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미인 등장
프로하우스 공작령의 기사, 로메인 드 데퓨탄은 공작령 동쪽 외곽의 성문을 지키는 자였다. 제국에 단 넷뿐인 공작 중 하나인 프로하우스 공작은 중앙의 요직을 맡은 대귀족으로, 대단히 풍요로운 영지들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공작이 기거하는 본성의 화려함은 많은 이들의 감탄을 샀기에 늘 오고 가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런 공작 같은 대귀족들은 일 년의 반 이상은 황제가 있는 황도에서 지낸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프로하우스 공작은 황도 대신 자신의 본성에서 지내고 있었다.
본래 어느 곳이든 주인이 제집에 있으면 오가는 사람이 배는 늘어나는 법이다. 덕분에 공작령의 외성문을 지키는 자들은 고된 격무에 시달리고 있었고, 따라서 심심하면 보직 변경이 되는 것이 다반사였다. 로메인도 무려 일곱 번째로 바뀐 동쪽 성문 담당자였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남들이 보면 로메인의 뒷배가 별 볼 일 없어 이곳에서 근무하는 것으로 알 것이다. 하지만 로메인이 이 혼란한 동쪽 성문에서 일하는 건 뒷배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는 본래 공작성의 총 경비대장으로, 검에 있어선 공작령 안에서 따를 자가 없을뿐더러 가문까지 우월했다. 그런 그가 승진도 아니고 한직으로 좌천처럼 가게 된 이유는 인사 담당자의 실수 때문이었다.
앞선 이유로 성문을 지키는 일은 모두 가기 싫어하는 자리다. 하여 인사 담당자는 주로 제비뽑기로 갈 기사를 결정했다. 헌데 이번 동쪽 성문 담당 기사를 정하는 제비뽑기에서 그만 로메인의 이름이 나와 버린 것이다. 대체 어떻게 섞여 들어갔는지는 뽑기를 섞은 당사자도 알지 못했다. 어쨌거나 제비뽑기에서 로메인의 이름을 본 인사 담당자들은 자리에서 그만 펄쩍 뛰고 말았다.
아니, 어째서 이 이름이 들어갔지?
“다, 다시 뽑겠네.”
명백히 불합리했다. 하지만 이번 성문 담당은 누가 되나 궁금해서 모였던 기사들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부정행위다 뭐다 욕하겠지만, 상대는 로메인 경이다. 그와 같은 인텔리를 어디 그런 한직에 처박아 놓는단 말인가?
거기다 로메인 경 자체는 그렇다 치더라도, 로메인 뒤에 있는 데퓨탄 후작이 문제다. 사랑하는 아들을 한직으로 보내 버리면 그가 과연 이들을 가만히 둘까? 백이면 백, 필시 후환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모두 인사 담당자가 다시 제비를 뽑겠다는 말에 찬성했다.
―딱, 한 명만 빼고.
“가겠습니다.”
“헉!”
“뭐?”
“어째서!?”
“만세!”
“로, 로메인 경!”
인사 담당자를 포함한 대부분의 이들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로메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모두의 시선을 받고도 로메인은 평연했다.
“모든 일에 예외란 있어선 안 됩니다. 한 번의 예외가 두 번, 세 번의 예외를 만들지요. 원칙을 지키십시오.”
고로 특별 취급 말고 보내 달라는 이야기였다. 로메인의 부리부리한 눈빛과 침착한 말에 설득당한 인사 담당자는 결국 로메인의 보직을 변경했고, 그는 동쪽 성문에 가서 출입하는 이들을 감시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성실하고, 성실한 만큼 유능하다는 평을 받는 로메인 경은 동쪽 성문의 감시를 아주 착실히 수행했다. 그는 무려 삼 년 넘게 동쪽 성문 감시를 아주 건실히 이행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따로 있다. 그가 동쪽 성문의 감시자로 가자, 늘 북새통을 이루고 무질서하던 동쪽 성문 출입객들이 통제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주변에선 이걸 더러 로메인이 자신의 몸을 갈아 일을 하는 줄로 알았다. 심지어 로메인의 아버지 데퓨탄 후작이나 그의 형조차 심심할 때마다 한 번씩 로메인을 찔러 ‘너 너무 힘들지 않니? 이제는 다른 데 가지 않으련?’ 하고 어를 정도였다. 그 힘든 곳에서 삼 년이나 버텼으니 그를 어디든 보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로메인은 그런 아버지와 형의 제안들을 모두 거절했고, 이 때문에 로메인의 주가가 더욱 올랐지만, 실상은 알려진 것과 조금 다르다.
부득부득 동문에 남은 로메인의 진실된 속내는 이러했기 때문이다.
‘대체 이렇게 쉬운 일을 놔두고 내가 왜 거기로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
로메인은 이 일이 너무도 쉬웠기에 돌아가지 않으려 했을 뿐이었다. 옛날에 비하면 꿀보직, 심지어 고된 일이라는 미명하에 월급마저 훌쩍 뛰었다.
그는 다들 왜 이 일이 힘들다고 아우성치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줄 좀 세우고, 신분패의 진위 여부를 감별하면서 통행증에 도장만 찍어 주면 되는 일 아닌가. 심지어 통행증 발급에 따른 수수료들까지 병사들이 걷는 마당이다. 회계도 따로 있다. 복잡다단한 공작성의 경비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이다.
사실 공작성의 경비대장은 하는 일이 대단히 복잡한 직책 중 하나다. 물론 남들 보기에 좋은 일이긴 했지만, 육체적인 노동보다 정신적인 고됨이 아주 장했다. 개중 로메인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성에 오는 귀족들이었다. 어찌나 고귀하신 인물들인지, 얼굴 되고 배경 되는 자들이 아니고서는 그 비위를 맞추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것이다.
물론 로메인이야 앞서 말한 모든 걸 충족했지만, 어디 조건이 된다고 일이 쉬워지나? 정치질과 줄타기와 협작질이 다반사인 경비대장의 일은 로메인에게 귀찮고 짜증스러운 일일 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무리 없이 이 일을 그만둘 수 있을까?’
당시 로메인의 최대 고민은 이것이었다. 그런데 인사 담당자가 그렇게 훌륭한 실수를 해 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심지어 주변에 면도 서게 해 주는 상황이다. 받아먹지 않는 것이 바보였다.
물론 외성문의 관리가 힘들긴 했다. 공작성에서 다년간 단련된 로메인도 그 아비규환을 보고 잠시 후회를 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일이라는 것은 손에 익기 마련 아닌가? 어려운 것은 초반 며칠뿐으로,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출입하는 출입객들이 이 담당 문지기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성실하다는 말은 곧 고지식하고, 고지식하다는 건 곧 융통성 없다는 말과 비슷한 것이다. 그간 공작성의 성문 담당자들이 고된 노동에 허덕였던 것은 기실 자업자득이었다. 그들은 자격이 되지 않는 이들에게 돈을 받고 몰래 들여보내 주거나, 순서를 지키지 않고 인맥으로 일을 처리했다. 병사들의 기강이 해이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와중이니 그 누가 질서를 지키려 하겠는가?
하지만 로메인은 기존의 병폐를 모두 없애고 무조건 선착순으로 사람들을 들여보냈다. 돈도 지위도 배경도 빵빵한 기사가 일을 원칙대로 처리한다는데 누가 말릴 방도도 없었다.
그는 대리로 줄 서는 자들까지는 처벌하지 않았지만 그들 때문에 줄이 흐트러지면 즉시 출입 금지를 시켰다. 반항하면 얄짤 없이 감옥행이었다. 한번 봐달라는 말도 소용없었다. 요령 없는 고지식의 화신이 성문에 강림하니 돈 주고 뒷길로 빠져 들어오던 자들은 모두 다른 성문으로 루트를 변경해야 했다.
뭐, 옛말에도 있지 않은가? 원래 누울 자리 보고 다리 뻗는 법이라고.
결과적으로 출입하려는 이들이 줄어들었다.
돈 주고 들어가려는 수상쩍은 이들이 사라졌다.
소위, 출입객의 수질이 관리가 되자 혼잡이 줄어들었다.
남은 이들은 기사의 눈치를 보고 알아서 질서를 지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동쪽 성문에 평화가 찾아왔다.
“역시 원칙을 지키는 게 좋다니까.”
눈이 마주치면 알아서 착착 신분 확인을 위해 열 맞추는 사람들을 보며 로메인이 한 말이었다.
딴은 맞긴 했다.
물론 로메인의 이 행동 때문에 나머지 성문의 기사들은 지금 죽어 나가고 있었다. 여기서 빠진 인원들이 다 거기로 몰렸기 때문이다. 처음엔 이게 무슨 조홧속인 줄 모르다 사정을 알게 된 기사들은 피눈물을 흘렸다.
아 진짜, 미친 인사 담당자여! 왜 저치를 저기로 보냈단 말인가?
서, 남, 북의 문을 지키는 기사들은 심심하면 동쪽 성문으로 인편을 보냈다.
“단장님, 좀 봐주십시오!”
“적당히 좀 해 주세요!”
“제발, 제발!”
“저희 죽습니다요….”
이도 안 들어갈 호소였다.
같은 일을 하는 기사라도 로메인은 아직 기사단장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그만둔 건 경비대장직이지, 기사들의 장을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그건 일종의 명예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메인은 그들의 울음을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계급이 깡패인 고로, 억울하면 출세하시라.
상당히 야멸찬 처사였지만, 이 건에 대해서라면 로메인도 나름 할 말이 있었다.
“정히 이게 힘들고 억울하면, 자기들도 원칙을 지키면 될 일 아닌가?!”
