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七 章 - 眞相(진상)
소복이 쌓인 흰 눈 사이로 발긋한 매화 꽃부리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싶더니 어느새 봄이 목전이라. 온 천지 만물이 곧 닥칠 봄을 대비해 바삐 움직이기 시작하니 제국 경의 신민들 또한 겨우내 집 안 가득 쌓인 묵은 때 털어내려 분주하였다.
이는 지존께서 거하시는 황궁도 다를 바 없었으니 어린 나인들은 호랑이 같은 선배들 호령 아래 묵은 침구 뜯어 챙겨 궁 서편 세답방을 향해 내달리거나 서넛이 무리를 지어 내전 별고(別庫) 정리에 매달렸고, 궁에서 제법 자리를 지켰다 싶은 궁인들은 남녀 구분 없이 넓디넓은 황궁 구석구석 쓸고 닦는 한편 궐 이곳저곳을 봄에 맞춰 단장하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이더라.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자들이라고 크게 다를 것이 없었으니 다른 날이라면 근엄한 낯으로 웃전 노릇 하고 있을 이들도 이날만큼은 잰걸음 놀려가며 온 사방을 바삐 움직이는 궁인들 하는 일 감독하느라 정신이 없더라.
허나 단 한 곳, 원향전만은 지금 전각 밖의 것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분주해지는 중이었다.
“움직이지 마시어요. 이제 동백기름을 부을 것이옵니다.”
“손을 뒤집어주셔요. 손톱은 다 되었으니 손등을 살펴야 하옵니다.”
“아이참, 가만히 계시래도요. 눈도 깜짝하시면 아니 되어요.”
“따끔할 것입니다. 조금만 참으셔요.”
대체 나더러 뭘 어쩌라는 것입니까….
넷이나 되는 여관들이 제각각의 이유로 움직이라마라 연신 입을 대니 반쯤 헐벗은 꼴을 하고 그 손에 붙들려 있는 청은 제 상전을 상대할 때와는 다른 의미로 막막해지고 말았다. 머리에다 귀한 동백기름 담뿍 부어대는 이와 제 낯에 무언가 끈적대고 뭉글뭉글한 것을 덧바르던 이는 움직이지 말라 난리인데 손을 붙든 이며 실로 제 다리의 잔털을 정리하는 이가 문제다. 아니, 연신 손을 뒤집어라, 손가락을 갈퀴처럼 구부려라 하는 이는 차라리 낫다. 팽팽한 실이 쓸고 지나갈 때마다 우수수 뜯겨나가는 잔털이 어찌나 아프고 따가운지 도대체 낯짝을 가만히 둘 수가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그저 난처할밖에.
허나 청이 그러거나 말거나 네 여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나긋한 목소리는 쉴 새 없이 청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중이다.
“힘드시겠지만 참으셔야 합니다. 마마께서 워낙 관리를 하지 않아 이리 서두르지 않으면 아니 되어요. 이것 말고도 할 것이 산더미이옵니다.”
“채 나인 말이 옳습니다. 세상에…, 그나저나 무얼 어찌하면 머리털이 이리된답니까? 보관(寶冠)은 품계가 모자라 쓸 수 없으니 천생 화관을 써야 하는데 이래서야 짚단 위에 꽃을 꽂아놓은 모양새가 될 것이어요.”
“머리만 문제가 아니어요, 금 나인. 급한 대로 꿀에다 해초와 곡물가루를 섞어 발라두기는 했지만 살결도 머리털 못지않습니다. 그을린 것이야 분으로 가릴 수 있지만 그것도 바탕이 온전해야 가능한 것을요. 으음…, 암만해도 면사(面紗)를 드리워 가리는 것도 생각해 보아야겠네요.”
“그도 나쁘지는 않을 듯합니다만 그래도 하는 데까지는 해야지요. 다리의 잔털은 모두 뽑았으니 이제 채 나인이 숫돌로 발을 다듬어 줄 것이어요. 양 나인이 얼굴에 바른 것을 걷어내면 얼굴의 털을 손질할 것이니 잠시만 기다리셔요.”
“송 나인, 그건 내일 합시다. 두 분 훈육상궁 분들께서 들 때가 다 되었어요.”
그것은 청이 감당해야 할 것이 아직 한참이나 더 남았음을 알리는 목소리들이더라.
입춘을 이틀 앞둔 원향전은 이렇듯 참으로 분주하였다.
* * *
이 모든 일의 시작은 사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
“때가 되었다 하였습니다.”
오랜만에, 정말로 오랜만에 원향전을 찾은 노상궁은 청을 향해 그 말만 반복하였다. 덕분에 청은 하루 사이 잔뜩 쌓인 빨랫감을 소쿠리에 담아 들던 자세 그대로 멍청히 굳어버렸다. 멍청히 굳어 눈만 껌뻑였다.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기도 하거니와 실은 그녀 뒤로 한참이나 늘어선 궁인들의 수에 기가 질린 탓이었다. 저이들은 또 무어야?
“성혼할 날은 진작 잡아놓은즉, 원래는 지난 중추절 이후부터 준비를 할 예정이었으나 그 전에 마마님께서 큰 흉사를 겪으신 탓에 차일피일 미룬 것이 결국 해를 넘겼나이다. 하여 지금이라도 채비를 하고자 하오니 마마님께옵서도 도와주옵소서.”
게다가 이어지는 말도 기가 막히건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 눈앞에 자리한 스물 여남은 명의 여관들이 상긋이 웃으며 고개를 조아리니 청은 저도 모르게 움칫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아이고, 이게 참말 무어람. 그렇지 않아도 당장 해야 할 일이 한 다발인 사람한테 뭘 또 도와달라는 것이야? 그리고 성혼? 무슨 성혼? 아니, 아니 그보다 잠깐만. 지금 이분이 나더러 존대를 하고 계신 게야? 어찌하여서?
파닥파닥, 파다닥. 알아차리면 차릴수록 제 허를 푹푹 찔러대는 현실에 청이 뭐라 말도 못하고 눈만 깜빡이고 있으니 그 사이 상긋이 웃는 낯 그대로 자세를 바로잡은 노상궁이 휙 돌아선다. 그리고는 그녀와는 달리 여직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한 떼의 여관들을 향해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누구랑 누구는 의복을 정리하고 누구랑 누구는 침소 정돈을 할 것이며 누구와 누구랑 누구는 사람을 챙겨 전각 구석구석 말끔히 쓸고 닦아라. 그리고 누구랑 누구는…. 청으로서는 반절도 알아듣기 힘들만치 빠르게 지나가는 그 지시에 원향전 앞마당을 바글바글 채우고 있던 인원이 이리저리 쑥쑥 빠져나간다. 그냥 빠져나가기만 하는 게 아니라 언제 챙겨온 것인지 눈 깜짝할 사이 머리 수건이며 앞치마까지 두르고는 지시받은 곳으로 바람처럼 사라진다. 혼자 하려면 하루가 훌렁 사라지는 원향전 살림이 눈 한 번 깜빡일 때마다 척척 해결되니 참으로 신통하더라. 오죽하면 없는 정신에도 홀린 듯이 그들의 움직임을 바라보았을까.
“허면 이제 마마님도 채비를 하셔야지요.”
“……응? 예? 뭐라 하시었어요?”
하여 그만 노상궁이 저를 향해 한 말을 놓치고 말았다.
“너희 넷이 가장 할 일이 많구나. 이 성혼례 전까지 마마님의 모습을 누가 봐도 예식을 치를 이의 것으로 만들어 놓으렴.”
그것은 앞으로 저가 겪어야 할 길고도 고달픈 시간의 시작이었다.
청이 ‘예식을 치를 이의 것’이라는 말에 담긴 의미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게 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아니, 시간이고 뭐고 없었다. 정신을 차리니 네 여인의 손에 붙들려 꽃잎이 둥둥 떠다니는 물에 씻기는 중이었고, 다시 정신을 차리니 지금처럼 전신에 향유를 뒤집어쓰고 숫돌에 손발을 내어주고 있더라. 이게 오늘까지 꼬박 사흘. 게다가 엊저녁부터는 정리랍시고 팔다리 잔털까지 쥐어뜯기는 통에 그렇지 않아도 고달픈 시간이 더욱 고달파졌다.
헌데 괴로운 것은 몸만이 아니었다. 이유인즉슨, 성혼례를 통해 황족의 반려가 될 것이니 그에 맞는 소양을 갖춰야 한다나? 하여 황제 폐하의 지밀상궁으로도 모자라 황후궁 제조상궁까지 제 훈육상궁이랍시고 등장했을 때는 그저 기가 막히더라. 그이들에게 하루 두 시진씩 궁중 예절이며 법도 등 당장 알아야 할 이것저것을 배우는데 어찌나 익힐 것이 많은지 첫날부터 죽다 살아났더랬다. 호된 동기 수업 덕에 최소한의 기본은 갖추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인사법을 외우는 것만으로도 나가떨어졌으리라. 하기야 그게 아니라도 무엇을 하든 예법을 따지는 이가 둘이나 붙어 사람을 달달 볶아대니 두 시진이 이틀 같더라. 하여 청은 진심으로 귀한 분들에 대하여 감탄하였다. 이리 고달픈 일을 감당하는 것이 귀한 분들의 소양이라니 그 자리 참으로 몹쓸 것이로구나. 이런 것을 어찌 다 감당할꼬.
거기다 그놈의 소양이며 예법 덕에 제 상전 모시지 못하게 된 지도 꼬박 닷새째였다. 저가 궁에 들어왔을 적부터 한 지붕 아래 함께 지낸 터라 성혼례 준비니 뭐니 하는 것도 별 의미가 없을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더라. 갑자기 꼬장꼬장한 낯을 한 이가 둘이나 나타나 예법을 내세운 덕에 그 날 이후로 지금껏 각방 살이를 하느라 상전 얼굴 못 뵌 지 꼬박 닷새. 어차피 어지간한 것은 다 한 처지에 이게 무슨 의미인가 싶은데도 기어코 각방 살이하게 된 지가 그만큼이더라. 뭐라더라, 성혼례 전까지 부부될 이가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야 평생 다복하고 무탈하게 금실지락을 나눌 수 있다나? 하여튼 그런 까닭으로 각방 살이를 하게 되었다.
