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十四 章 - 暴露 : 終幕(폭로 : 종막)
원향전 아기마마가 자신의 몸에 뭔가 문제가 생겼음을 알아차린 것은 후원이 연한 녹색으로 물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아니, 사실 시작은 참으로 사소한 것이었으니 그것이 제 몸의 문제임을 알아차리는 데까지 꼭 한 걸음이 남았더라.
어쩌지….
청은 아직 밝아지려면 한참이나 남은 창을 바라보며 자근자근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사람을 부리면 금방 해결될 문제라고는 하지만 이리 늦은 시간에 그리하기에는 암만해도 마음이 불편하다. 게다가 저가 뭐 대단한 것을 청할 것도 아니다 보니 더욱 입이 떨어지질 않더라. 그렇다고 저가 직접 움직이려니 이제 원향전의 살림은 저의 것이 아니요 궁인들의 손에 맡겨진 것이더라. 저가 찾는 것이 저가 아는 곳에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으니 더욱 움직일 수가 없다. 그저 입술만 잘근대며 속을 태울밖에.
내가 참말 미친 게지, 미친 게야.
허나 꾹 참고 다시 잠을 청하려니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아니, 그리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더라. 눈을 뜨거나 감은 것에 상관없이 제 머릿속도 모자라 눈앞에 어른대는 판에 잠은 개뿔, 군침만 꼴깍꼴깍 넘어가니 나중에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 지경이라.
희한치, 참말로 희한치. 지금껏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거늘 어찌하여 하필 지금 이러는 것이람? 내가 미친 게지. 그러니 이러는 게지.
생각하면 할수록 갑갑함만 더해지니 청은 이제 정말로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입을 틀어막고자 이불깃을 단단히 물어야 했더랬다. 차라리 대단한 것이면 이리 미련이 남지도 않으련만, 참으로 하찮은 것이 간절한 탓에 더욱 속병이 날 지경이라. 이럴 줄 알았으면 입맛이 없건 말건 석반을 든든히 챙겨 먹을 것을. 그러면 이리 쓸데없는 것으로 속을 끓일 리 없을 것을. 청은 깊이 시름 하며 연신 몸을 뒤척였더랬다.
“…어찌 이러니…?”
내 색시, 어찌 이러는 것이야?
그때, 갑자기 익숙한 체온이 청을 덥석 감싸는가 싶더니 곧 어린아이 어르듯 이리저리 뒹굴뒹굴하더라. 아른아른 귓전을 울리는 음성에 졸음이 뚝뚝 묻어나는 것이 암만해도 저로 인하여 잠에서 깨어난 것이 분명한 태자 전하이시다. 아이코, 이를 어째. 청아, 이 몹쓸 것아. 그까짓 게 뭐라고 이 귀한 분까지 잠을 설치게 만드는 게야. 철렁 내려앉은 가슴 위로 죄스러움이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하니 다시금 두 눈이 어룽어룽 물기로 그렁대더라.
“나쁜 꿈이라도 꾸었어? 아니면 갑자기 탈이라도 난 게야? 응? 청아, 내 색시. 무엇 때문에 이리 잠을 설쳐?”
으으음…, 이를 어쩔꼬…. 내 색시가 이리 잠을 설치니 이를 어쩔꼬….
웅얼웅얼 울리는 목소리가, 저를 감싼 온기가 연신 제 속을 뒤흔드니 그렁그렁 차오른 물기가 당장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 위태롭더라.
“자장가라도 불러주랴? 아니면 재미난 이야기라도 읊어주어? 말만 하렴, 내 색시. 내 너 말하는 것은 다 들어줄 터이니.”
말만 하렴, 응?
조곤조곤 제 귀를 파고드는 달큼한 음색에 제 가슴 묵직하니 짓누르던 것들이 단숨에 무너져 내리니 남은 것은 서러움이더라.
“…흑…!”
“………처, 청아?”
먹고 싶은 것 당장 가져다 먹지 못하는 서러움이 이렇게 클 줄은 몰랐더라.
맹랑한 것, 이 맹랑한 것.
“…무어가 먹고 싶다고?”
사내는 잠시 제 귀를 의심하였다. 허나 제 말 떨어지기 무섭게 또 그렁그렁한 눈이 자신을 향하니 암만해도 저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닌 모양이다.
“누룽지? 지금 누룽지가 먹고 싶어 이런다는 게야?”
“소…, 송구하옵니다….”
“아, 아니다. 아니야. 네가 송구할 건 또 무어 있누. 그래, 누룽지가 먹고 싶다고?”
“…예. 그, 예전에, 그, 예전에 전하랑 둘이서만 있을 때 주전부리 하던 그것이요.”
게다가 캐면 캘수록 더욱 구체적으로 다듬어지는 내용이 그야말로 기가 막히다. 그냥 누룽지도 아니고 저가 백치 노릇 할 적에 주전부리 삼던 그것이란다. 후궁전 차지한 계집들 반절 털어 내기 전, 정말 아무것도 없이 홀대받던 그 시절에 잠시 잠깐 먹은 그것. 기껏해야 어린아이 손바닥 하나는 채울까 말까 한 크기의, 그나마 귀한 설탕가루 솔솔 뿌려 저자의 것과 구분을 하였다지만 그래 봤자 소박하다 못해 초라한 근본은 그대로였던 바로 그 누룽지를 먹고 싶어 이 야심한 시간에 눈물을 글썽인 것이란다. 이 맹랑한 것이 왜 또 이러나 싶어 잠이 홀딱 달아나버린 사내로서는 기가 막히다 못해 벌컥 역정이 치밀 지경이라.
“번철에다 찬밥 얇게 눌러 붙여 구워 설탕 가루 솔솔 뿌린 그것?”
하여 제 속도 가다듬을 겸 하여 저가 기억하던 그것에 대해 잠시 읊으니 대번에 꿀꺽! 하며 군침을 삼키는 모습이 대답을 대신하더라. 그에 사내는 끄응…, 앓는 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식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가리는 음식이 없는 정도였던 이가 이 야심한 중에 겨우 설탕 가루 뿌린 누룽지 한 점에 이토록 탐심을 드러낼 줄 누가 알았을까. 차라리 구하기 힘든 과일이나 귀한 재료 담뿍 들어간 진미를 찾는 것이었다면 이리 당황할 일도 없었을 것을, 설탕 가루 뿌린 누룽지 한 점 먹고 싶어 눈물이 그렁그렁하니 기가 막히다 못해 잠시 넋이 나갈 지경이라.
“실은 저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근데, 근데 먹고 싶다 생각하니 그것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려서, 그래서 자려고 해도 어른어른하여서…, 그래서…, 그래서….”
허나 제 어린 내자의 상태는 매우 심각하였다. 뭐라 지절대나 싶더니 곧 두 손에 제 얼굴 푹 파묻는 기세가 불길하더라. 아니나 다를까, 그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온 눈물이 잠깐 사이 바닥을 후두두 떨어져 내린다. 그깟 누룽지가 뭐라고 기어코 두 눈 가득 그렁거리던 눈물 철철 넘쳐흐르기 시작하니 달아났던 넋이 단박에 제 자리로 돌아오더라.
“울지 마라. 울지 마라, 내 색시. 네 몸이 당장 그것을 먹고 싶다는 것인데 그게 무어 이상한 것이라고 이리 눈물을 보이는 게야? 괜찮다, 괜찮아. 사람이 그럴 때도 있는 법이다. 내 그 누룽지 얼른 구해다 줄 터이니 조금만 참으렴. 아, 울지 말래도.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실은 남아있던 정신마저 달아난 듯도 하였지만 그래도 하나는 확실히 머릿속에 담아놓은 덕분인지 움직임에 막힘이 없다.
“여기 누룽지 좀 챙겨오렴. 설탕 가루 넉넉히 뿌려다 얼른 가져다주어.”
누룽지 한 점이 간절해 훌쩍대는 어린 내자 고이 품어 달래며 아랫것들에게 명을 내리는 그 음성이 실로 비장하더라.
“누룽지?”
“예, 헉…, 예예. 누룽지. 누룽지 맞습니다.”
아침 수라로 올릴 사골진국을 끓이느라 홀로 밤새 국 솥 앞을 지키고 있던 숙수 염씨는 갑자기 숙수간으로 뛰어든 궁인의 뜬금없는 청에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늦은 밤 주전부리나 가벼운 술상을 찾는 경우는 제법 흔하였기에 그녀가 헐레벌떡 숙수간 안으로 뛰어들어온 이유 역시 그런 것이려니 했더랬다. 그런데 가쁜 숨 한참이나 몰아쉬면서 하는 말이 누룽지! …더라.
“갑자기 그건 왜? 당직하는 이들끼리 나눠 드시게?”
“아니, 아니옵니다. 태자 전하께옵서 급히 찾으셔서요.”
“…누가 뭘 찾으신다고?”
게다가 찾는 이유마저 희한하니 무려 태자 전하께옵서 누룽지를 찾으신단다. 자기들끼리 나눠 먹을 야식거리 챙겨 가려는 핑계치고는 지나치게 과한 그 내용에 뭐라 말도 못하고 멍청히 굳어드는 염씨다.
“아이참! 이럴 때가 아닙니다! 태자 전하께서 얼른 가지고 오라 하셨다고요!”
덕분에 그 명을 수행코자 원향전에서부터 숙수간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궁인은 속이 타다 못해 뒤집어질 지경이다. 저가 사잇문 넘어설 때까지도 연신 서두르라 채근하시던 그 음성 생각하니 더욱 마음이 급하더라.
“아, 아니…, 태자 전하가 그런 걸 왜 찾으신다는 게야?”
“제가 그것까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명을 내리시니 찾아온 것뿐인데. 아이고, 됐습니다. 그냥 어디 있는지만 알려주셔요. 제가 직접 챙겨가렵니다.”
설탕! 설탕은 또 어디 있습니까?
“아이고 내 찾아 주겠네! 내가 찾아줄 터이니 잠시만! 잠시만 기다리게!”
하여 제 손으로 챙겨가겠다며 숙수간 안으로 성큼 들어서니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염씨가 덩달아 펄펄 뛰기 시작한다. 이곳이 어떤 곳이던가. 다른 분도 아니고 지고하신 황제 폐하께서 드시는 것을 만들고 관리하는 곳이 아니던가. 괜히 외부인이 들어와 설치고 갔다가 문제라도 생기면 그야말로 독박이더라. 급한 마음에 잡히는 대로 챙기고 담으니 잠깐 사이 커다란 광주리 하나 가득 누룽지가 들어찬다.
“누룽지랑 또 뭐?”
“설탕이요. 설탕 가루 넉넉히 뿌려 가져오라 하셨습니다.”
“여기, 아예 단지째 챙겨 주겠소. 아, 마실 것은 필요 없고?”
“찻잎은 넉넉하니 그걸 드리면 됩니다. ―아이고, 늦겠네. 하여튼 욕보셨어요, 숙수님.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참, 소쿠리랑 단지는 이곳 기물이니 비워서 가지고 오는 것 잊지 마시오.”
“예에에에.”
그리고는 처음 숙수간에 쳐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휑하니 사라지니 멀어지는 중에 하는 대답이라 말꼬리가 길게 늘어진다.
“……빠르구먼.”
마치 비호와도 같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객쩍은 감탄을 흘리던 염씨는, 그러나 곧 불길이 가물대기 시작한 아궁이에 마음이 급해졌다. 암만 은근한 불에다 끓여야 하는 것이라지만 아직 한 시진은 더 끓여야 할 것인데 벌써 불을 꺼뜨려서야 되겠는가. 서둘러 미리 준비해 둔 백탄에 불쏘시개 한 줌 쏟아 넣으니 다시 발갛게 살아나는 기세가 보기에 좋더라. 그것만으로도 느긋한 낯이 된 염씨는 둥근 솥 아래 고루 불기운이 닿을 수 있도록 부지깽이를 휘저은 다음 잠시 솥뚜껑을 열어 그 안을 살폈다. 설렁설렁 끓는 뽀얀 국물이 그야말로 진국이더라.
“좋구먼.”
아침 수라에 딱 맞춰 올릴 수 있음을 확인한 염씨의 낯빛이 환히 돌아온다. 밤새 공을 들인 것이 좋은 결실을 맺으니 이보다 좋은 게 또 어디 있을까. 덕분에 마음이 더욱 여유로워지니 이제야 좀 전에 저가 겪은 소란을 웃으며 돌아볼 수 있더라. 야심한 때 다급히 누룽지를 찾으신 태자 전하라니, 숙수간 사람들끼리 잠시 잠깐 떠들고 말 이야깃거리로는 부족함이 없다.
“―누룽지라니…, 허 참….”
아마 처음 이야기를 꺼내면 거짓부렁 하지 말라 할지도 모르겠다. 다과만 전담하는 이씨는 벌컥 화를 낼 테지. 다른 분도 아니고 태자 전하께서 저가 만들어 광 가득 쟁여놓은 갖가지 과줄도 마다하고 겨우 누룽지에 설탕을 찾으셨다 하는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성격이 아니니 분명 그럴 것이다.
허나 사실이 그러한 것을 어찌할까. 게다가 이 핑계로 은근슬쩍 모난 놈 속 한번 긁을 생각하고 보니 이 또한 좋더라.
“허 참, 갑자기 웬 누룽지래, 누룽지가.”
애 선 계집도 아니고 말이지….
하여 미처 알아채지 못하였다. 저가 농담 삼아 주워섬긴 말이 설마 참이 될 줄은.
그리하여 황궁은 물론이요 온 나라가 발칵 뒤집어지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그저 절절 끓는 가마솥만 살피고 또 살피는 숙수 염씨더라.
* * *
연해제 27년 여월 초이레.
