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반역(?)모의
“숨을 들이쉬시고, 내쉬어 보십시오.”
로메인이 데려온 의원은 뚱한 얼굴을 한 중년의 남자였다. 렉시는 몰랐는데, 현재 시간이 제법 깊은 밤이었던 모양이다. 잠자다가 억지로 깬 의원은 기분이 나빠 보였지만 렉시를 진찰하는 손은 철저했다. 그의 인도에 따라 렉시는 시키는 대로 숨을 반복해 내쉬었다. 맥을 짚고 시간을 재던 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숨도 안정적이고… 맥도 제대로 되돌아왔군요. 다른 이상한 곳은 없습니까?”
“몸이 조금… 근육통이 있네.”
“흠, 근육통이라…. 관련 약을 처방하겠습니다. 큰일은 아닙니다. 원래 쓰러졌다가 일어나면 온몸이 아픈 법이지요.”
“아, 그리고 목도 조금 아프고… 막 일어났을 땐 조금 현기증이 있었던 것 같네.”
“그런가요. 허나 목이 아픈 건 지금은 어쩔 수 없습니다. 약을 먹고, 바르고 나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지요.”
“그런가….”
하긴 한번 졸린 목이 그렇게 빨리 나을 리는 없지. 렉시는 의원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뒤이어 줄줄 있을지도 모르는 증상에 대해서도 설명을 들었다. 대부분은 유용한 설명이었고, 제대로 들었다면 꽤 도움이 될 내용이다. 허나 안타깝게도 그 반 정도는 머리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로메인이 너무나도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로메인 경이 조금 이상해.’
의원을 데리고 온 뒤로, 그는 계속 뭔가 조금 이상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약간 넋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어딘지 멍하다고 해야 할까. 아까 전 알 수 없는 이유로 대화를 멈추더니, 돌아온 뒤로는 줄곧 저 모양이었다.
왜 저러는 걸까.
나 때문에 놀라서 저러는 것일까? 슬쩍 걱정이 된 렉시는 의원에게 속삭였다.
“바쁜 건 아는데 하나 물어보지. 그대, 혹 놀란 사람을 위한 약재도 지어 주는가?”
“물론 있습니다. 헌데 그건 이미 드시는 약재에 처방되어 있는뎁쇼. 혹시 강도를 좀 세게 처방을 받고 싶으신 건지?”
“아니 그건 아니고 좀 따로 처방 받고 싶어서…. 어려운가?”
“그야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만…. 혹시 다른 이에게 주실 요량입니까? 허면 일단 그 환자를 봐야겠는데요. 약이란 건 원래 환자마다 처방을 달리 해야 하니까요.”
“아, 그런가. 알겠네. 허면 저기 저 사람을 진찰할 수 있을까?”
“?”
그의 시선이 렉시가 살짝 가리킨 곳을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로메인의 존재를 확인한 순간, 의원은 얼굴을 확 찌푸렸다.
“저놈… 분을 진찰하란 말입니까?”
“그래. 로메인 경이 아까부터 조금 이상해 보여서 말이야. 아무래도… 경이 나 때문에 놀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어. 잘 보게, 눈이 약간 불투명하잖나.”
의원의 눈이 살짝 한심하게 변했다. 렉시는 슬쩍 눈치를 보다 눈썹을 찌푸렸다.
“…아닌 거 같아?”
“…제가 꼭 말씀을 드려야 한다면, 네. 그냥 봐도 건강해 보이는데요.”
“……그런가?”
“죽여도 안 죽을 거 같은 놈 걱정은 그만두시고…. 목이나 보여 주십시오. 약을 발라 드릴 테니까요.”
이상하다, 아무리 봐도 이상한데. 하지만 의원이 아니라니 뭐라고 할 것인가. 머쓱해진 렉시는 얌전히 목에 있는 붕대를 풀었다. 곧 의원의 손가락이 고약한 냄새의 약을 목에 치덕대며 발랐다. 약이 목을 건들 때마다 화한 기운이 코끝을 찔렀다. 렉시는 움찔거리며 약 바르는 손을 견뎌 냈다.
“됐습니다.”
약을 다 바른 의원이 작은 면포를 목 위에 얹었다. 렉시가 살짝 목을 건드리자, 그는 렉시의 손가락을 살짝 제지했다.
“건드리지 마십시오, 잘못하면 덧날 수도 있으니.”
“많이 심한가?”
“솔직히 어떻게 살아 계신 건지 궁금할 지경이긴 합니다. 흔적만 본다면 목이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인데….”
렉시는 흠칫했다. 목이 부러져?
“…목이 부러질 뻔했다고?”
“솔직히 흔적만 보면 그렇지요. 성대도 상했을 게 뻔한데, 목소리도 내고 있으니 참 신기할 노릇이기도 하고…. 뭐 가끔 이런 경우가 있긴 하니까요. 운이 엄청 좋으면 그렇지요. 어쨌거나 당분간은 안정이 최선이니 푹 쉬시기 바랍니다.”
의원의 말은 어딘지 모르게 섬뜩했다. 죽었어야 정상인 거 같은데 살아난 게 신기하단 투였다. 렉시는 눈썹을 찌푸렸다.
“…로메인 경은 내가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했었지…. 과연, 이래서 그런 착각을 한 모양이야.”
“그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그래. 그는 내가 죽었다 살아났고, 사취라는 것이 감돌았다고 그랬거든. 기사들은 그걸 가지고 죽은 이들을 구분한다지?”
“…아, 알겠습니다. 그 기사들의 개소리 말이군요.”
뭐라고? 렉시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나 의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자신을 모욕하는 자는 때려죽일 수도 있는 것이 기사인데, 그는 그것이 하나도 겁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말했다.
“사취 어쩌고는 그냥 기사 놈들이 대충 붙인 말입니다.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기사 놈들이 얼마나 선무당을 잘 잡는지 압니까? 그놈들 덕분에 산 놈을 파묻을 뻔한 적도 있었지 말입니다. 사람 죽이는 게 업인 놈들이 의원 흉내까지 내다니 나원, 기가 막혀서.”
멀찍이서 서 있던 로메인의 눈썹이 순간 꿈틀거렸다.
“…다른 이는 몰라도 전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습니다. 너무 과장이 심하신 게 아닌가 합니다만….”
“아이고 예, 그러시겠지…요!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으시겠지. 헌데 그 사취 돈다는 사람은 여기 왜 데려왔습니까요?”
“그야 살아 있으니…!”
“방금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면서?”
“…!”
로메인은 입술을 씰룩거렸다. 하지만 입만 씰룩댈 뿐, 결국 거친 태도로 숨만 삭였다. 그런 그를 보며 의원은 피식 비웃을 뿐이었는데 보는 렉시가 다 겁이 날 지경이었다. 저이는 겁이 없나, 어떻게 저러지? 렉시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지만 두 사람은 렉시가 둘을 어떻게 보는지 신경 쓰지 못하는 듯했다. 의원이 말했다.
“여하간 사취는 개소립니다. 죽었다 살아난 것도 개소리구요.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건 기적이 아닌 한 불가능한 이야깁니다. 아시겠습니까?”
“아, 알았네.”
렉시는 그 기백에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도 신경 쓰지 않는데 나 따위는 더욱 신경 안 쓰겠지 싶었다.
“여튼 저 개소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저이의 공이 있긴 있습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을 제대로 처치해서 살린 게 저놈… 분이긴 하니까요. 기사들은 사람 살리는 법을 잘 안 배우는데, 참 대단한 일이죠.”
“자네는… 기사들을 잘 아는 모양이군. 기사들은 일반 의원들보단 가문 소속의 의원들에게 자주 갈 텐데. 자네, 혹시 의원 열기 전엔 어떤 가문 소속의 의원이었나?”
“예? 아니요, 그럴 리가요. 제가 가문 소속 의원이었으면 이런 작은 의료소 따위에서 일을 하겠습니까?”
“…그래, 그건 그렇겠지.”
의원은 자기 눈치를 살짝 보며 말을 흐렸다. 렉시가 이 말을 한 순간, 로메인의 눈에도 순간 빛이 돌았다. 아닌 척하려는 거 같았지만 어림없지, 이미 다 본걸.
아무리 봐도 이 둘 사이엔 그가 모르는 어떤 내막이 있는 것 같았다. 왜 굳이 모르는 사이처럼 하려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뭐 아무렴 어떠랴.
태도는 거칠고, 약간 미심쩍은 구석이 있는 의원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이 의원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그의 외모가 아닌 환부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던 것이다. 로메인이 곁에 있다고 해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는 자기 영지에서밖에 못 봤다.
적어도 몸을 제대로 추스를 때까진, 이만한 자가 없으리란 건 불 보듯 뻔한 일. 렉시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언젠가, 알아낼 날이 있을 것이다.
꼬박 사흘 정도 지나자, 렉시의 몸은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나아졌다. 그 기간 동안 렉시를 간호한 건 주로 의원으로, 로메인은 렉시를 두고 밖을 바쁘게 돌아다녔다. 말로는 경호와 다른 일 때문이라는데 그 말이 맞는지 어쩐지는 알 길이 없었다.
‘이상하게 나랑 같이 있으려고 안 한단 말이야.’
내가 아파서 그러나. 편히 쉬게 하려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버나드의 일로도 말할 게 있는데, 자꾸 이래서 말이 점점 늦어지고 있다. 버나드가 꾀하고 있는 일의 내용상, 빨리 대화를 마무리 짓고 공작과 일을 도모해야 하는데.
그렇게 살짝 찌푸린 얼굴 위로, 불쑥 사과 조각이 들이밀어졌다.
“영주님, 영주님. 사과 드세요!”
“…고맙다 요수아.”
“많이 드세요. 여기 많아요.”
현재 렉시는 외부엔 행방불명인 것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렉시가 살아 있다는 걸 알면 몰래 죽이려고 할 백작 때문이었다. 물론 그건 외부인들에게 그렇고, 렉시의 가신들은 상황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렉시가 나아졌단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왔지만, 렉시의 몸을 보고 나선 영 낯빛이 좋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 어떤 가신이 영주가 몸져누운 걸 보고 기분 좋아 하겠는가.
“그 개 같은 잡놈 새끼 같으니. 감히 우리 영주님을….”
요수아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 렉시의 목을 보고 훌쩍거렸다. 필립도 렉시의 모습을 보며 기분 나쁜 티를 숨기지 못했다. 밖으로 나온 이래 렉시가 이렇게 다친 건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대체 로메인은 뭐 하다가 우리 영주님을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었나. 데이트하러 내보냈더니 사람이 다쳐서 오다니!
그들은 두 눈에 불을 켜고 로메인을 닦달했다. 너 대체 뭐하다 우리 영주님 이래 놔뒀냐고. 그리고, 잠시 뒤 뒤이어 밝혀진 원흉을 들은 두 사람은 입에서 불을 뿜었다.
버나드라니, 패트릭이라니!
안 그래도 미운 놈인 패트릭과 새로운 변태 버나드가 합세했다는 말에 둘의 눈이 뒤집혔다.
“연회에서 베일을 벗기더라니, 역시 하나를 보면 열을 알아요. 개 같은 자식!”
“역시 기회가 되었을 때 죽여 버릴 것을 그랬다. 괜히 살려 보냈어!”
“제 말이 그 말이에요. 세상에 초록은 동색이라더니, 어째 공작님은 그런 개 같은 놈을 새끼로 뒀대요?”
희번덕거리며 눈을 굴리던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공작은 어떻게 못 해도, 백작만큼은 어떻게 해 보리라는 투지가 두 사람 사이에서 피어올랐다. 뜨거운 불길이 용솟음치며 남작의 가신 둘을 둘러싸고 피어올랐다. 복수를 공모하는 두 사람의 눈빛이 시뻘겋게 타올랐다.
“필립 님, 공작님 아들은 몰라도… 백작, 그놈은 꼭 죽여 버려요.”
“그래, 꼭 죽여서 가죽을 벗겨 놓을 것이다. 그걸로 풍선을 만들어 발로 차고 다니자꾸나!”
“좋아요. 그렇게 죽이기 전에 최고의 고통을 주자구요. 그래, 그거다! 아예 고자를 만들어 버려요! 살아 있는 걸 후회하게!”
“오오 좋군! 그리고?”
“돈 있는 놈은 돈이 사라질 때 고통을 겪는대요. 그러니까 그놈의 밀밭에 몰래 불도 지르고! 집에도 질러 버려요! 타고 다니는 말 안장에 똥도 발라 주고! 살아 있는 내내 고통과 히스테리로 신음하게 해 주겠어요. 내 복수는 영원불멸할 거예요! 빌어먹을 패트릭!”
듣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지고 기분이 더러워질 것 같은 복수였다. 과연 얼마나 그 복수를 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으나, 말만 들으면 패트릭은 살기 참 힘들어질 것 같았다. 렉시는 피식 웃으며 두 부부의 설왕설래를 들었다. 어쨌거나, 둘이 있으니 마음은 편했다.
“그래, 아주 좋구나. 그 복수 모의는 앞으로도 계속해. 나중에 나도 꼭 한 다리 걸치자꾸나. 그보다… 요수아. 네가 보기에 요즘 성이 어때 보이니?”
