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 三 章 - 二重之計 (4/19)

第 三 章 - 二重之計

“으음….”

이 일을 어쩌면 좋아.

소년은 어느새 또 껑충하니 올라간 바짓단과 소맷자락을 보며 근심 어린 신음을 흘렸다. 부러 기장에 여유를 잡아 지은 옷이었음에도 채 두 달을 넘기지 못하는 데에 제대로 기가 질린 것이다. 게다가 겨우 석 달도 되지 않아 또 새 옷을 청하는 자신에게 뾰족한 시선을 던질 침방나인들의 낯을 생각하니 참으로 심란했다. 대체 어쩌다 이리되었담. 소매고 바지고 모조리 그 단이 뎅겅하니 올라간 모양새가 참으로 우스꽝스럽더라.

“청아?”

“잠시만 기다려주시어요.”

“응? 어찌하여서?”

“또 새 옷을 지을 때가 되어서 이럽니다. 치수를 잴 자를 가지고 올 것이니 잠시만 기다리시어요.”

“응, 빨리 와야 해.”

앳된 말투와는 달리 제법 사내답게 변한 낮은 목소리가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마음에 돌덩이처럼 얹힌다. 아아, 태의 영감께서 미리 언질을 했으니 망정이지. 바로 옆에 자리한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소년의 걸음이 마치 달리는 것과도 같더라.

유별나게도 바쁜 하루의 시작이었다.

* * *

달포 남짓한 시간이 지나고 흐지부지 사라질 것만 같던 후궁들의 고약한 행사는 채 두 달을 채우지 못하고 다시금 황궁에 거하는 몇몇 사람들의 속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문제의 피해자, 그러니까 2황자 광의 일신에 변화가 생긴 덕분이었다.

― 아무래도 그 계집들이 쓴 춘약에 고약한 약재가 쓰인 모양이오.

어느 날 밤, 갑자기 자다 말고 팔다리가 아프다며 우는 상전의 모습에 놀라 급히 불러들인 태의 영감은 그리 말하였다. 그에 소년은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잠시 고민을 하다 곧 퍼뜩 떠오른 한 가지 가능성에 낯이 새파랗게 질렸다. 동기 시절 색사 공부 시간에 약에 예민한 척을 하기 위해 몰래 익혀둔 약초학 내용을 기억해낸 덕분이었다.

― 혹…, 성장을 더디게 하는 약재라도 들어간 것인가요?

― 으음, 잘 아는구먼.

― 원래대로였다면 올해 여름 즈음해서 기적(妓籍)에 이름을 올려야 할 처지였으니까요. 부족하나마 그런 쪽으로의 지식은 어느 정도….

― 허면 좀 더 이야기를 하기 쉽겠구려. 맞소, 암만해도 그 계집들이 사용한 춘약에 그런 약재를 쓴 게지. 지금껏 독에 당한 후유증이라 여겼거늘 이제 보니 그게 아니구먼. 에잉! 육시를 해도 모자랄 년들 같으니라고!

그리고 내려진 진단이 ‘성장통’이었다. 더 이상 계집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된 이후 몸속에 쌓여있던 약 기운이 빠져나간 결과였다. 약 기운에 눌려 그동안 자라지 못한 것이 한 번에 몰아서 자라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의복들마다 기장이 짧아지기 시작하였다지. 아아, 그래서 그런 것이로구나. 청은 제 주인의 일신에 일어난 변화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스스로로 인해 우울해졌더랬다.

― 이런 것은 약도 통하지 않는다오.

― 허면 어찌해야 하나요?

― 뭐…, 사내대장부답게 참으시라고 하는 게 제일이려나?

― 태의 나리.

― 사지 멀쩡한 이라면 한번은 겪는 일인데 나더러 어쩌라고. 참말로 나라도 수가 없는 일이니 별수 없소.

다만 아프다고 하실 때마다 팔다리를 꼭꼭 주물러 주면 좀 덜할 것이외다.

늙은 태의가 혀를 차는 소리를 듣자니 속이 탔다. 나중에는 분이 치밀었다. 그 몹쓸 년들의 악한 행사에 왜 이분이 이리도 고생을 하셔야 하나. 어찌하여 다 끝난 줄 알았던 일이 이 분을 힘들게 하는 것이야. 저와 태의 영감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와중에도 눈꼬리에 눈물 한 방울 매달고 끙끙대던 상전의 모습이 어찌나 안타깝던지!

― …여하간 앞으로 욕 좀 보겠구려. 황가의 혈통이 모두 6척이 넘는 장신들이 대부분인 걸 생각하면 이분도 그 정도는 자랄 테니…. 힘내시오.

거기에 이어지는 말에는 아예 아득해졌더랬다. 제 손을 거친 어린 동기가 몇이던가. 덕분에 태의 영감이 무엇 때문에 그리 말을 한 것인지 알아차리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더랬다.

백치 황자의 하나뿐인 시동이 침방나인들의 날 선 시선을 마주하게 된 나날의 시작이었다.

“2황자께서는 자신 게 다 키로 간답니까?”

“그러게요….”

청이 오늘따라 더욱 사나운 낯을 하고 있는 침방나인 두령을 향해 객쩍은 웃음만 흘리고 있는 사연은 그러하였다. 하기야 새 옷을 잔뜩 받아 간 지 보름도 되지 않아 ‘옷이 작아졌으니 새로 지어주시오.’라며 찾아왔으니 역정이 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리라.

“이럴 거 같아 부러 기장을 넉넉히 잡아 만든 옷들인데….”

“아하하….”

게다가 말이 쉬워 옷이지 실은 속적삼이며 침의 등 크고 작은 것이 얼추 스무 벌은 되었다. 하여 지난번의 옷가지들은 침방나인들이 작정을 하고 모두 기장이나 둘레에 넉넉히 여유를 잡아주었다. 그런데 그것마저 모자라게 되었다. 제 부족한 바느질이며 다림질로 여유분으로 넣어둔 시접을 모두 내어도 부족했던 것이다. 실은 그것만 아니었어도 저가 이 사나운 시선을 감당하게 되는 것은 며칠 뒤의 일이 되었으리라.

“대체… 남들 다 자랄 때는 무엇 하시고 이제야 그리 쑥쑥 자라는 중이시랍니까?”

“그, 그러게요….”

“쯧, 하필이면 제일 바쁠 때 또 이럴 게 무어람.”

“제일, 바쁠 때요?”

“곧 맥추(麥秋) 연회가 있거든. 진작 예정된 행사였던 덕에 폐하와 황후마마의 연회복이야 진작 완성되었다지만 대신에 후궁전 마마님들의 주문이 산더미라오.”

“마마님들께옵서는 연회복을 미리 장만할 수 없는 것이어요?”

“그럴 리가요. 막판에 어느 마마님이 무슨 옷을 어찌 차려입는다는 소문이 돌아 이 꼴이랍니다.”

“저런….”

소년은 금시 상황을 짐작하였다. 실은 저가 기루에 있을 때에도 비슷한 일이 몇 번 있었던 것이다. 나라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거부와 이름난 장수, 그리고 부유한 귀족의 자제가 방문하였을 때였다. 아아, 난장판이 따로 없었지. 한번은 손님이 가시고 나서 칼부림까지 났으니 무얼 더 말할까.

“게다가 그저 비싸고 귀하기만 하면 좋은 줄 알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이달 치 내탕금이 바닥난 전각도 몇이랍니다. 내참, 나비는 하나인데 꽃은 넘쳐나니 애먼 데 불똥이 튄 꼴이지 뭐야.”

“아하하….”

소년의 웃음은 더욱 어설피 울렸다. 과연 여인네들의 투기란 타오르는 들불보다도 거세구나. 하기야 생각해보면 기루에서도 사내들보다는 계집들의 기 싸움이 더 치열하고 음험했더랬지. 바닥보다는 고급이라는 이들의 다툼이 더욱 심했고. 끄덕끄덕, 제 나름대로 납득하며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니 그를 이야기에 대한 호응이라 여긴 침방나인들의 두령이 더욱 처량한 어조로 지절대었다.

“그만만 하면 좋으련만 몇몇 분들께서는 아예 다른 분의 의복을 찢어놓기까지 해서….”

“저런.”

“덕분에 침방의 일이 몇 배랍니다. 수방나인들도 며칠째 밤낮을 잊고 수틀만 붙들고 있어요.”

“참말로 고생이시네요.”

“그뿐이랍니까, 실은 공방에서도―”

그리고 종일 갇히다시피 침방에 틀어박혀 있어야 했던 여인의 입에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쏟아지기 시작하니 그 기세가 마치 봇물이 터진 것과 같더라.

결국 소년이 임시로 지어둔 옷 몇 벌을 받아 나오는 데에는 그로부터 꼬박 이각의 시간이 더 흐른 뒤였더라.

전생이 촉새였나.

그 결과 이야기를 듣다 지칠 수도 있다는 것을 몸소 깨닫게 된 소년의 걸음은 지금 무거우면서도 다급했다. 저가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또 알 필요도 없는 후궁전 사정을 듣느라 상전께 약속한 시간을 훌쩍 넘긴 탓이었다. 이를 어쩌나. 이를 어째. 유달리 외로움을 타시는 분인데 이를 어쩌면 좋아. 품 안을 가득 채우는 옷 보따리의 묵직한 무게감이 그나마 죄책감을 덜어준다. 얼른 새 옷을 입혀드리고 달래야지.

“자네, 거기 서보게.”

그렇게 청이 허둥지둥, 그날의 일 이후 매일을 하루처럼 전각 입구에 버티고 서있는 위병의 곁을 지나치려 할 때였다.

“…?!”

찾는 이가 거의 없는 원향전이 아니던가. 갑자기 나타나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청은 당황하였다.

“자네가 청이라는 자인가?”

“예?”

하여 고운 궁장 차림을 한 궁인의 물음에도 당장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다만 품에 들린 옷 보따리만 바짝 끌어안았더라. 허나 저를 찾아온 이는 더욱 새치름한 낯을 하고는 짜증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되물었다.

“자네가 2황자마마를 모시는 바로 그자냐 이 말이네.”

“예? 아, 그, 예. 예, 그러합니다.”