그가 생각하기에 나머지 성문을 담당하는 기사들은 다들 월급 도둑들이었다. 원칙만 지키면 이렇게 편해지는데 왜 안 한단 말인가?
그리하여 원칙을 지키시는 성실하시고도 정의로우신 동쪽의 수호자 로메인 드 데퓨탄 경은, 오늘도 내일도 열심히 동쪽 성문의 감시자 역할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엄한 상관 아래 들들 볶이는 아랫사람들만 고생이었다. 병사들은 수군거렸다.
“저치는 어찌 쉬지도 않누.”
“니미, 고문관이 따로 없다니까. 사람이 어떻게 만날 각 맞추고 설 수 있냐고!”
“악마여 악마….”
“역시 피는 못 속인다고….”
“시, 시발. 야 조용히 해, 들린다고!”
뒤에서 구시렁대는 말을 귓등으로 흘리던 로메인은 흥, 하고 가슴을 폈다.
때는 겨울, 통행이 드물어지는 시기. 일 없이 한산해지니 또 요 모양이다. 본래 사람은 몸 편하고 할 일 없으면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마련인 것이다. 로메인은 오늘따라 더 한산한 동문을 훑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
안 그래도 동문 번을 서는 병사들의 검술 실력이 평균 이하라 생각해 온 터다. 상관에 대한 경외심은 말보다는 행동에서 나오는 법. 로메인은 오늘 오랜만에 검술 훈련이나 봐 주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가 눈을 싸늘하게 빛내며 병사들을 향해 고개를 돌릴 때였다.
“…?”
로메인은 병사들 대신 성벽 너머, 잘 다져진 대로 끝에서 달려오는 먼지구름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누군가 오고 있었다. 부연 흙먼지를 내며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저것은….
“마차?”
중얼거린 로메인은 눈을 가늘게 떠 그들을 관찰했다. 그리고 곧 저게 정확히는 마차 한 대와 말 탄 인영 둘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말 둘은 저 마차의 호위겠고….”
로메인은 둘 중 조금 더 커 보이는 사람의 몸 주변을 살폈다. 멀어 잘 보이지 않았으나, 등 뒤에 길쭉한 막대기 비슷한 것이 있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막대기 끝은 뾰족했고, 빛을 받은 끝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로메인은 쉽사리 그 정체를 짐작했다.
“기사로군.”
무기 든 기사가 있으면 당연 나머지 하나는 그의 종자일 터. 그렇다면 자동적으로 저 마차는 귀족이 탄 마차다.
“…흠….”
기사 딸린 귀족이 포함된 일행이라. 로메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
그가 얼굴을 찌푸린 이유는 별것 아니다. 그냥 곧 있을 일이 귀찮아서 그랬다.
“기사 하나 종자 하나면, 잘해 봐야 자작. 보통은 준남작부터니까… 진압하는 데야 별 어려움이 없겠군.”
그는 꽤 냉소적인 얼굴을 했다. 그의 옆에 있던 병사들은 이 작자 또 이러네, 하는 얼굴만 할 뿐 별말 하지 않았다. 하루 이틀 이러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로메인의 평등함은 남녀노소, 신분 고하를 막론하지 않는다. 귀족치고는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남들은 이런 로메인이 자기 일에 참으로 열심인지라 귀족 평민 기타 등등 다 안 따지고 일하는 줄 안다. 하지만 실상 로메인이 냉정히 대하는 건 평민이 아니라 귀족들이다. 이건 그와 같이 일하는 병사들만 알았다.
“귀족 나리들은 다 저러나?”
“우리는 우리끼린 좀 봐주기도 하는데.”
“전의 나리들도 그랬나? 야, 기억나?”
누군가 물었으나 답하는 이가 없었다. 누가 옛날 상사 평가 따위를 기억하겠는가.
“그러게, 생각이 잘 안 나는구마이.”
“저치 원래 경비대장이었다며? 그럼 높은 양반인디… 대부분 저러는 거 아녀?”
“그른가?”
“허 거참, 저 윗동네도 되게 살벌하구만….”
평민들이 대부분인 병사들은 귀족네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지 못했다. 거기도 사람 사는 동네이니 우리와 비슷하게 살지 않겠느냐는 누군가의 발언도 있긴 했다.
“넌 니네 아빠 친구도 패냐?”
그의 손끝에는 느이 아빠랑 친구니 좀 봐달라고 하다 영창으로 끌려가는 귀족 하나가 있었다. 물론 끌고 가는 것은 로메인이다. 병사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 친구를 패대기까지는 안 치지.’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주장이 힘을 잃는 순간이었다.
그리하여 동문에서 근무하는 병사들 사이에서 귀족들은 다들 저런 결벽증이 있나 보다란 설이 생겼지만 물론 망한 지식이라는 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귀족들이야말로 혼맥과 인맥의 끝판왕. 자기들끼리 봐주기로는 따라올 자들이 없기 때문이다.
그냥 로메인이 별난 것이었다.
로메인은 빠른 속도로 가까이 오는 마차를 보며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저것도 분명 꼴에 귀족이라고 그를 귀찮게 할 것이다. 하지만.
“누구라도 동문을 통해 성에 들어오려면 줄을 서야 할걸.”
그는 중얼거렸다. 저번에 오 뭐시기 백작이란 놈은 자기에게 줄 서라고 했다고 염병을 떨다 쫓겨났다. 이번이라고 다를 것도 없었다. 한산하니 줄은 안 서도 신분만큼은 제대로 확인할 것이다.
성문으로 근무처를 옮기면서 로메인은 생각보다 많은 귀족들이 몰상식하다는 걸 알고 크게 놀랐다. 그가 아는 귀족이란 안 이랬는데, 놀던 물에서 나와 보니 병신도 이런 병신이 따로 없었다.
줄 서서 기다리라 하면 입에 게거품을 무는 놈, 신분증도 안 들고 다니는 놈, 몰래 새치기하는 것은 애교였다. 문제가 생기면 니네 아비를 내가 아니, 내가 어디의 누구니, 니가 이러고도 기사 생활 할 수 있을 거 같냐느니….
무례함에 무식함이 아주 하늘을 찔렀다. 그들을 상대하는 로메인의 낯이 다 뜨거울 정도였다.
‘못 배운 것인가? 멍청한 것인가? 귀족의 품위는 어디다 가져다 버렸단 말인가?’
귀족은 귀족다워야 한다. 기사는 기사다워야 한다. 어른이 어른 짓을 못 하면 경멸받아 마땅하고 귀족이 귀족답지 못하면 처맞아야 마땅하다.
로메인이 배운 바로, 본분을 지키지 않는 자는 맞아 싼 것들이었다. 목불인견이었다. 그래서 로메인은 성문 대장의 권한을 아낌없이 휘둘러 반항하는 귀족들을 징벌했던 것이다.
퍽퍽퍽.
물론 항의가 없었겠느냐마는, 로메인의 성실함과 고지식함은 귀족 사회에서도 참으로 유명한 것이다. 거기다 잘못한 게 귀족들이 먼저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모두 없는 일이 됐다.
로메인의 규칙과 원칙 사랑이 굳어지는 이유가 다 있다.
마차가 해자에 빠르게 가까워지는 것을 본 로메인은 성벽에서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그가 다 내려왔을 때 즈음 마차는 이미 성 통행 제한 구역까지 들어와 있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 오지 마시오. 움직이지 마시오!!"
“잠깐―, …거기 서라니깐!”
문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의 목소리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로메인은 서둘러 발을 옮겼다. 이번 놈도 어서 들여보내 달라 난장질을 벌이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나 시끄러울 리가 없기 때문이다.
“대체 왜 품위를 지킬 줄 모르지?”
로메인은 한탄했다. 대체 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놈들이 하나도 없단 말인가. 동쪽 문 아래에 사람을 또라이로 만드는 수맥이라도 흐른단 말인가? 로메인이 서둘러 다가가자 벽처럼 늘어서 있던 병사 일부가 고개를 숙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안쪽으로 들어가다 얼굴을 굳혔다. 공기가 묘하게 팽팽했다.
“무슨 일인가?”
로메인이 동쪽 성문을 지킨 지 삼 년, 이제 동쪽 문의 기사가 엄하다는 것을 모르는 병사는 없다. 상급자의 목소리를 들은 병사가 황급히 대답했다.
“그, 마차 때문입니다.”
“…….”
이게 지금 장난하나. 누가 지금 그걸 몰라서 이러나? 로메인이 얼굴을 찌푸리자 병사가 아, 하고 덧붙였다.
“보통 마차가 아닙니다 대장님.”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마차 하나, 말 두 필뿐인 일행 아닌가?”
이미 위에서 다 보고 왔다는 로메인의 말에 병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이걸 참 뭐라고 해야 할지….”
“보고하라. 무엇이 그리 문제란 말인가.”
단호히 말하자, 병사가 차렷 자세를 했다.
“보고합니다! 일단 저걸 들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들여보내면 대체 통행료는 얼마를 받아야 하나! 모두 지금 그걸로 갑론을박 중입니다!”
“?”
로메인의 얼굴이 아리송해졌다.
“마차, 말, 사람 인원수별로 다 정해진 게 통행세다. 뭐가 문제란 말인가?”
병사가 입술을 달싹였다. 뭔가 말을 하고 싶기도 하고, 하고 싶지도 않기도 한 모양이었다.
“호위 기사가 날뛰기라도 했나?”
“아니, 그건 아닙니다.”
“그럼 귀족?”
병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거두절미하고 로메인의 팔을 잡아끌었다.
