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 九 章 - 蠢動(준동) (10/19)

第 九 章 - 蠢動(준동)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찌는 때, 곧 가을을 두고 이름이라.

거기에 올해의 가을은 제국 경에 있어서도 특별하였다. 풍년, 그것도 25년 만에 찾아온 대풍(大豐)이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모든 신민이 입을 모아 말하기를 용신의 축복이 돌아온 것이라 하였다. 어찌나 큰 풍년이 든 것인지 추수를 마친 뒤로 온 나라 곳간이 그득 차다 못해 철철 넘쳐흐를 정도가 되었으니 이는 곡식만이 아니요 온갖 과실에 소채는 물론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나고 자라는 산채며 해초까지 이름이라. 이렇듯 온 세상에 풍요가 넘치니 오죽하면 저자의 걸인조차 토실토실 살이 오를 지경이라. 과연 용신의 축복이라 할 밖에.

허나 과유불급이라는 말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니 지나친 풍요는 곧 이런저런 문제를 야기하기 시작했다. 거둬들일 것이 늘어나니 어디든 일손이 모자라 허덕이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이 모든 것을 관리하는 각 관청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일단 몇 배로 늘어난 소출 덕에 논밭마다 수확할 것이 넘쳐나니 일손도 늘어나야 함은 당연지사. 각 고을 백성들이 서로서로 품앗이를 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음을 알아차린 중앙에서는 서둘러 군대를 동원하였다. 이 과정에서 국경 수비 등 병역과 관련된 수많은 업무를 감당하게 된 것이 병부(兵部). 생각지도 못한 업무에 병부가 자리한 황도 북부는 전쟁을 치를 때보다도 더욱 긴박하게 돌아갔다.

게다가 진작 업무 폭주를 예상하고 대처를 했음에도 허덕인 곳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나라 살림을 관리하는 탁지부(度支部)라. 나라가 거둬들일 세수(稅收)도 몇 곱절 늘어나니 당장 세리들이 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두 배만 늘어나도 세리 한 명이 감당해야 할 일이 두 배가 넘는다는 것인데 아예 몇 배로 늘어난 것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당장 의정원의 육부(六部) 중 둘이 이리되었으니 남은 넷이라고 멀쩡할까. 형부(刑部)는 요동치는 물가와 인건비로 인해 갑자기 늘어난 갖가지 분쟁을 다스리느라 바삐 움직여야 했고 공부(工部)는 부족한 창고 건설과 농기구 제작에 혼이 빠졌더랬다. 심지어 이부(吏部)와 예부(禮部)마저 부족한 관원 확충을 두고 고정직과 임시직의 비율을 조정하는 한편 연이어 발생하는 각 부서 내 부정행위 감찰을 감당하느라 낮밤이 사라졌으니 그 혼란 알 만하였다. 오죽하면 만백성이 수확의 기쁨을 나눈다는 수확제마저 제대로 누리지 못하였다. 아니, 실은 수확제 이레 동안 퇴청조차 못 한 이가 한둘이 아니더라.

이렇듯 관(官)에 적을 둔 이들 중 바쁘지 않은 이 하나 없었으니 당연 나라 다스리는 지존은 물론이요 귀한 피 타고난 황족과 귀족들 역시 혼이 빠지도록 바쁘게 되었다. 다른 때라면 유능한 아랫사람 팔아 여유를 얻었겠으나 이번에는 팔아넘길 아랫사람들이 하나도 남지 않은 것이다. 결국 직계 황족도 모자라 각지에서 주어진 봉토만 관리하고 있던 방계들까지 모조리 동원되었다. 모친과 외가의 반역으로 관의 행정에 간여할 수 없는 3황자와 4황자, 그리고 연치가 모자란 5황자까지 동원하려다 바쁜 그 와중에도 헌간원(憲諫院) 관리들이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무산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하는 이들이 있을 지경이었으니 뭘 더 말하랴.

과연 무엇이든 공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없는 법이니 제국의 태평성대를 위해 관은 물론이요 황가에 적을 둔 모두는 그렇게 피와 땀을 쏟았더랬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흐르고 흘러 마침내 겨울을 알리는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하니 이제 제국의 모두는 새로운 준비를 위하여 바삐 움직일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더라.

* * *

황자들 중 유일하게 자격과 조건을 모두 갖춘 2황자 광에게 몰린 업무량은 황제 다음으로 많았다. 정식으로 책봉만 되지 않았을 뿐 사실상 황태자의 위치임을 모두가 암묵적으로 받아들인 까닭에 진작부터 조금씩 넘어오던 업무가 유례없는 대풍을 거치며 제대로 폭발을 한 것이다.

덕분에 가만히 처소에 틀어박혀 있기만 하는 양원 현씨, 곧 청도 아침저녁만큼은 제법 바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황제 다음으로 바쁘다는 2황자가 무슨 일이 있어도 침수만큼은 어린 내자 옆에서 드는 탓이었다.

“내 오늘은 일찍 퇴청할 것이다.”

“예, 그러시어요.”

조금만 숙여보시어요. 머리가 삐쳤습니다.

빈말도 하루 이틀 들어야 속아주는 법이다. 꼬박 석 달이 넘도록 새벽 같이 나가 별이 뜰 적에나 돌아오던 이가 일찍이라고 해봤자 얼마나 일찍일까. 하루 이틀 일도 아닌지라 청은 덤덤한 낯으로 대충 대꾸하고는 묘하게 흐트러져 있는 황자님 머릿결이며 옷섶 다듬는 데 집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황자님 당부는 멈출 줄 모른다.

“허니 어디 함부로 다니지 말고 나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렴.”

“딱히 갈 곳도 없는 걸요.”

“부르면 부르는 대로 뽀르르 쫓아가지도 말고.”

“항상 말씀드렸잖아요. 부르는 이는 더더군다나 없답니다. 그러니 그만하시고 이리 돌아보시어요. 띠가 조금 비뚤어졌네요.”

그리고 청 역시 그 당부 하나하나 건성으로 답하기를 멈추지 않으니 이는 저와 제 서방이 아침마더 이러는 것도 벌써 석 달이 넘은 탓이라. 처음 며칠은 그래도 부끄러운 티를 숨기지 못하였으나 똑같은 실랑이를 반복하고 또 반복하다 보니 이제는 그런 것도 없다. 그저 건성건성 대충 넘기며 제 서방 등청 준비나 거들 뿐.

“으음…, 어찌 이리도 차가울꼬.”

혹시 나한테 토라진 것이야? 그래서 내 색시가 날 이리 차갑게 대하는 것이야? 응? 그런 것이야?

그에 곧 황자님께서 시무룩한 낯을 하고는 산만한 덩치로 제 반절도 되지 않을 어린 내자를 향해 투정하니 그를 마주한 청의 낯 위로 대번에 엄한 기운이 서린다.

“그리 떠보셔도 소용없답니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바쁠 거라 하셨지요? 이제 곧 사시(巳時)가 될 것인데 지금 이리 늑장을 부리시면 일찍 퇴청하시겠다는 약조도 지키지 못하실 거여요.”

“그는…, 그는 그렇지.”

“예, 그런 것입니다. 허니 얼른 다녀오시어요. 저는 당부하신 대로 이곳에서 마마만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약조한 것이다?”

“예, 약조할 것이어요.”

그러자 대번에 한 마리 짐승이 되어 제 어린 내자 자그만 입술 담뿍 집어삼키는 황자님이시다. 그 덕에 오늘도 원향전 궁인들은 한 폭의 병풍이 되어 두 상전 도타운 금슬 지켜보아야 했더랬다. 그중 누군가는 제대로 금줄을 잡게 되었음을 기뻐하였고, 또 누군가는 석 달을 하루처럼 보고도 믿기 힘든 그 광경 다시금 의심하였으며, 소수의 몇몇은 이를 어떻게 전해야 할지 고심하였다.

어제와 다를 것 없고 내일도 변함없을 원향전의 아침이었다.

이렇듯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남들이 보거나 말거나 제 어린 내자와 깊이 접문한 다음에야 아쉬움 가득한 낯을 하고 원향전을 나선 광은, 그러나 채 오십 보도 되지 않아 얼음장 같은 안색으로 돌변하였다. 저가 보여줘야 할 이들은 이제 다 보았기도 하였거니와 지금부터 다뤄야 할 것이 제법 심각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 드디어 북이라고.”

“예, 그러하옵니다.”

하여 집무실 들어서기 무섭게 확인에 나서니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그의 책사요 대외적으로는 개인 문관으로 알려진 맹가 호가 냉큼 답하였다. 그에 사내의 낯 위로 잠시 흉악한 미소가 스치니 이로서 사내가 원한 마지막 명분이 드디어 손에 들어온 것임을 확인한 까닭이라.

허나 아직은 명분에 불과한 즉, 사내는 다시 싸늘한 낯을 하고 거듭 확인에 나섰다.

“너구리와 쥐는 아닐 것이고, 역시 뱀이더냐?”

“그러하옵니다. 때마침 여우가 한 손 거들었더구먼요.”

아니었으면 해를 넘겼을지도 모르겠사옵니다.

“이런…. 일찍 움직여준 건 반갑지만 여우가 낀 이상 아무나 보낼 수도 없게 되었구나.”

“예, 아직 군부 내의 정리가 다 마무리되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이미 꼬일 대로 꼬인 인선을 다시 한 번 뒤져야 할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움직일 거라 예상한 자가 움직인 것이니 그는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그자가 온전히 자의만으로 움직인 게 아니라 누군가의 입김이 닿아 움직인 것이라는 점이었다. 뱀 새끼, 그러니까 3황자 증에게 그의 세력이라 할 만한 것은 사실 별로 없었다. 애초에 역모를 꾀했다는 이유로 외척이 모조리 치워진 것도 모자라 황위 계승권까지 박탈당한 이가 그였다. 비록 얼마 전부터 이뤄지지 못할 꿈을 꾸느라 황후와 엮이는 것도 모자라 제 나름대로 북방 야만족 출신 용병들을 대거 고용하는 등 애를 쓰고 있기는 하지만 그나마도 진작 사내의 손바닥 안 일이었다. 대외적으로는 형제인 탓에 명분을 찾는 과정만 아니라면 일찌감치 역모를 꾀했다며 치워버리고도 남았을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 이가 드디어 명분을 내놓았다. 근데 하필 그 과정에 여우가 섞이고 말았다. 20년을 넘어 30년 가까이 황궁은 물론이요 의정원을 구성하는 육부에까지 제 세력을 구축해온 여우가 개입을 한 것이다. 저가 멀쩡한 것이 밝혀지고 난 이후로 은둔하는 줄로만 알았더니 이런 수를 준비하고 있었을 줄이야.

“쯧, 내 그래서 병부장관을 갈아치우자 한 것이거늘….”

“대체인선이 없는 이상 갈아치워도 달라진 게 없었을 것이옵니다. 다행히 워낙 해 먹은 게 많은 인사라 조만간 정리가 될 터이니 마음 놓으시옵소서.”

“조만간 정리가 되는 거야 누가 모르나. 당장 북으로 보낼 만한 인물이 없으니 이러는 게지. 어디보자…. 좌장 최씨는 이제 겨우 부장급이니 붙여 보내봤자 소용이 없을 것이고, 우장 관씨를 보내야 하나?”

“기운이야 이팔청춘도 울고 갈 이입니다만 내일 모레가 고희(古稀)라지요. 어르신 괴롭히는 거 아닙니다. 어지간하면 내성의 일만 맡기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그럼 남는 것은 중장 이씨뿐이로군.”

그이는 중갑군인데….