“소의마마께옵서 자네를 좀 보자고 하시네.”

“…예?”

“허니 그 희한한 보따릴랑 어디든 놔두고 당장 날 따라오게나.”

서두르지 않으면 경을 칠 게야.

말을 마치기 무섭게 바람 소리가 나도록 휙 돌아서니 이는 거절은 받지 않겠다는 무언의 겁박이라. 그로도 모자라 순식간에 쑥쑥 멀어지는 궁인의 뒷모습에 소년은 길게 한숨을 토했다.

아아, 오늘 일진은 제대로 황이로구나.

소년은 다시 품 안의 옷 보따리를 단단히 끌어안으며 고민에 빠졌다. 문제의 궁인은 이미 원향전과 본궁을 잇는 수풀 속 소로로 사라졌지만 어차피 자신을 오라 가라 할 만한 후궁은 저를 궁에 들도록 한 소의 부씨뿐이었다. 그러나 황궁의 법도에 따르면 저와 같이 황궁에 거주하는 황손의 전각에 적을 둔 이는 품계로만 봐서는 후궁보다 낮을지 모르나 그들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내명부 소속인 탓에 황후의 승인 아래 적을 두게 되는 황후궁이며 후궁전의 궁인들과는 달리 청은 황제 직속의 외명부에 소속을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저가 입고 있는 의복의 깃에 새겨진 검은색 비늘 무늬가 뜻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으니, 이는 곧 이 의복을 입은 자가 황제 폐하의 명을 받고 따르는 자인즉 다른 전각이나 품계의 누군가가 함부로 부릴 수 없는 이임을 나타내는 증좌라. 그런고로 지금과 같은 일방적인 호출은 소의 부씨의 훌륭한 월권행위라는 소리. 덕분에 포옥, 작은 한숨을 흘린 소년의 낯 위로 잠시나마 사나운 기색이 스친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알 거 다 알게 된 마당에 무슨….

처음 궁에 들어왔을 때야 그런 법도가 있는 줄도 몰랐던 탓에 이리저리 바쁜 중에도 불려 다녔다. 그러나 나중에 그를 알게 된 대전 지밀상궁이 소속을 잊지 말라는 따끔한 충고와 함께 차근히 일러준 황궁 법도를 머리에 넣은 뒤로는 알아서 몸을 사렸다. 그렇게 간간이 이어지는 호출에 대해 예를 갖춰 정중히 사양하기를 몇 차례. 게다가 몇몇 후궁들이 패악한 행사로 한바탕 피바람이 지난 뒤로는 그나마도 뚝 끊어졌던 참이라 슬슬 잊어가던 참이었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이리도 일방적인 호출이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덕분에 고민하던 소년의 입술 사이로 다시 포옥, 한숨이 터진다. 제 한숨 소리가 그저 짜증스럽기도 했다. 이제 겨우 지학(志學 : 15세)에 이른 저가―청은 지난 단오를 지나며 열다섯이 되었다― 벌써부터 입에 한숨을 달고 살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그렇다고 무시하기에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허나 그렇다고 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몇 번은 저가 직접 겪고, 또 몇 번은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간접적으로 겪은 소의 부씨의 성격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그녀의 부름을 거절한 대가를 치를 게 눈에 선했다. 그것도 누구나 다 알아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닌, 그야말로 당하는 이만 속이 썩고 피가 마를 그럴 대가를 말이다.

특히나 조금 전 기력이 빠지도록 들어야 했던 수다의 내용을 생각한다면 저가 치러야 할 대가는 만만치 않은 것이 될 터였다.

― 흥! 암만 새로 옷을 지어도 소용이 없을 것이요. 암, 그렇고말고.

어지간히 이야기할 상대가 궁하였던 것인지, 아니면 담아놓고 있던 말이 많았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으나) 주근깨로 콧등을 빼곡히 수놓은 침방나인 수령은 정말이지 오만 이야기를 모두 쏟아내었더랬다. 그리고 지존의 밤 사정을 사이에 둔 후궁전의 세력 구도는 그 수많은 이야기들 중 반절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 폐하께옵서는 이미 몇 달째 새로 들어오신 소의마마의 처소에서만 침수를 드신다오. 지금껏 여러 마마님들의 처소를 나비처럼 날아다니시던 분이, 벌써 몇 달을 그리 보내고 있다 이거지.

뭔가 대단한 비밀이라도 밝히는 양 더욱 목소리를 낮춰 종알대는 그 모습이 저에게는 참으로 우스웠다. 그녀에게 저가 바로 그분과 함께 이 궁에 든 자이다, ‘실은 후궁 첩지를 받기 전부터 궁 밖에서 밀회를 하던 분들이시다.’라고 답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아마 다시 반 시진은 더 붙들려 있었으리라. 무엇을 더 아느냐, 그것은 어찌 들었느냐, 조금이라도 웃전들의 은밀한 행사를 캐내려 저를 들볶았으리라. 다행히 저가 입을 다물고 있는 사이, 여인은 더욱 신이 나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 어지간한 고운 분도 보름을 넘기지 않으시던 분이 폐하시라지. 그런데 그분이 벌써 몇 달을 한곳에서 머무르고 계신다오. 이게 무슨 뜻이겠어? 아마 당장은 소의마마께서 거적때기 하나만 두르고 있어도 곱다 품으실 테지. 암, 그렇고말고.

마치 소의마마가 제 뒷배라도 되는 양 으스대는 모양새가 참으로 가관도 아니었더랬다. 허나 따지고 보면 그럴 만도 했다. 그 말 중 반절만 사실이라 쳐도 소의 부씨는 권력의 중심에 가장 가까운 이였던 것이다. 모시는 상전의 품계가 곧 아랫것들의 위치를 정하는 곳이 바로 황궁이 아니던가. 그런 황궁에 들어온 지 겨우 반년도 되지 않아 지존의 밤을 책임지게 된 여인이 지금 저를 부른 것이다.

싫어도 가야 하는 건가….

덕분에 소년은 이제 깊은 시름에 잠기는 중이다. 소의 부씨와는 달리 자신이 모시는 상전의 형편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아니, 실은 아주 나빴다. 암만 당금의 황가에 단 하나뿐인 적통 황손이면 무얼 하랴. 많은 이들 앞에 나서지 못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권력이란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보다 못한 것을. 그리고 숨겨야 할 것이 많은 이에게는 그조차도 의미가 없는 것을.

사실 2황자의 신체 미령하심이야 황궁 안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지만, 그것이 실은 과거에 몹쓸 독에 당한 후유증 덕분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지극히 소수였다. 당장 지존의 총희라는 부씨조차 자세한 사정에 대한 것은 알지 못한 채 그저 ‘백치다.’라고만 저에게 알리지 않았던가. 말 그대로 2황자님의 부족한 신체는 진작 알려져 있으되 그 이상으로 모자란 머리는 여직 꼭꼭 숨겨져 있다는 소리다. 10년이 넘게 궁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자리한 원향전에 숨겨져 있는 것도 모두 그런 연유였다. 모두의 눈을 피해 은거하며 시간을 들여 그 몸에 스며든 몹쓸 독 기운이 모두 빠져나가기를 기다리고자 한 것이었다. 실제로 그것은 어느 만큼 효과를 얻어, 최근에는 성장이 멈춰있던 상전의 사지가 쑥쑥 자라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게 벌써 10년이 넘었다. 작고 초라한 전각에서 혼자나 다름없이 10년이 넘는 시간을 보낸 것이다. 저의 상전이 부족함이 없는 생활이라 할지언정 귀한 피에는 걸맞지 않은 처지로 지낸 시간이 그만큼이라는 소리다. 덕분에 소년은 저가 항시 곁에 머물 것이라 하였을 때 기뻐하던 얼굴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아렸다. 만약 지난 후궁들의 일만 아니었다면 저조차도 제 상전이 진작 지존께 내쳐진 것이라 여겼으리라. 그만치 저의 앳되고 천진한 상전께서는 제대로 손에 쥐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이래저래 지존의 총희라 불리며 궁중 권력의 정점에 가까이 자리한 소의 부씨의 사정과는 비교하기조차 힘들다.

…역시 가야겠지?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지금껏 저를 찾을 때 그녀의 사람이 직접 원향전까지 찾아왔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항상 서면이나 전각을 드나드는 것이 허용된 소수의 인편을 통해 이야기를 전해오던 이가 오늘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제 사람을 직접 보냈다는 것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저가 가지 않는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하물며 찰나 간이나마 저가 직접 겪은 그녀의 성정은 보통 것이 아니었다. 더없이 아름다운 외모 이곳저곳에 묻어나는 표독한 성정은 무엇으로도 감출 수가 없었다.

“하…, 별수 없구나.”

이왕 맞을 매, 미리 맞고 치워야지.

그렇게 한참이나 고개를 이리 기웃, 저리 갸웃하며 고민을 거듭하던 소년은 마침내 결정했다.

“저기, 위병 나리.”

“? 무슨 일이요?”

“죄송하지만 잠시 이것 좀 맡아주시겠습니까?”

“음? ―어, 어이! 이봐!”

“금시 다녀올 것이니 잠시만, 잠시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당황한 위병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한참 전에 길 끝으로 사라진 궁인을 좇는 소년의 걸음이 마치 날개라도 달린 듯하더라.

그리하여 당도한 곳이 어딘가 하면 후궁들에게 내려진 전각들 중 가장 화려하다는 소의 부씨의 거처 만화당이더라. 만개한 꽃이 거하는 곳이라는 이름답게 안팎으로 어디 하나 빼놓을 곳 없이 멋들어지게 꾸며진 그곳은, 그러나 지금 온 사방으로 심상치 않은 공기가 자욱하였다.

뒤틀릴 대로 뒤틀린 전각 주인의 심사 덕분이었다.

“누가 황궁을 발칵 뒤집어 놓은 인사 아니랄까봐 얼굴 보기가 지존보다도 힘이 드는구나.”

이는 소년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날 선 목소리에서도 선명히 드러나는 것이었으니, 덕분에 상전에 대한 예를 올리기도 전에 뾰족한 타박부터 받게 된 소년의 낯이 하얗게 질린다. 아이코, 오늘 일진 한번 제대로 지랄이 났구나.

