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공작의 비밀
“로메인 드 데퓨탄 경, 알렉시아노 드 페르귄 남작 드십니다!”
쿵.
묵직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렉시는 잔뜩 긴장한 몸을 애써 풀며 로메인과 함께 문 안으로 들어갔다.
현재 프로하우스 공작이 쓰는 성은 달리아의 왕성이다. 본래라면 부수었어야 할 게 계속 있는 이유는 용이 성에 건 마법 탓이다. 부수다가 용이라도 오면 큰일이라 황제는 공작가가 이 성을 이어 쓰는 걸 허락했다.
오래도록 성세했던 왕가의 역사가 그대로 묻어나 있는 이곳은, 그래서 무척 아름답고 고색창연한 곳이었다.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안쪽에서 보이는 풍경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여긴… 숲?’
거대한 공간은 그 공간을 지탱하기 위해 기둥을 많이 사용한다. 용과 인연이 있기 이전에 지은 건물이라 이 거대한 알현실엔 기둥이 많았다. 현재는 신전에서나 쓰이는 건축 양식이라 고루해 보일 법하지만, 과거 건축가는 이 공간을 마치 숲처럼 보이게끔 예술혼을 불태운 모양이다. 기둥 하나하나를 나무처럼 만든 이 공간은 마치 태고의 숲을 연상시켰다.
기둥 위 높게 솟은 지붕은 아치 형태로 만들고, 그 위에 녹색 타일과 글라스를 섞어 발라 녹빛으로 빛나게끔 한다. 하늘에서 몇 줄기 비쳐 들어오는 녹색 광선도 아름답지만, 빛을 좀 더 수렴하기 위해 좌우에 낸 창이 상상 이상이었다. 시간이 지날 때마다 빛이 비치는 각도를 계산해 바닥에 일정한 모양의 문양을 만드는 모습은 실로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공간을 만들어 냈을까? 누가 했든 간에 그자는 세기의 천재였음이 분명했다. 이 장소는 고대에 존재했던 거대한 숲 그 자체였다.
짙은 녹의 나뭇가지 사이를 지나 비쳐 들어오는 아련한 빛, 좌우에 낸 스테인드글라스가 만드는 빛의 너울.
그리고 그 너울 끝 높은 단상 위에 공작이 앉아 있었다. 바위를 차곡차곡 쌓아 올린 것 같은 계단 위, 금과 은으로 만든 옥좌 위에서 방문자를 내려다보면서.
하늘에서 한 줄기 빛이 내려 공작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모습을 언어로 표현하라면 딱 하나밖에 없다.
왕의 위엄.
그 모습을 홀린 듯이 쳐다보던 렉시는 순간 얼른 눈을 내렸다. 로메인이 신신당부했던 게 뒤늦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뿔을 유심히 보지 말라 그랬던가.’
렉시는 눈을 내리깔며 스치듯 본 뿔을 되새겼다.
암적색의 머리칼 위로 자라나 있는, 흰빛의 뿔.
그것은 마치 땅 위에서 자라나는 어린 자작나무 같았다. 어두운 머리칼과 대비된 흰색 나무는 좌우에 대칭적으로 자라 안쪽에 엮은 관을 단단히 지탱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뿔은 크지 않았지만 마치 관처럼 머리 위를 둥글게 둘러쌌다. 재미있는 건 공작의 관도 좀 독특했다. 공작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관 대신, 이름 모를 보석과 금실들로 엮인 실관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렉시는 그게 무척 아름답고 기묘한 광경이라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흉하지는 않은데….’
사실은 흉하기보다는 매우 예쁘다. 하지만 그게 또 당사자가 되면 생각이 다를 것이기에 렉시는 떠오른 생각을 지웠다. 아무리 예쁘다 한들 머리에 난 뿔은 일종의 장애였다. 공작 정도 되니 쉬쉬하고 말지 어쭙잖은 귀족이나 평민에게 뿔이 났다면 그는 아마 몬스터나 괴물로 불리며 생을 마감했으리라. 지금에야 마법사가 없으니 별일 없겠지만, 예전 같았으면 마법사의 실험체로 팔려갈 수도 있었다. 타인과 다른 생김이란 건 생각보다 아주 스트레스 받고 힘든 일인 것이다.
‘슬슬 갈까.’
렉시는 천천히 걸었다. 그에 맞춰 옆에 있는 로메인도 걷기 시작했는데 속도는 렉시와 비슷했다. 렉시는 정신없어서, 로메인은 부끄러운 탓에 아직 손을 놓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뒤에서 따라오던 필립과 요수아가 서로 눈으로 대화했다.
‘공작님 알현할 때 손을 잡아야 하는 규정이 있던가?’
‘몰라요. 하지만 이상한 거면 로메인 경이 놓았겠죠. 저게 맞는 거 아닐까요?’
요수아와 필립이 멋대로 납득하는 가운데 아무도 못 말린 이 둘의 행동은 덕분에 옥좌 아래 끝까지 이어졌다. 그리하여 가장 높은 곳에서 이 향연을 실시간으로 보는 공작은 결국 극심한 내상을 입고 말았다….
“프로하우스의 공작, 기즈 드 프로하우스 전하를 페르귄 남작 알렉시아노가 배알합니다. 공작께 지혜와 평화가 영원히 함께하기를.”
“…기사 로메인 드 데퓨탄이 감히 전하를 배알합니다. 공작가의 번영과 영광이 불멸하길!”
렉시와 로메인이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자 공작은 못마땅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방금 본 장면을 생각하니 속이 들끓는다. 생각 같아선 그냥 나가 버리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 정도는 그도 알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둘에게 말했다.
“일어나라. 오랜만이구나. 로메인.”
“황공하옵니다.”
“황공하옵니다 전하.”
인사하느라 손을 뗀 두 사람을 본 공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렉시와, 그리고 벌겋게 달아올라 있는 로메인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 삐뚤어진 웃음을 내보였다.
“엉덩이가 무거운 로메인 경이 이 대전에 어인 일인가.”
“…송구합니다 전하.”
“송구는 무슨, 이렇게라도 얼굴을 보니 다행이지. 하마터면 얼굴도 잊을 뻔했지 뭔가?”
어투는 경쾌하나 내용은 차갑다. 정수리에 얼음물이 쏟아지는 듯한 느낌에 로메인이 고개를 들었다. 아직 붉은 기가 남아 있으나, 그는 아까 겪은 감정의 격류는 일정 부분 수습을 한 상태였다. 그는 눈을 살짝 뜨고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공작은 건강해 보였지만, 눈 밑에 있는 피로함은 숨길 수 없어 보였다.
‘…화가 나셨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갑자기 묵직한 것이 가슴을 눌러 왔다. 그것의 이름은 죄책감이었다.
어쨌거나 그는 한때 공작의 곁에서 많은 일을 해 왔다. 그런 그가 공작의 상태를 파악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옆에서 난처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시종장의 눈짓도 있었으니….
로메인은 어쩐지 한숨이 나왔다.
‘이해해 주신 줄로 알았건만…. 역시 많이 서운하셨던 것인가.’
사실 로메인은 근무지를 옮긴 뒤 공작의 이런저런 연락을 많이 받았다. 대부분 돌아와라, 일이 힘들지 않느냐, 몸은 건강하느냐는 일상적인 인사였다. 하지만 이런 연락 자체가 일종의 희망 고문 아닌가. 그랬기에 그는 공작의 연락을 받아도 모른 척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엔 너그러운 공작의 성정을 믿었던 그가 약간 도박을 한 것도 있어서, 문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는 자세를 바로 하고 공작을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빛으로 번뜩이는 녹색 눈동자가 따갑게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하, 삼 년 만에 뵙습니다. 한때 기체가 불민하시다는 소릴 들어 걱정이 많았습니다만 이리 강녕해 보이시니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네가 내 걱정을 다 해 주다니 별일이로구나. 너, 나는 별로 안중에도 없지 않았느냐?”
“…….”
로메인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설마 제가 그렇겠습니까. 공적으로 전하께오선 제가 검을 바친 분이고, 사적으론 외숙부 아니십니까. 그런 분을 제가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말은 잘하는군.”
공작은 작게 말한 뒤 입술을 비틀었다.
“우리 조카가 이 숙부를 그토록 생각해 주었다니 참으로 고맙군. 난 사실 네가 나 따윈 걱정도 하지 않고 있었다고 생각했지 뭐냐.”
“그런….”
로메인은 곤란한 얼굴로 공작을 보았다. 공작은 로메인의 곤란한 얼굴을 보고 얼굴에 화색이 돌며 신이 나 이 말 저 말을 했다.
“뭐 내가 널 모르겠느냐. 하지만 너 말고도 세상엔 별놈이 다 있더구나. 내가 쓰러졌을 때 병문안은 고사하고 연락도 않던 놈들이…. 내 그놈을 참 아꼈었는데 말이야. 솔직히 조금 서운했느니라. 하지만 그놈도 너처럼 참 바쁜 놈이었거든. 애가 일하느라 바빠서 못 온 걸 가지고 불평하는 건 어른이 할 일은 아니지 않겠느냐. 그래서 내 아무 말 않고 참았는데 말이야. 그런데 참 요 얄궂은 것이 막상 제 볼일 생기니 만사 제쳐 놓고 쪼르르 오지 뭐냐?”
주어는 말하지 않아도 이쯤 하면 누가 들어도 로메인이다. 공작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로메인을 겁박했다.
“뭐 걔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겠지. 우연처럼 일이 줄어들어서 온 걸 수도 있고. 아무렴, 그렇고말고. 그런데 참 나도 사람인지라 솔직히 기분이 나쁘더구나. 하지만 뭐 어쩌겠느냐? 이미 지난 일 이제 와서 꺼내는 것만큼 치졸한 게 없는데.”
“…….”
“뭐, 그렇다는 이야기다. 내가 이러고 살고 있단다. 그러니 강녕은 하나 안녕은 못하단 말이지. 늙으면 죽어야 한다더니 여기저기 치이고 무시나 당하고….”
어떤 미친놈이 공작성에서 공작을 무시한단 말인가. 그가 정말 무시를 당하는 거면 세상에 무시당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생각보다 넘을 산이 참 크고도 험난하구나. 로메인은 순간 말문을 잃고 말았다.
‘아니 누가 무시를 했다고….’
로메인은 억울했다. 그가 공작에게 연락을 하지 않은 게 맞긴 하지만 그건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였다. 공작이 후계자를 확고히 했다면 그도 맘 놓고 공작 병문안을 갔을 것이다. 하지만 공작은 그가 성을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후계 구도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허니 그가 어떻게 공작을 보러 갈 수 있었겠는가? 쓰러진 공작을 보러 예전 후계자 후보가 가는 장면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지는 그가 더 잘 안다.
나중에 경거망동하지 않아 고맙다고 한 건 싹 다 잊고 이리 안면 몰수라니….
‘앓고 나신 뒤 성격이 많이 강퍅해지셨다더니….’
이래서 노망났다고 소문이 났구나. 로메인은 한숨을 삼켰다.
그가 알던 공작은 이런 사람이다.
자신이 앉아 있는 옥좌의 무게에 마땅한 의무를 지며 절제하고 인내하는 고집이 있는 군주.
무관처럼 호탕한 면모는 없었지만 대신 시야가 넓고 사리 분별이 발라 만인의 존경을 받던 자.
헌데 그 근엄과 품위는 어디 가고 이리 경박한 이만 남아 있는가. 과거 그를 알던 사람들은 누구라도 당혹을 금치 못할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 공작이 능구렁이처럼 야로를 부리고 있다….
‘그놈들이 괜히 근위대에서 밀려난 것이 아니란 것이군.’
근위대가 단체로 전출된 미스테리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눈치라곤 약에 쓸래도 없는 놈들이니, 전하가 오락가락할 때 필시 성질을 건드리거나 했던 모양이지. 하기야 자신도 이렇게 당혹스러운데, 그놈들이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어 버텼겠는가? 제 밥그릇 못 챙겨 먹는다고 죽어라 욕한 부하들을 그는 관대하게 용서하기로 했다.
‘어쨌거나…이대로는 남작님이 거래하기 힘드시겠군.’
공작이 저토록 토라졌다니 이 일을 어찌해야 할까. 이 상황에서 렉시를 소개하고 마도구를 내놓으면 팔릴 물건도 안 팔릴 것이다. 예전의 공작이면 걱정도 안 하는데 지금의 공작은 솔직히 어디로 튈지 잘 가늠도 안 됐다. 로메인은 고민했다.