“성이요?”
“응, 요수아 네가 눈치가 빠르니 물어보는 거야. 공작성. 거기 요즘 좀 이상한 일은 없니?”
혹 버나드가 뭔가 하나 싶어 물어본 말에 요수아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는 대체 어떻게 알았냐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세상에,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요즘 분위기 엄청 흉흉하고 어수선한데.”
“버, 벌써?! 어떤? 혹시… 막 용병이나… 칼 쓰는 것 같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버나드가 벌써부터 일을 시작했나 싶었던 렉시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이야긴 아니었다.
“예? 아뇨, 그런 건 아니구요.”
“그럼?”
“지진 때문에 그렇죠 뭐. 요 며칠 난리가 났었잖아요. 지진 나고, 극장 무너지면서 그 여파로 주변 집들에 다 금이 갔어요. 다행히 극장 말고 무너진 건 없지만…. 난리도 아주 그런 난리가 없어요.”
“…지진이라고? 영지에 지진이 났었어?”
렉시가 놀라 묻자 요수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왜 그걸 모르… 아, 영주님은 기절해서 모르셨구나…. 장난 아니었어요. 공작성도 난리예요. 외성 벽 쪽에 금이 쫙 하고 갔더라구요. 그래서 그거 보수할 인부들이 성안으로 들어왔는데… 아무래도 사람들이 많아지면 관리가 어려우니까요. 그래서 기사단들이 나서서 이쪽 부근 다 경비 서고 시찰 다니고 그래요.”
참으로 공교로운 우연이었다. 건물이 무너졌다면, 혹여 있을 증거마저 사라졌다는 의미 아닌가. 버나드와 백작의 운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나쁜 것인지….
렉시는 공작에게 말해 줄 증거가 사라졌다는 데에 살짝 낙담했지만 곧 맘을 고쳤다. 어차피 무너지지 않았어도 밀실은 사라졌었다. 중요한 건 공작이 자기 말을 믿어 주느냐는 것이지 증거는 아니다. 그리고 그것에 한해선 렉시는 자신이 있었다. 이래저래 한배를 탄 자신의 말을 그가 믿어 주지 않을 이윤 없었으니까.
“요수아.”
“예?”
“너, 혹시 갈 때 나 좀 데려갈래? 몰래 말이야.”
요수아가 앉아 있다 말고 펄쩍 뛰었다.
“뭐요? 안 돼요! 그 몸으로 어딜 가신다 그래요?”
“내가 급한 일이 있어. 공작님과 꼭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절대 안 돼요. 그리고 이거, 바로 그 후… 아니 공작님이 오지 말라 그런걸요. 한 반달 정도는 더 있어야 보수가 끝나니, 그때 오라고 신신당부하셨어요.”
…플로랑 후작이?
“그분께서 그랬다고? 이유가 뭔데?”
“인부들이 드나드는 상황이라 내부 단속이 어려운 거죠 뭐. 솔직히 저도 그 말에 동의해요. 거기보단 여기가 훨배 안전한 건 확실해요.”
렉시는 얼굴을 찌푸렸다. 공비 쪽에서 손을 쓰는 것일까? 상황을 모르니 답답하기 그지없다. 물론 이 상황에서 관망하는 것이 좋은 패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반달이란 시간을 그냥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버나드와 백작이 언제 반역을 도모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런 와중에 반달을 놀아야 하다니…. 렉시의 어두운 낯빛을 본 요수아가 얼굴을 찌푸렸다.
“급한 일이세요?”
“응, 무척. 한시가 급한 일이야.”
“정히 그러시면…. 일단 청은 올려보도록 할게요. 영주님은 못 움직여도 전하는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정말 급한 일이면 전하가 오실 수도 있겠죠. 그런데… 너무 기댄 마세요. 안 될 가능성이 높거든요.”
“왜?”
“왜긴요, 그 시종장 할아버지 때문이죠. 영주님은 안 봐서 몰라요. 요즘 그 시종장이 얼마나 난리인지 말도 못하거든요.”
지진으로 큰 부상을 입은 자는 없다. 허나 자잘한 상처를 입은 자들은 많았는데, 안타깝게도 공작이 그 부류였다. 산산조각 난 잉크병에 손이 벤 공작 때문에, 요즘 시종장은 공작 곁에서 떠나려 하지 않았다. 식사, 수면, 심지어 화장실까지 따라붙는다는 요수아의 말에 렉시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 사람이 화장실까지 따라다녀?”
“많이 다쳤다면 내가 말도 안 해요. 그냥 손 좀 벤 게 다래는데 뭐 그리 야단인지 원. 진짜 좀 사람이… 자발스럽다고 해야 하나 말로 못하겠어요.”
충심도 과도하면 독이 되는 법인데 어찌 나이 먹은 양반이 그런 것도 모르는지. 요수아는 투덜대며 시종장을 욕했다.
“우리 집사 할아버진 거기다 대면 완전 천사예요. 전하는 어떻게 그 양반을 견디는지 이해가 안 간다니까요. 저희한테도 별일 아니면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하는데 진짜 노인네만 아니면 그냥 콱!”
“아이고 시끄러워!”
그리고, 동시에 쾅 소리와 함께 진료실의 문이 열렸다. 시끄럽게 떠들던 요수아의 소리를 듣다 못한 의원이 화가 잔뜩 난 채 달려온 것이다.
“아주 저 방 너머까지 네 목소리만 들린다 이놈아. 대체 절대 안정 모르느냐? 네놈이 정말 남작님 가신이 맞아? 아주 동네 다 떠내려가겠다, 이놈. 어서 나가라! 면회 시간 끝났으니 이제 나가!”
“앗, 조금만 더요. 조금만 더 있으면 안 돼요?”
“네놈 다음부턴 아예 못 들어오고 싶은가 보구나. 그러하냐?”
“헙! 아닙니다. 나가야죠, 아무렴요!”
요수아가 얼른 눈꼬리를 내리며 헤헤 웃었다. 실로 재빠른 태세 전환에 의원의 눈이 샐쭉하게 변하자, 요수아는 손바닥을 싹싹 비비며 슬쩍 무언가를 건넸다.
“아이구, 명의 어르신. 어르신 덕분에 저희 영주님이 잘 쉬고 계십니다. 앞으로도 저희 영주님 잘 좀 부탁드려요. 헤헤, 그리고 이거 별거 아닌데….”
“흐, 흠흠!”
의원은 살그머니 건네받은 주머니의 무게에 콧수염을 꼬았다. 그냥 동화여도 이 정도면 제법 많은 양의 돈이었다. 의원의 코 평수가 넓어지면서 칼 같던 기세가 슬쩍 누그러졌다.
“…험, 험. 이런 거 안 줘도 내 영주님을 잘 살펴봐 드릴 것이다.”
“그럼 저희…내일 다시 와도 되지요?”
“흥! 환자가 있는 공간에선 정숙이 기본이라는 것만 기억한다면….”
의원의 허락에 둘은 얼른 짐을 챙겨 떠났다. 영주님 그럼 내일 봬요! 꼭이요! 시끄러운 소리 끝에 두 사람이 사라지자, 주변은 순식간에 적막해졌다. 렉시는 두 사람이 사라진 문 너머를 응시하다 의원을 바라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멋쩍은 얼굴을 한 그는 한쪽 팔을 뒤로 돌린 채 서 있었다. 가만 보니, 아까 받은 돈을 안 보이게 뒤로 슬쩍 숨겨 놨다. 이미 주는 거 다 봤는데, 저렇게 안 받은 척하는 이유는 또 뭘까. 은근히 괴짜였다.
“내 가신들이 폐를 끼쳤어.”
“폐라니요, 그런 말씀 마시지요. 저이들의 소란이 생각보다 더 시끄러워서 조금 나섰을 뿐이지 유감은 전연 없습니다. 게다가 남작님께선 아직 정양을 하셔야 하는 몸 아닙니까. 흠흠!”
그리고 은근슬쩍 잽싸게 옷 안으로 돈주머니를 숨기는 게 수준급이다. 어차피 진료비 받을 거 미리 땡겨 받는 건데 내외하는 게 솔직히 조금 웃겼지만 렉시는 모른 척했다. 본인이 그렇게 한다는데 뭐라고 하겠는가.
“오래 앉아 계셨으니 이제 좀 쉬시지요.”
“그래… 조금 누워 있겠다.”
아닌 게 아니라 조금 피곤했다. 렉시가 눕자 의원이 바지런히 방안을 정리했다. 이 의료소의 모든 일은 의원이 거의 홀로 처리했다. 처음엔 자기 때문에 사람을 내보냈나 했는데, 그게 아니란 건 금방 알게 되었다. 나이도 제법 있는 것 같은데 참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혼자서 치료소 관리하고, 환자까지 치료하긴 조금 버거울 텐데.
작디작은 렉시의 영지에 있는 의료소도 최소 상주 인원은 셋이다. 추운 겨울엔 장작 패기 하다가 허리 나가는 노인네들이 여럿 나올 테니 지금쯤 그곳은 사람으로 북적거릴 것이었다. 시골은 대도시와는 달리 환자가 올 땐 떼로 왔다.
‘흠…. 그러고 보니 여긴 좀 환자가 없는 편이네.’
렉시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을 열었다. 분명 지진이라고 그랬으니 환자가 넘쳐날 시기일 텐데…. 혹시 나 때문에 환자를 받지 않는 것일까?
“헌데 여긴 나 말고 환자가 없나?”
“예?”
“가신의 말을 듣자 하니 지진이 났다고 해서 말이야. 극장도 무너졌지 않나…? 그럼 여기저기 부상자가 넘쳐날 때 아닌가. 혹시 자네, 나 때문에 다른 환자를 받지 않는 것인가?”
“…아, 그 말이시군요.”
의원은 혀를 찼다.
“맞습니다. 데니우스 극장이 이번 지진에 무너졌지요. 지어진 지 채 이 년도 안 된 건물이 그렇게 무너질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런 대형 사고엔 늘 사상자가 많이 나오니까요. 그런데, 아닙니다.”
“아니라니, 뭐가?”
“환자 말입니다. 거절한 적이 없단 말입니다. 지금 이 의료소에 사람이 없는 건 이번 사건으로 다친 사람이 없어서거든요.”
다친 사람이 없다고? 렉시의 귀가 번쩍 뜨였다.
“환자가 없다니? 그렇게 큰일이 벌어졌는데 다친 사람이 없단 말이야?”
“예. 천만다행 아닙니까.”
“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던 거지? 사전에 지진이 올 걸 누가 알고라도 있었나?”
“도망친 사람들 말로는 지진 전에, 화재 감시종이 울렸다더군요. 그게 지진 덕분에 울린 건지는 모릅니다만…. 뭐 덕분에 무너지기 전에 다들 대피해서 피해가 없었답니다.”
“…화재 감시종?”
“예, 그 불날 때 울리는 그거 말입니다. 당최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이 일로 밥 벌어먹고 살긴 하지만 다친 사람은 없는 것이 나으니까요.”
맙소사, 그랬나.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마른세수를 했다. 방금 그의 말을 듣기 전까지, 렉시는 자신이 울린 종으로 인해 이런 일이 생긴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혹스러움과 동시에 미묘한 뿌듯함이 가슴 안을 맴돌았다. 의도한 일은 아니었지만 자기가 한 일 덕분에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허니 기분이 나쁠 리가 없었다.
“정말 다행이로군. 그러면 이제 지진으로 무너진 건물주만 잡으면 이 일은 끝인 건가?”
“건물주를 말입니까?”
“그래. 아무리 사람이 다치지 않았다지만 그런 건물을 지은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 아닌가. 어떻게 지었기에 이 년 만에 건물이 무너져? 마땅히 모든 관련자들을 문책해야지. 실로 당연한 일 아닌가.”
“예…. 뭐… 맞는 말씀이긴 합니다만.”
그의 말에선 어딘지 모를 쓴웃음이 감돌았다. 렉시는 의아함을 감추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내 생각이 틀리다고 생각하나?”
“아니요, 틀리긴요.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제대로라면 그렇게 되겠지요.”
“…제대로라니. 자네 말은 처벌이 꼭 없을 거란 이야기같이 들리는데.”
“……뭐, 예. 그렇죠.”
마지못한 의원의 대꾸에 렉시는 눈을 찌푸렸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 이곳은 공작령 아닌가? 내가 뵌 전하는 실로 공명정대하고 상벌이 확실한 분이었다. 그분은 필히 관련자를 문책할 거네.”
“공작 전하께오서 무척 공정하신 분이란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허나 이번 일은 그분도 조금 어려우실 겁니다. 그 극장의 주인은 바로 기레스 백작가이고, 그 뒤엔 공비 전하가 있으니까요. 기레스 백작은 소공자의 가장 큰 후원자이자 측근이니, 공비 전하가 어떻게든 무마시켜 주지 않겠습니까? 인명 피해도 없으니, 아마 대충 문책 좀 당하고 말 거라는 게 사람들의 중론이지요.”
렉시는 의원의 설명에 얼굴이 굳었다. 기레스 백작?
“…그 극장의 소유주가 기레스 백작이라고? 내가 듣기론 그곳의 주인은 부유한 상인이라 하던데.”
