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시종장의 의심
“보고 올립니다.”
먼지 구덩이에서 나온 듯, 새까만 얼굴을 한 심부름꾼이 백작저의 한구석에서 무릎을 꿇었다. 움직일 때마다 폴싹대는 먼지가 맨눈으로도 보인다. 누군가를 만나기에 적절하지 않은 복장이 분명했지만, 여기 있는 누구도 그것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던 백작은 심부름꾼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은?”
“말씀대로, 돈은 아끼지 않았습니다. 고용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죄다 고용하여 인부로 일하게끔 했습니다. 신년이라 여기저기서 몰린 평민들이 많아 생각보다 더 많은 인력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무너진 건물들을 치우는 작업은 순조롭습니다. 슬슬 끝이 보이고 있습니다. 지금 상황대로면 일주일 이내로 다 치우고 정리할 수 있을 걸로 보입니다.”
본래라면 한 달은 족히 걸릴 일. 그러므로 남자는 백작이 자신을 크게 치하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주일이라고? 그게 최선인가?”
“그 일은, 본래 한 달은 넘게 걸릴 것이었습니다. 이 정도로 기한을 단축시킨 것만 해도 대단한 것으로….”
심부름꾼의 설명을 듣던 백작의 눈 위로 경멸이 스쳐 지나간다. 그는 겨울처럼 싸늘하게 내뱉었다.
“대단? 웃기군, 그런 말로 네 무능을 포장하지 마라. 그 정도 돈을 융통할 수 있으면 네가 아니라 열 살짜리 어린애도 그 정도는 해낼 테니까.”
“…죄송합니다.”
“여전히 그 입만 살았군. 쓸모없게스리.”
그는 못마땅하다는 듯 발을 굴렀다. 쿵. 숙이고 있던 남자의 어깨가 덩달아 흔들렸다.
“다른 것은? 흔적은 찾았나?”
“…네. 방의 흔적이 있는 곳까지 파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때마침 저녁이라 일은 중단했고, 밤늦게 저희 측 사람들이 가서 흔적들을 빼돌렸습니다. 모두 입이 무거운 자들입니다.”
“그래? 그리고?”
“걱정 마십시오. 이후 폐기는 아주 확실히 할 것입니다.”
“그 말이 아니야. 내가 명한 다른 일이 있지 않나? 그건 어떻게 되어 가나.”
백작의 채근에 남자는 말을 골랐다. 이미 한번 욕을 먹은 상태였으니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좋게 볼 리 없다. 하지만…. 그는 백작을 향해 고개를 조금 더 깊이 숙였다.
“송구합니다. 그 건은 아직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백작의 눈이 사납게 번뜩였다.
“…어째서? 그쪽까지 파냈다면 어려울 일은 끝이다. 바로 옆이라고 했잖아! 그 바로 옆에 분명 빈 공간이 있을 것이다. 거기서 사람 하나 찾는 것이 그리 어려운가?”
마음이 급했다. 그를 그렇게 두고 올 생각은 아니었다. 단지 너무 놀라서, 숨을 쉬지 않아서 무서워서 도망친 거다. 나중에 다시 오려고 했다. 허나 그가 가기도 전에, 갑자기 건물이 무너질 줄은 생각도 못했다. 대체 건물이 왜 무너졌을까? 그가 한 일은 방을 폭파한 것뿐이었는데.
미칠 것 같았다.
‘죽지 않았어. 사람이 그렇게 죽을 리 없다.’
공작가와 후작가엔 지금 렉시가 없다. 로메인 역시 성 밖에서 헤매고 다닌다고 하니 실종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분명 렉시는 지금 그 아래 묻혀 있을 것이다. 렉시를 놓고 도망친 그 복도는 밀실이 있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 튼튼하게 지어 놨다. 그러니 빈 공간이 분명 생겼을 거고, 그는 그 안에서 분명, 살아 있을 거다.
‘그럼 구하면 돼. 그리고 실수했다고 말하고, 데리고 오는 거다.’
한시가 급한 와중이다. 그런데 저 멍청이들은 왜 일을 이렇게 못하는 거지?!
기레스 백작은 이를 갈며 부하를 노려보았다.
“말해라. 대체 뭐가 문제냐?!”
“…그것이, 일하는 자들이…모두 돌아갔습니다.”
“…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게 무슨 소리야. 돌아가? 시킨 일도 안 하고 말인가?!
“그게 무슨 말이냐? 이 돼지 같은 것들이 감히 내 돈을 받고도 그냥 돌아갔다 이 말이야? 이런 황당한! 아니, 너는 그걸 그냥 보고만 있었나?”
참으로 황망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간 수없이 많은 일을 시켰어도 이런 경우 없는 대처는 또 처음이다. 경악이 지나가자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새빨간 분노. 노화가 솟구친 얼굴이 마치 터지기 직전의 화산 같았다. 아아 이젠 어쩔 수 없다. 심부름꾼은 고개를 조아리며 다급히 외쳤다.
“죄송합니다, 백작님. 하지만 저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그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는데 제가 어찌 잡겠습니까? 백작님께서 고용하신 이들은 이번 일로 소유한 마도구를 모두 잃고 말았습니다. 허니 부디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지금 그게 무슨 소리냐? 뭘 잃어?”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던지는 말치고 내용이 심각하다. 백작은 내던 화도 멈추고 남자를 주시했다. 참으로 영문 모를 말 아닌가?
“난 지금 네가 하는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다. 마도구를 잃었다는 게 무슨 소리지? 도둑이라도 맞았단 소리냐?”
“…….”
남자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다급해서 말을 하긴 했는데, 어째 시작하려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대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니, 설명해도 믿기는 할까?
그가 본 것은 정말로 기괴한 것으로, 그도 그 장면을 목격하지 못했다면 절대 믿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비현실적인 일이라도 그는 이 일의 책임자였고, 따라서 목격한 걸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는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보낸 자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백작님의 명을 충실히 이행했지만, 명을 이행하는 도중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이상한 일?”
“사람을 찾기 위해 마도구를 작동하자 단 하나 빼고 모두 먹통이 되었는데, 그 작동했던 것이 매우 이상하게 움직이며 기이한 말을 남겼습니다.”
“…계속해 봐.”
백작의 얼굴에서 차츰 노기가 사라졌다. 남자는 그런 백작을 향해 자신이 본 것을 천천히 설명했다.
“시작은 안개였습니다. 갑자기 바닥에서 새까만 안개가 치솟아 올라 공사장을 뒤덮었지요. 사람들이 크게 놀란 사이 그게 곧 어떤 형상을 이루었는데 마치 사람 같았습니다. 다들 놀랐지만 제일 놀란 건 다름 아닌 그 마도구의 주인이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 도구엔 그런 기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마도구가 그렇게 작동한 건지는 그자도 알지 못했고, 얼마 후 완전히 사람의 형체를 취하자… 안개가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이 화가 났다.
―받아야 할 것을 받지 못하고 돌아갔기 때문이다.
―천명이 보다 강했다. 하지만 죽음의 화는 풀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 헛걸음을 하게 한 자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허니 죄 지은 자여, 어둠을 두려워하라.
―죽음이 네게 그 값을 요구하러 찾아갈 것이다.
남자는 몸을 떨었다. 그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써늘하고, 숨이 턱턱 막히며 몸이 차가워진다. 솔직히 일만 아니었으면 다시 떠올리기도 싫었다.
그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진 안개 때문에 당시 공사장은 경악의 연속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검은 안개의 정체도 그렇지만, 뒤늦게 생각해 보면 그게 보인 것도 문제였다.
당시 백작이 그들에게 명한 일은 파묻혀 있는 누군가를 찾는 것으로, 남들 눈에 띄면 안 되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들이 이 일을 한 시간은 달도 없는 새까만 어둠 속. 따라서 안개가 있어도 볼 수도 없고 봐서도 안 된다.
헌데 거기서 일하는 모두가 다 검은 안개를 목격했다. 실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것은 그 말을 총 세 번 반복하고, 사람들이 당혹한 사이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게 사라지면서… 거기 있던 모든 마도구가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남자의 말이 이어질수록 안 좋아지던 백작의 얼굴은 그 말에 그만 딱딱하게 굳었다. 부서졌다고?
“마도구가… 부서졌다고? 모두 다?”
그게 다 얼마짜린데 부서져? 아니 그보다 마도구가 부서져?
“압니다. 믿어지지 않으시겠지요. 저도 마도구가 부서지는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건 정말입니다. 제가, 아니 모두가 보았습니다. 증인이 여럿입니다…!”
말을 하는 심부름꾼의 이마에서 땀이 맺혔다. 그는 오한과 더위가 동시에 오는 것처럼 땀을 닦고, 사시나무처럼 떨다 옷깃을 세게 여몄다. 마치 무언가에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이는 모습에 백작의 얼굴이 오묘해졌다.
‘저놈이 겁을 먹었어?’
그는 혼란스러워졌다. 어지간해선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놈이 저 지경이라니. 대체 무엇을 봤기에?
그때였다.
―쾅!!!!
“백작님, 큰일 났습니다!”
“누구냐!!”
갑작스러운 난입, 백작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안 그래도 불쾌했던 심중이 송곳처럼 뾰족해지는 것은 순간. 감히 누가! 서둘러 상대가 누구인가 살핀 백작의 얼굴이 이내 야차처럼 변했다.
“네놈, 공작성의 시종 아니냐. 분명 세작을 하며 대기하라 명했는데… 여긴 무슨 일이지?”
“헉, 헉, 그것이…!”
시종이 뭔가 말하려는 걸 보며 백작은 삐딱한 얼굴을 했다. 사실 그는 이 시종에겐 별반 기대가 없었다. 얼마 전 공비가 보내 준 정보원이었지만 솔직히 말해 영 쓸모가 없는 놈이었다. 어찌 처음에 용케 괜찮은 정보를 물어 오긴 했으나 그것도 처음뿐. 공비가 직접 보낸 자를 내치기도 그렇고, 또 개똥도 쓸데가 있다는 말에 데리고만 있었을 뿐이었다. 백작은 힉힉 몰아쉬는 숨을 듣다 말고 버럭 화를 냈다.
“숨은 그만 몰아쉬고! 어서 용건부터 말해!”
“쓰, 쓰러졌습니다!”
백작이 두 눈을 홉떴다.
“뭐? 성벽이 또 쓰러졌다고?”
요즘 그의 심중을 장악하는 건 무너진 극장 안의 렉시와 금이 간 성벽이다. 하물며 방금 하던 이야기는 공사장 건물 이야기였고, 따라서 생각이 그쪽으로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백작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외쳤지만, 물론 시종은 그런 말을 한 게 아니다. 그는 백작의 외침에 다급히 오해를 정정했다.
“아니요! 성벽이 아닙니다! 전하입니다!”
“응?”
백작은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이 본래 그렇다. 원래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으면 이해는 뒷전이 된다. 시종은 그런 그들을 향해 새파란 얼굴로 다시금 외쳤다.
“전하께서…쓰러지셨습니다!”
오랜만에 공작성의 중앙 홀이 열렸다.
지난 연회 이후 처음으로 열리는 홀이었다.
홀은 소식을 듣고 달려온 귀족들로 북새통이었다. 공작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은 귀족들 모두가 하던 모든 일을 멈추고 성으로 달려왔기 때문이다.
“이게 대체 무슨 횡액일까요?”
“전하께서 또 쓰러지다니!”
“일어는 나셨답니까? 네? 몰라요?”
“어떻게 이런 일이….”
귀족들은 쑥덕대며 서로를 향해 불안한 얼굴을 했다. 권력의 이동에 민감한 건 귀족들이 더하다. 가진 것이 많으므로 더욱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저번만 해도 참으로 강건해 보이셨는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이런 일이 또 생길 수가 있단 말이오?”
“공작가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죠?”
“그러게요…. 아직 후계자가 제대로 정해지기도 전인데.”
“로메인 경은 지금 뭘 하고 있지요? 약혼자가 사라졌단 소리도 있던데….”
“뭐 로메인 경만 문제겠소? 버나드 님도 두문불출하고 있으니….”
“둘 중 누구에게 줄을 서야 하나, 그게 참 문제로군요.”
“어허! 누가 듣소!”
누군가가 실수로 말한 진심을 다른 이가 크게 꾸짖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만 그렇지, 다들 속내는 그 비슷했다. 모두 공작의 안위보다는 그다음 권력이 어디로 갈지가 가장 걱정인 자들. 아무리 자신들이 영지를 가진 귀족들이라도 공작 정도 되는 부와 권력 아래선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다. 줄 잘못 선 죄로 망한 가문이 어디 한두 개여야 말이지….
이 권력의 향방은 어떻게 될까? 그걸 알아야 자신들의 향후 노선을 정할 수 있을 텐데…. 모두 숨죽이는 그때, 누군가 의구심 섞인 소리로 속닥거렸다.
“그런데 이번엔 진짜겠지요?”
“그건 무슨 소리요?”
그 왜, 몇 달 전 기억 안 나십니까. 그는 은밀한 태도로 주변만 들리도록 말소리를 작게 죽였다.
“그때도 전하께서 쓰러지셨잖습니까. 모두 법석이었죠. 전하께서 일어나실 때까지 기다릴지, 아니면 버나드 공자 쪽으로 줄을 설지도 의견이 분분했고요. 물론 실제론 별일 아니었고, 전하께선 자리를 금방 털고 일어나셔서 없던 일이 되긴 했습니다만…. 하지만 그때 경거망동했던 사람들은 단체로 된서리 맞고 있지 않습니까?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이렇게 등줄기가 오싹한데 이래도 되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된서리라고? 그, 그런 일이 있었소?”
“허어…. 조용히 이루어져 다들 잘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전하의 분노는 은밀하게 타오르는 숯불처럼 끈질기지요. 당시 연루됐던 사람들이 요즘 왜 안 보일 것 같습니까?”
모두 정도만 다르지, 민달팽이가 소금을 맞은 것처럼 영지고 뭐고 다 쪼그라들고 말았습니다. 그중 한 명이 제 벗이었기에 잘 알지요….
남자가 말하며 부르르 떨자 주변이 찬물 맞은 듯 조용해졌다. 쓰러졌다는 소리에 놀라서 달려왔지만, 막상 저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너무 의심이 많네요. 지금은 그때랑 사정부터가 다르지요. 게다가 전 그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이미 예상했는걸요.”
“…그 소식?”
이것은 또 무슨 말?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한 곳으로 향했다. 그곳엔 고상하게 생긴 한 귀부인이 있었다. 어딘가에서 꽤 자주 본 얼굴로, 이쪽에서도 행세깨나 하는 가문의 여인이다. 성향으로 따지면 공비도 공작도 아니고 중도파에 속했는데, 때문에 어지간히 확실한 일이 아니면 나서서 말도 잘 안 한다. 그녀는 몰려든 시선을 은근슬쩍 부채로 차단하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이 일을 미리 알았다니.”
“어머, 척하면 착! 하고 나오셔야지 그걸 물으세요?”
귀부인의 입술이 작게 오물렸다.
“모두 성벽에 금이 간 건 알고 계시죠?”
“!”
“다들 우연이고 사고라고 말하긴 하죠. 하지만 보세요, 전하께 벌써 일이 생겼잖아요? 세상에 이유 없는 일은 없어요. 전 이게 일종의 계시라고 봐요. 전하의 치세가 곧 끝난다는….”
“미, 미치셨소?”
사람들은 헉 소리를 냈다.
“어디서 그런 헛소리를!”
“이거 큰일 날 사람이군! 난 못 들은 걸로 하겠소!”
실로 대담무쌍한 말에 그들은 황급히 그녀와 멀어졌다. 하지만 사람들이 아무리 경원시해도 귀부인의 태도는 실로 의연하고 오만했다. 그 태도에 사람들이 흔들렸다. 아무리 개소리라도 저렇게 당당하면 뭔가 솔깃해지는 법. 거기다 귀족들 사이에서도 저 소문이 아주 안 도는 것도 아니어서, 결국 그들은 혼란함에 파묻혀 머리만 아파졌다. 렉시가 보았다면 역시나 하고 무릎을 탁 칠 광경이었다. 이 모든 일이 그가 생각한 그대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금이 간 게 큰일이긴 하지. 하지만 저건 너무 나간 예상 아닐까?”
“그냥 큰일이 아니지 않소. 지난 수백 년간 금 한번 간 적이 없는 물건이니… 저이도 딱히 못 할 말이 아니라고 보오.”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오? 일단 어디든 줄을 대는 것이 낫다는 거요? 그러다 이도 저도 안 되면?”
“허어….”
숙덕대는 소리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니 바닥이 울릴 지경이다. 아 이 말도 맞고 저 말도 맞는 것 같으니 느는 것은 두통뿐이라. 이미 어디로 갈지 정한 사람들이야 여기에서 빠졌지만, 이들이 아닌 중립파도 무시 못 할 숫자였다. 결국 그들은 일단 어느 쪽이 더 후계자에 어울릴지 의논이나 해 보자고 결론내렸다. 사실 길든 짧든 이건 언제든 올 일이었다. 어차피 판도 깔렸고, 칼 뽑은 김에 무라도 써는 게 낫지 않은가? 솔직히 지금처럼 이 이야기를 할 만한 적기가 없기도 했다.
“까놓고 말하지요. 다른 곳 같았으면 이런 논의도 할 필요가 없죠. 버나드 경은 전하의 유일한 아드님 아닙니까? 거기다 모친 역시 귀한 핏줄이니 뒷배도 괜찮고. 저는 이쪽이 옳다고 봅니다.”
“이미 공작가의 기사단 일부는 버나드 공자께 충성을 맹세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지도력이 괜찮다는 이야기죠.”
“맞는 말이오. 그만하면 한 가문을 능히 지탱할 정도지. 사람이 딱히 못난 것도… 아니지 않소?”
물론 뒤에 있는 게 황가고, 여자와 색을 탐하는 게 약간 걸리긴 한다. 하지만 오늘날 후손이 부족해진 공작가의 입장을 생각하면 이 또한 나쁘지 않은 것. 따라서 제법 괜찮은 개진이었지만,
“하지만 프로하우스 공작가의 후계는 장자 승계제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거기다 가장 중요한 전하의 뜻은 버나드 공자께 없었습니다. 그분께선 내심 로메인 경을 맘에 두셨지 않습니까. 그러니 여태까지 후계자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지요…. 솔직히 여기서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이에 대항하는 공작파의 의견도 만만찮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게다가 그들이 가장 중점적으로 설파한 것은 공작의 뜻이었으니…. 아무리 공비 뒤에 황가가 있다 한들 결국 작위의 주인은 공작과 공작가 아닌가?
“버나드 공자를 후계자로 삼을 요량이면 시간은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간 로메인 경이 이 싸움을 멀리하셨을 때도 차일피일 미루신 게 바로 전하 아닙니까?”
“거기다 공비 전하의 배경, 그것도 생각해 보면 문제지요. 공작령은 그간 독립적인 자치를 해 왔지만, 버나드 공자가 공작이 되면 그게 달라질 수도 있단 말이지요. 과연 황가가 공작령을 내버려 두려고 하겠습니까? 하지만 로메인 경의 모친께서는 공녀입니다. 외부의 개입을 차단한다, 딱 걸맞은 인선 아닙니까. 전 로메인 경이 더 낫다고 봅니다!”
“헛소리요! 황가가 어떻게 외세가 될 수 있소? 어쨌거나 공작령은 제국의 한 부분이고, 초대 공작도 결국 황가에 충성을 맹세했소!”
“그렇다고 후계자 자리를 황가의 손에 내주란 말입니까? 왜, 아주 입은 속곳까지 가져다 바치시지요!? 프로하우스 공작령은 자치령입니다!”
제국 유일의 자치령 특성상 험한 말이 오갈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어쨌거나 이들은 공작가에 봉신한 귀족들이다. 황가보다는 공작가를 우선하는 게 당연했다.
“로메인 경은 이미 한번 그 자리를 포기하고 도망간 바 있소. 그런 이를 후계자 자리에 놓으란 말이오?”
“허나 지금은 돌아왔지요. 거기다 가장 불안했던 문제 하나도 해결되었지 않습니까? 아마 그 약혼자를 잡기 위해서라도 후계자 자리를 놓지 않으려 할 겁니다.”
“바로 약혼자가 행방불명이란 소문도 있소만…?”
“확실하진 않지요. 그리고 그렇게 예쁘니 난 소문일 수도 있고 말이지요. 혹 압니까? 아무도 모르게, 어디 꽉 박혀서 재미보고 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남자가 거침없이 자신의 하반신을 가리키자 주변 사람들이 얼굴을 붉혔다. 거기서 말하는 재미가 뭔지, 못 알아들을 사람은 여기 없었던 것이다. 누군가 떠듬대며 외쳤다.
“그, 그건 그렇다고 칩시다. 하지만 고작 혼인 좀 한다고 로메인 경이 후계자 자리를 놓치지 않으려 한다는 건 좀 말이 안 되는 논리 아닌가?”
“…당신, 그분의 얼굴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까?”
“예쁘다는 소문을 듣기야 했소. 하지만 지금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이요?”
“아주 큰 상관이 있지요. 그 미모를 보지 못했으니 그런 말을 하는 것이지….”
남자가 비죽 웃었다.
“그 미모를 건사하려면 적어도 공작위는 가져야 할 겁니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요?”
상대는 황당한 얼굴로 대꾸했다. 하지만 주위를 돌아본 순간 당황했다. 그 말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 말에 납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요, 적어도 공작위는 가져와야 걸맞죠.”
“맞습니다, 그 정도 미인이 혼인해 준다는데 그 정도도 못해 주겠습니까.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죠!”
“그보다 그 정도는 되어야 미인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요?”
안 본 사람은 모른다, 그 파괴적인 용모를. 로메인이 데려온 약혼자의 성별이 남자여도 그닥 저항감이 없던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그 사람 같지 않은 외모 덕분 아닌가?
“…다들 지금 제정신입니까…?”
상상을 초월하는 주변 반응에 당혹하는 상대였지만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보면 알아서 이해될 거 뭐 하러?
“그 건은 그만하지요, 공도 보시면 알 테니까. 어쨌거나 이러한 이유로 저는 로메인 경을 밉니다. 로메인 경!”
끄응, 어디선가 나온 신음 소리가 불편하게 좌중을 넘나든다. 어쩌면 버나드를 미는 측에서 나왔을 소리일 수도 있었다.
“흥! 그래 봤자 삼 년간 자리를 비운 자와 어찌 버나드 공자를 비교할 수 있소? 버나드 공자의 모친이 황가이긴 하지만 권력은 부모 자식도 갈라놓는 법! 나는 공자가 황가의 손을 잡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오!”
“버나드 공!”
“로메인 경!”
거대한 홀이었지만 모인 인파가 워낙 대단하니 달아오르는 것도 순식간. 홀은 악다구니 쓰는 인파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작은 학당의 모의 법정 시간도 이것보다는 논리적일 것이었지만 모인 이들 모두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피차 서로의 세 싸움, 허니 악다구니 정도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평민들만 모르지, 원래 귀족들 싸움이 더 개 같고 치졸했다. 슬슬 여기저기서 욕지거리가 나오고 있었다.
“고자 새끼 주제에!”
“여기저기 씨 뿌리고 다니는 건 참 잘하는 짓이고?”
“오쟁이 진 놈보단 내가 낫지! 니 부인 애인이랑 집 나갔다며?”
“네놈 지금 말 다 했냐? 뭐가 어쩌고 저째?”
미는 후보자 옹호하다 슬슬 서로 간의 감정싸움으로 치닫는다. 잘하면 서로 머리 쥐어뜯고 싸우지 않을까? 여기 잘못 휩쓸리면 덤터기 쓰기 십상인데…. 멀리서 관조하던 시종들이 주춤거리며 슬슬 뒤로 물러서려 하던 그때였다.
