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오해와 오해의 오해 (5/20)
  • 4. 오해와 오해의 오해

    여인은 눈을 떴다.

    “…….”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태양과 새가 부조된 거대한 사주식 침대의 천장 부분이다. 이글거리는 태양은 실제처럼 뜨겁고, 그쪽으로 날아가는 새는 진정 하늘로 날아갈 것같이 생명력이 넘친다. 필시 어딘가의 이름난 예술가가 심혈을 기울여 조각했음직한 물건은 퍽 아름답지만 그렇다 하여 누구나 다 그걸 좋아하리란 법은 없다.

    예를 들어, 눈을 뜰 때마다 그걸 봐야 하는 여인 같은 이라면 특히.

    ‘지겨워.’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하루 이틀이라는데 예술품이라고 뭐 다를쏜가. 거기다 저 볼수록 압도적인 물건은 보면 볼수록 그녀의 현 처지를 실감시켰다.

    ‘젠장. 빌어먹을!’

    한참 부조와 눈싸움을 하던 그녀는 고개를 모로 돌려 누웠다. 그간 과해진 스트레스 때문인가, 상쾌해야 할 아침이 왜 이리 지지부진한지.

    ‘내겐 휴식이 필요해. 뜨거운 남국의 태양 아래서 만끽하는 휴양지로의 여행 같은 그런 거 말야. 내 피로는 이런 잠으론 풀릴 피로가 아니라고.’

    그녀는 중얼거리며 잠을 청하려 애썼다. 하지만 늘 그렇듯 잠이란 것은 한번 깨면 다시 찾아오기 요원한 법. 오늘도 오지 않는 잠을 찾아 한참 전전반측하던 그녀는 결국 짜증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연스레 속으로 욕설이 쏟아진다. 빌어먹을.

    ‘젠장맞을! 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 전생에 나라라도 팔아먹은 걸까?’

    아아, 알 수가 없다. 나는 정말 건실하고 착하게만 살아왔는데, 왜 신은 날 이 지옥으로 집어넣은 것일까. 팔자에도 없는 일로 시달리는 것도 억울한데 심지어 잠마저 제대로 잘 수 없다니…! 다 죽어 버렸으면!

    아으아으아으아…. 차마 내뱉을 수 없는 불평을 하며, 그녀는 결국 옆으로 난 긴 줄을 잡아당겼다. 찰랑거리는 느낌과 함께 뒤이어 사람들이 들어왔다.

    “―기침하시었습니까.”

    수십 명의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와 그녀의 시중을 든다. 그녀는 서서히 걷히는 천개를 의식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래.”

    “허면 소셋물을 들이겠나이다, 전하.”

    “―그리하라.”

    단 몇 분 만에, 그녀의 지옥은 서서히 막이 오른다. 주변은 분주하다. 소셋물을 들고 오는 시녀, 아침을 가지고 오는 시종, 옷을 준비하는 시종들, 종종거리는 발걸음, 그리고 멀리서 그녀의 기침을 알리는 기상나팔 소리까지.

    ‘아아. 대체 이 일은 언제 끝나는 것인가.’

    그녀는 신을 믿지 않지만 요즘은 신을 찾는다. 그 정도로 요즘 일정이 고된 탓이다. 신이여, 나의 동아줄은 언제 오시나이까?

    그녀를 이곳에서 벗어나게 할 동아줄은 분명 세상에 존재하건만. 그런데, 왜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인지 모를 일이다.

    “의관을 정제해도 되겠사옵니까?”

    “……허한다.”

    그녀는 천천히 침상에서 일어나 몸을 만지는 손들 속에서 휘청인다. 동아줄, 동아줄…. 대관절 언제 올지 모르는 동아줄을 속으로 새기며 그녀는 오늘도 이렇게 지옥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늘 그렇듯.

    “오늘의 일정을 가져오라.”

    *****

    사르칸트 제국의 4대 공작 가문은 제국 황도의 동서남북을 수호하는 방벽들이다. 순서대로 아슬론, 폰타나, 프로하우스, 카나타. 이 넷이 황도의 사방을 수호하는데 이들 중 유일하게 황족과 연이 없는 가문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남쪽의 프로하우스다.

    황실에서 흘러나온 세 가문과 달리 프로하우스는 그 기원 자체가 나머지 셋과 다르다. 그들의 전신은 제국과 마지막까지 항전하던 달리아 왕국으로, 공작가는 그 패망 왕조의 마지막 후손이었다.

    앞서 제국은 통일 전쟁 도중 망국 왕조의 왕족들을 죄다 죽였다고 말한 적 있을 것이다. 자진하여 항복한 왕국들을 제외하고 사르칸트 황조는 몰락 왕족들을 죄다 제거했다. 이것은 지난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믿어라, 이건 절대적인 사실이다.

    허면 어째서 달리아는 살아남았을까?

    왜 제국은 마지막까지 항전한 나라의 왕가를 내버려 두었을까?

    하도 어이없는 결정이라 말이 많긴 했다. 말이 많은 만큼 반대도 허다했다. 허나 사르칸트 시황제는 굳건했다. 그는 달리아 왕가의 왕작을 회수, 프로하우스라는 새 성을 내려 공작으로 강등하는 데 그쳤다.

    물론 성을 받는다는 건 제국에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다. 거기다 현 공작대에 와선 황제의 조카와 혼인까지 한 마당이긴 하지만 그땐 국혼도 없었다. 허니 참으로 이상한 일 아닌가. 달리아가 뭐가 다르기에?

    모두 의중을 알고 싶어 몸 달아 했으나, 황제의 입을 억지로 열 수는 없는 노릇. 그리하여 수많은 가설들이 날뛰었으니 거기엔 심지어 이런 설마저 존재했다.

    ―달리아의 여왕이 시황제를 후렸다!

    ―시황제가 여왕에게 뻑 갔다!

    ―둘이 배 맞았단다!

    …….

    뭐 실제로 달리아 최후의 여왕이 대단한 미인이었던 건 맞다. 미인이 많기로 유명한 왕실 사람들 중에서도 돋보이는 미모였다고 하니, 필시 보통 미모는 아니었을 터. 시황제와 여왕이 마주한 것은 단 한 번―패전 협상을 할 때뿐이었지만, 이 한 번의 협상으로 왕가의 존속이 결정 났기에 소문은 마치 들불 번지듯 번졌다.

    “역시 예쁜 게 남는 거란 건 진리였어.”

    “이런, 예쁜 것만 대접받는 더러운 세상!”

    “니미럴, 얼마나 예쁘길래 황제까지 후렸대?”

    “나 초상화 본 적 있긴 한데, 이쁘긴 이쁘더만. 그래도 참 어떻게 적국의 여왕과 그럴 수가 있지?”

    “시황제께옵서도 남자였다는 것이지. 자고로 영웅은 호색이라고 하지 않나. 난 솔직히 부럽네.”

    “이미 망한 나라들만 안됐군. 진작 미인계나 쓰지.”

    “그 나라들은 달리아 같은 미인 여왕이 없잖아? 그러니 아마 안 될 거야.”

    미모의 여왕, 패망한 왕국, 시황제와의 만남, 왕가의 유지.

    상당히 상황이 극적이다 보니 유언비어가 횡행하는 거야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역사를 좀 아는 이들이라면 이 말들을 새겨듣기보다는 머리로 생각이란 걸 해 보길 바란다.

    자, 사르칸트의 시황제 이그리트가 과연 사사로운 감정으로 대사를 결정할 인물인가?

    아무리 사랑은 지구를 구하고 나라를 구하고 우주를 구한다고 해도 그건 소설 속에서나 일어나는 일. 세상 모든 일엔 최소한의 개연성이 존재하는 법이다.

    수백 년간 피오니아 대륙을 통일하고자 시도했던 이들은 저 하늘의 별처럼 많았으나 성공했던 것은 시황제 한 명뿐이다. 황제 스스로가 검의 극의에 달했다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그의 옆에 있었던 것은 인류 최후의 마법사였다. 이성의 화신인 마법사들은 감정에 흔들리는 자들을 경멸한다. 그런 마법사를 수하로 부리는 이가 사사로운 감정에 흔들리는 자일 리가 있겠는가.

    그러니까, 다시 말해 시황제가 달리아를 존속시켰던 건 그 뒤에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제국을 건국한 일대 호걸이자 영웅인 시황제, 그리고 마법사조차 건드릴 수 없었던 엄청난 이유가.

    그건 바로 용의 존재였다.

    “…용이요?”

    렉시는 중간에서 말을 끊었다. 실례인 줄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용이라니. 그 용?

    렉시의 질문에 로메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용이 달리아의 뒷배경이었죠.”

    “…흐얼.”

    렉시는 기이한 신음을 냈다. 그는 뻑뻑한 눈으로 그림처럼 앉아 있는 로메인을 보았다.

    현재 둘은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속닥거리고 있다. 몸은 최대한 가까이, 얼굴을 맞대고, 슬쩍 슬쩍 눈을 맞추어 가며―무려, 일대일 과외 수업 중인 것이다. 뜬금없이 과외를 시작한 건 따지고 보면 로메인 덕분이었다.

    줄 중 가장 좋은 줄은 탯줄이라고, 어제의 그 만찬에서 난데없는 영입이 결정되자마자 알현 일정을 잡아 온 것이다. 성심껏 직분에 임하겠다더니 명불허전이었다. 사실 못해도 일주일 이상은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로메인 경이 이렇게 빨리 알현 날을 잡아 올 줄 몰랐던 렉시는 속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아직 가문 공부 덜 했는데. 이러다 실수하면 어쩌지?’

    로메인이야 성격 좋아 넘어갔다지만, 어디 공작에게 그럴 수나 있을까. 하여 렉시는 로메인에게 공작가, 특히 공작과 관련한 과외를 청하였고 그를 선생님 삼아 목하 공부 중이었던 것…인데?

    ‘…근데 갑자기 웬 용?’

    그거 전설 아니야?

    “용이… 달리아의 뒷배경이란 게 무슨 소리인가요? 용은 전설 아닌가요?”

    “응당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달리아는 조금 다릅니다.”

    세월이 흐르면 역사는 전설이 되고, 전설은 언젠가 신화가 된다.

    오래전 북녘의 땅에서 마지막 드래곤이 잠든 이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용은 없다. 그들은 인간 세상을 떠나 머나먼 용들의 땅을 향해 날아갔기 때문이다. 한때 피오니아 대륙의 역사 속에서 당당히 자리했던 용은 이제 역사가 아니라 전설 속의 무언가로 자리한 지 오래다.

    용은 전설이다. 그러나 달리아는 다르다….

    렉시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대륙 통일 전쟁이 끝난 건 이백 년 전, 사르칸트가 세워진 것도 그때였지? 페르귄이 망한 건 그보다 이전이지만 그래도 용이 모습을 드러냈다면 대륙사가 바뀌는 일이란 말이야. 우리 영지에 영향이 왔다면 분명 사라가 기록으로 남겼을걸.’

    마법으로 이루어진 지성체는 기록물의 정밀과 정확성에 집요하게 집착한다. 그런 사라의 기록에 언급이 없다면, 그건 정말로 없는 일이다.

    하지만….

    골똘히 생각하던 렉시는 순간 이런 생각을 했다.

    ‘잠깐. 혹시 너무 당연해서 …기록을 안 한 건?’

    그렇게 하면 소거법으로 딱 한 마리가 남긴 남는데. 렉시는 설마 하는 생각으로 로메인에게 물었다.

    “…설마 하는데요, 로메인 경. 혹시 그 용 이름이 …힐라그라스인가요?”

    정답이었다.

    “매우 예리하십니다, 영주님. 아직 채 말하지도 않았는데 …놀랍군요. 대체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냥 찍었습니다….

    놀란 얼굴로 되묻는 로메인에게 렉시는 그저 망연한 얼굴만을 돌려주었다. 와, 이런 말도 안 돼. 진짜 힐라그라스라고?

    “로메인 경, 그것보다 지금 말씀은 …힐라그라스가 잠에서 깼다는 말인가요?”

    그랜드-할루카 산맥 위쪽에서 잠이 든 힐라그라스는 빙룡치고 상당히 거대한 몸집을 가진 용이다. 그 몸체 하나가 작은 산보다 크다는 목격담도 있는데, 그 때문에 얻은 이명이 무려 대륙의 재앙일지니. 성격이 어떤지 알려진 건 없다지만, 이런 거 저런 거 다 떠나서 그렇게 큰 몸뚱이를 가진 용은 잠에서 깬 것 자체가 세계 멸망급 사고였다.

    렉시의 경악을 마주한 로메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십시오. 지금은 자고 있으니까요.”

    “…진짜 깨긴 깼었다는 이야기네요?!!!!”

    “너무 놀라실 필요는 없습니다. 완전히 깨기 전에 잠들었으니까요. 그리고 …설사 깼어도 큰일은 없었을 겁니다. 우리가 아는 것과 달리 용들은 인간의 역사에 끼어드는 걸 즐기지 않습니다.”

    기실 로메인 경이 하는 말이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어 주고 싶은 렉시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말은 좀 믿기 힘들었다. 일단 아까 한 말과 앞뒤가 안 맞잖아!?

    “달리아가 용 때문에 살아남은 건 역사가 아니구요?”

    렉시의 뜨악한 눈초리에 로메인이 난처하게 웃었다.

    “제 외가가 관련된 일이라 믿어지지 않으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용들은 게으릅니다. 인간사에 끼어들면 귀찮은 일들이 생기는데 그런 일을 일부러 할 리가 없지요. 아마 힐라그라스도 특별한 사정이 아니었다면 그냥 잠이나 자고 있었을 겁니다.”

    용이 어쩔 수 없이 한 나라 뒷배경이 되어 주는 사정이라, 그거 참 엄청나게 궁금하네. 어쩐지 스케일이 커지는 기분에 렉시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랜드-할루카의 만년설 위로 끝없는 잠을 자고 있는 북방의 주인, 빙룡 힐라그라스가 잠에 빠져든 것은 대략 천 년 전이다. 그는 이후 그저 말없이 잠만 잤는데, 그런 용이 뜬금없이 나타나 달리아의 뒤를 봐준 까닭은 간단하다.

    달리아 왕가에는 힐라그라스의 피가 흘렀다.

    가끔 용들은 수면에서 깨어나 인간의 몸으로 여행을 한다. 힐라그라스도 그랬는데, 인간 여인의 몸으로 분해 여행하던 그는 우연히 한 남자를 만나 목숨을 구해 주었다. 여기까지는 뭐 그럭저럭 있을 수도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바로 그 뒤부터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남자가 용에게 구애한 것이다.

    물론 남자는 용인 줄 몰랐다. 당시 힐라그라스는 평범한 얼굴을 한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남자가 용에게 구애한 이유는 그 나라에 있는 혼인법 때문이었다.

    ‘목숨을 구해 준 동성에게는 재산을, 이성에게는 평생을 바쳐라.’

    남자는 그 나라의 태자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태자가 법을 어기면 왕이 못 된다. 남자는 힐라그라스에게 매달렸고 용은 뒤늦은 후회를 했다. 그냥 지나칠걸, 내가 저걸 왜 구했지? 하지만 이미 살린 목숨 다시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결국 용은 남자와 혼인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전무후무할 이종혼의 서막이었다.

    “억지로 한 결혼이긴 했지만 제법 사이는 좋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왕은 왕비 이외의 여인에겐 관심이 없었지요. 딸만 하나 낳은 왕비 때문에 후계 구도가 위태로웠는데도 왕은 다른 여인은 곁붙이로 두지도 않았거든요. 자연스레 왕이 죽고 나자 왕위 다툼이 일어났지만, 힐라그라스가 그걸 막았습니다.”

    죽는 그날까지 자신만을 곁에 둔 왕을 위해, 용은 왕이 죽기 전까지는 인간으로 행세했다. 그리고 왕이 죽자 곧 인간의 탈을 벗고 날아갔는데, 그래도 그 개판 속에 남겨질 딸을 위해 한 가지 안배를 남겨 주고 떠났다.

    이후 수백 년간 달리아 왕가에 내려올 피의 수호란 것이었다.

    ‘용의 표식을 이은 이를 해하는 자, 용의 저주가 내리리라. 그의 피가 이 땅 위에 흐르는 그 날 용의 분노가 도래하리니, 이것은 용의 이름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이어질 맹세로다.’

    신은 용에게 마법을 허락했고, 그 대신 맹세의 자유를 앗아갔다. 맹세를 깬 용은 마법을 잃는다. 때문에 용은 한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켰다. 마법은 용들의 전부였다.