노망까진 아니어도 성격 괴팍한 어른은 어떻게 다루어야 하나….
‘역시 그 수밖에 없나.’
그는 들었던 고개를 약간 숙이고 매우 화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가 어쨌건 불쾌감을 표했으니 한번 기분을 맞추어 주겠다 마음먹은 것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모르는 척 편들어 주기.
그의 평소 생활을 반추해 보면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었지만 의외로 당사자는 덤덤했다. 내가 아닌 남, 그것도 렉시를 위한 일이라 생각하니 거부감이 놀랍도록 없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전하께 와 봤어야 하나, 일신상의 사정이 힘겨워 연락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이제 와 이렇게 연락드린 점 송구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 역시 그렇지?”
“헌데 저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자는 누구입니까?”
“응? 누구?”
“사죄는 들으셨습니까?”
공작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원래 없는 놈이었으니 사죄를 들었을 리가 없었다.
“그자가 누구인지는 모르나 참으로 파렴치한 작자로군요. 사죄도 아직입니까? 감히 공작령에 적을 둔 자가 전하를 무시하다니….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기에 전하가 쓰러졌는데도 불구하고 연락조차 없었단 말입니까? 전하가 쓰러진 일로 공작령이 얼마나 어수선했는데 가신이 감히 그런 일을 하다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입니다.”
“…?”
“아무리 바빴더라도 사람이 정도라는 게 있습니다. 전하께서 쓰러진 뒤로 벌써 수개월이 지났는데 그 기간 동안 찾아오긴커녕 연락 한 번 없다 자기 볼일만 보고 간 게 정녕 사실입니까? 실로 천하에 다시없을 후레자식이로군요!”
“후…후레…?”
공작은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천하의 공작이라도 여기서 그게 너라고 할 만한 용기는 없었다.
“이 모든 게 전하의 너그러움 때문입니다. 전하의 바다와 같은 아량을 이용해 제 안위를 꾀하는 모리배가 공작령에 있다니! 이건 좌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응, 그렇긴 한데…. 그놈도 바빠서 그랬다니 뭐….”
“아니, 아무리 바쁜 자라도 휴일이 없을 리가 없습니다. 설령 휴일이 없더라도 만들어서 찾아와야 하는 게 가신의 도리 아닙니까? 어찌 전하가 주시는 녹을 타 먹으며 그런 파렴치한 짓을 저지를 수 있단 말입니까? 가신의 자격이 없는 놈이 분명합니다.”
서릿발 같은 추궁이었다. 공작은 등에서 땀이 났다. 애초 화를 내려고 말을 꺼낸 것이긴 했으나 욕먹는 당사자가 저렇게 나서 자기 욕을 하는데… 뭔가 못할 짓을 하는 것 같았다. 공작의 얼굴에서 미소가 점점 사라졌다.
저놈 설마 일부러 저러나.
공작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저놈이 아무리 눈치가 코치라도 저게 자기 향한 말인 거 모를 리가 없는데. 그런데 본인이 자꾸 저렇게 나오니 그는 자꾸 헷갈렸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자기도 모르게 로메인을 옹호하고 있었다.
“에이… 파렴치까지는 아니란다. 사람 살다 보면 정말 급한 일이 생길 때도 있는 거지. 내가 그걸 이해 못 할 만큼 그렇게 고지식한 주군은 아니니라.”
“전하는 너무 너그러우십니다. 그런 몰염치하고 배은망덕한 이를 감싸 주실 필요 없으십니다.”
“아니 감싸 주는 것이 아니라―.”
“전하의 가신에게 전하의 안위만큼 급한 일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전하의 너그러운 인품이야 제 익히 알지만 이건 그냥 넘어가선 안 되는 일인 것입니다!”
‘아니야. 왠지 넘어가도 될 것 같아. 아니 넘어가는 게 좋겠다.’
이거 이상해. 너무 이상해. 뭔가 많이 이상한데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다는 게 더 이상하다. 공작은 이 기묘한 상황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조카야. 내가 생각해 보니 괜한 말을 하였던 것 같구나. 사실 그냥 웃자고 한 소리였느니라. 허니 그냥 못 들은 말로 하고…. 그래, 응 그렇지. 네 볼일부터 처리하자꾸나. 응?”
“전하의 마음이 불편하셨는데 그 일이 어찌 없던 일이 되겠습니까? 제가 비록 몸은 떨어져 있으나 마음만은 늘 전하의 곁을 지켰습니다. 전하가 마음의 불편함을 느끼신 건 다 그자가 전하께 믿음과 충절을 드리지 못한 탓이 분명합니다. 전하, 충심으로 간언하니 부디 그자의 죄를 물어 주십시오.”
“죄, 죄를 물으라고?”
“예. 무릇 가신이란 주군의 내심을 헤아려 그 불편함을 풀어 주어야 하는 자. 허나 그자는 주군의 마음을 어지럽게 한 죄가 있으니 가신 될 자격이 없다 할 것입니다. 허니 그자가 직분이 있는 자라면 파직하고, 검을 내린 자라면 검을 회수하십시오.”
듣다 못한 공작은 결국 버럭 소리치고 말았다.
“이 녀석! 무슨 그런 일로 파직에 검을 회수해!?”
“마땅히 그래야지요! 감히 전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였는데 어찌 그냥 넘어가겠습니까?”
공작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아니다. 아니야. 마음 불편한 적 없다. 그냥 내가 헛소리를 했어. 농담이었다.”
“…정말이십니까?”
“아 그렇다니까? 그냥 너 오랜만에 와서 내가 농을 했느니!”
누군가 그랬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고 싸움도 맞서는 사람이 있어야 나는 법이라고. 공작과 맞붙어 싸워야 할 로메인이 미리 선수를 치니, 그것은 마치 허공에 주먹질을 하는 형국이라. 거기다 공작은 방금 자기 입으로 그 일이 헛소리요 농담이라 말했다. 이는 결국 향후 이 일 가지고 입도 벙긋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망할 놈!
공작은 새뜩한 얼굴로 로메인을 흘겨보았다. 얻은 것 없이 괜히 힘만 썼지 않은가.
‘저놈이랑 엮이면 내가 정말 되는 일이 없어.’
그는 남작 일행에게 일어나라 손짓하다 머쓱한 얼굴을 했다. 멍청한 얼굴로 둘의 공방을 지켜보는 일행의 아연한 심정이 멀리서도 확연했던 것이다.
젠장. 그는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공작을 둘러싼 소문을 신경 쓰고 있었기에 뒤늦게 후회가 감돌았다.
‘…이러다 진짜 노망났다고 소문나면 정말 큰일인데.’
*****
공작의 염려와는 다르게 렉시는 공작이 노망났다 생각하지는 않았다. 과거를 모르는데 어찌 현재를 평가할 수 있겠는가. 물론 로메인에게 미리 예습 복습 받은 바 있었기에 공작의 옛 평판 정도는 대충 알고 있었다.
렉시는 그 평판과 자기 눈앞에서 벌어진 이 아리송한 툭닥거림을 합쳐, 공작에 대한 정보를 이렇게 갱신했다.
‘대외적으론 엄격하고 예민하며 품위를 중시하지만…. 사석에선 장난도 잘 치고 쾌활하게 지내는 분인가 보네.’
공작이나 로메인은 몰랐지만, 사실 배경 모르는 사람에게 이 두 숙질간의 대화는 의좋은 친인척 간의 정담처럼 보였다. 렉시는 속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로메인 경이 중개를 선 이유가 있구나. 생각보다 더 친밀하셨어.’
이거 배짱 장사해도 좀 봐주는 거 아닐까? 렉시의 내심에서 흑심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순간이었다.
“남작, 초면에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군.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전하, 외려 즐거운 기다림이었습니다.”
그는 재빨리 눈을 내리깔며 시치미를 뗐다. 선량하게, 무해하게. 공작은 그런 렉시를 뚫어지게 보다 입꼬리를 올렸다.
“기다림이 즐거운 사람이 어디 있겠나. 하지만 그렇게 받아들여 준다니 고맙군. 어쨌거나 반갑네 남작. 공작령에 온 걸 환영하네.”
“영광이옵니다 전하.”
“영광은 무슨, 과례는 됐어. 나도 편히 말할 테니 자네도 편히 있게나. 굳이 그렇게 예를 차릴 필요는 없어.”
렉시의 눈이 순간 커다랗게 떠진다. 옆에 있던 로메인 역시 깜짝 놀란 듯 공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렉시는 황송하다는 티를 감추지 못하며 공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전하. 어찌 이런 촌부에게 그런 귀한….”
“어쨌거나 자네는 로메인이 데려온 자이니…. 그만한 대우는 해 줘야 하는 거겠지.”
어쨌거나 로메인이 좋다고 사람 데려온 건 지금이 처음이기도 하고. 공작은 둘을 은근하게 흘기며 코를 흥흥거렸다.
“뭐 그렇다고 너무 좋아하진 말게나. 솔직히 말해서 나는 좀 아주 많이 보수적인 사람이야. 이런 일에 대한 편견도 매우 강하다네. 다만 자넬 데려온 저 녀석의 얼굴도 있으니…. 되도록 공정하게 자네를 대하려고 노력하겠단 뜻이고. 알겠나?”
“…황공하옵니다.”
묘하게 뼈가 있는 말이다. 렉시는 공작이 은연중 자신을 살피겠노라 공언하는 것을 눈치챘다.
‘권력자가 하는 말은 늘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더니…. 조카의 면을 세워 주면서 경거망동하지 말란 뜻을 이렇게 내비치는구나. 거기다 은근슬쩍 귀족이 직접 장사치 일을 하는 걸 힐난하기까지 하다니…. 역시 제국의 대귀족다운 능수능란함이다.’
렉시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귀족이 직접 상행 나서는 걸 싫어하는 분일 줄은 몰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대해 준다는 건 로메인 경의 이름값이 그만큼 크다는 것일 터.
‘잘해 보자.’
눈을 깜박이던 렉시는 옆에 돌처럼 선 로메인과 눈을 마주했다. 공작과 렉시의 짧은 대화를 살피는 그는 몸을 잔뜩 굳혀 세우고 있었다. 아마 어떻게 될지 몰라 조바심이 난 모양이다. 렉시는 로메인에게 싱긋 눈웃음을 쳤다. 이럴 땐 당당히 웃어 주는 것이 답이었다.
‘안심하세요 경. 이 정도는 아무 문제 아니랍니다.’
“…….”
렉시의 눈웃음을 받은 로메인의 귓가가 살며시 붉어졌다. 얼굴 전체가 붉어지지 않은 것은 그의 치열한 노력의 일환이었으나….
어쨌거나 문제는 그 모든 것들이 렉시는 몰라도 공작에겐 아주 잘 보였다는 데 있겠다. 난생처음 겪는 이 상견례 비슷한 것에서 무엇을 질문해야 하나 고뇌하던 공작은. 이 모습을 보고 순간 멈칫했다. 로메인 경이 얼굴 붉히는 모습과 그를 대하는 렉시의 태도에서, 그는 필설로는 형용할 수 없는 모종의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으흠?’
이건 뭐지?
누군가는 짐승 같다고 하는 그의 기민한 촉이 외치고 있었다. 이건 뭔가 아주 이상하다고.
‘뭘까, 이 속이 근질근질하고 개운치 않은 감정은….’
저 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뭔가 이상한 감각이 그의 뒤통수를 슬그머니 어루만졌다. 그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오묘한 대우주의 무언가가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공작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꿈틀거렸다.
자고로 세상엔 숨길 수 없는 것이 세 가지 있다.
첫 번째는 감기, 두 번째는 가난, 그리고 세 번째가 사랑.
감기는 기침 때문에 못 숨기고, 가난은 행색 때문에 드러나며, 사랑은 상대를 보는 눈 때문에 드러난다.
공작이 로메인의 연애를 혐오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그가 연애에 보수적인 옛날 남자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오해라는 것을 이 자리를 빌어 밝힌다. 기실 여기 있는 공작은 연애 없는 세상은 살 가치가 없다 여기는 극렬 로맨티스트였던 것이다.
요약하자면 그가 보수적인 건 상대의 성별이지, 연애나 사랑 쪽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기억할지 모르겠으나 그는 앞서 로메인이 이혼녀나 유부녀를 데려와도 괜찮다고 한 바 있다.
공작.
그는 단지 남자가 싫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강제 휴식 중이나, 한때 다양한 연애 사건으로 세간의 물의를 빚은 바 있는 높으신 분께선 단 아래 있는 연인들을 지그시 살폈다. 두 다리 세 다리 최대 열 다리 넘게 걸쳐 별명이 천벌 받을 문어발이었던 바람둥이의 혼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이 바람둥이는 거의 본능적으로 뭔가를 깨달았다.