손이 귀한 황실에 새로운 혈손이 잉태되었으니 태자 광의 하나뿐인 후궁, 양원 현씨가 그 태의 주인이라. 오랜만에 황실을 찾은 경사에 크게 기뻐하신 지존께서 양원 현씨에게 큰 상을 내리시니 동해에 새로이 지은 행궁이 바로 그것이더라. 이에 양원 현씨가 크게 놀라 지나치게 과분한 상이라며 사양하고자 하니 태자 광이 나서 이르기를 ‘이는 온전히 그대 하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그대의 태에 자리한 어린 것을 위한 것이기도 하니 그대는 부디 폐하의 황은(皇恩)을 감사히 받아야 할 것이다.’라 하였더라. 그제야 지존의 깊은 뜻을 헤아린 양원 현씨가 깊이 사죄하며 저에게 내려진 상급을 감사히 받으니 후에 이를 전해 듣게 된 제국의 신민들이 황실의 행사를 크게 찬양하였더라.
* * *
나라에 큰 홍복이 드니 원향전 아기마마께옵서 귀한 황손을 잉태하였음이라. 이에 온 나라에 기쁨이 출렁이니 다만 한 곳, 구중심처에 자리한 황후궁 현양전의 공기만은 한껏 날카롭게 벼려지는 중이더라.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것이더냐? 알이 아직 멀쩡하게 남아있다더니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야?”
입이 있으면 말을 해 보아!
이제 완연한 노인의 행색이 된 황후 남씨는 제 앞에 부복한 이들을 향해 연신 책망과 채근의 말을 쏟아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원향전으로 들어간 ‘인어의 알’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지 이제 겨우 이틀이었다. 아니, 그 이틀 사이 뭔가 달라진 것이 있었다면 진작 연통이 오고도 남음이라.
“어찌하여 저 천한 남총이 배태를 하였다는 것이냐! 대체 어찌!”
헌데 와야 할 연통은 오지 않고 돌고 돌아 들어온 소식이 실은 진작 쌀이 익어 밥이 되었다는 것이더라. 저는 결코 가지지 못할 것을 나는 가졌노라 비웃는 것만 같은 그 소식에, 여인은 이제 병약한 여인네의 모습마저 내던졌다. 사갈 같은 제 본성 마음껏 흩뿌리며 제 아랫것들 사납게 몰아붙이기를 저어하지 않으니 영문도 모르고 부름을 받아 그녀 앞에 자리한 산천 남가의 수장으로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이런 것이로구나 싶더라.
아니, 실은 작히 억울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사람을 쓰지 않으면 내전 사정은 전혀 알 수 없는 저와는 달리 제 누이는 내명부의 수장인 덕에 누구보다 내전 사정에 환할 수밖에 없더라. 헌데 그런 이도 터지고 나서야 알게 된 일을 저가 무슨 수로 알 것이더냐. 그렇지 않아도 제 부정의 증좌를 쥐고 흔드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누이의 아래로 다시 돌아와야 했던 원망이 목까지 들어찬 마당에 되도 않은 억지까지 감당하고 있자니 절로 이가 갈릴 지경이라.
“황실의 귀한 피가 천한 창기의 몸을 타고 나오게 되었다! 이 참담한 일을 어찌할 것이더냐!”
허나 이미 깊은 분노와 끓어오르는 질시로 눈이 뒤집어진 여인은 제 오라비의 울분이며 반심(叛心) 따위 알 바 아니더라. 애초에 그녀가 분노하는 까닭이 저가 예상하지 못한 일을 맞이한 것으로 인함이 아니요, 저는 절대 이루지 못할 일이 사내의 몸에서 이루어지게 되었음을 알게 된 까닭이라. 심지어 그 사내가 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천출이기까지 하니 여인의 분노는 이제 들불처럼 번져 그 머릿속 가득 넘실대는 것도 모자라 영혼까지 살라 먹을 지경이다.
“한때의 춘정이라 생각하였거늘 그것이 과하여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진즉슨, 내 더 이상은 좌시할 수 없노라!”
다만 그런 와중에도 제 진정한 속내를 감추는 것만큼은 잊지 않으니 이는 결코 여인에게 이성이 남아 있어서가 아니요, 다만 아직까지는 저가 목적한 것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가 절절 끓어 넘치는 분노를 모두 아우르고도 남을 만큼 굳건한 덕이라.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게다가 바꾸어 말하면 드디어 그 빌어먹을 놈에게 쥐고 흔들 약점이 생긴 것인즉, 이것을 빌미 삼아 제 마지막 패의 위력을 더하기에 부족함이 없더라. 치솟는 분기 마음껏 터뜨리는 것도 실은 그러한 까닭이었으니 이제 여인의 기세는 황후궁 지붕이 들썩일 지경으로 등천을 하였다.
하여 문밖에 자리하고 있던 이들 중 누구도 알지 못하였다.
그 기세가 사방으로 뻗치는 틈을 타 그녀의 앞에 부복하고 있던 이들에게 작은 종이쪽이 하나씩 쥐어지고 있었음을.
음전하신 황후마마께옵서 크게 노하시매 그 기세가 다친 맹수와도 같아 황후궁이 요란하게 들썩이니 어린 궁인들 사이로 ‘황후궁에 귀신이 들었다더라.’는 말이 돌기 시작하였더라.
한편, 여인처럼 사납지는 않은 대신 몇 배는 더 어수선해지다 못해 난장판이 되기 일보 직전인 이들도 있었으니 각각 동관 맥가와 서성 적가를 중심으로 나누어진 두 계파가 그들이라. 그들 역시 황후 남씨와 마찬가지로 원향전 안팎에 각자의 줄을 대어놓은즉, 지금 그들이 크게 당황하는 까닭은 여인의 분노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더라.
“아무래도 알이 하나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지켜보는 눈이 있음을 알고 수를 쓴 게지요.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까지 사람의 뒤통수를 칠 리 없소이다.”
“하여간 예정보다 일러도 너무 이릅니다. 이제 겨우 원향전에 줄이 닿겠구나 싶은 참이었는데 이래서야….”
어수선하고 또 어수선하니 나아갈 방향을 잃은 탐욕이 제 갈 곳을 몰라 허둥대는 꼴이 참으로 볼 만하더라. 특히나 금력을 동원하여 간신히 내주(來週) 중을 예정으로 접견 허가를 받아내었던 몇몇의 낯은 떡메로 내려친 메주만도 못한 꼴이 되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곳에 모이기 직전에 양원 현씨의 회임을 이유로 그 허가 자체가 없던 것이 되었음을 통보 받은 탓이라. 그들의 사정까지 전해지니 동관 맥가의 사랑채는 곧 장날 저잣거리 꼴이 되기 시작하였다.
“…―실은 말이네.”
그때 마침 동관 맥가의 수장 맥가 천우가 느릿하니 입을 떼니 이는 실로 간만의 일이더라. 그동안은 제 계파의 사람들이 떠드는 것 지켜보며 침묵만 지키던 이가 오랜만에 나선 것이다.
“황후전에서 연통이 왔다네.”
게다가 이어지는 말 또한 심상치 않은 탓에 어수선하다 못해 심히 소란스럽던 공기가 단숨에 조용히 가라앉으니 찻물 한 모금 삼키는 척 잠시 말문을 닫았던 천우는 쥐죽은 듯 변한 공기를 확인한 뒤에야 더없이 느린 몸짓으로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귀한 황실의 피해 천한 피가 섞이는 것은 두고 볼 수 없으니 우리들 중 하나에게 국구(國舅)의 자리를 권하더구먼.”
그리고 그 몸짓만큼이나 느릿한 어조로 저에게 전해진 황후의 제안을 모두에게 전하니 공기는 다시금 뜨겁게 달아올랐더라.
그것이 황후가 놓은 덫인 줄도 모르고 제 탐욕에 취해 날뛰었더라.
물론 여전히 차분한 공기가 흐르는 곳 또한 적잖이 존재하였으니 그중 하나가 지존께서 나랏일 두루 살피시는 편전이더라. 나라의 홍복을 맞이해 귀한 용종 수태한 양원 현씨에게 큰 상을 내리시기도 하였던 지존께서는, 그러나 정작 그 홍복의 근원이라 할 태자 광을 향해서는 불편한 시선을 아끼지 않으시더라.
“―태자.”
그리고 한참 만에야 제 앞에 자리한 이를 부르니 이는 태자와의 독대를 시작하고 꼬박 일각의 시간이 흐른 뒤더라.
“예, 폐하.”
“기어이 찾아내었더구나.”
“예?”
“고얀 놈. 어디서 감히 어중된 흉내를 내는 게냐?”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참말로 알아듣지 못하여 이러는 것이니 너그러이 살펴주시옵소서.”
허나 태자 광이 어떤 이던가. 목적한 바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제 낯을 꾸미고도 남을 이니 지금만 하여도 진정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얼굴을 하고 고개를 조아리더라. 그 태연한 행사 뻔뻔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으니 차라리 파렴치하다는 말이 걸맞을 모양새라.
“…그래, 생각해보니 내 물음이 잘못된 것이었구나.”
“…….”
“어찌 알게 된 것이더냐.”
“무엇을 말입니까?”
“나조차 그 존재를 알지 못하였던 탓에 쓰고 나서도 한참이나 지나서야 ‘그런’ 이능을 가진 신물임을 알아차렸다. 모든 것이 끝난 뒤에야 그것이 지존의 위에 오른 자만이 알고 있어야 할 황가의 비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말이다.”
“그렇습니까?”
“당연히 너에게도 알려준 바가 없지. 아니, 말할 생각도 없었다. 어차피 내 친히 너의 출신을 만든 이상은 알고 있는 이가 적으면 적을수록 좋은 일이었으니까.”
“흠…, 그것은 좀 아닌 것 같습니다만…. 폐하께서 그렇다니 그런가 보지요.”
“태자!”
“―애초에!”
“……?!”
“애초에, 소자가 알고 있는 것이 폐하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음을 알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 물음에 지존이신 연해제 단의 낯이 참담히 일그러지니 이는 결코 그가 태자 광의 무례함에 노한 탓이 아니요, 다만 되돌아온 물음으로 인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한 결과라.
“폐하께옵서도 그를 알기에 과거 소자의 선택에 힘을 실어주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하여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진정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지요.”
그리고 더 이상 그 어떤 책망의 말도 할 수 없더라.
“이미 때가 차 그 끝이 목전인즉, 이제 폐하께서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 완성되는 모습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해사하게 웃는 그 낯이 지고하신 황제 폐하의 가슴 세게 들이받으니 그 아픔이 단숨에 머리를 가득 채우매 무어라 말을 해야 할 것인지도 잊고 말았더라.
제국에 큰 홍복이 드니 온 나라가 기쁨으로 들썩이더라.
다만 그 기쁨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이들 또한 존재하였으니 누군가는 분노하였고 누군가는 탐욕에 영혼을 팔았으며, 또한 누군가는 깊이 슬퍼하였다.
누군가는 깊이 슬퍼하였더라.
* * *
사실 지금 가장 놀라고 당황해야 할 이는 따로 있었다.
이 모든 소란의 시발점.
귀한 용종을 품고 낳을 당사자.
양원 현씨, 청이 바로 그이더라.
“양원, 괜찮으십니까?”
“…….”
“양원. 양원?”
“…예? 어, 무어라 하였어요?”
“…양원….”
“아, 저, 아니 나 괜찮아요. 참말입니다.”
허나 정작 청은 그 어느 때보다 말간 낯을 하고 멍하니 후원 정자만 지키고 있으니 도리어 애가 달은 것은 청을 모시는 원향전의 궁인들이라. 그제야 근심 가득한 낯으로 저를 바라보는 송 상궁이며 비슷한 낯을 하고 제 주변을 둘러싼 궁인들을 향해 손사래까지 쳐가며 괜찮다 말하였지만, 그럼에도 그녀를 비롯해 저를 바라보는 원향전 궁인들의 표정은 여전히 돌덩이와 같이 굳어 도통 펴질 줄을 모른다.
하기야 그럴 만도 한 것이, 지금 저의 일신에 벌어진 일이 보통 큰일이 아닌 탓이라.
사내의 몸으로 수태를 하고 열 삭을 다 채우면 해산을 하여야 하는 탓이라.
“참말이래도요. 나도 괜찮고, 음…, 아마 금아도 괜찮을 것이어요.”
이렇게 먹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보면 아주 건강한 녀석일 듯싶습니다.
허나 희한한 데서 배포가 남다른 어린 후궁은 근심은커녕 도리어 아직 홀쭉한 제 배 토닥이며 다시 한 번 저가 괜찮음을 밝혔다. 아니, 저는 물론이요 제 배 속에 자리를 튼 용종도 괜찮을 것이라 자신하더라.
“금…, 금아요?”
“네?”
하지만 이제 모여 있던 궁인들 모두는 또 다른 의미로 당황하고 말았다. 지나치게 태연한 모습도 기가 막히건만 낯선 이름까지 들먹이며 연신 괜찮다 하시니 오히려 의심만 더 커진 것이다. 그에 제일 연장자 된 자격으로 다시 한 번 앞장서는 송 상궁이라.
“송구하오나 양원. 금아라 함은 누구를 두고 이르는 것이옵니까?”
…아니, 사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누구를 두고 이르는 것인지 충분히 짐작을 하고도 남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불경을 무릅쓰고 확인에 나섰더라.
“여기, 이 녀석이요.”
“…….”
…괜히 확인하였구나.
기다렸다는 듯 돌아오는 즉답에 송 상궁과 모여 있던 원향전 궁인들은 그 속이 복잡하게 얼크러지고 말았다. 이는 묻지 않아도 될 것을 물은 것에 대한 깊은 후회와 어린 상전의 예상을 벗어난 반응으로 인한 황망함으로 인한 것이었으니 이제 그들에게는 더 이상 놀라울 것도 없더라.