역모를 명분으로 내세워야 하니 어쨌든 군을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다. 그것도 최대한 은밀하고 신속하게 움직여야 한다. 헌데 하필의 장이 여우와 줄이 닿아있는 자인 것도 모자라 당장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이 기동력에서 가장 떨어진다는 중갑군이다. 이래서야 기껏 찾은 명분 제대로 써먹기도 전에 내전부터 치를 판이니 두 주종이 골머리를 앓을 밖에. 차라리 고민할 시간이라도 길면 좋으련만 그도 아니니 더욱 마음이 급하다. 두 주종은 물론이요 각각 궁인과 사무원이 모습을 하고 있던 밀군 둘과 은신 중이던 밀군 수장까지 머리를 더한 끝에 갖가지 수가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니 덕분에 겨우 반 시진도 되지 않아 수십 개의 수가 나왔다 사라진다.

“―아니면 이리하는 것은 어떻겠사옵니까?”

“…?”

그 수가 마침내 백에 이를 무렵, 책사가 다시 한 수를 내놓으니 그는 다음과 같더라.

“마마께옵서 움직이는 겁니다.”

“내가 먼저 치라는 것이냐?”

“아니옵니다.”

“으음?”

“말 그대로 움직이기만 하시면 됩니다.”

들을수록 뜬금없는 말이다. 허나 잠시 고민하던 사내는 제 나름의 답을 찾았다.

“…날더러 미끼가 되라는 것이로구나.”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더냐?”

“마마께옵서는 미끼로 들어가 장수가 되어 나오시면 되옵니다.”

“호오? 그거 재미있구나. 어디 한 번 풀어보렴.”

그리고 드디어 계책이 완성되었으니 그 내용 다음과 같더라.

“우선 행궁을 이용하시지요.”

“행궁을? 하지만 북의 행궁이라면 이미 흑마와 백곰이 자리를 틀고 있지 않으냐?”

“그러니 더 이용하기 좋지 않습니까? 그들을 만날 목적으로 가는 것이라 하면 뱀 새끼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옵니다. 게다가 그 두 사람의 호위가 진작부터 자리하고 있은 즉 혹여 인원이 좀 늘어난다 하더라도 쉽게 드러나지 않을 것이옵니다.”

“흠…, 과연 병력 운용 면에서는 나쁘지 않을 듯하구나. 허나 그리 하면 굳이 내가 미끼로 들어가 장수로 나올 일도 없지 않으냐?”

“아니, 그는 아니옵니다. 그런 식의 방문이라면 마마가 직접 드러내놓고 움직일 수 있는 병사의 수라고 해봤자 채 서른이 되지 않을 것이옵니다. 밀군의 정예만 챙겨 움직인다 해도 이미 뱀 새끼가 챙겨놓은 병력의 수가 3천을 바라보고 있는 이상은 턱없이 부족한 수이지요.”

“그는 그렇지.”

“허니 우선은 마마의 존재로 뱀 새끼를 꾀어내야 할 것입니다.”

“내 존재로 뱀 새끼를 꾀어내라?”

“예.”

“꾀어낸 다음은?”

“홀려야지요.”

“무엇을 어떻게?”

“이정도면 당장이라도 덤빌 수 있겠구나 싶을 정도로 홀리시면 됩니다.”

“흐음….”

“마마 하나만 잡으면 모두 제 뜻대로 될 것이라 믿도록 만드세요.”

“그리고 날 잡으러 덤비려는 순간 치라는 게로군.”

“과연 주군이시옵니다. 그 지혜로움을 감히 뉘가 넘으리오.”

“논다.”

“송구하옵니다.”

사내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분명 내용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니, 과연 계책이라 할 만한 내용이었다. 스스로 미끼가 되어 적진에 뛰어드는 것으로 상대의 방심은 물론이요 만용까지 이끌어내어 그 기세 한껏 올랐을 때 단숨에 쳐내는 것이었다. 북부를 정리한다는 목적에도 부합할뿐더러 혹시 모를 잔챙이들의 기를 꺾기에도 최적의 방법이었다.

“호.”

“하문하옵소서.”

“그 계책에 한 가지 문제가 있구나.”

“……예?”

허나 이 계책이 제대로 결과를 얻기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네가 뱀 새끼라도 나 같은 놈이 미끼로 보이지 않을 듯싶다만?”

그놈이 암만 머리가 모자란다 해도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형제를 얕볼 정도는 아니야.

“그는 그렇지요.”

헌데 지적하기 무섭게 수긍의 답이 돌아오니 어지간해서는 막히지 않는 광의 말문이 막히는 순간이다. 상전이 그러거나 말거나 책사는 제 할 말 쏟아내기 바쁘다.

“그러니 꾀어낸 다음 홀려야 한다고 말씀드린 것이옵니다.”

그 방법은 주군께서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그리고는 히죽이 웃어 보이니 광은 뭐라 더 말하는 대신 조용히 제 앞에 놓여 있던 찻잔을 집어 던지는 것을 선택하였다.

참말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

때아닌 털옷도 모자라 털신에 털장갑까지 동원해 전신을 꽁꽁 싸맨 청은 제 품속에 자리한 뜨끈한 온옥(溫玉) 바로잡다 말고 다시금 한 팔로 저를 단단히 품고 있는 제 서방 낯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으음? 어찌 그리 보누?”

추워? 아직도 추워서 그래?

그리고 대번에 돌아오는 근심 어린 목소리에 서둘러 고개를 내저으니 그 기세에 덮어쓰고 있던 모자가 위태롭게 흘러내린다. 그러자 대번에 시커먼 장포 자락이 저를 옴팡 감싸니 살짝 들어 치나 싶던 냉기가 대번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더라.

“얼른 고쳐 쓰렴. 이제 제법 북으로 들어온 터라 자칫하다가는 크게 고뿔이 들 게야.”

“예? 예, 예.”

청은 지금 황자님 품에 안겨 하늘을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그것도 항상 날아다니는 것만 보던 비익조(飛翼鳥) 위에 올라탄 채로 말이다. 덕분에 청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어리바리한 상태였다. 생전 처음 금수 위에 올라타 하늘을 날게 된 것도 기가 막혔지만 애초에 저가 어찌하여 이리된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세상에, 이게 참말 무슨 일이야.

분명 좀 전까지만 해도 궁인들 피해 후원 정자에서 서책 필사를 하고 있던 저였다. 이런저런 소일거리 찾다 공부가 될 것이라는 말에 혹해 시작한 것이었는데 의외로 책을 잘 골라온 덕에 재미도 쏠쏠하여 한창 불이 붙은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궁인들이 우르르 저에게 몰려드나 싶더니 순식간에 사람을 둥글둥글한 털 뭉치로 만들어 놓더라.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바람처럼 나타난 황자님 손에 붙들려 낯선 길을 한참이나 내달렸더랬다. 발이 좀 더디다 싶으니 대번에 덜렁 안아 드는 기세에 놀라 무슨 일이냐 따져 물을 겨를도 없더라. 아니, 실은 바닥에 다시 발을 디딜 것도 없이 황자님 품에 안긴 그대로 원향전 본채만 한 덩치의 날짐승 위에 올라타고 있더라. 펄럭펄럭 날아오르고 있더라. 그것도 한 떼의 무리가 목청껏 아니 된다 외치는 것 뒤로 하고 서방님과 단둘이서만 후르르 하늘로 솟구치고 있더라. 어찌나 난처하고 당황스러운지 뿔이 날 겨를도 없이 달아난 넋부터 챙겨야 할 판이 되었다.

게다가 그게 끝이었냐하면 그것도 아니다. 금시 돌아가려니 했더니 웬걸. 그야말로 하염없이 날고 날기를 한참. 머리 바로 위에 떠 있던 해가 서편으로 제법 기울었음에도 거대한 날짐승의 날갯짓은 멈출 줄을 모르더라. 그러는 사이 스치는 바람마저 더욱 차가워지기 시작하니 어느 순간 궁인들이 제 품에 미리 넣어준 온옥 한 덩이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꼭 끌어안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청이었다. 참으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사태가 아닐 수 없더라.

“내 참으로 미안타. 서두르라 했더니 이 망할 놈들이 연(輦)도 없이 덜렁 비익조만 마련해 놓을 줄은 몰랐어.”

너와 첫 외유가 시작부터 이리 험하게 되었으니 이를 어쩔꼬….

헌데 이 모든 사태의 원인임이 분명한 황자님께서는 오히려 저보다 더 난처한 낯을 하고는 연신 사죄와 한탄만 거듭하시니 귀한 분의 사죄 연달아 받게 된 청은 이제 아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분명 저가 먼저 따져야 할 일임에도 도리어 더욱 죄스러워지는 것이다. 이는 청의 타고난 성정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저를 향한 황자님 귀애가 참으로 지극한 탓이라. 비록 순수한 것은 아닐지언정 저에게는 분에 넘치는 귀애였으니 그야말로 백골난망(白骨難忘)이더라. 아니, 실은 그 귀애가 지나쳐 황송함에 피가 마를 지경이 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마침 지금이 딱 그 짝이라.

희한타, 참말로 희한타. 저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이러시는 것일까? 고이 끼고 돌고 살피는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할 따름인데 이렇게 사죄를 거듭하시니 이를 어쩌면 좋아.

“그, 저는 괜찮습니다. 워낙 싸맨 데다 온옥도 끼고 있지 않아요? 춥지 않습니다. 따뜻하여요.”

“참말이냐?”

“예, 참말이어요. 게다가 마마께옵서 이리 감싸주시니 오히려 땀이 다 날 지경입니다.”

그래, 정말로 땀이 난다. 황송함을 이기지 못한 비루한 몸뚱이가 놀라서 식은땀을 쏟아낸다. 허나 사실을 고백하면 또 한참이나 사죄가 이어지겠지. 잠시, 아주 잠시 제 처신을 두고 고민하던 청은 곧 저를 품고 있는 제 서방 너른 가슴에 가만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여린 웃음을 입매에 그려 넣으니 이는 어릴 적 기생 공부를 할 적에 배워두었던 교태를 흉내 내려는 것이더라. 보고 배우기는 했지만 따로 써먹을 일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이런 날도 있구나.

“그…, 그거 다행이구나. 기껏 외유를 나와 병을 얻어 돌아갈까 걱정하였는데.”

“저는 참말로 괜찮습니다. 도리어 마마가 더 걱정이어요.”

“음? 나? 무어가?”

“이리 차가운 바람 다 막아주고 계시잖습니까. 이러다 마마께옵서 고뿔이 들 것이어요.”

“아하하하, 내 색시, 착하기도 하지. 괜찮다, 괜찮아. 내 금군들과 어울려 놀기만 한 것은 아니거든. 무릇 장수라 함은 한서불침(寒暑不侵)의 강건한 신체를 갖춰야 하는 법. 이 정도 추위는 충분히 견디고도 남음이야.”

“그래도 바람이 이리 차가운데….”

“어허, 어찌 이리 의심이 많누. 내 지금이라도 저 아래 계곡물에 수욕이라도 해야 믿을 것이냐?”

“예에? 아이고, 아닙니다. 아니어요. 믿겠습니다, 믿을 것이어요.”

허니 내려가실 것 없습니다. 마마, 내려가실 것 없대두요!

심지어 드디어 돌아오나 싶던 정신마저 황자님 쓸데없는 고집에 허둥지둥 실랑이를 하는 동안 다시 열 길 밖으로 달아나니 이거 암만해도 오늘 하루가 별나게 길어질 모양이구나. 뿔난 망아지 같은 서방 심사 덕에 늘어나는 것은 한숨뿐이더라.

“―어이쿠 이런.”

“…?”

