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위기일발
프로하우스 공작가의 안주인들이 대대로 거하는 공비의 성. 이 성은 본성 안에서도 가장 은밀한 심처다. 성안에 또 따로 작은 성을 만든 것처럼 보이는 이곳은, 실제로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따로 있는 독립 공간이었다. 과거 왕비가 사용했었던 장소이니만큼 삼엄한 감시가 일상인 성안의 소성. 공작 역시 비가 거부하면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경계가 삼엄한 이곳에서, 지금 한 남자의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아아악!
“아, 아파! 아프다고!”
“죄송합니다, 공자. 하지만 참으셔야 합니다.”
환자의 비명에 궁의는 쩔쩔맸다. 얼마나 처절한 비명인지 좁지 않은 방 안에 메아리가 가득이다. 하지만 아프다고 환부를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 잠시 쉬는 듯하던 의원의 손이 움직이자, 조금 잦아들었던 비명이 다시 튀어나왔다.
아…악! 악!
“이런…! 도…돌, 팔이 같…으니!”
버나드는 얼굴을 붙잡고 끙끙거렸다. 로메인에게 얻어맞은 자리는 가볍게 친 것 같았으나 상태는 실로 심각했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본래 타박상은 후폭풍이 무서운 법. 보기도 무섭게 부풀어 오른 볼 덕분에 그는 지금 말도 잘 안 나왔다. 하지만 그것보다 버나드를 괴롭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얼굴 상태였다. 찌그러진 감자처럼 울퉁불퉁한 얼굴은 버나드를 미치고 팔짝 뛰게 했다. 내 얼굴! 내 잘생긴 얼굴이!
평소 자기 얼굴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른 버나드다. 그는 통증을 참으며 의원을 위협했다.
“어서 야…약을 쓰라고…! 약… 있잖아! 베릴로! 좋은 약 놔두…고! 지금 장난…해?”
팡!
남자, 버나드의 주먹에 침대 위의 베개가 퍽 하고 터져나간다. 그 무지막지한 기세에 의원은 움찔했다. 그나마 저 주먹으로 자신을 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는 바짝 굳은 얼굴로 공자가 요구하는 베릴로에 대해 찬찬히 설명했다.
“공자, 베릴로는 좋은 약이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 베릴로를 쓰면 안 됩니다. 자칫 잘못하면 얼굴이 비틀린 채 붙게 되니까요. 베릴로는 쓰기 전 뼈를 맞추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저라고 왜 약을 안 쓰고 싶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이렇게 부러지거나 금이 갔을 시엔 쓰지 못한다. 사전에 반드시 뼈 맞추는 작업을 해야 제대로 붙기 때문이다. 의원의 말에 버나드가 울부짖었다.
“거짓…말!”
“거짓말이 아닙니다. 어느 안전이라고 제가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처음 듣는…!”
“…물론, 공자께선 생소하신 일일 겁니다. 공자는 이렇게 다치신 게 처음이시잖습니까?”
보통 기사 수업을 받는 자는 얻어터지면서 베릴로의 효능을 몸으로 체득한다. 하지만 버나드는 공작, 그리고 공비의 아들 아닌가. 그 누가 있어 공작의 아들을 때릴 것인가? 본인이 원한다면야 모르겠으나 사실 버나드는 맞는 걸 매우 싫어했다. 의원의 지적에 버나드는 입을 다물었고, 의원은 속으로 혀를 차며 자신의 불운을 한탄했다.
“씨…씨…팔!”
까득 이를 갈다 말고 버나드는 얼굴을 움켜쥐었다. 움직일 때마다 머리가 미친 듯이 지끈거린다. 이래서야 다 치료하기 전엔 밥도 못 먹을 것이다. 이 새끼 이거 일부러 쳤어. 버나드는 로메인을 떠올리며 눈을 부라렸다.
‘음흉한 새끼!’
팔 명치 다리 기타 다 놔두고 얼굴을 때린 건 이게 후폭풍이 제일 크기 때문일 터. 기사란 자고로 구타의 달인. 허니 얼굴을 친 건 일부러가 맞다. 아름다운 천사에게 어찌 그런 흉신악살이 붙었단 말인가. 천사는 필시 속고 있는 것이다. 로메인 이 씹어먹을 놈! 버나드의 눈동자가 분노와 아픔으로 이글거리는 그때였다.
쾅!
“아드님! 로메인과 싸웠다니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커다란 소리와 함께 공비가 문 안으로 들어왔다. 공작이 연회장에 들어온 뒤 잠시 보다 자리를 떠 버린 그녀는 덕분에 그 난장판을 보지 못했다. 때문에 그녀가 전해 들은 것은 버나드와 로메인이 싸웠다는 소리뿐. 여태 로메인과 둘 사이의 무력 충돌은 없었기에 그녀는 그게 그냥 말싸움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로서는 그것도 충분히 경악할 만한 이야기였다. 이게 대체 무슨 헛소리인가, 둘이 왜 싸워?
‘아드님이 또 사고를 쳤구나!’
고슴도치도 내 새끼는 함함하다 하지만 그녀는 이성적인 여자였다. 평소 하던 행동거지를 생각하면 로메인보다는 아들이 뭔가 일을 냈을 터. 후계자 낙점이란 중차대한 일을 앞두고 싸움이라니! 대체 붙여 놓은 것들은 뭣하고 이 지경을 만들었단 말인가? 성이나 씩씩대며 달려온 그녀였지만, 퍼렇게 부은 아들의 얼굴은 공비의 노여움을 멈출 만한 것이었다. 엉망으로 변한 버나드의 얼굴을 본 공비는 그만 입을 딱 벌렸다.
“아…아드님?”
“…어머…니.”
순간 넋을 놨던 공비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맙소사!
“어, 어떻게…! 어, 얼굴이 그게 대체…!”
깎아 놓은 밤톨 같던 내 아들 얼굴이 왜 곰팡이 핀 못난 감자가 됐나. 공비는 순간 저게 제 자식이 맞긴 한가 의심했다. 보통 자기 자식 몰라보는 부모야 없을 것이다. 하지만 버나드의 현 상태는 그 정도였다. 과장 좀 보태 목소리가 아니었으면 저게 자기 아들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맹렬하게 내려던 화는 의문으로 치환됐다.
대체 누가 쟤를 때려…? 어떤 미친놈이…?
그녀는 황당함에 말을 더듬거리다 문득 자기가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 로메인과 싸웠으니 로메인이 이랬겠지.
“아드님. 로메인이 그대를 그렇게 구타했나요?!”
“…….”
버나드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참혹해진다. 물론 지금도 못생겼지만 더 못생겨졌다는 의미. 어쨌거나 간접적인 긍정에 그녀는 기가 턱 막혔다. 신이시여.
“대, 대체 이게 무슨 경우 없는…! 어떻게 이런 짓을….”
속에서 열불이 치솟는다. 감히, 감히 내 아들을 이렇게 만들어? 그녀는 바르르 떨며 아들 옆에 있는 시중인들을 노려봤다.
“설명하거라. 대체 홀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내 아드님 얼굴은 왜 또 저렇게 됐어!”
“고, 공비 전하….”
서로 눈치를 보며 말 못 하는 시종들을 향해 공비는 버럭 소리쳤다.
“어서 말하라니까!”
짝짝!
“훌륭하오! 아주 호방한 행동이었어!”
공작가의 방 안에서 둘이 오길 기다리던 필립과 요수아는 갑자기 돌아온 둘을 보고 묘한 얼굴을 했다. 아니 왜 벌써 와? 이런 얼굴이었다.
하지만 뒤이어 들린 상황 설명에 둘은 이 둘의 귀환을 매우 격하게 납득했다. 그리고 로메인의 행동에 열띤 응원의 함성을 보냈다. 특히 필립의 환호가 아주 대단했다. 그는 마지막에 버나드의 얼굴을 후려갈겼다는 이야길 듣고 환호성을 지르며 손뼉까지 쳤던 것이다. 그는 싱글거리며 로메인을 칭찬했다.
“캬, 다른 곳도 아니고 면상을 치다니…. 이제 보니 경 뭘 좀 아는 분이었구려. 그렇지, 그런 철없는 놈은 일단 얼굴부터 조져야 정신을 차리지. 그게 바로 폭행의 도 아니겠소!”
사람 때린 걸 이렇게 격하게 칭찬할 수 있는 건 세상천지 필립뿐일 것이다. 렉시는 어색한 얼굴로 로메인의 눈치를 봤다.
방으로 피난 온 뒤, 로메인은 바위처럼 조용히 앉아 있었다. 필립의 말 또한 별말 없이 듣고 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양심에 찔린다. 어쨌거나 그는 기사 아닌가. 다른 데도 아니고 비무장자의 얼굴을 발로 깠으니 여기저기서 비난이 솟구치지 않을까?
그런 렉시의 걱정에 필립은 콧방귀를 뀌었다.
“영주님, 그걸더러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하는 겁니다. 어쨌거나 경은 영주님의 약혼자 아닙니까? 약혼자에게 붙은 벌레 퇴치 좀 했다고 욕하는 놈이 어디 있겠습니까? 제정신이면 로메인 경보다 그 잡놈을 욕할 겁니다. 걱정 마십쇼.”
“…그, 하지만.”
렉시의 눈이 흔들리자 옆에서 요수아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영주님, 영주님이 뭘 모르셔서 그러는데 이런 일은 원래 개싸움이 일반적이에요. 외려 로메인 경은 엄청나게 기사다운 태도를 취하신 거라구요.”
과연 기사 중의 기사! 로메인 경 내가 다시 봤어요! 요수아는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해죽댔다.
“원래 임자 있는 사람에게 치근대는 것들은 다 처맞아도 싸요. 살아 있는 거 자체가 죄악이라구요. 살려서 뭣해요? 먹고 자고 싸는 자원들이 아깝기만 한데. 저라면 기회 될 때 그냥 다 좆대가리를 잘라서 죽여 버렸을걸요?”
조, 좆 뭐? 렉시는 물론이고 로메인마저 멍한 얼굴로 요수아를 보자 요수아는 상큼하게 웃었다.
“뭐, 말이 그렇다는 거죠 말이. 농담이에요 농담!”
과연 농담일까. 농담이라고 하기엔 이상하게 진정성이 느껴졌는데…. 어쨌거나 이들의 단언에 그나마 조금 마음이 놓이긴 한다. 렉시가 떨떠름하게 있자 옆에 있던 로메인이 쓰게 웃었다.
“남작님, 이들의 말이 맞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 평판은 그닥 신경 쓰지 않습니다. 죄 지은 자는 따로 있는데 왜 당신께서 그런 걱정을 하십니까.”
“하지만 정말…괜찮으시겠어요?”
“괜찮다마다요. 게다가….”
로메인은 잠시 생각하는 얼굴을 하다 미간을 찌푸렸다.
“지키겠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무언가를 지키는 이가 체면을 생각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는 두 눈을 빛내며 렉시를 응시했다.
“그보다는 뒤의 일을 생각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앞으로 이런 일이 한 번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버나드 그놈도 문제지만 다른 귀족들 또한 당신을 봤으니까요. 일차적으로 경고를 하긴 했지만….”
경고. 렉시의 눈이 크게 떠졌다. 설마….
“…일부러 일을 크게 만드신 건가요?”
로메인은 쓰게 웃었다.
“―그 정도는 해야 다른 이들에게 본보기가 될 테니까요. 물론 화가 났던 것도 사실입니다만…. 어쨌거나 후회는 없습니다.”
굳이 다른 곳이 아닌 얼굴을 때린 것도 그 일환이다. 그가 한 폭행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귀족들을 향한 경고이기도 했다. 수틀리면 니들도 다 이렇게 될 거라는 아주 단순무식하지만 확실한 경고.
그자의 얼굴에 상처가 있는 이상, 보는 사람들은 싫어도 그 폭행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렉시는 입을 벌렸다.
“맙소사, 로메인 경….”
“죄책감을 가지지 마십시오. 그자에겐 그럴 가치조차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고집 피우는 거 보셨지 않습니까? 세상엔 맞아야 아는 것들이 존재하는 법이죠. 당신께선 앞으로 그런 놈들을 보실 일이 많으실 겁니다. 허니 사소한 것 하나에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뒷맛이 묘한 말이다. 렉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즉….
“…저기, 경. 혹 제게 접근하는 사람들을 다 구타하시겠다는… 그런 말씀이신가요?”
설마 하는 심정에 한 물음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설마는 사람을 잡는 법. 로메인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일단 시작은 말로 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못 알아들으면 좀 맞아야겠지요.”
그리고 동시에 들려오는 뿌득하는 소리. 가볍게 쥔 로메인의 주먹에서 난 소리였다. 저거 농담이 아니야. 렉시는 당황해 외쳤다.
“경, 하지만 그렇게 되면 경의 명예가 땅에 떨어질 게 뻔해요!”
아무리 약혼자의 일이라도 정도가 있다. 약혼자의 숭배자를 때려눕히는 기사라니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기사의 명예를 헌신짝처럼 버릴 셈인가? 렉시의 비명에 로메인은 고개를 저었다.
“약혼자를 지키는 일이 어찌 망신이 되겠습니까? 물론 시정 잡배처럼 드잡이질을 하는 건 당신께도 누가 되는 일일 테지요. 해서 저는 기사만이 누릴 수 있는, 한 가지 특권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그게 뭔가요?”
“―결투입니다.”
로메인의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로메인 드 데퓨탄. 데퓨탄 후작가의 차남이자 프로하우스 공작령의 기사, 그리고 영광의 기사단 단장인 그에 대한 세간의 평은 퍽 좋다. 그가 고자라는 소문이 팽배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걸 빼고서라도 그가 전도유망한 기사임엔 틀림없었다. 혈통과 외모를 떠나 그처럼 젊은 나이에 상급 기사가 되는 이는 제국서도 퍽 드물다. 무식할 정도로 정도를 걷는 게 흠처럼 느껴지긴 하지만 세상엔 이런 것을 장점으로 삼는 이들도 분명 있는 법. 그리고 이런 것을 장점으로 생각하는 이들 중엔 사르칸트 제국의 황제도 있었다.
―하여 본인은 몰랐으나, 그는 한때 황녀의 혼담 상대로도 오르내린 적이 있었다….
물론, 본인은 몰랐지만.
첨언하자면 이 혼사는 이미 파장난 지 오래다.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여동생을 고자에게 시집보낼 오라비가 어디 있겠는가. 물론 로메인은 고자가 아니라 그저 눈이 높을 뿐이었으나, 이 당시에 그는 분명 그렇게 보였다. 대륙 최고의 미녀를 두고도 그토록 덤덤한 건 고자밖에 없을 거란 게 세간의 중론이었으니까.
어쨌거나, 이렇게 별 쓸데없는 황녀 이야기까지 꺼낸 이유는 간단하다. 한때 황녀의 부군 후보로 오르내릴 정도로 로메인의 평가가 대단했다는 것.
이건 그가 고자라는 소문이 돌아도 변치 않았다.
헌데 그런 남자가 갑자기 홱 돌아 사람을 공개석상에서 팼단다. 그리고 앞으로도 팰 거라고 경고했단다. 사람들은 처음에 귀를 의심했다.
“들었소? 로메인 경이 버나드 공자를 폭행했다는 거?”
“네, 아주 작신작신 밟았다나 봐요.”
솔직히 작신작신 밟지는 않고 그냥 좀 발로 깠을 뿐이다. 하지만 귀족들 눈엔 그게 그거였다.
“맙소사. 정말인가요?”
“정말이구말구. 본 사람이 한 둘이 아니던데.”
“로메인 경이 함부로 그러는 분은 아니니…. 필시 버나드 경이 일을 좀 쳤나 보지. 안 그런가?”
버나드를 좀 알고 로메인을 좀 알면 할 수 있는 사태 파악이었다. 사람들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공개 석상에서 그런 짓을 하다니…. 좀 과하지 않나 싶네. 아무리 그래도 버나드 공자의 면은 세워 줘야 하지 않나.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그런 건가?”
이들이 아직 그 이유를 잘 모르는 건 공비가 그 소문만 퍼지도록 노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메인의 공평한 성정은 귀족들 사이에서도 매우 유명한 것. 그는 이유가 있으면 패고, 없으면 절대로 안 팬다. 이건 즉 버나드가 매우 맞을 짓을 했다는 이야기다. 말소리가 작게 잦아든 장내에서 누군가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맞을 만한 짓을 하시긴 했죠. 건드려선 안 될 사람을 건드렸거든요…. 다들 혹시 로메인 경이 약혼자를 데리고 온 건 알고 계세요?”
헉. 다들 숨을 들이켰다. 로메인 경이? 그 고자가?
“그런 소문을 듣긴 했는데… 그게 정말이었단 말이오?”
“소식이 조금 늦으시네요. 하긴 뭐 그럴 법도 하지요. 바로 어제 일이었으니…. 네, 어제 신년 연회에서 로메인 경이 약혼 발표를 했답니다. 하지만 정말 놀라운 건 약혼 발표가 아니라 약혼자 쪽이었죠. 절세미인이었거든요.”
“저, 절세미인?”
“네, 절.세.미.인!”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며 말하는 이는 어제 연회에 참석했던 한 귀족이다. 절세미인을 말하는 그녀의 눈엔 묘한 광기가 서려 있었다. 그녀는 당시의 광경을 되새기며 황홀한 얼굴을 했다.
“정말 다들 상상하지도 못하실걸요. 베일 속에 숨겨진 얼굴이 그토록 아름다울 줄이야…. 마치 천사가 내려온 것 같았어요. 아아…! 아직도 눈앞에 어른거리는군요. 어떻게 그토록 아름다운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 걸까요?”
그녀는 두 눈을 감고 바르르 떨었다. 사람들의 얼굴이 점점 황망해졌다.
“…당신 말은, 그러니까…. 버나드 공자가 그 절세미인 약혼자를 건드렸단 거요?”
“네, 맞아요. 버나드 공자가 그분과 강제로 춤을 추고, 베일을 벗겼죠. 두 분 다툼은 그래서 벌어진 거구요. 정말 부러워 죽겠어요. 로메인 경에게 맞아 죽어도 좋으니 나도 그분과 춤 한번 춰 봤으면…. 로메인 경은 대체 무슨 복으로 그런 아름다운 분을 얻었을까요?”
“허허….”
여자의 상태가 이상하다. 맞아도 좋다고? 사람들은 헛기침을 했다. 어쨌거나 저 말이 맞다면 버나드는 맞아도 싸긴 했다. 노총각의 약혼자를 건드리다니 실로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게 아닌가. 그나저나…. 그들은 그녀에게 질문했다.
“헌데, 그 약혼자가 그렇게 아름답소?”
“물론!”
여귀족의 눈이 번뜩였다.
“그분의 미모에 비할 건 세상에 아무것도 없어요. 저 황성의 황녀님도 그분과 비교한다면 보름달 앞의 반딧불일 뿐입니다. 공전절후, 전무후무, 세계제일!”
그녀는 주먹을 휘두르며 외쳤다.
“세상에서 제일 예뻐요! 최고로 아름답습니다! 아아 그 손 한번 잡아 봤으면! 죽어도 좋으니까!”
“……지, 진정하시오.”
“다들 그분을 못 봐서 그래요, 못 봐서! 그렇게나 아름답냐니? 그런 질문 자체가 무의미해요. 아아 보셨으면 이 마음을 다들 알 텐데…! 실로 원통하네요.”
중얼중얼 말하는 여귀족은 평소 얌전하고 고상하기 이를 데 없다는 여인이다. 헌데 지금 하는 걸 보면 숫제 미친 사람이 따로 없었다. 사람들은 식겁했다. 대, 대체….
‘얼마나 예쁘길래 저래?’
*****
“이거 원, 그야말로 악마의 미모로군.”
오늘 올라온 감청 서류를 검토하던 공작, 플로랑 후작은 서류를 보다 말고 내려놨다. 감청 문건에는 오늘 하루 공작성 내에서 있었던 특이 사항을 기록해 놓는다. 특히 이 시기엔 성에 오가는 인원이 늘어나므로 보통은 검토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다들 내용이 어찌나 한결같은지 검토고 뭐고 보는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공비가 이리저리 정보 조작을 시도하긴 하는데 아예 소득이 없군그래. 이거 약 오르겠는걸?”
아들이 엉망으로 맞은 이유를 알게 된 공비는 필사적으로 사람을 풀어 정보를 교란했다. 아들의 미래가 걸린 일이다. 강력한 라이벌이 돌아온 것도 골치 아픈데 그 약혼자에게 손을 대다니…. 자식이라고 하나 있는 게 어쩜 이리 애물단지인가.
여하간 아들의 삽질 탓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공작의 눈을 피하지 못하고 성내를 활보해야 했다. 덕분에 공작, 후작은 공비가 가진 전력을 상당수 알아낼 수 있었다. 공비는 피눈물을 흘렸지만 일단은 소문을 잠재우는 것이 우선. 하지만 공비는 그런 대출혈을 하고도 원하는 걸 얻지 못했다. 도무지 교란이 먹히질 않았던 것이다. 모두 렉시 때문이었다. 그의 그 공전절후한 미모가 정보 조작을 불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어젯밤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렇지요?’
‘아아 아름다우신 분. 다시 한번 보고 싶어….’
‘어제 연회에 버나드 공자는 참석한 일이 없습니다. 그렇지요?’
‘버나드 공자! 그렇군, 나도 한 대 맞으면 그분과 춤을 출 수 있을까?’
‘어제 연회에선―.’
‘버나드 공자가 부럽군. 뺨 몇 대로 그분과 마주할 수 있었으니. 어쩜 그렇게 운이 좋을 수가 있을까?’
‘…….’
그 미모를 직접 보지 않은 공비는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큭큭 웃었다.
“헌데 굉장하군, 이렇게 많은 인원들이 성안에 침투해 있었다니. 거 참 평소 같으면 이미 먹히고도 남았을 거야. 안 그런가?”