    “용의 현신을 목격했던 달리아 왕가 사람들은 매우 두려워하며 용의 딸을 여왕으로 추대합니다. 이후 달리아 왕가는 매우 번영했습니다. 그 표식은 때때로 왕가에 나타나 왕실의 큰 힘이 되었으니까요. 패전 협상 당시 표식의 소유자였던 여왕은 그 증명을 위해 자신의 팔을 그었는데, 그와 동시에 대륙에는 지진이 일어났다고 하지요. 용은 자연재해와 비슷합니다. 대제께서 뭘 어떻게 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

    렉시는 말을 잊었다.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세상은 넓고 기이한 일은 셀 수도 없다고 말이야 듣긴 했다만, 용이 사람이랑 결혼한 것도 모자라 애까지 낳았대. 이야, 이쯤 되면 참 재주도 용했다. 대체 그 왕실은 뭘 해서 전쟁에 진 거란 말인가. 아무것도 안 했어도 이겼겠는데? 렉시가 불쑥 물었다.

    “대체 달리아가 패전한 이유가 뭔가요?”

    이미 이 이야기 할 때부터 그 질문이 나올 줄 안 로메인이다. 그는 쓰게 웃으며 종이와 펜을 꺼내 들었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그것 역시 용의 피 때문입니다. 용의 피가 내려오며 생긴 부작용이 아주 치명적이었거든요.”

    그는 침착하게 허공 위에 가계도를 그려 보였다.

    “이건 용의 피가 섞인 후 추가된 달리아 왕실 계보도입니다. 세세한 이름은 생략합니다만, 자손이 점차 줄어드는 건 확실히 보이실 겁니다.”

    열, 다섯, 넷, 셋, 점차 줄어드는 계보도의 가지를 보여 주며 로메인은 설명했다.

    “종이 다르니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만, 대가 갈수록 달리아 왕실은 손이 귀해졌습니다. 용의 표식을 가진 자도 대가 갈수록 줄어들었지요. 왕실 자손이 가장 많이 태어났던 해조차 표식을 지닌 자는 채 열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여왕은 결정해야 했지요. 사르칸트는 뜨는 해였고, 달리아는 지는 해였습니다. 버틸 것인가, 아니면 협상을 할 것인가.”

    과연, 그렇게 된 일이로군. 렉시는 감탄했다.

    “그래서 후자를 택했군요…!”

    “네, 그랬습니다. 용의 피를 목도한 대제는 달리아에게 프로하우스라는 이름을 내리고 대부분의 영토까지 보존해 주었지요. 여왕은 패전 협정이란 이름을 내거는 대신 이 모든 것을 얻어 냈습니다. 실로 협상의 귀재라 할 만하지요.”

    과거 국경선과 거의 일치하는 영지의 지도를 보며 렉시는 납득했다. 과연, 이 정도면 서로 얻을 수 있는 것을 다 얻은 협상이 맞다. 사르칸트는 대륙 통일을, 달리아는 명맥의 유지를.

    용의 것은 언젠가 용에게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사라지는 왕가를 보며 여왕은 자신이 죽고 난 그 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이그리트 대제는 어려운 상대였다. 파죽지세인 그 앞에서 달리아가 얼마나 버틸 수 있었을까?

    “지혜로운 여왕이시네요. 진심이에요.”

    “그렇게 생각하시니 영광입니다.”

    로메인은 왠지 가슴이 설렜다. 렉시가 여왕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그 역시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어디다 말은 못 했으나, 로메인은 최후의 여왕의 숨은 팬이었다. 직분에 충실한 사람을 좋아하는 로메인다웠다.

    “당시엔 이런저런 말이 많았습니다만 지금에 와서 보면 여왕의 선택이 옳았다는 게 더욱 분명하죠. 프로하우스로 성이 바뀐 뒤 나타난 용의 표식은 더욱 줄었지요. 현재엔 표식을 이은 자가 단 한 분뿐이고, 그나마 최근엔 용의 피조차도 고사한 게 분명한 증거가 나타났으니까요. 제 형 같은 사람 말이죠.”

    시간과 상황이 허락하면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레 서로를 까 대는 게 형제. 로메인은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제 형 흉을 봤다.

    “무슨 종마도 아니고, 애가 벌써 다섯이면 지칠 때도 되었는데 말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하하하하하.”

    렉시는 로메인이 올린 차를 마시며 피식피식 웃었다. 담백한 차는 상당히 고소했다. 잠시 소강상태에 이른 수업 내용을 정리하며 렉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로메인이 있어 다행이었다.

    “로메인 경, 고맙습니다. 제가 마도구를 파는 데 성공한다면 다 경의 덕분일 거예요.”

    미소하는 렉시의 뒤로 꽃이 피는 느낌이다. 마성적인 미모를 보며 로메인은 찻잔을 세게 움켜쥐었다. 잘못하면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는 흠흠 하고 목을 울렸다.

    “영주님께 도움이 되었다니 제가 더 기쁘지요. 공작님께서는 담대한 이들을 좋아하십니다. 그러니 부디 뵐 때 크게 놀라지 마시고, 평연히 응대하십시오. 마도구를 퍽 좋아하시는 분입니다. 영주님의 마도구는 제가 봐도 값진 물건들입니다. 아마 큰 무리 없이 값을 치르실 겁니다.”

    안심되는 말이다. 렉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첫 만남인데 심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누구라도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 외에 제가 주의해야 할 건 없나요?”

    잠시 생각하던 로메인이 얼굴을 긁었다.

    그 외에 뭐 또, 있나? 아.

    “그 외엔 별것 없습니다. 아, 혹시라도 머리 쪽에 있는 뿔을 보게 되시면 그냥 못 본 척하십시오. 뿔을 쳐다보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거든요.”

    “네, 그러겠… 푸흡?”

    무심히 답하며 차를 들던 렉시는 순간 먹던 차를 뿜었다. 뭐라고? 뿔?

    그는 놀라 버럭 소리쳤다.

    “공작님께 뿔이 있어요?!”

    다음날 아침, 렉시는 요수아와 필립을 불렀다. 어젯밤 늦게까지 로메인과 한 수업 때문이었다. 그는 졸려 눈도 못 뜨고 있는 두 사람에게 어제 들은 내용을 정리해 읊었다. 효과는 굉장했다. 자울자울 졸던 둘이 하품 쩍 하다 돌처럼 굳었기 때문이다.

    “용이 사람과 결혼을 했다는 말입니까?!”

    “머리에 뿔이 있어요!? 어헝?”

    흐릿하던 요수아와 필립의 눈동자가 마치 별처럼 반짝였다. 그들은 차려진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앞다퉈 말을 쏟아 냈다.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라더니 그 말이 맞긴 맞네요. 맙소사, 뿔이 달린 사람이라니. 진짜죠? 우와 엄청 신기하다! 이런 사람은 보통 뭐라고 부르죠? 사람용? 용사람?”

    흥분하는 요수아를 보며 필립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사람이건 용이건 그게 무슨 상관이야? 우린 물건만 팔고 돌아가면 된다.”

    굉장히 별일 아닌 것처럼 말한 필립이었지만 렉시는 알았다. 탁자 아래 다리를 달달 떠는 필립 역시 상당히 흥분했다는 것을…. 부창부수라고, 요수아나 필립이나 신기한 것엔 사족을 못 쓰는 경향이 있었다.

    ‘하여간, 내숭은.’

    렉시는 어깨를 으쓱하며 빵을 뜯었다. 렉시가 조용하게 식사를 하자 몸이 단 요수아가 재차 물었다.

    “영주님, 그거 말고 뭐 다른 건 없어요?”

    “다른 거? 공작님 말이야?”

    “네. 막 불을 내뿜는다든가, 변신을 한다든가, 날아다니지는 않는대요? 그래요, 그거. 마법! 마법도 써요?”

    대체 얘는 어디서 뭘 봤길래 이렇게 상상력이 풍부한 걸까. 그보다 그런 일이 가능했으면 이미 제국 전역에 소문이 났을 거 같지 않니? 렉시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용의 피를 이었다고 마법을 쓰지는 못해, 요수아.”

    “하지만 뿔도 있는데! 용의 자식인데? 책에선 이런 출생의 비밀을 가진 사람들은 숨겨진 힘을 깨닫고 신세계의 신이 되어 나라를 막 세우던데!”

    렉시가 로망스에 환장한다면, 요수아는 영웅 설화에 사족을 못 쓴다. 둘 중 상태가 심각한 걸 고르라면 물론 요수아 쪽일 것이다. 왜냐고? 그야 요수아의 나이가 어리니까.

    청소년은 무릇 꿈과 희망을 먹고 살아야 하는 법이라지만, 그래도 헛꿈은 초장에 잡아야 한다. 렉시는 쯧쯧 혀를 찼다.

    “영지에 돌아가면 너 시험부터 보자.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너 또 줄창 소설만 봤지?”

    “아, 아니거든요? 공부 완전 열심히 했어요!”

    “그런 녀석이 마법을 쓰네 마네 헛소리를 해?”

    입술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하렴. 얼굴이 노랗게 질린 요수아를 보며 렉시는 피클을 입에 넣었다.

    “인간은 마법 못 쓰잖아. 마법사 빼고는.”

    “…왜요? 용의 피를 이어받았잖아요. 그냥 인간도 아닌데, 그럼 가능하지 않겠어요?”

    렉시는 대답을 포기했다. 그는 대신 날 선 목소리로 필립을 불렀다.

    “…필립!”

    필립은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시정하겠습니다.”

    “지금 이게 시정으로 될 일인가? 이건 상식 수준이야. 어째서 요수아가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기사는 종자를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다. 요수아 꿈이 그냥 영지 빵집 주인 같은 거면 사실 저건 몰라도 상관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는 현재 필립의 종자였고, 언젠가는 영지에서 기사로 봉직하게 될 것이었다. 기사는 검만 쓰는 것이 아니라, 그에 걸맞은 지식 역시 쌓아야 하는 고급 직종이었다. 귀족을 옆에서 보좌하기 위해선 그만한 능력이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적으로는 네 마누라겠지만, 공적으로는 내 영지의 영민이자 가신이 될 애야. 머리가 나쁜 애도 아닌데 그간 대체 뭘 한 건가? 하늘에 있는 쳄발로 부부가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화내겠어?”

    맡겨만 주시면 끼고 열심히 가르친다며? 지금 이게 가르친 거야? 렉시의 타박에 죄 지은 자 필립은 쭈뼛거렸다.

    “그, 공부를 하긴 하는데 말이죠. 요즘 좀 바빴잖습니까. 그래도 꼬박꼬박 책은 읽히고 있지 말입니다. 영주님께서 빌려주신 그 거울책으로―.”

    “―물론 소설이나 읽었겠지. 내가 바본 줄 알아?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군.”

    몰래 놀다 들킨 부부는 합죽이가 되었다. 그들은 고개를 숙이며 렉시의 눈을 피했다. 허어쭈, 내가 아주 환장하겠네.

    “됐다. 이건 뭐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겨 놓은 격이니 원.”

    하긴 누굴 탓하겠는가, 생선더러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저 고양이를 믿은 내 잘못이지. 이 건은 나중에 영지에 가서 해결하기로 하고…. 고양이에게 생선을 물려 준 주인은 흰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어쨌거나 당면한 건 이 무식이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소년의 눈높이 교육이다. 잠시 생각한 뒤, 렉시는 질문을 했다.

    “요수아, 만일 네가 외국어를 배운다 치자. 아무런 교재 없이, 선생 없이 독학을 할 수 있겠니?”

    “…저, 외국어 배워야 해요?! 혼자서?”

    저 못 해요! 차라리 때리세요! 맞을게요! 요수아가 숨 막힌 소리를 내자 렉시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비유다 이놈아, 비유!

    “인간이 마법을 한다는 것도 그런 거야. 심지어 그건 절대 배울 수 없는 언어지. 마법사가 마법을 부리는 건 용이 통역을 대신해 주기 때문이야. 네 3대조 할아버지가 나르카스 반도인이었지만 너는 그 지역 언어를 하지 못하잖아? 마법도 그래. 알려 주는 사람이 없으면 절대 할 수 없어.”

    렉시는 작게 자른 빵을 수프에 적셨다.

    “용과 인간의 혼혈이 독특하긴 하지만 그냥 그뿐이야. 지식이 피로 전해지는 것도 아니고…. 공작님은 외양이 약간 독특하실 뿐, 평범한 사람이라고. 이거 잘 기억해 둬. 행여나 말실수하지 말고.”

    “네에.”

    팍 기가 죽은 요수아의 등을 필립이 살살 쓰다듬는다. 요수아가 공부 못 한 이유가 여실히 나오는 순간이다. 분명 저 연약한 척 기죽은 척하면서 공부를 면피했겠지. 이런 더러운 커플 같으니, 눈꼴시어서 어디 살겠나.

    “어쨌거나 둘 다 유의해. 절대 머리의 뿔은 언급하지 말고, 보더라도 스치듯 지나 보낼 것. 공작 성내에서 공작님의 뿔에 대해서는 말도 하지 마. 로메인 경 말로는 온갖 곳에 귀가 있다니 소란도 피우지 말고.”

    그것만 알고 있으면 돼. 렉시는 엄히 말했다.

    *****

    프로하우스 공작, 기즈 드 프로하우스는 공작령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 하나였다. 약간의 과장과 일말의 진실을 조금 덧붙이자면, 가장 바쁜 사람들 중에서도 제일 바빴다.

    사람들은 흔히들 말하곤 한다. 권력자란 하릴없이 놀고먹는 게 일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 그것은 오해.

    힘주어 말하는데, 세상천지 놀고먹어서 유지되는 건 살밖에 없다. 원래 가진 것 많고 지킬 것 많은 사람일수록 처리할 일이 많은 것이다.

    거기다 프로하우스 공작은, 말하자면 약간 결벽증적인 기질이 있었다. 그는 타인을 믿지 못했다. 타인의 손으로 거치는 일들은 죄다 검토하고 싶어 하는 그의 결벽증은 일중독 기질과 맞물려 눈부시게 빛이 났다. 하나가 끝나면 다른 일, 다른 일이 끝나면 또 다른 일. 이 무한루프의 일더미 속에서 그의 가신들은 딱 죽기 직전까지 굴렀다.

    자고로 일 열심히 하는 상사만큼 지옥 같은 상사가 없는 법 아닌가. 유능하지만 부지런한 상사 덕분에 공작성의 사람들은 늘 수면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상사가 열일하고 계시는데 아랫사람들이 어찌 놀 수 있으리오. 아아, 부지런한 당신 때문에 우리는 불행해요! 그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공작의 뒤를 쫓아다니며 외치곤 했다.

    “이 일은 저희가 하겠습니다 공작님, 이 일은 안 하셔도 됩니다 공작님. 제발 좀 쉬십시오 공작님!”

    …물론, 소득은 없었지만.

    공작령은 돈이 많으므로 녹봉도 높았고, 행정 관료제 역시 잘 정착된 곳이었지만 공작 때문에 관료들의 무덤이었다. 공작성에 갔다 하면 모든 행정 관료들이 감감무소식에, 나오더라도 파김치가 되어 나온다. 견디다 못해 사직을 청해도 공작이 도통 사직서를 수리하지 않으니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란 말은 바로 이런 때를 말하는 것이리라. 거 오죽하면 황제가 나서서 사람 작작 좀 들볶으라고 불평을 할 정도였을까?

    “오전 일정은 이로 끝내겠다.”

    거대한 테이블이 반을 차지한 집무실, 그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남자는 짧은 숨을 내쉬며 펜을 내려놓았다. 펜이 툭 하고 떨어지자 팽팽하게 긴장되었던 집무실의 공기가 훅 풀렸다. 곳곳에서 환희의 기운이 퍼져 나온다. 쉬는 시간! 쉬는 시간!

    “전하, 식사는 어디서 하시겠습니까?”

    “이곳으로 가져오라 이르게.”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알겠사옵니다.” 하고 말한 시종장은 자리를 옮기기 전 냉큼 그 앞에 물컵을 대령했다. 이상한 냄새, 색깔마저 검은 물은 매우 기괴했다. 쓴 내, 단내, 비린내, 매운 내가 순식간에 남자를 엄습한다. 그냥 봐도 역한데 냄새마저 지랄이었다. 그는 순간 얼굴을 찌푸렸다.

    “…이게 뭐지?”

    “약이옵니다, 전하.”

    전하라고 불린 남자의 입매가 비틀렸다.

    “누가 약인 걸 몰라서 묻는 줄 아나. 내가 말하는 건 이게 어떤 약이냐는 거다.”

    그는 오만가지 인상을 쓰며 물컵을 손가락질했다. 희고 긴 손가락이 파르르 떨리는 걸 보니, 대답을 듣지 않으면 먹지 않을 기세였다. 시종장은 한숨을 삼켰다.

    아아, 저 지랄병 또 시작이구나.