사나이 자존심으로 고집을 세우던 황자님 기세가 한풀 꺾인 것은 빠르게 휘몰아치는 삭풍 사이로 모래알보다 가늘고 고운 얼음알갱이가 섞이기 시작한 때였다. 사실 기세가 꺾였다기보다는 다른 데 눈이 돌아간 것이 더 정확하였지만, 어쨌거나 차가운 계곡물에 수욕을 하겠다는 말은 들어갔으니 다행이었다.

“겨울이 가장 빠른 곳이라 하더니 이곳은 벌써 눈이 한창이로구나. 서두르지 않으면 낭패를 보겠어.”

“예? 어찌하여서요?”

게다가 알고 보니 저와 황자님 처한 처지가 제법 심각하다.

“이러다 큰 눈이 내리기 시작하거나 도착 전에 해가 지기라도 하면 꼼짝없이 눈밭에서 노숙을 해야 하거든.”

“…………엑?! 어찌하여서요?!”

“그리되면 보이는 것이 없으니 비익조도 날지를 못하고 우리도 걸음을 옮길 수가 없어 그렇단다.”

“세상에….”

태평한 낯으로 하는 말치고는 무엇 하나 무섭지 않은 것이 없으니 그렇지 않아도 차가운 바람에 얼어있던 청의 낯이 아예 하얗게 질리기 시작하더라. 뒤늦게 그를 알아본 황자님, 허둥지둥 제 어린 내자 어르고 달래기에 나선다.

“다행히 이미 한 번 몰아친 뒤라 조금만 더 서두르면 얼추 시간 안에 떨어질 듯도 하구나. 다만 그만큼 네가 고될 것 같은데…. 괜찮겠느냐?”

“저, 저는 괜찮사옵니다. 뭐든 다 견딜 것이니 마마 뜻대로 하셔요.”

“미안타, 참말로 미안해.”

“으, 으아아아…!”

“단단히 잡으렴!”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저를 향해 몰아치는 바람이 더욱 거세게 돌변하였으니 이는 황자님이 고삐를 죄어 비익조를 채근한 덕이라. 귓전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조금 전만 해도 서로 말소리 알아들을 정도는 되었는데 순식간에 마치 천둥처럼 돌변하니 여차하면 제 몸도 그 바람에 휩쓸려 날아갈 것만 같더라.

덕분에 청은 또 한 번 지금의 상황과 자신들이 향하는 목적지에 대하여 물어보고 확인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어찌하여 지금 저가 사내와 함께 움직이는 것인지, 그리고 그들이 함께 향하는 곳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알아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하여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조차도 모두 사내의 계획대로 이루어진 것임을, 또한 그의 계획 속에 진작 저가 들어가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후에 두 사람의 가슴에 더없이 크고 아픈 가시가 되어 박힐 시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한편 제국의 북편 위왕부에서도 가장 북쪽 외진 산지에 자리한 백련행궁은 때아닌 방문객을 맞이할 준비를 하느라 점심나절부터 지금까지 매우 분주하였다. 특히 두 해 가까이 이곳에 머무르며 주인 노릇하고 있는 1황자 혁이 지나치게 신경을 쓴 끝에 신열로 쓰러지는 일까지 더해지면서 좀 전부터는 분주하다 못해 전쟁터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오죽하면 방문하기 한나절 전에야 연통을 넣은 문제의 귀빈을 원망할 짬도 없더라.

“어디까지 오셨다더냐?”

그나마 원래부터 주인 노릇 하는 이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진작 난리가 났으리라.

“일각 전 수림(樹林) 경계 초소 위를 지나갔다는 연통이 닿았나이다.”

행궁 수석 집사의 말에 4황자 수의 낯이 돌덩이처럼 굳어든다. 남부 수림의 경계라고 하면 행궁에서 마차로 두 시진, 준마로는 한 시진 남짓한 곳이었다. 헌데 문제의 객은 비익조를 타고 날아오는 중이니 그나마도 다시 반 토막이 날 게 분명하다. 즉, 손님 도착까지 겨우 반 시진도 남지 않았다는 소리. 이제 겨우 손님이 지낼 별채 단장을 시작한 참인데 이래서야 손님에게 큰 실례를 저지를 판이다.

“어쩔 수 없구나. 내 우선 차라도 대접하며 시간을 끌어 볼 테니 자네는 별채 단장이나 한 번 더 살펴주게.”

“허면 소주방에다 다과를 챙겨두라 합지요.”

“아, 그나저나―.”

“예?”

“그, 형님은 좀 어떻다 하더냐?”

허나 지금 그가 마음을 졸이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 실은 곧 닥칠 예정이라는 손님보다 지금 본인의 처소에 쓰러져 있다는 제 장형이자 제 단심(丹心)의 주인 되는 이, 곧 1황자 혁에 대한 걱정이 더욱 큰 탓이라. 갑작스러운 손님 소식에 심란한 속이 제 주인 생각에 이르니 바짝 마르다 못해 자글자글 타들어 가기 시작한다.

“의원 말로는 너무 신경을 쓰다 잠시 심맥이 흐트러진 것이라 하옵니다. 항상 드시는 탕제를 올렸으니 곧 기력을 찾아 일어나실 것이옵니다.”

다행히 돌아오는 답이 참으로 기꺼운 내용이라 타들어 가던 속이 조금은 편히 가라앉는다. 잠시 가슴을 쓸어내린 수는 다시 원래 나누던 이야기로 돌아갔다.

“왕부에 연통을 넣으라 한 것은 어찌 되었느냐? 회답은 온 게야?”

“예, 그러하옵니다. 마침 경계 초소에서 보낸 연통과 함께 닿았나이다.”

“뭐라 답했던가?”

“그게…, 오늘은 왕부의 업무로 인해 당장 찾는 것은 무리라 하옵니다. 대신 명일(明日) 아침 일찍 찾겠노라 답이 왔사옵니다.”

“…………왕부의 업무라니 어쩔 수 없지.”

그리고 저가 미리 언질을 받은 것과 토씨 하나 틀린 게 없는 그 내용에 내심 혀를 내둘렀다.

그도 그럴 것이 황궁에서 이곳 위왕부까지 사람의 걸음으로 쉼 없이 움직여도 꼬박 한 달이 걸리는 거리였다(그나마도 큰길에 물길까지 모두 이용해야 가능한 시간이었으니 그 거리 알 만하였다). 헌데 그리 멀리 떨어진 곳에 계신 분이 어찌 이리도 북의 상황 거울 보듯 읽어 저에게 미리 언질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 왕부에서 어쨌든 시간을 미루려 들 것이라는 정도는 사실 저도 짐작하였다. 하지만 그를 위해 내세운 핑계며 미적거리는 시간까지 미리 받은 언질과 정확히 일치하니 제 주군의 능력에 놀라다 못해 덜컥 두려움이 일어날 지경이더라.

“…―혹시 조반을 같이 들 것이냐 물어보게. 그리 바쁘다니 평시에는 쉽게 시간을 내기 힘들 수도 있으니 말이네.”

과연 이런 이를 상대로 무엇을 어찌하겠다는 것일까? 상대도 상대 나름일지니 무엇이든 제 손바닥 위에 놓고 보는 이를 적으로 삼은 자들의 어리석음이 기가 막힌 것을 넘어 안쓰럽기까지 하더라.

허나 저가 안쓰러워한다고 달라질 것은 또 무어냐. 이제 저가 살아야 할 이유는 하나뿐이었으니 그것이 바로 제 단심의 주인이요 드디어 마음이 서로 마주 닿게 된 제 정인이라. 그를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으니 제 차형이었던 자를 주군으로 모시는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적어도 그를 따르면 저가 원하는 것을 얻게 될 터이니 그것만으로도 저가 그를 주군으로 모실 이유는 충분하였다.

그러니 수는 그저 따를 수밖에 없다.

지금껏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황가의 비밀이, 그 처절한 진실이 만방에 드러날 그 날. 그리하여 저와 제 정인이 더 이상 서로를 정부 삼지 않아도 될 그 날을 위해 제 주군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비록 그것이 지금 당장은 참으로 귀찮고 번거로운 내용으로 가득할지언정, 그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저가 선택한 길이었으니 이제 그 길을 따라 달리는 것만이 저가 할 일이더라.

“마마, 방금 비익조가 왕부 위를 지났다 하옵니다.”

“오냐.”

내 곧 나가마.

수는 더 깊이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행궁의 주인 노릇 하는 것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도 당장 손님의 걸음이 지척에 닿았으니 이제 마중을 나갈 때였다. 하여 흐트러진 복색 가다듬으며 서둘러 행궁 뒤편에 자리한 공터를 향해 걸음을 옮기니 기다렸다는 듯 거대한 그림자가 백련행궁의 반절을 뒤덮는다.

드디어 새로운 객이 닿은 것이더라.

제국 역사에 ‘위왕(僞王)의 소란(小亂)’이라는 이름으로 남게 될 사흘을 이틀 앞둔 백련행궁의 풍경은 이토록 소란스러운 것이었다.

이렇듯 백련행궁이 갑자기 찾아든 귀빈 덕에 소란스럽다면 위왕부에 서북쪽 해안가에 자리한 또 하나의 행궁이자 3황자 증의 유배지인 북해원(北海園)은 지금 또 다른 의미로 소란해지고 있었다.

“달랑 제 남총 하나만 데리고 움직였다고?”

다른 호위고 뭐고 하나도 없이?

“예, 그렇다 하옵니다.”

어미의 허물로 진작 보위를 이을 자격을 박탈당한 것도 모자라 어린 나이에 유배형을 받은 3황자 증은 제 유모의 아들이자 저의 책사 겸 호위인 완 가(家) 이(伊)의 답에 비릿하니 웃고 말았다. 저잣거리 뜬소문인 줄로만 알았더니 설마 그것이 참일 줄 누가 알았을까. 덕분에 저가 생각지도 못한 호기를 맞이하게 된 것을 알아차린 그의 낯이 대번에 박꽃마냥 활짝 피어난다. 어찌하면 그자를 잡을 수 있을 것인가 골몰했던 지난 몇 달이 억울할 정도로 쉽게 찾아온 기회가 기꺼워 견딜 수가 없다.

과연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간단히 해결될 리가 없지.

그에 어미를 닮은 짙은 자색 눈동자가 위험할 정도로 번들거리니 이는 그가 하늘이 제 편이라 확신을 가지게 된 탓이라. 진작 광기에 잡아먹힌 탓에 그것이 한낱 착각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고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때를 맞춰 저를 향하는 호기만을 경험한 욕심쟁이 어린애의 머릿속이란 그토록 단순한 것이더라.

“잡종 녀석에게는 내가 일러준 대로 답하였느냐?”

“예. 혹시 몰라 부주에게도 언질을 해 두었으니 혹시 확인을 하려 들어도 알아낼 건 없을 것이옵니다.”

“그래, 잘했다. 허면 혈룡대는 어디까지 왔다 하더냐.”

“황공하오나 아직 하루하고도 반나절 거리라 하옵니다.”

“뭐라? 하루하고도 반나절?”

“그것이…, 그자가 하필 비익조를 타고 움직이는 탓에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다고….”

“빌어먹을! 그 작자는 어찌하여 내 발목 잡는 일만 골라서 하는 게야?”

이러니 그 작자부터 치워야 한다는 것이야. 그 작자부터!

심지어 저에게 불리한 일은 모조리 남의 탓으로 몰아버리니 누가 봐도 모자라고 덜 자란 자의 모습이라. 약관을 넘긴 장부라고는 믿기 힘들 만치 어린 그 모습이 참으로 기가 막히다.

