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기사가…넝쿨째? (4/20)

3. 기사가…넝쿨째?

여기 한 남자가 있다.

타고난 신분, 사회적인 지위, 경제적인 능력,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권력,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아주 대단한 사람이다. 사실 신분을 타고났다는 점에서 나머지들은 그에 다 수반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흠… 뭐.

그래도 굳이 변명을 해 보자면, 신분이 높다 하여 권력을 가질 수 있지는 않다는 것이겠다. 권력으로는 신분을 살 수가 있지만, 신분으로는 권력을 살 수가 없다. 그 높은 신분 안쪽에서도 피나는 노력을 해야 쟁취할 수 있는 것이 권력, 고로 대단하다는 단어가 제법 어울리지 않는가.

어쨌거나 태어나기를 금탯줄로 태어나 모든 걸 가진 이 남자는 결혼도 참 잘했다. 똑같은 신분에서 고른 아내는 미인이었고, 떡두꺼비같은 아들도 둘이나 떡하니 낳아 줬다. 딱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슬하에 딸이 없다는 것이지만 그건 사람 노력으로 되는 일은 아니니 그러려니 넘어가자.

그런데 이거 참, 신도 불공평하지.

이렇듯 다 가졌으면 뭐 하나 빠트릴 것도 있을 법한데, 이 남자는 그런 게 없었다. 심지어 다들 실패한다는 자식 농사마저 끝내줬으니 말 다한 거 아닌가. 남들은 애들이 엇나가네 후레자식이네 사고쳤네 운운하는데, 남자의 아들들은 뭐 하나 빠질 게 없이 잘 자랐다. 질풍노도의 시기는 남의 이야기였다. 주변의 부러움을 산 건 당연한 일이었다.

“각하께오선 행복하시겠습니다. 자제분들이 다들 훌륭하시잖습니까.”

한 모임에 참석해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남자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린 걸 알고 당혹한 얼굴을 했다. 그는 간신히 앞말을 떠올리고 대답했다.

“아, 미안하네. 방금 나 두고 한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말이야 바른말이지만, 각하의 자제분들이 훌륭하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일 아닙니까.”

“후계자이신 큰아드님은 아카데미에서 교수로 달라는 인재고, 작은아드님은 당대 제국 제일검이 제자로 보내 달라 말했던 검의 귀재지요.”

“맞습니다, 거기다 자제분의 사이도 그렇게 좋다면서요. 역시 형과 나이 차가 많이 나서 그럴까요? 저희도 그렇게 낳을걸.”

“솔직히 말해서 정말 부럽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자제분들을 두실 수 있는지….”

“후작가는 대대로 명문의 피가 흐르지요. 부인의 가문 역시 그렇고요. 명문과 명문이 결합하였으니… 당연한 결과일지도 몰라요.”

여러모로 듣기 좋은 소리다. 하지만 요즘 아들 때문에 속 시끄러웠던 남자 귀엔 크게 기껍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그는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을 보며 쓰게 웃었다.

“다들 좋은 말을 해 주니 고맙네. 내 얼굴에 금칠을 해 주니 참 몸 둘 바를 모르겠군. 하지만 말일세, 나도 요즘 자식들 때문에 여러모로 걱정이 많은 사람이라네. 나도 부모는 부모라는 이야기지….”

남자가 한탄하듯 말하자, 주변인들이 조용히 입을 닫고 침을 삼켰다. 꿀꺽.

“자, 자제분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귀족들은 집안일을 밖으로 잘 내보이지 않는다. 이건 남자도 마찬가지로, 그는 단 한 번도 자기 집안일을 밖으로 말한 적이 없다. 헌데 이런 곳에서 저렇듯 자식 한탄을 하다니…?

실로 놀랄 노 자였다. 필시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렸다.

앞서 말했다시피 남자의 아들은 둘이다.

후계자인 큰아들, 검으로 유명한 둘째 아들.

이 둘 중 남자가 걱정하는 이는 누구이며 그 이유는 어떤 것이란 말인가. 다들 두근 반 세근 반 하는 심정으로 남자의 입이 열리기만 기다렸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 말일세, 기본적으로 인생이란 정해져 있는 과업을 완성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네. 나 역시 명문에서 태어났지만 안주하지 않고 가문과 나를 빛내기 위해 많이 노력했네. 결혼도, 자식 농사도 그 일환이었지. 운이 좋게도 내 자식들은 둘 다 세간에서 평들이 좋은 것 같아, 자네들의 말을 들어 보면 말이야.”

그는 턱을 톡톡 두드리며 입을 축였다.

“남자란 족속들은 말이야, 그런 게 있어. 사회에서 출세하고 남들의 인정을 받으면… 그다음으로는 가정을 가지려고 노력해. 내 큰아들인 데미안은 그런 의미에서 남자 중의 남자라고 할 수 있지. 벌써 자식만 다섯이지 않나?”

짧은 웃음이 모임 인원들 입에서 번져 나갔다.

“다섯이라니, 벌써 그렇게 되었습니까?”

“응 그렇다네. 다섯째는 아직 며늘애 배 속에 있지만 말이야. 손주들이 다들 하나같이 어찌나 귀여운지 몰라.”

남자는 하하 하고 웃은 뒤 몸을 나른히 뒤로 젖혔다.

“어쨌거나 아까 자네들이 말한 것처럼, 내 아들들은 모두 그럭저럭 출세는 했어. 큰아이도 그렇고, 작은 아이도 나름 인정받고 있지. 그럼 당연한 수순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노려 봄 직하지 않겠나. 가정이나 결혼 말이야. 안 그런가?”

“…그렇지요.”

아하.

‘차남이 문제였군.’

이쯤 이야기가 전개되면 상대가 누군지는 너무도 일목요연하다. 남자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자신의 차남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작은아드님이 아직 약혼 전이셨지요?”

“말도 말게, 약혼은커녕 만나는 여자도 없는 것 같아! 세상에, 공작령에서 내 아들에 대해 무슨 소문이 도는지 알고는 있나?”

“…….”

소문 좋아하는 귀족들이 남자의 아들에 대해 도는 이야기를 모를 리가 없다. 철벽, 난공불락의 요새, 고자, 기타 등등등.

이 모든 별명 대부분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들 입에서 나온 소문이다. 다른 무엇보다 그게 심각한 일이었지만 다들 눈치는 있었으므로 침묵을 택했다.

“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나는 요즘 그 애만 생각하면 밤에 잠도 안 오네. 내가 부럽다고 그랬던가? 아, 나도 그대로 돌려주고 싶군. 나는 자네들이 부럽네, 진심이야.”

“각하….”

이곳의 모임은 대부분 남자와 같은 연배다. 같이 자식 키우는 입장에서, 남자의 걱정이 공감 가지 않을 리 없었다. 짧은 이해의 침묵이 모두를 휩쓸었다.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좋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수년째 감감 무소식이야. 도무지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으니…. 그저 내 속만 썩는 것이지.”

누군가 조심스레 남자에게 권유했다.

“그냥 집안 대 집안으로 약혼을 시키면 어떻습니까. 본인이 생각 없다면 그러는 것도 괜찮지 않습니까? 각하께서도 그렇게 하셨잖습니까.”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자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상대는 흠칫했다. 아뿔싸, 정략결혼이 싫으신 거였군. 하긴 정략으로 결혼시킬 거였으면 진작 시키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는 즉시 실언을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하도 갑갑해하시길래 한번 해 본 말입니다. 그래도 한 번뿐인 혼사에 정략결혼은 안 될 말이지요.”

“그거 말고! 엘자와 나는 연애해서 결혼했단 말일세! 정략혼이라니!?”

남자는 벌게진 얼굴로 펄펄 뛰었다. 귀족들 사이에서 정략혼이 횡행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는 다르다. 첫 만남이야 어쨌든 남자는 부인과 뜨거운 연애 끝에 결혼했다는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몰랐습니다.”

“앞으로는 말조심하게! 그리고 나도 안 한 정략을 내가 자식에게 시킬 리가 없지 않나?”

어떻게 보면 좀 트집이긴 했다. 허나 이 모임에서 남자는 피라미드의 꼭대기였으므로 다들 상대만을 욕했다. 상대는 황급히 물러나 남자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그는 한동안 씩씩대다 간신히 성질을 죽였다.

“방금은 화내서 미안하네. 내가 요즘 예민해서 그런 거니 이해해 주게나.”

“아닙니다, 그러실 수도 있는 것이지요. 부모가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속이 많이 상하시겠지요…. 이해합니다.”

사람들의 호응을 조금씩 들으며, 반백의 남자가 흐리게 웃었다.

“다들 참으로 마음들이 너그럽구만. 어쨌거나… 내가 요즘 이렇게 산다네. 아들 걱정 때문에 하루하루 늙어 가는 마당이지. 이건 내 아내도 나와 마찬가지더군. 어떻게 해도 좋은 방도가 떠오르지 않아.”

“참으로 심려가 크시겠습니다.”

“…그렇지. 그래서 말이네만.”

축 처져 있던 남자의 눈동자 위로 순간 빛이 번뜩 지나갔다.

“자네들은 어땠나?”

“? 무엇 말입니까 각하?”

“자네들은 자식들을 어떻게 혼인시켰냐 이 말이야. 여기서 미혼 자식이 있는 건 나밖에 없지 않은가. 자네들 아들들은 어떻게 여자를 만났나? 혹시 아는 거 있는가?”

“예…?!”

뜻밖의 질문에 사람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무리 그래도 질문이 참 이런 자리에서 할 만한 것은 퍽 아니다. 그러나 피라미드의 꼭대기가 질문하셨으니 아랫사람들은 대답해야만 하는 법이라. 그들은 잠시 서로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곧 저마다 입을 열었다.

웅성웅성웅성웅성.

모임 인원들 사이로 조용한 의논들이 오고 갔다. 이번에는 남자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만용은 부리지 않는다. 방금 한번 불벼락이 내린 걸 봤으니, 적당히 의논하여 괜찮은 수를 찾아 올 것이다. 남자는 조용히 앉아 대답을 기다렸다. 속이 상하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이게 무슨 꼴이람.’

남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집안 사정을 동네방네 떠들면서 도움을 청하다니 이런 수치가 어디 있을까. 허나 입을 잘못 놀린 죄가 있는 남자로선 더 이상 수가 없었다. 늦어지는 작은아들의 결혼 문제로 어제 입 한번 벙긋했다가, 화난 부인 엘자가 남자에게 최후통첩을 했던 것이다.

“정말 너무하시네요, 당신. 어쩜 그렇게 자기만 알고 이기적일 수가 있어요?”

“에, 엘자?”

“내 이름 부르지 말아요, 듣기 싫으니까. 당신이 작은애 결혼 건으로 조바심이 난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게 어디 내 탓인가요? 나도 노력했어요. 당신이 내 노력을 알기나 해요?”

엘자는 바들바들 떨며 부군을 향해 삿대질했다. 곱디고운 얼굴이 노여움으로 붉게 물들었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티 파티에 참가하고, 소규모 모임을 열면서 정보 수집하는 게 요즘 내 일상이에요. 어디의 처자들이 참한지, 요즘 젊은 남자들은 어떤 여인들을 좋아하는지! 요즘 유행이 뭔지, 어디에 여인들이 자주 모이는지! 그런데 뭐가 어쩌고 저째요? 작은애 결혼에 왜 이리 무심하냐고?!!!! 그게 지금 할 말이에요? 내가 이럴 동안 당신은 여태 뭘 했지요? 그 애 부모는 나 하나뿐인가요? 이렇게 입 한번 벙긋하면 뭐 답이 나와요?”