헌데 그 각방 살이라는 것이 알고 보면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더라. 귀한 분 사정에 따르느라 저나 상전이나 원향전을 벗어날 수는 없으니 원향전 안에서 별거를 하라나? 덕분에 지금껏 창고인 줄로만 알았던 원향전 동서 양 끝의 허름한 건물들이 원래는 전각에 딸린 별채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알고 싶어 알게 된 것이 아니라 그날부터 동편 건물에서 숙식을 하게 된 덕에 알게 되었다. 당연히 황자님께서는 서편 별채로 거처를 옮기셨다. 그냥은 가지 않으시려 하시는 통에 퇴궐하려던 문사가 힘을 보태야 할 정도의 난리를 치르고서야 옮기셨다.
문제는 그곳이 동편 별채에서 제 걸음으로 기껏해야 스무 걸음 남짓 떨어져있다는 것이었다. 목청만 좀 키우면 어려움 없이 서로 대화도 나눌 거리를 사이에 두고 별거를 해봤자 얼마나 효과가 있겠는가. 덕분에 저를 대신해 원향전 살림을 하던 궁인들은 별거 첫날 전각 문짝 모조리 갈아치운 것을 시작으로 툭하면 쳐들어오려는 황자님 막느라 하루에도 몇 번씩 홍역을 치르는 중이었다. 오죽하면 엊그제 저녁에는 훈육상궁들 붙들고 사정을 했더랬다. 이러다 원향전 살림 남아나는 게 없겠다고, 다복이고 뭐고 저는 상관없으니 그냥 황자님과 함께 지내면 안 되겠느냐고 말이다.
허나 그리 사정해서 될 것이었으면 여직 저가 이리 고민할 일도 없으리라. 괜히 예법을 따지는 이들이 둘이라 한 것이 아니다. 저를 가르칠 적에는 심심치 않게 서로를 향해 대립각을 세우던 두 상궁은, 어찌된 영문인지 별거에 대해서는 한목소리를 내었던 것이다. 오히려 황자님을 위한 일이거늘 어찌 초를 치는 것이냐 엄히 꾸짖기까지 하더라. 심지어 궁인들에게 미안타 말하는 것조차 야단을 치더라. 웃전이 그리 쉽게 아랫것에게 미안하다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서. 웃전이라는 자리 참말로 불편하구나 싶더라.
어쨌거나 사정이 이러하니 별수 있나. 지금처럼 두 눈 질끈 감고 모르는 척할밖에. 하지만 그도 하루 이틀이다. 이제 겨우 닷새 떨어진 것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원향전을 뒤집어 놓으시니 앞으로 남은 열흘 남짓한 시간은 또 어쩔 것이더냐. 생각하면 할수록 아득하더라.
― 에라이…!
우지끈!
그렇게 목까지 차오른 한숨 간신히 되삼킬 무렵, 때마침 기다렸다는 듯 멀리서부터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지니 청은 이제 아득하다 못해 정신을 놓고 싶어졌다. 아이코, 아이코 우리 황자님. 오늘도 기운이 넘치다 못해 사방이 뻗치시는구나. 마마, 그 문짝 새로 가져다 달아 놓은 지 겨우 이틀 되었어요. 그것까지 깨부수면 당분간은 온 사방 뻥 뚫린 곳에서 침수 드셔야 하옵니다. 춥다고 꼭 붙들어 안고 잘 저도 없는데 그러시면 고뿔드실 것이어요. 아이코, 아이코 참말 이를 어쩌나. 내 지금 이리 붙들려있는 것만 아니면, 그 망할 놈의 법도만 아니면 얼른 달려가 달래줄 것인데. 잔뜩 뿔난 우리 황자님, 꿀떡이든 뭐든 드시고 싶은 거 다 해드리겠다고 달래드릴 것인데.
반쯤 헐벗은 것도 모자라 얼굴이며 머리에 좋다는 건 모두 바르고 올려놓은 덕에 이도저도 못하는 청의 속은 그저 새카맣게 타들어갈 뿐이라. 좀 돌아오나 싶던 정신이 다시금 아득히 멀어지는 순간이다.
“……황자님께서 참말로 마마님을 아끼시나보아요.”
“그러게요. 두 분 정이 어쩜 이리 도타운지….”
“어…, 그, 그러니 마마님께옵서 더욱 단장을 해야 하는 거지요!”
“암요, 암요. 그렇고말고요. 암요, 암요.”
아득하고 또 아득하니 덕분에 여직 저의 몸을 붙들고 있는 네 여인의 어수선한 말소리는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도 않더라.
춘삼월 봄. 경사를 열흘 앞둔 원향전의 풍경은 그랬더랬다.
* * *
제 꽃 같은 내자와의 생이별을 견디다 못한 황자님의 진노는 마침 경서 강연 시간이 되어 원향전에 들어선 곰 같은 외양의 문사에게 붙들리고도 꼬박 일각을 더 잡아먹고서야 간신히 끝을 보았다. 허나 때는 이미 반 시진이 넘게 소란이 이어진 다음이었으니 원향전 꼴 더 말해 무엇 하랴.
결국 그 사정 대전에서 국정을 살피시던 지존의 귀에까지 닿았으니 덕분에 아들의 절절한 단심 깊이 탄복하신 상께서 친히 금군 대장을 불러다 명을 내리시매 ‘2황자의 기력이 남다른즉 성혼례 전에 그 기력 좀 덜어주어라.’ 하셨더라.
“거 좀 대강 하십쇼. 매번 이게 뭡니까?”
저 문짝 저거, 저것도 전부 돈이라고요.
갑자기 날아온 지존의 명에 죽을상이 된 금군 대장을 대신해 황자님 훈육에 나선 문사는 그 곰 같은 낯 가득 짜증을 담아 제 주군을 향해 타박을 날렸다. 대계의 끝이 목전이라 그렇지 않아도 저가 은밀히 처리할 일이 한 다발인 마당에 주군이라는 이가 도움은 되지 못할망정 쓸데없는 일만 늘려놓으니 절로 타박이 나올밖에. 여기저기 듣는 귀가 많아 평소처럼 편히 소리 내지 못하는 것이 그저 아쉬울 따름이라.
그 덕에 벌 받는 흉내를 내느라 허공섭물의 능(能)을 제 머리 위에 의자를 띄워놓는 데 써먹고 있던 황자님 미간에 잠시나마 깊은 고랑이 패였다 사라진다. 과연 제국 황가 묵씨 성의 피를 받은 사내답게 수전노 기질 하나는 타고난 탓이었다. 허나 사내는 곧 느른한 한숨 한 자락으로 그 불편한 심사 흔적도 없이 흘려버렸다. 어차피 저 돈 몇 푼 깨지는 거야 오랜 계획을 시작할 때 이미 각오한 일이 아니던가. 설령 좀 깨진다 해도 제 돈이 아니거니와 욕심껏 몹쓸 돈 챙긴 연놈들 적당히 털어내면 그 손해 메우고도 남음이라.
이게 다 해 바뀌기 무섭게 갑자기 성혼례를 준비해야 한다며 제 심복까지 보낸 여우 탓이었다. 그 수작 덕에 다시금 제 계획의 일부가 꼬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게 벌써 몇 번째이던가. 하기야 그 년 꽁지에 불이 붙은 꼴이니 놀라울 것도 없구나. 적당히 좀 들쑤실 작정으로 시작한 일들이 하나같이 저가 의도한 것 이상으로 깊은 곳까지 파헤친 꼴이 되어버렸으니 그 년 속은 오죽할까. 넘치는 수족 좀 쳐낸다는 것이 여우만 남기고 모조리 치워버린 꼴이 된 것은 시작이었다. 그 과정에서 여우와 지존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너구리 떼 좀 솎아내려던 것이 여우가 생각지도 못한 들개 떼까지 엮어버리는 바람에 너구리도 모자라 쥐 떼까지 섞어 몇 개의 가문이 사라지는 대 혈사로 이어졌다. 이제 그 년에게 남은 세력은 너구리 몇과 가문의 세만 믿고 모가지 뻣뻣한 쥐 떼 몇 정도였다. 굳이 더하자면 저 멀리 제국이 북에서 헛된 꿈을 꾸고 있는 뱀 새끼 정도? 그나마도 온전히 여우 제 것이라 할 것은 원래부터 제 뒷배로 두고 있던 일가붙이가 전부이니 속이 타다 못해 피가 마르는 중이지 않을까.
“어쨌거나 이만하면 들쑤실 만큼 들쑤셨나이다. 당장 지난 닷새 사이 튀어나온 것들이 어찌나 많던지 헤아리다 숨이 넘어가는 줄 알았지요.”
“논다. 어울리지도 않는 약한 척은. 진작 다 걸러내고 추려낸 것 내 모를 줄 알아?”
게다가 그 얼마 남지 않은 세력조차 지난 닷새 사이 조금씩 추려지는 중이었다. 광의 성혼례가 목전이고 그 과정에서 제 내자라며 진작부터 살 부대끼며 살던 남총에게 미쳐 날뛰는 중이라는 소문에 혹한 연놈들 솎아내기 시작하니 그마저도 또 반 토막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암만 대단해봤자 지존만도 못할 게 뻔한 권세, 그것이 무어 대단한 것이라고 참으로 쉽게도 걸러지고 추려지더라.
“덕분에 죽어도 손을 잡지 않을 것들이 서로 손을 잡았으니 이를 어쩔꼬.”
“음…, 그는 저도 좀 놀랐나이다.”
그래서일까? 구석까지 몰린 여우는 생각지도 못한 수를 던졌다. 아니, 여우만이 아니라 세력이 턱없이 줄어든 너구리 떼까지 그 수에 힘을 보탰다.
서로 간에 쌓인 것이라고는 원한뿐인 두 세력, 여우와 너구리 떼가 손을 잡은 것이다.
“설마 여우가 동편 너구리하고 손을 잡을 줄은 누가 알았을까요. 서편이면 그래도 연차가 짧아 잡을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말이지요.”