옆에서 보조하던 시종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하. 필시 그랬겠지요. 하지만 이해 갑니다. 실로 그럴 만한 외모시지 않습니까?”
“그래… 그렇지. 무려 이 나도 홀릴 뻔했으니까 말이야.”
처음에 그 얼굴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젊은 시절 퍽 놀아서 미모에 내성이 있는 자신조차 순간 홀릴 뻔했다. 그녀가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건 그가 나이 좀 먹고 탐욕이 줄어들었던 탓이 컸다. 그게 아니었으면 그녀도 필시 이 난장판에 한발 거하게 꼈을 것이다. 참고로 시종장은 약간 다른 이유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는데 어쨌거나 무사하니 불행 중 다행일까. 만약 시종장이 그 미모에 넘어갔다면….
그녀는 어쩐지 불쾌해져 생각을 멈췄다.
“헌데 시종장. 대체 저런 미모가 왜 소문 한번 안 났을까? 나는 그게 참 궁금하단 말야. 혹 페르귄 영지엔 사람이 별로 오가지 않나? 혹은 오지라든가.”
“글쎄요, 오지라기보다는… 저런 미모이니 사전에 준비를 하지 않았을까요. 제 생각엔 아예 어릴 적부터 얼굴을 가리고 생활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사람 입이란 게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아예 본 사람이 없으면, 소문이 날 이유가 없겠지요.”
“…흠, 그럴듯하군.”
그녀는 납득했다. 실제로 그 정도는 했으니 소문이 안 났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으므로. 동시에 그의 머리에 남작의 과거가 그린 듯 스쳐 지나갔다. 퍽 암울한 과거였다.
처음엔 얼굴만 가렸지만 나중엔 감금도 좀 했겠지. 저것 덕분에 친구는 몇 있지도 않았을 거야. 소문날 테니까. 영지 내에선 극소수의 사람만 보고 생활했겠군. 가정 교사는 부친이 했을까? 아아 얼마나 답답한 인생일까.
‘좀 측은하기도 하고…?’
사실 이 시점, 플로랑 후작은 자기에게 아무 말도 안 한 렉시에게 조금 토라져 있었다. 연회에서 둘이 말없이 사라지고 난 뒤 홀로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피똥을 쌌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 없이 살았을 남작의 삶을 생각하니 어째 자기가 화내는 것이 좀 너무하다 느껴졌다. 그는 생각했다.
‘그래, 저런 얼굴이면 경계하는 것이 당연한 거지. 뭐 어쨌거나 일은 잘됐으니….’
그녀는 결국 렉시가 얼굴에 대해 숨긴 걸 용서하기로 했다. 그래, 그간 그 얼굴로 영지에서 퍽 고생했겠지. 그런 가련하고 불쌍한 미인이니 내가 한번 봐주지 뭐.
물론, 착각이었다.
페르귄 영지의 영지민에게 영주란 원래 대단한 존재다. 요수아만 봐도 그것은 확연하지 않은가. 이런 영지민들에게 영주의 미모가 뭐 얼마나 새삼스러울 것인가. 못생겨도 예뻐도 워낙 대단한 우리 영주님이니 미모는 그냥 당연하다 하고 말이 안 나온 거다. 천 년이나 이어 내려온 땅의 주인이란 이토록 무서운 존재인 것이다.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앞으로 이 오해는 풀릴 일이 없을 테지만….
그녀는 깍지를 끼고 등을 뒤로 젖혔다.
“그나저나 이거 참 대단하단 말이야. 작정하고 소문을 퍼트려도 이거보단 못하겠어. 이제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다음 주면 제국이 아니라 외국까지 네 약혼 이야기가 퍼지겠구나. 로메인, 지금 기분이 어떠냐?”
그녀의 시선이 눈앞에 있는 로메인에게 향했다. 그렇다. 여기 이 방엔 현재 셋이 있었다. 공작, 시종장, 그리고 로메인.
난데없는 질문에 로메인은 얼굴을 찌푸렸다.
“뭐가 말입니까?”
“뭐겠니? 네가 오매불망 원하던 약혼 말하는 거지. 어떠냐, 행복하냐?”
“무슨….”
로메인은 얼굴을 찌푸리고 플로랑 후작을 바라봤다. 대체 뭔 헛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언제 이 약혼을 오매불망 바랐다고…? 하던 그의 시선이 슬쩍 시종장을 향했다. 약혼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만면에 홍조를 띠는 그의 눈동자는 마치 태양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아아, 그런가.
‘외인 앞이라 하는 소리군.’
시종장은 이들의 일을 아직 모른다. 공작, 그러니까 후작이 그는 알리면 안 된다고 막았기 때문이다. 진짜 공작의 충실한 가신인 시종장은 알면 대사를 그르칠 인물이었다. 그는 공작에게 너무 충성했다. 앞에 있는 공작이 후작이라는 걸 알면 그는 즉시 성을 뒤집어엎을 것이다. 그는 마땅히 그럴 만한 남자였다. 공작에 한해선 그 어떤 타협도 없는 자, 그게 이 프로하우스 궁의 시종장인 것이다.
‘헌데 그런 줄 알면 그냥 좀 내보내면 좋지 않나?’
렉시와 의논한 일을 공작에게 통보하기 위해 온 게 무려 한 시간 전. 저 여자는 지금 사람 앞두고 제 할 일만 한 시간 했다. 고로 로메인의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지금 연기 중이라도 좀 너무하지 않은가. 가족 간의 일을 의논한다고 하고 시종장을 내보내면 될 일 아닌가? 그럼 이미 일 다 끝나고도 남았겠다!
게다가.
‘너무 자리를 오래 비웠어.’
침착한 얼굴이었으나 사실 로메인은 속이 탈 대로 탔다. 무려 한 시간, 렉시를 홀로 둔 시간이다. 물론 렉시 옆엔 필립과 요수아가 있으므로 혼자라는 단어는 딱히 맞지 않다. 하지만 로메인은 어제 그 스스로 결의한 바 있었다. 이후, 공작성에서 렉시에게 접근하는 모든 이들은 다 쳐 패겠노란 무시무시하고 무지막지한 결의.
‘그 누구도 손대게 하지 않겠다.’
그 몸에 누군가 손을 댄다는 상상만 해도 속이 뒤집히고 두 눈이 시뻘게진다. 손을 잡으면 잡은 손을 자르고, 삿되이 보면 그 본 눈을 뽑을 것이며 모욕하면 그 말을 뱉은 이와 혀를 뽑을 터. 이제 대놓고 렉시 한정 비상식적으로 변하는 그였지만 당사자는 이게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로메인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래, 차라리 잘됐군. 적어도 반대는 못 할 상황이다.’
외인이 있어 움직이지 못하는 건 피차 마찬가지. 로메인은 약혼이 행복하냐는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젯밤 내내 생각했던 앞으로의 계획을 입에 담았다.
“행복은… 네, 그렇습니다. 무척 행복하고, 그리고 열의가 넘칩니다.”
“오…? 그, 그래?”
“예. 그리고 덕분에 주먹을 쓸 일이 많아질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주먹?”
그녀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주먹이라니?
“주먹으로 끝났으면 합니다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높겠지요. 해서 검과 창, 기타 무구도 준비하겠습니다. 당장 없는 것은 성에서 좀 빌릴까 합니다. 성에 제가 쓸 만한 무구는 아직 있습니까?”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여기서 무기를 왜 찾는 것이냐?”
성스럽고 행복해야 하는 약혼식에 갑자기 피와 살기가 난무하고 있다. 얘가 왜 이래? 그녀가 당황하자 로메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왜겠습니까?”
그녀의 얼굴이 순간 멍해졌다. 상황이 꼬여서 발목을 잡혔으나 그녀의 본질은 공작의 지낭(智囊). 그런 그녀가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를 리 없었다. 로메인을 바라보는 플로랑 후작의 낯빛이 시시각각 변하기 시작했다. 이, 이, 이놈 봐라?
“야, 야! 너, 설마?!”
동서고금 남녀노소 막론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그것은 바로 드라마로, 특히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누군가의 사랑 이야기다. 사랑 이야기의 서사는 대부분 이렇다. 짝 없는 자들이 서로의 운명을 만나 사랑을 나누고, 결혼으로 그 사랑을 완성한다. 헌데 이 서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의외로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위기다. 자고로 위기 없는 사랑이란 소금 빠진 음식 같은 것이라. 허니 사랑 이야기가 나오면 적어도 여자 하나 두고 구애자들끼리 난투극 정도는 벌여 주여야 하는 것이다. 그게 연애 서사의 가장 큰 백미니까.
헌데 지금 이 연애의 백미가, 소설도 아니고 바로 현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노총각 로메인 경이 약혼을 한다! 상대는 페르귄의 남작!
―헌데 로메인 경의 약혼자를 본 사람들이 모두 홀렸다!
―로메인 경의 약혼자는 대륙 제일의 미인?
―이 미인에게 다가섰던 버나드 공자, 로메인 경에게 한 대 맞고 기절하다!
―로메인 경의 약혼자, 남자로 밝혀져!
―‘그분의 손 한 번만 잡을 수 있다면 맞아 죽어도 좋아요.’
귀족들, 모두 앞다퉈 외쳐!
혈기 방장한 청년들의 가십이다. 사람들은 미쳐 돌아갔다.
갑자기 나타난 미인, 그 미인을 둘러싼 귀공자와 귀족들 간의 혈투.
개중 가장 사람들이 열광한 건 버나드와 로메인의 충돌이었다. 한 명은 기사, 나머지 한 명은 주군의 아들이란 파격적인 상황! 가히 미칠 수밖에 없는 조합 아닌가.
물론 이 둘은 저것보다 정치적인 정적으로 더 유명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세세한 건 무시하는 대범함을 보였다. 본래 대중이란 그냥 자기 눈에 좋은 걸로 알아서 상상하는 법. 그들이 보기에 이건 대충 충심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기사의 고뇌였다.
오오오!
이 상황의 해법은 누가 봐도 로메인이 갖고 있었다. 그들은 로메인을 향해 두 눈을 번뜩였다. 로메인. 과연 그는 이 난장판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기사답게 충정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사랑을 수호할 것인가?
그리고 바로 지금, 그들은 그 질문의 답을 듣고 있었다.
―내 약혼자는 내가 지킨다. 로메인 경!
불특정 다수를 향해 결투 선언!
공작령이 뒤집혔다.
*****
불이 타오르고 있다. 꺼지지 않는 불꽃, 거대한 불덩이가 영지를 태운다. 그의 가문을 대대로 지켜 왔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다. 위몰레스 자작은 방안에서 잔뜩 구겨진 채 타오르는 성벽을 지켜보았다. 속이 쓰라리다 못해 탄다. 마음 같아선 당장 달려가 저 불을 끄고 싶다. 조상대부터 내려온 소중한 영지다. 자신, 나아가 아들이 이어받아야 하는 소중한 재산.
“으윽!”
그는 신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는 현재 방 안에서 나올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지금 그는….
“아름다운 빛이로군. 밤인데 마치 대낮같이 밝아. 어때, 자작. 그대의 성이 타는 이 불빛은?”
“네 이놈!!”
자작은 악 하고 노성을 내질렀다. 등 뒤로 단단히 묶인 팔이 움직일 때마다 통증을 유발한다. 배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절절히 끓어오르고 있었다.
“빌어먹을 자식들 같으니…! 감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이런 짓을 하느냐! 대체 내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런 짓을 벌여!”
그는 이를 악물고 자길 억압한 남자 둘을 노려봤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나타난 수상한 자들. 이 둘은 잠들었던 그를 납치해 영주관 어딘가에 억류했다. 평소 수족처럼 움직이던 하인들과 집사는 이 변고를 모르고 있었다. 만일 영주가 이렇게 곤욕을 치르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가만히 있을 자들이 아니다. 필시 그들은 지금 이 사태를 모르고 불을 끄러 갔음이 틀림없었다. 실제로 저 멀리 성벽 아래로 수많은 인파가 물을 가지고 달려들고 있었다. 자작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멀리서도 불길은 거셌고 시시각각 벽을 살라 먹었다. 저 불이 꺼지기 전까지 그들은 자작의 변고를 모를 것이다.
젠장! 왜 하필 이럴 때!
자작은 몸을 거세게 흔들었다. 움직일 때마다 밧줄이 몸을 죄어들었지만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자작의 목줄기에 핏대가 솟았다. 그는 으르렁대며 고함쳤다.
“누구냐. 너는 대체 누구냐!”
“누구냐라….”
로브를 쓴 남자가 자작에게 다가왔다. 깊이 눌러쓴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체격이 굉장히 크다. 위압감에 자작이 긴장하자 남자의 입술이 슬쩍 위로 솟았다.
“자기가 직접 쫓아낸 주제에 기억을 못하다니, 나야말로 놀랄 일이야. 아, 혹 자작은 이런 일이 일상인가?”
“…뭐?”
자작의 얼굴이 설핏 굳는다. 남자는 로브를 벗고 그와 눈을 마주했다.
“그제, 상인 하나를 기사 셋을 시켜 쫓아낸 건 기억하나?”
“뭐?”
“그리고 살해한 뒤 돈을 가져오라고 했고 말이야. 물론 셋 다 실패했겠지만.”
“…그, 그걸 어떻게?”
자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두 눈으로 어두운 빛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며칠 전 만났던 상인 하나.
간곡하게 그가 가진 마도구 하나를 팔아 달라 거래를 청했던 남자.
가격을 얼마든지 쳐 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상인의 요구를 거절했다. 사실 팔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돈이 문제가 아니다. 그는 평민 따위가 감히 귀족과 대등하게 서려 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감히 상인 따위가.
그리하여 그는 기사를 시켜 상인을 성 밖으로 쫓아내도록 명령했다. 할 수 있다면 약탈도 하라고 명령은 했지만 도망쳤다고 했고.
허나 도망쳤어도 별다른 위기감은 들지 않았다. 아무리 상인이래 봐야 평민. 감히 귀족이자 위몰레스령의 영주인 자신에게 무얼 어쩔 것인가.
…분명, 그랬을 터였는데.
“너…, 그 마도구 상인이냐…!”
“아하, 다행이야 자작. 기억하고 있어서.”
가래 끓는 자작의 비명에 남자는 활짝 웃었다. 그는 자작의 얼굴을 슬슬 쓰다듬었다.
“자, 그럼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 볼까 자작? ‘그거’ 어딨나?”
묻자마자 턱을 세게 잡아 오는 남자의 손은 억셌다. 자작은 턱을 빼내려 용을 썼다. 여기서 말하는 그거는 분명 그때 팔라던 그 마도구일 터. 자작은 이를 드러냈다.
“웃기지 마라! 이런 꼴을 당했는데 내가 그걸 내놓을 것 같으냐?!”
“오, 기개가 있다 이건가. 헌데 조금은 머리를 쓰는 게 어떤가, 자작. 이 추운 겨울에 집마저 불에 타면 좀 많이 곤란할 텐데…. 아니면, 그대에겐 여기 말고 다른 영주관이 있나?”
자작의 머리에 번개가 쳤다. 아까까지 파리했던 자작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은 순간. 뒤이어 두 눈을 부릅뜬 그는 찢어질 듯 악을 썼다.
“너, 너!! 네놈이 저 불을 냈구나!!!!!”
아무리 때가 겨울이라지만 불이 너무나 대규모로 번진 게 이상했다. 그래, 자연적인 게 아니라 누군가의 방화였어. 그것도 이놈의! 분노로 터질 것 같은 자작을 굽어보며 남자는 짐짓 안타까운 듯 비웃었다.
“…그러길래 순순히 마도구를 팔지 그랬어 자작. 자작이 팔았다면 자작도 나도 좋았을 거 아닌가. 나는 갈 곳 가고, 자작은 돈을 벌었겠지. 물론 오늘 같은 횡액도 없었을 거고…. 대체 왜 거절했나? 아, 돈은 필요한데, 마도구는 팔기 싫었나? 그랬으니 우리를 잡으러 기사들을 보냈겠지?”
“이 찢어 죽일 놈! 저주 받아라! 이 씹어먹을 자식!!! 개잡놈!”
“하하하….”
누워서 욕을 퍼붓는 자작의 눈엔 광기가 흘렀다. 바닥에서 벌레처럼 꿈틀대는 자작의 발악은 꽤 길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았다. 밤은 길고, 저 불은 어지간해선 꺼지지 않을 테니.
자작은 모르나 저 불은 마법적인 불로, 물을 끼얹는 것으론 꺼지지 않을 불이었다. 즉 현재 영지민들이 하는 소화 작업은 다 헛짓이란 이야기다. 자작이 이렇게 발악해 봤자 그가 얻을 건 재로 된 성벽과 영지뿐이다.
남자는 차가운 눈으로 입을 열었다.
“계속해 보라고, 자작. 하지만 기억해 둬. 난 인내심이 길지 않고, 여기엔 자네 생각보다 태울 게 많다는 걸.”
“……!”
지킬 것이 있는 자는 약하다. 잃을 것이 많은 자의 자존심이란 파도 앞에 허물어질 모래성과 같은 것. 그래, 너는 얼마나 참을 수 있을까.
짐승처럼 번뜩이는 자작의 눈을 보며 남자는 미소했다.
“여기 있습니다. 사용해 보십시오.”
“…….”
남자의 뒤에서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던 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자와 비슷한 로브를 입은 자로, 그보다는 키가 조금 작았으며 몸은 호리호리한 자였다. 남자는 의기양양하게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자작에게 얻어 낸 전리품을 주인에게 넘겼다.
“진작 이럴 걸 그랬습니다. 쓸데없이 시간만 보냈어요. 제가 뭐라 그랬습니까?”
남자의 말에 조용히 지켜보던 이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 남자의 말이 맞긴 하다. 하지만…. 그가 짧게 한숨 쉬자 남자가 혀를 차며 그의 손을 잡았다.
“왜요. 또 뭐가 문제입니까?”
“조금 과했나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다 태울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조금 심란한 듯한 주인에게 남자는 츠, 하고 혀를 찼다.
“죽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으로 여겨야지요. 고작 영지 좀 태운 게 뭐가 어때서 그렇습니까. 사람 죽은 것도 아니고 겨우 건물 몇 갭니다. 설마 그놈에게 당한 게 부족했던 것은 아니죠?”
그는 분노한 얼굴로 제 주인의 얼굴을 응시했다. 로브 아래, 아직까지 푸릇하게 남아 있는 멍 자국만 보면 억장이 무너졌다. 남자의 시선을 눈치챈 주인이 흐릿하게 웃으며 얼굴을 문질렀다.
“괜찮아, 경. 아프지 않네.”
“괜찮기는 무슨! 당신께서 안 아파도, 제가 아픕니다. 제가!”
버럭 외치는 남자의 눈동자엔 분노와 살기가 넘실댔다. 아무리 강한 기사라도 패싸움엔 장사 없는 법. 자작이 보낸 기사들 사이에서 둘이 몸 성히 빠져나온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감히, 이 몸에 상처를 내다니.
죽어 마땅할 죄였으나 주인은 마음이 약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중죄인을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 그래서 그는 목숨 정도는 살려 주나 사지 중 두엇은 거둬 갈 생각이었다. 원래 오늘 일도 주인 몰래 하려고 했다. 안타깝게도 도중에 들키고, 또 자기 기사의 성정을 익히 아는 주인이 따라와 결국 계획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지마는.
얼굴은 무표정하나 주변에선 살기가 가득하다.
“너무 화내지 말게. 그저 운이 나빴을 뿐 아닌가.”
남자의 주인―기즈 공작은, 쓰게 웃었다.
“상처는 별것 아니야. 그저…나는, 자네가 너무 잔인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 때문에 자네는 늘 손해만 보았지 않나.”
“제가 잔인해지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이러지 마십시오. 이번 일도 제가 때마침 가지 않았으면 크게 경을 치실 뻔했지요. 여기가 공작령입니까. 왜 늘 이렇게 무모하십니까? 혼자 모든 걸 끌어안는 게 답은 아닙니다. 그럴 거면 신하는 왜 두고 가신은 왜 뽑습니까? 전하, 감히 말하는데 그건 오만도 아니고 어리석은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비단 이번 일뿐만이 아니다. 사실 공작은 거의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하려 했다. 그 강박증이 왜 시작되었는지 이유는 알고 있는 그였으나 이해는 할 수 없었다.
“선대의 유지였네.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알고 있지 않나?”
“…그 빌어먹을 뒈진 선대의 유지는 늘 당신을 옭아매고 있군요.”
시라노는 노여움을 감춘 채 입을 다물었다. 눈앞의 남자가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다.
왜 모든 것을 홀로 안고 속으로만 삭이는가. 누가 알아 주지도 않는데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을 보면 속에서 그저 천불만 났다.
그는 이를 갈며 선언했다.
“좋습니다. 대신 이 일이 끝나 영지로 돌아가도 일할 생각은 접어 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향후 십 년은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할 테니까요.”
시라노의 말에 공작이 난처하게 미소했다.
“―시라노.”
“어르듯 하지 마십시오. 저도 이젠 양보 못 하니까요. 거기다 어차피 이 일이 끝나면 싫어도 그렇게 될 것 아닙니까?”
시라노는 손에 쥔 마도구를 흔들었다.
“전 애초 그걸 위해 따라 나온 겁니다. 제가 영지의 그 모지리나 사갈 같은 여자가 무서워서 나온 줄 아십니까?”
그는 난처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공작을 흘끗 보며 이를 드러냈다.
“그러니 모르는 척 난처한 척 그런 얼굴 하지 마십시오, 제 마지막 인내심은 오늘 저놈을 살려 두는 걸로 다 썼습니다.”
“이봐, 시라노….”
재차 불렀으나 시라노는 입을 다문다. 이젠 아무리 뭐라 해도 듣지 않겠단 이야기다. 저럴 때의 시라노는 누구도 못 말렸다. 이 고집불통을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공작이 고민하며 손안의 마도구를 만지작거릴 때였다.
―급보, 급보, 즉시 확인 요망!