“이 안에 자리를 틀고 앉아 시도 때도 없이 설탕 가루 뿌린 누룽지며 잘 익은 수박 찾는 녀석이 금아랍니다.”
아랫것들 그런 어수선한 속내 아는지 모르는지 어린 상전의 음성이 해맑기 그지없다. 아니, 해맑다 못해 혹시 저분이 살짝 광증이 든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담담한 느낌마저 묻어나니 이제 모두는 민망함마저 느끼는 중이다.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괜히 주변에서 호들갑을 떨고 있는 것만 같은 꼴이니 민망하고 또 송구하여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라.
이상타, 대체 어찌하면 저리도 초연하실 수 있는 것일까?
특히 그들 중 출산의 경험이 있는 이들은 더욱 머릿속이 복잡하였다. 모르면 또 모를까 제 몸속에 또 다른 생명이 자리했다는 것이 선사하는 충격이 어떤 것인지 이미 한 번 겪어 본 그들로서는 어린 상전의 초연한 모습이 암만 봐도 이해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본디 수태와 출산이 가능한 몸을 타고 난 자신들조차 첫 수태를 알게 된 순간에는 며칠이 그냥 사라졌다. 간절히 기다리던 이들은 기쁨으로 정신을 놓았고 예정에 없던 일을 맞이하게 된 이들은 크게 놀라고 당황하여 넋을 놓았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원향전 아기마마께서는 사내의 몸으로 태어나신 분이 아니던가. 당연히 몇 곱절은 더 놀라고 당황하다 못해 자신이 수태하였다는 사실을 부인하여도 이상할 것이 없더라.
“다행히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만 먹고 싶다 하니 참으로 기특한 아이라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헌데 정작 아기마마의 행사는 그중 어느 것도 아니었으니 평시와 다를 것 없는 태도는 물론이요 당신이 수태한 사실을 선선히 받아들인 것도 모자라 태중 용종께 ‘금아’라는 태명까지 붙이셨다. 괜히 민망하다는 것이 아니니 무엇이든 당연한 일이라는 듯 초연히 받아들이시는 어린 상전의 모습이 낯이 설다 못해 더럭 겁이 날 정도라. 이제는 궁금한 것이 있어도 차마 물을 엄두조차 나지 않더라. 그에 모두는 복잡한 낯으로 어린 상전 말간 웃음만 바라보았더랬다.
아기마마가, 참말 많이 불안하기는 하셨나보네.
그러다 어느 순간, 이 상황에 대하여 제멋대로 결론을 내리고 만 원향전의 궁인들이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아기마마의 저 기이할 정도로 순순한 모습에 대하여 온전히 자신들의 기준만을 바탕으로 답을 정하였다는 게다.
하기야 워낙 출신이며 조건이….
태자 전하 지극한 총애 매일처럼 지척에서 살피고도 기껏 이유랍시고 생각한 것이 이 따위이니 과연 편견이라는 것이 무섭기는 무서운 것이더라. 애초에 태자 전하께서 아기마마 내자 삼겠노라 나선 때가 백치 황자 시절이라 자신들이 짐작한 천출이니 사내니 하는 조건들은 아무 의미가 없었으리라는 건 생각지도 못하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아마 그럴 것이다.’라며 결론을 내린 것이다.
참으로 불쌍하신 분이로다. 오죽 당신 있을 자리가 간절하였으면…!
하여 서로 약속이나 한 듯 말갛게 웃는 어린 상전 향해 똑 닮은 측은한 시선을 던지기 시작하였더랬다. 아기마마 저런 모습이 태자 전하에게 내쳐지고도 기댈 곳이 생긴 탓이라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내의 몸으로 임신과 출산이라는 엄청난 일을 감당하게 된 마당에 저리 해맑을 리 없을 거라 믿은 결과였다.
이제 모두는 어린 상전이 뭐라 말하든 그저 ‘그렇구먼요.’, ‘양원의 말씀이 옳습니다.’, ‘예, 그러합니다.’ 하며 영혼 없는 맞장구를 치느라 목이 뻐근할 지경이 되었다. 제멋대로 내린 결론이 참으로 참담하니 차마 어린 상전 바라볼 염치가 없더라. 아니, 할 수만 있다면 얼른 이 자리를 피하고 싶더라. 어린 상전을 보고 있노라니 애처롭고 측은하여 자꾸만 코끝이 찡해지는 것이 이러다 흉한 꼴 한 번 되게 보일 판이라.
“…하오면 양원.”
“??”
그런 까닭으로 이번에는 상궁 채씨가 나섰다. 넷이나 되는 상궁들 중 가장 젊다 보니 다른 세 선배들에 비해 제 감정 추스르기 살짝 벅찼던 탓이었다.
“혹시 지금 따로 드시고 싶은 것은 없사옵니까?”
“응? 네?”
“꼬박 이틀 동안 드신 것이라고는 전부 주전부리들뿐이지 않습니까? 그래서는 아니 되어요. 그렇지 않습니까들?”
그리고 갑작스러운 물음에 아기마마가 당황하는 틈을 타 잽싸게 주변의 다른 이들까지 끌어들이니 이는 결코 저 혼자서 이 상황을 마무리 지을 수 없음을 잘 아는 까닭이라. 다행히 자리하고 있던 다른 이들 또한 이런 사정을 꿰고 있던 덕에 기다렸다는 듯 어울리기 시작하였다.
“예, 예에. 채씨 말이 옳습니다. 당장은 그것들이 가장 달고 맛날지 모르겠습니다만 계속 그렇게만 드시면 양원은 물론이고 태중에 계신 분에게도 좋지 않을 것이어요.”
“이를 말입니까. 괜히 의서마다 회임한 산부가 반드시 챙겨먹어야 할 음식에 대해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산달이 가까워지면 위가 눌려 드시고 싶어도 드실 수가 없게 되어요. 지금부터 잘 먹어두어야 그때에 버틸 기운이 생기는 겁니다.”
…아주 작정하고 덤벼들었더라.
“…그, 그런 것이어요?”
그 기세가 어찌나 장하던지 좀 전까지만 해도 태연자약하다 못해 말갛게 웃는 낯을 하고 있던 어린 상전께서 대번에 주눅이 들어 우물대신다. 그 모습마저 애처로운 탓에 자리하고 있던 궁인들 중 마음이 여린 몇은 급히 가슴을 부여잡았더라.
“예, 그런 것입니다. 이제 양원께서는 홑몸이 아닌즉, 몸과 마음을 편히 하는 것은 물론이요 태중의 용종을 대신하여 좋은 것만 가려서 보고 듣고 행하는 것은 물론이요 먹고 마시는 것 또한 그리 단속을 하셔야만 합니다.”
“그, 그렇구나….”
“송구하오나 양원께서 여인이 아닌 까닭에 회임과 출산에 대해 잘 모르시는 듯합니다. 그렇지 않사옵니까?”
허나 일단 잡은 기회를 허투루 날릴 수는 없는 법. 부러 엄한 낯을 꾸민 네 상궁들은 모르는 척 저 할 말을 쏟아내었다.
게다가 처음 말을 꺼낼 때만 해도 이 곤란한 상황에서 빠져나올 작정으로 시작한 것이 어째 말을 하면 할수록 근심이 늘어난 덕에 이제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임신한 딸(…)을 상대하는 친정어미 내지는 누이(…)를 마주한 자매의 심정이 되고 말았다. 한눈에도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게 환히 보이니 이거 참 가슴이 벌렁댈 지경이라.
“그것이…. 음…, 그렇…겠지요?”
“…….”
…아니, 아니다. 그도 아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덜컥 애부터 들어선 어린애를 상대하는 기분이 가시질 않으니 어느덧 모두는 진심으로 이 애달픈 이 챙기기에 나섰더랬다. 이미 출산을 겪은 이들은 물론이요 곁에서 보기만 한 이들까지 달려들어 임산부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 살펴야 할 것들을 줄줄 읊어대기 시작하니 멋도 모르고 그 가운데 오도카니 자리한 아기마마의 시선이 그 어느 때보다 불안하게 흔들리더라.
그렇게 원향전 궁인들이 불경죄 무릅쓰고 왁자하니 덤벼들기를 꼬박 2각.
만약 지나치게 과한 관심에 질리다 못해 경기가 들 지경에까지 이른 아기마마가 파리한 낯으로 고단함을 호소하지 않았다면, 그 덕에 처음의 목적을 상기한 네 상궁이 정리에 나서지 않았다면 다시 한참은 더 소란스러웠으리라. 실은 쉬시라 말을 남기고 물러나는 그때까지도 미련이 가득한 눈으로 어린 상전 돌아보며 미적대는 통에 보다 못한 청이 부러 더욱 고단한 시늉까지 내어야 했더랬다.
마침내 문이 닫히는 것까지 확인한 청의 입에서 길고 긴 한숨이 흘러나온다. 이게 뭐라고 사람의 진이 쭉 빠진 것이다.
하…, 내가 뭐라고 저리들 난리람.
그리고 기가 막혔다. 저를 향한 궁인들의 관심과 소란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더라.
당연하게도, 청이 제 일신에 일어난 큰 사건에 대해 지극히 초연한 이유는 그들의 짐작과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 아니, 만약 그들이 알았다면 자리를 뜨기는커녕 진작 청의 앞에 엎어지고 자빠지며 눈물로 제 죄를 청하였을 것이나 안타깝게도 원향전 궁인들에게 남의 속을 읽는 재주가 없더라. 하기야 그러니 어린 상전의 담담한 반응에 대하여 자기네들 멋대로 판단을 하고 결론을 내린 끝에 잔뜩 수선을 떨어댄 것이었지만, 그런 사정까지 결코 알 리 없는 청이더라. 어쨌거나, 덕분에 그런 까닭으로 제 몸에 벌어진 일보다 그로 인해 제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더라. 희한치, 참말로 희한치. 대체 내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이리들 난리들이람?
…―금아야, 혹시 너 때문이야?
허나 조금만 깊이 생각을 하니 알 것도 같다. 저에게 달라진 것이라고는 제 몸에 자리 잡은 조그만 녀석이 전부이니 바꾸어 말하면 이 조그만 녀석이 이 모든 상황의 원인일 듯하였다.
금아 너 때문에 저러는 것이니? 응?
어차피 이제 겨우 자리를 튼 탓에 아직 별 티도 나지 않건만, 청은 연신 제 홀쭉한 배를 향해 속으로 물음을 던졌다. 이게 만약 꿈속의 그곳이었다면 단박에 고 작고 예쁜 것이 통통 몸을 튕기며 그런 것이라고, 그 말이 옳다고 답을 하였겠지만 생시인 탓에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더라.
그래, 너 때문인 게야. 그렇지?
하지만 이번에도 알 수 있었다. 의원이 저에게 회임하셨노라 말하는 것을 듣기 무섭게 제 몸에 자리를 잡은 것이 저가 꿈속에서 만나 이름까지 지어준 그 녀석이로구나 하고 곧장 알아챘던 것처럼 이번에도 알 수 있더라.
우리 금아, 참말로 대단하구나.
하여 대견한 마음 가득 담아 제 배를 살살 쓰다듬으니 마치 꿈속에서 그 조그만 것 쓰다듬을 때처럼 보들보들 따끈한 온기가 제 손을 간지럽힌다. 어차피 손바닥에 닿은 것은 제 홀쭉한 뱃가죽에 몇 겹 비단옷이 전부이거늘, 그러니 저가 느껴야 하는 것은 미지근한 제 체온에 그를 가린 비단천이 전부이거늘, 희한하게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리 느껴지는 것이다. 헌데 그조차도 이상하기보다는 그저 좋을 따름이니 이게 다 금아 덕분이더라. 하여 청은 기어코 꿈속에서 생시까지 쫓아온 이 놀라운 녀석을 향해 장하다, 대단하다 하며 치사를 하였더랬다.
― 들어주시려는 게로구나.
그러다 문득 저가 태연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를 떠올린 청의 얼굴이 환히 피어나니 마치 달빛 아래 만개한 박꽃과도 같은 모양새라.
전하께옵서 내 청을 들어주시려는 게야.
환한 낯을 하고 연신 제 배 살살 쓰다듬는 모양새가 사정을 모르는 이가 보면 더도 말고 수태의 기쁨을 만끽하는 산부의 모습이다. 허나 실은 제 서방이 제 청을 들어주려는 것을 두고 크게 기뻐하는 것이었으니 다른 이가 들으면 참람하기 짝이 없는 청이로되 저에게 있어서는 세상에 둘도 없을 간절한 청인 탓에 이루어질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멈추질 않더라.
들어주지 않겠노라 그토록 역정을 내시더니 실은 이리하시려고 그런 것이었구나.
청은 웃고 또 웃었다. 기쁨이 가득 차오르다 못해 넘실넘실 넘쳐날 지경이니 그저 웃음만 나오더라.
때가 되면 저를 새처럼 날려 보내달라던 그 청, 결국에는 들어주려는 모양이니 기쁘기 그지없더라.
“…―있지, 금아야.”
결국 청은 말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전하가, 그러니까 네 부친 되는 분께서 내 청을 들어주시려는 모양이야.”
기쁜 마음 이기지 못하고 두근두근, 달음박질치는 제 심장 가만히 다독이며 입을 떼니 그 흘러나오는 음성이 마치 한숨과도 같더라.
“내가 말이다, 일전에 전하께 청을 하였거든?”
한편으로는 살랑대는 봄바람과도 같았으니 이는 지금부터 제 배 속의 자그마한 것에게 한껏 자랑을 할 작정인 까닭이라.
“내 쓰임이 다 끝이 나면, 꽃으로서 내 쓰임이 다 끝이 나면 나를 새처럼 날려 보내달라 그리 청을 하였거든?”