“그 덕에 동편보다 세가 달리지 않니. 10년 살림 다 털어먹은 마당에 별수 있나.”
그것도 권세 한번 잡아볼 작정으로 뒤늦게 제 딸자식 내다 판 서편 너구리들이 아니라 일찌감치 딸 팔아 세력이라는 걸 갖췄다가 여우에게 그 딸 명줄은 물론이요 제 살까지 물어뜯긴 탓에 독이 오를 대로 오른 동편 너구리들과 손을 잡았다.
“흠…. 거 참 고약타.”
이래서야 내분을 일으킬 것도 없으니 어쩌면 좋을꼬.
“그는 그렇지요. 따지고 보면 원수끼리 손을 잡은 셈이니 그네들도 나름 분열에 대비하고 움직일 테니까요.”
“대신 제대로 힘이 모이지도 않겠지. 다행이라면 다행이기는 하나 결국 원래 계획한 대로 흘러가기는 제대로 글렀구나.”
이래서야 순번을 나누어 차근히 치우기는 글러먹었구먼.
“어쩌겠습니까. 하나만 쳐내기에는 턱도 없을 만치 제대로 얽히고설킨 것을. 그나마 들개 떼 잔당이며 너구리 떼 반절 미리 솎아냈으니 다행이지요.”
아니었으면 주군 성격에 솎아내기 귀찮다고 불 싸질렀을 걸요?
심드렁한 어조로 제 상전 향해 일침을 날린 책사는, 그러나 곧 낯을 굳히더니 부러 목청을 높여 ‘똑바로 드시옵소서!’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이는 성혼례 채비를 핑계로 원향전 이곳저곳에 자리한 수많은 귀들로 인함이니, 아니나 다를까 그 외침 다 끝나기도 전에 조금 가까워지나 싶던 기척 몇이 후다닥 멀어진다. 그에 두 주종의 낯 위로 떫은 고소가 스친다. 드나드는 사람들이 늘어나니 이게 귀찮다. 닷새 전만 해도 제 어린 내자 하나만 주의하면 되었는데 이건 또 무슨 지랄인지 원.
어쨌거나 잠시나마 이쪽으로 쏠려있는 귀들을 가릴 필요가 있다. 사내와 그의 책사는 더없이 불퉁한 낯을 하고 거짓 실랑이를 이어나갔다. 다행히 이럴 때를 위해 진작 준비해놓은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이 지금 서탁 위에 자리한 오각형 수정패더라. 그럼 이제 경전을 살피겠노라는 말로 실랑이를 마무리 지은 책사가 그것을 들어 가만히 뒤집으니 곧 조용하나 싶던 방 안에 책사의 지친 강학 내용 따라 읊는 황자님 골난 음성이 우렁우렁 울리기 시작한다. 모르는 이가 보면 대번에 용신님 찾으며 기겁을 할 광경이었다.
그러나 정작 방 안에 자리한 두 주종은 태연하기 그지없었으니 이는 문제의 음성이 괴이한 귀신의 장난이 아니요, 이런 때를 위해 들여온 술국 넘어 자리한 서천의 어느 나라에서 만들었다는 기물(奇物)의 능력이었던 탓이라. 광이 저의 대계를 위해 금 한 관을 들여 구해 온 저장구라는 이름을 가진 이 기물은, 이름 그대로 원하는 소리를 담아 몇 번이고 반복해 들려주는 것은 물론이요 그 안에 담긴 말을 모두 쏟아내는 동안 자리한 곳을 기준으로 반경 석 자 이내의 공간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를 차단해주는 기능까지 갖추고 있었다(실은 그 기능 덕분에 청이 원향전에 들기 전까지만 해도 대계를 위해 맹활약을 펼쳤더랬다).
드디어 두 주종만의 시간과 공간이 돌아온 것이다.
“―지금 같아서는 정말 불을 지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만.”
그러면 이 귀찮은 짓도 할 필요가 없지 않아? 응?
허나 안 해도 될 일을 해야만 했던 황자님 심사는 이미 제대로 뒤틀린 뒤였다. 저가 백치의 모습을 벗어던질 날이 목전이라 그런 것일까? 10년 남짓 감당한 바보 노릇이 귀찮다 못해 부아가 치민다. 오죽하면 제 책사 부추기는 대로 꼬일 대로 꼬인 여우와 너구리 떼를 향해 불을 던질 생각까지 했을까.
“참으십쇼. 그러다 쓸 만한 인재까지 덩달아 쓸려나갑니다.”
저라고 생각이 없어 가만히 놔두는 게 아니라고요.
덕분에 장난으로 던진 말에 죽자고 덤비는 꼴을 보게 된 책사는 깊은 한숨과 함께 자칫 잊힐 뻔한 사실 하나를 지적했다. 그래, 맞다. 워낙 오래전부터 뿌리를 내린 것도 모자라 대를 이어가면서까지 이어져 온 악물(惡物)들인 탓에 대계의 말미에 다다른 지금에 이르러서는 나라의 녹을 받는 이 중 많은 수가 그들과 엮여있는 것이다. 실은 그런 까닭에 앞서의 혈사 후에도 관과 군에서 난리가 났더랬다. 수습을 하려 해도 일할 사람이 없으니 난리가 날밖에.
“논다.”
어차피 그 나물에 그 밥인 것을 무어 다 챙기려 드니.
그런데 그 사정 모르는 것도 아닌 이가 이리 삐딱하게 나오는 꼴이 암만해도 황자님 심사 제대로 비꾸러진 모양이다. 그제야 상전 심술 알아차린 곰 같은 책사, 목까지 치밀어 오른 한숨을 가만히 되삼키며 사정하기에 나섰다. 아니, 돌아서면 태산이 되어 저를 내려다보는 일거리를 생각하니 사정을 아니 할 수가 없더라.
“제발, 제발요. 제발 부탁입니다. 좀 참아주십쇼. 성질대로 질렀다 여기서 더 꼬이면 정말 풀다가 죽을 판이라고요.”
더럽고 치사해 배알이 꼬일 판이지만 그래도 사정해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얼마 남지 않은 그들의 계획이 또 어찌 꼬일지 알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허나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 황자님 심사 제대로 꼬였다고 말이다. 게다가 그 꼬인 심사로 시커먼 곰 같은 작자가 어울리지도 않게 울상을 하고 있는 꼴까지 마주한 탓에 원래도 남다른 심술보가 제대로 등천할 채비를 마쳤다. 멀뚱히 제 책사 청승 지켜보나 싶더니 곧 그 입 한끝 비뚜름히 끌어올리는 모양새가 암만해도 심상치 않더라.
아니나 다를까,
“―다 풀 건 또 무어있누?”
“예?”
“어차피 꼬일 대로 꼬이지 않았니? 괜히 되지도 않게 풀겠다고 용 쓸 것 없다. 그냥 잘 드는 칼로 석석 잘라내면 그만이지 않니.”
그리 잘라 멀쩡한 토막 적당히 골라 쓰면 될 것 아니냐.
예의 그 느른한 어조로 차근히 덧붙이는 말이 어째 하나같이 악질이라 듣고 있던 책사님 잠시 얼이 빠지고 말았다. 무슨 말을 어찌 꺼낼까 고민하니 한숨부터 탁 터져 나온다.
“…그 실타래, 주군 것이옵니다.”
“그래, 내 것이지.”
그러니 나 편한 대로 풀겠다는 소리 아니더냐.
게다가 이어지는 말 또한 악질이기는 매한가지이니 이거 참 막막하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골치가 아팠다. 아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되 저대로 행하면 죽어나는 건 책사인 저를 비롯한 힘없는 아랫것들뿐이었으니 그로서 상전의 악랄함은 더욱 빛을 발했다. 덕분에 무엇을 어떻게 답해야 저 심술 막을 수 있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나라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머리가 상전 비꾸러진 속 달래기 위해 팽팽 돌기 시작하니 주군과 책사의 호위를 위해 별채 지붕이며 바닥 아래 은신하고 있던 밀군들은 진심으로 그 처지 동정하였더라.
“―아 맞아.”
“예, 예?”
다행히 그렇게 허둥대는 꼴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황자님 비꾸러진 심사가 조금은 누그러진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여우 그 년이 기어코 백곰 녀석마저 끌어들일 작정이라지? 덕분에 일정까지 꼬였더구나.”
고얀 놈. 형님이 술 한잔하자고 연통을 한 것이 언제라고 여직 소식이 없어.
“…그게 아무래도 주군의 연통마저 여우의 것으로 착각한 모양입니다. 착각도 모자라 입궁 후 처소인 향림전(香琳殿)에 틀어박혀 꼼짝도 않더구먼요. 꼬박 이레 동안 그러고 있사옵니다.”
사내로 태어나 어찌 그리 새가슴이랍니까?
…아니, 그보다는 그 심술이 방향을 바꾼 듯하다. 덕분에 한숨 돌린 책사는, 허나 그 방향의 끝이 저의 또 다른 두통거리임을 깨닫고 새로이 한탄을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내 말하지 않았니. 백곰 그놈이야말로 드러난 성정이 단순해서 그렇지 실은 꽤나 감이 좋다고 말이다.”
“암만 그래도 정도가 있는 법입니다. 여우가 손을 내밀기 무섭게 숙수간 밥상도 마다하고 위왕부에서 챙겨온 건량에 향림전 우물물만 먹는답니다. 이 정도면 감이 좋은 게 아니라 의심병 수준이지요.”
그것도 광이 뭐라 거들 수도 없을 만큼 희한한 짓만 골라서 하고 있는 탓에 그로서는 흔치 않게 말문이 막혔다. 거참 희한치. 어찌되어 내 주변에 있는 곰들은 하나같이 별난 것일까.
“흠…, 거야 제 명줄 귀해 그러는 게 아니라 남의 명줄 대신 챙길 작정으로 그러는 게지. 어차피 백곰 그놈은 살아있으나 죽어 나자빠지거나 차이도 없지 않으냐.”
“그는…, 그는 그렇지요.”