공간을 찢고 무언가가 나타났다. 공작의 머리 위로 곧바로 떨어지는 것을 반사적으로 받아 챈 시라노의 눈썹이 꿈틀댔다.
“보고군요. 받아 보십시오.”
“급전인가?”
손을 내밀던 공작이 순간 멈칫했다.
“왜 그러십니까?”
“…….”
공작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가 받는 보고는 세워 둔 대리인과 무관하다. 대리인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긴 했지만 뒤에선 이렇게 보고를 받으며 그의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다. 즉 마냥 대책 없이 나온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적색이군.”
밀정이 보내는 보고는 그 분야를 색으로 나눈다. 황궁의 동향이라면 금색, 동맹의 일이라면 녹색, 군사라면 검은색, 영지 내의 행정이라면 흰색.
그리고 적색은, 그의 혈족 간의 일이다.
“대체 무슨 일이지?”
남자는 심각한 얼굴로 서신을 개봉했다. 혹시 또 그 여자가 무슨 일을 벌인 건가. 만일 그렇다면 일을 빨리 끝내고 돌아가야 했다.
물론 아직 시간은 남아 있다. 하지만 생각보다 길어진 외유는 대리인에게 조급함을 주었을 터. 자칫 잘못하다간 상황이 골치 아프게 돌아갈 것이다.
딱딱하게 굳은 공작의 눈이 보고서를 빠르게 훑는다. 그리고 보고서의 마지막 장을 본 순간. 그는 자기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어?”
*****
“우와, 이거 다 뭐죠?”
필립과 잠시 염탐을 다녀온 요수아는 문 앞에 쌓인 포대를 보고 기가 질린 얼굴을 했다. 아침에 나갈 때만 해도 없었는데, 이게 대체 뭘까? 방에 마련된 탁자에서 혼자 뭔가 끼적이던 렉시는 요수아가 돌아온 걸 알고 반색했다.
“요수아, 다녀왔구나. 필립은?”
“아, 저 먼저 왔어요. 필립 님은 조금 더 알아볼 게 있으시다고 해서요. 그보다 이건 대체….”
“오늘 내 앞으로 도착한 거야. 고 앞에 있는 거 하나 지금 가져올래?”
“예? 아, 예!”
요수아는 렉시가 말하는 포대를 안아 들고 앞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여기요. 남은 거 다 가져올까요?”
“아니, 그거 말고 옆에서 이것 좀 대신 개봉하렴. 이거 혼자 하려니 영 진도가 안 나가더라. 네가 와서 다행이야.”
렉시가 건네는 것을 얼결에 받아 든 요수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페이퍼 나이프?
“이거 다 편지예요?”
렉시는 어깨를 으쓱했다.
“응, 덕분에 손이 남아나질 않는구나.”
영지가 아닌 터라 대필 시종이 없으니 어쩌랴, 혼자 해야지. 원래 집 떠나면 고생인 법이다.
“…아니, 무슨 편지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요?”
“그러게나 말이다. 다들 할 짓도 없지.”
렉시는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기지개를 켰다. 수많은 서신에 답장을 쓰는 건 대단한 노동이다. 께름한 눈초리로 편지를 쏘아보던 요수아는 편지 내용을 슬쩍 훔쳐봤다.
“흠, 초대장이네요.”
“…요수아, 훔쳐보면 안 되지.”
렉시의 타박에 요수아는 혀를 내밀었다.
“네에. 잘못했어요. 그런데 영주님. 설마 저것들 모두 다 초대장인 건 아니죠?”
“모두는 아닌데, 대부분은 그럴걸? 가져다준 사람이 슬쩍 말해 주던데.”
“에엑….”
“그나마 이게 줄이고 줄인 거야. 공작령 내부 것만 가져온 거라던가…. 믿어지니?”
원래 번영한 영지엔 사람이 많이 살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게 이 정도나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물론 글을 쓸 줄 아는 평민도 존재하니 귀족들만 편지를 보낸 건 아닐 것이다. 소문이 뭐 귀족 평민 가려 가며 나는 것도 아니고…. 요수아가 허탈한 듯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목적 달성은 하셨네요….”
달성뿐인가. 덕분에 얻은 유명세는 공작령을 넘어 아주 대륙 전체로 뻗어 나갈 기세다. 렉시는 어설프게 웃었다.
“하긴… 밖도 난리긴 했어요. 요 앞 시장에 있는 악사까지 영주님 이야기를 하고 돌아다녀요. 사람 셋이 붙어 있으면 다들 영주님 이야기를 한 꼭지로 하구요. 잘하면 아주 찬가도 돌아다니겠던데요.”
“그 정도야?”
요수아는 창을 등지고 앉아 있는 렉시를 흘끗 보았다. 오후 늦은 햇살이 비치는 유리창 아래, 그림처럼 앉아 있는 미인 모습은 솔직히 말해 한 폭의 명화처럼 화사했다. 음, 그 정도 맞는 듯? 자기도 모르게 해죽 웃던 요수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말도 마세요. 혜성 같은 등장이니 숨겨진 미인이 드러났느니 야단도 그런 야단이 없어요. 다들 어떻게 그런 미인이 사교계에 여태 소문 한번 안 났느니 하고 궁금해하던데….”
흐음. 말하다 말고 요수아는 잠시 눈을 깜박였다. 가만있자. 생각해 보니까 이거…?
“영주님. 그러고 보니 이거 영주님 첫 사교 행사네요?”
남들 다 사교계 데뷔할 때 혼자 못 한 영주는 사교계 행차는 고사하고 현재 장기 출장 중이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이게 첫 데뷔가 맞는 것이다. 이럴 수가, 생각지도 못한 걸 깨달았다. 요수아의 눈동자가 순간 별처럼 빛났다.
“이 약혼으로 좋은 일이 있긴 있네요. 성공적인 영주님의 첫 데뷔요.”
렉시의 입가에 난처한 미소가 떠올랐다.
“요수아, 내 나이가 벌써 몇인데 데뷔야. 남들이 들으면 주책이라고 욕해.”
“욕을 왜 해요? 제가 뭐 없는 말 했나요?”
요수아의 볼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욕이라니! 상황이 좀 그렇긴 해도 데뷔는 데뷔 아닌가. 요수아는 짝 손뼉을 치며 렉시의 첫 데뷔 성공을 축하했다.
“축하드려요, 영주님. 뭐 당연한 결과지만요.”
“…앞길이 첩첩산중에 갈 길은 구만리다. 축하는 무슨….”
렉시는 손사래를 쳤지만 요수아는 꿋꿋했다. 그는 씩 웃으며 렉시에게 개봉한 편지를 건넸다.
“에이, 좋은 게 좋은 거죠. 누가 욕하면 그 물건 제 앞으로 데려오셔요! 제가 아주 요절을 내 버릴 테니까. 허면 어디 행차하실지는 정하셨어요? 저렇게 무더기로 왔는데 괜찮은 곳 한두어 개는 있겠죠? 공작령에 들어오고 나서 어디 구경도 못 하셨는데 마침 잘됐네요. 이참에 핑계 대고 좀 나갔다 오세요.”
렉시는 얼굴을 찌푸렸다.
“가긴 어딜 가? 다 거절할 건데?”
“예?! 아니 왜요?”
요수아가 빽 소리치자 렉시는 귀를 후볐다.
“네가 나라면 나갈래?”
자신을 향했던 시선의 집요함을 기억하는데 가긴 어딜 간단 말인가. 여기가 공작의 성이나 되고 로메인이 그 조카라서 사람들이 조심하는 것이다. 아니면 무슨 사달이 나도 벌써 났을 터. 이 말에 렉시는 주머니에 있는 금화도 걸 수 있었다.
“요게 며칠 편하게 지냈다고 아주 빠졌어. 등 따숩고 배부르니 옛날 일 까마득하지? 요수아, 너 붕어였어?”
렉시의 타박에 요수아는 얼굴을 붉혔다.
“아이 참, 영주님! 제가 설마 그걸 잊겠어요? 단지 지금은 좀 상황이 다르니까 한 말이죠.”
“다르긴 뭐가 달라?”
“엄청 다르죠! 일단 그땐 평민, 하지만 지금은 귀족이시잖아요!”
미인이 평민인 것과 귀족인 건 그야말로 천양지차. 같은 귀족끼리 납치감금협박하는 건 크나큰 범죄다. 그것도 경우에 따라선 반역으로 몰릴 수도 있는 커다란 중죄인 것이다. 따라서 요수아의 말은 나름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요수아. 솔직히 귀족도 힘 없으면 별 볼 일 없어. 귀족의 이름이 안전을 담보하는 건 가문의 힘이 센 자들뿐이라고. 그게 됐으면 내가 굳이 가명을 쓰고 다녔겠어?”
“뭐가 걱정이세요? 영주님껜 로메인 경이 계시잖아요.”
“응?”
갑자기 훅 들어오는 반격이었다. 렉시는 순간 당황했다.
“무… 무슨 소리야?”
“로메인 경은 영주님의 약혼자라구요. 사실이야 어쨌건 어쩌면 다음 대 공작이 될지도 모르는 예비 권력자. 그런 약혼자를 두고 왜 사서 걱정하세요?”
“…아….”
그 소리구나. 약혼자. 그랬지. 로메인 경은 내 약혼자지…. 렉시의 귀가 슬쩍 붉어졌다. 이상하지. 순간 요수아의 말이 굉장히 묘하게 들렸다.
“로메인 경은… 지금 무척 바쁘시잖아. 그런 쓸데없는 일로 귀찮게 하면 안 되지.”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다. 로메인은 요즘 정말로 바빴다. 결투를 선언한 뒤 동문의 대장 직분도 내려놓은 그는 기사 몇을 두고 훈련 중이었던 것이다. 혼자서 기사 셋을 상대하는 사람의 어디가 실력이 녹슨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헌데 참 대단한 건 그 와중에도 꼬박꼬박 렉시를 보러 온다는 것이다. 와서 하루 있던 일을 보고 하는데, 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도 꼭 와서 얼굴 도장은 찍고 갔다. 렉시의 눈동자가 순간 멍해졌다. 어젯밤에도 그랬다.
‘피곤하실 텐데 이렇게 오시지 마시고, 그냥 가서 쉬세요. 이곳은 안전한걸요.’
‘바로 옆방인데 피로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외려 남작님을 보지 않는 게 더 마음이 불편하고 힘이 듭니다.’
‘예? 하지만….’
‘이런 건 힘든 일 축에도 끼지 못합니다. 그러니 걱정 마십시오. 당신이 절 맞아 주실 때마다 이렇게 웃어 주시는데 무엇이 힘들겠습니까?’
‘…제가, 웃는 게 좋으세요?’
‘사실 그냥 보는 것만도 좋습니다만… 굳이 따지자면, 그렇겠군요.’
‘…….’
‘그러니 부디 오지 말라는 말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제가 이 시간을 얼마나 고대하는지, 남작님께선 모르실 겁니다.’
그때 내 얼굴은 어땠을까?
모르긴 몰라도,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을 것이다. 찬 밤바람을 맞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몸이 여름날처럼 뜨거워 추운 줄 몰랐으니까. 그는 그렇게 자신과 함께 짧은 산책을 한 뒤 자신을 방으로 데려다주었다. 바로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었음에도, 끝까지 에스코트해 주는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
아마 그가 하는 행동이나 말엔 그 어떤 사심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성실하고 고지식한 성정 탓에, 약혼자가 해야 할 모든 일들을 하는 것에 가깝겠지. 게다가 그는 이 일이 끝나면 자신의 기사로 봉직한다고 한 적이 있지 않은가. 잘 대해 주는 이유도 아마 그와 같을 것이다.
…그래, 안다. 알고 있다.
하지만….
렉시는 눈을 살짝 감았다.
이상하게도 렉시는 요즘 로메인의 이 의례적인 챙김이 마음 쓰였다. 그냥 신경 쓰이는 것도 아니다. 사실, 그가 올 오후가 되면 그때부터 그를 만날 때까지 온 신경이 그쪽으로만 쏠렸다. 거의 하루 반나절은 그렇게 로메인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를 볼 때는 그의 존재 때문에, 그가 없을 땐 그가 남긴 잔향 때문에 어지러웠다.
시간만 나면, 연회 날 있었던 맹세 같은 것들이 시시때때로 생각났다. 어느 땐 하루 종일 그것만 되새기는 나날이었다.
‘제 맹세를 받아 주시지 않겠습니까.’
영혼을 꿰뚫는 것 같은 푸른 눈동자 너머, 일렁이는 무언가. 천천히 내뱉는 목소리의 나지막한 울림. 그리고, 손등 위로 떨어지는 뜨거운 입술….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다가 얼른 정신을 차렸다.
맙소사, 정말 내가 왜 이러는 걸까.
솔직히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사람만 생각하면 자꾸 가슴이 뛰고, 시간이 나면 자꾸 그 사람만 생각이 난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요즘 자신은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이것은 대체….
“영주님?”
“어, 응?”
요수아의 물음에 렉시는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그래, 늘 이렇다. 또, 이렇게 상념에 빠졌다. 렉시는 얼른 표정을 고치고 요수아를 바라보았다. 요수아는 한순간 멍해져 있던 자신의 주인을 보며 혀를 찼다.
“에효, 저 봐 저. 지금 또 로메인 경 생각하셨네.”
“어…어?”
“또 로메인 경 걱정하신 거죠? 우리 영주님 이렇게 순진해서 어쩌나 몰라요. 영주님! 로메인 경 사정은 그냥 무시해도 돼요. 로메인 경 바쁜 걸 영주님이 왜 걱정하세요?”
“…무시라니. 그런 건 당연한 거 아니니? 바쁜 사람을 귀찮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그건 남이나 그런 거죠. 두 분이 어디 남이에요?”
남이 아니면 뭔데? 렉시가 당황하자 요수아가 한숨을 팍 쉬었다.
“아… 우리 영주님은 아직 이런 건 모르시지…. 에효, 어쩔 수 없죠. 제가 하나하나 알려 드리는 수밖에. 영주님, 원래 연애로 약혼한 사람들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상대에게 끊임없이 구애를 하는 존재예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도 약혼자가 부르면 열 일 제쳐 놓고 오는 관계라구요. 그러니 쓸데없는 배려 마시고 당당해지세요. 어차피 그쪽도 영주님 일이라면 뭐 만사 제쳐 놓고 달려올걸요? 아니에요?”
“……그, 그건.”
렉시는 침묵했다. 솔직히… 자기가 생각해도 그럴 거 같긴 했기 때문이다. …그래, 분명 로메인은 자기가 말하면 뭐든 작파하고 달려올 것이다. 당장 몇 시간 뒤 출정을 한다 해도 일단 오고 볼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는 생각하다 말고 묘한 눈으로 요수아를 응시했다. 가만히 듣다 보니, 뭔가 좀 이상했기 때문이다. 이 녀석…. 어쩐지, 좀 이 약혼을 대하는 태도가 바뀐 거 같지 않나?
어째… 상당히 긍정적으로 변한 것 같은데.
“요수아…. 헌데 너 좀 이상한 것 같다.”
“예? 뭐가요?”
“어쩐지 너 이상하게 이 약혼에 대해 적극적으로 변한 거 같아서…. 너, 이 약혼 싫어하는 거 아니었니?”
그와 가신 셋 중 이 약혼을 제일 싫어했던 게 누구인가. 아무리 가짜라도 싫다고 공처럼 구르던 게 누구였던가. 그렇게 유난스러울 정도로 극렬 반대하던 애가 왜 갑자기 이런 태세 전환일까? 자고로 사람이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면 몹시 수상한 법이었다. 얘 혹시 뭐 잘못 먹었나? 미심쩍은 눈초리에 요수아는 잠시 합죽이가 됐다. 그는 잠시 붉어진 얼굴을 하다 미적거리며 입을 열었다.
“누, 누가 그래요 좋다고? 저 좋다고 한 적 한 번도 없거든요?”
“그래?”
“…그게…! 그! 임시건 뭐건 일단 약혼 발표한 건 맞으니까요. 해서 일단 일이 끝날 때까지는 약혼자로 인정하자 한 것뿐이에요.”
“…정말 그것뿐이야?”
정말? 진짜? 렉시의 눈썹이 치켜 올라간다. 아무래도 뭐가 더 있는 것 같은데…. 이어지는 렉시의 추궁에 요수아는 결국 치, 하고 속내를 고백하고 말았다.
“쳇, 그래요. 조, 조금 감동했어요. 감동했다구요!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어느 누가 남에게 그렇게까지 숭고한 희생을 해요? 맙소사, 불특정 다수와의 결투 선언이라니…. 정말 장난이 아니라구요.”
요수아는 볼을 긁적였다.
“솔직히 제가 관계자만 아니었다면 두 분이 정말 뭔가 있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아 물론! 두 분이야 한겨울의 눈처럼 희고 깨끗하고 순수한 사이시죠. 제가 그걸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냥 멋모르는 사람이 보면요, 두 분 완전 서로 죽고 못 사는 연인 같다 이거죠. 그런데 제가 또 이런 거에 정말 약하단 말이에요….”
“뭐?”
컥. 렉시는 숨을 들이켜다 말고 켁켁거렸다. 갑자기 들린 단어에 자기도 모르게 심장이 떨어질 뻔했던 것이다.
연인이라니.
나랑, 로메인 경이?
“연인?”
“왜 영주님이 좋아하는 기사도 문학에 그런 거 많이 나오지 않아요? 레이디의 맹세를 하고, 숭배자들을 처단해 주고, 결투도 짬짬이 하고. 그러다 정신 차리고 보면 둘이 뭐 눈 맞고 배도 맞고. 그러다 보면 애인 되고 결혼하고.”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연애 소설 읽은 가락이 여기서 술술 풀린다. 요수아는 자기가 읽어 왔던 모든 로망스의 핵심 서사들을 줄줄 읊었다. 참으로 기가 차고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헌데 문제는 설득력이 없어야 하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그럴듯하게 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들을수록 뭔가 묘하게 술렁대는 심정을 애써 감춘 렉시가 반박했다.
“소설이랑 현실이 같니? 그건 소설이니까 그런 거고!”
“아이고, 우리 영주님 정말 뭘 모르신다니까요. 소설은 원래 현실의 반영이에요. 물론 현실엔 로망스의 기사 같은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적어도 연애 파트는 그럭저럭 비슷하단 말이죠.”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요수아는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영주님, 제가 이래 보여도 연애로는 척척박사예요. 경력이 몇 년인데요? 영주님도 잘 알고 계시잖아요.”
“…….”
물론 그의 연애 상대는 필립 하나뿐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경력 없는 누구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할 말 없어진 렉시는 입을 다물었고, 이후 필립과의 연애사를 줄줄 늘어놓던 요수아는 점점 달아오르는 렉시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연인…이라고?”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걸요. 저같이 연애에 통달한 사람 눈에도 그렇게 보일 정도니 말 다했죠 뭐. 로메인 경 생각보다 연기 잘하시더라구요? 너무 실감 나는 건 그렇긴 하지만, 약혼자랑 사이가 좋아 보이는 건 나쁜 게 아니니까요.”
물론 진짜면 국물도 없지만, 가짜니까. 페이퍼 나이프로 봉인을 뜯어 내던 요수아는 코를 흥흥거렸다.
“이렇게 된 이상 저도 최선을 다해서 약혼자 대우해 드릴게요. 그러니까 남들 눈치 너무 보지 마시고 그냥 맘에 드는 곳 있으시면 로메인 경 불러다 같이 가세요. 약혼한 사람들끼리 너무 내외해도 못써요. 기왕 이렇게 된 거 …로망스의 기사 같은 이야깃거리 좀 보여 주는 거죠 뭐.”
“…이야깃거리라니…. 대체 뭘 생각하는 거니?”
“아 왜 공개 데이트 같은 거요. 사람들이 그런 거에 얼마나 환장하는지 모르시죠? 그런 거 쫓아다니면서 노래 만드는 음유시인도 있어요. 영주님은 모르시겠지만.”
“데, 데이트?!”
렉시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데이트라니, 갑자기?
“뭐 예행연습이라 치세요. 나중엔 진짜 약혼도 하셔야 할 텐데, 그땐 이런 경험이 나중에 영주님께도 많은 도움이 될 테니까요.”
미래를 위한 투자, 미래를 위한 연습. 요수아는 흐뭇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날 밤.
렉시는 자신을 찾아온 로메인에게 어렵사리 위의 말을 꺼냈다. 렉시와 짧게 앞뜰을 산책하던 로메인은 렉시의 말이 끝난 뒤로 묵묵부답이었다. 렉시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로메인을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불쾌하다고 하면 어떻게 하나?
한참 무겁던 로메인의 입이 가까스로 열렸다.
“…그러니까, 요는. 데이트를 하자는… 그런 말씀이십니까?”
“아, 아니요. 데, 데이트가 아니고요. 아니 맞긴 한데, 제 말은 그런 것이 아니라!”
렉시는 화들짝 뛰며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차가운 겨울인데도 얼굴이 왜 이리 화끈거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데, 데이트가 아니라… 외출이요. 데이트란 말은 요수아의 말을 옮긴 것이고, 그러니까 요는 저희 둘이 관광 겸 외출을 하는 것이 어떨까… 하고.”
“그렇습니까.”
“그, 요수아의 말로는 사이좋은 약혼자들이 데이트 한번 하지 않는 건 이상하게 볼 거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래서 그런 거예요!”
필사적인 렉시의 부가 설명이 있었지만 그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말끄러미 렉시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렉시는 얼굴이 마치 닳아 사라질 것 같았다. 뜨거운 시선이 흰 뺨에 어룽거리자 렉시는 그만 자기가 한 말을 취소하고 싶어졌다. 민망함과 무안함과 수치심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렉시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역시, 안 되겠다.
“죄송합니다. 역시 바쁘시니 이건 없던 것으로―!”
“어디가 좋으십니까.”
“…예?!”
