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난데없이 빚잔치 (2/20)
  • 1. 난데없이 빚잔치

    알렉시아노 드 페르귄 남작, 애칭 렉시.

    이름자에 드가 붙는 사람답게 귀족인 이 사람은 사르칸트 제국 중남부에 위치한 페르귄 영지의 영주다. 현 페르귄 영지에 딸린 작위명은 남작, 고로 알렉시아노 드 페르귄 남작이 그의 정식 명칭이겠지만 그건 좀 기니까 이하 렉시로 줄이기로 하자. 어쨌거나 이후 렉시로 통칭할 이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일단 그의 집안부터 소개해 보기로 하겠다.

    페르귄 가문은 대략 천여 년 전부터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온 가문이다. 황실에서 매년 발행되는 귀족 연감에 늘 올라가는 전통 있는 가문이지만, 의외로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세력도 재력도 그저 그렇기 때문이다. 가끔 가문 연혁 살펴보는 이들의 입에 한두 번쯤 오르내리긴 하지만, 그저 그뿐인 하찮은 집안인 것이다.

    아주 예전 일이긴 해도 한때는 왕으로까지 불렸던 적이 있기야 하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시간 아닌가. 그 긴긴 시간 지내 오며 페르귄 가문은 가지고 있던 거대한 봉토의 대부분을 잃고 현재는 완전히 영락한 상태였다. 현재 유지하고 있는 작위는 남작 작위로, 조상들이 안다면 땅을 치고 울겠지만 이게 현실이니 어쩌겠는가.

    과거가 무엇이든 현재 페르귄 가문은 고작 남작위에 어울리는 작은 영지와 성만 유지하고 있었고, 그나마도 어디서 체면치레만 간신히 할 정도였다. 풍요로운 곡창 지대도, 화려한 성도, 금맥이 잔뜩 있는 금광도 없는―그저 그런 시골구석에 박혀 있는 영지.

    그게 바로 페르귄 가문의 실상이었다.

    하지만 정작 영주인 렉시 남작은 자기가 상속받은 작위와 영지의 상태를 꽤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 전 페르귄 남작의 독자인 렉시가 영지를 상속받은 나이는 불과 17세. 젊다 못해 어린 나이였던 그가 영지를 온전히 지킬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영지가 하잘것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이곳이 남이 탐낼 만한 부유한 영지였다면 렉시는 영주가 되기는커녕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바로 즉사했을 것이다. 혹은 옆 영지의 침략을 받아 몰락했거나. 물론 여기엔 어느 정도 운이 작용했다.

    대륙이 일통되고 황제는 귀족들끼리의 소모전을 금지했다. 영지전 역시 그중 하나였지만, 황제의 눈이 제국 전역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서 지금도 변방의 어딘가에선 자그마한 땅 귀퉁이 가지고 살 떨리는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실정이었다. 추후 일이 알려지게 되더라도 영지전의 승자는 전 영주에게서 합법적인 방법으로 영지를 사들였다는 식으로 말을 꾸몄기에, 밝히기도 쉽지 않았다.

    렉시가 갓 영지를 상속했을 때의 일이다.

    “페르귄 영지가 주인이 바뀌었다는데, 소식 들었나?”

    “그런 영지가 있었어? 처음 듣는데.”

    “역시 모르는군, 하긴 좀 작은 데다… 가난한 지역이긴 하지. 하지만 들어 봐, 이번에 그 지역을 상속받은 영주가 대단히 어리단 말씀이야.”

    “흠, 몇 살인데?”

    “17세. 좀 솔깃하지 않아?”

    아직 어린 소년이 페르귄 영지를 상속받았다는 소식은 금세 주변 영주들 귀에 들어갔다. 그들은 재빨리 속으로 셈을 했다. 작지만, 어쨌거나 땅을 넓힐 수 있는 기회. 원래 영지나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니겠는가. 이들에게 있어 방금 영주가 바뀐 영지 하나 쓱싹하는 것은, 어린아이 손에서 사탕 뺏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영주들 간의 친목 모임이 바야흐로 페르귄 영지 침략 모의로 변하고, 이젠 누가 거길 먼저 치나 이리저리 눈치 게임이 시작되려는 찰나였다. 그중에 속해 있던 루이스란 이름의 백작이 그 게임 중간에 이렇게 툭 내뱉지 않았다면 그 묘한 긴장감은 계속되었을 것이다.

    루이스 백작은 젊은 시절의 전 페르귄 남작과 만난 적이 있었고, 덕분에 페르귄의 상황에 대해 남들보다 잘 아는 축에 속했다. 그는 혀를 찼다. 아는 자의 눈에 저들의 행위는 긁어 부스럼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다 좋은데, 자네들 페르귄 영지가 천 년간 이어져 내려온 것은 알고 있나?”

    툭 떨어진 백작의 말 속 의미를 알아들은 이들은 다투다 말고 다들 입을 벌렸다.

    “…응?”

    “천 년…?”

    “믿기진 않겠지만, 정말이라네. 굉장히 오래된 가문이지. 괜히 귀찮아지기 전에, 그만두게나.”

    백작은 덤덤히 말했으나, 다들 못 믿겠다는 눈치였다.

    “그 말, 정말이야?”

    “맞아, 그런 곳은 대륙 전쟁 때 다 사라진 것 아니었나? 거짓말 아니야? 자기 혼자 땅을 차지하려고!”

    아아, 실낱같은 우정으로 해 준 말을 저리 매도하다니. 내가 그렇게 믿음 없는 남자였단 말인가? 백작은 한탄하는 대신 탁자 가까운 데 있던 귀족 연감을 던지는 것으로 응징했다.

    퍽!

    크헉!

    누군가 두꺼운 장정을 맞고 넘어간 것 같았지만, 백작은 모른 체하고 말했다.

    “정 안 믿기면 그걸 보든가.”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귀족 연감에는 그 귀족 가문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적는 것이 상례이다. 연감의 출판은 황실이 맡아 하고 있으므로, 그게 잘못 기재되어 있을 리는 없다. 그들은 거기서 백작의 말이 정말임을 확인하고 크게 놀랐다.

    “역사가 오래된 가문은 거진 사라졌을 텐데.”

    “이백 년 전 그 난리 통에서 살아남았단 말인가?”

    이들 대부분은 이백 년 전, 사르칸트 제국이 시작되면서 생긴 신흥 귀족들이다. 이백 년 정도면 신흥이란 말을 떼도 상관없겠지만, 천 년이나 지속된 가문 앞에선 자연 고개를 수그릴 수밖에 없다. 연감을 보는 귀족들 가슴 속에서 스멀스멀 부담감이 올라왔다. 친목에서 침략이 되었던 모임이 다시 침묵 모임으로 변모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몇이 중얼거렸다.

    “굉장하잖아?”

    “천 년이나 가문을 지키다니…. 어떻게 이런 가문이 지방에서 이러고 썩고 있는 거지? 이해가 안 되는데, 저력이 대단한 것이 아닌가. 중앙에 진출하지 않고 그 시골구석에서 뭐 하는 거야?”

    “중앙의 귀족 정치에 뜻이 없는 것인가?”

    “알 수가 없군.”

    “그냥 괴짜일 뿐인가.”

    사실 페르귄 가문은 가늘고 길게 살자는 전략을 사용해 여태 생존해 온 것이었지만, 멋모르는 사람들에겐 천 년이란 기간만 눈에 들어올 것이다. 물론 이것만 있지는 않다. 가늘고 길게란 전략만으로 오랫동안 버텨 오기엔, 세상이란 게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과거 남작을 만났던 백작은 페르귄 가문의 다른 면모를 알고 있었지만, 그것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 어찌되었든 상대가 착각을 하는 편이 낫기 때문이었다.

    “젠장, 못 먹을 떡이라 이거군. 좋다 말았잖아?”

    “그래, 설령 가진다 해도 천 년이라니…. 다스릴 수 없는 영지라고 이건.”

    누군가 투덜거렸다.

    본래 땅따먹기보다 어려운 것은 그곳에 사는 영민들을 통치하는 일이다. 황제는 멀고 영주는 가깝기 때문에 영민들은 자기들을 다스리는 영주가 바뀌는 일에 대단히 민감했다. 헌데 일이십 년도 아니고 무려 천 년이나 자기들을 다스리던 가문이 바뀌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손해가 막심하겠지.”

    “거기다 곡창 지대가 있는 지역도 아니니 모아 둔 돈도 없을 거고.”

    “부유한 지역이면 우리가 모를 리 없으니까…. 이거, 괜히 힘만 쓰고 개털 될 뻔했지 않나?”

    지척에 페르귄과 마주한 영지를 가진 영주 하나가 자기는 그만두겠다 말하자 분위기가 더욱 나빠졌다. 백작이 말했다.

    “자, 이제 알겠지? 솔직히 말해서 나라면 내버려 둘걸세. 떨어질 돈도 없는 땅을 소유하면 뭐 하나? 사는 영민들이 반항할 게 뻔한데, 그걸 언제 신경 쓰고 앉아 있단 말인가. 자칫 잘못해서 중앙에 들키기라도 하면 엿 먹는 거네. 뭐, 그 영지에 미녀라도 있으면 뺏을 맛이나 나겠지만….”