“소, 송구하옵니다.”

소년은 기겁을 하고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허나 여인은 저의 무엇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나라에서도 으뜸이라는 그 고운 낯 가득 사나운 기세를 드리운 채 그 뾰족한 타박을 이어나갔다.

“너 하나 부르자고 몇이나 움직였는지는 아니? 맙소사, 2황자를 돌보는 보모의 위세가 그리도 등등할 줄 몰랐다지.”

“그, 아, 소, 소인은….”

“그나마도 그 일 이후로는 너에게 말도 전하지 못하였다, 응? 네가 대체 무엇이라고 감히 사람을 몇이나 거쳐 말을 전해야 하는 것이냐 이 말이다!”

이건 또 무슨 소릴까. 제 위로 우르르 쏟아져 내리는 타박 중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알아차린 소년의 시선이 이리저리 불안히 흔들린다. 내용이라도 알면 어떻게든 사죄라도 하겠건만, 아는 게 없으니 입도 코도 뗄 수가 없는 것이라.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네놈 덕에 내가 대전 지밀이라는 년에게 고약한 소리까지 들었다. 내명부에 속한 이가 함부로 외명부에 속한 자를 부르는 것은 예가 아니라더라. 건방진 년! 감히 누구에게 예를 따지는 게야?”

허나 소년이 알아듣든 말든 여인은 상관치 않았다. 이제 그녀의 역정은 대상을 바꿔 저 멀리 대전의 지밀상궁에게로 향했다. 고얀 년, 내가 누구라고 감히! 제깟 게 무어라고 나에게 함부로 입을 대! 저가 아닌 다른 이에게 화살이 돌아간 틈을 타 살며시 눈치를 살피니 이거 어째 묘하게 익숙하다. 희한타 싶어 곰곰이 기억을 더듬던 소년, 곧 자그마한 탄성을 흘렸다.

닮았구나, 누이들이랑.

소년은 소의 부씨의 앙칼진 목소리 속에서 저가 자라는 동안 만나고 부대꼈던 수많은 기녀들을 떠올렸다. 예정된 계획에 따라 적게는 은 한 냥, 많게는 금 열 냥에 초야를 팔았던 저의 누이들. 저를 찾는 손님들의 씀씀이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던, 그래서 겉으로는 꽃같이 웃으면서도 뒤로는 보이지 않는 칼날을 아무렇게나 휘두르던 그녀들. 그러다 결국 적당한 누군가의 후처나 첩실이 되는 것으로 타협을 보거나, 아니면 더 높은 곳으로 올라서려다 말라죽어버리곤 하던 그녀들. 그리고 그리되기까지 짧고도 긴 시간 동안 주변의 모두를 휘두르려 하던 서글픈 삶의 그녀들.

이상타, 어찌하여 이런 것이람?

하여 소년은 곧 설핏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소의 부씨의 신경질적인 모습은, 소년이 잠시나마 잊고 있던 그 누이들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단골의 발길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하면서 바짝 독이 오르기 시작했던 이들의 모습을 말이다. 덕분에 소년은 오랜 동기 생활을 통해 진작 체득해두었던 처세법들 중 하나를 마음껏 써먹는 중이었다. 신경이 곤두선 여인은 산중에서 곰을 만난 것같이 하라는 방법을 말이다.

이상타, 참말로 이상타. 벌써 몇 달이나 여러 후궁들을 제치고 홀로 지존의 밤을 책임진다는 이가 어찌하여 이런 것일까.

“흥, 너 그거 아니?”

“…?”

“해가 바뀌면 내게 빈의 첩지가 내려진단다.”

“가, 감축 드리옵니다.”

게다가 이어지는 이야기 역시 더더욱 상황을 짐작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소의의 품계로 황궁에 든 지 이제 겨우 백 일 남짓. 해가 바뀐다 해도 채 반년이 될까 말까 한 짧은 기간을 머문 이가 새로운 첩지를 받는다 했다. 그것도 바로 윗 품계인 귀인이 아니라 그 많은 후궁들 중에도 여직 단둘밖에 받지 못했다는 빈(嬪)의 품계를 받는단다. 덕분에 청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착실히 권력의 정점으로 걸어가고 있는 이가 어찌하여 아직 바닥으로 추락할 준비가 되지 않은 기녀들처럼 구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는 탓이다.

“그러면 무얼 할까.”

허나 여인은 아랫것의 복잡한 머릿속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다만 자신의 처지를 동정하고 한탄할 따름이었다.

“남들 눈에나 총애인 것을, 백날 받아 무얼 할까.”

시퍼런 원독마저 묻어나는 그 나지막한 목소리에, 소년은 설핏 어깨를 움츠렸다. 혼란하던 머릿속이 차분히 가라앉은 것도 그때였다. 잠시 전 저가 침방 앞에서 기력이 빠질 만치 주워들어야 했던 수많은 이야기에 지금 여인이 흘리고 있는 처량한 푸념을 더한 결과였다.

“대전내관들이 와서 내 방문 앞에 향등을 달면 무엇 할까. 그 등의 향과 빛을 함께 즐길 이가 없거늘.”

마침내 소년은 깨달았다.

“그 향과 빛을 보며 홀로 침상을 지켜야 하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던 지존의 총애는 모두 거짓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인이 스스로 밝힌 그녀의 사정은 실로 빛 좋은 개살구와 다름이 없더라. 궁 밖에서부터 연을 맺어 몸을 섞은, 그래서 저보다 다섯하고도 반이나 더 먹은 아들을 돌보는 조건까지 감수해가며 기어코 궁으로 들어선 그녀가 아니던가. 헌데 궁 밖에서는 둘도 없을 정인이었던 이가 정작 그의 공간에 그녀를 들인 이후로는 남보다도 못한 이가 되었단다.

“잡은 고기에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지? 내 그게 무슨 말인지 궁에 들어와서야 알았단다. 내 오죽하면 지난번에 도륙이 난 그년들 심사가 이해가 될 지경이라지.”

하늘을 봐야 별을 따는데 그 하늘을 뵐 수 없으니 별인들 보겠느냐.

“…이제는 향등이 문밖에 걸려도 반갑지가 않아.”

그리고 여인의 목소리 한끝에 흐릿한 물기가 묻어나기 시작하니 소년은 더욱 몸 둘 바를 모르게 되었다. 지존께서 밤을 보내는 곳임을 뜻하는 향등이 지난 몇 달간 매일을 하루처럼 한 곳에만 내걸린 것에 숨겨진 사연이 암만해도 저가 감당할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참말로 이상타. 어찌하여 나에게 이런 사정을 밝히는 것이야?

허나 덕분에 소년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아니, 물밀 듯 밀려드는 공포에 입안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저가 어찌하여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왜, 왜 나에게 이런 사정을 모두 털어놓는 것인가. 하기야 그 사연이라는 것이 참으로 동정할 만한 것이고, 그래서 누구에게든 하소연을 하려는 것이라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저리 섬뜩한 눈으로 절 죽일 듯 노려보며 할 이유는 아니지 않은가?

아니, 어쩌면 죽일 작정으로 저러는 것일지도.

그러다 문득 떠오른 불길한 생각에 청은 다시 한 번 마른 침을 삼켰다. 지금 이 상황이 기루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제 분을 이기지 못한 기녀의 신경질을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나, 안타깝게도 이곳은 저가 자란 기루가 아니었다. 그러니 곧 닥칠 모진 해코지에 대한 각오로는 턱도 없으리라. 지금 저가 있는 곳은 구중심처 깊은 곳에 자리한 후궁전 중 하나였고, 저를 향해 오만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이는 저를 이 황궁에 끌어들인 당사자요 당금 지존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알려진 총희더라. 게다가 저가 황궁에 적을 두고 귀한 분을 모실 수 있게 된 것 역시 모두 그녀로 인함이 아니던가. 그 말인즉, 어쩌면 그녀가 저를 죽이지는 않더라도 다시 궁 밖으로 내칠 수 있다는 소리더라. 순간 한겨울에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것보다 더한 한기가 전신을 내달렸다. 더 이상 갈 곳도 없는 저의 신세며 저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얻은 양 환한 낯을 하고 다니는 앳된 상전의 낯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찾을 수가 없더라.”

여인이 저를 찾은 이유를 밝힌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내 아무리 찾아도 그분이 계신 곳을 찾을 수가 없더라 이 말이다.”

“…예?”

“그분의 걸음을 알고자 내가 쓸 수 있는 것은 모두 써 보았다지. 금전도 쓰고 총희의 이름도 써 보았다지. 몇몇에게는 수치도 무릅쓰고 그분의 밤에 대해 넌지시 물어도 보았다.”

꽃 같은 외양의 여인은 이제 그 나이 스물의 꼭 곱절은 더 먹은 듯한 낯을 하고 서늘한 어조를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광증이 든 것과도 닮아 소년은 더럭 겁이 났다. 그래, 광증이구나. 지존께서 제대로 찾아주지 않으시니 결국 광증이 든 게야.

소년은 다시금 저가 기루에 머무르는 동안 겪은 수많은 일들을 떠올리며 작게 한숨을 흘렸다. 이제 겨우 열넷을 넘겨 막 열다섯의 목전에 다다른 저의 연치로서는 사람과 사람 간의 연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다만 그것이 멀쩡한 사람을 광인에 폐인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는 것만큼은 몇 번이나 목격을 한 탓에 지금 저에게 허탄한 목소리를 흘리는 여인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아니, 두려웠다. 적어도 저가 겪은 그들의 모습은 더없이 추하고 악랄했던 것이다.

하기야 귀한 분들이라고 따지고 보면 인간이니까.

그리고 그 고약한 기억 위에 지금 저가 겪는 일을 가만히 겹쳐본 소년은 애써 납득할 만한 이유를 떠올렸다. 아니, 어쩌면 비교하기도 미안하다. 정인이라 할 이가 곁을 떠난 것을 처음으로 겪은 이들의 몸부림에 비하면 지금 이 여인의 행사는 참으로 조용했던 것이다.

기어코 광증이 든 게지. 참, 그놈의 연심이 무어라고.

