 베일을 걷은 상태였다. 나름의 노림수였다. 아름답게 치장한 자신을 보고 시종장이 흔들리길 기대했던 것이다. 그랬다, 일종의 미인계였다.

“당신이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만 전하를 놓아주십시오 시종장. 설령 전하가 품에 있다 한들 도망칠 곳은 없습니다. 알지 않습니까?”

옥구슬 같은 목소리가 대전을 울린다. 보는 사람을 홀리는 미모가 시종장을 미혹했다. 그러나 렉시의 계책은 미수에 그쳤다. 실로 놀랍게도, 시종장은 렉시를 보면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흔들리길 바라는 것이라면 소용없습니다, 남작. 외모에 대한 경탄은 그에 할양할 여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지금의 제겐 부질없는 짓입니다.”

“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건지 말해. 무슨 이유로!”

로메인은 노기와 고통 섞인 얼굴로 고함쳤다. 적어도 이건 그에게 연기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시종장과 대치하고 있었지만 그 또한 심력이 크게 상했다. 어머니 덕에 공작성에 자주 왔다 갔다 한 그다. 시종장은 그가 어릴 적부터 보고 자랐던 이였다. 또한 퍽 친하기도 했다. 믿은 자에게서 배신당한 충격은 로메인을 고통스럽게 했다.

“당신을 믿었소. 나도, 전하도! 헌데 어떻게 당신이 이런 짓을 할 수가 있나!”

로메인의 절규에 시종장이 눈을 들었다. 표정 없는 얼굴로 입술만 위로 올린 얼굴은 퍽 무서웠다. 그는 어딘지 모르게 광기 띤 눈으로 로메인을 노려봤다. 마치 불투명한 유리를 깎은 것 같은 눈동자가 기묘하게 번뜩였다.

“왜 이런 일을 했느냐라. 정말 몰라서 물어보시는 겁니까?”

시종장은 자신이 잡은 공작을 내려다봤다. 여유롭던 태도가 곧 눈에 띄게 거칠어졌다.

“…하! 역시 그런가? 쉽지는 않군.”

공작의 얼굴을 확인한 그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진다. 그는 그대로 고개를 들어 바닥을 훑었다. 불투명했던 눈동자가 일순 색을 띠고 달아올랐다.

“몸에서 떼놓는 것으로 안 된다면….”

알 수 없는 말이 이어진다. 렉시는 시종장의 시선이 피 웅덩이 쪽으로 간 것을 눈치챘다. 저기에 뭐가 있기에 저런 얼굴을 하지? 궁금함에 그쪽을 바라본 렉시는 웅덩이 안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순간 숨을 삼켰다.

손가락이었다.

그리고 반지였다.

―마법!

깨달음은 느렸지만 지각은 순식간이다. 렉시는 경악한 얼굴로 시종장을 바라봤다. 그가 한 행동이 뭐였는지 이제야 알겠다. 맙소사!

‘…반지를 빼려고…손가락을 잘랐던 거야!’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모든 걸 알아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모든 것이 너무도 확연하다.

저이는 공작이 가짜인 걸 눈치챈 것이다!

‘큰일이다!’

차가운 물이 정수리부터 쏟아지는 것 같다. 렉시의 얼굴이 순식간에 파리해졌다. 반지가 벗겨졌는데도 불구하고 마법이 유지되는 것은 아마 저 보석 탓일 것이다. 반지를 뺀 것으론 마법이 파훼되지 않도록 뭔가 수를 쓴 것이겠지.

그러나, 만일 반지가 부서진다면?

렉시는 이미 반지가 부서지면서 마법이 풀리는 걸 본 적이 있다. 게다가 모든 마도구들은 보통 마법이 걸린 본체가 부서지면 파훼된다. 이것을 저 눈치 빠른 시종장이 과연 모를까?

―저이가 저 반지를 가져가게 둬선 안 된다.

결심한 순간 몸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렉시는 필사적으로 웅덩이 안의 반지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게 바로 패착이었다.

“렉시!”

“차핫!”

“악!!”

갑자기 눈앞으로 강맹한 기파가 밀려온다. 렉시는 뒤로 크게 밀려나며 넘어졌다. 갑자기 튀어나간 렉시를 로메인이 뒤늦게 수습해 품에 안았다. 잘못하면 기파에 휘말려 어디 하나라도 부러졌을 것이다. 로메인은 새파랗게 질린 렉시를 품에 안고 다급하게 살폈다.

“갑자기 왜 튀어 나간 겁니까! 위험할 뻔하지 않았습니까?!”

“아, 안 돼!”

그러나 렉시는 로메인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의 손에 쥔 반지를 본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세고 말았다. 렉시는 목소리를 쥐어짜듯 외쳤다.

“바, 반지가…!”

반지?

로메인은 그제서야 렉시가 손에 반지를 쥐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건 그의 눈에도 아주 익숙한 반지였다. 붉은 마석이 마치 보석처럼 빛나는, 아니 빛났던 공작의 반지.

―한때는 무척이나 빛나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던 반지의 마석이, 깨져 있다.

로메인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것은…!?”

그때였다.

“자, 여러분. 이제야 말할 수 있겠군요. 제가 왜 이런 미친 짓을 한 건지 궁금하십니까?”

시종장이 바닥에 주저앉은 공작의 뒷목을 잡아 일으켰다. 푹 아래로 숙여 있는 그의 목을 억지로 세운 그는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공작의 얼굴을 고정했다. 참혹하게 구겨진 그의 얼굴을 보는 귀족들이 숨 막힌 소리를 냈다. 여기저기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시종장은 의연한 얼굴로 그들에게 공작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자, 잘들 보십시오! 이게 바로 이유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마치 거짓말처럼.

공작의 얼굴이 이지러졌다.

지지직….

지직….

시끄러운 소음이 공작의 주변에서 일어나며 이상한 불꽃이 튀었다. 그리고 불꽃이 일어날 때마다 공작의 모습이 흔들렸다.

그건 마치 아지랑이 같기도 했고, 마치 불이 수천 번 깜박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머리가 깜박이기도 하고 몸이 지워지기도 했다. 참으로 기묘한 것은 그 흔들림이 계속될 때마다 공작의 모습이 점점 이상해진다는 것이었다.

머리가 붉어지기도 하고, 몸이 여자처럼 곡선이 생기거나, 혹은 얼굴이 아예 모르는 사람의 것으로 변하기도 하는 등 이루 말로 없이 괴상하고 괴이하다.

그리고 마침내, 지직거리는 소리가 아예 잦아지고 깜박임이 아예 멎자….

그곳엔, 공작이 아닌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붉은 머리칼을 가진, 제법 아름답게 생긴 중년의 여성이.

사람들은 경악했다.

“…플, 플로랑 후작?!!!”

이것이 어찌 된 영문인가?

어째서 공작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플로랑 후작이 있을 수 있지? 영지에 있어야 하는 그녀가 왜 여기 있으며, 하물며 공작이 사라진 자리에 있는 것인가.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는 가운데 시종장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게 공비 전하와 왜 손을 잡았느냐 물으셨지요.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맙소사 이것이 무슨…!”

“왜 플로랑 후작이 저기에…? 그녀는 영지에 있는 게 아니었나?!”

“그, 그럼 전하는 어디 계시단 말인가!”

산발적으로 목소리들이 튀어나온다. 시종장은 의문을 표하는 이들에게 침착히 대응했다.

“네, 많이들 궁금하실 겁니다. 이게 무슨 일인지, 그리고 어째서 이자가 전하 행세를 하고 있는지. 제가 이 일을 어떻게 알게 되었으며 공비 전하와는 어찌 된 영문인 것인지…. 제가 이 일을 알게 된 건 얼마 전입니다.”

그는 치욕스럽고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잡았던 플로랑 후작을 도로 놨다. 털썩, 후작이 바닥에 쓰러져 신음했다. 그러나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언제부터 다른 자가 전하 행세를 하고 있었는가? 이건 저도 잘 모릅니다. 이렇게 감쪽같은 외장이니 누군들 눈치챘겠습니까? 다만 전하는 쓰러지고 나신 뒤, 갑자기 성격이 변하셨습니다. 늘 점잖던 분이 퍽 괴팍해지시고 평소보다 인내심을 발휘하지 못하셨지요.”

“!”

사람들은 저마다 과거를 떠올리려 애썼다. 다들 공작이 쓰러지고 난 뒤, 어떻게 변했는지 골몰했던 것이다. 과연 저랬던가? 이상한 점이 있었나?

“어쨌거나 저는 저자가 몰래 숨어든 게 바로 이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이외엔 정말 틈이 없었으니까요. 이때 눈치챘어야 했습니다. 허나 저는 이게 병자 특유의 신경질이라고만 생각하고 말았지요. 사람은 원래 아프고 나면 성격이 변하게 마련이기에….”

시종장은 날이 시퍼렇게 선 눈으로 후작을 내려다봤다.

“그래서 뒤에서 이런 간악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걸 몰랐습니다. 얼마나 한스러운지 모릅니다. 이 말을 하고 있는 지금도 제 심장은 찢어지고 오장이 녹는 것 같으니까요!”

“아니네, 대단한 걸세! 이걸 알아챈 게 더 믿기 어려운 일이야. 우리는 아예 눈치조차 채지 못했네! 자네는 대체 이 일을 어찌 알아낸 것인가?”

누군가 물었다. 실로 합당한 물음이었다.

솔직히, 남들이 보기엔 이걸 알아챈 시종장이 더 신기했다. 이걸 직접 눈으로 보니까 믿는 거지 말로만 했으면 듣지도 않았을 것이다. 시종장은 아, 하고 짧게 웃었다.

“다른 사람이, 제게 알려 주었습니다.”

“…뭐? 그게 누군가?!”

“송구합니다만 그자가 누구인지 신원은 밝히지 못합니다. 만일 밝히면 크게 피해를 입을 만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허나 그자가 제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건 지금 일만 봐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그이는 제게 전하를 의심해 보라고 언질을 했지요.”

시종장은 잠시 입술을 축였다.

“그뿐인가? 그걸로 이 모든 것을 알아냈다고?”

“네. 그간 저는 여러모로 전하의 변모를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않습니까. 제가 몰랐던 건 하나였지요. 세상엔… 다른 사람으로 변할 수 있게 하는 마도구가 있다는 것 말입니다. 그걸 안 순간, 눈앞이 환해지는 듯했지요.”

그는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솔직히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가 그런 생각을 해 보겠습니까? 그러나 천천히 생각하자 그 말이 아귀가 맞는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러자 떠오른 건 다른 의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공작 전하를 흉내 내는 건 누구란 말인가? 누가 감히 이런 망극할 짓을 저질렀는가. 잠시 생각한 뒤, 저는 곧 범인을 추릴 수 있었습니다. 감히 전하 행세를 한 자,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우리 모두를 기만한 자…. 이자는, 반드시 전하를 잘 아는 측근일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사람들은 눈을 크게 떴다. 그게, 그렇게 되나?

“생각해 보십시오. 한 사람의 일상을 아예 대신해야 합니다. 그걸 정녕 아무도 모르는 사람이 도전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

“저자는 전하의 평소 성격을 세세히 따라하진 못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것만 제외한다면 나머지는 놀라울 정도로 흡사했습니다. 일상은 물론이고, 업무도 비슷하게 해냈지요. 저조차도 홀딱 속아넘어갈 정도로 말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과, 과연….”

사람들의 시선이 후작에게 동시에 갔다.

플로랑 후작을 보는 그들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플로랑 후작.

여인의 몸으로 고위 귀족 작위를 받은 걸로 유명한 그녀는 공작의 충실한 신하였다. 사실 플로랑가 정도 되면 공작에게 붙어 있기보단 그냥 황도 정치에 도전해도 된다. 그게 더 가문을 위해 낫기도 하고.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이건 그녀가 공작에게 깊은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그녀가 후작위를 받은 것은 공작이 그녀를 인정했기 때문 아닌가. 아마 현 공작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이리 수월하게 후작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했을 것이다.

때문에 공작에게 충실한 그녀를, 공작 역시 신임했다. 자신으로 인해 자리를 잡은 사람이니 절대 배신하지 않으리란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자고로 된 사람은 은혜를 알고 그걸 갚는 법.

여기에 더해서, 그녀는 시종장과도 개인적으로 인연이 깊다. 이런 인연이 첩첩이 겹쳐 있으니, 사실 신뢰하지 않기가 더 어려웠으리라.

“참담합니다. 금수도 은혜를 입은 자에겐 보답하기 마련이거늘… 어찌 사람이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시종장은 치를 떨었다. 아무리 과거 인연이 있었다 한들 공은 공이요, 사는 사. 게다가 시종장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공작이다.

“…사실 반 정도는 당신이 아니었으면 했습니다. 혹은 다른 사람이었으면 했지요. 하지만 정말 당신이군요.”

“으, 으읏…! 나, 난!”

“물론 당신도 할 말이 있겠지요. 핑계 없는 무덤은 없으니…. 허나 듣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말할 곳은 여기가 아니라 법정이니까요!”

서릿발 같은 내침이었다. 그의 말을 엿들은 누군가 경악하며 물었다.

“자네는 그럼… 플로랑 후작이 전하 행세를 하고 있다는 걸 아주 확신한 것인가!?”

“확신까진 아닙니다. 용의자는 많았습니다.”

다만, 그는 단서를 달았다.

“단지 전 저만큼 전하를 잘 알고, 전하의 곁에 오래 있었으며, 또한 근래 전하 근처에서 보이지 않는 인물이 누구일지 생각해 봤을 뿐입니다. 전하의 측근은 많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게 들어맞는 사람은 많지 않지요. 안 그렇습니까?”

“!”

사람들은 주변을 둘러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게 소거법으로 알아냈다면 이상하지 않다. 실제로 그렇게 하면 플로랑 후작 하나밖에 남지 않기 때문이다. 논리정연한 시종장의 말에 사람들은 침음성을 냈다. 복잡한 머릿속이 하나둘씩 정리됐다.

그러나, 수수께끼는 아직 남아 있었다.

“후작은 대체 왜 이런 짓을 했단 말인가. 그리고, 그렇다면 지금 전하는 어디 계신단 말인가?!”