    그는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어쨌거나 우리들의 얄팍한 우정을 위해 말해 주는데, 거긴 건드리면 무조건 귀찮아져. 심지어 아직 충성 맹세 한 기사들도 남아 있단 말일세.”

    그래도 영지를 넓힐 욕심이 남아 있던 영주들조차 백작의 마지막 말에는 입을 다물었다. 한 영지의 무장 상태는 그 영지에 얼마나 많은 기사들이 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사르칸트 제국이 결국 대륙을 통일한 저력이 무엇인가. 바로 이 기사들을 계획적으로 양성, 맹세를 받았기 때문 아닌가. 이 기사들의 무력은 하급 기사라도 만만히 볼 게 아니었다.

    그곳에 있는 기사들이 하급인지, 상급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기사를 대적할 수 있는 것은 같은 기사뿐이라는 것이다. 천 년이란 시간 동안 유지해 온 가문이니, 충성 맹세를 한 기사는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사실 기사들의 충성 맹세란 여기저기 남발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 가문은 좀 오래된 가문이다. 대륙 전쟁 이전에 최우선 신서를 받아 놓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하찮은 영지 하나 먹겠다고 고급 인력 기사들을 잃을 수는 없는 노릇.

    “거지 같은 영지에 뭐 볼일 있다고 그런 게 있나 몰라. 하여간 먹어 봤자 탈 나는 데라는 거지?”

    “고맙군 백작, 덕분에 곤경을 면했어.”

    “뭘, 이 정도 가지고 그러나.”

    백작은 피식 웃었다. 귀찮아서 미루고 미루다 참석한 영주 모임인데, 이런 일이 논의될 줄이야. 생각보다 큰 건을 해결했다. 이들과의 개똥 같은 우정보다야 한때 목숨 빚을 졌던 남작과의 약속이 훨씬 중요했다.

    ‘이 정도면 빚은 대충 갚은 것일까?’

    백작은 저 깊숙이 숨겨 놓았던 마음의 짐을 덜어 놓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백작의 꿍꿍이가 무엇인지 몰랐던 영주들은, 백작의 미소가 오로지 호의 때문에 나온 것으로 착각했다. 그들은 쑥덕쑥덕 의논한 끝에 결국 영지전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우리 중남부 연합은 페르귄의 영지전을 포기하도록 한다.”

    땅, 땅, 땅.

    이상이, 페르귄 영지의 영지전을 위해 모였던 주변 영주들의 회합 내용이다. 루이스 백작이 전 남작에게 목숨 빚을 지지 않았고, 또 우연찮게 그 회합에 루이스 백작이 없었다면 이렇게 좋게 끝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물론 여기엔 페르귄 영지가 하잘것없다는 것도 크게 작용했겠지만, 엄청난 행운이었다.

    “참 재수도 오지게 좋단 말이야.”

    나중에 사정을 알게 된 페르귄의 먼 친척 하나가 한 평이었다.

    어쨌거나 이러한 어른들의 사정들이 작용한 끝에, 렉시는 무탈히 영주를 계속할 수 있었다. 루이스 백작에게 이날 있었던 일을 들은 렉시는 쓰게 웃었다.

    “운이 좋았지.”

    그는 중얼거렸다. 아마도 이런 일은 두 번 다시는 없을 것이다. 일생일대의 행운이었다. 렉시는 아직 어렸지만 바보는 아니었기에 이 뒤에 있을 일이 눈에 보였다. 영주 회의에서 그렇게 결정났어도 시간이 지나면 영지에 욕심을 낼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사람의 탐욕이란 본래 그런 것이었다. 렉시는 생각했다.

    “어쩌실 겁니까? 이번은 이렇게 지나갔습니다만, 시간이 지나면 욕심을 품을 자들이 분명 있을 텐데요.”

    “응, 분명 그렇겠지.”

    옆에서 렉시를 보좌하던 집사의 말에 렉시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뭇 영주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페르귄 영지가 가진 무력은 하잘것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였다. 별로 쓰고 싶지 않은 수였지만, 별수 없지 않은가. 렉시는 하,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맹세를 지키라고 해야지 뭐.”

    “맹세, 말씀이십니까?”

    렉시에게 차를 따라 주던 집사의 손이 살짝 떨렸다. 렉시의 말이 무엇인지 곧바로 알아들은 것이다. 그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페르귄의 가장 충성스러운 가신들은 저희와 같이 다 초야에 묻힌 지 오래입니다. 현재 힘이 있는 자들은 저희와 연을 끊은 지 수백 년이 넘는 이들뿐이라는 것이지요. 주인님, 정녕 그런 자들에게 도움을 청하실 생각이십니까?”

    집사의 말에 잠시 눈을 깜박이던 렉시는 곱게 웃었다. 그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후였다. 렉시의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녹음을 담은 눈꼬리가 살짝 휘었다.

    “응.”

    “―골치 아파지실 겁니다.”

    집사는 확언하듯 말했으나, 렉시는 고개를 저었다. 뭐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한가지 아닌가? 거기다 그가 생각하기로, 이 일은 실보다는 득이 더 많았다.

    “골치가 아파질 일이라곤 그 사람들과 해묵은 연을 다시 시작하는 거밖에 더 있나?”

    “세상일은 모르는 거잖습니까. 거기다 귀찮은 거 싫어하시는 거 아니셨습니까.”

    “뭐 그렇기야 한데…. 굳이 그쪽이 이런 한미한 가문이랑 뭔가 도모해 보려고 하지는 않을 거 같아서. 뭐 우리가 없는 일 만들어서 요구하는 것도 아니잖아.”

    맞는 말이긴 하다만, 뒷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너무나도 여실하지 않은가. 그 태평한 기색에 집사만 한숨이었다.

    “그쪽에서 무시나 안 당하면 다행이겠습니다만….”

    “사실 그럴 공산이 크지. 하지만 집사, 잊고 있는 게 있어. 우리 대단하옵신 사르칸트의 대제께선 제국의 귀족들에게 아주 좋은 의무를 남기셨거든.”

    렉시는 서랍을 열어 가문의 문장을 꺼내 들었다. 끝이 뭉툭한 꼬리를 잡자, 문장의 앞쪽이 희미하게 빛났다. 주인의 기척을 알아챈 마력인의 반응이었다. 렉시는 시동어를 읊었다.

    “〈맹세를 한 자여, 반드시 그를 지켜라.〉”

    ―화악.

    인장의 끝이 희게 타올랐다. 기묘한 형상으로 이글거리는 마력의 인印을 즐겁게 보던 렉시는 서랍에서 양피지를 꺼내 펼쳤다.

    “제국 이전에 한 것이라도 맹세는 맹세. 만의 하나가 있으니 절대로 무시 못 할걸.”

    사르칸트 제국의 초대 황제가 기사들에게 받은 이 맹세는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이다. 황제 옆에 있던 인류 최후의 마법사는 제국 전역에 이 맹세의 마법을 건 뒤 숨을 거두었다. 죽은 마법사가 다시 살아 돌아온다면 모를까, 맹세의 유효 시기가 언제부터 언제까지인지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잠시 속으로 셈을 센 뒤, 양피지에 인을 눌렀다. 매캐한 냄새를 내며 가죽이 타들어 간다. 페르귄의 문장이 곱게 찍힌 양피지를 이리저리 살피며, 렉시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일이 어그러지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자고. 어쨌거나 시도해서 나쁠 것 없잖아?”

    만일 여기서 렉시가 보낸 서신이 당사자들에게 무시당했다거나, 혹은 노여움을 사 결과적으로 남작가가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면 이 이야기는 좀 다른 양상을 띠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주 다행스럽게도, 렉시의 도박은 성공했다. 그것도 매우, 아주, 크게, 성공적으로.

    페르귄이 엉덩이 비비고 앉아 있을 천 년간 홀로 잘나가고 있던 옛 가신들이 새삼 페르귄을 기억해 낸 건 물론 아니다. 렉시의 도박이 성공한 이유가 있긴 한데, 그게 사실 좀 재미있다.

    맨 처음 페르귄의 문서를 받은 가문들은 그 요구에 매우 노여워했고, 그게 진짜란 걸 알고 황당해했다. 하지만 페르귄이 장장 천여 년간 가문을 지켰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서는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 가문의 조상이 맹세를 한 집안이 있단다. 헌데 이 가문이 무려 천 년을 버텨 온 곳이라고 한다. 귀족 명부에 따르면, 이 말은 진짜다. 제국 건국 이후 역사에 이 맹세에 대한 기록이 없으니 제국 건국 이전 한 맹세일 것이다. 헌데 맹세라는 것은 최소 기사 이상부터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가문은 그 오랜 옛날부터 귀족이었다는 이야기 아닐까? 한 오백 년 정도.”

    질 나쁜 농담 같지만, 진짜다.