“내가 그놈 얼굴 한 번 보려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다 그런 까닭이야. 자고로 제 목숨 귀한 줄 모르는 놈이 남의 목숨 지키겠다고 설치기 시작하면 그것만큼 무서운 것이 없는 법이다. 하물며 그놈은 가진 것도, 가질 것도 없지 않더냐? 그래서 진작 욕심내는 것도 없던 놈이라지.”
“하오나 지금은 그도 아니지 않사옵니까?”
“옳다. 있는 듯 없는 듯 죽지만 않으면 되는 것처럼 살던 놈이 가지고 싶고 지키고 싶은 것이 생겼지. 심지어 그 존재가 저와 같은 이유로 위태롭기까지 하지. 지금이야 여우고 나발이고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라면 뭐든 경계를 한다지만 그도 잠시뿐일 게다.”
지켜야 하고, 함께 살아야 하니까.
“…필요하다면 여우와도 손을 잡겠지요.”
“그래, 그렇지. 간절함이 남다를 터이니 능히 그러고도 남을 게다. 하지만 백곰 그놈이 그리 곱게 남에게 넘기기에는 너무 아까운 패라서 말이지.”
“으음…. 제 계산으로는 챙겨서 득이 될 확률이 반, 버려서 독이 될 확률이 반인지라….”
사내의 말에 책사는 꽤나 곤혹스러운 낯을 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도 그럴 것이 제 주인의 말이 느긋한 어조와는 달리 제법 심각한 내용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어찌해도 득이 될 확률이 반절이라는 소리는 곧 득이 되지 않을 확률도 반절이라는 소리였다. 대계의 초입이라면 모를까 이미 끝을 바라보고 있는 시점에서는 크게 혹할 게 없는 조건인 것이다. 심지어 세력조차 갖추지 못한 자였다. 외척을 잃으며 대부분의 세력이 사라진 데다 그나마 좀 남아있던 것마저 얼마 전 애기마마님 일로 뿌리째 뽑혀나갔다. 남은 것은 온전히 백곰 하나뿐이라는 소리. 여우가 세를 늘리는 건 반갑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게 새로운 사람을 아군으로 받아들일 이유는 되지 않았다.
적어도 가의의 생각으로는 그러하였다.
“의.”
“예, 주군.”
허나 사내에게는 제 ‘형제’를 끌어들여야 할 이유가 있었다.
“백곰 그 녀석, 지금쯤이면 기마며 궁으로는 나라에서 한 손에 꼽힐 게다.”
“……예?”
“아마 황가에서도 아는 이가 몇 없을 것이야. 아, 뱀 새끼도 모를 게야. 백곰과 어울리기를 죽기보다 싫어했거든.”
그래 봤자 내 눈에는 그 놈이 그 놈이더라만, 하여간 뱀 새끼 그놈도 참 주제를 모르지.
제법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치고는 참으로 태평한 사내다. 물론 10년이 넘게 그를 모신 책사로서는 그 느긋한 모습 뒤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잘 알기에 절로 마른침을 삼켜야 했지만 말이다.
“그 나이 유(幼 : 10세, 예기(禮記) 곡례편(曲禮篇) 상(上)에 사람의 나이에 대해 10세를 유(幼), 20세를 약(弱), 30세를 장(壯), 40세를 강(强), 50세를 애(艾), 60세를 기(耆), 70세를 노(老), 8, 90세를 모(耄), 100세를 기(期)로 분류.)에 이르기도 전에 제 키만 한 장궁을 수족처럼 다루던 녀석이다. 제대로 외탁을 한 덕에 마술(馬術)에 대한 자질도 남달랐지. 외척들 그리 쓸려나간 뒤로 몸을 사리느라 잘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수련도 착실히 한다더라. 그 자질로 성실하기까지 하니 충분히 한 손으로 꼽히고도 남을 테지.”
아, 검도 그럭저럭 죽지 않을 만큼은 쓸 게다.
“그런….”
아니나 다를까, 이어지는 이야기는 더욱 놀라운 것이었으니 듣고 있던 가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4황자가 사냥을 즐기며 한량처럼 산다는 이야기는 저도 들은 바 있지만 설마 그것이 저리 연결될 줄 누가 알았으랴. 게다가 이런 것을 여직 알려주지 않다 지금에서야 툭 던지는 주인의 속내는 또 무엇일까. 너 일 참 못하는구나, 그리 타박이라도 하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너 지금 할 일 남았다 그리 언질하시는 것일까? 덕분에 잠깐 사이 그의 머릿속이 바빠진다.
헌데 상전의 속내는 이도저도 아니었다.
“사실 나도 얼마 전까지는 너와 다를 게 없었다. 가진 능력이 좀 아쉽긴 하지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면 무어 굳이 챙길까 싶더라.”
혹여 방해다 싶으면 그냥 쓸어 내버리면 그만이지 않니.
“그런데 계획한 것보다 지나치게 이른 때에 여우의 손발이 잘려나갔다. 게다가 다 사라진 줄 알았던 백곰의 옛 세력이 너구리를 끼고 여우와 붙어먹기까지 하였다. 결국 내가 건재하다는 것을 밝힐 시기마저 턱없이 앞당겨졌지.”
“…….”
“잠시만 긴장을 풀면 일이 손에서 벗어나려 들어. 10년을 큰 강물처럼 흐르던 것이 갑자기 구곡계곡으로 빠지기라도 한 양 정신이 없다. 이런 와중에 또 무어가 변수랍시고 떨어져 내릴지 짐작도 할 수 없구나. 그렇지 않으냐?”
“그는…. 예, 그도 그렇군요.”
그럴 바에는 변수가 될 법한 건 미리 치우든가 챙기든가 택일을 해야겠지요.
“그래, 옳다. 하물며 그 가능성이라는 것이 지킬 게 생겨 살아남을 작정을 한 놈이라면 치우려다 독이 될 터. 차라리 챙겨서 써먹음이 제일이라지.”
“그렇습지요. 게다가 기마전에 능한 명궁이라니…. 적이 되는 순간 재앙이 되겠지요. 반드시 챙겨야 할 것이옵니다.”
“후후, 이제야 말귀를 좀 알아듣는구나.”
“부끄럽구먼요. 아, 근데 말입니다.”
“으음?”
“뭐든 일단 얼굴을 봐야 가능하지 않을까요?”
사람 피해보겠다고 식사도 건량으로 때우는 이를 어찌 만나시려고요?
허나 가의의 진심 어린 우려를 담은 반문 덕에 황자님 느른한 낯 위로 살짝 금이 간다. 실컷 설득하고 났더니 전혀 뜻밖의 장벽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에 잠시 고민하다 싶던 사내는, 그러나 곧 가장 쉽고도 간단한 방법을 떠올렸다.
“―풍백.”
“하명하옵소서.”
“백곰 잡아다 대령하렴.”
술상은 알아서 챙겨놓고.
가볍기 그지없는 그 명에 깊이 부복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밀군 수장의 신형이 그대로 바닥을 향해 꺼진다. 그리고 별채 주변에 자리하고 있던 기척 중 둘이 뒤따라 사라지니 이는 곧 그들이 주군의 명을 수행하고자 황궁 서편에 자리한 향림전으로 향한 것이더라.
“허면 소신도 이만 가 보겠사옵니다.”
“오냐.”
한편, 그 잠깐 사이 짙어진 밤하늘을 살펴 시간을 확인하던 책사 역시 퇴궐 준비를 마쳤다. 다른 일이라면 모를까 지금 제 주군이 하려는 일은 그가 관여할 일이 아니더라. 하물며 주군이 타당한 근거를 들어 직접 마음을 먹고 움직이겠다는 데 저가 무엇을 더 간여하겠는가. 게다가 실은 당장 가의에게는 그 나름의 책무가 있었으니 채 백 일도 남지 않은 거사를 위한 채비라. 두 시진 후 황부 지하 수로를 통해 들어올 서역 술국의 지원이 그것이니 그 내역에 물품만이 아니라 사람도 포함된 탓에 암만해도 챙길 것이 많았던 것이다.
“내일부터는 부디 좀 조용히 맞이하여 주옵소서.”
“논다.”
“……끙…. 내 앓느니 죽지.”
물러가옵니다아.
누가 들어도 지친 티가 확 드러나는 인사말과 함께 문사 양반 문밖으로 나서니 이로써 사고뭉치 2황자님의 하루가 모두 마무리되었다.
“…그나저나 참으로 아쉽도다.”
그리고 어수선한 방 정리며 황자님 늦은 석반을 위해 다섯이나 되는 궁인이 바삐 움직이는 사이 후원으로 걸음을 옮긴 사내는 어느 순간 나직이 속삭이기 시작하였다.
“여우 그년만큼은 최후에 손을 댈 작정이었거늘….”
아쉽구나, 참으로 아쉬워.
어느새 살며시 모습을 드러낸 하얀 눈썹달이 구름 사이에 반쯤 몸을 숨기고는 그런 사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더라.
4황자 수(垂)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당황하는 중이었다.
분명 저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건량 한 줌에 황차 한 잔으로 석반을 대신하고 큰 형님께 보낼 연서 적을 채비를 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막 연적을 집어 들던 참에 갑자기 눈앞이 새까매지나 싶더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생전 처음 보는 곳에 자리하고 있지 뭔가. 아니, 그만으로도 기가 막히건만 저를 진정 당황스럽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뭘 어찌 챙겨왔기에 저리 어리바리하누?”
이거 원, 술 한 잔이 아니라 당과나 한 줌 쥐여주어야겠구먼.
사위가 막혀 어둑한 가운데 빛이라고는 어린애 팔뚝만 한 황초 둘이 전부인 곳에 자리한 것은 저만이 아니었다. 일렁이는 불빛 사이에 자리한 얼굴이 저를 보며 혀를 차는 모습에 수는 다시금 오도독 얼어붙고 말았다. 단순히 놀라서가 아니라 어둑한 가운데 하얀 낯만 둥실 떠 있는 것처럼 보인 탓이었다. 장부의 체면 덕에 간신히 얼어붙기만 하였지 아니었으면 그 스산하고도 괴이한 모양새에 비명이라도 질렀으리라.
헌데 수가 놀라고 당황할 것은 그것이 끝이 아니더라.
“나를 기억하느냐?”