그들의 외침에 시종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

“네, 저도 그게 참 궁금했습니다. 왜 플로랑 후작은 이런 짓을 했는가? 그리고, 전하는 어디 계시는가. 전하의 거취는 짐작되는 바가 있었습니다만 후작의 행동은 몇 번을 생각해도 답이 없었지요. 정보가 너무도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보통은 이러면 대놓고 물어보길 선택한다. 약간의 무력을 덧붙여서.

아마 시종장이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당장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시종장은 그런 멍청이가 아니다. 이미 측근이 배신한 걸 눈치챈 마당 아닌가? 이런 망극한 일을 저지른 것을 보면 필시 어떤 곡절이 있을 터. 그는 상대를 심문하는 대신 그 이유를 찾을 생각부터 먼저 했다.

그리하여.

“그래서, 저는 공비 전하에게 갔습니다.”

“…?!”

“전 저를 제외한 측근은 전혀 믿을 수 없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말이죠. 그러니 반대로 측근이 아닌 자를 찾아가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겠습니까?”

“…허어!”

사람들은 괴상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묘안이었다. 공비는 공작의 가장 큰 적이자 정치적인 반대파 입장. 암중의 칼과 드러난 칼 중 어느 것이 더 위험하겠는가? 누구인지 모를 배신자의 정체를 찾아내기에 그보다 더 나을 상대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건 고육지계였다.

“허나 위험하지 않은가. 만일 둘이 같은 세력이라면 어쩌려고 그랬나?”

“제가 틀릴 경우도 물론 염두에 뒀습니다. 제가 공비 전하께 간 뒤 소식이 끊기면 판을 엎을 방안 역시 예비해 뒀으니까요. 허나, 제 선택은 옳았습니다. 놀랍게도 저는 공비 전하를 통해 어떤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그리고 바로 그 일 때문에….”

시종장은 여기서 잠시 입술을 떨었다. 참담한 기색이 얼굴에 줄줄 흘렀다. 그러나 곧 그는 맘을 다잡았다. 어쨌거나 알려질 일이라면, 자신이 해야 했다.

“전하께오서…시해되신 거란 걸 확신하게 되었던 겁니다.”

“뭐!!”

시해!!!!

다들 벼락이라도 맞은 듯했다. 시해라니, 갑자기 왜 그런 망극할 말이 나온단 말인가? 대체 저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두 알아먹지를 못했다. 물론 여기엔 렉시와 로메인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더불어 아파서 죽어 가는 후작까지도.

시해라니, 누가? 언제?

‘말도 안 돼! 대체 저 자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렉시는 무척 당황했으나 상황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시종장의 무지막지한 폭로는 홀 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자, 잠깐!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시해라니!!!”

“지금 전하가 돌아가셨단 말인가?!”

“혼란스러우시겠지요. 압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닙니다! 모두 진정하시고, 일단 저것을 보아 주시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돌아갔다. 시종장이 손끝은 그들의 뒤에 있는 기사단을 향해 있었다. 시종장이 외쳤다.

“공비 전하!”

그리고, 시종장의 외침에 공비가 나타났다.

기사단의 등 뒤에서 숨어 있던 그녀는 이때만을 기다린 듯했다. 보란 듯이 앞으로 나선 그녀는 손에 무엇인지 모를 물건을 잡고 있었다. 득의 만연한 얼굴에 흥분이 가득한 공비의 모습은 실로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두 손을 위로 쭉 뻗었다. 그리고 크게 외치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여기! 이것이다!”

―파앗!

환한 빛이 그녀의 손에서 뿜어져 나왔다. 지켜보던 사람들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변했다.

“저것은…?!”

그것은 빙설처럼 흰 빛을 서리서리 내뿜었다. 반 정도는 손으로 잡고 있어 보이지 않았지만 일단 겉으로 보기엔 흡사 문진 같았다. 그리고 그 문진을 빛내는 건 위에 달려 있는 둥근 물체였다. 저것이 무엇이건 일단 기물인 것은 분명했다. 사람들은 그 문진 끝에 달린 작은 별빛에 시선을 빼앗겼다. 희고 밝은 빛이 번쩍번쩍 빛나는 게 실로 범상치 않았다. 자세히 그것을 살펴보던 몇몇이 흠칫하고 몸을 떨었다.

“저것은 설마!”

물건의 정체를 알아본 자들이 목이 졸린 소리를 냈다. 커헉, 헉, 마치 숨이 부족한 사람이 컥컥대는 소리 같다. 아직 정체를 알아보지 못한 자들도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대체 저것이 무엇이기에 저런 반응이란 말인가?

답은 시종장이 외쳐 주었다.

“그렇습니다. 저것은 바로… 이 공작가의 인장입니다!”

사람들은 기겁을 했다. 공작의 인장이 왜 공비의 손에 있단 말인가?

그러나 여기서 가장 놀란 사람을 찾으라면 물론 렉시와 그 일행들이다. 렉시는 대체 왜 저게 저기 있는지부터가 이해가 안 갔다. 당장 렉시부터 사라진 인장 때문에 큰 곤욕을 치른 바 있지 않은가. 저 인장이 왜 저기서 나온대? 없어졌다며?!

‘…잠깐, 혹시 시종장이 말하는 바가 그건 아니겠지?!’

순간 스치는 생각이 너무나 불길하다. 렉시의 얼굴이 파리하게 변했다. 설마 아니겠지? 아니어야 할 텐데?! 그러나 인생은 늘 그렇듯 기대를 배반하고 설마는 사람을 잡는 법이라. 시종장은 공비가 쥔 인장을 보며, 렉시가 생각하던 바를 그대로 외쳤다.

“전하께선 쓰러지기 직전 다음 후계자를 이미 정한 상태였습니다. 바로 버나드 공자를 후계자로 정하신 것이지요. 전하를 노린 흉수들은 바로 저 사실을 눈치채고 전하를 해한 것입니다!”

기가 막힌 감정의 홍수가 장내를 스치고 지나갔다. 사람들은 공비의 손안에 들린 인장을 멍청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세상의 온갖 천태만상을 목격해도 이보다는 덜할 것이다. 그 시선을 만끽하던 공비가 만족한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

“뭘 그리 보나? 진짜 인장이라는 건 자네들도 이미 눈치챘을 텐데?”

“정말 공작 전하께오서 공비 전하께 인장을 내려 주셨다는 겁니까…?”

“…그래. 그 말이 맞아.”

공비는 입을 샐쭉하게 모았다.

“내가 받았지. 아무렴.”

“맙소사…!”

인장이란 후계자의 증명, 그것을 공비가 받았다는 건 이미 후계자 선정이 끝났다는 거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만일 그렇다면 공작은 어째서 그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란 말인가? 적어도 끝났다면 대외적으로 밝혀야 하는 것 아닌가?

이것은 사람들이 알아 끼워 맞췄다.

“아, 설마 주시고 나서 곧바로 쓰러지신 건가?!”

“그렇군, 그렇다면 말이 돼!”

실상은 물론 전혀 다르다. 그러나 여기엔 그걸 밝힐 공작은 없었으므로 다들 그런 줄 알았다. 시종장은 바로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참담한 사실을 들은 제게 공비 전하가 보여 주신 것은 바로 저 인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걸 전하께서 직접 주셨다 말씀하셨지요. 그리고 저는 공교롭게도, 저 가짜가… 인장을 이미 몇 년 전 잃어버렸노라 말한 걸 들은 바 있었습니다. 아마 인장이 없어진 이유를 몰라 꾸며 댄 것이겠죠.”

이 말에는 아파 죽어 가는 후작조차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무리 아파도 이쯤 되면 정신이 번쩍 난다. 그가 지은 죄는―사실은 죄도 아니지만― 하나뿐인데, 어째서 계속 여죄가 추가된단 말인가.

“아니다. 저것…저것은, 거짓말이야!”

플로랑 후작은 간신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이 마당에 그녀의 말을 들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시종장이 물었다.

“무엇이 거짓이란 말입니까?”

“이건… 아니야. 모함이야! 나는 전하를 죽이지 않았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이냐!”

그녀의 절규가 쩌렁쩌렁 울렸다.

“당신과 공비 전하는 사이가 아주 나쁘지요. 지금이야 전하께서 계시지만, 차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전하의 뜻을 꺾을 수 없자 당신은 전하를 살해한 뒤, 마도구로 그분 대역을 할 생각을 한 겁니다. 인장을 부인께 미리 준 것도 모르고서 말이지요….”

“아니다. 아니야!”

“애초 당신은 로메인 경을 후계자로 밀었습니다. 일은 순풍에 돛 단 듯 잘 흘러갔지요. 심지어 때맞춰 로메인 경까지 왔으니까요. 어디선가 나타난 아름다운 남작과 약혼을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서….”

시종장은 비웃는 듯한 얼굴로 후작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 쓰여 있었다.

나는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사실 방금 전까지는 이 일이 당신의 단독범이겠거니 했습니다. 그러나, 방금 저 아름다운 남작이 보인 행동은 실로 놀랍더군요. 저이는 당신의 반지가 마도구인 것은 어찌 알고 있었을까요? 부서지기 전에 달려들던데 말입니다.”

“무슨, 뭐?! 잠깐!”

“제가 맞춰 볼까요? 당신은 저 남작에게 도둑이란 누명을 씌워서 감옥으로 데리고 갔지요. 그리고 심문하면서 저자가 필요한 걸 찾아냈지요. 그리고, 그 알아낸 사실로 저자를 몰래 매수했습니다. 천만 크레아라는 빚 탕감을 조건으로요. 목적은 아마도 그자가 팔려고 한 마도구였겠지요. 그걸로 잃어버린 인장을 대신할 셈이었겠지요…. 하하…! 결국 로메인 경까지 이 일에 연루하게 한 당신의 능력은 참으로 경탄할 만합니다, 후작.”

하나하나 개소리가 아닌 게 없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 모든 것이 퍽 그럴듯하게 들린다는 것이다. 시종장의 말을 듣는 사람들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해 갔다. 경악, 혼돈, 불신, 그리고 납득으로.

이윽고 따가울 정도의 적의가 세 사람을 향해 쏟아졌다.

살인자!

반역자!

적의가 가득한 시선에 한숨이 절로 날 지경이었다. 심지어 지금은 렉시의 미모도 별반 소용이 없다.

아, 일이 꼬이려면 참 개같이 꼬인다더니….

렉시는 아뜩한 눈으로 이마를 짚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 오해를 풀어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이 일을 어쩌지?’

설마 반지 잡으러 달려간 것이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죽이 되건 밥이 되건 일단 냅뒀을 거다. 후작을 버린다는 게 아니다. 같은 편으로 엮인 자의 구명은 지나가는 개도 안 들으니 하는 소리지…. 하지만 이미 물은 쏟아졌고, 한번 벌어진 일은 되돌릴 수 없는 법. 렉시가 입술을 깨무는 사이 다음 질문은 로메인을 향했다. 시종장은 실망감과 적의를 가득 안은 채 그에게 물어왔다.

“알고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모르고 연루된 겁니까.”

“무슨 말인가.”

“다 경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서 하는 소리입니다. 경은 길이 아닌 길은 가지 않는 성격 아닙니까?”

로메인은 시종장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저이가 말하는 것은 자신의 성격이다. 평소 하는 행동을 바탕으로 그는 로메인이 어쩌다 보니 휘말린 것으로 생각했다.

“역시, 모르고 연루된 것이군요. 그럴 것 같았습니다.”

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실제로 이 일이 있기 전 업무적으로 자주 만난 것은 저 둘이지요. 경은 이번 지진으로 치안 유지를 위해 밖으로 자주 나가 이 일을 보았습니다. 목격자들의 진술도 그렇고요. 게다가 반지를 보고 놀란 것은 경이 아니라 저 남작 아닙니까?”

“…….”

로메인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솔직히 말하자면 몰라서 못 갔다. 알면 자기가 갔지 렉시를 보냈겠는가? 그러나 시종장의 눈엔 그게 그렇게 보였다. 때문에 그는 이 멋도 모르게 휩쓸린 젊은이를 갸륵히 여겨 동아줄을 내려 주기로 마음먹었다.

“로메인 경,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죄를 뉘우치시고 용서를 구하십시오.”

로메인은 당황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사정 참작을 해 드리겠다는 겁니다.”

시종장은 멀거니 자신들을 보는 사람들을 흘낏 쳐다본 뒤 다시 로메인을 바라봤다.

“플로랑 후작은 남이라 그럴 수 있습니다. 저 남작도 돈이 급하니 매수에 응했겠죠. 하지만 당신은 그저 모른 채 휘말린 것 아닙니까? 물론 사안이 사안이니 징계는 피할 수 없을 겁니다. 또한 맹세도 파기해야 하겠지요. 이건 물론 불명예스러운 일일 겁니다. 허나 경, 반역은 최소 사형입니다. 그것보단 약간 명예스럽지 못하더라도 맹세를 파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지금 뭐라고?! 로메인은 입을 떡 벌렸다. 대관절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나 했더니!

“시종장! 당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고는 있나?”

“저도 압니다. 레이디의 맹세는 몹시 무겁지요. 허나 경, 그 맹세는 영원불멸이 아니고 때에 따라 파기도 가능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게다가 저쪽도 따지고 보면 당신을 이용했지요. 백번 양보하여 약혼을 했다면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허나 그 약혼도 제대로 성사된 것이 아니니…. 맘은 아프지만 차라리 천만다행이라 생각합시다. 살다 보면 이것보다 더한 일도 많이 겪는 법입니다. 일종의 수업료라 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미친 건가?”

실로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올 지경이었다.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가 현재 렉시와 약혼이 흐지부지된 것은 맞다. 일단 공작이 가짜였으니 제대로 된 약혼이 아니기도 하고.

그러나 그는 이미 렉시에게 맹세를 했다. 그를 지켜 주고, 언제 어느 때나 배신하지 않을 맹세를.

그걸 저렇게 쉽게 저버리라고 하는 자가 내가 아는 이가 맞는가?