―그만!
기이이이잉!
묵직한 음성이 사람들의 사이를 갈랐다.
그리고, 동시에 거대한 힘이 이들을 덮쳤다.
그것은 마치 바람처럼 다가왔지만 그처럼 휙 가지는 않았다. 그는 가는 대신 순식간에 다가와 엉망이던 모든 것을 그야말로 찍어 눌렀다. 갑자기 들려온 음성에 멈칫했던 사람들은 이내 다가온 힘 때문에 도망치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잡혔다. 기괴한 비명 소리들이 홀을 울렸다. 대략 이런 음성들이었다.
“꺄아악!”
“어흑!”
“뭐야, 뭐가 누르는 거야?!”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무언가 벌어졌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느껴는 지는데 눈에 보이질 않는다. 잡혀는 있으되 실체를 모르니 그게 뭔지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비명 군데군데 점잖지 못한 욕설들이 섞인다. 하지만 그들이 그럴수록 가해지는 힘은 더욱 세지기만 했다. 결국 철푸덕! 하고 묵직한 것이 바닥에 붙는 소리가 났다. 견디다 못한 사람들이 바닥에 찰싹 달라붙은 것이다. 심히 꼴불견이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는데, 어떤 이는 엉덩이가 아니라 무릎이 바닥에 붙거나 얼굴이 붙었으니 그 모습이 뭐 얼마나 보기 좋을 텐가. 그나마 홀이라도 커서 다행이었다. 적어도 자기들끼리 달라붙어 산을 이루는 꼴은 면했기 때문이다.
“이, 이게 대체?!”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해 일어서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일어설 수가 없었다. 공기가 마치 물처럼 무거워 일어나는 행동 자체를 방해했기 때문이다. 일어나려고 해도 바닥에 주저앉고, 간신히 섰다가도 한 발짝 내딛으면 도로 엉덩방아를 찧는다. 마치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것 같은 퍼포먼스를 선보이던 그들은 결국 스스로 일어나는 걸 포기했다. 그 대신 멀찍이 있던 시종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뭘 거기서 멀뚱히 보고 있어? 어서 우리를 일으켜!”
“거기 너! 어서 나를 도와라!”
“기, 기다려 주십시오!”
시종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홀 안으로 튀어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이 들어서자 마치 투명한 막이 그들을 툭 하고 밀어냈다.
“앗!”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만일 소리가 들렸다면 디용, 뭐 이런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이 현상에 시종들이 어쩔 줄 몰라 하자 귀족들이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뭣 하는 거냐? 어서 나를 꺼내라!”
“장난치지 말라고!”
이쯤 되니 멀리 대기하던 호위 기사들도 삼삼오오 몰려와 그에 가세했다. 몇몇은 무기를 사용하여 이상한 막을 없애려 하고, 나머지는 무력으로 진입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도 별수 없었다. 검은 쓸 때마다 발랑 발랑 요상한 소리와 함께 뒤로 튕기고, 사람이 힘을 줘도 똑같은 반탄력으로 튕기기만을 반복한다. 결국 그들 모두 사람을 꺼내지 못하고 포기했다. 귀족들은 공포에 질렸다.
“사, 살려 줘!”
“죽고 싶지 않아!”
기실 바닥에 찰싹 붙은 걸로 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닥친 재난은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법이다. 실체 없는 힘이 죽음의 공포로 변질되는 건 한순간. 귀족들이 앉아서 허우적대던 바로 그때였다.
―꼴같잖아들 죽겠군. 그 와중에 목숨은 아까운가?
“!”
아니 이 목소리는?
어디선가 들려온 묵직한 음성에 사람들은 핫 하고 입을 벌렸다. 정신이 없었는데, 갑자기 확 하고 돌아온다. 그들이 아무리 싸움에 넋이 팔렸어도 아까 들렸던 천둥 같은 목소리는 다 들었다. 더더군다나 그 목소리가 외치자마자, 이렇게 이상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는가? 눈치가 아무리 코치여도 이쯤 되면 이 일의 범인이 누구인지 모를 리 없다.
저놈이다! 저놈이 범인이다!
“네 이놈! 너는 누구냐?”
“감히 제국의 귀족들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죽고 싶은 것이냐?”
“어서 이것을 풀어라!”
귀족들, 시종들, 그리고 기사들 모두 목소리의 진원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당장 잡아서 치도곤을 내야 했다. 하지만 공간 전체가 울리는 터라 어디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목소리가 한심하다는 듯 홀을 울렸다.
―…아직 정신들을 덜 차렸군. 내가 누구냐고?
츠, 하고 혀를 차는 음성과 함께 가해지는 힘이 갑자기 두 배 정도로 강해졌다. 찰싹 달라붙었던 몸이 뒤로 넘어갈 정도였다. 아까까지는 앉아는 있을 수 있었다면 이제는 앉아 있기도 힘들 정도의 중력. 팔다리가 무거운 쇠를 단 것처럼 무거워지자 사람들은 그제야 자기들이 누구 눈치를 보아야 하는 것인지 깨닫기 시작했다. 아뿔싸.
“제, 제발 이러지 마시오. 뭘 원하오?”
“대체 누구시오? 일단 누구신지 알려 주시오, 그래야 대화를 하지 않겠소?”
“우리한테 왜 이러시오?”
―왜냐고? 지금 하는 행동들을 보고도 왜라는 소리가 나오나?
치지직…
웅대했던 음성에 점점 기묘한 스파크가 섞여 든다. 썩어도 준치라고, 여기서 눈치 빠른 몇몇 귀족들이 깨달았다. 이거 …사람 생목소리가 아닌 거 같은데…?
“설마 확성 마법…!”
그들은 크게 놀랐다. 마법이라고?
“말도 안 돼. 성안에서 마도구는 아무나 사용할 수 없을 텐데!”
프로하우스 성안에서 마법을 쓰는 건 소수의 허가받은 자만이 가능했다. 용이 이 성에 건 마법이란 대단히 많고 복잡하여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많았다. 이것은 개중 그나마 간신히 세간에 알려진 몇 안 되는 마법 효과 중 하나였는데, 이렇게 대단위 마법 자체가 기실 용 아니고선 불가능했다. 용의 마법이 대단하다 여겨지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어쨌거나 지금은 마법사가 없는 시절이니 이는 필시 마도구의 소행인데, 문제는 그런 마도구를 쓸 수 있도록 허가받은 것은 그들이 알기론 공작의 측근뿐이라는 것이다. 귀족들은 당황했다.
“대체 당신 누구요? 누구길래 감히 프로하우스 성에서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것이지!”
―내가 누구냐고?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군. 성에서 이 정도 마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할 수 있는 자가 과연 누구일 것 같은가?
지지지직…
조금씩 잦아드는 스파크 너머 웅성대는 소리가 겹쳤다. 동일한 목소리가 조금씩 겹치는 하울링 현상이었다. 목소리를 내는 자가 마법이 행해지는 장소와 가까워지기에 벌어지는 일인데, 지금 문제는 그 현상이 아니라 말의 내용이다. 이 정도의 대규모 마법을 맘대로 할 수 있는 자라고…?
설마….
“참으로 가관들이야 그대들.”
“!!!!”
귀족들은 멍청한 얼굴로 홀 안에 들어온 이를 응시했다. 넋이 한 반쯤은 나간 시선이었다. 표현하자면, 그야말로 님이 왜 거기서 나와요? 하는 얼굴들이었는데 기실 당연했다. 지금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자가 바로 공작이었던 것이다. 쓰러졌다고 하던 바로 그 공작.
평소와 달리 호화찬란한 가마에 탄 그는 가마꾼 어깨 즈음에서 그들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그 얼굴이 심히 까칠하다 못해 살기가 등등했다.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저, 전하?!!!”
“쓰러지셨다고 들었는데!!!”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그만큼은 지금 여기 있으면 절대 안 되지 않나. 몇몇이 땅을 치며 후회했다. 아까 친구가 어쩌고저쩌고하던 남자였다.
“역시 사기였어…! 또 속았어!”
“속기는 무슨….”
공작은 작게 중얼거렸지만 너무 작아 들리지는 않았다. 꿇어앉아 있던 귀족들은 자리에서 아우성쳤다.
“전하! 이 일이 어찌 된 일입니까?”
“살려 주십시오 전하!”
“전하, 정말 쓰러지신 것이 아니었단 말입니까?”
대체 뭐가 진짜고 뭐가 가짜인 걸까.
그들은 해당 정보가 나온 루트를 불신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몇몇은 도무지 사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 몇은 놀랍게도 공작파였는데, 이것은 그들이 공작의 와병을 시종장에게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시종장이 공작의 현 상황을 가지고 거짓말을 할 리가 없어. 헌데 이건 뭐지?
이것은 적을 속이려면 아군을 속이라는 뭐 그런 것인가? 그런가?
아수라장이 된 홀, 공작은 씁쓰레한 얼굴로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시끄럽다 시끄러워. 저런 자들이 가신들이라니….”
내가 진실로 늙는구나. 어쩜 이놈이고 저놈이고 도와주는 놈들이 한 명도 없는가?
공작은 피로한 얼굴로 가마 위에서 사람들을 보며 머리를 짚었다. 우미한 얼굴에 진 그늘이 마치 그림자처럼 짙었다. 할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어디 들어가 눕고 싶다. 한 삼 년 정도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잠만 자고 싶다… 대략 그런 얼굴이었다.
그는 밀려오는 피로감을 숨기지 않은 채 홀 안의 등신들을 응시했다. 참으로 갈 길이 멀고도 멀었다.
“참 잘들 하는 짓이군 그래. 성의 홀이 싸움장인 줄은 내 오늘 처음 알았군!”
왼손에 낀 반지 중 하나를 만지작거리자 귀족들을 옥죄던 힘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놀라운 눈으로 공작의 손을 보았다가, 다른 손가락에 반지가 또 있는 걸 보고 조금 긴장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어째 저것도 마도구 중 하나일 것 같은 강렬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저게 뭔지는 모르지만 우리 엿 먹일 도구인 건 분명하겠지.’
‘취미가 마도구 수집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간 긁어모은 마도구 숫자를 생각해 보면 없는 게 더 이상할 지경이다. 몇은 슬쩍 그거도 마도군가 묻고 싶긴 했지만 옛말에도 그랬지 않은가. 모든 일은 긁어 부스럼이라고….
고로 저게 뭐든 지금은 묻지 말자.
그러한 암묵적인 합의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공작이 시시때때로 마도구를 긁어모은 건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였던 게 아닐까? 공작의 속내야 예나 지금이나 오리무중이었으나 어쩐지 지금은 그런 것도 같았다.
어쨌거나 지금 보다 중요한 건 공작의 또 다른 마도구 지참 유무보다는 이 초유의 무력 시위 사태에 대한 해명이었다. 그들은 이 놀라운… 그러니까 본인들의 흑역사를 갱신한 사건을 어찌 타파해 갈까 고민했다.
곧 몇몇 용기 있고 나름 방귀깨나 뀌는 귀족들 몇이 필두로 앉아 읍소하기 시작했다.
“전하!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다짜고짜 무력행사라니요? 저희는 정말 별것 하지 않았습니다!”
“맞습니다. 저희는 단지 전하께서 쓰러지셨다는 말을 들어서 왔을 뿐이온데…!”
“너무하십니다!”
공작파건 공비파건 무소속이건… 결과적으로 그들은 모두 공작의 가신이다. 아무리 공작이 거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더라도 정당한 사유도 없이 이래서는 안 됐다. 다들 항의로 아우성쳤지만, 공작은 흥 소리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가당찮았던 것이다.
“성벽에 금이 간 걸로 이러쿵저러쿵 하는 건 되고, 그걸 들은 내가 그대들을 징치하는 건 안 되나?”
“그, 그건!”
귀족들은 입을 홉 다물었다. 설마 다 들었던 건가? 공작은 이러저러 말을 하는 대신 자신이 쓴 마도구를 소개했다.
“방금 내가 한 것은 한때 왕실에서 쓰던 마법이야. 불경한 자들을 골라내는 마법인데, 이 때문에 보통은 역심을 품은 자들을 골라내는 마법이라고도 하더군.”
“예?”
귀족들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뭐라고?
“여, 역심이라니요?”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난데없이 이야기가 이상한 지점으로 흘러가려 한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식겁한 귀족들은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찔려서가 아니다. 억울해서다. 역심이라니, 이 무슨 엉뚱깽뚱한 말이란 말인가. 아니, 자기들이 좀 시끄럽게 떠들고 쌈질을 하기야 했지. 하지만 그게 왜 공작에 대한 역심이 된단 말인가?!
물론 후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바는 있으나, 그건 따지고 보면 공작가의 미래를 생각한 것에 불과했다.
“억울하옵니다!”
“시끄럽고!”
결국 공작이 다시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 동시에 이마를 짚었는데, 마치 머리가 울려 견딜 수가 없다는 그런 모양새였다.
“억울은 내가 더 억울하네. 자네들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이리 달려온 내가 억울해! 그리고 내가 언제 자네들이 역모를 꾀했다 말했나? 나도 그대들이 역심을 품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아. 예 있는 자네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안전제일주의의 수호자들 아닌가?”
“!”
이것은 방금 그들이 보여 준 행태를 꼬집는 말이다. 공작의 은근한 비꼼에 귀족들이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이 마법이 성안에서 불경한 행동을 한 자들을 잡는 마법이란 것은 확실하지. 그렇다면 생각들 해 보게, 왜 자네들만 이 마법에 걸려들었겠는가. 그리고 또 생각해 보게. 왜, 함께 있던 저들은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공작이 지적한 건 멀찍이 서 있는 시종과 호위 기사들. 그들은 갑작스런 공작의 말에 흠칫 몸을 떨었지만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귀족들이 눈을 굴리고 답하지 못하자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무슨 팔자에도 없는 선생님 짓인지 모를 일이었다.
“아까까지 이곳에서 자신들의 본분을 지킨 건 저자들뿐이었기 때문이야. 이 마법은 장소에 맞지 않는 불경한 행동을 한 자들을 혼내는 마법이니까.”
요는 저들이 마법에 걸린 이유가 홀에서 싸웠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긴 아픈 환자 냅두고 자기들끼리 쌈박질을 했으니… 불경하다면 불경한 일이긴 하다. 이로써 모든 전말을 알게 된 귀족들은 속으로 구시렁댔지만 그 이상 항의는 하지 못했다. 하기야 벼룩도 낯짝이 있고, 이런 걸로 항의하는 건 지나가던 개도 웃을 일. 공작이 물었다.
“이제 내가 왜 이랬는가 알겠나?”
“…네, 전하.”
“그래. 허면 이제야 내 물어볼 수 있겠군. 자네들 여기 뭣 하러 온 건가?”
“…?”
왜 오긴, 다음 권력 걱정돼서 왔지. 그 답이 모든 이의 머릿속에서 동시에 튀어나왔지만 다행스럽게도 나온 말들은 달랐다.
“저는 말씀드렸다시피 전하께서 쓰러지셨다고 들어서….”
“그렇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전하께서 아프시다는데 어찌 가신 된 자가 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문병을 온 것이옵니다!”
입에 침도 안 바른 거짓말에 공작의 입술이 비틀렸다. 자기들이 한 짓도 생각 안 하고 문병 운운이 기가 막혔던 것이다. 내가 자기들 말 다 들었다는 건 벌써 까먹은 건가?
“문병? 환자가 누워 있다 시끄러워서 깰 정도의 문병이라니 내 아주 새롭군그래. 내가 왜 온 줄 아나? 시끄러워서 나왔네. 소란스러워서! 아파서 쓰러진 사람이 쉬고 있을 것 같으면 알아서 좀 조용히 하고 그러는 게 도리 아닌가? 헌데 대체 이게 무슨 짓거리인가?”
공작은 가마 위에서 반쯤 누운 채 귀족들을 향해 일갈했다. 그리고 아이고…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방석 위에 몸을 누였다.
“내가 이렇게 나와서 건강해 보이나? 그렇다면 그거야말로 큰 오산일세. 내가 건강하면 내 발로 걸어 나왔지 이런 가마를 타고 나올 사람인가? 이런 꼴로?”
귀족들의 시선이 그제야 가마에 꽂혔다. 다들 공작이 나타난 것에 놀라서 그가 어디에 앉아 있는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엔 가마 위에 앉아 있는 공작의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눈치채지 못한 것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그제서야 발견한 건 맞았다.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전하. 가마라니… 설마!”
가마라 함은 보통 탄 당사자의 지위를 인식시켜 줄 때, 혹은 어떤 한 부위가 불편한 병자가 타는 물건. 허나 공작은 여태 가마 같은 건 탄 역사가 없었으므로 귀족들은 당연히 후자로 생각했다. 그들의 시선이 거의 동시에 한 부위로 갔다. 공작의 하반신, 그러니까 다리 쪽이었다. 설마, 저분 다리가! 갑자기 쏟아지는 무지막지하게 시선에 공작이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줄은 알겠는데, 그건 아닐세. 마비는 아니야. 내 힘이 없어 걸을 기운이 안 나 타고 온 것이지.”
“그, 그렇습니까…?”
여기저기서 한숨이 튀어나왔다. 갑자기 지옥에서 천당으로 온 기분들이었다. 하반신 불수 공작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닌가?
“자네들을 보니 내 시름만 깊어지는군. 시름만 깊어져. 하지만 이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가마에 있는 쿠션 위로 몸을 반쯤 누였다. 누가 봐도 나 피곤하다는 자세로 병자가 할 법한 모양새다. 주변이 조용하게 잠겼다. 공작은 두 눈을 짧게 떨었다.
“생각해 보면 자네들이 그렇게 부화뇌동하는 것도 반쯤은 내 탓이 없지는 않아. 내가 공식적으로 후계자를 정하지 않았으니 도리 없는 일이지…. 하지만 이건 자네들도 이해를 조금 해 줘야 한다네. 아무리 해도 후보자들이 내 눈에 안 차는 걸 어쩌겠나?”
“저, 전하.”
귀족들은 놀랐다. 공작이 이렇게 공식적으로 후계자 선정에 대해 언급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거기다 생각들 해 보게, 나는 아직 젊은 편이야. 벌써부터 후계자를 고민하기엔 좀 빠른 나이지. 내가 후계자 선택을 미룬 건 다 나름 생각이 있어서였어. 하지만 내가 쓰러질 때마다 난리 치는 자네들을 보고 있자니 내 남은 수명이 더 짧아질 것 같은 생각이 든단 말이네. 내가 아무리 젊다고, 더 일을 할 수 있다 외친들 자네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그래, 좋네. 내가 졌어.”
홀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턱이 떡 벌어졌다. 귀족, 시종, 호위 기사… 너 나 할 것 없었다. 졌다니, 설마 저 말은 후계자를 정한다는 의미인가?
“저, 전하. 그렇다면 그 말씀은?!”
“후계자를… 정하시겠다는 겁니까?”
공작이 쓰게 웃었다.
“그래. 허나 지금 당장은 아니야. 나도 여러 가지 생각할 것이 있으니까…. 허니, 모든 것을 정하기 전 잠시 휴식을 가질까 하네. 좀 쉬면서 자네들이 말했던 후계자 건도 생각해 보겠어.”
묵직한 경악이 사람들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정말인가. 설마 성벽에 금이 간 건 이걸 예견했던 건 아니었을까?
홀 안에 있는 사람 수만큼의 상념들이 각자의 머리 위에서 춤췄다. 공작이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이건 정말이다. 누군가 조심스레 후일을 물었다.
“허, 허면 집무는 어쩌실 계획입니까?”
“아. 그것 말인데, 그건 대리를 조금 세울까 하네.”
“대리… 말씀입니까?”
“그래, 대리청정이라고 해야 하나? 몇 달 정도만 그렇게 해 볼 생각이야.”
어째 조금 생소한 단어에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공작은 고개를 슬쩍 끄덕이며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는 자들을 향해 신호를 보냈다. 공작이 그러는 사이 고개를 갸웃거리던 사람들 중 한 명이 다시 물었다.
“어떤 식으로 할 예정인지 여쭈어도 됩니까? 합의체를 구성할지, 아니면 어떤 한 명에게 일임할지….”
“합의체는 구성하기엔 시간이 너무 걸리지. 거기다 해산하기에도 시간이 걸리고… 그래서 일단은 한 명에게 일임할 거네. 하지만 아무리 임시라도 나의 대리이니, 아무에게나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야. 그래서 고민 끝에 한 명을 택했지. 그것이 누구냐면…아, 때마침 저기 오는군.”
공작이 막 홀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내밀자, 사람들의 눈이 동시에 그쪽으로 향한다. 터벅터벅,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찰칵대는 금속 소리가 들리고, 그 묘하게 차가운 소리가 가까워지자 귀족들은 두 눈을 부릅떴다. 공작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로메인 드 데퓨탄 경일세.”
공작이 탄 가마 아래 가까이 다가온 로메인의 은발이 시린 빛을 내뿜으며 차갑게 반짝인다. 펄럭이는 붉은 망토 아래, 한때 반납했던 기사단의 갑옷을 입은 로메인은 마치 큰 성채를 보는 것처럼 단단하고 거대해 보였다. 그는 경악한 귀족들을 한번 보고, 자신을 바라보는 공작의 가마 아래 무릎을 꿇고 인사했다.
그런 그를 향해 공작은 비쭉 미소를 지었다.
“로메인 드 데퓨탄 경. 바로 그를 내 대리로 선정하네.”
******
그녀는 벽난로를 보고 있었다.
타닥타닥….
괄게 타오르는 불꽃 속 장작더미가 작은 소리를 내면서 튀어 오른다. 겨우내 잘 말린 삼나무 장작은 불길이 무척 셌다. 벽난로 앞에 있는 안락의자 앞은 무척 따뜻해서, 앉아 있는 볼이 발갛게 달아오를 정도였다.
보온 마법이 걸려 있어 방은 늘 따뜻했지만 그녀는 때때로 이렇게 벽난로 앞에 앉아 생각에 잠기곤 했다. 따뜻한 물 한 잔과, 딱딱하게 마른 과일을 천천히 물에 불려 씹으면서 세차게 타는 불꽃을 바라본다. 몸을 옥죄고 있던 드레스 대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바닥엔 동물의 털을 깔아 둔 채 가끔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하고 있자면 천천히 그녀를 어지럽히는 번잡한 것들이 잊힌다. 그러면 마치 과거의 어느 날, 그녀가 아직 자유로웠던 그때로 돌아온 것 같았다. 전 황제는 그녀가 가진 이 취미를 그닥 좋아하지 않았지만….
표정 없이 불을 쬐던 여인의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빌어먹을.’
그녀는 손에 쥔 컵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적당히 식은 찻물이 손등 위로 넘쳐 젖는다. 일부는 입은 옷에도 흘러 무릎 언저리가 축축하게 젖었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정확히는 신경 쓰지 못했다. 아까 전 전해 들은 소식은 아직까지도 그녀의 상념을 어지럽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라고? 그게 정말이냐?”
“네, 공비 전하. 방금 전 공작 전하께오서, 후계자를 정하겠노라 공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쉬는 동안 로메인 경을 업무를 대리할 자로 하겠노라… 말씀하셨습니다!”
공비, 메르디스의 눈썹이 묘하게 꿈틀댔다. 다급하게 가져온 소식이 무언가 하여 들였더니 참으로 생각지도 못한 말 아닌가.
“믿어지지 않는 일이로구나.”
