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十一 章 - 開戰(개전) 下
당장이라도 휘몰아칠 것만 같던 피바람이 멎었다. 언제까지 멈춰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멈춘 것은 멈춘 것. 일촉즉발의 불안한 공기로 연신 들썩이던 제국의 북편이 잠시나마 평화를 되찾는 순간이었다.
허나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평화로운 것은 황자님과 어린 후궁 자리하고 있는 위왕부의 백련행궁뿐이었으니 이는 애초부터 위왕부에서의 일이 온전히 명분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음이라. 다른 이도 아니고 지존의 보위에 가장 가까이 자리한 이가 연거푸 혈사를 행하여야만 했던 명분임과 동시에 그가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몇천의 병력을 모두에게 드러낼 명분을 만들기 위한 행사였던 것이다. 그뿐이랴, 배가 다르다고는 하나 친히 제 형제라는 이 명줄 끊어내는 것도 모자라 그 목 위왕부 성벽에다 효수까지 해두었으니 그 명분도 확실히 챙겨두어야 했다. 내키는 대로 움직인 것 같아도 실은 다 나름의 계산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는 소리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이 그 계산대로 흘러가니 남은 것은 그가 만들고 챙기려 했던 바로 그 명분들이라.
덕분에 이제 제국의 저자에 떠도는 수많은 말들은 오로지 한 방향으로 내달리는 중이었다. 아니, 그 말들이 담고 있는 내용이 하나라는 뜻이 아니다. 이를테면 어떤 이는 과연 흑룡의 피 온전히 받은 이다운 행사라 찬탄하였고 또 어떤 이는 제 혈육조차 두 번 돌아보지 않고 참하는 그 단호함에 혀를 내둘렀으며 어떤 이는 아무도 모르게 남다른 무력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두고 각각의 논리를 내세워 설전을 이었더라.
허나 희한하게도 이 말들이 향하는 목적지는 하나였으니 실은 저자의 소문마저 진작 사내의 수중에 들어있는 덕분이라. 애초에 모든 구설의 시작점이 사내의 수족들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아니, 실은 시작점이라기보다는 씨앗이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 그들이 한 것이라고는 관아에서 나온 이들이 저잣거리 이곳저곳 사람이 모이는 곳마다 붙여놓은 방 앞에서 이미 오가는 말 사이에 약간의 추임새만 더한 것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그 손질 덕에 저자에 떠도는 수많은 말들은 이제 한 방향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수천, 수만의 목소리가 하나의 말로 귀결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말하였다.
이제 곧 지금껏 비어있던 태자의 위에 주인이 자리할 것이니 그가 곧 2황자 광이라.
* * *
“이게 대체 몇 번째인지….”
황후 남씨는 조그만 찻잔 안을 찰랑이는 찻물을 바라보며 한숨 같은 목소리를 흘렸다. 오늘 아침 황부에 첫서리가 내렸다더니 과연 흐릿하게 김이 피어오르는 모양새가 겨울이 목전이구나 싶더라.
“워낙에 모자란 놈이라 좀 잘 챙겨두라 따로 언질까지 하였거늘…. 뭘 어찌하면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 하다 그리 멍청하게 뒈질 수 있는 것일까요?”
조곤조곤한 울림과는 달리 그야말로 험악한 내용으로 점철된 그 말소리가 그녀의 발 앞에 부복한 이의 머리 위로 살랑살랑 떨어져 내리니 잘게 떨리던 그 몸이 크게 한 번 튀어오른다. 그 꼴이 참으로 우스꽝스러우니 연지로 곱게 물들인 입술이 길게 늘어지며 우아한 호선을 그린다. 약관은 진작 넘기고 이제 이립을 바라보는 아들을 둔 어미라고는 믿기 힘들만치 앳되고 가냘픈 외양의 미인은 그렇게 말없이 미소 지었다. 제 발 앞에 엎드린 채 달달 떨고 있는 자의 몸이 조금이나마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며 가만히 미소 지었더랬다.
“―상황이라는 것이 참 잘 돌아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라버님?
그리고 그렇게 하염없이 미소만 지으며 제 몫의 찻물 홀짝이기를 꼬박 반 시진. 침묵의 무게에 짓눌려 숨이 턱턱 막히기 시작한 산천 남가의 가주 종명은 지극히 잔잔한 울림을 가진 그 물음에 뭐라 제대로 답도 못하고 다시금 고개를 급히 조아려야 했다. 조아리다 못해 이마가 바닥에 딱 달라붙을 지경이지만 어쩔 수 없다. 저가 아는 한 제 누이의 저런 음색은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던 탓이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의 틈도 없이 조아리고 있는 제 고개 옆으로 무언가 날아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나뒹굴더라.
“대체 무슨 일을 어찌 처리하고 계신 겝니까?”
그리고 조용한 질책이 그 뒤를 따르니 그리 크지 않은 음성임에도 그 아래 깔린 기세만큼은 산도 뒤집어엎을 것이더라.
“들으셨습니까? 삼천. 삼천이나 된답니다. 그놈이 거느린 무력이 삼천이래요. 대체 그놈은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어 우리가 꼬박 10년 걸려 만든 것을 이리도 빨리 만든 것이랍니까?”
차라리 크게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른다면 이리 피가 마르지는 않을 것인데, 희한하게도 제 누이의 음색은 여전히 자분자분 잔잔한 울림을 잃지 않고 있다. 하여 남가의 가주는 조심스럽게 마른침을 삼켰더랬다. 분이 크면 클수록 오히려 차분하게 가라앉는 제 누이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탓에 곧 떨어질 불벼락을 생각하니 그의 쪼그라든 간담 아예 말라붙는 것만 같아 절로 혀가 말려들더라.
“그, 그것이…. 저도 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여 간신히 대답을 꺼내어보지만 도리어 더 큰 분기만 뒤집어쓰게 되었다. 하기야 애초부터 독자(獨子)라는 이유 하나로 가주 자리에 오른 그가 아니던가. 황후가 시키는 것도 열에 한 번은 반드시 망친 탓에 황후의 친동기간이 아니었다면 진작 내쳐지다 못해 명줄 끊어지고도 남았을 이가 바로 당대 산천 남가의 가주더라.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그의 답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으니 이는 그의 누이요 제국의 어미를 깊이 분노케 한 일련의 사태들이 모두 제국의 북편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위왕부에서 벌어진 일인 탓이더라.
이는 모두 제국 북편의 역사적, 지정학(地政學)적 특성 탓이었다.
작정하고 걸어 잠그려 들면 감히 지존이라 할지언정 함부로 걸음하기 힘든 제국 북부의 희한한 특성 말이다.
시작은 당금 지존의 고조부 되시는 무현대제께서 보위에 오르기 전. 그러니까 햇수로는 300년 남짓 되는 때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제국사에 기록된 두 번째 대제. 무신(武神)의 현신이라 불리며 다시 오신 흑룡의 어버이요 지금의 국경을 만든 자, 무현대제의 때로 말이다.
제국 역사에 있어 가장 위대한 황제 중 하나로 꼽히는 무현대제는, 사실 지존의 위에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황자였다. 그 부황되시는 원희제께서 나이 쉰을 몇 해 앞두고 새로이 들인 황후를 통해 얻은 여덟 번째 황자. 이미 적장자를 황태자로 책봉하고도 몇 년이 흐른 뒤에야 얻은 늦둥이 아들이 바로 그였던 것이다.
게다가 애초에 흑룡께서 강림하여 건국하신 제국이다. 그런 까닭에 황위 계승에 있어 가장 우선으로 치는 것은 황자 개인의 나이나 능력이 아니요 얼마나 흑룡의 색을 일신에 지니고 태어나는 가였으니 태어나기를 백발에 청람색 눈을 타고난 그로서는 제 위의 형제가 모두 죽지 않는 이상은 황위에 오를 길이 없더라.
그뿐이랴. 몇 번의 흉사로 오른쪽 눈을 잃은 탓에 온전한 외양이라기에는 부족하기까지 하였으니 그 처지 더 말해 무엇 할까. 그의 무신이라 불리기에 부족함 없는 무위와 오랜 전장 생활을 통해 업게 된 무력이 아니었다면 친왕의 자리는커녕 속 좁은 제 형제들의 투기와 질시에 진작 깔려 죽었으리라.
허나 괜히 그가 무신의 현신이라 불린 것이 아니었으니 매우 이른 나이에 일군의 수장이 되어 전장에 나선 것 역시 그로 인함이라. 그가 첫 전투를 맞이할 당시 겨우 9세에 불과하였다는 것이나 제국의 수많은 적들에게 ‘전장의 하얀 귀룡’이라 불리게 된 때가 그의 나이 13세에 막 접어들었을 무렵이었으니 이는 채 지학(志學 : 15세)에도 이르지 못하였을 때라. 이것만으로도 그 타고난 무재(武才)는 물론이요 그를 바탕으로 한 빼어난 군재(軍才)까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전공을 인정받아 혼례도 올리기 전에 무(武)의 칭호와 함께 친왕의 좌를 하사받은 그는, 그러나 곧 저가 받을 수 있는 봉토가 제국에서도 가장 열악한 환경을 자랑하는 북부임을 알아차렸다. 좀 괜찮다 싶은 곳은 형제라는 이들이 진작 이리저리 갈라 먹은 결과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북부의 일부가 아니라 북부 전체를 모조리 저의 땅 삼게 되었으니 이는 그 척박함에 누구도 그곳을 탐내지 않은 덕분이라.
게다가 그가 제 봉토에 제대로 발을 들인 것이 부황인 원희제께서 승하하시고도 몇 년이 더 지난 뒤였다 하니 그 사이 얼마나 더 척박하여졌는지 더 말할 것도 없으리라. 살아있는 사람보다 짐승이 더 많은 곳. 그곳이 바로 대제께서 친왕의 이름으로 받은 봉토더라.
후에 제국의 마지막 친왕부로 기록이 남게 될 무친왕부의 시작이었다.