뜻밖의 사태로 잠시 얼이 빠져있던 수는 갑작스러운 그 물음에 바로 답하지 못하고 은회색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렸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이상타, 참말로 이상타. 저이는 대체 누구이기에 나에게 저리 말하는 것인고? 저이가 대체 뉘라서 나에게 하대를 하는고? 내 아무리 형제들 중 가장 천대받는 자라고는 하나 결국 황자의 위에 자리한 자인즉, 저리 당당히 하대할 자는 그리 많지 않거늘.
“흠…, 여전하구나.”
어릴 적에도 그러더니 성년례를 치르고도 달라진 것이 없어.
심지어 더욱 노골적으로 끌끌 혀를 차더니 제 어린 시절까지 들먹이며 타박 아닌 타박을 늘어놓는다. 덕분에 수는 다시 얼이 빠지고 말았다. 저이가 대체 누구이기에 저를 향해 오랜 지인의 흉내를 내는 것일까? 대체 누구이기에 저토록 저에게 살갑게 구는 것일까? 내 비록 살아남을 작정으로 아둔한 척을 하고 다니기는 하나 사람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빙충이 짓은 한 적이 없거늘.
“자박자박 걸음마 할 적부터 다른 형제 모다 무시하고 장형(長兄)만 따라 다니더니 다 커서도 다른 형은 형도 아닌 게로군. 네 녀석도 참 어지간하다. 어지간해.”
허나 상대가 느른한 어조로 제법 길게 덧붙인 그 말을 듣는 순간, 뿌옇던 수의 머릿속이 단숨에 밝아진다. 아니, 어둑하던 눈앞까지 환해지나 싶더니 제 앞에 자리한 무도한 자의 생김이 선명히 제 뇌리를 파고든다. 새카만, 그야말로 깊은 어둠의 색을 지닌 자. 흑룡께서 세우신 이 나라에서 가장 그 빛을 짙게 타고난 자.
“서, 설마….”
작은…, 형님?
그리고 제 입으로 말하고도 믿을 수 없는 그 호칭에, 마주한 자가 더없이 해사한 미소 만면에 그려 넣으며 답하였다.
“오랜만이구나, 수야.”
10년 전, 독에 당해 백치에 병신이 되었다던 2황자가 지극히 멀쩡한 모습으로 저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받으렴.”
광은 제 앞에 놓인 주호(酒壺)를 들어 아직도 어리바리한 기색 떨쳐내지 못한 4황자를 향해 내밀었다. 그러자 허둥대며 잔을 내미는 모양새가 기가 막히다 못해 안쓰럽더라.
게다가 아랫것들더러 술상은 알아서 챙겨 놓으라 했더니 이거 뭐 사내놈들 손길 아니랄까봐 참으로 소박하다. 그래도 나름 황자를 대접할 술상이거늘 안주라고 올려놓은 것이 한입 크기로 반듯하게 썰어놓은 두부에 역시 한입 크기로 잘라놓은 육포, 그리고 소금으로 간을 해 기름에 볶아낸 낙화생(落花生 : 땅콩)이 전부였던 것이다. 그나마 주호에 담긴 술이 귀한 황주라 소박하다는 것이지 아니었으면 초라하다 못해 제 손으로 엎었으리라. 상대가 10년 만에 마주한 ‘형님’ 덕에 안주는커녕 손에 든 술잔도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하는 중이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불러놓고 이리 홀대하는 것인가 오해를 사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그―….”
허나 말했다시피 지금 수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제 앞에 자리한 술상이나 손에 들린 술잔이 아니다.
“왜 그러누?”
“그, 정녕 광이 형님이십니까?”
“…네 녀석도 참으로 어지간한 놈이로다.”
어찌하면 꼬박 일각을 그 물음으로 흘려보내어?
정말 끈질길 정도로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는 아우 덕에 결국 사내는 두 손을 들어야 했다. 얼마나 끈덕지게 물어대는지 부실한 술상을 대접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 연기처럼 흩어질 지경이었다. 아니, 실은 들고 있는 술잔 그 멍한 낯짝 향해 내던지고픈 것 참느라 손이 다 부들거리더라.
다행히 상대도 사내의 그 사나운 기세 알아차린 모양이다. 반쯤 넋이 나간듯하던 눈빛이 또렷해지나 싶더니 곧 손에 든 술잔 홀짝 비워버리고 제대로 확인에 나선다.
“허나 들리는 이야기로는―.”
“독에 당해 백치가 되었다는 그것 말이냐?”
“…예.”
허나 그 시도는 시작부터 난관을 맞이하였다. 간신히 정신만 차린 상황에서 상대가 되레 치고 들어오니 또 흔들리는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네가 보기에는 어떠하냐?”
“…예?”
“네가 보기에는 그 소문이 참인 것 같으냐, 거짓인 것 같으냐?”
“그, 그는….”
머리가 모자라는 것은 아니나 천성이 계산을 모르고 단순한 4황자는 제 차형(次兄)이라는 자가 얼마나 성격이 나쁜지 짐작도 못 하는 탓에 그저 어물대기 바쁘다. 실은 저가 백치였던 것인가 내심 고민하는 중이었다. 상대가 뭐라 하는지는 알아들었으나 무엇을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는 도통 짐작이 가질 않는 탓이었다. 하여 연신 말끝을 흐리며 이리저리 눈만 굴리고 있으니 곧 맞은편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리 고민할 것 없다. 무언가 따지려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네 생각을 묻는 것이야.”
“아…. 그런 것입니까?”
“그래, 그런 것이란다. 허니 솔직히 이야기해보렴.”
“그… 거짓인 듯합니다.”
“어찌 그리 생각하느냐?”
“너무, 음…, 너무 멀쩡해 보입니다.”
“너무 멀쩡해 보인다?”
“예, 독을 먹고 백치에 못 자란 이가 되었다는 소문과는 달리 지금 아우 앞에 자리한 형님께서는 정신도 맑고 풍채 또한 헌앙하시니까요.”
허니 소문이 거짓인 것이지요.
어리바리한 낯으로 진지하게 답을 하는 모습이 참으로 재미나다. 얼마나 재미나던지 사내는 한 번 더 크게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더랬다. 이미 초라한 술상으로 무례를 저지른 상황이 아니던가. 거기에 또다시 무례를 더할 필요는 없다. 하여 크게 소리 내어 웃는 대신 느른히 그 입 길게 늘이는 것으로 대신한 사내는 제 술잔 채우며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네가 그리 생각하면 그게 맞겠지.”
“……예?”
“네가 거짓이라 생각하면 거짓이라는 소리다.”
“……참이라 여긴다면…?”
“그럼 참이겠지.”
“…….”
“내가 널 놀리는 것 같으냐?”
“…그는, 음, 아닙니다.”
선문답과도 같은 말에 잠시 눈빛이 흔들리던 수는, 그러나 허둥지둥 제 나름의 답을 내어놓는다. 놀리는 것이라기에는 제 차형의 눈빛이며 태도가 너무나도 진지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 이유도 충분히 짐작하는지라
다행히 그의 답이 제대로 된 것이었는지 맞은편에서 한 번 더 나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아니, 그도 모자라 다시 주호를 들어 비어있는 술잔을 채워주기까지 한다. 누가 봐도 기꺼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그 모습에 수는 깊이 안도하였다. 적어도 그와 저가 척을 질만 한 일은 없겠다 싶어 마음이 놓인 것이다.
거기다 오랜만에 마주하게 된 제 차형의 언변이 어찌나 유려하던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술 한 동이 들여놓고 별별 이야기를 다 늘어놓고 있더라. 어린 시절 형제들이 합심하여 제대로 골려준 성질 고약한 첫 훈육 상궁 이야기부터 수학관(受學館) 학사의 강연하는 음성 자장가 삼아 번갈아가며 졸았던 이야기, 유난히 뜨거웠던 어느 여름날에 더위를 이기지 못한 수가 연못으로 뛰어들어 내전을 발칵 뒤집어놓은 이야기 등 그 시절을 함께하지 않은 자라면 결코 나눌 수 없는 기억들은 물론이요 의미심장한 은유와 비유를 빌려 잊을만하면 들썩대는 고약한 이들에 대한 은밀한 대화까지 정말 별 이야기를 다 나누었더랬다. 허나 두 사내 모두 그 와중에도 용케 만나지 못한 지난 시간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으니 이는 그것이 결코 웃으며 대화를 나눌 내용이 아님을 서로가 잘 알고 있는 까닭이라.
“헌데 수야.”
“예, 형님.”
그래서 새로 들여온 두 번째 술동이를 열다 말고 저를 부르는 차형의 음성에도 딱히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하고 냉큼 대답부터 하는 4황자님이시다.
“남과 북, 둘 중 어디가 좋으냐?”
“예? 갑자기 그게 무슨….”
“위왕부와 해경부 중 어디가 좋으냐 이 말이다.”
“……예?”
그런데 이어지는 말이 어째 희한하다. 뜬금이 없어도 이만저만이 아닌지라 또 잠시 넋을 놓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제법 술이 오른 참에 갑자기 말허리를 뚝 분지르나 싶더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수가 광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위왕부가 북에 자리하고 있고 해경부가 남해에 자리하고 있으니 남과 북, 둘 중 어디가 좋으냐는 물음과 위왕부와 해경부 중 어디가 좋으냐는 물음은 사실 같은 물음이었다.
허니 수가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은 질문의 내용이 아니었다. 그가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은 왜 지금 저가 이런 질문을 받고 있나 하는 것이었다. 하여 또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고민하던 수는 곧 들고 있던 잔 내려놓고 술기운에 살짝 흐트러져 있던 몸가짐을 바로잡았다. 광이 진심으로 탄복했던 백곰의 감이 이번에도 빛을 발한 것이다.
“형님.”
“으음?”
“어찌 그런 것을 물으시는 것이옵니까?”
그리고 이 자리가 시작된 이후 가장 정중한 태도로 확인에 나서니 돌아오는 대답이 어째 범상치 않더라.
“선물을 주려면 받는 이의 마음에 들어야 하지 않겠니? 그래서 묻는 게다. 둘 중 어느 곳이 더 마음에 드누?”
“……?”