아니, 실은 제 서방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사정 이 녀석에게 모두 털어놓을 생각에 잔뜩 들뜬 탓이라.
“그런데 금아 네가 나한테 왔어.”
설마 그것이 그야말로 저 혼자만의 생각이라는 것도 모르고 그저 제 서방이 드디어 제 청 들어주시나보다 하며 기뻐하였다.
“쓰임 다한 꽃들이 기적(妓籍)에서 제 이름 뺄 때 하던 것을 내가 하게 되었으니 꽃이 그 쓰임을 다 하고 열매를 맺은 것이 아니고 무어겠니?”
설마 저가 생각하고 판단하여 내린 결론이 제 서방이 뜻한 바와는 정반대의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채 그리 기뻐하며 종잘대었더랬다.
“전하께옵서 내 청을 들어주신 게지. 날 날려 보내주시려는 게야. 암, 그렇고말고.”
마침 제 어린 내자 찾은 태자 전하께옵서 그 떠들어대는 말 모두 듣고 말았다는 것도 모르고 제 배 속 자그마한 것을 향해 종알종알 떠들었더랬다.
“누가, 무얼 어찌할 것이라고?”
“……!”
사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성큼 방 안으로 들어섰다. 금갈색 눈동자 동그랗게 둥글리고 저를 바라보는 어린 내자의 모습은 다른 때라면 더없이 곱게 보였을 것이나 지금은 그저 부아만 솟구치게 하는 것이더라.
내가, 이런 꼴을 보겠다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는데.
“청아, 내 색시. 다시 한 번 말해보렴. 내가 널 어찌할 것이라고?”
“저, 전하? 이 시간에 어찌….”
“어찌하여 내가 널 날려 보내줄 것이라는 것이냐?”
“…예?”
“말해 보아! 어찌 또 그 참담한 말을 입에 올리는 것이냐 이 말이다!”
그리고 기가 막혔다. 저는 이미 속이 훌떡 뒤집어질 지경이건만 저를 바라보는 저 말간 얼굴에 담긴 것은 순수한 의문 하나뿐이었으니 이는 저 맹랑한 것이 지금 정말로 몰라서 저러는 것이라는 뜻이라. 이제 사내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짚고 넘어가야 할지 알 수가 없더라. 아니, 어떻게 하면 저 고집스러운 것에게 제 뜻 온전히 전할 수 있을지 막막하더라.
“어찌하여 아직도 날 떠날 생각을 하는 것인지, 내가 어찌하여 널 날려 보낼 것이라 생각하는 것인지 소상히 이야기해보라 이 말이다!”
갑갑하고 또 갑갑하니 속이 터지다 못해 걸레짝이 되는 것만 같더라. 이 조그만 머리통에 제 진심 새겨 넣으려면 얼마나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인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실은 지금도 한 자락 남은 이성 덕에 간신히 참고 있는 것일 뿐, 아니었으면 진작 이 맹랑한 것 답삭 붙들고 짤짤 흔들어대고 있었거나 원향전 지붕이 들썩이고도 남을 만치 고성을 내질렀으리라.
이 맹랑한 것은, 정말이지 사내의 인내심을 단숨에 날려버리는 재주가 탁월하였다.
“…들어주시려는 것이, 아니어요?”
참말로? 참말이어요?
“그러니까 대체 어찌하면 그리 생각할 수 있는 것이야? 그를 말해보라 이 말이다.”
심지어 돌아온 반응마저 저따위니 사내는 이제 제 한계가 목전이더라. 그나마도 어린 내자의 세상 무너진 낯 덕에 제 음성 나지막이 낮출 정신이 남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아니지, 실은 저것이 더 부아를 돋운다. 저 조그만 머리통에 무슨 생각을 어찌 담고 있기에 저런 낯을 하는 것일까?
“…어찌하여서요?”
“……!!!!!!!!”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주화입마에 들 뻔하였다. 체면이고 나발이고 육두문자를 쏟을 뻔한 것을 간신히 되삼킨 결과였으니 실은 지금도 저 맹랑한 것을 향해 소리를 꽥 내지르고 싶어 입이 다 근질거린다. 저가 제 어린 내자에게 지은 죄가 적잖은 거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설마 이런 대가를 치를 정도였나 싶어 생전 처음으로 죄책감이라는 것까지 일어날 지경이더라.
“어찌하여, 아니라는 것이어요?”
하여 사내는 치밀어 오르는 분을 실어 쿵쿵, 제 가슴 세게 치기 시작하였다. 맹랑할 때야 예쁘기 그지없는 제 색시로되 그저 맹하기만 한 지금은 사람 복장 뒤집어엎다 못해 터뜨리는 천하의 악적이로다. 암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적어도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말을 말같이 들어먹어야 할 것 아닌가? 말을 해도 믿지를 않아, 몸으로 행하니 무슨 대단한 착각을 한 것인지 멋대로 참람한 결론을 내린 것도 모자라 그것이 아니라는 소리에 세상 무너진 얼굴까지 한다.
“어찌하여 아니라는 것인데!”
그도 모자라 버럭 화까지 내는 모습이 참으로 기가 막히다.
“그거면 되는데! 이제 곧 내 쓰임이 다 할 것이니 그거면 되는 것인데!”
“청…아?”
기가 막힌 한 편으로 더럭 겁이 나더라.
“꽃으로 쓰임이 다 하였다 해놓고 어찌 아니라는 것인데!”
아니, 실은 기겁을 하였다.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린 안색도 모자라 반쯤 뒤집어진 그 눈이며 휘청대는 몸짓이 누가 봐도 단단히 탈이 난 모양새였으니 그럴밖에.
“청아! 얘야, 내 색시!”
결국 휘청대던 몸짓이 한 쪽으로 크게 기우는 것을 알아차린 사내는 당장 제 목까지 차오른 분기도 잊고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기다렸다는 듯 제 품 안으로 떨어지는 마른 몸의 온기가 마치 제 심장과도 같더라.
“청아, 청아? 청아, 왜 이러는 게니? 어찌 또 이래?”
정신이 훅 날아가는 것이 이런 것이리라. 사내는 반쯤 빠져나간 혼 간신히 붙들어 잡고 제 품 안에 늘어진 청의 몸을 대신 추스르기 시작하였다. 애타게 어린 내자 이름을 부르며 맥을 짚으니 이리저리 어지러이 흩어지는 기맥이 그야말로 숨이 경각에 달한 자의 것이라. 사내는 더욱 기겁을 하고 서둘러 제 몸의 기를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다행히 이 작고 마른 몸 안에 자리를 튼 녀석도 이 위태로운 사태를 알아차린 것인지 사내의 기가 청의 몸에 스며들기 무섭게 그 움직이는 방향을 이끌기 시작하였다. 그를 따라 청의 몸속 막히고 맺혀 위태로운 기혈을 향해 사내의 정순한 기가 움직이니 곧 위태롭게 달막이던 몸이 조금씩 차분히 가라앉더라. 허나 이는 그야말로 응급조치에 불과한 것이었으니, 그런 까닭에 그 몸속으로 흘러들어가는 기의 흐름은 멈출 줄을 모르더라.
청아, 내 색시. 이 미련한 것아.
그리고 탄식하였다. 이 지경이 되도록 참고 또 버틴 제 어린 내자의 미련함으로 인하여 깊이 탄식하였다. 대체 언제부터 이리 무너지고 있었던 것일까? 스스로 꽃이기를 자처한 그때? 아니면 저와 가시버시 맺은 그날? 알 수 없다. 암만 생각해보아도 짐작 가는 것이 없으니 그저 갑갑할 따름이라. 아니, 실은 짐작 가는 게 너무 많아 어느 것이 시작인지 감도 잡히질 않는다. 고민하면 할수록 이 아이가 천성이 어른스러워 뭐든 잘 참는 것이 아니라 실은 참는 것 말고는 아는 것이 없음을 미처 짐작하지 못한 제 자신의 어리석음이 참으로 원망스럽더라. 제 어린 내자의 정신이 진작부터 흔들리다 못해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 것도 그런 까닭이었으니 어쩌면 온전히 저를 위한 꽃이라 할 적에 이미 무너질 만큼 무너져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기야 그러니 저더러 새처럼 날려달라는 참람한 청을 한 것이리라. 그러니 그 청 들어주려는 것이 아니라는 말에 기어코 정신을 놓은 것이리라.
“미안하다, 내 색시…. 알아보지 못하여 참말로 미안해….”
하여 사죄하였다. 겉보기에 달라진 것이 없다는 이유 하나로 깊이 들여다볼 생각도 않은 자신의 무지함을, 어둔한 행사를 사죄하였다. 그래, 생각해보면 이상하였다. 혼례 날, 그러니까 저의 거짓 백치 노릇이 밝혀진 그날에 저를 향해 어찌하여 미리 알려주지 않은 것이냐고, 저를 데리고 노는 것이 그리 재미있었냐며 온몸으로 서운함을 드러냈던 이였다. 그랬던 이가 어느 순간 꽃이기를 자처하였으니 실은 그때 이미 조짐이 보인 것이리라. 그런 것을, 그 선명한 조짐을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한 것은 물론이요 그저 맹랑하다 기꺼워하기만 하였으니 그 어리석음을 어찌 말로 다 할까. 사죄하고 또 사죄하여도 그저 부족할 따름이더라.
“내가 어찌하면 좋을까….”
사내는 한탄하였다. 만약 청의 몸속에서 열심히 그의 기운을 이끄는 누군가가 아니었다면 치료를 하려다 저까지 기혈이 뒤틀려 반병신이 되었으리라. 태중에서부터 열심히 효도하는 제 자식이 참으로 대견하고 기특하니 그로 인하여 더욱 암담하더라. 이 효심 가득한 녀석이야말로 순전히 이 맹랑한 것 제 곁에 붙잡아 놓을 욕심 하나로 만들어진 후사가 아니던가.
“…크윽…!”
처고 자식이고 모두 제 같잖은 욕심으로 인한 것임을 떠올린 사내는 결국 울컥 치밀어 오른 핏물 한 모금을 내뱉어야만 했다. 정순한 마음으로 집중해도 모자랄 일을 어수선한 정신으로 아슬아슬하게 행하였으니 기어코 기의 흐름이 제 손을 벗어나려 든 결과더라.
“…청아, 내 색시.”
내가 이렇다. 내가 이렇게 모자란 놈이야.
무얼 하든 제 자신이 우선이니 정신이 무너져 기혈이 진탕 난 제 어린 내자 고치겠다고 덤빈 주제에 제 생각하느라 두 목숨, 아니 세 목숨이 한날한시에 한 곳에서 나란히 스러질 뻔하였다. 저의 모자람이 대참사를 불러일으킬 뻔했더랬다. 과연, 저는 이제 이 맹랑한 것이 없으면 아니 될 모양이더라. 무얼 하든 똑 부러지는 제 어린 내자만 멀쩡하였어도 일이 이 지경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인데, 저를 위해서라면 달달 떨어대면서도 제 할 말 다 쏟을 줄 아는 똘똘한 색시만 제 곁을 지키고 있었어도 이리되지는 않았을 것인데.
견딜 수가 없더라. 지금껏 잘난 척하고 다닌 시간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더라.
“―그러니 얼른 일어나렴. 일어나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전하, 그러면 아니 되어요.’하고 꾸짖어다오.”
맞닿은 이마가 마치 죽은 자의 것처럼 사늘하니 다시금 기혈이 진탕을 일으키려 들더라. 그에 또 핏물 한 줌 내뱉었더랬다. 시커먼 핏덩이 바닥에 진득이 눌어붙는 모양새가 희한하게도 반갑다. 잠시, 아주 잠시나마 이것으로 제 어린 내자 묶어놓을 수단이 하나 더 늘어났구나 싶었던 것이다.
비참하더라. 참으로 비참하더라.
이런 상황에서조차 저에게 유리한 것만 챙기려 드는 스스로의 비열함이 참으로 비참하더라.
“…얼른 일어나서, 예전처럼 ‘같이 해드릴 것이어요.’ 그리 말해주어.”
내가…, 내가 다 잘못하였으니까…, 그러니까 제발….
그리고 아스라이 흩어지는 간청 사이로 한 떼의 비명이 섞이기 시작하니 뒤늦게 방 안의 사정 알아차린 아랫것들이 몰려든 결과더라.
새까맣게 물드는 시야가 반갑기 그지없으니 이것이 제 어린 내자의 심정이련가 싶더라.
* * *
사내와 그의 어린 내자가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꼬박 하루하고도 한나절이 더 흐른 뒤더라. 무엇이 어찌 잘못된 것인지 피를 몇 번이나 토한 태자 전하보다도 반나절이나 늦게 깨어난 아기마마 덕에 원향전의 공기는 그야말로 초상집이 따로 없었더랬다. 황궁은 물론이요 온 나라가 발칵 뒤집어지고도 남을 흉사가 되고도 남을 일이었으니 만약 노련한 네 상궁의 발 빠른 대응이 아니었더라면 진작 원향전 안으로 금군이 밀려들어 오고 전각에 적을 둔 궁인들 모두는 상전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죄를 물어 뇌옥으로 끌려갔으리라. 그뿐이랴. 대계의 끝이 목전인 참에 다시 몇 걸음 물러서고도 남을 일을 피하게 되었으니 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난 태자 전하께서 원향전 궁인들에게 상을 내린 것이 아니더라.
그나마도 다시 얼굴을 마주하는 데 걸린 시간이 다시 한나절이니 결국 이틀 만에야 마주하게 된 광과 청이라. 허나 무슨 말을 어찌 꺼내야 할지 모르기는 둘 다 마찬가지인 탓에 마주하고도 한참이나 찻물만 홀짝였더랬다.