‘저게 사귀는 사이라고?’
공작은 미간을 좁혔다.
물론, 둘 사이의 핑크빛이 없지는 않다. 무려 들어올 때 손도 잡고 왔지 않은가? 하지만 열렬한 연인치곤 공기가 너무나 건조했다. 자고로 연인이란 마구마구 끈적거려야 하는 법인데!
공작은 아리송한 심정을 감춘 채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이거 나만 이렇게 느끼나…?’
공작은 슬그머니 시종장을 바라보았다. 혹시 자기와 같은 느낌을 받고 있나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확인한 그의 신하는 드디어 노총각을 장가보낸다는 기쁨에 휩싸인 부모의 얼굴이었다. 즉, 매우 뿌듯하고 설레어하고 있을 뿐이었다. 공작은 그냥 착각인가, 하고 얼굴을 긁다 멈칫했다. 어떤 사실이 그의 뇌리를 강타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시종장 미혼이지?’
미혼. 사람에 따라 비혼이라고 하기도 한다만, 어쨌거나 그 뜻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자.
‘첫사랑에 실패한 뒤 연이어 계속 차였지….’
시종장이 연애에 얼마나 헛짓을 하고 다니는지는 그가 제일 잘 안다. 일적으로는 유능한 주제에 연애만 관련되면 무슨 그런 헛발질을 그렇게 하는지, 다시 생각해도 참 짜증이 나는 사실이다. 사실 첫사랑도 상대가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절대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만….
어쨌거나, 이 사실을 떠올린 공작은 현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축약할 수 있었다.
‘그렇군. 바로 그거였어!’
공작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는 채신없이 크흐흐 웃을 뻔한 걸 간신히 참아 냈다. 그는 자기를 착각하게 만든 시종장을 살짝 흘겨보다 로메인을 보았다.
‘사고치고 사귄 게 아니야. 저놈은… 저이에게 잘 보이고 싶어 여기까지 데려왔던 거군?!’
이런… 깜찍한 자식!
공작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치밀어 오르는 웃음을 차마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럼 그렇지, 저 꽉 막힌 놈이 사고부터 칠 리 없지! 연애 사건에 둔감한 시종장의 말을 믿은 내 잘못이야. 하지만 다행히도 난 이런 일에 있어선 아주 도가 튼 사람이라 이 말씀이야.’
공작은 뿌듯하게 가슴을 내밀었다.
‘손을 잡았으니 친구 이상이지만, 저 분위기를 보니 아직은 연인 미만. 즉 저 둘은 아직 사귀기 전 간을 보는 상태인 것이다!’
실로 깊은 오해였다. 거기다 그 진상을 따져 보면 이 둘은 연인은커녕 심지어 친구도 아닌 상태.
하지만 공작은 자신의 판단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바람둥이의 혼과 그릇된 편견과 자신감을 가진 자는 알아서 착각의 수렁으로 빠져 들어갔다.
‘자고로 구애의 정석이란 상대가 원하는 걸 들어주는 데서 시작하는 법. …그렇다면 저자는 정말로 마도구를 팔러 왔단 말인가?’
렉시가 소중하게 들고 온 상자에 그제서야 시선이 간 공작은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찼다. 저렇게 작고 초라한 상자라니…. 어째서 로메인이 직접 나섰나 알 법했다.
‘도무지 팔릴 것 같지 않으니 로메인 저것이 직접 나섰구나. 괘씸하군. 아무리 소문을 냈다지만 그래도 저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정작 내가 찾는 물건은 나오지도 않는데….’
사실 공작이 마도구를 모으는 이유는 따로 있다. 비밀스레 사라진 무언가를 찾기 위해 마도구 애호가를 가장했을 뿐, 그의 마도구에 대한 지식은 일반인과 비슷했다. 덕분에 렉시가 들고 있는 상자가 마도구인가 착각하고 만 공작은 기가 막히고 말았다.
‘내가 이 자리에 올 땐 다 큰 조카 떼도 들어줘야 한단 이야기는 없었는데 정말 너무하는군. 아아, 저걸 과연 내가 사 줘야 한단 말인가?’
슬슬 공작 짓에 회의감이 오려고 한다. 그간 쌓은 애호가 이미지가 아깝긴 하지만 솔직히 너무 사 주기 싫었다. 그냥 여기서 콱 싫다고 해 버려? 그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내가 거절한 뒤 저게 사재를 털겠다고 나서면 그게 무슨 헛일인가.’
그는 부르르 떨었다. 왠지 그가 사지 않는다고 하면 정말 저렇게 될 것도 같았다. 월급쟁이 기사에, 분가하지 않은 상태라지만 기실 로메인은 제법 부자였다. 요령 없는 아들이 걱정된 후작 부처가 미리 상속조의 유산을 제법 떼어 놨기 때문이다.
‘…안 돼. 그럼 간 보는 사이가 곧바로 애인 될 수가 있어.’
공작은 황급히 생각을 고쳐먹었다. 실로 오한이 드는 미래 아닌가.
‘그래, 쉽게 생각하자. 저자가 마도구를 팔려고 하는 건 돈이 필요해서일 것이다. 귀족이 직접 저러고 돌아다니는 것 보면 정말 급한 사정인 것이지.’
곰곰이 생각하던 공작은 음험한 생각을 품었다.
‘그래. 그렇다면 차라리 높은 가격으로 사 줘 버리자. 대신 뒤로 몰래 불러서 로메인을 거절하고 영지를 떠나라고 조건을 거는 것이지! 우아하게!’
이것은 동서고금 남녀노소 돈 싫어하는 자란 없다는 데서 착안된 돈 봉투 전법이다. 돈 필요 없는 자는 몰라도 필요한 자에겐 거의 백발백중을 자랑하는 악마적인 전법인 것이다. 조카와 헤어지는 대신 돈 봉투를 던지겠노란 공작의 수법은 우아하고는 뭐 백만 광년 떨어져 있었지만….
어쨌거나 수를 생각해 낸 공작의 머릿속은 희열로 가득 찼다.
‘좋아, 결심했어!’
두 주먹을 불끈 쥔 공작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쿵!
공작의 발소리에 렉시와 로메인의 시선이 풀렸다. 왠지 모르게 아쉬워 보이는 로메인을 보며 공작은 조소를 삼켰다. 그는 둘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그만 기다리게 하고 물건을 보여 주게. 마도구 팔러 온 거 아닌가?”
“아, 네! 전하. 지금 보여 드리겠습니다!”
렉시가 주섬주섬 가지고 온 걸 풀어 놓는 걸 공작은 태평한 얼굴로 보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시종장이 작게 속삭였다.
“저, 전하. 마도구라니요…?”
“자네는 조용히 하게.”
“저 두 분 날 잡으러 온 거 아닙니까?”
“…눈치 없긴.”
니가 그래서 여태 혼자인 거다. 공작은 혀를 차며 시종장을 무시했다. 덜컥거리며 가방을 연 렉시가 공작에게 마도구를 보여 주기 위해 높이 들었다. 공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마도구인가?”
“네, 그렇습니다.”
“흠, 보통은 물량으로 승부를 보는데 자네는 질로 승부를 볼 셈이로군. 상자 하나라….”
“예? 아, 아닙니다 전하. 마도구는 이 상자가 아니라 이 안쪽의 물건입니다.”
렉시는 안쪽을 보다 활짝 열어 공작이 보이게끔 앞으로 가져갔다. 동시에, 약간 어두워져 있던 공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가 전하께 보여 드릴 것은 저희 집안에 내려오는 기물들입니다.”
렉시가 가묘를 파훼해 발견한 마도구의 수는 대략 백여 점. 보통 유적지를 파헤칠 때 나오는 마도구의 수가 대여섯 점이니, 한 왕가의 무덤을 파헤쳐 나온 것치곤 대단히 많은 수량이라 할 수 있다.
그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왔으면 참 모두에게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 마도구가 본래 왕가에 바쳐진 마도구라는 것을…. 이것은 ‘왕가’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의미로, 과거 왕을 의미하는 표식 중 몇 개는 현재 황제를 의미하는 표식으로 변했다. 즉, 팔 수 없는 물건이라는 뜻이다.
‘결국 들고 온 건 열 점밖에 되지 않지만, 괜찮아.’
렉시는 가슴을 쭉 폈다. 비록 그 수가 줄긴 했으나, 렉시가 선별한 마도구는 그 하나하나가 가치를 따질 수 없는 보물이었다.
궤짝에서 꺼낸 첫 번째 물건을 보며 공작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그거… 주머니인가?”
“네, 전하. 맞습니다. 이것은 무한의 주머니란 것입니다.”
“무한의 주머니라?”
상당히 직관적인 이름이지만, 외관은 무척이나 평범하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상세한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렉시는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공작의 시선이 렉시의 손을 따라 오르락내리락 했다. 입구의 금줄, 열린 주머니, 그리고 그 안으로 쑥 사라진 렉시의 …한쪽 팔뚝. 당연하겠지만, 공작은 눈을 매우 홉떴다.
“??!!”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자면 주머니의 크기는 작다. 기껏해야 어른 주먹 두어 개 들어갈 정도로, 팔뚝은커녕 손목도 들어갈 동 말 동한 크기인 것이다. 헌데 순식간에 사람 팔뚝 하나가 쑥 들어가니 놀라 자빠지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할 일. 이 주머니 안으로 팔이 소실된 것 같은 광경을 보며, 공작은 허! 하고 한숨을 토해 냈다.
“밑 빠진 독이로군. 저렇게 작다니!”
“예, 전하. 이 주머니엔 공간 확장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주머니를 통과할 수 있다면 무엇이건 무한대로 넣을 수 있지요. 실로 밑 빠진 독처럼 말이지요.”
“아니, 그 말이 아닐세. 내 말은 그거 이름이 밑 빠진 독이란 이야기야.”
“예?”
공작은 끙 하고 팔짱을 꼈다. 설명이 퍽 귀찮은 모양이었다.
“사실 그 비슷한 걸 저번에 온 상인에게서 샀다네. 내가 산 건 큰 술독 같은 항아리였는데, 그 항아리에 바로 그런 마법이 걸려 있었지. 무한대로 들어가고, 뭘 넣어도 썩지 않는다던가? 그것도 비슷하지?”
“흐, 흡사합니다.”
“역시. 그 상인은 그걸더러 밑 빠진 독이라고 부르더군. 그래서 내가 밑 빠진 독이란 말을 한 걸세.”
“…하하하하. 그러셨군요.”
하하하. 렉시는 웃으면서 속으로 울었다. 똑같은 걸 이미 샀다니…! 이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인가. 설마 물품이 겹칠 줄이야…. 생각지도 않은 사태에 당황한 렉시였지만, 의외로 공작은 개의치 않았다. 외려 그는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팔걸이를 툭툭 건드렸다.
“상인이 말하는 걸 들어 보니 곡물 창고에 쓰면 좋을 것 같아서 그쪽으로 보냈지. 사실 물건만 있었으면 더 사서 실험을 해 봤을 텐데, 그자가 가지고 온 것은 그거 하나였다네. 그래서 조금 아쉬웠었지…. 똑같은 물건이 아니긴 하지만 자네 것도 제법 괜찮아. 아니 어떤 면에선 더 실용성이 있어 보이는군. 그건 사람이 들고 다녀도 좋을 크기 아닌가?”
“!”
이미 산 것이 있다고 새로운 물건을 사지 않는 것은 패기 없는 자나 하는 일. 취미를 위해 주머니를 아낌없이 여는 공작의 행동은 실로 사치의 귀감이었다. 이것은 참으로 이로운 돈지랄! 렉시는 크게 안도했다.
“그럼, 구매하시겠습니까? 이 주머니의 가격은―.”
“그 주머니는 살 건데, 가격은 나머지를 다 보고 나서 정하도록 하지. 설마 하나하나 다 가격을 매길 셈인가?”
일단 보고 한꺼번에 구매하겠노란 소비 형태마저 대범하기 그지없다. 혹시 공작이 맘 바꿀까 두려웠던 렉시는 얼른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전하. 그럼 다음 물건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간 했던 개고생은 다 이날을 위해 겪은 것인 건가 보다…. 렉시는 물건을 꺼내며 개 같던 지난날에 안녕을 고했다.
*****
“대체 뭣 하고 있는 거지? 아직도 못 알아냈나?”
휙!