    당사자가 어느 정도 이상의 재력과 권력을 가졌다고 가정했을 때, 그 귀족들의 격을 결정하는 것은 가문의 역사이다. 그들은 고작 남작이 맹세의 요구를 하는 데 기막혀했지만, 그 덕에 자신들의 가문이 생각보다 오래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크게 기뻐했다. 맹세의 요구 대상자가 고작 남작이라는 사실이 조금 거슬렸지만 어차피 그거야 그들이 직접 밝히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일이다.

    “굉장히 오래된 맹세지만, 맹세는 맹세니까.”

    하여 그들은 꽤 기꺼운 마음으로 렉시의 요구를 수행했던 것이다. 거기다 렉시가 부탁한 것은 그들 입장에선 별일도 아니었다.

    ‘귀 영지의 소유 기사단 훈련을 페르귄 영지 접경 지역에 와서 해 줄 것. 훈련이 안 된다면, 행군이라도 좋음.’

    렉시의 청을 받은 그들은 렉시의 부탁대로 페르귄 영지 주위를 무장한 채 왔다 갔다를 해 주었다. 대부분 훈련보다는 행군이었다. 한 기사단의 행군이 끝나면, 다른 기사단이, 다른 기사단이 끝나면 또 다른 기사단이 열을 지어 행군한다. 그저 행군이었지만, 남들이 보기엔 새 영주가 상속 직후 주변 단속을 하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 틀림없었다.

    이 대단한 기사들의 행렬은 주변 영주들의 눈길을 끌 수밖에 없었는데, 거기엔 당시 그 비밀 회합에 참석했던 영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차후에라도 한번 페르귄을 건드려 볼까 했던 영주들은 이 광경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고, 이렇게 렉시의 허장성세 작전은 성공리에 막을 내렸다. 그리하여 모든 도움이 끝났을 때 렉시는 그 누구의 위협도 받지 않고 영지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렉시는 크게 만족했다.

    그리고, 그 이후를 이야기할 것 같으면… 뭐.

    놀랍도록 별일이 없었다.

    못 먹을 떡이란 걸 알게 된 다른 영주들은 자기들 영지에만 신경 썼고, 렉시는 영지에 남아 있는 아버지의 가신들과 더불어 영지만 운영하면 됐다. 가끔 전에 도움을 줬던 가문의 사람들이 와서 기록물 열람을 요청하는 것만 빼면, 전반적으로 조용했다.

    애초 시골에, 이런 일만 아니었으면 조용히 살았을 곳이다. 변방의 전쟁터와도 먼 지역인지라 영지는 제법 평화로이 잘 굴러갔다. 뭐 기껏 있는 큰일이래 봤자 산맥 아래서 나오는 곰이나 늑대 퇴치가 다였으니, 문제가 있다는 게 더 이상할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그러지 않았는가?

    삶이란 언제나 예측 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가진다고.1) 이건 렉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정확히 오 년 뒤, 생각지도 못한 거대한 폭탄으로 생의 의미를 알게 된다.

    그 잊지 못할 생의 의미는 빚.

    그것은 천만 크레아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으로 찾아왔다.

    *****

    “뭘 갚으라고?”

    렉시는 황당한 표정으로 눈앞의 독촉장을 내려다보았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현실감이 사라진다더니. 렉시는 자기가 지금 눈 뜨고 꿈꾸나 싶었다. 가슴이 벌렁벌렁하고 머리가 징징 울리고 세상이 빙빙 도는데 이상하게 위기감이 들질 않는 것이다. 어쩐지 목이 말라 렉시는 찬물을 들이켰다. 찬물을 마시자 찡한 기운에 머리가 맑아진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차용증에 써진 0을 다시 세었다. 그리고 절망했다.

    “진짜 …천만 크레아?”

    렉시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빚? 천만 크레아? 지금 농담해?

    마지막이었다. 렉시는 다시 한번 눈을 비볐다.

    이것은 꿈이다, 이것은 환상이다. 나는 눈 뜨고 악몽 꾸는 거다. 자, 깨라 꿈!

    “이런 미친, 안 깨잖아!”

    하지만 아무리 눈을 비벼도 눈앞의 서류는 사라지지 않는다. 차용증의 0의 개수도 여전했다. 결국 렉시는 헛된 발광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그는 방금 날아온 제국 중앙은행의 독촉장을 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기분 좋게 시작했던 아침 일과가 악몽으로 변해 있었다. 은행에서 편지가 올 일이 없는데 온 것부터 수상하더라니. 아니 대체 이게 무슨 망할 일이란 말인가?

    “아버지가 미쳤었나?!”

    렉시는 소리 없이 아우성쳤다.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무려 천만 크레아나 빌렸는지 알 길이 없었다.

    “미친 게 분명해, 미친 게 분명하다고! 천만이라니! 우리 영지를 팔아도 안 나올 금액이잖아!”

    렉시는 맹렬한 살의를 느꼈다. 지금 이 자리에 베르크 남작이 있었다면 그는 자기 아들의 손에 이승을 떴을 것이다. 천만 크레아란 액수는 사람이 천륜을 저버리게 만들 수도 있는 금액이었다.

    “도대체 어디에 쓴 거야?”

    타당한 의문이었다. 조그만 시골 영지에서 저런 큰돈이 필요한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페르귄 가문이 무슨 큰 사업을 벌이고 있다면 또 모른다. 하지만 이 동네는 그저 1차 산업으로 먹고사는 농업 지역이었다. 영지의 한 해 예산마저 백만 크레아가 조금 넘는 마당에 빚이 천만이나 생기니 눈앞에 뵈는 게 없었다.

    천만? 일이백만도 기가 찰 마당인데, 뭐? 천만?!!

    “집사! 집사!”

    렉시는 정신없이 집사를 불러 젖혔다. 서류에 따르면 아버지가 돈을 빌린 시점은 십 년 전, 그가 영지 경영에 손을 대기 전의 일이다. 해명을 해 줄 아버지는 없지만, 그 아버지를 평생 모신 집사는 남아 있다. 그는 이것이 어찌 된 영문인지 필시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 정정한다. 알아야 했다. 반드시.

    렉시가 고함을 치자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집사가 구르듯 안으로 튀어 들어왔다. 집무실에서 렉시가 영 이상하다는 연락을 미리 받고 기다렸던 그는 렉시의 얼굴을 보고 심상찮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무슨 일이지? 그는 황급히 달려와 고개를 조아렸다.

    “네,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대체 십 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뭣 때문에 이 돈을 빌렸어?”

    다짜고짜 묻는 말에 집사가 황망한 얼굴로 되물었다. 돈?

    “무슨 말씀이십니까. 돈이요?”

    “그래, 십 년 전 말이야! 빚! 중앙은행에서!”

    “제가 빚을 졌다고요?”

    의아한 집사의 반응에 렉시의 가슴에서 천불이 치솟았다. 평소 혼자 똑똑한 척은 다 하더니 왜 지금 천치 짓이란 말인가!??

    말하기도 귀찮았던 그는 설명 대신 눈앞에 채무 독촉장을 들이밀었다. 반사적으로 집사가 글자를 읽었다.

    “귀 가문의 채무금 변제 기일이 도래하였사…오니…?”

    번쩍!

    집사의 멍청한 눈동자에 빛이 스쳤다. 조금씩 커지던 눈이 마지막에 가서는 왕방울만 해진다. 사정없이 흔들리던 시선이 서류의 맨 마지막, 새빨간 잉크로 적혀진 동그라미에 도달했을 무렵 집사의 눈은 썩은 동태눈처럼 떼꾼해졌다. 그는 예의도 뭐도 걷어치우고 렉시에게 매달렸다.

    “그거 이리 주십시오!”

    렉시는 반항할 틈도 없이 눈앞의 노인에게 차용증을 빼앗겼다. 곧 환갑을 앞둔 노인답지 않은 기민함이었다. 그는 렉시에게 빼앗은 서류를 단박에 읽어 내렸다. 늙은 집사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와들와들 떨리기 시작했다.

    “이, 이, 이건!”

    렉시의 어머니였던 전 페르귄 남작부인이 돌아가신 이래, 페르귄 영지와 성의 안살림을 도맡아 온 것은 집사였다. 대대로 페르귄에 충절했던 그는 자기 용돈보다 더 영지를 꼼꼼히 관리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이 모르는 페르귄의 출납부는 없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외쳤다.

    “위조입니다!”

    “자네 당장 안경 안 쓸래?!”

    렉시는 버럭 성질을 냈다.

    “내가 그걸 확인 안 하고 자네에게 그걸 줬겠어?!”

    렉시는 낮게 으르렁거리며 집사의 눈에 안경을 씌웠다. 엉겁결에 눈에 걸린 안경을 고쳐 쓰던 집사는 시야 너머에 푸르게 빛나는 문장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나라의 정식 인증 마크, 마법 인장이었다.

    드래곤 힐라그라스가 잠이 든 이래 대륙에서 마법을 사용하는 이들은 사라졌다. 하지만 그들이 만들어 낸 마법 물품들은 여전히 움직이는 것을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위조가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으니 저것은 필시 진품이다. 집사는 치밀어오르는 혈압 때문에 거의 쓰러질 뻔했다.

    “억…!”