헌데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만들어진 무친왕부가 제국의 소속이되 제국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제국 북부가 가진 지리적인 특성 탓에 제국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독립된 국가나 다름없는 형태로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 원래도 척박한 토질에 북방 야만족의 잦은 침략으로 대부분의 지역이 불모지나 다름없는 땅이기도 했지만 애초에 지리적으로도 육지 안의 섬이라고 해도 될 만큼 사방이 고립된 지역이 바로 제국의 북편이라. 이는 당장 300여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에 이르러서도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당장 북은 꼬박 백여 년에 걸쳐 세워진 장벽 너머 야만족이 바글거리는 동토(凍土)가 자리하고 있었고 서는 깎아지른 듯한 협곡에 동은 사나운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게다가 제국에 직접 맞닿아있는 남쪽마저 몇몇 관도를 제외하면 더없이 울창한 수립으로 막혀있었으니 그나마도 대제께서 친왕일 적에 그 무력을 바탕으로 확장할 수 있는 만큼 확장한 결과더라. 처음 그가 부황에게 친왕의 위와 함께 그 봉토로 받았을 무렵에는 수림 너머 약간의 땅이 전부였다 하니 그 사정 더 말해 무엇 하랴. 하기야 난군(亂君)으로 악명 높던 이복형제의 질시 탓에 열셋 어린 나이에 남만 토벌의 선봉장 자리에 올랐다는 것을 생각하면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홀대라.
허나 제국의 북쪽 끝에 자리한 봉토에 첫발을 들이고서야 이 극악한 조건을 확인하신 대제께서는 오히려 크게 기꺼워하시며 이 약점을 오히려 강점으로 이용했다. 이는 처음 자리 잡을 당시만 해도 오솔길이나 다름없이 방치되어있던 몇 개의 길들이 실은 하나같이 요긴한 외부 교역로임을 알아차린 그의 책사 덕분이었다. 여기에 조건들을 잘 따져보면 그야말로 천연의 요새라는 사실까지 확인한 책사, 곧 후대의 손을 통해 명재상으로 이름을 남긴 맹가 호(浩)가 주인의 허락 아래 신이 나 손질을 하니 각자의 권력다툼이며 주색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던 대제의 이복형제들이 상황을 알아차렸을 즘에는 이미 북은 제국의 영토이되 제국의 영토가 아닌 곳이 되었더라.
그것은 홀대 속에 변방으로 내몰린 것을 빌미로 제국의 그늘 아래 자리한 왕부가 아닌, 하나의 독립된 국가가 되기를 꾀한 결과였다.
문제는, 그가 결국 지존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이다.
그냥 들으면 이것이 왜 문제인 것인가 싶으리라. 허나 생각해보라. 온전히 하나의 나라로 독립하고자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제국과의 연결을 끊어놓은 곳이 바로 무친왕부였다. 아니, 단순히 연결만 끊어놓은 것이 전부가 아니었으니 이는 나라가 나라답기 위해 필요한 것이 땅덩이만이 아님이라. 진작 각지에서 모아다 놓은 인재들은 물론이요 척박하다 외면 받던 땅덩이로도 먹고 살 수단을 마련해놓았던 것이다. 실은 무친왕부를 그대로 독립시켰더라도 이상할 게 없었던 것이다.
허나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으니 대제께서 처음부터 무력시위를 통한 독립을 꾀한 탓에 넓디넓은 무친왕부 곳곳이 하나의 훌륭한 요새요 전진, 혹은 보급 기지가 되었다는 점이었다. 원래도 규모와 상관없이 천연 요새라 할 만한 지역을 작정하고 손질한 결과였다. 실제로 그가 「폐제의 화(禍)」라 불리는 사건을 빌미로 휘하의 군사들을 황궁으로 진격시킬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까닭이었으니 이를 바꿔 말하면 대제가 황궁에 자리를 잡은 이후 가장 주의를 기울여야 할 곳이 되었다는 소리.
하여 대제께서 보위에 오르고 어수선한 나라 살림 정리되기 무섭게 가장 먼저 손을 댄 곳 역시 무친왕부였다. 몇 안 되는 관도를 크게 넓히는 것을 시작으로 너른 땅 이곳저곳을 필요와 용도에 따라 이리저리 쪼개매 본디 당시 제국의 형태를 흉내 내어 모두 9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던 무친왕부는 18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졌다. 그리고 서로 반목하는 자들로만 골라 18개 구역 중 17개 구역을 채우니 이는 서로 경계를 하느라 감히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노림이더라.
다만 그중 원래 친왕부의 궁이 자리하고 있던 곳을 따로 떼어내 장자로 태어났으나 큰 죄를 지어 경면(黥面)의 형을 받은 후궁을 어미로 둔 죄로 황자의 위는 물론이요 친왕의 위조차 받지 못하고 오직 군호(君號)만을 받은 아들에게 봉지(封地)로 내어주었다. 이것이 바로 위왕부의 시작이라. 바꾸어 말하면 오직 이곳만큼은 지금껏 황가와의 연을 이어가는 곳이더라.
오랜 세월에 걸쳐 오직 제국 경의 황실을 위해 예비 된 곳. 그것이 바로 위왕부였던 것. 그리고 이것이 바로 황후의 세력은 물론이요 귀족원이나 여러 세가들의 세력들이 제대로 파고들지 못하는 까닭이었다. 심지어 그들 중 누구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으니 이는 원래도 위왕부의 진정한 실체가 오직 황위 계승이 예정된 자에게만 전해지는 탓이더라.
“내 더는 아니 되겠습니다.”
허나 그런 사정 결코 알 리 없는 황후 남씨로서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제 손을 벗어나는 오랜 대계가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라. 제 손 안에 들어있던 것이 꽤 많았던 것도 같은데, 헌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남은 것이 없다. 이제 한 걸음만, 더도 말고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저가 진실로 원하던 그 마지막 하나마저 제 손에 들어올 판이었는데 그것이 사라진 것이다.
“내 더는 아니 되겠다 이 말입니다.”
앙다물린 붉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음색에 분기가 가득하니 원독 가득한 귀녀의 음색이 이런 것이 아닐까.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제 누이 시키는 일 하는 게 전부인 산천 남가의 가주는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것마냥 오싹한 한기를 느끼며 다시금 쿵쿵 바닥에 이마를 박았더랬다.
“그놈, 그 몹쓸 놈 반드시 치워버리겠다 이 말이에요!”
겨우 두 시진 뒤. 지존의 입을 통해 청천벽력이 떨어져 내릴 줄도 모르고 그리 독을 품었더랬다.
내 반드시 휴가를 받고 말 것이니….
가의는 이를 갈며 스물다섯 번째 두루마리를 길게 펼쳐 들었다. 잘나도 너무 잘난 주군을 둔 덕에 무엇을 하든 번갯불에 콩을 볶아 먹겠다는 의지를 담아 달려들어야 하니 지금도 딱 그 짝이라. 새벽 닭 우는 소리와 함께 시작된 업무가 오반 때를 훌쩍 넘겨 석반 때가 목전임에도 줄어들 줄을 모르니 가의로서는 대계고 나발이고 당장이라도 달아나고 싶은 마음만 한 다발이 되었다. 허나 어쩌겠는가. 이미 밝혔다시피 이게 다 저가 잘나도 너무 잘난 주군을 둔 탓인 것을. 후회한다고 물릴 수도 없는 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2황자의 책사는 더없이 묵직한 한숨 길게 토하는 것으로 부글대는 속 다독였다. 당장이라도 손에 들린 기다란 두루마리 구기다 못해 찢어발길 듯 부들대던 커다란 손 뻣뻣하게나마 원래의 목적대로 움직이는 것도 그러한 체념의 결과더라.
내 이것만 끝나면 남방 다도해로 떠나고 말 것이니….
그렇게 스스로가 생각해도 이뤄지기 요원할 다짐만 거듭하며 석 자는 족히 넘을 두루마리의 내용을 꼼꼼히 살피기 시작하였다. 다행히도 세필로 소상히 기입해놓은 그 내용들이 하나같이 그의 우울함을 달래기에 부족함이 없으니 우중충하던 낯 위로 슬금슬금 환한 빛이 스며들더라.
어디보자, 이것은 서경부의 멍청이 조져먹을 때 써먹으면 될 내용이로구나. 음음, 이거 좋구나. 그러고 보면 그 작자 숨겨놓은 재산이 꽤 쏠쏠하다지? 하기야 그러니 다섯이나 되는 첩을 데리고 사는 게지. 옳거니, 이건 곧 작살날 서부 국경 정비에 돌리면 되겠구먼. 그리고 이것은 또 어디더라…. 어이쿠, 해경부도 만만치 않구먼. 어째 경자 돌림 부의 부주라는 것들은 다 그 나물에 그 밥인 모양이네. 이것은…. 옳지, 수군으로 돌리면 되겠군. 어차피 수군 본부가 해경부에 있으니 딱 좋아. 음음, 딱 좋구나.
…과연 그 주종이 똑 닮았으니 하필 가장 많이 닮은 것이 좋게 말하면 근검절약하는 정신이요 제대로 말하자면 수전노 기질이다. 어쨌거나 덕분에 남의 돈 털어 제 돈 들어갈 구멍 알차게 메울 생각으로 곰 같은 낯짝 위로 희색이 만연하여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오금이 저릴 모양새가 되었다. 하기야 앞서 스무 개가 넘는 두루마리가 모조리 앞으로 어떻게 돈이 나갈 것인지를 정리해놓은 것들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기는 하지만 말이다.
게다가 남은 두루마리 셋도 어디에 어떻게 몹쓸 돈이 숨어있다는 내용들이 태반이라 나중에는 사내다운 두툼한 입매가 좌우로 길게 늘어지다 못해 아예 귀에 가 걸릴 지경이더라. 하여 겨우 한 시진 만에 앞서의 것보다 배는 되는 길이의 두루마리 넷을 모두 읽고 확인하는 가의였다.
“어이쿠…, 벌써 시간이….”
허나 암만 빨리 마무리를 하면 무엇 할까. 이미 잡아먹은 시간이 한참인 것을. 그렇지 않아도 겨울에 접어들며 해가 짧아진 덕에 이미 창문 한 귀퉁이가 어둑어둑하다. 그제야 오늘도 저의 하루가 이렇게 날아갔구나 싶어 시무룩한 낯을 하던 가의는, 그러나 곧 어딘지 후련한 얼굴이 되어 저가 종일 붙잡고 있던 두루마리들을 기름을 먹여 새카맣게 번들대는 궤짝 안에 쏟아 넣었다. 지난 한 달여간 쉴 새 없이 몰려든 일거리들이 드디어 끝을 보인 것이다. 한 마리 불곰과도 같은 거구가 씰룩씰룩, 꿀렁꿀렁 해괴한 움직임을 선보이는 것도 실은 그런 까닭이었으니 꼬박 한 달 만에 맞이하게 된 여유가 참으로 기껍고도 또 기꺼운 책사님 되시겠다. 심지어 며칠 새 부쩍 차가워진 날씨마저 기꺼우니 이는 흔적을 지우려 굳이 비싼 화골산 쓸 일 없이 제 침소 데우는 장작으로 써먹을 수 있는 덕이라. 하여 또 그 곰 같은 풍신 씰룩씰룩, 꿀렁꿀렁, 제 마음속에 울려 퍼지는 음률 따라 움직이며 제법 묵직한 두루마리 궤짝 열심히 제 침소 아궁이 속에 밀어 넣었더랬다.