“아마 아시는 것 역시 진실이긴 합니다. 물론 대부분 그렇게 알고 있기도 하구요. 하지만 저 건물의 원주인은 백작이 맞습니다.”
“자네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아나?”
“그것은….”
의원은 뺨을 씰룩댔다. 짧은 고뇌가 남자의 얼굴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말을 할까, 하지 말까 하는 고뇌라는 게 한눈에 다 보였다. 그는 그렇게 한참을 망설이다 툭 내뱉었다.
“제 집… 그러니까 예전 의원이 그 땅 위에 있었거든요. 덕분에 알게 되었죠.”
의원은 입을 다물었다. 허나 때로는 한마디가 백 마디를 대신할 때도 있는 법이다. 렉시는 왠지 알만한 상황이 생각나 더 캐어묻지 않았다. 그의 영지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귀족들은 사사로이 평민들의 재산권을 침해하여 피해를 주곤 했다. 아마도, 이 의원은 그 비슷한 일을 이미 당하며 백작이 주인인 걸 안 모양이었다.
‘기레스 백작이 그곳의 주인이었다고.’
렉시는 얼굴을 찌푸린 채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을 곱씹었다. 솔직히 예상 밖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알면 안 갔을 텐데 참 재수도 없지. 그는 천천히 일의 아귀를 맞춰 보며 머리를 굴렸다. 자신이 온 걸 모르는 걸 보면 영업은 아마 대리인이 대신하는 것일 터. 그런 그가 극장의 주인이라 생각하자, 찜찜했던 그날의 미스터리가 단박에 풀렸다.
‘그래. 자기 소유의 건물 안이라 그런 위험한 이야기를 나눈 것이었군…. 밀실을 없앤 것도 그럼 백작이란 소린데…. 그래, 이제야 아귀가 맞아 들어가는군.’
어떤 방법으로 밀실을 부순 건지는 모르겠지만 넘쳐나는 백작가의 부로 뭐든 못할 것인가. 용의주도한 그라면 당연히 할 법한 일이다.
‘지금쯤 내 시신을 찾느라 난리겠군. 살았나 죽었나 확신하지 못할 테니까.’
패트릭이 자신의 목을 조른 건 우발성이 강했다. 하지만 우발이건 어쨌건 이미 일은 벌어졌다.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 생긴 만큼, 기레스 백작은 현재 매우 초조한 상태에 빠져 있을 것이다. 백작가에 비하여 하찮은 남작가지만 그 하찮은 남작은 현재 로메인의 약혼자였다. 로메인을 다시 공작가의 후계자로 보이게끔 한, 그런 약혼자.
‘내가 몸을 숨기고 있으니 더욱 확신할 수 없겠지. 시신이 없다는 걸 알아내기 전까진 아직 시간이 있겠어.’
이렇게 된 이상 조금 더 빨리 움직이는 자가 일의 성패를 좌우할 것이다. 렉시는 공작의 만류를 무시하고 성안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천만다행이게도, 렉시는 자신을 도와줄 적절한 조력자를 알고 있었다.
오랫동안 성에서 살았고, 또한 신분이 확실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
―로메인.
자길 요즘 피해 다니는 그를 잡아 와야 할 때가 되었다.
렉시는 입 다물고 약을 만드는 의원을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빛냈다. 이제 슬슬 이 의원의 가면을 벗길 시간이었다. 그는 천천히 일하는 의원을 보다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자네, 약은 다 만들었나?”
“예, 이것만 하면 다 끝입지요. 오늘 업무도 이로서 끝이구 말이지요.”
“잘되었군. 그럼 자네, 내 심부름 좀 하나 해 주게.”
“심부…? 아 예, 말씀하십시오.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별건 아니고, 내가 지금 로메인 경이 무척 필요해서 말이야.”
“…예?”
“자네도 알다시피 요 며칠 경이 바빠서 내가 대화를 통 못 했어. 그래서 그대가 로메인 경에게 전언 좀 넣어 주었으면 해. 내가 기다리니, 어서 빨리 와 달라고…. 할 수 있지?”
이 요구에 남자의 얼굴이 희한하게 변했다. 그는 잠이 확 달아난 얼굴로 렉시를 보다 고개를 퍼뜩 저었다. 말도 안 된다, 그런 얼굴이었다.
“…저, 그것은 힘들 것 같습니다. 제가 어떻게 경에게 전언을 넣습니까? 어디 계신지도 모르는데요.”
“그것은 자네가 알아서 해야겠지. 자네에겐 내가 모르는 방법이 있지 않나. 로메인 경과 대화할 방법 말이야.”
“예? 제가 말입니까?”
“이젠 슬슬 알려 줄 때도 되지 않았어? 자네와 로메인 경. 사실 서로 상당히 친밀한 사이 아닌가?”
“!!!”
그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렉시는 그런 의원을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
“솔직히 모르는 척하기도 이젠 힘들어서 말이야. 자네는 치료는 잘하는데… 뭘 숨기는 연기엔 통 재능이 없더라고.”
렉시는 작게 투덜거렸다. 기실 렉시는 이 연극을 조금 더 두고 보려고 했었다. 로메인이 그러길 원하는 것 같기도 했고, 쉬는 동안 수수께끼나 풀지 하는 심산도 있었기 때문이다. 자고로 수학과 퍼즐과 수수께끼란 풀라고 있는 거 아닌가? 아마 지금 같은 일만 아니었다면 좀 더 두고 보면서 퍼즐을 풀었을 것이다. 렉시의 말에 의원이 펄쩍 뛰었다.
“이,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남작님, 저는 그냥 평민일 뿐입니다. 경이 제 의원에 오신 건 여기가 제일 가까워서 그랬던 것이지 서로 알아서가 아니었습니다요. 제가 어찌 후작가의 기사 분과 알고 지냅니까?”
“아, 그런 설정인가. 뭐 그럭저럭 못 들어 줄 정도는 아니네. 허술하긴 한데 딱히 거짓으로 보이지도 않고…. 하지만 아직 눈치 못 챘나? 자네와 로메인이 친분이 깊단 증거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말이야.”
렉시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바로 나. 정확히 말하자면, 나와 자네를 같이 두는 지금 이 상황. 그게 바로 증거지.”
“그게 무슨….”
의원의 얼굴이 괴상하게 변했다. 안다, 전후 사정 모르면 이건 매우 뚱딴지같은 소리일 것이다. 환자의 보호자가 환자를 의원에게 맡기는 게 어떻게 친분의 증거냐 싶을 테니까.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상황에서나 그런 거고…. 렉시는 좀 달랐다.
“나 말이야. 미인이지?”
“예?”
“그것도 그냥 미인이 아니지. 뭐래더라, 절세미인? 무슨 황녀님보다 더 예쁘다고 하는데 그분을 내가 본 적이 없어서 그 건은 나도 잘 모르겠어. 내 얼굴에 금칠을 하는 거 같긴 하지만 어쩌겠나? 내가 모르고 싶어도 주변에서 나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고 홀리는데.”
되는 대로 지껄이는 것 같아도 이 모든 건 실화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진실과 미모인 것이다.
“헌데 이런 날 자네와 같이 두다니, 말이 돼?”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뭐 로메인 경이 뭔가 위협적인 언질을 주었을 가능성도 있긴 해. 먼 곳의 법보다 가까운 주먹이 두려워서 그럴 수도 있고. 하지만 그럼 로메인 경이 주야장천 밖을 돌아다니는 게 설명이 안 된단 말이야.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 날 맡긴 거잖아. 안 그래?”
“무, 무슨!”
의원이 억울하다는 듯 버럭 소리쳤다.
“남작께서 아름답다는 것에는 저 또한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남작께선 귀족이십니다. 어찌 평민이 귀족 분을 넘보겠습니까?”
“내가 여행을 좀 해 봤더니 신분 때문에 탐욕을 참고 그러진 않더라. 난 여관 급사들이 그렇게 양심이 없는 줄은 여행하면서 처음 알았지 뭔가? 개중 몇은 죽었는데, 아직 감옥에 있는 자들도 있을 거야. 굳이 증거가 필요하다면 서류 정돈 받아다 줄 순 있는데….”
죄목은 죄다 납치미수, 강간미수, 기타 등등 각종 미수 및 기수범들이다. 때문에 보기 싫지만 굳이 관을 봐야 울겠다면 못 줄 것도 아니었다. 렉시의 말에 의원은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긴장한 기색이 그냥 봐도 선했다.
“그자들과 저는 다릅니다. 고작 그런 이유를 가지고서 저를 핍박하시겠다면…!”
“이런, 이봐. 내가 설마 그것만 가지고 그러겠어.”
렉시는 두 눈을 곱게 휘었다.
“사실 결정적으로 이 가설에 방점을 찍은 건 자네가 은연중 실수한 말 때문이야.”
“말?”
“자네, 날 만난 첫날 사취가 어쩌고 운운하며 로메인 경에게 놈 놈 거린 거 혹 기억해?”
“…!?”
렉시는 순간 의원의 얼굴이 해쓱해지는 것을 목격했다. 그럼 그렇지, 누구 눈을 벗어날라고. 아무 일 없이 넘어간 것은 바로 지금을 위한 것이었다. 그때 그건 누가 봐도 본능적으로 뛰쳐나온 단어였으니 말이다.
아마 말하는 본인도 자기가 그런 말을 한 줄 몰랐을 것이다. 아마 평소에 하는 행동이 그대로 나온 것이겠지.
솔직히 말은 안 했지만, 렉시는 이곳이 어디인지 안 뒤부터 자기가 왜 여기 있는가 조금 궁금한 상태였다.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라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 공작성으로 데려가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병약한 미인이란 고래로 가장 쉬운 약탈의 대상이다. 헌데 그걸 아는 로메인이 이런 선택을 했다. 자신이 동석하지 않아도 모든 걸 일임했고, 귀족인 그를 폄하하는 용어를 써도 화조차도 내지 않는다. 허니 어떻게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건 신뢰가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었고, 보통 그러한 신뢰는 상호간 아주 친밀한 사이에서 오고 가게 마련이었다.
“……허어.”
그리고 결국, 의원이 얼굴을 감싸 쥐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해도, 더 이상 헤어날 방도가 있을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남자의 폐부에서 나오는 숨은 마치 땅이 꺼질 것처럼 무거웠다. 그는 한순간 십 년은 늙은 얼굴로 한탄하며 말했다.
“…제가 그렇게 어리숙했습니까?”
“글쎄. 내가 조금 눈치가 빠른 편이란 소리를 듣긴 해.”
어설픈 위로였다. 의원은 희게 센 수염을 쥐어뜯다 입을 삐죽 내밀었다.
“이거 참 골치가 아프군요. 열흘은 속일 수 있을 거라고 큰소리 빵빵 쳐 놨는데….”
“뭐?”
“별거 아닙니다. 그냥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죠.”
그는 피로한 얼굴로 머리를 휘휘 젓다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런 그를 보던 렉시가 짓궂게 물었다.
“변명은 더 안 하는 건가?”
“이미 눈치채셨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더 해서 제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그냥 얼른 인정하고 말아야지요.”
한번 인정하자, 태도가 마치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빠르다. 끝까지 밀고 나가지 않는 것을 보면 아예 끝까지 속일 생각은 없었던 것 같았다.
“자넨 대체 누군가? 왜 로메인 경과의 사이를 속였어? 자네 본업이 의원이긴 한 거지?”
“세상에! 그야 당연하지요! 설마 제가 의원이 아니면 기사겠습니까?”
펄쩍 뛰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의원이긴 한 듯했다. 그는 렉시를 보며 한숨을 내쉬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거짓말, 멍충이, 순진 같은 단어가 짧게 지나간 뒤 그는 다 포기한 듯 어깨를 푹 숙였다.
“아이고 내 팔자야. 다 늙어서 이게 무슨 일인지….”
“?”
렉시의 흥미로운 시선을 무시하며, 그는 허리춤에서 뭔가 꺼내 들었다. 그것은 금빛으로 빛나는 정방형의 물체로, 의원이 뭔가 손을 대자 손바닥 위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범상한 물건은 아니었다. 렉시가 물었다.
“그건 무엇인가?”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일단 이것 좀 작동시키지요. 금방 됩니다.”
“금방이라니 무슨 …어?”
그 말대로였다. 렉시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의원의 손에서 진동하던 물체가 순식간에 슉 사라졌다. 렉시는 깜짝 놀라 눈을 깜박댔다. 그가 이젠 됐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몸을 바로 잡았다.
“일단 명하신 일부터 했습니다.”
“명한 일이라니. 방금 뭘 한 건데?”
“로메인 경 불러오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게 그 연락용 전서조 같은 거지요. 곧바로 오라고 해 놨으니 금방 올 겁니다.”
“…전서조? 그거, 혹시 마도구인가?!”
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선대의 물건인데, 같은 가문 사람들끼리는 언제나 연락할 수 있게 만든 마도구죠.”
렉시는 입을 벌렸다. 세상은 넓고 기인은 많다더니 자기가 들고 있는 마도구에 비할 법한, 제법 재미있는 물건이 아닌가. 같은 가문 사람들끼리면 필시 핏줄로 반응해서 소식을 전하는 물건일…. 아니 잠깐. 렉시는 죽 이어 나가던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같은 가문 사람?