    “예, 예. 설명 올리겠습니다. 이것은 전하의 건강을 위하여 지고하신 황제 폐하께오서 하사하신, 건강을 위한 탕약입니다. 식전 약이고, 뜨거울 때 드셔야 약효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지요. 허니 식기 전 쭈욱 드십시오.”

    “그 약은 아침에 먹었지 않느냐?!”

    버럭 짜증을 내는 전하, 프로하우스 공작에게 시종장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황공하옵게도 전하, 약이 늘었사옵니다. 아침의 약은 조식 후 드신 약이고, 이것은 중식 전 드시는 약입니다.”

    “…중식?”

    입이 떡 벌어진 공작에게 시종은 참으로 송구스럽다는 얼굴을 했다.

    “폐하께오서 금일부터 전하께 올리는 약의 분량을 늘리라 명하셨습니다. 하루 두 번에서, 다섯 번이지요. 이 또한 총애의 증거 아니겠습니까? 폐하께오서 전하를 이토록 귀애하시니 망극할 따름이지요.”

    “다, 다섯 번?!!”

    하루 두 번 먹는 것만도 질려 죽겠는데 거기서 세 번이 더 늘었어? 희게 질리는 공작의 얼굴을 보며 시종장은 속으로 혀를 찼다. 뭣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애처럼 약 먹기 싫어서 칭얼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미리 약을 기미해 본 그는 알고 있다. 저 시커먼 약물은 정말로 쓰고 맛이 없었다. 물론 건강에야 좋겠지.

    ‘맛은 지옥 같지만.’

    그는 입안에 몰래 넣은 사탕을 굴리며 애써 맛을 잊으려 노력했다.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쓰다는 말처럼 이 약은 참 맛이 없다. 하지만 이 약은 무려 황제가 보내 주는 하사품이었다. 뭐 정확히 말하면 황궁 어의가 지어 주는 약이지만, 그 어의를 보낸 게 황제니까 이거나 그거나 엎어치나 메치나.

    근래 공작의 건강에 심하게 예민해진 황제 덕분에, 어의는 하루걸러 한 번씩 꼭 공작의 용태를 살펴보고 있었다. 이상이 있다면 그건 즉시 황제 귀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허니 먹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는 왠지 공작이 애석해졌다.

    ‘그러니 적당히 좀 하시지….’

    사실 이 모든 일의 발단은 공작이다. 용의 피를 이었으니 범인보다 튼튼하긴 했겠지만 그래도 사람이 정도껏 눈치도 좀 보면서 일을 했어야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진 공작 때문에, 공작성은 물론이고 멀리 황성까지 뒤집힌 것이 불과 몇 달 전의 일이다. 물론 금방 일어났지만, 그렇다고 쓰러진 사실이 사라지진 않는다. 수십 년을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살면 암만 강철같은 몸이라도 그게 삭지 안 삭고 배기겠는가?

    그저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등줄기가 오싹한 시종장이다. 그는 욱이 받쳤다.

    ‘그러니 진작 후계자를 좀 세우시지! 대체 왜 일을 그렇게 혼자 하셔선!’

    공작이 이렇게 무리하게 일을 하는 이유, 그가 쓰러지자 공작령이 뒤집어진 이유의 근간이 다 그거다. 공작이 쓰러지면 그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제대로 없다는 것.

    후계가 제대로 서 있지 않으니 모든 일은 공작에게 집중되고 업무는 과중된다. 이럴 때 가장 좋은 방편은 업무의 분담 아닌가. 후계자를 세워 일을 나누면 이럴 일이 없었을 텐데 그는 쓰러지고 나서도 후계자의 후 자도 꺼내지를 않고 있다.

    대체 그 쉬운 길을 왜 가지 않는단 말인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버나드 공자 정도면 괜찮은 후계자감 아닌가. 아무리 싫으셔도 남은 후계자는 그분밖에 없으니 길든 짧든 그분이 뒤를 이을 텐데. 헌데 왜 저렇게 버티시는 건지….’

    공작이 단 하나뿐인 아들을 냉대하고 있다는 건 딱히 비밀도 아니었다. 여태까지는 그저 그런 부자간의 갈등 정도로 치부했지만, 사정이 이렇게 된 이상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다. 시종장은 요즘 공작의 친인들이 발 벗고 나서 둘의 관계 개선을 위해 이리저리 찔러 보는 걸 알고 있었다. 그 행위의 목적은 물론 버나드의 후계자 승계였겠지만, 공작은 모든 걸 깔끔하게 거절했다. 심지어 그는 요즘 화해의 화 자만 꺼낼 사람 같으면 만나지도 않고 있었다.

    ‘대체 왜?’

    아니 물론, 작위 주인이 쟤 주기 싫다는데 남이 뭐라 할 바 못 되긴 한다. 하지만 본인이 저렇게 골골 앓는데도 불구하고 버티는 건 누가 봐도 미련한 일 아닌가!?

    ‘공자의 성격이 더러워서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걸리는 건 그것 하나였지만, 그는 이 생각을 이내 지웠다. 좀 말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지체 높은 귀족가의 아들들치고 성격 좋은 자들이 뭐 얼마나 있다고. 그나마 버나드는 일머리 좋고 검도 잘 쓰고 외모도 준수한 편이다. 공작이 버나드를 꺼리는 데엔 분명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다.

    ‘공비 전하와 사이가 안 좋아서 그런가. 하여간, 높은 분들의 심정이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야.’

    고민하던 시종장은 결국 이해를 포기하고 말았다. 자기가 고민한들 공작이 저렇게 완강한데 뭘 어찌할 도리가 있나. 그저 앓느니 죽는 것은 남으로 족했다.

    그는 불퉁한 심정을 숨긴 채, 천천히 공작에게 약을 가까이 밀었다. 후계자고 자시고, 지금 그에게 당면한 문제는 공작에게 약을 먹이는 일이다. 못 먹이면 무려 황명을 어기는 것! 설마 공작에게 뭐라 말은 못 할 테니 욕 먹는 건 그 혼자가 될 게 뻔했다.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공작에게 약을 올렸다.

    “자, 전하. 어서 황명을 받으시옵소서.”

    “그 황명, 반려는 안 되겠나?”

    “알고 계시면서 왜 물으십니까?”

    시종장이 정색했다. 정색을 맞닥뜨린 공작의 얼굴이 푸석해졌다. 그는 진심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진정 이게 내 건강을 위한 길이란 말인가? 내 이토록 제국에 충성을 바치고 있거늘, 어찌 내게 이런 잔인한 짓을 하신단 말인가?”

    시종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보약을 빙자한 사약을 받는 기분이야 이해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체면이 있지 이게 대체 무슨 추태란 말인가.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폐하께오선, 전하의 건강을 정말로 염려하고 계시는 겁니다.”

    “내 건강은 요즘 저 약 때문에 더 나빠지고 있을 것이다. 아니, 나빠지고 있다!”

    그는 씨근덕거리며 손가락질을 했다.

    “보아라, 내가 얼마나 약을 싫어하는지 알면서 줄이기는커녕 되레 늘리는 저 작태를 말이다. 아직도 모르겠나? 폐하께오선 내게 일부러 저러는 것이다!”

    “허면, 물릴까요?”

    반쯤은 진심이었다. 이렇게 투정을 듣느니 차라리 그냥 물려 주십쇼, 공작님 때문이란 핑계라도 대게. 시종장의 속내 어린 말에 공작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잇!”

    그는 이를 악물었다.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볼이 파들파들 떠는 게 다 보일 지경이다. 그는 결국“에잇!” 하고 약을 채 갔다. 약을 앞에 놓은 그는 두 눈을 감고 쉭쉭 숨을 몰아쉬었다.

    “…….”

    참 놀구 있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작태였으나, 시종장은 암말 않고 그냥 있기로 했다. 앞으로 저렇게 한 오 분은 놓고 고뇌하다 두 눈 감고 꿀꺽 마시겠지. 그리고 또 업무 시간에 오십 년 묵은 히스테리를 자신에게 부리리라. 대체 애도 아니고, 약 한번 먹이는데 십 년은 늙는 기분이었다. 그는 절로 나오는 한숨을 간신히 삼켰다.

    ‘쓰러지고 나신 뒤 심술이 느셨어.’

    그가 딱히 보좌하는 자신에게 악감정으로 심술을 부리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심력이 소모되는 건 제법 다른 이야기다. 공작이 이렇게 굴 때마다 그는 수명이 하루치씩 사라지는 것 같았다. 시종장은 진심으로 옛날이 그리웠다.

    ‘그땐 이렇게 체신 없게 굴지는 않으셨는데!’

    그 공작이 이 공작이고, 이 공작이 그 공작인데 뭐 어떻게 다르냐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현재의 공작과 과거의 공작 사이엔 그를 오래 본 사람들만 알 수 있는 아주 거대한 간극이 있었으니. 그 불일치 사이에서 정처 없이 괴로워하는 것은 그같이 옆에서 보좌하는 이들이었다. 시종장은 한숨 쉬며 눈물지었다.

    ‘사람이 크게 아프고 나면 성격이 변한다고 듣긴 했다만. 어쩜 변해도 이렇게 변할 수가 있단 말인가?’

    과거의 공작을 생각하면 할수록 현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과거 그는 정말 나무랄 데 없는 주인이었다. 진중하고, 과묵하고, 부지런한…. 물론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주변이 괴로워지는 단점은 있었지만, 적어도 약 하나 가지고 이렇게 사람 괴롭히고 그러진 않았다.

    ‘이러시니 아무리 건강하다 하셔도 사람들이 믿질 않는 것이지!’

    공작은 아마 모를 것이다. 공비파의 세가 날이 갈수록 불어나는 이유 중 하나가 그의 이런 까탈 때문이라는 걸. 본래 안 그러던 사람이 급작스레 변하면 저거 혹시 죽는 거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법 아닌가?

    ‘길어 봐야 내년 초 신년 연회야. 아무리 늦어도 그때엔 후계자 발표를 하시게 될 것이다! 아무렴!’

    그는 빠드득 이를 갈았다. 공작이 건강했다면야 오 년이고 십 년이고 이 상황이 이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수년간 그가 조절해 온 권력의 추는, 그가 쓰러지면서 유명무실해졌다.

    불안은 전염된다.

    지금이야 단순 과로라고 한다지만, 그다음엔 중병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 시작하지 않았으면 모르되, 이미 나타난 이상 그 흐름은 인력으로 막을 수 없었다. 공작은 그가 좋건 싫건, 버나드를 소공작의 자리에 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리 못 미더워하고 좋아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그의 뒤를 이을 자가 버나드밖에 없는 이상 이건 정해진 미래였다. 이래저래 앞일을 가늠하던 시종장의 낯이 설핏 흐려졌다. 문득 떠오른 사람 하나가 그의 심사를 어지럽혔기 때문이다.

    ‘…허면 로메인 경이 많이 곤란해지겠군.’

    로메인 드 데퓨탄, 데퓨탄 후작의 둘째이자 공작의 조카.

    현재는 한직으로 밀려났다지만 아직도 공작성 내부에선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많았다. 정확히는 귀족들이 아니라 사용인들 사이에서 그랬는데, 이건 그가 사용인들을 무시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던 탓이다.

    귀족들이 아니고 겨우 사용인들 사이에서 인망 좋은 게 뭔 소용 있겠냐 싶을 것 같다. 하지만 모두 기억하길 바란다. 프로하우스 공작가의 전신은 귀족가가 아니라 왕가라는 것을….

    일개 귀족들과 달리, 그들은 수백 년간 오로지 한 가문에 대대로 충성한 사람들이다. 오랫동안 공작가에 목숨을 바친 그들의 영향력은, 그저 사용인이라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것이다.

    ‘그분이 이 자리에 욕심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시종장은 안타까운 마음에 입맛을 다셨다.

    로메인이 소공작의 자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현 상황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과거 달리아 왕국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프로하우스 공작가의 후계자 승계는, 남들 하는 것처럼 계승 순서대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승계 전통은 이러했다.

    ‘피를 이은 자 중 가장 뛰어난 자만이 왕이 되리라.’

    괜히 황제가 후계자 선정에서 손 뗀 게 아니다.

    공작가의 후계자 자리는 능력제였다.

    ‘버나드 공자가 훌륭하긴 하다만, 로메인 경에 비할 바는 아니지.’

    입이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 한다고 했다. 로메인에 비한다면 버나드는 태양 앞의 촛불이요 달빛 아래 반딧불 같은 존재였다. 과장이 좀 심한 게 아닌가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진실인 걸 어떻게 하나.

    외모, 검, 머리, 성품…. 그 무엇 하나 버나드가 로메인보다 나은 게 없다. 딱 하나 월등한 게 있다면 권력욕과… 야망 정도?

    ‘망할, 그 정도로 잘났으면 야망도 좀 가지고 그럴 일이지.’

    시종장은 한숨을 삼켰다.

    로메인은 몰랐겠지만, 그가 동문으로 떠난 뒤 공작파는 한동안 몸살을 앓았다. 이들이 다음 대 소공작으로 밀려고 했던 게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혈통도, 능력도 하자 없는 후계자란 찾기 힘들다는 점에서 로메인은 그들이 밀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후계자였다. 헌데 그런 완벽한 방패이자 무기가 하루아침에 사라졌으니, 얼마나 황망할 것이며 미치고 팔짝 뛰겠는가.

    공작이 로메인의 후계자 후보 건에 대해 가타부타한 적은… 물론 없었지만, 공작파는 좋게 생각했다.

    ‘맘에 안 들면 말을 했겠지.’

    지금이야 사람이 좀 빙충맞고 그래 보여도 영민했던 공작이다. 하는 꼴이 정말 맘에 안 들었으면 애저녁에 하지 말라고 말했을 것이다. 거기다 공작이 로메인을 대하는 태도는, 버나드에 비한다면 아주 봄날 춘풍이었다. 비빌 만한 구석, 매우 넘쳤다.

    좋아, 이 정도면 해 볼 만해!

    그리하여 공작파 일동들은 과감히 로메인을 소공작으로 밀었던 것이다. 번잡해지는 주변을 매우 짜증스러워 한 로메인이 냅다 동문으로 튀기 전까지―열심히, 매우, 가열차게.

    ‘공비파는 소가 뒷발로 쥐 잡은 격이지. 나 원, 대체 어떤 놈이 그런 짓을 했지?’

    동문에 파견될 기사들 제비뽑기 명단에 로메인의 이름을 넣은 자는 누구였을까? 공비파의 장난질이었는지, 누군가의 실수였는지…. 그 진실은 삼 년이 지난 지금도 미궁 속이었다. 공비파고 공작파고 아는 놈이 없었다. 자기 영역을 침범당한 데 대해 빈정이 상한 시종장이 나섰는데도 그랬다. 어찌나 신출귀몰한지 흔적 하나 남은 게 없었던 것이다.

    아아 늙으면 죽어야 한다는 말이 이래서 나오는 것인가? 자학하는 시종장을 뒤로한 채 귀족들은 고군분투했다. 로메인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 것인가. 답이 나오지 않는 주제였다.

    “뭐가 문제였을까요?”

    “로메인 경은 본래 이런 번잡한 일을 싫어했다고 하더군요. 데퓨탄 후작이 왜 그런 반응이었는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데퓨탄 후작은 공작파의 필두였다. 하지만 로메인과 관련해선 한발 뒤로 물러나 있었다. 아니, 뒤로 물러설 뿐만 아니라 은근 이들이 하는 일을 탐탁지 않아 했다.

    왜? 자기 아들 잘되는 게 배 아픈 건가?

    부모가 자식을 질투하는 경우가 없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후작은 제 자식 사랑하기로 유명한 이였다. 모두 그런 그를 이상히 여겼는데, 이제 보니 이상한 게 아니라 당연한 거였다. 후작은 그저 자기 아들을 너무 잘 알아서 저런 행동을 했을 뿐이었다. 자고로 자식 문제는 부모에게 물었어야 하는데.

    후작가의 가족사에 괜스레 끼어드는 일이 될까 저어되어 아무 말 묻지 않던 귀족들은, 일이 터지고 나서야 뒤늦게 후회했다.

    “후작은 자기 아들에게 강요를 하고 싶지 않다더군요. 그에겐 말해 보았자 별 소용없을 것 같습니다.”

    “허면 어쩝니까? 이대로 두고 보자구요?”

    누군가가 불평을 터트리자 다른 이가 한숨 쉬었다.

    “두고 보자는 게 아니라, 딱히 할 일이 없다는 말이죠. 지금으로선 그가 동문 관리가 힘에 부쳐 돌아오는 걸 기대하는 수밖에 없어요. 듣자 하니 그쪽 일이 많이 힘들다던데―.”

    “아서십시오, 생각보다 일을 너무 잘 처리해서 위에서 상을 줘야 하나 고민하는 중이랍니다. 줘 봤자 본인이 반려할 거라 이도 저도 못 하고 있다더군요. 아주 뼈와 살을 불태워 치안 유지를 하고 있어요.”