“지켜야 할 사람을 버리라고!? 맙소사, 대체 어떻게 그런 말이 입 밖으로 나올 수가 있나?! 맹세를 깨라고?!”

로메인이 노여움에 버럭 소리를 쳤다.

“그렇게 하잘것없는 일로 깰 맹세였으면 하지도 않았다. 시종장, 당신도 기사 수련을 받았다면 알 텐데. 맹세가 왜 맹세인지 아는 자가 어떻게 그런 말은 하지!?”

“저자는 죄인입니다. 죄인과 한 맹세에 어떤 가치가 있단 말입니까? 그것이 당신의 남은 생보다 더 가치가 있습니까?”

시종장은 눈을 부라렸다.

“현실을 보십시오. 남작과의 신의를 지켜 봤자 당신에게 돌아올 건 형장의 칼날뿐입니다.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부지한다 한들 무엇이 남습니까? 꿈? 신념? 좋은 말입니다, 저도 그거 참 좋아하지요. 하지만 사람은 언젠가는 현실을 돌아봐야 할 때가 옵니다. 한때 전하께서 그랬듯, 경도 그때가 온 것이지요. 부디 바르게 생각하세요. 앞날 창창한 자신의 미래를 이렇게 내던질 겁니까?”

“현실을 돌아보라고? 신념을 버린 자가 어떻게 앞으로 나갈 수 있단 말인가?! 내 삶의 지침을 왜 자네가 재단하여 판단하는가? 자네 이렇게 오만한 사람이었나?”

로메인은 두 눈에 불을 켰다. 감정이 격해진 눈동자가 마치 밤처럼 시커멓게 변했다.

“뱀 같은 혓바닥을 저리 치워라, 시종장. 자네가 뭐라고 해도 나는 이 사람의 곁에 있을 것이다.”

“로메인 경! 색에 미쳐 미래를 버릴 겁니까?!”

“지금 내가 고작 미색 때문에 이런다고 생각하나?”

“아니면 무엇입니까!”

귀를 찢는 듯한 고함엔 숨기지 못할 노여움과 광기가 엿보였다. 허나 로메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내가 이러는 건, 바로 이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 옳은 길이란 남이 말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정하는 것. 나는 늘 이렇게 살아왔고 이렇게 살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걷는 자로서 말하건대! 나는 정정당당히 나의 결백함, 그리고 모두의 결백함을 외친다. 알겠나 시종장! 자네의 주장은 전제 자체가 틀렸어!”

로메인의 기세는 사뭇 바르고 정갈했다. 시종장의 격장에 넘어간 사람들조차 순간 어? 하고 멈칫할 정도로 로메인의 기도는 정돈되어 있었다. 실로 당당한 자세였지만, 안타깝게도 시종장에겐 그저 허장성세로 보였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생각이 틀릴 리 없으며 그것이 맞다고 확신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답을 내린 자에게 아무리 외친들 그것이 와 닿을 리 없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과한 사람은 이렇듯 고집불통이 될 때가 많았다.

“곧 죽어도 기사도를 지키시겠다 이겁니까? 경, 그건 아집입니다. 기사도가 아니라!”

“아집? 그것은 지금 그대가 하는 짓이야. 내가 아니라.”

로메인을 둘러싼 공기가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단단하게 바위처럼 굳어 가는 로메인을 본 시종장은 떫은 감을 먹은 것처럼 얼굴을 구겼다. 자신이 어떤 말을 하건, 로메인은 맘을 되돌리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것은 마치 웃는 것 같기도 했고, 동시에 우는 것 같기도 했다.

“…한때 저는 당신이 전하의 뒤를 이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전하의 후손은 아니지만, 전하와 참 잘 어울렸으니까요. 버나드 공자보다 로메인 경, 당신이 전하와 닮은 면이 많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이제 보니 제가 생각을 아주 잘못한 모양입니다…. 당신은 전하와 전혀 닮지 않았군요.”

만일 로메인이 공작과 닮았다면 지금의 선택은 달랐을 것이다. 분명 달랐다.

“당신을 다음 후계자로 밀었던 건 취소하겠습니다. 당신은 애초 다스리는 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저 기사일 뿐이지…. 아예 자격조차 없었던 자를 왜 그렇게 원했는지 모르겠군요.”

“!”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불꽃이 튄다. 어딘지 모르게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두 사람과, 그런 둘을 보는 수십 명의 사람들, 다친 자, 그리고―그 사이에 뭐라 말도 못하고 끼어 있는 또 한 명.

꿀꺽.

렉시는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침을 삼켰다. 듣는 내 속이 타면서 입이 마르는 게 아주 장난이 아니다.

‘이거, 어쩌지?’

사실, 방금 저 둘의 말을 들으면서 뭔가 반짝하고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어쩌면 이 상황을 헤쳐 나갈 자그마한 교두보 정도는 돼 줄지 모르는 것이. 하지만 지금 그 말을 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아닌지 판단이 잘 안 섰다. 실로 일촉즉발의 상황인데, 이게 또 괜히 불에 기름 붓는 짓은 아닐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맞는 거 같았다. 둘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과 함께 침묵이 자리한 지금이 바로 기회다. 렉시는 눈치를 보다 재빨리 끼어들었다.

“시종장님, 아까부터 계속 묻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왜, 갑자기 변명이라도 하시려고요?”

“설마요! 그것이 아닙니다. 단지 제가 말할 것은…. 당신은, 어째서 전하께서 돌아가셨다고만 생각합니까?”

그랬다.

사실 이 모든 일이 개판 오 분 전으로 향하고 있는 건 다 공작이 죽었다고 저이가 확언을 해서다. 렉시는 이게 제일 이상했다. 어째서 공작을 그렇게 못 죽여서 안달이란 말인가?!

저이가 시신이라도 봤으면 또 모르겠다. 하지만 산 사람 시신이 있을 리 없으니 저건 백 프로 추측으로 한 말이었다.

“이보시오 남작. 전하께서 살아 계시다면 저자가 왜 여기 있답니까? 정체까지 숨기고서요. 이게 가장 확실한 대답 아닙니까?”

“만일 전하께서 이 일을 모두 명령한 거라면요?”

“뭐라?”

시종장의 얼굴에 당혹이 스쳐 지나갔다. 실로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당하는 입장에선 솔직히 어처구니가 없었다.

만일 자신이 시종장이라면 그는 일단 그것부터 고려했을 것이다. 사람은 무슨 일이건 일단 좋은 쪽으로 상황을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건 사람의 본능이었다. 최악의 상황은 애써 피해 보려고 하는 본능 말이다. 사람이 죽은 것보단, 시켜서 했다고 생각하는 게 훨씬 낫지 않은가? 질문을 듣는 시종장의 입가가 잘게 떨렸다.

“…전하의 명령이라?”

“네, 그렇습니다.”

시종장은 즉시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야말로 절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상정하지 않았지. 있을 수 없는 일을 상정하는 바보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그런 일이 왜 있을 수 없습니까? 지금만 해도 전 있을 수 없었던 두 사람의 연수를 보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것도 전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요.”

공비와 함께 있는 것을 꼬집는 말이었다. 시종장의 얼굴 위로 노여움이 스쳤다.

“기, 기가 막히는군. 지금 날 놀리는 겁니까?!”

“비난하는 게 아니라…. 이런 피치 못할 사정을 말하는 겁니다. 피치 못할 사정.”

재빨리 첨언했지만 그렇다고 한 말이 사라지진 않는다. 놀림 받았다 생각했는지 시종장은 부들부들 떨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퍽 볼 만했다. 그는 노기충천한 얼굴로 이를 갈았다.

“여하간! 그건 절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부정만 하지 마시고 생각해 보세요. 정말 전혀 있을 수 없습니까? 플로랑 후작은 전하의 측근입니다.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닐 텐데요?”

“불가능하지요!”

“아니요, 가능합니다.”

“당신! 지금 자꾸 사람 가지고 말장난을…!”

“장난이 아닙니다. 사실 이 모든 건 전하께서 명령하신 일이 맞으니까요.”

노성을 내뱉던 시종장의 입이 훅 닫혔다.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말이었지만 뜻은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뭐라고? 이 말엔 숨죽이고 있던 사람들 또한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끔벅끔벅 금붕어처럼 입을 벙긋대던 시종장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는 입에 게거품을 물었다. 이 무슨!

“어, 어딜 감히 여기서 거짓말을! 그렇다고 당신의 죄가 덜어질 것 같습니까!!”

“제가 이 마당에 거짓말하게 생겼습니까?”

말하면 안 되겠지만 어차피 이판사판이다. 렉시는 술술 불었다.

“일이 이렇게 된 마당이니 어쩔 수 없이 다 말하겠습니다. 그래요, 플로랑 후작이 전하 대신을 한 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건 전하께서 명령했던 겁니다. 중요한 일 때문에 공작성을 비워야 하는데, 후작께 그 대신을 하라고 명하시고 저 반지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태까지 공작 전하를 가장했던 것이지요. 저는 이곳에 와서 우연찮게 그 일을 알게 되었고, 플로랑 후작의 부탁으로 그 일을 입 다물기로 했던 겁니다.”

싸늘한 정적이 주위를 감돌았다.

“따라서 플로랑 후작 각하는 잘못이 없습니다. 일을 열심히 한 게 죄라면 또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공작 전하는 살아 계시니까요!”

물론 어딨는지는 그도 모른다. 알면 이러고 있지도 않았을 테니… 어쨌거나 공작이 살아 있긴 살아 있으니 시종장이 저럴 이유도 없지 않은가. 최대한 유화책을 택하려 한 렉시였지만, 문제는 시종장은 그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거짓말! 내가 그런 거짓말을 믿을 것 같소?”

“참 이해가 안 가는군요. 전하께서 살아 계시다면 좋아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헌데 왜 자꾸 제 말을 거짓이라고 치부하는 겁니까?!”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니까!”

시종장은 피를 토하듯 외쳤다.

“수십 년간 전하를 모셔 온 것도, 계속 그분의 옆에 있었던 것도 바로 납니다. 헌데 어찌 전하가 날 제쳐 두고 후작을 선택한단 말인지? 전하가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그런 중차대한 일을 맡길 리가 없습니다!”

시종장의 째지는 목소리. 렉시는 순간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그분이 가장 믿는 것도, 그분을 가장 잘 아는 것도 바로 나니까!”

언젠가, 요수아가 렉시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영주님. 저희가 떠나온 뒤로 시간이 꽤 오래 흘렀잖아요. 지금 우리 영지 일은 누가 대신하고 있나요?”

“그거? 그야 집사가 대신하고 있지. 집사 말고 내가 누굴 믿겠어.”

“…그렇죠? 역시 그게 맞죠?”

렉시가 이상한 얼굴로 요수아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쟤가 왜 저런 걸 묻는 걸까…. 왠지 모르게 궁금해진 렉시는 요수아의 등을 툭툭 건드렸다.

“요수아. 그런데 그거 왜 물어봤어?”

“아, 그거 말이에요?”

요수아는 왠지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렉시에게 다가갔다. 누가 있지도 않은데 은근슬쩍 목소리도 내리깐 모양이 꼭 여기서 오래 일한 시종 같았다. 어디서 뭘 배웠는지…. 그가 은근하게 속삭였다.

“그게, 조금 헷갈리더라구요.”

“뭐가 헷갈리는데?”

“우리 영지 집사님 비슷한 사람이, 여기는 시종장님 아닌가요?”

“음… 대충 그렇지?”

“네, 그게 이상했어요.”

“?? 뭐가?”

이거 무슨 선문답인가? 렉시가 눈을 끔벅이자 요수아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에휴, 잠깐만 귀 좀요….”

요수아는 주변을 살살 둘러보다가 렉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렉시의 귀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영주님은 부재 시에 집사님한테 일을 시키셨잖아요…. 근데 여기 공작님은 시종장이 아니라 후작님이 일을 해요. 보통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더 믿는데 말이죠. 그게 이상했다구요.”

‘네 말이 맞았구나, 요수아.’

렉시는 탄식했다.

그땐 그냥 어린애가 한 말이라 넘겼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건 실로 핵심을 찌르는 말이었던 것이다. 통상 영지의 주인이 가장 믿는 것은 성을 관리하는 자다. 자신만 해도 집사에게 전권을 맡기고 이렇게 돌아다니고 있지 않은가. 이건 그가 그만큼 집사를 신뢰하며, 그만큼 영지와 자신을 잘 아는 자가 없기 때문이었다.

헌데 어째서 공작은 늘 곁에 있는 시종장에게 이 일을 의논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리 후작이 영민해도, 시종장보단 영지의 상황을 잘 알지 못할 텐데.

후작이 더 잘할 것 같아서? 그가 보다 더 똑똑하니까?

아니, 그건 아니다.

아무리 후작이 공작의 측근이라고 한들 늘 곁에 있던 시종장만은 못할 것이다. 제대로 된 영지라면 자신처럼 집사 같은 인물이 후작의 일을 대신했어야 하는 것이 옳았다.

‘―과연, 저래서 그랬구나. 저래서!’

렉시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공작을 늘 곁에 모시는 시종장은, 어딘지 모르게 비틀려 있다.

광적이고 비뚤어진 믿음을 가진 측근만큼 위험한 사람은 없다. 이것은 신뢰의 문제였다.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공작은 아마 그걸 알고 시종장을 경계했던 것이 분명했다.

직접 낳은 자식이라도 그 속을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 타인이 어떻게 한 사람을 다 알 수 있단 말인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렉시는 혀를 찼다.

‘가장 가까워야 할 측근이 못 미더운 상대였단 거로군.’

통상 가장 가까워야 하는 상대를 배제했다는 건 생각보다 많은 걸 함의한다. 뭔지는 몰라도 여기엔 필시 어떠한 곡절이 있을 터. 렉시는 공작이 시종장 모르게 사생아를 찾는 것이 그 때문일까 싶었으나…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지.

어쨌거나 렉시는 시종장의 이 돌아 버린 현실 파악이 뭐에서 기인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절로 탄식이 나왔다.

“전하도 안됐군….”

순간적으로 말하고 난 뒤, 렉시는 흠칫 놀랐다. 앞서 한 말과 합치고 나니 이게 꼭 시종장을 조롱하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혹시 들었을까?