거대한 의자가 하늘을 날았다. 던진 것은 방금 성질을 부린 남자로, 타는 것 같은 붉은 머리가 인상적인 미남이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는 그의 폭급한 성격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화려한 차림새는 그의 신분을 짐작케 했다. 그가 던진 의자의 궤적 끝에는 시종들이 있었지만, 시종들 누구도 감히 의자를 피하지는 못했다. 오랫동안 남자를 모셔 온 시종들은 남자의 더러운 성깔머리를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격이 워낙에 지랄맞은 이 남자는 시종이 피하면 한 대 더 때릴 위인이다. 피해서 더 맞느니, 차라리 지금 좀 맞고 끝내는 게 올바른 판단인 것이다. 그리하여 의자는 그대로 시종들을 향해 낙하했고,
콰직!
하고 섬뜩한 소리와 함께 시종들 머리를 깼다. 매우 튼튼한 의자였다. 머리에서 피가 줄줄줄 흘렀지만 신음 소리는 없었다. 누군가 흘리는 신음이 남자를 자극하는 방아쇠가 된다. 이것은 남자를 모시게 된 뒤 계속된 폭력의 연쇄였다.
“무능한 것들!”
쾅!
남자가 재차 뭔갈 던졌지만 다행으로 이번엔 빗겨 나갔다. 시종들은 몸을 움츠리며 이를 악물었다. 공작령의 시종직은 매우 선망받는 직업이었지만, 이들의 눈 안에 자리한 것은 체념이었다. 폭력은 사람을 병들게 만든다. 이 폭력의 연쇄에서 벗어날 길은 단 한 가지. 시종직을 포기하고 공작령을 나가는 것뿐이었지만…. 문제는 그걸 시도하면 나가는 건 고사하고 저 뒤끝 쩌는 남자에게 잡혀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대체 우리 팔자가 언제부터 이렇게 개 같아졌단 말인가…?
“어떻게 된 것들이 하나를 제대로 하는 게 없어. 놈이 오면 곧바로 내게 데려오라고 한 건 아주 까먹은 모양이고!”
“…송구합니다, 공자.”
“송구해야지, 아무렴. 니들이 일을 못해서 이 지경이 된 거니까. 그래! 아버지를 만난다는 놈을 빼 오는 건 힘들 수도 있다 치자. 아직은 놈을 추종하는 자들이 곳곳에 산적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는 왁 하고 고성을 내질렀다.
“여자는 아니잖아! 내가 어려운 걸 명했나? 놈은 어려워도, 놈과 함께 온 그 여자! 난 그저 그 여자가 누군지 알아 오라 했을 뿐이야. 겨우 여자 이름 하나 알아 오는 걸 못해서 날 이렇게 바보로 만들어?”
“…송구합니다.”
“송구, 송구, 송구, 송구! 닥쳐! 송구한 줄 알면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어서 가서 그게 누군지 알아내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게 뭐가 어렵다고 여태 알아내질 못하는 거지?!”
“기, 기록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뭐?”
남자가 도끼눈을 떴다. 시종은 얼른 첨언했다.
“공작령에 들어오는 모든 이들은 기록을 남깁니다. 평민, 귀족, 심지어 노예까지도 그 수와 이름은 적게 마련입니다. 헌데 이 여인은 그 어디에도 출입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귀족의 여인인 것은 분명하온데, 그 외는 오리무중입니다.”
“확실해? 동문도 제대로 살펴본 건가. 그놈이랑 왔으면 동문을 지나왔을 것 아닌가!”
“모두 살펴보았고, 확실합니다. 동, 서, 남, 북 모든 문의 출입 기록을 살펴보았으나 그와 같은 여인이 공작령에 들어왔다는 기록이 전무합니다.”
남자가 싸늘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 여자는 얼굴을 가렸다. 기존에 온 사람이 얼굴을 숨기고 왔을 가능성은?”
“공작령에 들어온 귀족 여인의 수는 지난 한 달 동안 총 다섯 명입니다. 그중 셋은 모두 한 가문의 안주인들이라 신원이 확실하고, 나머지 둘은 만삭의 임부들로 오늘 본 그 여인과는 전혀 다릅니다.”
“공작령 내에 들어왔다면 숙소를 잡았을 것 아닌가. 그쪽은 아예 없나?”
“이들이 타고 온 마차가 데퓨탄 후작의 전용 마차였습니다. 아무래도 공작령에 들어온 즉시 후작저에 가서 머무른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목격자 역시 전무한 상태입니다..”
“목격자도 없다, 이름도 없다…. 하! 그럼 내가 오늘 본 게 귀신이란 소린가?!”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지금으로선 귀족 여인이란 것 외엔, 알 수 있는 것이 없사옵니다. 호명관의 명단을 입수하면 확실할 것이나 호명관은 확실한 전하의 사람입니다. 섣불리 매수하다가는 큰 경을 칠 것이옵니다.”
부들부들 떨던 남자는 화를 못 이기고 책상을 걷어찼다.
젠장!
“교활하기 그지없는 년이로군. 그래, 그 정도 담이 되어야 날 눈앞에서 농락하고 비웃을 수 있는 거겠지.”
여자가 사라진 뒤 곧바로 나온 터라 남자는 로메인과 여자 사이에 어떤 소문이 돌고 있는지 듣지 못했다. 그가 여인의 내력을 찾는 이유는 감히 자신을 비웃은 여자에게 본때를 보여 주기 위해서다. 그의 매무새를 보며 슬며시 비웃는 그 눈웃음을 생각하니 자다가도 열이 뻗칠 지경이었다.
“…좋아. 하늘에서 떨어졌건, 땅에서 솟았건 이젠 상관하지 않겠다. 너희는 지금 즉시 알현실에서 빠져나오는 문으로 가라. 그리고!”
남자는 두 눈을 번뜩이며 시종들에게 명했다.
“알현이 끝나면 그 여자를 곧바로 빼돌려 내게 데려와. 알겠나?”
시종이 경악했다.
“공, 공자. 전하의 알현객을 빼돌리는 것은 전례 없는 일로서, 공작 전하의 심기를 거스를 가능성이 있습니다.”
“흥!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
남자는 비열하게 웃으며 두 눈을 빛냈다.
“나는 곧 공작령의 유일무이한 후계자가 될 거야. 그렇게 되면 난 아버지의 병환을 근거로 공작위를 곧바로 승계할 거다.”
어쩔 수 없이 공비와 결혼한 공작은 공비의 세를 직접 견제했다. 자신의 영지에서 황제의 힘이 강해지는 것을 염려한 그는 공비를 멀리하고 그 아들마저 멀리한다. 이 두 부자간의 대립은 실상 공작과 황제의 대리전이었던 것이다. 여태까지는 능력 좋고 배짱 좋던 공작의 승리였지만….
“이미 공작가의 가신 반 할 이상이 우리에게 붙었다. 이젠 아버지도 이 흐름을 어쩔 수 없어. 알았나?”
공작의 하나뿐인 아들이자 미래의 소공자, 버나드 드 프로하우스는 야망에 불타는 얼굴로 시종에게 명했다.
“가라. 가서 그 여자를 데려와!”
이렇게 공작성의 어딘가에서, 렉시를 여자로 착각한 누군가가 그를 잡아 오라 펄펄 뛰고 있을 무렵.
공작에게 물건을 팔고 있는 렉시는 현재 매우 감격 중이었다.
“좋군, 아주 좋아. 그것도 사지!”
“그것도 마음에 드는데. 보호의 종이라. 그것도 사겠네.”
“굉장히 재미있는 물건이로군. 길을 찾아 주는 지팡이라. 아주 재밌어. 그것도 내가 사지.”
“마법 검? 내가 검을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지?”
“시들지 않는 장미? 관상용으로 딱이겠군. 아주 좋아!”
놀라운 구매력이다. 렉시는 얼이 빠졌다. 뭐지, 이 엄청난 결과는?
‘이럴 수가. 나는 그간 엉뚱한 곳에서 헛고생한 게 아닐까?’
그가 공작을 마지막 타깃으로 삼은 건 귀족 신분을 드러내기 싫어서다. 신분이 드러나면 집안이 드러나고, 그러면 렉시 집안이 작위를 저당 잡힌 것이 알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제국은행이 마수를 드러내고 있지는 않았다. 렉시가 대놓고 이러고 다니는 걸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주인 자기가 직접 나서 마도구 팔고 다닌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제국은행이 훼방을 놓고 다닐 게 뻔했다.
‘몇몇 영지엔 이미 은행의 협조 공문이 갔다고 들었어서 더 조심스러웠던 건데…. 내가 잘못 생각했던 걸까?’
제국에서 돈 좀 있는 귀족들은 죄다 제국은행과 사업상 한 다리를 걸친다. 종이로 된 어음의 지불 보증은 제국은행이 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제 다음으로 부유하다고 알려진 영지의 주인은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세상에.
‘그래, 차라리 그냥 빨리 팔고 치고 빠지는 게 나았겠구나. 공작 정도 되면 제국은행은 별것도 아니었구나. 내가 전략을 잘못 짰어. 괜히 고생했구나!’
렉시는 자기가 너무 몸을 사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빨리 팔고 돈 받고 빚 갚으면 제국은행 따위 신경 쓸 게 없었던 것을…. 뒤에 있는 필립이나 요수아 역시 같은 생각인지, 뒤통수가 아주 뚫어질 것 같았지만 그는 애써 무시했다. 양심이 조금 찔렸지만 어쩌겠는가?
‘고생은 자기들 혼자 했나? 나도 같이했어! 거기다 원래 첫 끗발이 개끗발이라잖아. 처음에 좋았으면 끝이 나빴겠지!’
어쨌거나 렉시는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바야흐로 빚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구멍이 보였기 때문이다. 기나길고 먼 길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역시 죽으란 법은 없었다.
‘아직 전하가 다 사진 않았지만…. 무조건 모든 가격은 천만이다. 천만 크레아!’
천만, 아무리 공작이라도 솔직히 큰돈이다. 가격을 들으면 어느 정도 조정하자 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재수 없으면 안 산다 하고 어깃장을 놓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렇게 마도구를 맘에 들어 하는 사람이 손바닥 뒤집듯 태세를 전환할 리는 없을 것 같았다. 거기다 공작 체면이 있지 설마 깎아 달라고 할까?
그는 서둘러 대망의 마지막 물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것만 다 보이면 이 기나긴 대업도 끝이었다. 렉시는 검붉은 비로드로 장식된 상자를 꺼내 들었다.
“이것이 오늘 보여 드릴 마지막 물건입니다.”
이것은 렉시가 가지고 온 것 중 가장 희귀하고 귀중한 것이다. 이 물건의 정체를 안 렉시조차 순간 대단히 놀랄 정도로, 아마 이런 사정이 아니었으면 절대 팔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이 마지막의 마지막이 될 때까지 이 물건 하나만큼은 팔까 말까 고민했다. 렉시가 꺼낸 검붉은 비로드 상자를 보며 공작의 눈썹이 위로 슬쩍 올라갔다.
“보여 드리기 전에 말씀드리자면, 전하께서도 이건 처음 보는 물건일 겁니다. 급한 사정이 아니었다면 저 역시 이 물건을 팔 생각은 못했을 테니까요. 감히 단언하건대, 전 제국에서 이와 같은 물건은 또다시 없을 겁니다.”
여태도 열심히 광고에 열 올리긴 했지만 지금 하는 말엔 렉시의 진심이 서려 있다. 말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진정성이 아주 설득력이 넘치는 것이다. 슬슬 울리는 렉시의 변죽에, 공작은 물론이고 시종장까지 단박에 집중했다.
“그렇단 말인가? 그렇게까지 귀하다 말하는 물건이라니 내 무척 궁금하군. 지금까지 자네가 내게 보여 준 물건보다 그게 더 귀하단 말인가?”
“물론입니다 전하. 앞선 것들을 모두 합쳐도 이것 하나만 못합니다. 물론 물건의 가치라는 것은 개인의 가치 판단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만… 이것은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최고의 물건이라고 자부합니다.”
렉시의 단언에 공작의 눈썹이 슬쩍 꿈틀댔다.
“자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니 굉장히 궁금하군. 폐하조차 가지고 있을 리 없는 물건이라 …대체 그것이 무엇이지?”
“―지금 보여 드리겠습니다.”
렉시는 천천히 조개처럼 다물린 상자를 천천히 열었다. 달칵, 열자마자 은은한 빛이 마치 후광처럼 상자 주변으로 동그랗게 뜬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렉시는 침을 꿀꺽 삼켰다.