소년의 머릿속으로 겨우 열 너덧에 불과한 나이답지 않은 푸념이 스친다. 여직 바닥에 붙어있는 시선 위로는 여인을 향한 측은함이 어른거린다. 어찌할꼬. 이를 어찌할꼬. 연심, 그 몹쓸 것이 이 고운 분에게까지 고약한 행사를 저질렀구나. 어찌할꼬, 이를 어찌할꼬.

그리고 상대가 알았더라면 저를 육시하겠노라 패악을 떨 생각을 멋대로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내 긴말 않으마.”

애먼 동정심을 불태우고 있던 소년의 머리 위로 다시 여인의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

“나를 원향전에 들여다오.”

“……예?”

“내 좀 전에도 말하지 않았니. 그분을 찾으려 별짓을 다 하였다고.”

“아, 그, 그러셨지요.”

“덕분에 이 넓은 황성에 내 사람이 닿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단다.”

“예….”

“단 한 곳만 빼면 말이다.”

“…예?”

“네가 있는 그곳, 원향전.”

“―?!”

“이리 알아보고 저리 찾아보아도 남은 곳은 그곳뿐이더라. 실은 이 넓은 황궁에 그런 곳이 있다는 것도 몰랐더랬지.”

“아, 저….”

“남은 곳이 그곳뿐이니 당연히 폐하께서도 그곳에서 밤을 지새우시는 것이 아니겠니?”

…절대 아닌데요.

소년은 이제 예법도 잊고 난처한 낯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아니, 난처하다 못해 멍청하기까지 하였다. 다행히 여인이 제 생각에 취해 혼몽한 중이니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진작 무엄하다며 저를 향해 매서운 손매를 날렸으리라.

폐하, 대체 무엇을 어찌하셨기에 이분께서 이리 혼이 빠진 것입니까.

어느새 여인은 원향전에서 밤을 보내시는 지존의 품으로 날아가 있었다. 제대로 된 방이라고는 전각 주인의 침전과 저의 처소, 그리고 저와 저의 상전이 식사를 하고 놀이를 하는 널찍한 공간이 전부인 곳을 마치 천하에 둘도 없을 극락인 양 지절대며 뺨을 붉히고 있다. 광증이로다. 과연 광증이로구나. 소년은 그렇게 한참이나 어찌할 바를 모르고 여인의 행사만 지켜보고 있었더랬다.

“저…, 송구하옵니다만….”

그러나 언제까지 이 꼴을 지켜볼 것이냐. 청은 제 상전의 몸 하나 누이기도 빠듯한 낡은 침상이 졸지에 삼천궁녀도 거뜬히 감당할 화려한 비단금침으로 돌변하는 것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입을 뗐다.

“응? 무어가?”

“저기, 폐하께옵서는 한 번도 원향전을 찾으신 적이 없사옵니다.”

“…무어?!”

어딘지 꿈이라도 꾸듯 혼몽하게 흐려져 있던 고운 낯이 단박에 야차의 것처럼 변한다. 딱 봐도 ‘네놈이 감히 나에게 거짓을 고하려는 것이냐!’는 노성이 터져 나올 모양새더라. 하여 소년은 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이었다.

“사실이 아니면 제 목을 치옵소서.”

“목이라니…. 허면 그게 참이란 말이더냐?”

“참말이옵니다. 적어도 제가 전각에 든 이후로 폐하께옵서 걸음하신 적은 한 번도 없사옵니다.”

대체 무엇이 어찌된 연유인 것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 청은 황망한 정신 추스르며 저가 아는 바를 소상히 고하고자 노력하였다. 그저 상전이 제 말 믿어주기만을 바라며 온전히 저가 아는 것만을 고하려 노력하였다.

“허면 원향전 주변에 오직 황명만을 받든다는 금군위병을 세워놓은 이유는 무엇이라더냐?”

폐하께옵서 드나드시는 곳이라 그런 것이지 않느냐? 응?

“……예에? 그이들이 금군이었습니까?”

허나 도리어 생각지도 못한 사실을 알게 된 청은 제대로 식겁을 하였다. 금군, 금군이란다. 황명만 받든다는 금군이 저와 제 앳된 상전 먹고 자는 그곳을 지키고 있단다. 그래, 생각해보니 심상치 않구나. 따지고 보면 저 역시 황궁에 적을 둔 궁인이라고는 하나 다른 후궁들이나 황손들의 시중을 드는 궁인들과는 소속이 달랐다. 황후님이 다스리는 내명부가 아닌, 금군과 같이 지존의 직속들이 들어있다는 외명부에 속해있었던 것이다. 처음 제 소속을 확인할 때야 구중궁궐 돌아가는 행사를 알지 못해 그러려니 하였는데, 생각해보니 그럴 게 아니었다.

어이쿠, 이건 또 무어람? 대체 무어가 어찌 돌아가는 것이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

그러나 소년의 고민은 답도 얻지 못한 채 멈추고 말았다. 기어코 저에게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 매서운 손길이며 발길질을 감당하느라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진 것이다.

“네가! 네가 감히! 네가 감히 나를 능멸해?!”

지존의 총애를 받는다는 나를? 네가?! 네가!

천상의 아름다움을 가진 미희(美姬)는 그 손매마저 천상의 것이라. 전신으로 떨어져 내리는 매질이 실로 사납고도 혹독하더라. 청은 혹시라도 제 얼굴에 흉이 질까 두 팔로 머리를 단단히 감싸 감췄다.

― 청아, 아파?

이는 저의 얼굴을 귀히 여기는 탓이 아니요, 저가 조금이라도 지치고 힘든 기색을 흘리면 단박에 울상이 되어 동동거리는 앳된 상전으로 인함이라.

아아, 이제 곧 석반을 준비하여야 할 것인데.

소년은 제 등을 짓밟기 시작한 여인의 발을 느끼며 더욱 단단히 제 머리를 가렸다. 어느새 아득히 멀어지는 정신도 알아채지 못하고, 그렇게 제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저도 모르는 사이 흐려지는 사위도 깨닫지 못하고 그렇게 여인의 매질을 감당하였다.

“마마! 더는 아니 되옵니다!”

“마마! 소의마마!”

마마께 따뜻한 밥 한 끼 얼른 차려드려야 할 것인데.

그러다 제 머리 감싸고 있던 두 팔이 힘없이 풀리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홀로 전각을 지키고 있을 상전만 걱정하였다.

“…―이오?!!”

마마, 참으로 송구하옵니다. 오늘 저녁은 많이 늦을지도 모르겠어요.

어느 순간 제 귓전을 울리는 사내의 목소리조차 알아듣지 못하고, 소년은 그렇게 정신을 놓았다.

유별나게도 바쁜 하루의 끝은 그러하였다.

“흐음…, 거 못 써먹을 년이로세.”

여우도 못 되는 쥐새끼 같은 것이 천지분간도 못하고 여우 흉내를 내려 드는구먼.

그리고는 입매를 삐뚜름히 뒤튼 채 어느덧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는 황자님의 모습은 이제 완연한 장부의 것이더라. 소년이 어떻게 꾀를 내어 간신히 모양을 갖춘 매무새가 위태로운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방 안을 이리저리 거니는 걸음이 더없이 가볍다.

“그래, 아이의 상태는 어떻다 하더냐? 혹여 속까지 다쳤다 하든?”

“그는 아니옵니다. 심하게 채이고 밟히기는 하였으나 다행히 뼈는 다치지 않았다 하옵니다.”

“겉만 되게 상한 것이라는 게로군.”

“예, 그러하옵니다. 의원의 말로는 멍든 것은 며칠이 지나야 가실 것이로되 움직이는 것은 하루에서 이틀 정양하면 금시 본디대로 돌아갈 것이라 하옵니다.”

“음음, 그래야지. 남아로 태어나 겨우 계집 발길질에 골병이 들면 그 무슨 망신인고.”

“송구하옵니다.”

“으음? 네가 송구할 건 또 무에 있누? 미친년 지랄이 그리 유별날 줄 모른 내가 모자란 놈이지. 금군 셋이 들러붙어도 한참을 더 날뛰었다니 그 지랄 참 장하기도 하구나. 아아, 어쨌거나 그년 참 약발 한번 제대로 받는구나. 어디에 얼마나 썼다고 했지?”

“다호에 들어갈 찻잎에 손질한 만다라엽(曼陀羅葉; 흰독말풀 잎) 소량을 섞었사옵니다. 평시대로 마신다면 약재로 쓰일 정도의 분량이옵지요.”

“그 말인즉 평시대로 마시지 못하게 하였다는 게로군.”

“예, 주군.”

“알만하다. 그 계집, 오늘 오반 때 소금깨나 먹었겠구나.”

짜게 먹어 목이 타니 찻물이라도 들이켜야지.

목까지 차오른 비웃음 대신 부러 끌끌 혀를 찬 사내는, 그러나 곧 모든 것이 저가 계획한 대로 이루어진 것을 확인하고는 더욱 느른하니 입꼬리를 휘었다.

그가 처음부터 이리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소의 부씨의 연줄로 제 곁에 오게 된 소년의 정체를 확실히 못 박아두어야 할 때가 되었다 여긴 것이었으니, 이는 저가 그간 여러 수단을 썼음에도 소년의 존재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었던 탓이라.

하기야 애초에 소년이 저에게 온 사연이 참으로 해괴하였다. 지존께서 오랜 계책을 위하여 희롱하던 계집이 깊은 꿈에 빠진 것을 깨우치고자 한 것이 잘못 꼬인 덕에 그리된 것이 아니던가. 소년의 존재는 지존이 백치가 된 아들을 핑계로 내세운 결과였다.

사실 저보다 서너 살은 더 먹은 이를 갓난아이 돌보듯 할 각오가 되었다면 후궁 직첩 내려주마 하는 말로 계집의 탐심에 찬물을 끼얹고자 한 지존이나 그 되도 않은 핑계조차 오히려 잘 되었다며 덥석 문 계집이며 그 가문이 다를 게 무어 있으랴만, 어쨌거나 그러한 연유로 저의 곁에 닿은 이가 소년이었다. 게다가 궁에 들게 된 사연이 해괴한 것도 모자라 출신마저 한미하다 못해 천하였으니 대체 어찌하여 부씨의 연줄을 잡게 되었는지 궁금해할밖에.