아니길 바랐지만 아니나 다를까였다. 자신을 보는 시종장의 눈동자가 칼처럼 흉흉했다. 아마 시선에 힘이 있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갈기갈기 찢겨졌을 것이다. 렉시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잠깐, 이 말은…!”

“이제 그만! 사람 가지고 노는 것이 아주 수준급이군! 로메인 경도 그 혓바닥으로 가지고 논 겐가?!”

이중 삼중 타격을 입은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시종장은 렉시가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고 확신하고 말았다. 격정을 감추지 않은 채 그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그리고 팔을 크게 들어 이상하게 휘둘렀다. 어찌나 세게 휘둘렀는지 렉시가 있는 방향까지 바람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을 기점으로 모든 것이 변했다.

드디어 시야 바깥에 있던 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철그럭, 쿵, 쿵, 쿵!

“!!”

기사들이 움직인다. 렉시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은빛 갑주를 착용한 기사들의 전진은 무게 때문에 느릿했다. 그러나 그렇기에 굉장히 위압적이고 패도적이다. 마치 거대한 벽이 열을 맞춰 다가오는 것 같았다. 황야의 소 떼가 밀려들어도 저것보다는 덜 위협적일 것이다. 그들의 틈에서 기회만을 엿보고 있던 공비가 기사들을 향해 목청 높여 외쳤다.

“이제 되었다. 모두 저자들을 잡아 옥에 가두어라! 전하의 시해범들이다!”

챙!

공비의 외침과 동시에, 로메인은 검을 뽑았다. 연철로 만들어진 검이 크게 휘며 흔들린다. 아름답지만 뭉툭한 가검이 빛 아래 여과 없이 드러난다. 화려하게 아롱대는 예식용 검면 위로 푸른빛이 물처럼 씌워지다 이내 유백색으로 변했다. 잉, 하고 검이 떨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사의 검기였다.

“제 뒤로 오십시오.”

희게 빛나는 검을 직각으로 세우며 로메인이 자세를 잡았다.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에 놀란 렉시가 소리쳤다.

“…로, 로메인!? 설마 맞서려고요?”

로메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목을 낮게 숙이고 렉시에게 속삭였다.

“잘 들으십시오. 저 뒤, 세 번째 벽을 치면 통로 하나가 나옵니다. 들어가신 뒤 곧바로 잠그고, 뛰십시오. 제가 뒤를 맡을 테니까요.”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방금 들은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당신 …지금 저 혼자 도망가라고 하는 건가요?”

“지금은 위험하니 그런 겁니다. 전 곧 뒤따라가겠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여럿… 수십이에요!”

“기사들의 싸움에서 갑옷은 큰 문제가 안 됩니다. 중요한 건 경지이지요. 저런 하급 기사들 몇으론 저를 뚫을 수 없습니다. 저를 믿으십시오.”

다짐하듯 말하는 로메인의 등은 무척이나 굳건했다. 아마 렉시가 기사를 아예 몰랐다면 홀딱 넘어갔을 것이다. 허나 렉시도 한때는 기사를 지망했다. 로메인이 아무리 상급의 기사라도, 수가 저렇게 많으면 열세다. 그 사실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걸 저더러 믿으라구요?”

“걱정 마십시오. 혹여…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더라도, 어쨌거나 저는 전하의 조카입니다. 저들도 살수는 쓰지 못할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그렇다고 어떻게 당신을 두고 가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들은 절 못 죽입니다. 기껏해야 가두는 게 다겠지요. 그 정도 소란이면 전하께서도 곧 오실 테니… 그때까지만 버티면 됩니다. 그러나 당신은 어찌 될지 모릅니다. 그러니 당분간 다른 곳에 피해 계십시오.”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마주쳤다. 새파랗게 변한 로메인의 눈동자 너머로 강렬한 감정들이 이글거렸다. 반드시 살아남겠다는 결의, 상대에 대한 애정, 애달픔, 그리고 혹시 모를 일들에 대한 안배와 희생.

…거짓말.

정직하게만 살아온 남자는 맘을 숨기는 것도 서투르다. 상대의 생각을 읽은 렉시의 얼굴이 단단하게 굳었다.

“―안 가요.”

“렉시!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가십시오!”

“싫어요!”

누가 간대? 렉시는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

“착각하지 말아요, 로메인. 당신은 내 기사예요. 지금 나는 당신의 연인이 아니라 영주 자격으로 말하고 있어요! 영주는 가신을 지키는 거예요. 페르귄의 영주는 절대 지킬 자를 뒤에 두고 도망가진 않아요!”

다스릴 자를 두고 도망가는 치자(治者)가 어디 있는가. 물론 렉시는 같은 영주들과 대화를 한 적이 별로 없기에 이게 보편적인 것인지는 잘 모른다. 제국은 넓고 귀족은 많으니, 그래. 도망칠 영주도 있긴 하겠지.

하지만 적어도, 자신은 아니었다. 페르귄의 영주들은 늘 그랬다. 적에게 고개를 숙일지언정 다스리는 자들만큼은 주욱 지켜 왔다.

싸움을 회피하는 것은 피해를 줄이기 위한 것. 생명이 중하니 그런 것이지, 싸움만이 답이라면 결국은 검을 잡는 것이 페르귄의 영주다.

“나는 싸우지 못하지만, 그래도 내 몸 하나 정돈 지킬 수 있어요.”

그리고, 렉시는 옷 안쪽으로 손을 넣어 뭔가를 꺼내 들었다. 목에 걸고 안쪽으로 살짝 숨겨 보이지 않던 것이 그제야 나타난다. 그것은 피리였다. 얼핏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상아로 만들어진 길쭉한 피리.

그러나 렉시는 이 피리가 어떤 것을 불러낼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나와라, 엘피디오스.”

그리고 렉시는, 있는 힘껏 피리를 불었다.

―――!

그것은 마치 새의 울음소리 같았다.

혹은 말의 울음소리 같기도 했고, 동시에 소가 우짖는 소리처럼도 들렸다. 꾀꼬리가 우는 것 같기도, 혹은 사자가 그르렁대는 것 같기도 한 기이한 음. 세상 만물의 소리를 응축한 것 같은 그것은 마치 누군가 귀에 대고 부르는 것처럼 선명했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웠다.

“이 소린 대체…?”

장내의 소란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선명한 음색은 사람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절대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닌데, 그렇다고 듣기 싫은 소리도 아니다. 헌데 이상한 것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사람들에게서 일어난 변화였다. 모두 정도만 다르지, 순간 기이할 정도로 가슴이 선뜩해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 소리가 잦아들 무렵.

그것이, 화려하게 시작됐다.

자그만 모닥불 같은 것이 렉시의 머리 위로 떠올랐다. 불꽃이 새파란 빛을 뿜어내며 둥근 원을 그렸다. 그것은 곧 빙빙 돌다가 몸집을 불렸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 위로 불꽃이 기이한 형상을 이루면서 웅웅 떨린다. 길쭉한 막대기가 교차되면서 세모꼴을 그리고, 그 안에 잊힌 옛 문자들이 거침없이 꼬리를 이으며 공기를 태웠다.

그리고 그 문자들이 완벽하게 다 채워졌을 때.

쑥, 온몸에 푸른 불꽃을 두른 유니콘이 뛰쳐나왔던 것이다!

―불렀나, 주인?

일반 말의 두세 배는 될 것 같은 몸체, 말발굽에서 시작된 불이 온몸으로 번져 있고, 이마에는 마치 창처럼 긴 뿔을 가진 기이한 생명체.

“!!!!”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갑자기 말이 나타나도 놀란 판이다. 헌데 말도 아니고 말처럼 생긴 괴물이 나타나다니!

“으, 으악!”

“괴물이다!”

듣도 보도 못한 괴물의 출현에 사람들은 단상에서 멀리 떨어졌다. 시종장 역시 이 모습을 보고 당황해 떨어졌다. 방금까지 천천히 압박해 오던 기사단들도 오던 것을 멈추고 사태를 관망했다. 정체불명의 적을 앞두게 되었으니 전략적으로 멈춘 것이지만, 어쨌거나 나타난 것만으로도 한숨을 돌렸다.

이들의 오만 난장을 지켜보던 유니콘이 투덜거렸다.

―무식한 놈들. 내 어디가 괴물이라고! 나처럼 완벽하고 아름다운 생물에게 괴물이라니 어불성설도 지나치군!

순결과 청결의 수호자, 처녀의 수호자, 기타 등등 많은 말이 있긴 하지만 유니콘은 사실 자기애가 제일 투철한 생물이다. 요 얼마간 못 보긴 했지만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발이 되어 준 유니콘을 보며 렉시가 입을 열었다.

“엘피디오스.”

―…흠, 잠깐. 상황을 보니 대충 알겠군. 또 벌레가 붙었나? 도망치게?

늘 자신을 부를 때마다 스토커들에게 도망칠 때였으니 저런 오해를 할 법도 하다. 렉시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그런 거 아니야.”

―도망이 아니라면….

유니콘은 주변을 둘러봤다. 렉시, 렉시 옆에 있는 칼 든 놈, 빽빽하게 모여 있는 냄새나는 귀족들, 그리고… 기사단?

유니콘의 콧평수가 순간 크게 넓어졌다.

―오오, 저것은. 설마?!

“그래. 이번엔 전투다.”

―!!!

안 그래도 불이 타오르는 눈동자에 보다 짙은 불길이 확 피어올랐다. 유니콘은 흥분한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콧김을 쒹쒹 내뿜었다.

―전투! 전투라고!

“그래. 이번엔 볼썽사납게 도망치지 않고, 저 기사단을 상대로 우리를 지켜.”

―좋아. 주인은 지킨다. 전투도 해 주지! 하지만 주인 옆의 놈은 됐어!

그 와중에도 칼같이 영역 구분을 하는 철저함이 대단했다. 그는 잔뜩 흥분한 몸으로 머리 위의 뿔을 휙휙 휘둘렀다.

―저 빌어먹을 계약 때문에 피를 언제 봤는지 참으로 까마득했다. 하는 꼴 보아하니 앞으로도 평생 없을 것 같았는데… 헌데 드디어 전투라니! 오! 신이여, 잘 걸렸다. 모두 덤벼라!

히히히히힝!

소리 높여 전투태세에 임한 그가 목을 잔뜩 곧추세웠다 내렸다. 이마의 뿔 위로 붉고 검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임전 태세가 되어 잔뜩 흥분한 유니콘이 기사단을 향해 뛰쳐나갔다. 기사단은 당황했다. 사람은 상대해 보았어도 동물, 그것도 유니콘을 상대해 본 적은 없었던 그들이었다. 그들은 이 무시무시한 기세를 품은 유니콘에게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컥!”

―약하다!

“으아악!”

―가소롭군!

“이, 이런 짐승 새끼가!”

챙챙챙!

곧 기사단 여럿이 눈을 까뒤집고 검을 세웠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적은 적! 오랫동안 합을 맞춘 그들은 곧 대열을 정비하고 유니콘을 상대로 날붙이를 휘둘렀다. 반복 훈련의 장점이 눈이 부시게 빛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멈춰 선 유니콘의 뿔이 일순 길게 늘어나더니, 일렬로 선 기사단 다섯을 그대로 날려 버렸던 것이다. 순식간에 공중으로 튕겨 나간 기사단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악!”

―흥! 겨우 이 정도 가지고!

단기필마(?)로 수십 명의 사이를 헤집는 유니콘의 모습은 실로 전신 그 자체였다. 사방팔방 헤집으며 적을 무찌르는 유니콘의 뒤로 기사단들이 꼬리처럼 뒤따랐지만 발길질 몇 번에 또 뒤로 날아간다. 수십이 아니라 수백이 나타나도 혼자 다 해먹을 기세다. 로메인이 가까스로 입술을 축였다.

“……저게 대체.”

“유니콘 엘피디오스예요. 보셨지요 한 번?”

“…네. 압니다. 마차를 끌었던 그.”

“마차도 잘 끌고, 힘도 세고… 그런데 제일 잘하는 건 싸움이에요. 특히 저 머리의 뿔을 검처럼 휘두르는데, 어지간한 기사들은 이기질 못한다고 해요. 특히 싸움에 죽고 못 사는데, 이 피리의 주인하고도 싸움 내기를 하다가 져서 복속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렇습니까…?”

그래, 그래 보인다. 유니콘의 뿔놀림에 검을 놓친 기사들이 속출하는데 어찌 못 믿으리. 어찌나 뿔놀림이 귀신같은지, 이리 번쩍 저리 번쩍 번개처럼 움직였다. 아무리 로메인이라도 이 순간엔 얼이 나갔다. 어처구니가 없는 마음 반, 다행이라는 마음 반이 치열하게 싸우는 그였다. 그때 갑자기 렉시가 입을 열었다.

“로메인. 다시는 그러지 말아요.”

“예?”

“전 사실 집착이 심한 편이에요. 그리고 저처럼 집착이 심한 사람은, 자기 것은 어디다 놓고 안 다니거든요.”

“…….”

“한번 내 품에 들어온 건 절대 안 놔주고, 꼭 옆에 끼고 다니죠. 그러니까 앞으론 아까 같은 말 하지 마세요. 놓고 가라거나, 먼저 가라거나.”

로메인의 눈에 렉시의 귓불이 들어왔다. 마치 딸기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이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맙소사…. 그는 탄식했다. 그럴 상황이 아닌데, 갑자기 그를 무척 강하게 끌어안고 싶어졌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면 그를 안고 무작정 키스하고 싶다는 열망에 몸이 훅 달아오른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렉시가 채근했다.

“답은요?”

“…명 받들겠습니다. 앞으론 절대로 그런 말 하지 않겠습니다.”

렉시가 헤실 웃었다.

“좋아요. 로메인, 이제 제 손을 잡고…”

―주인! 뒤를 봐라!!!!

유니콘이 벽력성을 외치고, 로메인은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최대한 빨리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둘의 행동은 뒤늦었다. 로메인이 검을 쳐 냄과 동시에, 렉시가 난입한 인물에 붙잡혀 뒤로 죽 끌려 나갔던 것이다. 전투 중 한눈 판 여파치고 치명적이었다. 그렇게 갑자기 들이닥친 양동 작전에 로메인은 순식간에 렉시를 잃고 말았다. 로메인은 다급히 소리쳤다.