이번에도 수는 곧장 알아듣지 못했다.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그 말 저에게 던지는 이의 어조며 태도가 어찌나 가볍던지 허풍 좀 더해 바람 불면 날아갈 깃털과도 같았던 탓이다.
“……그, 그….”
“으음?”
허나 한 박자 늦게 그 말뜻 알아듣고 보니 절로 온몸이 떨리기 시작한다. 배포가 작아서가 아니라 상대가 하는 말의 규모가 어지간한 배포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치 어마어마했던 탓이다. 6척을 넘어 7척에 육박하는 거구가 와들와들 떨어대는 기세에 당연 목소리마저 풍 맞은 것 마냥 덜덜대니 사내는 또 한 번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자 애를 먹었더랬다. 거참 덩칫값도 못하는 위인이로고.
“무, 무엇이, 선, 물이라고, 요?”
“그놈 참 주사 한 번 희한하구나. 아니면 풍이라도 맞은 게야? 무얼 어찌하면 그리 덜덜대누?”
“소, 송구하옵니다. 하, 하오나 워낙 믿기 힘든 이야기인지라….”
“으음? 무어가? 둘 중 네 마음에 드는 것을 선물로 주겠다는 것이 말이냐?”
그에 시퍼렇게 얼어붙은 얼굴이 와들거리는 박자 그대로 급히 아래위로 고갯짓을 한다. 덩치는 산만 한 놈이 하는 짓은 어찌나 숫되던지 결국 사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처음에는 그래도 손님을 배려한답시고 잔기침을 좀 섞더니 그나마도 오래가지 못한다. 곧 원향전 지하 밀실이 묵직한 웃음소리로 술렁이기 시작하니 그것은 어지간해서는 그치지 않을 듯싶더라.
“하하…, 이거 내가 참 형으로서 신용이 없구먼.”
동생한테 선물 한 번 하려는데 의심부터 사고 말이야.
하여 사내는 간신히 웃음을 그치기 무섭게 타박부터 날렸더랬다.
“소, 송구―….”
“송구할 것 없다. 다만 내 아직 답을 듣지 못하였구나.”
그래, 남과 북 중에 어디가 더 좋더냐?
그도 모자라 얼른 답을 내놓으라며 채근까지 한다. 한참이나 이어진 웃음소리에 짙은 피부색 시뻘겋게 물들였던 수가 다시 시퍼렇게 얼어붙는 순간이다.
“말만 하렴. 내 원하는 곳 너에게 내어주마.”
“그, 그는….”
“아니면 차라리 장형에게 답을 청할까?”
“……예?”
게다가 수의 정신을 아득히 날려버릴 만한 이야기는 아직 한참이나 더 남아있었다.
“형님더러 너와 살림 차리고 싶은 곳이 둘 중 어디냐 물어보면 되느냐 이 말이다.”
“……――?!!”
놀랍게도,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백치 흉내를 내며 황궁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지내던 2황자의 입에서 1황자와 4황자의 가장 비밀스럽고 절대 세상에 밝혀져서는 안 될 비밀이 흘러나온 것이었다.
“음? 어찌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게야?”
“그, 그것을…, 어, 찌…?”
“무어가? ―아아, 장형과 네가 정분이 난 것을 어찌 알고 있느냐 그 말이로군.”
거 뭐 대단한 일이라고.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그런 엄청난 사실을 예사로 이야기한 것도 모자라 더없이 하찮게 여기는 티가 역력한 상대의 태도였다. 형제간에, 그것도 무려 제국의 1황자와 4황자가 서로 정분이 났다는데 그를 두고 대단한 일이 아니라 하면 대체 무엇이 대단한 일이라는 것일까. 그에 다시 한 번 수의 말문이 막혔다. 아니, 말문도 모자라 숨통도 틀어 막힐 지경이다.
그래서 수는 미처 짐작치 못했다.
“어차피 진짜 형제도 아닌 사이에 정분 좀 나면 어때서 그리 호들갑이람.”
“…―헉…!”
설마 온전히 저 혼자만의 것이라 여겼던 비밀마저 상대가 알고 있을 줄이야.
순간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술잔이 기어코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다. 좀 전까지는 제 그릇으로는 도저히 감당 못 할 이야기에 사지가 떨렸다면 지금은 온전히 두려움 하나로 사지가 떨리더라. 오랜만에 마주한 제 차형이라는 이가 알고 보니 제 명줄 틀어쥔 저승사자임을 알아차린 덕분이라. 그에 식은땀 한 됫박 쏟아내며 와들거리던 수는, 그러나 곧 새로운 의문 하나를 떠올렸다.
제 아비라 세상에 알려진 이, 당금의 지존.
“그, 형님, 아니, 형님 마마, 아니, 아니 그, 화, 황자마…마?”
“논다.”
형님이면 형님이지 그 지랄 맞은 호칭은 또 무어람?
하여 제 혼란한 머릿속 다 정리되기도 전에 제 ‘차형’을 부르니 정체불명의 해괴한 호칭 탓으로 대번에 매운 타박이 돌아온다. 덕분에 또 뭐라 바로 말도 못하고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수는 떨어지지 않는 입 억지로 떼어 그 새로운 의문 해소하고자 나섰다.
“호, 혹시….”
“혹시?”
“혹시…, 혹시 폐하께옵서도…?”
“알고 있다.”
“―?!”
돌아온 것은 지극히 간결한 내용의 즉답이었다.
“적어도 나와 폐하께서는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 그, 그랬군요. 그랬어요.”
그래서 그러신 거였어요….
그리고 현재 살아있는 적통 황족 중 누구보다도 이질적인 외양을 한 제국의 4황자는 결국 더없이 침통한 낯을 하고 무너져 내렸다. 자신의 근원이 부정하다는 것이야 진작 짐작하고 있었으나 그래도 아비라는 자가 저에게 무심한 것이 서운하지 않았다면 거짓이리라. 허나 직접 그 이유라는 것을 듣고 확인하니 마치 끝이 없는 무저갱으로 내던져진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다. 하여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보고자 하였으나 당장 눈앞이 깜깜하고 머릿속이 아득하니 무엇 하나 제대로 떠오르는 것이 없다.
허나 따지고 보면 당연히 그럴밖에. 연유야 어찌되었든 감히 귀한 황통을 자칭한 죄를 저지른 셈이 아니던가. 당장 목이 떨어져도 부족함이 없을 대역 죄인이 바로 저였으니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면 그게 더 희한할 판이라. 저와 제 정인이 실은 매우 떳떳한 관계인 것을 확인하면 무엇 할까. 당장 제 명줄이 위태로워진 것을. 이를 어찌하나. 그렇지 않아도 부평초 같은 인생, 이제는 바람결 앞에 놓인 깃털만도 못하게 되었으니 이를 어찌하나. 수는 망나니 시퍼런 칼날이 제 앞에 어른대는 것만 같은 착각을 견디다 못해 침통한 낯으로 눈을 감았다.
“거 참, 그게 무어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그리 죽상을 하누?”
허나 정작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내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더없이 심드렁한 타박뿐이더라.
“그리 따지면 우리 형제 중에 뻐꾸기 새끼 아닌 이가 어디 있을까.”
헌데 그 타박하는 내용 참으로 희한하다. 어찌나 희한하던지 냉큼 알아듣지 못하고 또 한참을 눈만 끔뻑였다. 이상타, 참말로 이상타. 이 형님이 지금 나더러 뭐라고 하는 것이야? 누가 무어라고? 누가, 뻐꾸기 새끼라는 것이야?
“………?!!!!”
그리고 그 말을 온전히 이해한 그 순간, 수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벌어졌다. 더 놀랄 것이 있을까 했더니 이런 어마어마한 것이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게다가 광은 그런 그를 향해 싱긋이 웃어 보인 것도 모자라 가장 큰 비밀을 알려주고자 운을 떼었다.
“그럼에도 나는 다르다지.”
너는 물론이요 장형이나 뱀 새끼는 물론 막내하고도 다르다지.
“어째서 그런지 아니?”
하여 수는 홀린 듯이 고개를 내저었더랬다.
“그는 말이다….”
그에 곧 답을 해줄 것처럼 입을 뗀 광이 갑자기 몸을 기울이더니 지극히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듣기도 힘들만치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
하지만 그로도 충분하였다.
백곰이 이 제국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차리기에는, 그래서 저가 모실 주인을 정하기에는 그로도 충분하였다.
큰 경사를 겨우 아흐레 남짓 남겨둔 원향전의 숨은 풍경은 그러하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시간만큼 거침없이 제 갈 길만 가는 놈은 없으리라. 붙잡을 수도, 막을 수도 없는 그 걸음이 어느덧 원향전 큰 경사에까지 이르니 귀한 분 곱게 단장하는 아랫것들 손길이 그 어느 때보다도 분주하였다.
“―이에 현(玄)가 청에게 양원(良媛)의 첩지를 내리는바, 현가 청은 나아와 예를 바치라.”
기가 막혀라.
허나 경사스러운 날, 그 경사의 주인공이신 아기마마께서는 지금 허무함으로 몸서리치며 관원의 손에 들린 교지를 향해 구배지례를 올리는 중이다. 성혼례라고, 하여 예법을 갖추어야 한다는 이유로 지난 보름 동안 청은 온몸의 잔털이 뽑히고 손발을 숫돌로 갈리는 것도 모자라 하루 두 번 성질 고약한 훈육 상궁들에게 시달리기까지 했다. 동기 시절에 수업이랍시고 시달릴 만치 시달린 가락이 있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사내 체면도 잊고 밤마다 눈물 바람깨나 날렸으리라. 어찌나 고달팠던지 성혼례 날 제 서방이라는 자 만나면 되게 한번 울어버려야지 하는 마음까지 먹었더랬다.
현가 청은 누구인가요? 소인은 청이라는 이름자 하나가 전부입니다만?