“…이제 좀 정신이 드니?”
결국 이번에도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사내더라. 제 어린 내자가 본디 먼저 나서 떠드는 성정이 못 됨을 떠올린 것이 하나요, 실은 저가 제 내자 말소리 간절한 것이 둘인 까닭이라.
“…….”
허나 안타깝게도 돌아오는 것은 까닥까닥, 불경한 고갯짓이 전부더라. 저를 향한 조심스러운 시선은 덤이다. 그에 가슴 속으로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스치니 뭐라 말할 수 없는 서운함으로 입가에 절로 쓴웃음이 맺히더라. 내 색시, 어쩌면 이리도 모질까.
“그, 몸은 괜찮고?”
“…네….”
그래도 마냥 모질기만 한 인사는 또 아닌지라 거듭 물으니 기다리던 음성이 들린다. 우물우물 기어들어가는 통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도 않을 그런 목소리가 저에게 답을 한 것이다. 이게 뭐라고, 이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서늘하던 가슴 속으로 다시 훈풍이 스미니 사람 마음 간사하다는 것이 이런 것을 두고 이름이라. 하여 사내는 더욱 씁쓸하니 웃고 말았다. 하여 사내는 뭐라 더 말을 꺼내는 대신 얼마 남지 않은 찻물을 들이켰다. 미지근하나마 이 찻물 한 모금으로 떫은 입맛 씻어낼 작정으로 그리하였다.
“……하하….”
“…?”
그러나 곧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빈 찻잔 내려놓기 무섭게 다호를 들어 다시 채우는 제 어린 내자의 모습이 기가 막혀 절로 웃음이 터진 것이라. 게다가 금갈색 눈동자 크게 둥글리고 제 눈치 살피는 그 모습 위로 ‘으응? 어찌 그러시어요?’하는 물음 선명하게 새겨져 있으니 사내는 그만 한참이나 웃고 또 웃었더랬다. 이런 것을 두고 웃지 않으면 언제나 웃을 것인가 싶을 지경으로 웃었더랬다. 제 어린 내자 놀란 낯마저 기껍기 그지없어 웃고 또 웃었더랬다.
속이 다 후련하더라.
그렇게 얼마나 웃어댔을까.
“하하…. 청아, 내 색시.”
“네? 네, 네….”
사내는 여전히 웃음기가 담뿍 묻어나는 음성으로 제 어린 내자를 불렀다. 그러자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낯을 하고 있던 청이 냉큼 답을 하니 그마저도 보기 좋더라.
“어찌하여 그런 것이니?”
그래서 사내는 좀 더 수월히 묻고자 하는 것을 꺼내어 놓을 수 있었다.
“……!”
“아니, 널 탓하는 것이 아니야. 내가 널 탓할 이유도 없다.”
다만 말 꺼내기 무섭게 파랗게 질리는 그 낯은 영 마음에 들지 않으니 사내는 냉큼 제 어린 내자 달래기에 나섰다.
“무엇이든 모다 내 잘못이지 않니? 네가 그런 것도 다 내 탓인 게야, 그렇지?”
“그, 그것이….”
“허허…, 이토록 신용이 없으니 이를 어찌할까. 네 탓을 하는 게 아니래도.”
“전하….”
“그저 내가 궁금하여 그런다. 내 아무리 네게 신용이 없다지만 몇 번이고 들어줄 수 없다 한 청을 들어줄 것이라는 오해를 살 정도는 아니지 않니?”
“…….”
“……그럴, 정도더냐?”
“아, 아닙니다! 그는 아니어요!”
“…참말로?”
“참말입니다. 참말로 그는 아니어요.”
“…그래, 믿으마.”
“아이 참! 아니래도요!”
다행히 제 어린 내자 어르고 달래는 가락 어디 가지 않았더라. 지금도 보아라. 저가 풀죽은 흉내 몇 번 낸 것만으로도 언제 그랬냐는 듯 냉큼 제 곁으로 다가와 아니라고, 그런 것이 아니라고 종알대는 모습이 참으로 어여쁘더라.
“저, 전하?”
맹랑한 것, 이 맹랑한 것.
그에 사내는 잠시 저와 제 어린 내자 사이의 불편한 공기도 잊은 채 제 곁으로 다가온 청을 답삭 안아 품고 말았다. 아니, 잊었다기보다는 모르는 척하였다는 것이 바른 말일 것이라. 어쨌거나 겨우 이틀 만에야 제 품 그득 채우는 바르작거리는 몸짓이며 물씬 피어오르는 풋풋한 체향이 그저 황홀하다. 하여 잠시 말문을 닫고 그 체온이며 향기를 만끽하였다. 이전에는 이런 것조차 거리낌이 없었거늘, 이제는 이마저도 조심스러운지라 이리 기회가 주어지니 도저히 놓칠 수가 없더라.
“저, 전하아….”
“그래, 내 색시.”
“그, 저기, 무겁습니다. 내려주시어요.”
“으음? 누가 무겁다는 게야? 아, 혹시 내 팔이 무거워 그래? 미안타, 내 팔은 치우마.”
내친김에 늘 하던 희롱도 해보았다. 저를 놓아달라는 그 청만은 들어주고 싶지 않아 모르는 척 눙치며 그 허리 감싸 안으니 아직은 턱없이 마른 허리며 배가 한 품에 쏙 들어오더라.
태어나기도 전에 효도부터 한 녀석이 그 안에 함께 하였더라.
“행여나 네가 무거워서 그렇다는 말일랑은 말거라. 이거 원, 두 몸이 되었다면서 어찌 이리 가볍누. 가볍기가 깃털과도 같구먼.”
“아이참…. 이렇게 무거운 깃털이 어디 있다고 그러십니까. 되었으니 내려주시어요. 전하가 불편하실까 이러는 것이어요.”
“내 청수련, 빈 소리 하는 재주가 늘었구나. 아니면 내가 불편하다는 말 돌려 하는 게야?”
서운하구나, 참말로 서운해….
부러 풀죽은 흉내 내는 것도 잊지 않고 제 어린 내자 이리저리 흔들어대는 사내더라.
“그, 그런 것이 아닌데….”
진짜 아닌데….
“음? 어이쿠, 농이다. 내 농을 한 것이야. 어찌 그런 낯을 하누.”
결국 이리저리 휘둘리던 청의 낯이 울상이 될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제야 다시금 번쩍 정신이 든 태자 전하이시라.
그럼에도 제 품에 든 것 놓아줄 마음은 없는 탓에 끝까지 꼭 끌어안은 채로 다시 어르고 달래기 시작하니 어린 내자 낯빛 울긋불긋 꽃물이 들더라. 헌데 그마저도 고와 보이니 이를 어찌할까. 저가 이 맹랑한 것에게 미쳤음을 인정한 이후로 무엇이든 곱지 않은 것이 없고 예쁘지 않은 것이 없으니 감히 눈을 뗄 수가 없을 지경이더라. 과연 사람 마음이 이토록 간사하구나. 대계를 이끌어 나감에 있어 제법 쓸 만하다는 이유로 담아두었던 인사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를 쥐락펴락하고 있음에도 그를 내치고자 하는 생각은커녕 벗어날 마음조차 일어나지 않으니 이는 또 어찌할까.
“…―청아.”
“네, 네?”
내 색시, 내 곱고 고운 청수련.
“청아, 내 색시.”
“네, 말씀하시어요.”
내 마음 들었다 놓는 것도 모자라 갈기갈기 찢으려 드는 내 못된 청수련.
“그러니 말을 해주련?”
“…예?”
“어찌 그랬던 것인지, 그것만큼은 내가 꼭 들어야겠구나.”
무엇이 너를 그렇게까지 몰아붙인 것인지, 내 그것만큼은 꼭 알아야겠어.
그런 까닭에, 사내는 기어코 제 뜻을 이루고자 작정하였다.
“무엇이 너를 그렇게까지 몰아붙인 것인지, 내 그것만큼은 꼭 알아야겠어.”
툭하면 제 곁을 떠나려 드는 이 몹쓸 인사 꽁꽁 묶어 놓을 방법을 찾기 위해서라도 그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더라.
“저…하….”
복잡한 색채 이리저리 섞여드는 제 어린 내자의 낯빛이 참으로 애처롭더라.
한참이나 고민하던 청이 입을 연 것은 꽃살문 틈으로 새어들던 겨울 볕이 제법 길게 늘어질 무렵이더라.
“―기생들이 기적에서 나올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아요.”
헌데 어째 그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참으로 걸작이었으니 사내는 대번에 치밀어 오르는 한숨을 되삼키느라 애를 먹었다. 듣고자 한 것은 이틀 전에 벌어진 위험천만한 일에 대한 이야기였거늘, 정작 제 어린 내자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기생이 그 업에서 벗어나는 법에 대한 것이라.
마음 같아서야 당장이라도 어찌 그런 말을 꺼내는 것이냐 되묻고 싶으나 이마저도 한참이나 어르고 달랜 끝에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라는 사실이 그의 입을 묶더라. 혹여 제 물음에 어린 내자가 다시 입을 다물기라도 하면 갑갑한 건 저 하나뿐이었으니 말이다.
“가장 흔한 것이 누군가의 측실로 들어가거나 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꽤 젊은 나이에 기적에서 나올 수 있는 방법이지요. 그 다음으로 많은 것이 가무 등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그렇게 쉬운 방법이 아니어요.”
“어찌하여서?”
“가무나 음율, 그도 아니면 서화나 시조 중에 무언가 하나가 세 손가락 안에 들 만큼 빼어나야 하거든요. 게다가 재력이 있는 후원자가 붙지 않는다면 그런 능력을 갖췄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답니다.”
“그렇지. 무엇이든 사람이 먹고사는 데에는 금전이 드는 법이니….”
“예, 그렇습니다. 선생으로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수입이랄 게 없으니까요. 혹여 기생 시절부터 기예로 이름이 높은 이라면 귀한 댁 독선생으로 들어갈 수 있겠지만 보통은 그러합니다.”
“허나 청아, 내 색시.”
“예, 전하.”
“그런 것들이 대관절 네가 착각하고 오해하여 크게 실망한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지 나는 도저히 알 수가 없구나.”
“…….”
“청아?”
“…마지막으로 한 가지 방법이 더 남아있사옵니다.”
“으음?”
“수태를 하는 것이지요.”
“……무어?”
“이도 저도 못 되는 퇴기들, 그중에서도 사내 기생들이 주로 쓰는 방법이 그것이랍니다.”
그리고는 저를 향해 흐릿하게 웃는 낯을 마주한 그 순간에 무언가 제 가슴을 세게 들이받으매 광은 차마 아프다 말도 못하고 그를 감당하였더라.
“더 이상 기생 노릇 못 하는 사내들이 그러하답니다.”
그 말간 낯 감히 마주할 수 없어 제 어린 내자 작고 마른 몸만 폭 감싸 안고 말았더랬다.
“그래서…, 그래서 저도 그런 것인 줄 알았어요.”
품속에서부터 아른아른 울리는 잔잔한 음성이 그 아픈 가슴 다시 한 번 할퀴고 지나가니 제 어린 내자에 대한 저의 죄가 참으로, 참으로 크더라.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곳이 하필 기루였던 탓에 굶지는 않았으나 젖먹이 시절부터 꽃으로 길러져야 했던 청이다. 그나마 그 꽃이 되지 않을 작정으로 늦은 나이까지 동기 노릇만 하다 결국 기생하고는 쥐뿔도 상관없을 재주 덕으로 구중심처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떠밀려 들어온 이더라.
너무나도 뼈저리게 그 삶을 겪은 이가 바로 양원 현씨, 청이더라.
“사내가 기생이 된다 해서 모두 곱고 예쁜 것은 아니어요. 저처럼 어쩌다보니 기생으로 길러지는 일도 허다합니다.”
“……내 눈에는 네가 제일 곱고 예쁘다만?”
“후후…, 빈말이라도 감사하여요.”
“…내 색시, 언제나 내 말을 곧이 믿어줄꼬….”
“예, 예. 믿어 드릴게요.”
“흥…, 되었다. 되었으니 하던 이야기나 계속해 보아.”
헌데 큰일 났다. 어찌된 것이 이야기 하는 내용보다 제 품속에서 아른아른 피어오르는 그 잔잔한 음성만 들어온다. 사내는 부러 불퉁한 낯을 하는 것으로 제 당황한 마음 가리느라 애를 먹었다. 하여 제 어린 내자 음성 조용히 이어질 때에는 진심으로 가슴을 쓸어내릴 뻔했더랬다.
“어쨌거나… 하여튼 그렇습니다. 못난 인물도 모자라 황궁에 들어오느라 동기 딱지 떼지도 못하고 들어온 주제에 제대로 된 기생 노릇 하는 거라 믿은 것 같아요.”
“으음?”
설마 그 이야기라는 것이 근본도 짐작하지 못할 자기 비하일 줄은 생각지도 못하고 그랬더랬다.
“그래서 제가, 제가 잠시 광증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모자란 이가 딱 모자란 짓을 한 거지요.”
“…내 색시, 좀 알아듣게 이야기해주련?”
내가 모자란 탓에 네 말 다 알아듣지를 못하겠다.
하여 더욱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되어가니 결국 사내는 염치 불고 제 처에게 사정하였다. 그러자 청이 두 뺨 볼그레하니 물들이며 고개를 푹 숙인다.
“……어요.”
“으응?”
“…꼬…, 꽃이라 자처하고 보니 참말로 기생 노릇 하는 거라 착각하였다 이 말이어요.”
“…….”
“하여, 저도 때가 되면 그네들처럼 되겠거니 하였나봅니다.”
“그네들처럼?”
“기생으로써의 쓰임이 다 되면 수태하는 것으로 그 노릇 마칠 줄 알았어요.”