“렉시!”

“멍청하긴, 전투 중에 한눈을 팔다니!”

로메인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두 눈동자가 공격한 사람들을 확인한 순간 푸르게 불타올랐다. 거기에 있는 건 그가 잘 아는 자들이었다. 렉시의 목에 검을 들이민 기레스 백작, 그리고 자신과 검을 맞댄 버나드가 그를 보며 야비하게 웃고 있었던 것이다.

저놈들이!

“멈춰라! 이 괴물!”

기레스 백작, 패트릭은 렉시의 목에 검을 들이댄 채 멀리 있는 유니콘을 향해 소리쳤다. 유니콘은 이를 악물고 뒤로 물러섰다. 맘 같아선 당장 요절을 내고 싶었지만 아무리 유니콘이라도 한계는 있었다. 그렇게 다가온 주인의 위기에 천군만마 같던 유니콘의 활약도 끝. 엘피디오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몸만 공중에 띄워 간신히 기사들을 피해 냈다.

하지만 곧 죽어도 싸움꾼은 싸움꾼이라 그냥 피하진 않았다. 일단 피해 내면서도 당장 기사들이 렉시에게 돌입하는 건 대충 막아선 자리에서 몸을 멈췄던 것이다. 아무리 인질이 잡혔더라도 이렇게 되면 기사들도 쉽게 움직이진 못한다. 뒤이어 단상을 쳐다본 유니콘이 성이 나 공중에서 발을 굴렀다.

―젠장! 네 놈은 기사도도 없느냐?! 아녀자와 약자와 애들은 건들지 않는 게 기사의 도리거늘!

“괴물 따위에게 그런 소리 들으니 새삼스러운걸. 하지만 나는 기사가 아니라서 말이야.”

그는 이죽대면서 렉시의 목에 검을 길게 들이댔다. 렉시는 딱딱하게 굳은 채 입술을 깨물었다.

“기레스 백작…! 당신!”

“그래, 나야 남작.”

패트릭은 눈을 날카롭게 좁히며 길게 웃었다. 이런 상황이 오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던 그였다.

“잘 지냈나 봐? 그날 이후 며칠 죽어라 잔해만 뒤졌지…. 헌데 이렇게 사람 엿을 먹일 줄 누가 알았겠나. 그냥 죽었으면 피차 좋았을 텐데 말이야!”

“날 죽이려고 했던 게 정작 누군데…!”

렉시는 자기 목을 움켜쥔 기레스의 팔을 쥐어뜯었다. 기레스의 눈이 순간 꿈틀거렸다. 렉시는 순간 숨을 턱 멈췄다.

“가만히 있어!”

“으윽!”

렉시는 혀를 깨물었다. 목 쪽으로 써늘한 금속날의 압박감이 더해졌다.

“버나드 공자가 어지간하면 당신을 살리라곤 했지. 나도 어지간하면 그럴 생각이고. 하지만 반항이 심하면 나도 어떻게 될지 몰라. 정말로 죽고 싶은가?”

기레스는 얼굴에 흉흉함을 두른 채 눈을 희번덕댔다. 한번 죽이려고 한 것, 두 번은 못 할 것 같나?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렉시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 꼴을 보는 로메인의 눈에서 불이 확 붙었다.

“패트릭! 그를 놔라! 젠장!”

당장 떨치고 달려가려는 로메인을 버나드가 막았다. 그는 자신을 무시하는 로메인에게 검을 휘두르며 고함쳤다.

“날 무시하지 마! 네 상대는 나라고!”

챙!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두 검이 격돌한다. 맞부딪친 검과 검 사이로 불꽃이 작열했다. 로메인은 얼굴을 찌푸린 채 버나드의 검격을 막아 냈다. 떨쳐 낸 검 끝이 파르르 떨린다. 마음이 급했다. 평소 실력대로라면 버나드 따위는 자신의 상대가 아니다. 허나 예식용 가검에, 인질까지 잡혀 있는 상황이 실력차를 상당수 메꾸고 있었다. 로메인은 잠시 망설이다 단검을 꺼내 쌍검식을 취했다. 그걸 본 버나드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오, 검을 버리는 게 아니라 구출을 택하는 건가?”

로메인이 입매를 단단히 굳혔다.

“나는 바보가 아니야 버나드. 저 유니콘이 있는 이상 렉시는 안전할 가능성이 크지. 하지만 넌 내가 검을 버리는 순간 단박에 날 죽일 것 아닌가. 내가 널 모르겠나?”

“역시 내 사촌이군! 날 너무 잘 알아! 하하하!”

버나드는 비열하게 웃으며 얼굴을 활짝 폈다. 로메인은 침착한 얼굴로 버나드를 노려보았다.

“이 상황에서 내가 검을 버리는 것만큼 바보짓은 없을 터. 그렇다면 나도 최대한 응전할 밖에! 널 베고, 패트릭을 쓰러트린 뒤 렉시를 구출하겠다.”

“오, 무서워 죽겠군. 그 날 하나 안 서 있는 가검이 불안해 단검까지 꺼낸 네가?”

“날 우습게 보지 마라 버나드. 너 따윈 이 검 하나로도 충분해. 이건 널 물리치고 난 뒤 패트릭을 상대할 용도다.”

“흥! 꼴이 이렇게 되었어도 아직 여유롭다 이건가!?”

로메인의 응수에 버나드의 입아귀가 아래로 내려갔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도 과거처럼 쉬이 날뛰진 않았다. 자존심이 상하는 말이지만, 로메인의 말이 맞는 말이긴 했었으니까. 게다가 이렇게 도발을 한다는 건 그도 상황이 영 좋지는 않다는 이야기였다. 좋아, 버나드는 피식 웃으며 로메인의 말을 긍정했다.

“그래, 네 말이 맞긴 하지. 다른 건 몰라도 검 실력 하나만큼은 네 우위가 맞으니까.”

“자신의 모자람을 안다니 많이 성장했군, 버나드.”

“그래. 그래서 나도 나름 그 격차를 메꿀 것을 준비했다네, 친애하는 사촌. 부디 이게 자네의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말이야…! 모두 나와!”

“무슨…!?”

불길한 외침에 로메인은 몸을 움찔했다. 그리고 버나드의 뒤로 재빨리 나타나는 일단의 장정들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거기엔 로메인도 얼굴을 본 자들이 다수 있었다. 그들은 가끔 성벽 시찰을 나갈 때마다 서투르게 일하던 일꾼들이었다. 곡괭이와 삽이 아닌 무기를 든 일꾼들을 본 순간 그는 일의 저간을 순식간에 파악했다.

“일꾼들을… 아니, 병사들을 일꾼으로 위장한 건가?!”

“흠… 거기까지 눈치챘나?”

버나드는 잠깐 당황한 얼굴을 하다 이내 얼굴을 바로 했다. 어차피 이리되었는데 들킨 것이 무슨 상관이랴.

여 보란 듯 버나드의 뒤에 선 그들은 하나같이 검 하나씩을 꼬나들고 있었다. 모두 제각기 다른 무기를 들고 있는 자들은 기사치곤 기도가 거칠었다. 버나드는 가소롭다는 듯 로메인을 바라보며 이를 드러냈다.

“그래, 내가 이들을 모았지. 일꾼들로 변장시켜서 성안으로 끌어들였어. 어머니가 저렇게 나올 줄 몰라서 내가 따로 모았던 것이지.”

“…따로 모았다고?”

로메인의 눈이 살짝 떨렸다. 공비와 같이 온 게 아니라?

“그래! 어머니가 모아 온 저 고상한 기사들과는 격이 다르지. 내가 모아 온 자들은… 그래. 일종의 해결사들이라고나 할까?”

“해결사라고!”

로메인은 경악으로 두 눈을 부릅떴다. 보통 해결사라 함은 끔찍한 죄목으로 파문된 기사들을 의미했다. 일종의 용병처럼 돈을 받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자들이지만 보통은 노략질로 영주의 골치를 썩이곤 한다. 따라서 귀족이 기사도 아니고 용병을 동원했다는 건 명예를 저버리는 행위였다.

“미쳤군! 제정신인가?”

말이 잘해 용병이지 사실 저들의 본령은 도적에 가깝다. 어떻게 귀족이 도적을 고용한단 말인가?

“귀족으로서의 품격을 지킬 생각이 없는 건가? 어떻게 도적들 따위를!”

“웃기는군! 네가 내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아버지의 생사로 사기나 친 주제에!”

버나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콧등을 찡그렸다. 사실 그도 도적을 고용하는 건 크게 기껍진 않았다. 다만 백작이 강권했고, 또 다른 수단이 없어 일을 진행했을 뿐. 허나 그의 일탈은 방금 벌어진 일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아버지가 죽다니?!

‘귀찮은 영감탱이였지만 …그래도 아버지라고.’

아무리 사이가 안 좋다 한들 아버지는 아버지. 어쨌거나 부친이 죽었으니 그는 복수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하여 그로서는 이 선택에 하등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그래, 나도 어머니가 저렇게 기사들을 몰고 올 줄 알았다면 이렇게까진 안 했을 거야. 하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어!”

그렇게 외친 버나드는 제각기 무기를 들고 위협적인 소리를 내는 용병들을 향해 손짓했다. 잔뜩 신호를 대기하던 용병들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다. 하아아앗! 그들은 각자 무기를 들고 로메인에게 덤벼들었다. 로메인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로메인을 둘러싼 용병들의 검 끝이 로메인의 몸통을 향해 내리꽂혔다. 로메인은 재빨리 몸을 위로 뛰어 그들의 칼을 피한 뒤 몸을 빙글 돌려 검신을 발로 찼다. 웅, 기이한 소리를 내면서 검이 굽어진다 싶더니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 기사의 기세가 잔뜩 어린 발차기에 검이 채 견디질 못한 것이다.

“끄악!”

콰창창창!

짧은 비명과 함께 용병 몇이 피를 뿜으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내장으로 침투한 암경이 용병들의 속을 뒤집었다. 단 한방에 나가떨어진 동료들을 보며 용병들이 이를 갈았다.

“이게 뭐, 뭐야!”

“상급 기사다!”

“젠장! 말이 다르잖나! 그냥 기사라고만 했는데!!!”

“이런 씨발 새끼! 거짓말을 했군!”

용병들 몇이 욕설을 내뱉으며 로메인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사람 잡는 것을 업으로 하는 그들이다. 때로는 기사도 몇몇 잡아 봤다. 때문에 별 의심 없이 이번 의뢰를 받았지만, 상대가 상급 기사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기사가 넘쳐나는 제국 내에서도 상급 기사는 채 쉰을 못 넘기는 실정이었다. 만일 상대가 상급 기사란 걸 알았다면 그들도 이 의뢰를 다시 생각했을 것이다. 뒤에서 바라보던 용병의 우두머리가 버나드를 향해 으르렁댔다.

“버나드 공자! 말이 다르잖소! 그냥 기사라고만 했잖나!”

“이봐! 내가 고작 기사를 잡는 일로 금화 삼백 개를 줬을 것 같나?”

“…젠장!”

“닥치고 어서 일이나 해! 일이 이렇게 된 거 잡지 않으면 다 죽는다!”

“으아아아악!”

로메인의 검에 후려쳐진 용병 두엇이 또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이런 시발! 다급해진 용병대장은 뒤를 향해 소리쳤다.

“거기! 쇠사슬 가져와!”

어차피 이리된 것 짐승 잡듯 해야 한다. 날카로운 낫이 달린 쇠사슬이 건네지자, 용병대장은 그걸 길게 잡고 위로 휘둘렀다. 즉시 위협적인 파공음이 공기를 갈랐다.

윙윙윙윙!

“모두 물러서!”

익숙한 무기의 굉음에 용병들은 그 즉시 뒤로 물러섰다. 로메인은 갑자기 자신에게 쏘아지는 쇠사슬을 보고 재빨리 옆으로 피했다.

콰콰쾅!

고급스러운 대리석이 산산조각 나면서 조각들이 허공으로 비산했다. 쇠사슬이 마치 두꺼비 혓바닥처럼 빠르게 돌아갔다. 로메인은 옆에 난 거대한 구덩이와 쇠사슬을 보고 사나운 웃음을 지었다.

“감히!”

그는 즉시 몸을 돌려 용병대장을 향해 내달렸다. 순식간에 가속된 움직임은 실로 전광석화! 용병대장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재차 쇠사슬을 돌리다 실수를 깨닫고 몸을 피했다. 저 속도면 무기를 쓰는 것보다 피하는 게 옳다. 그러나 로메인이 한발 더 빨랐다. 그는 난무하는 쇠사슬의 그림자를 재빨리 피해, 용병대장의 대가리를 으깨 버렸다.

“으아아아아악!”

촤악!

끔찍한 비명과 함께 새빨간 핏물이 바닥으로 튀었다. 용병들은 머리 반이 사라진 자신들의 대장을 보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핏물이 용솟음치는 것은 뒤의 일이다. 털썩, 시신이 바닥으로 쓰러지며 먼지가 일었다. 로메인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날이 서지 않은 가검이라 상처가 지저분하군.”

“이런 개 같은!”

용병들은 이를 악물었다. 마치 개 한 마리 죽였다는 저 태도가 몹시 거슬린다. 하지만 섣불리 다가서지는 못했다. 무심하게 하는 말에 느껴지는 피 내음이 자기들 못지않았으니까. 실로 옳은 선택이었다. 자고로 기사란 쉽게 생명을 거두지 않는 법이지만, 지금 로메인은 그런 것 따윈 상관치 않는 상태였던 것이다.

“민생을 흉흉하게 하는 도적에게 아량을 베풀 이유는 없다. 하지만 걱정 마라. 고통 따위는 느낄 새도 없이 단박에 없애 주겠다!”

“!!”

용병들은 이를 악물고 로메인에게 달려들었다. 초반엔 돈이 목적이었다면, 이젠 살기 위해서 달려들 차례였다.