아니, 정확히는 믿을 수가 없다. 그녀는 자신에게 소식을 가져다준 시녀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이 이는 누굴까. 혹여 자신을 속여 이득을 취하려는 자는 아닐까?
공작이 쓰러진 일은 그녀도 안다. 아니, 알다 못해 확인도 했다. 시국이 시국이니 정확한 사안 판단이 최우선의 과제 아닌가?
시종장이 막았으나 어쨌거나 그녀는 공작의 하나뿐인 아내. 하여 어찌저찌 문병을 가는 데 성공했고, 거기서 직접 공작의 상태를 확인했던 것이다. 그녀가 어제 본 공작은 분명 아프다 못해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바짝 말라 있었다. 정치적으로 정적이지만 한순간 안쓰럽다는 감정을 가질 정도로….
‘속이는 것이 분명해.’
그렇게 아픈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하물며 움직일 수 있다손 쳐도 이상한 점은 또 있다. 그녀가 아는 공작은, 난데없이 이렇게 성급하게 일 처리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최대한 우아함을 유지한 채 차분히 말했다.
“네가 뭔가를 잘못 알고 있는 것 아니냐. 전하께오서는 와병 중이시라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시다.”
“아니옵니다. 저만 들은 것이 아니옵니다. 홀에 있던 귀족들, 그리고 시종들, 모든 사람들이 다 들었습니다. 시녀장께서도 이제 이 소식을 들으셨을 겁니다. 부디 하문하여 주소서. 이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옵니다!”
“시녀장이라?”
메르디스는 옆에 있는 설렁줄을 당겼다. 시녀장을 부르는 줄이었다. 그녀가 줄을 당기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시녀장이 들어와 메르디스 옆에 시립한다. 메르디스는 시녀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까닥였다.
“밖에서 다 들었을 테니 설명은 필요 없겠지. 알로라, 저 말이 사실이냐?”
시녀장의 낯빛이 흐려졌다.
“마마, 송구합니다만…. 모두 사실입니다.”
비웃는 얼굴로 잔뜩 시녀를 징치하려던 메르디스의 얼굴이 순간 차갑게 굳었다.
“뭐라고?”
“저도 방금 알았습니다. 이 시녀가 저보다 조금 빨랐군요. 아마 그 자리에서 듣자마자 달려온 모양인….”
“마, 말도 안 된다!”
메르디스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알로라가 한 말이 사실인 것을 이성으론 인지했다. 허나 들은 말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후계자를 선정한다면서, 대리인을 로메인으로 정한다는 건 그가 후계자가 될 거란 말과 다름이 아니다.
“이치가 미친 것이 아닌가. 어찌 감히 그런 짓을!”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숨을 씨근덕댔다. 어쩐지 요 근래 묘하게 조용하다 싶더니 이렇게 사람 뒤통수를 치려고 준비를 했었단 말인가?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뭔가 정보가 있었을 것 아니냐?”
“송구하옵니다 마마. 아무래도 이 일은 극비로 이루어진 일 같습니다. 생각키로, 공작 전하와 로메인 경 둘만이서 밀실 대화가 오간 것이 아닌가 합니다.”
밀실 대화라고?
“로메인이 언제 그랬단 말이냐. 그보다 대체 성은 언제 또 들어왔단 말이지? 분명 붕괴 사고가 난 뒤 한동안 두문불출했던 것으로 아는데? 로메인이 언제 우리 모르게 성안으로 들어온 적이 있었단 말인가?”
“…아무래도 그러하온 듯합니다.”
“이런 멍청한―!”
메르디스의 눈이 불처럼 타올랐다.
“어떻게 성안에서 사람이 오고 가는 걸 알지도 못했단 말이냐.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냐? 너희가 그러고도 이 성의 사용인이며 폐하께서 내려 주신 내 충복들이야?”
“송구하옵니다 공비 전하.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시녀장이 공비 앞에 무릎을 꿇자, 연이어 그걸 보고 있던 시녀들이 따라 무릎을 꿇는다. 메르디스는 무시무시한 얼굴로 그런 그녀들을 보았다. 용서고 자시고, 당장 단매에 쳐 죽여도 시원찮을 심정이었다.
“알로라, 여기서 네가 제일 문제다. 어찌 이런 일을 일개 시녀보다 더 늦게 알 수가 있느냐? 네가 시녀장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메르디스의 고함에 시녀장이 어두운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공비의 힐난이 아니더라도 그녀 역시 분하기 그지없는 심정이었다. 시종장이 버티고 있다지만 그래도 이 성안에서 자신이 모르는 일은 거의 없다 자부하고 있었다. 그녀는 잘근잘근 입술을 씹으며 자신이 알아낸 것을 공비에게 아뢰었다.
“모든 것이 제 불찰입니다. 허나 공비 전하, 아무리 저라도 전하께서 즉흥적으로 결정하신 일을 알아내긴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오면서 시종장을 만났는데, 심지어 그조차 이 일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시종장이?”
시녀장에게 노화를 쏟아부으려던 공비가 순간 멈칫했다.
“이 일을, 시종장조차 모르고 있었다고?”
“그렇습니다. 실제로 제가 어찌 된 일이냐 묻자, 얼굴이 파랗게 질리며 뛰어가는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공비의 얼굴에 의구심이 어렸다.
“그자가 널 속인 것은 아니냐. 그자가 이 성에서 일한 세월을 생각해 보라. 보통 너구리가 아니다.”
“제가 그것을 모르겠사옵니까? 허나 전하, 그 얼굴은 진짜였습니다. 제가 이곳에 와 전하를 모신 것이 스무 해가 넘어갑니다. 또한 시종장도 그 세월 간 꾸준히 보아 왔습니다. 분명합니다. 그자도 이 일을 몰랐습니다.”
“참으로 괴이하군….”
시녀장이 단언했다. 메르디스는 점점 혼란에 휩싸였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어서일까? 그녀는 이 모든 것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어나는 일들 모두가 그녀의 예상외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뭔가, 무언가 중요한 게 어긋나있다.
‘이상해.’
사람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그간 공작이 보인 행동과 확연히 다른 이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녀는 그렇게 한동안 복잡한 상념을 안은 채 그 자리에서 그렇게 서 있었다.
타닥!
타오르던 불이 조금씩 잦아든다. 메르디스는 허리를 굽혀 장작더미 하나를 집어 불길로 던졌다. 불똥이 슬쩍 그녀의 다리께에 튀었으나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어차피 곧 사라질 깜부기불임을 알기 때문이다.
공비인 그녀가 스스로 이 일을 하는 까닭은 이 방이 오롯이 그녀만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공비가 되면서 공비의 거처를 공사할 때, 다른 것은 다 알아서 하게 두었으나 이 방 하나만큼은 그녀가 직접 설계했다. 때문에 이 방의 존재를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공사한 인부들도 이 방의 존재를 아는 이는 없다. 메르디스가 몰래 사람을 보내 말이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홀로 있고 싶을 때 주로 이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일종의 비밀 공간, 비밀 거처인 셈이다.
“폐하께서 살아 계셨으면 좋았을 것을….”
그녀는 타오르는 불을 보며 중얼거렸다. 여기서 말하는 황제는 죽은 전 황제다. 그녀를 이곳에 오도록 만들었던 자, 공작가의 모든 것을 훔치라 사주한 자. 죽도록 미워하는 자이지만 그래도 살아 있을 땐 그만한 방파제가 없긴 했다.
“청정하고 의심 없는 자이니 쉬울 거라고?”
정녕 그자가 그렇게 보였다면 황제는 천하에 다시없을 모지리였다. 처음 시집왔을 때 본 공작은 황제의 말과 아예 다른 자였다. 용모 하나만큼은 황제의 말과 비슷하다. 허나 그건 그저 외양일 뿐. 그 내면엔 거대한 성채가 있어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단단했다. 그는 처음부터 아예 그녀를 배제하고 있었다. 단지 황제의 말이 있었고, 그녀가 첫날밤을 보낸 뒤 수태를 했기에 비의 자리를 주고 있을 뿐.
“이제 와서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이지.”
그녀는 씁쓸하게 말하며 차를 마신다. 향긋해야 할 차가 마치 독처럼 쓰다. 역시 그때 그 손을 잡지 말아야 했던 걸까?
그녀는 생각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애초 그녀에겐 그밖엔 길이 없었다. 아비 모를 자를 배태한 그녀에게 도움의 손을 내밀어 준 것은 어쨌거나 죽은 전 황제뿐. 만일 그녀가 그때 황제의 손을 잡지 않았다면 그녀는 몰래 아이를 낳은 뒤 어디 먼 나라의 백작이나 남작가의 후처로나 보내졌을 것이다. 황도의 화려한 생활에 익숙해져 있던 그녀가 그런 삶을 견딜 수 있을까? 아니, 그녀는 절대 그렇게는 살 수 없었다. 절대로.
메르디스는 찬찬히 그녀의 손에 쥐여 있는 것을 셈했다.
“황가는 …더 이상 도와주지 않겠지.”
현 황제인 사촌 오라비는 그녀와 선황과의 일을 모른다. 물론 어느 정도는 유추하고 있겠지. 허나 현 황제가 황위에 오른 뒤, 그녀에게 오는 황실의 내탕금이 반으로 줄었다. 말이 반이지, 오는 그 대부분이 비단이나 장신구 같은 물건들뿐이니 이는 황가가 간접적으로 그녀와는 손을 끊겠다는 이야기였다.
다만 전 황제와의 연이 있고, 또 그녀 자체가 황가의 피가 섞여 있으므로 아주 내치지 않을 뿐.
“귀족들은… 기레스 백작이 있으니 아직은 괜찮고.”
재물이 부족한 그녀를 대신해 백작은 아낌없이 제 재산을 풀어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물론 그가 자신에게 어떤 달콤한 감정을 가져 이 모든 일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셈이 빠른 자이니 그 와중에 자신이 가질 이득을 모두 생각해 놨을 터.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레스 백작은 그녀의 좋은 파트너였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공작가, 그리고 백작이 원하는 것은 그 공작가의 막후 실세 자리.
때문에 그녀는 패트릭을 믿었다. 정확히는, 기레스 백작의 욕망을.
“마지막으로 남은 건 시녀들과…?”
그녀는 그릇 안에 있던 작은 사과 조각을 물어 씹었다. 시큼하고 달달한 것이 입안을 밝힌다. 단것이 들어와서일까, 어쩐지 머릿속이 조금씩 정리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조금씩 사과를 깨물어 먹다가 아까부터 자꾸 마음에 걸리던 것을 기억해 냈다.
“시종장도 몰랐다고 했지 분명….”
타닥, 타닥, 타닥.
괄게 타던 불길이 잦아들고, 방 안의 온도가 서서히 식어 간다. 타오르던 삼나무가 숱으로 변하고, 벽난로 안의 불길이 사그라들어 불씨만이 간간이 숨을 쉴 무렵.
생각을 끝낸 메르디스의 붉은 입술이 열리며 곱게 휘었다.
“시종장이라….”
*****
홀에서 렉시가 꾀한 일들은 무사히 끝났다. 사람들은 이 무지막지한 선언에 크게 놀랐고, 극적인 반전에 기절했다. 그리하여 이 사실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귀족들 사이로 미친 듯이 퍼져 나갔다.
이게 다 로메인이 필요 이상으로 멋들어지게 연기를 해낸 덕분이었다. 솔직히 조금은 불안한 면이 없잖아 있었는데 놀라운 결과였다. 기실 일을 하기 전 렉시와 공작은 조금 걱정을 했었다. 일을 도모하려고 하고 보니 로메인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로메인이 누구인가. 요령 없는 동의 철벽, 어떠한 경우에도 정도를 걷는 고지식의 소유자. 생전 거짓말이라곤 해 본 적이 없을 것 같은 이 남자가 저런 연기력이 필요한 일을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모든 염려는 쓸데없었다. 그들이 한 염려는 고려할 가치도 없다는 듯 로메인과 공작 대리의 이인삼각은 환상적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멀찍이서 대기하고 있던 렉시는 차마 나설 틈도 없었다. 여차하면 그가 나서서 사람들의 시선을 돌릴 작정이었는데…. 누구누구들에겐 여러모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뭐 누군가에겐 이쪽이 더 좋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여하간 이렇게 폭탄선언을 한 틈을 타 렉시도 슬그머니 성안으로 들어왔다는 걸 알렸다. 로메인에게 직함을 달았으니, 공비 쪽의 기세도 한풀 꺾였기 때문이다. 성안에서 공작의 세가 무시 못 할 정도로 회복되었으니 렉시의 안전에도 무리가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 부드럽게 대리 업무를 할 준비만 하면 될 뿐.
그렇다고 생각했다.
“…….”
저 멀리서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에 공작, 플로랑 후작은 아무런 말 없이 땀을 흘렸다. 뜨겁다 못해 아주 뚫릴 것 같은 시선이다. 원망과 슬픔과 배신감이 가득한 눈빛은 겪어 보면 알겠지만 무시하기 참으로 쉽지 않다. 난감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푹신한 방석 위, 반쯤 누워 있으므로 몸은 근래 들어 다시없을 정도로 편안하건만. 하지만 마음은 불편하다 못해 가시방석에 놓여 있는 기분이었으니….
따끔따끔따끔….
“에잇!”
그녀는 결국 자리에서 덥석 일어나고 말았다. 저 멀리서 자신을 원망스레 보고 있는 시종장 때문에 도저히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말을 해라. 그냥 말을 해! 시종장! 그러지 말고 말을 하라고!”
대체 무엇이 불만인가! 그녀가 외치자 시종장은 불퉁한 얼굴로 입술을 쭉 내밀었다.
“뭐 말입니까?”
“불만이 있다면 부디 말을 해 주게. 그렇게 보지만 말고! 평소엔 이것저것 말도 잘하면서 오늘은 왜 이러나?”
“제가요? 언제 말입니까? 이거 참 서운하기 짝이 없습니다. 제가 감히 전하께 무슨 말을 했다고 그러십니까?”
“자네…!”
플로랑 후작의 입이 콱 막혔다. 난처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옛말에도 그랬다. 안 그랬던 사람이 변하면 그것만큼 무서운 일이 없다고….
평소 공작이 하는 일은 팥으로 메주를 쒀도 그렇거니 할 양반이 저렇게 나온다. 그러니 미치고 팔짝 뛸 만도 하지 않은가. 허나 시종장은 영 화를 풀 기색이 없었다. 그는 대신 부리부리한 두 눈을 뜬 채 입을 툭 내밀었다.
“그냥 저는 없다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뭐, 제가 무슨 말을 한다 한들 전하께 이제 의미가 있긴 하겠습니까?”
…큰일 났다. 그녀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 아니 무슨 그런 서운한 소리를 하나?”
따끔따끔한 시선이 가슴으로 왔는가. 어딘지 모르게 심장이 아파서 숨을 핫 하고 들이켰다. 일종의 양심통이었다.
“자네가 전, 아니 내 곁을 지킨 세월이 몇 년인가? 헌데 의미가 없을 리가…!”
“아하, 그러십니까?”
작게 콧김 소리가 들린 것 같다. 아마도, 흥? 핏? 쳇? 그 소리에 놀라 두 눈을 뜨는데 시종장은 모른 척 집무실 정리에만 야단이었다. 아까는 미친 듯이 째려보더니, 이젠 아예 어린 숙녀처럼 앵도라져 이쪽으론 시선도 주지 않는다.
‘산 넘어 산이다. 이 일을 어쩌지?’
후작도 대략 그가 왜 그러는지는 짐작했다.
이처럼 큰일에 자신을 빼고 진행했으니, 필시 그것으로 속이 상한 것이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를 끌어들이면 필연적으로 그들이 하는 일이 일종의 기만책임을 설명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공작이 가짜인 걸 알려야 한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느니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답 아닌가.
‘전하께서 크게 화를 내실 텐데 큰일이군.’
진짜 공작이 돌아오면 이거 가지고 분명 경을 치실 터. 안 봐도 확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나중엔 자연스레 시종장도 둘이 바뀐 사실을 알게 될 텐데….
후작은 어쩐지 머리가 아파 왔다.
‘저 사람 뒤끝 엄청나게 긴데….’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후작은 안다. 이 공작성에서 공작 다음으로 건드리면 안 되는 것이 저 시종장이라는 것을…. 시종장은, 한번 삐지면 그 삐진 게 십 년을 넘게 가는 최악의 뒤끝을 가진 인사였다. 그리하여 그 별명도 심지어 삐돌이다. 한번 토라지면 십 년은 가볍게 상대를 무시하는 최악의 상대가 저 시종장이었다.
‘…제기랄.’
그녀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를 배제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살짝 언질 정도는 했어야 했나 싶긴 하다. 어쩔 수 없구나. 그녀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입을 열었다.
“내가 잘못했네.”
덜컥. 시종장이 의자를 빼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 내가 잘못했다고 했어. 미안하네.”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살아생전 미안하다 말 한번 해 본 적이 없던 그다. 그래서 그런지 말하기가 무척 고역스러웠다. 허나 살려면 해야 한다.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자네도 날 좀 이해해 주면 안 되겠나? 이번 일은 무척이나 긴급하게 이루어졌다네. 자네를 불러오거나, 그럴 시간이 없었단 말이야. 자칫 새어 나가면 공비 측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었고.”
“그 자리에 페르귄 남작도 있었다 들었습니다.”
“그는 곧 로메인과 결혼을 하게 될 자 아닌가. 게다가 이번에 밖에서 큰일도 겪었고. 어쨌거나 자네는 외부인이니….”
요는 이렇다. 가족끼리 내밀한 이야기 하는데 외부인은 끼우기 그렇잖아? 네가 좀 이해해 주라.
제법 깔끔한 정리였다.
이 정도면 이해해 주겠지. 그녀는 자기가 나름 말을 잘 둘러댔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한 반 이상은 다 진실이지 않은가? 나머지 반은 아닐지라도.
“…그렇군요.”
“그래, 그런 거라네.”
“제가 전하를…. 아니 이 프로하우스 공작가를 뫼신 것이 무려 반세기를 넘어갑니다. 헌데 아직까지 저는 외부인인 것입니까?”
“으…응?”
뭐라고?
그녀가 제가 무슨 소리를 들었나 되짚는 사이 시종장은 서글픈 얼굴로 자리에 섰다. 그리하여 후작은 보고 말았다. 시종장의 눈가에서 또륵 하고 맺히는 이슬의 존재를….
그녀는 진심으로 놀랐다.
“자, 자네. 혹 우나?”
“저도 압니다. 제가 얼마나 이 가문을 섬겨 왔건, 제가 전하께 지은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란 것을. 그날 이후, 저도 늘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저도 전하께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지요. 허나 전하, 전하께오선 이 공작령의 유일무이한 통치자십니다. 그러하니 어찌 제가 그 뜻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전하, 저는 정말 전하와 이 공작령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그랬던 것이었습니다….”
그날은 무엇인가. 또 죄는 무엇이고?
후작은 이 초유의 사태에 얼어붙었다. 모든 것이 문제였지만 그녀의 눈엔 시종장이 우는 거만 보였다. 저 시종장이, 저 시종장이 울다니…! 수십 년 그를 알고 지내왔으나 딱 두 번 본 눈물은 그녀를 당혹케 했다.
아무래도 공작과 시종상 사이에 그가 모르는 어떠한 곡절이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지만….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녀는 일단 저 눈물이 문제였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상대를 달랬다.
“아니야.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든 그거는 아닐세. 내가 말실수를 했네. 나는 자네의 충심을 믿어!”
“아닙니다 전하….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노인네가 염치가 없게도 전하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말았군요.”
그거 아니래도!
후작은 소리를 치려 했으나 자칭 노인네인 시종장이 빨랐다. 그는 그녀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재빨리 문밖으로 튀어 나갔다.
“시, 시종장!”
그녀는 아픈 시늉 하고 있다는 것도 잊고 밖으로 시종장을 쫓아나가려 했다. 하지만 때마침 안으로 들어온 로메인과 렉시 때문에 나가지도 못하고 자리에 붙들리고 말았다.
“뭐, 뭡니까?”
렉시는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그도 그럴 게 갑자기 눈앞에서 시종장이 튀어나오더니 들어간 방안에선 공작이 뛰쳐나가려고 하지 않는가.
“혹시 두 분 싸웠습니까?”
“그런 거 아니네!”
크흑….
그녀는 가슴을 부여잡다가 애먼 바닥을 꽝꽝 굴렀다. 로메인과 렉시를 보자 자기가 어떤 상태를 해야 하는지 뒤늦게 생각난 탓이었다. 잡아야 하는데, 잡아야 하는데! 저 우는 거 그치게 해야 하는데! 또 왜 혼자 저렇게 막 나가!
안타까움과 환장함이 어우러진 플로랑 후작의 내적 고뇌는 뙤약볕 아래에서 꿈틀대는 지렁이처럼 격렬했다. 그 꼴불견을 가만히 보고 있던 로메인이 렉시에게 슬쩍 속삭였다.
“싸운 거 맞는 거 같습니다.”
한편, 공작과 싸우고 나온 시종장은 공작의 업무실에서 나와 자기 집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공작성의 본성은 과거 왕성을 그냥 그대로 쓴다. 따라서 궁정백의 집무실을 이어받은 그는 자신의 관저가 따로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집무 자체는 왕성, 그러니까 공작성 안에서 했다. 때문에 자신의 관저로 돌아가는 일이 도통 없는 그였지만 오늘만큼은 자신의 공간이 절실했다.
시종장, 제퍼슨.
그는 지금 무척이나 서운했다.
“참으로 세월이 무상하구나.”
말이 무상이지 그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그걸 넘어섰다. 허무, 슬픔, 애상, 절망….
겨우 그거 조금 가지고 너무 확대 해석해 난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시종장, 그는 그럴 만한 사람이었다. 솔직히 모신 기간도 그렇다. 반세기라는 건 그 혼자만 말하는 것으로, 사실 그의 집안은 사실 대대로 공작가만을 모신 집안이었던 것이다. 달리아 왕조에서부터 궁정백이었던 선조들의 가업을 이어받은 이래 그는 정말이지 몸과 마음을 다해 공작을 모셨다.
“물론 모든 날들이 꽃날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모든 것은 다 전하와 이 공작가를 위해 한 일이었다. 허나….”
궁정백, 아니 시종장의 자리란 무척이나 어려운 자리다. 과거 황제국 같았으면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자리. 허나 왕가가 공작가로 격하되면서 그 또한 함께 내려왔다. 왕이 하라니까 하긴 한다. 허나 참으로 난감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솔직히 공작은 뭐 공작이기라도 하지, 궁정백에서 시종장이 되어 버린 그의 집안이 겪은 혼란의 역사는 솔직히 대하 서사시로 엮어도 부족함이 없었다. 허나 그 모든 것을 그와 그들의 집안은 충심과 애정으로 견뎌 왔다. 그러나….
“그분은 아직도 나를 원망하고 계시는구나….”
발아래 서걱대는 마른 잔디가 지금 그의 처지 같았다. 그토록 오랜 세월 전하를 보필했건만, 마음에 맺힌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닌 것인가.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싸늘하고 건조한 겨울바람이었다. 프로하우스 성은 용의 마법이 걸린 성. 또한 성의 마법은 아무리 넓더라도 성 안쪽이면 적용된다. 때문에 코트야드 위를 걷는 시종장에겐 이 바람이 차가울 리 없었지만 그는 바람이 마치 칼처럼 느껴졌다. 사람의 몸이란 기이하여 마음이 생각하는 대로 몸이 따르는 법. 얼음처럼 차가워진 몸을 이끌고 터덜터덜 시종장이 걸어가는 바로 그때였다.
“이런, 이 저녁에 누가 이곳을 거니나 했더니… 시종장님 아니신가요?”