순간 당황해 입이 얼어붙었다. 렉시는 설마 하는 눈으로 로메인을 보았다.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건가?
“그… 그러니까, 하신다는 말인가요?”
“물론입니다.”
로메인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이런 건 제가 먼저 권유했어야 하는데…. 제 생각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혹 원하시는 장소가 있으십니까?”
가고픈 곳이 있는가 물어보는 로메인의 얼굴은 무척 진지했다.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로메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조각처럼 단정한 얼굴 위로 환한 달빛이 쏟아진다. 조각처럼 매끄러운 얼굴 위로 쏟아지는 달빛에 잠긴 남자는 신화에서 보는 신처럼 보였다. 렉시가 아름답다면, 남자는 잘생겼다는 말이 어울리는 얼굴이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받고 빛나는 머리칼, 하늘을 연상시키는 푸른 눈동자는 어둠에 반쯤 잠겨 깊은 바다처럼 시선을 사로잡는다. 다소 더러워 보이는 대련복마저, 달빛 아래서 보니 정취가 넘치고 우아해 보였다. 기사이기에 두른 분위기는 다소 딱딱하고 날카로웠지만, 그것이야말로 기사다운 매력이니 뭐라 할 바 못 된다. 단지 안타까운 건 눈매가 다소 날카롭다는 것이었지만… 렉시는 그 눈동자가 살짝 미소할 때 얼마나 온화하게 변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원하시는 곳이 있으시다면 기탄없이 말해 주십시오. 설령 그곳이 황궁이라도, 어떻게든 모시고 가겠습니다.”
―마치, 지금처럼.
쿵.
렉시는 순간 현기증이 들어 눈을 깜박거렸다. 잠시라도 정신을 높으면 이대로 쓰러질 것 같은 느낌에 그는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한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
그리고 동시에 세상이 뒤집히는 감각.
이것은 마치 망망대해에서 폭풍을 만난 조각배 같은 아득함이었다. 혹은, 무지개의 끝을 찾아다니던 이가 마침내 발견한 황금빛 조각을 만끽하는 감각일지도 모른다.
‘이럴 수가….’
렉시는 탄식했다. 요 며칠 내내 그를 괴롭히던 어떤 하나가, 무엇이었는지 결국 깨닫고 말았다. 부정하고 싶었다면 했을 것이다.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리했으리라. 그러나 이것은 부정한다고 하여 변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세상 모두가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는 것.
부정하고자 해도, 결국 그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괴로움과 즐거움, 그 모든 것이 함께할 수밖에 없는 것.
사랑이었다.
*****
다음날, 렉시와 로메인은 공작이 내준 마차를 타고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이 간 곳은 공작령에서 가장 거대하고 화려한 극장이었다.
“환영합니다, 로메인 경. 그리고 페르귄 남작님. 저희 극장에 두 분을 뫼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극장의 지배인은 깊이 고개를 숙이며 렉시와 로메인 둘을 맞이했다. 현재 공작령에서 가장 유명한 커플 두 사람이 온다는 것만으로도 극장은 오늘 전 회차가 마감되었다. 귀빈이야, 귀빈! 그는 씰룩대며 온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그리고 은근슬쩍 이 영내에서 가장 유명해진 미인, 렉시를 흘낏거렸다.
저 사람이 그 유명한 미인이란 말이지.
그는 평민이었지만 심미안이 높았다. 그 심미안으로 이 거대한 극장의 지배인이 되기까지 했으니 말 다한 것이다. 현재 공작령에서 이름 높은 배우들은 다 그의 손을 거친 사람들이었다. 지배인은 입맛을 다셨다. 짙은 빛의 모자와 베일을 둘러쓴 탓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귀족과 평민들의 미적 기준이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자신이 보기에도 그가 그렇게 아름다울까? 그 호기심을 채울 기회일 줄 알았건만 이렇게 다 가리고 올 줄이야.
그는 렉시를 훑으며 어떻게 하면 그 미모를 볼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리고, 순간 등줄기가 싸해지는 느낌을 받고 멈칫했다. 등 뒤에서 땀이 흘렀다. 마치 목 줄기 끝에 차가운 검날이 닿은 것 같은 섬뜩한….
그는 본능적으로 눈을 들었다. 눈을 들자, 새파란 눈동자가 자신을 표정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소름이 오싹 돋았다. 아무런 표정 없이 바라보는 남자의 눈동자 뒤엔 숨기지 못할 경멸과, 불쾌함, 살기가 번뜩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배인. 이제 안내를 하지 않겠나?”
떨어지는 목소리가 무척 차갑다. 노골적인 경고에 지배인은 황급히 뒤를 돌았다. 뒤를 돈 남자의 이마에서 비 오듯 땀이 쏟아진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목을 쓰다듬었다.
“이, 이쪽으로….”
그는 떠듬떠듬 말하며 둘을 안내했다. 걷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쓰러질 것 같았다. 일반인의 몸이 기사의 살기를 정면으로 받았으니 어찌 제정신이랴. 뒤에서 렉시가 감탄하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극장은 처음이에요. 이렇게 화려하고 웅장하다니…! 정말로 멋지네요.”
“마,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하하하!”
한마디 할 때마다 따끔대는 시선이 온몸을 난도질했다. 지배인은 울고 싶어졌다. 제기랄, 미인이고 뭐고 다 필요 없었다. 그는 뒤늦게 남자가 공작령에 어떤 선언을 했는지 떠올리곤 입술을 깨물었다.
내 약혼자는 내가 지킨다더니…. 그거 아예 보는 사람들은 다 죽여 버리겠다는 선언이었나 보다. 그는 엉망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감추지 못한 채 예약석으로 날듯이 달렸다. 멋모르고 똥을 밟아 버렸으니… 어떻게든 최대한 빨리 도망쳐야 하지 않겠는가.
“이곳이 특별석인가요?”
“예, 저희 어머니가 친정에서 물려받은 박스석입니다.”
“박스석?”
“일종의… 전용석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 뭔지 알겠어요.”
그의 영지에도 그 비슷한 것이 있었다. 물론 이렇게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큰 영지의 극장에선 이런 것도 재산이 되는구나. 렉시는 신기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그들을 데려다준 지배인은 자리를 비우고 없었고, 이제 이곳엔 그들 둘뿐이었다.
“생각보다 조용하고 크네요. 사환은 상주하지 않는 건가요?”
“예, 개인적인 장소라 필요하다면 종으로 부릅니다.”
“그럼 베일을 벗어도 되겠네요.”
렉시는 기다렸다는 듯 베일을 걷어 냈다. 미색의 베일이 사라지자 주변 색상이 조금 더 선명해진다.
“맞은편 부스에선 여기가 보이나요?”
“어두운 곳이라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글라스를 쓴다면 보일 가능성이 클 겁니다.”
“이런… 그럼 이따 다시 둘러야겠군요.”
혀를 차는 렉시에게 로메인이 앞의 서랍을 뒤져 꺼낸 물건을 건넸다.
“갑갑하시다면 이런 것은 어떠십니까?”
“나비 모양…안경인가요?”
“오페라용 글라스를 개조한 것인데, 아마 그 베일보다는 갑갑증이 덜하실 겁니다.”
렉시는 그가 준 것을 잡고 신기한 듯 둘러보았다. 그 말대로, 베일보단 못해도 편하기는 해 보였다.
“감사해요. 조금 이따 사용하겠습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군요. 간단히 음료라도 드시면서 극을 기다리시면 될 것 같습니다.”
트레이 위의 음료를 들어 올리다 서로 손가락이 스쳤다. 아무것도 아닌 스침이었지만, 지금의 렉시에겐 상당할 정도의 자극이다. 렉시는 로메인 모르게 살짝 손을 떨다 얼른 음료를 넘겼다. 잔 너머로 비치는 그의 모습이 어째서 이렇게 매력적인지 모를 일이다. 농담이 아니라, 그는 오늘 정말로 멋졌다. 데이트라는 명분에 걸맞게 잘 차려입은 덕분일까? 허리에 찬 검만 없었다면 기사가 아닌 귀공자처럼 보일 모습이었다. 늘 꾸미고 다니는 것보다, 가끔 이렇게 꾸민 모습을 봐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우아한 로메인 주변으로 빛이 흘렀다.
렉시는 그런 로메인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차가운 은발 위로 흩어지는 빛, 바다를 머금은 것 같은 푸른 눈동자, 잘 조형된 이목구비, 딱딱하지만 웃으면 부드럽게 휘는 입술….
‘아, 맙소사.’
렉시는 희미한 알코올 향을 혀끝에서 굴리며 한숨을 삼켰다. 손끝이 짜릿하고 가슴이 쿵쿵쿵 뛰는 것이 심상치 않다…. 렉시는 속으로 탄식했다.
‘나… 정말 이분을 좋아하는구나.’
언제부터였을까?
대체 언제부터 그를 마음에 담은 것인지 렉시는 알지 못했다. 서서히 젖어 들었는지, 어느 한순간 그렇게 되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사실 요수아와 대화하다 각성한 일 자체가 렉시에겐 기적과 비슷한 일이었다.
렉시는 여태 사랑이란 감정을 겪을 일이 없었다. 그 흔한 혼약자도 만들기 전 영주로 내몰린 렉시에게 연애란 사치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좋아해야 할 일이었다. 이리저리 늦된 사람에게 사랑이란 감정이 찾아온다는 게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가.
허나, 그것도 상대가 상대 나름일 때의 이야기다.
‘상대가 너무 나빠….’
렉시는 입술을 깨물었다. 별처럼 반짝이던 렉시의 명민함은 이 일에 있어선 빛을 발하지 못했다. 아예 처음부터 의식하지 말았어야 했다. 사랑이란 건 어쨌거나 상대와 자신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길 원하게 되는 마음. 허나 그는 자신을 주군으로 보고 있으니, 연애 감정이 생길래야 생길 수 없지 않은가. 본의 아니게 사랑에 빠진 사람들을 자주 본 렉시는 그가 자신에게 연애 감정이 없다는 걸 확신 중이었다.
렉시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정말 미쳤구나. 어쩜 염치없게도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을까?’
기사의 맹세까지 받았으면서 상대의 미래를 진창에 빠트릴 짓을 넘보다니. 렉시가 생각하기에, 자기의 마음은 염치가 없는 짓이었다. 상식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안 되는 일.
‘…접자. 안 돼, 이 일은.’
사람의 마음이 접자고 해도 접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깨달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어떻게든 스스로를 다잡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은 없었지만, 어떻게든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남작님?”
렉시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로메인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조금만 움직이면 키스할 수도 있을 거리에 있는 거리에서 남자의 얼굴이 흔들린다. 도대체 언제? 당황하는 렉시를 푸른 눈동자가 직시했다.
“무슨 생각을 하시기에…. 얼굴이 좋지 않습니다.”
“그, 아무것도 아니에요.”
“문제가 있으시다면 기탄없이 말씀하십시오. 오늘만 날은 아니지 않습니까? 다음에 다시 나오시면 될 일입니다.”
“아뇨. 별문제 없어요.”
“허나 피곤해 보이십니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그냥 ….”
내가 당신을 좋아하게 돼서 그래요.
목구멍까지 튀어나올 것 같은 말을 간신히 잡아챘다. 렉시는 간신히 웃으며 로메인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말해야 그가 납득을 할까.
“그, 정말 오랜만에 느껴 보는 여유라서 그런 거죠. 정말 오랜만이라서. 이렇게 따듯한 공간에서 술을 마시며 연극을 보다니…. 엄청난 호사잖아요. 이렇게 여유 있는 생활은 영지를 나오고 나선 한 번도 못 했거든요.”
로메인의 시선이 느껴졌다. 진심인지 가늠하는 듯한 눈초리에 렉시는 애써 태연한 척했다. 다행히 그는 곧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렉시의 어설픈 연기에 넘어간 모양이었다.
“하긴 그렇긴 하겠습니다. 그간 고생이 많으셨지요.”
“네, 정말 끔찍한 시절이었죠…. 그때와 비한다면 지금은 천국이나 다름이 없죠. 안전하고, 볼 것도 많고, 맛있는 것도 있고….”
아스라이 웃는 렉시의 얼굴을 보는 로메인의 눈동자가 짙었다. 천천히 렉시를 훑던 그의 시선이 렉시가 든 잔에 닿았다. 트레이에서 같은 잔을 든 로메인은 도수를 가늠하고 눈썹을 찌푸렸다. 술이었다.
“…사환을 책해야겠군요. 도수가 있는 음료는 빼라고 했는데….”
이게 술이었나. 렉시는 당황한 얼굴로 잔을 내려다보았다.
“술 같지는 않은데…. 그냥 마실게요. 생각보다 도수는 높지 않은걸요.”
“벌써 얼굴이 붉습니다. 아직 몇 모금 드시지도 않으셨지 않습니까. 잔을 내려놓고 다른 걸 드시지요.”
“그건… 이, 이 안이 조금 더워서 그래요.”
렉시는 허둥지둥 목 전체를 감싼 외투의 목깃을 풀어냈다. 한 손으로 자꾸 풀려니, 손이 헛돌자 그는 음료를 내려놓고 단추를 뜯어냈다.
“이걸 이렇게 풀면…?”
턱.
렉시는 깜짝 놀라 손을 떨었다. 로메인의 손이, 렉시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손을 한 번에 감싼 손아귀의 힘은 무척 셌고, 그리고 무척 컸다. 그야말로 심장이 떨어질 것 같은 상황이었다. 거기다 심각한 건 안 그래도 가까운 로메인의 얼굴이 두 배는 더 가까워 있었다는 사실이다. 렉시는 가까워진 로메인의 얼굴에 그만 기절할 것 같았다.
‘허, 허억!’
로메인의 숨결이 얼굴께로 느껴지니 아예 현기증이 난다. 렉시는 새빨개진 얼굴로 로메인을 바라보았다. 눈앞이 순간 팽 돌며 머리가 아찔해진다. 그러나 로메인은 렉시의 이런 상황까진 알지 못했다. 그는 그저, 그런 렉시를 보며 마뜩잖은 얼굴로 낮게 그르렁대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곳에서 이렇게 목을 드러내시면 안 됩니다.”
“어, 어….”
“덥다고 이렇게 막 벗으시면 감기에 걸리실 수도 있으니까요.”
그는 렉시가 벗어 낸 목깃을 다시 채웠다. 천천히 손을 떼어 내고, 목깃을 추슬러 주는 남자의 모습은 무척이나 다정했다. 허나 지금 렉시에게 이런 남자의 친절은 독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손을 잡고, 가까이서 말을 한다. 그 어떤 남자가 이런 상황에 제정신일수 있겠는가?
가여운 렉시는 반쯤 이성을 잃고 말았다.
로메인 경이 내 손을 잡았어.
“남작님?”
로메인 경이 목의 단추를 채워 주시고….
“남작님, 취하셨습니까?”
로메인의 얼굴이 내게 가까이 와서…!
“남작님, 얼굴이 새빨갛습니다!”
다급한 로메인의 목소리. 렉시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위기는 아직도 그를 엄습하고 있었다. 숨결이 섞일 정도로 가까이 온 로메인의 얼굴이 바로 그 위기였다. 오늘따라 반짝반짝 빛나는 남자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온다니.
그건 갓 사랑을 자극한 남자의 심장에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잡힌 손끝부터 시작한 열기가 심장에 다다르고, 그 열기에 경도된 심장이 미친 듯이 펌프질했다. 렉시는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아앗!’
얼굴이 마치 불붙은 석탄처럼 타오르고, 몸이 열감으로 화끈거린다. 도무지 부끄럽고 황송하여 참을 수가 없었다. 렉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황급히 남자와 멀어졌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어라. 이 이상 붙어 있다간 로메인의 정조가 위험했다.
“저, 잠시요. 화장실 좀…!”
렉시는 허둥지둥 밖으로 튀어 나갔다. 우당탕탕! 바닥에 의자가 나뒹굴면서 부서지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황망하게 변해 있던 로메인의 얼굴이 점차 차갑게 굳어 갔다. 삐걱거리며 앞뒤로 흔들리는 실내 문을 보는 남자의 얼굴엔 알 수 없는 빛이 떠올라 있었다.
“……대체.”
로메인은 자기 손에 잡혀 있다 빠져나간 사람을 생각했다. 여리지만 따뜻했던 체온이 빠져나가자 이상하게도 손끝이 차가워지며 심장까지 다다른다. 차게 굳어 버린 그의 시선 끝에 머문 것은, 렉시가 벗고 나간 모자와 베일.
그는 그걸 집어 들고 천천히 매만졌다. 천과 천이 비벼지는 바스락 소리가 손끝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문 너머를 응시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응시하는 눈동자는 밤처럼 깊었다.
그리고, 잠시 뒤.
박스석의 문이 다시 열렸다 닫히며 인영이 뒤따라 빠져나갔다.
타닥타닥.
화려한 양각이 새겨진 복도 위로 한 인영이 내달린다. 발끝까지 채일 것 같은 긴 옷자락이 인영 뒤로 날개처럼 펄럭이고, 그때마다 작은 발걸음 소리가 꼬리처럼 따라붙는다. 어둠 속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이 인영은 굉장한 미인이었는데, 이 미인의 정체야 물론 아까 밖으로 뛰쳐나온 렉시였다. 갑작스레 두뇌가 파업한 탓에 밖으로 무작정 튀어나온 그는 방향 장소 막론하고 무아지경으로 내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헉, 헉, 헉….”
그리고 그렇게 미친 듯이 뛰던 렉시가 발길을 멈춘 것은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을 때였다.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뛰었는지, 온몸이 후끈하고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렉시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숨을 가다듬었다. 이렇게 전심전력으로 뛴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아, 아이고 죽겠다….”
도대체 얼마나 뛴 거지? 렉시는 자기가 온 길을 가늠해 보려 애썼으나 어둠에 잠긴 길 너머는 잘 보이지 않았다. 초행길에 이토록 미친 듯이 뜀박질을 하다니 내가 급하긴 급했구나. 잠시 여기가 어디일까 생각하던 그는 노도처럼 몰아치는 환멸감에 얼굴을 감쌌다. 방금 그가 남기고 온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 이런 제기랄….
“화, 화장실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꼴이람. 렉시는 딱 죽고 싶어졌다. 세상에 좋은 말 다 놔두고 왜 하필 화장실 소리를 했을까? 아무리 뇌가 파업을 해도 유분수지 나는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할 말 안 할 말 가리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나?
진정 흑역사도 이런 흑역사가 따로 없었다. 렉시는 내적인 발차기를 쉼 없이 하며 예쁜 머리를 쥐어뜯었다.
“내, 내가 얼마나 머저리 같아 보였을까….”
흑흑흑흑.
렉시는 치밀어 오르는 수치심에 눈물을 글썽거리다 눈을 마구 비볐다. 지금 이래 봤자 어쩌겠는가, 이미 엎질러진 물인걸. 이렇게 자기혐오에 빠져 있어 봤자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걸 그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렉시는 울상을 하며 자리에서 주섬주섬 일어났다.
“…근데 이젠 어쩌지?”
심각하다면 심각할 고민이었다. 당장 돌아가려니 면이 안 서고, 안 돌아가자니 정작 어디 갈 데가 없다. 아는 동네면 몰라도 여긴 모르는 동네 아닌가. 이거 로메인에게 말한 대로 화장실이라도 가야 하나? 렉시는 한숨을 푹 내쉬며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애매하네. 내가 대체 어디까지 온 거지?”
한참 뛰는 동안 이미 연극이 시작한 모양인지 주변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사환이라도 있으면 물어볼 것이었지만 사환도 없었다.
“…내가 이쪽에서 왔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가 서 있는 길은 외길이었다. 갈래길이 없다는 말이다. 렉시는 잠시 고민하다 일단 앞으로 가기로 했다. 한 방향 일직선으로 된 곳이라면 길을 잃을 일은 없을 터. 기왕 나온 것 정말 화장실이나 가자 생각했던 것이다.
그게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건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렉시가 선택한 이 데니우스 극장은 공작령 내에 세워진 극장 중 가장 근래에 세워진 극장이다. 근래 세워진 만큼 크고 화려하지만, 세워진 연식이 얼마 되지 않으므로 귀족 전용 극장의 지위를 획득하진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근래 귀족들이 가장 자주 가는 극장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렉시는 이곳을 잘 몰랐기에 최근에 가장 유명한 곳을 찾아온 것이었지만, 이곳의 실상을 아는 귀족들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 극장에 온다. 다른 귀족들이 오래된 귀족 극장을 버리고 데니우스 극장을 택하게 한 바로 그것.
매우 은밀하고, 유혹적이며, 다른 곳보다 차별적인 데니우스 극장 특별석만의 희소성.
그것은 바로―.
“…밀실?”
이곳의 특별실 통로엔 비밀 통로로 연결된 거대 밀실이 있다는 것.
이 데니우스 극장의 밀실은 근래 귀족들이 주로 애용하는 비공식적 접대 장소였다.
“뭐, 뭐야?”
길을 걷고 걷다 화장실처럼 보이는 문으로 들어왔는데 이게 무슨 별세계인가? 얼핏 보면 그냥 방처럼 보이나 사실 이 거대한 밀실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은밀한 장소의 총합이었다. 렉시는 그야말로 아연실색했다.
곳곳에 있는 긴 의자는 큰 가구 뒤에 숨겨져 있고, 커다란 나무를 그대로 식재한 화분을 불규칙적으로 배치해 그 주변을 가린다. 그런 장소가 한두 개가 아니라 십수 개였다. 얼핏 보면 개방된 공간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으며, 사생활을 지키기 위한 은폐가 실로 노골적인 장소였다.
참으로 웃기는 것은 장소는 은폐하면서 중간 중간 놓은 물건은 또 목적성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흰 테이블 보 위에 얌전하게 놓여 있는 물건들은 돼지 창자로 만든 피임기구, 혹은 마셔서 예방한다는 피임약들과 흥분제들이다. 또 어떤 것은 보기만 해도 흉악해 보이는 은밀한 물건들이었는데, 총각인 렉시로서는 그 물건들의 쓰임을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렉시는 그 소리 중간 중간 신음이 섞여 있는 걸 눈치채고 얼굴을 굳혔다. 이미 온 선객들이 일을 치는 소리였다. 아주 확인 사살을 하는 현실이 아닐 수 없었다.