“일단 대장님께서도 와 보십시오. 이건 그냥 와서 보셔야 합니다. 말로 설명하기 힘듭니다.”
병사가 앞장서서 로메인을 이끌자 빽빽이 뭉쳤던 병사들의 원이 조금씩 무너졌다. 그는 모여 있는 병사들의 숫자에 슬쩍 놀랐다. 동쪽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의 팔 할은 몰려온 것 같았다.
‘…왜 이리 많지? 또 귀족들 쫓겨나는 걸 구경 온 건가?’
공작의 본성에 딸린 직할 영지에서 날뛰는 귀족들 대부분은 이 동문에서 탄생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메인이 백작이든 자작이든 쫓아내는 것은 이들 입장에선 대단한 구경거리인 것이다. 병사들 구경하라고 하는 짓은 아니었지만 부하들 사기 독려 겸 어느 정도 내버려 두긴 했다.
하지만.
‘아니 이렇게 다들 몰려오면 경비는 누가 선단 말인가?’
로메인은 기가 막혔다. 아주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싸는 것들 아닌가. 요즘 좀 풀어 주었더니, 아주 살판이 난 모양이다. 로메인은 속이 비틀렸다. 삼 년간 그렇게 굴렀는데 단 며칠 만에 도로 돌아오다니 재교육이 필수였다.
‘이 일이 끝나면 모두 가만히 두지 않―!’
그렇게 호기롭게 병사들을 제치고 앞에 선 로메인은 순간 멍해졌다.
“…헉!!”
챙!
그는 자기도 모르게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나 차마 앞으로 나서진 못했다. 대체 저게 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병사의 말이 떠올랐다.
‘보셔야 알 겁니다.’
아니 봐도 모르겠는데. 로메인은 이 우르르 모인 부하들에게 화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착실히 임무 수행 중인 부하들에게 화는 무슨 화란 말인가.
“저게 대체 뭔지 아는 사람 있나?”
로메인이 말했으나 누구도 그에 답해 주지 못했다. 뭐 로메인도 답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로메인 이하 수십 명의 병사들은 동쪽 외곽에 나타난 이 괴이한 일행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마차를.
그것은 괴이와 신비의 어드메였다.
말 머리에 길게 난 뿔은 마치 창처럼 길었고, 밑동이 하얀 데 비해 그 끝이 붉어서 섬뜩했다. 새하얀 갈기는 마치 불처럼 위로 타올랐고,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그림자 진 아래서 푸른빛이 번져 나갔다. 몸집도 보통 말 세 배는 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대체 어떻게 공중에 떠 있지?’
로메인은 눈을 의심했다. 저 큰 몸집을 가지고 날개도 없이 붕붕 공중에 떠 있는 말이라니, 그 누가 상상조차 했을까. 심지어 마부조차 없다. 물론 저런 걸 누가 몰고 다니겠느냐마는. 어쨌거나 저런 말이 제법 큰 마차 한 대를 혼자서 몰고 다니다니 실로 눈을 의심하고 싶어지는 사태였다.
―푸르릉!
짐승이 투레질을 하며 발굽을 차자 공중에서 불꽃이 튀었다. 옆으로 떨어지는 불똥 때문에 로메인 이하 부하들은 순간 움찔 떨었다. 물론 로메인은 아닌 척했다. 상관의 비애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상한 게 저 말뿐이라는 것이다. 나머지는 제대로 땅 위에 서 있었다.
물론 저런 것과 일행이라는 것부터가 정상이 아니긴 하지만 그게 어디인가?
기실 로메인이나 병사들이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말은 그렇다 쳐도, 사람은 사람 같아 보인다는 것. 만일 저들이 다 땅 위에 떠 있었다면 다들 냅다 튀거나 공격을 했을 것이다.
저게 뭔지, 저게 왜 여기 왔는지, 나는 이 일을 어찌해야 하는지….
머리를 굴리는 로메인에게 누군가 속삭였다.
“대장님, 어떻습니까. 그… 유령은 아니지요? 낮이니까요.”
옆을 보니 방금 그를 이끌고 온 그 병사였다. 유령이 꼭 밤에 나온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심신이 편하긴 했다. 로메인은 침음성을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낮게 말했다.
“…상대의 신분은 물어봤나?”
“그랬습지요.”
다른 쪽에 있던 병사가 말했다.
“어디의 누구요? 대관절 뭐 하는 분이시오? 라고 말했더니, 저 옆에 있는 치가 그럽디다. 그냥 니 상관 불러오라고. 이런 닝기미, 어디서 개무시야?”
상관 불러오라는 말이 굉장히 고까운 듯 병사는 입을 삐죽였다. 그러나 로메인은 어설프게 웃었다. 기사에게 너 기사냐고 물어보다니. 그냥 냅둔 것만 해도 일생의 행운을 다 쓴 거다.
“누가 봐도 기사인 자에게 네가 누구냐고 물었으니 그러는 것 아닌가. 자네가 실수했어.”
그거 기사였으면 결투감이야. 주변에 있는 병사들의 얼굴이 모두 해쓱해졌다. 므어?
“결, 결투라굽쇼?”
흐히익!
암만 일자무식 병사들이라지만, 기사의 결투가 목숨 걸고 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로메인은 쓰게 웃었다.
“일이 생기려고 했으면 진작 생겼을 테니 결투 건은 걱정 말게.”
그는 말 너머에 있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마차를 호위하듯 서 있는 기사는 제법 훌륭한 모습이었다. 통갑옷을 입지는 않았으나 중요한 부위엔 막힘없이 철제 보호구를 착용했고, 몸 구석구석 각종 무기들이 숨겨져 있다. 겉에 보이는 무기에 홀리면 단박에 저것들이 목을 꿰뚫을 것이다. 심지어 옆에 어설프게 있는 종자마저 검과 활을 차고 있었다. 일반 여행객 치고는 무장이 조금 과한 편이다.
‘재미있군.’
저기에 수십 병사를 목전에 두고도 겁먹은 기색이 없다니.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이 선택이 대단히 옳은 것이다. 로메인은 그 점마저도 높이 샀다. 안 그래도 경계심 가득인 병사들이다.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는 순간 위에 준비된 수백 대의 화살과 창이 이들을 꿰뚫을 것이다.
‘하는 행동을 보아하니 이런 상황에 익숙한 모양인데….’
작금의 묘한 대치를 보며 판세를 살피던 로메인은 일단 대화를 시도하기로 했다. 본디 모든 일의 시작은 대화부터 아니겠는가.
“귀하들은 누굽니까?”
“당신이 여기 상관이요?”
로메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소관이 이곳의 총 책임자, 로메인 드 데퓨탄입니다. 당신들은 누구입니까? 거기다, 저 마차 앞의 이상한… 말은 대체 무엇이지요?”
말? 기사가 코웃음 쳤다.
“저게 말처럼 보이다니, 대단히 관대하군. 나는 아무리 해도 빌어먹을 짐승 소리밖에 안 나오던데.”
기사는 진절머리 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로메인은 당황했다. 기사가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여행객이외다. 공작령에 들어갈 수속을 밟으려고 여태 당신을 기다렸소.”
말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숨을 훅 하고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뭐, 진짜 들어온다고?”
“헉….”
“그래도 돼?”
“모르지? 일단 돈 내면 되지 않나?”
“저건 그럼 뭐로 처리해야 해?”
“말? 소? 몰라, 규정에 있나?”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로메인에게 꽂혔다. 대장님! 대장님! 우리 대장님! 병사들의 눈이 반짝였다.
“대장님이 있잖아! 다 알아서 하시겠지!”
물론 그러라고 있는 감투고 직책이다. 하지만 갑자기 훅 들어오는 변칙 공격에 로메인은 고민 없이 즉시 축객령을 내렸다.
“안 됩니다.”
“어째서? 우리는 신분도 확실한데? 여기 신분패도―.”
워워. 로메인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신분이 문제가 아니지요. 아시지 않습니까?”
그는 말인지 짐승인지 모를 것을 가리켰다.
“일단 저 말… 부터가 규격 외라서 말입니다. 저게 들어가면 공작령의 질서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 통행은 허가할 수 없습니다.”
상당히 조야한 핑계였다. 하지만 듣는 모두 납득할 만한 거절이었다. 병사들의 눈이 반짝대며 역시! 하고 로메인을 바라본다. 이래서 대장이 대장이구나!
“저 빌어먹을 짐승 때문이면 걱정 마시오! 저놈이랑은 여기서 헤어질 거요. 여기 온 것도 어쩔 수 없이 같이 온 거란 말이오! 말을 도둑맞아서!”
“말을 도둑맞았다고요?”
“그렇소!”
기사가 으르렁거리며 외쳤다.
“그 씹어 먹고 찢어 먹어도 시원찮을 새끼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덕분에 저런 망할 것을 부르고…! 쫓고, 쫓기고!”
남자는 하늘을 보며 외쳤다.
“내 하늘에 맹세코, 이번 일이 끝나면 그 개 잡것을 없애 버릴 것이외다!”
우렁우렁한 소리였다. 한이 맺힌 소리였다. 기가 막힌 건 옆에서 종자가 박수치며 우리 필립 파이팅! 하고 외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로메인은 막 활을 발사하려는 병사들의 손을 막고 황급히 남자를 제지했다.
“죽고 싶은 거요? 왜 여기서 갑자기 이러는 겁니까? 저기 활과 화살 안 보입니까?”
기사가 휙 로메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투구의 구멍으로 남자의 형형한 눈동자가 로메인을 응시했다. 로메인이 움찔하고 뒤로 물러서자 그는 덥석 무릎을 꿇었다. 기사가 외쳤다.