    “…하긴, 이 거대한 공작령을 다스릴 만하다 우리가 점찍은 분 아닙니까. 그깟 동문 하나 제대로 해결 못 하면 그게 더 우스운 일이죠.”

    이야기엔 도무지 진전이 없었다. 사람이고 동물이고 일단 유혹을 하려면 미끼라도 좋아야 한다. 하지만 어떤 미끼가 과연 로메인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단 말인가?

    보통 사람이면 돈과 권력이면 만사형통이겠으나, 로메인은 둘 다 싫다고 도망갔다. 그런 사람에게 뭘 내걸어야 할지 이들은 도통 알 수 없었다. 혹자는 미인계가 어떻느냐 들이밀기도 했으나, 기실 로메인의 철벽은 여자보다 남자들 사이에서 더 유명했다. 제국 제일 미녀를 보고 상사병 한번 앓아 보지 않은 고자에게 여자는 무슨 여자란 말인가?

    ‘아깝지 아까워. 책임감이 있는 건 닮았으니 그걸 공략하면 될 것도 같은데 말이야.’

    시종장은 혀를 찼다. 그도 한때 로메인 같은 이 때문에 애면글면해서 잘 안다. 저들도 지금 딱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을 거다. 자기도 한때 그랬으니까.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나 집착하는 것이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로메인 경은 그런 것도 영 없으니….’

    시종장은 꿈과 현실과의 괴리 때문에 괴로워하던 한 젊은이를 알고 있었다. 현실 대신 꿈과 원하는 걸 선택했던 젊은이의 결정 때문에 그가 얼마나 골치 아파했던가. 그러나 결과적으로만 말하면, 그는 결국 현실을 받아들이고 꿈을 버렸다. 꿈보다는 당장 눈에 걸리는 책임감이 중요하지 않느냐. 시종장이 계속하여 설득한 덕분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땐 잘했던 결정이었다. 그 결정으로 영지는 평화로워졌고, 명예와 선대의 유언 역시 지켜졌으니.

    하지만 그것이 인생이다. 세상에 자기가 원하는 일만 하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써! 쓰다! 쓰다고!”

    어느새 약을 다 먹은 공작이 울부짖는 소리에 정신이 돌아온 시종장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자기가 공작을 섬긴 게 수십 년이거늘, 고작 그 약 하나 더 먹였다고 저런 행패라니. 원망으로 이글대는 공작의 눈을 보니 참 인생에 회의감이 드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아아, 그래. 쓰다 이거죠? 그는 천천히 주머니에서 사탕 통을 꺼냈다. 공작의 눈이 번뜩 빛났다.

    “…여기 사탕―.”

    ―대령이옵니다, 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 공작은 비호처럼 통을 채 갔다. 먹이를 노리는 매도 저것보다는 덜 빠를 것이다. 시종장은 순간 할 말을 잊은 채 공작을 주시했다. 어느새 두 볼 가득 사탕을 우물거리는 공작을 보자니 웃기지도 않았다.

    “……허.”

    식전에 사탕을 먹으면 입맛 버린다는 말이 목구멍 바깥까지 나왔지만 그는 그냥 침묵을 선택했다. 시간으로밖에 덮을 수 없었던 인생의 쓴맛보다는, 이렇게 줄 사탕이라도 있는 게 낫지 싶어서였다.

    허니 시종장은 사실 이렇게 저렇게 불평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공작이 제멋대로 굴건 얌전해지건 그는 늘 공작에겐 물렀기 때문이다. 결국 자기 팔자 자기가 꼬고 있는 거지만, 뭐 늘 그렇듯 그는 모르고 넘어가게 될 것이다.

    본디 사람이란 자기 일만 되면 눈 뜬 장님이 되는 법. 지난 수십 년간 봉사였던 사람 눈이 갑자기 뜨일 리가 있나.

    *****

    아침 식사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메인이 찾아왔다. 평소의 제복이 아닌 흰 정복을 입고 있는 로메인의 모습은 어딘가의 왕족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전지적 렉시의 시점으로 말하자면, 마치 로망스의 기사처럼 보였다고나 할까? 뭐 어느 정도 당사자 보정이 있긴 하겠다마는, 이게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렉시에 비할 바 아니긴 하나, 로메인 역시 상당히 잘생긴 미남자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은발, 바다처럼 깊은 푸른 눈을 가진 미남이 옷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으면 누구라도 멋지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실제로 방안에서 대기하던 요수아, 심지어 필립까지 슬쩍 감탄하는 얼굴로 로메인을 보고 있었다. 이들이 이러는데 렉시야 뭐 말할 것도 없다. 그는 두 눈을 깜박이며 슬쩍 볼을 붉혔다.

    ‘와, 진짜 멋있다.’

    “일찍 와 주셨군요 로메인 경.”

    “네, 혹시 필요하신 것이 있을까 싶어 미리 왔습니다. 영주님께서는….”

    다가오던 그는 순간 자리에서 멈칫했다. 뭔가 설명하기 힘든 표정이었다. 어쩐지 놀란 것도 같고, 당혹한 것도 같은 얼굴. 그렇게 렉시를 살펴보던 로메인은 그와 눈을 마주하고 순간 어색하게 웃었다.

    “…아직 준비하시기 전이셨군요.”

    렉시는 고개를 저었다. 준비하기 전이긴, 이미 다 끝냈다. 이것저것 신세 지는 마당에 시간까지 지체하면 어쩌려고.

    “아니요, 이미 다 마쳤습니다. 지금 당장 갈 수도 있어요. 혹시 미리 가서 대기하는 편이 여러모로 나을까요?”

    “네? 그것은, 아닙니다만….”

    로메인은 천천히 두 눈을 끔벅거렸다.

    “그, 예복을 입어야 하시지 않습니까?”

    “이미 입었는데… 아, 모자. 모자를 안 썼구나!”

    렉시는 탁자 위에 놓인 모자를 머리 위에 눌러썼다. 이런, 큰일 날 뻔했네. 멀리 있는 거울을 보며 살짝 매무시를 살피는데, 어째 주변이 묘하게 조용했다. 뭐지?

    “지금 예복을 다 입으신… 그러니까, 그게 예복이란 말씀이시지요?”

    “네…? 그렇습니다. 혹시 다른 문제가 있나요?”

    모자, 망토, 가문 문장, 또 빼먹은 게 있나? 렉시가 허둥지둥 옷을 살피는 것을 본 로메인의 얼굴에서 차츰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 뭐라고 해야 할지.”

    그는 복잡한 얼굴로 렉시를 보았다. 정확히는, 그가 입은 옷을.

    옷은 전체적으로 어두운 빛깔이었다. 검은 광택이 돌고, 비슷한 색감의 실로 마감한 의복은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길었다. 제법 큰 키의 렉시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싸 안을 정도였다. 멀리서 보면 그냥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것처럼 보이는 옷은 실제론 복잡한 재단으로 되어 있었다. 이건 이 옷이 보기완 달리 일급 재봉사가 만든 것이란 증거였다. 유행하는 패턴은 아니지만 복잡한 수가 놓여 있는 천도 고급스러웠고, 옷의 전체적인 마감도 맵시가 좋다. 그가 머리에 쓴 모자도 그에 어울리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화려하지는 않지만 우아한 복장은 알현 복장으론 나쁘지 않았다.

    치마만 아니었다면.

    ‘…스커트?!’

    로메인은 뭐라 하지도 못하고 그냥 눈만 끔벅댔다. 원래 너무 놀라면 말이 안 나오는 법이다.

    ‘대, 대체 왜 치마를?’

    사실 굳이 따지자면 그건 스커트라기보단 긴 가운이라고 봐야 했다. 안쪽에 확실히 바지도 입었고, 여성의 옷이라기엔 재단도 직선이다. 허나 얼핏 보기엔 분명 스커트와 비슷하다. 로메인은 고민했다. 왜 저런 옷을 입으셨지. 예뻐서?

    ‘물론 무서울 정도로 어울리긴 한다만….’

    그래, 솔직히 말해서 어울리긴 아주 어울린다. 아마 저건 전례 없이 아름다운 렉시의 미모 덕분일 것이다. 자리에 있는 게 기사가 아니라 시인이었다면, 그들은 저 스커트 입은 모습 가지고도 두루마리 세 권은 넘어갈 대하 서사시를 읊었을 것이다. 저건 그 정도 대접을 받아도 마땅할 미모였다.

    하지만 여기 있는 건 시인이 아니라 기사고, 무엇보다 그들이 갈 자리는 공작의 성이다. 아무리 위화감이 일하지 않는다고 해도 세간엔 상식이란 것이 있었다.

    “영주님, 그, 지금 성장하신 예복은 무슨 의도가 있어 선택하신 겁니까?”

    차마 너 왜 치마 입었냐고 대놓고 물을 순 없던 로메인은 최대한 에둘러 물었다. 거울 속 모자를 매만지던 렉시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희 집안 예복 중 하나인데…. 좀 여성복 같죠? 다른 옷도 있는데, 기레스 소백작 때문에 일부러 골랐어요.”

    “…예?”

    “생각해 보니 그놈은 제 목적을 알고 있더라고요. 마도구 판매. 제가 공작 전하를 만나려고 할 걸 분명 알 텐데, 사람을 심어 놓으면 골치 아프죠. 하지만 이렇게 하면 좀 눈을 피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자들은 제가 남자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그, 렇군요.”

    “이게 그리고 얼핏 보면 여성복이지만…. 사실은 남성복이 맞긴 하거든요. 몇 십 년 전에 유행한 거긴 하지만…. 거기다 가문의 예복이니 예의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니까요.”

    여자로 오해받는 것보단 돈이 더 중요한 자의 판단력은 실로 무서웠다.

    체면보다 무서운 것은 돈. 돈을 위해서라면 체면 따윈 좀 상해도 된다!

    ‘저분은 자신의 이름보다는 실리를 더 우선시 여기시는군.’

    과연 빚을 갚기 위해 보물을 팔러 나온 자다운 행보였다. 로메인은 반쯤 감탄한 채 렉시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안 된다고 하면… 외려 이분의 마음을 상하게 하겠구나!’

    렉시의 설명에 뭐라 말할까 하던 로메인은 입을 닫기로 했다. 옆에 서 있는 필립과 요수아의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보니 더욱 뭐라 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래, 저들이 있는데 이 내가 뭐라고 할 것인가.

    ‘그래. 혹시라도 뭐라고 말하는 자들은 내가 찍어 내면 그만이다.’

    본분과 체면을 중시하는 로메인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버리기로 했다. 그래, 비웃는 자들은 직접 처단하리라. 뭐가 어쨌건 그의 고귀한 정신에서 나온 선택 아닌가?

    렉시를 바라보는 로메인의 눈동자가 살짝 짙어졌다.

    렉시 일행이 후작저에서 출발한 건 점심시간이 가까워서였다. 아침부터 일이 있어 나간 후작 대신, 후작 부인이 일행들을 배웅했다. 후작 부인은 렉시가 입은 옷을 보고 눈을 가느다랗게 떴지만, 이내 침착한 얼굴로 곱게 웃었다. 어차피 어울리니 상관없겠다고 너그러이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 저렇게 예쁘니 무슨 옷을 입건 무슨 상관이겠나?’

    자기 아들이야 옷으로 때 빼고 광냈지만, 이런 얼굴은 그런 게 필요 없다. 어째 장가가 늦더라니 이런 미모를 데려오려고 늦었던 게로구나. 역시 내 아들이야, 눈도 높지!

    아름다운 것을 싫어하는 여인이란 없다. 이 정도 미모면 남자인 게 외려 희소성이 있을 정도다. 어디 내놓아도 야유보다는 부러움을 살 미모의 남성을 보는 그녀의 눈이 별처럼 빛났다. 그녀는 살짝 눈을 접으며 렉시에게 말을 건넸다.

    “호호, 이제 가시는 것인가요?”

    “네, 부인. 실로 융숭한 대접, 무척 감사드립니다.”

    “아이참, 이 정도는 별것도 아닌걸요.”

    “아닙니다 부인, 제가 비록 타 귀족들과 교분이 없으나 이런 대접은 친척이나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일이 잘 되건 되지 않건, 이 은혜는 차후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어머나! 호호호!”

    여자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친척이나 이런 대접을 해 준다는 말에 순간 확 하고 설렜던 것이다. 두 사람을 보며 흐뭇하게 웃는 그녀의 머릿속엔 이미 이후 아들을 장가보낼 계획이 가득이었다.

    어젯밤, 제 아들이 풀어놓은 폭탄 발언은 그녀의 맘속에 분홍빛 확신을 심어 준 지 오래였다.

    ‘어머니. 저, 남작님의 알현이 끝나면 함께 남작령으로 내려갑니다.’

    ‘뭐, 뭐? 너 지금 뭐라고 그랬니?’

    ‘전하께 말씀드리고, 적을 옮기려 합니다. 이미 결정했습니다.’

    ‘…마, 맙소사.’

    난데없이 잘 다니던 직장 그만둔다는 예고에 후작 부처는 당황했다. 갑자기 얘가 왜 이러나. 마, 말려야 하나?

    그러나 그들은 곧 아들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입가에 가득한 웃음, 가느다랗게 접힌 눈동자, 붉게 화색이 도는 흰 얼굴.

    그건, 누가 봐도 ‘그런’ 얼굴이었다.

    아. 그렇구나.

    두 사람은 깨닫고 말았다.

    ‘…이, 이건 그것이로구나. 주군으로 시작해서 자기 당신 여보로 마무리 짓겠다는 심산!’

    ‘과연 내 아들이야. 밀어붙이는 데 거침이 없지!’

    ‘그렇다면 이번 알현은 혹시…?’

    후작 부처의 번뜩이는 눈동자가 동시에 마주쳤다. 너나 할 것 없이 동시에 입이 쩍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예비 상견례?!’

    수십 년 같이 산 부부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속내를 알게 되는 법. 이심전심으로 상대의 생각을 알게 된 그들은 그리하여 동시에 외쳤다.

    ‘찬성이다. 행복해라!’

    ‘예?’

    ‘네가 좋다면 우린 다 좋아. 그럼! 그렇지 여보?’

    ‘아무렴. 네가 좋다는데 우리가 뭐라고 그러겠니?’

    ‘가, 감사합니다.’

    사소한 반대를 예상했던 로메인은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환호하고 계시니 조금 얼떨떨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부부의 눈엔 첫사랑을 시작한 아들의 서투름으로 보였을 뿐이었으니.

    두 사람의 생각은 이랬다.

    남자? 그게 무슨 문제야, 이쁘면 장땡이지.

    후계? 방계에서 입양하면 되지. 그러라고 있는 계승법인걸.

    체면? 그게 무슨 문제야? 사랑이 있는데!

    아아 모든 것을 긍정케 하는 사랑이여. 황제에게 반항하며 연애결혼에 성공한 부부다운 생각이었다.

    어쨌거나 이 알현으로 아들을 장가보낸다고 생각하니 설레어 죽는 그녀는 만면에 꽃이 피었다. 아직 장가의 장도 시작하지 않았건만 그녀의 믿음은 확고했다. 그녀는 수줍게 손을 살랑살랑 저었다. 노총각 아들 장가보낼 생각에 잔뜩 들뜬 부인이 떠나는 이들을 향해 덕담을 쏟아냈다.

    “부디 성공적인 알현이 되시길. 저희 후작가는 남작님 편이랍니다. 아셨죠? 무엇이건 뜻대로 되실 거예요! 반드시!”

    “가, 감사합니다.”

    “호호호호!”

    흑심 섞인 높은 음정의 웃음을 뒤로 한 채, 렉시 일행은 그렇게 후작가를 나섰다.

    후작가에서 나온 마차는 곧 대로로 나갔다. 후작가의 사유지를 벗어나자마자 나타나는 사람들의 행렬에 렉시는 눈을 크게 떴다. 그야말로 바글바글이란 단어가 어울리는 엄청난 인파였다. 말이 다니는 쪽은 좀 나은 편이었다. 그쪽은 잘못 침범하면 밟혀 죽으니, 사람들도 조심해서 걸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정말 사람이 많다. 공작령에 집 있는 사람이란 사람들은 모조리 나온 것 같았다. 사람들의 열기가 마차 벽 너머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추운 겨울인데도 마치 여름처럼 뜨겁고 활기찼다.

    “사람들이 굉장히 많군요. 공작령은 늘 이런가요?”

    “평소에는 이 정도까지 모이진 않습니다. 하지만 곧 축제가 시작하니까요. 신년 축제는 공작령의 가장 큰 행사입니다.”

    “아.”

    렉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까 그런 소리를 얼마 전에 들은 것도 같았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본 로메인은 속으로 슬쩍 웃었다. 밖을 보며 순수하게 감탄하는 그 모습이 묘하게 순진했다.