그런데 이게 뭔가. 기다리던 서방이라는 놈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해가 중천에 이르기도 전에 낯선 이 한 무리가 우르르 몰려와 저에게 듣도 보도 못한 성씨와 직책을 내린단다. 그것도 모자라 웬 두루마리에다 대고 예를 바치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래도 눈치가 눈치인지라 시키는 대로 따르기는 한다만 구배지례를 바치면서도 이건 또 무슨 미친 짓인가 싶다. 게다가 이것도 엄연한 성혼례라며 단장은 또 얼마나 거창하게 해놨는지 머리에는 면사가 달린 커다란 화관에 귀에는 갓난아이 주먹만 한 수정 장식 귀걸이, 목에는 각각 향목과 산호, 유리에 옥으로 만든 목걸이가 네 겹으로 걸려있었고 혼례복이라고 입힌 옷이 또 꼭 그만큼이더라. 그나마 가장 적게 치장을 한 손과 팔목에조차 3개의 반지와 팔찌를 걸어놓은 탓에 그 무게가 마치 천금과도 같았으니 설마 머리 한 번 조아렸다 들어 올리는 데 무릎이 후들거릴 줄 누가 알았으랴. 덕분에 아홉 번의 예가 끝날 무렵이 되어서는 한 번이 아니라 꼭 아홉 번을 울어야지 다짐을 할 지경이 되었다.
내 이번만큼은 참지 않을 것이어요.
설마 그 다짐 지키려면 한참이나 더 시간이 필요한 줄도 모르고 그렇게 이만 뽀독뽀독 갈았더랬다.
“네? 뭐라고요?”
“양원, 말을 낮추셔야 합니다. 그게 예법이어요.”
상궁 아주머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거든요?
“옷을 못 갈아입는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성혼일이잖습니까. 본디 혼례복 아래 신부의 속살은 부군 되는 이가 가장 먼저 보아야 하는 법이어요.”
“그런….”
그런 되먹지 못한 법은 어디 법이냐 따져 물을 뻔한 것을 간신히 되삼킨 청이다. 그 법 이 사람들이 만들고 정한 것도 아닌데 굳이 따져 무엇 할까. 어쩐지 힘이 쭉 빠져 털썩 주저앉은 청은 다시금 이 자리에 없는 제 서방을 향한 원망만 차곡차곡 쌓아올렸더랬다. 근데 그럼 또 무엇 할까. 어차피 그 원망 들어야 할 이는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은 것을. 그놈의 예법, 참말로 지랄 맞구나. 그게 뭐라고 사람을 이토록 고되게 만든다는 말인가. 나오느니 한숨이라더니 지금이 딱 그 짝이다. 기생 공부할 적에도 입을 일 없던 이리 펄럭 저리 찰랑, 치렁치렁한 차림을 하고 며칠째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제 서방 기다릴 생각하니 벌써부터 아득하더라.
“……저기요.”
“그러니까 말을 낮추셔야―.”
“황자마마.”
“예?”
“마마, 언제 오시어요?”
마마께옵서 오시면, 그러면 이 거추장스러운 것들 다 벗을 수 있는 것이지요? 예?
“그, 그는….”
“언제 오시어요?”
“……쉬시옵소서.”
제 물음에 제대로 된 답도 못하고 우르르 빠져나가는 궁인들 뒷모습 보고 있자니 서러움만 차오르더라.
남들은 다 경사라는 성혼례에, 청은 다시 홀로 남아 기다리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참으로, 참으로 서러운 것이더라.
결국 청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제 서방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은 홀로 외로이 오반을 먹고 나서도 다시 두 시진을 훌쩍 넘긴 뒤였다.
“양원, 황자마마의 연통이옵니다.”
“……?”
“이각 뒤 폐하께 알현을 하러 갈 예정이니 단장하고 있으라 하십니다.”
“……?!?!?!?!”
헌데 그나마도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내용이었으니 반나절이 넘게 혼례복 차림으로 제 서방 오기만 기다리던 아기마마님, 그대로 넋이 나가고 말았다. 기다림에 지쳐 아홉 번 되게 울어버리겠다는 다짐도 잊었건만 이건 또 무슨 횡액이던가.
사실 이 빌어먹을 차림 덕에 지난 반나절 동안 청은 그야말로 생고생을 겪은 참이었다. 매무새 흐트러지면 안 된다는 이유로 어디 함부로 기대지도 못한 건 시작이었다. 가만히 앉아있으려니 좀이 쑤셔 좀 걸어보겠다고 일어났다 옷 무게에 눌려 그대로 다시 주저앉은 건 덤이더라. 오반이라는 것도 제 낯에 드리워 놓은 면사 함부로 걷을 수 없다는 이유로 시원한 꿀물에 곡분 곱게 푼 것만 두어 사발 들이켰더랬다. 그리고 차라리 굶을 것을, 하며 후회했다. 설마 옷 덕에 측간에도 갈 수 없을 줄 누가 알았으랴. 간만에 요강 신세 톡톡히 진 다음부터는 찻물 한 모금, 과줄 한 점도 무섭더라. 얼마나 고되었으면 되게 울겠다 다짐한 것도 홀딱 까먹고 이제나저제나 제 서방 돌아올 것만 기다렸을까.
“양원, 채비하셔야지요.”
헌데 그 기다림의 끝이 이런 것이라니, 참말이지 해도 해도 너무하는구나.
“이리 오시어요, 알현의 법도 탓에 면사와 화관을 벗어야 하옵니다.”
“알현의 법도에 따라 지환(指環)과 비환(臂環), 이환(耳環)도 제하겠습니다.”
“겉옷은 잠시 저에게 주셔요. 얼른 향을 입혀 오겠습니다.”
거기에 잠깐 사이 알현을 준비한다는 이유 하나로 반나절 내내 감당하고 있던 무게가 하나둘, 사라지기까지 하니 이건 뭐 더 화를 낼 기운도 없더라.
“양원, 머리를 손질하겠습니다.”
“양원, 서두르셔야 합니다.”
“양원, 이쪽으로.”
“양원.”
“양원.”
다만 사방에서 낯모를 이름으로 저를 불러대는 것을 들으며 그저 울고 싶을 따름이더라.
놀라울 정도로 가벼워진 차림의 청이 원향전 사잇문을 나선 것은 그로부터 정확히 일각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래 봤자 거추장스러운 장신구만 좀 덜어냈을 뿐 여전히 네 겹의 혼례복으로 꽁꽁 감싸고 있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이만큼 가벼워졌으니 적어도 지존께 절을 올리다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일은 없으리라.
어쨌거나 사잇문 나서기 무섭게 낯익은 노상궁이 다가와 안내를 자처하니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그 뒤를 따르는 청이다. 헌데 그 길이라는 것이 참으로 희한하더라. 저가 황궁에 머무는 내내 다녔던 길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치 크고 화려하고 웅장하여 감히 발을 딛는 것이 황송할 지경이었던 것이다. 허나 때가 때이다 보니 그에 취할 겨를도 없다. 걸음을 좀 더디 옮겼다 싶으면 대번에 한참이나 멀어지는 노상궁의 모습이나 그 모습 확인할 때마다 지금 저가 어디로 무엇을 하러 가는 길인지를 떠올린 덕분이었다. 하여 청은 더욱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마음 같아서는 이 치렁한 옷자락 한껏 끌어다 안고 냅다 달리고 싶지만 지난 보름간 고되게 배운 예법을 생각해 재게 걸음을 옮기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렇게 몇 개나 되는 사잇문과 꽃살문을 지나쳤다. 문 하나를 지나칠 때마다 제 뒤에 붙어 있던 꼬리가 조금씩 짧아지다 못해 아예 사라지는 줄도 모르고 그저 잰걸음 옮기는 데만 온 신경을 쏟았다.
“이제야 왔구나.”
허나 귀에 익은 목소리와 함께 홀로 우뚝 자리하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을 알아본 청은 그만 재게 놀리던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희한타, 저기 저이는 대체 누구람?
“청아.”
저기 저 앞에서 저를 부르는 이는 대체 누구인 것인가.
“기다렸다, 내 색시.”
하얗게 웃는 저 얼굴은, 냉큼 달려와 제 손 붙잡고 이끄는 커다란 손은 분명 제 서방 되는 이의 것인데, 헌데 어찌하여 이리 낯선 것일까.
“참말로 곱구나.”
덕분에 청은 그가 제 숨결 한 움큼 베어 무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저 멀거니 굳어 있었다. 아니, 어느새 환히 드러난 제 이마며 콧등, 두 뺨 위로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따끈한 숨결조차 한참이나 지나서야 깨달았다.
그것이 낯설고 또 낯설어 더럭 겁이 나기 시작했다. 누굴까? 지금 저를 끌어안고 연신 입을 맞추는 이는 대체 누구일까? 색시야, 청아 하고 부르는 목소리는 분명 저가 아는 그 목소리이거늘 어찌 이리 낯선 것일까. 어찌하여 저가 아는 그 목소리에서 이리도 달큼한 맛이 묻어나는 것일까.
“내 드디어, 너에게 밝힐 수 있게 되었구나.”
― 저가 아는, 그리고 지금 당장 듣고 싶은 그 말간 목소리는 어디로 가고 개미떼 잔뜩 꼬여내는 당과와도 같은 다디단 음색이 그를 대신하고 있는 것인가.
“이제 내 너에게 다 알려줄 수 있게 되었어.”
그리고 이 뜻 모를 말은 또 무엇일까? 청은 저를 품 안에 담은 채 어린아이 어르듯 하는 이의 익숙하고도 낯선 얼굴을 올려다보며 자꾸만 삐걱대는 머릿속을 다잡느라 애를 먹었다.
“청아.”
“…예, 마마.”
하여 간신히 그 부름에 답할 수 있었다.
그 달큼한 목소리가, 저를 바라보는 낯 위에 어린 교태가 너무나도 낯이 설어 이이가 과연 저가 아는 그이가 맞나 보고 또 확인하느라 겨우 대답이라는 것을 할 수 있었더랬다.
“이제 대전에 들어가면, 네가 놀랄 것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놀랄 대로 놀란 참이었더랬다. 항상 해맑기만 하던 이가 온전한 장부의 모습을 보인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놀란 청이 아니던가. 그래서 뭐라 소리 내어 답을 하는 대신 그저 고개만 까딱이고 말았다. 지난 보름 동안 예법을 가르쳤던 두 훈육 상궁이 보았더라면 대번에 엄히 꾸짖고도 남을만한 행사였지만 진작 말문이 막힌 탓에 그만큼이 청의 최선이었다.