챙챙챙챙!

죽기 살기로 달려들었다. 맞서는 로메인 역시 상당한 분전을 거듭했다. 초반에 보인 놀라운 실력은 여전했지만, 생사를 도외시하고 달려드는 자들을 대상으론 그도 조금 힘들다. 하지만 힘이 들다 뿐, 승기는 여전히 로메인에게 있었다. 시간이 걸렸지만 그의 검은 하나둘 용병들을 분명 쓰러뜨리고 있었다. 그 꼴을 보던 버나드의 얼굴이 급격하게 구겨졌다.

“제, 젠장! 빌어먹을, 돈값을 못하잖아!”

버나드는 분통을 터트렸다. 분명 제일 잔인하고 실력 좋은 자들이라 고용했다 들었건만,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그러나 이것은 그의 오해다. 오랫동안 합을 맞춘 용병들의 실력은 정말로 어지간한 기사는 이기지 못할 정도로 대단했기 때문이다. 단지, 그보다 로메인이란 남자의 실력이 실로 굳건했을 뿐. 작은 창으로 거대한 벽을 아무리 공격해 보았자, 이기는 건 벽 쪽일 수밖에 없었다. 모든 공격이 속수무책으로 이어지질 못한다. 급기야 용병들의 투기도 슬금슬금 내려갔다. 합격술로 간신히 현상유지는 하고 있었지만, 이대로는 다 죽을 것이 뻔했다. 용병들의 시선이 서로를 향해 움직였다.

―어쩌지?

―이대로는 다 죽을 거야!

―…도망칠까?

아무리 돈이 좋다 한들 살아 있어야 쓸 수 있는 것. 두목이 있으면 모를까 머리 없는 용병단들에게 더 이상의 승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으아아악!”

또다시 로메인의 검 아래 용병단이 쓰러졌다. 단박에 반으로 줄어든 자신들의 머릿수를 본 순간 용병들은 마음을 정했다.

튀자!

그들은 로메인의 검격을 간신히 받아 내면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슬슬 몸을 빼다 일제히 로메인을 향해 무언가를 던졌다. 로메인은 재빨리 자리를 피해 뒤로 물러섰다. 그것이 무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게 바로 속임수였다.

로메인이 몸을 사린 그 틈을 타, 용병들 모두가 죄다 꽁무니를 빼고 도망갔던 것이다.

“이, 이놈들이!”

버나드가 경악성을 내질렀다.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사태였다. 돈을 받을 대로 받은 놈들이 죄다 도망가다니!? 허나 아무리 그가 외쳐도 고용한 자들은 이미 꽁지를 빼고 달아난 후였다. 허탈해진 버나드를 향해 로메인은 흥 소리도 내지 않고 검을 고쳐 세웠다.

“상급 기사를 하급 기사로 묶어 놓는 것은 가능한 일. 허나 돈에 눈먼 자가 진정 기사들 같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차라리 공비 전하의 선택이 더 위협적이다. 어째서 공비 전하가 네게 이 일을 말하지 않았는지 알겠다. 아무리 자기 자식이라도 큰일을 도모하기엔 믿음직하지 않았겠지.”

로메인의 힐난에 버나드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네, 네가 뭘 안다고!”

“죽기 싫다면 비켜라. 이미 살계를 연 이상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을 테니!”

로메인의 으름장은 실로 매서웠다. 사람을 죽여 흥분한 기사의 뇌까림은 그냥 말이 아닌 실체적인 위협이었다.

그러나.

“너야말로 중요한 게 뭔지 잊은 거 아닌가? 로메인!”

“?!”

로메인은 갑자기 들려오는 패트릭의 목소리에 눈을 돌렸다가 얼어붙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검신으로만 위협하고 있던 검이, 날을 세운 채 렉시의 목가에서 번뜩이고 있었다.

“패트릭!”

그는 보란 듯이 날을 세운 검을 렉시의 목에 꾹 눌렀다. 그리고 로메인을 향해 으르렁댔다.

“검을 버려!”

“잠깐! 기레스 백작! 그만해!”

“당장 버려라!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레스 백작은 살기가 등등한 얼굴로 검날을 짧게 쳐 냈다. 그러자 렉시의 파르스름한 피부 위로 실금이 생기면서 핏방울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으악! 지켜보던 사람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멀리서 보기엔 목을 베어 낸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패트릭은 입을 딱 다문 로메인을 향해 고소를 머금었다. 해묵은 원한이 배 속에서 꿈틀대며 기지개를 켰다.

“방금은 그저 피를 낸 것뿐이지만 다음은 그 이상이 될 거야. 당장 검을 버려!”

“…!”

챙그랑!

로메인은 부들부들 떨다가 검을 떨궜다. 챙그랑! 차가운 소리를 내며 검이 대리석 바닥 위를 쳤다. 지켜보는 렉시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안 돼요 로메인!”

“시끄럽다고 했지!”

패트릭은 눈을 사납게 부라리며 재차 검을 쳐 냈다.

“악!”

날카로운 아픔이 목 위를 내달렸다. 서걱, 섬뜩한 소리와 함께 실금이 조금 더 벌어지며 피가 터졌다. 예복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꺄아아아악!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마치 환청처럼 렉시의 귀를 울렸다. 렉시는 순간 숨이 턱 하니 막혔다. 목덜미가 마치 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아, 아파….”

뚝, 뚝….

몸을 타고 흐른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새하얀 대리석 위로 흩어진 핏방울이 바닥으로 소리도 없이 스며들었다. 생각보다 깊게 베인 듯, 핏물이 금세 웅덩이를 이루는 모습에 렉시는 순간 눈이 아찔해졌다. 얼마나 베인 걸까? 많이 베였나?

잘은 모르겠다. 허나 충격으로 몸이 덜덜 떨려 오는 것이 자신이 좋은 상태는 아닐 거라는 건 무척 명확했다.

“렉시!”

견디다 못한 로메인이 렉시를 향해 달려왔다. 쿵쿵, 바닥이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두두두두 하고….

……응?

렉시는 이상한 느낌에 눈을 부릅떴다.

발이… 아니, 바닥이 요동치고 있었다.

드드드드드드드….

그것은 마치 먼 데서 수만 마리의 말들이 내달리는 것처럼 몰려왔다. 중갑옷을 입은 기사단들이 대지를 달릴 때 생기는 충격파 같은 것이 바닥을 뚫고 위로 솟구쳤다. 처음엔 미미했던 충격파가 시간을 가할수록 점점 커진다. 렉시가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시작된 잔떨림이 점차 홀, 그리고 성안을 뒤흔들었다. 이 흔들림은 달리던 로메인의 발까지 잡아챘다. 홀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불길함이 몸을 타고 올라왔다.

“이…이건?”

이것이 무엇인가. 혼란은 길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얼마 전 이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에서 점차 핏기가 사라졌다. 누군가 목구멍을 짜내며 쉰 목소리를 냈다.

“지… 지진! 지진이다!”

“으아아악!”

사람들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쳤다. 그 말이 도화선이 되었을까? 바닥이 마치 파도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쿠쿠쿠쿠쿵!

좌, 우, 위, 아래, 마구잡이로 흔들리는 지진파엔 이상할 정도로 규칙성이 없었다. 한참 흔들리던 바닥이 삽시간에 뚝 그쳤다. 흔들리는 바닥 위에서 필사적으로 몸을 지탱하던 사람들은 혼비백산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했다.

지진이… 멎었다?

“아니다! 다시 또 올 거야! 지진은 여러 번 온다!”

“어서 나가! 여기 있으면 죽어!”

누군가 외쳤다. 깔려 죽건 어찌 죽건 실로 맞는 말이라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기 위해 미친 듯이 뛰었다. 허나 이것이 무슨 일인가? 그때, 마치 거짓말처럼 위에서 거대한 석조물이 문을 향해 떨어졌다. 이 떨어진 석재가 문에 직격했다.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리면서 석재가 반으로 쪼개졌다.

콰카카캉!

사람들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자욱한 먼지구름이 문 쪽에서 일어났다. 뿌연 구름이 걷히자, 거기엔 석재에 직격한 철문이 크게 구부러진 채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 완악할 사태에 사람들이 뒤집어졌다.

“!!! 무, 문이!”

“꺄아아아아아! 갇혔어요!”

홀 밖으로 나가는 출입구는 저것 하나. 물론 내부와 연결된 출입문이 있긴 했다. 그러나 그쪽도 이쪽과 상황이 비슷하게 진행됐다. 쾅, 쾅쾅!

똑같이 위에서 떨어진 석재 때문에 문들이 죄다 막혀 버렸다. 우연치곤 기가 막힐 정도로 고약한 사태였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우왕좌왕 갈 곳 몰라 했다. 그때였다.

“무, 문을 가리고 있는 바위를 부숴라! 내부 출입문으로 들어가면 다 죽어!”

누군가 악을 썼다. 목소리는 정확히 단상 아래에서 나오고 있었다. 시종장이었다.

“시, 시종장님!”

“이 홀은 외부와 연결된 문이 저거 하나야. 나머지는 모두 내궁이다! 기사단 모두 바위를 부숴라!”

그는 옆에 플로랑 후작을 낀 채 고래고래 소리쳤다. 플로랑 후작은 기절한 채였다. 무슨 생각으로 그가 후작을 구했는지는 아마 그만이 알 것이지만, 어쨌거나 기사단들은 시종장의 말에 즉시 움직였다. 어쩌다 보니 공비와 함께 등장하긴 했지만 이 기사단을 총 지휘하는 것은 시종장이었기 때문이다. 기사단들이 즉시 검을 잡고 문으로 달려갔다. 갑작스레 호위가 모두 사라진 공비가 그런 그들을 향해 방방 뛰었다.

“잠깐! 몇 명은 나를 지켜야 하지 않느냐! 왜 모두 거기 가는 것이야?!”

기사가 분통을 터트리며 공비의 손을 털어 냈다.

“지금 그걸 따질 때입니까? 이대론 다 죽습니다!”

“난 공비다. 황족이고! 이 무엄한 것들! 응당 나부터 지켜야 할 것 아닌가!”

“…놓으십시오!”

털썩, 기사단이 공비를 뿌리치자 그 기세에 그녀가 바닥을 굴렀다. 그녀는 독살스러운 눈초리로 기사들을 노려봤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신분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기사들은 개의치 않고 시종장의 말을 따랐다. 잠깐 진동이 멎은 사이 그들은 열심히 바위를 부쉈다. 캉캉! 기사의 검기에 바위가 조금씩 잘려 나갔다. 지켜보던 사람들의 얼굴이 조금씩 환해졌다. 그러나 희망도 딱 거기까지였다. 상황은 기사단을 도와주지 않았다.

―그그그그그…

또다시 진동이 사람들을 덮쳤다. 덜덜덜덜 떨리는 바닥 때문에 몸을 가눌 수가 없게 되자 사람들은 급기야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안았다. 이건 패트릭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렉시를 붙들고 머리를 숙이며 돌부스러기를 피했다. 그리고 바로 이 틈을 로메인이 놓치지 않았다. 퍽! 그는 갑자기 달려든 로메인의 강격에 뒤로 휘청하고 나자빠졌다. 큰 충격이 머리를 강타했다.

“큭!”

패트릭은 이를 악물고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지금 상황에서 렉시를 놓치면 죽도 밥도 안 된다. 그는 재빨리 렉시의 뒷목을 잡아챘다. 허나 이번은 상황이 그를 돕지 않았다. 다시 파도처럼 출렁이는 바닥이 그의 몸을 쿵 하고 직격, 그는 결국 렉시를 잡은 손을 놓쳤던 것이다.

쿠당탕탕!

“이런 젠장할!”

패트릭은 텅 빈 손을 보며 바닥을 쳤다. 허나 렉시는 그의 품을 벗어나 로메인에게 안전하게 넘어간 뒤였다. 이렇게 렉시의 신변을 확보한 로메인은 그 즉시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렉시의 상태를 살폈다. 아까부터 가슴을 틀어막는 것 같은 느낌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는 그였다. 그가 다급하게 렉시의 안위를 물었다.

“렉시! 렉시! 괜찮습니까!”

“으, 으응….”

전기 같은 충격이 발끝까지 달려갔다. 짜릿하면서 아픈 무언가가 심장을 내달렸다. 로메인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렉시의 상처를 살폈다. 아직 목에선 줄줄 피가 나오는 상태였다. 로메인은 즉시 자신의 망토 끝을 쭉 찢었다. 얼핏 봐도 심각한 상처였지만, 놀라면 출혈이 더 심해질 것이다. 그는 렉시가 놀라지 않도록 다정하게 말했다.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아셨지요? 가만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일단 상처를 묶어 드리겠습니다.”

그는 망토 자락으로 목덜미를 지압했다. 오랜만의 붕대였지만 머리보단 손이 먼저 기억했다. 렉시는 점점 정신을 차려 갔다. 까막까막하던 눈앞이 조금씩 보이며 자신을 안은 로메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로메인….”

“정신이 듭니까?”

“예, 저걸 보니 아주 확 드네요….”

렉시가 보는 건 흙먼지가 떨어지는 천장이었다. 벽들은 온통 갈라져 자칫 잘못하면 그대로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렉시는 로메인의 품에 안긴 채 위를 바라보았다. 떨어지는 흙먼지가 마치 눈 같다. 렉시가 파리한 얼굴로 달싹댔다.

“비밀 통로… 나갈 수 있나요?”

“…안 됩니다.”

로메인은 이를 악물었다.

“통로는 지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마 다 무너졌을 겁니다. 저들이 문을 열면 그때 나가야 합니다. 가만. 그 유니콘, 그 유니콘은…?”

로메인은 엘피디오스가 있던 곳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렉시가 누워 있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은 소환이 취소됐어요. 기사단을 상대로 전투하라 한 조건 때문에… 조건이 사라지니 취소된 거죠.”

엘피디오스의 소환은 하루 한 번이 한계다. 렉시는 입술을 깨물었다. 핏기가 빠진 입술이 잘근잘근 씹혔다.

“아무래도 이 지진…. 이상해요. 저번 지진도 이런 식으로 일어났었나요?”