“―나리! 나리!”
“……응?”
헌데 그가 막 아궁이 속에 궤짝 밀어 넣기 무섭게 누군가가 애타게 주인을 찾으며 헐레벌떡 달려 들어온다. 가의의 가문이 망조가 들었을 때에도 충심 하나로 가씨 가문의 사람으로 남았던 노복이 내일모레 일흔이라는 나이도 잊은 채 헐떡헐떡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리는 것도 모자라 저리 애타게 그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영감,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나리! 허억! 나리!”
“아이고, 이러다 숨넘어가겠네. 숨 쉬어, 숨.”
“헤엑, 그, 그게, 아이고, 그게 문제가, 쿨럭쿨럭…, 아, 아닙니다!”
“응? 뭐가?”
게다가 주인 앞에 당도하기 무섭게 할 말 쏟아놓느라 숨도 제대로 못 쉰다. 이건 뭐 말을 하는 것인지 헐떡이는 것인지 구분도 되지 않을 지경이라. 하여 그 들썩이는 마른 몸 다독이다 말고 미간을 모으는 가의다.
“저자에, 후욱, 저자에 방이 붙었습니다. 방이 붙었어요.”
그리고 드디어 숨이 좀 골라지나 싶더니 냉큼 쏟아놓는 말이 저것이다. 대체 무슨 대단한 내용이라고― ….
“태자님이 정해졌답니다!”
“………뭐?”
…대단한 내용, 맞구나.
“2황자님을 태자로 책봉하신다고, 석 달 뒤에 책봉식이라고 합니다.”
“………뭐라????”
심지어 이마저도 번갯불에 콩을 튀겨도 열댓 번은 튀겨 먹을 내용을 담고 있으니 2황자님, 아니 태자님의 책사께서는 그대로 넋이 빠지고 말았다.
“그분이 나리께서 모시는 분이시지요? 그렇지요?”
드디어, 드디어 나리께옵서 가문을 살리시게 되었어요!
“…….”
그리고 제 충직한 노복이 기쁨에 겨워하거나 말거나 가의는 뻐근하게 저려오는 뒷목을 가만히 부여잡으며 곧 들이닥칠 일거리들을 짐작하고자 머리를 쥐어짜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자꾸 헛웃음이 나온다. 허허, 허허허…. 덕분에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중에도 가쁜 숨 고르느라 여직 헐떡대고 있던 노복 낯이 우중충하니 구겨지는 것도 모르고 연신 헛웃음을 흘렸다.
“나, 나리?”
괜찮으십니까요? 나리?
하여 늙은 하인의 조심스러운 물음에도 간신히 손짓 몇 번으로 답을 대신하였더랬다. 허나 어쩌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니 나오는 건 웃음뿐인 것을. 그래, 어째 좀 편하다 했다. 어째 일이 술술 풀린다 싶더라. 어째 해 떨어지기 전에 다 끝이 났구나 싶더라!!!!
“…끄응…”
“아이고 나리!!”
누가 핏줄 아니랄까봐 하는 짓이 똑 닮았구나….
결국 곰 같은 외양의 책사님께서 뒷목 부여잡은 모습 그대로 훌쩍 넘어가니 홀로 어린(…) 주인과 그 거처 살림 보살피던 늙은 종만 난리가 났더라.
제국의 북편 끝자락에서 ‘위왕의 소란’이 일어나고 마무리 된 지 보름 남짓.
천하를 다스리시는 지존께서 마침내 황실의 미래를 결정하시었으니 그 뜻이 전국 방방곡곡 알려지지 않은 곳이 없더라. 그 거침없는 행사에 백성들은 누가 더하고 덜할 것 없이 진심으로 기뻐하였으되 졸지에 날벼락을 맞게 된 만조백관들은 웃다가 울기를 반복하였으니 과연 제국에서 가장 고달픈 것이 관에 속한 이들이라는 말은 틀린 것이 아니더라.
허나 웃다가 울 겨를조차 없는 이들이 있었으니 사내와 그의 책사가 대놓고 너구리 떼라 부르기를 예사로 여기는 무리들이라. 따로 연통을 하고 말 것도 없이 약속이나 한 듯 은밀히 한 곳에 모이니 그곳이 어디인가 하면 동의 우두머리가 가주로 있는 동관 맥가의 저택 안에 자리한 비처라.
“버려야지.”
그리고 어지간히 사람이 모인 것을 확인하기 무섭게 동관 맥가의 주인이자 귀족원의 수장인 맥가 천우는 예의 그 사람 좋은 얼굴 가득 단호함을 담아 잘라 말하였다.
“득이 되기는커녕 독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지 않으냐? 하루라도 빨리 버리는 게 답이로다.”
허니 혹시 깊이 엮인 것 있으면 서둘러 잘라내고 털어내시게.
게다가 이어지는 말은 더욱 단호하였으니 이는 괜한 미련으로 미적대다 엉뚱하게 엮여 사라질 일을 사전에 예방하려 함이더라. 사실 반 시진 전만 해도 설마 이런 참견까지 필요한 것일까 고민하였지만 제 말 끝나기 무섭게 난처한 낯을 하는 이가 대번에 열 손가락을 꽉 채우는 것을 보아하니 말하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손발이 되어 움직여주던 이들이 몇 번의 흉사를 연거푸 겪는 사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판국이 아니던가. 여기서 더 토막이 나면 모가지만 남을 판이라.
“쯧쯧…, 사람들이 어찌 그리 코밑만 보고 다니는 게야?”
당장 몇 푼 챙기다 영영 골로 가는 수가 있어.
그에 부러 역정 가득한 낯을 하고 몇 마디 더 붙이는 동의 수장이라. 이러고도 말귀를 못 알아들으면 그 작자부터 버리겠다며 으름장을 놓기까지 하였으니 과연 쓸 만한 이들 후르르 쓸려나간 타격이 적지 않다. 인력만 넉넉하면 당장이라도 정리하고 싶건만, 워낙 토막이 날 대로 난 탓에 저런 것들까지 다 끌어안아야만 하니 이거 참 답답하구나. 하여 또 한 번 소리 내어 혀를 찬 노인은 제 손으로 직접 장죽에 연초를 채우고 불을 붙였다. 성질 같아서야 독주 한 잔이 간절하지만 취중에 논의를 이어가기에는 사안이 사안인 탓에 연초 연기 몇 모금으로 대신하려는 것이다.
“그나저나 황상께옵서도 참말 너무하시구먼요. 어찌 한마디 논의도 없이 이런 중대사를….”
그러는 사이 맥가 다음으로 동에서 세력을 자랑하는 목동(木棟) 초가(草家)의 가주가 입을 떼니 이쪽은 시작부터 불경한 원망이다. 허나 비처에 모여든 이들 중 그를 두고 뭐라 입을 대는 이는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초가의 가주가 그들 중 두 번째로 큰 세력의 주인이라서가 아니요 모두 진심으로 그의 말에 공감하였기 때문이라.
“누가 아니랍니까.”
“암요, 그렇고말고요.”
“귀족원이며 문무백관들을 우습게 여기시는 게지요.”
“거참…, 해도 너무하시는구려.”
하여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르르 동의를 표하니 제법 넓은 비처가 불온한 공기로 술렁이기 시작한다. 아니, 술렁이다 못해 일촉즉발의 긴장감까지 더해지니 무엇이든 계기만 있다면 대번에 크게 터져 나올 기세라.
―타앙!
허나 노회한 우두머리는 그를 두고 보지 않고 장죽을 휘둘러 제 앞에 놓인 놋재떨이 소리 내어 두들겼다. 겨우 그것만으로도 뭉게뭉게 일어나던 불온한 공기가 맥없이 흩어지니 맥가의 가주는 비어져 나오는 비웃음 감추느라 잠시 애를 먹어야 했다. 이 시급한 와중에도 제 위세 좀 더해보겠다고 함부로 떠들어대는 초가 놈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뭐가 중요한지도 모르고 들썩이는 놈들을 보고 있노라니 분이 치밀다 못해 웃음이 날 지경이라.
“정신들 차리시게나. 이미 벌어진 일을 두고 입을 대봤자 시간만 아깝지 않은가?”
그저 한 사람이 아쉬운 지금이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이미 황후와 등지기로 결정한 이상은 머저리에 배냇병신이라도 세력만 있으면 다 업고 가야 할 판이라. 게다가 한 손이 열 손 못 이기는 법이라 하지 않던가.
“게다가 우리가 입을 댄다고 정한 것을 물릴 분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별수 있나. 이런 모자란 것들이라도 어르고 달래 저가 원하는 대로 끌고 갈 밖에.
“그, 그는….”
“그야 그렇지만….”
“허나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옳습니다. 이미 황궁에 닿아있던 선 중 많은 수가 사라진 참이 아니더이까?”
“이대로라면 2황자가 보위에 오르기도 전에 모두 밀려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럼 황후를 굳이 버릴 것까지는 없지 않을까요?”
“썩어도 준치라고 내명부의 수장을 버릴 것까지는….”
하지만 이 모자란 작자들이 그런 깊은 뜻 알 리 없다. 어느 한 놈 주둥이가 터진다 싶더니 서로 한 마디씩 보태느라 정신이 나간 모양새더라. 심지어 말이랍시고 쏟아내는 것들이 더도 말고 흰소리 천지이니 그에 맥가 천우는 이제 진심으로 역정을 담아 땅땅! 장죽을 내리쳤다. 나중에는 놋재떨이가 그 기세 이기지 못하고 뒤집어져 나뒹굴 만큼 두들기고 또 두들겼다.
“―내 말하지 않았나.”
지금 급한 것은 그게 아니라고 말이야.
그리고 마침내 쥐죽은 듯 조용해진 것을 확인하고서야 다시 입을 떼니 나오는 것은 타박 아닌 타박이더라.
“어차피 황후는 폐하는 물론이요 2황자에게도 버린 패일세. 왜 그 계집이 제 배로 낳은 자식 대신 역도의 피를 받은 3황자를 내세우려 들었겠는가? 저도 제 신세 어찌 될지 잘 알고 있으니 그런 게 아니겠는가? 헌데 그런 물건을 어찌 버리지 않을 수가 있겠어!”