“부디 부탁합니다. 대장님! 제발! 우리를 들여보내 주십시오. 우리는 여기 아니면 이제 공작령에 들어갈 문이 없단 말이오! 그 개 같은 패트릭이 나머지 수문장들을 모두 매수해서―.”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매수요.”
“아니, 그거 말고 이름 말입니다. 패트릭? 혹시 그거, 기레스의 패트릭을 말하는 겁니까?”
아는 이름이었다. 그것도 매우 좋지 않은 인연으로 맺은 이름.
로메인의 눈이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기레스의 패트릭, 페트릭 드 기레스.
광대한 부를 자랑하는 백작의 외아들인 그는 여러 가지로 유명한 놈이었다. 돈, 안하무인, 그리고 자격지심. 집안 때문에 서로 알고 지내긴 했지만, 패트릭과 로메인은 사이가 나빴다. 그 이름이 왜 여기서 나오는 걸까?
“그 개… 아니, 놈분과 아는 사이요?”
기사가 바짝 긴장했다. 알긴 알지. 로메인은 차게 웃었다.
“알다마다요. 아주, 잘 아는 사이입니다. 그래, 그 후레자식과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잘 아는 사이라는 말에 몸을 굳히던 남자는 후레자식 소리에 노골적으로 안심했다. 친한 사이라면 욕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일? 너무 많아서 뭘 말해야 할지 모르겠소. 그래, 가장 최근에 있던 일로 말할까?”
으득! 기사가 이를 갈며 말했다.
“그 새끼가, 우리 말을 훔쳤소.”
“패트릭이… 도둑질을 했다고?”
로메인은 순간 당황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부정적인 단어가 패트릭과 연관이 있지만, 단 하나 관련이 없는 것이 있다면 바로 도둑질이다. 그는 자기 돈 많은 걸 자랑하고 다니는 게 인생의 낙이었다. 그런 녀석이 도둑질을 했다고?
“그건 좀 믿기가 힘들군요. 내가 아는 패트릭은 돈 자랑하는 게 삶의 낙인 녀석입니다만.”
“아, 그렇더군. 돈이 참 많다고 들었지. 우리도 그 소문을 듣고 갔으니까.”
기사는 이죽거렸다.
“하지만 돈이 많으면 뭐 하오? 인간이 개차반인 것을. 주변 평판도 좋고 돈도 많다는 평이길래 고르고 골라 간 건데, 다 헛거였소. 그 평판 다 돈으로 산 모양이더이다. 그래, 동문 대장님도 그놈을 후레자식이라 부르니 그놈이 어떤 놈인지 알 것 아니오?”
“그렇긴 한데….”
로메인은 말문이 막혔다.
사실 처음부터 두 사람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 보통 아이들의 친분 관계는 부모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라, 친분 있던 부친들 덕에 둘은 어린 시절 제법 잘 붙어 다녔다. 하지만 둘은 몰랐으리라. 서로 나이 같은 남자애 둘을 붙여 놓으면 사이가 좋아지기보다 일단 경쟁을 한다는 것을.
부친의 작위는 로메인 쪽이 높았지만, 정치적인 상황은 패트릭이 낫다. 유일한 후계자이지 않은가. 광활한 기레스 영지의 부를 한 손에 쥘 것이 예정된 후계자와 그냥 후작가의 차남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로메인의 아버지나 형이 박한 이들은 아니어서 적당한 영지와 작위 정도는 줄 것이다. 하지만 백작 후계자 눈에 로메인은 빈궁함이 예약된 지방 귀족. 자기 명령 내리면 꼬리를 흔들어야 하는 개와 비슷하게 봤다.
대단한 싹수였다.
“야! 너 이따 내 방에 와서 잠깐 내 숙제 좀 해!”
“…뭐?”
로메인은 어이가 없었다.
“숙제 정도는 네가 해야지.”
“아 씨, 말 되게 많네. 하라면 좀 해! 토 달지 말고!”
“내가 왜?”
“왜? 너 지금 왜라고 그랬냐?”
때는 13세, 바야흐로 질풍노도의 시기. 당시 패트릭은 점점 로메인이 검에서 두각을 나타내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분명 자기보다 못한 놈인데, 내가 말하면 대부분 져 주는 놈인데. 어째서 다들 저놈만 예뻐하지? 내가 제일 잘났는데?
물론 위에 말한 건 모두 패트릭 시점이다.
로메인이 패트릭의 요구를 들어준 건 그냥 친구라서 그랬던 거고, 다들 패트릭보다 로메인을 예뻐하는 건 그럴 만해서 그렇다. 누가 건방진 꼬마를 좋아하겠는가?
그러나 그걸 몰랐던 패트릭은 급기야 그 인생 최대의 흑역사를 갱신하고 말았다.
“못난 놈이 잘난 놈 밑에 기어야 하는 건 당연한 거잖아!”
―거잖아! 거잖아! 거잖아!
패트릭의 마지막 말이 메아리를 울렸다. 참고로 패트릭이 이 말을 한 건 두 가족들이 모여 친목을 다지는 자리였다. 그러니까 가족 모두가 있었다는 것이다. 기레스 백작 부처의 얼굴이 납빛이 됐다.
“패트릭! 너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데퓨탄 후작 부부는 그냥 아무 말 없었다. 애들 싸움 어른들 싸움 되는 것은 세상 이치이지만, 일단 그것도 애들이 싸워야 시작하는 거지. 그들은 자신들의 차남을 바라보았다.
“…….”
로메인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그는 한참 있다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안 되겠다.
“저는 말입니다, 백작 각하. 친우를 사귐에 있어 세 가지 원칙을 두고 있습니다.”
로메인은 백작에게 말했다. 기레스 백작은 자기 아들의 추태 때문에 할 말이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첫째는 인품, 둘째는 몸가짐, 셋째는 지성입니다. 물론 거기에 지위까지 더해지면 좋겠지만, 이건 제 욕심이니까요.”
로메인은 고개를 저었다.
“헌데 자제분은 그 세 가지가 다 없습니다. 아버님과의 우의는 제가 뭐라 할 바 못 되고 그럴 계제도 되지 않습니다만 부디 아드님과의 교제를 단절하는 것을 이해해 주십시오.”
입에 칼 물고 욕을 해도 이것보다는 덜 모욕적일 것이다. 곱고 우아한 말로 네 자식 멍청하고 수준 낮고 인성 나쁘다고 욕하는데 기분 좋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 잘못한 건 명백하게 자기 자식이었다. 로메인은 아주 우아하고 예절 바르게 기레스 백작에게 자기 뜻을 전하고 있었다. 백작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저는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로메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얼떨떨한 얼굴로 있던 패트릭이 간신히 정신을 차린 것은 그때였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야! 너 방금 뭐라 그랬어?!”
“이제 보니 귀까지 막혔던 건가. 각하도 고생이시겠어. 하나뿐인 아들이 귀머거리라니….”
마치 혼잣말 같았지만 다 들린다. 물론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패트릭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이, 이, 니가, 감히 날!”
늘 자기 멋대로 사는 놈이 노여움에 미치면 눈에 뵈는 게 없는 법이다. 패트릭은 눈을 까뒤집으며 옆에 있던 검을 들고 로메인에게 돌진했다. 연습용 검이었기에 날은 세우지 않았으나 그래도 검은 검. 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식겁했으나 로메인은 침착했다.
“이야야야야야야야야―!”
그는 마구잡이로 찔러 들어오는 패트릭의 검격을 피했다. 그리고 곧바로 스텝이 꼬인 페트릭의 발을 걸어 넘어뜨린 뒤 그의 엉덩이를 찼다.
쿠당탕탕탕!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패트릭이 넘어졌다. 패트릭이 놓친 검이 찬 소리를 내며 뒤로 밀려났다. 그리고 그때, 두 사람 사이가 완전히 파탄나게 된 치명적인 일이 벌어졌으니….
―지이이이익!
패트릭의 바지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북 찢어졌다. 로메인 이하 모든 이들의 눈동자가 똥그래졌다.
찢어진 바지 사이, 패트릭 드 기레스가 입은 속옷이 보였다.
기저귀가.
“…….”
로메인은 잠시 말없이 그걸 바라보다 뒤를 돌았다. 아직 기저귀를 차고 다니는 애와 대결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는 기절한 패트릭을 두고 인사하고 떠났고, 그렇게 미래의 백작과 후작 차남 사이는 아작이 났다.
“하긴, 그놈이 졸렬하긴 하지요.”
로메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일 뒤 패트릭은 로메인이 하는 모든 일에 사사건건 훼방 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돈은 돈, 검은 검. 실력은 실력. 자기가 뭘 할 때마다 돈으로 훼방 놓는 패트릭이었으나 아직 그가 사는 세상은 돈보다는 지위가 일등 먹는 곳이다. 그는 본연의 실력과 적절한 후광으로 패트릭의 발광을 다 무시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귀찮지.
“잘 아시는군! 대장님, 그러니 제발 우리를 좀 도와주시오. 나머지 문은 패트릭 그 개잡놈이 수작을 부려 우리를 공작령 안으로 들여보내 주지 않으려 하오. 그나마 동문은 다르다는 소문을 듣고 왔단 말이오. 설마, 동문 대장도 그놈에게 매수된 거요?”
로메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매수? 내가?
“워! 말도 안 돼! 우리 대장이?”
“세상 모두가 매수가 되어도 우리 대장놈, 아니 대장님은 안 그래!”
“맞아! 소문도 못 들었냐!”
“앉은 자리에 풀도 안 나는 동문의 사신!”
“원리 원칙의 수호자!”
“공명정대의 화신!”