“피의 반지라는 물건입니다.”
피의 반지.
이름은 좀 험악하지만 그 실체를 알게 되면 납득하게 되는 이 물건의 쓰임은 아주 독특하다. 이 반지는 주인의 피, 즉 혈연을 알아내는 물건으로 가문의 승계 구도를 확인할 때 쓰였다.
“가장 강력했던 마법사가 한 왕가에 바친 물건으로 이 물건의 원주인은 그 나라의 전대 왕이었습니다. 당시 그 왕국은 갑자기 모든 왕위 계승권자가 사라진 재난으로 자칫하면 사분오열될 위기에 서 있었습니다. 그걸 이 반지로 넘겼지요. 원주인은 죽었지만 그 피를 기억하고 있었기에 반지가 왕가의 적법한 계승자를 찾아 왕국은 위기를 넘겼던 것입니다.”
귀족들이 가문에서 가장 중요하다 여기는 것 중 하나가 제대로 된 대를 잇는 것이다. 비단 저런 사고로 후계자를 잃은 이에게 제대로 된 자를 찾아 줄 뿐만 아니라 배우자의 부정으로 태어난 아이도 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반지는 매우 유용했다.
“말하자면 친자 확인 마법이 영구적으로 걸려 있는 물건이지요.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시전하는 마법이기에 강력한 마법력이 필요한데, 이 물건을 만들어 낸 마법사는 이 물건을 만들고 몇 년간 마법을 제대로 쓰지 못했습니다.”
당시 가장 강력했던 마법사가 일시적으로 마법을 쓰지 못했을 정도의 마도구다. 이런 물건이 세상에 둘 이상 있을 리 없었다. 더더군다나 이 반지는 주인이 원한다면 타인에게 소유권을 이전도 해 줄 수 있다. 괜히 렉시가 팔겠노라 가지고 온 게 아닌 것이다. 렉시는 아까운 마음을 감추며 반지를 들어 보였다.
“사실 그것 말고도 보석 자체로서의 가치도 높습니다만…. 어떻습니까?”
“…….”
반지를 보는 공작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었다. 여태 싱글거리던 얼굴이 굳었다는 건 역시 놀라서일 터. 하긴 이 물건의 진가를 알아보면 누구라도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릇 귀족이라면 누구라도 가지고 싶어 할 물건임엔 틀림이 없지 않은가. 가볍던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사시겠습니까?”
하. 공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맙소사.”
뜻 모를 말이나 속내는 확연하다. 반지를 보는 공작의 얼굴은 이성이란 게 홀랑 날아간 사람처럼 보였다. 누가 봐도 보물에 대한 열망인지 갈망인지 모를 눈빛을 활활 태우는 그의 얼굴은 흥분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공작과 마주한 렉시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는 없어, 그는 자기도 모르게 뿌듯함을 느꼈다.
‘이 대장정의 끝이 보이는군. 아아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눈빛으로 사람을 어찌할 수 있다면 렉시는 필시 지금 불타올랐다. 미모가 아닌 물건으로 이런 시선 받는 게 얼마 만인가? 이제 남은 것은 돈 받아 빚 탕감 후 집에 가는 일뿐이었다. 길고도 긴 여정이었다. 영지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는구나! 돌아가면 일단 무조건 석 달 열흘은 잠만 자고야 말 테다…. 이런 생각을 하던 그는 뒤이어 외친 공작의 말에 순간 숨을 멈췄다.
“근위대! 지금 당장 저자를 잡아 가둬라.”
뭐?
“저, 전하?”
렉시는 순간 자기가 잘못 들었나 했다. 잡아? 누굴? …나?
왜???
“드디어 잡았구나. 이 도둑!”
도, 도둑?!
챙챙챙!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근위대들이 렉시 일행을 감싸고 둥글게 압박했다. 다들 놀랐지만 제일 놀란 건 로메인이었다. 갑작스런 공작의 위협에 로메인은 대경하며 렉시 앞에 나서 그를 감쌌다.
“전하!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경거망동하지 마라 로메인! 저자를 감싸면 반역으로 간주하겠다!”
“예? 이 무슨!”
냉엄한 목소리에 로메인이 당황하는 사이 근위대가 그를 제압했다. 필립도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사람 넷이 꽁꽁 묶였다. 렉시는 황황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 무슨 무도한 짓이란 말입니까? 갑자기 도둑이라니! 선량한 사람을 도둑으로 몰다니 프로하우스 공작가의 이름은 다 허명이었습니까?”
“네 사악한 행위에 공작가를 끼워 넣지 말거라. 외견을 바꾸면 설마 모를 줄 알았느냐? 참으로 뻔뻔하구나! 네가 마지막에 가져온 물건이 무엇인 줄 아나? 그건 몇 년 전 공작가에서 자취를 감춘 인장이니라!”
“??!”
이것이 무슨 말인가. 공작가의 인장이라니? 그건 내가 직접 파묘해서 가지고 온 것인데? 렉시는 다시금 외치려 했지만 목 끝까지 다가온 창끝 앞에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저들을 모두 지하 감옥으로 데려가라!”
노여움이 쟁쟁한 공작의 음성에 기사들이 움직인다. 렉시 이하 일행들은 그렇게 새끼줄 엮듯 줄줄이 끌려 옥으로 향했다.
오래된 가문인 만큼 공작가엔 비밀 통로와 감옥들이 많다. 그들이 끌려간 곳은 그런 곳으로, 낮인지 밤인지 모를 조도의 광원이 스며드는 어딘가였다. 신변을 구속당한 채 공작가의 알현자에서 죄인으로 위치가 수직 낙하된 셋과 하나는 감옥 바닥에 물건처럼 던져졌다.
쿵!
“으윽….”
렉시는 신음했다. 차가운 바닥에 무릎이 마치 부서질 것처럼 찌르르 울린다. 하지만 지금은 아픈 것보다 다른 것이 문제였다. 맙소사, 이게 무슨 귀신이 곡할 노릇인지!
‘절도라니. 이렇게 억울할 데가!’
공작은 그것이 인장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으나 천만의 말씀이다. 그것은 렉시가 직접 묘에서 꺼내 온 물건이었다. 대체 무슨 억하심정으로 그걸 인장이라 우긴단 말인가?
‘설마 내 외모에 혹해서 일부러?’
미모로 본의 아닌 평지풍파를 겪은 터라 처음엔 응당 그걸 의심했다. 하지만 아냐, 아니지.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냐. 얼굴은 확실히 가렸어. 그럼 물건이 너무 비싸서 탐욕이 생겼단 말인가? 하지만 그러기엔 가격도 말 안 했는데?!’
차라리 자기가 평민이면 욕심나서 그랬다고 이해라도 갈 것이다. 평민의 물건이면 대놓고 강탈하는 귀족들이 종종 있는 세상 아닌가. 하지만 렉시는 남작이고, 귀족 간의 거래 관계를 이렇게 파투 내는 건 아무리 공작이라도 무리한 일.
더더군다나 자기는 후작가와 관련된 사람 아닌가? 자기에게 손대는 건 후작가를 무시하는 일이란 걸 공작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때였다.
“말도 안 돼. 그건 우리 영주님이 가문의 물건을 가지고 온 거예요. 그런데 도둑이라니!”
“시끄럽다 꼬마. 어디 감히 도둑 주제에 입을 놀리나!”
요수아가 눈을 파르르 힘주어 뜨며 기사에게 대거리를 했다.
“멀쩡한 우리 영주님을 도둑으로 매도하고 물건을 빼앗아 간 건 공작님이에요. 그런 식으로 따지면 공작님도 도둑이죠!”
“뭐?! 감히 이 천한 것이 어딜!”
퍽!
“여, 영주님!”
“윽!”
렉시는 억눌린 신음을 내며 무릎을 꿇었다. 기사의 창이 가격하고 간 자리가 쨍 하니 울렸다. 요수아를 때리려고 했던 기사는 갑자기 나선 렉시를 대신 때리고 짜증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요수아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남작님, 괜찮아요? 이 일을 어째!”
“괘…괜찮아.”
요수아는 깽깽 울면서 렉시를 바라보았다. 기사라는 이유로 온몸이 억류된 필립은 뻘게진 얼굴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렉시는 흔들리는 머리를 간신히 바로잡고 입매를 굳혔다.
“기사라는 사람이… 어린애도 때립니까?”
“입을 멋대로 놀리는 자는 마땅히 그래도 된다. 어디서 감히 공작님을 모욕하는가?”
“본인이 행한 죄를 공작님이란 권위에 기대는 모양새가 천박하군요. 그러고도 기사라니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영민을 데리고 도둑질을 한 작자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진 않군. 네놈이 내게 그런 힐난을 할 자격이 있다고 보나, 도둑?”
큭, 하고 비웃는 작태가 무척이나 고깝다. 렉시는 이를 깍 악물었다. 상처 입은 자존심이 부글부글 끓었다. 고작 남작가이긴 하지만 그는 엄연한 한 영지의 주인이었다. 일개 기사에게 이런 모욕을 당할 위치는 절대 아니건만! 치밀어 오르는 모욕감으로 이를 악무는데, 옆에서 그 장면을 보고 대신 분개하며 외치는 이가 있었다. 로메인이었다.
“베링거 경! 대체 이 무슨 무도한 짓이오? 선량한 사람을 도둑으로 모는 것도 모자라 폭행에 모욕까지! 당장 사과하십시오!”
로메인 경!
머리 숙인 렉시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몸을 감싸 안던 불쾌감이 잦아드는 것은 그 목소리에 위안을 얻었기 때문일 터. 로메인의 태도에서 느껴지는 굳건한 믿음에 렉시는 가슴이 찌르르 떨렸다.
‘날 믿고 계시는구나.’
사실 지금 상황에선 로메인이 자길 의심해도 할 말이 없었다. 모난 놈 옆에 있다 정 맞아도 유분수지, 좋은 일 했다가 감옥에 오지 않았나. 요수아와 필립은 영민이기라도 하지 그는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남이었다. 허니 원망을 받아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인데 외려 역성을 들어 주고 있었다. 사람인 이상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로메인이 재차 외쳤다.
“그러고서 어찌 기사라 할 수 있단 말이오? 당장 사과하십시오!”
“흥!”
베링거라 불린 기사는 코웃음을 쳤다.
“사과라니, 로메인 경, 경은 눈치가 없는 거요 정신이 없는 겁니까? 경 또한 이 일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전하의 조카라 억류로 그치는 거요. 아시겠소?”
“…그것은 언어도단입니다. 내가 억류로 그치는 이유는 전하의 조카라서가 아니라 죄가 없기 때문이니까. 남작님 역시 매한가지고! 적법한 절차 없이 죄 없는 사람을 도둑으로 매도하다니!? 어찌 기사된 이로서 이런 간단한 원칙을 잊는단 말입니까?”
로메인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하지만 그는 이 지적에 콧방귀만 뀌었다.
“로메인 경. 절도 사건에서 피해자와 피해 물품이 나오면 일 다 끝난 거요. 그럼 지금 이 상황에서 뭐 재판이라도 해야 하란 말이오?”
“당연하지요. 사람을 도둑으로 몰려면 그만한 증거가 있어야 하는 법! 헌데 지금 이 상황에서 제대로 된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오로지 전하의 말뿐이잖습니까?!”
“증거가 왜 없소? 이들에게 몰수한 마도구가 증좌요, 그 피해자마저 확실하다오. 억지 부리지 마시오!”
로메인은 사납게 맞받아쳤다.
“억지요? 이건 억지가 아니라 전하를 위해섭니다. 비록 남작위긴 하지만 저분은 엄연한 한 영지의 주인입니다. 그런 이를 이렇게 억류하는 것은 국법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것을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자칫 잘못하면 영지전으로 번질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뻣뻣한 베링거였지만 로메인의 이 말엔 조금 움찔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도 그건 조금 걸렸다. 귀족끼리의 사안을 이렇게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무릇 이 자리에서 그걸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는 납득하는 대신 버럭 화를 냈다.
“로메인 경! 경이 아직도 예전의 경인 줄 아오? 경은 이제 공작가의 후계자 신분이 아니라 일개 기사 신분이오. 허니 이 일에 있어 그런 일을 논하실 수 없소. 그만하시오!”
“옳은 일을 말하는데 신분이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무릇 진정한 기사요 가신이라면 모시는 분을 제대로 된 길로 인도해야 하는 법입니다. 전하께서 아프시고 난 뒤 성격이 변하셨다고 경마저 그러시면 어쩌란 말입니까? 거기다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베링거 경, 경은 혹 인장이 사라졌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까?”