아니, 타박이라기보다는 역정이 터져 나온 것이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 갑갑하고 또 갑갑하니 저 말고는 모조리 바보 천치인가 싶다. 생각해보면 저들 중 나름 똑똑한 자들도 제법 되건만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탓인지 하나같이 머리가 굳다 못해 멍청이가 된 모양새다. 그나마 늙은 값 한다고 홀로 정신 바짝 차리고 다른 이들 굳은 머리 깨우고 있자니 절로 역정이 치밀 밖에.
“게다가 태자가 책봉되면 내명부의 수장 자리가 대단할 건 또 무어란 말인가? 지는 해는 지도록 내버려 두면 되는 것이야. 당장 중요한 것은 지는 해가 아니라 곧 새로 뜰 해란 말이네!”
자네들, 참말로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못 알아듣는 게야? 응? 그런 게야?
하여 말을 이어가면 갈수록 시퍼런 서슬이 번뜩이니 항상 넉넉한 웃음 달고 살던 이는 어디로 가고 야차도 울고 갈 험악한 낯을 한 이가 그 분기 사방으로 쏟아내는 모양새더라. 낯설다면 낯선 그 모습에 비처에 자리하고 있던 모두는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움츠러들었다.
― 과연, 이제 지는 해는 보내고 새로 뜰 해를 잡아야겠구먼.
움츠러드는 와중에 나름대로 납득하였으니 그나마 다행이더라.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날세.”
그리고 이어지는 목소리 역시 그런 그들의 속내에 힘을 보태는 것이더라.
“어차피 열 계집 마다하는 사내는 없는 법이니 새로 뜰 해를 우리 사람으로 갈아야지.”
하여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더랬다.
“지금 누가 있든 아무 의미가 없으니 결국 진짜 주인은 마지막에 자리한 자인 법일세.”
치우고 또 치우다 보면 결국 마지막까지 남은 자가 주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지.
그리하여 종내에는 비처 안에 자리한 모두의 낯 위로 똑 닮은 비릿한 웃음이 내어 걸렸더랬다.
독이 오르다 못해 제 독에 잡아먹힌 여인이 잘못된 선택을 한 지 반나절도 되지 않아 또 다른 한 떼의 어리석은 자들마저 잘못된 선택을 하고도 희희낙락 제 흥에 취해 들썩이니 휘영청 밝은 보름 달빛이 그 어리석은 행사 지켜보다 지쳐 구름 뒤로 숨어들더라.
2황자 광이 태자 책봉을 위해 저의 군사 3천을 이끌고 어린 내자와 함께 황궁으로 향하기 하루 전 황부의 풍경은 이러했더랬다.
* * *
연해제 26년 11월 보름.
지존께서 마침내 국저를 세우시니 그의 자손 중 유일한 적통 황손이요 흑룡의 색 가장 짙게 타고난 자, 곧 2황자 광이 바로 그더라.
나라의 큰 근심이 드디어 사라지니 만백성이 한목소리로 감축하매 온 나라가 큰 경사를 맞이해 기쁨이 넘치더라.
“아아.”
“……괜찮은데….”
“어허, 아아~ 하래도.”
“마마….”
“아 어서.”
아니면 또 접때처럼 입으로 직접 먹일 것이야.
몇 번의 실랑이 끝에 겨우 다물려 있던 입술이 조금씩 벌어진다. 그나마도 자꾸만 멈칫멈칫 벌어지나 마나 한 상태로 굳었다 움직이기를 반복하는 통에 사내는 다시 몇 번 더 추임새를 넣어야 했다. 옳지, 옳지 내 색시. 조금만 더 벌려보렴. 옳지, 잘한다. 그렇게 추임새와 실랑이를 반복한 끝에 간신히 종지 하나 비워냈더라.
이것이 바로 백련행궁 객당에 적을 둔 궁인들이 지난 사흘 꼬박 하루 세 번씩 보고 듣고 겪어야 했던 상전의 행사라. 크게 앓고 난 뒤에 입맛을 잃은 어린 내자 챙기신다며 나선 상전 덕에 행궁 궁인들은 오늘도 시틋한 낯 감추려 애를 먹는 중이다. 지극하고 애틋한 것도 한두 번이지 그게 다섯 번을 넘기고부터는 더도 말고 떨떠름하더라. 놀라고 당황스러운 거야 크게 달라질 것도 없지만, 상전께서 어린 내자를 향해 아낌없이 드러내는 그 귀애라는 것이 워낙 유별난 형태이다 보니 아무래도 보면 볼수록 속이 영 불편한 것이다.
“더 먹으련?”
“아뇨, 괜찮습니다.”
“하지만 너무 적지 않니?”
“참말로 괜찮아요. 움직이질 않으니 조금만 먹어도 배가 부르네요.”
게다가 저 자그마한 분께서는 사양을 한다고 하는 말이 어째 하나같이 저 모양이시다. 어찌 들으면 애처롭고 애틋하나 또 어찌 들으면 저걸 말이라고 하나 싶을 지경이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희한타, 참말 희한해.
덕분에 황부 소식에 밝은 몇몇은 오늘도 깊이 고민하였다. 분명 들리는 말로는 동기 출신에 사내 호리는 재주가 남다른 이라 하던데, 워낙 천한 출신이라 진작 궁 밖으로 내쳐질 것을 황자님 총애 하나로 후궁 첩지까지 받았다 하던데, 천하에 둘도 없을 요물에 우물(尤物)이라 그 행사 중에 요사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 하던데, 사치가 너무 심하여 처소에다 아주 금을 가져다 바른다 하던데, 툭하면 서방님 찾는 통에 이만저만 민폐가 아니라던데.
아랫것 된 죄로 오늘도 살아있는 병풍 노릇하다 말고 이렇듯 각자가 들은 소문들 되짚고 따지느라 정신이 없으니 이는 그들이 아는 것과 현실의 괴리가 지나치게 크다 못해 그 간극에 치여 죽을 판인 탓이라. 생긴 것은 단정하고 총기가 있어 보인다는 것이 전부요 그나마도 아랫것들 손이 닿은 티가 역력하였고 그 몸은 사내라기에는 작고 말라 그 나이 성년에 이르렀다는 말에 기함을 하여야 했더랬다. 빈말로도 곱고 예쁘다는 말을 붙이기에는 무리가 있는 외양인 것이다.
희한타, 참말로 희한해. 어찌하여 들어맞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람?
“흰소리 고만하렴. 내가 끼니때마다 시중드는 것이 불편해 그러는 거 다 안다.”
내 색시, 내 고운 청수련.
…헌데 또 황자님 하는 행사를 보아서는 암만 봐도 저이에게 홀릴 대로 홀린 모양새가 분명하니 이건 또 어떻게 된 것일까? 객당 침소 안에 자리하고 있던 궁인들의 시선이 더욱 복잡하게 얼크러지는 것도 다 이러한 까닭이니 그들이 전해 들은 이야기와 딱 반절만 들어맞고 반절은 제대로 어긋난 두 상전의 행사가 암만해도 당황스러운 탓이라.
희한타, 참말로 희한해.
사실 백련행궁의 궁인들도 황부에서 벌어진 혈사에 대해서는 진작 전해 들었더랬다.
허나 누구도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인 이는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그 혈사라는 것의 내용이 누가 들어도 과장된 것이라 받아들일 것인 탓이라. 생각해 보라. 수십 수백의 인원이 움직인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몇 날 며칠에 걸쳐 이뤄진 것도 아니었는데 그 결과가 참으로 대단하였다. 당장 황부 내 일곱 세가 중 둘을 지우는 것도 모자라 18개 부 중 셋의 주인이 갈아치워졌단다. 그도 모자라 황도에 역도의 피가 강물처럼 흘러내렸단다. 그 엄청난 내용을 오직 2황자 홀로 사흘 만에 이뤄낸 결과라 하니 누가 그리 선선히 믿겠는가?
헌데 직접 보고 듣고 겪어 보니 과연 혼자 힘으로 충분히 이루고도 남을 분이시더라. 그도 그럴 것이 이곳 위왕부에서의 혈사 역시 사흘 만에 끝을 본 것이다. 세간에는 자신 소유의 군대를 이끌고 패역한 3황자의 악행을 단죄하였다지만 실은 그 군대라는 것도 마지막 사흘째 되는 날에야 모습을 드러내었더랬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앞서 이틀 동안 왕부에 몰아친 피바람은 온전히 황자님 혼자 힘으로 이뤄낸 것이라는 말이다. 어지간한 여인네만 한 태도(太刀)가 한 번 휘둘러 질 때마다 적게는 서넛, 많게는 열 두엇의 목이나 그 외 다른 신체의 일부가 허공을 날아다니고 사방으로 튄 피가 개천이 되어 길을 만드는 모습이 마치 야차와 나찰의 연회를 보는 듯하였더랬다.
하여 나흘째 되는 날 동이 틀 무렵 왕부의 광장 한가운데 3황자 증의 목이 내걸렸을 때에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한마음 한뜻으로 현실을 받아들였다.
저분이야말로 흑룡의 진정한 후예라는 사실을.
“자, 요것 하나만 더 먹으렴.”
“아이 참…. 남들이 보아요.”
“그것이 무슨 상관이람? 서방이 제 색시 챙기는 것이 무어 대단한 것이라고.”
“아유, 아유우!”
“어이쿠! 내 색시, 기운이 넘치는구나. 좋다, 참말로 좋아.”
…그런데 지금은 그 현실 조용히 거부하고 싶다. 그 대단한 분께서 선보이는 행사라는 것이 참으로 기가 막히니 당과에다 꿀을 끼얹어 다시 설탕에 굴린 것도 저보다는 덜 달 것이라. 달고 또 달아 절로 쓴 차가 떠오를 지경이니 이제 자리하고 있던 궁인들 모두는 황부의 소문에 밝거나 어두운 것에 상관없이 황자님께서 선보이시는 총애며 귀애에 진저리를 칠 따름이었다. 그리고 병중임에도 난처한 얼굴로 허둥지둥 제 서방 행사 단속에 나서는 어린 후궁을 향해서는 진심으로 동정하는 시선을 던지고 말았다. 이제 보니 저이가 황자님을 홀린 것이 아니라 그냥 황자님 취향이 많이 별나신 것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저분이야말로 황금 동아줄이로구나.
하여 깨달았다. 저기 멀리 황성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원향전의 궁인들이 앞서 겪은 바 있는 그 깨달음을 이곳 백련행궁의 궁인들도 알아차린 것이다.
꼭 잡아두어야지.
하여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굳게 의지를 다졌더랬다. 그럴 만하였다. 그냥 황자님도 아니고 이제 곧 태자의 위에 오르실 분이 총애하는 분이시니 저만한 황금 동아줄이 또 어디 있으랴. 게다가 이렇게 멀리 떨어진 행궁에 나오게 된 이상 하루라도 빨리 황부로 돌아가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이 아니던가. 그러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짐하고 또 다짐할밖에.