하여 사내의 명을 받아 소년이 머물던 기루를 살피러 갔던 밀군의 수장은, 그러나 채 이레도 되지 않아 그로서는 흔치 않게 난처한 낯을 하고 돌아왔다. 기껏 알아낸 내용이 갓난아이일 적 기루 후문에 버려졌다는 것이라든가 늦은 나이까지 동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어린 것들 보부 노릇이나 하였다는 게 전부였다. 며칠이나 인력이며 금력을 들이고도 어찌하여 소년이 부씨의 가문과 연이 닿아 궁에 들게 된 것인지에 대하여 알아내지 못했다는 소리다.

덕분에 사내의 의심은 더욱 깊이를 더하였다. 동기 출신의 천애고아라는 것만으로도 야심을 가진 자들이 말로 써먹기에는 더없이 좋은 조건을 갖춘 소년이 아니던가. 그런데 드러난 배경이며 사연이라는 것마저 무엇 하나 뚜렷한 것이 없단다. 만약 저가 해경부 부주 부연백이라는 자의 음험함을 몰랐다면 또 모를까, 그와 그의 가문이 30년이 넘도록 거대한 탐욕의 배후를 조정해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그것은 절대 허투루 넘길 내용이 아니었다.

너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 것이더냐.

게다가 소년이 저에게 보여주는 아랫것으로서의 헌신은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사내의 심사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무엇 하나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는 존재인즉, 그것이 정말 순수한 헌신이나 충심이라 믿을 수 없는 탓이었다.

하여 괜히 백치 흉내 내며 문전에 어른거리기만 해도 붙잡아 둘 수 있을 인사를 멀찍이 떨어진 소의 부씨의 처소로 종종걸음을 치게 내버려 두었다. 소년이 가는 걸음 뒤에 붙여놓은 밀군 하나만 믿고 그리 놔두었더랬다. 설마 그 계집이 제대로 약발이 받은 줄도 모르고 그리하였다.

사내의 하나뿐인 시종이자 겉으로 드러난 유일한 우군이 투기로 눈이 먼 지존의 후궁에게 끌려가 되게 얻어맞다 정신을 놓은 사연은 이러하더라.

“내 사람 하나 건진 것은 반갑다만….”

참으로 쓸데없이 사람을 부렸으니 이를 어찌할까.

덕분에 미친년 지랄을 말리느라 어지간해서는 부리지 않는 금군 위병까지 움직여야 했던 것을 떠올린 사내는 사납게 입매를 뒤틀었다. 내키지 않지만 이번 일이 이리도 커지게 된 것은 저의 실책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상황을 부추기려고 쓴 약물이 설마 이렇게 요란한 결과로 이어질 줄은 미처 예상치 못한 탓이었다. 어지간하였으면 붙여놓은 밀군 두엇으로 끝이 났을 것이나 안타깝게도 미친년의 기세가 태산을 뽑을 항우장사에 버금가더라. 그 기세에 휩쓸린 탓에 넝마 꼴이 되어 정신을 잃고 원향전으로 실려 들어온 청을 떠올린 사내의 낯 위로 시퍼런 기운이 스친다. 이거 참, 여러모로 득보다는 실이 큰 한 수였다.

“폐하께옵서는 무어라 하시더냐?”

“쓰임새가 남은 패이니 당신께서 직접 손을 보겠다고 하셨나이다.”

이런, 재미있는 것만 골라 가시는구먼.

게다가 제 속 풀 상대마저 지존께 빼앗기고 보니 세상만사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떠름한 낯으로 혀를 차니 애먼 밀군 수장만 고개를 조아리기 바쁘다.

“거참 욕심도 많으시지.”

그렇게 한참이나 뚱한 속내를 드러내던 사내는, 그러나 곧 그 반듯한 미간에 굵은 빗금을 새기며 느릿하니 입을 뗐다.

“어차피 여우도 되지 못할 종자로 또 무엇을 하시려고 이러시나. 그런 걸 지금껏 써먹은 것도 아슬아슬할 것인데 무에 더 쓰시겠다는 것이야.”

불퉁한 속 가라앉히고 보니 지존께서 어찌하여 쥐새끼를 두고 ‘쓰임새가 남은 패’라고 한 것인지 짐작할 수 없음을 떠올린 탓이다.

“이미 그년 처소에만 향등을 밝힌 것이 몇 달이라지.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그년 콧대를 생각하면 제 처량한 사연 밖으로 나돌릴 리야 없지만….”

흐음….

사내는 그새 시커멓게 어두워진 원향전 후원을 바라보며 길게 숨을 흘렸다. 지존의 계책이 무엇인지는 알 바 아니었으나 아무래도 소의 부씨의 존재가 마음에 걸렸다. 아직은 내전에서 벌어지는 사정이니 어찌어찌 많은 이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다지만 그도 한계가 있는 법이 아니던가. 이미 지존께서 거짓 총애를 만방에 드러낸 것만 몇 달이었다. 거기에 궁 밖에서의 밀회 기간까지 더하면 얼추 서너 해는 이어진 거짓이더라. 그 사이 지존과 저가 얻고 잃은 것을 따지면 얻은 것이 압도적이었으니, 이를 바꾸어 말하자면 상대에게 쉽게 얻을 만한 것은 털어먹을 만큼 털어먹었다는 소리.

그렇다면 남은 쓰임새 역시 얼마 남지 않았다.

“아무래도 폐하께옵서 여우사냥을 서두르실 모양이구나.”

쥐새끼들을 미끼로 여우를 끌어낼 작정인 게야.

사내는 다시 끌끌 혀를 차며 창턱에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순서를 생각하면 틀릴 것은 없었으나 역시 문제는 그 행사를 행하려는 때라. 저더러 너무 빠르다 책하실 때는 언제고 어찌 이리 서두르신담. 산란하기 이를 데 없는 심정에 후원을 살피는 사내의 시선이 몇 번이나 이리저리 기웃댄다. 그러나 곧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사정들을 끼워 맞추고는 히죽이 입 한끝을 말아 올렸다. 지금 지존께서는 서두르는 것이 아니라 코앞에 닥친 기회를 붙잡으려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 것이라면, 부족하나마 거들어 드려야겠지요.

“풍백.”

“하명하옵소서.”

“폐하가 뜻하신 바와 여우며 쥐새끼의 사정이 제대로 맞물릴 듯하구나. 여우굴 주변에 사람을 늘리고 쥐 소굴에 들어가 있는 이들에게는 움직일 준비를 하라 일러두렴.”

“예, 주군.”

“또한 지밀상궁에게 근시일 내로 한 번 들르라 하라. 저 아이가 내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하면 그이가 뒷일은 알아서 할 것이다.”

“분부 받자옵니다.”

그렇게 대답과 함께 깊이 부복하던 밀군 수장의 모습이 곧 등불에 비친 그림자마냥 일렁이나 싶더니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저가 명받은 것을 수행하고자 서둘러 자리를 뜬 것이다. 사내는 순식간에 멀리 사라지는 기척을 확인하고서는 또 히죽이 입매를 뒤틀었다. 앞으로 며칠간 모자란 것들이 벌일 진흙탕 싸움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겠구나 싶은 것이다. 덕분에 어둑한 공기 속으로 꿍꿍이 가득한 웃음소리가 먹물처럼 번진다. 그래, 어디 한번 재미나게 싸워보렴. 내 튼튼한 올무 장만해 들고 옆에서 기다릴 터이니. 느릿한 걸음으로 다락을 빠져나가는 중에도 키들키들 음험한 웃음소리가 따라붙는다.

“청아, 얼른 일어나렴.”

이 재미난 것 나 혼자만 보기 아깝단다.

제 침상에 자리하고 있을 아이에게로 향하는 걸음이 가볍다 못해 바람과 같더라.

그러나 과연 미친년 지랄은 대단한 것이라. 그것은 소년이 꼬박 하룻밤하고도 반나절이 더 지난 뒤에야 정신을 차린 것만으로도 알 만하였다.

“…끄으….”

아이고, 삭신이야.

청은 전신을 두들겨대는 고약한 통증에 신음하며 느릿하니 눈을 떴다. 풀이라도 바른 양 딱 붙어 떨어지지 않으려는 눈꺼풀에 조금 겁이 나긴 했지만 끈기를 가지고 몇 번에 걸쳐 조심스럽게 눈을 뗐다. 깜빡, 깜빡깜빡. 한참을 그리하니 뿌옇게 흐려져 있던 시야가 차츰 맑아진다.

아이코, 이를 어째.

그러나 곧 저가 자리한 곳이 어디인지를 깨닫고는 새파랗게 질렸다. 저가 아무리 정신이 없다 해도 매일 하루 두 번 드나드는 곳의 모양새마저 잊을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것이 아니더라도 부드럽게 늘어진 유백색 능라 천개며 그 너머 흐릿하게 비치는 검은색 조각은 절대 저와 같은 신분이 취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맙소사, 이게 무슨 불경이람.

소년은 그제야 저가 감히 상전의 침상에 네 활개를 치고 잠이 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식겁을 하였다. 몹쓸 일을 겪은 상전이 혼자 못 자겠다며 보챌 때조차 올라오지 않았던, 아니 못했던 바로 그 침상.

“으…!”

그러나 기겁을 하고 일어나려던 소년은 단번에 전신을 난타하는 온갖 형태의 격통에 신음하며 쓰러졌다. 머리는 지끈거렸고 등과 옆구리에서는 욱신거리는 통증이 번졌다. 특히 두 팔과 손에서부터 느껴지는 괴이한 무게감과 전신을 묵직하게 누르는 무력감은 더욱 단단하게 저를 침상에 묶어 놓았다.

아, 맞다.

청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저가 무슨 일을 겪은 것인지 하나둘 머릿속을 스치기 시작한 것이다.

어디보자…. 처음에는 우리 황자님 의복을 구하러 다녔다지. 그러다 전각에 돌아오는 길에 누가 나를 불러서….

“…청아?”

“?!”

없는 정신에 들어도 풀이 팍 죽은, 작고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저를 부른다.

“청아, 이제 깨어난 것이야?”