“내 다 이야기해 줄 것이야.”
허니 조금만 더 기다리렴, 응?
아니, 실은 언제나 아이처럼 해맑은 목소리가 아니라 저를 두고 어린아이 타이르듯 하는 장부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어째 마치 당과에 꿀을 끼얹어 설탕에 굴린 듯 달고 또 달아 뒤늦게 오심이 치밀어 오른 탓이었다.
“그럼 이제 귀한 분 배알하러 가보자꾸나.”
이 손 꼭 붙들고 있으렴, 내 색시야.
그 어느 때보다도 헌앙하신 풍신 자랑하시는 황자님 손에 이끌려 걸음을 옮기는 청의 낯은 더도 말고 백지장과 같더라.
* * *
참으로 갑작스러운 황명이었다.
제 일이 바빠진 탓에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하고 받은 황명이었다. 덕분에 다른 때처럼 와병 중이라는 핑계도 댈 수 없게 된 황후 남씨는 병약한 중에도 지존의 명을 받드는 현숙한 아녀자의 모습을 꾸며야 했다. 연신 치밀어 오르다 못해 당장이라도 펑하고 터질 것 같은 부아 간신히 다독이며 지엄하신 황명 받들어 간만에 황후다운 단장을 마쳐야 했다.
“폐하.”
“으음?”
하여 저를 부른 이와 대면하기 무섭게 나긋한 어조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이제야 움직이시려는 것이옵니까?”
다 늦게 무슨 채신머리없는 행사이신지 원.
그에 더없이 무료한 낯으로 옥좌에 자리하고 있던 지존께서 그 입 한끝을 슬쩍 뒤트시더니 그녀만큼이나 낮고 조용한 음색으로 답하였다.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먼.”
“…….”
“나는 한 번도 멈추었던 적이 없거늘….”
“……?!”
그리고 그 답에, 자애롭기만 하던 여인의 낯 위로 시퍼런 독기가 스치니 그를 지켜보던 지존의 낯 위로는 더욱 짙은 미소가 피어오른다. 그 미소라는 것이 어찌나 화사하던지 분명 그 바탕이라는 것이 제법 연륜이 묻어나는 사내의 얼굴임에도 마치 갓 피어난 박꽃과도 같더라.
“다만 그대가 이제야 알아차린 것뿐이라지.”
그럼에도 진득이 묻어나는 우울함이 그 화사함을 작히 깎아 먹고 있기는 하였지만 독이 오를 대로 오른 남씨로서는 그딴 것 알 바 아니다.
“…허세가 참으로 장하시옵니다.”
어차피 내세울 놈 하나 없음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하여 잔뜩 힘이 들어간 입매 억지로 뒤틀어 웃는 낯을 만든 남씨는 저가 아는 대로 주워섬기며 한껏 이죽대었다. 이게 다 저의 세가 잠시 쇠한 탓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부아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다.
“흠…, 그대가 보기에 그리 보인다면 어쩔 수 없는 게지.”
허나 그녀가 독이 오르면 오를수록 지존은 더욱 여유가 넘친다. 하나뿐인 정궁(正宮)이 지아비를 향해 원독 가득한 시선도 모자라 날 선 말까지 던지고 있음에도 너그러이 받아넘기는 것은 물론 옅은 미소까지 지어 보인 것이다.
“하지만 사실이 그러한 것을 어찌할까.”
덕분에 내 그동안 참으로 재미나게 보냈다지.
“신첩이 폐하의 즐거움이 되었다니 참으로 영광이옵니다.”
그 모든 행사에 진득하니 묻어나는 조소를 견디다 못한 남씨가 서늘하게 얼어붙기 시작한 가슴을 부여잡은 채 화답하니 그 모습이야말로 제국의 신민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다는 병약한 황후의 모습이라. 그러나 그런 그녀의 모습을 마냥 웃어넘기나 싶던 지존께서 돌연 더없이 진지한 낯을 하고 속삭이시니 황후마마 병색은 더욱 깊어졌다.
“그대, 겸양은 잠시 더 미뤄두게.”
아직 때가 아니라지.
때마침 몇 겹이나 드리워져 그들의 목소리를 가려주던 능라 장막 너머에서부터 갓 성혼례를 마친 백치 황자와 그 후궁의 존재를 알려오는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하니 순간 황후마마 낯 위에 자리한 억지 미소가 참으로 볼만하였다.
“폐하.”
“으음?”
“허면 그 때는 언제이옵니까?”
“이제 곧 알게 될 게야.”
* * *
이미 몇 개나 되는 사잇문에 꽃살문을 넘어온지라 당장 문 하나만 넘어가면 금시 끝날 줄만 알았던 알현은, 그러나 다시 두 개의 문을 넘고 셋이나 되는 주렴을 지나서 옥좌 아래에 편을 나누어 갈라선 이들 사이에 들어서고 나서야 간신히 시작될 참이었다.
“거 몹쓸 놈이로다.”
헌데 어째 그 시작이라는 것이 심상치 않다. 배례는커녕 막 고개를 조아리기 무섭게 평신(平身)을 명하신 것도 당황스럽건만 대뜸 몹쓸 놈이다 타박부터 하시니 생전 처음 제국에서 가장 귀한 분 앞에 나서게 된 청은 혹시 저 타박이 저를 향한 것인가 싶은 마음에 다시금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그러는 폐하께서도 참으로 야박하십니다.”
게다가 더욱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으니 그는 바로 저의 옆에 자리한 황자님께서 지존의 지엄한 말씀 타박으로 받아침이라. 상상도 하지 못한 광경에 열 길 밖으로 달아나려던 정신이 제자리를 찾았다.
― 백치라 하더니….
― 덜 자랐다더니 멀쩡하지 않소.
― 그러게 말이오.
― 맙소사….
― 개죽음이었구먼, 개죽음이었어.
― 어째 이상하니 싶더라니….
― 아니, 아직은 모르는 일이오.
― 옳소. 좀 더 두고 봅시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희한한 말소리가 제 귓속을 파고든다. 얼핏 지나가는 바람 소리라 착각할 만치 작은 속삭임이었음에도 제 귀에는 마치 천둥소리처럼 우렁차더라. 거기에 보일 듯 말 듯 술렁이는 공기까지 더해지니 절로 입이 마르고 등줄기가 축축해진다. 황자님 멀쩡한 행사 반길 겨를도 없이 서운한 마음부터 불쑥 고개를 드는 참에 이것은 또 무엇일까. 작디작은 제 그릇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일만 줄을 잇는다. 보름간 독하게 배운 그놈의 예법만 아니었어도 진작 저 숨을 곳부터 찾았으리라. 하기야 그게 아니라도 이 너른 대전에 제 조그만 몸 하나 숨길 곳 없겠냐만.
청이 이렇게 홀로 엉뚱한 생각에 빠진 사이, 두 부자의 대화는 더욱 점입가경으로 이어지는 중이다.
“내가 야박할 건 또 무어람. 부러 백치 짓하고 다니는 아들놈 챙겨주기까지 하였거늘.”
“하여 이렇게 백치 짓 관두지 않았습니까?”
“논다. 저 편할 생각에 일단 저지르고 본 것을 내 다 알고 있느니.”
누가 들으면 네 녀석이 아주 큰 일 한 줄 알겠구나.
닮은 듯도, 닮지 않은 듯도 한 두 얼굴이 서로를 마주하고 한참이나 심통 가득한 타박만 주고받으니 그것만으로도 반신반의하여 지켜보던 이들의 낯 위로 선명한 경악이 더해진다. 특히 병약하기로 소문난 황후마마나 연세 지긋한 호호백발 대신 몇은 당장이라도 실기하여 쓰러질 듯 새파랗게 질려 부들거리더라.
“아들아.”
“하문하옵소서.”
지극히 온전한 그 모습에 놀라지 않은 유일한 이의 목소리에 2황자가 답하였다.
“때가 이르렀느냐?”
그에 지존께서 타박을 대신해 두서없는 물음을 던지시니 대전에 자리한 이들 중 그를 제대로 알아듣는 이 역시 2황자 하나뿐이더라.
“제가 원하고 있으니 이미 그 때가 되었나이다.”
그리고 그 답 역시 두서없기는 매한가지였으니 두 부자의 선문답을 지켜보던 모두는 각자의 사정에 따라 낯을 바꾸었다. 누군가는 표독한 눈매 가늘게 좁히며 단 아래 자리한 황자를 살폈고, 누군가는 불편한 기색 가득한 낯을 하고 역시 비슷한 낯을 한 또 다른 누군가와 은밀히 속삭임을 주고받았다. 몇몇은 나란히 새파랗게 질려 사시나무처럼 덜덜대기 시작하였고, 또 다른 몇몇은 어딘가 체념한 낯을 하고 한숨을 되삼켰으며, 지극히 소수이기는 하나 더없이 밝은 낯을 하고 고개를 주억이는 이도 몇 있더라. 대전에 자리하고 있는 모두가 두 부자의 대화 속에 담겨 있는 숨은 뜻을 알아내려 고심하는 것이다.
“흠…, 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그렇사옵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오직 단 한 사람만큼은 그 수많은 표정들 사이에서 홀로 덜 만들어진 가면마냥 무표정한 낯을 하고 있었으니 그는 바로 양원 현씨, 곧 청이더라. 당연한 결과였다. 애초에 저와는 하등 인연이 없는 것들의 사정이었으니 당연 홀로 한 걸음 물러나 있을 수밖에.
“하기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구나.”
다만, 다만 한 가지.
“주인이 제 자리 찾아 돌아오겠다는데 뉘라고 그를 말릴까.”
“황공무지로소이다.”
진작 제 마음 한가운데 불쑥 솟아난 서운함은 어찌해도 수그러들 생각을 않더라.
청의 생에 있어 다시없을 경사스러운 날.
청에게 주어진 것은 낯선 직첩만이 아니었다.
서운함이 크게 자라 서러움이 되었으니 아직 덜 자란 청의 가슴으로는 그를 감당하기 참으로 아프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