“으음? 어찌하여 벌써 눈에 졸음이 가득한 게야? 응?”
“후아암…, 그, 그것이…, 배가 부르니 그런가보아요.”
“무어? 설마 참말로 배가 부른 것이야? 겨우 그것을 먹고?”
“아이참…. 참말이래도요….”
실은 요즘 뭘 먹기만 하면 잠귀신이 달려든답니다.
“이런….”
그래서 몰랐다.
“내 색시, 이리도 몸이 상하였으니 이를 어찌할까.”
“아이고, 그런 것이 아니래도요. 그냥 잠이 좀 는 것입니다. 참말이어요.”
“청아….”
입만 열면 단물 뚝뚝 떨어지는 황자님께서 친히 제 어린 내자 식사 수발 자처하는 이유가, 실은 그 얼마 되지도 않는 죽 한 종지에 수면약을 섞어 먹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허니…, 후아…, 흐음…. 허니 너무 근심 마시어요….”
푹 자고 일어나면 되는 것입니다아아….
그런 까닭에 오늘도 죽 한 종지에 취해 우물우물 힘겹게 몇 마디 쏟아내고는 곧 톡 까부라지고 만 저 황금 동아줄이 실은 누군가 금칠을 해 내어놓은 미끼라는 것을, 그들은 미처 알지 못하였다.
“그래, 그리하렴.”
자장자장, 내 색시야. 자장자장, 잘도 잔다.
저이야말로 진정한 황실의 미래로다.
어린 내자 도닥이는 그 손길이, 실은 그 몸에 자리한 수혈 가만히 짚는 손길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리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더랬다.
사내는 지붕 위에 몸을 숨기고 있던 기척 하나와 창문 아래 수풀에 자리하고 있던 기척 하나, 그리고 열 발짝 떨어진 담장 너머 얼쩡대고 있던 기척 둘이 사라지는 것까지 확인한 뒤에야 행궁 객당 침소에서 빠져나왔다. 나오기 전 곤히 잠든 청에게 접문을 하는 척 몇 개의 혈을 더 잡은 그는 행궁 본채로 걸음 하는 와중에도 전음과 약속된 손짓을 통해 이런저런 지시를 내려야 했다. 제 어린 내자 향한 유별난 귀애야 하루 이틀 선보이는 것도 아니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오늘은 더욱 신경을 쏟은 것도 그러한 까닭이었으니 여보라는 듯 제 주변을 맴돌기 시작한 간자들의 기척이 암만해도 심상치 않더라.
“황부에서 연통이 왔다고?”
하여 행궁 본채에서도 가장 깊고 은밀한 곳에 자리한 밀실에 들어서기 무섭게 저 할 말부터 쏟아내시는 상전되시겠다.
“예, 그것도 아주 다발로 왔다지요.”
허나 애초에 닮은 곳이 많은 주종이 아니던가. 특히나 예법이고 나발이고 제 할 일 우선으로 하는 것을 가장 닮은 주종답게 인사 대신 광이 원하는 것부터 내어놓는 혁이다. 헌데 기다렸다는 듯 내미는 종이쪽이 한 다발은 개뿔, 달랑 셋. 이건 또 뭔가 싶어 받아드는 와중에 한쪽 눈썹 슬쩍 들어 올리니 어딘가 새침한(…) 낯을 한 혁이 대꾸하기를 쪽지는 셋인데 담긴 내용이 다발이란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제 손에 들린 종이쪽 차근히 살피던 사내는, 그러나 곧 소리 내어 혀를 찼더랬다. 어째 한동안 저나 제 책사가 계획한 것에 맞춰 일이 돌아가나 싶더니 기어코 또 쓸데없는 탄력이 붙은 것을 확인한 탓이었다.
“―과연 그 말대로 종이쪽은 셋인데 내용은 다발이로다. 황상께서 거하게 싸질러놓으시니 다들 알아서 밟고 자빠지니 거참 볼만하구나.”
“…암만 알 만한 건 아는 사이라지만 최소한의 체통은 좀 챙겨주시지요. 게다가 황상의 행사를 두고 그 무슨 불경스러운 언사랍니까.”
“논다. 원래 없는 데서는 나라님 욕도 하는 법이라지. 게다가 이 내용 좀 보렴. 욕을 하고도 남지 않아?”
미련하고 또 미련하니 이렇게 모자란 작자들이 세상천지 어디 있을까!
사내는 깊이 탄식하며 제 손에 기운을 모았다. 그에 들려있던 종이쪽들이 그 기운 이기지 못하고 순식간에 한줌 재가 되어 사라지더라.
“동과 서, 그리고 남부 지역의 것들이 설치는 거야 보는 눈이 없다 여긴 셈 치자. 허나 당장 내가 아직 위왕부에 버티고 있음을 잘 아는 북의 것들은 대체 뭐 하는 놈들이라더냐? 허락된 수 이상의 병사를 양성한 것도 기가 막히거늘 감히 제 자리 지키는 것도 잊고 움직이려 들어? 그것도 국경을 지켜야 할 병력까지?”
이건 모자란 것이 아니라 그냥 미친 것이야. 별것도 아닌 권세에 미쳐 눈이 뒤집어진 게야.
첫 번째와 두 번째 쪽지에 담긴 내용은 사실 짐작에서 크게 벗어날 것이 없었다. 하나는 구석까지 내몰린 여우가 기어코 쥐 떼들을 이끌고 잘못된 결정을 하였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도 너구리 떼 역시 예정대로 잘못된 결정을 택하였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마지막으로 살핀 것이었으니 셋 중 가장 작은 종이쪽이 바로 그것이더라. 워낙 작아 적힌 글줄이라 해봤자 채 열 자가 되지 않았으나 그에 담긴 내용은 매우 심각하였으니 황부를 중심으로 사방에 자리한 18개 부 중 두 번의 혈사로 부주가 갈아치워진 네 곳과 본디 여우나 너구리 중 누구도 택하지 않은 다섯 곳을 제외한 아홉의 부에서 병력이 움직일 준비를 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라.
“과연 태평성대가 길어지면 독이 된다 하더니 지금이 딱 그 짝이로다. 저가 진정으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설치는 꼴이 참으로 볼만하구나.”
이럴 것 같아 미리 사방으로 단속을 해둔 게 이렇게 다행일 줄 누가 알았을까.
사내는 탄식하고 또 탄식하였다. 대계의 말미에 가까워질수록 급박해지는 흐름도 희한하건만 그 흐름에 휩쓸린 자들이 작정하고 정신을 놓을 줄은 또 누가 알았을까. 저의 예정보다 훨씬 앞서 나가는 흐름이 결코 반갑지 않은 것도 이러한 까닭이었다. 저가 원하는 것은 곪고 썩은 자리가 씻겨나가는 정도의 흐름이었지 뭐든 남김없이 휩쓸어버리는 격랑이 아니었던 것이다.
허나 어쩌겠는가. 이미 모든 것이 거센 흐름에 올라탄 것을.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니 사내는 곧 이어질 흐름이라도 제대로 따라잡는 것으로 제 갑갑한 속 달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지 않아도 책사가 연통을 하였나이다. 서는 미리 이야기 해놓은 대로 곧 술국이 움직인다 하옵니다.”
“동과 남은?”
“그곳은 이미 중앙에서 단속을 시작하였다 합니다. 사실 그게 아니라도 그곳에서 움직일 만한 곳은 황부에 가까운 서너 곳이 전부이고요.”
“흠…, 그는 그렇지. 허면 누가 움직였다 하더냐?”
“동으로는 좌장사가, 남으로는 수군중장이 나섰다 들었습니다. 다만 많은 수가 움직이는 것은 혼란만 더할 수 있어 동에는 화포병과 궁병 각 50에 기병대 백을 포함한 백인대 셋을, 남에는 철갑선단 1개 대대만 보내는 것으로 결정이 났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수가 나선다. 과연 군부에 밝은이답게 묻지 않은 내용까지 술술 풀어놓으니 구겨져 있던 광의 낯 위로 잠시 웃음기가 스친다. 허나 곧 진중한 낯으로 입을 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더라.
“수야.”
“예?”
“암만해도 네가 움직여야 할 것 같구나.”
“…제가 말입니까?”
헌데 그 내용이라는 것이 도통 두서가 없으니 그에 수는 저도 모르게 반문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더러 움직이라는 소리는 곧 저에게 장벽 너머의 일을 맡긴다는 뜻이라. 허나 제 어미의 일족은 이미 저가 어릴 적에 한 번, 그리고 얼마 전 황부에서 벌어진 혈사로 또 한 번, 모두 두 번의 숙청을 거친 덕에 이제 남은 세라고 할 것이 손으로 꼽을 정도가 아니던가. 허니 저가 움직인다고 해봤자 장벽 너머에서 챙겨 올 것이 없음은 물론이요 주군 원하시는 대로 움직일 만한 세도 없더라. 그러니 수로서는 제 주군의 명이 참으로 뜬금없을 따름이라.
“그래.”
허나 돌아오는 답은 그야말로 간결하였다. 덕분에 여직 제 주군 성정이며 행사 다 알지 못하는 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며 다시 답을 하였다.
“하, 하오나 외가와는 진작 연을 끊은지라…. 게다가 그네들은 여우와 손을 잡았다고 알고 있사옵니다. 남아있는 이가 없으니 제가 가도 딱히 할 것이 없지 않사옵니까?”
열심히, 그야말로 열심히 저가 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음을 전하였더랬다.
“누가 네 외가 챙기라더냐?”
“…예?”
헌데 그 말 끝나기 무섭게 무심히 그를 바라보던 광이 가볍게 혀를 차더니 더욱 뜬금없는 소리를 한다.
“네 친가 식구들은 모두 남아있으니 그들을 챙겨 움직이라는 것이다.”
“………―예?!?!”
참으로, 참으로 뜬금이 없다 못해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더라.
곧 태자의 보위에 오르실 2황자 광이 황부로의 진군을 하루 앞둔 날.
위왕부의 백련행궁에서도 가장 깊은 심처의 풍경은 이러하였더라.
황부의 사저에서 거병의 때만 기다리던 너구리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정확히는 황부 외 다른 부의 수장 자리를 맡고 있는 자들의 발등에 떨어졌다.
―쾅! 쾅쾅!