“……청아, 내 색시.”
“아, 압니다. 이제 아니라는 걸 알아요. 제가 착각을 하였다는 것도 알고, 그 착각을 너무 믿어 잠시 광증이 들었다는 것도 압니다. 참말입니다. 참말로 다 알아요.”
파닥파닥 내젓는 손짓이 그야말로 절박하다. 온 몸으로 아니라고 말하는 그 모습에 사내는 그만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착각, 착각이란다. 모든 것이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란다.
이 맹랑한 것이 아직도 이리 흰소리를 해대니 사내로서는 그저 갑갑할 따름이더라.
뭐든 제 탓으로 돌리는 그 모습이 갑갑하고 또 애처롭더라.
“차, 참말인데….”
하여 뭐라 말도 못하고 그 머리만 살살 쓰다듬고 있으니 또 무엇을 어찌 오해한 것인지 울상을 하고 종알댄다. 나이보다 웃자란 모양새가 사라진 거야 반가운 일이다만 그 사라진 까닭이 이래서야 나오는 건 한숨뿐이라. 그래도 제 어린 내자 기분 챙긴다고 삼키고 또 삼키고 하였는데 더는 안 되겠다, 결국 장한 한숨 한 자락 길게 흘러나오니 청의 낯은 이제 당장이라도 눈물 바람 휘날릴 것이 되었더라.
“―너는….”
“예?”
“색시야, 너는 대체 어찌 그리 생각이 많은 게야?”
“…예?”
“네 오해의 대부분이 나로 인함이니 그는 딱히 새삼스러울 것이 없구나. 허나 오해를 오해로 두지 않고 크게 키운 것은 도저히 나 혼자만의 책임이라 하기 어려울 듯하다. 그렇지 않니?”
“그…, 어…, 네, 네….”
“이 작은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그리 많은 게야? 응?
“…예?”
“내가 언제 너더러 꽃이 되어 달라 하였니?”
“……예?”
“너더러 꽃 같은 색시라 한 적은 있어도 꽃이 되라고 한 적은 없단다.”
다행히 막 지껄이는 것치고는 제법 그럴듯한 말이 나온다. 아니, 나오는 듯싶더라.
“…하긴…, 제가 꽃이라 하기는 참 인물이 모자라지요?”
“야 이…!!”
기다렸다는 듯 돌아오는 그 말에 속이 훌떡 뒤집어지지만 않았어도, 그래서 제 매끄러운 혀가 삐꺼덕 멈추지만 않았어도 그리 믿고 지절댔으리라.
막막하고 또 막막하니 사내는 태어나 처음으로 저의 말재주가 턱없이 부족함을 통감하였다. 저를 새처럼 날려 보내 달라 간청할 때와는 또 다른 의미로 복장이 뒤집어지고 피가 거꾸로 치솟으니 이게 다 제 언변이 부족한 탓이 아니고 무어란 말이던가. 당장 제 어린 내자 하나 구슬리지도 못하는 혓바닥을 두고 매끄럽니 뭐니 자만하였던 스스로가 부끄럽기 그지없도다.
사내는 다시금 깊은 고민에 빠졌다. 어느 순간 뒤틀려 있던 제법 반듯하게 돌아온 것 같기는 한데 그 결과가 이런 것이고 보니 말 한마디 내뱉기가 무섭더라. 하여 시름 가득한 낯을 하고 저 할 말을 고민하였더랬다.
그렇게 다시 침묵만 주고받기를 한참.
“…청아, 내 청수련.”
“예? 예, 전하.”
마침내 제 나름의 말을 쥐어짜낸 사내가 입을 떼니 조금씩 불편한 기색 드러내던 청이 냉큼 답을 하였다.
“네가 있던 기루가 기생들의 미색으로 유명한 곳이었더냐?”
“그는…. 그는 아닌 듯합니다.”
“허면 계집이고 사내고 서로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교태가 넘치고 색에 능하더냐?”
“웬걸요. 모두 제각각이었습니다. 전혀 꾸미지 않았음에도 고운 자태 자랑하는 여인이 있는가 하면 암만 곱게 꾸며도 사내는 사내다운 이들도 있었지요.”
또랑또랑한 답이 이어지니 그 모습이 예전에 저와 처음 만났던 그 시절의 것과 닮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흐뭇하더라.
“다행히 저는 근골이라도 가늘지만 저보다 몇 해 먼저 기생이 된 이는 기골이 장대하고 그 이목구비가 마치 전쟁을 앞둔 장수와 같은 이도 있었다지요. 그 이는 어떻게 꾸며도 기백이 대단하였습니다.”
다만 그 소상히 풀어놓는 이야기가…, 참…, 참 뭐라 말을 해야 할까.
“그래도 꽤 인기 있는 이였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안는 것도 안기는 것도 두루 잘하는 이라 하더이다. 특히 양손에 월도(月刀)를 나눠 쥐고 추는 검무가 일품이었다지요.”
“그, 그러냐?”
“예, 그러하옵니다. 아, 그러고 보니 기적에서 나간 것도 군문에 투신하느라 그랬다 들었어요. 과연 사람은 능력이 있어야 하는 법인 듯싶습니다.”
“…그래….”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재주 남다른 어린 내자 기 좀 살려주려다 별 이야기를 다 듣는다.
특히 군문에 투신하였다는 말을 듣는 순간 제 처가 지금 누구를 두고 이르는 것인지 알아차린 통에 광은 지금 심란하기 이루 말할 데가 없더라.
이는 오랜 대계를 이유로 진작부터 군문에 간여를 한 덕이니 지금 제 어린 내자가 말하는 이가 5년 전 제 손으로 동부군 천부장 자리에 올려놓은 그 이임을 깨달은 것이다. 어이쿠, 이거 큰일 났구나. 그 인사 성정이 어떠하더라? 괜히 제 과거 묻어보겠다고 반기라도 들면 골치 아플 것인데. 제법 능력 있는 인재라 챙겼더니 이런 반전이 있는 이였을 줄이야. 하기야 그 풍신에 그 정도 무재를 가진 이가 소싯적에 기생 노릇하던 이라는 것을 누가 짐작할 것이냐. 좀 있다 제 책사한테 일러둘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구나. 사내는 잠시 제 품 안의 온기도 잊고 고민에 빠졌다.
“그래도 그이는 잘 풀린 편이니 차라리 나을 것입니다.”
허나 그런 제 서방 심란한 속 알 리 없는 어린 후궁은 제 손 조물조물 만져대는 커다란 손 가만히 내려다보며 제 할 말 쏟아내기에 집중하였다.
“보통은 여인보다 단단한 근골을 가졌다는 이유로 괴벽을 가진 이들만 상대하거나 한 번에 여럿을 감당하거나 하는 일이 허다하여요. 기녀들이 감당치 못하면 사내 기생들이 나서는 일도 많고요. 기생들 사이에서도 급이 있으니 암만 인물이 빼어나고 재주가 빼어나도 사내 기생이 기녀들을 앞설 수는 없답니다.”
“…어찌하여서?”
“꽃이 되기 무섭게 망가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제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제 서방 가슴에 대못이 되어 박히기 시작한 것도 모르고 그리 종잘대더라.
“짓밟힌 꽃이 다 그런 것이지요. 하물며 사내라 짓밟는 맛이 있다는 손님도 계셨는걸요?”
“…대체 어떤 손님이 그러더냐?”
“제가 잠시 시동 노릇하였던 그이를 찾은 손님이 그리 말하더이다.”
“…….”
덕분에 사내의 가슴 위로 다시 한 번 천근 무게가 뚝 떨어져 내리니 광은 소리 없이 진저리를 쳤더랬다. 제 어린 내자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 그야말로 참담하되 그를 종잘대는 음성은 시종일관 담담하니 그래서 더욱 절절하게 그의 가슴을 할퀴더라. 제 어린 내자가 꽃이 되지 않으려 발버둥 친 사연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 이상으로 처참한 사연이 바탕에 있었을 줄 누가 알았으랴.
“그이를 수태시키려 하던 손님이 그 손님이었다지요.”
게다가 이어지는 내용은 더욱 참담하니 사내는 이제 감히 입을 뗄 엄두조차 낼 수 없더라.
“그래서…, 그래서 저더러 꽃은 되지 말라고 하였나봅니다.”
참담하고 또 참담하니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더라.
“…전하?”
― 아니, 실은 알고 있었다. 제 어린 내자가 궁에 들 적에 진작 알아보았던 내용이니 모를 수가 없더라. 모를 리가 없더라. 이토록 끔찍한 내막이 담겨있다는 것까지는 다 알지 못하였다지만 제 어린 내자 지난 시간이 참으로 고달팠다는 것쯤은 진작 알고 있었더랬다.
“전하, 어찌 그러셔요?”
알고 있었다. 적어도 알아야 할 만큼은 알고 있었더라. 머리로는 어지간히 알고 있었다.
다만 알고만 있었더라.
“아이참, 갑갑하여요.”
그에 연신 제 가슴 세게 두들기는 통증을 이기지 못한 사내는 다시금 제 품에 든 자그마한 몸 단단히 감싸 안았더랬다. 이리라도 하지 않으면 제 품에 든 것이 당장이라도 한 마리 새가 되어 포르르 날아갈 것만 같아 견딜 수가 없더라.
“…―타….”
“예? 무어라 하시었어요?”
“미안타, 내 색시. 내가 참말로 미안해.”
“저, 전하?”
결국 입을 떼니 나오는 것은 덧없는 사죄뿐이라. 말로야 골백번도 더 할 수 있는 탓에 덧없고 그리 해봤자 저가 제 어린 내자에게 행한 수많은 악덕이 사라질 것도 아닌 탓에 덧없는 사죄더라. 사내도 그를 잘 알기에 그 몇 마디도 간신히 꺼내었더랬다. 그 몇 마디 꺼내고 나서는 다시 입이 다물리는 것도 모두 그런 까닭이더라.
“…사옵니다.”
하여 제 품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가냘픈 음성 곧장 알아듣지 못하고 한참이나 저 할 말 고르느라 머리만 굴렸더랬다. 어찌하면 새가 되어 날아가려는 제 색시 붙들어 놓을 수 있을까 그것만 고심하였더랬다.
“저는 괜찮사옵니다.”
“…뭐라 하였니?”
“참말이어요. 저는 괜찮습니다.”
“…청아, 내 색시….”
정작 저가 무얼 하든 모다 덧없이 만드는 재주 유별난 제 어린 내자는 생각도 않고 그리 고민하였더랬다.
“금아를, 그러니까 이 아이를 주시었잖아요?”
“……?!”
곱고 고운 아기마마께서 제 가슴에 대못을 쾅쾅 박을 줄도 모르고, 그리했더랬다.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택한 것이 금아여요. 가장 먼저 달려와 저를 선택해준 것이 금아랍니다.”
제법 반듯하게 돌아왔음에도 여전히 어딘가 한 군데 뒤틀려 있는 것이 분명한 청의 영혼이 기다렸다는 듯 광의 오만함을 향해 일갈하였다. 당신의 존재는 중치 않다. 당신의 선택도 중치 않다.
내가 선택하고 나를 선택한 이 아이가 중할 뿐,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로써 한 점 혈육은 남길 수 있게 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여요.”
하여 사내는 감당할 수밖에 없더라. 말갛게 웃으며 저의 속 후벼 파다 못해 쇠갈퀴로 박박 긁어대는 제 어린 내자 담담한 음성 온전히 감당하며 평생 할 일 없을 줄만 알았던 후회를 거듭하였더랬다.
“그러니 괜찮습니다. 그만으로도 충분하니 저는 괜찮습니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질러놓은 것이던가.
“전하?”
아이참, 어찌 이리 덥석덥석 끌어안는 것이어요? 갑갑합니다. 전하, 갑갑하여요.
종알종알 제 품에서 울리는 맹랑한 음성은 멈출 줄을 모르니 그럼에도 사내의 낯은 이제 돌덩이가 따로 없더라.
이상타, 이 분이 왜 이러신담?
뭐라 떠들어도 도통 저를 풀어줄 생각을 않으니 이를 어쩔까. 결국 청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제 몸 단단히 가두어놓은 품의 주인을 살피기 시작하였다. 아니, 살피려 하였다.
…아이코!
허나 시선을 살짝 들어 올려 제 서방 새카만 두 눈동자와 마주친 청은 기겁을 하다못해 그대로 꽁꽁 얼어붙고 말았다. 사실 시선을 마주치는 거야 무어 그리 대단한 일일까. 청이 놀란 것은 단지 시선을 마주한 탓만이 아니었으니 정확히는 그 시선 끝에 자리한 시커먼 눈동자가 저를 사로잡다 못해 꽁꽁 옭아맨 까닭이라.
진짜 왜 이러시는 거람?
차라리 무어라 말이라도 해주었으면 싶다. 다른 때는 달고 또 달아 듣고 있노라면 손발이 근질거릴 정도로 달콤한 말 잔뜩 쏟아놓던 이가 어찌하여 이리도 조용한 것일까?
게다가 저 시선은 또 무어란 말인가? 원래도 새카만 눈동자가 지금은 원향전 구석에 오래된 우물보다도 더 깊어 보고 있노라니 더럭 겁이 날 지경이다. 잔뜩 어둑한 눈이 하염없이 저를 바라보니 그것만으로도 옴짝달싹할 수가 없더라. 그렇지 않아도 이미 그 품에 단단히 갇혀있거늘 이제는 저 깊은 시선으로 저를 꽁꽁 얽어매니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싶다.
무어가 더 남은 것이 있는 것일까?