    “쓰러지지 마. 쓰러지더라도 돈은 알려 주고 쓰러져!”

    렉시는 퍼렇게 변한 집사를 뒤에서 받쳤다. 그리고 호랑이 같은 눈으로 엄히 말했다.

    “말해 봐. 집사, 대체 이게 뭔가? 십 년 전이면 자네가 아버지를 보좌했을 때잖아.”

    “저, 저도 모릅니다.”

    “몰라?”

    렉시의 눈꼬리가 위로 휙 치켜 올라갔다.

    “자네가 모르는 일이 있다는 걸 내게 믿으란 말이야?”

    “도련님. 아, 아니 주인님! 정말로 모르는 일입니다. 천만이라니요, 이런 무시무시한 액수는 꿈에서도 본 적이 없습니다!”

    렉시는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아니, 본인이 모르면 누가 안단 말인가. 그럼 내가 아냐?

    “자네가 아버지를 모신 햇수를 내가 몰라? 무려 삼십 년이 넘어가, 삼십 년이. 선친께선 기타 자질구레한 영지의 일들을 자네에게 맡긴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고. 아버지가 자네를 얼마나 신임했는지 늘 자랑했잖아. 그런 자네가 이 일을 모른다니 말이나 된다고 봐?”

    늘 자기가 자랑스레 하던 이야길 고대로 돌려받은 집사는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아, 이래서 사람은 늘 겸손해야 한다고 옛 성인이 말했던 것인가?

    “죄송합니다, 제가 …저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한 모양입니다.”

    저는, 저는 무고합니다. 정말입니다! 시종장의 몸부림은 절절했다. 하지만 렉시로선 영 믿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차용증이 사기일 리도 없고, 돈은 빌렸다는데 자네도 모른대고. 그럼 뭐야, 이건 아버지가 의논 없이 혼자서 한 일이란 말이네?”

    베르크 전 남작은 영주가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행정 사무를 상당히 싫어하는 남자였다. 그는 가끔 영지 예산 결제도 집사에게 넘기고 싶어 했다. 그걸 알던 렉시로서는 집사의 말을 순순히 믿기 어려웠다. 그러나 집사는 결사적으로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믿기 힘드시겠지요. 허나 보십시오 영주님, 그 서류엔 전 영주님의 인장이 찍혀 있지 않습니까. 영주님의 인장을 제가 어떻게 쓰겠습니까!”

    이 말을 끝으로 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던 집사는 곡을 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이런 중요한 일을 제멋대로 처리하고 알려 주지도 않은 선친에 대한 원망이었다. 렉시는 입을 닫고 의심스런 눈으로 집사를 바라봤다. 가슴에 서린 의심의 암운은 여전히 그를 장악한 상태였다.

    ‘정말로 모르는 건가?’

    그도 집사의 충심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머니 잃은 어린아이였던 자신을 정성스레 키워 준 집사의 공을 생각한다면 의심하는 것도 미안한 일. 그러나 렉시는 영주였다. 정 때문에 영지를 말아먹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하지만 렉시는 결국 의심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상황은 의심스러워도 증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의 말대로 영지의 직인은 영주만이 쓸 수 있는 것. 렉시는 한숨을 내쉬며 집사를 일으켜 세웠다.

    “…좋아. 믿어 볼게. 자네 말대로 직인은 아버지만 쓸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자네도 몰랐던 일이다, 이 말이지 지금?”

    “알았을 리 있겠습니까? 만일 제가 이 일을 알았다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막았습니다. 대관절 이게 무슨 날벼락입니까? 저희 영지 한 해 예산을 훌쩍 넘는 이 돈을 겁도 없이 빌리시다니! 대체 어떻게 갚으라는 말입니까?”

    그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닥을 쿵쿵 굴렀다. 그러다 퍼뜩 떠오른 듯 렉시에게 물었다.

    “그렇지. 그렇다면 이자, 이자는 대체 얼마인 겁니까?”

    집사가 헐레벌떡 묻는 말에 렉시는 아, 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그걸 확인 안 했던 것이다. 돈을 빌린 적이 없던 탓에 생각지도 못했다.

    “채무 독촉장에 너무 놀라서 그건 미처 보지 못했어. 그러고 보니 그간 이자는 어떻게 된 걸까? 난 오 년간 이자를 한 번도 낸 적이 없는데.”

    설마 제국은행에 맡겨 놓은 재산에서 자동으로 빠져나간 걸까?

    렉시의 의심에 영지의 꼼꼼한 재산 관리인이 즉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럴 리는 없습니다. 이자조로 정체불명의 돈이 매달 사라졌다면, 제가 진즉 이 일을 알았을 테니까요.”

    “그럼 이자가 연체되었단 말인가? 하지만 예전에도 이자 연체에 대한 서류는 받은 일이 없는데.”

    만일 그런 걸 받았다면 영지는 이미 뒤집어져도 진작 뒤집어졌을 것이다. 집사는 곰곰이 생각하다 렉시에게 물었다.

    “주인님, 은행에서 온 서류는 이것뿐입니까?”

    “응?”

    “보통 이런 독촉장엔 첨부되는 서류들이 더 있습니다. 혹시 같이 온 문서가 없었습니까?”

    행정 업무의 베테랑다웠다. 집사의 말에 렉시는 독촉장을 꺼냈던 봉투가 유달리 두터웠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 황급히 쓰레기통을 뒤졌다. 애초 비운 적이 없었기에 봉투는 금방 나왔다. 렉시는 집사에게 봉투를 건넸다.

    “여기 있어. 독촉장 때문에 나도 정신이 없었군, 이걸 못 보다니….”

    봉투를 뒤집어 탈탈 털자 안에서 쏙 하고 두툼한 첨부 문서가 튀어나왔다. 렉시는 자기가 어떻게 저걸 보지 못했을까 좀 한심스러웠다. 하지만 원래 사람이 넋이 나가면 안경 끼고 안경 찾으러 다니는 법 아닌가. 집사는 아무 말 없이 은행에서 별첨한 문서들을 훑었다.

    “이자, 이자, 이자….”

    미친 듯이 서류를 넘기던 집사의 손이 멈추었다. 렉시는 숨을 죽였다. 이자 조항을 찾은 모양이었다.

    “찾았어?”

    “…….”

    “뭐래?”

    집사의 묵묵부답이 심상찮았다. 렉시는 불안해졌다. 사채도 아니고, 은행이니 이자가 세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이 무시무시한 원금에 얼빠지는 이자가 붙은 것인가?

    “이자가… 생각보다 많아?”

    “주인님.”

    “응.”

    렉시가 얼른 대답했다. 집사가 말했다.

    “일단 이 문서에 따르면… 연체된 이자는 없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대여금에 따른 이자 규정이 없습니다.”

    “…뭐?”

    집사의 말을 들은 렉시는 깜짝 놀랐다. 이자가 없다고?

    “그럼 이자를 안 낸다는 소리야?”

    “네. 그래서 여태 이자를 갚으라는 이야기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

    세상에, 이 무슨 다행스러운 일이 있나!

    렉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암울한 가운데 서광이 비치는 기분이었다. 본시 대출이 무서운 건 원금도 원금이지만, 그에 따라 불어나는 이자 때문이 크다. 지금 천만이란 액수가 진정 어마어마하긴 하다만, 이자가 없다면 이야기는 달랐다. 이자만 아니면, 원금 갚는 건 가능한 수준이었다. 물론, 그것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래도!

    “잘됐어. 일단 원금부터 갚을 계획을 세우게.”

    말하면서 머리에서 착착 계획을 세웠다. 그간 모아 놓은 돈으로 일단 일부를, 앞으로는 영지 수입 여유분 전부를 할애해 원금을 갚아 나가자. 그러기 위해선 정확한 영지의 수출입 장부가 필요했다. 즉시 집사와 의논하고자 입을 열었던 렉시는 순간 멈칫했다.

    “…자네, 왜 그런 얼굴이야?”

    시체도 저것보다는 낯빛이 나을 것이다. 좋은 말을 듣고도 왜 저런 얼굴일까. 앞으로 나갈 돈이 너무 많아서 그런가?

    “…주인님.”

    “응?”

    말똥하게 눈 뜬 렉시를 보며 집사는 잠시 머뭇거렸다. 이자가 없다는 소식에 마냥 기뻐하는 렉시를 보자니 도무지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아아 우리 불쌍한 주인님…. 그는 저렇게 좋아하는 렉시가 너무나도 안쓰러웠다.

    ‘아직 어리신 이분이 이 일을 어찌 해결해 나가셔야 한단 말인가?’

    렉시가 남작 위를 계승한 지 오 년, 그는 나름대로 열심히 일을 배워 가고 있었지만 아직 사회생활에 있어 서투른 점이 많았다.

    자고로 세상엔 공짜가 없다. 장미에 가시가 있는 것처럼, 편해 보이는 길목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법이다.

    한참 입술을 짓씹던 집사가 입을 열었다.

    “대출엔 크게 신용 대출과, 담보 대출이란 게 있습니다. 적은 금액은 신용 대출로도 가능하지만, 보통 이렇게 큰 금액은 신용보다는 담보를 잡혀서 빌리곤 하는 걸 알고 계실 겁니다.”