“…아무래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여기 원래 이랬어요? 이렇게 지진이 자주 일어나다니….”

“아닙니다. 역사서에 보아도 지진이 일어났단 기록은 없다시피 합니다. 과거에도 이렇게 연속적으로 지진이 일어난 적은 없…!”

로메인은 말을 하다 말고 재빨리 렉시를 안고 자리에서 비켜섰다. 그것은 거의 본능이었다. 등줄기를 내달린 불길한 느낌에 자리를 피한 상급 기사의 본능. 그리고 본능은 아주 훌륭하게 주인을 지켜 냈다. 그가 자리를 피하자마자 갑자기 지반이 침하되며 구멍이 생겼다. 작았던 구멍이 점차 커지며 대리석들이 안쪽으로 와르르 쏟아졌다. 모든 것이 삽시간에 부서지며 거대한 구덩이가 만들어진다. 끔찍한 소리로 공기가 거세게 떨렸다.

콰가가가광!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로메인을 안고 비명을 질렀다.

“바, 바닥이!”

“절 꼭 잡으십시오!”

로메인은 허벅지에 힘을 주고 위를 향해 뛰어올랐다. 렉시를 안고 있음에도 위로 수 미터를 솟구친다. 실로 신기에 가까운 움직임에 렉시는 놀랐다. 이게 바로 상급 기사의 실력인가? 어쩌면 자신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거지, 자신만 아니라면 로메인은 어디로든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됐어. 헌데 저건…?’

렉시는 로메인에게 매달린 채 뻥 뚫린 무지막지한 구덩이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얼핏 봐도 지름만 십여 미터는 될 것 같은 구덩이 아래는 마냥 시커멨다. 바닥이 가늠되지 않는 거대한 암흑이 거기 있었다. 대관절 얼마나 깊기에 저토록 시커멓지? 설마 원래 있었던 구멍이었나? 아니면 이 지역이 지반 침하 지역이었던 걸까?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여긴 수도였다고.’

달리아가 있었을 당시엔 마법이 존재했다. 일국의 수도, 성의 위치를 그런 침하 지반 위에 세울 리가 없다. 이리 재고 저리 재서 정하는 것이 일국의 수도 자리였다. 허면 저 구덩이의 존재는 대체 무엇인가. 얼마나 깊은지 바닥조차 보이지 않는 저……!

“저, 저길 봐요! 로메인!!”

렉시는 비명을 질렀다. 렉시의 비명 소리에 따라 그쪽을 바라본 로메인의 얼굴이 경악으로 크게 굳었다.

“저건…!”

처음엔 자신들이 잘못 보았노라 생각했다.

워낙에 상상 외의 것인지라 머리가 받아들이길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것이 반쯤 위로 솟아오르는 것이 모두의 눈에 들어오자 잘못 보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거대한 몸체를 가졌고, 한때 이 대륙 일부를 지배했었으며 지금은 신화 속의 무언가로 자리한 것.

구멍을 통해 야트막하게 솟아오른 그것은, 바로 그 어떤 것의 일부였다.

렉시는 떨리는 목소리로 어떤 것의 정체를 외쳤다.

“…용…!”

구멍을 통해 솟아오른 것은, 용의 안면부―정확히는 용의 눈꺼풀이었다. 렉시는 두 눈을 부릅뜨고 거대한 그것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순식간에 대륙의 역사가 스쳐 지나갔다. 모든 대륙의 역사는 용에게 이런 이명을 붙여 놓았다.

재해.

재난.

대륙의 악몽.

저 용은 대체 뭘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뒤이어 공작가의 이야기가 머릿속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이곳에 오기 전 들었던 공작가의 역사. 달리아의 용, 공작가의 전설.

“설마… 그렇다면 저건…!”

달리아의 수호자, 힐라그라스.

저건 분명 그거였다. 그 용이 여기 있었다.

거체를 가진 빙룡, 대륙의 지도를 반으로 쪼개 놓은 제국의 악몽!

“힐라그라스!”

말도 안 돼! 렉시는 정신없이 외쳤다.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가 알기로 힐라그라스는 여기가 아니라 북쪽 땅에 있어야 했다. 그것도 거기서 잠을 자고 있어야 했다.

“로메인! 힐라그라스예요. 힐라그라스!”

으아아아악!

렉시와 로메인은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두 사람을 보았다. 둘을 제외하고 가장 단상 가까이 있었기에 저 용을 본, 버나드와 패트릭이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달아나 문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난리 법석은 아직까진 단상 아래 사람들에겐 와닿지 않았다. 아래쪽에 위치한 터라, 용의 눈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로메인은 그들을 보다가 렉시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네, 그렇군요. 용입니다…!”

렉시는 로메인 역시 용의 존재에 위압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용맹무쌍하던 로메인조차 이럴 정도로 용의 존재는 무시무시한 압박감을 선사했다. 렉시는 입술을 깨물었다.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저게 여기 있는 걸까?

“어째서 용이 저기에 있을까요…? 그 용은 저기 북쪽의 땅에 있어야 하지 않나요?”

“저도… 그렇게 알았습니다. 분명 역사엔 그렇게 나와 있었으니까…요!!”

뒷말을 거의 내뱉으며, 그는 렉시를 안고 뒤로 멀찍이 물러섰다. 짧은 흔들림이 또다시 바닥을 덮치고 있었다. 지진은 짧지만 잦게, 그리고 점점 크게 주변을 덮쳤다. 덕분에 아직까지도 사람들은 용의 존재를 깨닫지 못했다. 이 지진에 혼이 팔려 죄다 문이나 근처에 붙어 머리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가면 다들 용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지금은 그저 눈꺼풀이지만, 나머지 부분이 점점 위로 융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용이 대체 언제부터…. 그보다 어째서 용이 지금 나타난 거죠? 전설대로라면 용의 피가 위험할 때 나타난다고 했는데…! 혹시 당신이 위험에 빠져서?!”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위험해서 그랬다고 하기엔…!”

로메인은 이야기를 하다 말고 혀를 깨물었다. 거대한 용의 눈꺼풀이 서서히 열릴 준비를 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꿈틀거리며 움직거리는 눈동자가 그 시간이 임박했다는 걸 알려 주고 있었다. 사람이건 파충류건 일어나기 전엔 눈부터 뜬다. 그건 긴 잠에서 깨어나기 직전 모든 생물이 취하는 행동이었다.

쿠구구구궁!

눈꺼풀로 덮인 눈동자가 움찔거릴 때마다 바닥에서 미친 듯이 지진이 일어났다. 움찔대는 정도가 커질수록, 파도처럼 덮쳐 오는 진동이 더욱 심해졌다. 이로써 이 지진이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 것인지 너무나도 명확했다. 대지에 묻힌 용이 깨어나고,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지진이 났던 것이다.

렉시는 신음을 삼켰다.

“용이 움직이면서… 지진이 난 것이군요!”

“그런 것 같습니다. 다시 재워야 합니다!”

저것이 깨어나면 공작령 전체가 박살이 날 것은 명약관화. 더해서 제국의 안위에도 크나큰 위험이 도래할 것이다. 공작령을 위시한 제국의 남서부 지역은 대륙의 곡창 지대였다. 용이 깨어나 이곳에 도사리게 되면, 빙룡의 특성상 주변이 얼어붙을 터. 허면 제국의 신민들 대부분이 굶주림으로 허덕이게 되리라.

“하지만 어떻게요?”

“그건…저도 모르겠습니다.”

“역사서엔 그런 말이 없었나요? 여왕 때 지진이 났다고 했잖아요?”

“그런 말은 없었습니다. 단지 지진이 일어났다가…. 그래요, 여왕!”

로메인은 무언가를 떠올린 듯 얼굴을 찌푸렸다.

“여왕이, 여왕이 지진을 재웠다고 했습니다.”

“여왕이?”

렉시는 입을 벌렸다. 설마, 지금 상황에서 여왕이라면―.

“설마, 공작 전하요?!”

“그렇습니다!”

렉시는 아찔해졌다. 실로 그럴 수밖에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공작이라니? 공작은 지금 여기 없는데!

“지금 이 자리에 없잖아요! 전하를 어디서 찾아요?”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렉시는 파리한 얼굴로 용의 눈꺼풀을 바라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오는 사태였다. 저 용이 있는 것도, 또 깨어나고 있는 것도 이해 불가인 지점 아닌가. 하지만 로메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일단 해 볼 만한 것이 딱 하나 있었다. 자신은 없었지만, 지금은 그것 하나뿐 이다.

“로메인, 지금 공비 전하 옆에 사람이 있나요? 기사나?”

로메인은 렉시의 말에 뒤를 힐끔 돌아봤다. 뿌옇게 일어난 먼지구름 사이에서도 여자의 모습은 선명했다. 그것은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공작가의 인장 덕분이었다. 그는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습니다.”

“혹시 그녀가 지금 인장을 들고 있나요?”

“네, 그렇습니다. 헌데 그건 왜…?”

렉시의 눈이 반짝 빛났다.

“좋아요. 지금 당장 그걸 가져와요.”

“예?!!”

로메인이 놀라 렉시를 바라봤다. 인장이라고? 그는 대관절 렉시가 왜 이런 걸 시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렉시가 다음 한 말을 듣자, 이전에 한 의문 모두를 잊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잘하면 저 용을 재울 수 있을지도 몰라요!”

“…!”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렉시의 말은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을 로메인조차 이 말엔 순간 말을 잊었다. 그는 렉시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이 순간 그의 말을 믿고 따르는 자신이 있었다. 일단 이 상황을 어떻게든 할 수 있는 것은 그밖에 없을 것 같았던 것이다. 이것이 어디서 오는 확신인지는 잘 모른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고밖에는.

그는 조심스레 렉시를 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때마침 지진이 다시 잦아든 게 천행이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그는 그렇게 그대로 몸을 날려 공비를 향해 달려갔다. 희뿌연 연기가 있었기에 몸을 사릴 필요도 없었다. 그는 몸을 날리면서 목청 터지게 공비를 불렀다.

“공비 전하!”

“? 누구?!”

몸을 숙이고 머리를 감싸 쥐고 있던 공비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머리를 들었다. 혹시 누군가 와서 자신을 보호하려는가? 그러나 머리를 든 순간, 그녀가 본 것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로메인의 모습이었다. 살기가 등등한 얼굴 위에 스친 긴장감을 본 순간 그녀는 꺄아악 비명을 질렀다.

“로, 로메인! 꺄아아악!”

나를 칠 건가?! 그녀는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몸을 보호했다. 한쪽 팔에 든 인장도 무의식적으로 마구 휘둘렀다. 그것이 실수였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인장은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아, 아 안 돼!”

메르디스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인장! 인장이!

“네 이놈! 감히 인장을!”

메르디스는 앉은 채 펄펄 뛰었지만 로메인은 이미 바람처럼 돌아간 뒤였다. 그는 헐떡대지도 않고 렉시에게 돌아와 인장을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좋아요. 그거 잡고….”

렉시는 로메인이 가져온 인장을 확인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혹시라도 못 가져오면 어쩔까, 혹 생각대로 안 되면 어떨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어디 보자, 렉시는 재빨리 인장 끝 보석의 색을 확인했다.

“연하긴 하지만, 확실히 색이 변했네요. 로메인은 역시 자격이 있어요.”

“무슨 소리입니까?”

“색이요. 인장 색이 변했잖아요?”

공비의 손에서 희게 빛나는 인장을 보았을 때부터 대충 눈치깠다. 자신이 비슷한 걸 가지고 있었기에 더 그런 면도 있었지만. 렉시는 로메인 손에서 엷은 분홍빛으로 빛나는 인장을 가리켰다.

“혈통 인식 마법이에요. 흐리지만, 확실히 변했어요. 경이 이 공작가의 핏줄을 잇고 있다는 훌륭한 증거죠.”

공비가 인장을 훔친 것도 이것 때문인 것 같네요. 렉시의 중얼거림에 로메인은 인장을 말끄러미 보다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확실히 이런 식이라면 그녀가 훔친 이유가 말이 됐다.

“헌데 이걸 가지고 뭘 하실 건지?”

“어쨌거나 이걸 가지고 있고, 혈통 역시 확인됐어요. 그럼 이제 경이 지금은 공작이에요.”

“네?!”

로메인은 황당함에 소리쳤다. 그러나 렉시는 무척이나 진지했다.

“공작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면서요?”

“하지만 제가 어떻게…!”

“어차피 이거 말곤 수도 없어요. 여기 그럼 달리 공작이 될 사람이 있나요? 경밖에 없어요. 이걸 들고 한번 빌어 보든가 해 봐야죠! 이대로 가면 다들 죽어요!”

렉시의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렉시도 이게 반쯤은 억지인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인생 뭐 있나, 한번 도박을 걸어 보는 거지! 로메인은 그런 렉시의 얼굴을 당혹한 얼굴로 보다가 맘을 굳게 먹었다. 뭔가 이상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이것 말고 수가 없다는 덴 그도 동감이었다.

“알겠습니다. 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역사서에선 달리아의 여왕이 지진을 어떻게 진정시켰다고 했나요?”

로메인의 눈 위로 빠르게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과거에 읽었던 역사서를 떠올려 보는 것이다. 달리아, 이백 년 전, 역사서의 문구들.

한참 그러던 그가 드디어 원하는 구절을 기억해 냈다. 분명, 그러니까―.

“힐라그라스!”

“예?”

“이겁니다. 그녀는 용의 이름을 불러 지진을 진정시켰다고 했습니다.”

렉시는 로메인의 말에 침을 꿀꺽 삼켰다. 용의… 이름을 부르는 것?

“그럼 다시 한번 불러 보세요. 한 번 가지고 안 될지도 몰라요.”

“―힐라그라스!”

“다시요!”

이번엔 인장을 치켜들어 보세요! 렉시의 말에 로메인이 긴장된 얼굴로 인장을 높이 치켜들었다.

“―힐라그라스!”

그리고, 놀랍게도.

―누구냐.

답이 왔다.

“!!”

―누가 감히 나를 부르는가?