“…누구요?!”
시종장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았다. 차가운 얼음물에 전신이 빠진 기분이다. 그가 정신이 나가긴 나갔었던 모양이었다. 누군가 자신의 뒤를 따르는 걸 놓치다니…. 평소 같았으면 어림도 없었을 일인데!!
그는 선뜩한 가슴을 부여잡고 자신을 부른 사람을 찾았다. 하지만 어디서도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기이한 공포심이 시종장의 마음에서 피어났다.
어느덧 달이 뜬 궁정 마당 위로 나무의 검은 그림자가 마치 거미줄처럼 뻗어 있었다. 그 안에 있는 시종장의 모습은 마치 거미줄에 잡힌 먹이처럼 보였다. 그토록 사방이 퍽 어두운 시간, 그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누군데 나를 부르시는 거요? 모습도 드러내지 않고?”
“아, 실례했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어둠 속에서 사람이 불쑥 나타났다. 희고, 창백한 얼굴이 갑자기 솟아나는 광경이란 썩 보기 좋진 않다. 시종장은 등 뒤에서 갑자기 긴장이 쫙 오르고 땀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누구냐. 그는 벌렁대는 가슴을 부여잡고 상대를 자세히 관찰했다.
그리고,
“…시녀장 알로라?”
“네, 저랍니다.”
탁탁, 작은 발자국 소리와 함께 그녀가 다시 말했다.
“언제나 시종장님께선 절 시녀장이라고 불러 주시는군요.”
호호…. 공비의 시녀장, 알로라가 어둠 속에서 흰 얼굴로 곱게 웃었다. 휭, 바람이 둘 사이를 스쳤다. 시종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여자가 여기 왜 있지?’
황녀의 최측근인 시녀장은 황실 출신으로 능력이 매우 출중했다. 황가에서 하사한 인재답게 온갖 수라장을 헤쳐 온 그녀는 이곳에서 공비의 세력을 규합시켜 준 대단한 인재였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저 여자만큼은 시종장도 경계했다.
“시녀장, 당신이 여기에 왜 있습니까?”
“저는 잠시 산책을 나왔답니다. 오늘따라 날이 참 좋지 않나요?”
그 말에 시종장은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시간은 밤, 날씨는 잠시 잠깐 흐림.
…이게 좋다고?
누가 봐도 핑계다. 하지만 시녀장은 당당했다. 그녀는 짐짓 경쾌한 걸음걸이로 몇 발자국 앞으로 걷다 멈췄다. 어림잡아 시종장과 열 발자국 정도 떨어진 자리였다.
―네가 날 경계하는 걸 알고 있으니, 내 알아서 거리를 둬 주겠노라.
기실 나름 예의 바른 것이었지만, 시종장은 어쩐지 더 불쾌해졌다. 왠지 이게 더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실로 모든 범죄란 사전에 사람의 방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다정하게 다가오는 법. 누군가 그랬지 않은가? 무릇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가득 차 있다고. 그는 어쩐지 오싹해 몸을 떨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됐습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좋은 날이라면 그것이 맞겠지요. 허면 나온 김에 산책이나 계속하지, 나는 왜 불렀습니까? 이렇게 추운데 말이지요.”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다 시종장님. 아무리 제가 산책을 한다고 해도 시종장님을 모른 척하겠습니까. 요즘 공사다망하신 시종장님께서 바삐 지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어찌 그냥 보고 가겠습니까. 응당 인사라도 올려야죠.”
“…….”
시종장은 얼굴을 찌푸렸다. 이래서 이 여자가 별로다. 평소 자기와 얼마나 정답게 이야기했다고? 게다가 저게 말은 거창해도 요는 수상해서 불렀다는 말 아닌가. 안 그래도 속 시끄러운데 참 별일이었다.
“여전히 쓸데없는 말을 하십니다. 물론 당신 말대로 요즘 내가 일이 많긴 하지만 걱정해 줄 정도는 아닙니다.”
“어머, 그렇습니까. 역시 시종장님이시군요. 이 시간까지 집무실에 계시다 나오신 걸 봤습니다만 역시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시라니. 대단하십니다.”
방금 봤다면서 어디서 나온 줄은 어떻게 알까. 역시 일부러 쫓아온 게 분명하다. 시종장의 얼굴이 팽 하니 비틀렸다.
“시녀장. 예는 황성이 아닙니다.”
황도에선 윗사람들이 정치적인 정적이라도 아랫사람끼리는 서로 무척 친하게 지낸다. 수도는 워낙 온갖 곳의 지방 귀족들이 모이는 수라장 중 수라장. 거기다 합쳐서 수도 귀족들이 누대에 걸쳐 버티고 있다. 그렇게 각축전을 벌이는 귀족들 틈바구니에 있다 보면 아랫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뭉치게 된다. 넘쳐 나는 귀족들 틈바구니에 있다 보면 자신들의 위치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기 때문이라. 그도 이걸 무어라 할 생각은 없었다. 사람들이 그 나름의 편의를 챙기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니까.
허나 그건 수도고, 여긴 공작령이다.
때문에 그는 저 여자가 저렇게 다가오는 것이 영 별로였다. 설령 그가 전하와 다투었다고 해도 어찌 둘이 손을 잡겠는가? 그가 보기에 수도, 황실 사람들은 그저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축들일 뿐. 자고로 제대로 된 사용인은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주인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게 바로 그의 신념이었다.
“황성 쪽 사람들은 어떨지 몰라도 내 입에서 나올 것이라곤 인사 외엔 없습니다. 그걸 모를 리 없을 텐데?”
“어머, 오해십니다. 제가 언감생심 어찌 그런 걸 원하겠어요? 장난 삼아 해 본 이야기인데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죠. 시종장님께서 이 가문에 얼마나 충성하고 계신지 모를 제가 아니랍니다.”
“알면 되었습니다. 할 말 끝났습니까? 허면 나는 이만 가겠습니다.”
꼴에 눈치는 있다. 시종장은 휭 하니 뒤로 돌았다. 피곤이 물밀 듯이 밀려온다. 피곤에 잠긴 시종장의 미간에 일순 균열이 생겼다. 그리고, 그걸 본 시녀장의 눈이 순간 반짝 빛났다.
“하온데 시종장님, 지금 어디로 향하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어디긴, 집입니다!”
“집이라면 관저 말이신지?”
“그럼 내 집이 거기 말고 더 있습니까?”
시종장은 슬슬 짜증이 났다. 이 여자는 뭐 하러 나를 잡고 이리 물고 늘어지는가? 그러나 그는 몰랐다. 시녀장이 원한 것은 바로 이 순간이었다는 것을…. 시종장의 주의력이 낮아지는 바로 이 순간, 그녀는 그가 절대 발을 뗄 수 없게끔 은근한 덫을 놓았던 것이다.
“이런, 설마 했는데 역시로군요. 참으로 딱하십니다 시종장님…. 허나 전하께서도 참으로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어찌 시종장님께 그리하실 수가 있는지!”
“!”
씩씩거리며 걸어가려던 시종장의 발이 딱 달라붙었다. 짜증이 가득했던 시종장의 눈빛이 돌연 변했다. 너 지금 뭐라고 그랬냐? 딱 그런 얼굴이었다. 그는 시커멓게 변한 얼굴을 들어 시녀장을 노려봤다. 시퍼런 귀화가 두 눈에서 뚝뚝 떨어졌다.
“지금 감히 뭐라고 했나?”
살기를 넘어서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 모욕을 당한 듯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아주 볼만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건 아주 명백한 실수였다. 평소의 그라면 이런 말은 그냥 무시하고 넘어갔다.
즉 이렇게 반응하는 것 자체가, 그와 공작 사이에 무언가 있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었다. 허나 마음이 어지러운 시종장은 그것을 그만 잊고 있었다. 시녀장은 자신이 한 일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성공했다.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상처를 헤집은 것인가요?”
“시녀장!”
그는 버럭 소리쳤다.
그가 아무리 공작에게 마음을 다쳤다 한들 충성심이 다친 것은 아니다. 감히 외부인이 누구 앞에서 전하의 허물을 논한단 말인가? 저 여인이 제정신인가?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경솔한 태도는 삼가십시오. 어디서 감히 전하의 행사를 가지고 이런저런 말을 합니까? 예가 황궁이 아니라고 또 말을 해야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시종장님. 제가 그만 실수를 하였네요. 전하께서 어떠시든 시종장님의 충심이야 영원불멸할 텐데 말이지요.”
그리고는 참으로 황공하다는 듯 고개를 깊이 숙인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빙글대고 있었다. 그게 마치 자신을 농락하는 듯했다. 시종장은 속에서 열이 났다.
“이봐 당신…!”
“헌데 제가 아는 걸 전하께서 모르실까요? 그분은 왜 시종장님을 배제하셨을까요. 저라면 절대 그러지 않을 텐데….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귀한지는 저보다는 그분이 더 잘 아시겠지요. 전하께선 대체 무슨 생각이실까. 솔직히 원망스러우시죠? 모든 게 이상하진 않으신가요?”
쏟아지는 말들이 마치 독 같다. 시종장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대체 내게 무슨 교언을 하려 이럽니까?”
그는 그제야 자신이 한 실수를 깨달았다. 그냥 말을 섞지 말고 갔어야 했어. 아무리 발을 잡아채도 그냥 가야 했다. 허나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뒤였다. 이렇게 된 이상 그는 저 여자가 무슨 말을 해도 다 들어야만 한다. 몰랐다면 모르되 안 이상은 다 듣는 것이 뒤탈이 적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보는 시녀장의 두 눈이 요사하게 빛났다.
“이번 일을 본 저희 전하께서 말씀하셨답니다. 자신이라면 시종장님을 아주 귀히 대해 주실 텐데― 라고 말이죠.”
“뭐요?”
“어려운 길 그만 걸으시고, 이쪽으로 오시면 어떠시온지? 참고로 공비 전하는 아주 진심이었어요.”
“…지금 그거 포섭이요?”
“네, 공비 전하께서 슬쩍 말을 꺼내 보라고 하셔서요.”
“…그리고?”
“그게 다입니다.”
시종장은 순간 기가 턱 막혔다. 솟아오른 노화가 갑자기 쉭 하고 식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어이가 없다. 이게 뭐지? 무슨 포섭을 이렇게 해…?
아니 물론, 그가 뭘 하더라도 저쪽에 넘어갈 리는 절대로 없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런 건 좀 있지 않은가. 보통 상식적으로 포섭을 하려 할 때는 대부분 거부할 수 없는 조건 같은 걸 건다. 돈, 여자, 작위, 보물, 기타 등등등.
그리고 시종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무려 황제에게도 이런 권유를 받아 본 적이 있는 남자였다. 그때 그가 제시받았던 건 자그마치 작위가 딸린 영지. 심지어 기사단도 포함됐다. 물론 가뿐히 발로 깠지만 그의 시장 가격은 이런 정도라는 것이다. 헌데 대체 공비는 무슨 자신감으로?
그때였다.
“뭐 이렇게 말해도 안 들으실 걸 압니다. 이건 정말로 그냥 말을 전하라 하시기에 한 것이니까요. 물론 조금 더 설득은 해야겠지만 오늘만큼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
“그리고, 지금부터는 명령이 아닌… 제 자의적인 판단으로 하는 일입니다. 제가 당신께 몇 마디 말을 좀 할까 하는데… 물론 들어 주시겠지요?”
…지금 뭐라고? 시종장은 기겁하며 시녀장을 바라보았다. 저 시녀장이, 명령을 어기고… 뭘 해? 그는 당황하며 물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방금 공작과 싸웠던 것도 뒷전이었다.
“시녀장. 혹 …어디 아픕니까?”
피차 안부 물을 사이가 아니지만 지금은 좀 물어야겠다. 그만큼 당황했다. 둘이 아무리 적이라지만 그래도 알고 지낸 지 스무 해를 넘겼다. 그런 사람이 난데없이 안 하던 행동을 하면 아무리 적이라도 조금은 걱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시녀장이 피식 웃었다.
“압니다, 지금 제가 매우 이상하게 보이시겠지요. 이렇게 명이 아닌 제 스스로가 나서 말씀드린 건 처음일 테니까. 허나 일단 들어 주세요 시종장님. 이건 저도 나름 각오하고 벌이는 일이랍니다.”
각오해? 뭐를?
아는 말인데 왜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될까. 너무 피곤한 나머지 머리가 파업을 하는 모양이다. 시종장은 다른 의미로 얼른 집에 가고 싶어졌다. 눈앞에 있는 여자는 아무리 봐도 분명 시녀장이 맞는데. 헌데 하는 거 보면 그가 여태 알던 사람이 영 아닌 것 같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겁니까.”
“시종장님. 시종장님께선 계속 저희와 공비 전하를 감시해 오셨죠. 저희도 시종장님처럼, 그렇게 공작 전하를 지속적으로 관찰해 왔습니다. 물론 알고 계시는 이야기겠습니다만.”
물론 아는 이야기다. 상대에 대한 정보 수집은 기본 중의 기본. 따라서 역정보를 흘리는 것도 자신이 할 일이고. 하지만 왜 여기서 그걸 언급하는 것일까. 시종장이 얼굴을 구기자 여자는 쓰게 웃었다.
“물론 저희가 아는 것은 일부에 국한된 것일 겁니다. 시종장님께 정보를 알아내기란 정말이지 힘들더군요. 시종장님을 뵐 때마다 제 부족함을 통감하게 될 정도랍니다. 수도에도 시종장님 같은 인재는 별로 없을 겁니다. 헌데 시종장님, 알고 계십니까?”
“…? 뭘 말입니까?”
“시종장님은 매우 뛰어나십니다. 그래서 그런지 자신이 믿고 있는 사실은 별반 의심을 하지 않으시더군요. 때론 너무 가까이 있기에 모르고 넘어가는 일이 있지 않습니까. 저희는 그걸더러 오래된 익숙함이 눈을 가린다고 말하곤 하지요.”
“…그런데요.”
“그리고 …저희가 보기에 지금 시종장님은 그런 상태에 빠져 계십니다.”
“…….”
긴 침묵이 이어졌다. 뭐라고?
“재미있구려. 이 내가 …뭔가를 놓치고 있다?”
“아,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저는 시종장님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랍니다. 오히려 그저 약간의 도움을 드리고 싶을 따름이지요.”
도움이라니, 이 무슨 쥐가 고양이 생각해 주는 소리인가.
거기다 지금 한 소리 중 어디에 도움이 있단 말인가? 외려 모욕하는 말 아닌가?
하여간 근래 들은 것 중 제일 웃긴 개소리였다. 그녀의 목적이 자신을 웃기게 하는 거라면 방금 성공은 했다. 하하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젠 개나 소나 다 날 놀리는군. 내가 그리 만만해 보이나?
“왜 갑자기 분위기를 바꾸나 했더니 결국 이런 것입니까. 그렇게도 날 놀리고 싶습니까?”
“놀리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수이 믿기지는 않으시겠지만요.”
“오, 놀리는 것이 아니라니. 이거 아주 고맙습니다. 날 위해 그런 쓸데없는 일을 하시는 시녀장께 내 뭐라도 드려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시종장이 빈정댔다.
“설마요. 그저 제 말을 귀담아들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황당하기 그지없군…. 시녀장, 대체 내게 뭘 말하고 싶은 겁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그가 그간 놓친 게 대체 뭐란 말인가. 그는 슬슬 저 여자가 뭘 말할지 궁금해졌다.
“말해 보시지요. 한번 들어 볼 테니.”
시녀장이 침을 꿀꺽 삼켰다. 얼굴 위로 긴장감이 스쳐 지나갔다.
“시종장님. 현재의 전하를 어떻게 생각하고 십니까?”
“예?”
“예전과 같습니까? 뭔가 이상한 점이 보이진 않습니까?”
시종장은 잠시 침묵했다. 여기서 말하는 전하란 물론 공비가 아니라 공작일 터. 그는 그녀 말의 진의를 파악하려다 문득 이맛살을 찌푸렸다. 잠깐…?
“…시녀장, 당신 지금 제정신입니까?”
현재의 전하를 어찌 생각하는가.
저 말은 즉 이 말이었다.
―프로하우스 공작을 의심하라.
시종장의 기세가 칼처럼 날카로워졌다. 맙소사, 왜 저렇게 답지 않은 짓을 하나 했더니! 그는 큰 소리로 버럭대며 여인을 질타했다.
“맙소사, 이젠 이간질입니까? 이렇게 저열하고 저급한 수작이라니! 나를 뭘로 보고 이런 수작을 부립니까?”
“네, 노여우시겠지요. 압니다. 하지만 부디 이 말을 허투루 듣지 말아 주세요. 비록 모시는 분들이 정적이긴 합니다만 이 알로라, 시종장님을 마음 깊은 곳에서 존경하고 있답니다.”
“뭣?”
시종장이 멈칫했다. 하다 하다 이젠 가일층 해괴한 말을 한다. 날 뭐?
“존, 뭐? 지금 그거 나한테 하는 소리요? 존경?”
“모시는 분이 다르나 저 또한 사용인. 허니 한 주인을 배신하지 않고 수백 년간 섬겨 온 가문을 제가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쏴….
어디선가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갔다. 수천만 개의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려 내는 소리였다. 시종장은 이 스산한 바람이 마치 자신을 흔드는 것 같아 혼란했다. 눈앞에 있는 여자가 하는 소리는 그저 그런 망설(妄舌)이다. 그와 공작의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질 낮은 수작. 허니 그냥 귓등으로 흘려야 마땅한 이야기였다.
헌데 이상하게도, 이번만큼은 그게 힘들었다. 원래 인사도 안 받고 그냥 갈걸 후회한 나 아닌가. 왜? 새삼 존경이란 말을 들어서? 상대가 갑자기 이상하니까?
아니.
‘믿음이 흔들렸었구나. 내가 흔들렸어.’
정확히는 자신을 배제하는 공작의 행동에 자신이 흔들렸다. 주인이 무엇을 하더라도 참된 충성을 바치는 게 사용인의 사명이거늘. 그렇게 이 마음을 다 바쳐 전하를 뫼시고 있다 생각했건만, 그의 마음 어디 한구석은 아직 덜된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나도 아직 멀었구나…! 그는 속으로 탄식했다. 그리고 몹시 무서워졌다. 자신의 상황을 알아챈 공비의 눈치 때문이었다. 대체 그 여자는 이것을 어찌 알아챘단 말인가? 본인인 나조차도 이제야 눈치챈 것을…!
등 뒤로 싸늘한 것이 내달렸다. 시종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참으로 여우같군. 공비 전하가 이러라고 시켰습니까?”
“공비 전하께서 하신 말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하지만 아닙니다. 이건 제 판단입니다.”
“사용인에게 제 생각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모시는 분의 뜻이 내 뜻이 되는 것인데.”
시종장의 대꾸에 시녀장은 작게 미소했다. 어딘지 모르게 싸늘한 웃음이었다.
“네, 그렇지요. 하지만 저희에게 그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시종장님이야 그러시겠지만, 저희들은 모시는 분과 충성을 바치는 분이 다르니까요.”
“? 그럼 자네는 공비 전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모시고 있다는 말입니까?”
“현재 저희가 모시는 건 공비 전하가 맞습니다. 허나 저희가 그분께 충심을 다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그분이 황가의 분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그분을 모시기는 합니다만 충정을 드리지는 않아요. 저희의 충정이란 결국 황가를 위한 것…. 이 차이를 당신께서 모르실 리 없을 거라 생각해요.”
“…그 둘을 구분한다고?”
시종장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그로서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해는 하되 납득이 안 간다. 둘을 구분한다? 어떻게?
“그게 황궁에서 저희 사용인이 살아가는 비결이지요. 저희가 시종장님을 존경하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어떻게 가문이 아닌 사람에게 그 올곧은 신념과 순수함을 바칠 수 있는 것인지….”
저것이 진심인가? 시종장은 시녀장의 태도에서 그 뜻을 읽으려다 말았다. 지금 저게 진심인지 아닌지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대신 다른 걸 질문했다.
“그걸 공비 전하도 압니까?”
“저는 전하께오서 맡기신 일은 늘 성실히 수행합니다. 가능하다면, 명하시는 모든 일을 하려 하지요. 허나 불가능한 일을 명하시면 구태여 힘을 들이지는 않습니다. 나중에 그걸 보고하면 그뿐이니까요.”
시종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말하는 모시다와 충정의 차이가 뭔지 이제 알겠다. 늘 그들을 볼 때마다 느껴지던 미묘한 차가움의 의미 역시도.
‘그렇게 무서울 정도로 체계가 잡혀 있으면서도 열의는 보이지 않았던 이유가 이것인가. 그렇다면 공비 전하가 늘 초조해하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겠구나.’
저래서야 저건 온전한 내 칼이 되지 못한다. 칼 잡은 자는 따로 있는데 그게 어찌 자신의 무력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공비가 비공식적인 애인을 들여서라도 이곳 귀족들과 손을 잡으려 하는 이유를 알 듯했다. 칼이 있으나 남의 칼이니,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세력이 절실했던 탓이리라.
“그럼 이건 공비 전하의 명이 아니라면 황가의?”
“공비, 황가. 그 누구의 명도 아닙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시종장님을 존경해서 제가 한 일입니다.”
“날 존경해서 전하를 의심하라고 했다?”
“네. 더 이상은 시종장님이 농락당하는 걸 보기 힘들었으니까요.”
“…농락?”
이상한 단어였다.
농락.
보통 농락이라는 단어는 사람이 무언가에 속고 있을 때 쓰는 말이다.
어느덧 달이 중천에 떠 있었다. 짧은 시간인 듯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난 모양이었다. 그림자를 보며 시간을 가늠한 그는 속으로 갈등했다. 이 대화를 계속 이어 가야 하는 걸까? 자신을 존경한다고 한다마는, 솔직히 저 말이 완전히 믿기지도 않….
“!”
그때, 그녀가 움직였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시녀장이 갑자기 간격을 줄이자 시종장은 순간 반사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했다. 허나 그녀는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그저 앞으로 다가오는 것이 목적이었다.
저벅, 저벅.
그리고 시녀장이 그의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저를 봐 주시겠습니까?”
보다 환해진 달빛 아래 시녀장의 모습이 환하게 빛난다. 두 눈앞까지 다가온 시녀장의 얼굴은 멀리서 볼 때와는 조금 달랐다. 아무리 달이 환하다 한들 어두운 밤 야외다. 때문에 그냥 넘겼던 것들이 가까이서는 확연하게 보였다.
아까 보지 못했던 것들,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
시녀장의 모습은….
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자네…!”
“이런. 너무 놀라시니 무안하네요. 많이 보기 흉한가요?”
흉? 흉?
그는 지금 자신이 본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흉한 게 문제인가? 그것보다 더한 것이 있는데…! 자기도 모르게 비명처럼 외쳤다.
“어, 어떻게…!”
“적당히, 잘. 이 비밀은 지켜 주실 거라 믿어요.”
그녀는 새침하게 말하며 온 자리로 돌아갔다. 시종장은 넋이 빠진 듯 그런 그녀를 멍청하게 보고 있었다. 이것이 어찌 된 일인가, 말이 되는 일이야?
기다렸다는 듯 달이 다시 고개를 감춘다. 사위가 한결 어두워지고, 얼핏 드러났던 시녀장의 비밀이 다시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것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서지 않는 한, 이제 그건 조개 안의 진주처럼 안전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보지 못한 자의 사정일 뿐.
이미 드러난 비밀을 본 시종장은 태연치 못했다.
“맙소사…! 내게, 내게 그걸 대체 왜 보여 준 거요?”