베링거의 미간에 금이 파였다.
“그걸 왜 내게 물으시오? 인장은 공작가의 중대사 아니오. 친척인 경도 모르는 걸 내가 어찌 알겠소?”
로메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렇지요! 그는 손으로 가슴을 치며 크게 외쳤다.
“바로 그겁니다! 경의 말대로 본인은 전하의 조카. 만일 그런 일이 있다면 적어도 저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헌데 전 그 일에 대해 전혀 들은 바가 없습니다. 이상한 일 아닙니까? 인장 같은 중요한 물건을 잃었다면 분명 전하께서 제게 말하지 않을 리가―.”
그때, 누군가 뒷말에 끼어들었다.
“―있지. 로메인, 넌 삼 년간 내 연락을 무시했잖느냐?”
“…전하!”
로메인은 갑자기 나타난 공작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알현 때의 화려한 옷을 벗은 공작은 퍽 냉막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난 공작의 모습에 놀라 황급히 움직였다.
“전하가 오셨다!”
“전원 예를 갖춰라!”
촤자자자작!
성큼 감옥 안으로 들어온 공작을 향해 근위대 기사 전원이 무릎을 꿇는다. 십수 명의 기사들 틈에서 우뚝 서 있는 공작의 모습은 한 자루 검처럼 고고했다. 꼿꼿하게 서서 주변을 둘러본 공작은 곧 못마땅한 얼굴로 일갈했다.
“왜 이리 사람이 많지? 죄인만 놓고 다들 나가라! 심문은 내가 할 것이다.”
“허나 존귀하신 몸께서 어찌 홀로―.”
“철창은 멋으로 있는 줄 아나. 당장 안 나갈 건가?!”
살기등등한 공작의 눈빛을 맞이한 기사들은 깨갱했다.
어쩌지?
그들은 서로서로 시선을 나눴다. 공작이 스스로 모든 일을 다 하려 드는 건 공작성의 모두가 다 아는 사실. 하지만 죄인 심문마저 스스로 한다고 나설 줄은 아무도 예상 못 했다.
여기서 공작이 시켰다고 정말 시킨 대로 하면 시종장에게 쪼여 죽을 것이다. 하지만 공작의 지랄맞아진 성격은 기사들로서도 상대하기 역부족이었다.
어쩔 수 없지. 결국 그들은 포기하고 읍하며 사라졌다.
“명을 받듭니다.”
순식간에 기사들이 사라지자 이내 감옥에는 공작과 렉시 일행만 남았다. 공작은 철창 안에 따로 갇힌 렉시와 로메인 일행을 보다가 흥 하고 콧방귀를 꼈다.
“꼴 참 보기 좋구나.”
“전하.”
“저놈 말 하나도 틀린 게 없다. 로메인, 네가 아무리 공작의 조카라 해도 모든 일이 면책되는 것은 아니야. 이게 대체 무슨 난장판이냐?”
도둑을 잡아다 놨더니 조카란 놈은 도둑을 옹호하고 있고 이 무슨 개판 오 분 전인가?
이들을 보는 공작의 얼굴이란 대략 이랬지만, 로메인은 로메인대로 할 말이 많다. 그는 억지로 꿇렸던 몸을 일으켰다.
“전하, 저희를 내보내 주십시오. 대관절 이게 무슨 행패십니까?”
“행패라니?”
“누가 와도 이 일은 행패 그 이상 이하도 아닙니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이분들을 소개한 건 접니다. 제 체면을 봐서라도 이러시면 안 되시지 않습니까! 애초 인장을 잃은 게 사실이긴 합니까?”
“거짓말이라고?”
로메인의 부리부리한 눈동자와 마주한 공작은 그 안에 숨겨진 의구심을 읽었다. 그는 대노하며 외쳤다.
“인장을 잃어버렸단 말을 어떻게 거짓으로 할 수 있겠느냐? 저자가 가져온 게 바로 그 잃은 인장의 가장 중요한 요체였느니라. 내 당장 잡아다 죽일 저 도둑을 내버려 둔 것만으로도 난 네 체면 봐줄 만큼 봐줬어! 그런 내게 행패라니… 니가 공작의 조카면 다인 줄 아느냐?”
“…정말로 인장을 잃어버리셨다는 겁니까?”
미심쩍은 로메인의 반문에 공작은 혀만 찼다. 아니 이게 속고만 살았나?
“그래! 설마 내가 없는 말을 지어서 했겠느냐?”
의자로 다가가 앉은 그는 성난 얼굴로 로메인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이 일을 모르는 건 내가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네겐 알려야 하는 일이었다만…. 그간 네가 연락을 끊었으니 알려 줄 방도가 없었느니라. 그러니까 연락 좀 받지 그랬느냐?”
비꼬듯 말하는 공작이었지만 그 기색에 거짓이란 없다. 그 얼굴을 살피던 로메인의 푸른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대체… 그걸 어떻게 잃어버리신 겁니까?”
“낸들 아냐? 그리고 지금 그게 중요하니?”
“…….”
순간 로메인은 말문이 막혔다. 그렇지. 허기사 지금 어떻게 잃어버린 게 중요하나. 지금 중요한 건 그 말대로 다른 것 아닌가?
“외려 묻고 싶은 것은 나다. 로메인, 대체 저 도둑들은 어디서 어떻게 만난 거냐? 대체 뭐라고 널 꼬드겼지?”
도둑. 로메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좋습니다, 인장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이제 알겠습니다. 하지만 애먼 사람을 도둑으로 몰지 마십시오. 애초 그 반지 어디가 인장이란 말입니까? 저는 공작가의 인장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본 인장은 주먹만 한 도장이었지 반지와는 전혀 상관없었단 말입니다. 대체 생판 다른 물건을 들어 사람을 도둑으로 모십니까?”
“외견이 문제가 아니다, 이 답답한 놈! 로메인, 저자가 가지고 온 반지의 보석이 뭔지나 아느냐?”
공작은 힘주어 소리쳤다.
“드로셀로나. 그건 드로셀로나였다!”
드로셀로나, 용의 눈.
용이 죽을 때 남긴다는 이 보석은 세상에서 가장 희귀한 보석 중 하나다. 말 그대로 용의 생전 눈이 보석처럼 굳은 것으로, 공작가는 힐라그라스 덕분에 하나 가지고 있었다. 본래는 왕을 상징하는 신물이었지만 공작가로 격하된 뒤론 인장 장식으로 용도 변경을 했다. 이후론 중대사가 있을 때만 내어 사용했던 것인데 이 인장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그의 크나큰 근심이 되었던 것이다.
“어두운 곳에서 홀로 빛을 발하는 보석이란 세상천지 드로셀로나 하나뿐이다. 보는 순간 알 수 있었지.”
내가 그때 얼마나 기쁘고 황당하며 노여웠는지 아느냐? 흥분한 공작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도장이야 다시 만들면 돼. 하지만 인장의 진정한 본체는 바로 드로셀로나다. 헌데 그 중요한 것이 난데없이 사라졌으니 얼마나 막막할 노릇이었겠느냐? 하지만 드로셀로나는 장물로 취급하기엔 너무나 귀한 보석이다. 그런 걸 대놓고 팔 수 있을 리 없지.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 로메인, 내가 그간 왜 그렇게 마도구를 사들였을 것 같으냐?”
“왜냐니요. 취미시잖습니까?”
로메인의 반문에 공작이 날카롭게 웃었다.
“아니! 나는 본래 마도구에 큰 뜻이 없었다. 그건 다 드로셀로나를 찾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 이야. 저런 도둑들이 훔친 보석들을 무리 없이, 가장 값지게 파는 방식이 어떤 것인지 아느냐? 바로 만들어진 마도구에 장식처럼 달아 파는 것이다. 그냥 마도구보다, 보석이 박힌 마도구가 더 값이 나가지. 거기다 마도구에 보석을 박아 팔면 출처마저 세탁된다. 때문에 나는 그때부터 세상에 흩어진 마도구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그것들을 사들이다 보면 그 꼬리가 반드시 잡힐 거라 생각했던 것이지.”
“…….”
놀라운 이야기였다. 로메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어쩐지 머리칼이 쭈뼛 섰다. 설마 그간 공작이 행한 취미 활동이 도둑을 잡아내기 위한 기만이었단 말인가?
‘실로 놀랍구나. 그 모든 행동들이 덫이었다니!? 이것은 필시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궁리 아닌가.’
로메인의 눈빛이 깊게 침잠했다.
‘허나… 아무리 그렇다 한들 이 처사는 심하시다. 아무리 우리들이 그 덫에 걸려들었다고 해도 변명도 듣지 않고 몰아붙이는 건 해서는 안 되는 일 아닌가.’
아무리 불합리하더라도 원칙은 지켜라.
이것은 과거 공작이 기사가 된다는 로메인에게 해 주었던 말이다. 바빠도 돌아갈 것이며 옳은 길이 빠른 길이라. 이 말은 실로 공작의 평생을 좌우하는 말로 그는 이것을 모든 질서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냥 삼은 것뿐만이 아니라 철저히 지키기도 했다. 절차를 지키지 않고 범죄자를 심문한 기사에게 죄를 묻고, 해당 신문을 원점으로 돌려 그 죄를 감경해 준 일화는 그의 그런 성격을 방증하는 일화 중 하나였다.
그런 일련의 생각을 하던 로메인은 어쩐지 마음이 불편해졌다. 생각하면 할수록 뭔가 이상하게 걸렸던 것이다.
‘참으로 이상하구나. 남작을 이렇게 가타부타 체포한 것부터 덫을 친 것까지 죄다 원칙에 어긋나는 일 아닌가. 인장을 잃어버린 일을 숨긴 이유는 알겠지만 무릇 이런 중대한 사안은 널리 알리고 찾는 게 그분다운 행동 아니었나? 편의와 이득을 위해 대의를 숨기는 일은 결국 화를 부른다는 걸 누누이 강조했던 분이 대체 어째서….’
더욱 알 수 없는 것은 공작이 뼛속까지 군주라는 점이다. 대의는 군주의 것, 교활함은 참모의 것. 이런 행동은 군주가 아닌 참모의 덕목이라는 게 공작의 평소 지론이다. 군주가 대의를 말하면 참모는 교란하나니. 본래 공작은 군주 된 자가 간계를 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아픈 사람은 원래 저러는 것인가? 성격이 바뀌면 수십 년을 지켜 온 도리와 철칙마저 잊게 된다고?’
눈앞에 서 있는 것은 공작이건만, 어쩜 이다지도 다른 사람 같은가. 그는 어쩐지 공작이 매우 낯설어졌다.
“그 반지는 남작의 집안 대대로 내려온 물건이라 했습니다. 실제로 남작이 가져온 나머지 마도구는 대단했지요. 그게 정말일 거란 생각은 안 드십니까?”
“로메인, 좀 객관적으로 상황을 봐라. 부자가 물건을 잃어버렸는데 때마침 누군가가 그 물건과 똑같은 걸 판다고 나섰어. 흔한 물건도 아닌데 설상가상 내놓은 사람 재산 상황도 나쁘단 말이지. 네가 색에 눈이 어두워 지금 천지 분간을 못 하는 거 같으니 말해 주는데, 세상엔 정황 증거란 게 있는 법이다.”
“…….”
“고작 남작가일 뿐이야. 그런 곳에서 대대로 내려온 물건에 드로셀로나가 있다고? 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노골적인 빈정거림이었다. 로메인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맙소사….’
그는 렉시의 무죄를 믿는다. 아니, 확신한다. 그가 예쁘고 가련하고 기타등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렉시의 행보가 그럴 만하기 때문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실리보다 도리를 택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헌데 렉시는 대영지보다 농노의 사적 재산화가 더 공공연한 지방 풍토에서 착취 대신 사재 처분을 택했다. 그런 그가 새삼 타인의 재물을 절취할 리가?
‘예전의 전하라면 내 말을 들어주셨을 터. 하지만 지금의 전하는 아주 딴사람이 되셨구나.’
로메인은 숨이 턱 막혔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니 이 무슨 천박한 논리인가. 그가 상대하려던 것은 도리를 아는 공작이지 지금의 공작이 아니다. 사람 성격이 삐뚤어졌다고 해도 정도를 지켜 주리라 생각했던 예상이 전복되니 남은 것은 혼란 그 자체.
그야말로 사세난처한 상황에 로메인의 낯빛이 어둡게 변하던 바로 그때였다.
“왜 말이 안 됩니까? 내려올 수도 있지요.”