헌데 더욱 기가 막힌 꼴은 따로 있었다.

“그렇습지요. 그 작자야말로 마마께옵서 보위에 오르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옵니다. 마침 이렇게 때맞춰 하늘이 도우시니 이 기회만 제대로 잡는다면 곧 황궁에 드시게 될 것입니다.”

“그래! 그래, 네 말이 옳다! 내 이제 곧 황궁에 돌아갈 것이니!”

책사라 하는 자가 그런 상전을 더욱 부추기는 것도 모자라 헛바람까지 잔뜩 밀어 넣고 있으니 이거 참 우스꽝스럽다 못해 기괴하기까지 한 꼬락서니더라.

“허면 혈룡대에는 최대한 서둘러 이곳에 모이라 일러두겠나이다. 이제 마마께옵서는 그 작자 사지로 꾀어낼 채비를 하시옵소서.”

“오냐, 그리하마.”

내 이번에야말로 그 작자 치워내고 내 자리를 찾을 것이니!

그리고 그 헛바람 한껏 들이마시다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한 3황자가 기세등등하여 성공을 장담하니 이로써 두 주종의 대화는 끝을 맺었다.

그날 밤.

북해원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자리한 다락에서 꽁지에 빨간 줄 하나가 든 잿빛 새 한 마리가 그 발목에 검은 대롱 단단히 매단 채 남동쪽 하늘을 향해 포르르 날아올랐다.

대번에 검푸른 털빛의 해동청(海東靑)에게 잡아 채일 줄도 모르고 그리 날아올랐다.

제국의 최북단에 자리한 위왕부의 공기가 한껏 불온해지기 시작한 날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더라.

한편, 귀한 손님 맞이한 백련행궁의 하루는 제법 늦은 시간까지 이어지는 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귀한 손님이 궁에 닿은 때가 막 해가 넘어가기 직전이었던 것이다. 암만 겨울이 일러 해가 짧은 북의 행궁이라지만 결코 이르다 할 수 없는 시간에 당도한 두 객이었다.

게다가 석반 직전에야 백련행궁에 닿은 두 객의 몰골은 빈말로도 멀쩡하다 할 수 없었다. 아니, 둘 중 하나는 그들이 타고 온 비익조만큼이나 씩씩하니 기운이 넘쳤으되 다른 하나는 새파랗게 얼어붙은 털뭉치 꼴을 한 것이 한눈에도 고된 여행길에 크게 시달린 모양새더라.

그에 멀쩡한 쪽마저 크게 근심하기 시작하니 백련행궁은 다시 한 번 분주해지기 시작했더랬다. 대번에 행궁 내전 깊은 곳에 자리한 온천물을 길어다 나르는 한편 금귤 달인 것에 꿀을 듬뿍 넣어 내오는 등 서둘러 귀한 손님 떨어진 기력 북돋우기 위하여 애를 쓴 것이더라.

다행히 그들의 노력은 금시 결실을 얻으니 이는 두 귀한 손님이 한창 기력이 넘칠 때의 장부였던 덕분이라. 두 객이 온천물에 몸을 녹이고 새큼달큼한 금귤 달인 물 마셔 정신을 깨운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기운을 찾은 것도 그러한 까닭이었다. 어쨌거나 그 모습을 확인한 행궁의 모두는 크게 안도하여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그제야 원래 대접할 예정이었던 환영 연회를 시작하였다. 물론 말만 연회고 실은 평소 차리던 상에 음식 몇 가지와 귀한 술 몇 병이 올라간 게 전부였지만 원체 낭비를 질색하는 황가의 남자들이다보니 그만 해도 차고 넘치더라. 아니, 실은 잔뜩 기합이 들어간 궁인들이 연신 새로운 요리를 날라댄 덕에 달이 뜰 즈음부터 시작되어 그 달이 밤하늘 한가운데 걸릴 무렵까지 이어졌더랬다.

그리고 연회의 이름을 빌린 석반을 마친 지금,

“이것 좀 먹어보렴. 위에 올라간 것이 설산 계수화를 꿀에 절인 것인데, 이게 이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별미란다. 그리고 여기 이것, 이것도 맛보렴. 이것이 뭔고 하면 말이다―.”

…저놈 이름자가 빛 광(光)이 아니라 실은 미칠 광(狂)이었던 게로구나.

대외적으로는 당금 황가의 장자이나 태중에서부터 독에 당해 지극히 미령한 신체를 타고난 탓으로 진작 보위에서 멀어진, 심지어 어미의 죽음 이후 외척의 세력마저 급격히 쇠락한 끝에 15년 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알려진 비운의 황자. 1황자 혁은 암만 봐도 눈꼴이 시어 견딜 수가 없는 작태를 견디다 못해 결국 작게 신음하고 말았다.

“큰 형님.”

형님,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나쁩니다.

그러자 제 바로 곁에 버티고 있던 곰 같은 아우가 냉큼 저를 챙기기 시작하니 그 재빠른 처신 덕에 살짝 비꾸러져 들썩대던 속이 조금은 가라앉더라.

“이런…, 내 괜히 이곳을 찾은 모양이구려. 괜찮소이까, 형님?”

허나 곧장 이어진 또 다른 아우의 목소리에 다시금 불편하게 요동치니 이는 그의 신체가 워낙 부족한 것이 많은 탓만이 아니요, 그로 인해 비위가 남들보다 훨씬 약한 탓이 더 크더라.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손님이랍시고 제 앞에 자리한 제 ‘큰 아우’의 하는 행사가 참으로 지랄 맞다 못해 속이 뒤집어질 지경인 탓이라. 저 인사 뻔뻔한 거야 진작 알고 있었지만 간만에 겪으려니 속이 다 부대끼는구나. 다 알고 쳐들어온 주제에 저 말하는 본새 좀 보소. 덕분에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시원하게 토악질을 하고도 남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이 자리에는 그들 형제만 있는 것이 아니더라.

아니, 까놓고 말해 지금 이 자리에서 저가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할 유일한 하나가 바로 그이더라.

“…괜찮네. 오랜만에 손님맞이 할 생각에 들떠 좀 설쳤더니 잠시 피로하여 이렇다네. 놀라게 해서 미안하오, 제수(弟嫂).”

하여 이 불편한 자리를 마련하게 만든 몹쓸 ‘큰 아우’ 옆에 오도카니 자리하고 있는 어린 후궁을 향해 정중히 사죄하는 혁이다. 아니, 실은 간신히 사죄할 핑계를 찾은 김에 즉시 써먹었다고 봐야 옳을 것이라.

“아니옵니다. 저야말로 못난 부군을 대신하여 사과드려요.”

“으음? 내가 무얼 어쨌다고 또 타박인 게냐, 내 색시?”

“…이런 부군이라 참으로 송구합니다….”

…헌데 그 결과가 참 안타깝다 못해 눈물겹다. 정말 사과를 해야 할 당사자는 이번에도 뻔뻔함을 자랑하고 있거늘 아무것도 모르고 끌려온 게 분명할 어린 제수는 사정 다 알지도 못하면서 진심을 담아 사죄를 하고 있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까. 똘망똘망한 얼굴 가득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담아 사죄하는 그 모습 참으로 가련하더라. 대체 어찌하면 저 미친놈에게 저리도 멀쩡하고 반듯한 짝이 있을 수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도다.

“괜찮습니다. 큰 아우가 원래 저런 것을 내 모르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런 것입니까?”

“………그런 것이지요.”

심지어 저 가련한 이는 아직 제 ‘큰 아우’의 유별난 성정을 다 겪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 말 끝나기 무섭게 우중충한 낯을 하고 그런 것이냐 되물을 리 없으니 말이다. 그를 깨달은 혁은 어린 제수에 대한 측은함 반, 괜한 것을 말했구나 하는 후회 반으로 덩달아 우중충한 낯이 되었다. 다 알고도 주인으로 모시는 저야 제 팔자 제가 뒤튼 것이지만 저 어린 것은 무슨 죄란 말인가. 게다가 ‘큰 아우’가 백치에 병신 흉내를 낼 적부터 곁붙이로 있었다지? 하하…, 혹여 전생에 나라를 판 악적이라 쳐도 이만하면 그 죄업 진작 다 털고도 남으리라.

“이보시게, 큰 아우.”

“예, 형님.”

“그대가 참으로 귀한 이를 내자로 얻었네.”

하여 혁은 진심을 담아 어리고 가련한 제수를 칭찬하였다. 그것도 저 작고 어린 이에게 직접 하는 대신 부러 제 몹쓸 ‘큰 아우’를 향해 말하였다. 이미 제 서방 뻔뻔한 작태를 대신 부끄러워하느라 발갛게 물든 어린 제수씨 낯도 낯이거니와 저런 이를 제 곁에 두고 있는 ‘큰 아우’의 음험한 꿍꿍이가 어렴풋이 짐작이 가는 탓이었다. 그래, 맞다. 저 불쌍한 이 적당히 괴롭히라는 제 나름의 언질을 던진 것이다.

“그렇지요? 내 이 사람 내자 삼으려고 대전에 드는 머저리들과 얼마나 싸웠는지 말로 못 합니다. 그럼에도 겨우 후궁 자리 하나 내주게 된 것이 어찌나 분하던지….”

이 귀한 사람도 못 알아보는 머저리들을 얼른 치워버려야 할 것인데.

허나 기다렸다는 듯 돌아오는 답이며 그 끝에 따라붙는 혼잣말 듣고 보니 이번에도 남는 것은 후회뿐이더라. 이 뻔뻔한 ‘큰 아우’는 다 알고도 모르는 척 진지하게 맞장구를 치는 것도 모자라 제 계획 망쳐놓은 작자들을 향해 분통을 터뜨리기까지 하니 또 한 번 애꿎은 제수만 몸 둘 바를 모르고 허둥댄다. 무슨 말을 꺼내든 엉뚱한 이에게 불똥이 튀니 이제는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으응? 어찌하여 내 옆구리를 자꾸 찔러대는 게야? 왜, 무엇 때문에 이래? 응?”

아프다, 색시야. 아이고, 참말로 아프대도.

게다가 누가 악질 아니랄까봐 다 알고도 모르는 척 당황하는 낯을 꾸미니 ‘큰 아우’ 헌걸찬 풍신이 반절은 넘기나 싶을 자그마한 이가 발갛게 달아오르다 못해 숫제 불덩이가 되어간다. 오죽하면 저와 함께 있을 때는 다른 것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제 정인마저 난처한 얼굴로 연신 눈을 굴릴 지경이다. 자리한 모두가 민망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게 되었으니 오직 한 명, 이 상황을 만들어낸 당사자만 여전히 뻔뻔하게 그 입을 놀리고 있더라.

내가 죄인이로다….

결국 혁은 지끈거리는 가슴 부여잡고 작게 신음하였다. 저 몹쓸 ‘큰 아우’가 무슨 목적으로 저러는 것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알고 있다고 견딜 수 있는 것도 아니더라. 이 와중에 사정 다 모르는 백곰 녀석까지 제 장형 걱정한답시고 허둥대는 통에 두통거리를 더하니 이거 참 갑갑하다.

어찌할꼬, 참말 어찌할꼬.

무엇을 어찌해야 주군 명에 따라 유일한 외인인 저 어린 제수 하나만 이곳에서 내보낼 수 있을꼬.

“소, 송구하오나!”

“응? 무엇이?”

하여 때마침 사죄의 말과 함께 자리 박차고 일어난 어린 후궁의 모습이 참으로 반갑더라.

“송구하오나, 제가 아직 여독이 다 가시지 않은 듯하옵니다. 그, 그래서…, 아이고 좀!”

작작하시어요! 예의가 아니어요!