시종장은 마치 학질 환자처럼 떨었다. 생각지도 못한 장면을 본 그는 동요를 숨기지 못했다. 역시 나이 많은 분들은 이런 일을 받아들이기 어려운가 보다. 시녀장은 혀를 차며 대답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농락당하는 것이 보기 힘들어서라고….”
“그게, 이 일과 대체 무슨 관계요?!”
“글쎄요. 아주 많은 관계가 있지만…. 다 말해 드리면 저 또한 곤란하니까요. 그러니 여기서부턴 시종장님께서 잘 생각해 보세요. 시종장님이라면 금방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시종장님께선 유능한 분이시니까요.”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시녀장은 그를 완전히 등져 사라졌다. 그녀의 말대로 이것을 보여 주는 것이 목적이었던 듯, 발걸음은 망설임 하나 없이 곧고 발랐다.
탁, 탁….
그렇게 어두운 그림자 사이로 그녀의 치맛자락이 사라지고, 이제 이 거대한 공간엔 시종장만이 남게 되었다. 시종장은 부릅뜬 눈을 한 채 그곳에서 못 박혀 서 있었다. 마치 한 그루 나무처럼 그림자와 얽혀 있던 그는 그렇게 서서 그가 방금 보고 들었던 모든 것을 되새겼다.
익숙함.
공작.
의심.
농락.
그리고… 시녀장.
“……설마.”
일순 돌풍이 불었다. 달을 가리던 구름이 그 기세에 휘말려 빙 돌다 사라졌다. 달빛이 다시 바닥으로 쏟아졌다. 주변이 삽시간에 환해졌다. 시종장은 환한 달빛 아래 서서 자신의 그림자를 말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달빛 아래 보이는 그림자가 유달리 짙어 보이는 건 착각일까. 마치 헤어 나올 수 없는 거미줄에 단단히 사로잡힌 것 같았다.
―여기서부턴 직접 생각해 보세요. 금방 아실 수 있을 테니.
사라진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하게 울렸다. 그게 자신 안의 의심을 점차 충동질한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럴 리가, 설마 그럴 리가 없다.”
잔뜩 찌푸린 얼굴 위로 달빛이 쏟아진다. 그는 그렇게 거기서 한동안 서 있었다. 중천을 달리던 달이 조금씩 기울어 서쪽으로 사라질 때까지, 오랜 시간을.
그렇게.
*****
시종장이 사라진 뒤 벌어진 한바탕 촌극은 생각보다 빨리 무마됐다. 시종장이 화난 것은 크나큰 문제였지만, 그를 쫓기엔 남겨진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너무 비밀리에, 급히 계획한 일은 후폭풍이 크다는 걸 모두 까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셋 다 머리가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머리가 좋다고 물리적인 양이 어떻게 되진 않는다. 안 그래도 시종장 때문에 머리가 아픈데, 일마저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 후작은 그저 죽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서류를 붙들면서 이를 갈았다. 정말이지 쉬는 것도 일이라니 이 얼마나 불합리적인가.
“그만두는 것도 이렇게 힘들다니….”
중얼대는 그녀를 렉시가 다독였다.
“본래 모든 일이 다 그런 것이지요. 그래도 이 일이 끝나면 쉬실 수 있을 테니….”
“그래. 그렇지.”
“헌데 이건 뭡니까. 이것도 해야 하나요 각하?”
그녀는 끙 하고 머리를 잡고 일어나 양피지를 잡았다. 렉시가 건네준 양피지 내용을 본 그녀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몰라도, 저건 꼭 해야지.
“연회… 아, 축하연 말인가. 그건 해야 하네. 내 은퇴 연회 아닌가. 그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로메인이 대리가 되었음을 알려 줘야 하니, 꼭 필요하지.”
“…큰 영지는 본래 이런 건가요?”
“작은 영지는 뭐가 다른가? 대부분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데.”작은 영지에서 일해 봐서 뭐 알아야 말이지. 렉시는 신음하며 이마를 감싸 쥐었다. 밀려들 일을 생각하니 두통이 밀려오고 있었다.
“연회라니….”
렉시는 진저리쳤다. 그거 하나에 얼마나 많은 일거리가 파생될지 안 봐도 뻔한 것 아닌가. 안 그래도 바쁜데….
“그냥 무시하면 안 되겠지요?”
“남작. 이게 동네 촌장 자리인 줄 아나?”
“…공작의 권력으로 밀어붙여도 힘들까요?”
“그 권력을 이양받으려면 마땅히 올바른 절차를 따라야 하는 거네.”
후작은 한숨을 삼켰다. 어째서 저렇게 진저리를 치는지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으나….
“이건 나름 상징적인 자리야. 로메인에게 무력이 아닌, 이 내가 스스로 대리 청정할 권한을 맡겼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자리라는 거지. 심정은 이해하네만, 안 하는 게 더 문제가 될 수도 있어. 공작 정도 되면 이런 일을 할 때 지켜야 할 격식이 있으니 그냥 받아들이게.”
“…빌어먹을 격식.”
“뭐 아니라곤 못 하겠군. 원래 격식은 빌어먹을 것이니. 수고하게. 대신 지참금은 연회가 끝나면 곧바로 주지.”
“…네!?”
갑자기 들이밀어진 당근은 무척이나 갑작스러웠다. 렉시는 깜짝 놀라 눈을 토끼처럼 떴다. 돈을 미리 준다고?
“뭐 그리 놀라나? 어차피 주기로 한 건데.”
“아니 그거야 그렇지만, 은행 쪽 소문은… 괜찮을까요?”
“뭐 그런 걸 걱정하나. 소문이야 물론 조금 돌았을 테지만…. 별일은 없을 거네. 솔직히 안다 한들 어쩌겠나? 설마 새 신부에게 지참금 미리 줬다고 항의를 하겠나.”
렉시의 얼굴이 태양처럼 밝아졌다. 방금 연회를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모든 고민이 저 너머로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과연 있는 자는 돈을 쓸 줄 안다.
“그렇다면 물론 해야지요. 헌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게 뭐지?”
“다른 것은 몰라도… 이러한 은퇴연은 본인이 준비해선 안 된다는 것이 통례라고 알고 있습니다.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귀족인 여성이 해야 하지요. 허나 공비는 이 일에 손을 대지 않으려 할 텐데, 그것은 어찌할까요?”
“…이런.”
차마 거기까지는 생각지 못했다.
“제가 여자라면 상관없겠으나…. 저도 어쨌거나 남자이온지라. 혹 다른 귀부인을 알고 계시다면―.”
“그것은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렉시는 깜짝 놀라 로메인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조용히 일을 하던 그가 난데없이 말을 꺼내니 놀랐던 것이다.
“로메인 경. 어떤 묘안이 있으신가요?”
“예…. 그 이전에 한 가지 여쭐 것이 있습니다. 혹 두 분은 일주일 뒤가 무슨 날인지 알고 계십니까?”
뜻밖의 말에 두 사람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일주일 뒤?
“그날 무슨 일이 있나?”
“아뇨, 알지 못해요. 혹시 중요한 일정이라도 있는 건가요?”
“…역시, 잊고 계실 것 같았습니다.”
로메인은 어색한 얼굴로 렉시와 후작을 보았다.
“그날은… 제 약혼 날입니다.”
“…??”
“각하께서 직접 발표하셨는데 역시 잊으셨군요.”
후작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내, 내가 그런 걸 했…나?”
“네, 그랬습니다. 버나드가 도망가고… 전하께서 발표하셨지요. 혹시 했는데 역시 기억 못 하시는군요.”
“…!!”
후작은 희미한 기억을 떠올리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버나드를 패고 난 뒤 분명 자기가 그런 말을 하긴 했었던 것이다. 난장판 속에서 말을 한 터라 듣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건만, 유일하게 로메인 하나만큼은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제가 말씀드릴 것은 이것입니다. 제가 알기로, 몇 년 전 수도에서 거주하던 귀족 하나가 한 번의 연회에 두 번의 행사를 같이 한 적이 있었습니다. 오전엔 결혼식을 올렸고, 오후엔 은혼식을 올렸다고 하지요.”
선례 없는 일이라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미 누군가 한 번 그러한 연회를 열었으니 자신들이 한다 한들 뭐라 들을 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동공이 크게 떨렸다.
“자네 말은….”
“예,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그날 같이 한꺼번에 하는 겁니다.”
귀족들이 연회를 자주 열지만 한 연회를 끝내면 최소 이삼 주는 여유를 둔다. 공작과 로메인은 최대한 빨리 대리를 달아야 했으니, 약혼 연회가 먼저 열리면 퍽 골치 아플 일이다. 허니 그런 걸 감안한다면 이건 대단한 묘수였다.
“…괜찮은 수네요.”
정말로 괜찮은 수다. 이미 새로운 연회를 준비하지 않고, 기존 준비된 연회에 합치는 것이니 일도 줄고. 궁하면 통한다더니 어쩜 이렇게 좋은 생각을 떠올렸을까? 검만 잘 쓰는 줄 알았는데 경은 머리도 좋구나.
…그런데 잠깐.
렉시는 퍼뜩 무언가를 떠올리고 딱딱하게 굳었다.
그 약혼 준비, 지금 누가 하고 있는 거야?
*****
“어서 오렴 새아가! 세상에, 바쁠 텐데 와 주다니!”
후작 부인 엘자는 기쁜 얼굴로 예비 아들 부처(?)를 맞이했다. 렉시는 기가 질린 얼굴로 후작저를 살피며 몸을 떨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적했던 후작저는 오가는 상인들로 북새통이었는데 그 규모가 무척이나 대단했다. 언뜻 봐도 정차한 마차가 스무 대가 넘었는데…. 이야, 저게 다 뭐람.
렉시와 로메인은 그녀가 다가오길 기다렸다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후작 부인.”
“어머니, 좋은 오후입니다.”
엘자는 아들 부처의 인사를 들으며 흡족한 얼굴을 했다.
“그래, 좋은 오후구나. 헌데 후작 부인이라니 조금 서운하구나. 새아가, 어머님이라고 불러 주렴. 우리가 어디 남이니?”
“…네, 어머님. 잘 지내셨습니까?”
“호호호! 물론이지. 아주 잘 지낸단다.”
정말로 잘 지내는 걸까. 물론 겉보기엔 환한 얼굴에, 퍽 잘 지내 보인다만.
“… 그, 약혼 준비를 어머님께서 하고 계시는데 와 보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렉시가 고개를 숙여 사죄하자, 엘자가 깜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어머, 무슨 소리니. 아가, 걱정 말렴.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내 아들 약혼인데, 그게 어떻게 미안할 게 되니?”
후작 부인은 아들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약혼 준비는 잘 되고 있단다. 로메인 이 녀석이 너무 다급하게 맡아 달라고 하긴 했지만, 내가 누구니. 아주 완벽하단다.”
그랬다. 아무도 하지 않고 있을 것 같던 약혼 준비는 후작 부인이 하고 있었다. 무려 로메인이, 미리 그녀에게 언질을 해 놓았던 것이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정말이지 얼마나 놀랐는지….
렉시는 옆에 서 있는 로메인을 바라보았다. 보통 기사는 계획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편견이 있으나, 로메인은 달랐다. 자기는 생각하지도 못한 일을 이렇게 별 탈 없이 준비해 주는 건 로메인밖에 달리 없을 것이다.
“고맙습니다, 후작… 어머님.”
“호호호, 고맙긴. 나야말로 고마워 죽겠단다 새아가. 네가 아니었으면 저 미련퉁이는 평생 혼자 살았을 거야.”
“……제가 도와드릴 일은 없을까요?”
이렇게 좋아하는데, 이게 가짜라는 말은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 걱정이 되었지만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렉시의 질문에 후작 부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게, 그다지 도와줄 일은…. 온 김에 치수라도 재 보겠니?”
“치수? 옷 말입니까?”
“그래. 로메인은 저번에 와서 쟀는데, 새아가는 한번 재고 말았… 어머. 어머. 어머.”
렉시의 팔을 잡았던 후작 부인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세상에, 우리 새아가! 왜 이렇게 살이 확 빠졌니?”
그녀는 호들갑을 떨며 렉시의 몸을 살폈다. 아팠다 일어난 탓인지 옷이 헐렁한 걸 매의 눈으로 알아챈 엘자의 눈이 살벌하게 빛났다. 후작 부처는 렉시에게 일어난 일은 잘 몰랐다. 단지 조금 아파서 누워 있다는 소리만 들었을 뿐이다. 허나 아무리 아파도 그렇지…그 잠깐 새 이렇게 살이 빠지다니! 이래서야 준비한 예복이 맞으려나?
“로메인! 너 옆에서 대체 뭘 했니?”
렉시는 당황했다. 아니 왜 살이 빠졌는데 로메인에게 뭐라고 하지? 그러나 로메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무척 당연하다는 어투로 어머니에게 사과까지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네가 요즘 무척 바쁘단 이야긴 나도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하나뿐인 배우자를 이렇게 방치하면 쓰니? 내가 널 이렇게 키웠어?”
“죄송합니다 어머니. 시정하겠습니다.”
“늘 말만 시정시정! 말만 그렇게 말고, 행동을 해야지! 네가 얼마나 신경을 못 썼으면 새아가가 이렇게 살이 홀랑 빠졌을까? 아이고 새아가, 이 녀석이 이렇게 무심하단다. 내가 다 미안하구나!”
뭔가 대화가 튀는 것 같은데도 이어진다. 렉시는 정신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어머님, 저야말로 죄송한걸요. 제 약혼식인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머님께서 이 많은 걸 홀로 준비하시게 했는데….”
“어머, 또 그 소리니. 그리고 새아가, 아가가 왜 이 일을 해?”
엘자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약혼은 본인이 준비하는 것이 아니란다. 보통 부모가 해 주지. 허나 새아가는 부모님이 아무도 안 계시지 않니? 허니 당연히 모두 내가 준비해야지! 이 먼 데서 가족도 없이 홀로 약혼식을 하게 생겼는데 이 정도도 내가 못 해 줄까?”
서로의 기본 인적 사항은 이미 대충 들어 놨다. 때문에 엘자는 렉시에게 직계 가족이 한 명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가족도 하나 없는 것이 이걸 혼자 하려고 했구나! 그녀의 맘속에서 애틋함과 사랑이 샘솟는 순간이었다.
“네? 아니요, 괜찮습니다. 응당 제가 해야 할 일을….”
“우리 새아가는 마음도 착하지…. 네 맘 내가 잘 안단다. 나도 시집올 땐 우리 오라비가 대신 아버님과 어머님이 되어 주셨었어.”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렉시의 손을 쓰다듬었다.
“혹여 이 일로 마음 쓸 일 없게 내가 잘하마. 배우자 부모도 부모란다! 알았지?”
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로메인을 휙 째려봤다.
“로메인 너도 잘 들으렴. 이젠 너도 가정이 생기는 거야. 가정을 이룬 남자는 바깥일도 바깥일이지만 안사람에게 신경을 많이 써야 해요. 집안의 평화란 자고로 배우자의 행복에서 시작하는 거란다. 앞으로도 계속 나와 네 아버지는 무조건 새아가 편이 될 거니까 각오하렴. 또 이런 일이 있다가는 이 어미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어머니.”
“흥! 내 기억해 두겠다!”
이글이글 불타는 눈동자엔 거짓이라곤 없다. 실로 황공무지로소이다였다. 렉시는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중년 부인이 이렇게 호감을 표하고 다가올 땐 어떻게 해야 하나? 어머니가 어릴 적 돌아가시다 보니 이런 사소한 것에서 혼란이 생기는 그였다. 보통 사람은 어머니를 어떻게 대하나. 이럴 땐 역성을 드는 것보단 내 잘못이라고 말하는 게 맞나?
“그, 어머님. 그…이는 잘못이 없어요. 그냥 제가 좀 긴장이 되다 보니….”
“어, 어머…. 그러니?”
다행이다. 이렇게 하는 게 맞구나!
렉시는 안도했지만, 사실 그녀가 봄처럼 풀어진 건 ‘그이’라는 단어 때문임을 그는 알지 못했다. 아들 부처가 벌써 그이 당신 이러고 있으니 대번에 기분이 풀어졌던 것이다. 어쩐지 좀 주책맞은 모양새가 되었지만…. 여하간 말 한마디에 엄했던 얼굴이 봄처럼 풀어지긴 했으니 모로 가도 수도만 가면 되는 것이란 말이 맞긴 맞다.
“오라버니가 네 약혼을 도맡는다 해서 그러마 하긴 했지. 하지만 솔직히 속으로 조금 서운했어. 네가 마지막으로 내가 장가보낼 자식 아니니? 저 애가 언제쯤이면 결혼할까, 조금씩 모아 놓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 너희는 모를 거란다.”
조잘조잘 떠들면서 그녀는 몇 개나 되는 방을 건넜다. 렉시는 후작저의 분위기가 판이하게 달라진 걸 보고 조금 놀랐다. 차분하고 가라앉은 느낌이던 저택이 잠깐 새 마치 봄이 온 것처럼 변해 있었다. 후작 부인의 솜씨였다.
“그래서 로메인의 청을 들었을 때 솔직히 기뻤단다. 물론 오라버니가 아픈 건 좋은 일이 아니지. 하지만 덕분에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야. 이 말에 분명 서운타 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부모 맘이 그렇더구나.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오라버니는 이런 일엔 좀 솜씨가 없어. 물론 바깥일이야 잘하지! 하지만 약혼과 혼인 연회란 자고로 화사해야 하는 거 아니니? 내 혼인 연회와 약혼 연회를 너희가 못 봐서 다행이란다. 그때 내가 말은 안 했지만 얼마나 속이 상했던지….”
대체 뭐가 어땠길래 저러는 걸까? 렉시는 궁금했지만 그냥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네, 속이 많이 상하셨겠어요.”
“뭐, 남자가 꾸며 봐야 다 거기서 거기지. 사람이 다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 넘어간다마는…. 하지만 그 일을 겪고 난 뒤 나는 결심한 게 있었단다. 절대 내 자식들은 나처럼 우중충한 혼사를 치르지 않게 할 거라고 말이야.”
그녀는 렉시에게 눈을 찡긋했다. 모든 건 자신에게 맡겨라! 안심시키는 모양새였다. 아들의 혼사를 앞두고 들뜬 그녀는 마치 젊은 날이 다시 온 것처럼 씩씩했다.
“자, 여기란다. 들어오렴!”
렉시는 그녀의 손에 이끌려 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맙소사.’
이곳의 원모습은 렉시도 기억했다. 밥 먹으러 왔다 갔다 하면서 조금씩 봤다. 이 장소는 원래 손님들이 놀고 즐기는 각종 여가 시설들이 즐비했던 공간이었다. 헌데 지금 보니 아예 공간의 이름과 정의 자체를 바꿔야 할 것 같았다.
일단 모든 집기들이 다 사라졌고, 물건들만이 그득하다. 평소엔 반쯤 내려놓던 두터운 커튼은 싹 다 걷어 놓고, 햇빛이 잘 들게 해 안에 쌓아 놓은 물건들이 빛을 받아 눈이 부시게 빛난다. 반짝반짝반짝….
‘보물 창고다!’
“일부만 가져다 놨단다. 나머지는 다른 곳에 있어.”
일부라고 하니 꼭 약소한 듯했다. 하지만 그건 말만 그렇다. 지금 이곳엔 각종 옷감, 보석, 옷을 걸어 놓는 옷걸이, 기타 온갖 호화로운 것들이 마치 산처럼 쌓여 있었다. 평소 같으면 뭐라도 한 마디 했을 렉시조차 여기선 아무 말 못 했다. 맙소사! 어쩐지 현기증이 팽팽 나는 그였다.
“여기 있는 건 오시는 분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 목록들이야.”
“선물이요?”
“그래, 시간을 내서 약혼 연회에 오시는 분들이니 응당 감사를 표해야지. 신사분들은 일단 담배나 차를, 숙녀분들에겐 찻잔이나 향수를 드릴 생각으로 모았단다. 자, 어떠니?”
“어, 어머님의 선택이 탁월하시다고 생각합니다.”
먹을 것은 줘 봤어도 물건은 안 줘 봤다. 할 말이 있을 턱이 없으니 렉시는 그냥 대충 입만 놀릴 밖에. 헌데 의외로 여기서는 렉시 대신 로메인이 나서 주었다.
“여기 있는 것이 샘플입니까?”
“응, 이거랑, 저거. 어떠니? 병은 푸른색이고 담뱃갑은 은제야. 괜찮니?”
“재질은 괜찮지만…. 생각보다 외관이 투박하군요. 역시 시간이 촉박했습니까?”
그냥 봐도 화려한데, 라고 생각하던 렉시가 속으로 흠칫했다. 투박? 이게?
“흥, 역시 좀 티가 나지? 하지만 아무리 해도 이 이상은 안 되겠더구나.”
“혹시 이니셜은 준비하고 계십니까?”
“아직은 새기기 전이란다. 왜? 하지 말까?”
“네, 상황이 그렇다면 이니셜은 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다들 시간이 촉박한 건 알고 있을 겁니다. 이건 아예 안 하느니만 못할 것 같군요.”
“흠…그래? 아가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응, 나요? 렉시는 입으로 간신히 웃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소박…한가요?”
아마도 반쯤은 허둥댔을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아무리 해도 알 수 없다 저 개념…. 사치품을 어디 봤어야 알지. 렉시는 어쩐지 등에서 땀이 났다. 원래 아무 말 안 하면 반은 간다고 한다마는 이게 맞나. 여기선 대체 뭐라고 해야 해? 한 번도 부자였던 적이 없어서 부자의 느낌을 모르겠다. 다행이게도 어물쩡한 대답을 후작 부인이 찰떡같이 해석했다.
“그래, 새아가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그럼 이니셜은 그만두자꾸나. 나도 솔직히 저런 물건에 이름을 새기는 게 꺼림칙했단다.”
“네, 어머니. 큰일이긴 합니다만 고작해야 약혼 아닙니까. 그러니 너무 신경 쓸 필요는 없습니다.”
거기다 약혼식 뒤엔 은퇴연도 있다. 로메인은 그런 뜻으로 너무 신경 쓰지 말라 말했지만, 이게 의외로 엘자의 신경을 건드렸다. 특히 고작이란 단어가.
“…고작 약혼? 얘, 엄마가 조금 기분이 그렇구나. 아무리 그래도 고작 소리는 좀 아니지 않니?”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약혼은 약혼일 뿐, 본식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전 그런 의미였습니다.”
“뭐 그렇긴 하지만 말이 너무 심했구나. 앞으로 조심하렴.”
“네, 어머니 알겠습니다.”
싸해지려는 분위기가 간신히 잡혔다. 하긴, 본식에 비한다면 약혼이란 고작일 수밖에 없지. 그녀는 빠르게 납득하고 기분을 풀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곧 이어진 말에는 대번에 얼굴을 굳히고 말았으니….
“아, 어머니. 깜박했는데, 약혼은 오전에만 하고, 오후에는 전하의 안식년을 기념합니다. 그러니 오후 연회는 그것으로 대체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뭐라고? 너 그게 무슨 소리니?”
꿈과 희망이 가득한 그녀의 연회 로망, 그곳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약혼을 오전에, 오후에는 오라버니의 은퇴연을 한다고?”
총 세 번에 걸친 설명을 듣고서야 그녀는 상황을 이해했다. 너무 황망한 사태에 머리가 일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런 경우가 예전에 있었나? 이걸 생각하는 것이다. 한 번의 연회, 두 번의 행사….
“그래, 그런 경우가 없지야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전하께서 몸이 많이 안 좋으신 듯했습니다. 되도록 빨리 제게 일을 맡기고 싶다 하시더군요.”
“정말이니? 걱정이로구나….”