항상 사람 좋은 영감 같은 낯만 꾸미고 있던 동관 맥가의 가주는 지금 야차와도 같은 얼굴로 말없이 제 앞에 놓인 원탁만 거세게 내려치고 또 내려쳤다. 마음 같아서는 체통이고 나발이고 크게 악이라도 쓰고 싶을 지경이었지만 그나마 실낱같이 남아있는 이성이 그 입을 막더라. 그렇게 한참이나 용을 쓴 다음에도 다시 후욱, 후욱. 거칠고 탁한 숨 고르느라 애를 먹은 다음에야 머리끝까지 치민 욱기 잠시나마 다독일 수 있었다. 그나마도 오글오글 모여든 제 가솔들이 아니었다면 한참은 더 제 분을 쏟아내었을 것이라.
“…황후는, 뭐라 하더냐?”
맥가 천우는 그렇게 출렁출렁 넘치도록 차오른 분기 반절은 쏟아낸 다음에야 자꾸만 잠겨드는 목소리를 쥐어짜내어 말문을 열었다. 분을 쏟아내는 것도 좋지만 지금 발에 떨어진 불이 커도 너무 크니 더 이상 다른 곳에 팔 정신도 없더라.
“그것이…, 와병을 이유로 모든 접견을 거절하였나이다.”
그리고 일이 터지자마자 그의 명을 받아 황궁으로 달려갔던 장조카가 난처한 낯을 하고 답을 하니 잔뜩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모두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장탄식을 흘린다. 아니, 개중에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이도 있더라. 이제야 자신들만 당한 것이 아님을 알아차린 덕분이었다. 그 미련한 모습 무심히 외면한 맥가의 가주는 이제 새로운 확인에 나섰다.
“거기는 얼마나 털렸다 하던가?”
그에 상세한 내용 확인에 나서니 이번에는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말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방위금 조로 금 스무 관에 병장기 3백이랍니다.”
“또한 군량으로 미곡 3백, 건량 2백, 우마 50도 내어놓아야 했다더군요.”
“막사와 군복을 위한 목면도 5백 필이라 하더이다.”
웅성웅성, 소식에 빠른 자들이 각자 물어온 것을 풀어놓기 시작하니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목록이 만들어진다.
“그래도 사병 차출은 피했다 하니 어찌 보면 이쪽보다는 사정이 나은 게지요.”
게다가 누군가 수심 가득한 낯으로 내어놓는 이야기까지 더해지니 비처의 공기는 대번에 천금 같은 무게로 내려앉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자리한 이들 모두 소유 병력 중 8할이 예비군 명목으로 차출된 데다 그나마 남은 병력마저 황부 수비를 위해 움직여야 했다. 그렇다고 숨겨놓은 병력을 바로 움직이기에는 이미 온 나라가 전시체제인 탓에 자칫 제대로 이룬 것도 없이 치도곤을 당할 판이니 이건 뭐 시작도 전에 벽에 부딪힌 꼴이더라.
그뿐이랴. 함께 뜻을 모아 움직이기로 한 이들 사정은 더욱 고약하였으니 이는 그들 대부분이 황부가 아닌 다른 곳에 그 근거를 둔 덕이라. 본디 황부를 제외한 18개 부 중 아홉 곳에 고루고루 흩어져 자리한 이들이 딸자식 등에 업은 덕으로 한 자리씩 맡으면서 세력을 이룬 것이 대부분이다 보니 황부보다는 각자의 봉지가 더 중한 입장인 것이다. 아니, 내심으로는 황부가 더 중하여도 당장은 저에게 주어진 봉지부터 지켜야만 했다. 그것이 제국 경이 황실과 귀족, 그리고 관리들에게 가장 우선으로 요구하는 ‘다스리는 자의 의무’였으니 말이다.
지금 이곳에 모인 이들 대부분이 맥가의 힘이 직접적으로 닿는 가신이나 방계인 것도 같은 이유였으니 기껏 뜻을 모으고 확인한 지 하루를 넘기기 무섭게 모든 세력이 산산이 흩어진 꼴이 되었더라.
“누가, 얼마나, 어떻게 빠져나갔더냐?”
“당장 서경부주와 사천부주는 군부에 요청해 비익조를 타고 갔다 합니다. 북해부와 설산부, 은곡부 역시 조금 전 비익조로 돌아갔다 하고요.”
“아직 시간에 여유가 있는 이들도 황명을 받아 각자가 책임지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합니다.”
“황명이라니…! 그, 그럼 남으로 먼저 출발한 이들은? 그들은 어찌 됐다던가?”
“…5황자 쪽으로 갔던 이들 역시 진작 황군에게 막혔다 하더이다.”
“황군?!
“그게…, 알고 보니 남부 해안에서 작은 소요가 벌어졌다는군요.”
그냥 흩어지는 것도 아니고 무려 황명까지 힘을 보탠 것이란다. 게다가 하나 성공할 줄 알았던 시도마저 초장에 막혔다 하니 당장 출정을 목전에 두고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다. 기가 막힌 현실만 잔뜩 확인한 맥가 천우는 이를 악물었다. 어찌나 세게 악물었는지 희게 샌 수염이 푸들푸들 사납게 흔들릴 지경이라.
“―참으로 기가 막히는구먼.”
어찌하면 이리될 수 있다는 말인가?
그에 다시 한 번 침통한 탄식이 쏟아지니 이는 작정하고 내달리려는 순간 돌부리에 걸려 자빠진 결과가 너무나도 과한 탓이라. 오랜 세월에 걸쳐 절치부심 착실하게 모아놓은 살림 막 써먹으려는 찰나에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돌부리가 튀어나온 것도 기가 막히건만 그 돌부리 덕에 꼭꼭 숨겨놓은 것 탈탈 털릴 판이 되니 억울하고 분하다 못해 피를 토할 것만 같은 것이다.
게다가 그들의 입에서 장탄식을 이끌어내는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 혹시 다들 그 이야기는 들으셨습니까?”
퀭한 낯을 한 이 하나가 대뜸 내어놓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더라.
“북으로, 그러니까 위왕부 쪽으로 ‘알’이 갔다 합니다.”
어찌 들으면 별것 아닐 이야기였다. 그러나 자리하고 있던 이들 중 누구도 그를 두고 뭐라 탓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더라.
―쾅!!
“내 그것만은 막으라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맥가 천우는 기어코 폭발하였다. 엎친 데 덮친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거늘 어찌하여 하려는 일마다 이리도 제대로 막히고 꼬일 수 있다는 말인가?
“그, 그것이, 원래는 설산부로 갈 것이었다고 합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리로 갈 것이 어찌하여 위왕부로 갔다는 게야?”
심지어 변명이랍시고 사감에서 이어지는 이야기까지 그 부아 더욱 북돋우는 것뿐이니 맥가 천우는 폭발하고 또 폭발하였다. 그 서슬이 어찌나 시퍼렇던지 자리하고 있던 모두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자신들이 아는 사실들을 모두 쏟아내는 것으로 변명을 대신하였더라.
“갑작스럽게 병력이며 군수품을 동원해야 하는 탓에 급전이 필요했답니다. 하여 당장 필요 없는 물품들은 다 물렸다 들었습니다.”
“어지간하면 그것만은 챙길 작정이었으나 원래 북쪽이 벌이는 적고 나가는 돈은 많은 곳이라 방법이 없었다 하더이다.”
“거기다 이왕이면 한시라도 빨리 눈에 드는 것이 좋다며 예정되었던 아들들을 모두 이번 병력 동원에 밀어 넣지 않았습니까? 설산부주 아들들도 그중 하나랍니다.”
“다행히 설산부주가 주문을 한 ‘알’이 하나뿐입니다. 사람을 사 적당히 손질을 하면 최악은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허나 그 수많은 말들을 모아놓고 보니 더욱 암담하더라. 이미 벌어지지 말아야 할 일이 터진 마당에 무어가 최악을 막고 말고 한다는 것인가.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을 판이 되었는데 무어가 다행이라는 것인가.
“끄응….”
결국 아득함을 이기지 못한 맥가 천우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뭘 들어도 위안은커녕 절로 앓는 소리가 나온다. 한시가 급한 이때 뭐가 이리 막히고 꼬이는 것일까?
“하늘도 무심하시지….”
참으로 하늘이 무심하구나…
감히 역천을 꾀한 주제에 겁도 없이 하늘을 찾는 그들의 행사 참으로 볼만하더라.
허나 당연하게도 이러한 사정은 너구리 떼의 것만이 아니었으니 구중심처 깊고 깊은 곳에 몸을 숨긴 채 흑막을 자처하고 있던 여우라고 이를 피할 수는 없음이더라.
“…이번에는 누구라고?”
“서성 적가의 가솔이랍니다. 어찌할까요?”
그에 띠 아래 자리한 미간을 살짝 좁혔다 편 여인은 곧 가볍게 고개를 내젓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였다. 그에 고개를 조아린 노상궁이 소리 없이 물러난다. 황후를 뵙겠다고 찾아온 서성 적가의 가솔에게 거절의 말을 전하러 사라진 것이다. 그 모습 말없이 바라보던 여인은, 그러나 곧 신경질적인 몸짓으로 다시 자리에 드러누웠다. 아득바득 이까지 갈아대며 드러누워 다시금 자리보전하는 흉내에 나섰다. 실은 흉내가 아니라 참말로 앓아누울 판이다. 가만히 있어도 불쑥불쑥 치밀어 오르는 울화가 그대로 속병이 되어 골수에 스밀 지경이니 앓아눕고도 남을 지경이라. 하여 여인은 연신 이를 갈며 저를 이리 몰아붙인 고약한 존재를 향해 원망을 퍼부었다.
― 빌어먹을 황가.
아니, 아니다. 황가를 탓할 것이 아니라 제 서방이라는 사내와 그 핏줄이라는 놈을 탓해야 할 것이라. 용신의 피를 타고난 자들이라 그런지 희한할 정도로 절묘하게 운이 터지는 그들이 죽일 것들이라. 그게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 참담한 상황을 납득할 수가 없다. 절묘한 시기에 각자의 근거지로 달려가야만 했던 제 수족들을, 그리고 그 빈자리를 생각하니 그야말로 피를 토할 지경이더라. 왜 하필 지금인 것인가. 왜 하필!
쳐 죽일 놈의 용신.
하여 어느 순간부터는 겁도 없이 이 제국의 근간이 되는 이를 향해 제 모든 악의를 쏟아 부었더랬다. 이 모든 것이 황가의 혈손에게 내려졌다는 용신의 가호 탓인 것만 같아 절로 원망이 일어나더라. 상황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분기가 치밀어 오르니 자리보전하는 흉내가 아니라 참말로 크게 앓을 지경이라. 그렇지 않아도 결정적인 순간에 맞춰 3황자라는 놈이 헛짓거리 끝에 뒈진 덕에 겨우 숨구멍 하나 남겨놓고 숨어있던 참이다. 아니, 드디어 숨통 좀 트이겠구나 하고 이리저리 줄을 정리하던 참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이 고약한 순간을 버티면 곧 저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 그리 믿는 참이었다.