“…이봐 자네, 로메인 경과 정말로 어떤 관계인가?”
“아, 그거 말입니까.”
그렇게 말한 뒤 의원은 입술을 꿈틀댔다. 미묘하게 심술궂은 웃음을 지은 그는, 살짝 흰 이를 드러내며 렉시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뭐… 굳이 따지자면 백부입니다.”
“……?”
짧은 정적.
“뭐, 뭐라고?”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빽 하고 소리를 치고 말았다.
“참고로 귀족은 아닙니다.”
의원은 얼른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렉시는 그의 말이 잘 와닿지 않았다. 지금 그게 문제인가, 백부라는데. 이 난데없이 날아든 폭탄에 그의 머릿속은 연산 불능 상태였다. 백부라니…? 아버지의 형, 그거?
“백부라고… 아니, 백부시라고요?”
이럴 땐 존대를 해야 하나. 아니, 평대가 맞나?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인 격이라, 렉시는 자기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무척이나 헷갈렸다. 그런 렉시의 혼란을 짐작한 의원이 재빨리 상황을 정리했다.
“그냥 하대하십시오. 귀족이 평민에게 공대하는 게 더 우습습니다.”
“하, 하지만.”
“혼인도 하시기 전 아닙니까? 허니 이게 맞지요.”
본인이 이 정도까지 말하는데 더 버티기도 무엇하다. 렉시는 그냥 입을 다물었고 덕분에 잠시 정적이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의원은 자신을 보는 렉시의 눈에 질문이 그렁그렁 매달린 것을 보고 히죽 웃었다.
“많이 놀라신 모양이군요.”
“당연한 거 아닙니,… 아닌가!”
렉시는 더듬거렸다. 그런 렉시를 보며 의원은 살짝 미소지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렉시의 천품이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상대의 신분에 따라 스스럼없이 태도를 뒤집는 게 여반장인 자들이 소위 푸른 피였다. 공고한 신분제에서 일정 지위를 득하고 살아가는 귀족 중에서 이렇게 순진한 사람은 보기 드물었다.
보장된 지위를 내던지고 평민으로 격하된 뒤 퍽 많은 인사들을 겪었던 그는, 그래서 이 조카의 예비 신부(?)가 퍽 마음에 들었다.
‘좋군, 아주 좋아.’
후작가와 관련된 처신은 신중히 하는 그가 렉시의 치료 건을 승낙했던 건 조카가 뒤늦게 데려온 부인(?)이 대관절 누구인가 너무 궁금했던 탓이 컸다. 로메인 자체가 범상한 녀석이 아니니 상대도 여러모로 독특할 것이란 생각을 하긴 했지만…. 현실은 그의 예상을 훌쩍 초월하였으니 실로 상상이 무용이라는 게 이런 경우였다.
성별, 인품, 마지막으로 미모….
그 어떤 것도 예상에 들어맞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난데없이 남자와 혼인한다는 게 무슨 속셈인가 싶었는데, 솔직히 상대를 한번 보고 나니 모든 게 이해된다. 정말 너무 …예뻤던 것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도 혹할 정도로, 이 남작의 미모는 실로 무적이었다.
‘그래, 남자면 뭐 어떤가. 예쁘고 성격 좋으면 됐지 뭘.’
그는 그렇게 자신의 새 조카며느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렉시는 이 쓸데없이 마음이 넓어진 백부의 인정으로 나름 비사라면 비사일 후작가의 시시콜콜한 집안 사정을 듣는 데 성공하게 되었다. 백부의 무거운 입과, 한때 군에서 일했던 전력 때문에 그에게 렉시를 맡겼던 로메인으로선 퍽 곤혹스러운 일일 따름이었지만….
뭐, 어쩔 텐가.
말은 이미 시작했고, 현재 이 자리엔 그가 없는 것을.
“제 본래 이름은 아메스 드 데퓨탄…. 현재는 그저 아메스지만, 어쨌거나 현 데퓨탄 후작과는 이복형제간입니다. 부모님께선 정식으로 결혼하셨지만 제 어머니는 귀족 신분은 아니었지요. 덕분에 어머니는 마음고생이 퍽 심하셨는데, 설상가상 저를 낳다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덕분에 후작가의 안주인 자리가 비었고, 아버지는 주변의 강권에 얼마 지나지 않아 재혼하시게 되었습니다. 이후 아버지는 계모와의 사이에서 새 아들을 낳았고… 이후 일어난 일들은 뭐, 대충 상상하시면 될 겁니다.”
“……어.”
렉시는 당황했다. 사정은 알겠으나 저 말로 귀족이 평민이 된 이유를 유추하자니 걸리는 게 한두 개가 아니다. 말을 들어도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는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대충이라니….
게다가 저 말에 따르면 이 사람은 원래 후작가를 이어야 하는 정당한 상속자였다. 아무리 모친의 신분이 낮다 한들 정식으로 결혼한 사이면 그게 맞다. 속에서 오만가지 질문들이 비눗방울처럼 터져 나왔다. 궁금증을 참다못한 렉시는 결국 조심스레 사정을 물었다.
“그… 후작가는 본래 장자 상속 아닌가?”
“네,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친어머니가 없지 않습니까? 계모가 비록 후처라고는 하나 신분은 저보다 나았고…. 자신의 장자를 후계자로 올리고 싶었겠지요. 이해합니다.”
렉시는 입을 쩍 벌렸다.
“후작께서 그걸 두고 보고만 있었다고?”
“글쎄요. 뭐 죽은 아내보다 살아 있는 아내가 사랑스러운 것은 당연한 일일 거라 생각합니다. 그녀가 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막지는 않았으니, 어떻게 보면 용인한 거나 마찬가지기도 하겠습니다만.”
“……맙소사.”
남자는 덤덤하고 객관적인 어투로 자신의 과거를 읊었지만, 그와 달리 내용은 무겁기 짝이 없었다. 렉시는 뭐라 말을 첨언하려다 말았다. 여기서 뭘 더 캐물으란 말인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렉시는 떨떠름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정말 너무하는군! 이러니저러니 해도 명색이 첫아들이자 후작가의 자손이 아닌가. 헌데 지위도 주지 않고 이런 일을 하게 내버려 두다니…!”
“평민이 되는 조건으로 재산을 일부 받았지요. 어차피 거기서 버티고 있어 봐야 좋을 일도 없었습니다. 피차 불편하기만 하겠지요.”
눈 뜨고 자리를 뺏긴 것이나 매한가지이건만, 그는 그 건에 대해선 별로 유감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이 의료소로 말할 것 같으면, 제가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좋아서 의원을 해? 렉시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진짜로?”
“천직입니다. 천직.”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귀족이 용인하는 직업의 수는 극히 한정적이다. 그들이 인정하는 것은 군인, 기사, 성직자, 혹은 학자가 다이고 이외의 것은 천하게 여겼다. 노동은 노동하는 계층의 전유물이고, 귀족은 다스리는 것이 그 직분이라 여겨 예부터 그 둘의 경계는 확고부동했다.
“뭐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래요. 제가 처음부터 의원인 건 아니었습니다. 의술은 취미였고, 그 전엔 직업 군인이었으니까요.”
“…군인처럼은 보이지 않는데.”
“그렇게 오래 한 일은 아닙니다. 의원으로 산 시간이 더 길죠. 군인을 한 건 먹고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밖에 없었으니까요.”
아메스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재산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걸 믿고 평생 까먹고 살 수는 없는 일이지요.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압니까. 거기다 가정을 가질 생각을 하니 더 직업이 절실했습니다. 의술은 돈이 들고, 또 개업까진 긴 시간이 걸리죠. 해서 선택한 것이 군인이었습니다. 헌데 그 즈음해서 전쟁이 일어나지 뭡니까. 재수도 없지….”
“전쟁이라고?”
렉시의 눈이 흥미진진해졌다. 의원은 어깨를 으쓱하며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대략 스무 해 전의 일이니 모르실 수도 있겠군요. 북쪽과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당시의 폐하께서 제국의 전 귀족에게 참전을 명했던 그 전쟁 말입니다. 혹 남작님의 집안에서도 누군가 나간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귀족 집안이면 분명 누가 나갔을 텐데요.”
“글쎄, 그게 너무 오래전 일이라….”
고개를 흔들려던 렉시는 퍼뜩 떠오른 생각에 순간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젊은 시절 전쟁터에 나간 적이 있지 않았나?
‘…근데 그건 그냥 가출이었다고 들었는데.’
렉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말한 시기도 그렇고, 이리저리 따져 보면 아버지가 나간 전쟁은 저게 맞는 듯했다. 하지만 저 말이 맞다면 그의 아버지는 가출이 아니라 징집당했다. 굳이 가출이라고 표현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혹시 내가 아버지 따라 전쟁터에 나갈까 봐?’
자기도 한때 기사를 하고 싶어 난리를 친 적이 있으니 그런 것일까. 렉시는 어쩐지 아리송한 기분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아메스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교착 상태였던 전쟁은 후반으로 치닫자 세가 이쪽으로 기울었죠. 연전연승, 누가 봐도 전쟁은 곧 제국이 승리할 것 같았습니다. 폐하께서 귀족들의 참전을 독려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을 겁니다. 근 삼 년을 끈 전쟁으로 폐하의 지지도는 제법 떨어져 있었으니까요. 사기와 애국심, 그리고 충성심의 고취에 전쟁의 승리만큼 적당한 건 없었을 겁니다. 처음엔 폐하의 명에 반발하던 자들조차, 전세가 저러니 앞다퉈 자신의 아들들을 전투에 참여시키려 하더군요. 제가 소속된 부대는 그런 후계자들을 호위하는 부대였습니다. 정말 날이 갈수록 사람이 무섭게 늘어났지요…. 제가 본대에서 낙오된 날도, 그런 숱한 날들 중 하나였습니다.”
연이어진 승리는 부대의 기강을 흐트러트린다. 북의 적들은 그 틈을 노려 그가 속한 부대를 급습했다.
“막 참전한 신병도 많은 부대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요. 숱한 자들이 인질로 잡혀갔을 겁니다. 사방에서 몰려오는 적들을 막아 저도 간신히 몸만 빼내는 데 성공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 싶습니다.”
그는 오한이 이는 것처럼 몸을 떨었다. 수십 년 전 일이건만, 마치 어제 일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나니 본대는 사라졌고, 저 포함해서 딱 셋만 모르는 지역에 낙오되어 있더군요.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적은 본대를 쫓아갔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안전하진 않았습니다. 엄청난 추위가 닥쳐왔으니까요.”
아메스는 진저리를 쳤다.
“그쪽은 남쪽의 추위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거기선 숨도 조심해서 쉬어야 합니다. 잘못하면 폐가 얼어요. 설상가상 눈 폭풍이 휘몰아쳤고… 환자도 있었죠.”
취미로만 배웠을 뿐인 의술로 그가 사람을 치료한 건 그런 악조건이 겹쳤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글자 조금 읽은 놈이 임상이라니 어디 가당키나 합니까. 하지만 본대는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환자는 죽네 사네 하고 있고…. 허니 어쩌겠습니까? 게다가 그 환자에게 문제가 생기면 저 또한 죽인다고 칼까지 들이대는 놈도 있었으니 별도리가 없지요.”
거기서 칼을 들이밀었다고? 무슨 그런 미친놈이 다 있어? 렉시가 얼굴을 굳혔다.
“함께 낙오된 게 아군이 아니었나?”
“아뇨, 아군이지요. 제가 그래서 기사가 싫은 겁니다. 군인이라면 그 상황에서 그렇게 나오진 않았을 테니까요.”
이렇게 기사가 아군의 목숨을 등한시할 땐 보통 한 가지 경우밖에 없었다. 렉시는 어색하게 웃었다.
“부상자가 봉신을 맺은 자였군.”
“…글쎄요, 그게 과연 봉신이었을까요.”
제가 보기엔 충성보단 좀 다른 관계 같아 보였습니다만…. 그는 다른 가능성을 시사했으나 솔직히 상황은 확연했다. 후계자를 호위하는 부대에서 군인과 기사가 최소 하나씩 따라붙을 자라면 상대는 지위가 높은 귀족뿐. 아무리 못해도 최소 백작이나 후작은 너끈할 터였다.
“환자의 부상 정도가 심했었나 보군. 어지간하면 제대로 된 의원에게서 진찰을 받았을 텐데… 어딜 다쳤었나?”
“그 건은 저도 자세히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비밀로 하기로 했으니까요.”
어떤 가문에서는 부상 부위나, 그 정도에 따라 가문의 일원 자격이 없다 내치는 경우도 있다. 부상과 관련해선 말을 아끼는 건 그런 이유일 것이다. 렉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겠지…. 허면 치료는 성공적이었나?”
“그야 물론이지요. 덕분에 사람이 셋이나 살았는데요.”
“셋이나!”
“한 명은 접니다.”