하여 열심히 머리를 굴렸더랬다. 모자란 머리나마 굴리다 보면 뭐든 답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 제 서방 묵직한 낯 마주한 채 열심히 제 머리를 쥐어짰더랬다. 어디 보자, 내가 무엇을 빼먹은 것이야? 저가 오해하였음을 밝혔다. 저의 광증도 그로 인한 것임을 인정하였고 저에게 잘못이 있음을 사죄하였다. 그러자 태자 전하께서 사죄를 하시더라.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저 미안타고만 하시더라. 짚이는 것이 없는 건 아니지만 무슨 상관이랴. 제 몸에 금아가 형체를 가지고 깃든 마당에 무어 더 원망하고 탓할 것이 있을까. 그래서 그 사죄 다 받아주었다. 미안타는 그 말 다 받아주었더랬다. 제 나름대로 할 건 다 한 것이다. …헌데 그 결과가 이 꼴이다. 이 불편한 상황이 그 결과인 것이다.
왜? 어찌하여서?
그렇지 않아도 어수선하던 머릿속이 이제는 아예 난장판이 되었다. 제 기억 탈탈 털어보아도 나오는 것이 없으니 그럴밖에. 금갈색 눈동자가 요동을 치는 것도 그러한 까닭이더라. 이상타, 이거 참 이상타. 참말로 뭔가 더 남은 것이 있는 것이야? 그래서 태자 전하께서 이러시는 게야? 이상타, 대체 무어가 남은 것이람?
그렇게 어지러운 머릿속 한껏 쥐어짜낼 때였다.
“…―너는….”
“…네, 네?”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할 것 같던 이가 갑자기 입을 뗀다. 그것도 돌덩이 같이 굳어있던 그 낯 위로 흐릿한 웃음기 드리운 채 느릿느릿 묵직한 음성 흘리시더라.
“너는, 내가 무어라 말해도 믿지 않겠지.”
“…저, 전하…?”
“괜찮다. 네가 어찌 그러는 것인지 내 다 아니 괜찮아.”
그에 청은 기다 아니다 답하는 대신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참으로 안타깝게도 제 서방이라는 이에 대한 신뢰는 진작 바닥난 탓이었다. 아니, 믿고 싶은 마음은 남아있으되 이미 쌓인 불신의 크기가 제 스스로 돌이켜 보아도 무서울 지경이라.
아아, 이래서 태자 전하께서 나에게 사죄를 하였던 거로구나. 내가 이토록 당신을 믿지 못하는 것을 아시고 그러신 것이구나. 한참이나 저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던 문제가 단숨에 사라지는 듯하더라. 아니,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나 어렴풋하게나마 저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감이 잡히더라.
그에 말없이 제 서방의 절절한 시선 외면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니 기다렸다는 듯 저를 감싸는 온기에 더욱 힘이 실린다. 뭐라 더 말도 않고 그저 더욱 단단히 끌어안는 그 힘이 참으로 당황스럽더라.
“―나를 믿어달라는 말은 하지 않으마.”
다만, 그저 들어다오.
게다가 기다렸다는 듯 제게로 떨어지는 묵직한 음성에는 절박함이 한가득 담겨 있으니 이마저도 외면할 수는 없더라.
“그를 듣고 네가 무어라 생각하든 상관없으니 제대로 듣기라도 해 주렴.”
“…예. 전하.”
하여 다시 입을 떼니 그제야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제 귓전을 울린다.
“청아, 내 색시.”
내 곱고 고운 청수련.
평시처럼 저를 부르는 그 음성이 어찌 그리 반갑던지 알 수가 없더라.
“나는 살아야 했다. 그는 이야기 하였지?”
“예.”
“그리고 앞으로도 살아남을 작정이란다.”
“…예?”
덕분에 제 서방 말 냉큼 알아듣지 못하였더랬다. 아니, 뭐라 말하는지는 알아들었으나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암만해도 알 수 없더라. 오죽하면 저가 먼저 외면했다는 것도 잠시 잊고 번쩍 고개를 들어 제 서방 낯을 살피기 시작하였을까.
“그래서 아직 다 말해 줄 수 없음을 알아다오.”
“…예??”
“살아남고자 오랫동안 싸워온 즉, 그 싸움이 끝나기 전에는 내 너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구나. 다만 이제 그 끝이 목전이라지.”
허나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결코 저를 희롱하고자 하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으니 이는 지난 시간 저가 겪어왔던 태자 전하의 모습이 아니더라.
“모든 것이 끝나면…, 그 싸움이 모두 끝나면 내 가장 먼저 너에게 달려올 것이다.”
그래서 도저히 읽을 수가 없더라.
“그리고 그동안 하지 못한 이야기 모두 털어놓으마.”
이 사내가, 제 서방이라는 이가 지금 무슨 뜻을 가지고 이리 말하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더라.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주어.”
내 금시 다 해치우고 올 것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다오, 내 색시야.
그래서 가슴이 서늘하였다. 마치 예전에 백치 노릇 할 적의 그 모습을 마주하는 것만 같아 정신이 번쩍 들더라.
제국 경의 역사에 다시없을 대혈사가 벌어지기 보름 전 원향전의 공기는 이토록 불안한 것이더라.
때가 차매, 급류와 같이 흘러가던 시간이 쏜살과 같이 바뀌더라. 무슨 말인가 하면 대계의 마지막을 장식하고자 광을 비롯한 모두가 일각이 여삼추라는 말도 부족할 지경으로 움직이는 때라는 뜻이라.
특히나 거사를 실행할 날짜까지 딱 이레가 남은 지금은 여우는 물론이요 너구리나 쥐 떼의 시선조차 개의치 않을 지경에 이르렀으니 지금 사내가 바람처럼 회랑을 가로지르는 것도 모두 그러한 까닭이라. 바쁘고 바쁘니 그 와중에 주어진 업무까지 모두 감당하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태자님께서는 오늘도 끼니조차 잊은 채 할 일에만 몰두하시었다.
“읊어보렴.”
그런 까닭으로, 며칠째 제대로 머리 뉘어 잠을 청한 기억이 요원한 탓에 그 신경 칼날처럼 곤두세운 채 그의 집무실로 들어서기 무섭게 툭 던지니 기다리고 있던 책사의 낯이 와그락 일그러진다. 누가 보아도 불경스럽기 짝이 없는 행사이나 그런 것까지 일일이 짚고 넘어가기에는 무엇 하나 촉박하지 않은 것이 없을뿐더러 저이의 처지도 그 주인 된 자와 크게 다를 것이 없는 까닭에 사내는 너그러이 무시하고 말았다.
“뭐 하누?”
허나 너그러이 무시하는 것은 하는 것이고 촉박한 것은 촉박한 탓에 곧장 채근이 이어지니 곰 같은 책사 입에서 한숨이 터진다.
“…에효…, 내 주군께 무얼 바라리오.”
“논다. 흰소리 작작하고 얼른 읊기나 하렴.”
“예, 예. 그럼 읊어보겠나이다. 일단 군부의 문제는 군부에서 처리하기로 이야기를 마쳤나이다. 회유할 자는 회유하였고 겁박을 당하는 자는 그 내용에 따라 차등을 두어 구별을 해 둔즉, 여우가 움직이는 즉시 정리가 될 것이옵니다. 다만 너구리와 쥐 떼는 모두 치웠다가 살림이 어려워질 지경인 탓에 우선 치워야 할 자만 골라두었사옵니다.”
“흐음…. 그랬다가 살아남은 놈들이 굴로 파고들면 그다음은 어찌하려고?”
“하여 우두머리 노릇 할 것들만 우선으로 정리해두었사옵니다. 동편은 이번에 거의 다 정리가 될 예정이고 서편은 수장급 셋만 우선 치울 예정입지요.”
“셋? 다섯이 아니라?”
엊저녁만 해도 다섯이지 않았어?
“여우가 다른 둘의 여식을 노리는 중이라 해서 제외했나이다.”
“저런…. 효녀들이로구나. 제 목숨 날려 그 아비는 물론이요 가문까지 지켰으니 이런 것을 두고 효녀라 하지 않으면 무어라 할까.”
“그러게 말입니다. 아, 거기 붉게 인을 친 것이 그와 관련된 것이옵니다. 살펴보시옵소서.”
“망할 것들. 일을 치려면 좀 일찍 치던가.”
“그것들 탓만 할 것도 아니지요. 주군께서 몰아붙인 게 하필 지금 터지는 것이니까요.”
괜히 일각이 여삼추라 하는 것이 아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라 하여 잔뜩 준비를 해 놓았더니 정작 물겠다고 덤벼들어야 할 이 모자란 것들이 자기네들끼리 자중지란을 일으켜버린 탓에 무얼 하든 손질이 곱절은 들게 된 것이다. 덕분에 기껏 준비한 내용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기 일쑤이니 그렇지 않아도 끝이 목전인 탓에 더 이상 시간은 물론이요 인력도 한정이 되어있는 사내로서는 많이 움직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더라.
“터져도 한쪽만 자꾸 터지잖느냐. 몰아붙이기는 다 고만고만하게 몰아붙였거늘 어찌 터지기는 셋 중 하나만 터지는 것이야? 그 형태가 다른 놈들 살 깎아 먹는 것이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진작 갈아엎었을 게다.”
“참으시지요. 이제 겨우 열흘도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 갈아엎어봤자 달라질 것이라고는 지극히 미미한즉, 오히려 발목만 잡힐 수도 있사옵니다.”
“안다, 알아. 그래서 내 더욱 부아가 치미는 게지. 이래서야 원래의 목적에서 벗어나는 일이 벌어나고도 남음이니….”
이러다 여우만 남겨놓는 것이 아니라 여우부터 쓸어버릴까 걱정이야.
그에 태자 전하 역정 가득한 음성으로 한탄하시니 그 맞은편에서 열심히 수결 받을 서류 뭉치 챙겨 들고 있던 책사의 고개가 잠시 비뚜름하니 기운다. 바빠서 정신이 날아갈 지경임에도 제 주군 언사며 행사가 암만해도 낯이 선 탓이다.
“송구하오나, 주군.”
“으음?”
“그냥 한꺼번에 싹 쓸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모로 가도 목적지에만 확실히 도착하면 될 일이니 굳이 여우만 남겨두고 치울 것은 없지 않겠사옵니까?”
“나도 그리하면 딱 좋겠다만 하필 폐하께 미리 약조한 게 있어서 말이지.”
“…아니 주군께서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쓰셨다고….”
“폐하께서 대계를 허락하기에 앞서 내건 조건이기도 하다. 게다가 어찌하여 그런 조건을 내건 것인지 짐작하고도 남음이니 그 정도는 제대로 들어드려야지.”
“쩝…, 그런 것이라면 어쩔 수 없지요.”
“으음? 네가 어쩐 일이냐? 또 질척질척 늘어질 줄 알았더니?”
“온전히 주군 혼자만의 선택이라면 진작 그리하고도 남았겠지요. 하오나 아니지 않사옵니까? 되었으니 이거랑 이것, 그리고 이것까지 모두 살펴보시옵소서.”
허나 대강의 사연을 듣고 보니 제 주군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임을 확인한 책사는 다시 돌아볼 생각 없이 원래의 일에 다시 주의를 집중하였다. 그 단호할 정도로 시원스러운 모습에 부아가 치미는 중에서 슬며시 입매 한끝을 길게 늘이는 태자 전하이시다. 그가 저 곰 같은 이 제 책사 삼은 까닭을 떠올린 덕분이다.
“뭐 하십니까? 아직 살필 것이 많사옵니다.”
결국 잠시나마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저것. 저의 선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하면 두 번 미련을 두지 않는 저 말끔한 성정이 그 능력 이상으로 저가 원하는 조건을 채운 까닭이라. 당장 웃는 저를 향해 사람 실없다고 버럭 대는 불경함마저도 감당할 만한 능력이요 성정을 갖춘 자이니 저가 보위에 오른 뒤에도 두루 써먹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사더라.
“너구리 떼의 동선은 모두 마무리되었나이다. 이틀 내로 크게 부딪힐 빌미가 마련될 것이니 미리 군부에도 연통을 해 둘 것입니다. 그리고 쥐 떼는 밀군이 바꿔놓은 전서(戰書)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병력 이동을 시작하려 하니 늦어도 이 역시 사흘 내로 모두의 앞에 꼬리가 드러날 것인즉, 그때부터 때려잡기 시작하면 닷새 안에 모두 정리할 수 있겠지요.”
허나 사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업무에 집중하기 시작한 책사는 연신 저 할 말 줄줄 읊기 바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장 답을 듣지 못할 의문에 미련을 두기에는 상황이 촉박해도 너무 촉박한 탓이라. 10년이 넘는 시간을 들여 치울 것은 치우고 꾸밀 것은 꾸며놓은 것도 이 수확의 때를 위함이니 이제 돌아볼 여유는커녕 숨 한 번 몰아쉴 짬도 없다. 특히 사내를 대신해 은밀한 계책을 움직여야 하는 책사로서는 하루가 열두 시진이 아니라 스물네 시진이라도 모자랄 판이더라.
“아, 그리고 원향전으로 스며드는 여우의 종자는 어지간히 정리되었사옵니다. 다만 지나치게 막을 시 오히려 의심을 살 수 있는 바, 말자 몇은 부러 남겨두었사옵니다.”
“말단이 오히려 시선에 벗어나기 쉬운 법이지. 하찮을수록 허투루 보게 되는 법이니까.”
“하여 궁녀로 가장한 밀군 둘이 선임 자격으로 붙어 있사옵니다. 가지고 들어온 독물은 닮은 모양새의 약재로 바꾸어두었고요. 특별히 배태한 이에게 좋은 약재로 골라두었으니 안심하옵소서.”
“…증좌는?”
“당연히 다 모아두었지요. 솔직히 이것만 털어도 냉궁행은 확정일 겁니다. 아니, 당장 폐서인도 가능할 걸요?”