아니, 그렇게 일어나는 것으로도 모자라 여직 눈치 없는 자 흉내를 내고 있는 제 서방 몹쓸 손 찰싹찰싹 매섭게 내려치기까지 하니 그 똑 부러지는 모습 참으로 볼만하더라. 마냥 몹쓸 서방에게 휘둘리는 가련한 이인 줄 알았더니 그런 것도 아니구나. 특히 저 ‘큰 아우’ 상대로 제법 맺고 끊음이 분명한 것이 아주 마음에 든다. 지금도 보아라. 아무리 동기간이라 하여도 지켜야 할 예의는 있는 법이라며 호되게 꾸짖는 모양새가 어째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다행이로다. 저 정도면 이리저리 휘둘릴지언정 결코 제 중심을 잃지는 않을 이로구나.

혁은 다시금 깊이 안심하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깊이 동정하였다. 저런 인물이 어쩌다 하필 주군의 손에 들어 팔자가 꼬인 것일까. 보아하니 마음은 모르겠고 몸은 확실히 다 준 모양이니 그에 마음이 더욱 무겁다. 차마 내버리지 못한 양심이 혁의 심장을 쿡쿡 찔러내는 탓이었다.

“여튼 두 분 황자님께는 송구하옵니다만 저는 이만 들어가 쉴까 하여요. 무례한 청인 것은 알지만 부탁드립니다.”

다행히 그가 그리 고민을 하든 말든 어린 제수의 말소리가 다시 이어지니 혁은 이제 새로운 의미로 깊이 안도하였다. 어쨌거나 어린 제수의 저 강단 있는 대처 덕에 저가 할 일이 줄어든 덕분이었다. 괜히 명령을 따른답시고 내키지도 않는 장단 이어갈 것도 없이 저 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도록 놔두면 되는 것이다. 하여 냉큼 다 준비되었다 답하였다. 거기에 더해 가서 몸만 누이면 될 것이라 하니 조금 전만 하더라도 제 서방으로 인한 수치와 역정으로 울긋불긋하던 얼굴이 단박에 하얀 박꽃처럼 피어나더라.

물론 그 와중에 주군이라는 작자가 저만 두고 어딜 가냐 칭얼대다(…) 그 옆구리 세게 쥐어뜯기고 세게 밀쳐지는 볼거리가 더해지기는 하였지만, 어쨌거나 이제 갓 성년이 되었다는 어린 제수는 만난 이후 가장 환한 낯을 하고 인사를 올리더니 쌩하니 침소를 향해 사라졌다.

드디어 이 공간에 자리하고 있던 유일한 외인, 혹은 유일하게 대계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가 주군이 목적한 대로 자리를 뜬 것이었다.

사람을 치우기 위한 것이라고 하기에는 참으로 악취미라 할 방법의 결과였다.

“…여전히 재주가 좋습니다.”

사람 물리는 방법치고는 꽤 민망하지만 말이지요.

그런 까닭에, 혁은 도망치듯 자리를 뜬 어린 후궁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기 무섭게 은근한 타박의 말부터 꺼냈다. 그러자 좀 전까지만 해도 제 어린 내자에게 외면당한 충격으로 세상 무너진 낯을 하고 있던 이가 단박에 느른한 미소 만면에 걸치며 답하였다.

“먹고 살려면 못 할 게 무어있을까.”

“농이 심한 것도 여전하군요.”

여러 사람 명줄 들었다 놨다 하기를 예사로 하는 분이 할 말은 아닌듯합니다.

분명 형제의 대화이거늘 어째 언사가 참으로 희한하다. 존대를 하고 받는 이가 뒤바뀐 것은 차치하고 암만 들어도 오랜 세월 마주하지 못한 이들의 대화로는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모르는 이가 보면 괴이하다 여기고도 남을 광경이었다.

“혀, 형님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게 된 수는 갑자기 돌변한 두 형님의 태도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저야 대외적으로는 아우요 물밑으로는 수하가 되기를 자처하였으니 존대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 허나 어떻게 따져도 연장자일 혁이 어찌하여 광을 향해 존대를 하는 것도 모자라 저가 모르는 관계가 있음이 분명한 태도를 보이는 것일까?

내 정인이, 어찌하여 저보다 차형과 더 친밀한 것처럼 보이는 것일까?

“대체 무슨 연유로 장형께서 차형께 존대를 하는 것이며 왜 차형께서는 장형께 하대를 하는 것이옵니까? 또한 분명 10년도 넘게 서로 만나지 못하였다는 분들이 어찌하여 이토록 친밀한 것이옵니까?”

아아, 과연 장부의 뜨거운 연심이란 대단한 것이다. 뭐든 속에 담아놓는 것이 습관이 된 이가 단숨에 긴 물음 쏟아내는 기세 참으로 장하더라. 어찌나 장하던지 포악하기로 이름난 극지방 백곰과도 비견할 만하였다.

“…현가야.”

“예, 주군.”

허나 그 기세 아무리 사납다 한들 갓 태어나 강보로 똘똘 싸맨 꼴부터 지켜보았던 이들의 눈에도 그리 보일 리 없지 않은가. 아니, 오히려 전혀 엉뚱한 이야기가 튀어나오기 시작하니 두 사람 향해 사나운 낯을 하고 버티고 있던 수의 기세가 당장이라도 미쳐 날뛸 판이다. 현가는 또 누구이며 누가 누구의 주군이라는 것일까? 어찌하여 내가 모르는 것이 이리도 많은 것일까?

그 기세에 잠시 혀를 찬 광은 다시 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 아직도 밝히지 않은 게야?”

“…주군 오신 김에 밝힐 작정이었지요. 암만해도 내 입으로 먼저 말을 꺼내기 힘든 내용이지 않사옵니까.”

“논다. 힘들기는 개뿔, 실은 네 낭군 상처받는 것이 무서워 지금껏 미적댄 것 누가 모를 줄 알고? 어차피 너 하는 말이면 무엇이든 금과옥조 삼아 받들어 모실 놈이거늘 무어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지금껏 밝히지를 않은 게야?”

“…………그는.”

“게다가 진작 제 처지가 뻐꾸기 새끼꼴이라는 것도 다 알고 있던 놈이 아니더냐? 가슴에 남은 것이라고는 네놈 향한 단심 하나가 전부인 놈인 것 뻔히 알면서 왜 여직 말을 아껴 이 사단을 내?”

어디 입이 있으면 변명 해보아!

그리고 입에 꿀이라도 문 것 마냥 말문을 닫아버리는 혁의 모습 보다 못해 연신 타박을 늘어놓던 주군, 기어코 폭발을 하신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부아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는 탓이었다. 하기야 뭐가 좀 잘 풀린다 싶다가도 이렇게 엉뚱한 데서 생각지도 못한 돌부리가 불쑥불쑥 튀어나오길 반복하니 당연 그럴밖에. 게다가 이번에 제 발길 앞에 불쑥 튀어나온 돌부리는 그중에서도 가장 고약한 놈이었다. 졸지에 치정 문제가 섞인 꼴이 되었으니 이 일을 어찌할까.

“당장 네 입으로 너한테 미쳐 정신줄 빠진 저놈한테 모든 사연 소상히 털어 놓아!”

정(情), 그것참 무서운 것이더라.

네 사정 밝히기 전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것이라 못 박은 주군의 엄명에, 혁은 결국 내키지 않는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사실은 자칫 혼자 남게 될 것이 두려워 조금만 더 숨기고 가리고자 했던, 그런 까닭에 지금껏 제 입으로 먼저 밝힌 바 없는, 그래서 이미 알고 있던 이들을 제외하면 오직 저 하나만이 알고 있는 그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그것은 당금 지존의 장자, 묵가 혁으로서가 아닌, 30년 전 제국 역사에서 사라졌다 알려진 혁씨 세가의 유일한 후계임에도 그를 드러낼 수 없는 탓에 어미의 성씨를 쓰게 된 현가 혁으로서의 이야기였다.

혁의 어미인 귀비 현씨는 그 성씨로 짐작할 수 있듯이 한때 황가의 가장 충직한 신하 중 하나라 알려졌던 명경 현가 출신의 여인이었다. 세간에는 그 오라비인 현가 원(原)이 일찌감치 지금의 황제요 당시 10황자였던 묵가 단의 호위로 투신하여 있던 인연으로 황제가 품은 것이라 알려져 있었으나, 실은 더욱 고약한 사정이 엮여있었다.

시작은 현씨 세가와 마찬가지로 황가의 충직한 신하 중 하나라던 혁씨 세가가 흔적도 없이 지워지게 된 때부터였다. 지워진 이유는 지극히 간단했다.

역모. 감히 용신의 피를 받은 묵씨 황조를 밀어내려는 패역한 자들과 어울렸다는 이유였다.

직접 주도를 한 것도, 그들의 행사에 힘을 보탠 것도 아니고 단지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 하나로 200년 가까이 이어져 오던 명문가 하나가 흔적도 없이 지워진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사라진 가문이 혁씨 세가 하나만도 아니었으니 사정 모르는 백성들은 그 충신 가문이 어쩌다 그런 몹쓸 자들과 엮인 것이냐 한탄하였고, 사정 눈치 챈 세도가에서는 누가 작정하고 그들을 엮은 것이라며 수군대었다.

문제는 귀비 현씨가 본디 혁씨 세가의 안주인이 될 이였다는 것이다.

실은 이 인연 역시 그 오라비인 현가 원으로 인해 엮인 것이었으니 그 사연 참으로 절절하였다.

대대로 문관 가문이었던 현씨 세가에서 처음으로 걸출한 무관이 나왔으니 그것이 바로 현가 원이라. 문재가 달리는 것은 아니었으나 워낙 무재가 출중하여 일찌감치 10황자의 호위로 황궁 생활을 시작하였으니 그를 위해 군문에 적을 두게 된 제 오라비를 만나러 위관 관사를 찾았던 그녀가 오라비와 함께 관사를 나눠 쓰고 있던 혁씨 세가의 차남 혁가 건(建)과 안면을 트게 되었다. 서로 호감을 가진 한창 때의 남녀가 이런 이유, 저런 사정으로 자주 만나 정을 쌓기 시작하니 그것이 연정이 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더라. 하여 만난 지 두 해 만에, 그러니까 현씨 나이 열여섯, 혁가 건의 나이 열아홉이 되던 해에 두 가문은 정식으로 단자를 주고받았더랬다. 이른바 혼약을 맺은 것이었다.

헌데 이것이 화를 불러올 줄 누가 알았으랴. 단순히 명문 세가의 만남이 아니라 문관의 거두라는 현씨 세가와 무관의 으뜸이라는 혁씨 세가의 만남인 탓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유별나게 강한 황권에 더욱 힘을 더하게 될 그 결합에, 암중에 자리하고 있던 불온한 세력들이 준동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두 가문의 결합을 막기 위해 별별 짓을 다 벌였으니 두 세가를 찾기 시작한 매파들이 그중 첫째요, 늦은 밤 은밀히 양 가의 가주를 찾은 이들이 둘째라. 처음 것은 말 그대로 결합을 막기 위한 선택이었고 다음 것은 혹시 결합을 막지 못한다면 적어도 하나는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이미 말하지 않았던가. 두 가문 모두 황가의 충직한 신하였다고 말이다.