머쓱해질 뻔했지만, 이러나저러나 그래도 둘은 살렸다는 말이다. 그런 악조건하에서 사람 둘을 살렸다니 의술을 천직으로 여길 만도 했다. 렉시의 감탄을 보는 아메스의 눈이 살짝 접힌다. 입은 그대로 있으면서 눈가만 살짝 웃는 웃음은 은근히 로메인과 닮아 있었다. 확실히 같은 핏줄은 핏줄이구나. 수염 때문에 조금 덜 닮긴 했지만.
“북쪽의 눈 폭풍은 제법 오래가서 수색조가 저희를 찾기까진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돌아간 뒤 저는 전역을 했죠. 지긋지긋했으니까요. 이후론 의술을 좀 더 공부해서 의원이 됐죠.”
제법 굴곡진 초년이지만 이후로는 그럭저럭 평탄한 삶을 살아왔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다 들은 렉시는 그가 의원으로서 사는 삶을 좋아할 수밖에 없단 걸 납득했다.
“어쨌거나 저는 지금이 매우 만족스럽습니다. 후작가의 성을 버리긴 했지만 뭐 연을 아주 끊진 않았죠. 게다가 로메인은 그, 하는 일이 좀 험하잖습니까?”
몸을 쓰는 직종이라 평소 다칠 때마다 치료를 해 주었고, 이번 일도 그런 연장선상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군인 출신이었으니 기본 경호도 될 것이고, 의술 역시 훌륭하니 걱정할 필요가 없을 터. 렉시는 깊이 납득했다. 그리고 동시에 의문이 솟아올랐다.
“…그랬던 거군. 헌데 경은 왜 내게 이 사실을 숨긴 거지?”
사정 설명을 듣고 나니 모든 것이 설명되건만. 이 모든 걸 사전에 이야기해 주었다면 자신이 이렇게 백부를 몰아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딱히 숨길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그러나 의원은 알 만하다는 듯 웃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대는 렉시를 향해 깔끔한 웃음을 날렸다.
“남작께선 생각보다 순진하시군요.”
“응?”
“솔직히 당연한 거 아닙니까. 어쨌거나 이건 집안의 비사요, 좋은 일은 아니지요. 허니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런 이야길 누가 하고 싶어하겠습니까?”
“!!”
얼굴이 순간 붉게 달아올랐다. 당황이 역력한 렉시의 모습에 아메스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좋을 때군, 좋을 때야
“크흐흐흐, 흠흠! 어쨌거나 저는 여기서 이만 빠지겠습니다. 이 이후는―.”
쿵!
“남작님!!”
“―저놈과 이야기해 보십시오.”
그는 헐레벌떡 달려온 조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씩 웃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헤치고 달려온 로메인의 이마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기사가 이마에 땀 날 정도로 뛰다니, 얼마나 다급하게 달려온 건지 알 법한 모양새였다. 아메스가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누군가 침입했습니까?!”
“소란 피우지 마라. 들켜서 불렀어.”
“……!!!”
로메인의 두 눈동자가 부릅뜨였다. 아메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붕어가 된 둘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난 이만 빠질 테니 이후는 너 알아서 하고. 아무래도 할 말이 많을 것 같은데…. 한 두세 시간 정도 자리 비워 주마. 아 참, 잠자리는 아직 안 돼. 알지?”
“배, 백부! 지금 무슨 말을!”
“!!!!”
로메인과 렉시 사이에 폭탄을 던져 놓은 그였으나 그는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예비 조카 부부를 향해 손을 흔들며 밖으로 나갔다. 밖은 차가운 바람이 불었지만 방 안은 후끈했다. 유부들의 주책이란 가끔 이렇게 사람을 환장하게 한다. 그는 씩 웃으며 둘을 일별했다.
“늦었지만 약혼 축하한다.”
한동안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렉시나 로메인이나 서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렉시는 어색해서, 그리고 로메인은 걸리는 일이 한두 개가 아니라서.
그렇게 둘은 서로를 보다 바닥을 보다 하면서 시간을 보냈지만, 이러고 평생을 보낼 수 없다는 건 그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음, 오셨어요?”“죄송합니다!”
불시에 말이 겹쳤다. 결국 또다시 어색해졌지만, 그래도 상황은 아까보단 나았다. 어쨌거나 서로 대화하고 싶다는 걸 확인한 셈 아닌가?
“죄송합니다. 처음부터 속이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로메인은 침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얼결에 모시고 온 것이라 처음엔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가까운 곳에서, 이곳만큼 안전한 장소가 달리 없기도 했으니까요. 나중엔 백부인 걸 알게 되면 당신께서 편히 쉬시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입을 다물게 되었고….”
“저는 괜찮은데요.”
“…그리고, 솔직히 듣기 유쾌한 비사는 아니어서 말씀드리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
렉시는 침묵했다. 하기야, 어디다 대놓고 드러낼 이야기가 아니긴 했다.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건 백부의 오해겠으나, 솔직히 이런 건 친한 사이라도 말하기 힘들 이야기 아닌가.
“그리고 그분이 원래 농이 심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많이 불쾌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악의는 없으셨을 겁니다. 그럴 분도 아니지요. 제가 그분 대신 사죄드리겠습니다.”
렉시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잠자리 어쩌고 한 걸 사과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는 그 말이 크게 불쾌하진 않았다. 외려 좋다면 좋았을까?
그 이유야 물론….
그는 왠지 간지러운 기분에 손을 꼼지락댔다. 그렇지 않으면 그도 몰래 살랑대는 감정을 들킬까 조바심이 났다. 아,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까. 렉시는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저분은 우리 일을 모르니까요. 그다지 불쾌하지도 않았고요…. 그보다, 우리 한 일주일 만이죠?”
“그 정도는… 아닙니다. 정확히는 닷새하고, 12시간 29분입니다. 늘 세고 있었습니다.”
일순 농담인가 했다. 하지만 로메인이 이런 걸로 농담을 할 사람은 아니니 저건 정말일 것이다. 아니 대체…, 대체 왜?????
‘기사라 그러나?’
철저한 시간 개념이 기사의 기본 소양이라도 되는 것일까? 도중에 그만둔 자신은 알 수 없는 기사의 세계란 실로 심오하기 짝이 없었다.
“네… 그럼 닷새하고, 12시간 29분 만이네요. 대체 무슨 큰일이 있었길래 그간 뵙지 못했을까요. 어떤 급한 일이 생기셨었나요?”
“그간 크게 급한 일은 없었습니다. 단지… 주변을 경계하고 탐문하느라 조금 바빴지요. 혹시 남작님의 뒤를 쫓는 이들이 있을까 봐 신경이 쓰였습니다. 이 일에 신경을 쓰다 보니, 시간이 생각보다 빨리 지나간 걸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간 찾아뵈지 못해 죄송합니다.”
로메인 경은 생각보다 거짓말을 못하는구나. 못 본 시간을 분 단위로 세는 사람이 퍽이나 시간 지나가는 걸 몰랐겠다. 렉시는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혹시 기레스 백작의 뒤를 쫓고 계신가요?”
“일단 그는 내버려 두고 있습니다. 극장이 무너진 일을 처리할 때까지는 내버려 둘 계획입니다. 극장 처리가 끝나면 어떻게든 잡아 넣을 겁니다.”
“허면 그가 제가 살아 있는 걸 혹시 알아챈 것 같은가요?”
“아니요, 그렇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외려 극장이 무너진 자리를 치우면서 시신을 찾고 있더군요. 살아 있다 생각한다면 그러지는 않았겠지요.”
“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제가 죽지 않았다는 걸 알면 절 찾아다닐 텐데…. 만일 그렇다면 경께서 이렇게 자리를 비우지는 않았을 거고요. 허면 그것 말고 다른 어떤 일로 주변을 경계하신 걸까요. 이것 말고 다른 더 급한 일이 있었던 것인가요?”
불시에 찔러들어 온 공격이었다. 로메인은 순간 앗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제가 한 말의 모순을 깨달았던 것이다.
“경, 마냥 숨기는 건 좋은 것은 아니에요. 제가 이렇게 환자가 되어서 걱정되신 것은 알겠지만, 그래도 알 일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요?”
“…송구합니다.”
로메인은 한숨을 슬쩍 삼킨 채 창밖을 보는 등 딴청을 피웠다. 슬쩍 보인 귀 부분이 묘하게 붉었는데, 수가 간파당한 게 부끄러운 듯했다.
“사실… 저 개인적으로 조금 복잡한 일이 있었습니다.”
“…개인적인 일?”
“죄송합니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다만 이 일이 대단히 복잡하고, 확신이 가지 않는 일이라…. 홀로 생각할 시간이 조금 필요했습니다.”
로메인은 말을 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살짝 내리깐 푸른 눈동자가 우수에 젖은 듯 깊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어떤 사유이기에 자길 피해 다니면서까지 깊은 생각을 해야 했는지가 너무나 궁금해졌다.
“경. 홀로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라면 말씀해 주세요. 저도 몸이 많이 나아졌으니까요.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야지요.”
“예?”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하지요. 어떤 연유로 그런 것인지는 모르지만 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라면 저도 도와드릴게요. 어떤 일인가요?”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고, 슬픔과 고민은 나눌수록 줄어드는 법. 물론 여기에 사심이 없다고는 못했지만, 고민하는 것이 무엇이건 혼자 골몰하는 것보단 나을 터였다. 하지만 로메인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쩐지 복잡한 표정을 하던 그는 곧 고개를 저으며 도움을 거절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래도 혼자보다는 둘이 낫지 않나요?”
“죄송합니다. 이건 나눌 수는 없는 일 같습니다.”
“로메인 경. 제가 거북하신가요?”
로메인이 순간 움찔했다.
“거북하다니… 그럴 리 있겠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절대 아니라는 사람 눈이 왜 자신을 보지 못하는가. 렉시는 헛웃음이 나왔다. 저 사람은 강한 부정은 긍정이란 말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순간 알싸한 것이 가슴을 치고 지나갔다. 내가 거북하다라….
하지만 렉시는 차분함을 잃지 않고 로메인과 눈을 마주했다. 무엇이 문제인가는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그는 지금 자신과의 사이에 선을 그으려 하고 있었다.
“로메인 경, 절 너무 어렵게 여기시지 마셨으면 좋겠어요.”
“무슨 말씀입니까?”
“경이 절 지키지 못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였어요. 그걸 가지고 죄책감을 가지시지 마셨으면 한다는 말이지요.”
그가 이렇게 자신에게 선을 긋는 이유는 대충 짐작 간다. 아무리 친분을 쌓았다 한들 자신은 얼마 후 로메인의 윗전이 될 사람이라는 거겠지. 아마 이번에 자신이 다친 일로, 그가 그 사실을 가슴에 새기게 된 것이 분명했다. 상당히 친밀해진 사적인 관계 때문에, 그는 의무를 잊고 말아 결국 자신을 지키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선을 그으려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저와 경이, 봉신을 맺기로 한 것은 맞지만 전 사실 그 봉신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은 아니에요. 물론 경은 아니실 수도 있을 거예요. 맹세도 하셨고, 경께선 기사도를 중시 여기시니까요. 하지만 저는 군신 간의 예나, 뭐 격식 같은 그런 걸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도 아니었고…. 앞으로 그럴 생각도 없어요. 뭐 보시면 아시겠지만요.”
렉시는 요수아나 필립을 떠올리길 바라며 살짝 웃었다. 하지만 로메인은 렉시의 말을 들으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그저 경과 저 사이가 멀어지는 것이 싫다는 이야기예요. 저를 윗사람이 아니라… 조금 더, 친밀한 상대로 여기셔도 돼요.”
“…친밀한?”
“네, 지인이나 친구 같은….”
“…친구, 말입니까.”
낮게 말하는 로메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역시 너무 무리한 요구일까? 렉시는 침을 꿀꺽 삼켰다.
기실, 로메인을 위한다는 이 요구 뒤엔 렉시의 욕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버리지 못한 짝사랑의 미련, 앞으로도 피어나지 못할 미련. 연인은 안 될지언정 그저 친구라도. 곁에 있진 못하겠으나, 이렇게라도.
차마 고백은 못하지만 그래도 옆에서 지켜보고 싶다는 그런 사소한 욕망이 렉시의 두 눈을 가렸던 것이다. 자기도 알았다. 이건 매우 치졸한 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넘어가 줄까?
렉시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감춘 채 눈을 내리깔았다. 가슴이 두근두근 세차게 뛴다. 약간 붉어진 얼굴, 조마조마한 것을 숨기는 것처럼 떨리는 눈가와 손, 살짝 깨물린 입술…. 그런 렉시의 모습이 로메인의 눈에 남김없이 담겼다.
잠시간의 침묵 뒤, 로메인이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그는 짧게 뇌까렸다.
“제가, 지레 겁먹고 있었군요.”
…넘어갔다!
렉시는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러자 머리 위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로메인이 보였다. 약간 마른 듯한 얼굴, 그 위 박힌 눈동자가 마치 등불처럼 형형했다. 렉시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그걸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제가 당신께 조금 더 다가가도 괜찮습니까.”
“네, 물론이죠.”
“…정말로, 괜찮습니까?”
“괜찮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요?”
괜찮다마다! 렉시는 용기를 내어 로메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로메인의 눈썹이 순간 꿈틀거렸지만 뿌리치지 않는 걸 보니 불쾌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 고백은 못 해도 이 정도는 괜찮지? 실제로 친구들도 이 정도는 하잖아! 손은 잡잖아!