씩씩거리던 엘자는 남편을 향해 일갈했다.

“내가 아무리 이렇게 돌아다니면 뭐 해요? 당신의 잘난 아들은 그 동문 구석탱이에 들어앉아 나오질 않는데! 나로서는 이제 어찌할 도리가 없네요. 그러니 이젠 당신이 알아서 해요!”

“여, 여보!”

나더러 뭘 어쩌라고? 남자는 황황히 부인을 바라보았으나 열 받으신 마나님께서는 절대로 화를 풀지 않으셨다. 그녀는 고운 눈을 위로 쭉 째 올리고 고함쳤다.

“어쩌긴요? 늘 당신이 잘난 척하는 그 모임에 가서 머리 맞대고 물어보든가요! 어쨌든 뭔가 제대로 된 답이 나오기 전까지는 나한테 얼씬도 하지 말아요!”

쾅!

부부 침실의 문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닫히고 후작은 홀로 남겨졌다. 그간 침실 따로 쓴 적은 출장 갔을 때 말곤 한 번도 없었건만!

‘그 빌어먹을 기레스 놈의 농간에 넘어가는 게 아니었는데!’

그는 뒤늦게 후회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반올림하면 서른인 로메인이 왜 아직까지 약혼녀 하나 없는지 모르겠다며 빈정거리는 기레스 소백작의 주둥이는 진정 재앙의 주둥아리였다.

‘괘씸한 놈, 내 아들이 네놈이랑 같은 줄 아느냐? 가진 건 돈밖에 없는 녀석이 감히!’

그는 며칠 전 회의에서 만난 소백작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그가 나타난 자리는 와병 중인 공작의 차기 후계자와 관련하여 관료들이 의논하는 자리였다. 사실 그가 참석할 자리도 아니건만 제 아비를 대신해 나타난 패트릭은 보무도 당당히 공비의 파벌 한쪽에 앉아 시시덕거렸다. 다들 입을 떡 벌렸다. 기레스 백작은 원래 공작 쪽 파벌에 속했기 때문이다.

“기레스 백작은 이제 정계를 아주 은퇴한 것인가 보군요.”

“저런 천둥벌거숭이를 대신 내보내다니….”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하나뿐인 아들인데요.”

“황도에서 이상한 물이 들었다는데… 어휴, 답답합니다.”

다들 뒤에서 혀만 쯧쯧 찰 뿐, 뭐라 말 못 하는 것은 기레스 백작이 불쌍하기 때문이다. 아들 패트릭의 헛짓 덕에 삼십 년은 늙어 버린 옛 친구는 이제 부끄러워 죽겠다며 모임도 잘 안 나온다.

파벌을 바꾼 건 그렇다 치지만 그래도 예의는 지켜야지. 친구를 위해 점잖게 한소리 했던 후작은 뜬금없는 아들 욕에 그만 얼이 빠지고 말았다.

“과연, 데퓨탄 후작님. 옛 친구의 아들에게까지 신경을 써 주시다니, 참으로 감사하기 이를 데 없군요. 요즘 아드님 걱정 때문에 공사다망하실 텐데 말입니다.”

“지금 뭐라고 했는가? 기레스 소백작.”

내 아들이 뭐가 어쨌다고? 후작의 얼굴을 보며 기레스의 소백작 패트릭은 얄궂게 비웃었다.

“저야 뜻이 있어 미혼을 고수하고 있습니다만, 미래를 약속한 사람 정도는 있습니다. 아직 일이 정리되지 않았지만, 주변 정리만 끝나면 곧 식을 올릴 예정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 친구는 아직도 만나는 여인 하나 없지 않습니까?”

비로소 저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안 후작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즉, 이런 데서 나한테 신경 쓸 생각 말고 노총각인 니 아들 간수나 잘하라는 이야기였다.

‘이, 이 미친놈이?’

후작이 입을 벌려 화를 내려던 그때, 백작이 잽싸게 뒤를 이었다.

“아 물론, 그 친구도 뭔가 생각이 있을 겁니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지 않습니까? 로메인 드 데퓨탄, 후작 각하의 둘째 아드님은 말이죠.”

뺨치고 어르는 솜씨가 아주 수준급이다. 돈으로 황도 쪽 정치 줄을 뚫은 줄 알았더니, 단지 그것만으로 한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후작은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의 수단이 보통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내년이면 제국 나이로 서른… 하나였던가요?”

뻔히 알면서 묻는 것이다. 그러나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 후작은 뿌드득 이를 갈며 결국 노총각인 아들 나이를 언급해야 했다. 굴욕이었다.

“…서른일세. 자네와 동갑이었지.”

“아, 이런! 제가 착각했습니다. 그 친구는 늘 어른스러워서 말이죠. 그만 저보다 한참 연상인 걸로 오해했지 뭡니까? 어쨌든 그 친구도 곧 제 인연을 찾겠지요. 허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 하, 하.”

어쨌거나 겉으로는 훈훈한 대화 내용이다.

자신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친구에게, 자기는 괜찮다며 귀댁의 가내 평화를 걱정하는 아주 예의 바른 대화.

화를 내려면 일찍 냈어야 하는데 저 여우 같은 것이 타이밍을 낚아챘다. 여기서 후작이 뒤늦게 화를 내면 속 좁은 놈이라는 평만 얻게 된다. 더불어, 아들 로메인이 곧 노총각 대열에 들어선다는 소문 역시 들불처럼 번지리라. 진정 여우 같은 놈이었다.

‘여우 새끼! 감히 내 아들을 이용해서 날 우롱해?’

사실 이게 다 로메인이 여자 하나 안 만난 탓이었지만, 본래 가재는 게 편, 내 애는 내 편이다. 결과적으로 어린놈에게 망신을 당한 후작은 씨근덕대는 숨을 다스려야 했다.

“걱정 아주 고맙군! 그래, 식을 올린다고? 언제인가?”

“조만간 할 겁니다. 제 신부가 될 이가 좀 수줍음을 타거든요. 참으로 사랑스러운 사람이지요.”

“수줍음이라…. 좋은 덕목이지. 우리가 알 법한 집안의 영애인가?”

“아, 그것은 말하기 곤란합니다. 제 신부의 아름… 사랑스러움을 누군가 알고 낚아채면 어떻게 합니까?”

쌔하니 날카로운 표정을 짓던 패트릭의 표정이 황홀하게 물든다. 꼴에 아주 뜨거운 사랑을 하고 계신 모양이었다. 그래 봤자 니 눈깔에 뭐 얼마나 좋은 여자가 걸렸으려고. 후작은 삐딱하게 웃었다.

“그렇군, 미리 축하하겠네. 초대장은….”

“아, 물론 보내야지요. 아마 아버지도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요즘 몸이 안 좋으시다고 바깥출입을 잘 안 하고 계시거든요. 하지만 오랜 친구분을 뵌다면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안 보내도 된다고 하려고 했더니, 이놈이 끝까지 사람을 붙들고 늘어진다. 친구까지 언급됐으니 일 없으면 가야 했다. 레프트 훅, 라이트 훅을 연타로 맞은 후작은 결국 처절하게 패배했다.

‘이 여우 새끼 같으니! 내가 반드시 로메인 장가보낸다. 너보다 더 일찍! 더 빨리!’

어린놈에게 농락당했다는 울분이 후작의 눈을 멀게 했다. 원래 눈 뒤집힐 땐 입을 무겁게 해야 하건만. 그는 이날 집으로 가 마나님의 심기만 건드렸고, 결국 쫓겨나 여기서 사람들 의견을 구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저 입조심하지 못한 후작의 부주의라 하겠다.

‘미치겠군. 부디 엘자의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 있어야 할 텐데.’

앞에서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하던 사람들이 몸을 돌린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후작은 몸을 바로 세웠다. 일부러 반짝이는 눈동자를 하는 것도 고역이지만 어쩔 수 없다. 후, 그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삼켰다.

이렇게, 데퓨탄 후작은 본격적으로 노총각 구출 작전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 모의의 첫 구제 대상자는 물론 후작의 차남, 로메인 드 데퓨탄.

다들 후작의 어려움을 알고 참으로 성실하게 프로젝트에 임했지만 모두 기억하자, 이 모임 대부분은 나이 먹은 남자, 그것도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현역에서 은퇴한 남자들의 연애 세포는 연애치와 다를 바 없다. 그저 일을 열심히 하는 것과, 그 열심히 한 일이 쓸모 있는 것은 아주 다른 영역이라는 게 안타까울 뿐.

어쨌거나 이 야심찬 프로젝트 결과물을 들고 집으로 향한 후작은, 바로 그날 프로젝트를 폐기한다. 결과물이 똥이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고, 다른 일이 있어서였다.

“저는 알렉시아노 드 페르귄이라고 합니다, 각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먼 곳에서 올라와 어찌할 바 몰랐는데 이렇듯 숙소도 제공해 주시다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어차피 남는 게 방이라네. 자기 집인 듯 생각하고 가시게. 나도 참… 반갑네.”

후작은 얼떨떨한 얼굴로 미인과 악수했다. 그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미인이 그를 보며 웃고 있다. 살아생전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첨 보았다. 아내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그였지만 이런 미모를 가진 사람은 꿈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허나 그를 제일 놀라게 한 건 바로 이것이다.

바로 저 미인을 데려온 것이 그의 아들이라는 것!

‘내, 내 아들이…!’

생전 친구 한 번 데려온 적 없던 놈이 오늘 처음 본 사람을 집으로 데려왔다고?

그것도, 숙소가 없으니 며칠 묵게 하자고?

세상에.

그는 직감했다.

이건 뒤로 봐도 옆으로 봐도 앞으로 굴러서 봐도 그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거일 수밖에 없다!

그는 속으로 눈물을 좔좔 흩뿌리며 외쳤다. 오랜 기다림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우리 예비 며느님이다!’

둘째야. 너, 너 드디어 장가가려고 마음먹었구나!

*****

렉시 일행이 후작저에 몸을 의탁하기로 결정한 건 여러 제반 사항이 좀 꼬여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패트릭이 그들을 찾고 있었고, 공작령 안쪽 상황도 좀 복잡했다.

“혹시 해서 여쭙습니다만, 현재 정해 놓으신 숙소는 있으십니까?”

렉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일단 들어가서 정할 예정입니다. 공작령은 좋은 숙소가 많으니까요. 혹시 추천하실 곳이라도 있으신가요?”

“…곤란하시게 되었군요.”

로메인의 말에 렉시는 얼굴을 미묘하게 굳혔다. 이 빳빳한 느낌의 동문 대장은 허튼소리를 할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곤란이라고?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질문하는 렉시에게 로메인은 차분히 현 상황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그리고 렉시의 얼굴은 곧 침착하게 우거지상이 됐다.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현재 공작령에는 그 주인이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주인이 있는 영지는 그간 하지 못했던 오만 별거를 다 하게 마련이었다. 물주가 집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곧 있으면 신년 축제를 시작합니다. 요 몇 년간 공작께서 본성을 지키시면서, 축제가 점점 화려해지고 있지요. 지금 공작령 안쪽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습니다. 다른 성문을 보고 오셨다면 이해하시기 쉽겠군요. 통행 허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제법 많지 않았습니까?”