후작 부인의 얼굴에 그늘이 서렸다. 아무리 출가한 지 오래라지만 하나뿐인 오빠다. 몸이 안 좋아서 휴식하는 시일까지 앞당긴다는데 걱정이 안 될 리 없었다.
“의원은 뭐라고 한다니? 대체 어디가 얼마나 아픈 건데? 쉬는 시기를 앞당길 정도라니… 혹 큰 병이라도 걸린 것이니?”
속사포 같은 질문이 쏟아졌다. 하지만 무척 다행이게도 둘 다 오기 전에 이에 대해 설정을 짜 놓은 상태. 로메인과 렉시는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가짜로 공작의 병환을 꾸며 댔다.
“큰 병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다만 피로 누적이라 그렇다나 봐요. 사람이 일을 하다 보면 갑자기 기력이 팍 상하니까요.”
“전하께서 좀 일이 많습니까?”
“네, 거기다 제가 오기 몇 달 전에도 쓰러지셨다고 들었는데요. 아마 그것도 영향이 있을 것 같았어요.”
“맞습니다. 일단 푹 쉬어야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무척 마르셨더군요.”
“…그때보다 더 살이 빠지셨단 말이니?”
후작 부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날이 혹 신년 연회인가요? 그렇다면 그보다 더 마르셨어요. 말도 마세요, 마치 비쩍 마른 해골을 연상시키시더군요. 제가 다 가슴이 덜컹할 정도였어요.”
반쯤은 과장을 섞고 반쯤은 진실을 말했다. 일단 겉보기엔 엄청나게 말랐고, 사람이 일만 해서 푹 삭긴 했으니까.
어쨌거나 요는 이렇다. 일이 많아 말랐다, 큰 병은 아니다. 다만 피로 누적이 심하니 쉬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렉시가 긴 핑계의 방점을 찍었다.
“이번 연회가 끝나면 피정도 가시기로 했다는군요.”
“피, 피정이라고?”
그녀는 결국 입을 떡 벌렸다. 세상에! 몇 달 전 쓰러졌을 때도 피정의 피도 안 했던 공작이다. 신년 연회 때 오라버니를 보긴 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건강한 줄 알았던 그녀는 큰 충격을 받았다. 설마하니 피정까지 생각할 정도로 몸이 부실해졌단 말인가?
“대체 어느 정도기에!? 정말 큰 병이 아닌 게 맞아? 목숨이 위험하거나 뭐 그런 거 아니고?”
여기서부턴 로메인이 대답했다.
“그렇게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좋은 편도 아닙니다. 가능하다면 어느 하나를 미뤄야 하는 상황이지요. 그리고 그 미루는 건 약혼 쪽이 될 거고요.”
“그럼 약혼을 미루지!”
“이미 발표한 약혼을 미루기보다는 그냥 본인의 은퇴를 앞당기자고 하셨습니다. 사실 저도 그게 맞는 것 같아 그러시라 말한 겁니다.”
“맙소사….”
후작 부인의 눈가가 조금 붉어졌다. 왠지 모르게 눈물을 참는 모양새였다.
“그렇구나. 피정을 가실 정도로 몸이 안 좋지만, 너희 약혼은 꼭 보고 싶으셨던 게야.”
그게 …그렇게 보이나?
“뭐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보다는 몸이 많이 안 좋은 것이 더 크지 않겠….”
“아냐, 아가. 너는 모를 거란다. 우리 오라버니가 어릴 적부터 로메인을 참 귀여워했어. 그리고 장가를 가네 못 가네 해서 사람들의 빈축을 많이 산 걸 안타까워하셨지. 안 간다는 애 붙잡고 장가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냥 보고 계셨지만. 헌데 그런 조카가 이렇게 장가를 간다니 얼마나 기쁘셨겠니?”
그녀는 어쩐지 북받친 듯 가슴을 쳤다. 어리석은 자신을 탓하는 것이다.
“갑자기 네게 대리를 맡긴 것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야 하는데! 내가 너무 무심했다. 아무리 시집을 갔어도 하나뿐인 오라버니인데….”
또르르…. 한쪽 눈으로 눈물이 떨어진다. 자식 여읜다고 화사했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녀는 방울방울 울다 말고 벌떡 일어났다.
“안 되겠다. 잠깐 가서 전하를 뵈어야겠어.”
약혼도 중요하지만 오라버니도 중하다. 가서 얼굴이라도 보고 챙겨 주자!
그렇게 밖으로 튀어 가려는 그녀를 로메인이 간신히 잡아챘다.
“기다리십시오! 어머니, 지금 가서 무얼 하시려고요?”
“뭐든 해야지! 오라비가 아프다는데 그럼 동생이 아무것도 안 해?”
“그러면 가시는 게 아니라 여기 계셔야죠. 어머니, 어머니가 하실 일은 여기 있지 않습니까? 연회 준비 말입니다.”
로메인은 냉정하게 그녀의 행동을 막아서며 재차 말했다. 가서 무엇 하게? 할 일이 있긴 하고? 외려 지금 가면 일만 늘어날 텐데?
후작 부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일견 냉정하기 그지없는 말이었지만, 사실 그 말이 맞긴 맞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로메인의 행동은 너무 칼 같은 면이 있었다. 사람 문병을 꼭 할 일이 있어야 가는 건 아니잖는가.
“당장 일주일 뒤가 연회입니다. 약혼 연회, 은퇴 연회 모두 어머니가 하셔야 합니다. 발등에 불부터 끄시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문병은 그 이후에 가셔도 충분합니다.”
“…너도 참 너무하는구나. 어쩜 사람이 그리 정이 없니? 네 삼촌은, 널 믿어서 그 크나큰 자리까지 맡기신다고 했는데….”
그놈의 대리 참 대단도 하다. 실상은 속 빈 강정에 일만 하는 자리건만. 그 실상을 아는 그로서는 그 일이 참 같잖아 보일 뿐이다. 로메인이 한숨을 푹 쉬며 머리를 짚었다.
“그래서 지금 일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약혼식 전날까지 일을 하는 조카는 저밖에 없을 겁니다.”
“네가 뭘 몰라서 그러는 거야. 공작 업무를 대리하는 건 대단한 영광이란다.”
“네, 그 영광스러운 자리를 지키시던 전하는 와병 중이시죠. 그리고 그 자리에 제가 지금 가고 있고요. 어머니, 솔직히 말해 전하가 아니었다면―그리고 약혼만 아니었다면 저도 도망갔습니다.”
남들은 못 해서 안달인 걸 저렇게 쓰레기 취급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어떻게 된 게 쟤는 한마디도 안 지려고 해. 후작 부인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알았다. 알았어!”
하면 되잖아! 내가 너 얄미워서 다 하고 간다. 다 하고 가!
그녀는 멀리 뻘쭘하게 서 있는 사용인들을 불러 모았다. 혹여 불똥 튈까 멀리 있던 사용인들의 행동에 그녀는 빈정이 휙 하니 상했다.
“거기 너희들! 이번 약혼을 위한 목록표 가져오렴. 어서!”
사람들이 마치 각다귀 떼처럼 우수수 흩어졌다. 그리고 한참 뒤 다시 나타났다. 나타난 사람들 손엔 다들 무언가 하나씩은 들려 있었다. 후작 부인이 외쳤다.
“모두 순서대로 이쪽으로!”
그러고는 누군가 가져온 양피지를 둘둘 펴며 하나하나 체크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저 양피지가 목록이고, 사용인이 가져온 게 목록에 있는 물건인 모양이었다. 옆의 하녀장이 쩔쩔매며 부인에게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원래는 본인이 할 일인 모양이다. 허나 후작 부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들에게 자극받은 나머지 모든 걸 혼자 하는 걸 보여 주려는 것이다.
“이리 와라, 직접 확인하렴.”
그녀는 일렬로 선 사용인들을 하나하나 가리켰다. 그리고 가지고 온 물건들을 로메인에게 보였다.
“저건 레이스야. 남부의 일급 공방에서 공수한 거지. 탁자와 식기를 장식할 거란다.”
“단단하게 구운 푸른 도자기는 만찬 뒤 후식 시간에 선보일 것이고.”
“투명한 크리스털 잔은 글쎄, 와인 잔으로 적합할 거 같고.”
“와인은 시피오 21년산이야. 총 30병 준비했다.”
“여흥으로 광대를 부를까도 했지만 그건 취소해야겠구나. 웃고 즐길 일만 있진 않으니까.”
“흠, 이건 어떨까. 대신 악단을 더 부르고 음악을 전반 후반을 나누는 게 좋겠어.”
마지막으로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지간한 가문의 한 달 예산을 추가하는 기염을 토해 냈다. 하지만 여기서 제일 놀라운 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돈을 휙휙 써 대는 그 배포다. 원래부터 부유했고 여전히 부유하며 미래에도 부유할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돈지랄. 렉시는 뒤에서 그걸 보면서 조용하게 떨었다. 이거 뭐야 몰라 나 이거 무서워….
“흠, 이 전체 일정표는 있지만 이건 어차피 다시 짜야겠구나. 일단 약혼식 시간은 그대로 두되 성의 홀을 다 열어야겠어. 제퍼슨, 시종장은 지금 성에 있니?”
“네, 어머니. 있습니다.”
“어차피 요리사의 수도 부족하고 시중은 그쪽 사람을 빌릴 생각이야. 이 일 확인하면 오라버니를 보는 김에 그도 만나야겠다.”
그녀는 아들을 지그시 보았다. 아무리 어린 시절 함께 지낸 시종장이라도 남자는 남자. 로메인에게 같이 가 달라는 것이다. 참고로 후작은 지금 무척 바쁘다. 알아들은 로메인이 쓰게 웃었다.
“네, 제가 함께 가 드리겠습니다.”
“흥! 당연하지!”
만족할 만한 답을 얻은 그녀는 다시 눈을 양피지 위로 떨어트렸다. 어느덧 목록표가 거의 끝자리로 가 있었다. 그녀는 숫자와 표를 비교해 가며 로메인과 렉시에게 설명했다.
“기본적으로 가구들은 공작성의 물건들을 쓸 거란다. 의자나 탁자 같은 것은 내가 가져가기 힘드니까. 허나 말한 대로, 이외 집기나 장식용 레이스, 식기류는 내가 가져간 것을 쓸 거야.”
“상관이야 없습니다. 어머니께서 알아서 잘하셨을 테니…. 헌데 하나 여쭈어도 됩니까?”
“그러렴.”
“외람된 말이나, 손님 대접할 집기라면, 전하의 성에 많습니다.”
로메인의 이 말에 그녀가 두 눈을 곱게 접었다.
“성의 물건? 오, 내가 설마 그걸 모르겠니. 로메인, 잊고 있는 모양인데 이 어미는 거기서 아예 살았었어요.”
“헌데 왜 굳이 이렇게 다 챙기십니까?”
“맙소사! 내가 내 며느리 연회에 남의 걸 써야 할까? 그것도 새언니의 손이 닿은 걸?”
안 그래도 오라버니와 사이가 안 좋은 새언니다. 뭐라고 한마디 들을 게 빤한데 그 꼴을 뭣 하러 당해?
“거기다 후계자만 쓰는 걸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최하급을 내놓으면 어떻게 하니. 그런 꼴을 볼 바엔 내가 직접 준비하는 게 나아!”
지금이야 조용하지만 업무 대리 시작하면 분명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할 여자다. 아니, 필시 사전에 뭘 해 놓았을 수도 있었다. 솔직히 가구 쓰는 것도 많이 봐주는 것이라. 후작 부인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 살벌한 예시에 렉시가 물었다.
“사람들의 눈이 있는데도 그러실까요?”
“그 여, 아니 공비 전하를 내가 모를까? 사교계에서 그분과 가장 자주 마주치는 게 누구일 것 같니?”
남자는 남자가 알고 여자는 여자가 제일 잘 아는 법. 후작 부인은 순진해 빠진 자기 새아가가 슬쩍 걱정이 됐다.
“아가, 혹시 해서 말이다만 그분과는 가까이 지내지 말렴. 물론 사교계에 있다 보면 말을 섞어야 할 때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좀 걱정이 되는구나.”
“주의하겠습니다. 최대한 멀리할게요.”
최대한 멀리가 아니라 아예 피해 다닐 기세로 렉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런 렉시를 보며 작게 미소지었다.
“그래, 바로 그거란다. 맙소사! 네가 여인이 아닌 것이 이렇게 다행일 수가 없구나.”
남자랑 남자가 약혼을 하는데 보통은 그 반대를 말하는 게 정상 아닐까. 그녀의 말에 렉시는 해괴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별말 없이 자기 생각에 잠길 뿐이었으니.
‘그래, 정말로 그렇지. 여자였으면 정말 큰일이야.’
남자들은 모른다. 여자들이 한번 치사해지면 얼마나 치사해질 수 있는지를. 그저 겉으로 하하호호 웃기에 모르고 넘어갈 뿐, 그 물밑에서 얼마나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는지 알면 다들 기겁할 것이다.
“자, 자 어두운 이야긴 여기까지 하자꾸나. 그럼 마지막 순서로 넘어갈까?”
“네?”
그녀가 짝짝 손뼉을 치며 주위를 환기했다. 마지막? 할 것 다 한 게 아니었나?
“다 하긴? 가장 중요한 게 남아 있잖니.”
“…!”
렉시와 로메인은 하인들 가져온 예복을 보며 입을 벌렸다. 하나하나 보석을 박은 예복은 실로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시간이 촉박해서 로메인의 것은 예전 연회복을 조금 고쳤단다. 저 검은색이 네 것이야. 흰 것은 새아가 것이고. 어때, 맘에 드니?”
“저야 뭐든 상관없습니다만….”
로메인의 시선이 흰옷에 머물렀다. 그는 주의 깊게 두 옷을 살피다 렉시를 바라봤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저, 저요?”
“네, 아무리 좋은 물건도 본인 마음에 들어야지요. 당신이 별로라면 다른 걸 준비할 수도 있습니다.”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옷을 멍하니 응시했다. 세상에. 얼굴이 절로 붉어졌다.
“맘에 들지 않습니까?
“아, 아뇨! 맘에 들어요.”
렉시는 고개를 저었다. 고급스럽고, 화려하고, 보석도 많고, 선도 예쁘다. 하지만 가장 렉시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다른 것이었으니.
눈앞의 예복은, 색만 다를 뿐 서로 쌍둥이처럼 똑같았다.
즉 크기나 라인이 조금 다르지만, 아로새겨진 수나 보석이 누가 봐도 커플용 옷!
대체 누가 저런 걸 만들었나 모르겠다. 아마 입고 있으면 백 미터 밖에 서 봐도 서로 사귀는 사이로 보일 것이다. 재봉사 혹시 천재 아니야?
“정말, 아주 맘에 들어요.”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경, 이 아니라 로…메인 당신은 어떤가요?”
참고로 후작저에 오면서 둘은 서로 그이 당신 가끔 자기까지 하기로 미리 약조를 했다. 약혼까지 한 사람들이 존칭을 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 하지만 갑자기 당신이라 말하니 조금 부끄럽다. 그 어색한 호칭이 좀 웃겼는지 로메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가 말했다.
“저도 무척 마음에 듭니다.”
“저도요. 옷이 참 고급스러운 것이 보기 좋네요.”
“그렇습니까? 저는 누가 봐도 연인처럼 보일 거란 점이 제일 맘에 듭니다만.”
“……?!”
렉시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예? 얼결에 고개를 휙 돌리는 찰나.
“자, 자. 감상은 이제 그만하고! 다들 맘에 든다니 이제 입어 봐야겠구나. 옷은 보는 것이랑 입은 게 아주 다르단다. 자 어서 가져가서 시착부터 하고 오렴!”
둘의 만담을 보다 못한 후작 부인이 끼어들었다. 하기사 그녀의 눈엔 이게 아들 부처의 오순도순한 염장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 일도 중하지만 맘이 콩밭에 가 있으니 얼른 끊고 싶겠지. 하지만 렉시는 애가 탔다. 잠깐요, 저 지금 물어볼 거 있는데!
그는 안타까운 얼굴로 뒤를 돌았지만 로메인도 똑같이 끌려가는 마당이라 뭐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생각했다.
‘기능적인 관점에서 한 말인가?’
그런가? 그렇겠지?
…정말?
옷은 반은 괜찮고, 반은 조금 그랬다.
로메인은 딱 맞았고, 렉시에겐 헐렁했다. 부인이 처음 보고 걱정한 것이 과연 맞았다. 그저 자식 키운 엄마의 눈은 달라도 한참 다른 법이라.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렉시의 위아래를 훑었다.
“역시 조금 클 거 같더라니.”
“그럭저럭 맞습니다. 그냥 입겠습니다.”
렉시는 진심으로 말했다. 품이 좀 크지만 어깨랑은 잘 맞으니 된 거 아닐까? 살 빠진 게 자기 탓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거 가지고 고치기엔 시간도 부족하고. 그런 생각에서 한 말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렉시는 엘자에게 무척 혼났다.
“새아가, 자고로 옷태를 결정하는 건 몸매도 얼굴도 아닌 딱 맞는 옷이야. 네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다는 건 다들 알아. 하지만 그걸 너무 과신하는 것 같구나. 어떻게 약혼 때 품이 큰 옷을 입을 생각을 할 수가 있니?”
내 두 눈에 흙이 들어와도 안 맞는 옷 입는 꼴은 못 본다. 사실 저 미모면 뭘 입혀도 다 소화할 테지만 이건 자존심 문제였다. 그녀는 두 눈에 불을 켰다.
“미사! 미사!”
하녀장이 잽싸게 옆으로 섰다. 이미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다 준비해 놨다.
“옆방에서 대기 중입니다 주인마님.”
“잘했다. 당장 불러오렴!”
우르르르―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이 몰려왔다. 마치 기다린 듯 몰려온 이들은 모두 재봉사들. 이번 의상을 만든 의상실의 사람들이었다. 렉시는 몰랐지만, 사실 이것은 매운 놀라운 일이었다. 자고로 새 옷은 새해에 만드는 법. 후작 부인이 옷을 주문한 의상실이니만큼 실력이 좋아 예약 건이 흐르고 넘친다. 헌데 그들이 왜 여기 있을까?
이건 바로 그들이 자신들의 예약을 모두 취소하고 다른 곳으로 넘겼기 때문이다.
공작령에서 소문이 자자한 후작가의 새신부와 새신랑의 의상이 급하게 의뢰로 들어온 순간, 의상실의 주인은 통 크게 결정했던 것이다.
우리 의상실을 며칠 문 닫아걸고 이것만 하자!
어떻게 보면 미친 짓이었다. 손해 역시 매우 막심했다. 거래하던 귀족들 몇은 크게 항의하며 의상실과 안녕을 고하기도 했다. 아무리 후작 부인이 큰 손이라지만 해서는 안 되는 일, 하지만 정작 의상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 일에 절대 토 달지 않았다.
왜냐.
‘미인! 미인이 우리 옷을!’
‘황녀보다 더 아름답다는 미인이 우리 옷을 입어!’
‘이것은… 광고의 기회다!’
‘우리도 유명해지자. 황도의 로체란토처럼!’
그렇다.
로메인 경이 결혼하는 렉시의 미모에 대한 이야긴 이미 평민들 사이에도 짜하니 퍼져 있었다. 렉시를 본 귀족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아름답다 외치니 소문이 안 날래야 안 날 수 없었던 것이다.
‘옷은 누가 입어 주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는 법.’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의상실 로체란토의 전설은 재봉사가 아니라 의상실을 자주 이용하는 레아누 황녀 덕이라는 걸 모르는 업계인은 없다. 의상실 벨라의 주인과 재봉사들은 렉시의 미모에 의상실의 미래와 사활을 걸었다.
물론 렉시가 생각보다 안 예쁘면 어떻게 하냐고 투덜대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미친… 천사다. 천사야.’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생길 수 있지? 사람 맞아? 막 요정 이종족 이런 거 아니고?’
‘눈이 부셔. 아앗 눈이 멀어!’
‘성공한다. 이 판돈 성공한다!’
렉시를 본 순간 재봉사들은 속으로 환희했다. 황도만큼, 아니 그보다 더 유명해질 미래가 눈앞에 보였다. 우리 성공한다. 아니 반드시 할 거다!
그들은 확신했다. 저렇게 이쁘면 무엇인들 안 어울리리!
그 조용한 아우성 속에서 후작 부인이 말했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겠지?”
“네, 마님. 품이 조금 크게 제작되었군요.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저희 쪽에서 치수를 실수한 모양입니다.”
후작 부인은 호호 웃었다. 설마하니 그들이 실수를 했겠는가. 하지만 알아서 자기 탓이라고 해 주는 의상실 주인의 재치가 퍽 마음에 들었다.
“그래, 그럼 무얼 해야 할지 알겠구나.”
“물론입니다 마님. 당장 새로 제작해 올리겠습니다.”
후작 부인의 웃는 낯이 순간 멈칫했다. 줄이는 게 아니고?
“…늦지는 않겠지?”
“저희 손목을 걸고, 반드시 약혼식 전 제작해 올리겠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의상실의 미래와 본인들의 사활이 걸려 있다. 재봉사들의 눈이 번쩍번쩍했다. 가게 문도 닫았는데 일주일이 문제인가. 밤을 새서라도 다 해내서 빛나는 미래를 쟁취하리!
“좋아, 제대로 완성하면 주기로 한 금액의 스무 배를 주마.”
“헙!!”
재봉사들의 눈빛이 확 변했다. 스무 배라니. 이 일을 하기 위해 걷어찬 예약 건의 손해를 무마하고도 남을 금액!
“맡겨 주십시오!”
우렁찬 소리가 터져 나온다. 확실히 제대로 된 동기 부여였다. 그들은 서둘러 인사를 올린 뒤 새로 입력된 치수를 들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후작 부인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뒤를 돌았다. 그리고 어쩐지 넋이 나간 것 같은 렉시와 사랑스런 웬수를 향해 고갯짓했다.
“자, 그럼 이제 성에 가 보자꾸나!”
*****
사람은 생긴 것을 따라가진 않는다. 그리고 여기선 후작 부인이 딱 그랬다. 곱고 우아한 외양에선 고상함마저 느껴지는데, 그 주인의 행동력이란 실로 전광석화. 로메인과 렉시를 끌다시피 하고 나온 그녀는 단박에 성으로 갔고, 공작부터 먼저 찾았다.
“전하! 오라버니!”
“!”
난데없이 나타난 후작 부인을 본 플로랑 후작은 크게 놀란 얼굴을 했다. 마무리 일을 하고 좀 쉬려고 누웠는데 난데없이 폭풍이 상륙했다. 그는 렉시와 로메인을 황망하게 바라보았다. 떨리는 눈동자와 눈빛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척, 하면 착이라. 렉시는 그 뒤에 숨겨진 몇 가지 감정을 단박에 읽어냈다.
하나, 쟤가 여기 왜 있냐?
둘, 니들은 안 막고 뭐 했냐?
셋, 설마 우리 일을 들킨 것은 아니지?
뭐가 어쨌건 일단 일은 벌어졌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점잔을 뺐다.
“엘자, 아니 데퓨탄 후작 부인…. 예는 무슨 일로 왔는가?”
“왜긴요. 아프시다면서요! 둘째에게 말을 들었어요. 제가 그 말을 듣고 어떻게 오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그보다 그냥 엘자라고 부르세요, 사석인데 후작 부인이라니….”
“아아….”
둘이 평소에는 저렇게 부르고 살았나 보다. 그는 어렵사리 고개를 주억댔다. 마치 인형이 삐꺽대는 것 같은 부자연스러움이다. 조금만 살피면 명백하게 어색할 터.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후작 부인은 눈치채지 못했다.