왜, 왜 하필 지금이란 말이던가. 왜…!
헌데 저 빌어먹을 황제라는 작자가 대뜸 태자책봉이라는 패를 던지더니 다시 채 사흘도 되지 않아 제국을 둘러싼 모든 곳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소란의 결과 그녀가 죽을 각오를 하고 다시금 간신히 정리해 모아놓은 줄들이 이로 인해 일시에 얽히고설켜 아예 굵게 타래를 지어버리더라. 그것도 다시 풀어내는 것보다 잘 드는 칼로 성둥성둥 썰어버리는 것이 더 빠를 지경으로 굵고 탄탄하게 타래를 지어버리더라. 더 손을 대는 순간 그녀는 물론이요 그녀의 수족이라는 이들마저 남김없이 휘감아 그 속에 집어삼킬 그런 타래를 말이다.
별수 없구나, 참말로 별수가 없어.
그를 알아챈 순간, 여인은 다시 한 번 세월의 힘에 기대기로 마음먹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얽히고설킨 타래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알아서 낡고 삭아 마침내 끊어지고 헤쳐지는 것을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는 소리다. 당장 무엇을 다시 도모하기에는 이미 제 수족 중 많은 수가 잘려나간 터였다. 얼마 남지 않은 것이라도 건실히 살려볼 작정으로 다른 때라면 상대도 않았을 너구리 떼와 손까지 잡았건만 그마저도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며 잡지 아니한 것만 못한 것으로 돌변하였다. 그러니 남은 것은 다시금 때를 기다리는 것뿐이더라. 상황이 이렇게까지 꼬인 이상 시간 말고는 답이 없던 것이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꼴임에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더라.
하여 선택한 것이 와병을 핑계로 몸을 감추는 것이라. 지금껏 기다려왔으니 더 기다리는 것이 무어가 어려울까. 게다가 온 사방에 시퍼런 칼날이 비추기 시작하였으니 함부로 움직이는 순간 수족은 물론이요 자칫 모가지가 떨어져 나갈지도 모를 일이 아니던가. 당장 지금도 보아라. 기다렸다는 듯 달려온 이들만 다섯이요 세력으로 구분하여도 셋이다. 제 모자란 오라비야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방문인 데다 닥치고 죽은 듯 때를 기다리라는 말로 충분하였지만 다른 둘에서부터 각각 둘씩 도합 넷이나 되는 인편이 그녀에게 만나기를 청한 것이다.
멍청한 것들. 그러니 뭘 하든 그 꼴이지.
여인은 와병중인 자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만치 거칠고 세찬 움직임으로 돌아누웠다. 돌아누우며 바드득 소리 내어 이를 갈았다. 그렇지 않아도 제 코가 석자인 판에 다른 사람 사정을 봐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인물 하나 믿고 겁도 없이 제 자리 노리던 모자란 년들 들이민 것도 모자라 지금껏 맞서고 싸우기를 마다치 않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원래부터 아군이었던 이들만 함께 움직여도 맥을 못 추다 못해 잘라내기 바쁜 마당에 적이었던 이들까지 챙길 정신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일전에야 급한 마음에 먼저 나서 손을 잡았지만 상황이 이렇게까지 꼬인 이상은 가까이하는 것만으로도 독이 되는 이들이었다. 하물며 숨만 크게 쉬어도 허물을 잡히기 좋을 이런 때에 말이다. 심지어 그 사정 다를 게 없을 것들이 기껏 한다는 짓이 그녀에게 달려오는 것이니 뭘 더 말하랴. 어리석고 어리석으니 자칫 잘못 손을 뻗었다가는 그 어리석음에 휩쓸려 부러 멀리 떼어놓았던 그 크고 단단히 감긴 타래에까지 끌려가고도 남음이라. 온 사방이 불구덩이요 칼날 밭이 된 꼴 참으로 볼만하였다. 그에 사방에 능라를 드리워놓은 화려한 침상 위에서부터 연신 아득바득 사나운 소리 울려 퍼지니 그 속에 담긴 분과 역정이 가히 하늘을 찌를 기세더라.
― 내 아직 할 일이 참으로 많구나.
허나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그녀는 마냥 움츠리고 기다리기만 할 생각은 또 아니었다. 당장은 사방에 칼날이 번뜩이니 몸을 사리는 것일 뿐, 기회를 살펴 이리저리 얽히고설켜 단단하게 타래 지어진 온갖 줄들을 다시금 가닥가닥 풀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할 작정이었다. 다만 그를 행할 때가 지금 당장이 아닌 것일 뿐. 하염없이 흘러나오던 음습하고도 사나운 소리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도 그러한 까닭이니 어느새 여인은 고운 입술 단단히 앙다문 채 다시 한 번 다가올 미래를 고민하고 대비하였다. 어차피 발등에 떨어진 붉은 물 한 바가지만으로도 충분한 법. 중요한 건 불이 꺼진 다음 어떻게 발등을 멀쩡하게 되돌릴지가 아니던가. 하여 지금 당장이 아니라 곧 닥칠 미래를 온전히 제 손에 넣기 위해 고민하였다. 누구를 어찌 움직일 것인지,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지 고민하고 고민하여 답을 얻기에 골몰하였다.
황궁 밖에 자리한 제 수족들이 몸을 사리라는 말만 남기고 칩거에 들어간 저로 인해 어떤 혼란을 겪고 있을지는 꿈에도 생각지 않고 그렇게 아직 이뤄지지 않은 일부터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다.
그것이 과연 이루어질 일이기는 한 것인지도 모르고, 저의 뜻만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더랬다.
이렇듯 너구리는 물론이요 황궁 깊은 곳에 숨어있는 여우며 그 여우의 수족이라 할 쥐 떼들마저 하나 같이 제 발등에 떨어진 불을 두고 각자의 방법으로 전전긍긍하다 못해 속병을 앓으니 그 꼬락서니 참으로 우습더라.
허나 그럴 만했다. 당장 그들을 향해 사위에서 몰려드는 위기를 살펴볼작시면 과연 날뛰고도 남음이라.
시작은 서의 술국부터였다.
동과 서를 나누는 드넓은 사막을 고스란히 영토로 차지하고 있으며 과거 제국의 황실과 혼약을 통한 혈맹을 맺기도 하였던 서역의 부족국가가 바로 제국 서편에 자리한 술국이라.
허나 부족국가가 괜히 부족국가인 것이 아니니 그 혈맹이 맺어지고 2백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지금은 그야말로 이름만 남은 혈맹이 되었다. 그 증좌가 바로 짧게는 반년, 길게는 몇 년 간격으로 제국 서부 국경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분쟁이더라. 차라리 사람과 사람이 맞붙는 분쟁이었으면 어떻게든 결론이나 내었을 것이나 괴이한 금수와 인간의 다툼이 중심인 탓에 여직까지 해결된 것이 없더라.
이번의 것도 실은 바로 그 크고 작은 분쟁이 원인이었으니 갑자기 서역 사막에서부터 몰려든 모래벌레 떼 덕에 서부 국경이 발칵 뒤집어진 탓이라. 이 모래벌레라는 것들은 말 그대로 생긴 것은 금수라기보다 벌레와 같더라. 허나 생김은 버러지와 같을지 몰라도 덩치는 감히 비교할 것이 없으니 이는 길이는 열 장이 넘는 데다 둘레 또한 석 장은 가뿐하였다. 게다가 애초에 땅 위가 아니라 땅 속 깊은 곳을 제멋대로 움직이는 놈들이다 보니 사막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제국 서부에 악몽이 시작되는 것이다. 실제로 75년 전 발생한 서부의 환란이 바로 이 모래벌레 떼로 인한 것이었으니 그 환란으로 인해 죽고 다친 이들이 물경 3천에 이르고 부서지고 망가진 것을 복구하는 데 든 시간만 꼬박 10년에 금전은 무려 금 50관이라. 게다가 워낙 죽고 다치고 부서진 규모가 어마어마한 탓에 있던 사람들마저 하나둘 서부를 벗어나버리면서 서부 국경 인근에 자리하고 있던 3개 부는 복구 후에도 다시 10년 동안 혹독한 시기를 거쳐야만 했더랬다. 그 중 하나는 아예 교역을 위해 오가는 뜨내기들만 우글우글하다 하니 뭘 더 말할까. 그나마 술국 측에서 서둘러 모래벌레들의 진행 방향을 통보해 오지 않았다면 발칵 뒤집어지다 못해 간신히 살려놓은 국경지역이 모조리 갈아엎어진 뒤에야 대처랍시고 움직일 수 있었으리라. 괜히 서부에 근거를 두고 있는 이들이 군부 신세를 지면서까지 비익조를 빌려 움직인 게 아니라는 소리. 이제 그들에게 급한 것은 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허수아비 주군도, 언제 제 손에 떨어질지 모를 권력도 아니었으니 오직 그들이 가진 권세와 금전의 근간이라 할 봉토를 지키는 것이 우선이더라.
하여 너구리 떼고 쥐 떼고 가릴 것 없이 서부에 근거를 두고 있는 이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봉토로 향하였더랬다. 당장 제 모든 기반이 무너지고 사라질 위기에 처했는데 거사 따위 알게 무어란 말인가. 그야말로 바람처럼 제집이 자리한 곳으로 달려갔더라.
헌데 서부의 뒤를 이어 들썩이기 시작한 제국 북부는 사정이 또 달랐다. 어떻게든 황부에 틀어박혀 움직이지 않으려드는 북부의 부주들을 움직이기 위해 친히 황명까지 동원되었으니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국에서도 가장 험하다는 북부의 사정을 우선 알아야 할 것이라.