그리고 굼실굼실 뭔가 시커먼 것이 제 시야 안으로 기어들어온다. 하여 소년은 또 식겁을 하였다. 아이코, 이분이 어찌 이런 몰골을 하고 계신 것이야?

“…청아….”

“…마, 마…?”

“흐으….”

허나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다. 청은 제 시야로 들어온 상전의 낯이 울상이 되는 것도 모자라 어린애처럼 울먹이는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입만 딱 벌렸더랬다. 그나마도 곧 울음이 반이라 알아들을 수조차 없는 상전의 목소리에 놀라 다시 딱 다물렸지만 말이다. 그리고 끄윽, 끅, 서러운 울음소리 가운데 간간이 섞여 나오는 몇 마디 토막말을 이리 끼우고 저리 엮은 끝에 그가 저에게 뭐라 말하는 것인지를 알아차리고는 하얗게 질린 낯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아니어요, 그것이 아닙니다. 마마, 그리 말씀하시면 아니 되어요.

“자, 끅, 잘, 잘모해써…, 끅! 흐으…, 청아, 청아, 내가 잘못, 하였다.”

그러니까 무엇을 말이어요?

그 말이 저에 대한 사죄임을 알아차린 청은 이제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 되었다. 이상타, 거참 이상타. 대체 저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 이분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무슨 일이 있어 나를 이리도 황망히 만드시는 것이람.

“마마….”

“내가, 내가, 못나서, 그래서, 그래서….”

그리고는 다시 한참을 말도 못하고 울음을 삼키기 바쁘다. 이제 제법 사내의 태를 갖춘 이가 그 낯을 붉게 물들이는 것도 모자라 흥건히 적시며 훌쩍이는 모양새는 빈말로도 좋은 것이 아니더라. 허나 어찌하겠는가. 다른 이도 아니고 상전의 행사인 것을. 게다가 저의 두 배는 될 풍신이 바윗돌마냥 가슴 위에 떡하니 엎어져 있으니 말문은 둘째 치고 당장 숨 한 모금이 간절할 지경이라. 소년은 자꾸만 아득해지는 정신을 추스르며 유일하게 자유로이 놓인 왼손을 비칠비칠 들어 올렸다. 그리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제 위에 자리한 상전의 어깨를 도닥였다. 통, 통통. 괜찮습니다. 소인은 괜찮아요.

“흐어엉…! 청아…!”

나만 두고 죽으면 아니 되어!!

…그런데 마마께옵서 계속 그리 계시면 아니 괜찮을 듯도 싶사옵니다.

두 주종이 다시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로부터 꼭 한 다경이 더 흐른 뒤였으니, 이는 청의 가슴 위에 떡하니 올라가 있던 묵직한 돌덩이가 사라지는 데 걸린 시간과도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더라.

“청아, 괜찮은 것이야?”

“콜록…, 예…, 이제는 참말로 괜찮사옵니다.”

그리고 그 한 다경이 지난 지금, 소년은 자리끼 물 몇 모금을 넘기며 가쁜 숨을 차분히 고르는 중이다. 그것도 혼자 그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 같은 상전 품에 턱하니 안겨 그리하는 중이다. 다른 궁인들이 보았다면 단박에 무엄하다 소리치며 호되게 다스려질 행사더라.

“마마, 저기, 저 좀 놓아주시면…?”

“안 된다.”

“마마….”

“안 된다, 절대 아니 되어.”

나에게 떨어지면 아니 되어.

허나 이는 저가 뜻한 것이 아니요, 오직 앳된 상전께서 고집을 피우심이라. 하여 청은 옴짝달싹 못 하고 상전의 품에 가두어졌다. 아, 가슴에 돌덩이가 사라지니 그 다음은 사지를 칭칭 동여매는 구렁이구나. 청은 간신히 돌려놓은 숨이 또 턱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부러 소리 내어 기침을 터뜨렸다. 움칫움칫 전신의 힘을 빼는 상전의 노력이 참으로 눈물겹더라. 그리고는 어느덧 저의 곱절로 자라난 풍신으로 저를 조심조심 보듬더니 잔뜩 풀이 죽은 음색으로 우물거리신다.

“…미안….”

“…마마.”

“으, 응?

“마마 탓이 아니어요.”

저가 다친 것은 마마 탓이 아니랍니다.

원래대로라면 저 시무룩한 낯을 가만히 쓰다듬고 보듬으며 들려줄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손이라는 놈이 하나 같이 면포로 만든 커다란 헝겊 뭉치 꼴을 하고 있으니 별수 없다. 독기 가득한 발길질에 밟히고 채인 탓에 엉망이 된 것을 약초며 면포를 대어 감아놓은 덕분이었다.

“제가 마마를 제대로 모시지 못하여 이리 혼이 난 것입니다.”

허니 그런 말씀은 하는 게 아니어요.

대신 둘둘 감긴 면포 끝에 빠끔히 나와 있는 손가락을 움직여 상전의 얼굴 위에 주렴처럼 흘러내린 머리칼을 가만히 뒤로 넘겼다. 대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나 저가 잠들어 있던 동안에 제대로 거지꼴이 된 상전을 보고 있자니 이래저래 심사가 복잡하였다. 저가 부족해 챙겨주지 못한 것에 대한 죄스러움과 저가 없는 동안 누구도 이 분을 챙겨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 그리고 누구보다도 보살핌을 받아야 할 이가 홀로 저를 돌보고 있다는 놀라움과 감격이 두서없이 뒤섞인 탓이다.

“저가 다친 것은 마마 탓이 아니니까,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시어요.”

“그치만….”

“참말이래두요? 제가 못나 이리된 것이어요. 제가 앞으로 잘 모시면 되는 것이고요.”

그러자 울상이던 낯에 어딘가 꽁한 빛이 섞인다. 여전히 미간 가득 주름을 잡고는 그게 아닌데, 그게 아닌 거 같은데, 그리 말하는 눈으로 입술을 톡 빼무는 것이다. 덕분에 청은 저도 모르게 툭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삼키느라 애를 먹었다. 이미 그 품에 안겨 시중을 받는 불경을 저지른 참이 아니던가. 거기에 상전 행사를 보고 웃음을 터뜨리기까지 하면 이번에는 정말 단매에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더라. 무엇보다 아직 마음이 많이 어리신 분이다. 저가 웃으면 분명 크게 마음을 상하실 게 눈에 훤하였다.

하여 버텼다. 저로 인해 마음을 상할까 그게 두려워 소리 내어 웃지 않고 버텼다. 여기저기 쑤시고 결리는 중에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 애를 썼다. 덕분에 명치가 얻어맞기라도 한 양 쑤시기 시작했지만, 상전의 어설픈 토닥거림 하나로 참았다.

아, 이분이 참말로 나를 좋아하시는구나. 참말로 나를 의지하시는구나. 외로운 시간이 길어서 나같이 천한 것에게 마음을 주고 기대시는 것이야.

어렵지 않았다. 참으면 참을수록 가슴 어림이 싸하게 시리고 쓰려 오는 통에 어려울 게 없었다. 하여 나중에는 오히려 먹먹함이 웃음기를 삼키더라.

“허니 그런 얼굴 하지 마시어요. 우리 마마 잘난 얼굴이 이게 무어에요.”

“어, 얼굴?”

“이것 보시어요, 눈물에 콧물에… 에구, 관옥 같은 얼굴에 이게 다 무엇이랍니까.”

“보, 보기 흉하여? 그래서 그래?”

“아니어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어찌하여 그래?”

“저 때문에 이러시면 아니 되니 그럽니다. 마마처럼 귀한 분께서 어찌하여 저 같은 아랫것 때문에 이 귀한 눈물을 흘리시어요? 아깝습니다. 그러지 마시어요.”

그리고는 아직도 물기가 그렁대는 상전 눈매 살살 누르고 문지르니 이럴 때는 손에 감아놓은 면포가 의외로 쓸 만하다. 마른 건을 대신해 상전 낯 흥건히 적신 물기며 오물이 삭삭 지워내는 것이다. 그를 확인한 청은 아예 두 손을 모두 들어 상전의 낯을 꼼꼼히 쓸고 닦았다. 상처를 가리느라 감아놓은 면포인 것도 잊고 자리끼 물에 그 손 적셔가며 상전의 꼬질꼬질한 낯 말끔히 만들기에 골몰했다.

“이것 봐, 이렇게 잘난 것을.”

말끔해지면 말끔해질수록 그 낯이며 눈빛이 어둑하니 가라앉는 것도 모르고 그리 정신을 쏟았더랬다.

“으윽…! 마, 마마…?”

마마, 숨이 막힙니다. 마마? 마마!

“…수가 있어?”

“에?”

“어쩌면 그럴 수가 있을까?”

“마…마?”

“청이는 이렇게 착한데, 이렇게 고운데, 어떻게 이리 만들 수가 있지?”

“마마….”

“그년이 나쁜 년이야!”

“힉! 마마! 그리 말씀하시면 아니 됩니다! 소의마마를 두고 어찌 그리…, 읍!”

“그년은 이제 죄인이야. 죄인더러 년이라 하면 무어 어때서? 어쨌든 그년이 나쁜 년이야.”

아, 잠들어 있던 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설마 저의 일을 이유로 소의가 냉궁으로 내쳐졌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그저 어리둥절 당황스럽기만 한 청이다. 게다가 이어지는 말이 더욱 혼을 빼놓으니 돌아가는 사정에 대해 알아차리기는 더욱 요원할 듯싶더라.

“청이가 모자란 것이 아니야.”

제 위로 떨어져 내리는 묵직한 음색에, 소년은 그제야 상전의 모습이 평시와 다름을 깨달았다. 부쩍 자라난 풍신에 어둑한 낯빛에 무거운 어조가 더해지니 이렇게 낯설 수가 없다.

“내가 모자라서 이리된 것이다.”

놀랍게도, 상전은 지금 제 나이로 보였다. 겉만이 아니라 속까지 제대로 스물하고도 다섯 먹은 장부로 보이는 것이다. 그 모습이 어찌나 낯설던지 가슴이 다 벌렁대더라. 이분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다 알아듣지 못하면서 그저 입만 헤 벌린 채 그 묵직한 음색만 홀린 듯 듣고 있었더랬다.