당연하게도, 두 가문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단칼에 모든 유혹을 잘라냈다. 특히 문관인 데다 지존의 신의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알려진 현가의 가주가 몇 마디 말로 모든 것을 마무리 지은 것과는 달리 무관인데다 충의 하나로 변방만 나돌던 혁씨 세가의 가주는 그야말로 극렬한 반발을 선보였다. 전자야 다른 아들들이나 데려가라며 웃고 넘겼지만 후자가 그의 심기를 제대로 긁어놓은 탓이었다. 감히, 감히 저들이 뭐라고 지존의 위에 선을 대니 마니 떠들어댄다는 말인가. 실제로 몇 가문은 증좌를 잡혀 지워지기까지 하였다. 실로 대단한 충정이더라.

허나 그 중 가장 단호히 잘라냈음에도 증좌를 잡아내는 데 실패하여 어쩔 수 없이 남겨둔 곳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산천 남가라. 그래, 맞다. 황후의 가문인 그 산천 남가. 본디 상인 출신의 한미한 가문이었으나 뛰어난 상재로 제국 상권의 3분지 1을 장악하면서 뒤늦게 세가입네 나서게 된 가문이었다. 하여 그 가문이 귀족원 등 황권의 강화를 저어하는 세력들과 어울리고 있음을 알아차린 혁가의 가주는 그가 상대했던 여러 가문들 중에서도 가장 혹독하고 매몰찬 대우를 돌려주었다. 증좌가 없어 당장은 지우지는 못하나 반드시 그 증좌 찾아내어 지워버리겠노라 호언장담하였다.

산천 남가의 진정한 무기가 상재나 금력이 아니라 정보를 다루고 사고파는 능력에 있다는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혁씨 세가 가주의 크나큰 패착이었다.

혁씨 세가 몰락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하루아침에 명문세가 몇이 사라졌다. 그리고 남은 자들은 새로운 문제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현씨의 사정도 그 중 하나라. 혼례를 목전에 두고 서방 될 이는 물론이요 시댁이 될 곳이 사라진 것은 차라리 나았다. 이미 그녀의 배 속에 자리를 튼 정인의 씨에 대면 무어가 더 문제일까. 그나마도 혁씨 세가의 존재가 사라지고 다시 보름의 시간이 더 지난 뒤에야 알아차린 탓에 그 사정 의논할 이도 없더라. 하물며 역도의 씨를 품은 것이 아니던가. 그것만으로도 저는 물론이요 저의 가문까지 남아나지 않을 판임을 알아차린 현씨는 다시 꼬박 보름동안 속을 끓이며 생병을 앓았더랬다. 그를 보다 못한 오라비가 먼저 붙잡고 말을 걸지 않았다면 생병을 앓다 못해 지레 말라 죽었거나 태중의 아이와 함께 벼랑 끝 한 송이 낙화가 되었으리라.

그리고 뒤늦게 그 사정 알아차린 현가 원 역시 깊은 고민에 빠졌다. 비록 동복은 아닐지언정 하나뿐인 누이가 아니던가. 게다가 오랫동안 함께 관사를 나눠 썼던 혁가 건은 저가 누이를 맡기기에 부족함이 없는 친우였다. 무엇보다 저가 군문에서 직접 겪은 혁가 건이나 혁씨 세가의 가주의 충의는 결코 거짓된 것이 아니었던지라 그들의 멸문에 더욱 의구심을 가졌던 참에 누이의 눈물 어린 하소연을 들은 것이다. 자칫하면 누이는 물론이요 제 친우의 하나뿐인 핏줄이 사라질 판이었다. 그 뿐이랴. 여차하면 저의 가문마저 혁씨 세가 꼴이 날지도 모를 판이더라. 당연 고심, 또 고심할 밖에.

한참을 고심하던 오라비가 마침내 한 가지 구명처를 찾아내었으니 그것이 바로 당금의 지존이나 당시만 해도 10황자에 불과했던 저의 상전이라. 무엇을 어찌 사정하였는지는 모르나 그것으로 어린 여인은 사지에서 건져진 것은 물론 양원 현씨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제 태중에 품고 있던 정인의 마지막 흔적마저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묵가 혁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현가 혁이더라.

그러나 비극은 계속되었다. 기다렸다는 듯 불이 붙은 황위 계승 경쟁 탓이었다.

선황께서 무슨 까닭에서인지 태자 책봉을 저어하는 사이 열둘이나 되는 황자들과 그 외가 세력들 사이 알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역모 혐의로 몇 개나 되는 가문들이 사라지더니 결국에는 가장 연장자인 1황자가 낙마하여 죽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그 쌓인 알력이 그대로 폭발하고 말았다. 내전 아닌 내전의 시작이었다.

그 과정에서 1황자의 죽음에 의심을 품은 그 외가 양천 금가가 사병을 움직여 사냥을 즐기고 있던 2황자와 6황자 형제를 급습하여 목을 베었다 그 죄로 멸문 당하였다. 또한 세력이 강한 3황자와 5황자가 크게 부딪힌 끝에 두 황자 모두 죽는 것을 끝으로 양패구상하였으며, 그 다음으로 세력을 지키고 있던 4황자는 독살, 그 독살의 배후로 밝혀진 7황자와 그 외가는 4황자의 외가인 서산 이가의 공격을 받고 지워졌다. 그리하여 남은 것이 8황자를 비롯한 다섯 황자였으나 그나마도 곧 급격히 수가 줄어들었다. 서역 출신 어미를 둔 8황자는 국내에 이렇다 할 세력이 없음을 이유로 들어 제 동복형제인 11황자와 12황자를 데리고 제국을 등지는 것을 선택하였고, 9황자는 온전히 저 하나만 남을 작정으로 10황자를 치려다 그 호위의 목숨을 건 저항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죄인의 신분으로 형장의 이슬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엉겁결에 하나 남은 황자가 된 10황자는 그대로 황태자의 자리에 올랐다. 가장 한미한 출신의 어미를 둔 탓에 진작 기대를 버리고 있던 자리가 그의 것이 된 것이다.

허나 그가 황제의 자리에 가까워진 대신 그의 충직한 호위요 사사로이는 처남인 현가 원은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고 말았다. 게다가 부족한 세력을 더하고자 귀족파 가문 출신의 여인들을 정궁과 후궁으로 맞아들이게 되었으니 그들 중 가장 기반이 부실한 산천 남가를 황후의 가문으로 택한 것도 실은 후에 태어날 황손들의 외척 될 이들이 서로 경쟁을 하느라 함부로 국정에 개입할 수 없도록 수를 쓴 것이더라. 게다가 선택한 여인들 역시 하나같이 난잡한 품행 권력으로 가린 이들 뿐이었으니 이 역시 후일을 대비한 것이었다. 여차하면 치워버릴 여지를 미리 마련해 둔 것이더라.

하여 미처 몰랐다. 그들보다 한발 앞서 양원의 직첩을 받은 현씨에게 해코지가 가해지고 있음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였으니 이는 이미 그녀가 배태를 하여 곧 해산을 앞둔 탓이었다. 게다가 그 해코지라는 것이 어찌나 은밀했던지 아이가 나오는 그 순간까지도 그녀가 해코지 당했음을 알지 못하였다. 그가 황태자의 위에 자리한 그 날, 양원 현씨가 해산하매 그리 태어난 아이의 전신이 새파란 것을 보고서야 해코지한 자가 있음을 알아차렸으니 그 은밀함이 참으로 지독하였다.

이에 크게 진노하신 지존, 당시의 태자였던 묵가 단이 작정을 하고 추적에 나서니 이는 저가 반드시 지켜주겠다 약속한 이를 지켜내지 못한 것에 대한 속죄였음이라. 결국 이듬해 그가 보위에 오르고 두 달이 지나 2황자 광이 태어난 날 기어코 해코지한 자들을 모조리 찾아내었으니 귀족파 3개 가문이 사라지고 황권과 귀족원 세력이 본격적으로 대립을 시작하게 된 까닭은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1황자 혁이 2황자 광을 주군으로 모시게 된 까닭이었더라.

“…허면….”

“…?”

“허면, 형님은 대체 언제 알게 된 것이옵니까?”

“무엇을 말이더냐?”

“그것이….”

“…아, 내 친부 이야기 말이더냐?”

“그러하옵니다.”

“내 나이 열 살 때이니…. 그래, 너도 기억할 듯싶구나.”

“…예?”

“형님 울지 마세요.”

“………아!”

“그때 네가 나 혼자 속울음 삼키고 있는 것 어찌 알아보고는 다가와 그러지 않았니.”

겨우 제대로 된 말소리 내게 된 녀석이, 내 손 꼭 붙들고 그리 말하지 않았니.

그리고는 생긋이 웃는 낯으로 제 손 가만히 감싸 쥐니 그만으로도 정신이 혼미해지는 수다. 그도 모자라 그 때 내 너를 처음으로 마음에 담게 되었노라 하는 말까지 덧붙이니 좀 전까지 제 입술 짓씹으며 들어야 했던 참담한 사연들이 단숨에 멀어진다. 설마 이토록 오랫동안 저를 마음에 담았으리라고는 짐작도 못한 터라 대번에 머릿속에 꽃밭이 된 것이라.

그래서 저가 지금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제 정인 가냘프게 웃는 모습에 홀린 수다.

“논다.”

현가 저것이 어디서 은근슬쩍 넘기려 지랄인고?

만약 기다렸다는 듯 끼어드는 주군 음성이 아니었더라면 자리도 잊고 일 한 번 거나하게 쳤으리라. 어쨌거나 사정을 알아차리기 무섭게 회갈색 피부 단박에 시뻘겋게 물들이고 몸을 물리니 제 정인 입에서는 짙은 아쉬움을 담아 한숨 한 자락이 새어나온다. 그러더니 단박에 사나운 낯 하고는 주군 되는 이에게 되게 쏘아붙이기 시작하니 그 내용 참으로 기가 막히더라.

“좀 넘어가게 두면 아니 됩니까? 사람이 어찌 그리 잔인하십니까?”

“쯧, 작작하렴. 네 그 사연 밝히면서 언제부터 내 밑으로 들어온 것인지는 눙쳐 넘기려는 거 내 모르는 줄 아니? 당장 밝히라는 건 안 밝히고 어디서 수작질인고?”

참으로 기가 막히더라….

그리고 이어지는 사연은 더욱 기가 막혔으니 그 내용인즉, 어찌하여 혁이 요양을 이유로 일찌감치 궁을 떠나 전국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닌 것인지에 대한 것이라.

“그 날, 내게 진실을 알려준 이는 어미가 아니었다.”

“……?”

“지존께서 직접, 나에게 알려주셨지.”

“…!!!”

“그리고 그 곁에서, 내 어미가 그러더구나. 진작 죽었어야 할 네 목숨 황가가 살려주었으니 그 값을 하라고 말이다.”

그 바람처럼 가볍고도 바윗돌처럼 무거운 한 마디와 함께 혁은 잠시 침묵하기를 선택했다. 그리고 수는 이제 너덜너덜 걸레쪽이 될 판인 아랫입술 한 번 더 꾹 깨물고 말았다. 정인이 아비와 형제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배 속에 저를 품은 채 공녀가 되어 황제에게 진상되어졌던 제 어미 사연도 참으로 절절하였거늘 제 장형, 아니 제 정인과 그 모친의 사연도 그 못지않으니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라. 오죽하면 어느 순간 절로 헛웃음이 터져 나오더라.

“하여, 저이가 독에 당한 척 쓰러진 그 날부터 그의 눈과 입을 나르는 말이 되었다. 말이 되어 온 나라에 저이가 원하는 말을 날랐고 저이의 눈이 될 이 이곳저곳에 남겨 두었다.”

그게 꼬박 10년을 넘겼다지.

“10년…이요?”