렉시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그랬다.

“어, 그러고 보니… 다른 곳은 그랬던 것 같네요. 하지만 이곳은 이렇게 한산한데요?”

로메인이 정색했다.

“이곳과 다른 곳을 비교하시면 좀 곤란합니다. 이 성문은 제가 철두철미하게 관리하는 곳입니다.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이들은 들여보내지 않지요. 그래서 이렇게 질서정연한 것입니다.”

“아….”

렉시는 그 즉시 납득했다. 당장 자기도 얼굴 확인 때문에 부득불 이 남자를 보게 된 마당 아닌가. 그렇다면…? 렉시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숙소를 잡기 힘들겠군요?”

“네, 그리고 혹 있더라도… 그곳이 안전하리란 보장이 없습니다.”

“공작령의 치안이 그렇게 나쁜가요?”

돈 많은 곳이라 치안이 좋을 줄 알았는데, 그 반대였단 말인가? 기가 막힌 렉시가 되묻자, 로메인은 “그게 아니라, 패트릭 때문입니다.” 하고 오해를 정정했다.

“지금 패트릭에게 쫓기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 부하들의 입단속은 제가 할 것이니 걱정 마십시오. 허나 공작령 안쪽까지는 제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공작령 안쪽엔 패트릭의 눈이 많습니다. 필시 들킬 겁니다.”

“맙소사.”

렉시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기레스 소백작은 본성의 번화한 곳에 숙박 시설을 여럿 가지고 있습니다. 가지고 있는 식당만도 세 개이고, 잡화점도 있지요. 평민들 틈에 섞여 모습을 숨기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럴 수가…!”

“생각해 보십시오. 그자의 추격 속도가 유독 빠르지 않았습니까? 어디서 도망 오셨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평민들 속에도 수족이 많습니다. 실로 상대하기 어려운 작자입니다.”

과거 공작 본성의 경비대장을 지낸 바 있던 로메인이다. 패트릭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는 그가 제일 잘 알았다. 물론 렉시가 로메인의 옛 직업을 알 리 만무하다. 허나 남자의 말은 사리에 어긋남이 없었다.

‘어떻게 하지?’

렉시는 얼굴을 찌푸렸다. 성안에 들어가는 것만 생각했지 안에서 잡힐 것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설마하니 그놈이 이 안에서 그리 성세를 누릴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곤란한데. 진짜 여기가 아니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단 말이지.’

농담이 아니고 정말로 그렇다. 그간 돈 있는 귀족들을 돌고 돌아 온 마당이었다. 이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여기서 물건을 팔고 가야만 한다. 이대론 절대 돌아갈 수 없었다.

‘생각해 보자. 생각해 보자. 어떻게 해야 하지?’

렉시는 끙끙대며 이 난관을 넘어가기 위한 지혜를 짜냈다. 어떻게 하면 패트릭 놈의 시야에 안 띄고 공작을 만날 수 있을까?

“저, 남작님. 제가 지금 한 말씀 청해도 되겠습니까?”

렉시는 얼른 눈을 들어 로메인을 바라보았다. 그들을 구해 준 동문의 기사는 뭔가 색다른 방도라도 생각난 걸까? 렉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괜찮은 방도라도 있으신가요?”

“예. 크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혹 저희 집은 어떻습니까?”

……?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험악하게 구겼다.

“…지금 뭐라고 하셨나요? 집이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말을 생략했군요.”

렉시의 얼굴이 황당하게 변하자 로메인이 황급히 첨언했다.

“시정하겠습니다. 제 말은… 그러니까, 이대로 곧바로 데퓨탄 후작저에 내방하시면 어떠시겠냐는 겁니다.”

“…데퓨탄…후작저요?”

“예, 그렇습니다. 그곳이 제집입니다.”

로메인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자기 제안의 진의를 설명했다.

“데이비드 드 데퓨탄 후작, 제 아버지는 공작령 내에서도 제법 성세를 누리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저택 역시 대단히 크고,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지요. 본래는 부모님과 저, 형이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만 최근은 사람이 많이 줄었습니다. 형은 분가한 지 오래이고 저도 이곳에 나와 사는 터라, 집에 자주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참고로 제 어머니와 아버지는 대단히 금슬이 좋으신 분이고, 서로를 무척 사랑하여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리실 만한 분들이 아닙니다. 하인들의 기강 또한 엄격하게 잡아 놓았지요. 아, 또한 마도구 같은 것에는 취미가 없으시며―.”

“네, 네, 알겠어요. 거기까지요.”

아주 자기소개에 이어 가족 소개를 하는 로메인의 장광설을 렉시는 얼른 막았다. 그래, 거기까지. 그러니까 이 사람의 요지는, 이거지 지금?

“그, 대장님의 댁에 몸을 숨기라는 말씀이십니까?”

“…예, 그겁니다.”

로메인은 뿌듯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부끄럽게도, 저와 기레스 소백작의 사이는 퍽 나쁜 편입니다. 때문에 그들의 수족들 역시 후작저 부근으로는 발길조차 하지 않지요. 저희 후작저의 문턱은 부끄럽지만 조금 높은 편입니다. 허나 남작님처럼 곤란을 겪는 분이라면 아버님도 기꺼이 문을 열어 주실 것이 분명합니다. 패트릭은 귀하께서 상인이라 알고 있으니, 절대 당신이 그곳에 있다는 걸 의심하지도 못할 겁니다.”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요수아가 그런 것까지 말했나요?”

상인 행세하며 돌아다닌 것도 말했냐. 옆에 서 있던 요수아의 얼굴이 퍼레졌다. 그 모습이 제법 안쓰러웠던 로메인은 그냥 방금 것은 자기가 알아낸 걸로 해 주기로 했다.

“다른 성문에서 남작님이 당한 일을 듣지 않았습니까. 남작님이 귀족이라는 걸 알았다면 그런 짓은 못 합니다. 적어도 눈치는 있는 작자니까요.”

귀족이 같은 귀족을 겁박하는 건 정치적으로 큰 무리가 따르는 일이다. 가문의 처지가 다른 것과는 별개로, 귀족은 귀족이다. 타 귀족을 사사로이 억압하는 것은 황제나 가능한 일. 로메인은 간단히 렉시를 납득시킨 뒤, 재차 물었다.

“어떠십니까?”

“으음….”

렉시는 잠시 머뭇거렸다. 가만히 들어 보니 꽤 괜찮은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너무나 완벽한 제안이었다. 어떻게 이 짧은 시간에 저런 멋진 생각을 했을까. 솔직히 감탄이 나온다.

하지만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어떻게 처음 본 사람 집에 덜컥 간단 말인가?

렉시의 얼굴에 무지막지한 갈등이 스쳐 지나갔다. 렉시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로메인이 물끄러미 바라보는 게 느껴진다. 렉시는 반사적으로 남자의 시선을 가늠했다.

걱정, 놀라움, 조심스러움, 그리고 호감.

놀랍게도, 일절의 음심이 없는 시선이었다.

‘신기해. 어쩜 저럴 수 있지?’

밖에서 만난 사람치고 렉시에게 음심을 가지지 않은 자는 없다. 그간 얼마나 그 음심에 당했던가. 렉시의 외모는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겐 견딜 수 없는 매혹과도 같았다.

‘저렇게 깨끗한 시선이 대체 얼마 만인지.’

다른 사람 같으면 딱 잘라 거절했을 제안을 고민하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

단 한 점 욕심 없는 깨끗한 시선. 깨끗한 표정. 담백한 행동.

얼굴을 보면서도 찬탄은 할지언정 욕망을 내보이지 않는 이는 처음이었다. 이 기사는 이상하게 렉시의 경계심을 누그러트렸다. 좋은 사람 같은데…. 좋은 사람이 분명한데.

렉시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 말고 결국 한숨을 푹 쉬었다. 아깝지만, 거절해야 할 것 같았다.

“저, 대단히 감사하신 말씀이지만…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습니다. 권유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경.”

말을 하면서도 아까웠다. 솔직한 심정으론 막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고 싶다. 앞뒤 안 가리고 그냥 가고 싶다. 마음의 추가 갈팡질팡거리고 있었다.

그런 렉시의 거절에 잠시 침묵하던 로메인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제가 못 미더우실 거란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물론 그게 이유긴 하지.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언급하면 무안하지 않은가. 그러나 로메인은 비꼬거나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그는 말했다.

“남작님을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입장상 당연한 것이라는 걸 언급하는 것이지요. 저와 남작님 일행은 초면이고, 또 잘 알지도 못하니까요. 아마 저라도 남작님처럼 결정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 죄송합니다.”

당연한 결정이라고 말하는 걸 듣는데도 염치가 없는 것은 왜인가. 로메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죄송한 것은 저입니다. 무리한 말씀을 드렸으니까요…. 허나 남작님, 제가 마지막으로 딱 한 말씀 더 올려도 되겠습니까?”

렉시는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로메인은 그런 렉시를 보며 몸을 반듯하게 세웠다.

“물론 알고 계시리라 믿고 있습니다만, 여쭙습니다. 영주님, 혹시 기사의 덕목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예? 네, 물론 알고 있습니다만….”

렉시는 갸웃거렸다.

영주, 아니 귀족치고 기사의 덕목을 모르는 자는 없다. 영주가 기사를 서임하기도 하고, 가끔 그 스스로가 대영주에게 가서 기사로 봉직하기도 하니까. 렉시의 당황한 얼굴을 보며, 로메인은 천천히 기사의 덕목을 읊었다.

“기사의 덕목은 길고도 깁니다만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명예를 지키고, 황제께 충성하며, 절제하는 생활을 하고, 질서와 법을 수호하며, 약자를 지키고, 그를 도우라.”

“…네, 분명 그렇지요.”

렉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것이 바로 황제가 정한 기사의 수칙이다.

“사실 제 아버지는 제가 기사가 되기보단 문관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제 꿈은 어릴 적부터 기사였고, 문관 대신 기사 수업을 받았지요. 아버지의 뜻을 어겼기 때문에 제가 기사의 검을 바친 것은 후작가가 아닌 공작가가 되었습니다.”

후작가의 자제가 공작가에 검을 바치다니. 확실히 드문 일이어서 렉시는 놀랐다. 그건 자라 온 기반을 아예 버린다는 의미다.

“다들 저더러 어리석다 그랬지요. 허나 전 제가 기사가 된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습니다. 저는 기사라는 것이 제 운명이라고 생각했고, 또한 그 기사의 길을 한 점 의심 없이 걸었기 때문입니다. 제 이름, 가문, 모든 것을 버려도 아깝지 않은 것이 기사이고, 이것이 제 자부심이자 명예입니다.”

“…굉장하시네요.”

실로 대단한 포부이자 장한 삶의 궤적이다. 자기도 모르게 로메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렉시였다. 그때, 로메인이 묵직하게 목을 울렸다.

“동문 대장이 아닌, 이런 기사인 로메인을 믿어 주시면 어떻습니까?”

“…예?”

렉시는 깜짝 놀라 로메인을 바라보았다. 당혹한 눈동자와 마주한 푸른 시선이 무척이나 선명했다.