오 맙소사. 렉시의 고운 얼굴이 희게 질렸다.
‘미, 미, 이런 미친 일이!’
화장실을 찾기 위한 여정에 왜 이런 엉뚱한 것이 끼어들었는지 그는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것은 심지어 마법도 아니었다. 만일 이 장소에 마법적인 무언가가 존재한다면, 렉시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난리도 진짜 이런 난리가 없다. 그는 넋을 놓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나, 나가야겠어.”
렉시는 황망하게 뒤로 물러섰다. 음식점엔 밥을 먹으러 가고, 여관엔 잠을 자러 가듯 여기는 윤락이 목적인 이들이 모이는 장소. 재수 없이 무슨 짓을 당해도 항의 한마디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자긴 지금 얼굴까지 드러내고 있었다. 로메인이 있다면 모를까, 홀로 있는 자신은 그야말로 사냥감이 되기 최적의 상황이었다. 렉시는 옷자락으로 얼굴을 최대한 가리며 슬슬 뒤로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상황은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자가 여기 있다고?”
“!!”
나가려던 문 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렉시는 입술을 깨물었다. 들어온 문이 막혀 있으니, 이젠 수가 없다. 제기랄…. 렉시는 두 눈 질끈 감고 옆에 마련된 간이 공간으로 황급히 뛰어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문이 덜컥 열리며 사람들이 들어왔다.
“언제 행차하신 거냐.”
“오늘 점심 즈음 오셨습니다.”
“―점심이라니. 다섯 시간을 넘겼단 말인가? 참으로 잘나셨군, 우리 공자는. 이 판국에 좆질할 생각이 든단 말이지?”
기레스 백작은 빈정대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연회 이후, 안 그래도 말 안 듣던 애송이는 말을 더 안 듣는 애송이로 진화했다. 안 그래도 복잡한 와중인데 혼자 속 편하게 이 지랄을 하고 계시니 어찌 기분이 좋을 것인가.
어쩜 이 애새끼는 도움 될 일을 눈곱만치도 안 하는 걸까.
백작의 얼굴이 흉흉해지자 앞서 나아가던 사환이 몸을 작게 움츠린다. 백작은 저조한 기분을 숨기지 않으며 차갑게 물었다.
“그래, 오늘은 몇이나 있지?”
“그…오늘은, 하나입니다.”
“한 명?”
백작의 눈이 칼처럼 날카로워졌다. 거짓말하면 죽여 버린다는 의미의 눈짓에 사환은 고개를 미친 듯이 저었다.
“거짓이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최근에 들어온 아이들을 죄다 불러 모으시더니… 딱 한 애만 뽑아 가셔서.”
기레스 백작의 얼굴이 비웃듯이 변했다.
“흥, 꼴에 정말 아프긴 아픈가 보지.”
버나드의 정사는 난교가 기본이다. 그런 그가 한 명만 두고 즐기다니 근래 드문 일이었다. 생각보다 얻어맞은 게 독했나? 그는 비죽하니 웃음을 베어 물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뭐 보면 알겠지. 공자가 있는 곳이 저쪽인가?”
“네, 늘 계시는 그곳입니다.”
그는 발걸음을 빨리해 버나드가 있다는 곳으로 들어갔다. 사환이 안내한 곳에 있는 버나드는, 생각대로 여자와 정사 중이었다.
“으, 흑, 흑, 흡!”
쩍, 쩍, 턱, 턱.
빠르게 흔들리는 여자의 몸 위로 익숙한 상대의 얼굴이 보인다. 호리낭창한 여자의 몸을 떡 주무르듯 주무르던 버나드의 얼굴은 불유쾌한 쾌락에 잠겨 있었다. 누군가 온 기척에 눈을 든 그는 백작을 확인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나 허리 짓은 계속되고 있었다. 보건 말건 상관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그런 버나드를 보는 백작의 눈이 순간 꿈틀거렸다. 버나드가, 평소와 조금 달랐기 때문이다.
“…새로운 얼굴이군.”
갈색 머리의, 호리호리한 여자.
백작은 잠시 버나드의 취향을 되짚었다. 그가 아는 한 버나드의 여자 취향은 늘 확고했다. 금발에, 끝내주는 몸매를 가진 여자가 그의 취향이다. 하지만 오늘 안는 여자는 그간 안았던 취향과는 정반대였다. 배우 한답시고 온 애들이니 얼굴이야 예쁘겠지만… 그냥 아무 여자나 데려온 건가?
하지만 그를 데려온 사환의 말론 또 저게 고르고 고른 애라 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하루아침에 그 취향이 변할 리가 없을 텐데. 그렇게 갑자기 달라진 남자의 변화에 고뇌하던 백작의 궁금증이 풀린 건, 범하고 있던 여자가 눈을 떴을 때였다. 눈물이 가득 담겨 흐느끼는 여자의 눈동자는 보기 드물게 예쁜 녹색 눈동자였다― 마치 그가 아는 누군가처럼.
그리고 그걸 본 순간, 백작은 왜 모지리가 저 여자를 콕 찝었나 이해하고 말았다.
이거 봐라.
기레스 백작은 자기도 모르게 사납게 웃었다.
‘에드너….’
에드너 라몬테스.
순식간에 떠오른 이름 위로 꼬리처럼 다른 이름이 따라붙는다.
알렉시아노 드 페르귄.
그를 속인 상인의 이름을 떠올리는 백작의 눈빛이 기이하게 번뜩였다.
그가 에드너 라몬테스라는 이름의 상인을 만난 것은 몇 달 전의 일이다. 당시의 기레스 백작이 상인을 만난 것은 이 에드너 라몬테스라는 자가 마도구 상인이란 소리를 들어서였다. 그가 공비의 손을 잡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공작을 등한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고로 정치를 하는 자가 줄을 하나만 잡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는 법.
그리하여 마도구를 판다는 상인을 만난 그였지만, 그는 공작에게 바칠 마도구를 사긴커녕 가장 중요한 걸 잃고 말았다.
평민을 인간 취급도 하지 않던 그가 평민인 상인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이해할 수가 없군, 어찌 그대 같은 이가 이런 고생을 하지? 돈이 필요하다면 내가 주겠다. 평생 상상치도 못했던 부를 누리게 해 주지. 내게 와라, 에드너. 널 평생 행복하게 해 주겠다.”
사실 이 말을 하면서도 백작은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고로 귀족이 할 수 있는 사업 중 가장 중요한 게 결혼이다. 집안 대 집안, 가문 대 가문을 엮는 중차대한 사업을 이렇게 쓰레기통에 집어넣다니! 애초 그는 자기 결혼을 고르고 고른 최고의 혈통과 하기로 마음먹은 지 오래였다. 실지로 그의 책상 속엔 예비 신부들에 대한 정보가 가득했다.
하지만 눈앞에서 반짝이는 저 아름다운 것을 본 순간, 그는 과거의 결심을 모조리 지울 수밖에 없었다. 정치와 영향력은 노력 여하에 따라 언제든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저 미인은 세상천지 단 하나뿐일 것이다. 그는 결국 귀족의 모든 자존심을 접고 에드너에게 구애했다.
에드너는 몰랐으나, 어쨌거나 나름 일생일대의 청혼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죄송합니다만 백작님, 저는 혼인할 수 없습니다. 부디 다른 분과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뭐?”
“저는 남자이고 백작께선 후사를 이어야 할 분 아닙니까. 게다가 저 같은 천한 것이 어찌 백작가에 들어가겠습니까? 부디 없던 말로 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발칙하고 괘씸한 거절이었다. 하지만 그는 참았다. 옛말에도 원래 먼저 반한 자가 지는 법이라고 하잖는가? 게다가 거절하는 말이 꽤 자기를 위한 말이라는 것도 일부 작용했다. 그래서 그는 제법 너그럽게 대처했다. 윽박지르거나 위협하는 대신 그저 곁에 두고 설득하려 했던 것이다.
상인이 데리고 다니는 호위를 가둔 것도 그 일환이었다. 물론 둘의 성깔이 퍽 매서웠지만 그 수는 고작해야 둘. 날뛰는 둘을 가두는 대신 마차의 말만 빼돌린 것만 해도 그는 퍽 많이 참은 거였다. 에드너가 아끼는 자가 아니었다면 그 둘은 이미 죽어 무덤도 없이 어딘가에 묻혔을 것이다.
‘헌데 이토록 너그럽게 대해 준 나를 …농락해?’
프라이드가 드높은 만큼 자존심을 버렸던 건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을 만큼 에드너를 사랑했다. 허나 그 바친 자존심이 상대에게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알았을 때, 그것은 딱 그만큼의 증오로 되돌아왔다.
‘그래, 내 모든 게 너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거로군.’
진심을 다해 구애했건만 상대는 그걸 개똥만큼도 중히 여기지 않았다는 현실에 그는 상처입었다. 그를 조금이나마 진지하게 생각했다면 자신의 정체를 속일 리 없다. 에드너, 아니 알렉시아노 드 페르귄에게 있어 그는 딱 그 정도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의 사랑을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나서 택한 것이 그 로메인이라는 것 또한 그의 오랜 트라우마를 자극했다.
‘또 그놈인가. 감히!’
둘이 어떻게 만났고, 그 저간의 사정이 어떤 것인지는 이제 알 바 아니었다. 로메인과 함께 나타났을 때부터 그는 이미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로메인은 어릴 적부터 늘 패트릭의 걸림돌이었다. 자신은 백작가의 후계자고, 그놈은 고작해야 후작가의 차남. 허나 세간의 평은 늘 로메인이 낫다 했다. 그 그림자에서 벗어나기까지 그는 퍽 오랜 세월을 절치부심해야 했다. 검을 버리고, 황도 정치에 입문한 지금에 와서야 겨우 과거를 떨쳤다고 생각했건만….
이번 일로 그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음을 깨달은 기레스 백작은 숯불처럼 달아오르는 분노 속에서 몸부림쳤다.
용서하지 못한다.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내 기필코 너희 둘 다 나락에 빠트려 지옥 속에서 살게 하겠다.
대용품을 품에 안고 신음하는 버나드를 보며 백작은 진득한 증오에 날을 세웠다. 증오와 사랑은 동전의 양면이라. 자존심에 상처 입은 사랑과 증오란 이토록이나 서로 가까운 감정이다.
이렇듯 한쪽에서 한 남자가 사랑과 증오로 몸을 불태우고 있었지만, 그 단초를 제공한 당사자는 당면한 위험을 알지 못한 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중이었다. 거의 간발의 차로 들키는 걸 피한 탓이다. 렉시는 엄습하는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앞뒤 가릴 것 없이 뛰어든 이 장소엔 선객이 없었다. 참으로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만일 누가 있었으면 피차 여러모로 곤란해졌을 것이다. 렉시는 식은땀을 훔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런 데는 분명 신분 위장을 위해 뭔가를 놓는다고 들었는데….”
렉시는 곳곳에 우거진 수풀 사이를 뒤지며 부스럭댔고, 마침내 소파 아래쪽에서 원하는 걸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찾았다…!”
만세! 숨죽인 환호성을 지르며 렉시는 발견한 짐을 펼쳤다. 예상대로 거기엔 가장용 물품이 가득했다. 질은 나빠 보이지만 화려한 붉은 가발, 치렁치렁하지만 벗기기 쉬워 보이는 가운형 원피스, 아직 사용 전으로 보이는 여성용 속옷과 비단 양말…. 한참 안을 뒤지던 렉시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누가 이미 왔다 갔나?”
찾는 건 남자 옷인데 어째 죄다 있는 게 여자 옷뿐이래? 렉시의 입이 댓발로 나왔다.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이건 퍽 당연했다. 본래 이런 일이 끝난 뒤 옷가지가 더 필요한 건 대부분 여자들 쪽이지 않은가? 물론 남자들도 필요할 때가 있긴 하지만 세상사는 보통 통계로 돌아간다. 물품이 한쪽으로 편중된 건 바로 이 때문이었지만, 남녀 관계에 무지하신 우리의 숫총각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건 모르건 간에 눈앞에 둔 물건들이 변할 리는 없을 것이다. 렉시는 진지하게 이 일을 어찌해야 하나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일단 가발만 쓰자.”
아무리 그래도 여장만은 하기 싫었다. 렉시는 떨떠름한 얼굴로 빨간 가발을 집어 들었다. 모질은 저질이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쓸 만은 했다. 그는 치렁치렁한 가발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한쪽에 작게 있는 손거울을 들여다봤다. 붉은 머리칼에 녹색 눈이 예쁜 화려한 미인이 거울 속에서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 있었다. 놀랍게도, 아니 놀랍지 않게도, 참 너무나도 어울린다. 렉시는 혀를 찼다. 이게 대체 무슨 꼴인지….
“…역시 사심을 품은 나들이라 마가 낀 거지.”
렉시는 쓰게 웃었다. 일에 사심을 끼워 넣어 이렇게 된 것일까. 계시나 미신은 믿지 않지만, 어쩌면 이 일 역시 두 사람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증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내가 너무 큰 꿈을 꾼 거지.
지금 기분이라면….
로메인을 보아도, 아무런 일 없었던 것처럼 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래야 할 것이다. 싫더라도.
“나가자.”
렉시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발로 얼굴을 가렸다. 치렁치렁한 가발을 이리저리 뻗게 하니, 생각보다 제법 그럴듯했다. 혹시라도 찾으러 오기 전에 돌아가야겠다. 그렇게 자리를 탈탈 털고 일어난 렉시는 밖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고 했다.
“백작, 지금 설마 내게 반역을 권유하는 건가?”
“…?!”
렉시는 나가려던 발을 멈추고 순간 눈을 굴렸다. …뭐?
“말해 봐 백작! 지금 내가 말한 게 맞냐고!?!”
“…맞습니다.”
맙소사. 고민할 것도 없다. 렉시는 나가려던 모습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이게 무슨 소리야. 반역이라니…. 이런 무지막지한 말을 들었는데 묵과하고 넘어가면 그게 귀족일 리 없었다. 세상에, 역심이라니! 혹시 제국에 대한 역심인가?
렉시는 얼른 가까이 있는 수풀에 몸을 숨겼다. 무성한 수풀 사이로 눈을 내놓으려니, 남자 둘이 풀 너머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안타깝게도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태로 보아하니 귀족이 확실하다.
렉시는 자리에 웅크린 채 조용히 숨을 죽였다. 곧 남자 둘이 툭닥툭닥 말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왜 여자를 내보냈나 했더니…. 지금 고작 그런 말을 하려고 날 찾아온 건가? 기가 막히는군! 차라리 그 여자나 다시 불러들여, 나한텐 그게 더 건설적일 테니까. 백작, 자네가 이러는 걸 어머니도 아나?”
쇳소리가 걸걸한 남자의 목은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낮고 거칠었다. 다른 쪽에 있는 남자가 그 목소리를 들으며 혀를 차는 게 들려왔다.
“공자, 목소리를 낮추십시오. 이곳이 은밀하긴 하지만 소리를 다 막진 못합니다. 이게 남이 들어선 안 되는 이야기라는 것쯤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거야 백작 자네나 상관할 바겠지. 나는 아직 한다고 안 했는데?”
“공자!”
“아버지가 병환 중이지만 그 세력을 무시 못 한다 말한 게 누구였지? 나였나? 아니지, 자네였어. 그래서 자네 말대로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후계자가 되고자 노력했단 말이야. 헌데 그건 어찌 두고 다짜고짜 반역을 하자? 자네 지금 나 가지고 놀아?”
쨍그랑! 무언가 박살 났다. 아마 컵이라도 던진 모양이지. 되게 지랄맞은 성격이네. 렉시가 속으로 혀를 차는데, 뒤돌아 있던 자의 손이 불시에 수풀 위를 쓸고 지나갔다. 렉시는 황급히 머리를 숙여 남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거의 종이 한 장 차이였다. 저쪽은 몰라도, 이쪽은 상당히 예민한 자 같았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남자가 손을 회수해 갔다. 렉시는 보다 조심스럽게 둘의 대화를 엿들었다.
“공자, 오해십니다.”
“오해라고?”
“제가 공자의 편에 선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그런 제가 어떻게 공자를 가지고 놀겠습니까?”
“그런 놈이 이럴 때 와서 내 기분을 잡쳐 놓나?”
“제가 즐거운 시간을 방해한 건 압니다. 기분이 많이 나쁘셨겠지요. 저도 급하지 않았으면 굳이 사적인 시간에 오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공자,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고 계셔야지요.”
“상황? 무슨 상황 말이냐.”
남자가 후 하고 한숨을 내쉰다. 니가 그럼 그렇지, 이 말을 마치 그림으로 축약한 듯한 모양새였다. 그게 참 이상하게 기시감이 들어 렉시는 이마를 찌푸렸다. 묘하게 재수가 없는 저 태도, 내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누구였지? 아뜩한 기억 어딘가에서 기억이 떠오를락 말락 한다. 렉시가 잠시 기억 속을 헤매는 사이 남자가 대답했다.
“이쪽을 후계자로 밀어 주던 세력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주로 중도파였다 끌어들인 쪽이 그러더군요. 이대로 가면 그간 구축한 지형도가 바뀔 겁니다. 솔직히 말해 그들은 대안이 없어 이쪽에 선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뭐? 대체 자네 일을 어떻게 했길래―!!”
“글쎄요, 그게 온전히 제 탓일까요?”
남자가 버럭 화를 냈다.
“자넨 책사야. 나는 자네 주군이고! 백작, 난 자네가 하라는 건 다 했어. 고로 만일 뭔가 잘못됐다면 그건 내 탓이 아니라 자네 탓이지!”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게 맞겠지요. 하지만 공자, 부디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상황이 변하면 사람이 하는 행동 또한 변해야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그래서, 내게 반역을 권하는 게 그 때문이다?”
“공자께선 제가 책사라고 하셨지요. 네, 이건 제 책사로서의 판단입니다.”
“그게 그렇게 쉬워 보이나?! 자기 일 아니라고 말은 잘하는군!”
“정말 제가 제 일이 아닌 걸 어떻게 하나 보고 싶으십니까?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그렇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 드릴까요?”
“…!”
날카로운 반응에 남자가 주춤했다. 달래는 듯하면서 은근슬쩍 위협하는 솜씨가 수준급이다.
‘꼭 뱀 같은 놈일세.’
렉시는 얼굴을 찌푸렸다. 어디서 저런 놈을 보았나 드디어 기억났다. 마지막으로 만난 개진상, 기레스 백작이 꼭 저랬었다. 매끄러운 말 속에 숨겨진 뱀의 간교함과 독.
기레스 백작과 저 남자가 비슷한 과라면… 저 공자라는 자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것이다. 저렇게 말하면서 진의는 숨기는 게 그 남자의 특기였으니까. 저 자도 공자 공자 이러고 있었지만, 분명 속으로 다른 꿍꿍이를 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란 남자는 그것까진 눈치채지 못한 듯 보였다. 대신 그는 뱀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제기랄, 성공할 보장이 있긴 하고?”
“십중 팔할입니다.”
“…팔, 팔할? 자네 지금 아무렇게나 말하는 거 아니야?”
“제가 제 목숨을 두고 아무 말이나 하겠습니까? 충분히 생각하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잊지 마십시오 공자, 저는 공자와 한배에 탔습니다.”
“…흥…!”
공자, 후계자, 세력.
‘그렇군.’
남자들이 흘린 단서를 조합한 렉시는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황가와 관련된 게 아니구나. 그냥 집안싸움이었어.’
보통 반역이라 함은 황제를 생각하기 마련. 렉시가 굳이 이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건 황가에 대한 의무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닌 것이 밝혀진 이상, 그는 더 이상 이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귀족가의 집안싸움엔 내가 낄 이유가 없지. 굳이 반역이란 말을 쓰는 걸 보면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난 공자랑 그 가신이겠고…. 아버지가 아픈 와중에 음모를 꾸미고 뭐 이런 건가 보네.’
가문을 이어받을 후계자가 정해지면 대부분은 그 결정에 납득한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이란 본래 끝이 없는 법. 이권이 집중된 집안의 후계자 자리면 저런 일들이 적지 않게 일어나곤 했다. 고개를 끄덕인 렉시는 자리를 뜰 때라고 판단했다.
‘뭐 같은 영주 입장에서 곱게 들리진 않지. 하지만 내가 끼어들 일도 아니니까.’
거 어떤 집안이 저렇게 집안 정리를 오지게 못했나 좀 궁금은 했지만, 그저 흥미 때문에 인생 복잡해질 선택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렉시가 그렇게 조용히 벗어날 기회를 엿보는 사이, 공자와 가신의 모의는 위험한 지점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떻습니까, 이젠 하실 생각이 드시는지요?”
“흥, 내 생각이 소용이 있긴 한가? 내 어머니는 자네를 믿고 있고, 결국 난 우리 대단하신 책사 선생이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을 텐데 말이야.”
남자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나 태도는 조금 변해 있었다. 그는 앞으로 몸을 수그리며 뱀의 계획을 슬쩍 떠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할 건데. 뭐 어디서 용병이라도 부르려고?”
“결과적으론 비슷합니다. 성벽을 넘으려면 그 정도 극약 처방은 필요할 테니까요. 가장 단순하지만 확실한 방법 아니겠습니까. 속전속결도 가능하고.”
“이봐, 백작. 본성의 방비는 황성보다 철저해. 그런데 군대도 아니고 고작 용병 나부랭이들로 전쟁을 한단 소리야?”
“군대라니요. 제가 언제 전쟁을 한다 했습니까?”
“자네가 그랬잖아! 방금 용병을 부른다고…!”