“그래, 10년이 넘었단다. 그래서 네가 성년례 치르기 무섭게 내게 왔을 적에는 암담하더라. 이것이 들키면 어찌하나, 내 실은 황자도 뭣도 아니라는 것을 네가 알면 어찌하나, 네가 주군에게 맞서면 어찌하나. 정말이지 피가 마르더구나.”

그에 수는 저가 모든 사연 밝히며 제 마음 받아 달라 청하기 무섭게 주룩주룩 눈물을 쏟아내던 정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한참이나 울기만 하는 통에 혹여 저를 어떻게 거절할지 몰라 저러는 것인가 절망하려던 그 순간, 나도 너와 같다 하며 제 품으로 파고들던 그 모습을 떠올렸다.

아, 그런 것이었구나.

저는 그를 온전히 제 마음에 대한 답이라고만 여겼다. 그것이 그와 저가 똑같이 뻐꾸기 새끼꼴이라는 말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그저 저만 제대로 알고 있고 저이는 모르는 모양이라고 여겼더랬다. 헌데 아니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와 저는 온전히 닮아있었다. 놀랍게도, 그저 놀랍게도 닮아있었다.

“―내 말하지 않았니.”

우리 형제들 중 뻐꾸기 새끼 아닌 놈은 하나도 없다고 말이다.

그리고 다시금 주군께서 끼어드시니 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였다.

허나 이만큼 들었음에도 다 알지 못한 사정이 남아있었으니 그 중 가장 큰 것이 저와 장형도 모자라 뱀 새끼에 병든 병아리, 그리고 이제는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황녀 셋까지 제 자식이랍시고 품은 지존의 사정이더라. 대체 지존께서는 무슨 생각으로 이리도 많은 뻐꾸기 새끼들을 자식으로 삼으신 것일까. 하나나 둘도 아니고 황녀까지 하면 여덟이나 되는 수였다. 제 어미나 장형의 어미는 그 절절한 사연 긍휼히 여겨 받아준 것이라 치자. 허면 다른 이들도 모두 그런 사연에 처해 있었다는 것일까?

아니, 그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치기에는 당장 뱀 새끼의 외가가 멸문 직전까지 유별나게 기세가 등등하지 않았던가. 거기에 세 황녀들의 가문이나 병든 병아리의 가문도 나쁜 것은 아니다.

…아니, 아니었다.

그러나 곧 저가 간과하였던 사실을 떠올린 수는 그만 자리도 잊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래, 아니었다. 나쁜 집안이 ‘아니다.’가 아니라 ‘아니었다.’가 올바른 표현이다. 왜냐하면 그 가문들 중 지금껏 제대로 남아있는 가문은 하나도 없었으니 말이다. 3황자의 외가는 그 등등하던 기세를 바탕으로 제 외손자 내세워 나라를 좌지우지하려다 역모를 꾀했다는 이유로 멸문 당했고, 저의 외가는 단지 불만을 표현했다는 이유로 망국의 길을 내달리게 되었다. 세 황녀의 외가는 물론이요 후궁들 중 대부분이 비슷한 사정이었다. 후궁이 멀쩡하면 가문의 이름이 쇠하였거나 지워졌고, 가문의 세가 살아있으면 후궁 본인이 냉궁으로 내쫓겨 죽는 것만 못한 삶을 살아가는 중이었다.

마치, 마치 작정하고 차례로 치워내기라도 한 것처럼 하나둘 스러지고 몰락하였던 것이다.

“저러니 내 곰이라 하는 게지. 현가야, 너 정말 저런 놈으로도 괜찮은 것이야?”

저리 어리바리한 어린 것 낭군 삼아도 참말 괜찮은 게야?

“주군께서는 주모님이나 잘 챙기소서.”

주모께서 야반도주 하겠다고 하시면 제가 제일 먼저 거들 것입니다.

허나 충분히 짐작하였던 반응인 탓이었을까? 그의 주군은 물론이요 정인이라는 이마저 그런 수를 챙기는 대신 그들끼리 흰소리 나누기 바쁘다. 아니, 흰소리인지 아닌지도 헷갈리는 대화를 나누는 모양새 참으로 태평하더라. 어찌나 태평하던지 서운하다 못해 무안할 지경이더라.

그들이 제대로 된 이야기, 그러니까 그들의 주군 된 자가 이곳 북녘으로 제 곁붙이와 함께 날아온 까닭에 대하여 논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꼬박 이각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할 거 다 하고도 여전히 숫된 영혼을 유지하고 있는 흰곰을 놀리는 재미가 쏠쏠했던 탓이다. 덕분에 눈썹달이 중천을 넘기고서야 원래 목적했던 이야기를 나누게 된 세 사내다.

“뱀 새끼 꼬리에 드디어 불이 떨어졌다.”

“저도 들었사옵니다. 여우 짓이라지요? 하긴 여우가 아니면 그 구들장 장군이 움직일 생각도 않았겠지만.”

“그래도 몸을 사리는 것은 여전하지 않사옵니까. 언질하신 것에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답이 돌아오는데 참으로 기가 막히더군요.”

운을 떼기 무섭게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말들이 하나같이 가관이다. 바꿔 말하면 그 뱀 새끼라는 인사가 그만큼 가관이라는 소리.

그런데 정말 가관인 인사가 맞다.

어미와 외가의 허물로 인하여 일찌감치 이름뿐인 황자가 되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황궁에서 진작 큰 소리깨나 났으리라. 괜히 성년도 되기 전에 황궁에서 이곳 위왕부 끝자락으로 쫓겨난 게 아니더라. 조작조작 기어 다닐 적에는 그래도 갓난 것이니 그런가보다 하였는데 제대로 걸음 디디고 말문 터졌을 때부터 가관이 아닌 것이 하나 없더라. 아랫것들에게 막말은 예사요 손찌검은 고사리손일 적부터 거침이 없었다. 어차피 저도 이름뿐인 황자이거늘 아랫것들이 웃전 대접 소홀히 한다는 이유로 이틀에 한 번은 수련용 목검으로 시동이며 궁녀들 잡도리요 제후국 출신 어미를 둔 형제들은 잡종이라 불러대는 등 진작부터 누런 떡잎 사방에 자랑하였더랬다. 게다가 태중에 있을 적에 귀한 인물 만들겠다며 그 어미라는 이가 주워 먹은 영약이 과해도 너무 과했다. 갓 세 돌을 넘긴 아이가 온전히 제 힘으로 문짝을 박살낼 정도의 기력을 타고난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 약 기운이 육신에는 약이 되었으되 정신에는 독이 되었다는 것이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온몸에 힘이 넘치다 못해 사방으로 뻗치는데 그를 다스려야 할 머리가 함량 미달이라는 것이다.

세상에 둘도 없을 최악의 조합이 완성된 것이었다.

“내 그놈 덕에 지난 일 꾸미기가 더욱 쉬웠다지.”

약 잘못 써서 모지리가 된 작자가 지척에 있으니 일 꾸미기 어찌나 좋던지.

광은 순수하게 감탄하는 중이었다. 다시 돌이켜보아도 저의 선택은 탁월했던 것이다. 뱀 새끼의 선례가 있다 보니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저의 백치 짓을 독 기운 탓으로 여겼다. 아니, 실은 다행히 여기는 이도 있더라. 누구처럼 망종 짓은 하지 않으니 그게 어디냐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궁인도 있었으니 뭘 더 말하랴. 의심을 하는 이도 있지 않을까 했더니 뱀 새끼가 황궁에 지내는 10년 간 벌여놓은 망종 짓이 워낙 가관이라 광의 백치 짓은 신경도 아니 쓰더라.

“대체 무슨 약을 써서 그 지랄이 났답니까?”

그리고 혁은 첫 만남에서 저더러 배냇병신이라던 그분이냐는 개소리를 했다가 제 주군 발아래 지근지근 밟혔던 거구의 ‘둘째 아우’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암만 약 기운이 독이 되었다지만 그놈 막말 하는 꼴을 보고 있노라면 독 기운에 아예 뇌가 녹아내린 것인가 싶은 수준이었던 것이다. 저에게만 그리 막말을 한 것이 아니라 제 정인더러는 아예 볼 때마다 잡종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다. 제 주군께서 그 때마다 짓밟고 또 짓밟아도 도통 고칠 생각을 않더라. 오기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짓밟힌 것 자체를 기억지 못하더라. 생각하면 할수록 치가 떨릴밖에. 오죽하면 같은 위왕부의 행궁에 거하게 되었음에도 서로 안부 한 번 제대로 전한 적 없다.

“그 어미 되는 계집이 욕심 하나로는 여우 뺨을 쳐도 골백번은 치고 남을 인사라 그런지 약도 참 가지가지 엄청 가져다 썼더라. 약끼리 부딪쳐 독이 되면 용신께서 현신하셔도 고칠 길이 없거늘 그러거나 말거나 욕심껏 써댔으니 애가 멀쩡할 리가 있나.”

“…그냥 그대로 태중에서 칵 뒈질 것이지.”

“혀, 형님?”

벌컥 역정을 내는 정인의 모습이 그저 낯선 수는 크게 당황하였다. 항상 잔잔하고 차분한 공기로 이루어진 것만 같은 이가 이런 면도 있었을 줄이야. 허나 불행 중 다행으로(…) 그의 눈에 붙은 콩깍지는 여전히 건재하였다. 이 와중에도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 ‘저 이가 저리 열을 내다 또 쓰러지면 어찌하나.’하는 염려였으니 오랜 세월 자라다 못해 굳건한 거목이 되어버린 사나이의 연심 참으로 대단하더라.

“그래도 요즘은 좀 낫습디다.”

“?”

“으음? 무어가?”

“그 형님, 이제 대놓고 잡종 소리는 안 하더라고요.”

아마 뒤에서는 하겠지만, 그래도 그게 어딥니까?

“…….”

“…….”

허나 기껏 달래겠다고 내놓은 말이 저 꼴이니 어찌하면 좋을까. 덩치에 머리털 색만 보면 제일 연장자라 오해받기 딱 좋은 수가 생긴 것답지 않게 순한 낯을 하고 답을 하니 그 모습 안쓰럽다 못해 갑갑하다. 설마 제 대답이 정인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한 줄도 모르고 ‘허니 형님도 진정하세요.’라 덧붙이기까지 하니 광의 입에 헛웃음 한 자락 매달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더라. 다른 놈이었다면 저 물건을 어찌 써야 하나 잠시 고민했겠으나 다행히 그 곁에 붙어 있는 인사가 보통이 아니니 어떻게든 쓸 만하게 만들고도 남음이라.

“어쨌거나 그런 까닭으로 이제 정리를 하려고.”

“뱀 새끼를요?”

지금껏 내버려두고도 별문제 없었잖습니까?

“꼭 치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암만 들어도 제 발목 제가 잡을 이 같습니다만.

그러자 누가 연분 아니랄까봐 미묘하게 다르지만 결국은 같은 말을 하는 둘이다. 귀찮게 뭘 굳이 정리를 하려는 거냐는 게다. 사실 뱀 새끼 하나만 두면 광의 생각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치우려면 진작 치워버렸으되 지금만 봐서는 치우고 뭐고 할 것도 없을 물건이 아니던가.

허나 그런 것이면 저가 미끼 노릇할 이까지 곁에 끼고 이곳까지 날아올 리 없다.

“놔뒀다가는 여우의 말 노릇 톡톡히 할 모양새라 그런다. 저 혼자 설치면 별 게 아닌데 남의 손에 들어가면 별거라서 말이지.”

머리가 맛이 가서 그렇지 몸뚱이 하나는 천하에 둘도 없을 장수가 아니더냐.

“음, 그 형님이 확실히 겉은 번듯하지요.”

“책사는 무어라 합디까?”