“내가 저 밖에 서 있는 이들처럼 강하였다면, 청이가 이리 다치는 일도 없을 것인데.”

그러다 문득 뭔가 뜨끈한 것이 목까지 차오르는 것을 깨닫고 급히 입을 다물었다. 입을 다물지 않으면 그 뜨끈한 것이 단박에 왈칵 넘어올 것만 같아서였다.

“내가 청이를 지킬 수 있었으면, 그랬으면 청이가 이리될 일도 없었을 것이었는데.”

그리고 어느 순간, 가슴속 깊은 곳 어딘가에 가느다란 솜털 한 가닥이 불쑥 자라났다. 그 가느다란 솜털 가닥은 상전의 커다랗고 모양 좋은 손이 제 뺨을 어루만질 때마다 덩달아 술렁이며 간질간질 제 가슴속을 간질였다. 하여 저도 모르게 상전의 너른 품에 가만히 몸을 기대었다. 이어진 말만 아니었다면 한참은 더 그 낯선 기분에 취하고 홀려 그리 늘어져 있었으리라.

“―앞으로는 내가 지켜줄 것이야.”

“……?!”

“내 얼른 강해져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할 것이야.”

부쩍 자라난 그 몸을 사용해 저를 폭 싸안는 상전의 온기가 너무나도 생경해 청은 뭐라 말도 하지 못하고 연신 입술만 달싹였다.

“청아.”

“예, 예?”

“앞으로도 내 곁에 있으렴.”

“그, 그야 당연한 것을요. 소인은 마마를 모시는 자가 아니옵니까?”

“아니, 아니. 그런 것 말고.”

“…예?”

“내 너를 지킬 것이라 하지 않았어?”

“어, 그, 예.”

“그건 내가 앞으로 너를 모실 것이라는 말이야.”

“……예에에?!!”

허나 곧 생뚱맞은 대화 끝에 떨어진 날벼락에 기겁을 하고 말았다. 이것은 대체 무슨 말이던가. 이 귀한 분이 어찌하여 이리도 미천한 자를 향해 ‘모시겠다’고 하시다는 말인가. 소년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파들파들 떨기 시작했다. 내가, 내가 아무래도 소의께 제대로 되게 처 맞은 게야.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헛소리가 들릴꼬.

“얼마 전에 읽은 서책에서도 그리 말하였어.”

“무, 무엇을요?”

“사내라 하면 제 사람 하나는 제대로 지켜야 하는 법이다, 그리 말하였어.”

“…….”

마마, 저도 사내여요.

들으면 들을수록 뜬금이 없는 상전의 말이다. 비록 사내 호리는 기생으로 길러졌다고는 해도 결국 달릴 것 달린 사내이기는 매한가지이거늘 이분께서 어찌하여 이리도 황망한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 그렇게 면포 뭉치로 둘둘 감긴 제 손을 보듬어 쥐고 쓰다듬는 상전의 솜털 같은 손길이 점점 불길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그 순간이었다.

“마, 마마?”

소년은 제 손끝에 닿은 따끈하고도 습한 감촉에 기겁을 하고 바르작거렸다. 전신의 근골이 비명을 지르는 것도 잊고 저가 지금 처한 상황을 벗어나고자 펄떡였다.

마마, 어찌하여 저의 손에 그 입술을 대시는 것이어요? 왜 저의 손끝에 입을 맞추는 것도 모자라 물고 빨기까지 하시어요? 마마, 그러지 마시어요. 저는 마마께옵서 그리 대할 만한 자가 못 된답니다. 소년은 이제 혼이 쏙 빠져나가도록 기겁을 하고 달달 떨기 시작하였다.

“청아.”

“예, 예?”

허나 저가 그러거나 말거나 상전의 언사는 더욱 없는 정신을 휘저어 놓았으니 이는 그 내용이 황망하다 못해 마른하늘의 날벼락이 울고 갈 지경으로 엉뚱한 탓이더라.

“내 너를 색시 삼으련다.”

“……예에에에?!”

“청이 너를 내 색시 삼아, 평생을 곁에 두고 지켜줄 것이야.”

기가 막혀 입만 벙긋대고 있으니 그도 좋다고 방싯 웃어 보이는 상전의 낯이 마치 만개한 꽃과 같다.

“그러니 너도 나를 낭군 삼아 주어.”

꽃은 꽃인데 저승꽃이로다.

“청이, 내 색시.”

얼른 나를 낭군 삼아 주어, 응?

상전의 서툰 접문에 제 입술 내어주고 있는 청의 눈에는 그리 보이더라.

* * *

연이은 흉사로 여겨진 것일까. 소의 부씨, 아니 혜빈(蕙嬪) 부씨에 대한 처벌은 실로 가혹했다. 예정되었던 빈의 첩지를 받은 대신 그 길로 냉궁으로 내쳐진 것이다. 지나친 투기와 지존의 총애를 내세워 예법을 해친 죄를 물은 결과였다. 하여 멋모르고 새로운 처소로 간다며 좋다고 연(輦)에 올라탔던 혜빈, 곧 저가 닿은 곳이 황궁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냉궁임을 알아차리고 소리 내어 울며 비명을 내지르매 그 비통하고도 처절한 소리가 몇 겹이나 되는 담을 넘어 내전 이곳저곳에 닿았다 하더라.

허나 누구도 그녀의 처지를 동정하거나 측은해 하는 이는 없었으니, 이는 내전에 거하는 후궁들이며 궁인들 모두에게 감히 그럴 겨를조차 없는 탓이었더라. 후궁들은 후궁들대로 연적이 사라진 틈을 타 갈 곳을 잃은 성총을 받으려 정신이 없었고, 궁인들은 궁인들대로 새로운 줄을 찾아 눈치를 살피기 바빴던 것이다.

여기에 황후전의 사정마저 그들을 더욱 조급히 만들었다. 내명부 수장되시는 황후마마께옵서 당신의 태를 타고 나온 하나뿐인 아들 주변에 또 한 번 흉한 일이 벌어진 것에 크게 놀라 쓰러지신 것이다. 진작부터 오늘내일한다는 소문이 돌던 분이 그런 사정임을 알게 된 후궁들은 매일을 하루처럼 각자의 사가에 비밀스럽게 연통을 넣고 고관대작들의 내자들과 어울리느라 혼이 빠졌다. 설마 그것이 제 무덤을 파는 일인 줄도 모르고 그리 호들갑을 떨었더랬다.

“알아보았느냐?”

허나 문제의 그 오늘내일한다는 분께서는 지금 지극히 멀쩡한 낯과 음색으로 제 침전에 조심히 들어서는 황후궁 제조상궁을 채근하고 있었다.

“예, 마마.”

“제일 설치는 게 누구더냐?”

“아비어미 품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향비(響妃)와 경빈(暻嬪), 여인네들과 어울리기를 주로 즐기는 것은 귀인 양씨와 소의 권씨라 하옵니다.”

“흠…, 출신 따라 노는구먼. 집안을 업고 비빈에 오른 년들은 그년들대로, 하룻밤 승은으로 치고 올라온 년들은 또 그년들대로 어울리니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괜한 게 아닌 게지. 허면 다른 것들은?”

“그들 말고는 딱히 세라고 할 것을 가진 이들이 없지 않사옵니까? 그 외에는 어느 줄을 잡을까 눈치만 살피고 있나이다.”

“흥…,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소리로구먼.”

황후 남씨는 며칠 내내 시위조로 머리에 두르고 있던 흰 띠를 끄르다 말고 혀를 찼다. 다음으로 사라질 이들이 누구인지를 깨달은 것이다.

“어쨌거나 내일부터 새로운 빈과 비의 궁호를 골라두어야겠구먼.”

그 작자, 이리 귀찮은 것만 골라 나에게 넘긴단 말이지.

“자전(字典)을 찾아두겠나이다.”

그리고 상궁 역시 담담한 낯으로 답하며 주인의 손에서 띠를 받아든다. 그녀 역시 같은 것을 예감한 것이다.

둘. 이미 하나가 치워진 것도 모자라 다시 둘이 더 치워지리라. 적어도 그녀가 알고 있는 지존이라는 작자는 그렇게 할 것이다. 지존의 여인이라는 처지도 잊고 가문의 주구가 되기를 자처하는 계집들을, 그 사내가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으니 곧 그리할 것이라.

일이 쉽게 되었구나.

덕분에 여인의 입술에 곱디고운 미소가 배어든다. 지난번에 사라진 년들이야 그 가문이 아쉬워 열을 냈다지만 이번에는 딱히 아쉽고 뭐고 할 것도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매우 반가웠다. 향비 문씨의 아비는 좌시중 문형신이요 그 어미는 귀족원 네 부장들 중 가장 큰 세력을 가진 남장 유혁의 누이였고, 경빈 이씨는 병조의 수장과 황부에서도 이름난 상단의 주인을 어미로 두고 있지 않던가. 대시중을 오라비로, 이조의 수장과 귀족원의 차장을 사돈으로 둔 가문 출신의 황후로서는 자신의 발목을 잡을 만한 이들이 사라지는 셈이니 당연 반가울밖에. 게다가 잘만 하면 새로 비와 빈으로 들어올 이들의 가문과 손을 잡고 세력을 구축할 수도 있을 터. 이만하면 일전의 고약한 일로 우수수 잘려나간 저의 세(勢)를 두고 근심할 것도 없다. 맞붙들 상대도 저와 다를 것이 없어졌으니 무엇을 더 걱정하랴. 거짓으로 꾸며 칠해놓았던 병색을 지운 맑은 낯이 연신 방실방실 보드라운 미소를 흘리는 것도 모두 그러한 까닭이었다.

허나 이것이 마냥 좋아만 할 일도 아님을 잘 알기에 곧 새치름한 낯을 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가장 유력한 가문은 어디와 어디인가?”

“귀족원 서장의 여식과 호조 차장의 여식이 물망에 오르고 있나이다.”

“으음? 그들이 지금에야 나설 것은 또 무어라고?”

“서장 허륜이 얼마 전에 사돈을 맺은 이가 병조의 차장 가문이옵니다. 호조의 차장은 제 누이가 시집을 간 가문이 공조의 수장과 엮였다고 하고요.”