    “응, 알고 있어.”

    뜬금없이 시작한 담보 이야기에 렉시가 알 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담보는 자네가 말 안 해도 알겠어. 천만 크레아의 담보가 될 만한 건, 역시 우리 영지 정도일 거니까. 그러니 그렇게 심각한 얼굴 할 필요 없어, 집사. 나도 그건 각오하고 있었으니까.”

    차라리 그거면 좋겠습니다…. 집사는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선친께서 담보로 잡힌 것은 영지가 아니었습니다.”

    “응?”

    영지가 아니었다고? 아니 그럼 뭘 담보로 돈을 빌렸단 말인가?

    “그럼 뭘 가지고 담보를 잡혔단 말이야? 설마 신용 대출?”

    “신용이야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허나 그분 신용이었으면 천만이 아니라 삼십 크레아도 못 빌립니다.”

    집사는 정색했다. 옛 주인이지만, 평에는 가차 없었다. 물론 그 건에 있어선 렉시도 동감이었다.

    “페르귄 남작가는 영지도, 신용도 별로지만…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게 하나 있지 않습니까. 선친께선 그걸 담보로 돈을 빌리셨습니다.”

    “그게 뭔데?”

    우리 집에 그런 게 있었단 말인가. 영 감을 못 잡는 그를 보며 집사는 입술을 축였다. 그리고 하나 있지요, 하고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말을 꺼냈다.

    “―작위입니다.”

    한참 뒤, 렉시는 꽥 하고 소리쳤다.

    “…뭐라고?!”

    거의 반 넋이 나간 렉시가 집사의 도움으로 채무 독촉장을 훑어 알아낸 것은 총 세 가지.

    첫째, 베르그 남작은 십 년 전 페르귄 남작위를 담보로 중앙 은행에 천만 크레아를 빌렸다.

    둘째, 이자는 없다. (여기서 렉시는 중앙은행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돈을 빌려줬는지 알 수가 없어졌다)

    셋째, 변제 기일이 도달한 뒤 만 삼 년 내 빚을 갚지 않으면 페르귄의 남작 위는 몰수된다.

    “작위를 노리고 이자를 받지 않았다?”

    “제 짐작이긴 합니다. 하지만 정황을 보면,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집사의 말에 렉시는 귀를 기울였다. 보통 대출이란 이자를 얻기 위해 해 주는 행위이다. 그런데 이 차용증을 보면 근 십 년간 중앙은행은 이자를 받지 않았던 것으로 보였다. 아예 이자 관련 부분이 빠진 조항을 보던 렉시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무리 나라에서 운영하는 제국은행이라도 해도 기본적으로는 이득을 추구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자가 없다니, 이렇게 수상한 것을 자기만 마냥 좋아한 것이다.

    “그러니 이자 수익보다, 작위를 노린 게 아니겠습니까. 저 북쪽의 야만인들과 전쟁이 끝난 뒤로 새로이 작위를 받은 귀족들은 없다시피 하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듣자 하니, 작위 있는 귀족을 폐하께오선 더 이상 늘리지 않을 것이라 확언하셨다더군요.”

    집사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러니, 지방의 귀족 작위를 이렇게 헐값으로 사들여서 가장 높은 값을 치르는 중앙 귀족들에게 넘기는 거지요. 참으로 간악한 자들입니다.”

    천만이란 돈이 헐값은 아니지만 천 년이나 이어진 작위에 비한다면야 똥값이나 다름없다. 집사는 분에 못 이긴 듯 부르르 떨었다.

    “중앙 귀족들이 하는 일들이 다 그렇지. 거기에 넘어간 아버지도 잘못은 있지만….”

    렉시는 쓴 얼굴을 했다. 세상일이 다 그렇다. 모르면 당하고, 어수룩하면 입고 있던 속곳까지 싹싹 털리는 법. 그는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그나마 유예 기간이 있어서 다행이긴 하네. 다행이긴 한데….”

    하지만 삼 년 뒤 그가 천만 크레아를 갚을 수 있을까? 렉시는 입을 다물었다. 현재 영지 상황에선 삼 년이나 삼 개월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우리가 삼 년 동안 천만을 갚을 수 있을까?”

    “―노력해 봐야지 않겠습니까. 이것저것 팔고 삼 년간 허리띠를 바짝 조이는 겁니다. 값나가는 걸 찾아서 팔아 보도록 하지요. 천 년간 유지해 온 가문 아닙니까?”

    집사는 애써 쾌활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게 말 그대로 가정임을 렉시는 잘 알고 있었다. 거기다.

    천운으로 앞으로 삼 년간 농사가 대풍이라고 해도, 성을 뒤지다 오래된 보물이 나와 내다 판다고 해도 집사의 가정이 사실이라면 꽤 문제가 있다.

    “―사 줄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 거야. 자네 말대로라면.”

    제국은행이 작위를 노리는 거면, 아무리 귀한 보물이든 뭐든 매입자가 나타나지 않을 공산이 컸다. 렉시는 하, 하고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주인님, 어쨌거나 돈을 갚지 않으면 영주님은 작위를 환수당하시게 됩니다. 무슨 짓이든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되고 안 되고가 어디 있습니까?”

    집사가 펄펄 뛰었다. 렉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포기한다는 소리는 아니야. 그냥 일단 알아 두라 이거지…. 그건 가져왔어?”

    렉시의 물음에 집사는 장부를 들고 왔다. 베르그 남작이 살아 있을 시절 만들어 놓은 상세 장부였다. 먼지가 폴폴 날리는 장부를 뒤적이던 렉시가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십 년 전 무슨 큰 사고라도 있었나? 성의 개보수 공사나, 영지의 재해 복구나.”

    당시 렉시는 어렸기에 영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다. 십 년 전이면 렉시가 무려 열두 살일 시절이다. 아무리 남작의 독자라고 해도 그 나이 땐 장부 정리는커녕 수업이나 듣는다. 렉시에게 어린 시절의 기억은 그저 그냥 말 타고 놀거나 웅덩이에서 개구리 잡거나 수업 시간 몰래 나가 놀다가 가정교사에게 호통 들은 것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미리 아버지 일을 한번 견학해 보는 건데….’

    그랬다면 뭔가 실마리를 알았을까. 렉시의 요청으로 예전 일을 떠올리며 애써 기억을 되살리던 집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대규모 공사는 한 적이 없습니다. 재해도… 물론 없지요. 저희 영지의 가장 큰 장점이 그거 아닙니까. 자연재해가 거의 없다는 것 말입지요.”

    “그렇지…? 역시 도대체 알 수가 없단 말이야. 필요해서 빌린 돈일 텐데 어디 쓴 구석이 없으니.”

    렉시가 답답증에 가슴을 치자 집사가 그러지 말라며 렉시의 손을 말렸다. 집사가 한탄하듯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전 영주님께서는 그렇게 치밀하신 성품이 아니었기 때문에… 설마 이런 일을 벌이실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다 제 불찰입니다.”

    “이게 어디 다 자네 탓이겠어. 다 아버지 잘못이지.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야. 원래 하는 거 보면 내일 없이 사는 양반이었다고. 그간 돈으로 사고 친 일이 없어서 당한 거뿐이지….”

    하, 렉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어디 있을까. 뭐에 그 돈을 썼나. 그저 모든 일이 미궁 속이었다.

    “성의 수색은 잘 되어 가나?”

    “네, 일꾼들이 샅샅이 뒤지는 중입니다.”

    “뭐라도 좀 찾으면 좋을 텐데.”

    그나마 남은 희망이라곤 남작이 몰래 숨겨 놨을지 모르는 이 천만 크레아를 찾는 길뿐이다. 헌데 이것도 영 신통찮다. 렉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난데없이 찾아든 이 날벼락 때문에 지금 성안의 분위기는 흉흉했다. 성의 하인들은 선대 남작의 예전 집무실을 뒤져 비밀 공간을 찾으려 하고 있었지만, 기껏 찾은 장소에선 금괴는 고사하고 쓰레기만 잔뜩 나왔다. 혹시나 싶어 렉시는 몰래 영주만 쓰는 비밀 통로를 뒤졌다. 그러나 거기에도 돈은 없었다.

    “돈은 빌렸는데, 쓴 곳이 없고. 그렇다고 성안에 그 돈을 모아 둔 곳도 없고…. 정말 미치겠네.”

    렉시는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도무지 답이 안 섰다.

    “이젠 어떻게 하지?”

    “일단 돈이 있을 만한 곳을 계속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선친께서 중히 여기시던 몇몇 장소를 수색 중이니, 어디선가 단서가 나오겠지요.”

    집사는 작게 덧붙였다.

    “물론 안 나올 수도 있겠지.”

    “…나올 겁니다!”

    집사는 소리를 높이며 현실을 부정했다. 하지만 렉시는 그 돈이 아예 안 나올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이 정도 찾았으면 성안에는 없는 거다. 이건 렉시도 알고, 집사도 알고, 성의 하인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다만 만의 하나가 있을 수도 있어서, 이렇게 헛된 몸부림을 치는 것일 뿐.