    “이렇게까지 큰 축제는 본 적이 없어요. 저희 영지도 연초에는 축제를 열지만 작은 곳이라 사람이 모이는 것도 한계가 있거든요. 근처 대영주의 축제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공작령의 신년 축제 기간은 어떻지요?”

    “글쎄요… 보통은 한 달가량 계속됩니다. 덕분에 저 같은 이들도 한 번 정도 축제 구경을 할 수 있지요. 평소보다 배는 바쁘지만 한 달 정도 되면, 그럭저럭 시간이 나는 날이 있으니까요.”

    “한, 한 달?”

    기껏해야 열흘 정도 생각했던 렉시는 깜짝 놀랐다. 생각보다 더 어마어마한 기간이었던 것이다. 보통 이런 축제는 영주가 주도해서 벌이는 일종의 자선 사업이었다. 여는 날짜 하루하루가 돈 먹는 하마인데 그걸 무려 한 달이나 계속 열다니….

    ‘돈이 정말 많긴 한가 보구나.’

    실로 엄청난 재력이다. 렉시는 프로하우스 공작의 재력에 새삼 감탄했다.

    ‘마도구도 그래서 모으는 건가. 돈이 많아서, 주체를 못 하니까?’

    하기사 돈이 많으면 뭔들 못할까. 빚지고 사치하는 것도 아닌데 돈 있는 자가 돈 쓰는 건 세상에 이로운 일이다. 그저 렉시 아버지처럼 빚져서 쓰지만 않는다면야…. 여기까지 생각한 렉시는 조금 속이 쓰려 오는 것 같았다.

    ‘누구는 돈이 넘쳐 마도구를 모으고 누구는 빚 갚으러 전국을 떠도는군.’

    어쩐지 질투가 나는 것은 사람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렉시도 알고는 있었다. 세상엔 자기보다 못한 인생 수두룩하다는 것을. 하지만 사람이란 남의 일보다 내 손의 가시가 더 아픈 법 아닌가? 더더군다나 천만 크레아면 좀 큰 가시였던 것이다.

    아이구 내 팔자야!

    속으로 한숨 쉬는데, 로메인이 하지만― 하고 첨언하는 말이 들렸다.

    “올해는 더 규모가 클지도 모르겠군요. 올해는 공작가의 가신들이 거의 모두 모인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마 후계자 문제 때문이겠지만…. 한 두어 주 후면 각지에서 사람들이 도착하겠군요. 이미 몇은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그때는 이보다 더 혼잡할 겁니다.”

    “모두라면 혹시 지금… 기레스 백작도 있을 가능성이 있나요?”

    약간 창백해진 렉시의 얼굴을 본 로메인이 서둘러 렉시를 달래 주었다.

    “걱정 마십시오. 패트릭은 지금 이곳에 없으니까요. 그자는 얼마 전 총회의 참석 후 자기 영지에 내려갔습니다.”

    로메인은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자랑할 말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안심할 것이다.

    “그와 제 사이가 좋지 않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그 때문에 지인과 부하들이 신경을 써 주고 있지요. 그자가 영지에 들어왔다면, 제게 인편이나 우편이 이미 왔을 겁니다.”

    마주치기만 하면 싸움하는 둘을 견디다 못했던 한 주변인의 이 아이디어는 공작령, 정확히는 공작성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로메인이 성을 나간 후론 영 싸울 일이 사라져서 우편이 급감했지만, 어쨌거나 로메인은 확신하고 있었다. 만일 패트릭이 성에 있었으면 그에게 편지가 안 왔을 리 없다. 렉시는 적이 안심했다.

    “그렇군요!”

    “네, 그러니 걱정 말고 일단 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로메인 경. 로메인 경을 만나지 않았으면 정말 어땠을지…!”

    렉시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는 로메인의 귓가가 살짝 빨개졌다. 기사로서 행동하며 많은 이들에게 감사 인사를 받은 그였지만, 지금처럼 마음이 술렁대는 것은 또 처음.

    ‘침착하자. 침착하자. 안 그래도 미모 때문에 고생한 분인데, 내가 여기서 추태를 보여서야 어디 쓰겠는가?’

    로메인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꽉 움켜쥐었다. 어째서 이렇게 이분과 함께 있으면 평정을 잃게 되는지 모를 일이다. 사실 안 지 일주일도 안 된 사이이면서, 잘나가는 직장 뿌리치고 함께 내려가겠다는 것 자체가 이미 좀 많이 과한 것이었지만…. 그는 거기까진 미처 생각지 못했다. 첫 만남부터 숙소까지야 그럴 수 있어도 검까지 바치기로 한 것 역시 퍽 부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 또한 남자는 눈치채지 못했다. 눈치가 코치인 연애치가 이렇게 위험한 것. 원래 내 일은 당사자가 제일 늦게 깨닫는 법이라는데 그는 언제쯤 자기가 별나게 변한 것을 깨닫게 될 것인가.

    그렇게, 조용하게 렉시의 옆에 앉아 있던 로메인의 눈가에 이상한 게 잡혔다.

    ‘응?’

    그의 눈가에 잡힌 것은 희미한 선이었다. 마차 맞은편, 마부와 연결된 들창 너머에 흰빛이 보인다. 그는 눈을 찌푸렸다. 그간 몇 번 이 마차를 타고 다녔으나 저런 선을 본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흰빛의 선은 가로로 길었고, 세로로는 조금 짧았다. 손가락도 드나들지 못할 짧은 틈 사이로 바람이 살짝 들어오자 로메인의 얼굴이 더욱 굳었다.

    ‘저것은….’

    그때, 그 흰 선이 아래로 쑥 내려갔다.

    “도련님. 마지막 성문에 곧 도착합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네. 방금 두 번째 성문을 지났습니다요.”

    공작의 내성에 들어가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문은 총 셋. 그중 두 번째까진 후작가의 문장으로 무사통과지만 마지막 세 번째에선 검문을 하는 것이 관례다. 로메인이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마부가 머뭇대다가 다시 말을 걸었다.

    “그, 기사가 올 겁니다. 후작님이 안 계시니까요.”

    “그래, 알고 있다.”

    “헌데 마차 속도가 좀 빠르지 않습니까요?”

    “…? 글쎄, 빠른가? 나는 괜찮은 거 같은데.”

    “그래도 역시 조금 줄이는 게 낫겠지요?”

    “…….”

    로메인은 조용히 팔짱을 꼈다. 흘끗거리던 마부의 시선, 갑자기 생긴 덧창 덕분에 아까 본 흰 선이 뭔지 깨달았던 것이다.

    ‘저자가 감히…!’

    로메인은 사나운 시선으로 마부를 노려보았다. 감히 엿보기 구멍으로 손님을 훔쳐보다니! 어떻게 후작가의 마부가 저런 짓을 할 수 있는가. 불쾌감이 솟아올라 날카롭게 날을 세웠다. 방금까지 좋았던 기분이 삽시간에 흐려졌다. 로메인의 흉흉한 시선이 마부를 직격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잭슨?”

    들킨 것을 안 마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죄, 죄송합니다!”

    탁!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들창문이 닫혔다. 이번엔 엿보기 구멍은 보이지 않았다. 허나 로메인의 기분은 여전히 더러웠다. 자기가 옆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저런 무엄한 짓을 하다니.

    ‘…안 되겠군. 괜찮을 줄 알았더니.’

    로메인은 렉시의 얼굴을 보았다. 모자를 눌러쓴 아래, 진주처럼 빛나는 아름다운 얼굴이 아무런 가림 없이 백일하에 드러나 있었다. 무언가 꾸미기 위한 것 하나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홀리는 미모는 얼핏 스친 마부까지 홀린 모양이었다. 저택의 하인들이 집안 식구들이 대체적으로 이성을 유지했기에 괜찮을 줄 알았더니…. 물론 눈이 있으면 홀릴 수밖에 없는 미모이긴 하다만 그래도 정신줄은 붙잡을 줄 알았는데.

    로메인은 이를 까득 물었다. 어쩐지 기분이 무척이나 나빴다.

    ‘이렇게 가면 개나 소나 다 이분을 볼 것 아닌가.’

    저치가 하는 짓을 보니 안쪽도 비슷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 헌데 사람들이 일으킬 혼란보다, 사람들이 렉시를 흘낏댈 것이란 그 부분이 더 기분이 더럽다. 왜 남이 그를 보는 것이 기분이 나쁠까? 그는 자신이 왜 기분이 나쁜지 깨닫지 못한 채 밖을 보고 있던 렉시를 불렀다.

    “송구하오나 남작님, 제가 모자 부근을 좀 손봐도 되겠습니까?”

    “…예?”

    밖을 보던 렉시가 눈을 돌렸다. 로메인의 진지한 얼굴에 깜짝 놀란 눈동자가 크게 부풀었다.

    “모자요?”

    “예. 아무래도, 얼굴을 가리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아….”

    잠시 생각하던 렉시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로메인의 청에 응했다.

    “역시 여장만으론 눈을 피하기 힘들 것 같지요?”

    “… 아니. 네, 그 말이 맞습니다.”

    로메인은 순간 눈가를 살짝 좁혔다가 다시 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것 때문에 기분이 나빠졌나 싶었던 것이다. 그래, 저런 얼굴을 내보이면 여장이고 뭐고 일단 들키는 게 먼저겠지. 그래서 기분이 나빴나 보다. 순식간에 납득한 로메인이었다.

    “베렛 부분의 베일을 풀어 얼굴 부분을 가리게끔 하겠습니다.”

    로메인은 불투명한 젖빛의 베일을 조심스레 풀어냈다. 알 수 없는 천으로 만든 것이 손바닥에 마치 물처럼 감겼다. 이 정도면 빛이 들어도 얼굴 안쪽은 보지 못할 것 같다. 그는 천천히 흘러내린 베일의 끝자락을 렉시의 귀 옆에 걸었다. 작지만 예쁘게 생긴 귓바퀴 위로 천이 넘어가고, 그는 천천히 손을 뗐다.

    “다 됐나요?”

    “…잠시.”

    그는 살짝 얼굴을 찌푸리고 베일을 다시 비끄러맸다. 거친 검을 매만지는 사람이라 그런 건지, 로메인의 손아귀는 살짝 투박했다. 다시 베일이 슬슬 떨어지자 그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렉시는 약간 어색한 얼굴로 로메인을 바라보았다. 목적이 있긴 했으나, 갑자기 잘생긴 얼굴이 가까이 오니 조금 부끄러워졌던 것이다.

    “어, 저… 로메인 경?”

    “뒤로 넘기겠습니다. 다시 한번 해 보지요.”

    “!”

    렉시는 코앞까지 다가온 로메인을 바라보았다. 입가를 가린 베일이 없었다면 숨이 섞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렉시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커진다. 그리고 그 좁혀진 거리 덕분에, 렉시는 로메인의 눈동자 속에 숨겨진 색다른 걸 볼 수 있었다.

    푸른 테두리의 경계면, 그걸 시작으로 스며들 듯 짙어지는 동공 속에 끝이 없을 것 같은 푸른 바다.

    ‘…이런 눈동자였나?’

    많은 눈동자를 보았지만 이 같은 것은 또 없을 것이다. 신비할 정도로 주인과 어울리는 눈동자에 잠시 넋을 잃었다. 햇빛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입술이 바짝 말라 오는 느낌에 렉시는 황급히 시선을 떨어트렸다. 어쩐지 등 언저리가 뜨끈하다. 귓전도 조금 따뜻해진 것 같았다. 베일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안 그랬다면, 삽시간에 얼굴이 빨개진 것을 눈치채였으리라.

    “됐습니다”

    “…….”

    대답 없는 렉시를 뒤로하고 로메인은 천천히 몸을 뗐다. 새파란 눈동자가 잘되었는지 안되었는지 보려는 듯 렉시의 얼굴을 훑는다. 은근하게 풍겨 오는 향유 냄새가 이상할 정도로 달콤했다. 어쩐지 목이 말라 오는 것 같은 답답함에 숨이 가빴다.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로메인의 가슴에 살짝 손을 내밀었다.

    “그, 이제 다 되지 않았나요?”

    “마지막으로 고정 상태만 확인해 보겠습니다. 얼굴을 이쪽으로―.”

    렉시는 로메인의 손이 움직이는 대로 얼굴을 그쪽으로 돌렸다. 볼에 닿은 손가락이 살짝 떨린 것도 같았으나, 확실하진 않았다. 이내 떨어진 손가락은 베일 위로 다가가 매듭을 손질했고, 주인인 로메인의 얼굴은 상당히 진지했기 때문이다. 렉시는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는 남자를 응시했다. 시선을 눈치챈 로메인이 순간 손을 멈추고 렉시를 바라본다. 하늘을 닮은 푸른 눈동자가 조심스레 하늘을 바라보는 여린 녹색과 마주쳤다. 평온했던 마차 안의 공기가 순간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그리고―.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벌컥!

    커다란 소리와 함께 마차 문이 열렸다. 그리고 동시에, 둘 사이에 오갔던 기묘한 긴장감 역시 파삭 하고 깨지고 말았다.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고, 로메인은 왠지 모를 허탈감에 숨을 삼켰다.

    그리고, 그는 버럭 외치며 뒤를 돌았다.

    “어떤 놈이냐!”

    로메인은 눈에 불을 켜며 밖을 내다보았다. 방금 느낀 기묘한 상실감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노기가 불길처럼 일었다. 누군지는 모르나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감히, 공작의 내성에서 이토록 무례한 행동을 하다니!

    “누가 감히 마차의 문을 이렇게 멋대로!”

    그리고 재차 소리치며 로메인이 밖으로 나서는 바로 그 순간.

    “우오오오오오오!”

    “우와아아앗!!”

    “진짜야! 진짜다!”

    “거짓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엄청난 함성이 쏟아졌다. 검문을 위해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한꺼번에 왁자지껄 떠들어 대는 소리였다. 로메인은 발 하나 밖으로 내밀다 말고 우뚝 섰다. 뭐지. 왠지 모르게 익숙한 이 소리는…?!

    로메인은 그야말로 황당해졌다.

    “단장! 단장이다!”

    “이런 씨부럴 저 얼굴이 이렇게 반갑다니!”

    “대체 이게 얼마 만이세요? 단장!”

    “이, 이게 무슨…?!”

    로메인은 식겁한 얼굴로 소 떼처럼 달려오는 기사들을 보았다. 반갑다고 다가오는 것이었지만 당하는 사람 입장으로선 기실 무서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여자도 아니고 남자가 떼로 밀려오는데 반갑고 자시고 소름부터 돋았던 것이다. 그저 허리춤의 검을 뽑지 않은 것만 해도 로메인은 칭찬받아 마땅했다.

    어쨌거나 로메인이 필사의 의지로 검을 사수하는 것을 모르는 이 시꺼먼 기사들은 그저 좋다고 날뛰었다. 꼬리가 있으면 꼬리를 흔들고 제 자리 돌다 멍멍 짖으라 하면 짖을 기세였다. 아주 봄날 망아지가 따로 없었다.

    “겨울날인데 꽃이 만발한 꿈을 꿨다고 필시 좋을 일이 있을 거라 서덜랜드 자식이 입을 털더라니!”

    “설마설마했는데, 설마가 진짜 사람 잡네? 그놈 그냥 점쟁이로 나서라 그래라. 와, 나 완전 소름 돋았어!”

    “그놈은 직업을 잘못 골랐어. 어떻게 이걸 딱 맞히냐?”

    “그냥 지금이라도 기사 관두고 돗자리 깔아도 되겠는데? 와이 씨, 나 신년 운수 좀 알려달라고 그래야 하나.”

    서덜랜드?

    익숙한 이름에 로메인의 귀가 쫑긋거렸다. 서덜랜드라는 게 혹시 내가 아는 그 서덜랜드인가? 예전 기사단 회계 겸 서기 겸 기타 잡기 잡무 담당?

    로메인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몰려온 남자들을 살피다 입을 떡 벌렸다. 아는 얼굴들이었다. 하나도 빠짐이 없이 아는 얼굴들. 그리고 그 아는 얼굴들은 이 자리에 있으면 안 되는 자들이다. 로메인이 진지하게 물었다.

    “…귀경들, 대체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건가?”

    “뭐 하긴요! 경비 서지요!”

    “검문하고 있었지 말입니다?”

    로메인은 망연히 중얼거렸다.

    “경비? 성문 번을 서?”

    …자네들이? 대체 왜?

    로메인은 심기가 복잡하다 못해 환장스러워졌다. 방금 전 기별 없이 문 연 것은 이제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대관절 이해가 안 가는군. 자네들이 왜 여기서 번 따위를 서고 있지? 그대들은 전하의 위병들 아닌가. 혹 위에서 어디서 외적이라도 침입한다는 경고라도 하달되었나?”