뒤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병사들이 야유했다.
우우우우우.
병사들의 외침에 기사가 고맙다며 절을 했다. 옆에서 종자가 같이 팔짝거렸다.
“그럼, 우리를 들여보내 주시는 거지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동문 대장님 복 받으세요! 많이 받으세요!”
로메인은 무서운 눈으로 병사들을 노려보았다.
‘망할 것들!’
저놈들 때문에 이제 싫어도 이들을 들여보내야 하게 생겼다. 진퇴양난이었다.
안 들여보내 주면 매수자, 들여보내 주면 공명정대한 평소의 자신.
매수자란 오해를 사는 것만도 불쾌할 지경인데 심지어 상대가 저 패트릭 놈이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는 결국 말했다.
“…그래서 총 인원 수가 몇입니까?”
“사람 셋! 말 두 마리!”
기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로메인은 서둘러 단서를 달았다.
“저 말…은 정말로 안 됩니다. 절대로!”
혹시라도 들어온다고 우기면 도로 내쫓으리라. 로메인이 힘주어 말하자 기사가 가슴을 팡팡 쳤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하시오! 잠깐 기다리시오!”
그는 쿵쿵 소리를 내며 그 괴이한 말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푸히이이이잉!
뿔 달린 말이 엉덩이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기사가 다가가자 공중에 있던 말이 바닥에 닿을 듯 말 듯 내려왔다. 기사는 잽싸게 목에 걸린 멍에를 떼어 내고 물린 재갈을 벗겼다. 말이 시원하다는 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말은 기사에게 친분을 표시하려 다가왔지만 기사가 진저리 치며 뒤로 물러났다.
“이제 끝났다. 돌아가라!”
“맞아, 얼른 가! 가 버렷! 꺼졋!”
첫 번은 기사, 뒷말을 한 것은 종자였다. 기사 옆에 착 달라붙은 종자는 다가오려는 말을 착 막고 훠이훠이 내쫓고 있었다. 로메인 이하 병사들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특히 로메인이 그랬다.
저 말을 처리하고 오라고 하긴 했지만 저게 다 뭔가. 대체 어디에 뭘 풀어놓는 것인가. 꼭 여기에서 저걸 놓아줘야 하나? 저게 혹시라도 성문 뚫고 들어오면 어떻게 하라고?
“지금 대체 뭐 하는 겁니까?”
보다 못한 로메인이 막 다가가려던 바로, 그때였다.
―오오, 아름다운 처녀여. 이렇게 헤어지자니 너무 냉정하구려. 설마 작별의 키스도 안 해 줄 참이오?
“?!”
“!!?”
“!!!!?????”
말을 했다.
말이.
머릿속으로 직격해 들어온 음성이라 다들 현실 부정도 못 했다. 모두의 눈이 튀어나왔다.
“야, 너도 들었어?”
“어, 나도 들었어. 너도?”
“헐 미친, 저거 말도 하냐?”
모두가 수군수군거리는 가운데 오로지 종자와 기사만 태연했다. 아니, 정확히는 태연하지는 않고, 화냈다. 그러니까 말이 말하는 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종자가 바락바락 악을 썼다.
“이 변태 말! 어서 꺼져! 가 버리란 말얏! 우리 필립 님 괴롭히지 마!”
―내가 언제 갈지는 내가 정한다, 되바라진 꼬마. 필립이 택한 사람이기에 널 봐주는 걸 잊지 말라. 처녀가 아니면 귀엽기라도 해야 하는데, 쯧쯧. 대체 그가 네 뭘 보고 택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변태 말 주제에 봐주고 말고를 찾아?! 필립 님 넘보지 마라! 필립은 내 거야!”
―건방진! 처녀는 애정의 종류를 착각하는 것뿐이다, 꼬마! 측은지심도 애정이긴 하다만, 그는 곧 제정신을 찾을 것이다!
“그 말은 지금 내가 미쳤단 말이냐?!”
예로부터 불구경과 싸움 구경만큼 재미난 게 없다고 한다. 그리고 그 싸움 구경 중에서도 가장 재미있는 건 치정 싸움. 모두의 눈동자가 흥미로 초롱초롱해졌다.
그러니까 이거 사람 둘과 말 한 마리가 삼각관계란 것인가. 그게 가능한가? 대체 사랑의 작대기가 어떻게 되는가는 모르겠으나 엄청나게 흥미진진했다. 어째서 처녀인지는 모르겠으나 처녀라고 불린 기사가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자꾸 처녀 처녀 하지 마라 이 징글맞은 짐승아! 대관절 내가 어디를 봐서 처녀란 말이냐! 나는 신체 건장한 남자, 거기다 유부남이다!”
―처녀는 처녀니까 처녀라고 하는 것이라오. 오오 아름다운 나의 처녀여, 그대는 수줍음도 많구려. 진실로 매력적이오.
“으아아아아아아!”
기사가 투구를 땅으로 벗어 던졌다. 불꽃처럼 새빨간 머리칼이 겨울바람을 받고 사방으로 뻗쳤다. 말이 탄성을 질렀다.
―아! 역시 그대는 아름답소. 진정 아름다운 머리칼이오. 내 오랜 세월을 살아왔으나 그대처럼 아름다운 이는 없었다오! 처녀여, 정녕 내게 올 생각이 없소?
“너나 가라! 가! 제발 좀 가!”
―아, 내가 그대를 두고 어딜 간단 말이오? 처녀여, 그대는 마치 불처럼 뜨거우나 얼음처럼 차갑구려.
콩깍지란 진정 위대한 것이다. 남들 보기엔 미친놈이 탈춤 추는 장면인데 저 말의 눈엔 저게 달리 보이는 모양이었다. 기사가 말의 정신 공격에 괴로워하자, 옆에서 이를 득득 갈던 종자의 눈동자에 불길이 일었다. 그는 분연히 소리쳤다.
“이 변태 말! 너 자꾸 이렇게 필립 님 괴롭히고 안 가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기사에게 추근거리던 말이 종자를 돌아보았다. 같잖은 연적이 감히 자길 협박하다니. 말의 눈꼬리가 위로 치솟아 올랐다.
―호, 가만두지 않으면 네가 뭘 어쩐단 말이냐. 일개 인간 주제에, 참으로 궁금하구나. 그래, 뭘 어찌할 것이냐?
변태, 아니 말이 놀리는 어투로 말했다. 종자는 입을 딱 다물고 눈을 부릅떴다. 무시무시하게 보이고 싶어서 그런 모양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외모가 앳되어서 그냥 귀여웠다. 종자는 정말 큰마음을 먹었다는 듯, 부들거리는 손가락을 마차 쪽으로 뻗었다.
“깨울 거야.”
―!!!!!
“멀미 나신대서 일부러 주무시게 했지만, 나도 이판사판 공사판이다 이거야. 그분 주무신다고 지금 이렇게 나대는 거 내가 모를 줄 알고?”
―그, 그것만은!
의기양양하던 말의 기색이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아까부터 활활 타오르던 갈기의 색조차 희게 바랜 것 같았다. 종자가 으름장을 놨다.
“정해. 지금 갈 거야? 아니면 깨워? 직접 그분이―.”
말이 휙 사라졌다.
종자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이었다. 본의 아니게 하던 말을 멈췄지만, 종자는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그는 흥흥 하고 콧노래를 했다.
“흥 별것도 아닌 게 까불어 까불긴. 필립 님, 일어나요!”
“…….”
저 종자, 범상치 않다.
너나 할 것 없이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모두가 조용히 두 주종을 바라보는 가운데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역시 종자다. 종자는 정신적인 괴로움에 머리를 싸맨 제 기사를 내버려 두고 로메인에게 종종걸음으로 뛰어왔다. 방금 전 그런 일을 보여 주었으면서도 전혀 무안하다는 표정이 아니었다. 로메인은 외려 주춤거렸던 자기가 못난 놈 같아졌다.
“대장님, 감사합니다. 나중에 일이 잘 풀리면 꼭 은혜 갚을게요. 여기 신분패 있습니다!”
“아, 고맙….”
고마운 게 아닌데 저도 모르게 그 소리가 나온다. 로메인은 입을 다물고 얼결에 종자가 준 신분패를 받았다.
은패 하나, 동패 하나, 구리패 하나.
앞부분에 제국의 문양이 돋을새김 되어 있고 그 패 뒤 가장자리에서 안쪽 전면으로 이들이 사는 영지의 문장이 새겨진다. 그러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문양이라 로메인은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흠,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로메인은 즉시 초소로 달려가 문장 책을 꺼내 왔다. 그는 팔락팔락 책을 넘기며 물었다.
“어느 영지 출신인지?”
“헤헤, 페르귄 영지입니다. 좀 작아요.”
“역시.”
듣지 못한 고장이다. 로메인은 대령된 문장 책에서 페르귄 영지의 것을 찾아냈다. 우아하게 가지를 내린 나무와 새, 그리고 태양. 가지의 숫자와 새의 눈동자, 태양의 방향을 대조해 본 로메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품이었다.
“저는 요수아, 그리고 우리 기사님은 필립 러셀이에요. 보시다시피 기사시고, 저희 페르귄 영지의 치안대장이시죠.”
로메인은 치안대장 소리에 새삼스럽다는 눈을 했다. 치안대장이 영지를 벗어나는 일은 오죽해서는 없다. 로메인은 은패 뒤의 작위를 확인하고 물었다.
“혹시 마차 안의 분이, 페르귄 남작입니까?”
“네! 저희 영주님이세요. 사실 저희 영주님은 멀미가 있으시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약을 드시고 누워 계세요.”