과거 흑룡의 재래라 하는 현한대제의 치세 당시 벌인 몇 번의 대규모 토벌 이후 장벽 너머는 사실상 제국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곳이 되었다. 허나 괜히 제국의 모두가 여직 북방 장벽 너머를 두고 야만족의 땅이라 하는 것이 아니었으니, 원래가 제국에 비하면 미개하기 짝이 없는 곳인 것도 모자라 그 구성마저 인간인지 금수인지 구분하기 힘든 자들이 크고 작은 무리를 지어 우글우글한 곳이 바로 북방 장벽 너머의 현실이더라. 게다가 오랜 세월 척박한 환경에 고립된 상태로 살아남는 동안 만들어진 기괴한 풍습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니 식인은 예사요 북부 산맥에 자리한 괴수들에게 인신 공양을 하는 등 온갖 해괴하고 흉악한 행사가 넘쳐났다. 산맥 깊은 곳에 자리한 몇몇은 외양마저 금수와 다를 바 없었으니 그런 것들이 고만고만한 세력도 세력이랍시고 들썩이며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것도 모자라 툭하면 갖가지 이유를 들어 온 사방에 피를 뿌려댄 것이 한두 해도 아니고 몇백 년에 이른다. 제국사에 기록된 것만 따져도 얼추 5백여 년에 달하니 가히 제국의 역사와 함께한 것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더라. 오죽하면 그를 두고 몇몇 학자가 ‘미개함도 역사를 갖춘 이상은 문명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라 주장할 지경이었더랬다. 그나마 현한대제의 대규모 토벌 이후 장벽 인근의 야만족들이 제법 제국의 것을 어설프게나마 흉내 내기 시작하면서 어찌어찌 교류라는 것도 시작하게 되었으니 그 결과 중 하나가 북방의 대 부족 출신 후궁, 곧 4황자 수의 어미였다. 대부족의 족장이 제 딸을 후궁으로 바치는 대신 제후국의 이름을 얻어낸 것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지나친 탐욕을 부리면서 끝이 났다. 교류의 역사가 짧고 그 깊이가 얕아 제국 황실의 은밀한 후계 선별 과정을 알지 못했던 탓에 태자 책봉에 간여할 목적으로 무력시위를 일으켰다 지존의 진노를 사고 만 것이다. 그로 인해 제후국의 이름이 지워진 것은 물론 부족 자체가 산산조각 나고 말았으니 북방 장벽 너머 고만고만한 세력들 중에서도 그나마 큰소리를 치며 위세를 떨치던 존재가 사라졌더라.
덕분에 북방 장벽 너머는 다시금 과거의 악명을 되찾아가는 중이었다.
사실 그들이 암만 제국의 것을 흉내 내어 봤자 약탈과 살육을 근간으로 하는 그 본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기에 제후국이 존재할 당시에도 그들의 국경 습격은 왕왕 발생하였더랬다. 헌데 제후국의 존재 자체가 지워졌으니 그 이후는 더 말해 무엇 할까. 제후국 토벌 당시 북방을 휩쓴 제국군의 위세에 잠시 몸을 사리나 싶던 장벽 너머의 여러 부족들은 채 한 해도 되지 않아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제국과의 교류 이후 교활함까지 더해진 탓에 몇 배는 더 은밀하고 계획적인 것이었다. 과거의 움직임이 온전히 그들의 생존을 위한 약탈과 살육이었다면 지금의 것은 위협의 목적이 더해져 있었으니 약탈과 살육은 물론이요 제국의 백성을 산 채로 끌고 가 노예로 부리는 한편 인질로 내세워 토벌대의 창끝을 막기까지 하였더랬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장벽 인근에 거주하던 이들은 고향 땅도 버리고 남으로 향했다. 심한 지역은 겨우 반년 사이 세수(稅收)가 반 토막이 날 지경이 되었으니 당연 북부를 다스리는 여러 부주들은 골머리를 썩였더랬다. 오죽하면 부주 자리를 내어놓는 이마저 나올 지경에 이르렀으니 결국 지존께서 친히 군부에 명을 내려 주둔 병력을 늘리고 자리를 지키고 있던 부주들이 국경 단속을 강화하는 등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간신히 줄인 것이 제후국이 존재할 당시의 수준이더라.
제국 북부의 여섯 부주 자리를 두고 ‘빛 좋은 개살구’라 부르는 것도 이런 까닭이었으니 가진 권한만 따지면 병권이고 금권이고 모두 황부를 제외한 18개 부 중 으뜸이라 할 만하였으나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그 대단한 병력이고 금력이 모조리 국경수비에 동원되고도 항상 부족한 데다 부의 권력마저 셋으로 쪼개져 있는 탓이라. 기껏 부주 자리 올라봤자 제 손에 남는 것이 없는 것도 모자라 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조차 얼마 되지 않으니 누가 그 자리를 탐할까.
하여 그들 중 몇몇은 일찌감치 제 여식 황궁에 밀어 넣고는 황부의 사저에 죽치고 있었더랬다. 여차하면 제 여식이 받는 황총 등에 업고 중앙으로 들어갈 작정으로 각자의 줄을 만들어 잡기에만 골몰하였더랬다. 군부의 가장 많은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곳임에도 군부의 수장들과 북부의 부주들과 사이가 나쁜 것도 모두 이런 까닭이었으니 그들로서는 주인도 없는 집을 지키느라 목숨을 걸어야 함이라.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간만에 북방 장벽 너머에서 큰 소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알려지기 무섭게 황부에 자리하고 있던 북부의 다섯 부주(위왕부의 부주는 앞서 벌어진 3황자의 문제로 자리를 지키는 중이다)는 복귀는커녕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사저에 틀어박혔더랬다. 만약 소식 닿은 지 채 한 시진도 되지 않아 내려진 황명이 아니었다면 그 소란이 다 가라앉을 때까지 틀어박혀 있었으리라. 허나 다른 것도 아니고 황명을 거스를 수는 없는지라 군부에서 내어준 비익조에 올라 북으로 향하였으니 그 얼굴이 더도 말고 사지로 향하는 자의 낯이더라.
이렇듯 서와 북의 사정이 워낙 크다보니 그보다 앞서 동이나 남에서 일어난 소요는 일도 아니더라. 하기야 작정하고 황군이 움직여 그 소란의 근원을 캐어 내니 크게 자랄 틈도 없이 끝이 난 셈이지만 말이다. 덕분에 저자에 다니는 이들마다 입을 모아 ‘지존의 행사는 바람이로되 신하된 자들이 그를 따라잡지 못하더라.’며 수군대었다더라.
허나 너구리 떼나 여우며 쥐 떼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저자에 오가는 평판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며칠 사이 몰아치듯 이어진 이 모든 사건들이 작정이나 한 듯 그들의 세력을 깎아내고 조각내었다는 것이었다. 당장 거사를 앞두고 있던 너구리 떼는 그 행사에 있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병력을 잃었고 여우와 쥐 떼들은 간신히 추스른 세력들이 일시에 흩어진 것은 물론 수적의 형태를 빌려 동과 남에서 야금야금 챙겨먹던 금전을 잃고 말았다.
위기.
분명 이전에도 존재하였고 항상 동행하였던, 그러나 한 번도 뚜렷한 형체를 지니고 있지 않았던 탓에 지금껏 막연히 주의만 하고 있던 그것이 그들의 앞에 돌연 떨어져 내렸다. 생각지도 못한 때에 짐작도 하지 못할 만치 어마어마한 덩치를 가지고 그들 앞에 나타나 압도하기 시작하였다.
위기가 사방에서 그들을 죄어오기 시작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누군가는 당장의 곤란을 빠져나가고자 고심하였고, 누군가는 다시금 기회를 잡고자 때를 기다렸으며,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잊은 누군가는 우왕좌왕 헤매기 바쁘더라.
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알지 못하였다.
지금 그들을 죄어오기 시작한 위기가, 실은 위기도 아니라는 사실을.
실은 그들이 쌓아놓은 혈채가 하나 둘 돌아올 채비를 마쳤으매 이제 남은 것은 그들이 감당할 혈사뿐임을, 그들 중 누구도 알지 못하였다.
* * *
연해제 26년 11월 스무하루.
제국의 사위에서 앞 다퉈 일어난 소란들이 차례로 가라앉으니 이는 모두 지존의 덕이 지극히 높은 까닭이라.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고 어버이의 마음으로 보듬으시니 동의 화적떼와 남의 수적 떼를 향해 황군을 보내시매 채 사흘도 되지 않아 화평을 되찾았더라. 이에 서의 관리들이 지존의 애민(愛民)하는 마음 크게 받들어 서역에서 몰려드는 고약한 괴수와 맞서 싸우니 곧 태자의 위에 오를 2황자 광 또한 그 행사 거들어 그 빼어난 무위 만방에 선보였다. 또한 북방 장벽의 소란에 대하여는 지엄한 황명을 내리시니 북에 자리한 여섯 개 부는 ‘위왕의 소란’이 남긴 여파가 다 사라지지 않았음에도 그 명 받들고자 노력하였다. 이에 4황자 수가 힘을 보태었으니 북방 야만족 중 제국에 감화된 자를 모아 지존의 군사로 쓰임 받도록 하였더라.
이러한 연유로 제국 사위에서 벌어진 온갖 소란들이 차례로 가라앉게 되었으니 이를 두고 제국의 만민이 입을 모아 지존의 덕과 황가의 뜻깊은 행사에 칭송을 아끼지 않았더라.
* * *
“폐하.”
“으음?”
“현양전의 연통이옵니다.”
“고하려무나.”
“황후의 병증이 돌연 깊어진 탓으로 잠시 전각의 출입을 제하고 칩거를 청하니 폐하의 윤허를 바란다 하옵니다.”
“거 참 웃긴 년이로고. 언제부터 그런 것을 청하니 마니 하였다고 연통씩이나 넣었다더냐?”
“송구하옵니다.”
“자네가 송구할 게 무에 있어. 제 코밑만 아는 계집이 멋대로 행하는 것을.”
“허면 어찌할까요? 아니 된다 전하옵니까?”
“…자네도 참으로 짓궂구먼. 과인이 할 말 다 알고도 그리 둘러칠 것은 또 무어람?”
“그 또한 송구하옵니다.”
“되었네, 되었어. 내 그 정도 농도 못 받아 줄 만큼 박한 상전은 아니라지. 되었으니 현양전에는 적당히 알아서 연통하게나. 어차피 현양전에 붙어있던 줄은 진작 광아 그 녀석이 다 따고 들어갔다니 대강 눙쳐놓으면 나머지는 그 녀석이 알아서 할 것이야.”
“명 받자옵니다.”
“―이보게, 아지.”
“………예, 폐하.”
“이토록 오랫동안 기다리느라 고생하였네.”
“…아니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게나.”
그 녀석이 곧 끝을 볼 것이라 하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게나.
아련히 흩어지는 그 음성이 굳은 심지를 품은 채 늙고 충직한 여관에게로 향하니 어찌된 영문인지 눈가를 붉게 물들인 여인은 말없이 고개를 조아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였다.
후에 제국의 역사에 ‘국구(國舅)들의 난’이라 기록되는 황부의 소란을 열흘 앞둔 대전 집무실에서 지존과 대전 지밀상궁이 나눈 밀담 아닌 밀담이었다.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