    외벽에 짱박혀 있길 삼 년, 공작령 안쪽 복잡한 정치 상황과 담 쌓은 지 오래인 그였다. 아버지가 뭐라 말하려고 해도 안 들린다 귀 막고 도망쳤으니, 중요한 정치적 결단을 모르고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그의 기대와는 영판 달랐다.

    “에이 단장, 공작령에 침입할 간 큰 놈이 어디 있어요? 더더군다나 이 시기는 기사단들이 죄다 영내에 있는데요.”

    “뭐 자살을 참신하게 하고 싶으면 그럴 수도 있긴 하겠…. 아, 이거 혹시 그간 자살 지망자가 많았느냐는 소리셨는감? 그른감?”

    “헐 야 단장이 농담도 한다?!!”

    “세상에, 그 동문이 겁나 빡센 곳이라더니 다 거짓부렁인가 보네. 대장이 농담도 다 하다니 노난 곳 아니냔 말야!”

    로메인의 절망을 배경으로 과거 부하들은 시시덕대며 킬킬거렸다. 이들이 겔겔거릴수록 로메인의 안색은 점점 나빠졌지만 모두 눈치채지 못했다. 저들끼리 노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한가로운 이 광경에서 그저 로메인만 등에서 땀이 날 뿐이었다.

    ‘…이 망할 자식들!’

    아직 신년 축제가 시작되지 않았으나 성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들은 이 난데없는 사고 때문에 줄줄이 열 지어 통과를 기다리는 신세였다. 하지만 모두 화 한 번 안내고 이 사소한 소요를 구경했다. 어쨌거나, 참 보기 드문 광경이긴 했기 때문이다.

    “저거 뭐 하는 거래요?”

    “옛날 상사가 돌아와서 반겨 주는 거라는데. 흠, 얼굴이 좀 익숙한데?”

    “어머나 세상에, 지금 상사도 아니고 옛 상급자한테 저런다구요?”

    “뭐… 그런 모양이지?”

    한때 사회생활을 해 본 이라면 알 것이다. 일이 주도 아니고 삼 년 만에 돌아온 옛 상사를 반갑게 맞이하는 부하가 얼마나 드문 존재인지를. 하나만 봐도 열을 안다고, 사람 하나 됨됨이 알기엔 차고 넘치는 일화가 아닐 수 없었다.

    하여 멀찍이서 둘을 보고 있던 요수아는 매우 만족한 얼굴로 옆에 있는 필립을 쿡 찔렀다.

    “필립 님, 저거 좀 보세요.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저런 분이 우리 영지에 온다니…. 다른 건 몰라도 저런 인품은 좀 배울 필요가 있어요.”

    “…요수아, 네가 아직 몰라서 그러는 거다. 저거 다 가짜야 가짜. 연기라고.”

    풍, 풍풍. 요수아가 콧방귀를 뀌었다.

    “연기래도 저렇게 해 주는 게 어디래요? 우리 나갈 때 팡파레 울리던 누구누구들보다야 훨배 낫죠 무얼.”

    “…….”

    상사가 잠시 영지를 떠난다고 하자 광란의 축제가 벌어졌던 모 위병들의 행태를 요수아는 아직 잊지 않고 있었다. 할 말 없던 필립은 그저 침묵했다.

    여하간, 이렇게 흐뭇한 광경을 보여 주고 있는 로메인이었지만 그 속은 달랐다. 그야말로 현재 그의 속은 폭발 직전. 그는 지금 자신이 어디 있는 건지도 잊을 지경이었다.

    “그럼 자네들이 정말로 여기서 번을 서는 거라고? 내 일찍이 자네들을 근위대로 만들고 자리를 뜨지 않았나. 그 자리는 어지간해선 바뀌지 않는 보직이다. 어떻게 된 일인가!”

    로메인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저들은 기사들. 헌데 기사가 고작 위병, 병사의 옷을 입고 이렇게 밖에 나와 있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어째서 여기 와 있는 것이지?”

    “그, 뭐, 저희야 위에서 하라면 하고 말라면 말라는 말단 아니겠습니까요.”

    “지난 삼 년간 일들이 워낙 많았어 가지고….”

    “…하!”

    그는 지난 삼 년이 처음으로 후회스러워졌다. 성안의 정치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일부러 멀리 산 것인데, 그게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 알았더라면 보고라도 받았을 것이다.

    “여기는 언제부터 근무하게 된 건가?”

    “…한 몇 달 됐습니다.”

    “몇 달?!”

    로메인이 무시무시한 얼굴로 부하들을 바라보자 부하들이 움찔했다. 그들은 잠깐 서로를 바라보다가 칫 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 이야기 하려면 쪼매 오래 걸릴 것 같은데….”

    “너희 중 아무나 한 명 따라와라. 그 정도 시간은 있으니까!”

    그는 쪼그라든 부하들을 보며 두 눈에 불을 켰다. 뒤에서 렉시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을 보는 시선 역시도 생생히 느껴진다. 오늘 알현은 별일 없이 무탈히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오늘 알현 전에 할 일이 좀 많을 것 같았다.

    질질 끌려온 수하가 남기고 간 말은 퍽 놀라운 것이었다.

    ‘그, 몇 달 전 전하께오서 쓰러지신 것은 알고 계시지요?’

    ‘그래. 그건 나도 안다. 그런데 그게 왜?’

    ‘그때 전하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다고… 벌을 받아서 쫓겨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전하께오서 그랬다고? 그분이?’

    ‘일단 짚이는 것이 그것밖에는 없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저희가 이 일로 내려온 것이라….’

    로메인은 자리에 앉아 아까 들은 이야기를 복기했다. 수하의 말에 의하면, 전하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죄를 물어 쫓겨난 것이 분명해 보인다. 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로메인이 공작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공작이 쓰러진 것은 일개 근위대의 문제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의 문제이다. 그가 공작에게 일시적으로나마 검을 바친 건 그가 공명정대하고 사리 판단이 옳은 군주였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것을 타인에게 전가하지는 않는 사람이기에 로메인이 따랐다.

    전하가 그런 짓을 했다고?

    “이상한 일이로군….”

    렉시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로메인을 바라보았다. 수하와 몇 마디 속닥속닥한 뒤 심각해진 그는 아까부터 영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로메인 경.”

    “…….”

    “음, 로메인 경?”

    “……아 네. 말씀하십시오.”

    “저어….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로메인은 고민에서 빠져나와 렉시를 바라보았다. 불투명한 베일 위의 녹색 눈동자가 걱정스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곱고 여린 눈동자 위로 떠오른 우려란 감정에 로메인은 간신히 정신이 돌아왔다. 사람을 데려다 놓고, 너무 자신의 생각에 오랫동안 빠져 있었다.

    “아닙니다. 그냥… 제가 너무 성안의 일에 무지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부하 분들 일 때문에 그런 건가요?”

    “딱히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저 사소한 일이니 염려 마십시오. 제 일 때문에 남작님께 걱정을 끼쳐 드렸군요. 죄송합니다.”

    렉시는 잠시 고민스러운 얼굴을 했다. 말로는 괜찮다고 하는데, 얼굴은 전혀 괜찮지를 않으니 그 말을 어찌 믿을 것인가.

    ‘눈에 총기도 없고.’

    그 와중에도 알현을 위한 준비는 또 빈틈이 없는 게 신기했다. 영혼 없이 착착 걸어가는 방향 끝이 알현 대기실이고, 어이 하고 손들어 사람 부르고…. 참 책임감 하나는 대단하다고 해야 할 것 같지만.

    ‘부하들과 사이가 참 좋아 보이시던데… 그래서 그런가?’

    마차 안에 있어 상황을 잘 보진 못했으나 그럭저럭 눈치는 있다. 대충 사정을 보아하니, 예전에 자신이 취업 알선을 한 부하들이 죄다 자리에서 밀려난 게 맘에 걸린 모양이었다.

    ‘근위대에 있을 사람들이 저 모양이면 걱정이 될 만도 하지.’

    로메인의 성정상, 어쩌면 그건 자신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고민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로메인 경 같은 기사님들도 어려운 것이 많구나.’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어쩜 경은 이래서 우리 영지에 온다고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상 세파에 시달린 기사가 낙향을 택하는 건 사실 보기 드문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힘내셔야 할 텐데.

    렉시는 혀를 차며 로메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시금 심각한 생각에 잠긴 남자의 옆얼굴은 퍽 우수 어려 보인다. 어떻게 하면 로메인 경이 좀 힘을 내실까. 내가 뭐라도 해 드릴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렉시가 속으로 고민 고민을 하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음?’

    렉시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요 몇 년간 본의 아니게 단련된 렉시의 감각에, 무언가 기이한 기색이 잡혔다.

    프로하우스 공작을 알현하기 위한 알현실은 크게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 곳은 위병들이 지키고 있는 예약석, 나머지는 일반석. 사실 이 일반석은 없어도 상관없는 자리였다. 공작의 알현은 철저히 사전 예약제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만사 늘 그렇듯 예정이란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법. 미리 약속된 알현자가 알현을 파투 낼 경우, 시종들은 이 일반석에서 사람을 뽑아 빈자리를 채워 넣었다.

    이게 물론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보통 주에 한두 번 정도는 벌어지는 일이라 사람들은 눈을 벌겋게 뜨고 일반석에서 죽치고 기다렸다. 공작의 알현 명단 윗줄에 들어가는 것보다, 이편이 차라리 시간이 덜 걸렸던 탓이다.

    사실 이런 현상은 제국 곳곳에서 벌어지는 것이었다. 빠르게 순번을 선점하기 위한 새치기와 돈놀이는 인류 역사에서 단 한 번도 빠져 본 적이 없는 물건 아니겠는가.

    좀 셈 빠르고 약삭빠른 세력가들은 몰래 이걸로 뒷돈을 챙기기도 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프로하우스 공작은 그나마 양반 축에 속했다. 그는 적어도 알현 순번을 가지고 돈놀이는 하지 않는다. 왜냐, 돈이 많기 때문이다.

    고작 그런 푼돈으로 체면 망가질 필요가 없다는 그런 자신감의 발로에서 벌어진 일이긴 했다만….

    뭐 그렇다고 미덕이 악덕 되는 건 아니니까, 일단은 칭찬해 주도록 하자.

    어쨌거나 이 쓸모없는 알현실 구조에 대해 설명한 이유는 바로 저 일반석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곳에서 느껴지는 정체불명의 시선. 무시하고 싶어도 따끔따끔 피부결에 와 닿는, 노골적인 적의.

    그게 바로, 렉시가 미간을 찌푸린 이유였다.

    ‘…추격자?’

    반사적으로 생각난 건 역시 추격자의 존재다. 가장도 하고 얼굴도 가렸지만, 눈썰미가 빼어난 자라면 자신을 찾을 수도 있다. 렉시는 슬쩍 목을 틀어 우글대는 사람들 속을 흘낏거렸다. 누가 이런 시선을 보내는 건가. 어떤 놈인가.

    ‘저기, 조금 더 옆 …그래. 이쪽 방향이네.’

    렉시는 슬쩍 고개를 돌려 시선이 오는 곳을 응시했다. 만일 추격자라면 피하기보단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 의심을 덜 산다. 얼굴도 가렸으니 그쪽도 내가 누구인지 모를 것이다.

    ‘자, 보자. 너는 어디의 변태냐.’

    패트릭의 개? 아니면, 그 이전에 쫓아다니던 다른 변태들?

    신기하게도 렉시를 쫓는 놈들 대부분은 그 주인 변태들과 흡사한 면모가 있었다. 사람은 자기와 비슷하게 생긴 상대에게 호감을 가진다는데, 그래서 변태들의 수하가 된 건지도 모를 일이다. 생긴 것도 꼭 제 주인들을 닮은 재수 없는 놈들을 머릿속으로 되새기며 렉시는 상대를 가늠했다.

    그리고 잠시 뒤.

    렉시는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렸다.

    ‘…저건 또 뭐야. 추격자가 아니잖아?’

    단박에 추격자가 아니라 말한 건 저자의 외양이 참으로 휘황찬란해서다. 저런 이가 추격자면 지나가는 거지도 왕일 것이다. 렉시는 몰래 보던 것도 잊고 눈을 끔벅거렸다.

    화려한 남자였다.

    외모가 화려한 게 아니라, 치장이 화려했다. 안쪽에는 진줏빛 비단 셔츠를, 바깥에는 검은색과 금색이 어우러진 튜닉을, 그 위에 흰 여우 털로 만든 두터운 망토를 걸쳤다. 모자는 단순했지만, 대신 가장자리에 죄다 진주를 박아 넣어 눈이 부셨다. 하지만 남자가 차려입은 게 이것뿐이면 사실 말도 안 했다. 그가 단 다른 장신구들은 이보다 한술 더 떴기 때문이다.

    남자는 무슨 보석에 한이 맺힌 사람 같았다. 귀에는 귀걸이가, 목에는 색색으로 엮인 보석 목걸이가 걸려 있었는데 과장 좀 보태서 알이 주먹만 했다.

    거기다 팔뚝은 또 어떤가?

    왼팔에는 손목에, 오른쪽 팔은 팔뚝 쪽에 팔찌를 꼈는데 그것도 다 죄다 금세공에 보석이 빙 둘러 박혔다. 손목은 몰라도 팔뚝에 끼는 팔찌에는 보석을 다 박지 않는데 저 남자는 그냥 다 박았다. 바깥쪽은 몰라도 안쪽은 아마 보석들이 다 긁혀 있을 것이다. 허나 그런 걸 신경 썼으면 아예 차고 나오지도 않았겠지.

    다리를 모로 꼬고 앉아 있는 발엔 고급스러운 양가죽으로 만든 부츠가 신겨 있었는데 문제는 그가 굽에 금을 박아 넣은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발 밑면에 금으로 뭔가 한 것 같았는데 모두 알다시피 금이란 금속은 무르기로 유명하다. 저렇게 바닥에 금칠한 신은 솔직히 의전용으로도 만들지 않았다. 걷는 족족 바닥에 금을 뿌리고 다닐 일 있단 말인가?

    헌데 저 남자는 그 짓을 실제로 하고 있었으니, 아니 저건 무슨 신종 돈지랄이란 말인가?

    그야말로 사치 중의 사치, 재신의 재림이라 할 법한 모습이었다. 렉시는 저렇게 꾸미고 다니는 남자는 머리털 나고 진짜 처음 봤다.

    ‘저기다 대면 패트릭은 검소한 축이네. 세상에, 저게 대체 다 얼마야?’

    언제 나타난 건지 모르겠는 이 남자는 일반석에 일대 파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가뜩이나 번잡한데 남자 때문에 더 혼잡하다. 모두 이 화려 무쌍한 남자와 붙는 걸 부담스러워했던 탓이다. 괜히 손이라도 스쳤다가 저 고가의 물품들에 상처라도 생기면 큰일 아닌가.

    이곳에 모인 자들 대부분은 뭔가 한가락 하는 자들이긴 했지만, 저 정도 사치품을 턱 하고 배상할 만큼 통이 크진 않았다. 그리하여 이 남자를 중심으로 섬 같은 빈 공간이 생긴 것은 거의 순식간.

    이 박력 넘치는 돈지랄남과 떨어지고자 서로 최대한 몸을 붙인 사람들의 모습은 솔직히 좀 별꼴이었다. 하지만 렉시는 그들을 이해했다. 자기라면 저렇게 버티지도 않는다. 그냥 튀었지.

    ‘여기서 빚을 늘리면 정말로 파산이야. 그건 안 돼!’

    체면?

    돈 앞에 체면 차리는 건 여유 있는 놈들 뿐이다. 인간적인 여유는 풍족한 곳간에서 나오는 법. 돈 때문에 오지게 고생한 렉시 입장에서 실리와 체면을 저울질하라면 당연 실리 쪽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쨌거나….

    렉시는 점점 강해지는 남자의 안력에 얼굴을 굳혔다. 저 박력 넘치는 돈덩어리 남자는 왜 나를 저렇게 보는 걸까?

    ‘아는 사람은 아닌데. 본 적이 없어.’

    남자가 추격자가 아니란 걸 확신한 렉시는 덩달아 남자를 관찰하고 있었다. 너만 보냐, 나도 본다. 남자의 시선이 짙어진 건 렉시가 저렇게 대놓고 남자를 관찰하기 시작한 탓도 있었다.

    ‘내가 굉장히 맘에 안 드는 모양인데…. 내가 저런 자와 척을 진 일이 있었나?’

    렉시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보통 이럴 땐 묻어 두었던 과거의 험악한 인연이나 악연들이 툭 튀어나와 당사자를 경악게 하는 것이 수순이다. 하지만 렉시는 이제 겨우 24세, 조금 있으면 25세가 되는 섬약한(?) 지방 귀족일 뿐이었다. 그가 여태껏 수집한 인연과 악연은 돈 벌려고 만났던 변태들뿐이다.