“저기, 무슨….”

“부탁드리겠습니다.”

로메인은 렉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순식간에 시선의 높낮이가 달라졌다. 렉시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로메인을 바라보았다. 기사가 모시는 자가 아닌 이에게 무릎을 꿇는 일은 좀처럼 없었던 것이다.

“아니, 부탁이 아니군요. 청을 올립니다. 남작님, 부디, 저 로메인 드 데퓨탄이 당신께 기사의 덕목을 지킬 기회를 허락해 주십시오.”

“어….”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다.

“무릇 곤란에 처하신 분을 보고 넘기는 기사란 없습니다. 그런 자는 기사가 아니라 그저 칼잡이일 뿐이지요. 검을 쓰는 자라면 어려움에 빠진 이를 먼저 도와야 한다는 경구를 늘 가슴에 품고 삽니다. 전 단 한 번도 약자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한 적 없고, 곤란에 빠진 이를 내버려 둔 적이 없습니다. 종기사에서 기사가 된 이래, 단 한 번도 기사의 의무에 소홀한 적이 없는 저입니다. 그러니 부디 남작님, 제가 기사의 명예를 지키도록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묵직하게 말하는 로메인의 몸이 마치 산처럼 크다. 분명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렉시인데, 로메인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렉시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들이켜는 숨이 이상하게 떨렸다.

‘크, 큰일이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지만, 한때 렉시는 기사를 꿈꾼 적이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 역시 유망한 기사였고, 조부도 검을 대단히 잘 썼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그런 피를 물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렉시는 대단한 몸치였다. 얼마나 몸치였냐면, 검을 가르치던 전 베르크 남작이 포기하고 대신 호위를 가르칠 정도다. 베르크 드 페르귄, 렉시의 아버지는 그런 렉시가 어머니를 닮은 거라고 했다.

‘넌 참 네 엄마를 많이 닮았어. 네 엄마도 너처럼 몸치였거든. 춤도 못 추고, 검도 못 쓰고, 말도 못 타고… 몸으로 하는 건 다 못했지.’

아버지의 말에 렉시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춤이야 그렇다 치지만 뒤의 둘은 못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아버지, 어머니는 여성이잖아요. 검을 못 쓰시는 건 당연하죠.’

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렉시의 타박에 베르크 남작은 아, 하고 깨달은 표정을 했다.

‘…아 참, 그랬지?’

베르크 남작은 객쩍은 얼굴을 하며 렉시의 검을 고쳐 세웠다. 하지만 검을 고친들 무엇하랴. 엉거주춤한 발검 자세는 그대로인걸. 아들의 검 쥔 모습을 본 남작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참으로 꼴불견이다.

‘아들. 그런데 말이다…. 너 꼭 기사 해야겠냐?’

‘…그렇게 별로인가요?’

렉시의 실망한 얼굴을 보며 베르크 남작은 끙 하고 머리를 긁었다. 물론 하나뿐인 아들이 하고 싶은 일이니 전적으로 밀어 주는 게 부모가 할 도리. 허나 그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그의 아들에게 몸 쓰는 재능은 약에 쓸래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는… 검의 길은 아니야.’

‘그래도 꼭 하고 싶은데….’

칭얼대는 렉시를 달래며 베르크 남작은 말했다.

‘사랑하는 아들아, 진지하게 말하는데 그냥 아빠 말 들어. 다스리는 자가 꼭 검을 잘 쓸 필요는 없느니라. 검은 검 잘 쓰는 놈을 고용하면 그만이야.’

‘…우우우웅.’

‘사람은 다 자기 자리가 있는 거란다. 적당히 포기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뭐든 다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거든.’

하날 얻으면 하나를 포기하라, 인생의 명제지. 베르크 남작의 말에 렉시는 물었다.

‘…아빠도 포기한 게 있어요?’

‘그럼, 있지. 나도 사람인데.’

‘뭔데요?’

그는 렉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짓궂게 웃었다.

‘니 엄마랑 사는 거.’

‘…….’

사별한 것도 포기에 속할 수 있나? 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 말의 요지는 렉시에게 검을 포기하라는 말일 것이다. 렉시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자기의 검술 실력은 좀 심했기 때문이다. 렉시는 허리춤에 차고 다니던 검 대신 펜을 집어 들었고, 그렇게 어린 시절 가진 꿈 한 조각을 포기했다.

하지만 진로를 틀었다고 기사에 대한 로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건 렉시의 마음 한켠을 송두리째 사로잡은 꿈이자 환상이었다. 아버지 몰래 장서각에서 읽은 발라드, 기사 로망스만 해도 마차 한 수레를 넘어간다.

아아, 가질 수 없어 더욱 아름다운 그대여, 그대의 이름은 기사라.

로망스가 인기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발라드의 기사들이 인기 있는 이유는 그게 현실에선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 이르게 어른이 된 렉시도 그 점을 알고 있었기에, 버린 꿈이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건.

‘미친, 로망스의 기사 그대로잖아.’

상대의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어려움에 빠진 자라면 발 벗고 나서 주며, 명예와 예의를 지킬 줄 아는 기사도의 화신. 바로 여기 어린 시절 읽었던 옛 발라드의 기사들 같은 남자가 있다. 바로 내 눈앞에! 아아아아, 세상에! 렉시는 주먹을 꾸욱 쥐었다.

꿈이 눈앞에 있는데, 흔들리지 않으면 남자도 아니었다!

두근두근두근두근.

렉시는 세차게 뛰는 심장을 다독였다. 자칫하다간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낼 것 같았다.

“저, 그래도 그건 너무 실례일 것 같습니다만….”

렉시가 어설프게 웃자, 로메인은 눈을 반짝였다. 본능적으로 렉시가 반쯤 넘어온 것을 알아챈 것이다.

“실례라니, 천부당만부당합니다. 그저 기사에게 봉사하는 기쁨만큼 큰 것은 없는 것을요.”

“그, 그런….”

아아아아아아, 안 되는데에에에에….

그러나 마음과는 다르게 렉시의 손은 로메인에게 향하고 있었다. 렉시가 손을 내밀자, 로메인은 자연스럽게 그 손을 잡고 손등에 키스했다. 아주 훌륭한 로망스의 장면 그대로였다.

미모의 여인 대신 앉아 있는 것이 미모의 남자라는 것만 다를 뿐, 거의 똑같았다.

옆에 있던 요수아만 대체 이게 뭔지 몰라 입만 떡 벌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어쨌거나 바로 이게, 렉시의 일행이 후작저에 머물게 된 정확한 이유다. 그저 모든 것은 어린 소년의 이루지 못한 꿈 탓이었으니… 이래서 뭇 사람들이 미망이 위험하다 하는 것일 터.

하지만 대저 거의 모든 역사는 이렇듯 충동과 우연에 의해 이루어지는 법 아닌가.

그러니 렉시나 로메인이나 탓할 것 없다.

*****

말과 마차를 접객소에 숨긴 렉시 일행은, 곧 로메인을 따라 후작저로 향했다. 혹시 모를 수하들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였는데 잘한 결정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영지 내에 들어서자마자, 아는 얼굴들이 보였던 것이다. 그들이 쫓기면서 쭉 보았던 패트릭들의 수하들이었다.

“헉….”

렉시는 기가 질린 얼굴로 그들을 보다 얼른 창을 내렸다. 필립과 요수아는 이미 눈치채고 얼굴을 가린 뒤였다.

“그대로 타고 왔으면 큰일 났었겠군요….”

렉시는 치밀어 오르는 오한에 부르르 떨었다. 설마 벌써부터 안쪽을 염탐하다니. 탈 것을 다른 것으로 갈아타는 게 좋겠다는 로메인의 언질이 아니었으면 분명 여기서 들켰을 것이다. 로메인은 혀를 차며 일부러 마차에 붙었다.

“남작님의 말과 마차는 나중에 가실 때 찾아 가시면 될 겁니다.”

군데군데 마차까지 수색하는 놈들도 물론 있었다. 허나 아무리 그들이라도 로메인이 있는 마차엔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혹시라도 들키면 털리는 건 본인들이란 걸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덕분에, 결국 렉시 일행은 문제없이 후작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잠깐, 여긴 어디지? 아니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 건데?”

“어디긴요? 우리 며칠 묵을 숙소죠.”

“수, 숙소? 이 저택이?! 아니 어째서?! 왜!”

“아까 안 들었어요?”

“말하긴 했어?”

딱 하나, 홀로 말 묶고 일하느라 행선지가 어디인지 몰랐던 필립의 작은 반항이 있었지만….

렉시는 툭닥대며 말을 달리는 필립과 요수아를 뒤로 한 채 후작가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페르귄의 성보다는 작지만, 그보다는 배는 화려한 저택은 반쯤 저문 석양빛 아래서 번쩍거렸다. 실로 가문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 주는 으리으리함이었다.

‘데퓨탄 후작이라 그랬지?’

가문 이름은 낯서나 작위가 후작이면 대단한 거다. 하물며 공작령에서 저 정도 저택을 가지고 있는 거면 콧대가 엄청날 것이다. 얼결에 오긴 했지만 오고 나니 살짝 우려가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저 정도 위세가 대단한 집은 손님들도 가려 받기 때문이다.

‘쫓아내진 않겠지만 무시할지도 모르겠는데.’

렉시는 단단히 맘먹었다. 혹시 안 좋은 소리를 들어도 흔쾌히 받아들이기로.

그러나, 놀랍게도 후작 부처는 그들을 무척이나 환영했다.

“―어려운 사람을 어떻게 내치겠나? 부디 내 집이다 생각하고 있다 가시게.”

후작은 호탕한 사람이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손님의 외모에 크게 놀랐던 그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아들의 청을 흔쾌히 허락하며 렉시와 악수했는데, 로메인의 말대로 감탄은 하되 탐욕은 없었다. 과연 로메인 경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렉시의 콩깍지는 견고해졌다.

“감사합니다 각하.”

“…흐, 흐흠.”

렉시가 웃자, 그는 어색한 듯 헛기침을 하다 고개를 살짝 돌렸다. 로메인과 렉시를 번갈아 가며 보는 남자의 입가엔 흐뭇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특히 아들을 보는 얼굴에서 속내가 드러났다. 저것은 내 아들이 이런 훌륭한 짓을…! 하고 흐뭇해하는 부모의 얼굴.

‘과연 로메인 경의 아버지!’

실로 놀라운 성정에 렉시는 감격했다. 과연 위인은 홀로 나지 않는다. 그 뒤엔 그런 위인이 되게끔 교육하는 부모가 있는 것이다.

후작 부인은 여기서 한술 더 떴다.

“어머, 어머, 어머 세상에.”

조금 뒤늦게 나타나 렉시를 소개받은 그녀는 얼굴을 잔뜩 붉히며 렉시를 바라보았다. 조금 시선이 뜨겁다 싶어 긴장했는데, 그런 의미로 붉히는 게 아니었다.

“어서 와요. 세상에, 우리 둘째가 사람을 데려온 건 난생처음이랍니다. 우리 둘째는 연인은 고사하고 집에 친구 한 번 데려온 적이 없는 녀석이었거든요. 아무리 제 아들이라지만 걱정이 안 될 수 없었죠. 저렇게 소극적이고 사교성이 없어서야 어떻게 평생을 함께할 사람을 만나겠어요?”