“흠, 그렇군요.”
로메인은 납득했다. 치안대장이 영지를 벗어나는 건 그만큼 중한 일이 있을 때인데, 남작의 수행 기사라면 그럴 만했다.
“약을 먹고 누워 있다…. 그럼 제가 마차에 들어가야겠군요.”
“네, 그러세요가 아니라 지금 뭐라구요?!”
종자가 펄쩍 뛰었다. 마치 천하에 다시 없을 불한당을 보는 시선이었다. 로메인이 순간 자기가 무슨 큰 실수를 했나 착각했을 정도였다.
“어, 어떻게 그런 무지막지한, 무도한, 막돼먹은 말을!”
종자는 펄펄 뛰었다. 화내는 게 꼭 샤프롱 없이 과년한 레이디가 있는 방을 들어가겠노라 주장하는 불한당을 대하는 것 같았다. 종자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좋게 봤었는데! 수치도 모르고,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공명정대의 화신이시라면서요?!”
그것과 이것이 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가? 마차 안에 들어가서 얼굴 확인한다는 게 수치를 모르는 일인가? 왜 그걸 여기에다 비교하는가 도통 알 수가 없는 논리 전개였다.
“비약하지 마십시오, 원래 당사자 확인은 필수입니다.”
“저희는 지난 이 년간 온갖 곳을 다 돌아다녔어요! 하지만 어디서도 그런 말 들은 적 없다구요. 다른 곳들은 패만 봤어요!”
로메인은 피식 웃었다. 아, 그래서 그런 것인가.
“페르귄 영지의 치안대장, 기사 필립 러셀의 종자 요수아. 다른 곳은 어떤지 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이 제국과, 공작령의 기본 법규에는 이 점이 분명 명시되어 있습니다. 문을 통과할 시엔 당사자 확인이 기본이라는 것이요. 그게 원칙이지요. 저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원칙과 도리에 어긋나는 짓을 한 적이 없습니다.”
로메인은 딱딱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문을 지키는 자들이 돈을 받고 뒤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는 내 알 바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여기에 있는 이상, 무엇이든 그냥 넘어가는 법은 없을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는 잠시 쉬다가,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당사자의 얼굴 정도는 알아야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죠. 이건 당연한 겁니다. 소문을 들으셨다면 아실 텐데요, 이곳 동쪽 성문이 어떻게 관리되는지.”
종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그랬군요. 하지만….”
종자는 안절부절못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곤란한데….”
“본인이, 그러니까 영주님이 얼굴을 보이기 싫어하십니까? 아― 혹시.”
로메인은 요수아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속삭였다.
“혹시 현 남작께서는 …레이디십니까?”
진짜로, 정말로 드물긴 하지만 제국에선 여자가 작위를 잇는 경우도 있었다. 부모의 요청하에, 작위를 이을 이가 딸밖에 없는 경우 그러했다. 그런 여인들은 보통 치마 입은 남자 취급을 해 주지만, 로메인은 기사다. 그리고 여자와 아이에게 친절하라는 건 기사의 필수 덕목 아닌가.
사실 로메인이 종자에 불과한 요수아에게 하나하나 설명해 주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요수아가 여기서 조금만 더 나이 먹었어도 설명은 무슨, 주먹으로 설명했다. 애니까 이렇게 넘어가는 것이지.
그러니 만일 남작이 여성이라면, 그는 친절을 발휘할 생각이었다. 그건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로메인의 속삭임에 의외로 종자가 펄쩍 뛰었다.
“무슨! 저희 영주님은 남성이세요!”
“그럼 대체 뭐가 문젭니까. 저는 들어가야겠습니다.”
로메인이 마차 쪽으로 쿵쿵 걸어가려 하자 당혹한 요수아가 로메인의 팔뚝을 붙들었다. 로메인이 귀찮다는 얼굴로 요수아를 내려다보았다. 요수아가 간절한 시선을 보냈다.
“저기, 대장님. 정말 들어가셔서 확인하셔야 하나요?”
“예외는 없습니다. 마차 안에 계신 분이 설령 황족이라도, 저는 똑같이 할 겁니다.”
“…….”
요수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떻게 하지? 이런 중요한 일은 요수아가 아닌 필립이 하는 일이지만, 필립이라면 죽어도 안 된다고 마차 앞에 드러누울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공작령에 들어가지 못한다. 또 다른 곳을 떠돌 게 뻔했다. 요수아는 필립 쪽을 흘끗거렸다. 필립은 남아 있는 말들을 마차에 묶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당분간은 괜찮을 것이다. 요수아는 눈앞에 있는 동문 대장이란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 남자는 괜찮을까?
이 년간 겪은 별별 일들이 요수아의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통렬한 배신을 했을 때, 어린 요수아는 사람에 대한 믿음을 상당수 버린 상태였다. 어른들에게 우리 영주 같은 이가 없노라 누누이 듣긴 했지만 그래도 설마 했다. 지위 높은 이들은 다 자기 영주님 같은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 반대였다. 위험에 처했을 때 영주님을 도와준 건 같은 기사 계급이나 귀족들이 아니라 평민들이었다.
‘동문으로 가렴, 아가. 그곳의 기사님은 다른 분들과 달라.’
북문에서 서문, 남문으로 죽 돌아 공작령으로 들어가려고 했던 일행들은 뒤쫓아 온 패트릭의 뒷공작 때문에 진입이 막혔다. 심지어 남문에선 어땠는가? 그들은 하지도 않은 도둑질을 했다며 마차에 묶인 말마저 빼앗겼다. 그런 그들을 몰래 도와준 한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일행들은 이곳을 오지도 못하고 패트릭의 군사들에게 도로 잡혀갔을 것이다.
‘공작령의 동문을 지키는 기사야말로 진정한 기사님이야. 그분은 아가 일행들의 어려움을 이해해 주실 거야. 어서 가렴.’
할머니는 집시였다. 그녀는 집시인 자신에게 순서를 양보해 준 영주 일행에게 은혜를 갚는다고 했다. 그녀는 같은 집시들과 속닥거려, 요수아와 필립, 그리고 렉시의 마차를 병사들의 시야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귀족은 믿을 수 없다. 앞에서 웃고, 뒤에서 칼을 간다. 달콤한 말에 비수가 숨겨져 있고 낮과 밤의 얼굴이 다르다. 하지만 이 남자는 같은 귀족들이 아니라 평민들에게 신임받는 기사였다. 분명, 다를 것이다.
요수아는 결심했다.
“대장님. 저희가 굳이 영주님을 보여 드리려 하지 않는 건…이유가 있어요.”
로메인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게 뭡니까?”
“그건 저희가… 정확히는 저희 영주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어서예요.”
쫓긴다? 로메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잠깐, 혹시 범죄를 저지른 겁니까?”
“절대 아니에요. 부디 들어 주세요. 범죄를 저지른 건 물론 아닙니다. 수배서가 붙지도 않았잖아요. 저희가, 아니 영주님이 쫓기는 이유는 따로 있어요.”
요수아는 안타까운 눈으로 마차를 바라보았다.
우리 불쌍한 영주님, 우리 착한 영주님은 절대 이런 일을 겪을 분이 아닌데. 대체 어디서부터 일이 꼬인 것인지 알 수가 없었으나 상황이 이리되었으니 어쩌겠는가.
“저희가 아까 말씀드렸죠? 패트릭… 이란 놈, 아니 귀족분이 저희 말을 훔쳐 갔다고.”
로메인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기실 그가 이들과 얽힌 것은 그 패트릭 때문 아닌가.
“저희는 사실 영지의 빚을 갚기 위해 나왔어요. 영주님의 아버님이신 전 남작께서 천문학적인 빚을 지셨거든요. 저는 그런 돈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는데… 영주님은 그걸 갚기 위해 가문 대대로 내려온 보물을 들고 돈이 많은 귀족들을 만나기 시작하셨어요…. 상인을 가장하고요.”
요수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상인들과 직거래를 하지 않은 건 그들의 입이 싸기 때문이다. 심지어 눈치도 빠르고. 이런 물건이 시중에 나오면 필시 소문을 낼 것이었다. 여태 평화로운 남작령이었지만 보물이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도둑질을 하러 들어올 외부인은 저 하늘의 별만큼 많았다. 렉시 남작은 그런 일만큼은 피하고 싶어 했다.
“저희는 사실 이 여행이 길어 봐야 반년이나 걸릴 거라 생각했어요. 영주님도 그렇게 말씀하셨고, 필립 님도 그렇게 보셨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문제가 있었어요.”
“그게 뭡니까.”
“그건….”
로메인은 이 소년의 이야기에 점점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저 페르귄의 영주라는 이가 굉장히 궁금해졌다.
귀족들은 탐욕스러운 이들이 대부분이다. 얼마나 빚을 졌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빚을 영민들에게 지우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이 남자가 흥미로웠다.
그가 아는 거의 모든 귀족들은 파렴치하다. 자신들이 진 사사로운 빚조차 영민들에게 떠넘긴다. 이유는 간단하다. 본인의 재산을 포기하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민들을 가축으로 생각한다. 한 해에 얼마나 많은 영민과 농노들이 굶주림에 죽어 가는가. 한 해 농사의 풍흉과 관계없이, 굶주림에 죽어 가는 이들의 비율은 늘 비슷비슷하다. 영주들이 소요 영지의 영민들에게 지우는 세금의 비율은 가혹할 정도였다.
헌데 이 시골의 귀족은, 그 빚을 세금을 올리는 것으로 해결 보지 않고 가문의 보물을 가지고 나왔다고 했다. 감탄스러웠다. 지방 귀족에 불과한 남작의 보물이 대단해 봤자 뭐 얼마나 대단하겠나. 하지만 그런 것이라도 남작에겐 귀한 보물일 것이다.