공작의 얼굴이 휙 돌아갔다. 소리가 난 쪽을 본 공작의 얼굴이 야차처럼 일그러졌다.
“이 철면피 같은 놈이 어딜 감히 끼어들어!”
“황공하오나 전하, 이 일은 제 일이니 당연 제가 말을 해야지요. 로메인 경은 그저 제게 전하를 소개해 주었을 뿐 이 일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합니다. 왜 애먼 로메인 경을 잡으십니까?”
이것은 물론 렉시였다. 기사들이 사라지자 자유로워진 몸으로 상황을 살피던 그는 로메인이 구석에 몰리자 재빨리 끼어든 것이다.
‘조금 상황을 더 살피고는 싶었지만.’
대관절 뭐라고 하는가 더 듣고 싶었던 건 사실이지만 로메인이 겁박당하는 마당에 더 잠자코 있으면 파렴치할 노릇이다. 렉시는 의식적으로 반듯하게 섰다.
“직접 심문하신다 하신 것은 전하 아니십니까. 허니 제게 물어보시는 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맑고 청아한 목소리, 얼굴의 반은 가렸으나 드러난 것만으로도 우미한 자태, 명가의 자손다운 고고한 태도.
기실 렉시는 돈이 없다 뿐이지 천 년간 이어 내려온 가문의 정수를 담은 철저한 교육을 받았다. 솔직히 도둑의 도 자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이미 의심암귀가 눈에 씐 공작의 눈엔 사기꾼의 기만일 뿐이다.
‘저 뻔뻔한 모습으로 로메인을 홀린 것인가!? 이제 보니 얼굴을 가리는 것도 미혹술의 일종이라고 들은 적이 있지. 사람의 상상은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아름답게 여기니까. 참으로 가증스럽군!’
그는 서슬 퍼렇게 렉시를 힐난했다.
“나는 너 같은 도둑놈과 말을 섞을 생각 없느니라. 내가 직접 심문하려고 한 건 네놈이 아니라 저 녀석이야!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나서 나서길?”
“어딘지 아니까 이러는 겁니다. 솔직히 매우 불쾌할 지경이군요. 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감옥에 가둔 것도 모자라 대뜸 도둑이라니…? 공작령에선 원래 이럽니까?”
“너는 현행범이다. 현행범의 즉결 처분은 당연한 거야! 감히 범죄자 주제에 공작령을 비난해?!”
공작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로메인이 지적했다.
“전하, 공작령에서 현행범의 즉결 처분은 정관으로 친히 금지하신 일입니다. 이미 십 년도 더 전에 내리신 결정인데 설마 잊으신 겁니까?”
“…!!”
로메인의 지적에 공작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노여워서가 아니라, 그가 정말로 그 일을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야 없는 노릇이다. 그는 이때부터 점점 이성을 잃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내 말은 지금부터 그건 취소란 거야!”
“전하!? 아니 그게 무슨 …그 일을 금지하시기 위해 고생하신 세월을 잊으셨습니까? 그걸 어찌 이렇게!”
“아 모른다! 이 내가 그렇게 한다는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지? 내 말이 법이야. 그건 그러니까 취소다!”
렉시는 기가 막혔다. 공작가의 위신과 체면은 이미 다 가져다 버린 저 모습은 무엇인가. 점잖고 귀족적이고 공명정대한 군주라는 소리는 거짓이었나?
저런 게 귀족적이고 공명정대하면 날아다니는 똥파리도 새일 것이다. 실로 목불인견이 아닐 수 없었다.
아, 나는 어쩜 이렇게 신세가 파란만장하단 말인가. 렉시는 한탄했다.
직접 지지도 않은 빚 떠안고 팔자에도 없는 떠돌이 생활한 지 벌써 이 년 반. 그놈의 빚 좀 갚아 보려고 갖은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건만 빚 변제는 고사하고 막판엔 도둑으로 몰리기까지 하다니. 이래서야 일 자체에 마가 꼈다 해도 이해가 갈 지경이었다.
‘그래, 이래야 과연 우리 아버지가 엮인 일이지. 제대로 뭐가 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아버지가 엮였을 때부터 이 일이 만만찮다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지만, 이미 죽은 사람 원망해 봐야 무슨 소용인가. 렉시는 이를 아득 깨물었다. 공작이 저렇게 나오는 이상, 이젠 마지막 수단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좋습니다. 뭐든 전하 멋대로 생각하십시오. 허나 전하는 저희를 내보내 주셔야 할 겁니다. 어쨌거나 저와 제 가문은, 한때는 왕족이었던 고(古)귀족 출신입니다. 같은 출신이신 전하시라면 제가 무얼 말하는지 잘 아시겠지요.”
“……뭐?”
“아무리 영지의 사법권이 준엄하다 한들 제국의 법, 그리고 시황제의 칙령보다 위에 서지는 않는다는 이야깁니다.”
시황제, 이그리트 대제의 칙령.
이것은 제국에 스스로 복속된 왕족들을 위해 마련해 준 특례법이다. 황가에 대한 강상죄, 즉 반역을 제외하면 그 어떠한 범죄에서도 사면을 요구할 수 있다는 이 법은 그 초법적인 내용으로 인해 황제와 그 왕가의 직계만 알고 있었다. 실로 말도 안 되는 법이기에 횟수는 각 대의, 단 한 번에 한해서만 인정된다. 스스로 복속된 왕족들에게 당근이 필요했던 시황제는 이 파격적인 맹서를 통해 왕족들의 무탈한 맹약을 얻어 냈다.
‘이 법을 들먹이는 상대를 지금 만날 줄은 공작도 상상 못 했겠지. 하긴 나도 이렇게 하찮은 일에 이 법을 써먹을 줄은 몰랐으니까.’
저쪽은 공작, 이쪽은 남작이라지만 어쨌거나 왕가는 왕가다. 현재 규모가 무척 차이가 난다 한들 있는 법과 특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거기다 마법사를 통해 한 맹약은 제국이 존재하는 한 절대적인 위력을 자랑하지 않는가?
‘덕분에 내 죄를 인정하는 꼴이 됐지만 그건 어쩔 수 없지 뭐. 로메인 경에게 이 이상 피해를 줄 수는 없잖아.’
렉시가 이 칙령을 들먹인 건 사실 자기보단 로메인을 위해서였다. 그냥 자기 일행만 얽혔으면 솔직히 죽이 되건 밥이 되건 일단 버텨 진실을 밝혔을 것이다. 남작이 도적질을 했다는 명예를 이고 어떻게 귀족 사교계에서 살아남겠는가? 어떻게든 진실을 밝혀 명예를 세워야 하는 것이 응당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공작이 나선 이상 누군가는 이 일에 책임을 져야 했고, 높은 확률로 그건 로메인이 될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되면 로메인의 명예는 땅에 떨어질 것이다. 렉시는 자신에게 내주기만 했던 이 선량한 기사의 명예를 온전히 지켜 주고 싶었다.
‘내 명예야 차후 회복하면 돼. 그러니 일단 닥친 비부터 피하자. 공작도 이 정도면 만족하겠지.’
이만하면 공작도 적당한 체면치레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렉시는 그러니 그가 적당히 뒤로 물러서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생각보다 녹녹지 않았으니….
“…이거 아주 미친놈 아닌가. 대제의 칙령이라고?”
공작은 당치도 않은 말을 들은 사람처럼 두 눈을 부라렸다.
“이그리트 대제께서는 칙령은 고사하고 법률 제정 자체를 하신 적이 없다. 제대로 된 율법이 마련된 건 그 아들 대인 로뮬라 1세부터야. 귀족인 주제에 그것도 모르나?”
“…지금 뭐라고….”
렉시는 너무나 당황해 공작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허나 놀랍게도 공작은 매우 진심이었다. 깨달음은 느렸으나 뒤이은 경악은 빨랐다. 렉시는 그야말로 대경실색했다.
‘마법으로 맺은 맹약의 효력은 절대적이야. 헌데 그걸 부정하다니!? 공작은 목숨이 아홉 개라도 된단 말인가?!’
그냥 약속이나 법률이면 이 배째라 행동이 이해라도 갈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맹세, 마법사가 공증하고 서약케 한 절대적인 맹약이다. 용이 대륙을 떴을지언정 마법의 법칙이 사라진 것은 아니니 공작의 목숨은 이제 경각이었다.
“전하. 지금 진심이십니까?”
렉시의 머릿속이 팽팽 돌았다.
공작가는 혹시 다른 맹세를 했나? 그런가? 아닌데, 아닐 텐데? 이런 맹약은 귀찮아서라도 한 번만 하며, 무엇보다 대제가 왕국마다 다른 맹약을 할 정도로 한가한 자는 아니다. 그렇다면 공작은 이런 하찮은 일에 초개와 같이 목숨을 내던지는 거란 말인가?
‘설마 노망났나? 아니 이게 무슨 참신한 자살법이야?!’
죽으려면 곱게 죽지 이게 무슨 미친 짓인가. 이런 맹약의 파기는 그 여파가 어떻게 올지 모른다는 게 제일 공포스러운 점이었다. 목숨을 빼앗길지 아니면 다른 무엇으로 다가올지 모르는 게 바로 맹약의 부정. 그보다 이건 자살이야 타살이야? 하는 거 보면 자살이지만 맹세를 언급한 건 나니까 타살?
이 난데없는 횡액에 렉시는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지만 설상가상 공작은 기막힌 소리만 해대고 있었다.
“진심? 그건 외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네가 지금 제정신이냐? 도둑질도 모자라 대제의 이름으로 사기를 치려고 해!? 이런 죽어 마땅할 놈 같으니!”
“…사, 사기라니요! 전하, 시황제의 칙령입니다. 기억해 보십시오, 모르실 리 없을 겁니다.”
렉시가 그간 만난 귀족들은 개차반 일 분 전들이 대부분이다. 납치, 감금, 살해 시도, 협박, 하독, 기타 등등을 밥 먹듯이 해치우는 범법자들. 하지만 렉시는 그렇다고 그들이 죽기를 바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사람의 목숨은 중요한 것이다. 죄야 징치하면 그만이지만 목숨은 하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렉시가 공작에게 간절하게 매달리는 것은 이런 인류애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세상 모든 일이 다 내 마음 같지는 않은 법이었다. 공작은 격분했다.
“기억은 무슨 기억! 없는 걸 기억해 내는 놈도 있다더냐?!”
순식간에 차가워진 공작의 얼굴에선 이제 미약한 살기마저 감돌았다. 렉시의 간절함을 범죄자의 마지막 발악이라 받아들인 그는 대제의 이름을 앞세운 렉시에게 분노를 넘어선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살다 살다 너 같은 사기꾼은 처음이다. 감히 자신의 안위를 위해 황가를 능멸하려 하다니!”
그는 벌떡 일어나 허리춤의 칼을 뽑았다. 챙! 차가운 소리가 흉흉하게 주변을 울렸다.
“대제의 이름을 사사로이 언급하는 것은 황가를 기만하는 중죄에 해당한다. 너 같은 중죄인은 죽어 마땅해!”
날카로운 칼끝이 렉시를 향해 엄습한다. 철창 밖에는 공작밖에 없었으므로 누가 말릴 수도 없었다.
“……!!!”
실로 모든 것이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라 다들 비명도 지르지 못하던 바로 그때였다. 렉시는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매우 기묘한 광경이었다.
공기가 물처럼 흐르며 이지러진다. 둘 사이에 있던 공간이 순식간에 수축하다 팽창했다. 두 개의 공기층에 서로 밀도가 다른 투명한 막이 생기는 것 같았다.
텅!
공작의 칼끝에 걸린 막이 금속성의 탁한 음을 낸다. 공작은 그 반탄력에 밀려 뒤로 크게 물러났다.
“……악!”
비명을 지르며 떨어진 공작이었으나 비명을 지를 일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기이한 소리가 나며, 그가 쥐고 있던 검이 밝게 빛나며 소멸됐다. 손아귀에 쥐고 있던 검이 마치 모래알처럼 산산이 흩어지는 것을 믿지 못할 눈으로 보던 그는, 뒤이어 일어난 일에 몸을 덜덜 떨었다. 일진광풍이 일고, 바람이 잦아듦과 동시에 바닥에서 슉 하고 거대한 인영 하나가 솟구쳤던 것이다.
“누, 누구냐?!”