“―너무 너그럽구나.”
“…예?”
“겨우 냉궁에 폐서인이라니, 너그러워도 너무 너그럽지 않니.”
평시와 다름없는 가볍고 느른한 어조인 탓에 상전의 말 곧장 알아듣지 못한 책사는, 그러나 그 속에 담긴 감정의 깊이가 저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 편히 살려둘 것 같으면 시작도 하지 않았느니.”
지나가듯 흘리는 말이 온전히 진심이라는 것이 실로 무섬증이 일 지경이라.
“폐하의 명이 아니더라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남겨 놓을 치는 여우 한 마리뿐이라지….”
“…….”
팔락, 팔락….
태자 전하의 개인 집무실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으니 울리는 것은 주인의 손끝에 붙들린 종이쪽의 비명뿐이더라.
후에 『위봉(僞鳳)의 패악(悖惡)』이라 제국 역사서에 기록될 희대의 환란을 닷새하고 반나절 앞둔 사내와 그 책사의 대화는 이런 것이더라.
* * *
제국의 사방으로 흘러내리는 핏물의 시작은 참으로 사소한 것이었다.
큰 장이 열려 오가는 사람이 넘쳐나는 시간도 막 끝이 날 무렵, 저자에 가마가 오고 가는 순서를 두고 다툼이 일어나니 그 소식을 전해 들은 황부 치안청에서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다툼이 일어난 곳으로 치안감 하나와 병사 열을 보내었다. 특히 맞붙은 가마가 각각 동관 맥가와 서성 적가의 것이라는 것을 확인한 치안청 수장은 그야말로 땡감 씹은 낯을 하고 몰라도 될 것을 알게 되었음을 깊이 한탄하였더랬다.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어도 제 일신이 고달플 것이 눈에 훤했던 것이다.
헌데 채 반 시진도 되지 않아 증원 요청이 들어오더니 그와 관련된 것이 분명한 새로운 신고가 줄을 잇더라. 이에 곧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린 치안청이 급히 군부에 연통을 넣으니 그것이 유시(酉時) 초엽, 곧 해가 질 무렵이라.
결국 치안청 소속 치안관 스물, 황도 수비군 소속 병사 마흔이 다시 싸움이 벌어진 곳으로 몰려가니 그때는 이미 해가 지고 사방에 불이 밝혀진 뒤더라. 그나마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대로 위에서 벌어진 일인 덕에 통행을 위한 가로등이 자리한 곳이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횃불이나 등불까지 챙겨 들고 달렸으리라. 어쨌거나 그렇게 이르다면 이르고 늦다면 늦은 시간에 황부의 중앙과 사방관문에서부터 몇 떼의 병졸이 등등한 기세 뽐내며 꼬박 한 시진 내내 싸움이 이어지고 있는 곳으로 모였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기겁을 하였으니 이는 단지 그 싸움의 규모가 큰 탓이 아니요, 진작 가마 싸움의 범주를 벗어난 것임을 보고 확인한 탓이더라.
그것은, 두 가문의 이름이 걸린 전쟁이었다.
동관 맥가의 하나뿐인 자부(子婦)와 서성 적가의 차남이 상대보다 먼저 길을 지나려 고집을 부린 결과는 실로 참담하였다. 아니, 쓸데없는 자존심 싸움 끝에 폭주한 두 상전에게는 당연한 결과로되 모자란 상전 행사 따를 수밖에 없던 아랫것들이며 그들과 같은 시간에 그 길을 지나던 이들에게는 다시없을 횡액이더라. 겨우 가문의 자존심 하나로 지존께서 자리하신 황부 한가운데서 흉악한 칼부림이 벌어진 것이다. 심지어 다툼을 중재코자 달려왔던 치안감과 병사들마저 그 시체들 중 하나가 되어있었으니 그 참상 어찌 말로 다 설명하리오.
황당하게도, 맥가의 며느리와 적가의 차남 중 누가 먼저 공격을 명한 것인지는 누구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는 그를 목격한 이가 없거나 그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실은 목격자들 중 살아남은 이가 하나도 없는 탓이니 곧 다툼이 일어난 곳에 자리하고 있던 모두가 가문의 이름으로 눈먼 칼 아래 한 줌 핏물이 된 결과더라.
사태가 더욱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게 된 것도 실은 이러한 까닭이었다.
단지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로 스러진 이들 중 또 다른 세가의 인물들도 상당히 섞여 있었던 것이다. 동관 맥가와 서성 적가의 사사로운 다툼은 이로써 순식간에 황부의 내로라하는 세가들 사이의 혈전으로 번지고 말았다. 원래도 계파와 가문 간 이해득실 등이 얽히면서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관계가 단숨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이를 알아챈 치안청과 황도 수비군에서 서둘러 인력을 동원하였음에도 하룻밤 사이 죽어나간 세가 소속 인명만 세 자릿수를 넘겼으니 뭘 더 말할까. 괜히 가문의 이름이 걸린 전쟁이라 한 것이 아니었으니 동이 틀 무렵에는 온 황부에 피가 강물처럼 흘러내리더라.
게다가 높으신 분들의 다툼에 휘말린 죄로 명줄 끊어진 무고한 신민의 수 또한 만만치 않았으니 그 또한 세 자릿수에 육박하였다. 첫 다툼에서 스물이 죽고 다시 밤새 황부 곳곳에서 숨이 끊어진 이들이 일흔일곱이니 모두 아흔일곱이 한나절 만에 불귀의 객이 되었더랬다. 철철 흘러넘치는 핏물 사이로 부모 자식을 잃은 곡소리가 울려 퍼지니 그럼에도 끊이지 않는 단말마의 비명이며 병장기의 소리가 실로 참담하였다. 사방이 피와 눈물로 점철된 광기로 넘실대니 지옥이 바로 이런 것이라.
당연하지만 지존께서는 크게 노하시었다.
나라에서 금한 사병을 다른 곳도 아니고 황궁의 지척에서 운용한 것만으로도 불온하고 불경한 행사더라. 헌데 그도 모자라 지존의 신하와 군사는 물론이요 무고한 백성들까지 함부로 해치니 이는 곧 역도의 행사라. 이에 지존의 명을 받은 금군이 역적 토벌을 위하여 움직이니 곧 몇 개의 세가가 하루아침에 사라졌더랬다. 그나마 태자 광이 서둘러 나서 죄의 경중에 따라 차등을 두라 청하지 않았다면 제국의 세가라는 세가는 모두 사라졌으리라. 그럼에도 도성 북편에 자리한 형장 바닥에는 피가 마를 날이 없었으니 지존의 진노가 참으로 깊더라. 그렇게 꼬박 사흘 동안 황부 가득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북편 성벽이 효수된 죄인들의 목으로 붉게 뒤덮이니 지켜보던 모두는 부디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기만을 바랬더랬다.
허나 그 사흘이 다 지나기도 전에 사태는 더욱 최악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황부에서의 혼란을 기회 삼아 전국 각지에 몸을 숨기고 때를 기다리던 진정한 역적도당들이 준동하니 이제 황부도 모자라 온 나라가 들썩이게 된 것이다. 고만고만한 제후국이 주로 모여 있는 남부에서부터 들썩이기 시작한 불온한 공기가 눈 깜짝할 새 형태를 갖춰 황궁이 자리한 황도로 움직이니 이번에도 가장 먼저 희생된 것은 지존의 충직한 신하와 백성들이더라. 어찌나 치밀히 준비하고 움직였는지 움직임이 알려진 첫날에만 다섯 개 고을이 짓밟혀 사라지니 몇몇 호사가들은 이를 두고 ‘실은 황부의 일도 이 역도들이 꾸민 일이 아닐까?’하며 수군댈 지경이더라. 하기야 황부의 참사가 시작된 날로부터 채 사흘이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이니 그들의 추측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리라.
어쨌거나 이는 결국 지존을 대신하여 냉정을 지키고자 노력하고 있던 태자 광마저 분노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이었으니, 곧 자청하여 토벌군을 이끌기에 이름이라. 그가 귀한 흑철 아낌없이 들여 만든 갑주 전신에 두르고 비익조들의 수장 위에 올라탄 모습을 본 많은 이들은 그제야 지난 두 차례의 소란을 떠올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더랬다. 이번에야말로 이 참담하고 패역한 사태가 마무리될 것이라는 믿음이 모두의 마음속에 자리를 튼 덕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백치일 적에도 뛰어난 장수의 모습을 보였던 태자 전하셨다. 북에서 일어난 반란 또한 직접 진압하시며 그 공으로 태자의 위에 오르신 분이셨다. 그러니 이번에도 저 몹쓸 역적도당 가장 먼저 쓸어내고 이 환란을 잠재우리라. 지켜보는 모두는 그를 믿어 의심치 않았더랬다.
과연 그 믿음은 곧 제대로 보답을 받았으니 황도 하늘 가득 비익조의 날갯짓이 들어찼던 그날로부터 꼭 이틀 만에 남부에서부터 연이어 올라오기 시작한 승전보가 바로 그것이라. 채 보름도 되지 않아 역도 손에 들어간 2개의 부를 수복한 것은 물론이요 역도들 중에서도 가장 흉악한 기세 선보이던 이들부터 차례로 세상에서 지워지니 머나먼 남쪽에서부터 들려오는 소식에 귀 기울이고 있던 모두는 크게 기뻐하며 태자 전하 용맹하심을 찬양하였더랬다. 하루에도 몇십 명씩 오라에 묶여 황도로 끌려오는 역적 도당의 모습에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환호하였더랬다. 비록 쥐새끼처럼 사방으로 굴을 파고 숨어드는 잔당들 덕에 하루 이틀 늘어지는 시간이 조금씩 지루해지기는 하였지만 그마저도 반란이 끝나는 징조라 여겼더랬다.
이제 곧 이 모든 환란이 가시고 다시금 태평성대가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
반란 백 일을 사흘 앞둔 날, 금부 신문청에서 경천동지한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만 해도 제국의 모두는 그를 믿어 의심치 않았더랬다.
* * *
연해제 27년 여월 스무하루.
황부를 가로지르는 청룡대로 초입에서 가마 통행의 순번을 두고 크게 다툼이 벌어지니 동관 맥가와 서성 적가가 그 분쟁의 원인이라. 서로 다른 계파 간의 기 싸움에 불과할 줄 알았던 이 다툼은, 그러나 곧 황부 전체를 피로 아우르는 크나큰 분쟁의 시발이 되었더라.
이 다툼으로 인하여 비명에 스러진 이들이 모두 일흔하고도 둘에 이르니 그 내역은 다음과 같더라. 두 세가의 가솔 스물에 다툼이 벌어진 당시 그 주변을 지나던 백성이 마흔하나요, 다툼을 중재하고자 달려갔던 치안청 소속 치안감과 병사가 열하나라.
이 참담한 사태에 관은 물론이요 군까지 동원되어 수습에 나서니 그럼에도 이미 때는 늦어 온 사방에서 복수를 빙자한 살육이 횡행하기 시작하였더라.
연해제 27년 여월 스무이틀.
전일의 참사로 인하여 황부 곳곳에서 피가 흐르고 비명이 그칠 줄 모르니 이는 가문의 복수를 이유로 세가와 세가 간에 무력 충돌이 발생한 결과더라.
단 하룻밤 사이 백이 넘는 이들이 명을 달리 하니 사소한 다툼을 핑계 삼아 감히 황궁의 지척에서 군사를 움직이고 병장기를 휘두르는 것도 모자라 무고한 백성의 목숨까지 앗아간 그 패역한 행사에 지존이 크게 진노하사 금군을 움직이시니 이날 하루에만 다섯이나 되는 세가가 멸문에 이르렀더라.
이에 태자 광이 지존 앞에 나아가 충심으로 간언(諫言)하매 그 내용 다음과 같더라.
「그들의 죄 결코 작은 것이 아니나 하찮은 미물조차 무리를 지키는 데 목숨을 아끼지 않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즉, 부디 자비로우신 황상께서는 어버이의 마음으로 어리석은 신민들을 굽어살피사 목숨으로 죗값을 치러야 하는 자들과 아닌 자들을 구분함을 잊지 말아주시옵소서.」
연해제 27년 여월 스무나흘.
제국에 큰 혼란이 닥치니 남부 사리(楂梨)국 수림(樹林)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역적도당이 준동한 까닭이라. 황부의 소란을 기회 삼아 일어난 반란군의 수가 물경 5천에 이르니 그 기세 참으로 흉악하더라.
연해제 27년 삼월 초이틀.
반란군의 기세가 황궁을 향하매 그에 크게 분노한 태자 광이 토벌군의 수장을 자처하며 선봉에 나서니 비익조 백이 일시에 황부 상공으로 날아올랐더라.
연해제 27년 삼월 열하루.
태자 광의 지휘 아래 연전연승이 이어지니 1개 부, 스물다섯 고을이 반란군의 횡포에서 벗어났더라. 허나 이로써 그 기세 크게 상한 역적도당이 마지막 발악에 나서니 제국 남부의 전란은 더욱 깊어졌더라.
연해제 27년 오월 보름.
태자 광이 반란군의 수장과 그의 장수 셋을 산 채로 사로잡으니 마침내 제국의 환란도 끝이 났더라.
연해제 27년 오월 스무여드레.
역도의 수장과 그 장수 셋에 대한 국문이 금부 심문청에서 이루어지니 반역의 배후를 캐고자 꼬박 이레 동안 호된 고신(拷訊)이 이어졌더라. 그를 견디지 못한 죄인들이 하나둘 제 죄와 함께 갖가지 증좌에 대하여 토설하기 시작하니 곧 이 모든 환란의 배후가 밝혀짐이라.
『위봉(僞鳳)의 패악(悖惡)』이 온 천하에 드러나는 순간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