“흥, 자식 팔아 연줄 엮느라 늙은 연놈들 머리가 하얗게 세었겠구먼.”

“…마마….”

“내가 무어?”

“마마, 그 고운 입에 어찌 시정잡배들이나 쓸 법한 언사를 올리시나이까? 자중하여주옵소서. 누가 뭐래도 마마께옵서는 이 나라의 어미시옵니다.”

“흥, 그래 봤자 허울만 좋은 것을.”

“마마.”

“아아, 봐 주어. 어차피 듣는 것은 자네뿐이지 않은가? 이리 입으로라도 털어내지 못한다면 나는 진작 울화증으로 앓아누웠을지도 모르지. 허니 좀 봐 주게.”

30년 잔소리도 슬슬 지겹단 말이네.

“…저하고 있을 때만이옵니다.”

“응, 그리하겠네. 자…, 그럼 하던 이야기나 계속함세. 서장과 병조의 차장, 호조 차장과 공조의 수장이라 하였지?”

“예, 그러하옵니다.”

“흠…, 뒤의 것이야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로되 앞의 둘은 서둘러 잡는 것이 좋겠구나. 오라버님께서는 뭐라 하시던가?”

“대시중께서는 ‘둘 다 장단이 있은즉, 한 번에 하나씩 쫓으라.’고만 하시더이다.”

“장단이 있다, 라…. 흥, 속 편한 소리로구나.”

10년 살림이 한순간에 풍비박산이 난 마당에 무엇을 어찌하라고 그런 말만 남겼을꼬.

“대시중께서도 계획이 있는 것이겠지요.”

“누가 그를 몰라서 이래? 밑천이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 남김없이 사라진 판에 그리 느긋한 소릴 하니 갑갑해서 이러는 게지. 그것을 되돌릴 절호의 기회를 두고 어찌 그리 태평할까 몰라.”

도와주지도 않을 거면 초는 치지 말아야 할 거 아냐?

낭랑한 목소리로 토달대는 상전의 모습에 중년의 여관은 목까지 치민 한숨을 가만히 되삼켰다. 어둔한 제 머리로 보아도 큰 흉사가 지난 뒤끝에 서둘러서 좋을 것은 없어 보였다. 대시중 나리가 따로 주의를 하지 않았어도 알아서 몸을 사려야 할 때인 것이다. 허나 제 나이 열넷에 모시게 된 두 살 아래 어린 상전은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처음 만난 그 날과 다를 것이 없더라. 절벽 위 고고하게 홀로 피어있는 풍란과도 같은 성정이며 자태의 상전은, 그래서 지켜보는 아랫것들의 속을 더욱 아리게 하였다. 특히 그녀가 사가에서 데리고 온 이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강씨로서는 상전의 저 억지스럽기까지 한 오만함이 그저 안타까웠다.

“으음? 어찌 그런 낯을 하여? 오라비가 또 무어라 딱딱대며 네게 따지든?”

“…아니옵니다.”

그렇다고 말리기에는 이미 늦기도 늦었거니와 그동안 벌어진 온갖 사정을 함께 겪은 강씨로서는 뭐라 간언을 하고자 상전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절로 입이 다물렸다. 25년 전 현양전 후원 야차도 속에 오도카니 서 있던 소녀의 말간 낯이 떠올라 머릿속은 물론이요 가슴속도 어수선하니 뒤집어 놓는 탓이었다. 여인이 되지 못하고 진창에 내던져진, 그래서 골수에까지 독기를 품은 저의 상전 서러운 신세를 생각하니 당연 입이 다물릴밖에.

“그나저나….”

“…?”

“부연백 그자는 여전히 모른다지?”

제 딸 내쳐진 것도 모르고 귀한 빈자리 올랐다며 잔치를 하였다지?

“어쨌거나 폐서인이 된 것은 아니니까요.”

“흥, 그래도 그렇지 냉궁에 든 것도 큰 사건이 아닌가. 헌데 어찌 그를 몰라?”

“사정을 모르는 궁 밖 사람들 눈에야 빈의 직첩과 함께 내려진 처소로나 보일 테니 어쩔 수 없지요. 게다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감찰들이 보통 서슬이 시퍼런 게 아니옵니다. 연이은 흉사를 이유로 내전만 지켜보고 있어요.”

황후궁이라고 안전할 수가 없는 상황이란 말입니다.

“어렵구나, 어려워. 조금만 더 나가면 다시 잃은 만큼 찾을 판에 이건 또 무어람.”

“…설마, 부연백과 손을 잡으시려고요?”

“한 부의 부주가 아니더냐. 게다가 일전에 알아본 바로는 지존 몰래 뒤로 만들어 놓은 사병들이 적잖은 수라 하더라.”

“하오나….”

“살살 구슬려보아. 게다가 혜빈 고년만큼은 아니지만 그 장손녀 생김이 제법 봐줄 만하다더라. 이제 열 살 남짓하니 몇 년 뒤에 나이가 좀 차면 셋째와 엮으면 되지 않겠니? 그리하면 그 작자 속셈도 어지간히 채울 수 있겠다, 내 당장 필요한 손도 구할 수 있겠다 딱 좋지 않아?”

상전에게 경거망동하지 말고 때를 기다리자 고하려던 강씨, 잠시 입을 다물고 곰곰이 계산을 했다. 황후의 말이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찰나의 고민 끝에 진중한 답이 나온다.

“…당장은 불가할 것으로 아뢰어요.”

“어째서?”

“말씀드렸지 않아요. 감찰들 기세가 참으로 흉흉하여요. 함부로 아이들을 움직였다 꼬투리를 잡히면 다음이 힘들 것입니다.”

“으음, 그는 그렇지. 하지만 놓치기는 아까운 것을 어찌하나.”

“예, 그렇지요. ―아, 어쩌면 곧 틈이 날 수도 있겠네요.”

“그건 또 무슨 소리더냐?”

“오늘 재미난 소문을 하나 들었거든요. 그게 참이라면 감찰들이고 뭐고 궁이 발칵 뒤집어질 것이어요.”

“궁이 뒤집어지면 더욱 힘들어지는 게 당연하지 않아?”

“그것도 사정 나름이지요. 귀한 분 성혼과 관련된 소문이었으니 정말 참이라면 마마께도 연통이 올 것입니다. 그럼 이런저런 구실을 대어 대시중 댁 군부인께서 이곳에 들기도 수월해질 것이고요.”

“곧 죽을 것처럼 골골대는 놈이 장가는 가서 무엇 하려고?”

“1황자가 아닙니다.”

“으음? 그럼 그 반쪽짜리 오랑캐에게 벌써 짝을 붙이려는 게야?”

“그도 아니어요.”

“으음? 설마 셋째인 게야?”

“아니옵니다. 2황자여요.”

“…무어? 그 병신에게 시집오겠다는 미친년이 있어?”

“그럴 리가 있사옵니까? 장가보내달라고 떼를 쓴답니다. 게다가 년도 아니라 놈에게 말이지요.”

“년이 아니라 놈?”

“예, 그러하여요. 대전 나인들 종잘거리는 것이, 2황자가 얼마 전부터 저 시중드는 사내아이를 제 색시 삼겠노라 고집을 부리는 통에 대전 지밀이 아주 속이 썩는다고 하더구먼요.”

“어머나 세상에.”

백치가 된 것도 모자라 용양에까지 눈을 뜨게 되었으니 그를 어찌하면 좋아.

내용은 염려와 걱정이로되 그 어조에 담긴 기꺼움은 마치 봄날의 햇살과도 같더라.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비웃음이 더없이 선명하더라.

“계집들에게 어지간히 덴 모양이구나. 아아, 그러고 보니 그 시종 놈이 동기 출신이라 하였지? 음음, 알 만하다. 일찌감치 사내 호리는 재주를 익힌 놈이니 병신 놈 혼 빼먹는 것쯤 일도 아닐 것이야.”

“듣고 보니 참말 그런 모양입니다. 어쨌거나 2황자 고집이 황소고집이라 아침저녁으로 원향전 마당에 구르는 게 일이래요. 그 시종이라는 놈은 혜빈 탓에 골병이 들어 그 지랄을 말리지도 못하고 앓아누워있고요.”

“아아, 맞아. 그랬었지. 저런, 비루한 것들끼리 붙어먹는 꼴이 되었구나.”

저것을 어찌하면 좋아.

여인은 생글생글, 방실방실, 한창때의 처자도 한 수 접을 고운 낯이 햇살 같은 웃음 사방으로 뿌리며 그 기꺼움 마음껏 드러냈다. 허나 그럴밖에. 겉으로야 제 소생이라 알려지기는 하였지만 실은 지존이라는 작자가 유일하게 마음을 주었던 어떤 이름 모를 년 태에서 나온 놈이 바로 그 2황자가 아니던가. 헌데 그년 핏줄 병신된 것도 모자라 용양에 빠져 사내와 부부지연을 맺겠다고 지랄이란다. 이거야말로 천상에서부터 들려오는 황홀함 음률이더라. 그래서 여인은 웃고 또 웃었다. 그 웃는 낯이 마치 만개한 모란과도 같더라. 허나 곧 다시 새침한 낯을 하고는 제법 근엄한 어조로 제 심복 중의 심복을 부른다.

“―강 상궁은 들어라.”

“예, 마마.”

“아무리 모자라다 해도 내 평생에 아픈 손가락이 될 아들놈이다. 그런 아들놈 고집을 이 부족한 어미가 어찌 이기리오. 하여 내 이참에 그동안 제대로 하지 못한 어미 노릇을 하고자 하노라.”

더없이 매끄럽게 이어지는 목소리가 마치 흐르는 물과 같고 구르는 옥구슬과 같더라.

“내 하나 있는 아들의 간절한 청을 들어줄 것이다.”

허나 그 내용은 아는 사람은 다 알 파렴치함이 진득이 묻어나는 것이더라.

* * *

사흘 뒤, 지존께서 그의 정궁과 크게 부딪히시매 그 요란한 소리가 높다란 황후궁 담을 훌쩍 넘어 대전으로 통하는 회랑까지 닿았더라. 허나 비밀스러운 내전 사정인 탓에 그 자세한 사연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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