그 어떤 위인이라도 집에선 모자란 자식이다. 그녀는 가차 없이 아들을 혹평하며 렉시를 반겼다.

“여러모로 서투른 녀석이죠. 때문에 함께하다 보면 무뚝뚝하고 답답한 면이 있을 거랍니다. 부디 내 아들이 서운케 하거든, 제게 꼭 말하세요. 아셨지요?”

저렇게 말할 정도라니…. 로메인 경 교우 관계가 얼마나 건조했기에 어머님이 저리도 걱정하는 것일까. 하긴 원래 맑은 물이 고기 살기 힘들다는 옛말도 있는 법. 렉시는 할 수 있는 한 제일 근사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단지 데려온 것만으로도 친구로 쳐 주는 순진하신 분이다. 마음속에 서려 있는 아들에 대한 의구심을 지워 줄 만한 말로는 공치사와 웃음만 한 것이 없었다.

“아닙니다 부인, 로메인 경은 제가 만난 중 가장 기사답고 멋지신 분이십니다. 오늘 처음 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고상한 인품은 제게 깊은 감명을 주었지요. 아마 어디서도 경 같은 분은 만나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럴 수가. 세상에 어쩜….”

화사하고 아름다운 미소에 감명을 받은 것일까. 그녀의 커다란 눈에 순간 물기가 어렸다가 사라졌다. 그녀는 렉시의 손을 덥석 잡았다. 렉시는 화들짝 놀라 손을 놓으려 했지만 그녀의 손은 마치 끈끈이주걱 같았다. 부인이 외쳤다.

“저 녀석이 이토록 훌륭한 분을 데려오다니…! 정말 감격스럽기 그지없군요. 아아! 걱정 마세요. 전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나이, 성별, 국경, 신분 모두 상관없다고 생각한답니다.”

“…그, 그러시군요.”

“혹시라도 당신을 핍박하는 자가 있거든 지체 없이 말해 주세요. 데퓨탄 후작가의 귀한 분을 홀대하는 자는 제가 반드시 징치하겠어요!”

작은 키의 여인이었지만 기백은 어지간한 기사 이상이다. 그녀는 아들이 새로 사귄 친구의 뒷배를 그렇게 호언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이내 무안한 듯 호호 웃었다.

“…아참, 내 정신 좀 봐. 식사 전이시겠네요. 요리장을 불러 만찬을 준비하라고 해야겠군요. 쉬고 계세요, 금방 준비하라 이를 테니까요.”

“감사합니다 부인.”

“호호호, 그럼 쉬고 계세요!”

그녀는 팔랑팔랑 나비처럼 장소를 빠져나간다. 그렇게 사라지는 그녀의 등은 누가 봐도 명백히 들떠 있었다. 렉시는 생각했다.

‘아들의 교우 관계에 있어 신분의 고하를 따지지 않다니. 참으로 드문 분이 아닌가.’

과연 그 부모에 그 자식이다. 저런 양육 태도는 참으로 본받을 만한 점이 있었다.

렉시는 활짝 웃으며 로메인에게 말했다.

“경의 부모님들께오선 굉장히 관대하고 훌륭하신 분들이군요. 이런 환대라니,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건지….”

“…?”

로메인은 심각한 얼굴로 부모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곧고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가 당황스러움에 젖어 있다. 그는 살짝 굳은 얼굴을 풀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겼다.

‘부모님이 이상하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아버지도 아버지이지만, 특히 어머니가 이상했다. 그가 아는 어머니는 저렇게 칠랄레 팔랄레 다니는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어떤 경우에도 우아함을 버리지 않는 분이 왜 갑자기 저렇게 홱 바뀌셨단 말인가.

‘무슨 일이 있나?’

있다. 그것도 무척 있다.

허나 그의 주변머리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변모를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 퍽 그럴 만했다.

그가 이 상황이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면 여태껏 노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부모의 눈치를 볼 줄 아는 주변머리라면 적어도 사람 한둘은 만나는 척을 했을 테니까. 허나 그는 안타깝게도 눈치가 없는 남자였다. 하여 이 눈치 없는 노총각 기사는 부모가 끝까지 어떤 눈으로 둘을 보고 있는 것인지 깨닫지 못했다.

잠시 가 보아야겠군.

그는 결심했다. 손님 놓고 자리 비우는 건 큰 실례이나 지금은 어쩔 수 없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방금 들은 말에 고개를 갸웃대고 있는 렉시에게 말했다.

“남작님, 실례지만 제가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되겠습니까?”

“…아? 네, 네. 물론이지요.”

“손님을 청해 놓고 이런 무례를 범하게 되어 송구합니다. 되도록 빨리 돌아오겠으니 부디 편히 쉬고 계십시오.”

렉시는 화들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무례는요! 이렇게 좋은 집에, 흔쾌히 환대해 주시는 집은 처음이었는걸요. 로메인 경 덕분에 세상에 아직 온정이 남아 있다는 걸 확인하게 되었답니다. 경처럼 좋은 분을 만나게 된 것이 제 일생의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예?”

“정말 감사드립니다. 로메인 경만큼 좋은 분은 어디에도 없을 거예요.”

렉시는 진심으로 생긋 웃었다. 실로 아리땁기 그지없는 웃음에 로메인은 자기도 모르게 멍하니 그걸 바라보았다.

찌릿.

순간,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것이 가슴으로 번지며 짜릿한 것이 온몸 안으로 퍼져 나갔다. 그것은 고통스럽기도 했고 이상하게 달콤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처음 겪는 감정과 몸의 변화는 기사에게 생경한 것이었다. 갑자기 스며드는 기이한 느낌에 그는 크게 놀랐다.

뭐, 뭐지 이건.

“…저, 저는 얼른 가 보겠습니다.”

“네, 그럼 저는 여기서….”

쿵!

그는 렉시가 뭐라 뭐라 하는 뒷말도 채 듣지 못하고 허둥지둥 밖으로 달려나갔다. 예의가 어쩌고저쩌고하는 것도 이 순간은 떠오르지 않는다. 갑자기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머물고서야 제정신이 돌아온 그는 숨을 헐떡대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으음…!”

공처럼 튀어 오르는 심장이 내 것 같지 않아 그는 당혹스러웠다. 기사가 된 이래 이렇게 몸이 의지를 벗어난 적은 처음이다. 그는 필사적으로 숨을 쉬었다. 후, 하, 후, 하. 떨려 오는 숨 끝에서 로메인이 중얼거렸다. 아까부터 계속해서 귓가에 맴도는 속삭임이었다.

“내가, 좋다고….”

그는 손으로 입을 막고 파르르 떨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좋은 사람이라고 한 것이고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로메인이 바보도 아니고 그것을 모르겠는가. 허나 그 말이 이상하게도 귓가에서 떨어지질 않고 반복됐다. 마치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메아리 같았다.

로메인 경은 좋은 분이세요. 좋은 분, 좋은, 좋….

“이게 뭐지…?”

그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벽에 몸을 기댔다.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말에 다리가 후들대는 느낌이다.

그는 그렇게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귓가에서 들려오는 메아리는 끝날 기미가 없었다.

로메인은 꽤 오랜 시간 돌아오지 않았다. 하인들은 돌아오지 않는 로메인을 기다리다 결국 렉시 일행을 먼저 만찬장으로 안내했다. 주인이 오지 않는다고 손님을 배곯게 하는 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송구합니다 남작님. 아무래도 경께서 일이 오래 걸리는 듯합니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먼저 만찬장으로 모시겠습니다.”

오랫동안 집에 오지 않았다고 했었으니 뭔가 볼일이 많겠지. 은인에게 그런 거 가지고 뭐라 할 정도로 자기가 사람이 덜되진 않았다. 거기다 좀 늦으면 어떤가, 밥만 먹으면 되는걸? 렉시는 필립과 요수아를 데리고 하인들과 함께 자리를 옮겼다. 한참 같이 걸어가던 하인이 만찬장 앞에서 잠시 멈췄다.

“저, 송구합니다만 남작님.”

“무슨 일이 있나?”

“…함께 오신 분들께선 옆방으로 가셔야 할 듯합니다. 후작가의 만찬에서 가신들은 특별한 일이 아니고선 함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렉시와 일행들의 낯빛이 크게 변한 걸 본 하인이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허나 가법이 엄하온지라!”

“그런가…. 어쩔 수 없지.”

렉시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필립과 요수아는 욱한 얼굴이었지만 렉시가 수긍하자 그에 따랐다. 뭐 어쩌겠는가? 원래 밥 주는 사람은 신과 마찬가지다. 게다가 손님인 이상 가법에 따라 주는 것이 맞기도 했으니 그들로선 할 말이 없기도 했다.

“그럼 이따가 보자.”

“네. 조심…아니 맛있는 식사하세요 영주님!”

“…일 있으면 꼭 소리치십쇼. 아니면, 그거 그 빌어먹을 것도 있고요.

조금의 눈치도 안 보는 필립의 말이었다. 옆에 있는 하인의 얼굴이 조금 비틀린 걸 본 요수아가 꾹 하고 필립을 찔렀지만 그는 꿋꿋햇다. 애초 마지막까지 후작가에 들어오길 거부했던 그다. 억지로 떼어지는 이 상황이 맘에 들 리가 없었다. 그나마 그가 렉시를 홀로 보낸 건, 그가 목에 건 목걸이 때문이었다.

유니콘―그 변태 말을 부르는, 마법 목걸이가.

‘빌어먹을 변태 말 같으니라고.’

그는 이를 갈았지만 이 상황에선 그것만 한 것이 없다. 만일 무슨 일이 생기면 주인은 지체 없이 저 목걸이를 사용할 것이다. 죽여 버리고 싶은 말이었으나, 그래도 무슨 일 있는 거보단 그게 나았다. 어쨌거나 그는 렉시의 기사다. 그래 봬도 변태 말의 추파를 견뎌 줄 정도로는 렉시를 걱정하고 있었다.

필립의 의도를 눈치챈 렉시가 픽 웃었다.

“…그래. 이따가 보자.”

그렇게 요수아와 필립이 사라졌다. 그리고 렉시는 하인을 따라, 만찬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입니다.”

“오….”

후작가의 만찬장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간 많은 귀족 가문을 돌아봤지만 여기가 제일 멋진 것 같았다. 가족들을 위한 자리가 맞는 듯, 크기는 작은 편이었지만 화려함은 그간 다녀 본 귀족가 중 제일이다. 렉시는 입술을 살짝 오므리며 감탄을 표했다. 원래 이런 데 오면 칭찬부터 해 주는 게 손님의 도다.

“마음에 드시나 보군요.”

“굉장히 아름다워. 후작가의 격조가 보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데 이런 곳에 날 초대해 준 부인께 감사를 표하고 싶어지는군.”

“부인께서 그 말을 들으시면 무척이나 기뻐하실 겁니다. 그럼 이쪽 상석으로 오실…응?!”

헉!

하인이 순간 헉하고 숨을 쉬며 발을 멈췄다. 무슨 일이지? 렉시는 깜짝 놀라 앞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똑같이 헛 하고 숨을 들이켰다.

“…로, 로메인 경?”

“오셨습니까.”

로메인이었다.