“비슷하다고 했지, 전쟁을 한다 하진 않았습니다. 공자, 제가 비록 칼은 잡고 있지 않지만 기사 수업을 받았던 몸이라는 걸 잊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병법을 모르겠습니까? 공자의 말마따나 이 프로하우스 성을 점령하기 위해선 최소 황실군 정도는 동원되어야 하죠. 그런 어리석은 일을 제가 할 리가 없잖습니까.”
…어디?
슬금슬금 엉덩이를 뒤로 빼던 렉시의 몸이 순간 딱 굳었다.
“때마침 신년이고, 공작가의 가신들이 죄다 모였으니 일을 도모하기엔 시기마저 적절합니다. 계획은 이미 있으니, 공자께선 그걸 위해 몇 가지 일만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일? 그게 뭐지?”
“네, 그건….”
남자가 몸을 앞으로 숙인다. 앞에 앉은 공자 역시 남자를 따라 몸을 앞으로 숙였다. 보다 더 은밀한 대화가 오가기 위해 말소리를 죽인 것이다.
그리고 그걸 보는 렉시는 앉은 채 얼어붙어 있었다. 방금 들린 단어 하나가 가진 파괴력 때문이었다. 프로하우스? 프로하우스?
‘뭐라고?’
렉시는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지금 맞게 들은 건가? 황당하다 보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고 있었다. 뭐냐, 이거 뭐냐. 렉시는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안 되겠다. 얼굴을 봐야겠어.’
방금 들은 게 맞다면 저 앞의 공자란 작자는 버나드다. 느끼하고 제 잘난 척하는 그 얼굴을 보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확인을 해야 했다. 렉시는 이를 악물고 옆으로 꾸물꾸물 기었다. 굼벵이처럼 천천히, 하지만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은밀히.
그리고 그런 노력 덕분에 렉시의 시야에 남자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그리고 바로 그때.
―빠직!
“……!”
렉시는 얼어붙은 얼굴로 손바닥을 응시했다. 손 아래, 아주 작은 나뭇가지 하나가 볼썽사납게 부스러져 있었다. 눈앞의 상황에 정신을 판 나머지 바닥에 뭐가 있는지 확인하지 못한 결과였다. 실로 낭패였다.
“―누구냐!”
그리고 이 소리에, 불청객이 있다는 걸 알아챈 두 남자가 벌떡 일어섰다. 들켜서는 안 되는 걸 들켰다. 당장 잡으면 요절을 내리라, 남자 둘의 얼굴엔 그러한 결의와 살의가 가득했다.
하지만 둘이 렉시를 찾는 것보다, 렉시가 둘을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렉시는 자기 눈앞에서 일을 벌인 사람들을 확인하고 그만 희게 질렸다.
‘…패트릭!’
잔인함이 번들대는 두 눈동자를 보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오싹 달린다. 맙소사!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왜 아까부터 이상하게 기시감이 드나 했더니…. 저놈이 어떻게 여기 와 있지?
‘어떻게 된 일이지. 분명 로메인은 저놈이 영지에서 아직 올라오지 않았다고 했는데?’
날고 긴다는 로메인 경의 지인들이 죄다 죽기라도 했단 말인가. 렉시는 무척 당황했지만 일단 모든 걸 뒤로 넘겼다. 자기 영지에 있어야 하는 인물이 왜 여기 있나는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았다. 타인 명의로 몰래 들어왔건, 수문장을 매수했건 그건 나중에 따질 일. 중요한 것은 저 뱀이 입에 반역을 담았다는 거였다.
‘알려야 해.’
프로하우스 공작이 없는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그들이 꾀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정말로 공작위가 넘어갈 수도 있었다. 렉시는 둘의 시야 밖에서 손안에 쥔 나뭇가지를 재빨리 던졌다. 물론 자신과 먼 장소였다.
부스럭. 수풀이 움직이는 소리에 남자 둘이 재빨리 그쪽을 덮쳤다.
“거기냐!”
지금이다!
렉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을 향해 튀어나갔다. 숨어 있던 곳과 나가는 문이 가까이 있던 게 그저 천운이었다. 렉시가 문밖으로 빠져나간 것과 동시에, 남자들은 자신들이 속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은 멀어지는 렉시를 보며 두 눈을 부라렸다.
“제기랄!”
“저놈 잡아!”
그들은 그 즉시 이를 갈며 렉시를 쫓기 시작했다. 반역 모의를 들킨 이상 저놈을 잡아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일을 꾀하기도 전에 파장 날 수 있었다. 거친 구두굽 소리가 바닥을 시끄럽게 울리며 필사의 추격전이 시작됐다.
“제길, 어디 간 거지?”
“이쪽으로 간 게 맞습니까?”
“맞아! 여긴 여기 말곤 갈 길이 없다고…!”
두 사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쥐새끼 때문에 점차 초조해졌다. 본래 이런 건물 안에서 벌어지는 추격전은 끝이 있는 법. 밖이면 모를까 건물은 숨을 장소가 명백히 한정되어 있다. 헌데 이것이 어찌 된 영문일까. 분명 독 안에 든 쥐가 맞건만 독을 뒤져도 쥐가 안 나온다. 기척을 잡으면 사라지고, 간신히 잡았다 치면 허탕인 게 무슨 유령 같았다.
‘그 빨간 머리 자식!’
얼굴은 모르나, 쥐새끼의 뒷모습은 본 그들이다. 큰 키도 아니고 무인으로 보이지도 않던 호리호리한 몸을 가진 놈은 기가 막힐 정도로 재빨랐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잘 도망치고 숨을 리 없었다. 둘은 불안감에 가슴이 바짝 타올랐다. 분명 뭔가 있는 놈이었다.
‘세작이다. 누군가가 세작을 붙인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잡히지 않을 리가 없지!’
지난 몇 년의 여정으로 렉시의 도망술은 경지에 달해 있었다. 어떻게 해도 일반인이 얻을 수는 없는 렉시의 도망술 덕에 남자들은 렉시가 세작이라고 단단히 착각했다.
“반드시 잡아야 한다. 잡아서 죽여야 해.”
살기등등한 둘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이를 갈았다. 렉시는 점점 나빠지는 상황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끝까지 갈 기세네.’
하긴 그런 말 한 걸 들켰으니 필사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 명이면 어떻게든 따돌릴 텐데, 둘이나 되니 조금 힘들었다. 렉시는 화분 틈바구니에서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하면 저 둘을 따돌리고 도망칠 수 있을까. 그의 시선이 먼 곳에 있는 복도를 흘끔거렸다. 어떻게, 저쪽으로만 가면 곧바로 내가 있던 전용석으로 갈 수 있을 텐데.
‘가면 곧바로 들킬 거야. 그러니 사람… 사람이 필요한데.’
렉시는 두 손을 꼭 쥐었다. 사람이 숨는 데 제일 좋은 장소는 누가 뭐래도 사람의 숲이다. 지금까진 인식의 허점을 이용해 숨고 다녔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숨을 수는 없었다. 저들은 슬슬 기물 파손까지 염두에 두는 눈치였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제가 용빼는 재주가 있더라도 들킬 게 뻔했다.
‘어떻게 한다….’
렉시는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하면 쟤들을 따돌리고 안전히 돌아갈 수 있지? 휘휘 주위를 둘러보던 렉시의 눈에 그게 들어온 것은 거의 운명적인 일이었다.
붉고, 경고가 쓰여 있는 작은 종. 흐릿하던 눈동자가 일시에 반짝였다.
“…종!”
소방용 알람, 일명 소방종. 불이 나면 시끄럽게 울리며 대피하라 알리는 저게 그를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렉시는 남자들을 경계하며 얼른 종 쪽으로 다가가 연결선을 살폈다. 생각대로 팽팽하게 당겨진 줄이 벽 쪽 어디엔가 연결되어 있었다. 한 곳뿐만이 아니라, 건물 전체에 연결되어 있다는 표식. 렉시는 씩 웃으며 연결선을 당겼다.
그리고, 빽 하고 소리쳤다.
“―불이야!”
땡땡땡땡땡!
곧 미친 듯한 소음이 극장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머, 머리가 너무 아파요! 대체 이 소리는―.”
연극 중 갑자기 들리는 괴성에 사람들은 당황했다. 그들은 어디서 이 소란이 벌어지는가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다들 이게 소방용 알람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공작령에선 불이 자주 나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 영지의 사람들은 조금 달랐다.
“불! 맙소사. 어서 나가요! 불이야!”
“무슨 소리야. 불이라니?!”
“이거 불난 거 알려 주는 경고예요. 위몰레스 영지에서도 불이 났었을 때 이 소리가 들렸어요!”
위몰레스 영지가 쫄딱 타 도망 온 상인 하나가 크게 외치자 주변이 크게 술렁였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상인들의 정보는 확실하다. 그들은 주변을 향해 크게 외치며 문을 향해 튀어 나갔다.
“―당장 도망치시오! 어서!”
하나, 둘 달아나던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자 미적대던 사람들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혼란한 얼굴의 사람들은 곧 배우들이 도망치는 것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저, 정말 불이로구나! 깨달음이 느린 만큼 경악은 빠르게 번져 나갔다.
“사, 사람 살려! 불이야!”
와아아아악!
찢어지는 비명 소리와 함께 복도로 사람들이 쏟아졌다. 갑자기 밀려든 사람들 때문에 병목현상이 나타난 복도는 아비규환이었다.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빈방을 뒤지며 쥐를 쫓던 두 남자는 이 상황에 무척 당혹했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이,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패트릭은 온몸을 비틀며 사람들을 막아섰다. 그러나 고작 한 명이 수십 수백의 인파를 막을 수는 없는 법. 그들은 외려 자신들을 막아서는 패트릭을 향해 두 눈을 부라렸다.
“불! 불이 났다고!”
“뭐?”
버나드의 턱이 쩍 벌어졌다.
“불이라니! 어디에 불이 났단 말이냐!”
“저 소리 안 들려? 소방 알람이잖아!”
“미친놈아 당장 비켜! 죽고 싶어?!”
쏟아지는 막말에 두 가신은 당황했다. 고귀한 귀족들이 언제 이런 욕지거리를 경험해 봤을까? 하지만 목숨이 달린 마당에 그깟 귀족인지 나발인지가 사람들 눈에 뵐 리가 없었다. 그들은 결국 한 발짝 물러서 길을 내줘야 했고, 순식간에 밀려 나가는 사람들의 홍수에서 간신히 발만 붙인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실로 빌어먹을 상황이었다.
아우성치는 인해의 틈바구니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비명 소리, 탄식과 고함들. 지옥의 혼란 한가운데 갑자기 패대기쳐진 패트릭은 자기도 모르게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불이라고?”
그는 시끄럽게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인상을 썼다. 이렇게 소리가 크다는 건 발화점이 가까이 있다는 이야긴가? 허나 아무리 살펴도 연기는 고사하고 타는 냄새도 안 났다. 하나뿐인 복도이니 냄새라도 나야 하는데, 어디서도 뭔가가 타는 것 같은 냄새가 없었다.
이상해. 이상하다.
패트릭은 사나운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그리고 곧 저 너머에서, 그가 찾던 것을 발견했다. 아까 자기가 쫓다 놓친 빨간 머리 놈. 작은 몸 때문인지 저 사람 틈바구니에서도 용케 어디론가 빠져나가고 있는 놈의 손엔 긴 줄로 보이는 것이 덜렁덜렁 매달려 있었다. 패트릭은 눈을 찌푸렸다. 저건…소방 알람 줄…?!
“놈!”
그는 순간 모든 것을 이해했다. 갑자기 났다는 불, 시끄러운 소방 알람, 쏟아지는 이 사람들의 행렬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이 난데없는 소란을 불러일으킨 범인은 저 자식이었다! 불이 났다는 말은 저놈이 꾸민 게 분명했다. 그는 두 눈에 불을 켜며 남자를 뒤쫓았다. 불났다는 소리에 바짝 얼어붙은 버나드가 그런 그를 보며 높게 외쳤다.
“배, 백작! 어디 가나! 불이 났다는데!”
“―정문에서 기다리고 계십시오! 저는 저놈을 쫓겠습니다!”
“이, 이봐! 백작!”
재차 불러 오는 버나드를 무시한 채 패트릭은 독사처럼 눈을 빛냈다. 너 사람 잘못 건드렸어. 내가 널 놓칠 줄 알고? 한번 독이 오른 독사는 어지간해선 먹이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보이는 빨간 머리를 필사적으로 쫓아갔다. 저놈을 잡기 전까지, 그는 이 극장에서 나가지 않을 계획이었다.
*****
쏟아져 나온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반대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간 렉시는 숨을 헐떡였다. 인파에서 빠져나오는 것도 힘들었지만, 얼굴 숨겨 가며 오다 보니 진이 다 빠졌다.
“아이고 죽겠다….”
렉시는 앓는 소리를 내며 벽에 착 달라붙었다. 부들부들 몸이 떨리는 게, 아무래도 돌아가면 한바탕 앓을 모양새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무사히 도망도 쳤고, 결정적으로 자길 쫓는 놈들에게도 큰 엿을 먹이지 않았던가?
렉시는 씩 웃었다.
“흥, 쌤통이다.”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앞에서 혼이 빠진 두 남자를 생각하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맺히는 렉시였다.
“고생 좀 해 보라지.”
그들 같은 고위 귀족들이 어디 저런 아귀다툼을 겪어 봤을까. 제대로 꼬리를 치웠다 생각한 렉시는 한결 안심하고 움직였다. 뛰어가는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한차례 사람이 빠져나간 복도는 한산했다. 귀족들이 다니는 통로에 접어들자 간간이 보이던 인적이 점점 드물어진다. 뛰어다니는 사환들이 눈에 띄었지만 그들은 렉시를 흘끗 보고도 도망치기 바빴다. 누가 봐도 수상한 모습이었지만 일반실에서 도망쳐 온 손님이겠거니 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뭐 불난 상황에서 직업의식을 불태우기란 어려웠을 수도 있고.
어쨌거나 그렇게 수월하게 자기 방문 앞에 도착한 렉시는 안으로 뛰어들었다. 나가기 직전 벌인 민망함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 뒤였다.
“로메인 경!”
그러나 방 안엔 아무도 없었다. 렉시는 당황했다. 로메인 경이라면 분명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 잠깐.
“…불!”
렉시의 얼굴이 희게 변했다. 빌어먹을, 내가 왜 이 생각을 못했지? 이렇게 큰 소동이 일어났는데 로메인 경이 방에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갑자기 머리가 아파지는 느낌에 렉시는 이마를 짚었다.
“…베일도 가져가셨구나.”
이쯤 되면 확실했다. 맙소사, 그는 지금쯤 화장실을 뒤지며 자길 찾고 다닐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그를 찾아서 나가야 했다. 렉시는 즉시 가발을 벗어 던지고 아까 보았던 글라스를 얼굴에 걸쳤다. 자칫 벗겨질 가발보단, 어쨌거나 이런 안경이 얼굴 가리기엔 용이했다.
―땡땡땡
꽤 시간이 지났지만 벨소리는 여전히 찢어질 듯 컸다. 렉시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로메인을 찾아 외쳤다.
“경! 로메인 경!”
이렇게 해도 들리긴 할까? 워낙 종소리가 크다 보니 자기가 아무리 소리쳐도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렉시는 포기하지 않고 로메인을 찾았다.
“경! 어디 있습니까! 로메인 경?! 저예요! 저 여기 있어요!”
렉시는 천천히 자리를 옮겨가며 극장을 뒤졌다. 사람들이 달아난 공간은 메뚜기 떼가 쓸고 지나간 밀밭처럼 어수선했다. 걷는 곳곳마다 사람들이 버리고 간 옷가지나 흔적들이 발자국처럼 남겨져 있었다. 그걸 천천히 되짚어 가며 렉시는 최대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은 장소를 찾아내고, 또 뒤졌다. 화장실도 몇 번이고 들어갔다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일까. 아무리 찾아도 남자는 안개처럼 그 거취가 불투명했다. 대체 어디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남은 곳은 거기뿐인데….”
이렇게 뒤졌는데 없으면 남은 곳은 일부러 멀리한 밀실 쪽뿐이다. 렉시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맘먹고 밀실 쪽으로 뛰었다. 도망친 곳에 다시 돌아가는 게 꺼려지긴 했지만 생각해 보면 그들도 그쪽으로 올 생각은 못할 것이다. 혹시나 오더라도, 로메인 경을 발견하면 곧바로 나서면 될 것 아닌가.
그러나, 도착한 밀실은 렉시의 예상과는 크게 달랐다.
“…이, 이게?!”
렉시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당황한 나머지 주위를 몇 번이고 둘러보았으나 자리는 맞았다. 단지 있어야 할 것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을 뿐….
정확히 말하자면, 그냥 밀실 자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렉시는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얼마 전까지 화려하고 향락이 가득했던 장소는 폐허로 변해 있었다. 다른 곳보다 화려한 문도, 넓었던 내부도, 기기묘묘한 것들이 가득했던 밀실의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없다. 그가 직접 보지 않았다면 여기 그런 장소가 있었다는 걸 믿지 못했을 것이다. 그곳엔 무언가 그곳에서 존재했었단 흔적조차 있지 않았다. 남은 것은 돌덩이와, 폐자재로 보이는 폐기물들뿐.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 있는 이곳은 방이 아니라 쓰레기장 같았다.
렉시는 아연해졌다.
대체 어떻게 하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일까. 그가 이곳에서 뛰쳐나온 건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이 모든 걸 없애 버릴 수 있었다고? 아니 그보다… 왜?
거기까지 생각하던 렉시는 순간 멈칫했다. 등 언저리로 써늘한 한기가 솟구쳤다.
설마.
“혹시…나 때문인가?”
만일 이 장소가 생각보다 더 불법적이었다면 말이 되는 상황이다. 위험한 일이 생기면 사람은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걸 들고 도망친다. 이건 들고 간 것이 아니라 파괴한 것에 가까웠으나, 그 본질적으로는 같다고 볼 수 있었다. 자신이 도망친 뒤 이런 상황이 생겼다면, 이 장소는 생각보다 더 은밀하고 위험한 장소란 뜻이다. 렉시는 바짝 마른 입술을 핥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이 난리가 났는데도 관련자가 아무도 없다는 건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뜻….
어째서 사환들이 정신없이 도망쳤었는지도 대충 알 듯했다. 은밀한 장소에 외부인이 들어갔다 사라졌으니, 불똥 튀기 전에 없애고 도망치는 수순이었을 거다.
“…아무래도 여기 더 있는 건 위험해.”
로메인과 달리 렉시는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단이 없었다. 그가 가진 재주라곤 도망치는 일뿐인데, 이 마당에 얼마나 도망칠 수 있을지도 불확실하지 않은가. 이렇게 그를 찾다 자칫하면 위험한 자들과 마주칠 수도 있었다. 당장 로메인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면, 이대로 재빨리 나가 몸을 숨기는 게 옳은 선택이었다. 아마 로메인도 이 선택을 옳다 여길 것이다.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 렉시가 큰일을 당하는 건 그도 원하는 바가 아닐 테니까.
“마차로 가자. 찾다 없으면… 분명 그쪽으로 오실 거야.”
마음을 먹었다면 움직여야 했다. 렉시는 즉시 통로 안을 빠져나갔다. 재게 달리는 발자국 소리가 복도에 가득했고, 렉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들어왔던 통로에서 곧바로 몸을 빼낼 수 있었다. 그대로 갔다면 그는 분명 그가 했던 계획대로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행운도 거기까지였다. 그가 통로 밖으로 나선 그 순간, 누군가 렉시의 어깨를 세게 옥죄고 뒤로 팔을 꺾었던 것이다.
“악!”
“잡았다, 이 빌어먹을 자식!”
렉시는 악 소리를 내며 몸을 굳혔다. 갑자기 가해진 폭력에 눈앞이 희게 변한다. 억세게 잡아챈 어깨가 마치 빠질 것 같이 아파 왔다. 렉시를 잡은 남자가 이를 갈며 그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런 쥐새끼 같으니. 감히 천한 것이 날 농락해?! 누가 시켰나. 네 주인이 누구냐!”
“…아악! 악!”
“건방진 놈 같으니. 어디서 감히 쥐처럼 엿듣고 빠져나가려고!”
남자의 목소리를 들은 렉시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건 분명, 자기가 따돌렸다 생각한 백작의 목소리 아닌가! 렉시는 빠져나가려고 몸을 비틀었지만, 그럴수록 백작의 악력은 세질 뿐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렉시의 턱을 자신 쪽으로 향하게 했다. 그는 거친 숨을 그르렁대며 렉시를 향해 음산하게 을렀다.
“고개 들어라. 너 같은 쥐새끼는 대체 어떤 면상을 가지고 있는 건지 내 친히 보겠다!”
“으…아!”
렉시는 바들대며 최대한 남자의 시선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곧 찌를 것 같은 시선이 렉시의 턱을 타고 올라왔다. 천천히 렉시의 얼굴을 살펴보던 남자의 시선이 차갑게 굳었다. 패트릭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에드너?”
“…!!”
들켰구나. 렉시가 퍼뜩 몸을 굳히자 남자가 확신한 듯 재차 물어왔다.
“어떻게… 어째서 네가 여기에 있지?”
“누…구신지는 모르나 저와 다른 분을 착각하셨군요. 저는 에드너라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게, 대체 무슨 무례인지 모르겠군요. 팔을 놔주십시오!”
“허. 뭐라고?”
백작은 헛숨을 내뱉었다.
“너 설마 이거 하나 썼다고 다른 사람 행세를 할 셈인가?”
“저는 에드너란 사람이 아니라니까요. 저는…!”
백작은 가타부타 하지 않고 렉시의 가면을 뜯어내듯 벗겼다. 가면에 붙어 있던 보석들이 짤랑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럴 수가….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지는 가면이 악몽 속 한 장면처럼 느렸다. 파랗게 질린 렉시의 얼굴을 본 백작이 빈정대며 지껄였다.