    대체 저건 누구지, 왜 날 저렇게 보지? 심도 깊게 상황을 추론하던 렉시의 시선이 알현실로 향하는 복도를 훑었다. 알현실, 복도, 그리고 현재 알현을 기다리는 자신.

    아. 렉시는 문득 떠오른 추론 하나에 눈을 부릅떴다.

    ‘저자, 상인인가?’

    보는 눈이 없었다면 아마 렉시는 탁 하고 무릎을 쳤을 것이다. 번개처럼 찾아온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의 목적은 무엇인가?

    모두 제각기 이유는 다 다르겠으나 결국 목적은 공작을 보는 것이다. 저 사치병자 남자도 뭐가 어쨌건 알현 때문에 이 자리에 있다는 말이었다. 보통 이런 알현자의 방문 목적은 당사자와 담당 시종만 알고 있었지만 이게 중간에 또 새는 것이 없는 일은 아니다. 거기다 결정적으로 렉시에게 확신을 준 건 남자의 태도였다.

    저, 밑도 끝도 없는 살벌한 적의.

    그래, 저자는 자신과 같은 목적으로 공작을 찾아온 상인인 것이 분명했다!

    ‘그랬군!’

    수수께끼는 풀렸다! 저자는 마도구 상인!

    렉시는 희열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동시에 그의 입가에 맺힌 것은 미소였다. 저자가 뭘 팔러 왔건 렉시를 이길 수 없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흐흥 그랬군, 마도구를 팔러 온 날 견제하는 거였어.’

    렉시는 피식 웃었다. 본의 아니게 쫓겨 다녔지만 그의 자존감과 자존심과 강단만큼은 저 하늘의 별만큼 높디높았다. 상대의 질투심을 본인의 즐거움으로 승화시킨 그는 싱긋 웃으며 경쟁자를 약 올렸다.

    ‘이봐, 거기 돈 덩어리. 날 견제하느니 차라리 좋은 물건을 더 찾아 오라구. 뭐 그래 봤자 별수 없을 테지만…. 자네가 뭘 가져오건 내가 가진 걸 능가할 순 없을걸?’

    난, 이날을 위해 가묘를 털었다!

    후후후후….

    가묘 턴 게 자랑은 아니지만 이 순간만큼은 참으로 뿌듯한 그였다.

    상대의 목적을 아니 맘이 여유로워지는 것은 순식간. 렉시는 살짝 찌푸린 눈을 도로 펴고 단정히 앉은 뒤 상대를 응시했다. 곱게 아치를 그리는 눈매가 놀리듯 휘자, 바라보던 남자의 눈가가 위험하게 번뜩였다. 으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못마땅한 얼굴로 렉시를 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렉시에게 다가왔다. 뚜벅뚜벅, 앞에 있는 사람들을 헤치며 남자가 렉시에게 오려는 찰나였다.

    “로메인 경, 페르귄 남작님. 알현!”

    호명관이 높게 두 사람의 이름을 외쳤다.

    렉시는 재빨리 일어나 로메인을 일으켰다.

    “로메인 경. 일어나세요.”

    “…어?”

    실로 귀신같은 타이밍이다. 렉시는 깜짝 놀라 두리번거리는 로메인의 손을 잡고, 멀리서 멈칫대는 상인을 뒤로했다. 공작의 알현 전에 상인과 드잡이하는 건 그가 원하는 일이 아니다. 렉시는 아직 얼떨떨해하고 있는 로메인의 손을 턱 잡고 문으로 이끌었다. 약을 올릴 대로 올린 저자가 다가오기 전에 얼른 들어가 버리자.

    “자, 알현이에요. 어서 들어가요!”

    그리고 성큼성큼 문 안으로 들어가는 렉시의 모습은 실로 비장미가 넘쳤다. 로메인은 그런 렉시의 손에 질질 이끌리며 문 안으로 들어갔다. 등 뒤로 따갑게 다가오는 시선이 신경 쓰였지만 뭐 어떠리, 이미 들어가는걸.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렉시는 알지 못했다. 그가 이렇게 로메인을 끌고 감에 따라 사람들 사이에 어떤 유언비어가 횡행하게 되었는지를.

    렉시는 미처 몰랐지만, 사실 로메인은 공작령에서 생각보다 더 유명했다. 지난 삼 년간 성에 오지 않았지만 그의 외모나 독특한 지위, 그리고 어떤 사항 하나는 사람들에게 퍽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저분, 혹시 외성의 철벽 기사?”

    “맞아요. 저 은발에 헌헌한 기상은 그분이 맞으시네요….”

    삼 년이란 시간이 긴 시간이긴 하지만 사람 하나 잊기엔 짧다. 외모 집안 능력 삼박자 갖춘 로메인은 공작령 최고의 미혼남이란 평을 들었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유가 확실하지 않은 일로 좌천했는데 빨리 잊힐 리가 있는가. 본시 사람들이란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들을 더 잘 기억하게 마련인 법.

    그리하여 로메인을 알아본 몇몇들이 수군거렸다.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난 뒤 영 소식이 없어 궁금했는데 건강하시군요.”

    “맥아리가 없어졌군. 확실히 그쪽 일이 힘들다곤 하던데.”

    “내 말이 그 말일세. 큰일 할 사람인 줄 알았더니 에잉… 실망일세.”

    “조용히 하세요. 저이가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났지 아버지가 달라졌나요? 데퓨탄 후작이 자기 아들을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몰라서 그래요?”

    로메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고위 귀족들이나 알았다. 그래서 평민들이나 그저 그런 일반 하급 귀족들에게 로메인은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옛 후계자 정도였다.

    모든 것을 다 가졌다가 밀려난 공작의 조카, 권력의 중추에서 있다 밀려난 옛 권력자.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외성문으로 밀려난 미남 기사란 타이틀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면이 있었다. 특히 여자들에게.

    “그곳으로 좌천된 뒤 영 소식이 없던 분이 공작님을 왜 알현하러 오신 걸까요.”

    “그것도 저런 모습으로….”

    “조금쯤은 당당하셔도 좋을 텐데 말이에요.”

    “너무 안되어 보여요….”

    한때 당당했던 남자의 푹 꺼진 어깨여. 그 연유를 파악하기 위해 여자들이 머리를 맞대자 남자들은 혀를 찼다. 하지만 귀는 연다. 그건 그거고, 궁금한 건 궁금한 거였으니까.

    “푹 꺼진 어깨….”

    “이리저리 정처 모르고 헤매던 그 눈동자!”

    “저토록 수심 어린 얼굴이라니….”

    “한쪽 손을 여성분에게 잡힌 채 맥없이 끌려가시는 모습이란….”

    “…무척 힘이 없어 보였지요.”

    …어라.

    여자들의 머리가 갸웃거렸다. 어째 서로 말을 하다 보니 뭔가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보고 말한 장면을 천천히 극으로 재조립했다.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기사가 난데없이 공작을 알현하러 나타난다. 잔뜩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앉아 있는 기사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하다.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처럼 보인다.

    기사는 한숨을 푹푹 쉬며 하늘을 바라본다. 오고 싶지 않았다는 듯. 정말 괴로워 죽고 싶다는 듯.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름이 불리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한 여자의 손에 이끌려 천 근 같은 다리를 움직인다….]

    상업이 발달하면서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것들이 부유한 평민들에게도 개방되기 시작했다. 그중 평민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단연 연극이다. 최근 공작령을 휩쓸고 있는 극은 기사 탄트라와 공녀 릴리안이란 희극이었다. 무뚝뚝한 기사 탄트라와 적극적인 공녀 릴리안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이 극은, 남녀 불문하고 대단한 인기였다. 수동적이던 여성의 역할이 능동적으로 그려지는 내용 덕분에 기존의 연정 관계에도 새 바람이 불 정도였다.

    저돌적인 여자들의 행동에 말세라며 기함하는 남자들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모두들 기억하도록 하자.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수줍음 하나 정도는 숨기고 있다는 것을…. 그거 다 내숭이다.

    어쨌거나 이 새로운 연정 관계 덕분에 사회의 사건 사고에도 새바람이 불었다. 혼전 사고 커플들이 급증했던 것이다. 이게 다 적극적인 여인들의 애정 공세에 홀린 남자들 덕분이었다. 연정 관계의 새바람이고 어쩌고 간에 일단 욕망의 절제란 남자들의 몫. 허나 욕정에 휘둘린 남자들이 앞뒤 안 가리고 그만 일을 쳐 버렸던 것이다.

    아, 유혹에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남자라.

    요즘 공작령에서 여자 손 잡고 다니는 남자들 얼굴이 죽을상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 사실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남자들은 어른들에게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는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기에 다들 죽을상을 짓고 여자들에게 끌려갔던 것이다.

    방금 지나간 로메인 같은 얼굴들을 하고서.

    “…….”

    맙소사.

    차가운 경악이 좌중을 압도했다. 여자들은 소리 없이 입만 벌렸다. 아아아니, 럴수 럴수 이럴 수가…!

    ‘철벽의 기사가… 사고를 쳤어!?’

    로메인 경, 너마저!

    쿠르르르르릉.

    누군가의 명예가 와르르 무너졌다.

    이렇듯 근 삼십 년간 쌓아 올린 명예가 한순간에 무너진 로메인 경은 현재 정신이 몹시 몽롱한 상태였다. 청렴결백 기타 등등에서 정신 빠진 기사로 실시간 전직 중인 것 때문에 넋이 나간 건, 물론 아니다.

    알면 당연 난리가 났겠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그는 저 일을 알지도 못했다.

    어쨌거나 지금 로메인의 넋을 빼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손.

    ‘…손이.’

    로메인은 자신의 손을 움켜쥔 렉시의 손을 바라보았다. 제 손 반이나 될 법한 손이 자기의 손을 잡고 앞으로 마구 간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타인의 체온이 그의 철벽같은 가슴을 얼음처럼 녹이고 있었다. 아까 부하들의 소식이 심란하게 했던 것은 이미 안중에도 없다. 친구와 우정을 빙자한 주먹다짐은 해 봤어도 다정히 손잡은 적은 없던 로메인 경은 현재 이유 없이 가슴이 무척 뛰는 중이었다. 렉시의 손이 닿은 자리가 마치 탈 것처럼 뜨겁다.

    아아…. 그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미인은 원래… 손도 예쁜가?’

    검을 쥐고 사는 기사들의 손이야 다 그렇고 그렇다. 날카로운 무기와 사슬로 만든 장갑에 시달리다 보면 아무리 잘난 손이라도 거칠고 갈라지고 굳은살이 박인다. 울툭불툭한 손가락의 관절은 기본, 색깔마저 거무튀튀하게 변하게 되는 게 바로 기사의 손. 얼굴은 잘생겼을지언정 로메인도 손만큼은 이런 기사들과 다름이 없었다. 그런 마당에 매끄럽고 고운 귀공자의 손이 비교군으로 등장하니 눈이 혹 하니 풀릴 수밖에.

    두근두근두근두근.

    ‘갑자기 심장이 왜 또….’

    그는 갑작스런 부정맥에 신음했다. 그 와중에도 눈은 여전히 한곳에 못 박힌 채였다. 그을리고 못생긴 데다 큼지막한 손을 그 반도 안 되는 고운 손이 수줍게 잡는다. 그의 거친 손 틈으로 느껴지는 매끄러운 감촉만으로도 심장이 떨리건만, 아.

    로메인은 그야말로 귀 끝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방금, 렉시의 손가락이 로메인의 손바닥을 살짝 간질이듯 긁었다.

    ‘――!?!’

    가슴에 직격하는 간질간질한 감각. 나이 서른 넘어가는 수줍은 노총각의 얼굴이 불처럼 타오르며 숨을 삼켰다.

    ―그리고.

    쩌저적…

    30년 된 숫총각의 방심이 결국 거센 움직임을 보이며 벽을 꿰뚫었다. 와르르르…. 삼십 년 산 무적의 철벽이 조각나며 바닥으로 무너졌다. 그 무너진 철벽 무더기 아래에서 자기도 모르게 시작된 수줍은 연심이 여린 싹을 보이며 피어나고 있었다. 물론 아직 본인도 알지 못하게 시작된 연심이었으므로, 당분간은 그 철벽이 무너진 줄도 모를 테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30년 산 숫총각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손 잡혀 끌려가는 중이었다.

    *****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

    소문이 얼마나 빠른지 알려 주는 이 속담은 프로하우스 공작이 신처럼 모시는 말 중 하나였다. 그가 이걸 신봉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진짜로 발보다 말이 더 빠르기 때문이다.

    알현실에서 벌어진 이 일은 로메인이 채 오기도 전 공작에게까지 보고가 들어왔다. 오랜만에 만날 얼굴을 고대하던 그는 이 말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마법 도구 판매를 중개하러 온 거 아니었나?”

    “저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만…. 방금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그게 아니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그분이 사고를 친 것 같다더군요. 놀랍지 않습니까? 시종장이 옆에서 속살거리는 말에 공작은 순간 헛숨을 들이켰다.

    “…사고?”

    “네, 전하.”

    “…사고? 시종장. 혹시 지금 농담하는가?”

    “어느 안전이라고 제가 농짓거릴 하겠습니까?”

    거기다 전 로메인 경 두고 농담은 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로메인 추종자 시종장의 정색에 공작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맙소사.’

    하늘에 드래곤이 나타나고 바위에서 꽃이 펴도 이것보다는 덜 놀라울 것이다. 과거 로메인을 여자로 묶어 보려 있는 고생 없는 고생 다 해 본 그다. 그는 로메인이 보기보다 만만치 않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벌거벗고 품에 뛰어든 직업여성을 청사의 보호소로 보내는 자가 사고를 쳤단 말인가. 지금 그걸 날더러 믿으라고?’

    공작의 조카에게 안겨 부귀영화 누리려 했던 여자는 남자의 차가운 냉대에 길길이 뛰었다. 아무리 돈 받고 하는 일이라지만 벗고 덤볐는데 손끝도 안 댔으니, 퍽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공자는 고자입니다. 내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에요! 확인하세요, 확인해 보시라구요! 만졌는데 안 섰단 말이에요!”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해 들어간 돈만 평균 화대의 열 배였다. 뜻한 바도 이루지 못한 채 큰돈만 나가게 되었으니 손해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아니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열 여자 마다 않는 것이 남자라면 로메인은 필시 여성일 것이다. 공작이 공식적으로 로메인을 포기한 건, 그가 레아누 황녀를 만나고 온 뒤였다.

    세기의 미녀, 제국 제일 미녀, 너무도 아름다워 시간조차 멎는다는 아름다운 레아누.

    그녀의 미모는 황족을 싫어하는 공작조차 감탄하는 것이었다. 헌데 보기만 해도 눈이 부셔 기절자가 속출하는 그녀를 보고도 로메인은 그 흔한 상사병 한번 앓지 않았다. 심지어 덤덤하기까지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좀 이상하지 않은가.

    “…경, 황녀님이 아름답지 않으십니까?”

    이쯤 되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사람 혹시 미적 기준이 남다른 거 아닌가? 조심스럽게 물은 물음에 온 대답은, 놀랍게도 상식적이었다.

    “아뇨, 무척 아름다우신 분이더군요. 그런 분이 우리 제국에 계시다니 제국의 홍복입니다.”

    “역시! 그렇지요? 아름다웠지요?”

    “네, 혹시 누가 그분이 아름답지 않다고 말하는 겁니까?”

    로메인의 반문에 상대가 화드득 일어나 손사래를 쳤다.

    “아니! 설마 그러겠습니까. 그냥 그분을 보시고 난 뒤 경이 무슨 생각이 드셨는지 궁금해서….”

    “글쎄요…. 그분은 외국으로 시집가시기보다 국내에 남아 외교를 전담하시는 게 좋으실 것 같았습니다. 그분이 외교 사절을 하면 모든 정상 회담이 순풍에 돛달 것 같더군요. 다들 그분의 미모 때문에 제대로 된 생각을 못할 겁니다.”

    “…외교 사절?”

    “괜찮은 안건 아닙니까? 저는 진지하게 주청을 드려 볼까 합니다. 물론 제가 아니라 아버지나, 공작께서 올리시는 형태가 되지 싶습니다만….”

    “…주청이요?”

    “네. 혹시 이런 청을 올리면 폐하께서 불쾌해하실 것 같습니까?”

    “…….”

    천하절색 미인보고 외교 사절 운운하는 로메인의 모습에서 모두들 공통적으로 한 단어를 떠올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미모의 여성을 보며 생각나는 게 넌 고작 외교냐. 어떻게 그럴 수 있냐? 남자잖아? 아니 여자라도 혹할 미모를 보고 외교 사절? 회담 순풍?

    아….