대체 언제 온 것인지 모르겠으나 앞에 로메인이 있었다. 안 그래도 큰 키인데 거대한 의자 옆에 서 있자 그래도 제법 큰 만찬장이 꽉 차 보인다. 들어오자마자 못 본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시종이 놀란 것도 아마 이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어쩐지 늦더라니 먼저 와서 기다리셨구나.’

역시, 속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던 렉시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살짝 멈칫했다.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면 올수록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낯설지만 익숙하고, 익숙하지만 생경한 사람을 보는 느낌.

분명 로메인 경인데… 분명 그가 맞는데?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를 보면서 렉시는 정신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뭐가 이상한 거 같은데, 그 뭐가 무엇인지 딱 꼬집지 못하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어서 오십시오, 남작님. 후작가의 만찬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낯설다. 익숙한데, 낯설어! 렉시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 네. 그, 그렇네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려서…. 만찬장에 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서둘러 왔습니다. 오래 기다리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네? 아, 그, 그러셨네요. 그렇지요. 아니, 이게 아니라…! 전 괜찮습니다.”

아마 자신은 지금 굉장히 볼썽사납거나 이상할 것이다. 허나 지금 여기에 누가 있더라도 자기만큼은 놀라고 있을 것이다. 분명 눈앞의 남자는 로메인 경이 맞고, 또 그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뭔가, 뭔가 느낌이 아까와 하늘과 땅만치 달라졌다. 곰곰이 생각하던 렉시의 눈이 순간 크게 떠졌다.

‘그래. 이거야. 경이 갑자기… 잘생겨졌어…!’

그렇다. 그래서 이런 기분이 든 것이다. 경이 잘생겨졌다.

어떻게 저렇게 변했지?

렉시는 황황한 얼굴로 로메인을 훑으면서 그가 가장 변한 게 무엇인지 살폈다. 그리고―.

“그, 옷을… 갈아입으셨네요.”

“…네. 갈아입었습니다.”

로메인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사실 그가 갈아입은 것은 옷뿐만은 아니었다. 머리도 손질하고, 얼굴도 살짝 윤이 나게 진주분을 뿌렸다. 원래 꾸민 듯 안 꾸민 듯하는 것이 미용 기술의 최고봉. 허나 원래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라고 꾸밈을 당한 자나 보는 자나 그냥 옷만 갈아입었다고 착각했으므로 상황은 그냥 그렇게 정리됐다.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하며 로메인을 감상했다. 분명 같은 얼굴인데 꾸미기에 따라 저렇게 분위기가 달라질 수가. 옷만 바꿔 입은 것이 분명한데도 남자는 아까와 아예 다른 사람 같았다. 이래서 사람들이 옷이 날개라고 하는구나. 먼지 묻은 복장을 벗고, 번듯하게 옷을 갈아입은 로메인은 마치 어딘가의 귀공자처럼 번쩍거리고 있었다.

아… 잠깐, 귀공자는 맞지 않나?

뭐 어쨌든.

“와… 경, 그러니까 멋지시네요.”

렉시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자고로 기사란 필립처럼 좀 험악한 얼굴이 다인 줄 알았던 렉시에게 그런 로메인의 모습은 대단한 신세계였다. 사실 렉시는 로메인의 외견보단 태도에 감탄을 먼저 한 터라 얼굴이 저렇게 생긴 줄은 방금 알았던 것이다.

로메인이 얼굴을 붉혔다.

“…그, 본래는 옷을 갈아입으러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부모님을 뵈러 간 것이었는데…. 먼지 묻은 옷으론 만찬을 먹을 생각도 하지 말라셔서.”

‘너 미쳤니! 어떻게 그런 옷을 입고 사람 만날 생각을 해?!’

‘네? 어머니 갑자기 무슨….’

‘어서 옷 갈아입어. 어서!’

‘갑자기 옷이라니 무슨 소리입니까? 전 그저 어머니가 이상하셔서 온 것인데…’

‘이런 천치가 있나? 이 녀석! 자고로 사람을 홀리려면 제일 먼저 멋들어진 외견이 필요한 법이야. 헌데 네 꼴을 지금 보렴. 이게 무슨 거지꼴이니?’

아들이 입은 옷을 보며 그녀는 파르르 떨었다.

‘넌 네 외모가 잘생겼다고 생각하겠지만 저런 사람에겐 그 이상이 필요한 법이야. 꽃단장까진 기대 안 했지만 옷은 제대로 입어야 할 거 아니니!? 잘하고 싶은 생각은 있는 거니?’

잘? 대체 무엇을 잘?

‘옷 갈아입어!’

로메인은 어머니의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대체 무슨 말씀인 걸까. 이 상황에 옷은 무슨 상관이며 꽃단장은 또 뭐란 말인가? 또 뭘 잘하라는 것인가?

로메인은 어리둥절하며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덕분에 어머니가 평소와 똑같은 어머니라는 건 알 수 있었지만….

‘이상하게 민망하구나.’

로메인은 겨우 옷 때문에 자리를 비운 것 같아 부끄러워졌다. 그러나 렉시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뇨, 그럴 수 있지요. 본래 저택에선 안주인의 말이 법이니까요. 거기다 대단히 멋지신걸요.”

“…그렇습니까?”

“네. 경이 그렇게 잘생기신 줄 몰랐어요.”

“…….”

로메인은 순간 말이 없어졌다. 자세히 보면 귀 끝이 달아오른 것을 볼 수 있었을 테지만, 아직 렉시의 관찰력은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한참 말이 없던 로메인이 크흠… 하고 길게 헛기침을 했다.

“그, 음. 감사합니다.”

“사실인걸요. 정말 너무 잘 어울리시네요. 헌데… 후작 부처께선 함께 오시지 않으셨나요? 아, 조금 있다 오시는 건가요?”

오면 준비한 뒤 인사를 할 셈이었다. 헌데, 로메인이 뜻밖의 말을 했다.

“아. 부모님께서는 다른 일이 있으시다고 하시더군요. 현재 외출 중이십니다.”

“…예?”

외출? 아니 갑자기?

“본래 오늘 저녁에 다른 귀족가와 만찬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취소할 수 없는 약속인지라 어쩔 수 없다고 하시더군요. 죄송하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아…. 그렇군요.”

하긴 갑자기 들이닥친 사람들보단 먼저 한 약속이 먼저일 것이다. 렉시는 납득했고, 로메인도 납득했다.

물론 이 만찬이란 아들자식 데이트에 눈이 벌건 두 사람이 알아서 몸을 빼기 위해 한 변명이었지만…. 렉시나 로메인이나 이 사실을 알 리는 없었다.

“그럼, 식사는 저희 둘만 하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순간 로메인의 눈가가 잘게 떨렸다.

“혹…싫으십니까?”

조심스런 물음에 렉시는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싫긴?!

“그럴 리가요. 무척 영광인걸요?”

공치사가 아니라 진담이다. 아무리 로메인의 부모라도 아직은 타인. 게다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상황은 렉시에게 아주 좋은 일이었다. 십수 년간 맘속에 숨겨 왔던 이상의 기사와 단둘이 마주하는 독대의 현장 아닌가?

‘맘에 든다 후작가!’

렉시는 이 순간 후작가에 대한 의심을 완벽히 버렸다. 호감도가 위로 치솟아 의심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사실 그에게 일말의 흑심이라도 가졌다면 이 기회를 버릴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정말로 자신에게 아들 친구 이상의 관심이 없는 것이다.

아, 세상엔 아직 정의와 선의와 인정이 살아 있구나. 렉시는 뿌듯한 얼굴로 로메인에게 웃었다.

“경과 함께하는 식사라니 기대되네요.”

“……그렇습니까.”

로메인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대신 그는 렉시가 앉을 의자를 뒤로 빼 주며 작게 미소했다.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급박하게 준비한 만찬이라지만 식사는 무척 훌륭했다. 천천히 시간에 맞춰 격식에 따라 진행되는 만찬은 그간 맛을 잃고 살았던 렉시의 미각을 충족시켰다. 렉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나오는 음식을 집어 먹었다. 옆에서 시중을 드는 하인들이 없는 것이 조금 의아했지만, 음식은 제때 나오고 제대로 주니 큰 불편은 없다.

단지, 새로이 알게 된 사실 하나가 렉시를 매우 놀랍게 했을 뿐.

“치, 친척이요?”

“네, 그렇습니다. 프로하우스 전하께오선 제 외숙부시지요. 저희 어머니가 전하의 누이동생이시니까요. 혹시나 싶었습니다만 …모르셨습니까?”

먹고 있던 고기가 입에서 턱 막혔다. 렉시는 당황한 얼굴로 로메인을 바라보았다.

“…농담이죠?”

“…정말로 모르셨군요.”

렉시는 헐 하고 입을 벌렸다.

“마, 말씀하지 않으셔서….”

“오시기 전 저택을 유심히 보시기에…. 죄송합니다, 저는 내심 짐작하고 계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건 그냥 화려해서 그랬던 건데. 아, 과연 화려한 걸 보고 집안이 장난이 아닐 거라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지….

왠지 여기 올 때 로메인이 한 말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제 아버지 데퓨탄 후작께서는 공작령 내에서 제법 성세를 누리시는 분입니다.’

‘후작저의 문은 아무에게나 열려 있지 않지요.’

‘패트릭, 기레스 소백작은 남작님이 후작저에 있으리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 어쩐지 좀 자신이 만만하더라….

렉시가 망연한 얼굴로 로메인을 보자 상대가 작게 웃었다.

“저녁 식사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만…. 음, 남작님. 혹시 프로하우스 가문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렉시는 무안함을 감추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가 이곳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돈이 많다?”

“그것뿐입니까?”

“황제 폐하도 한 수 접어 줄 정도로 돈이 많고, 마도구도 모으는 분이다 정도….”

말을 하다 보니 참 자기도 답이 없는 것 같다.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는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사실 이곳은 제가 목적했던 곳이 아니었으니까요. 사실 들를 생각도 안 했던 곳이라… 제대로 된 조사를 하지 못했거든요.”

일단 되는 대로 내달린 것인가. 아마 그 즉흥적으로 온 이유의 대부분은 패트릭 때문일 것이다.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드는 상대이니 깊이 생각할 틈이 없었겠지. 로메인은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로메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바르게 폈다. 어쨌거나 모르면 알려 주면 그만 아닌가. 그는 천천히 머릿속을 정리하며 영지에 관련된 이야기를 렉시에게 들려주었다.

일단 프로하우스 공작은 그 말 그대로 거부다.

그것도 그냥 거부도 아니고, 영지도 넓고 지위도 높으며 능력마저 상당히 출중한 거부.

전 황제는 그런 공작을 경계해 본인의 조카딸과 억지로 혼사를 맺게 했다. 어떻게든 공작가에 황가의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런 식의 정략결혼이 좋을 리는 없어, 현 공작과 공비의 사이는 최악 그 자체였지만….

“일단 두 분 사이엔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허나 그 아들을 후계자로 세우고 있지 않을 정도로 나쁘지요.”

“그래도… 괜찮은 건가요?”

아들이 하나인데? 로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마다 후계자를 세우는 가법은 따로 있으니까요. 프로하우스 공작가도 그렇지요.”