“맙소사, 헌데 얼굴이 그게 다 뭔가요…!”
“엘, 엘자!”
그녀는 당혹했다. 후작 부인, 아니 엘자가 새파란 낯을 한 채 공작의 얼굴을 잡고 이리저리 둘러봤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공작이 그렇게 싫어한다는 뿔도 막 만졌다. 실로 놀랄 노 자였다. 어린 시절 친하게 지냈다지만 거기까지 만지게 해 줬다니…!
‘남매라서 그런가?’
주변의 남매 사이가 이렇게 좋지는 않았던 거 같은데…. 사람들 없을 땐 둘이 원래 이렇게 격의가 없이 살았나. 이 오누이가 미혼 시절 어떻게 지냈는지 알 도리가 없으니 그저 힘 빠진 채 있을 뿐이다. 한참 살피던 엘자가 손을 내려놓는다. 그녀는 깡마른 오라버니의 얼굴을 안타깝다는 듯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설마 혹시 또 단식하세요?”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또 단식이라니…?”
공작이 언제 단식을 한 적이 있었나? 애매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엘자가 아차 하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니라면 다행이지요. 허면 왜 이렇게 깡마르셨나요? 정말로 큰 병은 아니시죠?”
“병이라면 내가 이러고 있을 리가 있나. 의원들도 다 병은 아니라고 그랬다. 다만 요즘 일이 많아서 이렇게 된 것이지….”
“거짓말 하는 거 아니시구요?”
“뭐? 내가 왜 거짓말을 해야 하느냐?”
오빠의 단언에 후작 부인은 한숨을 삼켰다. 한시름을 던 얼굴이 아까보단 나았다.
“다행이네요.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 일을 어쩜 좋아…? 우리 오라버니 볼 거라곤 그 얼굴뿐인데. 잘생긴 얼굴이 아주 해골이 되었잖아요.”
“허허….”
가차 없는 평가에 플로랑 후작은 영혼 없이 웃었다. 프로하우스 공작에게 볼 게 얼굴뿐이라니 남들이 들으면 필시 웃을 터. 하지만 왠지 조금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그래, 남매란 원래 이런 사이지. 은근슬쩍 애정이 있는 까댐으로 서로서로 응수하는 사이 말이다.
어쨌거나 이 남매도 여타 남매랑 비슷하다는 걸 알았으니 조금 긴장이 풀린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보기 그러냐?”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셔요?”
오라버니의 농을 들은 엘자의 눈에 눈물이 글썽인다. 플로랑 후작은 식겁하고 튀어 올랐다.
“우, 울지 마라. 왜 울어?”
“오라버니가 제가 한번 되어 보세요. 안 울게 생겼나요?”
울면서 화내는 걸 둘 다 하는 위업을 달성하며 후작 부인은 눈물을 훔쳤다. 진짜는 몰라도 그로선 생전 처음 보는 후작 부인의 눈물이다. 공작은 난감한 얼굴로 허둥댔다.
“죄송해요, 아무리 제가 혼인을 했어도 오라버니가 어떻게 사는지는 확인했어야 하는데. 이렇게 힘드실 줄도 모르고 저만 즐거이 살고….”
후작 부인이 결혼한 뒤 두 사람은 자주 왕래하고 살진 않았다. 공작도 공작이지만 엘자도 무척 바빴기 때문이다. 자고로 귀족가의 부인들은 영지의 내실을 다져야 하는 법. 부유한 후작가이니 그녀가 해야 할 일들은 공녀일 때보다 많았다.
“결혼한 여인이 어떻게 친정에 신경을 쓰겠느냐? 나는 괜찮다. 후ㅈ, 아니 엘자. 그러니 눈물을 거두고 진정하거라.”
“제가 어떻게 진정할 수가 있겠어요? 오라버니는 늘 제게 괜찮다고만 하시죠…. 아무리 제가 철이 없어도 오라버니께서 겪고 계신 고통을 모르겠나요? 제가 오라버니였다면 한시도 잠을 이루지 못했을 거예요. 저도 대충 알 건 알고 있었어요. 다만 뒷감당이 무서워서 말을 못했을 뿐이지―.”
후작 부인은 또르르륵 눈물을 흘리며 작게 흐느꼈다.
“그래요, 어차피 이리 된 거 차라리 잘되었네요. 이 기회에 아주 푹 쉬시고 예전에 뜻하셨던 일을 하세요. 늘 맘에 걸려 하셨었잖아요?”
“…일이라고?”
“이제 와서 너무 늦은 것 같지요? 저도 알아요. 오라버니는 늘 이곳이 아닌 다른 어딘가에 맘을 두고 오셨다는 걸…. 하지만 지금은 밀어 드릴 수 있어요. 마침 로메인 저 녀석도 정신을 차렸으니 뒷일은 걱정할 것 없으세요!”
후작은 홀로 주억대는 엘자를 굳은 표정으로 응시했다. 가만 듣자 하니 뭔가 매우 미묘하다. 말의 행간도 그렇거니와, 아무래도 이 둘 사이에 둘만 아는 어떠한 곡절이 있는 듯했던 것이다. 물론 둘 사이에 뭔가 일이 있을 수도 있지. 말했다시피 둘은 오누이, 남들이 모르는 시간을 함께한 사이다.
하지만 문제는 현재 그가 가짜 공작이고, 하여 그가 이 미묘한 행간 내용을 하나도 모른다는데 있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사생아 건일까?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아. 안다면 저렇게 평온할 리 없지.’
에라 모르겠다, 사생아 아는 거 아니면 됐지. 대체 이놈의 전하는 무슨 까도 까도 깔 게 계속 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양파도 아니고.
그나저나 어떻게 해야 하나. 여기서 모른 척하는 것도 퍽 이상할 텐데….
그때였다.
“흠흠. 저기, 전하.”
렉시의 헛기침이었다. 플로랑 후작과 엘자는 동시에 흠칫하고 놀랐다. 특히 엘자 쪽이 그랬다. 그녀는 자신의 뒤에 렉시와 로메인이 함께 들어온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느라 까먹었어!
하지만 그완 반대로 후작은 안도의 한숨을 삼키고 있었다. 나를 돕기 위해서 목소리를 냈군. 여하간 눈치 빠른 사람이라 일이 편하다. 그녀는 렉시의 의도를 재빨리 알아챘다.
‘얼른 대화를 끊으란 거지?’
“…엘자. 그 이야긴 그만하자꾸나. 여긴 우리 둘만 있는 게 아니잖느냐?”
“……그래요. 제가 잊고 있었네요. 죄송해요 오라버니.”
너무 놀라 눈물도 쏙 들어갔다. 엘자는 우는 걸 멈추고 조금 침착해졌다. 하지만 아직도 뭔가 조금 답답한 눈초리였다. 할 말 못 하니 답답했던 것이다. 둘을 보는 그녀의 눈이 가느다랗게 변하고 있었다. 쟤들을 내보내? 말어.
그때 후작이 탁 하고 치고 들어왔다.
“그나저나 네가 나 대신 연회를 준비한다고 들었다. 준비는 잘 되고 있고?”
“아? 네, 네. 잘 하고 있어요.”
이것은 생각하던 맥을 끊어 정신없게 만드는 후작의 전략이었다. 솔직히 굉장히 대놓고였지만, 뭐 어떤가. 물론 나중에 또 나올 대화일 것이고, 그때는 이렇게 회피하지 못하고 진짜로 대화해야겠지만. 하지만 뭐 그땐 가짜가 아니라 진짜가 대화할 테니 문제없다!
그렇게 미래의 공작에게 일거리를 안겨 준 가짜 공작은, 질문 전략에 넘어가 줄줄 말하는 부인의 계획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며 자세히 듣는 척했다. 중간중간 오! 하고 추임새 넣는 것은 덤이다. 다 들은 그녀가 부인의 손을 잡고 쓰다듬었다.
“고맙다. 그 짧은 시간에 빨리 끝냈구나.”
“가족 사이에 고맙고 어쩌고가 어디 있겠어요. 별것도 아니었는걸요.”
“그래도 힘들었을 텐데. 그래, 혹 내가 도와야 할 건 있고?”
“예? 오라버닌 그냥 쉬세요! 나머지는 시종장과 제가 상의할 거예요!”
환자가 어딜! 후작 부인이 펄쩍 뛰자 후작은 머쓱한 듯 얼굴을 긁적댄다. 속이야 어떻든 실로 놀라울 정도로 사이좋은 오누이였다. 멀리서 둘을 보고 있던 렉시에게까지 훈훈함이 느껴진다. 아. 저것이 바로 형제애…. 물론 외동인 렉시는 형제자매가 없지만, 그래도 저런 걸 보고 있자니 없는 형제애가 막 생겼다. 온화한 평화로움이 짧게 이어진다. 그리고 그 온유한 평화 속에서 후작 부인이 우아하게 웃으며 물었다.
“헌데 오라버니, 그는 어디 있나요?”
“응? 누구?”
“제퍼슨, 아니 시종장요. 어째 안 보이네요?”
“…시종장?”
아, 그러고 보니 진짜네. 어디 갔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렉시는 순간 이상한 걸 목격하고 멈칫했다. 시종장. 그 말을 하는 후작의 눈가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네, 오는 길에도 안 보였거든요. 그래서 분명 이곳에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후작 부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당연한 질문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가 이렇게 올 땐 은근슬쩍 나와서 얼굴 비치고 가는 게 바로 시종장이다. 결혼 전까지만 해도 공작성에서 뛰고 논 그녀 아닌가? 어린 시절 숱하게 먹은 사탕의 반절은 다 그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그런 그가 자길 보러 나오지 않을 땐 딱 하나, 오라비인 공작의 곁에 있을 뿐.
“어디 일을 보내셨나요? 언제 오나요?”
“…….”
후작이 입을 다문다. 로메인도 때마침 의아함을 여기고 있었기에 그의 말에 집중했다. 아닌 게 아니라 매일 보던 사람이 안 보여서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터. 잠시 뒤, 공작이 말했다.
“제퍼슨, 시종장은 오늘 …휴가다.”
“…휴가요?”
“그래.”
휴가라고. 듣고 있던 모두가 놀랐다. 휴가? 그 시종장이?
“혹시 그도 아픈가요?!”
“그게 아니라, 그. 나도 쉬니 그도 쉬라고 한 거지.”
“아아. 그렇군요.”
하긴 공작도 이렇게 쉬는데 그보다 더 나이 먹은 시종장이야 어련하리. …노인 공경 해야지. 후작 부인은 빠르게 납득했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죠. 그도 나이를 먹었네요.”
“그렇지. 하지만 너의 일도 급한 것은 사실이니…. 그에게 오라고 사람을 보내야겠구나.”
“아뇨, 그러지 마세요. 제가 그냥 내일 다시 오죠. 그도 오랜만의 휴가인데.”
“그래도 괜찮겠느냐?”
“하루 정도는요.”
후작 부인은 짧게 웃고 뒤를 돌았다. 눈짓하자, 대기하고 있던 이가 그녀의 앞으로 와 에스코트하듯 팔을 내민다. 로메인이었다.
“집까지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다 들었지?”
“네, 어머니.”
그녀는 눈을 곱게 휘며 아들에게 말했다.
“오늘 시종장이 쉰다니 어쩔 수 없구나. 오늘은 그만 가자. 대신 내일은 반드시 만나야 하니, 넌 내일 아침 일찍 날 데리러 오렴. 그리고 새아가는….”
그녀는 뒷말을 하는 대신 잠시 렉시를 살폈다. 너는 뭐 할래? 라는 그녀식의 간접적인 질문이었다. 렉시는 재빨리 대답했다.
“저는 남아서 전하의 일을 돕고 있겠습니다.”
“그래, 그것도 좋겠지. 부디 잘 부탁하마. …아, 헌데 새아가. 혹 피부 관리는 받고 있니?”
“…네?”
피부 관리? 생소한 단어에 렉시의 동공이 지진 나듯 흔들렸다. 그, 그런 것도 해야 해? 그걸 본 후작 부인은 그럼 그렇지 하고 혀를 찼다. 아무렴. 내 그럴 줄 알았다. 남자들이 피부 관리를 할 리가 없지.
“내 오늘 당장 후작저의 하녀들을 보내 주마. 일주일도 안 남았으니 정신이 하나도 없겠구나. 아가, 누누이 말하지만 미모란 자고로 평소에 갈고 닦아야 하는 거란다. 알겠니? 참고로 필요 없다는 말은 하지 말고.”
방금 딱 그 말 하려고 한 렉시는 데굴데굴 눈을 굴렸다. 피부 관리라니! 생각 같아선 깔끔하게 거절하고 싶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는 저렇게 의욕적으로 나서는 부인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이건 결국 모두 자기 좋으라고 하는 일 아닌가. 사정이야 어떻든 자기 생각해서 하는 일을 딱 잘라 거절할 사람은 세상에 몇 없을 것이다. 아아 어쩔 수 없다. 그는 결국 피부 관리라는 대업을 눈물을 머금고 받아들였다.
“네, 알겠습니다. 부디 살펴 가십시오 어머님.”
“호호…. 그래. 내일 보자꾸나. 오라버니, 저는 그럼 이만 물러갈게요. 잘 쉬시고 약도 잘 드시고 그러셔요. 이렇게라도 보니 걱정이 덜하네요.”
“그래. 잘 가거라. 와 줘서 고맙구나.”
침대에 앉은 후작이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어쨌거나 쉬는 몸, 밖까지 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이 석별인지 전별인지 뭔지 모를 짧은 이별이 지나갔다. 문 앞에 있던 인기척이 사라진 걸 느낀 렉시는 고개를 휙 쳐들어 공작을 바라봤다.
“각하.”
“…왜?”
렉시의 시선을 받은 후작이 흠칫거린다. 아무리 봐도 찔리는 것이 있는 게 분명했다. 렉시는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숨을 들이켰다. 기척도 멀어졌고 사람도 없는 지금이야말로 아까 본 것을 추궁할 때. 그는 심각하게 목소리를 깔며 질문했다.
“시종장님, 어떻게 된 겁니까?”
“…….”
후작이 우거지상을 지었다.
눈치 빠른 자식….
일의 시작은 몇 시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날 그녀는 평소보다 조금 늦게 등청을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어젯밤 흥이 나 일을 하다 그만 늦잠을 잤기 때문이다. 평소보다 과도한 업무는 사람을 퍼지게 하는 법. 이날따라 신체 시계마저 오작동한 터라 그는 스스로 깨지를 못하고 늦잠을 퍼 잤다. 물론 공작 정도 되면 그를 제시간에 깨우는 자들이 있긴 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들이 오늘 모두 일을 안 했다. 업무 태만인가 싶겠지만 그가 사람을 한둘 쓰는 거도 아니고 기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하여 그녀는 이게 퍽 별일이라고 생각했다.
‘왜 안 깨웠지?’
그녀가 이 일을 궁금해하는 건 시종들을 익히 알기 때문이다. 시종장이 직접 키운 그들은 바지런하고 꼼꼼하기론 성내 으뜸이었다. 게다가 평소 공작의 일이 워낙 많다는 걸 알기에 어지간하면 게으름을 피우는 걸 봐주지도 않는다. 헌데 이런 애들이 날 왜 안 깨웠지?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곧 답을 찾아냈다.
‘내가 엄청나게 피곤해 보였나 보군.’
솔직히 그거밖에 답이 없었다. 물론 생각나는 게 그거밖에 없기도 했지만.
물론 무작정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그는 어제 퍽 피곤한 티를 내며 늦게 들어갔던 것이다. 무려 새벽 두 시라는 시간에 말이다. 밤늦게 자신의 잠자리를 봐주던 시종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걱정스러운 얼굴이었지…. 그는 소세할 때 일부러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대체 얼마나 피폐해 보이길래 늦잠을 다 재웠을까.
그리고 과연, 그곳엔 피로해서 죽어 가는 한 마리 업무 중독자가 있었다. 퀭하니 마르고, 눈 밑 어둠이 짙은 잘생긴 해골이 거울을 보며 안녕 하고 인사한다. 그는 속으로 혀를 찼다.
‘과연, 재울 만하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다크서클 아래 눈 마사지를 했다. 의식해서 그런지 평소보다 눈 아래 거뭇한 게 배는 짙고 퀭해 보였다. 어쩐지 건강위기설이 다시 나올 것 같아 그는 평소보다 조금 더 신경을 써서 식사를 하고 약을 먹었다.
그러고 나서 간신히 등청하니, 시간은 아침은 훌쩍 지나 벌써 점심이 가까워 있었다. 자신을 보고 분주히 왔다 갔다 하는 시종들을 한눈으로 흘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어제 한 일을 가져오라 한 뒤 그에 집중했다. 렉시가 시켰던 업무 분장은 거의 끝을 냈다. 하지만 어제 워낙 정신없이 한 터라 정정할 게 한가득일 것이다. 그에게 보여 주기 전 큰 실수는 마무리해서 줘야 할 터. 하여 그는 어제 내내 본 서류를 검토하며 남은 시간을 보내려 마음먹었던 것인데.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
이 기분은 처음엔 그냥 작은 좁쌀만 했다. 그래서 처음엔 그냥 넘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지던 그것은 그녀를 사로잡고 질척한 수렁 어딘가로 이끌었다. 뭔가 허전하고, 어딘지 모르게 하루가 하루 같지 않은 이 기묘한 기분. 어쩐지 반드시 해야 하는 하루의 절차를 그냥 날린 것 같은 그런 느낌.
뭐지? 후작은 얼굴을 구겼다. 뭔가 떠오를 듯 말 듯한 감각, 하지만 머리 밖을 빠져나오지 않고 기억은 머리 한구석에서 맴돌았다. 이상하다. 이상해. 뭐를 잊었지?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던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에라 모르겠다, 혼자 괜히 고생을 할 이유가 뭔가. 스스로 답을 모르겠으면 물어보면 그만이라. 묻는 상대야 물론 시종장이었다. 그가 뭔가 잊은 것이 있다면 시종장이 반드시 찾아내 줄 것이었다.
“이봐 시종장. 내가 뭘 잊었는데 자네는 그게 뭐일 것 같은가?”
그리고 잠시 뒤 재차 질문했다.
“흠, 자네도 뭔지 모르겠나?”
“…….”
대답이 없다. 그의 뒤에 있는 시종들이 부산히 인기척을 냈다. 공작은 속으로 혀를 찼다.
‘삐졌군. 삐졌어.’
사실, 그는 오늘 업무실에 들어오면서 일부러 시종장이 있을 자리에 시선을 안 줬다. 왜냐, 어색했기 때문이다. 피차 어색한 모양인지 그도 자신에게 인사를 안 했으니 뭐 이 건은 서로 똑같은 것 같지만…. 역시 어제 일이 문제였나?
‘하루면 풀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게 문젠가 보군.’
역시 좀 쫓아가서 달랬어야 했나. 그 나이 먹고서도 그런 걸 원하나. 아닌 척하면서 은근히 사람 귀찮게 하는 게 선수였다. 물론 그 점이 귀엽긴 하지만…. 자고로 아랫사람이 묵언 시위를 하면 그걸 달래야 하는 게 또 윗사람의 도인 법. 그래, 내가 사과한다. 아주 크게 한다! 플로랑 후작은 한숨을 삼키며 뒤를 돌았다.
그리고.
“…안 왔네.”
“네?”
“아예 입성(入城)을 안 했대. 아무 말 없이.”
“예?!”
시종장 제퍼슨.
그가 오늘 난생처음, 결근했다.
렉시가 물었다.
“입성을 안 했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설마 성을 빠져나갔다는 이야깁니까?”
“무슨 그런 소리를! 등청을 안 했다는 이야기야. 공작령 안에는 있어!”
그거야 당연하겠지. 공작령이 얼마나 넓은데…. 렉시는 이죽대려는 자아를 참고 재차 물었다.
“성문 쪽은 뭐라고 합니까. 사람은 보내셨지요?”
“당연히 보냈지!”
“뭐라고 하고 나갔다고 하던가요? 막 누가 납치하고 이런 건 아니지요?”
그녀가 벌컥 화를 냈다.
“누가 감히 공작의 영지에서 시종장을 건든단 말인가? 끔찍한 말은 하질 말게! 그는 혼자, 아주 여유롭게 나갔다네. 담당했던 기사의 말론, 그래. 어디 잠시 다녀온다고 하고 했다더군.”
“어디로요?”
“…내 말이 그 말이야. 아니 안 나가는 사람이 나가면 그걸 물어야지 그놈이 그걸 안 물었대! 그냥 나간다고 하길래 보내 줬다는 거야. 그게 말이 되나? 이런 월급 도둑 같으니라고!”
“…….”
그게 과연 월급 도둑일까. 자고로 들어가는 건 몰라도 나가는 사람 잡고 어디 가나 묻는 기사는 없는 법인데. 렉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물을 말이 한가득인데 뭐부터 물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 찾으러 사람을 보내셨겠지요?”
여기서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렉시는 어쩐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공관을 담당하는 사용인이 그랬다더군. 만일 누군가 자길 찾으러 오면, 오늘 하루는 자길 찾지 말라고 말해 달라고. 뭐라더라, 알아서 돌아오겠다고 했다나?”
전형적인 멘트였다. 렉시는 순식간에 일이 어찌되었는지 파악했다.
‘삐졌네.’
토라졌다. 그것도 그냥 토라진 게 아니고 엄청나게 토라졌다.
말만 들어도 알겠다. 대체 얼마나 화가 났으면 오고 간다 이야기도 안 하고 찾지도 말라고 그래? 화가 엄청나게 난 상대가 가까스로 화를 참을 때 말하는 전형적인 멘트를 들으며 렉시는 이마를 짚었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공작을 향해 간다. 아니 시기가 지금 어떤 시기인데 어린애같이 싸우고 그러나. 그는 후작을 향해 한심하게 일렀다.
“알 것 같군요. 각하, 대체 왜 싸운 겁니까? 아니 그보다, 그 나이 먹고 그러고 싶습니까?”
플로랑 후작은 얼굴을 구겼다. 다짜고짜 왜 싸웠냐니? 물론 싸운 게 맞긴 하지만 확신하는 말투에 은근 기분이 상했다.
“왜 싸웠다고 확신하는 건가?”
아닐 수도 있잖아? 천연덕스러운 대꾸에 렉시는 콧방귀를 뀌었다.
“왜긴요. 기억 안 나십니까? 전 어제 시종장님이 허위허위 뛰어 나가는 걸 봤답니다. 그리고 동시에 각하께서 쫓아 나가려다가 못 나간 것도 봤죠.”
“…….”
아 그랬지.
시퍼렇게 변하던 눈이 아래로 슬그머니 풀린다. 어이고 저 화상, 당황한 나머지 그것도 까먹었구나. 렉시는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삼키며 그녀에게 말했다.
“각하, 지금 시국이 어떤 시국입니까. 설령 화가 나셨어도 참으시고 다투질 마셔야죠. 나중에 전하가 오시면 무어라 하시려고요? 시종장은 전하의 가장 중요한 수족입니다. 이 와중에 그와 다투시다니 너무 경솔하셨습니다.”
렉시의 조근조근한 말에 플로랑 후작의 어깨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그 시무룩한 표정이 주인에게 혼난 강아지처럼 처량했다. 렉시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리 처량하다 한들 잘못은 잘못. 책임질 건 져야 한다. 그녀가 물었다.
“…이젠 어쩌지?”
“어떻게 하긴요, 사과하셔야죠. 연유가 뭐든 각하께서 잘못하셨을 게 뻔하니까요.”
“…자네 어째 아까부터 말이 좀 심한 거 아닌가?”