“이래도 아니라고 우길 텐가, 에드너 라몬테스? 그보다 그대, 대체 여기 왜 여기 있지?”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요 기레스 백작. 어떻게 이런 몰상식한 짓을!”
“몰상식?”
“그럼 이게 상식이 있는 짓입니까? 이런 폭력적인 행동이?!”
렉시가 씨근덕대며 눈썹을 바르르 떨자 백작은 입매를 굳혔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렉시를 노려보다가 하,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 이젠 귀족이시다 이거군. 좋아,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지.”
그는 거칠게 억류했던 렉시의 팔을 놓았다. 놓인 어깨 쪽으로 피가 돌면서 아픔이 더욱 커졌다. 부러지진 않은 것 같았지만, 필시 멍이 들 것이다. 단련하지 않은 육체는 조금만 강한 압박이 이어져도 쉽게 멍들었다. 렉시는 그렁그렁한 눈물을 애써 참고, 남자와 거리를 벌렸다. 그 모습이 마치 괴물을 피하는 신화 속의 미인처럼 보여 가련하기 그지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안쓰러운 감정이 들 것 같은 모습에 백작은 볼을 깨물었다. 분명 이자로 인해 자존심이 상했는데, 저 얼굴을 보는 순간 안개처럼 노여움이 흐려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그는 애써 들끓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비록 가발을 벗고 있었지만 입고 있는 옷은 아까 그가 좇던 이와 똑같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들었는지, 반드시 알아야 했다.
“어디까지 들었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요. 제가 뭘 들었어야 하나요?”
“아까 밀실에서 우리 대화를 듣고 도망가지 않았나. 계속 시치미를 뗄 셈인가?”
백작은 팔짱을 끼고 렉시를 날카롭게 훑었다. 혹시라도 얼굴색이 변한다면 그걸 꼬투리 잡아 탈탈 털어낼 것 같은 태도였다.
“…어처구니가 없군요. 저는 백작령에서 나온 이래 백작을 처음 보는 겁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모를 소리도 그렇고… 밀실은 또 뭡니까? 백작령에서도 느꼈습니다만 백작께선 정도를 모르시는 것 같네요. 절 그렇게 모욕하고 싶으십니까?”
렉시는 시치미를 딱 떼고 백작에게 대답했다.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태도만 보면 세상 떳떳한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백작은 기가 막혔지만 일단 입을 다물었다. 본인이 저렇게 아니라고 잡아떼는 데야 무슨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좋아. 말할 생각이 없다면 그렇게 해. 어차피 결국 말하게 될 테니까.”
“…억지도 그 정도면 대단하시군요. 겁날 것도 없습니다.”
의연한 렉시를 보며 백작은 삐딱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위로 올리고, 렉시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밀정 짓을 하러 온 게 아니면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지?”
“극장에 올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연극 보러 왔지요.”
“연극을? 설마 혼자 왔나? 그런 모습을 하고?”
렉시는 가림없이 드러난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고 머뭇거렸다. 이자에게 로메인과 함께 온 걸 말해도 되는 걸까 순간 고민이 된다. 하지만 결국은 밝혀질 일이었으므로 렉시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럴 리 없지 않습니까? 함께 온 사람은 지금 잠깐 다른 곳에 가 있습니다. 지금은 잠깐 베일을 벗었던 거고요.”
“함께 온 사람이라…. 이런 곳에 함께 올 사람이면 로메인밖엔 없겠군.”
“약혼자와 함께 연극을 보는 게 잘못된 일인가요?”
“내가 언제 잘못된 일이라고 했나? 헌데 조금 궁금은 하단 말이야. 대체 그대의 그 대단하신 약혼자는 뭘 하길래 그댈 홀로 둔 거지?”
“그건…당신이 알 바 아닙니다. 그리고 말해 줄 이유도 없지요.”
“왜? 약혼자가 사라진 미인에게 에스코트를 해 주기 위해 묻는 것일 뿐인데 너무 경계하는 것 아닌가?”
“약혼자가 있는 제가 다른 사람에게 에스코트를 청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알 만큼 아시는 분께서 참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시는군요.”
“…하.”
한마디도 지지 않는 모습에 백작은 점점 기분이 나빠졌다. 저 예쁜 얼굴만 아니었다면 당장 끌고 가 고문이라도 했을 텐데.
그는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렉시를 아래위로 훑었다. 짜증스러운 심기가 불쑥 솟을 때마다 저 얼굴이 화를 억누른다. 본래 미모가 뛰어났지만, 고급스러운 귀족의 옷을 입은 렉시의 모습은 그렇게 사람을 홀렸다. 보면 볼수록 스며드는 아름다움은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스라이 빛이 나고 있었다.
…그래, 그래서 내가 저것을 가지려고 했었던 거지.
떠올리는 순간, 남자는 순간 악심이 치솟았다. 자기가 가지려고 했다가 빼앗긴 것의 가치가, 이 순간 그의 배 속을 무딘 칼처럼 헤집고 있었다.
내가 먼저 발견한 것이었는데.
대체 내가 뭐가 부족해서 이걸 빼앗겨야 하는 걸까.
그것도 …그 빌어먹을 로메인 놈에게!
그는 이를 악물고 렉시를 노려보았다. 화를 억누르는 미모인 건 여전했지만, 로메인을 떠올리면 못 할 것도 없었다. 상처 입은 자존심은 무엇보다 우선한다. 그는 점점 이 자가 괘씸해졌다. 방금 한 말을 생각하면 더 그랬다. 정말 생각하면 할수록 건방지기 짝이 없는 자 아닌가.
내가 저에게 어떻게 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안면 몰수를 한단 말인가.
“기가 막히는군. 그래, 이젠 그럭저럭 괜찮은 남자를 건졌으니 과거의 남자는 이제 아예 없는 셈 친다는 건가?”
렉시는 놀라서 입을 벌렸다. 과거의 남자?
“과거의 남자라니요?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천박하기 짝이 없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 보지그래. 남작, 날 가지고 노니 어떻던가? 재미는 좋았나? 자신의 약혼자가 이렇게 천박하다는 걸 로메인 그놈이 아는가 모르겠군. 그놈이 보기보다 결벽적인 면이 있는데 말이야. 아, 그 외모와 몸이 있으니 그것 따윈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 생각했나?”
“…지금 대체.”
원색적인 비난에 렉시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천박이라고? 누굴 가지고 놀아?
“사람 매도하지 마십시오, 백작. 제가 언제 당신을 가지고 놀았단 말입니까? 저와 당신 사이엔 그 어떤 일도 없었습니다! 제가 왜 이런 모욕을 당해야 하는 것이지요?”
“발뺌하지 마. 고귀한 백작이 고작 상인 하나에게 절절매는 걸 보고 즐긴 걸 내가 모를 것 같았나?? 넌 날 가지고 놀았어.”
“뭐라구요?”
렉시는 어안이 벙벙했다. 살다살다 이런 매도는 또 처음이었다.
천박에 농락이라니…?! 그가 정말 백작의 마음을 가지고 놀았다면 억울하지도 않을 것이다. 허나 렉시는 전력으로 들이대는 백작을 단호히 거절한 기억밖에 없었다. 이건 무슨 방귀 뀐 놈이 먼저 성내는 행태란 말인가.
“백작, 저는 분명 백작의 구애를 거절했습니다. 제가 몇 번이나 거절했는지는 당신이 더 잘 알지 않습니까? 그 말을 듣지 않은 것은 당신이었고, 당신은 종내엔 떠나려는 제 말을 훔쳐 숨겨 놓기까지 했습니다. 이 이상 단호한 거절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요즘은 이런 것도 농락으로 칩니까?”
“단호라…. 남작의 단호는 나와 상궤를 달리하는군. 그게 어디가 단호한 거절이지?”
백작은 코웃음을 쳤다.
“남작, 단호한 거절이라는 건 이런 거야. 구애하는 상대와 식사자리도, 대화도, 그 어떤 것도 하지 않는 거지. 허나 자네는 상대와 식사를 하고, 차도 마시고, 술도 마셨어. 그런데도 단호를 말하다니, 본인이 생각해도 좀 염치없지 않나?”
이게 무슨 소리인가. 가만히 기억을 뒤지던 렉시는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기억해 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자는 설마 업무 때문에 만나서 밥 먹고, 차 마시고, 식사하며 마신 술을 가지고 망상의 나래를 펴고 있는 것인가. 지금 제정신인가?
“…그거 설마 마도구 구매를 위해 참석했던 만찬을 말하는 겁니까?”
너 미쳤냐???? 렉시가 온몸으로 거부감을 표시했다.
“백작, 제가 백작과 만찬을 몇 번 같이 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건 모두 마도구 거래를 위한 업무의 연장 아니었습니까? 대체 어떻게 그걸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까?”
“그것뿐이라면 내가 이랬겠나? 넌 구애하는 내게 거절한다 말하면서도 곱게 웃었지. 그대는 싫다고 하면서도 시종일관 내게 웃음을 흘렸어. 그리고 그 뒤 초대한 만찬에도 계속 참석했지…. 자 말해 봐. 이래도 날 농락한 게 아니라고 변명할 건가?”
이 침착하고 체계적인 개소리에 렉시는 대체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웃음이라고…? 그럼 그 자리에서 울기라도 해야 했단 말인가.
렉시는 정말로 억울했다. 물주랍시고 곱게 웃으며 거절한 걸 가지고 어떻게 하면 저렇게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가 있단 말인가. 아니, 무슨 뺨이라도 때려야 단호한 거절이야?
“당신은 예의도 모릅니까? 그건 예의를 차린 거지요!”
“정말 예의를 차릴 거면 거래도 거절했어야 한다. 여지를 주지 말았어야지! 남작은 거래를 계속할 거라고 말하는 이가 구혼을 진심으로 거부하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겠나?”
백작은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다.
“거래는 계속한다, 하지만 구혼은 거절한다. 그러면서 식사는 하고 또 계속 내게 꼬리를 쳐? 이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구혼을 거절하면 상업 활동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까?”
렉시는 기레스 백작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똑똑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사실 좀 돈 놈이었던 것인가. 공은 공이고 사는 사가 당연할 것인데 그걸 아니라 말하다니. 하지만 그는 렉시의 생각보다 훨씬 더 뻔뻔한 남자였다.
“당연하다. 구혼을 거절하면서 거래는 하겠다는 그 심산이 나는 더 이해가 안 가는군!”
“…….”
실로 기적의 논리였다. 아무리 말해도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도무지 이길 자신이 없다는 누군가의 말이 렉시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용서할 수 없는 건, 그렇게 나의 진심을 농락하고서 택한 게 로메인이란 사실이야. 네가 상인이어도, 남자여도 다 좋다고 한 나를 두고…!”
기레스 백작은 음습하게 달아오른 눈으로 렉시의 얼굴을 핥듯이 훑었다. 백작의 시선이 닿는 자리마다 더러운 오물이 묻는 것 같았다. 혐오감이 렉시의 얼굴에 번져 나간다. 백작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뜨거운 숨이 코끝에서 느껴질 정도로 근접했다. 기분이 순식간에 바닥을 쳤지만, 진짜 기분이 더러운 건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걸 렉시는 백작의 다음 말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그가 이죽거렸다.
“공비의 자리가 그렇게 탐이 났나?”
“…당신 지금 뭐라고….”
렉시의 얼굴이 순식간에 희게 질렸다. 짧은 말이었으나, 그 속에 담긴 저질스런 모욕은 그냥 넘길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 예쁜 얼굴 뒤에 숨어 있는 것이 교활하고 천박한 여우일 거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이 나조차도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인데 말이야. 그래, 로메인 그놈이 네게 넘어간 것도 무리는 아니야. 네 미모면 세상 누구라도 저항할 수 없을 테니…. 하지만 남작, 그건 실수였어. 네가 탐한 그 자리는 아무나 설 수 있는 자리가 아니고 하물며 남자가 될 수도 없다. 그 자리에 앉은 자는 반드시 아이를 낳아야 해. 공작가의 가신들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공비 따위는 인정하지 않을 테니까!”
렉시가 아연한 얼굴로 백작을 응시했다. 물론 오해가 오해를 낳는 이 상황이 어안이 벙벙해서 짓는 표정이었지만, 백작은 그게 다른 이유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는 득의만연한 미소를 지으며 성질 나쁘게 이죽거렸다.
“왜, 로메인 그놈은 다르게 말했나 보지? 만일 그렇다면 꿈 깨는 게 좋아, 남작. 애초에 그놈이 후보에서 제외되었던 건 바로 그것 때문이었으니까. 물론 네 덕분에 상황이 퍽 달라지긴 했지… 하지만 남작. 과연 현실이 그렇게 녹록할 것 같나?”
“…….”
렉시는 입을 붕어처럼 뻐끔거렸다. 차마 할 말이 없기도 했지만, 동시에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가 정말 비를 꿈꿔 로메인을 택한 거라면 이 남자가 하는 말에 렉시는 무척 상처 입었을 것이다. 사람의 약점을 후벼 파는 상대의 악의는 설령 그 내용이 빗겨 갔을지언정 영향력은 대단했다. 상관없는 것을 알면서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가 질리게 한다. 렉시의 안색이 시시각각 나빠지자 백작의 악의는 기운을 더해 날뛰었다.
“설마 사랑 타령으로 모든 게 해결되리라 생각한 건가. 안됐군, 기껏 유혹해 택한 것이 최악의 패가 돼서. 지금을 충분히 즐겨 보도록 해 남작. 어차피 너는 버림받을 수밖에 없어! 공작가의 소공이란 지위란 그런 자리야. 그날이 왔을 때 네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참으로 기대되는군.”
거절당한 남자는 다 저와 같은 것인가. 독설이 마치 칼날 같았다. 피부까지 와 닿는 악의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지만 렉시는 굴하지 않고 두 눈을 치켜떴다. 그냥 넘길 수도 있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남자의 입에 로메인이 담긴 순간, 욱하고 가슴 깊은 곳에서 노화가 솟구쳤던 것이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내 눈동자가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보다 날카롭게 빛나면 좋겠다. 렉시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로메인 경은 당신 같은 속물과는 다릅니다. 그분은 기사 중의 기사요, 함부로 약속을 남발하는 뭇 사람들과 다른 분입니다. 그분을 당신 같은 족속과 같게 보지 마십시오!”
“설마 그 같잖은 맹세 좀 받았다고 그렇게 기고만장해 하는 건가?”
“당신이 기사의 맹세를 알긴 합니까?”
기사도 아닌 주제에…. 렉시가 빈정거리자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기사도 아니면서 기사의 맹세를 모욕하지 마십시오, 기레스 백작. 그리고 왜 제가 공비 자리를 탐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처음 로메인 경을 보았을 때, 그분은 그저 동문을 수호하는 기사였을 뿐입니다. 전 그분이 공작의 조카인 줄도 몰랐습니다.”
이 모든 것은 진실이다. 실제로 그는 로메인이 공작의 조카인 것도 꽤 나중에 알았지 않은가? 렉시의 고백에 백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장에라도 뭐라 할 것 같아 렉시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저자의 개소리를 듣기가 싫었다.
“백작, 제가 왜 당신을 거절한 것인지 압니까? 사람이 다 자기 같다고 생각하는 그 오만함이 역겨웠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조건을 보고 연인을 고를지는 모르나, 저는 다릅니다. 제가 로메인 경과 약혼한 건 단 하나, 그분께 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했다고 말하는 렉시의 얼굴이 붉었다. 하지만 백작은 그런 렉시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단지 고백을 듣는 순간부터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었을 뿐이었다.
“…내가 역겨워?”
“네, 그렇습니다.”
렉시는 덤덤한 얼굴로 백작의 가슴에 철퇴를 꽂았다.
“당신은 제가 그분의 배경을 보고 택했다 생각하고 싶은가 봅니다. 그게 당신의 자존심을 지키는 방식인가요? 사람을 우습게 매도하지 마십시오. 전 요즘 같은 세상에도 기사 정신을 지키고 있는 그 고결한 기사도에 제 온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재차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백작. 제가 정말 배경만을 보고 배우자를 택했다면, 제가 왜 당신의 청혼을 거절했겠습니까?”
기레스 백작령은 부유하고 눈앞의 후계자는 그 지위가 탄탄하다. 상대는 자신에게 푹 빠진 상태였으니, 사람만 괜찮았다면 천하의 렉시도 약간은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렉시가 패트릭의 구혼을 받아들이지 않은 건 그 모든 것을 포함하더라도 상대의 인성이 너무나 글러 먹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쓰레기를 수집하는 취미가 없습니다.”
렉시의 혹평에 백작의 몸이 기어코 크게 휘청였다.
“…쓰레기라고…?”
“솔직히 쓰레기만도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쓰레기는 적어도 퇴비로는 쓸 수가 있지 않습니까?”
물론 종류가 한정되어 있긴 하다마는, 어쨌거나 그런 류의 쓰레기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살면서 이런 폭언을 언제 또 들어 보았을까. 렉시의 독설에 자존심이 박살 난 백작의 얼굴에 차츰 살의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감히… 감히…!”
수만 개의 말들이 가슴속에서 물고기처럼 자맥질하다 흩어지는 것처럼 백작은 한 가지 말만을 계속해 댔다. 감히. 가진 것이라곤 그 천박한 몸뚱아리뿐인 주제에, 감히, 감히 날 보고 쓰레기라고. 감히 날더러 역겹다고?
남자의 눈이 분노로 시꺼멓게 타오르자 렉시는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보다 남자가 렉시를 잡는 것이 빨랐다. 잡힌 손의 악력이 점점 세지는 걸 느낀 렉시의 얼굴에 고통이 그림자처럼 번져 나갔다. 실수였다.
“이 창녀 같은 …천한 놈이 감히 나더러 뭐라고…!!”
“잠깐 백…윽!”
그는 렉시를 벽으로 밀치고 목을 졸랐다. 억센 손아귀에서 숨구멍을 빼앗긴 렉시의 입술이 다급하게 열렸다. 목을 옥죄는 악력이 점점 세기를 더해 가자 렉시는 눈앞이 새카맣게 변했다.
“커, 커윽!”
“감히, 너 따위가―!”
렉시는 벽에 매달린 채 버둥거렸다. 필사적으로 남자의 팔을 할퀴며 발을 찼다. 그러나 이성을 잃은 백작의 눈은 반쯤 돌아 있었다. 꿈쩍도 하지 않는 백작의 몸뚱아리에, 렉시는 점점 의식을 잃어 갔다.
“죽어. 죽어 버려!”
“커…큭…!”
시야가 새카맣게 좁아지며 귀에 이명이 들려온다. 모자란 숨 때문에 머리가 멍해지고 있었다. 숨이 부족해진 렉시의 머리가 미친 듯이 아파 왔다. 갉작갉작 갉던 손가락에 힘이 빠지다 천천히 축 늘어졌다. 버둥대는 렉시의 몸이 서서히 축 늘어진다. 새까만 어둠이 밀물처럼 밀려와 렉시를 집어삼켰다.
암흑이었다.
.
.
....
“…….”
눈을 뜨자 고통이 밀려왔다.
미친 듯이 아파 오는 머리, 깔깔하다 못해 피 맛이 느껴지는 것 같은 목구멍. 렉시는 까무러칠 것 같은 아픔을 이겨내고 눈을 깜박였다. 희뿌연 안개 같은 것이 보이기도 했지만, 정신을 차릴수록 점점 앞이 밝아진다. 희미한 빛이 시야에 걸리며 어딘지 모르게 낯선 천장이 보였다.
무늬 없는 단색의 캐노피.
깨끗해 보이긴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결벽적인 모양새가 병자의 침상 같다…. 아니, 생각해 보니 그것이 맞았다.
뒤이어 돌아온 후각은 이 장소가 어떤 곳인지 렉시에게 확실히 알려 주었다. 지독한 고약 냄새에 렉시는 얼굴을 찌푸렸다. 온 사방에서 씁쓸하고 고약한 약 냄새로 가득했다. 여긴, 누가 보아도 병자의 침실이 맞았다.
“…이곳은.”
말하다 말고 렉시는 쿨럭거렸다. 목구멍이 바짝 말라 찢어질 것 같은 것과 별개로, 소리 내는 것조차 어려웠다. 렉시는 간신히 침을 삼켜 목구멍을 적셔 보았다. 그러자 뜯어질 것 같은 고통이 머리로 직격 한다. 렉시는 앗 소리도 내지 못하고 조용히 숨을 죽였다. 아픈 것은 목뿐만은 아니었다. 아픈 걸 깨닫자마자 온몸이 욱신거려 왔던 것이다. 목도 그랬지만, 전신도 후들후들 힘이 들어오지 않았다.
여긴 어디야.
빙빙 도는 머리 때문에 렉시는 현재를 정확히 가늠하기 어려웠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걸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리고 목은 왜 이렇게 아픈 거야.
힘없이 목 쪽으로 손을 가져다 대어 보던 렉시는 갑자기 흠칫했다. 자기 손인데, 목에 손을 대는 것에 이상할 정도로 거부감이 일었다. 그리고 그 거부감을 맞이한 순간, 밀물처럼 의식을 잃기 직전의 기억이 밀려왔다.
극장.
버나드와 패트릭.
밀실.
그리고, 그 앞에서 교살될 뻔했던 자신.
‘…죽지는 않았구나.’
두 눈이 뒤집어진 패트릭은 꼭 자기를 죽일 것 같았는데, 거기까진 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목을 조른 일이 없는 일이 되지는 않지만.
헌데, 여긴 어디일까. 혹시 패트릭이 날 납치했나? 렉시는 낭패감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그만 차갑게 얼어붙었다.
몸을 덮은 이불이 내려가자 보이는 자신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의 몸은, 나신 상태였다.
‘맙소사!’
렉시는 소리 없이 경악을 삼켰다. 이 순간 그가 느낀 감정은 필설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뒤이어 떠오른 가정은 그가 꾸었던 그 어떤 악몽보다 끔찍했다. 심장이 발끝으로 툭 떨어지는 것 같은 모멸감이었다. 렉시는 숨도 쉬기 어려워졌다.