    ‘정말 죽은 뒤에도 사고 치는 스케일은 여전하네요, 아버지.’

    이미 죽고 없는 아버지이니 욕설을 해도 상관없을 테지만, 화도 낼 것 다 내고 나니 이젠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하기야 전 남작이 친 사고가 어디 이것뿐이랴. 사실 더 심한 것도 많았다.

    젊은 시절엔 남작가의 독자 주제에 전쟁터에 나갔다가 결혼도 안 하고 애부터 낳아 온 화상이다. 조부였던 남작이 혈압으로 넘어가지 않은 것이 그저 기적이었다. 심지어 그는 엄마 품에서 떨어져 앵앵 우는 렉시를 조부에게 안겨 버리곤, 영지를 몇 달이나 비우기까지 했던 것이다.

    물론 렉시의 어머니를 데려오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있긴 했다. 허나 그동안 조부는 팔자에도 없는 양육을 하다 뼛골이 빠질 뻔했다. 내력 모르는 여자를 냉큼 며느리로 받아들인 이유 중 하나는 분명 육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을 거라고, 렉시는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가문도 모르는 여인을 며느리로 인정했겠지.’

    렉시는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성의 누구도 그에게 어머니에 대한 말을 해 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버지조차도 어머니에 대해선 별다른 말을 해 준 적이 없다.

    렉시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초상화 한 점이 다였다. 성 한쪽 방에 걸려 있는, 한 장의 가족 초상화. 그 초상화 안쪽에는 아기인 자신이 어머니의 품에 소중히 안겨 있었지만, 어릴 적 일이라 그 이상의 기억은 없다.

    하지만 아무리 모르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은 있었다. 그의 부모 두 사람은 서로를 무척 사랑했을 것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죽었어도 재혼하지 않고 홀로 살았다.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귀족은 귀족이다. 재혼은 고사하고 정부 하나 없이 사는 건 성인군자도 힘들다는 걸 렉시는 잘 알고 있었다.

    ‘외가는 뭐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 논외로 하고…. 친가 친척들에게 돈을 빌릴 수 있을까?’

    렉시는 잠시 생각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몇 안 되는 친척들의 사정도 그보다 나을 게 없다. 천만은커녕 백만도 빌리지 못할 것이 뻔했다. 괜히 들쑤셨다가 소문이나 더 날 바에야, 말도 꺼내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천만 크레아, 그리고 작위라….’

    이 일을 어찌 수습해야 할까나. 렉시는 곰곰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

    만 석 달간 이어진 보물찾기 대장정은 실패했다.

    가장 유의미한 성과로는 페르귄 성의 수백 년 묵은 때를 벗긴 일로, 안타깝지만 그게 유일한 성과였다. 온 성을 뒤져도 천만이란 거금의 행방은 나오지 않았다. 그 많은 돈이 대체 어디 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렉시는 깨끗하게 포기했다. 이 정도 찾았으면 충분했다.

    하지만 렉시를 제외한 성의 다른 식구들은 다들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몇몇은 이제 영주 성의 정원을 파 볼 순이라며 곡괭이와 삽을 들고 땅을 파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렉시야 괜히 힘 빼지 말라고 만류했지만, 다들 듣질 않으니 뭐 어쩌겠는가.

    ‘정말로 뭐가 나오면 좋은 일이지.’

    혹 아나. 천 년이나 내버려 둔 땅덩이에서 뭐라도 나올지. 그렇게 성안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는 렉시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영주님!”

    렉시는 고개를 들고 답하려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퉁퉁 부은 얼굴을 한 어린 소년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호위 기사인 필립의 종자, 요수아였다. 렉시는 화들짝 놀라 요수아를 살폈다. 아니 얘 얼굴이 왜 이러지?

    “이거 받으세요!”

    불쑥 내밀어진 주머니를 얼결에 받았다. 뭔가 제법 묵직한 것이 안에서 찰그랑거린다. 주니까 받긴 하는데 어쩐지 모를 불길한 기분에 렉시는 물었다.

    “고, 고맙구나, 요수아. 그런데 이게 뭐지?”

    그리고 너 얼굴은 왜 그러니? 가장 묻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으나 요수아가 잽싸게 외쳤다.

    “제… 봉급이에요!”

    “봉, 봉급?”

    렉시는 식겁했다.

    “네! 필립 님이 주신 걸 모았어요. 부디 받아 주세요 영주님!”

    그는 불에 덴 것처럼 주머니를 도로 휙 던졌다.

    “이걸 나에게 왜 줘!”

    “받으세요! 빚 갚으셔야죠! 보태 주세요!”

    “…뭐?”

    너 지금 뭐라고 그랬니? 렉시가 황당한 얼굴을 하자 요수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다 들었어요! 전 영주님이 빚을 엄청 엄청 지고 계셨는데 그게 이번에 발견되었다면서요?”

    요수아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나왔다. 아, 저 통통한 볼따구의 원인을 제공한 게 자신이었단 말인가! 렉시가 한탄하는데 요수아가 펑펑 울기 시작했다.

    “흐어어어어엉!”

    “요, 요수아! 뚝, 뚝!”

    렉시는 필사적으로 요수아를 달랬다. 이러다 필립이 보기라도 하면 자기만 큰일이었다.

    페르귄 영지의 치안대장인 필립 러셀은 페르귄 영지에서도 성격 더럽기로 악명이 높았다. 렉시가 그를 기사로 두고 있는 건 그 성격과 실력이 비례 관계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성격이 더러우면 검이라도 못 쓸 것이지, 참으로 안타깝게도 신은 필립에게 검의 재능까지 하사했다. 통탄할 노릇이었다.

    그 개 같은 성미 탓에 페르귄 영지의 범죄 조직이 기를 못 펴는 건 퍽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영주인 렉시조차 가끔은 필립의 눈치를 본다. 물론 필립이 렉시에게 성깔을 부린 적은 아직 없지만, 본래 모난 사람이 옆에 있으면 알아서 조심하는 법이다.

    헌데 그런 필립이 유일하게 알아서 성질을 죽이는 이가 바로 이 요수아인 것이다.

    둘은 애인 사이였다.

    ‘울지 마라, 울지 좀 마! 필립은 나도 무섭다고!’

    렉시는 땀을 뻘뻘 흘렸다.

    부모 잃고 고아가 된 요수아를 뜬금없이 종자로 거둔다 할 때부터 묘하더라니. 사실 이 생각은 그만 한 게 아니다. 영지 모두가 이상하다고 입을 모았다. 저게 왜 답지 않은 착한 짓인가, 설마 개과천선한 건가 갑론을박하던 사람들은 둘이 사귄다고 하자 비로소 납득했다.

    개과천선은 무슨, 개가 똥을 끊지. 필립과 요수아의 나이 차이는 스물로, 까놓고 말해 범죄였다.

    ‘변태!’

    그리하여 성격 더러운 필립 경에겐 변태라는 항목이 추가됐지만 워낙 소문이 안 좋아서 별 영향은 없었다는 후문이다. 거기다 둘 다 좋다고 하는 연애니 말릴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어쨌거나 요수아 혼자 비밀 연애라고 생각하는 이 범죄 행각은 곧 거하게 쫑날 예정이었다. 렉시가 미리 결재한 서류에 따르면 적어도 내년 초, 요수아는 요수아 러셀이 되기 때문이다. 페르귄 영지 최초 동성 혼인 되시겠다.

    하여 필립은 미리부터 이 귀여운 마누라에게 종자 월급이랍시고 본인 월급을 고스란히 주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모아 자기에게 주다니….

    누굴 죽이려고?

    “그거 못, 못 갚으면 영주님, 크흡, 큰, 큰일 나신다면서요. 엉엉엉….”

    요수아가 새빨간 눈으로 징징 울었다. 렉시는 이마를 짚었다. 차마 화도 낼 수 없는 것은, 이게 순전히 선의에서 나온 행동이기 때문이다. 눈치가 백치인 이 귀여운 소년에게 월급을 준 필립이 실로 대단해 보였다.

    ‘말을 말자.’

    그보다 대체 누가 애한테 겁을 준 거야? 아무리 소문이 짜해도 애에게 할 말 못 할 말이 따로 있지.

    “그, 누가 그런 말을 하든?”

    “모두요!”

    “…모두?”

    “성안의 형들이 다들 그랬어요. 아주머니들도요! 흐엉, 영주님이 망하면 우리는 어떻게 해요! 페르귄 영지에 다른 영주가 오면 우리는 다 망한다구요. 영주님만큼 세금 적게 걷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흐어엉!”

    “아….”

    렉시의 미소가 떨떠름해졌다.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말문이 막혔다.

    ‘…아무리 그래도 이유가 참 너무 정직한 거 아니니 요수아.’

    요수아는 히끅히끅거리며 말을 이었다.

    “성안 사람들이 다 그래요, 영주님 빚이 너무 커서 그냥 아주 포기했다구요. 영주님, 우리 영지의 영주님은 영주님이어야 해요. 그러니까 이거 받고 꼭 빚 갚으세요. 포기하시면 안 돼요!”