렉시는 입을 떡 벌리며 앞을 바라보았다. 눈앞에서 실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거대한 공동 위로 환한 빛이 떠올랐다. 크기로는 어른 주먹만 한 빛이었다. 그것은 마치 태양처럼 밝았지만, 이상하게도 태양처럼 눈이 시리지 않았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빛이 아니라 그것이 떠오르자 일어난 일이다. 빛이 웅― 하고 울자, 마치 거짓말처럼 모든 것이 멈추었다. 바닥을 울리던 잔 떨림이 멎었다. 그리고 공기도 숨을 죽였다.

마치 시간이 이 장소만 지나쳐 지나는 것 같았다. 공중에 떠오른 먼지조차 우뚝 멈춰 빛의 울림에 주목하는 듯했다. 피어오르던 먼지도, 소리도, 소란도 모두 삽시간에 사라지고 적막해졌다. 홀 안에 갇혀 있던 다른 인파들도 이 기이한 장면을 목격했다. 그들은 정확한 사정은 몰랐지만, 갑자기 벌어진 이 이상한 사태와 저 빛이 연관이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헉 소리도 내지 않고 주변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우웅.

다시 빛이 진동하며 길게 울렸다.

―나를 부른 자, 이름을 밝혀라.

렉시는 멍하니 우뚝 서 있던 로메인을 쿡 찔렀다. 로메인은 움찔했다가 얼른 그 말에 대답했다.

“저는 로메인입니다. 로메인 드 데퓨탄.”

―로메인, 드 데퓨탄.

빛은 잠시 조용히 있다 되물었다.

―달리아의 다음 이름이 데퓨탄인가?

잠시 생각하던 로메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달리아의 다음 이름은, 프로하우스입니다.”

―너는 달리아의 피를 이은 자인가?

“네, 그렇습니다.”

―인장을 내게 보여라.

로메인은 아무 말 없이 인장을 높이 치켜들었다. 빛, 아니 빛의 형상을 한 용이 볼 수 있게끔. 한참 있던 용이 로메인에게 물었다.

―…그래. 진짜이군. 로메인 드 데퓨탄이여, 나를 왜 불렀는가?

“당신이 깨어난 것을 알고, 착오를 다시 바로잡고자 불렀습니다.”

―착오라고?

“네. 큰 착오가 있었습니다. 당신이 깬 것은 이유가 없고, 또한 위험한 자 역시 없습니다. 그러니 부디 다시 잠들어 주시길 간청드립니다.”

―……이해할 수가 없군.

빛은 한참 동안 말이 없다 한마디 했다. 로메인은 용을 위해 서둘러 상황을 설명했다.

“당신께오서 깨어나신 이유를 다는 모릅니다만, 전설이 맞다면 이것이겠지요. 피를 이은 자가 위험에 빠진 것. 허나 용이여, 저는 전혀 위험하지 않았습니다. 위기에 처해 있긴 했지만, 혼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외려 위험한 것은 당신께서 일어난 뒤 벌어지는 일입니다. 당신께서 지금 일어나면, 공작령과 성이 완파되는 것은 물론, 이후 이 근방 지역은 쓸 수 없는 땅이 될 겁니다. 저는 그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니 부디 다시 잠들어 주십시오.”

긴 침묵과 간극이 묵직하게 공간을 갈라 냈다. 용의 빛은 조용하게 빛나며 로메인의 말을 되새기는 것 같았다.

―그런가. 네 말은 잘았다. 허나 네 간청은 거절한다. 나는, 지금 일어나야만 하기 때문이다.

“!! 어, 어째서입니까?”

―내가 일어난 이유는 네 말이 맞다. 여왕의 피가 이 땅에 흘렀기 때문이지. 때가 되었을 때, 나는 그이를 돕기로 이미 맹세한 바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일어나 그 적을 쳐야만 한다. 그것이 약속이었다.

“그것이 착오입니다! 저는 위험하지 않았습니다!”

―만민을 긍휼히 여기는 너의 뜻을 내 모르는 바는 아니다. 네 정의로움은 나 또한 불을 보듯 알겠노라. 네 그 정의로움으로 인장을 받은 것인가.

허나 나의 피를 이은 자여, 내 말하노라.

나는 한때 이런 말을 한 바 있었다.

‘용의 표식을 이은 이를 해하는 자, 용의 저주가 내리리라. 그의 피가 이 땅 위에 흐르는 그 날 용의 분노가 도래하리니, 이것은 용의 이름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이어질 맹세로다.’

인장을 가진 나의 후손이여.

나는 맹세를 지키는 용, 따라서 이를 지키기 위해 살아야 한다.

네 말을 들어주고 싶으나, 너는 이 맹약을 멈출 자격이 없구나.

따라서 나는 네 말을 듣지 아니할 것인즉, 이제 일어나 그자를 돕고 그자를 해한 자를 찾아 천지를 떠돌리라.

“!!!”

로메인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뭐라고? 용의 단호한 거절에 로메인은 기가 질렸다. 외려 펄쩍 뛴 건 옆에서 듣던 렉시였다. 로메인이 충분히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절한 걸 들은 렉시는 겁도 없이 용을 향해 크게 외쳤다. 맹세는 무슨 개뿔!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위험을 당한 당사자가 위험하지 않다는데요!”

용의 눈이 로메인에게서 빗겨나 렉시를 바라보았다. 그는 렉시를 보며 흥미롭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내 이름은 알렉시아노 드 페르귄! 페르귄 가문을 이은 남작입니다. 용이여, 들어 보십시오! 당신은 과거에도 이러한 일이 한 번 있었을 것입니다. 달리아의 마지막 여왕이 당신을 한 번 불러냈었지요! 허나 그때엔 그냥 들어가시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비슷합니다. 자격이라뇨? 위협을 당한 당사자만큼 확실한 자격을 가진 자가 어디 있습니까?”

―…알렉시아노 드 페르귄?

“그렇습니다!”

렉시를 보는 용의 빛이 일순 환해졌다. 어쩌면 번뜩였을지도 모른다. 색에도 감정이 있다면, 그렇다면. 렉시는 용이 어쩐지 희한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것 같다고 느꼈다.

―왕의 이름을 가진 남작이여. 그래, 너는 내가 맹약을 지키는 걸 원치 않는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어째서?

“당신이 여기서 일어나면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테니까요. 이곳은 한때나마 당신이 다스렸던 땅입니다. 부디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 …네 목에서 피가 흐르고 있구나. 꽤나 깊은 상처였으리라. 넌 네 피를 흘린 자가 원망스럽지 않다는 것이냐?

“아프지만 견딜 만한 아픔입니다. 설령 저라 해도 대답은 똑같을 겁니다. 이것보다 사람들이 죽는 것이 더 싫으니까요. 또한 더해서, 남의 손으로 하는 복수에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맹세를 지켜야만 한다. 맹세란 용의 존재와 일맥상통하노라. 이것은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당신의 분노는 이 지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허면, 저주는 어떤가?

“그것은 청컨대 원하는 만큼 하십시오. 저희가 막고자 하는 것은 대량 살상이니까요. 단지, 당신은 여기서 일어나셔서는 아니됩니다. 제발 과거 달리아의 여왕에게 보여 주었던 아량을 보여 주십시오.”

―…….

빛, 아니 용은 한참 침묵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렉시와 빛의 대화를 엿들었다. 다들 달리아, 아니 프로하우스 공작령과 얽힌 역사 일부는 알고 있다. 그들은 렉시가 무려 용과 담판 짓고 있다는 걸 알고 기이한 충격에 빠져 있었다.

“용이여. 제발!”

렉시가 재차 외치자 용이 한숨 쉬듯 말했다.

―그토록 원한다면야 어쩔 수 없지…. 좋다. 원한다면 그렇게 해 주겠다. 허나 잠드는 건 나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 이대로는 싫어도 내 몸이 스스로 일어나게 될 것인즉. 이건 나조차도 어쩔 수 없는 맹약 때문이다.

“!”

렉시가 크게 놀라자 빛이 부드럽게 웃음 지었다.

―허니 그대, 나의 진명을 불러 나를 잠에 빠지게 해다오. 쉬운 일 아니냐?

잠이라고? 이름을 불러서? 옆에서 렉시의 담판을 듣고 있던 로메인이 그 즉시 인장을 들고 외쳤다.

“…힐라그라스! 부디 잠에 들어 주십시오!”

―…그 이름이 아니다. 너희는 나의 이름을 모르는가?

렉시와 로메인은 크게 당황했다. 그 이름이 아니라고?

“힐라그라스가… 아니었습니까?”

―그것은 진명이 아닌 인간이 붙인 이름…. 용의 진명은 대대로 자격 있는 자만이 듣게 되어 있다. 달리아가 사라져도 왕가에서 용의 진명을 대대로 내려오도록 하였건만…. 안타깝구나. 자격을 갖추었으나 과거를 모르는 자, 자격이 없으나 열쇠가 있는 자만이 남아 있으니, 더 이상은 대화할 수가 없겠구나.

“요, 용이여!”

―미안하구나, 허나 나는 이제 맹세를 지켜야 하니….

환하게 빛나는 빛이 바닥으로 도로 사라졌다. 새까만 암흑에서 솟아올랐던 빛이 용의 눈꺼풀 안쪽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잠시 뒤, 다시 바닥이 파도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용이 다시 눈을 뜨려고 하는 것이다.

“안 돼! 다시 오세요! 힐라그라스!”

렉시는 안타까움에 소리쳤으나 이미 일은 그의 손을 벗어난 채였다. 쿠쿠쿠쿠쿵,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지진파가 바닥을 강타했다. 로메인이 렉시를 훌쩍 품에 안고 위로 풀쩍 뛰어올랐다. 더 이상은 안 되니 렉시를 끌고 도망치려고 하는 것이다. 렉시가 화들짝 놀라 로메인을 바라봤다.

“됐습니다 렉시. 충분히 했습니다.”

“로메인, 하지만! 이대로면 공작령은…!”

“저도 그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허나 이젠 수가 없습니다. 이 이상 당신이나 내가 할 일은 존재하지 않으니, 목숨이라도 챙겨야지요!”

로메인의 말은 무척 단호했다. 렉시는 아뜩한 눈으로 점점 융기하는 용의 눈꺼풀을 보았다. 저대로 눈부터 나와 머리가 나오면 어떻게 될까? 죽는 것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허나 저것이 깨어난 뒤 일어날 혼란이 더욱 두려웠다.

“아아아….”

렉시의 입에서 절망 어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정말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렇게 용이 깨어나는 걸 지켜봐야 하는가?

챙그랑!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천정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드디어 깨져 나갔다. 후두두둑 떨어지는 유리조각에 맞을지도 몰라 사람들이 다들 주변으로 황급히 피했다. 렉시 역시 로메인과 함께 글라스를 피해 구석으로 갔다. 헌데 바로 그때, 무언가 묵직한 것이 위에서 휙 하고 떨어져 렉시 앞으로 내려앉았다.

쿵!

렉시는 화들짝 놀라 앞을 바라봤다.

위에서 떨어진 것은 사람이었다. 덩치로 보아, 필시 남자였다. 로브를 깊게 눌러쓴 남자는 끙 소리를 내면서 일어나 섰다. 그리고 펄럭, 로브를 벗어 렉시와 마주했다. 새까만 로브를 벗자 드러난 것은 실로 놀라웠다. 만년설을 닮은 은발에 녹색 눈, 그리고 용의 핏줄을 나타내는 머리 위의 뿔이 마치 어둠 속 태양처럼 렉시의 시야에 들이찼다.

렉시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도무지 믿겨지지 않았다. 말문이 막힌 렉시 대신 상대의 정체가 흘러나온 건 동시에 그를 목격한 로메인의 입이었다.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남자를 보며 입술을 떨었다.

“공작…전하?!”

렉시와 로메인을 번갈아 보던 공작의 얼굴 위에 반가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나다.”

“!!!”

렉시고 로메인이고 죄다 말문이 막혔다. 진짜 공작이다. 진짜!!

“전하!”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공작은 그런 그들을 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보면 미안한, 혹은 다행이란 감정이 다분히 섞인 웃음이었다.

“늦어서 미안하구나. 하지만 잘 버텨 준 덕분에 시간이 맞았다. 이제 인장을 내게 다오.”

공작이 자신에게 손을 내밀자, 렉시는 흠칫 놀랐다.

“네?”

“어서! 용이 눈을 뜨려고 한다!”

“여기 있습니다 전하.”

공작의 외침에 로메인이 얼른 공작에게 인장을 건넸다. 그러자, 공작의 손에 들어간 인장의 끝부분이 루비처럼 새빨갛게 변하면서 휘황찬란한 빛을 발했다.

진정한 주인을 만난 인장의 빛은 본래 저렇게 붉은빛이 나는 법. 그 빛을 손에 안은 공작의 모습은 마치 성화 속의 성자처럼 보였다. 그게 너무나 눈이 부셔 렉시는 한쪽 눈을 가렸다. 시간차를 두고 공작의 등 뒤로 누군가 쿵 하고 떨어진 것 같았지만 렉시는 그게 누구인지 미처 보지 못했다.

둥둥, 인장이 제 주인을 만나자 기이한 파장이 퍼져 나가 주변을 에워쌌다. 마치 동심원을 그리는 종소리처럼 빛을 내뿜으며 기이한 아우라가 그들을 타고 퍼졌다.

쿠우웅!

세찬 바람이 홀 안을 돌개바람처럼 맴돎과 동시에 바닥이 슬슬 조각조각 갈라지기 시작했다. 렉시는 두 눈을 크게 뜨며 그 장면을 응시했다. 조금씩 움직이던 용의 눈꺼풀이 서서히 열리는 중이었다. 얼핏 뜨인 눈꺼풀 안쪽, 용의 눈동자는 짙은 숲을 닮은 녹색이었다.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그 눈동자를 빤히 응시했다.

저 눈동자를, 어디선가 본 것도 같았다….

“― ―――― ――― ―여!”

공작의 목소리가 귓전을 쟁쟁하게 울렸다. 약속된 인간이 아니고서는 들리지 않는 용의 진명이 공작의 입안에서 터져 나왔다.

“르 누르 아이베르크여! 청컨대, 잠에 빠져 주시오!”

[4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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