로메인이 무뚝뚝한 얼굴로 천천히 말했다.
“저는… 한번 정하면 그 길로만 가는 사람입니다. 한번 정하면, 다시 되돌리기 매우 어려운 데 반해 아주 질기고, 성가시지요. 심지어 좋은 성격도 아닙니다. 나중에 당신께서 원망을 하셔도 되돌리기 힘들지 모릅니다. 그래도?”
“되돌릴 것이었으면 청하지도 않았겠죠. 거기다 고집 없는 기사가 어디 기사인가요? 전 바른길만 옳다고 생각하는 편협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 정도는 감당할 수도 있고, 받아들일 수도 있어요.”
하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때론 정도를 벗어나기도 한다. 늘 정의로우면 좋겠지만 그런 정의로운 세상은 신이 사는 천국에서나 가능한 일. 렉시는 바른길도, 비틀린 길도 그 나름의 정의와 목적에 부합하다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너른 마음의 소유자였다.
“제가 …싫어지실 수도 있을 텐데요.”
렉시는 피식 웃었다.
“경. 이 기회에 말씀드리는데… 제가 생각보다 경을 많이 좋아합니다. 전 경이 처음 볼 때부터 좋았어요.”
“…예?”
“제 호감을 한번 믿어 보세요. 저도 좋아하는 건 잘 바꾸지 않으니까요.”
“……!”
고백 아닌 고백.
아마 로메인은 평생 알 수 없겠지만, 이게 렉시의 첫 고백이었다. 마주한 두 사람의 시선이 짧게 섞였다. 일순, 로메인의 푸른 눈동자 너머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넘실거렸다. 하지만 이내 사라졌으므로 렉시는 그게 무엇인지는 눈치채지 못했다.
*****
“…놀랍군요. 그가 그런 말을 했단 말입니까?”
“네. 사실 경을 부른 이유는 그것 때문이에요.”
“반역이라….”
로메인에게 반역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로메인은 크게 놀란 낯을 했다. 그가 아는 버나드는 그런 짓을 할 배짱이 없는 놈이었으나, 패트릭이 의견을 내었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로메인은 렉시의 말을 듣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심각해진 로메인의 얼굴 위로 어두운 빛이 스쳤다.
“버나드는 모르지만 패트릭은 용의주도한 놈이지요. 아마 말하기 전에 미리 계획을 세워 뒀을 겁니다.”
“허면 지금 성안이 흉흉한 것도 백작의 의도일까요?”
“그럴 가능성이 있긴 하지요. 하지만 지진으로 극장이 무너진 그로선 지금 성안이 흉흉한 걸 원치는 않을 겁니다. 자신의 죄가 더 드러나 보이니까요. 실제로 백작가의 사용인들이 여럿 몰려다니며 자경단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약삭빠르네요.”
로메인의 말에 렉시는 입술을 깨물었다. 렉시의 목을 보고 있는 로메인의 눈에 싸늘한 살기가 감돌았다.
“…원하신다면 당장 그놈을 잡아 가두겠습니다.”
“아뇨. 그러지 마세요.”
지금 당장은 억울하나, 미래를 보면 이게 맞다. 현재는 그가 그렇게 시일을 보내는 것이 이득이었다. 게다가 당장 잡아 가둔다고 해도, 그의 배경이면 도로 풀려나올 가능성이 높았다.
“일단은 지금 그대로 나가는 것이 좋겠어요. 그가 제 일을 처리하는 동안 우리는 다른 일을 준비할 수 있을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로메인은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렉시가 원치 않는 일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
“어쨌거나 얼른 플로랑 후작을 만나 이 이야기를 해야 해요. 헌데 요수아가 말려서, 경이 필요하고요.”
“가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만…. 요수아가 만나는 걸 말렸단 말입니까?”
“정확히는 그분께서 언질하신 거였어요. 내부가 흉흉하니, 반달 후에나 오라고….”
“…그렇습니까.”
로메인은 미간을 좁혔다. 렉시의 말이 맞다면 그의 생각보다 공작, 플로랑 후작의 상황이 나쁘단 의미이기 때문이다.
렉시는 몰랐지만, 사실 이번 사건은 건물이 무너지고 성 내부가 흉흉한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렉시의 몸이 완쾌될 때까진 아무 말 하지 않을 것이었으나, 이렇게 된 이상 말은 해야 할 것 같다. 그는 짧은 고민을 끝낸 뒤 입을 열었다.
“남작님. 혹 이 성의 역사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역사요?”
공작성의 역사라면, 달리아의 왕성이었던 그것 말인가? 로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맞겠습니다만….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건 이 성 자체의 역사입니다. 굳이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성이 과거 단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단 걸 알려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달리아의 왕성은 이미 이백 년 전에 제국에 함락되지 않았나요?”
“그랬지요. 하지만 그것과 제가 말하는 건 조금 다릅니다. 제가 말하는 건 물리적인 것이니까요.”
요는 이것이다. 공작가의 전신인 달리아는 과거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했으나, 그 성벽은 물리적으로 정복당한 적 없다는 것이다. 이건 달리아의 왕성이 정복되기 전 왕이 직접 그 문을 열었기 때문이라는 게 로메인의 설명이었다.
“헌데 그런 성이 조금이기는 하나 파손되었습니다. 고작 건물 하나 무너졌다고 말이지요. 어떨 것 같습니까?”
렉시는 잠시 생각하다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로메인이 무슨 말을 하고픈 것인지 알아챘던 것이다.
“…공작께서 공격당하고 계시겠군요.”
“―그렇습니다.”
로메인의 입매가 단단하게 굳었다.
한 나라의 흉사가 곧 그 왕의 허물로 여겨진 때가 있다. 이것은 옛일이나, 어떠한 지역에선 옛일이 아니기도 했는데 프로하우스 공작령이 바로 그 예외적인 곳이었다. 비록 공작이 왕은 아닐지나 공작령 안에선 왕과 같은 존재. 따라서 공작령의 흉사 역시 현 공작의 허물로 여겨질 가능성이 컸는 바, 이번 일이 바로 그 불에 기름을 부은 것이다.
“생각해 보면 참 기가 막히기 짝이 없긴 하네요. 고작 건물이 무너진다고 지진이 날 수가 있나요?”
“글쎄요. 저도 지질학 쪽은 잘 몰라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학자들이 그렇게 떠들어 대고 있는 걸 보면 그만한 근거가 있어 말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물론 학자들이 말하는 게 다 맞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그런 거 아니겠느냐. 로메인의 평이었다.
“거기다 달리아의 성벽은 용이 축조했다고 하지요. 혹자는 용이 그렇게 부지런한 이들이 아니니 이미 축조된 성벽에 마법을 건 것이라고도 합니다만….”
“…어쨌거나 용이 손을 댄 성이긴 하다는 거죠.”
성 조금 부서졌다고 왕의 위엄이니 뭐니 하는 건 구시대적 발상이다. 하지만 이 가문의 원혈족 자체가 용과 관련되었지 않은가? 그 권위가 훼손되었다는 걸 부정이 탔다 판단하여 공격하는 것이 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거기다,
“안 그래도 아파서 한 번 쓰러지셨던 분이니까요. 그래서 논쟁이 더욱 격한 것이겠지요.”
후계자가 없는 와중에 아픈 공작, 그리고 신년이 지나자 무너진 성벽은 미신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무언의 표징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는 신은 믿지 않았지만, 신앙이라는 게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잘 알았다. 애초 영주란 자리가 그런 불확실한 감정을 다스리고 휘두르는 자리 아닌가?
“어차피 건강 때문에 후계자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으니 우는 아이 뺨 때려 준 거나 마찬가지겠구요.”
“실로 그렇습니다.”
“하 참….”
렉시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래서야 자기가 로메인과 혼인한다고 시끄럽게 군 의미가 없다. 공작이 오기까지 시간을 벌려고 한 일이 무산된 거나 마찬가지라 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기껏 판을 벌여 놨는데 판이 아예 무효가 됐으니…. 무식하다고 사람들을 매도하기엔 솔직히 자기라도 그렇게 말했을 것 같아서 할 말도 없다. 솔직히 이번 일은 약간의 비약만 가미한다면 훌륭한 압박 용도가 될 법한 게 맞았기 때문이다.
“각하는 어쩌고 계시죠?”
“뭘 어쩌겠습니까? 일단은 건강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계십니다. 시종장이 붙어 있으니 누가 감히 범접하지는 못할 것이고요. 하지만 이번 일은 기본적으로 후대가 탄탄하지 못해 생긴 일이니….”
“결국 누구누구만 살판났단 이야기군요.”
여기서 말하는 누구누구란 물론 버나드와 공비다. 렉시가 짜증스레 뇌까리자 로메인이 쓰게 웃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기레스 백작이 조용히 있다는 겁니다. 그의 소유 건물이 무너져 생긴 일 아닙니까? 덕분에 가장 시끄러울 누군가의 입이 막혀 있지요.”
“그자가 입을 열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 비단 그것 때문이겠어요? 절 죽이려고 했으니 더 시끄럽게 굴지 못하는 거겠죠.”
그놈이 퍽이나 온건한 의도로 남 좋은 일을 하겠다. 렉시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지금 무너진 잔해 더미는 백작가가 치우고 있겠군요.”
“네. 자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직접 해결한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백작가의 사람들 이외에는 접근하지 못하게 통제하고 있고?”
“네, 맞습니다만…. 혹시 그쪽에 따로 가 보셨습니까?”
“제가 가긴 어딜 가겠어요? 그냥 저라면 그럴 테니까 한 소리예요. 제 시신을 치우면서 빼돌릴 기회니까요.”
기레스의 이야기를 말하는 렉시의 입가에 짧은 조소가 스쳐 지나갔다.
“뭐 백날 천날 찾아 봐야 헛짓일 테지만….”
렉시는 머리를 굴렸다. 애써 올린 판이 치워진 게 아깝긴 하지만 지금은 사라진 판을 아쉬워하기보단 새 판을 짤 때다. 지금쯤 홀로 머리 터지고 있을 공작 대리를 생각하던 렉시는 고개를 들었다. 오지 말라고 했지만, 지금은 가야겠다.
“로메인 경. 우리….”
“알겠습니다. 뜻대로 하십시오.”
말이 나오기도 전에, 로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렉시의 생각대로, 로메인은 곳곳에 숨겨진 비밀 통로를 잘 알았다. 어딘지 모를 이상한 언덕 뒤에 숨겨진 장소로 들어간 그들은 굽이굽이 구부러진 굴을 타고 성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여기서부턴 외성입니다. 이곳은 파손되지 않았으나… 조금 조심해서 걸으셔야 합니다. 외부에 노출된 곳은 아니지만, 소리는 들리니까요.”
로메인의 주의에 렉시는 숨을 죽이고 뒤를 따랐다. 그의 말대로 걸을수록 위에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진다. 한참을 걸어 외성을 지나 내성으로 접어들자, 어두웠던 안이 확 밝아지며 밖이 보였다. 외성이 끝나고, 내성으로 진입하는 장소였다.
“내성의 통로는 이쪽에서 다시 들어가야 합니다. 따라오십시오.”
렉시는 로메인의 뒤를 얌전히 따라가면서, 오랜만에 보는 외성을 흘끗거렸다. 얼핏 보기에도 외성은 분위기가 무척 수선스러웠다. 요란스럽다고 해야 할지, 술렁거린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허나 확실한 건 이상할 정도로 공기가 술렁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래서 요수아가 그런 말을 했던 걸까. 렉시가 한눈을 파는 걸 알았는지, 로메인이 뒤를 돌아보며 그를 재촉했다. 그의 재촉을 받으며 렉시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인부들이… 무척 많네요.”
“외성 한정입니다. 내성으론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고 있지요.”
“아, 내성으론 오지 못하나요?”
“그곳은 부서진 곳이 없으니 올 이유가 없지요. 내성으로 들어오려면 외부인들은 저 성문을 이용해야 하니, 그 선에서 걸러집니다.”
찬 겨울이었지만 부지런히 성벽을 보수하는 인부들의 등 위에선 김이 피어올랐다. 몇몇은 덥다며 옷을 벗어 던지고서 일을 했는데 인부치고 몸들이 대단히 건장했다. 멀리서 그걸 보며 환호하는 아낙네들도 보였는데, 전체적으로 공사장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다만 그걸 보는 렉시가 이상하게 뒷머리가 근질거렸을 뿐.
‘…뭐지? 이 이상한 기분은.’
렉시는 곰곰이 생각하다 한숨을 삼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딘지 모르게 딱 아귀가 들어맞지 않는다. 죽었다가 살아나면 머리도 나빠지는 건지, 어쩐지 머릿속이 안개가 낀 것 같았다. 뭔가 생각 날 듯 말 듯한데 딱 잡히지 않는 그림자 같은 것이 어른거려 숨이 답답했다.
“남작님?”
“…헛.”