    요수아는 자리에 덥석 앉아 생떼를 썼다. 렉시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방금 들었던 세금 어쩌고보다 이 말이 더 놀라웠던 것이다.

    “포기?”

    “네, 크헝, 다들 얼마나 속상해하는지 몰라요! 맨날 장서각에만 계신다고 난리도 아닌걸요!”

    아, 이런. 렉시는 반성했다.

    요 어린 것이 저렇게 난리 칠 정도니 소문이 어떻게 돌았을지 안 봐도 알 것도 같다. 자기가 그동안 장서각에 박혀 있던 일이 두 손 다 놓고 노는 걸로 보였던 모양이다.

    ‘물론 천만 크레아란 돈에 기가 질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렇지, 포기라니. 가벼운 한탄을 하며, 렉시는 요수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 마라 요수아. 포기한 게 아니야.”

    크흡, 요수아가 킁킁대며 코 먹은 소리를 냈다.

    “징짜영?”

    “응, 아버지가 착실하게 말아먹었어도 내 대에서 가문을 아작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니.”

    이건 그야말로 자존심 문제라고. 렉시는 중얼거렸다. 사정이야 어떻든 이렇게 작위가 날아가면 책임자는 결국 자신이다. 물론 연좌제가 만연한 현실이라지만 그 돈 내가 써 보기라도 했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어쨌거나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은 돈을 갚을 것이다. 헌데 타인에게 그런 오해가 만연해 있었다니 조금 자존심이 상하는 렉시였다.

    ‘너무 그 안에 박혀 있었나?’

    그간 장서각에서 두문불출한 것이 현실 도피로 보였다면 할 말이 없긴 하다. 하지만 그가 그곳에서 살다시피 한 건 나름 이유가 있었다.

    “내가 거기 있었던 건 뭔갈 찾기 위해서였어.”

    “호…혹시 거기에 돈이 있었나요?”

    “음, 아니. 돈은 없었지만.”

    렉시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거나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도를 찾았어.”

    렉시는 몇 시간 전을 떠올렸다.

    페르귄 가문의 역사를 기록한 기록물들은 모두 란이라는 언어로 쓰였다. 이백 년 전부터는 사르칸트 대륙 공용어도 사용되고 있지만 그 이전의 것들은 모두 그렇다. 이젠 사용하는 사람도, 기억하는 사람도 없는 언어이지만 그게 계속 사용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페르귄의 기록물 일체를 취급하는 사서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자주 보네요, 어린 페르귄.〉

    “안녕, 사라.”

    저 천만 크레아 건이 있고 난 뒤 제일 먼저 뒤진 곳이 이곳이다. 페르귄의 장서관은 개방된 공간이지만 동시에 가장 폐쇄적인 곳이기도 하다. 오로지 페르귄의 피를 이은 자만이 이곳의 진실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수만 개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마치 보석처럼 빛나는 공간이 현실의 공간과 겹치며 남기는 잔영에 렉시는 미소를 짓는다.

    남들에게는 거대한 서고처럼 보이겠지만, 이곳은 사실 사서의 몸속이었다. 렉시의 조상 하나가 마법사와 거래하여 만든 이 서고는 스스로 사고하고, 객관적인 왕들의 기록을 남기는 유일무이한 사관이다. 렉시는 너울처럼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시야가 차단됐다.

    〈어제 보시다 만 책, 다시 보시겠어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렉시의 눈앞에 둥그런 거울이 대령됐다. 그 안에 보이는 책의 강을 보며 렉시는 거절했다.

    “아니, 그건 됐어. 오늘은 다른 걸 볼 거야.”

    〈으흥?〉

    거울이 닫히고, 작은 빛무리가 재잘대며 렉시의 귓전을 지나갔다. 사라가 말했다.

    〈조상의 일대기를 보는 것은 흥미로운 작업이죠. 인간들은 과거를 보면서 미래를 안다고 하니까요.〉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것은 역시 안 보여 줄 거지?”

    〈어린 페르귄, 아시잖아요. 그건 금지되어 있어요.〉

    나라를 잃은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사라는 여전히 사관의 원칙을 지키고 있다. 그의 조상들이 겪은 기록물의 열람은, 해당자의 증조부까지만 가능하다. 당사자의 조부와 부친의 기록물은 그의 자식 대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만 볼 수 있었어도 내가 이 고생을 안 하는데.”

    렉시가 투덜거리자 까르르 웃는 소리가 서고를 울렸다.

    “그거, 좀 규칙 좀 바꾸면 안 돼? 내가 왕이라면 이해라도 하겠어. 하지만 지금 나는 남작이고, 세상은 제국이 된 지 오래라고. 너무 촌스러워, 당신.”

    〈세상이 변한 건 나도 알아요, 어린 페르귄. 하지만 이건 제 존재 의의인걸요. 너무 화내지 말아요.〉

    렉시는 입을 삐죽거렸다.

    “그 어린 페르귄 소리도 맘에 안 들어. 내가 작위를 계승한 지도 벌써 오 년이 넘었다고.”

    〈하지만 당신은 아직 어린걸요?〉

    제 기준에 따르면 당신은 아직 어린아이예요. 사라의 말에 렉시는 심사가 비틀렸다. 심히 억울한 말이었다.

    “당신에 비한다면 세상 누구라도 어릴걸….”

    〈―그건 그렇지만요.〉

    참으로 쓸모없는 대화이다. 렉시는 결국 오늘도 부친의 기록을 보는 데 실패했다. 저게 사람이면 측은지심에서라도 보여 줬을 텐데. 아무래도 마법으로 이루어진 지성이라 그런지 아주 칼 같은 냉정함을 보인다.

    ‘어차피 별 기대도 안 했지만.’

    렉시는 바닥인지, 허공인지 모를 곳에 몸을 기대 손을 내밀었다. 사라를 구슬리는 데 실패했으니, 이제는 그다음 일을 해야지 뭐.

    “27대 선조가 마법사 오스틴 루터와 나누었던 대담집을 줘.”

    〈총 서른한 권이죠. 어느 것을 원하세요?〉

    “그가 죽기 한 달 전의 것.”

    곧 렉시의 눈앞에 길쭉한 손거울이 생겼다. 아까와는 다른 모양의 거울이 허공에서 윙윙 떨린다. 렉시가 손을 대자 손거울 위에 글자가 나타났다. 거울을 툭툭, 두드리자 순식간에 그가 원하는 페이지가 나타났다. 렉시는 중얼거렸다.

    “사실 늘 궁금했었어. 천 년이란 세월을 이겨 낸 가문이 왜 이렇게 …궁벽한지 말이야.”

    부자가 망해도 삼 년은 간다는 말이 있다. 일반적인 부자도, 그 정도는 먹고살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하물며 렉시의 집안은 어떤가. 그냥 부자가 아니라 한때 왕이었던 집안이다. 현재야 남작이지만, 불과 삼사백여 년 전까지만 해도 왕국이었다. 그런데 해도 해도 너무 돈이 없다. 이상치 않은가?

    이걸 의문시 여긴 렉시는 가문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어느 한 시기에 갑자기 영토가 축소된 걸 발견했다. 이때는 대륙 전쟁이 대규모로 있을 시기가 아니었다. 페르귄의 영토가 작아진 데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다.

    “부자가 크게 망하는 길은 간단해. 하나는 도박, 하나는 사치, 그리고 마지막이 종교지. 사실 도박이나 종교는 어느 면에서는 비슷해. 실체 없는 욕망에 돈을 쓰는 거니까. 하지만 사치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다른 두 가지와 달리 사치는, 반드시 그 흔적을 남긴다. 렉시가 찾아낸 것은 바로 그 흔적이었다.

    “당시 페르귄의 왕은 마법에 심취해 있었어. 장서각에 있는 마법 관련 서적들이 공통적으로 말하길, 마법은 돈이 꽤 많이 드는 취미라고 하더군. 어쭙잖은 보석들이나 금괴랑은 격이 다르다나?”

    렉시는 혀를 찼다.

    “돈을 쓰려거든 차라리 금괴나 보석에 쓰란 말이야. 현물이라도 남잖아. 멍청이같이.”

    〈음, 제가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적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 줬으면 해요. 욕은 좋지 않아요, 어린 페르귄.〉

    “그나마 알고 있어서 이 정도인 거야 사라. 거기다 요즘 이건 욕 축에도 못 끼어. 아마 내 자식의 자식 대에선 이보다 더한 말이 일상적으로 쓰이게 될걸?”

    〈오, 맙소사. 욕이 일상어가 되는 세상이라니.〉

    그땐 정말 이 일을 하고 싶지가 않을 것 같네요. 사라가 종알거렸다. 물론 그냥 하는 말일 것이다. 그녀는 오랜 시간 세상이 변하는 걸 보고 기록해 왔으므로.

    렉시는 맨 마지막 페이지를 비추고 있는 거울을 보았다. 집중하자, 그것을 알아챈 거울이 부르르 떨며 대담집의 대화를 읊었다.