갑자기 생겨난 인영은 그 등장도 기이했으며, 감옥을 메울 듯한 몸집 때문에라도 위압적이고 흉흉했다. 공작은 뒷걸음질 치며 인영과 거리를 벌렸다. 아마 할 수 있었으면 밖으로 튀어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감옥이었고, 거기다 유일한 문은 이 인영 때문에 막혔으므로 애초 도망할 곳이 없었다. 우왕좌왕하던 공작을 찬찬히 굽어보던 괴인의 입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은 그때였다.
―나는 맹약을 지키는 자.
그것을 표현하라면 그저 어둠이라 할 것이다.
감옥 바닥에서 자욱한 안개가 끼는 것 같고, 아득히 저문 낙조에서 스며드는 것 같은 스산한 음파. 깊고 깊은 심연에서 안개처럼 일렁이는 목소리는 듣는 이의 공포심을 자극하는 뭔가가 있었다.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맹약을 지키는 자?
―세상에 유일무이한 것을 두고 맹세한 시간은 분명 천 년…. 그 천 년이 지나려면 아직 한참 멀었을 터인데.
어둠이 움직인다. 움직일 때마다 점점 빛이 사그라드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그것의 겉을 덮은 것은 검은빛의 로브지만 그건 옷이라기보다 차라리 지옥의 한구석을 베어 낸 흔적 같았다. 로브 안쪽 푸르스름한 빛 두 개가 불길하게 빛난다.
어디선가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후우…. 로브 속 인영이 숨을 들이켰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군…. 그래. 누군가 맹약을 어겼구나. 헌데 기이하기도 하지. 맹약을 어겼다면 그저 죽으면 그만. 이 내가 이렇듯 불려 나올 이유가 없을 터인데…?
인영이 천천히 팔을 올린다. 흘러내린 로브 안쪽에서 시체처럼 푸른 손가락이 나타나 기이한 수인을 맺었다. 수인을 맺은 손끝에서 빛무리가 너울거린다. 불길하기 짝이 없는 일렁거림이 잦아드는 것은 한순간. 시리게 남은 잔상을 묵묵히 살펴보던 인영이 뇌까렸다.
―기만이라.
공작이 흠칫 떨었다. 인영이 그런 공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부터 로브 안쪽에서 기묘한 울림이 웅웅 일고 있었다. 낮고, 높았다가, 파르르 떨리고, 조용히 잦아드는 기묘한 메아리. 소리가 잦아든다. 그림자가 천천히 공작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퍼렇던 공작의 얼굴이 삽시간에 잿빛으로 화했다.
“오, 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겁먹지 말라. 여는 널 해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역시 맹약에 얽힌 몸…. 올바르지 않은 맹약의 이행은 이 나조차도 두려워하는 것이다.
인영의 손가락이 천천히 공작의 머리를 향한다. 정확히는 그가 쓴 관, 그리고 그의 뿔을 향해서였다. 손가락이 넝쿨처럼 뿔을 얽는다. 거대한 손에 잡힌 관이 마치 작은 나뭇가지처럼 보였다. 공포에 질린 공작은 사시나무 떨듯 와들와들 떨었다.
“놔, 놔라. 날 놔! 이, 괴, 괴물! 날 놔!”
―이 대륙에서 마나를 두고 한 맹약은 실로 절대적이다. 그렇기에 맹약은 그 이행에 수십, 수백 가지의 단서를 두지…. 왜 내가 불려왔나 했더니. …실로 놀랍구나. 이 정도의 기만을 행할 수 있던 마법사는 과거에도 손에 꼽았다. 하물며 마법이 저물어 가는 이 시대에 이 정도의 교묘함이라니….
그는 흥미로운 장난감을 보는 것처럼 뿔을 어루만졌다. 부드럽게, 애무하듯이. 그리고 종내는 마치 여린 꽃을 꺾는 것처럼.
빠각.
실로 소름끼치는 소리였다. 렉시는 얼어붙은 얼굴로 공작의 뿔이 부서지는 것을 응시했다. 맙소사!
꺄아아아아―
어디선가 비명이 들려왔다. 처절한 비명 소리였다. 그것이 기화였다. 공포로 눌려 있던 공간이 순식간에 신음으로 시끄러워졌다.
“아, 아윽, 아아악!”
렉시는 황급히 앞으로 달려가 창살을 움켜쥐었다. 저 기이한 괴물 앞에 선 공작이 머리를 움켜쥐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렉시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괴물에게 손을 뻗었다. 저렇게 사람 하나가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
“잠, 잠깐! 맹약의 어쩌고 씨! 잠시 나 좀―!”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옆에서 팔 하나가 쑥 들어왔다. 시선을 빗겨 보니 로메인이었다. 쑥 들어온 팔이 렉시의 허리를 잡고 뒤로 끌고 갔다. 렉시는 힘주어 로메인을 밀어냈지만 기사의 힘을 그가 이길 리 없었다. 끙끙대며 몸을 뒤틀던 렉시가 얼굴을 찌푸리며 외쳤다. 지금 공작의 생명이 경각에 달려있는데 어째서!
“로메인 경, 어서 놔요! 전하를 구해야죠!”
“그래서 지금 미끼라도 되시겠다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 잠시 대화를 하겠다는―.”
“대화요? 맙소사! 절대로 못 놓습니다.”
로메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러다 전하가 죽을 수도 있어요. 이거 놔주세요!”
“전하가 죽어도 안 됩니다. 절대 못 놓습니다!”
“……!!”
빠져나가려고 할 때마다 허리의 압력만 더 강해진다. 설상가상 그는 렉시의 입가까지 살며시 막았다. 혹시나 크게 저것을 불러올까 우려되는 모양이었다. 한참 그와 씨름하던 렉시는 결국 포기하고 로메인 품에 안기고 말았다.
왜 나를 말리는 거야…. 렉시는 로메인이 일순 원망스러웠지만, 그 마음도 곧 사라졌다. 지쳐 올려다본 로메인의 모습을 본 순간 숨이 턱 막혀 왔기 때문이다. 그의 목대엔 핏대가 서 있었다. 안색은 긴장되어 있었고, 또 파리했다. 부릅뜬 두 눈엔 고뇌의 흔적이 역력했지만 그는 이를 깍 악물고 렉시를 잡고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렉시는 로메인의 얼굴을 보고 그만 탄식했다.
자신이, 너무 이기적이었다.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구나. 로메인 경의 속을 생각하지 못했어. 로메인 경도 저분을 구하고 싶을 텐데…!’
어찌 그라고 공작을 구하고 싶지 않겠는가. 다만 저 기괴한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니 렉시를 뒤로 물러서게 한 것일 것이다. 게다가 그는 지금 품 안에 검도 없었다. 아마 지금 마음은 피눈물을 흘리는 심정일 것이었다. 렉시는 바짝 마른 입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대관절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하지? 맹약의 현현을 막을 방도가 정말 없는 건가?’
맹약을 막는 방법이 존재하는가? 사실 막는 건 고사하고 그 맹약 자체가 극히 드문 사례라 그게 가능한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말이 통하는 무언가가 나타났다면 막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그래… 사라는 알지도 모른다. 그녀는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그러나 지금 그는 공작령에 있고, 또한 사라는 먼 곳에 있었다. 가히 모든 상황이 풀릴 길이 없었으며 명재경각이었다. 렉시는 안달이 났다.
‘이렇게 전하가 죽는 것을 보아야 하는가? 아무것도 못 하고?’
곧 눈앞에서 펼쳐질 아찔한 상황을 예상한 렉시는 그야말로 넋이 나갔다. 하지만 정황은 렉시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부서진 뿔을 보며 비명을 지르던 공작이 비틀거리고, 그의 모습이 갑자기 물에 비친 그림자처럼 일렁거렸다. 그리고, 그의 몸을 이룬 것이 조각조각 흔들리기 시작하면서―사태가 일변했던 것이다.
“아, 아아아악!”
―모든 기만은 그것이 밝혀지면 끝나야 하는 법. 오랫동안 숨겼다만, 기만이여. 거짓이 밝혀졌으니 이제 그 진실된 모습을 드러내어야 하지 않겠느냐?
남자가 잔혹하게 웃으며 외치자, 그에 화답하듯 공기가 술렁거렸다. 좁은 감옥 안의 압력이 그 순간 크게 그리고, 그 술렁거림이 공작에게 닿자….
그림자처럼 좌초하던 공작의 몸이, 그 테두리부터 천천히― ‘삭았다.’
“아, 안 돼! 안 돼!”
그것을 말로 표현하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렉시는 지금도 잘 모른다. 다만 가장 쉬운 표현으로 그 장면을 묘사하자면, 그것은 마치 종이가 불에 타 삭는 것과 비슷했다.
몸의 가장 말단부터 시작된 그 현상은, 빠른 속도로 몸 중앙으로 올라와 공작이 공작이게끔 하는 모든 것을 살라 먹었다. 남자답게 탄탄한 허벅지와 종아리, 풍채가 좋다 말하게 하던 공작의 늘씬한 어깨와 허리. 대단한 미남이라 일컫게 하던 그의 얼굴, 어떨 땐 마치 관처럼 보이게 했던 머리의 뿔까지.
모든 것이 불에 탄 종이처럼 검게 사라졌다.
“……!!!!!”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난 그곳엔…. 이름 모를, 어떤 여인이 있었다. 마치 남자처럼 머리가 짧고, 그 키 역시 겅중하니 컸지만 그건 분명히 여자였다.
그것도 상당한 미색을 가진, 중년의 여인.
저것은 누구지?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서 있는 여자를 보며 렉시는 눈을 부릅떴다. 대관절 이게 어떻게 되어 가는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여자? 고, 공작이 여자라고?”
인영이 음산하게 웃었다.
―맹약은 당사자만이 이룰 수 있는 것. 만일 이 여인이 진정 맹약의 계승자였다면 내가 나올 필요가 있었겠느냐? 보아라, 신성한 피의 맹약자여. 이 여인은 네가 알던 누군가를 가장한 다른 이다.
인영의 말에 사람들이 여인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새빨간 머리칼, 제법 나이를 먹은 여인의 얼굴이 누구인지 렉시 일행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 여인이 누구인지 로메인은 알았다. 저것은 그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눈을 부릅떴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광경에 그는 혼란스러웠다. 급기야 로메인의 입술에서 상대의 정체가 흘러나왔다.
“…플로랑 후작?”
“……젠장.”
맙소사.
로메인은 대경해 외쳤다.
“후작, 정말로 당신이군! 대체 당신이 왜 거기에 있는 거요?”
플로랑 후작이라 불린 여자는 낭패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그녀를 보던 로메인의 눈동자가 밝게 빛을 발했다. 설마….
“설마, 당신. 지금 여태까지… 전하로 변장하고 있었던 겁니까?”
“…….”
강한 부정은 긍정, 그리고 때로는 무거운 침묵도 긍정. 단박에 모든 것을 깨달은 로메인은 분노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래, 그랬던 거군. 그래서 전하께오서 그토록 다른 사람 같았던 것이었어. 어쩐지 이상하다 했더니 이런 망극할 일이 있을 수가! 카트린느 드 플로랑 후작,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감히 전하로 가장해 모두를 속이다니!”
서슬 퍼런 추궁이었다. 한참 말 없던 플로랑 후작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내 할 말이 없네.”
쾅! 로메인은 철장을 세게 쳤다.
“지금 그것이 할 소립니까? 전하는 대체 어디에 계신 겁니까. 후작, 당신 설마 공비의 사주를 받았습니까! 전하를 배신한 겁니까?”
“아니다! 공비라니!? 어디 날 그 미친년과 같이 볼 수 있지? 날 어떻게 보고?!”
플로랑 후작은 펄펄 뛰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공비와 한배를 탔다고 오해받는 것은 사양이었다. 그녀를 이 지옥에 끌어넣은 원인이 무엇인가. 바로 그녀 아닌가!
그녀는 눈앞에 있는 이형의 괴물도 순간 잊고 말았다.
“나는 전하의 충실한 신하야! 죽으면 죽었지 그 사특한 년과 한배는 안 타!”
“그럼 설명해 보시오. 대체 왜 당신이 전하의 모습으로 정무를 보고 있었단 말입니까?”
“내가… 내가.”
그녀는 새빨개진 얼굴로 입술을 짓씹었다. 비밀을 지켜야 하건만, 아무리 해도 이 이상은 무리였다. 인장, 괴물, 그리고 밝혀진 정체…. 이 모든 것이 그녀를 극에 몰았으니 어쩌랴.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오지 않는 동아줄이 이토록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내가 이러고 있는 건 다 전하 때문이야. 전하가 날 여기에 앉혀 놓고, 그리고…!”
그녀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다.
“…사라지셨단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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