심하다? 렉시가 되물었다.
“오, 그럼 아닙니까?”
“…아니.”
자기가 잘못한 게 맞긴 맞지만. 그녀가 다시 꼬리를 내리자 렉시는 이번엔 다 들릴 정도로 혀를 찼다.
“시종장은 전하를 수십 년간 모신 사람입니다. 그가 전하에게 화를 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겠죠.”
시종장이 미쳤다고 전하에게 화를 내겠는가. 분명 무슨 큰 이유가 있어 화를 냈을 터. 그리고 그 이유는 필시 현재 전하인 플로랑 후작이 했을 것이다. 아무리 똑똑해도 사람인 이상 실수는 한다. 게다가 감정이 얽힌 일은 원래 어렵지 않은가. 잘 나가다가 생각지 못한 곳으로 공처럼 튀는 것이 바로 사람의 감정.
“일단 오자마자 미안하다고 하십시오. 이런 일은 늦으면 늦을수록 화해하기 어려우니까요.”
어긋난 감정을 놔두고 놔두다 보면 그냥 그대로 상처가 아물어 버린다. 하나였던 것이 둘로 갈라진 채 아물면 다시 합쳐지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렉시는 자기가 어릴 적 싸웠던 일을 더듬으며 공작에게 충고했다.
“사과는 해 보신 적 있지요?”
“…사실 이런 일로 사과해 본 적은 없네만.”
“각하는 그렇다 치고… 전하도 그렇습니까?”
“…아마도?”
짝! 렉시가 손바닥을 쳤다. 경쾌한 소리에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거 잘됐군요, 최초라니 진심처럼 보일 테니까요.”
가벼운 태도지만 덕분에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그녀는 칙칙해진 얼굴을 추스르고 렉시에게 물었다. 사실, 이게 정말로 궁금했다.
“…그가 정말 내 사과를 받아 줄까?”
글쎄. 어려운 질문이었다. 사과를 받아 준다라…. 사실 이걸 누가 알겠는가? 열 길 물속보다 어렵다는 것이 한 길 사람 속 아닌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이거 하난 확실하다. 렉시는 엷게 웃으며 말했다.
“어쨌거나 안 하는 것보단 낫지 않습니까. 사과가 없다면, 용서도 없을 테니까요.”
*****
시종장은 멍하니 찻잔을 내려다 봤다.
향기로운 연꽃 향이 그의 찻잔을 감싸 안고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은은한 향이 나는 이 연꽃차는 그도 잘 아는 물건이다. 생으로 보관한 커다란 연꽃을 뜨거운 물에 담아 그 향과 맛을 즐기는 차. 꽃을 뜨거운 수조에 담그는 순간, 마치 비단처럼 꽃잎이 풀어지며 은근한 단맛이 감도는 차가 된다.
그야말로 눈과, 입과, 향으로 느끼는 차란 이것 아닐까. 귀하디귀한 물건이라고 상인이 신신당부한 순간 그는 고민 없이 차를 샀다. 비쌌지만 이 정도야 싶었다.
귀하디귀하다니, 그야말로 공작을 위한 차 아닌가? 그런 생각에서였다.
헌데 이게 왜 여기 있는 걸까?
분명 공작령에 들여온 연꽃차는 그가 다 산 것으로 아는데.
마시는 것도 잊고 눈앞의 차를 응시한다. 절로 심경이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탁자 맞은편의 여인이 그런 그를 보며 은근하게 미소를 흘렸다. 후후후…. 고상하고 우아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느른하게 감긴다.
그리고 그렇게 낮게 웃던 여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차가 맘에 안 드나?”
마실까 말까 고민하는 이 흰 연꽃차처럼 달고 깔끔한 웃음.
“…메르디스 공비 전하.”
그리고 동시에 독처럼 스며드는 음성.
시종장은 삐뚜름한 얼굴로 공비를 바라봤다. 차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라, 이 여자랑 함께 있는 게 맘에 안 든다.
“공비 전하, 하나 여쭙겠습니다.”
시종장이 묻자 공비가 미소했다. 이 시종장을 눈앞에 둔 그녀는 현재 기분이 퍽 좋았다. 설마하니 시종장을 내 눈앞에 둘 줄이야! 늘 성 안에만 있어 따로 만나기는커녕 이야기도 나누기 힘든 상대가 바로 시종장이었으니 그녀의 기쁨은 이유가 있다.
‘설마 거기서 만날 줄은.’
마음이 어지러워 밖으로 나온 거리, 마차를 타고 가던 그녀는 처음 시종장을 봤을 땐 눈을 의심했다. 저 방안통수가 무슨 바람으로 나와 거리를 걷고 있는 거지? 이거 실젠가? 싶어서였다.
공작의 인물 중 가장 가치 있는 자가 바로 저 시종장. 너구리같은 자이니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모를 리도 없다. 헌데 거리로 나온 건 둘째치고 심지어 호위도 없이 나다녔다. 당최 무슨 깡으로 그랬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뭐 그 덕분에 길가에서 보자마자 냅다 마차 태워 올 수는 있었지마는….
그녀는 생각했다.
‘평소와는 다른 행동. 이상한 패턴. 그래, 내 짐작이 맞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이야.’
공작이 시종장을 배제했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다. 분명 그와 공작 사이에 무언가 균열이 생겼다. 이런 일에 눈치 빠른 시녀장을 보낸 것도 그것을 캐내기 위해서였지 않은가. 돌아온 시녀장도 분명 그런 말을 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시종장이 공관으로 간 걸 보니 뭔가 일이 있었던 것 같긴 하다고…. 물론 자세한 사항은 알아내지 못했지만, 이렇게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가치는 있다.
파상적인 공작의 공세에 신음하던 찰나다. 그 와중에 둘 사이에 뭔가 문제가 생긴 건 무척 호재였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정보를 캐내 승기를 잡지?
고민하는 와중에 이렇게 당사자를 만났으니 이건 실로 천재일우의 기회 아닌가.
‘잘 구슬려서 비밀을 좀 캐낼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자기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게 된다.
대체 무얼까?
저 시종장을 흔들어 놓은 그 일의 정체가….
원래 그녀의 계획은 이랬다.
사람은 아플 때 약해지니, 그를 이용하여 판세에서 승기를 잡자.
공작이 평소와 같았다면 생각지도 않았을 일. 하지만 두 번째 쓰러졌다 일어난 뒤 공작은 어딘지 모르게 사람이 달라진 듯했다. 잔뜩 서 있는 날이 조금 무뎌지고, 대신 송곳처럼 변했다는 느낌? 다른 사람은 몰랐을지 모른다. 하지만 명목상이어도 그녀는 공작의 아내였다. 그리고 남편의 변모를 모르는 아내란 없는 법이다.
‘그래서 저이도 좀 사람이 물러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원하는 건 안전한 공작 자리이지 판을 뒤집는 것은 아니었다. 전엔 공작이 날이 서 말을 못 했지만, 지금은 가능할 것도 같았다. 하여 일단 명목상으로나마 화해의 뜻을 비친 것이 얼마 전 아닌가?
하지만 빌어먹을 로메인이 돌아오면서 모든 건 휴지 조각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로메인이 돌아오자 모든 것이 어그러진 것이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무탈한 작위 승계가 아니라 조금 험악한 찬탈뿐이었으니….
어쨌거나 임전무퇴의 상황이었다. 소파에 기대앉은 그녀는 마치 포식한 사자처럼 웃어 보였다.
“후후후, 뭐든 물어보시게. 무엇이 궁금한가?”
“네, 그럼 기탄없이 여쭙지요. 공비 전하, 혹시 별궁의 예산이 부족합니까?”
“…뭐시라?”
갑자기 들리는 어처구니없는 말에 낯이 웃는 채 굳었다. 뭔 소리야?
“갑자기 예산은 왜 묻는 건가?”
산전수전 다 겪은 공비라도 이런 말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 무슨 다짜고짜 예산 부족?
“예산이 부족하지 않다면 이 차는 무엇입니까?”
“이 차와 예산이 무슨 관련이 있나?”
그는 그 물음에 답하는 대신 물에 잠긴 연꽃을 건드렸다. 길고 투박한 손가락 끝에 감겨드는 꽃이 퍽 아름다웠다.
“왜냐하면, 아무리 보아도 이것은 제가 직접 구매한 차인 듯해서 말이지요. 저는 이게 왜 여기 있는지 의아스러울 뿐입니다. 이것은 제가 전하를 위해 구매해 보관한 것이라 다른 궁에 보낼 리 없습니다. 헌데 이게 왜 여기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제 답은 하나뿐입니다. 전하의 궁 재정이 공작 전하의 차를 ‘빌릴’ 정도로 악화되신 것인가 보군.”
“……뭐?”
“아닙니까?”
마주한 얼굴이 매우 진지하다. 그녀는 소태 씹은 얼굴로 애써 웃었다.
“이 연꽃차가 귀한 차라는 건 나도 알고 있네. 한창 꽃이 필 때 생 꽃을 따 보관해서 마시는 거니까…. 요즘 같은 겨울에는 특히 얻기 힘들지. 하지만 재미있는 생각이로군. 이걸 내가 ‘빌렸’다?”
메르디스는 눈을 날카롭게 떴다.
“기가 막히는군, 자네 그 말 책임질 수 있나? 내 시녀장이 산 것이면 어쩌려고 그러나?”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공작령 내에 들어온 상인은 죄다 제가 감리하니까요. 공비 전하께오선 아실 필요 없는 일입니다만, 애초 제국에선 이 차를 잘 취급 안 합니다. 그나마 취급하는 상단 중 프로하우스령을 이용하는 상단은 단 둘뿐. 헌데 그중 하나는 올해 상행을 오지 못했지요. 하여 한 상단만 이 차를 가지고 왔고, 제가 전매했으니 남아 있을 리 없지요 .”
“……하.”
메리디스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래, 솔직히 말해 슬쩍하긴 했다. 하지만 돈이 모자라 슬쩍 한 게 아니라 나름 이유 있는 슬쩍이었다. 그녀가 이치에게 이것을 내보인 이유. 그것은, 그녀의 공작성에 대한 영향력을 알리기 위한 것이다. 물 샐 틈 없는 공작과 시종장의 손을 뚫고 그녀가 독자적인 선을 구축한 것을 알면 시종장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 그걸 알기 위한 것이었던 것이었는데….
헌데 이건 뭔가… 생각보다 다르다.
너 거지냐?
남의 거 왜 먹냐?
우아하게 말하지만 저 말은 그냥 그 말. 따라서 그녀는 급기야 도적이 되었다. 그것도 가장 치사하다는 먹을 것 밝히는 좀도둑이! 가만 보니 일부러 그러는 거도 아니고 진심이었다. 황당하도다! 그녀는 입을 딱 벌렸다.
‘사람이 이렇게 쪼잔할 수가…!’
엄밀히 말하자면 쪼잔한 것이라기보단 까다롭다. 하기사 돈을 출납 관리하는 자리가 다 그렇고 그렇긴 하니 이해가 안 가지는 않는다마는.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건 좀 너무하잖아? 자기가 지금 얻을 게 없었으면 당장 단매에 저놈을 쳐 팼을 것이다. 그녀는 애써 욱하려는 복심을 참아 냈다. 이 사이로 나오는 목소리는 좀 그르렁댔지만.
“자네 참… 생각보다 재미있는 사람이었군.”
“그렇습니까? 저는 별로 재미가 없습니다만…. 뭐 한 명이라도 즐거우니 다행입니다.”
끝까지 한마디를 지지 않는 놈! 이 고약한 놈!
내가 과연 저놈 상대로 뭔가 캐내고 회유하는 게 가능은 한가? 그녀는 슬슬 자신의 자신감에 회의감이 들었다.
“글쎄, 설령 그 말이 맞다고 치세. 허나 나는 전하의 비일세. 허니 차 정도는 ‘빌려’ 마셔도 되지 않겠나?”
“그렇지요, 물론 빌리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방법이 틀렸지 않습니까?”
“차를 빌리는 데에 방법이 있단 말인가?”
“비단 차뿐이겠습니까? 원래 모든 물건은 쓸 때 주인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 법입니다. 아무리 주인이 내던져 놓은 것이라 하더라도 막 가져다 쓰면 그게 도적과 뭐가 다르단 말입니까?”
“도, 도적?”
“비유입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되는 법이니 미래성으로 보자면 틀린 말은 아니겠지요.”
“!”
실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말. 그녀는 머리가 멍해졌다. 황제의 조카로 태어나 갖은 호화로운 생활만 한 그녀다. 살다 살다 이런 모욕적인 경험은 처음이었다!
같은 성에서, 같이 살면서, 어쨌거나 애도 낳은 부인이 먹을 것 좀 나눠 갔다고 뭐? 도적?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그녀는 해괴한 얼굴로 시종장을 훑었다. 동시에 이놈이 미는 로메인이 떠올랐다. 이래서 미는구나. 거의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래서 로메인을 밀었구나. 둘이 똑같아! 똑같이 재수 없어!
‘재수 없다. 너무 재수 없어!!’
어쩐지 성에서도 시종들 포섭이 어렵다 했다. 이런 놈이 상사인데 어문 짓을 어떻게 하겠는가? 심각한 심력 손상이었다. 그녀는 이를 북북 갈았다. 저렇게 정 없이 구는 걸 보니 장가 못 간 게 참으로 이해가 갈 지경이다. 어떤 여자가 저런 놈을 좋다고 하겠는가. 이상하게 저 쪼잔한 남자를 보고 있자니 남의 편이 된 공작까지 생각나고 있었다. 어쨌거나 첫날밤도 치른 부인이 임신했다는데 기뻐하지도 않았던 그 야멸찬 화상의 모습을 떠올리니 이가 갈리는 그녀다.
‘과연 그 주인에 신하로군! 감히 내게 그딴 소리를 해?’
우아한 귀부인의 눈에서 살기가 번뜩이는 순간이었다. 허나 시종장은 눈 하나 깜빡하지도 않았다. 자기가 여기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상정을 하지도 않는 것이다. 물론 죽일 생각은 없었지만 맞을 수는 있지 않은가. 헌데 맞아도 좋다는 저 배짱 좋은 태도에 그녀는 기가 질렸다.
‘사이는 틀어졌어도 충심은 변함이 없다고?’
수십 년을 함께한 사이니 이 정도쯤은 괜찮다 이건가.
하지만 글쎄… 그녀는 그 일에는 조금 비관적이다.
자고로 사람의 속성이란 가까운 이의 배신에 더 상처 입고 흔들리는 법. 차라리 계약 관계로 이루어진 사이는 배신해도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가까운 사이는 어긋나면 그 순간부터 영원히 함께할 수 없는 평행선으로 변모한다. 그만큼 상대를 믿은 마음만큼 거대한 강이 둘 사이를 가르기 때문이다. 내 비록 여태까지는 그 틈을 찾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손만 빨고 있었지만….
‘좋다. 이미 벌어진 틈,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더 벌어지게 해 주마.’
그녀는 이를 갈았다. 그가 저렇게 뻣뻣하게 나오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자기가 흔들릴 걸 알아서 강경하게 나오는 것일 터. 좋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녀는 이자의 무례가 놀랍게도 괜찮아졌다. 그녀는 한결 여유 있는 태도로 으름장을 놨다.
“자네, 혹 죽고 싶은가?”
“똑똑하신 메르디스 전하께서 그럴 리는 없다고 믿습니다.”
“내가 뭘 할 줄 알고? 몰래 뭔가 할 거란 생각은 없나?”
“길에서 절 본 사람들이 누군가의 눈이 되어 주겠지요.”
“그 눈을 내가 막을 거란 보장은?”
“그렇게 하실 수가 없으니 전하께서 절 데려온 것 아닙니까?”
그녀가 자신을 왜 데려왔나 꼬집는 말이었다. 또한 이 땅에서 감히 전하의 행사를 그녀가 막을 수 있느냐는 말도 됐다. 둘 다 실로 맞는 말이라, 그녀는 결국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방자한 놈! 자기도 모르게 콧방귀를 훙훙 뿜어낸 그녀는 손을 휙 내저었다.
“좋아. 돌아가게. 내가 지금 자네를 더 잡을 이유는 없을 것 같군.”
“영민하신 판단이십니다.”
“하지만 잊지 말게나. 나의 궁의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다네. 내 마음은 저 너른 아이사의 대양보다도 넓지. 자네의 방자함을 그냥 넘길 정도로!”
“그렇습니까? 그런데 혹 그것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민물고기가 바다에 들어가면 죽는다더군요.”
끝까지 이렇게 나온다. 메르디스는 비소를 머금었다.
“자네의 충심은 참으로 경탄 받을 만해. 하지만 그거 알고 있나? 자네는 어쩔지 몰라도, 그 충심을 받을 사람도 언젠가는 변하기 마련이야. 하물며 아프기까지 하니 더욱 그렇겠지. 허니 너무 전하를 믿지 말게나. 뒤통수가 아플 수 있으니….”
“아주 흥미로운 관점이시군요. 허나 뭐라 하신들 제 맘이 변할 리 없단 건 전하께오서 더 잘 아실 겁니다. 전하께서 변하시는 건… 제가 있는 이상 그럴 리도 없을 것이구요. 조언은 그저 감사히 듣겠습니다.”
“자네도 참 자네로군. 전하께서 쓰러지신 뒤로 약해지셨다는 걸 내가 모를 것 같은가? 모든 일은 그렇게 조금씩 시작되는 법이야.”
“…어떤 의미이신지 모르겠군요. 전하의 어디가 약해지셨다는 것인지?”
시종장이 미묘하게 얼굴을 찌푸린다. 메르디스는 요사하게 미소했다.
“왜, 내가 그걸 아는 게 못마땅한가? 하지만 시종장, 어쨌거나 나는 그분의 비야. 남편의 변고를 그 부인이 모를 리가 없지 않나.”
“네, 물론 그러실 겁니다 메르디스 전하. 두 분의 궁은 비록 서로 달리 계시나, 공비 전하께오서 공작 전하를 생각하시는 진실된 그 마음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옛말에도 그랬지요. 상대를 가장 잘 아는 이란 바로―.”
“…당장 가라!”
그녀는 성이 나 소리를 쳤다. 괜히 여기서 더하면 자기 체면만 구길 폭이다. 이미 돈 없냐고 받아친 놈이 무슨 말을 더 할지는 실로 하늘만이 알 일. 여기서 혹시라도 잠자리 이야기까지 나온다면 그녀의 가느다란 인내심이 끊어질지도 몰랐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흥!”
꼭 닫혀 있던 문이 어느 순간 활짝 열려 있다. 그녀는 시종장이 뒤돌아 가는 모습을 보며 숨죽인 분통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 말 그대로 아직은 공작을 상대할 자신은 없다. 일단 보내 주고, 기회를 틈타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일단 그가 자신에게 온 것만으로도 공작은 시종장을 의심하기 시작할 테니까. 균열은 이제 곧 시작이다.
메르디스는 그렇게 얻은 것을 가늠하며 속으로 분을 삭였다.
시종장은 공관에 도착했다.
오늘 하루 종일 벌어진 일들로 심신이 피곤했지만 마지막 일은 아직 끝나기 전. 어제부터 오늘까지 어지럽던 머릿속이 방금 일로 간신히 명료해졌다.
“정말로 공비 전하에겐 아무 말도 안 했군.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
그는 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나가면 공비를 만나리라 생각한 그의 생각은 주효했다. 어렵지 않게 만난 공비는…. 어제 시녀장이 말한 그대로였다. 시녀장은 정말로 그녀에게 아무 말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만일 그 사실을 고백했다면, 내 건방진 태도를 그렇게 봐줄 리 없지.”
공비와의 대화에서 얻은 게 많다. 시녀장의 진심, 그리고 설마했던 사실에 대한 확신까지 얻었다. 어지럽게 아른대던 아지랑이가 어떤 실체를 가지고 형상화했다. 시종장의 두 눈 위로 어두운 빛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단지 가정으로만 생각했던 사실은 점점 현실로 다가왔다. 개념과 현상이 그저 점으로만 존재할 땐 아무것도 아니었으나, 그것이 생각으로 이어지면 어느 순간 선과 면이 될 때가 있다. 그는 그렇게 자리에 앉아 오랫동안 생각했다. 시계의 분침과 시침이 몇 번이고 원을 그렸다. 점심시간부터 시작된 생각은 거의 저녁이 다 되어서야 끝났다.
그리고 그 기나긴 숙고 끝에, 그는 무언가를 결심했다.
“그래. 상대를 가장 잘 아는 이는 바로… 그 적이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이 모든 것을 시작하기 전, 반드시 공비를 만날 필요가 있었다. 본관으로 시종장이 사라지는 것을 공관의 모든 것이 지켜보았다. 그들은 숨을 죽이며 시종장이 사라진 시간을 견뎌 냈다.
시간이 서서히 지나갔다. 하늘 위에 올랐던 달이 서서히 서쪽으로 옮겨간다. 밤이 깊어 가고, 달이 서쪽 하늘로 넘어가 거의 사라지려고 하는 직전.
공관에, 시종장이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갔던 때와, 퍽 달랐다.
나름대로 온화했던 눈동자는 얼어붙어 있었다. 보기 좋은 미소를 달고 있던 입매는 꽉 닫혀 차가웠다. 꼿꼿하게 세운 큰 키는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고, 팔과 다리는 조금씩 떨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놀랍게도 단 몇 시간 만에 벌어진 일이다.
공관은 숨을 죽였다. 대체 무슨 이로, 그는 이렇게 격노하고 있는 것인가.
―덜컹.
그는 공관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평소와는 다른 길로 걸어갔다. 쓰지 않는 건물을 몇 개나 지나친다. 그러다 작게 난 문을 열어 그 안쪽으로 들어섰다. 어두운 복도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간다. 대략 십여 분 후, 그의 앞에 퍽 아늑하게 생긴 서재가 나타났다.
“여긴 여전하군.”
그는 짧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책장에서 붉은 책 한 권을 찾아 꺼내 들었다. 붉디붉은 책가죽이, 마치 그가 앞으로 할 일을 말하는 듯했다.
“…….”
깊은 고뇌에 빠져 있던 얼굴이 점점 얼음처럼 차가워진다. 마치 살아 있는 석고가 된 것처럼 딱딱하게 굳은 얼굴. 그는 그것을 아무도 모르는 어느 틈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서재의 어느 부분이 스르륵 열리고 통로가 나타났다. 비밀 통로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통로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쿵. 그가 들어서자, 묵직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예전에 한 왕국이 있었다.
그리고 그 왕국은 그 자신이 건재할 시절, 왕의 명령으로 정기적인 비밀 회합이 열릴 어떤 장소를 만들었다. 그 비밀 회합에 참석하는 이들은 왕국의 지고한 충신들뿐. 들어올 수 있는 자들도 당대에 한 명씩뿐이라. 왕국이 성세할 시기엔 수백의 사람들이 모였다. 허나 세월이 흐르고 흘러 왕국마저 사라진 지금엔 단 수십만이 회합에 참여했으니….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회합이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일 터.
그리고 시종장은 왕을 제외한다면, 그 회합을 열 수 있는 유일한 자였다.
그는 고개를 들어 모여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어디서나 볼 수 있고, 그래서 더욱 평범한 얼굴들 수십이 무거운 얼굴로 그를 바라본다. 모두 공작가와 그 밖에서 몸을 숙이며 세상을 살피는 자들.
“모두에게 알린다.”
차가운 한숨이 장내에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그 한숨이 가슴에 쌓인다. 앞으로 있을 일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러하리라. 그는 무거운 얼굴로 그들에게 선언했다.
“―전하께오서, 시해되셨다.”
우르릉!
거대한 벼락이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