물론 전 황제가 살아 있었다면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친아들이 낫지 않냐고 그 아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겠지. 그러나 전 황제는 이미 죽고 없고, 현 황제는 현 공작과 나름 사이가 좋았다. 황태자 시절 공작에게 생명을 빚진 그는 그 보답으로 공작령의 후계자 결정에선 중립을 선언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권력 견제용으로 정략결혼을 제의하신 폐하가 제 어머니를 내버려 둘 리가 없었지요. 전 황제 폐하께선 제 어머니 쪽으로도 정략결혼을 타진하셨습니다. 허나 전하께선 그것은 안 된다고 반대하셨지요.”

안 그래도 맘에 안 드는 결혼을 해 잔뜩 짜증 났던 공작이었다. 그는 이 가당찮은 시도를 알고 눈에 불을 켰다.

“보자 보자 하니, 아주 알차게 빼먹으려 드는군. 어디 맘대로 될 줄 알고? 두고 보자!”

여동생과 사이가 아주 좋진 않아도 동생은 동생이다. 거기다 당대 프로하우스 공작가의 직계는 공작과 그 누이뿐이었다. 자기야 차치하더라도 여동생까지 황제의 손에 들어가면 향후 영지의 지배권이 흔들린다. 그리하여 공작은 중매쟁이를 자처하게 되었는데, 그때 소개한 게 바로 데이비드 드 데퓨탄, 로메인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서로 첫눈에 반하신 부모님은 곧 열렬한 연애를 시작하셨지요. 부모님의 이야기는 곧 적절하게 포장되어 황제께 올라갔습니다. 폐하의 명이 지엄한 건 사실이나, 열애하는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는 것은 아무리 폐하라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그때 당시 어머니는 제 형까지 배태하고 계셨으니까요. 결국 저희 부모님은 그해가 가기 전, 혼인에 성공하였고 이 이야기는 적절히 윤색되어 세간에 퍼졌습니다.”

“와…”

렉시는 먹는 것도 그만두고 로메인의 말에 빠져들었다. 자기가 아까 본 그 두 분이 그런 로맨스의 당사자였단 말인가. 무려 황제도 넘어선 사랑!

“멋지네요. 사랑의 승리로군요!”

렉시의 외침에 로메인이 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렉시를 바라보는 눈길에 따스한 기운이 감돌았다.

“큭, 음. 죄송합니다. 음유시인들과 같은 말을 하시는 것이 재미있어서 그만.”

“…음유시인이요?”

“네. 딱 그런 소문으로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야기가 부근에서 퍼졌지요…. 두 분을 대상으로 한 노래도 몇 가지 퍼져 있습니다. 음, 공작령 안쪽을 여행하시다 보면 알게 되실 겁니다.”

“그, 그렇구나….”

렉시는 왜 로메인이 공작가와 관련한 이야기를 대충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 건지 완벽히 이해했다.

그래, 저 정도면 모르는 게 이상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온 자신이 별난 것이었다. 당황과 부끄러움과 여러 가지 생각들로 얼굴이 붉어진다. 그런 렉시를 보던 로메인이 자연스레 대화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이외에도 드릴 말씀이 더 있긴 합니다만…. 일단 식사부터 먼저 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본래 음식은 따뜻할 때 먹는 것이 좋으니까요.”

“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말 속에 숨겨진 속내가 무척이나 고맙다. 민망하지 말라 일부러 말을 돌린 걸 렉시가 모를 리가 없었다. 새삼 로메인의 완벽함에 다시금 눈을 뜬다.

‘정말로 좋은 분이다.’

가슴이 따스하게 두근거린다. 아무렇지도 않은 친절만큼 사람의 호감을 사기 쉬운 것은 없었다. 렉시는 로메인에 대한 호감이 점점 짙어졌다.

“식사는 어떠셨습니까?”

“무척 훌륭합니다. 그간 이런 맛이 있다는 것도 까먹고 있었네요.”

렉시는 은잔에 내온 포도주를 마시며 감동에 젖은 눈을 했다. 쫓기는 자에게 술이란 사치. 이렇게 맘 놓고 술을 마시는 게 대체 얼마 만인가 싶었다.

“이런 맛이라니…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아뇨, 정말이에요. 이렇게 제대로 된 만찬을 먹은 건 몇 달 만인걸요.”

몇 달이라고? 놀라운 기간 설정에 로메인이 기가 막힌 듯 물었다.

“그간… 굶고 다니신 겁니까?”

“굶은 건 아닌데…. 그게, 아무래도 쫓기는 와중이었으니까요.”

렉시는 툴툴거렸다. 일행 수가 많질 않아 식량 문제는 없었지만…. 사 먹는 것은 무조건 주의해야 했던 것이다. 이건 다른 귀족들이 주는 음식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칫해 누구 하나라도 해가 가면, 그 즉시 발을 잡힌다.

“스펜서 백작이 음식에 약을 탄 이후엔 경계가 더 심해졌죠. 그래서 식사 때마다 마도구를 가지고 다녔어요. 혹시라도 약이 섞여 있으면 해독하거나, 몰래 버려야 했으니까요.”

“…그자만 그런 것이 아니었단 말입니까?”

스펜서 백작만 음식에 약을 탄 게 아니었던 건가. 요수아의 입이 아닌 렉시의 입에서 나오는 과거사에 로메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제가 잘못 생각했지요. 무력이 있는걸 알면 좀 괜찮을까 싶어 필립이 방랑 기사인 것처럼 꾸몄거든요. 무력으로 어떻게 힘들 것 같으니…. 그때부터 독을 쓰기 시작하더라구요.”

절로 나오는 한숨에 렉시는 쓰게 웃었다.

“처음엔 그냥 제가 운이 없는 것으로 알았어요. 그런데 겪고 보니 운이 없는 게 아니라 다들 사람들이 덜되었더군요.”

“…그럴 수가!”

로메인은 분개했다.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뿐만 아니라, 기사까지 독으로 죽이려고 했단 말입니까?”

아무리 방랑 기사라도 기사는 기사다. 기사를 독으로 죽일 생각을 하다니, 실로 제정신이 아닌 것들 아닌가. 로메인의 눈동자가 푸르게 타올랐다.

“스펜서 백작과 패트릭 말고, 당신을 겁박한 이들은 또 누가 있습니까?”

“그건… 왜 물으시는 건데요?”

“지금은 안 될 겁니다만… 나중에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할 겁니다.”

“대, 대가요…?”

어떻게? 렉시는 입을 벌렸다. 자기도 그런 생각을 한 적 있었으나 도무지 답이 없어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로메인이 힘주어 말했다.

“당신이 아름다운 것은 사실입니다. 모든 이들이 당신의 용모를 보고 마음을 빼앗겼겠지요. 허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단, 거기까지입니다. 제대로 된 이들이라면 나쁜 술수 대신 호감 어린 행동을 먼저 했을 것입니다.”

아름답다는 말에 얼굴을 붉힌 렉시였지만 뒷말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말은…!”

“네, 아마 당신 말고도 다른 피해자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전 그 사람들을 나중에 감찰 기관에 조사하여 고발할 생각입니다.”

애초 사람이 맘에 든다고 협박에 하독에 감금하는 것들이 제대로 된 자들일 리 없다. 사람은 급작스러운 상황에서 평소의 행동이 나오는 법.

물론 감찰 기관에서 아무나의 말을 들어주진 않으므로 일이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로메인은 아무나가 아니다. 작위는 없지만, 아버지는 후작이요 본인도 무예가 대단한 기사! 그가 말한다면 아무리 엉덩이 무거운 감찰관도 일단 보는 척은 해 주리라.

“그, 그렇군요!”

렉시의 얼굴이 밝아졌다. 로메인은 그런 렉시의 얼굴을 보며, 그가 알려 준 이들의 이름들을 머릿속에 자세히 새겨 두었다.

렉시는 몰랐지만, 로메인의 뒤끝은 퍽 길었다.

어쨌거나, 이렇게 단박에 복수의 단초가 마련됐다. 렉시는 로메인을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저 말이라도 이렇게 해 주는 사람을 만난 것이 대체 얼마 만인가.

“경은 정말 대단하시네요.”

“제가 말입니까?”

로메인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렉시는 얼굴을 발갛게 붉혔다.

“전 사실 밖엔 제대로 된 귀족이 없는 것으로 생각했거든요.”

“…….”

로메인은 침묵했다. 실로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었기 때문이다.

“저희 영지는 타 영지와 그닥 교분이 없어요. 아는 귀족들도 적고요. 그래서 제가 운이 없어서 그런 놈들만 만난 것이라고 생각했었지요.”

농담이 아니라 처음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운이 오지게 없어서 병신과 쓰레기 사이를 거니는 것이겠거니. 운이 좀 많이 없었겠거니.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렉시는 자신의 생각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범죄자는 일부였으나, 나머지도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다.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물론 일부일 거예요. 하지만 그들이 천지 분간 못 하고 날뛰는 건 뭘까요? 이건 소문을 내도 다수가 소문을 수수방관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다들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것이죠. 누가 뭐라고 하면 그들이 그러겠어요?”

렉시는 탄식했다. 함께 다니는 필립과 요수아를 볼 낯이 없었다. 귀족들에게 쫓겨 다른 영지로 숨듯이 튈 때마다 그는 땅으로 꺼지거나 하늘로 날아오르고 싶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부끄럽지도 않나? 영지의 영주잖아요. 다스리는 자가 어떻게 체면 불사를 하고 저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이지요?”

도무지 그로서는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다.

왜 그러는 걸까?

렉시가 아는 영지의 영주란 존재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의 아버지는 시시껄렁하고, 또 사고를 치는 게 일과였으나 그래도 영지민들은 가엾이 여겼다.

타인에게 존경을 받고 싶다면 내 자신이 존경을 받을 만한 자가 되어야 한다.

타인에게 엄한 만큼, 자신에게도 엄격하라.

이것은 렉시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훈이자 철칙이었다.

“…그렇군요.”

렉시의 말을 들은 로메인이 조용히 말했다.

“저는 대단하지 않습니다. 그저 본분을 지킬 뿐이지요. 허나 영주님은… 무척 바르신 분이군요.”

“예?”

바르다니, 보통이 아닌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렉시의 눈이 로메인과 마주쳤다. 어딘지 모르게 강한 눈빛이 렉시를 쏘아보듯 바라본다. 로메인이 물었다.

“…외람되나, 남작님께선 부친께서 이른 나이에 소천하셔서 많은 것을 배우지는 못하셨을 듯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네, 부끄럽게도 그렇습니다.”

렉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페르귄 영지를 다스린 지는 얼마나 되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직접 다스린 건 오 년이고, 그간 이 년간은 밖에 있었습니다. 이젠 적당히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 늘 사고 연발이라 가신들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지요.”

“그럼 칠 년이로군요.”

“햇수론 그렇지만… 이 년간은 외부에 나와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중요한 일은 서신으로 결정하셨겠지요. 칠 년, 칠 년이라….”

로메인은 진지한 얼굴로 렉시를 바라보았다. 일렁이는 푸른 눈동자 너머, 기이한 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요수아에게 들었습니다. 가문의 빚 때문에 이 여행을 시작하셨다고 하셨지요.”

“예. 부끄럽지만… 저희 아버지가, 참.”

렉시는 한숨을 삼켰다. 호감 가진 상대에게 좋은 것만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 아닌가.

“부친의 일을 자식이 이어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허나 부친의 잘못이 자식의 잘못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둘 사이는 엄연히 다른 것이니까요.”