“나더러 미끼가 되어 들어가 장수가 되어 나오라더라.”

순간 돌덩이 같이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는다. 두 사람 모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너무나도 잘 알아들은 탓이었다. 그에 혁의 낯 위로는 어둑한 수심이 드리워졌고 수의 낯 위로는 비장한 빛이 맴돌더라. 각자 그 나름의 방법으로 곧 닥칠 피바람을 대비하고자 마음을 먹은 것이다.

“논다.”

헌데 어째 그를 알아차린 주군이라는 이의 반응이 희한하다. 나름 저가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겠다는 데 대번에 칭찬은 못 할망정 타박부터 날리는 것이다.

“내 말하지 않았더냐. 미끼로 들어와 장수가 되어 나갈 것이라고. 미끼가 먼저 움직이는 것 봤니? 미끼는 가만히 앉아 사냥감 꼬이는 게 일이란다.”

“하오나…, 그 말인즉슨 이 백련행궁이 역도들의 공격을 받게 된다는 뜻이 아니옵니까?”

“그렇사옵니다, 차형. 아니, 주군. 이미 북해원 주변으로 북방 용병들이 오가는 중이라는 것은 비밀도 아니지 않습니까. 자칫 그 인원이 이곳을 치기라도 하면 이렇다 할 병력이 없는 행궁의 피해가 클 것입니다.”

“그야 나 혼자 미끼 노릇하면 그런 것이고. 그래서 내 다른 미끼도 달고 왔다 하지 않더냐.”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것이지?

두 황자는 다시 한 번 할 말을 잃고 고민에 빠졌다. 뭔가 엄청난 이야기를 들은 건 확신한데 도저히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는 수준이었던 탓이다. 설마 하는 마음에 서로 얼굴을 마주본 두 사람은, 그러나 자신의 귀가 잘못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당황했다.

“……설마…, 아니지요?”

“으음? 뭐가?”

“혹시, 형수님도 미끼였던 겁니까?”

그리고 가볍게 끄덕이는 고갯짓에 혁과 수는 경악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싸고돌지 못해 안달이던 이는 어디로 가고 제 처 미끼 삼아 데리고 왔다는 냉혈한만 남아있으니 그럴 밖에. 허나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느른한 낯으로 그들을 향해 히죽이 웃어 보이기까지 하니 그 기괴함 이루 말할 수가 없더라. 게다가 이어지는 말은 더욱 기가 막혔다.

“내가 그이를 사지로 내모는 것도 아닌데 어찌 그런 낯들인고?”

정말 기가 막혔다. 미끼로 데려왔다더니 또 사지로 내모는 것은 아니란다. 이게 무슨…!

혁은 다시금 제 주군의 이름자가 빛 광(光)이 아니라 미칠 광(狂)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수 역시 제 정인의 생각을 따라잡을 지경이 되었다. 주군이라는 자의 말은 그토록 기가 막힌 것이더라.

“날 잡으려면 군사를 일으켜야겠지만 그 아이 하나가 목적이라면 소수의 인원으로도 충분하다지.”

만약 이어지는 말이 아니었다면 주군이고 나발이고 한 번 세게 들이받았으리라.

“……아!”

“…여전히 악취미십니다.”

다행히 이어지는 말 역시 곧 알아들은 두 사람이다. 주군의 말인즉 저를 잡기 위해 군사를 움직이는 것보다는 저를 불러낼 수단을 위해 서넛만 움직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니 그리 움직이는 때를 노릴 작정이라는 소리. 차라리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라 밝혔으면 미끼니 어쩌니 했어도 그토록 놀랄 일은 없었을 것을…. 겪으면 겪을수록 그들의 주군이라는 이 성정 참으로 괴팍하더라.

“내 그리할 작정으로 판을 깔아 놓았으니 그놈이 그 판에 맞춰 놀아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야. 마침 그놈 곁에 붙어있는 여우의 꼬리가 비슷하게 부추겨놓았더라.”

“하긴 뭐, 뱀 새끼 일이니까….”

“그러게요. 그 형님이면 뭐….”

“…뱀 새끼 그 놈이 이상한 데서 신용이 넘치는구먼. 뭐, 그리되었으니 현가 너는 해가 뜨면 궁인들 사이에 구멍을 좀 내어놓으렴. 핑계는 알아서 적당히 만들고.”

“안 그래도 이곳에 오신다기에 뭔가 뜻이 있겠거니 싶어 며칠 전부터 작게 몇 뚫어놓았습니다. 넓히는 것은 알아서 하심이 좋을 듯하옵니다.”

“흥…, 거 빨라서 좋구나. 그리고 수야.”

“예.”

“네가 활 한 대로 잡을 수 있는 가장 큰 동물이 무엇이냐?”

“활 한 대로요? 으음…, 일단 시야가 확보되고 살이 제대로 박힌다는 전제하에서는 불곰 정도이옵니다.”

“허면 깊은 밤에 달리는 말이나 사람을 상대로는?”

“…살려서 잡는 것이 아니라면 가능하옵니다.”

“좋구나. 그럼 너는 내일부터 항상 활과 살을 곁에 두렴. 나와 사냥을 갈 작정이라 해도 좋고 궁술 시합을 하기로 했다고 해도 좋다. 언제든지 활과 살을 사용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을 준비해라.”

“명 받드옵니다.”

대강의 지시를 마친 광은 잠시 시선을 돌려 창 밖에 자리한 눈썹달이 어디까지 기울었는지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달의 모양새를 살펴 상대가 움직일 만한 시간을 가늠하였다.

답은 금시 나왔다.

“―이틀.”

“…?”

“예?”

“이틀만 더 있으면 그믐이라지. 삿된 것들이 숨어 움직이기 딱 좋은 때가 바로 그날이다. 어지간해서는 그날을 넘기지 않을 터.”

그에 두 황자, 아니 두 신하가 고개를 깊이 조아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니 사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제 어린 내자가 기다리고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마냥 길어질 것만 같던 ‘형제’의 술자리가 파하는 순간은 그러하였다.

허나 남은 두 사람은 아직 할 이야기가 남은 듯하다. 누구 하나 먼저 움직일 생각을 않고 묵묵히 자리만 지키고 있는 것이다. 다만 서로 눈치를 살피느라 선뜻 입을 떼는 이가 없으니 그 침묵이 마치 태산과도 같더라.

“…실망하였느냐?”

먼저 입을 뗀 것은 혁이었다.

“예? 무엇을 말입니까?”

허나 그 말이 참으로 뜬금없던지라 수는 얼른 알아듣지 못하고 멍청히 반문하였다. 그러자 흘끔 그 낯 한 번 살핀 혁이 머뭇머뭇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네 생각과는 다른 이라 실망하지 않았느냐는 말이다.”

그나마도 차마 그 얼굴 마주보고 물을 자신은 없는지라 객이 빠져나간 문 멀거니 바라보며 거듭 물었다. 저가 네가 알던 그런 이가 아니라 실망하지 않았느냐고, 내 너에게 다 말하지 않은 것으로 실망하지 않았느냐고 묻고 또 물었다. 헌데 잔뜩 졸아붙은 심정이 묻어난 탓인지 거듭되면 거듭될수록 아스라이 흩어지는 음색이 참으로 애처롭더라.

그에 저도 모르게 흐물흐물 풀어진 낯이 된 수는 저도 모르게 상대의 곁으로 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그 마른 몸 가만히 제 품에 담고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 수야?”

“―다행입니다.”

“…뭐?”

“몰랐던 모습까지 알게 되어 다행이고, 그를 지금껏 숨겨왔던 것이 온전히 저 때문이라 다행입니다.”

“…….”

“저는 그거면 됩니다. 형님이 내 사람인데 뭘 더 바랄까요. 그러니까 그거면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

“아시겠습니까?”

“……그래….”

흐릿한 대답 끝에 옅은 미소가 더해지니 곧 두 호흡이 하나가 되어 뜨겁게 얽혀들더라.

그것은 오랜 세월이 지나 마침내 마음이 통한 두 연인의 밤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위왕(僞王)의 소란(小亂)’이라는 이름으로 남게 될 사흘을 하루 하고 반나절 앞둔 백련행궁의 밤은 이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 * *

아이코, 이 일을 어째.

잘랑잘랑 울리는 것만 같은 새소리에 설핏 눈을 뜬 청은 제 눈앞에 자리한 것이 황자님 너른 가슴팍인 것을 확인하고 기겁을 하였다. 어찌나 기겁을 하였는지 가물가물 연신 밀려들던 졸음이 단숨에 날아갈 지경이더라.

아이코, 이 잠충이를 어찌하면 좋아.

암만 곤해도 상전보다 먼저 잠자리에 들 수는 없는 법. 하여 졸린 눈 비벼가며 침상 곁 의자에 앉아 황자님 돌아오는 것만 기다리고 있었거늘 대체 언제 이리 깊이 잠이 든 것일까?

아니, 문제는 그냥 잠이 든 것만이 아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금 저가 입고 있는 옷은 갈아입은 기억도 없는 침의더라. 누가 옷을 벗기고 갈아입히는 것도 모르고 마냥 잠이 들어있었다는 소리다. 그래도 나름 잠귀가 밝은 편인데 어쩌다 이리도 깊이 잠이 든 것일까? 아이고, 참말로 이를 어찌하면 좋아.

“후음…. 깨었니, 내 색시…?”

헌데 그리 고민하는 사이 제 서방마저 깨는 눈치다. 아직은 잠기운에 취한 듯 웅얼웅얼 저를 부르나 싶더니 제 몸 꼭 끌어안고 머리꼭지에 그 입술 부비는 것이 전부지만 이제 곧 그 입술이 제 낯을 누비기 시작할 터. 이야, 이거 진짜 어쩌면 좋니. 제대로 소세도 못 하였는데, 양치도 못 하였는데 이를 어쩌면 좋아.

“조금만…, 조금만 더 이리 있자아….”

“…흐잇…!”

“내 색시, 예쁜 내 색시. 어찌 이리 따끈하고 말랑하담….”

헌데 이거 좀 이상타. 조금은 맑아진 목소리로 웅얼웅얼 희한한 감탄을 늘어놓은 서방님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더라. 이마고 눈꺼풀, 입술에 턱 끝을 연신 훑고 떨어지는 그 입술의 움직임에 더해 은근슬쩍 침의 속으로 파고드는 크고 차가운 손길에 청은 기겁을 하였다. 남의 집에 놀러 온 것이니 어련히 자제를 할 줄 알았더니 이건 또 무슨 횡액이던가. 순식간에 제 중신 어루만지고 비문 어림 맴돌기 시작하는 그 손길에 뭐라 말도 못하고 할딱할딱 밭은 숨만 뱉기 바쁜 청이다.

아이코, 아이코 황자님. 이는 아닙니다. 이는 참말로 아니어요.

할 말은 태산인데 그 말 뱉을 입이 제 서방 입에 잡아먹혔으니 이를 어쩌나. 저와 서방 움직이는 기척에 수발들러 다가오던 이들 걸음소리가 황급히 멀어지는 것까지 듣고 나니 절로 눈물이 나더라.

“…―!!!!”

제대로 젖지도 않은 제 비문 깊이 파고드는 황자님 기세에 몸뚱이가 쪼개어질 것 같아 눈물이 나더라.

그렇게 영문도 모르고 사내에게 안기기 시작한 이래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맞이하는 청이었다.

그조차도 사내의 계책을 위한 것임은 알지 못한 채, 청은 백련행궁에서의 둘째 날을 맞이하였다.

‘위왕(僞王)의 소란(小亂)’이라는 이름으로 남게 될 사흘을 하루 앞둔 백련행궁의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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