신이여. 신이여, 설마!
두 눈이 홧홧하게 달아오르고 숨이 가빠졌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모든 것이 불처럼 타올랐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끔찍한 일들이 밀물처럼 다가왔다 썰물처럼 밀려갔다.
‘그, 그놈이 설마 나를…?’
렉시가 총각이긴 했지만 성적인 지식이 없진 않았다. 남자도 충분히 겁탈당할 수 있다는 걸 그는 지난 일들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온몸이 아프고, 목도 아프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깨끗했지만 속은 어찌 되어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남자인 그가 정절이니 순결이니 이런 것에 연연할 리는 없다. 허나 자존심은 무척이나 중요한 것이었다. 그건 이날 이때껏 온갖 일을 당하며 도망하던 그를 지탱하던 무언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방금 이 상황을 확인한 순간,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자존심이 끊어졌다. 파헤쳐진 심장 위로 모멸감이 솟아올라 렉시를 병들게 했다. 렉시의 두 눈에 송글송글 눈물이 맺혔다. 이 빌어먹을, 개 같은 자식.
감히 날, 날….
그때였다.
“―남작님?”
밖에서, 약간의 인기척과 함께 황급히 휘장이 열렸다.
렉시는 깜짝 놀라 나타난 사람을 보고 그만 말을 잊었다. 맺힌 눈물 너머 굴곡된 시야 속으로, 아까까지 계속해서 찾고 있던 사람이 보이고 있었다.
“로…”
“…맙소사, 드디어!”
그는 반색하며 렉시에게 달려왔다. 희게 질려 있던 그의 안색이 렉시를 본 순간 확 풀리는 게 눈에 보였다. 그는 격정적인 어조로 바닥 아래 무릎을 꿇으며 렉시를 바라보았다.
“걱정했습니다. 정말 걱정했습니다. 저는 당신이 영영 깨어나지 못하시는 줄 알고…!”
“으, 쿨럭…!”
여기 왜 당신이. 나는 패트릭이 데려온 게 아니었나? 무언가 말하려던 렉시는 순간 거세게 기침했다. 오랫동안 습기를 머금지 않았던 목이 갈라져 말하기가 힘겨웠던 탓이었다. 로메인이 서둘러 물잔을 렉시의 입으로 가져다 댔다. 렉시는 정신없이 물을 들이켰다. 적당히 미지근한 물이었지만 이 몸엔 차가운 생명수처럼 달았다. 이토록 비참한 와중에도 몸은 정직하구나. 자괴감을 느끼며 렉시가 물 한 잔을 다 비워 냈다. 렉시가 물을 다 마시자, 로메인이 렉시를 조심스레 부축했다.
“아직 몸이 정상이 아니실겁니다. 굳이 일어나려 하지 마십시오.”
“앉기만… 앉기만요. 머리가 정말 너무 아파요.”
간신히 뱉어 냈다. 그런 렉시의 애원을 로메인은 감히 거절하지 못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렉시의 몸이 드러나지 않게 몸을 모포로 둘러쌌다. 그리고 슬쩍 들어 자신의 몸에 기대게 했다. 그리고 어디선가 가져온 따뜻한 물수건으로 렉시의 이마를 살살 닦았다. 특히 눈가를 꾹꾹 누르는 것이, 아까 맺힌 눈물을 몰래 닦아 주려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고통이 심해도 남자가 우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 다정한 마음 씀에 렉시는 어쩐지 울고 싶어졌다. 렉시의 안색이 나빠진 걸 알았는지, 로메인이 다급하게 물었다.
“혹 고통이 심하십니까? 의원을 부를까요?”
“아뇨. …그보다….”
렉시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여긴 어디지요…?”
“이곳은 의원입니다. 공작저로 모셔야 했으나 상태가 위중하여 가장 가까운 곳으로 당신을 옮겼지요.”
“의원…? 여기가…요?”
의원. 순간 작게 싹튼 희망 하나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렉시는 더듬거리며 작게 물었다.
“저, 그럼 제 옷은…?”
“간밤, 땀을 많이 흘리셨습니다. 그대로 놔두면 크게 앓는다는 의원의 처치 때문에 부득이하게 환복해야 했지요.”
그랬구나. 로메인을 보자마자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이렇게 확언을 받으니 살 것 같았다. 렉시의 얼굴에 몰라보게 화색이 돌았다. 허나 로메인의 얼굴은 조금 굳어 있었다. 그는 렉시가 형편없이 누워 있는 것이 꼭 자기의 잘못인 것처럼 느끼는 것 같았다. 그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당신을 너무 늦게 찾았습니다….”
“절… 어떻게 찾으신 건가요?”
렉시를 안은 팔에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아마 로메인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기에 렉시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곧, 로메인이 천천히 상황을 설명했다.
“당신이 그렇게 나가시고 나서… 잠깐 고민했습니다. 따라 나갈까, 아니면 기다릴까…. 허나 얼굴도 가리지 않고 나가셔서 당신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당신을 찾고 있는데, 갑자기 불이 났다는 종소리가 울렸지요.”
그가 처음 뒤진 곳은 화장실이었다. 이것은 처음에 렉시가 그쪽으로 간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헌데 이 극장의 사 층까지 뒤져도 렉시가 보이지 않아 점점 걱정이 커지는 와중에 불이 났다는 종소리가 울려 퍼진 것이다. 그는 그 소리를 듣고 정말 혼이 빠진 듯 놀랐다고 말했다.
“불이 났다면 마땅히 매캐한 연기가 보여야 합니다. 하지만 어디서도 연기는 없었고 그저 사람들만이 복도로 쏟아져 나왔지요. 무언가 무척 수상했습니다. 당신을 빨리 찾아야 한다는 마음이 더욱 다급해졌지요. 하지만 그 어디서도 당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설마 미리 나가신 것인가. 나도 나가야 하나? 순간 고민이 들었습니다. 헌데 그때,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폭음이 들리더군요. 무언가 터지는 소리 같았습니다.”
―무언가… 터졌다고?
렉시가 감았던 눈을 뜨자, 깊게 침잠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로메인이 보였다. 렉시와 눈이 마주친 그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예, 바로 그곳에서 당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그렇게 만든 …그자도 목격했지요.”
그랬던 건가…. 렉시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가 말했던 폭음이란 필시 그 밀실을 부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무엇을 사용한 것이지는 모르겠지만, 기사가 간신히 들을 정도의 폭음이면 자신이 듣지 못한 이유도 이해된다. 굉장히 은밀히 부수고 떠난 것을, 로메인만 듣고 알아챈 것이니까. 자신이야 우연이 겹쳐 발견한 것이지만.
그보다….
“…절 이렇게 만든 그가 누군지 알아요?”
렉시의 말에 로메인의 눈이 칼처럼 단단해졌다.
“―압니다. 제가 패트릭, 그놈을 몰라볼 리 있겠습니까. 보는 순간 알았습니다.”
뒤이어, 뾰족하고 날카로운 기세가 로메인의 몸에서 일어난다. 렉시는 순간 몸을 굳히며 두려운 표정을 했다. 일반인이 감당할 수 있는 기세가 아니었는데 심지어 그는 환자이기까지 한 것이다. 그 변화를 눈치챈 로메인이 황급히 기세를 거둔 뒤에야 렉시는 간신히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로메인이 입술을 깨물며 서둘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당신을 배려하지 못했습니다.”
“괜찮아요 경. …저를 걱정하셔서 무의식적으로 그런 것인걸요.”
아마 자기라도 그랬을 것이다. 렉시가 이해한다는 말에 로메인의 턱이 위로 솟았다가 내려갔다. 치밀어오르는 무언가를 내리누른 그의 모습이 아까보다 평온했다. 노화를 어떻게든 이겨 낸 모양이었다.
“제가… 그자에게 공격당하는 걸 보셨나요?”
“보았다면 막았을 겁니다. 제가 갔을 때… 당신은 쓰러져 있었고, 패트릭 그놈은 도망치고 있었지요. 누가 보아도 그놈이 당신을 그렇게 만든 건 명백해 보였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도망치지 않았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동의를 구하는 눈빛에, 렉시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자가 …제 목을 졸랐어요.”
로메인의 몸이 순간 흔들렸다. 아마 짐작은 했을 것이다. 보이지는 않았으나 목은 몹시 아팠고, 필시 멍이 들어 있을 터. 허나 짐작하는 것과 실제로 그랬다고 듣는 것은 본래 와닿는 게 다른 법이었다. 로메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손등 위로 핏줄이 퍼렇게 솟아올랐다.
“그자가… 미쳤군요. 어떻게 감히 당신을…!”
“백작과는 우연히 마주쳤어요. 그리고 조금 …다퉜지요. 제가 그를 좀 모욕했는데… 설마 그가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거든요.”
알았더라면 안 했을 거예요. 제가 어리석었지요. 평소와 같았다면 하지 않았을 실수였노라 렉시는 말했다. 허나 로메인은 고개를 크게 저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 일에 있어 렉시의 잘못은 하나도 없었다.
“아닙니다. 애초에 소인배인 놈이니 당신이 모욕하지 않았더라도 다른 식으로 위해를 가하고도 남을 자입니다.”
“하지만….”
“하찮은 모욕을 당한 것 가지고 폭력을 쓰는 것 자체가 잘못입니다. 그놈이 괜히 기사가 되지 못한 게 아닌 것이지요.”
그렇게 말하는 로메인은 눈앞에 백작이 있었다면 당장에 요절을 낼 것처럼 화를 내고 있었다. 그의 노기충천한 얼굴엔 채 해소되지 못한 분노가 쌓여 있었다.
“그는 그럼 지금 어디 있나요?”
“…죄송합니다. 잡지 못했습니다.”
로메인이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인다. 저 해소되지 못한 분노엔 그자를 잡지 못한 자괴감 역시 섞여 있었던 듯했다.
“그자가… 생각보다 도망에 소질이 있었나 보네요.”
“…잡으려면 잡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허나 쓰러진 당신이 먼저였으니까요. 그때 당신은…숨이 멎어 있었습니다. 그런 당신을 두고 제가 어떻게 그자를 쫓아갔겠습니까? 그럴 정신조차 없었습니다.”
“…숨이 멎어요?”
“예. 그랬습니다.”
로메인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때를 반추하는 그의 두 눈엔 연유 모를 공포심마저 엿보이고 있었다.
“숨이 멎었다면… 죽는 거 아닌가요?”
이거 내가 혹시 죽었나? 허나 죽었다면 이렇게 몸이 아플 이유가 없을 것이다. 렉시의 질문에 로메인이 한숨을 삼켰다.
“그러니까 그때엔 분명….”
이렇게 말하고, 그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마치 단어를 고르는 것 같기도 했고, 혹은 표현하기 힘들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한참 망설이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제가 도착했을 때 당신께선… 숨이 멎어 있었습니다. 돌아가신 것처럼… 아니, 분명 돌아가신 상태였습니다.”
렉시는 입을 벌렸다. 지금… 뭐라고?
“제가… 죽었다고요?”
“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죽었다가… 되살아나셨다는 말이 옳겠군요.”
이것은 장난일까. 하지만 분위기도 그렇고, 내용 자체도 너무 진지했다. 렉시는 지금 상황이 무척 당혹스러웠다.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저도 제 말이 믿기지 않을 거란 걸 압니다. 허나 알아주십시오. 제가 근래엔 그저 문을 지키고 있었으나, 저는 본래 전투 기사입니다. 문을 지키던 이전엔 그 직분이 높아 의무적으로 수행하였던 전투가 퍽 많았지요. 때문에 저는 다른 기사들보다 죽음을 잘 아는 편에 속합니다.”
로메인이 굳이 전투를 운운하는 건 현 기사들 중 제대로 된 전투를 경험한 이가 드물기 때문이다. 제국이 마지막으로 전쟁을 한 것은 이십여 년 전. 그랜드 할루카 산맥 너머의 야만족들과 싸운 삼 년 전쟁에서 제국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것이 상처뿐인 영광이라는 건 모르는 사람들이 없었다. 포로도, 전쟁 배상금도 얻지 못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삼 년간 소비된 국력은 컸고, 제국 무력의 한 축이던 기사단들도 이때 숱하게 희생되었다. 기사를 키우는 데엔 시간이 걸린다. 때문에 황제는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라면, 기사들의 사사로운 결투를 금했다.
허나 아무리 막더라도, 이토록 광활하고 부유한 대지는 필연적으로 분쟁을 부르곤 한다. 기사의 명성이란 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로메인의 명성 역시 철의 길을 따랐을 것이란 건 자명한 일이었다. 피와 철로 이루어지는 대화란 기사란 직업이 생겨난 이래 그와 떨어진 적이 없었으니까.
어쨌거나 이 말의 요지는 이것이었다.
요는, 전투에 익숙하다 보니 죽음 역시 잘 알아본단 이야기 아닌가?
“…그러니까, 죽음에 익숙해져 있어서…그래서 제가 죽었다는 걸 알아채셨다는 건가요?”
“네.”
“착각이 아닐까요?”
“착각?”
“네, 산 자와 죽은 자를 혼동하는 일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나는 일이랍니다. 보통 큰 충격을 받았을 때 그러곤 하는데―.”
“…큰 충격을 받았을 때…?”
순간이었다. 렉시는 몸을 크게 움찔했다. 렉시를 받치고 있던 로메인의 손 하나가 불시에 렉시의 얼굴에 닿았던 것이다. 허나 놀랄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으니, 후에 생긴 일 때문에 렉시는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닿았던 로메인의 손가락이 렉시의 얼굴을 진득하게 쓰다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로메인, 로메인 경?”
“죄송합니다. 하지만 잠시 제가 다시 한번 확인하도록… 허락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부탁입니다.
“…….”
렉시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로메인의 손이 천천히 렉시를 더듬기 시작했다. 손이 의도하는 바는 무척 확실했다. 그건 렉시가 살아 있는 것인지, 죽어 있는 것인지를 확인하고자 움직이고 있었다. 렉시의 삶을 확인하는 과정은 천천히 이어졌다. 별처럼 보이는 눈동자, 목 아래서 팔딱이는 혈관, 코 아래 살짝 느껴지는 숨결 같은 것들.
그것을 확인하는 손가락은 부드러웠으나 동시에 무거웠다. 렉시를 내려다보는 눈동자는 촛불 아래 가려진 그림자처럼 일렁거리고 있었다. 닿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갈피를 잡지 못하는 감정이 렉시에게도 여실히 느껴졌다.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그의 얼굴을 매만지던 것은 어느 순간 다른 곳에 있었다. 그 끝이 맴도는 것은 심장 어름으로, 의심에 빠진 기사의 손가락은 기어코 렉시의 심장 소리를 찾아내고 있었다. 조금씩 맥동하는 혈류. 그를 확인하는 기사의 얼굴은 그 표변이 애매하여 심내를 짐작해 내기 퍽 어려웠다.
이건 대체….
얌전히 그에게 몸을 내주던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왠지 따갑다 싶더라니, 마셨던 물기가 가신 입술이 조금 말라 있었다.
“…사취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취요?”
“예. 죽음을 맞이하는 자들이 내뿜는 기운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 번이라도 전투에 참여해 본 기사들은 싫어도 이 사취를 알게 되지요. 전투가 끝나고, 산 자와 죽은 자의 판별을 합니다만 밤엔 그것이 어려우니까요. 어두운 밤엔 이것으로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리곤 합니다.”
처음 듣는 개념이었다. 그런 것이 있다니….
“그래서… 저희 기사들 사이에선 그것을 죽음의 키스라고 부릅니다. 죽음을 낭만적으로 부르는 건 퍽 고약한 일입니다만, 그래도 이렇게 하면 죽음의 여신이 당사자를 빗겨 가기도 한다는 속설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의 목울대가 위로 크게 솟았다.
“그때, 당신의 곁엔 그 사취가 맴돌고 있었습니다.”
“…….”
렉시는 잠시 침묵했다. 로메인의 손은 아직 그의 심장 위에 머물고 있었다. 두근 두근, 작게 맥동하는 심장의 세동은 여리지만 꾸준했다. 렉시는 로메인과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차분하게 질문했다.
“…지금 제 심장이 멈춰 있나요?”
“아니요, 뛰고 있습니다.”
“제게서 사취가 느껴지나요?”
“아니요, 그저 향기롭기만 합니다.”
“어때요. 살아 있지요?”
“네… 확실히.”
살아 있다.
그렇게 말하는 로메인의 얼굴에 비치는 것은 안심과 환희였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에서 순간 빛이 비치는 걸 본 자의 얼굴이 저러할까. 일순 작은 무언가가 퐁, 하고 파열하는 것 같은 감각이 렉시의 귓전을 울렸다. 렉시는 애써 눈길을 떨궈 냈다. 어쩐지 더 보고 있다면,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감출 수 없을 것 같았다.
“제 생각엔… 경이, 놀라서 착각하신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도 혼란하신 상태시잖아요.”
“제가… 말입니까?”
“예, 지금 경의 모습을 보세요. 시간이 지나고, 제가 무사한 지금도 이런 상태인데 그때라고 달랐을까요?”
동시에 렉시는 눈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엔 아직 심장을 매만지고 있는 로메인의 손가락이 있었다. 로메인은 자기 꼴을 보고 곤혹스러운 얼굴로 뒤늦게 손을 뗐다. 살아 있는 걸 확인한 뒤에도 더듬고 있었으니 그가 당황할 만했다.
“…죄, 죄송합니다.”
“아뇨, 그것 때문에 언급한 게 아닌걸요.”
렉시의 얼굴 위로 살짝 붉은 빛이 스쳐 지나갔다가 사라졌다.
“어쨌거나, 경께선 제 생명의 은인이세요.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혹 가능하다면, 대체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다지 좋은 생각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알고 싶어요 경. 아니, 알아야 할 것 같아요.”
대체 자기가 그때 어떤 모양이었길래 그가 이러는 걸까.
죽었다는 건 확대 해석일 것이나, 적어도 자기가 그에 준할 정도로 엉망이었던 건 분명하다. 로메인은 처음엔 꺼려 하는 모양이었지만 거듭된 청에 결국 입을 열었다.
“…폭음이 울리고, 저는 그 장소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당신을 발견했지요. 당신께선 백작의 발아래 쓰러져 있었고, 제가 놀라 소리치자 백작은 도망갔습니다. 저는 놈을 보았으나, 놈은 제가 누군지 보지 못했지요. 사람이 온 걸 알고 도망간 모양이었으니까요. 저는 당신에게 달려갔습니다. 꺾인 꽃처럼 쓰러진 당신의 모습은 처참했습니다. 목 쪽의 옷깃이 풀려 있었고, 그 틈으로 보랏빛의 멍이 보였지요. 목이 졸린 흔적이었습니다. 반듯하게 누워 있었으나 팔다리가 마치 나무처럼 딱딱해 보였죠. 얼굴은 잿빛이었고, 입술은 짙은 보라색이었습니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당시의 상황을 묘사했다. 듣는 내내 렉시의 안색은 굳어 있었다.
“찬 바닥에 드러난 손목과 그 손톱까지도 색이 바래 있었습니다. 막 죽음을 맞이하여 피가 흐르지 않는 시신의 모습 그대로였지요. 순간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고 입이 타듯이 말랐습니다. 마치 무딘 칼로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바닥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거려 도저히 서 있을 수도, 걸을 수도 없었습니다. 죽음이 당신을 앗아 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토록 무서운 것인 줄은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
생각보다 더 끔찍한 묘사였다. 렉시는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멍해졌다. 자기를 보고 죽었다 판단한 로메인이 이상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정신이 몹시 어지러웠지요. 바닥이 몹시 흔들리고 기이한 소리가 귓전을 강타했습니다. 거의 쓰러지다시피 당신께 다가간 저는 당신의 숨이 끊어졌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당신에게 숨을 불어 넣었습니다. 뒤이어 가슴을 압박하고, 다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숨을 불어 넣었지요. 얼마나 그렇게 했는지는 저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헌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당신이 다시 숨을 쉬고 있었던 겁니다.”
렉시는 듣다 말고 순간 로메인을 쳐다보았다. 죽었는데, 인공호흡과 심장 마사지를 번갈아 하다 보니 내가 다시 깨어났다고?
“…정말요?”
“네. 제가 왜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그 순간만큼은 신의 존재를 강하게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로 기적이었으니까요. 저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당신을 안았습니다. 치밀어 오르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지요. 서서히 숨을 쉬는 당신의 입술이 너무나도 기꺼웠지요. 차가웠던 입술에 서서히 온기가 차오르고 있었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제 입술 끝에 느껴지는 닿은 당신의 입…술이….”
그리고,
로메인의 말이 갑자기 뚝 끊겼다. 로메인의 말을 듣고 상황을 분석하던 렉시는 고개를 다시 퍼뜩 들어 위를 보았다. 그래서요? 그 말을 하기 위해서였지만….
그가 거기서 발견한 건 어쩐지 새빨간 얼굴을 한 채 입을 가리고 있던 한 남자의 얼굴이었다. 렉시는 깜짝 놀랐다.
“로메인 경? 어디 아프세요?”
“아닙니다. 저는, 당신의 숨을 확인하려고, 그러니까―.”
그는 어딘지 모르게 허둥대고 있었다. 손으로 감추지 못해 드러난 부분이 마치 사과처럼 새빨갰고, 이마엔 갑자기 여름을 맞이한 사람처럼 땀이 맺혀 있었다. 이상한 것은 렉시가 눈을 마주치려 하자 눈동자를 마주하지 못하고 다른 곳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다 그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 의, 의원을 데려오겠습니다.”
“…?”
뭐라 말할 새도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렉시를 곱게 눕히고 서둘러 방을 나섰다. 그 모습이 퍽 다급해, 남들이 보면 도망치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 렉시는 약간 어리둥절한 얼굴로 로메인을 바라보았다. 뭐야. 갑자기 말을 하다 말고… 왜 저러는 거지.
그래서 숨이, 대체 뭐 어쨌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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