로메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그것보다 다른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빚의 액수는 정확히는 모릅니다만, 일단 보물을 팔러 나온 것을 보면 큰 액수인 것은 알겠습니다. 헌데 참으로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인가요?”

“보통은 세금부터 올릴 텐데, 어째서 보물을 팔러 나오신 겁니까?”

렉시는 너무 놀랐다. 설마하니 로메인에게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세, 세금이요?”

“저는 본래 공작성의 경비대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제법 많은 귀족들을 보아 왔지요. 기근이나, 재해를 맞은 영주들의 선택들은 대부분 그와 같았기에 여쭈는 겁니다.”

렉시는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다. 당혹해서 그랬다.

“당연하지요. 아니, 벼룩의 간을 내먹을 수는 없지 않나요?”

“예?”

“또한 오리의 배를 가르는 짓이죠. 그들을 수탈해 보았자 빚의 반의반도 갚지 못해요. 게다가 그들은 대대손손 우리 가문의 영민들이었는데… 이제 와서 굶겨 죽이는 건 영주의 수치죠.”

그거 받아 봤자 얼마나 된다고 긁어낸단 말인가. 렉시의 영지는 영민들의 수가 잘 늘어나지 않았다. 세금이 낮지만, 먹고 살 만한 방편이 농사나 임업밖에 없으니까. 원래 어디든 돈이 돌아야 사람이 느는 법.

“우리 영지는 유랑민들도 잠시 있다 지나쳐 가요. 사람은 늘 부족하고요. 한 해 농사지어서 간신히 먹고만 사는 사람들을 수탈했다간 영지에 사람 하나 남지도 않을 거라고요.”

“…하지만 세상의 많은 영주들은 그렇게들 합니다.”

“그런가요? 허나 그건 그들이 잘못하는 것입니다. 상황이 아무리 어렵게 되더라도 영주는 공정함을 지켜야 해요. 그건 영민뿐만이 아니라 영주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비록 영주로서 임한 지 얼마 되지 않지만, 다스릴 땐 이치에 맞게 다스려야 한다는 걸 알고 있어요.”

렉시는 반듯하게 몸을 세웠다.

“그러니 부디 그런 말은 하지 말아 주세요 로메인 경.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사람들처럼 제 영민을 핍박할 수는 없어요.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을 하는 영주라니, 끔찍하네요.”

로메인은 한동안 침묵했다. 새파란 눈동자 위로 경탄이 스쳐 지나갔다. 명백히 감탄한 눈초리였다.

“…감탄스럽습니다.”

“예?”

“여태 한 말들이 불쾌하셨다면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분명 그러리라고 생각했으나…. 이토록 훌륭한 치국의 도를 대체 얼마 만에 보게 된 건지 모르겠군요….”

로메인은 어딘지 모르게 붉어진 얼굴로 렉시를 바라보았다. 새파란 눈동자가 불빛 아래 무척 짙었다.

“저는 그간 많은 분들을 보아 왔습니다만…. 남작님 같은 분은 진심으로 처음입니다.”

로메인의 찬사에 렉시는 얼굴을 붉혔다. 듣고 있자니 온몸이 간질간질했던 것이다.

“그, 저는 당연한 일을 말하는 것인걸요.”

“네, 맞습니다. 그것은 무척이나 당연한 일이지요. 허나 남작님. 세상 많은 사람들이 이 당연한 것을 잊고 삽니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세상이다. 작은 영지라 저런 순수함을 지킨 것이라기엔, 세상엔 작은 권력이라도 얻으면 변하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다.

처음 기사 작위를 받고, 그는 얼마간 밖을 돌아다녔다. 섬길 만한 군주를 찾기 위한 여행이었으나, 여행의 끝은 실망뿐이었다. 어디서도 그가 원하는 군주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이 난세라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나, 제국은 현재 평화로웠다. 외적들도 자신들의 거처에서 나오지 않고, 귀족들의 영지 역시 적당히 안정되었다. 보통 이렇게 평화로우면 민초의 삶도 나아져야 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는 돌아다닌 어디에서도 행복해 보이는 농노를 본 적이 없었다. 가혹한 영주의 통치 아래, 노예처럼 일하며 간신히 먹고 사는 것을 행복으로 아는 자들만이 있을 뿐이다.

허나 이분은….

로메인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내리눌렀다. 계획대로 사는 그가 이렇게 즉흥적으로 무언가를 하려는 것은 처음이다.

허나, 지금 이 순간 그는 결심했다.

“부끄럽지만 저는 검을 제법 쓰고, 또 이런 저를 좋게 봐 주신 분들이 많았지요. 허나 저는 그들 중에서 누구에게도 진심으로 검을 바칠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제 아버지가 아닌, 전하께 검을 바친 것도 그 때문이었지요…. 그분은 제게 진정 따를 사람이 생긴다면, 절 떠나보내 주겠노라 약조하셨으니까요.”

“전하라면… 공작님 말이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세상에. 렉시는 공작의 대범함에 무척이나 감탄했다. 보통 기사로 만들어 주는 것은 자신의 영지에 득이 되기 위함이다. 헌데 그 기사가 다른 곳으로 간다 하여도 보내 준다 하다니….

“제가 전하의 기사로 봉직한 것은 십오 년 정도 됩니다. 그러나 그 기나긴 시간 동안 어떤 분도 제게 와닿지는 못하였으나….”

로메인은 렉시의 맞은편에 앉아서 눈을 내리깔았다. 앞으로 할 말을 생각하니,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던 것이다. 그는 세찬 혈류를 억누르며 렉시에게 말했다.

“당신 같은 분을 보게 되다니. 그간 모든 세월이 마치 꿈처럼 잊혀지는 듯합니다.”

“…어….”

렉시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누구에게라도 들으면 부끄러울 칭찬이지만, 로메인에게 듣자니 더욱 각별했던 탓이었다.

그러나 렉시가 얼굴을 붉힐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잠시 뒤, 로메인이 어색한 얼굴로 주저하다 입을 열었던 것이다.

“페르귄 남작님. 남작님의 영지엔 검이 많습니까?”

“검이라니요?”

“기사 말입니다.”

“아….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몇 명 되지 않아요. 아무래도 산골이고, 이런 곳은 무명을 떨치기 좋은 곳이 아니죠.”

렉시 같은 자그만 남작령에 봉직하는 기사가 많을 리가 없다. 렉시의 말에, 로메인이 조심스레 말했다.

“그렇다면… 저를 받아 주시지 않겠습니까.”

“…??”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었지?

렉시는 멍청한 얼굴로 로메인을 바라보았다.

“예?”

“자리는 아무것이나 상관없습니다. 그저 남작님께 검을 바칠 수만 있다면 만족합니다.”

쨍그랑!

렉시는 깜짝 놀라 잔을 놓쳤다. 너무 놀라 손이 다 떨린다.

뭐, 뭐라고?

“저, 저기. 로메인 경? 저는 그냥 남작일 뿐이에요. 경은 공작가의 기사신데…!”

“저는 늘 당신 같은 이를 주군으로 모시고 싶었습니다. 작위, 부유함 같은 것은 제게 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렉시는 어벙벙한 얼굴로 로메인을 바라보았다. 장난인가? 그런 거지? 그냥 장난이지?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그의 얼굴엔 장난기가 없었다. 그의 얼굴에 넘쳐나는 것은 그저 진지함과 굳건한 결심뿐.

“저, 저는 돈이 없어요!”

“돈이요? 기사가 쫓는 것은 돈이 아닙니다. 돈을 쫓는 기사는 하잘것없는 칼잡이일 뿐이지요. 설마 제가 돈 때문에 주군을 택하는 그런 기사로 보이십니까?”

헉! 설마 그렇게 들렸나?

렉시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것은 아닌데…! 하지만 노, 녹봉을 많이 드리지 못할 거예요.”

“재산은 저도 있습니다. 받아 주신다면 아예 처분해서 들고 갈 생각이지요.”

들을수록 설상가상이다. 재산을 들고 와? 놀란 입은 도무지 다물어질 상황이 아니었다.

“저는 보기보다 유능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늘 부족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그거야!”

그것은 맞다. 사람은 늘 부족하니까. 하, 하지만 그건 농노를 말하는 거였지 기사를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렉시는 당황하여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저희 영지는 작고, 그리고 이런 곳 같지는 않아요 경. 사람은 큰물에서 놀아야지 어떻게…!”

“그 모든 것도 다 알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큰물에선 제가 뜻한 것을 다 이룬 듯합니다. 저는 이제 당신이 계시는 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습니다. 당신께서 받아만 주신다면요…. 남작님…혹시, 제가 싫으십니까?”

“…!”

렉시는 입을 뻐끔거렸다. 그렇게 직설적으로 자기가 싫으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란 말인가. 싫다기보단 부담스러웠고, 나아가 미안한 마음이 컸을 뿐이다. 렉시가 아무 말 하지 못하자 로메인이 싱긋 웃었다.

“업무 숙지는 문제없을 것이라 자신합니다. 제 전 근무처는 공작성의 경비대장직이었으니까요. 다만 영광의 기사단장직이 문제인데…. 명예직이라 겸직해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겸직을 금지하신다면 물러나도록 하지요. 본래 하고 싶어 하는 자리는 아니었으니까요.”

렉시는 얼떨떨한 얼굴로 로메인을 보았다. 대체 이 상황이 뭐가 뭔지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뭐지 이거? 이상하다? 지금 이거 뭐지?’

내가 지금 꿈을 꾸나? 왜 갑자기 멋진 기사님이 우리 영지에 온다 그러는 걸까. 렉시는 당황한 채 로메인만 바라보았다.

“받아 주시는 것입니까?”

“그, 그게…!”

렉시는 빨개진 얼굴로 허둥거렸다. 안 된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도저히 안 될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냉정히 생각해 보면 이건 무척 좋은 일이다. 분명 좋은 일인데…!

“―받아 주시는 것이지요? 감사합니다. 절대 후회하시지 않도록 성심껏 남작님을 받들겠습니다.”

“!!!”

싫단 말을 하지 않으면 받아 주는 것이다.

이 단순명쾌한 논리에 렉시는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이건 애초 이길 수조차 없는 싸움이었다. 렉시가 이 저택에 온 것이 무엇 때문인가. 로메인에 대한 호감 때문 아닌가?

그런 이의 저돌적인 공격을 렉시가 무슨 수로 거절하겠는가.

“앞으로 조금 바빠지겠군요. 영주님의 일이 물론 시급하니 일단 그것부터 처리한 뒤, 전하께 직접 사직서를 제출하겠습니다.”

‘정말 우리 영지에 온다고? 진짜?’

“전하의 알현 일정은 일단 제가 책임지고 맡도록 하지요. 어쨌거나 저는 그분의 조카이니, 다른 사람보다는 일정을 빨리 잡을 수 있을 겁니다.”

“…….”

렉시는 두 눈을 끔벅거렸다. 뭔가 가슴에서 몰아치는 말은 많은데, 할 말이 없었다. 본래 사람은 어이가 없으면 말문부터 막히는 법.

어쨌거나 이렇게 렉시는 얼결에 기사 하나를 영지에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헌데 이 영입 과연 괜찮은 건가?

그야말로 앞날, 오리무중.

실로 이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한마디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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