    ‘고자인가 보다.’

    직업여성의 피맺힌 외침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공자는 고자입니다! 그분은 엄인입니다! 본인은 모르지만 분명 고자일 겁니다! 진짜라구요!

    ‘그거 정말이었구나.’

    모두들 생각했다. 저거 장가는 텄다고.

    아마 이때 동석한 귀족들 반 이상은 그를 후계자로 밀길 포기했을 것이다. 외모 능력 배경 혈통 다 좋음 뭘 하나? 모든 게 완벽해도 생식 능력이 떨어지는 자를 공작가의 후계자로 미는 것은 좀 양심 없는 짓이었다.

    공작가는 대대로 후손이 적게 태어나는 집안이었다. 직계손만 적은 게 아니라 방계도 한 줌밖에 되질 않는다. 용의 피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화자(火者)로 의심되는 로메인을 중책에 밀어 넣는다는 건 합법적인 공작가 말살 계획이 아니고선 있을 수 없는 일.

    차라리 조금 덜떨어져도 버나드가 백배 나았다. 그는 능력은 떨어질지언정 성기 쪽은 발랄했으니….

    공작이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그를 보내 준 데엔 바로 이러한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뭐라고.

    이제 와서 그가 사고를 쳤다고? 그거 진짜? 정말이야?

    “걔 고자 아니었나?”

    “전하! 체통 좀 지켜 주십시오. 아무리 놀라셔도 그렇지 …대체 고자가 뭡니까?”

    개인 집무실도 아니고 공식 알현장에서 고자 운운이라니. 날이 갈수록 경박해지는 언사에 시종장이 기겁했으나 공작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체통이고 자시고 지금 그럴 때인가. 공작은 두쿵거리는 가슴을 내리눌렀다.

    “사, 상대는 대체 누군가?”

    내가 아는 영애인가? 응? 아니 걔라면 이혼녀도 괜찮아! 심지어 유부녀라도 원한다면 이혼 시켜 줄 수 있는 공작이다. 그런 공작의 간절한 기도에 시종장이 응답했다.

    “아무래도, 함께 오시는 분과 그렇게 된 모양입니다.”

    함께 오는 사람이면… 그, 마도구 판다는 그 남작? 공작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그 남작이 여자였단 말인가? 이런, 큰 실수를 할 뻔했군!”

    귀족들 사이에서 동성애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성애가 주류인 사회에서 결혼까지 한 공작이다. 보수적인 그가 조카의 상대가 남자일 것이란 생각을 할 수 있었을 리 없다. 때문에 그는 애먼 자기 눈을 탓하고야 말았다.

    “하하하! 내가 요즘 어떻게 되었던 모양이야. 눈이 삐었지…. 어떻게 여남작을 남작으로 잘못 볼 수가 있지?”

    허둥지둥 리스트를 다시 훑으려 하는 공작을 막은 것은 옆에 있던 시종장이었다. 원래 이런 일엔 어중간하게 나이 먹은 사람보다 아예 인생 거의 산 사람들이 더 트여 있는 법. 시종장은 공작의 오해를 정정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전하, 전하의 눈은 매우 명료하십니다. 함께 오시는 알렉시아노 드 페르귄 남작은 남성분이 맞습니다.”

    어수선하던 공작의 몸짓이 딱 굳었다.

    “…으응?”

    “로메인 경보다도 어린 분입니다. 선친이 일찍 타계한 탓에 이르게 가문을 물려받았다고 하더군요. 페르귄 가문은 중남부 지역의 오래된 …명가이지요.”

    잠시 멈칫하다 이어진 명가란 단어는 시종장의 마지막 양심이었다. 아무리 그라도 겨우 남작 가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명가란 말을 쓰긴 좀 무리였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 언감생심으로라도 로메인 경과 연을 맺을 수 있는 집안이 아니긴 합니다. 말이 좋아 소박에 평화지, 궁벽한 시골이란 뜻 아닙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지요. 경이 나이 서른 가까이 되어서야 데려온 사람입니다. 그냥 적당히 포기하시고 받아들이십시오.”

    노총각이 드디어 장가간다는데 성별이 문제인가. 사람이 살다 보면 적당히 포기할 건 포기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어차피 늦은 결혼 아무나와 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 법. 그럴 바엔 남자라도 맘에 드는 사람이랑 사는 게 낫지, 아무렴. 거기다 남자 나이 서른 넘어가면 슬슬 재취 자리도 오는 판국 아닌가!

    시종장은 현실을 직시했다.

    ‘그래, 성별을 제외한 조건은 괜찮은 편이야. 일단 어린 데다 사생아도 없고! 거기다 평민도 아니고…. 이 정도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아.’

    하지만 이것도 시종장이나 되니 가능한 납득이지, 조금 많이 덜 산 공작은 그 납득이 안 됐다. 한때 포기했던 길이 밝게 빛났다가 도로 못 먹는 떡이라는 걸 알게 되는 이 심정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이런 미친. 동아줄 내려온 줄 알았더니, 또 썩었잖아!? 고자였으면 포기라도 쉽지! 저놈은 왜 갑자기 남색자가 되어선 사람을 뒤흔들어 놓는단 말야?!’

    “…제길!”

    공작은 욕설을 내뱉으며 발을 굴렀다. 일순간 비추었던 서광이 너무 빛나 실망이 자제가 안 됐다.

    ‘고자나 남색자나 지금 상황에선 그게 그거야. 여자와 못 한다는 말이니 자연 애도 없을 거란 이야기 아닌가!’

    로메인은 모를 것이다. 그의 하반신 사정 탓에 인생 망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이 자리에 있는 그도 인생 고달파진 당사자 하나였기 때문에 그는 지금 로메인이 저러는 게 참 짜증이 났다. 한참 속으로 숨 몰아쉬던 공작은 옆에서 실실대는 시종장을 보고 도끼눈을 떴다.

    “지금 이게 웃을 일이야? 자넨 내가 실망한 게 눈에 보이지도 않나 보지? 아니면, 내가 실망한 모습이 보기 좋은 건가?”

    웃는 거 맘에 안 든다 지랄 떠는 상사라니 참으로 진상의 표본 같은 공작이다. 시종장은 이 뜻 모를 시비에 두 눈을 끔벅였다. 요 몇 달 늘어난 공작의 창의적 지랄은 익숙해진 그조차 가끔 당혹스러울 때가 있었다.

    “네? 오해십니다 전하. 어찌 그런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까? 전 단지 로메인 경이 드디어 노총각이란 무지막지한 단어에서 벗어난 걸 축하하고 싶었을 뿐입죠. 전하께서도 기쁘시잖습니까. 로메인 경이 곁붙이를 찾는 건 전하께오서도 바라 마지않던 일이었지 않습니까?”

    공작의 콧바람이 거세졌다.

    “내가 바란 건 시꺼먼 사내새끼가 아니라, 여우 같은 조카며느리였네!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그게 어떻게 축하할 일인가? 사내끼리 계간하는 게 뭐 그리 자랑할 거리라고 실실 웃어 웃길! 걔가 자네 조카였어도 그럴 텐가?”

    공작은 씩씩 콧김을 내뿜었다. 알현실 담당자가 곧 두 사람이 도착한다는 수신호를 보냈지만 그는 잠시 대기하라고 손짓한 뒤 머리만 헝클 뿐이었다. 이런 공작의 격렬한 거부 반응에, 시종장은 무척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언젠 남자라도 좋겠으니 누구라도 데려오면 소원이 없다 하지 않았나?’

    손바닥 뒤집는 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지금 공작의 반응은 그저 애면글면 짝이나 데려오라던 예전과 정반대의 행보였다. 본래 사람 맘이란 게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긴 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좋은 일 앞두고 저렇게 펄펄 뛸 건 또 뭔가?

    거기다 심지어,

    ‘계, 계간이라니…!’

    시종장은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그의 솔직한 심정으론 미친 건 자기가 아니라 공작 같았다. 평소 비하적인 표현은 보지도 쓰지도 않던 공작의 입에서 계간이라니 자기가 지금 무얼 들은 건지 귀가 의심스럽다. 지금 그게 할 소리인가?

    시종장은 웃던 낯빛을 지우고 심각한 얼굴을 했다.

    “전하… 말씀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계…간이라니요. 놀라신 건 이해합니다만 로메인 경은 전하의 조카 아닙니까. 예전에도 그러셨잖습니까. 로메인 경이 홀로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누구라도 있는 게 낫다고, 그게 남자라도 상관없다 하셨지요. 전하, 동성혼 역시 제국에서 인정하는 혼인입니다. 이리 노여워하실 게 아니잖습니까?”

    쾅! 공작이 팔걸이를 부서질 듯 내려쳤다.

    “그건 그냥 한 소리지, 진담과 농담도 구분 못 하나? 다른 사람이 다들 인정해도 내가 인정 못 하네. 세상 반이 여잔데 뭐가 그리 부족해서 남자랑 혼사를 논해? 가정은 애가 있어야 유지가 되는 법이야. 생산을 하지 못하는 관계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공작은 시종장이 듣든 말든 구시렁댔다.

    “속지 말게, 시종장. 저놈은 자네 생각보다 더 교활하고 이기적인 녀석이야. 후계자 소리 나오자마자 저놈이 한 행동 기억 안 나나?”

    무려 삼 년 전의 일이지만 허위허위 도망가는 로메인의 자태가 마치 어제 본 것처럼 생생한 그다.

    “검을 바친 기사 주제에, 주군을 두고 저 멀리 외성으로 훌쩍 도망간 것만 생각하면 내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가슴이 답답하다 못해 터질 것 같았던 것이다.

    ‘쓰러진 뒤론 모든 게 엉망이야. 이대로면 버나드가 후계자가 될 텐데…. 내가 그 꼴을 어찌 본단 말이야? 그나마 유일한 대항마가 저놈 하난데 이런 넋 떨어진 짓이나 벌이고 있으니… 나 원. 대체 답이 안 보이는군!’

    세상만사 피곤함이 노도처럼 밀려온다. 공작은 그 노도에 휘말려 그냥 그대로 탁 모든 걸 놓아 버리고 싶었다. 공작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챈 시종장은 일단 그를 달래듯 얼렀다.

    “전하. 상심하신 건 알겠습니다만 이런 일은 인력으로 되질 않습니다. 남자 좋다는 경을 때려눕혀 여자를 좋아하라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사나.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는 게 바로 인생이라네. 데퓨탄 후작도 후작이야. 어쩜 자식이 저렇게 막 사는데도 내버려 두는지 원!”

    실상을 따지자면 막 사는 것도 아니고, 후작이 마냥 내버려 둔 적도 없다. 하지만 지금 공작 눈엔 그게 그거였다. 그는 잔뜩 앵돌아진 표정을 지은 채 허공을 노려보았다. 머리 위에 얹은 관과 뿔이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후계자가 안 될 거면 자리라도 지켜 주든가. 아니 아무리 제비뽑기에 걸렸기로서니 뒤도 안 돌아보고 그렇게 가? 괘씸하기 짝이 없는 일인데 다들 물러 터져선…. 그놈이 제 자릴 지켰으면 오늘날 나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뛸 일이 없었을 거 아닌가. 기사란 놈이 주군을 놓고 도망가는데 욕은커녕 대단하다 칭송이나 하고 있으니…. 다들 눈들이 삐었지!’

    사람들은 누군가 부나 명예에 연연해하지 않는 모습을 보일 때, 그 당사자를 숭배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아무나 그렇게 숭배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포인트는, 당사자가 남들보다 잘난 인물이어야 한다는 데 있다.

    여우의 신 포도가 비웃음의 대상인 이유가 무엇인가. 가질 수 없는 물건을 가지고 마치 가질 수 있는 양 본인을 꾸미기 때문이다. 거지가 돈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말하는 건 웃음거리가 되지만 부자가 돈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말하는 건 감탄의 대상이다. 웃기지만 세상사가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다.

    즉, 명리에 초탈한 인물이 인기 있으려면 당사자가 잘나가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로메인은 그런 숭앙의 대상이 될 만한 필요충분조건을 갖췄다. 거기다 그는 배경 사연마저 완벽하지 않은가?

    공작가의 대공자 자리에 오를 뻔하다 떨려 나면 착했던 사람이라도 분노 조절 장애가 올 것이다. 하지만 로메인은 분노 조절 장애는커녕 좌천처럼 간 동문에서 자기 직분 열심히 하며 통행의 효율성을 드높였다. 이런 억울한 개인사까지 겹친 마당인데 화 한 번 안 내고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을 보이니….

    초연한데 성격까지 좋다고 이름이 높아지는 것은 일견 자연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공작으로선 이런 세간의 평가가 우습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었다.

    ‘웃기는 일이지. 정말 착하고 책임감 넘치는 자면 어려움에 빠진 주군을 도울 것이다. 헌데 말도 없이 도망가 겨우 동문의 통행 정상화 좀 시켰다고 그렇게 칭찬을 받다니….’

    그는 무척 억울했다. 세상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돌아가진 않지만 이건 좀 너무하다. 똑같이 일해도 누구는 당연한 것이고 누구는 특별하다 칭송받다니.

    인생사 될 놈은 되고 안 될 놈은 안 된다지만 부득이하게 이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그는 무척 서글펐다. 사람들이 로메인을 좋게 말할 때마다 그는 모든 일을 다 때려치우고 불량한 사회인으로 거듭나고픈 욕망을 느꼈다.

    ‘젠장 …부러워. 너무 부럽다구.’

    피로에 지친 그의 화는 망상 끝에 불합리하고 이상한 지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러나 과로에 짓눌리는 예민한 위정자는 현재 자기의 상태를 깨닫지 못했다.

    일거리에 치여 죽는 그는, 현재 울증이었다.

    “전하, 로메인 경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냥 물리실 겁니까?”

    “…….”

    “전하. 아무리 속상하셔도 이미 벌어진 일 아닙니까…. 진노하신 것은 알겠습니다만 일단 만나는 보셔야죠. 책임질 일을 했으니 책임지겠다고 데려온 건데 그걸 막는 것도 사람이 할 일이 아닙니다.”

    “흥!”

    “서른입니다. 전하, 서른이요. 이 기회를 놓치면 트릿한 경이 홀아비로 살겠노라 선언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원망은 누가 받을 것 같습니까?”

    “…….”

    공작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으며 다리를 꼬아 앉았다. 멀리서 문을 여는 시종이 안절부절 다리를 떨었다. 로메인과 그 남작인지 나발인지가 와 있다는 신호였다.

    ‘…진지하게 그렇게 놔둬 보고 싶긴 하지만.’

    불충한 기사가 홀아비로 사는 것도 퍽 좋은 벌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공작은 로메인을 총애한다. 거기서 어긋나면 안 된다.

    안 그래도 요즘 스트레스가 과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지랄을 떤 터라 기존 이미지가 퍽 상한 상태였다. 이 이상 노망난 짓을 하고 다니면 나중에 뒷감당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손에 낀 반지를 빙글빙글 돌렸다. 돌릴 때마다 반지 안쪽에 박힌 마석이 기묘한 광채를 내뿜는다. 내가 이걸 언제부터 끼고 다녔더라….

    반지의 광채를 무표정히 응시하던 그는 쯧 하고 혀를 찼다.

    ‘공작이어도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군.’

    이럴 줄 알았으면 이 자리에 앉을 생각조차 안 했을 텐데…. 처음 공작 자리에 앉았을 땐 여기가 이럴 줄 몰랐지. 모든 부와 권력이 결집되어 있는 공작의 자리는 실상은 빛 좋은 개살구였다. 날이 갈수록 그는 공작의 권력을 만끽하는 대신 일에 찌들어 가고 있었다.

    ‘이왕 시작한 일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내버려 두면 저 간악한 공비와 버나드가 실권을 쥘 테니까. 내가 차일피일 시간을 미루고는 있지만. 소식이 올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도 없어. 내가 무슨 수를 강구해야지. 그놈이 후계자 자리에 오르면 모든 게 끝이야. 나는 아주 망한다고!’

    어쩜 이렇게 사방이 암초요, 거할 곳 없는 망망대해일까. 그는 눈앞에 있는 가시밭길을 상상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일단 만나라도 보자. 일단 고자가 아닌 게 증명됐으니 그것만으로도 큰 성과로군. 대체 어떤 놈이 로메인을 꼬드겼을까? 나중을 위해서라도 취향을 분석해 놔야겠어.’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

    공작은 로메인의 취향 파악을 위해 둘을 만나 보기로 결정했다.

    “문을 열어 사람들을 들여보내. 자네 말대로 일단 만나 보긴 하겠어.”

    “!”

    불편하게 서 있던 시종장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그는 황급히 자리에 내려가 문을 열라고 손짓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쿵, 문이 열리고 렉시와 로메인이 손을 잡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공작은 고까운 얼굴로 두 사람을 응시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