군주가 다스리는 자에게 지나치게 관대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를 지키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신의 없는 군주가 권력을 지키는 일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법. 신의는 결국 군주 자신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현 제국에서 누가 백성에게 도리와 믿음을 지키는가? 그런 이를 찾는 것이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만큼 어려웠다.
로메인은 제도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군주의 도리를 고작 남작에 불과한 이가 지키고 있다는 것에 크게 놀랐다.
요수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부터 본론에 들어가야 한다. 이건 그냥 말을 해서는 모를 것이다. 기실 이런 일을 당하고 있는 당사자조차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 끝에 납득한 일이다.
요수아는 로메인의 마차로 이끌었다.
“저희 영주님을 보여 드릴게요.”
*****
마차로 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요수아는 최대한 조잘거렸다. 일단 영주를 만나기 전, 최소한의 상황 설명은 해야 했다.
“페르귄 영지 이름을 쓸 수 없어서, 귀족들과 만날 때 저희는 외지에서 온 상인을 가장했어요. 물론 여행이 마냥 순조로울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닥친 일들은 참 이상할 정도로 저희 예상을 벗어나더군요. 처음엔 보물을 탐내던 귀족들이 이상하게 물건만 가지고 가면 재흥정을 요구하는 거예요. 잠깐 다시 생각해 보자고 하거나, 가격을 조정해 보자고 하거나… 정말 한도 끝도 없었죠. 하지만 아시다시피 저희는 빚이 있고 그 빚을 기한 내에 갚아야 하잖아요. 그런 걸 상대해 주는 것도 시간 낭비라는 거죠. 안 그러겠어요?”
말을 멈춘 요수아는 잠시 씨근덕거렸다. 다시 생각해 봐도 화나는 모양이었다.
“사지 않을 거면 다른 사람을 찾아야죠. 그런데 견디다 못한 영주님이 그냥 다른 귀족을 알아본다고 하면 그때부터 미친 짓이 시작되는 거예요. 성 밖을 못 나가게 하고, 여관방을 못 잡게 막고, 심지어 감금도 당했어요. 솔직히 패트릭 놈이 말을 훔쳐 간 건 귀여운 축이었죠. 후폭풍이 제일 오지긴 했지만…. 어쨌든 어이가 없었어요. 처음엔 돈을 주지 않고 보물을 빼앗으려 그런 줄 착각했지요.”
“…아니었습니까?”
안 그래도 방금 비슷한 생각을 한 참이다. 사실 그래서 쫓기는 줄 알았다. 요수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차라리 그거면 좋았을 거예요.”
로메인은 알 수 없는 눈으로 요수아를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처음 이상한 걸 느낀 건 세 번째 귀족을 만날 때였어요. 스펜서 백작, 아마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네요. 영주님은 그 사람이 우리가 팔 물건을 모으는 취미가 있다고 하셨죠.”
로메인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이상하게 아는 이름들이 자꾸 나오고 있었다.
“혹시, 팔고자 하는 물건이 마도구였습니까?”
“…이 사람도 아세요?”
요수아가 기막히다는 듯 로메인을 보았다. 너는 어쩜 이런 놈들만 골라 아니? 듣지 않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로메인은 뭔가 억울했다.
“친하지 않습니다. 그저 약간 아는 사이지요. 마도구에 미쳐 있다는 점만 빼면, 귀족들 중에서는 그럭저럭 온화하다는 평을 듣고 있는 사람인데….”
요수아가 코웃음을 쳤다.
“아, 정말 약간 아나 보네요. 온화는 무슨 얼어 죽을 온화. 그런 사람이 식사에 약을 타요?”
“예?!”
로메인은 드물게 말문이 막혔다. 식사에… 뭘 탔다고?
“영주님이 가지고 계신 보물, 그러니까 마도구가 경고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미 죽고 없을걸요. 덕분에 잘 모르던 마도구의 다른 이용법을 알게 되었다며 그 점은 참 고맙다고 하시는데, 진짜 터지느니 내 속이죠. 우리 영주님이지만 사람이 참 너무 좋지 않나요?”
그냥 그런 놈은 콱 뒤져 버려야 하는데. 요수아의 욕설을 들으며 로메인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까스로 가다듬었다. 맙소사.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스펜서 백작은 아버지와 동문수학한 동기였다. 물론 로메인도 어느 정도 면식이 있다.
그는 마도구에 미쳐 있었다. 백작이 마도구 사는 일에 한재산을 쏟아붓는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 있지만, 저런 불법적인 방법까지 사용할 줄은 몰랐다.
로메인은 즉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그 사람이 그럴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귀족이 다 그러는 건 아닙니다.”
요수아가 로메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거야 물론 알고 있어요. 저희 영주님은 안 그러니까.”
“…그렇군요.”
참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는 투였다. 로메인은 살짝 상처받았다.
어느덧 마차 앞이었다. 가까이서 본 이들의 마차는 솔직히 말해 좀 낡았다. 하지만 새겨진 문양들이나 마차 자체의 균형을 미루어 보면 아마 만들었을 당시엔 상당한 고급품이었을 것이다. 요수아는 페르귄의 문장이 새겨진 문 앞에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그 말만 들어도 대충 아시겠지요? 저희 영주님은 정말로 선하고 좋은 분이라는 걸요.”
로메인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치 날개 없는 천사 같은 분이군요.”
요수아의 눈이 번뜩였다.
“네, 바로 그거예요. 하늘에서 내려온 날개 잃은 천사, 신의 실수로 올라가지 못한 마지막 희망, 존재할 리 없는 푸른 장미 등등등. 이것 말고도 영주님을 칭송하는 말은 많았지요. 우리가 상황을 늦게 파악한 이유가 그거였어요. 사람들은 늘 영주님을 칭송했으니까요. 그건 정말, 당연한 거였다구요.”
로메인은 점점 헷갈리기 시작했다. 영주가 쫓긴 이유를 설명하는데, 결론은 영주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란다. 그러니까 요수아의 요지는 이건가? 영주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서 쫓겼다고?
‘이래서 숭배자들이란.’
그냥, 직접 봐야겠다. 로메인은 이해를 포기했다.
퉁퉁, 기익.
요수아가 마차의 문을 톡톡 두드리자 우아한 마차의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요수아는 안에 들어가기 전, 옷매무새를 싹싹 정리했다.
“요수아입니다 영주님.”
그는 작게 말한 뒤 뒤에 서 있는 로메인의 손을 잡고 마차 안으로 쑥 끌어당겼다. 엉겁결에 마차에 탑승한 로메인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입을 벌렸다.
“여기, 마차 안입니까?”
“네. 마법 마차예요. 신기하죠?”
“정말 대단하군요.”
밖에서 봤을 때는 그저 2인승 마차로 보였던 작은 마차의 안은 마치 12인승용 마차처럼 넓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아니었다면 로메인은 자신이 어디 다른 곳으로 이동된 줄 착각했을 것이다. 마치 방처럼 보이는 마차 안을 보며 로메인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것도 파는 물건입니까?”
“사실은 파시려고 했는데, 이젠 못 파시겠대요. 나름 정이 든 데다 이게 아니었으면 여태 도망다니지도 못했거든요.”
요수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거나…. 잠시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남작님을 모셔올게요.”
요수아는 안쪽 가장 은밀한 곳에 있는 침상으로 다가갔다. 침상을 가린 짙은 천을 걷어 내자, 불투명한 엷은 망사 너머 누워 있는 사람이 보였다. 저게 예의 남작인 모양이었다. 요수아는 남작의 머리맡에 조용히 섰다. 로메인은 자세를 바로 했다.
“영주님, 일어나세요.”
“응… 요수아?”
잠에서 막 깬 듯, 낮게 까라진 목소리는 상당히 젊었다. 생각보다 남작이 젊다는 사실에 로메인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영주라던데, 이르게 상속을 받았나 보군.’
“공작령 동문에 도착했어요. 이젠 통행 허가를 받아야 해요. 그러니 일어나세요 남작님.”
“허가…?”
남작은 잠이 채 깨지 않았는지 머리를 쥐어 감쌌다.
“내가 혹시 신분패 안 줬니?”
“아, 여긴 패랑 당사자까지 모두 확인한대요. 원칙을 지켜 주시는 분이더라고요, 여러모로.”
저희로서는 퍽 고마운 일이죠, 요수아가 덧붙였다. 조용히 듣던 남작은 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대충 이해한 모양이었다.
“아… 그렇긴 하네. 알겠다 요수아. 잠시만….”
그는 잠시 헐떡거리다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하지만 차마 일어서지를 못했는데, 하는 게 꼭 약 먹은 병아리 같았다. 몇 번을 일어서려다 실패한 남작이 결국 신음했다.
“멀미가 없는 건 좋은데 약 기운이 너무 독해….”
“그래도 토하는 거보다는 그게 낫지요 무얼. 물 드릴까요?”
“아니, 됐어. 얼른 확인만 하고 다시 자련다.”
남작은 다시 비틀비틀 일어났다. 그러나 이번에도 뒤로 도로 넘어갔다. 아무래도 저거 기다렸다가는 오늘 해 다 지게 생겼다. 보다 못한 로메인이 조심스레 말했다.
“저, 남작님? 제가 그쪽으로 가도 되겠습니까?”
로메인이 말하자 잠시 남작이 침묵했다.
“…그, 누구신지요?”
잔뜩 긴장한 목소리에 로메인은 상황을 파악했다.