렉시는 깜짝 놀랐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바로 코앞에 있던 로메인이 수 미터는 더 멀리 떨어져 있었다. 상념에 잠기면서 로메인의 등 뒤를 놓쳤던 것이다. 비밀 통로에서 이렇게 앞선 사람을 놓치면 낭패를 입기 십상이었다. 로메인이 눈치채지 못했다면 렉시는 여기서 그만 길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렉시가 서둘러 로메인의 곁으로 뛰었다.
“무슨 일입니까?”
“죄송합니다. 잠시 생각을 하다 경의 뒤를 놓친 것 같아요. 어쩐지 주의력이 조금 떨어지네요.”
말을 들은 로메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역시… 그럴 것 같았습니다. 몸이 다 낫지 않으셨는데 움직인 게 무리가 온 것이 분명합니다. 꼭 오늘 전하를 뵈어야 하겠습니까? 아무래도 조금 쉬었다 나중에 뵙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만.”
“괜찮아요. 아픈 게 아니니까요. 목적지까지 먼가요?”
“아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괜찮으시겠습니까? 가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가서 의논도 하셔야 할 것 아닙니까.”
은근히 쉬도록 권유하는 로메인이었지만 렉시는 연신 고개를 저었다. 그라고 왜 쉬고 싶지 않겠는가? 허나 이 일은 그만큼 시급을 요한다. 지금 돌아가 봤자, 마음이 불편해서 쉬지도 못할 것이 뻔했다.
“아니에요. 그냥 얼른 말씀드리고 쉬는 게 편하죠. 거기다 이미 연락을 보냈으니 절 기다리고 계실 게 아닌가요?”
“조금 늦으면 뭐가 어떻습니까? 약간 사정이 생겼겠거니 하시겠지요. 그분도 아마 뭐라고 하진 않을 겁니다.”
“그래도….”
렉시가 마음을 접을 것 같지 않자 로메인은 결국 권하는 걸 포기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툴툴댔다.
“…남작님께선 정말로 고집이 세시군요.”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살짝 웃고 말았다. 늘 반듯하던 로메인이 저런 식으로 투덜대는 모습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래요? 제가 고집이 세다니…. 그런 소리는 처음 듣는데요.”
“글쎄요. 아마 다들 당연해서 말을 하지 않은 것이겠지요.”
로메인이 중얼거렸다.
“하긴, 저번에 요수아와 짧게 말한 적이 있군요.”
“무얼요?”
“이 여행을 시작한 뒤 단 한 번도 고향에 가 본 적이 없다 그랬지요.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자신의 영주가 고집이 세서 그렇다고. 그의 영주님은 한번 일을 시작하면 그게 끝날 때까지는 다른 일에 눈을 돌리지 않는 분이다. 그러니 뻔한 일 시도하지 않은 거라고…. 솔직히 그땐 그게 무슨 소리인가 했지요. 헌데 이제 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군요.”
“요…수아가 그런 말을 했다구요?”
렉시는 로메인의 말에 흠칫 놀랐다. 그 애가 그런 생각을 했단 말인가?
“놀랍습니까? 하지만 맞는 말일 겁니다. 당신께선 정말로 요수아가 잠깐 돌아가자고 해도 듣지 않으셨을 거 아닙니까?”
렉시는 그야말로 간만에 할 말이 없어졌다. 실로 맞는 말이라 뭐라 대꾸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를 보며 로메인은 앞서가던 발걸음을 늦췄다. 이내 그와 렉시의 어깨가 나란해졌다. 렉시의 얼굴로 로메인의 시선이 와 닿았다.
“너무 그렇게 심각한 얼굴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자기가 관련된 일은 당사자가 제일 늦게 깨닫게 되더군요.”
“…그런 게 아니라…. 그 애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 미처 몰랐거든요. 저와 같은 생각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요. 제 눈치를 보느라 그랬던 거라니….”
렉시가 씁쓸하게 뇌까렸다. 로메인이 그런 렉시를 보다 불쑥 물었다.
“혹시 지금 자신이 나빴다, 어리석었다… 뭐 이런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래요. 그가 그러는 게 좋은 일은 아니잖아요.”
로메인의 눈썹이 못마땅한 듯 꿈틀거렸다.
“글쎄요. 좋은 일이 아니면, 모두 나쁜 일입니까? 이건 그냥 서로 생각한 게 다를 뿐일 텐데요. 이러한 가치 판단은 상대적이지 절대적인 게 아닙니다. 요수아의 생각은 모르나,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건… 제게 고집 있다 말씀하신 분답지 않네요.”
“실제로 고집이 있으시니 한 말이지요. 하지만 전 그런 고집이 당신의 장점이자 매력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절대 부정적인 의미로 드린 말이 아닙니다.”
실로 갑작스러운 칭찬이었다. 반사적으로 로메인을 바라보자 부드러운 시선과 마주친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렉시의 얼굴이 빨개졌다.
“제가 한 말이 당신을 탓하는 것처럼 들렸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저는 당신이 의지를 가지고 그것을 관철하는 모습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면 저는 당신을 만나지 못했을 겁니다. 혹 어찌 만났더라도, 이처럼 당신께 마음을 빼앗기지는 않았겠지요….”
마지막 말은 너무 작아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로메인은 렉시의 손을 자기 팔 위에 올렸다. 상대를 에스코트할 때 몸을 편히 기대게끔 하는 자세였다. 앗 할 새도 없었다. 몸을 뻣뻣하게 굳힌 렉시를 로메인은 부드럽게 이끌었다.
“어쨌거나 그 말 때문에 본인을 탓하진 마십시오. 다만, 한 가지 부탁드리겠습니다. 앞으로 힘드실 땐 부디 홀로 견디지 말고 제게 기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기대요?”
“네, 지금 당장은…. 허나 차후엔 제게 더 의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당신께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힘들 때나. 그게 언제든지 늘 저를 먼저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없을 거란 가정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앞으로 제가 당신 곁에 없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자각 없는 유혹이란 바로 이런 것인가. 렉시는 입을 떡 벌렸다. 단어 하나하나가 어찌 이리 마음이 떨리나 모르겠다. 사정 모르면 꼭 고백처럼 들릴 말이다. 세상에…. 자기나 되니까 이렇게 있지 아니었으면 이미 놀라 쓰러졌다. 이런 남자가 여태 애인 하나 없었다니 그걸 누가 믿어?
렉시는 점점 달아오르는 얼굴을 감출 수가 없어졌다. 단단하게 잡힌 팔에서 전도되는 열이 점점 온몸으로 번져 가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안 되겠다. 견디다 못한 그는 작게 헛기침을 하며 로메인의 팔에서 몸을 슬쩍 빼고 말았다.
“유, 유념하겠습니다. 다음부터는 꼭 그럴게요.”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렉시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이 반달처럼 휜다. 그는 살짝 달아오른 렉시의 얼굴을 지긋이 보다, 이내 그의 팔을 살짝 잡고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를 안내하는 손에 온 신경을 쏟은 렉시는, 그래서 이외의 것에는 신경 쓰지 못했다. 예를 들어 그를 안내하는 발걸음이 조금 더 느려졌다던가, 혹은 무거웠던 발걸음이 조금 들뜨게 변했다는 것들을 말이다.
어쨌거나, 두 사람은 그렇게 비밀 통로를 지나 공작의 방안에 도착했다.
“어서 오게 남작. 기다리고 있었어.”
“각하.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나도 방금 왔네. 그보다 얼굴이 많이 까칠해졌군. 몸은 괜찮나?”
“괜찮습니다. 제가 생각보다 명줄이 긴 사람이랍니다. 그보다 각…하?”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공작 대리를 확인한 렉시는 인사부터 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가, 그만 멈칫했다. 그녀의 얼굴 때문이었다.
“각하. 얼굴이….”
후작이 피식 웃으며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조금 변했지?”
“조금이 아닙니다. 대체… 어디 아프십니까?”
렉시는 정말로 놀랐다. 깡마른 손가락 사이로 얼굴이 마치 사라질 것처럼 파리했다. 안 그래도 말랐던 얼굴인데 거기서 더 마를 데가 있었다고? 여기서 더 살이 빠지면 해골이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렉시는 입을 다물지 못하다 간신히 물었다.
“각하. 혹시 자객이라도 만나신 겁니까?”
“설마, 그랬다면 내가 시종장을 떼놓지도 못했겠지.”
“허면 어째서…?”
“걱정 말게, 내 건강에 문제는 없어. 이건 내 생각이긴 한데, 전하 때문에 이렇게 된 것 같네.”
“예? 전하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갑자기 무슨 전하를… 까지 생각하던 렉시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그 말을 듣자 무언가 퍼뜩 떠오른 것이 있었다.
“그, 마법이로군요!”
공작 전하의 외형을 본뜬다는 마법.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전하께서 요즘엔 이런 모습이신 모양이야. 무슨 일이 있으신 것 같긴 하지만 뭐, 돌아가신 건 아니겠지.”
죽었으면 시체처럼 변하지 이렇게 되진 않았을 것이다. 렉시는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헌데 갑자기 변했으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저번에도 한 번 이랬는데 또 이러면 곤란하다. 연속해서 바뀌면 누군가는 의심할 법하지 않은가.
“이번 일로 자네가 크게 다친 게 맞긴 하군. 그런 걸 묻다니…. 잊고 있는 모양인데 자네나 되니까 내가 자주 만나 주는 거야. 내가 그렇게 자주 볼 수 있는 얼굴이면 알현 신청이 그렇게 밀렸겠나? 어지간한 귀족들도 날 자주 보진 못해.”
아, 맞다. 원래 공작은 보기 무척 어려웠지. 그를 만나기 전엔 다들 숙지하는 것인데 요 며칠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잊어먹었던 것이다. 놀리면서도 실수를 꼬집는 말이라 렉시가 낭패한 얼굴을 하는데 옆에 가만히 있던 로메인이 정색하며 나섰다.
“각하, 아픈 분을 너무 놀리지 마십시오. 실제로 죽을 뻔했다 살아나신 분입니다.”
“놀리다니 누가? 내가? 설마!”
“제가 각하를 모릅니까?”
마치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것 같은 태도였다. 후작은 속으로 조금 찔끔했다. 그래, 솔직히 농을 치긴 쳤지….
“이분의 얼굴을 보십시오. 창백하시다 못해 파리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아픈 분을 놀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
로메인의 역성에 후작은 얼굴이 썩었다. 솔직히 그냥 놀자고 한 말에 죽자고 달려드니 기분이 썩 좋진 않았던 것이다. 아니 저게 약혼자 약혼자 하니까 자기가 진짜 약혼자인 줄 아나? 아무리 자기가 이 일이 끝난 뒤엔 저쪽 기사로 간다지만 날 너무 홀대하는데?
공은 공, 사는 사. 따라서 아직 공작가의 기사인 그는 공작에 충성한다. 다른 건 몰라도 이런 일엔 칼 같은 것이 로메인인 것이다. 그런데….
‘…뭐가 좀 이상한데. 쟤들 무슨 일 있나?’
그녀의 촉이 기민하게 반응했다. 왕년의 연애 관련 촉이 움찔움찔 미세한 무언가를 맡고 움직이려 했다. 뭔가 있어. 하지만 그런 촉도 렉시의 얼굴을 본 순간….
‘저, 정말 아파 보이긴 하네.’
아까 괜찮다고는 했지만 렉시는 아직 병색이 있었다. 물론 여전히 기가 막히게 예뻤지만, 예쁘다고 있는 병색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병색 있는 미인이 되었을 뿐. 그리고 그게 후작의 죄책감을 슬금슬금 건드렸다. 아니 왜 쟤는 아파도 저렇게 이쁜 거야. 쳇, 후작은 결국 어깨를 으쓱하고 알았네, 하고 사과했다. 어쨌거나 그녀는 미인에게 약했다.
“그래 그래, 알았어. 내 잘못했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고 깍지를 꼈다. 헛소리는 이만하면 됐다. 이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들을 차례였다.
“그나저나 이제 우리 슬슬 일 이야기를 하세나. 남작, 날 왜 보자고 했나?”
저렇게 아픈 몸을 이끌고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실 그래서 자기도 이 바쁜 와중에 시간을 뺀 것 아닌가. 렉시가 앉아서 하는 말을 듣는 후작의 얼굴에 점점 긴장이 차올랐다.
“…반역이라고?”
“네, 정황상 확실합니다.”
후작의 얼굴에 살기가 그득 찼다. 사실 당연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녀는 감히 공작이 자신의 흉내를 내라 준비시킨 사람. 충성심이 타인보다 웃돌면 웃돌지 낮을 리는 없었다. 그런 그녀의 충성심은 반역이란 단어를 듣자마자 그녀를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날뛰게 만들었다.
반역이라니,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인가? 감히 이 무지몽매하고 천한 놈이 그런 망상을 해?!
“그 잡것들이 미쳤군!”
그녀는 펄펄 뛰며 공비와 버나드와 백작의 욕을 했다. 사특하기 그지없는 자들 아닌가! 눈앞에 있다면 요절을 내다 못해 사지를 잘라 대로변에 뿌릴 정도로 그녀는 분노하고 있었다. 특히 그 분노는 공비를 향했다.