    “〈그대와의 대화도 곧 마지막이 될 것 같소. 마법사여, 그간 이 어리석은 자를 상대해 주어서 고맙다오.〉

    〈어찌 그런 말을 하십니까. 전하께오선 아직 정정하십니다.〉

    〈하늘을 가르고 땅을 뒤집는 그대라도 사람의 수명은 어찌할 수 없는 법이오. 궁정의가 말해 주었소. 짐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이오.〉

    〈전하, 약한 말씀 마시옵소서.〉

    〈그대는 참 좋은 말동무였다오. 사람들은 나더러 미쳤다 말하지만, 난 그대와 대화하기 위해 뿌린 재화가 아깝지 않소.〉”

    지랄을 한다.

    렉시는 욕설을 내뱉었다. 고작 마법사의 시간을 사려고 왕가의 기둥뿌리를 결딴냈단 말인가. 뿌린 너야 안 아깝겠지, 후손인 자신은 이렇게 똥줄 빼고 있는데.

    “〈…하여, 그대가 준 우의는 내 죽을 때까지 품고 갈 것이오. 그대가 아닌, 그대가 준 것들을.〉

    〈전하, 저는….〉

    〈그러니 그대는 좀 더 많은 것을 보고 와 주길 바라오.〉”

    세상이 끝나는 날 정도면 이야깃거리가 될 만하지 않겠느냐 하는 말이 이어진다. 그대는 오래 사니 가능할 거라며 농을 건넨 선조는 곧 이 대담집을 끝냈다. 거울이 흐려졌다.

    “마법에 미친 건지, 마법사에 미친 건지….”

    어쩐지 뒷맛이 쓴 마무리다. 렉시는 생각했다.

    총 서른한 권의 이 대담집은 두 사람 사이의 마법에 대한 견해차에 대해 담화한 내용을 적은 것이다. 사라의 말로는 이 대담집을 마지막까지 열람한 건 렉시가 최초라고 했다. 정말 어찌나 다행인지 모른다. 중후반을 넘어서면 선조가 마법사에게 가지는 감정의 색이 넘실넘실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거, 외부인 공개 금지 구역에 넣어 줘. 어쨌거나 사생활은 지켜 드려야지.”

    렉시의 말이 끝나자마자 거울이 사라졌다. 이 담화를 빙자한 애담愛談은 향후 찾는 이가 없다면 영원히 기억 저편에 묻힐 것이다. 렉시가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였다.

    왕이 죽은 뒤 마법사의 기록은 장서각에서 사라졌다. 이후 저 오스틴 루터라는 마법사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라가 기록하는 것은 페르귄의 왕과 직접 관련된 이야기뿐이다. 혹시 싶어 외부의 책들을 찾아봤지만 역시 없었다. 사실 마법사들이 이렇게 기록을 남기는 경우가 별로 없긴 했다. 외려 저렇게 남은 것이 별난 일이었다.

    “보통 영토가 축소되면 외적의 침입을 생각하지. 당시 왕이 죽고 새 왕이 등극하는 혼란기에 대륙 전쟁이 일어나 정확한 사정이 묻힌 게 아닐까 싶어. 왕이 영토를 팔아먹었다니,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저는 알았는데요.〉

    렉시가 매섭게 서고를 노려보았다.

    “알면 …좀 알려 주지 그랬어?”

    말이라도 못하면 밉지라도 않을 것이다. 렉시의 씨근덕거리는 숨소리에 사라가 얼른 첨언했다.

    〈하지만 전 그런 개입은 하면 안 되는걸요. 그게… 규칙이니까요.〉

    아, 실로 마법이란 대단하다. 본능에 따른 자기 보호 및 변명은 생물의 특권이거늘. 그 누가 이 서고를 무생물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저것은 서고다, 저것은 사람이 아니다, 저것은 인공적인 지성체다…. 중얼중얼 공염불을 외며 렉시는 화를 참아 냈다. 어쨌거나 원하는 것을 찾았으니 됐다. 이제 장서각을 나갈 시간이었다.

    “파묘破墓라…. 나 원 참, 살다 보니 별짓을 다 해 보겠네.”

    마지막 문장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마법사가 준 우의의 증거는 마도구를 의미하는 것이다. 총 서른한 권의 책을 모두 읽은 자만이 알 수 있는 왕만의 은유에서 렉시는 이 위기를 벗어날 동아줄을 발견했다.

    〈그런데 마법 도구가 그렇게 값진가요? 예전에도 값이 나가긴 했지만, 어린 페르귄이 원하는 것처럼 천문학적인 가치가 아닐 수도 있어요.〉

    기록만 하느라 밖의 상황에 영 맹탕인 사라가 물었다.

    “이젠 마법사가 사라졌으니까. 알려진 것들은 황실이 긁어 가고, 알려지지 않은 것들은 귀족들이 쓸어 가지.”

    정확한 시장 조사나 감정은 해 보아야 알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경로로 받았더라도 왕이 진상받은 물건이다. 값지지 않을 리 없다.

    “어쨌든 가문을 위해서니, 봐주시겠지.”

    천만이란 거대한 빚 앞에서 도굴은 한낱 관념에 불과하다. 세상만사 가장 중요한 것은 먹고사는 것 아닌가. 선조가 죽는 자리까지 끌어안고 갈 만큼 소중히 여긴 물건이라도 팔 수 있다면 팔아야 한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잖아?”

    그리하여, 렉시는 가묘를 털었다.

    “…….”

    “이것저것 제법 많았단다. 어떤 것인지는 조사해 봐야 알겠지만, 일단 다 내 방에 가져다 놨지.”

    “…….”

    “목록 정리해서 대충 팔면 그래도 천만 크레아는 어떻게든 채울 수 있을 거야. 그러니 걱정 말고 이것 가져가렴.”

    “…….”

    툭, 렉시가 도로 쥐여 준 돈이 요수아의 손에서 굴러떨어졌다. 렉시의 눈썹이 꿈틀댔다. 하도 울어서 안심시켜 주려고 비밀리에 해 준 말이거늘, 어린아이의 심기란 알 수가 없다. 렉시는 바닥에 주저앉은 요수아를 툭툭 건드렸다.

    “요수아?”

    “…영주님이….”

    “응?”

    “영주님이 타락했어…!”

    “뭐, 뭐라고?”

    으아아아아아앙!

    끄에에에에에엑!

    끼에에에에에!

    요수아가 대성통곡했다. 무시무시한 소음이었다.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는 괴성에 놀란 렉시는 황급히 창을 닫았다. 그러나 어디서나 요수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달려오는 불같은 머리털은 이미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 무시무시한 얼굴을 보며 렉시는 얼이 빠졌다. 아니 돈을 마련할 길을 찾았다는데, 대체 왜 이래 얘가?!

    “요, 요수아! 뚝! 그쳐!”

    “으아아아아앙! 흐아아아아아앙!”

    페르귄 영지에서 영주란 무엇인가.

    그것은 절벽 위의 꽃, 하늘에서 실수하여 떨어진 가련한 천사, 수십 년이 지나도 빛바래지 않는 첫사랑의 그림자 같은 것이다. 상냥하시고 고귀하시며 꽃길만 밟아야 하는 우리의 님이 도둑질을 하다니, 그것도 무덤이라니! 아아 잔혹한 현실이여!

    바닥에 주저앉아 펑펑 우는 요수아의 마음을 렉시는 아마 모를 것이다. 어쩌면 평생 모를지도 모른다. 사람의 마음이란 그와 같은 상황에 닥쳐 봐야 아는데, 렉시는 그럴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통곡하는 요수아를 달래기 위해 빌고 또 빌던 렉시는 결국 달려온 필립에게 한 대 맞았다.

    *****

    페르귄 영지에서 마차 한 대와 말 두 마리가 빠져나온 것은 위의 일이 있은 지 한 달 후의 일이다. 보물 팔러 나간다고 소문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최소한으로 줄인 인원의 수는 셋.

    하나는 필립이요, 하나는 그의 종자 요수아였으며 마지막이 …바로 영주 렉시였다.

    참 미쳤다고 할 인선이지만 이게 어쩔 수 없었다. 렉시가 아니고서는 마법 물품들을 한 발짝도 옮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쩐지 파묘가 쉽더라니, 성질 겁나 더러워 진짜.”

    렉시는 투덜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투덜거린들 어찌하겠는가? 일단 저걸 팔려면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뜻하지 않은 영주의 외유엔 이러한 연유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난데없이 물건 팔러 나가게 된 렉시는 참으로 골치가 아팠지만 애써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수행인 하나가 참으로 불유쾌하나, 나머지 하나가 그걸 상쇄해 주겠거니. 난생처음 영지 밖으로 나서는 영주의 바람은 그저 하나뿐이었다.

    ―어서 마도구가 한시라도 빨리 팔려 돈을 갚고, 영지에 돌아오는 것.

    그러나 길어 봐야 반년 정도라고 생각했던 이 여행이, 물경 이 년이 넘게 계속될 줄은 셋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저 도둑을 맞으려면 개도 안 짖고, 일이 꼬이려면 엉뚱한 데서 마가 드는 법. 렉시의 여행을 빙자한 고행은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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