‘내가 들어올 줄은 몰랐나 보군.’
하긴 보통 직접 들어와서 얼굴을 보진 않으니 놀랄 만하다. 그는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한 뒤, 자기를 소개했다. 어차피 그래야 할 거라고 생각은 했다.
“안녕하십니까, 남작님. 소관은 공작령 외곽 동문의 책임자인 로메인 드 데퓨탄이라 합니다. 이 마차는 당사자이신 남작님을 확인하기 위해 들어왔고, 그 이외의 뜻은 없습니다. 잠시 얼굴을 보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아아… 그렇군요.”
천개 너머 인영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아직 목소리엔 경계심이 가득했다.
“…저, 혹시 어째서 저희가 여기 왔는지도 설명을 들으셨습니까?”
로메인은 요수아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는 소리 없이 입으로 말하고 있었다.
‘무조건 다 들었다고 해요!’
로메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원하신다면야.
“기레스 소백작에게 쫓기신다는 이야기면, 괜찮습니다. 그자와 어떤 일로 엮이셨는지는 모르겠으나 필시 그놈이 잘못을 했을 겁니다. 그놈은 그러고도 남을 놈이지요. 저 역시 그와 악연을 맺은 바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남작이 잠잠히 있다 살짝 되물었다.
“악연, 말씀이십니까?”
“남작님이야 어떤지는 모르지만, 저와 그는 하루 이틀 된 악연이 아닙니다. 고로 매수와는 상관없다는 이야깁니다.”
그는 오로지 진실만을 이야기했다. 일부분만 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은 요수아 때문이다. 고로 죄책감은 없었다. 로메인의 말을 듣던 요수아가 얼른 거들었다.
“맞아요 남작님, 듣자마자 후레자식이라고 하셨기까지 한걸요?”
“그…랬어?”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말도 있잖아요. 우리도 들여보내 주신다고 했고요. 게다가 저분은 그 집시 할머니가 보증까지 해 준 분이에요. 안전한 분임이 확실해요. 절 믿어 보세요!”
요수아의 설득에 남작의 경계심이 풀렸다. 그는 안도의 한숨이 분명한 것을 내쉬며 로메인에게 사과했다.
“…그, 고맙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저희가 그동안 좀 많은 일을 겪었기에―.”
로메인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외려 제가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를 제외한 나머지 대장들이 성실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만, 매수까지 손을 대다니. 이건 징계감입니다. 차후 제가 직접 위에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맙소사.”
남작은 이 말에 정말 감격한 듯했다.
“세상에. 정말… 감사합니다!!”
얼마나 감동했는지, 다 큰 성인이 손뼉까지 친다. 그간 겪은 고초가 이만저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겨우 이 정도 일에 이렇게 감격하다니…. 로메인은 경징계 건을 중징계 안건으로 바꿔야겠다 마음먹었다. 한참 아이처럼 좋아하던 남작이 헛기침을 하며 로메인에게 물었다.
“저, 그럼 제가 무얼 해야 합니까? 당사자 확인? 그거만 거치면 됩니까?”
아주 내친김에 뭐든 해치우겠다는 기세였다. 로메인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그것만 끝나면 곧바로 동문을 통과하셔도 됩니다.”
“그럼 어서 하지요. 이쪽으로 와 주시겠습니까?”
그 말과 동시에 남작이 불투명한 천개를 걷었다.
촤악!
호쾌한 소리였다. 로메인은 조심스레 고개를 숙인 뒤, 남작의 앞으로 다가갔다. 일개 남작이라도 한 영지의 영주이다. 그를 숭앙하는 영민마저 있는 자리. 그런 이를 위에서 내려다볼 수는 없다. 그는 남작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럼 실례를.”
짧게 말한 뒤, 고개를 들었다. 로메인의 시선에 남작이 담겼다. 남작은 침상 위 약간 어두운 조명 아래 마치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조도 낮은 어두운 불빛 아래 있는 남작은 짙은 암갈색 머리칼을 가졌는데, 얼굴은 대리석처럼 희었고 이목구비는 선명했다. 아치처럼 휘어 있는 눈썹 아래 있는 눈동자가 마치 봄빛처럼 반짝였다. 남자가 살짝 웃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알렉시아노 드 페르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로메인은 몰래 탄식을 삼켰다.
미인이란 무엇인가.
미인의 의미란 나라, 지역, 시간 등등 여러 가지 요인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아무리 시대와 문화가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미인의 기준이란 것이 있다.
갓 짠 우유 같은 희고 매끄러운 피부, 갓 피어난 장미처럼 붉은 입술, 크고 푸르고 깊은 눈동자. 길고 매끄러운 머리칼, 둥근 옥처럼 흠 없는 얼굴형과 조화로운 이목구비, 희고 가는 목덜미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늘씬한 몸.
고금을 막론하고 변하지 않는 조건이란 대략 이런 것들이다. 그냥 말로만 보아도 한 사람이 다 가지기 힘든 조건 아닌가. 그래서 사람들은 저 중 셋만 가져도 대단한 미인으로 쳤다.
당대 최고 미인으로 불리는 이는 레아누 황녀다. 사르칸트 황제의 누이인 그녀는 저 험난한 조건 중 무려 네 가지나 충족하고 있었는데, 제국에서 현 황제의 이름은 몰라도 레아누 황녀의 이름을 모르면 그야말로 간첩이었다.
어쨌거나 아버지가 고위 귀족이었기에 로메인도 한 두어 번 그녀를 본 일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건 작년 황궁 주최 무도회였다. 황제는 자기 누이를 사람들 눈에 보이길 대단히 좋아했는데 그때도 레아누 황녀가 화려하게 꾸미고 나타났다. 로메인은 그때를 기억하고 있다.
그녀가 나타나자 무슨 하늘에서 빛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황녀가 움직일 때마다 주변이 화사해졌고, 한번 웃을 때마다 기절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눈이 부시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여인은 그밖에 없을 것이라 다들 말했고, 그건 로메인도 동감하는 바였다. 그때 그 기억은 로메인이 가진 기억 중 가장 아름답고 선명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지?
로메인은 생각했다. 아무리 레아누 황녀가 아름답더라도 이 눈앞의 청년에 비한다면 어떨까?
로메인은 잠시 둘을 비교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도 남자라 여성의 편을 들어 주고는 싶다. 하지만 설령 레아누가 아니라 레아누의 할머니가 와도 이 청년에는 대지 못할 것이다. 실로 충격적인 미모였다.
살짝 열린 들창으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와 남자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만지면 분이 묻어날 것 같은 하얀 피부, 곱게 뻗은 콧대, 섬세한 이목구비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고왔다. 미인의 조건인 푸른 눈은 아니었지만 녹빛이 도는 눈동자는 마치 에메랄드 같았고, 점 하나 없는 미간은 청아하고 깨끗했다.
로메인은 미인의 기준에 왜 눈동자 색이나 머리칼 색이 포함되지 않는지 깨달았다. 남자의 머리칼은 어두웠지만, 그래도 예뻤다. 정말 아름다우면 터럭의 색 따위 문제도 아니다. 덧붙여 성별조차도.
‘하늘에서 실수로 내려온 천사 같은 분이에요.’
‘요수아, 너 설명 정말 못하는구나.’
그렇게 말을 많이 했는데, 정말 중요한 본론은 빗겨 나가다니. 보통 그런 논지로 이야기를 전개하면 내면을 이야기하는 줄로 안다. 외면이 아니라….
대체 왜 핵심은 다 빗겨 가며 설명했는지 로메인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기존의 마도구 구매자들도 다 이 미모를 보고 그런 행동을 했으리라. 보물이고 마도구고 일단 남작밖에 눈에 안 보였을 테니까.
어쨌거나 이 수상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인이 눈앞에 있으니 아무리 로메인이라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실로 눈이 부시다 못해 멀 것 같다. 체신 없다 해도 상관없었다. 로메인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 이것은 미인계인가? 그런가? 그런 것인가?’
로메인이 정신 없어 하며 일어나지 못하자 남자가 살짝 웃었다.
“예의 바른 분이시군요. 일어나셔도 됩니다.”
“아, 아닙니다.”
로메인의 귀가 시뻘게졌다. 차가운 겨울인데 마치 봄이 온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청년의 눈이 샐쭉하고 휘어지자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프로하우스 공작령의 기사, 영광의 기사단 기사단장이자 현 공작령 동쪽 외곽 성문을 지키는 로메인 드 데퓨탄은 많은 별명을 가지고 있다. 고지식의 현신, 동문의 사신, 공명정대의 화신, 원리 원칙의 수호자, 기타 등등등.
철두철미한 남자답게, 그는 자기가 가진 별명들 대부분을 알고 있다. 그러나 딱 하나, 그가 모르는 별명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철벽.
물샐틈없이 동문을 수호해서 그런 별명을 가졌을 것 같지만, 그 실상은 다르다. 배경 좋고 외모 잘났으며 검 잘 쓰고 어쨌거나 작위도 받을 예정일 후작가의 차남 씨는 아직도 마음에 둔 여자가 없다. 수많은 여인들이 이 잘난 기사를 넘어뜨리려고 했지만, 철벽이 괜히 철벽인가. 여태 그 누구도 철벽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심지어, 저 레아누 황녀조차도.
그러나….
방금, 그 철벽이 무너졌다. 아주 조금이지만, 원래 이런 종류의 벽은 금 하나만 가도 와르르 무너지는 법. 철벽의 주인은 조용히 숨을 죽이며 머지않은 미래 그 인생의 주인이 될 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때는 겨울, 아직은 봄과는 관련 없는 찬바람이 부는 어느 날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