“이 빌어먹을 뻐꾸기 같으니! 자격 없는 자식 놈이 죽지 않고 살아 공자란 말을 듣고 있는 것만도 고맙게 여길 일이다. 헌데 전하의 자비심을 찬양하지 못할망정 감히 공작가를 넘봐? 그것들이 사람인가?!”
귀족에게 핏줄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애초 그녀가 여자의 몸으로 가문을 이어받을 수 있었던 건 플로랑가의 직계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의 핏줄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 허니 후작의 입장에서 공비는 상종 못 할 망종이요 패륜 그 자체일 수밖에 없었다. 핏줄도 아닌 자가 가문을 훔치려고 드는 것을 어찌 역성든단 말인가.
“그자들이 어떤 수를 쓴다고 했나? 그것도 들었나?”
렉시는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 소리를 들으려는 차에 그만 들켜서 도망을 쳤으니까요.”
덕분에 쫓고 쫓기다 막판에 죽을 뻔했지. 쉭쉭 뱀처럼 독을 내뿜던 후작이 두 눈을 번뜩이며 다그쳤다.
“그러니 요는 반역을 할 예정이긴 한데 그게 언제인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는 모른다 이거로군. 맞나?”
어째 요약하니 자기가 되게 무능한 느낌이다. 하지만 그 요약이 맞긴 맞다. 렉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감이 잡히는 것도 없는가?”
“네, 안타깝게도….”
렉시가 공작가의 사정을 조금 더 잘 안다면 모르겠다. 허나 기본적으로 렉시는 외부인이었다. 따라서 공작가의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가 알았다면 이렇게 아픈 와중에 올 리가 없었다.
잠시 고뇌하던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눈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외쳤다.
“됐어, 그냥 당장 죽여 버리세!”
“네?!!”
결론적으로, 그녀의 시도는 실패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도 자체를 못 했다. 렉시와 로메인이 열심히 말렸던 덕분이다. 세상일 끌리는 대로 꼴리는 대로 멋대로 맘대로 할 수 있다면 사는 게 참 편하겠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은 그렇게 녹록지 않다.
“이거 놓게! 이거 놔라! 안 놔?”
손에 검만 있었으면 능히 세상을 일도양단할 만한 기세다. 왜 이리 힘이 세? 덕분에 둘은 한참 진땀을 뺐다.
“안 됩니다. 놓으면 진짜로 가실 거잖습니까!”
“그럼 진짜로 가지 가짜로 가? 저걸 그냥 놔두라고?”
그녀는 잡힌 팔을 빼려고 버둥거렸다. 미친놈은 힘이 세다던데 이건 눈 뒤집힌 사람한테도 적용되는 말인 모양이다. 자칫 다칠까 봐 힘을 빼긴 했지만 그녀를 붙든 로메인은 기사. 헌데 그 기사가 힘으로 조금 밀렸다. 세상에. 렉시는 땀을 흘렸다.
“물론 그냥 놔두면 안 되지요. 하지만 각하, 지금 가서 대체 뭘 어쩌시려고요?”
어쩌긴! 그녀가 외쳤다.
“당장 기사단을 보내 죄다 목을 벨 것이다! 나도 더 이상은 못 참아! 안 참아!”
공작 행세를 하고 있어 참고 있었지만 기실 그녀와 공비는 물과 불같은 사이였다. 참고로 물과 기름이 아니다. 적어도 물과 기름은 비눗물이 있으면 섞이기도 하니까.
사람이 살다 보면 서로 안 맞다 못해 적개심을 가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 둘이 딱 그랬다. 성정 자체가 아예 맞질 않는다. 공작이 공비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만일 잠자리까지 했어야 했다면 이 둘, 이미 사달이 났어도 대차게 났을 것이다. 렉시는 이마를 짚었다.
“공비의 뒤엔 황가가 있습니다. 물론 전 황제 폐하처럼 친밀하진 않겠지요. 하지만 어쨌거나 그녀는 황가의 사람입니다. 그런 공비를 아무런 명분 없이 해할 수는 없습니다.”
솔직히 그렇게 할 수 있었으면 공작이 이미 나서서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드물게도 나서 맞섰다. 물러설 때와 물러서지 않을 때 중 후자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이 일을 모른 척하란 이야기인가? 황가라서 더 문제가 되는 것이다. 황가라서! 하잘것없는 남작위를 멋대로 가져간다 해도 문제인데, 하물며 이 거대한 공작가의 작위를 날로 먹으려 하는 걸 내버려 두라니?! 외부인인 자네는 몰라! 그간 황가가 공작가에 눈독을 들인 세월이 어디 하루 이틀 일인 줄 아나?”
그녀는 두 눈을 번뜩이며 이를 갈았다. 그 하잘것(?)없는 남작위 하나 때문에 이 년 넘게 고생한 사람 앞에서 할 말이 아니긴 하지만 지금 상대는 그런 걸 판단할 상태가 아니다. 렉시는 너른 마음으로 이해하며 한숨을 삼켰다.
“제가 왜 그걸 모르겠습니까? 저도 눈 있고 귀 있고 머리도 있는 사람인데요. 하지만 각하, 각하께선 지금 중요한 걸 잊고 계십니다.”
“내가 뭘!”
“성벽이요. 잊으셨습니까?”
“!”
무너진 성벽. 아작 난 성벽. 갑자기 부서져서 사람들의 심려를 사는 그 성벽. 휙 돌아갔던 눈동자에 그제서야 빛이 들었다. 애초 똑똑한 사람이니 이렇게 언급만 해도 알아먹긴 한다. 그나마 이거 하난 다행이었다.
“성벽이 무너진 와중이라 이래저래 말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무너져서는 안 되는 것이 무너졌느니, 흉조라느니 하는 말들이요. 전하, 과연 이 와중에 휘하 기사단들이 전하의 말을 온전히 듣겠습니까?”
“그, 그건!”
그녀는 두 눈을 부릅떴으나 그 이상 말을 하진 못했다. 아니라고 하고 싶다. 허나 렉시가 꼬집는 말엔 틀린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실제로 그녀가 요즘 바빴던 이유도 다 저것 때문 아닌가?
“물론 저야 그런 건 다 미신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고작 벽 하나 부서졌다고 나라가 망하고 이러는 게 어디 말이나 됩니까? 허나 사람은 하잘것없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걸 좋아하지요. 문제는 이 때문에 전하의 통치 능력을 의심하는 이들이 생겨났다는 겁니다. 이걸 잊지 마셔야 합니다 각하. 지금은 이렇게 노여워할 때가 아닙니다.”
더더군다나 지금 공작은 몸도 안 좋다고 소문이 나 있다. 여기서 공작이 반역이라고 해 보았자 뭐 얼마나 들어 먹히겠는가. 노환이라고 안 쑥덕거리면 다행일 지경이다.
“신중히 생각하십시오. 현재 각하는 생각보다 더 칼끝 위를 걷고 계시니까요.”
이 말에 플로랑 후작이 발끈했다.
“자네 말이 맞긴 하다. 하지만 그건 비약이 심하지 않은가! 그간 전하께서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가문과 영지를 경영하고 다스리셨는데!”
“압니다. 저도 고작 저 성벽 금 하나로 전하를 향한 주위의 신뢰가 무너지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각하. 만일 저들이 전하의 와병설을 널리 알리고, 전하의 신상에 문제가 생겼다 말을 퍼트린다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뭐?”
“사실 전 각하를 뵙기 전까지는 크게 걱정이 없었습니다. 우길 자신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젠 다릅니다.”
솔직히 너무너무 걱정이 됩니다 각하. 정말 너무 말이지요. 렉시는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대체 뭐가 그렇게 걱정이 된단 말인가?”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저라면 이렇게 했을 겁니다. 부친의 이지가 병환으로 미령하게 되었으니 유일한 혈육인 내가 임시로 그 자리를 대리하겠노라. 다만 이는 임시에 한하며, 아버지인 전하께오서 건강을 회복하시면 다시 돌려드리리라. 이는 아비의 건강을 염려하는 아들의 마음이며, 이 외 다른 뜻은 없노라. 평소와 같으면 다들 개소리라 하겠지요. 하지만 각하, 지금 모습이 어떻습니까. 퍽 야위시지 않았습니까?”
“!!!!”
“완벽한 명분 아닙니까? 패륜이라 참칭하기엔 부친에 대한 효를 내세웠고, 또 이를 그저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하며 단서를 달아 두었죠. 건강을 회복하시면 돌려드린다고요. 아마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다들 납득할 겁니다. 실제론 반역이나, 겉으로 보기엔 절대 그렇게 보이지 않으니까요.”
공작이 건강하고, 또 영지에 변란이 없다면 먹히지 않을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딱 그 두 개가 걸려 있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솔직히 저렇게 일이 진행되면 그냥 끝입니다. 진짜 전하도 안 계시는 와중입니다. 그걸 각하께서 견디실 수 있겠으며, 혹 전하가 돌아오시더라도 그분이 이 위기에서 벗어나실 수 있겠습니까? 쏟아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듯, 권력은 한번 빼앗기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필시 전하께선 건강을 위해 피정 가시는 도중 참살되시거나, 설령 목숨을 부지하더라도 죽은 거나 다름없게 되실 겁니다. 단언할 수 있습니다.”
“!!!”
“맙소사….”
렉시의 말을 듣는 후작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듣고 있는 로메인 역시 떫은 감을 먹은 것처럼 입매가 일그러져 있었다. 절로 신음이 나오는 소리다. 그들은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듣자 하니 비약이 아니라 정말 실현 가능성 있는 미래에 대한 예측이 아닌가. 혹, 지금 저런 이야기가 외부에 떠돌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간덩이가 비대한 그녀라도 순간 겁이 덜컥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낮게 외쳤다.
“설마 지금 밖에서 그런 말이…!”
“아닙니다. 아직까지는 안 돌 겁니다.”
렉시가 말을 탁 끊었다.
“그들은 아직 제 시체를 찾지 못했으니까요.”
“…자네 시체?”
“백작이 절 죽이려고 했다고 말씀드렸지요? 그 때문입니다. 그는 제가 정말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직 확신을 얻지 못했어요. 성격상 그걸 확인하지 않고는 못 배길 놈입니다. 집착 있는 놈이니 뭐든 확인하고 일을 진행하려 하겠죠.”
첩자도 못 잡았는데 아직도 잔해를 뒤집는 중이라는 데서 감 잡았다. 거 참 멍청하기도 하지. 자기 같으면 쓸데없이 시간 보내는 대신 이미 와병설 터트리고 영지를 휘젓고 다닐 텐데….
뭐 덕분에 시간을 벌어서 고마운 일이긴 하다. 렉시는 비쭉 웃었다.
“지금 저쪽이 정신이 없는 상황이란 걸 행운으로 여기십시오. 백작이 지금 제정신이었다면 전하께서 이렇게 여유로이 대화를 나누실 수도 없었을 테니까요.”
후작은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까처럼 흥분했던 기색은 적잖이 누그러져 있었다. 렉시의 만류가 제대로 먹힌 탓이었다. 아아….
‘인생사란.’
렉시는 안심하는 동시에 속으로 약간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몇 시간이라도 쉬다 올걸. 일하는 도중 생기는 자율 휴식이란 게 극히 희귀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자의 후회는 늘 그렇지만 뒤늦다.
“…그래. 알겠어. 자네 말은 이해했네. 그렇다면 자네 말은 내가 은인자중해야 한다는 것이로군.”
실로 맘에 들지 않는 안이다. 하지만 저런 말을 듣고도 움직이면 바보겠지. 그녀가 입술을 깨무는데 렉시가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런 말은 아닙니다. 왜 가만있습니까, 이런 천금 같은 시기에?!”
“…? 자네가 진정하라며?!”
아니 이게 왜 왔다 갔다 사람을 놀리나? 얼굴이 점점 사나워지려는데 렉시가 잽싸게 첨언했다.
“그거야 각하께서 당장 요절을 낼 듯하시니까 한 말이지요. 전 그 전략을 그만두시라는 거였습니다. 실제로 그렇게만 말했잖습니까?”
“…….”
얘는 왜 이렇게 말을 잘해?
합죽이가 된 후작을 앞에 두고, 렉시는 두 눈을 반짝였다. 솔직히 상황도 상황이지만 조금 기쁘다. 공비고 버나드고 패트릭이고 죄다 물 멕일 생각을 하니 가슴이 절로 설레고 있었던 것이다. 정도만 약간 다르지, 특히 백작에 대한 유감만큼은 렉시 역시 남들 못지않은 터. 뭐 납치 강도 살해기도, 이 모든 걸 다 당했는데 유감이 없으면 그게 어디 사람인가.
“저쪽이 저렇게 시간을 버리고 있는데 응당 움직여야죠. 이런 적기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시기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승기를 잡아야 합니다.”
청산유수, 줄줄 나오는 렉시의 언변에 두 사람의 얼굴이 솔깃해졌다. 뭔가 엄청난 안이 나오려나 보다. 승기라?
“어떻게?”
“선수를 칩시다.”
“뭐를?”
“반역이요.”
“??????????”
“예?”
뭐? 듣는 두 사람의 얼굴이 혼란에 휩싸인다. 렉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으며 가슴을 활짝 폈다.
“지금 대리 청정할 후계자가 영지 내에 하나뿐입니까?”
헐.
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